사람들은 흔히 시는 젊어서 쓰는것이라고 한다. 젊은 시절의 랑만과 젊은 시절의 정열이 없다면 시는 쓰기 어렵다는 뜻이 되겠다. 하지만 원로 시인 김철시인은 오늘까지도 시의 붓을 놓지않고있다.
얼마전 시인은≪황혼의 로맨스≫,≪휴전선은 말이 없다.≫란 시집을 펴냈다.
생사의 언덕을 넘어
긴 눈썹의 인자한 할아버지모습인 시인은 “다들 이 눈썹을 가리켜 장수하고 복받을 눈썹”이라 한다며 롱담을 하시였다. 참으로 시인의 눈썹은 옛이야기에 나오는 장수 할아버지의 눈썹처럼 길다는것이 인상적이였다.
그런 “팔자 좋은 눈썹”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김철시인은 몇번이나 저승문턱에 갔다옴으로서 기적같은 전설을 엮었다. 혹자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시인을 두고 “팔자 좋은 눈썹”덕이라 할수 있고 또 미리 그런 액땜을 했기 때문에 지금 이처럼 보람있는 나날을 보낼수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할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것은 파란많은 나날을 겪을대로 겪은다음의 오늘의 시인을 두고 해보는 안위의 “롱담”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이 넘어왔을 그 생사의 고비를 어찌 감히 “팔자”란 한마디로 가벼이 넘길수있으랴.
1932년 8월 가난한 배사공 김상기씨와 성판녀씨의 장남으로 일본 시모노세끼에서 태여난 시인은 걸음마도 변변히 타기전에 부주의로 2층에서 거꾸로 떨어졌다. 죽은거라고 생각했던 시인은 다행히 한 유명한 외과의사의 덕으로 목숨을 건지였다.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한국으로 건너가 전라도 곡성군에서 소학시절을 보낼 때 섬진강에 빠져 물귀신으로 될번 하였다.
룡정에서 대성중학교에 다닐 때 시인은 집안살림을 돕기위하여 부친과 함께 눈내리는 산길을 타며 회령으로 쌀장사 나갔다가 호랑이밥이 될번하기도 하였다.
젊은 시절 지원군으로 조선의 전쟁터에 나갔을 때는 폭탄의 세례를 받아야 했으며 또 ≪문화대혁명≫의 세례까지 받다보니 시인의 운명은 실로 파란많은 전설같은 인생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언젠가 한국 국회에서 자아소개를 할때 “저의 일생은 마치도 우리 민족 재난의 축도와도 같은 일생이며 제가 걸어온 길은 눈보라 사나운 국제류랑아의 설음많은 길이였습니다.”라고 말한적 있다.
일본에서 대만으로, 대만에서 고향으로, 고향에서 또 두만강건너 동북으로...실로 시인의 류랑사는 민족의 수난사라고 하지않을수 없다.
꿈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1953년 ≪지경돌≫로 문단에 데뷔하여 평생 시로 늙어온 시인, 그는 선후하여 ≪변강의 마음≫, ≪동풍만리≫, ≪동틀무렵≫(장편서사시), ≪산향길≫, ≪새별전≫(장편서사시), ≪가야금≫(한문), ≪태양에로 가는 길≫, ≪인간세상≫, ≪김철시선집≫, ≪나는 진짜 바보이고싶다≫, ≪황혼의 로맨스≫, ≪휴전선은 말이 없다.≫ 등 무려 30권의 시집을 국내외에서 출판하였으며 시인이 작사하고 유명한 작곡가 정진옥이 작곡한 대합창 가 제6차세계청년예술축전에서 은상을 타면서부터 전국소수민족문학상. 미국해외민족문학상, 한국해외문학상. 아리랑문학상, 백두컵문학상, 천지문학상, 중국계관시인상, 국가특수공헌상, 세계계관시인상, 세계문화명인성취상, 국제평하복지상 등 많은 상을 수상하였다.
허나 어린 시절 시인의 꿈은 가수나 마라톤선수가 되는것이였다. 흑룡강성 해림현 신안진에 있을 때 시인에게는 마을의 곰보가수-영삼아저씨가 우상이였다. 가수로 되기위해 시인은 늑대바위골 폭포에서 목소리를 틔우려고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한다. 목에서 세번 피가 터지면 명가수가 된다고 했는데 두번째로 목에서 피가 터질무렵 잔치집에서 먹은 막걸리 때문에 아예 목이 닫혀버렸다고한다.
중학시절엔 마라톤선수로 활약했던 시인은 신안진중학교 추석운동대회에서 마라톤 1등을 하였으며 목단강고급중학교에 다닐때에는 목단강시 마라톤대회에서 1등, 전 동북지구 운동대회에서 마라톤 2등을 하였다. 하여 장자 마라톤선수나 되여볼가 하는것도 먼 옛날 시인의 꿈이였다. 이 밑천을 바탕으로 시인은 신문사의 기자로 있던 1953년 “9.3”명절에 주 마라톤경기에서 1등을 하기도 하였다.
가수로, 마라톤선수로 되는것이 어린 시절의 꿈이였으나 전쟁은 그로하여금 시인의 길을 걷게하였다.
물론 격정과 랑만을 지녀 고중시절 앞다투어 지원군전선으로 나갔던 열혈청년인 그에게 장차 시인되면 어떨가 하는 생각도 전혀없었던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을 걷게된것은 전선에서 그토록 숭배하던 조선의 유명한 시인 조기천을 만난후부터였다. 전쟁중 마을의 불을 끄다가 담밑에서 타다남은 조기천의 장편서사시 “백두산”을 주어들고 무슨 보배라도 얻은듯 흥분했던 시인인지라 우연히 조기천을 만나게 되여 평생 잊지못할 추억의 한단락을 남기였으며 또한 시인의 길을 걸으려는 신념을 굳히게 되였다.
고난의 행군길은 시 창작의 좋은 시간이였다. 그후 김철시인은 행군길에 짬짬히 시를 지어 메모해두었다. 손전등을 켜고 시집을 읽다가 비생기야간공습을 받아 목숨을 잃을번도 했고 행군을 하면서 시를 쓰다가 천길벼랑에 굴러떨어질번도 하였다. 가렬한 전투의 나날 그는 한시도 시 창작을 잊은적 없었다. 당시 출판같은것은 상상도 할수없는일이라 시인은 그것들을 누런 포장지같은 종이에 정히 메모하여 “자작시집”으로 묶어두었다. 전선에서 돌아올 때 이런 자작시집이 3권 되였다고 한다.
참혹하고 무자비한 전쟁이란 현실과 피끓던 청춘, 그리고 그토록 숭배하던 조기천과의 만남으로 시인은 평생 걸어가야할 시인의 길을 선택하게 되였다.
홀로서기와 더불어 사는 세상
2006년 8월에 출판된 시인의 근작시집 ≪황혼의 로맨스≫에는 ≪허수아비≫라는 시가 있다.
“논벌은 만삭이 되여도/ 넌 늘 배고파 운다/ 그늘진 삶의 광야에/ 숙명의 느낌표 하나 세워놓고/ 뻗치며 살아가는/ 고달픈 인생의 홀로서기!”
어찌보면 여러번 생사의 고비를 넘기면서, 또한 파람많은 나날들은 지나오면서 시인이 절실히 느꼈던 외로우면서도 끈질긴 생의 행로에 대한 시심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세상은 “만삭”이 되여도 “그늘진 삶의 광야”라는 그 소외된 공간속에서 늘 “배고픔”을 느끼지만 “숙명의 느낌표”를 찍으며 꿋꿋이 살아가는 생명의 저력.
인생에 대한 이러한것들을 잘 알고있었기에 시인은 그 어떤 어려움에 부딪친다 하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생은 어디까지나 홀로서기임을 잘 알고 있을뿐만 아니라 또한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임도 시인은 잘 알고있었다.
항미원조전쟁이 끝난후 시인은 중국 연변의 ≪동북조선인민보≫(연변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하였으며 나중에 북경 ≪민족문학≫의 주필을 담당하였다.
북경에 전근한 시인은 ≪민족문학≫부주필, 주필을 력임하면서 자신의 창작도 견지하였지만 소수민족작가대오양성과 소수민족간부대오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83년 시인이 북경에 전근될 때만 하여도 많은 소수민족지역들에는 작가군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고있는 상황이였다. 소수민족작가를 양성하기 위하여 시인은 동료들과 함께 신강문필회, 내몽골문필회, 장백산문필회, 연태문필회, 운남문필회 등10여차의 문필회를 조직하였는데 번마다 40-50명 회원들이 참가하였다. 그리고 로신문학원에 청년작가반을 위탁하여 소수민족지구의 청년작가들에게 배움의 기회를마련해주었다. 이로부터 소수민족지구에는 점차 작가군체가 형세하기 시작하였다.
그 외 시인은 소수민족지구의 문화수준이 낮은 형편을 고려하여 전국소수민족문화인재를 양성할 타산으로 북경제2외국어학원과 중앙민족대학에 위착하여 문학, 비서반을 조직하였다. 하여 첫기에 260명의 소수민족간부를 양성하였는데 후에 그들은지방에 돌아가 문련지도일군, 형장, 법원 원장 등 여러 문화, 행정직을 맡게 되였다.
시장경제의 급속한 변화와 함께 우리 조선족들도 고향을 등지고 외지로 돈벌러 나가게 되였다. 북경에도 역시 많은 조선족들이 진출하게 되였는데 그들은 낯설은 타향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였다. 때론 어떤이들은 시인이 북경에 좀 오래있었다는 리유만으로 무작정 찾아와 도움을 청하기도 하였다. 북경에 전근된후 문학, 문화인들과만 접촉하여온 시인이지만 차마 거절할수 없어 파출소며 공상국 등 기관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도와나섰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의 도리를 모색해냈는데 뭉치지 않으면 외지에서 살기 바쁘겠다는 도리였다. 하여 시인은 기업인들을 모아 기업협회를 꾸려 앞으로 조선족들이 사업하는데 서로 힘이 되자는 의향을 내놓았다. 이는 많은 사람들의 찬성을 받았으며 드디여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 "KOREA"경제문화연구회가 설립되게 되었다. 이 협회는 조선족기업인들을 위해 북경대학과 련합하여 "최고경영자과정연수반"을 조직하였으며(북경대학 수료증 발급)일본, 한국, 미국 등 여러나라에 기업고찰단을 파견하여 외국의 선진경영경험을 배우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종 학술세미나와 예술공연, 국가대사 경축활동 등을 다양하게 펼치여 환영을 받고있다.
