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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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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0    시는 산문적 운문(韻文)으로서 문학의 가장 핵심 장르이다... 댓글:  조회:2306  추천:0  2017-05-22
  시창작이론.2 1) 시 읽기와 쓰기 ① 운문(韻文)으로서의 시 시는 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 가장 핵심이 되는 장르이다. 문학이 언어에 의해 완성된다는 사실에서 볼 때, 시가 언어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차원에서 다뤄지기 때문이다. 산문 문학이라고 하는 소설의 경우 언어는 작가가 구성한 허구적인 세계를 짓는데 필요한 재료로서의 역할을 주로 담당한다면 시에서는 언어 자체가 형식이요, 내용이며 표현의 역할을 해내기 때문이다. 고로 시에 동원된 언어는 그 언어를 일상적으로 쓰는 언중(言衆)이 가장 아끼고 즐겨 쓰는 어휘들이며, 표현법에서도 가장 친밀감을 주거나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법을 쓰게 되는 것이다. 시는 산문의 상대 개념으로 운문(韻文)이라고 부른다. 운문, 즉 시는 음악이 한 소절씩 마디로 끊고 화음을 유도해 발전해가듯 표면상의 시구가 주는 의미와 그 속에 담긴 각종 비유나 상징, 이미저리 따위들을 동시에 이끌고 발전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소설가들이 습작기엔 시짓기를 병행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운문은 모든 글쓰기의 기본이 된다. 즉, 다듬고 고치며, 정확하고 깊은 의미를 드러내는 데는 시를 짓고 퇴고할 때의 연습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산문으로서의 소설과 운문으로서 시라는 맥락에서 각각의 개념이 정리될 수 있다. 소설은 많은 어휘를 무제한으로 동원, 형상화하려는 큰 주제를 감안 설명적인 문장이나 묘사적인 문장을 취할 수 있다. 또 대화체의 형식과 지문(地文)으로 변화있는 전개가 가능하다. 시는 많은 어휘 중에 해당작품에 적절한 어휘를 선택해야 한다. 이는 언어를 최대한 절제하는 대신 함축과 온갖 수사적 표현이 요구된다. 시 한편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어휘 하나하나가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시는 노래 가락으로서의 의의도 있다. 그래서 작게는 어휘 하나하나의 음조가 영향을 주기도 한다. 언어로써 써진다는 사실, 언어의 본질을 깨우치며 다양한 성질을 갈고 다듬는 작업인 것이다. ② 읽고 모방하기 시를 짓는다는 것은 일차로 남의 작품을 모방하는 단계에서부터 출발한다. 자신이 읽고 어떤 점에서 좋다고 생각되는 작품, 내지 몇 권의 시집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 그리고 좋게 느끼는 점들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즉 시의 전체 분위기, 시의 내용, 특정 어휘나 구절에 대한 표현법 등을 분석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시인 A의 시집을 읽으며 습작을 할 때, 자신도 모르게 A의 아류화되는 경향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을 만큼 빠지는 것이 좋다. 그다음 B의 시집을 읽을 때는 B의 아류에 가깝게 스는 집중력이 필요하다. 이같은 과정을 몇 차례 넘기면 신통하게도 어느 누구의 아류도 아닌 자기만의 특유한 개성으로 독립하게 마련이다. 시인은 어휘 하나하나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사물을 대하는 심성이나 경험세계, 문화의 향수등 모든 인간 조건에서 상이하기 때문에 모방이나 아류화란 있을 수 없다. 의도적으로 모방하기 전에는 말이다. 비교문학에서 지적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두뇌는 어떤 종족이던 어느 시대이건 상관없이 비슷한 상상혁과 추리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유사한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이 지어낸 신화 등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 짓기에서도 좋은 시를 많이 읽으며 습작할 때 그 시의 장점들을 내 것으로 소화해 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마치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자라면 연습하는 곡을 사전에 명인(名人)이 연주한 것을 비교 감상하여 피아노곡의 진수를 깨우치면서 자기 연습이 이루어질 때만 빠른 발전이 가능한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③ 쓰고 보여주기 스스로 시라고 지어 본 것은 누구에겐가 보여주어야 한다. 보여주지 않고 수백편을 지어본들 그것은 시가 되기는 어렵다. 시가 제대로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자기 스스로는 분별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설령 분별해 낸다고 생각하더라도 객관성이 부족하다. 국화 한송이 평탄한 오솔길로 곱게 단장한 처녀가 연분홍 곱게 물들이네. 사랑따라 제비오고 남아따라 가오리오 뾰족한 입술엔 한없는 사랑이 깃들어라. 가슴에 담뿍 안고 온 쓸쓸히 죽어가는 침실엔 전기가 왔노라. 이 작품은 한 사업가 Y씨가 군대생활 중에 써놓은 작품 중의 한편이다. 그는 시골에서 떠나와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했고, 이어 군에 입대하여, 고향을 그리며 또 군대생활이란 특수 사회에서 느끼게 되는 향수병에 젖어 있을 때의 작품이라고 했다. Y씨가 필자에게 가져온 원고 뭉치는 대학노트 두 권에, 군대용 화장지에 쓴 원고 두 뭉치 등 한 보따리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업에도 성공했고 연륜에 맞춰 젊은 시절에 쓴 시들을 정리하여 한 권의 문집을 내겠다는 포부였다. 위에 인용한 시는 작가가 이 시를 쓰게 된 동기, 즉 시로 쓸 당시의 심정을 인지(認知)하기에는 충분하다. 즉, '어떤 심정에서 썼구나'하는 정황 정도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우선 맞춤법이 안 맞고(제시된 예문에서 교정을 보았음), 구문도 원활하지 않다. 첫 연 3행이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1행인 "국화 한송이"를 별개의 구문으로 처리하던지, 아니면 2행에서 처리되어야만 3행의 독립된 내용으로 전개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국화 한송이"와 "처녀"가 동격으로 들어온다. 국화를 처녀에 비유한 것으로 보아도 구문 전개상 모순이 있다. 또 둘째연의 제2행에서 느닷없이 "남아따라 가오리오"라고 표현한 것은 시상의 전개상 큰 무리이다. "뾰족한 입술에"의 표현은 국화꽃의 꽃잎을 사실에 가깝게 표현한 듯하나 너무 진부한 표현이 되고 말았다. 셋째 연에서도 1행은 무엇을 '알고' 왔는지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마지막 행에선 "침실엔 전기가 왔노라"라고 했다. 시 전체의 분위기를 깨어버리는 대목이다. 이 시를 연별로 내용을 뜯어보면 1연은 들국화를 처녀의 모습으로 비유하고, 2연에서는 그 처녀에 대한 그리움을 추억이라는 흘러간 시간에 얹어 놓았다. 3연에서 그리움의 추억을 현실로 자각하는 것으로 맺었다. 위의 Y씨의 작품을 다음과 같이 개작(改作)해 보았다. 가능한 한 원작자의 심경이 되어 보고, 나타난 구성과 전개에 충실하게 고쳐 본 것이다. 들국화 한송이 오솔길에 발돋움하고 밤이 가듯 밝은 아침에 편다 발길 멈추는 고운 처녀의 손끝에 물드는 연분홍빛 아픔 사랑의 빛깔이 이런건가 사나이의 그리움이 저렇게 피어있는 고 오솔길따라 十里를 가며 내 그리움 구비치는 사연 가슴에 한 아름 피어나는 들국화 언제 보아도 너는 내 사랑, 내 그리움 시인이 자신의 작품을 쓸 때보다 남의 작품을 퇴고하거나 완전히 개작을 할 경우, 이것이 더욱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이 든다. 결과도 좋은 작품이 되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작품을 쓴다는 것은 작자의 특유한 감각과 발상에 의해서만 구상되고 완성시킬 수 있는 고유한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황락(黃落)  ―김종길(1926∼) 추분(秋分)이 지나자, 아침 저녁은 한결 서늘해지고, 내 뜰 한 귀퉁이 자그마한 연못에서는 연밤이 두어 개 고개 숙이고, 널따란 연잎들이 누렇게 말라 쪼그라든다. 내 뜰의 황락을 눈여겨 살피면서, 나는 문득 쓸쓸해진다.     나 자신이 바로 황락의 처지에 놓여 있질 않은가! 내 뜰엔 눈 내리고 얼음이 얼어도, 다시 봄은 오련만 내 머리에 얹힌 흰 눈은 녹지도 않고, 다시 맞을 봄도 없는 것을!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그 붉은 산수유 열매//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서늘한 감각으로 그 옛날 문학청년들 가슴에 뜨거운 선망과 감탄을 불러일으킨 ‘성탄제’의 시인 김종길. 미수(米壽)에 이르신 선생이 시 전문지 ‘유심’에 최근 발표한 작품이다.     황락(黃落)은 한 해의 성장을 마친 식물이 누렇게 물든 잎을 떨어뜨린다는 뜻이다. 가을이 깊어져 황락의 풍경을 보이는 뜰을 둘러보다가 문득 ‘나 자신이 바로/황락의 처지에/놓여 있질 않은가!’, 새삼 깨닫는 화자다. 이제 곧 겨울이 오겠지. ‘내 뜰엔 눈 내리고/얼음이’ 얼겠지. 그래도 뜰엔 다시 봄이 오련만, 인생의 봄은 다시 오지 않아라. ‘내 머리에 얹힌 흰 눈은/녹지도 않고, 다시 맞을/봄도 없는 것을’…. 선생이 이 시의 시작노트에서 밝혔듯 ‘인생의 일회성이 인생 황락기의 애수의 근원’일 테다. 하지만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 소중한 나날들이다. 봄도 한 번이지만 가을도 한 번, 겨울도 한 번이다! 계절은 저마다 아름답다. 쓸쓸하게, 그러나 거칠지 않게 맞이하는 시인의 황락의 계절. 선생님, 몇 해 전 얼핏 뵌 선생님은 머리카락이 숱지시더군요. 제 주위에는 ‘흰머리라도 많이만 있었으면 좋겠네!’ 하는 친구가 한둘이 아니랍니다. 건강과 건필을 빕니다!
489    윤동주론 / 김호웅 댓글:  조회:2541  추천:0  2017-05-20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인 - 윤동주론 김호웅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인으로 불리는 윤동주의 생애는 순결하고도 아름답다. 그의 시는 “천체의 미학”, “부끄러움의 시학”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를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언제나 나의 넋이 맑아짐을 경험한다” 라고 한 문익환 목사의 고백이 아니더라도 그의 젊음, 그의 맑음, 그의 애처로움과 장함은 그의 인생과 그의 시를 접하는 이들에게 오래도록 애경과 불망(不忘)을 심어준다.   제1회 윤동주문학제를 맞는 이 자리에서는 윤동주가 연변에 알려진 경과를 소개함과 아울러 그의 대표적인 시들을 통해 그 사상, 예술적 매력과 현대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윤동주 시인과 연변   윤동주가 연변에 알려진 것은 1980년대 중엽이었다. 그것도 한 낯모를 일본학자에 의해서였다. 1985년 4월 12일,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라고 하는 50대의 일본인이 연변을 찾아왔다. 제주도출신의 조선인 부인 아키코(秋子)를 동반한 걸음이다. 일본 와세다대학 교수인데, 체류 명목상 연변대학에서 일본어교수를 담당하고 있었지만 짬만 나면 승용차를 타고 용정으로 달렸다. 사실 그는 옛 북간도에서 활약했던 문학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그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문학적 업적을 추적하고 정리할 목적을 가지고 왔던것이다. 워낙 중국문학을 전공했던 오오무라 교수는 1956년경부터 한국문학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한국의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최서해, 김정한, 정지용, 리육사, 윤동주 등 많은 작가와 시인들의 작품에 몰입했다. 그러나 크나큰 매력을 느끼고 깊이 파고든것은 윤동주였다. 윤동주의 작품을 더욱 깊게 이해하고 그의 인간적인 면을 좀 더 깊이 알려고 하던 차에 우연한 기회에 일본 도쿄에서 윤동주시인의 아우인 윤일주를 만나게 되었다. 윤일주는 40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윤동주의 묘는 옛 은진중학교로 이어지는 구릉의 동산교회 묘지에 있다고 했다.       오오무라 교수는 연길에 도착한 후 곧장 사람을 띄워 윤동주의 묘소를 찾게 했다. 오오무라 교수의 부탁을 받은 사람은 옛 동산교회 묘지를 구석구석 뒤지고 다녔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연길시만은 1985년 2월 개방도시로 돼 외국인도 자유롭게 다닐수 있게 되였지만 윤동주의 묘는 연길시가 아니라 룡정현 룡정진의 교외에 있었다. 공안국의 허가증이 나오자 5월 14일 오오무라 교수 내외는 연변대학의 승용차를 타고 직접 룡정으로 향했다. 연변대학 민족연구소 소장으로 있던 권철 교수와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리해산 교수가 동행했다. 먼저 옛 대성중학교 터에 있는 룡정중학교를 방문하고 룡정지역 력사에 밝은 한생철 선생을 동행으로 요청했다. 옛 동산교회 묘지로 올라가는 길, 승용차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구릉의 경사지에 밭과 어설픈 숲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조선의 회령으로 이어지는 길이 서북에서 동남으로 지나가고 그 좌측에 멀리 바라보이는, 끝없이 이어진 구릉의 여기저기에 펑퍼짐한 둔덕과 어설픈 묘비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산등성이 아래쪽의 묘비들은 넘어지고 부서진게 상당히 많았다. 그들은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쑥밭을 헤치며 앞장을 서서 걸어가던 리해산 교수가 큼직한 비석을 찾아가 정면을 보니 “시인 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글발이 보인다. 끝내 찾은것이다.       원래 봉긋하게 성토를 했을 무덤, 그 앞에 서남쪽을 향해 묘비가 서있었다. 오오무라 교수 등의 조사에 의하면, 받침돌 위에 세운 비석 본체는 정면과 뒤면은 상부가 약간 둥근 모양을 띠고 중앙의 가장 높은 곳이 세로가 1m, 좌우의 낮은 곳이 0.93m, 옆으로의 폭은 0.395m다. 측면은 세로 0.93m, 폭 0.17m로서 주변의 다른 비석에 비해 약간 컸다. 정면에 "시인윤동주지묘"라고 새겨져 있고 뒤면에 22자 8행, 정면으로 보아서 우측면에 22자 3행, 좌측면에 25자 3행에 걸쳐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 비문을 한문 투로 훈독(訓讀)하면 다음과 같다―       아! 그 선조가 파평인 고 윤동주시인. 어린 시절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화룡현립제일교 고등과에 편입한 뒤 다시 룡정의 은진중학에서 3년의 학업을 마치고 평양의 숭실중학으로 전학하였다. 학업을 닦느라 그 곳에서 한 해를 보내고 다시 룡정으로 돌아와 마침내 우수한 성적으로 광명중학부를 졸업하였다. 1938년에는 경성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여 4년의 겨울을 지내고 졸업을 하였다. 공부는 이미 성공의 지경에 이르렀으나 스스로는 아직 미진타 하여 이듬해 4월에는 책을 싸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지사대학 문학부에서 진리의 탁마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배움의 바다에 파도가 일어 몸은 자유를 잃고 형설의 생애는 조롱에 갇힌 새의 운명이 되였고 게다가 병이 더욱 깊어져 1945년 2월 16일을 기해 운명하였으니 그 때 나이 스물아홉. 사람됨은 당대에 큰 인물이 됨직 했고 그의 시 비로소 사회에 울려 퍼질만 했는데 춘풍이 무정하고 꽃은 피우고도 열매를 맺지 못 하였나니. 아아, 애석하도다 그대여. 하현어른의 손자며 영석선생의 아들인 그대, 영민하고 배우기를 즐겨했고 신시를 좋아해 작품이 많았으니 필명은 동주라 하더라.       1945년 6월 14일 해사 김석관 짓고 씀 동생 일주 광주 삼가 세움       윤동주의 묘소를 찾은 뒤를 이어 오오무라 교수와 연변의 학자들은 선후로 룡정중학교에서 윤동주의 학적부를 발견했고 송몽규의 무덤, 윤동주의 생가터, 유서깊은 명동교회를 비롯하여 윤동주의 삶의 궤적과 그 주변의 많은 사실들을 밝혀냈다. 오오무라 교수의 노력은 연변에 윤동주의 붐을 일으켰다. 연변의 문학인들을 비롯한 연변사람들은 이 땅에서 자랐고 이 땅에 불멸의 아름다운 시편을 남기고 이 땅에 영원히 묻혀있는 위대한 시인의 처절한 삶과 주옥같은 시편들을 두고 커다란 감동과 흥분에 잠기게 되였다. 윤동주는 연변이 낳은 자랑스러운 “저항시인”으로 각광을 받아 한국에서 들여온 그의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돌려가며 읽었다. 그러한 독자들의 열망에 부응해서 연변의 문인들은《문학과 예술》(1985년 제6기)에 윤동주 시 10수를 실었다. 윤동주의 모교인 룡정중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윤동주시연구회”를 결성하고 시랑송회, 묘소참배 등을 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있고 연변학자들도 윤동주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1994년 6월 14일 용정에서 “민족시인 윤동주 50주기 기념학술연구회의”가 개최되었고 한국의 지성인들과 연변의 지성인들의 공동한 노력에 힘입어 윤동주의 생가와 명동교회가 복원되었으며 윤동주의 삶의 발자취가 스며있는 명동촌, 룡정중학교, 옛 동산교회 묘지 등은 일약 력사유적으로, 관광명소로 각광을 받아 수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있다. 그리고《연변문학》지와《중학생》지는 문인들과 청소년들을 상대로 각각 윤동주문학상을 설립하였으며 연변대학 고적연구소에서는 1999년 한국어와 중국어로《윤동주유고집》을 펴냄으로써 윤동주시인을 13억 중국인들에게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2. 윤동주 시의 사상, 예술적 매력   윤동주의 이름과 함께 가장 사람들의 애송을 받고있는 시《별 헤는 밤》을 읽어보자. ……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佩, 鏡, 玉, 이런 異國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가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쟘, 라이넬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北間島에 계십니다…       고향 북간도 명동을 멀리 떠나 있는 시인은 맑고 그윽한 가을의 밤하늘을 보면서 별을 헤고 있다. 별 하나 하나에 고향의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보며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에 젖어있다.       대관절 시인에게 북간도란 어떤 곳인가? 시인 윤동주는 북간도에 이주한 집안의 제3세대로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북간도는 태를 묻은 고장이다. 그러므로 윤동주의 시심(詩心)은 북간도의 터전에서 움이 튼것이다. 하기에 시인은 북간도에서 지낸 어린 시절을, 그리운 모든것을 별에 부쳐서 노래하고있다. 아니, 잃어버린 아름다운 모든것들이 하늘의 별빛으로 승화하고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성좌의 복판에는 어머님이 계셨던것이다. 말하자면 “아슬히” 멀리 있는 북간도와 어머니를 비롯한 그리운 것들과 시인과의 수평적 관계는 별세계와의 대응, 즉 수직적관계로 변함으로써 시인의 추억은 그처럼 아름답게 승화하고 형상화되는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마치 아름다운 별세계와 같은 고향에 가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고 무서운 상실감에 젖게 된다. 그에게는 김북원의 경우처럼 “낙동강물 에워 젖처럼 마시며” 잔뼈 굵어진 고향도 없고 송철리의 경우처럼 “하염없이 쓰러보는 파란―꽃송이에/ 무지개마냥 아롱지는 흘러간 옛마슬”에 대한 추억도 없다. 말하자면 북간도에서 살았던 많은 시인들의 경우엔 남쪽의 어느 특정된 고장이 향수의 대상, 그리움의 대상으로 되지만 윤동주에게는 마냥 북간도와 함께 어머님이 성좌처럼 안겨온다. 윤동주에게는 북간도가 고향이요, 북간도가 시적상상의 원점이 된다.       하지만 정작 북간도를 찾아온 시인은 병들고 찌든 고향에 환멸을 느낀다. 어머님과 동년의 꿈을 찾을수 없는 시인은 별빛이 내린 언덕에 자기 이름자를 쓰고 그것을 덮어놓으면서 슬픔에 젖기도 하고 잃어버린 자기, 소외된 자기를 두고 비탄에 잠기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쉽게 씌어진 시》에서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번도 손들어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무서운 시간》에서       이처럼 시인은 무서운 소외감과 고독감에 빠져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자신을 괴로워하지만 역시 고향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었다. 하기에 시《길》에서는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정처 없이 방황한다. 시인은 이 길은 담을 끼고 뻗어있는 길이며 담우에 푸른 하늘이 넓은 공간을 암시하여주지만 길을 막은 담으로 하여 잃은 물건을 찾을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을 찾기 전에 시인은 완전한 사람이 될수 없었다. 이 시의 마지막부분에서 시인은 말한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시인은 끝내 꿈결에나마 북간도를 찾는다. 하지만 북간도 역시 그가 뿌리내릴 땅이 아니며, 그를 외면한다. 하여 실향의 아픔, 자기 상실의 그늘은 점점 짙어간다. 윤일주씨의 기록에 보면 시인은 1942년까지 매년 겨울과 여름 방학에 고향에 내려갔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향은 그의 추억 속에 남아있는 아름다운 고장이 아니다. 고향에 돌아온 시인은 역시 고향상실의 비애와 불안을 느끼고있다.       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房은 宇宙로 通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風化作用하는 白骨을 드려다 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짓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故鄕에 가자.       ―《또 다른 고향》에서       역시 윤동주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히는 이 시에서는 윤동주의 뿌리 깊은 고향상실의식과 그 비애, 불안한 심리, 강박관념과 함께 새로운 고향 즉 열린 세계에 대한 동경과 갈망이 잘 나타나있다. 시인은 그처럼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고향은 이미 령혼과 육신이 편안히 안주할수 있는 장소는 아니다. 이미 유년의 평화와 아름다운 동심은 사라지고 어둠으로 가득 찬 불안의 장소로 퇴색한 고향일뿐이다. 말하자면 죽은 자신의 시신(屍身)과 만나는 음산한 곳이고 “어둔 방”으로 집약하여 표상할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고향은 아름다운 추억과 그리움이 어두운 현실과 갈등을 이루는 장소이다. 따라서 “백골”, “나”, “아름다운 혼”이라는 이 시의 상관관계들이 밝혀진다. “백골”은 본질적인 자아, 즉 고향을 그리고 고향에 안주하려는 자아를 말한다면 “나”는 현실적인 자아, 즉 고향의 어둠에 질식을 느끼고 쫓겨가는 자아를 말하고 “아름다운 혼”은 리상적인 자아를 말한다고 할수 있을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중심 련으로 되는 “어둠 속에서 곱게 風化作用하는/ 白骨을 드려다 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라는 시구들은 어둠속에서 점점 상실되여 가는 삶의 터전에 대한 본질적인 자아, 현실적인 자아, 미래적인 자아의 탄식을 형상화한것이다. 또 이 세 가지 자아는 서로 모순되고 갈등을 빚어내고 있으니 현실적인 자아는 본질적인 자아를 포기하고 미래적인 자아를 동경하는것이다. 하기에 시인은 밤을 짖는 지조 높은 개에게 쫓기듯 “아름다운 고향”을 찾아 또다시 정처 없이 떠나는것이다. 이 점에서 고향상실과 그 비애 및 새로운 세계에 대한 신념과 동경은 윤동주 시세계의 정서적인 원형을 이룬다고 볼수 있다. 사실 시인은 북간도 명동촌에서 대랍자로, 평양으로, 다시 룡정으로, 다시 서울로, 또 일본 동경으로, 경도(京都)로, 후코오카(福岡)로, 마침내 유골이 되여 북간도에 돌아와 묻힐 때까지 스물여덟 짧은 생애를 줄곧 표박(漂泊)의 혼으로 떠돌아다녔다. 어두운 일제치하에 그가 뿌리내릴 고향은 끝내 없었던 것이다.       그토록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준 고향 북간도가 “어둔 방”으로 되고 자기의 시신과 함께 자리를 해야 할 음산한 “병실”로 되였을 때 윤동주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참회하고 마침내는 그 어떤 비장한 사명감에 젖게 된다. 그의 시가 저항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근거 또는 전환의 계기가 여기에 있다.       윤동주의 시창작은 1936년 중반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초기에 동시를 많이 썼고 또 이렇게 시작된 1930년대의 시들에는 시인의 사회의식이나 력사의식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민족의 력사적인 수난속에서 발견한 자아가 아니라 그같은 대사회적 사명감으로부터 고통을 의식하기 이전의 순수하고 행복한 자아였다. 하지만 실향의 아픔을 경험하고, 북간도는 물론 뿌리내릴 고향이란 전혀 없음을 깨달은 시인은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고 비장한 죽음을 선언하기도 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너무나도 유명한 그의 서시다. 이미 딱딱한 껍질 속에 동체(胴體)와 촉각을 움츠리고 해와 달과 산과 들을 노래하던 시인은 아니였다. 사회와 력사를 떠나서 저 혼자만의 서정적인 감각이 주는 쾌감과 그 피난처의 안식에는 그 이상 머무를수 없었던것이다. 사회와 력사를 보는 눈이 불현듯 밝아지고 나 개인속의 “나”가 아니라 “력사속의 나”, “민족속의 나”를 하나의 사명감으로 인식했다. 이미 6~7년간 시를 썼지만 이 시에 《서시》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도 바로 그러한 자각이 있었기때문이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 얼마나 고고하고 지순(至純)한 세계인가? 물론 이와 같은 변화는 아무런 예고 없이 다가왔다고 말할수는 없다. 시인은 여러 시에서 어두운 현실에서 오는 울분, 아픔, 진통, 반발을 조용히 읊고있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 이의 病을 모른다. 나한테는 病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試鍊, 이 지나친 疲勞, 나는 성내 서는 안 된다.       ―《병원》중에서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두는 것은 너 무나 괴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돌아와 보는 밤》중에서       시인이 암시하는 바는 분명하다. 시인은 현실을 부정적인것으로 받아들이며 어두운 현실의 중압에 지쳐 있고 피로를 느낀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과의 결별을 다짐하며 비극적인 감정에 젖는다.   괴로웠던 사나이, 幸福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중에서       이처럼 윤동주는 고통과 시련의 동굴 앞에서 망설이다가 이렇게 드디어 십자가를 짊어지게 된 것이며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하고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갔던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윤동주의 시를 저항시라고 하며 암흑기의 한줄기 빛이라고 한다.       세상에 일어나는 슬픔을 슬퍼할 자유도 없어서 자연과 원시와 신앙의 세계로, 또는 의미를 완전히 배제해버린 백치의 세계(순수시의 경우)로 도피해 버리거나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하고 일제의 총칼 앞에 아부, 굴종했던 시대, 일반인에게는 그것이 숙명처럼 받아들여지던 시대에 윤동주의 시는 그야말로 밤하늘의 한줄기 빛줄기처럼 소중한 것이요, 비록 그 당시 해빛을 보지 못했지만 해방전 우리 시단의 가장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시문학의 유산으로 남는다.         3. 윤동주 시의 현대적 의미   한국의 김우종 선생은 윤동주의 생애와 그의 시가 가지는 의미를 아래와 같이 나누어본바 있다.       첫째, 그는 강인한 저항정신을 지녔지만 이를 사춘기 소년과 같은 청순한 감각으로, 겸허하고 유연한 언어로 써나갔기 때문에 다수 독자들의 공감과 사랑을 받는다. 또한 그는 저항시인이였지만 그 기본정신은 결코 타민족에 대한 배타주의가 아니라 평화주의이고 인도주의였다.       둘째, 그의 정신은 렴치사상(廉恥思想)이다. 렴치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으로서 례의(禮義)와 더불어 참된 인간이 가져야 할 덕목이다. 그것은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정신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간절히 기원한 그의 사상은 정신적 순결주의이며 그것은 우리의 전통적인 렴치사상과 다름없다.       세째, 그가 남긴 가장 빛나는 시는 사명시(使命詩)이다. 우리 민족 또는 온 세상에서 고통을 받고 죽어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이 무엇인가를 하도록 사명을 받았다는 정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윤동주의 시를 통해 순수한 동심, 겸허한 자세, 평화주의와 인도주의를 되찾을수 있고 자기반성을 통해 바람직한 인간으로 거듭날수 있다. 더욱이 우리는 윤동주를 통해서 이 세상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도록 사명을 받았다는 놀라운 자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민족을 위한 사명이며 세계적인 평화를 위한 사명이며 조화롭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명이다. 우리는 이를 자각하고 실천하는 대열에 나섬으로써 진정한 삶의 목표와 가치를 찾고 긍지를 갖게 된다.       2010년 10월 28일   주해:   1)문익환,《동주형의 추억》,《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68년. 2)오오라 마스오,《나는 왜 윤동주의 고향을 찾았는가》, 정영민 엮음,《윤동주연구》, 문학사상사, 1995년. 3)김우종,《암흑기 최후의 별》(권영민 엮음, 《윤동주연구》, 문학사상사, 1995년)    
488    [그것이 알고싶다]-윤동주 비석에 새겨진 비문을 알아보다... 댓글:  조회:2717  추천:0  2017-05-20
윤동주 비석에 새겨진 글 (비문)   * 한문으로 쓴 것을 조선문식으로 훈독하면 다음과 같다.   아아, 고 시인 윤군 동주는 본관이 파평이다. 어릴 대 명동 소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화룡현립 제1교 고등과에 들어가 배웠고, 룡정은진중학에서 3년을 배운 뒤, 평양 숭실중학에 전학하여 학업을 쌓으면서 1년을 보냈다. 다시 룡정에 돌아와 마침내 우수한 성적으로 광명학원 중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여 4년 겨울을 보내고 졸업했다. 공무 이미 이루었으어도 그 뜻 오히려 남아서 다음해 4월에 책을 짊어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 동지사 대학부에서 진리를 갈고 닦앗다. 그러나 어지 뜻하였으랴. 배움의 바다에 파도 일어 몸이 자유를 잃으면서 배움에 힘쓰던 생활 변하여 조롱에 갇힌 새의 처지가 되었고, 거기서 병까지 더하여 1945년 2월 16일에 운명하니 그 때 나이 스물 아홉. 그 재질 가히 당세에 스일만하여 시로써 장차 사회에 울려퍼질만했는데 춘풍무정하여 꽃이 피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니 아아 아깝도다. 그는 하현장로의 손자이며 영석선생의 아들로서 영민하여 배우기를 즐긴데다 신시를 지어 작품이 많았으니 그 필명을 동주라 했다.   1945년 5월 14일 해사 김석관 짓고 쓰다. 아우 일주, 광주 삼가 세우다.     ============================= /////////////////////////////////////////////////////////////////// ============================= 윤동주의 묘소 앞에 세워진 묘비입니다. 묘비 왼편에 보이듯이, 이 묘비는 1945년 6월 14일에 세워진 것입니다. 비석을 세운 윤동주의 동생들(일주, 광주)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요.  그런데 해방이 되기도 전에 세워진 이 묘비에 '詩人尹東柱之墓'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윤동주의 가족들은 이미 그때 윤동주가 뛰어난 시인임을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시집 한 권 펴내지 못하고 죽은 윤동주를 가족들은 미리 '시인'이라고 불렀던 것이지요.  또 그 옆에 해사(海史) 김석관(金錫觀) 선생의 이름이 보입니다. 해사 선생은 윤동주의 부친인 윤영석 선생의 친구분입니다. 두 분은 북경 유학도 함께 했고, 명동학교에서 같이 교편을 잡기도 했습니다. 해사 선생은 친구의 아들을 위해 비석에 새긴 글씨도 쓰고 비문도 지었던 것이지요. ========================= ////////////////////////////////////////////////////////// =========================   해방되던 해 유월십사일 동생 일주, 광주 세우다     1945년 2월 16일 29세에 돌아가니   재주는 당대에 쓰일 만하고 시는 이 사회를 울릴 것이나 춘풍에 무정한 꽃 떨어지고 열매 없으니 안타깝도다 시인이라는 것이 그의 모든 것이다     정확한 시신은 찾지 못한듯 누이와 조카의 아쉬움이 돌로 남았다     돌아서며 다시 뒤돌아보는 시인의 묘소. 평안히 쉬소서      
487    시인 윤동주의 녀동생 윤혜원녀사는?... 댓글:  조회:2595  추천:0  2017-05-20
                시인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의 삶과 문학적 공로                                   -육필원고 가져와 증보판과 영인판 시집 발간-                                                                                                                  申  吉  雨               1. 윤동주 육필시와 윤혜원 부부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여동생 윤혜원(尹惠媛) 여사가 2011년 12월 10일 오전 1시 20분 호주 시드니 자택에서 향년 88세로 작고하였다. 장례는 시드니에서 치른 뒤, 2012년 봄에 경기도 광주 가족묘원에 안장되었다. 유족으로는 부군 오형범 장로와 장남 철주 등 2남 2녀를 두었다. 윤 동주의 형  제자매로 유일한 혈육이 떠난 것이다.                  가장 선호 받는 시인 윤동주(1917~1945)     윤동주 유고를 가져온 윤혜원과 오형범 여동생 부부.     우리는 이들을 따로 생각할 수가 없다. 이들이 친남매라서가 아니다. 100여 편이나 되는 윤동주의 시가 알려지고, 그 다량의 원본 원고를 확인할 수 있게 되기까지에는 여동생 부부의 노력과 활동이 없이는 가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동생 윤혜원 부부가 만주 용정(龍井)에서부터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오면서 윤동주의 육필원고를 가지고 월남하지 않았다면, 윤동주의 육필원고 영인본과 시집 증보판도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친여동생 부부로서보다도 90평생을 오로지 윤동주를 위해 살았다고 할 만큼 두 분의 한결같은 삶과 노력이 없었다면, 윤동주도 오늘과 같이 찬란한 빛을 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1948년 1월 30일에 정음사에서 발간한 윤동주의 첫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초판에는 모두 31편의 시가 실렸을 뿐이다. 친구였던 정병욱 교수가 보관한 유고 19편에 강처중 등에게 보내서 보관된 12편을 골라 도합 31편을 묶어서, 정지용의 서문을 붙여 간행한 것이다.     1955년 2월 윤동주 10주기를 기념하여 정음사에서 발행한 시집에는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포함하여 그 수가 3배인 93편으로 늘어났다. 1976년의 3판에는 다시 23편을 추가하여 모두 116편이 됐다. 이 증보판들과 1999년에 민음사에서 발간한《윤동주 자필시고집(사진판)》이 나온 것은 모두 윤혜원 여사 부부가 월남하면서 서울로 가지고 온 자료들 덕택이었다.     따라서, 윤동주는 위대한 시인으로, 여동생 부부는 그를 더욱 빛나게 한 사람으로 각기 우리 현대문학사에 크게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들 부부는 1999년에 을 제정하여, 2000년부터 해마다 시상해오고 있다. 연변에서 발행되고 있는 초중용과 고중용 잡지에 발표된 중국조선족 중고등학생들의 작품 수백 편을 대상으로 선정하여 시상한다. 윤동주를 기리기보다 윤동주 같은 훌륭한 문인들을 일찍 발굴하여 육성하자는 뜻이 더 많은 강하게 실린 사업이다.     후원자로 참여하고 있는 연세대학교가 해마다 수상자들을 초청하여 1주일 정도로 국내 문화관광과 교육 활동을 맡아 하는 것도 같은 뜻이다. 을 시키고 있다. 나아가 대상 수상자를 4년 장학생으로 선발하기로 결정하여, 2007년에 처음으로 옌볜의 한국화(19) 양이 인문학부에 합격시켰다.     그리고 윤혜원 부부는 윤동주와 고종사촌 송몽규의 묘소 관리에도 지극 정성이었다. 이들 묘소의 1차 개수는 1988년 6월에 재미동포인 현봉학(玄鳳學) 박사가 주도하는 미중한인우호협회 연증(捐贈)으로 용정중학교 동창회에서 수선(修繕)하였다. 이때 봉분 밑을 시멘트로 20여㎝ 높이로 둥글게 두르고, 묘비는 그 테두리 밖 정면에다 세웠다. 묘비 앞에 오석판(烏石板)을 맞춰 대어서 새로 상석을 설치했다.     윤혜원 오형범 부부는 2003년 봄에 80세 노인으로 2개월여에 걸쳐 윤동주와 송몽규의 묘소를 개수했다. 사방 4m 위치에다 폭 60㎝의 대리석판을 둘러 세우고, 그 안을 잔디로 심어 네모진 봉분 모습으로 만들었다. 묘비는 역시 봉분 앞에다 그대로 세웠다. 상석은 새로 오석 하나로 만들어 설치했다. 묘의 왼쪽 앞에다 따로 개수비를 세웠다. 왼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의 묘소도 윤동주의 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개수했다. 묘비와 상석은 예전 그대로 설치했다. 본래 명동 장재촌에 있던 것을 1990년 4월 5일에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윤혜원은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48년에 오형범과 결혼하고, 그해 12월에 함께 북한을 거쳐 서울로 월남했다. 1948년은 조부가 9월 4일에 작고하고, 모친도 9월 26일에 별세한 해였다. 이때 부부는 윤동주의 육필원고와 노트 3권 등을 가지고 왔다. 윤혜원 부부는 1970년 10월 15일 윤동주 25주기를 맞아, 고인의 친필 유고와 유품 전시회를 국립도서관에서 1주일 동안 개최한 바도 있다.     이러한 의미 있는 삶을 산 윤혜원이 2011년 12월 10일에 작고했다. 이에 윤혜원 오형범 부부의 주요 활동을 소개하여 그들의 문학사적 사회적 기여와 의미를 살피고자 한다.                    2. 윤혜원의 가족과 생애       윤혜원(尹惠媛)은 파평 윤씨로 1923년 0월 0일에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 지금의 중국 길림성 용정시 지신진 명동촌에서 부친 윤영석(尹永錫, 1895~1965)과 모친 김룡(金龍, 1891~1948)의 3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증조부 윤재옥(尹在玉)이 함경북도 회령에서 종성(鐘城)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1886년에 4남1녀 가족을 이끌고 두만강을 넘어 북간도 자동(子洞,紫洞)으로 이주해왔고, 조부 윤하현(尹夏鉉, 1875~1948)이 1900년에 지금의 명동촌으로 이주를 하였다. 이들 일가는 1910년에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할아버지는 부유한 소지주로 기독교 장로였고, 아버지는 명동학교를 졸업한 뒤 북경과 일본에 잠시 유학했던 지식인으로 명동학교 교원으로 있었다. 광명중학의 윤동주 학적부 아버지의 직업란에는 ‘상업(포목상)’이라 되어 있다. 어머니는 교육자요 독립운동가인 규암(圭岩) 김약연(金躍淵)의 누이동생이다. 형제자매는 3남1녀인데, 윤혜원 여사는 외동딸이었다. 시인 윤동주(1917~1945)는 6살 위인 오빠이고, 남동생으로 윤일주(尹一柱, 1927~1985)와 윤광주(尹光柱, 1933~1962)가 있다.    윤일주는 1946년에 월남하여 성균관대 건축과 교수를 지냈는데, 젊어서 많은 동시를 썼으나 형 동주에게 누가 될까 하여 발표를 않았는데, 간경화증으로 작고한 뒤에 아들 윤인석(尹仁錫, 성균관대) 교수가《민들레 피리》로 묶어 1987년 5월 30일 정음사에서 간행했다. 연세대 교정에 세운 윤동주 시비를 설계했다.     윤광주는 신체가 허약했으나 30세에 폐결핵으로 용정에서 작고하였는데, 시인으로 활동하여 시 3편(「다시 만나자 고향아」「고원의 새봄」「아침 합창단」)이 중화인민공화국 창건30주년기념 시선집(1969)에 수록되었다. 발표된 24편의 시를 수집하여 연변일보 등에 게재되기도 했는데, 시인 심연수(沈連洙)의 남동생과 문학친구로 지냈다.     출생지 명동촌은 윤동주의 큰외숙인 김약연(1868~1942) 목사가 1899년에 종성에서 가솔을 이끌고 이주해 와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정착한 곳이다. 그는 1901년 4월에 명동에 서당 규암재(圭岩齋)를 차리고, 뒤에 명동서숙(明東書塾), 명동소학교와 중학교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아들 김정규(金定奎)는 교장을 지냈고, 손자 김석관(金錫觀)은 학감으로 윤동주의 스승이었으며, 뒤에 윤동주 묘비를 짓고 썼다.     윤혜원은 용정에서 초등학교 교사로도 근무했는데, 1948년에 오형범(吳瀅範)과 결혼했다. 오형범은 윤동주와는 면식도 없었고, 사후에 맞선으로 윤혜원과 결혼을 했다. 윤동주가 시인인 것도 월남하여 그가 시인으로 알려진 뒤에야 알았다고 하였다.     부부는 1948년 함경북도 성진을 거쳐 함경남도 원산으로 왔다가, 12월에 3․8선을 넘어 서울에 도착했다. 이때 용정의 고향집에 남아 있던 윤동주의 육필원고와 노트 3권, 스크랩 철, 사진 등을 가져왔다. 대부분 윤동주의 초기와 중기에 쓴 작품들이다.     그때, 사진 봉투는 원산에서 월남하고자 할 때 위험하다고 판단되어, 용정으로 되돌아가는 친척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그가 열차 에서 검문하는 것을 보고 두려운 마음에 사진들을 차창 밖으로 던져버렸다고 한다. 중요한 사진 몇 장은 지니고 월남할 것을… 하며 필자에게도 몇 번이나 아쉬워함을 말했었다. 윤동주의 사진들이 많지 않은 것은 이런 사유가 있었던 것이다.     윤혜원 부부는, 6․25 직후 부산에서 많은 고아들을 돌보며 살았다. 그 뒤에 건축업에 종사하다가, 1970년에는 필리핀으로 가서 목재 사업을 하였다. 1986년부터는 아들과 함께 호주 시드니에 정착하여 살다가, 윤 여사는 2011년 12월 10일에 작고했다.                   3. 윤동주 묘소의 개수와 관리       윤혜원 부부는 윤동주의 묘소 관리에도 지극 정성이었다. 그 주변 묘들도 배려하고, 가까이 있는 고종사촌 송몽규의 묘소도 똑같이 보살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에 일본 후쿠오까 감옥에서 죽었다. 만 27년 1개월 16일의 삶이다. 묘소는 1945년 3월 6일 길림성 용정시의 동북쪽인 합성리 마을 뒤 동산의 교회공동묘지에 설치되었는데, 봉분만 있는 평범한 잔디묘였다. 세로 검정 글씨로 “詩人尹東柱之墓”라 새긴 화강암 묘비는 1945년 6월 14일에 가족들이 세웠다.                                                              2003년 6월 28일 필자가 용정의 숙소로 초대받은 자리에서, 윤혜원 오형범 부부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며 몇 가지 사실을 들려주었다. 이 내용들은 그 뒤 이들의 부탁을 받고,〈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윤동주 이야기〉로, 2004년 12월 1일에 발간한 윤동주 60주년 추모사화집《님을 그리며》에 싣고, 2004년 12월 11일 서울 문학의집에서 한국문인명예운동본부 주최로 연 행사에서 발표했다. 그 중에 묘비에 관련된 것 두 가지만 소개한다.       윤동주의 묘비 전면 표제는 “詩人尹東柱之墓”로 되어 있다. 그런데 어째서 “詩人”이라 했을까? 사실 묘비를 세운 1945년에는 윤동주가 시인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창작일자로 가장 빠른 시는 1934년 12월 24일자로 된 3편이 있다. 최초로 공개된 시는 1935년 10월에 숭실중학교 학생회에서 간행한 제15호에 게재된 「공상」이다. 동시는 1936년「병아리」가 연길의 11월호에 발표되고, 이어서「빗자루」(12월),「오줌싸개지도」(1937.1.),「무얼 먹고 사나」(37.3.), 「거짓부리」(37.10.)가 발표되었다.     1939년 1월 23일에는 시「遺言」이 조선일보 학생란에 실리고, 이어서 시「아우의 印象畵」와 산문「달을 쏘다」가 같은 난에 게재되었다. 동시「산울림」은 지에 발표되었다. 1941년에 연희전문 문과 발행의 6월호에 시 「새로운 길」이 실리고, 「자화상」도 6월호에 발표되었다.     사후에 최초로 발표된 시는 1947년 2월 13일 경향신문 4면에 게재된 「쉽게 씌어진 시」이다. 3월 13일에는 「또 다른 고향」이, 7월 27일자에 「소년」이 실렸다. 당시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있던 정지용이 게재한 것이다.     이런 사실로 보아, 묘비에 “시인 윤동주”라 한 것은 의문이다.     그런데, “詩人”이라고 붙인 사람은 조부와 부친이었다고 여동생 부부이 증언했다. 그 근거는 윤동주가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을 졸업하면서 19편을 묶어서 3벌을 만든 육필원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스승인 이양하 교수가 출판은 아직 때가 아니라 했던 그 시집이다. 출판은 되지 않았으나 시집은 이미 완성한 것이었고, 그 육필시집을 보았기 때문에 ‘시인’이라 한 것이라고 했다. 가족이 세운 묘비이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 물론 윤동주가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1948년 1월 30일 정음사에서 발간한 첫 유고시집부터이다.     또 하나, 묘비에는 연호(年號)가 아닌 서기(西紀)로 나온다. 어째서 연호가 아닌 서기를 썼을까? 윤동주는 서기 1945년 2월 16일에 일본 후꾸오까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묘비는 같은 해 6월 14일에 세워졌다. 그런데, 윤동주의 묘비에는 연도가 모두 연호(年號)가 아닌 서기(西紀)로 되어 있다. 비문 속의 연도도 서기이고, 묘비문 끝에도 “1945년 6월 14일 謹竪”라 새겨져 있다. 당시에는 다들 연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것은 특이한 사실이다.     같은 해 3월 7일에 작고한 송몽규(宋夢奎)의 묘비에는 서기가 아닌, 연호 “康德”으로 새겨져 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현석칠(玄錫七) 목사의 묘비에도 “康德”으로 되어 있다. “강덕”은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당시 연호였다.     비문은 은사인 김석관 선생이 지어서 썼고, 묘비는 가족들이 세웠다. 그러므로, 연호 대신 서기를 쓴 것은 이들이 의도적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하여 오형범 장로는 다음과 같이 의견을 말해 주었다. 윤동주는 한국 사람인데 억울하게 잡혀가서 일본 감옥에서 죽었다. 그러니 어떻게 일본이 세운 만주국 연호를 쓰겠는가? 그래서 서양에서 두루 쓰고 있는 서기를 쓴 것이다.     한창 나이의 자식을 잃은 어버이로서도, 윤동주의 스승으로서도 그들은 심정적으로 일본(만주국)의 연호는 쓰고 싶지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윤동주의 가족은 일찍부터 모두가 기독교 신자였기에 서기가 어렵지 않게 선택될 수 있었을 것이다.       윤동주의 묘소 1차 개수는 1988년 6월에 재미동포인 현봉학(玄鳳學) 선생이 주도하는 미중한인우호협회 연증(捐贈)으로 용정중학교 동창회에서 수선(修繕)하였다. 이때 봉분 밑을 시멘트로 20여㎝ 높이로 둥글게 두르고, 묘비는 그 테두리 밖 정면에다 세웠다. 묘비 앞에 오석판(烏石板)을 맞춰 대어서 새로 상석을 설치하였다. 가로 90㎝, 세로 60㎝, 높이 20㎝ 정도이다.     현봉학은 1984년 봄 재미동포인 신태민(전 경향신문 부사장) 댁에서 윤동주의 첫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고, 그해 여름에 재미동포 13명을 인솔하고 중국 연변을 방문하여, 여러 유지와 주정부에게 윤동주가 애국시인이며 그 묘소와 유적들을 찾아주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은 윤동주를 알지 못했고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내년 재방문 때에는 꼭 묘소를 찾아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당부하였다.     다음해 7월에 두 번째로 방문하여, 용정시 대외문화경제교류협회 최근갑 이사장, 용정중학교 유기천 교장, 연변대학 농학원 김동식 교수 등으로부터 묘소를 발견했으니 안내를 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폭우로 버스는 동산 묘지 언덕의 진흙땅에 빠지고, 걸어서 올라갈 수도 없어서 단념하고 말았었다.     그런데, 윤동주 묘는 1985년 5월 14일에 일본의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교수가 찾아냈다.1984년 여름 일본에 가 있던 윤일주 교수가 다음해에 연변대학 초빙교수로 가게 된 오무라 교수를 만나 윤동주 묘소 사진을 주며 묘소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오무라 교수가 1985년 4월 12일에 연변대학 교환교수로 가서, 연변대학의 권철, 이산해 교수와 용정중학교의 한생철 선생의 도움으로 동산에 있는 묘지를 찾아냈다. 묘는 사진으로 찾아냈고, 묘비의 비문으로 확인하였던 것이다.     오무라 교수는 그 뒤 용정중학에서 학적부을 발견하고, 송몽규 무덤, 윤동주 생가터, 영동교회터 등을 더 찾아냈다.       윤동주 묘소의 2차 개수는 윤혜원 부부가 2개월 정도 직접 인부들을 데리고 작업하여 2003년 7월 15일에 완료하였다. 봉분 밑의 시멘트 테를 제거하고, 사방 4m 위치에 폭 60㎝의 대리석판을 둘러 세웠다. 그리고 석판 안쪽은 모두 잔디를 심어 봉분 모습을 네모진 모습으로 여유롭게 만들었다. 묘비는 역시 봉분 앞에다 세웠다. 전의 오  석판 상석을 치우고, 새로 오석 하나로 된 상석을 새로 설치했다. 가로 100㎝, 세로 60㎝, 높이 15㎝의 크기이다. 묘의 왼쪽 앞에 따로 가로 60㎝, 높이 40㎝의 개수비를 새로 만들어 세웠다.     왼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 1917~1945)의 묘소도 윤동주의 묘소도 똑같은 모양으로 개수해 놓았다. 다만 개수비가 없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강덕(康德) 12년 을유 5월 20일에 세운 묘비와 1991년 7월에 용정중학동창회에서 수선했다고 새긴 상석도 그대로이다. 본래 명동 장재촌에 있던 것을 1990년 4월 5일에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그런데 윤동주의 묘소 앞에는, 가로 300㎝, 세로 150㎝ 정도를 대리석으로 네모지게 테를 두르고 그 안에다 잔디를 심어 참배하기에 좋게 계절(階節)을 만들어 놓았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2003년 6월 6일 연길 문인들과 함께 묘소를 방문했을 때 노부부가 인부들을 데리고 개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뜻밖의 만남을 반기고, 우리가 비탈진 자리에서 참배하는 것을 보고 느껴서 계획에도 없는 계절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웃으면서, “보태 드린 것 없이 한 몫 했네요”라고 하자, 오형범 장로가 “윤동주는 29살 젊은이로 죽었는데 환갑을 지낸 분들이 절을 하는 것을 보니 민망했었지요” 하고 답변했다. 참배자를 위한 배려겠지만, 내 손을 꼬옥 잡아주던 부부의 손이 그냥 따스하기만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80세 늙은 동생이 오빠에게 마지막 정성을 드리는 거지요”라며 웃던 그때의 노부부의 순수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4. 윤동주 문학상 시행       윤혜원 오형범 부부는 1999년에〈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했다. 윤동주 같은 시인을 발굴하여 격려 육성하고, 윤동주의 삶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취지와 목표로 만든 것이다.     제1회 윤동주 문학상은 2000년 2월 16일에 연변에서 시상을 했다. 이 문학상은 재미동포 현봉학 박사가 주도한 ‘미중한인우호협회’의 후원으로 시작되었다. 윤동주 첫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감동하고, 1984년 봄에 맨 먼저 윤동주 묘를 찾으러 나섰던 열정이 만든 것이다.     심사대상 작품은 연변인민출판사가 발행하는 초중과 고중용 월간지에 1년 동안 실린 중국 조선족 중고등학교 학생작품들로, 거의 1,000편을 대상으로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심사위원은 연변대학 교수 2명과 연변작가협회, 연변인민출판사와 연변교육출판사에서 각각 1명씩 모두 5명으로 구성되었었다.              2003년 연변대학 수필창작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던 필자도 그 해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5월 13일 연변대학의 최상철 교수, 허춘희(연변인민출판사), 김흠(연변교육출판사), 한석윤(연변작가협회)과 함께 5명이 심사했는데, 고중조와 초중조 각에 1등 1명, 2등 3명, 3등 6명씩 선정하고, 전체 대상 1명을 따로 선발했다. 시상식은 5월에 해왔는데, 조류독감으로 7월 18일 연길빈관에서 윤혜원 부부와 현봉학 박사가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윤동주 문학상은 연변인민출판사가 주관을 하는데, 시상식에는 호주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는 윤혜원 오형법 부부는 해마다 참석해 왔고, 연변의 문인들과 각급 학교 교사, 언론인들이 참석하고 있다.     문학상은 그 후에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와 한국민족교육문화원(전남 광주), 국제라이온스 포항지부 등이 후원단체로 참여하고 있고, 수상자들을 해마다 한국으로 초청하여 모국 방문과 문화 관광을 시키고 있다.     특히 연세대학교는 문학상 수상자들의 초청과 국내 체재 및 안내를 맡아왔는데, 대상 수상자를 4년 장학생으로 선발하기로 결정하여, 2007년에 처음으로 옌볜의 한국화(19) 양을 인문학부에 합격시킨 바 있다.     문학상을 창립부터 후원했던 미국의 현봉학 박사도 작고하고, 윤동주 친여동생인 윤혜원 여사도 작년 연말에 별세하였다. 형제자매로 유일한 오형범 장로도 90세를 맞는 고령이다. 그러나 윤동주 문학상은 많은 분들의 관심과 후원으로 계속될 것이며, 유능한 문인들의 배출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5. 윤혜원 오형범 부부의 삶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출생하여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29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해방되기 꼭 6개월 전에 그는 만 27년 1개월 16일을 살고 갔다.     윤혜원은 1923년 출생이니 6살 아래다. 오형범은 윤동주와 면식도 없었고, 1948년에 맞선으로 윤혜원과 결혼했다. 윤동주가 시인인 것도 월남하여 그가 시인으로 세상에 알려진 뒤에 알았단다.     그런 그가 윤동주의 자필원고와 시작 노트 등을 가지고 와서 윤동주 시집의 증보판과 육필원고본을 펴내게 하였고, 90평생을 처남 윤동주을 위해 살아온 것이다.     이들 부부는 오래 전부터 오빠 윤동주의 고결한 이미지에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 봐 자신들이 노출되지 않도록 애를 쓰며 살았다. 그들이 월남하여 서울에서 부산으로, 필리핀과 호주로 옮겨 산 것도 그런 뜻이었다. 남들을 만나도 늘 조심하고, 누구에게나 겸손하게 대하며 항상 봉사하고 베푸는 삶을 살았다. 필자가 윤혜원 부부를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6월 6일 윤동주 묘소에서였다. 연변의 문인 몇몇과 용정의윤동주 묘소에 갔다가 개수 작업을 하고 있던 두 분을 뜻밖에 만난 것이다.     이 개수가 평생에 다시는 할 수 없을 줄로 여기고 마지막 정성을 쏟는다는 말처럼 진지함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후에 연길 숙소에 초대되어 점심을 대접받은 적이 있는데, 평생에 80노인이 손수 마련한 식사는 처음이었다. 맛있는 음식에 셋이 반주로 먹었던 포도주 맛은 지금도 생각나게 한다.     두 분의 요청으로 상지대 서시작품비 사진을 용정중학교 윤동주 전시실에 게시했고, 완공된 윤동주 묘소를 촬영한 사진들도 갖다 드렸다. 윤혜원 여사는 묘소 사진들을 보며 “내 남편한테 절하고 싶다”고 했다. 평생을 친오빠 윤동주를 위해 산 남편이고, 오늘의 윤동주가 있기까지에는 그의 공이 컸기 때문이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을 지원할 때 집안의 기둥으로서 의과로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권고에 밥도 안 먹고 고민했는데, 결국 할아버지가 젊은이의 뜻을 꺾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여 문과로 진학한 것과, 일본 동지사대학에 윤동주 시비를 건립할 때 이를 계기로 만나지도 않던 민단과 조총련 인사들이 화합하고, 또 동지사대학 동포동문 모임인 코리아 클럽(Kore Clup)이 창설된 것을 감격해 하며 들려주었다.     또 서시의 일본어 번역이 잘못된 소견과, 윤동주의 스크랩북 원본을 심연수의 형인 심연호 씨가 소장한 경위와, 윤동주가 사귄 여성들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윤동주가 ‘아리랑’과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노래를 자주 불렀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나는 부부의 부탁으로, “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윤동주 이야기” 몇 가지를 한국문인명예운동본부가 발간한 추모사화집《님을 그리며》에 싣고, 2004년 12월 11일에 서울 문학의집에서 개최한 한일세미나에서 발표한 바 있다. 이 기간에 문학의집에 을 마련하여 2주 동안 전시했었다. 2005년 2월 12일부터 15일까지는 일본 후쿠오카 감옥 마당에 가서 를 갖고 세미나도 개최하였다.     에 감동을 받고, 2000년 7월에 학술대회에 참석했다가 앞장서서 용정의 동산공원 묘소를 찾아내어 참배했던 윤동주, 그리고 묘소 개수 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윤혜원 여동생 부부, 나와는 인연이 참 많다. 그래선지 윤혜원 여사는 마치 나의 누님 같은 느낌과 생각이 드는 분이다. 삼가 다시 명복을 빈다.        
486    [그것이 알고싶다] - 윤동주 사진 살펴보다... 댓글:  조회:2499  추천:0  2017-05-20
윤동주곁자리에 앉은 사람은 누구?     지난 2013년 2월 27일, 윤동주시인의 유가족인 윤인식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저항시인인 윤동주의 육필로 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비롯한 129편의 시와 윤동주시인의 손때가 묻은각종 물품 등 유품들을 공개했다.   특히 윤동주시인이 고종사촌인 독립운동가 송몽규와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도 공개됐다. 이 사진은 윤동주시인이 광명중학교 5학년, 송몽규가 대성중학교 4학년에 재학할 당시 중국 룡정에서 찍은것이다. 시기는 1937년쯤으로 추정된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익숙한 얼굴이고 그러면 가운데 앉은 이는 누구일가? 일설에 의하면 허성택이라고 한다.   용정 대성중학을 나와 북한으로 월북한 그 허성택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의 용정중학,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진 당시 용정의 대성중학은 사회주의자들을 대량 배출한 학교이다.   허성택은 북한의 정치인으로서 1908년 함북 성진에서 태여났다.   1933년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고 국내로 들어와 혁명적 농민조합 조직활동을 벌였다.  1945년 8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11월에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위원장이 되었다. 1946년 2월 좌익의 통일전선체인 남조선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당·사회단체대표자회의에 남쪽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월북했다가 그해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고, 이어 북한정부 제1차 내각의 노동상에 임명되었다.  1956년 제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 겸 당검열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이듬해 직업총동맹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 석탄공업상 등에 선출되었고, 노력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1958년부터 남로당 계열의 종파분자로 몰려 모든 공직에서 해임·숙청되었다.   그리고 각 뉴스마다 이 사진이 첫 공개라고 대서특필하고 있지만 실제 첫 공개는 아니다. 2008년에 출간된 서대숙 저 "김약연 : 간도 민족독립운동의 지도자(한국의 독립운동가들)" 에 이 사진이 이미 수록되였다.   /김혁                                 ( 길림성 용정시 명동촌 모습)  
485    시인은 일상적 시각으로부터 탈피해야... 댓글:  조회:2015  추천:0  2017-05-20
12. 서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거리 시 작품 속에서 '서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거리'가 독자들에게 주는 감동의 폭은 참으로 다양하다. 서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벌어진 틈을 '정서적 자극의 폭'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독자들의 반응을어떻게 다양하게 보여주는가는 다음의 예를 통하여 알아 보자. [가] 예쁜 새 [나] 비에 젖은 새 '[가] 예쁜 새'에서 대상은 '새'이다. 이 '새'가 예쁘다고 말하는 이는 물론 서정적 자아이다. '[나] 비에 젖은 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상은 '새'이며, 이 '새'가 비에 젖었다고 말하는 이는 서정적 자아이다. '새'라는 대상이 밝혀지고 서정적 자아가 밝혀졌으면, 이제는 '새'와 '서정적 자아'의 거리가 [가]와 [나]에서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거리라 함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가시적(可視的)인 거리가 아니라, 감정이 얼마나 개입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전자를 '거리가 가깝다', 후자를 '거리가 멀다'로 부르게 되는 추상적인 거리를 말한다. 이렇게 볼 때, [가]와 [나]에 나타난, 대상과 서정적 자아의 거리는 확연히 구별된다. 즉 [가]는 '새'를 서정적 자아가 직접 '예쁘다'고 말하는 경우이고, [나]는 '새'가 '비에 젖어 있는 상태'를 서정적 자아가 객관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인 경우이다. 다시 말해서 [가]는 서정적 자아의 '새'에 대한 '예쁜' 감정이 잘 드러나 있고, [나]는 서정적 자아가 자기의 감정을 절제한 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비에 젖어 있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니까 서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거리가 [가]는 밀착되어 있고, [나]는 느슨한 셈이 된다. 그러면 이같은 점이 시를 다듬거나 독자가 읽게 되는 경우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물론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점을 살펴보기 위해 대상과 서정적 자아와 독자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도식화 하였다. 작가 ------- 작 품 ------- 독자 서정적 자아 --새 위의 도식에서 수평적 측면은 서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거리를 나타내는데, 이것이 작품으로 이루어질 때 독자는 바로 이 작품을 읽게 된다는 말이다. 앞에서 말한 '정서적 자극의 폭'은 여기에 적용되어야 할 것 같다. '서정적 자아'와 '새'의 거리가 가까운 [가]의 경우 이를 감상하게 되는 독자의 위치와, 반대의 경우인 [나]에서 나타나는 독자의 위치는 다르다. 즉[가]는 서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거리가 너무도 가까운 이유 때문에 이미 작가가 '새'를 '예쁘다'고 규정지은 것밖에는 더 이상의 정서를 환기할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반면 [나]를 보자. '서정적 자아'가 '새'를 '비에 젖었다'고 표현했는데, 이 시를 감상하는 독자는 서정적 자아와 대상의 거리가 [가]보다 많이 벌어져 있는 틈으로 여유있게 위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비에 젖은' '새'라는 객관적 표현을 받아들이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에 젖었기' 때문에 '초라하다', '불쌍하다' 혹은 '애처롭다' 등 동정심 내지는 '고독', '슬픔'의 다양한 감정을 불러 일으킬 수 있게 된다.다시 말해서 독자에게 정서에 대한 환기를 충분히 시킴으로써 자유로운 감정 적용의 기회를 제공해 주게 된다. 이러한 결과로 미루어 본다면 시에도 '나만의 시'가 있는가 하면 '독자와 함께 하는 시'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가]와 같은 '나만의 시'가 좋다든가 [나]와 같은 '독자와 함께 하는 시'가 좋다는 식의 규정을 위함이 아니다. 상황에 알맞는 시적 표현이어야만 좋은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일 뿐이다. 13. 일상적 시각으로부터의 탈피 문학의 생명이 신선함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과거를 답습한다거나 모방의 차원에 그친 문학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벌써 문학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라고 보면 틀림없는 말이다. 그래서 작가들은 늘 신선한 눈을 갖기 위한 고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주변의 사물에서부터 심오한 철학에까지 다방변에 걸쳐 예사로운 눈으로 그것들을 대하지 않는다. 뛰어난 관찰력, 상상력, 추리력 등이 발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바로 문학이 신선한 창조이게 하는 생명력이다. 모든 예술 작품이 다 그러하지만 시는 정교한 언어 예술인 까닭에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언어 생활이 인간적인 삶의 기본이라는 측면을 덧붙인다면 더더욱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문학의 생명은 관찰력, 상상력, 추리력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은 관찰력이다. '사소한 사물이나 현상도 그냥 내버려 두지 말라. 거기에 기기묘묘한 착상이 있고 원리가 있고 언어가 있다.'는 이 말은 시인의 기본 정신이다. 즉 말을 확대 해석해 보면, 요는 관찰하라는 말이 되는 것이며, 이 관찰하라는 말은 일상적인 시각에 머무르지 말고 거기에서 벗어난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라는 말이 될 것이다. 일찍이 러시아의 형식주의 작가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란 개념은 일상적인 시각의 파괴란 의미에 다름 아닐 것이다. 육교 위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주먹을 불끈 쥐고 노래를 부르며 누군가 그들을 군중이라 불렀다 (중략) 아주 쬐그만 안개꽃들이 다발로 떠내려 가는 것이 먼 강에 보이는구나 때때로 시너를 끼얹고 사랑하라 사랑하라 뛰어내리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그 뿐 주위는 다시 적막에 젖고 아들아 작은 가지 끝에서 너는 언제나 홀로 시드는구나 환한 대낮에 한 묶음으로 묶여서 (고영조, '안개꽃'중에서.('시와 문학' 가을호)) 위의 시는 '안개꽃'을 소재로 하고 있다. 우리들의 일상적인 시각에서 '안개꽃'은 순결, 순수 혹은 순결한 사랑, 순수한 사랑 등의 이미지이다. 그래서 일상적인 방식대로의 시라면 이와 같은 내용이게 마련이다. 마침 그런 일이 있었다. 시 공부에 열을 올리던 친구들 앞에 안개꽃이 가득한 꽃병을 올려 놓고, 안개꽃을 소재로하여 시를 지어 보라고 했더니 50명 중 45명의 친구들이 순결하고 깨끗하고 순수한 사랑의 이미지를 풍기는 시 작품을 제출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친구들이 일상적 사고 방식에만 머물러 있었지 새로운 시각에는 별로 눈을 돌리지 못했다는 얘기이다. 고영조의 '안개꽃'은 새로운 눈을 갖게 해 준다. '안개꽃'을 노래하면서도 단순히 그 서경적인 묘사나 혹은 아름다움의 한탄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 내면에 숨겨진 존재론적 의미 탐색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는 기본적으로 사물 탐구를 통해 인간 존재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 그것을 사회적인 의미로 확산시킨다. 다시 말해 '안개꽃'에 반영된 죽음의 의미는 사회적인 것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시가 애초부터 사회 의식에 바탕을 두고 씌어졌다는 것은 도입부에서 암시되고 있다. '육교 위로 /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 주먹을 불끈 쥐고 / 노래를 부르며 / 누군가 그들을 군중이라 불렀다'라는 첫 5행이 그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 도입부를 읽으면서 이미 시의 제목으로 제시된 '안개꽃'과 '데모하는 군중'이라는 두 사물의 의미론적 등가성(等價性)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가령 에즈라 파운드의 저 유명한 '지하철 역에서' 군중을 비에 젖은 봉숭아 꽃잎으로 비유했던 사실과 유사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안개꽃은 장미나 백합처럼 개체로 피어나는 꽃이 아니라 무리지어 피는 꽃이라는 점에서 군중적 이미지에 훨씬 가깝다. 동시에 안개 역시 우리가 살아온 미망에 빠졌던 시대의 사회 생활을 환기시켜 주는 데 적절한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시인은 거리에 짓밟힌 한 묶음의 시든 안개꽃다발을 통해서 지난 시대 독재와 항거하다가 죽어간 우리의 젊은 넋들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시는 우리 사회의 아픔을 사물 탐구의 형식으로 서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월미도는 뿌연 바다로 막혀 있다. 월미도는 노을진 바다로 막혀 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바다'하면 '확 트이는 느낌 / 가슴을 열어 놓은 느낌 / 시원함 / 나아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가슴이 답답할 땐 바다를 찾고, 바다로부터 신선한 마음을 담아오는 습관도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저 '바다는 트여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한 구절을 옮겨놓고 보면, 시는 답답한 내 마음을 털어 놓는 그릇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런 일상성보다 신선한 맛을 느껴보고 싶을 때, '월미도는 / 뿌연 바다로 막혀 있다. 월미도는 노을진 바다로 막혀 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바다'하면 '확 트이는 느낌 / 가슴을 열어 놓은 느낌 / 시원함 / 나아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가슴이 답답할 땐 바다를 찾고, 바다로부터 신선한 마음을 담아오는 습관도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저 '바다는 트여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한 구절을 옮겨놓고 보면, 시는 답답한 내 마음을 털어 놓는 그릇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런 일상성보다 신선한 맛을 느껴보고 싶을 때, '월미도는 / 뿌연 바다로 막혀 있다'로 바꾸어 보자. 그러면 서정적 자아는 월미도 땅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입장이 아니라 바다 쪽에서 월미도 땅을 바라보는 입장이 되어 버린다. 바다에 있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자신을 한 척의 배의 입장으로 설정해도 색다른 느낌은 충분하리라고 본다. 적어도 뭍에 대한 그리움 정도의 내용을 형상화할 수도 있겠으니 말이다. 문제는 사물을 바라보되 틀에 박힌 시선으로 바라보지 말고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출처:신배섭의 국어마을) ------------------------------------------------------------------------------------       커다란 나무  ―김기택(1957∼ )     나뭇가지들이 갈라진다 몸통에서 올라오는 살을 찢으며 갈라진다 갈라진 자리에서 구불구불 기어 나오며 갈라진다 이글이글 불꽃 모양으로 휘어지며 갈라진다 나무 위에 자라는 또 다른 나무처럼 갈라진다 팔다리처럼 손가락 발가락처럼 태어나기이전부터이미갈라져있었다는듯갈라진다 태곳적부터 갈라져 있는 길을 거역할 수 없도록 제 몸에 깊이 새겨져 있는 길을 헤아릴수도없이가보아서눈감고도알수있는길을 담담하게 걸어가듯이 갈라진다 제 몸통에서 빠져나가는 수많은 구멍들이 다 제 길이라는 듯 갈라진다 갈라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 조금 전에 갈라지고 나서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다시다시 갈라진다 갈기갈기 찢어지듯 갈라진다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쉬지 않고 갈라진다 점점 가늘어지는데도 갈라진다 점점 뒤틀리는데도 갈라진다 갈라진 힘들이 모인 한 그루 커다란 식물성 불이 둥글게 타오른다 제 몸 안에 난 수많은 불길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맹렬하게 갈라지고 있다 이 나무는 백양나무나 메타세쿼이아처럼 몸통이 곧고 훤칠한 나무는 아닌 듯하다. 느릅나무일까. 사람의 눈이 쉬이 닿는 높이부터 가지가 갈라져 나오고, 그 가지에서 또 가지가 갈라져 나오고, 거기서 ‘맹렬하게 갈라지고’ 있는 잔가지로 우듬지를 이루는 나무. 나뭇가지들이 세세히 보이니 아직 나뭇잎 무성한 계절은 아니리라. 화자는 유난히 가지 많은 한 그루 커다란 나무에서 맹렬한 생식력을 보고, 징그러움과 동시에 경탄을 느낀다. 나뭇가지가 ‘몸통에서 올라오는 살을 찢으며’ 갈라진단다. 과연 무통분만인 듯한 식물의 생식도 동물 새끼가 어미 몸을 찢으며 태어나는 것처럼 폭력적일 수 있겠다. 화자는 ‘갈라진다 갈라진다’고 강박적으로 반복한다. 점점 빠르게, 점점 세게! ‘이글이글 불꽃 모양으로 휘어지며 갈라지는’ 나무의 몸속에서, 고조되는 생명력에 휩쓸려 화자는 거의 환각에 빠진 듯하다. 그러나 ‘점점 뒤틀리는데도’ 갈라지는 나무나 화자나 쓰러지지 않는다. 뿌리가 굳건하기에. ‘제 몸 안에 난 수많은 불길을/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은 김기택 시를 읽을 때면 감지되는 그의 치열한 시 정신이기도 하다. 잔가지 빽빽한 그 나무, 이제 깊은 녹음(綠陰) 드리우리라.  
484    "어머니,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댓글:  조회:2387  추천:0  2017-05-20
10. 초보 단계에서 시쓰기 시 쓰기를 처음 시도할 때는 먼저 형식과 내용에 신경을 쓰게 된다.형식면에서 가장 쉬운 방법이 있다면 정해진 틀을 그려 놓고 그 속에 내용을 끼워 넣는 것도 하나의 요령일 수 있겠다. 난 그날이 오면 내 팔과 내 얼굴은 밝은 웃음을 지으며 하나씩 치장을 합니다. 난 그날이 오면 사랑의 햇살을 받으며 조금씩 하얗게 피어납니다. 하얀 아이들의 웃음을 벗삼아 뭉개구름을 따라 그렇게 피어납니다. 난 그날이 오면 사랑의 햇살을 받으며 초록색 내 팔을 뻗습니다. 저 공허한 하늘에 태양을 따라 초록색 옷을 입습니다. 그날이 오면…… (고교생 작품, '목련') 친구야! 흰 눈이 소리 없이 내리는 하얀 겨울날 너에게 이 글을 띄운다. 지금 창 밖을 보면 아직 겨울이고 봄은 오지 않았는데 이 하얀 겨울은 너무나도 빨리 가려하는구나. 친구야! 온통 초록이던 내 마음이 오늘 아침에는 하얀빛으로 변했단다. 온 세상이 하얀 겨울로 변했듯이 말이야. 저 눈 속에서 너와 단 둘이 누워 눈물을 우리 품에 모두 안아보고 싶구나. 친구야! 왠지 하얀 겨울날은 슬퍼진다. 네가 내 곁에 없는 탓일까. 나에게 네가 없는 차가운 겨울은 모든 생명체가 깨어나지 않은 봄과 같구나. 친구야! 이 하얀 겨울이 다 가기 전 우리 기차를 타고 긴 여행을 떠나자.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젊음을 얘기하며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로 우리들의 사랑을 속삭이며 긴 여행을 떠나자꾸나! (고교생 작품, '하얀 겨울날 친구에게') '목련'은 '난 그날이 오면 ∼'과 '∼ 합니다.'를 반복해서 구사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그날'은 '목련이 필 봄날'이며, 네 번씩이나 반복 구사함으로써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게다가 '∼ 합니다.'의 내용에 '치장하고 → 꽃으로 피어나고 → 초록색 옷을 입는' 시간성을 가미시키면서 기교를 부리고 있다. '하얀 겨울날 친구에게'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빌어서 친구와 같이 우정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데, '친구야!'를 반복해서 부르는 틀 속에 서정적 자아의 다정한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다.그러나 틀을 설정해 놓고 내용을 틀 속에 억지로 가두는 이와 같은 방식은 작가는 작가대로 제한된 내용을 형상화할 수밖에 없으며, 독자는 또한 독자대로 이해의 폭을 좁힐 수밖에 없다. 시 쓰기의 초보 단계에서는 이와 같은 형식에다 다양한 내용을 담아봄으로써, 정갈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마치 등에 진 짐꾸러미가 제멋대로 놀지 않고 착 달라붙은 안착감을 갖게 해 줄 것이며, 완결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단아(端雅)한 맛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한마디로 스스로가 자기의 작품을 두고 잘 썼다고 칭찬하기까지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신석정의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는 이에 대한 적절한 예가 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 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 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 소리 구슬피 들려 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가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 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먼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신석정 '어머니,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이 시는 아홉 개의 연이지만 '어머니 /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를 반드시 앞에 배치하고 있는 세 단락의 구성을 보이고 있다. 또 각 단락의 마지막 부분에는 '∼ 합시다.'의 청유 형식을 취하고 있어 공통적이다.(세 번째 단락 마지막의 '∼ 하지 않으렵니까?'를 청유형으로 고치면 '∼ 합시다.'가 된다). 첫째 부분은 '비둘기를 키웁시다.'로 끝나고, 둘째 부분은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로 끝나고, 셋째 부분은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로 끝난다. '비둘기 - 어린 양 - 새빨간 능금' 사이의 필연적인 인과 관계는 없어 보인다.그러나 이들이 상징하는 바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비둘기가 평화라면 어린 양은 순수이고 새빨간 능금은 풍성한 수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 사이의 연관된 의미를 찾자면, 평화와 순수 속에서만 풍유로운 삶이 보장된다는 뜻이 되겠다. 그리하여 작가는 평화와 순수가 부정되는 세계에서 평화롭고 순수하고 풍요로운 세계, 즉 '먼 나라'를 동경하고 있는 셈이다. 읽기도 쉽고 구조도 쉽게 파악되는 이와 같은 시에 '비둘기 - 어린 양 - 새빨간 능금'과 같이 깊은 의미망을 형성하는 기교를 첨가하게 되면 시의 맛은 한층 더해진다. 11.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무엇'은 '주제'와 통하는 말이고, '어떻게'는 '표현'의 문제이다.이에 대한 선후 관계의 정답은 없다. 독자와 만나는 것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완성품)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습작기 청년의 시작 노트를 통해 인용해 본다. 어느 날 나는 다리 위를 걷다가 난간 틈바구니에 쌓인 흙먼지에 싹을 틔운 풀을 보았다. 그 때 나는 그 풀을 보고 예사롭게 넘길 수 없었다. 신비스러움, 놀라움, 끈질긴 생명력에서 오는 강인함, 애처로움 등 만감이 교차하여 한참을 서서 상념(想念)에 잠기고 있었다. 하나의 사실에서 오는 느낌을 감회의 목소리로 옯겨 보고 싶었다. 흙이 있는 곳이라면 풀은 어디서든 싹을 틔우고 있었구나. 얼마든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실이지만 왠지 나에게는 남다른 경험일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무력해져 있던 나의 모습과 만난 풀이라는 점이 나에겐 특별한 경험이었고, 화초를 가꾸는 화분에 불청객처럼 솟아난 잡초라든가 게다가 운동장 한 가운데 혹은 계단 구석 등에서 자기 영역을 넓혀가는 풀들은 수 없이 보아왔지만 다리 난간 흙먼지 쌓인 곳에 뿌리를 내린 한 포기의 풀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특별한 경험을 나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 한 구절의 경험과 함께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으로 그 풀 한포기를 보는 순간 나는 적어도 두 가지의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한 없이 초라해지는 나에 대한 발견과 오히려 강하게 일어서려는 의지. 그리하여 이 두 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곰곰히 따져보았다. 그랬더니 목소리(어조(語調):시 작품에 나타나는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만 다를 뿐 결과는 같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보잘 것 없는 풀 한 포기도 발 디딜 수 있는 곳이라면 저렇게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는데, 나는 그보다도 못한 존재가 아닌가 하면서 초라한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것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일 것이고, 나도 강하게 일어서야지 하는 것도 무기력함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결국은 같은 내용이라는 생각 말이다. 다만 앞엣 것보다 뒤엣 것의 목소리가 강하게 드러나게 될 뿐.결과가 같다면 이 둘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표현은 없을까하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마침 나는, 내가 흐르는 강물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서 있음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하늘과 다리와 다리 위에 서 있는 나를 통째로 안고 흘러가는 강물을 보았다. 거기에 내가 있었다. 흙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싹을 틔우고 있었구나 다리 난간 위에서 나는 못 볼 것들을 보고 말았다 하늘과 다리와 다리 위에 기대어 뿌리 내린 풀과 나를 업고 흐르는 강물 떠오른 생각들을 여기까지 옯겨 놓고 보니,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에 나는 무척이나 흥미를 갖게 되었다. 다리 위 위험한 곳에 싹을 틔우고 있는 풀을 보고 '못 볼 것'이라고 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이런 모습을 담고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못 볼 것'이라고 하게 되었는지. 이 애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이 애매한 표현을 살리고 싶었다. 애매한 만큼 다양한 의미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더욱이 3, 4행에서 불쑥 튀어 나온 '못 볼 것들'은 독자들에게도 충격일 수밖에 없다. 무슨 '못 볼 것들을' 보았다고 하는지 자못 궁금해질 것이며, 이러한 궁금증으로부터 이 시는 본격적인 해석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이다. '못 볼 것들을 보고 말았다'를 중심으로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못 볼 것'은 '다리 난간 위에 싹을 틔운 풀'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왜 '보아서는 안 될 것'이었을까? 나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나는 더욱 초라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둘째로 '못 볼 것'은 '하늘, 다리, 풀, 나를 비추고 흐르는 강물'이다. 왜 '보아서는 안 될 것'이었을까? 앞에서 초라해진 '나'가 나의 눈에 비친 모든 존재(조화, 갈등, 고뇌하는 나까지 포함한 모든 것)를 넉넉히 안고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본 순간 나도 강물처럼 넉넉한 존재로 거듭나겠다는 깨달음을 4∼7행에서 얻게 되는 구조이다. 어느 정도 완결된 맛도 있고 해서 나는 나름대로 만족해 하고 있었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면 2행의 '∼ 있었구나'와 4행의 '∼ 말았다'가 어쩐지 일관성이 없어 보였다. 둘 다 영탄조가 아니면 서술형으로 하고 싶었다. 그런데 2행이 감탄하는 형식을 취하게 되면 흙먼지 쌓인 곳에 피어난 풀을 바라보는 신비로움이 나만의 것이 되어버려 자극의 폭을 제한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작자는 나름대로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는 폭을 마련하고 싶었다. 비춰진 모습을 그대로 제시하게 되면 정서를 환기하는 자극의 폭이 넓어지겠기에 말이다. 결국 '∼ 있었다'로 바꾸기로 했다. 흙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싹을 틔우고 있었다 다리 난간 위에서 나는 못 볼 것들을 보고 말았다 하늘과 다리와 다리 위에 기대어 뿌리 내린 풀과 나를 업고 흐르는 강물 흥미로운 시작(詩作) 노트이다(간략한 부분 메모를 첨가 서술하였음). 아마도 위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 스스로는 기쁨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 틀림 없다. 시작 노트에서 엿보이듯이 한 구절 한 구절 고민한 끝에 완성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를 쓰는 기쁨이며, 그 기쁨은 실의에 빠져 있을 때에 작용하기도 하는 것이어서 삶의 활력소가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문제가 되는 부분의 골자는 '나도 강물처럼 넉넉한 존재로 거듭나겠다는 깨달음'까지 미치지 못하였는데도 스스로는 꿈보다 해몽이 좋은 쪽으로 자의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의 의도가 독자 쪽과 많이 빗나가고 있다는 말이다. 해석에 있어서 비약이 너무 심하지 않았나 한다. 그러나 서정적 자아의 감정을 절제하여 정서적 자극의 폭을 확대시키고 있는 점은 공감이 될 수도 있겠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주제인 '서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거리'에 자세히 언급하기로 한다. 적어도 어떤 방식을 통해 시적 형상화가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는 위에서 알아 보았다. 작가마다 과정이 사뭇 다르게 나타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       새들은 아직도…… ―최영미(1961∼ ) 아스팔트 사이 사이 겨울나무 헐벗은 가지 위에 휘영청 쏟아질 듯 집을 짓는구나 된바람 매연도 아랑곳 않고 포클레인 드르륵 놀이터 왕왕시끌도 끄떡없을 너희만의 왕국을 가꾸는구나 부우연 서울 하늘 무색타 까맣게 집을 박는구나 봄이면 알 낳고 새끼 치려고 북한산 죽은 가지 베물고 햇새벽 어둠 굼뜨다 훠이훠이 부지런히 푸들거리는구나 무어 더 볼 게 있다고 무어 더 바랄 게 있다고 사람 사는 이 세상 떠나지 않고 아직도 정말 아직도 집을 짓는구나     게으른 이불 속 코나 후빌 때 소련 붕괴 뉴스에 아침식탁 웅성거릴 때 소리 없이 소문 없이 집 하나 짓고 있었구나 자꾸만 커지는구나 갈수록 둥그래지는구나 봄바람 싸한 냄새만 맡아도 우르르 알을 까겠지 모스크바에서도 소리 없이 둥그렇게 새가 집을 지을까?     봄이 아직 저만치 먼데 ‘아스팔트 사이 사이/겨울나무 헐벗은 가지 위에’ 집을 짓는 새에게 ‘휘영청’ 쏟아지는 시인의 마음이다. ‘된바람 매연’, ‘포클레인 드르륵 놀이터 왕왕시끌’, 하늘도 부연 이 서울에서 ‘아직도/정말 아직도 집을 짓는구나’! 도무지 살 만하지 않을 이 인간 세상에 ‘무어 더 볼 게 있다고/무어 더 바랄 게 있다고’ 깃들이는 새여, 미안하고 기특하고 고맙구나! 이 시가 쓰인 시기는 ‘소련 붕괴 뉴스에 아침식탁 웅성거릴 때’다. 그 뉴스에 세상이 무너진 듯, 자신의 전 생애가 ‘꽝’이 된 듯, 충격받은 사람도 있을 테다. 인간사 어떻든 아랑곳 않고 ‘끄떡없을 너희만의 왕국을 가꾸는’ 새들. ‘봄이면 알 낳고 새끼 치려고’ ‘죽은 가지 베물고’ ‘부지런히 푸들거리는구나’.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지. 시인도 일찍 일어나는 새인가 보다. 그래 ‘햇새벽 어둠 굼뜨다 훠이훠이/부지런히 푸들거리는’ 새를 보고 시를 잡아챘을 테다. 최영미는 어딘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제 욕망을 매개로 거침없이 펼치는 그이 시들의 서사에서 화사할 정도로 활달한 생명력이 느껴져서일까. 어떤 패배 속에서도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뜨겠지’, 분연히 희망을 뇌는 스칼렛 오하라. 이 시도 최영미 시 특유의 톡 쏘는 맛은 덜하나 ‘봄바람 싸한 냄새만 맡아도/우르르 알을 까겠지’ 같은 시구에 야생초 같은 생기가 찌르르하다.  
