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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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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    수필의 허구문제를 알아보다(2) 댓글:  조회:2843  추천:0  2017-05-05
허구의 수용과  현대수필의 새로운 모색  이유식  - 배화여대 교수, 문학평론가 -  1. 허구 수용의 필요 여부  허구란 사전의 일반적 정의로는 근거도 없는 일을 엮어 만듦이라 되어 있다. 이는 거짓말과는 사뭇 달라 거짓으로 꾸며본 사건이나 일을 말한다 하겠다. 그리고 허구의 문학적 정의라면 특히 소설과 희곡 등에 있어서 실제로 없거나 없었던 일을 작가가 상상력으로 창조하는 일 또는 그런 이야기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소설 같은 장르에는 허구가 아무런 이의 없이 인정된다는 것은 문학원론의 ABC다. 소설은 허구다라는 말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같은 문학 장르이지만 수필 쪽으로 오면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보일 수밖에 없는 개연성이 높다. 그것은 종래의 수필관에서 온 고정관념이나 선입관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필은 ꡐ자기고백의 문학ꡑ이다, ꡐ체험의 문학ꡑ이다, ꡐ사실의 문학ꡑ이다라는 정의가 주는 속박 때문이다. 진솔한 ꡐ자기고백의 문학ꡑ이기 때문에 거짓이 들어갈 수 없고, ꡐ체험의 문학ꡑ이기 때문에 체험하지 않은 일을 체험한 양해서는 안 되며 또 ꡐ사실의 문학ꡑ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일이라면 절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요 생각이다.  물론 이런 정의는 타 문학 장르와의 차이점이나 변별성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서 수필의 이런 속성이나 특성만은 원론적으로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 수필을 창작하는 과정에서라면 어떤 사실을 재구성, 재배열 정도라도 하다 보면 허구 도입의 유혹을 받거나 아니면 부득이 도입하는 경우가 있다. 자기만이 아는 창작과정의 비밀로 함구하고 있을 뿐이다. ꡐ사실의 문학ꡑ이요 ꡐ체험의 문학ꡑ이란 거센 완력 앞에서 누가 감히 이 부분은 사실이 아니고 또 이 부분은 체험이 아니다라고 용기 있게 말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저 독자들이 사실인 양 믿어주기만 바랄 뿐이다.  이런 노출되지 않았던 창작과정상의 비밀이 수필작단에서 공식적으로 거론된 것은 1983년도다. 수필가 정진권은 1980년도에 석사학위 논문으로 「수필문학의 이론 모형 연구」를 쓴 바 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수필이 꼭 사실의 기록 같은 문학이 아니란 점을 강조하기 위해 ꡐ수필은 허구일 수도 있다ꡑ며 그 가능성을 여러 예증을 통해 보여준 바 있다. 결국 이 논문의 이른바 ꡐ허구인정론ꡑ이 촉발되어 김시헌의 반론이 나온 해가 바로 1983년도다. 김시헌은 「수필공원」(통권 제2호)를 통해 「수필과 허구-정진권씨의 구성론을 중심으로」란 글을 통해 정진권의 견해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ꡐ허구 불인정론ꡑ를 폈다. 논전에 불이 붙었다. 뒤이어 역시 같은 해 같은 지면(통권 제3호)에 정진권의 「허구와 수필-김시헌 선생께 답함」이란 반론이 나왔고, 다시 같은 해 같은 지면(통권 제4호)에 김시헌의 재반론 「다시 수필과 허구에 관하여- 정진권씨의 구성론을 재론함」이 나왔다.  이로써 금기시 되어 왔던 수필의 허구론이 한동안 설왕설래 화제가 되기도 했고, 또 이를 계기로 수필계 세미나의 공식적 주제나 토론의 뜨거운 잇슈가 되기도 했으며, 수필론에 관심 있는 이론가나 수필학 교수들도 각자 개인적인 글을 통해 자기 견해를 지금껏 간헐적으로 개진해 왔다.  그래서 이제는 허구의 부분적 인정론으로 대세가 기울어져 있다. 크게 말해 부분 인정론자 쪽에는 정진권, 윤재천, 강석호, 이철호, 정주환, 안성수, 이정림, 강돈목, 이유식 등이 있고, 불인정론자 쪽에는 김시헌, 윤모촌 등이 있는데 특히 김시헌은 허구론 논전 당시의 완강한 허구 불인정론에서 다소 후퇴하여 그 유연성을 보이고 있다.  2. 허구 수용의 범위와 한계  나는 1990년도에 「월간문학」출신 수필가들의 모임인 「대표에세이」동인회의 제3회 세미나에서 「수필의 벽과 그 극복의 길- 창작과정을 중심으로」를 발표하면서 허구의 부분 수용을 제기한 바 있다. 원론적으로는 수필이 ꡐ체험의 문학ꡑ이요, ꡐ사실의 문학ꡑ이니 만큼 어디까지나 체험이나 사실에 충실해야 하겠지만 소설이 ꡐ허구의 문학ꡑ이라고 해서 일체의 어떤 사실이나 체험이 들어가서는 안 되고 100% 허구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개념적 정의에만 지나치게 속박시키는 폭력이 아닐 수 없듯이 수필도 ꡐ체험의 문학ꡑ이나 ꡐ사실의 문학ꡑ이라고 해서 허구가 조금이라도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도 ꡐ체험의 문학ꡑ이나 ꡐ사실의 문학ꡑ이란 개념적 정의를 지나치게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경직된 작법관이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나는 무조건적인 허구의 도입은 인정하지 않지만 예술적 효과나 감동의 창출, 진실의 창출을 위해서라면 최소한의 부분적인 허구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령, 한 편의 수필에 있어서 뼈대가 되고 있는 사건이나 사실 자체를 허구화시켜 사실인 양 내보여서는 안 되겠지만 지엽적이거나 구성적 동기부여라면 허용되어도 무방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덧붙쳐 수필이 비록 ꡐ사실ꡑ에 충실한다 하더라도 100% 사실 위주의 글이어야만 하는 일기문이나 르뽀르따쥬 그리고 다큐멘타리와는 다른 만큼 ꡐ사실의 문학ꡑ이라는 테두리를 크게 훼손시키거나 벗어나지 않는 이상 ꡐ선의의 거짓말ꡑ이란 말이 있듯이 ꡐ선의의 허구ꡑ는 용인된다고 보았다. 수필가는 사실의 충실한 기록자도 아니요 단순한 작문가가 아니라 수필이라는 집을 창조적으로 지어내는 예술가라는 점을 강조해 보았다.  여기서 앞에서 나온 ꡐ부분적인 허구ꡑ를 다시 ꡐ제한적 허구ꡑ ꡐ한정적 허구ꡑ라고 바꾸어 볼 수도 있다. 사실 소설의 전문술어인 ꡐ허구ꡑ란 포괄적 외연의 뜻이 너무 넓은 만큼 수필적 허구라면 겸손하게 좀더 좁혀서 ꡐ허구적 화소(話素)ꡑ라고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수필문학에서 수용할 수 있는 허구가 ꡐ부분적인 허구ꡑ가 되었건 아니면 ꡐ허구적 화소ꡑ가 되었건 간에 그것이 과연 어떤 종류의 수필과 잘 결합되느냐는 문제를 여기서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수필을 일단 중수필과 경수필로 나누어 놓고 보면 허구 수용의 자력성(磁力性)이 강한 쪽은 물론 경수필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보면 주관수필, 개인수필, 서사수필, 콩트수필, 생활수필, 신변수필, 사건수필 쪽이다. 반대로 서정수필, 객관수필, 비평수필, 사색수필, 시사수필, 사회수필, 지식수필 쪽으로 오면 올수록 허구가 끼어들 자리가 없고 또 있어서도 안 된다. 작법이나 구성 그리고 내용상으로 보아 친화성의 원리나 배합의 원리가 통하질 않는다.  그렇다면 친화성의 원리나 배합의 원리가 통하는 수필의 경우라면 과연 그 수용의 범위와 한계는 어느 정도일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나는 앞에서 ꡐ부분적인 허구ꡑ ꡐ제한적 허구ꡑ ꡐ한정적 허구ꡑ ꡐ허구적 화소ꡑ란 용어를 사용해 보았는데 사실은 그 정도가 막연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몇 가지 비유로써 설명해 보는 것이 훨씬 이해가 빠르리라 본다.  첫째, ꡐ당의정론ꡑ이다. 쓴 가루약을 쓰지 않게 먹기 위해 제약과정에서 환(丸)을 만들어 당의(糖衣)를 입힌다.  둘째, ꡐ금반지론ꡑ이다. 반지를 만들 때 100% 순금으로는 안 된다. 합금이 되어야 견고해 지고 일정 형태가 유지되며 나아가 세공도 가능하다.  셋째, ꡐ감초론ꡑ이다. 한약을 지을 때 ꡐ약방의 감초ꡑ란 말이 있듯 반드시 감초가 들어간다. 약효를 높이면서 쓴맛을 없애주는 것이 감초다.  넷째, ꡐ화장술론ꡑ이다. 맨얼굴을 더 예쁘게 보이기 위해 화장품을 바르거나 또는 입술이나 눈썹을 그린다.  다섯째, ꡐ부분 성형수술론ꡑ이다. 전체 성형수술이 아니라 눈이나 코를 좀 멋지게 보이기 위해 성형한다.  여섯째, ꡐ요리론ꡑ이다. 생선찌게를 요리할 때 주 재료인 생선만 가지고 요리하지 않는다. 간장이나 고춧가루 기타 양념은 열외로 하고 부 재료도 들어간다.  예를 들어 본 이 6가지 비유에서 알 수 있듯 주 재료에는 큰 변화와 변형이 없다. 첨가 아니면 약간의 수정․보완 정도다. 맛과 멋 그리고 모양을 내기 위한 기술(技術)적 배려가 따르고 있을 따름이다. 바로 이런 이치나 과정, 그리고 정도가 수필에서 본 허구수용의 범위요 한계라 하겠다.  3. 허구의 종류와 그 기능  크게 보아 우리의 수필계에서는 이제는 허구의 부분 수용이 일반화되어 있고 그 논의도 끝나 있는 상태다.  그렇다면 논의는 논의로서 끝날 일도 아니며 또 공감대적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방관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수용의 구체적 이론화 작업이 있어야 할 일이다. 원론적 학습이 끝났다면 심화학습으로 들어갈 단계다.  그래서 나는 과연 ꡐ수필적 허구ꡑ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또 그 기능이 무엇인가를 시론(試論)삼아 개진해 보기로 하겠다. 앞으로 완성 아니면 완벽한 수필 허구이론의 시학(詩學)정립을 위한 시도일 따름이다. 필요시는 나의 수필창작 과정을 소개하면서 일단 한번 체계화시켜 보기로 하겠다.  허구에는 독자가 전혀 ꡐ인지(認知)할 수 없는 허구ꡑ와 ꡐ반쯤 인지할 수 있는 허구ꡑ가 있다 하겠는데 전자를 ꡐ기법(기술)론적 허구ꡑ나 ꡐ작법론적 허구ꡑ라 칭한다면 후자는 ꡐ수사적 허구ꡑ라 하겠다.  전혀 ꡐ인지할 수 없는 허구ꡑ 즉 ꡐ작법론적 허구ꡑ는 사실과 완전 융합된 허구다. 이에는 구성적 동기부여의 허구, 사건의 수정?보완에 따른 허구, 상상적 허구, 반전(反轉)적 허구 등이 있을 수 있다.  ꡐ구성적 동기부여의 허구ꡑ가 들어가 있는 나의 수필은 「테헤란로 아리랑」이다. 이 작품은 몇 년 전 어느 해 여름 오후, 집을 나서 강남의 테헤란로를 따라 20~30분 정도 걸으면 갈 수 있는 선정릉 공원에 이르는 과정을 얼개로 하여, 순간순간 눈에 보이는 거리의 풍경에다 그 동안 이곳에서 살면서 느낀 생각이나 경험들을 조합시켜 본 작품이다. 서두를 처음에는 ꡐ참으로 오랜만에 테헤란로를 따라 산책길에 나서 본다ꡑ라고 초안을 잡아 보았는데 너무 서두가 밋밋하고 단조로와 구성적 동기를 한번 생각해 보았다. 행선지가 선정릉공원이란 걸 생각하다 보니 문득 8년 전에 가 본 적이 있는 노르웨이 오슬로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각공원 비겔란 공원이 떠올랐다. 사실 그날 나는 여행기를 뒤적이고 있지는 않았지만 여행기를 뒤적이다 비겔란 공원이 나오다 보니 문득 공원으로 산책할 마음이 생겨 산책길에 올랐다고 썼다. 그러고 보니 독자들에게는 내가 가본 적이 있는 비겔란 공원을 잠깐 소개해 줄 수 있는 보너스도 생긴다 싶으면서 한층 글맛이 나는구나 싶었다.  ꡐ사건의 수정․보완에 따른 허구ꡑ가 있을 수 있다. 재료(소재)의 미학적 배열이나 재구성, 의미화의 발견이나 주제 형상화에 따른 통일성을 기하려다 보면 어떤 일이나 사건을 축소․확대해야 하는 경우나 가감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때 수정․보완이 불가피할 수 있다. 따라서 이에 상응할 수 있는 허구가 끼어들기 마련이다. 나의 작품 「와이키키 해변의 어느 오후」를 보기로 하자. 하와이 오하우섬 여행기인데 그 중에서 어느 오후 와이키키 해변에서 보낸 일이 하이라이트이다. 여기서 주체험은 그대로 하되 부체험으로서 와이키키 해변에서 만난 한국인 이민 3세의 이야기를 수정․보완해 본 것이다. 그를 통해 하와이 현지 이민자들의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직접 듣긴 했지만 실제로 초기 이민사에 관해서는 들은 바 없었다. 그러나 책에서 읽었던 초기 이민자들의 고생과 한스러움만은 결코 빼놓을 수 없다는 충동이 일어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은 것으로 사실화 시켜보았다. 말하자면 허구다. 그러고 보니 현장감은 물론 생동감이 살아난다는 생각이 들었던 전후사정이 있다.  ꡐ상상적 허구ꡑ는 일반 상상과는 다르다. 수필작품들을 읽다 보면 ꡐ수필적 자아ꡑ가 각양각색으로 이런 것 저런 것을 상상해 보고 있는 장면이 더러 나오는데 그것이 설사 현재나 과거 그리고 미래의 일에 관한 상상일지라도 곧 상상임이 드러난다. 그러나 가령 과거의 일을 재생하는 과정에서 없었던 일을 상상으로 사실화 시켜본다면 그것은 ꡐ상상적 허구ꡑ가 될 것이다.  바로 그런 예를 「내 청춘의 한 슬픈 소녀」란 작품에서 찾아 볼 수도 있다. 가을의 코스모스에 얽힌 수필 청탁을 받고 써본 작품인데 코스모스를 생각하다 보니 문득 섬약하고 청순가련하단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 다음 바로 연상된 것이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잠시 사귀었던 소녀가 떠올랐다. 코스모스처럼 섬약했던 그 소녀는 결국은 폐병으로 저 세상으로 갔다. 이런 옛 기억들이 떠오르자 이를 소재로 지나간 시절 내 청춘의 열정과 애상이 담긴 작품을 써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 써보았던 것이다. 끝을 이렇게 마무리해 보았다.  아마도 지금은 그녀가 천상의 코스모스 들판에 누워 있을 듯싶다. 오늘 나는 그녀가 그 옛날 나의 책갈피에 끼어넣어 주었던 이 지상의 코스모스 꽃잎을 찾아내 그 당시 내 청춘의 열정을 다시 담아 이 가을바람에 실어 보내 보련다.  여기서 ꡐ그녀가 그 옛날 나의 책갈피에 끼어넣어 주었던 이 지상의 코스모스 꽃잎ꡑ이란 부분은 과거재생 과정에서 생각해 낸 순전한 ꡐ상상적 허구ꡑ다. 일부러 이런 허구를 넣어 본 이유는 ꡐ코스모스 들판에 누워있을 듯싶다ꡑ는 상상의 사후 천상세계와 살아있을 당시의 지상의 세계를 코스모스 꽃잎과 연결지우고 싶은 욕구가 불쑥 일었고 또 한편 어느새 훌쩍 늙어버렸다는 내 나이도 셈해 보면서 내 청춘의 열정을 되살려 그 애틋한 심정을 꽃잎편지마냥 바람에 실어보내 보겠다는 작의(作意)에서 취해 본 허구였다.  ꡐ반전적 허구ꡑ는 흥미와 이외의 결과에서 오는 황당함을 살려보기 위한 허구다. 콩트에서 곧잘 이용하는 기법과도 유사하다. 「반딧불의 서정」이란 작품을 통해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이 작품은 유년시절 반딧불이를 잡으려 다닌 경험담을 작품화 시켜 본 것이다. 마을 앞 냇가에 여름밤이면 동네 처녀들이 목욕하러 나오는 은밀한 장소가 있었다. 풋고추들인 우리가 해찰궂게도 그곳으로 반딧불을 잡으러 나간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작품화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멀리서 몇 점의 불들이 깜박이고 있어 그것이 곧 반딧불인 줄 알고 가 보았더니 사실은 반딧불이 아니라 멱감는 처녀들을 훔쳐보며 달아오르는 욕정을 삭히고 있던 동네 총각들의 담뱃불이었다는 이야기를 넣었다. 이것이 바로 호기심과 흥미유발이란 계산에서 일부러 넣어본 ꡐ반전적 허구ꡑ다.  지금까지 나는 ꡐ인지할 수 없는 허구ꡑ 즉 ꡐ작법적 허구ꡑ를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여 설명해 보며 어느 정도 그 기능이나 기능적 효과도 설명해 보았다.  이제는 ꡐ반쯤 인지할 수 있는 허구ꡑ 즉 ꡐ수사적 허구ꡑ를 알아보기로 하겠다. 어떤 일이나 사건을 과소화나 과장화 하려다 보면 그에 따른 수사적 표현이 나오기 마련이고, 또 이에 준하는 과장이나 과소화 된 행동이나 행위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ꡐ수사적 허구ꡑ라 명명해 보았다. 글의 토온이나 필치로 보면 어느 정도 허구가 가미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머 수필, 풍자수필, 실수담 등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경우다. 이희승의 「오척단구(五尺短軀)」 김성진의 「뚱뚱이의 손득(損得)」 어효선의 「어씨지탄(魚氏之嘆)」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말에 쉽게 동의하리라 본다.  4. 허구 수용과 현대수필의 또 하나의 활로  지금까지 나는 수필의 허구 부분수용론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그 수용범위와 한계를 설명해 보았고, 또 시도적이긴 하지만 수용될 수 있는 허구의 종류와 그 기능이나 그 기능적 효과도 살펴보았다.  다시 극단적으로 말해 보건데 수필이란 형태가 사실이나 체험의 있는 그대로의 재현이나 나열이라면 기록일 뿐 작품이나 창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수필을 쓰고, 소설을 쓰고, 일기를 쓰고 보고문을 쓰는 이른바 ꡐ쓰는ꡑ행위는 똑같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또 다른 말 사용의 용례를 보면 일기문, 보고문, 기록문 등은 단순히 작성이나 쓰는 행위에 끝나지만 수필과 소설은 작성이 아니라 만들거나 짓는 행위와 통한다. 수필창작, 소설창작 그래서 창작예술이다.  또 한편 있는 그대로를 재현해 내는 사진과 사진예술이 다르듯 수필이 ꡐ체험의 문학ꡑ이나 ꡐ사실의 문학ꡑ이라고 해서 재현이 아닐진대 문학성이나 예술성을 살려내야만 한다. 이쯤에서 수필에도 ꡐ제한적 허구ꡑ가 용인되는 입지(立地)나 근거가 마련되는 것이다. 소설과는 아주 달리 사실과 허구 사이나 체험과 허구 사이에서 행복하게 융합이나 결합될 수 있는 황금비율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자료의 가공, 가감, 축소나 확대, 수정과 보완, 취사선택 등을 통해 질서화, 일반화, 의미화, 강조화가 이루어져 감동성, 진실성, 흥미성, 예술성이나 문학성 등이 획득된다면 허구야말로 맛과 멋 그리고 모양새를 내주는 당의(糖衣)요, 합금(合金)이며, 감초요 화장품이며, 성형물(成形物)이요 부재료다.  우리는 이제 허구를 독약인 것처럼 겁내거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현대수필이 환골탈태하고 또 한 차원 높은 예술성이나 미학성을 획득하려면 종래의 경직된 수필관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할 것이다. 한 차원 높인 작법론에서 보아 필요불가결의 허구는 반드시 용납되어야 하고 용납되리라 본다. 그렇다고 꼭 허구 만능론을 강조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리하여 앞으로는 반드시 수필의 정의가 ꡐ사실의 문학이나 체험의 문학이면서도 때론 제한된 허구가 용납되는 문학양식이다ꡑ라고 내려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 현대수필의 또 하나의 다른 활로가 열려 있다 할 수 있다.  과연 이런 시대가 온다면 마냥 쉬쉬하며 감추어놓고 있던 작법상의 비밀도 비밀일 수 없을 것이고 또 그 비밀의 공개는 고해성사도 아니요 양심선언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ꡐ제한된 허구ꡑ 수용의 자유를 쟁취했다고 해서 방종해서만은 안 될 것이다. 창작과정상에서 비밀 양심선언은 늘 수반되어야 하리라 본다. 엄격한 금지조항의 준수나 이행은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다. 소설적 허구는 물론 독서의 경험이나 다른 사람의 간접적 경험을 자기체험인 양 자기화시킨 허구는 반드시 추방되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황금비율의 양심을 어긴 수필가도 철퇴를 맞아야 하리라 본다.  ꡐ선의 거짓말ꡑ이 용인되듯 ꡐ선의의 허구ꡑ는 칭찬 받겠지만 ꡐ악의의 허구ꡑ는 거짓말쟁이 수필가란 악담을 들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수필세계 도래를 위해 다같이 나팔을 불어도 보자. 힘차게 전진도 해보자. 노도 저어 나가보자. ¶ì  수필의 정체성과 실험정신  안 성 수  - 제주대 교수․문학평론가 -  1. 서론  이 글의 목적은 수필의 정체성과 실험정신의 상관성을 탐구하여 장르 발전의 길을 모색하는데 있다.  문학의 정체성(identity)과 실험정신은 장르의 운명을 결정짓는 두 개의 축이다. 장르의 고유한 뿌리와 원형을 지속적으로 보존해주는 정체성의 축이 구심력이라면, 장르의 전통을 계승해 나가면서 문학적 지배 영역을 확충해 나가는 실험정신은 원심력에 해당된다. 어떤 장르가 구심력만 강하고 원심력이 약하거나, 거꾸로 원심력만 강하고 구심력이 약하면, 그 장르의 운명은 쉽게 쇠잔하거나 타 장르에 흡수되기 쉽다. 고대 서사시와 중세 로맨스가 그러한 비극적 운명의 길을 걸어간 대표적 희생물들이다. 이들이 주는 교훈은 과거의 전통적 방법과 완고한 이념에만 집착한 채 실험을 두려워하는 장르는 몰락하고 만다는 점이다. 전통에 대한 무비판적 향유보다는 발전적 계승을 위한 실험적 노력이 문학 장르사에 크게 이바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시와 소설의 장르는 끊임없이 자기 개혁의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환경과 독자층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고통스런 도전을 계속해오고 있다. 이에 비해, 수필은 환경의 변화에 둔감한 채 과거의 전통만을 답습하는데 급급하고 있다. 인간과 시대가 변하고 예술과 문화가 발전하는데 수필은 그 흐름을 주도하기는 커녕, 문학사의 주변부에서 수수방관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쪽에서는 새로운 형식의 시와 포스트모던 소설이 쏟아져 나오는데 수필은 고통스런 실험을 기피한 채 전통적인 창작 방법만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의 수필문학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지적은 이런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현대의 수필 작가들이 몰두하고 있는 전통적인 작법과 비실험적 자세는 한계에 이른 듯하다. 100년 전에 비해 별반 달라지지 않은 안이한 집필 태도와 스테레오 타입의 작품들, 이것은 분명 현대 수필이 새로운 시대의 독자를 위한 문학적 소통 매체로서의 책임과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증거로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수필의 정체성과 전통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편견들도 수필의 위기 상황을 부채질하고 있다.  당면한 과제는 일차적으로 수필 작가들이 담당해야 할 몫으로 보인다. 장르 정체(停滯)의 책임을 작가 집단에게만 전가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으나, 수필의 정체성과 전통을 작품 속에 형상화하는 것은 그들이기에 작가들의 실험정신과 사명감의 부재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당대를 풍미하는 시대 정신과 보편적 신화 의식, 그리고 미래의 역사적 변화와 흐름을 미리 감지하여 작품화하기 위한 노력 속에는 항상 전통과 현실 사이의 변증법적 반성과 성찰이 요구된다. 1차 텍스트의 생산자들이 작품을 통하여 장르 발전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창조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한 이러한 논리는 공허한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은 당대의 수필 작가들을 향한 몇 가지 제안을 담게 될 것이다. 먼저 수필 문학의 장르적 전통에 대한 왜곡의 근거를 밝히고, 그를 바탕으로 정체성의 실체를 정리한 뒤, 수필의 장르 발전을 위한 실험적 창작시 작가들이 고려해야 할 몇 가지 관점에 관하여 제시하려고 한다. 그리고, 수필 문학의 미래 또한 작가들의 끊임없는 실험적 글쓰기에 의해 이끌리게 될 것임을 역설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바람직한 수필 문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장르의 구심력을 만들어내는 문학적 정체성과 장르의 원심력을 만들어 내는 실험정신을 양극으로 하여 긴장된 변증법적 자기 인식과 실험적 창작이 필요함을 논증하고자 한다.  2. 수필의 전통과 정체성  1) 수필의 전통과 오해  수필의 실험정신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수필의 전통과 정체성(正體性)에 대하여 언급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전통과 정체성에 대한 인식 없이 이루어지는 실험은 자칫 장르 자체에 대한 근거 없는 자기 부정이나 논리적 모순을 가져다 줄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흔히, 한국의 독자들 중에는 -일부 타 장르의 작가나 비평가도 예외가 아니지만- 수필 문학의 예술적 위상이나 가치를 타 장르에 비해 폄하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것은 분명 그릇된 편견이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피해는 아직도 한국의 수필 문학계에 가중되고 있다. 특히, 시와 소설에 비해 수필의 미학성이나 철학성이 뒤지는 것으로 인식하거나, 타 장르의 작가들이 그들의 본업 사이에 잠시 창작에 얽힌 넋두리를 감상적으로 늘어놓는 여기(餘技)쯤으로 인식하는 경향도 적지 않다.  물론, 수필이 문단이나 학계에서 시나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게 다루어지고 있는 점은 인정한다해도, 그것이 곧 수필의 문학적 가벼움이나 미학적 가치의 열등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편견과 오해의 배경에는 그동안 독자 대중들에게 널리 회자되어 온 수필의 정의에 관한 수사적 표현들도 한 몫 하고 있다. 이를 테면, ꡒ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수필ꡓ이라거나, ꡒ무형식의 형식이 수필ꡓ이라는 등의 몇몇 선배 작가들이 멋을 부려 쓴 수사적인 말들이 이런 오해를 낳게 한 하나의 원인으로 보인다. 그리고 수필 쓰기를 잡문이나 여기쯤으로 이해하고 있는 문인들과 출판사의 상업적 전략도 수필의 본질과 전통을 흐려 놓는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수필은 쉽게 읽히되, 결코 쉽게 쓰여지는 글이 아니다. 겉보기에는 평이한 글이면서도 의미 있는 삶의 체험을 시적 감수성과 자기 철학, 품위 있고 함축적인 문장 미학에 실어 들려주기 위해서는 수많은 퇴고와 조탁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수필은 단순한 신변잡기(身邊雜記)의 서술을 넘어선다. 자기의 삶에서 터득한 생활철학을 개성 있고 감동적인 주제에 실어 들려주는 문학예술이란 점에서 쓰기가 녹녹치 않다. 또 필자가 자기의 삶의 일부분을 직접 제 목소리로 격조 있게 고백하는 문학이란 점에서도 결코 쉬운 글쓰기가 아니다. 평이한 문장으로 갈무리하되 읽을수록 깊은 글맛과 글멋을 미덕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만인(萬人)을 독자로 한 글이란 점에서 수필은 결코 쉽게 쓰여지는 글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수필은 짧은 글이되 결코 짧은 시간에 쓰여지는 글이 아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진정한 수필은 잡담을 늘어놓는 글이 아니다. 스스로 터득한 삶의 철학과 달관(達觀)의 미학을 격조 있게 형상화시켜 들려주기 위해서는 상당 기간 고통스런 창작의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 소재를 숙성시키고 발효시킨 뒤 견고한 구조위에 적절한 서술의 옷을 입히는 일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수필가 한흑구는 「나무」라는 글을 완성하는데 5년의 세월을 쏟아 부었고, 오창익은 200자 원고지 15매 남짓한 「북창(北窓)」이란 수필을 쓰는데 다섯 달이 걸렸다고 한다. 이런 것이 수필이다.  수필은 시조처럼 틀에 박힌 일정한 형식을 강요하지 않는 대신, 오히려 작품마다 독창적인 새로운 형식의 창조를 요구하는 글쓰기이다. 이 점에서 수필은 다른 문학장르보다 지적 세련미와 장인적(匠人的) 솜씨를 요구한다. 실제로 ꡐ무형식의 형식ꡑ으로 불리는 수필의 형식 미학은 글쓰기의 높은 경지에 도달한 달인(達人)들에게서 구할 수 있는 고도의 능력이다. 수필 쓰기가 어러운 이유 중의 하나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윤오영의 「달밤」은 불과 넉 장의 원고지에 주인공들이 주고받는 극적인 대화 형식과 달밤의 분위기를 통해 독특한 동양적 지성의 분위기와 관조의 경지를 형상화하는데 성공한다.  수필은 작가의 삶을 보여주되 허구적으로 꾸며 쓴 글이 아니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상상력의 힘만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인위적으로 창조하는 글이 아니다. 수필의 중심 이야기는 반드시 자신의 삶에서 끌어와야 한다는 뜻이다. 수필을 상상력으로 꾸며 쓴다면 길이가 짧은 소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이 점에서 수필은 타 장르에 비해 태생적으로 리얼리티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은 운문과 산문의 속성을 포용하되, 그들이 다루지 못하는 중간 영역을 다룬다. 좋은 수필은 시에도 속하고 소설에도 속한다면 과장일까. 수필을 더욱 압축하여 함축적인 언어로 리듬 있게 배열하면 운문이 되고, 사건과 서술을 더욱 복잡하게 구체화하고 덧붙이면 산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시와 소설을 섞어 화학적으로 융합을 시키면 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독특한 문학형식이 태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수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수필의 문장 속에는 세련된 시적 응축과 내포의 미학이 숨어있고 풍부한 시적 감수성이 내재하며, 소설보다 더 생생한 사건과 인물과 주제가 자리잡고 있다. 수필은 이렇게 다양한 문학의 장르적 속성을 함유하면서도 그들과 엄격히 구별되는 특성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수필은 타 장르에 비해 포괄성과 융합성을 보여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수필의 본질이자 전통임을 무수한 수필 작가들이 작품으로 증언하고 있다. 수필 문학의 본질과 전통은 결코 하루아침에 축적된 것이 아니다. 이미, 엘리엇(T. S. Eliot)이 「전통과 개인의 재능」이란 평론에서 주장했듯이, 전통은 역사의식을 내포한다. 작가에게 역사의식은 과거의 과거성에 대한 인식인 동시에, 과거의 현재성에 대한 인식을 포함한다. 뿐만 아니라, 역사의식은 작가의 정신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작품으로 잉태되면서 살아있는 전통으로 계승되는 것이다. 작가의 전통의식은 그의 작품 속에 용해되어 수많은 독자와의 문학적 대화(독서)를 통해서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전달된다. 그렇게 쌓여 계승되어온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문학적 전통의 모습들이다. 전통의 힘은 작품 창조의 순간에 보편적 지향의식으로 작용하면서 내재화된다.  수필의 전통과 본질적 요소에 대해서는 정체성과의 관련성 속에서 보다 체계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오랜 장르의 역사 속에서 작가들이 작품 창작시 유념해야 할 보편적 관습이나 미덕으로 인정 되어온 문학적 속성과 역사의식이 전통이라면, 정체성은 수필을 수필답게 만들고, 수필의 문학적 독자성과 자율성을 견지해온 장르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전통이 장르의 속성을 수평적으로 이끄는 힘이라면, 정체성은 장르의 본질을 수직적으로 환기하는 힘이다. 전통은 작가의 역사의식에 의해 계승되면서 정체성을 실어 나르는 수레와 같은 것이다.  2) 수필의 정체성  본래 정체성이란 아이덴티티(identity)의 역어로서 어떤 대상의 고유한 본성을 일관되고 동일하게, 연속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힘이나 속성을 가리킨다.  정체성을 수필과 연결시켜 보면, 한 마디로 모든 수필 작품에 일관되게 내재해 있는 장르적 본질과 고유성을 일컫는 말이다. 그것은 수필을 다른 장르와 구별할 수 있게 해주는 고유한 본성인 동시에, 수필을 수필답게 만들어 주는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속성들로서 동일성, 연속성, 일관성, 반복성 등을 갖는다.  모든 문학의 정체성은 전통에 실려 시대와 시대를 관통하여 흐른다. 그 불변의 속성들이 문학적 전통을 만들어 내는 본질의 힘이라면, 전통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정체성을 실어 나르는 초역사적 통로가 된다.  필자는 수필의 정체성을 소재의 측면, 화자의 측면, 허구성의 측면, 형식의 측면, 장르의 측면 등 다섯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 수필은 작가의 체험을 기본 소재로 한다.  일반적으로 문학은 상상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상상으로서의 문학은 작가가 꿈꾸는 세계를 허구적으로 창조하여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 행위이다. 따라서 허구적 문학은 핵심 제재까지도 상상력을 동원하여 허구적으로 떠올린 뒤, 개연성 있게 재구성하여 조직한다.  이에 비해, 수필은 전통적으로 작가의 체험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필은 이야기의 근간이 되는 글감을 작가가 직접 자기체험에서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다. 수필을 가리켜 진솔한 ꡐ자기 고백ꡑ의 문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만일 수필의 제재를 자기 체험에서 가져오지 않고, 상상력을 활용하여 전적으로 꾸며낸다면 그것은 진솔한 자기 체험의 고백이 아니라, 허구적 상상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지금까지의 전통에 따른다면, 적어도 수필의 중심 글감은 자기 체험에서 가져와야 된다는 것은 부동의 철칙처럼 보인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수필은 창작 산문이면서도 시나, 소설, 희곡 등의 허구적 상상의 문학과는 다른 비허구적인 체험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상상력에 의해 인공적으로 창조되는 시나, 소설, 희곡 등은 개연성을 중시하는 특성이 있다. 허구성에 의해 꾸며내는 문학은 개연성이라는 객관성을 확보해야만 리얼리티가 자리잡을 수 있고, 사실성이 확보되어야만 독자들의 공감을 획득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수필은 그런 인위적인 노력과 허구적 장치가 필요 없는 순수한 사실 문학의 장르이다. 수필은 전적으로 필자의 직접, 혹은 간접체험을 이야기로 구성하거나 재조직하므로 개연성이나 리얼리티가 기본적으로 소재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필 창작과정에서 허구성이 전혀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수필에서도 미적 감동을 효과적으로 창조할 수 있는 미적 전략과 고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필 작가는 이야기의 근간에 해당되는 기본 골격은 체험에 의존하면서도, 그것을 재구성하여 들려주는 예술적 순서나 방법에서는 허구성의 도움을 받게 된다.  모든 문학작품의 문학성은 기본적으로 언어의 선택과 이야기의 미적 배열방식에서 비롯된다. 같은 이야기라고 해도 어떤 언어를 어떻게 선택하여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주제의 향방이 달라질 수 있다. 헨리 제임스가 ꡐ소설에는 백만 개의 창이 있다ꡑ라고 언급한 것도 언어의 선택 방식과 이야기의 구성 및 조직방식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의 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소재의 차원에서, 수필 문학의 정체성은 작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꾸미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야기의 미적 조직(배열)방법과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수사적 측면에서 동원되는 허구성은 용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 수필은 작가의 실제 목소리로 전달된다.  수필이 다른 산문 장르와 구별되는 두번째 특성은 그것이 작가의 생생한 실제 목소리와 어조(語調)로 들려주는 점이다.  작가가 실제 목소리로 자신의 체험을 들려주면 그것은 고백문학 형태가 된다. 게다가 수필은 자기 자신에게 털어놓는 자기 고백의 형태를 띈다는 점에서 보다 순진무구한 진실성을 보장받게 된다. 자기 자신에게 고백하는 말은 굳이 거짓말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가의 실제 어조와 목소리를 활용하는 수필의 강점이 드러난다. 수필의 고백 형식은 소설처럼 특별한 화자(話者)를 도입하지 않고, 실제 작가가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여타 장르에 비해 비교 우위에 선다.  이러한 서술방법은 이따금 작가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기도 한다. 작가가 자신의 목소리로 사생활을 공개할 때, 일부 독자들이 작가의 삶과 인격을 그릇되게 인식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나 크게 우려할 바는 아니다.  오히려 세련된 작가들은 바로 이런 점을 미적 장치로 활용하여 독자와의 인간적 공감대를 증진시키는 효율적인 통로로 쓴다. 이처럼 수필의 실제 목소리는 이야기의 전달 과정에서 직접적인 감동을 창조하는데 크게 기여할 뿐만 아니라, 장르 차원에서도 리얼리티를 구현하는데 우위를 확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문학이 효율적인 교감과 미적 감동을 창조하기 위해 개연성과 사실성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수필은 이미 독자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는 전략을 구비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시 장르에서도 작가의 주관적 고백의 어조가 채택되지만, 이때 시인의 고백은 허구적 상상의 내용을 고백한다는 점에서 수필과는 다르다. 예컨대, 시의 화자는 퍼소나라는 숨은 화자의 존재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허구적 화자를 통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밖에도 소설이 화자라는 제 삼자를 내세우고, 희곡이 등장인물 각각의 목소리와 행동으로 직접 표출하게 하는데 비해, 수필은 언제나 작가가 자신의 음성을 1인칭 형태로 들려준다는 점에서 특이성을 갖는다.  셋째, 수필의 이야기는 허구적 창작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수필을 제외한 모든 문학 이야기는 허구적으로 창조하였으면서도 사실담처럼 보여주기 위해 ꡐ그럴 듯함의 원칙ꡑ을 동원한다. 허구적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꾸며낸 것이기 때문에 작품과 작가의 삶과의 일치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예켠대, 작가의 실제 삶과 작품 내용의 차이에서 오는 윤리적 책임이나 도덕성도 문제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당연한 문학적 관습으로까지 인정해 준다.  이에 비해, 수필은 허구성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창작론을 배척하므로 그러한 문학적 관습 또한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작가의 삶과 작품 내용은 일치하거나 적어도 유사해야 한다는 것이 수필의 오랜 전통이자 관습이다.  수필과 허구성의 문제는 일부 작가나 학자들 사이에서 첨예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수필의 본성 유지를 위해 허구성을 배척하자는 주장과 수필의 장르 발전과 미학성 증진을 위해 자유롭게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20년 넘게 대립되어 왔다. 이러한 갈등은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있지만, 수필의 오랜 전통과 정체성의 관점에서 보면 비허구적 창조의 길이 보다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물론 독자에게 미적 감동을 주고 카타르시스 체험과 바람직한 인간성 향상의 길을 교시하는 것이 문학이라면, 허구성은 하나의 효과적인 미적 방법을 제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허구성을 창조의 원리로 활용하는 길만이 완전무결한 글쓰기에 이르는 첩경은 아니다. 그것은 그 길에 이르기 위한 한 가지 가능성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수필을 제외한 모든 문학장르가 허구적 이야기의 창조 행위를 통해 완전한 글쓰기의 꿈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수필은 진실한 삶의 고백을 통하여 글쓰기의 이상향에 도달하고자 한다. 이것은 양자간의 명백한 차이점인 동시에 장르적 특성으로 규정짓는 원리가 되기도 한다.  수필이 지향하는 작가의 체험적 삶에서의 진실 찾기는 인간과 작품의 일치를 요청한다는 점에서 허구의 문학보다 한층 진실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보다 인간적이고 윤리적이며 사실적일 수 있다는 장점도 지닌다. 이에 비해, 허구적 창조의 길을 채택하는 장르들은 나름대로 현실세계에서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꿈과 욕망의 세계를 상상적으로 체험케 함으로써 대리만족의 길을 열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허구적 문학과 비허구적 문학의 길은 나름대로 장단점을 지니고 있지만 양자는 각기 불완전한 한 방법에 불과하다. 바람직한 인간의 길이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완벽한 통일이라고 볼 때, 허구적 문학은 상상력의 힘을 빌어 이상세계를 제시하고자 하고, 비허구적 문학은 현실세계로부터 진실한 삶의 길을 직접 제시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들의 조화를 통해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바람직한 문학의 길을 추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수필이 소설이나 시, 희곡 같은 허구 문학의 반대쪽에서 수 천년 동안 비허구 문학의 길을 걸어온 당위성이 여기서도 발견된다. 수필은 허구 문학이 보여주지 못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예술적 감동과 진실을 창조하는 문학이라는 점에서 그 고유성과 예술적 가치가 존중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허구 배척론과 허구 허용론은 비허구 문학과 허구 문학이라는 문학의 양대 줄기를 형성하면서 상호 보완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어떤 주장이 수필의 장르 발전에 바람직한 길을 제공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일이다. 문제는 어떤 주장이든 장르의 경계선을 해체시켜 수필의 정체성 자체를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특히, 소설처럼 흡수력이 센 다른 산문 장르와 구별될 수 있는 수필의 장르적 특성을 포기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수필의 허구 배척론은 바로 이런 점에서 강점을 지닌다.  그러나 허구를 배척한다고 하여 수필 창작과정에서 허구성이 전적으로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무리 체험적 사실(事實)에 바탕을 둔 문학이라고 하더라도 작가가 체험한 내용을 발생 순서대로 늘어놓기만 해서는 예술성 짙은 작품으로 창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재를 예술적으로 재조직하여 들려주는 이야기의 조직 방법은 작가의 미적 특권이자 문학성과 예술성을 창조하는 핵심원리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수필의 근간이 되는 중심 이야기는 비허구적인 작가 체험에서 가져오되, 그것을 문학적으로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예술적 형상화와 서술을 위한 허구성의 틈입은 용인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된다. 이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술이기를 포기한 사실의 기록에 지나지 않게 된다.  사실성에 의존하는 수필의 전통을 해체하거나 버리자는 주장은 수필의 장르적 특권을 포기하는 길이 된다. 사실적인 삶의 이야기를 글감으로 채택하는 것은 오직 수필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런 특성 속에 수필의 장르적 정체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미학원리가 숨어있다. 어떤 형식이나 창작 원리의 채택이 수필을 더욱 수필답게 만드는 길이 아니라, 타 장르의 모방이나 아류로 전락시키는 길이라면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넷째, 수필은 정형화된 형식이 없다  수필의 무정형성(無定型性), 혹은 무형식성의 개념은 가장 많은 오해와 왜곡을 불러일으킨 것 중의 하나이다.  사실, ꡐ무형식ꡑ이란 말이 주는 자유로움과 손쉬움의 이미지는 창작을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수필 쓰기를 쉽게 생각하고, 장르 자체를 가볍게 여기게 하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왜곡 현상은 실제로 한국의 기성문인들에 의해서도 저질러져 왔다. 걸러지지 않은 감정의 남발과 감상적이고 의미 없는 화려한 말들의 잔치를 통하여 청소년 독자층을 의도적으로 겨냥한 작품들이 상업성과 결탁하여 문자화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수필 쓰기를 마치 문학적 잔재주나 여기쯤으로 간주하는 일부 문인들이 문장력만 있으면 아무런 형식 없이 써도 된다는 통념을 만들어 유행시킴으로써 수필 문학은 상당한 평가절하 현상을 맞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장르 폄하 현상은 문학 지망생들의 등용문인 신춘문예 공모에서 수필 장르를 없앤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물론 현재에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극소수의 지방신문이 있긴 하나, 중앙에서 발행하는 대형 신문사의 신춘문예에서 수필 장르가 사라진 것은 오래이다.  이런 문제의 진원지에 놓여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ꡐ무형식의 형식ꡑ론이다. ꡐ무형식의 형식ꡑ이란 말은 형식이 없는 것이 곧 수필의 형식이라는 뜻보다는 오히려, 틀에 박힌 정형은 없으나 작품마다 그에 어울리는 개성 있는 새로운 형식을 창조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수필의 ꡐ무형식ꡑ론은 수필가에게 자유와 구속의 양면성을 동시에 부여한다. 일정한 형식이 없는 가운데서 작품을 쓸 때마다 독특한 형식을 창조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필을 진정으로 아는 작가들이 수필 쓰기의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과작(寡作)을 일삼는 것도 이런 부담 때문이다. 수필 쓰기가 항상 새로운 미적 형식 창조에 도전하는 실험이 되어야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수필은 장르 자체가 요구하는 고유한 형식이 없는 대신 새로운 작품을 쓸 때마다 독창적 형식의 창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한층 난해하고 지적이다. 기다림을 주제로 한 작품에는 그 기다림을 가장 예술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미적 형식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찾는 일은 단순한 체험적 이야기의 배열만 가지고는 달성할 수 없는 깊고 풍부한 문학 예술적 식견과 창조적 재능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수필 작가에게 무형식의 형식이란 말은 예사로운 권면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무제한적이고도 독창적인 미적 형식의 창조를 요구하는 강력한 속박의 언어가 내재해 있다. 수필의 ꡐ무형식ꡑ의 논리는 명작을 꿈꾸는 수많은 작가들에게 항상 영원한 과제로 남아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새로운 수필을 쓸 때마다 도전의 목표로 주어진다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이 쉽다고만 생각해온 수필이 가장 도전적이고 힘든 장르의 정체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도 이런 점 때문이다.  따라서 수필 작가들은 새로운 작품을 쓸 때마다 새로운 형식에 도전하고 새로운 형식을 창조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이러한 부담은 분명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도전정신으로 이어지고, 그런 창조적 실험정신이 수필 장르를 발전시키고 존속시키는 미학적 촉매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수필의 장인들 중에는 ꡐ무형식이 형식ꡑ이나 ꡐ붓 가는 대로 쓰는 것ꡑ이 수필이라는 왜곡된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애써 빚은 수백 점의 백자를 깨고 비로소 한 점의 작품을 건져 올리는 도공(陶工)처럼 수필가의 장인 정신 속에는 끝없는 실패와 도전, 그리고 치열한 실험정신만이 내재한다. 그런 높은 예술적 경지를 체득한 사람만이 던질 수 있는 말이 곧 ꡐ무형식의 형식ꡑ이나 ꡐ붓가는 대로 쓰는 글ꡑ이란 말이다.  그리하여 지고(至高)의 미의식을 터득한 달관자(達觀者)나 수필의 도(道)를 체득한 자에게 바람직한 수필의 세계는 ꡐ무형식의 형식ꡑ이나 ꡐ붓 가는 대로 쓰는 것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말이 가능하다면, 수필 쓰기는 정녕 무위자연(無爲自然)의 한 철학적 실천일 수도 있으나, 범인의 처지에서 수필 쓰기는 여전히 독창적인 형식을 찾아가는 고행의 길이다.  다섯째, 수필은 산문과 운문의 중간 장르이다  마지막으로 수필의 정체성은 중간 장르적 특성 속에서도 발견된다. 운문의 속성과 산문의 속성을 절묘하게 혼융하여 자신의 특성으로 간직하고 있는 장르가 바로 수필이다. 시의 속성을 뽑아 산문 속에 용해시키고, 산문의 속성을 뽑아 시와 결합시켜 창조해낸 이야기, 그것이 곧 수필 문학이다.  수필은 소설처럼 사건과 배경, 인물, 주제 등을 지니고 있지만 소설처럼 길지 않고, 시처럼 미적 감수성이 실린 함축적인 문장을 쓰지만 시처럼 짧지 않은 산문이다. 수필은 소설처럼 재미있되 소설처럼 꾸며 쓰지 않고, 시처럼 서정적이되 지나치게 함축적이지 않아서 평이하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수필의 미학적 속성은 매우 독특한 것으로서 수필이 운문이나 산문과 무관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이런 속성은 20세기 말에 불어닥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이르러 수필을 닮은 시와 수필을 닮은 소설이 출현함으로써 입증되게 되었다.  수필의 이런 장르적 차원의 독특성은 예술 기원설의 하나인 원시종합예술, 즉 발라드 댄스(Ballad Dance)설과도 무관하지 않다. 문학과 예술의 발생 초기에는 오늘날처럼 분화되지 않고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는 주장인데, 요즘 티브이나 영화 등을 통해 확인되는 미개한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제천의식 등을 빌어서 확인할 수 있다.  원시의 제천의식 속에는 언어와 동작, 소리 등이 혼합되어 있었는데, 언어는 문학으로, 동작은 연극이나 무용으로, 소리는 음악으로 분화․발전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원시인들의 종합예술 속의 언어(말)를 문학 장르와 연결시킨다면 운문성과 산문성이 통합, 혹은 혼융되어 있는 형태가 아닐까 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고대의 운문성과 산문성이 혼재된 원시의 종합예술 형태 속에서 수필의 원초적 양식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문학의 특성들을 본질로써 혼융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시적 요소와 소설적 요소, 혹은 희곡적 요소 등을 복합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통일 문학 형태가 수필로서 가능하다면, 미분화 상태의 원시종합예술 속에서 발견되는 원초적 문학 양식은 수필일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수필은 전통적으로 형식의 자유로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시적 요소와 소설적 요소, 혹은 희곡적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지닌다. 또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와서 소설이 수필화하고, 시가 산문화하는 퓨전문학 형태를 보면서, 수필이야말로 운문과 산문을 하나의 장류 속에 통합시킬 수 있는 중간 장르라고 할 수 있다.  3. 수필의 미래와 실험정신  1) 수필의 미래  지금 한국 수필 문단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의 하나는 수필의 미래에 대한 폭넓은 논의이다. 타 장르에 비해 논의 자체가 싱대적으로 저조하면서 수필의 문학적 가치를 폄시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바람직한 대응책을 강구하는 것은 불가피한 문제로 보인다.  이 문제는 곧 수필의 오랜 전통과 정체성을 유지 발전시키면서 장르 차원에서의 자기 변혁을 위한 모색의 길과도 직결된다. 이러한 논의는 구체적으로 당대의 모든 문학적 소통관계자들의 폭넓은 자기 인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작가 집단의 창작을 통한 왕성하고 풍부한 실험정신과 비평가들의 날카로운 비판 및 가치평가, 문학사가들의 작품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적 자리 매김, 학자(이론가)들의 이론적 체계화 작업, 그리고 독자들의 진지한 독서욕구와 독자반응이 상호 보완적으로 소통되며 영향을 주고받을 때 가시적인 성과를 보일 수 있다.  한국 수필의 미래는 전적으로 이들 다자간의 자기 반성적 노력과 협조 여하에 달려있다. 끊임없이 문학사를 되돌아보는 노력과 장르적 발전을 위한 실험적 자세, 그리고 현재의 문제점을 방관하지 않는 독자들의 관심 속에서만 수필의 미래는 보장받을 수 있다. 이러한 모든 노력들은 통합적인 관점에서 수필의 미래와 장르 발전을 위한 유기적 생존 전략에 다름 아니다. 그 중에서도 작가들의 왕성한 창작을 통한 실험정신과 장인정신은 수필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바로미터가 된다.  고대를 풍미했던 서사시가 전성기에 누리던 장르의 힘을 유지발전시키지 못하고 그 전통의 뿌리를 소설과 서정시에게 넘겨준 것은 한 마디로, 장르의 정체성을 변화하는 시대정신 속에서 계승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세의 로맨스가 전성기의 힘을 유지하지 못하고 그 뿌리와 전통을 소설에게 빼앗긴 것도 장르의 전통을 새로운 시대 정신에 맞게 진화시키면서 능동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필의 운명도 같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새롭게 다가오는 시대 정신이나 대중의 욕구와 상호 교통하면서 장르의 정체성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은 곧 수필의 전통을 이어나가는 일이다. 특히, 창작을 통한 장르 발전을 위한 실험 정신은 엘리엇(T. S. Eliet)이 주장했던 것처럼 역사 의식과 시대 정신을 골수에 깊이 간직한 채 전통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작가들의 중대한 창작의식과 사명의식 속에서 피어날 수 있다.  2)수필가의 실험정신  장르 차원에서 볼 때, 수필 작가들의 실험정신은 필연적인 생존전략이자 발전의 원동력이다. 작가들의 실험적 창작은 자발적인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자기 변혁의 몸부림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장르의 미래를 준비하고 개척하는 일이다.  생존 전략의 차원에서 추구되는 실험적 창작 정신의 발현은 철저한 변증법적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 질 때 바람직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러한 자기 모색은 모든 시대의 모든 수필인들에게 주어진 영원한 과제이자 사명이다. 특히, 수필 작가들은 장르 발전을 이끄는 실험적 창작의 선두에 서있는 자들이다.  다양한 실험 과정에서 수필 작가들이 우선적으로 명심해야 할 것은 전통과 정체성의 발전적 계승을 위한 실험 범주의 설정 문제이다. 작가들의 실험 작업은 필연적으로 두 가지 차원에서의 선택을 필요로 한다. 즉, 장르의 전통과 정체성까지도 변혁과 실험의 틀과 대상 속에 포함시키는냐? 아니면, 그들의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보완의 수준에서 부분적이고 부차적인 발전과 실험을 꾀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면한다. 전자가 적극적 실험의 태도라고 한다면, 후자는 소극적인 태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장르의 전통과 정체성 자체를 실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자기 모순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장르의 전통과 정체성의 훼손은 곧 칸트가 예술의 자율성을 위해 제기한 무목적적합목적성(無目的的 合目的性)의 이론에도 위배된다. 예컨대, 자기의 존재 목적을 상상한 문학은 반드시 그보다 힘이 센 타 장르에 흡수되거나 그 존재 자체를 상실함으로써 전통과 정체성을 잃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수필 장르를 위한 바람직한 실험은 전통과 정체성의 보완적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이차적 실험이 되어야 한다. 그 길은 곧 전통과 정체성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새 시대의 이념과 당대인들의 예술 철학적 욕구를 반영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될 것이다.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반영하지 못한 문학 장르나, 새로운 시대의 철학적 이념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문학 장르는 결국 살아남지 못한 채 소멸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환상성과 유토피아적 이상성을 본질로 갖고 있던 중세의 화려한 로맨스가 사실주의 시대를 맞아 죽음을 고한 것은 바로 그런 모델이 되고도 남는다. 엘리엇의 말처럼, 과거의 과거성에 대한 인식과 과거의 현재성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한 발 더 나아가, 다가올 미래 정신에 대한 인식까지 내포하는 힘을 지닐 때, 수필의 미래는 고대 서사사나 중세 로맨스의 전철을 밟지 않고 새로운 전통 계승의 길을 개척하게 될 것이다.  3) 실험적 창작의 길  장르 발전을 이끄는 키는 일차적으로 작가들이 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훌륭한 새 이론이 나오고, 독자들의 새로운 문학적 요구가 제기된다 해도 그것을 작품으로 수용하여 작품화하지 않는 한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이처럼 창작을 통한 장르 실험은 궁극적으로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지만, 그 아이디어는 작가의 단독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비평가와 이론가, 문학사가, 그리고 독자 대중의 유기적 소통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창조적 정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작가의 실험적 창작은 문학사적 맥락에서 기존의 작품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바탕으로 한 보완적인 의미에서의 도전적 성격을 띤다. 기존 작품과 현존하는 작품에 대한 유기적 반성과 성찰은 한 마디로 변증법적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자기 인식과 실험정신은 당대를 풍미하는 보편적 시대정신과 작가의 치열한 역사의식, 그리고 독자들의 수용적 욕구 등을 종합적으로 면밀하게 파악한 상황에서만 현실화될 수 있다.  인간과 시대와 환경의 끝없는 조우와 갈등이 영원한 문학적 탐구의 과제라면, 문학은 유기적이고 다극적 갈등의 한 복판에 서서 늘 독자와 만나야 한다. 그러한 만남을 통해서 문학은 독자와의 상호 텍스트적 교감을 주고받으면서 스스로 설 땅을 굳건히 확보할 수 있다. 나아가, 변화하는 시대, 다가올 역사적 흐름에 적응하려는 독자 대중의 노력, 그리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 보다 가치롭게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인간들의 삶을 작품화하고자 하는 작가들의 노력 속에서 문학은 변증법적 발전의 실타래를 풀 수 있다.  어떤 문학 장르가 번창하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시대정신과 역사적 환경을 당대의 보편적 신화소와 연결시켜 파악하면서, 독자들의 문화적 코드를 정확하게 인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새로운 정신과 문화적 욕구를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문학적 기법과 형식, 구조, 문체 등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포괄적인 모색과 노력은 새 시대에 적응하여 살아남기 위한 문학 장르 차원의 생존 전략이자 도전의 길이다. 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도전과 모색이 없는 문학 장르는 결국 시대 및 독자와의 조응에 실패함으로써 노쇠해 버리거나 유사 장르의 도전에 직면하다가 자취를 감추게 된다.  문학이란 본질적으로 시대, 인간, 환경의 삼각관계가 만들어 내는 의미 찾기에 다름 아니다. 모든 시대는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을 만들어 내고, 그것이 인간의 차원이나 우주(자연)의 차원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유기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작가의 사명에 해당된다. 이 시대의 수필 문학이 변화무쌍한 당대의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담아낼 수 있는가의 문제는 생존 전략적 차원에서도 반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제, 결론적으로 장르 실험의 차원에서 수필 작가들이 창작시 고려해야 할 점에 대하여 언급해 보기로 하겠다. 구체적인 방법을 내놓기보다는 문제 제기의 수준에서 몇 가지만 포괄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실험적 창작시 작가들이 어떤 방법과 양상을 취해야 하는가는 전적으로 작가들의 몫이자 특권이기 때문이다.  첫째, 이야기의 조직 방법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판에 박힌 이야기 방식만 가지고는 세련된 독자들의 감동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새롭고 낯선 이야기의 조직방식은 미적 감동의 충격을 증진시키고 강화하는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조직원리 자체가 새로운 이야기 형식을 창조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쓸모가 있다. 이는 ꡐ무형식ꡑ의 논리를 장르적 정체성의 한 측면으로 갖고 있는 수필의 이념과도 어울린다.  이러한 실험정신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70여 년 전에 이미 주장한 ꡐ낯설게 하기ꡑ의 미학 정신과도 연결된다. 늘 빈번하게 사용하여 익숙해진 이야기 조직 방식만 가지고는 독자들의 상투성과 감각적 타성을 깰 힘이 없다. 독자들의 완만한 감각과 감성의 상투화를 깨지 못하는 한 신선한 감동의 충격은 요원한 일일 수밖에 없다. 독창적이고 낯선 이야기 짜기 방식이야말로 새로운 감동을 창조하는 방법이자 형식 원리가 될 수 있다.  둘째, 다양한 이야기 전달 기법과 미적 장치에 대한 실험적 연구가 필요하다. 문학의 기법과 장치들은 흔히 이야기 조직의 보조수단으로 활용되지만, 문학적 이야기 구조에 역동성을 불어넣고 이야기의 의미구조에 다양한 상징과 변용력을 부여하여 주제의 형상화와 미학성 증진에 크게 기여한다. 예를 들면, 두 이야기를 병치시키는 방법으로 의미와 상징의 울림을 강화한다든가, 몽타주를 활용하여 입체적 의미공간을 확보한다든가, 콜라주를 통하여 생생한 현장감을 제공하는 것도 새로운 수필 문학의 의미공간을 구축하는데 기여하리라고 본다.  셋째, 다양한 형식과 매체의 다중적이고 다층적 사용도 권장할 만하다. 수필과 영상미학을 혼용하여 CD나 DVD로 제작하고, 수필을 작가의 음성으로 직접 낭송하는 녹음방식도 독자의 상상력과 사실성을 강화시키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편지의 형식과 희곡의 형식을 혼합하고, 음악의 소나타 형식을 액자의 형식과 병행하고, 미술의 기법과 시의 형식을 혼용하고, 수사관의 심문 형식과 자기 고백을 오버랩 시키고, 음악의 대위법과 건축의 공간기법 등을 활용한 역동적인 의미 생성방식 등은 분명 새로운 수필의 미적 전달체계를 제공할 것이다. 실험 방법은 무궁무진하지만, 수필 형식은 내용이면서 동시에 주제를 전달하는 의미구조라는 점에서 형식과 의미는 유기적인 통일성을 지녀야 한다.  넷째, 수필의 문장과 문체에 대한 연구도 실험 대상이다.  문학은 결국 언어로 형상화하는 시간예술이다. 문장과 문체는 고정되어 있는 것보다는 작품의 형식과 내용에 걸맞게 늘 변용 시켜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주제와 구조와 분위기에 따라 그들을 전달할 수 있는 언어 형식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모든 작가들의 꿈이자 이상이다. 작가들은 새로운 작품을 쓸 때마다 새로운 형식 실험과 문장 실험을 의도하지만 쉽지 않음을 고백하곤 한다. 한 작가가 쓰는 모든 작품이 동일한 문장 감각과 동일한 문체를 가지고 있다면 기본적으로 형식 실험에 실패했다는 증거이다.  1995년에 타계한 소설가 김동리의 문체가 청년기에 완성된 후 발전을 하지 못한 것은 그의 문학세계를 확충하는데 큰 장애로 작용했음을 저적하는 비평가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궁극적으로 작가의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는 언어 체계와 스타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허구성의 적절한 실험적 활용도 연구 대상이다.  언어를 매체로 하는 어떤 문학적 글쓰기도 허구성의 완전한 배제는 불가능하다. 수필이건, 소설이건, 시이건 간에 언어의 논리적 거리(logical distance)를 불식시키지 못하는 한 완벽한 사실의 전달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실제로 자기가 직접 체험한 소재를 언어로 재구성하여 들려주는 과정에서도 다소간의 허구가 끼여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현실이 이렇다면, 완벽한 허구성의 배제를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또 수필의 정체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문학성과 미학성을 증진시킬 목적으로 허구성을 적절하게 부분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작가의 미적 특권이기도 하다. 허구성을 전적으로 풀어놓으면 소설과 수필, 수필과 희곡의 경계선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요즘 들어 엽편(葉片)소설이니, 장편(掌篇)소설이니 하여 수필보다 더 짧은 소설이 유행하는 것을 보면서 지나치게 완고한 허구성의 배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기본 줄거리는 작가의 자기체험에서 가져오고, 그것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미적 감동과 문학성 증진의 목적을 위해 허구성을 다소 활용하는 것은 수필 세계의 발전에 기여하리라고 본다.  고답적인 자세로 일관하면서, 과거의 전통에만 뿌리를 박고 있거나 장르 실험을 배제한 문학은 어떤 경우에도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4. 결론  수필의 정체성과 실험정신은 수필 문학의 장르적 발전을 가져다주는 두 축이다. 정체성의 힘이 장르의 뿌리와 원형을 보호 유지하는 구심력의 축이라면, 실험정신은 새로운 전통을 개척하면서 새로운 수필의 장르적 영역을 확충해 나가는 원심력의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축의 유기적 상호성은 수필 문학 발전의 이념적 근간이 되면서 작가들이 명심해야 할 양가적 가치가 되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수필 문학의 장르적 전통에 대한 왜곡의 근거를 밝히고 그를 바탕으로 한 정체성의 실체를 정리한 뒤, 수필의 장르발전을 위한 실험적 창작의 필요성을 방법의 차원에서 제기하려고 노력하였다. 수필의 전통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편견들이 수필의 정체성의 약화 현상을 가져왔고, 그로 인하여 독자는 많으나 수필의 미래는 오히려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기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런 문제 의식으로부터 수필의 도전적인 실험정신이 요청됨을 역설하였다.  수필의 장르적 정체성으로는 자기 체험을 소재로 하는 점, 작가의 실제 목소리와 어조를 사용하는 점, 허구성을 기본적으로 배척하는 점, 운문과 산문의 속성을 혼용하는 중간 장르라는 점, 무형식의 형식 실험 등을 꼽았다. 그리고 이러한 장르적 정체성을 보유하면서도, 독자층에는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편견과 형식없이 아무렇게나 써도 수필이 된다고 믿고 있는 점, 그리고 타 장르의 작가들이 여기 삼아 수필의 본성과 무관한 작품을 남발하면서 수필의 장르적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음을 지적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필 작가들 또한 안이한 전통의 향수에만 젖어 실험적 도전을 게을리 함으로써 수필 문학의 위기를 맞고 있음을 논증하려고 힘 썼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야기의 조직 방법과 다양한 기법과 문학적 장치의 실험, 다중적이고 다층적인 형식의 혼용, 문장과 문체에 대한 청조적 실험, 허구성에 대한 융통성 있는 수용 등을 실험의 대상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창작 차원의 적극적이고 다양한 실험 없이는 정체성의 계승이 어렵고, 정체성의 계승 발전을 위한 적극적 노력 없이는 수필 문학의 미래가 밝지 않다는 주장을 폈다.  결국, 수필 문학의 발전은 장르의 구심력을 만들어내는 문학적 정체성과 장르의 원심력을 만들어 내는 실험정신을 양극으로 하여 생성되는 긴장된 변증법적 자기 인식과 성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ì  수필문학에서의 허구 수용문제와  현대수필이나아가야 할 방향  송 명 희  - 부경대교수․문학평론가 -  1. 허구 수용 논쟁은 소모적  수필문학에서 허구 수용 문제와 관련한 논쟁에 관한 결론은 한 마디로 허구 수용 문제를 논의하는 일 자체가 소모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은 그것이 어떤 장르가 되었든 만들어진 허구의 세계이다. 이때 허구라고 하는 개념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작가에 의해 그럴 듯하게 만들어진, 즉 가공의 세계라는 뜻이다.  흔히 수필문학에서 허구성 논쟁은 허구라는 개념을 자신이 경험하지도 않은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내어 쓴다는 의미로 지나치게 단순화시켜서 받아들이는 데서 발생한다. 무릇 문학에서의 허구는 거짓과 동의어가 아니며, 따라서 비난되거나 회피하여야 할 요소가 아니라 문학적 감동과 진실을 배가시키기 위해 선택되는 문학적 장치요, 기술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수필도 문학인 이상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로 허구성을 수용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수필이 단순한 신변잡기를 넘어서서 문학적으로 보다 세련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허구성 수용에 적극적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허구성 수용 문제를 양식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이라는 두 측면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자.  2. 양식적 측면에서의 허구성  소설(novel)은 명칭 면에서 픽션(fiction), 즉 허구라고도 칭하는데, 그것은 있을 법한 이야기, 지어내고 꾸며낸 이야기, 즉 허구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허구야말로 소설이란 장르의 가장 큰 변별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자서전 연구로 20여 년을 바쳐온 프랑스의 필립 르죈(Philippe Lejeune)은 『자서전의 규약』에서 자서전은 저자와 화자, 그리고 주인공 간의 동일성이 성립해야만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에 소설은 저자와 화자-주인공이 동일하지 않음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 그리고 이야기의 내용이 허구임이 증명될 것 등을 규약으로 제시했다. 즉, 소설의 허구적 성격은 화자-주인공이 저자와 동일인이 아닌 가공의 존재라는 점과 이야기의 내용이 만들어진 허구라는 점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소설뿐만 아니라 희곡을 비롯하여 서정장르인 시도 허구적 성격의 장르이다. 즉, 시의 화자(persona)는 그저 텍스트 속의 화자일 뿐 시인인 저자와 동일인이 아니다. 가령,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의 화자를 여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시를 쓴 김소월과 한용운은 잘 알다시피 남성이지 않은가. 남성인 김소월과 한용운이 여성화자라는 허구의 가면을 쓰고 시를 썼다고 해서 그들을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으며, 마찬가지로 「진달래꽃」과 「님의 침묵」에서 진술된 내용을 거짓말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진달래꽃」과 「님의 침묵」은 ꡐ이별ꡑ의 슬픔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시적으로 승화시킨 탁월한 작품으로 한국인의 가장 큰 애호를 받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김소월과 한용운은 이별의 슬픔을 보다 감동적이고 진실되게 표현하기 위해서 실제작가의 젠더(gender)와 다른 여성화자를 선택하는 시적 기술을 취하고 있으며, 이것이 시적 감동을 분명 배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시에서 다루고 있는 이별이란 소재가 소월이나 만해의 현실에서의 직접체험 여부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르죈식으로 말해보자면 저자와 화자가 다르다는 점에서, 또한 시의 내용이 저자의 실제체험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고 만들어진 허구라는 점에서 시는 허구적 장르이다.  구조시학에서는 실제작가와 구별되는 내포작가 및 화자를 명확히 구분하는데, 내포작가는 작가의 진술 토대 위에 재구축된, 오직 텍스트 안에서만 존재하는 작가이다. 이 내포작가의 가치관이나 태도는 반드시 실제작가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화자는 내포작가와 서사물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로서 서술된 사건에 참여하거나 혹은 그것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인물로 가정된다. 화자는 작품 속에 극화되어 있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여전히 텍스트 안에 존재한다.  수필장르에서 양식적 측면의 허구성 수용이란 서사적 양식의 차용을 의미한다. 서사(이야기, narrative)란 일차적인 의미로 ꡐ사건의 서술ꡑ을 뜻한다. 서사의 필수적인 요건은 이야기의 내용과 이야기하는 역할 즉 화자이다. 즉, 사건(event)이라는 내용과 서술(narration)하는 행위에 의해 서사는 성립한다. 그리고 서사물은 서사행위가 결과시킨 것, 일련의 현실 또는 허구적 사건들과 상황들을 시간 연속을 통해 구성해 낸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서사적 양식에 의존하는 서사물에는 소설을 비롯하여 서사시, 극, 신화, 전설, 역사와 같은 것이 있는데, 이것들은 비언어적 양식에 의존하는 영화, 뮤지컬, 뮤직 비디오 등의 비언어적 서사물과 구별하기 위해 언어적 서사물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언어적 서사물에 서사적 수필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필에서 재미와 감동을 확대하기 위해서 서사적 양식을 수용한 예는 오래 전부터 있어온, 또한 흔히 있는 일이다. 여기서 예를 들어보자.  내가 동경을 떠나던 날 아침, 아사꼬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고 있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선생 부인은 웃으면서 ꡒ한 십년 지나면 좋은 상대가 될 거예요ꡓ 하였다. 나는 얼굴이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사꼬에게 안데르센의 동화책을 주었다.  - 피천득의 「인연」에서  적막한 아스팔트 위에는 불규칙하게 밟는 나의 발자국소리만 울리었다. 부상당한 병정들을 실은 적십자 자동차 하나가 지나간다. 아마 그가 있는 병원으로 가나 보다 하고 바라다보았다. 빨간 불길이 솟아오른다. 그리고 그 위로 안개 같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불자동차소리도 났다. 북사천로에 불이 붙은 것이다. 불덩이 튀는 소리와 아우성 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일본 육전대 방색 가까이 왔을 때 패- 하고 탄자소리가 난다. 이어서 기관총을 내두른다. 나는 그 자리에 섰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 오분이 지났을까, 총소리는 그쳤다. 나는 그가 지금 근무하고 있는 시내 클리닉에 도착하였다.  그는 내 손을 잡으며,  ꡒ위험한 곳에 어떻게 오셨어요.ꡓ  그는 나를 자기 일하는 방으로 안내하였다. 총소리 대포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ꡒ고맙습니다. 그러나 저는 책임으로나 인정으로나 환자들을 내버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ꡓ  나는 그의 맑은 눈을 바라보았다.  - 피천득의 「유순이」에서  「인연」은 우리 수필문학사에서 중요하게 평가되는 피천득의 대표적 수필이다. 피천득은 일본여행에서 만났던 아사꼬의 이야기를 쓴 「인연」에서만이 아니라 중국 상해에서의 유학시절에 만났던 간호사 ꡐ유순이ꡑ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유순이」라는 수필에서도 허구적 양식을 차용하고 있다. 「인연」과 「유순이」란 두 작품에서의 1인칭의 화자는 분명 실제작가인 피천득과 동일인물이다. 하지만 이 수필에서 그리고 있는 사건의 중심인물(주인공)은 아사꼬와 간호사 유순이로서 저자-화자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르죈식으로 말하자면 저자와 화자는 동일인이지만 주인공은 동일인이 아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내용, 즉 아사꼬와 유순이라는 여성과의 만남은 저자가 직접 경험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즉, 내용은 허구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양식적 측면에서 두 작품은 허구성을 차용하고 있다. 즉, 사건이 있고, 서술하는 화자가 있다는 점에서 서사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마치 1인칭 관찰자 서술의 소설처럼. 하지만 두 편의 수필은 그리고 있는 내용이 작가 피천득이 직접 경험한 사실이라는 점에서 소설은 아니며, 길이도 짧아 서사적 수필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이처럼 피천득의 수필은 경험적 사실을 허구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보다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인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수필에서 허구성 수용은 수필의 내용을 보다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인상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기술적 장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수필문학은 초창기부터 허구적 요소를 적극 수용하여 왔음을 원로수필가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21세기에도 여전히 허구 수용문제가 쟁점이 된다는 것은 부적절하고 소모적인 논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3. 내용적 측면에서의 허구성  수필문학에서 허구 수용문제는 수필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만을 적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의 문제와 늘 상충해 왔다. 즉, ꡐ경험한 사실ꡑ의 범주를 너무 제한적으로 생각한 데서 발생한 오해이다.  필자가 이미 발표한 「수필문학의 허구성」(수필과 비평 99년 7-8월호)이란 글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 수필의 허구성은 환상성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험적 사실 위에 상상적 환상적 요소가 부가됨으로써 수필세계는 더욱 풍부해진다. 즉, 경험적 자아를 넘어서는 내적 자아의 표현, 심적 현실의 표현이 그것이다. 인간의 자아는 밖으로는 외적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안으로는 나의 마음, 즉 내적 세계와 관계를 맺도록 되어 있다. 심리학에서 외적 세계와 관계를 맺는 인격을 외적 인격이라고 부르며, 내적 세계와 관계를 맺는 인격은 내적 인격이라고 부른다. 내적 인격은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내적 인격은 인간의 무의식에 눈을 돌리게 만든다.  프로이트(S.Freud)에 의하면 무의식이란 의식으로부터 억압된 것, 망각된 것, 미처 의식되지 못한 심리적 내용,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의식에 의해서 인식되지 못한 채 정신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다. 칼 융(C.G.Jung)은 무의식이란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 모르고 있는 미지의 정신세계라고 정의했다. 즉, 무의식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정신세계이다. 자아가 무의식의 내용을 파악하고 그것을 의식화하고자 하면 할수록 무의식은 그의 창조적인 암시를 더욱 활발히 내보내게 된다. 어찌 보면 문학은 자아로 하여금 무의식의 세계에 눈을 돌리게 하며, 그 깊은 층으로 인간을 유도함으로써 창조성을 발휘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필에서 환상성이란 수필가가 체험한 경험적 자아만이 아니라 잠재된 욕구와 무의식적 욕망에 대한 상상적 표현과 미답의 정신영역에 대한 탐구를 의미한다. 문학은 바로 내적 무의식적 꿈을 언어를 통해서 드러냄으로써 창조성을 발휘하는 예술이다. 그리고 언어로 드러낸다는 것은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수필이 사실성을 떠나 허구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로 지평을 넓힌다는 것은 인간의 내적 자아, 무의식적인 측면을 드러내고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러한 수필을 경험적 자아만을 표현하는 리얼리즘 수필과 구별하여 모더니즘 수필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것이다. 무턱대고 있지도 않은 가공의 사실을 창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인간의 잠재의식, 무의식, 미답의 정신영역을 드러냄으로써 사실성을 넘어서는 인간의 내적 진실을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무의식은 직접 관찰이 가능한 정신현상이 아니라 일종의 관념적인 대상, 어떤 경험사실들에 대한 일련의 연역과 귀납의 결과로서 존재하고 정의되는 실체를 가리키며, 우리의 정신현상내에 결핍되어 있는 어떤 것이라고 장 벨맹 노엘(Jean Bellemin-Nol)이 규정했듯 그것은 외적으로 직접 경험한 사실과는 구별되는 정신영역이다.  모더니즘 문학의 가장 대표격인 심리주의 소설은 인간의 진실은 인간의 외면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세계, 즉 잠재된 무의식의 세계 속에 더 큰 진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리얼리즘 소설이 그때까지 구축해 왔던 이론을 전복하며, 베르그송의 시간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윌리암 제임스의 의식의 심리학 등의 영향과 이론을 토대로 하여 그때까지 빙산의 일각과도 같던 외적 세계와 의식의 세계만을 다루던 태도를 벗어나 물 속에 잠긴 잠재된 인간심리, 즉 무의식이라는 더 큰 진실의 세계를 그리는 데 기울어져 갔다. 심리주의 소설은 의식의 흐름, 내적 독백, 자동기술과 같은 기법을 즐겨 사용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기법상의 문제가 아니라 모더니스트들의 인생관과 소설관에서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상징주의 시와 인상파 화가에게서 비롯된 모더니즘은 문학에서는 1910년대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부터 시작된다. 유진 런(E.Lunn)에 의하면 모더니즘은 첫째, 미학적 자의식과 자기반영성을 중시하며 창작하는 과정 자체를 탐구한다. 둘째, 베르그송의 주관적 시간철학의 영향으로 과거 현재 미래로 진행하는 서술적 시간구조가 약화되는 대신에 시간적 동시성, 병치 또는 몽타즈를 즐겨 사용한다. 셋째, 패러독스, 모호성, 불확실성을 특징으로 한다. 넷째, 개성, 통합적 주체의 붕괴와 비인간화를 특징으로 한다.  수필이란 문학장르가 아직껏 직접 경험한 세계만을 다룬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다면, 이는 우리의 시나 소설 장르가 90년대부터 모더니즘의 시대를 지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 속에 놓여져 있는데도 수필만이 유독 모더니즘의 전 단계인 리얼리즘 단계에 지체되어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동쪽 복도를 지나 아랍풍의 무늬가 새겨진 문을 빠져 나올 때였다. 한 무리의 인도인 관광객이 내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그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 앞에 가는 한 여성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ꡒ미라, 이다르 아이예(미라, 이리 와 봐)!ꡓ  그 소리에 한 처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어떤 계시와도 같은 울림이 나를 흔들었다. 아, 그렇다. 내가 전생에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은 미라였다. 이제 모든 것이 생각났다. 그녀의 얼굴까지도, 그리고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의 그 표정과 웃는 모습까지도!  내 마음은 소리쳐 그녀를 불렀다.  ꡒ미라!ꡓ  그 이름이 성의 복도에서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기둥들 사이에선 아직도 그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녀를 만지기 위해 나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현생 속에 존재하고 있었고, 그녀는 전생 속의 사람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와 나 사이엔 한 생이라는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가로놓여 있었다.  나는 환영 속의 미라와 함께 성의 복도를 달려가 다시 야무나강이 내려다보이는 망루로 올라갔다. 오렌지색 석양이 서서히 강을 물들이고 있었다. 밀려오는 기억들을 주체하지 못해 나는 성벽 아래 쪼그리고 앉았다.  - 류시화의 「전생에 나는 인도에서 살았다」에서  인용한 수필은 류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1997)에 수록된 「전생에 나는 인도에서 살았다」의 한 대목이다. 인용한 부분이 소설의 한 장면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 인용한 대목은 영락없이 1인칭의 화자가 전생에서 사랑했던 여인을 만난 사건에 대한 서술이다. 이 작품은 양식적 측면에서 허구성을 채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 측면에서도 환상성을 띰으로써 허구적 성격이 매우 강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지극히 모호하다. 현실의 화자인 내가 전생의 연인을 만난 환상적 사건은 기존의 사실성에 얽매인 수필에 대한 관념을 전복시킨다. 류시화는 시간적으로 현재와 전생이란 먼 과거 시간의 병치, 객관적 시간관념의 붕괴, 미지의 세계인 전생에 대한 무의식, 여행지 인도에서 만났던 한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환상적 욕망 같은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현실세계에서 충족할 수 없는 결핍과 그 결핍을 메우려는 무의식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결핍된 욕망을 언어로써 메우려는 무의식을 드러냈다고 해서 이를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류시화는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서 유려한 문체와 더불어 허구적 요소를 양식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 양면에서 유감없이 발휘함으로써 이 산문집을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4. 상상력의 확대와 현대수필이 나아가야 할 방향  상상력이란 과거에 느꼈던 원물(原物)의 이미지를 재생하는 능력으로서 과거 감각의 이미지를 그대로 옮겨오는 재생적 상상력(reproductive imagination)과 여러 원물들에서 추출된 요소들을 결합해서 새로운 합일체를 구성하는 생산적 상상력(productive imagina-tion)으로 제임스(W. James)는 나눈 바 있다. 제임스가 말한 재생적 상상력은 과거 경험했던 감각적 영상이나 인상이 그대로 나타나는 경우인 반면 생산적 상상력은 그 경험한 요소들이 새롭게 결합해서 창조적 통일성을 이루어 나타난다는 점에서 창조적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술에 있어서의 상상력이란 인간의 체험적 여러 요소들의 결합에 의해서 발생되는 것이기 때문에 체험 없이는 상상력 역시 구성될 수 없다. 한편 콜리지(S.T. Coleridge)는 상상력을 1차적 상상력과 2차적 상상력으로 구별했는데, 1차적 상상력이란 무한한 자아의 영원한 창조활동이 인간의 한정된 정신 안에서 솟아오르는 무의식적 정신작용을 가리키며, 2차적 상상력은 무제약적인 1차적 상상력을 이념화하고 통일하려는 인간의지가 가미된 지성적이고 사회적인 정신작용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러스킨(J. Ruskin)은 정신이 사물의 진실을 뚫고 들어가 진실을 바라보는 통찰적 상상력, 서로 분리하면 부적당한 두 개의 관념을 결합시키고 통일시키는 인간지성의 기계적 능력인 연합적 상상력, 대상을 명상하는 가운데 사상과 정서가 나타나서 체험 전체를 통일해서 표현할 수 있는 명상적 상상력 등으로 상상력을 구분한 바 있다.  