산업화로 나가는 요즘 시인은 KOREA 경제문화연구회의 회장, OKTA(무역협회)부회장, 국제 GCS중국본부총재직무를 감당하면서 경제문화면에 심혈을 기울이고있다.
하지만 시쓰는것을 숙명으로 여기는 시인은 오늘도 거친 생의 들판에 나름대로의 시편을 엮어가고있다.
///전춘매
[출처] 정열에 불타는 시인-김철|작성자 혜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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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림금산)가 김철시인을 처음 알게 된것은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 연변대학시절이였다. 그때 우리 조문학부학생들은 “종소리”문학사란 문학단체를 활발히 꾸려나갔는데 쩍하면 시낭송모임같은걸 가졌었다. 그러던 어느 한번의 시낭송모임에 김철시인이 직접 오셔서 대학생들과 함께 시낭송을 하시였다.
그때 본 김철시인은 아주 열정적이고 말씀도 아주 빠르고 듣기좋게 했으며 행동도 아주 민첩하고 특히 눈빛이 유난히 빛뿌리였는데 시도 아주 멋지게 랑송하셨다. 우리는 몇번의 접촉이 있은후 “종소리”잡지 제일 첫페지에 김철시인의 권두언을 싣기로 우리끼리 약속하고 감히 김철시인의 댁으로 찾아갔다. 그때 나는 “종소리”문학사의 주요책임을 맡았음으로 한반 아래인 백일승(지금은 중앙국제방송국근무)동무와 함께 철남에 있는 김철시인네 댁으로 찾아갔다.
사모님께서는 우리를 아주 열정적으로 반기였지만 아쉽게도 김철시인은 댁에 안계셨다. 그때는 전화같은것도 없으니깐 먼저 예약할수도 없는 때였다. 우리는 아쉬운 대로 사모님한테 권두언에 대한 부탁의 말씀을 남기고 되돌아 나왔다.
헌데 며칠후 다시 찾아갔을때 역시 김철시인은 사업이 다망해 집에 안계시고 책상우에다 우리가 부탁한 권두언을 다 써서 놓고 가셨다. 우리는 너무도 흥분되여 아이들처럼 막 퐁퐁 뛰기까지 했다.그때까지 우리는 김철시인을 잘 알고 있었지만 김철시인은 우리들을 누구인지 모르고 있을때다. 그저 연대학생들이란것밖에 몰랐었다. 하지만 우리의 문학활동을 이렇게 지지하고 또 권두언까지 정성들여 써주신건 참으로 고마왔고 우리 연변대학 문학동아리활동에 대한 지대한 지지와 성원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으로 감히 대시인의 원고로 우리 “종소리”잡지의 첫페지를 아주 멋지게 장식하게 되였다.
그 무렵 나는 북경대학의 최응구교수가 김철시인의 인물론을 쓴 책을 읽게 되였는데 특히 김철시인이 조선전쟁에 나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조기천시인이 함박눈이 내리는 창가에 서서 시를 읊는 걸 목격하는 대목은 문학을 좋아하는 나의 마음을 거세차게 설레이게 하였다.
나는 또 이 책을 통하여 김철시인의 과거에 대해 더욱 상세하게 알게 되였다.
김철시인은 1932년 8월 6일 일본시모네세끼에서 출생하였고 4살까지 부모를 따라 일본, 대만에서 살다가 고향인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 삼오리에 돌아와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 중퇴하였다. 그후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이주하였다. 8.15 광복후 길림, 오상, 목단강, 용정 등 지를 피난 다니다가 환고향 길이 막혀 다시 흑룡강성으로 이주민으로 들어가 시골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운동을 즐기는 김철시인은 또 1949년 마라톤선수로 연변과 흑룡강성에서 1등을 따냈고, 전 동북구에서 2등까지 한 스포츠맨이였으며 가수가 되여보려던 꿈도 갖고있었다.
1950년, 그는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군하여 군예술단에서 무용배우와 안무가로 활약하였다. 1952년 그가 군에서 창작한 무용 은 중국인민해방군, 중국인민지원군 제1차 예술콩클에서 1등상을 수상하였으며 전국 순회공연에 참가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1953년, 군제대후 그는 선후로 기자로 취직하여 문필활동을 시작하였는데 그가 창작한 시이 신춘문예에 입선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1956년에 그가 창작한 대합창 는 제6차 세계청년예술축전에서 대상 을 수상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24살이였다. 그후 그는 련속 많은 시집과 시작품들을 창작해 냈으며 길림성청년련합회 부주석, 연변청년련합회 주석도 맡아보았다. 허나
전례없던 문화대혁명은 그한테도 덮쳤다. 그는 갖은 죄명을 쓰고 5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옥중에 갇혀있는 기간 그는 장편서사시 “동틀무렵”을 구상하였고 옥에서 나와서는 “천지”잡지사에서 일을 보면서 창작에 들어갔는데 련속 장편서사시와 서정시집들을 쏟아냈다. 그는 연변작가협회 부주석겸 비서장으로 발탁되였고 후에는 또 연변작가협회주석과 연변문련주석을 담임하기도 했다. 북경 “민족문학”에서 그를 모셔간후 우리는 문단활동에서도 그를 자주 볼수가 없게 되였다…
내가 소년신문사에서 문예편집을 맡아할때였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신문에 김철시인의 글을 실어볼가…그때는 이미 김철시인님께서 북경으로 전근해간지도 10여년 된 후였다. 나는 고민하던 끝에 또 학창시절때처럼 감히 북경에 편지를 날렸다. 만약 김철시인이 아이들글을 쓸 시간이 없어 안되더라도 믿져야 본전이겠지…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헌데 얼마 안되여 북경에서 김철시인의 따뜻한 문안편지와 함께 원고가 날아왔다. 원고제목은 “연안의 담요”였다. 즉 연안에 있을때 주덕총사령께서 모택동주석께 담요를 주었던 그런 이야기를 아이들 동심에 맞게 수필로 쓴 글이였는데 나는 너무도 감사하여 제일 빠른 시간으로 우리 어린이 신문에 올렸다…
아마도 김철시인과는 그 어떤 인연이 있는지. 그후에도 나는 여러차 김철시인을 뵙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한번은 민족문학잡지를 중심으로 해서 북경의 여러 문인들이 연변에 와서 전국소수민족필회를 가졌는데 그때도 김철시인께서 중공중앙선전부 부부장으로 있던 하경지시인을 모시고 왔었다. 회의기간 하루는 공원의 소나무숲으로 들놀이를 갔는데 술이 몇순배돌자 김철시인은 당장에서 일어나 노래하며 춤까지 추셨다.
그후 오래동안 우리는 김철시인을 만나지 못하다가 어느 한번 김철시인이 제20번째 시집 출간기념회를 연길에 와서 연변빈관에서 거행하였다. 우리 시인들은 모두 김철시인께서 직접 싸인한 시집을 받게 되였다. 그번 출간회에는 저명한 소설가 마라친부도 참석하였고 당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으로 있던 리덕수동지도 연변시찰차 참석하여 보귀한 연설도 하였다. 그후 우리는 또 오래동안 김철시인을 만나지 못하였다.
세월이 많이도 흘러 우리도 이젠 시단의 중임을 맡고 여러가지 이번트를 조직할때가 돌아왔다. 5년전 연변작가협회에서는 김영건을 시가창작위원회 주임으로 선거하고 나를 부주임으로 임명하였다.이미 20여년이나 이끌어온 시단의 성회-“두만강여울소리”도 이젠 우리들이 조직해야 하였다. 하지만 해마다 한번씩 진행되는 “두만강여울소리”를 어떻게 하면 더 다채롭고 내용이 더 풍부하게 조직할것인가가 고민이였다. 우리 조선족시단에서 “두만강여울소리”라 하면 해외에서도 소문이 짱한 명브랜드활동이였다. 더우기 동북3성을 포함한 전국의 우리 민족시인들이 대거 참가하는 그런 모임이였고 또 우리가 처음으로 시가창작위원회의 중임을 맡은후의 첫 행사였으니 신경이 안쓰일수가 없었다.
마침 박장길씨가 화룡시민족식당으로부터 일정한 자금과 음식상 갖추는걸 후원해 왔다. 우리는 기뻤다. 인맥이 넓은 김영건주임은 화룡시정부에 직접 련계를 달아 “제24차두만강여울소리”를 화룡시정부 회의실에서 거행하기로 협의를 보았으며 연변의 인기배우들과 가수들을 동원하여 회의에 멋진 공연을 선물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처음으로 조직하는 일이 잘되게 하늘이 도와주었는지 김철시인부부도 마침 연길에 와 있을때라 우리의 초청에 의해 이번 회의참가차로 직접 화룡시에까지 오셨으며 주당위선전부, 화룡시정부 등 정부차원에서 대폭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회의 첫날 저녁에는 민족식당에서 개를 앉히고 연회를 베풀었으며 소박하고 멋들어진 공연도 선보여 회의 분위기를 확 잡아왔다. 이튿날 오전에는 탐구시를 심사하는 날이였는데 우리는 김철시인한테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감독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심사는 아주 공정하게 진행되였다.
회의군들은 이튿날 연변의 금강산으로 불리우는 선경대를 유람하였고 또 선경대아래동네에 있는 유동림장에 가서 사슴까지 잡아 잔디밭우에다 사슴고기로 연회를 베풀었다. 김철시인은 당장에서 유동림장책임자한테 일필휘지하여 족자까지 써주셨다. 대회는 진짜 성공적으로 잘 되였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늘 김철시인한테 감사한 마음이다.
그때까지만도 우리는 김철은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시인으로만 알고 있었지 그후 북경에서 수도권의 우리 민족을 위하여 눈부신 사회활동을 활발히 펼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감감 모르고 있었다.
연변작가협회에서 령도사업을 할 때 연변대학과 합작하여 4년간 문학본과반을 꾸려 많은 문학인재를양성한 김철시인은 북경에 전근되자마자 민족문학잡지를 꾸리는 한편 전국 소수민족 문과대학을 꾸려 각 민족의 문학인재를 양성하였다. 아무런 기초와 준비도 없이 대학반을 꾸린다는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였다. 교실이 없어 빌어쓰고 교원이 없어 수도의 여러 대학에서 교수를 초빙하였다. 학교관리일군도 여기저기서 초빙했다. 민족문학의 주필인 시인도 바쁜 편집사업의 틈을 타서 학교운영을 지도했다.