483    시작할 때 남의 글을 흉내내지 말아야... 댓글:  조회:2256  추천:0  2017-05-20
< 시 쓰는 요령 요약 > 리듬이 살아있게 쓴다. 쉽고 간결하며 아름다운 말을 사용한다. 연과 행을 꼭 나누어 써야 한다. 알맞은 비유와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착한 마음으로 솔직하게 쓴다.   동시를 쓰는 방법 ① 글감은 무엇이든 좋습니다.   - 주위의 사물을 관심 있게 바라보며 지나쳐 버리기 쉬운 것에서 글 감을 찾아냅니다. 눈에 보이는 것, 마음을 스쳐 가는 짧은 생각, 늘 그 자리에 있는 자연 속의 일부분도 좋은 글감이 됩니다. 무엇을 쓸 것인가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무엇이든 동시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둡시다. 착하고 고운 마음에서 동시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됩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찰력과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어린이다운 정서 속에서 글감을 찾아냅시다.   ② 거짓없이 솔직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 동시는 맑고 깨끗한 마음의 글입니다. 억지로 기교를 부리거나 가식적으로 표현한다면 생명을 잃게 됩니다. 어린이의 마음은 때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부끄러움이나 잘못도 정직하게 표현하고, 사물을 바라보는 착한 마음으로 동시를 씁니다.   ③ 남의 글을 흉내내지 말아야 합니다.   - 동시는 짧은 글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다른 사람의 것을 암기했다가 모방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경우, 습관이 되어서 창작활동에 방해가 됩니다. 스스로 생각해 내어서 나만의 글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낱말 하나도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 하나, 연 하나에 정성을 다해 자신의 표현을 찾아냅니다.   ④ 리듬이 나타나게 씁니다.   - 동시는 노래에서 비롯된 글입니다. 노래처럼 아름다운 리듬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짧게만 쓰면 된다는 생각에 운율을 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음악처럼 율동을 가지고 노래를 부르듯이 쓰는 동시에서 동시의 참맛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설명하거나 이야기하듯이 쓰여서는 안 되며, 일정한 리듬과 흥겨운 가락이 숨어 있어야 합니다.   ⑤ 연과 행을 바르게 나누어 씁니다.   - 산문과 시의 구별은 연과 행의 구분에 있습니다. 동시는 산문과는 달리 글자와 글자가 효과적으로 이어져야 하며, 행과 연이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의성어나 의태어도 사용하고 반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하게 됩니다. 의미가 비슷한 행들이 모여서 각 연을 이루고, 이 연이 모여 한 편의 동시가 완성됩니다. 제멋대로 나눈 행과 연은 호흡이 끊어지게 되므로 잘 짜 맞추어 나누어야 합니다.   ⑥ 알맞은 비유를 사용합니다.   - 짧은 글 속에서 많은 내용을 표현해야 하므로, 다른 것에 견주어 표현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비유를 사용하면 읽는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효과적으로 시를 표현하게 합니다. 직유는 두 개의 사물을 견주어서 '-같이, -처럼' 을 사용하는 것이며, 은유는 다른 사물로 그 의미를 대신 나타내어 원래의 의미를 감추는 것입니다. 이처럼, 비유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아름다운 의미를 찾아냅니다.   ⑦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 동시는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의 감각이 모두 동원되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간직한 것이나 사물의 모습을 눈에 보이는 것 외에 더 새롭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감각을 표현하는 것을 자신의 느낌으로 새롭게 표현합니다.     좋은 동시를 쓰는 요령   ① 다른 사람의 시를 많이 읽어야 합니다.   - 동시를 잘 쓰기 위해서는 윗사람이나 친구들의 좋은 시를 자주 읽고 암기하여 그 의미를 파악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내 나름대로 그 시를 소화시켜서 자기의 감정으로 만들어 둡니다.   ② 자주 써서 정리해 둡니다.   - 동시의 글감이 될만한 것이 있으면 그때마다 써 둡니다. 막상 새롭게 쓰려면 안 되는 경우가 있으니, 계절이 지나기 전에 그 계절의 감상을 써두고, 기쁜 일, 슬픈 일 등을 겪고 난 뒤에 곧바로 동시로 표현합니다. 처음부터 잘 쓰려면 무리를 하게 되어, 좋을 글이 나오지 않습니다. 자주 메모하듯이 시의 구절을 써두면, 꼭 필요할 때 정리하여 좋은 동시를 쓰게 됩니다.   ③ 사물을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 계절이 변화하면, 온갖 자연의 모습이 바뀌며, 새 학년에 올라가면 친구들의 얼굴도 바뀝니다. 그러한 변화를 자주 찾아내어 자신의 감정으로 만들어 둡니다. 다른 사람이 찾지 못하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 동시 쓰기에 도움이 됩니다. 남들이 미처 찾아내지 못하는 자기만의 생각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면 좋은 동시가 됩니다.   시의여러가지 표현방법 ① 의성법; 소리를 비슷하게 흉내 내어 표현함으로써 그 소리가 직접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불러 일으켜 생동감을 더해 주는 방법입니다.   예) 귀뚜라미 귀뚜르르   ② 의태법; 사물의 모습이나 동작을 비슷하게 흉내 내어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예) 반짝반짝 빛나는 별   ③ 의인법; 사람이 아닌 것이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의인법은 무생물이 생물처럼 살아 움직이는 표현을 하므로 활유법에 속합니다.   예) 부끄러움을 가득 안은 아카시아 꽃   ④ 생략법; 낱말이나 구절을 빼어 버리거나, 간단하게 줄여서 여운을 남기도록 하는 표현법입니다.   예) 네 손을 잡듯…….   ⑤ 반어법; 문장에 나타난 뜻과 실제의 뜻을 서로 반대되게 나타내는 표현법입니다. 예) 아이, 얄미워라. (여기서 '얄밉다'는 귀엽고 예쁘다는 뜻)   ⑥ 역설법; 얼핏 보기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하나, 실제로는 그 속에 진리가 담기도록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예)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    
///정진명   중고생을 위한 시강의  제 1부   학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수업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하여 인터넷의 신나는 가상현실 속을 떠도느라 고생하시는 학생 여러분을 생각하면 기성세대로서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 운명은 여러분들의 몫이지만, 그 운명을 만든 것은 기성세대의 무책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장래는 여러분의 어깨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들의 어깨에는 특별히 한국 시의 장래가 달려있습니다. 시를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에게 혹시 도움이 될까 하여 이 강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시작하기 전에, 우선 한국에 살면서 시를 자신의 희망으로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아주 반가운 소식을 전하고자 합니다. 제가 한 20년 동안 시를 쓰면서 든 생각입니다만, 한국 시의 수준은 다른 인접 갈래와 비교해볼 때 별 볼 일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소설과 비교하면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나라의 소설 수준은 정말 대단합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아도 시원찮을 작품들이 아주 많습니다.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황석영의 장길산 같은 작품이 다 그렇지요.    그러나 시에서는 그렇지를 못해서 딱히 우러러 볼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냐면 시에 뜻을 가진 여러분이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뜻입니다. 정말 좋은, 위대한 작품이 아직 안 나왔으니, 그것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여러분에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엘리어트의 황무지 같은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시인들이 아니라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러니 한국에서 시를 자신의 희망으로 택한 여러분은 정말 좋은 기회를 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막 시를 시작하려는 여러분에게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있을까요?   혹시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분야에 눈독을 들이는 학생들이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장래희망을 얼른 시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더 희망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밥벌이가 된다는 보장을 못 하지만, 이상에 한참 불타는 여러분이라면 그 밥벌이 때문에 희망을 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쓴 동기는 간단합니다. 한국 시의 장래는 젊은 학생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학교 현장에서는 시 쓰는 법을 배우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시를 올바르게 읽는 것을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우는 시는, 평론가들이 이미 정리해놓은 이론을 시에 어거지로 꿰맞추는 작업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는 정서를 전하려고 하는 물건인데, 그것을 토막내어 내부구조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 정서가 전달될 리가 없지요. 발 앞에서 튀는 개구리를 보자는 것인데, 그것의 안이 궁금하다고 갈기갈기 찢어놓은 꼴입니다. 시험지로 묻는 내용은 바로 그 내부 모양새입니다. 그러나 시는 그런 모양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읽고 난 직후의 느낌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을 보고 놀라 팔짝 뛰는 개구리의 모습을 보자는 것이지요. 이 자명한 사실을 가르치는 교재도 없고 교사도 없습니다. 입시가 원흉이지요.   시중에 나와있는 창작 안내서를 보면 창작보다는 이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 창작에서 이론은 수박 껍데기를 핥는 일에 불과합니다. 수박 맛은 껍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거든요. 이론으로 백날 설명한들 단 한 번 쓰도록 유도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런데 시중에는 그런 맛을 느끼게 할 만한 이론서가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도서관을 뒤져서 내린 결론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직접 쓴 시를 인용하면서 실제로 창작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제가 발벗고 나섰습니다.    글쎄요, 여러분들이 읽으면서 어떤 느낌을 얻을지 모르지만, 한 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돈을 많이 벌면 저한테 그 돈 좀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이 원고를 좀 책으로 내게. 하하하.    학생 여러분, 반갑습니다. 한국 시의 유일한 희망인 여러분에게 저의 작은 선물을 드리고자 합니다.    참고로, 이 연재가 끝나면 여러분의 작품을 직접 봐드릴 예정입니다. 여러분이 평상시에 연습한 작품을 이 사이트의 회원 문단에 올리시면 제가 할 수 있는 한도까지 손봐드리겠습니다. 단, 학생인 경우에만 말이지요. 이미 대가리가 다 커버린 것들은, 가르쳐봤자 소용없습니다. 잔머리만 굴리거든요. 하하하.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1. 군소리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학생 여러분을 위한 시 창작 강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자 하니 알아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무엇이든 태도가 중요합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느냐 하는 태도에 따라 시를 쓰는 방법도 방향도 달라집니다. 따라서 시 창작 기술을 얘기하기 전에 그 동안 제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낀 몇 가지를 먼저 얘기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만 시 창작 강의에서 하는 말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책탕물+1(?)     시 창작 강의라? 이건 물론 시 쓰는 법을 강의한다는 얘깁니다. 그렇기는 한데, 학생들을 상대로 이런 강의를 하자고 결심하기까지는 적잖은 고민이 뒤따랐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 쓰는 법에 관한 책이라면 이미 많이 나왔는데, 다시 한 번 더 반복해서 책탕물(?)에 또 다시 별 볼 일 없는 책 한 권을 보태어 독자들의 혼란만 가중시키는 것이 아니냐 하는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책탕물이 뭐냐고요? 흙탕물이라는 말이 있죠? 여기에다가 ‘흙’ 대신 ‘책’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애써 글을 썼는데 쓸모없는 책이 되면 어쩌나 하는 고민은 책을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합니다. 책이란 새로운 정보를 전하는 귀중한 방법인데, 쓸데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거나 이미 남들이 다 써놓은 내용을 반복하면 그러잖아도 출판물이 홍수를 이루는 요즘 세상에 정말 처치 곤란한 쓰레기 하나를 더 보태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꽤 오래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쓰기로 결심하고 이렇게 나섰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도서관에 가서 시 창작에 관한 책들을 주욱 훑어보다가,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뭐냐면, 지금까지 시에 관한 창작이나 이론을 써낸 책들은 모두 어른들을 위한 책이라는 겁니다. 특히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쓴 안내서나 개론서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 공부하는 여러분들이 보기에는 다소 벅찬 내용들입니다. 또 창작을 위한 책이라고 하는 것들도 내용을 들여다보면 실제로 시를 쓰는 데는 크게 필요하지 않은 이론들까지 자세하게 나와 있어서 그런 책을 봤다가는 시 쓰는 일을 오히려 더 어려워 할 것 같았습니다. 궁색하지만, 이것이 제가 이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미 나온 것들의 내용이나 질서를 무시하고 그 동안 제가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느낀 방법과 이론을 중심으로 설명하되, 어떻게 하면 어렵지 않고 재미있게 시를 쓸 수 있는가 하는 방법에 대해 궁리를 해보겠습니다. 물론 그 결과는 이 책의 맨 뒷장을 덮으면서 여러분들이 판단하겠지요.     이왕 나온 김에 한 마디만 더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지금은 학생들이나 청소년들이 읽을 책이 많아졌습니다. 제 또래의 어른들이 청소년들을 위한 책을 많이 펴냈고, 또 외국의 청소년 서적을 많이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자라던 1970년대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책이 귀해서 동화책을 읽기도 어려웠지만, 그나마 동화책을 마칠 때쯤이면 어른들이 읽는 책으로 단계를 뛰어 넘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청소년을 위한 도서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피노키오나 삼총사들이 나오는 책을 읽다가 갑자기 프로이드 심리학이나 실존철학으로 넘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그 중간에서 무협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러니 중 고등학교 때에 우리 세대가 겪었던 공부의 어려움은 이루다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이해가 안 가니 포기를 하던가, 아니면 아예 문장 전체를 외워버려서 어느 날 문득 머릿속에서 터득이 되는, 그런 미련 맞은 방법으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이런 방법을 ‘독서백편의자현’이라던가요?   그런데 요즘은 청소년을 위한 좋은 책이 많이 나왔습니다. 아마도 이런 고생을 한 세대들이 어른이 되면서 다음 세대에는 이런 고생을 시키지 않고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맺은 결실이 아닌가 합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책이 많이 나오기 시작해서 1990년대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청소년 도서가 출판되었습니다. 2천 년 대 중반에 접어든 이제는 학생들을 겨냥한 도서가 출판업계의 소득과 생존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는 아주 다행한 일이지요.   그러나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실용서 부분에서는 많이 나왔는데, 정작 중요한 인문학 분야, 즉 철학, 문학, 예술, 사회학, 경제학 같은, 여러분들이 듣기만 해도 머리가 딱딱 아픈 분야에서는 아직도 청소년을 위한 도서가 거의 없다시피 한 실정입니다. 이름도 없는 제가 이렇게 발 벗고 나선 것도 바로 이런 사정 때문입니다.   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개론서가 나왔습니다만, 대부분 대학 강단에 선 교수님들이 대학생 언니들을 상대로 쓴 것들이어서 여러분 같은 청소년들이 읽을 책은 거의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 책을 따라가면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여러분의 시각으로 충고를 해주기 바랍니다. 그러면 언제든지 고치겠습니다. 지금 이 책은 저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필요한 책을 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시대가 변했다     시대가 변했다는 말은 유사 이래 계속 있어온 말입니다. 이집트 피라미드 벽에도 ‘요즘 젊은 애들 싸가지 없다’는 말이 나온다니, 이 말이 진짠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럴 법한 이야기입니다. 이미 있는 것에 익숙한 어른들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모험에 늘 의구심을 보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가 변했다는 말은 다른 그 어느 때의 그 말과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보 매체의 발달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누구나 편지를 쓰고 책을 읽었습니다. 새로운 정보를 접하는 방법은 책밖에 없었고, 소식을 전하는 방법은 편지가 유일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방식을 아날로그라고 한다는 것은 신세대인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랄 때만 해도 책 읽는 것이 새로운 정보를 얻는 유일한 창구였고, 바로 그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학교에 다녔습니다. 우리 시골 마을에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에 처음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그 후에 텔레비전이 들어왔지요. 그러니까 우리 세대만 해도 젊은 날의 가장 중요한 때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세상을 더듬은 것입니다.   바로 이 전기 때문에 세상은 확 뒤바뀌었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활자로 찍혀 나오는 데는 아무리 빨라도 몇 달이 걸립니다. 가장 빠른 것이 신문인데, 신문은 하루가 걸리죠. 그러나 책은 그렇게 빨리 나올 수가 없습니다. 조판과 제본을 하고 그리고 그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장사꾼의 손을 거치는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책 한 권이 지은이의 손에서 여러분의 손까지 도착하는 데는 아무리 빨라도 보통은 3~6개월을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텔레비전에서는 사건이 발생하는 그 즉시 화면을 타고 안방으로 전달됩니다. 시시각각으로 새로운 정보를 전해주는 것이지요. 이 속도는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더욱 빨라졌습니다. 더욱이 인터넷이라는 온라인 체계가 일상화되면서 지구 저편의 일까지도 책상 앞에서 금새 알아보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게다가 인터넷은 한쪽에서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쌍방체계라는 것이 앞의 텔레비전과는 또 다른 점입니다. 이러니 몇 달이 걸려서 새로운 정보를 전하는 출판 매체가 사양길에 접어들 수밖에 없는 시대입니다.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세상을 확 바꾸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었고, 그로 인해 세상을 사는 방법까지도 바꾸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지금 시대가 변했다고 하는 탄식은 옛날에 시대가 변했다고 탄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디지털 세대가 아날로그 세대와 가장 다른 점은 사고의 방식일 것입니다. 우리 세대는 책으로 사고 한 세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책으로 사고하기보다는 그 즉시 눈앞에 나타나는 화면을 통해 사태를 파악합니다. 즉 세상을 그림으로 읽어 들인다는 말이지요. 아프리카의 굶주림에 관해서 진단하고 해부한 몇 권의 책보다 그곳에서 찍어 보낸 사진 한 장이 여러분의 행동과 사고를 결정합니다. 우리 세대가 어떻게 하는 것이 이들을 돕는 일일까 고민하는 동안 여러분은 인터넷에서 후원회를 검색하지요. 또 애인이 필요하면 우리 때는 ‘썬데이서울’이라는 주간지의 뒤쪽을 뒤적여서 거기 나온 주소로 편지를 썼는데, 여러분은 인터넷 채팅 방에서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사진까지 보며 상대를 고르지요. 생각과 표현, 행동의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디지털 세대의 이러한 사고방식과 행동은 출판계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골치 아픈 책은 팔리지 않습니다. 팔리는 책들은 그림책이거나 만화책, 그것도 아니면 본격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중간중간에 그림이 들어가서 눈맛을 시원하게 자극해주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문학보다는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정도를 넘어서 스스로 영화나 드라마에 미쳐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기 싫어하는 폐인임을 자처합니다. 2003년도에 라는 미니 시리즈 드라마에 미친 사람이라는 이라는 말이 그 효시이지요.   그러니 이런 열광이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시인들이 내는 시집을 보지 않고 소설을 읽지 않습니다. 소설은 머잖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 때까지 기다립니다. 예술을 생각하는 기준과 가치가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 때는 시인을 아주 고상한 예술가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감수성이 조금 있는 학생들은 예외 없이 문학청년의 시절을 겪었습니다. 어쩌다가 학교에서 발행하는 교지나 청소년 잡지에 자신의 작품이 실리기라도 하면 천하를 다 얻은 듯이 자랑을 하고 자부심을 느꼈지요. 주변의 친구들도 그러는 그에게 존경의 눈길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관심 분야가 다르다 보니 이러한 세태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누구나 탤런트나 영화배우, 또는 슈퍼모델이 되는 것을 꿈꿉니다. 그러니 얼굴을 고치면서까지 그 꿈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델이나 탤런트를 양성하는 기관이 생기고 가수를 배출하는 전문회사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영향은 시나 문학에서 독자의 감소로 나타납니다. 영화판으로 젊은이들의 관심이 몰리자 문학판에는 텅 비어버리는 공동화 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요새 무슨 문학상이나 신인상 같은 데 응모해오는 사람들의 연령을 보면 대부분 30대 후반이라고 합니다. 세월과 세태의 변화를 한 눈에 보여주는 일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그렇다고 해도 글의 중요성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고는 잠시 스쳐가는 영상 몇 컷이 아니라 머릿속에 새겨진 깊은 이해력과 그러한 영상을 제공하는 현실세계 속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조리 있는 사고는 대부분 글을 읽고 쓰는 능력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논의한 바에 의하면 시대의 변화 때문에 시의 독자가 감소한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은 면도 있습니다. 어차피 젊은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문학을 배웁니다. 하기 싫더라도 거쳐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현실에 몸담고 있으면서 그 현실을 잠시 거쳐야 할 곳으로 생각하지 내가 앞으로 미래를 걸고 한 번쯤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의 탓만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지금 문학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문학을 너무 엄숙한 분위기로 했습니다. 무슨 상이라도 타면 마치 옛날에 과거 급제한 사람 모양으로 대접을 했고, 또 주변의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갔습니다. 바로 이 엄숙주의가 젊은이들의 발랄한 사고를 용납하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이든 재미가 있어야 거기에 오래 매달립니다. 그런데 엄숙한 분위기에서는 재미를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재미없는 곳에 누가 오래 머무르겠습니까? 오늘날 디지털 시대를 맞이해서 문학판이 이런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은 문인들 스스로 자초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시도 재미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과서에서 여러분들이 배운 시, 또는 그 시를 배운 시간을 돌이켜보십시오. 과연 재미있었는지요? 아마도 그렇다고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국어시간의 시 공부는 지루합니다. 그런 분위기가 여러분들을 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지요. 이 지루함의 원인은 앞으로 이 책 곳곳에서 지적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어떻게 같고 다른지 천천히 따라오면서 감상해보기 바랍니다 3) 학생도 변했다     앞서 시대가 변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변한 그 시대에 따라서 학생들도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런데 그 변화의 조짐이 심상찮다는 것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문예반 학생을 지도하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에 맞닥뜨립니다. 제일 골치 아픈 것이 관청에서 주관하는 대회에 학생들을 참가시켜달라는 주문입니다. 문예반 학생들을 지도하면 그런 공문이 전부 넘어와서 학생들을 대회에 내보내라는 은근한 압력이 들어옵니다. 그러다가 학생들이 대상이나 금상이라도 타면 학교에서 전교생이 보는 가운데 시상을 하지요.   그러다 보니 그런 대회에는 일종의 형식이 있습니다. 예컨대 민족의 비극인 6.25을 소재로 한 글짓기 대회가 열리면 할아버지의 얘기를 꺼내서 당시의 아픔을 회상한 다음 다시는 그런 비극이 없도록 힘써야겠다는 식의 수필을 쓰고 시를 짓지요. 그러면 이따금 운이 좋아서 상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행사가 학생들의 문예활동을 망가뜨리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주최 측에서도 내보내는 학교 측에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왜 학생들의 문예의식을 망가뜨리는 일이냐 하면, 그런 대회에 참가하면서 상 타기 위한 거짓말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학은 일종의 거짓이 조금씩 다 들어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또 합리화합니다. 그렇게 해서 몇 차례 상을 타면 그 학생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통해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양치기 소년의 거짓부리와 같은 것이어서 나중에는 문학이 일종의 거짓을 통해 ‘진실’을 전하는 것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점차 문학을 잊고 맙니다. 진실하지 않은 것에 평생을 매달린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금방 지루해지고 또 남들이 봐주는 재미도 없으면 스스로 그 판을 떠납니다.   바로 이런 점을 중고등학교의 문예반에서 차단하는 것이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우러나는 느낌을 글로 적은 것이 문학임을 깨닫는 것이 청소년 때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시를 보는 시각과 시를 평하는 태도를 기르는 것입니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은 대개 시를 감상하는 법입니다. 창작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1992년에 제천상고라는 학교에서 문예반을 지도할 적에,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학생들에게 몇 가지를 주문했습니다.   먼저 본받을 만한 좋은 시집 목록을 30여권 골라주면서 구해 읽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학생들 개개인이 이 많은 시집을 사려면 용돈이 바닥날 것이니, 한 학생 당 한두 권씩 사서 동아리에 기증하고, 그렇게 해서 모은 시집을 서로 돌려서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쓴 시를 가져와서 친구들과 돌려 읽으며 잘못 된 곳과 잘된 곳을 검토하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시 창작에 도움이 될 만한 이론서를 쉬운 것으로 골라서 소개했습니다.   다행히도 당시 학생들은 잘 따라 주었습니다. 매주 토요일 날 학교에 남아서 학생들 스스로 창작한 시를 돌려 읽으며 잘못된 부분과 잘 된 부분을 지적하며 몇 달을 지내니, 학생들이 시를 보는 안목과 시 쓰는 능력이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마다 한 번씩 시민회관을 빌려서 시화전을 했습니다.   그때 학생들의 관심은 자신의 고민과 생활의 느낌을 시로 쓰는 것이었습니다. 상을 타겠다던가 하는 다른 욕심은 있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도에 대도시의 한 인문계고등학교로 전근을 왔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부탁으로 이미 있던 문예반을 기꺼이 맡았습니다. 그리고는 회장을 불러서 앞서 제천상고의 학생들에게 주문했던 것을 그대로 다시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1달이 가고 2달이 가도록 어떻게 했다는 소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회장을 불러서 사정을 알아보았더니, 내가 요구한 사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학과 공부 때문에 바쁘고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학생들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속으로 굉장히 실망을 했지요. 과연 시대가 변했다더니 애들이 어쩜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하고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롭고 중요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학생들이 처한 환경이 10년 전과는 그 근본부터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즉 대학에서 내신 성적을 반영하여 수시로 신입생을 뽑는데, 그 내신 점수에 영향을 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전국 고교생들이 참여하는 백일장의 수상 경력이었던 것입니다. 각 대학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대상을 타면 입학할 때 혜택을 주는 제도가 그 10년 사이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학생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 상을 한 번 타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고, 관심이 글쓰는 즐거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장에 온통 쏠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학생들에게는 원론에 가까운 나의 요구가 오히려 이상했던 것이지요. 문학의 기초를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장 몇 달 후에 벌어질 백일장에서 상 타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런 것을 동상이몽이라고 하지요? 한 침대에서 잠자면서도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시 쓰는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인데, 학생들은 상 타는 방법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우스운 일입니까?   그런데 학생들의 이 같은 그릇된 열망을 채워줄 선생님조차도 일선 학교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또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국어선생님들도 문학을 다 배워서 알고 있지만, 창작하는 법은 따로 배우지를 않습니다. 대학에서 가르쳐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창작은 순전히 혼자서 궁리해야 할 몫이지요. 그러나 장래에 국어 교사를 하겠다고 해서 창작에 나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창작하는 분들은 정말 가뭄에 콩 나듯 한 일입니다.   그래서 정말 일선에서 애 타는 학생들을 위해서 누군가 그에 필요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몇 년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기에 재주 둔한 줄도 모르고 이렇게 나선 것입니다.     각 대학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에는 나름대로 다 의도가 있습니다.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행사가 학생들에게 안겨주는 좌절감은 결코 만만히 볼 것이 아닙니다. 대상은 한 명한테 돌아가는데 거기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1천명에 육박하거든요. 그러니 그 한 명 때문에 나머지 1천여 명이 재주 없는 학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백일장의 맹점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관청에서 주관하는 대회가 갖는 나쁜 점을 백일장 역시 그대로 안고 있을 수밖에 없지요.   백일장은 시를 삶의 표현으로 놔두지 않고 이벤트로 만들어서 극소수에게 엄청난 영광을 돌리고는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런데도 각 대학에서는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계속 강행하고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나쁜 일이라고만 단정 짓기도 어렵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그런 백일장에 응모하는 것을 보면 학생들의 관심을 모으게 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니까요.   그러나 먼 장래를 내다보고서 말하자면 그런 기획성 행사는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습니다. 생활 속에서 자연히 우러나서 시가 되어야지 어떤 행사를 염두에 두고 거기에 맞는 작전으로 시를 쓰는 것은, 오래 우려서 국물을 내려고 하지 않고 조미료를 부어서 맛을 내려는 것과 같습니다. 입맛을 확 당길지는 몰라도 몸에 좋을 리는 없겠지요.      새 학교에 와서 이런 상황을 접하게 되자, 안타깝지만, 학생들이 시를 잘 쓰는 법을 가르치지 않을 수도 없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천천히 가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해서 빨리 가려는 학생들에게 달리는 방법을 아예 안 가르쳐주는 것도 역시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름대로 학생들이 빨리 시 잘 쓰는 방법을 연구한 것이 이 책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서둘러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쁘더라도 원칙부터 해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은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분야에서 법칙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시 창작이라고 해서 그 원칙에서 벗어날 리는 없습니다.  4)어른들의 시가 재미없는 사연은?     2004년 10월부터 1년 동안 시집을 1,000여 권 읽었습니다. 손에 닥치는 대로 다 읽은 것입니다. 옛날에 읽었던 것은 물론이고 최근에 나온 것까지 손에 잡히는 대로 다 읽었습니다. 학교 도서관은 물론 시립 도서관, 그리고 시집을 갖고 있는 벗들이 소장한 것까지 빌려다가 모조리 읽었습니다.   이런 무모한 짓을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고 또 그것은 사사로운 것이어서 굳이 밝히지는 않겠습니다만, 시집 1천 권을 읽고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시인들은 거대담론에 집착해있다는 것과, 그 결과 시에서 가장 중요한 시 읽기의 즐거움을 시인들의 시집에서는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거대담론이란 커다란 주제라는 말입니다. 즉 민족의 장래, 국가의 통일, 이 시대 문명의 폐해나 방향,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에 끼치는 영향, 생명과 환경……, 이런 것들 말입니다. 시인들의 시와 시집에서는 이런 커다란 주제들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이런 커다란 주제를 말하면서 익살스럽고 재미있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뭐, 하자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게 쉽지는 않겠지요. 그러니까 시인들은 너무 진지한 주제를 진지하게 이야기하느라고 시가 원래부터 갖고 있는 놀이와 재미의 속성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시가 진지하고 무겁고 부담 가는 주제를 다루게 되면서 그런 분위기를 싫어하는 보통 사람들은 저절로 시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인문학의 위기네 시의 몰락이네 하면서, 독자를 탓할 것도 없는 일이지요.     수수께끼 하나 내겠습니다. 한 번 맞춰보기 바랍니다.       약 오르면 빨개지는 것은?   답은 뭐지요? 답은, 고추입니다. 썰렁하다구요? 썰렁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자라던 시대에는 이런 수수께끼를 들으며 낄낄거렸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이와 똑같은 수수께끼는 아니겠지만, 말장난으로 이루어진 수수께끼나 삼행시 짓기를 하면서 연인들끼리 혹은 친구들끼리 아주 재미있게 보내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재미는 우리 시대나 여러분의 시대만의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한 이런 말장난은 우리의 생활을 재미있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심하면 실없는 사람이 되겠지요? 그리고 삶을 허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컨대, 제가 한 학생을 혼내려고 불러서 ‘너 도대체 몇 살이야?’ 그랬더니 ‘게맛살!’이라고 하더군요. 당연히 화가 치밀어서 종아리를 때렸지요. 농담도 좋지만, 상황을 구별하지 않으면 큰 오해를 사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장난은 함부로 할 게 못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말장난이 꼭 필요한 분야가 바로 문학이고, 그 중에서도 시입니다. 시를 읽으면서 내용 때문에 감동하기도 하지만, 시에서 말이 만드는 재미를 또한 놓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살면서 먹고사는 문제로 인생의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먹고사는 일에 허덕이다 보면 어느덧 세월은 가고 살 만해지면 이미 나이가 들어서 옛날 청춘 시절에 꿈꾸었던 것들은 아득해져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삶의 모든 문제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그러다 보니 시도 이런 문제를 자꾸 다루게 됩니다. 이런 커다란 문제들은 인생사의 중요한 일이기에 시에서도 중요하게 다룹니다. 통일이라든지 민족의 장래라든지 문명 비판이라든지 환경 문제라든지, 하는 모든 것들이 시의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지금 제가 읽은 1,000권의 시집 대부분이 이런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겁습니다.   그렇지만, 시가 다루어야 할 것이 꼭 그런 것이어야만 할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는 우리가 우리 생활의 느낌을 표현하는 문학의 갈래입니다. 그러니 거기에는 우리 같은 소심한 사람들의 애환과 고민, 기쁨 같은 것이 있어야 하고, 또 그런 것을 우리 스스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하며, 그런 표현을 받아주고 발표해줄 수 있는 어떤 기관이나 잡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요? 여러분들이 고민하는 바를 시로 쓸 수 있습니까? 일기장에 써놓은 시를 발표할 잡지가 여러분 주변에 있던가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시의 위기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의 시는 무언가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시도, 서점에서 사보는 기성 시인들의 시도 모두 큰 주제에 집착해서 시가 가진 가볍고 재미있는 부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을 간과하고 자꾸 무거운 주제를 다룬 시들만을 좋다고 강요하다보니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이 사는 많은 사람들이 시를 싫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시가 너무 무겁고 큰 것만을 다루지 않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작은 느낌과 감정을 그때그때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그 방법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것이구요.   기성 시인들이 쓴 시를 읽으면 여러분은 당장 부끄러움을 느낄 것입니다. 내가 쓰고 싶은 내용은 아주 작은 것인데, 시인들이 쓴 시는 시란 큰 것을 노래하는 것이라는,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작용하니까요.   따라서 여러분은 우선 그런 생각부터 벗어 던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아주 작은 감정들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생각이 좀 더 깊어지고 시 쓰는 실력이 나아지면 그때 가서 좀 더 큰 주제를 노래해도 된다. 지금은 말장난이라도 좋으니 글을 쓰고 말을 꾸미는 재미에 빠져서 시의 맛을 느끼는 일부터 하자. 시는 놀이의 일종이다.   이것이 앞으로 시를 즐기면서 평생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은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이와 같은 생각으로 시를 가볍게 생각하고 매일 부딪치는 감정을 일기 쓰듯 쓰기 바랍니다. 시라는 거 별거 아닙니다. 엄청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맛있는 사탕 같은 것입니다. 쓰디쓴 것을 억지로 삼키려고 할 것 없습니다. 맛있는 것부터 핥아먹기 바랍니다. 지금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그것이고, 마침내는 그 방법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책의 끝까지 따라가면 저절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5) 엉뚱함은 예술의 원천     혹시 평소에 엉뚱한 생각을 하거나 행동을 해서 어른들한테 혼난 적은 없나요? 아마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것이 많은 청소년 시절에 그런 적이 없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요. 그런 중에도 유난히 엉뚱한 짓을 많이 해서 혼나는 사람이 있지요? 있을 것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거기에 해당할 것이고, 말과 행동은 안 해도 주변에서 혼나는 친구들을 보면서 혼내는 어른들에 대한 불만을 속으로 삭인 경우도 많았을 것입니다.   이 엉뚱함은 일상생활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둘러싼 환경은 이미 안정된 모습을 하고 있고, 그 안정된 모습이란 가장 필요한 것만을 해서 불필요한 낭비를 없애는 방향으로 오랜 세월 발전해온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생각 없이 어른들의 지시를 따르는 사람들이 빨리 성공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미 있는 질서와 환경이 장애가 되고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 장애를 뚫어야만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됩니다. 젊은이들 가운데 새로운 길을 뚫어서 성공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술에서는 그 엉뚱함이 생명입니다.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예술을 성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는 경제성을 본능에 가깝게 추구하지만 인간의 내면에는 경제성과는 상관없이 놀고자 하는 욕망도 있습니다. 노는 데는 경제성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지요. 바로 놀고자 하는 이 욕망을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킨 것이 예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성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엉뚱한 생각과 행동이 정말로 즐거움을 주는 원천이 되곤 합니다.   그러니 평소에 엉뚱한 생각을 한다고 혼나는 학생들은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술 쪽으로 방향을 바꾸십시오. 그 엉뚱함을 예술 쪽에서 살리면 칭찬 받을 수 있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에서는 이 엉뚱함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것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봄에 일제히 피는 꽃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름답지요? 당연하지요. 봄에 피는 꽃의 특징은 잎새보다 먼저 핀다는 것입니다. 잎이 피기도 전에 꽃이 피고, 꽃이 지면서 잎사귀가 나지요.   그런데 어느 날 저는 봄꽃을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가지 끝에서 밀려나오는 꽃이 꼭 똥으로 보이는 겁니다. 꽃은 나무가 누는 똥이다. 하하하. 웃기지요? 만약에 여러분이 저녁 밥상에서 아빠한데     아빠, 오늘 꽃피는 것 보니까 꼭 똥 싸는 것 같애.   라고 하면 어떨까요? 아마도 그 아빠가 예술가가 아니라면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지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사람이 다른 선생님이나 교장 선생님한테     어째 꽃이 똥으로 보이네요.   라고 한다면, 겉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속으로는,     미친 눔!   할 겁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게 궁금하거든 옆 친구한테 한 번 그렇게 말해 보세요. 그 반응을 보면 알겠지요.   그런데도 그 발상이 너무 아까워서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저는 이것을 시로 쓰기로 했습니다. 한 번 보겠습니다.     변비   뛰어가 앉으면 나오지 않고 멫 방울 힘겹게 떨구고 나와도 뒤끝이 영 개운치 못한 내가 변비 환자라는 사실을 안 것은 요 며칠 전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창밖의 꽃나무들도 심한 변비를 앓고 있구나. 겨우내 참고 참았던 것을 밀어내느라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버들강아지들 바야흐로 봄볕 아래서 끙끙거리고 있다. 힘겹게 밀려나온 꽃이 지자 파릇한 화장지까지 한 장씩 톡톡 밀어낸다.     여러분이 보기에 어떤가요? 혼날 짓인가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이 작품을 보고 시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시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분명히 시지요.   이 시를 써 가지고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읽어줬습니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배꼽을 잡고 웃더군요. 그러면서 ‘뭐, 그런 시가 있담?’ 하는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재미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재미로 학생들은 시에 한 발 더 가깝게 다가간 것입니다.   물론 저는 지금 제가 시를 잘 썼다고 자랑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시 중에는 이런 시, 이렇게 쓰는 시도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꺼낸 것입니다. 이 시가 잘 쓴 것인지 못 쓴 것인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각기 다를 것입니다. 사물을 인식하는 시각의 신선함으로 보면 잘 썼다고 할 것이고, 지금 유행하는 시집들의 무거운 분위기로 보면 시가 무슨 장난이냐고 힐책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그런 말에 개의치 않습니다. 재미없는 시는 그 시가 재미없는 것을 떠나서 시를 독자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마침내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결과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재미있는 모습으로라도 독자의 곁에 머무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편 더 보겠습니다. 봄에 벚꽃 피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벚꽃은 어느 날 갑자기 확 피었다가 불과 열흘을 못 버티고 순식간에 져버리지요. 불어오는 봄바람에 하얀 꽃잎이 눈발처럼 날릴 때는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확 피었다가 급히 지는 꽃의 특성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그 꽃을 가장 좋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들의 민족성에 갖다 붙입니다만, 꽃에서 국수주의의 냄새를 읽을 필요는 없겠지요. 어쨌거나 여러분은 이런 벚꽃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아무 생각 없다구요? 하하하.   무슨 폭발이라도 하듯이 피는 벚꽃을 보고, 어느 날 저는 갑자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거, 무슨 뻥튀기 장사가 튀밥 튀겨내는 것 같다.     쌀알을 뻥튀기면 하얀 튀밥이 되어 나오지요. 벚꽃 피는 모양이 그렇게 보인 겁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떨까요? 그래도 이번에는 아까 그 똥 연상보다는 나으니, 아빠한테 혼나는 일은 없겠지요. 그렇지만 엉뚱하다는 핀잔은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엉뚱하기는 하지만 버릴 수 없는 아주 소중한 발상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시를 썼습니다. 다음이 그겁니다.     벚꽃   4월의 봄바람에 가지를 흔드는 벚나무 뿌리 밑에서는 뻥튀기 장사가 기계를 돌리고 있는 것 같다. 맹꽁이처럼 똥똥한 몸통을 스스로 풀무질한 장작불 위에서 시커먼 숯검댕이가 되도록 궁굴리며 고압계 바늘이 허용하는 눈금까지 가까스로 참았다가 손가락으로 꼭 막은 우리들 어린 날의 귓바퀴를 뻥! 하고 때리면 하얀 콧김과 함께 헤벌어진 검정 아가리로 와르르르르 쏟아지던 튀밥과 강냉이들, 지금은 벚나무 가지에서 정신없이 터지고 있다. 뒤쫓아온 우리를 동구밖에 세워두고 황톳길로 돌아간 그 뻥튀기 아저씨일까? 우주의 손잡이를 잡고 지구를 빙글빙글 돌려 겨우내 땅속에서 풀무질 하다가 뜸 잘 들었다는 표시로 아지랑이가 오르면 앞이빨처럼 하얀 강냉이들이 폭발음을 내며 검은 가지마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계절이 뻥틀 자루를 잡고 시간을 돌리는 벚나무 밑을 지나노라면 이 가지에서 뻥 저 가지에서 뻥 뻥뻐벙뻥 뻥뻥 뻐버버버벙뻥 뻥뻥 강냉이들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귓구멍을 활짝 열어놓는다.     정신없이 터지는 벚꽃들을 보며 강냉이를 먹던 옛날의 추억을 떠올린 것이지요.   자, 이렇게 설명해놓으니까 어떤가요? 엉뚱함도 아주 버릴 것만은 아니죠? 엉뚱함도 쓸모가 있는 겁니다. 사람의 행동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사람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여러분들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공상이나 엉뚱함을 굳이 없애려 하지 말고 이렇게 예술의 원천으로 활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런 엉뚱함이 너무 심해서 일상생활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곤란합니다. 그러나 예술의 열정은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아니어서 많은 유명한 예술가들이 정신병원에서 생애를 마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짜라투스투라로 유명한 니체가 그랬고, 함형수도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삶을 마감했고, 김소월도 말년에 앓던 우울증을 아편으로 달래다가 죽음을 맞습니다. 엉뚱함의 열정이 삶을 망가뜨린 경우에 해당합니다만, 그런 엉뚱함이 이룬 예술의 성취 때문에 그 뒤를 살아가는 우리는 높은 정신의 경지를 감상하고 사는 것이지요. 개인으로서는 불행이지만, 그 뒤의 인류에게는 큰 도움이 된 것입니다. 시인이 된다는 것.     우리가 시인, 시인, 하는데 그 시인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여러분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거나, 아니면 단순하게, ‘시 쓰는 사람’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에게 붙이는 호칭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더 묻겠습니다. 시라고는 모르는 어떤 직장인이 술을 마시고 와서 저녁에 시를 썼습니다. 그 시는 일기장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시인인가요? 시인이 아닌가요?   어때요? 갑갑하지요? 앞의 말에 의하면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니 시인이 분명하고, 그렇다고 시 한 편 썼다고 시인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이를 어쩌지요?   자, 우리가 보통 시인이라고 부르는 사람과 어쩌다 시를 한 편 쓴 직장인의 사이에는 이상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 이상한 차이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장황하게 서두를 꺼낸 것입니다.     1) 시인이 되는 방법     앞서 말한 대로 시를 쓰는 모든 사람은 다 시인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나 보통 앞서 시 한 편을 쓴 직장인에 대해서는 시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 사회의 관습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인이라고 부르는 일군의 사람들은 시 쓰는 것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깁니다. 그러나 생각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시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이 되는 데는 일정한 절차가 있습니다. 그 절차란 이른바 을 말합니다. 등단이란 무대에 오른다는 뜻입니다. 시인으로 등단한다는 말은 시인으로 활동하는 시인들의 무대에 오른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시인이라는 무대에서 활동하도록 해주는 어떤 단체나 조직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맞습니다. 우리가 시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보통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일정한 절차를 거쳐서 시인이라는 인정을 누군가한테서 받은 사람들이고, 그들에게 그런 자격을 인정해주는 곳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런 일을 할까요?     보통은 문학잡지사에서 그런 일을 합니다. 잡지사에서는 문학작품을 싣는 잡지를 냅니다. 보통은 정기간행물로 내지요. 거기에는 문학 전반을 다루는 잡지도 있고, 시만을 다루는 시 전문지도 있습니다. 이런 잡지들이 출판되면 그런 잡지를 사서 읽는 사람이 생깁니다. 문학에, 또는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겠지요. 그들 가운데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잡지사에서는 추천해주겠다는 광고를 합니다. 그리고는 작품을 받아서 그 중에서 좋은 작품을 쓰는 사람이 발견되면 그 작품을 잡지에 발표해줍니다. 이런 것을 추천이라고 하지요. 이러한 관문을 통과하여 잡지에 계속 시를 발표하고 그러한 시를 모아서 시집을 내면 그때부터 시인이라는 호칭이 따라붙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추천을 잡지사에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엉뚱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각 신문사에서도 매년 초에 이런 행사를 합니다. 이름하여 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매년 말에 상금을 걸어놓고서 작품을 모은다고 광고한 다음에 응모작 중에서 가장 좋은 작품을 뽑아서 이듬해 첫날 신문에 발표하고는 수상자를 불러서 상금을 주지요. 여기에 당선되는 것을 우리나라 문학지망생들은 가장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좀 우스운 일이지요? 그런데 그 우스운 일이 왜 전통으로 굳었을까요?     잠깐 골프 얘기 좀 하겠습니다. 골프는 유럽에서 발생한 운동인데 미국에서는 메이저 대회가 있을 만큼 인기 있는 종목으로 성장했지요. 아마도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기 있는 종목인 만큼 그것을 즐기는 사람도 많아서 대중 스포츠로 정착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바라보는 골프는 어떻습니까? 돈이 없으면 하지 못하는 귀족스포츠지요? 왜 이렇게 됐을까요? 그것은 전파과정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국에서는 골프가 이미 대중화되었고, 마음만 먹으면 일반 시민들도 다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얘기는 비용이 크게 들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땅이 넓은 미국에서는 얼마든지 그 용지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따라서 골프를 치고 나오면서 흘린 땀을 씻을 수 있는 샤워 실이나 한 칸 있으면 누구나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에 골프가 들어오면서 성격이 약간 변했습니다. 일본은 땅이 좁은 나라입니다. 땅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골프장을 짓는 사람은 거기에 든 본전을 뽑아야 하고, 그러다 보니 찾아오는 손님들이 주머니를 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방법은 간단합니다. 부대시설을 좋게 만들어서 그 사용료를 비싸게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골프를 치기 위해 골프장에 들어서면 우선 옷을 갈아입는 곳이 있고, 대기실이 있고, 휴게실이 있고, 샤워 실이 있습니다. 매점도 만들어야겠지요. 이런 시설을 아주 으리으리하게 해서는 그만큼 비싼 이용료를 받는 겁니다. 좋은 시설에서 골프를 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골프라는 운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시설에서 여가를 즐기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단가가 올라가면 일반 봉급쟁이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차원으로 올라가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골프는 일반 대중 스포츠가 아니라 귀족 스포츠가 되는 겁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하기 어렵겠죠.   문제는 한국의 골프 역시 신분계층을 가르는 노릇을 톡톡히 한다는 점입니다. 웬만큼 수입이 보장되는 계층이 아니고는 골프를 즐기기 어려운 것이 우리나라의 실정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미국식 골프 문화가 들어온 것이 아니고 일본식 골프 문화가 들어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위공직자들이 골프를 친다는 고발이 뉴스에서 이따금 나오는 것은 골프 문화의 이런 속성 때문입니다.     추천제도라고 하는 관행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유럽에서는 우리나라 같은 추천제도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문단을 형성하는 어떤 장치가 있겠지만, 그것은 쌀롱이라든지 아카데미라든지 하는 식의 운영방법이 있지, 마치 옛날에 과거제도처럼 군림하는 우리나라 식의 추천제도는 없다는 얘깁니다. 그들은 시를 써서 시집을 내면 그것이 시인이 되는 길입니다. 아주 간단하지요.   우리나라에 이렇게 추천제도가 정착한 것은 일본의 제도를 본뜬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그런 제도가 있었고,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통치하면서 그 제도가 그대로 들어와 정착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행을 뒷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따르는 것은 우리나라에 그런 전통이 수백 년 이어져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과거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제도는 지방에서 실력이 뛰어난 후보자들을 시험으로 뽑아서 중앙으로 올려보내고 중앙에서 두 차례에 걸쳐서 시험을 치른 다음에 장원을 내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그리고 벼슬길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었기도 합니다. 따라서 옛날 조선시대에는 공부를 해서 과거를 치른 다음 거기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는 것만이 선비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무언가 뽑히지 않으면 자격을 주지 않는 어떤 관행이 생긴 것이지요. 바로 이런 관행이 잡지사에서 신인을 뽑는 제도로 정착하고, 거기에 신문사까지 가세해서 오늘날의 문단이라는 세력이 형성된 것입니다.   물론 근대문학 초기에 신문사에서 문인들의 작품을 신문에 실어준 것은 당시에는 문인들이 작품을 써도 딱히 발표할 지면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소설을 실어서 신문을 한 장이라도 더 팔아보겠다는 속셈도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고,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요.     뽑히는 자가 있으면 뽑는 자도 있는 법입니다. 신춘문예건 잡지사건 어떤 추천을 통과하면 뽑힌 나와 나를 뽑은 사람의 관계가 저절로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뽑는 사람의 시각에 맞는 작품이 뽑힌다는 결론이 나오지요? 무슨 얘기냐면 누구의 입맛에 맞는 작품들만 뽑힌다는 얘깁니다.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과와 배, 바나나를 주고서 고르라고 하면 당연히 사과를 고르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배나 바나나가 잘못 된 것은 아니거든요. 이처럼 입맛에 맞지 않는 것들은 저절로 묻히게 됩니다. 묻힌 그것이 아무런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만약에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면 그것을 어떻게 할까요? 신춘문예 심사에서 초심을 맡은 사람이 버린 것을 본심을 맡은 사람이 주워서 당선시켰다는 얘기가 종종 들려오는 것을 보면 이런 우려는 그냥 우려로 그칠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추천해주는 잡지사가 잡지 경영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어떤 의도를 깔고 추천을 감행한다면 그건 더욱 큰 문제를 일으키지요. 그것은 장사꾼들이 하는 흥정과 같습니다. 자격이 안 되는 사람에게 자격증을 주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질 테니까요. 추천제도 하에서 이런 일은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습니다.   결국 추천제라고 하는 것은 옛 시대 과거제도의 잔상이 남아서 전해오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얽매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자랑스러울 리 없는 일이지요.     이런 관행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섭니다. 그 방법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동인지를 내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돈을 걷어서 시집을 내는데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참여하여 시집 한 권 안에 여러 사람의 시를 싣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동인 활동이라고 합니다.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자신들의 세계를 마음껏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좋은 방법이지요. 여러분도 주변에 시 쓰는 친구들이 있으면 한 번 모여서 해보기 바랍니다. 꼭 출판사에 의뢰하지 않아도 됩니다. 두 세 명이 모여서 복사기로 복사를 해서 10부만을 해도 좋고, 아니면 부모님들의 지원을 받아서 출판을 해도 좋습니다. 미숙하더라도 어릴 때 그런 일을 해본 것이 나중에 굉장한 추억이 됩니다. 사실 이런 방법으로 시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야 시가 진정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스스로 시집을 내는 것입니다.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오래도록 시를 쓰다가 50편이 되고 100편이 되면 그것을 시집으로 묶는 것입니다. 실제로 시집을 평생에 한 권만 내고도 유명해지는 사람도 있고, 한 권도 내지 못한 채 죽고서 나중에 뒷사람들이 시집을 내줘서 유명해진 경우도 많습니다. 여러분이 저항시인으로 알고 있는 윤동주 같은 분도 생전에는 시집을 한 권도 못 냈는데, 그 뒤 해방 후에 친지들이 그가 남긴 유고를 모아서 낸 시집으로 유명해진 경우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 시를 쓰는 일입니다. 그것을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내가 즐거워서 시를 쓰면 지금 당장은 시인이라는 이름을 듣지 못해도 나중에 언젠가는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시인이 들어있습니다. 그 시인을 불러내어 노래하게 하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지금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숨어서 잠자고 있는 시인의 방문을 두드리십시오. 똑똑똑! 2) 시의 관행과 전통을 이해하는 방법 : 남의 시집 읽기     이 정도 하면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시인이 되는가 하는 것을 대충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있습니다. 추천제도 같은 억지 제도가 해줄 수 없는 중요한 일 한 가지가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시라는 전통과 관습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     시는 이미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옛날부터 써서 그것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전통의 한 분야로 굳었습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분야라고 하는 것은 그 분야에 오래도록 종사한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이고, 그러는 과정에서 다른 분야와는 다른 그 분야의 전통과 질서가 형성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시만을 놓고 보면 시라는 전통이 섰으면 시 아닌 것과 시인 것을 구별하는 방법이 확립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인이 된다는 것은, 문단에서 추천을 해주든 말든,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온 시의 전통을 이해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시의 역사는 아주 오랩니다. 문헌으로 기록된 것을 보더라도 고구려 2대 유리왕이 지은 ‘꾀꼬리의 노래’라는 것이 있지요. 고구려는 기원전에 선 나라이니 벌써 2000년도 넘은 세월입니다. 그 후에도 계속 한자가 들어와서 기록으로 남기는 바람에 이루 헤아릴 길이 없을 만큼 많은 시들이 있습니다. 국어시간에 배운 것들만 해도 민요, 향가, 고려가요, 경기체가, 시조, 가사, 한시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시의 전통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으로 시인이 되는 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시의 전통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선배 시인들이 써놓은 시를 읽으면 됩니다. 남의 시를 읽다 보면 시라는 것은 이렇게 쓰는 것이구나 하는 판단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런 방법을 익혀서 거기에 맞춰서 나의 감정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방법을 이렇게 시 읽기가 아닌 설명으로 배우는 중이구요.     아까 앞서서 제가 시집 1000권을 읽었다고 했습니다. 1000권이나 되는 시집을 다시 읽고 또 읽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점, 과연 정말 좋은 시가 되려면 어떤 속성을 갖추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직접 깨닫기 위한 것입니다. 이론으로 시를 배우지만 남의 시를 읽으면서 확인을 하고, 그렇게 해서 터득한 원리로 내가 직접 써보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1000권이라는 숫자에 기죽지는 말기 바랍니다. 많이 읽는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여러분처럼 이제 막 시 쓰는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 마음을 먹은 경우에는 많이 익는 것이 오히려 혼란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시를 인생의 목표로 삼아서 이미 등단의 과정을 마친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프로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한 것입니다. 프로는 프로다워야 합니다. 프로답다는 것은 자신이 택한 전문 분야의 일을 전부는 아니라도 큰 줄기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1000권에 도전한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 앞서 시의 전통을 배우려면 남의 시를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앞서 시인들의 시집이 참 재미없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그 많은 시집을 다 읽을 수는 없을 것이고, 설령 많이 읽는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좋은 작품을 골라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점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1000권을 다 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이건 정말 고민될 일입니다. 어떡하면 좋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시집만을 골라 읽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겠지요. 문제는 좋은 시집을 골라놓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변에서 좋은 시집 목록을 골라놓은 분 보셨나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물론 좋은 시 몇 편을 뽑아서 소개한 책들은 있겠지요. 궁여지책으로 그런 책들을 사서 읽는 것이 가장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욕심을 내서 장래에 시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꾸는 사람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한 일입니다. 그런 걱정을 하는 분들을 위해서 이 자리에 그 목록을 제시할까 합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1000권을 읽고 그 가운데서 이런 건 시 쓰는 사람이 꼭 읽어볼 만하구나 하는 생각을 한 시집들입니다.   □진달래꽃□김소월,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1, 미래사, 1991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33, 미래사, 1991 □님의 침묵□한용운,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4, 미래사, 1991 □광야□이육사,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18, 미래사, 1991 □접시꽃 당신□도종환, 실천문학의 시집 37, 실천문학사, 1986 □농무□신경림, 창비시선 1, 창작과비평사, 1975 □뿔□신경림, 창비시선 215, 창작과비평사, 2002 □탄광 마을 아이들□임길택, 실천문학의 시집 75, 실천문학사, 1990 □나그네□박목월,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30, 미래사, 1991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정유화, 시작시인선 24, 천년의시작, 2003 □땅의 연가□문병란, 창비시선 26, 창작과비평사, 1981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임영조, 민음의 시 94, 민음사, 2000 □도화 아래 잠들다□김선우, 창비시선 229, 창비, 2003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복효근, 경계시선 8, 문학과경계사, 2002 □대설주의보□최승호, 오늘의 시인총서 22, 민음사, 1983 □노동의 새벽□박노해, 풀빛판화시선 5, 풀빛, 1984 □정선 아리랑□박세현, 문학과지성시인선 103, 문학과지성사, 1991 □오라, 거짓 사랑아□문정희, 민음의 시 102, 민음사, 2001 □붉은 편지가 도착했다□박미라, 현대시시인선 16, 현대시, 2004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문정희, 민음의 시 119, 민음사, 2004 □적멸의 불빛□오세영, 문학사상 신작시집, 문학사상사, 2001 □너는 꽃이다□이도윤, 창비시선 113, 창작과비평사, 1993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도종환, 문학동네 시집 2, 문학동네, 1994 □입 속의 검은 잎□기형도, 문학과지성시인선 80, 문학과지성사, 1989 □만국의 노동자여□백무산, 청사민중시선 33, 청사, 1988 □난초□이병기,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8, 미래사, 1991 □세속도시의 즐거움□최승호, 세계사시인선 4, 세계사, 1990 □머나먼 곳 스와니□김명인, 문학과지성시인선 71, 문학과지성사, 1988 □우리 이웃 사람들□홍신선, 문학과지성시인선 39, 문학과지성사, 1984 □산시□이성선, 시와시학 시인선 4, 시와시학사, 2000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신석정, 창비시선 86, 창작과비평사, 1990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이면우, 창비시선 211, 창작과비평사, 2001 □제비꽃 여인숙□이정록, 민음의 시 105, 민음사, 2001 □몸에 피는 꽃□이재무, 창비시선 144, 창작과비평사, 1996 □이 짧은 시간 동안□정호승, 창비시선 235, 창비, 2004 □물 건너는 사람□김명인, 세계사시인선 21, 세계사, 1992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박남수,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29, 미래사, 1991 □별빛 속에서 잠자다□김진경, 창비시선 143, 창작과비평사, 1996 □향수□정지용,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9, 미래사, 1991 □슬픔이 기쁨에게□정호승, 창비시선 19, 창작과비평사, 1979 □백년 자작나무 숲에 살자□최창균, 창비시선 236, 창비, 2004 □기억들□송재학, 세계사시인선 107, 세계사, 2001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신용목, 문학과지성시인선 290, 문학과지성사, 2004 □멧새 소리□백석,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20, 미래사, 1991 □오감도□이상,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19, 미래사, 1991 □사랑의 기교□오규원, 오늘의 시인총서 11, 민음사, 1975 □외롭고 높고 쓸쓸한□안도현, 문학동네시집 1, 문학동네, 1994 □길은 광야의 것이다□백무산, 창비시선 82, 창작과비평사, 1999 □가난한 사랑노래□신경림, 실천문학의 시집 50, 실천문학사, 1988 □경주 남산□정일근, 문학동네, 2004 개정판 □절정의 노래□이성선, 창비시선 96, 창작과비평사, 1991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정일근, 시와시학 시인선 15, 시와시학사, 2001 □동두천□김명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9, 문학과지성사, 1979 □거미□박성우, 창비시선 219, 창작과비평사, 2002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안도현, 현대문학북스의 시 1, 현대문학북스, 2001 □오래 말하는 사이□신달자, 민음의 시 122, 민음사, 2004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이정록, 문학과지성시인선 221, 문학과지성사, 1999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유하, 열림원, 1999 □문자들의 다비식은 따뜻하다□주용일, 경계시선 20, 문학과경계사, 2003 □천지현황□김종길,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41, 미래사, 1991 □세상의 밥상에서□김은자, 세계사시인선 69, 세계사, 1999 □내 혀가 입 속에 갇혀있길 거부한다면□김선우, 창비시선 194, 창작과비평사, 2000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이윤학, 문학과지성시인선 159, 문학과지성사, 1995 □조국의 별□고은, 창비시선 41, 창작과비평사, 1984 □한 잔의 붉은 거울□김혜순, 문학과지성시인선 288, 문학과지성사, 2004 □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정영선, 문학동네 시집 42, 문학동네, 2000 □서울의 예수□정호승, 오늘의 시인총서 21, 민음사, 1982 □무화과는 없다□김해자, 실천문학의 시집 135, 실천문학사, 2001 □내 안의 열대우림□정해종, 생각의 시 1, (주)생각의 나무, 2001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정일근, 문학사상사, 2003 □지상의 편지□조성림, 우리시대의 시인 100인 선집, 문학마을사, 2002 □강릉, 프라하, 함흥□이홍섭, 문학동네 시집 29, 문학동네, 1998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김수우, 시와시학 시인선 19, 시와시학사, 2002 □우포 늪 왁새□배한봉, 시와시학 시인선 17, 시와시학사, 2002 □어두워진다는 것□나희덕, 창비시선 205, 창작과비평사, 2001 □개□최준, 세계사시인선 14, 세계사, 1991 □청산행□이기철, 오늘의 시인총서 20, 민음사, 1982 □세상의 모든 저녁□유하, 민음의 시 56, 민음사, 1993 □사랑의 감옥□오규원, 문학과지성시인선 102, 문학과지성사, 1991 □자신 없는 것들은 걸려있다□금기웅, 문학동네 시집 68, 문학동네, 2003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나희덕, 창비시선 125, 창작과비평사, 1994 □집은 아직 따스하다□이상국, 창비시선 174, 창작과비평사, 1998 □개같은 날들의 기록□김신용, 세계사시인선 9, 세계사, 1990 □국경의 밤□김동환,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7, 미래사, 1991 □알 시□정진규, 세계사시인선 77, 세계사, 1997 □젖은 눈□장석남, 솔의 시인 11, 솔출판사, 1998 □이용악 시 전집□윤영천 편, 창작과비평사, 1988 □푸르른 날□서정주,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23, 미래사, 1991 □무지개가 되기까지는□박정만, 문학사상한국시선 18, 문학사상사, 1987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조용미, 문학과지성시인선 283, 문학과지성사, 2004 □악어를 조심하라고?□황동규, 문학과지성시인선 53, 문학과지성사, 1993 □다보탑을 줍다□유안진, 창비시선 240, 창비, 2004 □우리 낯선 사람들□이하석, 세계사시인선 3, 세계사, 1989 □처용 이후□김춘수, 오늘의 시인총서 19, 민음사, 1982 □비단길□강연호, 세계사시인선 42, 세계사, 1994 □천년의 바람□박재삼, 오늘의 시인총서 7, 민음사, 1975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황인숙, 문학과지성시인선 69, 문학과지성사, 1988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장정일, 민음의 시 16, 민음사, 1988 □산정묘지□조정권, 민음의 시 33, 민음사, 1991 □풀잎□강은교, 오늘의 시인총서 5, 민음사, 1974 □쓰러진 자의 꿈□신경림, 창비시선 115, 창작과비평사, 1993 □맨발□문태준, 창비시선 238, 창비, 2004 □모래인간□최승호, 세계사시인선 101, 세계사, 2000 □우리들의 양식□이성부, 오늘의 시인총서 4, 민음사, 1974 □햄버거에 대한 명상□장정일, 민음의 시 7, 민음사, 1987 □자명한 산책□황인숙, 문학과지성시인선 281, 문학과지성사, 2003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신경림, 창비시선 172, 창작과비평사, 1998 □붉은 눈, 동백□송찬호, 문학과지성시인선 239, 문학과지성사, 2000 □추억의 푸른 이끼□장병천, 현대시 시인선 14, 현대시, 2004 □지상의 그 집□홍윤숙, 시와시학사, 2004 □나나 이야기□정한용, 민음의 시 92, 민음사, 1999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황지우, 문학과지성시인선 32, 문학과지성사, 1983 □인간의 시간□백무산, 창비시선 152, 창작과비평사, 1996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김남주, 창비시선 128, 창작과비평사, 1995 □누가 두꺼비집을 내려놨나□장경린, 민음의 시 21, 민음사, 1989 □진흙소를 타고□최승호, 민음의 시 8, 민음사, 1987 □지상의 인간□박남철, 문학과지성시인선 36, 문학과지성사, 1984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이윤학, 문학동네 시집 22, 문학동네, 1997 □여우를 살리기 위해□이학성, 민음의 시 58, 민음사, 1994 □낯선 길에 묻다□성석제, 민음의 시 39, 민음사, 1991 □처용□김춘수, 오늘의 시인총서 2, 민음사, 1974 □김씨의 옆 얼굴□이하석, 문학과지성시인선 35, 문학과지성사, 1984 □사랑은 늘 혼자 깨어있게 하고□한승원, 문학과지성시인선 160, 문학과지성사, 1995 □벽을 문으로□임동확, 문학과지성시인선 149, 문학과지성사, 1994 □황금 연못□장옥관, 민음의 시 44, 민음사, 1992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오규원, 문학과지성시인선 4, 문학과지성사, 1978 □무인도를 위하여□신대철, 문학과지성시인선 7, 문학과지성사, 1994 □예레미야의 노래□박두진, 창비시선 29, 창작과비평사, 1981 □별의 집□백미혜, 민음의 시 112, 민음사, 2002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이성복, 문학과지성시인선 13, 문학과지성사, 1980 □지리산의 봄□고정희, 문학과지성시인선 64, 문학과지성사, 1987 □게 눈 속의 연꽃□황지우, 문학과지성시인선 97, 문학과지성사, 1990 □자유가 시인더러□조태일, 창비시선 60, 1994 □겨울날□김광섭, 창비시선 4, 창작과비평사, 1975 □그대의 하늘길□양성우, 창비시선 63, 창작과비평사, 1987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심재휘, 제3의 시 10, 문학세계사, 2002 □내 몸이 유적이다□이순현, 문학동네 시집 62, 문학동네, 2002 □변명은 슬프다□권경인, 창비시선 181, 창작과비평사, 1998 □사무원□김기택, 창비시선 185, 창작과비평사, 1999 □유리의 나날□이기철, 문학과지성 시인선 211, 문학과지성사, 1998 □수런거리는 뒤란□문태준, 창비시선 196, 창작과비평사, 2000 □이팝나무 길을 걷다□박정남, 문학세계현대시선집 180, 문학세계사, 2001 □이형기 시 99선□이형기, 도서출판 선, 2003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허만하, 솔, 2002 □두고 온 시□고은, 창비시선 213, 창작과비평사, 2002 □버려진 사람들□김신용, 시작시인선 16, 천년의시작, 2003 □바늘구멍 속의 폭풍□김기택, 문학과지성 시인선 151, 문학과지성사, 1994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김승희, 민음의 시 99, 민음사, 2000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장석남, 문학과지성 시인선 156, 문학과지성사, 1995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이윤학, 문학과지성 시인선 241, 문학과지성사, 2000 □적멸의 즐거움□김명리, 문학동네 시집 37, 문학동네, 1999 □사물의 운명□하종오, 문학동네 시집 19, 문학동네, 1997 □뒤란이 시끌시끌해서□조달곤, 작가정신, 2004 □국토□조태일, 창비시선 2, 창작과비평사, 1975 □파천무□송수권, 경계시선 1, 문학과경계사, 2001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조정인, 시작시인선 37, 천년의시작, 2004 □염소좌 아래 잠들다□전명숙, 시작시인선 39, 천년의시작, 2004 □상처가 스민다는 것□강미정, 시작시인선 15, 천년의시작, 2003 □몽유 속을 걷다□김신용, 실천문학의 시집 118, 실천문학사, 1998 □열 손가락에 달을 달고□이준관, 문학과지성시인선 122, 문학과지성사, 1992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송찬호, 민음의 시 22, 민음사, 1989 □10년 동안의 빈 의자□송찬호, 문학과지성시인선 148, 문학과지성사, 1994 □혼자 가는 먼 집□허수경, 문학과지성시인선 118, 문학과지성사, 1992 □고슴도치의 마을□최승호, 문학과지성시인선 46, 문학과지성사, 1985 □그리운 바다 성산포□이생진, 동천사, 1987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오규원, 문학과지성시인선 19, 문학과지성사, 1981 □북 치는 앉은뱅이□양성우, 창비시선 23, 창작과비평사, 1980 □사평역에서□곽재구, 창비시선 40, 창작과비평사, 1983 □전야□이성부, 창비시선 30, 창작과비평사, 1981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최승호, 문학 판 시 1, 열림원, 2003 □꽃산 가는 길□김용택, 창비시선 70, 창작과비평사, 1988 □어여쁜 꽃씨 하나□서홍관, 창비시선 80, 창작과비평사, 1989 □밤의 공중전화□채호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201, 문학과지성사, 1997 □대머리와의 사랑□성미정, 세계사시인선 71, 세계사, 1997 □살아있는 날들의 비망록□임동확, 민음의 시 31, 민음사, 1990 □풍경 뒤의 풍경□최하림, 문학과지성 시인선 254, 문학과지성사, 2001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신현림, 세계사시인선 41, 세계사, 1994 □화개□김지하, 실천문학의 시집 141, 실천문학사, 2002 □섬진강□김용택, 창비시선 46, 창작과비평사, 1985 □반시대적 고찰□박남철, 세계사시인선 89, 세계사, 1999 □푸른 삼각형□강유정, 청하시선 8, 도서출판 청하, 1983 □국어선생은 달팽이□함기석, 세계사시인선 86, 세계사, 1998 □1차원 나라□박순업, 세계사시인선 25, 세계사, 1992 □난간 위의 고양이□박서원, 세계사시인선 59, 세계사, 1995 □지리산 갈대꽃□오봉옥, 창비시선 69, 창작과비평사, 1988 □자본주의의 약속□함민복, 세계사시인선 31, 세계사, 1993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이수명, 세계사시인선 62, 세계사, 1995     물론 이 중에는 여러분이 소화하기 힘든 시집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몇 권 읽어보고 어렵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선 이 중에서 구미에 맞는 것부터 골라 읽으면 됩니다. 시간이 가면서 시를 보는 안목이 발전하고 정신이 성숙하면 저절로 다 이해가 될 만한 시집들입니다. 접하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순서로 배열하려고 애썼습니다만, 그게 제대로 됐는지는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이 다르다면 저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의견을 감안해서 순서를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3)일기 쓰기의 중요성      장래에 시인이 될 꿈을 꾸는 학생들을 위해서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장래에 시인까지 될 필요가 없는 학생들은 읽지 않고 넘어가도 되는 부분이 되겠습니다. 단순히 남이 써놓은 시를 읽는 독자로만 남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냥 넘어가도 좋습니다.   시인은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나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진 것 같아도 그렇게 되기까지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시를 쓰기 위해서는 사전에 몇 가지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합니다. 무슨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이 준비 땅! 하고서 해도 되는 일이라면 일상생활에서 버릇까지 들일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나 시 쓰는 일은 시의 격식과 형식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맞추는 일입니다. 그런 훈련이 되어있을 때 시로 표현할 느낌이 찾아오면 그 순간에 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실로 시를 발상하는 순간은 몇 초에 불과하지만, 몇 초 안 되는 그 짧은 순간에 시를 만들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은 그 전의 꾸준한 노력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시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크게 오해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시는 천재성에 의존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즉, 굳이 시의 형식을 배우지 않아도 천재 시인은 나타나서 위대한 작품을 쓴다는 것입니다. 시의 천재는 어릴 때부터 재주를 드러내서 굳이 시 쓰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어른이 되기 전에 위대한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어린 시절에 시를 몇 편 써보고서 뜻대로 안 되면 ‘아, 나는 재주가 없는가보다!’ 하고는 등을 돌리고 맙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착각은 없습니다. 시에는 형식이 있습니다.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그 형식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 형식을 배우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립니다. 물론 그런 형식을 전혀 모르고서도 쓸 수 있는 것이 시이기는 합니다만, 역사 이래 위대한 작품은 그런 형식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고서 이루어진 작품은 없습니다.   시인의 천재성이 발휘되는 것은, 등산에 비유할 때 9부 능선 언저리쯤입니다. 누구나 노력하고 시간을 들이면 8부 능선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형식을 완전히 배워서 익힌 다음에 그 사람의 감수성이 절묘하게 작용하여 위대한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시인들이 위대한 작품을 남기지 못하고 고만고만한 작품을 쓰고 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부분이 작용하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런 위대한 작품만을 위해서 시가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는 우리 일상생활의 즐거운 도구입니다. 감상하는 것도 이런 창작의 비밀을 알 때 정말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위대한 작품의 위대성을 알아보는 것 역시 위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시를 쓰기 위해서 평상시에 길들여야 할 버릇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일기입니다. 일기를 꾸준히 쓰면서 시의 감성을 닦아야 합니다. 감성이라는 것은 느낌입니다. 이 감수성은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 줄어듭니다. 그냥 두면 20대 후반에 메말라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감수성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래서 감수성을 갈고 닦아서 나이가 들어도 세상을 그런 감수성으로 바라볼 줄 아는 그런 자세를 길러야 합니다. 그 방법이 일기 쓰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인들이 쓰는 일기와 똑같이 쓰면 그건 부족합니다. 일반인들이 쓰는 일기는 보통 사건을 중심으로 씁니다. 오늘 누구를 만났고, 무엇을 했으며,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 하는 식이지요.   그러나 시인 지망생의 일기는 달라야 합니다. 일기의 초점을 사건이 아니라 자신의 느낌, 즉 감수성에 맞추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니 안개가 끼었는데, 그 모습이 어땠다던가, 그 하얀 안개를 보니 무슨 느낌이 들었다던가 하는 그런 방식으로 말입니다. 사건을 접하더라도 그 사건의 개요만이 아니라 그 사건을 보는 나의 느낌을 적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감성과 느낌을 중심으로 일기를 오랜 세월 쓰면 어떤 사물을 보고 어떤 사건을 접하는 순간 말해야 할 느낌을 금방 잡아내게 됩니다. 시는 사건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을 전하는 갈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일기를 ‘감성일기’라고 합니다.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감성일기를 꼭 써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해서 백 번을 강조해도 좋습니다. 감성일기를 쓰지 않는 사람은 30 중반이 못 되어 시를 떠납니다. 감수성이 메말라서 세상을 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시를 쓴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요.     약간 빗나갑니다만, 말이 나온 김에 소설가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도 한 마디 하겠습니다. 역시 소설을 지망하는 학생들도 일기를 쓰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시인 지망생이 쓰는 감성일기와는 약간 다르게 써야 합니다.   소설은 사회의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문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변화에 따라서 변하는 사람의 의식과 풍속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감수성이나 생각도 중요하지만, 소설 지망생은 현재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시대의 변화를 꼼꼼히 적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앞서 이라는 말을 했지요? 무슨 드라마와 관련하여 폐인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3년도의 일입니다. 그런데 한 50년 세월이 흐른 뒤에 2002년도의 사건을 소설로 쓴다고 합시다. 그런데 2002년도에는 김두한의 일생을 다룬 라는 드라마가 유행했습니다. 소설에서 2002년도의 그 드라마에 반한 사람을 등장시키는데 여기서 이라는 말을 쓰면 될까요? 안 될까요? 당연히 안 됩니다. 시대 배경이 2002년인데 그 후에 생긴 말을 쓰면 안 되지요. 또 임진왜란 때 고추장을 담갔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안 되지요. 왜냐? 고추는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이 가져온 것이거든요. 그러니 그 후에는 되지만 그 전에는 안 되는 겁니다.   바로 이 점입니다. 소설은 사회의 변화를 꼭 읽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변화를 일기에 꼼꼼하게 적어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인터넷이 발달하여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만, 그것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인터넷에는 거짓 정보가 하도 많아서 그것을 걸러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자료가 가장 정확한 것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꼼꼼히 기록해놓으면 세월이 갈수록 자신에게 귀중한 소설의 자료가 됩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한 가지, 소설 지망생이 해야 할 일은 소설을 읽고 그것을 정리하는 공책을 만드는 일입니다. 소설을 읽으면 그에 대한 정리를 하는 버릇을 길러야 합니다. 즉 제목, 지은이, 출판사, 발행년도, 소설의 시점을 차례대로 적고 줄거리를 요약한 다음, 그에 대한 느낌과 문제점을 정리하는 버릇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소설을 읽는 대로 정리를 해두면 나중에 그것이 좋은 자료가 되거니와, 그런 작업을 하면서 소설에 대한 깊은 이해로 나아가게 됩니다. 깊은 이해는 창작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4) 진정으로 살아있는 시는 생활을 노래한 시이다     시인들이 쓴 시는 거대담론에 빠져서 재미가 없다고 앞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데는 다 사연이 있습니다. 그 사연은 우리나라의 복잡하고 한 맺힌 역사에서 비롯합니다.   일제 강점기 때에 일본군 소위였던 사람이 해방 된 뒤에 장군이 되었는데, 이 사람이 4.19로 어지러운 정국을 틈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서 대통령이 됩니다. 자신의 과거를 덮기 위해 경제 살리기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죽을 때까지 평생토록 대통령을 하려는 욕심으로 헌법을 고칩니다. 그것이 저 악명 높은 유신헌법이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1979년에 자신의 부하가 쏜 권총을 맞고 죽습니다. 20년 동안 철권통치를 했던 독재자가 죽자 우리나라 정치권은 갑자기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정국은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을 정도로 혼미에 빠졌습니다.   이 때 서울을 지키던 젊은 군인 몇몇이 흑심을 품고 또 한 번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자신들이 거느리고 있던 군대를 이용하여 서울을 장악했고,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휴전선을 지키는 군대까지도 몰래 빼내어 동원했습니다. 군대가 나라를 다스리는 체제로 간 것입니다. 나라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젊은 대학생들이 날마다 거리로 나와서 데모를 했고, 많은 시민들이 여기에 동참했습니다. 전국의 각 도시는 날이면 날마다 최루탄 가스로 가득 찼습니다. 권력에 눈이 먼 이들은 마침내 칼을 뽑았습니다. 전국의 도시 하나를 택하여 본때를 보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광주를 택했습니다.   1980년 5월의 일입니다. 다른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당시 광주는 매일 같이 학생들의 시위로 최루탄이 터졌습니다. 18일 새벽에 공수부대가 도시를 점령했고, 군인들은 물러가라고 시위하는 학생들을 공수부대들은 몽둥이로 무참히 때렸습니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분노하여 군인들에게 항의하자 군인들은 이들을 역시 몽둥이로 다스렸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날 군인들의 무지막지한 행동에 항의하기 위해 수만 명의 시민들이 도청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이들에게 총을 쏘았고, 그들이 모여들었던 금남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을 변했습니다. 이것이 저 유명한 5.18광주항쟁의 발단입니다.   그 뒤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광주에서 피를 뒤집어 쓴 그 군인들은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하고, 친구가 친구에게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며 10년 동안 한국을 주물럭거립니다. 문제는 이 젊은 군인들의 움직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있던 미국이 끝내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미를 외치지 않던 나라 대한민국이 이 사태를 계기로 미국의 정체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세상을 다시 보게 됩니다. 한국의 정치를 다시 보고, 미국을 다시 보고, 그리고 진정 무엇이 조국을 위하는 길인가를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잘못된 일들에 대해서 비판을 하기 시작합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것을 그대로 두고서는 아무 것도 안 된다는 믿음이 당시 민주주의를 꿈꾸던 평범한 젊은이들을 투사로 만듭니다. 그리고 군부독재를 타도하여 민주주의를 이루자는 혁명의 길로 나섭니다. 이것이 1980년대 내내 팽배했던 사회 분위기였습니다.     여러분이 시인이었다면 이런 시기에 어떻게 했을까요? 뒷짐 지고서 한가하게 세월을 노래하고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을까요? 아마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거든요. 순수하다는 것은 욕심 없이 올바르다는 것이고, 올바른 사람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합니다. 나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이런 고민을 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시인은 순수하기 때문에 옆에서 일어나는 불행을 그냥 보고 지나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것이 가족과 이웃과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결정하는 커다란 일이라면 목숨을 바쳐서 바로잡으려고 하겠지요. 당연한 일 아닌가요?   1980년대 이후의 시는 이런 상황을 빼놓고서는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시인들은 당시의 독재 정권이 만드는 암울한 세태에 대해 절규를 했고,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당연히 이런 것들이 그 당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떠올랐습니다. 그런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시도 일정한 기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의 주제가 통일이라든가 민족, 문명, 환경 같은 거대한 주제를 다루었던 것입니다.   어른들의 시가 재미없어진 것도 바로 이런 분위기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루도 아니고 10년이 넘게 매일 같이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고, 통일을 해야 하고, 인간을 황폐화시키는 도시 문명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이어져온 것입니다. 좋은 얘기도 한두 번이지 10년이 넘고 20년이 넘도록 들으면 어떻겠어요? 지겹지요? 그래서 최근 들어서는 이러한 경향에 반발을 보이는 시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주제들이 틀렸다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통일이 되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날까지 가장 중요한 시의 주제가 될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그러한 주제들이 너무 강해서 상상력이 딱딱해지고 그 바람에 시의 즐거움이 많이 줄었다는 것과 그런 영향으로 인해 시가 일반 독자들로부터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는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현실의 내용을 다루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1980년대의 시인들이 그러한 거대담론을 주제로 삼은 것은 그 당시에 그들의 고민이 거기에 집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떨까요? 여러분도 그런 주제에 깊은 고민을 하고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들도 그런 내용을 시로 써야 할 것입니다. 어떤가요? 그런가요? 날마다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나요?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게 여러분 고민의 전부는 아닐 겁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어떻게 하면 성적을 더 올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고민할 테고, 아니면 어떻게 하면 예쁜 여학생과 사귈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멋쟁이 남학생을 사귈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할 것입니다. 아니면 어떻게 하면 용돈을 더 올려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극히 사소하지만 중요한 고민들을 하며 지낼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것을 시로 써야 할까요? 답은 자명하지요? 시는 여러분들의 고민을 담아야 합니다. 당연히 공부 때문에 걱정하는 내용이 시에 담겨야 하고, 이성 친구에 대한 관심이 시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여러분의 나이에 써야 할 내용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평생토록 그런 내용으로만 시를 쓰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관심은 계속 바뀝니다. 그러면 시의 내용도 바뀌겠지요. 대학에 가서 운동권이 된 학생은 조국의 장래를 노래할 것이고, 평범한 주부가 된 사람은 평범한 주부의 일상을 노래하는 시를 쓸 것이고, 그럴 것입니다.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억지로 감정을 만들어서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를 쓸 때는 그 당시의 고민을 솔직하게 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고민하는 것을 쓰는 일에 익숙해지면 나중에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순간이 오고, 그때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아주 감동스런 시를 쓸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프로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자기 주변의 일과 감정을 시로 쓰면서 시의 재미를 느끼다가 나중에 가서 실력이 쌓이고 재능을 발휘하게 되면 저절로 시인이 되는 겁니다. 진정한 시의 즐거움과 발전은 프로페셔널리즘이 아니라 아마튜어리즘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시의 그런 즐거움을 만끽해야 할 나이이고 그런 때라는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5) 시평 하는 법     여러분들이 시에 관심을 갖고 살다보면 주변에서 그런 친구들을 만납니다. 시도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라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이 훨씬 진도가 빠릅니다. 재미도 있구요. 그래서 혹시 주변에 그런 친구들이 있으면 머뭇거리지 말고 동아리를 만들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매주에 한 번씩 모여서 자기가 쓴 작품을 보여주고 그들의 견해를 들으면 혼자서 고민하고 쓸 때에는 볼 수 없던 여러 가지를 보고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를 쓰는 사람들은 굉장히 콧대가 높습니다. 그래서 칭찬을 해주기를 바라지 단점을 지적 받는 것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래서 시평을 하다가 크게 상처를 받고 싸워서 그예 시를 그만두고 마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 손핸가요? 그만 두는 사람 손해겠지요? 남의 지적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발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시평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저는 26살이 되던 1985년에 시를 처음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가 몸담고 있던 이라는 문학 동아리가 있었는데, 거기서 시평 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면서 시평 하는 방법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창문학에서 하던 그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소개하려고 하는데, 만약에 나중에 더 좋은 방법을 찾게 되면 그때 가서는 그 새로운 방법을 소개하지요.     ① 자리를 둥글게 배치한다.   먼저 자리를 둥글게 배치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만 모든 사람을 볼 수 있고, 어느 한쪽이 논의를 주도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둥근 배치가 어려우면 네모난 배치를 해서 될수록 가운데를 향해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사회자는 사회 보기 편한 자리에서 합니다.   사회자는 보통 모임의 회장이 합니다. 회장이 없을 때는 연장자나 부회장이 맡게 되지요. 사회자는 특별히 할 것이 없고 회의 진행을 원만하게 하면 됩니다. 대개 논의가 시작되면 두 패로 나뉘어 격론을 벌이기 쉽습니다. 그러면 사회자는 눈치를 봐가면서 그 논쟁이 개인의 감정을 상하는 단계까지 나가지 않도록 적절히 조절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행을 위한 발언 이외에는 될수록 아끼는 것이 좋습니다.     ② 시를 미리 복사해온다.   시는 모임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복사해옵니다. 사회자가 미리 확인을 해서 시를 쓴 사람에게 복사해오라고 하던가 시를 미리 받아서 복사해둡니다.   지금은 복사하기가 편해서 좋지만, 옛날에는 칠판에 쓰고 그것을 노트에 옮겨 적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복사해서 보는 것보다는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쓰여 있는 시를 맨눈으로 볼 때와 손으로 한 번 옮겨 적는 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눈으로 읽을 때 눈에 띄지 않던 것들이 손으로 적으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복사 얘기를 했지만, 가장 좋은 것은 시를 자신이 직접 손으로 적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집을 읽다가도 유난히 좋다고 느껴지는 시가 있으면 꼭 한 번 공책에 적어두기 바랍니다. 눈으로 대충 읽을 때와는 다른 모습이 많이 발견됩니다.     ③ 시를 돌려주고서 5분가량 읽는 시간을 준다.   시를 돌리면 그것을 읽느라고 조용해집니다. 그 상태로 5분가량 둡니다. 그러면 시를 받아든 사람은 시를 읽으면서 자신이 말해줄 부분을 표시하고 내용을 정리해둡니다. 그리고 발표할 시간이 되면 발표합니다.     ④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지은이가 한 번 소리 내어 읽는다.   반드시 소리를 내어 읽어야 합니다. 옛날에 시는 노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듬이 잘 살아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대부분 잊고 삽니다. 시를 소리 내어 읽을 때하고 그냥 눈으로 읽고 말 때하고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느껴보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또 시 낭송의 즐거움을 이런 때가 아니면 누리기 어렵습니다. 보통 때에 우리는 시집을 사서 눈으로 읽지 그것을 입으로 소리 내어 읽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지은이 자신이 읽는 것은 혹시 글로 적는 과정에서 잘 못 적은 것이 있는가 확인하는 차원입니다.     ⑤ 지은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한 번 더 낭송한다.   지은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한 번 더 읽습니다. 아무나 읽고 싶은 사람이 읽도록 하고, 자원자가 없을 경우에는 사회자가 지정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⑥ 자유롭게 시에 대해서 견해를 발표한다.   두 번 낭송이 끝나면 이제 사회자는 시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 시의 문제점을 발표하기 시작합니다. 순서는 굳이 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나 한 사람의 발표가 끝나면 다른 사람이 발표하면 됩니다. 종종 서로 발표하려는 수가 있는 그 때는 사회자가 교통정리를 해주면 됩니다. 또 반대로 모두 침묵을 지키는 수가 있는데 그때도 사회자가 눈치를 봐서 시키면 됩니다.   중요한 건 이 부분입니다. 한 번 이야기가 시작되면 시의 단점을 지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왜냐하면 습작기의 여러분이 완벽한 작품을 쓸 리 없기 때문이지요. 시의 초보자인 여러분이 쓰는 시에는 아무래도 미숙한 부분이 많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부분은 시의 전문가가 아니라도 금세 눈에 띕니다. 그래서 그런 단점을 지적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적을 당하고 나면 시를 쓴 사람은 큰 충격을 받는 것이 보통입니다. 자신은 잘 썼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경험을 처음 하면 약이 얼마나 오르는지 그날 밤에 잠을 못 이루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존심이 너무 강한 사람은 그날 당장 시를 때려치우지요. 실제로 그래서 시를 그만 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 손해인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은 없고, 완벽한 시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래서 남이 지적하는 단점을 겸허히 받아들여 더 좋은 작품을 쓰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정도도 받아들일 수 없는 지경이면 그 사람은 시가 아니라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미워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부분을 고치라고 지적하는 것이 시평의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시평을 해주는 사람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를 비평하는 것은 그것의 잘못 된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격과 관련하여 상처를 받을 듯한 발언은 절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시에 잘못된 점이 발견되었을 때 그 점을 지적한 뒤에 반드시 자기의 체험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이런 문제점을 이렇게 해보니까 시 쓰기에 훨씬 좋더라, 하는 식으로요. 말하자면 그것을 고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사회자는 논쟁이 격해지면 특히 조심해서 운영해야 합니다. 논쟁이 너무 뜨겁게 진행되면 식혀주어야 하고, 너무 진행이 안 되면 잘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논쟁과정에서 개인이 상처를 입을 듯한 상황이 오면 재빨리 제지를 해서 좋게 풀도록 해야 합니다. 시평이 개인의 인격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좀 더 성숙된 토론의 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단점을 지적해주는, 그래서 오히려 격려해주는 것이라는 점을 계속 부각시켜주어야 합니다.     ⑦ 더 이상 새로운 견해가 없으면 마친다.   모임이 진행되다 보면 잠잠해지는 순간이 옵니다. 할 이야기가 대부분 나왔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눈치를 봐서 시평을 마칩니다. 이때 사회자가 대충 총정리를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작품 발표자입니다. 작품을 낸 사람은 발언권이 없습니다. 시평이 끝날 때까지 일체 한 마디도 하지 못합니다. 만약에 글 쓴 사람에게 발언권을 줘놓으면 이상하게도 변명을 하게 됩니다. 자기가 작품을 쓴 동기가 어떻고, 어떤 구절은 어떤 의미로 썼으며, 이런 말을 하려고 했다. 뭐, 이런 얘기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그건 변명이 되지요. 작자가 그렇게 얘기를 해놓고 나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겠어요. 시평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반박을 하면 시인을 욕하는 것이 되고요. 이래서 작품을 낸 사람에게는 일체 발언권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총무를 뽑아서 총무가 이 시평의 내용을 정리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⑧ 뒤풀이를 한다.   시평을 마친 뒤에 반드시 뒤풀이를 합니다. 우리는 신분이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주로 막걸리를 마셨습니다만, 중고생인 여러분들은 그러면 안 되겠지요? 빵집에 가서 빵을 사먹든가, 아니면 음료수와 간단한 먹을 것을 사다가 먹는 것도 좋습니다.   왜 이것을 해야 하냐 하면, 시평을 하다 보면 감정이 상합니다. 아무리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더라도 단점을 지적하는 것인데, 서로 기분이 좋을 리는 없지요. 그래서 말은 안 해도 속이 편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바로 그런 찜찜한 기분을 없애주는 것이 뒤풀이입니다. 음료수를 마시면서 시평에서 못 다한 이야기도 하고, 시평에서 마음이 상했으면 위로도 해주고, 생활하면서 겪는 고민도 털어놓고 또 고약한 성미를 지닌 선생님들 흉도 보고, 하면서 마음을 푸는 겁니다. 그러면서 한 층 더 친한 친구가 되는 것이지요.     자, 이상 장황하게 시평하는 절차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이상의 논의를 간단히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자리를 둥글게 배치한다. ② 시를 미리 복사해온다. ③ 시를 돌려주고서 5분가량 읽는 시간을 준다. ④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지은이가 한 번 소리 내어 읽는다. ⑤ 지은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한 번 더 낭송한다. ⑥ 자유롭게 시에 대해서 견해를 발표한다. ⑦ 더 이상 새로운 견해가 없으면 마친다. ⑧ 뒤풀이를 한다.     자, 지금까지 사설이 좀 길었지요? 이제부터 진짜 시 쓰는 법으로 넘어갑시다.   3.시 창작의 원리와 실제     시를 쓰는 방법은 모두 3가지입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① 빗대어 쓰기 ② 그리듯이 쓰기 ③ 직접 말하기     애개개! 겨우 세 가지 뿐이예요? 시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데 방법이 모두 세 가지 뿐이라구요? 뭐,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은 충동이 마구 일어나지요?   그러나 사실입니다. 위의 세 가지 방법만 기억하면 어떤 내용이든지 원하는 것을 모두 시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다른 책에서는 뭐라고 설명하는지 모르겠으나 제가 한 20년 넘게 시를 쓰다 보니 이 정도로 나누면 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실은 이것도 많이 늘려서 얘기한 겁니다. 아예 두 가지로 줄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하면 이론으로 설명하기는 좋아도 실제로는 조금 불편하니 그대로 두겠습니다.   너무 간단하지 않냐구요? 하하하. 별 걱정을 다 하는군요. 바둑 두는 분들의 말씀을 들으면 바둑판에서 벌어지는 전략과 계획은 무한대라고 하는군요. 바둑알은 색깔이 많아서 작전과 전략이 많은가요? 단 두 가지 색깔인데도 바둑판에 드러나는 정신의 질서와 배열은 무한대로 확대됩니다. 시 역시 그렇습니다. 이 세 가지가 혼자서, 또는 서로 섞이면서 만드는 시의 양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무한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한 가지씩 보면서 연습을 하겠습니다. 1)빗대어 쓰기 : 비유와 상징     빗대어 쓰기란 시를 비유의 방법으로 쓰는 것을 말합니다. 비유는 내 생각을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상대가 알고 있는 것을 토대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시는 시인이 보고 느낀 것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시인이 보고 느낀 것은 그 사람만의 체험에서 나옵니다. 특수한 것이죠. 그 특수한 체험을 그대로 쏟아놓으면 혼잣말이 되기 쉽습니다. 이렇게 혼자 느낀 내용이 어렵거나 복잡할 때 그것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이미 익숙한 것에 빗대어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자는 사바나 지역에 살기 때문에 온대 기후에 사는 우리 조상들은 볼 수 없는 짐승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옛날 우리네 할아버지들이 외국에 가서 이것을 보고 왔다면 사자가 뭐냐고 궁금해 하는 이웃들에게 뭐라고 알려주었을까요? 이거 궁금하지 않은가요? 나는 무척 궁금하던데……. 사자를 본 사람은 사자를 보지 못한 사람에게 이렇게 설명할 겁니다.   먼저 사자는 맹수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짐승에 비유할 겁니다. 조선의 호랑이가 먼저 얘기되겠죠. 그런데 사자와 호랑이는 여러 모로 다릅니다. 그래서 먼저 전체 모습이 비슷하다고 한 다음에 부분부분의 다른 점을 열거할 겁니다. 우선 목둘레에 긴 털이 수북이 난다는 것이 호랑이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머리가 훨씬 더 크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큰 얼굴 때문에 눈이 더 강조되죠. 뭐라고 하겠어요? 왕방울 만하다고 하겠죠. 거기다가 커다란 입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되겠지요. 머리통은 몸의 절반쯤이나 되게 크고, 목엔 목도리처럼 털이 달렸고, 입은 귀밑까지 찢어지고, 두 눈은 왕방울만하고…….   이와 같이 새로운 사물에 대해 설명할 때는 그것과 비슷한 것을 통해서 재구성하도록 듣는 사람이 잘 아는 것과 비교합니다. 그래야 빨리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비유의 기능입니다. 이를 토대로 비유를 정리해보면 비유는, 이미 있는 것을 토대로 낯선 것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앞서 사자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설명을 듣고서 우리 조상들이 떠올린 사자의 모습을 알 수는 없을까요? 있습니다! 어디에? 탈춤에! 탈춤에 나오는 사자들이 우리 조상들이 말로만 듣고서 머릿속에 그려본 그것입니다. 이제 알겠지요? 탈춤의 눈에 왜 커다란 방울이 달렸는지를요! 사자의 큰 눈을 보고 왕방울 만하다고 누군가 표현했고, 그 말이 비유인 줄을 모르는 순진한 할아버지가 진짜로 커다란 방울을 달아버린 것입니다. 우리 할아버지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사자는 두 눈에 방울이 달린 괴상망측한 모습이었습니다. 하하하.     이 비유는 같은 문학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갈래 예컨대 소설이나 수필, 희곡보다 시에서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쓸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시에서 가장 화려하고 멋있게 쓰입니다. 시의 전유물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옛날부터 시인들이 써온 방법입니다. 그래서 시를 배우는 첫 번째 항목에서 이 방법을 다루는 것입니다.   비유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비유와 상징이 그것입니다. 보통 문학이론서나 시 개설서에서는 비유와 상징을 많이 다른 것으로 다루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제가 시를 오래 쓰면서 보니까 이 두 가지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조금 다른데 시를 쓰는 원리와 방식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같은 항목으로 묶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론가와 시를 쓰는 사람은 다릅니다. 이론가는 이미 나타나있는 현상을 설명하는 사람이고, 시인은 없는 것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지금 시의 이론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시 쓰는 방법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론가들의 생각과는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먼저 비유를 살펴본 다음에 상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비유는 한자로 라고 쓰는 데 이 나 는 모두 옛날 한문에서 쓰이던 표현법입니다. 비는 좀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이고, 유는 하고픈 말을 직접 하지 않고 슬쩍 돌려 말해서 상대가 말하는 이의 의중을 눈치 챌 수 있도록 하는 표현법입니다. 메타포라는 서양의 이론을 번역하면서 이 두 가지를 합쳐서 라고 한 것이지요.   비와 유의 뜻을 보면 비유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직접 말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다른 상황이나 사물에 빗대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좀 과장을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여러분의 말로 좀 뻥을 치는 것이지요.   우리 집 아이가 어렸을 때 음악 책의 악보를 보더니 꼭 콩나물 같다고 말하더군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음악 책의 음표가 하고자 하는 말이고, 콩나물이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밤중에 켜져 있는 가로등을 보고서도 역시       아빠, 저거 콩나물 같아.   