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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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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3    [비는 처절히 처절히... 詩 한컷]- 극빈 댓글:  조회:4100  추천:0  2016-04-21
-문태준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구례 섬진강 가 폐교 사택을 얻어 2년을 산 적이 있습니다. 제가 원래 농사꾼 출신이라 텃밭에 상추며 열무며 참깨며 채소를 많이 심었습니다. 그런데 열무는 저 혼자 먹고 남아서, 아내에게 보내고, 마을사람들에게 거저 솎아가게 해도 비 한 차례만 내리면 우쭐우쭐 자라버렸습니다. 어느 날 여행을 갔다가 일주일 만에 돌아와 보니 몇 번 먹지도 못한 열무들이 연보랏빛 흰 열무꽃을 온통 피워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무꽃밭엔 나비떼며 벌 떼가 잉잉거리며 즈이들 사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미처 거두지 못한 열무밭을 나비며 벌 떼가 차지하고 있던 것입니다. 저는 그걸 바라보며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답고 싱그럽게 느껴졌었습니다. 문태준 시인도 저와 같은 경험을 시로 표현하고 있군요. 사람들이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고 놀리는 데서 알 수 있듯, 줄기와 잎 그리고 뿌리를 먹는 열무의 현실적 효용성을 ‘게을러’ 놓쳐버리고, ‘가까스로’ 꽃이라는 비실용적 미적 가치를 얻습니다. 채소밭은 아름다움을 위해 가꾸는 것이 아니라 채소를 재배하여 먹기 위해 있는 공간인데 비실용적이고 엉뚱한 일이 벌어져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난감하고 망설여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꽃밭에 한 마리, 두 마리, 나비 떼가 나타나 앉아서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을 머뭅니다. 한마디로 열무꽃밭의 쓰임새가 전복되는 순간입니다. 열무꽃밭은 사람들에게 싱싱한 채소를 제공해주진 못하지만 나비 떼에게 깊은 휴식의 시간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결국 나의 열무밭은 나비의 꽃밭이 되어버린 셈이지요. 나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편히 쉬라고 내준 ‘무릎’이 한 번도 없었는데, 열무꽃은 나비 떼에게 느슨한 휴식의 자리를 내어주었으니, 어쩜 나는 열무밭에서 잎과 줄기, 뿌리만이 아니라 나비에게 꽃마저 잃은 셈이지요. 그러니 이게 ‘극빈’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름다움을 향한 허영과 욕망마저도 비워버린 지독한 가난인 셈이지요. 여기서 ‘설핏설핏’이라는 부사가 나오는데 이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짜거나 엮은 것이 거칠고 성긴 모양입니다. 둘째 잠깐잠깐 나타나거나 떠오르는 모양을 가리킵니다. 셋째 잠깐잠깐 풋잠이나 얕은 잠에 빠져드는 모양을 가리킵니다. 물론 이 시에선 당연히 세 번째 의미를 갖는 첩어입니다. “잠을 자도 설핏설핏 노루잠을 자던 아이가…오랜만에 잠도 달게 자는 것이었다.” (현기영-변방에 우짖는 새)라고 쓸 수 있지요. 한편 거칠고 성기게 짠 피륙을 ‘설피창이’라고 하고, ‘해가 설핏하다’ 하면 해의 밝은 빛이 약해지는 것을 말한다는 것도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1362    [詩는 詩의 코너]- 詩는 ㄱ ㅐ ㅃ ㅜㄹ ?! ... 댓글:  조회:4172  추천:0  2016-04-21
산야 도처가 내 聖域이었고 교사였으며, 詩의 발생지였다. “여보셔. 여보셔. 열차 와분당게. 죽고 싶어 환장했소잉.”누군가의 급한 외침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떴을 때는, 맞은 편에서 군용열차가 삼킬 듯이 질주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뿐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다.그런데 어느 고마운 손이냐. 옆구리를 쇠갈고리처럼 움켜쥐더니 내박치듯 끌어냈다. 노인네였다. 그는 혀를 끌끌 차면서 지그시 초췌한 젊은이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고맙긴, 젊은 사람이 몸을 너무 함부로 썼그만, 그란 혀도, 6·25 사변으로 산천이 전부 피멍 들어 뿔고 걸레가 돼붙는디, 몸까지 가불문 어떡한당가잉.”노인이 아니었으면 그대로 치어 죽고 말았으리라.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노인의 어깨로는 여명의 푸른 빛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다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어디로든 떠나야 하는 것이다. 이를 악물며 두 다리를 엉버티고 일어섰다. 신기하게도 일단 일어서니 발을 옮길 수도 있었다. “내가 마시는 물은 언제나 흐르는 물이다. 내일 모레 쓰러지리라. 승냥이 새끼야. 너 얼마나 배고팠느냐. 비록 지지리 모난 몸뚱어리일지라도 잘 뜯어 먹어라. 아주 썩어버리기 전에.”눈에 들어오는 산들은 햇살에 눈이 녹아 내리면서, 다시 그 헐벗은 모습들을 누더기 누더기 드러내고 있었다. “내 아기 죽어 묻어버린 날 악아 악아 네가 벌써 하늘에 있구나 악아”8) “살아 있다면 55세가 되어 여기 서 있을 그대 그대 그대, 다 죽어 흔적도 없이 머리카락 한 올도 없이 나뭇잎만 푸르다 꽃만 붉다 꽃만 희다 시대의 잘못 있어 서로 원수와 원수로 불을 뿜고 피가 튀었던 그 싸움의 세월 묻어 여기 한 그루 다친 나무로 있을 뿐 다 죽어 어디에도 그대는 없다. 그 총도 칼도 없다. 그러나 백년 뒤 그 싸움의 역사 싹 없어지지 않으리라. 지리산 세석평전 철쭉 가득히 그 역사 새겨 눈감으면 산마루마다 골짜기 골짜기마다 그대들은 거기 서 있으리라. 검은 청년으로 적의와 순결로 우뚝 서 있으리라. 하나의 토대로 그대 그대 그대.”9)동족상잔의 전쟁은 산야는 물론 그 속에 인간의 삶과 죽음까지도 신성한 것으로 지속시킬 수 없는 싸구려 품펜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자신의 거덜난 육신처럼, ……“차라리 빈 논 가운데 그대로 서 있는 묵은 허수아비의 너덜너덜이여. 너에게도 바람은 피붙이였던가. 내 넝마를 휘날려주누나” 푸른 시절의 골목골목을 휘돌아, 이윽고 당도한 곳은 강화도 마니산 꼭대기의 어설프기 짝이 없는 제단터였다. “종교인가 예술인가. 어디에 쓸어 부을 것인가. 이 손아귀에 쥐어진 좁쌀 한줌만도 못한 生의 시간들을 어디에!”긴 고뇌 속 갈림길의 터널이었다. 그리고 밤이슬에 젖은 그의 심중에 꽂힌 것은 예술이라는 화살이었다. 환속. 1962년의 일이었으니, 스물에 입산하여 서른에 하산한 셈이었다. “시인이 된지 얼마 되지 않는 상태에서 나는 승려라는 往相의 回向에 대한 완성자의 귀환인 環相의 회향이 결코 아니었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그 동안 쌓아올린 어느 정도의 禪德조차도 다 내던져버린 채 내 정신에는 어떤 영향도 가늠할 수 없는 치매가 들어앉았던 것이다. 세상은 나에게 맞는 것이 아니고 나는 세상에 맞는 어떤 가능성도 없이 세상에 대해서 빙빙 겉도는 사회적 사생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걷고 있었다. 제 안이 곪아가도, 고뇌의 열풍이 몰아쳐도 변함없이 걷고 있었다. “나는 내가 승려이자 시인인 사실을 편력에 꼭 들어맞는 떠도는 자의 내면화된 의무에 넘치고 있는 천직으로 믿기 시작했다. 나는 떠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어떤 명제의 패러디는 사실은 그 명제보다 더 나의 삶의 절실성을 일구어낸 것이었다.”무거운 발은 그만큼 깊어 갔다. 한발 한발 옮기는 사이, 그는 자신의 몸이 길 속으로, 땅 속으로, 들풀들 속으로 스미며 섞여드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찢기고 할퀸 산이 되고 강이 되고 벌판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산의 가슴, 들의, 강의 심장이 되고 눈물이 되었다. 산야의 한숨을 토해냈고 분노로 일그러지기도 했다. “이 모든 고단하기 짝이 없는 편력에서 내가 가는 곳마다 그곳은 새삼스러운 聖域이 되는 것 같았다. 남십자성 밑의 오스트레일리아의 대지에 떠도는 음유시인이 있었듯이, 아니 어느 나라에도 필그림의 미덕이 있었듯이 내가 태어난 조국에 대한 자연 귀속의 편력이야말로 내가 산야의 격조를 찾는 일이고 그와 함께 내 영혼의 본성도 한층 더 승화시키는 일이 될 수 있었다. 산야의 도처가 바로 내 시의 발생지였고 교사이기까지 했다. 드문 체험인 바, 그것은 나에게 입혀진 인문사회과학분야의 어떤 교양조차도 바람 부는 날의 편력이나 그 하염없는 도보 여행의 길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길의 정당한 거리까지의 동행자들은 그런 인문적 대화가 가능하게 만들었던 어떤 愛智의 긴장을 불러일으켜 준 것이다.”그는 머언 길을 삶으로 하는 나그네였던 것이다. 나는 창조보다 소멸에 기여한다. ‘무엇을 향해서 나는 그리도 끝도 없이 걷고 있는 것일까?’나의 발은 땅을 딛고 산천을 서성이고 있지만, 나의 마음은 어디를 향해서 떠나고 있는 것일까? 늘 마음속에 화두로 되뇌이는 동안 그에게 미소처럼 다가온 것은 죽음이었다. 야트막한 산에 묘지들마저 지워버리는 눈발들, 어둠 속에 그 하얀 눈내림 속에서도 그는 연신 자결하는 몸짓을 보아야 했다. “겨울 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다다른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이 세상의 길이 신성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달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小白山脈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빈부에 젖은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끼고 서서 참으면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꽉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무덤으로 받는 것을. 끝까지 참다 참다 죽음은 이 세상의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 본다. 지난 여름의 부용꽃인 듯 준엄한 正義인 듯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나면 우리 모두 다 덮이겠느냐.10) 바다도 그에게는 죽음의 바다였고 시간도 그에게는 저무는 시간이었다. “저문 들에는 노을이 短命하게 떠나가야 한다.11)) 세월이란 저문 서녘바람과 같아서, 내 눈앞이 크게 적막할 때도 있네.”12) 일체가 無화되고 다만 공허한 배경만이 남아 있는 자리에서, 그의 역은 허무라는 배역이었다. 그러나 절망을 만성질환처럼 앓으면서도 오히려 죽음을 집요하게 탐닉해갔다. “나는 창조보다 소멸에 기여한다.”13) “나는 왕이 아니라 옛 천자 아니라 한 톨의 망령이노라. 盛衰詩人들이여 노래하여라 나의 술과 亡國의 城을 그리고 오늘의 心琴을”14) 삶에 의해서 영글어가는 죽음의 과육 냄새,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오, 눈부시게 아름다운 無여, 자살이여. 도취여. ‘나는 소멸의 저편에 내 스스로 마련한 피안을 향해서 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타박타박 걷는 걸음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세계, 결국 그 피안의 세계에 닿기 위해서는, 마음대로 변신도 하고 전신도 할 수 있는 죽음의 관문을 넘어야 하리라.’이런 떠남과 죽음에의 피안감성! 결국 그에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연장이었고, 삶을 위한 하나의 연습이었던 것이다. 그런 1970년 벽두, 전태일이란 섬찢한 벼락이 그의 가슴을 그었다. ==============================================================================   330. 상징은 배고프다 / 최종천                   상징은 배고프다     최종천     삼풍백화점이 주저앉았을 때 어떤 사람 하나는 종이를 먹으며 배고픔을 견디었다고 했다 만에 하나 그가 예술에 매혹되어 있었다면 그리고 그에게 한권의 시집이 있었다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그는 끝까지 시집 종이를 먹지 않았을 것이다 시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면서 서서히 미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 자신 하나의 상징물이 되었을 것이다       최종천 시집 중에서  
1361    [신선한 아침 詩 한컷]- 오빠가 되고 싶다 댓글:  조회:4171  추천:0  2016-04-20
오빠가 되고 싶다 -임보(1940~ ) 나팔바지에 찢어진 학생모 눌러 쓰고 휘파람 불며 하릴없이 골목을 오르내리던 고등학교 2학년쯤의 오빠가 다시 되고 싶다 네거리 빵집에서 곰보빵을 앞에 놓고 끝도 없는 너의 수다를 들으며 들으며 푸른 눈썹 밑 반짝이는 눈동자에 빠지고 싶다 (…) 토요일 오후 짐자전거의 뒤에 너를 태우고 들판을 거슬러 강둑길을 달리고 싶다, 달리다 융단보다 포근한 클로버 위에 함께 넘어지고 싶다 (…) “오빠”는 사랑받는 젊은 남성에게 붙여진 시들지 않는 기표(記標)다. 세월이 가도 오빠는 그대로 있어서, 나이를 먹는 남성들은 언제든 그리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팔순을 얼마 앞에 둔 시인도 “오빠가 되고 싶다”. “푸른 눈썹”의 소녀를 뒤에 태우고 달리다 “포근한 클로버 위에 함께” 넘어지는 꿈은 얼마나 풋풋한가. 세상의 모든 청춘들이 이 시절을 지났고, 또 지나고 있다.  
1360    [아침 詩 한컷]- 디딤돌 댓글:  조회:3904  추천:0  2016-04-20
디딤돌 - 김주완(1949~) 저 방, 들고 나는 자 누구든 나를 밟고 드나드시라 나는 침묵하는 받듦이니 참으로 밟을 자만 밟을 것이라 “세계 안에 존재한다(세계 내 존재)는 것은 타자와 함께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하이데거) “나”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시인은 자신을 “디딤돌”이라 정의한다. 말없이 타자들을 “받듦”으로 디딤돌은 비로소 존재의 의미와 이유를 갖는다. 그러나 “참으로/ 밟을 자만 밟을 것”이라는 조건은 받듦의 대상에도 선별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함부로 밟을 일이 아니다.  
1359    서울 지하철 詩가 덜컹거린다... 댓글:  조회:4634  추천:0  2016-04-19
"공공장소 안 어울리는 작품 많아" 잇단 민원… 8월부터 교체 75%가 문인단체 시인들 시 선정방식 공정성 논란 일어 名詩·공모작으로 바꾸기로   '내 몸속에서 은밀하게 자라/시간을 갉아 먹는 암세포를/고귀한 인연이라 생각해 본 적 있는가…(중략)/이것 또한 귀하지 아니한가.' 서울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과 3호선 홍제역 승강장의 스크린도어 옆 안전벽에 붙은 '몹쓸 인연에 대하여'라는 시(詩)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 있다. 이용객 사이에서는 "시인의 의도와 작품성을 떠나 모든 연령층이 이용하는 공간인 지하철에 적합한 작품인가" 하는 지적이 나온다. 3호선 고속터미널역 등에 있는 '공생'이라는 시에 포함된 '부자는 가난한 자들의 노동을 파먹고/가난한 자는 부자의 동정을 파먹고…'라는 구절에도 비슷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고속터미널역 승강장에 게시된 ‘공생’이라는 시. 시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계층 간 갈등을 조장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됐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남강호 기자 '목련꽃 예쁘단대도 시방 우리 선혜 앞거슴에 벙그는 목련송이만 할까'(목련꽃 브라자), '칼 막 쓰지 마라…(중략)/포도주보다 붉은 혁명의 밤이/촛불처럼 타오른다'('맑'스) 등의 시는 이미 민원으로 철거됐다. 공공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 많다는 지적을 받아온 서울 지하철 시가 오는 8월부터 바뀐다. 지하철 시의 상당수를 차지해온 문인단체 소속 시인들의 시가 순차적으로 빠지고, 국민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아온 명시(名詩)가 게시된다. 서울시 관계자는 "지하철 시를 두고 '읽기에 부적절하고 불편하다'는 민원이 끊이질 않아 명시 위주로 교체를 단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하철 시는 2008년 등장했다. 서울시가 '지하철에서 시를 읽자'는 김재홍 백석대 석좌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여 실천에 옮겼다. 현재 지하철 1~9호선·분당선 299개 역 4840개 면에 총 2059편의 시가 있다.   게시 작품 중 75%는 문인단체 소속 시인들의 시다. 나머지 25%는 시민 공모작이다. 문인단체 시인들의 시는 각 단체가 시를 제출하면 심사위원 11명이 선정해 왔다. 하지만 심사위원 중 7명이 문인단체 관계자여서 공정성 논란이 일었다. 지하철 시를 처음 제안한 김재홍 백석대 석좌교수는 "문인단체들이 다수의 시를 독점적으로 제출하고, 이 단체의 간부가 심사까지 맡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며 "인지도가 떨어지는 시인이 자기 시를 알리기 위해 지하철을 이용하는 측면도 있다"고 했다. 작품성이나 내용을 둘러싼 문제도 계속 불거졌다. 폭력·선정성이 지나치거나 계층 간 갈등을 부추기는 표현 등이 많아 공공장소에 게시하기에 부적절한 작품이 적잖다는 것이다. 문정희 전(前) 한국시인협회장은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시는 물론이고, 지나친 감상주의와 과도한 정서 남발, 언어의 비논리적 사용 등 미숙한 시가 상당수 있다"며 "같은 시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낄 때도 있다"고 했다. 서울시는 이런 논란을 없애기 위해 지하철 시 선정 기준을 전면 개편하기로 했다. 전체의 50%는 시민·평론가·독서지도사 등이 추천한 '내가 사랑한 시'로 채울 계획이다. 이 중 일 부는 윤동주·서정주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작고(作故) 시인들의 작품에 할당한다. 나머지 50%는 시민 공모 작품을 지금의 25%에서 두 배로 늘리기로 했다. 문인단체 시인 작품 공모는 폐지한다. 서울시는 시 한 편을 싣는 지하철 역 승강장의 숫자도 지금의 2~3곳에서 최대 7곳으로 늘릴 예정이다. 이용객들이 명시를 여러 곳에서 접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이다. /성진혁, 최윤아 기자
1358    [쌀쌀한 월요일 아침, 詩 한컷]- 숟가락 댓글:  조회:3752  추천:0  2016-04-18
숟가락 함민복(1962~)  기사 이미지 보기 숟가락아 넌 뭘 먹고 사니? 먹여 줌을 먹고 산다고 꼭 어미들 같구나 그래 그래 불 물 나무 쇠 흙 해 달 공기 다 어미지 다 숟가락이지 목숨이 타고 가는 배 한 척이지 시집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시인생각) 中 멀리 고향에 계신 어머니. 자식 걱정에 잠 못 이루시고, 오늘은 아침 밥 한술 뜨셨을까요. 그저 먹여 줌을 먹고 살아가는 것. 이 세상의 어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그럴 테지요. 아무 욕심도 없이 우리를 배부르게 먹이고 살아가게 해준 어미는 물 불 나무 쇠 흙 해 달 공기에도 있군요. 그것들이 오늘도 우릴 먹이고 목숨을 살리니 고마운 어미, 고마운 숟가락입니다. 김민율 시인
1357    詩와 음악, 음악과 詩 댓글:  조회:4514  추천:0  2016-04-17
정재학 시인 살인자와 그림자들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시체를 자루에 싸서 옮기려 한다. 일당은 순찰 중인 경찰관과 마주치지만, 경찰은 시체의 허벅지살을 보고도 모른 척한다. 한 패가 된 경찰 눈엔 시체도 지푸라기와 고구마로 보일 뿐이다. 심지어 한입 깨어 물기까지 한다. 섬뜩한 시엔 마침표가 없다. ...추천작은 정재학 시인(40)의 ‘공모(共謀)’다. 1996년 ‘작가세계’로 등단한 시인이 6년 만에 내놓는 세 번째 시집 ‘모음들이 쏟아진다’(창비)에 실렸다. 추천에는 김요일 신용목 이건청 이원 장석주 시인이 참여했다. 정재학 시인은 정치적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불신이 누적돼 시를 썼다. 정 시인은 ‘공모’ 시작(詩作) 메모에 이렇게 썼다. “때로 진실은 너무 깊숙이 감추어져 있어서 우리는 어떤 부패에 대해 심증만 가질 뿐 교묘하게 조작되어 있는 상황에 농락당하기 쉽다. 권력이 강하면 더욱 쉽게 불리한 상황을 빠져나간다. 우리는 농락당하는 것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가는 것 같다. 하지만 진실은 결국 밝혀져야 한다.” 시집 해설을 쓴 조강석 평론가는 정 시인을 ‘2000년대 한국 모더니즘 시의 선두 주자’로 꼽고 2000년대 한국시의 젊은 시인을 ‘정재학 이전’과 ‘정재학 이후’로 나눴다. 시집에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어릴 때부터 시와 음악을 많이 좋아했습니다. 한때는 시를 쓰면서 음악도 함께 하고 싶었는데 음악은 능력 부족으로 하지 못했습니다. 시인에게 열등감을 느낀 적은 없지만 음악가에게 열등감을 느낀 적은 있습니다. 음악에 대한 사랑이 시에 많이 담긴 것 같습니다.   김요일 시인은 “정재학이 단선율 음계로 연주한 몽환의 선율은, 다양한 색채의 기표가 되어 ‘한여름 밤의 음악회’를 더욱더 비밀스럽고 신비하게 만든다. 시집을 덮어도 끊임없는 배음(倍音)이 되어 귀를 때리고 심장을 쿵쾅거리게 한다”라고 했다. 이원 시인은 “시집에서 재즈와 씻김굿을 넘나들며 ‘전위적 굿판’을 만들어냈다. 그의 초현실적 상상력이 이토록 생생한 것은, 바로 이것이 은폐하고 싶었던 우리 사회의 민얼굴이기 때문이다”고 평했다. 신용목 시인도 “정재학은 ‘풍경의 해부학자’다. 그는 우리 시대의 아픈 장기들을 꺼내 수술대 위에 올려놓는다. 보라, 보라, 보라고 외치는 그의 발밑에는 늘 피가 흥건하다”고 추천했다.   장석주 시인은 김근 시집 ‘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문학과지성사)를 추천하면서 “김근의 시는 불편하다. 한데 그 불편함이 어딘지 익숙하다. 어디선가 불쑥 나온 젖은 손 하나가 발목을 붙잡고, 모르는 손이 내장을 끄집어내는데, 이렇듯 몸은 온전성을 잃고 해체된 지체들로 저마다 현실을 감당할 때, 현실은 낯섦과 기이함으로 물든다”고 했다. 이건청 시인은 조정권 시집 ‘시냇달’(서정시학)을 꼽았다. “시집에서 삶을 바라보는 깊고 원숙한 통찰을 본다. 존재의 근원까지 하강해가면서 정제된 말을 찾고, 찾은 말들을 질서화해가는 그의 시업은 지루한 진술의 시들이 판을 치는 요즘 한국시에서 귀한 개성으로 읽힌다.” 박훈상 기자
1356    [밤비가 찌저지는 한밤, 詩 한컷]- 얼마나 좋은지 댓글:  조회:3808  추천:0  2016-04-16
얼마나 좋은지 -타데우시 루제비치(1921~2014) 얼마나 좋은지 숲에서 산딸기를 주울 수 있으니. 생각했었어. 숲도, 산딸기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얼마나 좋은지 나무 그늘 아래 누워 있을 수 있으니. 생각했었어. 나무는 더 이상 그늘을 드리우려 하지 않는다고. 얼마나 좋은지 너와 함께 있으니. 내 심장이 이렇게 두근거리는데. 생각했었어. 인간은 심장을 가지고 있지 않노라고. 폴란드 시인 루제비치는 아우슈비츠의 체험을 계기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반(反)나치 바르샤바 봉기에서 친형을 잃었다. 그에게 시는 “죽음으로 다가서는 일”이었다. 그 악몽의 끝에서 그는 산딸기를 줍거나, 나무 그늘 아래 눕거나, 애인과 함께하는 소소한 시간이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되었다. 그러니 얼마나 나쁜가, 이런 것들을 빼앗아가는 그 모든 악들은.
1355    詩는 소리 있는 그림, 그림은 소리 없는 詩 댓글:  조회:3778  추천:0  2016-04-16
산수화가 발달한 중국과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좋은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찬사를 보냅니다. 그림을 보고 느낀 감상을 시로 써서 그림의 여백이나 별지에 부치기도 합니다. 이를 제화시라고 합니다. 조선 초의 시인이자 학자인 성간(成侃)은 강희안의 그림을 보고 ‘시는 소리 있는 그림이요, 그림은 소리 없는 시이니, 예로부터 시와 그림은 일치되어 있어서, 그 경중을 조그만 차이로도 가를 수 없네(詩爲有聲畵 畵乃無聲詩 古來詩畵爲一致輕重未可分毫釐)’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는 신숙주를 비롯해 무려 23명의 제화시와 찬문이 별지로 붙어있습니다. 안평대군이 당대 최고의 문사들과 함께 그림을 감상하고 제화시를 쓰게 했기 때문입니다. |화가는 시적 감성 키우고 시인은 이미지의 문법 익히고 겸재 정선은 그의 절친이자 당대 최고의 시인 이병연과 ‘시화상간(詩畵相看)’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시와 그림을 바꿔 보며 감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화가는 시적 감성을 키우고, 시인은 이미지의 문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겸재는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시화상간을 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동양에서는 시와 그림을 동일시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는 송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인 소식의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라는 말에서 비롯됐습니다. 소식이 당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의 시와 그림을 감상하며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말한 데서 유래합니다. 이 말은 문인화가 산수화의 한 장르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문인화는 서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장르입니다. 지금도 이 전통이 남아 있습니다. 시와 그림, 시와 사진을 엮어서 ‘시화집’으로 책을 냅니다. 또 잡지를 보면 앞 부분에 ‘포토포엠’이라던가 ‘시가 있는 풍경’ 같이 서로 감성이 통하는 시와 사진을 짝지어 연재하기도 합니다. 사진 크게보기 상고대. 2015 시사지 월간중앙에도 시와 사진을 엮은 ‘포토포엠’이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시인에게 사진을 보여 주고 시를 쓰게 하는 방식입니다. 지난 2월 시인 이원규에게 필자가 찍은 덕유산 상고대 사진을 보냈습니다. 추사의 를 오마주한 작품입니다. 고사목에 핀 하얀 서리꽃에서 선비의 꼿꼿한 절개가 느껴지는 사진입니다. 그는 상고대를 ‘정신의 흰 뼈’ ‘영혼의 희디 흰 밥’으로 표현했습니다. 참 멋드러진 표현입니다. 현대판 ‘시화상간’이 아닐까요. 사진은 시와 그림의 중간쯤 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미술의 한 분야로 취급하지만 창작 과정을 보면 시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좋은 시는 압축되고 정제된 언어로 감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시를 읽으면 시가 묘사하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영화 가 개봉돼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의 시 ‘자화상’의 한 구절을 옮겨 볼까요.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시각적인 표현입니다. 우물 속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잔잔한 물은 거울이 돼 하늘을 비춥니다. 달이 있고, 구름이 흐릅니다. 그리고 우물을 들여다 보는 자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시를 읽으면 우물을 들여다보며 고뇌하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는 거울이나 물그림자 등 ‘반영’을 소재로 즐겨 다루는 사진의 형식과 많이 닮았습니다. 어떤 대상을 존재론적으로,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묘사하는 방식도 서로 비슷합니다. 다음은 김춘수의 시 ‘꽃’의 일부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수분과 섬유질, 그리고 색소로 이루어진 ‘물질(몸짓)’이 시인과의 교감을 통해 구체적인 형태의 ‘꽃’으로 다가옵니다. 꽃에 대한 존재론적인 인식입니다. 사진의 정신 역시 피사체와의 대화이자 교감입니다. 이를 통해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마음을 담습니다. 사진도 시 ‘꽃’과 같이 피사체에 자기만의 이름을 붙여주는 작업입니다. 사진 크게보기 부화. 2014 무엇보다도 시와 사진을 가깝게 연결시키는 것은 수사법입니다. 사진은 대상을 보고 느끼는 연상작용을 통해 의미구조를 만들어 냅니다. 연상이란 하나의 관념이 다른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푸른 하늘을 나는 ‘새’를 보고 ‘자유’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장미’를 보고 ‘유혹’을 느끼거나 하는 겁니다. 이때 두 관념 사이에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는 희박하지만 감성적으로 연결되는 이미지입니다. 자유나 유혹은 원관념 새와 장미가 불러온 마음의 상 즉 ‘심상’입니다. 그리고 비교되는 두 가지 대상의 개념이 서로 거리가 멀수록 비유법이 신선해집니다. 문학에서는 이를 직유법·은유법·의인법·제유법 등으로 표현합니다. |사진과 시의 창작 과정 닮아 사진의 표현형식 역시 바로 이 연상작용에 있습니다. 이미지의 비유를 통해 이야기를 담고, 메시지를 전합니다. 감상자들은 한꺼풀 가려진 이미지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상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진 속에 숨겨진 비유의 뜻을 풀게 되면 희열을 느낍니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비유가 풍부한 시를 많이 읽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경북 예천에서 회룡포가 내려다 보이는 산정에 올랐습니다. 신새벽입니다. 마을을 감아 도는 곡성천에서 물안개가 피어올라 구름바다가 됐습니다. 운해를 뚫고 나온 가로등 불빛이 마치 알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나는 이 사진에 ‘부화(孵化)’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자연은 거대한 인큐베이터입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넉넉하게 품습니다. 주기중 기자  
1354    소멸과 존재와 돼지와 그리고 부처님과... 댓글:  조회:3990  추천:0  2016-04-16
나는 소멸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 장경기 나는 떠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드넓은 만주 벌판의 지평선 위에는 흰 달 하나만이 명상하듯 정적에 잠겨 있었다. 소년은 일몰의 긴 그림자를 뒤로하고, 끝 모를 그리움의 눈빛으로 그 흰 달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1)황량한 벌판 위로는 어느덧 소년의 고향인 군산을 껴안고 있는 호남 벌의 벼들이 바닷물처럼 밀려와 거칠게 일렁이고 있었다. “빈 들 가득히 입다문 사람의 숨결이여. 아무리 모진 때 살아왔건만 순된장이여 진흙이여. 언제까지나 변함없는 따뜻한 사람의 숨결이여.”2)꾸벅 인사를 하면, 땡볕에 그을린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어깨를 다독여주던 마을 어른들, 일꾼들하고 일꾼네 아이들하고 저 건너 밭에 나온 아낙까지도 어서 와 어서 와 불러다가 모두모두 논두렁 한마당에서 들밥을 먹었던 고향 들판, 일제하에서 가난과 혹독한 노동으로 할퀴고 뜯긴 주름살 패인 얼굴들이었으나 얼마나 친근한 눈빛들이었던가. 오랜 마을에는 꼭 정자나무 한 그루 계십니다 오랜 마을에서는 꼭 깊은 우물 시린 물 길어 올립니다 그 물 길어 올리는 시악시 계십니다 점심 먹고 한동안 모이십니다 아무리 이 세상 막 되어가도 언제나 넉넉한 정자나무 밑으로 할아범도 아범도 나오십니다 큰 나무 하나가 스무 사람 품으십니다 땀 들이고 더위 잊고 매미 쓰르라미 소리 자욱합니다 몇마디 말 허허하고 나누십니다 가만히 보니 과연 정자나무 밑에서도 좌상 자리 있고 다음 자리 있어서 저절로 늙은이 섬기고 손윗사람 모십니다 그 무슨 개뼈다귀 예의지국이 아니라 이는 정녕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3) 고향으로 고향으로 뻗어가던 그리움의 촉수가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였던가. 불쑥 정적 속을 꿰뚫고 질주해 온 말발굽소리가 창문을 파드드 흔들더니, 이내 흙먼지와 함성이 벌판을 뒤덮었다. 마적떼였다. 흰 달도 춤추듯 일렁이며 그들을 뒤좇아 달렸다. 소년의 마음도 함께 달렸다. 열망 하나만을 가슴에 품고, 화물차에 숨어든 채 이곳 봉천까지 단숨에 달려와버린 그의 가슴에 다시 불을 지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새 지평선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마적떼들, 흙먼지마저 너무 빨리 끝나버린 축제를 아쉬워하듯 하릴없이 땅바닥에 다시 가라앉았다. 고요의 정적 위에 흰 달도 다시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이미 불붙은 소년의 끝 모를 열망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여전히 소실점 저편 마적떼를 좇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고향을 떠날 때 그랬던 것처럼……“나는 떠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걷고 또 걸었다. 그런 生의 어느 길목이었던가. 그는 문득 중이 되어 있었다. 1952년 그의 나이 시무살이 되던 해였으리라. 一超가 법명이었다. 曉峰선사와의 깊은 인연, 그리고 무엇이 스쳐갔던가. 인연의 끝자락에서 흔적으로 남아진 것은 한 편의 詩였다. “많은 海印三昧 바다에 저마다 아버지가 있습니다. 저 추운 근본에 한 사람 당신은 저의 아버지였습니다. 어쩌란 말입니까. 아무도 오지 않을 때 判異하게 잎이 집니다. 이미 한 圓에 돌아간 八十年 당신은 하루하루를 저문 길을 失物을 찾듯이 눈을 번쩍 뜨고 살았습니다. 마침내 그 하루하루는 話頭 한 꼭지 달팽이였습니다. 무슨 할 말 있겠느냐. 그렇게 메마른 입 다물었습니다. 당신은 바다를 향하여 말 한마디 이루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전혀 다른 平常心으로 三千三千世界 諸佛諸菩薩을 일깨웠습니다. 어쩌란 말입니까. 한줌의 재에서 사리 부스러기에서 당신은 모습을 벗고 마침내 自在였습니다. 제 미치지 못한 울음소리 따위가 되돌아와서 다시 제 六根에 들어앉았습니다. 떠난 아버지여 늘 살아 있는 스님이여 이제 저는 저대로 따로 同行者 하나 얻어야겠습니다. 다만 바랍니다. 혼자서 어떤 산허리 잔치 밖에 있다가 이 세상 娑婆世界 좋거든 첫 손님으로 두런두런 비 맞으며 오소서.”4) 그렇게 曉峰 스님을 송별하고 또 얼마나 긴 세월을 걸어왔던가. 가물가물 앞이 흐려지면서 다리가 풀썩 고꾸라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철로의 차가운 금속성 감촉이 날카롭게 살 속으로 후벼왔다. 으스스 떨렸다. 얼굴은 핏기를 잃어가고, 그러나 정신만은 유난히 맑았다. 너무 굶주리면 잠이 오지 않는 것일까? 벌써 사흘째 빈 속이다. 손에 움켜쥐어지는 눈을 한웅큼 입 속에 털어 넣었다. 손이 시려왔다. 몸 위로, 얼굴로 유난히 희디흰 눈이 쌓이고 있었다. 구운 고구마의 감촉이 그리웠다. 따스한 늦가을날 털썩 밭고랑에 주저앉아 콩대로 불을 지핀 위에 고구마를 굽던 자신의 모습이 아릿한 환영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곧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절도죄로 경찰서에 끌려가서 곤혹을 치렀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몸이 싸늘하게 굳어갈수록 정신은 혼곤한 포근함 속으로 깃들이며, 아릿한 그리움을 피워올렸다. 그리움이란 누군가의 품으로 깃들인다는 것이었을까? 누님이 와서 이마맡에 앉고 외로운 파스 하이드라지도甁 속에 들어 있는 情緖를 보고 있다. 뜨락의 木蓮이 쪼개어지고 있다. 한 번의 긴 숨이 창 너머 하늘로 삭아가버린다. 오늘, 슬픈 하루의 오후에도 늑골에서 두근거리는 神이 어딘가의 머나먼 곳으로 간다. 지금은 거울에 담겨진 祈禱와 소름조차 말라버린 얼굴 모든 것은 이렇게 두려웁고나 기침은 누님의 姦淫,한 겨를의 실크빛 戀愛에도 나의 시달리는 홑이불의 일요일을 누님이 그렇게 보고 있다. 언제나 오는 것은 없고 떠나는 것뿐 누님이 치마 끝을 매만지며 化粧 얼굴의 땀을 닦아 내린다. 쪵 형수는 형의 이야기를 해준다. 형수의 묵은 젖을 빨으며 고향의 屛風 아래로 유혹된다. 그분보다도 이미 아는 형의 半生涯,나는 차라리 모르는 척하고 눈을 감는다. 항상 旗 아래 있는 英雄이 떠오르며 그 영웅을 잠재우는 美人이 떠오르며 형수에게 넓은 農地에 대하여 물어보려 한다. 내가 창조한 것은 누가 이을까. 쓸쓸하게 고개에 녹아가는 눈허리의 明暗을 씻고 그분은 나를 본다. 작은 카나리아 핏방울을 혀에 구을리며 자고 싶도록 밤이 간다. 내가 자는 것만이 사는 것이다. 그리고 형의 死後를 잊어야 한다. 얼마나 많은 끝이 또 하나 지나는가. 형수는 밤의 부엌 램프를 내 기침소리에 맡기고 간다.5) 폐결핵의 기침! 그리움의 빛살이 흐릿해지면서, 흥건히 손바닥에 고여 있는 붉은 피가 눈에 들어왔다. 피는 허옇게 떨리는 손에서 망설이듯 흘러내리며, 철로 위의 흰 눈을 촉촉이 물들였다. 피를 토하고 난 뒤 바라보는 눈 덮인 세상은 얼마나 순결한 것이냐.6) “아아 저물기 전에 노래하자. 괴로움을, 또한 첫 눈을 노래하자. 한 마리의 밤새가 되어 대낮 가득히 노래하자. 아무리 바라보아도 어제의 하늘일 뿐, 저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내 가슴에서는 눈이 쌓인다. 아아 저물기 전에 노래하자 혼자도 괴로우면 여럿이구나. 아아 저물기 전에 노래하자 저물기 전에 노래하자. 나는 누구한테도 사랑 받을 수 없고 오직 눈 먼 산 보며 사랑하였다. 아아 첫눈이 내리므로 노래하고 쓰러지자.”7) 그러나 그런 감격도 잠시, 아득한 현기증이 머리 속을 고통스럽게 휘돌리더니 하얗게 지워버렸다. ================================================================================= 329. 나이 40에 / 김형영 나이 40에 김형영 돼지 눈에는 부처님도 돼지로 보이는 것이라고 노스님 말씀에 “그야 그렇겠지요.” 무심코 고개 끄덕였는데 그때 나이 곱절 가까운 40이 넘은 오늘에 하늘의 별을 세듯 곰곰 생각해 보니 그 말씀이 나를 두고 한 말씀만 같아 밤낮없이 후회롭다. 오늘 내 눈에 보이는 것 개도 돼지도 그네 새끼들까지도 김형영 육필시집 중에서
1353    [봄 봄 봄... 詩 한컷]- 오리 댓글:  조회:3876  추천:0  2016-04-16
오리 -김영태(1936~2007) 오리가 가고 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달도 어정쩡한데 남빛 치마를 두른 오리가 물살 따라 가고 있다 오리는 주둥이가 빨갛게 벗겨진 우리 새끼들 같다 우리 새끼들은 하늘 개인 날에 오종종 물에 뜨는 게 춥다 저만치 비껴 서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달도 사위어가는데 의미로 채운 시도 좋지만 그냥 풍경을 보여 주는 시도 좋다. 이 시는 한 편의 예쁜 서양화 같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오래 붉은 꽃이 없다는데, 이 아름답고 덧없는 ‘순간’에 오리들과 어린 자식들이 겹쳐져 있다. 꽃과 달, 오리와 아이들이 그려내는 이 풍경은 일시적이어서 더 소중하고, 짧아서 더 간절하다. 그들도 또 우리도 춥지 않았으면 좋겠다.  