현대수필이 나아갈 방향과 관련하여 제임스, 콜리지, 러스킨의 상상력 이론을 원용하여 논의해 보겠다. 그 동안 한국 수필은 과거에 경험했던 영상이나 인상을 그대로 옮겨오는 재생적 상상력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ꡐ허구성 수용ꡑ 같은 논쟁으로 에너지를 낭비해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앞으로는 재생적 상상력보다는 경험적 요소를 새롭게 결합해서 창조적 통일성을 이루는 생산적 상상력이 더욱 요구된다. 또한 콜리지가 말한 1차적 상상력, 즉 무한한 자아의 무의식적 정신작용을 수필창작에 적극 활용해야 한다. 또한 수필문학에서 지성적이고 사회적인 정신작용인 2차적 상상력도 더욱 요청되는바, 수필이 신변잡기적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적 폐쇄성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지적 사회적 상상력이 요청되는 지적인 수필, 사회성이 강한 수필도 다수 나와야 한다는 점에서 지성적이고 사회적인 2차적 상상력이 더욱 요청된다고 본다. 법정 스님의 수필은 불교적 명상이 주요한 개성으로 드러남으로써 수많은 고정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이는 법정 스님이 불교적 사유를 통해 대상을 명상하는 가운데 사상과 정서가 결합되어 통일성을 이루는, 러스킨이 말한 명상적 상상력이 풍부한 수필을 쓰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우리의 수필은 제한적인 경험과 사실의 나열에서 벗어나서 사실을 뚫고 들어가 진실을 바라봄으로써 주제를 심화시키는 통찰적 상상력도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다양하고 풍부하고 깊이 있는 상상력으로 수필의 깊이와 문학성을 더욱 보강해야만 한다.  5. 변화에 유연성을 갖자  허구적 구성과 허구적 인물의 설정을 배제하며, 작가의 도덕적 비전과 기자의 경험적 시각을 결합한 새로운 소설적 경향인 뉴저널리즘 소설은 소설의 가장 큰 변별성인 허구성을 배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소설계에서는 이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소모적 논쟁을 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오히려 소설의 새로움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메타소설은 실제작가가 화자로 직접 등장하며 소설쓰기의 과정, 즉 제작과정을 노출시킴으로써 소설형식이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가공품임을 환기시키는데, 이는 기존의 소설적 관습을 전복하는 새로운 소설쓰기 방식이다. 기존에 소설은 허구이면서도 허구라는 사실을 감춤으로써 독자들의 동일시를 끌어냈다면 메타소설은 소설에서 재현된 현실이 한낱 언어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 허구라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허구와 현실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허구와 현실은 호환 가능한 것임을 입증하고자 한다. 메타소설 역시 뉴저널리즘 소설과 마찬가지로 소설의 기존 관습을 해체했지만 그것 역시 소설의 새로운 양식, 포스트모던 소설의 한 양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현대에 들어와서 소설은 기존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실험적 경향이 강하다. 즉, 현대의 소설가는 사건을 만들어내는 일에서보다는 사건을 증언하고 보고하는 일에 더욱 매력을 느끼고(뉴저널리즘 소설),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소설가 자신을 이야기하고자 하며, 소설 쓰기와 소설에 관해서 사고하고자 하는 자의식을 드러낸다.(메타소설) 그리고 창조적 상상력에 고갈을 느낀 탓인지 과거의 작품을 패러디한다.(패러디소설) 이제 소설의 가장 중요한 변별성으로 여겨지던 허구와 비허구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계가 이런 사실에 대해 소설의 결정적 과오나 결함으로 간주하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새로움으로 적극 수용한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끝없이 새로움과 독창성을 추구하는 것이며, 부단히 기존의 형식과 내용을 해체하고 전복하는 데서 새로움과 발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수필만이 유독 새로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부단한 저항에 부딪혀야 하는 것일까? 이제부터는 그 저항이 수필의 새로움을 저해하며, 수필문학의 발전을 장애하는 요소라는 점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작품의 새로움, 예술성, 재미, 감동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식과 내용에 대한 실험적 모색과 부단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설이나 시로부터 또한 타 예술로부터 많은 것을 차용하고 수용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모름지기 수필문학은 변화에 유연성과 적극성을 가질 때에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새겨두자. ¶ì  수필의 허구도입의 논란과  현대수필의 나아갈 방향  도 창 회  - 전 동국대 교수․수필가 -  1. 수필의 이론 定立에 있어 固定觀念의 타파와 수필의 虛構性에 대하여  필자는 최근 많은 세월동안 수필의 이론정립에 성행되었던 고정관념들을 깨어 버리는 게 우리 수필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생각해 본다. 알게 모르게 우리 수필문단에 무슨 상투문구처럼 용인되어 온 이런 고정관념들이 무엇 때문에 필요한지를 알 수 없다. 필자는 증오를 넘어서 분노까지 일으킬 정도로 안타깝다. 그러면 그런 고정관념의 상투문구를 열거해 보고자 한다.  수필을 ꡐ관조의 글ꡑ이란 고정관념의 상투문구로 치켜드는데 수필이 사색이나 창조의 글로 못가거나 갈 수 없다면 이를 어찌하나?  수필을 ꡐ상상(想像)의 글ꡑ이라고 명명해 놓고 수필의 허구성(fiction)을 배제하면 무엇으로 수필의 문학성을 꾀하려는가?  수필을 ꡐ일인칭의 글ꡑ 또는 ꡐ자조의 글ꡑ로 치켜세우는 바람에 자조(自照)의 영역을 벗어난 수필이 사이비 글로 몰린다면 그 죄를 누가 지려는가?  수필을 ꡐ주관적인 글ꡑ 또는 ꡐ개성문학의 소산ꡑ이라고 강조하는데 주관이나 개성이 배제된 객관성이 강한 몰개성적인 명작이 나왔을 때는 무엇으로 변명하려는가?  수필을 ꡐ광범위한 장르의 글ꡑ이라고 우겨대어 일기문, 여행기, 예찬 글, 심지어 논설문까지 모두 수필이라고 한다면 수필의 예술성(문학성)은 어디서 찾으며 그런 따위의 글을 읽고 과연 문학성의 여운을 맛볼 수 있을까?  수필장르의 확대설인가, 축소설인가, 어느 쪽이 더 진정 우리 수필의 문학성 창달에 이바지할까?  수필을 서정성을 강조한 나머지 서정수필을 하늘 같이 받드는데 서정수필 외의 수필은 전혀 감동을 주지 않는다는 그런 보장이 어디 있는가?  수필은 ꡐ사실적(寫實的)인 글ꡑ로 치부하는데 수필이 창작품 일진데 창조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수필정의에 대한 원의(原義)적 즉 실험적 창작이 어찌 나올 수가 있는가?  수필도 문학일진데 여타 장르에 영향을 입혀온 문학사조나 운동을 외면한다면 어떻게 유미주의(唯美主義) 수필작품이나 또는 이미지즘의 수필작품등이 나올 수 있을까?  이상 질문형식으로 타진해본 질책이지만 필자는 근래 유행해서 그 타성이 골수에 박힌 그런 고정관념의 상투문구들을 싹 없앴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왜 이런 용귀들이 우리 나라에서만 또 우리 수필문단에만 성행을 하는지 모르겠다. 근거를 댈 수도 없는 공언(空言)들이 왜 난무하는지 통 모를 일이다. 이젠 수필의 문학성을 위하여 이런 고정관념의 상투문구들로부터 해방되어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 예서 다시 수필에 허구성 도입 여부에 관한 논란을 새겨보기로 하자.  첫째, 수필에 허구(lie가 아닌 fiction)를 도입함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수필에 허구가 들면 소설이 되어버린다는 염려를 강조한다. 과연 수필이 허구의 일부를 도입한다고 수필이 소설이 될까부냐? 그런 염려는 붙들어 매어도 될 것 같다. 어떤 수필가들에게나 물어보라, 있는 사실(事實) 곧이 고대로 수필을 쓰는 사람이 과연 있는가를. 특히 내레이션(이야기)이 들어있는 수필에서 누가 곧이 고대로 썼다고 한들 그 말을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둘째, 수필은 진실된 글이라고 해서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허구(fiction)는 거짓말(lie)이 아니다. 거짓말은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것, 또 해서는 안 되는 나쁜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허구성이 바로 그런 뜻의 말인가. 그렇지 않다. 소설이나 수필 또는 시에서 쓰는 허구(fiction)는 ꡐ있을 법한 진실ꡑ 즉 가공(架空)의 진실(眞實)을 의미하는 것이다. 진실로 친다면 사실적(寫實的) 사상(事象)보다 어쩌면 허구적인 사상이 더 진실성(truth)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아진다. 허구가 거짓뿌랭이가 아님을 강조해 둔다.  세째, 허구를 배척하는 사람들은 수필에 쓰여지는(用) 것은 상상(想像)이지 허구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왕왕 찰스 램의 작품 「Dream Children(꿈속의 아이들)」의 얘기를 허구가 아니고 상상이라고 둘러대는 것을 본다. 허구는 허구이고, 상상은 상상이다. 어느 누구가 허구와 상상을 못 구분할까? 앞서 말한 것처럼 허구(fiction)은 ꡐ있을 법한 진실(what seems to be)이고, 상상(imagination)는 상상 그것인 것이다. 어찌 허구와 상상이 대비가 되는가? 허구, 곧 있을 법한 진실은 상상을 통하여 발생된다. 다시 말하면, 허구가 상상의 소산이란 말이다. 찰스 램이 발표한 작품 「꿈속의 아이들」은 처음부터 허구로 계획된 작품이다. 램은 홀아비로 살아왔기에 자식들이 없다. 마치 그는 자식이 있는 것처럼 허구로 수필을 썼던 것이다.  이 작품이야말로 ꡐ있을 법한 진실ꡑ, 곧 픽션의 줄거리다.  찰스 램이 있지도 않은 일을 있음직하게 fiction을 사용해서 꾸며 썼는데 마지막에 깨어보니 꿈이었다고 말해서 그럼 그 얘기가 정말 꿈이라고 믿는 바보가 있을까. 이를 픽션이 아니라 상상이라고 고집하는 사람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픽션이 상상의 소산일진데 허구가 상상을 통하여 나온 것을 부정할 생각인가? 따라서 허구와 상상을 못 구분하는 것처럼 망발을 하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는 노릇이다.  넷째, 우리 수필문단중 어느 수필단체의 세미나모임에서 수필은 사실적(寫實的)인 글이며 허구가 도입된 글은 수필이 될 수 없다고 단정지었다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망발이다. ꡒ지구는 정지해 있다ꡓ고 재판장이 판결했다고 해서 지구가 돌지 않던가? 어림반푼 없는 소리다.(피천득 선생이 말했다 싶이) 있는 사실(事實) 그대로 썼든, 허구를 조금 섞어 썼든 그게 진실에 접근하거나 진실에로의 승화가 되었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문제는 사실(寫實)이냐 허구냐가 아니라 작품의 진실성(眞實性)에 있다고 할 것이다. 문제는 있는 사실 그대로 썼든 있을 법한 진실로 썼든 그 작품이 진실(truth)에로의 회기 또 승화가 되면 된다. 고쳐 말하면, 사실(寫實)이든 허구(虛構)이든 수필만 되면 되는 것이 아닌가.  2. 현대수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 보자  ① 현대수필 방향을 모색하기 전에 먼저 수필의 창착성에 대해 말해보자. 수필작품은 어디까지나 재생적 상상(reproductive imagina-tion)의 소산이 아니라 창조적 상상(creative imagnation)의 소산임을 바로 알자. 코올리쥬가 말한 제1차적 상상(primary imagination)이 아니라 제2차적 상상(secondary imagination)의 소산이란 말이다. 제2차적 상상이 창조적 상상이다. 시, 소설, 수필, 희곡 등 모든 장르의 문학작품은 한결같이 창조적 상상의 소산임은 말할 것도 없다. 재생적(再生的) 상상이라 함은 옛적에 있었던 기억을 있는 그대로 떠올리는 상상을 말하는 것이고, 창조적인 상상은 글자 그대로 문학 창작에 필요한 상상으로 사고(思考)나 이성(理性)에 호소해서 감각적인 인상들(sensory impressions)을 재구성해 내는 상상을 말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정신적 심상들(mental images)인데 이 심상(心像)들의 재결합이 창조성의 기저(基底)가 된다는 것을 유의해야 된다. 수필문학도 재구성해 내는 상상의 소산작품임을 명념해야 한다. 문학적 창작성(creativity)은 그 사람의 뛰어난 상상력에 의존한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수필작품을 쓸 때 작가의 체험에다 바탕을 두고 출발한다. 이 체험들은 모두 작가의 몸 속에 녹아들어 수필의 제재(題材)로 사용된다. 우리가 한 편의 수필을 쓸 때 체험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서술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체험의 사실적 전사(轉寫)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겪은 체험을 수필화할 때는 반드시 상상력에 의존하도록 되어 있다. 체험의 사실(事實)에서 주제(主題) 등을 발견할 때는 반드시 상상력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상상이 창조의 능력이라고 말한 것은 앞서 말한 창조적 상상이 문학에 소용됨을 뜻하는 것이다. 수필을 혹여 사실적인 진실을 강조한답시고 수필의 픽션 배재를 전적으로 들고나오면 바로 재생적 상상 아닌 창조적 상상의 재구성의 문학성을 잃게 될 염려가 있음을 알자.  ② (尹五榮선생이 말한 대로)수필이란 어떤 것이냐가 문제가 아니고 수필이 어떻게 해야 문학이 되느냐가 문제다라고 한 말을 기억한다. 필자도 이 문제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떤 수필이 문학수필이냐가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를 놓고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수필장르의 범위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수필의 문학성을 위해 하나는 수필 범위를 확대하자는 편이고 또 하나는 수필 범위를 축소하자는 편이다. 확장편에서는 서간문, 일기문, 여행기, 감상문, 예찬문 등의 수필류를 수필 범주에 넣자는 의견이다. 진정 작가적 입장에서 이런 류의 글들을 수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초창기나 모색기에 이런 류의 글들을 수필범주에 넣었다손 치더라도 오늘날에도 과연 이런 글들을 문학수필이라고 명명(命名)해야겠느냐? 내 말은 그 말이다. 요새 와서 생활의 여적을 쓴 글들, 감성의 조각들을 모운 글들, 교훈 따위를 늘어놓은 글들, 자기 인생타령을 쓴 글들을 또 어떻게 문학수필이라 일컫겠는가? 실로 심각한 문제이다. 어쩌면 수필의 범위를 극도로 좁힘으로써 오히려 문학수필이 나오지 않을까도 싶다.  ③ 우리 수필 아니 수필장르도 다른 장르의 글처럼, 다시 말하면 시 장르나 소설 장르처럼 문학이론, 문학사조, 문학운동을 받아들여 그 이론, 그 사조, 그 운동에 입각한 수필작품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유미주의 시나 유미주의 소설이 있듯이 유미주의 수필작품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서정시, 서정소설, 서정수필이 있는 거와 같이 상징시, 상징소설이 있다면 상징수필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전위수필, 이미지즘의 수필, 주지수필 등 문학사조나 문학운동에 입각한 작품이 나와야 하리라고 본다. 옛 분네가 그런 수필을 못 썼다해도 오늘날 적어도 문학지식이 다양한 작가들은 충분히 그런 창작품을 저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또 이에 따른 문학 비평가들도 우리 수필작품을 멀리 바라다 보고 비평해야 옳을 것이다.  ④다음, 우리 수필문단에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대중수필이냐 문학수필이냐 두고 논란을 거듭해오고 있다. 어떤 이는 대중에게 잘 읽히우는 대중수필을 쓰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우기고, 다른 한 쪽은 돈벌이가 안 되고, 읽는 사람이 없더라도 진정한 문학수필을 써야 한다고 우긴다. 다른 장르의 문학에서도 문학의 대중성은 크게 논란이 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전자매체의 시대에 무슨 소리인가, 대중이 읽지 않는 작품은 써서 무엇하느냐고 큰 소리친다. 어떤 이는 단 한 사람이 읽어도 좋으니 그게 진정한 문학이라면 나는 그 길을 택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물론 양자의 입장에 부합된 작품이 나오면 더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하지 못한 게 현실이다. 허나 인류의 보고(寶庫)가 될만한 작품이 처음부터 많은 독자를 데불고 태어나지 않았음을 상기해 주기 바란다.  항상 양(量)보다 질(質)이 우선하는 이치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⑤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또 있다. 우리 수필관과 서양수필관이 다르다는 것 그것이다.  우리의 전통수필관은 대개 서정수필을 선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시다 시피 서양수필관은 유머수필을 좋아한다. 서양 수필은 유머나 위트가 없으면 수필 축에도 못 낀다.  그러나 우리 수필은 감성어린 서정수필에 반해 있다. 허나 어떻게 보면 서정수필만 고집하다 한국적 수필이란 태두리를 영영 벗어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우리 수필이 세계성을 얻으려면 우리의 전통적인 수필인식이나 사고를 빨리 벗어나야 한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국부적인 발전만 꾀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리라. 이는 곧 한국 수필의 체질개선이 필요하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수필관의 고정과념을 과감히 깨버려야 발전이 온다. 세계성에 입각한 우수한 수필을 써야 우리의 장래가 보장된다고 본다. ꡐ우리 것이 최고의 것이다ꡑ라는 고루한 사고는 버릴 때다. 그러면서도 개인의 독창적이고 천재성을 가미하는 작품은 명작이 되리라고 본다. 치열한 산고를 치루며 일탈한 작품을 써야 각광을 받는 작가가 되리라고 본다.  ⑥ 또 현대수필에 문제가 되는 것은 시대성이다. 그 시대 작가가 쓴 작품은 그 시대성을 모면할 수 없다고 엘리어트가 「전통론」에 말한 바 있다. 그 시대 서정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작가는 그 시대의 서정으로 쓴 작품이 될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살면서 시대정신을 반영한 작품을 외면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작가의 작품은 작가가 산 시대와 환경과 결코 무관할 수 없음은 재천명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 수필도 시나 소설처럼 시대성을 외면해서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어느 시대에 속해 있고, 그 시대에 속해있는 작가가 쓴 작품은 그 시대의 소산이다.  ⑦ 다음은 작가의 작품의 작풍(作風)의 변신(變身)이다. 변신은 형식, 내용, 사상의 변신을 말한다. 우리가 목격한 바이지만 시인들은 자기의 작품에 끊임없이 변신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서정주 시인은 「국화 옆에서」에서부터 사물화(事物化)함으로 「冬天」으로 변신하고, 다시 「화사」의 상징시로 몸을 바꾼다. 또 다시 그는 상징시에서 「신라초」로 영원과 진리에로의 회귀를 꿈꾼다. 이렇게 시인은 작품에 변신을 해가는데, 그러나 우리 수필작가는 단 한 사람도 그의 수필 작품에서 변신하는 걸 보지 못했다. 왜 그럴까? 수필이란 장르적 본질 때문인가? 그도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작품에 변신을 꾀하지 않는가. 필자는 우리 수필작품에도 얼마든지 개인의 변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개인의 변신은 우리 수필문단 모두에 영향을 끼치고 또 우리 수필문단을 발전시키는 터전이 마련된다. 개인은 끊임없는 변신으로 개성있는 명작을 남기길 바라마지 않는다.  ⑧ 또 문제가 있다. Formal Essays와 Informal Essays를 쓰는 작가가 따로 있는데 인포말리스트는 많으나 포말리스트가 전혀 없다는 게 우리 수필계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격식을 갖추어 길게 쓰는 철학수필, 곧 Formal Essays가 그리운 요즈음이다. 사고가 깊은 철인(哲人)들이 이런 수필을 시도하면 좋을 것이다.  모두 사수필(私隨筆)만 쓰다보니 포말 에세이가 없어 마음 한 구석 섭섭함을 금할 길 없다. 우리는 언제쯤 미국의 에머슨 같은 포말리스트가 나올까 감감하다.  ⑨ 끝으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말은 작가는 애오라지 명작(名作)을 남겨야 한다.  수필을 쓰되 수작(秀作)을 쓸려고 노력하다 보면 매스터 피스가 나올 수도 있다. 명작은 창조적 상상의 미적 형상화로 재구성된 문학수필을 말한다. 작가는 한 평생 동안 한 편이라도 명작을 남기고 싶어한다. 우리 나라의 수필가가 문인협회에 등록된 숫자만 해도 1,200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 많은 수필가들 중에 명작을 쓴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아마추어리슴을 벗어나 프로의 의식으로 치열하게 창작정신을 살리면 반드시 명작 몇 편은 쓰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개인을 살리고 또 우리 문단 전체을 살리는 길은 명작의 생산에 달렸다. 아무리 수필가 많고, 그 많은 수필가가 쓴 수필이 많다해도 그 중에 명수필이 없다면 그 수필들을 무엇에 쓰랴. 우리가 추구하는 최고의 정상은 가장 훌륭한 예술작품의 생산임에랴, 말을 해서 무엇할까. 비옵건데 끊임없는 노력으로 휼륭한 수필작품을 생산하여 자신을 빛내고, 나아가 한국 수필문단의 획기적인 발전을 기해주길 바라마지 않는다.   
449    수필의 허구문제를 알아보다(1) 댓글:  조회:2617  추천:0  2017-05-05
수필의 허구성과 상상력// 유한근   1. 수필에 대한 담론 중에 지속적으로 논의되는 테마는 '수필의 허구성'문제이다. 수필의 허구성 논의는 상상력 사이의 문제로 이 양자의 유기적 구조와 미학의 문제이다. 수필의 상상력 문제는 동어반복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말해 왔다. 수필의 허구성과는 별개의 문제로 그 문제를 상상력으로 문제로 편입시키려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원로 수필가인 김소운도 이 점에 대해 이렇게 고민했던 것이 보인다. "'진실'이란 말은 반드시 '사실 그대로'란 뜻은 아니다. 사실만을 나열한다고 해서 그것이 문장을 이루는 것도 아니요, 하물며 문학이 되는 것도 아닌 것은 재언할 필요가 없다. ​나 자신의 글이란 것을 돌이켜보면 실로 '허구' 그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이란 반드시 사실 그대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소위 내가 쓴다는 글은 언제나 '사실'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목적이 있고, 읽는 대상을 의식하면서 쓰는 글- 그것이 과연 옳은 글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사실을 그대로 글로 재현했을 때 그 글이 진실된 문학 작품이라 할 수 있는가를 의혹해 하는 글이다. 동시에 상상력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에 따른 수필 문채文彩의 정수를 그는 이렇게 다시 말한다. "윗물을 흘려버리고 뒤에 남은 진국-침전된 알맹이- 그것이 진정의​ 문장이라면, 언제나 목적의식을 꽁무니에 달고 다니는 내 글 따위는 부질없이 흘려버리고만 있는 한갓 '윗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뒤, 그는 자신의 글에 대한 부족함의 이유를 성급한 기질 탓과 공상력 부족으로 돌린다. "내 글이 '사실'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의 하나로는 , 체질적으로 공상력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인간의 생활 그것을 문학이나 예술성보다는 한 걸음 앞서서 언제나 직시하고 분석하려드는 성급한 내 기질에 연유하는지도 모른다. 할 말이 너무 많고 보면 결론에 도달할 최단거리에 마음이 쏠려 '허구의 진실'같은 복잡한 수속을 밟을 겨를이 없다고 그렇게 보아주는 이는 무척 고마운, 너그러운 지기知己라고 할 것이다." (김소운의 )고.   수필문학에 있어서 사실과 진실, 사실과 상상력 중 수필의 허구성 문제와 수필 문채에 대한 논의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이 시대에 논외로 놓아도 좋을 담론 테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이 문제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우리가 '수필은 사실의 문학 장르다'라는 문예미학에만 매달릴 때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닐까? 상상력의 한계에 대한 고민도 있을 수 없다. 시작부터 수필의 허구성을 차단하는 소재를 택했으며, 그로 인해 신변 잡기류의 잡문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좋​은 테마이며, 사실을 토로해야만 한다는 이론(?)에 발목 잡히지 않아도 좋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통 수필은 이런 맥락의 수필에서부터 시작했고 그 맥을 이어왔다. 언제부터 우리 수필이 자잘한 신변 이야기, 자기 과시의 주변 이야기류의 수필이 판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런 수필 때문에 수필의 허구성 담론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아닌가. 그리고 수필에 있어서 수필에 있어서 상상력을 통해 구현해 낼 수 있는 수필의 구조 미학의 한 단면을 통해 가능해진다. 그것은 문학적 상상력으로만이 가능해진다. 상상력을 통한 구조 미학적 처리다. 이런 상상의 힘을 빌어 구조적인 수필 미학을 실현할 때, 문학의 한 장르인 수필문학은 탄탄한 자리매김을 할 것이다. 수필도 문학이다. 문학이면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문학은 그것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다소 과장되게 사실을 부풀리더라도, 상상력이 다소의 허구적인 상황을 전개시키더라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그 '진실'을 전달하려는 의도에서 그 상상력을 증폭시켰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수필을 사실로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없는 사실을 있는 ㅅ실로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면, 불특정 다수를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상상력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표현 구조로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 인간에 대한 탐구 의식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위한 통찰력도 상상력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쯤에서 상상력은 체험한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환기한다. 그리고 한국 수필의 발전을 위해서는 문학적이고 창의적인 '상상력'이 무엇보다 필요함을 역설한다.   2. 앞서 개진했지만, 수필의 상상력은 허구의 문제와는 별개이다. 수필은 허구의 문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필은 허구를 용납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필의 허구 문제를 극복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허구는 소설의 용어이지 수필의 영역에 속하는 문학적인 용어에서는 제외되어야 한다. 하지만 수필에서도 상상력의 문제는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문학의 핵심적인 장르이기 때문이다. 상상력(lmagination)은 체험에서 나온다. 현실적인 체험에서 나오지 않은 상想은 이른바 '환상'이라고 말한다. 코올리지는 사상과 사물과의 조우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를 상상력에서 찾았다. 즉 정신과 자연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상상력을 '무한한 존재의 영원한 창조행위를 유한한 정신 속에서 반복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신이 혼돈(Caos)으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여, 그 혼돈된 세계에 질서와 형태를 부여했듯이 유한한 정신(the finite mind)'인​ 인간의 정신도 신이 그랬듯이 질서와 형태를 부여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이 신의 정신을 원형으로 삼아 만들어졌기 때문에 창조적인데, 그 창조적인 힘이 문학에 있어 상상력이다.   상상력의 이론을 코올리지나 칸트는 세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이 두 사람의 이론의 용어는 다르지만 개념은 유사하다. 코올리지는 상상력을 ​공상(fancy)의 차이를 시간과 공간에서 살폈다. 첫 단계의 상상력인 공상은 연상의 법칙으로부터 미리 준비된 자료를 받아들일 뿐이며, 시간과 공간의 질서에서 해방되어 나온 기억의 한 형태일 뿐 실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단계를 칸트는 재생력 상상력(the riproductive imagination)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는 상상력을 일차적 상상력(Primary imagination)과 이차적​ 상상력(Secondary imagination)으로 나누어 생각했다. 일차적 상상력은 인간의 모든 지각의 원동력이며, 이 지각의 원동력은 무한한 자아 존재(=신의 존재)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원한 창작 행위가 제약된 존재인 인간의 정신 안에서 되풀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각과 지각, 지각과 사상의 중개물로서 대상을 지각하게 할 뿐 아니라, 개념을 형성하게 하고 사고를 추출케 한다는 것이다. 이 단계를 칸트는 생산적 상상력이라고 부른다. 지성과 오성 사이, 사상과 세계와 사물의 세계 사이에서의 교량 역할과 상통된 점을 발견하는 단계이다. 그 다음의 단계를 코올리지는 이차적 상상력(Secondary imagination)이라 하고 있는데, 이차적 상상력은 일차적 상상력의 반향으로 보고 있다. 이 양자의 차이는 의식의 차에 있다. 전자가 무의식인데 비해 후자는 '무의식적인 의지'에서 성립된다는 점이다. 칸트는 이 단계를 미학적 상상력(The aesthetic imagination)혹은 시적 상상력(The poetic imagination)으로서 우리에게 진실로 진실된 그 무엇, 또는 우주의 구조나 인간 경험의 기초적인 본질, 표면에 숨어있는 실재, 그 밖에 이러한 것들이 암시해주는 그 무엇을 보여주는'힘', '관념화 되고 통일된 미적인 힘'을 보여주는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코올리지와 칸트의 상상력 이론을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시나 소설에서 뿐만 아니라, 수필 쓰기에 있어서도 이 상상력의 세 단계​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수필쓰기에서 위의 세 단계 중에서 가장 많이 적용하는 단계는 1단계, 코올리지의 공상과​ 칸트의 재생적 상상력의 상상력 단계이다. 많은 수필들이 이 단계에 의존한다. 과거에 체험한 사건이나 기억들 영상이나 느낌들을 재생하는 단계, 기억해 내는 단계, 체험한 사건이나 일들을 재생해서 질서를 부여하고 정리하여 기록하는 상상력에 의존한다. 수필은 체험의 문학이라는 문법에 의해 작가들은 자신이 체험한 일들을 기억의 창고에서 꺼내는 작업부터 하기 때문이다. 이때 보조적인 상상력으로 두 번째 단계인 일차적 상상력, 혹은 생산적 상상력 단계의 도움을 받게 된다.이 단계의 상상력은 재생해 낸 상상력 즉 기억에 의미를 부여하는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많은 체험 중​에서 취사·선택을 해야 하고 질서 있게 정리하기 위해서는 의미의 맥락에 따라 정리하는 것이 편하고 타당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주제에 따라, 분위기나 흐름에 따라 혹은 구성이나 다른 수필의 구성요소에 의해, 그리고 작가가 원하는 바에 따라 재생적 상상력에 의해서 기억해낸 에피소드를 선택하는 데에는 일차적 상상력. 생산성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상력의 세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층위는 미학적 상상력이다. 이 미학적 상상력의 한계는 무한하다. 작가에 따라 그 범주는 다르지만, 그 범주의 깊이 크기에 따라 작가의 역량은 가늠했고, 감동도 다르게 나타난다. 발칙하다 할 만큼 까지도 문학은 요구한다. 발칙한 상상력을 수필문학은 허락하지 않는다. 수필은 개인적 삶의 체험을 기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대로 그리면 일기문이 되겠지만, 문학적 상상력에 의해서 삶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이라는 것은 수필을 문학답게 만드는 힘이 된다. 수필은 허구가 없고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소설처럼 체험한 것처럼 꾸밀 수는 없지만, 작가가 체험한 사실을 미학적 상상력으로 증폭시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대두되는 것 중 하나가 발칙한 상상력이다. 발칙한 상상력은 삶의 도의적 국면에서 사용되는 사전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도발적이기는 해도 도전적이거나 전위적 혹은 전복顚覆적인 창의적 상상력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 문학이 자아 성찰이나 자신만의 글이 아니고 독자를 염두에 둘 때, 분명한 것은 독자를 어떻게 설득할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서 문학의 표현 구조의 제 요소가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이다. 참신한 주제와 소재라 해도 그것이 독자의 손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전달하는 것이 효과적인가 혹은 감동적인가 하는 문제는 표현 구조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작가의 언어 인식, 표현 구조, 문장력 등 제 요소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작가의 상상력과 직결된다. 작가의 상상력은 그 작가의 사고 구조나 감성 구조. 그리고 문학에 대한 이해, 문학관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물론 여기에서 작가의 온축된 삶에 ​대한 체험, 가치관 등 자연인으로서의 모든 조건들이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부분일 것이다. 작가의 상상력의 어느 곳으로 어디까지 뻗어나가고 있으며, 얼마나 깊고 높게 확대되어 나가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이 때문에 작가는 고뇌하고 괴로워할 것이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새로운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나타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소멸하게 되는 것처럼 문학은 죽게 된다. 폐기 처분될지도 모른다. 새로운 것에 대한 창조가 문학인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문학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이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확장시켜야 한다. 비록 그 상상력이 발칙하더라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          ========================= 수필문학에서의 허구 수용문제와  현대수필이 나아가야 할 방향                                  송  명  희                            - 부경대교수, 문학평론가 -  1. 허구 수용 논쟁은 소모적    수필문학에서 허구 수용 문제와 관련한 논쟁에 관한 결론은 한 마디로 허구 수용 문제를 논의하는 일 자체가 소모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은 그것이 어떤 장르가 되었든 만들어진 허구의 세계이다. 이때 허구라고 하는 개념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작가에 의해 그럴 듯하게 만들어진, 즉 가공의 세계라는 뜻이다.    흔히 수필문학에서 허구성 논쟁은 허구라는 개념을 자신이 경험하지도 않은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내어 쓴다는 의미로 지나치게 단순화시켜서 받아들이는 데서 발생한다. 무릇 문학에서의 허구는 거짓과 동의어가 아니며, 따라서 비난되거나 회피하여야 할 요소가 아니라 문학적 감동과 진실을 배가시키기 위해 선택되는 문학적 장치요, 기술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수필도 문학인 이상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로 허구성을 수용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수필이 단순한 신변잡기를 넘어서서 문학적으로 보다 세련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허구성 수용에 적극적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허구성 수용 문제를 양식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이라는 두 측면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자.  2. 양식적 측면에서의 허구성    소설(novel)은 명칭 면에서 픽션(fiction), 즉 허구라고도 칭하는데, 그것은 있을 법한 이야기, 지어내고 꾸며낸 이야기, 즉 허구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허구야말로 소설이란 장르의 가장 큰 변별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자서전 연구로 20여 년을 바쳐온 프랑스의 필립 르죈(Philippe Lejeune)은 『자서전의 규약』에서 자서전은 저자와 화자, 그리고 주인공 간의 동일성이 성립해야만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에 소설은 저자와 화자-주인공이 동일하지 않음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 그리고 이야기의 내용이 허구임이 증명될 것 등을 규약으로 제시했다. 즉, 소설의 허구적 성격은 화자-주인공이 저자와 동일인이 아닌 가공의 존재라는 점과 이야기의 내용이 만들어진 허구라는 점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소설뿐만 아니라 희곡을 비롯하여 서정장르인 시도 허구적 성격의 장르이다. 즉, 시의 화자(persona)는 그저 텍스트 속의 화자일 뿐 시인인 저자와 동일인이 아니다. 가령,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의 화자를 여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시를 쓴 김소월과 한용운은 잘 알다시피 남성이지 않은가. 남성인 김소월과 한용운이 여성화자라는 허구의 가면을 쓰고 시를 썼다고 해서 그들을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으며, 마찬가지로 「진달래꽃」과 「님의 침묵」에서 진술된 내용을 거짓말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진달래꽃」과 「님의 침묵」은 의 슬픔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시적으로 승화시킨 탁월한 작품으로 한국인의 가장 큰 애호를 받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김소월과 한용운은 이별의 슬픔을 보다 감동적이고 진실되게 표현하기 위해서 실제작가의 젠더(gender)와 다른 여성화자를 선택하는 시적 기술을 취하고 있으며, 이것이 시적 감동을 분명 배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시에서 다루고 있는 이별이란 소재가 소월이나 만해의 현실에서의 직접체험 여부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르죈식으로 말해보자면 저자와 화자가 다르다는 점에서, 또한 시의 내용이 저자의 실제체험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고 만들어진 허구라는 점에서 시는 허구적 장르이다.  구조시학에서는 실제작가와 구별되는 내포작가 및 화자를 명확히 구분하는데, 내포작가는 작가의 진술 토대 위에 재구축된, 오직 텍스트 안에서만 존재하는 작가이다. 이 내포작가의 가치관이나 태도는 반드시 실제작가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화자는 내포작가와 서사물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로서 서술된 사건에 참여하거나 혹은 그것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인물로 가정된다. 화자는 작품 속에 극화되어 있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여전히 텍스트 안에 존재한다.    수필장르에서 양식적 측면의 허구성 수용이란 서사적 양식의 차용을 의미한다. 서사(이야기, narrative)란 일차적인 의미로 을 뜻한다. 서사의 필수적인 요건은 이야기의 내용과 이야기하는 역할 즉 화자이다. 즉, 사건(event)이라는 내용과 서술(narration)하는 행위에 의해 서사는 성립한다. 그리고 서사물은 서사행위가 결과시킨 것, 일련의 현실 또는 허구적 사건들과 상황들을 시간 연속을 통해 구성해 낸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서사적 양식에 의존하는 서사물에는 소설을 비롯하여 서사시, 극, 신화, 전설, 역사와 같은 것이 있는데, 이것들은 비언어적 양식에 의존하는 영화, 뮤지컬, 뮤직 비디오 등의 비언어적 서사물과 구별하기 위해 언어적 서사물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언어적 서사물에 서사적 수필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필에서 재미와 감동을 확대하기 위해서 서사적 양식을 수용한 예는 오래 전부터 있어온, 또한 흔히 있는 일이다. 여기서 예를 들어보자.        내가 동경을 떠나던 날 아침, 아사꼬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고 있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선생 부인은 웃으면서 ?한 십년 지나면 좋은 상대가 될 거예요? 하였다. 나는 얼굴이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사꼬에게 안데르센의 동화책을 주었다.           - 피천득의 「인연」에서         적막한 아스팔트 위에는 불규칙하게 밟는 나의 발자국소리만 울리었다. 부상당한 병정들을 실은 적십자 자동차 하나가 지나간다. 아마 그가 있는 병원으로 가나 보다 하고 바라다보았다. 빨간 불길이 솟아오른다. 그리고 그 위로 안개 같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불자동차소리도 났다. 북사천로에 불이 붙은 것이다. 불덩이 튀는 소리와 아우성 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일본 육전대 방색 가까이 왔을 때 패- 하고 탄자소리가 난다. 이어서 기관총을 내두른다. 나는 그 자리에 섰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 오분이 지났을까, 총소리는 그쳤다. 나는 그가 지금 근무하고 있는 시내 클리닉에 도착하였다.         그는 내 손을 잡으며,         "위험한 곳에 어떻게 오셨어요."         그는 나를 자기 일하는 방으로 안내하였다. 총소리 대포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저는 책임으로나 인정으로나 환자들을 내버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나는 그의 맑은 눈을 바라보았다.        - 피천득의 「유순이」에서    「인연」은 우리 수필문학사에서 중요하게 평가되는 피천득의 대표적 수필이다. 피천득은 일본여행에서 만났던 아사꼬의 이야기를 쓴 「인연」에서만이 아니라 중국 상해에서의 유학시절에 만났던 간호사 '유순이'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유순이」라는 수필에서도 허구적 양식을 차용하고 있다. 「인연」과 「유순이」란 두 작품에서의 1인칭의 화자는 분명 실제작가인 피천득과 동일인물이다. 하지만 이 수필에서    그리고 있는 사건의 중심인물(주인공)은 아사꼬와 간호사 유순이로서 저자-화자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르죈식으로 말하자면 저자와 화자는 동일인이지만 주인공은 동일인이 아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내용, 즉 아사꼬와 유순이라는 여성과의 만남은 저자가 직접 경험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즉, 내용은 허구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양식적 측면에서 두 작품은 허구성을 차용하고 있다. 즉, 사건이 있고, 서술하는 화자가 있다는 점에서 서사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마치 1인칭 관찰자 서술의 소설처럼. 하지만 두 편의 수필은 그리고 있는 내용이 작가 피천득이 직접 경험한 사실이라는 점에서 소설은 아니며, 길이도 짧아 서사적 ! 수필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이처럼 피천득의 수필은 경험적 사실을 허구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보다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인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수필에서 허구성 수용은 수필의 내용을 보다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인상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기술적 장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수필문학은 초창기부터 허구적 요소를 적극 수용하여 왔음을 원로수필가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21세기에도 여전히 허구 수용문제가 쟁점이 된다는 것은 부적절하고 소모적인 논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3. 내용적 측면에서의 허구성    수필문학에서 허구 수용문제는 수필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만을 적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의 문제와 늘 상충해 왔다. 즉, '경험한 사실'의 범주를 너무 제한적으로 생각한 데서 발생한 오해이다.    필자가 이미 발표한 「수필문학의 허구성」(수필과 비평 99년 7-8월호)이란 글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 수필의 허구성은 환상성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험적 사실 위에 상상적 환상적 요소가 부가됨으로써 수필세계는 더욱 풍부해진다. 즉, 경험적 자아를 넘어서는 내적 자아의 표현, 심적 현실의 표현이 그것이다. 인간의 자아는 밖으로는 외적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안으로는 나의 마음, 즉 내적 세계와 관계를 맺도록 되어 있다. 심리학에서 외적 세계와 관계를 맺는 인격을 외적 인격이라고 부르며, 내적 세계와 관계를 맺는 인격은 내적 인격이라고 부른다. 내적 인격은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내적 인격은 인간의 무의식에 눈을 돌리게 만든다.    프로이트(S.Freud)에 의하면 무의식이란 의식으로부터 억압된 것, 망각된 것, 미처 의식되지 못한 심리적 내용,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의식에 의해서 인식되지 못한 채 정신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다. 칼 융(C.G.Jung)은 무의식이란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 모르고 있는 미지의 정신세계라고 정의했다. 즉, 무의식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정신세계이다. 자아가 무의식의 내용을 파악하고 그것을 의식화하고자 하면 할수록 무의식은 그의 창조적인 암시를 더욱 활발히 내보내게 된다. 어찌 보면 문학은 자아로 하여금 무의식의 세계에 눈을 돌리게 하며, 그 깊은 층으로 인간을 유도함으로써 창조성을 발휘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필에서 환상성이란 수필가가 체험한 경험적 자아만이 아니라 잠재된 욕구와 무의식적 욕망에 대한 상상적 표현과 미답의 정신영역에 대한 탐구를 의미한다. 문학은 바로 내적 무의식적 꿈을 언어를 통해서 드러냄으로써 창조성을 발휘하는 예술이다. 그리고 언어로 드러낸다는 것은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수필이 사실성을 떠나 허구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로 지평을 넓힌다는 것은 인간의 내적 자아, 무의식적인 측면을 드러내고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러한 수필을 경험적 자아만을 표현하는 리얼리즘 수필과 구별하여 모더니즘 수필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것이다. 무턱대고 있지도 않은 가공의 사실을 창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인간의 잠재의식, 무의식, 미답의 정신영역을 드러냄으로써 사실성을 넘어서는 인간의 내적 진실을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무의식은 직접 관찰이 가능한 정신현상이 아니라 일종의 관념적인 대상, 어떤 경험사실들에 대한 일련의 연역과 귀납의 결과로서 존재하고 정의되는 실체를 가리키며, 우리의 정신현상내에 결핍되어 있는 어떤 것이라고 장 벨맹 노엘(Jean Bellemin-Nol) 규정했듯 그것은 외적으로 직접 경험한 사실과는 구별되는 정신영역이다.    모더니즘 문학의 가장 대표격인 심리주의 소설은 인간의 진실은 인간의 외면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세계, 즉 잠재된 무의식의 세계 속에 더 큰 진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리얼리즘 소설이 그때까지 구축해 왔던 이론을 전복하며, 베르그송의 시간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윌리암 제임스의 의식의 심리학 등의 영향과 이론을 토대로 하여 그때까지 빙산의 일각과도 같던 외적 세계와 의식의 세계만을 다루던 태도를 벗어나 물 속에 잠긴 잠재된 인간심리, 즉 무의식이라는 더 큰 진실의 세계를 그리는 데 기울어져 갔다. 심리주의 소설은 의식의 흐름, 내적 독백, 자동기술과 같은 기법을 즐겨 사용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기법상의 문제가 아니라 모더니스트들의 인생관과 소설관에서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상징주의 시와 인상파 화가에게서 비롯된 모더니즘은 문학에서는 1910년대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부터 시작된다. 유진 런(E.Lunn)에 의하면 모더니즘은 첫째, 미학적 자의식과 자기반영성을 중시하며 창작하는 과정 자체를 탐구한다. 둘째, 베르그송의 주관적 시간철학의 영향으로 과거 현재 미래로 진행하는 서술적 시간구조가 약화되는 대신에 시간적 동시성, 병치 또는 몽타즈를 즐겨 사용한다. 셋째, 패러독스, 모호성, 불확실성을 특징으로 한다. 넷째, 개성, 통합적 주체의 붕괴와 비인간화를 특징으로 한다.    수필이란 문학장르가 아직껏 직접 경험한 세계만을 다룬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다면, 이는 우리의 시나 소설 장르가 90년대부터 모더니즘의 시대를 지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 속에 놓여져 있는데도 수필만이 유독 모더니즘의 전 단계인 리얼리즘 단계에 지체되어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동쪽 복도를 지나 아랍풍의 무늬가 새겨진 문을 빠져 나올 때였다. 한 무리의 인도인 관광객이 내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그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 앞에 가는 한 여성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미라, 이다르 아이예(미라, 이리 와 봐)!"  그 소리에 한 처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어떤 계시와도 같은 울림이 나를 흔들었다. 아, 그렇다. 내가 전생에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은 미라였다. 이제 모든 것이 생각났다. 그녀의 얼굴까지도, 그리고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의 그 표정과 웃는 모습까지도!    내 마음은 소리쳐 그녀를 불렀다.  "미라!"  그 이름이 성의 복도에서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기둥들 사이에선 아직도 그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녀를 만지기 위해 나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현생 속에 존재하고 있었고, 그녀는 전생 속의 사람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와 나 사이엔 한 생이라는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가로놓여 있었다.    나는 환영 속의 미라와 함께 성의 복도를 달려가 다시 야무나강이 내려다보이는 망루로 올라갔다. 오렌지색 석양이 서서히 강을 물들이고 있었다. 밀려오는 기억들을 주체하지 못해 나는 성벽 아래 쪼그리고 앉았다.     - 류시화의 「전생에 나는 인도에서 살았다」에서    인용한 수필은 류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1997)에 수록된 「전생에 나는 인도에서 살았다」의 한 대목이다. 인용한 부분이 소설의 한 장면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 인용한 대목은 영락없이 1인칭의 화자가 전생에서 사랑했던 여인을 만난 사건에 대한 서술이다. 이 작품은 양식적 측면에서 허구성을 채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 측면에서도 환상성을 띰으로써 허구적 성격이 매우 강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지극히 모호하다. 현실의 화자인 내가 전생의 연인을 만난 환상적 사건은 기존의 사실성에 얽매인 수필에 대한 관념을 전복시킨다. 류시화는 시간적으로 현재와 전생이란 먼 과거 시간의 병치, 객관적 시간관념의 붕괴, 미지의 세계인 전생에 대한 무의식, 여행지 인도에서 만났던 한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환상적 욕망 같은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현실세계에서 충족할 수 없는 결핍과 그 결핍을 메우려는 무의식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결핍된 욕망을 언어로써 메우려는 무의식을 드러냈다고 해서 이를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류시화는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서 유려한 문체와 더! 불어 허구적 요소를 양식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 양면에서 유감없이 발휘함으로써 이 산문집을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4. 상상력의 확대와 현대수필이 나아가야 할 방향    상상력이란 과거에 느꼈던 원물(原物)의 이미지를 재생하는 능력으로서 과거 감각의 이미지를 그대로 옮겨오는 재생적 상상력(reproductive imagination)과 여러 원물들에서 추출된 요소들을 결합해서 새로운 합일체를 구성하는 생산적 상상력(productive imagina-tion)으로 제임스(W. James)는 나눈 바 있다. 제임스가 말한 재생적 상상력은 과거 경험했던 감각적 영상이나 인상이 그대로 나타나는 경우인 반면 생산적 상상력은 그 경험한 요소들이 새롭게 결합해서 창조적 통일성을 이루어 나타난다는 점에서 창조적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술에 있어서의 상상력이란 인간의 체험적 여러 요소들의 결합에 의해서 발생되는 것이기 때문에 체험 없이는 상상력 역시 구성될 수 없다. 한편 콜리지(S.T. Coleridge)는 상상력을 1차적 상상력과 2차적 상상력으로 구별했는데, 1차적 상상력이란 무한한 자아의 영원한 창조활동이 인간의 한정된 정신 안에서 솟아오르는 무의식적 정신작용을 가리키며, 2차적 상상력은 무제약적인 1차적 상상력을 이념화하고 통일하려는 인간의지가 가미된 지성적이고 사회적인 정신작용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러스킨(J. Rus! kin)은 정신이 사물의 진실을 뚫고 들어가 진실을 바라보는 통찰적 상상력, 서로 분리하면 부적당한 두 개의 관념을 결합시키고 통일시키는 인간지성의 기계적 능력인 연합적 상상력, 대상을 명상하는 가운데 사상과 정서가 나타나서 체험 전체를 통일해서 표현할 수 있는 명상적 상상력 등으로 상상력을 구분한 바 있다.    현대수필이 나아갈 방향과 관련하여 제임스, 콜리지, 러스킨의 상상력 이론을 원용하여 논의해 보겠다. 그 동안 한국 수필은 과거에 경험했던 영상이나 인상을 그대로 옮겨오는 재생적 상상력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허구성 수용? 같은 논쟁으로 에너지를 낭비해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앞으로는 재생적 상상력보다는 경험적 요소를 새롭게 결합해서 창조적 통일성을 이루는 생산적 상상력이 더욱 요구된다. 또한 콜리지가 말한 1차적 상상력, 즉 무한한 자아의 무의식적 정신작용을 수필창작에 적극 활용해야 한다. 또한 수필문학에서 지성적이고 사회적인 정신작용인 2차적 상상력도 더욱 요청되는바, 수필이 신변잡기적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적 폐쇄성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지적 사회적 상상력이 요청되는 지적인 수필, 사회성이 강한 수필도 다수 나와야 한다는 점에서 지성적이고 사회적인 2차적 상상력이 더욱 요청된다고 본다. 법정 스님의 수필은 불교적 명상이 주요한 개성으로 드러남으로써 수많은 고정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이는 법정 스님이 불교적 사유를 통해 대상을 명상하는 가운데 사상과 정서가 ! 결합되어 통일성을 이루는, 러스킨이 말한 명상적 상상력이 풍부한 수필을 쓰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우리의 수필은 제한적인 경험과 사실의 나열에서 벗어나서 사실을 뚫고 들어가 진실을 바라봄으로써 주제를 심화시키는 통찰적 상상력도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다양하고 풍부하고 깊이 있는 상상력으로 수필의 깊이와 문학성을 더욱 보강해야만 한다.  5. 변화에 유연성을 갖자    허구적 구성과 허구적 인물의 설정을 배제하며, 작가의 도덕적 비전과 기자의 경험적 시각을 결합한 새로운 소설적 경향인 뉴저널리즘 소설은 소설의 가장 큰 변별성인 허구성을 배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소설계에서는 이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소모적 논쟁을 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오히려 소설의 새로움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메타소설은 실제작가가 화자로 직접 등장하며 소설쓰기의 과정, 즉 제작과정을 노출시킴으로써 소설형식이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가공품임을 환기시키는데, 이는 기존의 소설적 관습을 전복하는 새로운 소설쓰기 방식이다. 기존에 소설은 허구이면서도 허구라는 사실을 감춤으로써 독자들의 동일시를 끌어냈다면 메타소설은 소설에서 재현된 현실이 한낱 언어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 허구라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허구와 현실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허구와 현실은 호환 가능한 것임을 입증하고자 한다. 메타소설 역시 뉴저널리즘 소설과 마찬가지로 소설의 기존 관습을 해체했지만 그것 역시 소설의 새로운 양식, 포스트모던 소설의 한 양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현대에 들어와서 소설은 기존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실험적 경향이 강하다. 즉, 현대의 소설가는 사건을 만들어내는 일에서보다는 사건을 증언하고 보고하는 일에 더욱 매력을 느끼고(뉴저널리즘 소설),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소설가 자신을 이야기하고자 하며, 소설 쓰기와 소설에 관해서 사고하고자 하는 자의식을 드러낸다.(메타소설) 그리고 창조적 상상력에 고갈을 느낀 탓인지 과거의 작품을 패러디한다.(패러디소설) 이제 소설의 가장 중요한 변별성으로 여겨지던 허구와 비허구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계가 이런 사실에 대해 소설의 결정적 과오나 결함으로 간주하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새로움으로 적극 수용한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끝없이 새로움과 독창성을 추구하는 것이며, 부단히 기존의 형식과 내용을 해체하고 전복하는 데서 새로움과 발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수필만이 유독 새로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부단한 저항에 부딪혀야 하는 것일까? 이제부터는 그 저항이 수필의 새로움을 저해하며, 수필문학의 발전을 장애하는 요소라는 점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작품의 새로움, 예술성, 재미, 감동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식과 내용에 대한 실험적 모색과 부단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설이나 시로부터 또한 타 예술로부터 많은 것을 차용하고 수용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모름지기 수필문학은 변화에 유연성과 적극성을 가질 때에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새겨두자. 
448    시인은 자국자국마다 시향을 흩날려야... 댓글:  조회:2808  추천:0  2017-05-05
시론(詩論)     박태원       1 .심층 심리에 의한 암호 해독   현재의 나는 무엇인가? 定의 존재인가, 不定의 존재인가 맷돌은 돌아가나 중심축은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의 의식은 다층 구조로 되어있다. 마음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여 의식하는 나를 놓으면 본성과 계합하여 활연관통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은 부동이며 작용하지 않는데 사람이 신에게 다가 간다고 하였다. 定이면 신이요 不定이면 사람이다. 서양의 철학은 신과 사람을 분리시켜 사유했지만, 동양의 철학은 이분법으로 분리하지 않았다. 人乃天인 것이다. 맷돌을 마음껏 돌리되 다만 중심축은 건드리지 마라. 이것이 동양禪의 요결이다. 세계 평화의 도리는 동양에 있다. 밖으로 치닫는 마음을 안으로 거두어 회광반조(回光反照)하고 심의식을 투과하여 본성을 회복하는 곳에 세계 평화의 열쇠가 있다.   시심은 천심이다. 시인의 마을에는 평화의 향기가 피어 오른다. 시는 천재 또는 영감에 의하여 쓰여지는가 아니면 숙련된 의식적인 작업에 의해서 쓰여지는가, 시를 쓰는 주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시인이 자신의 심층심리를 얼마나 투과했느냐에 달려있다. 고요하고 적적한 정신상태에서 좋은 시가 창작된다.   과학자이며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의 비극과 서사시를 연구하여 모범적인 비평이론서인 시학을 저술하였는데 숭고한 시가 갖추고 있는 문장의 기술적인 요소를 서술하고 있다. 어떻게 인생사를 모방 또는 재현하여야 독자와 관객에게 감동과 쾌감과 숭고한 미를 전달하는가에 대하여 플롯과 성격, 사상과 조사(措辭), 장경(章景)과 노래를 제시한다. 이중 플롯을 비중있게 서술하고 있다. 당시에는 문학의 쟝르가 구분되지 않았지만 작시술(作詩術)의 보편적인 내용이라 할 것이다.(‘시학’ 아르스토텔레스 저 천병희 옮김 참조)   현대시의 특징은 무엇인가 시대의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 시의 형식과 내용도 변화해 왔는데 현대는 포스트모던이즘의 시대이다. 앙투앙 콩파뇽은 현대의 관점에서 모던니즘의 아이러니를 분석하였다. 모더니즘은 새로운 것에 대한 미신, 미래에 대한 종교, 이론에 대한 집착, 대중문화에 대한 호소, 부정의 열정이라는 면에서 현대적 전통을 하나의 궁지에서 다른 궁지로 오가며 스스로를 배신했다고 주장한다.(‘모더니티의 다섯개 역설’ 앙투앙 콩파뇽 저 이재룡 옮김 참조)     에드워드 사이드는 부정한 권력을 통해 지배하려는 모든 종류의 억압을 극복하고 분리와 배제가 아닌 상생과 공존의 관계를 지향하는 통합과 포용의 세계를 제시하는 탈식민주의 이론을 주장한다. 그것은 수직적 이분법을 해체한 문화적 차이의 증식과 전이의 가능성을 열어 놓은 제3의 공간, 열린 공간이며 다양한 차이를 포월(抱越)하는 경험의 시간이다. 이는 서구의 형이상학 철학이 생산한 자아 중심적인 도구적 근대를 부정하고, 타자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탈식민 현대라는 새로운 개념을 생산한다.   현대는 다중(多衆)의 시대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기존의 인민.민중.대중은 권력의 억압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 아니라 아주 쉽게 조정되어서, 인민의 힘을 빌린 공산주의 독재나 ‘대중 독재’ 형식으로 권력화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했지만, ‘다중’은 능동적인 자율성과 다수성을 지니기 때문에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세계화된 자본주의 제국의 권력의 양식에 저항하고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 경험의 총체적 인식과 객관적 재현, 합리주의, 보편주의, 개인주체, 과학적 이성과 진보주의, 서구.백인.남성중심주의, 고급문화의 권위주의, 매체와 장르에 대한 위계의식 등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현실에 대한 객관적이며 규정적인 파악에 얽매이기보다는 현실과 허구를 자유롭게 넘나듦으로써 인간의 삶과 진실을 좀 더 유동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다각적인 방식이 모색되고 시도되고 있다.   (‘21세기 문예이론’ 김성곤 편저 참조)       2. 詩의 風格 –風.骨.采     유협(425~520)은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작품이 이상적인 풍격을 이루기 위해서는 문장에 풍(風).골(骨).채(采)의 3요소가 내용과 형식으로서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풍골만이 구비되고 수식이 결여된 작품은 매처럼 높이 날 수 있으나 아름답지 못하고, 화려한 수식만 있고 풍골이 결핍된 작품은 살찐 꿩과 같아서 화려하지만 높이 날지 못하며, 풍골과 아름다운 수식이 겸비된 작품은 빛나는 아름다움을 지니면서도 하늘 높이 비상할 수 있는 봉황과 같다고 하였다.   유협은 문예작품이 작가의 사상과 감정과 생명력을 외면화한 것이라고 보았고, 감정이 뚜렷이 드러난 감화적인 작품에서 풍격을 찾았다. 풍(風)이란 작품의 기세와 감동력인 것이며 사람을 감화시키는 본원적인 힘이고 생명력이다. 골(骨)이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언어문자를 의미의 맥이 조리있게 흐르도록 배열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작품의 체계(짜임새)와 구성의 긴밀성, 그리고 이로부터 감지되는 표현력이다. 채(采)는 언어문자를 예술적으로 운용하여 아름답게 다듬어 꾸밈으로써 드러나는 수식의 미감, 즉 작품의 형상적인 미감이다.   유협은 작품 구성에서 풍.골.채의 3요소가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될 때 비로서 내용과 형식이 자연스럽게 조화되어 ‘아려(雅麗)’의 이상적인 풍격이 달성된다고 보았다.   유협은 아려한 문장의 모범을 성인의 경전으로 보았다. 경전을 규범으로 삼아 문장을 지으면 얻게 되는 여섯 가지 예술효과가 있는데 이를 종경육의(宗經六義)라 한다. 첫째, 감정이 깊고 거짓이 없다. 둘째, 작품의 감동이 순수하여 잡다하지 않다. 셋째, 인용한 사실들이 진실하고 허망하지 않다. 넷째, 사용된 의미가 정확하고 왜곡되지 않는다. 다섯째, 체제가 정련되어 번잡하지 않다. 여섯째, 문사가 화려하면서도 지나치지 않다.         3. 시의 예술성에 관하여     예술이란 문학.음악.미술을 포괄하면서 식정(識情)의 심미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자성(自性)의 창조 활동이다. 역으로 말하면 예술 활동이란 식정(識情)을 심미적으로 관조하여 자성(自性)를 깨닫고 표현하는 작업이다. 詩는 언어로 표현하되 음악적인 리듬과 회화적인 이미지를 심도있게 형상화 한다. 詩語는 일상어와 다르지 않으나 용법에 있어서 지시적이고 개념적인 관습적 사용을 거부하고, 정서적이며 함축성을 내포하는 자연적인 언어이다. 즉 시각적이고 구체적인 감각적 언어이며 진실한 감정의 언어이다.   詩는 유기적인 구조이며 자율적인 총체이기에 詩語는 전체적인 구조와 문맥 속에 놓일 때 의미가 형성된다. 시어는 이미지.상징.은유.리듬.아이러니 등 언어의 국면들과 관련하여 신중히 선택되고 긴밀하게 조직되어 정서적 상상적 반응을 일으키고, 심미적인 공감과 심도깊은 감동을 환기시킨다.       4. 발자국마다 꽃향기 흩날리고     세종대왕의 어진 신하였던 강희안(姜希顔)은 부지돈령(副知敦寧)의 한직(閑職)을 제수받아, 어버이를 봉양하는 여가에 화암(花庵)을 짓고 백여 그루의 화초를 기르며 속세를 잊었다. 그는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稱함을 받았다. 그는 청천양화소록(菁川養花小錄)에서 노송.오반죽(烏班竹).국화.매화.난초.연화(蓮花).석창포 등의 화초를 양생(養生)하는 법을 밝혀 놓았다. 화초의 천성과 배양하는 이치, 거두어 들이는 법을 알아야 하며, 건습과 한난을 알맞게 맞추지 못하고 그 천성을 어기면 반드시 시들고 만다. 하챦은 식물을 양생하는 천지조화의 이치는 만물의 영장인 사람에게도 다르지 않으니, 어찌 그 마음을 애타게 하고 그 몸을 괴롭혀 천성을 어기고 해치겠는가!             [청천자(菁川子)가 하루는, 저녁에 뜰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흙을 파고 꽃나무를 심는데 피로도 잊고 열중하고 있었다. 손이 찾아와 말하기를 “당신이 꽃을 기름에 양생하는 법을 알았다 하였음을 내가 이미 들어 알거니와 이제 체력을 수고롭게 하여 마음과 눈을 미혹시켜 외물(外物)의 끌림이 되었음은 어떻다 생각하시오? 마음이 쏠려가는 것을 뜻(志)이라 하였은즉 당신의 뜻이 빼앗겨 잃지 않았오?” 청천자 대답하되 “ 답답하구려! 참으로 당신 말과 같다면 몸뚱이를 고목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마음을 쑥대처럼 버려두어야 잘했다 하겠구려? 내 보건데 천지간에 가득히 차있는 만물들이 힘차게 자라고 씩씩하게 이어가며 저마다 현묘한 이치를 갖추고 있는 것이오. 그 이치를 진실로 연구하지 않고는 또한 알지 못하오. 그러므로 비록 한 포기 풀이나 한 그루의 나무라 할지라도 마땅히 그것들이 지닌 이치를 생각하여 그 근원까지 파고 들어가서 그 앎을 두루 미치지 아니함이 없고 그 마음을 꿰뚫어 통하지 않음이 없게 되면 나의 마음이 자연히 만물에 머물지 않고 만물의 밖에 뛰어넘어 있을 것이니 그 뜻이 어찌 잃음이 있으리오? 또 사물을 관찰하는 자는 몸을 닦고, 앎에 이르고, 뜻이 성실해야 함은 옛사람이 일찍부터 말하지 않았었소? 이제 저 창관대부(蒼官大夫:松)의 의롭고 굳건한 의지는 홀로 천훼백목(千卉百木:卉-풀훼)의 위에 솟아 있음은 이미 말할 나위가 아니오. 그 나머지 은일(隱逸)을 자랑하는 국화와 품격이 높은 매화, 또는 난초, 서향 등 십여 품종도 각각 풍격과 운치를 떨치고 창포는 고고하고 깨끗한 절개가 있으며, 괴석은 굳건하고 확실한 덕을 지녔으니 이것들은 진실로 군자가 벗삼아 마땅한 것이라, 항상 함께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익혀서 몸에 배게 할 것이지, 그저 멀리하여 버려두지 않을 것이오. 저들 화목의 지닌 물성(物性)을 법도로 하여 나의 덕을 삼아 가면 그 유익함이 어찌 많지 않으리오? 그 뜻이 어찌 호연(浩然)하지 않으리오? 설사 고대광실에 부드러운 털요를 깔고 비취구슬이 주렁대는 미희(美姬)와 생황을 불며 노래하는 재인(才人)들을 불러들여 스스로 마음과 눈을 즐겁게 함을 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것은 마침내 성정(性情)과 수명을 해치고 교만하고 인색한 마음을 길러낼 뿐이오. 의지의 상실은 물론, 도리어 내 몸까지 망치는 것을 어찌 모르오?” 손이 말하되 “당신의 말씀이 옳으니 나도 당신을 따라가리다.”하더라.]     (양화해(養花解)/양화소록 중에서)       분매(盆梅)/강희안   섣달이라 화암(花庵)에 늙은 매화 한 그루 창 밖에 내리는 눈 향기 따라 살포시 좇아오누나. 花庵十二月 篤老一(木+差)梅 [篤(도타울 독) 木+差(떼 사)] 蕭蕭窓外雪 細細逐香來 [蕭(쓸쓸한 고적한 모양 소) 逐(쫓을 축)]   우리집 섣달일사 늙은 매화 두세 그루 눈 속에 활짝 피었네 말없이 서로 대하니, 가지엔 그 향기 진동하여라. 古梅兩三樹 臘雪政(人+農)家 [臘(섣달 납) (人+農:나 농)] 無言相對坐 香動一枝斜   내가 매화이냐 매화가 나냐, 보기만 하여도 마음이 맑아, 티끌 하나 날지 않는 이슥한 밤 창가에 외로이 달이 흐른다. 相對片心白 梅(人+農)(人+農)是梅 一塵時不動 窓月獨徘徊 [徘徊:노닐 배,노닐 회]   화암(花庵) 깊은 밤에 달이 돋으면, 한 점 누(累)도 없는 이 마음으로 그대와 한 잔 술 나눌 만하네. 更深人語絶 庵靜月生時 此心無點累 一酌與君宣   한 밤 서호(西湖)에 눈은 내리고 어디서 떠오르는 그윽한 향기, 꿈도 이렇듯 한결 맑은데 매화 성긴 가지에 달이 비치네 西湖半夜雪 香自亞枝來 夢寢淸如許 疎窓月上梅 [疎:트일 소]   눈을 닮아 그대 그리 희어졌는가 붙잡고 요리조리 눈여겨보네. 볼수록 맑은 기운 뼈에 시리니 달도 바람도 더욱 차구나. 犯雪疑君白 移燈仔細看 看來淸襲骨 風月不勝寒   (양화소록 중에서/이병훈 역)     유교에서 시인은 思不邪(사불사)하고 溫柔敦厚(온유돈후)하며 성정(性情)을 보전하여 뜻(志)을 기른다. 시는 心之發(심지발)이며 志之言(지지언)인데, 言出於情(언출어정)이되 樂而不淫(낙이불음)하고 哀而不傷(애이불상)하기 때문이다.       5. 상상력의 체계와 초월적 변주   창조적인 상상(想像, imagination)은 예술과 과학의 중요한 정신 작용이며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다. 상상을 통하여 구상한 이미지에 삶의 생명력을 부가하고 심미적인 정서를 담아서 예술 작품이 탄생한다. 그 작품에서 인간의 조건을 극복하려는 극적인 드라마를 읽을 수 있고 언어와 색채가 상징하는 근원적인 의미에 공감하는 것이다. 불가역적인 시간과 필연적인 죽음이 인간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일으키는 운명이라면 이것을 초월하여야 하는 것도 인간의 숙명이다. 종교와 철학, 과학 그리고 문학, 미술, 음악은 이러한 도정에 놓여있다.   상상력이 무엇이고 언제, 어떻게 발현되는가?     석가모니는 제상비상(諸相非相)이면 즉현여래(卽現如來)하여 이미지와 생각이 실상이 아닌 마음의 그림자라는 것을 깨달으면 자기의 본래 성품이 드러난다고 한다. 깨달은 후에는 어떠한가? 창조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의식의 흐름인 시간이 멈춘 순간에 동시적으로 우주와 소우주인 나의 본래면목이 드러나는데, 상상력은 니르바나의 상태에서 주관(對自)과 객관(卽自)이 상즉(相卽)하여 발동하는 것이다. 무의식인 아뢰야식과 의식인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개별적인 나의 자아이며 마음의 그림자로서 몽상과 같고 집착할 바가 아니어서 자유롭게 거리를 두고 상상계에서 노니는 것이다. 우주와 소우주인 인간이 실상이 아닌 꿈인 것이다.     상상계의 구조는 어떠한가?   인간의 육체는 地, 水, 火, 風의 4大로써 인연 화합하여 존재한다. 이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음식을 섭취하고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투쟁하며 안락과 부귀를 누리기 위해서 경제 활동을 하고 영혼의 평화를 위해 서로 사랑한다. 이러한 기쁨과 고통의 역사적인 인간사가 무의식에 저장되어 예술 작품에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바슈라르는 물, 불, 대지, 공기의 4원소를 상상계의 원형으로 보고 예술 작품이 상징하는 의미를 해석하였다. 엘리아데, 레비스트로스 등은 신화를 통하여 그 상징의 의미를 연구하였고, 뒤랑은 상상계의 구조를 이미지의 낮의 체제와 밤의 체제로 정리하였다.   작가는 시간과 죽음의 공포를 초월하고 사회 환경의 억압에 저항하는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창작 활동을 통해서 심미적인 카타르시스와 정화를 얻는데, 그 작품의 상징적인 의미를 해석하고 감상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부분에 전체를 담고 전체에서 부분을 읽어내는 것이 온전한 이해이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즉일체 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의 법계가 상상계의 구조이다. 주역에서는 태극에서 음양, 사상, 팔괘, 64괘가 분열하고 순환한다. 음악적인 대위법과 화성이 리듬을 타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뒤랑은 힘 + 물질 = 도구 라는 르루아 구랑의 등식을 응용하여 상상계의 구조를 분석한다. 인간의 각각의 몸짓은 동시에 하나의 물질과 하나의 기술인 상상의 재료와 도구를 불러들이는데, 직립 보행하는 상승의 자세와 소화 작용의 하강성, 리듬의 몸짓이 지배소가 되어 상승구도(정상, 광명, 하늘), 분할구도(검, 세례), 하강구도(동굴, 밤, 걸리버, 잔), 웅크림구도(품, 내심), 순환구도(바퀴, 뱀)로 나누고, 변환적이고 역동성있게 구조화 시켜 낮의 체계(자세 지배소: 상승, 홀과 검)와 밤의 체계(소화, 순환 지배소: 하강과 잔, 은화와 지팡이)로 정리한다. 순수와 어둠은 시간과 죽음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정신과 감정의 상징적인 개념이다. 순수는 하늘, 태양, 낮, 빛, 황금이 상징하는 바이고, 어둠은 사랑, 비밀, 내면, 슬픔, 동굴, 최초의 시간, 물, 죽음, 용, 달, 월경, 뱀, 거미, 나르시즘이 상징하는 바이다.   위대한 예술 작품이란 그 작품 속에 영웅적이고 대조법적인 악센트, 반어법의 부드러운 향수, 희망과 절망의 수축과 이완이 모두 녹아있을 경우에 완벽한 만족을 줄 수 있다. (참조: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질베르 뒤랑 저, 진형준 옮김)             6. 존재의 시   이 세상 사람 사는 것이 시가 아닌 것이 없고, 이 세상 만법이 불법 아닌 것이 없다. 그렇지만 시 쓰는 것이 어렵고, 불법이 무엇인지 깨닫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시인은 심안이 열려야 하고, 수도인은 從法生眼(종법생안) 즉 법안이 열려야 한다. 법안이 열린다는 것은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법리를 체득하여 마음에 장애가 없이 만물의 실상을 밝게 아는 것이다.배워서 아는 관습적인 지식과 개념은 오히려 개안(開眼)에 장애가 되고 번뇌가 되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문득 내려 놓고 쉬어야 한다.     승이 동산에게 물었다. “추위와 더위가 올 땐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동산이 말했다. “어찌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는가?” 승이 말했다. “어떤 것이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입니까?” 동산이 말했다. “추울 때는 철저히 추워하고 더울 땐 철저히 더워하라.”   동산 선사는 본질을 묻는 질문에 대하여 자유 자재하게 다섯 가지의 관점에서 답변을 하여 학인을 가르치는데 이것을 동산의 五位라고 한다.     正中偏(본질에서 현상을 봄) 삼경 초저녁 달뜨기 전에 / 서로 만나 몰라본다 괴이타 마라 / 은근히 옛날의 정을 품고 있구나.   偏中正(현상에서 본질을 봄) 날이 샐 무렵 노파가 옛 거울을 보니 / 분명 자신의 얼굴이나 그 젊음 간 데 없네 / 거울 속 그림자를 자신의 진짜 머리로 알지 마라.   正中來(본질의 입장) 없는 가운데 길이 있어 번뇌의 티끌을 벗어났으니 / 거룩한 그 이름을 욕되게만 않는다면 / 말 잘하는 달변가보다 훨씬 나으리.   偏中至(현상의 입장) 두 칼날이 맞부딪침을 피하지 말지니 / 거장은 불 속의 연꽃처럼 부사의하네 / 여전히 충천의 기백이 남아 있구나   兼中到(본질과 현상이 하나인 입장) 有無에 떨어지지 않거니 뉘 감히 대적하리 / 사람마다 모두들 일상에서 벗어 나고자 한다면 / 결국은 불 꺼진 재 속으로 돌아와 앉아야 하네.       시어는 본질적인 대화의 언어로서 존재의 부름에 대한 시인의 응답이다. 그러므로 시어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를 지향한다. 詩作은 존재의 진리를 추구하는 본질적인 존재의 사유이며, 시인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入神의 경지는 시인의 개성을 초월한 경지인 것이다. 시어는 세계와 사물로서의 존재이며, 언어가 주체이며, 언어가 말하는 것이다. 존재의 시는 무의미시(김춘수), 비대상시(이승훈), 절대시(황금찬), 몰개성시(하이데거)이며, 시인의 직관과 영감으로 쓴 妙悟의 詩이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 늙은 비애다 /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 시인 릴케가 만난 / 슬라브 여인의 마음 속에 갈앉은 / 놋쇠 항아리다. (나의 하나님 중에서 / 김춘수)   허름한 처마 아래서 밤 / 열두 시에 나는 죽어, / 나는 가을 / 비에 젖어 펄럭이는 질환이 되고 / 한없이 깊은 층계를 / 굴러 떨어지는 곤충의 눈에 비친 암흑이 된다 / 두려운 칼자욱이 된다. (사진 중에서 / 이승훈)     시는 언어를 통해서 언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의미의 肉化를 통해서 의미의 세계에서 실체의 세계로 원초적 통일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날개가 없어도 / 하늘을 날고 / 발이 없어도 / 풀잎을 밟는다. / 바람아. (바람아 / 황금찬)           7. 입체적으로 시 쓰기   논어에 일일우일신(日日又日新)하라는 공자의 말씀이 있는데, 어떻게 매일 새로울 수가 있는가. 세월은 잠시도 쉬지 않고 흐르며, 세상사는 끊임없이 변해가는데 사람들은 안정을 바라고 변혁을 싫어한다. 관료와 정치가들은 기득권을 지키려 하고 과거의 가치관과 관념에 의해서 현실을 유지하려 한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고 맑은 물이 공급되지 않으면 더 이상 생명이 살 수 없게 된다. 국가와 기업은 그래서 민중과 조직의 번영을 위해서 계속 혁신을 해야 하는 것이다. 혁신을 하려면 사물과 사람의 이치를 궁구해야 하는데, 이것을 격물치지(格物致知)라 하고 정심(正心)이라고 한다. 불가(佛家)에서는 내가 성불하면 유정(有情), 무정(無情)이 일시에 모두 성불한다고 한다. 나의 본래 성품을 깨달으면 삼라만상의 성품이 나와 다르지 않음을 거울을 보듯이 알게 되는 것이다. 반야 지혜가 발현하는 것인데 그것은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무분별지(無分別智 : 평등성지), 대원경지(大圓鏡智)의 작용인 것이다.   시인의 마음 바탕은 공무(空無)한 것이어서 모든 사상과 감정, 감각과 이성, 의식과 무의식이 마음 바탕에서 생기고, 마음 바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시는 다사다난하고 희로애락의 우여곡절이 얽히고 섞인 인생을 언어로써, 파롤(발화)과 랑게(의미)의 구조로써 보여주는 것인데 언제나 새로운 형식과 내용으로 참신한 감동을 불러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감정의 정화와 미래의 비전과 꿈과 희망이 시인의 능력으로 창조되는 것이다.   시를 입체적으로 구상하고 작품화하는 것은 시인의 기술과 능력에 달려있는데, 현상의 사물과 사상은 대조적이고 대칭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선과 악, 긍정과 부정, 사랑과 미움, 민주와 독재, 화와 복, 범속과 신성, 과거와 미래, 有와 無, 남자와 여자, 행복과 불행, 주관과 객관, 동과 정, 앞과 뒤가 그러하지만, 시심의 바탕에는 이러한 대립이 없는 것인데 현실의 존재자는 상대적인 조망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고, 문학은 이러한 존재자의 현실재를 있는 그대로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개아(ego)와 자아(self)의 모순대립을 직관하고 포월하는 투쟁은 곧 사회와 개인의 투쟁이요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인류 문화의 발전과정인 것이다.   깊이 있는 사색과 사물에 대한 묘한 관찰의 결과는 인생의 의미를 풍부하게 하고, 문밖에서 허망한 것을 찾아 방황하지 않게 하고, 사물의 이치와 실상을 깨달아 번뇌의 불을 끄고 망상의 쐐기를 뽑아버리는 것이다. 예술적인 문예라는 것은 이러한 부조리한 상황에서 심미적인 끄나플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먼저 나의 마음과 생각이 아름다운 가치를 추구하여 변하면 세계가 따라서 이상적으로 변하게 된다.       8. 有情과 風流   사람은 평생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 그리워하며 살아가는데, 생명체는 물적, 심적 사랑과 정을 받으며 존재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내 마음 속의 그리움이 어디에서부터 일어나는지 그 근원을 아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사랑과 정이 샘솟는 근원은 무엇인가. 그리움의 생각이 일어나는 시원이 바로 상대가 없는 절대의 나인데, 생각하고 느끼는 상대적인 나와 언제 만나서 합일할 수 있을까. 그것은 내가 나를 생각하되 한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적적하고 성성한 때이다. 절대아와 상대아가 一合相을 이룬 사람은 풍류를 안다고 할 수 있다. 풍류는 생명의 무애자재한 흐름이며, 구하고 찾는 것이 더 이상 없는 집착없는 삶이다. 풍류는 가없이 크나 큰 사랑이며, 사람이 성취할 수 있는 고귀한 공덕이다.   신라시대의 석학인 최치원은 우리나라에 유불선 삼교를 포월하는 전통적인 현묘한 도가 있으니 그것이 풍류도라 하였다. 화랑들은 명산대천을 찾아들어가 이 풍류도를 닦았으며, 그 공덕을 나라와 백성들에게 회향하였다. 우리나라는 환인, 환웅, 단군을 三聖의 국조로 받들어 모신 유구한 일만년 역사의 나라이다. 문명은 발전하였지만 현대에도 인간의 근원적인 본성은 바뀌지 않았다. 절대아는 생명의 근원이며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없는 것이다.       9. 삶과 죽음의 초월     하늘도 땅도 바람도 새벽의 여명도 그대로였네 오직 변한 건 말문을 닫고 눈을 뜨지 않는 당신뿐   벚꽃은 흐드러지게 하품을 해대고 눈보라 밀어내며 피어난 매화 서럽게 떠나버린 4월의 그 새벽   팔십 다섯 해 봄을 떠나보내시던 당신 스스로 봄빛을 열고 낙화되어 미처 다 풀지 못한 가슴 동여매고 매화 꽃잎처럼 가더이다 봄비에 흩어지는 매화 꽃잎처럼...   -함숙자 전문     함숙자 시인의 시 “그 날의 낙화”를 선택하여 시평을 쓰기로 한다. 이 시가 만물이 침잠하는 겨울의 초입에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사유하게 하는 서정적인 단초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1) 시의 구조 당신의 죽음에 대면한 충격이 “오직 변한 건/말문을 닫고 눈을 뜨지 않는/당신뿐”으로 다가온다. 변함없이 순환하는 자연이 인간의 죽음과 대조되어 영원성과 유한적인 존재의 모순적인 심리적 갈등과 슬픔을 일으킨다. 이러한 대조는 제2연에서도 생명이 약동하는 4월, 벛꽃과 매화가 피어나는 계절에 “서럽게 떠나버린” 당신으로 이어져 슬픈 감정을 고조시킨다. 그러나 제3연에서는 이러한 모순과 갈등이 미학적인 정서로 승화되어, “스스로 봄빛을 열고/낙화되어...매화 꽃잎처럼 가더이다” 라고 말하며 아름다운 이미지로 당신의 삶과 죽음을 추모한다.     (2) 서정시의 깊이 서정적인 자아가 대상과 대면하여 발생한 감정을 어느 정도의 미학적 거리를 두고 시를 써야 좋은 시가 될 수 있다. 거리가 가까우면 감상에 치우치고, 거리가 너무 멀면 긴장감이 사라진다. 시 는 여운을 남길 수 있는 적당한 거리감이 있다.   서정적인 자아는 작가에 따라 심리적인 깊이와 넓이에 차이가 있다.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존재의 바탕에까지 들어가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존재의 진리에 대한 통찰력을 표상하지는 못하였다. 대상에 대하여 보고 느낀 것의 이면에 대한 상상력의 부재를 드러낸다.   자아가 깊고 넓으면 그에 따라 작품도 심오하고 풍부해진다. 감정과 지성이 조화를 이룰 때 현재에 존재하면서 일상적인 집착과 사고에서 벗어나 독자의 영혼을 깨우는 예술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 심오한 자아는 수평적인 사유와 수직적인 사유를 통해서 완성할 수 있다. 수평적인 사유란 세계에 대한 경험적 인식이며, 인생경험이나 여행, 독서를 통해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사유하게 된다. 수직적인 사유란 존재의 근본을 탐구하는 것이며, 종교적이며 명상적이다.     (3) 초월의 미학 삶과 죽음의 본질에 대하여 깨달음을 얻으면 그것을 초월할 수 있다. 인간은 소우주이며 나를 통해서 우주를 상상할 수 있다. 나는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과 종교적인 상상력이 인류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현대의 인류는 물질에 압도되어 인간성을 왜곡시키고 스스로 소외되어 있다. 사람사이의 관계가 신뢰를 잃어가고 있으며, 이성적인 합리주의가 해체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서로 사랑하는 감정이 인류의 행복과 문명의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유하려는 이기심을 버려야 한다. 타인을 도구로 이용하지 말고 나와 동일한 주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곳에 문학의 사명이 있다.     (4) 깨달음의 길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자아를 성찰하여 세계와 나의 관계를 이해하고 무한의 자유를 얻는 것이 깨달음이다. 자아는 돌이키면 무(無)로 환원한다. 깨달음이란 물질과 마음이 공(空)으로 돌아가며, 공(空)으로부터 가설된다는 것을 체득하는 것이다. 근원으로 돌아가고 또한 현재를 생성하는 본질적인 자아는 영원하다. 그 자아는 우주에 편만해 있다. 우주 그 자체이다. 이렇게 나의 존재를 깨달을 때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통찰할 수 있으며, 이 세상이 평등하여 아집을 떨치고 상하 분별없이 사랑하며, 대지혜를 갖추어 머물지 않고 자비를 행할 수 있다. 문자로서 감동을 주고 교화를 펼치지만, 진리는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다.    