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니까 가로등의 모습과 콩나물의 모습이 비슷하게 생긴 것이고, 그것을 연결시켜서 말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비유의 시초이고 시의 출발점입니다. 누구나 새로운 풍경을 보거나 사물을 보면 이런 연상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비유는 새로 발견한 것을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바꾸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는 콩나물을 먹었기 때문에 이미 익숙한 것이죠. 그런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음악 책에서 악보에 그려진 음표를 봤습니다. 얼마나 신기했겠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그것과 비슷한 것을 찾아내서 얘기한 겁니다. 이것이 비유의 의미이고 기능입니다.   따라서 비유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재주이고 기능입니다. 다만 시에서는 그것을 최대한 활용할 뿐이지요.     자, 그러면 이번에는 비유를 활용해서 시를 쓰기 위한 예행연습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요? 그런데 사랑이 뭐냐고 물으면 누구나 머뭇머뭇 거립니다. 그건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딱히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어서 그런 것이죠. 그런 상황에서 비유보다 더 잘, 그리고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가장 흔한 것은 그냥 마주보고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러면 받아들이는 사람은 사랑하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편지를 쓸 때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편지를 쓰는데 달랑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렇게만 달랑 써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여간 날씨는 어떻고 어쩌고 하면서 분위기를 잡은 다음에 사랑 얘기를 꺼내야 하지 않겠어요? 일종의 기교가 필요하다는 얘깁니다. 그때 비유는 사랑을 표현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 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라고 쓰는 것보다   내게 당신은 별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내 영혼 속에서 언제나 반짝반짝 빛나기 때문이지요.   라고 쓴다면 그것을 받아본 사람은 그냥 사랑한다고 쓴 것보다는 훨씬 더 감동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감동의 진폭을 크게 만들어주는 손쉬운 방법이 바로 비유입니다.   비유는 하고자 하는 말을 직접 하지 않고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 한 번 연습을 해보겠습니다. 앞에서 말한 사랑을 표현해보겠습니다. 먼저 사랑은 ~이다, 라고 해놓고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사랑은 사닥다리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유를 말해봅니다. 한 번 해보세요. 사랑이 왜 사닥다리일까요? 제가 한 번 해볼까요?   사랑은 사닥다리다. 왜냐 하면, 높이 있는 당신에게 다가가게 해주니까.   어때요? 그럴듯한가요? 별루라고요? 하하하하. 그러면 여러분들이 좀 더 좋은 해석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 더 합니다.   사랑은 가로등이다. 왜냐 하면 당신에게 가는 길을 환히 밝혀주니까.   어때요? 이번에도 시원찮았나요? 자꾸 그렇게 구박하면 곤란합니다. 자, 여러분도 한 번 해보세요. 아무거나 갖다 붙이고서 그것을 설명해보는 겁니다. 엉뚱하면 엉뚱할수록 좋습니다. 해보셨나요? 그러면 제가 생각나는 대로 한 번 나열할 테니 여러분은 그 뒤에다가 이유를 써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동전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유리창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봄바람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느티나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이쑤시개다. 왜냐 하면, ~   사랑은 빵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폭탄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참새다.  왜냐 하면, ~   자, 해보셨나요? 이 밖에도 여러분이 얼마든지 만들어서 설명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런 재치가 시를 잘 쓰는 바탕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비유를 활용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비유의 성질을 좀 설명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국어시간에 시를 배우면서 이것에 대한 설명을 많이 들었을 거예요. 지루하겠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복습을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비유는 내 생각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에 따라서 다시 두 가지로 나눕니다. 그 두 가지는 다음입니다.     -직유:   -은유:     이 차이는 엄청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말로 하다 보니 그것을 연결시켜주는 말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 연결사가 있으면 직유, 없으면 은유입니다. 예를 들어 앞서 살펴본 대로 라는 생각을 한 번 보겠습니다. 이 생각을 나타내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사랑은 사닥다리 같다.     -사랑은 사닥다리이다.     무슨 차이가 있나요? 와 의 차이지요? 는 생략해도 됩니다. 이 차이를 두고 직유와 은유라고 합니다. 직유는 위에서 보듯이 라는 연결사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연결사가 들어가지 않으면 은유라고 하지요. 은 인데 곧장이라는 뜻이고, 은 인데 숨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직유는 문장의 겉으로 직접 드러난다는 뜻이고, 은유는 그런 연결사가 문장 뒤로 숨어서 안 보인다는 얘깁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직유 : ~처럼, ~같이, ~인 양, ~답게, ~하듯     -은유 :     이것이 교과서나 이론서에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시를 창작하는 사람들 쪽에서 보면 이런 것은 굳이 구별하자고 따지지 않아도 됩니다. 결국 같은 발상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을 붙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시 쓰는 사람에게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발상을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이번에는 앞서 제시한 비유를 시의 모양으로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기억이 안 나요? 그러면 아래를 봅시다. 앞서       사랑은 사닥다리다. 왜냐 하면, 높이 있는 당신에게 다가가게 해주니까.   라는 놀이를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놓으면 발상은 될지언정 시가 되지는 않습니다. 시가 되려면 이 생각을 좀 더 다듬어야 합니다. 다듬는다는 것은 이 엉뚱한 연결을 그럴 듯하게 생각하게끔 살을 붙이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살을 붙여야 할까요? 한 번 살을 붙여보겠습니다.   당신은 내게 늘 높은 곳에 계십니다. 나는 당신에게 다가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은 사닥다리입니다. 나는 나의 사랑으로 높이 있는 당신에게 다가갑니다. 당신이 나를 돌아보지 않아도 나는 내가 만든 사랑으로 당신에게 날마다 다가갈 것입니다. 내게 사랑은 사닥다리입니다. 당신에게 다가가는 사닥다리.   자, 이렇게 써놓으면 어떤가요? 잘 쓴 것까지는 못 되어도 그럭저럭 시라고 할 만큼은 되지 않았나요? 시가 아니라구요? 떼끼! 하하하.   웃지만 말고 발상법을 배우기 바랍니다. 이렇게 비유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알맞은 상황을 만들어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시의 기초입니다. 알맞은 상황이라는 건 비유된 두 가지 사이의 닮은 점을 계속 찾아내는 겁니다. 그러면서 찾아낸 그것을 연관 지어 설명하면 묘한 긴장을 이루면서 시가 됩니다. 이건 시에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시에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 당장 해보시기 바랍니다. 재주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라고 방금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나 시인입니다. 방법을 몰라서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지요.   앞서 제가 제시한 사랑에 대한 비유 가지고 한 번씩 시를 만들어보기 바랍니다. 사랑은 동전이라는 것 갖고 한 번 더 해볼까요?   사랑은 동전입니다. 내가 앞면이면 당신은 뒷면 그래서 완벽한 사랑을 만듭니다. 내가 향하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이 향하고 당신이 향하지 못하는 곳으로 내가 향하여 당신과 내가 동그란 한 세상을 만듭니다. 둥글게 만든 그 세상으로 우리 사랑의 길을 갑니다. 만지면 만질수록 빛나는 우리 사랑은 동전입니다.     시는 이런 식으로 쓰는 것입니다. 전혀 어렵지 않지요? 어려운가요? 몇 번 연습하면 아주 쉽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시인이 한 명씩 들어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해서 작품 한 편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할미꽃   할미꽃을 보면 우리 할머니 같다.   할머니를 보면 할미꽃이 생각난다.   내 친구 할미꽃은 장미보다 예쁘다.   할미꽃 내 친구 할미꽃이 좋다.   우리 할머니 같으니까…….   난, 할머니가 좋다.     할미꽃의 모습에서 자신을 친근히 감싸주는 할머니를 연상하고 이렇게 쓴 것이겠지요. 할미꽃을 할머니에 빗대어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어때요? 잘 썼나요? 못 쓴 것은 아니지만, 썩 잘 쓴 것 같지 않다구요? 제 눈에는 이것이 아주 잘 쓴 것으로 보입니다. 내막을 알면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 학생은 한글을 잘 모르는 중학교 1학년 학생입니다. 초등학교 때 미처 한글을 떼지 못한 채 중학교로 올라온 것이지요. 특히 받침을 제대로 적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지금 열심히 배우고 있으니, 머지않아 다 깨우치겠지요. 그럼 어떻게 시를 썼느냐구요? 시화전을 할 테니까 시를 써보라고 하고 난 뒤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이 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에게는 시를 말로 쓰고 옆 학생에게 받아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말을 옆 학생에게 했고, 옆 학생이 받아 적어서 가져온 것입니다.   어때요? 그래도 못 쓴 시로 보이나요? 아주 잘 썼지요? 저는 이 학생에게 칭찬을 많이 했습니다. 시화전을 무사히 마쳤고, 아주 즐거운 시화전이 되었습니다. 이 학생의 명예가 걸린 일이기에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만, 굳이 이 얘기를 하는 것은, 시는 특별한 사람만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그것을 일상 생활 속에서 즐기는 것이 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임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시를 더 감상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공부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꺼낼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한 동안 고민했습니다. 비유와 관련하여 그 원리를 설명하는 일인데, 주로 이론가들이 즐겨 다루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것까지 말하면 너무 어려워질 것 같아서 그냥 지나갈까 하다가, 아무래도 그냥 지나치면 여러 가지로 문제가 생길 듯하여 일단을 설명을 해볼까 합니다.   비유는 두 가지를 전제로 합니다. 내가 하려는 말이 있고, 그것을 표현해주는 대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라고 할 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이고, 그 사랑을 꾸며서 상대방이 쉽게 알아듣게 해주는 것은 동전입니다. 이것을 일러서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 두 가지를 구별해야만 나중에 시가 어떻게 쓰이기 시작했는가 하는 원리를 설명할 때 아주 편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원관념이고, 동전이 보조관념이지요.   그런데 저는 이론서나 시 안내서를 읽으면서 늘 못 마땅하게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뭐냐면, 뭐든지 서양에서 들어온 이론이라고 해서 전부 이상한 말로 번역을 하는 겁니다. 대부분 일본에서 쓰던 번역어를 그대로 베껴다 씁니다. 철학이니, 문학이니, 과학이니, 하는 것들이 다 그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래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대부분 다 알아듣는 것이지만, 택배니, 구좌니, 하는 말들은 아직도 생소합니다. 우리가 만들어서 쓴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영어권에서 쓰는 것을 자기들 실정에 맞게 번역해서 쓴 것을 우리가 아무런 생각 없이 가져다 쓴 결과입니다. 학문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학자들이 쓴 논문을 읽으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초 용어의 낯섦 때문에 그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원관념과 보조관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마음에 안 드는 말들입니다. 좀 더 쉽고 친근하게 번역하면 어디가 덧나는가요? 예를 들어 원관념은 원래 전하고자 하는 생각이란 뜻이고, 보조관념은 그것을 쉽게 전달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과 라고 번역하면 안 되나요? 이란 말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가를, 어른들은 잘 모릅니다. 그러면서 이라고 쓰면 우스워 보이죠. 참 이상한 관행이 어른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과연 지금 이 자리에서는 어떻게 할까 보통 고민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다른 사람이 쓴 시 이론서를 보면 전부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고 나올 텐데, 나만 원생각, 도우미라고 쓰면 여러분들이 고생할 거란 말입니다. 이를 어쩌지요?   해서, 일단 여러분을 덜 고생시키는 방향으로 하겠습니다. 다른 책에서 쓰는 용어를 쓰는 것으로 하고 중간중간에 여러분이 어렵지 않게 제가 만든 용어를 쓰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겠습니다. 됐지요? 자,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물건들이 있고, 생각들이 있습니다. 나무, 책상처럼 눈에 보이는 것도 있는가 하면 손으로는 만질 수 없는 사랑, 믿음, 꾸지람 같은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름 붙은 것을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 김철수라는 학생이 있으면 그 김철수라는 이름은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시켜주는 노릇을 합니다.   꼭 사람의 이름만이 그런 건 아닙니다. 장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미는 다른 꽃으로부터 그 꽃을 구별시켜주는 일을 합니다. 장미란, 해바라기나 깨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모든 이름은 그 이름이 담는 내용을 다른 이름으로부터 구별해줍니다. 세상의 만사 만물을 구별 짓기 위해서 사람이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지요.   그런데 세상엔 다른 점만 있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공통점도 많습니다. 비유는 바로 이와 같이 구별하도록 이름을 지은 사람들의 생각을 반대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세상에 전혀 관련이 없는 사물들 사이에서 같은 점을 찾아내는 방법이 비유입니다. 그래서 비유는 세상을 모두 같은 것으로 보는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앞서 라는 시를 소개했을 겁니다. 꽃과 똥을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꽃과 똥이 같을 리 없지요.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을 나타낸 말입니다. 구별을 하기 위해서 붙인 이름이죠. 그러나 그렇게 다른 것에서 공통점을 보는 것도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고, 그 공통점이 남들이 생각을 하지 못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질 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감동을 합니다. 그 감동의 원인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세상에 꽃을 똥과 같다고 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그 공통점을 찾아내잖습니까?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한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관련이 있고 공통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 시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한 형제고,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한 바탕 위에 있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한 송이 꽃이라는 말입니다. 이쯤 되면 이제 철학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거지요? 시의 철학. 우리는 지금 너무 진도를 많이 나갔네요. 시를 많이 쓰다 보면 시의 영역 바깥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 만큼 넓은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에게 그 길을 안내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라는 시를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변비   뛰어가 앉으면 나오지 않고 멫 방울 힘겹게 떨구고 나와도 뒤끝이 영 개운치 못한 내가 변비 환자라는 사실을 안 것은 요 며칠 전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창밖의 꽃나무들도 심한 변비를 앓고 있구나. 겨우내 참고 참았던 것을 밀어내느라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버들강아지들 바야흐로 봄볕 아래서 끙끙거리고 있다. 힘겹게 밀려나온 꽃이 지자 파릇한 화장지까지 한 장씩 톡톡 밀어낸다.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제가 이 시를 인용한다고 해서 이 시가 잘 썼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잘 썼다던가 못 썼다던가 하는 평가는 어떤 관점과 믿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방법만을 보기 바랍니다.   꽃과 똥을 원관념과 보조관념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이 되겠지요?   원관념 : 꽃 보조관념 : 똥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꽃이 피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똥이 나오는 상태와 비슷하다고 보고 똥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지요. 원생각은 꽃이고 그것을 여러분에게 전달해주는 도우미는 똥인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생각하는 것을 다른 것에 견주어서 표현하는 것이 시의 아주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 방법을 알아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잊지 말고서 이제부터는 작품을 감상해보겠습니다. 먼저 직유부터 볼까요?   봄이 되면                김준옥(3-1)   방긋방긋 들녘 길가에 피어나는 진달래는 상진이의 얼굴을 닮았고 막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성식이의 흰머리를 닮았네.   들녘에서 농부들이 한해 농사가 잘 되기 기원하는 마음은 마치 노총각이 올해는 장가를 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과 같고   밤하늘에 초롱초롱 떠있는 별들은 개나리를 꼭 닮았고 사람이 아기들을 낳듯 식물들은 싹을 틔운다.     한 행마다 비유가 나오지요? 같은 매개어로 다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면 원래생각과 그것을 전하기 위해 도우미로 나선 것들을 분류해보겠습니다.   원관념 상진이 얼굴 성식이 머리 농사꾼 마음 별 싹 보조관념 진달래 아지랭이 노총각 마음 개나리 아기   이렇게 되겠지요? 상진이가 누구인지 성식이가 누구인지 굳이 알지 않아도 이 시를 감상하는 데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몰라도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주변에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이름까지 써서 아주 특수한 사람을 끌어들인 것 같지만, 잘 살피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이름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보편성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의 비유를 거꾸로 유추하면 상진이는 얼굴이 곧잘 벌게지는 사람이고, 성식이는 머리에 새치가 많이 있는 학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나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다 아는 것들입니다.   이 시에서 생각할 것은 이 시가 어디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시골입니다.  사람들이 도시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농사지을 사람이 부족하고, 쓸 만한 처녀들은 힘든 농사꾼에게 시집을 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농촌에 사는 총각들은 장가도 못 갑니다. 이 학생이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이 시에는 그런 정경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농촌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있다는 뜻입니다. 솔직함보다 더 큰 힘과 감동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에서 억지로 꾸미려 하지 말고 솔직하게 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정답습니까? 이렇게 주변에서 찾아보는 것이 쉽고도 좋은 방법입니다.   이 작품은 특별한 기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학생이 무슨 시의 대가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학생인데, 이렇게 빼어난 시를 쓴 것은 눈에 보이는 대로 정직하게 썼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시의 본성이 숨어있다는 뜻입니다. 자기 주변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끌어다가 서로 연결시켜 본 것이 이 시의 원리입니다. 서로 다른 것을 연결만 시켜 놓아도 이렇듯 감동이 옵니다. 아주 쉬운 방법이면서도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적극 활용하기 바랍니다.     학생의 이름 뒤에 이라고 나오지요? 제가 한 동안 근무한 학교입니다. 그런데 전화로 내북중학교라고 말하면 듣는 사람은 꼭 다음과 같이 되묻곤 합니다.       내복이요?   그러면 저는 웃으면서 다시 교정해줍니다. 내복이 아니라 내북이라고요. 그래도 잘 못 알아  들어서 몇 번은 다시 얘기하죠. 한자로는 이라고 씁니다. 내복은 이죠. 속옷이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내북은 낫습니다. 충북 단양에는 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거기에 사는 학생에게       너 어디 사니?   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가리요.     내북이라고 하면 어딜 가서든 이름 때문에 꼭 한 번씩 웃습니다. 내복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전교생수는 32명(2004년 현재)이고 한 학급에 열 명 안팎입니다. 그래도 정말 내복처럼 따뜻한 학교입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국어시간에 학생들을 이끌고 뒷산에 올라갑니다. 뒷산을 한 바퀴 돌고 오면 딱 한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 시간에 한 마디 하지요.       얘들아! 시 쓰자.   그러면 아이들은 괴성을 지릅니다. 그리곤 곧 잔잔해집니다. 지난 시간에 산에 가서 봄꽃을 본 풍경이 눈에 선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느낌이 선명하게 살아있기 때문에 10분이면 시 한 편을 씁니다. 그리고는 다시 떠들지요. 그래서 이렇게 쓴 작품으로 해마다 5월이 되면 시화전을 합니다. 자기가 쓴 시로 자기가 도화지에다가 그림을 그려서 전시회를 하는 것입니다. 시는 미리 써놓았으니 작품을 만들기만 하겠지요?   이 책에서 소개되는 시들은 모두 그런 시화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입니다. 따라서 소속을 표시하지 않은 학생들은 모두 내북중학교 학생으로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다른 학교 학생들의 작품일 경우에는 소속을 밝히겠습니다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닮았네 닮았어             김준석(2-1)   중국에서 날아온 황사는 제성이의 싹스를 닮았고 산에서 깝치는 토끼는 희성이를 닮았고 외양간에서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염소는 연호를 닮았네.   들판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는 영어선생님의 흰머리를 닮았고. 마당에서 뼝알거리는 병아리는 병덕이를 닮았고. 부엌에서 냄새나는 누룽지는 제성이를 닮았네.   비광에서 우산 들은 바보는 남주의 모습을 닮았고. 드라마에서 멋있는 원빈은 윤표를 닮았고. 김칫독에서 각이 진 깍두기는 봉진이를 닮았네.   “짱”에서 나오는 “현상태”는 영근이의 맞짱 실력을 닮았고. 학교에서 회장인 방제연은 국어선생님의 카리스마를 닮았고. 교실에서 주접떠는 정근이는 이성진을 닮았네.   학원에서 공부하는 현자는 조선시대 망나니를 닮았고. 학교에서 눈이 찢어진 순실이는 엽기토끼를 닮았고. 학교에서 잠자는 현진이는 호빵맨을 닮았네.   투성이지요? 잘 보십시오. 어떻게 시를 썼는가를. 주변의 인물들을 모두 다른 사람이나 사물이 빗대어 나타내본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 학생 주변의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생활하는가 하는 것이 눈에 잡힐 듯이 드러나지요? 여기에 나오는 이름의 주인공들이 어떤 사람들인가까지 알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비슷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이렇게 다른 시각으로 한 번 비춰봄으로써 내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표현해보는 것입니다. 각 구절마다 얼마나 정겹고 새롭습니까?   병덕이가 뼝알거린다는 것은,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인데, 병덕이라는 이름 때문에 뼝덕 뼝덕 하고 불렀겠지요. 그래서 종알거린다는 말을 변형시켜 뼝알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없는 말을 함부로 만들면 안 됩니다만, 여기서는 아주 정겹게 잘 쓰였지요. 방제연은 학생회 회장을 한 녀석인데, 늘상 머리에다 뭘 바르고서 폼 잡고 다녔습니다. 빳빳하게 선 머리 때문에 카리스마라고 별명이 붙었고, 방 카리스마가 줄어서 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표현입니다.   엽기토끼, 망나니, 호빵맨은 별로 좋지 않은 내용으로 이루어졌지요? 이걸로 보아 여학생들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이런 표현을 선택했겠지요. 남녀 합반이거든요. 얼마나 귀여운 발상입니까? 여기서 원관념이니 보조관념이니 하는 말을 떠들 필요는 없겠지요? 한 눈에 들어오는 일이니까요.   그러면 다음에는 나열이 아니라 좀 더 깊은 관찰을 담은 시로 넘어가겠습니다.   진달래 사스              박은범(2-1)   산에 사스가 유행한다. 진달래만 걸리는 사스   우리는 산에 문병을 갔다. 생각했던 것 보다 심한 사스 유행   모두들 사스가 무서워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어쩔 수  없이 나온 진달래꽃   사스 걸리기 전에 광놈 민호와 철한테 죽는다. 불쌍한 진달래꽃들.     산에 갔다가 진달래가 피어있는 모습을 보았겠지요? 붉게 핀 진달래에서 무엇을 연상했나요? 뜨거움을 연상했지요. 뜨거움에서 다시 자신이 감기 걸렸던 경험을 떠올렸을 겁니다. 그리고 좀 더 뻥을 치느라고 최근에 중국에서 유행한 유행성 괴질인 사스라고 한 겁니다. 감기에 걸리면 얼굴이 열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모습에서 진달래가 핀 것을 그것과 연관 지은 것입니다. 시의 발상 과정이 이해가 되나요? 지금 이렇게 조리 있게 설명하지만, 이 발상은 정말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친 것입니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그 즉시 받아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달래 핀 것을 감기 걸린 것으로 하고 나니, 산에 가는 것은 저절로 문병이 되는 것이지요. 한 가지 연상 작용이 다른 연상으로 금방 넘어간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서는 자기 체험을 적었습니다. 민호와 철이라는 친구가 진달래를 꺾었겠지요. 감기 걸린 데다가 그나마 꺾여 버렸으니, 얼마나 안타깝겠어요. 은 그래서 나온 결론입니다.   이란 말이 나오지요? 아마도 이것은 만든 말인 것 같은데, 은 미칠광(狂)자겠지요. 미친놈이란 뜻인데, 친구한테 미친놈이라고 하면 평상시야 그렇게 하겠지만, 그래도 시를 쓴다고 하는 마당에 그냥 미친놈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로 민망하고 불편하니까 슬쩍 바꿔 표현한 것이겠지요.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냥 애교로 봐줍시다.   자, 광놈이라는 표현을 보면 민호와 철이가 진달래를 어떻게 꺾었을까요? 곱게 꺾지는 않았겠지요? 아마 장난삼아 난폭하게 꺾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나이의 남학생들은 대개 그렇잖아요?   우리 학교의 봄                 이순실(3-1)   봄이 되니 왕눈을 가진 홍석영 선생님처럼 큰 눈을 가진 개구리가 울어대고   봄이 되니 손 매운 과학 선생님처럼 매운 고추들이 밭에 심어지고   봄이 되니 우리학교 공주님 조경애 선생님처럼 꽃들이 예쁜 옷을 입고   봄이 되니 우리교실을 청소하시는 체육 교생 선생님처럼 우리들의 마음마저 깨끗해지고   봄이 되니 이 모든 것들을 미술 선생님께서 봄이라는 하얀 도화지에 그려 넣으신다.     재미있지요? 봄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학교의 선생님들에 비유해서 시를 썼습니다. 이 역시 자기 주변에서 소재를 찾아서 썼다는 점에서 크게 칭찬 받을 일입니다. 위의 시에 선생님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 역시 어떤 이름이든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학교에든 그와 비슷한 분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특수한 사실이 흔한 사실을 가리키는 기능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시에 나왔으니 재미 삼아 한 번 알아보고 갈까요?    시의 표현대로 홍석영 선생님은 눈이 큼지막합니다. 눈 크고 얼굴은 갸름하고 키는 작달막하고 살빛은 하얗고……. 어떤 모습이 떠오르나요? 아주 예쁜 선생님입니다. 게다가 처녀 선생님이고, 집은 서울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아주 좋아한다는 겁니다. 사회 과목인데 늘 아이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주려고 노력합니다. 시골의 아이들에게 인기 있지 않겠어요? 이 시에 등장한 뒤 1년쯤 지나서 결혼을 했고, 다시 1년 뒤에 아들을 낳았답니다. 개구리 울음소리에서 눈 큰 개구리를 연상하고 다시 눈이 큰 선생님을 연결시킨 것입니다.   과학 선생님은 몸집이 아주 좋은 분입니다. 그리고 한시도 자리에 앉았지를 못하고 산으로 들로 돌아다닙니다. 수업시간에도 애들을 데리고 들로 나가서 나물을 캐곤 합니다. 산과 들을 얼마나 뒤지고 돌아다녔으면 학교 근처에서 새끼손가락만한 산삼을 다 캤겠어요? 또 학교 옆 공터를 삽으로 뒤집어서 밭을 만들었습니다. 상추도 심고, 고추도 심고, 하지요. 그런 선생님의 동작에서 봄을 연상한 것입니다. 손이 맵다는 것을 고추와 연결시켰는데, 고추가 맵기 때문이겠지요? 선생님은 몸집이 좋아서 손도 큽니다. 좀 뻥을 튀기면 솥뚜껑 만합니다. 그리고 그 손을 잘 활용하여 아이들을 통제합니다. 그 큰 손으로 떠드는 놈의 등을 쾅 내려치면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지요. 안 맞아본 학생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매운 손맛에서 고추를 연상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런데 덩치 큰 사람이 마음은 비단결 같은 법이어서 이 선생님도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하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만큼 마음이 여리고 좋답니다.   조경애 선생님은 메일 아이디가 입니다.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이지요. 어떤 분위기를 풍기는 선생님인지 금방 연상할 수 있지요? 나이는 마흔 안팎인데, 옛날에는 꽤나 공주병이 심했겠다 싶답니다. 발랄하고 자존심 강하고 아이들과 잘 어울리고, 나이 마흔 줄에도 곳곳에서 고운 자태와 애교 넘치는 마음씨가 엿보이는 분이랍니다.   고동춘이라는 교생 선생님이 한 달 동안 다녀갔습니다. 사춘기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학교가 작아서 아이들 수가 적다 보니 선생님은 아이들하고 매일 축구하고 과자 사주고 그랬습니다. 여러분들 말로 인기 짱이었죠. 그리고 교생 때에는 아이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그래서 정말 아이들이 해달라는 것을 다 해주고 싶은 시절이지요. 그 열정과 사랑을 아이들은 느낍니다. 이 시에서처럼 아이들 교실 청소까지도 같이 하는 분입니다. 지금은 발령을 받아서 아마 어디서 훌륭한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주변에 있는 선생님들을 봄을 표현하는 데 끌어들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친근하게 살아났습니까? 마지막 연에 이것을 미술로 그리는 동작으로 통합까지 했으니, 시로서는 완벽에 가깝게 마감 처리된 것이지요. 앞에서 비슷한 구조로 나열한 다음, 그것을 다시 통합시키는 발상입니다.   발가락            유제성(3-1)   다섯 명의 가족이 살고 있는 양말 속   발가락 중에 제일 큰 아빠 발가락 두 번째로 큰 엄마 발가락   그리고 아빠를 닮은 세 번째 발가락 또 네 번째 발가락은 엄마를 닮았네.   그럼 다섯 번째 발가락은 누굴 닮았을까?   그건 바로 아빠 발가락과 엄마 발가락을 모두 닮은 잘 생긴 막둥이 발가락이다.     가지런히 모여 있는 발가락의 모양을 보고 가족을 연상했지요? 그리곤 각각의 발가락을 가족구성원들에게 갖다 적용시켰습니다. 제일 큰 건 아빠, 그 다음 큰 건 엄마, 그리고 주욱 나가야겠지만, 이미 예측되는 것이기 때문에 생략하고, 마지막 새끼발가락으로 건너뛰었습니다. 전개와 생략이 잘 조화된 작품이지요.   대부분 학생들은 자신이 시를 써놓고서 그게 잘 쓴 건지 못 쓴 건지 판단을 못합니다. 이 학생도 상을 받을 때까지 자신의 이 시가 좋은 작품인지 모르고 있다가 시상식을 할 때 이름을 부르니까 놀라서 뛰어나간 경우입니다.   분필가족              정철(3-1)   분필가족이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 우리가족의 가장은 아빠다. 아빠의 몸은 하얀 피부 엄마는 노랗게 뜬 피부 나는 뻘건 피부 동생은 파란 피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시끄러운지 아빠가 직장을 나가신다. 아빠가 다니는 직장 이름은 칠판 그런데 너무 시끄럽다. 그러다가 우리엄마가 나가신다. 우리엄마가 키 작은 여자선생님한테 잡히셔서 높이 들린다. 얼마 후 내가 그 선생님한테 잡혀서 높이 들린다. 아이들은 모두 벌을 받고 조용하다.     가족과 분필을 대비시켰습니다. 분필은 칠판 밑에 모여 있죠. 종이컵에 담겨있거나 바닥 홈에 나란히 누워있죠. 옹기종기 모인 그 모양에서 가족을 연상한 것입니다. 한 가지 색깔만이었다면 이런 상상은 어려웠겠죠? 그런데 분필의 색깔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 중에서 하얀 색 분필을 가장 많이 쓰지요. 하얀 색이 아빠가 된 사연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필이 움직이는 공간을 가족이 움직이는 공간으로 만들어놓고서 그 상황을 서로 이은 것입니다.   선생님이 앞에서 칠판에 글씨를 쓰는 동안 이 학생은 이런 엉뚱한 상상에 빠져서 혼자서 빙긋이 웃었겠지요. 그런데 그런 엉뚱함이 그냥 낭비가 아니라 이렇게 시를 만나서 좋은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의 엉뚱한 생각이 시에서는 가장 중요한 글감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이런 시들은 발상만으로도 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에서는 발상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얼마나 정겹습니까? 자기 주변에서 소재를 찾아 쓴 것도 칭찬 받을 일입니다.   나무는 청개구리              양영주(3-1)   나무는 나무는 청개구리 우리학교 운동장의 나무도 청개구리 산에 있는 나무와 모든 나무도 청개구리   더운 여름에는 벗고 있어야 할 옷을 가지각색으로 입고 있어서 나무는 청개구리   추운 겨울에는 입고 있어야 할 옷을 뼈만 앙상하게 벗고 있으니까 나무는 청개구리   청개구리처럼 거꾸로 행동하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소중한 자연의 하나이지요.     엉뚱한 생각이지요? 생각이 엉뚱할수록 그것을 연결시키는 논리가 많이 드러납니다. 이 시에서도 그렇습니다. 청개구리는 부모님의 말을 안 듣다가 나중에 후회하지요. 개구리 아들이 하도 거꾸로 행동해서 개구리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죽어서 자신이 물가에 묻힐까봐 걱정하면서 죽은 뒤 물가에 묻어달라고 하지요. 그러면 매번 거꾸로 행동하는 아들은 당연히 양지바른 언덕에 묻지 않겠어요? 아들의 그런 뒤잡이 심성을 미리 예측하고 남긴 유언이지요. 그런데 매번 아버지의 말과 반대로 행하던 아들이 이번에는 마지막 소원이라도 들어드리겠다고 진짜로 냇가에 묻었습니다. 비가 오면 어떻겠어요? 빗물에 쓸려가겠지요? 그래서 걱정이 돼서 개굴개굴 우는 거랍니다. 이런 이야기를 시에 적용시켰습니다.   나무는 추운 겨울에 옷을 벗습니다. 더운 여름에 옷을 입지요. 잎새가 나무에게 옷인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학생은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거꾸로 된 겁니다. 이 거꾸로 된 것에서 개구리 이야기를 떠올린 것이고, 행동을 거꾸로 하는 청개구리의 특성과 나무의 행동을 연결시킨 것입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비유의 방법에 실려서 시를 만든 경우입니다.   봄의 무도회              김이슬(3-1)   봄이 오면 산과 들에 무도회가 열려요.   여기 저기 노랑 옷, 분홍 옷 … 초록 옷. 알록달록 옷을 입고 기지개를 피며 얼굴을 내밀어요.   현진이네 뜰에서도 미란이네 마당에서도 정훈이의 마음에서도   봄이 오면 모두 색동옷을 입고 나와 온 세상이 무도회장이 돼요.     이슬, 이름이 참 예쁜 학생이지요? 실제로도 예쁩니다. 예쁜 애들은 예쁜 짓을 하느라고 운동을 잘 못하는데, 이 학생은 오래 달리기를 하면 꼭 전교 1등입니다.   간단한 원리가 눈에 보이나요? 봄이 오는 것을 무도회의 광경과 연관 지었습니다. 무도회는 춤추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복장을 하기 마련입니다. 나무에게도 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지요. 그래서 예쁜 차림으로 나서는 무도회의 상황에다가 연결시킨 것입니다.   1연에서 봄을 무도회라고 전제해놓고, 2연에서 그 이유를 말한 다음에, 3연에서 장소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그래서 무도회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지요. 특히 3연에서 장소를 말할 때 1행과 2행에서는 실제 장소인 과 을 말하다가 3행에서는 실제의 장소가 아닌 사람의 마음속을 말하는 것은 아주 기발한 방법입니다. 사물에서 관념으로 생각을 확산시키는 방법이지요.   물론 이 학생은 이 이론을 알고 쓰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씁니다. 이것은 시가 요구하는 어떤 아름다움의 질서가 사람의 마음속에 다 들어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그런 질서를 알든 모르든 세상을 정직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보려고 하고 시를 쓰면 그것을 실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의 형제             김경수(1-1)   비는 여러 형제가 있다. 제일 큰 장마비 둘째 소나기 막내 이슬비   장마비는 말썽쟁이 아주 많은 비를 내여 많은 사람들을 아프고 힘들게 하는 비   소나기는 착한 둘째 사람들이 물 부족으로 힘들어하면 가끔씩 내려주는 착한 비   이슬비는 소심한 비 사람들이 물 부족으로 힘들어하면 아주 조금만 내려주는 소심한 비   가끔씩 비가 와서 우리 마음이 우울할 때 창문으로 흘러내리는 빗방울과 이야기를 나누어요.     비의 다양한 모습을 형제에 빗대어 표현해본 경우입니다. 먼저 형제의 관계임을 설명한 뒤 각 비의 모습을 다시 사람에 빗대어 구체화시켰고, 다시 이것을 끝에서 종합해서 정리했습니다. 아주 논리 정연한 구조와 전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표현을 통해서 각 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잘 보여줍니다. 비가 사람에게 미치는 관계와 영향을 평소에 체험하지 않으면 쓰기 어려운 시죠.   발상을 보면, 시를 쓰자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비 온 날 창문에 흘러내리는 모습이 인상에 남았는데, 거기서 흘러내리는 비를 보다가 빗방울을 연상했고, 빗방울에서 다시 빗방울의 상태에 따라 여러 가지 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상합니다. 그리고 같은 빗방울인데도 사람들의 반응이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같은 형제이면서도 각기 다른 특징을 보이는 점과 같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거기에 비유를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발상의 과정이 이렇게 해서 정리됩니다. 결코 시를 쓰는 발상이 어려운 일이 아니죠.   빨래                       김선영(1-1)   빨랫줄에 빨래가 걸려있습니다. 남자 빤스 여자 빤스   아우 민망해 남자 빤스가 말합니다.   맞아 여자 빤스가 말합니다. 맞아 사람들이 한 번씩 힐끔힐끔 보고   정말이지 이해가 안 가 무슨 물건이라도 된다고   아우 기분 나뻐. 그래도 우리는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썬탠을 합니다.     의인화시켰지요? 의인화란 사물을 사람에 비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에 비유한다고 해서 비유가 아닌 건 아닙니다.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원리입니다.   팬티는 가장 은밀한 곳을 감추는 옷이기 때문에 빨래가 널려있어도 사람들이 뚫어지게 쳐다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힐끔거리며 볼 것은 다 보고 가지요. 하하. 마음에 은근히 걸리면서도 피할 수 없는 그런 심리를 아주 잘 잡나냈습니다.   는 가 표준어겠지요? 그러나 시에서는 그런 것이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오히려 누구나 사용하는 빤스라는 말이 더 시를 살립니다. 시에서는 맞춤법이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분위기를 전하는 데는 오히려 사투리나 맞춤법에 안 맞는 말들이 더 잘 어울릴 때가 많습니다. 도 마찬가지죠. 틀린 표기이지만,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차장        김경애(마산 무학여고 3)   흰 선으로 둘러싸인 바둑판에 고수인 아저씨의 흰 알 초보인 아빠의 검은 알이 놓여있다. 한참 헤맨 끝에 찾았는데 서툰 아빠… 흰 선 안에 바둑알을 놓는 게 여간 쉽지 않다. 아저씨는… “뭐가 어렵냐”며 성화다. 날마다 늘어나는 한숨과 조여드는 삶의 공간에서 아빠는 흰 선과의 보이지 않는 사투를 벌이고 있다.   아빤 오늘도 바둑알을 놓을 바둑판을 찾고 있다.                2003년 경남대 제32회 전국고교생 한마백일장 운문 차상1)     주차장에서 차를 대는 상황을 바둑판의 상황에 빗대어 표현했습니다. 가지런하게 그어진 하얀 주차 선은 바둑판의 선으로 보인 것이고, 그 위에 놓여있는 차들은 바둑알로 보인 것입니다. 바둑알은 흰 색과 검정 색 단 둘 뿐이죠. 그런데 차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양한 색깔이 있는데, 주차 선을 바둑판으로 인식한 순간 나머지 색깔은 보이지 않는 것이죠. 이렇게 무리한 적용이 갑갑하고 어색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 시에서 필요합니다. 이미지를 단순화시키기 위한 것이죠. 초보 운전인지 주차에 서툰 자신의 아빠와, 숙련된 솜씨로 주차를 하는 아저씨를 비교하고서 바둑의 초보와 고수를 거기다 갖다 맞추었습니다. 전체의 시상이 바둑판의 상황과 주차장의 상황을 겹쳐놓는 방법으로 전개되고 있어서 비유를 활용한 시 쓰기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전에 무슨 운동을 하다가 목을 삐끗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형광등을 켜고 사진을 달아놓으니까 신기하게도 나의 몸속에 들어있는 등뼈의 배열이 나타나더군요. 그때 처음으로 내 등뼈의 속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등뼈의 배열은, 내가 아기들에게 보여주던 공룡의 그림책에 나오는 공룡들의 뼈와 똑같더군요. 그때 ‘아하, 내가 짐승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그리고서는 문득 느낀 바가 있어 다음과 같이 써 내려갔습니다. 길어도 이런 시 쓰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공룡   나는 내가 여태까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 알고 보니 공룡이다. 살가죽으로 뼈대를 싸고 그럴 듯한 헝겊으로 몸뚱이를 덮었지만 정형외과의 형광벽에 비친 나는 쥐라기나 백악기 어느 한 지층 속에 납작하게 박혀있어야 할 한 마리 공룡. 목에서부터 등마루를 거쳐 꼬리까지 날개처럼 돋친 스테고사우루스의 화려한 뼈들이 흑백의 필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수억 년 내력의 탐욕과 난폭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 뼈들의 행렬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니 이제서야 모든 의문이 스르르 풀린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은데도 마음속에서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던 물욕과 옷 밖으로 송곳처럼 치밀던 공격성, 그리고 약자한테 강하고 강자한테 약한 비굴함까지 도대체 내 마음 어느 구석에서 말미암는지 여태까지 좀처럼 알 수 없던 것들이 공룡의 뼈들 사이로 분명히 드러난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큰 코 다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며 등줄기 따라 톱날처럼 뻗어간 우람한 뼈들.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꼬리 끝의 뿔은 엉덩이 밑의 꼬리뼈 속으로 완전히 감추었지만 수십 억 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혀 진화하지 못한 채 한 마리 공룡이 내 몸 안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다.     발상법을 알겠지요? 이 시에서 이야기하는 바는 인간의 탐욕성입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성이 들끓는데,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공룡을 떠올린 것이고, 그 계기를 엑스레이 사진을 본 것에서 얻은 것입니다.   먼저 공룡의 뼈와 나의 뼈가 같다는 것에서 출발해서, 공룡의 난폭한 성질과 탐욕성을 나의 그런 특성을 나타내기 위해 이용했습니다. 시상을 전개시킨 순서 역시 뼈의 모양에서 심리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겉모습의 동일성에서 성격의 문제까지도 이끌어냈다는 것입니다.   운명   전생의 어느 먼 우주를 떠돌 때부터 당신은 내게 점지된 별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마음속에서 이렇듯 아름답게 깜빡일 리 없지요.   전생의 어느 먼 우주를 떠돌 때부터 당신은 내게 점지된 달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삶의 중심까지 이렇듯 인력으로 끌어당길 리 없지요.   전생의 어느 먼 우주를 떠돌 때부터 당신은 내게 점지된 해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삶의 모든 곳을 이렇듯 환하게 비추어줄 리 없지요.   전생의 어느 먼 우주를 떠돌 때부터 당신은 내게 점지된 바람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마음속에 이렇듯 힘차게 나부낄 리 없지요.     이번에는 사랑에 관한 시를 골라 봤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맺어진 것이 아니고 무언가 뗄 수 없는 어떤 질긴 인연이 운명처럼 엮여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마음이 절실할수록 사랑은 무언가 그럴 듯한 운명에 의해 연결되었다고 믿는 것이지요. 그래서 옛날에도 삼신할미나 월하노인 같은 어떤 신이 맺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에 관한 시 중에는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무언가 보이지 않는 손길인 운명이 작용한다고 노래한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감정이 아주 애절하게 잘 전달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그런 이상에 가까운 아름다운 사랑을 그리는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태까지 잘 따라온 학생은 이 시의 비밀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변치 않는 어떤 존재들에 잇따라 연결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한 것이죠. 따라서 원생각은 사랑하는 당신이지만 당신이라는 그 존재를 알리기 위해 도우미로 나선 말들은 별, 달, 해, 바람입니다.   비슷한 구절과 구조가 반복되면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함을 느낍니다. 음악에서 아주 중요한 요인이죠. 시에서는 그것을 운율이라고 합니다. 일종의 가락인 셈입니다. 이 시에서도 별, 달, 해, 바람으로 바뀌어 나타나지만, 각 연의 구조는 똑같습니다. 읽으면서 속도가 붙기 마련이죠. 그 속도에 빨려들어 갑니다. 사람에게 시를 익숙하게 하는 방법 중의 한 가지입니다.   은행   전생의 쥐라기 하늘에서 띄운 내 영혼의 꽃가루가 무수한 기억의 퇴적층을 뚫고 활짝 편 당신의 가지에 내립니다.   받아주셔요. 내 고단한 사랑을. 당신이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당신이 아무리 먼 세월 뒤에 있어도 내 영혼은 꽃가루가 되어 당신의 사랑을 찾아갑니다.   받아주셔요. 전생의 쥐라기 하늘에서 당신께 띄운 내 영혼의 꽃가루를.     우리가 흔히 보는 은행나무는 참 독특한 식물입니다. 우선 오래 산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500년, 1000년도 삽니다. 청주에는 고려 때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장수하는 이면에는 병충해에 강하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그런데 은행나무가 이런 장수를 누리는 데는 지구가 주는 시련을 몇 억 년째 이겼기 때문입니다. 은행나무는 공룡이 살던 시절에도 있던 나무랍니다. 놀랍지요? 공룡은 쥐라기, 백악기 때 최전성기를 누리지요. 그리고는 어느 순간 전멸하고 맙니다. 은행나무의 또 다른 특징은 암수가 서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물론 암컷 나무에서만 열매가 열립니다. 그러면 주변에 수컷 나무가 있어야 수정이 된다는 얘기겠죠. 어떻게 수정을 할까요? 암컷 나무에서 꽃이 피기 시작할 때 수컷 나무에서는 꽃가루를 뿌리는 겁니다. 그러면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암컷 나무에게 날아가서 수정되는 것이죠.   나무에게 암수가 있다는 사실과 마치 동물처럼 꽃가루를 날려서 수정을 한다는 사실. 무언가 신경을 탁 건드리는 바가 없나요? 나는 그런 은행나무에서 오래 된 사랑 법을 느꼈습니다. 천 년을 살고 수억 년 전부터 목숨을 버티어 오늘까지 살아온 은행나무의 특성을 이용해서 사랑을 노래한다면 무언가 절실한 느낌을 주겠지요. 그래서 쓴 것입니다.   1) 이재무 유성호 편, 전국고교백일장수상작품집, 천년의시작, 2003 이하 청소년백일장 작품들은 모두 이 책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자, 한 편을 더 살펴보고서 다음 단계인 상징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수렵도          박윤배   달리는 흰 말의 안장 위에서 상반신을 뒤로 젖힌 채 작은 체구의 사내가 달리고 있다. 우둔한 20대의 화살촉을 뽑아 아직도 푸르게 뛰는 수렵도의 사내처럼 펄떡펄떡 살아있기로 한다. 청년기가 지나더라도 포획된 용기와 젊음을 남기기 위하여 은밀히 은밀히 그려놓는…… 부장품으로 남길 시를 쓰는…… 내 스무 살의 수렵도.   나는 내 시대의 젊음을 위하여 수렵도를 그린다. 탄피 흩어진 이 터의 숲을 무너뜨리고 넝쿨로 기어드는 어둠 따위는 쏘아 넘기고 한숨뿐인 포획물을 끌고 돌아올지라도 저녁노을 뭉개는 어둠 자락을 빈 도시락 가득 채워올지라도 달아나는 노루와 사슴을 겨누고 있다. 불멸을 끌고 산 속을 달려 황산벌의 갈대숲 새떼들 날리며 달려 백두까지 오르고 있다. 그렇게 젊은 날을 살아있던 날의 함성을 부장품으로 남긴 한 사내의 수렵도.     이 작품은 1985년 어느 대학의 신문에 실린 작품입니다. 대학문학상의 수상 작품이죠. 상을 받았으니까 잘 썼다는 뜻이겠죠? 여러분이 보기에 어떤가요? 발상법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겠죠?   시인은 수렵도를 보고 있습니다. 수렵도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것이 유명합니다. 벽화 중에서도 무용총이라고 하는 벽화의 수렵도가 제일 유명하죠. 여러분도 많이 보았을 겁니다. 무용총은 벽화에 춤추는 인물들을 그려 넣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순 우리말 쓰기를 좋아하는 북한에서는 춤 무덤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수렵도는 어때요? 수렵도 역시 북한에서는 사냥그림이라고 합니다. 수렵도라는 말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사냥그림이라는 말이 어쩐지 좀 늘어진 듯한 느낌을 주지요? 말의 습관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뭐, 어느 수렵도를 보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요는 시인은 수렵도를 보고 있고, 그 수렵도를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엉뚱한 생각이란 무엇인가요? 수렵도는 힘찹니다. 당연하지요. 짐승을 사냥하는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화면에는 사슴과 범이 있습니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쉽지 않은 사냥이죠. 그런 힘찬 기상이 넘치는 그림을 보면서 무얼 떠올릴까요? 절망이나 우울함 같은 것은 아니겠지요? 당연히 힘찬 기상과 관련이 있는 내용일 겁니다.   시를 읽어보면 시인이 떠올리는 것은 자신의 젊은 날입니다. 수렵도는 힘찬데, 바로 저것처럼 자신의 젊은 날도 힘차게 살아야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면서 사는가요? 이 시인이 젊은 날에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시를 쓰는 일입니다. 좋은 시를 쓰는 일이지요. 이것이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발상은 이렇게 된 겁니다. 먼저 수렵도를 봅니다. 그림이 힘차지요. 거기서 무언가 강한 힘을 느낀 겁니다. 그 힘은 곧 젊음을 떠올립니다. 젊음이 이루는 것은 희망이지요. 그 희망 중에서 자신이 하고픈 것, 즉 시를 쓰는 일입니다. 그래서 먼저 수렵도의 사내 모습을 보여준 다음에 그 사내처럼 나도 힘찬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고 뒤이어 시를 쓰고 싶다는 욕심을 말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시에서 정작 하고픈 말은 앞부분의 1연에 다 나옵니다. 뒷부분의 2연은 이러한 희망을 한 번 더 반복해서 보여준 것이 되겠습니다. 과 까지 나아간 것은 용맹한 기상으로는 다 좋은데 너무 많이 나가서 좀 허풍스럽다는 생각도 조금은 듭니다. 그러나 전체의 흐름을 보면 허물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겠죠. 그런 기상은 젊음의 특권이랄 수도 있으니까요.   자, 한 가지 문제를 내겠습니다. 맞춰보기 바랍니다. 이 시에는 문장 구조상 앞 뒤 문맥이 잘 맞지 않고 어긋나는 부분이 둘 있습니다. 어디 어디가 그런지 한 번 맞춰보기 바랍니다.   우리가 완벽한 시를 보고 많이 배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완벽하면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시를 배우는 단계에서는 좀 허술하고 잘 정리가 안 된 작품들을 보는 것이 시의 원리를 배우는 데 더 많은 것을 얻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약간 문제가 있는 작품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발상만으로도 대단한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여러분이 확인할 수 있잖습니까? 다만 여기서는 그런데도 간간이 보인 허점을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작품의 발상이 좋아도 때로 허물이 있는 법이고, 그것을 찾을 줄 알아야 시 쓰는 법을 빨리, 그리고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자, 찾아봤나요? 잘 안 보인다구요? 당연하지요. 잘 안 보여야 정상입니다. 이 시 속의 문제점을 찾아낼 정도이면 여러분은 정말 눈이 매우 날카로운 사람입니다. 평론가로 나서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먼저 1연 1~3행에 문제가 있습니다. 뭐라구요? 다시 봐도 안 보인다구요. 하하하. 당연하지요. 이렇게 가르쳐 주어도 잘 안 보이는 것이 시 속의 단점입니다. 자, 보겠습니다.   달리는 흰 말의 안장 위에서 상반신을 뒤로 젖힌 채 작은 체구의 사내가 달리고 있다.     어때요? 밑줄을 쳐놔도 모르겠어요? 달리는 동작이 겹쳤지요? 달리는 말 위에서 사내가 달린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얘깁니다. 사내는 가만히 있고 말이 달리는 것입니다. 달리는 말 위에서 또 달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분명히 틀렸지요? 지은이도 미처 눈치 채지 못한 부분입니다.   또 한 군에 있는데 찾아보세요. 못 찾겠다구요? 4행에 있습니다. 그래도 못 찾겠죠?       우둔한 20대의 화살촉을 뽑아     그래도 못 찾겠어요? 그럼 가르쳐 주죠. 이 문젭니다. 그래도 몰라요? 무얼 뽑았나요? 화살이 아니라 화살촉을 뽑았지요? 화살촉을 뽑으면 어떡하나요? 화살을 뽑아 쏘아야지 화살촉을 뽑아 쏘면 안 되잖아요? 그렇죠?   웃기죠? 전문가 시인들도 이따금 이런 실수를 한답니다. 그런 실수를 통해서 우리는 배우면서 날카로운 눈매를 길러 가는 겁니다. 그런 눈매를 갖추면서 자신의 작품에 생기는 실수를 줄여 가는 것이죠.   이 시인도 나중에 이런 실수를 깨닫고 시집에 실을 때는 고쳤습니다. 하하하.   시를 읽다가 참 잘 쓴 시를 만나면 오래도록 그 이미지가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감탄에 감탄을 하다가 나중에는 질투가 납니다. 왜 나는 저런 시를 쓸 생각을 못했을까? 수렵도를 본 것은 이 시인만이 아니잖습니까? 나 자신도 맨날 수렵도를 보면서 왜 그것을 이 시인처럼 시로 쓸 생각을 못했을까 하고 탄식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질투가 나서 그보다 더 좋은 시를 한 번 써보겠다고 벼르는 것이죠. 그래서 1985년에 이 시를 접하고는 마음속으로 언젠가는 한 번 수렵도를 소재로 이보다 더 좋은 멋진 작품을 쓰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꿈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발상을 먼저 빼앗겼기 때문이지요. 시에서는 발상이 제일 중요합니다. 동일한 소재라고 하더라도 어떤 발상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작품의 수준이 천차만별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좋은 발상으로 쓴 시를 보면 질투가 나는 겁니다. 언젠가는 쓰고 말아야지! 하고 결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1985년에 이 작품을 봤으니 실로 20년만에 저도 라는 작품을 썼습니다. 그러나 제 작품이 위의 작품보다 더 잘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발상을 먼저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한 번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절대로 발설은 하지 마십시오. 만약에 어느 작품이 안 좋다고 말한다면 박시인이나 저, 둘 중의 하나는 상처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속으로만 판단하고 한 번 빙그레 웃고 말기를 바랍니다.   수렵도   내 안에는 커다란 동굴이 있다. 컴컴한 그곳으로 들어가면 깊은 어둠에 익어 가는 속도로 개이는 눈앞에 벽화가 나타난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또 할아버지가 연꽃 하늘 위의 북두칠성에서 걸어나와 내 젊음의 뒷편에 그린 수렵도.   왼여밈 한 허리를 질끈 동인 사내가 디귿(ㄷ)자로 굽은 활을 가슴 가득히 끌어안고 굽이치는 산봉우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꽁지로 달겨드는 헛살 소리에 달아나던 범이 놀라 고개를 돌릴 찰라 이마 한 복판의 임금 왕짜 무늬에 꽂히며 나뒹군 포획물에서 부르르 깃을 떠는 대우전. 방금 넘어온 산봉우리들이 말발굽 아래 엎드려 등성이 너머로 새벽을 쏘아 올린다.   뭉툭한 명적(鳴鏑) 하나 가만히 산 너머로 날리면 어둠 속 곳곳에 박혀있던 젊은 날의 꿈들이 매화포처럼 와아 솟아오르고 반구비로 날아오르던 명적 소리, 어두운 밤하늘의 배경으로 올라가 지상의 길을 비추는 별이 된다. 그 별빛 속으로 영혼의 더듬이를 내밀며 비로소 중심을 잡는 청춘의 뼈.   세월은 흘러도 벽화는 남는다. 흘러간 세월의 길이만큼 동굴은 스스로 더욱 깊어져 지상의 덧없는 꿈들이 사위어갈 때 마늘과 쑥을 먹으며 인간을 꿈꾸던 첫새벽의 빛과 말발굽 소리로 지평선 저쪽을 발 밑까지 끌어당기던 할아버짓적 기상이 천장과 벽의 딱딱한 돌 속으로 파고든다.   동굴 속으로 들어간 나의 일은 가없는 화폭 속에 얼어붙은 꿈을 깨우는 것. 할아버지의 영혼이 새겨놓은 수렵도 속의 꿈을 불러 달리다 멎은 그의 말발굽을 지상에 옮겨놓는다. 그러면 시위처럼 팽팽해진 벌판 위로 동굴 벽에서 방금 살아난 꿈들은 쏜 살 같이 달려나가고 그 꿈을 타고 달려간 사내들과 함께 무용총의 벽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달리는 말의 안장 위에서 가슴 가득히 활을 당긴다.     그러면 상징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빗대어 쓰기의 두 번째 방법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론가들은 비유와 상징을 다른 것으로 설명합니다만, 시를 쓰는 쪽에서 보면 같은 원리에 해당합니다. 다만 시에 나타나는 결과는 다르게 보입니다.   비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1:1로 대응합니다. 즉       사랑은 사닥다리다.   라고 했으면 이 비유는 의 대응이 쉽게 눈에 띕니다. 말하고자 하는 원생각이 사랑이라면, 사닥다리는 그것을 전해주기 위한 도우미이지요. 로 정확히 맞습니다.   그러나 상징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징은 1:1이 아니라 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나는 어려서 어렵게 자랐어. 그래서 내게는 어둠이 많아.   라고 했다고 칩시다. 여기서 은 무슨 뜻인가요? 아픔? 돈 없음? 쪼들림? 마음의 상처? 아픈 추억? 괴로움? 가족이 없음? 이 중에 무엇일까요?   자, 이와 같이 이 어둠이라는 말은 한 가지 뜻으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문장 때문에 그렇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은 사실을 가리키는 말인데, 뒤의 어둠이란 말은 그것을 뭉뚱그려 나타내는 비유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직유나 은유처럼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1:1로 대응하는 것도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1:1로 대응한다면 비유라고 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안 되고 1:여럿이 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그리고 원관념이 없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읽는 사람이 알아서 짐작할 뿐이죠.   이렇게 앞 뒤 정황을 참작해서 여러 가지 뜻을 한꺼번에 지니는 것을 상징이라고 합니다. 잘만 쓰면 시에서는 굉장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상징이란 말은 영어의 심볼(symbol)을 번역한 것입니다. 한자로는 이라고 씁니다. 이 은 원래 하늘에서 천체가 움직이면서 나타내는 조짐을 뜻합니다. 은 천체의 움직임에 따라서 땅에 나타나는 기운의 양상을 말합니다. 하늘의 기운에 따라서 지상에 기후가 변하고 그에 따라 생물들이 나타내는 변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둘을 합쳐놓은 상징은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나타나는 조짐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죠.   그러면 앞서 말한 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무슨 뜻일지 알아봅시다. 그런데 이것은 그 말을 한 사람 이외에는 이것이다, 라고 분명하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 뜻을 유추할 뿐이죠. 그러니까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안 좋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보면 되겠죠. 예를 들면 가난, 불화, 굶주림, 이별 같은 것들이 이 범주에 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상징은 느닷없이 나타나서 많은 뜻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만 쓰면 비유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잘못 쓰면 애매모호해서 오히려 시의 분위기를 망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막 시를 배우려고 하는 여러분들은 함부로 아는 체하면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7월 중순에 3학년 교실에 수업을 하러 들어갔습니다. 보통 7월초에 기말고사를 보니 기말고사가 끝나면 방학이 코앞에 다가와서 대부분 분위기가 어수선합니다. 게다가 7월 중순이면 무더위가 시작되는 때지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더워서 헉헉거리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수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지요. 제가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한 학생이       선생님, 우리 물놀이하러 가요!   하는 겁니다. 그러자 마치 메아리라도 울리듯이 교실 전체가 떼를 쓰는 분위기로 변하더군요. 아무래도 이놈들이 작전을 짰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더군요. 관찰 수업한다고, 체험 학습한다고 학교 뒷산으로, 들로 몇 차례 데리고 나갔더니 저를 만만하게 보고서 그러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게다가 그 전전달에는 애들을 데리고 학교 앞개울에서 물고기까지 잡은 적이 있거든요. 국어시간에 말입니다.   그러나 물놀이하러 가자는 것은 앞개울이 아닙니다. 한 20분쯤 걸어가면 꽤 큰 개울이 나옵니다. 거기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멀리 가는 데다가 물놀이를 하면 위험까지 동반되기 때문에 관리자인 교장은 허락하지 않기가 쉽습니다. 이 일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마찰이 있어야 할 듯한 일입니다. 그래도 평상시에 수업에 관심도 없던 놈들이 무얼 하자니까 신이 나서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좋다. 가자! 총대는 내가 메지.   그러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리고는 밖으로 뛰어나갔고 나는 허락을 맡으러 교장실로 갔습니다. 아이들이 바깥에서 웅성웅성 거리니까 다른 학년 아이들이 밖을 내다보고는 물놀이 간다는 소리에 다른 선생님한테도 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전교 세 반 중에서 한 반이 물놀이 간다는데 다른 두 반의 수업이 제대로 되겠어요? 그래서 교장 선생님한테 허락을 받고 나오니, 전교생이 다 나와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래서 전교생을 데리고 물놀이를 하러 갔습니다.   여기서 를 멘다고 할 때의 총대가 바로 상징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총대를 멘다는 것은 결과에 대해서 감당을 하겠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이 말이 이런 뜻을 갖는 데는 총대라는 말이 그 전부터 그와 비슷하게 쓰였기 때문입니다. 총대는 총을 얘기하는 것이고, 총은 전쟁에서 쓰는 무기입니다. 그러니까 총대를 멘다는 것은 전쟁터에 나간다는 얘기고, 전쟁터에 나간다는 것은 자신을 희생시켜 공동체를 지킨다는 뜻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목숨은 하나인데, 누가 전쟁터에 나가서 목숨을 바치려 하겠어요? 올바른 일인 줄은 알지만 목숨을 바쳐가면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죠. 그래서 외부의 적이 쳐들어오는데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때 총대를 멘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남을 위해서 적과 맞서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총대를 멘다는 뜻이 그와 유사한 상황에 적용되어 쓰이는 겁니다.   내가 총대를 메겠다는 것은 학생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학교 관리자는 막으려 들 것이고, 막으려는 학교 관리자와 불편한 관계를 감수하면서 그 일과 관련된 모든 책임을 진다는 얘기지요. 모든 책임이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렇게 총대란 말에는 많은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한 가지 말에 여러 뜻이 담기는 경우를 상징이라고 하는 겁니다.   뒷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은가요? 그렇게 돼서 전교생이 물놀이를 갔습니다. 장소는 도리비라는 곳입니다. 이름이 참 아름답지요? 라니! 이곳은 물길이 둥글게 돌아나가면서 만들어진 기슭에 동네가 들어섰고 그런 까닭에 동네 이름이 도리비입니다. 안동 하회마을의 본이름이 물도이동인 것을 보면 이 도리비도 물이 돌아나간다는 뜻과 관련이 있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5, 6교시 두 시간 연이어서 아이들은 신나게 물놀이를 했습니다. 애들끼리 서로 물속에 집어넣고 발버둥치는 여학생들까지 끌고 들어가서 온통 물귀신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양복 입은 남녀 선생님들까지 붙잡혀서 몽땅 물에 빠진 새앙쥐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신나게 노는데 방송사의 차가 오더니 멀리서 촬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 무더위가 오니까 시원한 여름을 보낸다는 보도 기사의 화면으로 내보내려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물속에서 손으로 V자를 그리며 흔들어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는 무사히 물놀이를 마쳤는데, 물에서 나오면서 방송국 카메라가 찍은 곳에 가서 보니 무슨 표지판이 있고 그 표지판을 가만히 읽어보니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수 영 금 지   다음날 학교에 출근하니 학교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어제 오후에 찍힌 그 화면이 텔레비전의 지방방송 뉴스에 나왔답니다. 물론 화면이 좀 흐릿하게 처리되어 사람을 정확히 알아볼 수 없게는 했습니다만, 그 위치라든가 상황을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이거든요. 게다가 여름철이 다가오면서 익사 사고의 위험이 높아진다며 자료 화면으로 내보냈다니 기가 막힐 일이지요. 저 대신 애꿎은 일과계 선생님이 교장실에 불려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꾸중 비슷한 넋두리를 들었답니다. 당사자인 저를 부르지 않은 것은 제가 그날 몇 분 늦게 간 탓도 있지만, 울뚝불뚝한 저보다는 고분고분한 여 선생님이 더 만만해 보였기 때문이겠지요? 하여간 한 바탕 소란이 일면서 저보다는 일과계 선생님한테 불똥이 튀어(이 불똥도 상징입니다.) 덕분에 예쁘고 맘씨 착한 홍선생님이 애를 먹었습니다.   출근하는 나를 보더니 애들이 먼저 긴장을 하고서 어떡하느냐고 걱정을 하더군요. 그래도 사고 안 났으니 괜찮다고 교장선생님은 더 이상 문제를 확대시키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습니다. 그나마 학생들을 야외로 데리고 나가면서 하는 수업에 대해 나름대로 깊은 이해를 하고 있는 분이 교장으로 계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큰 소란으로 이어질 뻔한 일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교장 선생님의 이름을 밝히는 것도 괜찮겠지요? 그 분의 이름은 안응락입니다.     그러면 박윤배 시인의 에서 상징이 어떻게 쓰이는가 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2연 앞부분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나는 내 시대의 젊음을 위하여 수렵도를 그린다. 탄피 흩어진 이 터의 숲을 무너뜨리고 넝쿨로 기어드는 어둠 따위는 쏘아 넘기고 한숨뿐인 포획물을 끌고 돌아올지라도 저녁노을 뭉개는 어둠 자락을 빈 도시락 가득 채워올지라도 달아나는 노루와 사슴을 겨누고 있다.     여러분이 한 번 찾아보시죠. 어떤 것이 상징에 해당하는 말일까요?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는 게 당연한 겁니다. 모르겠다고 너무 절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잘 알면 굳이 배울 필요도 없겠지요.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요. 모르면 세 살배기 아이한테도 머리 숙이고 배워야 합니다.   답은 입니다.       넝쿨로 기어드는 어둠 따위는 쏘아 넘기고   의 말입니다. 여기서 어둠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이 시 전체의 상황을 전제로 해서 유추해내야 합니다. 이 시의 상황은 수렵도라는 그림을 보고서 내 젊음 역시 그처럼 우렁찬 기백으로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수렵도의 사내처럼 우렁찬 모습의 시를 써야 하는데, 막상 살다보면 그게 안 되는 상황이 생길 겁니다. 그것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외부의 조건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런 시를 쓰는 데 방해가 되는 요인이 있겠지요. 그런 모든 요인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즉 내 젊은 날 좋은 시를 쓰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 전부가 이 어둠에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시간이 없어 쫓기는 것, 아니면 둔한 재주, 아니면 성실하지 못한 태도, 뭐 이런 모든 것들이 이 어둠에 다 포함됩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상징은 어느 한 가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뜻을 안에 간직합니다. 그래서 잘만 쓰면 굉장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뜻을 많이 끌어안을 수 있는 만큼 자칫 잘못 쓰면 오히려 시 전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를 만큼 모호해지는 수도 있으니 어설프게 알고서 흉내 내면 안 됩니다.   다음의 짧은 시를 보겠습니다.     맹수   ①맹수가 사라진 곳에 ②맹수가 산다. 온갖 ③맹수들 다 쫓아내고 ④맹수인 줄도 모르는 채 저희들끼리 으르렁거리며 ⑤맹수로 산다.     이 시를 보면 맹수란 말이 모두 다섯 번 나옵니다. 번호는 제가 임의로 붙였습니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이 같고 어떤 것이 다를까요? 한 번 짝을 지워보기 바랍니다.   이 시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①의 맹수는 그냥 사나운 짐승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범, 사자, 악어 같은 짐승들 말이지요. 그 맹수가 사라졌으니, 그 다음에 나오는 맹수는 틀림없이 ①의 맹수는 아니겠네요. 그러니까 ②의 맹수는 우리가 아는 그런 사나운 짐승을 쫓아버린 존재들을 나타내는 것이 되겠지요. 사나운 짐승들까지 쫓아내는 그런 짐승이 무엇이 있을까요? 현재 지구상에는 인간들 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짐승들과 공존을 꾀하지 않고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서 다른 짐승들의 멸종을 생각지 않는 그런 인간세계를 비꼰 것이라고 볼 수 없을까요? 그렇다면 ③은 맹수지만, ④의 맹수는 그냥 짐승이 아닙니다. ⑤역시 ④와 같지요. 그러면 이 시 속의 맹수라는 말은 단순히 그냥 사나운 짐승을 가리키는 뜻이 있고, 사나운 짐승이 아닌 무언가를 암시해주는 뜻이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되겠지요.   사나운 짐승의 맹수 : ① ③ 다른 존재를 암시하는 맹수 : ② ④ ⑤     그러면 다른 존재를 암시하는 맹수는 무엇일까요? 위에서는 그냥 인간이라고 추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이 맹수 속에 다 포함될까요? 잘 생각해보면 다른 종류의 맹수와 공존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다른 종족의 멸종을 전혀 생각지 않은 탐욕스런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포함된다고 보기는 좀 어렵겠죠? 그렇습니다. 이 맹수는 인간들 중에서 탐욕에 찌든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탐욕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 이상은 아마도 읽는 사람이 알아서 추측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어떤 특정 범위를 정해주지 않고 읽는 사람이 무한정 추정해 들어가야만 그 뜻이 확연히 정리가 됩니다. 이런 방법을 상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이러한 방법을 활용할 수 있을까요?   비유는 앞서 보았듯이 1:1로 대응을 시킵니다. 어떤 것을 보니 무엇을 닮았더라, 하는 생각이 들면 그 둘의 공통점을 찾아서 설명해주면 됩니다. 닮은 그것과 원래의 그것을 연결시켜주면 되지요.   그러나 상징은 1:1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 달리 해야 합니다. 원리는 비유와 같습니다. 그러나 원관념을 정하는 방향이 조금 다릅니다. 상징 수법을 활용할 때의 원관념은 한 가지로 정리되지 않는 생각으로 정해서 그것을 잘 나타내줄 수 있는 어떤 대상을 찾습니다.     예를 들면 젊은 시절에 저는 무언가 세상과 자신에 대한 불만과 분노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존심이 아주 강해서 남들이 싫은 소리 하는 것을 싫어했고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옳지 않은 일로 저에게 강요를 하면 한 판 붙었습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고 대들어 싸웠습니다. 싸움은 승산이 있어서 이길 때 해야 하는데, 젊어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상대가 다치고 내가 죽더라도 싸웠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저 놈은 다칠 것이고, 그러면 아플 것이니 내가 죽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생각이었지요. 죽기 살기로 산 것입니다. 그러니 남들이 저를 볼 때 어떻겠어요? 어느 정도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한 발 물러서는 것이지요. 자, 이렇게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사소한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이 불끈거리는 심사를 무어라고 하면 좋을까요? 불평불만? 정의? 분노? 화? 신념? 열등감? 치기? 어느 것으로 갖다 붙여도 적당한 것이 없지요? 그렇다고 관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씩은 다 관련이 있어요. 그렇지만 딱히 이거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딱 부러지게 이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머릿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들어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을 표현할 때 상징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 복잡한 심사를 나타내줄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찾아서 설명하는 겁니다.   저는 위에서 말한 그런 저의 심란한 심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느 날 그 감정이 송곳이나 뿔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을 찔러서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그런 도구를 떠올린 것이지요. 송곳이나 뿔은 얌전한 것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뿔은 그렇지요. 그래서 ‘야,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뿔   한창 때 내겐 뿔이 하나 있었다. 그 뿔은 젊음만큼이나 영롱한 빛을 냈고 우람한 그 만큼 무엇이든 들이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세상 어느 구석에도 그 뿔보다 더 크고 드센 뿔이 있으리라는 가정을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말하자면 내 뿔은 최고였다. 어쩌다 호락호락치 않은 뿔이 나타나면 그 뿔보다 작을지언정 섬뜩한 점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을 때까지 뾰족하게 갈고 또 갈았다.   지금도 그 뿔이 있다. 어쩌다 난폭한 말을 함부로 내뱉으며 스쳐 가는 나보다 더 젊은 친구들을 보면 오랫동안 잊고있던 그 뿔이 기억의 퇴적층을 뚫고 불끈 돋는다. 그러나 삼십대란 뿔의 상처를 헤아릴 줄 아는 나이 어르고 다독거려서 잠시 돋은 뿔이 가라앉을 때쯤이면 곰곰이 생각한다. 이 뿔을 좀 더 따스한 곳에 쓸 수 없을 것인가를.     이곳의 뿔은 어떤가요? 사람에게는 뿔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자신에게 뿔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뿔은 짐승의 뿔은 아니겠지요. 그러니까 무언가 다른 것을 나타내주는 그런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뿔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만약에 이 뿔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한 가지여서 뿔과 그 한 가지가 1:1로 대응하면 무엇이 되나요? 그렇죠! 비유죠. 만약에 1:1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건 무엇이라구요?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상징인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그 뜻을 찾아보겠습니다.   이 시의 뿔은 크고 드셉니다. 그리고 뾰족하기도 하지요. 섬뜩합니다. 난폭한 말을 뱉는 사람들을 보면 사라졌던 뿔이 돋아납니다. 다독거려서 달래면 또 가라앉기도 합니다. 자, 이렇게 해놓으니 뭐가 뭔지 모르겠지요? 어쨌든 딱 한 가지 뜻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마음속의 어떤 복잡한 감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상징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상징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잘 읽어보면 뿔은 용도에 따라서 무례한 젊은 친구들을 무찌를 수도 있고, 또 방향을 바꾸기만 하면 따뜻한 곳에 쓸 수도 있습니다. 남한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좋은 뜻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몸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돋았다 가라앉는 것으로 보아 몸 안에 있으면서 감정에 따라서 생기고 말고 합니다. 무엇일까요? 틀림없이 감정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정의감이나 혈기왕성함, 나아가 못 마땅한 것을 참지 못하는 어떤 심리상태를 가리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로 뜻을 파악하면 되지 않겠어요?   이 시에 대한 설명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대신에 어떤 방법으로 이런 상징을 쓰는 것인가 하는 것은 한 번 더 앞으로 돌아가서 확인해두기 바랍니다.   소 망                  장미(3-1)   저 깊은 숲 속을 걷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이리저리 미처 보지 못했던 곳까지 바라본다.   바라보지 못했던 곳에는 작은 꽃이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 속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작은 소망들이 담겨있다.     열매라는 말을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언뜻 보면 그냥 열매일 것 같은데, 앞의 상황이 약간 다릅니다. 늘상 보던 곳에 있던 열매가 아니라 평상시에는 바라보지 못했던 곳에서 발견한 열매입니다. 시에서는 이쯤 되면 아 무언가 있구나 하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평상시에 보지 못했던 곳에서 발견한 꽃이 피운 열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열매 속에 무엇이 들었나요? 소망이 들었다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천상 지은이에게 물어보던가 아니면 내 체험을 바탕으로 그것을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은이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니, 이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읽는 사람이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미를 해석하여 재구성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바로 상징입니다.   열매는 꽃과 관련이 있습니다. 꽃은 화려하지만 속이 없지요. 반면에 열매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알찹니다. 꽃의 화려함은 결국 이 알찬 열매를 맺기 위해서 식물이 취한 동작입니다. 열매의 가장 큰 임무는 종자를 퍼뜨리는 것이지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꽃이 맺는 열매는 희망을 안으로 가진 것일 수밖에 없지요. 그 희망은 여건이 주어지면 곧 싹을 틔워서 아름다운 꽃을 보여줍니다. 희망은 곧 소망입니다.   평상시에 보지 못하던 것을 이 학생은 숲에 와서 바로 그런 새로운 것을 자신도 모르게 보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 학생이 이러한 생물의 순환 과정까지 계산을 하고서 이 시를 쓴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굳이 그렇게 의도하지 않더라도 우주의 섭리 속에서 살기 때문에 사람의 관찰 속에는 뜻밖으로 우주의 깊은 섭리가 담기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멋을 억지로 부리려는 허황한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바라보는 자에게 우주는 자신의 비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겨울밤      이윤정(포항 유성여고 3)   할머니는 화롯가에 앉아 내 스웨터를 짜셨다.   한 올은 나뭇꾼 이야기로 한 올은 선녀 이야기로 돌리고 빼고 엮으면 밤은 숯칠 한 채 익어 가는 소리만 투둑투둑  할머니 무릎을 울리고 입혀주신 옷은 낮게 웅성이는 말들로 엮여 진눈깨비 졸음을 가렸다.   까치밥으로 남은 감이 마당가에서 쉬쉬거리며 겨울 바람을 쫓고 있을 때   따뜻한 베갯머리 맡에서 우리 할머닌 내 겨울을 짜고 계셨다.                    2003년도 배재대 청소년 소월문학상 운문 대상     여기서는 스웨터를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이 스웨터는 그냥 옷이 아닙니다. 할머니와 관련된 추억이 담겨있습니다. 스웨터는 두꺼운 겨울옷입니다. 추위를 막아주는 기능을 합니다. 할머니가 손주에게 스웨터를 손수 짜 줄 때는 사랑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추위를 막는다는 것은 단순히 온도가 차갑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세상의 추위까지도 함께 한다고 읽어야 합니다. 할머니는 나에게 스웨터를 짜주는데 그것은 곧 추위에 노출될 손주를 생각하는 할머니의 마음이 아니고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직접 짜는 스웨터는 단순히 겨울바람만을 막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늑한 사랑과 그 스웨터를 짜는 할머니를 바라보던 나의 추억까지도 입혀주는 기능을 합니다.   할머니는 스웨터를 짜면서 나무꾼 이야기를 해주었겠지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곤 했습니다. 할머니와 맺은 좋은 추억이지요. 따라서 스웨터를 보면 할머니의 추억이 떠오르고 그런 옷을 입으면 단순히 가게에서 산 옷과는 다른 느낌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추위라든가 하는 것은 누구한테나 같은 조건이지만, 추위를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따스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추위를 덜 느끼겠죠. 추억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의 스웨터는 그냥 추위를 막는 장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의 추억을 돌이켜 주는 그런 기능까지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가지 뜻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분위기를 한꺼번에 보여주기 때문에 스웨터는 상징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와 비슷한 발상을 시인의 작품에서 보겠습니다.   궤짝에서 꺼낸 아주 오래된 이야기                                 송찬호   우리 집에는 아주 오래된 얼룩이 있다 닦아도 닦아도 잘 지워지지 않는 누런 냄새, 누런 자국의,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그 건망증이다 바스락바스락 건망증은 박하 냄새를 풍긴다 얘야 이 사탕 하나 줄까, 아니에요, 할머니, 할머닌 벌써 십 년 전에 돌아가셨잖아요!     버릇이나 행동 특성이 세대를 넘어서 이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예컨대 우렁손톱이 자식에게 연결되고 손자에게 이어지는 경우가 있지요. 이와 같이 습관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건망증 같은 경우도 그렇죠. 이 시에서는 집안 내력으로 건망증을 말하고 있습니다. 건망증은 노망든 할머니에게서 나타났겠죠. 그런데 그것이 얼룩, 박하 냄새, 냄새, 자국에 비유되었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비유를 사용한 시입니다. 그런데 그 건망증이 나나 식구들에게 나타난다면 그것은 할머니와 나를 이어주는 매개체 노릇을 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이나 혹은 다른 식구들이 겪은 건망증을 보면서 할머니를 떠올린 것이고, 건망증에 걸린 할머니와 맺었던 추억까지 아울러 떠올린 것입니다. 여기서 건망증은 나와 할머니를 이어주는 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징이죠. 그러니까 비유와 상징이 동시에 들어있는 시입니다.   아버지의 휴대폰                     임태운(전주 영생고 3)   태양처럼 붉은 벽돌에 자식의 하루를 짊어져야 하는 아버지의 허리 같이 안테나가 휘어진 그 핸드폰은 언제나 꽃씨를 날리지 못하는 꽃잎이었다.   벌떼들처럼 온갖 소리들이 금 간 안전모 사이로 촉수를 뻗는 공사 현장도 하루살이 같은 내 희미한 목소리로는 닿을 수 없는 모래 화단이었고 찢어진 꽃잎처럼 깨어진 액정은 방향을 잃은 문자 메시지만이 먼지처럼 쌓여 있는 아버지의 휴대폰에는 동그란 종료 버튼만이 잎맥을 지운 채 닳아 있었다.   귓가에 와 닿는 몇 개의 구멍 너머 아버지의 낡은 생은 내 플라스틱 버튼으로는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그 어느 수신 지역에 피어 있는 것일까. 질 때를 알고 고이 지는 꽃잎처럼 아버지의 휴대폰은 늘 기본요금을 넘어서는 법이 없었지만 아버지의 휴대폰이 더 짙은 향기를 뿜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나는 오늘도 나만이 특수문자로 나비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송신해본다. 그 작디작은 나비의 더듬이를 아버지가 볼 수는 없을 테지만 아버지의 핸드폰 안에 피어있는 꽃잎 속에서만큼은 힘차게 날갯짓할 수 있도록.                  2003년 인하대 제9회 인하백일장 운문 장원     아주 재미있는 발상이 돋보이는 시입니다. 휴대폰을 통해서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휴대폰의 사용법을 잘 모르는 아버지와 휴대폰 없이는 살 수 없는 나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나는 휴대폰 속의 이미지나 언어를 잘 활용하지만 아버지는 거기에 익숙지 않아서 휴대폰을 끄고 켜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말하자면 보통 전화기의 용도 이외에는 활용할 줄을 모르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아버지는 나의 삶을 책임집니다. 그런 책임을 맡은 아버지의 노력 위에서 나는 휴대폰을 사용하는 세대죠. 그래서 아버지에게 휴대폰으로 내 생각을 전달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볼 줄 모릅니다. 세대 간의 단절된 거리를 휴대폰의 상황으로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런 단절을 다시 휴대폰을 통하여 해결하려는 의지가 아버지에게 문자메시지를 날리는 노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휴대폰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잇고 갈등을 해결하는 구실을 합니다. 당연히 상징입니다.   가는 비 온다                    기형도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다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여기서 가 나타내는 바는 무엇일까요? 죽음이라고 재빨리 대답한 사람들은 앞의 설명을 아주 잘 이해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앞으로 시에서 얼마든지 이 상징 기법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짝짝짝!   그렇다고 무슨 특별한 눈이 있어서 쉽게 알아본 건 아닐 겁니다. 앞의 시를 읽어보면 그렇게 해석하도록 상황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죽음은 시를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납니다. 그때부터 그 사람의 시간이 흐르죠. 그 시간의 흐름은 언뜻 보면 한 방향입니다. 자, 여러분은 지금 16세 안팎일 겁니다. 한창 나이죠. 16세라면 여러분들은 한 살이라도 더 살았노라고 제 나이를 속일 나이죠. 그러니까 여러분은 16년을 살아왔다고 말할 겁니다. 그러면 시간으로 환산해보겠습니다. 16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면 한 번 묻겠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70세까지 산다고 가정을 하면 이 사람에게 남은 시간은 54년이겠죠. 그러면 살았다고 대답한 이 16년은 시간을 줄여온 것인데, 산 게 맞나요? 아니면 죽어온 건가요? 시간이 줄어들었으니, 분명히 명줄이 짧아진 겁니다. 그러면 그게 죽은 것이죠. 어때요?   특별한 해결책이 없는 한 사람은 이와 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니 이대로 가다가는 저절로 다음을 알 수 없는 컴컴한 구멍으로 빨려들겠죠? 그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들이 위 시에는 여러 가지 나옵니다. 떨어지는 낙엽, 인질극, 식탁에 오를 나날에는 관심이 없는 거위……. 이렇게 무심한 듯이 묘사하고 있지만, 죽음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작용하도록 시인이 배치한 이미지들입니다.   는 속담이 있습니다. 소낙비나 장마비는 굵기 때문에 바깥에 나가면 금방 젖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안개의 경우는 어떤가요? 또 안개보다 입자가 조금 더 굵은 는개는 어떨까요? 만약에 는개 속에 있다면 옷이 눅눅하다고 생각할 뿐, 비에 젖는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가랑비도 마찬가지죠. 신경 쓰지 않고 나돌아 다니면 어느 새 젖어있는 것이 가랑비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요? 16년을 살아온 줄 알았는데, 조금씩 조금씩 시간은 흘러가 버린 것입니다. 드디어 죽음이 다가오죠. 이렇게 죽음으로 젖어 가는 것이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린다고 직접 말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가랑비가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빌리러 전당포로 간다고 표현하고 있으니 이 정황은 분명한 것입니다.   이 시의 는 존재하는 것을 무로 바꾸어버리는 어떤 존재를 나타냅니다. 거기에는 죽음도 있고 시간도 있고 허무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징입니다. 이 중에서도 죽음이 가장 중요한 의미로 들어있죠.   대답 없는 바람            조수현   내가 바람에게 물어 보았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그러나 바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굳어있는 바위처럼 또 내가 바람에게 물어 보았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그러나 바람은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나무로 만든 인형처럼 다시 또 내가 바람에게 물었다. 바다 건너 들을 질러 산을 넘는 동안 무엇을 얻었으며, 잃었느냐고 그리고 이 세상 다 휘돌고 난 끝에 무엇을 얻겠으며 잃겠느냐고. 그러나 바람은 이미 내게서 보이지 않을 만큼 들리지 않을 만큼 멀리 멀어져 가고 있었다.     여기서는 바람을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이 시의 바람이 무엇일까요? 우선 나는 삶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기고 있지요? 바람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도 없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 이와 같지요. 그래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람이 답을 할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시인은 누구에게 묻는 것일까요? 아마도 자신에게 묻는 것이 분명합니다.   시의 끝에서 바람이 멀어져 가는 것으로 봐서는 답을 얻었나요? 못 얻었지요. 원래 얻을 수 없는 답입니다. 그런데 답을 얻지 못해도 궁금한 것이 삶의 의미입니다. 자신에게 끝없이 되묻는 것이 그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바람은 무엇일까요? 자신이 궁금해 하는 질문에 대해 답을 해줄 수 있는 어떤 가상의 존재일 것입니다. 신일 수도 있고, 자신의 내면에 깃든 본성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질문하는 사람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딱히 어떤 존재라고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렇고 저렇게 보면 저렇습니다. 그렇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죠. 분명히 무언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상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989년의 일입니다. 한 후배가 찾아와서 부탁을 하나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자기네 동네에 어려서 소아마비를 심하게 앓은 사람이 있는데, 거동조차 불편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시를 쓰곤 한다는 거예요.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답답하다는 겁니다. 혹시 주변에 시를 쓸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그 부탁을 받은 후배는 나한테 와서 그 사람에게 시 쓰는 법도 알려주고 실제로 시를 봐달라고 당부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어려울 것 없으니, 그리 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 사람이 움직이기 어렵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이야 인터넷으로 대화도 하고 사진도 보내고 하지만 1989년에는 286컴퓨터가 막 나오는 시점이었고, 컴퓨터를 접하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편지로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 분의 주소를 받아서 시를 쓰는 데 필요한 몇 가지 마음가짐과 시 쓰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분한테서 답장이 오고, 그 때부터 편지로 하는 시 창작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책의 창작법이 대부분 그때 뼈대가 잡힌 것입니다.   열흘에 한 번 정도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면 그에게서 두세 번에 한 번씩 답장이 왔고, 그때 자신이 쓴 시를 한두 편 보냈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 시를 평해서 고칠 점을 다시 써 보냈죠. 이렇게 한 1년 남짓 편지 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시점부터인가 편지가 끊겼습니다. 아마도 제 쪽에서는 시 창작 강의의 중요한 부분을 거의 다 했기 때문에 저절로 편지를 중단한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리고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을 즈음에 다시 그 후배를 만났습니다. 반갑게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 사람 소식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오래 전에 세상을 하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면서 윙윙 소리가 들리더군요. 저와 편지를 나누기 시작한 1년쯤 뒤에 작고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저한테 답장을 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저는 그것을 모르고 계속 편지를 썼던 것이고, 답장이 오질 않자 제 풀에 꺾여 그만두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맨 막바지에 보낸 편지 몇 장은 그가 아니라 그의 영전으로 배달되었겠지요.   이 이야기를 할까 말까 많이 망설였습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여 혹시 그를 욕되게 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와서 시 한 편이라도 남긴다면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 드리운 아름다운 인연의 자취일 것이고, 그런 인연을 저버린다면 또한 그를 영원 속으로 묻어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한편으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이렇게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이 책의 첫 출발은 그에게서 비롯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남긴 시와 함께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아름다운 인연의 마지막 결산이라고 믿고 15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뒤늦은 명복을 빌면서 시인의 이름을 밝힙니다. 조수현 씨. 이승에서 못 다 이룬 시인의 꿈을 저승에서는 꼭 이루기를 빕니다. 2)그리듯이 쓰기 : 이미지     지금까지 비유를 활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제부터는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쓰는 방법을 배우겠습니다. 이것은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이미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겠지요?     이미지는 물론 영어입니다. 라고 쓰지요. 이것을 심상(心象)이라고 번역하여 씁니다. 심상이란 마음속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미지가 중요해진 것은 서양에서 20세기 들어 일어난 시의 한 유파 때문입니다. 즉 시에서 이미지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활용하여 쓰기를 주장한 사람들이 이미지즘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습니다. 에즈라 파운즈, 흄,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은 엘리어트 같은 시인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여러 이미지 중에서도 특히 눈에 보이는 시각 이미지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이미지즘이라는 시사의 중요한 문예사조가 등장하는데 영향을 끼친 것은 동양의 시들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세력이 한참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의 시인들에게 일본의 시가 많이 알려졌습니다. 거기에 중국의 한자 문학이 가세를 한 형편이지요. 서양의 시인들이 일본의 시와 중국의 시를 보니까 희한하게도 깔끔하게 풍경묘사가 된 거예요. 그러면서도 아주 절제된 풍경 묘사만으로도 주제를 잘 전달합니다. 그 원리가 무엇일까를 골똘히 연구하고 고민한 결과 그들은 일본과 중국의 옛 시인들이 이미지를 아주 잘 활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곧 그 방법을 시에 적용시켰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이미지즘이라는 문예사조입니다.     그러면 이미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자,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젓가락!   이렇게 말하면 이 말을 들은 여러분의 머릿속에는 젓가락이 한 짝 떠오를 겁니다. 안 떠오르는 사람은 졸았거나 딴 짓 하던 사람이죠. 하하하. 바로 이렇게 말을 듣고서 머릿속에 떠올린 그것을 바로 이미지라고 합니다. 이것을 심상이라고 번역한 이유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말을 듣거나 글을 읽고서 머릿속에 떠오른 사물이나 상황을 이미지라고 하는 겁니다.   이해 다 했지요? 그러면 한 가지 묻겠습니다. 방금 제가 젓가락이라고 했을 때 여러분의 머릿속에 젓가락이 떠올랐는데, 그 젓가락은 옆에 앉은 친구의 머릿속에 떠오른 젓가락과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를 겁니다. 다를 수밖에 없지요. 자기가 평소 쓰는 젓가락이 쇠젓가락인 사람은 쇠젓가락을 떠올릴 것이고, 거기에다가 황금을 입힌 금젓가락이면 금젓가락을 떠올릴 것이고, 일본에 자주 가는 사람은 네모난 나무젓가락을, 중국에 자주 여행하는 사람이면 길다란 대나무젓가락을 떠올릴 것입니다. 짜장면을 자주 시켜먹은 사람은 두 개가 들러붙은 배달용 나무젓가락을 떠올리면서 머릿속에서 여전히 두 가닥을 짜개고 있을 것이고요.   이미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 사람의 체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똑같은 이미지를 제공해도 그것에 반응하는 것은 그 사람의 경험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독자의 체험이 시의 감상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뜻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즘 시인들은 이러한 개인차를 최대한 극복하고 상황을 가장 효과 있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미지를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주로 느낌을 말로 전하는 그 전의 시에 대해서는 객관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했습니다. 사실 맞는 말이지요. 그래서 그 후로 이미지는 시에서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미지가 체험에 의존하여 해석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암시합니다. 내가 이렇게 시를 써도 그것을 읽는 사람은 내가 의도한 대로 읽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엘리어트는 ‘의도의 오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는 것이죠. 독자에게는 그렇게 읽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를 쓰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표현이 독자에게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 것인가 하는 것까지 감안을 해서 써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도 문제는 여전히 남겠지요. 그렇지만 시를 쓰면서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시를 써야 한다는 교훈은 남습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점점 개발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시인에게 남겨진 숙제입니다. 그리고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의 어긋남 현상을 최대한 자극하여 이미지가 부릴 수 있는 최대한의 효과를 추구하는 방법이 있기도 합니다. 이 점은 앞으로 여러분들이 시를 많이 접하고 쓰면서 점차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이미지의 종류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건 뭐 그토록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지에는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습니다.   -시각 이미지 -청각 이미지 -후각 이미지 -촉각 이미지 -공감각 이미지     이것은 감각을 어디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결정한 겁니다. 무슨 필연성 때문에 한 것이 아니라 편의상 나누어본 것이죠.   시각 이미지는 눈으로 인식하는 이미지를 말합니다. 청각은 듣는 것으로 인식하는 이미지를, 후각은 냄새와 관련된 것을, 촉각은 접촉과 관련된 것을 말하고, 공감각 이미지는 이상의 이미지가 둘 이상 결합한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시각 이미지 : 빛나는 아침 햇살 -청각 이미지 : 짹짹짹 참새소리 -후각 이미지 : 고소한 누룽지 냄새 -촉각 이미지 : 꺼끌꺼끌한 마룻바닥 -공감각 이미지 : 수정처럼 빛나는 목소리   어려운 것 없으니 공감각 이미지만 설명하겠습니다. 공감각 이미지는 두 가지 이상의 이미지가 결합한 것입니다. 를 보면 빛난다는 것은 눈으로 인식하는 것이고, 목소리는 귀로 듣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각과 청각이 결합한 것이죠. 이런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중요합니다만, 이 중에서도 시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시각 이미지입니다. 다른 것과 다르게 시에서는 시각 이미지만으로도 한 편의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다른 이미지들은 하나만으로 시를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청각 이미지인 소리만으로 시를 쓰려면 참 어렵겠지요. 그러나 시각 이미지는 그림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지에 의한 시 쓰기라고 하면 시각 이미지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이 단원의 제목을 라고 한 것입니다.   작품을 보겠습니다. 강아지          배형준(2-1)   얼마 전 태어난 새끼 강아지   9 마리의 강아지가 와글와글 북적북적   젖 달라고 우는 소리 깨갱깨갱   제일 귀여운 새끼 강아지 쓰다듬어 주고 만져주는데   내 손가락을 쪽쪽 빤다. 간지러운 가운데 손가락   그러다 내 손가락 깨물면 한 대 때려준다.   9 마리의 귀여운 새끼 강아지.     이 시를 읽고 나면 그림 같은 장면이 떠오르지요? 갓 태어난 강아지들이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고, 한 아이가 거기서 강아지들을 만집니다. 사람과 강아지가 어울린 한 폭의 풍경화가 연상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눈에 보이듯이 그리는 것도 아주 중요한 시의 방법입니다.   그런 걸 누가 못 쓰냐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한 번 해보세요. 어떤 풍경을 눈에 쏙 들어오도록 묘사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하게 될 겁니다. 먼저 무엇을 그려야 할지 선택하기가 참 애매합니다. 선택을 해도 어떤 것을 그리고 어떤 것을 빼야 할지 선택하기가 힘들어요.   예를 들면, 이 시에서도 무슨 강아지인지 알 수가 없지요. 그냥 똥개인지, 사냥개인지, 시베리안 허스키인지, 불독인지, 발바리인지 알 수 없어요. 그런데도 강아지를 귀여워하는 한 소년이 장난치는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지요. 만약에 불독이라든지 해서 강아지의 종류를 밝혔다면 오히려 더 어색해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또 개집은 어떤 모양인지 전혀 안 나타나 있어요. 그래도 상황을 이해하는 데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꼭 필요한 부분만 선택해서 보여주었다는 것이 이 시의 장점입니다.   물론 이 시를 쓴 학생이 일부러 이렇게 계산해서 썼을 리는 없습니다. 그냥 강아지가 귀여우니까 생각나는 대로 보인 대로 쓴 것이겠지요. 꼭 이론을 공부하지 않아도 아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절묘한 감각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잃어버립니다. 그리고서 어른이 된 뒤에 한 번 시를 써보라고 하면 엉뚱한 묘사만 잔뜩 하다가 괴상망측한 시를 내지요. 이런 감각을 잃지 않고 되찾는 일이 시인이 되는 길입니다. 그걸 배우는 것이 창작법이고요.   사실 배우지 않아도 순수한 마음으로 본 세상을 정직하게 적으면 그게 감동을 주는 시가 된답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무슨 엄청난 기술을 배워서 시를 쓰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깨끗한 영혼을 회복하는 것이 좋은 시를 쓰는 가장 좋은 기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병아리                 김은지(2-1)     어미 닭 쫓아다니느라, 나들이 나가느라, 정신없는 병아리.   소풍가는 아이들처럼 때지어 쫓아다니고,   까만 눈 속에 흑진주 박은 듯이 반짝거리며,   합창하듯이 ‘삐약’거리는 귀여운 병아리.   노란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유치원 아이들처럼   노란 옷이 잘 어울리는 사랑스런 병아리.     비유가 일부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전체 흐름은 병아리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있습니다. 연노란 색 털이 보송보송한 병아리를 보면 누구나 귀엽다는 생각을 합니다. 병아리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아주 잘 잡아내고 있지요. 봄에 눈에 잡힌 한 풍경을 그렸는데, 바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병아리를 보면서 감탄했던 순간으로 안내합니다. 딱히 병아리가 어때서라기보다는 그런 상황에 처한 자신의 체험을 떠올리기 때문에 감동하는 것이죠. 그런 순간은 아주 순수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으로 독자를 끌어들였다는 것이 이 시의 장점입니다. 이렇게 어떤 상황을 깔끔하게 그려놓기만 해도 좋은 시가 된다는 사실을 이 시는 보여줍니다.   부처님 오신 날              장미(2-1)   지금 목탁소리가 들린다.   스님들이 부처님 앞에서 절을 하고 있다.   불경소리가 들린다. 불경을 외우는 스님 옆에서.   사람들이 부처님께 절을 하고 있다.   어린아이에서부터 머리가 하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두 부처님께 절을 하고 있다.   부처님은 행복을 바라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지.   우리 모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신다.     절에 간 체험을 간략하게 잘 요약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미소를 짓고 있지요. 부처님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서 그 미소의 의미를 나름대로 제시했습니다. 부처님이 왜 미소를 짓고 있는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설명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 사람의 설명일 뿐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오신 날 사람들이 많이 가서 소원 비는 것을 보니까 그런 마음을 부처님이 아시는 거라고 추측한 것입니다. 그 추측이 생뚱한 것이 아니라면 시에서는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사물을 새롭게 해석할 권리가 있고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석한 장면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여주듯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서 자기 나름대로 새로운 면을 찾아내어 노래하는 것 역시 시의 중요한 방법입니다. 이 시는 그런 방법에 충실한 것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의 절터 풍경이 손에 잡힐 듯이 떠오르지요? 이렇게 생활의 느낌을 보이는 대로 그리듯이 쓰는 것도 시의 한 방법입니다.   요즘 나는             정해남(제천상고 3)   친구들이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면 난 힘없이 고개를 돌리고 맙니다.   친구들이  자기 집안 얘기를 하면 난 무척 바쁜 양 딴청만 피웁니다.   친구들이 심술궂은 내 짝 이야기를 하면 난 어디를 가는 척 슬며시 뒤로 물러 나와버립니다.   친구들이 조기 취업 이야기를 하면 난 나와 무관하다는 듯 하품만 해 버립니다.   무언가에  속하지 않으면 딴 세상 사람이 되어야 하는 세상의 법칙.   요즘 나는 이렇듯 모든 것에서 예외인 아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외톨이가 되어 가는 학생의 모습이 아주 깔끔하게 묘사되었지요? 정말 군더더기 하나 없습니다. 이란 말이 나오네요. 이 말은 실업계 학생들에게 해당하는 얘깁니다. 실업계 학생들은 3학년 2학기 때 현장실습이라는 것이 있어서 공장이나 회사에 취업을 나갑니다. 이때 각 업체에서 추천해달라고 주문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성적을 보거나 생활 태도를 보고서 점수에 따라 순서대로 취업을 내보냅니다. 못 나가거나 늦게 나가면 전에는 못난이 취급을 하곤 했습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요. 그것을 말한 것입니다. 열등감이 있는 학생의 심리와 행동을 아주 잘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이 학생만의 이야기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당시의 이런 환경에 처한 학생들은 열에 아홉은 이런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니 마치 자기 얘기인 것처럼 말했지만, 이것을 읽는 사람은 마치 자기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이야기를 해도 남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시입니다.   이 시에서 보듯이 그리듯이 쓰는 방법은 어떤 것을 그릴 것이야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노릇을 합니다. 남들이 별로 공감할 수 없는 것을 아무리 충실하고 빼어나게 그린들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지요. 그래서 시인들은 고민을 하는 겁니다. 과연 어떤 부분을 그릴 것인가? 정답은 늘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신에게 절실한 것은 남에게도 절실한 것입니다. 그런 부분을 흥분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주는 것이 좋은 작품을 쓰는 비결입니다.   5연에는 이란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이 중에 하나는 다른 말로 바꾸어주는 것이 좋겠죠? 불필요한 반복은 시에서 단점으로 봅니다 농무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서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조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농무는 시골에서 농사꾼들이 상모를 돌리면서 한 바탕 추는 춤을 말합니다. 물론 장구라든가 북 같은 도구들이 따라 나오지요. 이 시는 그런 시골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이 시를 쓰던 상황의 시골을 보면 농사를 지어도 비료 값도 안 나오죠. 사는 게 답답하고 고달픕니다. 시골 살림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런 어려움에 찌든 사람들이 나와서 춤을 추는 것입니다. 나 는 조선 중기 사람들입니다. 벽초 홍명희가 소설 을 썼는데, 거기에 나오는 인물들이죠.   답답하고 살기 어려운 시골의 정경이 잘 요약되었습니다. 그런데 하고 많은 풍경 중에서 하필 사람들이 버리고 떠나는 시골을 상대로 이렇게 세세하게 묘사를 했을까요? 여기에 시인의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농촌은 날로 피폐해졌습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그 속도는 점점 빨라졌지요. 우리나라는 농사를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하늘처럼 떠받들며 살아온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어요.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농사는 이제 사람을 먹여 살리는 기능을 도시에 떠넘긴 겁니다. 그러면서 점점 사람들이 시골을 떠나지요. 이렇게 되면 수 천 년 동안 이어져온 농촌이 파괴됩니다. 그러나 거기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잘 살 수 있을까요? 그 반대입니다. 떠나지 못해서 하는 수 없이 삽니다. 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래도 농촌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시는 그런 사람들의 애환을 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습을 충실하게 그린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사람들에 대한 시인의 동정심을 겉으로 드러냈다면 이 만큼의 감동을 주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감정을 살짝 감추고서 안타까운 풍경만을 슬며시 그려서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감동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미지로 그림 그리듯이 쓴 시가 어떤 효과를 내려고 하는 것인지 잘 알겠죠? 감정이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그림 전체를 머릿속에 그린 후에 한꺼번에 감동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주막                      백석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팔모알상이 그 상 위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잔이 보였다     아들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     울파주 밖에는 장꾼들을 따라와서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제목이 주막입니다. 나그네들이 오가는 길목에서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옛날 숙박업소를 말합니다. 백 시인은 평안북도 사람입니다. 해방 전에 자신의 고향집 풍경을 그린 것이죠. 풍경만 그려놓았을 뿐 가타부타 무슨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풍경만 제시해도 그것을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그림이 떠오르면서 어떤 감성을 불러일으킵니다. 친구 엄마가 운영하는 주막에서 친구가 호박잎에다가 잘 고은 붕어를 가져다준 모양이죠? 장꾼들이 망아지를 끌고 와서 밥을 먹고 가는 그런 추억의 풍경들이 고스란히 살아나서 그런 정황을 아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묘한 향수를 자극하게 됩니다. 이렇게 풍경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불국사                 박목월   불국사 자하문   달안개 물소리   대웅전 큰보살   바람소리  솔소리   범영루 뜬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달빛 자하문   바람소리 물소리.     이 시는 묘사의 극단까지 나갔지요? 불국사에 대해서 시를 쓰는데, 자신의 의견을 모두 버리고 눈에 보이는 대로 적었습니다. 그것도 거의 명사만을 썼습니다. 어떻습니까? 불국사의 분위기가 잘 전달이 되나요? 읽는 사람은 이 명사들이 나타나는 대로 불국사의 정경을 떠올리면서 따라갑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불국사의 정경이 그림처럼 나타나겠지요?   사실 절에 대해서 시를 써보면 만만찮습니다. 절이란 부처님이 사는 곳인데, 그곳에 대해서 섣불리 말했다가는 망신만 당하기 일쑤입니다. 불교의 사상이나 철학이라는 것이 쉽게 접근해서 얻기 어려울뿐더러 설령 얻었다고 해도 문자 밖의 세계이기 때문에 말로 하기 참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놀러왔다는 듯이 묘사를 해 가지고는 또 절의 그 신성한 모습이 담기지를 않거든요. 그래서 아주 절제된 감각으로 불교의 신앙체계와 관련이 있는 이미지들을 끌어들이기가 쉽습니다. 그런데도 설명을 자꾸 하게 되어 짧은 지식을 드러내곤 하지요. 이렇게 명사만 나열해서 시 한 편을 이루어야겠다고 판단한 것 자체가 굉장한 고수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듯이 쓰기의 극치를 보여주는 시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때때로 잊을 수 없는 장면이나 상황을 마주치는 수가 있습니다. 예컨대 5.18 광주항쟁 때 열 살 안팎의 한 아이가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안은 채 제 품에 안은 사진틀에 턱을 괴고 앞을 바라보는 사진 한 장이 신문에 실려 전 세계인의 가슴을 찡하게 만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광주 사태를 떠올릴 때 그 사진이 먼저 떠오릅니다. 한 장면이 그대로 한 사건의 인상을 결정해버린 것입니다. 비단 이런 커다란 사건만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이런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장면은 특별한 설명 없이 제시만 해주어도 큰 울림을 갖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어떤 전형이 될 만한 사건이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기에 가장 좋은 시의 방법이 바로 입니다.   디지털 세대인 여러분들이 이런 효과를 가장 많이 그리고 쉽게 접하는 것은 광고일 것입니다. 10초의 미학이라는 말이 있듯이, 광고는 가장 짧은 순간에 시청자의 뇌리로 파고들어야 하기 때문에 옛날식으로 물건의 쓰임새나 효과에 대해 시시콜콜 설명했다가는 당장 리모콘이 다른 번호를 눌러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장면을 제시해주는 방법을 많이 씁니다. 바로 이 광고식 보여주기 수법을 연상하면 시에서 쓰는 이 방법을 이해하기 좋을 듯합니다. 시를 오래 쓸수록 이 방법의 위력을 점점 더 느낍니다. 3)직접 말하기     위의 두 가지 방법은 무엇엔가 의탁해서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그런 만큼 어느 정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에는 이런 것을 전혀 몰라도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나는 것을 정리해서 수필 쓰듯이 쓰는 것입니다. 체험하면서 느낀 점을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라고 이름을 붙여봤습니다.     이 방법은 가장 흔하게 쓰이는 방법이고, 또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생각나는 것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쓰는 것입니다.   시는 언어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언어는 사람의 생각을 상대에게 전해주는 기능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의 본래 속성대로 내 생각을 전해주는 수단으로 여기고 자신의 생각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어는 사람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인데, 막상 글을 쓰면 이상하게도 생각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말로 적을 때의 감정까지도 전달됩니다. 