1352    詩의 진리, 詩人의 진실 댓글:  조회:4197  추천:0  2016-04-16
시창작 영감몰입법 소강 시의 진리. 시의 진실 그리고 시인의 진실 이양우(鯉洋雨) 1. 시인의 본질 시인은 생각하는 사람이다. 생각 하는 생활로서 시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시인이 시를 쓰지 못 한다면 시인이 아니다. 여기서는 시의 질적 수준에 관련된 의미 이다. 시인은 시를 생산해 내는 특수 존재 이다. 누에가 명주 실을 뽑아내는 것 처럼 시인이 시 라는 진짜 명주 실을 뽑아 내지 못 한다면 그건 시인이 아니다. 질 좋은 누에 가 질 좋은 고치를 생산해 내는 것과 같이, 질 좋은 시인이 질 좋은 시를 잉태 생산해 낼 수 있는 것 이다. 시가 만일 요즈음 학교나 수강 단체 에서 가르치는 보편적 방법의 것 이고 다분히 기술적이고 재료적인 것에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장 기초적인 단계 에서나 성립 될 수 있는 것 이다. 미리 계산에 넣고 계획적으로 쓴 시는 창작 적인 것이 아니라 미필적 고의의 모방작 이라 할 수 있다. 본래 고대 사회에서의 시는 즉흥적인 것이 대부분 이었다. 그것은 원시 적인 것이 라기 보다 오히려 영감적인 초자연주의 문학 이었다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흥적 영감 시는 일부러 멋을 부리기 위해 가식적 이거나 장식을 가미한 꾸밈의 시가 아니다. 아주 감흥적이고 솔직, 소박한 감정 이입, 그런 자연적인 진실성의 시인 것 이다. 물론 기초적인 시학 교육이 불필요 한 건 아니다. 미술 교육 처럼 뎃상을 먼저 터득 해야 한다는 것은 배제 할 수 없다. 그러나 본질적 시론에 들어 가서는 시는 사유의 산물이며 고뇌의 산물 이고 아울러 명상과 대오의 경지에 이르러서 초자연적 대화 우주에 가까이 이르는 대화, 그런 자연 스런 경지에 접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진리에 이르는 시를 쓸 수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렇지 못 하고 나온 시란 그저 모양 만 갖춘 시일 뿐 이다. 필자는 이런 시를 그저 보편적 문학의 산물 이라 지칭 한다. 그러나 진정한 문학의 진가는 진리에 이르는 길, 그에 접 할 수 있는 신성감의 문제, 즉 시를 쓰기 위한 명상과 묵상, 그 세계 에서의 대화의 근본, 소의 영감몰입법의 터득이 아니고는 깊은 경지의 원음을 갖춘 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소의 문학으로서의 깨달음에 이른 작품은 따로 있다. 일반적 견해에 의해 세상의 온갖 문학이 다 문학 이라고 한다면 별천지의 문학은 그와 상이 하는 문학이며, 신성시 돼야 하는 문학 일 수 있을 것 이다. 몰입에서 얻어진 영감 깊은 시는 질적으로 어감이 다르다. 인스피레이션이 다른 것 이다. 여기서 한 가지 방법적인 이해를 더 하기 위해서 간단한 예를 들어 설명 할 까 한다. 우리 가 흔히 불교 경전에 수양법 에서 내세우는 108번뇌 라는 말을 누구나 다 알고는 있다. 이 번뇌는 어떻한 과정을 거쳐야 벗어날 수 있는 것 일 까, 수리학적 으로는 108은 9 X 12 =108 이된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연산의 법칙에 의해서 수를 환산하면 이는 9는 우주의 원 숫자의 자리 이다. 구구 구단은 1의 수 에서 9의 수 까지 모두 곱해도 제자리 수로 합치 한다. 더 이상 나 갈 수 없는 으뜸 수 이며, 12는 달 수로는 12개월 이지만 날 수로는 365일 이다. 365일은 또 어떤 수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느냐며는 일년 이라는 합치수로 귀결 된다. 이 것을 소의 귀납적 수리라고 한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보자, 옛 부터 백일 정성을 드리면 목적 하는 바의 효험을 얻을 수 가 있다고 한다. 이 의미는 석달 열흘 만 기도를 드리면 타성이 붙는 다는 뜻과 일치 하는데, 사실 그렇다. 백일 정성, 석달 열흘은 108의 수효와 일치 한다. 이런 일정의 공을 드려야 108 번뇌 에서 벗어 날 수 가 있다는 뜻 이다. 그래야 타성이 붙는 다는 뜻 이다. 그래야, 신이 솟는 다는 뜻 이다. 그래야 다른 힘이 붙는 다는 것 이다. 그래야 껍질을 벗는 다는 의미 이다. 황골탈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눈이 밝아 진다는 뜻이다. 그래야 영감이 떠 오른 다는 뜻 이다. 시에 있어서도 그런 공로 즉 인고, 그런 몰입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런 이치를 터득 하고 시를 쓰는 사람과 그렇지 않고 쓰는 사람의 시와는 천양지판 인 것 이다. 옛 희랍 시대에는 시는 성스런 것 이고, 예언적 인 것이고, 계율적인 것 이었다. 오늘 날의 시는 어떻한 가, 매우 비관적 인 표현 이지만 예언이 없고 성스러움이 없다. 그래서 시성이 나올 수 가 없다. 그래서 시성이 나오지를 않는다. 앞으로 옳은 시인이 나와야 한다. 시성이 나와 한다는 말 이다. 현대사회 에서의 시성은 죽었다. 노벨상 수상자는 시성이 아니다. 시성이 될랴며는 이렇게 해라. 명상 만이 영감몰입의 지름 길 이다. 명상에 들어간 상태에서 깨닫고서 시를 써라. 영감을 얻어서 시를 써라. 영감을 얻는 방법의 경지는 이러하다. 고요의 경지 가 당신의 뇌리를 시어로서 장식 되게 한다. 예로서 호숫 가에 나가서 그 물위를 한 번 드려다 보라. 맑고 고요 한 물위에 잔잔한 물 위를 들여다 보라. 그 물위 에서 어떠한 현상을 볼 수 있는 가, 분명 코 자기 얼굴을 선명 하게 볼 수 있을 것 이다. 거울 속 같이 비춰 보일 것 이다. 그러나 흐리고 바람이 부는 상태 에서의 흔들리는 물 위를 보면 이와는 정 반대의 현상만 나타나는 것을 확 인 할 수 있을 것 이다. 이것을 자아반영현상 이라고 한다. 나르시스적 현상 이라고도 한다. 고요의 경지 가 당신의 시어를 창출 시켜 주는 첫 단계임을 감지 하라. 무턱 대고 인공적으로 시를 쓴 다고 해서 시인 이라는 칭호를 주는 것은 유치 한 일 이다. 받는 것도 몰지각 한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 시잘 썼다고도 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그 시는 기가 없고, 영혼이 없는 시일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위대 한 시인이 될랴며는 영감적인 시를 써야 한다. 대자연의 모든 이치와 결부된 깨달음의 시를 써야 한다는 말 이다. ====================================================================================== 328. 告解 /김형영 告解 김형영 원수 같은 놈 원수 같은 놈 죽어나버리지 되뇌듯 미워했는데 오늘 세상 떠났다는 소식에 내 앞길을 막으며 하얗게 쌓이는 아득함이여 김형영 시집 중에서 김형영 연보 1944년 전북 부안 출생.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66년 신인상. 1967년 문화공보부 신인예술상. 1969년 시 동인지 발간.(동인 강은교, 김형영, 박건한, 석지현, 윤후명, 임정남, 정희성) 1970~1997년 월간잡지 근무. 1973년 시집 간행. 1979년 시집 간행. 1981년 성서 예화집 간행. 1986년 엮음. 1987년 시집 간행. 제33회 현대문학상 수상. 1992년 시집 간행. 1993년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97년 시집 간행. 제7회 서라벌문학상. 2000년 시집 간행. 2001년 시집 간행. 2004년 시집 간행. 2005년 시선집 간행. 제8회 가톨릭문학상. 2009년 시집 간행. 육사시문학상. 구상문학상 수상. 2012년 육필시선집 간행.  
1351    물과 삶과 그리고 詩와... 댓글:  조회:4195  추천:0  2016-04-16
물과 구름의 도상학(김지하론)                                                               / 김수림       물과 구름의 도상학(圖像學) ― 金芝河의 서정시와 反映的인 물의 이미지 김수림 金芝河는 한국 현대시의 전통 속에서 쉽사리 찾아보기 힘든 물질적 상상력의 시인이다. 상승하는 불의 이미지는 거센 도전과 항쟁의 비장함이 주를 이룬 초기 서정시에서 특히 인상적인데, 이야말로 김지하가 지닌 물질적 상상력의 본류를 후기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표현하는 핵심 圖像(icon)이다. 이러한 `불 이미지'의 지배적 성격은, 남진우가 생명의 불 영원의 빛 이라는 글에서 이미 통시적으로 섬세하게 분석한 바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김지하는, 불의 司祭인 것 못지 않게, 물의 詩人이다. 물 이미지는 김지하 시 전반을 볼 때 불 이미지만큼 폭넓은 분포를 보이지는 않는다. 출현하는 빈도 역시 적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물 이미지'가 지닌 의미 비중은 그 분포의 지엽성을 넘어서는 무게를 가진다. 김지하의 서정시에서 `물 이미지'는 지배적인 `불 이미지'를 때로는 견제하고 때로는 보완하는 구실을 한다. 때문에, 불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김지하의 투쟁적인 남성성을 이해하고, 아울러 그의 시적 변모를 측정하기 위해서도 물 이미지는 가늠자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강조할 필요도 없이, 물과 불은 서로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물질이다. 물과 기름은 섞여들지 않고 서로의 표면을 회유할 뿐이지만, 불과 물은 서로를 殺害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서로를 살해하는 두 물질이 한 시인의 세계를 역동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렇게 물과 불이 펼치는 혼돈스러운 모순과 相生의 변증법이야말로 김지하의 문학이 지닌 `역동성'의 상징적인 근원이 아닐까? 그러나 `물과 불의 변증법'을 통해 김지하의 서정시편들을 조명하는 작업은 지금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이 글은, 실제 분석을 통해 `물의 이미지'가 김지하의 시 전반에 미치는 의미의 비중과 영향력을 밝히는 데 주력하고자 한다. 김지하의 시에서 불의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고 해서 물의 이미지가 사라지는 경우는 없다. 물의 이미지는 중기로 분류되는 애린 1부 이후부터 보다 활발히 드러나기 시작하지만, 첫 시집 黃土 에서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위적인 분류가 되겠지만, 김지하의 물 이미지는 대체로 사물을 비추는 자연의 거울로서 나타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후자의 경우에 물은, 불 이미지와 대립·모순되는 물질로서 제시된다. 그러나 좀더 지배적인 유형은, 물이 자연의 거울로서 드러나는 경우―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사물을 자기 안에 되비추고 반영하는 작용 자체로서 드러나는 전자의 유형이다. 이 경우 `물'이라는 어휘나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반영의 이면에 감춰진 `물'이라는 물질을 충분히 도출, 또는 복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물 이미지는 단순히 병행하는 이미지群을 형성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소통적인 場 안에서,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통일된 의미 맥락으로 연결된다. 이 글의 제한적인 성격상 논의의 주안점은 반영적인 물의 이미지에 집중될 것이다. 반영적인 물의 이미지는 많은 경우 지극히 암시적인 형태로만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김지하에게 반영적인 물은 `숨어있는 물'이다. 내 오른팔을 호랑가시나무라고 불러라 내 왼팔을 사자봉 벼락바위라고 불러라 있다면 내게 힘이 있다면 한 팔로 너희들의 죽음을 막고 한 팔로 너희들의 삶을 껴안아주고 싶구나 무심한 구름이 용추다리 건너가는 내 발 밑에 와서 나의 힘없음을 비웃는구나. ― 용추다리 , 全文2 김지하의 용추다리 는 그의 시에 나타난 반영적인 물의 이미지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으리만큼 중요한 작품이다. 요점적으로 말해, 용추다리 는 반영적인 물의 이미지가 시인에게 심리학적으로 얼마나 내밀한 深部에 자리잡고 있는가를 웅변해 주고 있다. 사실 용추다리의 外觀이나 그것이 말하고 있는 내용은 일견 단순한 것이다. 시적 자아 또는 話者인 `나'는, "너희들의 죽음을 막고" "삶을 껴안아주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럴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의 욕망은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이며, 그런 의미에서 헛된 욕망에 불과하다, 라는 것이 이 시의 일차적인 내용이다. 그 행간을 확신과 비탄이 교차하는 정서가 채우고 있다. 하지만 시에 있어서만큼은, 표면적인 전언의 이해가 모든 의미화 과정의 深化와 그에 참여하는 독자의 정서적·심미적 체험을 보증하지 못한다. 심지어, 표면적인 전언과 의미화 과정은 서로가 서로를 배반하기도 한다. 좋은 시, 중층적인 의미화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시가 지닌 덕목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거듭거듭 질문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째서 화자는 구름이 자신의 힘없음을 비웃는다고 생각한 것일까? 처음 두 행의 명령어법이 주는 효과와 마찬가지로, 타인들을 위해서 그들의 삶과 죽음마저 관장하고 싶다는 화자의 욕망은 실로 거대한 것이다. 그 욕망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꿈꾸기조차 불가능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 욕망은, 초월적인 절대자나 적어도 신화적 영웅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욕망이다. 김현이 일컬었던 김지하의 `영웅주의적 경향'이란, 이렇게 거대한 욕망을 품고 있는 시인에 대해 지식인으로서 그가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경계심을 다소 우회적으로 표현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체험이 그렇듯 거대한 욕망을, 그렇듯 손쉽게 꺾어 놓을 수 있었을까? 질문은 마지막 두 행에 집중된다. 화자는 구름이 자신을 비웃는다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한 이유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지 않다. 그 구절의 의미를 올바로 되새기려면 시의 전반부와의 대비가 불가피하다. "내 오른팔을 호랑가시나무라고 불러라 / 내 왼팔을 사자봉 벼락바위라고 불러라"라고 말하면서 화자는 거대한 자연물과 스스로를 동일시 하고 있다. 그의 명령어법은 거부하기 힘든 위엄을 느끼게 한다. 그는 이러한 명령어법에 의해서 초월적 존재를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웅변적으로 명령하는 화자의 상상적인 모습 역시 양팔을 치켜든 聖像을 연상케 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호랑가시나무와 사자봉 벼락바위라는 사물이 관찰자로 하여금 대상을 우러러 보게 만들고, 시각적인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보다 심화된 분석은, 1·2 행의 이미지가 작은 것(오른 팔/왼 팔)에서 큰 것, 수직적인 높이를 지닌 것(호랑가시나무/벼락바위)으로 변화하는 은유적 움직임을 보여주며 그 과정에서 `팔'의 위치가 아래로 늘어뜨린 것이 아니라 위를 향해 치켜드는 역동적인 자세로 표현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이어지는 3∼6행의 "죽음을 막고" "삶을 껴안"는다는 행위는, 앞서 나타난 `수직적인 상승'의 표상 작용에서 다시 수평적으로 확장되는 표상작용을 보여준다. 수직적인 높이와 수평적인 넓이를 함께 갖춘 나무·바위의 이미지는 이에 대한 아주 적절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1행에서 6행에 이르는 부분은 삶과 죽음을 주관하고 싶다는 화자의 욕망에 걸맞게 거대한 주체의 이미지를 표상한다. 그 거대함의 외적이며 동시에 내적인 크기는 간단히 `상승과 확산'이라는 이미지의 운동으로 규정된다. 여기에는 인간의 도덕적·정신적·육체적 한계들을 넘어서려는 높이에 대한 열망(상승)이라는 개인심리학이, 주변의 타인들을 보살피고 싶다는 바램과 만나고 있다. 또한, 외적인 세계에 맞서 싸우면서 위엄 어린 모습으로 현현하는 父性(男性性)이, 또 한 편으로는 타인의 삶을 자신의 품에 껴안는 母性(女性性)이 하나의 육체 속에 포개어진다. 이렇게 상승과 확산으로 규정되는 거대한 초월자의 이미지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7·8 행의 `구름'이다. 무엇에 얽매임 없이 세계를 부유하는 `구름'의 이미지는 동양적인 소요와 낭만주의적인 정신의 대표적인 상징의 하나로 남아있다. 우선 가능한 독법은 `구름'의 이미지를 낭만주의적인 상징으로서 이해하고, 그것을 다시 다리를 건너고 있는 화자와 대조시켜보는 것이다. 용추다리 의 후반부 두 행은 `화자가 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중'이라는 핵심적인 정보를 제공해준다. 지상의 삶으로부터 초연한 채 자유롭게 天空을 부유하는 구름의 존재에 비추어 볼 때, 화자는 그가 가진 다리(脚)를 통해 地上에 묶여있고 무언가를 건너가기 위해 다리(橋)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그는 그가 욕망했고, 욕망의 이미지를 통해서 만들어냈던 인신이나 영웅이 아니다. 이러한 독법은 나름대로 유력한 의미들을 생산해내기는 하지만 비객관적인 지표에 기대어 있고, 지나치게 추론적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화자의 `자기 인식'에 대한 해설이 결여되어 있다. 자신은 人神이 아니며 하나의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자기 인식의 체험을 고려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용추다리의 구름이 왜 천상에서 소요하지 않고 하필 화자의 발 밑에서 나타나는지를 답할 수 없다. 이 글이 줄곧 암시해온 바와 같이, 화자의 자기 인식의 근원에는 보이지 않는 `물'이 은밀하게 숨어 있다. `구름'이라는 단어가 독자에게 일차적으로 제공하는 心象은 하늘에 있는 구름, 즉 낭만주의자의 구름이다. 그러나 용추다리 에서 구름은 화자의 발 밑에 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화자의 발 밑에 와 있다는 말은, `물'의 이미지를 배제하고는 불가능한 진술이다. 시인은 어느 한 구석에서도 `물'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용추다리 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궁극적인 지표는 다름 아닌 `물'이다. 그 `물'은 명시적인 언표로서 존재하지 않지만, 의미의 행간에 숨어있다. "무심한 구름이 용추다리 건너가는 내 발 밑에 와"있다고 화자가 말할 때, 그는 하늘 위에 상승해 있는 구름이 아니라 물에 반영된, 즉 하강해 있는 구름을 보는 것이다. 그가 다리를 건너가는 도중이라는 상황은 이 시의 은밀한 심층에 `물'이 놓여있다는 사실을 보다 객관적으로 지지해준다. 자연의 거울인 `물'을 보는 체험은 언제나 내려다보는 체험이다. 따라서 그 하향적 시선은 호랑가시나무, 사자봉 벼락바위와 연관된 상향적 시선·욕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거대한 욕망과 그만큼 거대한 초월자와 영웅의 이미지를 갈망하던 한 사람이, 어째서 그가 애초에 품고 있던 `높이에 대한 열망'(상승)과는 반대되는 하향적 시선(하강)을 취하는 것일까? 이러한 시선의 뚜렷한 엇갈림과 그에 따른 상반된 태도는 이 시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가 된다. 그가 건너가고 있는 `용추다리'를 추체험하는 독자에게 그 다리의 구체적인 실상이 과연 어떠한가에 대한 세세한 정보는 허락되어있지 않다. 그러나 토속적인 명칭과 산속에 있는 다리라는 사실이, 튼튼하게 만들어진 현대식 다리가 아니라 낡고 위태로운 다리라는 인상을 준다. 굳이 이러한 유추가 없더라도 다리는 그 높이 때문에 불안정하게 느껴지고 막연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물이다. 화자는 어쩌면, 다리의 높이와 그 불안정함에서 비롯하는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의 시선은 어째서 굳이 발 밑의 심연을 향하는 것일까? 융의 심리학은 인격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꿈과 무의식의 기능을 강조한다. 그의 이론은, 도덕적·정신적인 높이에의 극단적인 추구가, 언제나 추락에 대한 매혹과 두려움에 의해 보완·수정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3 용추다리 의 화자가 느꼈을지 모를, 다리 건너기의 불안은 공간적인 동시에 심리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불안 심리에 의한 정신적 균형 회복이라는 융 심리학의 해석적 전제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는 화자가 내려다보는 행위를 그 자체로 상향적 욕망의 반성으로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은 욕망하는 바를 이루려는 맹목적 일념 속에서 욕망 자체를 반성하기도 어렵고 성취하기도 어렵다. 어떤 의미에서 반성을 통한 욕망의 제동과 수정은, 당위적 상태에 대한 욕망과 현실적 제약 사이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노력일 수 있다. 生死의 반복으로부터 타인들을 보살피기 위해서 인간적 제약을 넘어선 힘과 높이를 바란다는 영웅주의적 욕망은 너무 크고, 너무 압도적이다. 그 욕망의 거대함이 그리는 심상에 비해 모든 인간 존재는 힘없고 초라하다.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는 행동은, 이 욕망의 위압과 맹목성으로부터 한 발 물러나 현실적 제약―"나의 힘없음"―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수정하려는고통스런 자기 확인의 행위가 아닐까. 이 하향적 시선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나의 힘없음"에 대한 성찰의 계기이다. `발 밑의 구름'이라는 언표의 이면에 숨어있는 물의 존재는 이 점에서 중요하다. 이 시의 화자가 과연 물에 비친 구름과 함께 초인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는 힘없는 자신의 영상을 내려다 보았는지는 단정짓기 어렵다. 그러나 반영적인 물 이미지는, 발 아래 물에 비친 구름의 영상을 보는 일이, 시적 자아에게는 자신의 범상함을 돌아보는 `자기 확인'의 중요한 계기였으리라는 가능성을 시사해준다. `발 밑의 구름'이라는 언표의 이면에 숨어있는 물의 존재는, 자연의 거울을 통한 화자의 `자기 확인' 체험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맥락에서, 반영적 물 이미지와 연관된 김지하의 시적 자아가 흔히 괴로운 자기 확인의 체험에 마주치고, 거기에서 자신의 제약과 한계를 통찰하는 성찰적 자아로서 나타난다는 점은 주의를 요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초기작에서 물의 영상은 자신의 결함과 누추함에 대한 모멸감이 섞인 內省을 보여준다. 주무르고 벗기고 악을 쓰고 빨고 핧고 나는 고름 담긴 술 한 잔의 고름 시궁창 속 얼굴이 달과 내 오줌에 깨어질 때 ― 뒷골목의 시궁창 까마귀 벌판 일부, (1: 122) 흔히 복수심·증오·恨 등의 비장하고 도전적인 정서를 수반하는 불의 상승 이미지가 중심인 작품에서와는 달리, 자연의 거울을 대하는 김지하의 시적 자아는 내성적인 면모를 강하게 보인다. 만약 그를 나르시스적 인간 유형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때의 나르시스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한 탐미주의적 나르시스가 아니라, 당위(sollen)와 존재(sein)의 간극―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사이의 극복될 수 없는 간극을 통찰하고 괴로워하는 비극적인 나르시스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깨달음이 인공의 거울이 아닌 자연의 거울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그와 연관하여 나타나는 것이 예의 고개 숙이는 행위―`하향적 시선'이라는 점이다. 초기 김지하가 치솟는 불의 미학을 통해 보여주었고 용추다리 에서도 나타나는 영웅주의적 태도는, 당위와 존재의 이런 괴리를 살피는 매개물인 `반영적 물'에 의해 견제된다. 그러나 물을 내려다 보며 얻은 깨달음은 너무 고통스러운 체험이다. 위의 인용에서도 보이 듯이, 물과 연관된 자기 확인의 체험은 흔히 비탄·자기 환멸 등의 정서를 낳는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는 "도대체 자의식이 발달한 인간이 어찌 자기를 존경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외친다. 용추다리의 화자는 아직 깨달음의 고통으로부터 회복하지 못한 단계에 있다. 그는 여전히 욕망하는 바와 존재하는 바가 양분된 상태에서 괴로워한다. 시인이 자신의 고통을 점차 다스려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물-구름의 이미지를 다시 만나게 된다. 삼라만상·1 에서 그것은 놀라운 물질적 상상력을 통해 제시된다. 썩은 물도 물은 물 흐르는구나 하늘을 비추는구나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구나 아니 구름 한 점 어린 것 보니 돌아오겠다 깨끗이 되어 또 오고 또 돌아오겠다. ― 삼라만상·1 全文, (2: 243) 黃土 에 실린 비녀산 이라는 작품에서 시인은, "삶은 탁한 강물 속에 빛나는 / 푸른 하늘처럼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것"(1: 52)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때의 구름이 속한 하늘과 지상의 물은 푸른 광채와 탁함이라는 양극의 이미지로 분열된 것이었다. 그 분열은, 그러나 양쪽으로 찢겨진 별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만은 아니다. 좌절된 꿈 때문에 우리가 고개 떨굴 때, 누추한 현실을 증거하는 바로 그 탁한 물이, 지상의 반대편에 위치한 푸른 하늘과 구름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준다. 반영적인 물은, 우리가 그 앞에서 성취될 수 없는 욕망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기억해야 하는 聖所와도 같다. 시인이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이 땅의 삶이 누추하고 더럽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더러운 강물/현실 속에 망각할 수 없는 기억과 꿈으로서 푸른 하늘이 빛나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좁혀질 수 없는 듯이 보이는 하늘과 지상의 거리를 거듭 확인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 그것이 괴로운 것이다. 비녀산에서 푸른 하늘을 비추고 있는 강물의 이미지는, 지상과 천상의 행복한 합치가 아니라 대립과 분열의 심화이고, 그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삼라만상·1 에 이르러서 물과 하늘/구름의 이미지는 근본적으로 변화된 양상을 보여준다. 분열과, 그것에 대한 기억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던 더러운 물의 이미지는 이제, 순환과 생성의 그것으로 변모한다. "썩은 물도 물은 물"이다. 그 물은 흐르고, 하늘을 비추고, 낮은 곳을 찾아 흘러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물질이다. 그것이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물의 속성이다. 그런데 시인은 곧이어 그 물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지고 있다. 이 부분의 내용을 단순화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a) 썩은 물은 흘러간다 b) 썩은 물은 하늘을 비춘다 c) 썩은 물은 돌아오지 않는다 d) 썩은 물에 구름이 어린다 e) 썩은 물은 (깨끗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우리는, 물이 구름이 되고 그것이 대기의 순환을 거쳐 다시 비가 되어 내린다는 상식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또, 그러한 자연과학적 상식이 삼라만상·1 의 화자가 진술하고 있는 내용을 한층 수월하게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시가 초등 교육의 수혜자라면 누구나 소유하고 있는 상식을 시적인 형태로 변형시켜 놓은 작품에 불과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썩은 물에 구름이 비친 모습을 본다는 것과, 그 썩은 물이 돌아오겠다는 진술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연관도 존재할 수 없다. 독자가 자신의 과학적인 상식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그 간격은 메워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텍스트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일차적인 독해에 있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대기와 물의 순환에 관한 과학적 상식이다. 시인의 직관은 그러한 첨언이 없이, 물에 어린 구름을 보는 행위와, 그 물의 회귀와 순환이라는 두 개의 문장을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어미 `-니'로써 연결짓는다. 물이 구름이 되고, 구름이 다시 물로 變轉하는 과정에 대한 일체의 설명을 생략함으로써 시인은 결국 하나의 사실을 강조한다. 썩은 물과 승화된 구름은 궁극적으로 하나이다. 더러움과 부패 그리고 어두움과 무거움 등을 속성으로 하는 썩은 물의 이미지와, 깨끗함·맑음·가벼움·밝음 등을 속성으로 거느린 구름의 이미지는 우리의 감각적인 인식에서 대립·모순된다. 사물의 外觀에 바탕을 둔 인식은 결코 그 상반된 이미지들을 한 데 통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간단한 과학 상식은 썩은 물과 순백의 정화된 구름이 특정한 변화의 단계에 속해 있을 뿐이며 근원적으로 동일한 물질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면서도, 그것들이 서로 다른 밀도를 지닌 별개의 사물이라고 구별을 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물의 순환 과정에 대한 언급을 모두 생략하고 다만 그 물이 "돌아오겠다"는 말이 되풀이될 때, 그것은 시인의 직관이 물과 구름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언술의 조직 방법이다. 돌아온다는 動詞는 흘러간 것과, 지금 썩은 물 위에 어리는 것과, 또 미래에 이 땅에 내릴 것이 동일한 물질이라는 전제 없이는 불가능한 표현이다. 계속적으로 형태를 뒤바꾸는 물에 있어서 가고 돌아옴, 즉 `순환'은 결국 물이라는 물질의 내재적인 속성으로 표현된다. 지상의 썩은 물도, 하늘에 浮遊하는 구름도, 돌고 도는 순환의 궤도 안에 있는 하나의 자리이며, 동적인 순환성을 함께 나누어 갖고 있다. 그것을 직관적으로 깨닫는 물질적 상상력의 소유자에게 있어 구름은 곧 `가벼운 물'이다. 더러운 물과 대비되는 구름은, 심리학적으로 말한다면 `더러운 물'이 높은 차원으로 高揚되고 승화(Sublimation)된 形象, 아니 말 그대로 `昇華' 자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더럽지 않은 물이 과연 어디에 있을 것인가. 고양된 순수성의 상징인 구름은, 非육체적이고 지상의 욕망에 대해서 초월적이라는 점에서 낭만주의자들의 구름과 속성을 같이하지만, `가벼운 물'의 진정한 이미지가 비로소 확연히 드러나는 지점은 무거운 물·더러운 물이 변화한 모습이 바로 구름이라는 점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구름은 자기 고양과 단련을 거쳐 淨化된 썩은 물 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벼운 물'로서의 구름은 낭만주의자의 구름과는 상당한 거리에 놓여 있다. 부패하고, 더럽고, 무거운 육체를 지닌 썩은 물이 하나의 잠재적인 `질료'라면, 그것의 미래적 `형상'이 저 정화된 구름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흘러가는 썩은 물이 "깨끗이 되어 / 또 오고 / 또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화자의 어조는 분명히 관조적이고 아직 짐작의 형태에 머물러있음에도 낙관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승화의 과정은 거의 언제나 욕망의 전환과 지연, 혹은 쾌락의 억제와 같이 고통스럽고 부정적인 억압을 수반하지만, 삼라만상·1 에서 淨化 작용으로서의 승화는 그런 억압의 부정적인 내용과는 상당한 거리에 있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승화의 과정을 거친 썩은 물은 대기 속에 머물러만 있지 않고 지상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이 되돌아옴으로써 천상과 지상은 하나의 圓環 속에 놓이게 된다. 구름과 물이 다르다면 지상과 천상은 어떤 연계점도 없이 분열만을 영원히 계속할 뿐이다. 그 둘은 그저 단절된 세계에 불과하다. 일단 천상의 가벼운 물과 지상의 썩은 물이 동일시됨으로써만, 물이라는 물질의 속성에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순환'이라는 새로운 속성이 추가된다. 그 `순환'이야말로 썩은 물의 淨化를 가능하게 하는 운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물의 순환성을 깨닫는 일은, 현재에는 아직 잠재적인 모습으로만 머물러 있는 운동들을 미래와 과거로 확장된 시간의 지평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의 전후에 포개어져 있는 시간을 볼 수 있는 시인만이 물의 순환성을 깨닫고, 정화의 가능성을 예감한다. 삼라만상·1의 화자는 썩은 물 속에 "구름 한 점 어린 것"을 일별함으로써 현재 속에 충일한 시간과, 거듭되는 `삼라만상'의 우주적 순환을 감득하고 있다. 물가에 자리한 시인은 썩은 물이라는 잠재적인 질료 속에서 정화된 구름이라는 미래태를, 그러나 동시에 발견하는 것이다. 그에게 언젠가 도래할 미래태(구름)는 잠재태로서의 질료(썩은 물) 안에 내재되어 있다. 그는 현재와 미래를, 현실과 꿈을 한꺼번에 생각하며, 그 안에서 존재하는 것(sein)과 당위적인 것(sollen)은 극적으로 동일성을 획득한다. 그러한 同時性과 共存의 가장 함축적이고 탁월한 상징은 `구름을 반영하는 썩은 물의 이미지'에 의해 표현된다. 그 반영적인 이미지는 `물과 구름'이 아니라 `물-구름'이다. 물과 구름을 별개로 여기지 않고 물-구름으로 인식하는 시인은 이제 "맑은 나도 더러운 나도 / 앞서거니뒤서거니 함께 / 내 안에서 걷고 있다"( 속살·1 )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더러움과 맑음이 순환하는 물의 궤적 속에 있는 등가적인 부분임이 밝혀진 후에야 그는 비로소 더러움 또한 분명히 자신의 일부이라는 것을 용인할 수 있다. 삼라만상·1 의 관조적이고 여유로운 어조는 이러한 관용의 자세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물-구름의 이미지가 없이, 또 그 이미지를 바라보는 행위가 없이, 과연 이 모든 깨달음과 예감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물-구름을 바라보는 행위가 얼마나 본질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가령 서로 짝을 이루고 있는 `b) 썩은 물은 하늘을 비춘다―c) 썩은 물은 돌아오지 않는다'와 같은 내용소의 짝이 `d) 썩은 물에 구름이 어린다―e)썩은 물은 돌아올 것이다' 와 같은 내용소의 짝과 얼마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가 하는 점을 한 번 눈여겨보면 명확해진다. 하늘만을 비출 때, 물은 돌아오지 않는다. 구름을 비출 때만이 그 반영적인 물은 다시 돌아올 물이 된다. 즉, 순환하는 물이 된다. 이것은 분명히 넌센스다! 하지만 그러한 넌센스와 몽상이 없이, 어떻게 우리는 썩은 물과 구름이 같고, 그것들이 자리를 바꾸며 순환하고, 마침내 "또 오고 / 또 돌아"올 것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구름을 반영하는 물의 이미지가 없이 천상과 지상,당위와 존재는 하나의 圓環 속에 자리할 수 없다. 구름을 비추는 순간 반영적인 물의 이미지는 물-구름이 된다. 이제 땅에도 구름은 있고, 하늘에도 물은 있다. 前과학적인 정신에게 있어서 물과 대기의 순환에 관한 과학적 상식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썩은 물 속에 구름이 비치고 그 구름을 보면서 명상에 잠기는 일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썩은 물이 더러우면 더러울수록 그 물은 사물을 더 훌륭하게 비추어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반영적인 물이 지닌 `부패와반영의 정비례 법칙'에 의해서, "썩은 물도 / 물은 물"일 뿐만 아니라, 썩었으면 썩었을수록 그 물은 더 좋은 물이 된다. 물의 내부에서 진행되는 부패와 혼돈이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그 물은 `구름'이라는 승화의 꿈을 더욱 뚜렷하게 반영하고, 시인은 그 앞에서 더욱더 자주 명상에 잠길 것이기 때문이다. 수면에 비친 구름으로부터 물의 순환성을 깨닫는 정신에게 있어, 승화의 가능성은 이미 순환하는 물의 내재적인 속성일 뿐만 아니라 썩은 물(반영적인 물)의 그것이기도 한 것이다. 시인의 사유 속에서 무화과 의 꽃이 열매의 내부에서 만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 게 / 그게 무화과 아닌가 / 어떤가 (2: 191)), 백색의 구름은 썩은 물의 진창 속에서 피어오른다. 김지하의 물 이미지는, 고양·정화·조화된 形象(구름/속꽃)을 저 혼돈스럽고 더럽기 짝이 없는 질료(물/과육) 속에 이미 잠재해 있는 가능성으로 파악하는 역동적인 사유의 한 유형을 열어 보여준다. 그것은 정태적인 현재를 가능성이 들끓고 있는 곳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역동적이며, 그 가능성을 썩음/더러움/혼돈/모순 등이 뒤얽혀 있는 `運動'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또한 역동적이다. 그러니 `혼돈과 더러움을, 부인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라'. 누구보다도 혼돈과 더러움에 찌든 이 땅의 자아로 인해 괴로워해온 시인이, 당위와 존재 사이의 불화로 고통받아온 시인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위-존재 간의 분열로 괴로워하던 비극적 나르시스는 이제 썩은 물(존재/질료)과 구름(당위/형상)의 화엄적 얽힘을 통찰함으로써 거대한 긍정에 도달한다. 나로서는 그러한 긍정의 강도와 수량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 긍정은 경이롭고, 섬찟하다. 이렇게 역동적인 긍정성은 마침내 逆旅 와 같은 절창 속에서 연꽃이라는 불교적 상징을 이용하여 불의 형상(붉은 연꽃)을 물이라는 질료(진흙창) 속으로부터 개화시키고, 양자 간의 친화와 잠재적인 하나됨을 이끌어내기에 이른다. 내 이마는 기억의 집 회한과 원한 가득한 진흙창 연꽃 한 송이 일찍 피어 이마를 가르며 붉게 벌어진다 ― 逆旅 일부, (2: 302) 이로써, 반영적인 물의 이미지는 김지하의 역동적인 시적 旅程을 이해하는 중요한 圖像으로 자리한다. 김지하는 단일한 명제로 정의되기를 끊임없이 거부하는 현재 진행형의 시인이다. 초기에 도전적인 불의 상승 미학으로 세상과 격렬하게 맞부딪쳐온 청년 시인은, 반영적인 물의 이미지에 기대어 역동적인 갱신을 이루어낸다. 시인은 물을 굽어보는 자세로 초기의 영웅주의적 자의식을 수정하고, 지상적인 존재에 대한 긍정을 통해 당위와 존재의 분열을 감싸안기에 이른 것이다. 그 과정을 동행하는 물-구름이라는 도상은 끝내 逆旅 라는 상징적인 제명의 후기시에 와서, `불'-`물' 두 원소의 근원적인 대립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둘 모두를 감싸안는다. 모밀을 태우는 태양과 더운 피와 횃불이 지배하는 저 황토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 애린 이후의 변모가 보여주는 단절과 연속을 다각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구름과 반영적인 물의 도상은 김지하 시의 동력원의 하나로 주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 반영적인 물의 상상력은 시적 원동력의 하나일 뿐이지 김지하가 도달한 궁극적인 해결점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때때로 다음과 같이 사뭇 절박한 어조로 "내 마음을 쳐라 / 불타는 노을이여 / (…) / 맑은 샘물에다 구원 청하는 /산란한 내 마음 / 더욱더 산란하게 쳐라"( 쳐라 , 2: 283) 외치면서 물에 의지하는 자신을 불의 힘으로 부정한다 1) 물과 불의 二元的 대립은 주체의 분열이라는 주제와 연관될 때 보다 記述的적인 힘을 증명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김지하가 다루고 있는 중심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는 바로 `분열된 주체'의 문제이며 여기에는 남성성-여성성, 세계-주체의 대립과 융합이라는 가볍지 않은 주제들이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개요만을 말하자면, 김지하에게 있어서 불은 남성성의 표상으로서 물은 여성성의 원리로서 기능한다고 여겨진다. 물과 불이라는 존재의 動力이 어떤 역학 관계 속에 서로의 힘을 조정하고 변화시키는가 하는 문제와 남성성과 여성성의 문제, 분열된 주체의 문제는 相同 관계에 있다. 2) 김지하 시전집 2권: 모란 위의 四更 , 솔, 1993, 53쪽 (앞으로 김지하의 작품인용은 권수·면수만을 표기) 3) 칼 구스타프 융 編著, 정영목 옮김, 사람과 상징 , 까치, 1995, 68∼69쪽 참조 4) 도스토예프스키, 李東鉉 譯, 지하생활자의 手記 , 문예출판사, 1972, 24쪽. ====================================================================================   327. 그물 / 홍해리             그물     홍 해 리   어떤 자는 던지고,   어떤 이는 걸리고,   어떤 놈은 빠져나가는,   세상이라는 허방.     홍해리 시집 중에서       洪海里 詩集 《비밀》       명창정궤明窓淨几의 시를 위하여     시는 무엇이고, 시인은 누구인가?     이제까지 시와 함께 살아오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시 쓰는 일은 육체가 행하는 것처럼 영혼이 숨쉬고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행위이다 어떤 곡해나 구속도 용납되지 않는다 어떤 이념이나 주의도 필요없다 시 쓰기는 영혼의 자유 선언이다 시란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다 늘 설레면서 한편으로는 한 편 한 편으로 완성되는 이별이기 때문이다 시에서는 잘 익은 과일의 향기가 난다 그래서 한 권의 시집은 잘 갖춰진 과일전과 같다 시는 호미나 괭이 또는 삽으로 파낸 것도 있고 굴삭기를 동원한 것도 있다.   목재소를 지날 때면 나무 살 냄새가 향긋하다 나무의 피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나온다 목이 잘리고 팔이 다 잘려나가고 내장까지 분해되어도 도끼나 톱을 원망하지 않는 나무는 죽어서도 성자다 한자리에 서서 필요한 만큼만 얻으며 한평생을 보낸 성자의 피가 죽어서도 향그러운 것은 나일 먹어도 어린이같은 나무의 마음 탓이다 사람도 어린이는 향기로우나 나일 먹으면 내가 난다 목재소를 지날 때면 나도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한 그루 나무 같은 시를 쓰고 싶다.   양파는 얇고 투명한 껍질을 벗기고 나서 살진 맑은 껍질을 까고 또 까도 아무것도 없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양파를 까는 사람이다 양파의 바닥을 찾아야 한다 양파의 바닥에까지 천착하며 끽고喫苦해야 한다 철저히 벗겨 양파의 시작/씨앗/정수/처음을 찾아야 한다 늘 처음처럼 시작始作/試作/詩作해야 한다.   매화나무가 폐경기가 되었지만 해마다 봄이면 이팔청춘이다 삼복에 맺은 인연의 끈을 잡고 삼동을 나고 나서 봄이 오면 여봐란 듯이 몸을 열어 보인다 겨우내 폐가처럼 서 있더니 어디에 저 많은 꽃을 숨기고 있었을까 수많은 청매실을 달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몇 분 안 되는 정정한 시인을 뵙는 기분이다 오늘은 귀로 향기를 맡고 싶다 노매 같은 시인을 만나 고졸한 시 한 편 듣고 싶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라고 먹이 찾아 가기 전이나 잠자리 찾아 들기 전 날아다니는 수묵화로 가창오리 떼가 하늘을 가득 메우는 것은 혼신으로 먹을 갈아 일필휘지로 호수를 품에 띠어 가고 싶기 때문이라고 가창오리 떼는 움직이는 시로 말하고 있다.   시인은 죽으면 신이 된다 시를 버리면 사람만 남고 사람을 버리면 시만 남도록 시와 사람이 하나가 되어 신으로 탄생한다 사람의 영혼을 실어 나르는 신이 되기도 하고 영혼을 노래하는 신神이 되기도 한다.   바다가 내 속으로 들어왔다 신선한 푸른 수평선이 눈썹에 걸렸다 해가 빨갛게 지고 있다 수평선의 두 끝을 잡고 해를 걷어올려라 너의 넋을 잡고 매달려라 시가 걸릴 것이다.   모든 예술이 놀이이듯 시 쓰는 일도 영혼의 놀이이다 시는 내 영혼의 장난감 나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이 나의 시는 울퉁불퉁하다 그래서 자박자박 소리가 난다.   그리움이란 소리없이 불어왔다 사라지는 바람 같은 것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할 것이라며 바람은 멀어지면서 보이지 않는 몸짓으로 말해 주고 있다 맨발로 뛰어가는 발자국 소리 그것이 시였다.   한평생의 그리움을 파도에 실어 보낸 천길 바다를 물질하는 잠녀들은 네가 그리움을 아느냐고 묻는다 바다에 묻은 푸르고 깊은 그리움 숨비소리로 뱉어내던 쉰 목소리 그것이 한 편의 시였다 해녀는 천길 바다의 시를 다시 바다에 묻는다.   풍경소리 시끄럽다고 바람 부는 날에는 떼어 놓으라는 입이 큰 옆집 여자 하늘붕어는 바람 부는 날에나 제 목숨꽃을 피우는데 바람호수가 없으면 붕어는 어디서 사나 죽은 붕어는 시가 아니다.   새벽 세 시 발가벗은 영혼이 나를 만나 말을 타고 천리를 달리면 금빛 현란한 언어의 사원에 닿을까 풀어진 마음을 매어 하늘과 땅을 잇는 시간 풍경소리 푸르게 울리는 곳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에 사금을 녹여 관을 만든다 법당 안 가장 낮은 자리에 놓고 석달 열흘 목탁소리로 다듬으면 가는 현의 찬란한 울림의 시 한 편이 관 속에 놓일까 바람 가는 길을 따라 무작정 가고 있다.   눈을 잔뜩 뒤집어쓴 오후 산이 저물 대로 저물어서 어스름 속으로 절름절름 지고 있다 어디선가 눈 속에서 새 한 마리 울고 있다 시 한 마리 따라 울고 있다.   죽은 나무에는 죽어도 새가 깃들지 않는다 둥지를 틀 마음도 없다 보금자리 치는 사랑도 없다 집이란 그늘이 깃들지 않는 곳 그늘이 짙으면 풀이 나지 않는다 시도 싹을 틔우지 않는다.   시 한 편을 가지고 시집에 넣기 전 마지막으로 손을 본다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파여 있는 굽은 길이 보인다 손금이다 마지막 퇴고의 길에서도 부끄러워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망설인다 시집에 넣고 나서 또 고칠 것이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서 잘 죽기 위해서 시를 쓰는 일이란 다짐을 다시 한 번 다져 본다.   하늘 한복판을 조금 지난 곳 달이 보름보름 부풀고 있다 꽃반지 낀 사내가 마른 풀밭에 누워 있다 침묵이다 왜 침묵이 금인가 말 없음 속에 말이 뛰어 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을 잡아타고 천리를 달려라 온몸이 이슬에 젖을 때까지.   인수봉이 저기 있다 저 잘난 사내 밤낮없이 백운 만경을 거느리고 당당하기 그지없는 아무리 유혹해도 다가서지 않는 안타까운 계집처럼, 저 사내 품안에 넣고도 속수무책, 대책이 없다 요지부동이다 아무리 진달래가 꽃불을 놓아도 아무리 소리쳐도 들은 척 만 척 눈이 내려야 가끔 흰 모자를 쓰는 의연한 기상으로 하루살이 떼 같은 군상을 내려다본다 허상이다 나의 시가 늘 그렇다.   너를 한 번도 잊은 적 없다 해가 지고 밤이 와 어두워지면 칠흑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속에서도 너를 잊은 적 없다 너도 내가 보고 싶은 때가 있느냐 내 마음을 다 모아 불을 밝혀도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두고 어딘가로 스친 듯 하루가 진다 쓰지 못한 시가 노을 따라 지고 있다.   꽃 속의 궁전은 황홀하나 허망하게 무너진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궁전을 짓는 부산한 역사 도끼질 톱질 대패질 망치질소리 향기에 취하는 것은 찰나 깨고 나면 허무의 푸른 지옥 피어날 때야 영원할 것 같지만 며칠이나 붉겠느냐 이내 꽃이 진 자리 찬바람 불다 가고 자궁 속에서 아기가 놀듯 나무 속에서 봄이 노는 소리 들린다 다시 붓을 들어라.   먹어야 산다고 아무것이나 먹기만 해서야 쓰겠는가 화려한 재료에 인공 조미료 듬뿍 쏟아붓고 지지고 볶고 튀기고 굽고 끓이고 삶아 익힌 것이 아니라 날 냄새나는 날것을 요리하라 천연 조미료로 맛을 낸 날것으로 시탁詩卓을 꾸며라 신선한 안주 옆에 맑은 술도 한 주전자 놓여 있기를! 그래야 자연을 만날 수 있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가 되라 우주의 자궁은 늘 열려 있다 냉수로 눈을 씻고 마음을 헹구고 손을 모아라 새벽 세 시 우주와 독대하라.   시인은 감투도 명예도 아니다 상을 타기 위해, 시비를 세우기 위해, 동분하고 서주할 일인가 그 시간과 수고를 시 쓰는 일에 투자하라 그것이 시인에겐 소득이요, 독자에겐 기쁨이다 오로지 올곧은 선비의 양심과 정신이 필요할 따름이다 변두리 시인이면 어떻고 아웃사이더면 어떤가 목숨이 내 것이듯 시도 갈 때는 다 놓고 갈 것이니 누굴 위해 쓰는 것은 아니다 시詩는 시적是的인 것임을 시인詩人으로서 시인是認한다 생전에 상을 받을 일도, 살아서 시비를 세울 일도 없다 상賞으로 상傷을 당할 일도 아니고 시비詩碑로 시비是非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다 시인은 새벽 한 대접의 냉수로 충분한 대접을 받는다 시는 시로서, 시인은 시인으로서 존재하면 된다 그것이 시인이 받을 보상이다.   여시아문如是我聞!      