447    시의 파문이 느리게 오래 지속되는 시를 써야... 댓글:  조회:2482  추천:0  2017-05-05
동백숲에 길을 묻다      느리게 쓴다는 것의 의미  1.  프랑스 철학자 삐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시리즈가 얼마 전부터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으면서 수많은 여염집 서가를 장식하고 있다. 이 책은 철학 에세이로서는 보기 드물게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예에 속하는데, 이것은 그만큼 속도에 대한 맹신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반성하고 성찰하려는 욕망이 우리 사회에 미만해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쌍소는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를 우선 삶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는 점과 삶을 철저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찾는다. 그는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생활 차원에서 다음의 몇 가지를 제안한다. 즉 한가로이 거닐 것, 말하기보다는 남의 말을 들을 것, 권태 속에서 느긋함을 느낄 것, 즐거운 몽상에 빠져볼 것, 어떤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 열린 자세로 결과를 기다릴 것, 고향의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거나, 추억이 새겨진 나만의 장소를 만들 것, 글을 쓸 것, 남을 비판하거나 질투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 것, 가벼운 술 한 잔의 여유를 즐길 것 등이 그것이다.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적 일상을 살아가면서 실천하기에 쉽지만은 않은 일들이다.  그러면, 시의 차원에서 느리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인가? 우리 시단에는 현대 사회에서 속도 지상주의에 찌든 삶에 대응하는 방식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현대의 속도 신화에 몸을 싣고 그 속에 파고 들어가는 전위적 시인들이 있는가 하면, 속도의 메커니즘에서 살짝 비껴 서서 속도에 찌든 세태를 바라보고자 하는 관찰자적 시인들이 있다. 다른 한 쪽에는 그런 광경을 아예 외면해 버리고 속도 세계와는 절연된 곳을 찾아다니는 시인들도 있다. 김선태 시인은 이들 중 마지막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는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를 시의 차원에서 실천한다는 점에서 우리 시단의 삐에르 쌍소다. 사실 오늘날과 같은 스피디한 세상에서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를 부단히 반추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2.  그런데, 삐에르 쌍소도 지적했듯이 느리게 산다는 것은 게으르게 사는 것과는 전연 다르다. 게으르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방치하는 무책임한 것이지만, 느리다는 것은 삶의 세부적 국면들을 음미하며 철저히 사는 방식이다. 시인에게 느리게 산다는 것은 곧 느리게 쓴다는 것과 매한가지다. 이번 시집 가운데 느리게 쓴다는 것의 의미를 가장 명료하게 제시한 시는 이렇다.  나는 미욱하여 늦게,  아주 늦게, 네게  닿고 싶다  가장 먼 길  휘어져서, 꾸불꾸불  세상을 한 바퀴  두루 산보하고서야, 너를  지구처럼 둥근 너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  부분  삶에 대한 시인의 기본적 태도가 드러난 부분이다. 시인이 스스로를 어리석고 미련하다(“미욱하다”)고 전제하고는, 대상을 향해 “아주 늦게” 도달하고 싶다거나 “세상을 한 바퀴/두루 산보하고서야” 대상을 소유할 것 같다는 말은, 오늘날처럼 빠른 것만을 맹신하는 세태에 비추어 볼 때 상식에 어긋난다. 이 시에서 지시하는 ‘너’가 사랑하는 사람이든 우정어린 친구이든 삶의 목표이든, 상식대로라면 어떤 방법을 택하든 빨리 그(것)를 만나고 싶어할 테지만, 시인은 세상을 고샅고샅 두루두루 돌아다닌 이후에 천천히 그(것)와 만나고 싶다고 한다. 이 이상한 바람의 밑자리에는 ‘너’와의 만남을 완전하고 진정한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시인의 심리가 내재한다. 만남의 대상을 빨리빨리, 대충대충, 순간적으로 만나는 데 그치지 않고 천천히, 철저하게, 영원히 만나려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이 스스로를 ‘미욱하다’고 했던 전제에서 파악되는 것은 시인의 우둔함과 미련스러움이 아니라 삶에 대한 겸손한 태도이다.진정한 만남을 추구하기 위해 빠른 세상에 역행하며 살아가는 시인은 오히려 아주 현명하고 용기 있는 존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둥글게’ 살려는 태도는 곡선적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느리게’ 살려는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직선적인 것이 인공적이고 빠른 속도감을 연상시키는 반면, 곡선적인 것은 자연스럽고 완만한 속도감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가령 ,  등은 ‘둥글게’가 내포하는 느림의 시학을 적극적으로 형상화한 예에 속한다.  김선태 시인이 추구하는 느림의 시학은 세계관에 있어서는 낭만적 태도와 연관된다. 주지하듯 낭만적 태도란 현실 세계를 구성하는 무기적(無機的) 세계와 유기적(有機的) 세계, 그리고 윤리적(倫理的) 세계가 일원론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 다음의 시에는 연속적 세계관이라고 부를 만한 낭만적 태도가 잘 드러난다.  늦가을, 정수사 깊숙이 꼬부라져 들어간 길목에 서 있었습니다. 삶이 어떤 행색을 하고 있는 것이더냐고 혼자 중얼거릴 때 저 길목에 늘어선 늙은 바위들은 무어라 말을 건네주지 않습니다. 삶이 무어라고 말하면 이미 삶은 거기 없다는 듯, 풍경 하나를 제대로 만나려면 그 풍경과 몸을 바꾸어야 한다는 듯, 비밀을 먼저 탐하려는 자의 우매를 억만 겹 세월의 무게로 지그시 눌러버렸습니다.  ―  부분  시인은 ‘정수사’라는 절의 “길목에 늘어선 늙은 바위들”을 일련의 ‘풍경’으로 제시하면서 “풍경 하나를 제대로 만나려면 그 풍경과 몸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삶의 거처라 할 자연과 객관적 거리를 버리고 온전한 일체가 되어야만 그것의 진정한 의미와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늙은 바위들”이 만들어낸 ‘풍경’은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낸 존재, 혹은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를 깨달은 자의 모습이다. 세월이 가져다 준 온갖 풍상을 다 겪어내며 일관되게 저의 자리를 지키는 “늙은 바위들”은, 변화무쌍한 세상사를 가로질러 득도의 경지에 오른 고매한 노승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반면에 “비밀을 먼저 탐하려는 자”는 속도 신화에 찌든 세속적인 현대인을 표상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자연이나 인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발견은 ‘바위들’과 같은 여유로운 기다림 없이 그저 남보다 빨리(‘먼저’) 염원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시인은 그런 염원이 ‘우매’한 것이라고 보고, 자연이나 인생의 발견을 위해 중요한 것은 “풍경과 몸” 사이의 연속적 일체감을 확보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처럼 시인과 자연이 일체(一體)가 되려는 태도, 혹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인식은 이번 시집의 골간을 구성한다. 이런 낭만적 태도가 드러나는 방식은 두 가지인데, 그 중 하나는 시인이나 화자가 직접 개입하지 않은 채로 자연물들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발견하여 존재의 원리를 깨닫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뼈 시린 바닷물에 깊게 몸 담근 자만이 비로소 아름다운 진실 하나를 건져낼 수 있다”(), “둥근 황동 거울을 하나씩을 품에 안은 채/허리띠도 풀어버리고 그냥 산다”(), “오늘도 지상은 저마다 돌아가도 있는 것들의 풍경으로 가득하다”(), “네 몸에서 네 길 위에서/피는 꽃만이 네 꽃이다/마침내 시다”(), “세상의 기쁨이며 슬픔까지를 죄다 거두어 삭혀선/참, 구성지게는 남해와 몸 섞는 것을”(), “모두들 그 계집아이를 자연산이라 불렀다 황홀한 보름달의 자식이었다”(), “낮에는 풀꽃이며 산짐승들이 밤이면 달빛과 별빛이 동행의 길을 밝힙니다”() 등이 그런 예에 속한다.  자연과의 일체감을 통해 낭만적 태도가 드러나는 또 하나의 방식은 시인이 스스로 풍경 속으로 들어가 하나의 풍경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이런 현상은 우선 “저물 무렵 하산하는 마음속으로 오솔길 하나 따라옵니다”(), “이 진창의 갯고랑에 묻힌 참나무처럼/나 산 채로 깊이 묻히겠노라.”()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 풍경을 다시 바라보는 일은 ‘파란만장’()으로 얼룩지거나 “심하게 깨진/내 얼굴”()로 표상된 자신의 삶의 이력을 정직하게 성찰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특히 이 시집의 3부에 실려있는  연작 4편은 상처로 얼룩진 삶을 스스로 치유하는 생명의 메커니즘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이들은 동백나무처럼 살아온 시인 자신의 삶에 대한 진솔한 성찰의 기록으로도 읽힌다. 이 시편들에 대한 분석은 필자가 이미 ([현대시], 2002년 4월호)에서 시도한 바 있으므로 굳이 반복할 필요는 없으리라. 이 시편들에서 특히 ‘본다’는 행위는 절묘한 메타포를 이루는데, ‘본다’는 행위를 통해 시인은 생명의 원리에 대한 발견과 인생 역정에 대한 치열한 성찰적 인식에 이른다.  이번 시집에서 느림의 시학을 실천하는 수사적, 표현적 측면에서의 방법은 감탄사, 의성어, 쉼표 등을 적실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이들의 활용은 시적 정서의 흐름을 잠시 멈추게 하거나 느리게 하여 시상의 흐름을 찬찬하고 여유롭게 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1) 오호라, 지천으로 지천으로 물이 올라, 어디를 가도 한참은 정신이 몽롱한 남도의 봄 연애사태여, 그리하여 나도 대지 위에 벌렁 누워 뒹굴고 싶은 아흐, 더는 참을 수 없는 봄의 오르가슴이여.  ―  부분  2) 딱따구리 소리가 또 한 번 딱다그르르  숲 전체를 두루 울릴 수 있는 것은  숲의 나무와 이파리와 공기와 햇살  숲을 지나는 계곡의 물소리까지가 서로  딱,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  부분  우선 1)은 봄을 맞이하는 대지의 생동감을 성적 이미지와 절묘하게 결합시킨 시다. 이 짧은 시구에서 감탄사를 두 번이나 활용하고 있다. 사실 감탄사는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거나 그 영향권 내에 있는 시인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다. 감탄사는 명징한 이미지를 형상화하거나 지적인 인식에 이르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남발되는 수준만 아니라면 감탄사는 낭만적 감정이나 서정적 영감을 드러내는 데 여간 유용한 게 아니다. 이 시에서 사용된 감탄사 ‘오호라’와 ‘아흐’는 시상을 고양하여 그 여운을 길게 늘어뜨리는 데 긴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감탄사가 따뜻한 봄날에 여성적 대지와 남성적 대지의 어울러짐을 감각적 이미지로 표현하는데 활용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생명력이 약동하는 봄의 기운을 찬찬히, 느리게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외에 , , , , , , , , , ,  등에서도 감탄사가 시상의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2)에서 ‘딱,’은 의성어이자 의태어이다. 딱따구리라는 새가 내는 소리의 한 부분으로 들을 때는 의성어지만 아귀가 잘 들어맞는다는 뜻으로는 의태어의 구실을 한다. 이것은 일종의 음성 상징어로서 ‘숲 전체’을 구성하는 것들인 “나무와 이파리와 공기와 햇살”, ‘물소리’ 등이 ‘하나’로 조화된 국면을 형상화하는 데 적잖은 효과를 발휘한다. 숲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유기적 관계 속에서 하나의 전체로 작용하며 존재한다는 인식은 낭만적이고 생태주의적인 세계관과 깊이 연관된다. 이 시가 성공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면, 그것은 ‘딱,’이라는 시어에 절묘한 사용에 크게 빚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 , , ,   , ,  등도 의성어가 시상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번 시집의 적잖은 작품들은 쉼표의 사용에서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도 느림의 시학과 연관된다. 단적인 예로 “마음은, 지금, 어느, 남쪽, 섬, 기슭,/한, 마리, 갯고둥, 처럼, 엎으러져, 있어라.”( 전문)와 같은 시는, 불과 12단어(혹은 어절)로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쉼표가 11개나 사용되었다. 모든 단어들 사이에 쉼표가 사용된 셈인데, 이 쉼표들은 시의 중심 메타포인 ‘갯고둥’의 생리를 적실히 드러내는 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쉼표를 활용함으로써 시인의 ‘마음’은 이름 모를 해변의 ‘갯고둥’처럼 여유로움, 혹은 느림을 지향한다는 메시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이외에도 ,  등의 시에서도 쉼표가 일반적인 용법에서 벗어나 시상의 흐름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이 발견된다. 쉼표가 시상의 흐름에 휴지를 줌으로써 느림의 시학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3.  이처럼, 김선태 시에서 느리게 쓴다는 것의 의미는 주제의 차원에서 보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경계와 비판이라는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수사적 차원에서 보면 시상의 흐름을 완만하게 함으로써 주제의 여운을 길게 하여 그것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데 기여한다. 이렇게 형상화된 김선태 시는 속도 지상주의에 혼과 몸을 빼앗기고 앞뒤 돌아볼 겨를도 없이 달려가는 우리 시대를 제어하는 브레이크로서 의미가 있다. 이 브레이크의 성능이 온전히 발휘되게 하는 핵심 기제는 “느리지만 철저하게 사는” 삶의 태도이다. 이런 태도로 느리게 쓴다는 것의 의미를 부단히 반추해 온 김선태 시인은, 그의 시구에 빗대어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느려터진 포유류”에 속할지 모르나 “결코 나무에서 떨어진 적이 없”는 ‘나무늘보’( 부분)처럼 자신의 시와 삶에 철저하다. 이번 시집은 그 철저한 삶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느림의 시학을 실천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속도 신화에 찌든 세상만이 아니다. 김선태 시인은 순수한 시정신을 위협하는 것으로 자기 안의 욕망을 문제 삼는다. 가령 “꿈속까지 따라붙는 질긴 욕망과도 멱살을 잡고 싸웠다. 그리고 순수 하나 지키기를 바라며 울었다”.()고 하는 대목을 보라. 그는 속도와 싸우는 일 외에 “날마다 검은 수염처럼 기어 나온다”는() 욕망과도 싸우며 더 철저한 자세로 시를 쓰고자 한 것이다. 이때 속도와의 싸움이 세상과의 싸움이라면, ‘욕망’과의 싸움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뜻한다. 그런데 속도와 ‘욕망’은 사실 닮은꼴이다. 인간의 욕망은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인간의 내면과 세상을 안팎으로 넘나들며 질주하듯 과속으로 움직이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또한 속도와 욕망은 엇나간 근대적 세계의 순수하지 못한 것들의 표상한다는 점에서도 닮음꼴이다. 이와 반대의 속성을 지닌 느림과 순수도 또한 서로 닮음꼴이다. 근대적 욕망과 속도에 찌든 세태에 재빨리 적응하지 않고 스스로를 느림의 삶으로 이끄는 태도는 순수하다고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김선태 시인은 느림과 순수를 지키기 위해 속도와 욕망에 뻗대며 시를 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선태 시인이 느림의 시학을 실천하는 일은 세상사에 무감한 상태에서 멋모르고 하는 순진한 행동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 둔다. 그는 순수하되 순진하지는 않다. 순진하다는 것은 세상사에 대해 뭘 모른다는 것이지만, 순수하다는 것은 속악한 세상사를 다 알면서 올곧은 자신의 신념을 굳건히 지향하는 태도이다. 그는 언제든 세상에서 “부르면 길들여진 메아리처럼 빠르게 돌아갈 것”()을 알면서도 삶과 시를 더욱 철저히 살아내기 위해 느림의 시학을 추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시집은 이 순수함을 바짝 밀고 나아간 자리에서, 빠름만을 추구하는 황량한 세태의 한 구석에서 더욱 “눈부시게 살아서 파닥거”()린다. 아마도 “파닥거”림은 시의 파문이 되어 느리게, 오래 지속될 것이다.  -------------------------------------------------------------------------------------   길  김기림(1908∼?)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 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져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뿍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 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강어귀의 그 마을, 아마도 화자의 고향이리라. 화자가 소년 시절에 ‘호져(혼자) 때 없이’ 헤매다 강가로 내려가곤 했던 ‘그 긴 언덕길’, 슬픔이 자욱이 깔린 상실의 길. 그 길에서 화자는 어머니의 상여가 꼬부라져 돌아가던, 영원히 잊지 못할 광경을 봤다. 그리고 그 길에서 데이트를 하며 풋사랑을 일구었던 대상을 바로 거기서 잃었다. 아름답고 슬프고 그리운 그 길은 실제 한 마을의 길인 동시에 ‘소년의 길’이다. ‘꼬부라져 돌아가다’란 말은 슬프다. 꼬부라져 돌아간 뒤에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감수성 예민한 선병질 소년의 외롭고 여린 마음이 독자 가슴속 원초적 설움을 건드린다. 그 이미지가 선연히 떠오르는 시 속 풍경도 화자 개인의 기억이 아니라 인간 기억의 원형 같다. 전혀 흔하거나 진부하게 그려진 공간이 아님에도 친근하고 익숙하게 와 닿는다.     나무도 하필 늙은 버드나무일까. 이 시의 원형적 공간에 딱 어울리는 나무다. 청년이나 장년일 나이가 된 화자는 고향마을 어귀의 늙은 버드나무 밑에 서서, 깊은 그리움에 휩싸인다. 마을을 떠났던 자기처럼, 어머니도 계집애도 자기의 소년 시절도 돌아올 것만 같아. 아스라하고 아련했던 기억이 사무치게 되살아나 눈물짓는 화자를, 어둠 속에서, 어둠만큼이나 어두운 늙은 버드나무는 묵묵히 내려다봤으리라.  
446    시인은 위대한 상상력의 소유자이다... 댓글:  조회:2499  추천:0  2017-05-05
중국 연변 연길시 소영진 하룡촌 "천년송" 시는 말로 그린 그림이다.   조성연(월간 시사문단 편집위원)   위대한 시인은 위대한 상상력의 소유자다. 남이 못 보는 것을 보고, 남이 못 듣는 것을 듣는 사람이다. 그런 이유로 중세에는 시인이 신과 대화하는 매개자(媒介者)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리스  시대 시신(詩神)이 시관(詩觀)은 `신은 시를 통하여 인간과 통화한다`고 보았다. 신이 영감(靈感)으로 시인을 부르고, 시인은 그것을 영감으로 느끼며, 신의 부름에 답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 쓰기에 대해서 세계를 모방하는 모방설을 말했다. 어떤 모상(模像)을 재창조하는 일로 본 것이다. 이것을 전적으로 인정할 수는 없지만 시인은 무의식 속에 묻혀 있는 체험들을, 시로 창작하기 위해서 이미지를 만든다. C.D 루이스는 이미지(image)란 말에 대해서 `말로 그린 그림`이 라고 보았다. 시인은 이러한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다. 하나의 이미지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지각이 결합하여서 만들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이미지는 시의 형식적 정의이다. 과학적 언어는 이해는 언어이며 논리적인 언어다. 과학적 언어의 가장 훌륭한 표본은 수식(數式)이다. 모든 과학의 법칙은 수식으로 요약되고 이해된다. 피타고라스의 삼각형을 구하는 공식에서처럼. 수식으로 그것을 명쾌하게 우리을 이해하게 한다. 그러나 숫자는 모양은 있으나 이미지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따라서 시 쓰기가 숫자처럼 모양을 그리는 일은 아니다. 시적 감성이나 표현은 명료해야 한다. 독자들에게 적확(的確)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새로움을 추구해야 한다. 과거는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안함을 주지만. 그 반대로 과거로 복귀하려는 퇴행성(退行性)을 가져다준다. 혼자만의 추억이 아니라 독자와 같이 공감하기 위해서는, 나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共有)할 수 있는 시를 써야 한다. 전제한 것처럼 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창시(創詩)가 어렵지만. 이 시각에도 수많은 시들이 책과 인터넷 공간에서 난무한다. 시다운 시를 발견하기도 쉽지 않다.   시 쓰기에서도 산문 쓰기처럼 줄거리(story), 테마(theme), 아이러니(irony),음미하는 즐거움(詩減)이 있어야 좋은 시가 된다. 전제한 시들 중에는 형상화나 이미지화는 만들어졌지만, 메세지가 약하고, 건너뛰기가 머무 심해서, 의미전달이 취약한 시가 있다. 또한 시 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형상화와 이미지즘화가 되지 못한 시도 있다. 작가가 가지고 있는 상상의 세계를 너무 형이상하학적으로, 너무 단조롭게, 너무 부드러운 점들이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치면, 좋은 시가 되지 못한다. 작가가 일정한 선을 유지하고, 시를 쓰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작자의 `응축`과 독자의 `음미`가 동질의 시감(詩感)으로 함께 공유 될 때. 상호교감의 공감대가 높게 형성됨으로써 좋은 시가 된다.   ///시사문단
445    시는 자기 자신의 삶을 발견하는것이다... 댓글:  조회:2155  추천:0  2017-05-05
    *詩쓰기에대한 짧은 강의 /정호승   1.시라는 산의 능선은 천천히 걸어가도 된다.  그러나 능선을 걸어갈 때 그 마음만은 무심하고 순수해야 한다. 그러면  많은 하고 싶은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떠오를 것이다.   2.시는 자신의 삶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발견하기 위한 마음의 움직임이 발견한 것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다.   3.시는 눈에 보이지 않았거나, 나도 모르게 감추어놓았던 나의 인생의 일들을  다시 찾는데서 시작된다.   4.시는 자신의 내부에서 구해야 한다. 그 내부를 위해 외부가 존재할 뿐--- 만일 외부만 있으면 종이인형에서 생명을 느낄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5.'노력이 소질이며, 연습의 양이 질'이라는 말은 시쓰기에 있어서도 해당된다.     시를 쓰는 세 단계 - 이형기 님의 시창작법 참고   영국의 시인이자 시론가인 루이스가 쓴 라는 책을 참고하여 이 형기님은 시를 쓰는 단계를 다음과 같이 3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시의 종자'를 얻는 단계이고, 두 번째는 이 종자가 시인 정신 내부에 성장하는 단계이고. 세 번째는 하나하나 언어를 골라 거기에 구체적인 표현을 부여하는 단계 이다. 한 단계씩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개개인들의 시 쓰는 방법을 연구해 보자.   1. 첫 번째는 '시의 종자'를 얻는 단계 '아, 이거 시가 되겠다' 싶은 인상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 있으면 시의 종자가 될 수 있다. 이 종자는 반드시 노트에 적어야 한다. 그 종자를 당장 한 편의 시로 만들려고 서두를 것은 없다. 시를 쓰려고 서두르면 상상력이 종자 자체에만 얽매어 표현이 단조롭고 내용이 빈약한 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조급증을 부리지 말고 지긋하게 기다릴 줄 아는 힘 을 기를 필요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의 종자를 붙든 순간에 펜을 들어 단숨에 한 편의 시를 써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율이 높고 성실성도 문제 되는 방법이기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닌 한 그렇게는 시를 쓰지 말아야 한다.   또 시의 종자를 노트에 적는 것이 중요한데 시의 종자를 노트에 적지 않으면 완전 히 까먹어 종자가 싹터서 자랄 수 없는 멸실(滅失)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노트에 꼭 적어 두어야 한다. 노트가 곧 시의 종자의 생명력을 보증하는 비망록이라고 볼 수 있다.   2. 두 번째는 종자의 성장과 시적 사고를 하는 단계 종자 얻기 과정을 거치면 다음에는 그 종자가 시인의 정신 내부에서 성장하는 단 계에 접어들게 된다. 종자의 성장은 며칠 동안 속성(速成)으로 자랄 수도 있고, 몇 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성장이 느리다면 수 년 동안 시를 몇 편 쓰지 못 할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갖지만 우리 속에 자라는 시의 종자가 하나일 수 없다.   여러 개의 종자가 동시에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의 종자가 혼자 힘으로 소망스럽게 쑥쑥 자란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제대로 싹틔우고 자라게 하려면 정성어린 노력이 필요하다. 전 날 쓴 노트를 펼쳐 그 종자를 보며 거기에 자신의 상상력을 가미하게 되면 성장과 발전의 단계에 접어 들게 되는 것이다.   서정주 님은 라는 시를 쓰고 나서 이런 말씀을 그의 자서전에 남겼다. "내가 어느 해 새로 이해한 이 정밀한 40대 여인의 미의 영상은 꽤 오랫동안 -아마 2-3년 동안 그 표현을 찾지 못한 채 내 속에 잠재해 있었다가 1947년 가을 어느 해 어스름 때 문득 내 눈이 내 정원의 한 그루의 국화꽃에 머물게 되자 그 형 상화 공작이 내 속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서정주, 에서   그러니까 그 종자의 획득은 2-3년 동안 지속적으로 그런 이미지를 떠오를 수 있게끔 시적 사고를 거듭하면서 준비를 해온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3. 세 번째는 구체적인 언어 표현 찾기 단계 이 단계에 이르면 시를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 시를 쓰려고 할 때는 가장 적합한 표현의 언어를 찾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신을 집중해도 척척 풀리지 않을 때, 시인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이를테면 뜰을 거닐거나, 목욕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아니면 침대에 누워 명상에 잠긴다.   를 쓴 서정주 님의 말을 빌리자면 몇 시간 누었다, 앉았다 하며 비교적 쉽게 1-2연을 썼고, 마지막 연은 좀처럼 생각이 안 나서 잠 자버리고 며칠 동안 그대로 묵혀두었다가 완성했다고 한다. 서정주 님도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를 완성했는데 하물며 시의 초심자의 경우는 어떤 자세로 시를 써야겠는가? 그러나 고통이 아무리 크다해도 작업의 결과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되면 그로써 고통은 절로 보상된다.   마지막 단계에 하나 더 붙인다면 퇴고(推敲)이다. 초고를 1주일 정도 설합에 넣어 두었다 꺼내면 자신의 시라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 때 초고(草稿)를 다시 검토하면 완성된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낙서 /오봉옥  1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바쳐라  ……  술 마시고 싶을 때 한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보아라.”  노래를 듣다가 문득 생각한다. 시야말로 목숨을 걸고 써야 한다는 것을. 한편의 시가 죽어가는 이를 살려낸다고 한다. 죽어가는 이를 살려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아름다운 시를 쓰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아픔이 없어서는 안된다. 시는 정말이지 그런 것이어야 한다.  시  초겨울 바람에 부르르 떨고 보니  시 쓰고 싶다  그 옛날 콜레라에 걸린 아이처럼  덕석말이로 마당 한가운데 누워  피가 질질 흐르도록 덕석만 할퀴다가  제 몸 위를 소가 쿵쿵 뛰어다니는 소리에 다시 놀라  까무러치기도 하다가  끝내는 온통 땀에 젖은 작은 몸으로  그 무서운 병을 툴툴 털고 일어나 히히 웃는  마치 그런.  2  서정의 특성은 개성적이라는 데에 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고도 그것을 보는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르게 나타난다. 노동자로서 보는 달과 자본가로서 보는 달은 느낌이 다른 법이다. 또한 같은 노동자라 할지라도 내성적 성격을 갖고 있는 사람과 외향적 성격을 갖고 있는 사람의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의 특성이 개성적인 것만큼 모든 인간이 느끼는 감정도 다르다는 것이다.  통일에 관한 시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어쩌면 통일을 생각하는 느낌이 그렇게나 비슷한지. 진달래가 어떻고 백두와 한라가 어떻고 등등. 자신의 생활 속에서 깊이 있게 통일을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서정의 개성을 살리지 못하고 시를 관성적으로 쓰는 탓이다.  3  흔히 시평을 읽으면 ‘사상성’이라는 개념이 눈에 띈다. 시에서 ‘사상성’이란 무엇일까? 노동자의 생활을 다루면 사상성이 충실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상성이 불투명한 것인가? 사상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문제는 생활 속에 담긴 사상에 있다. 다시 말해 생활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사상을 어떻게 하면 올곧게 끄집어내어 정서적으로 잘 표현하는가에 있는 것이다. 그것의 성공 여부가 ‘사상성’ 운운으로 되어야 한다.  4  시에 있어서 상징어는 생동감을 보장하기 위하여, 비유는 말하고 싶은 바를 가장 적절히 표현해내기 위하여, 그리고 반복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시각․청각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내 독자를 시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좋은 시일수록 이러한 시적 장치가 잘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5  시적 정서란 무엇일까?  시인이 생활 속에서 한 계기를 만났다 치자. 그래서 충동을 느꼈다 치자. 외치고 싶은 충동을, 춤이라도 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치자. 그럼 그 정서적으로 느낀 충동이 시적 정서일까? 맞는 말이다. 반쯤은 맞는 말이다.  반쯤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 충동의 삭이는 과정을 생략했기 때문이다. 삭인다는 것은 그 충동을 자기의 것으로 되게 하는 것이며 모두의 것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삭임이 끝난 그 어떤 정서적 표현이어야 비로소 ‘시적 정서’가 아니겠는가.  6  시에서 생활 반영의 진실성은 어떻게 구현될까. 생활을 있는 그대로 복사하듯이 옮겨놓으면 되는 것인가. 아니다. 생활 속에서 보고 느낀 것을 시인 자신이 내화시켜낼 수 있어야 그것은 가능하다. 내화시킨 뒤의 정서적 토로라야 생활 반영의 진실성을 보장한다.  7  우리가 흔히 현실을 왜곡시켰다고 하는 것은 현실을 잘못 그렸다는 것만은 아니다. 넓게는 생활과 거리가 먼 이야기를 했다거나 생활의 본질이 아닌 이러저러한 현상만을 나열하는 식으로 그린 것은 물론 현실을 과장되게 묘사하는 것까지를 일컫는다. 그러한 것은 모두 사람의 요구와 지향을 묵살하는 데 공통점이 있다. 우리 현실 속에서 자연주의적 경향은 그러한 것이다.  우리가 현실을 폭로하는 데 있어서도 ‘대안없는 폭로’를 우려하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8  시의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일차적으로 형상화의 높이를 보아야 한다. 다음으로는 내용과 형식의 대중적 성격을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시의 평가는 사상의 관점이나 주제의 방향이 얼마만큼 서정 속에 적절히 녹아들었는가를 보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모두 시 속에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9  시들을 보면 종종 생각한다. 어떤 시는 절실한 문제를 형상적 비유에 의해 더욱더 선명하고 절실하게 문제를 전해주는 데 반해 또 어떤 시는 절실한 문제를 형상적 비유의 실패로 인해 더욱더 불투명하고 왜곡되게 문제를 전해주고 만다는 점이다. 왜일까?  창작적 사색이 부족해서일 것이다. 사상학습이 부족한 결과로 자신 스스로가 생활과 사상의 연결 끈을 정확히 포착하지 못한 탓일 터이다.  10  담시와 서사시는 어떻게 다를까.  서사시가 이야기 구조를 짜임새 있게 보여준다면 담시는 이야기의 핵심적인 부분만을 잘라내 보여준다는 데 그 차이점이 있다. 또한 서사시보다는 보다 더 서정적 측면을 담시는 가지고 있다. 시인의 정서가 보다 더 직설적으로 관통되는 것이라고나 할까. 뛰어난 담시 하나 보고 싶다.  11  시에서 서정을 느끼는 주체가 독자임은 당연한 사실이겠다. 때문에 독자가 요구하는 정서에 깊이 파고드는가의 문제는 서정시에 있어서 관건이 된다. 독자의 구미를 파고들지 못한 시는 제 아무리 보기 좋은 시라 하더라도 실패작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그럼 독자 즉, 다수 민중의 구미에 맞는 내용이란? 다수 대중의 구미에 맞는 형식이란? 창작자의 고민은 한사코 거기에 있다.  12  시는 생활의 한 단면을 충격적으로 보고 느낄 때 쓰는 것이라고 한다. 정말 그런가?  세상 사는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은 느낄 그 충동이 시를 쓰게 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지언정 종착점까지를 보장해 주진 못한다. 문제는 충동을 주는 그 대상의 구체적인 내면 세계까지를 정서적으로 충분히 공감했을 때 비로소 감동을 주는 시가 쓰여지는 것이다.  13  노래 같은 시들이 있다.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흥얼거리고 싶은 시 말이다. 그것은 일정한 흐름을 반복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느껴진 것이다. 깊은 뜻을 아우르고 있으면서도 쉽고 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일 터이다. 어느 한 시가 박자를 머리 속에 그려지게 만든다면 그 시는 명시가 아닐 수 없다.  14  정서적으로 느끼고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얼마 전에 가뭄이 극성을 떤 적이 있다. 논바닥이 갈라지고 농부들은 일손을 놓고 한숨만을 내쉬기에 바빴었다. 그런데 비가 왔다. 그때 TV에 비친 농부들은 비를 손바닥에 받으며 “아, 쌀이 옵니다”, “이것이 돈입니다. 지금 수천만 원이 내리고 있어요” 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러한 농부들의 표현이야말로 정서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을 “아, 지금 태양의 복사열을 받아 증발된 수증기가 구름을 이루어 떠돌다가 높은 곳에서 찬 기운을 만나 중력의 가속도로 인하여 물방울이 되어 비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라고 했다 치자. 물론 농부라면 그럴 리도 없겠지만 말이다. 이 때의 표현은 생활정서로부터 벗어난 논리적 느낌․표현이 된다.  정서적으로 느끼고 표현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그런 것이다. 논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15  음악을 모르고서 시를 안다고 할 수 없다. 시를 모르고서 음악을 안다고도 할 수 없다. 시와 음악은 쌍둥이와 같은 존재이다.  16  시인은 응당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고속버스를 타고 갈 때 보게 되는 비디오의 삼류영화를 보고도 울 줄 알아야 하고 저 숱한 뽕짝을 듣다가도 평펑 울 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소한 것에도 웃음을 풍기는 사람이 시인이다. 가족과 주위의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전혀 모르는 사람의 즐거움에도 함께 할 수 있어야 진짜 시인이다. 결국 시인은 감정의 폭이 큰 사람인 것이다.  17  대학을 가보면 가끔씩 벽시가 눈에 띈다. 투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목적으로, 학생운동에 관심이라도 가져줄 것을 호소하는 목적으로, 당면 투쟁의 의미를 정서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벽에 붙이는 것이다. 그런 벽시는 대부분의 경우 문예일꾼들이 조직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꽤나 세련된 시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는 못쓴 시라 하더라도 일반 학우들이 써서 붙인 것을 보고 싶다. 자신들이 그것을 즐기면서 이용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문학예술의 주체와 향유자는 결국 민중 일반이니까.  18  왜 서정시는 길이가 짧은가, 여운을 주기 위해서이다. 생활의 작은 세부를 통하여 전체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은 사실로 많은 것을 연상시켜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읽어볼수록 새로운 여운을 느끼게 하는 것이랄까. 그래서 그 감동적 충격을 오래오래 기억되게 만드는 것이랄까. 아무튼 그런 것이다.  그러나 요즘 시들을 보면 너무나도 길기만 함을 느낀다. 산만함이 감동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19  우리 시대의 시인들은 ‘이야기 시’를 많이 쓰고 있다. ‘이야기 시’란 하나의 사건적인 이야기를 통해 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적 주인공의 정서를 보여주기 위해 이야기를 빌려서 쓰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이야기 시에 등장한 인물은 시인이 뭔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잠시 빌려온 인물일 뿐이다.  20  선동시라는 게 있다. 우리 시대의 문제점들을 낱낱이 밝혀 주면서 사람들을 고무․추동해내는 시 말이다. 그런데 선동시라고 쓰여진 시들을 보면 하나같이 개념이 남발한다는 점이다. 개념이 남발하는 곳에 감동은 없는 법이다. 감동이 없는데 선동이 될 까닭이 없다. 문제는 생활정서를 얼마나 잘 선동적으로 보여주는가에 선동시의 특성이 있다.  21  집회장에서 낭송시를 들으면 흔히 느끼는 일이다. 비교적 형상화가 잘된 시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는 전혀 먹혀들지 않을 때가 있고 시적 형상화에 서툰 그 어떤 시가 오히려 대중의 심장을 흔들어 놓을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 것일까?  우선은 시적 호흡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정서적으로 다가가는 호흡률을 가져야 대중은 꿈틀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시적 소리의 문제이다.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정서적 시어를 가져야 호소력을 얻게 된다.  우리의 시단도 낭송시의 영역을 개척해야 될 때가 온 듯싶다.  22  발표된 시들을 보면 객관적 실재를 묘사하면서 그 속에 시인 자신의 목소리를 집어넣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시인 자신의 정서적 토로와 객관적 실재의 묘사를 결합시켜내는 방식으로 시를 쓴다는 말이다. 이것도 시를 쓰는 한 방법이겠다.  23  분신 현장을 목격했다. 나는 그때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쿵쾅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어쩌지 못해 안절부절해야 했다. 호흡은 호흡대로 가빠져 그 자리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손을 심장 위에 올려놓고 길게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그때를 생각하며 시를 쓴다면 나는 필시 짧게 끊어치며 넘어가는 반복적 형식으로 시를 쓸 것이다. 그 상황을 옳게 반영하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될 것 같다.  24  생활을 그림처럼 그려내는 시들이 있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선명하게 그려내는 것도 있고 반대로 두리뭉실하게 굵게 그려낸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는 시적 대상을 생동감 있게 묘사해내는 장점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의문이 머리를 스치는 것은 또 무엇인가, 시가 생활의 한 단면을 정서적으로 느껴서 그것을 안으로 삭인 결과로 일반화시켜내며 또 그 결과로 정서적 토로를 하게 되는 것이 서정시의 근본특성이라면 위와 같은 방식은 그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다시말해 생활은 그림처럼 선명하게 그려내지만 서정시라는 근본특성은 잘 살려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러나 이런 생각도 함께 든다. 그림 같은 시 중에서도 감동을 주는 경우와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서정의 특성을 비교적 잘 살렸기 때문이며 후자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25  시를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를 배우기 위해서는 생활 속에서 민중들의 요구와 지향을 내용으로 배우고 민중들의 호흡법․말법을 그 형식으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시적인 기교를 연마할 수 있어야 한다. 시적인 기교를 말하고 싶은 바를 가장 적절히 표현해 내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뿐만 아니라 과거 역사 속에서 우리만의 시적 재부로 내려오고 있는 바를 습득해내야 한다. 시를 배운다는 것은 일종의 그런 것들이다.  26  풍자시는 사람들에게 통쾌함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형태이다. 포악한 자에게 비웃음을, 간사한 자에게는 야유와 멸시를, 누리는 자에게는 통렬한 조소를 보내기 위한, 그래서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통쾌함을 주기 위한 것이다. 최근 어느 한 시인의 풍자시를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통쾌함은 느껴지는데, 왜 가슴 한켠에 아쉬움이 남는 걸까.”  새로운 실험적 형식으로 쓰여진 그 풍자시는 다름아닌 서정성이라는 고유한 특성을 간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7  돌아보면 80년대는 정치적 격변기였다. 그래서일까. 80년대 시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전투적 서정시가 많이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내용만을 보아도 그렇다. 감상적인 내용보다는 과학성을 앞세운 내용이 훨씬 더 많았다.  이제 90년대이다. 90년대로 넘어오면서 우리의 시단은 80년대의 관념적인 경향을 극복하고 서정시의 본령을 찾아나가자는 목소리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서정을 제대로 찾아나가는 것이 아닌 본 뜻도 없는 잘못된 서정으로, 정서적 표현으로 흐르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 정서적으로 표현되어야 서정인 것이지 요즘의 풍토처럼 그럴싸한 미사여구식의 시가 남발하는 것은 서정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28  외국에서 교포가 왔다. 그가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우리 문학을 일어로, 영어로 번역해 많이 많이 소개하겠습니다. 밖에 있는 우리가 할 일이 그런 것인 거 같아요.”  “좋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소설은 몰라도 시는 전문성을 요구할 듯합니다. 우리의 시어를 외국어로 옮기기가 보통 일이 아닐 것 같아요.”  정말이다. 우리 말처럼 표현이 풍부한 말도 드물다. 더구나 시란 게 백 마디의 말을 한 마디로 줄이는 것이기에 거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는 것이고 그 한 마디의 표현일지라도 그 표현에만 맞는 고유한 색깔이 있는 것이어서 그것을 표현하기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듯 싶었다. 이를테면 운율을 살려내기 위한 ‘줄임말’은 얼마나 많으며 반대로 ‘늘임말’은 얼마나 많은가. 표준어와 사투리의 다른 맛은 어떻게 할 것이며 현재 쓰는 말과 옛말의 다른 맛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29  오늘 나는 결혼식장에서 축시를 읽었다. 그런데 풍자적 요소를 도입한 축시였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는 것이었다.  돌아오면서 나는 곧바로 후회했다. 축시의 특성을 살리지 못한 것에 대해 한편으로는 신랑․신부에게 미안했고 또 한편으로는 그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축시는 응당 묵직하고 밝은 것이어야 한다. 순결성과 숭엄성이 흐르는 것이어야 한다.  30  우리는 흔히 시인이 말하고 싶은 바를 정서적으로 토로한 시들을 접하게 된다. 호수가의 물처럼 잔잔하게 흘러가는 방식으로 쓴 것도 있고 태풍을 동반한 바닷물처럼 격정적으로 다가오는 식으로 쓴 것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러한 것들을 적절히 결합하여 굴곡을 이루는 방식으로 쓴 시들도 많다. 서정시의 특성을 가장 잘 살려내는 이러한 방식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방식인 것 같다.  31  내가 좋아하는 한 선생이 말하기를  “평론에 그만 관심 쏟고 창작에 더욱 더 매진하시지요. 창작자가 갖는 고집은 중요한 재산입니다.”  내가 그 선생에게 대답하기를  “어디 우리 풍토가 그러나요. 비평의 목소리가 워낙 크다 보니 엿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맞는 말이에요. 창작자가 가져야 할 창작적 고집은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겠지요. 비평을 엿보다 보면 작품을 관념적으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이나 그런 것 같아요.”  비평을 엿보면 엿볼수록 관념적인 작품을 쓰게 된다? 넌센스이다. 우리 시대의 넌센스.    출처 :문학의 향기 좋은 쉼터
또 하나의 문학을 만드는 《백천문학》 (ZOGLO) 2017년5월3일  첫 명사특강으로 나선 연변대학 우상렬교수. 요즘 조선족문단에 신선한 바람이 불고 있다. 연변작가협회가 운영하는 작가협회 사이트 및 위챗 공식계정과 “해란강닷컴”의 “문학아카데미”가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활약하고 있는 가운데 순 사이버형식으로 조선족문단의 신진작가 력량을 발굴하고 기량 있는 신진작가들을 양성하는 전문작가양성교육프로그램인 2017등단작가반이 온라인 계간 《백천문학》에 의해 새로운 바람으로 등장한 것이다. 2012년 10월에 창간호를 낸 《백천문학》(사장, 총편 김춘택)은 다음 카페에 디자인한 편집물을 올리고 발표작가들에게만 소량의 종이잡지를 인쇄하여 증정하는 문학지로 현재까지 5기를 내면서 다양한 행사로 자체의 모습을 만들어 가고 있다. 지난해 장백산아래 첫동네인 안도현 이도백하진 내두산촌에 작가촌과 작가공원을 건설한후 5차례의 행사를 조직하였고 올해에는 등단작가반과 백천문학독서회를 내와 조선족문단의 문학작품을 많이 읽는 운동을 하고 있다. 시인, 작가, 평론가로 두루 불리는 안도현 태생 김춘택(46)씨는 문학을 열망하고 시인과 작가의 꿈을 지닌 문학애호자들을 하루 속히 등단작가로 이끌어가기 위해 문학교실을 꾸리게 되였다고 하면서 여러가지 여건으로 작가협회에서 조직하는 강습에 참가하지 못하는 문학지망생들에게 어떻게 문학수업 기회를 제공할가 고민하다가 만들게 되였다고 덧붙였다. 그는 백천문학이라는 백천에 대해 ‘흰 시내물'이라는 뜻으로 장백산에서 발원하는 흰 강물 이도백하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기간이 2017년 3월부터 2018년 3월까지인 이번 문학학습반은 위챗을 통한 명사와의 1대1 강의와 40시간의 명사문학특강, 창작된 문학작품에 대한 추천발표 등 내용으로 원생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현재까지 연변지역 11명, 상해, 북경, 복건 등 국내 기타지역에 5명, 외국에 1명 이렇게 총 17명의 원생들이 문학수업을 받고 있다. 첫 특강에 참가한 원생들과 함께. 공부를 위해, 생계를 위해 문학의 꿈을 접어야 했던 40, 50, 60대의 원생들은 작가반의 학습을 통해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였고 책에서 작품을 통해 알고 있던 유명한 문학인들을 접하게 되여 매우 기쁘다고 하면서 문학공부를 열심히 할것을 밝혔다. 김춘택씨는 또 이런 문학지망생들을 위하여 력사문화답사와 현장창작교류회, 문학세미나 등 다양한 활동을 조직하고 있다면서 다음달에는 내두산산나물채집활동을 조직한다고 밝히면서 이런 활동에 참가하지 못하는 외지원생들에게는 동영상을 제작하여 보내준다고 설명했다.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443    시인은 령혼이 없는 시, 5차원이 없는 시를 쓰지 말아야... 댓글:  조회:2297  추천:0  2017-05-04
시를 쓰는 세 단계                            - 이형기 님의 시창작법 참고  영국의 시인이자 시론가인 루이스가 쓴 라는 책을 참고하여 이 형기님은 시를 쓰는 단계를 다음과 같이 3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시의 종자'를 얻는 단계이고, 두 번째는 이 종자가 시인 정신 내부에 성장하는 단계이고. 세 번째는 하나하나 언어를 골라 거기에 구체적인 표현을 부여하는 단계 이다. 한 단계씩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개개인들의 시 쓰는 방법을 연구해 보자.  1. 첫 번째는 '시의 종자'를 얻는 단계  '아, 이거 시가 되겠다' 싶은 인상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 있으면 시의 종자가 될 수 있다. 이 종자는 반드시 노트에 적어야 한다.  그 종자를 당장 한 편의 시로 만들려고 서두를 것은 없다. 시를 쓰려고 서두르면 상상력이 종자 자체에만 얽매어 표현이 단조롭고 내용이 빈약한 시가 되기 때문이 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조급증을 부리지 말고 지긋하게 기다릴 줄 아는 힘 을 기를 필요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의 종자를 붙든 순간에 펜을 들어 단숨에 한 편의 시를 써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율이 높고 성실성도 문제 되는 방법이기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닌 한 그렇게는 시를 쓰지 말아야 한다.  또 시의 종자를 노트에 적는 것이 중요한데 시의 종자를 노트에 적지 않으면 완전 히 까먹어 종자가 싹터서 자랄 수 없는 멸실(滅失)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노트에 꼭 적어 두어야 한다. 노트가 곧 시의 종자의 생명력을 보증하는 비망록이라고 볼 수 있다.  2. 두 번째는 종자의 성장과 시적 사고를 하는 단계  종자 얻기 과정을 거치면 다음에는 그 종자가 시인의 정신 내부에서 성장하는 단 계에 접어들게 된다. 종자의 성장은 며칠 동안 속성(速成)으로 자랄 수도 있고, 몇 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성장이 느리다면 수 년 동안 시를 몇 편 쓰지 못 할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갖지만 우리 속에 자라는 시의 종자가 하나일 수 없다. 여러 개의 종자가 동시에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의 종자가 혼자 힘으로 소망스럽게 쑥쑥 자란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제대로 싹틔우고 자라게 하려면 정성어린 노력이 필요하다. 전 날 쓴 노트를 펼쳐 그 종자를 보며 거기에 자신의 상상력을 가미하게 되면 성장과 발전의 단계에 접어 들게 되는 것이다.  서정주 님은 라는 시를 쓰고 나서 이런 말씀을 그의 자서전에 남겼다.  "내가 어느 해 새로 이해한 이 정밀한 40대 여인의 미의 영상은 꽤 오랫동안 -아마 2-3년 동안 그 표현을 찾지 못한 채 내 속에 잠재해 있었다가 1947년 가을 어느 해 어스름 때 문득 내 눈이 내 정원의 한 그루의 국화꽃에 머물게 되자 그 형상화 공작이 내 속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서정주, 에서  그러니까 그 종자의 획득은 2-3년 동안 지속적으로 그런 이미지를 떠오를 수 있게끔 시적 사고를 거듭하면서 준비를 해온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3. 세 번째는 구체적인 언어 표현 찾기 단계  이 단계에 이르면 시를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 시를 쓰려고 할 때는 가장 적합한 표현의 언어를 찾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신을 집중해도 척척 풀리지 않을 때, 시인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이를테면 뜰을 거닐거나, 목욕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아니면 침대에 누워 명상에 잠긴다.  < 국화 옆에서>를 쓴 서정주 님의 말을 빌리자면 몇 시간 누었다, 앉았다 하며 비교적 쉽게 1-2연을 썼고, 마지막 연은 좀처럼 생각이 안 나서 잠 자버리고 며칠 동안 그대로 묵혀두었다가 완성했다고 한다. 서정주 님도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를 완성했는데 하물며 시의 초심자의 경우는 어떤 자세로 시를 써야겠는가? 그러나 고통이 아무리 크다해도 작업의 결과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되면 그로써 고통은 절로 보상된다.  마지막 단계에 하나 더 붙인다면 퇴고(推敲)이다. 초고를 1주일 정도 설합에 넣어 두었다 꺼내면 자신의 시라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 때 초고(草稿)를 다시 검토하면 완성된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이다.  --------------------------------------------------------------------------------------------       납작 ―정다운(1977∼ ) 은퇴한 아버지는 유명 카페 가맹점을 냈다 커다랗고 똑같은 간판이 싫단다 하지만 아무도 간판 보고 찾아오지 않는다 지도앱을 이용하지 어쩌다 한 번 이메일을 받았다 검색창에 내 이름을 넣어도 좀처럼 찾아지지 않는다는 말 널 치면 네가 다니는 회사 네가 먹은 저녁이 뜨는데 너의 이름은 유별나고 거칠고 물고기처럼 덥석 무니까 정다운 원룸이나 어린 여배우가 나오는 내 것과는 아주 다르다 내가 너를 기억하는 방식은 그 길을 머릿속으로 다시 걷는 거 지하철역에서 포장마차를 지나 아파트에 둘러싸인 움푹한 공터까지 가면 아무도 없는 새벽의 낮은 흥분과 누가 베란다 밖을 내다 볼 것 같은 불안이 거기 있다 너는 꿇어앉고 나는 그 마음을 자꾸 묻고 그런 게 대체 어디 있다고 우린 그렇게 어렸고 그렇게 들쑥날쑥했다     사람들은 목을 구부리고 손가락으로 화면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면서 납작한 지도 위를 잘도 걸어 다닌다 이제 기억은 골목처럼 구부러지는 게 아니라 목록처럼 길어져서 인기 많은 아빠의 가게가 있고 검색되지 않는 내가 저 밑에 있고 너는 몇 쪽쯤 찾아보다가 포기했을 것이다     ‘유명해야 유명해질 수 있다’, 영국 작가 조지 기싱의 1891년 출간 소설 ‘신 삼류문인의 거리’에 나온 말이다. 유명한 건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한번 이름나야 이름이 더 알려지고, 더 알려진 이름은 더욱더 알려지게 마련이다. 기싱 시대에도 그랬거늘 하물며 이 인터넷 시대에는 ‘아무도 간판 보고 찾아오지 않는다 지도앱을 이용하지’. 손님은 카페 간판에 담긴 업주의 마음이나 꿈 같은 건 관심 없다. 이미 ‘유명 카페’가 올라 있는 ‘지도앱’만을 신봉한다. 이렇듯 유명하다는 것은 장사에도 아주 이익이다. 그래서 정치인이나 연예인이나 음식점이나 어떻게든 인터넷 검색창에 이름 한번 올리기를 그토록 원하는 것. 외부를 향한 공적 영역뿐 아니라 마음이나 추억 등의 개인적이고 내적인 영역도 인터넷에 내준 사람들이 많다. 옛 애인이나 친구가 그리우면 이 시 3연의 화자처럼 추억의 장소를 기억 속에서 더듬거나, 실제로 찾아가 하염없이 거니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런데 ‘너’는 대뜸 검색창을 두드려보는 사람. 왜 ‘나’를 만인의 ‘근황’과 ‘소문’의 긴 목록인 검색창에서 찾는가. 그리고 뭘 잘했다고 못 찾겠노라는 메일을 보내는가. 검색창에 뜨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건가. 영혼 없이 나를 찾지 마오. 나는 2차원의 납작한 존재가 아니라오!
442    시인은 함께 하는 눈과 멀리 보는 눈이 있어야... 댓글:  조회:2315  추천:0  2017-05-04
  함께 하는 눈, 멀리 보는 눈                                        -문태준의 시들을 중심으로  1.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문태준, 「가재미」 전문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가 따스하게 읽히는 것은 가족애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 의식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머니와 같이 가난하고 하찮은 사람들의 삶을 긍정하고 포용하고 있기에 점점 개인주의, 이기주의, 물질주의가 횡행하는 이 시대를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몸 안쪽에 두 눈이 달려 있는 의 눈은 작지만 멀리까지 내다본다는 휴머니즘의 의미를 갖는다.  자본주의의 한 특성은 멀리 내다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과거의 문제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에 대해서도 기대하지 않고 현재에 보다 관심을 둔다. 자본주의는 과거에 일어난 전쟁에 대해서도 각종 사건에 대해서도 전염병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미래에 일어날 환경오염에 대해서도 인구문제에 대해서도 종교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대신 오늘, 어떻게, 최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다. 만약 주주총회에서 선임된 회사의 사장이 미래를 내다본다고 단기간 내에 이익을 남기지 않는 경영을 했다면 그 사장은 주주들로부터 당연히 해고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장은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투자보다도 현재의 이익에 지식과 정보와 전략을 투자하는 것이다.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는 자본주의의 이러한 근시안과는 대조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작품에서의 시간은 현재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까지 연결되어 있어 멀기만 한 것이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시인은 의 오솔길과 뻐꾸기 소리를, 가는 국수를 삼던 저녁을,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까지 생각하고 있다. 현재는 그 과거의 토대 위에 성립되어 있어, 는 상황이나 라는 인식이 그러하다. 이러한 시인의 눈길은 미래의 상황까지, 즉 의 상황까지 내다본다. 그리하여 라는 상황은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숙연함을 갖게 한다. 이와 같이 시인의 원시안에는 자본주의의 속도가 들어 있지 않다. 앞으로 앞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있을 뿐이다.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고 달려가는 자동차와 같은 자본주의의 속도는 없고 가난하지만 삶의 무게를 지니고 한발씩 걸어간 한 인간의 발자국이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재미」에는 인간의 유대감이 들어 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대신하는 공동체 의식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는 라는 시인의 행동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내는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의 상황에서는 한층 더 결속력과 친밀감이 느껴져 강한 휴머니즘을 갖는다.  자본주의의 근시안은 이기적인 행동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최대한 자신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 탐욕을 드러내어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추고 대출이자율을 높인다. 보다 많이 소유하고 보다 많이 이익을 내려고 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제1원칙이다. 사회적 불평등이나 부의 분배에 대한 불균형은 문제 삼지 않고 적자생존의 원칙만 내세우고 적용한다.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는 그와 같은 자본주의의 상황을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고 원시안으로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2.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가 뛰어난 점은 시 형식의 면에도 있는데, 우선 좋은 비유의 사용을 들 수 있다. 는 모습을 같다는 비유가 그 단적인 모습인데, 에 이르러서는 좋은 비유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문태준 시인이 구사하는 좋은 비유는 2003년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에서 시인 및 평론가들이 가장 좋은 작품으로 선정한 「맨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맨발」 전문  어물전에 있는 가 바깥으로 몸을 내보인 모습을 로 비유하고 있는 작품인데, 그 세계인식은 깊고도 넓다. 시인은 부처와 그의 제자 迦葉과의 깨달음을 담은 槨示雙趺를 인유한 을 비롯하여 , , , , 등의 비유를 통해 힘든 삶이지만 품고 나아가야 하는 우주 만물의 운명을 잘 그리고 있다.  비유는 상관없다고 여기거나 구별된다고 여기는 대상들로부터 유사성을 발견해내는 인식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를 배제하지 않고 포용하는 행동이다. 자신의 편리나 편견에 의해 이 세계의 대상들은 배제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해서 동일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비유는 조화의 추구이고 대립적인 대상들을 포용함이다. 따라서 비유에는 자본주의의 속도가 들어 있지 않고 대신 공동체 의식과 연대감이 들어 있는 것이다.  3.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가 형식적인 면에서 뛰어난 또 다른 점은 작품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담고 있는 詩行의 사용에 있다. 시인의 리듬인 시행이 독자의 리듬인 律行보다 길기 때문에 시는 장중하고 사색적인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동체 인식과 멀리 내다보는 눈길은 느리지만 길기만 하다. 만약 「가재미」의 시행이 지금보다 짧았다면 인간의 삶과 죽음과 그리고 그 힘든 노정에 대한 사유의 깊이는 훨씬 감소되었을 것이다.  파운드(E.Pound)가 정의했듯이 현대시는 논리시(logopoeia)의 성격을 갖는다. 논리시는 음악성을 통하여 직접 호소력을 지니는 음악시(melopoeia)와 시각적 이미지를 중시하는 회화시(phanopoeia)보다 언어의 이지적인 면을 중시한다. 고도로 전문화되고 다양하고 급변하는 이 자본주의 시대를 음악이나 시각의 차원으로 담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자세로 시의 대상들을 담아내야 하는데 작품의 주제를 살리는 시행의 사용도 그 일환이다.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는 좋은 비유와 아울러 적절한 시행의 구사로 인해 가족애를 바탕으로 한 휴머니즘을 무게 있게 담고 있다. 그리하여 이기주의와 물질주의가 만연한 이 자본주의 시대를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4.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 전문  문태준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맨발』에 수록되어 있는 시편들은 시적 자아가 이 세계와 동화(同化)되어 있다는 면에서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시적 자아가 이 세계의 대상들과 다르지 않다는 인식을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에 이어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그와 같은 인식의 표상이 "그늘"이며 "그림자"라는 점이 주목된다. 세속적인 삶을 배제한 순수 서정시나 정신주의 시와는 다르게 이 세계를 내적 체험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늘"이며 "그림자"는 "촌로"와 같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고모, 이발사며, 그들의 "주름"과 "쓸쓸함"(슬픔, 서글픔, 서러움), 그리고 "저녁(밤)"과 동일체를 이루고 있다. 선택의 거리가 발견되지 않을 만큼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늘과 그림자는 촌로며 주름살이며 쓸쓸함이며 저녁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서로 유기관계의 존재로서 서로는 서로를 낳고 서로를 돌보고 서로를 유지하는 것이다. 결국 작품들은 이 세계의 대상들을 포용해서 단순한 총합 이상의 의미를 낳는다.  위의 작품에서 시인의 관심은 일반적으로 예상하는 것인 "산수유나무가" 틔운 "노란 꽃"이 아니라 "산수유나무"의 "그늘"에 있다. 그렇지만 일방적으로 그 "그늘"의 이미지와 색감과 정감의 세계로 기울지 않고 있다. 시인은 밝음과 어둠, 하늘과 땅, 높음과 낮음, 육체와 마음, 좁음과 넓음 같은 이분법으로 산수유나무의 본령을 구분 지어 파악하지 않고 결합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라거나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라고 의인화한 것이 그 모습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산수유나무를 "그늘"과 "노란 꽃(좁쌀)"이 동일화되어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와 같은 모습은 다음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암내 난 들고양이는 우는 아가 소리를 업고 집채의 그늘을 짚으며 돌아나간다(「저녁에 대해 여럿이 말하다」)  이제서는 수령이 꽤나 되어서 깊은 그늘을 데리고 사는 감나무 터가 말하자면/아버지가 찾던 우물 자리였는데(「우물이 있던 자리」)  깊게 파인 눈두덩 같은/살구나무 그늘이며 깊은 못가를 지나갑니다/당신을 위해 상여를 멈추었다 갑니다/죽음은 달그림자가 못에 잠기는 것/젖을 듯 말 듯 산그림자 속으로 당신은 잠기어갑니다(「당신이 죽어나가는 길을 내가 떠메고」)  갈참나무의 그림자들이 비탈로 쏟아지고 있다(「그림자와 나무」)  산그림자가 서서히 따오기의 발목을 흥건하게 적시는 저녁이었습니다(「따오기」)  빛보다 그림자로 더 오래 살아온 것들이 내 눈 속에 붐벼(「반딧불이에게」)  저 멀리서 밀려오는 산그림자를 마중 나가본 지도.(「봄날 지나쳐간 산집」)  입동 지나고 차가운 물고기들은 생강처럼 매운 그림자를 끌고(「나무다리 위에서」)  못자리 무논에 산그림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물처럼/한 사람이 그리운 날 있으니(「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날」)  당신의 눈에서 눈으로 산그림자처럼 옮겨가는 슬픔들(「저물어가는 강마을에서」)  (* 밑줄은 필자가 친 것임)  들고양이가 우는 아가의 소리를 업고 집의 그늘을 짚으며 돌아나간다, 살구나무의 그늘이 눈두덩 같다, 산그림자가 서서히 따오기의 발목을 흥건하게 적시는 저녁이다, 갈참나무의 그림자가 비탈에 쏟아지고 있다, 물고기들이 생강처럼 매운 그림자를 끌고 간다 등은 시인이 이 세계의 대상들을 품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하여 『맨발』에는 촌로와 그들의 주름살이며 슬픔이며 그리움이며 그리고 어두워지는 저녁이 깊은 우물처럼 짙지만 결코 암울하거나 절망적이지 않다. 희망적이거나 역동적이지는 않지만 이 세계의 대상들과 함께하기에 따스하고 넉넉한 것이다.  5.  『맨발』에 수록되어 있는 시편들은 시적 대상들의 순간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서정시라고 볼 수 있다. 이 세계의 대상들을 서사적인 차원이 아니라 순간의 결정체(結晶體)로 품고 있는 것이다.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절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들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비가 오려 할 때」 전문  위의 작품에서 서사적인 모습은 발견하기가 어렵다. 서사를 이루기 위한 플롯도 등장인물도 드러나지 않고 "비가 오려 할 때"의 상황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순간의 정경, 순간의 인물, 순간의 행동, 순간의 정서가 도드라지는 것이다. 시인은 그 순간으로 영원함을 추구하고 있다. 시간의 가치를 연속적인 차원에 두지 않고 또한 영원이란 현재로부터 먼 거리에 있다고 여기지 않고, 찰나의 지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가 오려 할 때"의 순간들은 무게를 지닌다.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절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의 상황은 분량보다 무거운 것이다. 이는 이 세계 전체를 간파할 수 없으므로 한 순간을 최대한 품겠다는 시인의 솔직하면서도 적극적인 세계인식의 모습이다.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한 호흡이라 부르"(「한 호흡」)는 것이다.  때때로 나의 오후는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했다  간판이 지워져 간단히 역전 이발이라고만 남아 있는 곳  역이 없는데 역전 이발이라고 이발사 혼자 우겨서 부르는 곳  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 속을 긁어내는 풍경이 생각난다  마른 모래 같은 손으로 곱사등이 이발사가 내 머리통을 벅벅 긁어주는 곳  벽에 걸린 춘화를 넘보다 서로 들켜선 헤헤헤 웃는 곳  역전 이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녁빛이 살고 있고  말라가면서도 공중에 향기를 밀어넣는 한송이 꽃이 있다  그의 인생은 수초처럼 흐르는 물위에 있었으나  구정물에 담근 듯 흐린 나의 물빛을 맑게 해주는 곱사등이 이발사  「역전 이발」 전문  "역전 이발"이라는 한 공간에 시인의 많은 체험들이 축적되어 있다. 현재라는 시인의 의식 속에 수많은 과거의 체험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과거의 상황이 줄거리로써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밀도 있는 이미지로써 되살아나고 있다.  그렇지만 시인의 "역전 이발"에 대한 추억은 과거를 향한 것이 아니다. 그리움의 촉수를 그곳에 뻗는 것이 아니라 이곳의 인연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그곳의 역전 이발소와 곱사등이 이발사를 현재 의식에 담고 있어, "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 속을 긁어내는 풍경"이나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한 순간이 따스한 추억으로 빛난다. 손님과 곱사등이 이발사, 마른 모래와 한 송이 꽃, 흐린 물빛과 공중의 향기 등이 합일되어 어머니의 품속 같은 살내를 풍기는 것이다.  "나는 대청에 소 눈망울만한 알전구를 켜 어둠의 귀를 터준다"(「저녁에 대해 여럿이 말하다」),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맨발」), "매미의 뱃가죽보다 많이 주름진 그 소리들을 사랑하였다"(「가죽나무를 사랑하였다」), "작은 다리 아래서 뱀의 차가운 허물 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동천(東天」), "내 숨결이 꺼져가는 화톳불같이 아플 때/머위잎처럼 품어주던,/몸에서는 가뭄 끝 개울 물비린내 나던 고모"(「화령 고모」)와 같은 비유와 의인화되어 있는 작품들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은 성숙한 인간 정신으로 이 세계의 그늘이며 그림자를 가족처럼 고우처럼 그리고 동지처럼 품고 있는 것이다.  * 맹문재 (시인/평론가/안양대학교 교수) -------------------------------------------------------------------------------     길에 누운 화살표 ―최정례(1955∼) 네 비행기 날아가고 지금쯤 구름 속에 있겠다 바다 위에 떴겠다 드디어 땅바닥에 닿았겠다 그러나 생각 않기로 한다 대신 네 호흡인 구름에게 푸른 사과와 붉은 사과가 있다고 전한다 좌판에 푸른 사과와 붉은 사과 서로의 볼을 맞대고 있다고     내 앞에 트럭이 지나간다고 굵은 대파가 책처럼 높다랗게 쌓였고 밧줄에 묶였고 뿌리는 뿌리끼리 푸른 잎은 잎끼리 서로가 서로를 꽉 채우고 빈틈 하나 없이 저렇게 묶여 실려간다고 허공 속의 공책에 사과를 사과나무를 다 마셔버리고 싶다고 쓴다 사과나무 한 채를 다 마시고 지금쯤은 구름 속인지 바다 위인지 땅바닥인지 길바닥에 누운 화살표에게 묻는다 좌로 꺾인 하얀 화살표 따라간다고 쓴다 희망은 난폭해서 날마다 쫓기며 가보게 한다고     그 사람을 배웅하고 공항을 나온다. 집에 돌아와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면서, ‘지금 어디쯤 지나가겠지’ 마음은 내내 항로를 따라간다. 시간이 또 지나 ‘아, 지금쯤 도착했겠다’ 생각하자 그 닿을 수 없는 거리가 가슴에 사무친다. 상대에 대한 감정이 진할수록 떨어져 있는 거리가 사람을 미치게 한다. 화자는 혼자 걸으면서 휘몰아치는 별별 느낌과 생각을 비행기를 타고 떠난 그 사람, 허공에 대고 전한다. 좌판에 빨간 사과 푸른 사과가 섞여 있는 것도 ‘그런가 보다’ 하지 않고, 두 빛깔 사과가 ‘서로의 볼을 맞대고’ 있단다. 굵은 대파가 가득 실린 트럭이 지나간단다. 옴짝달싹 못하게 운명에 묶여 어디론가 실려 가는 우리 인생이다. 그러니 희망은 난폭한 것, 삶은 난폭한 것!  살다 보면 목적지를 잃고 길에 누워 있는 화살표대로 걷게 될 때가 있다. 시의 정황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잘 짜여 있다. 주체 안 되는 감정을 격정에 실어 토로하는 최정례 시의 말맛!  