학생들도 여러 변강지구에서 오다보니 민족이 다르고 생활습관이 서로 달랐다. 하기에 여러 가지 복잡한 사항이 생길 때마다 김철시인은 직원들과 함께 여러 민족의 특성과 습관에 맞게 세심하고 살뜰하게 그들을 보살펴주었다. 한데서 2년간 학교는 큰 차질이 없이 잘 운영되여 국가민족사무위원회의표창을 받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2년동안에 250명 여러 민족 학생들을 졸업시켰는데 중앙민족대학 졸업증을 수여받은 학생들은 지금 각 소수민족지구에 돌아가 현위서기, 법원 원장, 문예단체 책임자와 중견작가로 활약하고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후 김철시인은 또 기업가협회 회장사업도 맡아하였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한다. 시인이 어떻게 기업가협회 회장이 되였느냐고.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개혁개방후 각지에서 돈을 번 사람들이 수도 북경에 몰려들었다. 그러나 수도에 발붙인다는것은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였다. 식당을 개업도 못한채 돌아간 사람, 식당을 꾸렸다가 일부 망나니들의 성화에 못견뎌 그만둔 사람… 여하튼 억울함을 당한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였다. 여기서 뭉쳐야할 필요성을 실감한 김철시인은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라는걸 발족하였다.
지도기구를 구성할 때 부회장 인선은 있는데 회장인선이 없었다. 사흘을 고민하던 끝에 사람들은 시인 김철선생을 추대하였다. 그때 그는 완곡히 거절했다. 그러나 모두들 한결같이 추대하는 바람에 할수 없이 응낙했던것이다.
기업가협회 회장이 된 후 그는 수도권의 기업가들을 위하여 많은 일을 했다. 그들의 경영수준을 제고하기 위하여 북경대학 경영학원과 합작하여 최고경영자 연수반을 꾸리고 북경대학과 국가경제단체의 유명한 학자, 교수들이 세계경제발전 추세와 최고경영학을 강의하게 했다.
경제인들의 시야를 넓혀주기 위해 경제인 국외시찰단을 무어 미국, 일본, 한국 등 나라에 가서 경제고찰을 하게 했으며 한상대회, 세계해외무역인대회 등에 그들을 참석시켜 견식을 넓히게 했다.
그는 또 경제인 경험교류회와 좌담회 등 모임을 조직하여 서로간 경영비결을 따라배우게 했다. 그뿐만아니라 해외에 좋은 투자항목이 있으면 훌륭한 파트너를 소개해 합작하게 하는 등 기업인들의 친근한 벗으로, 사업의 길잡이로 되였다.
1996년 정부의 지시에 따라 북경 고려문화경제연구회가 창립되였다. 원유의 기업가협회도 여기에 합류했다. 정부의 위촉을 받아 시인은 또 고려문화경제연구회의 회장직을 담임하게 되였다. 하여 그의활동무대는 더 넓어졌다.
김철시인은 수도권의 문화예술생활에 많은 관심을 돌렸다. 그는 우리 조선족예술인들의 성장을 돕기위해 북경 음악청에서 민족가무단의 청년가수 리성주독창음악회를 도와주었다.
그는 또 연변의《꽃노을예술단》을 북경에 초청하여 1200명을 수용하는 대극장에서 공연을 하도록함으로써 수도권에서의 그들의 영향력을 넓혀주었다.
뿐만아니라 국제공연도 조직하였는데 한국의 《국제경로단》공연, 《보리수예술단》의 공연은 매우이채로왔다.
지금 고려문화경제연구회 산하에는 《미인송예술단》이 있는데 상당한 수준을 갖춘 이 예술단은 자기들의 다채로운 예술공연으로 수도권의 문화생활을 활성화시키고있다.
이토록 수도권에서 맹활약을 하고있는 그지만 짬짬이 틈을 타 시창작에 몰두하면서 팔순이 넘는 고령이지만 청춘의 활기를 과시하고있다. 그는 늘 말한다. 《시인은 영원히 청춘이다. 세월은 흘러도 바빠서 늙을새가 없다!》고.
2013년 1월 23일, 연변의 시인들은 연변주정부 정무청사C-108호 회의실에서 “중국조선족시화선집”출판기념회를 가지였다. 헌데 누구도 몰랐다. 81세 고령의 김철시인께서 전날 비행기편으로 이 모임에 참가하고저 친히 북경에서 날아올줄이야.
비록 북경에서도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김철시인은 우리들의 상세한 회보를 접한후다른 일들은 잠시 미루고 전국 조선족시인들 작품을 집대성한 이 시화선집의 출판을 축하해주기 위해 불편한 몸으로 직접 추운 겨울날씨도 마다하고 사모님과 함께 쉽지않은 걸음을 하신것이였다. 그는 이날 대회에서 보귀한 축하말씀도 주셨으며 자신이 직접 북경에서 만들어온 공로패를 김영건시인한테 수여함으로 김영건을 비롯한 이날 모임에 참가한 많은 로시인,청년시인들을 감동시켰고 고무해 주었다.시인들은 다시 한번 우리 민족 대시인의 인자한 모습을 보게되였으며 김철시인이 민족시단에 대한 끝없는 배려와 사랑을 가슴뜨겁게 느끼게 되였다.
이미 38권의 저작을 출판하여 반세기 남짓한 문단생애에서 빛나는 업적을 쌓아올린 김철시인은 미국 링컨재단의 세계문화예술훈장과 일본황실의 국제문화공로훈장, 한국문인협회의 해외문학상을 비롯하여 50여개의 크고작은 상패와 메달을 수상, 그의 자택의 한쪽벽은 몽땅 상패, 공로패, 감사패로 가득 채워져있다. 오늘도 그는 시창작에 몰두하는 한편 여러가지 유익한 사회활동으로 여력을 발산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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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를 거꾸로 먹어도 제멋이라는데
* 김철 시인
나는 요즘《중국조선족명시》라는 책을 읽고 별난 느낌 하나를 적고싶다. 연변에 나가보니
이 책을 잘 펴냈다느니, 못했다느니 말썽이 많은데 나는 그런 시비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참여도 하고싶지 않다. 왜냐 하면 시라는건 각자 제나름대로 평가하고 감상하는것이고 고
정된 척도가 없으니 말이다. 마치도 누구는 소고기료리를 좋아하는데, 또 누구는 돼지고기
료리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비게가 질색이라는데, 또 어떤이는 일부러 비게만 골라먹고
곱을 많이 먹으면 단명이라는데, 세계에서 제일 오래 산 사람은 또 그 비상이라는 비게만
골라 먹는다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추어야 할꼬?
책을 읽고 느낌 그대로 솔직히 말한다면 앞부분, 그러니까 세상에 이미 널리 알려진 명시
들은 그저 그러려니 하고 읽었는데 뒤부분, 그러니까 지금의 무명시인, 젊은 친구들이 쓴
시들에 나는 홀딱 반해버렸다. 그래서 절반쯤 읽고 시집을 덮어버리려 했다가 끝까지 탐독
했고 후반부는 두세번씩 다시 읽었다. 이것이 나의 진솔한 고백이다.
어떤 사람은 오늘의 우리 시가 30년대 수준이라기도 하고 또 어떤이는 그것도 과분하다고
까지 하는데 천만의 말씀!
속담에 오이를 거꾸로 먹어도 제멋이라는데 시를 보는것도 다 제멋에, 제나름대로 평가할
수는 있겠지만 이 책을 읽고 나는 한마디로 말해서 진정한 명시는 우리 젊은이들속에, 말
하자면 이제 솟아나는 무명시인들 손에 있다고 떳떳하게 말할수 있다. 시를 어떻게 비겨야
하는가. 오늘의 중국조선족시가 30년대수준이라 한다면 오늘의 한국시는 다 명작이란 말
인가.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는 한국의 여러 문학월간지들이 달마다 증정되여오는데 나는
그것들을 접수할 때마다 우선 시들을 골라본다. 그런데 어떤 달에는 한수도 맛있게 읽을
시감이 없어 실망하군 한다. 그럼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런데 우리의 문학
지들에서는 달마다 심심치 않게 맛있는 시들을 만나게 된다. 이건 누가 시켜서 하는것도
아니요, 아무런 선입감도 없는 상황에서 나타난 현상인걸 어찌하랴. 문제는 단도직입적으
로 말해서 오늘의 한국시들이 다 그렇게 수준이 높은것도 아니요, 우리의 시들이 모두 그
렇게 쓰레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한국시에도 명작이 있고 우리의 시에도 명작이 있다는 말이 되겠다. 여기에 변증법이라는게 필요한것 같다. 이 책에 수록된 30년대, 그리고 해방직
후에 인정받은 명작이라째孤?그때는 좋다고 보았는데 지금에 와 다시 보니 그것도 그저 그
래, 라고 생각되는걸 어찌하랴,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시대 시들을 부정하고싶은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다. 문제는 그 시대의 시도 반드시 그 시대에 맞춰, 그 시대의 다각적인 인
소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충분히 긍정하거나 실제에 맞게 평가되여야 한다는 말이다. 여
기에 맹목적인 긍정이나 부정은 금물이다. 더구나 오늘의 자대로 옛것을 재거나 옛날의 자
대로 오늘을 부정하거나 해서는 안되는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시인이나 명작이란 그리
많지 않는 법이다. 그 일부의 명작을 가지고 오늘의 전반 수준을 평가하거나 절대적인 부
정, 또는 긍정해서도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 시집을 읽고 신심과 희망을 갖게 된것은 우리의 시단, 특히는 젊은 시인들 손에서
명작들이 적지 않게 나오고있고 이미 나왔다는 점에 있다. 평소에 나는 우리 잡지나 신문
들에 나오는 시들을 다 읽지는 못했는데 적지 않게 처음 접하는 시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적지 않게 이름을 모를 시인들이여서 뒤끝의 소개를 보니 많이는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
업한 젊은이들이였다. 그래서 그들을 만나고싶었고 고무해주고싶었다. 이 글을 쓴것도 바
로 그래서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책에는 (특히 뒤부분) 혼자 무릎을 툭 치게 되는 시들이 많았다. 나는
여기서 우리 시단의 로시인이나 이미 많이 평가 받은 시들에 대해서는 다시 구구히 말하
고싶지 않고 새로 두각을 드러낸 젊은이들의 좋은 시 몇수에 대해 나의 천박한 소감을 피
력하고싶다.