1350    [詩공부 미치광이]- 詩作에서 이미지 가져오기 댓글:  조회:4123  추천:0  2016-04-16
시인들의 이미지 표현                                /조병무   시인들의 이미지 표현 -이미지 가져오기 시를 사랑하는 여러분, 참, 시란 것은 이런 것 같기도 하고 저런 것이기도 하는 묘한 여운을 남겨주는 것이라 생각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앞서 한 분의 시인이 어떻게 이미지를 찾아오는가를 시인의 육성으로 들어 보았습니다. 한 분만으로 부족하기에 다른 두 분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우리나라 시인들은 이러한 이미지를 불러오고 가져오는 세계가 철학의 냄새를 풍기기도 하고 일상의 생활 냄새를 풍기기도 합니다. 시에서 이미지란 알라딘의 마술 같아서 하나의 사물이나 대상에 대하여 시인의 마음이 어떤 무엇을 요구하고 갈구하는 과정에서 과거나 현재 미래에 체험했고 느끼고 한 모든 것들이 요동을 치면서 무언가 그려지는 하나의 형상이 이미지의 착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에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시인 구재기(丘在期) 님을 통하여 이미지를 찾아 작품으로 나타나기까지의 말을 들어 봅시다. "시에 있어서의 이미지는 마음속에 깊이 가라앉은 어떠한 것들을 언어를 사용하여 명확하게 제시하여 주는 곳에 있게 된다. 그러한 제시가 직접적이든 비유적이든 언어라는 일종의 형상화된 표현 수단으로 구체적인 사물을 암시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되고, 그러한 암시의 역할은 한갓 치장의 수단으로 머무르는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 또는 그 자체를 그려 넣는 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는 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할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시에 있어서의 이미지는 시 자체라 할 수도 있다. 존재하는 구체물을 또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도록 언어를 통하여 빚어내는 것이 시이며, 존재하지 않는 구체물가지도 존재할 수 있도록 가능한 기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 곧 시이다. 이러한 시란 곧 이미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에 있어서의 이미지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등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상상력을 낳게 한다. 상상력은 모든 가능한한 정신이 세계를 이미지로 그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존재에의 창조물로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상상력은 초자아적이어서 수많은 체험으로부터 거듭 형성된다. 체험이 깊으면 깊을수록, 체험이 넓으면 넓을수록 초자아의 힘은 깊고 넓어지며, 이러한 초자아로부터 얻어지는 상상력은 부수적으로 넓고 깊어진다."라고 좀 길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존재하는 구체물을 받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내면서 만들어지는 시는 상상력의 깊음으로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자작시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개울을 건너 보리수 울타리로 떠오르는 달빛만큼 한 밝기로 하고 바람이 이는 대나무 밭 대나무 잎에 머무르는 별빛만큼 한 밝기로 하고 한 흡 가량 초가집 용구새에 피어나는 박꽃 박꽃 속에 묻혀 푸작나무를 지피던 아궁이에 누이의 가녀린 손가락만 남았는데 온종일 하늘을 맴돌던 고추잠자리 떼 다 어디로 갔나 무서리가 쏟아지고 쏟아져도 합장한 손은 흩어지지 말라 하늘에는 처마 밑을 찾는 참새 떼의 행렬이 일어섰다. 이 작품은 시인의 작품「귀소(歸巢)」의 전문입니다. 이 시를 얻게 되는 과정과 그 이미지의 진행을 다음과 같이 들려줍니다. "부인의 직장관계로 나의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충남 서천 천방산을 지켜주는 시인 권선옥 형에 대한 예우로 찾아 본 나의 고향은 유달리 많았던 박꽃을 모조리 잃고 있었다. 지루한 여름이 무르익어 매미가 한창 울어댈 즈음 어둠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기 시작하면 새하얀 박꽃이 초가집 지붕 위에서 용구새를 붙잡고 기어오르던 마을 둥그런 달덩이가 상기된 채 떠오르는 모습에 부끄리고, 귀소하는 참새 떼들이 소란한 울음소리와 만나던 곳. 생솔가지와 푸작나무를 한꺼번에 집어넣은 안마당의 한 여름용 간이 부엌. 흙담장 울안에서 한창인 백합의 짙은 향기 밑으로「딴솥」아래의 무성한 연기가 하늘로 지나가고, 누이들의 하이얀 손가락 사이에서 좁쌀 같은 설거지물이 흘러내리던 자리에는 카세트와 디스코풍의 소음을 울리고 있다. 누이의 손가락은 보이지 않고, 플라스틱 빈 바가지가 전기 자동펌프 밑에서 홀로 뒹굴며, 용구새를 쥐어 잡던 박넝쿨 대신 장식용 함석 뾰족탑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흙담장이 시멘트 부록, 참새 떼가 들락날락하던 처마 밑은 함석 차양이 저물어 가는 여름의 햇살을 막아내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 모습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실토입니다. 구재기 시인의 시작품과 함께 이미지가 오는 과정의 이야기를 곁들여서 감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아, 그렇구나 하는 감동이 마음에 자리 잡을 것입니다. 좀 긴 인용인 것 같습니다마는 시인의 이미지 가져오기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한 분의 이야기를 더 듣도록 하겠습니다. 오수일(吳壽一) 시인의 이미지 가져오기에 대해서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졸시의 체험적 이미지를 전개하기엔 미흡하지만, 이 너무 공소해진 이야기의 실감을 위해 시도해 보고자 한다. 시의 소재가 되는 대상은 무엇이나 가능하다. 정신적 감각으로서의 자연현상 그 무엇이나, 관념의 사후공간의 그 무엇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인간의 의식 작동은 외적 세계와 내면 세계와의 만남으로 비롯된다. 외계에 대한 감각적 관찰은 내면의 지각을 통하여 정서와 의미를 부여한다. 이미지의 추적이다. 즉 정서적 직관으로 포착되는 순간이다. 나에게 있어 그것은 무상의 심형을 구축하게 한다. 발견이며 희열이기도 하다. 곧, 잉태된 시심인 것이다. 이미지의 형성 과정인 것이다. 사실 내게는 정동(Emotion) 요소가 강한 편이다. 그래서 나의 시적 체험은 대개 서정적 미감을 동반한 감정으로 대두되곤 한다. 그리움의 그 여린 몸짓에서는 내 막연한 향수의 대명사「순이」가 등장한다." 오수일 시인은 이렇게 좀 어려운 잉태된 시심이 오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한 인물의 등장을 다음과 같은 시작품으로 구체적으로 무한한 향수의 몸짓을 보여 줍니다. 손끝에 바람이 인다. 너, 어디서 그리운 몸짓에 옷을 벗는가. 세월이 바람 타고 허락 없이 입술을 포갠 오후. 멀찍이 떠가는 산야의 잠든 순이 그립다. 꽃 그늘에 실려 간 지금은 슬픈 사람. 너, 어디서 그리운 몸짓을 보내오고 있는가 손끝에 눈물 어린다. 이 작품은 오수일 시인의「몸짓」이라는 제목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 대한 이미지의 찾아감을 다음과 같이 들려줍니다. "쓸쓸한 어느 오후, 손끝을 스치는 바람에서 문득 살아 온 정적 감각이며 의식이다. 이 순간을 나는 의식에 대한 무의식이 대상작용으로 대치한다. 알게 모르게 오랫동안 마음속에 키워온 그리움이 대상「순이」다. 물론 어린 날의「순이」도 그렇지만, 이는 내 마음을 지배해 온 여성상이다. 내 몽상의 여인이다. 바슐라르는 그의「몽상의 시학」을「아니마(Anima)」의 시학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니마는 융의 심리학에서「남성 속에 내재하는 여성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순이」는 아니마의 존재다. 누구나 어린 시절, 꿈처럼 키워온 여성상이 있다. 순이는 바로 그녀의 이미지다. 손끝이 바람에서 바람의 몸짓에서, 그녀의 이미지를 감지한 것이다. 이런 경우는 서정주의「부활」에서도 볼 수 있다. 종로를 걸어오는 수많은 소녀들에서「순이」의 부활의 이미지를 보는 것이다." 순이는 여성상에 대한 강한 이미지로 그녀는 하나의 여인상으로 키워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좀 다른 이미지의 가져오기를 들려줍니다. 구재기 시인의 작품과 함께 읽어보면 그 이미지의 찾아옴을 짜르르 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음의 작품을 마음으로 음미하며 읽어봅시다. 밤이면 먹물 같은 설움을 한 줌씩 걸러 진달래꽃 무너진 산허리에 묻고 아침이면 북선동 뒷산에 와서 우는 뻐꾸기. 청솔가지 물먹은 목소리로 잃어버린 고향을 물어다 놓고 오늘은 목이 쉬어 절름절름 우는가.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위해 무명자락 동여 맨 허리춤 아래 풀잎으로 흔들거리는 가슴을 묻고 얼굴빛도 푸르르게 우는 뻐꾸기. 북선동 뒷산이 잠귀를 열고 그때마다 한치씩 내려앉는다. 오수일 시인의 작품인데 이 작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들려줍니다. "다음 경우는 좀더 뼈아픈 현실적 체험이 어떻게 시의 이미지로 구상되었는가. 물론 작품으로서의 성패는 차지하고 말하고자 한다. 이는 일반적 생활 체험의 세계를 이미지를 통해 관념 조형으로 형상화한 경우이다. 이는 원래「뻐꾸기가 운다」로 발표된 나의 데뷔작 중의 하나지만, 그 후「서울뻐꾸기」로 제목을 고쳐 보았다. 수 년 전 일이다. 내가 사는 북선동(이제는 동명조차 없어졌지만) 일대가 헐리어 나가게 되었다. 도시재개발 사업으로 산꼭대기까지 들어 찬 가난한 이웃들의 가슴이 헐리게 되었다. 그런 어느 날, 아침을 들던 나는 문득 뒷산의 뻐꾸기 소리에 수저를 놓고 말았다. 잘 살아보자고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밀려든 저들의 가슴 헐리는 소리-내 가슴 헐리는 소리. 나는 이 뻐꾸기 소리에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 집도 헐리게 돼 있었다. 그들은 밀려나서 어디로 갈 것인가. 갈 곳이 있는가. 소시민의 애환과 원성의 눈물 소리. 그 후 뻐꾸기는 아침이면 그렇게 울었다. 나도 울고, 그들도 울고, 그래서 뻐꾸기도 그렇게 울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 도심지의 서울 뻐꾸기는 이렇게 나에게 와서 감성적 인식의 대상으로 의식 속에 자리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대로 정서적 직관에 의해 대상물 가운데서 포착된 이미지의 형인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몇 분의 시인이 들려주는 이미지란 시를 만드는 하나의 작용으로서 얼마나 크고 많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가를 잘 말해 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미지의 작용이 자신의 체험이나 마음의 세계에서, 그리고 사물이 경험이나 느낌에서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들 시인이 체험적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항상 우리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것이지 너무 멀리서 찾아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이미지(image)란 원래 하나의 실제적인 실물에 대한 모상(模像)으로 그에 가깝거나 유사한 모양을 만들어 내는 상상(imagination)으로 그 상상의 힘이 만들어 내는 심상(心象)이 사람의 많은 체험을 통하여 감각적으로 마음 속에 되살아나는 거대한 스크린이라고나 할 까요. 그래서 루이스(C.D Lewis)는 이미지를 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파운드(E. Pound)는 라는 시인의 이미지 가져오기의 중요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 여러분, 여러분도 지금 연필을 들고 이미지 가져오기를 실기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주변의 여러 사물을 대상으로 그 이미지를 찾아보면 그것이 시작품의 기초가 됩니다. =========================================================================================   326. 막막 / 홍해리             막막   홍 해 리   나의 말이 너무 작아   너를 그리는 마음 다 실을 수 없어   빈 말 소리없이 너를 향해 가는 길   눈이 석 자나 쌓였다.     홍해리 시집 중에서    
1349    [같은 제목의 詩 한컷]- 아니오 댓글:  조회:3821  추천:0  2016-04-15
아니오              남태식 무덤의 나라에는 아니오가 없다 아니오가 없는 무덤이 허물고 쌓고 허물고 쌓는 것들은 모두 무덤 무덤들 위에 새로 피우고 돋우는 꽃들도 무덤 풀들도 무덤 무덤이 된 꽃들이 슬프다 풀들이 슬프다 아니오가 없으면 아니오가 없는 나라도 무덤 그 나라의 산천이 모두 무덤 아니오가 없는 무덤이 슬프다 아니오가 없는 나라가 슬프다 그 나라의 산천이 모두 아프다 /// 우리는 어쩌면 긍정의 가치에 길들여져 있는 것은 아닐까. 시인은 아니오라고 말 할 수 없는 세태를 경계하고 심히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는 아니오가 사라진 지 오래된 듯하다. 쉽게 따라가버리고 동의해버리는데 익숙해져 있다. 시인은 이러한 맹목과 순응의 시대를 죽음이라고 지칭하면서 아닌 것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 양심을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 / 김만수 시인
1348    [해살 창창한 이 아침, 詩 한컷]- 아니오 댓글:  조회:4154  추천:0  2016-04-15
아니오                                          문병란   가난은 불편할 뿐이고 결코 부끄럽지 않다 이 말의 당위성은 무엇인가.   부질없는 목숨 굶주려도 죽어도 정신이 살아 굽히지 않은 그 마음 부끄럽지 않은 그 죽음 무엇인가.   희미론 마음 희미론 하늘 칼날 앞에 떨리는 모가지 아니오 아니오 마지막 외치는 단심 무엇일까.   그대 철창에 갇히고 쇠사슬에 꽁꽁 묶이고 무릎엔 낭자한 피꽃 육신 산산 조각이 나도 성삼문의 부릅뜬 눈 아니오 아니오 피 뱉고 뱉은 피 도로 삼켜 마지막 토해낸 피울음 무엇일까.   칼날 앞에 육신 무너지고 찢긴 가슴 찢긴 하늘 마지막 숨결은 가늘어도 모질게 앙다문 입술   님이여, 마지막 남긴 오직 한 마디 말은 아니오 아니오 한 생애 목숨은 하나뿐이고 결코 죽음은 부끄럽지 않다.   아니오 아니오.      
1347    [눈발이 그물대는 새벽 詩 한컷]- 가위바위보 댓글:  조회:4053  추천:0  2016-04-15
  남태식 시몇수 집중     안개가 짙다. 안개가 짙으면 안개에 집중해야만 한다.     안개의 몸피를 더듬어 가늠하고 손가락 발가락의 수를 세어보아야 한다. 안개의 표정은 맑은가 어두운가, 입술은 여태껏 앙다문 체인가 배시시 열리는 중인가, 안개의 속살은 두꺼운가 부드러운가 또 얼마나 깊은가 음습한가 헤아려보아야 한다. 안개의 속살 사이에 들어앉은 나무와 풀과 집과 그 안의 숨결들, 웃음들, 빈 들판의 눈물들, 쉼 없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한숨들을 코로 귀로 숨으로 느껴야 한다. 감전된 듯 감전된 듯 온몸을 떨어야 한다. 언젠가는 걷힐 안개에 뒤따르는 햇살, 뒤따라 날아오르는 새 떼들의 날갯짓 따위는 잠시, 어쩌면 오래도록 잊어야 한다.     바야흐로 때는 안개가 짙을 때, 어김없이 안개가 짙고, 지금 우리는 오직 이 안개에만 집중해야 한다.         언제나없이     언제나없이 꿈은 무덤에서 이루어진다.     무덤이 열리고 아이들이 쏟아진다. 우리가 남이가 얼굴이 없는 짝퉁 우리가 손을 내민다. 살짝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저 주먹 속에는 무엇이 들었나. 저 주먹을 본 적이 있다. 저 주먹과 거래를 한 적이 있다. 그 거래는 무엇이었나.     뒷짐을 지고 한 아이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또 한 아이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또또 한 아이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무덤 앞에는 아직은 고개를 가로저은 아이들과 고개를 가로젓는 아이들뿐이다. 모두 걷고 있다. 제자리걸음이다.     언제나없이 꿈이 산허리 높이 올라앉아서도 낮은 무덤에서 틘다.         가위바위보     지나면 큰 집 대문 보이는 무덤가에 오래된 아이들이 왁자하다.     뒷짐을 풀고 한 아이가 손을 펼치면 또 한 아이가 손을 펼치고 또또 한 아이가 손을 펼친다. 머뭇머뭇 뒷짐을 풀고 머뭇머뭇 손을 펼친다.     왁자한 소리 마당은 꽃들 흐드러지게 핀 봄날인데 풍경은 아직 움 안 돋고 망울 안 맺은 겨울 산천이다.     한 아이가 손을 내밀면 또 한 아이가 손을 내밀고 또또 한 아이가 손을 내민다. 펼친 손은 언제 말아 쥐었을까. 내미는 손도 느닷없고 말아 쥔 손도 느닷없다.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가위……? 바위……? 왜?!…… 내민 손들은 모두 허공을 향하고 손들이 갸웃하니 허공이 갸웃갸웃한다.     지나면 큰 집 대문 환하게 보여도 오래된 아이들 아무도 아직 무덤가를 못 뜨고 있다.    