441    시인은 화폭같은 이미지를 잘 구사할줄 알아야... 댓글:  조회:2701  추천:0  2017-05-02
섬세한 서정과 이미지 전 종 봉 ( 문학박사, 서일대학 부교수 )   1    문학의 위기를 말하는 이가 많다. 위기는 많은 원인을 내포하기에 나름의 진단과 처방으로 평자들 역시 분분하다. 더러는 원인을 작가들에게 찾고, 더러는 문학을 외면하는 독자들에게 돌리고, 아니면 작가와 독자를 아울러 편한 것만 찾는 가벼운 시대를 탓하기도 한다. 문학이 위기라면 시의 위기는 말할 나위 없다. 위기는 시를 찾는 이가 점점 줄어든다는 말일 것이다. 수험용 독서와 글쓰기가 아닌 시가 좋아 시집을 열독하는 문학소녀나 작가 지망생을 자처하는 문학 청년은 보기 힘들어졌다. 대학마다 문학 동아리가 명맥을 유지하나 문학적 탐구의 치열성이 약화된 느낌이다. 밀란 쿤데라가 말한 ‘속도의 엑스터시’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책읽기는 점점 부담스러운 작업이 되었다. 더구나 모호성, 다의성으로 대상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시는 즉흥적인 영상시대에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실험성을 중시하는 모더니즘을 거쳐 해체전략이 주무기인 후기모더니즘에 이르는 동안에 시는 더욱 어려워졌고 독자 대중은 한층 멀어져갔다. 위기에 처하면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있음을 역사에서 배운다. 종교의 위기가 오면 원리주의자들이 득세하고, 민족의 위기가 오면 새삼 민족의 뿌리에 눈을 돌리게 되듯, 시의 위기라면 시의 근원적 특성을 되새겨 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시의 본질적 요소에 바탕을 두며 추출해본 박강남 시인의 특성적 사항을 중심으로 시인의 시를 감상해 보고자한다.  2     상호 교감이 예술의 속성이지만, 시와 그림의 연결은 더욱 자연스럽다. 잘 그린 그림을 보면 시심이 일고, 시를 읽으면 그림이 떠오른다. 그러기에 ‘시화전’이라는 정감 있는 장르가 가능할 것이다. 박강남 시인의 시 중엔 읽으면 그림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시적 이미지에 강점을 지닌 시인임을 암시해준다. 주지하다시피 시의 근원적 특성 하나가 이미지 창출이다. “시는 그림이다”라는 말은 시에 있어서 이미지 구축작업이 시적 생명을 구성하는 요소 중의 하나임을 말한다. 선명한 이미지는 누구에게나 통하는 보편적 언어이다. 거기에 복잡한 해석이 필요 없고 구구한 주가 딸리지 않아도 된다.  박강남 시인의 시적 이미지는 다채로운 색상의 조화가 우선 두드러진다.  사랑한다는 말 소리 내어 말한 적 없어도 한 곳에 서서 푸르게 푸르게 그대 바라보다가 저 혼자 누런 잎 떨구는  소나무인 것을요. (‘아시나요’ 1연)   무언의 고백을 색감으로 잡아 풀어놓은 한 폭의 수체화이다. 푸른 색과 누런색의 대비는 탄탄한 구조를 만들어 주는 시적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화자의 섬세한 내면적 경험을 푸른색이라는 단색으로만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 풋풋한 정서가 미세한 파동을 이어가며 가녀린 마음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누런색으로 포착함으로써 견실한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푸른색과 누런색의 상징성이 첨가되어 시는 다의성이 내포된 더욱 알 찬 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기차가 들어온다는 신호등은 여름 한 낮 해로 돌아 부산해진 철도원이 긴 차단기로 건널목을 철컥 잠궈 또 다른 경계가 된 길 저편은  빠-아-앙 소리위에 한 점 섬으로 떠 있어 (‘나팔 부는 하루’ 1연)   나른한 오후 기차가 통과하는 동안 잠시 차단되는 건널목 풍경을 그대로 묘사하여 생생하게 전달해주지만 인용된 부분만 보면 정적인 사상(寫像)이다.  모더니즘의 한 부분을 장식하였던 이미지즘은 직접적인 이미지 제시로 선명한 시적 정서를 전하지만 단조로운 풍경묘사에 그칠 위험이 있다. 시를 풍요롭게 하는 상징에 바탕한 다의성 창출에 한계를 보이는 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문학사에서 이미지즘의 단명 요인 중의 하나로 지목된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다음 인용하는 후편은 이 단조로움을 깨는 한 차원 고양된 이미지이다.    초록뱀이 꼬리를 흔들며 바삐 사라지자 잠시 흐름이 멎었던 강물은 섞여지고 남은건 문명이 흩뿌리고 간 멍멍한 귀울림 뿐 나팔꽂은 그 소리를 먹고 크는지 사열 끝난 철길을 향해 모두가 나팔을 부는 하루의 정점 (‘나팔 부는 하루’ 2연)   초록뱀과 나팔꽃의 붉은 색으로 채색된 선명한 이미지가 전반의 다소 권태로운 분위기를 깨며 시적 긴장을 유발한다. 전반부의 정적인 분위기와 후반의 동적인 상황이 대조되는 구조로 상호 효과를 견인하고 있다. 섞여지는 동적 동작에 가려 선명하지는 않지만 강물 역시 맑고 푸른 색감적 이미지로 시가 더욱 생기 있게 하는 내적 구조를 만들고 있다. 나팔꽃의 붉은 색조는 무언가 경청하고 무언가 외치는 강렬함을 준다.    이러한 생동적 이미지에서 풍기는 강렬함은 시인의 시에 대한 열망으로도 볼 수도 있다. 이러한 박강남 시인의 시에 대한 집념과 열정은 여러 시에서 쉽게 감지된다.     지리산 화가의 전시회를 보고    송도 바다를 들이킨 밤    파도 소리로 추임새를 넣으며    창(唱)으로 삶을 울어예는 소리꾼과     붓만 들면 지리산을 온통    불바다로 만드는 고독한 고호와    늙어버린 시를 배고프게 줍는 나는     별빛만 축내고   달빛을 기울여 그 밤에 마신 건   송도 바다와 갈매기 소리였어   (‘밤바다에서’ 전문)   화폭 같은 이미지를 구사하는 시인과 화가의 전시회는 자연스러운 어울림으로 다가온다.  빈센트 반 고호(Gogh, Vincent Van)는 자기 응시의 작가였으며 그가 그린 많은 작품이 그의 정신적인 자화상이었다. 외부의 사물을 자신의 내부에 용해시켜 강렬한 화필로 고뇌에 찬 내면의 세계를 표출하였던 고호를 시어로 활용함으로써 시인이 추구하는 시 세계의 열망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붓만 들면 지리산을 온통 / 불바다로 만드는”에서 투사된 이미지는 고호가 그의 생애 중 가장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했던 시기에 발표한 화염과 같은 강렬한 “해바라기”를 연상시킨다. “별빛만 축내고”라는 비하적인 발언은 역설적으로 시인의 시에 대한 높은 이상을 가늠케 한다. 어두운 미완의 밤바다에서 자기 예술에 혼을 쏟았던 고호는 시인의 예술적 등대이기도 하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고층 아파트 등 뒤에서 너울너울 타오르는 불덩이를 만난다. 급히 가면 그 불덩이를 혹시 받을까 속력을 내 달려오니 연기도 피어오르지 않는데 산만 여울여울 불타고 있다 (‘일몰’ 일부)   이렇게 등장하는 불덩이의 이미지는 시인의 마음에 불타는 모닥불이 있음을 알린다. 그 모닥불의 근원이 무엇이든 시로 유입된 모닥불은 시혼으로 승화되어 간단없이 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불덩이를 피함이 아니라 달리는 자동차로 불덩이를 맞이하려는 열망을 보여준다. 그 불덩이는 고호를 불태웠던 예술혼이며 시인이 갈망하는 시혼으로 여겨도 무방한 것이다.    많은 경우 예술가의 고독은 바로 예술에의 열망, 예술혼에 사로잡힘이다. 예술혼에의 고독이 때로는 고뇌가 되고 고통이 되기도 한다.    이따금 울타리에 가두십니다. 그 울타리에 기쁘게 들어 앉아 소나무가 되어 별빛 달빛을 받습니다. 중략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바라지 않는다 하여 정-말 원하는 게 없는 것은 아니어요.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당신의 맑은 물살이 되어 흐르는 것입니다. (‘섬’ 일부)   섬으로 상징된 시인의 고독과 바람이 형상화 되어있다. 시인의 숙명인 고독에 침참하여 순응한 듯하지만 강한 바람이 있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바라는 ‘맑은 물살,’ 그것은 예술적으로 승화된 흐름이다. 이러한 흐름은 모든 예술가의 보편적 희구이며 예술적 고독의 지향점이다. 3      박강남 시인의 또 다른 시적 특성 중의 하나는 섬세한 서정성이다. 단시에 있어서 서정성의 확보 역시 시를 읽을만한 시로 만드는 본질적 요소이다.  ‘낭만적 서정성’이라는 용어는 본래 개인적 경험과 감정에 크게 의존한 듯이 보이는 위고(Hugo), 라마르틴느(Lamartine), 뮈세(Musset), 드비니(de Vigny)등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서정시에서 유래되었다. 극히 주관적인 시의 특성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된 말이다. 따라서 개인적 서정을 잘못 다루면 감정 과잉 노출이나 거북한 사적 정서의 남용이라는 부작용이 우려된다. “시는 개성으로부터 도피”라고 한 엘리어트의 명제는 낭만적 서정성의 이러한 부적 기능을 염두에 둔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 정서나 감정을 어떻게 시적으로 변용시키느냐가 시인의 역량이며 시적 상상력의 역할이다.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시에 있어서 서정성은 중요하기에 개인적 정서를 다루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작업이다. 적절히 절제되고 시적 변용에 성공한 개인적 정서는 독자의 정서를 자극하여 공감으로 이끈다. 바람벽에 걸어 두면 마르는 줄 알았더니 물기 촉촉 흐르는 채 바라보고 있는 시선 (‘그리움 쫓아내기’ 일부) 일상으로 경험하는 그리움을 쏟아 붇지 않고 정제하여 시의 그릇에 담아낸 구절이다. “바람벽‘과 물기, ”마름과 촉촉“이 주는 대조효과는 절제된 그리움의 크기를 가늠케 해준다. 바람길인 토담집 모퉁이에 엮어 걸어 놓은 푸성귀가 연상되는 1행과 2행은 그리움을 이겨내고자 하는 화자의 마음이다. 모진 다짐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푸성귀는 걸어 놓으면 바람이 지나며 바짝 건조되지만 그리움은 시들지 않은 배춧잎 그대로임을 3행과 4행에서 담담히 보여주고 있다.  등불을 내 걸어야겠다 온 밤을 걸어올 그가 길을 잃고 방황하지 않도록 잠들지 말고 지구의 이쪽 끝에서도 불을 밝혀야겠다. (‘나를 부른다’ 3연) 앞서 인용한 ‘그리움 쫓아내기’와는 달리 강한 그리움을 서술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단조로운 감상에 빠질 염려가 많은 서술적 진술을 적절한 통제와 효과적인 시어 선택을 통하여 시적 진술로 성공하고 있다. ‘등불’의 따스한 이미지와 아늑함 그리고 막막한 어둠 속에서 등대와 같은 방향성은 그리움이라는 모티브에 적합한 시어로 볼 수 있다. 희구하며 깨어있는 경야(經夜), 비난수로 밤을 세는 여인의 이미지로 중첩되어 간절함이 배인 시가 되었다.    여기서 시인이 갈망하는 그리움의 정체는 시적 호기심을 자아내는 요소이다. 시인이 염두에 둔 그리움이 무엇이든 독자는 시를 통하여 그리움을 독자 나름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시는 좋은 시다. 사막을 걷다가도 타닥타닥 장작 타는 난로를 빙 둘러 앉으면 사람과 사람사이 온기 흐르고 군고구마 꺼내 놓듯 곰삭은 이야기 접시에 수북이 담아내고 (‘산이 웃고 바람이 달려오고’ 1연) ‘사막’과 ‘난로’라는 역설 속에 시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사막은 불타는 곳이지만 생명의 온기가 없는 곳이다. 메마른 인간 세상은 삶의 경쟁으로 불타는 사막이다. 인간미 흐르는 사람 찾아보기 힘든 사막이다. 거기에 난로가 필요하다. 사람이 모여드는 난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난로, 난로 주위의 군고구마는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든 집어들 수 있는 공유물이 된다. 난로의 온기는 모여든 모든 이에게 방사된다. 그곳은 나눔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런 곳에 이야기가 꽃피우게 된다. 현대인의 사막은 대화의 단절에 있다. 사라져 버린 이야기의 세계, 그것은 상실된 과거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근원회귀의 여망이다. 4   시에 대한 열정이 시를 향한 출발이라면, 시적 기교는 시를 산출하는 구체적 도구이다. 박강남 시인의 시에 대한 열정과, 시의 근원적 요소인 견실한 이미지 창출력은 그 양자를 겸비한 시인임을 보여준다. 모던풍의 감각은 물론, 복고풍의 전통적 정서에 이르기까지 시의 바탕이 되는 섬세하고 풍부한 서정성은 박강남 시인의 또 다른 강점이다. “새는 노래로 씨를 뿌리고(4월 봄산)”라고 시인이 말한 바와 같이 부단히 씨를 뿌리고 거두는 농부 같은 시인임을 믿는다.    -------------------------------------------------------------------------------------       풍선  ―황학주(1954∼)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날이 있다 아이에게 풍선을 불어 묶어주려다 갑자기 바람구멍이 열리자 풍선이 갯벌 위로 끌려 날아간다 무슨 말을 저리 온몸으로 하나싶어 문득 소름 돋는다 간간이 대화를 하며 뭔가 부풀리다 열려버리는 바람구멍 묵은 굴레를 하나도 풀지 못한 채 입김처럼 그것이 사라지는 날이 있다 그 사이 나는 얼음장처럼 얼다 녹는다 색색의 풍선이 떠있는 바다 또 하나 풍선이 터지면 부끄러운 입술 하나가 다물어지는 걸까 풍선 속에 하나 둘씩 별을 묶던 여기, 마음은 그때 가난한 밤을 위한 묵념으로 흐른다     말이 나를 끌고 멋대로 날아가도 기절할 정도로 좋았던 시절은 이미 끝난 지 오래인데 아직도 풍선을 불고 있는 슬픈 입술     입으로 부는 풍선과 입으로 떠드는 말을 병치시켰다. 풍선을 입술로 살짝 물고 양손 엄지와 검지로 살포시 누른 채 후후! 바람을 불어 넣어 부풀린다. 언제까지 풍선을 불까. 거죽이 팽팽해지도록 최대한 크게 부풀리고 싶지만 한계를 넘으면 빵 터진다. 풍선을 부는 아빠나 보는 아이나 조마조마하다. 드디어 풍선을 다 불어 주둥이를 묶으려는 순간, 아이가 손뼉을 치며 기뻐하려는 순간, 풍선을 놓친다. 로켓처럼 발사돼 갯벌에 떨어져서 푸르릉푸르릉 제풀에 끌려가는 풍선. ‘무슨 말을 저리 온몸으로 하나!’  바닷가에서 아이에게 풍선을 불어주다 놓친 경험을 모티브로 자기성찰을 보여주는 시다. 떠드는 즐거움에 취해 말에 이끌려서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살아왔던가. 말이 많다 보니 지나치게 부풀리다 묶는 걸 놓친 적도 있었지. 말이 다른 데로 새어버렸지. 애먼 데로 튄 말, 핀트가 안 맞는 말에 어색하게 얼어붙었지. 아, 허풍선이! 입김처럼 사라져버린 말, 말, 말들! ‘풍선 속에 하나 둘씩 별을 묶던’, 말 한 마디 한 마디, 시 한 구절 한 구절에 진실과 아름다움을 새겨 넣던 시절도 있었건만. 겉만 번드르르한 말, 기교만 승한 시! 바다 위에 내가 불어버린 색색 풍선들이 떠다니는구나.  
440    시는 짧은 속에서 시인의 시력과 시야가 압축되여 있어야... 댓글:  조회:2358  추천:0  2017-05-01
1. 글쓰기는 말걸기이다(듣기가 읽기인 것처럼)  누구에겐가 말을 건다는 것은 첫 마디를 던진다는 것이다. 처음 몇 마디가 뒤엉켜 버리면 끝장이다. 내 후배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이 말을 꺼내는 친구가 있다. “저어, 있잖아요, 제가, 며칠 전부터 생각한 것인데요, 선배에게도 전에 한 번 말씀을 드린 사항인데……” 그래서 그 후배가 다가오면 나는 이렇게 쐐기부터 박는다. “너, 결론부터 말해.”  글도 마찬가지다. 모든 글쓰기는 첫 문장 쓰기이다. 나는 후배 기자들에게, 기사의 첫 문장은 ‘호객 행위’라고 말한다. 단편소설은 물론이고, 영화나 드라마, 다큐멘터리 필름도 도입부를 매우 중시한다. 리모콘이 등장한 이후, 텔레비전 프로그램, CF 제작자들은 강박증이 생겼다. 첫 장면에 승부를 걸어라. 처음 몇 초 안에, 시청자를 붙잡지 못하면, 채널을 바꾸기 때문이다. 모든 글은 첫 문장이다! 이 지면을 통해, 글 잘 쓰는 비결을 하나 공개한다. 내가 잘 아는(이름 석 자 가운데 한 자만 대도 독자들 대부분이 알 수 있는) 시인은 시를 한 편 완성하고 나면, 첫 문장을 백 번 이상 소리내어 읽는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다시 읽어 본다. 첫 문장이 흡족해야 시를 발표하는 것이다. 거듭 반복한다. 첫 문장에 목숨을 어떨지 몰라도 ‘나’는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쓰기)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의 시(쓰기)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절실한 것이며, 절실하기 때문에 생명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문창과 학생들,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도 시(쓰기)가 자신에게 왜 필요한 것인지 명쾌하게 정돈하지 못하고 있었다. 열에 일고여덟은 ‘나 자신과 대화하기 위해서’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가까운 이들과 좋은 느낌을 공유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시를 쓰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답한 학생은 거의 없었다. 상대적으로 글쓰기와는 무관한 젊은이들에게 두 번째 질문(꿈이 있다면, 그걸 한 문장으로 말해 보라)을 던졌다가 낭패를 당한 적이 있다. 출판사에 다니는 젊은 편집자들과 술을 마시다가 꿈을 물어 보았더니, 몇몇은 당혹스러워했고, 몇몇은 ‘있는데 말할 수 없다’고 했으며, 한둘은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했다고 여기는 기색이었다. 한 문장으로 만들 수 없는 꿈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내 지론을 강요했다간 싸움이 날 판이었다. 나는 ‘우리는 꿈꾼 것만을 이룰 수 있다’는 무하마드 유누스(〈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의 저자. 방글라데시의 대안 운동가)의 잠언을 들려 주고 싶었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시는 왜 필요한가? 나는 ‘마지막 개인’으로서의 나를 확인하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 시(쓰기)가 필요하다. 시(쓰기)를 벗어나는 순간, 나는 단독자가 아니다. 완전한 포로다. 나는 이 거대 도시가 요구하는 온갖 제도와 가치로부터 이탈해 자립, 자존, 자족할 수 없다. 나는 이 반인간적인 문명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말해 늘 깨어 있기 위해 시(쓰기)를 필요로 한다. 시를 쓰는 순간, 시를 읽고 시를 생각하는 시간만큼, 나는 이 우주 안에서 자립, 자존, 자족할 수 있는 것이다. 악기이기를 지향하면서도 나의 시는 아직, 수시로 무기이다(이외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지만 지면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내가 바라마지 않는, 한 문장의 꿈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쁘게 가난을 선택할 수 있게 하소서’이다. 산업 문명으로부터 완벽하게 이탈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도시에서 스스로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는 ‘기생의 존재’가 도시를 떠나 흙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생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쌀 한 톨을 일궈내는 데도 삼라만상이 참여해야 한다). 야생조차도 인간 문명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과학적 보고서가 있는 터에, 함부로 도시의 바깥을 상정하는 것도 유아적으로 보인다. 시를 통해 자기 삶과 존재를 확인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동시에, 도시적 삶의 그늘로부터 한 뼘씩이나마 벗어나고 싶은 독자가 ‘아직도’ 있다면, 감히 한 권의 책을 권한다. 나탈리 골드버그가 쓴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권진욱 옮김, 한문화). 이 책을 한 번 읽어 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면, 당신은 이미 이전의 당신이 아니다. 미국의 글쓰기 지도 전문가인 나탈리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권하고 있다. ‘여러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꿈에 대해서 5분 동안 써 보십시오’.  2. 문제는 감각이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축구 경기를 보다 보면, 간혹 ‘감각적인 플레이’라는 멘트가 나온다.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선수’라는 표현도 자주 접한다. 최상의 기량이라는 찬사다. 지난 해 6월, 월드컵 축구대회 대 폴란드 전에서 황선홍 선수가 이을용 선수의 패스를 받아 성공시킨 골 같은 경우 말이다. 황선홍은 골대를 보지 않고 슛을 날렸다.  스포츠에서는 ‘감각적’이라는 수사가 극찬이지만, 시에서는 그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 시에서 감각적이라는 평가 앞에는 대개 ‘지나치게’라는 부사가 붙는다. 감각이 승한 시는 깊이가 없다는 전통적인 잣대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같은 ‘비평’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나치면 그르치는 것이 어디 감각뿐이랴. 상상력에서부터 이미지, 리듬, 관념어, 주제의식 등 시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 가운데 지나침이 허용되는 것은 없다. 나는 감각적인 시를 옹호하는 편이다. 감각없는 축구 선수가 드리블이 좋지 않듯이, 감각적 형상화가 서툰 시는 생생하지 않다. 감각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가벼운 감각이 가벼울 따름이다. 감각에는 깊이가 없다는 지적도 마찬가지다. 감각은 몸과 마음의 경계이다. 감각은 자아와 타자 사이에 있는 가교이다. 시인은 감각을 통해 (자아를 포함한) 세계와 만나고, 독자는 감각을 통해 시와 교감한다.  실존은 감각의 실존이다. 감각의 실존 가운데 가장 앞서 가 있거나 높이 있는 것, 그러니까 감각의 극단이 시이다(‘잠수함 속의 토끼’라는 비유가 있다). 감각의 제국 안에서 제왕은 단연 시각이다. 인간이 외부 세계를 인지할 때 사용하는 감각은 시각이 대부분이다(80퍼센트).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간다(혹은 비켜선다). 보통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쓰기는 단순한 보기(見)가 아니라 꿰뚫어보기(觀)이다. “북쪽은 고향/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다시 풀릴 때/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마음은 눈 감을 줄 모른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시인 이용악(1914-1971)의 초기 시 〈북쪽〉 전문이다. 시 속에서 국경 근처 고향을 그리워하는, 국경 너머 팔려간 여인을 염려하는 시인의 눈은 마음의 눈이다. 그 마음의 눈은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는 지경까지 꿰뚫어보는 놀라운 시력을 가지고 있다. 시인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이처럼 언제나 깨어 있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존재다. 그러나 시각이 감각의 전부는 아니다. 시각은 오히려 흘러넘치고 있다. 이용악 시대의 시각과 21세기 후기 산업 시대의 시각은 크게 달라져 있다. 시각은 대량 소비 시대, 대중 문화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혹사당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광고와 매체를 통해 인간의 눈을 포섭해, 인간을 소비자로 전락시키고 있다. ‘시각 패권주의’ 시대이다. 시는 시각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이제 시는 저 왜곡돼 있는 시각과 맞서 싸워야 한다. 소비자의 눈을 인간의 눈으로 돌려 놓아야 한다. 주로 시각에 의한, 시각을 위한 인지와 소통은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배제하거나 왜곡한다. 시각 과잉은 인간을 인간 자신과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정현종의 시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던, 그리하여 그 섬에 가고 싶어하던 시대는 행복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인터넷과 휴대 전화가 있는 이 시대에 인간을 시각 과잉으로부터 ‘구원’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가, 시각 패권주의에 희생당하고 있는 나머지 다른 감각을 복원하는 것이다.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들은 시각이 활동하지 않을 때에라야 활발해진다. 깊은 어둠 속에 누워 있어 보라, 얼마나 많은 소리가 들리는가. 제대로 맛을 낸 음식을 음미하는 미식가의 얼굴을 보라, 미식가는 눈을 감고 ‘음~’하는 탄성을 내지른다. 손가락도 촉감에 충실하고자 할 때는 지그시 눈을 감는다. 최근 젊은 시인들이 발표하는 시들에는 소리와 향기가 자주 등장한다. 나는 이 같은 변화를 시각 패권주의에 대한 시의 저항이라고 이해하고자 한다. 차창룡 시인이 최근에 펴낸 시집 〈나무 물고기〉에는 ‘똥은 꽃처럼 향기로워’(〈트리베니 가트에서 누는 똥〉)라는 놀라운 대목이 나온다.  이 시는 꽃을 똥의 차원으로 추락시킨다. (아름다운) 꽃이 상승이라면 (추한) 똥은 하강의 이미지인데, 이 상승과 하강을 똥의 형상(하강하면서도 결국은 상승을 의미하는 생김새)으로 일치시켰다가, 급기야 똥의 냄새를 꽃의 향기로 격상시킨다. 아, 얼마나 통쾌한가. 시각 패권주의의 대표적인 아이콘인 꽃에서 똥의 향기를 ‘맡는’ 시인의 감각이라니. 황선홍의 월드컵 첫 골에 못지 않은 ‘감각적인 시’이다.  3 . 짧은 글을 읽어라 봄이여 눈을 감아라/ 꽃보다/ 우울한 것은 없다 전문 여기저기서 보내오는 시집이 많다. 내가 가만히 앉아서 시집을 받아 볼 높은 위치에 있다는 소리가 아니다. 시사주간지에서 오랫동안 문학 담당 기자를 했기 때문에 출판사에서 ‘보도 자료’로 보내오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다 동료, 선후배 시인들이 ‘부채의식’ 때문에 보내는 시집들도 제법 있다. 시인들은 시집 받는 것을 ‘빚’으로 여긴다. 그래서 새 시집을 펴낸 시인들은 그동안 시집을 보내온 시인들의 명단을 놓고 한 나절 넘게 주소를 쓴다. 그동안 밀린 ‘시집 빚’을 갚는 것이다.  보름달은 어둠을 깨울 수 있지만 초승달은 어둠의 벗이 되어 줍니다. < 달처럼> 전문 우편으로 시집을 많이 받다 보니, 몇 가지 요령이 생겼다. 출판사와 시집 장정을 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시집 맨 처음에 실린 시를 먼저 보게 된다. 그러고 나서 시집 맨 뒤에 자리잡고 있는 시를 본다. 그 다음에 눈여겨보는 시가 짧은 시들이다. 시집 맨 처음과 맨 나중에 위치하는 시에 신경을 쓰지 않는 시인은 거의 없다. 첫번째 실린 시는 시집 전체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고(서시 분위기가 많이 난다), 마지막 시는 이른바 ‘앞으로의 계획’쯤에 해당한다. 이렇게 두 편의 시를 읽고 나서, 짧은 시들을 골라 읽는다. 그러니까 서너 편 정도 일별하면 시집의 높낮이를 웬만큼 측정할 수 있다. 왜 짧은 시인가? 짧은 시 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짧은 시에는 시인의 시력과 시야가 압축되어 있다. 사물과 사태, 삶과 세계의 핵심을 치고 들어가는 직관력은 물론이고 직관한 내용을 최소한의 어휘로 형상화하는 솜씨. 장악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파스칼이었던가? ‘시간이 없어서 짧게 쓰지 못했다’라고 말한 이가. 흔히 장시를 쓰는 데 시간과 공력이 많이 들어가는 줄 알고 있는데, 모든 장시가 그런 것은 아니다. 서너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를 쓰는 데 평생이 걸리기도 한다(일본의 전통적인 정형시 하이쿠를 쓰는 시인들은 수도승 못지 않은 삶을 살았다. 두 행짜리 하이쿠를 쓰기 위해 엄격한 규율을 지켰다. 4행짜리 게송을 읊은 선승들은 또 어떻고). ‘봄이여 눈을 감아라/꽃보다/우울한 것은 없다.’() ‘보름달은/어둠을 깨울 수 있지만/초승달은 어둠의 벗이 되어 줍니다.’() 두 편 다 3행으로 이루어진 지극히 짧은 시이다. 앞의 것은 김초혜 시인이 계간 2002년 겨울호에 발표한 작품이고, 뒤의 것은 최종수 시인의 첫시집 에 실린 시이다. 짧은 시는 비수라기보다는 번개에 가깝다. 하지만 사람들은 번개와 천둥이라고 하지 않고, 천둥과 번개라고 말한다. 번개와 천둥은 사실 동시에 발생하는데, 빛보다는 소리를 더 두려워하는 모양이다. 짧은 시는 번개다. 번갯불에 벼락을 맞기도 하지만, 한참 뒤에야 세상을 뒤흔드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 병상일기 5>를 보자. 봄은 꽃의 계절인데, 봄으로 하여금 꽃을 보지 말라고 한다. 생명의 한 절정인 꽃에서 ‘우울’을 보았기 때문이다. 절정인 꽃은 곧 시들게 마련. 만개한 꽃 속에서 꽃의 죽음을 본 것이다. 짧은 시는 이처럼 우리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온갖 고정관념(선입견)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의식을 뒤흔드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꽃, 기쁨)에서 죽음(우울)을 발견하는 눈! 시의 위력은 그 눈에서 나온다.  < 달처럼>은 또 어떤가. 달을 빛의 양(동그란 정도)으로만 규정하고, 어둠을 빛으로 물리쳐야 할 악으로만 이해해 오던 우리에게 시인은 아주 새로운 견해를 제출한다. 어둠을 깨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어둠과 함께 하는 벗 또한 절실하다는 것이다. 이 순간 어둠은 빛의 반대 진영에 있는 악이 아니라, 빛과 더불어 존재하는 동반자로 거듭난다. 어둠의 입장이 되어 보자. 자신에게 위압적인 큰 빛(보름달)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작은 빛(초승달)이 훨씬 더 애틋하지 않을까. 보름달이 혁명이라면 초승달은 연민(공감)의, 혹은 연대의 은유이리라. 짧은 시를 많이 읽자. 짧은 시는 서너 번 읽으면 외어진다. 그렇게 외운 시는 삶의 여러 국면, 구체적인 삶의 문제와 접점을 가지면, 시의 의미가 부풀어오른다. 이룰 수 없는 사랑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친구가 있다면 ‘꽃보다 우울한 것은 없다’라고 말해 보라. 큰 것, 힘센 것만을 추구하는 선배가 있다면 어둠과 벗이 되어 주는 초승달 이야기를 꺼내 보라. 좋은 시는 짧은 시이고, 짧은 시는 우리들 구체적인 삶의 안쪽에 들어와 있다.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 이메일을 띄울 때, 외우고 있는 짧은 시를 전송해 보자. 보내는 이나 받는 이의 일상 속에서 아름다운 스파크가 일어날 것이다.  4. 은유, 그 아슬아슬한 거리 지중해가 맑은 이유가 그 청년 때문인 것 같았다. 몇 년 전,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보고 나왔을 때, 주인공 마리오에 대한 기억이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말라터진 바게뜨 빵을 연상시켰던 마리오는 너무 섬약하고 또 너무 순수했다. 그가 지중해의 청정함을 지키는 정수기처럼 보였다. 마리오가, 잠시 섬에 체류하게 된 세계적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전속 우체부’가 되면서 시인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네루다를 영웅화했다면, 네루다가 떠난 이후,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보낸 별이 반짝이는 소리까지 담은 ‘녹음 편지’는 전통적인 시(활자)의 시대를 마감하는 징후로 보였다. 시위 현장에서 마리오가 스러져가는 장면은, 네루다 혹은 시의 시대에 대한 비판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래 전에 본 영화여서 몇몇 장면만 남아 있다. 그 중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네루다가 거두절미하고 ‘메타포’라고 답하는 대목이다. 메타포, 은유. 그렇다. 은유가 시의 전부는 아니지만, 은유를 빼 놓고서는 시를 쓸 수도, 읽어내기도 쉽지가 않다. 은유는 시와 시쓰기, 시읽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동력(전달 장치)이다. 직유를 거쳐 은유를 웬만큼 구사/해독할 수 있다면, 그는 괜찮은 시인/독자이다. 직유는 주종 관계이다. ‘그는 바람처럼 달렸다’라고 쓸 때(결코 좋은 비유라고는 할 수 없지만), 바람은 그가 달리는 상태를 구체화하는 보조 역할에 머문다. 하지만 ‘비가 쇠못처럼 내렸다’라는 표현에서는 약간 달라진다. ‘그’와 ‘바람’ 사이도 그렇게 가까운 것은 아니지만, ‘비’와 ‘쇠못’ 사이처럼 스파크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비와 쇠못 사이는 매우 먼 거리다. 일상적 차원에서 비와 쇠못은 거의 무관한 관계이다.  ‘비둘기는 평화다’와 같은 상징은 아예 주종 관계에서 종이 사라진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으로 쓰이는 순간, 비둘기 고유의 정체성은 지워져 버린다. 상징은 상징에 동원되는 수단을 지워 버리는, 매우 폭력적인 비유법이다.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으로 내세울 때, 비둘기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 상징이 종교와 신화 분야에서 자주 사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징은 권력의 도구이다. 직유에서 주종 관계가 희박해질 때, 나는 그것이 바로 은유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직유가 술어(동사)를 거부할 때, 예컨대 ‘비가 쇠못처럼 달렸다’가 아니고, ‘비는 쇠못이다’로 변화할 때, 직유는 은유로 한 차원 승격한다. 그래서 나는 비유법을 자주 은유법이라고 이해한다.  ‘그대는 꽃이다’라고 쓸 때, 그대는 꽃을 지배하려 들지 않는다. 그대가 꽃을, 또는 꽃이 그대를 없애려고 하지도 않는다. 은유의 차원에서 그대와 꽃은 그대도 아니고, 꽃도 아닌 전혀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은유의 위력이다. 내가 지지하는 은유는 다원주의에 바탕한 은유이다. 즉 하나의 절대적 중심을 인정하지 않는 대신, 모든 존재와 의미가 각자 하나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은유이다. 직유가 수직의 상상력이라면, 은유는 수평의 상상력이다. 직유(혹은 상징)가 과거의 세계관이라면, 은유는 미래의 세계관이다. 공존, 상생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직유도 그렇지만 은유의 생명력은 비유되는 두 이미지 사이의 거리에서 나온다. 앞에서 예로 든 문장을 다시 불러와 보자. ‘그는 바람처럼 달렸다’ 혹은 ‘그는 바람이다’라고 했을 때, ‘그’의 이미지가 선명해지지 않는 것은 바람이 갖고 있는 모호성 때문이다. 여기서 바람은 주어를 도와 주지도 못하고 동사에 기여하지도 못한다. 참신하거나 구체적이지 않은 직유는 구사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 상투성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비가 쇠못처럼 내렸다’ 혹은 ‘비는 쇠못이었다’라는 표현이 위의 경우보다 조금 산뜻한 까닭은 쇠못이 갖고 있는 구체성 덕분이다. 은유를 ‘A는 B이다’라고 흔히 말하는데, A와 B의 사이가 너무 가까울 때 상투성으로 전락하고, A와 B 사이가 너무 멀면 난해함으로 빠진다.  네루다와 마리오 사이의 대화를 흉내낸다면, 시란 저 A와 B 사이의 아슬아슬한 긴장이다. 그리고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저 A와 B를 결합시키는 비결은 (전에도 말했지만) 평소의 관찰력과 상상력에서 나온다. A와 B를 난데없이 연결시켜 강한 스파크를 일으키는 직관력은 갑자기 나오지 않는다. 관찰과 상상의 누적이 없다면 은유의 직관은 불가능하다. 사족 같은데, 한 마디만 덧붙여야겠다(은유를 말하고 있으니까).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풍선에 바늘을 찔러야, 풍선은 강렬하게 터진다.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풍선, 그것이 관찰과 상상의 상태이다. 그것이 깨어 있는 정신이다. 그렇게 깨어 있다면, 바늘(직관)은 얼마든지 있다. 불지 않은 풍선은 풍선이 아니다. 탄생 이전이거나 죽음 이후다.  [이문재시인]  『시사저널』편집위원. 시운동으로 등단.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 줄 때』『산책시편』『마음의 오지』등이 있다 -----------------------------------------------------------------------------------     선물 ―정다혜(1955∼ ) 갱년기 우울증으로 한동안 소식 끊겼던 친구, 갑자기 수다쟁이가 되어 첫눈처럼 찾아왔지 뭐예요. 깍쟁이 그 친구 갈빗집에서 밥까지 샀어요. 그 이유가 궁금한데도 그냥 싱글벙글 했지요. 무슨 이유가 있는지 무슨 비법이 있는지 따지듯이 묻자 마지못해 입을 열듯 선물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친구. 그 선물이 커다란 다이아몬드인지 값이 오른 부동산인지 몰라 궁금증이 들끓는데, 그 뜨거움 단숨에 식히는 친구의 고백. 열흘 전에 첫 손자를 선물 받았어! 사람의 상처는 사람으로 치료된다는 것을 예순에 손자를 선물 받고 할머니란 이름을 선물 받고 단숨에 알아버렸다는 친구.  ‘갱년기 우울증’은 호르몬 영향이라지만 하루하루 허덕이며 먹고사는 처지에서는 그걸 앓고 있을 여유가 없다. 갱년기 우울증이 뭔지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그마한 복일 테다. 화자의 친구는 부동산이 좀 있는 사람, 보석 사치도 누릴 만하게 산다. 노후 생활에 아무 걱정 없으니 오직 속절없이 나이 든 것만이 안타까울 뿐. 삶을 즐길 의욕에 차 있는 젊은 날에는 경제력이 없고, 경제력이 있는 노년에는 즐길 거리도, 의욕도 줄어드는 게 인생이어라.  ‘갱년기 우울증으로 한동안 소식 끊겼던 친구, 갑자기 수다쟁이가 되어 첫눈처럼 찾아왔다’고 한다. 현실 감각 있고 생활력 강했던 친구의 돌연한 변화에 걱정하던 차, 그 친구의 활기찬 모습에 화자는 ‘첫눈’처럼 반갑고 덩달아 마음이 환해졌단다. 친구는 웃음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그 ‘깍쟁이’가 ‘갈빗집에서 밥까지 샀다’니 더 좋아진 게다. 그 심각했던 우울증을 이리 날려 보낸 비결이 뭘까? 평소 친구의 성향으로 넘겨짚어 본 화자의 의표를 찌르는 답, 첫 손자의 탄생! 생의 일선에서 물러나는 건 힘들지만 삼선이 되면 차라리 초연해지는 건가. 모든 게 허망하고 시들해지는 갱년기 고개에 3세의 탄생이 ‘영차!’ 힘을 실어줄 수도 있겠다. 화자의 친구는 ‘할머니’로서의 삶을 새로이 펼치리라. 남자들은 ‘은퇴한 뒤의 삶’이 막막하기 쉽지만 여자의 삶에 은퇴란 없다. 예순 살일 화자의 것으로는 시의 어조가 참으로 발랄하다. 여자들은 예순이건 일흔이건 오랜 친구끼리 “어머, 얘는!” 하며 산다네.  
439    시인은 언어란 이 괴물을 쉽게 휘여잡을줄 알아야... 댓글:  조회:2408  추천:0  2017-05-01
시인에게 기교는 무엇인가 - 이창배  워즈워스가 장황하게 시인론을 펴면서도 시의 기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그가 시는 일상인의 일상어로 써야 한다든지, 조작된 장식어를 쓰지 말 것 등을 주장했겠지만 그렇게 주장한 본뜻은 "시는 힘찬 감정의 자연스런 표출"이어야 하지 인위적으로 조작해서는 안 된다는 감정 우위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기교를 경시하고 감정을 쏟아내는 데 주력하는 경우와 기교에 주력하는 경우는 시론상의 차이 이상으로 작시과정에서는 시의 성패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 대체로 고전주의 시학쪽으로 기울어진 현대시학에서는 시인을 제작자(maker)로, 그리고 시를 제품(art)으로 본다. 그래서 시를 기교(형식)의 산물로 본다. 특히 포스트모던 시학에서는 텍스트를 벗어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의미'는 텍스트에서의 언어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본다. 똑같은 소재를 갖고서도 좋은 항아리를 빚어내는 도공과 그렇지 못한 경우는 그 도공의 솜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시인이 표현하고 싶은 것, 그것을 느낌이라고 해도 좋고, 아픔이라고 해도 좋고, 실상(리얼리티)이라고 해도 좋고, 주제라고 해도 좋다. 그 '주제'는 언어 이전의 추상, 즉 없음의 상태이다. 시의 출발을 감정이라고 한다면 그 감정은 모양도 이름도 없는 구름 같은 것이다. 그것이 언어를 갖게 되므로써 비로소 모양을 갖추고 생명을 얻게 된다. 주제에 생명을 부여하는 데 쓰이는 언어를 주무르는 시인의 솜씨를 기교라고 한다. 시인은 이때 주제와 언어와의 타협점을 찾고자 괴로운 '시의 병'을 앓게 된다. 그 주제를 감정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감정과 이성의 싸움이고, 또한 그것은 로고스(의미)를 로고스(언어)로 포촉하는 싸움이다. 시인은 말을 고르고 행을 바꾸는 하나하나의 과정에서 '주제'의 눈치를 살피고 그 간섭과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다.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는 막연한 존재이지만, 시인을 붙잡고 괴롭히는 주제는 쉽게 언어로 휘어잡을 수 없는 괴물이다. 이 괴물이 공룡처럼 가공할 만한 존재일 수도 있지만, 시인에 따라서는 생쥐 정도의 경미한 존재일 수도 있다. 대시인과 이류시인의 차이는 일차적으로 시인이 도전하는 대상이 공룡이냐 생쥐냐의 차이에서 결정되고, 이차적으로는 그 대상과의 싸움이 성공하여 잘 연주되는 멜로디처럼 화음의 선율을 들려주느냐에 달려 있다. 엘리엇은 주제와 언어와의 관계에 언급하여 "낡은 방법에 의한 우회적인 공부는 항상 말과 의미와의 견딜 수 없는 싸움"을 자아낼 뿐이라고 말한 일이 있고, 그보다 앞서 그 양자의 조화롭지 못한 경우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말이  의미의 짐을 싣고 긴장할 때면 터지고, 때로는 깨어지며  부정확할 때엔 벗어나고, 미끄러지고, 소멸하고 썩는다.  결국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고요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비명의 목소리,  힐책, 조롱의 목소리, 또는 단순히 지껄이는 목소리는  항상 말을 공격한다.  -[번트 노튼] 중에서  엘리엇은 특히 표현과 내용의 조화로운 상태를 강조하여 그 경지를 '고요'라 했다. 그는 그것을 선의 경지와 같은 예술의 극치로 생각했다. 그는 시에서 말이 내용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빈약한 내용에 말만 잘 다듬어진 기교주의 시를 이류시로 생각했다.  기교파 시인이라고 불리우는 시인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지용이 그 대표적이고 영국과 미국에서는 17세기의 소위 왕당파 시인이라고 불리우는 로버트 해릭, 에즈먼드 윌러 등, 그리고 20세기 초의 조지왕조파 시인들, 그리고 에즈라 파운드 등 寫像派 시인들이 그에 속한다. 이들 시인의 시는 대체로 일상 사물이나 사소한 체험을 정확하고 기발한 비유로 형상화하는 데 그쳤을 뿐, 시인의 감정의 심도와 강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다음에 정지용의 시 한 편과 같은 계열의 시인 김광균의 시 한 편을 인용해 본다.  포탄으로 뚫은 듯 동그란 船窓으로  눈썹까지 부풀어오른 水平이 보이고,  하늘이 함폭 나려앉아  크낙한 암탉처럼 품고 있다.  투명한 魚族이 행렬하는 위치에  흔하게 차지한 나의 자리여  망토 깃에 솟은 귀는 소랏속같이  소란한 무인도의 魚笛을 불고-  해협 오전 2시의 고독은 오롯한 圓光을 쓰다.  서러울 리 없는 눈물을 소녀처럼 짓자.  나의 청춘은 나의 조국!  다음 날 항구의 개인 날씨여  항해는 정히 연애처럼 비등하고  이제 어드메를 달밤의 태양이 피어오른다.  - [해협] 전문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갈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연기를 내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半圓을 긋고 잠기어간다.  -[秋日抒情] 전문  정지용의 [해협]은 (어쩌면 판부연락석을 타고 일본으로 가는) 기선의 선창으로 내다본 해협의 인상을 그려낸 풍경화이다. 주로 직유로 단편적인 이미지들을 나열한 이 시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하늘이...... 크낙한 암탉처럼 품고 있다"든지, "귀는 소랏 속같이 / 소란한 무인도의 어적을 불고"와 같은 기발한 비유들이라 할 수 있고, 가을날의 시골 풍경을 그려낸 김광균이 시의 수법과 유사하다. 1910년대의 영국에서 한창이던 이미지스트 시풍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이 시편들은 서정시라기보다는 즉물시, 혹은 서경시라 할 수 있어서 마치 투명유리를 통해서 보는 수묵화 같기도 하고 먹물로 찍어낸 탁본글씨 같기도 하여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고 시인의 생명력이 전달되지 않는다. 이 시편들에 대하여 시인 서정주는 이 '기발한 비유'들이 마치 "졸부네 따님 금은보석으로 울긋불긋 장식하고 나오"는 것 같아서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나는 [花蛇]와 한 무렵에 쓰여진 일군의 시들을 쓸 때에 내가 탈각하려고 애쓴 것은 정지용의 형용수사적 장식적 시어조직에 의한 심미가치 형성의 지양에 있었다. 내 이때의 기호로는 졸부네 따님, 금은보석으로 울긋불긋 장식하고 나오는 듯하는 그따위 장식적 심미는 비위에 맞지 않을 뿐더러, 이미 치렁치렁 거북스럽고 시대에도 뒤떨어져 보여, 그리 말고 장식하지 않은 純裸의 미의 형성을 노렸던 것이다. ......무엇처럼 무엇처럼 등의 형용사구 부사구의 효력으로 시를 장식하는 데 더 많이 골몰하는 것들은 인생의 진수와는 너무 멀리 있는 것으로 내게 보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30년대의 정지용, 김광균 등 시인들은 1910년대 영국의 이미지스트 시인들의 영향을 받은 시인들로서 그들은 시에서 감정을 배제한 고담한 시를 쓰고자 노력한 시인들이다. 그들은 소위 일컫는 모더니즘 시운동의 선언문을 통하여 시인은 이미지를 통하여 말할 것이며, 그 이미지는 견고하고 (hard and dry), 정확하고(exact), 구체적(concrete)이어야 할 것이지, 정서적이고 추상적이고 막연해서는 안 된다고, 이전의 감상적이고, 상징적인 시의 기법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나, 영국에 있어서나 모더니즘 시대의 기교 위주의 이미지스트 시인들은 비록 그들의 시가 크게 감동을 주지는 못했지만 낭만주의 시대의 축축하고 불확실하고 막연한 감정의 시를 초극하는 단계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438    시인은 고독한 원을 긋으며 도망친다... 댓글:  조회:2396  추천:0  2017-05-01
8月       박항식         봉선화 고 빨강 꽃 속에 8月이 들어 있다.   콩콩 찧어 물들이면 빨강 8月이 손톱에 옮아 온다.   눈동자 푸른 바닷가에서 빨강 모자를 쓰고 웃는 少女―   ―손톱이 자라면 차츰 8月이 밀려 가겠지만   나직한 歲月을 등에 지고 기대어 생각노라면   해가 갈수록 짙어지는 기억 속으로 손톱을 물들이며 빨강 8月이 온다.                   한국시단의 모더니즘 운동의 선구적 이미지스트 ― 박항식의 재조명       이 선(시인)     1. 서론     한국 시단의 모더니즘 운동의 대표적인 유미주의적 이미지스트는 정지용과 김광균이다. 그런데 한국시단에 알려지지 않은 이미지스트 시인으로 동시대를 살다 간, 남원 출신의 박항식 시인이 있다.   「8월」은 박항식의 대표적 이미지 시로서, 김광균의 「추일서정」이나 정지용의 「유리창」과 대비될 작품이다. 박항식의 시를 중앙문단에 소개하면서, 박항식의 이미지 시의 특징을 김광균, 정지용 시와 대조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2. 김광균의 이미지 시의 구조   김광균의 시 「추일서정」은 도회적 감각과 서구적 세련미가 있다. 「설야(雪夜)」, 「와사등(瓦斯燈)」, 「외인촌(外人村)」, 「데생」 등의 작품에서도 선명한 이미지 시로서의 고른 작품성을 보여준다.   1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2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3 도룬 시의 가을을 생각게 한다. 4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5 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6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7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8 포플라나무의 근골 사이로 9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10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11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12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13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14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15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 쪽에 16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김광균, 「추일서정」 전문   「추일서정」은 ‘낙엽’을 중심으로 한, ‘추락 이미지’와 ‘소멸 이미지’, ‘하강 이미지’를 각 시행 전체에서 골고루 보여준다. ‘낙엽이 떨어진다’라는 단순한 명제에서 시는 출발한다. 각 행들은 낙엽의 ‘하강 이미지’ ‘소멸 이미지’ ‘추락 이미지’의 동사와 형용사를 사용하고 있다. 는 표현을 눈여겨보자. 모두 낙엽의 ‘사라진다’는 ‘소멸 이미지’와 ‘추락 이미지’ ‘하강 이미지’를 가진 용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 각 시행의 명사나 주어들은 어떤 이미지 역할을 할까?  는 표현을 눈여겨 보자. 모두 낙엽의 ‘소멸 이미지’를 가진 단어와 표현이다. ‘떨어진다’는 낙엽의 이미지에서 파생된 이미지를 담고 있다. 각 행마다 철저히 계산된 낙엽과 치환되는 단어, ‘소멸 이미지’와 ‘하강 이미지’의 사물을 다양하고 적절하게 배치하였다. 각각의 사물들은 포물선을 그리며 사라진다. 낙엽의 ‘날아간다’와 ‘떨어진다’와 ‘사라진다’는 이미지를 차용한 이러한 표현은 정지된 시에 운동감을 준다. 시를 흔들어 주며 정서를 환기시킨다. 낙엽의 ‘소멸 이미지’와 ‘하강 이미지’를 표현하는 문장들은 어떤 표현이 있을까?  부분을 눈여겨 보자. 각 문장들은 다른 사물을 차용하였지만, ‘사라진다’ ‘풀어진다’ ‘나부낀다’ ‘기울어진다’ ‘잠긴다’는 ‘소멸 이미지’ ‘하강 이미지’의 동사를 내포하고 있다. ‘낙엽’의‘떨어진다’는 이미지를 붙잡고 여러 형태의 공감각적 이미지의 합일을 보여준다. 6, 9, 11행  부분은 현대문명에 대한 반항과 부정, ‘소멸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아이러닉하게도 ‘연기, 지붕, 구름’의 연상 이미지는 ‘둥둥 뜬다’라는 ‘상승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시에 ‘운동감’을 주며 시를 처지지 않게 받쳐준다. 그러나 12-14행  에서는 다시 부정적 추락과 쇠락의 ’하강 이미지‘로 변환하고 있다. 5, 7, 11, 16행  부분에서도 ‘하강 이미지’가 있다. 무거운 주제를 감각적으로 가볍게 그림을 그리듯 가볍게 터치하고 있다. 다양한 은유는 내용과 주제의식, 시대 상황까지 유의미한 진정성을 심어준다. 시는 역사와 사람을 대변한다. 욕구불만시대의 지성은 나라를 잃고 좌절하였다. 해방을 맞았지만, 남북분단과 강대국의 지배라는 혼란에 휩싸인다. 시인의 박제된 지성과 역사의식, 문명에 대한 불안감이 잘 표출된 작품이다.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 라는 표현은 절박하고 급박한 실존적 반항과 행동주의가 투영되어 있다. 김광균은 「추일서정」 에서 교과서적 표현주의 이미지 문학의 외형적 완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지는 가볍다, ‘단어 합성’의 기술이라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시다, 위의 시는 현란한 기교주의, 표현주의 시의 감각적 미의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3. 정지용의 이미지 시의 구조   정지용의 「유리창」은 또 다른 독특한 이미지와 심상을 보여준다.   1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2 열 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3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4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5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6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7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8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9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10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 정지용, 「유리창」 전문   정지용의 대표시 「유리창」은 김광균의 「추일서정」이나, 박항식의 「8月」과는 다른 이미지의 시다. 1행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객관적 상관물을 차용한 화자의 심상이 압축된 객관화가 완성된 표현이다. ‘유리’라는 사물에 화자의 마음을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라고 담아놓았다. 3행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나, 5~6행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부분의 선명한 이미지를 주목하여 보자. 「유리창」은 고요한 서정이 내밀하게 압축되어 있다. 7-8행  부분의 내면적 고요의 관조적 심상에 집중하여 보자. 승화된 슬픔이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정지용의 「유리창」은 기교가 찬란한 이미지 시가 아니다. 모든 이미지와 수사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시의 기조는 조용하고 단정하다. 아니, 억압이 느껴질 정도로 정숙하다. 냉철한 이성이 폭발적 슬픔을 억압한다. 절제의 미학이다. 그래서 더욱 절절하다. 이 시는 사물인 ‘유리창’과 사물의 마음인 화자가 ‘산새가 되어 날아간, 너’에게 내밀하게 ‘말 걸기’를 한다. ‘너’에게 속삭이는 심상의 편지다. 화자의 독백적 고백록이다. 이미지 시지만, 언어유희라고 느껴지는 구절이 없다. 각각의 시행은 ‘슬프다’ ‘외롭다’ 라는 단어를 관통한다. 시와 시인이 먼저 감상에 빠지면 안 된다. 감정의 절제를 보여주어야 한다. 「유리창」은 심상의 진정성이, 독자를 압도하여 공감을 이끌어낸다. 정지용은 찬란한 슬픔을 완성하는 마력의 이미지스트다.       4. 박항식의 이미지 시의 구조   (1) 박항식 소개   박항식 시인은 1917~1989년까지 생존한 남원 출신 시인으로 한국적 정한을 이미지로 선명하게 표현한 시인이다. 1949년 한성일보 신춘문예 시 『눈』 당선,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文藏臺』 당선. 1946년 시집 『白沙場』(1946, 삼덕문화사), 1959년 시집 『流域』(삼덕문화사), 1976년 시조집 『老姑壇』, 1981년 시집 『方壺山 구룸』을 발간하였으며, 원광대에서 시인을 양성한 교육자다.   박항식의 대표시 「8월」은 김광균과 정지용의 이미지 시와 어떻게 다를까? 어떤 구조적 차이와 내용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을까?   「8월」은 전통적 이미지 시의 전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시의 효과는 위에 소개한 김광균, 정지용의 시와 전혀 다르다. 그 이유는 첫째, 민족적 정한의 상징인 ‘봉선화’를 제재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표현주의는 관념을 배제하며 유미주의를 지향한다. 이미지 시의 문제점은 화려한 기교주의로 인한 내용과 주제의 결핍인데 그 문제점을 박항식 시는 거뜬히 해결하였다. ‘봉선화’는 가장 한국적 정한의 ‘집단무의식’을 대표한다. 한국적 집단무의식은 참고 견디는 인고다. 봉선화는 일제 강점기에 애국가처럼 불렸다. 무언의 항변이며 데모였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구슬프게 부를수록 효과적이다. 시골 어느 집에서나 흔히 보는 봉선화, 화려하고 아름다운 봉선화, 낙화가 더 아름다운 봉선화, 손톱에 꽃물을 들여 겨울까지 견디는 봉선화. 봉선화는 민족의 눈물이요, 카타르시스다. 봉선화는 한국인의 정서적, 정신적 지주였다. 시골마을의 상징이면서― 서울로 시집간 순이, 서울로 돈 벌러 공장에 간 순이, 서울 술집에 팔려간 순이를 상징한다. 또한 아직도 그리운 고향, 어머니, 장독대의 상징이다. 둘째, 위의 시의 완성도는 제목 때문이다. 「8월」은 시간 이미지를 내포한 현대적 감각의 초현실주의적 제목이다. 아마도 시창작 초보자라면 위 시의 제목을 「봉선화」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시가 제한적이며 한계성을 갖게 된다. 「8월」이라는 제목은 시원하다. 여유와 유연함이 있는 확장된 제목이다.   (2) 「8월」의 이미지 구조   그러면 「8월」 시가 갖는 구조적 매력은 무엇일까? 아래 세 가지 측면으로 분류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가) ‘색채 이미지- 빨강’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8월은 선명한 ‘빨강색 이미지’다. 빨강 모자를 쓴 소녀는 곧 봉선화다. 선명한 ‘빨강 이미지’다. 위의 시는 봉선화를 소재로 빨강이라는 ‘색채 이미지’로 「8월」을 구조화하고 있다. 1   나) 「8월」이 상징하는, ‘시간 이미지’   위의 시에서 모든 연들은 제목 「8월」에 연결되어 있다. 시간이라는 관점으로 각 연이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연― 봉선화 고 빨강 꽃 속에/ 8月이 들어 있다.(시간) 2연― 8月이 손톱에 옮아 온다.(시간) 3연― 눈동자 푸른 바닷가에서(장소인 동시에, 시간― 계절을 명시함) 빨강 모자를 쓰고 웃는 少女(봉선화 이미지) 4연― 손톱이 자라면 차츰/ 8月이 밀려 가겠지만(시간) 5연― 세월을 등에 지고 기대어/ 생각노라면(시간의 경과) 6연― 해가 갈수록 짙어지는 기억 속으로/ 손톱을 물들이며 빨강 8月이 온다. (과거의 현재화, 지난 기억을 현재의 시간으로 소환.)   다) 봉선화- 사물의 관점과 시점에서 본 시의 이미지 구조   「8월」은 사물시로서, 사물의 관점과 시점에서 씌어졌다. 1연: 봉선화― 빨강꽃― 8월(사물의 관점, 사물적 시점) 2연: 봉선화 물들임― 빨강― 8월― 손톱(봉선화 물들이기, 손톱도 사물임. 사실적 사물의 관점과 시점) 3연: 바닷가(시간, 계절)― 빨강모자(봉선화 치환은유)― 소녀(봉선화 이미지)(봉선화의 사물의 관점) 4연: 손톱― 8월(시간의 경과, 사실적 사물의 관점) 5연: 세월(인간의 관점과 시점) 6연: 1행 기억(화자, 또는 시인의 시간적 시점, 인간의 관점) 2행 손톱물― 빨강― 8월(제목과 연결시킴, 봉선화의 사물적 관점과 시점)   위의 시는 사물시로서 사물의 관점에서 씌어졌다. 그러나 2연, 4연, 5연에서 보여주는 ‘세월’ ‘기억’ 등의 단어들은 숨은 인간 화자의 목소리가 엿보인다.   (3) 박항식이 중앙문단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그런데 왜 「8月」과 같은 우수한 이미지 시를 쓴 박항식 시인은 중앙문단에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필자는 아래와 같이 몇 가지 관점에서 유추해 보았다. 첫째, 지방시인의 한계성. 중앙문단 진출이 막힘. 학연, 지연, 거리, 발표지면 등. 둘째, 장르적 분산. 교육자, 저자, 시인, 시조시인, 동시작가 등 지필활동이 분산됨. 셋째, 홍보 부족. 서울에서 시집을 출판하지 않고 활동하지 않아서 중앙문단이 모름. 넷째, 평론가와 제자들이 부각시키지 않음. 다섯째, 노년기, 시인 후반기에 시집을 내지 않음.   (4) 박항식의 기타 이미지 시   박항식의 아래 시를 소개하는 이유는, 위의 모든 조건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음을 밝혀 둔다. 아래의 이미지즘 시들은 박항식 시의 경계가 다양함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시가 쉽게 독자와 친교할 수 있는 시 세계를 가지고 있음을 밝혀둔다.     靑山을 사랑에 눈 뜨게 한 도라지꽃 피었네 청산을 半만 취하게 한 한들한들 도라지꽃 피었네   淸明한 가을날 풀 푸른 내 故鄕 뒷山에 이쁜 固執으로 도라지꽃 피었네 ― 박항식, 「도라지꽃」 전문 * 청산을 반만 취하게 한 → 의인화 * 이쁜 고집으로 도라지꽃 피었네 → 의인화 「도라지꽃」은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단 7행의 짧은 시가 갖는 매력은 김소월의 「산유화」에 비교할 수 있다. 정답고 친절하며 사유적이다. 특히 밑줄 친 부분은 압권이다.  인간과 산, 도라지가 한 공간에서 포옹하고 호흡하는 시다. 「동그라미」처럼 노래로 만들어 불러도 좋은 이쁜 시다.     마음이 서러우면 쏟아지는 눈물 알알이 이슬져 영롱하구나   하늘은 언제나 쪽빛이어도 푸른 잎 푸른 恨을 연상 지녀서…   무성한 구름이 지나가는 날에는 길 잃은 새들이 여기 모여서 가지각색 이야기를 조잘대었다. ― 박항식, 「앵두」 전문 * 쏟아지는 눈물/ 알알이 이슬져 영롱하구나 → 앵두의 시각 이미지 * 무성한 구름이 지나가는 날에는 → 시각적 이미지 「앵두」처럼 그의 시는 달콤하다. 인간과 자연을 품어주는 따뜻함이 묻어난다. 동시를 쓰는 시인의 맑고 순수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바다는 사과처럼 둥그러운 껍데기에 싸여 있습니다 (중략) 사과를 먹은 사람은 그 향기에 볼이 붉어지고 바다를 가는 사람은 그 물감에 눈이 파알해집니다   바다! 바다는 사철 사과처럼 행그럽습니다 ― 박항식, 「바다」에서 * 향기에 볼이 붉어지고 → 후각 이미지를 시각 이미지화 * 물감에 눈이 파알해집니다 → 시각 이미지, 색채 이미지 「바다」는 권태응의 동시 「감자꽃」과 비교되는 시다. 같은 발상에서 시작한 시지만, 내용의 질량이 다르다. 박항식의 「바다」는 동그라미에서 이끌어낸 사유와 철학이 있다. 시의 향기가 시간을 넘어 코끝에 맡아진다. 세상을 위로하는 착한 시다.     해는 西으로 기울어 琉璃窓마다 칸칸이 곱게 크레용을 발라 놓고 ― 박항식, 「송학초등학교 일요일 오후」에서 * 크레용을 발라놓고 → 색채 이미지 곱디 고운 초등학교 교실의 어린이들 모습이 상상되는 색채 이미지 시다.     초록 치마를 입고 섰는 少女 덧없이 흐르는 歲月이지만 빠알간 리본 하나로 푸른 하늘을 온통 꾸미고 섰다. ― 박항식, 「코스모스」에서 * 빠알간 리본 → 색채 이미지 * 하늘을 꾸미고 섰다 → 역발상 역발상 시의 진수다. ‘소녀가 하늘을 꾸미고 섰다’는 새로운 표현은, 거시적 색채 이미지의 진수를 맛보게 한다.   발랑 발랑 발랑 발랑…… 조랑 조랑 조랑 조랑…… ― 박항식, 「포플라·Ⅰ」 * 발랑 발랑 발랑 발랑/ 조랑 조랑 조랑 조랑 → 시각 이미지/ 운동감 양면이 다른 미루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팔랑이는 모습을, 이토록 귀엽고 명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발랑 발랑, 조랑 조랑 귀여운 의태어가 압권이다.     베짜는 소리 한창 들려 오는 날   나무는 고깔을 쓰고 합창을 했다. ― 박항식, 「살구꽃」 * 합창 → ‘살구꽃’의 청각 이미지 살구꽃길을 걸어본 사람은 안다, 그 진한 향기와 팝콘처럼 닥지닥지 붙은 하얀꽃을. 꽃들이 합창을 한다면, 온 동네에 향기가 진동할 것이다.     항상 끄트머리로부터 처음이 온다는 號外의 방울소리 ― 「아침」 * 방울소리 → ‘아침’의 청각 이미지 사유가 있는 한 문장의 짧은 시로 처음부터 창작하였으면 한다. 이 한 문장으로 완성된 시다. 아침의 청각 이미지가 청량하다.     5. 결론   「8月」과 함께 한국의 중앙문단에 알려지지 않은 박항식의 이미지 시 몇 편을 소개하였다. 또한 과거의 작품을 통한 현재적 관점에서, 박항식 시인의 위치와 문학적 가치를 평가하여 보았다. 박항식 시의 한국적 서정이 잘 전달되었기를 바란다. 김광균, 정지용과 함께 박항식을 새로운 이미지스트 시인으로 인정하는, 문학적 재평가의 장이 열리기를 바란다.    