나는 이 책에서 김영춘의 《8월의 호수가를 거닐며》, 허련화의 《가을산》, 남철심의 《우리들의 자화상》, 리범수의 《형씨 K의 자취방 소문》, 박설매의 《마지막 신화》, 전춘매의 《다조》, 윤영애의 《초불》과 《늙은 량주》, 박정웅의 《자화상》, 김영건의 《철쭉꽃》, 김선희의 《비》, 림금산의 《당신은 아십니까》, 석화의 《외로움》과 《옥수수밭에서》, 박문봉의 《과부》, 리임원의 《동해바다》, 류광철의 《남편》, 김일량의 《버드나무숲》, 최룡국의 《아버지 말소리》, 김학송의《갈대》, 리문호의 《자라곰탕》, 김문세의 《산》, 최기자의 《채소바구니를 들지 않는
건》, 김철학의 《학두루미》, 김동진의 《가을로 가는 나무》 등을 매우 감명깊게 읽었다
. 이 책을 펴낸 사람이 아주 잘 고른것 같다. 그외에도 우리의 로시인, 중견시인들의 명시
들도 많은데 여기에서는 략하겠다. 그래서 좋?시들을 례로 든것도 제일 뒤페지부터 든 까
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젊은이들의 시에는 몇가지 공동한 특점이 있는것 같다.
첫째, 그들의 시는 착상이 기발하다. 엉뚱하다는 말이다. 남이 생각지 못하는 시, 같은 제
목이라도 읽고나면 놀라게 하는 시, 그것이 진짜 시가 아닐가. 하늘의 달은 수천년동안,
수천명이 노래했어도 시인마다 그 감수가 다르다. 그래서 그것이 시가 되는것이다. 최기자
는 사람들이 날마다 들고다니는 《채소바구니》를 가지고 시를 썼는데 평범한 채소바구니
에 인생철학을 담았다.
함께 먹어줄이 찾기가 그렇게 어려울수가 있습니까/잠간 함께 먹어주는 그림자가/그토록
아프게 내 피를 말린다는걸 /당신은, 당신은 아십니까
이 대목에서 최기자라는 인간이 빤히 보인다. 절절한 하소연, 한 녀인의 고독과 외로움…
피말리는 인간의 그리움 이런것들이 너무나도 평범한 시구에서 평범하지 않은 체험을 진실
하게 잘 말해주고있다. 류광철의 《남편》을 보자.
여리디 여리였던/행화(杏花) 같은 꽃나이를 /그대의 이름자에
이것이 진짜 명시가 아닌가. 《밉고도 고운 그 이름을 먹고 사는》 녀자, 한국의 노래에는
사랑을 먹고 산다는 말은 있으나 《밉고도 고은 그 이름》을 먹고 산다는 말은 못들었다.
중국시단에서도 못보았다. 진짜 엉뚱한 소리다. 시는 남이 말하지 않은 소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시론에서는 시적발견이라 한다. 어쩌면 젊은 사람들이 이런 엉뚱한 생각을
했을가? 나는 반세기 남짓이 시농사를 짓고있지만 이런 생각을 못해보았다.
석화의 《외로움》이나 《옥수수밭에서》도 그렇다.《외로움을 손가락사이에 끼워/불 붙여
물면/먼 기억은 가물가물 눈앞에 피여오르고/옛날은 하얗게/재털이에 쌓이다/손가락끝에
서 짧아지는 고독/빨갛게 타는 심사 비벼끄는》 사나이의 형상이나 《등에/그리고 가슴에/
아기를 업고 또 안고있는/내 엄마같은 옥수수》의 형상은 매우 생신하고 너무나도 진실하
다.
《눈에 띄우는/꽃잎 하나 피우지 못한채/벌써 오늘의 계절에/휘여질듯 서있는/옥수수…》
그것이 마치도 애기를 업고 서있는 어머니 같다는 말이다. 나는 아니 우리는 한평생 수없
이 옥수수를 보고, 옥수수밭을 지나다녔지만 누구도 그것을 애기를 업고있는 어머니에게
비유한 사람은 아직 없는걸로 알고있다. 이것이 바로 재치있는 시인의 눈이다. 범상한 일
상생활이나 사소한 사물에서 시의(詩意)를 발견할줄 아는 재간, 그것이 시인의 남다른, 독
특한 사고방식인것이다. 허련화의 《가을산》을 보자.
가을산은 언제든지 벗는다/못벗는건 나다//산은 벗어도 당당하고/나는 입고있어도 춥기만
하다.
이것이 시의 전부다. 모두 합쳐 4행시에서 얼마나 많은 사색을 자아내는가. 이것은 대단히
세련된 높은 수준의 시라 하겠다. 이런 시들을 어찌 수준이 낮은, 보잘것 없는 시라고 하
겠는가. 오늘 우리의 시단에는 이런 시들, 쟁쟁 소리나는 시들이 적지 않다. 더구나 이런
시들을 어찌 30년대 수준이라 하겠는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렇게 평가하는 사람이 진짜 시
를 알고 하는 소리인지 의심하지 않을수 없다.
둘째, 이런 시들은 흔히 시적구상이나 발상이 기묘하다. 김영춘
의 《8월의 호수가를 거닐며》 같은 시는 진짜 명시라고 생각한다. 8월의 호수가를 거니는
《나》는 한마디 《은빛잉어》가 되고싶다고 한다. 《물속에 숨어 그대를 지켜보는/자그
마한 꿈이고싶다》고 한다. 《그러다 서글피 읊조리는 그대 사랑시/나를 부르는 예쁜 미끼
라 믿어질 때/그대 사랑의 낚시를 텀벙 물고/행복한 죽음으로 그대 손에 이르고싶다》고
한다. 행복한 죽음으로 그대 손에 이르고싶어하는 잉어의 심정, 매우 심각한 의미와 철리
를 내포하고있는 사랑시라 하겠다. 고금중외 수많은 시인들이 사랑을 노래했지만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지어는 비장한 사랑을 형상적으로 재치있게 노래한 시는 매우 드물다. 얼마
전에 나는 초청을 받고 세계시인대회에 참석한적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노벨상수상자도 있
고 각국의 저명한 대표시인들이였건만 각자 랑송하는 자작시들중에서 내 가슴을 쿡 찌르는
시는 그리 많지 않았다. 시란 절대로 미신할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
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좋은 시들을 쓰고있는가. 그들은 절대 얕잡아보아서는 안될것이다.
세계적인 수준이라는것도 상대적이지 결코 절대적인것은 아니다. 북데기속에 알맹이가 있
다는 농민들의 말은 실로 명언이라 하겠다. 우리의 평론가들은 이런 《알맹이》를 골라낼
줄 알아야 하고 그 싹을 부추켜 키워줄줄 알아야 할것이 아닌가!
이런 견지에서 나는 진짜 젊은이들의 《명시선》을 따로 하나 펴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언젠가 낚시군의 시를 시도해본적이 있는데 김영춘시인처럼 그렇게 심각한 시의를 발견하지 못하고 포기한적이 있었다. 낚시군과 물고기, 이는 본래 모순의 량극이다. 그런데 그것을 《행복한 죽음》으로 통합시켜 사랑이 주제를 고도로 승화시켰다. 이 얼마나 기묘한 시적전환인가. 실로 보통솜씨가 아니다. 우리가 얼마쯤 어떻게 써야 《세계수준》이라고 할수 있을가. 도대체 《세계수준》이란 어떤걸 두고 하는 말일가. 우리는 그런걸 쓸수 없단 말인가. 너무 허무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셋째로는 이 시들이 삶의 밑바닥을 훑고있다는 점이다. 진솔한 시들이 특징적이다. 시의
진짜 감칠맛은 생활의 밑바닥에 있다. 감정의 솔직한 고백이라 할가. 이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 이는 시를 써본 사람만의 체험일것이다. 흔히 좋다는 시들은 솔직한 멋에 있다. 생
활의 진실, 인간 내면세계의 발굴, 진솔하고 소박하고 가식없는 시어의 고백, 고금중의 명
시들에는 이런 색채가 농후하며 복합적으로 표달되고있다. 시의 공명이란 왕왕 시인의 체
험이 독자 체험의 공감대에서 이루어지는것이다. 공명―공감―체험의 공감대, 이것들이 어
찌 보면 유기적인, 자연적인 통합에서 이루어질 때가 많다.
윤영애의 《늙은 량주》 참 실감이 나는 시라 하겠다.
《돌아보면 안해란/꼭 지난가을에 장독밑에 묻어/절인 무오가리 같은 존재/안해에게 난 무
엇일가/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본다/면도칼 갈던 성미에도 녹이 쓸어/흰수염 몇오리 턱밑에
말라붙어있고/아무렇게나 남은 이발 몇대/겨우내 이마를 벽에 쪼으며/처마에 매달려있는/
삶은 강냉이 같은 존재가 아닐가》
이 시에서는 군때 묻은 늙은 량주의 몸내가 진하게 풍긴다. 가식없는 삶의 묘사, 실감나는
생활의 향기, 누구나 보고 아, 그렇다! 하고 동감이 온다.
《싸― 하게 맞혀오는 매운 성미/먹은 뒤에도 오래동안/입안에 여춤이 남아돌게 하는 녀자
/언제나 귀벽을 긁어주는 칼칼한 목소리/까드득―까드득―/이발이 저리게 하는 녀자》누구
나 체험하고있는 늙은 량주다. 밉고도 고운, 싸움을 하면서도 헤여질수 없는 령감 로친,
한뉘 원쑤라고는 입버릇처럼 하면서도 한시도 떨어질수 없는 사이, 《까드득―까드득》이
를 갈면서도 밤이면 등을 긁어주며 살아가는 늙은 부부… 삶의 밑바닥을 긁어대는 시란 명
시가 아닐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시는 현대 한국시에서도 찾기가 힘들다. 공연히 자
기걸 너무 얕잡아보지 말아야 할것이다.
박정웅의 《자화상》도 상당히 멋지다.
《그림자처럼/무시당하고 짓밟히는 사람/마침내 자신이/그림자로 되여가는 사람》이 세상
에는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외롭고 지쳐보이는 사람》… 불운한 사람, 많
고도 많은 서민층의 군상을 불과 8행밖에 안되는 단시에 매우 잘 개괄하였다. 많은 내용을
짧게 표달하는 재간, 이것이 시의 본질이 아닌가. 한족들은 이것을 함금량(含金量)이라
한다. 짧은 시행에 금싸락 같은 값진것이 많이 포함될수록 좋다는 말이다. 시는 되도록 짧
게 써야 한다. 튕기면 챙챙 소리나는 언어, 값비싼 금속품이라야 한다. 여위여진 하늘을
짜면서 내린다는 김선희의 《비》, 사랑이란 두글자는 한획만 틀리게 씌여져도 글자마다
아파한다는 림금산의 시, 단 3행 시에서 독자들은 많은것을 사색하게 된다. 《밤마다/그녀
의 깊어가는 방으로/발자국 한줄이 곧추 뻗어가건만/그녀의 옆 빈자리는 시종 메워지지 않
는다》는 박문봉의 《과부》, 모두 함축된 생활의 진실이다.