시는 바로 이 점을 노린 겁니다. 생각을 전달하되, 거기에다가 최대한 많은 감정이 실리도록 쓰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글을 쓰는 사람이 그렇게 감정이 잘 실리도록 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언어 자체에 시의 속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어가 감정을 최대한 갖고 가도록 쓰는 방법에 시의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방법을 잘 터득할 수 있는가? 그건 딱히 어떻다고 말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말로 설명하자면 너무 어려워집니다.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왼쪽 신발을 먼저 신었던가 오른쪽 신발을 먼저 신었던가를 말하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잘 쓰면서도 왜 그렇게 썼느냐고 물으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시입니다.   다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이 읽고, 또 많이 쓰면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쓰는 요령은 이렇습니다. 자신이 겪은 일 가운데서 새로 깨달은 부분을 과장되지 않고 솔직하게 적으면 됩니다. 그런 일을 자꾸 반복하다 보면 점차 숙련이 됩니다.   그러면 작품을 보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안의 적                    김민지(3-1)   이번만은 꼭 하겠다고 이번만큼은 해 내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말일뿐이다. 생각일 뿐이다.   몸과 마음은 서로 적이다. 그래서 인지 마음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상한 현상이다.   진실하게 말하자면 나도 몸이 하는 행동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지 모른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몸과 마음을 구별할 수 있는 시기가 온 것 같다.     자, 이 시에 앞서 배운 어떤 표현이 있나요? 없지요? 특별한 기교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학생이 현재 고민하고 있는 생각의 질서만이 나타날 뿐입니다. 그래도 자신의 갈등을 아주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간략한 정리 역시 생각의 질서를 나타내는 것이고, 그런 생각의 질서를 아무런 꾸밈없이 드러내는 것 역시 시의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라고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생각을 직접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학생의 작품을 한 편 더 보겠습니다. 겉모습은 많이 다른 것 같지만 원리는 같은 시입니다.   나들이 가던 날           김민지(3-1)   어미 닭과 그 뒤를 졸졸 따르는 병아리들처럼……   우리도 선생님 뒤를 따라 쫑쫑거리며 봄나들이를 간다.   우리가 나들이 왔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곤히 자던 잠을 깨고 눈을 비비며   서로서로 먼저 나올려고 발버둥을 친다. 할미꽃은 허리 많이 아픈지 고개를 들을 생각도 않는다.   진달래는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줄지어 서서 바람을 따라 산들산들거린다.   진달래가 샘이 났는지, 소나무와 다른 나무들은 우리를 막아서서 못 가게 가시를 이용해 마구 찔러댄다.   우리는 ‘아야’ ‘아야’ 하며, 화를 내지만 우리는 알 수 있다.   샘이 나서가 아니라 관심을 끌기 위해서란 걸…….     중간 중간에 비유도 나오지만 이 시를 잘 보면 선생님을 따라서 산으로 봄나들이 간 체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봄나들이야 누구나 다 하는 일이지요. 그런데도 이것이 시가 되는 것은 이 학생이 경험한 느낌을 적었기 때문입니다. 체험은 같을지 몰라도 그것을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선생님을 따라갔기 때문에 이 학생만 간 건 아닙니다. 다른 학생들도 다 갔지요. 그런데 이 느낌은 이 학생만의 것입니다.   앞서 자신의 느낌을 적으라고 했던 것 기억날 겁니다. 자신의 느낌이라는 것을 유달리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 때문입니다. 느낌은 사람마다 다 다르고 시에서는 사람마다 다 다른 그런 느낌을 존중합니다. 사람마다 느낌이 다 같다면 시라는, 나아가 문학이라는 예술이 성립할 수도 없습니다. 예술은 독자성이 그 생명입니다.   가는 도중에 꽃도 구경하고, 바람도 느꼈고, 나무들에게 찔렸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들이 사람의 사랑을 받으려고 샘을 냈다고 썼습니다. 아마 그 날 산에 가서 본 것은 이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구름도 봤을 것이고, 동네도 봤을 것이고 무덤도 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시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시에서 자신의 체험을 쓸 때 모든 것을 다 쓰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몇 가지만 추려서 쓴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경험 중에서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요약해서 제시하는 방법이 바로 지금 우리가 세 번째의 방법으로 제시한 방법입니다. 어떤 다른 표현법을 사용하지 않고 체험을 추려서 중요한 부분만 직접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시에서는 비유도 들어있지만, 전체의 흐름은 자신의 체험을 말하는 것이라고 미리 말했습니다. 그래서 의 범주에 넣은 것입니다.   4연 첫 행의 는 가 맞는 것이겠지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시에서는 그런 거 너무 골치 아프게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그런 거 시시콜콜 따지다가는 정작 생각이 끊겨서 시를 잘 못 씁니다. 그리고 이런 틀린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실제 생활에서 그렇게 발음하고 쓰면 그게 오히려 더 시의 분위기를 살려줍니다. 시에서는 맞춤법보다 어감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래 5연을 보면   진달래가 샘이 났는지, 소나무와 다른 나무들은 우리를 막아서서 못 가게 가시를 이용해 마구 찔러댄다.   는 굳이 없어도 되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없어도 앞 뒤 의미 연결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있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 이렇게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경우에는 없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합니다.   계속해서 작품을 보겠습니다.   시 쓰는 친구들             김봉진(2-1)   지금은 국어시간. 노는 시간이라 착각하고 놀고있는 친구들   병덕이는 나무에 매달리고. 광섭이는 돌아다니며 시를 자랑하고. 연호는 노래를 리매이크를 하고. 제연이는 “방카”의 카리스마를 자랑하고. 팔장 끼고 돌아다니는 윤표. 시를 쓰고 들어오는 정근이와 희성이 춤을 추며 들어오고.   우리 반은 시 쓰는 시간이 체육시간보다 쬐금 재미있다.     시를 쓰라고 시간을 주면 얌전히 앉아서 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자꾸 떠들려고 하지요. 한 번은 시상을 떠올려야 한다면서 밖으로 나가자고 하더군요. 말하자면 야외수업을 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모르는 체하고 허락을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시 쓸 생각은 안 하고 엉뚱한 장난만 하면서 놀더군요. 그래도 그냥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들이 해놓은 말이 있으니까 뒤가 켕겼는지 집에서 써왔습니다. 이 시도 그 중의 하나죠.   국어 시간에 시 쓰는 친구들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돼있죠? 여기서 병덕이니, 광섭이니, 연호니 하는 학생들이 누구인가를 굳이 알 필요는 없겠지요? 왜냐하면 여러분의 경험으로 보아 어떤 상황인지 모두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름은 특수한 명사이지만, 이렇게 독자로 하여금 연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쓰이면 보통 명사처럼 쓰인답니다.   이 시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어떤 상황을 잘 요약한 겁니다. 특별히 화려한 표현도 없고, 재미있는 표현도 없지만, 시 쓰라고 준 시간을 활용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눈에 잡힐 듯이 보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살고 행동하고 느끼는 것을 잘 요약하여 옮겨놓으면 그것이 그대로 시가 되는 것입니다.   맨 마지막 줄에는 재미있는 심리가 드러나 있지요? 남학생들에게 체육시간보다 더 재미있는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도 국어시간이 재미있다고 말하는 것은 미안한 마음이 투영된 것이겠죠? 앞부분에서 제시했듯이 시를 쓴다고 하면서 엉뚱한 짓을 하는 데도 혼내거나 뭐라고 잔소리를 하지 않으니까 일종의 아부를 한 것이겠죠. 그런 순수한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 마음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시의 장점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애개개! 이런 정도는 누가 못써? 이런 생각을 하는 학생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학생들은 여태까지 약간 잘못된 고정관념에 빠져있던 것입니다. 시는 무언가 그럴 듯한 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그런 고정관념 말입니다. 그런 고정관념은 틀림없이 교과서의 시에서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학생들처럼 자신의 생활을 노래하는 과정을 충분히 거쳐서 그런 시에서 시의 재미를 느끼게 된 다음의 일입니다. 시는 결코 특별한 것을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소박하게 담는 훌륭한 그릇입니다. 바로 이 점을 깨닫는 것이 시를 잘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무시무시한 놀이터              이세호(1-1)   놀이터는 위험을 주는 곳 항상 조심해야 할 곳.   시소는 무척이나 재미있다. 하지만 엉덩이가 다칠 수도 있다.   그네도 무척이나 재미있다. 하지만 뒤에 있다가 부딪칠 수도 있으며 떨어질 수도 있다.   미끄럼틀도 재미있다. 하지만 굴러 떨어질 수 있다.   놀이터는 언제 다칠지 모르는 위험한 곳.     재미있지요? 놀이터를 재미있는 곳으로만 생각했지, 위험하다고 노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나 내막을 살펴보면 정말 그렇지요. 누구나 놀이터에서 다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이터라는 머릿속의 개념 때문에 그런 위험을 노래한다는 생각을 미처 못 한 것입니다. 이 학생은 놀이터라는 선입관을 버리고 자신이 처했던 위험한 경험을 시로 쓸 생각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남들이 흘려버리기 쉬운 것을 한 번 깊이 생각해서 옮겨 놓는 것도 좋은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너무나 많지요.   시작과 끝 부분에 비슷한 말을 반복하면 의미를 강조하는 효과를 냅니다. 물론 이 학생이 그러한 시의 이론을 알고 썼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잘 정리하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는 명쾌히 몰라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바로 이와 같이 자신의 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것이 시를 잘 짓는 것입니다. 시의 이론을 배운다고 해서 시를 잘 쓸 수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생각이 움직이는 방향을 면밀히 살피면 복잡한 시의 이론에서 설명하는 효과를 나도 모르게 시에서 발휘하게 됩니다.   봉진이                김준석(2-1)   우리 반의 실장 우리 반의 덩치 얼굴에는 여드름 꽃.   얼굴에는 하얀 미소를 띠고 귀에는 항상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부르네.   내가 놀리면 도끼눈을 뜨고 나는 도망을 가네. 잡히면 죽으니까.     사람의 특징을 아주 짧게 요약하여 보여주는 것도 시의 좋은 방법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무수히 만나면서 살고 사람 사이에서 감정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그런 감정들을 소홀히 하지 않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서 그들의 특징을 노래하는 것 역시 즐거운 일입니다.   맨 끝에 보듯이 장난을 많이 치는 관계인가 봅니다. 잡히면 죽는다는 표현은 좀 과장된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표현하는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만큼 친하게 지낸다는 뜻입니다. 장난치고 도망가고 하는 두 사람의 관계가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게 상황을 아주 잘 요약했습니다.   내 필통               채희성(2-1)   내 필통은 갈곳 없는 볼펜들의 종착점 갈곳 없는 볼펜은 다 내 필통으로 온다.   교실에 굴러다니는 볼펜도…… 복도에 굴러다니는 볼펜도……   내 눈에만 띠면 전부 다 내 필통으로 모여든다. 그래서 내 필통에는 내 볼펜 조금. 줏은 볼펜 하나 가득.     우리가 자랄 적에는 연필도 귀했고 볼펜은 더더욱 귀했습니다. 그래서 보통 잉크를 펜촉으로 찍어서 썼지요. 그런데 잉크는 병에 담겨서 가지고 다니면 아주 불편합니다. 깨지는 수도 있고 엎질러지는 수도 있고, 또 펜촉은 너무 날카로워서 찔리는 수도 있습니다. 연필 같은 경우에는 쥐고 쓸 수 없을 정도로 짧게 닳으면 볼펜깍지에 끼워서 썼습니다. 종이도 그렇습니다. 그때는 질도 나빴고 귀했습니다. 교과서도 몇 해를 건너면서 빌려다 보아야 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요새는 물자가 너무 흔해서 탈입니다. 연필은 절반도 쓰기 전에 잃어버리기 일쑤이고, 볼펜 종이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학생들이 돌아가고 난 교실에 가보면 볼펜이나 공책 따위는 쉽게 주울 수 있습니다.   이 학생은 볼펜을 줍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지요? 자신의 그런 습관을 잘 묘사한 작품입니다. 옛날 같으면 남의 볼펜을 주워서 자기 필통에 넣기 쉽지 않습니다. 도둑놈으로 몰릴 테니까요. 그런데 요즘이야 물자가 흔한 세상이니 설사 다른 사람이 가져간다 해도 그거 돌려달라고 할 사람 거의 없을 것입니다. 흘린 것이니 말이죠.   이와 같이 자신의 습관을 소재로 표현하는 것도 중요한 재미입니다. 그래서 늘 자신의 버릇이나 생활을 꼼꼼히 살피는 것이 시를 잘 쓰는 지름길입니다. 시는 주변에 대한 관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3년 마지막 행의 은 이 맞겠지요? 그러나 이런 거 함부로 따지면 안 된다고 아까 말했죠? 그 사람의 말버릇이라고 봐도 되기 때문입니다. 시에서는 개인의 그러한 소소한 버릇까지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우유             길영근(2-1)   월 화 수 목 금 토 매일 매일 나오는 매일 우유   화요일엔 정근이 얼굴처럼 검은 초코 우유   금요일엔  소풍을 가고 싶던지 피크닉 우유   우리 학교엔 언제나 3가지 맛! 우유가 찾아온다.     요새는 학교마다 거의 우유를 먹습니다. 옛날에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지요. 면장 아들이라든가 아니면 최소한 양조장 주인의 조카쯤은 되어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유 역시 흔한 것이 돼놓으니, 이젠 잘 먹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학생들이 돌아간 뒤에 교실에 가보면 교탁에는 꼭 우유가 몇 개씩 남아있습니다. 그 만큼 흔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각 학교에서는 성장기에 있는 학생들이 우유를 먹도록 갖가지 꾀를 냅니다. 그 중에 좋은 것이 입맛을 당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흰 우유를 주다가 어떤 때는 딸기 우유, 초콜렛 우유같이 다른 맛이 나는 우유를 주기도 하지요. 어떻게든 먹여보려는 선생님들의 노력입니다.   이 시는 그렇게 해서 배달되는 우유를 보며 장난삼아 쓴 것입니다. 매일 우유, 초코 우유, 피크닉 우유. 이렇게 오는 우유 이름을 갖고 나름대로 해석을 붙여본 것이죠. 매일 오니까 , 초코 우유는 밤색이니까 친구의 얼굴색을 닮아서 , 피크닉에서는 소풍을 연상하고는 , 모두가 친근하고 엉뚱한 생각입니다.   발상이 참 재미있지요? 그런데 잘 보면 비유도 있어서 시 전체의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체의 흐름은 매일 공급되는 우유에 대해서 쓴 것이기 때문에 비유에서 다루지 않고 이 단원에서 다룬 것입니다. 이렇게 재미를 느끼면서 시를 쓰다 보면 나중에 저절로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있게 됩니다. 그전에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이렇게 생활 주변에서 재미있는 시의 소재를 찾는 일입니다.   처마 밑 고드름                   노은희(1-1)   언제 녹아서 고드름이 되었는지 처마 밑엔 고드름이 줄지어 서있다.   누가 더 키 크나, 누가 더 뚱뚱하나 대결하기 바쁘다.   제일 큰 고드름은 뽐내다가 어느 개구쟁이의 손에 떼어지고   두 번째로 큰 고드름도 뽐내다가 두 번째 개구쟁이의 손에 떼어진다.   이렇게 처마 밑의 고드름들은 개구쟁이 손에 하나 둘씩 떼어져 간다.   언제 녹아서 고드름이 되었는지 처마 밑엔 고드름이 줄지어 서있다.     이 시에도 역시 비유가 나오지요? 그렇지만, 비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고드름을 보고서 그것을 관찰했다는 것이 이 시의 장점입니다. 고드름은 추녀 끝에서 땅 쪽으로 자라지요. 추울수록 굵기도 굵어지다가 햇빛을 받으면 물을 뚝뚝 흘립니다. 아이들이 이것을 신기하게 여기고서는 똑똑 떼어서 먹기도 하고 차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을 눈에 보이는 대로 정리하여 적은 것이지요. 어른들의 눈에는 보일 리 없는 현상입니다. 세심한 관찰이 이룬 일이지요.   그림                정윤섭(3-1)   하얀 백짓장 위에 색색깔로 그림을 그린다. 살색으로 얼굴을 그리고 검은색으론 머리를 그리고 파랑색으로는 옷을 그리고 회색으로 바지를 그리면 나의 모습 완성   옆에서 누군 줄 모르는 사람을 그리고 그 사람을 향해서 빨간색을 날린다. 누군 줄 모르는 사람이 나를 보고 웃는다. 그 사람이 누굴까?   다음 장으로 넘기고 그림을 한 장 더 그린다. 이번엔 그 사람이 보인다. 누구지? 아직 내가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이 나에 사랑에 상대 그 사람의 색깔을 모르겠다. 나는 사람에 색깔을 모르는 아직 애송이다.     사춘기 학생이면 누구나 이성에 대해서 사랑을 느낍니다. 대부분 그것이 부끄러운 것인 줄 알고 숨기지요. 그리고는 혼자서 끙끙 앓습니다. 표현력이라도 좋고 배짱이라도 좋으면 과감하게 자기감정을 표현하면 되는데,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것도 여의치 않습니다. 그래서 속을 속 태우지요. 그런 감정을 시로 쓴 것입니다. 그것을 그림에다 비유를 했고, 그림을 보면서 완성하고픈 사랑을 노래한 것입니다. 사춘기의 섬세한 감수성이 아주 잘 나타난 경우가 되겠습니다.   시험             김영주(2-1)   시험은 나에게 어려운 문제 시험을 보면 틀릴까봐 마음이 콩닥콩닥.   풀고도 걱정되어 또다시 풀어보고 수학시험을 보면 내 마음은 긴장하듯   시험은 왜 어려울까? 아이들은 고민하네. 틀린 문제 싫어   시험을 부모님께 보여 주면 부모님이 나에게 하시는 잔소리.     자, 이 시는 학생들의 절실한 고민을 담은 시지요? 무슨 기법이나 기술을 가지고 쓴 시가 아닙니다. 성적을 두고 걱정되는 생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그저 시험 때문에 애간장 타는 심정을 있는 그대로 적은 것이지요.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직접 말하듯이 쓰는 방법이 있습니다. 마음이 간절할수록 시는 감동을 줍니다. 아주 많은 시들이 이 방법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모기향                엄유진(안양예고 1)   초등학교 1학년 정식이,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친구들과 얼음땡을 하고 들어와서는 얼굴과 손, 발에 물만 대충 묻히고 잔다 땀냄새 때문에 극성을 부리는 모기 소리에 찡얼대며 일어난 준식이는 미색바탕에 백합 무늬가 그려져 있는 이빠진 접시 위에 모기향을 피워 동생 머리맡에 놓는다. 그래도 형이라고.                     2003년 경남대 제32회 전국고교생 한마백일장 운문 장원   이 시의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한 형이 동생을 위해 모기향을 피우는 사연을 동작이 이어지는 대로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시답게 해주는 것은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맨 마지막에 제시함으로써 앞에서 무심한 듯이 묘사해온 구절들을 한 순간에 시로 만들어줍니다. 그럼으로써 동생을 생각하는 형의 마음을 아주 잘 나타냈습니다.   이런 시를 보면 좋은 시를 쓰는 것은 글재주가 아니라 주변의 사소한 일들에 대한 관심과 관찰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시에서도 특별히 엄청난 기교나 재주가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동생을 생각하는 한 아이의 행동을 관찰하여 그것을 시로 써볼 생각을 한 계기가 좋은 시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을 이 학생이 시를 쓰는 재주가 부족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겠죠? 이 상황을 이만큼 간략하면서도 필요한 말들만 골라 쓸 줄 아는 것도 아주 대단한 능력입니다. 그리고 오랜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죠.     앞서 살펴본 두 방법, 즉 1)빗대어 쓰기와 2)그리듯이 쓰기는 나름대로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 번째 방법인 직접 말하기 수법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느낀 점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쓰면 됩니다. 물론 어떻게 쓰면 시가 단단해지고 군더더기 없이 자기의 생각이 잘 전달될 것인가 하는 것을 익히고 연습하는 숙제가 남아있습니다만, 달리기 연습을 많이 한 학생이 잘 달릴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많은 작품을 쓰면서 조금씩 숙달시켜 가면 될 일입니다.     금강산   글 깨나 한다는 사람치고 읊지 않은 사람이 없고 그림 깨나 그린다는 사람치고 그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런 작품을 위해 나도 기꺼이 절망의 순간을 맞고 싶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조화옹의 손길 앞에서 절망한 나머지 시 한 구절 읊조리지 못하고 그냥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그리움이 너무 긴 나머지 막상 보았을 때 조화옹의 솜씨가 그 동안 꿈속에서 그려낸 내 작품만 못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순전히 생각만으로 썼습니다. 비유도 없고 상징도 없고 이미지도 없습니다. 그냥 금강산을 생각하는 마음뿐입니다.   금강산은 우리나라, 아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이지요. 그런데 분단으로 인해서 남쪽에서는 가볼 수 없는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금강산에 다녀온 옛날 분들한테 금강산 칭찬을 들으면서 나름대로 금강산을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너무 오랜 세월 동안 가장 아름다운 형상으로 금강산을 마음속에 만들었습니다. 분단의 세월이 깊어가면서 그 그림 역시 화려해지지요. 한 사람의 상상력을 최대한 가동해서 그렸으니까요.   그러다가 몇 해 전부터 북한 금강산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배를 타고 가기도 하고 얼마 전부터는 육로로도 가지요. 그래서 지금은 갈 수 있는데도 이제는 겁이 나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생각한 금강산보다 실제 금강산이 못하면 어쩌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나는 겁니다. 오랜 분단이 사람의 마음속에 만들어놓은 상처지요. 이런 상태를 있는 그대로 생각 따라 적은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만을 적어도 시가 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이 작품을 소개했습니다.   이 작품은 비유나 이미지가 없이 생각으로만 썼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이 꼭 순수하게 생각만으로 쓰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생각을 직접 말하는 방법으로 시를 쓰더라도 그 안에 이미지도 나타나고 비유도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더 흔한 방법입니다. 한 번 보겠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가족이 서울 나들이를 간 적이 있습니다. 방학을 이용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롯데월드를 가서 놀다 오자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기차를 타고 청량리역에서 내려서 잠실 가는 지하철을 탔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아내, 그리고 아이 둘, 해서 모두 넷이었습니다. 낮이어서 그랬는지 자리가 비는 바람에 우리 넷은 나란히 앉았습니다. 몇 시간 기차에 시달리다 보니 피곤했는지 옆에 앉은 아내가 꾸벅꾸벅 졸다가 제 어깨에 머리를 대는 겁니다. 곧 이어서 아이들도 엄마 옆구리에 끼여서 졸더구만요.   그런데 저는 졸 수가 없는 겁니다. 넷 중에 행선지를 아는 사람은 저뿐이고 만약에 제가 졸다가 역을 지나치면 낭패를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졸음이 쏟아지는데도 저는 졸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마음속으로 내려야 할 역을 꼽으면서 기다렸지요.   그런데 그 순간 묘한 생각이 떠오르는 겁니다. 이거 상황이 꼭 제가 살아가는 것과 똑같은 것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남편이라고 아빠라고 한 가족이 저를 따라나섰는데, 저 자신도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잘 알 수 없고, 그러면서도 한 가족을 이끌고 그들을 어디론가 데려가는 제 처지가 생각난 겁니다. 순간 순간의 내 결정에 따라서 이들의 삶도 바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묘한 상황입니까? 사는 게 뭔지도 모르고 흘러가는 것이 내 인생인데, 그런 인생에 또 다른 인생 여럿이 딸려서 지금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입니다.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히면서 막막해지더구만요.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나이 마흔 아저씨가 어디 울 수가 있나요? 한 동안 고개를 떨구고 있는데 머릿속에서 갑자기 시의 회로가 작동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담담히 속으로 이 시를 썼습니다. 그리곤 집에 와서 정리했지요.     지하철에서   그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운이 좋게도 우리 식구 넷이서 나란히 앉았다. 잠시 후 아이들이 졸고, 양쪽 옆구리에 아이들의 몸을 받친 아내도 존다. 롯데월드 가는 길, 나는 잠이 오질 않는다. 우리 식구가 누릴 한 때의 즐거움을 향하여 지하철이야 잠실에서 끝나겠지만, 그곳에서 끝나지 않을 또 다른 길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살아갈수록 길은 험하고 흐려지는데 방향을 물어도 분명해지는 건 없고 캄캄한 창 밖은 불빛이 번뇌처럼 스쳐간다. 종착점과 방향을 분명히 모르는 한 가장과 그 가장을 철썩 같이 믿고 따라나선 곤한 식솔들을 태우고 지하철은 덜컹거리는 어둠 속을 달린다. 롯데월드 가는 길 간간이 서는 간이역을 잊은 채 식솔들은 곤히 잠들고 나는 잠이 오지 않는 지하철에서.     비유도 나오고 이미지도 나오지만 시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지하철을 타고 롯데월드를 찾아가던 체험입니다. 이 체험의 과정에서 깨달은 내용을 독자들이 알기 쉽게 설명해준 것입니다. 이렇게 직접 말하기의 수법으로 시는 써집니다.     라는 창작 방법을 마치기 전에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하기는 누군가 듣는 것을 전제로 하고 속삭이듯 쓰는 것입니다. 산문 중에서 그러한 방법으로 쓰는 것이 바로 입니다. 따라서 편지의 어법을 시에서 활용하면 아주 좋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예를 보겠습니다.   해바라기의 사랑                 최희정(제천상고 2)   당신의 뒷모습에서 빗물이 묻어납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형태를 흐리게 하고 내 마음을 흐리게 합니다.   언제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서 있는 기다림의 마음을, 그것만으로도 행복과 슬픔을 모두 느낄 수 있는 해바라기의 사랑을 당신은 모르십니다.   바람이 세차어도 꺼지지 않을 촛불 하나 가지고 있지만 당신에게서 묻어나온 빗물에 내 가진 촛불 하나 슬픔으로 가물거립니다. 이젠 돌아서서 날 보아주지 않으시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쓴 편지의 투를 흉내 낸 시입니다. 누군가에게 말하는 형태로 쓰였지요? 물론 이 시의 원리는 비유를 활용한 방법입니다.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보면서 삽니다. 해와 해바라기의 관계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관계로 바꿔놓고서 쓴 시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그 비유가 아니라 말투입니다. 편지에 쓰이는 말투로 쓰면 시를 쓰기가 굉장히 편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시를 써야 할지 막막할 때는 편지투를 사용하는 것도 좋습니다.     신혼 초에 주말부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일요일 날 새벽에 떠나서 토요일 날 오후에 오는 것이죠. 사랑하니까 함께 살자고 하는 것이 결혼인데, 결혼을 하자마자 떨어져서 일주일에 한 번 보니 얼마나 애절하겠어요? 월요일마다 아내는 눈물바람입니다. 그런 아내를 보는 저의 심사는 어떻겠어요. 감정이 북받칠 밖에요.   그런데 현실이 현실이다 보니 아내를 위로해야 할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가끔 편지를 썼지요. 그런데 감정이 애절하다 보니 써놓은 편지를 읽어보면 시 같은 거예요. 그래서 이참에 시를 쓰자 마음을 먹고 그날 그날의 느낌을 시로 썼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그것을 엽서에 적어서 보냈습니다. 아내가 무척 감동하더군요. 그러면서 그 어렵던 시절을 건넜습니다. 옛날에 냈던 시집에서 두 편만 소개합니다.   완행열차   좌석표가 이미 매진이 되어 하는 수 없이 완행열차에 올랐습니다. 긴 의자 두 줄뿐인 맨 뒷칸으로 가니 텅 빈 것이, 속도에 떠있는 것은 덜컹거리는 고요와 나 혼자 뿐입니다. 느긋한 마음에 늘어질 대로 늘어져 긴 의자에 네 활개를 펴고 누웠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편할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가는 길은 언제나 이렇게 마음 편하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허리띠를 한 칸 늘여놓고 돌아갈 그 어떤 곳이 있다는 것은 이 각박한 세상에 당신이 내게 내린 커다란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투명한 햇살과 시원한 봄바람이 열린 창으로 손뼉 치듯 쏟아집니다.     이 시는 정말 편지 그대로지요? 일요일 날 아내를 헤어져서 돌아오다가 기차를 타고서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적은 것입니다.   꽃   아름다움이란 개나리, 튜울립, 장미 같은 꽃들을 염두에 둔 말이지요. 그러나 복숭아, 살구 혹은 사과나 배꽃도 그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것들임을 이 아침 과수원 길에 잠시 서서 깨닫습니다. 목적에 가려진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인지 삶의 그늘에 가려진 아름다움을 어느 날의 당신에게서 문득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듯이 아름다움이 목적인 꽃나무들보다 더 아름다운 과일나무의 꽃들 앞에서 감탄사를 연발하는 아침입니다. 꽃이 지면 그저 풀일 뿐인 꽃들과 가지마다 풍성한 가을의 예감을 매달고 있는 과일나무의 아름다움을 잠시 생각하곤 이 시간 생활의 먼지 속에 가려져 있을 당신의 빛과 풍성한 당신의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여기에는 비유가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비유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편지투로 된 방식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점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자, 이렇게 해서 시를 쓰는 원리 세 가지를 다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시를 이렇게 분류한 것은 이전에는 없던 일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칭찬 받을 일인지 비난  받을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읽고서 실제로 시 쓰는 데 도움을 받으면 칭찬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고 저러고,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를 했는데, 그냥 이렇게 설명만 해놓으면 좀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방법에 대해 간단한 이름을 한 번 붙여볼까 합니다.   세 가지 방법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는 내 생각을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비유라고 하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사물 사이에서 같은 점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생각과 같은 것을 골라내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것은 서로 다른 사물의 사이에서 동일점을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동일시의 시학’이라고 이름 붙이면 어떨까요?   두 번째 는 이미지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지로 말을 한다는 것은 마음의 그림을 그린다는 얘깁니다. 따라서 쉽게 ‘그리기의 시학’이라고 하겠습니다.   세 번째 는 자기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쓰는 데는 듣는 사람을 전제로 합니다. 말하자면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야기의 시학’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이렇게 해서 서툴지만 나름대로 이름을 붙여봤습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빗대어 표현하기 - 동일시의 시학 ②그리듯이 쓰기 - 그리기의 시학 ③직접 말하기 - 이야기의 시학  4)변형과 종합     시를 쓰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라는 것이 여태까지 말해온 지론이었습니다. 방법상으로 보면 분명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방법을 섞어서 쓰는 또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 방법을 둘 또는 세 가지를 모두 섞어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원칙은 세 가지이지만, 이 섞어 쓰는 정도에 따라서 다시 몇 가지로 더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변형과 종합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그 변형의 방법에 대해 한 번 훑어보고 가겠습니다. 그냥 참고로 하기 바랍니다. 어차피 위의 세 가지 원칙만 알면 나머지 변형은 그 세 가지를 가지고 적당히 섞은 것이기 때문에 다 알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순수하게 위의 방법 한 가지만으로 쓴 시들이 있을 것입니다.   [1] 순수한 동일시의 시학 [2] 순수한 그리기의 시학 [3] 순수한 이야기의 시학   여기에다가 두 가지를 섞어서 쓴 것이 있을 수 있으니, 그 경우의 수를 만들어보면 다음 네 가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1+2] -[1+3] -[2+3] -[1+2+3]     관찰력이 민감한 학생은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1+2]와 [2+1]은 다른 것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그런데 수학에서는 맞는데 시에서는 이 두 가지가 섞인 양상이 거의 비슷합니다. 물론 동일시의 시학을 주로 하고 그리기의 시학을 곁들이로 하는 것과, 그리기의 시학을 주로 하고 동일시의 시학을 곁들이로 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지만, 막상 그 정도로 정확하게 구별해서 섞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섞이나 저렇게 섞이나 다 비슷한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것은 [3]을 뼈대로 하고 거기에 [1]이나 [2]를 추가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접하는 시의 한 7~80% 가량이 이런 형태에 속합니다. 자신이 살아가면서 느끼거나 깨달은 것을 담담히 서술하면서 거기에다가 신선한 비유와 상징, 또는 이미지를 곁들여 쓰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자세한 구별이 필요하다면 더 자세히 나누어도 됩니다. 다만 그렇게 너무 세세히 구별하면 시 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이런 정도로 그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방법이 섞인 시를 보겠습니다. 유성음            -야학일기 3.-                               강규선   저무는 날. 처음부터 우리들은 흔들림이었고.           Ⅰ 비틀대는 수업을 가로지르며 네가 다가왔다. 썬생니, 수업을 하노라면 흐르는 시간 따라 떠돌던 마음도 문득 깨어나, 그렇지 너도 읽어야지, 국어 책을 읽히고, 순간 깜빡이는 불빛으로 불안하던 눈동자들.   저무는 바람 속. 무심히 드러누운 활자 사이를 더듬으며 비틀대는 반신불구, 네 혀 주위로 우뚝 솟아오르는 한 어둠을 보았다. 종결어미 없이 스러지는 너의 말 끝으로 부끄러이 스며드는 한 얼굴을 보았다. 견고하게 아름답던 세상 풍경마저 비스듬히 돌아누워 아 우 어 우 으, 으, 으.   결국은 소리죽인 울음으로 끝나가던 책 읽기. 끝없이 응고하며 주저앉는 너의 침묵이 크낙한 말의 벽으로 일어서는 역설 앞에서 웅웅대며 흩어지던 시야 끝 돌연 반신불구처럼 뒤틀며 키득이던 아이들.              Ⅱ   모든 우리들은 어디에도 없어. 오늘 국어시간. 하루의 안전을 확인하듯 조심스레 출석을 부르면, 너의 번호 위에서 언뜻 비틀대는, 붉은 두 줄의 확고함. 꿈꾸듯 걸어온 나의 실족들을, 꼭꼭 디디며 이어서는 너의 빈자리. 사실 산다는 것은 흔들림 이외에 또 무엇인가. 살아있는 우리들은 잠시 역설일 뿐이라며 교탁을 후려치는 불빛.     그러나 이제 책을 펴야지. 가진 것 너무 많은 우리여서 서글픈 확신 하나, 아는 것이 힘. 어둠 저 너머로 별 하나 흐르듯 자 찔끈 두 눈 감고 오늘은 유성음을 공부할 차례. 저…… 선생님. 유성음(流星音)이란 우리들처럼 어디에도 없는 소리인가요. 아 아니야 유성음(有聲音)은 떨려, 떨리는 음. 코를 잡고 발음해 봐, ㄴ-ㄹ-ㅁ-ㅇ- 그래 너희들처럼 코가 울리지 울리는 너희들이 유성음.     이라는 부제가 달린 것으로 봐서는 연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야간학교 생활을 다룬 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용을 추려보면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발음을 잘 못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발음이 잘 안 되니 국어시간에 곤란하겠지요. 그 때문에 아이들은 웃고요. 당사자는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을 바라보는 교사의 마음은 너무나 아프고 게다가 그런 상황을 어찌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이 교사를 괴롭히고 있는 상황입니다.   야간학교는 일반 학교를 갈 여건이 못 돼서 다니는 학교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배우고자 하지만 그게 여의치 않은 사람이 있는 겁니다. 이와 같은 체험이 시의 중요한 줄기를 이루고 있지요. 직접 말하기를 택하는 입니다. 그런데 섬뜩하면서도 날카로운 표현들이 들어있습니다.   무심히 드러누운 활자 말의 벽 반신불구처럼  너의 번호 위에서 언뜻 비틀대는, 붉은 두 줄의 확고함 유성음(流星音) - 유성음(有聲音) 울리는 너희들이 유성음.     이런 표현들은 비유에 바탕을 둔 표현들입니다. 의인화도 들어있고요. 또 자세히 보면 상징도 들어있습니다. 다음이 그런 구절들입니다.   처음부터 우리들은 / 흔들림이었고 우뚝 솟아오르는 한 어둠을 꿈꾸듯 걸어온 나의 실족들을, 꼭꼭 디디며 이어서는 너의 빈자리.   의인화니 상징이니 하는 것들은 빗대어 쓰기의 수법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는 에 이 결합된 경우입니다.   이렇게 시는 어느 한 가지 방법으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방법이 결합하면서 다양한 표정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학생의 작품을 보겠습니다.   대망석재                박미라(옥천고)   바닥에 널린 돌조각들 밟고 선 아버지의 신발 속으로 불편한 시간이 들어가 있다 아버지는 돌을 깎는다 살점 떨어져나갈수록 더 선명한 눈물자국 보여주는 대리석에 형의 숨소리 박아넣는다 돈을 벌어오겠다며 뛰쳐나간 형은 석재상의 간판 주름처럼 거미줄이 생기고 색 바래가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버지는 형을 기다리며 날마다 무딘 망치소리 사이에 흐느끼는 신음 채워넣는다 전기톱이 살을 뚫고 오는 소리에 톱날을 물어버리는 대리석 돌가루 날리는 허공에 물 뿌려보지만 뿌연 그리움은 쉽게 진정되지 못한다 아버지의 닳은 옷소매에 채워지는 기다림 털어도 헤진 자리 깊숙이 파고 들어가 털어지지 않는다 망부석처럼 말이 없는 석상 앞에서 아버지는 굳게 다문 입으로 바람 드나드는 것 허락하지 않은 채 구름도 멈춰선 하늘을 오래 바라본다 신발 속에서 뒤척이는 돌조각들 서로 부딪혀 모서리 헐어내고                         2003년 배재대 청소년 소월문학상 운문부 우수     이 시는 석재상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삶을 요약한 시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묘사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을 깎아서 석물을 만들면서 이루어지는 동작을 동원시켜서 말을 하고 있지요. 그런데 거기에 할 말이 사이사이 끼어들어서 읽는 사람에게 설명을 해줍니다. 돈벌이가 안 되는지 형은 돈을 벌어오겠다며 뛰쳐나갔습니다. 그 만큼 아버지는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지요. 그런데 시인은 아버지의 생활이 힘들고 어렵다고 쓰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을 석재상의 여러 도구와 작업으로 대신 묘사를 하면서 중간 중간에 자기가 하고픈 말을 곁들인 것입니다. 묘사와 할 말이 적당히 배합된 작품입니다.     시의 형식을 보고서 발상법을 구별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예컨대 비유를 사용하는 동일시의 시학에서도 가짓수를 무제한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동일시의 시학은 비유이기 때문에 비유하는 것과 비유 당하는 것 두 가지가 나타나게 마련이지요. 그것을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고 한다는 것은 앞서 설명한 대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원관념을 더 많이 드러내느냐 보조관념을 더 많이 드러내느냐에 따라서 시의 모습이 많이 달라집니다. 원관념만 많이 드러내고 보조관념은 조금만 드러낸 시와, 원관념은 조금 드러나고 보조관념이 많이 드러난 시는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아주 조화를 이루어서 균형 잡히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를 구별하면 다음과 같이 되겠지요.   -원관념을 더 많이 드러낸 시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비슷하게 드러난 시 -보조관념을 더 많이 드러낸 시   이렇게 하면 셋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 사이사이에도 무한정으로 종류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무지개는 일곱 색깔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 사이사이에 무수히 색깔이 들어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컨대, 이런 식이지요.   -원관념 10% + 보조관념 90% -원관념 20% + 보조관념 80% -원관념 30% + 보조관념 70% -원관념 40% + 보조관념 60% …………… -원관념 90% + 보조관념 10%     물론 이 사이에도 계속 숫자를 잘게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게 현실 속에서 정확히 그숫자만큼 달아서 시를 판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요. 이론상으로는 그렇다는 얘깁니다.   게다가 이것을 위의 분류와 결합시키면 시의 가짓수는 무한대에 가깝게 많아집니다. 그것을 다 다루어 볼까요? 어때요? 머리가 딱딱 아프지요?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앞서 말한 세 가지 방법만 기억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상황에 따라서 섞여서 나타난다고 보면 간단합니다. 5)퇴고하기     시에서 이미 써놓은 작품에 손을 대거나 고치는 것을 퇴고(推敲)라고 합니다. 물론 한자말이죠. 이 말은 중국의 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아니! 이 어려운 말은 쉬운 말로 바꿔 쓸 생각을 안 하셨나요? 더욱이 남의 것을 갖다 쓰는 것은 더 싫어하시면서. 이렇게 물을 사람이 있을 법도 합니다. 없다구요? 없으면 말구요. 하하하.   사람이 하는 일이 전문화가 이루어지다 보면 불가피하게 어려운 용어가 등장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말을 쓰지 않고 전문용어를 쓴다고 해서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자꾸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일반인들이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자기들이 하고 있다는 식의 권위를 세운다든지, 그것을 바탕으로 일반인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한다든지 하는 것 말입니다. 법률 용어나 의학 용어를 보면 이런 혐의를 지울 수 없습니다.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가피한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영어나 한문 같은 어려운 말을 써서 일반인들이 따라가기 참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뜻 보면 이 퇴고라는 말도 그렇게 보입니다. 어려운 말이지요. 그 말이 생겨난 사연까지 알아야 하는 경우니까요. 그런데 이 말에 작품을 고치는 어떤 아름답고 인간미 넘치는 사연이 들어있다면 어떨까요? 그런 사연으로 인해서 시 쓰는 사람들 사이에 관습으로 전해졌다면, 그 아름다운 사연을 기억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어요? 그런 말들은 좀 어렵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그 사연을 좀 보겠습니다.     옛날 당나라 말기에 가도(賈島)라는 중이 있었습니다. 이 중이 나귀를 타고 가다가 기가 막힌 시 한 구절을 얻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새는 연못가 나무에 깃들고,(鳥宿池邊樹)     중은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린다.(僧敲月下門)   어때요? 길을 가다가 저녁때가 되면 시인으로서 이런 생각을 할 법하지 않은가요? 그런데 써놓고 나니 이 자가 문제였습니다. 중이 문 앞에 서서 인기척을 낼 때 두드린다고 하는 것이 더 좋을까, 민다고 하는 것이 더 좋을까 잘 판단이 서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귀 위에서 직접 동작을 해보았습니다. 미는 동작을 했다가 두드리는 동작을 했다가, 이렇게 혼자 움직이고 흥얼거리며 어떤 글자를 쓸까 골똘히 고민하는 사이 나귀는 등에 탄 사람이 방향을 가르쳐주지 않자 엉뚱한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나귀가 간 곳은 공교롭게도 경윤의 행렬이었습니다.   경윤(京尹)은 요즘으로 치면 서울시장쯤 됩니다. 당시 서울을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가 호위군사를 대동하여 지나가는 행렬로 밀고 들어간 것입니다. 당연히 소란이 일었지요. 으리으리한 원님 행차가 지나가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은 어디에 온 줄도 모르고 밀고 두드리는 동작을 하면서 흥얼거리고 있으니 미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겠어요? 시위들이 당장 붙잡아서 경윤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러자 그 경윤은 어찌 된 사연이냐고 물었고, 가도는 시 구절에 들어갈 말을 고르지 못해서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그랬다고 사연을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경윤은 어떤 구절이냐고 물었고, 가도는 앞의 두 구절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구절을 한참 생각하던 그 경윤은 가 더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 경윤은 누구냐 하면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유명한 한유라는 선비였습니다. 다행히도 그 나귀는 가도라는 이름 없는 한 중을 당시의 대학자이자 높은 벼슬아치에게 데려가 소개를 해준 셈입니다. 아주 묘한 인연이지요. 사정이 이쯤 되니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어떻겠어요? 당연히 친해졌겠지요? 이 사연을 전해주는 이야기책의 끝 구절이 ‘드디어 함께 고삐를 나란히 하여 돌아갔다’(遂與竝轡而歸)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그 뒷이야기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한유의 권유로 이 중은 환속하여 나중에 벼슬생활을 합니다. 이 사건으로 한유의 명성 덕분에 단숨에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시가 지닌 경향은 다소 달랐습니다. 한유는 당나라 말기의 시 풍조가 화려한 표현을 좋아하는 쪽으로 흘러가자 그것을 비판하면서 꾸밈이 없는 옛날 한나라 때의 순수한 분위기로 돌아가자는 쪽이었고 가도는 당시 화려한 재주를 한껏 뽐내며 멋을 부리는 쪽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친다는 뜻으로 쓰는 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가도가 로 할 것이냐 로 할 것이냐 고민하듯이 정성 들여서 고친다는 뜻이 담긴 말이지요. 이 정도면 아름다운 일 아닌가요? 그래서 라는 말보다는 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기억하는 일이야말로 시를 생각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퇴고를 하는 방법에 무슨 왕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그리고 많이 쓰다 보면 저절로 고치는 요령이 생기는 법입니다. 이런 일에 수학 문제 풀 듯이 어떤 방법이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죠. 시는 이 세상에는 없는 마음속의 느낌을 언어에 담아서 질서화 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많이 쓰다 보면 저만의 어떤 원칙이 생기는 것이고, 그것을 창작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무언가 기댈 언덕은 있어야겠죠? 먼저 시를 쓸 때는 발상을 메모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메모를 마친 다음에 그 시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 하는 것을 찾아봅니다. 쉽게 말하면 주제를 찾는 것입니다. 처음 시상이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는 주제가 분명하게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상상만으로도 존재하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대부분의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제입니다. 나머지 표현 방법들은 이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표현은 이 시의 주제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 작용한다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발상을 메모했으면 주제를 한 번 더 생각하고, 그 주제에 맞는 내용을 보충합니다. 이 때의 내용이란 주제를 보충해주는 할말도 포함되고 거기에 필요한 표현이나 장식도 포함됩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는 다시 처음부터 읽어가면서 주제를 전달해주는데 잘 어울리는 이미지들은 놔두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잘라버립니다. 라고 하는 것은, 표현이 아깝다고 그대로 두지 말라는 얘깁니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표현을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평상시에도 이런저런 좋은 표현들을 머릿속에 담아두었다가 시에 필요할 때 쓰죠. 좋은 표현을 얻는 일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애써 얻은 구절들은 버리기 아까워하죠. 그렇다고 그대로 두면 바로 그 아까운 구절 때문에 시 전체의 초점이 흐려집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버린다고 해서 영원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나중에라도 다시 쓰는 날이 생기니 염려 말고 지금 당장은 과감하게 버리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읽어가면서 부족한 부분은 표현이든 주제든 추가시킵니다. 그리고 다시 읽어 가면서 다듬으면 됩니다. 그리고 반드시 소리 내어 읽어야 합니다. 몇 차례 소리 내어 읽다 보면 읽어가면서 가락도 생기고 눈으로 볼 때와는 또 다른 단점들이 눈에 띕니다.   이상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① 발상부터 재빨리 적는다. ② 초고를 보면서 시의 주제를 명확히 정한다. ③ 그 주제를 중심으로 이미지를 재배치한다. ④ 불필요하거나 조금 거리가 먼 이미지나 표현은 과감하게 잘라낸다. ⑤ 다시 읽으면서 부족한 주제나 표현을 보충한다. ⑥ 세밀한 부분을 다듬는다. ⑦ 몇 차례 소리 내어 읽는다.   그러면 퇴고의 과정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비유로 쓰는 동일시의 시학을 소개하면서 이란 작품을 소개했습니다. 그 작품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목이 삐끗해서 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고 내 몸 속의 뼈가 드러난 그 사진을 보면서 쓴 시입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어떤 할 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을 대충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내가 여태까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 알고 보니 공룡이다. 흉측한 모든 뼈대를 살가죽으로 덮고 헝겊으로 잘 싸기까지 한 저 백악기나 쥐라기의 한 공룡이다.   정형외과에서 찍은 엑스레이 사진에 내 본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등뒤로 살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목뼈부터 등뼈까지 날개처럼 돋친 스테고사우루스 뼈들의 나열. 엑스레이 앞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니까 이제야 풀린다. 옷으로 덮어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던 탐욕과 주머니에 든 송곳처럼 밖으로 치솟던 공격성과 난폭함 이런 것들은 공룡한테 당연한 것이다. 어디서 말미암은 것인지 분명해진다.   수 억 년이 지났는데도 완전히 퇴화하지 못한 채 내 살과 가죽 속에서 으르렁거리며 한 마리 공룡이 깃들어있다.     먼저 형광 사진에서 본 뼈를 통해서 나를 공룡으로 규정을 하고, 그 모습의 실상을 제시한 다음에, 내 속의 난폭성이 공룡에서 왔음을 말한 다음에, 그런 공룡이 내 몸 속에 들어있다고 제시하고자 한 방법입니다. 그 순서대로 정리됐죠.   그런데 좀 거칩니다. 이렇게 제시하면 뭐 시라고 못 할 것까지는 없지만 잘 썼다고 보기는 힘들겠죠. 이렇게 네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독자가 아무런 불편도 느끼지 못하고 저절로 따라가게 하려면 이 비약과 비약 사이를 좀 더 매끈하게 연결시켜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제입니다. 이 정도에서도 주제가 분명하기는 합니다. 육식공룡의 탐욕성이 내 안이 있다는 것이죠. 그 탐욕성에 대한 설명이 그냥 뼈대만 나와 있어요. 그래서 공룡과 인간의 탐욕성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부분에 대한 추가설명과,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표현하는 것이 이번 퇴고의 목적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쳤습니다.   나는 내가 여태까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 알고 보니 공룡이다. 약육강식이 판을 치던 저 쥐라기나 백악기의 한 지층에서 살아온 한 마리 육식공룡임을 정형외과에 와서 알았다. 엑스레이선이 통과한 뒤 형광불로 밝혀진 벽에 드러나는 나의 본모습. 비록 살가죽으로 뼈대를 싸고 그럴듯한 헝겊으로 덮기는 했지만, 정형외과의 형광벽이 흑백으로 밝혀주는 나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살에 가려서 거울로는 볼 수 없었지만 목에서부터 등을 거쳐 꼬리까지 날개처럼 돋친 스테고사우루스의 화려한 뼈들이 엑스레이 필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제야 모든 의문이 스르르 풀린다. 내 마음속엣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던 탐욕과 옷으로 덮어도 송곳처럼 밖으로 치밀던 공격성, 약자한테 강하고 강자한테는 약한 비굴함까지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불분명하던 것들이 질서정연한 뼈와 뼈 사이로 가지런하게 이제야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꼬리의 뿔은 꼬리뼈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지만 수십 억 년이 지난 지금에도 내 살과 살갗 속에서 으르렁거리며 한 마리 공룡이 깃들어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연을 없앴다는 겁니다. 연은 의미와 이미지를 구성하는 한 매듭입니다. 대개는 연을 넘어갈 때 상상력의 비약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상상력의 비약이라고는 두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몸의 뼈 배열이 공룡의 뼈와 같기 때문에 공룡의 탐욕성이 내게도 남아있다는 두 가지입니다. 그러니 이 두 상황을 설명하려면 시가 길어질 것이고, 시가 길어진 것에서 굳이 연을 나누어야 좋은 효과를 얻기 어렵다고 본 것이죠. 차라리 설명하듯이 끌고 나가면서 두 가지를 서로 대비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연을 없애고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놓고 나니까 좀 더 상황이 자세하게 설명되었고, 또 이 시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주제도 명확히 잡혔습니다. 그런데 너무 길어졌고, 또 설명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앞쪽의 든가 든가, 다든가, 라든가 하는 것의 거의 산문 수준입니다. 그래서 산문 투의 문장을 없애고 군더더기를 조금 덜어내는 작업이 남았습니다. 아래의 작품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드러날 것입니다.     공룡   나는 내가 여태까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 알고 보니 공룡이다. 살가죽으로 뼈대를 싸고 그럴 듯한 헝겊으로 몸뚱이를 덮었지만 정형외과의 형광벽에 비친 나는 쥐라기나 백악기 어느 한 지층 속에 납작하게 박혀있어야 할 한 마리 공룡. 목에서부터 등마루를 거쳐 꼬리까지 날개처럼 돋친 스테고사우르스의 화려한 뼈들이 흑백의 필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수억 년 내력의 탐욕과 난폭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 뼈들의 행렬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니 이제서야 모든 의문이 스르르 풀린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은데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던 물욕과 옷 밖으로 송곳처럼 치밀던 공격성, 그리고 약자한테 강하고 강자한테 약한 비굴함까지 도대체  내 마음 어느 구석에서 말미암는지 알 수 없던 것들이 공룡의 뼈들 사이로 분명히 드러난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큰 코 다칠 것임을 예고하며 등줄기 따라 톱날처럼 뻗어간 우람한 뼈들.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꼬리 끝의 뿔은 엉덩이 밑의 꼬리뼈 속으로 완전히 감추었지만 수십 억 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혀 진화하지 못한 채 한 마리 공룡이 내 몸 안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다.     문장의 배열 구조가 바뀌고 위치가 바뀌면서 좀 더 단정해졌다는 느낌이 올 것입니다. 형광벽에서 공룡의 뼈를 연상하고 그것을 정신세계까지 연장하여 욕망과 탐욕에 시달리는 나, 나아가 인간의 속성을 고발하고자 한 작품이 된 것입니다. 큰 뼈대는 변하지 않았지만, 중간중간의 말투나 문장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 바뀐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시를 고치는 방법에 대한 암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많이 써나가는 과정에서 이런 점들을 터득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앞에서부터 시에 천재가 없다고 자꾸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과정 때문입니다. 발상은 천재성으로 얻는 것일 수 있지만, 이런 것은 천재성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실하지 않으면 천재 역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충북 보은에 가면 장안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인내천을 기치로 내건 동학의 출발점이 된 곳이죠. 원래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은 경주사람이었습니다. 창시자 최제우의 후계자였죠. 그런데 동학을 혹세무민하는 종교로 규정한 관청의 탄압을 피해 깊은 산중으로 숨었습니다. 북으로 올라가서 소백산 기슭의 마을에 숨었다가 다시 백두대간 줄기를 타고 내려오다가 보은의 깊은 산 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숨어 지냅니다. 교세가 확장되자 신도들은 억울하게 죽은 그들의 초대교주 최제우의 죄를 풀어달라는 신원운동을 합니다. 초대교주 신원운동을 하려면 2대교주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그러려면 그가 사는 곳으로 모여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각 지역의 동학 지도자들은 최시형이 살던 보은으로 모여듭니다. 그리고는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논의를 하게 됩니다. 바로 그곳이 장안입니다.   이 신원운동을 시발점으로 하여 한국의 근대사는 벌집을 쑤셔놓은 모양으로 요동을 치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동학농민전쟁이 그것입니다. 정부는 백성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탐관오리들은 날뛰고 하니 참을 수 없는 백성들은 무기를 들고일어납니다. 그리고 청나라와 일본군까지 가세한 정부군을 상대로 몇 년에 걸쳐 전쟁을 하지요. 그리고는 쫓기고 쫓긴 농민군이 다시 보은의 북실이라는 곳에 와서 마지막으로 궤멸 당하고 맙니다. 이 북실이라는 곳은 장안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습니다. 동학농민전쟁의 시작과 끝이 충북 보은이라는 곳에 있는 셈입니다.   지금 북실에는 종곡초등학교가 있습니다. 종곡은 한자로 이라고 쓰는데 북의 골짜기라는 뜻이죠. 당연히 을 한자로 번역한 것입니다. 동네 이름도 종곡리입니다. 이 학교에 볼 일이 있어 들렀다가 그곳이 바로 그 북실임을 알고는 머릿속이 텅 비면서 한 가지 시상이 문득 스쳤습니다. 북실, 북처럼 생긴 동네. 그런데 북은 소리를 내서 무언가를 알려주는 도구입니다. 그렇다면 그 북은 천지개벽을 알리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그것은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동학의 의미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학은 잠든 백성들의 마음속에 천지개벽의 기쁨을 알리는 종교였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죽은 곳이 북실이라면 그들의 행동과 사상을 북이라는 도구에 상징화 시켜서 시로 쓴다면 아주 적절한 비유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퍼뜩 스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재빨리 그 발상을 메모지에 썼습니다.   천지개벽을 알리는 커다란 쇠북이 이 골짜기 어딘가에 묻혀있다네. 저 어두운 세상에 누군가 남아있을까 두려워 귀머거리도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를 내기 위하여 온 신명으로 소리를 내려다가 깨진 북. 여기까지 오는데 100년이 걸렸네. 100년 전의 자취 찾아볼 수 없어도 어디선가 쇠북소리 들리네.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들리고 여인의 소맷자락에서 들리고 소달구지, 뛰노는 아이들 골짜기 전체가 큰 북이 된다.   이렇게 썼습니다. 중요한 것은 골짜기 전체를 북으로 묘사하고 그 북을 천지개벽을 알리는 어떤 상징물로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북을 상징물로 사용하되 거기에 어떤 주제를 넣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동학농민전쟁은 백성들의 자신들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일어선 것이고, 그것은 곧 민주주의를 뜻할 것입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도 백성들은 관료들과 정치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삽니다. 완전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죠. 입으로는 백성들의 심부름꾼으로 자처하면서도 국회의원이 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뇌물 받아먹다가 검찰에 붙잡혀가고, 대통령이 되고 나면 공약은 기억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일들이 소란스럽게 일어나는 꼴을 우리는 매일 안방의 텔레비전에서 봅니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도 당시의 실패한 혁명을 얘기하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이루어야 할 민주주의 내지는 백성들의 나라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방향으로 내용을 대폭 추가시켰습니다.   천지개벽을 알리는 커다란 쇠북이 이 골짜기 어딘가에 묻혀있다네. 새로운 시대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저 어두운 세상에 누군가 남아있을까 두려워 귀머거리도 듣게 하기 위하여 온 신명으로 소리를 내려다가 깨진 북. 그 북소리 다시 들으려 만장의 물결 앞세우고 여기까지 오는데 100년이 걸렸네. 한 번 열린 세상은 다시 닫히지 않는 법이니 만장의 물결 따라 어디선가 북소리 들린다. 처음엔 두근두근 심장 박동소리 같다가 한 사람의 한 발자국 모으고 두 사람의 두 발자국 모아서 조금씩 커진다. 개벽을 알리기 위해 기꺼이 깨진 100년 전의 북이 공명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하늘을 모신 마음속에서 둥 두둥 운다. 마음의 골짜기에서 큰 북이 울다가 골짜기 전체가 큰 북이 된다.   이 정도 되면 일단 주제는 확정됐고, 발상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셈입니다. 2000년에 보은에서 작은 행사가 열렸습니다. 동학군들의 넋을 추모하는 행사였습니다. 그러니 거의 100년만에 보은에서 죽은 동학군들을 위로하는 행사가 열린 것이지요. 는 것은 그것을 암시하기 위해 집어넣은 말입니다. 그렇지만 시에서는 꼭 그 사건이나 행사를 얘기하는 것만은 아니고, 이 시를 쓰거나 읽는 사람들의 현재와 연결시켜주는 구실을 하지요.   그런데 어딘가 좀 산만하지 않은가요? 할 말만 제시되어 그렇습니다. 이 산만함을 없애려면 상상해간 방향을 뚜렷이 드러내야 하고 그에 따라 주제를 아울러 더 드러내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시상의 전개 방법과 순서를 좀 더 뚜렷이 하는 것입니다.   북실에서 천지개벽을 알리는 북을 떠올렸습니다. 그 북소리를 사람들은 듣기도 하고 못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들어야 할 내면의 소리입니다. 그 소리를 들으러 북실에 왔고, 민주주의의 의미를 기억하는 현재의 시점으로 보면 100년만에 그들을 그런 의미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그렇게 보겠죠. 현재 북실에는 그들의 흔적을 찾아볼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도 아울러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의미가 있다는 얘기도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설득하면 안 되고 북이라는 상징물에 실어야 하지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북이라는 사물을 묘사해주면 됩니다. 앞의 글도 그런 방향이 어느 정도 잡혀있지만, 조금 불투명하지요. 그래서 시가 좀 산만한 겁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생각을 좀 더 자세하게 정리하면서 이렇게 완성했습니다.   북실   천지개벽을 알리는 커다란 쇠북이 이 골짜기 어딘가에 묻혀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새 세상 밖에 누군가 남아있을까 두려워 귀머거리라도 들을 큰 소리를 내려고 온 신명으로 부딪다가 깨진 북. 그 북소리 다시 들으려 만장의 물결 앞세우고 여기까지 오는데 1백년이 걸렸다. 솔잎죽창이 삭풍과 싸울 뿐 백년 전의 자취 찾아볼 길 없어도 한 번 열린 세상은 다시 닫히지 않는 법이니 눈을 감고 가만히 귀 기울이면 어디선가 북소리 들린다. 처음엔 두근두근 심장 소리 같다가 모여드는 발자국들 따라 공명을 일으키며 커지다가 마침내 세상을 삼켜버리는 큰 울림. 개벽을 알리기 위해 백년 전에 깨어진 북이 묻힌 마음의 골짜기에서 북이 운다. 큰 북이 울리며 골짜기 전체가 큰 북이 된다.     한결 단정해졌음을 느낄 것입니다. 이런 뼈대를 만들어 가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오랜 훈련을 거치고 연습을 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자꾸 반복하다 보면 저절로 요령이 생깁니다. 여러분은 갑자기 천재가 되려 하지 말고 꾸준히 연습해서 좋은 시를 쓰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송나라 때 적벽부라는 유명한 시를 쓴 소동파라는 선비가 있습니다. 이름은 식이고 동파는 호죠. 그런데 이 사람은 평소 자기가 시의 재주를 타고났다고 큰소리 쳤던 모양입니다. 하루는 친구들이 찾아갔는데, 시를 보여주더랍니다. 그게 저 유명한 적벽부라는 시입니다. 삼국지의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한 그 적벽인데, 그곳을 유람하고 난 뒤의 소감을 시로 쓴 것입니다. 친구들이 명작이라고 모두 찬탄을 했습니다. 그런데 소동파는 그것을 단 한번의 가감도 없이 한 달음에 써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천재성을 자랑하려고 했던 것이죠.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은 더욱 감탄했습니다. 그러는 벗들을 바라보며 우쭐거리는 소동파의 모습에 눈앞에 선합니다. 잠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소동파가 다른 일로 잠깐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 사이에 친구들이 혹시 다른 글이 없나 하고서 소동파가 앉았던 자리를 살펴보니 방석 밑으로 무슨 종이가 삐죽 나와있는 겁니다. 꺼내보니 거기에는 방금 보여준 적벽부를 고친 흔적이 역력한 글들이 수북이 쌓여있더랍니다. 적벽부를 고치다가 친구들이 오자 얼른 방석 밑으로 숨긴 것이죠. 소동파 역시 자기 재주를 한껏 자랑하고픈 마음을 지닌 평범한 사람임을 이런 데서 깨닫습니다.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고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말로 퇴고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481    시는 극점에 달한 미적 언어이다... 댓글:  조회:2574  추천:0  2017-05-19
.. 늙은 사람 한 가지 즐거운 것은 붓가는 대로 마음껏 써 버리는 일. 어려운 韻字에 신경 안 쓰고 고치고 다듬느라 늙지도 않네. 흥이 나면 당장에 글로 옮긴다. 나는 본래 조선사람 즐겨 조선의 詩를 지으리. 그대들은 그대들 법 따르면 되지 이러쿵저러쿵 말 많은 자 누구인가. 까다롭고 번거로운 그대들의 格과 律을 먼 곳의 우리들이 어떻게 알 수 있나. ―정약용 「老人一快事」 붓놓자 풍우가 놀라고 시편이 완성되자 귀신이 우는구나 筆落驚風雨 詩成泣鬼神 ―杜甫 시 3백수에는, 한마디로 말한다면 사악함이 없다. ―공자 『논어』 爲政篇 그대들은 왜 시를 공부하지 않느냐? 시는 사람에게 감흥을 돋우게 하고 모든 사물을 보게 하며, 대중과 더불어 어울리고 화락하게 하며, 또 은근한 정치를 비판하게 하는 것이다. 가깝게는 어버이를 섬기고, 나아가서는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시에서 배울 수 있으며, 또한 시로써 새나 짐승, 풀, 나무들의 이름도 많이 배우게 될 것이다. ―공자 시란 뜻(志)이 향해 가는 바라, 마음 안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나타내면 시가 된다. ―공자 고시(古詩)는 충후(忠厚)를 주로 했다. 시라는 것은 언어만 가지고 구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언제나 깊이 그 의도를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기평(譏評)할 때에는 그 소위(所爲)의 악을 얘기하지 아니하고 그 벼슬의 존비와 차안의 미려를 들어 백성의 반응을 주시하여야 하는 것이다. ―소식 시란 정(情)을 뿌리로 하고 말을 싹으로 하며, 소리를 꽃으로 하고 의미를 열매로 한다. ―白居易 시란 말의 뜻을 나타내고 노래란 말을 가락에 맞춘 것이다. 소리는 길게 억양을 붙이는 것이고 가락은 소리가 고르게 된 것이다.―유협 『문심조룡』 시는 의(意)가 주가 되므로 의를 잡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맞추는 것은 그 음이다. 의도 또한 기(氣)를 위주로 한다. 기의 우열에 따라 의의 깊고 옅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기란 천성(天性)에 딸린 것이어서 배워서 이룰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가 떨어지는 사람은 글 다듬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의를 앞세우지 않는다. 대체로 글을 깎고 다듬어 구(句)를 아롱지게 하면 아름다움에는 틀림 없다. 하나 거기에 심후한 의가 함축되어 있지 아니하면 처음에는 볼 만하나 다시 씹어보면 맛이 없어져 버린다. ―이규보 시에는 마땅치 못한 아홉 가지 체가 있다. 이것은 내가 깊이 생각하여 체득한 것이다. 시 한 편 속에 옛사람의 이름을 많이 사용한 것은 수레에 귀신을 가득 실은 것, 옛사람의 뜻을 몰래 취해 쓰는 것은 도둑질을 잘한다고 해도 옳지 않은데 도둑질이 서투르면 이것은 서툰 도둑질이 잘 잡히는 것, 강운으로 압운하여 근거가 없으며 이것은 쇠를 당기나 이기지 못하는 것, 재주는 헤아리지 않고 지나치게 압운하면 이것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험벽한 글자를 쓰기 좋아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미혹하게 하는 것은 구덩이를 파놓고 장님을 인도하는 것, 말이 순편하지 않으면서도 같은 사람에게 쓰기를 강요하는 것은 억지로 자기를 따르게 하는 것, 일상용어를 많이 쓰는 것은 촌사람이 이야기하는 것, 공자나 맹자를 범하기 좋아하는 것은 존귀함을 함부로 범하는 것, 글이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은 잡초가 밭에 가득한 것이다. 이 마땅하지 못한 체격을 면할 수 있게 되면 함께 시를 이야기 할 수 있다. ―이규보 시문은 기를 위주로 삼는다. 기는 성(性)에서 발하고 의(意)는 기에 의지하며,말은 정(情)에서 나오므로 정이 곧 의이다. 그러나 신기한 뜻은 말을 만들기 어려우므로, 서두르면 더욱 생소하고 조잡해지는 것이다. ―최자 시는 마음에서 우러난다고 한 것이 믿을 만하다.―이인로 『破閑集』 시는 함축되어 드러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희미한 글, 숨은 말로서 명백하고 통쾌하지 않은 것은 또한 시의 큰 병통이다. ―서거정 『東人詩話』 시가 교화를 위한 것이라는 뜻은 본래 온유 돈후한 시정신으로써 성정을 다스려서 풍화(風化)를 이루게 하며, 사람의 마음을 감화하여 세상의 도리를 평정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남구만 시는 성정의 허령(虛靈)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유몽인 시는 성정을 나타내는 것이다.―이의현 시는 원리와는 관계 없는 별종의 취향을 갖고 있다. 오직 천기(天機)를 농(弄)하여서 심원한 조화 속을 파악하여 정신이 빼어나고 음향이 밝으며 격이 높고 생각함이 깊으면 가장 좋은 시가 된다. ―허균 시란 사람의 천성과 정서를 조정하고 인간관계를 향상시킬 수 있어야 한다. ―심덕잠 지금 우리 나라의 시와 문장은 고유의 언어를 버리고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워서 쓴 것이다. 가령 아주 흡사해진다 해도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김만중 무릇 시에 있어서는 자득(自得)이 귀하다.―이수광 시란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적은 것이다. 마음 속에 있으면 지(志)라 하고 말로 표현하면 시가 된다. 정(情)이 마음 속에 움직일 때, 시인은 그것을 말로써 표현한다. ―신위 시는 교화(敎化)하는 것이니 힘써 그 뜻을 전달해야 한다. ―이익 임금을 사랑하지 않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어지러운 시국을 아파하지 않고 퇴폐적 습속을 통분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단 진실을 찬미하고 거짓을 풍자하거나 선을 전하고 악을 징계하는 사상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정약용 『목민심서』 시는 대개 정신과 기백이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정약용 시에는 신비한 정신의 경지가 있는데 이것은 무형 중에 우거(寓居)하면서 갑자기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지기 때문에, 우연히 만나면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는 찾아보려고 해도 얻을 수 없다. ―신광수 보기 좋은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모아놓고 시라고 하는 것이야 비천한 잡배의 장난에 불과하다. 시는 선언이다. 만천하의 현재 뿐 아니라 진미래제(盡未來際)까지의 중생에게 보내는 편지요, 선언이요, 유언이다. ―李光洙 시는 그 시인의 고백이다. 신의 앞에서 하는 속임 없는 고백이다. 구약에 시편만이 아니라 무릇 시는 시인의 심정 토로다. 시인은 시에서 거짓말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신을 기만하는 것이다. ―李光洙 시인이 창작한 제2의 자연이 시다.―조지훈 시는 신(神)의 말이다. 그러나, 시는 반드시 운문(韻文)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는 곳곳에 충일(充溢)한다. 미와 생명이 있는 곳에 시가 있다. ―I.S.투르게네프 『루진』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 ―F.Q.호라티우스 『詩法』 시의 목적은 진리나 도덕을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보들레르 기쁨이든 슬픔이든 시는 항상 그 자체 속에 이상을 쫓는 신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보들레르 시는 진리가 그 목적이 아니다. 시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보들레르 시를 쓰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그건 낚시질하고 똑 같네. 아무 소용이 없는 것같이 보이지. 허지만 그래도 그것이 좋은 수확이 되는 법이거든. ―E.크라이더 『지붕밑의 무리들』 시는 넘쳐 흐르는 정감의 힘찬 발로이다.―워즈워드 시는 체험이다.―R.M.릴케 시는 악마의 술이다.―A.아우구스티누스 시란 것은 걸작이든가, 아니면 전연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J.W.괴에테 위대한 시는 가장 귀중한 국가의 보석이다.―L.베에토벤 시는 거짓말하는 특권을 가진다.―프리뉴스2世 시는 의미할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한다. ―머클리쉬 시는 단지 그 자체를 위해 쓰여진다.―E.A.포우 시는 예술 속의 여왕이다. ―스프랏트 시는 마치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은 것이다. ―R.M.릴케 시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은 아니다. 시가 만일 감정이라면 나이 젊어서 이미 남아 돌아갈 만큼 가지고 있지 않아서는 안된다. 시는 정말로 경험인 것이다. ―R.M.릴케 『말테의 手記』 시는 단 하나의 진리이다.……명백한 사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전한 마음의 표현이다. ―에머슨 시는 최상의 마음의 가장 훌륭하고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하나의 시란 그것이 영원한 진리로 표현된 인생의 의미이다. ―P.B.셸리』 감옥에서는 시는 폭동이 된다. 병원의 창가에서는 쾌유에의 불타는 희망이다. 시는 단순히 확인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재건하는 것이다. 어디에서나 시는 부정(不正)의 부정(否定)이 된다. ―보들레르 『로만파 藝術』 시란 냉랭한 지식의 영역을 통과해선 안된다.……시란 심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곧바로 마음에로 통해야 한다. ―F.실러 시란 가장 간단히 말해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이고 다양하게 효과적으로 사물을 진술하는 방법이다. ―M.아놀드 시적(詩的)이 아닌 한, 나에게 있어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A.지이드 『私錢쟁이』 시는 모든 예술의 장녀(長女)며 대부분의 사람들의 양친이다. ―콩그레브 만약 사람이 마력적인 시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그때부터 그대는 아름다운 생(生)을 알게 된다.―J.아이헨돌프 도덕적인 시라든가 부도덕적인 시라든가에 대해서 말할 것은 아니다. 시는 잘 씌어져 있는가 아니면 시원찮게 씌어져 있는가, 그것만이 중요하다. ―O.와일드 『英國의 르네상스』 시는 힘찬 감정의, 위세 좋은 충일(充溢)이다. 그 원천은 조용히 회상된 감동이다. ―O.와일드 『英國의 르네상스』 나이 어려서 시(詩)를 쓴다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은 없다.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기다리지 않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그것도 될 수만 있으면 70년, 혹은 80년을 두고 별처럼 꿀과 의미(意味)를 모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최후에 가서 서너 줄의 훌륭한 시가 써질 것이다. ―R.M.릴케 『말테의 手記』 시는 근본적인 언어 방법이다. 그것에 의해 시인은 그의 사상과 정서는 물론 그의 직각적 매카니즘을 포착하고 기록할 수 있다. ―M.무어 시는 오직 인간의 능력을 발양(發揚)하기 위해서 우주를 비감성화시킨 것이다. ―T.S.엘리어트 『超現實主義 簡略事典』 시란 감정의 해방이 아니고 감정으로부터의 탈출이며, 인격의 표현이 아니고 인격으로부터의 탈출이다. ―T.S.엘리어트 『傳統과 個人의 才能』 시의 세계로 들어 온 철학 이론은 붕괴되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이 진리이건 우리가 오류를 범했건 그런 것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으며 의미하는 그 진리가 영속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T.S.엘리어트 『評論選集』 시의 의미의 주된 효용은 독자의 습성을 만족시키고 시가 그의 마음에 작용하는 동안 정신에 대해서 위안과 안정감을 주는 데 있다. ―T.S.엘리어트 『詩의 효용과 批評의 효용』 시란 무엇은 사실이다 하고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좀더 리얼하게 느끼도록해 주는 것이다. ―T.S.엘리어트 시는 미에 있어서의 참된 집이다. ―킬피란 우리의 일상 생활의 정서 생활과 시의 소재 사이엔 차이가 없다. 이러한 생활의 언어적 표현은 시의 기교를 사용하게끔 되어 있다. 이것만이 단지 근본적인 차이일 뿐이다. ―I.A.리차아드 시는 우리들이 익숙해서 믿어버리고 있고 손쉽게 가깝고 명백한 현실에 비해서 무엇인가 비현실적인 꿈 같은 느낌을 일으킨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뒤바뀌어진 것으로서 시인이 말하고 시인이 이렇다고 긍정한 것 그것이야말로 현실인 것이다. ―M.하인거 『횔더린과 詩의 本質』 시는 법칙이나 교훈에 의해 완성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감각과 신중함에 의해 완성될 수 있다. ―J.키이츠 아무리 시시한 시인이 쓴 글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정말로 그를 이해한다면 좋은 시를 얼핏 읽어버림으로써 받은 인상보다야 훨씬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나. 내가 시를 읽고 싶지 않을 때, 시에 지쳤을 때, 나는 항상 자신에게다 그 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타이르는 바일세. 또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대단히 아름다운 감정이 내 마음 속에서 진행 중일 것이라고 타이르기도 하네. 그래서 언젠가 어느 순간에 내가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있어 그 훌륭한 감정을 꺼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네. ―J.러셀 『사랑이 있는 기나긴 對話』 시는 보통의 이성의 한계를 지닌 신성한 본능이며 비범한 영감이다. ―스펜서 시는 시인의 노고와 연구의 결과이며 열매이다.―B.존슨 시의 으뜸가는 목적은 즐거움이다. ―J.드라이든 한 편의 시는 그 자체의 전제(前提)를 훌륭하게 증명해 놓은 것이다. ―S.H.스펜더 『시를 위한 시』 18살 때 나는 시라는 것은 단순히 남에게 환희를 전달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살 때, 시는 연극이라는 걸 깨달았지요. 나는 가끔 시를 갱도(坑道)속 함정에 빠져서 미칠 것 같은 불안 속에서 자기를 구출해 줄 다른 갱부들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사람에게 생기를 주는 희망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시인은 성자여야 합니다. ―P.토인비 『J.콕토와의 인터뷰』 시란 삶을 육성시키고 그리고 나서 매장시키는 지상의 역설이다. ―K.샌드버그 시의 본질은 동작이다. 이 동작은 내적 완전을 나타내고 이 내적 완전이 참으로 인간적이고 또 진실이기 때문에 참으로 시적인 성격은 위대한 격정의 자유로운 움직임 가운데 나타난다. ―네싱 시적 형식은 본질이 무엇이든 시가 문학의 특수한 형식으로서 쾌락을 주는 근원은 변화에 의한 반복성에 있다. ―R.E.앨링턴 한 줄의 글자와 공백으로 구성되는 싯귀는 인간이 삶을 흡수하고 명확한 말을 되찾아 내는 이중의 작용을 한다. ―클로델 시에는 그림이 있고, 그림에는 시가 있다. ―스카르보로 『중국격언집』 만약 시가, 위대한 그 무엇이 아니면 안된다면, 어느 의미에서 그것은 현대와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면 안된다. 그 제재가 무엇이든간에, 작자의 정신의 내부에 있는 산 그 무엇과, 그것이 전달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시로써 표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신체는 어디 있든간에, 그 혼은, 이곳에, 그리고 현재 있어야 하는 것이다. ―A.C.브래드레 시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이 단순히 감정이 아니다 .(감정이라면 우리들은 간단히 가질 수가 있다) 시는 경험이다. 한 편의 시를 쓰려면, 많은 도시를, 많은 사람들을, 많은 사물들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동물, 새의 날으는 모습, 아침에 피는 꽃의 상태 등을, 알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미지의 토지에 있는 도로, 우연히 만난 사람들, 애당초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이별, 기억도 확실치 않은 먼 어린 시절, 자기도 알지 못하였던 즐거움이며, 마음먹고 아버지 어머니가 주는 것을 반항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들에 공상의 힘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사람 각자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사랑하던 밤의 일, 분만하는 부인의 애끊는 절규. 어린애 침대에서 잠도 자질 못하고 창백하게, 그리고 잠들어버리는 부인들의 추억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땐, 들창을 열어 놓은 채, 계속적인 시끄러움이 들리는 방에서, 죽은 사람 곁에 앉아 있었던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만으로도 충분치 않다. 기억이 많이 있을 땐 잊어버리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하여 기억이 또 한번 떠 오를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이 우리들의 내부에서 피가 되어 명확히 이름지울 수도 없게끔 되어버리든가, 이미 우리들 자신과 구별할 수도 없게끔 되어버릴 때 ―그야말로 어느 순간 시의 최초의 한마디가, 기억의 한가운데 나타나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R.M.릴케 「말테의 수기」에서 시의 기능은 세계의 슬픔과 조화시키는 것이다. ―A.E.하우스만 시적 진실 ―‘개인적, 국부적인 것이 아니고, 보편적이며, 기능적인 것’ ―워즈워드 시는, ……인간의 마음의 제일 먼저의 활동이다. 인간은 일반적인 개념을 만드는 단계에 이르기 전에 상상상의 관념을 만든다. 명증한 마음으로 생각하기 전에 혼란한 머리로 파악한다. 명확하게 발음하기 전에 노래부른다. 산문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운문으로 이야기한다. 전문어를 쓰기 전에 은유를 쓴다. 말을 은유풍으로 쓴다는 것은 우리들이 ‘자연발생적’이라 부르는 것과 같이, 그에 있어서 자연인 것이다. ―G.B.비코 시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T.E.흄 시의 중요한 목적은 정밀하고 명확한 표현에 있다. ―T.E.흄 사랑받지 못한 해바라기가 아름답게 빛나고 씨를 가진 꽃만이 불꽃으로 반사한다. ―A.L.테니슨 시는 상징주의이기 때문에 우리들을 감동시킨다는 이론을 만약 사람들이 승인하지 않으면 안된다면 현대시의 양식 속에 어떠한 변화를 찾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것은 우리들의 선조들의 방법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즉, 자연을 위하여 자연묘사를, 도덕을 위하여 도덕율을, 그리고 테니슨의 경우 시의 중심이 되는 불꽃을 거의 다 깨버린 일화나, 과학적 의견에의 고려 등을 버리는 것이다. ―오든 시란 현존시에 붙어다니는 한낱 장식물에 그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일시적인 감격이나 감동에 그치는 바도 아니다. 더구나 한낱 열중에 빠지는 바도 아니며 오락물로 떨어져버리는 것도 아니다. 시는 역사를 지탱해주는 밑바탕이다. ―하이데거 산문시란 리듬과 각운이 없으면서도 음악적이고 영혼의 서정적 동요, 환상의 파동, 의식의 경련에 응답하기 위해 충분히 유연하고 충분히 거칠은 시적 산문이다. ―C.보들레르 ―『파리의 우울』(Spleen de Paris) ‘시―인스피레이션’의 공식을 믿는 시적 사고는 허망한 하나의 옛이야기가 되어도 좋다. 지적(知的)으로 확신되는 사상에만 정적(情的) 신앙을 주려는 폐습이 일부 사람들에게 굳게 뿌리 박혀 있다. 과학이 증대하여 힘과 그것은 장차 일반화하여 갈 것이다. ―L.A.리처즈 시는 최상의 행복, 최선의 정신, 최량이고 최고의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P.B.셀리 『詩歌擁護論』 시란 진리며 단순성이다. 그것은 대상에 덮여 있던 상징과 암유(暗喩) 의 때를 벗겨서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고 비정하고 순수하게 될 정도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J.콕토 『暗殺로서의 美術』 시란 그 시를 가장 강력하고 유쾌하게 자극하는 방법으로 사상의 심볼들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예술이다. ―W.C.브라이언트』 즉흥시는 진정 재지(才知)의 시금석(試金石)이다. ―J.B.P.몰리에르 서정시는 감정이 흘러 넘치는 청춘의 생명의 표현. 억제하려고 해도 억제할 수 없는 힘이며 열렬한 신앙의 발로다. 그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자연과 사랑과 신 등으로 작자의 모양이 십분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제1인칭의 시라고 해도 좋다. ―에론네스트보배 서사시의 흥미는 작자가 아니고 그 시 속의 사건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의 위대한 서사시인 호메르스는 개인적으로는 실제인물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을 만큼 아무래도 좋은 인물이다. 다만 호메르스의 시 속 영웅들에 흥미를 느낄 따름이다. 이에 비하여 같은 그리스의 위대한 서정시인 만나의 시를 읽을 때는 시 속의 영웅들은 무엇이던가 관계할 바 없고 다만 시인 그 자신에 일체의 흥미를 느끼게 되는데 서정시의 주관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단테 시는 음악과 맞추어 만든 수사적인 작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단테 뮤직과 포에지의 길은 서로 교차한다. ―뽈 발레리 포에지는 말의 전능으로 베일을 벗긴다. 포에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문제는 날마다 그의 마음과 눈에 부딪치는 것을 그가 보고 느끼는 것처럼 그가 생각하도록 각도와 속도를 맞추어 그에게 보여주는 데 있다. ―쟝.꼭또 시는 우주에 담긴 비밀의 광선을 찾아내어 우리에게 잊어버린 천국을 소생케 한다. ―D.E.시트웰 시는 애련 속에서만 존재한다. ―W.H.오든 진실로 시라고 할만한 것은 서정시를 제쳐놓고는 없다. ―E.A.포우 의식의 사고와 시적 표현의 기초는 구체적 직관 그 자체이다. ―S.길버트 시의 안에 사상은 과실의 영양가와 같이 숨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뽈 발레리 시는 운문에 의한 모방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는 가르치고 즐거움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말하는 그림이다. ―필립 시드니 현대시는 하나의 신앙 위에 서 있다. 곧 숨은 진실이 존재한다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되려면 믿어야 한다. 미지의 세계를 믿어야 한다. ―R.M.알베레스 산문;말을 최상의 순서로 놓은 것. 시;최상의 말을 최상의 순서로 놓은 것. ―워즈워드 시는 본질적으로 무슨 악마적인 것이 있다. ―괴테 시는 시 이외의 무슨 목적을 가질 수 없다. 도덕이라든지 과학과 결부시킬 수 없다. 시는 두 가지 기본적인 문학적 특질, 즉 초자연과 아이러니 속에 있다. ―보들레르 시는 말의 의미를 이마쥬들의 분위기로 둘러싸이게 하면서 그 의미의 가지를 치게 한다. ―바슐라르 시는 진정한 의지의 범미주의적(汎美主義的) 활동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의지를 표현한다. ―바슐라르 서정적인 시는 돌진한다. 그러나 유연하고 물결치는 움직임으로이다. 모든 갑작스럽거나 끊어지는 것은 시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는 그런 움직임을 비극이나 관습적인 성격의 소설 쪽으로 돌린다. ―보들레르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다. 시가 감정이라면 젊은 나이에도 벌써 흐를 정도로 시를 갖게 될 게 아닌가. 시는 정말로는 체험인 것이다. ―R.M릴케 시란 꿈과 같은 것이기는 하나 현실은 아니다. 말장난이기는 하나 진지한 행위는 아니다. 시란 해로운 까닭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힘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말보다 해롭지 않은 것이 어디 또 있으랴. ―하이데거 온갖 예술은 감각적 매개물에 의한 관념의 표현이라고 말하나 시의 매개물인 말은 사실 관념이다. ―R.S.브리제스 다정한 시여! 예술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여! 우리 안에 창조의 힘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를 신성(神性)으로 접근시키는 그대여! 어릴때 내가 그대에게 바치던 사랑은 수많은 환멸도 꺾질 못했다! 전쟁까지도 시가 내게 미치는 영향력을 더욱 커지게 하였으니, 이제부터 별 박힌 내 머리와 하늘이 서로 혼동되기에 이른 것은 전쟁과 시의 덕분이다. ―아뽈리네르 우리는 남들과 논쟁할 때는 수사학으로써 논쟁하지만 스스로 논쟁할 때는 시로써 한다. 자기를 지지한 혹은 지지할 거라는 군중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자신만만한 음성을 지닌 웅변가들과는 달리 우리는 불확실성 가운데서 노래한다. 따라서 가장 고상한 아름다움의 존재 가운데서도 우리가 고독하다는 인식때문에 우리의 리듬은 떨린다. ―에이츠 시의 의미란 그 텐션, 즉 시에서 발견되는 모든 외연(外延)extension) 과 내포(內包)intension를 완전히 조직한 총체이다. ―알렌 테이트 시가란 마치 화가가 색채로 하는 것을 언어로 하는 예술로서 상상력에 의하여 환상을 분출하는 방법에 의하여 산출하는 예술이다. ―토마스 머코올리 시란 이성의 조력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진리와 즐거움을 결합시키는 예술이다. 시의 본질을 발견이다. 예기치 않는 것을 산출함으로써 경이와 환희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S.존슨 시인은 그의 예민한 흥분된 눈망울을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굴리며 상상은 모르는 사물의 형체를 구체화시켜 시인의 펜은 그것들에 형태를 부여해 주며 형상 없는 것에 장소와 명칭을 부여해 준다. ―W.세익스피어 시는 생의 진술이며 표출이다. 그것은 체험을 표시하고 생의 내면적 진실을 묘사하는 것이다. 제2의 세계, 꿈은 최고의 시인이다. ―워즈워드 한 편의 시는 하나의 의식(儀式)이다. 따라서, 형식적이고 의식적 성격을 갖춘다. 시가 가지는 언어의 용법은 회화의 용어와는 달리 의식적이며 화려한 꾸밈새가 있다. 시가 회화의 용어나 리듬을 이용하는 경우에도 그러한 것과 대조를 이루게 마련인 규범을 미리 전제하고 의식적으로 형식을 피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 ―W.A.오오든 시는 몸을 언어의 세계에 두고, 언어를 소재로 하여 창조된다. ―M.하이데거 『詩論』 시의 용어는 필연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W.B.예이츠 시는 언어를 향한 일제사격이다.―앙리 미쇼 시는 언어의 건축물이다.―M.하이데거 시는 언어의 모자이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행위와 시는 언제나 인간보다 크다. ―T.E.흄 시는 극점에 달한 언어다. ―말라르메 시는 절조 있는 언어로서 절규․눈물․애무․입맞춤․탄식 등을 암암리에 표현하려는 것이다. ―뽈 발레리 시인에게 있어서 낱낱의 단어가 그 원료다. 단어는 극히 여러가지 모양의 뜻을 가진 것으로 이것들의 뜻은 시의 구성에 따라 처음으로 똑똑해진다. 이와같이 단어가 콤포지션의 가능성에 따라서 변모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형성된 예술 형태의 한 부분이 될 때까지는 어세(語勢)도 그 효과도 다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프도프킨 시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의 생활은 사막의 생활이다. ―메르디트 시란 우리에게 다소 정서적 반응을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해주는 언어이다. ―E.A.로빈슨 시에선 해조(諧調)가 미리 공허한 형식을 결정하고 말이 위로 와서 위치를 잡는다. 말과 경험 사이의 응화(應和)와 불응화 그리고 결국에 응화가 해조를 확보하여 주의력을 거기에 모은다. 물러섬이 없는 움직임이 듣는 사람과 시인을 함께 끌고 간다. ―알랭 시는 미의 음악적 창조다.―E.A.포우 시란 영혼의 음악이다. 보다 더욱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이다. ―볼테에르 정서가 있고 운율이 있는 언어로 인간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또 예술적 으로 표현하는 것이 시이다. ―오든 시는 어떤 리듬을 선택하여 그것들을 체계화시켜 반복한다. 이것이 운율이다. ―r.브리지스 시는 역설과 아이러니의 구성체다.―브룩스 시는 우연을 기피한다. 시에 나타나는 클라스․성격․직분 등의 개성은 반드시 어떠한 클라스를 대표한다. ―코울리지 시를 구성하는 두 개의 주요한 원리는 격조와 은유이다.―웰렉․워렌 시는 정서의 표출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요,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 ―T.S.엘리어트 시는 상상과 감정을 통한 인생의 해석이다. ―W.H.허드슨 예술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작게 되는 것처럼 느끼게 하며, 그러면서도 우리들을 확대 시킨다. ―E.M.포스터 아직 탄생하지 않은 어느 특별한 일절 또는 일련의 배후에서, 하나의 힘과 같이 집중되어, 넓게 전개되는 의식의 총체. ―보트킨 열정적인 시란 것은, 우리들의 본성의 도덕적 지적 부분과 동시에 감각적 부분―지식에의 욕망, 행위의 의지, 감각의 힘을 방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가 완전한 것이 되려면, 우리들의 신체의 다른 여러 부분에 자극을 주어야 한다. ―하즈리트 시는 조잡한 요소로(물을 타고 섞어서) 연하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엑기스(精)이며, 그것을 키울 수 있는 것, 쓸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순수한 이미지의 시는 수정 조각과 같은 것이어서―우리들의 동물감각엔 너무나도 차고 투명한 것이다. ―허버트 리드 가장 위험한 것은, 순수한 물의 성분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는 거와 같이, 정말로의 순수한 시라는 것은 그 무엇에 대하여서도 강연을 할 수 없는 것이다.―불순하며, 메칠알콜이 들어간 거칠은 시에 대해선,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월터 로리 시적 논리가 시의 결말을 맺는 것은, 일반적으론, 기분의 변화라든가, 위상의 전환을 통하여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그것이 시적 논리이다. 즉 논술이나 명증에 의하여 위상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단계가 듣는 사람의 마음에 만족을 주는 그러한 위상의 변화이며, 이해할 수 있는 추이인 동시에 그 진행은 앞의 단계를 무효로 하는 그러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W.P.카 오로지 이미지는 시의 극치이며 생명이다. ―드라이든 방대한 저작을 남기는 것보다 한평생에 한번이라도 훌륭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낫다. ―에즈라 파운드 믿을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진실한 이미지 뿐이다. ―W.블레이크 만약 지각(知覺)의 문을 맑게 한다면 모든 것은 그대로 즉 무한감(無限感)을 가진 것같이 보일 것이다. ―W.블레이크 이미지는 우리들에게 사랑과 희생의 능력을 각성시킨다. 그것은 어느 경험을 생각케 하며 그 문체에 의하여 그러한 경험에의 어느 종류의 능력을 각성시킨다. 우리들은 어느 하나를 배우게 된다. 즉 그것이 우리들에게 가능한 것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희열이든가 절망이든가 어떠한 감정이든간에 그것을 아는 것이 강한 만족으로서 느껴지는 것이다. ―챨스 윌리암즈 이미지의 생산은 무의식의 어두침침한 속에서의 정신의 일반적 행위에 속한다. ―E.S.달라스 나에게 있어서 지각은 처음에 명료한 일정한 목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중에 형성되는 것이다, 나의 어느 음악적인 무우드(기분)가 우선한 다음에 시적 사상이 나에게 다가온다. ―쉴러 이미지의 발생, 진전, 설정은, 예를 들면 태양의 광선이 자연히 그에게 도달하여 ―그의 위에 빛나고 다음엔 냉정히 더구나 장려하게 기울어 가라앉아가며 그를 호화스러운 황혼 속에 혼자 남기는 현상에 흡사하다. ―J.키츠 우리들은 정신의 영역을 3중의 층으로 생각할 수가 있을 것 같다. 더구나 그러한 경우 지질학의 ‘단층’에 비교할 수 있는 어느 현상이 일어난다. 그 결과……지층은 비연속적이며 서로 불규칙한 단층을 나타나게 된다. 그와 매한가지로 자아의 감각적 의식은 본능적 충동과 직접 교섭을 갖게 되며, 그 ‘끓는 가마솥’에서 어떠한 원형적 형태 즉 예술작업의 기초가 되는 말, 이미지, 음 등의 본능적 짜임을 끄집어내게 되는 것이다. ―H.리드 나의 경우 시에 있어서는 많은 이미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시의 중심이 많은 이미지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만든다’라는 말은 적당치 않은 말이지만, 나는 나의 이미지에 내 내부에서 정서의 여러 가지 배색을 물들여 놓고 그것에 내가 가지고 있는 지적 비평적인 힘을 적용하여 그것이 또 다른 이미지를 낳게 한다. 그리곤 그 제2의 이미지를 제1의 그것과 모순시켜, 그 둘에서 난 제3의 이미지에서 제4의 모순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그것들 모든 것을 나에게 주어진 형식적인 제한의 범위 내에서 서로 모순시킨다. 각각의 이미지는 그 속에 스스로를 파괴하는 종자를 가지고 있다. 즉 나의 변증적 방법(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은 중심의 종자에서 성장하는 많은 이미지의 끊임없는 건설과 파괴며, 그 중심의 종자도 그 자신으로 파괴적인 동시에 건설적인 것이다.……나의 시의 생명은 중심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 속에서 나와, 그리고 죽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이미지의 건설은 창조와 재창조와 파괴와 모순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 ……이미지의 어쩔 수 없는 충돌에서 (아무리 해도 피할 수 없는 충돌에서)―아무리 해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자극을 주는 중심 즉, 충돌의 모태가 창조와, 재창조와, 파괴와, 모순의 성질을 갖기 때문에―나는 시라는 순간적 평화를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딜런 토마스 이미지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자신으론 시인의 특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가 독자적인 본능의 증거가 되는 것은 훌륭한 정열, 또는 그 정열로 잠깨워진 일련의 사상 혹은 이미지 여하에 따라 시 그 자체가 변할 만큼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을 때 뿐이다. ―코울리지 추상적 관념에 대립하는 감각적 이미지를 너무나 주장하는 나머지…… 결과는 회화에 의한 시로 되어버렸다. 다시 말하면, 때로는 그림이 전부가 되어버려, 일반적 경험에 아무런 관계가 없어져 버렸다. 이것은 존재와 의미와를 분리시키는 잘못의 제일보였던 것이다. ―로버트 히리아 상상된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시적 몽상이라는 몽상의 절대를 인식한다. ―바슐라르 실제로 물질적 상상력은 문화적 이미지와 실체를 합체시키는 유일한 매개체이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모든 삶을 시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바슐라르 상상력 그 자신은 기억의 작용이므로 기억이 시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 진실한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은 없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전에 경험한 것을 기억하며, 그것을 어느 다른 환경에 적용하는 능력이다. ―스펜서 추상적인 것의 구체화를 추구하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내 방법은 아니다. 나는 내 자신 속에 감동 ―감각적으로 생생한, 사랑스러운, 다채로운 여러가지의 감동 ―을 기민한 상상력의 에너지로서 받았던 것이다. ―괴테 이성이라는 것은, 기지(旣知)의 사물을 질서있게 정리하는 작용이며 상상력이라는 것은 사물의 개개, 혹은 전체로서의 가치를 지각하는 작용이다. ―C.V코노리 상상력이야말로 도덕적 선(善)의 훌륭한 방편이다. ―셸리 상상력이라는 것은 죽어 가는 정열을 되살리기 위하여 살(肉)을 잡아 두는 불사의 신을 말하는 것이다. ―J.키츠 모든 것에 앞서서 훨씬 중요한 것은 은유를 자기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만은 다른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는 천부의 은총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밀하게 만들도록 하라. 그러면 자연 은유가 될 것이다. ―J.M.머리 은유는 현실을 살피며 경험을 질서짓게 하는 정신의 본질적이며 또한 필요한 행위와 같이 생각된다. ―J.M.머리 어떠한 번역이나, 은유나, 우의라도 극단적인 비유와는 전연 다른 방향으로 흘러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은유를 바다나 파도에서 시작하여 불꽃이나 재로 끝내서는 안된다. 그것은 대단히 나쁜 모순이기 때문에. ―벤 존슨 은유를 깊이 추구하려면 건전한 의식의 세계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 ―J.M.머리 상징파의 상징은 언제나 자기만이 아는, 특별한 관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시인이 독단적으로 쓰고 있는 ―즉, 그러한 관념의 일종의 투영인 것이다. ―에드문드 윌슨 상징주의의 상징의 실체는 제재에서 분리한 은유였었다.―왜냐하면 시에 있어서 어느 한 점을 넘으면 색채와 음은 그 자신을 위하여 즐거워할 수가 없을 뿐더러 이미지의 내용을 억측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에드몬드 윌슨 시는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구형의 사과처럼 무언(無言)이어야 한다. 엄지손가락에 닿는 오랜 대형 메달처럼 조용해야 한다 이끼 자란 창턱의 소매자락에 닳은 돌처럼 시는 말이 없어야 한다. 새들의 비상처럼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 오를 때처럼 마치 달이 어둠에 얽힌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놓아주듯이 겨울 잎사귀에 가린 달처럼 기억을 하나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A.맥클리쉬 『詩法』 나의 시의 장부(帳簿)는 어디에 있는가 이 나의… 종이도 없고 펜도 없고 시도 없이 나는 무(無)앞에 있다. ―R.끄노오 『詩法을 위하여』    
480    훌륭한 시작품은 부단한 습작에서 얻은 시행착오의 결과물... 댓글:  조회:2382  추천:0  2017-05-17
9. 좋아하는 시부터 관심 갖기 누구나 좋은(잘 된) 시를 쓰고 싶어 한다. 좋은 시를 쓰겠다 하면서 한 편의 시도 쓰지 못 한 채 좋은 시만을 기다리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좋은 시는 평생 그림의 떡일 뿐이며 습작시 한 편도 제대로 구경할 수 없는 초라한 시인에 머물고 말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대개 시에 대하여 관심이 지대한 편이며, 실의에 빠져 있는 경우라 해도 좋은 시에 대한 열망 하나만으로 이를 거뜬히 극복해낼 줄 아는 굳은 의지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문학이라는 말 자체만으로도 거기에서 큰 기쁨을 얻고 있는 사람들같이 여겨져서 왈가왈부할 것도 아닌 것 같으나 노력(습작)하지 않고 좋은 결과(작품)를 기대하는 것은 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이 세상의 모든 훌륭한 작품들은, 부단한 습작에서 얻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룩된 것들이다. 우선은 부족한 모습에서부터 시작하는 처음이 열려야 한다. 쓰는 것보다는 읽고 음미하는 즐거움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많은 작품들을 읽고 음미하는 일은 표절(남의 글을 그대로 모방함)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표절하는 잘못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애송시 하나 정도를 간직하고 산다. 나는 과연 어떤 내용의 시를 좋아 하는가? 이것을 알아보는 일은 시 쓰기의 초보 단계에서 꼭 필요하다. 모든 일에 선후 관계가 있듯이 시 쓰기에도 선후 관계는 있을 테니까 말이다. 자칫 순서를 그르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의 틀에 구속되어 헤어나지 못하고 무조건 좋고 나쁨으로만 시 작품을 평가하려 하는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예시한 작품들을 보자. [가]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 소냐 머언 미개(未開)적 유풍(遺風)을 그대로 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熱愛)하되 삼가 애련(愛憐)에 빠지지 않음은 - 그는 치욕(恥辱)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憎惡)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두 동공(瞳孔)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不意)에 짐승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日月)에 또한 무슨 회한(悔恨)인들 남길쏘냐 (유치환, '일월(日月)')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砂)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本然)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유치환, '생명(生命)의 서(書)')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절정(絶頂)')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 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쫒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쫒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윤동주, '또 다른 고향(故鄕)') [나]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김소월, '초혼(招魂)')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 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 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서정윤, '홀로 서기' 중 1, 2연)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떠날 것을 미리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욺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沈默)') 위에 제시된 작품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어떤 것인가? 아마도 대개는 [나]에 속한 작품일 것이다. 실제로 한 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나]의 작품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애송하는 시 스무 편 안에 모두 속해 있다.이유는 여러 가지로 분석되는 바, 우선 [가]에 예시된 작품들은 강렬하면서도 의지적인 성격이 짙어, 시라고 하면 부드러운 인상으로 생각해 왔던 일반적 통념에서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시를 공유(共有)하는 것으로보다는 소유(所有)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독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어서, [가]가 주로 시대 상황을 문제 삼고 있음은 사회적 차원의 것이지 개인적 차원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 가지 더 짚어 보면 개인적 차원의 시는 주로 서정성이 짙게 나타나지만 사회적 차원의 시는 참여성이 두드러져, 일반 독자는 가슴 깊이 와 닿는 심금을 울려 주는 소위 서정시를 좋아하기 때문일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이 서정성을 다룬 시를 애송하는(혹은 애독하는) 독자들은 [가]처럼 범위가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어 있는 시에 대하여 무조건 배척하려 한다는 점이다. 참여적 성격이 강하다 보면 기교가 다소 떨어질 수 있다는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사고 깊이나 기교면에서 나름대로 충분히 가치가 인정되는 작품도 많다. 이는 반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참여적 성격이 짙은 사회적 문제를 다룬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는 [나]와 같은 시는 여리다, 비겁하다는 등의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창작을 위해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니만큼 어떠한 내용을 가지고 습작에 임하면 좋을까를 고민하기로 하자. 정도(正道)가 있을 수는 없다. 창작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니 내가 좋아하는 내용을 선택해서 시도해야 한다. 다만 어디 어디에 써 먹어야겠다는 효율성을 앞세우다보면 문학으로서의 시에 관심을 갖기보다 사회 문제에 치중하게 되어 사소한 언어 하나에도 애착을 갖고 고민하는 다소곳한 자세를 잃을까 우려할 뿐이다. ----------------------------------------------------------------------------------------     하루 ―윤명수(1941∼ ) 신대방 전철역 아래 도림천 고수부지에는 매주 월요일 새벽이면 뱀이 기어가듯 인간 띠가 늘어선다 꼬부라진 지팡이들이 급식 순번표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더러는 노숙을 해가면서 새벽안개로 아침을 때우고 하품을 입에 문 채 시멘트 바닥을 긁고 있다 오늘은 선착순 오백 명까지다 순번표를 받지 못한 빈손들은 돌계단에 지팡이를 내려놓고 널브러져 있다 이글거리는 햇살만 한입 가득 물고 먼 하늘만 쳐다본다 순번표 속에는 단팥빵 세 개, 이백 밀리리터 두유 한 팩, 현금 천 원이 들어 있다 어떤 이는 빵 한 봉지와 두유를 그 자리에서 천 원을 받고 되팔기도 한다 그 돈으로 라면을 사들고 휘적휘적 허기진 쪽방으로 지팡이에 끌려간다 개천 둔치에 500명이 넘는 노인이 급식 순번표를 받으러 늘어선 새벽이라니, 슬픈 풍경이다. 다들 어디서 오신 걸까. 노숙인이거나 쪽방에 사는 극빈 노인이기 쉽다. 다 늙어서 노동력도 없고 보살펴 줄 가족도 없으면 급식을 받으러 가야지 어떻게 하겠나. 이런 시를 읽으면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나이 들어 극도로 가난한 처지가 남의 일 같지 않아 새삼 암울하다. 내가 사는 비탈동네에는 폐품 줍는 노인들이 많다. 보름 전인가, 작고 마른 체구의 할머니 한 분이 입술이 바싹 타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골목 계단 아래서 숨을 고르고 계셨다. 계단에는 그 전날 내린 진눈깨비에 푹 젖은 매트리스가 쓰러져 있었다. 세 정류장 거리에 있는 동네에서부터 끌고 오셨다고 했다. 매트리스를 해체해 발라낸 철제 스프링은 6000원을 받는다고 한다. 아, 무겁고도 무거운 6000원 돈! 이런 현실이 있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화로 치밀어 오른다.  극단적 가난을 어떻게 해야 할까. 세계의 부가 상위 4%에 몰려 있다는데, 그들이 좀 풀면 나아질까. 가난은 그나마 나라만이 구제할 수 있다. 정부에서 관심 갖고 복지정책을 견실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힘 있는 사람들이 대책을 생각해야 한다. 극빈자 당사자들은 하루하루 연명하느라 생각할 힘도 없다. 온정에 ‘허기진 쪽방’…….     황인숙 시인  
479    시를 통하여 시인의 마음을 읽어내는 지름길을 찾아라... 댓글:  조회:2178  추천:0  2017-05-17
7. 시어 선택과 작가 의도 파악하기 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또 한 가지가 있다면 시를 통하여 작가의 마음을 읽어내는 일이다.작가의 의도를 독자가 알아차린다는 것은 작가에게 있어서도 기쁜 일이다. 그러면 작가의 마음을 읽어내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뭐니뭐니 해도 시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 내려고 했는가 하는 점을 찾아내는 일이다. 여기에서 '무엇'은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對象)'일 것이며, '어떻게'는 '표현 기법'일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가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데, 어떤 언어를 사용하여 이를 대치(代置)시키고 있으며, 대신한 그 나름대로의 표현 기법에 의하여 어떠한 의미로 환기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알아차리는 일이 시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라는 말이다. 작가의 창작 의도에 대한 깊이에 대하여 이해하려는 나의 눈높이를 맞추고 그 지점에서 대상과 다듬어진 시구(詩句)를 바라보는 것과 똑같은 원리이다. 이에 대한 쉬운 이해는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제도 하로밤 나그네 집에 가마귀 가왁가왁 울며 새었소. (김소월, '길' 제 1연) '갈 길을 잃은 나그네의 비애(悲哀)'를 주제로 한 김소월 시 '길'의 첫 연이다. 여기에서 시의 전체적 분위기를 압도하는 시어는 '가마귀'이다. '가마귀'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모진 신세나 어두운 이미지를 드러낼 수 있다고 판단한 작가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만약 선택된 시어가 '가마귀'가 아니고 '참새'였다면 이 시는 어떤 모습일까? 어제도 하로밤 나그네 집에 참새 짹짹 울며 새었소. 이와 같은 모습일 텐데, 분위기는 너무나 달라진다. 작가 자신의 길 잃은 나그네로서의 모습을 형상화시키기에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 느낌일 뿐이다. '참새'가 아니고 '까치', '종달새' 등의 다른 새였다 해도 '가마귀'가 드러내는 분위기만큼의 정서는 표현해내지 못 할 것이다. 즉 어두운 분위기를 위해서는 가장 잘 선택된 시어라고 여겨진다. 박목월의 시 '청노루'를 보자.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살펴 보아야 할 핵심 소재(제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청노루'다. 시의 유기적 구성을 위해 동원된 시어가 모두 자연물이라면 그 중에는 유일하게 동물로 선택된 '청노루'가 있다 작가는 거기에 이 시의 초점을 맞추었을 것이 뻔하다. 작가의 깊은 마음을 이러한 식으로 헤아렸다면 '청노루'라는 제재를 가운데 두고 해석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다.그런데 우리에게 의심스러운 것은 청(靑), 즉 푸른 색깔의 노루가 있느냐 하는 점이다. 노루는 송아지처럼 누런 색깔일 뿐이다. 그럼 이 시를 '황노루 / 맑은 눈에 // 도는 / 구름'이라고 시어를 바꾸어 보면 어떻게 될까? 놀랍게도 이 시가 주는 이미지는 신선함이 아니라 칙칙함이다. 이렇게 되면 작가가 드러내고자 한 신선한 봄, 아름다운 봄의 이미지는 본래의 의도와 벗어나게 되는 실패작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작가는 실재(實在)하지도 않는 '청노루'라는 시어를 의도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이해하여야 한다. 시어의 선택면에서 '청노루'와는 조금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개나리'라는 시를 한번 읽어보자. 샛노란 얼굴빛으로 앙증스런 눈웃음으로 너의 가여린 몸짓은 이 봄날을 위해 고스란히 탄생되었고…… 티없이 맑은 하늘을 우러러 대지의 언 가슴을 녹이는 너의 기도는 무언의 고독으로 떨고 있구나 오늘쯤 나는 너를 만나러 가는 한 마리의 나비가 되고 싶다 개나리 화관을 머리에 이고 개나리 목걸이를 목에다 걸고 개나리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나풀나풀 날개짓으로 너를 만나고 싶다 노오란 꽃잎이 먼저 스러져야만 연두빛 잎사귀가 트이는 너의 엇갈린 슬픈 사연을 듣고 싶다 나의 빈 가슴 하나 가득 너를 부비고 온통 싱그러운 마음으로 돌아오고 싶다. (김영실, '개나리'(주부 백일장 시부문 장원작)) 이 시는 '청노루'에서처럼 작가의 의도적 시어 선택이 흔적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나리'에서도 '청노루'를 해석하는 방법은 똑같이 통할 것 같다. 즉 시 전체를 통하여 가장 특징적인 시어를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나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나리'를 제대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눈길보다도 '나비'의 시선이 더욱 정확하고 예리할 것이라는 것을 작가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음직하다. 그리하여 '오늘쯤 나는 / 너를 만나러 가는 / 한 마리의 나비가 되고 싶었던 것이며, '노오란 꽃망울이 먼저 스러져야만 / 연두빛 잎사귀가 트이는' 개나리의 '엇갈린 슬픈 사연을' 들을 수 있을 만큼의 정확한 관찰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욱이 작가는 여섯 연으로 이루어진 '개나리'전 편을 통하여 3연에만 단 한 번의 '나비'를 등장시키고 있어 핵심 시어의 절제면에서도 무척이나 돋보인다. 8. 서정적 자아의 위치 확인하기 시나 소설이 자서전이나 수필 등의 글과 다른 이유로는 서술자의 실체 문제를 들 수 있다. 자서전이나 수필 같은 글의 경우 서술자인 '나'는 곧 작가이다. 그러나 시나 소설의 경우 서술자는 곧 작가라는 등식을 곧이 곧대로 믿어버리면 크나 큰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소설 작품에서 한 작가가 서술자로 하여금 성행위를 하는 표현을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고 가정할 경우, 서술자는 곧 작가라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게 되면 그 작가의 가정(家庭)은 곧바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작품의 내용이 이성(異性)과 이별한 뒤에 오는 사무치는 그리움을 표현했다고 해서 그것이 꼭 작가의 경험일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음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지만 적어도 작가를, 서술자와 일치한다는 등식 위에서 인식하는 것은 작가 혹은 독자들이 피해야 할 기본적 예절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나 소설은 수필이나 자서전과 다른 장르가 되는 것이며 시에서는 서술자를 서정적 자아(시적 화자 또는 시적 자아)소설에서는 작중 화자라고 일반적으로 부르는 것이다. 소설에서의 시점(視點 - 1인칭, 3인칭)이 시에도 있다면 의아해할 지도 모르겠다. 1인칭과 3인칭의 차이는 서술자의 위치가 작품 속에 있는가 작품 밖에 있는가에 있다. 그러니까 시의 경우 서정적 자아인 '나'가 작품 속에 있는가 작품 밖에 있는가 하는 점이 소설로 말하면 1인칭 시점 혹은 3인칭 시점이 되는 셈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절정(絶頂)')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나그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서정적 자아인 '나'가 작품 속에 있으며(소설로 말하자면 1인칭 시점), 이육사의 '절정(絶頂)'은 '나'가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생략된 경우로서 역시 같은 경우에 속한다. 박목월의 '나그네'에는 '나'가 작품 밖에 위치하고 있어 소설로 말하자면 3인칭 시점에 해당한다.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같은 내용도 서정적 자아의 위치를 바꾸어 보면서 창작을 시도해 보면 느낌은 사뭇 달라진다. 작품의 내용이 서정적 자아와 밀착되어 있는 '진달래꽃', '절정(絶頂)'을 읽을 때에 독자는 자신의 위치와 서정적 자아를 동일시하게 됨으로써 작품 속에 푹 빠지게 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반대로 '나그네'의 경우는 작품의 내용을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제 삼자의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마치 독자가, 독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감상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전자의 경우는 자신의 일을 서술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감정이 위주가 된 주정적(主情的)작품이 많은 편이며, 후자의 경우는 제 삼자의 입장에서 작품의 내용에 간섭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서정적 자아의 감정을 노출시키기 어려운 문제가 많아 지성이 위주가 된 주지적(主知的)작품이 많은 편이다. --------------------------------------------------------------------------------------       탑  ―박영근 (1958∼2006) 저 탑이 왜 이리 간절할까 내리는 어스름에 산도 멀어지고 대낮의 푸른빛도 나무도 사라지고 수백 년 시간을 거슬러 무너져가는 몸으로 천지간에 아슬히 살아남아 저 탑이 왜 이리 나를 부를까 사방 어둠 속 홀로 서성이는데 이내 탑마저 지워지고 나만 남아 어둠으로 남아     문득 뜨거운 이마에 야윈 얼굴에 몇 점 빗방울 오래 묵은 마음을 쓸어오는 빗소리 형체도 없이 탑이 운다 금 간 돌 속에서 몇 송이 연꽃이 운다 하늘엔 먹구름 느리게 흘러가고, 그 아래 벌판을 화자는 정처 없이 걷고 있었을 테다. 축축한 공기 속에서 날이 저물어 가는데, 한 돌탑이 화자의 마음에 절실하게 와 닿는다. ‘수백 년 시간을 거슬러/무너져가는 몸으로/천지간에/아슬히 살아남은’ 형상의 돌탑. 어쩌면 절 터였을까. 알고 찾아오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그 마을의 어떤 할머니는 들일하러 지나갈 때마다 그 앞에서 합장하고 고개 숙였을 테다. ‘저 탑이 왜 이리 나를 부를까.’ 들판에 버려진 듯 홀로 서 있는, 풍상에 닳고 닳은 돌탑에서 화자는 제 모습을 보는 것이다. ‘내리는 어스름에/산도 멀어지고/대낮의 푸른빛도 나무도 사라지고’,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서 산도 멀어지고, 대낮의 푸른빛도 나무도 사라진 제 인생의 어스름을 보듯이.      화자는 천지간에 마음 둘 곳 없이 ‘사방 어둠 속/홀로 서성이는’ 나그네다. 화자의 외로움과 비애가 정갈한 시어에 실려 독자의 가슴이 자욱이 젖어드는데, ‘문득 뜨거운 이마에/야윈 얼굴에 몇 점 빗방울/오래 묵은 마음을/쓸어오는 빗소리’!  형체 없이 닳아도 탑에는, 그 금 간 돌 속에는 몇 송이 연꽃이 있을 테다. 돌탑의 희미한 연꽃 문양이 비에 젖어 선명해지듯이, 일생의 먼지가 쌓여 진흙탕 같은 화자의 ‘오래 묵은 마음’에 연꽃이 피어나려 움찔거린다. 박영근 시에는 남성적이면서 섬세한 서정이 깃들어 있다. 청정하고 우미(優美)한 연꽃처럼.  