1346    [새벽에 올리는 詩 한컷]- 국경선의 도적들 댓글:  조회:4251  추천:0  2016-04-15
국경선의 도적들                             /이윤길 에이허브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멸치, 전쟁이, 고등어, 꽁치, 가시나비고기가 오기도 많이 왔지만 대어는 보이지 않습니다. 가끔 무장한 경비정이 소문을 듣고 빵 빵 빵 총소리를 냅니다. AIS로 주민등록원부 열어보니 마른하늘에 날벼락 쳤다고 합니다. 조밀한 냉기의 오아시오에 들자 많은 도둑이 도착했다 전해집니다. 10도, 11도, 12도 겹겹으로 쳐진 철조망 가로지르는 그들에게 신호등 언제나 빨간불입니다. 비표 없이 갈 수 없는 그곳을 씩씩하게 갑니다. 자동차를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한 잔 소주를 위하여 박명이 되면 곤죽이 된 채, EEZ LINE 넘어 공해로 돌아옵니다. 만선하거나 빈부랄 소리 요령처럼 흔들며 혹은 거시기 빠지게 /시평; 원양어선 선장이기도 한 이윤길 시인의 시에는 역설이 많이 쓰이고 있다. 배타적 경제수역인으로 가로막혀 물고기를 뒤쫓는 일이 도적질이 되지만 바다엔 공공의 바다인 공해가 있다. 물고기의 밥으로 자신의 다리를 내어줬다는 에이허브의 끊임없는 투쟁에서 시인은 우리네 한 생의 모양을 그려내고 비춰보고 있는 것이다. / 김만수 시인
1345    <돌> 시모음 댓글:  조회:4575  추천:0  2016-04-13
+ 돌멩이 나는 돌멩이 눈도 코도 입도 귀도 없는 돌멩이 누군가 지나가다 발로 차올리면 쨍그랑! 유리창이 깨지고 깨깨깽! 개의 비명 소리가 들리고 푸드득! 한쪽 끝에서 새가 날아오르는 그 짧은 순간, 작렬하는 빛처럼 내 존재가 드러나지만 여전히 나는 슬픈 돌멩이 한낮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 더없이 달아올랐다가 한밤에는 캄캄한 어둠에 잡혀 더없이 외롭고 캄캄한 언제나 혼자 놀고 혼자 꿈꾸는 아무도 몰래 神이 지구 위에 눈 똥 (김상미·시인, 1957-) + 돌 사람들은 젖은 손으로 굳은 대지를 긁고 나무들은 여린 가지로 빈 하늘을 흔든다. 그러나 돌은 그 숨은 영혼으로 모든 허무를 품어 가장 무겁고 긴 시(詩)를 쓴다. (임보·시인, 1940-) + 숨은 돌이 말한다 나는 내 안에서 솟는 불길 잠재울 줄을 안다 내 안에서 뻗쳐오르는 돌개바람 같은 욕망 참아낼 줄도 안다 마을이여 당산나무여 나를 좀 어떻게든 밀어올려다오 이 견디기 어려운 함묵緘默의 고빗길마다 응어리 하나씩을 뱉어 내놓았으니 그것들은 빛나고 빛나는 흰 이마 내 그리움의 다른 얼굴일 뿐 (이성부·시인, 1942-2012) + 무늬석에 묻다 돌 하나 건져들면 물내 난다 물의 멀고 긴 유적, 억만 소리의 냄새의 지질의 빛의 유전자가 보인다 백만 년 전 강물의 자모음 들린다 물 속의 돌이 궁구하던 해와 해 사이 밤과 밤 사이를 내다보며 새의 문양을 천 년에 한 뜸씩 중얼중얼 새겼으리라 전생의 전생으로부터 받아 온 별의 노래다 단순침전 형상으로 치부하지 말라. 새를 가슴에 품은 자만이 아는 일. 강믈 깊은 늑골 밑을 울린 소리들이 쟁이고 쌓여 겨울,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또 겨울. 겨울강의 체온이 체취가 묻고 씻기고 새겨져 모천으로 회귀한 저 물비늘 묻힌 돌 생 비린내 난다 잿빛 물돌 속에 갇힌 붉은 새 한 마리, 너, 뉘 가슴에서 왔니? (김추인·시인, 1947-) + 바다에게·3 - 몽돌 바닷가에서 주워 온 몽돌 하나,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릴 때마다 쏴아- 파도 소리 들리고 눈앞에 바닷물이 출렁인다. 바다가 된 작은 돌멩이- 사랑이란 것, 심신이 닳도록 그대와 부대끼기도 하며 물새 떼 줄지어 떠나고 난 뒤로도 기-인 날 파도가 오가는 시린 해안선을 지켜보며 때론, 눈물 자국 하얗게 말라가는 짠 의미를 맛본 후에야 세월의 깊이로 완연해져 가는 것이라고. 끼룩 끼룩 쏴아- 몽돌 해변이 내 둥근 그리움 속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다. (허영미·시인, 1965-) + 돌을 줍는 마음 돌밭에서 돌을 줍는다 여주 신륵사 건너편 남한강 강변에서 돌을 줍는다 마음에 들면, 줍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줍지 않는다 마음에 드는 돌이 많아 두 손 가득 돌을 움켜쥐고 서 있으면 아직 줍지 않은 돌이 마음에 들고 마음에 드는 돌을 줍기 위해 이미 마음에 든 돌을 다시 내려놓는다 줍고, 버리고 줍고, 버리고 또다시 줍고, 버린다 어느덧, 두 손에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빈손이다 빈손에도 잡히지 않을 어지러움이다 해는 지는데 돌을 줍는 마음은 사라지고 나도 없고, 돌도 없다 (윤희상·시인, 1961-) + 돌멩이의 곁을 지나왔네 아침을 걷다가 돌멩이 하나의 곁을 지나쳤네 산비둘기 알만하게 참 둥근 돌이었네 저 돌은 왜 이곳에까지 굴러왔나? 그 돌에게는 바다 냄새가 나는 사월이었고 내 곁에선 꽃들이 함부로 피어났네 한참을 더 가다가 매우 둥근 돌 자꾸만 보고 싶어졌네 너무 멀리 지나쳐 왔을까 뒤돌아보던 내 발이 이별을 알아버렸네 어느새 하루가 또 저물었네 (심재휘·시인, 1963-) + 꿈꾸는 돌 비에 젖어 꽃피는 돌밭 주름 깊은, 청록빛 돌 하나 힘있는 근육 슬며시 풀며 자욱한 물안개로 푸른 산자락 지운다 눈감으면 돌의 숨결 너머 나직이 물이 흐르고 시간이 흐르고 바람과 우레, 그 위에 설핏 둥지를 튼다 비 그치고, 눈부신 햇살 다시 내려와 앉자 돌은 돌아누워 서서히 잠들며 꿈꾸기 시작한다 하늘이 그의 잠을 다시 깨울 때까지 깊은 주름 속에 고이는 부질없는 꿈으로 조금씩 조금씩 더 야위어가며 (이구락·시인, 1951-) + 강원도의 돌| 나는 수석(水石)을 전연 모르지만 참 이쁘더군, 강원도의 돌. 골짜기마다 안개 같은 물냄새 매일을 그 물소리로 귀를 닦는 강원도의 그 돌들, 참, 이쁘더군. 세상의 멀고 가까움이 무슨 상관이리. 물 속에 누워서 한 백년, 하늘이나 보면서 구름이나 배우고 돌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더군. 참, 이쁘더군. 말끔한 고국(故國)의 고운 이마, 십일월에 떠난 강원도의 돌. (마종기·시인, 1939-) + 길가에 버려진 돌 길가에 버려진 돌 잊혀진 돌 비가 오면 풀보다 먼저 젖는 돌 서리가 내리면 강물보다 먼저 어는 돌 바람 부는 날에는 풀도 일어서 외치지만 나는 길가에 버려진 돌 조용히 눈 감고 입 다문 돌 가끔 나그네의 발부리에 차여 노여움과 아픔을 주는 돌 걸림돌 그러나 어느 날 나는 보았네 먼 곳에서 온 길손이 지나다 걸음을 멈추고 여기 귓돌이 있다 하셨네 마음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 집을 지을 귀한 귓돌이 여기 있다 하셨네 그 길손이 지나고 난 뒤부터 나는 일어섰네 눈을 부릅뜨고 입 열고 일어선 돌이 되었네 아침해가 뜰 때 제일 먼저 반짝이는 돌 일어서 외치는 돌이 되었네 (이어령·평론가, 1934-) + 머나먼 돌멩이 흘러가는 뭉게구름이라도 한 번 베어보겠다는 듯이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에서 수수억 년 벼르고 벼르던 예각의 날선 돌멩이 하나가 한순간, 새카만 계곡아래 흐르는 물 속으로 투신하는 걸 보았네 여기서부터 다시 멀고 험하다네 거센 물살에 떠밀려 치고 받히며 만신창이로 구르고 구르다가 읍내 개울 옆 순댓국밥집 마당에서 다리 부러진 평상 한 귀퉁이를 다소곳이 떠받들고 앉아 있는 닳고닳은 몽돌까지 (이덕규·시인, 1961-) + 原石 사람들은 슬픔과 외로움과 아픔과 어두움 같은 것들을 자신의 쓰레기라 생각한다 버려야 할 것들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줍는 거지 사랑하는 거지 몇 해 전 집을 옮길 때만 해도 그들의 짐짝이 제일 많았다 그대로 아주 조심스레 소중스레 데리고 와선 제자리에 앉혔다 와서 보시면 안다 해묵어 세월 흐르면 반짝이는 별이 되는 보석이 되는 原石들이 바로 그들임을 어이하여 모르실까 나는 그것을 믿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나는 슬픔 富者 외로움 富者 아픔의 어두움의 富者 살림이 넉넉하다 (정진규·시인, 1939-) * 거지: 걸인  
1344    詩調는 민족의 얼, 슬기로운 가락 댓글:  조회:5406  추천:1  2016-04-13
詩調 歌唱의 實際 시조 가창의 실제 고 두 석 (국립국악원 정가동우회장) 1. 들어가는 말 시조는 우리 겨레의 고유한 시가로서 민족의 얼을 담은 슬기로운 가락이다. 우리 선조들은 詩言志 歌詠言 歌與詩一道라 해서 詩와 歌는 하나의 道로 통한다고 했다. 그래서 시를 지으면 이를 창으로 불러서 시의 운치를 살리고 감동을 자아냈던 바, 요즈음엔 시와 창이 문학과 음악의 각각 다른 분야로 분리 되어버림으로써 옛날 우리 선조들이 느꼈던 감흥은 반감되고 말았다. 그 나라의 전통이나 문화가 시대에 따라 변모 되어감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시조가 우리의 독특한 전통예술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함은 가락을 얹어 불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볼 때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그런 의미로 전통적인 시조의 맥을 잇기 위해서 시와 창이 서로 만남으로서 문학과 음악의 접점에서 시적 감동과 운률의 감흥을 상승시킬 수 있다면 앞으로 우리는 이의 접목을 다시 시도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해본다. 최근에 와선 경향각지에서 시조 경창대회가 열리고, 시조창 애호가들을 많이 배출해내고 있으며 이에 따라 시조창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가고 있음을 볼 때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라 생각된다. 차제에 우리 시조시인들도 자신이 작시한 시조를 낭송 대신 창으로 직접 불러봄으로서 자신의 시에 심취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시조 가창의 실제에 대해 기술해보고자 한다. 시조창은 선율의 변화가 적고 단조로워 일정기간 조금만 익힌다면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다. 그리고 곡이 단일곡이므로 한번만 익혀두면 평시조는 어떤 가사에 얹어 불러도 똑같은 곡으로 부르면 되므로 자기가 작시한 시조를 충분히 노래로 표현할 수 있다. 또한 별다른 반주 악기의 준비 없이도 자리를 마련하여 여럿이 巡唱할 수 있는 장점을 지녔기에 대중적이고 일상화할 수 있는 음악이다. 2. 시조창의 음악적 특성 시조가 현재와 같은 형식의 노래로 불리우게 된 것은 대략 18세기 영조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 영조(1725 - 1776) 때의 가객 李世春이 일반 시조에 장단을 붙였다는 문헌( 신광수가 지은 石北集의 관서악부)상의 기록으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는데 당시엔 평시조만을 불렀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에 들어와서 평시조 이외에 지름시조, 사설시조, 사설지름시조와 같은 형태의 시조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시조창하면 평시조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여기에선 평시조에 관한 가창 방법만을 다루고자 한다. 평시조도 지방적인 노래 특징에 따라 경제와 향제로 구분된다. 경제는 서울 지방을 중심으로 불리던 가락이며 향제는 다시 전라도 지방의 완제, 충청도 지방의 내포제, 경상도 지방의 영제로 나누어진다. 각 지방의 민요가 각기 그 특색이 다르듯이 시조도 선율의 변화나 시김새의 변화에 따라 그 특징이 달라서 그렇게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와 향제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가락에 있어서 경제는 중장 제 2각의 제 4박과 제 5박, 종장 제 1각의 제 2박과 제 3박에서 높은 속소리(세청)로 부르나, 향제는 그 부분을 속소리로 부르지 않고 평성으로 부른다는 점이 다르며, 장단에 있어서도 다소 차이가 있다. 최근에는 석암 정경태가 시조악보를 새롭게 정리하여 세상에 내놓았는바, 시조 애호가들의 대부분이 지금은 이를 석암제라 하여 즐겨 부르고 있다. 석암제는 경제와 향제의 좋은 점을 취택하여 알기 쉬운 선율보로 내놓고서, 이의 보급을 위해 경창대회, 연수회 등을 개최하는 등, 시조를 대중화시키는데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3. 평시조의 가창 방법 (1) 먼저 장단을 알아야 한다. 시조의 한 장단을 1각이라고 한다. 1각에는 5박 장단과 8박 장단 두 가지를 사용하는데 평시조 한 수에는 다음과 같이 장단 구성이 되어 있다. 1각 2각 3각 4각 5각 5 8 8 5 8 ( 5각 34박) 5 8 8 5 8 ( 5각 34박) 5 8 5 8 ( 4각 26박) < 총 14각 94박 > 1) 5박과 8박 장단의 구성을 알아보자. * 5박 장단 1박 2박 3박 4박 5박 * 8박 장단 1박 2박 3박 4박 5박 6박 7박 8박 * 합박 : 양손으로 치는 박 * 지박 : 왼 손 식지로 치는 박 * 채박 : 채로 치는 박 * 궁박 : 왼 손으로 치는 박 궁박( ○ )은 왼 손, 채박 ( | )은 장구채를 잡은 오른 손, 지박( ○ )은 왼손 검지손가락의 표시이다. 1칸은 1박을 뜻하며 1박의 길이는 약 2초반 정도이다. 평시조 한 수를 부르는데는 약 3분 30초 정도 소요된다. 2) 장단 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요령으로 하면 된다. 시조창을 할 때는 대금(단소)과 장구를 반주로 사용하나, 준비가 안되었을 때는 양손으로 무릎장단만 짚어도 무방하다. 먼저 첫 박을 칠 준비자세로 양손을 어깨의 반 정도의 높이만큼 들었다가 양손으로 동시에 치며 '하 ㄴ 나'라고 속으로 센다. '하나'라고 빨리 발음하지 않는 건 1박의 길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하 ㄴ'까지 양손을 붙이고 있다가 '나'소리에서 왼손 식지 만을 세워든다. 여기까지가 제 1박이다. 즉 그 박을 치고 나서 다음 박의 준비동작 까지가 한 박이 된다. 두 번째 박도 역시 '두ㅡ울'이라고 속으로 발음하는데 '두ㅡ'에서 식지로 짚어주고 '울'하면서 오른 손을 드는 셋째 박 준비동작 까지가 제 2박이다. 이런 식으로 제 3박, 제 4박, 제 5박을 쳐나가되 제 5박을 칠 때에는 '다ㅡ'에서 채를 치고 '섯'에서는 양손을 든다. 이제 제 2각인 8박으로 넘어갈 준비동작을 하기 위해서다. 8박 장단도 5박 장단과 같은 요령으로 치면 된다. 이렇게 해서 장단 치는 법을 터득한 뒤에 무릎장단에 맞춰 혼자서도 창을 얼마든지 부를 수 있다. (2) 다음은 음계에 대해서 알아보자. 서양의 오선보에는 7음계가 있듯이 우리 전통음악은 12음계로 구성되어 있다. 서양음악의 7음계와 우리 음악의 12음계와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중에서 아라비아 숫자 '1'로 표시되는 황종, '4'로 표시되는 중려, '5'로 표시되는 임종의 3음계가 주로 시조창에서 쓰이는 음계이다. 위의 표에서 보다시피 황종은 서양음악의 '도'에 해당되는 음을 내면 되고, 중려는 '파', 임종은 '솔'에 해당하는 음을 내게 된다. 이 기본 옥타브에서 한 옥타브 더 올라가면 아라비아 숫자는 '1'로 표시하고 기본 율명 앞에 청(淸)자를 붙여서 '청황종'이라 하는데 이는 서양음악의 '높은 도'에 해당하는 음계를 지닌다. 마찬가지로 중려가 한 옥타브 올라가면 '청중려(4)'로 부른다. 또한 기본 옥타브에서 한 옥타브 내려가면 아라비아 숫자는 '1'로 표시하고 기본 율명앞에 배(倍)자를 붙여서 '배황종(1)' '배중려(4)'등으로 부르며 '낮은 도' '낮은 파'를 내면 된다. 이 음들을 쉽게 익히기 위해서 가락선으로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가) 황(황종)과 중(중려) (나) 황과 임(임종) (다)중과 황 (라) 중과 임 (마) 황과 중, 임   (3) 악보 보는 법을 터득해야한다. 악보를 볼줄 알아야 그 악보를 보면서 창을 할 수 있다. 시조 악보로는 정간보와 선율보(가락보)가 있는데, 정간보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칸으로 되어있다. 각 칸은 시가(時價)를 나타내며, 각 칸 안에는 음의 높이를 나타내기 위해, 황종 중려 임종 등의 율명을 기재하고 있다. 정간보를 일반인들이 보고 부르기엔 어려운 감이 있어 이를 가락선으로 표시하여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그려진 악보로 선율보가 있다. 선율보는 음의 높고 낮음, 음의 오르내림, 목을 막았다 트기, 음을 세게 흔들기 혹은 약하게 흔들기 등을 그림으로 그려 표시했으므로 초심자들도 쉽게 보고 부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여기서는 선율보를 보면서 부르는 법을 익히도록 하겠다. 선율보 에서는 가락선 표시 방법과 부호 표시 방법만 알면 누구나 쉽게 보고 부를 수 있다. 1) 가락선 표시 직인성(直引聲) : 곧게 쭉 뻗는 소리 전성(轉聲) : 반음 간격으로 오르내리며 흔드는 소리 요성(搖聲) : 얇고 완만하게 흔드는 소리 가성(假聲) : 속청. 가늘게 내는 속 소리 2) 부호 표시 된소리 표 : 후두를 막았다 떼는 소리 전성 표시 : 흔드는 소리 반음 올림표 밀음 표 < >와 같은 역할 숨 쉼표 상삼각(上三角) : 반음 올렸다가 원 위치로 환원함 하삼각(下三角) : 반음 내렸다가 원 위치로 환원함 악보를 보고 부를 때 이상의 가락선과 부호 표시를 잘 터득해서 시조창을 해야한다. (4) 이제 악보를 보고 실제로 시조창을 해보자. 다음에 수록된 악보는 경제로 된 선율보이다. 1) 시조의 내용을 먼저 알고 부르자. < 사설 > 자네 집의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소 草堂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 請해옴세 百年덧 시름없을 일을 議論코저 하노라 < 지은이 > 김육(金堉) (1580 - 1658) 조선왕조 효종 때의 영의정. 학자.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청풍 사람. 충청감사로 있을 때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도록 상소하고, 영상이 된 후에 이에 대한 절목(節目)을 작성하여 정부에 바쳤으며 먼저 호서지방에 단행하여 성공하였음. 학문에 조예가 깊으며 그 중에도 경세에 뛰어나 "구황찰요(救荒擦要)" "벽온방( 瘟方)"을 저술 간행하고, 특히 서양 역법을 잘 알아 시헌력(時憲曆)을 시행했음. 시호는 문정(文貞). < 풀이 > 자네 집의 술이 익거든 꼭 나를 부르시게 초당에 꽃이 피거든 나도 자네를 청하겠네 만나면 백년동안 근심이 없을 일을 의논하고자 하노라 2) 악보를 보고 직접 불러보자 악보를 보면 맨 윗줄에 장단 표시가 되어 있다. 5박 장단은 왼편에, 8박 장단은 오른편에 되어 있으니 이 장단에 맞춰 부르란 뜻이다. 그 아래로 2개의 가락선으로 가락의 흐름을 나타내고 있는바, 윗줄은 중려성의 흐름을 나타낸 것이고 아랫줄은 기본음인 황종성의 흐름을 나타낸 것이다. 가락선 밑으로 표시되어 있는 부호 표시는 이미 앞에서 기술했으므로 생략한다. 부호 표시와 함께 적혀있는 아라비아 숫자도 이미 12 음계표를 통해서 기술한 율명을 나타낸 것으로, 예를 들면 1은 황종을, 4는 중려를, 5는 유빈을, 1은 청황종을 표시한 것이다. ① 초장의 제 1각 (초장 첫 5박) '자네'를 중려(파)음으로 발성을 시작하되, 첫음인 '자'만 중려에서 반음 높은 유빈성으로 하여 '네'에다가 빨리 붙인다. 증려성으로 2박까지 서서히 소리를 하되 2박에 가까울수록 점점 세게 밀어준다. 3박에서 반음 높이로 오르내리며 흔드는 전성을 하다가 4박에서 '지'발음을 함과 동시에 'ㆆ' 부호가 있으므로 목을 한번 막았다 터준 후, 황종성(도)으로 떨어져 실을 풀어 내리듯이 잔잔히 떨어주면서 5박 끝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진행한 후 1각을 마치고 숨을 쉰다. 이 대목을 부를 때는 한운출수(閒雲出峀)라 하여 한가한 구름이 산등성이에 떠오르는 듯한 소리 묘사를 하라고 했다. 이는 예의염치를 알고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는 선비의 삶을 소리로 묘사한 대목으로 해석된다. ② 초장의 제 2각 (초장 첫 8박) 1박에서 '술이 -'를 황종에서 중려로 높이면서 3박까지 점점 세게 소리를 밀어주다가 3박 끝에서 황종으로 살짝 떨어뜨려 'ㄱ'을 재빨리 발음하고서 4박인 중려로 올라가서 전성을 해준다. 이때 3박 끝에서 황종으로 살짝 떨어질 때는 출렁하는 맛이 있게 한 후에 4박으로 올라서야 한다. 4박과 5박을 전성으로 흔든 후에 6박에서 8박 까지 증려로 쭉 뻗어 마무리 한 후에 숨을 쉰다. 2각에서는 처음 부분을 약하고 부드럽게 시작하여 3박부터 점점 더 강하게 소리를 밀다가 4,5박에서 전성을 강하게 한후 6,7,8박은 점점 여리게 여운을 남기듯 처리한다. 1박에서 8박 까지 한 호흡으로 길게 연결되어야 하나 호흡이 짧은 경우 5박이 끝난 후 도둑 숨(살짝 쉬는 숨)을 쉬면 된다. 이 대목을 부를 때는 연비여천(鳶飛戾天)이라 하여 나르는 솔개미가 창공을 배회하듯 소리 묘사를 하라고 했다. 선비는 삶의 목표를 뚜렷이 정해놓고 살아가는 동안 어떤 상황에선 온몸을 투신하기도 하고 다시금 유유히 관조하는 제 모습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이러한 선비의 의연한 기품을 묘사한 대목이다. ③ 초장의 제 3각 (초장 둘째 8박) 1박의 '부디'를 발성할 때 '부'는 유빈성으로 내고 '디'는 중려성으로 내되, 평조로 곧장 끌고 가야 된다. 소리에 점점 힘을 실어주면서 무거운 느낌으로 끌고 가다가 4박 들어서면서부터 5박까지 계속 흔들어 준다. 이때는 전성처럼 흔들지 말고 표가 나지 않도록 느슨하게 소리를 흔들어 주어야 한다. 5박 중간쯤에선 된소리 부호가 2개 있으므로 목을 두 번 연속해서 막았다 터주면서 음을 중려 에서 황종으로 떨어뜨린다. 6박에선 계속 황종으로 전성을 하다가 7박 끝에서 잠깐 숨을 쉬고 8박은 배중려의 낮은 소리로 무겁게 내면서 황종에 도달해야 한다. 이때 1박에서 7박 까지는 한 호흡으로 끌고 가다가 잠깐 숨을 쉰 다음에 8박에서 호흡을 다시 시작하여 제 4각으로 바로 들어간다. 이 대목을 부를 때는 한상효월(寒霜 月)이라 하여 찬 서리 내린 새벽달처럼 소리 묘사를 하라고 했다. 이는 삶을 청냉(淸冷)하고 투명하게 살아가는 선비의 기개와 지조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우리는 이렇듯 시조창을 통해서 선비 정신을 은연중 체득케 되는 경이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④초장의 제 4,5각 ( 초장 두 번째 5박과 세 번째 8박 ) 첫 발성은 2각의 1박처럼 시작한다. 1박에서 '부르 -'는 황종 에서 중려로 음을 높인 후에 중려로 2박까지 끌고 가다가 3박에서는 전성을 강하게 해준다. 4박에서는 '시'발음을 냄과 동시에 'ㆆ'가 있으므로 목을 한번 막았다 터준후, 황종으로 음을 떨어뜨려 잔잔하게 요성을 하면서 5박 끝까지 진행한 후 숨을 쉰다. 그리고 나서 제 5각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첫 박 에서 황종으로 '이 -' 하면서 중려로 밀어 올린다. 계속 중려성 '이 - 소'로 음을 끌고 가는데 초장의 종지음이 중려이기 때문에 6박까지 진행한 후 6박 끝에서 완전히 종지 한다. 나머지 7박과 8박은 여음(餘音) 2박이라 해서 쉬게 된다. 이때 중려성을 평조로 진행하지만 약간 강약의 표현을 해주게된다. 즉 1박에서부터 서서히 평음으로 나가다가 5박과 6박에서는 좀 더 세게 밀었다가 멈추게 된다. 이 대목을 부를 때는 잔연고등(殘煙孤燈)이라고 해서 외로운 등불에 하늘거리는 연기처럼 소리 묘사를 한다. 이는 시조의 한 장을 마무리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 삶이 어떻게 마무리되어야 하는가를 시사하고 있다. 시작과 끝을 장엄하게 마무리하면서 운명에 순응할 줄 알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묘사한 대목이다. ⑤ 중장의 제 1각 ( 중장 초 5박) 1박에서 '초다 -'를 중려성으로 내면서 약한 요성으로 떨 듯이 진행하다가 2박 들어가기 직전부터 임종성으로 한음 높여서 '아-' 모음으로 끌고 가되, 중려를 향해서 음을 풀어가면서 이동한다. 이렇게 임종에서 1율 아래로 떨어뜨린 상태로 3박을 마무리 하고 4박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ㅇ'받침을 붙이고 '에' 발성으로 들어간다. 4박과 5박은 느슨한 요성으로 흔들며 진행하다가 끝낸다. 이 대목은 2박 임종성으로 살짝 들어서 '아-'모음으로 풀어내릴 때가 점입가경이 된다. 그래서 이를 묘입운중(杳入雲中)이라 해서 아득히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형상을 소리로 그려내는 것이다. 높은 이상을 꿈꾸며 인생의 포부를 펼치려는 기상으로 묘사되는 대목이다. ⑥중장의 제 2각 ( 중장 첫 8박 ) 일단 '꼬' 발음을 중려로 내면서 2박 까지 끌고 가다가 3박에서 전성을 강하게 한후에 받침인 'ㅊ'을 붙인 후에 다음 속청을 내기 위해 호흡을 조정한다. 다음 4, 5박의 속청이 평시조에서는 절묘한 대목인데, 먼저 4박을 중려성으로 전성을 하며 들어가다가 바로 청황종으로 높여 가성으로 발성을 하면서 또한 전성도 겸해 진행하다가 5박에는 상삼각 부호가 있으므로 이를 처리하기 위하여 청황종 보다 1율 높은 청태주 음 까지 빨리 올라갔다 청황종으로 내려온 후 다시 중려 전성으로 5박 까지 진행한다. 4,5박을 요약해서 표시하면 순서로 소리를 처리한다. 6박의 중려는 평음으로 이어지다가 7박에 가서는 전성으로 끝내고 숨을 쉰다. 이때 4박에서 7박까지 한 호흡으로 처리하고 숨을 쉰다음 8박의 중려로 밀고 가서 8박 끝에선 황종으로 재빨리 내려갔다가 중장 제 3각으로 연이어 들어간다. 이때 8박 끝에서 황종으로 떨어질 때에 초장의 제 2각 3박과 같이 출렁거리는 느낌으로 표현하도록 한다. 이 대목은 고산방석(高山放石)이라 하여 높은 산에서 돌 구르듯이 소리를 하라고 했다. 우리 삶이 항상 유유자적할 수만은 없다. 숨가쁘게 달리며 살아야 할 경우가 수없이 많다. 설사 그렇더라도 창자(唱者)는 음의 높낮이와 속도감을 조절하며 소리를 정확히 끌고 가야 하듯이, 우리의 삶도 윤리와 도덕, 그리고 규범을 지키며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와중에서도 인간답게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시조창을 통해 깨닫게 될 것이다. ⑦중장의 제 3각 ( 중장 두 번째 8각 ) 1박의 '나 -'를 중려성으로 발성하여 잔잔한 요성으로 끌고 가다가 2박에서 '도'를 발음함과 동시에 된소리 부호(ㆆ)가 있으므로 목을 한번 막았다 터준 후에 황종으로 음을 떨어뜨려서 5박까지 진행한다. 이때 2박에서 4박 까지는 평음으로 내다가 5박이 가까워질 때 잔잔한 물결이 치듯 요성을 한다. 5박을 마치고 잠깐 숨을 쉬고 나서 6박에서는 '자'를 유빈성으로 시작하여 곧 바로 밀어올려 중려성에서 '네'를 발성하면서 나간다. 8박에선 전성으로 강하게 흔들어 주는데 8박 끝에 하삼각 부호가 있으므로 유빈 - 중려 - 유빈으로 재빨리 처리한 후 제 4각으로 들어간다. 이 대목은 장강유수(長江流水)라 하여 장강의 물이 흐르듯이 소리 묘사를 하라고 했다. 세월은 물처럼 흐르고 인생도 따라 흐른다. 물은 역행하지 않는다 . 세상을 순리적으로 살아라 한다. 이 대목을 하다보면 일회성인 우리의 인생, 장강의 물처럼, 선비의 시조 소리처럼 순리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창자 스스로가 터득케 된다. ⑧중장의 제 4, 5각 ( 중장 두 번째 5각과 세 번째 8박 ) 제 4각의 1, 2, 3박은 초장 제 1각 5박 장단의 축소 형태로 볼 수 있다. 1박에서 '처'를 중려성으로 끌고 가다가 끝에서 받침 'ㅇ'을 붙인 후 2박 들어선다. 2박에서 '해'를 발성함과 동시에 된소리(ㆆ)를 처리하면서 황종으로 떨어뜨린 후 2박과 3박은 완만한 요성으로 끌고 간다. 3박을 마친 후 숨을 쉬었다가 4박의 '오 - 오'는 황종에서 중려로 밀어 올려 끌고 가다가 5박에서 강한 전성을 해주되, 5박 끝에서 받침 'ㅁ'을 붙이면서 쉬지 않고 곧 바로 제 5각으로 들어간다. 제 5각은 중려로 계속 뻗다가 4박에서 황종으로 소리의 끝을 사뿐히 내리면서 종지한다. 초장의 종지음은 중려로 끝나지만 중장의 종지음은 황종으로 끝나므로 끝맺을 때 약간 출렁이듯 약하고 짧게 맺도록 해야 한다. 여기 중장에서는 여음 4박이 되어 창자는 나머지 4박치는 동안 충분히 숨을 고른다. 이 대목을 평사낙안(平沙落雁)이라 하여 모래사장에 기러기가 사뿐히 내려 앉듯이 소리 묘사를 하라고 했다. 아득한 구름 속에 길 떠나는 나그네 같은 인생, 고산 방석(高山放石)하듯 숨 가쁘게 살기도 하고, 장강유수(長江流水)처럼 유유자적 순리적으로 살기도 하다가, 기러기 사뿐히 내리듯 한 폭의 그림처럼 한 장(障)을 마무리 하는 인생, 아, 얼마나 아름다운가! ⑨ 종장의 제 1각 ( 종장의 초 5박) 1박에서 '바 -'는 유빈성에서 반음 아래인 중려로 풀어 내리는 하행 진행이다. 사설 붙임은 '백년'을 산음(散音)이 안되도록 하기 위해 '바익년'으로 한다 그래서 1박에서 '바 -'로 풀어 내리다가 2박에서 '이 -'를 속청 전성으로 청황종 까지 올려 내다가 3박 '녀 -'에서 상삼각 부호가 있으므로 청태주 까지 재빨리 올렸다 청황종으로 내리면서 속청을 풀고 나서 중려음으로 떨어뜨린 후 겉소리로 전성을 해나간다. 이 대목의 소리내는 방법은 중장 2각의 4, 5박 자리와 같다. 3박 끝에서 받침 'ㄴ'을 붙인 후 4박은 중려, 5박은 중려 전성으로 나가다 받침 'ㅅ'을 붙여준 후 숨을 쉰다. 평시조에서는 속소리로 처리해야하는 곳이 중장 제 2각과 종장 제 1각 두 군데가 나오는데 이를 매끄럽게 잘 처리할 줄 알아야 시조창 맛을 제대로 낼 수 있다. 이 대목을 원포귀범(遠浦歸帆)이라 하여 먼 포구에서 돌아오는 돗단배처럼 소리 묘사를 하라고 했다. 시조에서의 종장은 마지막 장으로서 우리 인생으로 보면 황혼기에 해당한다. 그동안 모진 풍파를 무릅쓰고 만선이 되어 귀항하는 어선처럼, 우리 인생도 이제는 많은 업적을 쌓고 낙향하여 말년을 준비해야 할 때에 이르렀다. 애내곡 부르면서 귀항하는 뱃길처럼, 향리에서 후학이나 가르치기 위해 낙향하면서 귀거래사를 읊는 선비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가. ⑩종장의 제 2각 (종장의 첫 8박) 1박에서 3박 까지는 중장 제 2각 처음과 같이 중려로 뻗어 나가다가 3박에서 전성을 해준 후 끝에서 받침 'ㅁ'을 붙이고서 이어서 4박으로 들어가는데, 4박의 사설 붙임 '어-'를 중려에서 황종으로 떨어뜨려서 3단계로 순차적으로 음을 끌어올려 쌍받침 'ㅂㅅ' 과 모음 '으'를 붙여 5박 중려성으로 끌고 간다. 5박 끝에서 된소리 부호 2개가 있으므로 목을 두 번 막았다 터준 후 황종으로 떨어뜨려 받침 'ㄹ'을 붙이고 6박 7박은 황종 전성으로 밀고 간다. 7박 마치고 잠깐 숨을 쉬었다가 8박은 초장 제 3각 8박처럼 배중려로 깊숙이 내려갔다가 요성을 하면서 황종으로 올라온다. 이 대목은 동정추월(洞庭秋月)이라고 해서 넓고 넓은 동정호에 가을달이 떠있는 것처럼 소리 묘사를 하라고 했다. 산자수려한 자연경관에 에워싸여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호수만으로도 그 정경은 아름다운데, 그 위에 떠있는 휘영청 밝은 달은 삼라만상을 숙연케 한다. 이러한 정경 속에서 아름다운 시가 잉태되고 결고운 소리가 직조되어 나올 수밖에 없다. 시성 이태백이 채석강 에서 완월 하며 시를 지어 읊었고, 소동파는 적벽강 추야월을 보고 적벽부를 읊었다는 그 달을 연상하며 시조창을 하다보면 창자는 어느덧 시인이 되고 만다. 아름다움만을 보고 살면 아름답게 살아진다. 자연과 시조창은 이미 하나가 되어 어울리면서, 읊는 이나 듣는 이 모두 자연과 동화된다. 우리 삶은 이런 대목에서 여유와 낭만이 넘치게 된다. ⑪ 종장의 제 3각과 제 4각 (종장의 두 번째 5박과 마지막 8박) 사설의 자수가 2자이므로 '의'를 황종에서 내고 '론'을 중려로 낸 후, 다시 중려로 뻗어 나가다가 3박에서 전성을 힘있게 해준다. 3박 끝에서 하삼각 부호가 있으므로 유빈 - 중려 - 유빈으로 재빨리 하삼각 처리를 해주고 나서, 4박과 5박은 평음으로 끌고 간다. 5박이 끝나도 숨 쉬지 말고 바로 제 4각 1박으로 들어가서 종지 한다. 종지음은 계면조 기본음인 황종음으로 종지 하는데 각이 지지 않도록 부드러운 곡선처럼 끝맺는다. 이때 호흡은 제 3각의 1박에서부터 제 4각 1박에서 종지 할 때까지 한 호흡으로 해야 한다. 여기 종장에서는 여음 7박이 되므로 제 4각 8박 중에서 1박만으로 소리를 끝낸다. 그리고 마지막 사설 '하노라'는 시조창에서는 부르지 않고 생략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선율보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 대목은 완여반석(完如磐石)이라 하여 맺음은 반석처럼 하라고 했다. 시조의 3장이 모두 끝나는 순간이다. 유종의 미는 움직일 수 없는 튼튼함에서 나온다. 끝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한 인생의 마무리도 어떠해야 한다는 걸 암시한다. 공자는 명미당집(明美堂集)에서 불항기지(不降其志)요 불욕기신(不辱其身)이라 했다. 즉 선비는 그 뜻을 꺾이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고 했다. 평생을 이런 선비정신으로 살아온 사람의 마지막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4. 맺음말 지금까지의 내용은 시조를 직접 평시조 곡에 맞춰 부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술했다. 특히 악보 보는 법을 자세히 설명했기 때문에 수록된 악보를 보면서 실제 창을 할 수 있도록 구성해 보았다. 평시조는 사설이 다르다 하더라도 단일곡이기 때문에 어느 사설이든 얹어서 부를 수 있으므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직접 소리를 듣고 전수를 받아왔던 우리 노래인지라 아무리 자세히 설명을 했다 하드라도 시조창을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초심자에겐 좀 무리가 따를 것이다. 이는 가창의 실제 방법을 터득하는데 있어서 지면만으로는 이해가 되도록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조창은 결코 어려운 노래가 아니다. 이미 우리들의 몸 속에는 우리의 가락이 베어있기 때문에 우리 국민이면 누구나 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우리의 것이라는 걸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본문에서 몇 번 언급한 바와 같이 시조창 속에는 선비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에 와서 가치관이 전도되었다고들 개탄한다.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외래문화의 영향 때문에 우리 전통문화가 설 수 있는 공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전통문화 속에 담겨진 미풍양속도 많이 실종되어버린 상태다. 그렇다면 전도된 가치관을 어떻게 제자리에 갖다 놓을 것인가? 그 나라의 음악을 들으면 그 나라의 정치를 알 수 있고, 그 나라의 춤을 보면 그 나라의 덕스러움을 알 수 있다는 뜻으로 문악지정(聞樂知政)이요 관무지덕(觀舞知德)이라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음악을 소중히 여겨왔다. 세종대왕께서는 몸소 궁정 뜰에 나오셔서 막대기로 정간보를 그려가며 신하들과 음악에 대해 의논하시곤 했다. 음악을 통해서 백성들의 귀를 순하게 길들여 순한 백성으로 순화시킴으로써 요순시대 같은 선정을 펴고자 하셨던 것이다 . 그런 까닭에 우리 선조 들은 순리적이고 바른 음악을 접하면서 곧고 바른 삶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며 생활해 왔던 것이다. 이 시대에도 선비정신은 필요하다. 이 선비정신은 시조창과 같은 음악을 통해서 심어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시조창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되고 앞으로도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1343    [한밤중 비가 추적추적 오는 이때 詩 한수 드리매]- 고백 댓글:  조회:4522  추천:0  2016-04-13
봄마다 내 봄 속에 죄가 꿈틀, 거린다네. 티 없는 눈길로는 피는 꽃도 차마 못 볼, 들키면 알몸이 되는 죄가 꿈 틀, 거린다네. 죄가 꿈 틀, 거린다네 들키면 알몸이 될, 망치로 후려치고 때릴수록 일어서는 두더지 대가리 같은, 피는 꽃도 차마 못 볼, /(이종문, [고백] )
1342    시조는 정형을 벗어나지 말아야... 댓글:  조회:4387  추천:0  2016-04-13
시조는 정형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이 봉 수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시조는 아무리 내용이 문학적이고 예술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정형을 무시하면 시조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정형을 일탈한 시조는 이미 시조가 아니다. 따라서 자유시로서 평가를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시조작품으로 평가를 받아서는 안 된다.   시조는 3,4조의 율격과 3장 6구 12음보를 기본 정형으로 한다. 이에 더하여 종장 3.5.4.3의 변화를 의무화 하고 있다. 시조시인이나 심사위원, 평론가, 학자는 물론, 등단지망생과 시조를 공부하는 학생들 까지도 이런 시조정형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시조문예지에는 시조정형을 제대로 갖춘 작품을 찾기 어렵다. 수 천 편에 달하는 출품작에서 골라 뽑은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서도 정형과 내용을 제대로 갖춘 시조를 만나기가 어렵다.   혹자는 시조는 융통성이 있는 정형시이므로 어느 정도의 파격은 허용된다고 한다. 한두 자의 가감은 무방하다는 것이다. 물론 음보율이 맞으면 자수율만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음보율은 한국어의 의미마디, 발음 및 호흡이 맞을 때 무리가 없는 것이지 억지로 짜 내어 음보율을 주장하면 정형의 파괴로 이어진다. 한두 자 가감도 어쩌다 부득이한 경우에 예외로 허용되는 것이지 음보마다 무제한 가감하는 것은 이미 시조정형이 아니다.   “누가 시조는 .......3장 6구의 제약에 꼭 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고집스런 한정된 공식의 누각만 짓는다면 시조문학은 현대인으로부터 멀어지고 말 것이다. 시 같은 시조, 시조 같은 시를 우리는 시도할 때이다....” 이런 중견 시조시인의 글이 있다(조옥동, 새시대시조2007겨울호 P218). 시 같은 시조를 시도해야 한다 즉 시조는 정형이 필요 없이 시와 같게 써야 한다는 뜻이다. 시조장르를 해체 하자는 주장이다.   시조정형은 수백 년의 시간을 투입하여 얻어낸 결과이다. 유명 무명의 수많은 문인들이 대를 이어 오면서 갈고 다듬은 결과이다. 가장 좋다고 인정되었기 때문에 정형으로 굳어진 것이다. 마치 물이 과학적인 원리에 의하여 흐름을 이루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폭포의 모양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현대는 개성(個性)의 시대라고 한다. 그렇다고 시조정형을 개성에 따라 각인각색으로 정할 수는 없다. 이는 시조정형의 파괴에 다름 아니다.   시조정형을 파괴하는 일에 앞장서서 큰 역할을 하는 일번 타자는 신춘문예 심사위원, 각종 문예지등단 심사위원, 각종시상 심사위원, 시조평론가 등 시조비평계에 있다. 극소수에 불과한 비평계가 절대다수의 창작계와 독자를 향도(嚮導)한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사람이 시조정형을 무시하고 각양각색의 개인적인 주장으로, 새 지평을 여는 선구자인 양,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거장(巨匠)인 양, 자기도취에 빠져 심사하고, 평론하고, 시상을 함으로서 시조는 나날이 병들어 가고 있다.   시조정형을 더 다듬고 굳히는 일은 안중에도 없고 개인적인 공명심과 이해관계에 빠져 여러 형태의 시조 분열에 일조하고 마침내 시조장르해체의 위기를 앞당기고 있다. 시조가 교과서에서 사라질 날도 멀지 않았다.   특히 언론사 신춘문예는 파괴력이 절대적이다. 화려한 등단(실제로 신춘문예등단은 문예지 등단보다 화려하지도 않고 반짝 인기가 아닌지 의문)을 목표로 하는 수많은 응모자들은 심사위원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을 관건(關鍵)으로 인식하고 심사위원의 구미를 맞추는데 창작에너지를 낭비한다.   이런 환경에서 신춘문예 심사위원이 정형을 파괴한 작품을 당선시키면 수많은 지망생들이 그런 작품만 쓰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독자인 전 국민이 시조를 오해하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다.   왜곡된 당선심사와 각종 시상이 해를 거듭하면서 시조는 회생불능의 상태로 병들어 가고 이대로 방치하면 마침내 한국에는 정형시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1341    고 정몽호시인 "시조논문" 찾아보다... /리임원 시집 댓글:  조회:4500  추천:0  2016-04-13
시조 창작에서 기형적이 조합                                                                                                                     -고 정 몽 호(도문) 당대 남한의 시조 작품들을 보면서 인상 깊은 것은 시조의 심상 조합에서 기형적인 조합들 이 남다른 빛을 뿌리면서 시단을 장식하는 것이다. 시조 창작 사유의 기본 규율은 대립 통일이나 객관과 주관의 관계와 모순 속에서 주관이 주요한 위치에서 주도적인 작용을 하면서 객관세계를 주관화한다. 중국의 고대 시론에서는 '시는 옥수수가 아니라 옥수수로 빚은 술이다'라는 개괄은 곧 바로 객관세계의 주관화를 의 미한 것이다. 오늘도 중국시단에서는 시의 변형률을 중히 여기며 변형의 방법들을 탐구하고 있다. 어떻게 주관화하는가? 고대 희랍 시론에서 개괄한 상사성 원리나 접근성 원리로 주관화할 수 있으나 이 낡은 틀을 벗어나서 기형적인 편계와 조합으로서도 새롭고도 생소한 심상들을 창출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아주 흥미롭고도 바람직한 사유 방식이라 하겠다. 현대시조 동인 문학회 사화집 제1 집 이라는 시조집에 실린 시조들은 기본 상에서 심상화 하였으며 적지 낳은 시조들은 기형적인 조합의 방법을 아주 능숙하게 사용했다. 일부 시조시인들은 한 수의 시 조에 기형조합의 형태인 대소결합, 원근결합, 추상과 구상의 결합 등등의 방법들을 유기적으 로 배합하여 심상의 흐름에 여울소리를 남겼다. 이런 창작 실천들은 시인들이 잠재의식, 연각(聯覺), 착각, 환각, 통감, 자유편상, 절단 등등 의 심리형태의 작용을 충분히 발휘하여 창작 사유의 공간을 넓히고 있다는 것을 존중해 준 다. 기형적인 조합은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남한의 시인들은 기형적인 조합을 위한 조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심미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니 정말 기쁘다. 일부 시인들의 시조를 보면 창작 사유의 경화증에 걸린 감을 준다. 시조도 시적 발견과 새 로운 심상을 전제 조건으로 하는데 어떤 시조들은 새로운 느낌이 없어서 서운하다. 동맥경화증을 방지하고 치료하듯이 창작사유의 경화증을 방지하고 치료하듯이 창작 사유의 경화증을 방지하고 치료했으면 하는 심정을 금할 수 없다. ============================================= 미와 사랑에 대한 추구를 자기 시장착의 목표로 내세우고 30년간 끈질기게 달려온 시인- 리임원, 그의 시집 《바다가 륙지로 되지 않는 까딹은》이 최근 민족출판사에 의해 출간되면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있다. 79수의 시를 담은 시집 《바다가 륙지로 되지 않는 까딹은》은 총 5개 장절로 나뉘였다. 제1부 '가을편지'는 인생의 가을에 림한 시인의 내면의 표출이고. 제2부는 '바다가 륙지로 되지 않는 까딹'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제3부는 '사랑을 찾습니다', 4부는 '페허의 노래', 5부는 '꽃의 이야기'이다.   저자 리임원은 머리말에서 "나에게 있어서 시는 못시 춥고 시리 때 볕을 쪼일수 있고 무더운 삼복철에 서느러운 나무잎 하나의  그늘이 되여주고 아프고 힘들 때 작은 희망이 되여주는 빛이 되듯이 나 또한 나의 시가 타인에게도 그런 작은 감동으로 되여줄수 있을가를 고민한다"며 "항상 내 마음에 시를 지니고 살기를 소원했고 타인도 시의 감미로움으로 삶의 여유를 찾기를 바랐고 타인의 감슴까지도 치유할수 있는 그런 좋은 시를 쓰려고 나름대로 모지름을 써왔다'고 말했다. 바라가 륙지로 되지 않는 까닭은... 바라가 륙지로 되지 않는 까닭은 쉽게 사랑하고 쉽게 리별하고 그리움을 망각해가고있는 바라가 륙지로 되지 않는 까닭은 섬마을 아이가 크레용으로 매일매일 그려가는 빨간 이력이 보석처럼 아름답기때무이다. ... 평론가 최삼룡은 시인 리임원과 그의 시집에 대해 " 리임원시인은 자연을 읽는 자세가 독특하다. 무언의 대상에서 소리를 듣고 거기에서 시재가 과시되고 동서고금의 꽃을 노래했다. 즉 시의 내용과 형식이 모두 꽃처럼 아름답다."며 "그의 시에는 차갑고 어지럽고 매마른 세상에서 사랑을 찾아내고 어렵고 외롭게 살아가는 민초들에게 따뜻함과 아름다움과 기쁨을 선물하려는 따스한 가슴이 살아숨쉬고있다."고 평가했다. 조글로미디어 문야기자  
1340    3章 6句 시조 창작법 (2) 댓글:  조회:4718  추천:0  2016-04-13