《명금의 시작은 굵고/끝은 가늘다》라고 시작한 리성비의 《손금》도 매우 철리적이다.
비늘 떨어진 상처투성이 몸으로 강을 거슬러 지느러미 젓는 연어의 삶을 통해 사람들은 많
은것을 생각하게 된다. 시인의 재간은 자기가 말하지 않은 깊은 함의를 독자가 생각하게
하는것이다. 이것을 만약 줄글로 쓴다면 아마도 긴 소설이 될것이다. 독자가 음미하도록
사색을 이끌어주는것이 시의 공능이라 할가. 아무튼 시는 하나의 공명통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명시집에 수록된 젊은이들의 시에 티가 없는것은 아니다. 많은 주옥속에 간혹 티도
보인다. 미숙한것들이 있다는 말이다. 발견은 잘했고 시작도 잘 뗐는데 그것을 더 깊이 피
지 못하고 파다가 만것 같은 아쉬움이 가끔 보인다. 좀더 사색을 무르익혔더라면 진짜 명
시가 될번한것들이 있어 읽는 사람은 안타깝게 한다. 좋기는 많이 생각하고 짧게 쓰는것이
상책이다. 그리고 내가 잡지들에서 본 젊은이들의 좋은 시들이 여기에 수록되지 못했음이
아쉽지만 그거야 사람마다 보는 각도와 취미가 다르니 하는수 없는거고. 문제는 우리 선
배들이, 평론계가, 그리고 전 사회가 원예사가 되여 두각을 나타낸 새싹들을 잘 키우는것
이다.
가끔 우리의 신문 잡지들에 젊은이들의 좋은 시가 선보이는데 사람들은 여기에 너무
무관심하고 반응이 없다는 섭섭한 생각이 든다. 망울을 터친 이쁜 꽃은 끝까지 가꾸어야
하고 튕겨진 불꽃은 거기에 불이 달리게 해야 한다. 흔히 기성작가에 대한 분촌 없는 지나
친 평가나 지어는 우상화하는 문장은 많아도 신진작가나 시인을 고무하고 보듬어주고 이끌
어주는 따뜻한 평론이 적은것은 하나의 유감이 아닐수 없다.
우리가 모두 원예사가 되자. 그리고 알심들여 새싹을 키우자. 없다고 낮다고 나무리지만
말고, 알짜를 골라서 키우는 작업 다 같이 하자. 오늘의 기성작가나 시인도 옛날에 다 그
렇게 한걸음한걸음씩, 남의 손목에 이끌려 자라나지 않았던가. 그래야 우리 민족의 문단에
희망이 있게 되고 21세기에 우리 민족시단에 새로운 명인이 나타나게 될것이 아닌가!
▲ 김철 시인
▲ 김철 시인에게 중국정부에서 수여한 영예시민상 , 아주 특별한 공로가 인정될 때 받을 수 있는 상이라고 한다.
▲ 김철 시인 가족에게 수여한 5호가정, 가장 모범적인 시민에게 수여되는 귀한 상이라고 했다.
▲ 김철 시인이 남녘에서 출간한 같은 내용의 두 권의 시집
▲ 김철 시인이 북경고려경제문화연구회 신년 행사에서 조선족동포들을 격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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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이 다가와도 저녁놀은 아름답게”
“나의 인생은 어언 석양길에 들어섰고 글쓰기에서도 오래잖아 황혼이 다가올 것이다.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불 태워 쓰는 글로써 내 인생의 저녁놀을 조금이라도 어여쁘게 물들이고 싶은 욕망, 아직도 살아있다.” _김응준
김응준, 그의 숙명은 문학이요, 그의 천명은 시인이다. 광풍이 련련히 몰아치고 고패치는 그 세월에 한때 억울한 서리를 맞고 변강 벽지에 가서 움츠러들어 거의 절필하다시피 했던 시절에도 그는 마음속 깊이 알게모르게 움틀거리는 문학에 대한 욕망을 앞으로 언젠가는 터치울 것이라는 다짐을 했다. 때는 일찍 그가 뿌리를 내린 중국 변강의 땅 훈춘으로 이른다.
가난한 학창시절
그는 1934년 10월 14일(음력) 길림성 훈춘시 밀강향 태평구(현 해방촌)의 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2살적 월사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났는데 그때 아버지는 검정귀버섯을 팔아 공부를 계속시키려는 목적으로 산에 갔다가 전염병(왜놈들이 패망하기 직전 동북대륙을 휩쓸던 그 몹쓸 전염병 콜레라로 인해)에 걸려 결국 열흘만에 사망하고 연이어 삼촌과 여동생을 모두 잃었다. 태평소학교를 다녔던 그는 어릴적부터 공부를 유난히 잘하였지만 가난한 살림때문에 부득불 학교를 중퇴했어야만 했다. 이젠 농사를 하려고 하던 찰나, 1942년 로을룡선생의 간곡한 권고 하에 그는 2년간 짚신을 신고서 밀강소학교에 통학을 하게 된다. 그 시절, 가난한 살림에 도시락을 싸갖고 가지 못하여 배고픔을 달래러 마을 관자집에 들어가서 타래떡 냄새를 맡군 하였는데 그렇게 향기로울 수가 없었다. 5,6학년을 밀강소학교에서 마치고 또 다시 집안일을 도우려고 다짐을 하였다가 초중입학시험 일주일 전 전학손선생의 “초중에 입학하면 5원의 조학금을 받을 수 있고 또한 기숙사에도 들어갈 수 있다. 절대 포기하지 말고 공부를 계속하라”는 의미심장한 얘기에 생각을 바꾸었다. 후에야 그는 그때 전학손선생이 통신학부에 “앞으로 계속 노력하면 우수한 머리에 무한한 발전을 기할 것이다.”라는 글을 쓴 것을 보고 희망찬 앞날에 대한 신심을 가지게 되었다. 초중입학시험 결과 12명중 2명이 입학하게 되었는데 그도 포함되었다.
훈춘중학에 입학하여 과외독서와 글쓰기에 매진한 그는 작문경색에 나가 우수상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앞으로 걷게 될 문학의 길에서 재능과 소질이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수 있다.
고중에 올라갈 무렵인 1952년, 그는 리학용 담임선생님의 권고로 학비가 안드는 연변한어사범학교(로동자문화궁 서켠에 있는 공상은행 사무소 자리에 허름한 단층 벽돌집)에 입학하였다. 이는 나중에 연변대학 중문계로 입학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 학교에서는 자연과를 설치하지 않고 주로 중문을 몇개 과목으로 나누어 배우는 외에 조선어, 정치, 력사, 지리, 음악 등 과목을 더불어 가르쳐주었다. 자연과학을 전공할 길은 막히고 문과를 전공하는 길밖에 없었다. 초중시절 문학에 흥취를 갖고있었고 작문 경색에서 입상한적도 있었던 그는 그곳에서 문학의 길을 가려고 다짐하였으며 고리끼와 푸쉬킨, 조기천 등 문학거인들의 작품을 남김없이 열독하였다. 드디어 1954년 초 처녀작 이 연변문예에 발표되었다. 그 이듬해인 1955년 5월에는 작품 가 역시 연변문예에 발표 되었는데 1956년 8월 연변작가협회 창립시 학생신분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문예상과 함께80원의 상금까지 받아안았다. 그 80원의 상금으로 그는 여동생을 데리고 볼품없는 초가집에서 살고있는 어머니에게 50원을 보내여 새로이 집을 장만하게 하였다. 1955년 그는 연변대학 중문계로 입학하게 되는데 1956년 말부터 1958년 7월까지 북경대학 중문계로 연수를 떠난다. 이러한 좋은 기회가 따라준 것은 연변한어사범학교 시절인1955년의 사연이 계기가 되었다. 그해 5월, 교도주임은 우수한 학생들을 불러 연변대학 중문학부에 입학할 자격에 부합되는 학생들을 선발하겠다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운동대회에서 문예대회, 졸업생대표발언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우수한 학생이었던 그는 마침내 연변대학 중문학부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북경대에 연수를 가게 된 첫걸음이었다.
연변대학 중문학부에서 그는 , , 등 작품을 발표하였고 북경대학 시절에는 등 다수의 글을 써냈다. 북경대학은 중국 최고의 학부인만큼 일류의 학습환경을 구비하였고 동방어문학부에는 도서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는 이 자원을 충분히 이용하여 열람식에서 2년동안이나 폐문독서를 하며 문학지식을 늘였다. 고문과 열독에 몰두하였으며 라는 한문으로 된 7언시도 발표하였다.
훈춘에서의 20년 세월
시작이 좋아 한창 부풀어오르던 이 시절, 반우파투쟁이 일어나 기술실무만능주의(白专道路: 문학에만 열중하고 정치적활동에 적극적이지 못하였다.)로 “우파언론이 있고, 공청단원 1년간 보류, 사용제한”(有右派言论, 留团查看1年, 限制使用)이라는 처분을 받고 1959년 8월 훈춘시 제2고중에 분배받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14년동안 한어교원사업에 충성하였고 모범공청단원이 되면서 사회주의 교양운동으로 인해 공작대대장 리용눌으로부터 1965년 6월에 재해방 되면서 입당을 하였고 부교무주임으로 승진하였다. 문학에 대한 욕구를 제대로 표출하지 못했을 그때, 리상각과 김성휘, 김철 등 문학친구들의 권고로 다시 필을 든 그는 , , , 등 작품을 써냈다. 1973년, 그는 훈춘시 서기 김성화의 추천으로 훈춘시 외사반공실 주임으로 전근하게 되어어 6년간 그곳에 있었다. 그후 1978년 즈음 훈춘시 진교향당위서기로 1년간 종사하다가 1979년 3월 훈춘을 떠나 연변작가협회 부비서장으로 임명되었지만 편제가 없어 1년간 연변군중예술관 “해란강”잡지(문예지)의 편집을 맡게 되었고 1980년 3월부터는 연변인민출판사에 30년의 청춘을 바쳤다.