478    [쉼터] - 우리 말의 가치와 그리고 그 반성... 댓글:  조회:2280  추천:0  2017-05-15
'왜 우리 말 잘 못하나?'... 나부터 반성 필요 2017년 05월 15일 작성자: 박영옥 어느날 길가에서 친구를 만났는데 곁에 있는 아이보고 “전에 널 가르치시던 선생님이신데 빨리 인사해라”고 한어로 말했다. 애는 기꺼이 나를 보고 역시 한어로 “로오쓰 호우?”고 인사했다. 그러자 친구가 또 한어로 “애두 참 왜 우리 말을 그렇게도 하기 싫어하니?”고 나무람 했다. 그러면서 나를 보고 “이 애가 한어 말만 해서 참 속상해요. 자칫하면 ‘한족애’란 말 듣겠어요. 그렇게도 우리 말을 하라고 해도 말 잘 안들으니”고 말했다. 그러자 애가 제꺽 “엄마는 왜 늘 나와 한어 말 만 하는 가요? 그러니 나도 한어 말 하는 거지요”고 반박했다. 그애의 되알진 반박에 친구는 “엉?…엉…”할 뿐이였다. 이 몇년간 나는 조선어를 가르치면서 이와 류사한 일들을 많이 목격했다. 방학이면 한족학교에서 공부하던 조선족애들도 우리 글을 배우러 오는데 첫날 어머니 혹은 아버지가 데려다 준다. 그런데 거개가 애하고 한어 말을 많이 했다. 애가 조선 말을 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면서도 나보고 애가 집에서 조선 말 하기 싫어 하는데 좀 조선 말을 하게 끔 부탁드린다고 했다. 내가 애들을 보고 집에서 왜 조선 말을 하지 않는가고 물으면 애들 모두 부모들이 먼저 한어로 대화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냥 한어 말만 하다보니 그것이 습관이 된것 같다. 그러면서도 애가 한어 말만 한다고 하소연 하다니? 누구탓이란 말인가? 여기에서 한가지 감동적인 사연을 말하고 싶다. 재작년의 일이다. 대학을 졸업한 한 젊은이가 조선 글을 배우러 왔다. 본인이 배우고 싶어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핍박이란다. 어릴 때 한족학교에 보낸 걸 뒤늦게야 후회하면서 조선족으로서 우리 글을 모르고 우리 말을 잘 모르면 수치라 생각한 아버지란다. 공부를 시작한 첫날 젊은이 아버지가 집식구들한테 오늘부터 어느 누구든 한어 말 하면 벌금 50원 하는 규칙대로 실행한다고 했다. 여직껏 매일 한어로 대화하던 젊은이의 아버지, 어머니는 그날 부터 아들애의 공부에 도움이 되라고 조선 말만 했다 한다. 아주 사소한 일 같지만 그만큼 우리 글에 대한 애착과 중시를 돌렸다는 것이 감동이다. 우리 말을 제대로 할 줄 몰라서 생긴 일도 적지 않다. ‘창문을 열어라(开窗户)’고 말한다는 것이 ‘테비를 켜라(开电视)’는 ‘켜라’로 알고 ‘창문을 켜라’고 말해서 폭소가 터지고 “小时候犯点小错误是常事”를 “어릴 때 자꾸 ‘사고’를 치는 건 좋은 일이다”고 말하는 학생도 있었다. 한족학교에서 공부했다 해서 다 우리 말을 모르는 건 아니다. 나의 외조카는 한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에서 사는지라 유치원때부터 줄곧 한족학교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우리 말을 매우 표준적으로 잘한다. 집에 오면 부모들이 그냥 조선말로 대화하기 때문이다. 이런 실례가 많고도 많다. 애가 큰 다음 조선 말을 몰라 큰일이다 어쩌지 하면서 부랴부랴 강습반을 찾아가서 학비 많이 내면서 배우느라 해도 짧은 시간내에 배우면 얼마 배울수 있을가? 또 조선 말 발음이 틀릴가봐 위축감이 들어서 감히 하지도 못하는 애들도 적지 않다. 그런 애들을 바라보면서 만약 아무리 한족학교에 다녔다 해도 어릴 때부터 부모들이 우리 말을 중시하는 마음 가짐이 있었더라면 우리 말을 모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애들이 우리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아이들을 탓하기 전에 부모들은 먼저 자신을 반성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가. /길림신문 2017년  5월 12일  
5. 제목에 관심을 가져라 제목을 사람으로 말하면 그 사람의 얼굴이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을 어느 정도는 간파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제목을 보면 그 시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제목이 '무제'인 경우를 접하게 되면 독자들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말 그대로 제목 '題'이 없다 '無'는 의미일텐데, 제목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제목으로 선택한 의도가 무엇일까를 고민해야 한다. 역설적 의미를 담은 것일 수도 있겠고, 내용 자체가 제목이 없는 것에 대한 내용일 수도 있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제목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다거나 그저 무성의한 제목 붙이기에 다름 아닐 수도 있겠다. 이렇게 다양한 내용을 암시할 수 있다는 것은 풍부하게 정서를 환기시킬 수 있지 않겠나 하겠지만 그만큼 애매할 수도 있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제목부터 애매한 시는 결국 애매한 시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용 없는 시가 어디 있겠는가? 파도에 휩쓸려도 산꼭대기에서 떨어져도 돌멩이가 되리라. 새싹이 돋아나고 태양이 다시 떠오르 듯 이제 웅덩이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리라. 기적 소리를 멀리하고 떠나가는 열차의 바퀴에 치어 가늘게 떨고 있는 손가락의 기억을 잊을 수 있는 하얀 새가 되리라. (고교생 작품, '무제') 위에 제시된 시는 제목 '무제'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 수 없을 뿐더러 세 가지의 되고 싶은 존재가 연결 고리없이 흩어진 채 끝맺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무제'라는 제목을 붙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그러나 제목은 시가 갖고 있는 내용을 어떤방식으로든지 암시해 주어야 한다. 제목도 시의 일부이다. 유치환의 '깃발'은 이를 잘 드러내준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 '깃발') 시의 본문에서는 '이것은'으로 제목 '깃발'을 지시해 놓고 '소리 없는 아우성',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 '애수(哀愁)',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라고 은유되어 있다. 제목을 뺀 본문에는 '깃발'이라는 시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여기에서 제목 '깃발'이 언급되지 않았다면 위에 열거된 비유의 원관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어렵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이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신석정.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제1연)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박두진, '해' 제 1, 2연) 이 시들은 제목은 다르지만 같은 내용을 형상화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제목이 '해'인 만큼 '해야 솟아라'는 표현은 광명의 세계를 추구하는 내용일 테고,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역시 촛불을 켜야 할 어둠의 시간을 거절한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같은 내용을 암시하는 제목이다. 6. 시어의 이미지를 활용하라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상상력, 표현 기법, 율격, 어조, 이미지 등 다양한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미지는 시가 압축을 생명으로 삼는 문학이면서도 구체성을 잃지 않게 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 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시어(詩語)란 시에만 쓰이는 특별한 언어가 아니라, 일상적 언어가 시 작품의 재료로 선택될 때 이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시어와 일상적 언어는 다른 점이 있다. 일상적 언어는 언어 기호가 의미하는 내용이 사전적 의미로 국한되지만 시어는 언어 기호가 갖는 자체의 의미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연상되는 내용까지를 포함하는 보다 폭넓은 의미이다. 흔히 말하는 직유니 은유니 상징이니 하는 표현 기법은 시어가 일상어와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 앞에서 언급한 '해'의 경우 '해'를 통해 연상되는 이미지는 밝음, 정열, 희망 등이다. '어둠을 살라 먹고 ∼ 해야 솟아라'를 반복하는 것은 어둠의 세계에서 벗어나 밝은 세계로 향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일 것은 당연하다. 유치환의 '일월(日月)'을 보면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 소냐 (유치환, '일월(日月)' 제 1연) 제목부터 '해와 달'로 설정되면서, 제 1연에서는 '내가 가는 곳 어디인들 밝은 대낮이 없을 소냐(있을 것이다)'하여 '밝은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읊었다. 같은 시인의 다른 작품을 보자.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중략)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유치환, '바위') 이 작품은 '바위'가 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죽은 뒤에 산에 있는 바윗 덩어리로 환생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위가 가지고 있는 단단하면서도 불감부동(不感不動)의 이미지를 지닌 그 속성을 닮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 해', '바위'는 두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시어들이다. 어떤 작품이든지 핵심 시어는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대개는 작품의 제재(題材)가 되는데 이 제재에 대한 이미지를 통하여 내용 분석을 시도하면 70% 정도는 작가가 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시의 흐름이 어떤 방향이냐에 따라 시어의 이미지는 사뭇 달라지기도 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생사(生死 춘산(春山)에 눈 녹일 바람 어제 불고 간 데 없다. 그 바람 불어야 이 언덕 파릇파릇 새싹 돋아 두 작품의 '바람'은 어떠한가. 전자는 '잎새를 흔들리게 하는 바람'으로 나를 괴롭게 할 정도라면 외부적 시련의 이미지로 적당하다. 그러나 후자는 눈을 녹이고 새싹을 돋게 만드는 '바람'이니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는 '바람'이 아닌가. 이와같이 같은 시어라도 시적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은 시어로서 선택된 일상어의 흥미로운 여행이다. ' 밤(夜)'은 어둠의 속성으로 부정적 현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오붓한 공간을 제시해주는 포근한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눈(雪)'은 추위와 관련되는 속성으로 고통, 시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랑의 매개체나 그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미지를 일러 일반적 이미지 혹은 보편적 이미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보편성을 떠난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은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기도 하는 만큼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       지우개  ―김경후 (1971∼ ) 1 자정의 책상엔 지우개 또는 얼룩진 종이 지우고 지우고 또 지운다 한때 사람들은 빵 조각으로 글씨를 지웠지 빵이 아니라 망각을 달라 2     지우개, 외딴 성당의 고해소 그것에겐 흙바닥에 떨어진 미사보 끊어진 장미 묵주 냄새가 난다 어둡게 피 흘리는 기억들 내 혀에서 떨어져 가루로 흩어져라 모든 기억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지웠다는 기억 입속에서 잿빛 성체가 부서져 떨어진다 3 핏자국을 핥는 혓바닥, 지우개 흉터들의 감옥이자 숙성실 문지르고 문지르고 또 문지른다     이제 지우개가 나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그린다 화자에게는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다. 그게 무엇인지 말할 수는 없다. ‘어둡게 피 흘리는 기억들’, 추악하고 고통스러워!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기억이 난다. 제 잘못은 아무리 무거운 거라도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이 있지만, 화자는 그런 사람이 못 된다. 화자는 예민하고,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다. ‘지우개, 외딴 성당의 고해소.’ 기억을 지운다는 건 그저 숨겨버린다는 게 아니라 참회한다는 의미도 있다. ‘모든 기억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지웠다는 기억!’ 화자가 얼마나 많은 한숨을 쉬었으면, 그 속이 썩어 문드러졌으면, ‘잿빛 성체’가 가루가 됐을까. 죄의식의 고독이 절절히 전해진다. 화자처럼 나도 잊고 싶은 일이 있다.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가 있다. 시와는 상관없는 얘기지만, 이제 어느 누구도 자기의 과거를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게 돼버렸다. 폐쇄회로(CC)TV나 e메일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등에 우리의 행적이 기록되고 보존되고 심지어 유통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너무 놀라지 마시라.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어느 날 불쑥 나타나 뒤통수를 치더라도.   ---------------------------------------------------------------------------       바람  ―다카하시 아유무(1972∼) 나와 사야카 그리고 바테루텐(홈스테이 집의 아들) 세 사람이 양을 몰고 초원을 한없이 걸었다. 나는 하모니카로 밥 딜런의 ‘바람의 소리’를 불었다. 장난을 좋아하는 바테루텐이 내 손에서 하모니카를 뺏는다. “하모니카 불 줄 알아?”라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젓는다. 그는 내 하모니카를 바람에 맡겼다. 후∼ 후∼ 화∼ 화∼ 바람이 하모니카를 불고 있다. 강하게 가늘게, 미세한 비브라토를 주면서 바람은 절묘한 톤으로 하모니카를 불었다. 인간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소리… 열 개의 음이 동시에 울리는 소리…     1분 정도 바람의 연주를 들려준 뒤 바테루텐은 살짝 웃으며 나에게 하모니카를 돌려준다. ‘바람의 연주가 어때?’라는 듯. 맞아, 네가 이겼다! ‘후∼ 후∼ 화∼ 화∼’ 360도 지평선의 몽골 대초원이 하늘만큼 땅만큼 커다란 입으로 부는 하모니카 소리를 떠올려본다. ‘후∼ 후∼ 화∼ 화∼’ 양들도 귀를 쫑긋거렸으리. 하모니카 칸칸 바람에 스쳐 떨리는 가녀린 그 소리, 바람결에 전해져 누군가는 환청처럼 들었으리.     연주법이 간단해서 단순한 곡조라면 누구라도 제법 흥겹게 불 수 있는 하모니카는 작고 가벼워서 여행할 때 지니고 다니기에 적격이다. 다카하시 아유무가 아직 시를 쓸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는 스무 살에 대학교를 중퇴한 뒤 출판업, 인디밴드 리더 등을 하다가 스물여섯 살에 결혼해, 곧장 아내 사야카와 단둘이 세계일주를 떠났다. 위 시는 2년간의 그 여행 중에 썼다. 첫 세계일주에서 돌아온 뒤 오키나와에 이주해서 오키나와를 세계 제일의 파라다이스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주재했다는데, 2008년에 이번엔 네 식구가 무기한으로 세계일주를 떠났다는 게 그에 대해 내가 아는 마지막 정보다. ‘세계’라는 말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세계적인 시인, 세계적인 음악가, 세계적인 운동선수, 세계적인 기업 등등은 그 분야에서 자기 힘을 세계로 넓혔다는 것이겠다. ‘세계적인’ 사람들은 먹고살기 편하겠지. 좋겠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계적인 명성’에 야망을 갖는 것일 테지. 다카하시의 세계일주는 다르다. 인생을 우주적으로 느끼고 세상 사랑하기라는 꿈을 여행을 통해 실현하는 그의 다감하고 다정한 발자취를 그려 본다. 오랜만에 리 오스카의 하모니카 독주 ‘비 오기 전’을 듣고 싶다. 하지만, 비는 당분간 그만 왔으면!  
476    시의 목표는 언어의 순수성과 일관성이다... 댓글:  조회:2792  추천:0  2017-05-13
36명 대담기록 '작가란 무엇인가' 작가들, 대부분 오전에 글 쓰고 쉼 없이 수정하는 공통점 지녀 폴 오스터 '글쓰기를…' 출간도 세계 문학의 육성을 들려주는 책들이 잇달아 나왔다. 미국 문예지 '파리 리뷰'가 세계적 작가 36명을 인터뷰한 기록을 모은 '작가란 무엇인가'(전 3권·권승혁 외 옮김·다른 출판사)다. 미국의 뉴욕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폴 오스터의 대담 모음집 '글쓰기를 말하다'(심혜경 옮김·인간사랑)도 출간됐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원조(元祖)로 꼽히는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의 가상 대화를 담은 연구서 '보르헤스의 지팡이'(양운덕 지음·재남)도 눈길을 끈다. '작가란 무엇인가'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를 비롯해 지구촌 곳곳에서 널리 읽히는 작가들을 엄선해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수록 작가들은 대부분 오전에 글을 쓰고, 원고 수정을 쉼 없이 하며, 책을 늘 곁에 두고 산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첫 권엔 노벨상 수상 작가 헤밍웨이, 포크너, 마르케스, 파무크가 실렸다. 늘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쿤데라, 로스, 에코, 하루키도 실렸다.   (왼쪽부터)헤밍웨이, 에코, 오스터, 보르헤스. 헤밍웨이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다 작품에 쓰진 않는다고 했다. "빙산은 전체의 8분의 7이 물속에 잠겨 있다"는 것이다. 작가가 쓰지 않은 부분이 눈에 보이진 않지만 작품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퇴고하면서 압축과 생략에 힘들게 공을 들인 소설이 바로 '노인과 바다'라는 것. 48세에 '장미의 이름'을 써서 세계적 작가가 된 에코는 "갑자기 소설을 쓴 게 아니다"고 했다. 기호학자로서 논문을 쓰며 이론 속에 '내러티브'를 넣으면서 소설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설을 썼다는 것이다. 쿤데라는 출세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비결이 소설의 다성성(多聲性)이라고 일러줬다. 꿈, 서사, 성찰이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완전한 흐름이 되길 바랐다는 것. 그의 소설은 '키치(싸구려 예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여러 사건이 뒤섞인다는 얘기다.   '작가란 무엇인가' 2권엔 노벨상을 받은 겐자부로, 사라마구, 요사, 그라스, 모리슨을 실었다. 20세기 문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보르헤스, 미국 대중소설의 스타 작가 킹의 인터뷰도 실었다. 겐자부로는 "저는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무정부주의자"라고 했다. 그는 주로 오전 7~11시에 물만 마시며 글을 쓴다. '양철북'의 작가 그라스도 "밤에는 절대 안 쓴다"고 했다. "밤에 쓴 글은 너무 쉽게 씌어 믿기 힘들다"는 것. 3권엔 SF 작가 르 귄, 일본인이지만 영어로 소설을 쓰는 이시구로, 소설 '슬픔이여 안녕'의 프랑스 작가 사강의 목소리를 담았다. 폴 오스터와의 대화만 담은 '글쓰기를 말하다'에서 오스터는 "글쓰기가 내게 대단한 즐거움을 주진 않지만, 글을 쓰지 않으면 상태가 더 나빠진다"고 밝혔다. 원래 시인이었던 그는 "시의 목표는 언어의 순수성과 일관성이지만 산문은 갈등과 모순을 명확히 표현하는 것"이라며 소설가로의 변신을 설명했다. 그는 한때 추리소설 기법을 차용해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는 "탐정소설엔 늘 해답이 있지만, 제 소설엔 질문만 있다"고 했다. 철학자 양운덕은 "보르헤스의 단편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담은 흥미로운 우주"라며 연구서 '보르헤스의 지팡이'를 썼다. 그는 보르헤스 혹은 그의 소설 속 인물이 마치 한국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이야기를 꾸몄다. 이 책은 보르헤스의 문학 속으로 마치 꿈을 꾸듯이, 꿈 속에서 또 다른 꿈으로 계속 빠지는 상상의 미로(迷路)를 펼쳐놓는다.   /ⓒ 조선일보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475    시는 찰나, 비극적 불확정적인 하나의 세계이다... 댓글:  조회:2912  추천:0  2017-05-13
산문은 모두 녹내장 판정을 받은 후 썼다. 조연호 시인은 “감각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것이 감수(感受)에 영향을 미친다는 자명한 사실을 슬프게 느끼고 있다”며 “제임스 조이스도, 보르헤스도 녹내장이었는데 제 두 눈을 다 가져가도 좋으니 신께서 그들의 발톱만큼의 능력이라도 제게 주신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낭독 붐을 타고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가 ‘읽는 맛’을 추구한다면, 10여년 전 많은 젊은 시인들의 시는 ‘보는 맛’을 추구했다.   연과 행마다 시제가 바뀌거나 화자가 여럿인 다중 시점이 출현하는 등 언어 실험이 한창이었다. 이들의 시는 ‘미래파’(문학평론가 권혁웅), 혹은 ‘뉴웨이브’(신형철)란 타이틀로 소개됐는데 ‘소통불가의 난해시’란 수식을 통해, 역설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지금은 중견이 된 김경주 김언 김행숙 진은영 황병승 등이 바로 이 뉴웨이브의 기수들이다. 저들 중 읽기에 ‘난해함’을 기준으로 줄을 세울 때, 시인들이 “이구동성으로”(시인 김민정) 가장 첫 머리에 올리는 시인이 조연호다. 철학적, 관념적 색채가 짙은 그의 시는 비문, 경전을 연상시키는 문체를 빌려 유려하면서 고답적인 스타일을 빚어낸다. 생경한 한자 조어는 음악성을 만든다. 저 독특한 만연체 문장에 하늘(시집 ‘천문’), 땅(‘농경시’), 지하(‘암흑향’)의 풍경을 담은 시집을 잇달아 출간한 그의 별명은 “시단의 박상륭”(권혁웅)이다. 조연호 시인이 자신의 시론(詩論)과 시작(詩作)을 풀어 쓴 산문집 ‘악기’(惡記ㆍ난다)를 냈다. 한국일보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그는 “제 시들에 대한 사후적인 설명서”라며 “시나 문학의 세계에는 선함도 악함도 없다. 선함을 입히려는 모든 행위에 반대하는 의미로, 그들의 도덕 기준에 어긋났다는 의미로, ‘악(惡)’을 제목에 사용했다”고 밝혔다. 산문집이지만 역시 읽기에 녹록하지는 않다. 파르니메데스, 사포, 종영의 ‘시품’(詩品), 하이데거, 아도르노까지 동서양 고전을 ‘시인답게’ 해석하며, 현상과 감정, 언어와 시, 독서와 문체에 관한 사유를 풀어놓는다. 거칠게 정리하면, 우선 시가 어떤 현실을 언어로 담으려 해도 언어의 특성상 완벽하게 담을 수 없는 한계에서 이미 출발한다는 것이다. 산문집을 “시 형식에 대한 시 형식적 답변”이라고 정리한 저자는 “옥타비오 파스의 ‘활과 리라’ 같은 질감의 글을 염두에 뒀다. ‘시론의 이성, 시의 감성의 조합’인데, 제가 시를 쓰면서 도달하려는 지점과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시가 정서에 매달린 물방울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성에 매달린 땀방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장르에서 시적 감흥을 받을 때, 영역이 서로 교차할 때, 시 한편의 무게와 다름 없습니다.” 조연호 시인은 "시에 대해, 난해냐 순해냐가 아니라 향유냐 비향유냐의 차원으로 접근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인에 따르면 '이해'는 대상을 타자화하는 방식, '향유'는 대상에 상호 조응하고 감흥되는 방식다.    책 곳곳에 ‘문체 선생’, 철학자 니체에 대한 오마주가 가득하다. “문체에 관한 한 오로지 니체에게서 배웠고 오로지 니체만을 존경한다”는 그는 아예 “니체 선생께 드리는 편지(‘음악의 남쪽, 인간의 북쪽’)”를 한 챕터로 따로 썼다. 자신의 시작(詩作) 방식도 소개한다. 책 ‘악기-문체’ 편에 담은 비법을 요약하면 “언어든 의미든 형식이든 연쇄적인 걸 즐기기 때문에, 엄청나게 수정한다”는 것. ‘한국 전위시의 최전선’으로 불리는 그는 자신의 글이 난해하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지만 평소 “불확정적인 세계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해왔다. 그는 “쓰는 자 외에 아무도 원치 않는 시를 쓰는 이유”를 자문하며 이렇게 말했다. “시 쓰기라는 행위는 하나의 세계이고 그 세계 안에서 저 자신은 자유로우니까요. 쓰고 있을 때에만 그것은 세계입니다. 시라는 것은 찰나적 비극을 알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지, 시 자체가 숭고하고 위대하여 길이 남을만한 물질적 대상이라는 그릇된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한국일보 이윤주 기자 ===================덤으로 더 보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그가 키웠던 하얀 고양이.   출생 1899. 8. 24,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망 1986. 6. 14, 스위스 제네바 국적 아르헨티나 요약 남아메리카에서 극단주의적 모더니즘 운동을 일으킨 작가로 평가된다. 1961년 사뮈엘 베케트와 함께 권위있는 포멘토상을 받은 후, 그의 소설과 시는 점차 20세기 세계문학의 고전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전까지 보르헤스는 자신의 고향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다른 작가들은 그를 단지 기교와 재주를 지닌 장인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그가 '창조해낸' 악몽의 세계는 프란츠 카프카의 세계에 필적할 만한 것이라는 평을 받았고 일반적인 언어를 가장 지속성 있는 형태로 응축시킨 작가로 높이 평가되었다. 보르헤스의 작품을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문학은 학문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전세계의 일반 독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목차 개요 생애 평가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아르헨티나 시인, 소설가, 평론가. 개요 남아메리카에서 극단주의(Ultraísmo)적 모더니즘 운동을 일으킨 작가로 평가된다(라틴아메리카 문학). 생애 보르헤스는 당시 빈민구였던 팔레르모에서 자랐으며, 이곳은 뒤에 그의 몇몇 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아르헨티나 역사상 주목할 만한 그의 집안에는 영국계 혈통이 흘러서 그는 스페인어보다 영어를 먼저 배웠다. 한 영국 학교의 교사였으며 박식했던 아버지의 서재에서 그가 처음으로 읽은 책들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 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H. G. 웰스의 소설들, 〈천일야화 The Thousand and One Nights〉, 〈돈 키호테 Don Quixote〉 등 모두 영어책들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꾸준한 자극과 모범에 힘입어 어린시절부터 문학의 길을 걷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가족을 따라 스위스의 제네바로 갔고, 그곳에서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배웠으며 제네바대학에서 문학학위를 받았다. 1919년에 그곳을 떠난 보르헤스가(家)는 마요르카와 스페인에서 1년씩을 보냈다. 스페인에서는 98세대(Generation of '98:기성작가들의 타락에 반발하여 일어난 극단주의 운동의 젊은 작가군)에 가담했다. 1921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돌아와 자신이 성장했던 도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풍부한 상상력으로 과거와 현재를 형상화한 시들을 통해 고향 팔레르모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출판한 책은 시집 〈시(詩),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정 Fervor de Buenos Aires, poemas〉(1923)이다. 그는 또한 뒤에 관계를 끊기는 했으나, 남아메리카에서 극단주의 운동을 일으킨 사람으로 평가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여러 권의 수필집·시집 등을 펴냈고 3개의 문학지를 창간했으며 전기(傳記) 〈에바리스토 카리에고 Evaristo Carriego〉(1930)를 완성했다. 그후 그는 순수주의 소설 창작을 대담하게 시도했다. 처음에는 〈불명예의 세계사 Historia universal de la infamia〉(1935)에 실린 단편에서처럼 다소 불명예스러운 사람들의 일생을 재구성하기를 즐겼다. 한편 생계를 위해 1938년 그의 조상 이름을 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도서관에서 중책을 맡아 9년간 그곳에서 일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1938년에 머리를 심하게 다쳐 그로 인한 패혈증으로 거의 죽을 뻔했는데 후유증으로 그후 말을 못하게 되었으며 자신의 정신이 온전한지를 걱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이 그에게 내재해 있던 가장 강렬한 창작력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그뒤 8년 동안 가장 훌륭한 작품들을 창작했는데, 이 작품들은 뒤에 연작집 〈소설 Ficciones〉·〈알레프 외(外) The Aleph and Other Stories, 1933~69〉라는 영역판에 실렸다. 이 시기에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라는 작가와 함께 조상의 이름을 서로 결합해 만든 H. 부스토스 도메크라는 필명으로 탐정소설을 썼는데, 이 작품은 〈돈 이시드로 파로디의 6가지 문제 Seis problemas para don Isidro Parodi〉(1942)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실제 세계에 대한 반어적·역설적 설명이라 할 수 있는 그의 고유한 꿈의 세계를 독특한 언어와 서술 기법을 사용해 처음으로 보여주고 있다. 1946년 독재자 후안 페론이 권력을 쥐게 되자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측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도서관에서 쫓겨났다. 그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강연·편집·저술활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수필집 〈다른 종교재판들 Otras inquisiciones, 1937~1952〉(1952)에서 냉철한 판단력과 분석력을 보여주었다. 1955년 페론이 물러나자 명예직인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 관장이 되었고,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에서 영미문학 교수직도 맡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앞을 전혀 못 보게 되었는데 이 병은 그의 아버지도 겪었던 유전질환으로, 1920년부터 점차 시력이 약해졌었다. 이로 인해 그는 손으로 직접 글 쓰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고 어머니나 비서, 또는 친구들이 받아써주어야만 했다. 후기 작품에 속하는 〈창조가 El hacedor〉(1960)·〈가상의 존재들에 대한 책 El libro de los seres imaginarios〉(1967) 등은 산문과 운문 사이의 장르 구별을 거의 없앤 작품들이다. 후기 소설집으로는 복수·살인·공포를 다룬 〈브로디에의 보고서 El informe de Brodie〉(1970)·〈모래의 책 El libro de arena〉(1955) 등이 있는데, 두 작품 모두가 민담 이야기꾼의 소박함과 자기 내면의 미로를 파헤쳐 그 핵심에 도달하려는 한 인간의 복잡한 시각을 결합시킨 우화들이다. 평가 1961년 사뮈엘 베케트와 함께 권위있는 포멘토상을 받은 후, 그의 소설과 시는 점차 20세기 세계문학의 고전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전까지 보르헤스는 자신의 고향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다른 작가들은 그를 단지 기교와 재주를 지닌 장인(匠人)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그가 '창조해낸' 악몽의 세계는 프란츠 카프카의 세계에 필적할 만한 것이라는 평을 받았고 일반적인 언어를 가장 지속성 있는 형태로 응축시킨 작가로 높이 평가되었다. 보르헤스의 작품을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문학은 학문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전세계의 일반 독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474    시인은 자화자찬에 빠지지 말아야... 댓글:  조회:2520  추천:0  2017-05-12
        張家界(장가계) 天門山(천문산) 관광지에서ㅡ 3. 이미지와 수사 시어의 생명은 객관적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함축적인 의미에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는 논리적 분석의 대상만은 아니다. 문학 일반이 그렇듯 시는 독자에게 정서적 반응을 불러 일으키고, 독자는 이를 통해 시적 체험(詩的體驗)을 하게 된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이 절실하게 느꼈던 체험이나 감각을 생동감 있게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제재인 언어를 통해 그것을 감각화(感覺化)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미지다. 그러니까 이미지는 감정이나 사상이 감각과 통일되어 나타난 것이다.독자들은 누구나 여러 가지 감각 기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미지를 통한 환기(喚起)가 가능한 것이다. 예컨대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라고 했을 때 '소리'라는 청각과 '푸른'이라는 시각의 두 이미지가 합쳐져 있다. 이것을 공감각(共感覺)적 이미지라고도 하는데, 보이지 않고 들리기만 하는 종소리를 보이는 대상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특히 시각적 이미지는 시의 회화성(繪畵性) 획득에 크게 기여한다.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에서) 이 시의 주된 정서는 '설움'이다. 그러나 그 정서는 '서럽다'는 직접적인 진술보다는 '제삿날 큰 집의 불빛', '해질녘 가을 강', '사랑 끝 울음', '소리 죽은 가을 강' 등의 이미지들이 모여 만들어 낸 정서다.특히, 공감각적(共感覺的) 표현인 '울음이 타는 가을 강'에서 '울음(청각)'과 '타는(시각)'이 만나, '설움'의 정서는 한층 선명해지고, 동시에 심화되고 있다. 이처럼 직설적, 추상적인 어법을 피하고 감각적인 표현을 지향할 때, 시는 보다 참신하고 풍요로운 예술적 형상화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새로운 의미, 새로운 이미지를 얻기 위해 비유의 방법을 동원한다. 비유의 방법이 가능한 것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 유사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전혀 닮아 보이지 않는 두 사물 사이에서도 공통점을 찾아 내기도 한다.이 공통점을 시인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그 방식에 따라 직유(直喩)·은유(隱喩)·의인(擬人)·제유(提喩)·환유법(換喩法)등의 비유법이 성립하게 된다. 스스로의 생명을 키워 그 생명을 다 하기 위하여 빛 있는 곳으로 가지를 늘여 잎을 펴고 빛을 모아 꽃을 피우듯이 추운 이 겨울날 나는 나의 빛을 찬아 모아 스스로의 생명을 덥히고 그 생명을 늘여 환한 그 내일을 열어 가리. (조병화, '난(蘭)') 이 시에서 '빛'은 시 전편에 반복되어 나타남으로써 시인 자신의 어떤 관념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상징적 차원에 있다. 이 시의 화자인 '나'는 단순히 '빛을 찾아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보조 관념인 '빛'은 자연스럽게 원관념인 '이상, 희망, 혹은 이념' 등의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이처럼 상징이란 가시(可視)의 세계, 곧 물질 세계가 연상의 힘에 의하여 시인의 관념인 불가시(不可視)의 세계, 곧 정신 세계를 드러내는 표현 양식이다 4. 운율과 시짓기 서정시의 본질은 언어의 유기적(有機的) 조직을 통해 의미와 음악의 통일을 이루어내는 데 있다. 이 때 시의 음악성, 곧 가락(리듬)을 가리켜 운율이라고 한다. 음악이 시간 예술이며, 음의 고저장단(高低長短)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듯이 운율 역시 운율 요소들의 규칙적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 규칙적 반복은 기계적 반복이 아니라 일정한 의미를 지닌 조화로운 형식이다. 운율이 조화로운 질서임을 구체적 예를 통해 알아보자. 괴나리 / 봇짐을 / 짊어지고 // 아리랑 / 고개로 / 넘어간다 // 아버지 / 어머니 / 어서오소 // 북간도 / 벌판이 / 좋다더라 // ('신아리랑'에서) 이 민요는 3마디가 1행을 이루고 있고, 이러한 행이 반복되어 1연을 이루고 있다. 1마디를 1걸음으로 치면 3걸음이 1행을 이룬다. 이 걸음은 소리의 걸음이기 때문에 음보(音步, foot)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위의 민요는 3음보 가락으로 되어 있다.우리 나라의 시는 대부분 3음보와 4음보의 가락으로 되어 있다. 민요와 현대시에는 3음보와 4음보가 두루 쓰이고, 고려 가요에는 3음보가 많으며, 시조(時調)와 가사(歌辭)는 모두 4음보로 되어 있다. 다시 위의 민요를 보면 1음보의 글자 수가 3자와 4자로 되어 있다. 즉, 3·3·4 // 3·3·4 // 의 규칙적 반복인 것이다. 그러면서 3·3·3으로 하지 않고 3·3·4로 변화를 주면서도 뒤의 글자수가 한 자가 많은 4자여서 전체적인 안정감을 주고 있다. 이처럼 운율은 규칙적 반복과 변화가 조화를 이루면서 질서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추강(秋江)에 / 밤이 드니∨물결이 / 차노뫼라 // 낙시 / 드리치니∨고기 아니 / 무노ㅁ라 // 무심(無心)한 / 달빗만 싯고∨빈 배 저어 / 오노라 // (월산대군(月山大君) 이 평시조는 4음보로 된 1행이 3번 반복되어 있다. 그러나 글자 수조차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3·4·3·4 // 2·4·4·4 // 3·5·4·3으로 3·4를 중심으로 가감(加減)되고 있다. 평시조는 4음보의 규칙적 반복이 외형적으로 틀이 잡혀 있는 시이므로 정형시(定型詩)에 속한다. 그리고 운율이 겉으로 드러나 있으므로 외재율(外在律)에 속한다. 해야 / 솟아라. // 해야 / 솟아라. /// 말갛게 / 씻은 얼굴 // 고운 해야 / 솟아라./ 산 너머 / 산 너머서 // 어둠을 / 살라먹고, /// 산 너머서 / 밤새도록 // 어둠을 / 살라먹고, /// 이글이글 / 앳된 얼굴 // 고운 해야 / 솟아라 (박두진, '해'에서) 이 시는 겉으로 보기에는 산문(散文)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호흡 단위로 율독(律讀)하면 4음보의 가락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운율이 겉으로 틀 지어져 있지 않고 자유로운 형태 속에 내포되어 있으므로 자유시라 하고, 그 운율은 내재율(內在律)이라 한다. 시의 운율에는 음수율(音數律), 음위율(音位律), 음성률(音聲律)등도 있다. 음수율은 글자수의 정형성을 말하는데 우리 나라 시의 기본적인 음수율은 주로 3·4조나 4·4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음위율은 압운법(押韻法)을 말하는 것으로, 한시(漢詩)에서 그 대표적인 예를 볼 수 있다. 음성률은 음의 고저 강약(高低强弱)에 의존하는 것이다. 운율의 요소로는 이 외에 음성 상징(音聲象徵), 의성어(擬聲語), 반복과 병렬등이 있으며, 행·연 등의 시의 형태도 운율과 관계가 있다. 음성 상징은 음색(音色)과 음상(音相)을 이용한다. 예컨대 발자국 소리를 '자박자박'이라고 표현하는 경우와 '저벅저벅'으로 하는 경우의 음성 상징은 서로 같지 않다. 전자처럼 양모음(陽母音)을 쓸 경우 밝고 경쾌한 느낌을 주지만, 음모음(陰母音)을 쓸 경우 어둡고 둔중(鈍重)한 느낌을 준다. 또 ㄴ·ㄹ·ㅁ·ㅇ과 같은 자음과, 모음과 모음 사이에 발음되는 ㅂ·ㄷ·ㅈ의 음도 즐겁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김영랑의 시 구절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과 같은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의성어는 소리를 모방한 것으로, 실감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삐이 뱃종 뱃종! / 하는 놈도 있고박두진의 '사슴'에서와 같은 것이다. 반복의 경우는 앞의 박두진의 '해'에서 잘 볼 수 있으며 병렬은 한시의 대구(對句)에서 잘 나타나 있다. 시를 공부하면서 흔히 문제가 되는 것은, 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및 분석과 창작하는 일의 선후 관계이다. 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나 분석은 이론의 문제일 터이고 창작은 직접 써 보는 일이 되는 셈인데, 무엇을 먼저 공부해야 옳은가 하는 문제는 당연한 물음이 될 수도 있지만 사실은 무척 중요하다. 몇 편의 시를 창작 혹은 분석해 보고 기쁨을 얻게 되면 대부분은 시를 많이 아는 양 우쭐거려 보기도 하고 마치 시인이 된 양 자찬에 빠지기도 한다. 물론 시를 모른다는 것이 아니며, 시인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시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다고 생각될 때가 시를 가장 모를 때라고 한다면 오히려 옳은 말일 것이다. 조금 알고 있음에 만족하고 그치는 경우, 그 편협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시의 세계를 그릇되게 인식하고 심지어 시의 본질까지도 왜곡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문자 언어를 매개체로 하는 예술인 경우에 꼭 필요한 말로, '이해할 수 없으면 쓰지도 못 하고, 쓸 수 없으면 이해할 수도 없다.'는 말이 있다. 이는 이론과 실제의 조화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글 공부를 위해서는 '이해하지 못 하면 쓸 수 없다'는 말 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시 짓기를 위한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분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밟다 보면 짓기를 사사롭게 시도하지 않으며, 지으면서 그 과정 속에서 얻은 것을 조심스럽게 적용하려 할 것이다. 이에 널리 알려진 시를 분석하는 요령을 네 가지 차원에서 알아 보고자 한다. ------------------------------------------------------------------------------------------- 아직  ―유자효(1947∼)     너에게 내 사랑을 함빡 주지 못했으니 너는 아직 내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내 사랑을 너에게 함빡 주는 것이다 보라 새 한 마리, 꽃 한 송이도 그들의 사랑을 함빡 주고 가지 않느냐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그들의 사랑이 소진됐을 때 재처럼 사그라져 사라지는 것이다 아직은 아니다 너는 내 사랑을 함빡 받지 못했으니     마치 철칙인 듯 선물은 번듯한 것으로, 무엇을 베풀 때는 풍성하게 하는 친구가 있다. 받는 사람의 기분을 깊이 헤아리는 그 마음은 아름답지만, 곤궁하다 할 수 있는 그의 형편을 아는지라 옆에서 볼 때마다 안타깝다. “이것저것 섞어서 이천 원어치만 주세요.” 인색함이나 근천스러움에 대해 떠올릴 상황이 됐을 때 그와 주고받는 오래된 농담인데,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는 길에 한 일행이 이리 주문했단다. 그의 기질에 얼마나 경악했을까. 하지만 예의 그 사람은 제 말이 우리의 신랄한 농담거리가 된 줄 짐작도 못하리라. 마음이든 물질이든 우리는 저마다의 경제관념을 갖고 있다. 사랑의 총량도 저마다 다르리라. 그리고 대개 우리는 그 총량을 다 쓰지 못하고 가리라. 그래야 하리라. 사랑이 바닥난 채로 남은 삶이라니 생각만 해도 스산하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그들의 사랑이 소진됐을 때/재처럼 사그라져 사라지는 것’일 테다.  ‘너에게 내 사랑을 함빡 주지 못했으니/너는 아직 내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단다. ‘아직’이란 말에 밴 안타까움이 어떤 절박한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사랑이 깊으면 그 대상에 대해 항상 이리 절박한 느낌을 가지리라. 시에 ‘함빡’이란 말이 거듭 나온다. 화자가 가진 사랑의 빛깔은 알 수 없지만, 그 양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무한정이리라. 그러니 언제까지라도 ‘아직’일 테다. 언제까지라도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을 테다. 이 사랑의 부자는 항상 제 사랑이 ‘아직’이라고 안달하는 사랑의 거지이기도 하다.  
473    "윤동주앓이" 댓글:  조회:2506  추천:0  2017-05-11
상실의 시대 ‘윤동주앓이’ (ZOGLO) 2017년5월10일  [서울신문]= 시대상과 그의 詩 들어맞아…공연·음반·문화행사 신드롬  “부끄러워하는 시인에서 실천·희망 이미지로 변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윤동주 ‘서시’ 중) 윤동주 시인윤동주(1917~1945) 탄생 100주년을 맞아 우리 사회 곳곳에서 그를 기리는 행사들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부끄러움’과 ‘희망’(별)을 따르기라도 하듯, 조용히 그러면서도 또렷하고 단호하게 그를 좇는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 문단의 그 어떤 거목들에 대한 기림보다도 강렬하다. ‘윤동주앓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인과 사회학자들은 이를 단순히 탄생 100주년이라서가 아니라 윤동주의 삶과 그의 시가 지금의 시대정신에 들어맞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우리 사회의 윤동주 신드롬은 지난해부터 시작됐다. 당장 한국 시집 판매량이 2015년에 비해 무려 505.7% 늘었다. 무엇보다 윤동주의 일생을 그린 영화 ‘동주’가 개봉하며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복간 초판본이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초판본 찾기 행렬을 낳았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지금도 주요 서점의 ‘베스트셀러 10’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윤동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주요 문화예술단체와 지자체 등의 다양한 행사로 이어지고 있다.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가 전석 매진 기록을 이어 간 끝에 지난달 막을 내렸고, 오는 12일에는 서울문화재단이 후원하고 네오아르떼가 기획한 공연 ‘시인 윤동주를 위하여’가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펼쳐진다. 공연에서는 윤동주의 29년 짧은 생과 그의 주옥같은 시어를 담은 가곡을 드라마 형태로 그려 낸다. 그런가 하면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클래식 음반들이 쏟아지고 있고, 그의 시를 그림으로 펼쳐 낸 시화전도 줄을 잇는다. 문화행사도 다채롭다.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의는 윤동주를 비롯해 1917년생 문인 이기형, 조향, 최석두, 손소희 다섯 작가를 재조명하는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 심포지엄과 문학의 밤 행사를 지난달 연 데 이어 올 9월부터 내년 1월까지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윤동주와 관련 시·그림전, 일본 문학 기행 행사를 잇달아 연다. 지난달 서울 남산도서관에 이어 서울 서대문도서관은 10일부터 7월 말까지 윤동주 기념행사 ‘윤동주, 읽다·쓰다·걷다’를 진행한다. 윤동주 문학을 20년 동안 분석한 김응교 숙명여대 기초교양학부 교수는 이런 새삼스럽다 싶은 ‘윤동주앓이’에 대해 “과거와 달리 윤동주에 대한 평가가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김 교수는 “윤동주 대표 시로 꼽는 ‘자화상’이나 ‘참회록’은 윤동주가 창씨개명과 징용제도 등을 겪으면서 시를 쓰지 않은 침묵기(1939년 9월~1940년 12월) 전에 쓴 시다. 이런 시들이 교과서에 실리고 주목받으며 윤동주에 대해 ‘일본강점기에 아무것도 하지 못해 부끄러워하는 시인’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지만 침묵기 이후의 시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저항하고 실천하는 시인’으로 이미지가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그가 최근 ‘윤동주 하면 떠오르는 단어나 이미지’를 묻는 설문조사(인터넷 이용자 1086명 대상)를 벌인 결과 312명이 ‘별’을 꼽았고 ‘부끄러움’(249명) ‘성찰’(78명) 등이 뒤를 이었다. 그런가 하면 ‘왜 윤동주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에는 ‘교과서에 나와서’나 ‘기독교인이라서’ 등의 예상 답변을 제치고 ‘시가 좋아서’라는 응답이 첫 번째를 차지했다. 결국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시절 몇 줄의 글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무기력한, 그러면서도 하늘의 별을 보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청년 윤동주의 모습이 지금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많은 이의 공감을 자아내고 있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김 교수는 지난해 촛불집회에서 자주 쓰였던 ‘쉽게 씌어진 시’(1942년)의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이라는 구절을 들어 “실천의 시대에 대한 답을 윤동주에게서 얻고 싶은 욕구를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굵직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우리의 새 시대에 대한 희망이 너무 커져 버린 감이 있다. 대선 이후 들어서는 정부가 이런 희망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 주느냐에 따라 윤동주에 대한 인기도 달라질 것”이라고 밝혔다.
472    시인의 특권은 감정의 표현을 누리는것이다... 댓글:  조회:2511  추천:0  2017-05-11
시창작이론1 1.시와 시의 언어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쉽지 않다. 지금까지 시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내려졌으나 완벽한 정의는 나오지 않았다. 원래 시의 정의는 나올 수도 없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시는 이미 의미가 없는 것이요 발전이란 것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대에 따라 시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시 자체도 변모하기 때문이다. 편의상 시는 마음 속에서 이루어진 뜻을 말로 나타낸 것이라는 정의에서 출발해 보자. '시언지(詩言志)'라는 이 정의는 동양의 전통적인 시관(詩觀)으로 오랫동안 통용되어 왔다. 먼저 뜻을 보자. 문학을 정의할 때 '가치 있는 체험을 내용으로 한다'고 하니, 시에서의 뜻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표현하지 않고는 못배길 절실한 그 무엇이 여기서의 뜻이라고 하겠다. 이번에는 뜻을 전달하는 '말'에 주목해 보자. 문학이 언어 예술이므로 시에서의 말도 제재(題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의 경우에 있어서 언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가 하면 시의 형태도 소설이나 희곡과는 다르다. 짧고 압축되어 있다. 그러나 짧고 압축된 형태의 문학이면 모두 시라고 할 수는 없다. 절제(節制)된 언어의 질서가 어떤 원리에 의해 이루어지고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만 한다.이처럼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해명해야 할 과제가 많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에 대한 부당한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좋다. 시는 아름다워야만 한다든가, 고상한 세계를 노래해야만 한다든가, 시는 일상 생활에서는 쓸모가 없다든가 하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는 것이 시에 대한 정의(定義)를 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시의 언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는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알아보자. 언어를 매개로 하는 문학 중에서도 가장 언어에 민감한 갈래가 시이다. 시인은 자신의 체험·정서·사상 등을 제한된 형식과 언어 속에 담아내야 하기 때문에, 시어(詩語)의 선택에 각별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역사적·사회적으로 형성된 관습적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즉 언어는 어떤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記號)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한 의사 전달을 위해서는 언어의 이와 같은 기능은 필수적이다. 이처럼 지시적 기능(指示的機能)을 가진 언어의 의미를 외연적(外延的) 의미라고 부른다. 그러나 시어로 채택된 언어는 외연적 의미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시어는 관습적인 때가 벗겨진, 보다 신선하고 새로운 의미의 언어이어야만 한다. 고향(故鄕)은 늘 가난하게 돌아오는 그로하여 좋다. 지닌 것 없이 혼자 걸어가는 들길의 의미(意味) 백지(白紙)에다 한 가닥 선(線)을 그어 보라. 백지(白紙)에 가득 차는 선(線)의 의미(意味) 아,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모르는 그 절망(絶望)을 비로소 무엇인가 깨닫는 심정이 왜 이처럼 가볍고 서글픈가. 편히 쉰다는 것 누워서 높이 울어 흡족한 꽃 그늘 ― 그 무한한 안정(安定)에 싸여. 들길을 간다. (이형기, '들길') 이 시에는 들길을 걸어가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시를 읽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가 삶에 지쳐 귀향(歸鄕)길에 오른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 고향이란 그 누구에게나 안식과 평화를 베풀어 주는 따뜻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된다. 따라서, 시의 제목인 '들길'은 바로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여기에는 물론 삶에 실패하여 빈손으로 고향을 찾아가는 화자의 궁핍한 심정이 암시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화자의 가난한 귀향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물질적으로 가난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자기를 성찰(省察)함으로써 얻게 된 정신의 충만함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는 가난했으므로 참다운 고향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세속적인 만족과 쾌락이란 덧없고 허망하다는 것, 참된 삶이란 욕망을 채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비우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상의 설명은, 물론 시인이 시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전체 의미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전체의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 좀더 긴 글을 쓴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시를 설명 혹은 분석하는 일은 일상적인 언어 행위인데 반해, 시 그 자체는 일상어를 초월한 시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일상어로서는 표현이 불가능한 이 시적인 진실, 즉 궁핍한 귀향자가 들길을 가며 깨달은 생(生)의 진실을 한 마디로 '백지(白紙)에다 한 가닥 / 선(線)을 그어 보라. / 백지(白紙)에 가득 차는 / 선(線)의 의미(意味)'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창조한 언어, 즉 시의 언어라 할 수 있다. 다음을 보자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본래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성북동은 서울에 있는 한 지역의 구체적인 지명이다. 번지란 땅을 인위적으로 나누고 번호를 부여한 것이다. 그런데 1행에서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겼다는 것은 원래 자연이었던 곳에 인간의 주택지가 인위적으로 조성되었다는 뜻이다. 2행에서는 자연인 그 산에 살던 비둘기만 보금자리를 잃었다고 했다. 1행과 2행은 문명과 자연의 대립 구조(對立構造)로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1행의 번지는 문명을, 2행의 번지는 자연적 삶의 터전을 뜻하게 된다. 이처럼 시어는 언어의 지시적 의미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데, 이를 함축적(含蓄的), 또는 내포적(內包的) 의미라고 한다. 지시적이고 객관적인 외연적 의미에서 암시적(暗示的)이고 주관적인 내포적 의미로 확대되어 가면서 시어는 하나 이상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리고 시어가 하나의 의미로 포착되지 않고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때 오히려 시의 의미와 가치를 풍부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산(山)에 산(山)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김소월, '산유화(山有花)'의 2연) 이 시에서 '저만치'의 뜻은 무엇일까? 우선 어떤 거리를 지시함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몇 미터라고 해석될 수는 없다. 전체적 문맥으로 보아 꽃이 저기, 저 쪽에서 피어 있다는 의미에서 거리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저만치'는 시인이 꽃과의 사이에서 느끼는 심정적(心情的) 거리감으로 해석되어도 좋다. 그런가 하면 '저만치'는 '저렇게' 또는 '저와 같이'로 어떤 상태나 정황(情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산에서 피는 꽃은 저렇게 외로이 피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만치'를 거리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과, 상태나 정황으로 해석하는 것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상승 작용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저만치'의 의미가 더욱 풍부해지게 되었다. 이처럼 한 단어 또는 한 문장 구조 속에 두 개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경우를 일러 언어의 다의성(多義性), 또는 모호성(模糊性)이라 한다. 이것은 문학, 특히 시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2.시와 서정 시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서정성(抒情性)이다.전통적인 시에서부터 오늘날의 실험시에 이르기까지, 작품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시는 산문(散文)과 달리 어느 정도 서정성을 지니고 있다. 서정성이란 대상을 의미나 개념으로 파악하지 않고 감정이나 느낌으로 이해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것은 음악의 세계와 매우 유사하다. 음악에서는 직접적이거나 분명한 의미, 혹은 개념의 전달이 없다. 다만, 소리의 변화가 주는 감각적인 분위기와 느낌이 어떤 감정을 유발시키고, 청자(聽者)는 자신의 주관을 통해 그 의미를 상상할 따름이다. 시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음악이 소리를 통하여 어떤 대상을 이해한다면, 시는 소리가 포함된 언어를 통해 대상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적인 요소이다. 산문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만, 시는 주관적 혹은 감정적으로 느끼는 언어인 것이다. 나아가 시에서는 대상과 주관이 아예 하나로 융합되거나 결합된다.때로 인간에게는 감정적(感情的)인 의미가 이지적(理智的)인 의미보다 더 중요한 경우도 많다. 이에 따라, 언어를 이지적인 의미를 지향하는 것과 감정적인 의미를 지향하는 것의 두 가지로 나누기도 한다. 전자를 산문의 언어, 후자를 시의 언어라고 부른다. 산문의 언어가 중시하는 것은 이지적인 의미, 즉 외연적(外延的)인 의미이며, 시의 언어가 중시하는 것은 감정적인 의미, 즉 내포적(內包的) 의미이다. 붉은 해는 서산(西山)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山)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서름에 겹도록 부르노라. 서름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김소월, '초혼(招魂)'에서) 이 시에서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는 무슨 뜻일까? 먼저, '돌'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시의 전체적인 문맥으로 볼 때, 여기서의 '돌'은 '바위의 조각으로 모래보다 큰 것'이라는 사전적 의미, 즉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라, '돌'이 가진 한 부분의 속성만을 확대하여 '붙박이로 자리를 지키는 존재'라는 내포적 의미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이는 곧 님에 대한 시적 화자의 변치 않는 사랑이 형상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이 관심을 가진 것은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표현하거나 전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서 연유된 자신의 슬프고 허무한 감정 그 자체의 형상화(形象化)이다. 이처럼 감정의 표현은 문학, 특히 시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 숲  ―이제하(1937∼) 밤새 격렬하게 싸우다 달아난 애인을 뒤쫓아 숲까지 갔더니 웬 녀석이 사과궤짝까지 들고 와 새벽부터 웅변연습을 하고 있다. 구케의원이라도 돼 또 나라를 말아먹으려나 싶어 야리다 보니 한 옆에는 낯짝 우두바싸고 세상의 고뇌란 고뇌는 혼자 짊어진 듯이 신음소리를 내는 녀석까지 보인다. 하지만 고요한 바다와 푸른 나무로 에워싸인 숲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쫓던 애인도 잊고 나는 무슨 생각에 잠긴 말 곁으로 다가간다. 야채와 당근을 먹을 만큼 먹은 듯 말은 호주에 가 있는 짝이라도 생각하는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그렇게 받아들일 밖에 없다.                     여자나 남자나 성정이 불같은 연인들일 테다. 사랑할 때만큼이나 싸울 때도 격정적이어서, ‘밤새 격렬하게 싸우다’ 급기야 애인이 뛰쳐나간다. 아직 어두운데 나가긴 어딜 나간단 말이냐. 걱정도 되고 해서 화자는 ‘애인을 뒤쫓아 숲까지’ 간다. 숲은 일상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뭔가 낯선 것들이 거기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예로부터 숲은 시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왔다. 그런데 화자는 애인을 찾으러 숲에 갔다가 이런저런 기이한 세상 풍경을 본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새벽 숲에서 ‘정치인’도 보고 ‘철학자’도 보고 말도 본다. 말은 이제하의 상징동물이니 ‘시인’이라고 생각해도 될 테다. ‘우두바싸고’는 피난 보따리 싸듯 감당 못하게 담아 싼다는 뜻이다. ‘정치인’ 흉내 내는 놈과 ‘철학자’ 흉내 내는 놈에 대한 야유에 찬 묘사가 ‘푸른 나무로 에워싸인’ 바닷가 숲의 아름다움과 대비돼 더욱 우스꽝스럽다.  시의 배경이 된 공간은 제주도가 아닐까? 여행지에서도 독하게 싸운 그 애인은 어디서 분을 삭이거나 후회하고 있을까. 맨몸으로 뛰쳐나갔을 테니 혼자 공항에 가 있지는 않을 테다. ‘쫓던 애인도 잊고’ 화자는 ‘무슨 생각에 잠긴 말 곁으로 다가간다’. ‘야채와 당근을 먹을 만큼 먹은 듯 말은/호주에 가 있는 짝이라도 생각하는 것 같’단다. 말은 시선을 아득히, 동이 틀락 말락 한 수평선 너머로 두고 있을 테다. 차분해진 화자도 아득히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그렇게 받아들일 밖에 없다’고. 참으로 감수성이 안 늙는 시인 이제하!
471    시인은 습작에 습작을 거듭하는 아픈 작업을 련속 걸쳐야... 댓글:  조회:2483  추천:1  2017-05-11
창작의 기본 태도                                                                                                 백현국 (시인. 비평가)         많은 작품들이 인터넷상에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그 습작의 수준은 놀라운 수준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습작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창작에 대한 막연한 자신감과 독단적인 태도일 것이다.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문학의 각종 이론과 원론에 대한 견해의 충돌과정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각 시대나 사조, 철학이나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따라 문학이 어떠한 노선을 어떻게 걸어왔는가를 배우게 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과거의 문학적 환경 이해와 문학자들의 행태에 대하여 배우게 되고 나아가 현실에 처한 시인들은 철저한 자기만의 독특한 인식을 작품에 반영하게 된다. 그 인식이란 바로 자신이 처한 현실과 시스템, 그리고 세계관을 새롭게 해석해 내는 힘을 말한다. 각 사이트를 돌아보면서 느끼는 것은 일부 습작들과 일부 기성 시인들의 작품 속에는 다음과 같은 안타까움이 있다는 사실이다.    첫째는 내용이 너무 단순성이다. 내용이 창의적이지 못할 경우에는 아무리 시를 잘 썼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는 반감된다고 볼 수 있다. 꽃을 아름답다고 한 시는 시라기 보다 서술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물을 보고 누구나 같은 감성으로 쓰는 것, 그리고 문학적 언어의 측면이 무시된 시어의 구사 등으로 쓴 작품은 내용의 있어 참신성이 없는 글이 되는 만큼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는 내용에 있어 창의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자신만의 문학세계로 발전시키지 못하면 아류가 되기 쉽다. 비록 글은 세련되지 못하여도 내용은 아주 감동적일 수 있는 작품을 쓰는 것을 말함이다. 깊이를 주지 못하면 가장 유혹 받기 쉬운 것이 바로 형식의 난해다.    둘째는 개인의 총체적인 사유가 뒷받침 되지 않은 작품이다. 깊은 사유의 틀에서 출발 되지 않은 것들은 대부분 말비틀기 즉 언어의 유희적인 측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시 자체가 가볍게 느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어의 효과음이나 언어의 모사 이미지의 변용은 심각한 오류를 낳게 된다. 깊은 사유란 곧 자신이 갖고 있는 세계관이고 보면 그 세계관이 어느 날 문득 깨달아지는 선禪적인 깨달음과는 다른 것이다. 방대한 독서량과 깊은 천착으로 나타날 문제라는 것이다. 일부 시인들은 자신이 처한 세계관을 해석해 낼만한 사유의 틀이 없어서 오히려 왜곡된 사상寫像과 일탈된 시스템에 역이용 당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식민지를 겪고 독재를 겪은 우리 문학계에 그리고 자본의 논리에 함몰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는 것이다.  셋째는 구체성이나 정확성이 결여된 나머지 관념적인 시를 쓰는 경우이다. 관념이란 개별 시인의 독특한 세계관을 드러내는 아주 요긴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념이란 적절한 시어와 효과적인 비유나 상징에 장애요소이다. 자신의 관념을 시로 옮겨 쓰다보면 각 이미지간 연결이나 시작 속에 나타나야 하는 종결의 거리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관념을 시로 옮기면 알 수 없는 시어들이 혼란스럽게 배치되는 데, 이는 무질서한 시어의 남발이나 무의미를 조장하게 된다. 자신은 자신의 시를 알 수 있으나 독자는 그 시를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형이상학적인 말만 늘어놓고 아주 수준이 높다는 것을 스스로 강요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모호한 표현의 문제요 적절치 않은 시어의 사용이다. 시어를 사용함에 있어 이 시어의 사용이 적절한지, 정확한지는 반드시 따져보고 써야 한다.    넷째는 자기만 감동시키는 시는 독자를 감동시키지 못한다는 문제이다. 습작이 시인의 주관적인 정서에 그치고 말면 독자가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진다. 글을 쓴다는 것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습작을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토로는 자신의 감정을 순화시킬지는 모르나 독자들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끌고 가 마침내 독자의 감성을 박탈시키는 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작을 하는 이들은 대체로 보여주고 싶은 시가 주류가 된다. 보여주고 싶은 시란 결국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시 쪽으로 가게 되는데 결국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시로 가게 된다. 심지어는 자신의 컴플렉스를 습작을 통해 폭력적으로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는 분명 글의 폭력이다. 남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습작을 할 필요가 없다.  다섯째 공부하지 않는 습작 시인의 문제이다. 습작은 글의 기교적 측면을 배운다는 것이 아니다. 습작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보고, 그들의 작품성에 대한 배경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글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이상 절대 훌륭한 시를 쓸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시 창작에 관한 공부와 사조 그리고 문학의 개론서 정도는 독파를 하고서야 습작을 하라는 얘기다. 인간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세상에서 시를 쓰지 않는 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작의 문제보다 모작을 방지하는 문제로 먼저 인식해야 한다. 일부 시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쓰고 싶은 글은 모두 작품이다” 라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이러한 글은 비평조차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여섯째 작품은 구조성이 중요하다. 흔히 문학 작품의 내용구조를 건축물에 비유한다. 건축물에는 그 건물을 지탱하는 철골구조가 대단히 중요하듯 작품에도 구조의 중요성은 중요하다. 작품은 일종의 구조를 갖는다. 일자시가 아닌 이상 반드시 처음/중간/끝이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구조가 부실하면 시로써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말한다. 작품의 전개상 기승전결이나 서/본/결이 단단하지 못할 때, 작품의 질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발전적으로 전개하던지, 하강하던지, 아니면 처음과 끝이 연결되도록 장치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각 내용과 각 연들의 내용이 서로 관련성이 없을수록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보면 된다. 습작을 하는 분들의 가장 큰 문제가 이러한 연결 구조를 잘 정리하지 못하는 문제를 자주 본다.    끝으로 습작은 습작이다. 습작이란 수정을 요하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계속적인 습작에 대한 수정과 보완을 통하여 발표되어야 한다. 발표란 세상에 내놓는 것이고 보면 자신의 작품이 영원히 세상에 남는다는 뜻도 된다. 이는 독자들은 물론 평자들의 평가를 영원히 피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한 때 이미 작고한 시인들의 미발표 시작을 공개하고 책으로 낸 경우가 있었다. 이것은 그 시인을 욕보인 뜻이기도 하다. 피치 못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완성작으로 내놓지 않는 이상 미발표작을 공개하는 것이 얼마나 그 시인의 평가에 악영향을 끼쳤는가는 한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창작이란 늘 자신의 부끄러운 속살을 보이는 아픈 작업이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심한 말은 아니라고 본다.   백현국   詩人 평론가   경북 영천 출생     계간 현대시문학 평론 당선    東國大 國文, 嶺南大 大學院       제 1회 랭보 문학상(작가상)을 수상   -------------------------------------------------------------------------------   버티는 삶 ―박상우 (1963∼ ) 사막과 황무지와 무인도로 이루어진 나의 세계 갈증을 견디기 위해서는 한 잔의 물만, 허기를 견디기 위해서는 한 움큼의 먹이만 있으면 되고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서는 인간은 본디 섬이라고 믿으면 되느니, 그런 삶도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 햇빛이 닿지 않는 심해(深海)에 빠져 염통과 뇌가 터질 듯 말 듯해도             ‘사막과/황무지와/무인도로 이루어진/나의 세계.’     한 마리 인간의 외로움이 절절하다. 시의 어조는 무표정하리만치 담담한데, 거기서 배어나오는 비장함이 찌릿찌릿하다. 박상우는 시의 로커(rocker)다.  ‘햇빛이 닿지 않는 심해(深海)에 빠져/염통과 뇌가 터질 듯 말 듯해도.’     이토록 처절한 사이키델릭 상태에서 거칠게 악을 쓰지 않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절규를 읊조리는, 감정적이기보다 이성적인 로커. 살림과 마음의 힘겨운 근황(近況)을 꾸밈없이 드러낸 시 ‘버티는 삶’이 실린 시집 ‘이미 망한 생(生)’에서 시인은 ‘뭔가 잘못 살아온 삶’의 양상들을 분석하고 선고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선언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470    시인은 그 어떠한 령혼을 흔들수 있는 시를 써야... 댓글:  조회:2455  추천:1  2017-05-11
광기의 나날에 핀 아픔이라는 꽃 ㅡ이승하론 주 영 숙  2. 침묵의 거리에 서 있는 목격자    날카로운 변증(辨證)의 재능을 갖고 있던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절망 혹은 고뇌는 인간이 스스로 죽을 수 없다는 바로 그것에 기인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렇게 절망은 죽을병에 걸려 있는 사람의 상태와 비슷하다. 이 병자는 거기에 누워서 죽음 때문에 시달리고 있으나 죽을 수는 없다. 이렇게 '죽으리만큼 앓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죽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지만 그렇다고 삶에의 희망이 아직 거기에 있으리라는 것은 아니다. 죽음이라는 최후의 희망까지도 있을 수 없다는 희망의 상실인 것이다. 죽음이 최대의 위험인 때에 사람은 삶을 바란다. 사람이 다시 더 두려워할 만한 위험을 배워 알게 되면 그는 죽음을 원한다. 죽음이 희망의 대상이 되는 정도로 위험이 증대된 때, 절망은 죽을 수 있다고 하는 희망까지도 잃는 것이다.    이승하 시인은 폭력과 광기뿐만 아니라 공해와 질병, 절망감과 소외감으로 이 도시의 위험수위가 점점 차오르는 것을 우뚝 선 채로 목격한다. 그리고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 아픔 때문에 가슴 저 밑바닥에서 치밀어오르는 신음을 내뱉고 있다. 아픔에 대해서만은 체념의 도에 다다라 있지만 자신의 것이 아닌 그 아픔을 아프지 않게 해줄 재주가 없다. 다만 한잠 자?nbsp;나면 아프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혹 아파서 죽더라도 다른 무수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지도 모른다고, 그런 말만 되뇌이다가, 문득, 아픔의 꽃을 피우면 될 거라는 삼라만상의 순리에 해당하는 대안을 내놓기도 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타인의 아픔이나 죽음에 대하여 우리는 그저 목격자일 뿐이다. 시인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목격자일 뿐이라고. 시집을 주마간산격으로 훑어보자.    발작이 멎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아침이다. 피고름의 병실 한 구석에…… 네 눈의 희미한 빛. 단 한번 죽어서 무수히 살아나야 한다. 무거운 시간에 짓눌려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목을 만져보면 아직 붙어 있는가…… 인질이여. 가족이여, 우리 허물어진 가축들이여……. 나는 불발탄, 끝끝내 터지지 않고 그냥 타인과 함께 살아갈 뿐이다. 칼바람 부는 이곳, 서울바닥에서. 울지 말고 가자, 자꾸 뒤돌아본들 버린 고향 버려진 유년…… 혼자 돌아누울 수 있는 자유, 혼자 가려운 곳 긁을 수 있는 자유, 그 어마어마한 자유가 없는 이곳에서 그대 천장 노려보며 이빨 꾹 깨물고서 참고 있구나…… 뼈가 갈리는 비명을. 나는 내 뼛속의 고통에게 타전한다. 한번 지독하게 아파본 사람은 알리라. 새벽 동이 트기까지가 얼마나 가파른 길인가를…… 하반신이 마비된 어느 별은 아무 말 없이 버틸 때까지 버틴다. 소원은 단 하나, 집에서, 죽고, 싶다는 것. 침묵이 흐르는 21세기 벽두, 대형 전광판이 빛을 쏘아대는 휘황한 거리에 서 있는 나는 목격자야. 나는 이승하야.    한 순간에 한 사람이 사라져    하나뿐인 소우주가 폭발하였다    '그'는 틀림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지구상 유일한 목격자로서    (……)   다음 날 아침 아스팔트 위에는    핏자국과 흰 스프레이 자국    며칠 후 그 거리에는 '목격자를 찾습니다'    플래카드 외롭게 펄럭이고 색 바래고    ……침묵이 세상을 암흑에 휩싸이게 한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외로운 신은 얼마나 가슴아파하고 있을까   침묵이 흐르는 21세기 벽두의 거리    대형 전광판이 빛을 쏘아대는 휘황한 거리    ……그는 나다.                                        [침묵의 거리] 부분    이승하 시인이 2002년 6월 15일 날짜로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글(제2회 지훈문학상 수상 소감)에 이런 내용이 있다.    조지훈 선생은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승무], [고풍의상], [완화삼] 등 주옥같은 시를 남긴 시인입니다. 그러나 지훈 선생은 탁월한 문학론을 전개하여 저를 일깨워준 분이었습니다. 지훈 선생의 문학론은 문학의 예술성과 독자성을 강조한 순수문학론, 문학정신의 지향점이 된 민족문학론, 민족문학의 실천적 방법으로 삼은 고전주의적 문학론, 이 세 가지로 집약됩니다. 지훈 선생이 쓰신 글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순수시는 경향시에 대한 정통시요, 순수시의 영역은 정치, 종교, 사회, 어디에도 갈 수 있는 무제한이나 다만 시가 되고 예술이 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무제한이다." 이 말씀을 저는 시라는 것이 공리적인 가치나 정치·종교·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완전히 별개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가치를 초월하는 이상적인 가치, 혹은 미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순수시라는 이름을 가지려면 그 소재가 비록 폭력이어도 반드시 예술성을 지녀야 한다. 그렇다면 시인 이승하는 한 편 한 편의 시마다 정치·종교·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완전히 별개일 수는 없으면서도 그런 가치를 초월하는 이상적인 가치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승하는 공리적인 가치를 초월하는 이상적인 가치, 즉 행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미적 가치를 추구했음이 시 편편에 드러난다. 그런데 결국 폭력이라는 것은 인간의 뇌에서 나오고 시인 역시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을 부정하기? 아직 그 대답은 성급하다. 우선은 인류의 역사가 폭력의 역사였다는 부정의식이 나온다. (물론 인간의 역사가 그 자체로서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기도 하지만.) 그 부정의 둘레에는 '나'의 책읽기와 개인적 경험이 놓여 있다. {폭력과 광기의 나날}에서 시사된 바 있는 각종 신문이나 책에서 오려낸 사진이나 기사, 수기의 편린은 폭력의 항구성과 편재성을 반복적으로 타전한다. 그 폭력의 항구성과 편재함에 대한 지식이 시간의 경계와 공간의 경계마저 넘어서게 되는 것은, 그러나, 책읽기의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사의 기억에 의해서이다. {폭력과 광기의 나날}에 끔찍하게 묘사되어 있는 '개인사'의 잊지 못할 기억은 끔찍한 폭력에 붙들려 있다.    계속 화를 내시는 아부지, 참다 못해   누이가 한마디 뱉자마자 저 얼굴에 밥상을   (……)   딴 집 아부지는 술 취하면 애들을 팬다는데    왜 늘 맨정신으로 아부지, 불쌍한 어무이 고만 때리이소   할무이 앞에서는 제발 상 엎지 마이소                                       [10대] 부분   웃음을 잃은 무기력한 어머니. 가슴 치며 혼절하는 할머니. 니체를 읽는 초인이 되어 "찬란한 성적표를 들고" 오는 것이 최선이던 형. 참다못해 누이는 한마디 내뱉는다. 그러나 누이는 "눈에 띄는 빗자루나 총채로 흠씬" 두들겨 맞기만 한다. "벌레처럼 누이는 비명도 못 지르고/ 벌레처럼 내도 죽은 시늉"을 한다. 아버지를 제외한 여타 가족의 삶은 벌레의 삶과 다를 바 없다. 그 벌레 같은 삶의 끝은 발작이다. "누이를 데리고 다닌 이 나라 정신병원의 수와/ 내 입 속으로 털어넣은 몹쓸 알약의 수"([본회퍼의 혼에게 띄우는 편지])를 시인은 셈할 수 없다. 대한민국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한 시집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에는 그 누이에 대한 시가 나오는데, 이러하다.    누이는 어느 날부터인가    월경이 멎고, 식욕을 잃었다    낮에 웃고 밤에 바장이고    혼자 웃고 혼자 흐느끼고    잘 쉬어라 쉬어    네 곁에서 나직이 휘파람 불면    누이는 일어나 두 팔 아느작거리며    집을 나섰다 마을을 나서    혼자 가만가만 웃다 바람이 이끌면    네 혼을 불러내는 정든 시내    그 냇둑에 서서 바람을 그리겠다고    바람의 매무새를 그리겠다고    甘川아, 甘川의 바람아, 착란의 이 땅아    내 누이는 영원히 어린애란다    나와 누이를 연결시켜 주는 끈은 없단다    버려진 내 누이, 너는 아직 곱게도 미쳐……                                       [바람 그리기] 부분    10대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모든 인간관계가 파탄된 그 지점에서 '나'의 삶은 시작되었다. 이런 인식은 '나'란 존재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의혹으로 이행되어 간다. 그러나 '나'는 누이 앞에서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45년이 바다임을 말해주기 위해 어머니, 살아 있어야 했고 아들, 살아남아야 했던" 45년 기다림 끝의 90대 노모도, 70대의 그의 아들도 아니다. 내 큰아버지가 "할아버지 정액 속의 한 마리 정충이었"던 것과 같이 "우리는 모두 물에서 나와서/ 열 달 동안 양수 속에서 살다/ 추깃물이 되어 땅 속으로" 스밀 뿐이다. 깊이깊이 한숨짓는 바람의 다발을 울음 참고 오래 지켜볼 수밖에 없는 무력한 목격자일 뿐이다.     3. 버려지는 것들에 대한 양심 고백    이승하는 {뼈아픈 별을 찾아서}에 '아버지'가 제목에 들어가는 시를 다섯 편 실었다. 그 시편 속에서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가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식솔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술을 간혹 마시긴 했지만 장이 안 좋아 과음을 하면 꼭 배탈이 났었다 하니, 알코올 중독자가 될 턱이 없었다. 취한 모습도 1년에 고작 서너 번, 아주 드물게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시인 이승하는 그런 아버지를 부엌칼을 들고 자기 식솔들을 협박하는 인물로 그렸고, 자발적으로 배설하지 못하는 몸으로 그렸고, 뇌사 상태에 빠뜨렸다가 결국 임종의 순간을 맞이하게도 만들었다. 그의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 있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승하 시인이 사기를 친다고 하며 배신감에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시집 {뼈아픈 별을 찾아서}를 아버지에게 보냈고, 아버지가 그것을 읽어주기를 바랐다. '용서'하기 위해서였다. 아니, 용서는 할 수 없어도 이해는 해야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인은 뼈아픈 별이 된 누이, 아버지의 딸이었던 그 누이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시편 속에서나마 일련의 벌을 받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누이더러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하늘의 별에 대고 애소했던 것이다. 그리고 시집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에서 와서 시인은 아버지를 '산불 진화에 나선 아버지'로 만들어놓고 아버지에 대한 그 모든 서운함을 한줌 재와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   물이 점점 줄어들어 메말라가는 세상   아, 아버지의 옷에 지금 불이 붙어 있습니다   활활 불이 되어 쓰러지면   아버지가 못다 끄신 불을   제가 나서서 끄겠습니다 마지막 불씨까지.                                       [산불 진화에 나선 아버지] 부분       시집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는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소외되고, 버려지고,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썩어가는 것들"이기도 하고 "혀, 혀가 자, 잘/ 도, 도, 돌아가지 않는"([혀]) 것들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꼬꼬댁꼬꼬댁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푸드득푸드득 하늘 향해 날개를 치며" "한꺼번에 죽어가는"([닭을 잡던 날]) 닭들이기도 하다. 시인의 이들 존재에 대한 애정은 우리 사회의 풀뿌리라고 할 수 있는 민중에 대한 애정과 맞물리면서 오늘을 '무사히' 살아가고 있는 독자들의 양심을 고문한다.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는 형이상학적인 사유와 성찰보다는 고통의 실재에 대한 감각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고통을 철학적인 대상화로 허용하지 않고 절박한 즉자적 현실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시인의 의도가 반영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는 비유와 수사의 장식을 배제한 산문적인 서술형의 언술은 고통의 구체적인 사실성을 배가시키는 효과를 내고 있다. 또한 시적 대상으로 주로 아들·아버지·외할머니·어머니·할아버지 등 가까운 가족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신문지상에 거론된 인물들을 직접 등장시킴으로서 결과적으로 독자들이 고통의 실상을 일상의 층위에서 체험적으로 환기하고 공유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어린 날, 비가 오면 마당에서    지렁이가 몇 마리씩 기어다니곤 했다    저 징그러운 놈들을 괴롭혀주자    재미로 몸 위에 소금을 뿌리면    온몸으로, 미친 듯이 춤추는 지렁이의    아아 그 열렬한 몸짓이라니    그 처절한 발광이라니    내 필생의 화두는    '고통의 뜻을 알자'는 것    지렁이처럼 기어가는, 짓밟히는    소금을 처바르고 몸부림치는    그놈들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그러므로 내 시는 이래서는 안 되는 것!                                        [지렁이 괴롭히기] 부분    곱창전골을 노래한 시 [질긴 창자]의 "얼마나 많은 죽은 것들의 살과 뼈마디를 내 창자는 소화시켜 왔는가"를 읽으면 모든 생명은 타자의 목숨을 담보로 영위되고 있다는 이치를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얄팍한 피부 안으로 뭇 짐승과 동일한 색깔의 붉은 피가 흐르고 있다. 그런데, "내 필생의 화두는 '고통의 뜻을 알자는 것'"인데, "지렁이처럼 기어가는, 짓밟히는/ 소금을 처바르고 몸부림치는/ 그놈들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지렁이를 괴롭히는 현장을 재미있게 써서는 안 될 일이다. 재미 위주의 가벼움은 이승하의 시와는 거리가 멀다. 통통 튀는 상상력보다는 체험의 진실성에 무게를 둔다. "그러므로 내 시는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다짐도 시인의 진지한 현실인식의 산물일 것이다. 지렁이가 아무리 폐쇄혈관계를 가지고 있고 100마디 이상의 몸을 가진 환형동물이지만 그 나름대로 매우 유익한 존재인데, 단지 작고 보잘것없다고 해서 마구 괴롭혀서야 되겠는가. 그런 의도였는지 시인은 이 시집의 마지막 작품으로 [지렁이 괴롭히기]를 놓았다. '지렁이를 대표로, 이 세상 모든 약한 것들을 괴롭힌 폭력에 대해 나는 양심 선언을 한다. 나의 시를 읽는 모든 이들도 반성해야 한다.' 마치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는 듯이.    "내 필생의 화두는 고통의 뜻을 알자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는 시인의 심상이 사랑과 평화에 대한 열망에 접근해 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고통의 뜻을 알고 나면 과연 잔잔한 평화가 올 것인지, 끝없이 용서의 주문을 외우며 반짝여댈 별들에 대한 노래를 계속 부를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을 논자가 알 수가 없지만, 그러나 공허한 관념을 되씹고 있는 오늘의 시단에서 그가 제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뚜렷한 문제의식, 모든 약하고 소외받는 것들에 대한 관심, 그리고 폭력의 양상을 연구한 그의 시편들은 반드시 주목받아야 할 것이다. 눈물 그렁그렁한 생명체들의 비명이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겠지만 언젠가는 한 송이 한 송이 꽃으로나마 아름답게 피어날 것이라고 시인은 믿고 있다. 이승하 시의 힘은 바로 이런 믿음에서 나오고 있다.     주영숙 : 시인, 문학평론가.  ----------------------------------------------------------------------------     보순토바하  ―곽재구(1954∼ ) 내 꿈속에 꽃이 핀다면 저런 형상으로 필 것이다 신이 내 꿈속의 마을을 방문한다면 그는 바로 저 빛깔의 사리를 입고 올 것이다 누군가 내 꿈속에서 지상의 별들을 모두 잠재울 노래를 부른다면 그는 바로 저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볼 것이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아기를 잠재운 어머니들이 비로소 떠나고 싶은 한세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저 꽃의 순결한 그늘일 것이다     동무여, 가난한 내 노래는 한 잔 2루피 찻집의 호롱불보다 침침하고 환멸과 탄식으로 가득 찬 내 영혼은 그믐의 조각배 위에 위태롭게 출렁거리나니 언젠가 한번 꼭 피거든 이 꽃만큼만 피어라 언젠가 한번 빚을 죽음이거든 이 꽃만큼만 처절하게 시들어라 젊은 날에 푹 빠져서 읽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 한 구절, ‘편도나무여, 내게 신의 이야기를 하여다오/그러자 편도나무는 활짝 꽃을 터뜨렸네’가 뭉클 떠오르게 하는 시다. 보순토바하는 ‘봄의 말, 또는 봄의 노래라는 뜻을 지닌, 느티나무만큼 큰 꽃나무’인데 노란색 꽃이 핀다고 한다.      인도를 여행하던 어느 봄날, 시인은 가지마다 노란색 꽃 가득 인 나무와 마주치고 영혼이 흔들릴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얼마나 아름답기에? 그늘도 순결하단다. 신의 숨결과 눈빛이 느껴지는 환하고 장엄한 꽃나무! 신성할 정도로 아름답게 꽃 피운 그 나무를 실제로 보았으니 이후로 시인은 ‘꿈속에서 꽃이 핀다면/저런 형상으로 필 것이다’. 부러워라, 그런 축복은 방안풍수에게는 찾아오지 않는다. 제 발로 찾아가야 만날 수 있을 테다. 그 강렬한 순간이 세상을 떠돌고 헤매는 여행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일 테다. 누구 못지않게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를 써온 한 시인이 이제껏 써온시를 가난하고 침침하게 느끼고, 제 영혼이 환멸과 탄식으로 가득 찬 걸 깨닫게 하는 이국의 봄나무 보순토바하. 너무 큰 것은 사람을 압도한다. 아름다움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압도당하면서 찬미하고 다짐한다. ‘언젠가 한번 꼭 피거든/이 꽃만큼만 피거라!’ 죽음을 걸고 처절하게 아름다우리라. 지극한 그 노래는 지상의 삶, 그 환멸과 탄식의 고단한 때를 부드러이 씻어 주리라.  