우리 민족의 내재율 3장(章) 6구(句) (2)   시조창작법(2) 정완영 ■ 격조(格調) 또는 경(境) ■ 포시법(捕詩法) ■ 생활시조의 갈길 ■ 고시조의 풍도(風度)와 멋 ■ 동시조와 민족 정서 ■ 명시조 감상   ■ 격조(格調) 또는 경(境) 아무리 학문이 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품이 높지 않으면 우선 그 사람은 사람으로서 낙 제다. 시조가 아무리 좋은(?) 뜻을 담았다 하더라도 격조가 높지 않으면 낙제다. 난(蘭)있는 방이든가, 마음귀도 밝아온다 얼마를 닦았기에 눈빛마저 심심한고 흰 장지 구만리 바깥 손 내밀 듯 뵈인다. 김상옥 선생의 작품 {난있는 방}이다. 밝고 맑고 청정하기까지한 시다. 3장 단수에 갈무려져 있는 간결한 시상을 마치 한 장 백지장을 떠올리듯 건져내고 있다. [흰장지 구만리 바깥 손 내밀 듯] 내뵈는, 정말 눈빛까지 심심한 작품이다. 이 무욕, 이 허심, 시가 여기에 이르르면 하나의 선(禪)의 경지에 들었다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시의 품격, 다시 말해서 시조의 격 조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 작품이다. 다음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경(境)]의 이야기다. 자유시와 시조의 상이점이 무엇이냐고 묻 는다면 자유시에 있어서 [의(意)]가 시조에 있어서는 [지(志)]요, 자유시에 있어서 [논(論)]이, 시조에 있어서는 [관(觀)]이라는 이야기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유시에 있어서, [유(流)] 는 시조에 있어서는 [풍(風)]이라고나 할까. 이 좁은 지면의 논고에서 일일이 작품까지를 들 어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점에 있어서 자유시가 시조에서 배워갈 것이 있을 지언 정 시조가 오늘의 자유시 쪽을 아무것 하나 의식할 것은 없다는 이야기다.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탄주할 때나 시조창(時調唱)을 할 때도 그 [경(境)]이라는 것이 있다. 가사 {동산일출(東山日出)}이라든지, {평사낙애(平沙落雁)}이라든지, {주마축지(走馬蹴地)}라든지, {경조탁사(驚鳥 蛇)}라든지 우리 시조의 종장에도 이런 [경(境)]이라는 것이 있고 또 한 수 한 수에는 수마다 시정신의 뿌리가 그 경(境)이라는 것에 가 닿아야 하는 것이다. 즉 희(喜)이거나, 비(悲)거나, 애(哀)거나, 낙(樂)이거나, 환(歡), 적(寂), 고(孤), 멸(滅), 근 (近), 원(遠), 직(直), 우(迂), 묘(妙), 현(玄), 등 무어 동양정신의 뿌리가 어느 경(境)에 가 닿 긴 닿아야 하는 것이다. 너무 전문적인 이야기가 되었지만, 아무튼 시조란 자수만 맞으면 되 는 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 둔다.   ■ 포시법(捕詩法) 짐승이나 어별(魚鼈)을 잡는데도 그 포획법이 따로 있다. 가사 호랑이나 곰이나 멧돼지를 잡 는데는 이놈이 잘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앉았다가 무심코 어슬렁이며 나타난 놈에게 일발필 중(一發必中)의 포화를 쏘아 적중시켜야 된다. 그렇지 않고 섣불리 맞히게 되면 짐승을 잡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이 해를 입게 된다. 쩡 터질 듯 팽창한 대낮 고비의 정적(靜寂) 읽던 책도 덮고 무거운 눈을 드니 석류꽃 뚝 떨어지며 어데선가 낮닭소리. {오(午)} 이호우 선생의 작품이다. [석류꽃 뚝 떨어지며 어데선가 낮닭소리] 이 종장이야말로 일발필 중으로 적중한 종장이다. 이 시에는 이 종장말고는 다시 다른 말이 있을 수가 없다. 종장뿐 아니라 시제 자체도 {오(午)}라는 단자를 놓아 이미 적중하고 있다. 단발로 큰 짐승(詩材)을 쓰러뜨린 통렬감이 뒤따르는 작품이다. 포수로 친다면 과연 명포수의 솜씨이다. 바늘못 하나로 나비나 잠자리의 등을 찔러 꼼짝없이 표본실의 함 속에 꽂아 놓듯이, 시인에 겐 은바늘(的中語) 한 개만 가지고도 숨통을 찔러 지구의 자전까지를 멎게 하는 재능이 있 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종장에는 주마축지(走馬蹴地), 달리는 말이 뒷굽으 로 땅을 차듯 하는 경개(景槪)도 있는 것이다. 궂은 일들은 다 물알로 흘러지이다 강가에서 빌어본 사람이면 이 좋은 봄날 휘드린 수양버들을 그냥 보아 버릴까. 아직도 손끝에는 때가 남아 부끄러운 봄날이 아픈, 내 마음 복판을 뻗어 떨리는 가장가지를 볕살 속에 내 놓아. 이길 수가 없다 이길 수가 없다 오로지 졸음에는 이길 수가 없다 종일을 수양이 뇌어 강은 좋이 빛나네. {수양 散調} 고려청자·이조백자만 국보가 아니라, 이런 시품이야말로 국보급이다. 박재삼 시인은 총포로 사나운 짐승을 잡는 포수가 아니라 여울목에 그물이나 통살을 쳐 놓고 제발로 걸어 들어오 는(?) 고기를 건져올리는 어부 같은 시인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두어야할 일은 그물이 나 통살을 아무 물에나 친다고 고기가 들어와 주는 것이 아니다. 물고기의 통로를 알아서 그물이나 통살을 쳐야 고기가 걸려드는 것이다. 이 시인은 물고기가 흐르는 목, 다시 말해서 인정의 흐름, 천지의 기미(幾微), 무엇 그런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차리는, 말하자면 모든 사물과 통화를 가장 잘하는 달인(達人)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별로 힘을 안들이고도(?) 고기를 잘 잡아내는 달통한 어부라고나 할까. 그러기 에 그의 시에는 억지를 부린 흔적이라고는 없다. 자수를 맞추기 위해서 고심한 흔적이 눈곱 만큼도 없을뿐 아니라, 오히려 그의 가락(내재율)에 자주가 절로 따라온다. 그대 그리움이 고요히 젖는 이 밤 한결 외로움도 보배양 오붓하고 실실이 푸는 그 사연 장지 밖에 듣는다. {비} 이영도 선생의 살뜰한 작품이다. 그리운 사람을 못내 그리워하는 곡진한 심정이 잘 담겨져 있다 언단의장(言短意長), 이 짧디짧은 단수 하나로 하여 우리들은 몸도 마음도 온통 촉촉하 게 젖어드는 것이다. 무엇인가 간곡히 타이르는 듯한 이 정의(情誼)로운 저음은, 마치 봄날 어린 소녀가 신발을 벗어들고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뒤쫓아가 나비 날개를 잡아내듯 하 는 포시법(捕詩法)을 쓰고 있다 묘품(妙品)이다. 심안(心眼)을 열고 입실하여 보라. 천지간에 시는 얼마든지 편재해 있는 것이다. ■ 생활시조의 갈길 자수만 맞는다고 다 시조가 되는 것이 아니라 했는데, 그러면 시조가 되고 안되는 사이는 무엇인가? 피 살아 도는 정기 신열의 불꽃 바쳐 어김없는 시간의 맥이 뛰는 너울로 일어라 잠깨는 동녘 예지의 햇살처럼. {깃발} 내가 맡아보는 어느 월간지에 투고해 온 독자의 작품이다. 종장의 끝 머리가 조금 어긋나긴 했지만 자수는 거의 맞아 있다. 그런데 시조가 왜 안 돼 있는가? 첫째로 이 시는 시조로서 의 내재율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글자 수를 토막내어 시조라는 틀에 구겨박고 있다. 구슬을 실에 꿰어 사름사름 사려담은 것이 아니라, 생나무 가지를 구겨박듯 하는 무리를 범 하고 있다. 바다가 무어냐고 아이들이 하도 묻기에 군산가는 길에 먼 수평을 가리키며 돛배와 갈매기와 아! 그 다음 아무 말도 못했다. {바다}라는 어느 독자의 시다. 앞의 작품에 비해 이 시는 얼마나 여유로운가. 앞의 작품이 배배 꾀어있는데 비해 뒤의 작품은 얼마나 넉넉하게 사려 담겨져 있는가. 앞의 작품은 시조라는 틀에 갇혀 숨도 제대로 못쉬고 있는데 비해 뒤의 작품은 시조라는 우 주 속에서 자적(自適)하게 소요하고 있다. 누가 시조는 틀이 좁아 답답하다 했는가? 구두를 새로 지어 딸에게 신겨주고 저만치 가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생애 사무치던 일도 저리 쉽게 가것네. {어느 날} 김상옥 선생의 시다. 시제(詩題)도 그저 {어느 날}이다. 다 자란 딸자식에게 구두 한 켤레를 지어 신겨놓고 저만치 걸어 가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감회에 잠기는 어버이의 심정을 아무 구김살없이 노래한 작품이다. 자식의 자라나는 그늘에 묻혀 절로 늙어가는 어버이의 생애, 자식은 어쩌면 나를 비쳐보는 거울이 된다. 이때 이 시인의 가슴은 아마 모르긴 몰라도 텅 빈 항아리가 되어 있었을 것이 다. {한 생애 사무치던 일도 저리 쉽게 가것네} 이 종장 뒤에 깔린 말(여운)은 그 얼마인가? 언 외언(言外言), 그래서 시란 언단의장(言短意長)이다. 구정물에 호박씨가 모두 떠오르듯 그렇 게 말들이 의표(意表)에 다 떠올라야 하는가, 수다를 떨어야 하는가. 아이는 글을 읽고 나는 수(繡)를 놓고 심지 돋우고 이마를 맞대이면 어둠도 고운 애정에 삼가는 듯 둘렸다. {단란(團欒)} 이영도 선생의 작품이다. 이 시인의 특기(詩法)인, 한 점 군살을 붙이기를 용납않는 깔끔하 게 깎아 놓은 밤 같은 작품이다. 얼마나 진솔한 작품인가. 시가 왜 꼭 난해해야 하는가. 왜 꼭 많은 어휘가 동원되고 윽박질 러야 하는가. 시조는 민족시요, 국민 시가다. 봄비에 옷이 젖듯, 그렇게 읽는 이의 가슴에 타 이르듯 젖어들게만 하면 된다. 말은 짧게 하고 뜻은 길게 하면 되는 것이다. 사흘 와 계시다가 말 없이 돌아가시는 아버님 모시두루막 빛 바랜 흰 자락이 웬일로 제 가슴 속에 눈물로만 스밉니까. 어스름 짙어오는 아버님 여일(餘日) 위에 꽃으로 비춰드릴 제 마음 없사오매 생각은 무지개 되어 고향길을 덮습니다. 손 내밀면 잡혀질듯한 어릴제 시절이온데 할아버님 닮아가는 아버님의 모습 뒤에 저 또한 그 날 그 때의 아버님을 닮습니다. {父子像} 졸시다. 제 시를 제가 무어라 이야기 하기란 쑥스럽다. 다만 이 시도 생활시에 드는 것이라 여기에 실어 독자 여러분에게 참고로 적어본다. 이상 몇 편의 작품을 보더라도 우리 생활주변에 얼마나 많은 시조의 소재들이 산재해 있는 가를 알 수 있다. 아직은 시조 인구의 연령층이 얕아(20-30대), 작품에서도 몸부림이 보이지 만 장차의 날엔 온 계층의 국민들이 참여하여 백화가 만발한 날이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 는다.   ■ 고시조의 풍도(風度)와 멋 한 시인이 어느 노시인에게 물어 보았다. "옛날에는 이론이나 평론이니 하는 것이 없었어도 곧잘 불후의 명작들이 나왔는데 요즘은 그 요란스런 평론이니 무슨 주의이니 하는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그렇지 못한 까닭이 무엇입니까"하고. 그랬더니 노시인 왈 "옛날 시객이나 문객들은 붓만 들면 붓 끝에 그 [신명]이라는 게 따라 왔지만 지금 시인들은 그 [신명]이라는 것에 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더란다. 옳은 말씀이다. 시의 기능공은 많아도 시의 장인(匠人)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양하여 잠 못이뤄 하노라. 고려 충혜왕 때 병조판서 이조연(李兆年)의 시다. 지금으로부터 6, 7백년을 격한 그 시절에 도 벌써 사람의 정한(情恨)은 배꽃 핀 삼경, 이지춘심(一枝春心)에 달빛을 앉힐 줄 알았던 것이다. 물론 지금에 와서 [월백]이니, [은한]이니, [일지춘심]이니를 쓰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작품 속에 숨어있는 시정신의 멋, 정과 한이 한 자락 강물만한 것을 흘리고 있다는 것이다.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날 저물거든 꽃에서나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청구영언}에 실려 있는 실명(失名)씨의 작품이다. 아니 애시당초 이름 3자도 남기기가 싫었 던 무명씨의 작품이다. 이 허무, 이 낙막(落寞), 페이소스라면 이만한 페이소스가 또 어디 있 겠는가? 우리는 이 고 고시조들에서 그 외형적인 것을 따오자는 것이 아니라 그 여유, 그 풍도의 정신을 배우자는 것이다 시에서건 생활에서건 모두가 왜소일로(矮小一路)를 치달아 소위 그 장자지풍(長者之風)이라 는, 동양 선비의 [悠長]이라는 것을 보지 못한 날이 올까봐 두렵다. 동양화가의 멋이 여백에 있고, 거문고나 가야금의 율조가 단속(斷續)에 있듯이, 우리 시조의 참 멋이란 장(章)과 장 (章) 사이의 여운에 있는 것인데 요즘 유행하는 그 디스코 춤을 추듯 말로만 빽빽히 메워버 린다면 하늘도 감아 넘기던 승무의 소매자락 같은 것은 어디가서 찾아볼 것인가 말이다. 사람이 몇 생(生)이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劫)이나 전화(轉化)해야 금강(金剛)의 물이 되나! 금강의 물이 되나! 샘도 강도 바다도 말고, 옥류(玉流) 수렴(水簾) 진주담(眞珠潭)과 만폭동(萬瀑洞) 다 고만두 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안개 풀 끝에 이슬 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連珠八 潭) 함께 흘러 구룡연(九龍淵) 천척절애(千尺絶崖)에 한번 굴러 보느냐. 조운의 {구룡폭포(九龍瀑布)}라는 사설시조이다. 진실로 금강에 서서 구룡폭포의 실경을 본 다한들 어떻게 이렇게 장관이기야 하겠는가. 백문이불여일견(白聞而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다지만 시에 있어서는 천만의 말씀이다. 이 환희, 이 비애, 이 목숨의 통한을 보라. 어느 화인(畵人)이 있어 이 설움을 그리겠는가? 어느 악인(樂人)이 있어 이 지애를 탄주하겠는가? 이 거장이 간후 시조를 한다는 시인이 이제 2 백으로 헤아린다. 사설시조를 쓴다는 시인도 적지 아니 있긴 있다. 그러나 그러나다. 복판을 울려야 변죽이 울지 변죽만을 더듬어서야 복판이 울겠는가? 아무 말이나 구겨박는다고 사설 시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구름은 월출봉에 끊이락 또 이으락 그저 한양으로 나올제 바라봐도 조수(潮水)는 오르락 내리락 영산강구(榮山江口)로구나. 역시 {나올제 바라봐도}라는 조운의 작품이다. [조수만 오르락 내리락 영산강구로나] 한 짐 져다 부려놓은 듯 이에 더 후련하겠는가. 어떻게 살면 어떻며, 어떻게 죽으면 어떠랴 나고 살고 죽음이 또한 무엇인들 무엇하랴 대하(大河)는 소리를 거두고 흐를대로 흐르네. 이호우의 {하(河)}라는 단수다. 예까지는 왔다. 장차 누가 있어 이 풍도, 장류를 이어 나갈 것인가?   ■ 동시조와 민족 정서 언제인가 서울 도심의 중·고등학생들이 그려낸 잠자리 날개가 앞 뒤 두 줄로 4개나 달려 있고, 닭다리도 역시 앞 뒤 두 개씩 4개가 나 있는 것을 신문 보도로 읽은 적이 있었다. 그 냥 웃어넘길 수만 없는 이런 이야기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것인가.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부터 피아노 교습이나 시킨다고 고갈되어가는 민족정서가 치유될 수 있을 것인 가. 국적있는 교육을 아무리 입으로만 떠들어봐도 민족 정서가 고갈된 곳에서는 참된 한국인상 은 정립되지 않는다. 필자는 하나에도, 둘에도 민족 정서의 함양에는 초등학교 학생 때부터 동시조 교육을 시켜야 하리라고 본다. 까치가 깍 깍 울어야 아침 햇살이 몰려들고 꽃가지를 흔들어야 하늘빛이 살아나듯이 엄마가 빨래를 헹궈야 개울물이 환히 열린다. {꽃가지를 흔들 듯이} 어린 시절을 시골 산마을에서 자란 필자는 엄마가 윗 냇물에 앉아 배꽃 같은 흰 빨래를 헹 궈야 비로소 도랑물이 환히 열리고 봄이 오는 줄만 알았었다. 생각해보라. 엄마가 빨래로 헹구지 않은 도랑물이 어찌해 열릴 것인가. 겨우내 꽁꽁 얼어 붙 었던 도랑물은 어머니가 사랑의 손길로 풀어냈던 것이었다. 동네서 젤 작은 집 분이네 오막살이 동네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밤 사이 활짝 펴올라 대궐보다 덩그렇다. {분이네 살구나무} 사람은 무얼 먹고 사는가고 묻는다면 그 누구나 밥을 먹고 산다고 대답할 수밖엔 없다. 물론 사람도 몸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먹이를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나 사 람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밥보다 더한 것, 꿈을 먹고 사는 동물(?)인지도 모를 노릇이다. 그래서 옛부터 사람은 쌀독 속의 쌀이 떨어져서 죽는 것이 아니라 가슴 속의 꿈(소망)이 떨 어져서 죽는다고 했다. 동네서 제일 작은 집 분이네 오막살이에 하늘은 제일 큰 살구나무의 선물을 심어 주었다. 밤 사이 내린 가는(細)비에 젖어 활짝 꽃망울을 터뜨린 살구나무의 분홍빛 꽃대궐, 사람이 지은 어느 대궐이 이에서 더 높고 더 현란하겠는가. 벌·나비의 신들린 마지굿 울리는 소리 가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분이는 이 조그만 대궐에서 태어나 온누리보다 더 큰 꿈을, 한 봄뿐 아니라 일생동 안 누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밥은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다음 끼니 때가 되면 배고파 오지 만, 어린 시절 먹은 흐뭇한 민족정서는 일생을 두고 두고 생각할수록 배불러 오는 것이다. 달아논 태극기 보고 아침해가 인사하고 마을길 마을길들이 서로 만나 인사하고 산새알 물새알 같은 아이들이 모입니다. 잔솔밭 비둘기처럼 종소리가 날아가고 여울물 고기떼처럼 풍금소리 흘러가고 푸른 산 메아리 같은 아이들이 뛰놉니다. {산골학교} 산새알 물새알 같은 아이들도 없고, 푸른 산 메아리 같은 뛰어노는 아이들도 없는 서울의 콩나물 교실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한국의 고향의식인 민족 정서를 이식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어머니들, 우리 아버지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모두 시조짓기운동에 동참하는 날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동시조를 쓰는 아동문학 부문의 시인이 아직은 별반 없고, 또 필자의 수중에 그 자료가 없 어, 졸시로만 예문을 든 것이 미안하다.   ■ 명시조 감상 찌르릉 벌목소리 끊어진 지 오래인데 굽은 가지 끝에 바람이 앉아 운다 구름장 벌어진 사이로 달이 반만 보이고 낮으로 뿌린 눈이 삼고 골로 내려덮어 고목도 형형(炯炯)하여 뼈로 아림일러니 풍지에 바람이 새여 옷깃 자로 여민다. 뒷산 모롱이로 바람이 비도는다 흰 눈이 내려덮여 밤도 여기 못 오거니 바람은 무엇을 찾아 저리 부르짖는냐. {한야보(寒夜譜)} 하보(何步) 장응두(張應斗)선생의 회심의 역작이다. 하보는 우리 시조단의 거장이었는데 불 운한 생애를 살고 간 때문인지 업적만큼 문명이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다. 이 {한야보} 한 수만 가지고라도 그는 재평가 받아야할 시인이다. 필자가 졸고에서 전술한 바 있거니와 만 약 판소리로 친다면 이 작품이야말로 송만갑(宋萬甲)의 그 벌목형형(伐木炯炯)한 우람한 목 소리를 듣는 듯한 장중한 목소리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살구나무 허리를 타고 살구나무 혼령이 나와 채선(彩扇)을 펼쳐들고 신명나는 굿을 한다 자줏빛 진분홍을 돌아, 또 휘어잡는 연분홍! 봄을 누룩 딛고 술을 빚는 손이 있다 헝클린 가지마다 게워넘친 저 화사한 발효 천지를 뒤덮는 큰 잔치가 하마 가까워 오나부다. {축제} 김상옥 선생의 작품이다. 화사한 봄날 가지가 휘어지게 만발한 살구꽃을 보며 정말 미치게 신명이 잡힌 작품이다. [자줏빛 진분홍을 돌아 또 휘어잡는 연분홍] 그야말로 미치게 신명나 게 짚고 넘어가는 굿거리 장단을 보는 느낌이다. 가야금 산조에다 비긴다면 진양조도 아니 요, 중몰이도 아니요, 잦은 몰이도 아니요 휘몰이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한빛 황토재 바라 종일 그대 기다리다 타는 내 얼굴 여울 아래 가라앉는 가야금 저무는 가락, 그도 떨고 있고나. 몸으로 사내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부연 들기름불이 지지지지지지 앓고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만(萬) 갈래 여울 바닥에는 잠 안자는 조약돌을 날 새면 하나 건져 햇볕에 비쳐 주리라 가다간 볼에도 대어 눈물 적셔 주리라. {내 사랑은} 박재삼 선생의 작품이다. 누에가 명주실을 뽑듯 나긋나긋 뽑아낸 시상(詩想), 가늘고 흐느끼 는 듯하다. 또한 질기기가 명주실오라기 같다. 천의무봉이란 이런 솜씨를 두고 이른 말일까. 송만갑의 창법이 우렁우렁하고 큰 도끼로 고목을 찍는 듯하여 벌목형형이라 했다면, 이동백 (李東伯)의 창법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며, 마치 귀신이 흐느끼는 듯하여 귀곡성(鬼哭聲)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두둥실 창파에 뜨니 하자할 것 없는 목숨 조국도 유품만 같고, 인생은 꿈이다마는 지울 수 없는 사랑아 먼 돛배야 갈매기야 {창파에 떠서} 격정 6백리 달래도 설레는 섬아 남해 쪽빛 다 마시고 초록도 울먹이는데 제 마음 이기지 못해 나도 너를 찾아왔네. {섬} 서귀포 귤밭에서 술래 잡던 밝은 바람 모슬포 돌아온 길엔 장다리꽃 흩어 놓고 님 오실 바다를 향해 시시덕여 갑니다. 절도엔 어둠도 감청 향수도 물이 든다 한 가락 젓대를 불어 일만파도 다 눕히면 한라도 구름을 열고 달을 띄워 이더라. {한라의 달} 졸시 {제주 기행시초}(10수) 중에서 4수만을 골라 싣는다. 시조가 꼭 무슨 의식의 심층이란 늪(?)에만 빠져 허우적거려야 된다는 법은 없다. 조금은 [가(歌)]이어도 좋다는 이야기다. 30년 전의 작품인데 기행시가 가지는 시조의 멋, 뭐 그런 것을 생각하며 써 본 작품이다. 감상은 독자 여러분에게 맡긴다.    
1339    시조 창작법 1 댓글:  조회:5358  추천:0  2016-04-13
우리 민족의 내재율 3장(章) 6구(句) (1) ☆ 시조창작법(1) 정완영 ■ 시조작법 ■ 생활과 운(韻) ■ 민족시란 무엇인가 ■ 자수고(字數考) ■ 단수와 연작   ■ 시조 작법 오랜 세월동안 망각의 바다 속에 버려져 있던 보물들의 인양업이 지금 우리 정부에 의해 서 둘러지고 있는 걸로 안다. 가령 각 지방의 민속놀이의 부흥, 또는 무슨 연희자(演戱者)들의 인간문화재 지정, 예컨대 근자에 발굴된 안동지방의 차전(車戰)놀이라든지, 봉산탈춤, 하회 (河回)탈춤이라든지 심지어 어느 지방의 모내기 노래까지 모두 자리 있을 때마다 연희되고 있고, 우리 국악, 우리 판소리의 계승문제, 조그만 기물들의 장인(匠人)에 이르기까지 소멸되 어가는 민족적인 정신문화의 향수에 대한 배려가 오늘보다 더 고양되어간 적은 일찍이 없었 다. 하물며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민족 역사의 애환이 스며있다고 하여 대중가요 에까지 훈장이 주어지는 오늘이 아니었던가. 한데 여기 아주 국보급 중에서도 국보급인 유산이 그 바다의 심저에 가라앉아 있는 채 인양 자(當路者)의 시선이 닿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 정신의 본향, 우리 정성의 본류인 民族詩歌 [時調]다. 다시 말해 3章 6句에 갈무리되어 있는 민족혼의 내재율 3·4·3·4(초장), 3·4·3·4(중장), 3·5·4·3(종장)의 시조인 것이다. 이것은 중대한 오 류이며 시행착오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이 3章 6句에는 우리 민족의 온갖 사고(思考), 온갖 행위, 온갖 습속까지가 다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좀 비약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필자의 나라사랑의 안목으로 바라볼라치 면 춘하추동 계절의 행이, 할머님의 물렛잣던 손길, 늙은 농부의 도리깨타작, 우리 어머님들 의 다듬이 소리, 거 어깨춤도 절로 흥겹던 농악에 이르기까지 가만히 새겨 보고 새겨 들으 면 3章 6句 아닌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이며 심지어 구부러진 고향길, 동구밖의 느티나 무, 유연히 앉아있는 한국 산의 능선들, 부연끝 풍경소리, 아차(亞字)창의 창살, 어느 것 하 나 3章 6句의 시조가락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흐름(流)이 있고, 굽이(曲)가 있고, 마디(節)가 있고, 풀림(解)이 있는 우리 시조는 그 가형 (歌形)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정신의 대맥(大脈)이 절로 흘러들어 필연적으 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하기 때문에 필자는 어떠어떠한 민속놀이, 어떠어떠한 고기물 (古器物)에 앞서 진실로 민족정신의 보기(寶器)인 우리 시조를 먼저 인양해야 되리라고 믿 는다. 우리 문단의 인구가 지금 1천 6백(이 책 발행시)을 헤아린다고 한다. 다른 이는 그만두고라 도 글을 쓴다는 우리 문인들 중에서 시조의 틀을 이해하는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 것 인가?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문인뿐 아니라 전체 국민이 자기 나라 국시(國詩)인 단가(短 歌) 배구(俳句)를 모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저네들은 촌부(村夫)이건, 공인(工人)이건, 회사원이건, 공무원이건 할 것없이 이 국민시가로 하여 국민 정서의 순화를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온 국내에 작가(作歌)정신이 미만 해 있는 것이다. 요즘 또 듣기로는 자기네 국시를 서구에까지 내보내어 그곳에서까지 [短歌 會]니, [俳句會]니가 성행되고 있다는 소문이다. 우리들은 교과서에서 시조를 배운다는 학생 들도, 이를 가르친다는 선생들도 건성으로 넘기고 있다. 그나 그뿐인가, 문인들 중에서는 간혹 시조무용론까지를 들고나오는 몰지각한 사람이 있으 니, 심히 민망하고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유시 중에서도 시문학사에 남을 만한 작품 은 거의가 시조적인 내재율이 흐르고 있는 사실을 이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 인의 맥박 속에는 본질적으로 시조적인 내재율이 흐르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문화재도 보호해야 한다. 연희도 계승받아야 하고 공장(工匠)도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더 시급한 일은 온 국민이 우리 국민문학·민족시를 모두 배우고 익혀 우리 정신의 대종(大 宗)을 이어받고, 본류를 밝히어 정서를 순화하고, 인격을 도야하여 흐려지고 거칠어지려는 풍조를 시조짓기운동으로 하여 바로 잡아야 하리라 믿는다. 사실 우리 구국의 성웅 이순신 장군도 {한산섬 무루} 시 한 수로 하여 구국 충정이 더욱 빛났고, 절세가인 황진이도 {동짓 달 기나긴 밤} 한 수로 하여 오늘날까지 그 향기가 전해 내려오지 않았던가. 물량에만 쏠리 려는 우리들의 메마른 심전(心田)에다 물을 대주고 윤기를 돌리는 전국민 시조짓기운동은 이제 봉화를 올렸다.   ■ 생활과 운(韻)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박재삼 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4가지 일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관혼상제 (冠婚喪祭)의 절차이다. 그 4가지 절차 중에서 혼례(婚禮)·상례(喪禮)·제례(祭禮)는 지금도 형식상 살아았지만 관례(冠禮)만은 이미 희미한 기억 속에 매몰되어가고 없다. 하지만 예 (禮)라는 것이 사라지기야 이미 오래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제례이야기다. 이다. 연전 어느 사회단체에서 예술인의 성장과정을 조사한 통계보고서에 의하면 제삿날 종가(宗家)집에서 지내는 제례는 감수성이 강한 어린 소년 소녀의 가슴 속에 일생동안 지워지지 않는 조그만 감동을 심어주었다는 것이었다. 필 자도 어린 시절 할아버님 아버님의 손길에 이끌려 마치 석류꽃 같은 초롱불을 밝혀들고 큰 댁으로 참배차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가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속에 조그만 희열의 잔물결이 파문짓곤 하는 것이다. 1년이면 열번도 넘어드는 대소 제례는 철따라 꽃 피고 잎 지는 시절의 사이사이 우리들 한국에 생을 받은 소년들의 향수에 사무치는 축제요. 카니발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우리 생활, 우리 정신의 가장 깊은 골을 밝혀주던 하나의 심등(心燈)이요, 하나의 운사(韻事:운치 있는 일)인 것이다. 시조 이야기를 하면서 제례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그 제 례의 운치가 바로 시조의 운치와 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조는 바로 제례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그 운치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 가 우리 생활주변에서의 그 운사들은 등불마저 희미하게 빛바래져가고 말았다. 제례뿐만 아 니라 운사란 운사는 하루가 다르게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다. 행사는 있어도 운사는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생활, 우리 주변에서 운치를 되찾고 그것을 느끼는 일, 그것이 우리 고유의 정서를 되찾는 것이며 시조 캠페인의 기본이요 근간이 되어야한다. 아직 안동(安東) 차전(車戰)놀이도 있고, 봉산탈춤도 있고, 하회탈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무슨 행사 날에나 선보이는, 그야말로 하나의 행사이지, 서민대중 속에 뿌리박은 민족 애환 의 운사는 못되는 것이다. 차라리 대보름날 부럼을 깨물고 달불을 놓던 일, 3월 삼짇날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깔던 일, 5 월 단오절 그네를 뛰고 궁궁이물에 머리를 감던 일, 6월 유두날 동류를 찾아 머리를 헹구던 일, 7월 백중날 물꼬를 찾아가서 겨릅에 꽂아둔 인절미를 뽑아먹던 일…같은 것들이 우리 정신의 피가 되고 살이 되며 그 운치가 시조의 훌륭한 소재가 되는 것이다. 생활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면 문화는 사멸하고, 정치는 경직하고, 역사는 정체되는 법이다. 진실로 작은 듯하면서도 아주 막중한 일이 생활 속에 운을 불어 넣는 일이다. 시조를 국민 문학·민족문학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것이 선행돼야 한다. 필자는 가끔 이런 일을 생각해 보며 아리송해질 때가 있다. 가령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 늘이란 현실과, 우리 선인들이 살고 간 그 시대의 사화상과를 비교해 볼 때, 과연 문명이 극 도로 발달한 오늘이란 세월이 반드시 더 행복하다 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지(人智)나 문명이 좀 덜 깨인 채라도 훈훈한 인정과 정감에 젖으며 살고 간 옛 사람들이 오히려 더 행 복을 누리고 갔다 할 것인지? 사람에 따라 그 척도하는 바가 다르기야 하겠지만 필자는 아무래도 물질문명이 갖다준 편리 라는 이기를 얻기 위해서 인간 본연의 재화인 덕성마저도 팔아넘기는 오늘보다는 차라리 자 연과 인성의 본향에서 조금은 배고프고 조금은 등이 시려도 서로들 애휼(愛恤)하며 살아가 던 그날이 훨씬 더 소망스러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 시조만이 가지고 있는 정신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시조짓기운동은 식어가는 민족정서에 군불을 지피고 굳어가는 인간덕성에 모닥불 을 놓아 사람마다의 가슴에 나라사랑, 겨레사랑의 더운 숨결을 회복하고 집집마다 마을마다 인정있는 꽃밭을 가꾸자는데 큰 뜻이 있는 것이다.   ■ 민족시란 무엇인가 옛부터 민족이 있는 곳에 그 민족 특유의 시가 있어 왔다. 멀리 태서(泰西)의 이야기는 그만 두고라도 우리 한문문화권인 동양 3국을 살펴보면 중국에 5언이니 7언이니 하는 한시가 있 고, 일본에 단가(短歌)니 배구(俳句)니 하는 자기네 나름의 고유시가 있는가하면, 우리나라에 는 한국 특유의 뛰어난 가형(歌形) 3章 6句의 시조가 있어 왔다. 그런데 이 제각기의 시가 (詩歌)들이 하나같이 우연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중국의 한시가 수천년 동안 풍우에 씻기어 단단하게 광택이 나는 큰 산 큰 계곡의 반석 같 은 것으로서, 중국인이란 대륙의 끈질기고 요지부동한 민족성과 그 역사의 장구성을 드러내 는 것이라면, 단가(5, 7, 5, 7, 7)니 俳句(5, 7, 5)는 그 자수의 긴축성으로 보나, 그 노래솜씨 의 삽상한 맛으로 보나 일호의 군더기를 용납하지 않는 그네들의 성품이며 식성까지 여실히 나타내는 것으로써, 어떻게 보면 그네들의 너무나도 빽빽한 여유롭지 못함까지가 엿보이기 도 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우리 시조는 떠 어떤 노래인가? 우리 민족시인 시조는 초·중·종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초장이 3, 4, 3, 4, 중장도 3, 4, 3, 4, 인데 종장만이 유독 3, 5, 4, 3으로 자수의 변용 을 가져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시의 5언이나 7언, 일본의 단가·배구가 모두 자수의 배 열에 있어서 한 자의 가감이나 어떠한 변용도 용납이 안되는데 반해, 우리 시조는 초장, 중 장에 있어서도 자수의 가감(다음에 상술하겠음)이 가능할뿐 아니라, 종장에 와서는 물굽이가 한 바퀴 감았다가 다시 풀어져 흐르는 듯하는 변용(3, 5, 4, 3)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나라들의 시가가 일행직류(一行直流)인데 반해 유독 우리 시조만이 직류에다 일곡을 더 보태어 마치 여름날의 합죽선(合竹扇)처럼 접었다 펴는 시원함을 가져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여기에 그 연유한 바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나이가 든 사람이면 누구나가 다 알겠거니와 옛날 밤을 새워가면서 잣던 할머니의 물레질, 한 번 뽑고(초장), 두 번 뽑고(중장), 세 번째는 어깨너머로 휘끈 실을 뽑아 넘겨 두루룩 꼬 투마리에 힘껏 감아주던(종장)것, 이것이 바로 다름아닌 초·중·종장의 3장으로 된 우리 시 조의 내재율이다. 이만하면 초장·중장이 모두 3, 4, 3, 4인데 왜 하필이면 종장만이 3, 5, 4, 3인가. 그 연유를 알고도 남을 것이다. 이런 시조적인 3장의 내재율은 비단 물레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 리 생활 백반에 걸쳐 편재해 있는 것이다. 설, 다음날부터 대보름까지의 마을을 누비던 걸립(乞粒)놀이(농악)의 자진마치에도 숨어 있 고, 오뉴월 보리타작마당, 도리깨질에도 숨어 있고, 우리 어머니 우리 누님들의 다듬이 장단 에도 숨어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든 습속, 모든 행동거지에도, 희비애락에도 단조로움이 아니라 가다가는 어김없이 감아 넘기는 승무의 소매자락 같은 굴곡이 숨어 있다 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 하나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우리 국학자들 중에서는 더러 우리 시 조의 3장을 견강부회로 한시의 기(起), 승(承), 전(轉), 결(結)에다 억지로 떼어다붙여, 초장 이 기(起)요, 중장이 승(承)이요, 종장이 전결(轉結)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한심 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본의 학자들이 자기 나라 시가를 아직 그 누구도 한시와 결부하여 이야기한 논거를 찾아 보지 못했는데, 하필 우리 학자들이 우리 시조를 한시와 관계지으려고 하는 뜻은 무엇인가? 이것도 항용 말하는 사대주의사상에서 온 풍조라면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또 요즘 시조를 쓰는 시인들 중에는 시조가 이미 창(唱)에서 떠난 지가 오래라고 한다. 그러나 시조창이 시조시 발상의 도출에 원용된다는 것은 하나의 철학(?)인 것이다. 제각기 의 민족정서의 필연적인 귀결이라면, 우리 시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판소리, 우리의 시조창 도 우리 민족 수천년의 조용하고 은은한 내부의 흐름의 소리겠기에 말이다. 하나에도 둘에도 시조에의 용념(用念)은 3, 5, 4, 3인 종장에 있다는 것을 말해 두고, 이제 다음부터는 자수고(字數考)로 넘어가기로 한다.   ■ 자수고(字數考) 앞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시조는 우리 고유의 정형시로서 우리 민족의 모든 내재율이 담겨 진 그릇이다. 혹자는 지금같이 문물과 사고가 복잡다단하고 자유분방한 현대에 있어서 정형 속에 인간의 사유를 끌어담기에는 너무 부자연스럽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실은 우리가 반만 년이란 역사를 살아오면서 깎고, 갈고, 다듬고, 간추려온 틀인 까닭에 사람이 길을 걷다가 마침내는 절로 발걸음이 제 집으로 옮겨지듯이, 우리 모두의 귀결점인 시조로 들어가기란 결코 부자유스럽거나 어렵거나 한 일이 아니다. 그나 그뿐인가. 우리 시조는 한시나 일본의 단가 배구(俳句)처럼 그 자수에 요지변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주 신축성이 있고 자유자재롭다는 것이다. 다음에 그 예증을 들어보기로 한 다. 시조의 기본율은, 3 4 3 4 (초장) 7 7 3 4 3 4 (중장) 7 7 3 5 4 3 (종장)이다. 成佛寺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3 4 3 4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3 4 4 4 저 손아 마자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3 5 4 3 노산 이은상 선생의 [성불사의 밤]이 그 기본율에 맞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기본율에서 벗 어나 더 휘청거리는 멋이 있는 작품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태양이 그대로라면 8 지구는 어떤 건가 7 수소탄 원자탄은 7 아무리 만드다더라도 9 냉이꽃 한 잎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3 5 4 4 가람 이병기 선생의 {냉이꽃}의 셋째 수다. 이렇게 시조란 틀에 박힌 듯 하면서도 박히질 않고, 또 자유분방하면서도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정형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경우이든 내재율만 잃지 않는 범위안에서 어느만큼 자수의 가감은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파격(자수가 많으면)을 하면 쥐잡기 위해 독을 깨는 우(遇)을 범하는 일이 되는 것이니 삼가야 할 일이라 믿는다. 마치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준법(遵法)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가 허락되듯이 말이다. 그러면 시조에 있어서 허락될 수 있는 자수의 테두리는 얼마만큼의 것인가? 한번 알아보기 로 하자. 3 4 (9자까지 가능) 3 4 (9자까지 가능) 3 4 (9자까지 가능) 3 4 (9자까지 가능) 3(부동) 5(7자까지 가능) 4(5자까지 가능) 3(4자까지 가능) 이것을 풀이한다면 초·중·중장의 전후귀가 3, 4자로 합하면 7자인데, 9자까지가 가능하고 (예컨대 3, 4도 좋고 3, 5도 좋고 3, 6도 좋고, 2, 7이나 4, 5도 좋고), 종장 3, 5, 4, 3의 첫 3 자는 부동이나 5자는 7자까지, 4자는 5자까자, 3자는 4자까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음에 작 품의 예를 들어 보겠다. 아무리 여름이 더워도 싫단 말 다신 않을래 3 6 3 5 이밤도 또 밤새워 우는 저 가을 벌레들 소리 3 6 3 5 더구나 우수수 잎들이 지면 어이 견딜 까본가 3 8 4 3 이호우 선생의 {聽秋(청추)}라는 작품의 첫 수다. 얼마나 자수나 틀에 구애받지 않고 내재율을 잘 살려 낸 작품인가. 그러면서도 파격이 전혀 없는 천의무봉한 가락인가. 이상 드러난 작품들만 보더라도 우리 시조가 얼마나 리듬미컬하 고 멋이 있으며, 부자유한 듯하나 기실은 자유롭고, 또 분방한 듯하나 아주 잘 정제된 우리 가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단수와 연작 이웃에 봄을 나눈 살구꽃 그늘 아래 도란도란 얘기들은 소꿉질에 잠차졌고 상치 씨 찾는 병아리 돌아올 줄 잊었다. 작고한 시인 이영도 선생의 {봄Ⅱ}이다. 시조는 원래 시절가조(時節歌調)라 하여 계절이건 인심이건 시절을 노래한 시였다. 그리고 시제라는 것을 붙여서 노래했던 것도 아니고, 더더 구나 연작이니 하여 여러 수를 엮어서 한 편의 작품을 이루었던 것도 아니다. 하기 때문에 시조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이 단수에 있다는 것을 말해둔다. 일본의 단가니 배구는 오늘날 까지도 우리 시조의 본을 떠서 시제를 붙이는 일도 없고, 노래 속에 반드시 계절이 나오며, 더더구나 연작이라는 것은 없다. 여긴 내 신앙의 등주리 낙동강 흥건한 유역 노을 타는 갈밭을 철새 떼 하얗게 날고 이 수천(水天) 헹구는 가슴엔 [세례요한]을 듣는다. 석간을 펼쳐 들면 손주놈 [고바우]를 묻는다 혀 끝에 진득이는 이 풍자 감칠맛을 전할길 없는 내 어휘 모국어로 가난타네. 네 살짜리 손주놈은 생선 뼈를 창살이란다 장지엔 여릿한 햇살, 접시엔 앙상한 창살 내 눈은 남해 검붉은 녹물 먼 미나마따에 겹친다. 역시 이영도 선생의 {흐름 속에서}라는 작품이다. 이런 시상을 단수에는 담을 수 없다. 현대 인들의 복잡하고 다기한 생활상을 3장 6귀에 다 담을 수 없어 자연발생적으로 이어져 나간 것이 오늘날의 연작시조라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유의해 두어야 할 일은 아무리 연작이라 하더라도 수마다 떼어놓고 보아 한 수 한 수가 다 작품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알아둘 일은 3장 중 어느 한 장은 꼭 풀어놓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계속
1338    詩人이라면 시조 몇수라도... 댓글:  조회:4423  추천:0  2016-04-12
시인은 왜 시를 쓰는가 시인은 왜 시를 쓰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문화가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 문화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 문학이요 그중에 정수를 모아 짧은 글로 감동을 옮겨 놓은 것이 시(詩)이다. 배창환 시인은 시와 수학은 인류의 보물이라 하였는데 왜냐하면 시는 형상적 인식의 기초요, 수학은 논리적 인식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라 하였다. 왜 시인은 정신의 허공을 휘저으며 진저리치고 밤을 새우고 절망과 씨름해야하는가? 왜 아픔의 현장에서 함께 딩굴며, 무너진 성터의 기와조각 앞에서 서성이며, 여인의 울음소리 곁에서 함께 부딪쳐야 하는가? 형상의 이미지화를 위해 이미지를 형상화시키기 위해 시인이 시를 써야만 하는 이유를 고민하며 정리해본다. 첫째 생명의 소리를 찾아 형상화하기 위함이다 그 옛날 사람들은 흙 토(土)자에 마디 촌(寸)을 붙이고 말씀 언(言)변을 앞에 세워 시전 시(詩)자를 만들었다. 흙속에서 찾아 낸 한마디의 말을 시(詩)라고 부른 뜻은 흙속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명이 있는 사람을 지었음이니 흙속에 숨은 소리를 찾아 생명의 소리를 찾아 한마디 말로, 뜨거운 언어로 담아낸 것이 바로 시(詩)인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생명의 소리를 찾아 흙속에 숨은 소리를 찾아 오늘도 산하를 방황하는 것이며 영원을 흔드는 외로운 울림을 생명의 씨알로 키워내기 위해 뼈 속까지 저미는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시(詩)라는 언어의 그릇에서 담아낸 영혼의 숨결을 느끼고, 푸득 푸득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용솟음을 본다. 그래서 신동엽시인은 시란 바로 생명의 발현이라 하였다. 둘째 역사에 잠자는 의식을 깨우기 위함이다. 공자의 말씀에 시즉절(詩卽切)이라는 구절이 있다. 진정한 시는 절실함을 담고 있다는 말이다. 절실함은 개인이나 가족이나 민족의 아픈 역사 속에 스며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이 살아오며 느낀 치열함이 스며있는 역사 속에 숨결을 불어넣어 그 역사가 살아 숨 쉬게 되면 거기 녹아 꿈틀대는 절실함을 만나게 되고 그 절실함이 시인의 언어와 만나 정신의 허공을 휘저으며 감동을 풀어 올려 미래와 접목시키는 것이다. 윤강로 시인은 시인의 역사적 책임을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시인은 자유의 존재로서 살아 있는 이야기로 미래를 꿈꾼다. 미래를 꿈꾸는 정신의 허공은 태어난 땅에 뿌리를 박고 떠오르는 자의 것이다. 우리의 땅에는 우리의 역사가 숨 쉬고 있다. 꿈이 없는 자가 뇌까리는 역사는 박제의 역사이며, 그것은 영원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역사와는 떨어질 래야 떨어질 수 없는 필연의 관계에 있다 하겠다. 따라서 역사와 현실을 외면한 공상과 추상은 관념과 언어의 탁상공론이 될 가능성이 있다. 내면의 갈등을 다듬고 자연의 섭리 속에서 찾아낸 깊은 사색의 결정을 묘사한 서정의 날개를 우편에 달고 있다면 역사 속에 잠자는 아픔과 목마름을 일깨운 의식의 날개를 좌편에 달아 팽팽한 영혼의 비상과 갈등의 침하를 거듭하면서 머나먼 시의 창공에서 날개 짓을 계속하는 것이다 셋째 모국어의 속살을 살찌우기 위함이다.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성경의 말씀이 있다. 사람은 밥만 먹고 배설하는 짐승이 아니라 문화를 먹고사는 영적 존재라는 말이다. 수많은 인류문명이 명멸을 거듭해왔지만 오늘까지 살아있는 것은 언어를 통해 이어온 전통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언어를 잃어버리는 문명은 쉽게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역사에서 소멸되게 마련이다. 자기나라의 언어를 지키고 다듬어 모국어를 지키고 그 속살을 살찌게 하는 것은 시인의 사명이다 시인은 모국어로 시를 쓴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있어 릴케는 모국어인 독일어로 시를 쓰면서 프랑스어 시편을 남기고 있지만 특수한 문화적 소산이다. 헌데 한국의 시인들이 한자로만 시를 쓰던 시대가 있었다. 그래야만 사회에서 행세를 하고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한글 시(詩)인 시조가 있어 민족의 자긍심을 높여준다.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는 구전으로 전해오다가 우리글이 창제되면서 한글시의 명맥을 이어왔고 현대시에서 한글이 살아나면서 오늘의 한글 전성시대가 열리고 그에 따라 우리의 문화도 국력도 신장되게 되었다. 김삿갓으로 유명한 천재시인이라는 김병연이 있었지만 대중에게 그의 시가 쉽게 기억되지 않는 것은 한시(漢詩)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시를 말하려면 ‘이 몸이 죽고 죽어’ ‘청산리 벽계수야’를 먼저 외우며 시조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은 모국어로 써진 시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김천택(金天澤)의 청구영언이 기록되어 오늘까지 전해진 것은 한민족의 문화와 지성을 높인 어떤 보물보다 귀한 보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현대시풍토를 보면 자유시의 풍토에 밀려 한글시의 전통인 시조를 너무도 천시하는 경향이 있다. 한 예로 2005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 주빈국으로 선정되어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릴 절호의 기회를 맞았으나, 번역 소개할 "한국의 책 100권"에 고우영의 만화 ‘일지매’는 있는데 시조집이나 시조 관련 책자는 단 한 권도 없고, 한국문학을 소개할 62명의 문인 중에, 현대시조시인은 단 한 명도 끼지 못할 정도로 알뜰하게 천대받았다. 물론 자유시가 일구어낸 한국문학사의 지대한 역할을 긍정해야하지만 중국의 한시나 일본의 하이쿠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것에 비해 우리의 모국어로 된 전통 시조는 그 자리가 너무 빈약하다. 그래서 한국의 시인이라면 적어도 시조 몇 수는 적어낼 수 있어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수만 명의 문필가와 수천 명의 시인을 안고 있는 한글은 행복한 언어로 기록될 것이며, 시조에 담긴 민족의 혼을 살려 한글의 멋을 살려 나갈 때 한민족 문화 발전의 터전으로 영원히 자리매김할 것이다.  