문학의 봄날
문학의 꽃망울을 틔우려다 사그러든 그는 다시 문학의 봄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1980년대 말, 지식분자들이 걸어온 역사를 돌이키며 해방받지 못한 울분을 토한150행에 이르는 를 발표하였고, 1984년 10월에는 아내를 잃은 슬픔으로 쓴 연변문학상을 수상한 (대표작가운데의 하나)를, 1980년대 말에는 100수에 달하는 인생3부작인 연작시 (연변문학상 수상작품), 사랑주제 , 겨례의 역사 를 써냈다. 이 시기에 쓴 가요 은 2007년도 장백산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1993년 해외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그는 1993년에는 러시아, 1996년, 1997년, 2000년 3차례에 거쳐 약 2년간 미국에 머물었다. 그 시기 그는 여행을 하고 글을 쓰며 손군들을 키우는 등 일들을 하였으며 사랑하는 딸을 잃은 아픔으로 라는 기행시집을 써냈다. 그리고 자본가의 상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맑스의 중 잉여가치의 이론을 직접 체험하기도 하였다. 그곳의 선진문화를 폭넓게 받아들여 문학의 전통에서부터 현대에로의 탈바꿈을 시도한 그를 평론가 우상렬은 “인류를 내다보는 시인”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2006년 3월, 그는 연변시인협회를 창립하여 현지창작과 도서출간, 시상식 등과 같은 활동들을 활발히 펼치고있다. 그는 장백산의 웅위함은 수많은 여러 봉우리들에 있다고 말한다. 시인협회의 창립 역시 시의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좋은 시를 뽑아 웅기중기 솟아서 이채를 돋구어 새로운 각자의 향기를 풍기게 하기 위함에 있다고 한다.
돌아보면 아득한 세월, 류수처럼 구름처럼 무정한 세월은 흘러흘러 그의 생에도 어언 황혼의 석양무렵이 다가왔다. 이팔청춘에 아침노을을 곱게 짜보려고 직기에 올라탔다가 때아닌 서리를 맞고 광풍에 휘말려 가슴깊이 상흔을 남긴적도 있었다만 문학에로의 사랑, 시에로의 사랑은 올곧이 인이 박혀 그한테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좋은 시절을 맞이하여 봄바람을 타고 꽃노을을 짜는 직기에 다시 오른지도 30년의 세월, 그리고 지금도 짜고있는 저녁노을쪼각이 앞으로 우리의 겨례가 나아가는 앞길에 한송이 꽃댕이나 한오리 옷고름으로 날릴수만 있다면 그는 흔쾌히 웃을 것이다. “시쟁이”인 그는 인생의 황혼이 바득바득 다가오는 석양무렵에도 그냥 분초를 다투어 연소하고 있다.
김응준시인 략력
1.2.3.4.5.6.7.8.9.10.11.12.13.14.15.16.17.18.19.
김응준의 소년시절
김응준의 청년시절
2000년, 샌프로시스코, 유람선위에서의 김응준
해란강닷콤 류설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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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준ㆍ1934년 10월 14일(음력) 길림성 훈춘시 밀강향 태평구 출생.ㆍ1959년 연변대학 중문학부 졸업 후 훈춘시2고중, 훈춘시 외사판공실 근무.ㆍ1979년 이래 문학편집에 종사, 연변인민출판사 편심,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단풍수필회 부회장 겸 비서장.ㆍ1954년 처녀작 발표 후 시집 『별찌』, 『남자와 여자와 사랑과 시』, 『사랑새를 기다린다』 등 다수ㆍ시초 『사랑의 애가』, 연작시 『불타는 황혼』, 가요 『사랑아 어찌 늙으랴』 등 40여 편 수상.]
시적상관물 응용해 새로운 이미지 창출한 력작
"그쯤에 나는 원래 쓰던 나의 사실주의의 재래식 시를 어수룩하고 재미없게 보고있었습니다. 이미지즘의 시를 쓰려고 했으나 완전히 현대파의 우점을 융합해서 자기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나이아가리폭포'가 그 실험작이라 할수 있습니다."
김응준 시에서의 획기적인 돌파일 뿐만 아니라 우리 시단에서도 보기 드문 우수작이라고 정평나 있게 한 "나이아가라폭포"창작경위를 물었을 때 김시인은 이렇게 말머리를 뗐다.
1996년 5월말부터 12월초까지 반년 남짓한 기간 김시인은 맏딸 홍화의 덕분으로 미국에 체류하면서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최고의 과학기술을 소유한 부요지국을 편답할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하여 당시까지 세계에서 제일 높았던 시카코의 시얼즈청사며 현대총아들의 모임인 뉴욕의 마천루빌딩을 바라보면서 경탄했고 필라델피아의 독립운동시기의 거대종을 두드려보면서 감격하기도 했다.
"그때 우연히 뉴욕교외 마우드 키스코에 사는 치과의사 겸 시인인 장석열선생을 만나게 되였는데 우리는 서로 현대시에 대한 견해도 교류하고 즉흥시도 주고 받으면서 유쾌히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을 느껴 보고픈 갈증은 대도시 구경만으로는 풀 수가 없었던 시인은 미국의 대자연에 눈길을 돌리게 됐다. 순수, 청신, 거대의 상징인 나이아가라폭포에 그 목표가 정해졌다. 딸애가 아버지를 위해 전문 마련했다는 '링컨'표 승용차에 앉아 나이아가라폭포를 향해 떠나는 마음은 하냥 들뜨기만 했다. 운전대를 쥔 사위는 나이아가라폭포에 대해 신나게 설명해주었지만 직접 보지 않고는 그 진가를 가늠할 수 없는지라 마음이 조급해지기만 했다. 9월 13일, 이른 새벽에 뉴욕에서 출발한 차는 눈깜짝 할 새에 천리길을 달려 오후나절에 버팔로시에 도착, 멀리서 쿵쿵 울려오는 폭포소리가 벌써부터 마음을 설레이게 했다. 기진맥진한 사위는 구경을 래일로 미루자고 했으나 조급해난 시인은 폭포가로 당장 달려가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하여 같은 숙박집에 들어있는 버팔로대학원 박사연구생 허원수씨의 안내로 급기야 폭포유람에 나섰다.
뉴욕주와 카나다와의 국경을 흐르는 나이아가라강에 있는 나이아가라폭포는 세계에서 제일 큰 폭포인데 락차가 51메터, 너비가 1240메터이다. 원래 고우트 섬에서 두갈래로 갈라져 미국폭포와 카나다폭포로 나누여 졌는데 지금은 유람선에 앉아 계선 없이 두 개 폭포를 마음대로 유람한다고 했다. 매일 찾아 오는 유람차만 해도 1만여대, 1년 사시절 관람인수는 무려 1200만을 넘긴다고 하니 엄청난 관광지가 아닐 수 없었다.
차가 폭포근처에 다가갈 수록 쿵쿵하는 폭포의 굉음이 더욱 커져 가슴마저 두근거렸다.
"그 천둥같은 굉음은 십여리 밖에서 부터 들려 오고 금장에 이르러 보니 그 기세는 천군만마가 질주하는 듯이 호대하고 그 모습은 밤하늘의 은하수가 내리 걸린 듯이 장관이였습니다. 해빛 아래 아롱거리는 물보라는 칠색무지개를 만들고 있었는데 아름다운 무지개가 폭포에 가로 걸려있어 문자그대로 수정궁에 들어선 듯한 황홀한 극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승강기를 타고 50메터 벼랑을 내려가 7.5딸라의 유람선표를 사가지고 거기서 발급해주는 하늘색 비닐비옷을 입고 유람선에 오른 시인은 마음이 더욱 들뜨기만 했다. 물보라가 아름찬 물안개를 만들고 있는 속으로 들어가는 유람선, 그저 쿵쿵하는 폭포의 굉음만 들릴 뿐 폭포는 보이지 않았지만 완전히 딴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이였다. 참으로 혼자서는 구경하기가 아까운 경관이였다. 서로 면목없는 이국 친구들이였으나 엄지손가락을 내밀면서 감격의 의사를 나누기도 했다. 조선족처럼 생긴 두 아가씨가 옆에 다가서고 있는지라 조선말, 한어 등으로 물었더니 일본어로 대답했다. 일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시인은 격동된 심정을 터놓았다. 교또에서 온 대학생처녀들은 세계 여러 나라를 유람했지만 이렇게 굉장한 경치는 처음이라고 감탄하고 있었다.
머리가 젖든 말든 비옷모자를 벗어 버리고 폭포를 바라보았다. 거대자연의 순수 앞에서 물보라 같은 자신을 발견한 시인인 격앙된 목소리를 뿜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이건 대자연의 교향곡이다. 저 폭포는 수천수만의 악사가 아니고 뭔가. 말발굽처럼 반형으로 둘러선 저 악사들은 천하제일의 곡을 연주하고 있구나.
숙박집에 돌아온 시인은 낮에 보았던 그 장쾌한 폭포의 출연이 자꾸 눈에 밟혀와 도무지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시인은 필을 찾아 쥐였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온 후 이미 서양의 현대시론과 현대시들을 많이 읽고 있었는지라 이번의 시만은 이미지수법을 도입하여 새롭게 써보려고 작정했다.
"폭로는 다부작의 교향곡이다. 이것이 바로 종자이며 발견이다. 이것을 쥐고 다른 것은 다 버리자. 그 모습, 그 소리는 교향악대이며 교향가수이며 교향곡인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떤 교향곡도 대자연의 교향곡보다 못하다. 자연만이 가장 아름다운 교향곡을 울릴 수 있다. 모든 때를 여기서 깨끗이 씻을 수 있다."
김시인은 필을 든 채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느새 필이 날려졌다.
하얀 너울을 쓴
수천만 가수와 악사들
휘우듬히 반원으로 둘러서서
장엄한 교향곡을 울린다.
튕기는 하아얀 목소리
하아얀 마음에 젖어
속세의 어지러움과 소음
쥐 죽은 나라로 달려가고 청순한 순수만 메아리쳐
구중천을 휘젓는다.
천만년 부르고 불러도
끝이 없는 다부작 연주
그 속에서 한번만 젖어 보아도
혼령마저 시원히 가셔지는
너그러운 대자연의 교향곡이여!