469    시는 쉽고 군더더기 없는 시어로 다듬어야... 댓글:  조회:2171  추천:1  2017-05-11
      西安, 서안시 취장(曲江)구 구완청古玩城--- 광기의 나날에 핀 아픔이라는 꽃 ㅡ이승하론 주 영 숙   1. 고통에서 사리 건지기    니체가 지적했듯이, 미래가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신비스러운 현존재는 자기의 척도와 법칙에 따라 살아가도록 우리를 강하게 고무한다. 그리고 아무리 해도 알 수 없는 수수께끼는, 우리가 생겨나기까지 앞서 있었던 시간의 길이이다. 우리는 한 뼘 길이도 안 되는 오늘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오늘' 속에서 오히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야만 하는 실존적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이다.    이승하의 일련의 시를 미술작품과 대조해보면 신표현주의 기법의 서양화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비교한다면 한국 현대미술관에 소장·전시되어 있는 독일 신표현주의 화가 바젤리츠(Georg Baselitz)의 그림 [동방 여인] 같다. 그 그림을 본 나의 소감은 다음과 같다.    여자는 거뭇거뭇하게 그을린 것 같은 벽돌을 배경으로 언뜻 거꾸로 매달려 있다고 보아지지만, 무릎이 약간 꺾여 있는 다리로 미루어 딱히 매달려 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밑으로 쏠리지 않은 머리칼은 만유인력의 원칙을 단적으로 불식시킨다. 눈썹은 벌겋지도 검붉지도 불그스레하지도 않은, 그저 갓 익은 앵두 색깔이다. 껍질을 벗긴 삶은 계란 색깔의 흰자위만으로 통일된 눈 두 개가 이마의 양편 귀퉁이로 각각 찢어진 것이 여덟 팔(八)자 아니면 들 입(入)자를 거꾸로 갈겨놓은 것 같다. 두 허벅지와 아랫배가 만나는 곳의 작은 삼각형도 익을 대로 익은 토마토의 피막을 조심조심 벗겨낸 빛이다. 나체가 분명한데도 젖가슴이 없다. 가슴이 있어야 할 자리엔 핏방울 흔적도 없이 뜬금없는 초록색이 어지러이 칠해져 있다. 흰 페인트가 움직이는 것 같다. 어깨 부분에서부터 밑으로 낭자하게 흘러내려, 밑으로 쏠리지 않은 머리칼 사이로 슬금슬금 스며드는 형상이다.   그런가 하면 피카소의 [게르니카] 같은 끔찍한 고통의 도표를 그리고 있기도 하다. 이 예술품들의 소재는 여러 양상의 폭력이나 질병, 전쟁, 고문, 기아 등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승하의 시와 연관성을 지닌다. 질병의 병원균은 우리의 몸에 들어와 활동을 함으로써 우리의 에너지를 소진시킬 법도 한데, 시인은 그런 현상조차도 새로운 탄생을 위한 통과의례로 보고 있다. 고통의 현상학이라고나 할까. 폭력이나 질병, 전쟁, 고문, 기아 같은 외재적 고통뿐만 아니라 "수면제와 절교하자 수면제의 두려움을 알자"([밤의 유희]), "달콤한 잠 한번 자보았음 좋겠어요"([어떤 유서]) 하면서 내재적 고통인 불면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필사의 노력을 하기도 한다.   2005년 6월에 펴낸 시집 {인간의 마뼁?nbsp;밤이 온다}의 제일 앞머리의 시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에서 "오죽했으면 죽음을 원했으랴" 하고 서두를 뗀 시인 이승하. 그의 작품만으로 시인을 분석한다면 이러하다. 첫째, 榴?nbsp;겪거나 보거나 들은 폭력을 적발하여 시로 고발하려는 사명을 띠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다. 둘째, 그는 폭력으로 인한 다층 구조의 인간들, 또는 사물들의 아픔을 낱낱이 드러내어 시로 형상화해야만 잠을 이룰 수 있는 생체 리듬을 가진 사람이다. 어떤 평자는 이승하의 시에서 시적 울림을 기대하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시인이 폭력 그 자체만을 말하는 시를 쓰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니다. 이승하의 시에는 터지기 직전의 봇물처럼 울림이 가득하다. 시에 있어서 울림이 필연의 조건이라면 바로 그 이상의 울림도 드물 것이다. 화가 뭉크의 [절규]처럼, 귀를 꽉 틀어막아도 온 천지를 쥐고 흔들 울림이다. 비록 그것이 모종의 시적 울림과 상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시적 울림이 없다'는 단정적인 표현을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승하의 시는 개성적이고 특징적인 터치로 서양미술사의 한 장을 그었던 반 고흐나 뭉크를 닮아 있다. 미술사전에서 '터치'라는 것을 찾아보면 작가의 감동과 감격을 단적으로 화면에 전하는 구실을 하는 중요한 유화 기법의 한 가지이다. 그리고 터치는 표현 기술의 유력한 수단일 뿐 아니라 작가의 주관적인 심정을 종종 화면에 나타냄으로써 그 작가의 개성을 잘 드러낼 수 있다. 모네·반 고흐·뭉크 등이 바로 각각 개성적이고 특징적인 터치를 써서 독자적인 표현을 전개했다. 표현주의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뭉크는 불안·공포·애정·증오 같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을 격렬한 색채와 왜곡된 선으로 표현한 화가로서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 [절규]다. 자신의 강박관념을 그림으로 나타내고자 한 뭉크의 작품은 특히 독일 미술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시인 이승하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1984년 중앙일보 지상에 발표되었던 그의 데뷔 시 [畵家 뭉크와 함께]가 그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   어디서 우 울음소리가 드 들려   겨 겨 견딜 수가 없어 나 난 말야   토 토하고 싶어 울음 소리가   끄 끊어질 듯 끄 끊이지 않고   드 들려와   야 양팔을 벌리고 과 과녁에 서 있는   그런 부 불안의 생김새들   우우 그런 치욕적인   과 광경을 보면 소 소름 끼쳐   다 다 달아나고 싶어   도 同化야 도 童話의 세계야   저놈의 소리 저 우 울음 소리   세 세기말의 배후에서 무 무수한 학살극   바 발이 잘 떼어지지 않아 그런데   자 자백하라구? 내가 무얼 어쨌기에   소 소름 끼쳐 터 텅 빈 도시   아니 우 웃는 소리야 끝내는   끝내는 미 미쳐버릴지 모른다   우우 보트 피플이여 텅 빈 세계여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畵家 뭉크와 함께] 전문   다른 내적인 요인은 차치하고라도 말더듬이, 앙상한 외모, 그런 것들에서 오는 동병상련을 감지할 수 있는 이승하의 뭉크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시집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와 {폭력과 광기의 나날}에서 더욱 도드라지고 있다.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에는 '에르바르트 뭉크의 그림'을 부제로 한 [병든 아이], [불안] 같은 시가 나오고, {폭력과 광기의 나날}에는 뭉크의 그림 제목과 그림을 그대로 차용하여 쓴 시 [미역감는 남자들] 같은 시가 있다. 그리고 2권 시집에 각 5편씩이 실려 있는 '정신병동 시화전' 시리즈에는 뭉크뿐만 아니라 고흐, 니체까지도 들어 있다.    시적 울림을 전해주든 그렇지 않든 그의 시는 거대한 역사적 의미를 함유한다. 그가 시라는 장치를 통해 지상에서 행해진 각종 폭력과 광기를 기록해왔다는 사실은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말고도 사진과 도판까지 이용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시집 {폭력과 광기의 나날}에서 이미 입증된 바 있다. 그러나 시인은 갖가지 형태의 폭력으로부터 그 대상물을 구해낼 힘도 방법도 찾지 못한다. 이 사회의 폭력에 항거한 신표현주의 화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시인 한 사람이 온 인류를 폭력에서 구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래서 시인은 랭보가 시 [취한 배]에서 했던 것과 같이, 비탄에 차 울음을 터뜨릴 뿐이다. 랭보는 "여명들은 비통하고, 달은 온통 잔혹하고, 해는 온통 가혹하고, 쓰디쓴 사랑은 취기 어린 마비 상태로 나를 부풀린" 이 세상을 향해 "오, 나의 용골을 터뜨려라! 오 나를 바다로 가게 하라!"라고 부르짖지 않았던가.    내 체온을 전했던 생명체들이여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이치는 너희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누추하기 짝이 없는    노래 몇 곡조 목쉬도록 부르는 일   이 고약한 일뿐이로구나.    시집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의 자서를 이렇게 쓴 시인에게 죽어가는 생명, 즉 죽음 그 자체에는 '가치'라는 것이 개입할 틈새가 없다. 그런데도 시인은 번번이, 이미 무의미해지고 있는 죽어가는 생명의 아픔을 붙들고, 생명을 죽어가게 한 온갖 폭력에 대항하여 위로의 언어를 찾아내느라 안간힘을 쓴다. 그러면서 시인 자신 끙끙 앓는다. 그러나 그의 아픔에 대한 인식은 그 자신의 경험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인간다운 삶이란 실상 끔찍한 것이며, 어차피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끔찍한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대승적 인식에서 나온다.    조금만 더 아프면 오늘이 간단 말인가   조금만 더 참으면 내일이 온단 말인가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부분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오면 이 아픔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역설적으로 말한 이 시에는 단기간의 아픔이 아닌 오랜 기간의 아픔이 내재되어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시인은 오늘도 아프다. 자신의 몸이 아플 수도 있고 타인이 당하는 폭력 때문에 아플 수도 있지만 말이다. 오늘밤만 자고 나면 혹 아픔이 가실지도 모른다고 소망하지만, 직접 아파보지 않고는 아픔의 정도를 알 길이 없다. 세상 모든 일은 끝이 있게 마련이고, 그 아픔의 끝은 오늘로 종지부를 찍으면 좋을 것이다. 이런 소망은 기어이 '꽃'으로 피어난다. 시의 제목 그대로 오랜 진통 끝에 피어난 생명으로 고통이 승화되는 것이다. 마치 아픔이 깊을수록 더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행운목'을 보는 것 같다.    시인은 이러한 고통의 일상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순백하다 못해 무맛일 지경인 직설적 화법은 그 체험적 사실성에서 오히려 독자의 마음을 쉽사리 잡아버리는 효과를 얻는다. 보편성이 없는 신비적인 체험이나 연극 무대 뒤(인생의 뒤안길)의 어떤 끔찍함을 목격했을 때, 그 경험이 준 인상은 시인을 옴짝달싹 못하게 할 것이고, 그것이 그의 시 세계 전부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차라리 아픔의 꽃을 피우고자 한다. 아니면 그 아픔의 재에서 사리(舍利)를 찾아내고자 한다.    시인은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 제 24쪽부터 29쪽까지에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을 피력하고 있다. 문명의 튼튼한 몸이 덮친 아들의 피부에서, 태어나자마자 만난 가려운 세상에서, 고기와 달걀이 빠진 김밥을 싸줘야 하는 아들의 소풍날에서 그것을 찾으며 전전긍긍하고 있다.    2시에 깨었다 3시에 깨었다    밤새 집 안 곳곳을 뺑뺑이 돌면    어미는 부채 들고 따라다니며 존다    아이가 자면 그 옆에서 웅크리고 잔다    이 녀석아 짐승도 밤에는 잔단다    잠이 들어야지 좀 덜 긁지    아침 햇살이 깔깔 웃어대면    까만 색 소파에 인공 눈처럼 뿌려져 있는    가루 가루 흰 가루    손가락에 침 묻혀 모으다    사리라는 느낌이 들어 무릎 꿇는다    네 몸에 깃든 인내천의 뜻을 알 듯도 하다.                                        [짐승은 자고 난 흔적을 남긴다] 부분    이 참담한 현실에서 시인은 마치 인생의 숙제를 푸는 것 같은 명분을 찾는다. "나도 이 도시에서의 나날을/ 행복해 해야만 한다"([늦은 귀가])라고 하면서 행복을 의미를 탐색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고 나면 찾아올 것도 같은 이 작은 행복에의 열망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신음을 내뱉기도 하고 때로는 귀를 틀어막고 절규한다. 비중 있는 알레고리의 시, 이승하의 시가 바로 그런 것이다. 이러한 시 창작 방법 속에는 한 개인의 시적 편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단순한 변화 이상의 그 무엇인가가 담겨 있다. 게다가 아무리 사적인 글일지라도 이미 인쇄되어 나오면 그것은 시인 자신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잠이 들어야 덜 긁지, 잠을 좀 자렴, 하는 애소는 모든 불면증 환자들의 속사정을 대변해주고 있기도 하다. 불면증을 일으키는 요인은 각양각색이겠으나, 그 어떤 고민이 있거나 아픔이 있을 때에, 또는 신경이 곤두섰을 때에 그것이 찾아오기 십상이다. 이 세상 어떠한 고통이며 고민도 잠이 들면 사라질 수 있겠지만, 바로 그 뻔한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를 잠들지 못한다. 이승하의 시에는 차라리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하고 싶을 만큼의 지긋지긋한 진실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다. 그래서 독자는 개인적인 고통으로 분류 받은 모종의 아픔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밤을 꼬박 샐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고해(苦海)에 떨어져 고행(苦行)을 하는 것이 대부분 인생의 모습일 것이고 보면 시인은 그 자신의 시 안에서 고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으로써 고통의 꽃을 피워내는 것이다.  --------------------------------------------------------------------------------       그이 얼굴 ―김연희(1981∼ ) 돈이 없어서 힘들었다 맛있는 거 못 사 먹고 기저귀도 못 사고 갑자기 똑 떨어지니 어떡해 이럴 줄 몰랐는데 어떡해 난 몰라 난 몰라 생기겠지 생기겠지? 저녁에 해지고 애들이랑 구루마* 끌고 온 그이 마중 문 앞에서 그이가 웃는다 그을린 얼굴엔 찌든 땀이 가득     돈 많이 벌었어 십만 원 가까이 벌었다 그래서 맛있는 거 먹고 기저귀도 사고. * 내 남편 한받은 ‘구루부 구루마’를 끌고 홍대 앞을 다니며 음반과 책을 판다     화자는 젊은 여자지만 어린애가 딸렸으니 일거리를 찾기 힘들 테다. 젊은 남자일 화자 남편도 일자리가 불안정하다. ‘난 몰라/난 몰라’, 화자는 속수무책으로 애를 태운다. 아기 기저귀도 떨어져가고 어쩌면 쌀도 간당간당하고. 지난 세기의 60년대나 70년대 얘기가 아니다. ‘삼포세대’ 남녀가 부잣집 자식도 아니면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지 않아 처한 작금의 현실이다. ‘생기겠지/생기겠지?’, 문 앞에서 작은애를 업고 큰애의 손을 잡고 일 나간 남편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늦저녁. 다행히 ‘그이가 웃는’단다! 힘없고 쓸쓸한 웃음이 아니라 활짝 갠 웃음일 테다. 빤한 살림을 모를 리 없는 남자도 온종일 속이 탔겠지. ‘돈 많이 벌었어/십 만원 가까이 벌었다’! 의기양양한 남편의 보고에 아내 얼굴이 환해졌겠지. 애들도 영문 모르며 까르륵거렸겠지. ‘그을린 얼굴엔 찌든 땀이 가득’, 고맙고 안쓰러운 내 남편, 애들 아빠! ‘그래서 맛있는 거 먹고/기저귀도 사고’, 당분간의 다행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소박한 기쁨을 만끽하는 화자다.  내가 알기로 김연희는 일반적인 등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시인이다. 삶을 섬세한 촉수로 더듬는 자세를 잃지 않고 살려는 이가, 그 일상을 일기 쓰듯 시로 써서 그게 모이면 혼자 작은 시집으로 내는, 말하자면 ‘재야’ 시인이다. 이 시는 2년 만에 낸 그의 두 번째 시집 ‘작은 시집’에서 옮겼다. 쉽고 군더더기 없는 시어로 다듬은 시들에서 편편이 전해지는 시인의 여리고 따뜻하면서도 견결한 심성이 독자를 기어이 정들고 편들게 만든다.  
468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마음을 다스리는 글귀들... 댓글:  조회:3631  추천:0  2017-05-06
      마음을 다스리는 글 모음   諫於未形者上也 간어미형자상야 / 나타나기 전에 잘못을 고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잘하는 일이다..   鑑明則塵垢不止 감명칙진구부지 / 거울이 맑으면 먼지가 앉지 않는다.   見理明則遇思迎刃而解 견이명칙우사영인이해 / 사리에 밝으면 일에 임해도 해결이 빠르다.   見利而忘其眞 견이이망기진 / 눈앞의 이득에 사로잡히다 보면 자신의 참된 입장을 잊게 된다.   敬小愼微動不失時 경소신미동부실시 / 작은 일도 조심하라.   敬天尊地愛人 경천존지애인 / 하늘을 공경하고 땅을 존중히 여기고 사람을 사랑하여라.   苦莫吉於多願 고막길어다원 / 만족을 모르는 것처럼 괴로운 것은 없다.   公生明,偏生闇 공생명,편생암 / 공평한 마음은 밝음을 낳고, 편협한 마음은 어둠을 낳는다.   功成惟欲善持盈 공성유욕선지영 / 성공하게 되면 그것을 지켜 끝을 조심하기를 처음같이 하라.   九層臺起累土 구층대기누토 / 위대한 사업도 작은 것을 쌓아서 되는 것이다.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군자욕눌어언이민어행 / 행하는 것을 먼저하고 말은 뒤에 하라.   君子贈人以言,庶人贈人以財 군자증인이언,서인증인이재 / 군자는 좋은 말로서 선사하고, 서인은 돈이나 물건으로 선사한다.   屈己者能處衆好勝者必遇敵 굴기자능처중호승자필우적 / 겸손하면 뭇사람을 얻게 되고 이기기를 좋아하면 반드시 적을 만난다.   窮不失義達不離道 궁부실의달불이도 / 궁색하여도 의리를 잃지 말며, 출세해도 정도를 떠나서는 안된다.   勤百善之長怠百惡之長 근백선지장태백악지장 / 부지런함은 온갖 선의 으뜸, 게으름은 온갖 악의 으뜸이다.   今日事今日畢 금일사금일필 / 오늘에 할 일은 오늘에 끝마쳐라.   氣不平則發言多失 기불평칙발언다실 / 마음이 편할 때 말해야, 편치 않을 때 말은 실수하는 일이 많다.   吉莫吉於知足 길막길어지족 / 가장 바람직한 일은 만족 할 줄을 아는 것이다.   累積不輟可成丘阜 누적불철가성구부 /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이다.   多聞闕疑多見闕殆 다문궐의다견궐태 / 의심나고 미덥지 못한 것 빼고 말하고 행하면 허물이 적어진다.   多聞博辯守之以儉 다문박변수지이검 / 널리 사물을 배우고 검소로서 세상을 살아가라.   多門之室生風多口之人生禍 다문지실생풍다구지인생화 / 창많은 방에 바람이 많듯이 말많은 사람은 재앙을 낳게 된다.   多聞擇其善者而從之 다문택기선자이종지 / 널리 듣고 그 가운데서 좋은 것을 가려 이에 따르라.   當大事要心神定心氣足 당대사요심신정심기족 / 큰 일을 당했을 때는 마음에 여유를 가져라.   當仁不讓於師 당인불양어사 / 仁을 행하는 데는 두려워하거나 꺼릴 것이 없다.   德不孤泌有隣 덕불고필유린 /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   道義重,則輕王公矣 도의중,칙경왕공의 / 자신의 행실이 어긋난 것이 없다면, 누구 앞에서나 떳떳하다.   讀書能使人寡過 독서능사인과과 / 독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허물을 적게 한다.     讀書百遍其義自見 독서백편기의자견 / 어려운 글도 되풀이해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알아진다.   敦篤虛靜者,仁之本也 돈독허정자,인지본야 / 정이 두텁고 마음이 거리낌 없이 고요함은 인의 근본이다.   動則思禮行則思義 동칙사례행칙사의 / 행동에는 언제나 예의를 생각해야 한다.   得丘民則得天下 득구민칙득천하 / 조그만 일을 성공하면, 전부를 성공한다.   樂莫樂於好善 락막락어호선 / 착한 일을 하라. 제일 즐거운 것은 착한 일을 하는 것이다.   萬事從實基福自厚 만사종실기복자후 / 만사에 너그러움이 따르면, 그 복이 자연히 두터워진다.   明極則過察而多疑 명극칙과찰이다의 / 끝까지 밝히려고 한다면 살피는데 치어서 의심만 많아진다.   名者實之賓也 명자실지빈야 / 명목이라는 것은 실질의 나그네   謀先事則昌事先謀則亡 모선사칙창사선모칙망 / 일은 그 순서를 그르치면 안 된다.   無急勝而忘敗 무급승이망패 / 일에만 성급해서, 패했을 경우의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     未雨苔先滑欲風松先鳴 미우태선골욕풍송선명 / 모든 재앙은 싹이 트기 전에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博學而篤志切問而近思박학이독지절문이근사 / 널리 배우고 뜻을 참되게 가지며 먼저 할 일을 묻고 가까운 일부터 하라.   防小人之道,正己爲先 방소인지도,정기위선 / 소인됨을 막는 길은 우선 자기를 바로 하는 것이다..   百論不如一行 백론불여일행 / 백가지 논란은 한가지 행함과 같지 못하다.   百發一失,不足謂善射 백발일실,부족위선사 / 백 발 쏴서 한번이라도 실패하면, 名弓이라고 할 수 없다.   百忍堂中有泰和 백인당중유태화 / 백 번 참으면 집안에 평화가 있다.   福生於無爲患生於多慾 복생어무위환생어다욕 / 복은 비움에서 생기고 화는 많은 욕심에서 생긴다.     蓬生麻中不扶直 봉생마중불부직 / 착한 친구를 만나라 서로 착한 사람이 된다.   富潤屋德潤身 부윤옥덕윤신 / 부는 집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한다.   夫人必自侮然後人侮之 부인필자모연후인모지 / 남을 바르게 하려면 나 자신이 굽어 있지 않아야 한다.   不作無補之功不爲無益之事 부작무보지공불위무익지사 / 세상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말아라.   不知其子,視其友 부지기자,시기우 / 그 사람을 알 수 없다면 그 사람의 친구를 보라.   不加功於無用不損財於無謂 불가공어무용불손재어무위 / 힘은 쓸모 없는 데 쓰지 말고 재물은 이유없이 쓰지말라.   不見可欲使心不亂 불견가욕사심불란 / 욕심나는 것을 보지 않으면 마음이 평정해 진다.   不告其過非忠也 불고기과비충야 / 허물을 알려 주지 않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다.   不貴尺壁重寸陰 불귀척벽중촌음 / 무엇보다도 시간을 소중히 여겨 헛되게 보내지 말아라.   不矜細行終累大德 불긍세행종누대덕 / 작은 행동을 조심하지 않으면 큰 덕을 해치게 된다.   不起妄念是敬妄念不起是誠 불기망념시경망념불기시성 / 망념을 하지 않는 것이 공경이고 성실이란 것이다.   不善人善人之資 불선인선인지자 / 악인은 선인의 반성을 위한 자료가 된다.   不愼其前而悔其後雖悔何及 불신기전이회기후수회하급 / 후회는 소용이 없다. 먼저 조심하라.   不榮通,不醜窮 불영통,불추궁 / 출세를 해도 그 지위를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고 곤궁해도 그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不學便老而衰 불학변노이쇠 / 배우지 않으면 곧 노쇠 한다.   不患莫己知求爲可知也 불환막기지구위가야 /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말고 알아줄 일을 하는 데 힘써라.   非我而當者,吾師也 비아이당자,오사야 / 잘못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바로 스승이다.   舍近謀遠者勞而無功 사근모원자로이무공 / 먼 것만을 바라고 발아래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思其始而成其終 사기시이성기종 / 처음을 조심하고 끝도 같은 마음으로 하면 성공한다.   事能知足必常安 사능지족필상안 / 자기가 한 일에 만족함을 알면 항상 평안하다.   辭達則止不貴多言 사달칙지불귀다언 / 말은 뜻을 전하면 된다. 많은 말은 필요치 않다.   使明信念意志 사명신념의지 / 해야한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思無益不如學 사무익불여학 / 배워라! 생각만으로는 아무런 보탬도 없다.   事者生於慮成於務 사자생어려성어무 / 일은 사려에 의해 시작되지만 그 성공은 노력에 의해 있다.   事之成敗必由小生 사지성패필유소생 / 천리의 긴 둑도 개미 구멍으로 무너진다.   上交不諂下交不驕 상교하첨하교불교 / 윗사람에게 아첨하지 말고 아랫사람에게 교만하지 말아라.   先憂爲後樂之本 선우위후락지본 / 먼저 근심하는 것이 뒤에 즐기는 근본이 된다.   先衆人而爲後衆人而言 선중인이위후중인이언 / 일은 남보다 먼저 하고 말은 남보다 뒤에 하라.   先行基言而從後之 선행기언이종후지 / 먼저 그 사리를 가려 말하고 그 말대로 일을 실행하라.   盛年不再來一日難再晨 성년부재래일일난재신 / 시간은 지나가기 쉽고 다시 오지 않는다.   所見所期,不可不遠且大 소견소기,불가불원차대 / 보는 바, 기대하는 바는 원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小不忍則亂大謀소불인칙난대모 /작은 일에 참지 못하면 큰일을 그르치고 만다.   少言者不爲人所忌 소언자불위인소기 / 생각하고 말을 하라. 말많은 사람은 실언을 면치 못한다.   少而不學長無能也 소이불학장무능야 / 어려서 배우지 않으면 커서 무능한 사람이 된다.   修己而不責人 수기이불책인 / 자신을 닦고 남을 책하지 않으면 원한을 사는 일이 없다.   雖有嘉肴不食不知其旨 수유가효불식부지기지 / 아무리 훌륭한 일이라도 체험하지 않으면 참 맛을 모른다.   時然後言人不厭其言 시연후언인불염기언 / 말을 잘 듣고 말을 하면 그 말을 싫어하지 않는다.   是謂是,非謂非,日直 시위시,비위비,일직 / 옳은 것을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는 것이 정직이다   時有基時人有基人 시유기시인유기인 / 때에는 때가 있고, 사람에게는 적소에 필요한 사람이 있다.   信孚於上下天下無甚難處事 신부어상하천하무심난처사 / 信과 實로써 천하에 임하면 세상일이 어려울 것 없다.   信信信也,疑疑亦信也 신신신야,의의역신야 / 믿을 것은 믿고,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함이 믿음이다.   信言不美,美言不信 신언불미,미언불신 / 진실은 아름답게 장식하지 않고, 화려한 말은 진실이 없다.   心口身愼愼愼 심구신신신신 / 깊이 생각하여 말과 행동을 조심하라.   心欲小而志欲大 심욕소이지욕대 / 뜻은 크게 갖고, 마음은 항상 조심하라.   弱其志强其骨 약기지강기골 / 갖가지 욕망을 약하게 하고 참된 도의 골격을 튼튼히 한다.   良農不爲水旱不耕 양농불위수한불경 / 훌륭한 농부는 홍수나 가뭄에도 밭을 가는 손을 멈추지 않는다.   養心,莫善於誠 양심,막선어성 / 마음을 수양하는 데는 성실한 것을 지니는 것이 최상이다.   養心莫善於寡欲 양심막선어과욕 / 욕망을 억제하라. 억제하지 않으면 본심을 잃게 된다.   漁利者害多務名者毁至 어리자해다무명자훼지 / 이익만을 생각하면 해를 보고 이름 얻는데 급하면 비방을 듣는다.   言顧行行顧言 언고행행고언 / 언행을 일치하게 하는 마음을 가져라.   言不妄發發必當理 언불망발발필당리 / 말은 함부로 하지 말아라. 말은 반드시 도리에 맞게 해야 한다.   言卽信實行必正直 언즉신실행필정직 / 말은 좋은 결과가 있고, 행동은 반드시 정직해야 한다.   言之易行之難 언지역행지난 / 말은 쉽고 행하기는 어렵다. 언행이 일치해야 한다.   言必可行 行必可言언필가행행필가언 / 말과 행동은 반드시 같아야 한다.   言必信 行必果 언필언행필과 / 말은 반드시 진실 되게 하고 행동은 과감하게 하라.   言必忠信行必誠實 언필충신행필성실 / 말은진실하고 미덥게 하고, 행실은 참되고 진실하게 하라.   業精於勤荒於嬉 업정어근황어희 / 노력하면 정묘한 경지에 이르고 놀고 있으면 거칠어진다.   寧人負我我勿負人 영인부아아물부인 / 남이 너를 배반하더라도 너는 남을 배반하지 말아라.   玉不琢不成器 옥불탁불성기 / 배우고 닦지 않으면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없다.   玉不琢不成器 人下學不知道 옥불탁불성기 인하학부지도 / 학문으로 갈고 닦지 않으면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없다.   欲觀千歲,則審今日 욕관천세,칙심금일 / 먼 장래 일을 알고자 하면 오늘의 일을 명확하게 알도록 하라.   慾淡則心輕心輕則理見 욕담칙심경심경칙이견 / 사욕에 덮이지 않으면 마음은 밝은 거울처럼 된다.   欲當大任,須是篤實 욕당대임,수시독실 / 큰일을 맡아서 하려면 모름지기 독실해야 한다.   欲富乎,忍恥矣 욕부호,인치의 / 富하려 하면 창피를 참지 않으면 안 된다.   欲齊其家者先修其身 욕세기가자선수기신 / 집을 다스리려면 먼저 자신의 행동을 바르게 하라.   容物美德也然亦有明暗 용물미덕야연역유명암 / 남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은 좋으나 이것을 이행하는 데는 잘 판단해서 하라.   原淸則流淸,原濁則流濁 원청칙유청,원탁칙유탁 / 근원이 맑으면 하류도 맑고, 근원이 흐리면 하류도 흐리다.   爲大不足以爲大 위대부족이위대 / 자신의 한일을 큰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도저히 큰 일을 못한다.   爲人下者,其猶土也 위인하자,기유토야 / 남의 밑에서는 사람은 대지의 흙과 같은 사람이다.   有德者必有言 유덕자필유언 / 안에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착한 말을 가지고 있다.   有爭氣者,勿與辯也 유쟁기자,물여변야 / 남과 다투려는 사람과는 일의 시비를 말하지 말라.   有志者事竟成 유지자사경성 / 뜻만 있으면 언젠가는 그 일을 해내게 된다.   有治人無治法 유치인무치법 / 세상이 다스려 지는 것은 인간의 힘이지 법에 의해서가 아니다.   義天下良寶也 의천하양보야 / 義 곧 道義는 이 세상에서 제일 값진 보배이다.   以善先人者,謂之敎 이선선인자,위지교 / 착한 행동으로 앞장서서 보이는 일, 이것이 바로 교육이다.   以衆小不勝,爲大勝也 이중소불성,위대승야 / 작은 것에 이기지 않는 태도라야 큰 것에 이긴다.   以天而得者固以人而得者脆 이천이득자고이인이득자취 / 자기 힘으로 얻은 것는 견고하고 남 힘으로 얻은 것는 약하다.     人無遠慮心有近憂 인무원려심유근우 / 人無遠慮難成大業 인무원려난성대업 / 멀리 생각하지 못하면, 가까운 날에 근심할 일이 있고 멀리 앞을 보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人變愁爲喜歲易儉爲豊 인변수위희세역검위풍 / 근심 없는 것으로 기쁨을 삼고 검소한 것으로 넉넉함을 알아라.   人不可以無恥 인불가이무치 / 사람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된다.   人生唯有常是第一善德 인생유유상시제일선덕 / 떳떳한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으뜸의 미덕이다.   人而無信不知其可也 인이무신부지기가야 / 사람은 信實하지 않으면 안 된다.   人而無恒終身一事無成 인이무항종신일사무성 / 늘 변하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용을 얻기 어려워 성공을 발랄 수 없다.   人一能之己百之 인일능지기백지 / 남을 이기려면, 남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한다.   忍一時之念色百日之憂 인일시지염색백일지우 / 한때의 분한 마음을 참으면, 백일 동안의 근심을 면한다.   人一十之己讀百之 인일십지기독백지 / 사람들이 열 번 읽는다면, 나는 백번 읽어야 우수 할 수 있다.   忍一字衆妙門 인일자중묘문 / 참는다는 한 글자는 만사에 성공하는 바탕이 된다.   人之性惡,其善者僞也 인지성악,기선자위야 / 안간의 성질은 본래 악, 선은 의지를 사용해서 노력하는 결과다.   一勤天下無難事 일근천하무난사 / 한결같이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움이 없다.   一心一念一通天 일심일념일통천 / 한가지 마음으로 바라고 생각하면 하늘로 통한다.   日日新日一新 일일신일일신 / 매일 매일 새롭게 매일 한가지씩 새로워 져라.   一寸光陰不可輕 일촌광음불가경 / 아주 짧은 시간도 헛되이 보내지 말라.   一出而不可反者言也 일출이불가반자언야 / 한번 입 밖에 낸 말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   臨淵羨魚不知退而結綱 임연선어부지퇴이결강 / 남의 성공을 부러워 말고 스스로 노력하라.   臨義莫較利害論人莫計成敗 임의막교이해논인막계성패 / 의리에 임해서는 이해를 따져서는 안 되고 사람을 논하는 데는 성공여하를 논해서는 안 된다.   雜言最害正理 잡언최해정리 / 필요한 말만 하라. 말이 많으면 실천할 수 가 없다.   藏器身待時動 장기신대시동 / 재능을 몸에 닦아 지니고 때를 기다려 움직여라.   將欲論人短長先思自己何如 장욕론인단장선사자기하여 / 단점을 말하려면 먼저 자신이 어떤가를 생각 후에 하라..   在上不驕高而不危 재상불교고이불위 / 위에 있어도 교만하지 않으면 지위가 높아도 위태롭지 않다.   積財千萬無過讀書 적재천만무과독서 /돈을 많이 쌓는 즐거움보다는 글을 읽는 쪽이 낫다.   前事不忘後事師 전사불망후사사 / 앞의 일을 잊지 않으면 뒤의 일을 그르치지 않게 된다.   精勤不退一念通天 정근불퇴일념통천 / 일의 성공은 힘을 다하여 부지런히 일하는 데 있다.   正己而不求於人則無怨 정기이불구어인칙무원 / 스스로 지키기를 바르게 하고 남에게는 바라지 말아라.   精神一到, 何事不成 정신일도,하사불성 / 정신을 한대 모으면 무슨 일이든 이루어 진다.   正言正心正行 정언정심정행 / 바른말, 바른 마음, 바른 행동.   終身爲善一言則敗之 종신위선일언칙패지 / 평생의 착한 일도 말 한번 잘못하면 이것이 무너진다.   贈人以言,重於金石珠玉 증인이언,중어금석주옥 / 좋은 말을 선사하는 것은 보석을 선사하는 것보다 귀하다.   知道易,勿言難 지도역,물언난 / 道를 알기란 쉽다. 입 밖에 내지 않도록 하기는 어렵다.   知道者不惑知命者不憂 지도자불혹지명자불우 / 길을 알면 헤매는 일 없고 운명을 알면 걱정이 없다.   知道則言自簡 지도칙언자간 / 말이 수다스런 것은 가장 수양에 해가 된다.   知命者,不怨天 지명자,불원천 / 명을 아는 자는 이에 만족하고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다.   止謗莫如修身 지방막여수신 / 남의 비난을 막는 데는 내 몸을 닦는 것 만한 것이 없다.   知事人然後能使人 지사인연후능사인 / 남을 섬길 줄 알아야 뒤에 사람을 잘 부릴 수 있다.   智欲圓而行欲方 지욕원이행욕방 / 지혜는 원만하게 하고, 행동은 방정하게 하라.   知而不言,所而之天 지이불언,소이지천 / 알아도 말하지 않는 것은 하늘의 경지에 들어가는 길이다.   知者不言,言者不知 지자불언,언자부지 / 참된 지자는 말이 없고, 말이 많은 사람은 지혜가 없다.   知者自知,仁者自愛 지자자지,인자자애 / 자신을 앎은 참다운 앎이요, 자기를 중히 여기는 것은 참 어짐.   智者知幾而固守 지자지기이고수 / 지혜로운 사람은 낌새를 미리 채고 굳게 지킨다.   知足常樂能忍自安 지족상락능인자안 / 足한 것을 알면 부족이 없고 참으면 마음이 절로 편안하다.   知止所以不殆 지지소이불태 /자신의 욕망에 대한 한도를아는 것은 안전을 지키는 길이다.   智和孝行成人 지화효행성인 / 지혜롭고 화목하고 효를 행하는 자는 뜻을 이룬다.   盡人事待天命 진인사대천명 /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려라.   差若毫釐,繆以千里 차약호리,무이천리 / 털끝 만한 차이가 천리나 빛나간다.   天道無親.常與善人 천도무친.상여선인 / 천도는 특별히 친히 하지 않는다. 언제나 착한 사람편이다.   千里之差生自毫端 천리지차생자호단 / 천리의 차이도 처음 한 걸음의 차다.   千里之行,始於足下 천리지행,시어족하 / 천리 길을 가는 것도, 한발자국부터 시작된다.   千里行始足下 천리행시족하 / 위대한 일도 가까운 곳에서 출발한다.   天下無二道,聖人無兩心 천하무이도,성인무양심 / 천하에는 두 길이 없고, 성인에게는 두마음이 없다.   天下之事,不進則退 천하지사,불진칙퇴 / 하늘 아래 모든 일이 나가지 않으면 물러난다.   推古驗今所以不惑 추고험금소이불혹 / 古今을 거울삼아 세상을 살아가면 그르치는 일이 적다.   出門如賓,承事如祭 출문여빈,승사여제 / 문밖에 나가면 손님을 대하듯 일에는 제사를 지내듯 조심하라.   濯去舊見,以來新意 탁거구견,이래신의 / 낡은 견해를 씻어 냄으로서 새로운 뜻을 맞는다.   呑舟之魚不游枝流 탄주지어불유지류 / 큰 고기는 작은 강이나 냇물에서는 놀지 않는다.   泰山不讓土壤 태산불양토양 / 큰 사업을 하려면 문을 열고 도량을 크게 하라.   必有忍其乃有濟 필유인기내유제 / 참고 노력하면 반드시 어떤 일이나 성공한다.   下流不可處君子愼厥初 하류불가처군자신궐초 / 사람은 그 처음이 가장 중요하다.   學以養心亦所以養身 학이양심역소이양신 / 학문은 정신을 기르고 또한 몸을 기른다.   學而知之,本固邦寧 학이지지,본고방영 / 공부하여 진리를 깨달아라, 근본이 굳건해야 나라도 편안하다.   學至於行之而止矣 학지어행지이지의 / 학문은 그것을 실행하는 데 이르러야 최상에 달했다 할 것이다.   行欲先人言欲後人 행욕선인언욕후인 / 행동은 남보다 먼저 하고 말은 남보다 뒤에 하는 것이 좋다.   向己如霜雪,對人如春風 향기여상설,대인여춘풍 / 자기에게 눈서리 같이 냉혹하게. 남에겐 봄바람 같이 온화하게.   賢者順理而安行 현자순리이안행 / 어진 사람은 순리대로 따르고, 편안하게 행동한다.   好問則裕自用則小 호문칙유자용칙소 / 모를 때 물어서 하면 여유롭고, 알아도 멋대로 하면 성과 없다.   虎死留皮,人死留名 호사유피,인사유명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禍莫大於不知足 화막대어부지족 / 만족을 모르는 것이 모든 화의 근원이 된다.   禍與福同門 利與害爲隣 화여복동문 이여해위린 / 禍福과 利害는 붙어 다니는 것, 깊이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胸次淸快則人事百艱亦不阻 흉차청쾌칙인사백간역불조 /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떤 어려움도 헤치고 나갈 수 있다.   興一利不若除一害 흥일이불약제일해 / 이득을 일으키는 것보다 해로움을 없애는 것이 좋다.   喜氣自能成歲豊 희기자능성세풍 / 일가화락해서 농사에 힘쓰면 풍년은 절로 온다.    
467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파스칼 명언... 댓글:  조회:3435  추천:0  2017-05-06
파스칼 명언 모음 겉으로 보기에 무척 연약해 보이는 모든 것이 바로 힘이다.  파스칼  결점이 많다는 것은 나쁜 것이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더 나쁜 것이다.  파스칼  고뇌에 지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쾌락에 지는 것이야말로 수치다.  파스칼  고민하면서 길을 찾는 사람들, 그들이 참된 인간상이다.  파스칼  그렇다면 우리들이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특성인 셈이다.  파스칼  나는 내가 곧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안다.  하지만 내가 결코 피할 수 없는 그 죽음이란 것에 대해서  어느 무엇 하나 아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  파스칼  나는 특히 누구를 치켜세우고 칭찬하는 사람 쪽에  서고 싶은 생각이 없다.  또 누구를 지칭하여 비난하는 쪽에도 끼고 싶지 않다.  현재 행복한 체하는 사람의 편에도 들고 싶은 생각이 없다.  고민하면서 길을 찾는 사람 이런 사람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파스칼  남들로부터 칭찬을 바란다면 자기의 좋은 점을 늘어놓지 말라.  파스칼  너그럽고 상냥한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을 지닌 마음  이것이 사람의 외모를 아름답게 하는 힘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다.  파스칼  누구나 결점이 그리 많지는 않다. 결점이 여러 가지인 것으로  보이지만 근원은 하나다.  한 가지 나쁜 버릇을 고치면 다른 버릇도 고쳐진다.  한 가지 나쁜 버릇은 열 가지 나쁜 버릇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잊지 말라.  파스칼  도대체 사람들이 무슨 일을 도모하고 있는가 주위를 돌아보아라.  사람들은 가장 소중하고 불요불급한 것만 빼놓고  쓸데없는 것들만 생각한다.  곧 춤, 음악, 노래, 집, 재산, 권력을 생각한다.  그리고 심지어 부자와 왕을 시샘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들이 인간다운 삶에서  정말 필요한 것인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파스칼  도박을 즐기는 모든 인간은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서  확실한 것을 걸고 내기를 한다.  파스칼  마음속의 공허는 내 마음속에 생명력을 불러일으킴으로써만  메울 수 있을 뿐이다.  파스칼  만일 친구가 남몰래 수근거리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이 비록  진지하게 사실 그대로를 말했다고 하더라도 우정은  거의 유지되지 않는다.  파스칼  모든 것은 항상 시작이 가장 좋다.  파스칼  모든 사람이 서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알게 된다면  누구든 이 세상에서 네 명 이상의 친구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파스칼  무엇이든지 풍부하다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더 바랄 것 없이 풍족하다고 해서 그만큼 기쁨이  큰 것은 아니다.  모자라는 듯한 여백. 그 여백이 오히려 기쁨의 샘이다.  파스칼  무지함을 두려워 말라.  거짓 지식을 두려워하라.  파스칼  미모를 위해 있는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여자를  언제까지나 사랑할까? 아니다.  그 여자를 죽이지 않고 그 여자의 미모를 빼앗는  작은 흠에 의해서도 그 사람은 그 여자를 더는  사랑하지 않게 될 것이다.  파스칼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듣고 싶다면 자신의 우수한 점을  내세워 말하지 말라.  파스칼  사람은 자기의 탓이 아닌 외부에서 일어난 죄악이나  잘못에 대해서는 크게 분개하면서도 자기의 책임 하에  있는 자기 자신이 저지른 죄악이나 잘못에 대해서는  분개하지도 않고 싸우려고도 하지 않는다.  파스칼  사람은 천사도 아니요, 짐승도 아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천사처럼 행세하려는 사람이 짐승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파스칼  사람의 마음속에는 인간의 이성과는 다른 그것만의  독특한 이성이 있다.  파스칼  사소한 잘못을 용서할 수 없다면 우정은 결코 깊어질 수 없다.  파스칼  생활이란 생각하는 것이 그 본질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오로지 사고에 달려 있다.  인간의 내부에 있는 모순되는 두 요소  즉 천사의 일면과 금수의 일면 어느 쪽이 나를 지배하는가는  나의 사고에 달려있다.  파스칼  습관은 제 2의 천성으로 제 1의 천성을 파괴한다.  파스칼  시간은 슬픔과 다툼도 가라앉힌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인간으로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파스칼  신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시인이 아니면 안 된다.  파스칼  신념은 현명한 도박이다.  신념은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밑져야 본전인 것이다.  만일 당신이 얻는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얻을 것이고  만일 당신이 잃는다면 당신은 하나도 잃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주저하지 말고 신념을 믿어라.  파스칼  심장은 이성(理性)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분별력을 갖고 있다.  파스칼  악은 행하기 쉽다.  그리고 그 형태는 끝이 없다.  파스칼  우리는 이치로써만이 아니라 가슴을 통해서도  진리를 터득한다.  파스칼  우리들이 진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이성뿐만 아니라  감정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파스칼  이 무한한 우주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파스칼  이 시대에는 진리는 막연하고 허위는 확실시되어 있으므로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지 아니하고는 진리를 알 수 없다.  파스칼  인간에게 있어서 고뇌에 복종하는 것은 치욕이 아니다.  오히려 쾌락에 복종하는 것이야말로 치욕이다.  파스칼  인간은 더없이 연약한 한줄기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이다.  파스칼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파스칼  인간은 생각하는 것과 일하기 위해서만 태어났다.  파스칼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설령 그것이 진리를 발견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최소한 자기 생활의 질서를 잡는데는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일 이상으로 훌륭한 일은 없는 것이다.  파스칼  인간은 자신에 관해서는 좀처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건강한 데도 죽어 가는 듯이 생각하고  또한 죽어가고 있는데도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파스칼  인간은 자연 가운데에서도 가장 연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그는 생각하는 갈대다. 모름지기 언제나  사색하도록 힘쓰라.  그곳에 도덕의 원리가 있는 것이다.  파스칼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야수도 아니다.  그러나 불행한 일에 천사처럼 행동하기를 바라면서도  야수처럼 행동한다.  파스칼  인간의 모든 존엄성은 사고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가 채울 수 있는 공간이나  시간에 의해서 자기회복을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사고에 의존해서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고를 잘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도덕의 기본 법칙이다.  파스칼  인간의 위대함은 자기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깨닫는 점에 있다.  파스칼  인생은 우주의 영광이요, 또한 우주의 모욕이다.  파스칼  인생의 최고 불행은 인간이면서 인간을 모르는 것이다.  파스칼  인생이 사랑으로 시작하고 야심으로 끝나는 경우는 행복하다.  파스칼  일은 시작할 때가 언제나 가장 좋다.  파스칼  자기에게 이로울 때만 남에게 친절하고 어질게 대하지 말라.  지혜로운 사람은 이해관계를 떠나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어진 마음으로 대한다.  왜냐하면 어진 마음 자체가 나에게 따스한 체온이 되기 때문이다.  파스칼  자기 인생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것을 알 수 없다고 확신하고 또한 모르는 것이 예지라고  떠벌리는 사람은 더욱 불행하다.  파스칼  자연에는 완벽한 신의 형상이라고 느끼게 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느끼게 하는  불완전한 것도 있다.  파스칼  정의의 미명하에 폭력으로써 사람들을 복종시킨다면  그 어떠한 경우라도 사람들을 복종시킨 것이 정의라고  주장될 수 없다.  파스칼  진리가 자기의 죄업을 증명하지 않을까 하고 진리를  겁내는 것만큼 불쌍한 일은 없다.  파스칼  진리는 우리에게 신념을 줄 뿐 아니라 진리를 구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마음의 평화를 주는 것이다.  파스칼  진실은 언제나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에 주의하지 않았을 뿐이다.  항상 진실을 찾아야 한다.  진실은 우리를 늘 기다리고 있다.  파스칼  진정한 철학은 철학을 조롱하는 것이다.  파스칼  칭찬 받기를 원하면 자화자찬을 하지 말라.  파스칼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가  이것은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인생에 있어서 오직 하나의 의미는  신이 원하시는 이 짧고 제한된 시간 속에서 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가 뒤돌아 볼 때다.  파스칼  현재는 결코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는 수단이며 미래만이 우리의 목적이다.  파스칼  힘없는 정부는 미약하고, 정의 없는 힘은 포악이다.  파스칼  힘없는 정의는 도움이 안 된다. 정의 없는 힘은 폭군적이다.  우리는 정의로운 것을 힘세게 만들 수 없으므로  힘센 것을 정의로운 것으로 삼아 왔다.  파스칼    출처: http://blow1005.tistory.com/524 [부동산채권]
466    시인은 시의 구절구절 섬세한 언어적 쾌감을 줄줄 알아야... 댓글:  조회:2340  추천:1  2017-05-06
김종원 시집 [이별한 날에는 그리움도 죄가 되나니] 서평  김순진     *미완의 아름다움  시인은 만남과 이별을 매개로 성장을 꿈꾼다.  미완성은 극도의 완성에서 오는 불안감과 산비탈을 내려가야 하고, 꽃이 만개했을 때 지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면, 김종원 시인은 이제 70%의 완성도를 보이고 있는 시인이고 그 완성을 위해 정진하는 가능성을 내재한 시인이라는 점에 큰 매력을 느낀다.  가장 생생하고 적나라한 전쟁을 보도하기 위하여 종군 기자들은 전장에 목숨을 걸고 들어간다. 이는 김종원 시인이 사랑시와 이별시를 가장 잘 쓸 수 있다는 시인이라는 논리를 뒷받침해 준다. 그 세대의 가장 깊은 관심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랑이고 이별이며 그를 통틀어 망라할 수 있는 소재 이성이다.  이별한 사람들은  가끔,  일요일 오후 낮잠을 자다가  약속시간에 늦은 줄 알고  그와 자주 만났던 곳에 갔다가  다시 돌아올때가 있다  어디 갔을까  어디 갔을까  내 사랑이 어디 갔을까  습관이  이별을 아직 인정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  [이별한 날에는 그리움도 죄가 되나니] 전문  김종원 시인은 젊지만 그간 살아온 역정은 실로 파란 많다 하겠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가장으로 자란 그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고 스스로 개척하는 우직한 남정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의 깔끔하고 수려한 외모엔 어쩐지 그늘이 진다. 그것은 그의 집안이 모두 외국의 이민을 가고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김종원 시인이 힘든 세상을 헤쳐 오는데서 오는 그늘이 아닐까?  그가 이처럼 심오한 이별의 시, 가슴 절절한 사랑의 시를 쓰는 데는 내력이 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란 말이 있다. 그 말은 정승 집안에 정승 나고 백정집안에 백정난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김종원 시인이 어려서부터 시를 쓰게 된 것은 물론 그가 자라온 시련의 성장과정도 큰 요인이 될 수 있겠지만 집안 내력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김종원 시인의 집안 할아버지가 바로 '내 마음은‘을 쓰신 초허 김동명(超虛 金東鳴) 시인인 것이다.  내 마음은 호수(湖水)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라.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김동명「내 마음은」 일부  이 시는 김동명 시인의 시이다. 김종원 시인은 사람의 감정을 자연에 잘 이입할 뿐 아니라 김동명 시인에서 볼 수 있는 장시가 그의 시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보면 그의 할아버지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그는 선천적인 시인인지 모른다.  이 시집의 시들이 자연을 축소하고 감정을 극대화한 시이지만 자신을 이 시집이라는 거울 속으로 침전시키고, 그 촉촉함을 화운데이션 바르는 스무 살 소녀의 감정처럼 빗줄기가 창으로 흘러내리듯 우리내 가슴으로 젖어든다. 그의 이별에 대한 절절함은 풀잎이슬에 맺힌 아침이슬보다도 선명하다.  불행했던 과거와 시를 쓰는 자식의 장래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거리에서 시인은 부모와의 매듭에 고리를 푸는 수단으로 삼으려 한다.  산에 들어가는 것만이 출가는 아니다. 김종원 시인은 이 시집 한 권을 탈고하기 위하여 집을 나와 자취방에 전전하면서 그 흔한 컴퓨터나 TV조차 들여놓지 않고 오로지 시에 대한 사랑에 대한 이별에 대한 일념으로 사른 그의 시정신이야말로 프로정신으로 뭉쳐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프로정신과 아마추어 사고는 아마도 그의 시세계를 꽃봉오리를 보는 듯 미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아닌가?  * 신세대 고민의 해법 모색  식사를 하다가  유독 하나 남은 깍두기가  눈앞에 보여  날카로운 포크로  깍두기를 밀어보았다  툭 치면 친 만큼 뒤로 물러서는 너  아프면 아프다고  싫으면 싫다고 내색도 않고  아무런 반응 없이 물러만 가는 깍두기를  보며 눈물이 났다  「깍두기와 나의 신경전」일부  김종원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묘사하는데 발군의 재치를 보이는 시인이다.  그는 현 세상의 물질 만능을 적절히 소화하며 글에 접목시킬 줄 아는 현대시 언어구사 능력이 뛰어난 시인일 뿐 아니라 감정몰두에 충실한 눈물의 시인이다.  그의 사랑은 짧게 끝난 듯 보이나 그의 내면의 아픔은 결혼식장 드라이아이스 연기처럼 퍼져 이 시집을 아름다운 배경음으로 감동시키고 있다.  유난히 전화하는 걸 좋아하는 니가  전화기를 열 때마다 보이는 오빠 사진이  너를 힘들게 하진 않겠니?  아침잠이 많아  늘 학교에 지각을 해서 대신 자리를  맡아주던 오빠가 없는데,  이제 없는데  이제 그 모든 것이  모두가 현실인데 아프지 않겠니?  울지 않고 잘 지낼 수 있겠니?  잘 살 수 있겠니?  「훈련소 앞에서/남자의 독백」[일부]  어떻게 내가 오빠를 보내고  오빠 이름 석자를 기억해 가며 편지를 쓸 수가 있겠어?  매일 밤 그리워하다가  그리움에 지쳐 잠이 들 텐데  [중략]  오빠가 내 옆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주체하지도 못하는 눈물이 흐를지도 모르는데  나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아이처럼 돌려달라고  오빠 돌려달라고 떼쓸지도 모르는데  「훈련소 앞에서/남자의 독백」[일부]  그때,  어서 입소하라는 조교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짧은 머리가 어색해 쓴 모자를 벗기 시작했다.  낯선 나의 짧은 머리를 보고  너는 울기 시작하고,  그런 너를  울지 말라고, 제발 울지 말라고 말리며  내 눈에도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냥 다 미안하다.........  다시 너에게 돌아가는 날  이 모든 아픔 다 갚아 주리라.  그때까지 부디 아프지 말고  오빠 없다고 울지 말고  잘살아줘  「훈련소 앞에서」일부  김종원 시인은 신세대 시인이다. 시인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우리들의 친구이며 애인이고 때론, 소개팅에 나가 딱지맞은 가련한 청춘이다. 자장면이 최고의 메뉴인 푼돈바라기 청춘이다.  그는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한 대한민국의 건강한 청년이다. 가장 일반적이고 모태가 되는 이별인 군복무의 이별이 실제로 젊은이들에게는 얼마나 크고 소중한 일인가? 그의 시정신은 그런 건강미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랑하는 애인을 두고 나라에 몸 바칠 줄 알기에 더욱 숭고하다.  남자가 헤어지고 운다는 것은 어쩌면 남자답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가장 남자답고 사람다운 행동이다. 나는 시골에서 소를 기르던 경험이 있다. 어미소가 송아지를 팔 때 송아지를 찾아 목이 쉬어라 우는 것처럼 그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스스로 시작에 몰입하면서 보이지 않는 사랑 노래를 목쉬어라 부른 셈이다.  말하자면 그의 여성상과 사랑의 깊이는 감히 그를 남자라 부르기보다는 수절하고 기다리는 춘향정신과 통한다 할 수 있고, 한 마리가 죽으면 따라 죽는다는 원앙새의 사랑과도 비교될 수 있다. 그가 남성임에도 이별을 그리 서럽게 울며 잊지 못함은 그의 내면에 남성만의 진실한 사랑이 이 시인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정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서둘러 집을 나서야 했는데,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서두른다고 서둘러서 급히 약속 장소를 갔습니다.  그렇게 급하게 약속 장소에 도착한 후에  세수도 못하고 그곳에 온  나의 푸석푸석한 모습을 단장해 보려고  화장실의 거울에 나를 비추어 보았습니다.  당신이 사 준 남방에,  당신이 골라 준 면바지에,  당신이 좋아하던 안경을 쓴 내 모습이 눈에 보입니다.  그렇게 서둘러서  세수도 못 하고 서둘러 왔는데  지금 내 눈에 비친 내 모습은  내가 아닌 당신입니다  오늘은 왠지 하루가 짧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불길한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내일 볼 시험은 접어버리고  강남 역으로 갔더랬습니다.  하늘이 흐려지더니, 결국  비가 오더군요, 후.......  이런 날에 비가 오는 건지, 아니면  비가 오는 날에 이런 건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술이 몸에 좀 받을 것 같네요.  「아직도 사랑합니다」일부  대장장이가 잘 드는 칼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도의 기술로 수 없이 많은 담금질을 하며 두드리고 연마한다. 칼이라는 것은 아무 쇠나 그라인더에 갈아서 만들면 잘 드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칼이라는 것은 잘 들어야 할 뿐 아니라 충격에도 유동적으로 견디어 이가 나가지 않아야 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용도에 맞아야하는 것이다.  사랑시를 쓰는 시인의 대상이 꼭 정해진 것은 아니다. 물론 60대,70대 원로 시인들도 사랑시를 쓸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야기는 당사자에게서 듣는 것이 가장 솔깃하며, 이별 이야기는 그 당사자 주변에만 머물러도 눈물이 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이별시는 조금만 읽어도 눈물이 난다.  혼자 달리다  혼자 서성거리다  너를 만났다  누구의 심부름인 줄을  꿈에도 모르고  사랑을 실어 나르고  희망을 밀어 넣으면  이런 게 행복이다 생각하며  결국엔  다른 사람의 심부름인 줄  꿈에도 모른 채  지금껏  참 오랜 동안  헛 사랑을 했다  「헛 사랑」전문  우리는 때로 독백한다. 세상을 향하여 푸념하고 때론 산에 올라 욕지거리를 한다. 하는 일마다 안 풀려 좌절한다. 왜 내가 하는 일은 꼭 이 모양일까? 왜 나는 되는 일이 없을까? 그러나 김종원 시인은 그런 슬럼프를 시를 지으며 소화해냈다. 밥 대신 술을 마시며 고독으로 시를 쓰고, 담뱃재를 컴퓨터 온 방에 떨어뜨리면서도 이별한 여인을 그리는 시를 썼다. 그는 슬럼프를 시라는 구조자를 매개로 성장을 꿈꾼다. 그의 시가 속물 시나 모자람 시를 탈피하고 이처럼 지적 거울에 반사된 삶의 흔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만의 뚝심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 스물여덟 살에 중앙대학교를 다니는 그의 외견도 그 마스크만큼이나 매력이다. 그러나 외모로 보면 185cm의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에서 무슨 시 정렬이 그리 쏟아져 나올 수 있을까 의아해 할 수 있겠지만 그는 사람을 끄는 눈매와 천사표 그 자체의 외모완 달리 며칠이고 방구석에 틀어 박혀 써 내는 근성은 그만의 매력이다.  양파를 냉장고에 넣어둔 채  한동안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잊혀진 동안  양파 껍질들은 서로 살을 맞대고  견뎌내느라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썩어가고 있었다.  나는 양파 껍질을 하나하나 떼어 낸다.  썩었다고 떼어내고,  짓물렀다고 떼어내고  떼어내고, 또 떼어내도  서로 겪은 상처가  너무나 크다.  나는  끝이 날 때까지 상처를 떼어낸다.  양파껍질은 모두 다 떼어지고  나는 눈물을 흘린다.  단지 양파가 너무나 매울 뿐이라고  그래서 눈물이 나오는 거라고  정말 그럴 뿐이라고.......  이제 내 손에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양손이 진물처럼  슬픔이 범벅이 되어 있을 뿐  「슬픔 범벅」전문  이 시에서는 다른 시와 다르게 은유를 통한 참신한 이미지 형상화와 생명과 생활의 거리를  좁혀가면서 큰 시인으로서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고 있다.  그의 시는 차라리 수필에 가깝다. 그는 진솔한 표현을 무기로 언어의 덧칠이 없이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으로 몰입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외형을 택하기보다는 사람의 솔직한 감정을 그래도 가감 없이 표현해 자기완성의 계기로 삼고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만나고 사랑하며 이별한다. 그것은 어쩌면 인생살이의 모델이고 필연 이리라. 만나고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별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외로움에서 자라나 깊은 이별을 실감하였고, 더욱이 친척들이 모두 외국으로 이민 간 상황에서 명절이면 도시의 골목바람을 온 몸으로 견디며 자라나 잠시 잠시의 사랑보단 깊은 이별의 아픔과 가슴앓이를 이겨내고 있는 이 젊은 시인에게 우리는 격려의 손길을 뻗어야한다.  그의 이 소중한 시집 “이별한 날에는 그리움도 죄가 되나니”가 서점에서 인터넷에서 기립박수를 받는 것은 어쩌면 내 일이고 내 친구의 일일는지 모른다.   ---------------------------------------------------------------------------------------------     청포도 ―이육사(1904∼1944)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청포도는 다 익어도 빛깔이 푸른 포도다. 칠월 어느 쾌청한 날, 포도 잎사귀 아래 송이송이 탐스러운 청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려 무르익어 가는데, ‘먼 데 하늘이’ 알알이 비췻빛으로 영롱한 포도에 들어와 박힌다. 푸른 포도 알 하나하나 그 작은 몸에 하늘을 담고 있다. 그 광경만으로도 홀릴 만한데 포도밭 저 아래 바다가 넘실거린다. ‘흰 돛단배 곱게 밀려서’ 오고. 실제 시인이 잘 알고 사랑하는 고장의 꿈결같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을 배경으로,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조국 광복에의 염원을 서정적 시어에 담았다. ‘육사’는 시인이 항일운동으로 수감됐을 때의 수인번호 ‘64’에서 딴 호(號)라고 한다.  곳곳의 섬세한 언어감각이 쾌감을 주는 시다. 푸르고 파랗고 하얀 색조의 시각적 이미지가 독자의 가슴을 서늘하고 싱그럽게 씻어준다. ‘주저리주저리’는 부사 ‘주절주절’의 방언인데, ‘과실 따위가 많이 매달렸거나 어우러져 있는 모양’, 혹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모양’을 이른다. ‘이 마을 전설’과 포도송이를 아울러 꾸미기에 이처럼 적절할 수가 없다. 기어이 찾아올 손님이 입고 있을 것이라는 청포(靑袍), 푸른 도포는 더 옛날 조선시대 중간층 관직의 상징으로 시에서는 애국지사를 뜻할 텐데, 청포도와 맞물리는 말이다. 청포도는 청포를 입은 포도니까, 조국에 빛을 찾아올 지사일 테다. 그러니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또한 숨은 뜻이 있는 것이다. ‘전설’과 ‘아이’는 과거부터의 꿈과 미래의 희망 아닐까….  
465    수필의 허구문제를 알아보다(17) 댓글:  조회:2378  추천:0  2017-05-06
수필은 변해야 한다  저는 오늘 두 분 선생님께 한 가지 질문만 하겠습니다. 수필이 변하려면 남녀 간의 성문제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조금은 개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시와 소설에서 보여주는 적나라한 포르노 상태로 진입하자는 것이 아니라 청자연적에 준하는 운우지정이란 막연한 표현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이런 귀한 자리에 선 김에 평소 제가 생각하고 있는 수필이 달라져야 하는 나름대로의 소회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두 분 선생님께서 제가 평소에 생각해 오던 것을 조목조목 잘 정리해 주셔서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들이 제시해 주신 수필의 갈 길은 무지개가 뜨는 곳처럼 방향은 분명한데 그 곳까지 가야 할 구체적 방법은 아직도 모호합니다. 백내장 환자가 사물을 보듯 흐릿하기만 합니다.  저는 ‘수필이 엄청나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수필이 달라지려면 허구성 논쟁도 그만 두어야 합니다. 그러한 소모성 논쟁은 발전 쪽으로 달리는 전진 에너지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뿐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수필에 허구를 수용하자는 사람은 그런 글을 쓰면 될 것이고, 허구는 용서치 못해도 상상력을 대체용품으로 활용하자는 이들은 아름다운 상상을 발휘하여 글을 꾸며 가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허구나 상상에 돌아 앉아 경험한 사실만으로 글을 쓰시는 분들은 그렇게 나아가시면 됩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앉아 허구논쟁을 종결짓고 뜻을 한 곳에 모은다고 하더라도 사람마다 각자의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에 지나고 보면 소득 없는 논쟁에 시간만 낭비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국가나 사회가 다양성을 요구하듯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와 소설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 가는 동안 수필은 고정관념이란 틀을 깨지 못하고 벽속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습니다. 그것은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 가르친 1세대의 잘못도 있지만 그것 보다는 개혁과 실험을 시도해 보지 않은 후세대들의 책임이 오히려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필이론이 지나치게 도덕적 인간이기를 요구한 나머지 문학이 가야할 길인 감추어진 욕망이 언어로 표현되는 것을 거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수필이 오랜 세월 동안 엄숙주의와 경건주의에 포섭되어 욕구와 욕망의 바다로 내딛는 수필가들의 아장걸음까지 눈치를 살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로’부터 시작된 우리 현대시는 김소월 이상 김수영 서정주 김춘수 등에 의해 갈고 닦이고 그리고 수많은 난해 시와 무의미 시를 생산해 내는 시인들에 의해 오늘의 시로 성숙했습니다. 소설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런데 유독 수필만은 실험과 도전 정신이 부족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수필의 한계를 모르고 하는 소리군”하고 말씀하시는 어른들도 물론 계실 줄 압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이상의 ‘오감도’정신을 수필로 흉내 내는 사람이 없었으며 투철한 실험 정신으로 난해 수필을 시도해본 수필가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것은 ‘수필은 고고해야 한다.’는 매듭을 풀지 못하고 위리안치 상태에서 세월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수필이 고향. 가족. 아이 키우기. 학창시절. 외국여행기란 틀에 박힌 주제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선생님들의 지적대로 수필은 변해야 합니다. 편집자도, 비평가도, 수필가 자신도, 그리고 독자까지 변해야 합니다. 변하지 않으면 다른 장르의 문학인들로부터 옳은 대접을 받지 못할 것이며 신춘문예의 한 축에 영원히 끼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 미래의 문학 판에서 제명되거나 추방될지도 모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서울 경기 지역에서 좀 떨어진 대구 부산 대전 경남 전북에는 수필이 신춘문예의 한 장르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발간되는 신문들이 수필을 신춘문예의 장르로 넣어주지 않는 것은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필 관계자들의 노력과 열성이 부족한 소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잡지 만들고 책 팔고 신진작가 등단시키는 일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수필잡지를 만들고 있는 발행인과 편집 책임자끼리라도 서로 반목하지 말고 힘을 합쳐 원로들의 조언을 얻어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적극적인 활동을 벌인다면 안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간 신문에서 수필을 신춘문예의 한 장르로 받아 준다면 수필의 발전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얘기가 잠시 신춘문예 쪽으로 샜습니다. 죄송합니다.  수필은 재미가 있는 가운데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수의 삶의 영역으로 확대도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그 속에 철학까지 끼어들면 더 좋겠지요.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여간한 기술자가 아니고선 원고지 열 몇 장에 그렇게 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저는 모든 것 다 접어두고 지금부터 수필은 낯설고 생기가 넘치는 것이 주제가 되고 소재가 되었으면 합니다. 앞으로 시대에는 낯설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익숙한 것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그래서 파격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물을 보는 시각도 글을 쓰는 기법이나 기교도 신선해야 하고 발랄해야 합니다. 모든 예술의 지향점도 그러하고 아트 전반의 추세가 그렇습니다.  최근 삼성사건으로 유명해진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은 옛날 풍경화만 봐오던 눈에는 그림 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일본의 야요이 쿠사마가 그린 동그라미로 그린 호박 그림은 그림 같잖은 그림이지만 실제로 잘 익은 누런 호박이 오천 원 정도 인데 비해 무려 만 배인 5~6천만 원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낯설기 때문입니다. 낯선 것은 신기하고 신기한 것은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몇 달 전에 타계한 입 생 로랑은 남성 전용 턱시도를 여성에게 접목시켜 세계적으로 히트 시킨 패션 디자이너입니다. 뉴 에이지 뮤지션으로 제3세대 음악을 이끌고 있는 야니가 타지마할, 자금성, 그리고 아크로폴리스의 헤롯 아티쿠스 음악당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낯설고 신기하여 음악 애호가들에게 경이롭게 느껴졌던 까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요즘은 오페라도 벗는 시대입니다. 오페라에서 ‘살로메’역을 맡은 마리아 에윙은 ‘일곱 베일의 춤’을 부르다가 일곱 베일의 망사를 완전히 벗어 던집니다. 그리고 지난해 뉴욕시티 오페라단이 공연한 ‘모세와 아론’에선 합창단원 모두가 옷 하나 걸치지 않고 무대에 올랐습니다. 현대 발레는 발레리나들이 발레복과 토슈즈를 벗어 던지고 무대에 오릅니다. 또 일본의 전라 여성 관현악단은 샌달 하나만 신고 바이올린과 첼로를 켜고 풀륫을 불었으며 지휘자 역시 지휘봉 외엔 별로 걸친 것이 없는 공연 장면이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소설도 마찬가집니다. 박상륭이란 소설가는 ‘잡설품’이란 난해소설을 시대의 화두로 던져두고 있습니다. 그는 종교와 철학의 단서들을 조합하여 소설에 영문자까지 섞어 아주 낯설고 불친절한 소설 읽기를 시험대에 올려놓았습니다.  중국의 한소공은 ‘마교사전’이란 새로운 형식의 자전적 소설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소설 속에는 가난한 장애자 남동생을 보러 왔다가 여자도 없이 혼자 살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가련하여 “그냥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만이라도 여자의 맛을 느껴 보렴”하고 몸을 주려한 누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남동생은 아무 말 없이 비바람 속으로 떠납니다. 성이 아무리 문란한 시대지만 이런 이야기는 낯설고 신선합니다. 그리고 감동적입니다.  예술 전반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런대도 수필을 고고한 공식에 대입하고 치수로 재단하여 맞느니 안 맞느니를 따지고 있습니다. 수필은 변해도 아주 단단히 변해야 합니다. 구각을 벗지 못하고 음풍농월이나 하고 있으면 신춘문예는커녕 지금 자리도 지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수필 속에 성적인 묘사도 좀 더 과감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시와 소설이 보여주는 포르노 상태로 진입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리고 용기 있는 사람들의 모험성 짙은 실험수필도 기대해 볼 만한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됩니다.  대구의 문학 평론가이자 수필가인 신재기 교수는 ‘나는 계획한다. 분서를’이란 신작수필집 서문에서 “수필을 떠나라. 울타리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내동댕이쳐라. 이젠 수필 아닌 수필을 쓰자.”고 했습니다. 수필이 신선하게 변하도록 다 같이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문화예술위원회는 2009년 창작지원 모집 요강을 발표하면서 수필을 해당 장르에서 제외시켰습니다. 해당 장르는 장편소설 시 시조 평론 동시 동화입니다. 그러니까 수필은 문학이 아니란 말을 이렇게 문서로 표현한 것입니다.)  
464    수필의 허구문제를 알아보다(16) 댓글:  조회:2258  추천:0  2017-05-06
미래수필의 방향/ 한상렬        “문학의 주체는 작가가 아니라 언어다. 1970년대 이래 언어행위 이론은 뚜렷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소쉬르를 위시한 구조주의 언어학자들은 시, 소설 또는 신화 등에서 일종의 규칙 체계를 찾아내려 한다. 이렇듯 언어는 육체적 감수성을 표현하는 장치이며 글쓰기는 욕망의 대상에 해당한다.” (『수필학』제 16집, 박양근 , 2008. 문학관,66-67쪽)     박양근은 이 글에서 시대정신을 담는 그릇으로 수필을 정립하려는 윤재천은 메타수필이라는 담론을 이끌어내고 있다고 보았다. 즉 그의 담론은 필연적으로 들뢰즈의 탈영토론에 일치한다고 보았다. 포스트모던 문학비평가인 들뢰즈는 탈 모더니즘의 패러다임으로 탈영토화라는 문학적 담론을 제시하였다. 그에 따르면 일반 독자는 혼돈에 대한 두려움으로 탈영토화를 원하지 않지만, 일탈이든 해방이든 자유든 간에 탈영토화는 잠재된 존재성을 활성화한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꿈의 핵심에 다다르는 문학적 사유는 영토화→탈영토화→재영토화라는 원리에 따른다고 보았다.   윤재천은 그의 《수필문학전집》권2 《명수필 바로알기》의 서문인 에서 “문화의 대홍수 사태에 침몰당하는 수필장르가 되지 않기 위해 퓨전수필, 접목수필, 해체수필, 마당수필, 수필적 다다이즘까지를 따라가는 수필문학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결단을 밝힌 바 있으며, 제3권의 발문인 에서는 시대적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21세기는 메타수필의 시대다.   서구를 휩쓸던 해체주의도 기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 흔들리며 새로움을 찾고 있다. 이것은 인간본성인 호기심에 의한 자연스러운 발상이며 현상이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우리 수필계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실험정신이다. (5쪽에서)     그렇다면 21세기의 수필문학은 어떤 방향을 가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행태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1. 테마수필     수필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삶과 표현 방식에 부응하는 문학이다. 개인은 보편적 삶 외에 개별적인 시공과 심적 층위를 지니고 살아간다. 수필작가는 삶과 자연과 우주에 대하여 나름의 인식과 개성을 보유한다. 현대문학이 강조하는 개성은 작가 자신의 테마를 설정하여 새로운 안목을 제시하는 문학적 속성이다. 윤재천의 말과 같이(오차숙, 《수필문학의 르네상스》, 문학관, 2007. 59쪽) “작가는 자신에게 맞는 테마를 정해서 천착하고,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는 말은 이를 뜻한다.   『현대수필』을 중심으로 한 그룹은 이런 테마수필의 경향이 농후하다. 예를 들면 조재은의 영화에세이, 오차숙의 성에세이, 이옥자의 풍자에세이, 남홍숙의 형이상학에세이, 김소희의 동물에세이, 김희수의 일러스트에세이, 김미자의 동수필 등이 그것이다.   박양근은 앞의 『수필학』16집(70쪽)에서 현대 독자는 구태의연한 소재에서 벗어나 전문적이고 세분화된 영역을 다루는 작품을 선호한다, 고 하면서 “독자 수용에서 보아도 테마와 소재의 차별성을 지니지 못하는 수필은 예술적 긴장감과 가독성을 저하시키며 사이버 공간에 익숙해진 독자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작가는 고유한 문학을 구축하는데 성실하여야 한다는 명제에서 볼 때 테마수필의 정립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다.     2. 퓨전수필     21세기는 학문과 예술의 경계가 차츰 무너진다. 문학과 영상, 문학과 미술이 만나는 테크놀로지의 통합이 확장되고 있다. 이런 추세에 문학이라고 예외일 수만은 없다. 하이브리드 문화의 탄생을 예고하는 퓨전화는 순종주의보다 이종배합이 문학의 지평을 보다 넓혀준다.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시적수필, 서사수필, 극적수필이라는 하부장르 외에도 바다수필, 의학수필, 음악수필, 건축수필, 철학수필, 자연수필, 원예수필 등 문화양식이 뒤섞인 테마수필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퓨전Fusion이 미래의 비전Future Vision을 의미하듯 “이종결합은 21세기의 문학의 키워드”(한상렬, , 『수필학』, 제13집, 2005. 291쪽) 그러나 미술과 음악에 비해 문학의 이종결합이 더딘 이유는 봇구적 문단의 경직성 때문일 것이다. 윤재천도 이에 대하여 “21세기의 문화적 특성에 다른 문화적 대응 방안”(윤재천, , 『수필학』제8집, 한국수필학회, 2001. 133쪽)으로 이미 제시한 바 있다. 퓨전은 문학 장르의 혼성 이외에 문학과 미술, 문학과 음악 나아가 인문학과 공학의 접목까지 확장되는 광의적 이종결합으로 나아간다.     3. 메타수필     메타문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양식으로서 사실주의 문학이 지닌 한계성을 극복하는 예술이론이면서 고답적인 형식에 대한 반동으로서 대두된 문학이다. 쉽게 풀이하면 어는 작품이 다른 작품보다 좋다면 그 근거를 밝히는 것이 메타비평이고 타인이나 자신의 작품에 대한 다시쓰기가 메타문학이다.(박양근, 앞의 『수필학』, 72쪽)   이에 대하여 윤재천은 《윤재천수필문학전집》( 제1권, 2008, 252쪽)에서 메타의 의미를 “메타는 시나 소설, 수필이나 비평에 대한 고정관념을 해체하거나 통합함으로써 새로운 정신적 질서에 걸맞은 문학의 한 양식을 낧기 위한 자연스러운 노력, 반성과 기대가 총체화되어 나타난 당의적 현상”으로 정의하고 있다.   수필은 체험의 문학임으로 메타문학을 “새로운 정신적 질서에 걸맞은 문학의 한 양식을 위한 반성과 기대”라는 윤재천의 언명을 보면 수필의 화자는 곧 작가임으로 삶 자체가 텍스트이고 이를 수필로 디시 쓰는 작업에 메타 글쓰기라는 해석이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소설적 허구가 아닌 상상은 수필쓰기에 불가피하고 메타수필은 픽션과 리얼리티 사이의 틈을 메우는 글쓰기가 된다는 게 박양근의 해석이다. 소설이나 시에서 메타픽션과 메타시가 본격적으로 발표되는 현상도 허구가 아니라 다시 글쓰기를 근거로 하듯이 텍스트에 대한 해체와 재구성을 도모하는 메타수필의 등장은 자연스럽다고 할 것이다.     4. 웰빙수필     수필작가의 양적팽창, 수필상의 남발, 수필평론의 야합 등 병리적 현상이 수필의 진정성을 해한다면 체험과 미적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웰빙수필은 사회에 대한 방부제의 역할을 할 것이다. 문학의 사회적 기능은 세대와 계층 간의 간극을 조정하고 정치 불신에 따른 사회 분위기를 순화시켜 현실문제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할 것이다. 그러므로 웰빙수필은 휴머니즘의 도래를 앞당기는 최적의 역할을 당당하게 할 것이다.l 이 점이 현실에 안주하려는 개인의 사익으로 회귀하려는 사수필과의 차이가 될 것이다.   5. 마당수필     마당놀이는 우리 전통의 열린 무대로 관객과 하나가 되는 화합의 장이다. 풍자와 해학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웃고 웃으며 관람하고 돌아가는 길에도 눈물나게 우스워 풍자를 통한 해학의 묘미를 제음미하곤 한다. (앞의 《윤재천 수필문학전집》 제1권, 324쪽)     윤재천은 에서 마당의 의미를 ‘열림과 나눔과 함께 함“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마당은 열린 공간으로 판소리와 탈춤이 열리는 공이다. 중요한 것은 배우와 관객이 혼연일체한다는 점이다. 수필의 대중성을 위한 공감대가 형상되는 공간으로서의 마당이다.            6. 隨畵에세이     상상과 환상에서만 존재하는 신화의 나라를 수화로 재현하려는 이른바 수필과 미술의만마남이 수화에세이이다. 2004년 9월 삼성갤러리에서 서초수필문학회와 분당수필문학회가 중심이 되어 개최한 회첩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윤재천의 취지가 담겨 있다.     『현대수필사에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기획수화전’을 준비했습니다. 혼자 꾸는 끔은 때론 허황될 수 있으나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되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또 다른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더불어 가는 길입니다. 육십 명이 넘는 수필작가의 작품과 열 분의 그림을 두 이미지로 포갰습니다. 이는 우리의 수필 사랑에서입니다. 인간과 연결된 모든 생태계의 작은 길이 에코브리지라면 수필과 맺어질 수 있는 다른 예술과의 에코브리지를 이번 수화전을 통해 설치한 것입니다. (윤재천, 《수필과 그림의 만남》, ECO-Bridge展-2004, 리임기획, 2004.9)     출처 :월간 국보문학/ 주간 한국문학신문 
463    수필의 허구문제를 알아보다(15) 댓글:  조회:2966  추천:0  2017-05-06
수필 쓰기의 벽                                                                                                     최원현 ... ... 만일에 제가 안내했던 그 길대로 따라오지 않으신 분이 계시면 저를 따라오신 분보다는 훨씬 힘이 드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몇 번 말씀 드렸듯이 수필 쓰기는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예를 하려는 사람이 처음부터 글씨부터 쓰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획 긋기 연습을 한 후에야 쉬운 글씨부터 쓰기 시작하는 것처럼 수필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지금까지 여러분이 느끼신 것은 어떻습니까. 수필 쓰기가 쉬워 보입니까, 어려워 보입니까? 또 실제 써 보니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또한 어렵다면 무엇이 어렵습니까? 틀림없이 어렵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수필 쓰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시나 소설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어려울까요? 그 까닭 알아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성 수필가들의 고백도 한결같이 수필을 쓰면 쓸수록 점점 어렵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걸 하나의 벽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산이라고 해도 좋고, 강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만 여하튼 수필 쓰기를 어렵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수필가요 평론가인 이유식 교수는 에서 몇 개의 벽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창작 과정에서 만나는 수필의 벽에서 첫째 신변잡기로의 위험성, 둘째 소논문이나 논설문으로의 위험성, 셋째 참신한 주제 찾기의 어려움, 넷째 허구 도입의 망설임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이유식 교수가 지적한 대로 우리가 수필 쓰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그런 벽 때문일까요? 한 번 이유식의 중 '창작과정에서 만나는 수필의 벽'을 보면서 강의를 이어가겠습니다. * 창작과정에서 만나는 수필의 벽 수필가들이 직접 수필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벽이라면 첫째가 신변잡기 식 경향으로 빠지기 쉬운 점과 소 논문이나 논설문 식으로 둔갑되기 쉬운 취약점이라 하겠다. 그 둘째의 벽은 참신한 주제를 찾는데 다른 어려움과 사실에만 충실하느냐 아니면 허구를 얼마쯤 도입해도 무방 하느냐에 따른 망설임일 것이다. ☞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수필은 신변에서 소재를 얻지만 신변잡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대부분의 수필을 써보려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으려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글로 옮겨놓을 수 있는 이야기조차도 처음부터 수필답게 써보려고 하다 보니 오히려 한 줄도, 아니 시작도 제대로 못 해보고 만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 신변잡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아주 쌈박한 주제를 찾아내겠다는 욕심을 내다보니 가장 잘 알고 그래서 만만하게 가장 잘 쓸 수 있는 것들을 버려 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필은 아주 특별한 소재, 아주 특별한 내용을 다루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노변한담' 같이 편안하게 읽힐 수 있는 글이 좋은 수필이 될 수 있습니다.  1. 경수필의 경우 - 신변잡기로의 위험성 수필을 관례대로 경수필과 중수필로 크게 분류해 놓고 보면 경수필의 경우는 소재론적 입장에서는 자연히 신변수필이나 생활수필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특히 신변수필을 쓰다보면 자칫 신변잡기에 빠질 위험성이 높다. 신변잡기란 문자 그대로 자기나 자기주변의 이야기를 단순히 늘어놓는 식이라 하겠는데 이런 수필은 의미성이 거의 없다.  신변수필이라고 해서 무조건 신변잡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체험이 고도의 예술적 여과를 거쳐 질서화 내지 의미화 된다면 거기서 우리는 인생의 어떤 보편적 진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감동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만큼 경수필을 쓰는 경우라면 신변수필이 신변잡기가 되지 않도록 각별한 조심과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 여기서 주의 할 것은 '신변수필 = 신변잡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 오히려 좋은 글감, 좋은 글을 놓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만의 체험인 소재에서 예술적 여과를 통해 철학적 또는 문학적 의미화를 가져오라는 것이지 그냥 신변사를 줄줄이 써놓기만 한다면 그건 문학이라 하기 어렵게 됩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수필 쓰기가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수필에 대한 기본지식이 부족하여 수필을 오해함으로써 갖게 되는 잘못된 접근 때문인 것입니다. '신변수필'과 '신변잡기'를 혼동하게 됨에 따라 소재의 빈곤을 겪게 되고 그래서 수필 쓰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2. 중수필의 경우 - 소 논문이나 논설문으로의 위험성 중수필을 쓰다보면 고도한 작법훈련이나 발상법이 없으면 무미건조한 소 논문 식이거나 논설문 식으로 끝날 위험이 높다. 이런 함정을 극복하려면 첫째로 소재를 수필의 제재(題材)에 과부족이 없는 '단소경박'(短所輕薄) 형을 찾아내는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만약 어느 누가 '장대중후'(長大重厚) 형의 제재를 가지고 글을 쓴다면 십중팔구 소 논문 식이거나 논설문 식으로 끝나기 마련일 것이다.그런 만큼 중수필의 제재라면 가령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역사학. 심리학. 생활과학. 민속학. 문화인류학. 철학. 윤리학 등의 인문과학과 나아가 자연과학의 연구대상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물에서 빠져 나온 사금(砂金)과 같은 제재가 가장 이상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제재에 대해서는 정면접근을 피하고 오히려 측면이나 후면접근을 하는 것이 수필적 접근이 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낙수'(落穗)요 '여적'(餘滴)의 성격으로 접근해야 된다는 뜻이다. 이런 형의 중수필에서 인생의 진실이나 어떤 이치를 깨닫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촌철살인(寸鐵殺人)적 수필다운 효과요, 그 멋과 맛이라 하겠다.  중수필이라고 해서 '장대중후'한 큰 창문 식 제재를 통해 인간사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단순경박'한 제재 즉 바늘구멍이나 열쇠구멍 또는 문구멍을 통해 인간사를 바라보는 것이 긴장과 짜릿함의 멋이 있다는 뜻이다. 또 이렇게 되어야 소 논문이나 논설문 식의 무미건조 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중수필의 집은 대형 간판이 거창하게 붙은 '불고기 집'이나 '불 갈비 집'이 아니라 골목 어귀에 있음직한 '꼬리 곰탕 집'이거나 '족발 집'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만약 여성의 남녀동등화 문제를 수필로 다룬다고 하자. '장대중후'한 제재를 피한다면 가령 여성의상을 통해서도 그런 주제를 얼마든지 형상화 할 수 있다. 아니 진정 '바늘구멍' 식 관찰이라면 의상에 부착된 단추나 지퍼의 위치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그런 해석을 도출해 낼 수 있다. 아시다시피 여권신장이 안 됐던 지난 시절에는 블라우스나 바지 그리고 스커트나 원피스의 단추나 지퍼가 불편스럽게도 뒤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복고풍이 아닌 이상 남자복식과 마찬가지로 그 위치가 모두 앞에 와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 ☞ 흔히들 중수필이라고 하면 논문식 글을 떠올리고, 또 무거운 주제이거나 양이 많아지면 중수필로 몰아 버리는 예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거야말로 '수필'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입니다. 위에서 예로 든 '여성의 남녀동등화' 같은 주제도 여성 의상의 단추나 지퍼의 위치만 다루어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곧 무거운 주제가 주어지면 내용도 무거워야 하고, 가벼운 주제이면 내용도 가벼워야 한다고 생각하다 보니 쉽고 편하게 풀어갈 방향을 놓쳐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수필은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엉킨 실 끝을 찾아내는 것처럼 접근해야 합니다.  첫 문장부터 독자가 보고 반할 정도로 써보겠다고 하거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너무 분명하게 전달 하려는 의지가 앞서면 결국 시작은 했다 하더라도 몇 문장 나아가지 못하고 막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3. 참신한 주제 찾기의 어려움 소재에서 주제를 찾아내건, 주제를 정하고 그에 알맞는 소재를 찾건 수필창작에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참신한 주제 찾기에 있다고 하겠다. 특히 경수필만 써 온 수필가라면 한두 권의 수필집을 내고 보면 소재나 주제의 고갈을 실감할 것이다. 비슷한 소재나 비슷한 주제에 스스로 싫증도 느낄 것이고, 때로는 참신한 주제가 없을까 많은 고심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발상법의 전환'이나 '착상법의 전환'이 필요할 것이다. 이 점은 수필창작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뒤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로 한다. ☞ 남이 찾아내지 못할 기발한 생각이나 소재를 찾아내면 기막힌 수필이 나오는 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밀가루'라는 재료로 우리는 열 가지도 넘는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본 것, 보이는 것 그대로만 보기 때문에 쓸거리를 이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하늘은 파랗다, 바닷물도 파랗다, 산의 나무들도 파랗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만일 그림으로 그린다면 그들은 하늘도 빨갛게 그리고, 나무도 노랗게 그릴 것입니다. 그들이 보았던 하늘 중 가장 강한 인상으로 남았던 저녁 노을진 하늘을 아이들은 그리는 것이고, 햇빛이 찬란하게 내리 쏟아지는 시간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나무를 본 강렬한 기억이 서슴없이 나무를 노랗게 그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필 쓰기가 어렵다고 느끼는 것도 보이는 대로 한 가지만 생각하고 보려하기 때문입니다. '발상법의 전환', '착상법의 전환'도 바로 이러한 바꿔 생각하기의 발전인 것입니다. 4. 허구도입(虛構導入)의 망설임 문제  수필가라면 때로 허구의 도입이 허용되는지 안 되는지 꽤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필평론에 있어서도 이미 이런 점은 공개적으로 쟁점화 된 바 있다. 구성화 하는 과정에서 사실은 사실 그대로여야 한다는 논리와 필요시엔 허구의 도입도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가 맞서 있다. 허구를 일체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논자들의 논리는 수필이 '체험의 문학'이요, '사실의 문학'인 만큼 어디까지나 체험이나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수필을 소설과 대비해서 본다면 우선 그 논리가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이 '허구의 문학'이라고 해서 일체의 어떤 사실이나 체험이 들어가서는 안 되고, 어디까지나 100% 허구이어야 한다고만 주장하면 그것은 개념적 정의에만 지나치게 속박시키는 폭력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필이 '사실의 문학'이라고 하여 허구가 조금이라도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도 '사실의 문학'이란 개념적 정의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경직된 논리라고 하겠다. 나는 무조건적인 허구의 도입은 인정하지 않지만 예술적 효과나 감동의 창출을 위해서라면 최소한의 부분적 허구는 인정해야 된다고 본다. 가령 한 편의 수필에 있어서 뼈대가 되는 사건이나 사실 자체를 허구화시켜 사실인 양 내보여서는 안 되겠지만 지엽적이거나 구성적 동기부여라면 허용되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을 수필가 이철호 씨가 '수필창작에 있어서의 구성과 그 전개'란 글에서 밝힌 바도 있는데 나도 상당부분 공감을 한 바 있다. 수필은 비록 '사실'에 충실한다 해도 100% 사실위주의 글이어야만 하는 일기문이나 르뽀르다쥬 그리고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만큼 '사실의 문학'이란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상 '선의의 거짓말'이란 말이 있듯이 '선의의 허구'는 용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필가는 사실의 충실한 기록자가 아니며, 단순한 작문가도 아니라 수필이라는 집을 창조적으로 지어내는 예술가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수필이 자기의 체험적 이야기라 하여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고 하니까 오히려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소설은 아예 '허구'라고 하여 출발을 하니가 그런 부담이 없지만 그렇다고 소설이 모두 '허구'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소설 또한 작가의 직.간접 체험을 바탕으로 씌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수필에서 너무 '허구'에 민감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수필은 자기의 이야기인데 자기의 이야기를 왜곡되게 쓰거나 또는 과장되게 쓴다면 결국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이며, 그것은 이미 수필로서의 품격을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위 이유식 교수의 글에서 ' 수필가는 사실의 충실한 기록자가 아니며, 단순한 작문가도 아니라 수필이라는 집을 창조적으로  지어내는 예술가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한 것처럼 수필도 창작문학이란 점을 인정할 때 창조적으로 집을 짓는데 풀향기를 내고 싶으면 흙속에 풀을 넣을 수도 있고, 색감을 넣을 수도 있는데 그걸 '허구'를 삽입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가 수필 쓰기에 들어가면서 진실하게 솔직하게 수필을 쓴다는 점만 있지 않는다면 이 또한 크게 문제될 성질의 것이라 아니라 생각됩니다. 이상에서 수필쓰기에 대하여 벽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몇 가지 살펴보았습니다. 처음엔 쉬워 보이다가도 막상 해 보려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처음엔 어려워 보이다가도  막상 해보면 할만한 것도 있습니다. 수필쓰기도 그렇습니다. 무엇이 어려운가,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첫 단추부터 끼워야 함에도 그 첫 단추를 무시하고 건너 뛰어서 두번째 내지 세번째 단추부터 끼우려 하니 잘 안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쉬운 것, 하찮은 것 같아 보이는 것이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것인데 우린 그걸 무시해 버리는 것이지요. 수필은 작은 것, 하찮아 보이는 것을 귀하고 아름답게 볼 수 있어야 좋은 수필을 쓸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눈, 그런 마음, 그런 생각이 쑥쑥 자라나길 바라겠습니다. 수필의 구성 요소와 참신한 주제 찾기 (2) 우리는 흔히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작품)을 쓸 수 있는가란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에 확실한 답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쓰는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기 마련이고, 또 같은 작품이라도 그 작품을 읽는 사람의 개인차에  따라서 평가도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쓴 글이 아무리 좋다고 하여도 읽는 사람이 좋다고 느끼지 못하면 결코 좋은 글이라고 할순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객관적일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거나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는 그런 작품을 우리는 좋은 글, 좋은 작품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필 쓰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쓰면 될까요?  수필은 너무 많은 이론에 매이다 보면 오히려 좋은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조건들이 구속의 요인이 된다면 그 글은 이미 순수한 의미에선 허구에 가담했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랜동안의 습작 또는 작품활동이라는 훈련을 거친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한 편의 글이 우러나오는 것은 그가 상당한 훈련을 통해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름의 경지를 이룩한 결과이며, 다른 사람들의 그러한 경험을 들으므로써 나의 작품 활동에도 큰 도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강의부턴 수필 쓰기에 직접 도움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런 1단계로 수필 쓰기를 어려워만 하지 않고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하여 먼저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수필의 구성 요소  수필은 형식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아니 '형식이 없는 것이 수필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형식이 없는 그 형식이 수필의 형식이라면 어려운 말이 될까요? 일 정한 틀이나 요건만 갖추면 그것이 좋고 나쁜 차이는 있을지언정 형식면에서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제반 문학장르들인데 비해 수필에선 그런 형식을 주장하지 않다보니 그러한 장르로 잘 구분이 되지 않는 모든 부류를 수필류에 포함 시키는 것 같아 준 문학장르처럼 느껴져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결코 수필이 형식이 없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형식을 중시하는 것이 수필일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수필의 구성요소를 중시합니다. 구성요소를 충족치 못하면 수필다운 수필이 이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필을 쓸 때 4가지의 구성요소를 말합니다. 바로 주제(主題)와 제재(題材)와 구성(構成)과 표현(表現/描寫)입니다. 즉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나타내려는 핵심적인 사상이나 중심적 의미인 主題, 그러한 사상이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선택하는 소재 또는 제재(題材), 이런 선택된 재료들을 치밀하게 얽어짜서 조화를 이루고 의미화 할 수 있게 하는 작업인 構成,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생명력 있게 작품으로 잘 드러날 수 있게 하는 알맞고 효과적인 표현인 描寫, 이러한 일련의 유기적 관련의 작업이 전혀 꾸밈 없이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이뤄져 한 편의 글로 완성 되었을 때 우린 좋은 글이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글을 있게 하는 주제와 소재는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2. 참신한 주제와 소재 찾기  1) 좋은 수필의 첫째 요건은 무엇보다도 문장이 솔직하고 소박하여 진솔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저 아름다운 말로 꾸미려만 하다보면 진실과 멀어지기 마련이고 독자의 가슴을 파고들지 못하는 허약한 내용, 겉치례로 넘치는 문장이 되어 진솔성을 저버리게 됩니다. 좋은 글, 좋은 수필이란 무엇보다도 독자를 감동 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글이 되는 표현 곧 문장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고,그 문장은 작자의 품격이 스며난 것으로서 아주 잘 익은 술처럼 은은한 향기로 작자의 사상과 감정이 넘쳐나게 하는 것입니다.  2)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참신한 주제와 소재 찾기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대개의 작가들이 가장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는 부분도 바로 이 부분입니다. 수필은 자기의 주장을 아주 강하게 말하는 것도, 또 너무 자세히 설명하는 것도, 그렇다고 자기 독백처럼 되어서도 아니되는 문학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특출하게 한다고 해서 너무 기발하거나 괴벽스러운 것도 참신성을 잃기는 마찬가지고, 너무 일상적이고 평범해도 그렇습니다. 결국 참신한 주제와 소재란 다른 사람은 겪지 못하는 나만의 독특한 체험일 것이고, 그것이 충격적으로 자신을 지배하는 것, 남보다 더 많은 생각과 주의 깊은 관찰 속에서 자기만의 것을 찾아낼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동일한 사건도 자기만의 눈, 자기만의 생각, 특유한 자기만의 체험이 될 수 있을 때 참신성이 돋보일 수 있으리라 생각되며, 이러한 참신성이야말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맛이요 멋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수필의 주제는 설득하거나 강요하는 식이 아니라 은근하게 시사만 해 주어서독자가 자기 수준에서 깨닫게 해주어야 하며, 적당히 여백의 여유를 주어야 여운으로 오래 남게 되는 것이라고들합니다. 이야말로 우리가 꼭 새기고 있어야 할 사항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수필 쓰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주제와 소재 찾기의 어려움이요, 또 찾아내는 그러한 주제와 소재가 진부한 것들이 아닌 참신한 것들이어야 한다는 부담이 수필 쓰기에 어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수필 쓰기의 제1 관건은 무엇에 대해 쓸 것인가와 무엇으로 쓸 것인가인데 그 또한 다른 사람들의 많은 작품을 접하면서 나름대로의 생각 넓히기, 생각 깊이하기, 색다르게 생각해 보기 등을 해야만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원고량이 정해지는 경우 같으면 더욱 힘이 듭니다. 그냥 길이에 구애됨이 없이 쓰는 글도 쉽지 않은데 원고 매수에 맞춰야 할 때는 내용을 대폭 늘리거나 줄여야 하는 이중고, 삼중고를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제목을 붙이는 것,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은 한 편의 글을 완성할 때 맞이하는 아주 큰 어려움이 되기도 합니다. 마지막 마무리 한 문장을 만들지 못해 몇 달을 퇴고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3. 주제와 소재를 얻게 되면 수필 쓰기에 들어가는데 이 때 가장 주의 할 일은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좋은 단어로만 나열하려 한다던가, 내가 읽었던 아주 아름다운 문장처럼 만들어봐야겠다는  욕심이 앞서면 벌써 진실하고 솔직한 글로 나아갈 길을 잃게 됩니다. 소박하게, 담백하게 얽어가서 시원함이 감돌고 그러면서도 이야기의 흐름이 감지되게 해야 좋습니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글에 지나친 화장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것도 같고, 안 한것도 같으면서 품위와 격조를 유지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것, 수필은 바로 그런 글입니다. 그러나 역시 그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원고 청탁을 받고 급하게 썼던 글이 한 편 있습니다. 그런데 원고량이 1천자로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초고에서 1,800자가 되었습니다. 다시 줄이니 1,400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더 줄여서 1,100자 정도로 만들어 보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없는 버리기를 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버리기는 버리되 버려도 내용은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주제, 소재, 구성, 표현을 살펴보며 집이 무너지지 않게 서까래를 몇 개 빼내는 작업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문제가 생깁니다. 조금 지나치게 너무 빼면 집이 무너져 버리는 것처럼, 너무 빼다 보면 처음에 내가 말하려 했던 핵심이 잘 나타나지 않아서 좋은 글이 되지 못하는 위험을 낳게 됩니다. 그 예는 다음 강의에서 직접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하나 글을 쓰려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꾸준한 습작과 수련입니다. 그 습작과 수련에 대해서 윤오영의 에서 제시한 내용을 중심으로 습작과 수련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강의 편의상 내용을 재구성합니다) * 습작과 수련(3) - 윤오영의 에서- 글은 거저 쓰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냥 한 편의 글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많은 글을 읽지도 않고 글을 쓰려는 것은 밑천도 들이지 않고 장사를 하려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읽어도 써 보지 아니하면 안고수비(眼高手卑)격이어서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목수(木手)나 석공이 되려면 먼저 끌 구멍을 파고 대패질을 하는 데, 징을 대고 망치질하는 데도 많은 수련을 쌓은 뒤라야 비로소 공예품이나 조각에 착수할 수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글을 쓰려면 우선 많은 습작과 수련을 하라는 것입니다. 등단을 하려면 시나 소설은 보통 2회의 추천이나 신인상으로 문단에 등장하게 됩니다. 추천제이건 신인상제이건 많은 수련을 거친 결과일 것입니다. 수필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필이라고 대번에 써서 될 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현재 수필다운 수필이 드문 이유의 하나입니다. 구양수는 단 다섯자를 쓰기 위해서 수십 매의 원고를 버렸고, 육방옹은 만 수천 수의 시를 쓴 시인이지만 8천 수가 넘은 뒤에야 남 앞에서 서슴지 않을 시를 쓸 수가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이태백이 쇠절구공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말을 듣고 다시 들어가 공부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지 않습니까? 천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투른 글을 빨리 발표할 일이 아닙니다. 자기의 글이 처음 활자화됐을 때의 기쁨은 큽니다. 그러나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는 수가 많습니다. 반드시 직업 문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문단인과의 교유, 문학단체에 참가함으로써 문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분투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고독의 길을 가고, 스스로 자기를 키워나가는 길입니다. 원래 수필은 고독의 소산입니다. 이것이 싫다면 정치나 사회활동을 할 일입니다. 그러면 수필이란 현실도피의 문학인가 하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야 참여문학일 수도 있고 비판, 투쟁, 혁명의 문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예란 기술이 필요하고, 기술이란 연마가 필요합니다. 연마를 하는 데에는 또 일정한 기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혼자 대성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보면 오히려 두각을 나타낼 기회를 놓치게 된다. 우선 한 자리 뚫고 앉아서 정진해야 한다고. 그 말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당선작가나 출세한 작가들이 그 후에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예가 많고, 기성 작가들도 얼마 안 가서 관록으로 한몫 보고 있는 예가 적지 않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당 나라 때 시인 최호는 황학루(黃鶴樓) 시 한 편으로 이백을 압도하고 당나라 시단의 제 일인자로 후세에 길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단 한 편이라도 걸작을 낼 수만 있다면 많이 발표하지 못한 것을 한할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 문학수필다운 수필이 별로 없는 것도 오로지 기초적인 수련의 과정을 밟지 아니했다는데 중대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도 수필이 다른 문학보다 수준이 낮다고 할 것이니 이것도 소설이나 시나 평론을 쓰는 문학가가 그 여세를 빌어 쓴 것 외에 전문가가 드물다는 데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초적 수련을 잘 하여 출발한다면 일약 웅비하여 수필문학의 개척자로서의 영광을 거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초심자들이 커다란 야망을 갖고 원대한 출발을 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글을 썼으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퇴고를 거듭해야 할 것입니다. 일사천리의 속필이 재주가 아닙니다. 한 자 한 자 쪼고 쪼아서 정밀하게 다듬어 나가야 합니다 또 방망이를 못 맞은 글이란 자기만족에 그치고 때를 벗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소설이나 시는 평론가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지만 수필은 평가하는 이가 드물기 때문에 항상 자기류에서 만족하고 만다는 것도 수필이 발전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친구나 선배의 비평을 듣기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칭찬하는 이가 있으면 두 번 다시 찾아갈 필요가 없지만, 결함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진심으로 고마워 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해서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헐뜯기는 것을 싫어하는 까닭에 이것이 항상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글의 결함을 밝혀 주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꾸준한 자기와의 싸움으로 수련을 하고, 자기의 결함을 지적해 주는 사람을 찾아 그 결함을 시정하며,  정진해 갈 때 한 편의 좋은 수필을 써 낼 수 있는 것입니다.    