437    시란 잘 고양된 수학이다... 댓글:  조회:2954  추천:0  2017-05-01
  현 영민(문학박사, 충남대 영문과 교수)   I. 서  론   미국 모더니스트 시는 1910년을 전후하여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가 관여한 이미지즘 시 이론에 의해 시작되었다. 1946년 9월호의 "시"(Poetry: A Magazine of Verse)에 기고한 T. S. 엘리엇(T. S. Eliot, 1888-1965)의 평론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에 따르면, 20세기 첫 14년간 미국 시문학계는 침체기에 빠져 “완전한 공백 상태”였다. 이 때 파운드가 “이런 상황을 파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가 나아갈 방향을 알고” 시의 형식과 시의 언어에 대한 일대 변혁을 시도했다. 다행히도 파운드는 시를 하나의 예술, 그것도 “상당히 의식적인 예술”로 파악한 독창적인 비평가였다(17, 21, 24, 20). 엘리엇은 이보다 7년 후인 1953년 6월 9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워싱턴 대학에서 행한 「미국 문학과 미국 언어」(“American Literature and the American Language”)라는 강연에서 미국의 현대시가 1910년을 전후하여 시작되었다고 주장했으며(To Criticize the Critic 58), 1954년 "에즈라 파운드의 문학 평론"(Literary Essays of Ezra Pound)에 붙인 서문에서 “20세기 시의 혁명은 어느 누구보다도 파운드의 시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LE xi). 이와 같은 엘리엇의 주장은 1910년경 출현한 파운드의 이미지즘 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엘리엇의 평가대로 파운드는 “자신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게/죽은 시의 예술을 부활시키고/옛 의미에서의 ‘숭고함’을 유지하기 위한” 과거의 모방 기법을 버리고, 이미지즘 시 운동을 통해 새로운 시의 방향을 제시했던 것이다(SP 61). 파운드의 이미지즘 시 이론이 주창된 이래 이 이론에 대한 논의는 많았으나, 이 이론이 일상 언어를 시어로 써야 한다는 파운드의 주장과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느냐에 주목한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여기서는 파운드의 시어 개념에 주목하면서 그의 이미지즘 시 이론을 논의하게 될 것이다. 파운드의 이미지즘의 기원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지만, 프랑스 상징주의가 이미지즘 출현과 관련이 깊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파운드는 상징주의자들의 상징은 산수에서 말하는 아라비아 숫자처럼 “고정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이미지스트들의 이미지는 대수에서 말하는 기호처럼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논하면서 이미지즘과 상징주의가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다(Gaudier-Brzeska 84). 그러나 그는 당시의 이미지즘 시운동에 대해 언급하면서 “영시의 역사는 프랑스 사람들로부터 성공적으로 훔쳐 낸 역사”라고 지적함으로써 이미지즘과 상징주의의 상관관계가 긴밀했음을 부인하지는 않았다(Wellek, 5: 154에서 재인용). 상징주의 기법이 레미 드 구르몽(Rémy de Gourmont, 1858-1915)을 거쳐 T. E. 흄(T. E. Hulme, 1883-1917)에게 전달되면서 이미지 기법으로 재현되었고, 흄의 이미지 시 기법이 파운드의 이미지즘의 모태가 되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상징주의가 이미지즘 시학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 셈이지만, 프랑스의 상징주의가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의 시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휘트먼이야말로 파운드의 이미지즘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II. 파운드 시학의 기초가 된 흄의 이미지 이론   케임브리지 대학 시절 말다툼에 휘말려 1904년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런던에서 얼마간 지내던 흄은 캐나다, 브뤼셀 등지에서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다가 1908년 영국으로 돌아와 헨리 심프슨(Henry Simpson), 헨리 뉴볼트(Henry Newbolt) 등과 함께 소위 “시인 클럽”을 만들어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인 클럽 회원들은 주로 수요일 저녁에 만나 저녁 식사를 같이 하며 자신들의 시를 낭송도하고 서로의 작품에 대해 토론도 하는 동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흄은 이 시인 클럽 회원들의 시가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진부하다는 F. S. 플린트의 공격이 A. R. 오레이쥐(A. R. Orage)의 편집으로 출간되고 있던 주간지 "신시대"(The New Age)의 1909년 2월호에 실리자 이 공격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이 시인 클럽과 결별하고 같은 해 3월 25일 플린트를 비롯하여 엣워드 스토러(Edward Storer), F. W. 탠크렛(F. W. Tancred) 등과 함께 새로운 시인 클럽을 만들었다. 이 새로운 시인 클럽 회원들은 런던 소호(Soho)의 한 식당에 모여 식사를 하며 히브리 성경에 사용된 시 형식,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일본 하이꾸(haiku) 시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미지 기법과 간결하고 정확한 시어, 자유시 형식 등에 대해 토론하였는데, 이 시인 클럽에 파운드가 회원으로 참여하게 되고 소위 이미지즘이라는 시 운동이 여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흄의 이미지 시 기법은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철학적 미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거의 확실하다. 1910년경부터 차츰 시에서 철학과 미술로 관심을 돌린 흄은 1911년 4월 볼로냐(Bologna)에서 개최된 철학 학회에 참석하여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논하는 이미지 개념에 이끌리게 된다. 귀국하여 그는 베르그송의 철학적 이미지 미학을 4월 27일자의 "신시대"에 소개하고 그 해 11월 23일과 12월 14일 사이에는 베르그송의 미학에 대한 일련의 강의를 하였다. 파운드가 이 강연을 경청하고 후일 이미지즘 시학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흄이 바로 파운드의 이미지 미학에 철학적 기초를 제공해 준 장본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Stock 133-134). 흄은 1912년 여름에 행한 「시에 나타난 새로운 예술 철학」(“The New Philosophy of Art as Illustrated in Poetry”)에 대한 강연과 1913년에 행한 베르그송에 대한 일련의 강연, 그리고 1914년에 있었던 현대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일련의 강연을 통해 고전주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구체화시켰다. 또한 그는 1912년 독일로 건너가 9개월 간 머물며 독일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하고 런던으로 돌아와 베르그송의 "형이상학 입문"(Introduction to Metaphysics)을 번역하여 1913년에 출판했다. 「시간과 자유의지」(“Time and Free Will”)에서 시인을 “감정을 이미지로 바꾸어 놓는 자”라고 했던 베르그송의 정의에 따라(Coffman 56에서 재인용), 흄은 「현대시에 대한 강연」(“Lecture on Modern Poetry”)에서 시인을 정의하여 자신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킨 자연 풍경에서 얻은 “어떤 이미지들”을 별개의 시행에 병치시킴으로써 자신의 느낌을 “환기시키는” 자라고 했다(Coffman 56에서 재인용). 흄의 평론 「베르그송의 예술 이론」(“Bergson’s Theory of Art”)은 그의 이미지 미학이 베르그송에게서 왔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베르그송의 예술 이론」에 따르면, 베르그송에게 “실제”는 “지성으로 포착할 수 없는 요소들의 도도한 흐름”이며, 예술은 “실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해주는” 매개물이다. “인간의 지각은 어떤 선을 따라 굳어져 버리기 때문에 사물을 보는 어떤 고정된 습관, 어떤 고정된 방법”이 형성된다. 따라서 “우리는 외적 대상과 우리의 내적 상태를 지각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지각할 수 없다.” 우리 인간의 깊은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어떤 음악,” 즉 “생명의 리듬”이 흘러나오지만, 우리는 그것을 듣지 못한다. 인간의 지각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속에 있는 모든 말도 처음엔 살아 있는 은유로 시작되지만 거기서 모든 시각적 의미가 서서히 사라져 버리고 일종의 통속어가 되고 만다.” 그러나 “창조적인 예술가”는 겉을 둘러싸고 있는 흐름의 베일을 뚫고 “내적 흐름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 그가 고정시킬 새로운 모양의 것을 가지고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새로운 은유”이며, 이 은유가 바로 “사물을 도식화된 형태로 표현하는” 인습화된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 인간의 “미적 정서”를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이미지”인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새로운 은유일지라도 그것들은 일단 사용되고 나면 곧 신선한 의미, 즉 “시각적 의미”를 상실하고 “일종의 통속어”로 전락하고 만다. 따라서 시인은 “자기를 억압하고 있는 언어와 일반적인 지각의 힘을 벗어 던지고” 계속하여 사물의 내적 생명을 드러낼 ‘새로운 은유’를 찾아내어 “단지 언어 속에 형상화되어 축적된 형상만 보는”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사물의 그 내적 생명의 미묘한 움직임은 물론 그 물질적 세계의 형태, 소리 그리고 색을 본래의 순수한 상태대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관찰한 사물이나 느낀 감정을 감각적․시각적 이미지로 전달하는 시는, 대수학에서의 기호처럼 도식화된 표준적인 형태만을 사용하여 “어떠한 이미지”도 제시하지 않는 산문과 다르다. 이런 신념에서 베르그송은 예술은 “특수한 것으로 보편적인 것을 보여 주는 것”이며, 예술가는 “사물을 본래의 모습 그대로 볼 수 있는 자”라고 정의했다. 흄은 이 베르그송의 예술론이 예술을 “무한을 유한으로 계시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로센스타인(William Rothenstein)의 견해와 예술을 “의지로부터 해방되는 순간 이데아를 순수하게 관조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주장과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지적했다(Speculations 143-169). 이와 같은 베르그송의 미학에 기초한 흄의 이미지즘은 주로 이미지의 시각적 요소를 중시하고 있지만, 코프만(Stanley Coffman)은 마이클 로버츠(Michael Roberts)의 견해에 따라 흄이 시에서 운율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통적인 운율보다는 자유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72). 흄의 이미지즘 기법은 베르그송에서 얻어온 것이지만, 이미지즘의 사상은 그가 프랑스의 조르즈 소렐(George Sorel), 샤를르 모라스(Charles Maurras) 등의 고전주의 개념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소렐의 고전주의 개념이 잘 표명된 "폭력에 대한 재고"(Reflections on Violence)가 그의 번역에 의해 1916년에 출판되었으며, 그 전해인 1915년 10월 14일자의 "신시대"에 이 번역에 붙일 그의   「번역자의 서문」이 발표되었다. 이 서문에서 그는 소렐의 고전주의 개념이 “인간은 천성이 나쁘거나 아니면 한계를 지닌” 존재라고 믿는 “원죄” 개념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했다(Speculations 256). 그리고 그는 그 해 12월 9일부터 1916년 2월 10일까지 소렐과 모라스로부터 터득한 이와 같은 종교적 고전주의에 대한 평론들을 「T. E. H.에 의한 노트북」(“A Notebook by T. E. H.”)이라는 제목으로 "신시대"에 연재했는데, 그의 "고찰: 휴머니즘과 예술철학에 대한 평론"(Speculations: Essays on Humanism and the Philosophy of Art)에 수록된 「인본주의와 종교적 태도」(“Humanism and the Religious Attitude”)는 이 글들을 모은 것이다. 이 평론에 따르면, 절대자인 신만이 완전하고 “인간은 원죄를 타고난” 불완전한 존재로서 “저주받은 창조물에 불과하다.” 그런데, 인본주의는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혼동하고 그것들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인간의 완전성을 주장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훈련에 의해서만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을 뿐이며,” 또한 “인간은 때로 완전에 참여하는 행위를 할 수는 있지만, 결코 완전해 질 수 없다. 그러므로 질서는 단순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며, 제도 또한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흄은 인간이 완전하다는 개념에 기초하여 “개성을 신뢰하는” 잘못된 인본주의를 거부하고 “원죄의 교리”에 기초한 기독교의 비인간적인 “종교적 태도가 옳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 터무니없는 개성이라는 것”을 신봉하는 인본주의가 만들어 낸 예술이 그리스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이며,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절대신 앞에 엄숙하게 무릎을 꿇는 종교적 태도가 만들어낸 것이 이집트와 인도와 비잔틴 시대에 출현한 모나고 딱딱하며 건조한 예술이라고 결론지었다(Speculations 3-71).  「인본주의와 종교적 태도」라는 평론이 인본주의적 태도와 종교적 태도의 차이점에 기초하여 역사적 관점에서 각기 다른 형태의 예술의 출현을 조명한 것이라면, 「낭만주의와 고전주의」(“Romanticism and Classicism”)는 이 두 태도가 낭만주의와 고전주의 문학의 출현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지를 밝힌 평론이다. 이 평론에서 흄은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의 개념이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논지를 명쾌하게 하기 위해 그 정의를 아주 단순화시켰다. 그에 따르면, 낭만주의는 인간은 천성이 선하기 때문에 사회의 “악법과 인습”을 제거하면 “그의 무한한 가능성”이 발휘되며 사회도 진보하게 된다는 루소(Rousseau)의 인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하나의 저수지,” 즉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한 수원지”라고 보는 루소의 견해를 따르는 인본주의자를 낭만주의자라고 불렀다. 낭만주의자는 인간을 신이라고 생각하여 신을 믿지 않으며, 또한 하늘 나라의 천국 대신에 이 지상의 천국을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흄은 낭만주의를 “분열된 종교”라고 불렀다. 이런 낭만주의적 인본주의 견해가 인간의 원천적 타락을 설파하는 종교적 신념에 의해 억압당한 결과로 고전주의가 생겨났다고 흄은 보았다. 플로렌스(Florence)의 사보나롤라(Savonarola), 제네바의 칼뱅(Calvin), 17세기의 영국 청교도들처럼, 인간은 “그 천성이 절대적으로 불변하는, 특이하리 만치 고정되어 있고 한정되어 있는 동물”이며, 인간이 얼마간의 품위를 지니려면 “오로지 전통과 조직에 의해” 훈련받아야 한다는 종교적 태도를 가지는 사람을 흄은 고전주의자라고 불렀다. 흄은 이와 같은 고전주의적 견해가 “조그마한 변이들이 축적되어 새로운 종이 생겨났다”는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의 등장으로 잠시 흔들렸으나, “각각의 새로운 종은 짧은 걸음들이 축적되어 서서히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스포츠인 한번의 도약으로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며, 일단 생겨나면 절대 고정인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는 드 브리스(De Vries)의 돌연변이설에 힘입어 오늘날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고 주장했다(Speculations 113-140).   이와 같은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의 개념에 기초하여 흄은 자신의 미학 이론을 전개했다. 흄은 “아름다움의 개념”에 대한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의 해석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다. 낭만주의자는 인간의 신성을 신뢰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무한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만, 고전주의자는 인간의 한계성을 믿기 때문에 “작고 건조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낭만주의 시인은 시에서 “비상의 은유들”을 사용하지만, 고전주의 시인은 “결코 한계성을 잊지 않고 . . . 언제나 한계의 개념에 충실하며” 또한 “지상과 얽혀 있음을 명심하고, 뛰어오르더라도 언제나 되돌아오며, 결코 에워싼 공기 속으로 날아가 버리지 않는다.” 흄이 옹호하는 고전주의 문학은 “어떤 표준적인 고정된 양식에의 순응”을 지향하며, 고전주의 시인은 “자신이 보는 것을, 그것이 어떤 사물이든, 마음 속에 있는 어떤 생각이든 간에,” 잘 통제된 시각적이고 구체적인 언어로 “정확한 곡선”을 정밀하게 그려내려고 한다. 고전주의자에게 시란 시인이 느끼는 순간적인 인상을 “물질적인,” 즉 “시각적인” 이미지로 간결하고 정확하게 표현해 낸 것이며, “시에서의 이미지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직관적인 언어의 정수 그 자체다”(Speculations 120-135). 흄의 “이미지” 시는 단어의 모자이크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에, 과거의 전통적인 시의 규칙적인 운율은 무시되고 자유로운 운율이 허용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흄은 시를 청각적인 “음악”보다는 시각적인 “조각”에 근접시키려 했다. 「현대 예술과 그 철학」(“Modern Art and Its Philosophy”)이라는 평론에서 보듯이, 그가 주장하는 “새로운 예술”은 “살아 있는 유기체적인” 것이 아니라, “기하학적인” 것이다. 그는 예술을 크게 두 가지 양식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인본주의가 지배했던 그리스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한 유기체적 예술 양식이며, 다른 하나는 고대 이집트와 비잔틴 시대의 종교적 태도가 낳은 기하학적 예술 양식이다. 그리스와 르네상스 예술에서는 “부드럽고 살아있는” 선을 사용하지만, 이집트나 비잔틴의 예술에서는 “모든 것이 각지고, 곡선도 딱딱하며 기하학적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육체마저 종종 완전히 죽어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다양한 종류의 굳은 선과 입체적인 모양에 맞도록 뒤틀어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현대 예술이 살아 있는 유기체적 예술 양식에서 기하학적인 모자이크 예술 양식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현대에 접어들어 인간을 “일종의 비인간적인 기계”로 파악하는 새로운 감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라고 흄은 주장한다(Speculations75-109). 그가 「베르그송의 예술론」(“Bergson’s Theory of Art”)에서 작품에 사용된 언어로서 시와 산문을 구분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산문은 “계수 언어”를 사용하고 시는 “직관 언어”를 사용한다. 계수 언어를 사용하는 산문은 사물을 시각적으로 제시해 주지 못하며 독자로 하여금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한다. 반면에, 시는 “직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감각을 구체적으로 전달해 줄 수 있으며” 독자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구체적인 사물을 볼 수 있도록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흄은 시인이 “사물의 정확한 곡선을 얻기 위하여” 계수 언어인 인습적인 언어를 피하고 “새로운 은유의 덩어리”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은유의 덩어리를 사용하는 시적 기법이 바로 이미지를 창출하는 언어의 기법으로서 흄의 이미지즘의 요체이다(Speculations 143-169). 결국, 흄의 이미지 미학은 베르그송의 이미지 철학과 소렐, 모라스 등의 고전주의 개념의 결합으로 형성된 것이다.     III. 파운드의 이미지스트 시학   흄이 시각적 이미지 시의 출현에 기여했다면, 파운드는 거기에 청각적 요소를 추가하여 이미지 미학을 보다 진일보시켰다고 할 수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과 해밀턴 대학에서 고대 영어, 프로방스 어, 프랑스 어, 독일어, 이탈리아 어, 스페인 어, 그리스 어, 라틴 어 및 중세사 등을 두루 공부한 파운드는 1906년 로망스 어를 전공하여 석사를 받은 다음 바로 그 해 스페인 시인 로페 드 베가(Lope de Vega, 1562-1635) 연구를 위한 장학금을 받게 된다. 유럽에서 자료 수집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1907년 인디애나 주 크로포즈빌(Crawfordsville) 소재의 워배쉬(Wabash) 대학에 로망스 어 교수로 초빙되어 가르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유 분방한 생활 때문에 6개월도 못 채우고 학교를 그만 두게 되자 차제에 로페 드 베가의 연구를 마무리짓기 위해 1908년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그 해 여름을 베니스에서 보내면서 그는 미국을 떠나기 전에 쓴 시들을 모아 시집 "희미한 빛"(A Lume Spento)을 출판하였다. 첫 시집이 출판되면서 박사 학위를 위한 연구를 포기하고 시인이 되기로 결심한 그는 그 해 가을 런던으로 건너가 1909년 4월 22일 시 「세스티나」(“Sestina: Altaforte”)를 선보이며 흄의 소호 시인 클럽에 가담했다. 1912년 초 F. S. 플린트로부터 구르몽의 작품을 소개받은 그는 구르몽의 "사랑의 자연 철학"(The Natural Philosophy of Love)(1926)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사랑의 자연 철학"을 번역하며 그는 성과 시 창작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구르몽의 이론에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구르몽의 "문체의 문제"(Le Problème du Style) (1902)를 통해 프랑스 상징주의의 기법에 매료된 그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유일한 기쁨”으로 삼는 “알몸의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SPR 386, LE 340).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그는 흄이 추구했으나 아직 문학 이론으로 정립하지 못한 간결하고 명확한 “이미지”를 제시할 수 있는 시적 기교에 대해 리처드 올딩턴(Richard Aldington), 에이취 디(H. D., Hilda Dollitle) 등과 함께 켄싱턴(Kensington) 가에 있는 찻집에 모여 논의했다. 이 때부터 파운드는 차츰 시보다는 철학으로 관심을 돌린 흄을 대신하여 시인 클럽을 이끌게 되었다. 그의 노력에 의해 "신시대"에 실렸던 흄의 시 5편과 시인 클럽 회원들의 시를 함께 수록한 시집 "반론"(The Repostes)이 1912년 10월 출판되었다. 이 "반론"의 부록으로 수록된 흄의 시에 대한 서문에서 파운드는 여기에 시를 수록한 시인들을 “이미지 학파”에 속한 시인들이자 흄의 “1909년의 잊혀진 학파의 후계자”로서 “이미지스트들”(Les Imagistes)이라고 불렀다(P 266). 이것이 소위 “이미지즘”(Imagism)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시발점이다. "반론"과 더불어 이미지즘 시 운동의 중추적 인물로 부상한 파운드는 1912년 10월 시카고 사업가들의 재정적 지원과 해리엇 먼로(Harriet Monroe, 1860- 1936)의 편집에 의해 시 전문지 "시"가 시카고에서 창간되면서 먼로의 요청에 따라 이 저널의 해외 주재 특파원이 되었다. 그 해 8월 해외 특파원으로 활동하겠다는 수락 편지와 함께 보낸 그의 시 두 편이 "시"의 창간호에 실렸고, 그가 9월에 먼로에게 보냈던 올딩턴의 시 세 편이 "시"의 두 번째 호인 1912년 11월호에 게재되었으며, 10월에 보냈던 에이취 디의 시 세 편이 그의 주해와 함께 "시"의 1913년 1월호에 실렸다. 특히 에이취 디의 시에는 파운드의 권유에 따라 “이미지스트, 에이취 디”(H. D., Imagiste)라는 서명을 붙이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이미지스트”라는 명칭이 비로소 공식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의 1913년 3월호에 그가 에이취 디 및 올딩턴과 함께 설정한 새로운 시의 세 가지 원칙을 담은 「이미지즘」(“Imagisme”)이라는 제목의 글이 F. S. 플린트의 이름 아래 발표되고, 그 자신의 이름으로 된 「이미지스트에 의한 몇 가지 금기 사항」(“A Few Don’ts by an Imagiste”)이 담긴 평론 「회고」(“A Retrospect”)가 함께 발표되면서 “이미지즘”은 하나의 새로운 시 운동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이미지즘”(Imagisme)이라는 말과 “이미지스트”(Imagiste)라는 말이 프랑스 어 형식을 따르고 있는 것은 이미지즘이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 아래서 생겨났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파운드의 이미지스트 미학은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라는 두 가지 측면을 다 포함하고 있다. 파운드가 1914년 5월호 "시"에 기고한 W. B. 예이츠(W. B. Yeats)의 "책임들"(Responsibilities)에 대한 서평에서 “예술의 최고의 기능은 고귀하리 만치 풍부한 소리와 이미지로 마음을 채워 주는 것”이며, 시에는 음악을 지향하는 시와 조각이나 그림을 지향하는 시 두 종류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겐, 가장 ‘시적인’ 두 종류의 시가 있어 왔다. 첫째는 음악이 스스로 또렷한 언어로 변모해 들어가는 것 같은 종류의 시이고, 둘째는 마치 조각이나 그림이 언어로 변모해 들어가는 것 같은 종류의 시이다. (LE 380)    이처럼 이미지의 시각적 요소와 청각적 요소 둘 다 중요시했던 파운드는 이미지즘 시 운동이 에이미 로우얼(Amy Lowell)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차츰 정적인 시각 이미지 창출에만 매달려 인상주의로 흐르게 되자, 이미지즘이 “에이미지즘” (Amygism)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비난하며 이미지즘 시 운동과 결별해 버렸다.  로우얼은 먼로의 권유로 1913년 1월호 "시"에 실린 에이취 디의 시 몇 편을 읽고 스스로를 “이미지스트”라고 생각하고는 먼로의 추천서를 소지하고 그 해 여름 런던으로 건너가 파운드의 이미지스트 시인 그룹에 가담했다. 그녀는 1914년 4월호 "시"에 8편의 이미지스트 시를 기고했으며, 같은 해 파운드는 로우얼의 시를 포함하여 올딩턴, 플린트, 파운드, 에이취 디,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등의 시가 수록된 시 선집 "이미지스트들"(Des Imagistes)을 출판했다. 로우얼은 그 해 7월 17일 이미지스트 시인들을 위한 소위 “이미지스트 만찬”을 베풀고, 이 자리에서 이미지스트 선집을 5년간 매년 발행한다면 경제적 뒷받침을 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9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지원 아래 1915년 첫 번째의 이미지스트 시집 "몇 명의 이미지스트 시인들"(Some Imagist Poets)이 출판되었으며, 이 시집의 서문에 올당턴이 쓰고 로우얼이 수정한 다음 여섯 개의 이미지즘 원칙이 제시되었다.     1. 일상 용어를 사용하되, 거의 정확한 단어나 단지 장식적인 단어를 사용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정확한 단어를 사용한다.  2. 새로운 분위기를 표현해야 하므로 새로운 운율을 창조하도록 하고 단순히 옛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는 옛 운율은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시를 유일한 시작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자유의 원칙을 위해 싸우듯이 자유시를 위해 싸운다. 시인의 개별적인 특질은 인습적인 형식으로보다는 자유시로 보다 더 잘 표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시에서 새로운 운율은 새로운 생각을 뜻한다. 3. 시 제재의 선택에 있어서는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비행기와 자동차에 대해 나쁘게 쓰는 것이 좋은 예술이 아니듯이, 과거에 대해서 잘 쓰는 것이 반드시 나쁜 예술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현대 삶의 예술적 가치를 열정적으로 신뢰하지만, 1911년의 비행기만큼 감격적이지 않은 것도 없고 그렇게 구식인 것도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4.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한다(여기서 “이미지스트”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우리는 화가의 집단이 아니지만, 시는 아무리 거창하게 울려 퍼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애매한 일반적인 것을 취급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을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예술의 진정한 어려움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우주적 시인에 반대한다.   5. 흐릿하거나 확실하지 않은 것은 완전히 배제하고 딱딱하고 명료한 시를 쓴다.  6. 끝으로, 우리 대부분은 압축이 바로 시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Coffman 28-29에서 재인용)   로우얼은 이 첫 번째의 이미지스트 시집에 자신의 시가 한 편 밖에 실리지 않자 이에 불만을 품고 다음 출판될 시집부터는 각 시인들의 시가 평등하게 실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녀의 주도 아래 1916년에 출판된 두 번째의 이미지스트 시집 "몇 명의 이미지스트 시인들"에 각 시인마다 지면을 고르게 분배받았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시를 “지성인들 사이의 의사전달” 이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LE 55), “어떠한 예술도 대중의 눈을 바라다봄으로써 성장한 적이 없다”고 믿었던(L 4) 파운드에게는 이러한 로우얼의 처사가 못마땅했다. 이미지즘 시 운동은 이런 내부의 갈등과 그 이론 자체의 편협성과 지나친 단순화 때문에 더 발전하지 못하고 1917년 세 번째로 출간된 "몇 명의 이미지스트 시인들"을 끝으로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파운드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석사 과정에서 프로방스 문학을 공부하며 시는 간결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흄의 시인 클럽을 드나들며 이미지 창출이 시의 핵심 요소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 다음 그의 이미지 시 기법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것은 1913년부터 1916년 사이에 예이츠의 비서로 세 번의 겨울을 스토운 코티지(Stone Cottage)에서 함께 보내면서 알게된 일본의 “노”(Noh) 연극의 일관된 이미지 기법이다. 그는 1913년 후반 미국의 철학자이자 동양 예술사가인 어니스트 페놀로사(Ernest Fenollosa, 1853-1908)의 일본 및 중국의 문학 관련 평론 "시의 매체로서의 중국문자"(The Chinese Written Character as a Medium for Poetry)의 원고를 그의 미망인 메리 맥닐(Mary McNeil)의 부탁을 받고 정리하면서 일본의 “노” 연극은 물론 중국의 상형 문자에서도 다시 한번 이미지 시의 가치를 확인하였다. 이미 일본의 “하이꾸”(haiku) 시가 지닌 이미지의 간결성과 암시성에 익숙해 있던 파운드는 이 원고의 출판을 위해 편집하면서 의미를 시각적인 그림으로 제시하는 중국어의 응축된 표의 문자와 역동적인 언어 배열이 자연 현상에서 직접 얻어온 이미지라는 것과 이런 이미지가 시에 적합한 이상적인 요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의 표의 문자가 어떤 소리의 그림이 되려고 하거나 어떤 소리를 상기시키는 문자 기호가 되려고 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사물의 그림이 되고, 어떤 주어진 위치나 관계 속에 있는 사물, 혹은 사물들의 혼합을 나타내는 그림이 된다. 그것은 사물, 행동, 혹은 상황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그것이 묘사하는 몇 가지 사물에 긴밀하게 관련된 특성을 의미한다. (ABCR 21)   이처럼 “물질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비물질적인 것들을 암시하는” 중국의 상형 문자는 파운드에게 적절한 시의 언어로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가장 훌륭한 시는 자연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고귀한 사상과 정신적인 암시와 모호한 관련들도 다루기” 때문이다(CWC21-22).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중국의 상형 문자에서(ABCR 21) 파운드는 후일 윈덤 루이스(Wyndham Lewis)의 그림과 앙리 고띠에-브르제스카(Henri Gaudier-Brzeska)의 조각에서 발견하게 될 소용돌이와 같은 역동적인 이미지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래서 파운드에게 중국은 “새로운 그리스”였다(LE 215). 파운드는 자신의 중국 시 번역본 "중국"(Cathay)(1915)이 발표된 얼마 후 역시 페넬로사가 남긴 일본의 “노”(Noh) 연극의 번역을 손질하면서 긴 소용돌이 이미지의 시도 음악과 동작에 의해 단일 이미지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일본의 노 연극은 파운드에게 단테의 ������신곡������(Divine Comedy)처럼 “하나의 정교한 삶의 은유”를 제시하는 문학 형식이었다(SR 87). 다양한 전설과 역사적 사건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그의 방대한 서사시 "캔토들"은 바로 소용돌이 이미지의 소산이다. 소용돌이주의에 대한 파운드의 관심은 "희미한 빛"을 출판할 때 이미 잉태되었던 것이지만, 그 관심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된 것은 1914년 6월 20일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이며 화가인 윈덤 루이스(Wyndham Lewis)와 함께 "돌풍"(Blast)이라는 잡지를 창간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그는 베르그송 이미지 미학에 대한 흄의 강연에서도 시적 기교로서의 소용돌이의 필요성을 감지했었다. 파운드가 “소용돌이주의”라고 명명한 시적 기법은 병치의 방법을 통해 이미지를 보다 큰 패턴으로 유도하는 것으로서, 역동적인 “소용돌이” 이미지를 도입한 예술 운동이었다. "돌풍"은 여기에 참여했던 루이스와 고띠에-브르제스카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됨에 따라 1915년 7월 두 번째 호를 내고 막을 내렸지만, 파운드의 새로운 이미지즘 이론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잡지로 기억된다. 왜냐하면 이 잡지를 통해 파운드는 특히 루이스의 그림과 고띠에-브르제스카의 조각 같은 공간 예술 양식이 보여 주는 명확성과 뚜렷한 윤곽, 그리고 기계의 역동성을 구현하는 소용돌이의 기법을 배워 자신의 시에 생각들을 병치시켜 하나로 결합하는 소용돌이를 창출해 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소용돌이가 파운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그에게 이미지즘은 소용돌이주의를 뜻하는 것이었다. 1914년 9월 1일자 "포트나잇틀리 리뷰"(The Fortnightly Review)에 기고한 「소용돌이주의」(“Vorticism”)이라는 평론에서 파운드는 소용돌이 이미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미지는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빛나는 마디점 즉 덩어리이다. 그것은 사상이 그것으로부터, 그것을 통해, 그것 속으로 끝임없이 돌진하기 때문에 내가 소용돌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고상하게 표현하면 그것은 소용돌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필요성에서 소용돌이주의가 생겨났다. (Gaudier-Brzeska 92)   이런 관점에서 파운드는 이미지를 “주관적” 이미지와 “객관적” 이미지 두 가지로 구분했다. 주관적 이미지란 마음에 작용하는 외부 요인들이 “마음 속에서 융해되고 전파되어 그 자신들과 다르게 나타나는” 이미지이며, 객관적 이미지란 “외부의 장면이나 행동을 포착하는 감정이 그것을 그대로 마음에 전달하고, 소용돌이가 그것에서 본질적이거나 지배적이거나 극적인 특질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정화시킴으로써 외부의 본래적인 것처럼 나타나는” 이미지이다(SP 344-345).  소용돌이주의는, 그의 "시 읽기의 기초"(ABC of Reading)(1951)에서 다시 거론되고 있듯이, 파운드에게 “움직이는 이미지”의 개념을 확실하게 심어준 예술 양식이었다. 파운드는 이미지즘을 “희석시키는 자들은 가장 손쉽고 가장 쉬운 의미만을 취하여, 단지 정체적인 이미지만을 생각했다”고 비난하면서, 이미지즘에 “움직이는 이미지”를 포함시키지 않을 경우 “고정된 이미지와 작용”의 구분을 쓸데없이 하게 된다고 지적했다(ABCR52). 그는 또한 “시에는 대체로 고정된 요소와 다변적인 다른 요소가 있다”고 전제하고 “어느 요소가 고정되어야 하고 어느 요소가 가변적이어야 하는 것, 그리고 그 정도가 어느 만큼 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은 작가의 문제”라고 주장했다(ABCR 201). 시에서의 “움직이는 이미지”의 개념이 시에 도입되면서 이미지즘 시는 하나의 유기체로 정의될 수 있었다. “시란 각 부분이 기능하면서 소리 혹은 의미에 무엇인가를 주는―오히려 소리와 의미 모두에 무엇인가를 주는 하나의 유기체이다”(SPR 27). 1913년 3월호의 "시"에 발표된 파운드의 이미지즘은 “힘 혹은 감정의 형태로서 스스로를 표현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파운드는 “하나의 힘 혹은 감정이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할 때,’ 이것은 말로 적절하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 이미지의 언어적 표현은 적절한 혹은 동족의 운율 형식과 음색 형식에 의해 보강될 수 있다”고 믿었다(SPR 346-7). 그는 감정을 효율적으로 표현하는 시적 방법을 에이취 디 및 올딩턴과 함께 토의하고 다음과 같은 “이미지즘”의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1.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 다룬다. 2. 표현에 기여하지 못하는 말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3. 운율에 대해서는 음악적 어귀의 운율을 따르도록 하고 박절기의 운율에 따르지 않는다. (LE 3).    이 원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은유의 적절한 사용”을 통해 감정을 신속하고 강렬하고 생생하게 표현하는 시적 기법과 유사하다. 시인은 “어떤 생각과 그에 수반하는 감정들, 혹은 어떤 감정과 그에 수반하는 생각들, 혹은 어떤 감각과 그것에서 생겨나는 감정들, 혹은 감정적인 어떤 인상 등”을 동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가능한 한 적은 수의 말을 사용하여” “완전하리 만큼 분명하고 간단하게” 표현해야 하며, 그렇게 되었을 경우 그의 작품은 훌륭한 것이 된다는 것이 파운드의 생각이었다(LE52, 51, 50).  여기에 제시된 세 개의 원칙 중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 다룬다”는 첫 번째 원칙은 감정에 의해 창조되는 이미지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두 가지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미지가 주관적인 것이 되는 경우는 “외부적인 요인들이 마음에 들어와 혼합되고 변형된 다음 그 자체와 다른 어떤 이미지로 나타날” 때이며, 이미지가 객관적인 것이 되는 경우는 “어떤 외부적인 장면이나 행동을 포착하는 감정이 그것을 마음에 그대로 끌고 들어가게 될 때 그 소용돌이가 그것에서 본질적이거나 지배적이거나 극적인 특징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정화시키고 외부의 본래 대로의 것처럼 나타날” 때이다. “어느 경우이든, 이미지는 사상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혼합된 사상의 소용돌이거나 덩어리이며, 힘을 지니게 된다”(SPR 344-345). 이미지가 주관적인 경우든 객관적인 경우든, 이미지 시는 추상적인 언어보다는 구체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말과 사물을 합치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첫째의 원리의 핵심이다(SL 158).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 다룬다”는 첫 번째 원칙을 잘 반영하고 있는 시의 표본은 아마도 「지하철 정거장에서」(“In a Station of the Metro”)일 것이다.   군중 속에 나타난 이 얼굴들의 환영, 축축한, 검은 가지에 피어난 꽃잎들.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SP 35)   이 시는 파운드가 1911년 봄 파리를 방문했다가 파리 지하철역에서 기차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느낀 놀라운 경험을 이미지 기법을 빌어 표현한 작품이다. 이 시가 생겨난 과정에 대해서 그는 1914년 9월 1일자 "포트나잇틀리 리뷰"에 기고한 「소용돌이주의」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3년 전 파리에서 나는 콩코르드역 지하철 기차에서 내렸는데, 갑자기 아름다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또 다른 얼굴을, 그리고 또 다른 얼굴을, 그리고 또 아름다운 어린이의 얼굴을, 그리고 또 다른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날 종일 이것이 나에게 준 의미를 표현할 단어를 찾아보려 했지만, 나는 그에 합당한, 아니 그 갑작스러운 감정만큼 아름다움을 표현할 어떤 단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날 저녁 레이누아르 가를 따라 집으로 가며, 애쓰다가 갑자기 표현을 찾아냈다”(Gaudier-Brzeska 86-87). 이렇게 하여 생겨난 이 작품은 그 길이가 처음에는 30여 행이었으나, 1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 번의 손질을 거쳐 2행으로 줄어들어 1913년 4월호의 "시"에 지금의 형태로 발표되었다. 첫 행은 지하철에서 밖으로 나오며 드러나는 군중들의 환한 얼굴에 대한 사실적 묘사이며, 둘째 행은 이 밝은 얼굴을 “축축한, 검은 가지에서 피어난” 밝은 색의 꽃잎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첫 행에는 “환영”이란 단어의 사용으로 군중 출현의 극적 효과가 나타나 있다. “축축하다”와 “검다”라는 두개의 형용사가 사용되고 있는 둘째 행은 “지나친 형용사 사용을 금하는” 이미지스트의 강령에 반대되는 것 같지만(SL 11), 밝은 색의 꽃잎의 이미지를 뒷받침하는 이 두 형용사는 칙칙하고 어두운 지하철에 나타난 환한 얼굴 색의 생생한 이미지를 표현해 주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하고 있으며, 어두움에서 밝게 피어나는 꽃잎의 이미지는 지하철에서 아름답게 비친 승객들의 얼굴을 보고 느낀 시인의 벅찬 감정을 적절히 나타내는 일종의 등가물로서 손색이 없다. “표현에 기여하지 못하는 말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미지즘의 두 번째 원칙은 “시가 훌륭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훌륭한 산문처럼 잘 쓰여져야 한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SPR 345). 이 원칙은 훌륭한 시의 이미지는 최소한의 말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의 경제”에 의해 창조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LE 4). 1913년 "에고이스트"(The Egoist)에 기고한 「진지한 예술가」(“The Serious Artist”)라는 글에서 파운드는 구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산문을 진지한 시인이 따라야 할 표본으로 생각했다. 그는 「휴 셀윈 모벌리」(“Hugh Selwyn Mauberley”)라는 시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시적 기교에 가장 근접한 산문을 쓴 작가의 예로 플로베르를 들며 그를 자신의 “진정한 페넬로페”라고 불렀다(SP 61). 「진지한 예술가」에서도 플로베르는 “정열적인 간결성”을 지닌 산문을 쓴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파운드에게 산문과 시는 모두가 동료들과 의사 교환을 하는 언어적 수단이다. “산문과 시는 언어의 확장에 불과하다. 인간은 동료들과 의사교환을 바란다.” 사람은 “어떤 생각과 그 생각이 지니고 있는 정서나, 어떤 정서와 그 정서가 지니고 있는 생각이나, 어떤 감각과 그 감각이 동반하는 정서나, 정서를 일으키는 어떤 인상 등을 전달하기를 원한다.” 만일 시에 사용된 “모음과 자음의 멜로디”가 시가 전달하려는 “정서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시는 훌륭한 작품이 된다. 산문의 경우도 “단어들과 그 의미가 정서를 전달하기에 적합하게 쓰여졌다면” 훌륭한 작품이 된다. “시인들도 산문의 장점들을 획득할 필요가 있다.” “대충 말하면, 훌륭한 글이란 완벽하게 통제된 글이다. 작가는 자신이 의미하는 것만을 말한다. 그는 완벽하리 만치 명료하고 간결하게 그것을 말한다. 그는 가능한 한 가장 적은 수의 단어를 사용한다.” 산문과 시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시의 언어보다 “산문의 언어가 훨씬 덜 충전되어 있다”는 것이며, “시가 보다 더 충전되어 있다”는 것이다. 파운드에게 “똑똑한 사람들과의 의사 교환”인 시는 “표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가능한 한 간결하게 쓰여져야 하는 것이다(LE 49, 50, 51, 50, 26, 49, 55, 56).  이와 같은 견해를 파운드는 1915년 1월 해리엣 먼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되풀이하면서, 시의 언어가 구어체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시는 산문처럼 잘 쓰여져야 합니다. 시의 언어는 훌륭한 언어이어야 합니다. 고양된 강렬성(즉 단순성)에 의한 경우를 빼면 구어체에서 결코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책의 언어도, 에두르는 표현도, 도치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시는 모파상의 산문과 스탕달의 산문처럼 간결해야 합니다. 감탄사가 있어서도 안됩니다. 어떠한 말도 허공을 향하여 날아가서는 안됩니다. . . . 진부한 말도, 고정된 어귀도, 상투적인 저널리즘 언어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객관성 그리고 다시 객관성, 그리고 표현이 있을 뿐입니다. 앞뒤가 바뀌는 것도, (“썩은 이끼 낀 각진 모서리”와 같이) 양다리 걸친 형용사도, 테니슨이 사용하는 것 같은 말도, 어떤 환경, 어떤 감정의 압박 상태에 있어서, 실제로 이야기될 수 없는 것은 어떠한 것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SL 48-49)   파운드는 「베도스와 연표」(“Beddoes and Chronology”)란 그의 평론에서 시가 보다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고어체 대신에 일상 구어체를 사용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나는 말한다 어느 누구도 언어로 말할 수 없는 백발이 성성한 수 백년의 세월에서 솟아난, 마치 옛날의 허깨비에게처럼, 단어의 그림자를.’   이 시행들은 그가 지금까지 쓴 어떤 것 못지 않게 아름답지만, 우리는 직접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순전히 고대 일상어로 시를 쓸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 베도스가 그렇게 했다. 그러나 초기 빅토리아 시대의 무대에서는 사용되었을 테지만 그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분명히 존재하지 않았던 언어 대신에 실제의 구어체를 사용했더라면, 이 시가, 그의 시가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또 그 효과도 훨씬 더 오래 지속되지 않았을까? (SPR 351)   1917년에 출판된 소책자 "에즈라 파운드, 그의 운율과 시"(Ezra Pound: His Metric and Poetry)에서 엘리엇은 과거의 제한된 시 형식으로부터 파운드를 해방시켜준 것은 고띠에르(Jules de Gautier), 라포르그(Jules Laforgue, 1860-1887)나 코르비에르(Tristan Corbière, 1845-1875) 등의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의 영향이라고 지적하면서 파운드는 휘트먼으로부터는 영향을 받은 바 없다고 주장했다. “휘트먼은 분명히 영향을 끼친 인물이 아니다. 그 어디에도 그의 흔적이 없으며, 휘트먼과 파운드는 서로 정반대이다”(TCC177). 그는 또한 1928년 그의 편집으로 출판된 "에즈라 파운드 시 선집"(Selected Poems of Ezra Pound)의 서문에서도 파운드의 자유시 형식 사용에 대해 언급하면서 “나는 파운드가 휘트먼에게 신세진 것이 없다고 확신한다”고 주장했다(Schulman 77). 그러나 파운드 자신이 인정했듯이, 이미지즘이 일상 구어체 사용을 중시하고 자유시를 옹호하는 것은 상징주의 시인들과 휘트먼의 영향이다. 파운드의 객관성 추구, 주지주의에 대한 신념, 엘리트 중심사상, 예술로서의 시 창조의 개념이 휘트먼이 추구했던 주관성, 민주주의적 이상, 대중성, 삶으로서의 시와는 상반되지만, 휘트먼의 혁신성, 자유시 추구, 시어로서의 일상구어체 사용 등은 파운드를 미국시인으로 길러낸 원천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프랑스 상징주의의 성숙에 미친 휘트먼의 영향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휘트먼이 프랑스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 초이고, 프랑스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1870년대에 접어들어서이다. 그리고 그가 프랑스 상징주의 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은 1880년대 후반 라포르그(Jules Laforgue, 1860-1887)의 번역을 통해 그의 시가 본격적으로 프랑스에 소개되어 프랑스 시인들이 그의 시적 비전과 기법을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부터이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이 휘트먼에게서 배운 것들 중에서 파운드의 이미지즘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 구어체를 시어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과 전통적인 운율을 버리고 자유시 형식을 쓰는 것이었다(Erkkila 51-77). 휘트먼의 자유시 옹호는 자연의 리듬을 따라 시를 써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휘트먼에게 자연은 곧 신의 상징이며, 시의 모형이다. 자연에서 자유 민주주의 양식을 발견한 휘트먼은 자신의 시의 운율을 전통적인 “약강 5보격, 강강격, 강약약격 등의 운율 규칙”을 버리고 유기체처럼 자유로운 양식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Prose Works, Vol 2: 519). 이와 같이 자유시를 옹호하는 휘트먼의 입장은 자유시를 지향하는 상징주의와 이미지즘의 시적 원리로 수용되었던 것이다. “운율에 대해서는 음악적 어귀의 운율을 따르도록 하고 박절기의 운율에 따르지 않는다”라는 이미지즘의 세 번째 원칙은 감정이 “눈에 보이는 형태와 색채의 조직자일 뿐만 아니라 들을 수 있는 형태의 조직자이기도 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시인에게는 “말을 창조적인 감정의 운율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충분한 기술”이 요구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원리에 따라 쓰여질 경우, “시는 ‘음악’에 맞추어진 말의 결합 혹은 ‘구성’이 되는 것이다”(SPR 345). 이미지스트 시에서의 “움직이는 이미지”는 시어가 음악으로서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시 읽기의 기초"보다 훨씬 앞서 1918년에 발표된 평론 「자유시와 아놀드 돌메취」(Vers Libre and Arnold Dolmetsch)에서 이미 이와 비슷한 견해가 피력된 적이 있다. "프랑스와 비용의 증언"(Le Testament de François Villon)(1921)과 "카발칸티"(Cavalcanti)(1932)라는 두 편의 오페라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바이올린 곡을 작곡한 경험이 있는 파운드가 시에서 청각적 이미지의 창출에 관심이 깊었던 것과 시가 “음악으로 읽혀지기를” 희망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청각적 이미지에 기초한 그의 시어 이론은 “모든 예술은 끊임없이 음악의 조건을 지향한다”는 월터 페이터(Walter Pater)의 신념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Elliott 156). 「자유시와 아놀드 돌메취」에서 자유시에 대해 언급하는 가운데 파운드는 “단어는 그 자체에 음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단어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시는 음악을 떠날 때 시들어 소멸하고 만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음악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시인들은 신통치 않은 시인이거나 그런 시인이 됩니다. 나는 시인들이 결코 음악과 너무 오래도록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음악을 연구하지 않으려는 시인들은 결점을 안게 될 것입니다. 내 말은 그들이 음악의 대가가 될 필요성이 있다든지, 아니면 반드시 음악 교육을 받으며 시간을 보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조금은 고집이 세고 이단적일 수 있는 것이 어쩌면 그들의 가치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예술은 진부해지는 경향이 있기 마련이며, 또한 언제나 평범한 것은 당대의 유행이 불변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반 의식적으로든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든지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거나 그렇게 해버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LE 437)    이런 신념에 따라, 파운드는 시를 정의하여 “음악에 맞추어진 말의 결합”이라고 했다(LE 437).  파운드에게 시의 음악은 “표현될 정서나 정서의 그림자에 꼭 부합되는 하나의 운율, 즉 ‘절대 운율’”을 뜻한다(LE 9). 이 절대 운율은 화자의 감정의 곡선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일상 구어체의 자연스러운 운율을 뜻하며, 자유시 출현의 배경이 되었다. 파운드가 일상 구어체가 시의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한 것은 대학 시절 프로방스 시를 연구하면서부터이다. 머레이 셰이퍼(Murray Schafer)에 따르면, “파운드에게 프로방스 어는 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악과 결합된 시를 의미하며” 또한 “바로 자기 앞에 음악을 놓고 시를 쓰는 일이야말로 중요한 작업이었으며, ‘음악적 어귀의 연속’에 도달함으로써 비로소 그는 오래도록 영시를 구속해 온 뒤틀린 운율과 형식으로부터 영시를 해방시키게 될 특이한 시적 기교를 발전시켰던 것이다”(131-132). 시와 음악은 같은 운율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시의 율동적인 흐름은 음절과 분절적인 소리의 성질에 의해서 그리고 음악의 법칙이나 아름다운 가락의 운율에 의해서만 제한을 받으며,” 또한 “이 음악적인 진실성을 시에 적용하는 것은 바로 자유시를 사용하는 것이 된다”고 파운드는 생각했다. 파운드는 이와 같은 자신의 견해가 고대 그리스와 중세의 프로방스 시에서 왔음을 밝히고, 그 때에는 “시와 음악 예술이 아주 긴밀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에 “시가 최고의 운율적인 탁월성을 달성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LE 9, 93, 91). 그래서 그는 “우리의 목표가 자연적인 구어체, 즉 말하는 대로의 언어이다. 우리는 시의 언어가 자연적인 순서를 따르기를 바란다. 우리는 감정에 따라 우리가 실제로 삶에서 말하지 않는 것은 쓰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LE 362).   파운드에게 “감정은 단지 시각적인 형태나 색채뿐만이 아니라 청각적 형태까지도 구성하는 것”이었다(SP 345).   당신의 시를 개별적인 약강격으로 짤라 나누지 마십시오. 각각의 시행을 그 행의 끝에서 완전히 멈추게 하지 말고 매 다음 행을 상승 어조로 시작하십시오. 결정적으로 길게 중단할 생각이 아니면, 다음 행이 시작될 때 운율 물결의 상승을 이어가게 하십시오. (LE6)   화자의 정서가 일상 구어체의 운율에 의해서 전달되어야 한다면, 전통적인 규칙적 약강격 운율의 시행보다는 자유시 형식이 보다 적절한 것이 된다. 그러나 파운드는 언제나 자유시를 써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꼭’ 자유시를 써야 할 때만, 다시 말하면, ‘사물’이 미리 정해진 보격의 운율보다 더 아름답고, 더 사실적이고, 그 ‘사물’의 정서의 일부에 더 근접하고, 규칙인 강세를 지닌 시의 율격보다 더 밀접하고 친밀하고 해석적인 운율을, 즉 미리 정해진 약강격이거나 약약강격의 율격에 만족하지 못하는 운율을 형성할 때만 자유시를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LE 12). 이런 원리에 의해 파운드는 “음악이 분명한 말로 변형되는 부류의 시”와 “마치 조각이나 그림이 언어로 변형되었거나 변형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류의 시”가 생겨난다고 생각했다(LE 380). 표현 대상을 조각이나 그림과 같은 정확한 언어와 음악적인 자연스러운 운율로 창조된 이미지 시는 인간 정서에 대한 등가물을 제시하게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결국 파운드가 지향하는 이미지 시의 목표는 정확한 언어로(두 번째 원칙) 시각적 이미지를 창조하여(첫 번째 원칙) 음악적 효과를 달성하는 것(세 번째 원칙)이다. 이 세 가지 원칙과 관련하여 파운드는 1923년 1월호의 "크라이테리언"(The Criterion)에 기고한 「비평 일반론」(“On Criticism in General”)에서 고띠에, 고르비에르, 라포르그, 랭보 등에 대해 언급하면서 언어를 충전하거나 언어에 힘을 불어넣는 다양한 방법에 따라 시를 “음악시,” “회화시,” 그리고 “언어시” 등 세 종류로 구분하고 각각의 유형의 시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으며, 이 세 종류의 시에 대해 1929년 1월 세 번에 나누어 "뉴욕 해럴드 트리뷴"(The New York Harold Tribune)에 기고한 평론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How to Read”)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했다.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파운드는 “위대한 문학은 가능한 한 최상의 의미로 충전된 언어다”라고 정의하고, “말들이 음악적 속성에 의해 충전되어 평범한 의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시를 “음악시,” “시각적 상상력에 이미지들을 투영하는” 시를 “회화시,” 그리고 “단어들 사이에서의 지성의 춤”을 연출하는 시를 “언어시”라고 불렀다(LE 23, 25). 파운드는 이 세 종류의 시를 프로방스 시에서 발견했다. 프로방스 시는 “말을 음악과 잘 어울리도록 하는 예술”인 음악시의 전형이었다(LE 112). 프로방스 시의 대표적인 시인인 아르나우트 다니엘(Arnaut Daniel)의 시는 그에게 “시는 음악과 너무 멀리 떨어지게 될 때 퇴보한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다. “주로 음악시를 위한 것이라면 트루바두르 시를 연구하면 될 것이다”(ABCR 61, 52). 또한 다니엘이나 카발칸티(Cavalcanti) 같은 프로방스 시인들은 “외적 자연이든 감정이든 그것을 명확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그들이 사용하는 시어는 “거의 새로운 언어”로서 “새로운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태초에 “아담이 사용했던 언어”로 생각되었다(LE 11, 112). 그들의 시는 파운드에게 일상의 “구어체를 새로운 방법으로 사용하고, 새로운 말을 글쓰기에 활용하고, 또 말들을 새롭게 혼합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언어시의 전형이었다(LE 111). 그래서 프로방스 시는 “말을 극도로 명확하게 사용하려는 상당한 욕구”를 드러내는 회화시의 전형이기도하다(LE 26).  파운드는 1951년에 출판된 "시 읽기의 기초"(ABC of Reading)(1951)에서 “언어를 최고도의 의미로 충전시키기는” 방법에 따라 시를 세 종류로 구분했다. “시각적 상상력(고정적이든 동적이든)에 사물을 투영하는” 방법을 쓰는 회화시, “말의 소리와 운율에 의해 정서적 등가물을 유추하는” 방법을 쓰는 음악시, “사용된 실제 언어나 단어 집단과 관련하여 받아들이는 자의 의식에 남아 있는 (지적이나 정서적인) 인상을 자극하여 양쪽 효과를 이끌어 내는” 방법을 쓰는 언어시 등이 그것이다(ABCR 63). 음악적인 어귀를 따라서 시를 써야 한다는 셋째 원리와 관련이 되는 음악시는 말의 소리와 운율에 의해 정서를 유발시키는 시의 청각적 혹은 음악적 양상에 역점을 둔다. 사물을 직접 취급해야 한다는 첫째 원리와 관련이 있는 회화시에서는 고정된 사물이나 유동적인 사물이 독자에게 시각적인 이미지를 제시한다. 정확한 언어의 사용을 주장하는 두 번째 원리와 긴밀하게 관련이 된 언어시는 독자의 지적 혹은 정서적 연상을 자극시킴으로써 시각적·음악적 효과를 유발시켜 미적 내용을 정확하게 표현한다. 파운드는 이 세 종류의 시가 따로 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시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세 부류의 시를 구분짓는 요소들이 모두 한편의 시에 나타나 있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에게 “모든 글은 이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LE 26). 시에는 시각적 이미지와 음악적 요소가 미적 내용을 전달하는데 동시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 가지 양상이 서로 혼합되어 완성된 마지막 한 편의 시에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운드의 이미지즘 시 이론은 둘째의 원칙이 적용되는 언어시에 그 핵심이 있다. 왜냐하면 첫째 원칙에서 말하는 시각적 이미지는 둘째 원칙에서 말하는 정확한 언어의 사용에 의해서만 창조되고, 셋째 원칙에서 말하는 시의 음악적 효과도 정확한 언어의 사용에 의해서만 성취되기 때문이다. 파운드는 「진지한 예술가」에서 정확성에 기초한 도덕적 미학 이론을 전개했다. 여기서 그는 “예술의 시금석은 정확성”이며 “나쁜 예술은 부정확한 예술”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예술을 인간을 소재로 한 과학에 비유하며 예술가를 과학자에 비유한다. “예술과 문학과 시는, 화학이 과학이듯이, 과학이다. 그것들의 소재는 인간과 인류와 개인들이다.” “과학자가 추상적인 숫자, 분자의 힘, 물질 구성 등의 관계를 다루듯이, 진지한 예술가는 인간, 즉 개인들의 속성을 다룬다.” “진지한 예술가는 자신의 욕망, 자신의 미움, 자신의 무관심의 이미지를 정확하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과학적이다. 그의 기록이 정확하면 할수록 그의 예술 작품은 더 영속적이고 난공불락이 된다.” “훌륭한 글이란 완벽하게 통제된 글이며, 작가는 자신이 뜻하는 것만 말한다. 그는 완전하리 만큼 분명하고 간단하게 그것을 말한다. 그는 가능한 한 적은 수의 말을 사용한다”(LE 48, 43, 42, 47, 46, 50).      IV. 결  론   파운드에게 이미지는 일차적으로 흄이 말하는 사물에 대한 “정확하고, 간명하며, 뚜렷한 묘사”를 뜻한다(Speculations 132).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에게 이미지는 “특별한감정의 형식이 될 일련의 사물, 어떤 상황, 일련의 사건들”을 표현하는 엘리엇의 “객관 상관물”과 유사한 것이다(Sacred Wood 100).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이미지를 “인간 정서에 대한 등가물”로 정의하였다. “시란 일종의 고양된 수학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추상적인 숫자, 삼각형, 원 등에 대한 등가물이 아니라 인간 정서에 대한 등가물을 주기 때문이다”(SR 14). 결국 파운드에게 “‘이미지’란 순간적으로 지적․정서적 복합체를 제시하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시에 “그와 같은 ‘복합체’를 순간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갑작스런 해방감, 시간적 한계와 공간적 한계로부터의 해방감, 그리고 우리가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 앞에서 경험하는 갑작스런 성숙감을 고취시켜 주게 된다”(LE4). 파운드의 이미지즘은 흄의 경우처럼 반낭만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미지즘이 시의 예술성을 강조하며 순수 예술을 지향하는 모더니스트의 시운동으로서 “시가 예술이라는 생각을 달갑지 않게 여기며” 여전히 시란 감정을 “풀어놓는 것이 되야 한다고 기대하고 있던” 당시의 예술 풍토에 대한 도전이었다(ABCR 74- 75). 파운드에게 예술 작품은 “자기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엮어낸 몰개성적이고 객관적인 이야기,” 즉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감정의] 등가물”이었기 때문에(LE 431), 이미지즘 시 이론은 작품의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는 것이 되었다. 엘리엇의 몰개성 시론과는 달리, 파운드의 이미지즘은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원죄 개념에 기초하고 있지는 않지만, 인간이 노력의 대가 없이 부를 축적하려는 물질적 욕망에 의해 인간의 정신이 타락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고리대금업은 인간과 그의 끌을 녹슬게 하며 그것은 장인을 파멸시키고, 기술을 파괴시킨다. 하늘은 암으로 병들어 버렸다. Usury rusts the man and his chisel it destroys the craftsman, destroying craft; Azure is caught with cancer. (C 250)   파운드는 고리대금업을 “악이거나, 범죄”라고 생각했다(SPR 317). 클라크 에머리(Clark Emery)의 지적대로, 파운드에게는 “돈의 오용과 언어의 오용은 사회 질병의 어떤 징후”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Sullivan 249). 그래서 파운드는 언어의 오용을 없애기 위해 간결하고 구체적이며 꾸밈없는 일상 언어를 추구하는 이미지즘 시 이론을 정립했던 것이다. 엘리엇은 파운드가 어빙 배빗(Irving Babbitt)처럼 공자의 영향을 받아 “개성주의자”가 되었으며, 배빗보다 “오히려 더 자유 의지 옹호자”가 되고 말았다고 공박한 적이 있지만(ASG 41-42), 파운드는 엘리엇과 마찬가지로 작가 자신의 독특한 개성을 배제하고 보편적인 인간 정서를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더니스트였다. 그러나 파운드의 이미지즘은 상당히 낭만주의적인 요소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어는 화석화된 시”이며 “훌륭한 작품에서는 언어와 사물은 하나가 된다”고 주장하는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신념(“The Poet” 231, Journals 3.271), 혹은 “사물의 완전함”에 대한 신념에서 시인은 “실제 사물에서 영감을 발견한다”거나 “언어를 완전하게 사용하는 작가는 사물을 사용한다”는 휘트먼의 주장(Leaves of Grass 727, 564; Neglected Walt Whitman 165)과 아주 유사하기 때문이다. 에머슨이 "자연"(Nature)에 “언어의 타락은 인간의 타락을 수반하며” 언어의 “이중성과 거짓이 그 단순성과 진실성을 대신하게 될” 때 언어의 힘은 상실하게 되고 “새로운 이미저리는 더 이상 창조되지 않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20), 파운드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로마는 시저와 오비드 그리고 타키투스의 언어와 함께 번성하였다가 생각을 숨기는 외교관의 언어인 수사적 표현의 와중에 몰락하였다. . . .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마치 훌륭한 의사가 무지한 아이가 단지 잼 파이를 먹는 줄 알고서 그 어린애가 스스로 결핵에 감염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앉아 만족해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조국이 문학을 부패시키거나 훌륭한 작품이 멸시당하도록 방치할 때 더 이상 조용히 앉아 몸을 사릴 수 없다. (ABCR 33).    파운드의 주장은 추상적인 표현에 가려진 언어의 힘을 재생시키기 위하여 부패된 언어를 순화시키고 언어를 이미지로 옷 입힐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파운드가 몇 번에 걸쳐 인정한 것으로 보아 그의 시 이론은 휘트먼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우선 우리는 파운드가 1909년의 평론 「내가 휘트먼에 대해서 느끼는 것」(“What I Feel about Whitman”)에서 휘트먼을 “나의 정신적인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평론에서 파운드는 자신의 시가 휘트먼 시의 운율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며, 그와 같은 시를 쓰는 자기의 출현은 휘트먼에 의해 예언된 것이라고 밝히면서 “정신적으로 나는 휘트먼과 같은 사람이다”라고 주장했다(SPR 115). 파운드는 휘트먼으로부터 시에서의 단순성의 가치를 배워 자신의 이미지즘의 초석으로 삼았던 것이다. 휘트먼은 그의 1855년에 출판된 자신의 시집 "풀잎"(Leaves of Grass)의 초판 서문에서 “예술의 예술”은 “단순성”이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시인”은 어떤 화려한 치장이나 우아한 표현을 삼가는 자라고 정의했으며(717), 그리고 어느 한 노트에서 “신성한 문체”는 “장식적인 비유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완전히 투명하고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Notebooks, Vol. 1: 385). 그와 마찬가지로 파운드도 1910년에 출판된 "로맨스의 정신"(The Spirit of Romance)에서 “진정한 시인”은 형용사도 사용하지 않고 “가장 단순한 표현”을 일삼는 자라고 정의했다(SR 219). 그래서 파운드가 이미지즘의 세 원칙을 제시한 그 다음 달인 1913년 4월에 발행된 "시"의 4월호에 발표한 시 「계약」(“A Pact”)에서 자신의 이미지즘 시 이론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미국 시인이 휘트먼이었다고 했던 주장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나는 당신, 월트 휘트먼과 계약을 맺겠소― 나는 당신을 너무나 오래도록 싫어했소. 나는 이제 고집이 센 아버지를 가진 다 자란 어린이가 되어 당신에게 왔소. 나는 이제 화해할 수 있을 만큼 자랐소. 새 목재를 쓰러뜨린 것은 바로 당신이고, 지금은 조각할 시기요. 우리는 하나의 수액과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소― 우리 서로 영적 교류를 가집시다.   I make a pact with you, Walt Whitman― I have detested you long enough. I come to you as a grown child Who has had a pig-headed father; I am old enough now to make friends. It was you that broke the new wood, Now is a time for carving. We have one sap and one root― Let there be commerce between us.  (SP 27)   휘트먼에게와 마찬가지로 파운드에게도 이미지는 “자연 대상물”을 사용하는 “적절하고 완전한 상징”과 같은 것이다(LE 9). 따라서 이제 우리는 라포르그의 번역을 통해 프랑스에 소개되어 프랑스 상징주의 성숙을 도운 휘트먼의 시적 비전과 기법이 프랑스 상징주의 작가 레미 구르몽을 거쳐 영국의 흄과 미국의 파운드에게 전달되어 이미지즘을 낳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 한국현대영어영문학회 제47권 제1호(2003)    
436    [시문학소사전] - "이미지스트"란?... 댓글:  조회:3674  추천:0  2017-05-01
요약 1912년경 에즈라 파운드에 의해 형식화된 시적 경향을 공유한 일단의 영미시인들.   당대를 풍미하던 방만한 사고방식과 낭만주의적 낙관론에 반기를 든 T. E. 흄의 비판적 견해에 고무되어, 파운드 이외에도 동료시인 힐다 둘리틀, 리처드 올딩턴, F. S. 플린트 등이 활동했다. 이 시인들은 정확한 시각적 이미지가 시적 표현의 전부를 이루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명료하고 딱딱한 형식의 간결한 시를 썼다. 이미지즘(Imagism)은 프랑스 상징주의운동을 이어받은 것이었으나, 상징주의가 음악과 유사성을 지닌 반면 이미지즘은 조각과의 유사성을 추구했다. 1914년 파운드가 소용돌이파(Vorticism)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자 에이미 로웰이 이 집단을 주도했다. 이미지즘 경향의 시를 쓴 그밖의 시인으로는 존 굴드 플레처와 해리엇 먼로가 있다. 콘래드 에이킨, 매리앤 무어, 월리스 스티븐스, D. H. 로렌스, T. S. 엘리엇도 이들의 영향을 받은 시를 썼다. 4명의 이미지스트의 시선집인 〈어떤 이미지스트들 Des Imagistes〉(1914)과 〈Some Imagists〉(1915, 1916, 1917), 1912년 미국에서 창간된 잡지 〈포이트리 Poetry〉와 1914년 영국에서 창간된 〈에고이스트 The Egoist〉 등은 12명 정도의 이미지스트들의 작품을 발표하는 무대였다.
435    [시문학소사전] - "무운시"란?... 댓글:  조회:3578  추천:0  2017-05-01
요약 각운(脚韻)이 없는 약강(弱强) 5보격(步格) 시행.   영어로 된 극시(劇詩)와 산문시의 대표적 운문 형식이며, 이탈리아어와 독일어 극시의 표준형식이기도 하다. 무운시(無韻詩)의 풍부함과 자유자재로움을 제대로 살리려면, 각 행의 강세와 휴지(caesura)의 위치를 변화있게 구사하고 언어의 변화하는 음감(音感)과 감정적 뉘앙스를 잘 반영하며, 각 행들을 내용에 따라 단락으로 묶는 시인의 기교가 필요하다. 그리스·로마의 각운 없는 영웅시를 변형·발전시킨 무운시는 다른 고전 운율과 함께 16세기경 이탈리아에 도입되었다.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프란체스코 마리아 몰차는 1514년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Aeneid〉를 번역하면서 일련의 무운시를 썼다. 또 16세기에 잔 조르조 트리시노가 쓴 비극 〈소포니스바 Sofonisba〉(1514~15)와 조반니 루첼라이가 쓴 교훈시 〈레 아피 Le api〉(1539)에서도 무운시가 쓰였다. 루첼라이는 '무운시'로 번역될 수 있는 용어 'versi sciolti'를 처음으로 쓴 사람이기도 하다. 무운시는 곧 이탈리아 르네상스 극의 기본 운율이 되어, 아리오스토의 희극들과 타소의 〈라민타 L'Aminta〉, 구아리니의 〈일 파스토르 피도 Il pastor fido〉 같은 주요작품들에서 이용되었다(이탈리아 문학). 영국에서는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가 16세기초에 소네트를 비롯한 이탈리아 인본주의 시 형식들과 더불어 무운시를 들여왔다. 토머스 새크빌과 토머스 노튼은 영국 최초의 비극 〈고르보덕 Gorboduc〉(1561 초연)에 무운시를 이용했고, 크리스토퍼 말로는 〈탬벌레인 Tamburlaine〉·〈파우스트 박사 Doctor Faustus〉·〈에드워드 2세 Edward II〉등에서 무운시가 지닌 음악적 특성과 감정적 호소력을 발휘했다. 셰익스피어는 무운시를 탁월하게 구사하여 영국의 위대한 극시를 탄생시켰다. 셰익스피어의 초기 희극들은 무운시를 운을 밟은 10음절 2행연구 및 산문과 결합시키고 있으며 음절의 길이보다 강세에 역점을 둔 무운시가 쓰이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햄릿 Hamlet〉·〈리어 왕 King Lear〉·〈오셀로 Othello〉·〈맥베스 Macbeth〉·〈겨울이야기 The Winter's Tale〉 같은 후기 희곡에서 구사한 시적 표현은 매우 유연하며 운율있는 대사를 이용해서 미묘한 인간의 기쁨, 슬픔과 당혹감 등 미묘한 감정들을 잘 전달하고 있다(영국 문학). 무운시는 어느 정도 퇴조하는 듯했으나, 밀턴의 〈실락원 Paradise Lost〉(1667)에서 다시 한번 그 매력을 발산했다. 밀턴의 무운시는 어순도치, 라틴어식 단어, 다양한 강세, 행 길이, 휴지, 서술적이며 극적인 효과를 얻기 위한 단락나누기 등 다양한 기교를 구사하여 지적으로 복잡하면서도 유연성이 있다. 18세기에는 제임스 톰슨이 묘사적인 장시(長詩) 〈4계절 The Seasons〉에서 무운시를 썼으며, 에드워드 영은 〈야상(夜想) Night Thoughts〉에서 힘과 정열에 넘치는 무운시를 썼다. 또한 워즈워스는 무운시로 시 정신에 대한 일종의 자서전 〈서시(序詩) The Prelude〉(완성 1805, 출판 1850)를 썼다. 셸리는 극 〈센시 The Cenci〉(1819)에서, 키츠는 〈하이피리언 Hyperion〉(1820)에서 무운시를 구사했다. 무운시는 셰익스피어의 감정이 고양된 비극에서부터 로버트 프로스트의 〈이성의 가면 A Masque of Reason〉(1945)에 나오는 가라앉은 회화체 어조에 걸쳐 매우 융통성있게 쓰였다. 오늘날 무운시는 현대인을 과거와 이어주는 운율로서 현대인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 쓰인다. 독일극에서 무운시는 고트홀트 레싱의 〈현자 나탄 Nathan der Weise〉(1779)에서 탁월하게 구사되었으며, 괴테·실러·게르하르트·하우프트만의 작품에서도 쓰였다. 그밖에 스위스·러시아·폴란드의 극시에서도 널리 쓰였다(독일문학).