창작된 시는 대해를 건너 연변땅으로 날아왔다. 연변일보 문예부 편집으로 있었던 최룡관씨는 김응준 시인의 이 시를 처음 받았을 대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금싸락을 얻은 듯이 기뻤다. '나이아가라폭포'는 실로 웅장하고 장쾌한 교향곡이였다. 처음에 이 시를 읽어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김시인이 이런 시를 쓰리라고 꿈에도 생각 못했기 때문이다. 60이 넘어서 새롭게 시를 시작한 그의 몸가짐이 실로 멋있었다." 그후 최룡관씨는 시론 "폭포가 울리는 장쾌한 교향곡"에서 이 시를 이렇게 평하기도 했다. "이 시에는 폭포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이 한마디도 없다. 제목에 '나이아가라폭포'라는 명칭만 있을 뿐 본문에는 폭포라는 언어조차 비치지 않는다. 이 시에서 표현되는 것은 '너그러운 대자연의 교향곡'뿐이다. 내가 알건대 이미지시학으로 말하면 이는 시적 상관물의 응용이다. 시적 상관물은 시인의 받은 감수를 새로운 사물이나 사실로 표현하는 작업이다. 시적 상관물을 응용하는 것은 현대시의 정수를 응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시인이 추출해낸 새로운 사실이 나이아가라폭포에 대용되고 있어서 참신한 이미지 - 장엄한 교향곡이 되었다... 이제 폭포 앞에 선 시인은 폭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수천만 가수와 악사들이 하얀 너울을 쓰고 있는 장엄한 교향곡을 현장에서 보고있고 폭포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교향곡을 듣고있는 것이다... 폭포와 교향곡은 완전히 다른 사물이지만 김응준시인에 의하여 하나로 일치되고 있다. 량자는 서로 침투하고 융합 되여 폭포이자 교향곡이고 교향곡이자 폭포로 되었다. 그 외에도 시인은 '목소리'와 '악음'에다 있지도 않는 색깔을 울림으로써 추상적 언어의 구상화에로의 전이도 실현 하였거니와 '하아얀' 목소리와 악음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창출해내기도 했다."
"이미 10권 시집을 펴냈는데 이 시가 들어있는 미국기행시집 '그리움 천만리'가 가장 좋다는 얘기더군요. 솔직히 말해 창작 당시거나 지금도 '나이아가라폭포'가 정말 좋은 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옆에서 다들 좋다고 하니 그저 글쎄 하는 마음일 뿐입니다. 아무튼 이 시에다 나는 나름대로의 환상적인 시세계를 그리려 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엊저녁에 내린 눈이 목화송이처럼 피여 있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김응준시인은 그때의 감격에 다시 젖어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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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제자들과 연변시인협회에서 축하의 꽃묶음을 시인에게 드렸다.
8월 9일 오전, 중국조선족시단의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인 연변시인협회 김응준회장이 80고령에도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하면서 19번째 시집 《사랑으로 가는 길》(연변인민출판사)을 출간하여 연변국제호텔에서 출간기념식을 개최하였다.
1934년 10월 14일에 길림성 훈춘시 밀강향 태평구에서 출생한 김응준시인은 1954년에 문단에 데뷔한후 시집 《별찌》, 《남자와 녀자와 사랑과 시》, 《김응준시선집》 등 18부의 시집을 펴내고 《세계명언》(공저), 《문학묘사사전》(공저), 《문학명작소개》(공저), 수필집 《짚신으로부터 구두에로》(2013) 등을 펴냈으며 《사랑아 어찌 늙으랴》, 《두만강 천리》 등 70여수의 가요를 창작하여 노래로도 중국조선족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장백산》문학상 등 수차의 수상경력을 가지고있는 시인은 1959년 연변대학 중국언어문학학부를 졸업하고 훈춘시제2고중과 훈춘시외사사무실에서 근무하다가 1979년부터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문학편집, 편심으로 사업하였다. 중국작가협회 회원인 시인은 퇴직후에 연변시인협회를 설립하고 회장과 시총서 《시향만리》의 주필을 맡고 활발한 문학창작활동을 하고있다.
웃줄 왼쪽으로부터: 김철, 채영춘, 림혜영, 최국철, 김응룡, 림장춘, 최삼룡, 채미화, 김동진, 김영능.
이날 출간기념식에서 저명한 시인 김철, 전임 연변주인대 부주임 리득룡(채영춘 대독), 연변주신문출판국 국장 림혜영,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 최국철, 연변시인협회 부회장 김응룡, 연변일보사 전임 부사장 림장춘(제자대표) 등이 축사를 하고 평론가 최삼룡과 연변대학 교수 채미화가 시인의 시와 시창작에 대하여 평론을 진행하였다.
제자들이 김철시인과 동희철작곡가와 함께 《선생님의 들창가 지날 때마다》를 열창하고있다.
이날 출간식은 시인의 출생 80주년, 문단데뷔 60주년, 19번째 시집 출간기념 등 다양한 내용으로 진행, 훈춘2고중시절의 제자들과 김철, 리상각 등 저명한 시인들 그리고 연변시인협회 회원과 연변작가협회 부분적인 회원 등 1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자들의 축하공연과 연변가무단 가수들의 축하공연, 시랑송 등이 곁들여지면서 시인의 건강장수를 기원하고 시인의 시집출간을 기념하며 시인이 창작한 가요를 부르는 등 이색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제자들속에서 흥겹게 춤추는 김응준 시인(가운데 사람).
동희철(좌2)작곡가와 김철시인부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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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주관,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주최
2014년 10월 18일 오후, 연길시 신라월드에서 개최된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10주년기념행사에서 김철, 김응준, 조룡남, 리상각 등 4명 원로시인이 개혁개방 전후시기에 황페화되였던 우리시단을 구축하기 위하여 견마지로를 다하고 문단의 기틀을 잡아준 동시에 문학창작에서 거둔 성과들이 높이 인정되여 《시스승님》상을 수상했다.
1932년 일본 시모노세끼에서 출생한 김철시인은 20세기 50년대에 해방군예술단에서 활약하였고 신문기자, 문예편집 등을 거쳐 연변작가협회 주석, 연변문련 주석 등을 력임하였으며 1956년에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였다. 문화대혁명시기 억울한 루명을 쓰고 4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1982년 중국작가협회로 전근하여 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 주필을 담임하였다. 세계예술축전 대상(1956년 모스크바), 전국문학상, 계관시인상, 세계문화명인성취상, 한국해외문학상, 국무원특수공헌상, 세계문화예술공로훈장 등 다수를 수상한바 있다. 서정시집 《휴전선은 말이 없다》, 장편서사시 《새별전》 등 20여부의 시집을 출간하였다.
신봉철(오른쪽)회장과 오장권부회장이 김응준시인에게 시스승님상을 시상하였다.
1934년에 훈춘시 밀강향에서 출생한 김응준시인은 1959년에 연변대학 중문학부를 졸업하고 교원, 외사주임,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 편심 등을 력임하다가 1994년 정년퇴직하였다. 2006년에 연변시인협회를 세우고 협회시전문지 《시행만리》를 창간하였다. 중국작가현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회원인 그는 1954년 서정시《념원》을 처녀작으로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동요동시집 《꽃도 웃고 나도 웃고》, 서정서사시집 《별찌》, 《남자와 녀자와 사랑과 시》 등 19부의 시집을 출간하였다. 연변문학상, 장백산《모두모아》문학상, 연변주진달래문예상 공훈상 등 다수를 수상했다.
신봉철회장과오장권부회장이 조룡남시인에게 시스승님상을 시상하였다.
1935년에 훈춘현 춘화향에서 출생한 조룡남시인은 연변사범학교 졸업하고 교원으로 사업하다가 우파로 몰려 23년간 고생, 1979년부터 연변인민출판사 《아리랑》문학편집을 담당하였다. 연변작가협회 회원,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연변주정치협상회 제7기, 제8기 상무위원 등을 력임하였다. 1951년부터 서정시 《해빙기의 강변에서》, 《영원한 미소》 등 서정시 500 여수와 《반디불》, 《제비네 학교》, 《딸랑강아지》등 동요 300 여수를 발표하였다. 시집 《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 《그리며 사는 마음》, 《고향마을 동구 앞에서》와 동요동시집 《반짝반짝 반디불》, 산문집《노래 저켠의 추억》등 이 있다. 리랑문학상, 천지문학상, 도라지문학상, 장백산문학상, 연변작가협회상, 연변주정부우수작가상, 연변주정부진달래문예공훈상, 길림성아동문학상, 길림성정부《장백산문예상》, 전국소수민족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1936년 9월 14일 조선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한 리상각시인은 1961년-1996년 《연변》, 《연변문예》, 《연변문학》의 편집, 총편,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을 력임한 중국작가협회 회원이다. 시집 《샘물이 흐른다》, 《사랑의 꽃바구니》, 《두루미》, 서사시집《만무과원 설레인다》 등 10여부 출간했으며 《중국조선족구전민요집》, 중문번역시집《인생삼매》, 의형제시조집《민들레 홑씨 둘이서》, 문학리론집《시조와 시조론》 등 다수가 있다. 길림성민족문화상, 중국소수민족문학상, 중국작가협회 우수편집 영예상, 중국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회 원예사상, 중국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회 문학사과 1등상, 길림성장백산문예대상 다수를 수상하였다.
신봉철회장과 오장권부회장이 리상각시인에게 시스승님상을 시상하였다.
주관단위인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이하 진흥총회) 신봉철회장은 개회사에서 수십년간의 창작생애에서 거둔 4명 시인들의 문학성취와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다년래 진흥총회가 주관한 문화경제활동들을 소개했다. 그는 진흥총회는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평선활동》, 《길림성산재지구 조선족중소학교 취재탐방 조사연구》, 《정률성탄신 100주년 계렬기념행사》, 《남영전토템시문화축제》, 《동북3성 조선족서법, 미술, 촬영작품전시회》, 《길림성산재지구 조선족기업가탐방》 등 무게있고 큼직큼직한 활동들을 87차례 조직하였으며 앞으로도 《50년대 출생한 조선족중견작가좌담회》, 《고 리정문동지 기념문집출판》 등 다양한 활동과 행사들을 조직하게 된다고 하면서 조선족경제사회발전과 민족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을것이라고 밝혔다.
주최단위인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최룡관회장은 페회사에서 연구회가 걸어온 지난 10년간의 성과들을 회고하고 《시스승님》상을 수상한 김철, 김응준, 조룡남, 리상각 등 4명 시인들에게 열렬한 축하를 보냈다. (김철시인은 사유로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시상식에서는 또 스승님상을 수상한 시인들의 대표적인 서정시들이 랑송되였으며 허룡석, 림원춘, 남영전, 김만석, 오상순, 한석윤 등 문인들과 평론가들이 축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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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4일 14시 04분 작성자: 김응준
♧ 추모수필 ♧
우리 시단의 한 거성을 추모하며
김응준
우리 시단의 한 거성― 임효원시인이 지난 11월 19일, 간암이란 잔혹한 병마에 시달리다가 80세를 일기로 불행히 별세했다. 며칠전 리상각 등 몇몇 시우들이 문병하러 갔을 때까지만 해도 《감사하오!》 몇마디 말씀까지 하시던 분이 이렇게 빨리 가실줄은 몰랐다. 인간의 생명은 병마앞에서 너무도 취약하고 한 인생은 너무도 총망히 사라지는구나.