462    수필의 허구문제를 알아보다(14) 댓글:  조회:2505  추천:0  2017-05-06
수필과 시의 관계는 수필과 시가 문학이라는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수필과 시는 우선 동질적인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시는 시로서 수필은 수필로서 각자 자기 특성을 지닌 독립된 장르이다. 이는 두 장르의 이질적인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시와 수필은 동질적이면서도 이질적인 관계에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를 수필처럼, 수필을 시처럼 쓰려는, 다시 말해서 두 장르의 표현상 한계가 모호해지고 있는 현상은 어디서 오는가. 이는 아무래도 두 장르의 동질성에 원인이 있겠고 또 다른 이유는 수필이 갖은 특성에 있다고 하겠다. 이에 대하여 차례로 살펴보고 두 장르의 이질적 관계에 대하여도 알아보자. 수필과 시의 동질성 이 두 장르가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하는 문학이란 원초적 동질성에 대하여는 재론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 두 장르는, 다른 문학 장르(소설, 희곡)가 허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비하여 상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두드러진 동질성이라 하겠다. 상상이나 허구는 각자의 체험에서 비롯된다. 직접 체험 중에서 대상이 없는 내적 체험을 ‘생각’이라고 하는데 생각 중에도 사건이 없는 생각을 ‘사색’이라하고 사건이 있는 생각을 ‘상상’이라 한다. 이때 상상으로만 이루어진 사건이 ‘허구’이다. 이 허구虛構를 바탕으로 하는 문학 장르가 소설과 희곡이요, 상상想像을 바탕으로 하는 문학 장르가 시와 수필이다. 흔히 수필은 현실을 바탕으로 그것만을 나타내면 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느 문학 치고 현실을 배제할 수는 없다. 시는 물론이요, 소설이나 희곡도 현실(작자의 체험)을 도외시 할 수는 없다. 사람은 자기의 체험(직접체험이든 간접 체험이든)으로 인식한 것(앎) 이외에는 상상도 할 수 없고 상상으로 인한 사건(허구)도 구성해 낼 수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어느 문학이든 현실(작자의 체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다만 수필은 교술 문학이므로 어느 문학 장르보다 현실성이 강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수필이 상상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현실만을 기록하는 것이라면 수필을 문학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나 수필가는 작품을 쓸 때 현실을 모사模寫하지는 않는다. 현실을 상상을 통하여 수정하고 재구성한다. 작자가 현실을 수정하고 재조정할 때 작가의 인생관, 세계관, 도덕관, 철학관이 작용하지만 상상력 개입이 가장 큰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나뭇가지에 참새들이 나란히 앉아 지저귀는 걸 보고, 「참새가 짹짹, 나뭇가지에서 짹짹, 아침에도 짹짹, 저녁에도 짹짹 울지요.」한다면 이는 현실의 모사일 뿐이다. 그러나「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고요, 저녁에 우는 새는 임이 그리워 울지요.」라고 한다면 새에게 물어 볼 수는 없었을 터이니 작자의 상상에 의한 글이므로 문학으로 생명을 갖게 된다. 수필도 이와 다르지 아니하다. 수필이 현실성이 강하다고 하여 상상을 배제한다면 문학으로서의 생명력을 잃게 된다. 「아들 내외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자를 내게 맡기고 미국으로 떠났다. 하던 공부를 마치려면 아직 2년은 더 미국에 머물러야 한다. 오늘이 손자의 생일이다. 제 어미가 보고 싶은지 녀석은 아침밥도 드는 둥 마는 둥하고 집을 나섰다. 저녁엔 케이크를 사다가 촛불을 켜고 생일 축하를 해 주었다 녀석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저도 제 친구의 생일에 그러는 걸 보아 은근히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윗글에서 밑줄 친 부분(상상)을 제외한다면 현실 이야기만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 되어 문학성이 없는 글이 되고 만다. 물론 문학성을 갖는다고 하여 훌륭한 작품이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다만, 글(詩든 수필이든)은 상상을 통함으로써 비로소 문학성을 갖는다는 걸 말했을 뿐이다. 이처럼 두 장르, 시와 수필은 상상을 통하여 문학으로 태어난다는 동질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상상이라는 마음의 작용은 시에만 적용되고 수필에서는 상상 작용 없이 현실만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오인하고 있기 때문에 상상을 통하여 시가 형성되면 상상과 관계없어 보이는 수필형식으로 표현하려는 경향이 이즘 들어 늘고 있다. 수필은 시와 달리 행行과 연聯의 배열이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이다. 이번엔 수필을 시처럼 쓰는 이유를 알아보자. 이는 수필의 특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수필의 특성 수필이 무형식의 문학이라는 어설픈 정의로 야기된 몇 가지 문제 중 하나가 수필을 시의 형태를 빌려 써도 무관하다는 그릇된 생각이다. 시의 형태란 행行과 연聯을 구분하여 운율을 맞추는 것을 이름인데 산문으로서의 수필은 그런 형식으로는 일관할 수 없다. 어느 한 대목을 그런 형식을 빌려 쓸 수는 있겠지만 글 전체를 시형을 빌려 쓴다면 산문으로서의 성격을 잃게 될 것이다. 때로 시적인 소설도 볼 수 있다. 이효석의 산이나 메밀꽃 필 무렵 같은 것은 시적 소설로 평가 받고 있다. 그것은 서술 방식이 시형詩形을 닮아서가 아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내용적인 문제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절語節별로 혹은 문장 단위로 행을 바꾸고 연을 만들어 마치 시를 쓰듯 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의 행行과 연聯은 운율을 맞추기 위한 것이므로 만일 수필을 본래 의미대로 행과 연에 맞춘다면 이는 산문으로서의 수필이 아니라 운문으로서의 시로 둔갑할 것이다. 그러니까 운율을 위한 행과 연이 아닌 단순히 읽거나 보기에 편하도록 혹은 필지의 멋(?)으로 수필을 시처럼 행과 연으로 나타냈다면 이는 시도 아니요, 수필도 아닌 잡문이란 평을 벗어날 수 없다. 더구나 산문을 시형에 맞추려면 문장을 생략하거나 축약해야 할 터인데 산문으로서의 수필은 생략된 문장이 아닌 완벽한 문장을 요구한다는 것을 인지하여야 한다. 수필과 시의 이질성 우선 시는 운문 문학이고 수필은 교술 문학이다. 시가 운율을 기본으로 하여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문학이라고 한다면 수필은 메시지를 통하여 가르치고 깨우쳐 인도引導하는 문학이다. 문학을 운문 문학과 산문 문학으로 나누던 아리스토텔레스의 2분법 이후에 명상록, 인생론 등 많은 명저가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명저(문학)는 시나 소설로 분류할 수 없었으므로 오랜 동안 문학자와 학자들이 숙고한 끝에 교술 문학을 설정하여 문학의 3분법시대를 열었다. 이 교술 문학이 오늘의 수필문학이다. 이 교술 문학은, 서정 문학이나 사사문학과 같이 독자들을 이해시키고 공감을 얻어 감명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메시지를 전달하여 독자로 하여금 그 메시지대로 행동하게 함으로써 비로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문학이다. 이것이 시와 수필의 다른 점이다. 수필의 성격이 이러하니 작가가 말하려는 생각과 감정을 오차誤差없이 독자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따라서 모호한 표현이나 개인 상징적인 언어, 과도한 생략과 비약은 용납되지 않는다. 따라서 수필에서는 시의 기법으로 즐겨 쓰는 상징적 표현, 은유, 대유, 생략, 비약 등은 극도로 제한되는 것은 물론이다. 결론 시와 수필은 상상想像을 바탕으로 하는 문학이란 동질성을 갖는다. 그러나 각자 다른 장르이므로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운문인 시가 산문인 수필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거나 산문인 수필이 운문인 시의 형식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장르의 전환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는 시다운, 수필은 수필다운 형식을 가져야 한다. 다른 장르의 형식을 섣불리 모방하면 잡문이란 평을 피할 수 없다.    
461    수필의 허구문제를 알아보다(13) 댓글:  조회:1924  추천:0  2017-05-05
상상과 허구 오덕렬   Ⅰ. 들어가며        에세이(수필)와 창작에세이(창작수필)의 개념 하나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수필계의 현실이다. 에세이는 태어날 때부터 비창작 일반산문문학이었고,창작에세이는 에세이에서 태어난 제3의 신종 창작 문학인 것을 말이다. 에세이는 몽테뉴가 시조요, 창작 · 창작적 에세이는 찰스 램의 「꿈속의 아이들」에 이르러 나타나게 되었다. 에세이는 비창작 문학이기 때문에 ‘상상과 허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창작에세이는 시문학에 속하기 때문에 그렇지가 않다. 여기서 말하는 시문학은 몰톤이 문학을 양대 산맥으로 분류한 시(창조적 문학)와 산문(토의적 문학) 중에서 전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창작문학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상과 허구’의 세계에 서 있는 것이다.    본고는 문학에서의 ‘상상과 허구’의 역할을 살펴보고, 그 둘의 관계를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Ⅱ. 상상과 허구   1. 문학적 상상력과 기억의 왜곡         우선 ‘상상(想像)’의 국어사전적 뜻을 살펴보자.      상상: ①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그려 봄.           ②  외부 자극에 의하지 않고 기억된 생각이나 새로운 심상을 떠올리는 일. 재생적 상상과 창조적 상상이 있다. (네이버국어사전)        문학이란 무엇인가? 김윤식 교수는 고등학교『문학』책에서 ‘문학은 언어 예술이다’라 하였고, 이상섭 교수는『국어』책 「문학의 구조」에서 ‘문학을 언어의 특수한 구조’라 했다. 이렇게 말한 것은 교육의 편의상 그렇게 정의했을 뿐이다. 
460    수필의 허구문제를 알아보다(12) 댓글:  조회:2550  추천:0  2017-05-05
    수필의 허구수용론과 그 한계에 관한 고찰                                                                                                                                   권 대 근    I. 서 론    1. 연구 목적     지금까지 수필문학을 정의해 온 진술들은 오늘날에 와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수필문학을 바르게 정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내리는 정의도 하나의 시도에 불과할 것이다. 문학 작품은 실제로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문학 작품 자체는 그대로 있지만 해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아직까지 수필문학에 대한 우리의 신념이 확고하지 못함으로부터 오는 수필의 경시 현상이다. 문단의 일부 귀족주의자들로부터 수필이 경시 받지 않기 위해서는 수필의 특질론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수필을 다른 장르와 구별하는 데 기준이 되어온 "수필은 사실을 기록하는 문학"이라고 규정한 데서 생기는 혼란과 반론을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다면, 수필을 문학성의 시비에서 따로 떼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수필가가 수필을 쓰는 행위는 분명 창작 행위다. 창작이라는 말에는 사실이 아닌 허구가 개입될 수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 말은 수필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논픽션이라는 수필문학의 고전적 특성과 정면으로 배치될 수 있는 문제고, 수필의 장르적 특성을 파괴할 수 있는 일이다. 파고 들면 들수록 딜레마에 빠진다고 해서 이미 많은 작가들이 수필을 창작할 때 허구를 수용하고 있는 현실을 덮어 둘 문제도 아니고, 무조건 수필을 사실의 기록이라고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대규는 수필의 개념을 분류적 정의에 의하여 규정하여 '수필은 내용을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지은이와 작품 속의 말하는 이가 일치하는) 제재 또는 주제 중심의 문학이라고 하여, 다른 문학 장르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수필의 정의를 차별적으로 내리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내린 어떤 정의보다 신뢰할 수 있는 정의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 탁월한 정의도 수필의 내용에 있어서 사실이어야 하는지 허구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유보하고 있다.    물론 지은이와 작품 속의 말하는 이가 일치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인칭 시점의 글이라는 것이지 사실과 허구의 한계를 분명히 해 주는 것은 아니다. 수필문학의 창작과 허구의 한계를 밝히려는 본 연구의 목적을 위해 필자는 조동일의 언급을 적시하지 않을 수 없다.   조동일은 " 수필은 실제로 있는 사실을 전달하며, 전달을 위해 허구나 비유를 사용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수필의 정의와 특성에 대한 조동일의 진술은 수필의 취약점인 상상적 측면을 보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수필의 정의적 특성을 확실히 규정하는 데 있어서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된다고 하겠다.   이는 현대수필의 창작에 있어서, 허구가 수용될 수 있다는 것으로 현대수필의 창작에 있어서 허구의 한계를 밝히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   본고는 선행 연구된 수필 창작의 허구수용론 비판을 바탕으로 해서 현역 수필작가들의 창작 후기를 통해 수필 창작 과정에 있어서 허구가 어느 선까지 나아가고 있는가를 알아보고, 수필의 본질과 문학적 특성을 함께 만족시키는 범위 내에서 수필의 허구적 상상과 그 표현의 한계를 나름대로 정해보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2. 연구사 검토     수필의 허구 가능성을 최초로 거론한 이는 수필가 정진권 씨로 알려져 있다. 1982년 계간지『수필공원』에 수필가 김시헌 씨가 '수필과 허구'라는 글을 발표함으로써 수필에 있어서 허구 문제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후 1989년 계간지 '한국수필'에 수필가 이철호 씨가 '수필 창작에 있어서의 구성의 전개'라는 글을 게재, 수필에 있어서 부분적으로 허구가 허용될 수 있다는 입장을 피력한 후, 한국체대 교수이자 수필가인 정진권 씨가 1989년 월간지 '수필문학'에 '수필문학의 허구성'을 발표하고 이어서 1990년 『수필문학』지에 '수필문학의 허구성 재론'이란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허구론 수용 논쟁을 불러왔다.    이러한 수필의 허구성에 동조하고 있는 이들이 속속 수필문학의 허구론이 수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논문으로 발표하고 있는데 ,수용론의 입장에 서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정진권,김열규,정주환,도창회 씨 등이다.    수필문학의 창조적 지평을 확장하는 한 방편으로 허구 수필의 이론을 정립 제시하는 데 대한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 찬반 양론이 엇갈려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문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체(작품)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론 정립의 과열 현상이 과연 수필문학의 발전에 이바지할 것인가는 좀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그러나 수필은 다른 문학과 달리 기존의 수필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특질론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로 비판을 받고 있고, 그러한 비판은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기 때문에, 허구 수용에 관한 문제는 반드시 정리되고 넘어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허구수필의 등장은 가뜩이나 난립된 수필이론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수필문학의 개념 정의에 또 하나의 어려움을 보태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서 많은 분들이 수필의 허구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고 있는 데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싶다.   1) 허구수용론에 대한 비판 주지하다시피 허구 수용론은 수필계의 공동 관심사의 하나로 대두되어 있는 채 선명한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수필에는 일체의 허구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체험론과 완전한 허구도 가능하다는 허구론이 대립되다가 90년대로 와서 수필의 허구 문제는 허구성 수용 차원에서 수필가들 사이에서 자주 논의되고 있다.    대체로 허구 문제의 입장은 세 가지 부류로 구분이 가능하다.    하나는 허구는 전혀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체험론' 다른 하나는 주체험을 제외한 지엽적인 표현에는 주제를 살리기 위해 부득이 창작적인 표현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절충론',그리고 주체험까지도 허구가 가능하다는 '허구론'이다.    먼저 수필에 있어서 허구가 완전하게 수용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정진권 씨의 허구 수용론과 도창회 씨의 동조론을 소개하면서 문제점은 없는지 진단해 보도록 하겠다.     정진권 씨가 수필에 있어서 허구가 완전히 수용될 수 있는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은 '수필도 문학이다'는 관점이다. 그는 문학의 본질을 중시하면서 문학은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의 기저에서 수필도 문학인 이상 문학 본질에서 예외일 수 없다고 한다. 문학은 여러 가지 다양한 인생의 반영이며, 그 인생은 실제의 인생과 똑 같지는 않으며, 작가가 그것을 보충하고 새로이 조직하는 한 그것들을 수정하고, 변형하고 새로이 조직하는 일 또는 그 결과는 허구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허구는 창조적 활동 내지 창조적 소산으로서 문학의 장르에 공통되는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문학이 사실의 묘사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다창조인 한, 허구 세계의 표출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수필도 문학이라 한다면 허구를 거부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전제 하에서 정진권 씨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허구로 수필을 쓸 수 있다고 보며, 그것은 수필을 쓰는 사람의 자유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진권 씨의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 적어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데 사실만의 기록으로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허구 없는 현실의 모사는 한낱 사실의 소개에 끝나지 않겠는가? 둘째, 허구는 막강한 창조의 힘인데, 이를 부정하고서 어떻게 창조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위의 가설을 통해 결론적으로 수필도 문학인 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행위 즉 허구는 수필 창작에 있어 과감히 수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씨는 '수필문학의 허구성 재론'이란 논단을 통해서 허구가 제한 받는 경우와 제한 받지 않는 경우를 예문을 통해 보여 주고 있는데, 글 속의 '나'와 그 글을 쓴 사람이 동일한 인물로 받아드려지는 수필에 "굳이 무제한의 허구를 왜 도입하려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허구 도입)이 자기가 그리는 하나의 세계(인물)를 창조하는 데 유용하다고 믿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그는 '수필이 어떤 문학인가'하는 본질의 문제는 도외시한다. 그의 이러한 답에는 수필 속의 '나'는 그 지은이와 동일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수필의 재래적 정의에 대한 믿음이 없다. 이는 "수필이란 선택된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씌어지는 일인칭 문학이다. 선택된 체험이란 그기에서 어떤 주제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제재를 말한다. 그리고 그 주제를 끌어내는 주체는 작가 자신 ,즉 '나'인 것이다."라는 수필의 전통적, 본질적 특성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입장인 것이다.    글 속의 '나'가 본인이든 아니든 일인칭은 독자가 글 속의 '나'를 그 지은이와 동일한 인물로 받아들이므로, 1인칭으로 수필을 쓰면 글 속의 '나'가 그 행동에 제한을 받기 때문에 허구적으로 3인칭 인물을 설정해 수필을 창작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까지 한다. 3인칭 수필을 통해 어떤 사람의 삶을 보다 창조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가 쓴 수필의 예를 들어보겠다.     예문1. 우리 아빠는 늘 아침 일곱 시면 집을 나가십니다. 회사에서 보내주는 파란 승용차를 타시고요. 참 이상한 일이어요. 차까지 있는 높은 분이 왜 매일 아침 일찍 나가셔야 하나요. // 어제 저녁 때의 일입니다. 엄마를 따라 큰댁엘 다녀오다가 아빠가 다니시는 회사 앞을 지나게 되었어요. "엄마, 우리 들어가서 아빠 좀 보고가" 나는 그냥 가자시는 엄마의 손을 끌고 수위실 앞으로 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저만치 떨어진 본관 현관 앞에 고급 승용차 한 대,그리고 그 뒤를 아빠가 따라 나오시는 게 보였습니다. 그 신사가 차에 오르는 동안, 아빠는 두 손을 마주 모으시고 연방 허리를 굽히셨습니다. 정진권 '나는 언제나 이렇게' 정씨는 상사 앞에서 굽신거리는 월급쟁이들을 볼 때, 비애를 느낀 일이 있어 한 어린이가 되어 봤다는 것이다. 물론 완전히 꾸민 글이다. 정진권 씨 자신이 비록 수필 속의 '나'는 그 지은이와 동일한 인물이어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해도 이 글을 읽는 독자는 글 속의 '나'를 정진권 씨로 여길 게 뻔하다 하겠다.    1인칭의 허구 수필은 독자와의 관계에서 벌써 도덕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독자가 글 속의 '나'와 필자를 동일시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허구의 나를 창조했기 때문에 본인(필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결국은 독자를 속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데 완전 허구는 문제가 있다.   예문2. 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은 소년은 뒤안으로 돌아가 그 굴뚝 옆에 섰었다. 어머니가 야속해서 눈물이 났다. 말없는 굴뚝을 바라 보며 소년은 누가 와 달래 주기를 바랬다. 그러면 할머니가 오셔셔 그 때묻은 치마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 소년은 다 자랐고 눈물을 잃어버렸다.      예문3 늦은가을의 산입니다. 억새가 서적서적 바람과 속삭입니다. 바위가 억새를 보고 말했습니다. "얘야, 좀 묵직해 보렴, 원, 그렇게 수다를 떨어서야" 도토리가 뚝 떨어져서 떼굴떼굴 구릅니다. 바위가 도토리에게도 말했습니다. "얘야, 좀 묵직해 보렴. 원 그렇게 가벼워서야" 바위는 수다 스러워서 걱정입니다. 도토리가 가볍게 돌아 다녀서 걱정입니다. 하지만 억새와 도토리는 그런 ㅡ바위가 싫습니다.     예문2, 3도 완전 허구화된 수필이다. 정씨는 1인칭을 3인칭화한 이유로 독자가 글 속의 '나'를 그 지은이와 동일한 인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했고, '나'의 행동에 제한을 주지 않으려고 3인칭의 인물을 설정해서 글쓴이가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보다 창조적으로 표현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여기서 과연 이런 허구 수필이 수필 문학의 창조적 지평을 확장하는 방법이 될까에 우선 의문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완전히 허구화된 수필은 첫째 수필의 본질적 특성을 거부하는 데서 이미 수필 밖으로 이탈해 있고,    둘째 독자와의 엄연한 약속을 알면서 일부러 어기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으며,    셋째, 꼭 사람의 어떤 면을 보다 창조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그릇을 굳이 수필의 본질과 특성을 무시하면서까지 수필 용기에 담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정진권 씨가 허구화 수필의 가능성을 보여 주기 위해 제시한 예문들은 전부 동화라는 그릇에 담아 얼마든지 창조적 문학 행위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넷째, 이런 허구화된 수필이 수필이란 이름으로 발표되면 수필의 고유한 특성은 사라지게 될 것이며, 다른 장르 특히 꽁트, 동화 소설 등과 같은 산문 문학과의 경계는 더욱 불분명해지기 때문에 완전 허구수필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정진권 씨 말고도 허구 수용론에 적극 찬동하고 있는 분은 『수필과 비평』지 주간을 맡고 있는 정주환 씨인데 정주환 씨의 허구에 대한 가설도 정진권 씨와 마찬가지로 문학의 속성에 그 기저를 두고 있다.    그는 허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문학 본래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현상이라고 단정한다. "모든 문학은 사실상 그 자체가 허구다. 창작이나 감상이냐를 막론하고 허구가 아니면 문학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상 그 자체가 허구이기 때문이다. 사실에 뿌리를 두고는 문학은 성립될 수 없다. 문학은 어디까지나 상상력의 소산이며 공상에 대한 현실화다. 문학인 수필에 있어서 허구가 배제된다면 그건 이미 문학임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왜냐하면 문학은 속성상 어떠한 경우에도 픽션 즉 허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은 허구이고 수필은 사실이어야 한다는 논리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그는 수필이 엄연히 문학인 이상 수필의 허구 수용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며, 수필을 별도로 분류해서 '문학의 본질' 밖에 두려는 데서 수필이 문학의 서자 취급을 받는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문학 일반론적인 논리로 과연 수필의 진솔성과 고백성이란 장르적 특성을 파괴할 필요가 있을까? 무제한의 허구로 수필 장르의 본질과 특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에 의문이 든다.    필자는 이 시점에서 수필문학이 다른 장르처럼 이론 난립으로 '이것이다' 라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을 안타깝게 여긴다. 80년대를 넘어 90년대로 접어 들면서 수필의 개념도 어느 정도 정립되어 가는 마당에서 대뜸 완전한 허구 수필의 수용을 들고 나오는 것은 몇 가지 측면에서 수필의 영역 확장보다 수필장르의 고유성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된다.      따라서 필자는 정주환 씨가 문학 일반론적인 접근을 통해서 수필에 있어서 허구를 주장하는 데 대해 반론을 펴보기로 한다.   첫째, 사실에 뿌리를 두고는 문학은 성립할 수 없다고 하는데 포스네트는 문학의 본질을 '사실보다는 상상이며, 효율성보다는 쾌락, 전문적 지식보다는 보편적 진리'라 하였다. 실용문이냐 예술(문학)이냐의 차이는 그대로의 이야기냐 아니면 프리즘에 통과된 새롭게 탄생된 이야기냐에 있다. 거의 모든 문예창작물은 작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제작된다. 이 실제적 체험에 상상력의 수확인 픽션이 조합되어서 마치 직조물의 씨줄과 날줄처럼 사실성과 허구성이 교차하는 이중 구조로 짜여지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개성적 성격의 문학인 수필에 있어서는 상상력의 범주가 공동체적 삶의 동일성에만 걸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상상력은 곧 허구라는 등식을 내세워 문학은 허구여야 한다는 논리도 너무 비약된 것이 아닌가? 김시헌은 허구가 아닌 체험 그대로를 수필화할 때도 창작적 상상은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일부를 주제에 맞게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에 뿌리를 두고는 문학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은 허구 수필의 수용론의 근거를 위한 비약된 논리인 것이다.    둘째, 문학 본질적 속성을 토대로 수필 고유의 본질과 속성을 무시하는 것은 마치 운문에 있어서 시조가 갖는 고유한 율격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허구 수필의 수용 불가는 결국 문학을 모르는 소치라는데, 크게 예술은 예술의 본령을 가지고 있고 그 속의 문학은 문학으로서 본질이 있고, 문학 장르 속의 수필은 수필대로 시는 시대로 시조는 시조대로 나름의 독특한 속성을 갖고 있다. 그 속성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수필이 예술의 본령에서 또는 문학적 본질에 벗어나지 않아야 될 것이다. 수필은 필자의 체험을 직접 문학적 상상력으로 표현하는 것이 수필의 본질적 속성이다. 그것은 작자가 일상 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사물일 수도, 경험일 수도, 작자의 사고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관념적 실체일 수도 있다. 다만 수필에는 작가의 개성적 내면 세계가 드러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완전 허구화된 수필을 장르 불명의 문학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수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필은 수필의 속성과 문학의 본질이 서로 군형을 이룰 때 성립 가능하다 할 수 있다고 보겠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것은 문학의 본령을 이탈한 것이기 때문에 문학이 될 수 없고, 체험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완전한 허구로 창작된 '나'가 그려내는 글은 이미 수필의 본령을 이탈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수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문학의 본질을 갖고 있다고 해서 수필의 속성과 본질 밖에 있는 글을 수필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도창회는 수필은 허구가 수용될 수 없는 자기 고백의 글이라는 단정에 대해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는 1989년 {수필문학} 7월호에 수필은 1인칭으로 써야 하는가'란 논고를 통해서 '문학의 모든 장르에서 오로지 ,수필만을 자기고백적 문학이라고 하는 논리는 당치 않으며 마치 그것 때문에 수필이 독자적인 것처럼 이유를 붙이는 것은 유치한 설명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도창회는 영미수필을 중심으로 한 연구를 통해서 수필이 일인칭이어야 하고, 비허구라야 하는 주장에 반대하며 수필에 있어서 허구니 비허구 하는 것은 문학적 본질과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주관 객관 양면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창작의 세계일 것이요, 주관과 객관 두 개의 상관 관계에서 어느 쪽을 강조하든 그것은 작가의 자유라고 강조한다. 그 역시 수필이 문학임을 내세워 수필이 수필다운 수필이 되려면 허구, 비허구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문학적으로 창조되었는가 즉 수필이 얼마나 문학적 본질을 갖추느냐에 그 관건이 달려 있다고 보고 있다. 허구든 비허구든 수필이 미적 재생내지 승화없이 쓰여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들어 수필문학의 쟁점이 되고 있는 허구론의 수용 논의에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3. 연구 방법과 범위      수필은 사실 개념으로 정의할 수도 있고 가치 개념으로도 정의할 수도 있다. 사실 개념으로 정의할 때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수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단 모두 수필의 범위 안에 포함된다.    그러나 가치 개념으로서 정의할 때는 오직 수필다운 수필만이 수필로 인정된다. 이는 양적으로 팽창한 현대 수필에 대한 비판적 견해로서 문학수필과 비문학수필을 구분한 개념적 정의로서 많이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수필에 대한 정의는 수필의 정체를 말해 주기에는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 여기에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지는 수필의 성격 및 기능과 효용, 그리고 그 영역이 밝혀짐으로써 수필의 본질은 더욱 구체화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수필가들이 수필 창작 과정에서의 진실을 여기나 창작 후기 형태로 남겨 놓기는커녕, 함구하고 있기 때문에 수필의 본질과 특성을 규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오늘날 우리 수필문학의 쟁점이 되고 있는 허구 수용 가능성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함과 동시에 기존 수필작가들의 수필 창작시 허구 도입의 사례 분석을 통해 대안을 제시하고 허구 수용의 한계를 규정해 보고자 한다.      II. 본 론   1. 수필의 본질과 허구와 관계     수필의 허구론 수용에 앞서 '수필이란 어떤 문학인가' 하는 그 본질을 규명해 보는 것이 필요하리라 본다. 동서양의 전래된 수필관에 따르면 수필은 작가 자신이 주체가 되어 그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자유스럽게 풀어 나가는 글로 그 수필의 바탕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진실''사실''체험''경험'임이 익히 알려져 있다.    이러한 초기 수필관 외에도 수필의 본질에 대해 언급한 정의는 많다. 이태준은 수필을 필자의 심적 나상이라고 했고, 김광섭은 수필은 다른 문학보다도 더 개성적이며 심경적이고 경험적이다 했으며, 김진섭은 수필에 있어서 중요한 특징이 되는 것은 숨김없이 자기를 말하는 것이라 했다. 일본의 한 작가는 에세이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건은 필자가 자기 자신의 개인적 인격적인 색채를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데에 있다고 했다. 윤오영 역시 '좋은 수필은 독자의 앞에서 자기를 말없이 부각시킨다. 수필의 대상은 자기다, 결국 수필은 외로운 독백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수필의 개념과 본질이 확연히 드러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필의 영역 확대와 창조적 지평을 확대한다는 측면에서 수필에 대한 기존 인식-수필은 허구일 수 없다-을 타파하는 완전한 허구 수필의 수용은 시기상조를 넘어 문제라 할 수 있다.    수필도 문학인만큼 문학 본질을 외면할 수 없다는 논리로 수필이 허구여도 된다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문학이 그리는 세계가 무조건 허구여야 한다는 논리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수필 창작에 있어서 허구의 수용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허구냐 비허구냐의 판별에 어려움이 따르는 데서 생겨나고 있는 현상이다. 그렇다고 문제가 이렇게 비화되고 있는데 허구의 수용 문제를 작가 개인에게 맡겨두고 그냥 묻어 둘 수 있는 것인가? 허구수용론자들은 수필 창작의 지평을 확대하는 측면에서 허구의 도입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나'를 문학화하는 문학적 특성을 갖고 있는 수필의 고전적 전통적 본질을 붕괴시킴으로써 야기되는 문제를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무리 문학의 본질이 허구에 있다고 해도, 수필에 있어서의 허구론 수용은 수필문학의 생명과 관련되는 중대한 문제인만큼 섣불리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다. 뿐만 아니라 허구성의 수용 과제는 기존 수필관을 떠나서도 문제를 안고 있는데, 독자가 허구적 수필을 읽고 얼마나 감동을 받겠느냐는 것이다.    수필이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글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독자들이 허구 수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은 문학의 생명이랄 수 있는 감동의 창출 문제와 결부된다 하겠다. 수필이 여타 문학 장르와 다른 점은 작가의 '진실'을 작품 속에 담음으로써 수필 나름의 변별성, 고유성, 독자성을 지닌다는 데 있다. 문학장르가 다 마찬가지겠지만, 수필은 특히 감동을 생명으로 한다. 허구 수필을 읽고 독자가 감명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 열도를 울음 바다로 만들었다는 구리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이란 작품이 그토록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감동을 자아내게 한 것은 그 글이 실화라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중에 창작된 동화라는 것으로 밝혀지자,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면 괜히 울었잖아'하고 투덜댔다고 하는 일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허구의 수용론은 하나의 실험 이론으로서 연구할 과제이지, 현실적으로 당장 수용하기에는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된다.    수필의 '나'와 지은이를 독자들이 동일시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조작되고 창조된 '나'에 대한 아무런 설명 없이 '수필'이란 글로 발표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허구의 수용으로 창작된 허구수필이 수필 문학으로 인정받고 싶다면, 여기에는 무슨 대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정립된 이론으로도 수필문학의 개념이 모호해 비수필 수필을 구별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는데 여기에다 다시 허구수필까지 나타나면 수필은 독자성을 잃음과 동시에 문학 장르로서의 특성을 버리게 되는 것은 뻔한 것이다.    수필가 김시헌 씨가 1990년 {수필문학}지에 발표한 '허구와 체험사이'란 글에서 허구수필이 가져 올 수 있는 혼란을 독자와의 관계에서 잘 지적해 놓았는데 여기 소개하겠다.   '맹장염에 안 걸려 본 사람이 맹장염으로 병원에 일 주일 동안 입원한 이야기를 소장하게 상상으로 썼다고 하자', 그 수필을 읽어 본 친구가 어느 날 길거리에서 만나 "자네 맹장염으로 앓았더군 입원 중에 문병도 못 가고…" 하고 인사말을 건네 왔을 때, 필자는 무슨 말로 대답할 것인가 "그건 수필이 아닌가?"로 통할 수 있을까?' 위의 인용문은 허구 수필의 해독을 잘 지적해 놓은 글이라 할 수 있다.     허구를 본질로 하고 그 허구 세계를 창조적으로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수필 말고도 많은데 꼭 허구를 수필의 그릇에 담아 보겠다는 발상은 기발하지만 문제가 많다는 것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수필가들이 그렇게 알고 있고 많은 평론가들이 수필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쓰여지는 글이라고 규명해 놓은 이상, 수필의 구성과 표현에 있어서 체험의 주제화를 미적으로 또는 문학적으로 승화, 형상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작품 속에 창조적 상상력을 약간 빌려 오는 것은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독자와의 공감성 확보를 위해 작품 안의 '나'의 주관을 객관으로 지향시킬 필요 하에서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허구성의 불가피한 수용도 수필을 문학으로 만들기 위한 부득이한 기교로써의 역할에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수필관을 피력하고 있는 사람들로는 정목일, 김시헌, 이유식, 강석호, 황정환 등이다. 1) '사실'과 '허구의 사이 수필의 집필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사실'과 '허구'다. 양주동은 에서 "소설이 주로 꾸며 낸 이야기로써 만들어지는 데 대하여, 수필은 필자 자신의 진심 그대로 아무런 가작된 스토리를 빌리지 않고, 표현되는 것이므로, 항상 주관적이요, 개인적이다. 그러나 어떠한 자기 이야기를 더 효과 있게 표현하기 위하여, 하나의 스토리를 꾸며서 그것으로 자기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의 스토리는 어디까지나 자기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차용된 것이다." 윗 글의 요지는 '사실'은 왜곡될 수 없으나, '진실'은 작품을 위하여, 감동을 위하여 꾸어 올 수도 있음을 말하였다.  수필에서는 사진사의 기법보다 화가의 기법이 허용된다는 내용이다.    김소운은 수필 창작에 있어서 허구가 개입될 소지가 많다는 것을 더 적극적으로 암시하면서 일본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글을 인용한다. " '진실'이란 말은 반드시 '사실 그대로'란 뜻은 아니다. 사실만을 나열한다고 해서 그것이 문장을 이루는 것은 아니요, 하물며 문학이 되는 것도 아닌 것은 재언할 필요도 없다. 예술의 방법에는 크게 나눠서 두 길이 있다. 진실을 진실 그대로의 위치에 두고 정시하고 추구하려는 방법과, 허구의 유리 그릇 너머로 왜곡된 가상을 통해서 하나의 진실을 발굴하려는 방법, 외국문학에서 그런 예를 든다면, 톨스토이나 플로베르는 그 전자요,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같은 것은 그 후자에 속한다." -김소운 : ,진실과 허구 사이>-    그러나 '사실'과 '허구'는 물과 기름이다. 어디까지나 수필은 '사실'에 호적을 둔 것이지, 소설이나 희곡이 허구를 단골 메뉴로 하는 것과는 다르다. 만일 수필을 철두철미 허구로 썼다면, 그것은 몽유병자의 잠꼬대거나 백일몽의 기록일 것이다. 윗 글이 지적한 '허구의 부분 긍정론'도 수필과 소설에서 문학적 특성상 최소한도로 허용되어야 한다는 말이지, 전적 긍정론은 아니다. 그 '최소한도'의 범위야말로 수필에서의 '허구'에 대한 면죄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칼로 무 베듯 내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들의 실제 창작 경험에 비추어 다음 사항 정도로 허구의 한계를 유추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2) 수필창작과 허구성 도입      수필은 단순히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창작의 소산이다. 우리는 수필을 읽고, 그 자체에서 허구성의 증거를 찾기는 대단히 어렵다. 수필 창작시 허구가 개입된다는 것은 수필이 반드시 사실의 기록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수필문학의 허구성을 직접 증명하는 일은 못 되지만, 수필이 사실의 기록이라는 선입견을 불식시키는 데는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된다.    수필가들이 수필 창작시 허구를 부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이다. 제아무리 수필문학에 허구가 없다고 주장한다 해도 수필가들은 작품 제작 과정에서 허구를 동원하게 된다. 왜냐 하면 독자들의 진실된 영혼을 흔들어 더 큰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허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필에서 허구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주장은 수필이 문학임을 부인하는 행위와 전혀 다름이 없다. 수필을 논픽션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을 바탕으로 쓴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실은 무엇인가. '사실'을 만일 '실제로 존재했던 것', 또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로 한정해서 생각한다면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 그들의 '존재' 또는 '사건'은 그 자체로서는 사람이 시각이나 청각 그 밖의 다른 지각을 통해서 직접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외적인 착각이나 고의의 왜곡이 없는 한 둥근 것은 누구의 눈에도 둥글고, 어떤 여자가 울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예외일 수 없는 사실일 터이다. 그들의 '존재' '사건'이 갖는 '물질성' '사실성'은 어느 누구도 이를 침범하거나 바꿀 수가 없으며, 그것은 만인에게 공통의 객관적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실'만을 오로지 기술하고 사생한다고 하면 사유는 그다지 복잡할 리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실은 그 같은 지각적 사실만은 아니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는 '존재' '사건'과 같이 단순한 물질적 도는 물리적 사실에는 들지 않는, 인간의 '심리적' 사실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때, 어떤 일에 대해서, 혹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꼈는가 하는 인간의 '심리적' 사실은 '존재'나 '사건'과 같이 지각적, 객관적 인식의 대상은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쓰는 사람이 상상력으로써 파악하고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거기에는 앞서 사실간의 관계의 경우에도 불구하고 쓰는 사람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까지 오면, 체험을 직접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을 수필로 볼 때, '사실을 쓴다'는 것은 주관적 판단이란 상상력 즉 허구성이 자연적으로 개입되는 것이다. '사실을 쓴다'고 하지만 설사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쓴다'고 하는 이상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그 사실에 대한 '의미부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대상이 단순한 지각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쓴다'는 것은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 혹은 사실이 갖는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다.    자기 체험을 솔직하게 적는 것을 전제로 하는 수필의 경우도 작가의 사실해석, 의미부여, 즉 작가의 사상이 필요하며 그런 의미에서 다른 문학 장르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수필은 일차적 소재 즉 대상이 창작에 속하지 않는 실제적 사실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며, 그 재료로 전달하고자 하는 사상을 더 진실되게 그려내기 위해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창작적 상상 즉 허구성이 자연적으로 도입된다고 하겠다.    다만 수필가들의 제작체험이 별로 공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수필의 창작에 허구가 도입된다는 창작의 비밀이 공개되는 것을 꺼리는 것은 허구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결과라 하겠다. 몇몇 수필가의 수필 또는 경험을 토대로 수필창작상 도입되는 허구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김소운의 경우 " 내 글에도 허구 아닌 허구가 얼굴을 내밀 때가 있다. 그런 예의 하나가 여기 붙여 둔 란 짧은 글이다. (중략) 주인공인 H는 실상은 일본인이요, 하숙 살이 하는 그의 친구도 역시 일본인이다. (중략) '주먹으로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다'는 대문에도 픽션이 있다. 싶었던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그와 같이 나오는 길에 나는 을지로3가 근처 큰길에서 주먹으로 한 대 후려갈겼다. (중략) 어느 여성지가 '증오를 느낀 순간'을 쓰라고 해서 이런 글을 쓴 것이지만, H를 일본인이라고 밝히면 사연은 복잡해지고 글의 초점은 흐려져 버린다. 무위도식의 식객에게 전화를 걸어서까지 식사를 알려 주는 그런 가정은 아마 우리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우리라. '꽤나 살림이 넉넉하다는 친척댁'이면 혹시 그런 친절도 있고 전화도 있으리라고 해서 이런 사족이 붙은 것이요, H가 식객 노릇으로 붙어사는 그 일본인 집은 사실은 친척도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아는 이의 가정이었다."   2) 차배근의 경우 " 이것은 내가 대학교 4학년이던 1965년 동아일보 에 라는 제목을 게재한 것이었다. 소재는 나의 군대 생활에서 얻었다. 이것이 신문에 난 후, 독자들로부터 백여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정말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남편을 일선에 보낸 젊은 주부들한테서 오는 동병상련의 정을 담은 편지가 많았다. 이들이 만약 내가 더벅머리 소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기절초풍을 했을 것이다. (중략) 그런데 여기서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수필의 허구성 문제이다. 수필이란 자기의 감정과 소감을 붓 가는 대로 담백하게 적어 내려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런 수필이 있느냐가 문제이다. 내 좁은 소견으로는, 수필이 일기와 다른 것은 그 허구성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3) 정진권의 경우 " 저자는 물론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안타까워한 일이 있다. 성냥개비로 귀를 후비며 시원해하다가 그만 그 성냥개비를 부러뜨린 일도 있다. 그리고, 귀후비개로 귀를 후비면서 퍽 시원해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다른 날에 겪었던 별개의 체험들이었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의 무능을 탓했다든지, 부러진 성냥개비를 욕했다든지, 귀후비개의 공로를 찬양했다든지, 반성하는 자세로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내던진 성냥개비를 주워다가 성냥갑에 넣었다든지 하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저자는 그렇게 해 본 일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꾸며야 했던 것일까? 저자는 위에 말한 세 가지의 따로 노는 체험들이 버리기 아까웠다. 그래서 이들 사이에 필연이라는 관계를 부여했다. 그 결과, 아무 관계도 없이 따로 놀던 세 개의 체험들이 '손가락 - 성냥개비 - 귀후비개'의 관계로 짜이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를 짜는 과정에서 '새끼손가락의 무능을 탓하는 일', '성냥개비를 욕하는 일', '귀후비개의 공로를 찬양하는 일'이 재료로서 필요했던 것이다."   4) 권대근의 경우 " 수필 는 부분적으로 허구가 삽입된 글이다. 수필의 첫 문장인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도 사실상 그날의 기상과 다르다. 비가 오지 않았다. 이는 아내가 아들을 낳길 바라는 필자의 기대가 어긋난다는 암시적 기능이랄까, 예보적 기능으로 이상기후를 재료로 차용했다. 아내가 딸을 분만하고 난 다음 '김남조의 시 한 연이 생각났다'고 하며 시의 한 연을 적어 놓은 것이나, 회남자의 인간훈에 나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고 적은 대목도 전부 사실이 아니다. 예상 밖의 결과에 담담해 하는 필자의 심정을 부각시키기 위해 상상력을 빌려 왔던 것이다. '허허로운 환상에서 깨어나 하늘을 보니 흰구름 떠 가는 게 한없이 평화롭다. 햇살이 화사하게 퍼져 흐르는 가운데 향기로운 솔잎 내음이 코 끝에 머문다.'는 표현도 퇴원하는 날의 기상 상태와는 다르다. 하늘에 흰구름도, 보지 못했고, 솔잎 내음도 맡지 못했다. 딸을 낳고 무력감에 빠져 우울해진 아내의 기분을 생각하여 남편의 마음을 윤색하였던 것이다."   5) 장재성의 경우 "허구가 많이 끼었다. 소설적 구성으로 하자니 대사가 없을 수 없었고, 그 대사는 거개가 개연성의 것이다. 곧 마지막 달래보는 '남편의 애절'은 10년 가까이 독신으로 지낸 그 '고난'과 조응시키기 위함이다. "한 여인이 짓밟아버린 어느 비운"- 그를 강조함으로써 여승에의 증오심에 불을 당기려는 저의를 깔아 보았다고나 할까. 이 작품에 '허구'를 제외한다면, 그건 완전 낭패일게다. '고백적 수필'과 '단편적 수필' -이 둘은 아예 출발부터 다르게 보아야 할 듯 하다. 앞엣것은 '사실의 전달'에, 뒤엣것은 '감화적 전달'에 과녁이 모아져야 할 성싶다.   6) 오창익의 경우 "참고로 필자의 작품 '걸객'이 완성될 때까지의 구성의 각도를 예로 든다. '걸객'은 참새를 소재로 한 15매 내외의 수필이다. 구도를 두 번 바꾸어 완성한 작품이다. 편의상 썼다 버린 첫 번째를 로 하고, 나중 것을 로 한다. 에서 참새를 거지로 의인화 하고, 참새를 '소심한 인간상'으로 비유하여 종결구에서 '선심'을 관조해 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구성의 각도를 바꾼 것이다. 에서 거지를 '걸객'으로 승격시키고, 소심한 인간상이 아니라 탯자리를 지키려는 '수구정신'으로 관조하여, 의 종결구인 "먹이를 주리라. 마당 한 귀퉁이에 눈을 쓸고, 오늘만은 내 쌀 한 줌을 뿌려주리라." 대신, "오늘만은 눈이 쌓여 오갈 데가 없는 오늘만은 제발 바닥까지 싹싹 핥아 빈 그릇을 내놓는 일이 없기를 빌어주자, 빌어주자."라 했다. '실향의 아픔'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산을 높이기 위해서는 반대로 그 산의 골짜기를 더 깊이 팔 수도 있다는 역리적 구성법이다."   2. 허구수용과 표현의 한계     수필에 허구가 수용되고 있다는 것은 위의 예에서 이미 증명된 바 있다. 문학 작품은 작가의 정신 작용에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문학장르와 비교해, 사실적인 체험이나 생각이 작품의 기저를 이룬다는 것이다. 허구란 논리에서 말하는 것과 오류와는 다르다. 다시 말해 허구를 거짓이란 말과 동일 개념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거짓이 남을 속이려고 꾸미는 말이라면, 수필 창작에서 말하는 허구는 일종의 상상력인 것이다. 이는 화장에 비유하면 더 쉽게 이해된다. 얼굴에 있는 점을 감추기 위해 하는 화장이 여인의 화장이라면, 수필의 화장은 얼굴에 있는 점을 더 잘 보이게 하는 화장이 수필의 화장이다. 그러니까 수필의 허구는 감추고 속이려고 하는 허구가 아니라 보다 더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더 감동하도록 하기 위해 동원되는 기교상의 장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수필 창작시의 허구성은 다음 네 가지 면에서 부분적으로 문학적 효과를 위해 쓰여질 수 있다. 물론 허구 수용은 개연성을 생명으로 하는 만큼 리얼리티의 인상을 주도록 해야 한다.    위의 차배근의 예는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수필로 볼 수 있지만 자신의 군대 생활을 통해서 얻은 소재로 '자신이 남편을 군대에 보낸 젊은 아내'가 되어 쓴 창작수필이기 때문에 수필로 인정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고 하겠다. 일단 수필의 본질 즉 일차적 재료는 '사실을 쓴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실의 발견과 의미 부여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창작적 상상 즉 허구성도 무제한적으로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의 경우에 한정된다고 보겠다.   1) 주제의 효과      화제나 종속제재 일부 주제의 효과적 전달을 위해 소재나 화제의 일부분을 변용할 수가 있을 것이다. 김소운의 란 수필에 대한 김소운 자신의 술회를 토대로, 일본인 아무개라는 실재 인물에서 국적을 떼어 냈다는 점에서 1)번의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렇게 한 이유를 김소운은 "H를 일본인이라고 하면, 사연은 복잡해지고, 글의 초점이 흐려지기"때문이라고 하고, 그래서 "불필요한 가지를 추려 버렸다"고 자신의 작법을 밝혔다.  이는 주제를 살리기 위하여 재료(체험)를 수정하는 수법이다.   2) 예술적 구성      부분적 삽입이나 보충 예술적 구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적으로 재료를 삽입하거나 보충할 수가 있다. 정진권의 수필 는 서로 다른 날에 겪었던 별개의 체험들을 버리기 아까워서 이들 사이에 필연의 관계를 부여하고, 세 개의 체험들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새끼손가락의 무능을 탓하는 일", "성냥개비를 욕하는 일", "귀후비개의 공로를 찬양하는 일"이 구성상 재료로서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 가지의 체험(사실)과 세 가지의 꾸며낸 재료를 얽어 짜는 것만으로는 저자가 기대하는 어떤 수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반성하는 자세로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내던진 성냥개비를 주워다가 성냥갑에 넣었다는 말을 꾸며서 끝부분에 배치했다는 사실에서 구성상 부득이한 경우 부분적으로 종속재료가 삽입되거나 보충될 수 있다.   3) 인과적 관계    개연적 유추되는 상식 개연적으로 유추되는 인과관계나 어떤 일에 부차적으로 따르는 상식적인 일이나 당연히 예상되는 결과로서 쓰여질 재료를 부분적으로 변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소운이 "친척도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아는 이의 가정"을 "꽤나 살림이 넉넉하다는 친척댁"으로 고쳐 놓았다는 점, 즉 재료를 수정했다는 것에서 김소운이 허구의 개연성에 대하여 퍽 많은 신경을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만일 김소운이 "친척도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아는 이의 가정"을 사실대로 밝혔다면, "무위도식의 식객에게 전화를 걸어서까지 식사를 알려 주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 그럴싸하게 들리기 어려울 것이다. "주먹으로 한 대 후려갈긴 사실"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도록"으로 수정한 것도 개연성과 관련된다. 그만한 일에 큰길에서 주먹으로 후려갈긴다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라도 잘 믿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4) 필자의 경험       체험의 부분적인 변용 필자가 경험한 내용도 부분적으로 변용된다. 이때 주체험은 사실이고, 그에 부수되는 종속재료들은 부분적으로 허구로 짜여질 수 있는 것이다. 윤오영의 수필 이란 수필을 보면, 허구적일 수 있는 내용을 발견할 수가 있다. 윤오영이 잠시 낙향해서 있었을 때, 어느 날의 달밤 풍경에서 독자는 자연과 혼연일체가 된 한 동양적 인간상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윤오영이 달밤에 술을 등장시켰는데, 술의 처리가 대단히 미숙하다는 데서 허구성을 찾아볼 수 있다. 윤오영의 회고가 없더라도 주인공이 서울에서 이사온 김군을 찾아가다 맞은편 집 사랑에 툇마루에 앉아 있는 노인을 만난 것은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치더라도, 달밤에 노인이 술을 취급하는 일에 있어서는 허구의 개입이 강하게 추측된다. 일반적으로 술을 내놓을 때는 주전자나 술병 같은데 담아 와서 사발이나 대접이나 잔에 따라 주는 법이지, 사발에다 직접 따라서 상에 받쳐 오는 법은 없다. 따라서 " 막걸리 두 사발이 놓여 있었다."라든지, "농주가 두 사발 남았다더니", "그 노인이 마시는 바람에 따라 마셔 버렸다."는 것은 사실로 믿기에 거리감이 든다.     6. 결 론      필자는 물론 많은 수필가를 포함하여 독자들은 수필이 논픽션 문학이라는 전제로 수필을 창작하고 있으며 감상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면서, 또 무제한 허구의 수용으로 독자와의 관계에서 도덕성 시비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 왜 정진권, 김열규, 정주환, 도창회 씨 등은 허구 수필의 수용론을 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알아보았다. 그들의 주장은 한결 같이 수필을 문학의 한 장르로 보는 한, 수필에서 허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허구 수용 불가론을 대충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수필의 고유 속성을 버림으로 인해 수필은 기타 장르와의 관계에서 분별성과 독자성을 잃게 되고, 산문문학의 기형아로 떠돌이 신세가 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 독자와의 관계에서 문제점을 찾아 볼 수 있는데, 독자들의 생각이 작품 속의 '나'를 작가와 동일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 완전히 조작된 '나'는 결국 독자를 속이게 되며, 내용에 따라서는 도덕성, 신뢰성 문제로 그 피해 범위가 엄청나게 확대될 소지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수필이 논픽션의 문학이라는 것은 수필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정설로 인정되어 있는데, 그 정설(속성)을 파괴하면서 작가가 창조하는 허구 세계를 굳이 수필이란 용기에 담을 필요가 뭐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꽁트나 동화, 단편으로 얼마든지 '나'를 중심으로 허구 세계를 창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넷째 수필을 허구라고 독자가 생각할 경우의 가정인데 과연 독자들이 수필을 즐겨 읽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수필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 중에 하나가 작품을 통해서 작가와 내면적 공감대를 형성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꾸며낸 이야기는 작가와의 공감대는 물론 감동의 창출에도 근본적으로 실패하고 만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수필을 외면해 버릴지 모른다. 아무리 잘 꾸며 쓴 수필이라고 해도 그것은 '허구'라는 것 때문에 진정한 감동을 독자에게 줄 수 없다는 것 역시 허구 수필이 가지고 있는 한계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진권 씨 역시 허구론을 주장하면서도 수필의 내용에는 허구화할 수 없는 것, 즉 허구화하면 개연성을 획득할 수 없음으로써 독자의 신뢰를 상실하게 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문학이 허구를 속성으로 한다해도 작가의 내면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사실)에 대해서는 허구가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수필 창작에 있어서 허구는 제한 받는 경우가 있고 제한 받지 않는 경우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수필에 있어서 허구 수용론이 근본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수용론자의 논리대로 라면, 수필이 문학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나 무제한의 허구가 허용되어야만 마땅할 것이 아닌가? 어떤 때라도 허구가 제한 받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정주한 교수는 허구는 거짓말이라고 했다 만약 필자가 교수도 아닌데 다만 상상에 의해 교수가 되어 강단에 서서 느끼는 강회를 수필로 발표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상상해 보면, 허구 수필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허구가 하나도 수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체험론도 체험론과 허구론을 다 허용해야 한다는 절충론도 완전 허구일 수 있다는 허구론 모두 어느 하나만의 수필론으로는 좋은 수필이 나올 수 없다는 것도 밝혀졌다.    수필의 본질이 '사실을 쓴다'는 데서 출발한다면, 그 사실의 발견과 의미부여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창작적 상상 즉 허구성도 무제한적으로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의 경우에 한정된다. 1) 주제의 효과적 전달을 위해 소재나 화제의 일부분 2) 예술적 구성상 어쩔 수 없는 재료의 부분적 삽입이나 보충 3) 개연적으로 유추되는 인과관계나 어떤 일에 부차적으로 따르는 상식 4) 필자가 경험한 내용 중의 일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은 체험과 창작적 상상이라는 허구성을 어떻게 잘 접맥시키느냐에 수필의 문학성 여부가 달려 있다고 하겠다. 체험의 진솔성만으로도 문학적 형성화가 가능하다면 굳이 창작적 상상을 빌어 글을 꾸밀 필요야 없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허구 수필의 수용에는 반대하지만 수필 문학의 창조적 지평의 확장을 위해 수필 이론의 정립 차원에서 허구론을 들고 나온 정진권 씨의 진지한 연구에 깊은 감명을 받았음을 밝힌다. 수필이 필자의 직접적 체험을 기록한 글이라는 특성으로 비문학의 오해를 받아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수필을 아는 사람이나 수필을 써본 사람은 잘 안다. 수필은 구상화 과정에서 주제를 위해서 체험을 생략하고 수정하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따르기 때문에 결코 체험의 기록 그대로일 수 없다는 사실로 해서 문학으로서의 격과 본질이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체험의 기록'과 '문학의 본질'의 상관 관계를 가지고 수필이 비문학이라는 식으로 접근하거나 이러한 우려를 의식해서 수필의 완전 허구론을 주장하는 발상은 제고해 보는 게 좋은 듯싶다.      
459    수필의 허구문제를 알아보다(11) 댓글:  조회:2429  추천:0  2017-05-05
= 수필 문학계(文學界), 세미나 갖고 본질(本質)규명...   =女流詩人들의 베스트.셀러集 비판도... (서울=연합(聯合)) 수필은 체험의 글인가 아니면 상상력으로 쓸 수 있는 허구(虛構)의 글인가? 대형서점들의 베스트셀러 집계때마다 상위권을 점하는 여류시인들의 수필집들이 체험과 유리된 환상의 세계를 다룬 글들로 가득 차있어 이의 주된 독자인 청소년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산문정신에 위배된다는 비판이 일고 있는 가운데 '수필은 무엇을 어떻게 써야하는가'를 논하는 수필문학세미나가 열렸다. 韓國수필(隨筆)文學振興會는 를 주제로한 제7회 수필문학세미나를 충남(忠南) 온양그랜드파크호텔에서 열고 '아무나 쓸 수 있는 글'로 잘못 인식되고 있는 수필의 본질을 규명하는 한편 최근 문단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수필에서의 허구 수용여부문제를 집중적으로 토론했다. 주제발표자인 수필가 李正林씨는 에 대해 "수필이 소설과 다른 점은 그 테마가 작자의 상상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작자의 사실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서양의 에세이나 동양의 수필이거나 공통적으로 수필의 속성 내지 개념은 사실에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李씨는 "수필이 사실적 체험의 글이지 '사실의 기록'은 아닌데도 이를 잘못인식, 새삼스레 허구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불필요한 논쟁"이라고 허구론을 일축했다. 수필의 허구론을 주장하는 鄭震權씨(수필가)는 허구(虛構)란 "체험 또는 사실을 수정·보충·조립하는 일(제작수법) 또는 그 결과"이며 허구(虛構)性이란 "전체적이든 부분적이든 허구적 요소를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하면서 "수필문학의 창조적 지평을 확장하기 위해 허구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허구성은 문학작품의 한 특질인 바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라면 "허구는 그 창조를 위한 미더운 수법이 아니겠는가"하는 게 鄭씨의 견해이다. 토론자중 한사람인 尹牟邨씨(수필가)는 "수필의 본질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요약한다면 개인적이면서 인격적인 문필"이라고 정의하고 "개인적이라 함은 개인의 체험·견문을 토대로 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인데 이런 개인적인 성격때문에 쓰는 사람의 인격과 직결되는 것이고 따라서 여기에는 소설처럼 허구가 들어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수필이 "미숙한 독자층을 대상으로한 일부 시인들의 매명주의와 상업주의에 의해 말장난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지적한 尹씨는 작가의 인격이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전이되는 것이 수필의 특질인만큼 "용어 하나에도 품격을 잃어서는 안되고 철저하게 산문정신에 입각해서 인생의 참모습과 철학을 담아야한다"고 강조했다. ==================== ==================== 수필의 허구와 소설의 허구 / 김시헌     1. 상상과 허구       ‘수필은 체험의 표현이다.’ 하면 어떤 사람은 체험을 굳이 ‘사실’로 대체해 놓는다. 사실로 대체한다 해서 많이 다를 것은 없다. 하지만 그 의도에 문제가 있다. 신문기사의 사실처럼 수필도 주제, 주관이 없는 모사만의 글임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어디까지를 체험으로 보느냐에도 문제는 있다. 체험을 나누어서 간접체험, 직접체험 한다. 간접체험은 책을 읽는 것, 영화를 보는 것,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 해서 직접 몸으로 당하기보다 사이에 매개물이 끼어 있을 때이다. 직접체험을 다시 둘로 나눌 수도 있다. 하나는 외적 체험, 다른 하나는 내적 체험이다. 외적 체험은 대상을 두고 그것과 직접 부딪칠 때이고 내적 체험은 부딪치는 대상 없이 내면에만 일어나는 생각들이다.   생각도 체험이냐고 하겠지만 뇌의 움직임이 있고, 생각해 보지 않는 것과 생각해 본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른 새벽에 잠이 깨었다고 하자. 더 잠이 오지 않을 때, 누운 채로 온갖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 가운데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생각이 있다. 하나는 수직적인 생각이다. 인생이란 무엇이냐? 왜 살아야 되느냐? 인생의 종말은 무엇과 연결이 되느냐? 등의 일직선상의 생각들이다. 다른 하나는 구상적인 생각이다. 내일 누구와 만날 약속이 있다면 그와 만난 뒤에 어떤 대화를 해야 하고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뒤처리는 어떻게 해야겠다는 구상이다. 구상적인 생각은 수직적인 생각보다 훨씬 더 계획적이다. 왜, 무엇이, 어떻게 따위의 육하원칙 같은 구상이 따른다.   두 가지를 두고 볼 때, 하나를 사색이라 한다면 하나는 상상이 된다. 하나에는 사건이 없고 하나에는 사건이 있다. 하룻밤에 기와집 열두 칸을 짓는다는 공상은 뒤의 것이다. 그래서 사실이 아닌 상상만의 사건을 허구(虛構)라고 말하기도 한다.   소설, 희곡에서 말하는 허구는 뒤의 것이 된다. 그런데 상상과 허구를 동일시하는 사람이 있다. 상상은 허구를 포함한 모든 구상적인 생각 전부이다. 과학자가 비행기가 없을 때, 땅에서 기어 다니는 자동차를 보고 저 놈을 공중에다 날게 할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고 하자. 그것은 상상일 뿐 허구라 할 수는 없다. 그 상상이 마침내 비행기의 발명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화가가 상상 속의 어떤 여인을 그대로 화폭에 옮겼다고 하자. 그릴 때 수많은 상상을 하겠지만 그것을 허구라고 하지는 않는다.   허구는 주로 소설, 희곡을 창작할 때 그 안에 만들어 넣는 사건을 말한다. 사건이 없는 소설, 희곡은 없다. 필수적인 요건이다. 사건에는 육하원칙이 따른다. 그러한 조건을 생각하면서 체험의 사실이 아닌, 생각만의 사건을 허구라 한다. 허구(虛構)의 構는 비었다이고 없음을 말한다. 無에서 有가 되고 여기에서는 有가 곧 ‘있어진 사건’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상상 전부를 곧 허구로 동일시한다. 넓고 넓은 상상의 세계를 허구라는 좁은 뜻으로 축소시킬 수는 없다.   ‘문학은 허구성을 가졌다.’라는 말도 있다. 문학에서의 창작적인 요소가 다 허구성이 될 수 있다. 사실만이 아닌 상상 속의 여러 가지가 문학에는 표현되기 때문이다. 허구성은 허구적인 요소라고 할까, 허구의 성격이라고 할까 그래서 허구와 허구성은 구별이 된다. 허구는 사건을 사실 아닌 것으로 엮어 짠 것을 의미하고, 허구성은 넓은 의미의 창작성이다. 허구성 안에 허구도 들어갈 수 있지만, 허구가 곧 허구성이 될 수는 없다.   ‘시는 허구성을 지녔다.’ 하면 말이 되지만 ‘시는 허구로 되어 있다.’는 말이 안 된다. ‘소설은 허구로 되어 있다.’는 말이 되지만 ‘소설은 허구성으로 되어 있다.’ 하면 뜻이 애매해진다.   그래서 허구성을 그대로 허구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사건의 요소가 있는 것만이 허구가 되어야 한다. 허구를 확대 해석해 버리면 허구성과의 구별이 없어진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체험은 내적 체험까지를 포함하고 그 내적 체험은 상상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상상을 곧 허구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 허구는 허구이고 상상은 상상인 것이다.       2. 소설의 허구와 수필의 허구     소설에서는 허구가 문제되지 않는데 왜 수필에서는 문제가 되느냐? 그 답은 간단하다. 수필은 체험의 표현이라는 원칙론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했을 때 시, 소설, 수필이 있고 희곡 시나리오가 있다. 이러한 장르가 생긴 데는 이유가 있다. 희곡은 연극을 위해서, 시나리오는 영화를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다. 시, 소설, 수필도 제각기 이유가 있다. 소설은 제한 없이 사건을 그려내기 위해서 허구가 필요했고, 수필은 허구 아닌 실제의 체험을 그리고 싶었다. 똑같은 허구의 수용이면 수필이란 종류가 따로 필요 없었다. 짧은 산문을 위해서라면 소설 형식의 콩트도 있다.   동시, 동화도 그렇다. 하나는 운문이고 하나는 산문이다. 동화에는 소설처럼 허구가 허용되고 있다. 허구가 허용되는 동화가 있으니 허구가 허용되지 않는 실제의 체험만을 표현하고 싶다면 동수필도 있어야 한다. 어른의 수필에 ‘동’을 붙이면 동수필이 된다. 귀엽고 밝은 느낌을 주는 용어여서 참 좋게 느껴진다. 다만 그것이 동화와의 혼돈이 생긴다면 굳이 따로 동수필을 만들 필요가 있겠느냐가 된다.   수필에 허구를 도입하자는 의견이 끓임 없이 계속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소재의 확대, 상상의 자유, 따라서 창작성의 제한 없는 확충이다. 그것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허구의 자유, 그 무제한한 창조의 자유를 수필에도 수용하자는 의견 자체는 건설적이다.   하지만 앞에도 말한 모양, 수필의 발생 동기는 체험만이라는 제약에 있었다. 제약 없는 소설과 제약 있는 수필, 두 가지를 따로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야만 수필의 존재 이유가 있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수필은 체험의 사실을 표현한다는 독자와의 약속이다. 언제부턴지 모르게 그 약속은 지켜져 왔다. 소설은 허구임을 인정하지만 수필은 허구를 인정하지 않는다. 수필에 허구를 도입하려면 독자에게 새 선언을 해야 한다.   체험한 사실만으로 소설을 썼다 해도 독자는 그 소설을 허구로 믿고 허구만으로 수필을 썼다 해도 독자는 실제의 체험으로 믿는다. 이 믿음을 어찌하랴? 왜 그렇게 되었느냐고 묻고 싶으리라. 그것은 수필의 역사가 대답해야 한다. 그 믿음이 잘못된 것 아니냐고도 하고 싶으리라. 그 잘잘못도 수필의 역사에 맡겨야 한다.   수필은 체험만으로 쓴다는 제한을 벗어나는 길은 없는가? 그래서 허구의 도입이 제안되기도 한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그 방법을 이미 제시해 놓고 있다. 찰스 램의 『꿈에 본 아이들』이다. 상상만의 세계, 또는 허구의 세계를 실제의 사실로 오인할까봐 어느 부분은 ‘꿈’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의 행동은 눈에 보이지만, 상상은 작자 자신만 알 뿐 독자에겐 보이지 않는다. 그 보이지 않는 부분에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허구 또는 상상임을 밝힐 필요가 있다. 아들이 없는 찰스 램이 상상 속의 자기 아들과 놀았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면 어떠한 결과가 올까? 독자는 찰스 램에게 아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부인할 어떤 근거도 없다.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하리라. 찰스 램에게 아들이 있다고 독자가 믿으면 또 어떠냐고… 그러나 찰스 램에게 아들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친구나 이웃집 사람은 어떻게 하랴? 그는 결국 거짓말을 수필 속에 썼다가 된다. 수필이 아니고 소설이었다면 문제될 것도 없는데…….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미혼 여성이 결혼한 뒤의 일을 상상하다가 그것을 수필에 썼다. 남편과 신혼여행을 간 이야기, 새살림을 차린 이야기, 남편이 퇴근한 뒤의 행복한 가정생활 등…….   그랬더니 작자의 친구가 잡지에서 수필을 읽었다. 친구는 깜짝 놀라서 전화를 걸었다.   ‘얘, 너 결혼했더구나. 나한테 말도 안 하고…….’   하면서 수필 속의 사실을 언급했다면 그때 작자는 어떻게 말해야 하나?   그것은 허구였다고 하면 되는 것일까? 독자의 이와 같은 착오를 막기 위해서 수필 속의 허구는 ‘허구’였음을 밝혀야 한다. 그러나 밝히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다. 수필 속의 허구가 독자에게 이미 허구로 인지되는 때이다.   옛 글에도 허구로 된 수필이 있었다.   ‘규중칠우쟁론기’이다. 바늘과 실과 골무…… 들의 말다툼을 그리면서 인간을 풍자한 내용이다. 내용을 작자의 사실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박지원이 썼다는 ‘호질’도 그렇다. 그 글을 소설로 보느냐 수필로 보느냐도 있지만, 수필로 본다 해도 그 속에 있는 내용을 박지원 자신의 이야기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김태길 씨는 ‘대열’이라는 수필에서 대학생들의 데모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 당시의 심경을 ‘꿈’으로 다루었다. 실제로 꿈을 꾸었느냐, 만든 이야기냐를 따질 까닭은 없다. 작자가 꿈이었다고 했다면 그대로 믿으면 된다.   허구를 사실로 오인할 요소가 있는 수필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것이 허구임을 글 속에 밝혀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수필의 독서계에는 큰 혼란이 일어난다. 신기한 이야기를 수필에서 읽을 때마다 독자는 그것이 허구이냐 실제이냐를 의심해 보아야 한다.   일본에 있었다는 『우동 한 그릇』도 그 때문에 일어난 혼란이었다. 처음은 수필로 알았는데 뒤에 가서 동화라고 했기 때문에 실망한 사람이 많았다. 뒤에 가서 실망하든 말든 처음의 감동은 대단했던 것 아니냐, 한다면 작자의 이성을 좀 검토해 보아야 한다.       3. 역사와 역사소설     역사는 사실의 기록이고, 역사소설은 역사적인 사실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이다. 수필을 위의 문제와 연관시켜 보자. 어떤 사람은 수필이 사실의 기록에 그친다면 역사와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 그러니까 문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수필을 써 본 사람이면 수필을 쓸 때 역사의 기록처럼 사실 그대로만 쓴다는 사람이 없다. 수필에는 주제도 있고,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 섬세한 체험은 가감도 한다. 또 심리 표현 부분에서는 작자의 창작성도 발휘된다. 그런데 왜 역사의 기록과 같다고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허구의 도입이 안 되면 문학성도 없다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역사소설은 어떤가.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하면서 나머지 부분은 작가의 창작에 의해 만들어지는 문학작품이다. 그때 작자는 역사적인 사실을 임의로 바꿀 수가 있다.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서 어떤 것은 빼고 어떤 것은 새로 넣는다면 그것은 역사의 왜곡이 된다.   이성계 때 있었던 사실을 세종대왕 때로 옮겨 써도 안 된다. 역사적인 사실에는 허구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역사관에 따라 해석에는 작가의 철학이 따른다. 또 기록에 없는 부분은 보충도 해야 한다. 역사소설에 나오는 동작의 묘사, 심리의 표현, 대화의 삽입 등은 모두가 작가의 창작성에 의해 만들어진다.   수양대군과 단군의 이야기를 역사소설로 쓴 것이 두 작품 있었다. 하나는 김동인이 쓰고, 하나는 이광수가 썼다. 같은 역사적인 사실이었는데도 두 사람의 사관에 따라 하나는 수양대군을 긍정적인 방향에서 썼고, 하나는 부정적인 방향에서 썼다. 정치면에서 보느냐 윤리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록에 있는 역사적인 사실에는 허구가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역사소설과 수필을 비교해 보자. 수필에 허구가 허용되지 않는 것은 역사소설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바꿀 수 없는 것과 같다.   역사소설에 작가의 해석이 들어가고 기록에 없는 부분을 창작에 의해 보충하는 부분도 수필은 닮았다. 그런데 어째서 역사적인 기록 자체를 수필과 비교하고자 하는가. 역사적인 기록은 문학이 아니고 역사이다. 창작도 아니고 사실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체험의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수필이 신문기사와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 신문기사는 사건을 의미화할 수도 없고 표현에 창작성을 첨가할 수도 없다. 사실에 충실한 글이 되어야 가장 좋은 신문기사가 된다. 그런데 수필은 체험한 사실을 토대로 할 뿐 그것에 대한 의미화 작업, 작품으로 만들기 위한 적절한 구성, 세밀한 부분의 모사 등에서 작자의 창작성이 십분 발휘된다.   수필에 허구가 없다 해서 창작품이 아니라는 말은 너무 단순하다. 허구만이 창작이라는 뜻은 무엇에 근거한 말일까. 마치 상상을 모두 허구로 간주하려는 뜻과 비슷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 같다. 허구는 구성상의 창조적인 생각이라면, 창작은 그것까지를 포함한 문학작품의 제작 과정 전체를 의미하는데도…….       4. 거짓과 진실의 문제     문학은 진실을 표현한다. 소설은 진실을 지적하기 위해서 길고 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사실과 사건을 바로 진실이라 할 수는 없다. 그것들을 통해서 그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철학을 지적 제시했을 때 진실이 된다. 진실은 사실과 사건의 아래에 떨어지는 앙금이다. 사람들은 진실을 만났을 때 쾌감이 온다. 나도 그러하더라는 공감이 된다. 그래서 문학은 ‘있을 수 있는 일’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있을 수 있는 일이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하자. 도덕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문학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아들의 교양이 거기까지밖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며 인간의 충동적인 본능이 그러한 악을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악인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다루었을 때 독자는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도달한다. 그 가능성에 진실이 있다. 있을 수 있는 인생사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허구는 진실을 표현한다. 허구는 꾸민 이야기이지만 그것에 진실이 담겨지고 있다. 수필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허구로 된 수필이라 하더라도 독자는 실감을 하면서 읽는다. 실감이 난다는 것은 그곳에 바로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수필의 허구는 거짓말이다.’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일까? 수필의 허구도 소설의 허구처럼 진실이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도 수필의 허구를 ‘거짓말이다’ 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독자를 표준으로 보았을 때 거짓말이 된다는 것이다.   독자 편에서 볼 때 소설의 허구는 이미 용인되고 있지만, 수필의 허구는 용인되고 있지 않다. 수필의 내용을 작자의 체험으로 믿고 있는 독자는 허구를 읽고도 실제의 체험으로 믿어 버린다. 그때 허구는 독자에게 거짓말이 된다. 그러니까 허구로 표현된 내용은 거짓말이 아닌데도 수필에 대한 독자의 믿음 때문에 거짓말이 된다. 거짓말이란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말한다. 수필에 쓴 허구와 작자 자신의 체험이 다를 때, 독자는 두 가지 사이에 끼인다. 그때 체험이 아닌 허구 쪽이 거짓말이 된다. 앞에 든 미혼 여성이 쓴 수필은 어떤가? 결혼을 하지도 않으면서 상상한 결혼 후의 이야기를 허구로 썼기 때문에 독자는 그것을 사실로 믿었다. ‘너 결혼했더구나…’ 하는 전화는 수필에 속은 결과이다. 만약 그 수필이 허구였음을 밝혔다면 어떻게 될까 독자는 속지도 않고 전화도 걸지 않는다.   이것을 작자 편으로 바꾸어 보자. 작자에게는 상상이 그대로 체험의 사실이다. 실제로 상상해 보았으니까 상상한 대로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그것에도 거짓말이 없다. 그러한 상상은 실제로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또 상상한 사실대로 수필에 쓴 일도 거짓이 아니다. 누구를 속이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다. 상상한 대로 정직하게 충실하게 묘사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독자가 속았다는 결과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수필의 허구는 거짓말이다.’ 하는 말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5. 맺는 말     허구를 도입하자는 주장은 정진권 씨에 의해 발설되었다. 그 뒤 정진권 씨는 허구성 쪽으로 뜻을 넓혀갔다. ‘문학에는 허구성이 있다.’ 하면 어떤 문학 종류에도 해당이 된다. 창작적인 부분을 허구성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허구성’이라는 말을 ‘창작’으로 대체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도 내고 있다. 어떤 용어이든 그런 것은 작은 일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허구성’에 대한 확대 해석이다. 허구도 허구성에 해당된다는 넓은 수용이다. 그로 인해서 허구인지 허구성인지 구별도 안 되는 ‘허구’ 도입설이 다시 고개를 든다.   허구는 작자가 알 뿐 독자는 모른다. 허구라도 말하지 않으면 그대로 작자의 체험으로 믿는다. 체험으로 믿으면 어떠랴? 재미가 있고 감동이 크면 그만 아니냐 할 수도 있다. 그래서 허구 문제는 작자에게 맡기자는 말도 나오고 있다. 그러면서 다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네거리에 선 교통순경과 같은 심경이라 할까. 그러나 작은 손으로 아무리 흔들어 보아야 갈 차는 가고 올 차는 온다.    
458    수필의 허구문제를 알아보다(10) 댓글:  조회:2350  추천:0  2017-05-05
1. 수필의 개념   자연과 인생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일정한 형식이 없이 붓 가는 대로 쓴 글, 인생에 대한 관조(觀照)와 체험을 개성적인 문체로 표현하여 작가 자신을 진실하게 드러내면서, 멋과 운치(韻致)를 곁들이는 산문 문학의 한 장르. 2. 수필의 구성 요소  (1) 소재(素材) : 수필의 재료로 모든 것이 수필의 소재가 될 수 있다. (2) 주제(主題) : 글쓴이가 그 글에서 나타내려고 한 주된 생각으로 제목이 주제인 경우도 있다.  (3) 구성(構成) : 수필의 짜임을 말한다. (4) 문체(文體) : 글에 나타나는 글쓴이의 개성으로 수필은 가장 개성적인 글이다 수필의 소재와 주제는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으나, 적어도 선택된 소재들은 주제를 향하여 통일되어야 하고 긴밀한 관련성을 지녀야 한다. 3. 수필의 특성  (1) 자유로운 형식의 글이다. - 무형식(無形式)의 문학 수필은 시나 소설, 희곡 등 문학의 어느 장르보다도 형식적 제약이 없는 자유로운 형식의 문학이다. 수필은 무형식을 그 형식적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붓을 들어 생각에 비치는 모든 것들을 표현하면 된다. 여기에 내용의 다양성과 형식의 자유로움이 있다. 그러나 자유로운 형식이라 하여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2) 무엇이든 수필의 소재가 될 수 있다. - 소재의 다양성 수필은 다른 어떤 장르보다 제재가 다양하고 광범위하여 인생이나 자연 등 소재를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다. 즉 세상의 삼라 만상(森羅萬象) 중 무엇이나 다 제재가 될 수 있는 문학이다. (3) 개성적이며 고백적인 글이다.  수필은 작가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개성이나, 취미, 지식과 이상, 인생관 등이 생생하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글이다. 흔히 일인칭으로 서술하고, 자신이 알고 느낀 경험을 토대로 자기 생활을 그려내는 글이다. (4) 수필은 심미적, 철학적인 글이다. 수필은 글쓴이의 심미적 안목과 철학적 사색의 깊이가 드러나는 글이다. 기법이나 문체에 의해서 표현되는 심미적 가치, 즉 예술성에 의해서 사상·사회·생활 등에 의한 철학적 가치, 즉 사상성이 형상화되어 진리를 전달하는 글이다. (5) 수필은 유머·위트·비평 정신의 문학이다.  수필은 단순한 생활의 기록이나 객관적 진리의 서술이 아니다. 그것은 '지성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신비적인 이미지로 되어진 것'이어야 한다. 거기에는 곶감과 같은 따스한 서정의 감미로움이 있어야 하고, 입가에 스치는 미소가 있어야 한다. 주름살을 펴고 파안 대소(破顔大笑)할 수 있는 유머가 있어야 하고, 깜짝 놀라 기겁하면서도 즐거움을 주는 위트가 있어야 하며, 얼음장과 같은 냉철한 비평 정신과 내일에 대한 지표가 있어야 한다. (6) 수필은 비전문적인 문학이다. 수필은 생활인이면 누구나 쓸 수 있는 비전문적인 글이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개성이 드러나야만 한다. (7) 수필은 간결한 산문 문학이다. 수필은 간결한 것이 특징이며, 기성의 언어를 그대로 구성하여 이루어진 생활에 젖어 있는 산문으로 구성된다. (8) 1인칭 시점의 글 4. 수필의 종류  (1)수필의 내용에 따른 분류  ① 사색적 수필 : 철학적 명상(瞑想)을 다룬 글  ② 묘사적 수필 : 주관을 섞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적은 글  ③ 비평적 수필 : 문학, 음악, 미술 등 예술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인상, 소감을 밝힌 글 (2) 주제의 경중(輕重)에 따른 분류  ① 경수필  ② 중수필  경수필과 중수필의 비교    중수필(重隨筆, formal essay)   ⊙ 베이컨적인 수필이다.    ⊙ 문장의 흐름이 무거운 느낌이다.    ⊙ 소논문적이다.    ⊙ 논리, 설명으로 전개된다.    ⊙ 논증적(論證的)이다.    ⊙ 객관적, 사회적 표현이다.    ⊙ 화자(話者)가 보이지 않는다.    ⊙ 사색적, 지적, 비판적이다.    ⊙ 실용적 가치를 추구한다.     [예] 서평, 평론, 인생론 등  경수필(輕隨筆, informal essay)   ⊙ 몽테뉴적인 수필이다.    ⊙ 문장의 흐름이 가벼운 느낌이다.    ⊙ 시적(詩的)이다.    ⊙ 감성, 정서로 전개된다.    ⊙ 자기 고백적 표현이다.    ⊙ 주관적, 개성적 표현이다.    ⊙ 화자가 등장한다.    ⊙ 정서적, 신변적이다.    ⊙ 예술적 가치를 내포한다.     [예] 수상(隨想), 문예적 수필 등  (3) 진술 유형에 따른 분류  ① 서정적 수필 : 일상 생활이나 자연에서 느낀 것을 솔직하게 주정적, 개성적으로 표현한 수필, 서정적 정조, 관조, 예술성 중시  [예]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 피천득의 '인연', 이효석의 '청포도 사상', 이양하의 '신록 예찬', 김진섭의 '백설부', 이병기의 '백련(白蓮)' ② 서사적 수필 : 현실적 사건을 소설처럼 행동과 사건을 객관적으로 서술한 수필. 내용의 사실성, 서술의 정확성 중시  [예]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 이희승의 '딸각발이' ③ 교훈적 수필 : 인간이나 인생, 자연 등에 대한 필자의 오랜 경험이나 깊은 사색에서 이루어진 지혜를 바탕으로 일정한 교훈을 주기 위한 수 필. 계몽주의적이고 신념, 설득적 요소가 강함.  [예] 이양하의 '나무', 김진섭의 '매화찬' 이광수의 '우덕송', 심훈의 '대한의 영웅', 이희승의 '지조' ④ 희곡적 수필 : 사건의 내용이 다분히 극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어 내용 전개가 희곡적인 수필. 사건이 유기적, 통일적으로 전개됨.  [예] 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 계용묵의 '구두', 이숭녕의 '너절하게 죽는구나' ⑤ 연단적 수필 : 연설적·웅변적인 글 (4) 형식에 따른 분류  ① 서술체 수필 : 상념이나 정감을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쓰는 수필이다. ② 서간체 수필 : 가상적인 대상을 설정하고, 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는 수필로 실제의 서간문도 수필에 속한다. ③ 일기체 수필 : 일기나 일기와 같은 형식으로 쓰는 수필이다. ④ 기행문체 수필 : 기행문이나 기행문 형식으로 쓰는 수필이다 (5) 성격상 분류 ① 사색적(思索的) 수필 - 인생의 철학적 문제를 다룬 글이나 감상문 따위를 말한다. ② 비평적(批評的) 수필 - 작자에 관한 글이나, 문학, 음악, 미술 등 예술 작품에 대한 글쓴이의 소감을 밝힌 글이 여기에 해당한다.  ③ 기술적(記述的) 수필 - 주관을 배제하고 실제의 사실만을 기록한 글이다. ④ 담화적(譚話的) 수필 - 시정(市井)의 잡다한 이야기나 글쓴이의 관념 따위를 다룬 글이다. 필자의 관점이나 사상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야기하는 식으로 쓰는 수필이다. ⑤ 개인적(個人的-신변적) 수필 - 글쓴이의 자신의 성격이나 개성, 신변 잡기 등을 다룬 글이다. ⑥ 연단적(演壇的) 수필 - 실제의 연설 초고는 아니나, 연설적이고 웅변적인 글이다. ⑦ 성격 소묘 수필 - 주로 성격의 분석 묘사에 역점을 둔 글이다. ⑧ 사설적(社說的) 수필 - 개인의 주관이나 의견이긴 하지만 신문의 사설과 같이 사회의 여론을 유도하는 내용의 글이다. 5. 수필의 구성  가) 수필의 구성   ① 3단 구성 : 서두[도입, 기(起)], 본문[전개, 서(敍)], 결말[정리, 결(結)] - 중수필(重隨筆)의 경우   ② 4단 구성 : 기승전결(起承轉結) - 경수필(輕隨筆)의 경우   ③ 자유 구성 : 작가의 개성에 따라 일정한 틀이 없이 짜여진 구성 - 경수필의 경우  나) 수필의 짜임   ① 직렬적 짜임 : 인과(因果)나 시간적 순서, 공간적 순서 등의 유기적인 관계에 놓이는 짜임이다.   ② 병렬적 짜임 : 서로 유기적 관계가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면서 주제에 봉사하는 짜임이다. 때로는 위치를 바꾸어 놓아도 상관이 없다.      예) 피천득 '나의 사랑하는 생활', 안톤 슈나크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③ 혼합적 짜임 : 직렬 구성과 병렬 구성이 혼합되어 있는 짜임이다.     예) 이양하 '나무' ; 전체-직렬 구성, 부분-병렬 구성        이희승 '청추 수제' ; 전체-병렬 구성, 각 부분-직렬 구성 6. 수필의 표현 방법  ① 설명(說明) -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알기 쉽게 풀이하여 일러주는 진술 방식  ② 묘사(描寫) - 모습이나 소리, 특징 등을 그림으로 그리듯이 자세하고도 구체적으로 그려 보이는 진술 방식.  ③ 서술(敍述-서사) - 어떤 사물의 움직임이나 사건의 진행 상태를 그려 보이는 진술 방식. 서사(敍事)라고도 한다.   ④ 설득(說得) - 글쓴이가 독자로 하여금 믿거나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하여 논리적 근거를 보이거나 감정에 호소하는 진술 방식. 7. 수필과 다른 문학 장르와의 비교  (1) 시 ; 운문. 이미지만으로 이루어짐. 창조적 표현·수필 ; 산문. 설명이 필요함. 구성적 표현  (2) 소설 ; 허구(虛構)의 세계 ·수필 ; 사실(事實)의 세계  (3) 희곡 ; 객관적 진술의 문학 ·수필 ; 주관적 진술의 문학 8. 훌륭한 수필의 요건  (1) 수필은 삶에 대한 지속적 관찰에서 얻어지는 사색과 명상의 깊이가 필요하다.  (2) 독자에게 미소와 정감을 주면서 공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3) 겸허하고 품위 있는 개성의 반영이어야 하며, 문학적 예술성이 있어야 한다. 9. 올바른 수필 감상법  작자 자신의 인생에 대한 체험과 사색의 내용이 개성적 문체로 표현되는 것이 수필의 특성임을 염두에 두고 읽는다.  ① 해석적 읽기 - 제재에 대한 관조적 태도나 이면적 태도 등을 파악해 가면서 읽는다.  ② 비판적 읽기 - 작자의 인생관과 자신의 인생관을 견주어 가면서 반성적, 비판적인 태도로 읽는다.  ③ 창조적 읽기 - 수필에 깃든 감성과 지성의 조화를 음미하고 거기에서 드러나는 긍정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가면서 읽는다.  ④ 개성적이고 효과적인 표현법에 유의하면서 읽는다 10. 수필의 기원  (1) 서양의 수필 문학의 기원   '수필'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영어의 'essai'란 말은 이전의 라틴어의 'exigere'에서 나온 말이다. 'exigere'는 '계량(計量)하다. 조사하다. 음미하다'의 뜻이며, 'essai'는 '시험해 보다. 시도하다'라는 뜻의 동사이다.   '수필'이라는 용어로 'essai'나 'essay'가 쓰이게 된 것도, 처음에는 책의 제목에 붙여지면서부터였다. 그 최초의 작자는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로,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자신의 체험이나 신념을 기술한 글들을 모아, 책 이름을 이라 붙였다. 뒤이어, 영국에서 철학자 베이컨의 이 1597년에 간행되었다. 이로부터 서양에서는 본격적으로 수필 문학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명칭이 붙여지기 훨씬 이전부터 수필로 분류할 수 있는 글이 쓰여졌으니,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 테오프파스토스, 로마의 키케로, 세네카 등의 철학적인 저술들이 그 예이다. (2) 동양의 수필 문학의 기원  수필이란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중국 남송 때의 홍매이다. 그는 "나는 게으른 탓으로 책을 많이 읽지 못했으나 그때 그때 뜻한 바가 있으면 앞뒤의 차례를 가려 챙길 것도 없이 바로바로 기록하여 놓은 것이기 때문에 수필이라 일컫게 되었다."라고 책 이름을 수필이라고 쓴 까닭을 말하고 있다. 수필(隨筆)의 한자어는 '붓을 따라서' 또는 붓 가는 대로'라는 뜻으로 '그때 그때 보고 느낀 대로를 붓 가는 대로 써 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3) 우리 나라의 수필 문학의 기원  우리 나라에서는 서설(書說), 증서(贈書), 잡기(雜記), 찬송(贊頌), 논변(論辯) 등의 문장으로 고려 때부터 써 왔다. 고려 때의 학자인 이제현의 수필집이라 할 수 있는 의 서문(序文)에, "지정(至正) 임오년 여름 비가 한 달 동안 계속 왔다. 문을 닫고 들어앉으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 답답함을 이길 수 없었다. 처마의 낙수를 받아 벼룻물을 삼고, 벗들 사이에 왕복한 편지 조각들을 이어붙인 다음 기록할 것을 닥치는 대로 그 종이의 배면(背面)에 적고, 그 끝에 제목(題目)을 붙여 역옹패설이라고 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오늘날의 수필과는 좀 다르다 해도 비평 의식에 의해 붓 가는 대로 쓴 글임에 틀림이 없다.  이보다 먼저 나온 이규보의 에서도 수필적인 문장을 찾아볼 수 있다. 수필이란 말은 이민구의 , 조성건의 , 박지원의 등에 그 용례가 보인다.   우리 나라의 근대 문학에서 수필 문학은 주로 기행적(紀行的)인 성격으로 출발하여 30년대에 이르러 산문 문학의 한 장르로 본격 수필이 형성된다. 본격 수필은 주로 고전 수필의 기행적 성격을 계승하고, 서구 수필의 개성적 시각을 수용하여 이원적 근저(根底)에서 출발한다. 곧 송강의 을 비롯하여 김인겸의 등의 기행 가사에서 계승된 자연을 즐기고 기리는 기행적 수필과 생활 주변의 통찰이나 내적 세계의 성찰을 주로 하는 수상적(隨想的) 수필의 두 경향이 20년대에는 각기 고전 수필의 전통성과 서구 수필의 개성적 성찰로 대립하다가 30년대에 와서 본격 수필로 형성된다. 이것은 유길준의 에서 태동하여 최남선과 이광수의 기행적 수필과 박종화, 변영로 등의 '단상(斷想), 상화(想華), 만필(漫筆)'과 같은 장르명으로 써 온 수상적  수필이 병립 상충하면서 본격 수필의 기초가 되었음을 의미한다.(우리 나라에서 수필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타난 것은 조선 시대 박지원의 26권 '일신수필'에서이다.