434    시인은 자기자신만의 시론으로 시창작에 림하면 행복하다... 댓글:  조회:1983  추천:0  2017-04-30
나 호 열  고통의 극단에 처해 있을 때 평범한 생활이 ‘위대한’ 평범한 생활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 박찬일, 시집『모자나무』 6 아포리즘 기타 중에서  자신의 시론을 가지고 있는 시인은 행복할 것이다. 이 말은 어떤 시인들은 자신의 시론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함축하고 있다. 시의 경향이 다르고 시를 다루는 기법이 다른 까닭은 시의 정의와, 더 나아가서 시의 핵심인 언어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시의 정의가 다양하고 언어의 쓰임새에 대한 시인의 태도가 여러 갈래인 까닭에 작품의 좋고 나쁨을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좋은 시, 훌륭한 시가 존재하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뚜렷한 시론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얼마든지 우리는 좋은 시, 훌륭한 시를 생산해 낼 수 있다. 시인 앞에 주어진 오브제를 직관적으로 통찰할 때 빚어지는 찰라의 아름다움을 붙잡을 수도 있고, 시인이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이미지를 선연하게 그려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에 시인은 대상이 자신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만일, 대상이 시인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오게 될까? 詩心이나 詩興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술을 마시거나 음악을 듣거나 여행을 할 것인가? 노련한 낚시꾼은 이무 곳에나 낚싯대를 드리우지 않는다. 자신이 잡고자 하는 어종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서 미끼를 선택한다. 시인에게 있어서 시론이란 그런 것이다. 한없이 미끄러져 나가는 이미지와 메시지를 붙잡기 위해서 詩作의 목적과 효용성을 분명히 자각하는 것과, 이미지와 메시지를 포획하기 위한 그물, 즉 언어의 쓰임새를 확고하게 다지는 것이다.  창작에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시론이 없어도 사물과 현상에 대한 직관력만으로도 훌륭한 시를 생산해 낼 수 있다. 약관의 나이에도 세계의 보이지 않는 구조를 꿰뚫어보고 살아보지 않은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 언어의 쓰임새를 궁구하지 않았어도 呪術과 念力으로 獅子吼를 토해낼 수가 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의 작품 세계는 얼마든지, 충분하게 논리적으로 설명되거나 이해될 수 있다. 논리적 설명이나 이해의 근저에는 시인의 고정되어 있으나 투명한 詩眼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세상 만물을 바라보되, 투명하고 명확하게 초점을 맞추는 것, 그것을 詩論이라 이른다면 너무 억지를 부리는 것인가?  생각을 뒤집어 놓고 보면 확고한 레이더 (시안이나 시론이라 불러도 좋다)를 장착하고 그 레이더에 포착된 관념을 형상화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당장은 주목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자신의 시론을 정립해 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시를 쓰는 것이 배설과 타인에 대한 훈도의 목적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인격을 가다듬고, 혼탁한 세상을 맑게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나만의 시론을 가지고 있는가? 이미 자신의 시론을 가지고서 창작에 임하는 시인들은 행복할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자신의 시론을 가지지 못한 시인들이 불행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난 후에, 나는 나의 시론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이야기할 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지금은 나의 시론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으며 따라서 시인으로서 행복한 지 아닌 지 불명확한 상태라고 해야겠다. 오늘날의 시인들은 과거의 시인들에 비해서 높은 대접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 先知者의 역할도, 세상과 삶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증언하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시와 시인의 역할은 다양한 표현 매체의 출현으로 계속 축소되어가고 있으며, 이 추세대로라면 가까운 미래에 문학이라는 장르가 소멸해버릴 것이라는 불길한 전망 앞에 놓여 있는 처지를 놓고 보면 나는 분명 불행한 자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요인 말고도 더 불행한 사태는 시인이 지니고 있는 비극적 성향에 기인한다. 예술의 숙명이 그러하지만, 시도 평온한 일상의 뒷면을 들춰보거나 평범 속에 가리워진 불안을 노래하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아름다운 꽃’ 이나 ‘노래하는 새’를 부정하고 ‘꽃이 피는 이유’와 목청을 돋우는 새의 ‘신호 해독’에 더 눈길을 준다. 갈수록 부조리해지고 해체되어 가고 있는 세계에서 시인인 ‘나’는 불안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증언해야 하는 억압에 시달린다. 나의 시 「벚꽃 축제」에서 벚꽃이 떨어지면서 생화임을 주장하는 까닭은 이 세상이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造花’가 판치는 세계임을 증언하는 것이며,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고/ 나는 그 끝마저도 / 뛰어넘고 싶다” -시 「아침에 전해준 새소리 부분」 -처럼 일차적인 새의 지저귐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모든 생명은 ‘울부짖음’을 내포하고 있다는 자각을 증언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게 되기 때문이다. ‘否定’과 낯설음‘을 통과하지 않은 시들은 그 절실함에서 격이 떨어진다. 부정을 통한, 부정을 넘어서고 난 후의 평화와 안락을 노래하는 시는 시인과 더불어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섣부른 달관과 자연에 대한 찬미는 시의 한 덕목인 眞正性과 ‘상상력의 총화’를 놓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 시대는 분명히 이 시대만이 가지고 있는 傾向性을 지니고 있다. 시인들은 분명히 이 경향성과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경향에 편입되거나 끝까지 자신의 주관과 시대의 흐름과 길항하는 것, 그 모두가 시인에게 주어진 싸움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내가 나의 삶을 타인에게 맡길 수 없듯이 내 삶의 증언을 타인에게 맡길 수는 없는 까닭에 아무리 사소하고 버려질 만한 것이라도 나의 삶을 증명하고 반성하는 도구로서 시는 충분히 불행해져야 할 것으로 믿는다. -------------------------------------------------------------------------------------   주유소 / 윤성택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 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길을 떠나야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 1972년 충남 보령 출생 200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 [감상] 마지막 구절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는  구절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시인은 본질적으로 사랑은 휘발성이라고 믿는다 휘발유와 첫사랑의 공통점은 쉬이 닳아 없어진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진한 흔적이 남는다. 라이터 없이도 폭발할 수 있었던 불온한 사랑도 한 시절이 지나고 나면 귀 닳은 편지봉투처럼 시들해지게 마련이고, 뜨거운 열정이 휘발(揮發)하고 나면 남는 것은 추억이거나 혹은 불면의 가슴앓이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먼 길을 떠나는 중이다. 저 모퉁이를 지나노라면 우회로에  몇 개쯤의 주유소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추억은 늘 가슴 아픈 법이다. [양현근]      
433    시의 정신활동은 가장 중요하게 통찰력과 상상력 이다... 댓글:  조회:2257  추천:0  2017-04-30
시창작과 비평 오세영 (시인,서울대 교수) 한 시인이 작품을 이루어내는 전체 과정은 크게 두 가지 국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나는 원칙적인 측면이요 다를 하나는 실현적인 측면이다.  전자는 생의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시의 영감을 솟구치게 하는 정신의 어떤 샘물에, 후자는 그것에 가시적으로 형상화시킨 구체적인 언어 형식, 즉 쟁반에 오른 한 그릇의 물에 비유될 수 있다. 시 창작이란 원천에서 솟구쳐오르는 이 시의 샘물을 하나의 정교한 그릇 ㅡ 클리언즈 부룩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청자 항아리"에 담아 식탁에 내놓는 과정이다.  여기서 "원천의 솟구쳐 오르는 샘물"이란 그것을 영감이라 부르든 혹은 포에지라 부르든 언어화되기 이전의 어떤 정신적인 상태를 "그릇에 담겨진 샘물"이란 언어화된 작품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제3의 단계가 있다.  그것은 자연의 상태인 샘물을 떠 그릇에 담고자 하는 충동 ㅡ 그러니까 갈증에 대한 인지와 그것을 해갈하고자 하는 행위이다.  아무리 신선하고 맑은 샘물일지라도 그릇에 담겨지지 않는다면 한낱 무위 자연의 일부,의미 없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 까닭이다.  샘물이 하나의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은 갈증을 느낀 사람이 식수로 인식, 그것을 마시려 드 는 순간이다.  이때 자연의 일부로서 땅 밑에서 솟는 샘물은 비로소 식수라는 의미를 지니며 이러한 의미화는 구체적으로 그릇에 물을 뜨는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물을 먹는 과정은 ① 자연 상태의 샘솟는 물, ② 갈증의 인식과 그 해갈의 충동, ③ 그릇에 담긴 물의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시 창작 역시 마찬가지이다.  편의상 이 세 단계를 나는 ① 시의 원천, ② 시의식, ③ 시적 형상화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해 보기로 한다.  여기서 ① 이 시 창작의 원천적인 측면에 해당한다면 ③ 은 실현적인 측면에 ② 는 의미화의 측면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① 우선 시의 원천의 경우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아무 곳이나 땅을 파서 물을 얻을 수 없는 것 처럼 시의 원천 역시 아무 사람이나 지니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분명 선천적으로 시의 원천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후자에 속하는 사람의 경우는 아마도 훌륭한 시인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전혀 시를 쓸 수 없다는 뜻이 물론 아니다.  누구나 시는 쓸수 있고 시를 쓰는 사람을 편의상 우리가 시인이라 칭한다면 아무나 또한 시인이 될 수는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의 원천을 지니고 있지 못하는 사람은 다만 훌륭한 시를 쓰기 어렵다는 것이다. 문학을 동류의 것으로 비교할 수는 없겠으나 우리는 그것을 음악이나 미술의 경우에 대비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누구나 한 곡조쯤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그것은 심지어 음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노래를 부를 줄 안다는 그 사실 하나로서 그를 '가수'라 하지 않는다.  누구나 종이에 그림을 그릴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를 '미술가'로 부르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누구나 시를 쓸 수는 있다.  그러나 전문적인 시인, 혹은 훌륭한 시인이 되기 위하여 하나의 조건으로써 풍요롭고 심원한 시의 원천을 생리적으로 가진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둘째, 시의 원천을 지녔다 하더라도 지닌 그 자체로서는 별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계발하지 않고서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수맥 그 자체가 샘물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하나의 실용적인 샘물을 얻기 위해서는 땅을 파 수맥의 물꼬를 트고 이로써 물이 솟아오르도록 해야 한다.  시 원천의 경우 이것은 시인의 후천적인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질 터이다.  그렇다면 시의 원천은 어떻게 계발할 수 있을 것인가.  매우 상식적이지만 그 해답은 아주 간단하다.  즉 좋은 저서를 두루 읽고, 인생의 많은 체험을 쌓아야 하며,깊이 있는 사색을 즐겨야 한다는 점이다.  독서란 그것이 좋은 내용의 책이든 나쁜 내용의 책이든 많이 하면 할수록 좋다.  좋은 책에서는 좋은 내용을 받아들이고 나쁜 책에선 비판적인 내용을 받아들이면 그뿐이다.  혹자는 나쁜 책은 나쁜 영향을 주니까 읽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그런 소아병을 앓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애초부터 훌륭한 시인이 될 자질이 없으므로 예외에 속한다. 여기서 한 가지 전제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독서는 인류의 보편적인 진실을 담은 저서를 우선 기초로 삼아서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보편적 진실의 독서를 통해 어느 정도 내적 세계가 확충된 연후에 개별적이고 특수하고 전문적인 내용의 저서를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만 정신의 편견이나 불구성을 모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인류의 보편적인 진실을 담은 저서'를 구체적으로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다.  다만 상식적인 차원에서 우리들이 흔히'고전(classic)' 혹은 '세계문학(world literature)'이라 부르는 것은 이범주에 속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시인이 되기 위하여 꼭 읽어야 할 저서는 위대한 종교의 경전들이다.  기독교의 「성서」, 불교의 여러 경전, 이슬람의「코란」그리고 종교의 경전이라 할 수는 없으나 사서삼경, 우리의 「삼국유사」등을 들 수 있다. 시의 원천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인생체험과 깊이 있는 사색 또는 독서 못지 않게 중요하다.  우선 체험은 그것이 기억으로 남아 있든 혹은 무의식의 세계에 참전해 있든 시인의 내면 세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쓰면서 우연히 구사하는 한 개이 단어, 하나의 에피소드는 사실 그의 과거체험이 무의식 속에 용해되어 있다가 그의 독서체험과 어울려 상상력의 힘으로 토로된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평소에 시인이 깊이 있는 사고와 묵상에 자주 드는 것은 더 바랄 나위가 없다.  시인은 사색을 통해 독서 및 체험에서 얻어진 가치들을 정리 체계화하고 자신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정립하며 시작의 힘이라 할 상상력을 풍부하게 발양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의 원천에 대한 이 같은 정기적이고도 근원적인 계발이 없이 단기적인 학습이나 글 쓰기 훈련 따위로 시 창작의 효과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용하다.  그것은 마치 위암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에게 영양제를 투약하는 행위와 진배 없다. ② 시 의식의 경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날카로운 관찰과 상상력이다.  관찰은 다시 통찰(insgt)과 깨우침(realizing)으로 나누어 살펴볼수 있다.  우선 통찰은 넓은 의미의 관찰(observation)과 혼동하기 쉽지만 전혀 다른 정신행위이다.  관찰이 대상, 즉 개관의 외면 혹은 현상을 주시하는 정신 행위라 한다면 통찰은 이와 달리 대상의 내면 혹은 실재를 들여다보는 행위이고 관찰이 대상을 분석하여 전체를 구성하는 각 부분의 유기적 관계성을 토대로 사물을 이해하려는 행위인 것과 달리 통찰은 대상을 처음부터 전체로 인식하는 행위인 까닭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관찰은 객관적이지만 통찰은 주관적이다. 한편 관찰은 이성을 통해, 통찰은 직관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전자가 우리의 인식대상에 어떤 이해 즉 철학적으로 '오성(understanding)'이라부르는 것을 가져온다면 후자는 어떤 깨우침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우리 즉 주체는 대상 혹은 개관을 만나거나 수용함에 있어 두 가지의 정신 경로를 활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관찰을 통해서 이성으로 대상의 객관적 의미 즉 외면을 이해하는 행위이며 다른 하나는 통찰을 통해서 직관으로 대상의 주관적 의미 즉 그 실제를 깨우치는 행위이다.  우리는 전자의 정신활동을 과학이라 부르고 후자의 정신활동은 문학(혹은 종교)이라 부른다.  과학은 인문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이성에 의하여 사물의 어떤 보편적이고도 논리적인 법칙을 찾아내지만 문학은 직관에 의하여 어떤 총체적이고도 모순된 삶의 진실을 깨우친다.  여기서 문학은 사물 혹은 인생을 단지 이해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것을 넘 어서 어떤 인생론적 진실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정신활동의 구분은 기본적으로 문학이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직관의 산물이며 세계를 객관적으로 대면하려 하기보다는 주관적으로 대면하려 하며 대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통해 무엇인가를 깨달으려 하는 행위임을 말해 준다.  어떤사물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다만 이성에 의해 논리적으로 이해되는데서 끝난다면 우리는 굳이 그것을 직관적인 깨달음으로까지 끌고나아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분명 거기에서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은부분이 있다.  예컨대 어떤 등산가가 벼랑을 타기 위해 막 집을 나서는 아침 하필 등산화의 구두끈이 뚝 끊어졌고 이를 불길한 징조로 생각한 그가 그날의 등산 일정을 취소했다고 하자.  이때 구두끈이 끊어진 사태를 이성적으로 판단할 경우 오래되어 삭은 구두끈이 평소보다 한 켤레 더 겹쳐 신은 양말의 압력에 견디지 못해 일어난 것이라고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  이는 관찰을 통해 이성으로 구두끈의 객관적인 의미를 '이해'한 데서 오는 진실이다.  그리고 물론 이러한 이해는 과학적 관점에서 의문의 여지 없이 옳다.  그러나 그 옳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시적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시는 과학적 판단이나 이해에는 관심이 없고 그 너머에 있는 어떤 직곽적인 진실을 추구하는 행위라는 점, 그리고 만일 위와 같은 진실(삭은 구두 끈과 겹쳐 신은 양말의 압력)의 발견을 시라고 한다면 과학과 시의 구분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는 점 때문이다. 위의 사태에는 과학적 관찰과 이성적 판단으로 충분히 설명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해명되지 않은 문제가 하나 남는다.  그 등산가가 왜 구두끈이 끊어진 일을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여 그날의 등산 일정을 취소했느냐 하는 점이다.  과학적 차원에서 볼 때 구두끈이 끊어진 것은 끈이 삭고 또 평소보다 두꺼운 양말을 신은 탓이므로 그가 새 줄로 갈아 매거나 새 등산화로 바꿔 신으면 등산에 아무 지장이 없을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불길한 징조로로 해석하여 그날의 등산 일정을 취소하였다.  따라서 여기에는 과학적 관찰이나 해명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진실이 내재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즉 구두끈이 끊어진 사태에는 과학적 진실만이 아니라 그 과학적 진실과는 어떤 다른 진실이 혼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후자의 진싱은 논리적인 것도 아니며 이성적인 판단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진실인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시적 진실이라 부른다.  그래도 여전히 시적 진실과 같이 모순을 내포한 직관적인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일컫는 바'진리'란 기준을 과학에 둔 '진리'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학이 아닌 이와 같은 '어떤 다른 진실' 즉 시적 진실을 여전히 진실이라 부르는 것은 그 역시 과학 못지 않게 인간의 삶에 영향을주기 때문이다.  앞서의 예에서도 등산가는 과학이 아닌 '어떤 다른진실'로 인해 그날의 등산 일정을 취소하였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그것은 한 인간 혹은 전체 인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가령 황야에서 벼락을 만난 한 악한이 그 공포의 체험으로 인해 선한 사람으로 거듭났다면 이때의 벼락은 단지 대기중의 전류방전이라는 과학적 진실 이상의 보다 더 중요한 인생론적 진실을 지닌다. 그러므로 여기서 내가 시가 될 수 있는 '어떤 다른 진실'이라 부르는것은 '진실'이 아님이 아니라 과학적 진실과 그 종류에 있어서 다를뿐 그 역시 인생에 중요한 진실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과학에 기준을 둔 과학적 진리 외에 시에 기준을 둔 비과학적 진리도 있다는 사실에 동의해야 한다. 결국 이 세계에는 이성의 작용으로 이해되는 논리적, 합리적, 객관적 진리가 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직관으로 깨닫는 모순되고 비합리적이며 주관적인 진리가 있다.  이 후자는 모순을 본질로 하고 있는까닭에 '관찰'로는 발견하기 어렵고 오직 '통찰'에 의해서만 도달될수 있는 진리이다.  시 창작의 과정에서 통찰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있는 것이다.  앞의 예에서도 등산가가 그날의 등산 일정을 취소했던것은 이성의 판단에 따른 분석적 사고의 결과에서 얻어진 판단이 아니라 직관적인 어떤 깨달음, 즉 통찰의 결과에서 기인하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누구나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이 세계 혹은 사물이 지닌 과학적 진실이 아니라 비과학적 진실, 즉 모순되고 불합리하지만 총체적이면서 인생론적인 진실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앞의 에피소드를 시로 쓰고자 할 때 "등산화의 끈이 끊긴 것은 삭은 끈에 가해진 두꺼운 양말의 압력 때문이었다'라고 쓴다면 시가될 수 없지만 '등산화의 끈긴 것은 벼랑에서의 추락을 예고한 것이다"라고 쓴다면 최소한 시가 될 가능성이 있다. 시 창작이나 시 독서에서 통찰보다도 오히려 더 중요한 정신활동은 상상력이다.  시인은 우선 세계 혹은 대상을 통찰로써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시인이 대상이나 세계를 통찰하여 깨우친 진실은 비록 날카롭고 심오하다고 할지라도 아직은 철학적 단상이나 추상적 사고이상이 될 수 없다.  그리하여 시인은 다음 단계로 그것을 구체화하고발전시켜 하나의 형태 혹은 감각적인지가 가능한 상태로 만들고자한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발휘하는 것이 상상력이다. 그러므로 상상력이란 통찰에서 얻어진 시적 진실을 구체화하고 체계화하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단계에서도 순수한 사고는 필요하다.  그러나 상상력이 보다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상상력은 간단히 논리를 초월한 사고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것은 극적으로 모순의 사고에 다다르기도 한다.  따라서 상상력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즉 단순한 사고와 구분된다.  가령 "꽃밭에 장미꽃 한 송이가 피어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순수한 사고를 표현한것이다.  그러나 "꽃밭에는 장미 한 그루가 등불을 밝히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상상력의 표현이다. 이때 '장미꽃'은 '등불'로 환치되고 있는 이는 사실에 근거를 둔 논리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 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된 자가 처음 된다" 혹은 "나는 님을 보냈지만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와 같은 경지의 '모순의 사고'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훌륭한 상상력은 모순의 사고 속에 어떤 심오한 진리를 지닌 것이다. 상상력은 또한 유추, 연상, 환상 등과 구분된다. 유추란 한 사물이 다른 사물과 총체적이고도 논리적으로 대응될 때 이루어지는 사유체계이다.  예컨대 카메라와 인간의 눈은 유추의 관계에 있다.  그것은 인간의 수정체가 렌즈에, 각막이 조리개에, 눈거풀이 뚜껑에, 망막이 필름에 각각 논리적으로 대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카메라의 원리를잘 모르는 사람에겐 자신의 눈을 대배시켜 설명한다면 그는 쉽게 카 메라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상상력은 연상과 부분된다. 연상은 유추처럼 한 사물의 전체가 다른 사물의 전체와 논리적으로 대응되지는 않지만 어떤 부분이나 특징 특히 기억의 유사성에서 기인하여 건너뛰는 사유체계이다.  가령 붉은 색의 깃발을 보자 피를 생각하고 형님을 생각하자 고향의 추억을 생각하는 따위이다. 전체적으로 대응되지는 않지만 붉은 색과 피의 색은 유사하고 피를 흘리는 행위와 전쟁의 살육은 유사하며 어린시절의 형과 자신과는 고향이라는 기억에서 결합되기 때문이다.  환상은 백일몽에 가까운 것으로 무책임한 사유를 의미한다.  환상은 대상으로부터 그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자유로운 상상이다.  달리 말하여 환상이란 인식의 대상이 없는 주관홀로의 사고 유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연의 느낌만이 산만하게제시될 뿐이다. 이에 대하여 상상력은 최소한 대상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환상과, 유사성을 넘어 직관적으로 대상에 틈입한다는 점에서 연상과 각각 구분될 수 있다.  그리고 대상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논리적으로 전체와 대응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또한 유추와 다르다.  그러나 상상력에 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성적인 논리가 아닌 감성의 논리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환상에서는 이 감성의논리조차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통찰과 상상력은 기본적으로 시의 원천에서 길러진 것들이다.  그러므로 시의 원천을 계발하는 수고를 멀리하고 통찰과 상상력을 행사하려는 것은 마치 사료를 먹이지 않은 소에서 젖을 짜려는 행위에다름이 없다. ③, ②의 단계를 성공리에 마친 시인은 이미 그 사고 속에 한 편의 시가 마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것을 실제로 언어화하여 원고에 기술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시적 형상화의 단계라 부르는 것에서의 작업이다.  그런데 이 단계는 다시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진다. 하는 언어의 외면적 측면이요 다른 하나는 언어의 내면적 측면이다.  우선 전자부터 살펴볼 경우 시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운율을 가져야 한다.  현대시는 그 이전과 달리 외형적인 율격이 없는 소위 자유시형으로 쓰여져서 언뜻 운율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대시도 비록 어떤 법칙으로 정해진 소위 정형률은 아니라 하더라도 나름대로 미묘한 내재율을 가지지 않고서는 결코 훌륭한 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재율이란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시인의 언어적인 감수성과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리하여 우리로서는 다만 그와 같은 언어의 음악적 감수성을 천부적으로 갖고 태어난 시인이라면 더 바랄 바 없겠으나 그렇지 않은 시인의 경우는 후천적으로 이를 꾸준히 연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 연마의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좋은 시들을 가능한 많이 읽고, 가능한 많이 낭독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음악을 감상하는것이다. 그래도 터득이 안 된다면 그는 시인이 될 자질이 없는 사람이므로 시를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언어의 내면적인 측면은 보다 복잡한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이 좁은 지면에서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다.  아마도 이에 해당하는 문제들을 기술한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편의상 '시론'이라는 이름의 저서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상식적인 차원에서 그 원리적인 것만을 간단히 지적한다면 시의 언어화에 필수적인 것은 이미지, 은유, 상징,신화 등에 의한 표현과 아이러니나 역설의 구조라는 점이다.  명백히 말할 수 있거니와 이상의 언어화를 표현되지 않은 어떤 진술도 시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산문과 구분되지 않기 때문인데 우리는 산문과 구분되지 않은 진술을 시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 언어의 내면적인 특징이 이처럼 이미지, 은유, 상징, 신화, 아이러니, 역설로 되어야만 하는 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과학적 진리와 다른 시적 진리란 일상적 의미의 논리를 벗어나 그 자체가 모순되거나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 산문처럼 논리적이거나 직설적인 어법으로는 그 표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이미지, 은유, 상징, 신화, 아이러니, 역설 등은 비과학적 진실 그러니까 시적 진실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어법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시인은 항상 참신하고 의미 있고 창조적인 이미지나 은유 혹은 상징, 신화 등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능력의 계발 역시 많은 독서와 체험과 사색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제 한 편의 졸시를 인용해 보겠다.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가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땅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는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썩 한 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런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① 위 시의 원천에 관한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실제 시작과는구체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도 의식을 못하고 있지만 과거의 나의 독서나 체험이나 사색이 내 의식의 밑바닥에 이 시를 쓸 수 있는 어떤 침전물들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② 시 의식의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정신활동은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통찰과 상상력이었다.  이 작품에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자기 희생으로서의 사랑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물론 내 자신의 독창적인 것도 아니요 새롭고 참신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생각 자체가 대단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문학작품 역시 마찬가지이다. 문학작품은 무슨 새로운 철학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사상이나 철학을 독자들에게 감동시켜 그로 하여금 생의 가치 있는 질적 변화를 가져 오게 하는 언어행위일 뿐이다. 그런데 이 '자기희생으로서의 사랑의 정신'이 시가 될 수 있었던것은 어느 날 내가 그것을 능금을 먹다가 깨달았던 데 있다. 왜냐하면 이 평범하면서도 상식적인 진리는 능금을 매개로 해서 비로소 관념적인 지식으로부터 벗어나 감각적인 구체성을 띠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관념적인 상태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단지 철학적 단상 이상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어떤 사보의 기사에서 돌아가신 우장춘 박사가 사각형의 수박을 개발했다는 글을 읽고 무언가 흥미를 느끼고 있었던 터였는데 마침 그때 딸 아이가 쟁반에 능금 몇 개를 가지고 왔던 것이다.  둥근 쟁반에 담긴 그 둥근 능금들을 보자 나는 문득 왜 열매들은 둥근 것일까 하는 궁금증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차례로 둥글다는 것은 곧 원이며 불교에서는 자비의 상징이라는 것과 열매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육체를 아낌없이 바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통찰이었다.  한 개의 능금 과실로부터 모든 열매는 둥글고 또 모든 둥근 것이니라 ㅡ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능금이 지닌 이 같은 진실 즉 자기희생이 사랑이라는 진실은 과학적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능금 나무가 지닌 과학적 진실은 "능금나무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의 작은 교목, 잎은 타원형 또는 긴 타원형임, 4~5월에 흰 꽃이 방사형으로 피고 거의 구형의 이과는 7~8월에 홍색 또는 황갈색으로 익음 "(이희승, 『국어사전』)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단순한 깨달음만으로 시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을보다 발전시키고 완전한 형태의 구체성으로 체계화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요구되는 것이 상상력의 작용이다. 그리하여 우선 나는 열매와 대립되는 사물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자 원에 대립되는 기하학적 모형은 직선이라는 것, 직선은 원과 달리 둥글지 않고 날카로운 모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의 자각에 이렀다.  그리고 나의생각은 다른 한편, 원의 상징이 열매라면 직선의 상징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으로 발전하여 갔다.  물론 쇠창살이나 젓가락이나 텔레비전안테나 따위의 사물들도 직선의 상징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소재인 능금의 전체 의미망으로서는 적합한 것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쇠창살이나 젓가락이나 텔레비전의 안테나는 인식 대상인 능금과 아무 관련 없는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인식 대상으로서 능금과 관련 있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드디어 나뭇가지와 뿌리, 가시라는 직선의 상징들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뿌리와 가지는 안테나나 젓가락, 쇠창살 등과달리 능금 열매가 거느리고 있는 사물이라는 점에서 무책임한 사고인 환상과 달리 상상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열매 : 가지(뿌리), 원: 직선의 대립된 상상체계가 성립하자 그것은 곧 이차적인 상상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열매에서 연유하여 먹히는 자와 먹는 자가 지닌 대립 체계이다.  그리하여 전체 상상력의 구도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원 : 둥근 것, 열매, 먹히는 자, 부드러운 살, 스스로의 소멸(헌신)=사랑 직선 : 모난 것, 가지(가시 ·뿌리), 먹는 자, 이빨, 타자에 대한 공격(수탈)=증오 그러나 마지막 한 가지 남는 문제가 있다.  이와 같이 대응되는 상상의 체계를 어떻게 종합시켜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소재적 측면과 상상력의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우선 전자의 경우이 모든 소재의 동원은 결국 과실나무와 그 과실을 먹는 행위에 관련된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후자의 경우는 시인의 또다른 통찰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것은 누구에겐가 먹혀진 과실만 그 씨앗의 파종으로 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진실의 발견이다. 이와 같은 역설적 인식을 통해 나는 사랑의 승리, 부드러운 것의 승리라는 도가적 인생관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③ 인용시의 형상화 단계는 앞에서 지적했던 원리 그대로 모든 시적 진술이 이미저리, 은유, 상징, 신화 등으로 표현되고 역설 및 아이러니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설명된다.  즉, 가시나무, 탱자, 땅, 하늘,이빨, 뿌리, 능금 등은 기본적으로 모두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은유, 상징의 언어이다.  그리고 과실이 땅에 떨어져야만 새싹을 움틔운다는 인식은 신약성서의 '포도나무' 비유에 조응된다는 점에서 '신화'를 반영한 것이다.  한편으로 '열매란 누구에겐가 먹혀야만 새 생명을 얻는다는 인식'은 바로 그 자체가 역설 혹은 아이러니로서의 진실이다.  시의 상상력의 전개 역시 이와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   금강경을 읽는 오월   정동철     동근 입을 옴죽거려 황금빛 씨 한 알을 톡 세상에다 뱉는다   저 씨 자라나 초록 가지 끝에 청동으로 만든 입술을 달았다   봄바람에 잠을 이루지 못한 입들이 쉴 새 없이 종알댄다 중얼중얼 오월 하늘에 독경을 한다   나도 마음속의 당나귀 귀가 가려워 깊은 잠 못 이룰 지경이니   바람아 감나무 좀 건드리지 말고 가만 좀 있거라   - 정동철 시집 『나타났다』 (2016, 모악출판사)에서        1967년 전북 전주 출생 전북대학교 졸업 2006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집 『나타났다』 등 2014년 작가의 눈 작품상 수상    
432    시를 배울 때 이전에 배운 지식들을 다 버리시ㅠ... 댓글:  조회:2170  추천:0  2017-04-30
  1. 시를 쓰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詩를 쓰겠다고 찾아오는 분들을 만나면,  "왜 시를 쓰려고 하십니까?" 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제일 먼저 던집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왜 시를 쓰려고 하십니까?" 詩人이 되시려고요? 그냥 시가 좋아서요?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어떤 대답이든 좋습니다. 정답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분명히  한 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 말씀입니다. "詩人이 되기 위해서 시를 쓰지는 마십시오."라는  것입니다.  시인이 뭐 그리 대단한 존재라고 시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냥 시가 좋아서 열심히 시를 짓고 공부하며 노력하다가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인은  되어지는 것입니다. 생활인보다 더 나은, 더 아름다운 존재는 없습니다. 먼저 생활인이 되십시오  그리고 사람의 삶을 사십시오. 그것이 시인되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왜냐고요?  사람의 삶을 사는 생활인이어야만 진실한 시를 지을 수 있고, 진실한 시만이 오랫동안 독자의 가슴에 감동을 주는 생명이 있는 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교만으로 쓰는 시는 어느 순간에는 독자를 속일 수 있어도 그것은 언어의 유희에 지나지 않으며 생명력이 없습니다.  많이 배워야 시를 지을 수 있고 시인이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진득한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시, 사람의 냄새가 나는 시, 그런 시를 쓰려면 먼저 사람이, 생활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시를 쓰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입니다.  2. 이제까지 배워 알고 있는 지식은 버리십시오.  해방 이후의 우리 나라 학교 교육은 모두 서구식 교육이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나 나나 모두 그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모든 면에서 합리적, 타산적, 이성적이게 되어 조직적이고, 통일성을 추구하고, 논리적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이제는 시를 공부하기 전에 버려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제까지 배운 것들을 해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해야만 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여러분들 가정에 유리로 된 맥주 컵 있지요? 내가 여러분들에게 그 컵을 들고 "이게 뭡니까?"라고 묻는다면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당연히 "맥주 컵", 아니면 "맥주 잔"이라고 대답하시겠지요. 다른 대답을 생각하신 분이 있다면 대단하신 분입니다. 아마 100이면 100 사람 거의 다 같은 대답을 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렇게 획일적인 교육을 받았고 그 고정 관념은 우리의 머리 속에 아주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그 고정 관념을 버리고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 봅시다. 그 유리컵은 유리라는 물질로 만들어진 용기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유리컵이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는 것입니다.  물을 부었다면 물 컵이 되고 막걸리를 부었다면 막걸리 잔이 되고 또 사이다나 콜라를 부었다면 음료수 잔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컵을 보면 맥주 컵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것이 교육에서 생활에서 비롯된 고정 관념 때문입니다. 그 고정 관념을 깨는 것이 교육받은 지식의 해체 작업입니다. 그리고 다시 나만의 눈으로 새롭게 대상을 보도록 하십시오.       ---------------------------------------------------------------------------------   희망촌 1길 ―임형신(1948∼ ) 은사시나무 포자가 눈처럼 날리는 언덕에 희망촌이 있다 상계4동 배수지 아래 철거민들이 모여들어 사십 년 넘게 희망을 먹고 산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골목마다 만신들의 깃발이 펄럭이고 그 옆에 엉거주춤 태극기도 붙들어 매져 있다 기울어진 담벼락에 나팔꽃 씩씩거리며 올라간다 사금파리에 찔린 청도라지 독기를 뿜고 웃자라는 한 뼘의 마당 대낮은 텅 비어 있다 무허가 봉제 공장 사라지고 교회가 들어섰다 목공소 있던 자리 단청 고운 절도 하나 들어앉아 서로 마주보며 희망 한 줌씩 나누어 준다 겨우살이풀처럼 늘어져 있는 할머니들 등 뒤 며느리밥풀꽃도 기웃거리고 만신들의 깃발이 휘청거린다 오늘 또 무엇이 들어와서 어떤 희망 한 줌 뿌리고 가려나      은빛 잎사귀들이 파르르 나부끼는 은사시나무 숲 아래에 작은 집들 올망졸망한 언덕. 버스 타고 지나가다 차창 너머로 보았다면 정감어린 동네라 느낄 수도 있을 테다. 어디서 보는가, 누가 보는가. 동네 내력을 잘 아는 이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골목’을 고샅고샅 걸으면서 보는 풍경은 척박하다.      ‘골목마다 만신들의 깃발이 펄럭이고 그 옆에 엉거주춤 태극기도 붙들어 매져 있다’, ‘무허가 봉제 공장 사라지고 교회가 들어섰다 목공소 있던 자리 단청 고운 절도 하나 들어앉아 서로 마주보며 희망 한 줌씩 나누어 준다’. 곤고하나마 생활을 꾸려 나가게 해주던 일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들어선 교회와 절. 세상에 기댈 데 없는 사람들, 더이상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아들 곳은 신의 가슴뿐이라는 걸까.  종종 종교는 무지와 절망을 먹고 크는 듯하다. ‘철거민들이 모여들어 사십 년 넘게 희망을 먹고 사는’ ‘희망촌 1길’. 동네나 집 이름에 ‘희망’ ‘햇살’ ‘별빛’ 같은 이름이 붙으면 슬프다. 실상은 그 정반대라는 역설을 보여주는, 어린이처럼 무구한 꿈을 실낱처럼 붙들고 있는 이름…. 주민들이 다른 동네로 밥벌이 나가 ‘대낮은/텅 비어 있’는 희망촌 1길, ‘은사시나무 포자가 눈처럼 날리’고 ‘만신들의 깃발이 휘청거린다’. 세밀하고 적확한 사실적 묘사로 현실과 풍경을 꿰어내는 시인의 힘!  
431    시를 공부하는 과정에는 "이미지"가 한 필수조건 이다... 댓글:  조회:2292  추천:0  2017-04-30
시와 이미지  하 재 영  오늘 이미지(Image)란 주제는 어쩌면 감당하기 힘든 내용이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미지는 모든 종류의 예술에 마치 한약방의 감초처럼 끼지 않으면 안될 용어입니다. 그림, 조각, 사진, 춤, 음악, 하물며 스포츠에서도 이미지는 작품성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독자, 청중들에게 전해지는, 그리하여 느끼게끔 하는 그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술을, 특히 시를 공부하는 한 과정에 필수조건으로 ‘이미지’가 들어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했기 때문에 커리큐럼 속에 ‘이미지’를 넣은 것 같습니다.  이미지에 대한 언어적 개념을 파악한 후, 시인은 시속에 이미지를 어떻게 담고 있으며, 여러분이 시를 쓸 때, 시의 이미지 처리를 어떻게 끌고 나가야 할 것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지를 사전적 의미로 파악해보자면 ‘형상. 영상 또는 마음속에 그리는 상. 심상’입니다. 즉 우리가 겪은 여러 체험의 관념이나 정서를 사물로 바꿔 보여주는 형태를 이미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원래 심리학의 용어로 ‘머리에 떠오른 것으로서 감각적 성질을 지닌 것’ 이라 정의되기도 했습니다.  문예사조의 한 분야에 반영된 이미지즘(Imagism) 은 제 1차 세계 대전 말기로부터 재래된 전통적 시풍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영국과 미국의 시인들이 일으킨 신시 모더니즘 운동을 말합니다. 시각적 효과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 그룹은 영상의 색채와 율동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애매한 일반 개념을 피하여 일상 적확한 용어로 새로운 운율을 창조하려 한 데에 특징이 있습니다. 문학의 갈래에서 이러한 작품을 쓴 사람들을 ‘이미지스트’라 말합니다.  좀 더 깊이 이야기하자면 이미지스트(Imagist)는 1912년 에즈라 파운드에 의해 형식화된 시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일단의 영미시인들을 일컫습니다. 당시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할 수 있는 감정의 표현을 최대한 작품에 반영하는, 즉 풍미했던 방만한 사고방식과 낭만주의적 낙관론에 반기를 든 T. E. 흄의 비판적 견해에 고무되어, 파운드 이외에도 동료 시인인 힐다 둘리틀, 리처드 알링턴, F.S.플린트 등이 이미지스트의 대표적 인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시인들의 특징은 정확한 시각적 이미지가 시적 표현의 전부를 이루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명료하고 딱딱한 형식의 간결한 시를 썼습니다. 이미지즘은 프랑스의 상징주의 운동을 이어받은 것이었으나, 상징주의가 음악과 유사성을 지닌 반면 이미지즘은 조각과의 유사성을 추구했습니다.  후일 이미지스트라 일컫는 알링턴(R.Aldington)이 쓰고 로우얼(Amy Lowell)이 수정한 ‘이미지즘 선언’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1. 일상어 사용, 수식적인 말은 사용하지 말 것  2. 새로운 창조의 표현으로써 새로운 리듬을 창조할 것. 새로운 운율은 새로운 사상을 추구.  3. 주제의 선택을 절대로 자유롭게 할 것.  4. 막연하고 보편적인 것을 사용하지 말고, 명확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것.  5. 조각같이 확고하고, 눈에 명백히 보이는 시를 지을 것  6. 긴축(집중)의 시가 정수임을 명심할 것.  여기서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이미지란 개념이 들어온 이후 이미지스트들에 의해 씌여지는 시는 어떤 것이 있나 짚어보고자 합니다. 우리 문학사에 김기림이라는 시인, 평론가가 있습니다.  1930년대 일본에서 신학문을 접한 이 시인에 의하면  『시인의 정신의 포즈는 대체로 세 가지로 가정할 수 있다.  1. 내 자신을 노려봄.  2. 나에게 반영된 세계를 굽어봄.  3. 나를 통하여 세계를 바라봄.  이미지스트 이전의 모든 유파와 시인의 정신적 포즈는 대체로 1의 것이었다. 이미지스트의 정신적 포즈는 제 2의 것이었다. 』  김기림의 시론 ‘시인의 정신의 포즈’에서  작품 한 편 감상하면서 우리는 이미지에 조금 더 접근토록 하겠습니다.  정한모의 ‘아가’란 시를 분석하기 위해 쓴 아래 평론을 통해 이미지에 대한 접근은 보다 용이해집니다.  『이미지가 한 시에 있어서 얼마나 큰 비중을 지니는가 하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쉽게 이미지스트라고 부를 만한 뛰어난 시인들(박남수,김광림같은)과 작품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미지 시론의 암시를 담은 시이며 대표적 시의 하나로 소개되는 흄의 ‘가을’을 읽을 때면 발언된 물상으로서가 아니라 시각적 상징에 머물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A touch of cold in the Autumn night - 가을밤의 싸늘한 감촉.  I walked abroad, 나는 밖을 걷고 있다.  And saw the ruddy moon lean over a hedge 불그스름한 달이 생나무 울타리에  Like a red-faced farmer. 기댄 것을 보았다.  I did not stop to speak, but wistful stars 벌건 얼굴을 한 농부와 같이  With white faces like town children 나는 멈춰서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무엇인가 바라는 것 같은 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도회지의 아이들처럼 흰 얼굴을 하고  이 시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달과 농부의 얼굴, 별과 도회지 아이들의 얼굴을 통해서 가을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미지의 강조로 해서 물상과 물상 사이의 다른 표현(어휘)을 제거하고 있다. 고전적 방법이나 이미지 제시를 위한 암시적 작품으로는 수작일지 모르나, 한 낱말이 이미 대화의 개념을 지니고 있다고 함으로써 설득되어질지는 모르나, 물상 그 자체로 머물 수밖에 없는 경우, 그 시인이 지닌 구술적 가치를 소흘히 하는 경우를 포함할 소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가을’과 같은 작품이다.』  - 김형필의 평론집 “현대시와 상징”의 ‘시인의 음성세계’에서  일반적인 이미지에 대한 윤곽을 우리는 우리 문학사에서 훑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현대, 우리 시인들의 시에 용해된, 시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는 어떤 것이 있는가 최근 우리 문학에 드러난 ‘이미지’ 용어를 몇 개 찾아보며 이미지에 대한 개념을 접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황동규의 초기 시는 인간의 절대를 향한 비극적인 자세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그것은 지극한 내면적 고뇌이며 따라서 그의 치열한 개인적 정서이고 쉽사리 포기하지 않고 그 비극과 대결하려는 지적 의지를 이룬다.  ……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 ‘즐거운 편지’  나는 갔었다. 너의 문 닫는 집으로/얼은 벽에 머리 부비고 선 사내에게로/너의 입가에서 웃음으로 바뀌는 너의 서 있는 자세에로 -‘얼음의 비밀’  ……당신이 나에게 바람 부는 강변을 보여주며는 나는 거기에서 얼마든지 쓰러지는 갈대의 자세를 보여주겠습니다. -‘기도’ 기다림, 기대서 있음, 쓰러짐과 같은 황동규의 몸짓은 삶의 외향, 의식의 바깥으로부터 자기를 폐쇄시켜 피할 수 없는 스스로의 내부와 치열한 씨름을 벌일 태세를 예비한다. 그것은 따라서 명징한 영혼의 부르짖음, 거의 운명적으로 치솟는 갈구, 그것에 대한 안타까운 사랑을 내포한다. 20대 초에 씌어진 그의 시들은 ‘겨울노래’ ‘겨울날 단장’ ‘얼음의 비밀’ ‘눈’과 같은, 그리고 ‘겨울밤 노래’와 같은 추위에 내맡긴 한밤을 노래했다는 것이 이와 깊이 관련을 맺는다. 얼음, 눈, 언 땅과 같은 이미지들은 어두운 밤의 이미지와 어울려 정신의 고통을, 그 고통과 대결하는 엄격한 정신을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은 이 추움과 어두움의 힘을 빌려 자신의 영혼을 채찍질하여 비극적인 정서를 극대화시킨다.』  -황동규의 시집 ‘삼남에 내리는 눈’ 김병익의 해설에서  『서울은 어디를 가도 간판이 /많다 4월의 개나리나 전경보다/더 많다 더러는 건물의 마빡이나 심장/한가운데 못으로 꽝꽝 박아놓고/ 더러는 문이란 문 모두가 간판이다/ 밥 한 그릇 먹기 위해서도 우리는/간판 밑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한다 소주 한잔을 마시기 위해서도 우리는/간판 밑으로 또는 간판의 두 다리 사이로/허리를 구부리고/들어가서는 사전에 배치해놓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 마빡에 달린 간판을/ 보기 위해서는 두 눈을 들어/우러러보아야 한다 간판이 있는 곳에는/무엇이 있다 간판이 있는 곳에는/무슨 일이 있다 좌와 우 앞과 뒤/ 무수한 간판이 그대를 기다리며 버젓이/가로로 누워서 세로로 서서 지켜보고 있다/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자세히/보라 간판이 많은 집은 수상하다  -‘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전문  자본주의적으로 기능화된 가장 첨예한 언어 양식인 광고 언어의 저 현란하고 감각적인 언어적 기교들, 그 매끄럽고 그윽한 상상력과 감수성들, 그 넘치는 쾌적과 안락과 풍요의 환상들. 그러한 언어들의 끊임없는 수사학에 의해, 우리는 그것들이 던져주는 따뜻하고 나른한 행복의 이미지들과 그 상품 자체를 동일시하는 매몰된 의식에 머물게 된다. 시인(오규원)은 이제 이러한 자본주의적 언어의 도구성을 폭로하는 데 주력한다. 』  - 오규원의 시집 ‘사랑의 감옥’ 이광호의 해설에서  『시인인 겸손하게 언급한 ‘조선시대 아낙들이 만든 조각보’의 시학이 첫시집에 이어서 여기서도 주도적 동기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빨강색,주홍색,노랑색,초록색,파랑색,자투리 헝겊을 모아 조각보를 만들 듯, 김영무 시인은 아름답고 참신한 이미지를 통하여 소박한 향토의 서정과 선인들의 지혜, 자연의 순리와 존재의 진상, 환경파괴의 현실과 공동체적 삶의 회복을 노래한다. 이러한 노래의 말과 가락은 그러나 우리의 상투적 기대를 벗어나고 있다.  파란불이 켜졌다./꽃무늬 실크 미니스커트에 선글라스 끼고/횡단보도 흑백 건반 탕탕 퉁기며/오월이 종종걸음으로 건너오면//아,천지사방 출렁이는/금빛 노래 초록 물결/누에들 뽕잎 먹는 소낙비 소리/또 다른 고향 강변에 잉어가 뛴다 - 「아,오월」전문』  -김영무의 시집 ‘산은 새소리마저 쌓아두지 않는구나’ 김광규의 해설에서 우리는 시를 통해, 시에서 해설한 평론가들의 말을 통해 이미지의 의미를 느낌(feeling)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미지란 결국 시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형상 또는 의미라 여길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미지’는 흔쾌히 모든 단어 아래, 상상력과 결부시켜 쓸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존 러스킨(John Ruskin)은 이미지와 관련 맺어 상상력을 직관적 상상력,연합적 상상력, 정관적 상상력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상상의 결과가 언어로써 나타나는 것이 이미지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이미지를 복수의 개념으로 몇 가지로 구분해 보면  첫째, 외부의 사물에 대한 체험을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지각할 수 있는 사물의 상을 감각적 ‘이미저리’라 이야기 합니다. 여기에는  시각적 이미지 - 현대시는 전달이 아닌 구체적 드러냄을 시의 본질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가장 많이 의지하는 시각적 활동(사물의 형태, 빛깔, 대소 등)에 그 의미를 두는 시각적 이미지는 시에 있어 대표적 이미지라 할 수 있습니다.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김광균,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정한모 등  청각적 이미지 - 소리(동물 웃음, 울음, 무생물 부딪치는 소리 -의성어 등)  후각적 이미지 - 냄새(상긋함, 향긋함, 달콤함, 커피향 등)  미각적 이미지 - 맛 (단맛, 쓴맛, 소금맛 등)  촉각적 이미지 - 부드러움,  둘째, 내용면에서  정신적 이미지 - 시각적, 청각적, 미각적 등의 것이 다 포함되며  비유적 이미지 - 제유, 환유, 직유, 은유 등  상징적 이미지 - 상징  심리적 이미지 - 외로움이나 마음의 한 상태를 상상의 세계 속에서 언어로 표출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살아 있음으로 체험하게 되는 모든 이미지는 시에서 결국 본질을 나타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편의 작품이 주는 이미지는 시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최소 단위의 낱말에서, 한 행, 한 연 그리하여 한편의 시 전체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시를 가다듬고 있는 시인을 통해 등장하는 시는 결국 시인의 이미지가 실루엣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이미지의 의미적 분석, 이미지와 시와의 관계를 살펴볼 때 중요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주지적, 회화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를 쓰고자 하는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이런 학문적 이론보다 시를 쓰는 시인의 체험적 시 접근 방법일 것입니다. 이미지의 접근을 위해 제가 쓴 부족한 작품 ‘돌’ 하나를 놓고, 시적 이미지를 깊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4월 5일(월)이었습니다. 그날은 식목일로 길을 걷는데 돌이 눈에 띄었습니다. 살아오며 무수히 보았고, 만졌고, 밟았고, 어쩌면 흔하기에 별볼일 없었던 돌이 이날은 굉장한 보물처럼 보였습니다. 돌, 돌, 돌, 그리고 돌-. 걸으면서 돌에 대한 상(이미지)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돌은 흔하다.’, ‘돌은 무게를 가졌다.’ ‘돌은 멈추고 있다.’, ‘돌은 움직인다.’ ‘돌은 부식한다.’ ‘돌은 다양하다.’ ‘돌은 무식하다.’, ‘돌은 쓸모가 있다.’, “김동리의 ‘바위’란 소설은 돌을 소재로 했다.”, “박두진 시인은 ‘수석열전’이란 시집을 냈다.” ‘돌은 우주에도 있다.’, ‘돌은 따뜻하다.’, ‘돌은 차갑다.’ ‘돌은 늙었다.’, ‘돌은 ?’ -  그날은 이상하게도 ‘돌’이란 물체에 시적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습니다.  종이에 ‘시작메모’를 했습니다. 그날 초안을 보면  「돌은 무게를 끌고 다닌다/ 강바닥 자갈에서 산 하나로 이룬 바위까지/ 지구 중심으로 향한 돌의 무게/돌은 고행하는 성자의 번뇌를 갖고 있다/천년 전쯤이면 짧을까?/ 우주 먼 곳에서 달려온 빛/ 그 빛의 찰라적 욕망 바라보며/ 선의 경지로 좌선하며/지구 중심으로 향하고 싶은 욕망/ 흐르는 세월에 닦고 있는/ 아 돌의 단단함」  이 시를 만나고 밤낮으로 며칠 끌어안았습니다. 어쩌면 그런 대로 흡족한 이미지시가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시어, 행의 구성에 손을 조금씩 대기 시작한 후 일주일쯤 지나 이 시는 다음과 같이 바뀌었습니다. 바뀌었다고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시에 담으려 했던 이미지, 즉 이미지의 본질이 다치지 않는 상태로 시는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강변 자갈에서 산 하나를 이룬 바위까지/ 돌은 무게를 끌고 다닌다//고행하는 성자의 모습//천년이라면 짧을까?/우주 먼 곳에서 달려온 빛/ 그 빛의 찰라적 욕망 끌어안으며/지구 중심으로 향하고 싶은/끊임없는 열정/차갑게 식히는/아! 무념무상의 세계」  매일 물을 마셔야하는 그런 식물이 있다면, 단 하루 물을 주지 않으면 죽게 되는 식물이 있다면, 그 식물을 꼭 길러야하는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면-. 마치 이 시는 그 식물을 닮아 내게 물을 요구하는 것 같았습니다. 물을 주듯, 시를 들여다보며, 시어 몇 개를 다독거리고, 흡족해하다가 실망하고, 다시 만지작거렸습니다. 예를 든다면 처음 시는 연 구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난 작품은 연구별이 생겼고, 시어도 많이 다듬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런 상태로 만족할 수 없어.’ 결국 어딘가 나의 손을 요구하는 부분을 다시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길바닥에 있는, 산에 있는, 내 마음속에 있는 돌을 찾아 관찰해보았습니다.  1연의 1행 ‘강변 자갈에서 산 하나를 이룬 바위까지’를 조금 더 세분화시켜, 시각적 이미지를 추구하게 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강변 자갈에서/ 산 하나를 이룬/바위까지’ 이렇게 고치고 나니 길게 쓴 앞의 시행보다 정경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결국 이 시는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돌  하 재 영  강변 자갈에서  산 하나를 이룬  바위까지  돌은 무게를 끌고 다닌다.  고행하는 모습  때론 풀과 나무의 뿌리  수염처럼 길게 기르고  천년이라면 짧을까?  우주 먼 곳에서 달려온 빛  그 빛의 찰라적 욕망 끌어안으며  지구 중심으로 향하고 싶은 열정  끊임없이 삭이는  아!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성자여  어떤 의미에서 이미지는 시적 화자와 독자와의 공감대 형성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를 ‘아내’ 또는 ‘남편’감이라 합시다. 당신은 어느 스타일의 ‘아내’,‘남편’의 이미지를 찾으며, 당신에게 맞은 이미지의 배우자를 만들어 나가고(만들어지고) 있습니까? 만약 결혼을 앞둔 20대의 여자(남자)가 원하는 스타일이 이렇다 칩시다. 그가 원하는 배우자 감은 키가 크고, 지적이며, 특히 음악을 좋아하는 이지적이 사람이라 합시다. 주변에서 찾아보면 그런 사람을 쉽게 찾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 여자(남자)는 그런 사람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습니다.  시 역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분명 내가 추구하는 이미지만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감각과 낯선 이미지를 추구한다는 것이 시에 있어서, 예술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20대가 지나고, 30대, 40대, 50대 그 이후 사람은 쌓인 연륜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시에 있어서의 이미지는 시인의 주관적이지만, 그 주관적인 이미지는 객관성을 요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작품 속에 녹아있는 새로운 이미지를 객관화시키느냐가 시를 쓰는 데 성공의 요인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덤으로 @@= 수필의 향기  빈남수  1. 수필은 어떻게 쓸것인가?  수필은 생활(生活)을 바탕한 사상이요, 생활적인 사건을 문학적 차원에서 관조(觀照)하고 채색한 것이다. 즉 수필은 관조라는 여과(濾過)과정을 거쳐 표출된 생활의 지혜요 철학이다.  모든 문학 장르가 그러하듯이 글은 인간의 감정을 고향하는 힘이 있어야 하고, 하나의 이상향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론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생각을 작품으로 형상화한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흔치 않다.  흔히 수필은 붓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쓰는 글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써 보면 사뭇 그 어원적(語源的) 의미와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수필은 삶의 영위를 과정에서 우러나는 진실의 기록이다.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공감할 수 있는 세계를 구축하고 독자로 하여금 감동의 세계로 몰입시키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실을 솔직히 이야기하되 결코 푸념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 수필의 세계다.  작가는 언제나 사명의식을 가지고 글을 써야 한다.  수필 작품 속에는 그 나름대로의 세계가 있어야 한다. 현실적인 것 같지만 그 속에는 반짝이는 멋이 있어야 하고 싱그러운 사건이 있어야 한다.  수필은 만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생각을 응축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고마움과 끈끈한 정, 인생에 대한 관조, 과거에 대한 회상과 미래에 기대가 엉겨 하나의 글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수필을 중년 이후의 문학이라고 한다.  2. 수필의 이해와 생활화  수필은 예술적인 형식에 자기 사상을 농축시키는 작업이다.  가장 힘들게 쓰여지면서도 가장 쉽게 읽혀져야 하는 글이 수필이다.  누구든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쉬운 일일 수는 없다.  작가가 글을 쓰고자 할 때 무엇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은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일과 자신을 단순한 자기 존재만으로 귀착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확대시켜보는 안목을 갖는 일일 것이다.  좋은 글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요건을 갖추어야 할 것인가  ① 우선 수필은 개성이 드러나 있어야 한다. 글은 곧 그 사람이다.  ② 수필을 읽으면 글쓴이의 사유, 생활태도, 성품, 취미, 말투까지도 알 수 있다.      --------------------------------------------------------------------------       한복  ―황금찬(1918∼ ) 한복 한 벌 했다. 내 평생 두루마기를 입어 본 기억이 없었으니 이것이 처음인 것 같다. 암산·상마·학촌·현촌·난곡·청암 모두 한복을 입는데 나만 한복이 없다고 했더니 병처가 큰맘 써 한 벌 했다. 78년 정월 첫날 아침 새 옷을 입고 뜰에 서니 백운대와 도봉이 내려다보고 웃고 있다. 어디든 가서 세배를 드리고 싶다.     우이동 계곡으로 발을 옮긴다. 아직도 우리들의 맥박 속에 살아 있는 선열들 일석·의암·해공·유석 무덤 앞에 섰다가 다시 걸음을 옮긴다. 4·19묘소 비문에 새겨진 꽃 같은 나이들을 읽어 본다. 구름이 날린다. 구름에 새 옷깃이 날린다.   이 나이에 비로소 한 겨레 안에 서는 그런 느낌이 든다. 손가락을 꼽으며 계산해 보니 1978년이면 36년 전이다. 그 시절 선비 스타일 삶이 설날을 배경으로 진솔하게 그려져 있다. ‘암산·상마·학촌·현촌·난곡·청암’, 친구라도 나이 들어 이름을 부르는 건 경망스럽다 여겨서 호로 부르는 점잖은 양반이 ‘모두 한복을 입는데/나만 한복이 없다’고 아내를 은근히 압박한다. 아내에게만은 철부지처럼 풀죽은 모습을 보이고 새 옷을 조르는 것이다. 착한 남편, 여태 내색 한번 안 했지만 그렇게 부러웠구나. 아내는 아무리 넉넉지 못한 살림에 몸도 아프지만 ‘큰맘’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화자는 두루마기까지 갖춘 ‘한복 한 벌 했다’! 설날 아침 그 ‘새 옷을 입고 뜰에 서니/백운대와 도봉이/내려다보고 웃고 있’단다. 마음에 쏙 드는 옷을 입으면 기쁜 건 남녀노소 다를 바 없을 테다. 들뜬 마음에 화자는 ‘어디든 가서/세배를 드리고 싶다’. 그래서 집 가까이 있는 선열들의 무덤도 찾아가고 4·19묘소도 간다. 그 참배는 그전부터도 화자의 설날 행사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한복으로 의관을 정제하니 더욱 숙연해지고 옷깃이 여미어진다. ‘비로소/한 겨레 안에 서는/그런 느낌이 든다’. 한복을 통해 민족의 피가 뭉클하게 ‘맥박 속에 살아 있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황금찬 선생님은 현재 한국의 최고령 시인이시다. 그동안 써오신 따뜻하고 순수한 시와 함께 늘 건강하시기를!  
430    시지기라는 눔에게 "치매 걸린 엄마"라도 있었으면... 댓글:  조회:2191  추천:0  2017-04-30
  시의 눈과 시의 몸 /박남희  잠결에  시가 막 밀려오는데도,  세계가 오로지 창(窓)이거나  지구라는 이 알이  알 속에서 부리로 마악 알을 깨고 있거나  시간이 영원히 온통  푸르른 여명의 파동이거나  하여간 그런 시가 밀려오는데도,  무슨 푸르른 공기의 우주  통과하지 못하는 물질이 없는 빛,  그 빛이 만드는 웃고있는 무한  온몸을 물들이는 무한,  하여간 그런 시가 밀려오는데도  나는 일어나 쓰지 않고  잠을 청하였으니......  (쓰지 않으면 없다는 생각도  이제는 없는지  잠의 품속에서도  알을 부화한다는 것인지)  ―정현종, 「시가 막 밀려오는데」전문(『세계의 문학』2003년 겨울호)  필자의 경험으로도 잠결에 기가 막힌 시가 몰려올 때가 있다. 필자 역시 인용 시에서처럼 한번도 좋은 시를 얻은 적은 없지만, 이것은 누구나 흔히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쉽게 공감이 간다. 그런데 시인이 잠결에 본 시의 형상은 그리 간단하게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자신이 잠결에 본 시를 "세계가 오로지 창(窓)이거나/지구라는 알이/알 속에서 부리로 마악 알을 깨고 있거나/시간이 영원히 온통/ 푸르른 여명의 파동이거나" "무슨 푸르른 공기의 우주/ 통과하지 못하는 물질이 없는 빛,/그 빛이 만드는 웃고있는 무한"이라는 복잡한 수식어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수식어를 간명하게 간추려보면, 시인이 잠결에 본 시는 푸르른 공기와 투명한 빛을 받고 있는 알(지구)속에서 깨어나는 환희에 찬 생명, 즉 "웃고 있는 무한"이나 '우주'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시의 육체는 종종 형이상학적 상상력의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를 써야 시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정현종 시인은 시는 쓰지 않는 곳에서도 존재하고 잠 속에서도 존재한다는 사유에까지 나아간다. 이러한 사유는 라캉이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고 한 말과 유사한 맥락에서 읽힌다. 이처럼 시의 몸은 일상적 물질성을 뛰어 넘는 차원의 물질성을 지니고 있다.  화엄이란 구멍이 많다  구례 화엄사에 가서 보았다  절집 기둥 기둥 마다  처마 처마 마다  얼음 송송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그 속에서 누가 혈거시대를 보내고 있나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개미와 벌과  또 그들의 이웃 무리가  내통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화엄은 피부호흡을 하는구나  들숨 날숨 온몸이 폐가 되어  환하게 뚫려있구나  그날 밤 누군가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잠을 털고 일어나 문을 열어 젖혔다  창문 앞 물오른 나무들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첫날밤을 염탐하듯  하늘에 뚫어놓은 구멍,  별들이 환한 박하향을 내고 있었다  ―손택수, 「화엄에서」전문(『애지』2003년 겨울호)  이 시는 제목부터 낯설다. "화엄사에서"가 아니고 "화엄에서"라니? 화엄은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고 하나의 관념이다. 시인은 '화엄'이라는 관념에 육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화엄이란 구멍이 많다"는 진술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화엄'은 관념이지만 시인에게는 구체적인 육체로 읽히는 것이다. 물론 시인은 화엄의 육체성을 화엄사라는 대상을 통해서 환유적으로 읽어낸다. 시인은 절집 기둥과 처마에 송송 뚫려있는 구멍을 통해 개미와 벌이 서로 소통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 '화엄'의 실체를 인식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화엄'이라는 불교 사상 역시 자아와 타자의 '관계' 즉 열린 차원의 소통을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시인의 이러한 사유는 급기야 절터에서 벗어나 우주로 향해있다. 시인은 하늘에서 박하향을 내며 반짝이고 있는 별들을 "창문 앞 물오른 나무들이/ 손가락에 침 묻혀/ 첫날밤을 염탐하듯/ 하늘에 뚫어놓은 구멍"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시인은 자아라는 견고한 육체성을 허물고 그 곳에 '관계'의 구멍을 숭숭 뚫어놓은 곳에서 화엄의 육체성을 발견한다. 이처럼 물질이 아닌 것을 물질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시인의 눈이다.  내 눈 속에 나비 한 마리 살고 있다  부신 햇살을 타고 어느 먼 풀밭이 문득 내 눈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풀꽃만한 나비 한 마리가 그 속을 종일 날고 있다  (중략)  어느날 내가 바르트의 텍스트를 펼쳤을 때 그는  문득 날아와 다시 어룽대기 시작했다  더듬이를 비비고 은빛 날개를 턴다  행간이 뿌옇다  흰 벽 같은 세상과 마주할 때, 흔들리는 길 위에 있을 때  그는 나와 그것들의 행간에서 어룽거렸다  나는 그를 검열하는 어룽나비라고 부르기로 했다  ―홍승주, 「내 눈 속으로 들어온 나비」부분( 『리토피아』2003년 겨울호)  눈에서 나비같은 것이 어룽거리는 현상, 즉 환시 현상을 시인은 자신의 눈 속에 나비가 살고 있다고 바꾸어 말하고 있다. 의사는 이런 현상을 "망막에 이상이 생겨 맺힌 像"으로 설명하지만, 시인의 눈에는 그것이 '나비'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사라졌던 나비가 "바르트의 텍스트를 펼쳤을 때"다시 나타난 것일까? 시인이 바르트를 읽는 의도는 아마도 어떤 규칙이나 문법에도 얽매이지 않는 롱랑 바르트의 자유로운 글쓰기로부터 어떤 자유를 배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바르트가 모든 글을 하나의 기호로 인식했듯이 시인 역시 나비를 하나의 기호로 인식하고 있다. 이 시에서 '나비'라는 기호는, 그러나 자유와는 상반되는 '검열'로서의 기호이다. 나비는 시인이 "흰 벽과 같은 세상과 마주할 때"나 "흔들리는 길 위에 있을 때" 시인의 눈 속에 나타나서 경고의 신호를 보낸다. 시인이 환시 현상을 "검열하는 어룽나비"라고 명명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자기 검열을 통해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담배를 끊고부터 그녀에게  달콤한 구름도넛을 만들어줄 수 없게 된 남자, 생각 끝에  구름수풀 헤적여 반지를 건져다 주었지  강변에 앉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여자와  잠시 흐름을 멈추고 물비늘의 반짝임 속으로 몸을 숨기는 강물  반지의 동그라미 속에 찰랑찰랑 함께 갇혔지  물 항아리 속 웅숭깊은 우렁각시 그 여자, 날마다  남자의 빈집으로 동그랗게 소반을 차리러 가지  그녀가 나간 사이  동그라미 속 동그마니 남은 마음들 살금살금 실금이 가기 시작하지  저녁의 붉은 강물이  그녀 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개망초 떨리는 꽃빛이 빠져나가고  잠 속에서도 젖지 않는 비오리 속날개가 빠져나가지  달콤한 도넛구름이 빠져나가지 남자가 빠져나가지  우렁이 껍질 같이 가벼워진 물 항아리만 물 위에 두고  그녀가 빠져나가지  ―류인서, 「구름도넛」전문(『현대시』2004년 1월호)  류인서의 「구름도넛」은 처음엔 따뜻하게 읽히다가 차츰 서늘하게 읽힌다. 그것은 이 시가 허무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삶의 과정으로서의 여성성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1연은 담배를 끊고부터 그녀에게 구름도넛을 만들어줄 수 없는 남자가 그 대신 구름수풀을 헤적여 반지를 건져다 준다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의 문맥을 자세히 읽어보면 결코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 시의 둘 째 연에 나오는 우렁각시 설화와 만나면서 시적 진정성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연의 중심 이미지인 '구름도넛'과 '반지'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사내가 그녀에게 만들어준 '달콤한 구름도넛'은 남편에 대한 그녀의 달콤한 환상의 환유이고, '반지'는 둥글다는 이미지 속에 일종의 성적인 메타포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읽힌다. 즉 1연은 신혼의 환상을 잃어버린 아내에게 남편이 그 대신 성적인 즐거움을 준다는 줄거리로 요약된다.  그렇기 때문에 강물도 "잠시 흐름을 멈추고 물비늘의 반짝임 속으로 몸을 숨기"고, 그들은 "반지의 동그라미 속에 찰랑찰랑 함께 갇"히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2연에 오면 여자는 우렁각시가 되어 남자의 빈집으로 소반을 차리러 가게 되는데, 여기서의 '남자'는 문맥상으로 보면 1연의 '남자'인 남편이 아니라 다른 남자 즉 외간남자로 읽힌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나간 사이/동그라미 속 동그마니 남은 마음들 살금살금 실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2연은 남편에게서 떠나가는 그녀의 마음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3연에 오면 그녀의 여성성은 거의 황폐화되고 그녀의 존재의 집이었던 '물항아리' 역시 그녀가 빠져나간 후 우렁이 껍질처럼 가벼워져서 물위에 둥둥 떠있게 된다. 우리는 3연에서, 그녀의 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저녁의 붉은 강물"이 여성의 폐경을 암시해주고 있다는 것과, "개망초 떨리는 꽃빛"이라든가 "잠 속에서도 젖지 않는 비오리 속날개"에서 젊은 여성이 가지고 있던 사랑의 감정이나 꿈, 또는 희망의 은유를 읽어낼 수 있다.  이처럼 이 시는 소멸되어 가는 여성성과 아프게 대면하면서 여성의 존재성을 반추해 보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노력은 어떤 결론을 향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과정 속에 배치되어 있는 내밀한 시의 육체성을 읽어내는 재미만으로도 이 시의 존재이유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밖에 필자가 관심있게 읽은 시들은 이나명의 「왜가리는 왜 몸이 가벼운가」(『현대시』 2003년 12월호)와 김경인의 「거울을 만드는 사람」(『세계의 문학』 2003년 겨울호), 김행숙의 「한 사람」(『애지』 2003년 겨울호), 안명옥의 「먹구름」(『불교문예』2003년 겨울호) 등이다. 이들 시 역시 좋은 시의 눈과 몸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면관계상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못하는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       치매 걸린 시어머니  ―진효임(1943∼)     눈도 못 맞추게 하시던 무서운 시어머니가 명주 베 보름새를 뚝딱 해치우시던 솜씨 좋은 시어머니가 팔십 넘어 치매가 왔습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손발은 말할 것도 없고 방 벽에까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대소변도 못 가리시면서 기저귀를 마다하시던 시어머니, 꼼짝 없이 붙잡힌 나는 옛날에 한 시집살이가 모두 생각났는데, 시어머니가 나를 보고. 엄니, 엄니 제가 미안 허요, 용서해 주시요 잉. 공대를 하는 걸 보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우리 시어머니 시집살이도 나만큼이나 매웠나 봅니다.   이제는 전설 속에나 있을 캐릭터, ‘눈도 못 맞추게 하시던 무서운 시어머니’가 등장한다. 시인의 연배가 짐작되는 대목이다. 위 시가 실린 시집 ‘치자꽃 향기’에서 시인 소개를 보니, 시인은 열여덟 살에 결혼했다. 사십여 년, 그 긴 세월을 매운 시집살이 시키던 시어머니, 치매가 와서도 유난해서 시인은 ‘꼼짝 없이 붙잡힌’다. 시인도 젊지 않은 나이, 새삼 옛날 생각에 미운 생각이 버럭 나기도 하고, 어쩌면 고소하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하는데, ‘엄니, 엄니 제가 미안 혀요, 용서해 주시요 잉.’ 이 한마디에 마음이 풀린다. 치매 걸린 시어머니 눈에 나이 든 여인이 며느리가 아니라 시어머니로 보인다. 치매로 상한 머리에도 그 오래전 무서움이 지워지지 않는 시어머니! 우리 어머니들, 그렇게 제 며느리한테 호랑이 노릇 톡톡히 하고는 늙은 몸을 푹 맡겼단다. 고부(姑婦)간에 대를 물려 그랬단다.  진효임은 일흔 다 돼서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한글을 배우니까 즐거운 일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좋은 건 머릿속 생각들을 내 손으로 직접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치자꽃 향기’ 앞머리에 적힌 ‘시인의 말’이다. 평생 소리(말)로 날려 보냈던 생각들을 이제 그림(글)으로 남기는 도취감! 소리를 붙잡아 앉히는 두근두근함을 그의 시 곁에서 숙연히 맛본다.  