1337    현대시의 뿌리는 시조 댓글:  조회:4655  추천:0  2016-04-12
 현대시조의 올바른 작시법(세종문학회 세미나 자료: ) 강사 : 이 광 녕 1. 현대시의 뿌리는 시조다. * 다음 글들과 현대시조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A 耿耿/ 孤枕上에 / 어느 미/ 오리오// 西窓을/ 여러 니 / 桃花一發 /도다// 桃花/ 시름 업서/ 笑春風 다/ 笑春風 다 // -「滿殿春別詞」(제2절) B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에서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깃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 유치환, 「春信」1~2연 C 해와 하늘빛이 / 문둥이는 서러워 //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 서정주, 「문둥이」전문 D 살이 잎새 되고 / 뼈가 줄기 되어// 붉은 피로/ 꽃 한 떨기 피우는 날엔 // 비린내 나는 운명도 / 향내를 풍기오리 - 구상, 「목숨이여」1~3연 * 현대시의 뿌리는 시조다. 시조는 향가-고려가요-고시조-현대시조의 맥을 이어 왔다. 우리 시가의 율격체계는 주로 2보격(민요), 3보격(고려가요), 4보격(시조․가사)의 형태로 분석되고 있다. 시조의 율격은 2음보의 연첩형으로 볼 수도 있는데 거기서 율격의 반복성을 살필 수 있으며, 또 각 장마다 4음보가 규칙적으로 재현된다는 점에서도 규칙성이 발견된다. 시조의 이러한 반복성과 규칙성은 정형시로서의 율격을 형성하게 된다. 2. 부적절한 창작기법 1) 관념적 ․ 사무적 용어의 남발과 한자어의 과다 노출 국방의 의무인 조국의 부름 앞에 * 2수로 이루어진 연시조이지만 제1수의 완결성, 청춘의 젊은 피가 온 몸을 휘감고 한자어, 사무적 용어 등에 문제가 있다. 왕성한 푸른 기운이 몸 속에 가득한데 언제나 위협적인 북한의 거짓 행동 당의정 속임수에 눈가림 평화행진 화농성 연쇄상구균 침투한 바이러스 - 리창근, 「봉와직염」일부 2) 설명적 진술의 일관 간척은 밥 팔아 똥 사먹는 짓거리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는 일이다 이보다 더 심한 말도 주고 싶은 맘이다 - 강영환,「새만금을 지우다」, 전 5수 중 제4수 아아 저 거울 속에 죄가 다 얼비치네// 얼라 궁디에 붙은 밥풀을 띠 묵은 죄, 문디이 콧구멍 속의 마늘을 빼 묵은 죄....// 머리카락 보일까봐 꽁꽁 숨겨뒀던 이 세상 온갖 죄들이 낱낱이 들통나는,// 미치고 환장할 놈이 몇 놈쯤은 나올 하늘. - 이종문, 「하늘」 * 묘사적인 글 공든 도배 해 바뀌니 어느덧 퇴색하다// 족자를 들춘 자리 문득 파란 고 빛깔!// 어쩌면 접어둔 마음 나와 나의 해후여. - 이상범,「족자를 들추다가」 전문 빗물 / 고인 자리에 / 아침 솔빛이 잠긴다 // 멀리서 / 종소리 울려와 / 그림자 위에 얹히고, // 이윽고 / 돌도 구름도 / 서로 눈길을 맞춘다. - 김상옥, 「아침 소묘(素描)」 전문 3) 문장 ․ 어법 구조의 오류 깨지기 위해서 솟아나야 하는 저 운명 입 다물고 툭툭 몸부림치며 말하는 그런 식 둥근 틀에 갇혀 / 지껄이는 신문 사설 - 김수엽,「분수-국회의사당 앞에서」 전3수 중 제1수 4) 산문형의 글( 분장, 행갈이, 문장부호의 문제 ) : 다음을 시조라고 볼 수 있는가 생각해 보자 청송땅 샛별 품은 갈맷빛 외진 못물 갓밝이 저뭇한 숲 휘감아 도는 골짝만 된비알 뼈마디 꺾는 물소리 가득하다. 호반새 울음 뒤에 퍼지는 새벽 물안개 실오리 감긴 어둠도 한 올씩 풀어내고 삭은 살 연기가 되고 재 되는 저 춤사위. 사는 일 짐 부려 놓고 제 거울 들여다보는 고요도 버거운 이 차갑게 돌아앉고 못 속에 누운 왕버들 퉁퉁 부은 발이 시리다. 숨 돌릴 겨를 없이 짙붉게 타는 수달래 먹울음 되재우고 저마다 갈 길 여는가 내 앞에 툭툭 튄 물살 쌍무지개 지른다. - 조성문, 「주산지 물빛」전문 간밤에 시인들이 떼로 몰려왔습지요 연거푸 파지를 내며 머릴 쥐어뜯으며 밭두덕 비탈마다 술잔을 내던지며 그렇게 온밤을 짓치던 하늘시인들입죠 개울을 줄기째 들었다 태질을 치곤했다는데요 - 박기섭, 「하늘 시인」 전문 5) 탈격 : 다음 글을 시조라고 할 수 있는가? * 다음 글은 “絶章詩”,“兩章詩”, “4章詩”라고 불러야 한다. 시조의 정의를 말할 때, 초중종 3장의 결속 체계를 갖춘 유기체적 형태의 글이라는 점을 거론해야 하기 때문이다. A, “절장시조” 말로 다 할 수 있다면 꽃이 왜 붉으랴 - 이정환, 「서시(序詩)」 전문 B, “양장시조” 입 다문 꽃봉오리 무슨 말씀 지니신고 피어나 빈 것일진댄 다문 대로 곕소서 - 이은상, 「입다문 꽃봉오리」 전문 C, “4장시조” 천근 든 쇠북을 들 듯 안았던 꽃을 드립니다. 꽃도 머물렀다 한 번 핀 보람 있어 예와 고이고저 피인 상 싶으거늘 제주도 유자꽃이야 오죽 부러우리까. - 조운, 중 「해방탑」 길손이 막대전져 천리강산 헤매더니 여기가 어디메오 그림 속에 들었구나 무등산 눈얼음이 녹아풀려 흘러내려 양림천(楊林川) 굽이굽이 봄풍악이 요란하다. - 이은상, 「전남특산가(全南特産歌)」 전 26수 중 제1수
1336    詩作할 때 詩人은 신조어를 잘 만들기 댓글:  조회:4493  추천:0  2016-04-12
시어사전 '시어사전'이라는 사전이 있읍니다. 모든 사물에 관하여 사전, 도록, 도감 등을 만들 수 있읍니다. 그러나 사전에 있는 것을 무조건 받아 들이는 것은 재고해야 합니다. 시어사전은 시에서 나오는 시어를 모아서 해설을 붙인 것입니다. 편자에 따라 천차 만별한 시어사전을 만들 수 있읍니다. 시어사전에 있는 낱말을 써야 시가 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써서 시를 지으라고 장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해설을 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시인은 비유법을 많이 쓰고 신조어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시어사전에 올려집니다. 남이 쓴 신조어나 시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시인으로서 할 일이 못됩니다. 시어사전에 있는 시어들은 다른 시인이 선점해 버린 낱말입니다. 그 시인에게는 영광이지만 나에게는 수치입니다. 시어사전에 있는 시어인줄 모르고 또는 다른 적절한 낱말이 없어서 부득이하게 쓸 수는 있어도 일부러 골라서 쓸 이유가 없읍니다. 신조어가 오래되어 일반인이 보편적으로 쓰는 낱말이 되었을 때는 시인도 일반인의 자격으로 쓸 수는 있지만 다른 시인이 만든 신조어를 바로 따라 하는 것은 모방입니다. 창작이 아닙니다. 시인이 아닌 일반인이 시어사전에 있는 낱말을 적소에 골라 쓰면 탓할 바 못되지만 일상의 대화나 글쓰기에서는 가급적 권위있는 국어사전에 있는 보편어를 쓰는 것이 제격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일상어,보편어에만 매달리면 안됩니다. 시인은 [언어의 마술사] 입니다. 관중에게 언제나 똑 같은 마술을 보여 주어서는 안됩니다. 꾸준히 신조어를 만들어 내고 언어를 기술적으로 갈고 다듬는 것이 시인의 특기요,권리이면서 의무입니다.  
1335    [배꽃이 꽃샘추위에 오돌오돌 떠는 아침 詩한수]-방파제 끝 댓글:  조회:4370  추천:0  2016-04-12
방파제 끝 -황동규(1938~ ) 언젠가 마음 더 챙기지 말고 꺼내놓을 자리는 방파제 끝이 되리. 앞에 노는 섬도 없고 헤픈 구름장도 없는 곳. 오가는 배 두어 척 제 갈 데로 가고 물 자국만 잠시 눈 깜박이며 출렁이다 지워지는 곳. 동해안 어느 조그만 어항 소금기 질척한 골목을 지나 생선들 함께 모로 누워 잠든 어둑한 어물전들을 지나 바다로 나가다 걸음 멈춘 방파제 환한 그 끝. “끝”은 관계의 사라짐을 의미한다. 나와 얽혔던 그 많은 끈들이 하나둘씩 지워질 때 끝의 징후가 보이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소금기 질척한 골목”을 헤쳐 나왔는가. 분투와 욕망의 골목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치열했던 의미소(意味素)들을 잃어갈 때, 우리는 어느덧 생의 종점에 가까이 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끝이 환하다면, 그렇게 확 트인 ‘절대’라면 “어둑한 어물전”의 현세(現世)를 지나온 것도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닐 것이다.  
1334    [출근전, 詩한컵 드이소]-둥근 우주 댓글:  조회:4520  추천:0  2016-04-11
    둥근 우주 1 새벽 풀밭에서 방울방울 맺힌,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동그란 언어의 우주와 마주한다 찰나의 풀잎과 교감(交感) 해 뜨기 전 적막 속으로 동그란 우주는 소멸하고 다시 피안으로 이르는 둥근 우주 ―유지희(1959~ ) 새벽 풀밭에 이슬이 방울방울 맺혀 있다. 영롱한 구슬이 파란 풀잎 위에 내려앉아 있다. 시인은 환한 광채를 뽐내는 그 동그란 우주와 마주한다. 그 동그란 우주는 매끈하고 깨끗하다 . 그 동그란 우주는 원만하고 신성하다. 이슬은 방울방울 맺혀 있다 사라진다. 우리는 구슬을 잃어버린다. 우리가 사는 백자 항아리와도 같은 이 세계는 순간 적막 속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그 동그란 우주를 만났던 환희와 순수의 시간을 잊을 수 없다. 그 동그란 우주의 희고 말쑥한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우리도 모두 그처럼 동그란 우주로서 이곳에 왔다.
1333    [詩한컵]- 황복 댓글:  조회:4535  추천:0  2016-04-11
기사 이미지 보기 기사 이미지 보기 사람에게 죽음의 본능마저 초월하는 맛의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황복 맛! 절세가인 서시유방처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혹의 맛. 봄에 죽어도 좋을 만큼 먹어보고 싶게 하니,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맛. 황복이 맛있는 살구꽃 피는 봄날에 시인의 말처럼 자는 듯 먹어봤음 하는 그 비밀스러운 맛을 맛보고 싶어집니다. 김민율 시인
1332    [월요일 아침, 詩한송이 드리매]- 푸른 곰팽이 댓글:  조회:4135  추천:0  2016-04-11
푸른 곰팡이 산책시(散策詩) 1 - 이문재(1959~)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속도 지배의 세계는 “발효의 시간”을 버린다. 세계는 채 익기도 전에 버려지는 것들로 가득하다. 더디 가는 시간의 “푸른 강”은 사라지고 없다.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 당신에게 가보고 싶다. 빨간 우체통은 그리움과 기대감으로 넘치고, 당신은 아직도 오고 있는 중인 그 먼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속도가 제왕인 세계는 이런 발상을 낭만적 혹은 시대착오적 “곰팡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곰팡이도 발효의 시간을 겪는다.  
1331    [꽃샘추위를 하는 아침, 詩한컵 드리매]- 사람과 집 댓글:  조회:4301  추천:0  2016-04-11
사람과 집                             오규원 김종택의 집을 지나 이순식의 집과 정진수의 집을 지나 박일의 집 담을 지나 이말청의 집 담장과 심호대의 집 담장을 지나 박무남의 집 담벽과 송수걸의 집 담벽과 이한의 집 담벽을 지나 강수철의 집 벽과 천길순의 집 벽을 지나 박규수의 집 담벽을 지나 허인자의 집 벽을 지나 한오상의 집 벽과 최일중의 집 벽을 지나 권기덕의 집 벽과 장녹천의 집 벽과 최점선의 집 벽을 지나 이수인의 집 담벽과 이무제의 집 벽을 지나 조민강의 집 담을 지나 박방래의 집 담벽과 오재식의 집 담벽과 신영식의 집 담벽과 전태욱의 집 담벽을 지나 허면의 집 목책과 이종의 집 철책을 지나 김일수의 집 담과 윤난서의 집 담과 김실의 집 벽을 지나 김숙전의 벽과 박성식의 벽과 오재만의 벽과 안범의 벽과 홍숙자의 벽과 고석의 벽과 최수덕의 벽과 문정삼의 벽과 윤인행의 벽을 지나 김대수의 벽 우만식의 벽 이벌의 벽 강진국의 벽 방말자의 벽 조인만의 벽 김영덕의 벽 황규장의 벽 한수태의 벽 박상숙의 벽 오희상의 벽 원호영의 벽 이강본의 벽 전무연의 벽 김말영의 벽 권오항의 벽 남희선의 벽을 지나 /// 사람의 집을 지납니다. 세 집을 지나니 담 담장 담벽 벽이 추가됩니다. 한동안 계속되다가 목책과 철책을 딱 한 번씩 지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집은 사라지고 ‘~과’와 ‘~을’도 사라지고 벽 벽 벽입니다. 김대수의 벽 우만식의 벽 이벌의 벽. 이 시를 읽는 우리는 어디를 통과하는 것일까요. 시인이 ‘날(生)이미지시’라고 명명한 후기시에 속하는 작품입니다. 인간이 덧씌워놓은 관념이나 허구를 배제하는 시론으로, ‘세계를 투명하게 인식’하고자 한 언어주의자의 행로였습니다. 제목이 ‘사람의 집’이 아니라 ‘사람과 집’입니다. ‘~과’는 종속이 아닌 나란함, 즉 수평ㆍ개방적 연대를 가리킵니다. 오규원 후기시의 지향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호명은 사람, 집(세상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에 덧씌워놓은 관념을 벗겨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강본의 벽쯤에 이르면, 자신도 모르게 이강본과 벽, 이라고 수정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공사장 철책에도 선거용 벽보가 붙었습니다. 산책길에 한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내세운 지향들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내가 봉오리 하나를 매달면, 세상은 그만큼 깨어날 작정을 합니다. ‘사람과 집’을 위해, 이틀 뒤, 꽃봉오리 하나씩! 깨끗한 한 표를 찍으러 가야겠습니다. / 이원 시인    
1330    인도 시성 타고르와 최초 만난 한국인 청년 댓글:  조회:7343  추천:0  2016-04-10
1974년 2월 3일 새벽 다섯 시...... 왕년의 번역가 한 사람이 고단한 삶을 마감했습니다. 1894년생이니 향년 80세. 그 시절의 한국인 치고 파란만장한 삶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을 테고, 번역가 치고 번역가로 종신한 사람 또한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나마 여든 해를 살았으니 비통할 만큼 모자란 세월은 아니겠고,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지내기도 했으니 가난에 찌들리지는 않았을 터입니다. 범상하다면 범상한 죽음...... 그런데 한 줌의 재가 된 뒤에 신문에 실린 부고는 조금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장례가 끝난 뒤인 2월 8일 아침 신문에 부고 겸 답례 인사말이 함께 실렸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많은 총애를 받았사옵고 또 적지 아니한 폐를 끼쳤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오늘 먼저 갑니다. 여러분,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1974년 2월 3일 진학문   고인의 뜻에 따라 화장으로 하고 여러분의 염려하여 주신 덕택으로 모든 일을 무사히 끝마쳤음을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974년 2월 7일 미망인 진수미 우인 최승만   날짜가 2월 3일로 된 광고는 나 먼저 가노라는...... 말하자면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자기 부고입니다. 그 옆에 나란히 붙은 2월 7일 날짜의 광고는 조문해 주어서 감사하라는 유족의 답례 인사말입니다. 그러니까 고인이 된 진학문은 자기 자신의 부고를 유서 겸해서 미리 써 놓았다가 장례를 마친 뒤에 신문에 광고를 낸 모양입니다.   순성 진학문...... 젊은 시절 창간의 주역이며, 최남선이 창간한 과 를 맡아보기도 했습니다. 한때 만주국의 친일 고급 관료로 변신했다가 해방 후에는 재벌 기업의 최대 이익 단체인 전경련 부회장에 오른 번역가......   아마 자기 부고를 낸 일만으로도 이야깃거리가 많겠지요? 그런데 조금 이상한 대목도 눈에 띕니다. 유족의 이름으로 된 왼쪽 광고가 좀 어색하지 않나요?   조문에 대한 감사 인사를 내려면 당연히 유족 이름으로 내야 하고 보통은 장남 이름으로 내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진학문의 경우에는 부인 진수미와 친구 최승만의 이름으로 인사말을 냈습니다. 게다가 부인이 진학문과 같은 성씨입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장남이나 장손이 없을 수도 있고 시대를 앞지른 남녀평등의 실천가일지도 모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러면 제가 굳이 포스팅할 이유가......?)   먼저 최승만...... 경기도 안산 출신의 최승만은 보성중학과 일본 유학 시절을 진학문과 함께 보낸 평생의 지기입니다. 최승만은 일본 유학 시절에 에 참여한 초창기 주역인데, 주로 동경 YMCA에서 활약했고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뒤에는 동아일보사의 에 참여했습니다. 최승만은 한국전쟁 시기에 아내와 생이별하고 제주도로 피난을 가서 도지사를 지내고 제주대학 설립에 관여했습니다. 나중에 인하공대 학장을 맡기도 했죠.   부인 진수미...... 부인이 진학문과 같은 성씨인 것은 동성이나 동본인 탓이 아니라 부인이 일본인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스무 살의 미야자키(宮崎)는 스물여섯 살의 일본 유학생과 만나 성씨를 진씨로 바꾸고 일생을 함께했습니다.   사실 진학문은 남녀평등은 고사하고 부인에게 엄청난 결혼 조건을 걸었다 합니다. 그것도 세 가지나 되는 조건을 말이죠. 첫째는 조선인이 될 것, 둘째는 남편에게 절대 복종할 것, 셋째는 가난을 참고 견딜 것...... 아니, 뭐 이런...... 그 결혼이 무난히 성사되고 55년을 함께한 것을 보면 진학문도 보통 아니거니와 부인도 보통은 훌쩍 뛰어넘습니다.   그렇죠...... 국제결혼이고 자시고...... 식민지 청년이 종주국 여성과 결혼한 것도 뒷전이고....... 무조건 조선인이 되고 절대 복종하라는 판에 한술 더 떠서 가난까지 참고 견디라니, 이거야 원...... (많이 부럽~)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는 재일 조선인, 재일 동포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척하는데 정작 우리 곁에 함께 살고 있는 일본인 여성에 대해서는 지독하리만치 무심합니다.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해방 후에 한국 땅을 떠나지 않고 남은 이른바 일본인 할머니들은 딱딱하게 말하자면 재한 일본인 아내(처)로 부를 수 있는데 약 1만 명 안팎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아무도 정확한 숫자를 모를 정도입니다. 그분들이 그동안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차마 상상하기 겁나기도 하고요.   진학문의 가족사진을 찾아보니 부인은 정말 한눈에 반하지 않고 못 배길 만큼 꽃다운 미인입니다. 당연히(??) 신혼 때부터 내내 조선 옷을 입었고요. 진학문과 진수미 부부는 슬하에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사실 청년 시절의 진학문도 상당한 미남입니다만 첫째 딸과 둘째 아들 모두 부인의 미모를 물려받았습니다.   정작 진학문의 부고와 답례는 딸과 아들의 이름이 아니라 부인 진수미 여사의 몫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부고를 미리 준비해 둔 진학문의 파격적인 발상 덕분이 아니라 초창기 번역가가 지나온 가슴 아픈 편력기의 마침표였습니다.   세계적인 시성이라 일컬어지는 타고르...... 여러분은 타고르 하면 누가 떠오르시나요?   안서 김억? 만해 한용운?   김억은 1923~1924년에 무려 세 권의 타고르 시집을 번역해 내놓은 최고의 타고르 전문 번역가입니다. 김억은 1923년 4월에 《기탄잘리》를 처음 번역했고, 일 년 뒤인 1924년 4월에는 《신월》을, 1924년 12월에는 《원정》을 잇달아 번역했습니다.   《님의 침묵》의 시인 만해 한용운은 타고르의 사상과 시 세계를 이어받은 것으로도 이름이 높죠. 덧붙이면 잔소리.......   그럼 타고르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은요?   아시아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교과서에서 배운 ?   타고르는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1913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아시아인에게 첫 노벨상을 안겨 준 작품이 바로 《기탄잘리》입니다. (두 번째 노벨상은 55년 뒤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돌아갔죠.) [신에게 바치는 송가]라는 뜻의 《기탄잘리》는 1910년에 벵골어로 처음 출판되었다가 1912년에 타고르가 직접 영어로 번역한 시집입니다. 타고르가 바로 그다음 해에 노벨상을 받은 것도 실은 영어 번역 덕분입니다.   한국인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 이게 실은 엄청난 오역과 의도적인 왜곡의 산물이라는 것은 이미 2009년에 측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지적된 바 있습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학계와 언론에서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건데요...... 심지어 타고르의 시를 처음으로 번역한 것이 소파 방정환이라는 얘기도 나오더군요. 최근에 정지용이 학창 시절에 번역한 타고르 시가 발굴되면서 일부 신문에서 잘못 흘린 얘기 같은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한 타고르 번역과 관련해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글은 동아일보 블로그뿐입니다. (아놔~ 쪽팔려서, 원~)   ■ 타고르의 시와 관련된 오해들   타고르의 에 얽힌 이야기를 하자면 너무 길어질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결론은 우리가 아는 은 없다.......는 얘기......   그럼 얘기가 도대체 어찌 되는 것이냐 하면......   ■ 이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하는 것에 어지간히 익숙해지셨죠?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상하(像下)의 문자는 벵골문으로 선생이 성명을 자서(自署)한 것 이 사진은 아마 영인본에는 빠져 있을 겁니다. 이거 찾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   1916년 7월 11일 정오...... 요코하마에 있는 유명한 일본식 별장 산케이엔(삼계원)에 스물세 명의 방문객이 도쿄에서 도착했습니다. 일본인도 있고 중국인도 있고,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학생도 있고 교사도 있었습니다. 그중에 두 명의 한국인 청년이 섞여 있었습니다. 바로 진학문과 또 다른 유학생 C군입니다.   일본에 머물고 있던 타고르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타고르는 1916년 5월부터 약 석 달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타고르는 이듬해인 1917년 1월에도 한 달가량 일본에 체류했으며, 1929년까지 모두 다섯 차례나 일본을 찾았습니다. 문제의 시 은 한참 뒤인 1929년 6월에 마지막으로 일본에 들렀을 때...... 한국을 방문하려는 계획이 신병 문제로 무산된 후에 주요한의 번역으로 에 실렸던 겁니다.   그러니까 타고르와 한국의 진짜 진한 인연은 그보다 13년 전인 1916년에 처음 맺어진 셈입니다. 타고르를 방문한 두 명의 한국인 진학문과 C군......   타고르와 진학문의 대면은 이듬해인 1917년 11월 최남선의 신문관에서 발행된 11호에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번 길에 조선과 지나에를 꼭 들르려 하였더니 시일이 없어 여의치 못하게 된 것을 대단 유감으로 아오.   선생님, 바쁘신데 어렵습니다마는 새 생활을 갈구하는 조선 청년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조금 써 주시지 아니하겠습니까? 선생께서 써 주신다 하면 감사한 말씀은 다 할 수 없으려니와 그 반향은 서구 철인이나 문인이 우리를 위하여 써 준 이에 몇 배 이상의 느낌이 있을 줄 압니다.   예, 그것은 무슨 잡지에 낼 것이오?   예, 조선 전체에 단 하나라 할 이란 잡지에 게재하려 합니다.   그것은 물론 조선문 잡지이겠구려?   예, 그렇습니다.   내가 미국 가서 할 강연의 초안을 이곳에서 쓰느라고 대단히 바쁘오. 한즉 길게 쓸 수는 없고 짧은 것이라도 무방하다면 써 드리오리다.   예, 길고 짧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잠시 다른 대화가 이어지고 기념 촬영......)   (......) 옥상 노대(露臺)에 올라가 기념 촬영을 한 후에 선생이 나를 돌아다보고 아까 약속한 글은 수일 내로 보내리다.   그래 놓고는 타고르는 어느 흐린 날 저녁 요코하마에서 캐나다호를 타고 미국으로 훌쩍 떠나 버렸다는 얘기입니다. 진학문은 부슬비가 가느다랗게 내리기 시작하는 요코하마 항구에서 타고르를 배웅했습니다. 캐나다호 갑판 위에서는 타고르가 한국인 청년 진학문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진학문은 훗날 타고르를 만날 때의 일을 라는 제목으로 정리해서 최남선에게 보냈습니다. 그때 진학문은 라는 글도 함께 보냈습니다. 최남선은 1917년 11월호의 앞머리에 타고르의 사진을 내걸고 진학문이 보내온 두 편의 글을 함께 실었습니다.   아참, 타고르와 진학문이 대화를 나누는 중에 잠깐 이야기가 끊기고 기념사진을 박았더랬죠? 타고르가 스물세 명의 방문객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을 이 빼놓았을 리가 있나요?     가운데에 앉은 노인이 바로 타고르이고 빨간색 동그라미로 표시한 청년이 바로 진학문이올시다. 원본 상태가 좋지 않아 얼굴이 또렷이 보이지 않죠?   하지만 실망하지 마시라...... 진학문과 타고르가 따로 찍은 사진이 아주 선명한 화질로 남아 있는 게 있습니다. 그게 어디에 있더라........ (^*^)   아차차...... 타고르가 의 독자에게, 한국의 청년에게 써 주마고 약속한 글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것도 궁금하시면 내일을 기다리시라...... ^ㄴ^   ● ● ● ● ●   진학문이 에 보낸 는 한참 뒤인 1938년 8월에 에 전문이 다시 실렸습니다. 는 이런 짓을 자주 했거든요.   제목만 살짝 바꿔서 ......그런데 1938년에 다시 실리면서 다이쇼 6년 7월 11일, 즉 1917년 7월 11일의 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건 원문에서 서기 1916년으로 되어 있던 것을 일본식 연호로 바꾸면서 착오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타고르는 1917년 1월에 일본을 두 번째로 방문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한 달가량만 머물렀기 때문에 한여름에 산케이엔(삼계원)에서 벌어진 일과 어긋나거든요. (사실 이것 때문에 한참 헤매긴 했습니다. 젠장~)   ■ 진학문 ■ 진학문   다만 1916년 7월에 벌어진 역사적인 장면이 왜 한참 뒤인 1917년 11월에야 소개되었는지 의문입니다. 또 진학문과 동행한 C군의 정체도 몹시 궁금합니다. C군은 대체 누구일까요? 왜 하필 이니셜로 처리했을까요? 언젠가는 꼭 밝혀내고 싶은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물두 살의 한국인 청년 진학문과 의문의 C군이 1916년 7월 11일 정오 무렵에 요코하마에서 타고르와 대면한 것, 진학문이 타고르에게 한국 독자를 위해 글을 청한 것, 타고르와 스물세 명의 일행이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앞의 포스트 읽다가 살짝 이상한 점을 발견하셨는나요? 궁금하면 지금 이 포스트 읽는 것일랑 당장 중단하고 앞의 포스트로 돌아가서 추리를 시작해 보세요~. 제가 조금 시간을 끌고 있을 테니까요......   일단 타고르가 진학문에게 수일 내로 글을 보내 주마고 약속한 일...... 곧바로 실현되었을까요? 글쎄요...... 워낙 바쁘신 몸이다 보니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의 말미에도 진학문이 요코하마 항구에서 타고르를 배웅하는 장면까지 생생하게 묘사되었지만 글을 받았노라는 말은 끝내 보이지 않으니까요. 어쩌면 1916년 7월의 역사적인 만남이 1917년 11월호에야 실린 것도 그래서인지 모릅니다. 타 선생의 글을 기다리느라고......   또 한 가지 미스터리는 뭐냐면...... 바로 앞의 포스트에서 인용한 타 선생과 진 청년의 대화에서 포착할 수 있습니다. (이상한 점...... 바로 찾으셨나요?)   진학문과 타고르의 대화 끝에 다른 청년이 타고르에게 교육 방법에 대한 의론을 묻자 타고르의 긴 답변이 이어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일행이 타고르에게 기념사진 촬영을 청했습니다. 앞 포스트의 인용문에서 제가 건너뛴 대목입니다.   우리는 일어나 선생에게 촬영을 하기를 청하니 선생이   “사진? 박입시다. 좋은 카메라를 가졌소? 하나 내 옷을 바꾸어 입고 나오리다. 나는 인도 옷을 입고 박이고 싶소.” 하고 들어가더니 인도 도포를 개착(改着)하고 나와   “자, 박입시다.” 하고 옥상 노대(露臺)에 올라가 기념 촬영을 한 후에 선생이 나를 돌아다보고   “아까 약속한 글은 수일 내로 보내리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죠?   옥상 노대......? 옥상 노대로 올라갔다......?? 노대란 난간뜰이나 발코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앞 포스트의 사진을 잘 보시면 그냥 정원인 것을 쉽게 알 수 있죠. 진학문의 몸집보다 더 굵다란 나무가 우거진 센케이엔(삼계원)의 뜰입니다.   그런데 왜 진학문은 옥상으로 올라가서 사진을 찍었다고 말했을까요?   그건 앞에서 말한 사진이 에 실린 그 사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아요? 기념사진을 꼭 한 장만 박으라는 법 있나요? 또 다른 사진의 존재 가능성...... 이를테면......     이런 사진 말입니다.   타고르와 진학문 일행의 만남 도중에 옥상에 올라가 찍은 사진이란 아마 이 사진을 가리킬 겁니다. 보시다시피 타고르가 인도 옷으로 갈아입었고 난간 뒤쪽의 나무로 보아도 이 층이나 삼 층 높이의 옥상이거든요. 진학문의 머리 모양과 옷매로 보아도 같은 날 찍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진은 진학문의 사후에 출판된 추모 문집 권두 화보로 실린 사진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 밑에 달린 설명에는 1925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 1925년이 아니라 1916년 사진일 겁니다. 일단 1925년에 타고르와 진학문이 다시 만났다고 보기 어렵고...... 무엇보다 1925년이라면 진학문이 서른한 살 때라는 얘기인데....... 아무리 봐도 진학문은 더 어려 보입니다.   아, 누가 진학문이냐고요? 뭐 별로 어렵잖게 찾을 수 있지요? 맨 왼쪽입니다. 다른 네 명의 정체는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가운데 서 있는 약간 까무잡잡한 청년이 C군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가만 보면 일본인 같기도 하고...... 하여간 진학문은 틀림없이 맨 왼쪽의 청년입니다.   얘기가 또 옆으로 샙니다만...... 기왕 스물두 살 진학문의 얼굴을 확인한 김에 일본 유학 시절의 사진 두어 장을 더 볼까요? 진학문의 어린 시절, 학창 시절, 가족사진, 만년의 모습까지 몇 장의 사진을 더 찾아볼 수 있습니다만 그중에서 바로 요 무렵, 타고르와 만나던 무렵에 찍은 멋진 사진 두어 장이 있습니다.   어디 한번 사진 속의 주인공을 알아맞춰 볼까요?   자, 누가 진학문일까요? 첫 번째 사진을 보시면 쉽게 찾으실 만하죠?   네, 역시 맨 왼쪽이 바로 진학문입니다. 이 사진은 1918년 서울에서 찍은 것입니다. 진학문은 1918년에 에 입사해서 경성지국 기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두 번째 인물은 천풍 심우섭....... 소설가 심훈의 맏형입니다. 1890년생인 심우섭은 당시 기자 겸 작가였고 이광수의 《무정》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조연 신우선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나이로는 넷 중에서 제일 위이면서도 가장 짖궂어 보이죠?   그 옆에 선 훤칠한 인물이 바로 춘원 이광수...... 1892년생입니다. 아무리 봐도 최고의 미남자라고 할 만합니다. 스물여섯 살이고 연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일약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입니다.   맨 오른쪽 인물은 하몽 이상협...... 1893년생인 이상협은 《눈물》, 《정부원》, 《해왕성》을 잇달아 번안한 인기 연재소설 작가이기도 하고 당시 의 실질적인 편집장으로 식민지 시기 최고의 일간지 편집자이자 실무 경영자입니다.       요 사진도 역시 1918년 무렵의 사진입니다.   뒤쪽에 어깨를 겯고 있는 두 사내가 이광수와 진학문입니다. 이렇게 봐도 역시 이광수의 미모가 빛을 발하는군요. 진학문은 나이가 어린 탓인지 눈매가 날카로워 보이는 걸 감출 수 없습니다. 가족사진을 보니 진학문은 저 사납고 매서워 보이는 눈매를 하필 첫째 딸에게 물려준 것 같더군요. 그래도 나이가 들면서 눈매가 몰라볼 만큼 부드러워지고 몸피가 커지면서 아주 푸근한 인상으로 바뀌긴 했습니다. 훗날의 사진은 다음에 보기로 하죠.   앞쪽에 걸터앉은 인물은 정노식입니다. 김제 출신의 정노식은 1899년생이어서 한참 어린 편인데 사진으로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조금 이상하긴 합니다. 어쩌면 1899년생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노식은 삼일운동 때 민족 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옥고를 치렀습니다.   정노식은 이미 1915년에 사회주의자 김철수, 장덕수와 비밀결사를 조직한 바 있고 1916년에는 국제적인 규모의 신아동맹단을 결성했습니다. 사진을 찍은 1918년에는 을 발행한 유학생 학우회에 가입했으니까 아마 그 무렵의 장면일 겁니다. 또 정노식은 1921년에는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에 가입해서 활동했습니다. 식민지 시기에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정노식은 해방 후 월북하여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정노식의 이력 가운데 흥미로운 대목은 1940년에 조선일보사에서 출판된 《조선 창극사》의 저자라는 점입니다. 판소리의 이론과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저술이 바로 정노식의 《조선 창극사》입니다.   저는 이 분야에 문외한이므로 정노식의 저술이 지닌 성격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 책의 장정이 너무 멋져서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한눈에 보더라도 당대 최고의 장정가 정현웅 화백의 솜씨입니다. 또 사회주의자의 국학 저술이라는 점이 흥미롭고 정노식의 학문적 배경과 역량이 무척 궁금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이처럼 멋진 책의 저자가 바로 저 위의 사진 속에 이광수, 진학문과 함께 있는 그 인물입니다.   사실 저는 진학문과 타고르의 만남에 동석한 의문의 C군이 혹시 정노식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마는 진짜 추정일 뿐 그렇다 할 마땅한 증거도 없고 아니라 할 증거도 못 찾았습니다.   ● ● ● ● ●   가만가만...... 타고르 얘기하다가 왜 또 여기까지 왔누...... 대체 타고르는 진학문에게 약속한 글을 보냈을까요? 과연 한국의 독자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잊지 않았을까요? 그걸 기다리느라고 1916년 7월의 역사적인 만남을 1917년 11월호에야 공개한 게 아닐까요?   궁금하죠? 궁금하면 오후까지 기다려 주세요. 아님 직접 을 찾아보시든가...... ㅋㅋㅋ 네 번째 글은 밥 먹고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름하여 !! 두둥~     1916년 7월 11일에 한국인 청년 진학문과 C군을 만난 타고르...... 그러고는 곧바로 요코하마에서 캐나다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 버린 타고르...... 타고르는 과연 진학문과 맺은 약속을 지켰을까요? 의 독자, 한국의 청년에게 시를 보내 왔을까요?   결과적으로 1917년 11월호에 실린 진학문의 에는 타고르에게서 글을 받았노라는 언급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역쉬~   만약 타고르가 정말 진학문에게든 최남선에게든 시를 보냈다면 그 우편물을 대서특필할 만도 한데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 보낸 것도 아닙니다. 으잉?   자자...,... 진학문은 1917년 11월호에 분명히 두 편의 글을 보냈고, 최남선은 권두 화보에 타고르의 사진을 실으면서 진학문의 글을 짜자잔~ 공개했습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막상 11호를 뒤져 보니 글이 두 꼭지가 아니라 세 꼭지...... 엄밀하게 따지자면 목차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무려 네 꼭지가 실려 있습니다. 타고르의 시도 한 편이 아니라 무려 네 편이나 실려 있습니다. 아...... 이건 또 뭔 소리인가요??   일단 진학문의 는 두 번째와 세 번째 포스트에서 간략히 살펴 보았습니다. 타고르와 방문객 23명 일행의 단체 기념사진이 실린 것도 의 맨 끝 부분입니다. 그런데 진학문은 또 하나의 글 를 보내왔다고 했잖아요? 요 글은 제목 그대로 타고르를 소개하는 네 페이지짜리 짤막한 글입니다.   그런데 의 후반부에는 타고르의 시 세 편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요......     