457    수필의 허구문제를 알아보다(9) 댓글:  조회:2528  추천:0  2017-05-05
허구도입(虛構導入)의 망설임 문제 수필가라면 때로 허구의 도입이 허용되는지 안 되는지 꽤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필평론에 있어서도 이미 이런 점은 공개적으로 쟁점화 된 바 있다. 구성화 하는 과정에서 사실은 사실 그대로여야 한다는 논리와 필요시엔 허구의 도입도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가 맞서 있다. 허구를 일체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논자들의 논리는 수필이 '체험의 문학'이요,'사실의 문학'인 만큼 어디까지나 체험이나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수필을 소설과 대비해서 본다면 우선 그 논리가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이 '허구의 문학'이라고 해서 일체의 어떤 사실이나 체험이 들어가서는 안 되고, 어다까지나 100% 허구이어야 한다고만 주장하면 그것은 개념적 정의에만 지나치게 속박시키는 폭력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필이 '사실의 문학'이라고 하여 허구가 조금이라도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도 '사실의 문학'이란 개념적 정의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경직된 논리라고 하겠다. 나는 무조건적인 허구의 도입은 인정하지 않지만 예술적 효과나 감동의 창출을 위해서라면 최소한의 부분적 허구는 인정해야 된다고 본다. 가령 한 편의 수필에 있어서 뼈대가 되는 사건이나 사실 자체를 허구화시켜 사실인 양 내보여서는 안 되겠지만 지엽적이거나 구성적 동기부여라면 허용되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을 수필가 이철호 씨가 '수필창작에 있어서의 구성과 그 전개'란 글에서 밝힌 바도 있는데 나도 상당부분 공감을 한 바 있다. 수필은 비록 '사실'에 충실한다 해도 100% 사실위주의 글이어야만 하는 일기문이나 르뽀르다쥬 그리고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만큼 '사실의 문학'이란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상 '선의의 거짓말'이란 말이 있듯이 '선의의 허구'는 용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필가는 사실의 충실한 기록자가 아니며, 단순한 작문가도 아니라 수필이라는 집을 창조적으로 지어내는 예술가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수필, 새로운 길의 모색                                                                                                                   이 동 민       1. 들어가는 말       오늘을 수필의 전성시대라고 말한다. 그만큼 쓰여지는 수필의 편수는 엄청나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가,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된 글인가를 따지게 되면 마냥 자신만만할 수가 없다. 이 글은 그 이유를 탐색해 봄으로써 수필이 나아가야 할 길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우선 수필이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개념적 입장에서 살펴보자.   “수필은 산문 문학의 한 유형으로 생활과 관련되는 모든 사물을 소재로 하고, 자아(ego)의 표출을 기본으로 하되, 어느 특정한 주의나 주장, 또는 지식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하지 않는다. 체제에는 제한이 없으나 대체로 독백 양식이다. 미지의 가장 이상적인 상대(독자)를 상정한 일방적인 대화의 한계에 머문다.”1)   위의 글은 차주환이 ‘수필의 개념’이라는 논제로 쓴 글에서 발췌하였다. 위의 정의는 수필의 사전적 뜻이라든지, 학자들 간에 합의가 이루어진 정의는 아니다. 그러나 이 논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용하고 있는 이론이다.   이 글에서는 “자아의 표출이 기본이다.”라는 말을 유의한다면 ‘자아’의 본질에 대한 고찰이 수필의 본질을 아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독백의 양식’이라는 말과 같이 생각해 보면 수필은 작가의 인간성(personality) 내지 내면을 표현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인간성이라고 하면 적어도 보편자가 아닌 한 특수자로서 작가의 인간성을 담론으로 삼는다는 말이 다. 작가라는 한 사람의 인격체(자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배경이 투여된다. 이럴 때의 인격체는 단순히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니고 자아라는 존재론적인 사물이 된다. 말하자면 자아는 사회, 문화적인 맥락에서 다루어야 한다. 결국 한 인간성의 정체성(identity)으로 귀속한다.   작가가 자신을 ‘시공간의 존재론적인 사물’이라는 하나의 물상으로 다루게 되면 자아는 하나의 기술의 대상이 될 뿐이다. 앤서니 엘리엇은 이렇게 말했다. “사회는 자아를 훈육하고 조절한다. 우리 자신에 대한 감정과 우리의 정체성은 더 깊은 뿌리까지도 여러 사회적인 힘과 문화적인 감수성에 의해서 형성된다.”2)   우리가 객체로서 기술의 대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자아는 ‘나’이면서도 사회문화적인 맥락이 만들어 낸 수동적인 산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아를 설명하는 또 다른 이론으로는 정신분석학적 담론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프로이트가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무의식이라는 심층심리 구조가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본인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의식으로서 실제의 우리 행동을 지배하는 심층심리이다.   사회, 문화적 체계에서 우리의 행동을 수용할 수 없을 때는 억압이라는 심리기제에 의해서 내면 깊숙이 감추어 버린 것이 무의식을 구성한다. 억압하는 것은 성적 갈망과 가족 로망스에 대한 유년기의 기억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프로이트는 자신의 무의식 이론을 정립하였다. 욕망에는 언제나 유년기의 기억들이 잠재되어 있다. 억압되어 있는 유아기의 충동과 좌절된 소망이 심리구조의 틈새로 비집고 튀어나오려는 힘(리비도)이 숨어 있다.   장년기에는 그러한 유년기의 기억들이 환상의 영향을 받아서 필연적으로 복원한다. 우리의 개인사와 사적인 서사 내용들은 엄밀히 따져 보면 무의식적인 의미들로 가득 차 있다. 각 개인이 주관적으로 갖고 있는 관심사들은 우리가 아무리 자신의 생활(삶의 행로)을 제어한다고 자신하더라도 무의식적인 관념과 환상과 충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3)   근대는 내면의 발견부터 시작한다는 주장도 있다. 내면의 발견은 공적인 사회적 영역으로부터 개인의 사적인 영역이 분화되어 나온 과정을 보여 준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공적인 영역에서 본질적으로 삶의 가치를 부여하였다. 반면에 근대 이후에는 사적 영역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장소로 여기고 있다.4)   오늘, 수필 분야가 크게 신장할 수 있는 사회, 문화적 배경은 위의 언급에서 찾을 수 있다. ‘자아의 표출’과 ‘독백 양식’이라는 수필의 정의적 개념은 바로 개인의 사적 영역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리 시대에 가장 적합한 문학 장르가 될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도 수필이 아직 문학의 분야에서 제자리를 확고히 차지하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는 까닭이라면 수필이 과연 ‘자아 표출’을 하고 있는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수필 작법에 대한 여러 주장을 살펴보자.       수필은 생활이다. 성실한 생활이 없으면 수필은 없다. 우리는 수필에 의하여 인생을 키워나가야 한다.― 김우현       수필을 쓰려면 박학이어야 하고, 인생 체험의 축적이 풍부하여야 한다.― 윤오영       위의 인용문들은 수필의 특성을 설명한 글들이다. 이들의 주장에서 ‘성실한 생활, 박학, 인생 체험의 축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회의 가치와 사적인 욕망이 충돌을 일으키면 욕망은 억압되어 버린다. 앞에서 수필의 특성으로 꼽는 것에는 사회, 문화적 체계가 수용하는 가치5)를 표현해야 된다는 말이다. 자아6)를 표출하는 독백적인 글이 아니라는 뜻이다. 공적인 사회 영역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수필 쓰기는 “내면의 발견에서 근대가 시작한다.”는 주장과는 많이 다르다.   근대는 내면의 발견을 중요시하는 만큼 ‘사적 가족의 발견’을 같은 맥락으로 다룬다. 사적 가족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표현되는 심리적인 갈등 구조인 동시에, 가족의 유대를 통한 사생활의 독립을 뜻한다. 내면과 사적 가족은 공적, 사적 영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만든다. 이로써 한 인간의 독립된 공간을 형성할 수 있다.   내면과 사적 가족 둘 다 외부와 자신을 구분시켜 준다. 인간의 내면을 다루는 문학의 장르에서 수필의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2. 성장 소설과 수필       작가를 주인공으로 다룬 소설의 영역에 ‘성장소설’이 있다. 물론 소설이므로 스토리의 전개에 극적인 플롯이 필요하므로 허구적 요구가 개입한다.   작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수필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수필에서는 장르의 특성상 허구를 도입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대신에 진정성이라고 하는 더 깊은 감동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둘 사이에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성장소설을 살펴봄으로써 수필을 아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성장소설은 젊은이의 내면적인 성장 과정을 다룬 소설이다. 자기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열정이 그 어느 시기보다도 강하고, 그럴 가능성이 제일 많은 젊은 시절의 이상과 좌절하는 과정이 펼쳐지면서 작가의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교양 이념이 표출된다.   주인공의 개성적인 인격이 형성되는 과정은 교육학에서 말하는 인격 도야와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 그렇다고 하여 성장소설의 창작 동기를 교양 이념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감동적인 성장소설은 그 시대의 본질적인 문제와 대결한 작가의 자서전적인 체험의 기록이어서 교육학적 통념으로서의 인격 도야의 과정이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자연적 능력의 발전에 필수적인 은총 같은 것에 순종하고, 만족할 수 없는 작가의 분신이 그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7)   “젊은이의 내면적인 성장 과정을 다루었다.”는 말을 ‘수필 작가의 내면적인 성장 과정’이라는 말로 대체한다면 바로 수필 자체를 설명하는 글이 될 수 있다.   “주인공의 개성적인 인격의 형성은 교육학에서 말하는 인격 도야와 상통하는 면이 있지만 성장소설의 창작 동기는 그것만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내용을 두고 수필의 입장에서 검토해 보자.   수필은 문학의 갈래 분류에서 ‘교술문학’으로 다룬다. 그렇다면 인격 도야라는 면은 수필문학이 다루어야 할 분야이다. 성장소설에서는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다.   수필은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할까? 나도 ‘설명할 수 없다’에 낙점을 주고 싶다. 교술문학이란 말이 함의하고 있는 것은 수필을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회귀시켜야 한다는 강한 지침서가 된다. 내면이라는 사적 영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수필의 특성에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근대를 열었다는 ‘내면의 발견’이나 ‘사적 가족’이라는 의미는 공적 영역과 상충된다. 내면과 사적 가족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수필로서는 결코 환영할 만한 조건일 수 없다.   성장소설이 태어난 배경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시민 의식을 꼽는다.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기계적 합리주의는 비인간성이라는 속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또 정치적인 이유로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형으로 태어나기를 강요한다. 보편적인 교양 이념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이러한 요인들은 온전한 자아 발전을 저해한다. 원만한 자기실현을 이룰 수가 없게 한다. 따라서 성장소설이란 순진한 상태의 한 인간이 경험을 통해서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을 나타낸다.   성장소설의 전개를 살펴보면 사회 현실에 무지한 한 인간이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형으로 적합하게 이행함으로써, 결국은 공동체의 이념에 종속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장소설이란 주인공의 개인적인 성장을 다룬 개인사이다. 개인의 역사가 규범적인 사회 질서 속으로 편입되어 가는 과정으로 점철되어 있다면 개개인이 갖고 있는 영혼은 거대한 사회의 규범(초개인적인 가치관)이라는 수레바퀴에 깔려서 괴롭게 신음할 수밖에 없다.8)   나는 여기서 성장소설과 수필의 차이점을 찾으려 한다. 욕망으로 구성된 인간의 내면이 초개인적인 가치 체계에 종속되기를 강요당하면 좌절을 겪기 마련이다. 인간의 내면이 형성되는 과정을 프로이트와 라캉의 주장으로 살펴본다면 차이는 극명하게 나타난다.   성장소설의 주인공은 거의 대부분이 사회적 명성과 행복한 결혼으로 귀결된다. 도덕 교과서에서 미리 정해 둔 과정을 걸어가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이 발달해 가는 과정은 그렇게 안일하지도, 일방적이지도 않다. 한 개인의 내면이 성장하는 과정은 심한 갈등과 좌절을 겪으면서 무의식 속에 하나의 그림자로 머물게 된다.9)   내면의 그림자란 성장소설의 결론처럼 아름답지도, 행복한 모습도 아니다. 어쩌면 추하고, 징그러운 모습이다.   다시 자아로 되돌아가서 내면의 자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살펴보자. 수필은 어차피 “자아의 표출이다.”라고 한 이상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자아의 형성 과정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원초적’, 혹은 ‘원형’이라는 심리적 형태로 태어난다. 배고픔이라는 욕구와 어머니의 젖가슴이라는 욕구 충족의 실현물에서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경험을 한다. 더 나아가서 성적 욕구도 어머니를 대상으로 발현한다. 그러나 아이는 곧 어머니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사회 가치적인 금지에 부딪힌다.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금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 심리 영역에 속하는 욕망 자체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욕망은 무의식 속으로 잠행하면서 자아가 형성된다. 그렇다고 하여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사회적 영역 즉 공적 영역에 속하는 자아의 개념으로 성장하였다면 바람직한 인격 도야가 일어난 것이다. 반면에 내면이라는 사적 영역에서는 끊임없이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개인적인 심리적 성장사를 경험한다.   내면이라는 것에서 보면 욕망의 대상으로서 어머니와, 금지하는 사회적 법으로서의 아버지, 그리고 나 사이에 ‘가족 로망스’가 성립한다. 가족 로망스는 성장소설에서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다. 마찬가지로 수필에서는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누구든지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오이디푸스 가족’에는 끼어들 틈을 발견하지 못하므로 영원한 타자가 된다. 금지의 대상인 어머니와 금지자인 아버지, 그 누구도 나와는 멀리서 존재하는 자들이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가까이하고픈 그리움의 존재들이다. 아버지는 두려움의 존재인 동시에 내가 닮고 싶어 하는 동일시의 존재이다.   수필에서 수도 없이 등장하는 고향(곧 한 개인의 유년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채울 수 없는 욕망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존재(사회적 금지)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수필을 쓰는 작가는 누구나 오이디푸스 가족에서 아들이 된다. 지금의 정의대로 수필을 쓴다면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서 안 되고, 금지자로서 아버지에 대한 살해 심리는 조금이라도 냄새가 나서 안 된다. 이런 유의 수필로는 ‘내면의 표출’이라고 할 수 없다. 공적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수필을 쓴다면 영원히 사적 영역에서 개인의 자유를 구가할 수 없다.   여기서 수필은 ‘성장소설’과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한다. 오이디푸스 가족에서 타자로서의 나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에서 떠돌고 있는 나 자신은 성장소설의 주인공처럼 해피 엔딩으로 끝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기 완성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술을 통해서 가능하다.10)   수필작가는 허구의 소설이 아닌 현실 자체를 다루기 때문에 해피 엔딩으로 끝낼 수 없는 비극성을 숙명으로 안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수필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대로 수필을 통해서 자기 완성을 구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아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적 모델로는 라캉의 거울 단계가 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바로 자신으로 인식하고 닮아 간다. 거울 속에 비친 영상은 실재의 자기가 아니고 상상으로서의 자기인 것이다. 동일시한 대상이 상상의 존재라면 자아도 하나의 허구인 셈이다. 거울 단계의 이론은 자아(ego)가 안쪽(자신의 내면)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바깥쪽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자아의 지각은 외적인 이미지에 따라서 구조화하는 것이다.   라캉의 대명제인 “주제의 욕망은 큰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결국 내면의 표현도 나를 감싸고 있는 사회 문화적인 욕망을 대변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다시 자아의 표현에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면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맞닥뜨린다.   나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오늘의 자아가 형성되기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고 표현하는 글이 수필이다. 자아의 형성 과정이 개개인에 따라서 다르기 마련이다. 글도 사람에 따라서 달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찰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또 성찰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 규정’을 하여야 한다.11)   이제 성장소설을 검토해 봄으로써 수필과 차이점을 인식하고 수필을 써야 할 방향을 짚어 보자. 우리는 수필을 통해서 오늘의 자신으로 성장해 온 과정을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자아의 표출’이기도 하다. 자아란 타자의 욕망에 의해서 사회, 문화적 가치에 순응하게끔 형성되기 마련이지만 심리적인 내면을 바라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좌절과 갈등은 숨어 있고, 환상으로 뒤덮인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다. 욕망은 내 인격의 그림자가 되어서 나를 짓누르고 있다. 수필은 이런 것을 솔직하게 표현해야 한다. 성찰을 통해서 그림자를 인격으로 수용하는 과정을 표현해야 한다.   억압으로 숨기고 싶은 나의 추한 내면을 성찰 과정을 통해서 수필로 표현함으로써 한 단계 성숙한 인격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수필은 이런 것을 쓸 수 있어야 한다. 성장소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픔과 고통이 따르겠지만 이것만이 수필이 나아갈 길이다.           3. 작품으로서의 수필       수필은 개인의 기록일 수밖에 없다. 개인이 사회와 문화라는 숲 속을 헤쳐 가는 여정을 보여 주는 글일 수밖에 없다. 개인은 외부의 온갖 위협으로 상처를 받는다. 자기 방어적으로 도사리기도 한다. 그러한 과정을 표현하다 보면 사회 비판적인 요소도 담긴다. 사회라는 거대한 조직에서 나란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내면에서 형성되는 자아라는 것은 소위 타자라고 부르는 모든 외적 요소가 관여하여 형성된다. 자아는 곧 시간과 공간이 공동으로 만들어 내는 한 시대의 총체적 산물이다.   이렇게 보면 ‘나’라는 한 개인의 진술, 아니 개인이라기보다는 ‘자아’가 진술하는 기록은 의미가 매우 크다. 더구나 요즘의 신역사주의는 하부 구조의 삶의 방식에 더 큰 의미를 두므로 역사의 측면에서도 개인의 기록인 수필은 가장 적합한 텍스트가 된다.   한 개인이 만드는 문학 작품에 대한 프로이트의 논문이 있다.12) 창조적인 작가들은 어린이들의 놀이처럼 공상적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자기가 창조한 세계를 진지하게 생각한다. 어린이들의 놀이는 욕망에 의해서 인도된다. 그러나 어른은 자신이 몽상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몽상을 불러오는 욕망 중의 어떤 것은 숨기고 싶은 것이 많다. 어른들은 자기의 몽상을 마치 유치하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인 양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몽상은 자기 자신이 영웅이 되는 자화자찬식이 대부분이다.13)   요약해 보면 문학 작가는 자신들의 몽상을 작품으로 형상화해 낸다. 그러나 몽상에는 남에게 숨기고 싶은 유치한 내용이 많다. 그러나 자기 예찬식 글을 씀으로써 유치함을 숨기고, 사실을 변형하고,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수필을 이런 방식으로 써서는 내면은 전혀 드러내지 않으므로 자아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 표출된다. 이럴 때는 수필 작품의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황병하는 ‘얼마만큼 벗을 수 있을까?’라는 글을 통해서 시사성이 큰 언급을 하였다.14)   “자전소설까지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자전(自傳)은 문자 그대로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문학) 장르를 가리킨다.”   황병하는 그의 글에서 자전소설에서의 벗기를 다루고 있다. 자전소설의 자리에 수필을 대입하면 그대로 수필문학에 대한 비판이 된다.   그는 자전소설의 예로서 박완서의 ‘그 많은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와 신경숙의 ‘외딴방’을 비교하였다.   “박완서는 작가의 말에서 ‘그러나 자신을 바로 보기처럼 용기를 요하는 일은 없었고, 내가 생겨나고 영향 받은 피붙이들에 대한 애틋함도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다.’라고 작가가 고백하는 데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무엇인가 의도적으로 생략할 수밖에 없는 이 작품이 걸작이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미리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황병하의 말이다. 신경숙의 ‘외딴 방’을 평한 그의 글은 이렇다.   “신경숙의 ‘외딴 방’은 이러한 고교 동창생의 질책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미 널리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기 때문에 한때 자신의 나이를 속이고 동남전기에 근무했던 소녀 노동자였고, 여성 노동자를 위한 영등포여고 산업체 특별 학급의 학생이었던 사실을 밝혀야 하는 데서 오는 아픔과 고뇌를 신경숙은 극복한다. 바로 이 점이 신경숙과 박완서의 차이인 것이다.”   수필이 아닌 자전소설을 두고 황병하는 벗기에 대해서 이렇게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소설이 아닌 수필을 쓰는 사람에게 벗기를 따지는 일조차 무의미하다. 왜냐면 허구가 용납되지 않는 수필에서 벗기에 대한 논쟁이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수필은 허구를 인정하지 않는 문학의 장르를 차지하면서, 벗지도 않는 글을 써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프로이트가 몽상에서 논하였듯이 유치하여 숨기고 싶은 것들로 구성된다면 더더욱 벗기는 난감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수필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은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들을 다룬 것이 대부분이다. 그 글들도 사실을 얼마나 벗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벗어도 별로 부끄럽지 않는 내용들로 메꾸어져 있다. 드러내고 싶지 않는 나의 그림자는 언제나 꼭꼭 숨어서 숨죽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수필을 새롭게 조명할 필요성이 있다. 프로이트가 말하였듯이 놀이의 방법으로 자기 치유의 역할을 자아의 뒷면에는 그림자라는 무의식이 웅크리고 있다. 그림자는 의식의 세계에 머물기에 부적합하여 무의식의 세계로 쫓아 버린 것들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림자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사람은 일상 생활에서 별다른 저항이 없는 조그만 흠집도 의식 세계에 담아 두지 않는다.   시공간에서 형성되는 삶의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 개개인의 그림자가 다르다는 것은 당연하다. 박완서가 많이 벗지 않는 이유도 그의 자아 뒤편에 있는 그림자가 벗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림자가 항상 열등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의식화함으로써 긍정적인 기능을 가질 수 있다. 성찰을 통하여 나의 그림자를 정확하게 인식하여 나의 의식 세계로 편입함으로써 인격의 폭을 넓힐 수 있다.   그림자 속에 내포되어 있는 가치를 살리기 위해서 강압적으로 그림자를 없앤다고 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림자를 의식 세계에 받아들임으로써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갈등을 극복하는 용기가 필요하다.15)   수필에서 자신을 벗는 일도 그림자를 의식 세계로 불러내어서 인격화시키는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방식의 글쓰기는 가장 바람직한 수필 쓰기가 된다. 진정성에서 어느 장르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성장소설이나 자전소설의 방법을 좇아서 즉, 자기 성찰에 의해서 새로운 인격체로 재탄생하는 문학의 장르에 가장 적격이다.   서양에서는 하나의 장르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성장소설, 자전소설이 우리의 문학에서는 아직까지도 미답의 분야이다. 수필의 장르적 특성을 살려서 우리가 선점한다면 새로운 활로가 될 수 있다.           4. 자서전과 수필       자서전의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 필립 르죈은 이렇게 말하였다.   “한 실제 인물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소재로 하여 개인적인 삶, 특히 자신의 인성(人性=personality)의 역사를 중심적으로 이야기한, 산문으로 쓰인 과거 회상형의 이야기이다.”16)   이 정의는 거의 사전적 권위를 가질 만큼 일반화되어 있다. 이 규약에 따른다면 자서전은 산문으로 쓰여진 이야기 형태이다. 다루어진 주제는 한 개인의 삶과 그 개인이 오늘의 인성으로 형성되기까지의 역사이다. 책을 쓴 저자는 자서전의 화자와 동일 인물이어야 한다. 화자는 자서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회상 형식으로 쓰여진다.   자서전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 내면 문학의 갈래에는 회고록, 전기, 한 개인의 삶을 그린 자전적 사소설, 자전적 시, 내면 일기, 자기 묘사 이야기 그리고 수필이 있다. 필립 르죈의 분류에 의하면 수필과 자서전 사이에는 서로 전이가 가능할 만큼 깊은 연계가 있다. 자서전을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내면 문학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저자와 화자, 그리고 주인공 사이에 동일성이 성립해야 한다는 것이 필립 르죈의 주장이다. 말하자면 이 규약에 가장 근접해 있는 장르가 수필인 것이다. 수필 형식으로 자서전을 쓰는 것에 걸림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자서전의 규약에서 명시하고 있는 이야기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자. 소설이든, 자서전이든, 이야기에는 하나의 사건이 통일성을 이루면서 그 나름대로 하나의 구조 속에 수용되어 있다. 이 때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이야기 속에 나오는 ‘나’라는, 혹은 ‘주인공’은 동일인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장르가 달라진다.   자서전에서도 화자인 나는 이야기 속의 나(주인공)를 서술하므로 긴장 관계가 성립한다. 이 때의 화자인 나는 이야기 속의 나를 질책도 하고, 회한도 토로하므로 주관성이 나타나서 담론을 형성한다. 자서전을 설명하는 이 말을 수필의 기법으로 그대로 따른다면 수필도 훌륭한 자전 수필이 된다. 수필 쓰기도 자서전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삶을 과거 회상형으로 서술하면서 화자의 주관을 깊이 새겨 넣기 때문에 ‘자아의 글쓰기’인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할 때는 어떤 순서로 하여야 할 것인가. 거의 대부분은 태어날 때를 시발점으로 하여 이야기를 연대기식 순서로 전개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유년기를 정확히 기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더라도 심층심리 학자들은 대부분이 부정확할 뿐더러 왜곡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하더라도 우리는 기억이 이끄는 대로 자신이 살아온 인생 행로를 돌아다니면서 여행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의 글쓰기에는 현재와 회상 속의 과거가 관계를 맺으면서 극적 요소를 형성한다. 왜냐면 우리의 삶을 이야기할 때는 소설적 형식이 모델이 되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과 사건의 극적 효과가 미묘한 관계를 형성하므로 우리의 글쓰기도 자연스레 관계를 부각시키는 방향이 된다.   연대기적 서술이거나 극적 효과를 노리는 소설적 구성이거나 간에 궁극적으로는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위에서 말한 관계 형성이란 말도 그런 뜻이 들어 있다. 사람이 긴 세월을 살아온 삶이 하나의 선으로 그을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자서전의 의미 생산에 문제점으로 나타난다. 클로드 모아는 이의 해결책으로 자신의 자서전 ‘나, 나는(Moi je)’에서 연대기적 기술의 순서를 부분적으로 뒤집는 방법을 선택하였다.17)   또 다른 실제의 예를 들면 미하일 조르첸코는 그의 ‘해 뜨기 전’에서 역연대기 순서로 서술하였다. 현재를 시발점으로 하여 장년기로, 청년기로, 유년기로, 그리고는 탄생에 관한 추억까지도 기술하였다. 사실상 탄생의 기억을 추억으로 불러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자서전에 이런 내용을 기술하였다면 자서전 쓰기에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 주는 것이다.   이런 형식의 자서전은 수필 쓰기의 방식이 훨신 더 유리하다.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지 않는 수많은 사건을 회상 형식으로 불러내서 단편적인 글들을 쓴다. 물론 단편적인 글들이라고 하여도 작가는 하나의 흐름을 기획하고, 구성하여 글쓰기를 하여야 한다. 그래야만이 의미를 생성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필은 하나씩, 하나씩의 단편적인 기억들로 이루어진다. 과거에 묻혀 있는 삶의 궤적을 쫓아가면서 파편화된 여러 기억들을 짜깁기하듯이 재생해 낸다. 이런 경우에는 자서전에서 요구하는 연대기적 서술이라는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수필이 갖는 자유로운 구성으로 글쓰기를 할 수 있다. 자전 수필적 글쓰기에 의미 생성을 위해서 시간의 흐름도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다.   자서전이 요구하는 또 하나의 규약은 총체성이다. 자기의 인생을 관통하여 흐르는 통일된 의미를 기술해야 한다. 자기의 인생을 자기의 이름으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의미를 만들어내어야 한다. 파편화된 수필의 글쓰기에서도 전편에 일관되게 흐르는 의미를 담아내어야 한다. 그것은 오늘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회상의 형식이므로 그때의 삶이 지금의 가치관으로 반드시 긍정적인 것일 수는 없다. 과거의 자신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자신을 설명해야 한다. 자서전에서 과거란 과거에 머물러서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나를 만들어 내는 원인이 되므로 오늘의 나에게 귀속되어지기 때문이다. 18)   따라서 과거를 진술하는 방법에는 자전적/자기비판적인 이중의 양상을 띤다.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내면을 고백할 때는 이미 그 안에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이 담겨져 있다. 수필이 비록 내 인생에서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하나의 사건으로 구성된다고 하더라도 긍정도 하고, 비판도 하므로 저자의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의미를 담아낼 수 있다.   성장을 통해서 형성되는 인간의 내면은 일의적인 내용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다양한 내면을 함유한다. 이와 같은 다면성을 통일을 이루도록 종합하는 일이 쉽지 않다. 결국에 자기비판적인 글쓰기를 하므로 통일성을 갖도록 종합하는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 종합성이란 자서전의 주인공이 살아오면서 형성된 현재의 가치관이 중심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줄거리로 연속하는 자서전의 글쓰기 방식보다는 자전 수필적 글쓰기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자전적 수필은 성찰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었음을 확인해 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자서전/자전 수필 읽기에서 저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고, 감추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독자들은 저자의 진술을 마냥 순진하게 믿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에 의심을 가질 때는 사실이 아니더라도 저자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고 믿는다. 독자들이 의심을 가지는 것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다. 사소한 문제이겠지만 글을 너무 정성스럽게 다루어도 독자들은 무언가를 의심한다. 기교가 느껴지면 내용조차도 인위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글에서 너무 짙은 서정성으로 독자에게 감정의 폭발을 일으키는 경우에도 진실성에 의심을 일으킨다. 왜냐면 감정은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은 문장의 직접적인 내용만이 아니다. 언술의 행위가 감정을 일으키는 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글쓰기와 장식적인 수식어들이 난무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작가의 목소리가 우렁차거나 애조를 띠는 것도 독자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그렇다고 하여 독자들은 작가의 의도에 고분고분하게 따라 주는 존재는 아니다. 꼼꼼히 살피면서 의심을 한다.   작가와 주인공이 동일하다는 자서전의 절대적 규약은 진실이라는 진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규약을 어기면 자서전의 의미는 상실한다. 자서전 쓰기에 절대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조건은 바로 여기에 있다. 소설로는 결코 이루어내지 못하는 진정성을 수필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5. 몇 가지 자전 수필적 글쓰기       전인권의 『남자의 탄생』   “먼저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가족 관계를 꼼꼼히 살펴보기로 하였다. 나를 알려고 할 때 ‘나’ 자신은 이러하다 저러하다고 하는 말을 아무리 많이 해도 소용이 없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그런 말이 정확할 수 없다. 그래서 나와 가장 가깝고, 나를 길러 준 나의 부모가 어떤 사람인가, 그분들은 나를 어떤 방법으로 길렀는가, 하는 사실을 알아보기로 하였다.”19)   전인권은 전인권이라는 오늘의 성인이 된 한 남자로 만들어지기까지를 짚어 보았다. 먼저 부모와 맺어져 있는 가족 관계에 시선을 주었다. 전인권은 자신의 자서전적 책의 부제로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과정’이라고 이름 붙였다.   프로이트 이론에 의하면 한 사람의 자아(ego)가 형성되는 기제는 ‘동일시’이다. 부모는 애증이 교차하면서 동일시의 절대적인 대상이 된다. 말하자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심리적 갈등을 심하게 겪으면서 인격체를 가진 한 사람의 인간으로 탄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인권은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형성되는 인간관계를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나의 삼각관계라고 하였다.   전인권이 자서전적 책으로 출판한 ‘남자의 탄생’은 프로이트 이론에 입각하여 자신의 탄생 과정을 살펴본 내용이다. 따라서 자신을 알기 위해서 부모를 알아보려 한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부모의 알기가 아닌 부모와 자신과의 관계 맺음에서 자신의 내적 심리 작용에 의해서 정체성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글쓰기의 형식이 너무 이론에 충실하려는 논리성 때문에 수필이라는 문학적 양식으로 분류하기에는 마땅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수필쓰기에서 나의 진정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심층심리의 이론도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배울 만하다.    최인호의 가족소설 『가족』   최인호가 오래 전에 샘터지에 가족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인 ‘가족’ 시리즈의 글을 발표하였다. 어머니와의 관계, 아내와의 관계, 자녀들과의 관계를 수필적 기법으로 서술한 소설이었다. 소설이면서도 수필쓰기 양식을 취하였기 때문에 자전수필의 좋은 보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읽어 보면 최인호라는 자신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없다. 가족 간의 긴장 관계를 의식적으로 표현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평범한 일상사를 수필 형식을 빌어서 소설을 구성하였다. 특별한 긴장감이 흐르지 않는 잔잔한 흐름의 가족 관계는 수필적 형식이 가장 적합하구나 하는 느낌이어서 여기에 소개한다. 자전수필도 이런 양식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있다면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밤 열시 이후 걸려 오는 전화는 모두 딸아이의 전화였고, 딸아이의 전화는 밤 한 시건, 두 시건 계속 이어져서 방금 만나고 온 친구들과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계속 히히 헤헤 호호 야단들이다. 나는 원래 전화로 수다 떠는 일은 좋아하지 않는다. 아내가 친구들과 전화로 이야기하는 것도 싫어해서 아내는 전화를 걸 때마다 내가 없는 빈방으로 도망쳐서 눈치를 보면서 도둑전화하는 것이 보통인데, 밤이면 밤마다 걸려 오는 딸아이의 전화에 정말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서클 선배라는 남자 친구들도 전화를 걸 때면 ‘저는 누구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인사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대뜸 “다혜 바꿔 주세요” 하고 용건부터 말하는 것이 보통이니 나는 자연 비위가 상하고 밸이 꼴리고 아니꼬워서 내가 뭔가, 전화 바꿔 주는 교환수인가 하고 스스로 자신에게 묻곤 하였었다.   두고두고 보다가 한번 밤늦게 걸려 온 전화를 받자마자 분통이 터져서 “야 너는 최소한의 예의도 없느냐, 너는 에미 에비도 없느냐, 나는 이 집의 아버지이자 가장이지 전화를 바꿔주는 교환수가 아니다.” 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는데 그날 밤 나는 딸아이의 항의에 그야말로 묵사발이 되어 버렸다. 아버지는 야만인이고, 교양도 없는 독재자이며, 이해심도 없는 옹고집에 전형적인 구세대의 낡은 유물이라는 것이다.       최인호가 소설 형식을 빌려서 가족 이야기를 쓴 글이다. 비록 소설이긴 하여도 세대 간의 갈등과, 시대에 밀려나는 자신의 처지를 잘 나타낸 글이다. 그러나 내 가족들과의 관계를 진솔하게 표현하는 문학 형식으로는 수필이 가장 적합하다고 믿는다. 가족 간의 갈등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시대가 반영되고, ‘나’라는 인격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위의 글은 수필 형식을 빌린 소설이다 보니 진정성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소설 형식을 빌린 수필로 표현할 수도 있다. 밀란 쿤데라의 많은 소설이 수필 형식을 빌리고 있다. 이는 소설이라는 허구에 수필의 장점을 접목하려는 시도이다. 반대로 수필에 소설 형식을 빌림으로써 갈등이나 긴장감을 더 높일 수도 있다. 최인호의 ‘가족’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므로 주인공이 나이더라도 나의 내면까지 보여 주는 데 한계가 느껴진다. 전화라는 하나의 사항을 두고 가족 간의 시선에 차이가 있다. 이를 자신의 내면에 투영하여 자아를 표현하는 형식의 글로 쓸 수 있다. 자전수필을 바로 이런 형식의 글로 쓸 수 있다.       고흐의 『영혼의 편지』   또 하나의 유형으로 나는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를 들고자 한다. 1881년부터 죽을 때인 1890년까지 쓴 편지가 668통이나 된다고 한다. 테오는 그의 동생이었지만 그의 삶에서는 인생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그의 편지에는 그의 내면 즉, 영혼까지 담겨 있으므로 우리나라에서 그의 편지 중 일부를 모아서 『영혼의 편지』라는 책으로 출간하였다.   고흐가 쓴 편지는 허구가 아닌 사실이고, 그의 내면을 드러내므로 바로 수필이다. 앞에서 소개한 남자의 탄생이나, 가족보다는 수필 형식에 가장 충실한 글이다. 고흐의 편지는 인간 내면을 가장 진솔하게 표현하였으므로 수필적이다.   고흐가 서른 살 나이일 때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창녀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동거를 하였다. 가족들의 반대가 심하였다. 이 때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를 보면 고흐의 내면이 잘 드러나 있다.       내가 시엔과 이렇게 지내고 있는 이상 결혼이라는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겠지. 비록 우리 가족은 그렇지 않다 해도 아버지가 결혼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와의 결혼에 반대하지만, 결혼도 하지 않고 사는 일은 더 나쁘게 보시겠지. 아마 시엔과 헤어지라고 하실 거다.   이제 나도 이마에 주름이 진 30살의 남자이다. 게다가 얼굴에 가득한 잔주름은 40대처럼 보이게 하고, 손에는 굳은살이 가득하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나를 어린애로만 보신다. 1년 6개월 전에 띄운 편지에서 아버지는 “이제 너는 첫 번째 청춘을 맞고 있다.”라고 쓰셨다. 과거에도 여러 번 들었던 터라 조금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다.20)       최인호의 가족소설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수필은 바로 이런 형식의 글이어야 한다. 고흐는 아버지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와의 갈등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고흐의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양식에는 일기가 있다. 안네의 일기를 꼽을 수 있다. 사춘기의 문을 두드리는 한 소녀의 순수한 내면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수필은 개념적 정의에 이미 내면의 표출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내면을 감추는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독자의 확보에 실패하였다고 생각한다.           6. 나가면서, 그리고 자전수필       시간의 흐름 속에 우리는 나름대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을 실행하므로 인생이란 결코 무의미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다. 그 의미를 굳이 찾으려 하지 않을 때만이 무의미한 것이다. 수필은 바로 그 의미를 찾는 하나의 방법이 되고 있다.   자전은 개인사이다. 개인사라고 하여 사회와 문화와 역사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자신이 만들어지기까지 숱한 충돌과 갈등과 고뇌를 겪으면서 만들어진 결과물인 것이다. 자전수필은 그러한 자신을 역사적인 맥락을 갖고 기술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라고 하면 개인의 삶은 묻혀 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거대한 사건만이 있고, 거시적인 시간의 흐름만 있을 뿐이다. 역사적 사건 속에 호흡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개인의 존재는 망각되어 버린 것이 개인사가 실종되어 버린 이유이다.   우리는 우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회적인 가치관과 부딪히는 것을 두려워하여 표현을 포기하면서 살아왔다. 역사란 수많은 개체들이 모여서 만들어 내는 총체적인 흐름이라고 할 때 개인사인 자서전이나, 자전수필은 역사에서 중요한 몫을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쓴 수필은 자서전이란 장르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한 개인의 단편적인 느낌이나, 한순간의 사건들을 쓰므로 자신을 파편화하여 표현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파편화되어 있는 자신의 존재를 일관성 있는 가치로 연결시키는 작업을 하여 자전이라는 장르에 편입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다.   서구의 문학 장르에서는 이미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자서전 분야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씨를 뿌리는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얼른 생각나는 것이라고 백범 일지 정도이다. 이 분야에 수필이 자전수필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선점하자는 것이 이 글을 쓴 의도이다.   이러하기 위해서는 수필의 장점인 진솔한 내면의 고백으로 진정성을 확보하여야 한다. 그러면서 알을 깨고 새롭게 태어나 오늘의 자신이 된 과정을 진솔하게 표현하여야 한다. 침체의 늪에 머물고 있는 수필이 뻗어 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면서 나름대로 찾아낸 길이 자전수필이라는 생각이다.      
456    수필의 허구문제를 알아보다(8) 댓글:  조회:2326  추천:0  2017-05-05
수필과 다른 문학 장르의 차이점 문학은 언어를 도구로 하여 작가 자신의 감정이나 사고(思考), 체험, 표출하고자 하는 것 등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표현하는, 예술 행위이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만 본다면 소설이나 시, 희곡, 그리고 수필 등은 같은 문학 행위로서 다같이 문학의 범주에 속한다. 더욱이 이 중에서 시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산문 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더욱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소설과 시, 희곡, 수필 등은 분명히 각자만의 고유 영역을 갖고 있고 나름대로의 특징을 각기 지닌, 서로 다른 형태의 문학 장르이다. 이 점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구분되어 온 것이고,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소설과 시, 희곡, 수필 등이 같은 문학이면서도 그 형태가 서로 다르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과 시, 희곡, 수필 등이 좀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다르며 각기 어떤 특징이나 특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차이점이나 특성 등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거나 혼동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특히 소설과 수필의 차이점이나 각기 다른 특성을 잘 구분하지 못하거나 혼동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이것은 아마도 소설과 수필이 같은 산문 형식을 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얼핏 보기에는 비슷한 면도 있어 보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소설과 수필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마치 사과와 감이 얼핏 보기엔 색깔이 비슷한 것 같아도 이들은 서로 본질적으로 분명히 다른 과일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특히 수필은 작가 자신의 체험이나 생각, 또는 사상이나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문학 행위이다. 즉 수필은 허구 세계가 아닌, 사실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근래에 와서는 수필에서의 허구성 문제를 놓고 수필가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고, 일부에서는 수필에서 어느 정도의 허구는 용납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그러나 수필에서는 근본적으로 허구 세계가 용납되지 않고 있다. 또 수필에서의 허구를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견해도 수필에서의 허구는 문학으로서의 예술성과 극적 효과 등을 위해 꼭 필요한 경우에만 극히 제한적으로 허용하자는 것이지 소설에서처럼 무한정의 허구 세계를 용납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수필과는 크게 다르게 무한정의 허구 세계가 용납된다. 작가의 체험이나 생각, 또는 사상이나 가치관 등을 바탕으로 얼마든지 허구와 가상의 세계를 그려내고 가공 인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소설이다. 또한 이러한 허구와 가상의 세계, 가공 인물 등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내고, 이를 통해 작가의 사랑이나 의도를 표출하고 창조적·예술적 문학 행위를 하는 것이 바로 소설의 기본 형태이다.   그러면서도 소설에서는 그 허구와 가상의 세계를 마치 그것이 현실인 것처럼, 또는 작가 자신이 직접 체험한 얘기를 사실 그대로 그려놓은 것처럼 묘사하는 수가 많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소설의 기법이자 특징이며, 또 그래야만 소설로서의 가치가 있고 독자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소설에서의 이러한 허구와 가상의 세계를 실제 상황으로 착각하고, 자신의 체험이나 생각 등을 사실 그대로 묘사한 수필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하는 수가 있다. 특히 소설에서는 1인칭 수법으로 '나'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수가 많은데, 소설에서의 이 '나'를 그 소설을 쓴 작가 자신의 모습이나 생각, 또는 체험을 그대로 그려놓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나'의 형식을 빌어 쓴 소설과 작가 자신의 모습이나 생각 등이 그대로 그려진 수필에서의 '나'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즉 소설 속의 '나'나 수필 속의 '나'를 모두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여 소설이나 수필을 비슷한 문학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람들의 숫자는 아주 적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소설 속의 '나'와 수필에서의 '나'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소설 속의 '나'는 거의 대부분 소설의 극적 효과와 사실감 등을 높이기 위해 도입된 허구의 '나'일 뿐이다. 반면에 수필에서의 '나'는 어디까지나 작가 자신의 모습과 생각 등이 그대로 투영된, 실제 모습의 작가 자신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소설 속의 '나'는 작가 자신의 인격이나 가치관, 생각, 성격, 또는 교육 수준이나 교양 정도 등과 무관하게 얼마든지 작가의 의도대로 그려질 수 있지만, 수필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수필에서의 '나'는 어디까지나 작가 자신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의 인격이나 가치관, 생각, 성격 또는 교육 수준이나 교양 정도 등에 따라 사실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소설 속의 '나'는 저속한 말이나 욕설 따위를 마구 쓰는 등 용어 선택이나 언어 표현 등에 거의 제약이 없다. 그러나 수필에서의 '나'는 곧 작가 자신의 모습이며 작가의 인격이나 품위 등을 나타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같은 표현에는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으며, 용어 선택이나 언어 표현 등에 작가 스스로 신중을 기하기 마련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수필에서의 '나'가 소설 속에서의 '나'처럼 저속한 표현이나 욕설 따위를 마구 쓴다면 독자들은 그 수필을 쓴 사람의 인격이나 품위를 아주 천하게 여길 것이다. 또 수필에서의 '나'가 소설에서의 '나'처럼 허구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거나 그 내용이 허구적이라면 독자들은 그것도 사실 그대로 믿어 버리기 쉽다.   소설과 수필과의 이러한 관계와는 달리 시와 수필은 그 형태부터가 눈에 띄게 달라 보이기 때문에 이를 서로 혼동하거나 동일시 하는 사람들은 적다. 특히 시는 수필에 비해 대체로 분량이 적고 몇 구절의 짤막한 시구로 표현되는 수가 많기 때문에 구분하기 용이한 편이다.   그러나 근래에는 시의 분량이 늘어난 것들도 적지 않고, 산문 형식처럼 쓰여진 시들도 있다. 장편시나 서사시 같은 것들 중에는 수필보다도 그 분향이 훨씬 많은 것들도 흔히 보게 된다.   다라서 이러한 시들과 수필을 자칫 혼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더욱이 최근에는 시인이 쓴 수필이 많이 발표되고 있는데, 이런 수필 중에는 시적인 표현과 시적인 형식이 자주 인용되어 그것이 시인지 수필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렵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소설과 수필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시와 수필의 관계도 분명히 다른 것이다. 특히 시는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 생각 또는 체험 등을 사실 그대로 표현하기 보다는 무한한 상상력과 허구적인 요소까지도 가미하여 재구성, 또는 재창조하여 표현하는 수가 많으며, 시적인 언어의 선택과 배열, 구성 등이 독특하기 때문에 수필과는 같을 수가 없다.   또한 희곡은 줄곧 대화체의 문장으로 이어지며, 주로 대화와 행동의 표현 묘사로 쓰여진 문학 장르이기 때문에 그 형식에서부터 수필과는 쉽게 구분괸다. 특히 수필에서는 가능한 한 대화체의 문장은 절제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대화체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희곡과는 더욱 잘 구분된다.   '수필'이란 이름으로 쓰여진 글등 중에는 더러 그것이 소설인지 희곡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화체의 문장을 많이 쓴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본질적으로 수필이라고 할 수 없다. 수필은 어디까지나 산문 형식의 묘사로 표현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수필은 소설이나 시, 희곡 등 다른 문학 장르와 분명히 다른 것이며, 나름대로의 영역과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 이 점을 망각하고 소설이나 시, 또는 희곡 등의 특성과 마구 혼합하여 수필을 쓴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죽도 밥도 아닌, 이상한 형태의 잡문이 되고 만다.
455    수필의 허구문제를 알아보다(7) 댓글:  조회:2318  추천:0  2017-05-05
수필과 상상에 대하여   李正林   1. 서두   이라는 논문에서, 본인은 "수필에서 창조라는 말은 허구와 동의어(同義語)이다. 수필은 결코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구절에 대하여 김병규(金秉圭) 선생은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원용(援用)하면서 '창조'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혀 주었다. "상상력이 문학을 만드는 측에서도 문학을 읽는 측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누구도 의심치 않을 것이다. 문학의 핵심에 상상력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상상력이 예술의 창조와 수용에 소중하다고 말하기에서부터, 거길 뛰어넘어 상상력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불가결한 기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선생은 이렇게 덧붙였다. "얼핏 보면 상상력은 소설의 허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상상력이 예술의 창조에도 수용에도 중요하다고 말한 것을 우리는 경청해야 할 것이다. 오에는 '자연에 대하든 무엇에 대하든, 대상을 향하여 마음이 열려가는 것, 그 근본의 힘이 상상력이다'라고 말한다. (...) 그런 상상력에서 비로소 '창조'가 나온다. 수필에서 허구는 용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필에서도 허구가 아닌 창조는 용인되어야 하지 않을까. 수필가가 일상 생활 속에서 여느 사람이 여태껏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썼을 때 그것은 하나의 '창조'라 할 수는 없을까."   본인은 김병규 선생의 이 글을 대했을 때, 애정 어린 지적에 감사하면서 또한 앞뒤 전후를 배제하고 어느 한 문장만을 가지고 해석한다면 본의 아니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독자들이 선생의 이 글을 읽으면, 본인이 상상조차 수용하지 않는 편협한 수필관을 가진 것으로 오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이 글은 다분히 그런 해명성 동기에 의하여 수필과 상상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펴 보일 수 있는 장(場)으로 삼고자 한다.   2. 창조와 상상   앞의 논문에서 "수필에서 창조라는 말은 허구와 동의어이다. 수필은 결코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한 배경에는 전제된 이론이 있었다. 문제의 그 문장은 에서 두 장르의 본질을 다루는 두 번째 항목에 들어 있다. 본인은 그 항목에서 수필의 본질은 체험이요 소설의 본질은 허구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일부 논자들은 '수필문학의 창조적 지평을 확장할 수 있다면 이를 (허구) 거부할 이유가 없다'(鄭震權)고 하면서, '허구가 있음으로써 사람의 정신세계는 풍요로워지고 생활의 폭은 넓어진다'(孔德龍)고까지 주장한다"는 것을 전제 이론으로 제시하였다. 이들 허구론자들에게 수필의 '창조적 지평'이란 곧 허구의 도입을 뜻한다. 그러므로 사실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수필에서 '허구적 창조'는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는 것이 그 글이 말하고자 한 논지였다. 따라서 본인은 그런 자신의 논지를 설득시키기 위해 성급하게 "수필에서 창조라는 말은 허구와 동의어이다. 수필은 결코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을 했다. "수필은 소설처럼 허구를 통하여 없는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도 새로울 것이 없는 우리의 실제체험 속에서 작가의 눈으로 새롭게 선택되는 소재를 가지고 형상화되는 것이다."   "실제체험 속에서 작가의 눈으로 '새롭게' 선택되는 소재를 가지고 형상화되는 것이다"라는 문구에서 '새롭게'라는 뜻은 '소재의 의미화'를 말한다. 수필은 결코 사실의 기록도 아니요, 사실의 기록에만 머물러서도 안 된다. 소재의 의미화는 대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자 철학이다. 그리고 그것은 체험과 사실의 재창조라 할 수 있다. 김병규 선생이 앞의 글에서 "수필가가 일상 생활 속에서 여느 사람이 여태껏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썼을 때 그것은 하나의 '창조'라고 할 수는 없을까" 하고 제시한 그 창조와 바로 동의어인 것이다. 수필은 사실의 의미화를 통하여 체험을 재창조해 낼 때 비로소 사실의 기록문이 아닌 문예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역사가 기억에, 철학이 이성에 의지할 때, 문학은 상상(想像, imagination)을 바탕으로 전개된다"고 했다. 여기에서 상상이란 무엇인가. 베이컨은 "상상은 사실의 세계에 매이지 않고 사실들을 마음대로 변형시켜 사실보다 더 아름답게, 좋게, 다양하게 만들어 즐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영국의 조지프 에디슨은 이라는 평론에서 상상을 이렇게 정의했다. "상상은 감각적 체험을 심상으로 파악하는 능력일 뿐 아니라, 감각의 대상이 없을 때에도 머리 속에 심상을 만들어 보고, 또한 여러 심상들을 융합하여 전혀 새로운 심상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 즉 상상은 사실이나 실재의 부족한 것을 완전하게 꾸밀 수 있는 일종의 창조적 능력"이라고 하였다.   김우종(金宇鍾) 씨는 한국수필의 문제점 중의 하나로 "상상력의 공급 부족으로 인한 미적 감동의 결핍 현상"을 들었다. 수필에서 상상이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수필은 허구의 문학이 아니라 체험의 문학'이라는 본질을 편협하게 해석한 때문이다. 체험은 허구가 아니다. 수필 속의 상상은 그 체험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수필의 상상은 허구가 아니다. 그러나 수필의 상상이 허구가 아닌 좀더 분명한 논거는 수필에서는 상상이 상상임을 밝힌다는 점이다. 소설의 구성도 체험적 요소와 상상으로 짜여져 있지만, 소설 속의 상상은 상상임을 밝히지 않는다. 따라서 소설에서는 실제체험에 해당되는 부분까지 허구라 하듯이, 소설에서의 상상은 상상이라 하지 않고 허구라는 말로 대체된다. 그러나 상상이 상상임을 밝히는 수필에서의 상상은 허구라 하지 않는다. 수필의 "체험은 내적 체험까지를 포함하고 그 내적 체험은 상상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상상을 곧 허구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 허구는 허구이고 상상은 상상인 것이다." 수필에서의 상상은 허구의 도입이 아니라 수필을 좀더 문예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한 수법이자 기법일 뿐이다. "(수필 쓰는) 우리는 사실 과정을 지킨다. 그러나 수필이 단순한 사실 기록에 머물 수 없다. 그 사실이 감동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 감동적인 전달을 위해 예술적인 표현을 개발해야 한다. 그 예술적인 표현의 한 방편으로 '상상'을 마다하지 않는다."   3. 작품의 실례   수필에서 상상이 훌륭하게 작품성을 얻은 예는 찰스 램의 이다. 이 수필에는 '하나의 환상'이라는 부제목이 붙어 있다. 이 부제목에서 이미 이 수필은 실제의 이야기가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아들딸을 앞에 놓고 증조 할머니와 큰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고, 세상 떠난 아이들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사이에 아이들이 눈앞에서 멀리 사라진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 환청을 듣는다.   "우리는 앨리스의 아이가 아니오, 당신의 아이도 아니오.(...) 앨리스의 아이들은 바트럼을 아버지라 부른다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오, (...) 그저 꿈이라오. 우리는 단지 존재할 수도 있었던 것에 불과할 뿐이오."   여기에서 독자들은 잠시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램은 독자를 혼란 속에 오래 놔두지 않는다. 이렇게 곧 다음 문장을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바로 잠을 깨 총각 신세인 내가 안락의자에 앉아 잠이 들었던 거다."   램이 이 문장을 달지 않았다면, 이 글은 콩트다. 왜냐하면 램은 어린아이가 없는 독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구론자들은 이 을 수필에서 허구를 도입해도 된다는 텍스트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 허구라는 용어 사용은 적합치 않다. 꿈이었음을 밝히지 않았다면 허구다. 그러나 밝혔기 때문에 그것은 상상이 된다. 이 글이 수필로 장르 구분이 될 수 있는 열쇠는 바로 상상임을 밝혔다는 데 있다.   상상임을 밝히지 않아 결과적으로 독자를 기만한 꼴이 되어버린 예로는 차배근(車培根)의 를 들 수 있다. 이 글은 군에서 보내 온 아빠의 편지를 아가에게 들려주면서, 기합을 받는 남편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눈시울을 적셨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글이 주로 가정주부들이 투고하는 신문의 가정란에 실리자, 같은 처지에 있는 독자들로부터 백여 통의 편지를 받았다는 후일담이 공개되면서, 이 글은 일약 허구론자와 비허구론자 사이에 상반되는 의미의 텍스트가 되었다. 그 이유는 이 글을 쓴 사람이 남편을 군에 보낸 젊은 새댁이 아니라 대학교 4학년생인 청년이었다는 데 있었다. 허구론자들은 허구로 쓴 이 글이 그만큼 좋은 반응을 얻었다면, 수필에서도 허구를 도입해 볼 만하지 않겠느냐 그 가능성을 타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쓴 이가 주부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했어도 독자들의 반응이 그렇게 컸을까는 왜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일까. 그 글은 글재주가 있는 남자 대학생이 어디까지나 상상으로 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상상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수필이라고는 볼 수 없고, 동병상련을 느낀 많은 독자들을 우롱하고 기만했다는 비난을 떠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지은이가 그 글을 콩트로 썼다면 상상은 허구가 된다. 그리고 콩트의 상상은 상상임을 밝힐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글을 수필로 썼다면 그것이 상상임을 밝혀야 한다. "상상은 허구를 포함한 모든 구상적인 생각의 전부"이지만, 수필의 상상과 소설의 허구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본인의 수필에서 상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두 편을 소개해 볼까 한다. (1992)이라는 글에서는 버스에 붙어 있는 사람 찾는 광고 사진을 보며 실종자를 상상해 보았다.   이 사진을 찍었던 어느 해 봄, 어쩌면 사진 속의 남자는 아이들과 함께 화단에 꽃씨를 심었을지 모른다. 그는 모종삽을 들고 채송화와 나팔꽃 같은 순박한 꽃 씨를 흙 속에 묻으면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꾸어질 그의 화단을 머리 속에 그려 보았으리라. 그리고 그 옆에서 잔시중을 들고 있던 그의 아내는 고운 흙에 촉촉이 물을 뿌리면서, 행복이란 결코 크고 화려한 것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을 것이다.   봄볕이 따스하던 어느 날, 드디어 그들의 화단에는 다투듯 꽃들이 피어났다. 이른 봄 정성어린 손길로 심었던 씨앗들이 그 가정에 기쁨을 선사한 것이다.   남자는 작은 사진기를 가지고 그 꽃들 앞에서 가족의 사진을 찍어 주었으리라. 처음에는 꽃보다 예쁜 자기 아이들을 화단 앞에 세웠을 것이다. 다음에는 그 아이 들을 양팔에 안은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을 찍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다가 문득 그 자신도 사진이 찍고 싶어졌을까. 그는 배우처럼 멋진 포즈를 취하고 꽃 앞에 섰다. 하늘을 쳐다보면 더 멋있지 않을까. 팔을 늘어뜨리기보다는 팔짱을 끼 는 편이 더 근사해 보이겠지. 그렇게 남자는 자기 연출을 하면서 화단 앞에 섰고, 그의 아내는 그런 그를 렌즈 속으로 들여다보면서 남편이 아닌 행복을 찍었을 것 이다.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그 절박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광고 전단 속의 사진 은 그렇게 평화스럽게만 보였다. ―   다음은 국가적인 경제 위기를 맞이하여 많은 가장들이 실직을 당한 오늘의 현실을 상상을 통한 상징적인 수법으로 그려보고자 한 (1998)이다.   아버지들은 그러고 싶어도 감히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걱정스러워하는 아내 의 눈길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고,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릴 것 같은 아이들의 얼굴을 차마 마주보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아니면 지하도 맨바닥에서 신문지 한 장 깔고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이제까지 달려온 숨가쁜 세월, 그것은 누구 를 위해서였던가.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였다면, 그들은 아마 일찌감치 그 고된 삶 의 짐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한 여자를 만나 아이 낳고 기르면서, 그들을 위해 사는 것이 평범한 사람이 가는 정도(正道)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를 가기 위해 자신은 기꺼이 모든 것을 버렸다. 하고 싶은 일도, 뱉고 싶은 말도, 모두 버리고 참았다. 밥값을 내지 않으려고 제일 늦게 구두끈을 매는 좀생원이 되었어도, 그런 비굴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상 사(上司)의 모욕적인 말도 저녁때 한잔 술로 풀어내면 귀는 다시 깨끗해졌다. 내 가정만 지킬 수 있다면, 내 아이들만 잘 기를 수 있다면 아비의 자존심 따위가 무 슨 대수랴 싶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아버지들이 의욕을 상실했다. 날로 야위어 가는 것은 육체뿐만 이 아니다. 육체를 지탱케 해주는 것은 의욕이요 희망인데, 그것이 없는 사람에게 찾아드는 것은 무기력일 뿐이다. 무기력은 정신을 갉아먹는 좀벌레와 같다. 이젠 더 이상 체면이라는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무료배급소에서 밥을 타 먹는 두 손도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생존만이 절체절명의 과제일 뿐이다. ―   4. 결 미   수필은 산문이다. 그러나 수필이 감동을 얻기 위해서는 문예적인 산문이 되어야 한다. 문예적인 산문은 문예적인 요소를 지닌다. 문예적인 요소란 비유·상징·상상 같은 표현상의 기법을 말한다. 시(詩)에서만 비유와 상징이 동원되는 것은 아니다. 소설에서만 상상이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수필은 이 모든 표현법을 포용하되, 다만 그 정도가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 또 어디까지나 산문의 성격에서 일탈되지 않도록 이를 자제해야 한다. 이 중용의 자세만 잃지 않는다면, 수필에서 상상은 사실체험에 윤기를 주고, 형식의 다양성을 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표현 기법의 하나라 할 수 있다.     李正林. 《한국수필평론》, 서울: 범우사, 1998. 金秉圭. , 《수필공원》, 1998. 여름. 李商燮. 《문학비평용어사전》, 서울: 민음사, 1976. 金宇鍾. , 《隨筆公苑》,1997. 겨울. 許世旭. , 《수필문학론집》2, 서울: 수필문학사, 1994. 6. ================= =================                                      수필은 말맛으로 읽는다                                                                                                                                 손 광 성   수필은 산문으로 씌어진다. 그러나 같은 산문인 소설이나 희곡에 비해 운문적 성격이 강하다. "치밀한 묘사나 장황한 서사적 언어보다는 간결하고 여운이 있는 문장을 택한다." "수필은 치고 빠지는 것"이라든가, "수필은 탕관에 넣고 끓이면 주옥 같은 시가 되고, 가마솥에 넣고 삶으면 대하소설이 된다"고 하는 비유적 표현들은 모두 수필의 언어가 시, 소설, 희곡과 다른 언어적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질펀하게 눌러 앉아 뭉그적거리는 언어가 아니라, 핵심을 때리고 다음 목표로 이동하는 순발력이 있는 언어이다. 수필의 언어는 "갈고-닦아-빛나게-가다듬어-선택한 언어, 다시 말해서 거친 언어가 아니라, 엘레강스한 언어이다."(18페이지)   "수필은 자기 고백의 문학"이라고 한다. 이것은 내용 제시 방법에서 수필이 다른 장르와 구별되는 특징이다. 시, 소설, 희곡에서는 작가는 뒤에 숨고 화자話者를 대리인으로 전면에 내세워 말을 하게 한다. 그러나 수필에서는 작가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독자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나 소설에서 서정적 자아 또는 화자는 작가와 동일 인물이 아니지만, 수필의 화자인 '나'는 작가와 동일 인물이다.   수필의 이와 같은 고백적 형식을 통해서 작가는 독자에게 친근감을 주고, 독자는 작가에게 신뢰를 보낸다. 소설 독자가 소설을 읽을 때, 허구라고 생각하고 읽는 것과는 다르다. 수필 독자는 이것은 사실이라고 믿으며 읽는다. 만약 '수필의 허구'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대로 수필도 허구적 서사를 원용한다면, 필자와 독자 사이에 형성된 이와 같은 친근감과 신뢰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필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결국 독자는 수필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될 것이다. 수필이 허구적 서사를 원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내용을 직접 제시하느냐 간접적으로 제시하느냐 하는 것은 수필을 시, 소설, 희곡과 구별하는 가장 뚜렷한 특성이 된다.(27페이지)     운율은 수필에 있어서도 중요한 요소이다. 심상은 생각과 느낌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여 회화적 효과를 낸다면, 운율은 문장에 탄력을 주어 낭창거리게 하여 음악적 효과를 낸다. 수필은 '말맛'으로 읽는다는 말이 있다. 말맛을 내는 것은 심상 쪽이 아니라 운율 쪽이다. 시에서 운율이 중요한 것처럼 수필에 있어서도 중요한 구실을 한다. 특히 시적 수필에서 그렇다. 이어령이 말한 소위 '나비의 언어'니 '춤추는 언어'니 하는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수필에서 운율이 주도적 역할을 맡게 해서는 안 된다. 운율이 주도적 역할을 하면 운문이 된다.수필은 어디까지나 산문이지 운문이 아니다. 따라서 수필에서는 논리적 구조가 주도적이어야 한다. 리듬은 어디까지나 종속적이어야 한다. 논리적 구조가 주도적 역할을 하느냐 운율이 주도적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산문과 운문이 나뉜다.(35페이지)     단어 선택에서 또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선택하려는 단어들이 서로 어느 정도로 잘 조화되느냐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말하려는 조화란 단어들의 계통, 또는 위계와 관용적 용법을 말한다. 단어는 추상적 기호이지만 그 결과 무늬를 가지고 있다. 고유어에 대한 한자어가 있고, 경어敬語에 대하여 평어平語가 있고, 평어에 대하여 비속어卑俗語가 있으며, 상위어에 대한 하위어가 있다. 또 관용적으로 어떤 말은 저희들끼리만 어울리기 좋아하고 다른 말이 오는 것을 배척한다. 이 모든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결이 맞지 않아서 이음새가 흉하게 보이거나, 아니면 무게가 한 쪽으로 쏠리는 현상이 일어난다. (79페이지)     소설 서사와 수필 서사는 같지 않다. 첫째, 서사의 세 가지 요소 가운데 하나인 행동 주체의 성격이 다르다. 소설에서 행동의 주체는 가상의 인물이고 전형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수필에 등장하는 행동의 주체는 실제 인물이고 전형성이 아닌 역사성을 띤다. 둘째, 소설 서사는 인과적 원리 위에서 조직되지만, 수필 서사는 우연성 위에서 취사선택된다. 실생활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논리성이나 인과성에 의하기보다 우연성에 의해 발생할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소설 서사와 수필 서사의 차이는 원소재를 다루는 미적 변용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술적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소설 서사는 다음과 같은 미적 변용 과정을 밟는다.(134페이지)     좋은 수필이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은 대략 다음 여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통일성, 일관성, 완결성,경제성, 명료성 그리고 균형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이것 외에 한 가지 조건을 더 충족되어야 한다. 바로 예술성이다. 이제 이 일곱 가지 조건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여섯 가지 기본 요건 가운데서 다시 그 중요도의 순서에 따라 세 가지로 압축한다면 통일성, 일관성 그리고 완결성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은 글을 조직하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들이다. 경제성과 명료성은 주로 단어 선택과 문장 차원에서 지켜야 할 요건들이라면, 균형은 비율의 문제이다.(195페이지)                                        * 출전 : 손광성의 수필쓰기         
454    수필의 허구문제를 알아보다(6) 댓글:  조회:2308  추천:0  2017-05-05
좋은 수필과 좋지 않은 수필                                  -고동주 1. 좋은 수필  1)읽기 쉬워야  문장을 읽어 가는 가운데 리듬이 있고, 깊은 뜻이 있고, 군더더기 없이 산뜻하게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독자가 부담없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그런 것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우선 표현을 쉽게 하여야 하고 내용은 진지하고 구수하게 엮어야 할 것이다.  2)문장이 간결하면서도 짧아야  한 문장이 50자를 넘으면 지루하게 느껴진다.  문장이 너무 길면 호흡처리가 곤란하고 산만하여 글의 뜻을 파악하기 조차 힘들게 된다.  쓰는 사람이야 분위기에 도취되어 문장이 지나치게 길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ꡐ어쩔 수 없이 길어졌군!ꡑ하고 이해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처어칠이 말하기를 ꡐ나는 짧은 말과 쉬운 문구를 즐긴다ꡑ라고 했다.  여기서 쉬운 문구라고 하는 것은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고 간결하게 정돈된 것을 말하지 않았을까.  간결하면서도 짧은 문장이야 말로 수필에 있어서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3)강한 인상을 주어야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거나 다른 사람이 이미 써 버린 글을 다시 쓰면 진부하여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지 못한다.  자기만의 독특한 소재나 단어를 발굴하여 생기가 넘치게 써야 한다. 그래야만 강한 인상을 주는 살아 있는 글이 될 수 있다.  4)즐거움을 주는 글  수필을 읽는 목적이 있다면 은은한 즐거움이나 감동적인 분위기에 젖어보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런 재미가 없으면 이 바쁜 세상에 무엇 때문에 남의 수필을 읽어 주겠는가.  수필이 재미있게 될려면 시(詩)적인 정서가 감돌고, 소설처럼 이야기가 구수하게 잘 짜여져야 한다. 웃음 속에 날카롭게 번득이는 재치도 보여야 하고, 가슴을 울려주는 진리가 들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첫쩨 진실성이 요구된다. 그래야 감동과 연결될 수 있다. 억지로 꾸민 이야기는 감동을 불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예술성이 있어야 한다. 수필은 실용문이 아니고 예술문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문학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해야 한다. 하나의 이야기가 그냥 이야기가 아니고 문학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여 새롭게 탄생된 글이기를 바란다. 쌀과 누룩을 버물려서 익히면 술이 되듯이, 잘 여과된 사색과 감정은 즐거움을 주게된다.  5)품격이 넘치는 글  사람에게 인격이 있드시 글에는 문격(文格)이 있다.  유치한 감정이나 야비한 표현 등 저속한 내용은 품격을 상실하게 된다.  복잡한 세상사의 일을 글로 쓰되 그대로 쓰지 않고 맑은 마음의 눈으로 여과시켜 품위있게 써야 한다. 이것을 심안(心眼)이라 하는데, 심안을 거치면 격이 달라진다.  난(蘭)에 대해서 글을 쓰면 여기에 향(香)이 머물러야 하고 인생을 대상으로 이야기하면 사랑이 깃들어야 한다.  바다를 노래하면 물새들이 머물러야 하고 황야를 그리면 역사 속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야 한다.  연인끼리 애정을 그리되 일정한 간격이 있어야 하고, 지나간 추억 속에서는 절실한 그리움이 머물러야 한다. 그것이 글의 품격, 즉 문격이라 할 수 있다.  6)진솔한 글  수필은 무조건 진솔해야 된다. 그것이 최대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솔직하면서도 구수하게, 담담하면서도 거짓없이, 유머스러우면서도 지성적인 감각이 있어야 한다.  수필은 주제에 관련된 상상까지는 허용할 수 있으나 허구까지를 허용한다면 진솔하다는 매력에 문제가 있을 것 같다.   
453    수필의 허구문제를 알아보다(5) 댓글:  조회:2467  추천:0  2017-05-05
수필과 형상화(形象化) ㅡ 이 관 희     소설문학은 끓임 없이 '형상화'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수필문학은 어떠한가? 나는 수필과 형상화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먼저 내 서가에 꽂혀 있는 몇 권의 문학 이론서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내 서가에 꽂혀 있는 문학이론서들 가운데서 수필과 형상화 문제를 다루는 항목을 단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내가 사는 곳의 큰 거리에 있는 책방 두 곳을 뒤져 보았는데 두 책방에 꽂혀 있는 거의 모든 수필문학이론서에서도 형상화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마지막 한 권까지 찾아보던 중에 마침내 수필과 형상화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수필 이론서 한 권을 발견하게 되었다. 정주환의 '쉽게 쓴 수필 창작론'이라는 책이었다. 나는 그 책을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해 보았다. 왜 수필문학이론서들이 '형상화'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을까? 내가 미루어 생각해 낸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어떤 문학이론서든지 그 책에서 말하는 모든 내용은 결국은 작품의 '형상화'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 아닐까. 예를 들어, 내가 마침내 찾아낸 수필과 형상화 문제를 다루는 단 한 권의 수필문학 이론서인 정주환의 '수필 창작론'의 목차를 보면 1장과 2장으로 나뉜 밑에 총 9부의 항목이 들어 있었다. 그 중 형상화 문제는 마지막 9부에서 다루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마지막 9부 이전의 다른 항목들의 내용은 모두 형상화 문제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들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 같은 질문은 차라리 질문으로 성립이 안 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주환의 수필 창작론의 모든 항목은 작품의 형상화 문제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 것들일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형상화란 대체 무엇이기에 그러한가? 먼저 '형상화'라는 단어의 뜻풀이부터 찾아보기로 하자.   내가 가지는 국어사전에 찾아보니 '형상화形象化'란 "예술활동에서 구체적인 형(形)을 취한 상(像)을 그리는 일"이라고 되어 있었다. (참고 - 形: : 꼴 이룰 형. 형상. 꼴. 모습. 모양. 본뜨다. 나타내다. 像: : 꼴. 모양. 모습. 사람 짐승 같은 것의 형체를 만들거나 그린 것. 象: : 코끼리. 꼴. 모양. 본떠 모양을 그리다. 象形文字) 이상의 뜻풀이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술활동에서'라는 단서다. 구체적인 형을 취한 상을 그리는 일은 예술활동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늘 일어나는 일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얼마 전에 철도파업이 있었다. 그날 나는 꼭 참석해야 할 회합이 있어서 서울까지 외출하게 되었다. 시간이 되어 전철역에 나갔더니 역사 안은 평소와는 달리 그야말로 발 들여 놓을 틈도 없이 승객들로 붐볐다. 파업으로 전철 배차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오랫동안 기다리던 전철이 들어오자 이미 콩나물시루같이 꽉 들어찬 전철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마구 밀고 올라타서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가 겨우 회합장소에 도착하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전철 사정이 괜찮았느냐고 걱정하였다. 나는 괜찮은 게 다 뭐냐, 30년 만에(이민 갔다 돌아와서) 처음으로 콩나물시루 같은 차를 타 보았다고 방금 내가 겪은 '지옥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때, 내가 말(이야기) 해 준 '지옥철 이야기'는 분명히 방금 내가 겪은 만원전철의 모습을 그려 보여 준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나의 그 같은 말(이야기)은 문학적 형상화 작업과 같은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국어사전에서조차도 '형상화'라는 단어를 뜻풀이할 때 '예술활동에서'라는 단서를 분명하게 달아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 활동에서의 형상화와 일상 언어생활에서의 형상화는 어떻게 다른가? 내가 콩나물시루 같은 전철 안의 모습을 말로 그려 보여 준 행위는 존재하는 현실의 어떤 특정 사물 자체를 전달해 주는 데 목적이 있는 행위였다. 나는 내가 방금 타고 온 만원 전철이라는 사실 자체를 이야기 해(전달해) 주었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상상의 세계의 사실을 그려 보여 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학예술에서의 형상화 작업의 목적은 그것이 시가 되었든 소설이 되었든, 그리고 수필까지도 존재하는 현실의 특정 사물 자체를 전달해 주는 데 목적이 있는 행위가 아니다.   위에서 '수필까지도'라고 한 까닭은 수필은 경험된 사실을 소재로 하여 창작되는 문학예술행위이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리 수필문학이 겪는 작품성의 질 저하의 문제의 근본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첫째는 수필은 '붓 가는 데로 쓰는 글'이라는 자살 꼴 식의 잘못된 문학이론에 있고, 두 번째는 수필은 경험된 사실을 소재로 쓰이는 글이라는 피 할 수 없는 운명론에 있다.  시에서 '형상화' 문제는 시는 시어를 창작하는 일이므로 시의 형상화 작업이란 시어를 통한 작품의 형상화 작업이라고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소설은 사건(허구의 사건)을 창작하므로 소설의 형상화란 사건(허구)을 통한 작품의 형상화 작업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필은 무엇을 통해서 작품을 형상화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수필문학도의 대답은 자칫 '수필은 경험된 사실을 형상화한다.'라는 오답에 빠지기 쉽다. 이것이 바로 한국 현대 수필 문학사 근 1세기 속에 숨겨진 수필 문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암적 요인이었다.   '수필은 경험된 사실'을 소재로 하여 쓰이므로 당연히 '경험된 사실 자체를 형상화하는 글'이라는 잘못된 인식의 결과 많은 수필 작가들이 '경험된 사실'이라는 것에 묶여 사실 자체를 전달해 주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 같은 글쓰기와 일상생활에서 의사 전달(Communication)과 다른 점은 단지 말을 문자로 전환한 것뿐이다. 그 같은 수필 쓰기의 반복 누적의 결과 오늘날 수필문학은 '신변잡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저 평가를 받게까지 된 것이다. 만약에 수필이라는 것이 참으로 경험된 사실 자체를 전달해 주고자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라면 수필은 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말(이야기)을 글자로 적어놓은 전신 통신문이나 컴퓨터 화면에 뜬 채팅 문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즉 자신이 경험한 일을 '이야기하는 것' 이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문학이 아니다.    문학이란 무엇이며 이야기란 무엇인가? 문학과 이야기의 근본 차이는 두 가지로 크게 대별 할 수 있다. 첫째, 이야기는 말(언어)의 행위이고(구전 문학이 있었다.) 문학은 문장(글)의 행위(현대문학)라는 것이다. 두 번째 차이는 이야기에는 문학예술적 구성이 없다는 것이고 문학예술 작품(현대문학)에는 반드시 문학예술적 구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첫 번째 차이인 '언어의 행위'와 '문자의 행위'에 관한 문제는 다음 기회에 다루어 보도록 하고 오늘은 두 번째 차이인 구성에 관한 문제만 생각해 보도록 하자.   구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야기와 어떻게 다른가?  'E.M 포스터'는 그의 소성론에서 '왕이 죽고 다음에 왕비가 죽었다.'라는 것이 이야기이고, '왕이 죽자 왕비도 슬퍼서 죽었다.'라는 것이 구성이라고 하였다.  '왕이 죽고 다음에 왕비가 죽었다.'라는 것과 '왕이 죽자 왕비도 슬퍼서 죽었다.'라는 것과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왕이 죽고 다음에 왕비가 죽었다.'라는 것에는 '그래서'만 있고 '왜'가 없다는 것이다. 즉 '왕이 죽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다음에 왕비도 죽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왕이 죽자 왕비도 슬퍼서 죽었다.'라는 것에는 '그래서'가 아닌 '왜'가 있다. 즉 '왕이 죽자 왕비도 죽었다.' 왜 죽었느냐? '왕이 죽은 슬픔 때문에 죽었다.'라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청중은 이야기하는 자의 입술을 바라보며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되었느냐?'라고 묻는다. 그러나 소설(현대문학작품)의 독자는 왜 그렇게 되었느냐는 의문을 가지고 작품을 읽게 된다.   이상은 소설론이므로 수필에는 해당이 안 되는가? 만약에 수필을 읽는 독자가 수필을 읽으면서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라고 다음 이야기를 재촉하면서 읽고 있다면 그 수필은 틀림없이 문학작품으로 구성하지 않은, 이야기를 글자로 옮겨 놓은 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수필은 과연 신변잡기 곧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가? 말할 것도 없이 수필은 절대로 신변잡기 곧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잡문이 아니다. 그런데 왜 많은 수필 작가라 하는 사람들이 구성하지 않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 까닭은 수필은 경험된 사실을 소재로 하여 쓰이는 글이라는 글의 소재에 관한 문학적 오해 때문이다. 문학적 구성에 관해서 다음으로 우리가 분명하게 밝혀두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야기'에도 많은 분량 사실이 아닌 허구가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야기는 경험된 사실 자체의 전달도 이야기될 수 있는데 반하여 문학 작품은 경험된 사실 자체의 전달은 문학작품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문학 작품에서 다루는 소재가 A라는 인물에 관한 것이라면 A라는 인물을 문학 작품으로 형상화한다 함은 현실세계 속의 A라는 특정 인물 그 자체를 복사하기 위한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현실세계가 아닌 '문학예술세계 속'의 A라는 인물로 재창조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문학예술세계 속의 인물'이란 무슨 뜻인가? 현실세계와 문학예술세계는 서로 독립된 별개의 세계다. 문학예술세계 속의 사물은 문학예술세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 속의 '소년과 소녀'는 영원히 황순원의 '소나기' 속에서만 존재한다. 두 소년 소녀는 10년 후에도 천 년 후에도 결코 '소나기' 속에서 현실세계로 뚜벅뚜벅 걸어 나올 수 없다. 즉 현실세계 속에는 황순원의 '소나기' 속의 두 소년 소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언제라도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으면 우리는 그 속에서 지금도 가슴 두근거리며 소녀에게 등을 돌려대는 소년과 그 소년의 등에 업히는 소녀의 콩닥콩닥 뛰는 가슴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바로 이것, 황순원의 '소나기' 속에서만 존재하는 '소년 소녀'가 문학예술세계 속의 사물이며 인물이다. 그런데 수필의 문제는 '경험된 사실을 소재'로 하여 쓰이는 문학이므로 수필 속의 인물은 당연히 현실 속의 인물과 같은 인물일 수밖에 없지 않으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천득의 수필 작품 속의 는 황순원의 소년 소녀와는 달리 작품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서 현실 세계로 나올 수 있는 사실적 존재인가? 혹은 는 피천득이 를 쓸 당시의 서영이라는 딸을 소재로 쓴 글이므로 (딸 서영이를 소재로 삼아 글을 쓰기 시작할 때와 글쓰기를 마쳤을 때의 서영이는 이미 글쓰기 시작할 때의 서영이가 아닌 그만큼의 시간이 지난 다음의 서영이지만 이론 전개를 위한 편의상 동 시간대의 인물이라고 여겨 주기로 한다면)그 당시에만 살아 있는 인물의 문학이고 지금은 죽은 인물의 죽은 문학인가? 즉 피천득의 수필작품 속의 서영이라는 인물은 지금은 환갑 나이 근처의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므로 더는 작품 속의 서영이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인물인가? 즉 죽은 인물인가? 만약 그렇다면 피천득의 모든 문학은 죽은 문학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라는 수필 속의 인물은 지금도 피천득의 문학세계 속에서 살아있는 인물로 팔팔하게 생동하고 있다.   만약에 수필이라는 것이 내가 철도 파업이 진행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전철역에 나갔다가 30년 만에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전철을 타 보고 그 경험담을 그날 만난 사람에게 말로 전달해 준 것과 같은 현실 그 자체를 전달해 주자는 데에 목적이 있는 행위라면 피천득의 는 물론 모든 수필 작품 속의 이야기(사건)들은 신문시사적인 역사서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신문기사와 역사서도 광의적 의미에서는 문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문학예술작품은 아니다. 아무리 좋게 변명해 준다 해도 그와 같은 글들은 전기문학 이상이 될 수 없다. 만약에 역사서와 문학예술작품이 다를 바가 없다면 김훈은 이순신 이야기를 다시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필과 현실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그 대답은 너무도 분명하고 간단명료하니 곧 수필과 경험된 사실(현실)의 관계는 경험된 사실은 단지 수필의 소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너무도 자명한 사실을 더욱 분명히 밝히고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보도록 하자. 즉 이 세상에 현실에서 그 소재를 취하여 가지 않은 예술작품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그런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회화, 음악, 무용, 희곡, 시, 소설 - - -등 모든 예술작품의 소재는 동일하게 경험된 사실에 있다. 'E.T'와 '해리포터' 속에 나오는 각종 기괴한 등장인물들조차도 그 근본이 경험된 사실에 있지 않은 인물이나 사물이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사고력은 '경험된 사실'이 아닌 것은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 그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기상천외한 창작물이라 할지라도 경험된 사실로부터의 연상, 변형 혹은 허구적 창작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모든 예술 작품의 소재가 경험된 사실에 있다면 수필과 다른 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다른 모든 장르의 소재가 경험된 사실에 있듯이 수필도 같이 경험된 사실에서 그 소재를 취해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는가? 여기에 수필문학의 고민이 있다. 시는 경험된 사실에서 소재를 취하여 가서 시어를 창작하고 있고, 소설은 경험된 사실에서 소재를 취하여 가서 허구의 사건을 창작하고 있는데 수필은 무엇을 창작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선 듯 명쾌하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오늘날 수필문학의 문제가 있다. 만약에 수필은 경험된 사실을 변형하거나 그것에서 창작 영감을 얻어 새로운 대상, 즉 허구의 사건을 창작하지도 않고 경험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작품 내용으로 사용하고 있으니까 창작할 것이 없지 않은가, 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대답이 맞는다면 우리는 고만 붓을 꺾고 모두가 시인이 되거나 소설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수필도 시나 소설처럼 독립된 그것만의 문학예술성을 창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필이 시나 소설과 구분되게 창작하는 그것만의 문학예술성의 실체는 무엇인가? 나는 그 이름을 '수필문학적 감성'이라고 부른다.   모든 예술작품의 감동은 그것의 감성적 작용으로부터 우러나오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 '봄'을 소재로 창작된 예술 작품이라도 그림의 봄과 음악의 봄과 시의 봄에서 받는 감동이 다 다르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까닭은 회화예술적 감성과 음악예술적 감성, 그리고 시의 문학예술적 감성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필은 어떠한가? 말할 것도 없이 수필도 마찬가지다. 그림과 음악과 시의 감성이 각기 다를 뿐만 아니라 저마다 독특한 특성이 있고 독립되어 있듯이 수필문학적 감성도 수필문학만이 가지는 독특한 감성을 가지고 독립되어 있다. 만약에 수필이 수필문학만의 독특한 문학적 감성을 창작하고 있지 않다면 수필은 아무것도 창작할 것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필문학적 감성을 창작하고 있지 않은 수필가는 그가 경험한 사실을 말로 이야기하는 대신에 이야기를 단지 글자로 옮겨 놓는 작업을 하고 있을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는 어느 문학 지망생의 여행 수필 원고를 읽은 일이 있다.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쓴 그의 글은 다음과 같은 식의 글이었다.  "A라는 곳을 다녀왔다. 그동안 말로만 듣다가 실제로 가보니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두 번째 가 본 곳도 정말로 아름답기 비할 데 없는 곳이었다. 우리는 돌아오면서 너무나 행복감에 젖어 다음에는 꼭 C라는 곳을 여행하기로 다짐하였다." 이상에 든 예문의 글은 문학예술작품인가 아닌가? 만약에 이 글이 문학예술작품이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는가?  위의 예문은 말할 것도 없이 문학예술작품이 아니다. 적어도 함량 미달의 글이다. 함량 미달 쳐 놓고도 결정적인 요소, 곧 계란의 노른자위라 할 수 있는 수필문학작품으로서의 결정적인 요소가 빠진 글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수필문학에서 계란 노른자위는 무엇인가?  그것은 '왜(어떻게)'가 빠졌다는 것이다. 위의 글에 필자는 멋있고 아름답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곳이 왜(혹은 어떡해) 멋있고 아름답단 말인가? 위의 예문과 금강산 구경을 갔다 온 사람이, "야, 금강산 진짜 멋있더라. 어찌나 멋이 있던지 그냥 입이 딱 벌어져서 말이 안 나오더라."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금강산 일만 이천 봉 앞에 서니 입이 딱 벌어져서 말이 안 나오더라."라고 말하는 것이 문학인가? 금강산이 입이 딱 벌어져서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아름답고 멋지더라는 것은 보통 사람들(일반인)의 언어(말. 대화. 이야기)다. 보통 사람들로서는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상적 어법이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은 금강산 일만 이천 봉 앞에 섰을 때 그 아름다움에 압도당하여 입이 딱 얼어붙어도 괜찮다. 그러나 작가는 그래서는 안 된다. 작가는 입이 딱 얼어붙어서는 안 된다. 작가는 반드시 금강산이 어떻게 아름다우며 왜 멋있는지 그 아름다움과 멋있음의 구체성(즉 왜 입이 딱 벌어지는지)을 느껴야지만 된다. 느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할 언어(글)를 찾아내야지만 된다. 그래야 작가다.   위의 예문의 여행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여행하고 돌아온 곳이 아무리 평소 말로 듣던 대로 멋있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어떻게 라는 문학예술적 구체성으로 형상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학이 아닌 말(일상 대화. 이야기)에 지나지 않게 된다. 여행을 하고 돌아온 사람이 그가 여행하고 돌아온 곳이 어떻게 아름답고 멋진 곳이었다고 작가답게 문학적으로 느낀 느낌(혹은 사색, 사상, 철학, 종교적 내용)을 구체적으로 형상화 시킨 것이 곧 수필 문학적 감성이라는 것이다. 문학적 형상화 작업이란 바로 그가 느낀 문학적 감성을 예술문장이라는 문학적 도구를 매개로 삼아 구체화 시키는 작업을 가리켜 형상화 작업이라 한다. 수필의 구성이란 바로 그가 느낀 느낌을 가장 효과적으로 형상화 낼 수 있는 각종 장치와 그것들의 얽음을 말한다. 그 같은 각종 장치와 얽음을 통해서 작품의 형상화가 이루어진다. 수필문학적 감성의 내용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무한히 많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수필문학의 다양한 양식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필과 형상화의 문제를 생각해 볼 목적에서 크게 세 가지 경우만을 실제 작품에서 예를 들어서 살펴보도록 하자. 그 하나는 서정적 감성의 형상화에 관한 것이고, 그 두 번째는 사색적 감성의 형상화에 관한 것, 세 번째는 서사적 감성의 형상화에 관한 것이다.          서정적 감성의 형상화 - 정목일의   한밤중 은하(銀河)가 흘러간다. 이 땅에 흘러내리는 실개천아. 하얀 모래밭과 푸른 물기도는 대밭을 곁에 두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아.흘러가라. 끝도 한도 없이 흘러가라. 흐를수록 맑고 바닥도 모를 깊이로 시공(時空)을 적셔가거라. 그냥 대나무로 만든 악기가 아니다. 영혼의 뼈마디 한 부분을 뚝 떼어 내 만든 그리움의 악기―. 가슴속에 숨겨 둔 그리움 덩이가 한(恰)이 되어 엉켜 있다가 눈 녹듯 녹아서 실개천처럼 흐르고 있다.       눈물로 한을 씻어 내는 소리, 이제 어디든 막힘없이 다가가 한마음이 되는 해후의 소리―. 한 번만이라도 마음껏 불러 보고 싶은 사람아.      마음에 맺혀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아. 고요로 흘러가거라. 그곳이 영원의 길목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깊고 아득한 소리, 영혼의 뼈마디가 악기가 되어 그 속에서 울려 나는 소리―.         영겁의 달빛이 물드는 노래이다.   이상은 무엇에 대한 서정을 형상화하고 있는가? 대금산조 가락을 듣고 느낀 서정적 감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정목일은 대금산조 가락에서 듣고 느낀 감성을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는가?      흘러가는 은하로, 쉬임없이 흐르는 실개천으로, 혹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빗대어, 시공을 초월하는 흐름과 적심으로, 영혼의 빼 마디로, 가슴 속에 숨겨 둔 그리움의 덩어리로, 눈물로, 한으로, 그리운 사람으로, 영원의 길목으로, 영겁의 달빛으로… 이 모든 '수필어'들을 통하여 형상화 시키고 있다.('통하여'란 그것들을 직조하여 혹은 얽어서…, 즉 구성적 작업을 통하여라는 뜻)            * 사색의 형상화 - 피천득의          수필은 청자(靑瓷)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이상의 글은 무엇에 대한 사색의 내용을 형상화한 글인가? 수필에 대한 사색적 감성을 형상화하고 있다.(필자 주: 피천득의 은 수필 이론이 아닌 수필을 소재로 한 수필 작품임)      피천득은 어떻게 자신의 수필에 대한 사색을 형상화 시키고 있는가?  청자 연적, 난, 학, 여인의 몸맵시, 숲 속 고요한 길, 가로수 길, 주택가 길 등의 '수필어'들을 통해서 자신의 수필에 대한 사색적 감성의 내용을 형상화 시키고 있다.('통해서'란 왜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를 서두에 놓지 않고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를 서두에 놓았는가의 문제다. 즉 글 구성의 문제다.)          * 서사적 감성의 형상화 - 이태준의          어제 경성역으로부터 신촌 오는 기동차에서다. 책보를 메기도 하고, 끼기도 한 소녀들이 참새 떼가 되어 재깔거리는 틈에서 한 아이는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흑흑 느껴 울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우는 동무에게 잠깐씩 눈은 던지면서도 달래려 하지 않고, 무슨 시험이 언제니, 아니니, 내기를 하자느니 하고 저희끼리만 재깔인다. 우는 아이는 기워 입은 적삼 등허리가 그저 들먹거린다. 왜 우느냐고 묻고 싶은데 마침 그 애들 뒤에 앉았던 큰 여학생 하나가 나보다 더 궁금했던지 먼저 물었다. 재재거리던 참새 떼는 딱 그치더니 하나가 대답하기를,"걔 재봉한 걸 잃어버렸어요."  한다."학교에 바칠 걸 잃었니?"    "아니야요. 바쳐서 잘했다구 선생님이 칭찬해주신 걸 잃어버렸어요. 그래 울어요."    큰 여학생은 이내 우는 아이의 등을 흔들어 달랜다.         "얘 울문 뭘 하니? 운다구 찾아지니? 울어두 안 될 걸 우는 건 바보야." 이상의 글은 무엇을 형상화하고 있는가? 필자가 경험한 사건(이야기)의 감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필자는 자신이 경험한 사건의 감성을 어떻게 형상화 시키고 있는가?    필자는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소설적 서술' 방식을 빌어서 형상화 시키고 있다.('소설적 서술 방식'이란 '소설적 구성법을 빌어서' 라는 뜻임을 놓치지 말자.)        이상의 예문에서 정목일과 피천득은 수필어를 통해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문학적 감성을 형상화 시키고 있다고 하였고 이태준은 소설적 서술 방법을 빌어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문학적 감성을 형상화 시키고 있다고 하였다(수필문학의 특성은 그 다양하고 자유로운 표현방법의 채용에 있다. 그러므로 소설적 서술 방법을 채용하였다고 수필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런데 수필어라는 것은 무엇인가? 시에 시어가 있듯이 수필에도 수필어가 있는가? 그렇다. 위에서 수필문학만이 가지는 수필문학적 감성이라는 것은 좁은 의미에서는 수필어적인 감성이라고 할 수 있다. 시어가 시적 감성을 들어내기 위한 목적의 시어를 가지듯 수필도 수필문학적 감성을 형상화해 내기 위한 목적에서 수필어를 가진다.       맺는 말무릇 모든 예술작품은 그것이 목적하는 바의 작품성에 이르려면 형상화 작업이 완성되어야지만 된다. 형상화 작업은 구성을 중심으로 한 문학예술작업의 전반적인 기법을 통해서 기대할 수 있다. 시가 시어를 통해서 시적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소설이 소설적 서술 방법을 통하여 사건(허구. 이야기)을 형상화 시키듯 수필은 수필어를 중심 도구로 삼아 수필문학적 감성을 형상화 시킨다.     수필은 수필어를 중심으로 삼아 수필문학적 감성을 형상화 시킨다는 말의 뜻은 수필은 시, 소설과 달리 그 형식의 무한한 자유를 가지는 수필문학의 특성 때문이다. 수필은 위에서 예를 든 대로 소설적 서술 기법을 빌어다가 쓸 수도 있고 혹은 서간문이나 일기문 등의 기법을 빌어다가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표현기법을 차용 해다 쓴다 할지라도 수필은 전체적으로 혹은 그 하나하나의 문장을 통해서 또 혹은 하나하나의 문단을 통해서, 또 혹은 단어 하나하나를 통해서 수필문학적 감성(느낌, 사색, 사상, 철학, 종교)을 형상화 시켜야 한다. 만약 하나의 글이 그 필자만의 독특한 감성(느낌, 사색, 사상, 철학, 종교)을 형상화 시키는 일이 없이 단지 경험된 사실을 서술(나열)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면 이는 일반적으로 부르는 산문(혹은 잡문)은 될 수있을지언정 수필문학이라는 독특한 예술 작품은 될 수 없다.    일반인은 금강산 구경을 가서 그 아름다움에 압도당하여 입이 딱 벌어져 할 말이 없을 수 있고 그것으로 넉넉할 수도 있으나 작가는 그래서는 안 된다. 작가는 감기를 앓아도 보통 사람들처럼 그냥 끙끙 앓아서는 안 된다. 작가는 반드시 어떻게 끙끙 앓아야 한다. 작가는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그 작가만이 느끼는 것(혹은 사색, 사상, 철학, 종교)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형상화) 해 낼 글(단어. 문장)을 찾아내어야지만 된다. 그래야 문학이 된다. @
452    수필의 허구문제를 알아보다(4) 댓글:  조회:3240  추천:0  2017-05-05
  (1) 수필과 소설의 차이 ㅡ김숙희 (2) 이를 통해 수필의 특성을 이해한다  1. 사실과 허구의 차이  수필과 소설의 차이는 전자가 사실을 다룬다 할 때 후자는 허구를 다룬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 양자의 차이는 이 뿐만 아니라 문장이 구조나 글의 분량,  그리고 주제 전달의 방법 등에서도 다르다 할 수 있다.  다음의 글은 김소운의 에서 발췌한 글이다.  '진실'이란 말은 반드시 '사실 그대로' 란 뜻은 아니다.  사실만을 나열한다고 해서 그것이 문장을 이루는 것은 아니요,  하물며 문학이 되는 것도 아닌 것은 재언할 필요가 없다.  "예술의 방법에는 크게 나눠서 두 길이 있다. 진실을 진실 그대로의 위치에 두고  정시(正視)하고 추구하려는 방법과, 허구의 유리그릇 너머로 왜곡된 가상(假想)을 통해서  하나의 진실을 발굴하려는 방법-외국문학에서 그러한 예를 든다면  톨스토이나 플로베르는 그 전자요,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같은 것은 그 후자에 속한다."  이것은 일본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를 두고 나 자신이 쓴 해설의 첫 대문이다.  (同和出版社刊, , 제8권,p.540)  다자이란 작가의 '허구의 미'내지는 '허구의 진실'을 설명하기 위한 전치사지만,  요컨대 문학이란 문장에 있어서의 허구는 결코 경시할 것도  부인할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  이런 서두를 앞장 세워두고 나 자신의 글이란 것을 돌이켜보면  실로 '허구' 그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이란 반드시 사실 그대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소위 내가 쓴다는 글은 언제나 '사실'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목적이 있고, 읽는 대상을 의식하면서 쓰는 글 -  그것이 과연 옳은 글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윗물을 흘려버리고 뒤에 남은 진국 -침전된 알맹이- 그것이 진정의 문장이라면,  언제나 목적의식을 꽁무니에 달고 다니는 내 글 따위는 부질없이  흘려 버리고만 있는 한갓 '윗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 글이 '사실'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의 하나로는,  체질적으로 공상력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인간의 생활 그것을 문학이나  예술성보다는 한 걸음 앞서서 언제나 직시하고 분석하려드는  성급한 내 기질에 연유하는지도 모른다.  할 말이 너무 많고 보면 결론에 도달할 최단거리에 마음이 쏠려  '허구의 진실' 같은 복잡한 수속을 밟을 겨를이 없다고  그렇게 보아주는 이는 무척 고마운, 너그러운 지기(知己)라고 할 것이다.  윤재천93-94쪽  위의 인용문처럼 수필은 '사실'의 기록이다.  자신의 체험이 정신을 거쳐 토론되는 것이지만, '허구'를 일반적으로 허락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 이유는 뒤에서 설명될 수필의 허구성 때문이다.  이 문제는 다른 강의에서 집중적으로 강의될 것이다.)  그런데 반해 소설은 '허구'에 거의 의존한다. 작가의 체험을  그대로 기술했다 해도 그것은 '허구' 즉 진실된 허위의 기록이다.  따라서 수필은 글쓴이의 생각이 진술되는 반면에 소설은  스토리 형태로 소설속의 인물에 의해서 상황이 기록된다.  (2) 문장의 차이  수필과 소설은 산문문장으로 쓰여진다.  산문이란 글자의 배열이 일정하지 않는 문장이라는 의미로 운문의 반대 개념이다.  이 양자의 근본적인 문장 차이는 수필이 글쓴이의 생각의 흐름에 따라  문장의 흐름이 진행되는데 반해, 소설은 글쓴이의 생각보다는  스토리 전개의 흐름에 따라 진행된다는 점이다.  어슴프레한 어둠을 가르며 택시는 잿빛 도로 위를 달린다.  차분히 가라앉은 거리에는 정적만이 무겁게 흐르고 있다.  은색 기둥 꼭대기에 겸허하게 고개 숙인 나트륨등이 엷은 빛을 흘려댄다.  나는 안경을 고쳐 쓰고 주위를 살핀다.  눈에 익은 거리다.  차창에 비치는 모든 것은 정지되어 있다.  아니, 거리 풍경은 잘 짜여진 시이퀀스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나를 태운 차만이 홀로 멈춰 있는 듯하다.  반대 차선에서 돌연 빈 택시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껌뻑이며 달려온다.  두 대가 엇갈리는 순간 휘익, 하고 마찰음이 빚어진다.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들이 흠칫 놀란다.  그러나 이내, 다시 정적이 찾아든다.  택시는 잘 포장된 아스팔트 길을 미동도 않고 미끄러져 간다.  -김익건 중에서  위의 인용문은 도시의 새벽 분위기를 묘사하는 소설 문장이다.  정지해 있는것과 움직이는 것의 대비를 통해 새벽이 갖고 있는  이중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쓰여진 문자이다.  이 글은 '나'로 기술되었기 때문에 수필의 한 문장으로도 손색이 없을 수 있다.  수필 문장의 경우에도 묘사의 문장이라기 보다는 곧 날이 밝으면  사람들은 이 도시를 활보할 것이라는 상징적인 분위기를 암시하기 위해 쓰여진 문장이다.  아래의 문장은 '아침'을 묘사한 수필 문장이다.  내가 살아있음을 가장 실감하는 때는 아침 잠에서 깨어나 커튼을 걷고 창을 여는 순간이다.  나는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눈을 크게 뜨고 솟구치는 생명력으로 오늘 하루를 연다.  그리고 하늘을 날고 귀소하는 새처럼 열린 창으로 나가 하루를 뛰다가  밤이 되면 오렌지 불빛이 아른거리는 창가로 다시 돌아온다.  그러면 진정한 삶의 기쁨이 창문을 닫고 어둠속에 포근히 잠들 때 나를 휘감는다.  열리는 창. 그리고 닫히는 창. 그 창 속에는 사람마다의 생활이 있고  제각기 살아가는 기쁨과 슬픔이 맴돌고 있다.  아무리 작은 창일지라도 사람들은 그 속에서 삶을 엮고 세월을 갈면서 변모해 간다.  창 밖에는 항상 바람이 오가고 창 안에는 언제나 따뜻한 인정이 솟는다.  창은 밝고 솔직하여 밖의 모습도 안의 움직임도 거짓없이 드러내 준다.  그래서 열린 창 속에는 활기차고 단란한 가정이 있고 닫힌 창은 병든 폐가를 느끼게 한다.  -고임순 수필 서두  위의 글은 아침을 묘사하면서 자신의 심정을 직설적으로 토로한다.  이렇게 같은 아침을 묘사하더라도 수필은 글쓴이의 생각 또는 감정에 따라  문장이 흐르는데 반해, 소설은 상황에 따라 문장이 전개된다.  수필가의 눈은 예리하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정곡을 찌르지 못하고, 어떤 사건의 주변을 우회하거나  뒷덜미를 치기 위한 준비를 마련하고 있을 때, 수필가는 핵심을 보다 정확히  찌를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십인십색(十人十色), 수필가의 눈은 다른 것이다.  또한 문학이란 워낙 관념적인 분야이기 때문에 어떤 기획하에 획일적(劃一的)으로  다룰 수 없는 것이지만, 어느 정도의 범주 내에서 질서를 이루어야 할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수필문학은 형식적인 구애를 받지 않는 장르라 하여 소홀히 대할것이 아니라  제 나름대로의 계획하에 자기대로의 작은 규모의 형식을 세우고  개념을 확고히 하는 것이 수필을 쓰는 사람의 자세이다.  넷째, 수필은 형식적인 수사가 필요치 않다.  수필에 있어 언어의 미학(美學)이란 있을 수 없다.  수필은 시처럼 어느 한가지 사물에 대한 형용이 필요치 않고,  그에 대한 묘사가 필요한 쓸데없는 수식을 요하지 않는다.  자칫 잘못, 수필이 이러한 수식이나 형용 따위에 현혹되어 생경(生硬)한  어휘의 나열이나 고도의 관념으로 이루어졌을 때  독자는 이러한 작품에서 공감을 찾아 낼 수 없을 것이다.  생활관념으로 용해된 절실한 기원, 어떤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수식이라면 몰라도  형식적인 수사나 형용은 필요치가 않다.  -윤재천 48-50쪽  위의 인용문은 '수필의 관조성'에 대해 언급한 글이다.  그래서 수필문장은 관조, 통찰, 직관에 의해서 쓰여지는 언어임을 강조한 글이다.  이 이론에 대해 전혀 이견이 없는바 아니지만,  수필의 문장은 어떤 장르의 문장보다도 직관적이고 관료적이다.  따라서 수필 문장은 소설 문장과는 달리 단순하고 명료하고 수식이나 형용이 필요없게 된다.    [출처] 수필과 소설의 차이 |작성자 아이리스
451    수필의 허구문제를 알아보다(3) 댓글:  조회:2460  추천:0  2017-05-05
        수필에 있어서의 상상과 허구 문제                               임 병 식  한국 수필문단에서는 한때 허구(虛構)도입 문제를 두고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열띤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하나,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채 내연(內燃)을 거듭중이며 잠복해 있는 게 사실이다. 양측이 주장하는 논거를 보면 허구도입을 찬성하는 측은 수필도 문학인만큼 문학성을 획득하려면 어느 정도 그 수용은 불가피하며 따라서 용인되어야 한다는 입장이고, 반대측의 주장은 수필은 어디까지나 자기 체험의 세계를 바탕으로 해서 쓰여지는 글인 만큼 만약에 허구가 도입하면 수필 본래의 특성을 훼손할 뿐만이 아니라, 사실로 믿는 독자에게도 배신행위가 될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모두에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결코 이 주제와 무관치 않은게 뇌리를 스쳐서이다. 많은 사람들은 구리요혜이가 쓴 '우동 한 그릇'이란 작품을 기억할 것이다. 일본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던 이 수필은 매우 큰 파문을 일으켰다. 사실이 아닌 것을 허구로 꾸며낸 것이 밝혀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책의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필과 다른 문학장르와는 어떻게 다른것인가. 여기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분기점은 진실을 쓴 글인가, 허구로 꾸민 글인가로서 갈린다고 본다. 예를 들어보자. 다른 장르의 경우는 비록 허구로 쓰여진 글이라도 작가의 기량에 따라 그 영절스런 표현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가령 고운 시인이 있지도 않은 여동생이 죽은 것처럼 눈물나게 표현했다하여 시비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탁월한 표현력으로 칭찬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왜 유독 수필만이 진실이 요구되며 중요시되는가. 그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태생적으로 수필은 '진실을 기초로 하는 문학, 체험의 문학'이기 때문이다. 가령, 어느 수필가가 허구로 '아버지의 별세'에 대하여 글을 써서 발표를 했다고 치자. 아마 모르면 몰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소식을 듣고 부의금을 전달하거나 위로의 말을 전할 것이다. 나중에 아무리 거짓으로 쓴 글이라고 손사래를 쳐도 곧이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사례가 있다. '귀밥파기'라는 작품인데, 작가 스스로 사실이 아닌것을 지어 썼다고 토설을 한 것이다. 그 작품은 부자지간의 살가운 정이 듬뿍 담겨진 글인데, 그로인하여 감동이 반감되어 버린 것이다. 이를 보면 결론은 자명해 지는 것이다. 한데, 여기서 미묘한 문제, 즉 상상의 문제와 허구의 문제가 부딪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어느 정도는 교통정리가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상상의 경우는 그것이 꿈이 되었건 어떤 사물을 보고 느끼건 간에 그것은 자유로운 범위 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기법상의 가미 정도에 그친다면 굳지 엄격주의를 표방할 것까지는 없는 것이다. 만약, 중요하고도 명백한 공지의 사실이나,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허구는 당연히 배제가 되어야겠지만, '자기가 자기의 마음도 모르는 마당'에 하나 하나의 일들을 시시비비 가린 것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머리 속의 사상을 처벌할 수 없듯이 양념으로서의 가미는 발설만 하지 않으면 문제소지도 없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만약에 꿈속에서 옛 애인을 만나 즐겁게 놀다가 그만 잠꼬대하여 아내에게 들켰다고 치자. 아내가 물었을 때 가정의 평화를 위해 '당신과 옛날 데이트 하던 꿈을 꾸었다'고 얘기하고 그런 글을 썼다고 하여 그것을 비난할 것인가. 자기가 말을 않는데 알 수 도 없을 뿐더러 자기만 알고 있는 비밀의 범주를 시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스스로 발설하는데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용인되지 않는 부도덕한 범위하고 보아야 한다 . 지금도 윤오영의 수필 '방망이 깎는 노인'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진정성에 대해 의심을 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인불언귀부지(人不言鬼不知)라는 말과 같이 본인이 가부간 말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체험한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문제 사단은 대개 그 원인이 두 가지에 의해서 드러나는 게 보통이다. 별안간 증언자가 나타나거나 당사자가 연득없이 정직한 척 고백성사 하여 '나는 사실 그 작품을 이렇게 썼다'고 발설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작품 속의 그 날의 기상이 내리지도 않은 비나 눈이 내렸다고 한다면 모를까, 심상에 비추어 겨울비를 진눈개비가 내렸다는 등의 서술(착오나, 기법 상으로나 )은 그리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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