429    시인은 고독을 줄기차게 친구 삼고 문제의식을 늘 가져라... 댓글:  조회:1995  추천:0  2017-04-30
@@ 詩作을 위한 열가지 방법 / 테드 휴즈   1. 동물의 이름을 머리와 가슴속에 넣고 다녀라. (조류,곤충류,어패류,동물들의 이름을 가령 종달새,굴뚝새, 파리,물거미,달이, 소라고동, 바다사자, 고양이 등)   2. 바람과 쉼 없이 마주하라. (동서남북 바람, 강바람, 산바람,의인화한 바람까지도)   3. 기후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라. (안개,폭풍,빗소리,구름, 4계절의풍경 등)   4. 사람들의 이름을 항상 불러 보라. (옛 사람이든 오늘 살고 있는 사람이든, 모두)   5. 무엇이든지 뒤집어서 생각하라. (발상의 전환을 위해 가령 열정과 불의 상징인 태양을 달과 바꾸어서 생각한다든지 또 그것을 냉랭함과 얼음의 상징으로 뒤집어 보는 것이 그 방법 그리고 정지된 나무가 걸어다니다고 표현단다든지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상식을 배상식으로 구상을 추상으로 추상을 구상으로 유기물을 무기물로 무기물을 우기물로 뒤집어서 생각하라. 이것이 은유와 상징 넌센스와 알레고리의 미학이며 파라독스에 접근하는 길이다)   6. 타인의 경험도 내 경험으로 이끌어 들여라. (어머니와 친구들의 경험, 혹은 성현이나 신화속의 인물들의 경험이나 악마들이나 신들의 경험까지도)   7. 문제의식을 늘 가져라. (어떤 사물을 대할 때나, 어떤 생각을 할 때 그리고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적 현상을 접할 때 이것이 시정신이며 작가정신이다.)   8.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안 보이는 것까지 손으로 만지면서 살아라 (이 우주 만물 그리고 지상위의 모든 사물과 생명체들은 다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 있으며 뚫여있다고 생각하라. 나뭇잎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의자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매일 무심코 사용하넌 연필과 손수건에도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있는 사실을 생각하라. 우주안에선 모든 것이 생명체이다)   9. 문체와 문장에 겁을 먹지 말아라. (하얀 백지 위에선 혹은 여러분 컴퓨너 모니터에 들어가선 몇 십번을 되풀이 해 자유자재로 문장 훈련을 쌓아가라.)   10. 고독을 줄기차게 벗 삼아라. (고독은 시와 소설의 창작에 있어서 최고의 창작환경이다. 물론 자신의 창작을 늘 가까이 읽어주며 충고해 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428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댓글:  조회:3221  추천:0  2017-04-24
 묘비명 비문_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   주제 인생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소설가로서 실패한 버나드 쇼는 사회주의자, 연설가, 논객, 극작가 등을 통해 자아를 찾았다. 그는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 찬 빅토리아 시대의 무대를 생동감 있게 변화시키는 희곡을 쓰면서 극작가로 성공하게 된다. 버나드 쇼는 성공의 순간에 만족하지 않고 활동을 멈추지 않았는데 94세까지 살면서 유머와 풍자, 위트를 잊지 않았으며, 사상가로서 자기 위치를 더욱 견고히 했다. 그가 남긴 묘비명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울리는 경종과도 같다. 묘비명의 원문은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like this would happen."이다.     영국의 극작가 겸 소설가, 비평가인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   1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극작가 겸 소설가이자 비평가. 사회주의 선전문학가. 온건좌파 단체인 '페이비언협회'를 설립했다. 생명 철학에 기초한 작품 『인간과 초인』으로 세계적인 극작가로 발돋움했으며, 192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17세기 이후 영국의 중요한 극작가로서 당시 뛰어난 희극작가 이상의 역할을 했다.  걸작으로 꼽히는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인간과 초인』, 『피그말리온』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아래 클릭해보세용@^^@)ㅡㅡㅡ 묘비명 비문_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  미셸 투르니에의 묘비명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묘비명  이소룡의 묘비명  노스트라다무스의 묘비명  타이 코브의 묘비명  마타하리의 묘비명  헨리 필딩의 묘비명  니콜라이 고골리의 묘비명  르네 데카르트의 묘비명  블레즈 파스칼의 묘비명  올리비아 수잔 클레멘스의 묘비명  임마누엘 칸트의 묘비명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묘비명  존 게이의 묘비명  아이스킬로스의 묘비명  셔우드 앤더슨의 묘비명  인생에 관한 명언  아르튀르 랭보의 묘비명  존 키츠의 묘비명  김창흡 아내의 묘비명  김창협 여동생의 묘비명  정농장의 묘비명  정약전의 묘비명  이문건 부모의 묘비명  퍼시 셸리의 묘비명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의 묘비명  키르케고르의 묘비명  존 드라이든 아내의 묘비명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의 묘비명  예니 마르크스의 묘비명  세바스찬 샹포르의 묘비명  토마스 하디의 묘비명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묘비명  장 콕토의 묘비명  루돌프 발렌티노의 묘비명  사랑에 관한 명언  프랭크 시나트라의 묘비명  벤자민 프랭클린의 묘비명  마가렛 미첼의 묘비명  니콜라이 레닌의 묘비명  중광의 묘비명  에비타 에바 페론의 묘비명  프리드리히 니체의 묘비명  이지함의 묘비명  노긍의 묘비명  오상순의 묘비명  슈바르의 묘비명  존 밴브러의 묘비명  모리야 센얀의 묘비명  한유의 묘비명  천상병의 묘비명  행복에 관한 명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볼테르의 묘비명  조나단 스위프트의 묘비명  칼 마르크스의 묘비명  토마스 제퍼슨의 묘비명  조지 고든 바이런의 묘비명  최북의 묘비명  이상의 묘비명  베네딕트 드 스피노자의 묘비명  프란시스 베이컨의 묘비명  조르주 자크 당통의 묘비명  오스카 와일드의 묘비명  장 드 라퐁텐의 묘비명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묘비명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묘비명  자유에 관한 명언  조봉암의 묘비명  남효온의 묘비명  쑨즈강의 묘비명  김옥균의 묘비명  코페르니쿠스의 묘비명  토마스 모어의 묘비명  벤 존슨의 묘비명  최영의 묘비명  정몽주의 묘비명  임경업의 묘비명  민영환의 묘비명  라울 발렌버그의 묘비명  유응부의 묘비명  홍대용의 묘비명  에이브러햄 링컨의 묘비명  정의에 관한 명언  박수근의 묘비명  스탕달의 묘비명  프란츠 카프카의 묘비명  버지니아 울프의 묘비명  조병화의 묘비명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묘비명  김유정의 묘비명  박인환의 묘비명  프랑수아 비용의 묘비명  미켈란젤로의 묘비명  산치오 라파엘로의 묘비명  폴 발레리의 묘비명  데보르드 발모르의 묘비명  이호우의 묘비명  에밀리 디킨슨의 묘비명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묘비명  파울 클레의 묘비명  예술에 관한 명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묘비명  한니발의 묘비명  디오판토스의 묘비명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묘비명  제임스 딘의 묘비명  아서 코난 도일의 묘비명  요하네스 케플러의 묘비명  데이비드 힐베르트의 묘비명  토미 라소다의 묘비명  호라티오 넬슨의 묘비명  고트프리드 빌헬름 라이프니츠의 묘비명  프랑수아 라블레의 묘비명  도로시 파커의 묘비명  채만식의 묘비명  니콜로 파가니니의 묘비명  짐 토르프의 묘비명  엘리자베스 1세의 묘비명  명예에 관한 명언  토마스 에디슨의 묘비명  테드 터너의 묘비명  조지 이스트먼의 묘비명  피터 포크의 묘비명  로버트 에반스의 묘비명  드윗 월리스의 묘비명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묘비명  게일 보든의 묘비명  성공에 관한 명언  허목의 묘비명  이황의 묘비명  앤드류 카네기의 묘비명  월터 롤리의 묘비명  찰스 2세의 묘비명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묘비명  휴 헤프너의 묘비명  스티븐 킹의 묘비명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묘비명  이순신의 묘비명  퐁파두르 부인의 묘비명  샤를 드골의 묘비명  정중부의 묘비명  상진의 묘비명  윌리엄 포크너의 묘비명  정철의 묘비명  보우썬의 묘비명  수신에 관한 명언  찰스 린드버그의 묘비명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의 묘비명  오쇼 라즈니쉬의 묘비명  방정환의 묘비명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의 묘비명  프란츠 피터 슈베르트의 묘비명  아이작 뉴턴의 묘비명  호머 헐버트의 묘비명  클라이브 커슬러의 묘비명  에드거 앨런 포우의 묘비명  알버트 슈바이처의 묘비명  루쉰의 묘비명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묘비명  조셉 콘래드의 묘비명 ////////////////////////////////////////////////////////////////////////////// //////////////////////////////////////////////////////////////////////////////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샬롯 가에 위치한 빌리 그래함 목사의 기념 도서관 입구에는 2007년 6월 14일에 남편보다 앞서 ​사망한 루스 그래함 여사의 소박한 묘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묘지 앞에 새겨진 문구가 보는 이를 미소짓게 합니다. ​ -세상을 떠나기 전 어느 날, 남편 빌리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던 루스 여사는 긴 공사로 불편했던 거리 한 모퉁이에 세워진 안내 표지판을 보고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자신이 죽으면 묘비에 꼭 그 표지판에 있는 문구를 그대로 새겨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 ​ 그래서 세워진 그녀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졌던 것입니다. ​ "공사끝, 그동안의 인내에 감사드립니다." "The end of construction.... Thank you for your patience" ​ .................. ​6음절의 대가 헤밍웨이(1899~1961)는 자신의 묘에 더 짧은 글을 적었습니다. " 일어나지 못해 미안해!"​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는 마음에 팍 와닿은 글을 적었네요. "오직 한 순간만 나의 것이었던 그 모든 것들" ​ 시인 라퐁텐(1621~1695)은 이런 묘비명을.. "빈 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갔노라" ​ 철학자 노스트라다무스(1503~1566)의 묘비명은 왠지 으스스 하비다. "후세 사람들이여, 그의 휴식을 방해하지 마시오." ​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묘비명은 역시 버나드 쇼(1856~1950)가 아닐까 합니다. 많은 분들이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알고 계신 분들,  워낙, 그 묘비명은 실은 이런 말이라고 하네요. ​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오래 버티면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 ...​ 오늘, 묘비명에 어떠한 말을 적어넣을가고 한번쯤 생각해봄은 또,-... ================================== ///////////////////////////////////////////// ================================== 인생 - 고맙다 나의 인생이여!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 -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미셸 투르니에의 묘비명 - 내 그대를 찬양했더니 그대는 그보다 백 배나 많은 것을 내게 갚아주었도다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묘비명 - 인생은 의미 있는 것이다. 행선지가 있으며, 가치가 있다  이소룡의 묘비명 - 브루스 리, 절권도의 창시자  노스트라다무스의 묘비명 - 후세 사람들이여, 그의 휴식을 방해하지 마시오  타이코브의 묘비명 - 야구 역사에 한 줄기 빛을,     자신의 삶에 한 움큼 어둠을 남기고 떠난 외로운 영혼  마타하리의 묘비명 - 마르가레테 게르투르드 젤러  헨리 필딩의 묘비명 - 영국은 그가 낳은 자식을 그 가슴에 안지 못함을 슬퍼한다  니콜라이 고골리의 묘비명 - 고골리는 죽었다. 그는 러시아인이었다  그네 데카르트의 묘비명 - 고로 여기 이 철학자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블레즈 파스칼의 묘비명 - 근대 최고의 수학자, 물리학자, 종교철학자인 파스칼  올리비아 수잔 클레멘스의 묘비명 - 따뜻한 여름 햇볕이여, 다정하게 이곳을 비춰라  임마누엘 칸트의 묘비명 -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더 커지는 놀라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묘비명 - 일어나지 못해서 미안하오  존 게이의 묘비명 - 인생은 농담. 만사가 그것을 나타내준다  아이스킬로스의 묘비명 - 나는 말한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살해한다고  셔우드 앤더슨의 묘비명 - 죽음이 아니라 삶이야말로 위대한 모험이다  사랑 - 그 목소리는 들을 수 없어도  아르튀르 랭보의 묘비명 - 1891 년 11월 10일, 아덴에서 돌아온 시인 장 아르튀르 랭보  존 키츠의 묘비명 - 여기, 이름을 물 위에 새긴 사람이 잠들다  김창흡 아내의 묘비명 - 아아, 당신의 고생은 뼈에 사무쳤소  김창협 여동생의 묘비명 - 다시는 너를 볼 수 없겠지  정농장의 묘비명 - 나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데 살아 있고  정약전의 묘비명 - 차마 내 아우에게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며 나를 보러 오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문건 부모의 묘비명 - 이 비석은 신령한 비석이다  퍼시 셸리의 묘비명 - 마음의 마음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의 묘비명 - 오픽가의 사람들  키르케고르의 묘비명 - 잠시 때가 지나면 그때 나는 승리하고 있으리라  존 드라이든 아내의 묘비명 - 여기 내 아내가 잠들다. 여기에 그녀를 잠들게 하라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의 묘비명 -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예니 마르크스의 묘비명 - 칼 마르크스의 절반이 여기에 잠들다  세바스찬 샹포르의 묘비명 - 40세가 되어도 인간이 싫어지지 않는 사람은     인간을 사랑한 일이 없는 사람이다  토마스 하디의 묘비명 - 대문호 토마스 하디의 숭고한 정신과 통찰의 심장이 여기에 묻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묘비명 - 오오, 장미여! 순수한 모순의 꽃  장 콕토의 묘비명 - 당신 이름을 나무에 새겨놓으시게  루돌프 발렌티노의 묘비명 - 그 목소리는 들을 수 없어도  행복 -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프랭크 시나트라의 묘비명 - 최상의 것은 앞으로 올 것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묘비명 - 이 사람은 하늘에서 번개를, 폭군에게서 옥띠를 빼앗았다  마가렛 미첼의 묘비명 - 1900 년 11월 8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나     1949 년 8월 16일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죽다  니콜라이 레닌의 묘비명 - 미래의 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 것이다  중광의 묘비명 - 괜히 왔다 간다  에비타 에바 페론의 묘비명 - 아르헨티나 국민들이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프리드리히 니체의 묘비명 - 이제 나는 명령한다. 차라투스트라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발견할 것을  이지함의 묘비명 - 세상에서는 토정을 잘 알지 못하고  노긍의 묘비명 - 문장의 길이 열리고도 우적의 한계를 넘지 못하더니  오상순의 묘비명 -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  슈바르의 묘비명 - 영원한 휴식, 침묵의 무덤  존 밴브러의 묘비명 - 흙이여, 무겁게 그를 눌러라  모리야 센얀의 묘비명 - 내가 죽으면 술통 밑에 묻어줘  한유의 묘비명 - 유자후묘지명  천상병의 묘비명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자유 -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롭다  볼테르의 묘비명 - 인간의 정신에 강한 자극을 주고 우리들을 위해 자유를 준비했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묘비명 - 여기에 본교회 수석사제 신학박사 조나단 스위프트의 유해가 잠들다  칼 마르크스의 묘비명 -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토마스 제퍼슨의 묘비명 - 독립선언문의 기초자, 버지니아 종교자유법의 기초자  조지 고든 바이런의 묘비명 - 그러나 나는 살았고, 헛되이 살지 않았다  최북의 묘비명 - 아아, 몸은 얼어 죽었어도 이름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으리로다  이상의 묘비명 - 일세의 기재 이상은 그 통생의 대작 종생기 일편을 남기고  베네딕트 드 스피노자의 묘비명 - 신에 취한 사람 스피노자  프란시스 베이컨의 묘비명 - 아는 것이 힘이다  조르주 자크 당통의 묘비명 - 조르주 자크 당통  오스카 와일드의 묘비명 -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 소리  장 드 라퐁텐의 묘비명 - 장은 밑천과 수입을 모두 탕진하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갔노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묘비명 - 별이 총총한 드넓은 하늘 아래 무덤 하나 파고 나를 눕게 하소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묘비명 - 삶과 죽음에 차가운 눈길을 던져라, 마부여, 지나가라!  정의 - 고결한 양심, 불멸의 영혼  조봉암의 묘비명 - 우리가 독립 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남효온의 묘비명 - 땅 속 개미들은 입에 들어오고, 파리와 모기는 살을 물어뜯네  쑨즈강의 묘비명 - 죽음으로써 중국의 법치를 한걸음 나아가게 하였기에 그를 기린다  김옥균의 묘비명 - 비상한 세대에 비상한 인물  코페르니쿠스의 묘비명 - 주님! 저는 주님이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그 친절을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토마스 모어의 묘비명 - 고결한 양심, 불멸의 영혼  벤 존슨의 묘비명 - 아아, 희귀한 존슨  최영의 묘비명 - 위엄을 떨쳐 나라를 구할 때 백발이 성성했구나  정몽주의 묘비명 - 고려수문하시중 정몽주지묘  임경업의 묘비명 - 세월은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으니  민영환의 묘비명 - 계정민충정공영환  라울 발렌버그의 묘비명 - 날씨가 좋을 때는 친구가 많고 하늘에 구름이 끼면 혼자일 것이다  유응부의 묘비명 - 사나운 기운이 가득한데 못 구멍이 막혔도다  홍대용의 묘비명 - 아, 슬프다 덕보는 민첩라고, 겸손하고, 식견이 원대하여     사물의 이해가 정밀하였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묘비명 -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예술 -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  박수근의 묘비명 -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스탕달의 묘비명 -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묘비명 - 내면을 사랑한 이 사람에게 고뇌는 일상이었고,     글쓰기는 구원을 향한 간절한 기도의 한 형식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묘비명 - 너에게 대항해 굽히지 않고 단호히 나 자신을 내던지리라  조병화의 묘비명 - 나는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묘비명 - 우리는 묘비명이 아닌 음악으로 위대한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기억한다  김유정의 묘비명 - 세상에 진실하고 겸손한 사람이 많되 김유정만 한 사람 드물고  박인환의 묘비명 -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프랑수아 비용의 묘비명 - 아무 쓸 데도 없는, 머리가 돈 부랑자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 대지에 몸을 되돌렸다  미켈란젤로의 묘비명 -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는 것만이 진실로 내가 원하는 것  산치오 라파엘로의 묘비명 - 여기는 생전에 어머니 자연이 그에게 정복될까     두려워 떨게 만든 라파엘로의 무덤이다  폴 발레리의 묘비명 - 오, 사색 뒤에 오는 보상. 신들의 고요에 던져진 그토록 오랜 시선  데보르드 발모르의 묘비명 -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네  이호우의 묘비명 - 여기 한 사람이 이제야 잠들었도다  에밀리 디킨슨의 묘비명 -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았다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묘비명 - 예수를 믿는 행인이여, 하나님의 아들이여, 잠시 걸음을 멈추라  피올 클레의 묘비명 - 나는 이 세상의 언어만으로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명예 - 오직 한순간만 나의 것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묘비명 - 용기 있게 살고 영원한 명성을 남기고 죽는 것은 아주 멋진 일이도다!  한니발의 묘비명 - 그의 강철의지 앞에서는 높은 산도 몸을 낮춘다  디오판토스의 묘비명 - 보라! 여기에 디오판토스 일생의 기록이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묘비명 - 여기 묻힌 유해가 도굴되지 않도록 예수의 가호가 있기를  제임스 딘의 묘비명 - 제임스 B. 딘 1931∼1955  아서 코난 도일의 묘비명 - 강철처럼 진실하고 칼날처럼 곧았다  요하네스 케플러의 묘비명 - 나는 하늘을 재었고, 이제 나는 어둠을 재는구나  데이비스 힐베르트의 묘비명 -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결국 알게 될 것이다  토미 라소다의 묘비명 - 다저스 구장은 그의 주소였다. 하지만 모든 구장이 그의 집이었다  호라티오 넬슨의 묘비명 - 영국의 수호자, 국민의 영웅  고트프리드 빌헬름 라이프니츠의 묘비명 - 세계에 빛을 독일에 영광을 가져다준 영혼  프랑수아 라블레의 묘비명 - 가장 비꼰 놈들을 비꼰, 그 해박한 코 큰 라블레  도로시 파커의 묘비명 - 용서하소서, 티끌이 되어버린 나의 육신을  채만식의 묘비명 - 채옹 채만식 선생, 1950년 49세를 일기로 여기에 묻히시다  니콜로 파가니니의 묘비명 - 제노바 태생의 천재 음악가 니콜로 파가니니 여기에 영면하다  짐 토르프의 묘비명 - 짐 토르프, 그대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운동선수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묘비명 - 오직 한순간만 나의 것이었던 그 모든 것들  성공 - 다시, 또 다시 성공을 위해  토마스 에디슨의 묘비명 - 상상력, 큰 희망, 굳은 의지는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 것이다  테드 터너의 묘비명 - 깨우지 마시오!  조지 이스트먼의 묘비명 - 77 년 동안 잘 정돈된 삶을 살아온 만큼 그는 짤막한 글을 남겨놓고  피터 포크의 묘비명 - 나는 탁월한 살인전담반 형사지만 사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피카소 같은 화가였다고 기억되기 바란다  로버트 에반스의 묘비명 - 잘 사는 것이 최상의 복수이다  드윗 윌리스의 묘비명 - 마지막 요약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묘비명 - 자비, 진리 그리고 정의를 사랑하는 분들은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기 바란다  게일 보든의 묘비명 - 나는 시도하다 실패했다. 그러나 다시 또 다시 시도해서 성공했다  수신 - 돌에 새겨 뒷사람을 경계하노라  허목의 묘비명 - 말은 행실을 덮어주지 못하였고, 행동은 말을 실천하지 못했도다  이황의 묘비명 -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앤드류 카네기의 묘비명 - 자기보다 훌륭하고 덕이 높고, 자기보다 잘난 사람,     그러한 사람들을 곁에 모아둘 줄 아는 사람  월터 롤리의 묘비명 - 나의 오랜 인생 행로는 허영의 삶이었다  찰스 2세의 묘비명 - 여기에 우리 왕이 잠들다  루카우스 코넬리우스 술라의 묘비명 - 이 사람보다 더 친구들에게 관대했던 사람은 없었다  휴 헤프너의 묘비명 - 성에 대한 우리의 유해하고 위선적인 생각을 바꾸는데 어느 정도 역할을 했고  스티븐 킹의 묘비명 - 그는 본래의 자기보다 나아지려고 애썼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묘비명 - 이슬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지는 게 인생인가보다!  이순신의 묘비명 - 필생즉사 필사즉생  퐁파두르 부인의 묘비명 -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 퐁파두르 후작부인  샤를 드골의 묘비명 - 샤를 앤드루 조셉 메리 드골, 1890~1970  정중부의 묘비명 - 고려부장 상장군 의협대인 정중부  상진의 묘비명 - 시골 구석에서 일어나 세 번이나 재상의 관부에 들었도다  윌리엄 포크너의 묘비명 - 나의 야심은 역사에 묻혀 없어진 한 사람의 개체로 남는 것이다  정철의 묘비명 - 유명 조선좌의정인성부원군 시 문청공 송강정철지묘  보우썬의 묘비명 - 이곳 근처에 그의 유해가 묻혔도다  희망 - 삶 다음의 죽음은 기쁨을 주는 것  찰스 린드버그의 묘비명 -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의 묘비명 - 모든 일을 남을 위해 했을 뿐, 그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쇼 라즈니쉬의 묘비명 - 태어나지 않았고 죽지 않았다. 다만 지구라는 행성을 다녀갔을 뿐이다  방정환의 묘비명 - 동심여선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의 묘비명 - 이 몸은 아니 죽고 살아남아 하나님의 음악을 노래하리라  프란츠 피터 슈베르트의 묘비명 - 음악은 이곳에 소중한 보물을 묻었다  아이작 뉴턴의 묘비명 - 여기 아이작 뉴턴 경이 잠들다  호머 헐버트의 묘비명 - 헐버트 박사의 묘-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클라이브 커슬러의 묘비명 - 계속되는 동안 그것은 훌륭한 파티였다  에드거 앨런 포우의 묘비명 - 갈가마귀는 말하되 다시는 없도다  알버트 슈바이처의 묘비명 - 만약 식인종이 나를 잡으면 나는 그들이 다음과 같이 말해주길 바란다  루쉰의 묘비명 - 노신선생지묘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묘비명 - 당신이 오시기 전에는 우리가 어둠 가운데 살았는데,     당신이 가신 후 우리는 빛 가운데 삽니다  조셉 콘래드의 묘비명 - 수고가 끝난 후의 수면, 폭풍우 치는 바다를 항해한 후의 항구,     전쟁이 끝난 후의 안락, 삶 다음의 죽음은 기쁨을 주는 것이다    ============================ \\\\\\\\\\\\\\\\\\\\\\\\\\\\\\\\ ============================ 세계 유명인들의 묘비명(墓碑名)       조지 버나드 쇼(극작가, 1856~1950) 우물쭈물 살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어니스트 헤밍웨이(소설가, 1899~1961)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오.             벤자민 프랭클린(정치인, 1706~1790) 출판업자 벤 프랭클린의 시신이 여기 벌레의 먹이로 누워 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늘 새롭고 더 우아한 판으로 개정될 것이기 때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화가 / 조각가, 1475~1564)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는 것만이 진실로 내가 원하는 것.                 에이브러햄 링컨(정치인, 1809~1865)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영원할 것이다.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교육가, 1745~1827) 모든 일을 남을 위해 했을 뿐 그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노스트라다무스(철학자, 1503~1566) 후세 사람들이여! 그의 휴식을 방해하지 마시오.           토머스 에디슨(발명가, 1847~1931) 상상력, 큰 희망, 굳은 의지는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 것이다.       앤드루 카네기(기업인, 1835~1919)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들을 곁에 모으는 기술을 가졌던 사람이 여기 잠들다.                 프리드리히 니체(철학자 / 시인, 1844~1900) 이제 나는 명령한다. 자라투스트라를 버리고 그대 자신을 발견할 것을..               스탕달(소설가, 1783~1842)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         기 드 모파상(소설가, 1850~1893)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조봉암(독립운동가,1898~1959) 우리가 독립 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호머 헐버트(사학자, 1863~1949)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윌리엄 포크너(작가, 1897~1962) 나의 야심은 역사에 묻혀 없어진 한 사람의 개체로 남는 것이다.                     로널드 윌슨 레이건(정치인, 1911~2004) 옳은 일은 언제나 궁극적으로 승리한다.                 프랑수아 모리아크(소설가, 1885~1970) 생은 의미 있는 것이다. 행선지가 있으며 가치가 있다.                 마타하리(스트립 댄서 / 스파이, 1876~1917) 마르가레테 게르투르드 젤러(마타하리의 본명)                 르네 데카르트(철학자 / 수학자, 1596~1650) 고로 여기 이 철학자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셔우드 앤더슨(소설가, 1876~1941) 죽음이 아니라 삶이야말로 위대한 모험이다.                         키에르케고르(종교철학자, 1813~1855) 잠시 때가 지나면 그때 나는 승리하고 있으리라.                     라이너 마리아 릴케(시인, 1875~1926) 오 장미여!  순수한 모순의 꽃                 프랭크 시나트라(가수 / 영화배우, 1915~1998) 최상의 것은 앞으로 올 것이다.                 칼 마르크스(작가, 1818~1883)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토머스 제퍼슨(정치인, 1743~1826) 독립선언문의 기초자, 버지니아 종교자유법의 기초자.           조지 고든 바이런(시인, 1788~1824) 그러나 나는 살았고 헛되이 살지 않았다.           베네딕트 드 스피노자(작가, 1632~1677) 신에 취한 사람 스피노자.           프란시스 베이컨(화가 1909~1992) 아는 것이 힘이다.                 장 드 라퐁텐(시인 / 동화작가, 1621~1695) 장은 밑천과 수입을 모두 탕진하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갔노라.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시인, 1865~1939) 삶과 죽음에 차가운 눈길을 던져라, 마부여, 지나가라!                 프란츠 피터 슈베르트(작곡가, 1797~1828) 음악은 이곳에 소중한 보물을 묻었다.                 프란츠 카프카(소설가, 1883~1924) 내면을 사랑한 이 사람에게 고뇌는 일상이었고 글쓰기는 구원을 향한 간절한 기도의 한 형식이었다                           에밀리 디킨슨(시인, 1830~1886)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았다.           디오판토스(그리스 수학자, 246?~330?) 보라! 여기에 디오판토스 일생의 기록이 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작곡가, 1756~1791) 우리는 묘비명이 아닌 음악으로 위대한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기억한다 .               프랑수아 비용(시인, 1431~1463?) 아무 쓸 데도 없는, 머리가 돈 부랑자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 대지에 몸을 되돌렸다.         라파엘로 산치오(화가 / 건축가, 1483~1520) 여기는 생전에 어머니 자연이 그에게 정복될까 두려워 떨게 만든 라파엘로의 무덤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마케도니아의 왕, BC 356~BC 323) 용기 있게 살고 영원한 명성을 남기고 죽는 것은 아주 멋진 일이도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극작가 / 시인, 1564~1616) 여기 묻힌 유해가 도굴되지 않도록 예수의 가호가 있기를..           아서 코난 도일(소설가, 1859~1930) 강철처럼 진실하고 칼날처럼 곧았다.           엘리자베스 1세(잉글랜드의 여왕, 1533~1603) 오직 한순간만 나의 것이었던 그 모든 것들..                 게일 보든(발명가, 1801~1874) 나는 시도하다 실패했다. 그러나 다시 또 다시 시도해서 성공했다.                   모리야 센얀(일본 선승) "내가 죽으면 술통밑에 묻어줘, 운이 좋으면 술통바닥이 샐지도 몰라"                 청화 스님 (1924~2003) “사람들은 이 몸이 한낱 허깨비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절제하고 줄이지 않으면 행복과 평화란 없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노스트라다무스- 후세 사람들이여, 나의 휴식을 방해하지 마시오"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니콜라이 고골리(러시아의 문호) 고골리는 죽었다. 그는 러시아인이었다. 그 손실이 너무 잔인하고 갑작스러워,우리는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르네 데카르트- "고로 이 철학자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모파상(프랑스 소설가) "나는 모든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바이런(18세기 영국의 낭만파 시인) "그러나 나는 살았고, 헛되이 살지 않았다."     박인환(시인)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것"       블레즈 파스칼- 근대 최고의 수학자, 물리학자, 종교철학자인 파스칼     아르키메데스- "내 묘비는 원기둥에 구가 내접한 모양으로 세워달라."     아펜젤러-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에디슨(발명왕) 상상력, 큰 희망, 굳은의지는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것이다."     이소룡- 브루스 리. 절권도의 창시자.     이순신(장군) 필생즉사(必生卽死), 필사즉생(必死卽生)"     임마누엘 칸트- 생각하면 할수록  날이가면 갈수록, 내 가슴을 놀라움과 존경심으로 가득채워주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과 내 마음속 도덕률이다"     조병화(시인) 나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중광스님- "에이, 괜히 왔다"     프랑스와 모리악(프랑스 소설가) "인생은 의미있는것이다. 행선지가 있으며 가치가 있다."     미셸 투르니에 - 내 그대를 찬양했더니 그대는 그보다 백 배나 많은 것을 내게 갚아주었도다.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 -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최영 - 위엄을 떨쳐 나라를 구할 때 백발이 성성했구나.     라울 발렌버그 - 날씨가 좋을 때는 친구가 많고 하늘에 구름이 끼면 혼자일 것이다.     데보르드 발모르 -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네.     한니발 - 그의 강철의지 앞에서는 높은 산도 몸을 낮춘다.     토마스 에디슨 - 상상력, 큰 희망, 굳은 의지는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 것이다.     로버트 에반스 - 잘 사는 것이 최상의 복수이다.     게일 보든 -  나는 시도하다 실패했다. 그러나 다시 또 다시 시도해서 성공했다.       허목 - 말은 행실을 덮어주지 못하였고, 행동은 말을 실천하지 못했도다.     미셀 투르니에- 내 그대를 찬양했더니 그대는 그보다 백 배나 많은 것을 내게 갚아주었도다. 고맙다 나의 인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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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크릴로프의 우화를 읽게 해야... 댓글:  조회:3111  추천:0  2017-04-24
    출생 1768/69. 2. 13(구력 2. 2), 모스크바 사망 1844. 11. 21(구력 11. 9),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적 러시아 요약 러시아의 우화작가.   겉으로는 순진한 동물들이 펼치는 이야기를 통해 당대 사회의 인물들을 풍자했으며, 압축된 문체와 구어체 관용구를 사용함으로써 러시아 고전주의 문학에 사실주의의 색채를 더해주었다. 그의 경구들은 대부분 러시아의 일상용어로 뿌리내렸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정식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며 9세 때부터 사환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0대 소년시절에 이미 오페라·희극·비극 등을 쓰기 시작해 1789년 이후 풍자적 저널리스트로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나 정부의 검열로 활동을 방해받았다. 1805년에는 장 드 라 퐁텐의 우화를 번역하기 시작했으나 독자적인 우화 창작이 자신의 진정한 표현 매체임을 깨달았다. 1809년 첫번째 우화집을 발표하면서 황실의 후원을 받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도서관의 명예직에 올랐고 30년간 이 직책에 있었다. 그밖에 운문으로 씌어진 8권의 우화집을 발표했으며 수많은 훈장을 받았다. 그가 다룬 주제 중 일부는 이솝과 라 퐁텐에게서 빌려온 것이지만 나름대로 이를 변모시켰다. 여우와 까마귀, 늑대와 양은 교활하든 어리석든간에 언제나 뚜렷하게 러시아적인 특징을 띤다. 상식·근면·정의를 강조하는 신랄하고 진솔한 우화를 통해 그는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한 최초의 러시아 작가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모든 계층의 독서대중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독자 개개인은 그의 작품 속에 러시아의 민족적 특성이 구현되어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Daum백과] 크릴로프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이반 크릴로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반 안드레예비치 크릴로프(Ива́н Андре́евич Крыло́в, 1769년 ~ 1844년) 우화시를 주로 쓴 러시아의 시인이다.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렸을 때 육군사관이던 부친을 잃고 역경 속에서 자랐다. 1783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긴 뒤 평생을 그 곳에서 보냈다. 1789년부터 풍자 잡지의 편집에 종사하는 한편, 수편의 희극 및 희가극을 썼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게다가 농노제에 대한 풍자를 이유로 잡지는 정간처분을 당했다. 그 뒤 수년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1805년 우화시 《떡갈나무와 갈대》를 발표하여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이솝이나 라퐁텐의 우화를 모방하였으나 차츰 독창적인 러시아의 우화를 창작하였다. 1809년에 최초의 《우화》 시집을 발간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부터 명성이 높아져, 우화시 창조를 천직으로 하여 평생을 통해 205편을 써서 우화시를 민중생활에 도입했다. 또한 민중어를 자유로이 구사하여 러시아 문장어의 발전에 끼친 공이 크다. 크릴로프의 우화는 시 형식으로 되어 있고 총 205편이 있다. 이 가운데 45편은 이솝(기원전 6세기경의 사람), 라 퐁텐 등의 개작인데도 자작의 것과 다름없을 만큼 러시아화되어 있다. 작자의 생전에 약 7만 5천 부가 팔려,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취재범위가 넓으며 동물과 식물 등 온갖 것이 등장하여 인간의 우매함, 아첨, 허영, 사회관습, 전제정치 체제 등을 풍자한다. 그리고 이 풍자는 모랄리스트로서의 작자의 성격과 건전한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의 우화는 민중의 말을 대담하게 도입하여 민중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점에 의의가 있다.   ​  
426    시란 무경계 세상에서 희노애락의 꽃을 꽃피우는 행위이다... 댓글:  조회:2480  추천:0  2017-04-24
시적 여유의 회복을 위해                                                        박수연(문학평론가)     한 계절의 시를 평하는 자리는 꽤나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무수히 많은 작품량이 일차적 이유이기는 하지만, 작품들의 갈래도 그렇다. 시들은 좀처럼 동일한 지평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시가 개성적 서정장르인 이상 각각의 작품이 특이성을 실현하는 것은 속성상 필연적이라고 해도, 최근 한국 시단의 모습은 개별자들의 무한한 각축장인 듯 보인다. 그것을 나는 어느 자리에선가 시의 바로크라고 롤러본 적이 있다.  그 규정은 고무되어야 할 측면에서는 시적 자기 영역의 성실한 개성 탐구를 의미하지만, 그 반대 측면에서는, 바로크의 장인들이 절대왕정에 주박되어 있었듯이 자본에 휩쓸린 문화적 자기부정을 의미한다는 말이었다. 전자의 측면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다채로운 해석적 글을 통해 애정을 표한 바 있다.  최근의 시비평은 주로 섬세한 시 언어의 결을 따라가면서 의미(도달할 수 없는 기의의 세계)를 해석하고 그로써 비핑에 구두점을 찍었다. 이 구두점은 비평의 미학적 기준에 대한 확실한 자기 표현은 아니었을까? 글이 종결되는 순간 미끄러지던 기표들은 의미 해석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고정점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해석 자체가 이미 일정한 주관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보면, 최근의 시비평이 비판과 평가를 결여한 해석에 머무르고 있다는 비판은 한편으로는 옳고 한편으로는 그르다.  시의 지속적 갱신에 기여할 수 있는 비평적 질문의 필요성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그 비판은 충분히 납득되는 바가 있지만, 해석 자체로서 시의 의미론을 입증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에서 보면 그 비판은 그다지 정곡을 겨냥한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해석에 이미 평가가 포함된 것이겠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의 비평이 한 측면의 관점만을 대변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특징이 되었다면, 그렇다면 문제삼아야 할 것은 오히려 근대적 개인 신화의 현재적 실현은 아닐까? 말하자면 여전히 주체라는 문제 설정이 결여되거나 과도한 형태로 문학 영역에 제기되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시에 대한 시대의 규정성이란 바로 이것의 객관적 요인을 뜻하는 것이겠다. 근대적 개인주의 신화의 한 면이 서정시의 개성으로 실현될 때, 이 개성이란 곧 시적 주체의 발언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발언의 방향과 수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 난맥상에 있다고 해도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먼저 이야기해 보고 싶은 것은 여성시인들의 작품이다.  < 황해문화> 2005년 봄호는 여성 시인들의 시만 수록하고 있다. 편집자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가 아닐 수 없는데, 시인틀은 김혜순, 허수경, 이경림, 이수명, 김선우, 이기성 등이다. 이쯤 되면, 다앙하면서도 활달한 언어로 한국 시단의 여러 갈래에 피를 돌게 하고 살을 입힌 시인들이 모여 있다는 평가가 나올 만도 하다. 다양한 언어라고 했듯이, 실로 이들의 시를 여성 시인들의 시라는 말로 묶기에는 작품들의 진폭에 큰 낙차가 있다. 가령, 나는 언덕을 쓰다듬는다 나는 언덕의 젖꼭지를 문다 나는 하늘과 땅 사이 희멀건하게 벗겨진 언덕의 엉덩이를 가려보려고 손수건을 펴고 앉는다 ---중략--- 나는 저녁 산책을 마치고 사지가 잘린 언덕을 불쌍한 가슴처럼 두 팔에 싸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김혜순, 「산책」부분 에서처럼 대지모신의 상처를 보듬는 시가 있고 , 휴게소 녹슨 탁자 위를 기어가던 까만 자벌레 둥글고 광막한 지평선 두리번거리다 허공을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상행과 하행의 고속도로는 마주보며 질주하고 한낮 주유소의 사내는 검은 기름 탱크를 깔고 앉아 졸고 있는데 뱉어낸 가느다란 실을 입에 꼭 물고 매달린 자벌레. 백미러에 쨍쨍하게 반사되는 빛, 한 겹씩 동그랗게 몸을 말아 안간힘으로 기어오르는 눈먼 자벌레의 이글거리는 표정으로 목이 쉰 사내는 다시 트럭에 오른다. 닳아버린 타이어에 찌그러진 그림자가 깔려 있다. 검은 고속도로가 다시 끈적하게 펴지고 폐타이어 가득 실린 트럭이 허공에 매달려 있다. 슬픔을 모르는 흰 손이 천천히 허공을 흔들고 있다. -이기성, 「슬픔」전문 에서처럼, 현실의 검은 삶을 막막한 이미지로 빚어내는 시도 있다. 서정시가 시인의 내면을 드러내는 언어라면, 김혜순과 이기성 사이에는 넘지 못할 어떤 선이 있다. 그것은 외적 대상에 대한 묘사의 태도에서 나타나는데, 김혜순이 안타깝게 대상을 품에 안는다면 이기성은 냉정하게 그것을 관찰한다. 여기에 물론 좋고 나쁨이 있을 수는 없다. 이것은 대상과의 거리를 표시할 뿐이다.  그래서 김혜순이 대상과의 일체감을 표현함으로써 여성성 자체의 힘과 아픔을 노래한다면, 이기성은 결코 일체화될 수 없을 듯한 대상을 통해서 세계의 슬픔을 노래한다. 세계에 대한 이 차이 나는 대응의 표현에 있어서 김혜순이‘꼼지락거리고, 물고, 만지고, 입술을 대고’등의 용언을 사용한다면, 이기성은‘두리번거리고, 안간힘을 쓰고, 찌그러지고, 끈적한’등의 용언을 사용한다. 김혜순이 재생의 국면에 주목한다면, 이기성은 불모의 순간에 집중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러므로 여성의 언어라는 말로 포괄될 수 없는 굴곡을 갖는 언어들이다. 이것은 차라리 여성의 언어를 넘는 언어이다. 허수경은 그 사이에서 여성의 대지모신적 넉넉함을 노래하지만(「고요하게 손을 뻗다」), 그것을 부유하는 실재의 애매모호한 대상으로 표현함으로써 도달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동그라미」의 “달팽이”는 그 안타까움을 실체화하고 있는 징후적 대상에 해당할 것이다. “누군가 달팽이에게 말을 좀 걸어 주오/빗장을 걸 듯 말을 걸어/달팽이를 어느 어수선한 집 안으로 들여보내 주오"(「동그라미」)라는 진술은 그 도달할 수 없는 세계를 향한 애절한 호소이다.  이에 대비해서 이수명의 시를 볼 수 있다. 이른바 기표의 미끄러짐이라는 명제가 적절하게 표현되고 있는 그의 일련의 시들에 비해 「검은불 붉은 불」과 「그를 매달았다」는 그 언어 놀이의 강도가 훨씬 딜하지만, 여전히 의미의 확정성에 대한 저항의 시편들이라는 인상이 크게 다가오는 작품들이다. “불의 어깨 위로 불이 내려앉는다. 검은 물 위로 붉은 불이 붉은 불 위로 검은 불이 내려앉는다. 검은 붙이 붉은 말을 하고 붉은 불이 검은 말을 한다. 엉겨붙는 이 들쭉날쭉한 말들을 닫을 수가 없다. 말에는 문이 없다."(「검은 불 붉은 불」) 와 같은 진술은 그것을 직접 표현한 경우이다.  '말들을 닫을 수 없을 때’시의 언어들은 끝없이 의미의 기원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이 또한 대상의 참된 세계에 대한 호소라고 할 수 있다. 대상 세계에 도달하려 하되 도달하지 못하는 운명이 곧 허수경의 언어들이 전달하고 있는 운명이다. 허수경이 그것을 격정적 언어로 만들어낸다면 이수명은 그것을 이지적 언어로 만들어낸다. 이 둘 사이에도 대상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경림과 김선우는 어떨까? 이경림에게는 우선 비애가 있다. 이 비애는 하나의 대상과 그것을 둘러싼 존재들의 무정함으로부터 비롯되는데, 「외등」이 그 관계의 비정성을 묘사한다면 「검은 문」은 그 비정성의 본질을 묘사한다. “검은 선팅된 저 자동문 안/언듯 보이는 것//회색의 계단......회색 벽...... 회색 바닥......회색 천장....../천장에 붙은 형광빛 해....../......닫힌 엘리베이터"(「검은 문」)와 같은 언어는, 안이한 선택이기는 하지만 세계의 비애를 충분히 전달한다. 여기에는 어찌할 바 모르는 주체의 안간힘 같은 것이 있다.  “도대체 어떤 무지막지한 힘이" (「바람이 하도 모질게 부니」) 세계를 움직이는지 알지 못할 때 그 안간힘이 나온다는 것은 시인이 세상을 그렇게 살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무지막지한 힘 앞에서 속절없이 쓰러져가는 존재들에 비하면 이런 태도야말로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는 비애의 냉정함을 뛰어넘는 능력이 있다. 김선우에게는 비애를 넘어서 긍정으로 향하는 생명의 커다란 힘을 발견할 줄 아는 시선이 있다. 「어떤 출산」은 죽음마저도 삶의 따뜻함으로 감싸서 피를 돌게 한다. 죽음이 삶을 덮을 때 무정함이 나온다면 그 반대의 경우에 사랑이 세계를 덮는 것인데, 후자에는 개별의 삶이 그것 자체로 충만한 경지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김선우 특유의 사랑법이다. 이 사랑은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없애는 사랑이며, 그 무경계로서 세상을 꽃피우는 행위이다.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그대가 꽃피는 것이/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라고 말할 때 그 무경계의 확산과 깊이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 여섯 명의 여성 시인들이 냉정과 열정의 언어들로 대상을 관찰하거나 대상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할 때, 혹은 대상과 주체의 경계 지우기를 노래할 때 시들은 그 관계의 궁극에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관계의 궁극이란 사건들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것인데, 관찰은 그 출발점을 아예 바라보지 않는 태도이고, 불가능성이란 어떤 좌절에 해당하며, 경계 지우기란 주체의 소멸과도 통하는 것이다. 이것이 근대적 인식론의 폐해에 대한 심미적 비판일 수는 있지만, 서정시의 개인 주체적 성격에 호응하는 것인지는 더 따져볼 문제임에 틀림없다. 시에서 주체는 과연 지워질 수 있는 것인가? 류외항의 시는 그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변을 제출한다. 「바다조곡 」( 2005. 봄)이란 시다. 바다와의 점층적인 합일을 거쳐 드디어 바다를 넘어서는 주체의 행위가 있고, 그 결과 이루어지는 우주의 신생이 있다. 여기에서는 걸코 지워질 수 없는 주체의 능력에 주목해야 하는데, 그것이란 각 연의 첫째 행들인 “내가 바다에 이르렀을 때” “내가 바다에 한 발을 내밀었을 때” “내가 바다에 다른 한 발을 내밀었을 때” “내가 바다에 가슴을 내밀었을 때” “내가 바다메 입술을 내밀었을 때” “내가 바다에 들어 우주의 반대편으로 떨어질 때”로부터 비롯되는 우주의 탄생을 가져오는 힘이다.  주체가 존재한다면, 이렇게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다. 그렇지만 그것을 근대적 주체중심주의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류외향이 말하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 세계의 움직임이 드디어 나를 떠나서 그대에게로 들어가는 일의 시작이다. 여기에는 탈주체중심주의와 주체중심주의의 상관이 있다 . 주체에 대한 이런 인식은 최근의, 특히 무의식에 의탁한 시적 진술들에 비교해서 볼 때 독특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한국 여성시인들의 시는 언제부터인지 무의식의 언어에 갚게 집중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무의식에 의탁한다는 것은 그것대로 생애의 또다른 국면을 펼쳐 보인다는 점에서 배척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것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오면, 주체의 망각과 개성의 소멸을 불러오지 말란 법도 없다. 현재 한국의 여성시가 넘어서야 할 분수령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되는 때에, 류외항의 시는 그에 대한 분명한 응답이다. 여성 시인들이 삶과 죽음과 재생을 냉정과 열정으로 보여주는 틈에, 선배 시인들에게 삶은 무엇이었을까? 두 경향이 대략 손에 잡힌다 2005년 봄호에 발표된 황동규, 조정권의 시와 2005년 봄호의 최하림과 신대철의 시다. 두 개의 대비되는 세계 인식을 위해 두 작품을 인용해보겠다. 여기저기 볏짚단들이 가을을 가을을 들어 세우고 있는 들녘에서 까마귀들이 날고 경운기가 털털털 나락가마를 싣고 간다 우리는 고개를 수그리고 따라간다 만 가지 감회 서린 어스름이 시시각각 색조를 달리하면서 우리 뒤를 따르고 시간도 시간들도 따라간다 빈 들이 시간들을 끌어당긴다 ---중략--- 수확이 많고 적고를 불문하고 지금은 그러할 때이다 한 해 농사가 끝나고 남은 날들도 거의 가고 있으므로 저렇게 새날들이 서둘러 오고 있으므로 -최하림 「저녁 종소리」 부분 소멸해가는 존재들의 숙명에는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그럴 때 “새날들이 서둘러 오”는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 삶의 재생 국면이 다름아닌 순리의 법칙임이 조용히 기록되는 이 시는 같은 지면에 수록된 신대철의 시와도 상통한다. “생의 감각을 넘어서면 바람도 제자리로 돌아가는가, 고독도 죽음도 제자리로, 우주 어디로?" (「흰새」)라고 말하는 신대철의 생사 감각은 최하림의 그것과 거의 동일한 세계에서 형성된 것이다. 두 편의 시에서 삶의 비장함이 도드라지는 것은 죽음마저도 긍정하는 그 갚은 의미의 언어들이 독자들에게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2005년 봄호에 실린 황동규와 조정권의 시에는 일상적인 긍정의 세계관이 작용한다. 여기에는 비장미 대신 경쾌함이 있다. 황동규의 오랜 시작법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조정권에게도 그것은 세계를 보는 새로운 프리즘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듯하다. 그런데 이 둘의 경쾌함은 사실은 다분히 시적 진술의 방식에서 기인한다.  “눈썹 바로 앞에서 나무 하나가 몸을 홱 뒤틀어/간신히 충돌을 피해준다./전신 한차례 출렁! 잠시 나를 잊었다./그만 발길 되돌려?/이런, 백자 유약 같은 외길인데!/그대로 걷는다. 허방들이 촉각에서 해방된다. 촉각들이 놓여난다./안개 속이 훤하다,"(「안개 속에서」) 와 같은 진술은 생의 심각함을 묘한 경쾌함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 유머는 “어제는 잎 다 떨구고 있는 저녁비/혼자 가게 했다./거적때기 밑에 꺼져 있는 햇빛./거 누구요./거 뉘시요....../땅거미가 먼저 나와 있다."(「이 마음의 걸(乞)」)라고 말하는 의뭉스러움과 통한다. 이것은 어떤 여유에서 비롯될 것이다. 이 여유가 시의 행 사이에 여벽을 만들어낸다. 젊은 시인들에게서는 이런 여유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의 성공과 실패를 따져볼 수는 없지만, 시의 언어에 갚이를 부여해주는 한 방법으로 이 여유를 생각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비장함도 마찬가지인데, 젊은 시에 그게 점점 사라지는 듯하기 때문이다. 이 사라짐의 근원적인 원인으로 시적 주체의 상실이라는 측면을 지적하는 것은 그리 잘못된 일은 아닌 듯하다. -------------------------------------------------------------------------   작별  ―주하림(1986∼ ) 나는 그것들과 작별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나는 그것을 향해 가요 ―배수아 ‘북쪽 거실’ 혐오라는 말을 붙여줄까 늘 죽을 궁리만 하던 여름날 머리를 감겨주고 등 때도 밀어주며 장화를 신고 함께 걷던 애인조차 떠났을 때 나는 사라지기 위해 살았다 발 아픈 나의 애견이 피 묻은 붕대를 물어뜯으며 운다 그리고 몸의 상처를 확인하고 있는 내게 저벅저벅 다가와 간신히 쓰러지고는, 그런 이야기를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할 것만 같다 ‘세상의 어떤 발소리도 너는 닮지 못할 것이다’ 네가 너는 아직도 어렵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우리가 한번이라도 어렵지 않은 적이 있냐고 되물었다 사랑이 힘이 되지 않던 시절 길고 어두운 복도 우리를 찢고 나온 슬픈 광대들이 난간에서 떨어지고, 떨어져 살점으로 흩어지는 동안 그러나 너는 이상하게 내가 손을 넣고 살며시 기댄 사람이었다                   ‘한번이라도 어렵지 않은 적이’ 없었단다. 결국 ‘사랑이 힘이 되지 않던 시절’이 오고. 두 사람은 자기를 ‘찢고 나온 슬픈 광대들이’ 되어 서로 물고 뜯기도 했을 테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누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없는 가난. 그래도 나만큼 가난하고 나보다 약한 ‘너는 이상하게/내가 손을 넣고 살며시 기댄 사람이었다’. 그랬건만 떠났다. 누추하다 못해 혐오스러운 현실에 ‘늘 죽을 궁리만 하던 여름날’. 애인은 떠나고 애견은 발을 다쳐 ‘피 묻은 붕대를 물어뜯으며’ 울부짖는다. 만신창이가 돼 쓰러져 있는 화자에게 개가 다가와 풀썩 몸을 눕힌다. 그 슬프고 불안한 눈빛이 무슨 말을 하는 것 같다. ‘세상의 어떤 발소리도 너는 닮지 못할 것이다’. 이런 말 아닐까. 내겐 당신밖에 없어. 세상 어떤 발소리도 대신할 수 없는 당신 발소리를 잃지 않게 해줘.      이 시가 실린 시집 ‘비버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은 몸도 마음도 집시인 화자들이 거침없이 펼치는 성적 판타지가 인상적이다. ‘미찌꼬의 오르가즘은 모든 것을 병든 기관지처럼 빨아들이고 뱉어내지 굶주림에 지친 채로 오, 미찌꼬, 미찌꼬’(시 ‘미찌꼬의 호사가’)같이 요사스러운 매력을 뿜는 시구가 즐비한데, 간간 ‘왜 네 영혼은 영혼이 들지 않는 아픈 몸만 골라 떠도니’(시 ‘텍스처 무비’)같이 단아한 시구가 열을 가라앉히고 숨을 돌리게 한다.  
425    시인은 자기자신만의 시를 찾아야 생명력이 있다... 댓글:  조회:1933  추천:0  2017-04-23
삶의 진정성을 향해서                                                                          김명인 (시인)  제 주변의 글을 쓰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아주 어려서부터 글을 쓰고자 했고, 나중에 그 꿈을 실현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몇 달 전의 일인데, 저한테 혹시 중 고등학교 때 쓴 작품이 있으면 그걸 모아서 책을 만들고 싶다며 원고 청탁이 왔습니다. 하지만 그때 글을 쓰지 않았던 저로서는 그 청탁에 응할 수 없었습니다. 문학이 무언지 모르고 지낼 때였으니까 작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을철이면 동해안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고기가 오징어입니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오징어 말리기를 도우면서 조그만 시골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문학이나 다른 문화를 접해볼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글을 써서 뭐가 되겠다거나 하는 따위의 꿈은 꾸지 않았습니다. 집이 너무 가난하니까 돈이나 많이 버는 직업을 얻어서 어떻게 이 세상을 잘 살아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의 제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의사가 되면 누구한테도 존경을 받을 테고 마음대로 돈도 벌면서 편안한 생활을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집이 워낙 가난했으니까 대학에 진학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냥 있으면 오징어 배나 타면서 죽을 때까지 고생을 해야 한다는 막막한 생각이 들어 도망치다시피 해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오징어 배를 피해 서울로 도망친 끝에  혼자 공부를 해 대학 입학 시험을 치렀는데 떨어졌습니다. 다 포기하고 내려가려고 생각했는데 마침 주변에서 다른 대학도 시험을 한 번 쳐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녔던 고려대학에 우연히 1차 지망도 아닌 2차 지망으로 합격이 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들어간 셈이 되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 보니까 그 공부가 전혀 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의도했던 공부가 아니었습니다. 궁리 끝에 다시 시험을 쳐서 의과대학에 도전했지만 건강을 해치고 학업조차도 계속할 수가 없어서 모든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나한테 허락된 이 길이 최선이라고 하면 열심히 해봐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비며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서 학교에 다녀야 했기 때문에, 그런 결심을 하고 나자 무엇보다도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珝♣?비로소 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왕에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할 바에야 장학금도 받아 학비는 더 이상 내지 않고 다녀야겠다는 무모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학과 과목들에 신경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조지훈 선생님께서 제가 다녔던 학교에 재직하고 계셨습니다. 건강을 해쳐서 학교는 거의 못 나오실 형편이셨지만 한 학기에 한두 번 정도 나오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이 강의 강의하는 과목의 모든 과제는 성적의 대상이 되었고, 과제로 학과 공부가 계속될 형편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받았던 과제 중에서 첫 번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고 30매 정도로 요약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선생님이 쓰신 시론 책인 {시의 원리}에 대해서 노트 필기를 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숙제는 자작시 다섯 편을 써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기왕이면 학비를 내지 않고 학교를 다녀야 한다고 스스로 결심을 했는데, 학점을 잘 받지 못하면 학비를 내야 할 형편이었던 저로서는 그 과제를 받고 참으로 막막했습니다. 시가 뭔지를 알아야 하는데 난감했습니다.  그래서 궁리한 끝에 우선 남들의 시를 읽어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모든 걸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각오를 가졌기 때문에, 시를 읽는 것도 참으로 열심히 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시라고 생긴 것은 빠뜨리지 않고 손에 닿는 것은 다 읽어본 것 같습니다. 제가 판단을 해서 마음에 와 닿는 작품이 있거나 괜찮다는 생각이 들면 노트에 옮겨 적었습니다.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다만 점수를 잘 받기 위해서 노트에 옮겨 적었던 시가 대학노트로 7권 정도 되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시를 열심히 읽었는가 하면 대학노트 7권의 시를 모으기 위해서 제가 읽었던 시는 아마도 10배 정도는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시가 뭔지를 좀 알 것 같았고 자작시 다섯 편을 선생님께 제출을 했습니다.  조지훈 선생께 제출할 숙제로 처음으로 시를 쓰다  그렇게 시를 읽고 시를 쓰는 사이에 저도 모르게 시에 몰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지훈 선생께 다섯 편을 제출한 뒤에도 시를 계속 썼습니다. 뭔가 나 같은 표현하는 형식이 있다면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시를 꾸준히 써 나가기 시작했는데, 누구한테 습작을 보여줄 대상이 없었습니다. 내가 쓴 시가 잘된 시인지 잘못된 시인지 누가 판단을 해주고 검토를 해줘야 하는데 그럴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제 주변에 읽어줄 시인이 없어서 동급생들한테 좀 읽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지만 사실 동급생들은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저는 생각다 못해 와병 중이신 선생님 댁을 찾아 뵙기로 했습니다. 시가 몇 편 써지면 그걸 들고 2주에 한 번씩 선생님 댁으로 갑니다. 그때는 워낙 촌스러웠으니까 변변히 말씀도 못 드리곤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왜 왔어?" 하고 문간방에서 누워 계시다가 방문을 열고 내다봅니다. 고개를 숙여 꾸뻑 절을 하고 손을 내밀어 "이걸 좀 읽어주십시오" 하면, "두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생님께서는 잘 썼다거나 잘못 썼다는 말씀도 없으신 채 2주만에 가면 옛날 원고를 돌려주시는 겁니다. 아무 말씀도 안하시니까 원고를 받고 새로 써간 시를 내밀고 돌아오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검토를 하시고 내가 쓴 이상한 말에 밑줄을 그어놓고 다른 말로 고쳐놓거나 또 제목이 영 마음에 안 들면 제목을 고쳐 놓으십니다. 시 한 편에 서너 군데 첨삭을 해서 돌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첨삭을 해놓은 것을 보니까 제가 미리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은 표현이 되고 깊은 의미를 띠었기 때문에, 그것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 첨삭을 해놓으셨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혼자서 자발적으로 시험공부를 한 셈입니다. 다만 선생님은 제 원고에 첨삭만 해주셨고, 그런 관계는 제가 대학 4학년 때 선생님이 돌아가심으로 해서 끝났습니다. 조지훈 선생님께서 2년 동안 제 작품을 읽어주신 셈이 됩니다.  그 사이 저는 놀랍게도 첫해에 신춘문예에 3편이 최종심에 올랐습니다. 그때가 대학 2학년 때인데 소설가 윤후명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1년도 채 공부를 안했는데 이렇게 시를 잘 쓰는가. 혹시 시의 천재가 아닌가' 하는 따위의 건방진 생각을 했습니다. 해마다 최종심에 올라갈 때도 있고, 그나마 아무 것도 아닐 때도 있고 떨어진 것으로는 스무 번도 더 됩니다. 결국 저는 이것도 저것도 안 되었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고는 군대에 갔습니다.  군대 생활 3년을 끝내고 돌아오니 10월 중순이 좀 넘었을 때일 겁니다. 신문사마다 신춘문예 공고가 나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취직을 하기 위해서 학교를 찾아갔더니, 지금 고대 교수로 재직중인 김인환 선생이 이렇게 귀띔을 해 주었습니다.   "야, 너 대학 때 쓴 작품 정도면 요즘 신춘문예가 질이 좀 떨어졌으니 투고하면 충분히 당선이 될 거야."  그러면서 정리해서 신문문예에 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서울에 아무 근거도 없고 취직은 해야 하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열흘 동안 작품을 열 다섯 편이나 썼습니다. 그 작품들을 나누어서 신문사마다 투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원양어선을 타고 떠나는 형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 형님을 배웅하러 부산으로 기차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형님한테 무언가 짤막한 글을 써줘야지 하는 생각으로 부산에 도착하니 시가 완성되었습니다. 그걸 책 앞에 끼워서 다른 책과 함께 드리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 작품이 아까워서 그걸 남는 작품과 합쳐서 다른 신문사에 투고를 했습니다. 그것도 하루만에 쓴 작품인데, 그것이 그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시인이 된 내 생애가 우연일까 필연일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돌이켜보지만 제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우연적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의과대학에 합격이 되었으면 시를 썼겠습니까. 제가 다녔던 고려대 국문학과는 그 한해만 후기로 학생들을 뽑았던 것입니다. 제가 국문학과를 들어간 것도 우연이고 시를 쓴 것도 극히 우연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니까 아마도 우연만이라고 생각해서는 제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6·25사변을 겪으면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고, 그때는 실컷 먹어보는 게 저의 소원이기도 했습니다. 식구들의 절반이 좌우 대립의 와중에서 죽었으니까 생활은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납부금을 제때에 내지 못해서 집으로 쫓겨오기 일쑤였습니다. 그럴 때면 가방 팽개쳐 놓고 낚싯대를 바닷가로 달려갔고, 학교 공부는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웬지 바다 앞에 서면 막막하고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곤 했습니다. 제 시가 그런 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형성이 되었다면, 후기 대학에 붙어 시인이 된 건 필연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운명의 척수가 저를 몰아 여기까지 온 게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지만 많은 시인들이 스스로 느끼는 어떤 결핍이나 절실한 느낌 때문에 시를 쓰려고 할 것입니다. 시는 무언가 하면 한 사람이 느끼는 절실함이나 특수성을 언어라는 형식을 통해서 바꿔놓는 양식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실제로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적 충동을 언어라는 형식으로 바꿔놓는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시라는 대화 체계를 낳는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시는 언어를 표현 매재로 선택하는 순간 이미 공유자산화 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공유의 자리에서 표현되는 것은 나를 끌어내는 형식이 아니겠는가 생각됩니다. 나를 끌어내는 내용은 일종의 느낌이거나 관념일 수도 있고, 감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문단에 데뷔한 뒤 한동안은 관념화하는 데서 헤매었습니다. 데뷔한 2, 3년 동안은 시를 아름답게 치장하려고 애를 썼고, 또 어떻게 하면 그럴듯한 생각을 그 속에 포함시키는가, 누가 읽어봐도 참 괜찮은 생각이라는 것을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삶 가운데 막연하게 스며드는 깨달음이나 절망, 외로움 따위가 큰 시의 자신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이런 것들을 시로 형상화하려 애썼습니다. 말하자면 추상성이 제 시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관념시를 쓰다가 나만의 시를 찾아  그러나 어느 순간 반성이 되었습니다. 데뷔한 지 3년 정도 그런 느낌이 지속되다가 그  다음부터 반성이 되더군요. 제 시 자체에 스스로 불만이 생긴 거죠. 내가 쓴 시가 나조차 감동시키지 못하고, 나에게 절실하지 못하다면 내 시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반성이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쓴 시는 내 스스로에게 절실하다고 믿어지는 시이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거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시가 아니라, 우선 내가 인정하는 시를 써야지 하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만이 쓸 수 있는 시를 생각해 내기 시작했습니다. 남들이 알아듣든 말든 나만의 시를 생각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나만이 쓸 수 있는 시의 형식이 딱히 생각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나만이 쓸 수 있는 얘기가 생각났습니다. 내 고향 울진 이야기, 군대 가기 전 한 열 달 정도 머물렀던 동두천 이야기 등이 떠올랐습니다. 그런 것들은 오직 나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들을 시로 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꼈던 삶의 구체적인 감흥, 또 나만이 상상할 수 있는 세계, 나만이 말할 수 있는 삶의 진실들을 표현하는 게 내 작품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한 거죠.  그렇게 해서 탄생된 시 몇 편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 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쳐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동두천(東豆川)·I]  동두천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열 달 정도 고등학교 선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을 하면서 즐거움보다는 자괴감이 더 많았습니다. 스물 세 살의 저는 월급은 쥐꼬리만큼 받았고 세상살이는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안 가도 갈 군대를 영장을 미리 받아 놓고, 그 감격 속에 훈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어렸을 때 먹고살기 힘들어서 방황하던 생각들이 겹쳐서 이런 시를 쓰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제 진솔한 삶으로써 시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실천에 옮겨진 셈입니다.  한 삶이 갖는 고유성은 간절히 희구하고 진정으로 애쓰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룩되는 게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아마 이 시도 그런 것일 겁니다. 저는 제 시로나마 제가 간절히 원했던 것,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세계를 담고자 애썼습니다. 이제 시간이 많이 흘러서, 다시 그때를 돌이켜 보고 제 시작품들을 읽어 보기도 합니다만, 남의 것이 아닌 자신만의 것을 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마도 진정성에 대한 요구가 아닌가 합니다.  그럼 여기서 과연 진정성은 무엇인가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저는 진정성을 돌아볼 때면 우리가 어떤 것을 왜 필요로 하고, 왜 거기에 매달리는가, 어떻게 그것을 영위하고, 그 결과 어떤 전망에 도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라고 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살이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고비마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는데, 그 의문이 곧 진정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 의문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삶의 본질적 실체와의 접촉에서 생겨납니다. 내가 꼭 묻고 싶은 의문이나 듣고 싶은 대답은 구체적인 삶 속에서 생깁니다. 말하자면 진정성은 살아가는 실체적 감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가식 없는 삶의 근원에서 우러나는 것이 곧 진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결핍되어 있는 것이 곧 진정성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근대화를 통해서 어느 정도 삶의 풍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잘 살게 되면서 우리네 삶은 나날이 황폐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구심력, 우리네 삶을 지탱해 주는 중심이 없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뭐가 삶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봅니다. 모든 삶들은 해체되고 구심점은 나날이 사라지고 고뇌와 갈등은 없어지고, 뭘 묻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삶의 진정성과 반성을 시 속에 담으며  저는 시를 이제껏 써오면서 의사가 되기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괜찮은 의사가 되었을는지 모르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행려병자가 되어 서울역에 쓰러져 있었다 할지라도 시인이 된 것은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의 길은 무언가 잃어버린 말을 되찾게 해주는, 남겨진 진실을 들으려고 애쓰는 과정입니다. 돌이켜 나에게 묻고 대답하고 스스로 살아가는 의미들을 반성하는 무기가 곧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졸시 [침묵]을 함께 읽도록 하지요. 이 시는 동두천에서 많이 떨어져 와서 쓴 작품입니다. [동두천] 연작이 씌어진 게 1976년인데, 이 시는 1997년에 씌어졌으니 그 간격이 한 20여 년 되는 셈입니다. 저의 여섯 번째 시집 {길의 침묵}에 실려 있습니다.  긴 골목길이 어스름 속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녁을 지켜본다  그 착란 속으로 오랫동안 배를 저어  물살의 중심으로 나아갔지만, 강물은  금세 흐름을 바꾸어 스스로의 길을 지우고  어느덧 나는 내 소용돌이 안쪽으로 떠밀려 와 있다  그러고 보니, 낮에는 언덕 위 아카시아숲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나무가 제 우듬지를 세우려고 애쓰는지  침묵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 물음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생겨나듯  상상도 창 하나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것,  창의 부분 속으로 한 사람이  어둡게 걸어왔다가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한동안 그쪽으로는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나는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본다  그 속에서도 바람은  안에서 불고 밖에서도 분다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길은 이미 지워졌지만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침묵] 전문  어떤 물음에는 쉽게 대답이 되지만, 어떤 물음에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해답이 안 나오는 인생 앞에 서 있다고 해서 그 인생이 값어치 없지는 않을 겁니다. 어쨌거나 저는 저에게 많이 물어 보면서 스스로 대답을 찾아 보려고 애를 썼고, 그게 정 안될 때에는 이처럼 들끓는 저 안의 울음 소리에 젖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제 삶의 진실이라면 가치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침묵도 달리 보면 각도를 달리하여 우회하여 있을 뿐 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시가 아니고는 펼칠 수 없는 어떤 자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어딘가 제 시가 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제 시는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제 안에서 튀어나온 어떤 시, 저에게 절실한 어떤 시는 제 창조와 저의 변형의 어떤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누리는 것은 영원한 시간이 아니라 한정된 시간입니다. 누구나 제한된 시간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생명이 없는 것들은 제한된 시간을 말할 수 없겠지요. 생명이 있는 것들이 유한한 삶을 살기 때문에 갖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움은 죽음의 한 짝이 아니겠는가 봅니다. 꽃의 경우에도 영원히 피어 있다면 누가 아름답다고 하겠습니까. 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획득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인식에 바탕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저로서는 죽음과 재생의 신화라고 봅니다. 왜 시가 아름다울까. 시야말로 죽음과 재생의 원초적인 형식과 내용을 말로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의 관련과 참여로써 진실을 찾아내고,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죽음과 재생의 신화 내용도 진실과 감동이 아닐까요. 말하자면 시야말로 죽음과 재생의 신화를 아로새기고, 진실과 감동을 먹고 살아가는 생명체라고 봅니다.  시는 그렇다 할지라도 시인은 완성된 시를 쓸 수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시인은 죽음과 재생의 신화에 참여할 수 있지만, 그것을 완성시킬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상 자체가 우주적으로 넓혀져 있기 때문에, 그 우주적 존재는 우주를 자기를 넓히지 않는 한 완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근원의 삶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시인으로 하여금 환호하게 만드는 게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의 근원적 삶에 자리하고 있다 믿으면서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인만이 그런 특권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처음 쓸 때에도 그랬지만 시력 30년이 넘은 지금에도 시는 저를 들뜨게 하고 감동스럽게 만듭니다. 누군가 필생을 던져서 돌파하고 싶은 감동이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회피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순간으로 끝날지라도 거기에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제 시가 펼칠 수 있는 감동의 자리가 생생하게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제가 가는 자리야말로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도정이 아니겠습니까. 연어는 물맛 때문에 온갖 부귀의 자리를 찾아다니다가 모천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아마도 제 시에도 상실과 회복이라는 원초적인 물맛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도 잃어버린 낙원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낙원에 돌아가려고 애쓰는 게 저의 시 쓰기가 아니겠는가 믿고 있습니다. 끝끝내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완성을 그리워하는 나그네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상의 삶이 나그네의 삶이고, 시인은 더 깊은 근원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잠잘 곳이 없고 쉴 곳이 없어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두려워하는 순간 그는 이미 나그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       쫄딱 ―이상국(1946∼ ) 이웃이 새로 왔다 능소화 뚝뚝 떨어지는 유월 이삿짐 차가 순식간에 그들을 부려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짐 부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서울에서 왔단다 이웃 사람들보다는 비어 있던 집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예닐곱 살쯤 계집아이에게 아빠는 뭐하시냐니까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단다 그러자 골목이 갑자기 넉넉해지며 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 누군가 쫄딱 망한 게 이렇게 당당하고 근사할 줄이야   낡은 집이 많은 우리 동네, 한 집이 공사를 하더니 그림 같은 집으로 외양도 산뜻해진 게 보기에 좋았더라. 그 집 앞을 지나가다가 격앙된 여자의 까칠한 목소리에 발을 멈췄다. “지금이 도대체 몇 시야, 응?!” 여자가 계단에서 내려다보는 길에 한 줄 횡렬로 서 있는 남자 중학생 넷 중 하나가 “여섯 시 사십 분요”라고 대답했다. “응, 응, 그래.” 막힌 말문을 여자는 내친 기세로 터뜨렸다. “지금이 오전이니, 오후니!? 이 시간이면 어른들이 퇴근해서 쉴 땐데 길에서 그렇게 떠들고 다니면 민폐 아니니!? 왜들 그렇게 남 생각할 줄을 모르니!?” 나는 훤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피식 웃으며 자리를 떴다. 요즘 중학생들 무섭다던데 우리 동네 아이들 착하기도 하지. 그러고 보니 웬일인지 다들 열중쉬어를 하고 있었다. 새로 이사 온 그녀는 ‘동네가 왜 이 모양이야!’ 못마땅하고 주민들을 깔보는 것 같다.  지방 하고도 도시가 아닌 시골 동네에서는 구성원 간 영향이 긴밀하다. 이사 온 사람만큼은 아니지만 새 이웃을 맞는 동네 사람들도 어느 정도 삶이 변동한다. 새 이웃이 어떤 사람들일까 기웃거리는데, ‘이삿짐 차가 순식간에 그들을 부려놓고/골목을 빠져나갔’단다. 싣고 온 살림이 단출한 것이다.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다는 말을 그 집 ‘예닐곱 살쯤 계집아이에게’ 듣고 화자는 ‘골목이 갑자기 넉넉해지며/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단다. 어른은 쉬쉬할지 모를 사정을 당당히 밝히는 아이도 깜찍하니 사랑스럽고, 요런 딸을 둔 ‘쫄딱 망한’ 젊은이라니! 낯선 가족에 대한 긴장이 풀리고 편히 받아들일 마음이 든 화자, 더이상 잃을 것 없이 ‘께벗고’ 들어온 새 이웃이 안쓰러우면서 담뿍 정이 간단다. ‘쫄딱’이라는 말, 속이 쑥 내려가는 것 같네요.  
424    "시인"이랍시고?-, 당신의 "구두"는 젖어보았는가... 댓글:  조회:2316  추천:0  2017-04-21
  ▣  시창작법                                                               이문재 1. 글쓰기는 말걸기이다(듣기가 읽기인 것처럼)  누구에겐가 말을 건다는 것은 첫 마디를 던진다는 것이다. 처음 몇 마디가 뒤엉켜 버리면 끝장이다. 내 후배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이 말을 꺼내는 친구가 있다. “저어, 있잖아요, 제가, 며칠 전부터 생각한 것인데요, 선배에게도 전에 한 번 말씀을 드린 사항인데……” 그래서 그 후배가 다가오면 나는 이렇게 쐐기부터 박는다. “너, 결론부터 말해.”  글도 마찬가지다. 모든 글쓰기는 첫 문장 쓰기이다. 나는 후배 기자들에게, 기사의 첫 문장은 ‘호객 행위’라고 말한다. 단편소설은 물론이고, 영화나 드라마, 다큐멘터리 필름도 도입부를 매우 중시한다. 리모콘이 등장한 이후, 텔레비전 프로그램, CF 제작자들은 강박증이 생겼다. 첫 장면에 승부를 걸어라. 처음 몇 초 안에, 시청자를 붙잡지 못하면, 채널을 바꾸기 때문이다. 모든 글은 첫 문장이다! 이 지면을 통해, 글 잘 쓰는 비결을 하나 공개한다. 내가 잘 아는(이름 석 자 가운데 한 자만 대도 독자들 대부분이 알 수 있는) 시인은 시를 한 편 완성하고 나면, 첫 문장을 백 번 이상 소리내어 읽는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다시 읽어 본다. 첫 문장이 흡족해야 시를 발표하는 것이다. 거듭 반복한다. 첫 문장에 목숨을 어떨지 몰라도 ‘나’는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쓰기)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의 시(쓰기)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절실한 것이며, 절실하기 때문에 생명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문창과 학생들,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도 시(쓰기)가 자신에게 왜 필요한 것인지 명쾌하게 정돈하지 못하고 있었다. 열에 일고여덟은 ‘나 자신과 대화하기 위해서’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가까운 이들과 좋은 느낌을 공유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시를 쓰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답한 학생은 거의 없었다. 상대적으로 글쓰기와는 무관한 젊은이들에게 두 번째 질문(꿈이 있다면, 그걸 한 문장으로 말해 보라)을 던졌다가 낭패를 당한 적이 있다. 출판사에 다니는 젊은 편집자들과 술을 마시다가 꿈을 물어 보았더니, 몇몇은 당혹스러워했고, 몇몇은 ‘있는데 말할 수 없다’고 했으며, 한둘은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했다고 여기는 기색이었다. 한 문장으로 만들 수 없는 꿈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내 지론을 강요했다간 싸움이 날 판이었다. 나는 ‘우리는 꿈꾼 것만을 이룰 수 있다’는 무하마드 유누스(〈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의 저자. 방글라데시의 대안 운동가)의 잠언을 들려 주고 싶었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시는 왜 필요한가? 나는 ‘마지막 개인’으로서의 나를 확인하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 시(쓰기)가 필요하다. 시(쓰기)를 벗어나는 순간, 나는 단독자가 아니다. 완전한 포로다. 나는 이 거대 도시가 요구하는 온갖 제도와 가치로부터 이탈해 자립, 자존, 자족할 수 없다. 나는 이 반인간적인 문명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말해 늘 깨어 있기 위해 시(쓰기)를 필요로 한다. 시를 쓰는 순간, 시를 읽고 시를 생각하는 시간만큼, 나는 이 우주 안에서 자립, 자존, 자족할 수 있는 것이다. 악기이기를 지향하면서도 나의 시는 아직, 수시로 무기이다(이외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지만 지면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내가 바라마지 않는, 한 문장의 꿈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쁘게 가난을 선택할 수 있게 하소서’이다. 산업 문명으로부터 완벽하게 이탈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도시에서 스스로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는 ‘기생의 존재’가 도시를 떠나 흙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생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쌀 한 톨을 일궈내는 데도 삼라만상이 참여해야 한다). 야생조차도 인간 문명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과학적 보고서가 있는 터에, 함부로 도시의 바깥을 상정하는 것도 유아적으로 보인다. 시를 통해 자기 삶과 존재를 확인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동시에, 도시적 삶의 그늘로부터 한 뼘씩이나마 벗어나고 싶은 독자가 ‘아직도’ 있다면, 감히 한 권의 책을 권한다. 나탈리 골드버그가 쓴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권진욱 옮김, 한문화). 이 책을 한 번 읽어 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면, 당신은 이미 이전의 당신이 아니다. 미국의 글쓰기 지도 전문가인 나탈리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권하고 있다. ‘여러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꿈에 대해서 5분 동안 써 보십시오’.  2. 문제는 감각이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축구 경기를 보다 보면, 간혹 ‘감각적인 플레이’라는 멘트가 나온다.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선수’라는 표현도 자주 접한다. 최상의 기량이라는 찬사다. 지난 해 6월, 월드컵 축구대회 대 폴란드 전에서 황선홍 선수가 이을용 선수의 패스를 받아 성공시킨 골 같은 경우 말이다. 황선홍은 골대를 보지 않고 슛을 날렸다.  스포츠에서는 ‘감각적’이라는 수사가 극찬이지만, 시에서는 그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 시에서 감각적이라는 평가 앞에는 대개 ‘지나치게’라는 부사가 붙는다. 감각이 승한 시는 깊이가 없다는 전통적인 잣대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같은 ‘비평’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나치면 그르치는 것이 어디 감각뿐이랴. 상상력에서부터 이미지, 리듬, 관념어, 주제의식 등 시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 가운데 지나침이 허용되는 것은 없다. 나는 감각적인 시를 옹호하는 편이다. 감각없는 축구 선수가 드리블이 좋지 않듯이, 감각적 형상화가 서툰 시는 생생하지 않다. 감각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가벼운 감각이 가벼울 따름이다. 감각에는 깊이가 없다는 지적도 마찬가지다. 감각은 몸과 마음의 경계이다. 감각은 자아와 타자 사이에 있는 가교이다. 시인은 감각을 통해 (자아를 포함한) 세계와 만나고, 독자는 감각을 통해 시와 교감한다.  실존은 감각의 실존이다. 감각의 실존 가운데 가장 앞서 가 있거나 높이 있는 것, 그러니까 감각의 극단이 시이다(‘잠수함 속의 토끼’라는 비유가 있다). 감각의 제국 안에서 제왕은 단연 시각이다. 인간이 외부 세계를 인지할 때 사용하는 감각은 시각이 대부분이다(80퍼센트).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간다(혹은 비켜선다). 보통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쓰기는 단순한 보기(見)가 아니라 꿰뚫어보기(觀)이다. “북쪽은 고향/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다시 풀릴 때/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마음은 눈 감을 줄 모른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시인 이용악(1914-1971)의 초기 시 〈북쪽〉 전문이다. 시 속에서 국경 근처 고향을 그리워하는, 국경 너머 팔려간 여인을 염려하는 시인의 눈은 마음의 눈이다. 그 마음의 눈은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는 지경까지 꿰뚫어보는 놀라운 시력을 가지고 있다. 시인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이처럼 언제나 깨어 있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존재다. 그러나 시각이 감각의 전부는 아니다. 시각은 오히려 흘러넘치고 있다. 이용악 시대의 시각과 21세기 후기 산업 시대의 시각은 크게 달라져 있다. 시각은 대량 소비 시대, 대중 문화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혹사당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광고와 매체를 통해 인간의 눈을 포섭해, 인간을 소비자로 전락시키고 있다. ‘시각 패권주의’ 시대이다. 시는 시각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이제 시는 저 왜곡돼 있는 시각과 맞서 싸워야 한다. 소비자의 눈을 인간의 눈으로 돌려 놓아야 한다. 주로 시각에 의한, 시각을 위한 인지와 소통은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배제하거나 왜곡한다. 시각 과잉은 인간을 인간 자신과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정현종의 시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던, 그리하여 그 섬에 가고 싶어하던 시대는 행복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인터넷과 휴대 전화가 있는 이 시대에 인간을 시각 과잉으로부터 ‘구원’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가, 시각 패권주의에 희생당하고 있는 나머지 다른 감각을 복원하는 것이다.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들은 시각이 활동하지 않을 때에라야 활발해진다. 깊은 어둠 속에 누워 있어 보라, 얼마나 많은 소리가 들리는가. 제대로 맛을 낸 음식을 음미하는 미식가의 얼굴을 보라, 미식가는 눈을 감고 ‘음~’하는 탄성을 내지른다. 손가락도 촉감에 충실하고자 할 때는 지그시 눈을 감는다. 최근 젊은 시인들이 발표하는 시들에는 소리와 향기가 자주 등장한다. 나는 이 같은 변화를 시각 패권주의에 대한 시의 저항이라고 이해하고자 한다. 차창룡 시인이 최근에 펴낸 시집 〈나무 물고기〉에는 ‘똥은 꽃처럼 향기로워’(〈트리베니 가트에서 누는 똥〉)라는 놀라운 대목이 나온다.  이 시는 꽃을 똥의 차원으로 추락시킨다. (아름다운) 꽃이 상승이라면 (추한) 똥은 하강의 이미지인데, 이 상승과 하강을 똥의 형상(하강하면서도 결국은 상승을 의미하는 생김새)으로 일치시켰다가, 급기야 똥의 냄새를 꽃의 향기로 격상시킨다. 아, 얼마나 통쾌한가. 시각 패권주의의 대표적인 아이콘인 꽃에서 똥의 향기를 ‘맡는’ 시인의 감각이라니. 황선홍의 월드컵 첫 골에 못지 않은 ‘감각적인 시’이다.  3 . 짧은 글을 읽어라 봄이여 눈을 감아라/ 꽃보다/ 우울한 것은 없다 전문 여기저기서 보내오는 시집이 많다. 내가 가만히 앉아서 시집을 받아 볼 높은 위치에 있다는 소리가 아니다. 시사주간지에서 오랫동안 문학 담당 기자를 했기 때문에 출판사에서 ‘보도 자료’로 보내오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다 동료, 선후배 시인들이 ‘부채의식’ 때문에 보내는 시집들도 제법 있다. 시인들은 시집 받는 것을 ‘빚’으로 여긴다. 그래서 새 시집을 펴낸 시인들은 그동안 시집을 보내온 시인들의 명단을 놓고 한 나절 넘게 주소를 쓴다. 그동안 밀린 ‘시집 빚’을 갚는 것이다.  보름달은 어둠을 깨울 수 있지만 초승달은 어둠의 벗이 되어 줍니다. < 달처럼> 전문 우편으로 시집을 많이 받다 보니, 몇 가지 요령이 생겼다. 출판사와 시집 장정을 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시집 맨 처음에 실린 시를 먼저 보게 된다. 그러고 나서 시집 맨 뒤에 자리잡고 있는 시를 본다. 그 다음에 눈여겨보는 시가 짧은 시들이다. 시집 맨 처음과 맨 나중에 위치하는 시에 신경을 쓰지 않는 시인은 거의 없다. 첫번째 실린 시는 시집 전체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고(서시 분위기가 많이 난다), 마지막 시는 이른바 ‘앞으로의 계획’쯤에 해당한다. 이렇게 두 편의 시를 읽고 나서, 짧은 시들을 골라 읽는다. 그러니까 서너 편 정도 일별하면 시집의 높낮이를 웬만큼 측정할 수 있다. 왜 짧은 시인가? 짧은 시 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짧은 시에는 시인의 시력과 시야가 압축되어 있다. 사물과 사태, 삶과 세계의 핵심을 치고 들어가는 직관력은 물론이고 직관한 내용을 최소한의 어휘로 형상화하는 솜씨. 장악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파스칼이었던가? ‘시간이 없어서 짧게 쓰지 못했다’라고 말한 이가. 흔히 장시를 쓰는 데 시간과 공력이 많이 들어가는 줄 알고 있는데, 모든 장시가 그런 것은 아니다. 서너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를 쓰는 데 평생이 걸리기도 한다(일본의 전통적인 정형시 하이쿠를 쓰는 시인들은 수도승 못지 않은 삶을 살았다. 두 행짜리 하이쿠를 쓰기 위해 엄격한 규율을 지켰다. 4행짜리 게송을 읊은 선승들은 또 어떻고). ‘봄이여 눈을 감아라/꽃보다/우울한 것은 없다.’() ‘보름달은/어둠을 깨울 수 있지만/초승달은 어둠의 벗이 되어 줍니다.’() 두 편 다 3행으로 이루어진 지극히 짧은 시이다. 앞의 것은 김초혜 시인이 계간 2002년 겨울호에 발표한 작품이고, 뒤의 것은 최종수 시인의 첫시집 에 실린 시이다. 짧은 시는 비수라기보다는 번개에 가깝다. 하지만 사람들은 번개와 천둥이라고 하지 않고, 천둥과 번개라고 말한다. 번개와 천둥은 사실 동시에 발생하는데, 빛보다는 소리를 더 두려워하는 모양이다. 짧은 시는 번개다. 번갯불에 벼락을 맞기도 하지만, 한참 뒤에야 세상을 뒤흔드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 병상일기 5>를 보자. 봄은 꽃의 계절인데, 봄으로 하여금 꽃을 보지 말라고 한다. 생명의 한 절정인 꽃에서 ‘우울’을 보았기 때문이다. 절정인 꽃은 곧 시들게 마련. 만개한 꽃 속에서 꽃의 죽음을 본 것이다. 짧은 시는 이처럼 우리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온갖 고정관념(선입견)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의식을 뒤흔드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꽃, 기쁨)에서 죽음(우울)을 발견하는 눈! 시의 위력은 그 눈에서 나온다.  < 달처럼>은 또 어떤가. 달을 빛의 양(동그란 정도)으로만 규정하고, 어둠을 빛으로 물리쳐야 할 악으로만 이해해 오던 우리에게 시인은 아주 새로운 견해를 제출한다. 어둠을 깨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어둠과 함께 하는 벗 또한 절실하다는 것이다. 이 순간 어둠은 빛의 반대 진영에 있는 악이 아니라, 빛과 더불어 존재하는 동반자로 거듭난다. 어둠의 입장이 되어 보자. 자신에게 위압적인 큰 빛(보름달)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작은 빛(초승달)이 훨씬 더 애틋하지 않을까. 보름달이 혁명이라면 초승달은 연민(공감)의, 혹은 연대의 은유이리라. 짧은 시를 많이 읽자. 짧은 시는 서너 번 읽으면 외어진다. 그렇게 외운 시는 삶의 여러 국면, 구체적인 삶의 문제와 접점을 가지면, 시의 의미가 부풀어오른다. 이룰 수 없는 사랑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친구가 있다면 ‘꽃보다 우울한 것은 없다’라고 말해 보라. 큰 것, 힘센 것만을 추구하는 선배가 있다면 어둠과 벗이 되어 주는 초승달 이야기를 꺼내 보라. 좋은 시는 짧은 시이고, 짧은 시는 우리들 구체적인 삶의 안쪽에 들어와 있다.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 이메일을 띄울 때, 외우고 있는 짧은 시를 전송해 보자. 보내는 이나 받는 이의 일상 속에서 아름다운 스파크가 일어날 것이다.                     4. 은유, 그 아슬아슬한 거리 지중해가 맑은 이유가 그 청년 때문인 것 같았다. 몇 년 전,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보고 나왔을 때, 주인공 마리오에 대한 기억이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말라터진 바게뜨 빵을 연상시켰던 마리오는 너무 섬약하고 또 너무 순수했다. 그가 지중해의 청정함을 지키는 정수기처럼 보였다. 마리오가, 잠시 섬에 체류하게 된 세계적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전속 우체부’가 되면서 시인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네루다를 영웅화했다면, 네루다가 떠난 이후,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보낸 별이 반짝이는 소리까지 담은 ‘녹음 편지’는 전통적인 시(활자)의 시대를 마감하는 징후로 보였다. 시위 현장에서 마리오가 스러져가는 장면은, 네루다 혹은 시의 시대에 대한 비판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래 전에 본 영화여서 몇몇 장면만 남아 있다. 그 중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네루다가 거두절미하고 ‘메타포’라고 답하는 대목이다. 메타포, 은유. 그렇다. 은유가 시의 전부는 아니지만, 은유를 빼 놓고서는 시를 쓸 수도, 읽어내기도 쉽지가 않다. 은유는 시와 시쓰기, 시읽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동력(전달 장치)이다. 직유를 거쳐 은유를 웬만큼 구사/해독할 수 있다면, 그는 괜찮은 시인/독자이다. 직유는 주종 관계이다. ‘그는 바람처럼 달렸다’라고 쓸 때(결코 좋은 비유라고는 할 수 없지만), 바람은 그가 달리는 상태를 구체화하는 보조 역할에 머문다. 하지만 ‘비가 쇠못처럼 내렸다’라는 표현에서는 약간 달라진다. ‘그’와 ‘바람’ 사이도 그렇게 가까운 것은 아니지만, ‘비’와 ‘쇠못’ 사이처럼 스파크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비와 쇠못 사이는 매우 먼 거리다. 일상적 차원에서 비와 쇠못은 거의 무관한 관계이다.  ‘비둘기는 평화다’와 같은 상징은 아예 주종 관계에서 종이 사라진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으로 쓰이는 순간, 비둘기 고유의 정체성은 지워져 버린다. 상징은 상징에 동원되는 수단을 지워 버리는, 매우 폭력적인 비유법이다.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으로 내세울 때, 비둘기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 상징이 종교와 신화 분야에서 자주 사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징은 권력의 도구이다. 직유에서 주종 관계가 희박해질 때, 나는 그것이 바로 은유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직유가 술어(동사)를 거부할 때, 예컨대 ‘비가 쇠못처럼 달렸다’가 아니고, ‘비는 쇠못이다’로 변화할 때, 직유는 은유로 한 차원 승격한다. 그래서 나는 비유법을 자주 은유법이라고 이해한다.  ‘그대는 꽃이다’라고 쓸 때, 그대는 꽃을 지배하려 들지 않는다. 그대가 꽃을, 또는 꽃이 그대를 없애려고 하지도 않는다. 은유의 차원에서 그대와 꽃은 그대도 아니고, 꽃도 아닌 전혀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은유의 위력이다. 내가 지지하는 은유는 다원주의에 바탕한 은유이다. 즉 하나의 절대적 중심을 인정하지 않는 대신, 모든 존재와 의미가 각자 하나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은유이다. 직유가 수직의 상상력이라면, 은유는 수평의 상상력이다. 직유(혹은 상징)가 과거의 세계관이라면, 은유는 미래의 세계관이다. 공존, 상생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직유도 그렇지만 은유의 생명력은 비유되는 두 이미지 사이의 거리에서 나온다. 앞에서 예로 든 문장을 다시 불러와 보자. ‘그는 바람처럼 달렸다’ 혹은 ‘그는 바람이다’라고 했을 때, ‘그’의 이미지가 선명해지지 않는 것은 바람이 갖고 있는 모호성 때문이다. 여기서 바람은 주어를 도와 주지도 못하고 동사에 기여하지도 못한다. 참신하거나 구체적이지 않은 직유는 구사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 상투성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비가 쇠못처럼 내렸다’ 혹은 ‘비는 쇠못이었다’라는 표현이 위의 경우보다 조금 산뜻한 까닭은 쇠못이 갖고 있는 구체성 덕분이다. 은유를 ‘A는 B이다’라고 흔히 말하는데, A와 B의 사이가 너무 가까울 때 상투성으로 전락하고, A와 B 사이가 너무 멀면 난해함으로 빠진다.  네루다와 마리오 사이의 대화를 흉내낸다면, 시란 저 A와 B 사이의 아슬아슬한 긴장이다. 그리고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저 A와 B를 결합시키는 비결은 (전에도 말했지만) 평소의 관찰력과 상상력에서 나온다. A와 B를 난데없이 연결시켜 강한 스파크를 일으키는 직관력은 갑자기 나오지 않는다. 관찰과 상상의 누적이 없다면 은유의 직관은 불가능하다. 사족 같은데, 한 마디만 덧붙여야겠다(은유를 말하고 있으니까).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풍선에 바늘을 찔러야, 풍선은 강렬하게 터진다.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풍선, 그것이 관찰과 상상의 상태이다. 그것이 깨어 있는 정신이다. 그렇게 깨어 있다면, 바늘(직관)은 얼마든지 있다. 불지 않은 풍선은 풍선이 아니다. 탄생 이전이거나 죽음 이후다.  [이문재시인]   『시사저널』편집위원. 시운동으로 등단.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 줄 때』『산책시편』『마음의 오지』등이 있다 ---------------------------------------------------------------------------     해수찜  ―노향림 (1942∼) 이따금 바다 갈매기들이 하얗게 똥을 떨어뜨린다. 그 똥이 훤히 올려다보이는 유리 천장 아래 상체를 내놓은 반라(半裸)의 여자들이 모여 찜질을 한다. 유황 성분에 바닷물을 끌어들여 만든 해수탕     질기고 비루한 일상을 벗어버리겠다고 바닥에 오체투지 하듯이 납작 엎드려 부항을 뜨거나 약쑥 냄새 자욱한 평상에 무릎관절 꺾고 앉아 있다. 만삭처럼 부른 배들을 스스럼없이 내놓고 뜨거운 열기 속에 얼굴들이 복숭앗빛으로 불콰하다. 더운 수증기에도 잘 젖지 않는 젖가슴들 한때 아기들에게 젖을 물렸을 자루처럼 늘어진 가슴 끝에 시든 꽃꼭지 같은 유두를 매달고 있다. 유난히 하복부가 나온 젊은 아낙이 통성명을 한다. 아따, 언니는 임신 팔 개월째여? 배만 징허게 나와부렀소. 삼십 대로 보이는 아낙이 저승꽃 핀 얼굴의 팔십이 넘어 보이는 늙은 아낙에게 말을 건다. 폐경기를 다 넘긴 여자들이 다시 회임했다고 깔깔댄다. 싸 온 도시락들을 나눠 먹으며 아따, 언니는 벌써 두 양푼째네. 요렇코럼 만수위 된 뱃속에 뭘 또 심고 싶소, 소나무 장작불 땐 해수탕에 와서 배 따땃하면 됐제. 그녀들은 유황 성분이 온몸에 녹아들었는지 불이 이는 홍조를 띠며 자매들처럼 앉아 있다.   솨솨솨솨솨, 바람소리나 쇄쇄쇄쇄쇄, 햇빛 쏟아지는 소리 들릴 듯 섬세하게 구축된 시각 이미지들을 슬며시 내보이는 게 내가 알고 있는 노향림 시인데 이 시는 완연 다르다. 왁자지껄 소리와 함께 여러 인물이 분주히 움직인다. 마치 정지시켜 놓았던 비디오가 갑자기 움직임에 돌입한 듯이. 추억처럼 아스라하고 쓸쓸한 노향림 시 특유의 아치도 근사하지만, 이 시의 불콰하고 후끈한 현장감도 썩 근사하다.  고갱의 그림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가 문득 겹쳐지는 반라의 여인들. 그러나 처녀의 긴장이 없어 그네들은 더 평화롭고 자유롭다. 자루처럼 늘어진 가슴과 만삭인 듯 불룩한 배를 하고 있지만 다들 마찬가지니까 부끄러움도, 질투도, 불만도 없다. 아이를 배고 낳고 기르고, 자기 몫의 ‘지루하고 비루한 일상을’ 살아내느라 삭신이 쑤시는 여인네들이 모처럼 편안하게 수다를 떨며 해수찜을 즐기는, 떳떳한 낙원!  