위에서 보시다시피 《기탄잘리》의 일절, 《원정》의 일절, 《신월》의 일절...... 이렇게 세 토막입니다. 이 세 편의 시가 바로 한국어로 번역된 최초의 타고르 시입니다.   문제는 이 세 토막의 시를 번역한 주인공이 누구일까 하는 겁니다. 분명히 진학문의 글 안에 포함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막상 진학문이 이 세 편의 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진학문의 솜씨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세 편의 시는 앞의 본문과 매끄럽게 이어지거나 주석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대문호 소개를 앞세우고 대표작을 늘어놓은 모양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세 편의 시를 번역한 것은 의 편집자 최남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쨌거나 이 세 편의 시는 타고르가 보내기로 약속한 시가 아니겠죠?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냥 타고르의 대표적인 시집 세 권에서 한 토막씩 뽑은 것이니까요.   진짜 문제는 바로 그다음 페이지에 있습니다.   ■ 원래는 왼쪽의 영문시가 99쪽이고 오른쪽이 100쪽입니다만 편의상 좌우를 바꿔 놓았습니다. 앞의 사진은 오른쪽이 먼저고 이 사진에서는 왼쪽이 먼저입니다. 페이지가 넘어가서 보기 불편하므로 제가 바꿔 편집한 것 뿐입니다. ■   바로 이 두 페이지는 11호의 목차에서도 각각 별도의 꼭지로 처리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전체적인 순서로 보자면 (95~98쪽) → (99쪽) → (100쪽) → (101~107쪽)...... 이렇게 되는 겁니다.   는 [상역(上譯)]이라고 해서 앞 페이지의 를 번역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두었습니다. 그리고 총 23행의 시 바로 뒤에 여남은 줄의 설명이 붙어 있지요? 그게 바로 편집자의 주석입니다. 우선 궁금하니까 주석부터 먼저 볼까요?   이 글은 작년 시인이 동영(東瀛─동쪽 바다라는 뜻)에 내유하였을 적에 특별한 뜻으로써 우리 을 위하여 지어 보내신 것이니 써 인도와 우리와의 이천 년 이래 옛 정을 도타이 하고 겸하여 그네 우리네 사이에 새로 정신적 교호를 맺자는 심의에서 나온 것이라. 대개 동유(東留) 수개월 사이에 각 방면으로 극진한 환영과 후대를 받고 신문 잡지에게서도 기고의 간촉(懇囑)이 빗발치듯 하였건마는 적정(寂靜)을 좋아하고 충담(冲淡)을 힘쓰는 선생이 이로써 세속적 번쇄(煩瑣)라 하여 일절 사각(謝却)하시고 오직 금옥가집(金玉佳什)을 즐겨 우리에게 부치심은 진실로 우연한 것이 아니라 이 일 편 문자가 이렇듯 깊은 의사 있음을 알아 읽고 읽고 씹고 씹어 속속들이 참맛을 얻어야 비로소 선생의 바라심을 저버리지 아니할지니라.   아, 맞네요. 타고르가 보낸 시...... 지금 우리에게 흔히 라고 알려진 그 시가 바로 ...... 즉 로군요.   타고르 원작의 는 찬찬히 음미해 볼 가치가 있는 시입니다. 그렇지만 감상은 제 몫이 아니므로 원문과 새 번역까지 함께 소개한 좋은 글 하나를 링크해 두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 타고르의 한국 관련 두 편의 시   그런데 의문이 듭니다.   미국의 대학에 타고르의 원시가 남아 있고 그 원시에 타고르가 최남선에게 준 시라는 설명까지 붙어 있다고 하는데...... 과연...? 바쁘신 타고르가 미국에서 손수 시를 지어 한국에 보냈다...?? 그런데 최남선은 단지 한 구절 [특별한 뜻으로써 우리 을 위하여 지어 보내신 것이니]라는 한마디 말로 간단하게 넘겼다...??? 권두 화보에 타고르의 육필 편지를 소개한다든가 대대적인 특집을 편성하지 않고...???? 훗날 진학문도 최남선도 더 이상 타고르의 육필 시에 대해 두 번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과연 그렇게 보아도 좋을까요? 이상하잖아요?? 최남선이 쓴 저 한마디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나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을 위해 타고르가 시를 지어 보냈다는 말은 의례적인 진술에 가깝습니다. 역시 진학문 또는 최남선...... 아마도 최남선이 임의로 뽑아 번역했을 터입니다. 타고르의 뜻과 무관하게 말입니다. 다만 시의 내용으로 보건대 앞의 시 세 편과는 격을 달리해야 할 가치와 필요가 분명했을 뿐입니다.   좀 더 현실적인 추리도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는 타고르가 따로 지은 시가 아닌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슬쩍 언급한 동아일보사 블로그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이 시 또한 타고르의 또 다른 시집 《Fruit-Gathering》에 실려 있으니까요. 1916년에 출판된 이 시집은 [채과집], [과일 따기], [열매 모으기] 정도로 번역되는 모양입니다. 어쨌든 일본을 방문하기 직전에 이 시집이 이미 출판되었거든요...!!   ■ 타고르의 시와 관련된 오해들     의 글을 쓴 분은 을 분명히 확인했지만 동아일보사 블로그의 글은 미처 참조하지 못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타고르는 한국인에게 시를 지어 보내지 않았습니다. 만약 뭔가를 보냈더라도 그것은 이미 출판된 시집 《Fruit-Gathering》의 한 대목일 따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타고르는 진학문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기도 하고 안 지킨 것이기도 하며, 에 시를 보낸 것이기도 하고 안 보낸 것이도 합니다. (뭐, 쉽게 말해 시를 안 보냈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   이런이런...... 그럼 1917년 의 타고르 번역시 역시 1929년 의 상황과 매한가지였던 셈이군요.   다만 차이도 분명히 있습니다. 1929년 주요한의 번역은 훨씬 더 노골적인 오역을 겨냥했고 그 효과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쭉 지속되고 있습니다. 동방의 등불 코리아...... 그러나 진학문의 번역(사실상 최남선의 번역)은 은근하면서도 한국의 현실을 강렬하게 환기시켰으나 곧바로 잊히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타고르 시의 제목이 가 아니라 라는 것도 그러한 현상의 일부일 터입니다.   어쩌면...... 최초의 타고르 시 번역가 진학문이 잊힌 탓이 크지 않을까요?     먼저 시의 성격과 가치로 보자면 보다는 가 교과서에 실리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에 을 배울 때에도 뭔가 좀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고 시라는 게 너무 노골적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교과서로 배운 타고르 시는 (조금 과장하자면) 카프 시나 노동해방운동의 전위시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게 사실이었습니다. 은 그냥 정치시잖아요. 게다가 타고르의 동양 문제 인식에 대해서도 논란이 없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야겠지요.   ● ● ● ● ●   또 하나는 지난해 말에 타고르 번역시 문제를 놓고 영문학자 한 분이 계간지에 글을 발표한 적이 있고 을 비롯한 일부 언론 두어 곳에서 보도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분의 평론을 찾아 읽지 못했고 다만 기사로 보도된 요지만 파악했습니다. 그런데 기사만 놓고 봐서는 동아일보사 블로그에서 밝힌 내용과 차별화된 새로운 발견이라 보기 어렵더군요. 제가 굳이 그분의 평론을 찾아 읽지 않은 것은 그런 뜻에서 흥미가 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전에도 타고르 시의 번역 문제를 지적한 글이 두어 차례 인터넷에서 떠돈 적이 있었습니다. 위에서 제가 링크한 글 말고도 의미 있는 게시물이 두엇 더 있는데 어쩐 일인지 최근 들어 검색되지 않거나 열리지 않습니다. 요건 나중에 보충해 넣겠습니다만...... 학계 일부에서 어느 정도는 공감하고 확인된 얘기라는 뜻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충남대 고분자공학과 류주환 교수의 글이 아닐까 싶습니다.   ■ 타고르와 동방의 등불 문제 (→ 이 글은 어떤 때에는 잘 열리다가 어떤 때에는 안 열리는데 대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군요. 어찌어찌 잘하면 읽으실 수 있습니다. 특히 익스플러어를 아예 닫았다가 주소 http://kenji.cnu.ac.kr/juwhan/tagore-2008.htm 로 접근하면 또 열려요. 거참......)   어쨌거나 진학문에 관한 포스트를 쓰면서 이런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좀 더 학술적으로(쉽게 말해 논문이라는 형식으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한 가지 더...... 에 번역되어 실린 20행에 이런 구절이 보입니다.   고요한 동방(洞房)의 문이 열리며   여기에서 동방(洞房)이란 침실을 뜻합니다. 동방(東方)이 아닙니다. 왼쪽의 원문과 대조해 보면   The door has been opened in the lonely chamber   아예 원문을 쭉 한번 훑어보시렵니까?   앞에서 링크한 몇몇 글 말고도 이글루스 초록불 님의 초록불의 잡학다식 에도 참고할 만한 자료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미국 USC(남캘리포니아 대학)의 디지털 아카이브에 공개된 자료 한 건이 보입니다.     이 자료의 본래 출처가 어디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래쪽에 주석으로 붙은 설명은 1916년이 아니라 나중에 자료 수집 과정에서 기록된 것이 분명합니다. 최남선의 이름을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건 한국쪽 자료를 확인한 뒤에 덧붙인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원문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거시기한 자료일 뿐입니다.   이 자료와 함께 에 실린 번역을 나란히 소개합니다. 최남선의 번역(아마 진학문의 번역이 아닐 겁니다)을 보자면 타고르의 시를 이렇게도 번역할 수도 있구나 싶습니다.   THE SONG OF THE DEFEATED My Master has asked of me to stand at the roadside of retreat and sing the song of the Defeated, For she is the bride whom He woos in secret. She has put on the dark veil, hiding her face from the crowd, the fewel glowing in her breast in the dark. She is forsaken of the day, and God's night is waiting for her with its lamps lighted and flowers wet with dew. She is silent with her eyes downcast; she has left her home behind her, from where comes the wailing in the wind. But the stars are singing the love song of the eternal to her whose face is sweet with shame and suffering. The door has been opened in the lonely chamber, the call has come; And the heart of the darkness throbs with the awe of the expectant tryst.   —Rabindranath Tagore. This poem is written on Korea by the famous Hindu poet and teacher upon the request of Mr. Choy Nam Sun, the persistent Korean publicist and leader among Koreans. Mr. Tagore shows through this poem undoubtedly his heart-felt sympathy to Korea, as well as his keen insight into the real situation of her, in shame and in disgrace. (* 디지털 아카이브 주석: This poem was written was written in 1918 on Korea by the famous Hindu poet and teacher uprm the request of Choy Nam Sun, the profound Korean scholar and author.)   쫓긴 이의 노래   주(主)께서 나더러 하시는 말씀 외따른 길가에 홀로 서 있어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라시다. 대개 그는 남모르게 우리 님께서 짝 삼고자 구하시는 신부일세니라. 그 얼굴을 뭇사람께 안 보이려고 검은 낯가림(面紗)으로 가리었는데 가슴에 찬 구슬이 불빛과 같이 캄캄하게 어둔 밤에 빛이 나도다. 낮(晝)이 그를 버리매 하나님께서 밤(夜)을 차지하시고 기다리시니 등(燈)이란 등에는 불이 켜졌고 꽃이란 꽃에는 이슬(露) 맺혔네. 고개를 숙이고 잠잠할 적에 두고 떠난 정다운 집 가로서 바람결에 통곡하는 소리 들리네. 그러나 별들은 그를 향하여 영원한 사랑의 노래 부르니 괴롭고 부끄러 낯 붉히도다. 고요한 동방(洞房)의 문이 열리며 오라고 부르는 소리 들리니 만날 일 생각하매 마음이 조려 어둡던 그 가슴이 자주 뛰도다.           이 글은 작년 시인이 동영(東瀛─동쪽 바다라는 뜻)에 내유하였을 적에 특별한 뜻으로써 우리 을 위하여 지어 보내신 것이니 써 인도와 우리와의 이천 년 이래 옛 정을 도타이 하고 겸하여 그네 우리네 사이에 새로 정신적 교호를 맺자는 심의에서 나온 것이라. 대개 동유(東留) 수개월 사이에 각 방면으로 극진한 환영과 후대를 받고 신문 잡지에게서도 기고의 간촉(懇囑)이 빗발치듯 하였건마는 적정(寂靜)을 좋아하고 충담(冲淡)을 힘쓰는 선생이 이로써 세속적 번쇄(煩瑣)라 하여 일절 사각(謝却)하시고 오직 금옥가집(金玉佳什)을 즐겨 우리에게 부치심은 진실로 우연한 것이 아니라 이 일 편 문자가 이렇듯 깊은 의사 있음을 알아 읽고 읽고 씹고 씹어 속속들이 참맛을 얻어야 비로소 선생의 바라심을 저버리지 아니할지니라.     ─ 11호, 신문관, 1917년 11월호, 100면.   ● ● ● ● ●   마지막으로 타고르의 일본 방문 횟수는 총 5회입니다. 세 번이나 네 번이라는 설명도 있고 다섯 번이라는 설명도 있는데, 그것은 1929년에 잇달아 두 차례 방일했기 때문에 빚어진 혼선입니다. 그나마 한국의 문헌이나 인터넷 자료에서는 타고르가 대체 몇 차례나 일본을 방문했는지 거의 찾을 수 없습니다. 또 1929년 이 깜짝 등장했을 때의 정황도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결론적으로 타고르가 한국을 방문할 생각이 있었지만 신병 문제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일제의 방해 때문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논증된 바 없는 듯싶군요.   타고르의 방일 기록은 정확한 날짜를 찾지 못해서 대강 연월만 정리해 둡니다.   첫 번째 방일: 1916년 5월 19일~9월 2일 두 번째 방일: 1917년 1월~2월 세 번째 방일: 1924년 6월 네 번째 방일: 1929년 3월 다섯 번째 방일: 1929년 5월~6월       그러고 보니 1920년대에 아인슈타인도 한국을 방문할 뻔했고 타고르도 한국을 방문할 뻔했지만 둘 다 오지 못했군요. 아인슈타인과 타고르가 함께 찍은 사진이 눈에 띄어 한번 올려 봅니다. 1930년 7월 13일 베를린에서 만났을 때 사진이라 합니다.   ● ● ● ● ●   어쨌거나 타고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고 진학문 이야기도 아직 멀었군요. 타고르 이야기는 오천석, 김억, 정지용, 한용운으로 쭉 이어져야 해서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건 조금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진학문에게 돌아가 보죠. 에효효~     ■ 한 가지를 더 덧붙여 둡니다. 원시 가 8행의 시로 소개되었지만 사실은 6행입니다. 번역 이전에 이미 부주의하게 소개된 셈입니다.    1916년 7월 요코하마의 산케이엔(삼계원)에서 타고르를 만난 스물두 살의 진학문...... 진학문은 대체 어떤 청년이고 어쩌다 그 자리에 끼었던 걸까요? 진학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은 데에다가 청년 시대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진학문이 타고르와 만난 이야기나 타고르를 처음 소개한 사정조차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것을 보면 대강 알 만하죠. 진학문은 1894년 12월생인데, 만년에 남긴 회고에 의하면 서울 토박이입니다. 진학문은 지금의 명륜동에 해당하는 숭삼동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을 보면 이천 출신으로 되어 있어서 확실치 않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진학문도 자신의 가계나 집안에 대해서 이렇다 하게 남겨 둔 말이 별로 없습니다만 언뜻언뜻 비치는 말뜻호락호락한 집안은 아닌 듯싶습니다. 자세하지는 않지만 육당 최남선 집안과는 가깝지는 않으나 혼인으로 얽혀 있다고 하네요. 또 인천 출신의 극작가로 열 살 아래인 진우촌이 진학문의 재종손이라는 것 정도...... 첫 번째 유학 시절 진학문이 일본으로 처음 유학 길에 오른 것은 열세살 때인 1907년입니다. 입학시험을 치러 게이오의숙 보통부에 입학한 것은 이듬해인 1908년입니다. 하지만 가세가 기운 탓에 학비가 끊겨 1909년에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어린 나이였고 짧은 유학 시절이었지만 그사이에 진학문은 아주 뜻깊은 흔적을 남겨 두었습니다. 일본 유학생들이 발행한 잡지에 몽몽(夢夢)이라는 필명으로 두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1907년 5월에 발표된 과 1909년 12월에 발표된 의 작가가 바로 진학문입니다. 과 은 근대적인 단편소설의 선구로 일찌감치 주목받은 작품입니다. 다만 몽몽의 정체가 진학문이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실은 진학문이 겨우 열세 살, 열다섯 살 때 쓴 소설인데 말이죠. 이 층 위 남향한 요조오한이 함영호(咸映湖)의 침방, 객실, 식당, 서재를 겸한 방이라. 장방형 책상 위에는 산술 교과서라 수신 교과서라 중등 외국지지(地誌) 등 중학교에 쓰는 일과 책을 꽂은 책가(冊架)가 있는데, 그 옆으로는 동떨어진 대륙 문사의 소설이라 시집 등의 역본(譯本)이 면적 좁은 게 한이라고 늘여 쌓였고 신구간의 순문예 잡지도 두세 종 놓였으며 학교에 다니는 책 보자는 열십자로 매인 채 그 밑에 벌였으며 벽에는 노역복을 입은 고리키와 바른손으로 볼을 버틴 투르게네프의 소조(小照)가 걸렸더라. 1909년에 발표된 의 첫 대목입니다. 고리키와 투르게네프의 초상이 걸린 사 첩 반짜리 작은 방...... 아마 열다섯 살 진학문이 머문 하숙방 풍경에 가까우리라 짐작됩니다. 뻔한 하숙방 모습이지만 고리키와 투르게네프의 얼굴이 특히 인상적이죠? 이 방의 풍경은 훗날의 진학문에게도 오래도록 기억되었을 터입니다. 그건 그렇고...... 다시 서울에서 노닥거리게 된 진학문은 1909년 보성중학에 입학했습니다. 진학문의 말에 따르면 동네에 있던 보성중학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놀다가 입학했다는군요. 그때 알게 된 사람이 운동부 축구 선수 변영태...... 수주 변영로의 둘째 형입니다. 영문학자의 길을 걸은 변영태는 훗날 국무총리를 지내기도 했죠. 그렇게 해서 1912년에 보성중학을 마친 진학문은 경남 진주에서 잠시 교사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진학문이 진주에 머문 것은 고작 몇 달 정도로 보이는데 어떤 인연으로 갑자기 진주까지 내려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유학 시절 열아홉살이 된 1913년에 진학문은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번에는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는데 1914년에 또 뛰쳐나왔습니다. 최고의 문학 학부요 영문학의 메카라 일컬어진 와세다 영문과였는데 왜 또......? 아마 학비 문제도 걸리긴 했을 텐데 아무래도 영문학이 맘에 안 들었나 봅니다. 1914~1915년에 진학문이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1916년에 이번에는 도쿄외국어학교 러시아문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고리키와 투르게네프의 나라...... 와세다를 뒤쳐 나올 정도면 보통 열정이 아닌 게 틀림없습니다. 어째 폼새를 보아 하니 한 번으로 끝날 일도 아니겠죠? 바로 그 무렵...... 학교를 옮길 무렵 놀면서 진학문은 유학생 잡지 에 글을 발표했습니다. 이번에는 번역입니다. 러시아 작가 코롤렌코, 안드레예프, 자이체프, 체호프의 단편소설을 잇달아 번역했고 투르게네프의 시를 번역했습니다. 진학문은 러시아 문학에 흠뻑 빠져 있었던 셈입니다. 진학문이 번역해 내놓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최초의 러시아 단편소설 번역입니다. 진학문이 타고르를 만난 1916년 7월 11일...... 그때는 바로 진학문이 도쿄외국어학교 학생 시절이었고 러시아 문학에 깊이 취해 있을 때였습니다. 잠시 미뤄 둔 문제입니다만...... 간다(神田)의 하숙방 시절부터 진학문의 절친은 동갑내기인 해공 신익희입니다. 또 최남선의 아우이자 역시 진학문과 동갑내기인 최두선도 함께했습니다. 타고르를 만난 두 명의 한국인 가운데 하나인 C군이란 어쩌면 신익희나 최두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에서 제가 슬쩍 언급하고 만 정노식까지....... 왜 이리 C가 많은지 원......  인생의 우연 막상 진학문은 도쿄외국어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습니다. 1918년에 갑자기 자퇴해서는 귀국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최남선이 꼬드겼습니다. 마침 에 취직 자리가 났으니 서둘러 들어오라는 것....... 사실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당대 최고의 청년 명사 최남선이 마련해 놓은 자리인 데에다가 1910년대에 단 하나밖에 없는 한국어 중앙 일간지 였으니까요. 진학문은 냉큼 귀국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네요. 돌아와 보니 마련해 놓았다는 자리가 날아가 버린 겁니다. 무슨 일인고 하니...... 최남선이 측의 부탁을 받고 주선한 그 기자 자리라는 게...... 멀쩡하게 공부하고 있던 유학생을 불러들인 자리라는 게...... 실은 천풍 심우섭이 퇴직하기로 되어 있던 자리였습니다. 심우섭은 기자였고 연재소설을 맡기도 했거든요. 심우섭...... 심훈의 맏형 심우섭 말입니다. 휘문고보 1회 졸업생이자 이광수의 《무정》의 빛나는 조연 신우선 말입니다. 앞의 포스트에서 본 그 개구쟁이 표정의 심우섭이 중국으로 유학 가겠다 해서 기자 겸 연재소설가 자리를 급급히 채운 건데...... 그 심우섭이 신문사를 그만두지 않겠다고 한 거죠. 아니아니...... 실은 그만두지 못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정인즉...... 심우섭이 한창 연애하고 있던 모 여성을 떼어 버리지 못한 사태...... 하여간 심우섭은 타고난 바람둥이였을 공산이 큽니다. 그 여성은 아마도 평양 기생으로 이름 높은 김초월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심우섭과 김초월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곳을 참고. 얼핏 봐도 《무정》을 안 떠올릴래야 안 떠올릴 수가 없는 사태...... 어쨌거나 문제는 진학문이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겁니다. 이런 사태를 업계 전문 용어로는 [나가리]라 부르기도 하죠. ㅉㅉ 심우섭 때문에 당황한 최남선과 측은 어쩔 수 없이 진학문을 본사라 할 수 있는 에 입사시켰습니다. 는 한일병합과 함께 진행된 대대적인 언론 통폐합의 산물인 초대형 관제 언론기관이요 일본어 일간지입니다. 실은 라는 것도 의 자매지요 하위 부서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 쳐도 진학문이 낙하산이 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에서 천대를 받은 진학문은 얼마 못 버티고 사표를 던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진학문도 보통내기는 아닌 것이...... 일본에서 요시노 교수라는 이를 찾아가 추천서 두 장을 어렵잖게 받아서는 오사카로 향했습니다. 과 의 문을 두드린 겁니다. 두 신문 모두 본사가 도쿄가 아니라 오사카였습니다. 진학문은 인기가 더 좋은 을 먼저 찾아갔는데 마침 편집국장이 자리를 비운 탓에 에 취직되었습니다. 그러고는 경성지국으로 발령을 받아서 다시 귀국 길에 올랐습니다. 그게 진학문이 스물네 살 때 벌어진 일입니다. 이런 와중에도 진학문은 또 몇 편의 중요한 글을 발표했습니다. 1917년에는 에 이라는 중요한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최남선의 에는 모파상의 를 번역해 내놓았습니다. 역시 한국에서 처음으로 번역된 모파상 소설입니다. 진학문은 이때부터 순성(舜星)이라는 호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에는 아주 파격적인 번역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우섭이 연재한 라는 번역소설에 바로 뒤이어 자리를 넘겨받았거든요. 제목은 구태의연하기 짝이 없는 《홍루》...... 하지만 놀랍게도 원작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춘희》를 번역한 소설입니다. 동백꽃을 들고는 파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 일류 매춘부 마르그리트의 이야기 말입니다. 소설 《홍루》는 불란서의 이름 높은 소설가 뒤마 씨의 걸작으로 세계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수백만 남녀의 눈물을 흘리게 한 유명한 소설이라. 달 같고 꽃 같은 곽매경의 다정다한한 일생의 기록을 보고 누구라서 어여쁘다고 칭찬하지 아니하며 가엾다고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리오. 자고로 미인은 박명하다 하지마는 매경이처럼 박명한 사람은 세상에 드물리라. 그 고운 얼굴에 그 좋은 재주에 그 좋은 명성에 천하 사람의 사랑을 한 몸에 모으면서 사랑하는 남자를 위하여 갖은 고락을 다 겪다가 마침내 이역의 원혼이 되니 그의 남긴 책 한 권만 그의 기념의 되어 사랑하던 남자의 아홉 구비 창자를 끊도다. 이 미인 매경의 파란 많고 층절 많은 일생이 대문호 뒤마 선생의 신령한 붓 끝에 이슬이 되어 세계적 걸작 《홍루》 일 편이 되고 이것이 다시 청년 문사로 명성이 쟁쟁한 순성 진학문 군의 유창하고 염려한(─아름답고 고운) 붓을 거쳐 조선 문단에 옮겨 심게 되니 실로 새로 일어나는 조선 문단의 다행일뿐더러 애독자 여러분의 차마 놓지 못할 애독물이 될 것이라. 대환영 대갈채를 받던 천풍 군의 《산중화》가 끝나기를 기다려 본지상에 연재될 것이오니 독자 여러분은 잠깐 기다리소서. 눈치 채셨겠지만 곽매경이라는 여성이 바로 마르그리트......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소설이 번역된 것도 처음이지만 고급 매춘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소설도 물론 처음이었습니다. 하여간 진학문은 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라? 진학문이 설마 고리키와 투르게네프를 배신하고 프랑스 문학으로 돌아선 걸까요? 붙박이 결혼과 떠돌이 운명 진학문이 의 경성지국 기자가 되어 보란 듯이 돌아온 일은 해프닝에 가까웠지만 진학문에게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 출입 기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청와대 출입 기자인 셈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감히 총독과 독대도 가능합니다. 자칭 조선총독부 출입 한국인 기자 1호입니다. 그사이 삼일운동이 일어났고 진학문에게도 이런저런 변화가 있었습니다. 진학문이 스물여섯 살이 된 1920년 3월에 앞에서 말한 미모의 부인 미야자키를 진씨로 창씨개명시켜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4월에 창간된 에 뛰어들어 초대 논설위원, 정치경제부장 겸 학예부장을 맡았습니다. 에 염상섭을 끌어들인 것도 진학문입니다. 진학문은 일본인 부인과 평생 동안 금슬 좋게 살았습니다만 다른 데에서는 영 그렇지 못했습니다. 역시 두세 달 만에 그만두었거든요. 와세다 대학, 도쿄외국어대학, 신문 기자...... 무엇 하나 제대로 끝을 보지는 못했죠. 그나마 졸업했다는 보성중학교도 왠지 의심스러워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부인과는 그 뒤로 55년 동안 내내 함께했습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진학문의 부인 진수미는 결혼 후 55년 동안 내내 떠돌이와 함께해야 했습니다. 를 그만두고 뛰쳐나온 진학문은 이번에는 어디로 떠돌아다니기로 한 걸까요? 갓 차린 신혼살림에다가 창간 주역 진학문....... 진학문은 왜 갑자기 를 뛰쳐나왔을까요? 스물여섯 살의 번역가 진학문은 또 어디로 떠나고 싶었던 걸까요? 열다섯 살 도쿄 유학 시절 간다의 사 첩 반짜리 하숙방에 고리키와 투르게네프의 초상을 붙여 놓았던 번역가 진학문...... 진학문은 스물두 살 적에 타고르를 만났고, 때로는 모파상이나 마르그리트에게, 때로는 후타바테이 시메이에 빠졌지만 끝내 달려가고 싶은 곳은 모스크바였습니다. 진학문이 꿈꾼 것은 타고르의 나라도, 셰익스피어의 나라도 아니라 바로 고리키와 투르게네프의 나라였습니다. 의문의 방랑길 진학문은 우선 일본으로 건너가 상하이를 거쳐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모스크바에 갈 계획를 세웠습니다. 진학문은 상하이의 불란서 조계에서 머물며 조소앙, 홍명희와 어울렸습니다. 일찍이 유학 시절의 친구들입니다. 그리고 부친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중국인 유력 인사의 도움으로 해삼위에 들어갔습니다. 상하이에서 인도인 호위병이 지키는 저택에 살았다는 중국인 유력자는 쑨원의 광둥 정부 국무원 총리 돤치루이(段祺瑞)인데 위안스카이(원세개)와도 교분이 깊었습니다. 스물여섯 살의 진학문이 돤치루이의 저택을 방문하고 환대를 받을 정도라...... 대체 진학문의 부친이 누구이고 어떤 집안인지 궁금합니다만 진학문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어쨋거나 노잣돈을 두둑이 얻은 진학문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무사히 들어가서 이시영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모스크바로 가노라는 진학문의 말에 이시영이 펄쩍 뛰면서 겁을 잔뜩 준 모양입니다. 한마디로 언제 홍마적(紅馬賊)이 뛰쳐 나오고 어디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그래서 모스크바로 가서 러시아 문학에 흠뻑 취해 보리라 결심했던 진학문은...... 그냥 돌아와 버렸습니다. 으잉? 뭐?? 뭣이라??? 이건 또 뭐죠? 이상하죠? 열세 살에 꿈꾸기 시작해서 스물여섯 살에 겨우 모스크바의 코앞까지 도착했는데 거기에서 되돌아가다니...... 아닌 게 아니라 진학문의 모스크바행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아직 조심스러운 대목이기는 합니다만 학계 일부에서는 진학문의 행적이 사실상 조선총독부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된 밀정 노릇이 아니었을까 의심하기도 합니다. 얼마 뒤 다시 상하이에 건너갔을 때에도 진학문은 안창호, 이광수와 만났고 이동휘, 이시영의 밀명을 받아 돌아왔다 합니다. 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를 상하이로 끌어내라는 것...... 진학문의 진술에 의하면 박영효는 진학문의 부친과도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밀명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박영효가 부친의 주량을 익히 알고 있었다는 것....... (진학문은 이번에도 요 대목에서 입을 닫았습니다. 그래서 부친이 대체 누구길래......??) 적어도 상하이에 망명한 이광수의 무사 귀국을 주선한 막후 장본인이 바로 진학문이라라는 것은 꽤 알려져 있습니다. 임시정부 요인 이광수는 실제로 국경을 넘어 서울로 무사히 걸어들어 올 수 있었고 감옥으로 직행하지도 않았죠. 그뿐만 아니라 조선총독과 면담하기까지......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이광수가 귀국하자마자 재혼을 기다리고 있던 허영숙의 협력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따지고 보자면 일본 유학 시절에 허영숙을 놓고 이광수와 진학문이 한때 겨루기도 했으니 인연 치고는 참 거시기합니다. (하기야 뭐 유학생 사이에서 염문으로 엎치고 덮친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만......예컨대 최승구와 나혜석, 나혜석과 김우진, 이광수와 나혜석, 나혜석과 허영숙, 이광수와 허영숙, 허영숙과 진학문....... 뭐 대충 이딴 식......) 어쨌든 한 번은 서백리아(시베리아)로 떠난 진학문...... 과연 진학문은 고리키와 투르게네프를 꿈꾼 것일까요? 아니면 단지 임시정부 요인을 염탐한 밀정이었을까요? 비운의 백자서이(伯刺西爾) 속내를 알 수 없는 방랑에서 돌아온 진학문은 이광수 컴백의 배후이기도 했지만 최남선 컴백의 일등공신이 되기도 했습니다. 1921년 10월에 가석방된 최남선은 진학문과 손잡고 1922년 9월에 시사 주간지 의 발행 허가를 얻어 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최남선과 진학문의 공조는 1924년 3월 창간에 이르기까지 쭉 이어졌습니다. 1922~1924년 무렵에 드디어 진학문은 다시 번역가로 돌아왔습니다. 1922년 1월부터 일본 근대소설의 개척자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소설을 이라는 제목으로 번안해서 에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번역이냐 하면 완전한 번역도 아니요 그러면 창작이냐 하면 물론 창작도 아니다. 밥도 아니요 떡도 아닌 속칭 버무리. 밥데기가 보면 비웃겠고 떡 장수가 보면 노하겠으나 아직 비웃음을 받거나 노함을 받을 만한 자격도 없는 초대...... 그해 8월부터는 고리키의 를 연재했습니다. 는 고리키의 소설이 신문에 연재된 효시입니다. 사실 진학문은 딱 한 달 전인 1922년 7월에도 이라는 잡지에 고리키의 단편소설을 번역해서 내놓은 바 있습니다. 염상섭이 《만세전》의 원형인 《묘지》를 처음 발표한 바로 그 잡지의 꼭 그 호입니다. (→ 최남선의 와 염상섭의 《만세전》 참고)     그런가 하면 과 시절에 염상섭, 현진건, 변영로를 끌어들인 것도 바로 진학문입니다. 특히 에 빼어난 번역 작품이 여럿 실렸던 것은 최남선도 최남선이려니와 진학문의 공이 컸으리라 짐작됩니다. 진학문 자신도 에 모파상의 소설을 번역해서 내놓기도 했고요. 그러고 보자면 모스크바를 포기한 진학문은 다시 번역가로...... 고리키 번역가이자 모파상 번역가로 되돌아온 듯싶습니다. 하지만 1927년 4월 10일 오전 10시 경부선 열차...... 진학문 일가가 몸을 실었습니다. 진학문, 부인 진수미, 그리고 어린 딸 진기(秦奇)가 향한 곳은 도쿄도 아니요 상하이도 아니요 모스크바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백자서이(伯刺西爾)...... 지구 반대편에 있다는 브라질이었습니다. 브라질이라니...... 1927년 4월의 브라질이라니...... 진학문이 대체 왜 브라질 이민을 떠났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한때 청진동 학교 앞에서 [문화상회]라나 하는 문방구를 열었다가 쓴맛을 보기는 했지만 느닷없이 브라질로 떠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브라질로 왜 떠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브라질에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도 중요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진학문에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꼭 일 년 만인 1928년 4월 7일 오후 7시 40분 기차로 다시 서울에 내렸다는 사실...... 그런데 이번에는 진학문과 부인 단 둘이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일 년 전 같은 곳에서 함께 떠난 어린 딸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브라질에서 딸이 전염병에 걸리는 바람에 그곳에 묻고 돌아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문(文)’ 자를 뗀 곳 브라질에서 돌아온 진학문은 계명구락부에 드나들기도 하고 이런저런 재계 조직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만 뚜렷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진학문의 행적이 다시 드러난 것은 십여 년 뒤인 1930년대 중반부터입니다. 그 무렵 진학문의 면면은 길게 설명하느니 《친일인명사전》을 요약하는 편이 수월할 것 같습니다. 진학문은 1934년 관동군 촉탁, 만주국 협화회 촉탁을 시작으로 만주국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1936년에는 고문을 지냈습니다. 진학문은 이번에도 염상섭을 만주로 불러들였고 염상섭은 편집국장을 맡았습니다. 최남선은 머잖아 만주 건국대학 교수로 부임할 참이었습니다. 최남선, 진학문, 염상섭의 질긴 인연이 끝내 만주국까지 이어지고 만 셈입니다. 진학문은 1937년부터 만주국의 고위 관료로 등용되고 만주 최대 조직인 만주국 협화회 간부로 활동했습니다. 진학문은 친선 사절의 사명을 띠고 유럽을 순방했고 독일과 이탈리아 정부에서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마흔네 살 때 파리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진학문의 멋진 모습(아래 사진)은 기실 만주국의 수뇌부가 유럽 순방 길에서 잠시 낭만에 젖은 여유로운 장면 가운데 하나일 따름입니다. 1940년에 들어서면서 진학문의 이름은 하타 마나부(秦學)로 바뀌었습니다. 창씨개명을 하자면 대개 한 글자를 더 집어넣곤 했는데 진학문은 오히려 맨 끝의 ‘문(文)’ 자를 떼어 버렸습니다. 부인의 성씨를 의식해서였을까요? 진학문의 명함도 여러 장으로 늘어났습니다. 그중에서 자본금 5천만 원이라는 만주생활필수품 주식회사의 상무이사에 취임한 사실이 눈에 띕니다. 처음에는 만주국의 본사에서,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경성지사로 내려와서 전시 물자의 관리, 공급, 통제를 지휘했다는 뜻입니다. 시간을 한참 건너뛰어 만주국 장교 출신의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3년에 전경련 부회장에 오른 재계 인사 진학문의 앞길은 그렇게 결정되어 갔습니다. 그것이 시대의 비극이라면 다른 한편에서는 진학문의 비극도 되풀이되었습니다. 진학문과 진수미 부부는 1941년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진신일(秦新一)? 하타 신이치(秦新一)? 어떻게 읽어도 상관없습니다. 어떻게 읽어도 아들이었으니까요. 브라질에서 딸을 잃고 돌아온 뒤 13년 만에 얻은 아들...... 그 아들을 1944년에 그만 또 잃고 말았습니다. 이미 진학문의 나이 쉰...... 악몽이 거듭될 때마다 가위에 눌리던 시절의 일이었습니다. 운명의 길 1945년 8월에 해방이 되고 보니 진학문이 설 자리가 마땅할 리 없었습니다. 진학문은 도망치듯이 일본으로 건너가야 했습니다. 반민특위가 바짝 죄어 오기도 했거니와 어차피 부인을 생각해서라도 일본이 더 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학문과 진수미 부부는 1948년 8월 일본으로 떠났는데 그 앞뒤의 행적은 분명치 않습니다. 진학문의 재기는 이승만 정권에서 외무부 장관에 오른 변영태의 도움을 통해 다시 재계 인사로 복귀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왕년에 보성중학교 운동장에서 함께 뽈 차던 그 변영태 말입니다. 그 끝머리가 해방 후 한국 최대의 재벌 조직인 전경련 부회장까지 이어진 셈이지요. 진학문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진학문의 만년 초상을 보노라면 타고르를 만나던 청년 시절의 눈빛을 도무지 떠올릴 수 없을 만치 너무나도 변했습니다. 고리키와 투르게네프를 꿈꾸었던 번역가 몽몽, 번역가 순성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까요? 또는 젊은 날의 진학문 초상에서 서백리아로, 백자서이로, 만주로, 일본으로 떠돌지 않으면 안 되었던 불운한 번역가의 운명을 읽어 낼 수 있을까요? 간다 거리의 하숙방에서 고리키와 투르게네프의 세계를 열망한 번역가를 브라질과 만주에서 헤매는 풍운아로 만든 운명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끝)    