임효원시인은 일찍 1945년에 처녀작 시를 발표했고 문학에 큰 뜻을 품고 흑룡강성으로부터 우리 연변에 와서 정착하였으며 연변을 고향으로 삼고 사랑했다. 그는 60년이란 세월속에서 시로써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주었고 장시기 동안 한 지도일군으로 우리 문단을 이끌어오면서 로고를 아끼지 않고 많은 업적을 쌓았다. 림종전에는 우리 연변시인협회의 고문을 맡았었다.
임효원시인이 주필을 맡아하시던 1954년에 필자는 《연변문예》(지금의 《연변문학》 전신)지에 처녀작을 발표했고 1956년 연변작가협회창립시기에 임효원시인을 비롯한 선배님들의 추천으로 졸작시 《령을 넘으며》가 창작상까지 받았었다. 구호식 서정토로가 범람하던 그 년대에 임효원시인은 비유와 상징적수법으로 《길짱구》, 《아, 산딸기는 익어가건만》 등 개성적인 시를 써냈다. 이런 시들은 그 비뚤어진 년대에 억울하게 《독초》로 몰리워 비판을 받았지만 실제는 시적형상이 아름다운 생명시, 련애시였다. 우리 일대는 임효원시인 등 여러 선배시인들의 많은 수작들을 따라배우면서 문학의 길에 들어섰고 또 성장해왔다.
1978년 말과 1979년 정초로 기억된다. 우리 나라 동란의 시기가 끝나고 연변작가협회가 방금 사업을 회복하자 주석을 담당한 임효원시인은 김철시인(부주석 겸 비서장)과 함께 당시 필자(진교향 당위서기)가 일하는 훈춘으로 두번이나 찾아왔었다. 두번째로 왔을 때 두 시인은 현당위 책임자의 동의를 얻었다면서 나의 집으로 오셨다. 임효시인은 나의 손을 굳게 잡고 연길에 가서 함께 문단의 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라》고 신신당부했다. 1979년 3월, 나는 과연 본의 아니게 푹 빠져있던 행정사업에서 벗어나 작가협회 부비서장 명의로 연길로 전근되였고 임효원시인과 김철시인의 수하에서 일하는 한편 시창작, 문학편집을 정식으로 하게 되였다.
한사람의 생애에 큰 영향을 주는 기회는 여러번 주어지지 않는다. 나를 《비문학(非文學)》의 길에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진출하도록 절호의 기회를 마련해주고 몸소 이끌어주신 선배님의 그 은정과 고마움을 영원히 잊을수 없다.
1984년 3월초, 연변작가협회에서 조직한 현지창작조 십여명 성원들은 화룡현으로 갔다. 임효원시인은 가장 년로한 분이였다. 그는 원래 그리 건강하지 못한데다 감기까지 걸려 간신히 우리와 동행하였다. 여러 후배들이 먼저 귀가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나도 좀 단련해야지!》라고 하면서 화룡현의 두만강일대와 평강벌일대를 십여일간에 걸쳐 편답했고 좋은 시 몇수 써냈다. 그때 제일 인상깊은것은 서정시 《여울소리》이다. 이 시는 후에 임효원시인이 가사로도 개작하여 좋은 곡이 붙어서 널리 불리웠다.
임효원시인은 많은 후배들을 양성했고 별처럼 빛나는 시들을 써냈다. 그는 평생에 《진달래》, 《오월은 노랑저고리》 등 여러 부의 시집을 출간하였다. 그의 많은 시들은 상징법, 비유법을 잘 운용하여 아름다운 시적형상이 부각되였고 간결한 언어속에 깊은 뜻을 묻어두었기에 음미할 멋이 있다. 민족의 얼을 읊조리고 인생, 향토, 애정에 바쳐진 주옥 같은 시편들, 이를테면 《아, 오월은 노랑저고리》, 《백의동포》, 《길짱구》, 《거친 수림에》, 《아, 산딸기는 익어가건만》 등 수작들은 우리의 심금을 울려줄뿐만아니라 후손만대에 길이 전해질것이다.
우리 시단의 한 거성― 임효원시인이여, 몸은 비록 갔으되 시는 큰 별로 길이 빛날것이다.
200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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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살아있는 집》을 돌아보며
―김철 신작시집 《황혼의 로맨스》를 읽고
김응준
우리 중국조선족시단의 거두인 김철시인은 이미 고희에 올라선 만년에 나라안팎의 문단활동에 아주 바삐 도는 와중에도 게으름없이 펜을 놀려 하냥 타작의 본새를 보임으로써 이미 30부의 시집을 펼쳐내는 기꺼운 성과를 올리고있다. 그가 최근에 출간한 시집《황혼의 로맨스》를 감명깊게 읽어보았다. 이 시집에는 김시인이 인생의 황혼무렵에 서서 홀러간 자기의 인생, 고향, 안정 등에 대한 추억과 사고가 맥맥히 흐르고있으며 많은 시편들이 감정이 절절하고 시적형상이 아름다워 독자의 가슴을 울리고있다. 시집에는 고향을 그리는 사향(思鄕)의 정회를 읊조린 시편들이 많은데 그중 《추억이 살아있는 집》을 돌아보면서 필자의 감상을 적어보려 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서 고향의 자연이나 인문을 두고 많은것을 쓸수 있지만 김시인은 인간의 정서를 가장 쉽게 건드릴수 있는 고향집을 둘러싸고 상상의 날개를 펼치였다.
낮에는 버얼건 해가 알몸으로
퇴마루에 누워 뒹굴고
밤이면 하아얗게 분바른 달이
늘 기웃거리는 집…
이 시는 첫련부터 독자를 비록 아득한 옛말이지만 눈앞에 선히 떠오르는 어여쁜 현장으로 끌고 들어간다. 시인이 표면에 써낸것은 퇴마루의 《해》와 《달》이지만 실지는 상징적인 수법으로 독자에게 떠올리는것은 천진란만하게 벌거숭이로 뒹굴며 자라나던 동년시절이며 분바르고 찾아와 갸웃거리던 소꿉시절의 곱살스런 소녀의 모습이다. 이 어여쁘고 정겨운 집에서 시인은 《장국을 많이도 먹었습니다》라는 소박한 구절로 장국을 좋아하는 우리 백의민족의 한 생활특성을 표현해주었고 자기를 키워준 고향집에 대한 뜨거운 감사의 정을 표달하였다.
두번째 련에서 김철시인은 집의 담장을 기여오르다 지친 《노오란 별》, 《꽃별》(아마 김시인이 별처럼 예쁜 꽃이라 하여 조합시킨 단어인것 같음)과 《시들해진 담쟁이》의 형상을 부각했는데 그 본의는 꽃과 풀을 쓰는데 그치는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 황홀하게 꽃핀 담장을 넘어다니다 지쳐 잠들었거나, 가난한탓으로 여위여지긴 했지만 부드러운 마음은 변함없이 《연한 바람을 휘젓고있는》 인간의 형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것 역시 은유적인 기법이 묘하게 운용된 일례라 하겠다.
세번째 련에서 김시인은 추억이 살고있는 이 고향집을 어머니께서 욕먹고 아버지께서 매맞던 일까지 모두 《사랑》으로 승화시켜 모든것을 고마운 감정으로 노래하며 세월의 풍상에 고향집은 찌그러졌지만 그리움과 사랑의 정은 《추녀밑에 깔려있고요》로 장생함을 읊조리면서 인차 다음 련의 주정토로로 과도한다.
금의환향 바라시던 두분의 말씀이
지금도 귀전에 쟁쟁하건만
그렇게 못하는 내 신세라
공연히 남의 탓만 같아 한스런 세월
그렇다, 자식을 낳아키움에 고생 많은 부모들은 자식들이 출세할것을 바라며 또 출세하여 귀향하는것을 크낙한 자랑으로 알고 락으로 여기며 자식들은 자기를 키워준 부모님의 은정에 고향의 은정에 무엇으로나 잘 보답하려는 선량한 마음을 지니고 고향을 떠나며 또 흔히는 고향을 떠난 다음에도 그렇게 하겠다는 결의를 잊지 않고 살아간다. 하지만 세상살이란 흔히 그대로 잘 이루어지는것이 아니여서 늘 향수에 빠지거나 통한과 죄책까지 느끼게 되는것이다. 부모에게 효성 다하지 못하고 고향에 보답하지 못한 떠돌이 불효자의 그 한이 진솔하고 친절하게 표현된 대목이라 보여진다.
울고 웃는 변덕스러운 창상의 세월에 고향집 우물도 인제는 말라버리고 가난에 의해 억압에 의해 《설음을 토해내던 청개구리도》 자취를 감추었다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한스레 읊은 다섯번째 련을 과도하여 마감련에서 김시인은 인생의 무상함을 아래와 같이 솔직하게 읊조린다.
아리송한 기억속으로
증발해버린 고향의 정
그래도 고향엔 예와 다름없이
철이 되면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네요
김철시인의 년보를 들추어보면 그의 고향은 한국 전라남도 곡성이니 고향집도 거기에 두고있는것이다. 김시인이 오랜만에 이 고향을 찾아가서 지은 《가시든 살점》이라고 통절하게 읊은것은 바로 그 뼈아픈 마음의 소산이라 보아진다. 그제날 침략자에게 쫓기고 가난에 몰려 떠돌이하던 불우의 세월은 물론 오늘 현실에 이르기까지도 이러저러한 여건으로 인해 고향에 고향집에 가보고싶어도 자유로이 가볼수 없는 형편이다. 많은 시인들은 수십년을 지나가도 고향에 대한 기억이 아주 또렷하게 살아있는것으로 쓰고있지만 김시인은 자기의 개성적인 생활체험을 솔직하고 진실하게 기억이 아리송해지고 고향정이 바래지는것으로 독특하게 썼다. 인생의 무정과 무상을 자연의 유정과 영생을 형상적으로 깊이있게 표현하여 독자에게 긴긴 사색의 여운을 남겨준다.
《추억이 살아있는 집》은 그 편폭이 좀 길다는 느낌이 가긴 하지만 총적으로 김철시인의 원 스찔의 발양으로서 재래의 사실주의적인 창작기법에다 현대화의 은유, 상징 등 기법을 재치있게 도입하여 고향에 대한 숭고하고 경애하는 정회를 세련된 언어로 절절하게 읊조린 성공한 시편으로서 필자의 가슴을 깊이 울렸을뿐아니라 여러 독자들의 심금도 울려주리라 믿는바이다.
2007. 5. 23
2007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