1329    [또 詩공부]- 詩습작품 자기 키만큼 쌓여져야... 댓글:  조회:4578  추천:0  2016-04-10
[ 2016년 04월 08일 07시 33분 ]       시(詩) 제3강...시작법(詩作法)의 실제(實際)1/김용진     우선 시창작에 있어서 선행되어야 할 조건은 작품의 핵심이자 정신이 되는 시상(詩想)과 주체이다. 이것은 시인이 사물을 바라보았을 때 일어나는 감정의 반응, 그리고 강렬한 감수 성의 순화를 거쳐서 얻어지는 것이며 그렇게 되자면 대상의 본질을 파헤쳐 그 내면에 잠재 된 새로운 이끌어 낼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시창작의 기본이 된다. # 남의 작품을 많이 읽어라. 시인은 온갖 체험을 맛보아야 한다. 그러자면 남의 체험도 자기 체험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남의 체험을 자기의 것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의 기초가 바로 독서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남의 체험을 자기 체험으로 축적시키고 나아가 자기의 직접체험을 시도할 수 있는 기 본이 되며 자기의 생각을 깊고 넓게 하는 작업이다. 특히 시창작을 위한 독서는 남의 시를 많이 읽으므로서 그 작품이 노래하고 있는 시인의 마 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더불어 사물이 시인의 심성에서 어떻게 용해되어 시적 형상화로 표출된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많은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메모하는 습관을 길러라. 무심코 바라보면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저 그런대로 아무 감흥을 느끼게 하지 못할 것 이다. 그러나 들에 피어 있는 보잘 것 없는 작은 풀꽃 한 줄기나, 하늘을 무심코 떠 다니는 그름 한 점에 내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실어보면, 거기에서 남다른 감흥과 느낌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때를 놓치지말고 그 생각을 메모해 보라. 그 기록들이 모이고 쌓이면 남다른 생 각과 느낌으로 나타나는 한 편의 작품으로 형상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때로 미치광이처럼 혼자 흥얼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감흥에 심취되어 덩실덩 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춤을 추기도 한다. 그 것이 바로 자기 창조를 기뻐하는 시인의 마음 이요. 시에 몰두하는 시인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 많이 써 보라. 시창작의 기초는 모방에서 시작된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창작의 전제 조건은 선행된 결과에서 재창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쯤 다음과 같은 의아심 을 가지게 된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수많은 시인들이 사물을 시적으로 형상화 시켜서 표출해낸 그 많은 작 품들이 있는데 내가 새삼스럽게 지금 무엇을 쓰자는 것일까? 하고--그런데 그러한 생각은 극히 어리석은 생각으로 일축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흐르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정도 달라지고, 또한 사물을 바라보는 시야도 새로워지기 마련이다. 마 치 이세상 사람들은 각기 자기 얼굴 모습이 다르듯이 또한 생각하는 바도 제각각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어리석은 질문은 해소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위에서 시창작은 모방에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러면 그 실제의 예를 박목월의 라는 작품을 기본으로 정해 놓고 예시해 보기로 하자. *원작 산사(山寺)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아이는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 삼 만리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모방작 산사(山寺) 목탁을 똑딱똑딱 치다가 마음이 치쳐 늙은 스님네는 산을 응시했다. 어린 동승은 청산처럼 침묵속에 앉았는데 마음 깊은 억겁의 길 타는 단풍불 속에 가을이 탄다. 위의 예시에서 원작과 모방작을 비교해 보면 시창작의 기초가 되는 것은 바로 모방에서 시 작된다는 생각은 이해될 줄로 안다. 이와 같이 계속 수련을 통해서 작품을 쓰다가 보면 저 절로 자기가 착상해서 짓게되는 자기다운 작품을 얻게 될 것이다. 첫 술에 배가 불러질 수 없듯이 작품의 모양새를 갖추지 않았더라도 모래 속에서 자금을 얻어내듯이 꾸준한 수련의 과정을 지속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흙 속에서 옥을 찾듯 내 안 에서 보배스러운 내 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요. 옥은 갈고 닦는 수련을 거칠 때 그것은 값진 보석으로 남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창작의 진가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습작으로 인해 쌓인 원고지가 자기 키만큼은 쌓 여져야 한다는 말은 또한 다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   321. 다짐 / 홍해리                     다짐   홍 해 리           적당히 게으르게 살자 하면서도, 네 앞에 오면 그게 아니고. 조금은 무심하게 살자 하면서도, 네 앞에 서면 그게 아니고.     홍해리 시집 중에서               홍해리(洪海里) 연보     충북 청원 출생.   1964년 고려대학교 영문과 졸업.   1969년 시집 출간.   1975년 시집 출간.   1976년 시집 출간.   1977년 시집 출간.   1980년 시집 출간.   1983년 시선집 출간.   1987년 시집 출간.   1989년 시집 출간.   1992년 시집 출간.   1994년 시집 출간.   1996년 시집 출간.   1998년 시집 출간.   2006년 시집 , 출간.   2008년 시집 , 시선집 출간.   2010년 시집 출간.   현재: 월간『우리詩』대표 및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장    
1328    [앞집 할배 배나무에 약치는 날 詩 한갭]- 거미 댓글:  조회:4336  추천:0  2016-04-09
거미 - 김수영(1921~68)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설움은 삶의 근원에 있는 비애를 감지할 때 생겨난다. 그것은 고통의 정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동반한다. 그 안에 유토피아 욕망이 있고, 유한자(有限者)로서의 인간에 대한 성찰이 있다. 김수영 시인은 그것과 “너무나 자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고 고백한다. “바라는 것”이 있었으나, 그의 현실적 생애는 그것들을 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으스러진 설움”이 그의 시를 키웠다. 생계의 반대편에서 그는 구할 것을 구한 것이다.  
1327    ... 댓글:  조회:4422  추천:0  2016-04-08
시(詩) 제3강...시작법(詩作法)의 실제(實際)1/김용진     우선 시창작에 있어서 선행되어야 할 조건은 작품의 핵심이자 정신이 되는 시상(詩想)과 주체이다. 이것은 시인이 사물을 바라보았을 때 일어나는 감정의 반응, 그리고 강렬한 감수 성의 순화를 거쳐서 얻어지는 것이며 그렇게 되자면 대상의 본질을 파헤쳐 그 내면에 잠재 된 새로운 이끌어 낼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시창작의 기본이 된다. # 남의 작품을 많이 읽어라. 시인은 온갖 체험을 맛보아야 한다. 그러자면 남의 체험도 자기 체험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남의 체험을 자기의 것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의 기초가 바로 독서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남의 체험을 자기 체험으로 축적시키고 나아가 자기의 직접체험을 시도할 수 있는 기 본이 되며 자기의 생각을 깊고 넓게 하는 작업이다. 특히 시창작을 위한 독서는 남의 시를 많이 읽으므로서 그 작품이 노래하고 있는 시인의 마 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더불어 사물이 시인의 심성에서 어떻게 용해되어 시적 형상화로 표출된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많은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메모하는 습관을 길러라. 무심코 바라보면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저 그런대로 아무 감흥을 느끼게 하지 못할 것 이다. 그러나 들에 피어 있는 보잘 것 없는 작은 풀꽃 한 줄기나, 하늘을 무심코 떠 다니는 그름 한 점에 내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실어보면, 거기에서 남다른 감흥과 느낌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때를 놓치지말고 그 생각을 메모해 보라. 그 기록들이 모이고 쌓이면 남다른 생 각과 느낌으로 나타나는 한 편의 작품으로 형상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때로 미치광이처럼 혼자 흥얼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감흥에 심취되어 덩실덩 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춤을 추기도 한다. 그 것이 바로 자기 창조를 기뻐하는 시인의 마음 이요. 시에 몰두하는 시인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 많이 써 보라. 시창작의 기초는 모방에서 시작된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창작의 전제 조건은 선행된 결과에서 재창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쯤 다음과 같은 의아심 을 가지게 된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수많은 시인들이 사물을 시적으로 형상화 시켜서 표출해낸 그 많은 작 품들이 있는데 내가 새삼스럽게 지금 무엇을 쓰자는 것일까? 하고--그런데 그러한 생각은 극히 어리석은 생각으로 일축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흐르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정도 달라지고, 또한 사물을 바라보는 시야도 새로워지기 마련이다. 마 치 이세상 사람들은 각기 자기 얼굴 모습이 다르듯이 또한 생각하는 바도 제각각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어리석은 질문은 해소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위에서 시창작은 모방에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러면 그 실제의 예를 박목월의 라는 작품을 기본으로 정해 놓고 예시해 보기로 하자. *원작 산사(山寺)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아이는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 삼 만리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모방작 산사(山寺) 목탁을 똑딱똑딱 치다가 마음이 치쳐 늙은 스님네는 산을 응시했다. 어린 동승은 청산처럼 침묵속에 앉았는데 마음 깊은 억겁의 길 타는 단풍불 속에 가을이 탄다. 위의 예시에서 원작과 모방작을 비교해 보면 시창작의 기초가 되는 것은 바로 모방에서 시 작된다는 생각은 이해될 줄로 안다. 이와 같이 계속 수련을 통해서 작품을 쓰다가 보면 저 절로 자기가 착상해서 짓게되는 자기다운 작품을 얻게 될 것이다. 첫 술에 배가 불러질 수 없듯이 작품의 모양새를 갖추지 않았더라도 모래 속에서 자금을 얻어내듯이 꾸준한 수련의 과정을 지속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흙 속에서 옥을 찾듯 내 안 에서 보배스러운 내 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요. 옥은 갈고 닦는 수련을 거칠 때 그것은 값진 보석으로 남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창작의 진가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습작으로 인해 쌓인 원고지가 자기 키만큼은 쌓 여져야 한다는 말은 또한 다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   321. 다짐 / 홍해리                     다짐   홍 해 리           적당히 게으르게 살자 하면서도, 네 앞에 오면 그게 아니고. 조금은 무심하게 살자 하면서도, 네 앞에 서면 그게 아니고.     홍해리 시집 중에서               홍해리(洪海里) 연보     충북 청원 출생.   1964년 고려대학교 영문과 졸업.   1969년 시집 출간.   1975년 시집 출간.   1976년 시집 출간.   1977년 시집 출간.   1980년 시집 출간.   1983년 시선집 출간.   1987년 시집 출간.   1989년 시집 출간.   1992년 시집 출간.   1994년 시집 출간.   1996년 시집 출간.   1998년 시집 출간.   2006년 시집 , 출간.   2008년 시집 , 시선집 출간.   2010년 시집 출간.   현재: 월간『우리詩』대표 및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장    
1326    [또 詩공부]- 詩의 종류 댓글:  조회:5226  추천:0  2016-04-08
시(詩) 제2강...詩의 종류/김용진 詩의 종류 ●서정시(抒情詩) 1.주정시(主情詩) 감정(감각, 정조)을 주 내용으로 하는 시를 말한다.   ◎감각적인 시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이장희 ◎정조적인 시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이하생략 김소월의 2.주지시(主知詩) 지성(기지, 지혜, 예지)을 주 내용으로 한 모더니즘 시. 초현실주의 시. 심리주의 시와 같은 지적인 시를 말한다. ◎모더니즘 시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에 연기를 내 뿜으며 새로 두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러 나무의 근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민 채 한가닥 구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샐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내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 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김광균의 ◎초현실주의 시 가을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가을속의나는왼손잡이요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요. 이하 생략 이 상의 3.주의시(主意詩) 의지(저항의지, 긍정, 창조, 의지)를 주 내용으로 쓴 시를 말한다. ◎저항의지의 시 이상화의 와 같은 시가 이에 속한다. *의지의 시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노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질질하며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먼 원뢰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유치환의 ● 서사시(敍事詩) 서정시에 비하여 객관적이고, 비개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신의 이야기, 영웅의 이야기, 한국가의 역사적 체험 등을 서술한 시로써 "호머" "단테" "밀턴" 등이 대표적 서사 시인이 며, 동양에서는 이 서사시가 발달하여 인생의 서사시인 소설로 된 것이라 보기도 한다. 이규 보의 "동명왕" 이승휴의 "제왕운기" 등은 한문으로 된 장편서사시이고 조선초의 "용비어천 가" "월인천강지곡"은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서사시이다. 그리고 신문학사상 최초의 서사시 는 김동환의 "국경의 밤"을 들 수 있으며 현대에 와서는 신동엽의 "금강"이 있다. 1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말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만을 경비하는 외투 쓴 검은 순사가 왔다-갔다- 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가고 안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밀수출 마차를 띄워 놓고 밤 새가며 속태이는 검은 아낙네 물레 젓는 손도 맥이 풀리서 파!하고 붙는 이유 동전만 바라본다. 북극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가는데. 김동환의 전 72연중 1연 ●극시(劇詩) 서사적인 이야기에 서정적인 운문 대사를 넣었다고 볼 수 있는 주관과 객관을 겸한 시를 말 하며 세익스피어의 여러 작품과 극시, 괴테의 파우스트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극시의 종류에는 비극시와 희극시가 있다. 이 극시는 근대극에 이르러서는 산문인 희곡으로 발전하였다. TS엘리어트의 사극 "칵텔 파아티" 등오 여기에 포함된다. 시의 형태(形態) ●정형시(定型詩) 일정한 외형적 운율에 맞추어 쓴 시로서 우리나라 정형시는 대부분 음수율을 주로 한다. 평시조, 4,4조, 7,5의 민요풍의 정형시, 조선말의 창가 등이 정형시라고 할 수 있다. ●자유시(自由詩) 일정한 외형률이 없이 시인의 내재적 리듬에 의하여 쓴 시로서 미국의 휘트먼, 벨기에계의 프랑스 시인 베르하렌 등에 의해서 완성된 형태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주요한의 를 자유시의 효시로 본다. ●산문시(散文詩) 운율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산문형식으로 된 시로써 넓게는 자유시이에 포함될 수도 있 다. 그러나 자유시 보다 더 구속성이 없고 산문에 가깝다. 다만, 이미지, 시적 함축성, 수사 법등이 산문과 다르다. 프랑스의 보들레르 등에 의해서 확립된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 서는 조지훈의 "봉황수" 김구용의 "성숙" "제비"등이 이에 속한다. 예문. 벌레 먹은 두리 기둥, 빛날은 단청, 풍경소리 날아간 추녀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위엔 여의주 희롱하는 쌍릉 대신에 두 마리 봉황 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을 빫고 가는 나그네 그림자, 패옥소리도 없었다. 품석 옆에서 정일품 종구퓸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 없었다. 조지훈의 ================================================================== 목련 / 고정숙 꼬깃꼬깃 접힌 하얀 편지 한 송이, 손 안에 피어났다 꽃술처럼 들쑥날쑥 써진 글자들 젖내음 나는 여백, 누르면 뚝 뚝 떨어질 것 같은 젖 방울인데 양파깡 과자 한 봉지 선물과 함께, ‘엄마, 생일 축하해’ 하며 달아나는, 눈이 부셨다 가지의 등뼈를 자근자근 밟으며 자라는 꽃 커질수록 그 무게에 굴곡지나 햇살처럼 발산하는 빛에 충전되는 건전지 모양의 가지 뙤약볕에 살점 쩍쩍 갈라진 줄기는 무성한 전선줄 뿌리, 흙 속 깊이 플러그로 꽂아 제 몸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방송 새들에게 계절마다 울긋불긋 들려주고 싶어하고 태풍에는 잡음도 무성하다 나보다 훌쩍 키가 커버린 큰 아이 손에 들려있는 봄이 완연한 꽃다발 가지를 곧 떠날 것 같은 하얀 꽃잎 편지지에 빽빽이 써진 글 생크림 케익 한 조각 먹는데 속에서 갑자기 울렁 울렁 창작시방에서 필명 예시인으로 활동중 현재 독일 거주 목련을 素材로 한, 시는 참 많다. 그건, 아마도 꽃이 지닌 복합적 이미지 때문인듯 하고. (화사함과 더불어 그 어떤 애틋함, 또는 생시 같은 하얀 꿈 等) 어쨌던, 시에 있어 목련은 시어의 문맥文脈 상으로 떠받힘을 받고 있는 意味에 의해 결정되는 것. 시에서 話者는 아이(딸인지, 아들인지?)로 부터 받은, 하얀 편지를 한 송이 목련으로 말하고 있는데. 생각하면, 어미로서 자식을 키운다는 건 얼마나 많은 굴곡진 일이던가. 하지만, 한 시라도 자식을 향한 사랑과 근심은 멈추지 않고. 그 모든 걸 아이가 헤아릴 길이야 없겠지만, 하얀 편지에 꽃 수술처럼 들쑥날쑥 써진 몇 글자들. (아마도, 사랑이었을) 그 어떤 生日 선물보다 향기로웠을, 그 한 송이 사랑에 가슴이 뭉클해짐은 화자만의 몫은 아닐게다. 정말, 시를 쓰고 읽는 일은 體驗 나누기이며 感動 나누기인 것을. 가슴 울렁한, 그 하얀 사랑이 엄마의 가슴에서 한 송이 목련이 된다. ---------------------------------------------- 320. 아침 식사 / 김현승 아침 식사 김 현 승 내 아침상 위에 빵이 한 덩이, 물 한 잔. 가난으로도 나를 가장 아름답게 만드신 主여. 겨울의 마른 잎새 한끝을, 당신의 가지 위에 남겨두신 主여. 主여, 이 맑은 아침 내 마른 떡 위에 손을 얹으시는 고요한 햇살이시여. 김현승 시집 중에서
1325    [또 詩공부]- 詩란 압축된 언어적 건축물 댓글:  조회:5866  추천:0  2016-04-08
시(詩) 제1강...詩란 어떤 글인가/김용진 詩란 어떤 글인가 시는 운률적인 언어로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 관념이나 정서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문학의 한 형식이다. 따라서 산문과는 달리 논리의 비약, 생략, 함축적 비약 등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해가 쉽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詩)의 정의를 쉽게 말한다면 "시(詩)란 압축된 언어로 표현된 건축물"이다 라는 말로 대 신할 수 있다. 시(詩)의 정의에 대해서는 이미 동서고금의 많은 문인들이 수 없이 언급한 바 가 있다. 그러나 "시(詩)란 결국 인생의 비평이다"라고 한 T.S 엘리어트의 말은 시(詩)가 가 진 두 개의 측면을 대표하고 있다. 시(詩)의 언어 시(詩)란 문자로써 표현하는 문학에 소속된 한 장르이며, 그래서 일반적인 문학과 마찬가지 로 자기의 생각한 바 또는 생각하는 바를, 혹은 느끼고 있는 것 또는 느낀 것을 문자로써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詩)가 아닌 운문적 특성은 다른 문학과 달리 문자(시어)를 배열 함에 있어서 일정한 규율(운률)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시(詩)에서 사용되는 시어 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이다. 그러나 그 언어를 어떻게 배열, 조작하느냐에 따라 전혀 일상생활 속에서 쓰여지는 언어와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느낌이 놀랍게 나타날 수 있다. 특히 시(詩)에는 작가의 언어 운용에 따라 여러 가지 비유, 상징 등이 이를 효과적 으로 나타난다. 예문1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 위의 시(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詩)에 사용된 언어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 는 언어와 전혀 다른 것이 없다. 그러나 운율적 언어 구사가 생략과 압축의 묘미를 가미하 여 아주 긴 이야기를 실타래 풀 듯 토해내고 있다. 세상에서 그 누구도 아는 체 하기를 꺼 려하는 문둥이, 오히려 해와 달까지 쳐다보기 민망한 문둥이의 처절한 절규가 시행 한 줄로 압축되어 긴 이야기를 끝없이 토로해내고 있다. 보리밭이라는 향토색 짙은 낱말을 배경으로 해서 차가운 달빛의 조명을 받으며 애기의 배에서 간을 꺼내먹는 문둥이의 속설은 어느 긴 긴 실화와 같은 이야기를 토해내고 있다. 그러나, 문둥이가 우는 꽃처럼 붉은 울음은 인간이 면 누구나 자지는 속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처절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시(詩)는 이처럼 압축된 언어로 생략의 묘미를 보여 줄 때 시(詩)가 가지는 요소를 어김없 이 나태내 주는 것이다. 예문 2 얼굴 하나여 손바닥 둘로 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나 눈 감을 밖에 정지용 이 시(詩)의 화자는 누군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다. 그 그리운 사람의 얼굴쯤이야 두 손바닥으로 충분히 가릴 만큼의 넓이 밖에는 안 된다. 그러나 보고 싶은 마음의 넓이는 호 수만큼이나 된다. 그러니 그것을 가릴 길이란 아예 자기의 두 손을 "호수"라는 말로 빗댐으 로서 드러 내는 정서, 그리고 무엇보다 일체의 군말을 생략함으로서 오히려 강렬하게 드러 나는 이 시의 주제 등에서 우리는 시의 언어적 특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 밖에도 시 에는 시의 운율로서의 음악적 요소와 시의 색상으로서의 회화적 요소, 시의 사상과 감정으 로서의 요소가 포함되어 나타난다. 다음 시간에는 시의 종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 319. 地上의 시 / 김현승 地上의 시 김 현 승 보다 아름다운 눈을 위하여 보다 아름다운 눈물을 위하여 나의 마음은 지금, 상실의 마지막 잔이라면, 시는 거의 반쯤 담긴 가을의 향기와 같은 술……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사라지는 것만이, 남을 만한 진리임을 위하여 나의 마음은 지금 저무는 일곱시라면, 시는 그곳에 멀리 비추이는 입 다문 창들…… 나의 마음-마음마다 로맨스 그레이로 두른 먼 들일 때. 당신의 영혼을 호올로 북방으로 달고 가는 시의 검은 기적- 천사들에 가벼운 나래를 주신 그 은혜로 내게는 자욱이 퍼지는 언어의 무게를 주시어, 때때로 나의 슬픔을 위로하여 주시는 오오, 지상의 신이여, 지상의 시여! 김현승 시집 중에서
1324    [또 詩공부]- 詩는 많이 다듬어야... 댓글:  조회:5246  추천:0  2016-04-08
적게 고치고 다듬는 세 가지 전략/김영남 화초를 키우다 보면 두 가지 경우에 부딪친다. 하나는 화초의 싹이 처음부터 싱싱하고 튼튼해서 자라는 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나중에 예쁜 꽃봉오리를 절로 맺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아무리 돌봐주고 신경을 써도 화초가 뜻대로 성장하지 않는 경우이다. 즉 화초의 장래가 처음부터 싹이 노란 것이다. 시 쓰기에도 화초의 이러한 감정법이 적용된다. 잘 가꾸면 보기 좋은 꽃이며 튼실한 열매를 가지가 휘도록 매달아줄 시가 있는가 하면, 가꾸어 보았자 애만 닳을 뿐 결코 좋은 열매를 볼 수 없는 시가 정해져 있다. 이때문에 나는 초고를 써 놓은 다음에는 반드시 될성부른 나무인가부터 감정을 한다. 구조가 탄탄하고 가슴에 울림이 오는 녀석은 본격적인 다듬기에 들어가지만, 처음부터 싹수가 노란 시, 싱싱하지 못한 시는 아예 버리고 만다. 따라서 나의 시 고치기에는 별다른 힘이 들지 않는다. 대개 부분적인 손질로 끝나거나 시행을 추가시키는 일이 전부이다. 연을 통째로 고쳐야 할 만큼 대작업이 필요한 시라면 아예 싹수가 노란 시로 분류해 미련없이 휴지통으로 날려 버린다. 그러면 적게 고치는 시, 성공도가 높은 시를 어떻게 하면 쓸 수 있을까? 시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나름의 비방을 갖고 있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적게 고치기 위해 남보다 유별나게 강조하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그 첫번째 원칙은 오브제의 선택이다. 가능한한 변용이 쉬운, 즉 쉽게 이중구조를 구축할 수 있는 오브제를 선택하는 것이다. 변용이 쉽지 않는 것이라도 그 오브제 자체에 다의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을 선별해서 활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방안을 한번 살펴보자. 방에는 창, 벽, 책상, 책, 스탠드, 연필, 재떨이, 옷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변용이 가장 쉬운 오브제를 고르라면 누구라도 ‘창’과 ‘벽’을 택할 것이다. ‘창’과 ‘벽’이 다른 것들에 비해 가장 변용하기 쉽고, 메타포를 쉽게 구축할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창’은 현실의 창, 인생의 창, 내면의 창, 지식의 창, 학문의 창, 유년의 창… 등으로 상상을 쉽게 변용해서 확대해 나갈 수 있고, 그에 따라 메타포가 잘 형성될 수 있다. 둘째로는 시의 첫줄에 강력한 긴장이 흐르도록 하는 것이다. 도입부가 긴장과 흥분을 자아내야만 시를 읽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시킬 수 있다는 작시법의 전략 때문이다. 나아가 도입부의 긴장은 전개부의 상상력을 증폭시키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촉매 역할을 갖는다. 도입부의 긴장은 또한 상상력의 빈약함이나 엉뚱한 진행을 막을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떤 문장이 긴장과 흥분을 갖게 하는가? 내용상으로는 동기부가 생략되었을 때 문장에 탄력이 생긴다. 물론 여기에는 대상을 남다르게 파악하는 표현, 즉 독특한 발상이 기본적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셋째로 내가 신경쓰는 원칙은 구조상 마무리에 증폭이 가해질 수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보는 것이다. 마무리는 작품의 작품성, 작가의 철학성 등 깊이를 평가받을 수 있는 항목이다. 실제로 뚜렷한 마무리가 예상되는 시는 쉽게 써지고, 또한 전개나 전환 부분이 약간 미진하더라도 훌륭한 마무리 덕택에 별달리 결점이 노출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경우에는 시의 첫줄과 마무리가 훌륭하게 구상되면 나머지 부분은 거의 무수정 상태로 채워져 한 편의 시가 태어나게 된다. 쓰고 난 다음 퇴고를 행할 때에도 구절을 보완하는 경우는 있지만 대폭적으로 고치는 경우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면 실제에 있어서 어떻게 시를 적게 고치고, 완성하는지 한 번 살펴보자. 언젠가 나는 소설책을 읽다가 눈길을 확 잡아끄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발견하였다. ‘그에게는 말뚝에 붙들어 맬 수 없는 고집이 있다.’ 이 표현이 너무 맘에 들어서 나는 얼른 노트에 채집해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벤치에 앉아 있다가 문득 담을 타고 오르는 덩쿨을 발견하고서는 ‘그래, 바로 저거다’ 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메모를 하였다. 땅을 기어가는 것들에는① 기둥에 붙들어 맬 수 없는 고집이 있다. 황토밭을 달리다가 잠시 뒤돌아보는 고구마순, 벽을 기어오르며 허공에 내미는 담쟁이손, 이것들에게는 허리가 꺾이고 발목이 묶이더라도 오로지 가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근성이 무섭도록 꿈틀댄다. 그 구불구불한 줄기를 들치면② 어둔 싹들을 이 세상으로 업어낸③ 아름다운 등이 있다. 이렇게 메모를 한 다음 몇 주일 후에 이것을 다시 꺼내놓고 검토했다. 시로 완성시키기에 충분한 오브제인지, 도입부의 긴장과 마무리의 증폭이 효과적인지 면밀하게 따져보았다. 다행하게도 시로 완성시키기에 충분하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즉, ①을 시의 처음으로 삼고, ③을 결론으로 삼으면 좋은 시가 탄생할 것 같았다. 문제는 전개부와 전환부가 다소 허약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전개, 전환부란 마무리로 몰아나갈 수 있는 기능이면 족하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미 흡족한 마무리를 확보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하자 의외로 쉽게 그 실마리가 풀려나갔다. ‘그래, ②에 살을 붙여 ③의 결론을 얻는 데 합당한 나의 이야기를 집어넣는 거야’. ①의 중심 모티브가 강인한 근성이라면 ②의 전개부에서는 그 근성을 형상화할 수 있는 어머니를 중심 모티브로 삼았다. 어머니야말로 실로 무한한 변용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말이 아닌가. 일단 중심 모티브를 잡아내고 나면 그 다음의 묘사는 순조롭게 마련이다. 그래서 거의 무수정 상태로 다음과 같은 한 편의 시를 얻을 수 있었다. 땅위를 기어가는 것들에는 땅을 기어가는 것들에는 기둥에 붙들어 맬 수 없는 고집이 있다. 황토밭을 달리다가 잠시 뒤돌아보는 고구마순, 벽을 기어오르며 허공에 내미는 담쟁이손, 이것들에게는 허리가 꺾이고 발목이 묶이더라도 오로지 가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근성이 무섭도록 꿈틀댄다. 그 구불구불한 줄기를 들치면 대나무 뿌리같은 손이 있고 그 손 속에 들녘으로 나가는 어머니 호미자루가 쥐어져 있다. 꺾인 자리를 지우며 푸른 하늘을 향해 날개 펴는 새순 속에는 또 얘야, 손발이 부르트도록 땅을 뒤져 네게 올려주마 하시던 고무신발 같은 말씀이 달리고 있고 주렁주렁 열매 달린 묵은 순 속에는 딱딱한 매듭으로 남거나 삭정이로 부러지는 줄기의 마지막 모습이 아프게 숨어 있다. 땅을 기어가는 것들, 절벽을 기어오르는 줄기들에는 어둔 싹들을 이 세상으로 업어낸 아름다운 등이 있다. (김영남) ◇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중앙대 경제학과 및 국제경영대학원 졸 ========================================================================== 318.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의 기도 김 현 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 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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