423    윤동주 묘비의 각인을 살펴보다... 댓글:  조회:3468  추천:0  2017-04-21
  해방되던 해 유월십사일 동생 일주, 광주 세우다     1945년 2월 16일 29세에 돌아가니   재주는 당대에 쓰일 만하고 시는 이 사회를 울릴 것이나 춘풍에 무정한 꽃 떨어지고 열매 없으니 안타깝도다 시인이라는 것이 그의 모든 것이다     정확한 시신은 찾지 못한듯 누이와 조카의 아쉬움이 돌로 남았다     돌아서며 다시 뒤돌아보는 시인의 묘소. 평안히 쉬소서         윤동주 장례식(1945. 3. 6)   ------------------------------------------------------ =[자료]=     《더기아래 윤동주의 집》은?  [ 연변일보 ] 2011-11-28  연변라지오방송국 문학부 남철주임이 극본을 창작하고 정광이 연출을 맡고 서태문이 해설을 진행한 다큐멘터리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은 윤동주가 15살때부터 생활했고 그의 장례식까지 치러진 집터를 배경으로 윤동주의 모습과 문학창작배경을 새롭게 발굴된 자료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오늘날 세인의 주목을 받고있다. 기자: 다큐멘터리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은 어떤 내용을 담고있습니까? 남철: 우선 제목은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입니다. 민족시인 윤동주가 명동에서 태여나 소학교를 졸업한후 1932년에 중학교에 붙을무렵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이 아들의 장래를 위해 룡정으로의 이사를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이사한 집이 지금의 룡정정부청사동쪽에 있는 집이였습니다. 그때 그 집에는 윤동주의 조부모, 부모, 형제 셋에 고모의 아들 송몽규까지 여덟 식솔이 살았습니다. 동주가 입학한 중학교는 지금 룡정로년대학(옛날 모윤숙이 교편을 잡았던 명신녀교)옆에 있는 영국선교사들이 꾸린 은진(하느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운다는 뜻)중학교였습니다. 그 은진중학교는 바로 지금 룡정에서 말하는 《영국더기》에 있었고 윤동주네 집은 바로 그 더기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큐드라마의 제목이 《더기아래 윤동주의 집》으로 되였습니다. 기자: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의 창작계기는 무엇입니까? 남철: 지금까지 윤동주의 생가와 묘지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지만 윤동주가 15살부터 살았고 은진중학(초중), 평양숭실중학(고중), 서울 연희전문(대학), 일본 도지샤대학(류학)시절을 지냈으며 윤동주가 세상뜬 후 장례식을 치렀던 집은 아는 사람이 극히 적고 또 그 집자리는 지금 파가이주되여 어느 공장의 창고로 돼있습니다. 열백번 문화재로 되여야 할 그 자리가 력사의 진토속에 묻혀버린 아쉬움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것이 저의 프로 기획 의도였습니다. 윤동주 사망후 가족들은 계속 그 집에서 살았고 그 집에서 윤동주의 조부모, 어머니가 사망했으며 1958년에 아버지 윤영석은 동주의 계모 홍씨, 막내아들 윤광주와 함께 용문교쪽으로 이사갔습니다. 윤동주가 살던 옛집은 그냥 방치된채로 있다가 1996년에 이개축을 하면서 허물어졌습니다. 기자: 무엇때문에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이 국제상을 수상할수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남철: 프로가 상을 받자면 우선은 제재가 참신해야 합니다. 저의 프로에는 우리가 다 알고있는것 같았지만 또 모르고있었던 윤동주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있습니다. 이 정보는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김혁주임이 제공한것입니다. 《연변문학》지에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발표한 김혁작가도 지난해에야 이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 정보제공자가 바로 1930년대에 은진중학교부근에서 종살이를 했고 윤동주의 은진중학교 12년 후배인 최근갑로인(86세)입니다. 또 다른 정보제공자는 윤동주의 막내동생 윤광주의 딱친구인 리송덕로인입니다. 연변라지오방송국 문학부 남철주임이 제작한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은 일전에 한국 KBS 세계한국어방송인대회에서 시상하는 국제상인 《서울프라이즈》 시상식에서 라지오부문 특별상을 수상했다. / 허국화기자 더기우의 시인의 집   2015-8-5    윤동주의 장례식 광경.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일제의 서슬푸른 총칼아래에서도 붓자루를 놓지 않고 우리 말, 우리 글을 보듬었던 저항시인 윤동주, 윤동주의 집 하면 누구나 할것없이 우선 명동촌의 시인의 생가를 떠올리게 된다. 연변행차를 하는 외지사람들이면 선참 찾아보는 관광코스의 일번지로 자리매김되여있는 생가. 하지만 룡정 시가지에 또 하나의 윤동주의 거처가 있고 그곳에서 윤동주가 가는 마지막 길을 바랜줄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고있었다. 태여난 명동에서 소학교를 졸업한뒤 윤동주는 명동에서 20리 떨어진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 학교에 편입되여 계속 공부를 했다. 소학교 6학년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자식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주기 위해 당시 연변지역 사람들이면 너나가 선망하던 “서울” 격인 룡정으로의 이사를 결심했다.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씨가 생전에 간행물 《나라사랑》 23집에 기고한 추모문 ”윤동주의 생애”에 따르면 “1931년에 윤동주는 명동에서 북쪽으로 30여리 떨어진 룡정이라는 소도시에 와서 카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룡정으로 이사하였다”고 밝히고있다. “은진중학과 몇분 거리에 있는” 윤동주의 룡정자택 주소는 정안구(靖安區) 제창로(济昌路) 1ㅡ20이였다. 룡정으로 이사오면서 윤동주네 거주환경은 크게 변했다. 명동에서 터밭과 타작마당, 깊은 우물과 작은 과수원까지 달리고 지붕을 얹은 큰 대문이 있어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서 한껏 넉넉하게 살다가 20평방메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초가집으로 옮겨온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윤동주, 일주, 윤혜원 3남매, 거기에다 큰고모의 아들인 송몽규까지 합류한 8명의 식구가 20평방메터의 초가집에서 옹색하게 붐벼야 하는 환경속에서 윤동주의 룡정생활이 시작되였다. 명동의 생가에 비해 환경은 여의치 못했지만 윤동주는 그에 구애되지 않았다.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버릇된 바른 신앙과 좋은 성격으로 학업에 열중해나갔다. 동생 윤일주의 증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은진중학교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기에 앉아서 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학도 잘하였다. 특히 기하를 잘하였다.” 은진중학교는 한 언덕우에 자리잡고있었다. 이 언덕은 룡정 동남쪽에 있는 언덕으로서 사람들은 그 언덕을 “영국더기” 라고 불렀다… 여기서 더기란 언덕을 가리키는 옛날 방언이다. 룡정 사람들은 이곳에서 서양문화에 눈을 떴다. “영국더기”안에 있던 학교나 교회는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의 피난처가 되였고 병원은 부상당한 독립운동가들을 치료해주고 숨겨주는 은신처가 되였다. 그 결과 “영국더기”는 반일운동을 지원한다는 리유로 일본경찰당국으로부터 견제와 탄압을 받았다. 이런 배경에서 “영국더기”는 인걸을 많이 키워냈다. 김약연과 윤동주, 송몽규를 비롯하여 박계주, 리태준, 명희조,  문익환, 리봉춘, 안병무 등등. 력사의 행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걸출한 독립운동가, 문인, 종교인들이 이곳 “영국더기”를 거쳐 나갔다. “영국더기”의 이 자택에서 윤동주는 근 8년간이나 지냈다. 집과 불과 몇백메터 떨어진 은진중학교에 다니면서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학교 문예지를 만드는가 하면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또 교내 웅변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라는 제목으로 1등상을 따내는 등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다. 오래동안 오스트랄리아에 거주하다가 타계한 윤동주의 녀동생 윤혜원녀사는 2006년 필자의 취재를 접하면서 윤동주의 룡정에서의 나날을 떠올렸다. “절구통우에 빈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련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학교 문예지를 만드는 오빠의 손가락에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고 윤녀사는 회상했다. 친지와 친구들의 증언을 모아보면 룡정 은진중학에서의 윤동주의 모습이 또렷이 나타난다. “잘생긴 외모에 옷차림에도 관심이 커 손수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맵시나게 고쳐 입기도 하고 동시인을 지향하는 문학도이면서도 축구선수이기도 하고 웅변대회에서 일등을 수상한 경력에다가 문학 관련 서적만 들고 다니던 그였으나 뜻밖에도 수학을 잘하는데는 친구들이며 집안 식구들이 모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오늘날 신세대들의 용어를 빈다면 그야말로 “꽃미남”, “인기 짱”이였다. 연희전문에 입학한 뒤 윤동주는 방학때마다 룡정으로 돌아오군 했다. 그는 집에 돌아오면 사각모와 교복을 벗어 가지런히 걸어놓고 베바지, 베적삼에 밀짚모자를 쓰고 소를 몰고 나갔으며 집안일을 도왔다. 꼴도 베고 물도 긷고 때로는 할머니와 마주 앉아 매돌도 갈아드렸다. 윤일주씨의 회고에서 보면 윤동주가 “방학때마다 이불짐속에 한아름씩 넣어오는 책은 800권 정도” 되였고 “벽 한쪽을 전부 메웠던 서가”가 있어 그 책들을 꽂았다고 한다. 집의 한쪽벽을 전부 차지한 서가, 그 서가에 꽂혀있는 800여권의 책들, 이것이 바로 윤동주의 룡정자택의 풍경이였다.    윤동주의 유명한 일화인 진학문제를 놓고 아버지와의 “설전”도 바로 이 룡정의 자택에서 치렀다. “물사발이 밖으로 휙 휙 날고 아주 란리가 났었어요.” 하고 윤혜원은 당시를 회상했다. 윤동주는 문과에 가겠다고하는 반면 그의 부친은 의과를 해서 의사가 돼야 한다고 강요한데서 아버지와 윤동주 사이에 처음으로 대립이 생긴것이다. 아버지 윤영석은 젊어서 북경, 일본 도꾜에서 문학쪽의 공부를 한적 있었으나 문학적으로 양명(揚名)해본적은 없었다. 했기에 아들에게만은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게 하려는 의지가 강력했던것이다. 대립이 계속되더니 끝내는 동주가 밥을 굶고 생전 처음으로 집에 안 들어오는 날까지 생기도록 사태가 악화되였다. 윤일주씨에 의하면 집안의 험악한 분위기에 동생들은 어지간히 겁이 들었다고 한다. 밥을 굶으면서까지 문과 지망을 고집하는 손자의 고민을 보다 못한 할아버지 윤하현(尹夏鉉)의 중재와 외삼촌인 규암 김약연 선생의 권면에 힘입어서야 윤동주의 문과 지망의 길이 드디여 열렸다. 1940년 은진중학을 졸업한후 윤동주는 “영국더기”를 내렸다. 룡정촌의 더기를 내려선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을 지망해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동산”으로 올랐다. 1942년 연희전문을 나와 또 다시 숙명의 동반자 송몽규와 함께 윤동주는 일본으로 류학, 선후로 도꾜 릿교대학 영문과, 도꾜 도지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그러다 이른바 “사상범”으로 체포되여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형무소에 갇혔고 생체실험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주사를 맞고 옥사했다. 윤동주가 비명에 간뒤 근 한달이 지나 아버지에 의해 일본에서부터 그의 골회가 제창로에 위치한 윤동주의 집으로 운송되여 왔다. 1945년 3월 6일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 집 앞뜰에서 윤동주의 장례가 치러졌다. 윤동주의 절친한 친구 문익환의 부친 문재린 목사가 영결을 집도했다. 장례식에서 연희전문 《문우》잡지에 실렸던 윤동주의 시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윤동주의 장례식광경을 담은 사진이 보존돼 있는데 그 사진속에서 상복을 입고 애통함에 빠진 윤동주의 친지들을 헤아려 볼수 있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은 윤동주의 영정 오른쪽에 서있고 아버지 윤영석은 그 두번째, 동생 일주는 세번째, 어머니 김용은 다섯번째, 녀동생 혜원은 여섯번째, 막내동생 광주는 왼쪽으로 네번째에 서있다. 영정 바로 왼편에 선 이는 장례를 집도했던 문재린 목사이다. 사연많은 윤동주의 룡정자택에 대한 확인은 력사의 행간에 묻혀졌던 윤동주가 일본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교수에 의해 연변에서 처음 알려지던 1985년경 그 자택에서 직접 살았던 윤동주의 녀동생 윤혜원에 의해 이뤄졌다. 오스트랄리아에 거주하고 있는 윤혜원과 그의 남편 오형범은 중국에로의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해진 1990년 이후, 해마다 윤동주의 고향 연변으로 와서 윤동주묘소를 새롭게 조성하고 중학생잡지사에서 주최하는 “윤동주 문학상”시상식에 참석했다. 윤동주의 매제 오형범은 어제날의 기억을 더듬어 윤동주의 룡정자택에 대한 략도를 그렸다. 비교적 소상하게 그려낸 그 그림에는 당시 “영국더기”의 진풍경이 빠침없이 그려져 있다.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중학, 그 곁의 명신녀중학, 독립선언서를 찍었던 제창병원 그리고 동산교회와 카나다 선교사들이 거주했던 사택의 위치와 간호사들의 기숙사까지 그려져 있다. 그 략도에 윤동주의 자택이 명확하게 표시되여 있다. 윤동주의 룡정자택에 대해 확인한 또 한분이 있었다. 연변박물관 연구원으로 지냈던 리송덕 옹이였다. 그는 1960년대에 윤동주의 막내동생인 윤광주와 두터운 교분을 맺어 이 자택을 늘 찾았다고 한다. 리송덕 옹이 확인하는 윤동주의 자택 옛터는 “간도일본총령사관”(지금의 룡정시정부청사) 동쪽 담장에서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다. 룡정시 문화관의 바로 뒤편에 자리한 그곳은 지금의 안민가 동산사회구역의 룡정시 기계수리공장의 뜨락으로 현재 “룡정.윤동주연구회” 사무실이 바로 그 위치에 오픈돼 있다. 60년대부터 이 지역에서 살아왔다는 김정호(76세)씨에 의하면 기계수리공장은 50년대에는 고아원이였다가 “항미원조”전쟁이 일자 의족공장으로 탈바꿈했다가 현재의 기계공장으로 되였다고 한다. 기계수리공장은 지체장애인을 위해 민정국계통에서 차린 기계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였으나 현재는 작업을 중단하고 그 곳에 주차장이 생겼다. 주차장 남쪽켠에 지어진 차고 부근이 바로 윤동주의 룡정 집터이다.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 윤동주를 보듬어 안고 그의 시상을 유발시킨 동생 광주가 뛰여놀았을 곳, 처음으로 “동주”라는 필명으로 연길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 에 동시를 발표했던 곳, 그 유명한 동시 ”오줌싸개 지도” 를 산출시킨 곳,  “초 한대”등 자신의 시 작품에 처음으로 이름과 날자를 명기한 곳, 문학에 뜻을 두고 연희전문을 지망하면서도 아버지와 설전을 벌린 유명한 일화를 남긴 곳이 바로 이 룡정의 자택에서였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이제 한국, 지어 그를 숨지게 한 “적국” 일본을 아울러 그의 위상이 재조명되고 있지만 그의 생전 거처를 밝히는 표지석 하나 없어 우리의 마음을 아릿하게 한다. 글 김혁 사진 리련화 윤동주의 장례식을 치르고 가족이 윤동주의 룡정자택 뜨락에서 남긴 합영. 표지석조차 없는 윤동주 룡정자택 옛터.       . 역사기행 .   윤동주의 또 하나의 거처- 룡정자택을 찾아서     지난 13일 기자는 젊은 지성들의 모임 “중국조선족력사문화동호회” 회원들과 더불어 룡정의"산증인"으로 불리는 저명한 사학자 최근갑 옹(85세)을 모시고 룡정의 여러 명소와 명물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와중에 윤동주의 마지막 길을 바래였던 룡정에서의 자택 옛터를 확인할수 있었다.   태여난 명동에서 소학교를 졸업한뒤 윤동주는 명동에서20리 떨어진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 학교에 편입되여 계속 공부를 했다.소학교6학년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그런 아들의 처경을 안타까이 여기던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자식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기위해 당시 연변지역 사람들이면 너나가 선망하던 “서울”격인 룡정으로의 이사를 결심했다.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씨가 생전에 “나라사랑”이라는 잡지에기고한 추모문 ”윤동주의 생애”라는 글에 따르면”1931년에 윤동주는 명동에서 북쪽으로30여리 떨어진 룡정이라는 소도시에 와서 카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룡정으로 이사하였다.”고 밝히고있다.   윤동주네 일가가 룡정으로 이주한것은 대변혁이였다.명동에서 일껏 이룬 터전을 버린 것은 당시36세의 나이였던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의 도시로 향한 새로운 열망도 있었지만 주로는 파령 윤씨가문의 장남이였던 윤동주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였다. 막상 이사를 단행했지만 거주환경은크게 변했다. 윤동주네가 이사온 룡정집은 룡정가 제2구1동36호로서20평방메터 정도의 초가집이였다.명동에서 터밭과 타작마당, 깊은 우물과 작은 과수원까지 달리고 지붕을 얹은 큰 대문이 있어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서 한껏 넉넉하게 살다가20평방메터 정도밖에 안되는 초가집으로 옮겨온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윤동주, 윤일주, 윤광주3형제 거기에다 큰 고모의 아들인 송몽규까지 합류한8명의 식구가20평방메터의 초가집에서 옹색하게 붐벼야하는 환경속에서 윤동주의 은진중학교시절이 시작되였다.   환경은 여의치 못했지만 윤동주는 그에 구애되지 않았다.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버릇된 바른 신앙과 좋은 성격으로 학업에 열중해 나갔다.지금 남아있는 은진중학교 학생시절의 윤동주에 관한 증언들을 보면 그 모습이 풋풋하고 싱그럽다.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중학의 30년대의 모습     윤일주교수의 ”윤동주의 생애”에 있는 증언을 보자. “은진중학교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기에 앉아서 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학도 잘하였다. 특히 기하를 잘하였다…” 윤동주와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또 숭실중학교 그리고 광명학원 중학부를 같이 다닌 절친한 친구인문익환목사는 “중앙월간”(1976년4월)에 실린”하늘, 바람, 별의 시인 윤동주”라는 글에서 윤동주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페소트를떠올리고있다. “동주는 재봉틀질을 참 잘했어요. 그래서 학교 축구선수들의 유니폼에 넘버를 다는것을 모두 동주가 집에 갖고 가서 제손으로 직접 박아왔었지.” 문익환목사는이어 그들의 은진중학교 학창시절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한다. “1932년 봄에 동주, 몽규와 나는 룡정 은진중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은진중학교는 한때 모윤숙(毛允淑)씨가 교편을 잡았던 명신녀학교와 한 언덕우에 자리잡고있었다. 그곳에는 또 카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제창병원이 있고 선교사들 집이4채가 있었다. 이 언덕은 룡정동남쪽에 있는 언덕으로서 우리는 그 언덕을‘영국더기’라고 불렀다. 그 지경은 만주국이 서기까지 치외법권지대여서 일본순경이나 중국관원들이 허락없이 들어갈수 없는 곳이였다.”   여기서 말하는 “영국더기”는 지금 룡정 동남쪽에 위치한 더기로서 당년에 연변의 첫 조계지가 이곳에 설립되여 있었다. 그 더기우에 일떠선 은진중학은 1만평 부지에600평의 본관과150평의 기숙사, 400평의 대강당을 가지고있는 ,명실상부한 룡정 최고의 신식근대교육기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다른 학교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민족교육을 거침없이 실시해 일제가 금지하던 조선말 교육은 물론 영어-성경-국사 등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지식인을 양성하는 수업이 이뤄졌다. 간도 개척기에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의 산실이 명동촌의 명동학교였다면 일제 강점기에는 룡정의 은진중학이 그 맥을 이였던것이다. “영국더기”와 가까이 상거한 이 자택에서 윤동주는 근8년간이나 지냈다. 집과 불과200메터 상거한 은진중학교에 다니면서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학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교내 웅변대회에서“땀 한방울”이라는 제목으로1등상을 땨내는 등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다.이곳에서 윤동주는  그 청년기를 담금질했다.   현재 오스트랄리아에 거주, 현존하는 윤동주의 유일한 혈육인 녀동생 윤혜원녀사는  2007년 필자의 취재를 접하면서 룡정에서의 나날을 떠올렸다.“절구통우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련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빠의 손가락에는 늘 등사잉크가 묻어있었다”고 윤녀사는 회상했다. 친지와 친구들의 증언을 따라가며 룡정에서의 윤동주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축구선수인 문학소년,잘 생긴 외모에 옷차림에도 관심이 커손수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맵시나게 고쳐입는 멋쟁이, 웅변대회에서1등상을 수상한 경력에다가 문학소년치고는 의외로 수학마저 잘하고…   1940년 은진중학 졸업후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을 지망해 고종사촌 송몽규와 당시 간도지역에서는 단 두사람으로 합격했다. 1942년 연희전문 을 나와 윤동주는 일본으로 류학, 선후로 도꼬 립교대학 영문과, 도꾜도지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그러다  이른바“사상범”으로 체포되여 일본 규슈의 후꾸오까형무소에 갇혔고 생체실험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주사를 맞고 옥사한다.       룡정의 자택에서 치러진 윤동주 장례식 광경. 상주들중에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영정곁의 오른쪽 첫번째), 아버지 윤영석(그 두번째), 동생 일주(세번째), 어머니 김룡(다섯번째), 여동생 혜원(여섯번째), 막내동생 광주(왼쪽으로 네번째)의 모습이 보인다. 영정 바로 왼편에 선 이가 문익환 목사이다.    윤동주가 비명에 간뒤 근 한달이 지나 아버지에 의해 일본에서 부터 그의 골회가 운송되여 왔다 . 1945년3월6일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 집 앞뜰에서 윤동주의 장례가 치러졌다.윤동주의 절친한 친구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영결을 집도했다. 장례식에서 연희전문“문우”잡지에 실렸던 윤동주의 시“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봄이였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고  그날 따라  눈보라가 몹시 날려서 동주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춥게 했다고 한다.   윤동주의 룡정자택에 대한 확인은 력사의 행간에 묻혀졌던 윤동주가 일본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에 의해 연변에서 처음 알려지던1985년에 이루어졌다.   서대숙 (미국 하와이대학 정치학 석좌교수)     30~40년대 룡정에 거주했던 서대숙 일가는 윤동주의 룡정 자택과 불과100여메터 떨어진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고 명동학교 설립자인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선생의 자택과도 역시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다. 서대숙은 그후 미국콜롬비아대학교 정치학 박사, 연세대학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 일본 게이오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미국 하와이대학교 정치학 석좌교수를 지내면서 조선문제연구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발돋움했다. 그는 명동의 정초인이며 이주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약연에 대한 위인전기를 집필해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형인 서화숙(뉴욕 한인교회 장로)이32년 은진중학에서 재학하고있었는데 바로 윤동주와 동기생으로 되고있다.     1985년 이들 일행은 룡정으로 행차, 옛날 기거하고있던 “영국더기”를 찾으면서 룡정에서의 윤동주의 자택을 확인했다.   명동마을의 정초자,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룡정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사학자 최근갑옹이 김약연 목사의 옛집 터를 확인하고있다. 지금은 한 아파트단지의 접수실로 변모해 있다.   최근갑 옹은30년대 김약연목사의 자택(현재 룡정 안민가 “해란의 별(海兰之星)”아파트)부근에서 당시“벌채조합(伐采组合”의 조합장으로 있는 일본인 오오마가리(大曲)네 집 급사로 종살이를 한적있었다. 이들은 당시 개혁개방으로 국문을 열어젖힌 중국에서 자주 만날수 있었고 조선족력사에 관한 어제의 “산증인”으로 학술계에 많은 의거있는 자료를 제공했다.   1926년독립운동가 최청남의 아들로 태여난 최근갑옹 역시 은진중학교 23기 졸업생이다. 즉 윤동주와 은진중학의12년 후배로 되는것이다. 해방후 맡은바 직무에 충실하면서수차례 길림성정부와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의 표창을 받기도 했던 최근갑옹은1986년룡정시 건설국 국장에서 정년 리직한 뒤 제2의 인생 즉 우리 민족의 력사발자취를 찾고 그것을 발굴, 복원해 후세에 남김과 아울러 력사관광전적지건설에 혼신을 바치고있다.     윤동주의 룡정자택 옛터     최근갑옹이 확인하는 윤동주의 자택 옛터는 지금의 안민가 동산사회구역의 룡정시 기계수리공장의 뜨락으로 변모해 있다. 성이 조씨인 한족 공장장이 경영하는 작은 규모의 공장으로서 주로 지체장애인을 위해 민정국계통에서 차린 기계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 공장마저 조업을 중단하고 그곳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었다.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 윤동주를 보듬어 안고 그의 시상을 유발시킨 동생 광주가 뛰여놀았을 곳, 처음으로 “동주”라는 필명으로 연길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에 동시를 발표했던 곳, 그 유명한 동시 “오줌싸개 지도”를 산출시킨 곳, “초 한대”등 자신의 시작품에 처음으로 이름과 날자를 명기한 곳, 문학에 뜻을 두고 연희전문을 지망하면서도 아버지와 설전을 벌린 유명한 일화를 남긴곳이 바로 이 룡정의 자택에서였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이제는 한국 지어 그를 숨지게 한 “적국” 일본 그리고 아세아를 넘나들며 그의 위상이 재조명되고있지만 그의 생전 거처를 밝히는 표지석 하나조차 없어 보는 우리의 마음을 아릿하게 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0년11월22일     ==============================자료===   윤동주와 은진중학교     윤동주는 짧디짧은 인생에서 선후로 명동소학교,달라자(大砬子)중국인소학교(6학년1년간 수학),은진중학교(룡정),숭실중학교(평양),광명학원(룡정),연희전문학교(한국서울),릿교대학(일본동경),동지사대학(일본교토)을 다녔다.     1932년4월 은진중학교에 입학한 윤동주는 1935년9월1일 평양숭실중학교로 전학가기전까지 줄곧 은진에서 공부했다.         은진중학교 본관 3층건물   함께 은진에 입학한 동기생들로는 송몽규,문익환등이 있다.셋은 1935년에 이르러 각자의 길을 가게 되였다.4월 송몽규는 학업을 중단하고 중국락양군관학교 조선인반 2기생으로 들어갔고 문익환은 숭실중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9월 윤동주는 편입시험에 실패하여 숭실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송몽규와 윤동주는 다시 룡정에 돌아와 윤동주는 광명중학교에,송몽규는 대성중학교에 편입되였다가 1938년4월 둘은 북간도에서 유일하게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왼쪽사진-숭실중학교때 윤동주(뒷줄 오른쪽 첫번째,뒷줄 가운데 문익환) 오른쪽사진-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윤동주와 송몽규 (왼쪽 첫번째 윤동주-광명학원시절/오른쪽 첫번째 송몽규-대성중학교시절)     일찍 윤동주와 은진을 같이 다녔던 문익환목사는 고 회고했다.명의조선생은 항상 전통민족복장차림으로 다니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적 기개를 품게 하였으며 상해,남경,제남 등지에서 활동하던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인 김구,리웅 등이 이끄는 반일민족독립단체들과 련계를 갖고 있었던 인물로서 대단한 애국자였다.송몽규를 락양군사학교로 보낸것도 명의조선생이였으며 그가 가르쳤던 학생들 중에는 동북항일투쟁에 참가하여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 겸 중공연길현 제1임서기로 있었던 김성도도 있었다.   명의조선생은 1938년 체포되여 서울서대문형무소로 압송되여 갔다.     은진중학교시절의 윤동주는 다방면이였다고 전해지고 있다.축구도 잘했으며 재봉질도 곧잘 잘해 축구부선수들의 유니폼도 그가 직접 만들어 왔을정도라고 했다.교내 잡지를 만들랴 밤새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으며 내성적인 성격에 반해 웅변대회에 나가 “땀 한 방울”이라는 제목으로1등까지 하였다고 한다.의외로 수학도 잘하였으며 뭐니뭐니 해도 그는 문학소년이였다.           '영국더기'로 올라가는 두갈래 길.(오른쪽 사진 건물이 '제창병원'옛터)       왼쪽 사진 길로 곧게 올라가면 바로 '명신녀자학교'로 통했다.오른쪽 길로도 은진중학교로 다닐수 있었다. 아마 윤동주는 자택에서 이 길을 오르고 내리고 걸어다녔으리라...   당시 윤동주를 키웠던 은진중학교는 어떤 학교였을가?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합방’등 불평등조약으로 조선은 국권을 상실한채  일제의 침략하에 허덕이게 되였다.   당시 중국으로 망명해온 수많은 우국지사들과 반일민족투사들은 룡정에 들어와 앞다투어 학교를 세워가고 있었다.       왼쪽사진- 새로 낸 도로로 인하여 '영국더기'는 허리가 뭉텅 잘리웠다. 오른쪽사진- '영국더기' 일각   (오늘의 '영국더기'에서는 당년의 위용을 전혀 찾아볼수 없다. 새로 낸 도로로 몸퉁이가 두동강이 나 있고 옛 건물들은 하나도 찾아볼수도 없다.설상가상으로 새로 선 아파트며,나무들로 한 눈에 바라볼수도, 사진에 담을수 없다.)   (팻말조차 없는 '영국더기',누가 이곳에 그것도 100여년전에 최신의료기술을 자랑하는 '제창병원'이 있었으며,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최고의 교수진으로 수많은 인재들과 항일투사들을 길러낸 민족교육문화의 요람인 은진중학교가 있었으리라 상상이나 하랴...) (恩眞은 훗날 세계적인 시인 윤동주를 배출하는 영광을 안게 되였다.)   당시 룡정동산(東山)에는 일본인들도 마음대로 손을 댈수 없었던 ‘치워법권’인 특수 지역이 있었다.바로 영국조계지인 ‘영국더기’였다.’영국덕이’란 영국사람들이 살던 언덕을 줄인 것으로 일제시대 ‘영국국적’을 지녔던 카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이 살던 동네라는 뜻이다.바로 카나다장로회 룡정 선교부(mission station)가 있었던 곳이다.         1910년대 초 선교 차 말을 타고 두만강을 건너고 있는 구례선(로버트 그리슨)목사와 부인 레나. 나룻배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고 있는 영국국적 카나다 선교사들, 이들은 룡정에 와서 제창병원을 세웠으며 학교와 교회를 륙속 세웠다.   캐나다장로회는 1907년 룡정 선교에 착수한 후 교인이 늘어나자 1913년 바커(한국명 박걸)선교사를 룡정주재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계속해서 1914년 푸트(부두일)와 1915년 마틴(민산해)등을 파송하였다.이들은 룡정 동산언덕에 1만여평 대지를 구입하고 선교사 사택과 병원(제창병원),학교(은진중학교,명신녀학교),교회(동산교회)등 건물을 지었다.이때로부터 이곳을 ‘영국덕이’라 불렀다.   1920년2월4일 부두일의 노력으로 은진중학교가 설립되였다.라는 뜻의 은진(恩眞)은 개학당시 학생은 27명,제1교장에는 부두일,학감에는 리태준,고문에는 김약연,리병하,박래수였다.교사는 잠시 성경서원 2층을 사용하였고 수업과목은 자연과학을 위주로 성경,영어,한문 등을 배워주었으며 학제는 5년이였다.     부두일이 학교를 설립하여 학교건축을 시작하였지만 1920년12월에 귀국한 관계로 제2임교장인 빠제브(박걸부)목사가 부임되여 왔고 1921년 여름 건평이 600평방메터 되는 3층짜리 교사를 건축하고 나서야 옮기게 되였다.     1922년4월 일찍 훈춘일대에서 선교사업과 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던 서고도(소크트)선교사가 제3임교장으로 부임되였다.대뜸 학교는 명성에 걸맞게 조선과 북만,로씨야 연해주 등지에서 많은 학생들이 찾아와 300여명을 넘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1925년9월 서고도(스크트)교장이 조선으로 전근되고 페레스목사가 제4임교장으로 부임되였다.리사들로는 남존경명신녀자학교 교장),김약연,리병하,김내범,문재린등이였다.   1927년 4월 150여명의 학생들은 종교와 수업의 분리를 요구하면서 집단퇴학을 선포하고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로 집단전학하였다.하여 은진중학교에는 신도들의 자제들만 몇십명이 남게 되였다.     1930년 은진중학교도 기타 룡정중학교 학생들과 같이 ,라는 구호를 웨치면서 시위행진을 벌렸다.     1934년5월 페레스가 귀국하자 빼훈목사가 은진중학교 대리교장으로 왔다.새로운 실험기재를 구전히 갖추었으나 1936년2월부터 만주국 교육부의 지령에 좋아 공과학교로 고치고 토목과와 건축과를 두었다.1937년12월에는 교육권 이양식까지 거행하게 되였다.   1938년4월 만주국민생부대신으로부터 공과은진중학교로 윤허를 받자 종교교육은 정식으로 페지되였다.             왼쪽으로부터       사진1: 현, 룡정시 4중학교 내에 있는 은진중학교 기념비   사진2: '영국더기'에 있었던 '명신녀자학교'옛터   사진3: 현, 룡정시 4중학교 동쪽(은진중학교 옛터)           이때 페레스가 다시 돌아왔으나 1940년12월 부득불 교장직에서 사직하고 리태준에게 학교사무를 맡기고 귀국하였다.그때 박종렬(朴宗烈)이 제6임교장으로 되였으나 일제한테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였다.영국인과 카나다선교사들이 떠나자 일본관동군 진규시(神宮司)부대가 진주하여 학교를 점령,병영으로 만들었다.     1942년3월 은진중학교는 만주국교육부의 지시로 간도성제3국민고등학교로 개칭하고 1943년초에는 일본인 히다까겐조(日高健三)가 제7임교장으로 부임하면서 교권은 완전히 일제에게 넘어갔다.     1945년초 일본인 마에다유베몬(前田右部門)이 제8임교장으로 부임되여 왔고 학교는 일본군에게 빼앗겨 합성리영림서자리로 이사갔다.     1945년8월 최시학(崔時學)선생이 은진중학교 제9임교장으로 부임하였다.그해 겨울 학교명을 로 고쳤다가 1946년2월 다시 원래 학교명으로 고쳤다.     1946년9월16일 룡정의 6개중학교는 하나로 합쳐 길림성룡정중학교로 거듭났다.     총적으로 카나다선교사들은 ‘영국더기’에다 와 을 세워 선교활동과 치료를 병행하였으며, ,를 세우면서 계몽교육활동과 남녀평등을 실현하기에 노력하였으며 특히 조선인들의 반일투쟁,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은진중학교에서 열린 명신녀자학교와의 합동체육대회       윤동주가 다녔을 시 은진중학교는 ‘치외법권’지역이였으므로 ‘특수성’을 누렸을뿐만 아니라  명의조(明義朝)같은 교사의 밑에서 민족주의에 한층 눈을 뜨게 되였으며 문학에 더욱  증진할수가 있었다.     윤동주의 작품생애에서 처음 ‘1934년12월24일’으로 기록된 ‘초한대’, ‘삶과 죽음’, ‘래일은 없다’ 3편의 작품도 바로 이 시기에 태여났다.     이때 윤동주와 한집에,명동소학교서부터 줄곧 문학소년이였던 고종사촌간인 송몽규는 1935년1월1일자 [동아일보]신춘문예 콩트 부문에 응모하여 이 당선되였다.은진중학교3학년 학생이 일반인들과 겨뤄 당당하게 저명한 신문의 신춘문예에 이름을 올린 쾌거였다.이는 송몽규 자신에게도 고무가 되였을뿐만아니라 윤동주에게도 큰 자극이 되였을것이다.     초 한대   윤동주     초 한대-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心志)까지   백옥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버린다.     그리고도 책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초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1934.12.24     오늘의 윤동주가 있기까지 태여나서 자란 명동촌,가정배경 그리고 매 시기마다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恩眞 또한 윤동주의 성장과정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수 있다.     2013년4월29일    
422    아프리카 세네갈 대통령 시인 - 상고르 댓글:  조회:2563  추천:0  2017-04-20
상고르 Leopold (Sedar) Senghor 1906. 10. 9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세네갈 대통령(1960 ~80)  시인, 정치가로서 온건한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주요 제안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검은 여인(女人) 벗은 여인(女人)아, 검은 여인(女人)아 그대 입은 피부빛은 생명(生命)이라, 그대 입은 형상(形象)은 아름다움이라! 나는 그대의 그늘 속에서 자라 났네, 그대의 부드러운 두 손이 내 눈을 가려 주었지. 이제, 여름과 정오(正午)의 한가운데서 나는 알겠네, 그대는 약속된 땅임을, 목마른 높은 언덕의 정상으로부터 그대의 아름다움은 독수리의 번개처럼 내 가슴 한복판에 벼락으로 몰아치네. 벗은 여인(女人)아, 검은 여인(女人)아 단단한 살을 가진 잘 익은 과일, 검은 포도주의 어두운 황홀, 내 입에 신명(神明)을 실어주는 입 해 맑은 지평(地平)을 여는 사반나, 동풍(東風)의 불타는 애무에 전율하는 사반나, 조각해 놓은 듯한 탐탐북이여, 승리자의 손가락 밑에서 우뢰같이 울리는 탐탐북이여. 조 그대 콘트랄토의 둔탁한 목소리는 연인(戀人)의 드높은 영혼의 노래. 벗은 여인(女人)아, 검은 여인(女人)아 바람결 주름살도 짓지 않는 기름, 역사(力士)의 허리에, 하늘 나라의 띠를 맨 어린 양이여, 진주(眞珠)는 그대 피부의 밤 속에서 빛나는 별, 그대 비단 물살의 피부 위에 노니는 정신(精神)의 감미로움, 붉은 금(金)의 그림자, 그대 머리털의 그늘 속에서, 나의 고뇌는 이제 솟아날 그대 두 눈의 태양(太陽)빛을 받아 환하게 밝아오네. 벗은 여인(女人)아, 검은 여인(女人)아 시샘하는 운명(運命)이 그대를 한 줌 재로 만들어 생명(生命)의 뿌리에 거름 주기 전에, 나는 노래하네. 덧없이 지나가고 마는 그대의 아름다움을, 내가 영원(永遠) 속에 잡아 두고픈 그 형상(形象)을 나는 노래하네.    요점 정리  작자 : 생고르(Senghor)/ 김화영 옮김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예찬적  표현 : 돈호법  제재 : 검은 여인  주제 : 검은 여인에 대한 찬양, 검은 피부에 대한 긍정과 흑인주의의 고귀함에 대한 찬양  출전 : (1945)    내용 연구  탐탐북 : 아프리카 흑인들이 손으로 치는 북의 일종  시샘하는 운명이 그대를 - 생명의 뿌리에 거름 주기 전에 : 죽음이 찾아와 육신이 소멸하여 대지에 다시 뿌려지는 의식. 제2행의 '그대 입은 피부빛은 생명'이라는 구절을 생각할 때, 시인은 흑인을 가장 생명력이 강한 인종(人種)이라 찬양하고 있다.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1945년에 발간된 시집 에 실려 있다.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시인이 흑인에 대한 찬양을 그린 작품이다. 이 시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피부색에 대한 긍정이며, 그것을 가장 드높이 외치는 고귀성에 대한 찬양이다. 또한 시인은 흑인을 가장 생명력이 강한 인종이라 찬양하고 있다. 그간의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인 종래의 흑인문학과는 달리 밝고 건강하며 긍정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는 작품이다. 이러한 밝은 정서는 흑인종에 대한 시인의 자부심과 긍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심화 자료    생고르와 흑인주의  생고르 이전에는 프랑스말 사전 속에 네그리튀드(Negritude : 흑인성. 다시 말해서 흑인 특유의 사고 방식, 정신)란 어휘가 없었다. 언어 학자이며, 시인인 생고르에 의하여 신조(新造)가 된 이 어휘 속에는 생고르의 흑인주의가 담겨 있다. 세계의 불의(不義) 앞에서 그가 느낀 사명감, 즉 수 세기에 걸쳐서 허리를 굽히고 침묵하는 것 이외에 권리라고는 가져 보지 못한 흑인들의 대변자가 되겠다는 사명감이 담겨 있다.  그에게 있어서 흑인이 해야 할 첫째 임무는 스스로 부끄럼 없이 흑인임을 자처하는 일이며, 스스로의 피부색을 되찾는 일이다. 시 '검은 여인'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바로 피부색에 대한 긍정이며, 그것을 가장 드높이 외치는 고귀성에 대한 찬양이다.    생고르 Leopold (Sedar) Senghor 1906. 10. 9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세네갈 조알~ . 세네갈의 대통령(1960 ~80). 시인·정치가로서 온건한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주요 제안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세레르족(族)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생후 7년간을 작은 마을에서 보냈으며, 최초의 꿈은 설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근의 가톨릭 선교회와 신학교에서 수업 을 받았다. 20세가 되자 그는 사제직이 자기의 천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다카르에 있는 리세(중학교)로 전학했다. 어려서부터 상고르는 아프리카 문화재의 중요성에 대한 끈질긴 신념을 드러냈다. 1928년에 그는 부분 장학생의 자격으로 파리에 가서 루이르그랑 리세와 소르본대학교에서 정식 공부를 계속했다. 이 기간에 상고르는 아프리카 예술이 현대의 회화· 조각·음악·문학에 명백한 자취를 남겼음을 발견했으며, 이 발견은 아프리카가 현대 문명 에 공헌할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을 굳건하게 했다.    1935년 생고르는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학교제도에서 최고의 유자격 교사인 아 그레제(agrege)가 되어 투르에서 프랑스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2년 후 그는 파리 가까이에 있는 한 리세로 전임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초인 1939 년에 징집된 그는 1940년에 포로로 잡혀 나치의 집단수용소에서 2년을 보냈으며 그곳에서 그의 가장 우수한 시들 가운데 몇 편을 집필했다. 집단수용소에서 풀려나자마자 그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 가입했다. 전후에 상고르는 프랑스 제헌의회의 의원이 되었으며, 1946년 에는 파리에서 개최된 프랑스 국민의회에 세네갈의 대의원 2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파견되 었다. 사회당(SFIO)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한 상고르는 1948년에 세네갈민주연합(BDS)을 설 립했으며, 이 당의 후보로 1951년의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차점자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재선되었다. 5년 후 그는 세네갈의 철도교통의 중심지인 티에의 시장이 되었으며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56년 프랑스 의회가 아프리카의 프랑스 영토들에 광범위한 자치를 부여하는 구역법(區域 法 loi cadre)을 통과시킬 때 상고르는 처음부터 동법안에 반대했다. 그는 이 법이 연방이 아닌 영토 정부를 강조했으며, 그 결과는 생존력이 없는 작은 나라들의 난립이 될 것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구역법의 효과를 무산시키기 위해 그는 아프리카 연방체의 설립을 위해 헌신할 일련의 정당 창설을 돕고 그 정당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그중 어느 정당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국내 전선에서 그는 세네갈진보주의연맹(UPS)의 결성을 도왔는데, 이 연맹은 1976년 이후 사회당(PS)으로 불리면서 1980년대초까지도 세네갈의 집권 여당으로 존속했다. 1950년대말에 상고르는 서아프리카의 다양한 정치 집단들이 동맹을 체결하는 것을 도왔으며 그 결과 1959년에 세네갈(프랑스령 수단[말리], 다호메이[베냉], 어퍼볼 타[부르키나파소]와 함께)이 회원국으로 가입한 단명한 말리 연방이 창설되었다. 1959년 12월 상고르는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에게 독립을 호소하는 열변을 토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말리 연방은 이듬해 8월까지밖에 유지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두 회원국 세네갈과 프랑스령 수단이 탈퇴했기 때문이었다. 세네갈은 공화국이 되었고 상고르는 만장일치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상고르의 일생에 닥쳐온 2번째의 큰 위기는 1962년말에 일어났다. 오랫동안 상고르의 비호를 받았던 마마두 디아 총리가 쿠데타를 기도한 것이다. 다시 한번 세네갈 국민은 상고르를 지지하여 궐기했고, 마마두 디아는 종신구금형을 선고받았다. 새 헌법이 비준되고 상고르는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그는 1980년 12월 31일 5번째 임기 도중에 공직에서 은퇴했고 아브두 디우프가 그의 뒤를 계승했다.    최고행정관으로서 생고르는 세네갈의 농업을 현대화하고, 개화된 시민 의식을 고취하고, 부패와 무능력을 추방하고, 인접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프랑스와의 지속적인 협력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무신론과 지나친 물질주의에서 다같이 벗어나 아프리카의 현실 에 바탕을 둔 아프리카 사회주의를 주창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같은 슬로건들과 거리가 먼 개방적이고 민주적이고 인도적인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제3세계의 강력한 대변인으로서 그는 농업국들에 불이익을 초래하는 불공정한 무역 조건들에 항의했다. 정치 적·경제적 문제들에 대한 그의 관심을 그가 '흑인 아프리카 세계의 문화적 유대의 총화' 라고 정의한 네그리튜드(negritude)에 대한 그의 옹호를 더욱 강화시켰다. 그는 문학 작품과 정치적 업적을 인정받아 4개 대륙의 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69년 12월에 그 는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윤리·정치학 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1984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입회, 이 아카데미의 역사상 최초의 흑인 회원이 되었다.   생고르의 생애는 역설로 가득 찼다. 그는 가톨릭교도인데다 세레르족이면서도 이슬람교도와 월로프족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를 이끌었다. 탁월한 지식인이면서도 농민을 가장 큰 지지 기반으로 삼았다. 뛰어난 시인이면서도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직업 정치인으로서 조국을 독립으로 이끌었고 그후 20년 동안 유능한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    네그리튀드(Negritude) - 흑인주의  1930~50년대에 파리에 살던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출신의 작가들이 프랑스의 식민통치와 동화정책에 저항하여 일으킨 문학운동.  그 주도적 인물은 1960년 세네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레오폴드 세다르 상고르로서, 그는 마르티니크 출신의 에메 세제르, 프랑스령 기아나 출신의 레옹 다마스와 함께 서구의 가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아프리카 문화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프랑스의 동화정책이 이론적으로는 인간평등의 신념에 근거를 두지만 아프리카 문화보다 유럽 문명이 우월하며 심지어 아프리카에는 역사와 문화가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주장하며 여기에 반박했다. 세계대전에서 동포들이 자신들과 상관없는 명분을 위해 죽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 종처럼 취급받는 것을 보고 분노했으며, 역사연구를 통해 흑인들이 처음에는 노예제도로, 다음에는 식민통치로 고통과 굴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이런 견해가 네그리튀드의 여러 기본사상을 형성하게 해준 요인이 되었다. 즉 자연과의 친근함 및 조상과의 부단한 접촉에서 비롯되는 아프리카인의 삶의 신비로움과 포근함은 서구문화의 영혼부재, 물질주의에 맞서 올바른 관점에서 자리를 찾아야 하며, 아프리카인들은 현대사회에서 어떤 가치와 전통이 가장 유익한가를 선택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풍요로운 과거와 문화유산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사상이 나왔다. 또한 사회참여 작가들은 글을 쓸 때 아프리카의 문제와 시적 전통을 다루어야 할 뿐 아니라, 아프리카인들이 정치적 자유를 갈망하도록 고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그리튀드라는 개념은 아프리카의 문화적·경제적·사회적·정치적 가치들을 모두 포괄하며, 무엇보다도 아프리카 전통과 민족의 가치 및 존엄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았다.    상고르의 시에는 이런 주제가 모두 드러나 있으며, 그는 다른 여러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세네갈 출신의 비라고 디오프의 시는 아프리카 삶의 신비를 다루었고, 다비드 디오프는 혁명적 저항시를 썼다. 또 자크 라베마낭자라는 마다가스카르의 역사와 문화를 예찬하는 시와 희곡을 썼으며, 카메룬의 몽고 베티와 페르디난드 오요노는 반(反)식민주의 소설을 썼고, 콩고의 시인 치케야 위 탐지는 매우 개인적인 시를 쓰면서도 아프리카 민족의 고통을 다루었다. 그러나 1960년대초부터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에서 이 운동의 정치적·문화적 목표가 이루어지자 네그리튀드를 주제로 한 작품은 많이 줄었으며, 서아프리카 문학운동의 중심지도 세네갈에서 나이지리아로 옮겨갔다.(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    세제르 Aime(-Fernand) Cesaire  1913. 6. 25 마르티니크 바스푸앵트~ . 프랑스어를 사용한 아프리카의 시인·극작가. 레오폴드 세다르 상고르와 함께 아프리카 흑인문화의 정체성 회복운동(네그리튀드 운동)을 시작했고, 이 운동은 큰 영향을 끼쳤다.  상고르를 비롯하여 네그리튀드 운동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제르도 파리에서 교육받았다. 1940년대초에 마르티니크로 돌아와 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의 독립을 지지하는 정치활동에 참여했다. 흑인들의 곤경을 무산계급 투쟁의 일환으로 보았으며, 1946년에 제헌의회 위원이 되었고, 1946~56년에는 공산당에 가담했다. 전통적인 언어형태로부터 탈피하게 해주는 초현실주의야말로 자신의 신념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수단임을 깨닫고, 아프리카적 심상이 강한 유럽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격앙된 저항의식을 표현했다. 〈귀향수첩 Cahier d'un retour au pays natal〉(1939)·〈목 잘린 태양 Soleil cou-coupe〉(1948) 같은 격한 시들로 압제자들을 심하게 비난했다.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된 후에는 네그리튀드 운동 대신 흑인 무력투쟁을 선택했다. 그의 비극들은 강한 정치성을 띠는데 〈크리스토프 왕의 비극 La Tragedie du Roi Christophe〉(1963)은 19세기 아이티의 독립을 그린 희곡이고, 〈콩고에서의 한 철 Une Saison au Congo〉(1966)은 1960년 콩고에서 일어난 반란과 콩고의 정치 지도자 패트리스 루뭄바의 암살을 다룬 서사시이다. 이 두 작품은 영원히 실패로 끝날 흑인 지위향상운동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   (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                                             친      구                                  상  고  르                                          친구여,                                          내게 바싹 붙어다니는                                          내 검은 피부를 나는 찢고 싶다.                                          성미 까다로운 너의 태도를                                          나는 헤쳐 나가고 싶다.                                          빈정거리는 너의 화살을.                                            친구여,                                          볕에 그을린,   생채기가 난 너의                                          피부와 두 손을 넘어서                                          예민한                                          너의 심장까지,   뱃속까지                                          나는 가라앉고 싶다.       [출처] 상고르의 시 : 친 구|작성자 산뜰내  
421    시인은 시를 오랫동안 삭힐줄 알아야... 댓글:  조회:1919  추천:0  2017-04-20
  시를 삭히는 법/이섬 음식을 만드는 과정 중에 ‘삭힌다’는 말이 있다. 김치나 젓갈, 식혜 등을 제맛이 나도록 익히는 것인데 중요한 건 인위적으로 익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적당한 온도와 바람, 햇빛 등 자연적인 요소로 숙성시켜야만 잘 삭혀진다고 하겠다. 전문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음식물 속에 있는 효모나 박테리아같은 미생물에 의해서 유기 화학물이 분해·산화·환원하여 유기산이나 탄산가스 등이 생겨서 발효되는 것이다. 잘 익고 맛있게 삭은 고추장만 해도 그렇다. 메주가루와 고추가루, 엿기름가루, 소금물 등을 골고루 섞어 버무린다. 이것을 항아리에 담아 통풍이 잘 되고 양지바른 곳에서 낮에는 햇빛을 쪼이고, 밤에는 뚜껑을 꼭 덮어 물기가 스미지 않게 해서 두 달 이상이 지나야만 제대로 삭혀져서 맛이 나게 된다.  또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내가 좋아하는 반찬 중에 가자미 식해라는 것이 있다. 함경도가 고향인 어머니가 해 주시던 음식인데 잘 삭혀진 가자미 식해의 맛은 ‘입에 살살 녹는다’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겨우내 먹을 김장을 끝내놓고 나면 꼭 가자미 식해를 담그시는데 노르스름한 색깔이 도는 참가자미를 결대로 썰어 놓고, 고슬고슬하게 지은 좁쌀밥에 채로 썬 무와 엿기름가루를 섞은 다음 고추가루를 듬뿍 넣어 갖은 양념으로 버무린다. 버무린 것을 키작은 항아리에 꼭꼭 눌러 담은 다음 웃소금을 살짝 쳐서 바람이 잘 통하고 그늘진 곳에 두었다가 열흘쯤 지난 뒤에 꺼내 먹는다. 요즘 들어서 건강에 신경들을 쓰다보니까 이처럼 발효된 음식이 항암 효과가 있다고 환영을 받기도 하는 듯하다. 폐일언하고, 앞의 예를 든 조리 과정을 보건대 ‘삭힌다’는 건 지적한 것과 같이 열을 가하는 등의 인위적인 방법으로 익힐 수가 없다는 점,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한두 시간이나 하루이틀에 빨리빨리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음식마다 다르지만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맛이 숙성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멸치젓갈같은 경우는 몇 달간의 낮과 밤이 지나야만 소금에 버무린 생멸치의 살과 뼈가 녹아서 잘 익은 젓국이 우러나는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나의 두번째 시집 『향기나는 소리』를 읽어 본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섬 씨 삭힌다는 말을 좋아하나 봐.”  그랬었구나! 내가 ‘곰삭은’ 말을 좋아했었구나. 시집을 펼쳐 보았다. ‘상원사 종루에서 나무공이로 두들겨 삭아져서’ ‘우묵한 오지 뚝배기에 노랗게 삭은’ 등등. 이왕 내친 김에 덕담 한 마디 해야겠다. 잘 익어서 맛있게 삭은 시를 쓰고 잘 삭아져서 감칠맛나게 사는 삶, 좋지 않겠는가! 대전을 오가기 위해서 경부고속도로나 중부고속도로를 자주 다닌다. 어느 비 오는 날 오후 중부고속도로 매표소 지하도를 건너가게 되었다. 도로가 16차선이나 되는 꽤 긴 편인 시멘트 동굴같은 델 들어갔는데, 바로 머리 위 길에서 엉엉 우는 소리가 났다. “아니, 아니! 길이 울다니….”  비가 오기 때문이었는지, 차가 달리는 소리가 동굴에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머리 위쪽 길에서 엉엉 우는 소리가 났다. 사람 하나 없는 흐릿한 불빛 아래에서 그것은 굉장한 놀라움이고 떨림이었다.  며칠이 지난 뒤 나는 「길도 울 때가 있더라」라는 제목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대부분 시를 먼저 쓰고 제목을 붙이는 평소의 습관과는 달리 제목이 쉽게 튀어 나왔다. 그때 들었던 울음소리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큰 울림으로 내게 닿았을까? 길도 울 때가 있더라 중부 고속도로 매표소 지하도를 건너는데 바로 머리 위 길이 엉엉 우는 소리를 냈어 눈물을 흘리면서 울더라니까① 마음밭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검불들을 쥐어뜯는 그런 울음이었어 검고 진했어 숨도 안 쉬고 맥박도 안 뛰는 줄 알았는데 아픔도 눈물도 없는 줄 알았는데② 심장 안쪽에 피가 돌고 있었어③ 끓고 있었어④ 살아서 꼬물거리던 작은 생명체들이 길속에 또하나의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야 살아 있음의 생생한 기억들을 불러내고 있는 중이었어 여러 겹으로 포장된 뇌사의 길이 비 오는 날이면 엉엉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어 다 드러내놓고 쓰기로 했다. 내가 겪었던 체험은 내 의식 주변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연결되었다. 내가 알지 못하고 상상할 수 없는 곳에서도 있을 수 있는 갈등과 아픔 그들을 치유하고자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①행을 좀 더 강조해야겠고, ②행과 ③행의 연결고리가 너무 느슨했다. 갈등을 화해로 전환하는 데 좀더 탄력있게 조여줄 수 있는 연장을 찾아보기로 했다. 시를 쓰고 고치는 것도 성격대로인가? 서두르지 않았다. 석 달쯤 지난 후 작품들을 정리하면서 다시 그와 마주했다. 그를 한 등급 높여서 예우해 주기로 했다. 의인화시켜서 그에게 더운 피가 돌게 하고, 다시 ④행을 수정하여 맑은 공기를 흠뻑 들어마시게 해 주었다. 잘 삭혀진 것일까? 고른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길도 울 때가 있더라 중부 고속도로 매표소 지하도를 건너는데 바로 머리 위 길이 엉엉 우는 소리를 냈어 정말이야 눈물을 흘리면서 울더라니까 마음밭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검불들을 쥐어뜯는 그런 울음이었어 검고 진했어 숨도 안 쉬고 맥박도 안 뛰는 줄 알았는데 시멘트에 방수에 겹겹이 포장된 심장 안쪽에 아직도 더운 피가 돌고 있었어 펄펄 끓어서 맑아지게 하고 있었어 살아서 꼬물거리던 작은 생명체들이 길 속에 또 하나의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야 살아 있음의 생생한 기억들을 불러내고 있는 중이었어 여러 겹으로 포장된 뇌사의 길이 비 오는 날이면 엉엉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어 나는 시에서 운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읽으면서 걸리는 구절이나 어색한 부분은 없는지 몇 번씩 읽어보곤 한다. 또한 탄탄한 집을 지어주고자 한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도 끄떡없는 구조가 탄탄한 집, 거기에 유산균이 풍부한 잘 삭은 맛깔스런 시의 국물까지 곁들인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이 섬) 93년 『문학과 의식』 등단. 시집 『누군가 나를 연다』 『향기나는 소리』가 있다. 96년 국민문학상 시 부문 이천만원 고료 당선 ------------------------------------------------------------------------------------     그리움  ―아이헨도르프(1788∼1857) 별들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다. 나는 홀로 창가에 기대어 고요한 마을 멀리서 들리는 역마차 피리소리를 들었다. 어쩐지 가슴이 타오르듯 뜨거운 이렇게 아름다운 여름밤 저렇게 함께 여행할 사람이라도 있다면 좋겠네. 그런 생각을 슬쩍 하기도 했다. 젊은이 두 사람이 산비탈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걸어가면서 노래하는 소리가 고요한 산자락을 따라 멀어져간다. 살랑살랑 속삭이는 숲을 맴돌고 현기증 나는 바윗길을 맴돌아 낭떠러지를 뚝 떨어져서 숲의 어두움 속에 사라지는 샘물을 맴돌고 간다. 그들은 대리석 조각에 대해 노래하고 있었다. 어두컴컴하게 우거진 갈퀴덩굴 속의 바위 있고 잔디밭 있는 정원과 달그림자에 떠오르는 궁전을 노래했다. 아름다운 여름밤 아가씨들이 그 창가에 기대어 아련한 샘물의 속삭임 소리에 귀 기울이며 칠현금 소리 울리기를 기다린다고.     화자는 한적한 시골마을에 산다. 어느 맑은 여름밤, 창가에 기대어 하늘 가득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멀리서 ‘역마차 피리소리’가 들려온다. 지금이라면 기차소리일 테다. 그렇잖아도 아름다운 여름밤, ‘어쩐지 가슴이 타오르듯 뜨거운’ 참인데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이 시간 저 역마차에는 여름여행을 떠난 사람들이 즐겁게 웅성거리겠지. 아, 나도 저 역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구나. 혼자서는 말고, 누군가 사랑하는 이와 함께.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친구와 함께 도보여행을 하던 젊은 날이 그립게 떠오른다. 산비탈도 바윗길도 숲길도 발이 부르트도록 걸었지. 날이 저물도록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 노래 가사는 대리석 조각에 대해서였지. 또 잔디밭이 있는 정원의 궁전, 달 밝은 여름밤이면 궁전에 사는 아가씨들이 창가에 기대어 아련한 샘물의 속삭임에 귀 기울인다고도 노래했지. 아, 아가씨들이여, 알지 못할 먼 곳들이여, 내 젊은 날이여! 독일 낭만파 시인 아이헨도르프는 만년을 전원에서 살며 시를 썼단다. 이 시는 그 시절에 쓴 듯한데 대체 몇 살부터 ‘만년’이라는 걸까. 아직 그리움이 펄펄 작동하누나. 시골생활은 때로 외로울 테지만, 그래서도 마음에 그리움이 들어찰 여유가 생길 테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그리움에 가슴 조인 지 오래다. 그리움이 그립다!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청춘남녀를 들썽거리게 하는 여름밤이다. 아름다운 여름 보내시라!
420    [쉼터] - "연변말"이 "마지막 수업"으로만 되지 말기만을... 댓글:  조회:2379  추천:0  2017-04-19
연변말이 창피한가?! /허연화 2017년 03월 28일 작성자: 정음문화칼럼 연변에서 태여나고 자란 필자는 연변말이 참으로 정겹고 좋다. 일본에서 산지 오래되기에 연변말을 할수 있는 지인을 만나서 연변말로 대화하는 시간이 너무나 즐겁고 소중하다.    하지만 중국의 다른 지역 조선족이거나 한국 지인, 자이니찌분(재일동포)들과 대화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연변말의 특유한 억양을 감추려 하고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연변말의 특유한 억양과 특수한 중국식 우리말 단어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우리 민족들과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에 영향을 줄수 있다는 배려에서 나온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연변사투리를 혼자 한다는것이 왠지 낯뜨겁다는 의식이 조금은 있었던것 같다.   연변말이 정겹고 좋은데 무의식적으로 “표준우리말”과 갈라서 사용하려 하였던것이다. 아마 독자들중에도 나와 같은 경험이 있거나 현재 이런 상황인 사람들이 있을수 있다. 왜 이렇게 연변말을 “표준우리말”과 갈라서 사용하려는 상황이 발생할가? 그것은 단지 편의를 고려해서일뿐일가?   본래 언어자체는 서렬을 매길수 없다. 하지만 현실생활에서 의식조사를 해보면 어느 나라에든 낮게 평가되는 방언이 존재한다. 례를 들면 일본에서 동북지역의 방언은 촌스럽고 렬등하게 평가되며 이 지역 출신의 사람들은 일본 다른 지역에 갔을 때 방언을 억제하는 경우가 많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또한 한국 국내에서도 서울 및 서울말의 패권주의가 사회적문제로 론의되기도 한다.   허나 같은 방언이라도 표준말보다 호의적이고 자랑스러워하는 경우도 있다. 례를 들면 일본의 교토, 오사카 지역에서 많이 사용하는 간사이벤(関西弁)이라는 방언은 현재 일본에서 널리 알려져있으며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특히 교토지역은 교토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며 다른 지역으로부터 온화하고 아름답고 정중하다는 좋은 평가를 받고있다.   그럼 왜 어떤 방언은 렬등감을 조성하고 어떤 방언은 자랑스럽다고 느끼는것일가?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있는 편견에서 온다. 편견이라는 단어는 종종 나쁜 결과와 련계할때가 많지만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편견이란 어떤 집단의 성원이 다른 집단에 대해 가지고있는 의견이나 태도를 말한다. 편견을 가지고있는 사람들의 선입견은, 많은 경우 직접적인 증거라기보다 얻어들은 소문에 의한 경우가 많으며 새로운 정보를 눈앞에 직면해도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같은 편 의식”을 느끼는 집단에는 호의적인 편견을 갖고있고 그렇지 않은 집단에는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특정된 집단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갖고있는 사람은 그 집단에 대해 공평하게 대하기를 거부한다.   그럼 이런 편견은 어떻게 형성된것일가? 우선 매체의 영향으로부터 분석할수 있다. 연변사람, 연변말의 경우 한국TV의 뉴스와 드라마, 연예프로에서 부각된 모습이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 사실 한국에서의 “조선족”은 연변출신뿐만은 아니라 흑룡강성, 료녕성출신도 많다. 연변 이외의 출신의 말투는 연변말투와 다르며 경상도쪽의 말투와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조선족”하면 연변사투리를 구사하는 사람이 부각된다.    문제는 메체에서 보도되는 “조선족”의 표상이 특히 한국진출초기에는 사회밑층에서 사는 폭력적이고 거칠며 도시화되지 않은 모습이 위주였다는것이다. 그것은 한국진출초기 조선족이 종사한 일이 같은 한국사람일지라도 천대받고 기피하는 원향어선이나 3D(Dirty, Difficult, Dangerous)업종이였기때문이다. 게다가 말이 통하는것 같은데 아닌것 같은, 서로 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도 다르다는것을 느끼던 적응단계였기에 크고작은 많은 트러블이 생길수 밖에 없었다. 한국에서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매체에서 비춰지는 조선족의 이미지도 변화되고있지만 아직도 초기단계의 이미지가 뿌리깊게 작용하고있다. 하여 아직도 조선족이 쓰는 연변말은 흔히 조롱의 대상이 되군 하는게 사실이다.    연변말의 한국에서의 마이나스적 이미지의 영향은 한국사회뿐만아니라 중국사회 및 중국의 조선족사회에도 파급된다. 한국과 만나기전의 연변말은 중국의 조선족들이 쓰는 여러 억양중의 하나에 불과했고 연변조선족자치주라는 이름이 보여주듯이 중국의 조선족사회에서는 중심이였고 연변말은 주류어였으며 연변에서는 “표준어”로 통했다. 같은 연변에서 사는 한족들도 연변말을 따라하거나 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쇼핑중심이였던 서시장일대를 가면 조선족이든 한족이든 “아재, 아재”하고 말을 걸어오군 한다. “아재”란 연변에서 젊은 녀성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또한 연변은, 중국의 다른 민족으로부터 자기 민족의 특유한 문화를 유지하고있고 춤 잘추고 노래 잘하며 깨끗하고 부지런한 민족으로 알려져있다. 중국의 55여개 소수민족중에는 천만을 넘거나 가까운 소수민족도 많다. 200만명(2010년 인구조사에서는 183만명)도 안되는 조선족이지만 예술에 능하고 교육률이 높다는 평가를 받게 되기까지 중국인민해방군국가를 만든 정률성으로부터 시작하여 현재의 강경산원사(중국에서 과학기술방면의 최고학술칭호), 중국대지의 각 대학의 조선족교수들, 우리말/우리문화를 유지하려는 모든 조선족들의 노력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한국붐이 중국대지에 퍼지면서 한국매체에 비춰지는 조선족의 이미지는 중국에서 알려진 이미지와 너무 다르다. 게다가 중국처럼 큰 땅떵어리에서 소수민족이라는 개념조차 없고 조선족이라는 이미지 자체가 없는 지방에서는 되려 한국매체에서의 “조선족”의 이미지가 실제 이미지로 자리잡을 때가 많다.    매체의 마이나스적 효과는 연변이미지에만 국한된것이 아니다. 매체는 소외, 모방살인, 사람들사이의 무관심의 생성, 편견의 강화, 중대하고 복잡한 문제의 왜소화와 간단화를 조성할수 있다는 지적을 많이 받아왔다.   물론 시청취자들은 그냥 피동적으로 매체가 보여주는것을 곧이곧대로 믿는것은 아니다. 시청취자들은 몰입만 하는것이 아니라 자기절로 해석하고 분석하는 능동성을 가지고있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력은 별개다. 영국의 어떤 대학의 연구팀에서는 과거 TV뉴스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력을 체크하는 과정에서 뉴스의 객관성보다 화면에 비춰진 폭력적인 기억이 고대로 사람들의 기억으로 자리매김하고있었다는것을 발견했다. 주류매체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연구결과이다.   매체가 만드는것은 부정적인 편견뿐만이 아니다. 우에서 말한 일본의 간사이지역 방언의 경우가 매체에 의해 전파된 긍정적인 편견에서 온것이라고 볼수 있다. 일본의 강호동, 류재석으로 통하는 산마, 신스께 등 개그맨거장들이 간사이지역출신이고 또한 연예프로그람에서 간사이출신의 사람들이 자주 등장함으로써 간사이벤이라는 방언을 전 일본에 침투시켰다.    상업화된 매체가 주류인 현대사회에서 객관성을 가지기란 어려운 작업일것이다. 하지만 매체를 비판적 눈으로 관찰해야 할 중요성은 계속 강조되여야 한다.   편견은 또한 한 집단이 처한 경제적위치와도 관련된다. 한국의 여러 동포들중에서도 연변말투가 유독 촌스럽다고 부각되는것은 왜일가? 그것은 한국과 중국이 만난20세기 90년대의 중국의 경제적상황에 의한것이 많다. 즉 같은 동포라 할지라도 재일, 재미 동포는 한국보다 발전한 나라에서 온 동경의 대상이고 중국, 구쏘련 동포들은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기때문이다. 사실 구쏘련지역출신의 동포, 재미, 재일 동포들은 우리말자체의 보유가 매우 어려운 력사적, 사회적 환경에 의하여 우리말자체의 유지가 되여있지 못하고 사투리로라도 우리말을 구사할수 없는 사람이 오히려 더 많다. 하지만 중국에 이주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력과 중국소수민족정책이 유효하게 결합됨으로써 소수민족집중거주지에서 민족학교를 꾸리고 조선말로 공부를 할수 있고 심지어 대학입시시험도 조선어로 시험을 볼수 있다. 타향에 이주해서도 우리말로 말하고 글을 쓰는 매우 행운스러운 집단이 조선족인것이다. 물론 연변말은 다른 모든 방언들과 마찬가지로 조선말에서 나왔지만 또 자기 지역의 특정에 따라 변이를 거친것은 사실이다. 다른 민족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자신의 언어를 잃지 않은것에 대한 자부감을 갖고있었는데 되려 “고국”에서 그렇게 소중하게 유지해온 우리말이 우리말이 아니라고 비웃음을 당한격이다. 못사는 나라에서 온 가난한 동포, “가난하다는건 게으른것이고 못배워서이다”는 한국사회의 가치관이 바탕이 되여 조선족이 쓰는 언어마저 가난해지고 천대받게 된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조선반도외에서 유지된 소중한 우리말의 변이인데도 말이다.   편견은 또한 력사적, 정치적 요인과도 관계된다. 례를 들면 일본의 동북지역방언이 자타평가에서 렬등적으로 평가받는데는 이 지역이 력사상 분단되고 정치적세력이 약화됨으로써 이 지역의 문화자체도 부당한 평가를 받은 력사가 현재까지 내려온것이 리유가 아닌가고 분석하기도 한다. 반면 교토는 오랜 세월 일본의 중심이였고 일본스러움의 모든 상징으로서 일본인의 귀속의식이 교토에 있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언어의 이미지는 그 지역의 력사적인 평가와 밀접히 련관되여있다는것이다.   일본에서 살면서 여러 지역의 우리민족과 접촉해보면 우리말의 다양성과 변이를 느낄수있다. 각 지역의 우리말들이 억양이 다르고 쓰는 단어도 다를 때가 있지만 서로 느끼는 우리말의 기본적인 정서는 공통한것이 너무 많고 정겹다. 작년 3월, 일본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学)에서 윤동주시인을 기리는 모임이 있었다. 시인이 남겨놓은 시를 읊는 부분에서 필자는 너무 감동을 먹었다. 우리가 다 아는 윤동주의 시들이 서울억양, 재일동포억양, 조선족억양, 일본인의 우리말발음억양으로 각각 읊어 귀에 들려오는것이 그렇게 아름다울수가 없었다. 감동에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연변말이 낯뜨거웠던 그 시절이 낯뜨겁던 순간이였다.    “우리말”이라는것이 “표준어”만 가리키는것이 아니라 더 넓은 범주로 의식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민넷 
419    아리랑은 영원한 아리랑이다... 댓글:  조회:2203  추천:0  2017-04-19
디아스포라 조선족아리랑의 서사와 담론 /정월매 2017년 04월 19일 작성자: 정음문화칼럼 아리랑은 조선민족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민족의 노래이다. 아리랑은 조선반도의 적대적 남북관계에도 동질성의 끈이 되여 “국가”의 경계를 넘어 “민족”이란 호명으로 하나로 묶어주고 해외에 거주하는 조선민족에게 민족적정체성을 확인시켜준다.   아리랑이 널리 확산되고 조선민족의 아이콘이 된것은 1926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서 비롯되었다. 영화 예술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나운규감독은 나라 잃은 설음을 영화에 간접적으로 표현하였다.   영화스토리는 간단하다. 대학을 다니다 3.1운동의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된 주인공 영진에게 아끼는 녀동생이 있었다. 일본경찰의 앞잡이노릇을 하는 기호가 어느날 녀동생을 겁탈하려고 하자 영진은 기호에게 낫을 휘두른다. 영진은 일본순경에게 붙잡혀 수갑을 찬채 끌려간다. 이때 주제가 “아리랑”이 흐르며 영화는 끝난다.   주인공 영진의 모습이 마치 나라를 잃고 정처 없이 헤매여 조선반도를 떠나 만주로, 연해주로 이주하는 수난당한 한민족과 같다고 생각한 관객들은 영화의 주제가인 “아리랑”의 흐름과 함께 영화관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영화의 주제가는 우리들이 익숙히 알고있는 가사이다.     1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나네     2 청천 하늘엔 별도 많고 /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     3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온다네 / 이 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네     4 산천초목은 젊어만 가고 / 인간에 청춘은 늙어가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예전의 지역적인 민요아리랑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불러졌고 공동체적 집단의식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가사에서는 “우리네 살림살이” “이 강산 삼천리”라는 국토관념, 민족이라는 더 큰 대자아로 비약하게 된다. 이는 영화안팎의 사람들을 이 강산의 일원으로 동참시켜 노래의 민족정서적공감속에서 집단적눈물을 자아내게 하고 상상의 공동체로 메아리치게 하였다.   일제는 “아리랑”이 민족의 얼이 깃들어있다고 하여 상연금지령을 내렸고 아리랑노래를 부르는것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조선인작가들을 동원하여 대동아공영을 위한 황국신민의 친일아리랑을 만들게 하였다. 대표적인것이 윤해영의 “만주아리랑”이다.   그러나 조국독립을 위해 항일투사들이 건너온 중국지역은 항일독립운동근거지가 되면서 독립운동을 고취하는 아리랑이 탄생하였다. 여기에는 “광복군아리랑”, “독립군아리랑”, “혁명아리랑” 등이 있다. “독립군아리랑”의 "일어나 싸우자 총칼을 메고 일제놈 쳐부셔 조국을 찾자/.../부모님 처자들 리별을 하고서 왜놈들 짓부숴 승리를 하자//(후렴)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 났네 독립군 아리랑 불러를 보세" 가사에는 총칼 들고 일제놈 싸워 이겨 조국을 되찾자는 항일의 의지, 저항의 의지가 굳게 표현되여있다.   민요뿐만아니라 중국지역에는 항일의식과 항전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아리랑”무대가 열렸다. 그 일례로 1938년 조선의용대가 계림에서 공연한 연극 “아리랑”, 1940년 서안을 비롯한 전선지역이 가까운 서북지역에서 순회공연한 한유한의 가극 “아리랑” 등을 들수 있다.   조선의용대의 “아리랑”은 아리랑고개를 넘어 고향을 떠나 이역을 류랑하는 조선민족의 고통스러운 삶을 표현하였다. 일제강점기 늙은 농부와 소녀가 침통한 표정으로 한번 떠나면 영원히 조국으로 돌아올수 없는 아리랑고개를 넘는 장면들이 나오고 극의 결말은 죽더라도 조국의 품안에서 죽겠다고 절규하는 청년들의 굳은 의지로 끝난다.   예술가이자 독립운동가인 한유한이 창작한 가극 “아리랑”은 극정이 조선의용대의 “아리랑”에 비해 심오하다. 평화로운 조국의 품에서 살던 목동과 촌녀는 련인관계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러나 아리랑산 정상에 일본국기가 걸리고 강산은 혈흔으로 물들었다. 그들은 늙은 부모와 리별하고 산아래서 보국을 맹세한 뒤 한국혁명군에 가담한다. 그뒤로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 수십년전 떠나온 고향에 돌아와 전투에 림한다. 그러나 적의 포화속에서 장렬히 희생되고 한국 국기는 다시 아리랑산우에서 나붓긴다.   이국에서 망국노로 살아가면서 독립 위해 고군분투하는 조선인에게 아리랑은 저항의 상징이였다. 공연이후 공연대가 지나간 서안외곽 전쟁구역에는 아리랑노래가 류행할 정도로 중국인들의 호응이 대단하였다 한다. 이 공연은 항전에 참전하고있는 독립군을 독려하였고 중국인들에게 조선인은 함께 일본을 상대로 싸울수 있는 항일력량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으며 그들을 항일투쟁으로 끌어들이는 구국투쟁운동의 대외선전역할을 하였다.   해방전 동북을 비롯한 중국지역에는 항일아리랑이 있었는가 하면 일제의 수탈을 피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살길 찾아 북간도로 이주하는 이주아리랑이 있었다. 여기에는 민요 “신아리랑”, “북간도” 등을 들수 있다. “신아리랑”의 "밭 잃고 집 잃은 동포들아 어디로 가야만 좋을가보냐 /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 백두산 고개를 넘어간다 /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북간도”의 "문전옥답 다 빼앗기고 거지생활 웬 말이냐" 등 가사들은 이주시기의 어려움을 잘 반영하고있다.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는것은 일제에 삶의 뿌리가 뽑혀 고향을 떠나는것을 의미한다. 아리랑고개는 리별고개이고 원한고개이며 설음고개이다. 이주아리랑은 이산의 상징이고 민족수난의 상징이다.   그 외에도 이주력사에 관한 아리랑으로 실제사건에 의거한 리혜선의 논픽션 “두만강 충청도 아리랑”(2001)을 들수 있다. 이 저서는 1938년에 충북지역에서 180여호가 집단적으로 이주하여 정착함으로서 생겨난 마을 도문시 량수진 정암촌 사람들의 이주 이야기를 담고있다. 그들의 집단이주, 광복, 한국전쟁, 집체화와 문화대혁명 등의 시대적상황에 따른 이주민의 삶을 객관적으로 조명하였다. 특히 일제의 강제이주정책으로 기인된 뜻하지 않은 고향과의 리별, 그 리별의 아픔을 삭이며 살아야 했던 애절한 삶을 그려냈다. 이는 조선족이주사의 축도로서 디아스포라 “아리랑”의 또 다른 얼굴이다.   랩소드 오프 C 아리랑”(일명 청주아리랑) 제작진은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현장조사를 통해 살아 숨 쉬는 소설속 인물들과 일일이 접촉하면서 세세한 감정까지 포착하여 다양한 예술장르를 접목한 스팩타클한 공연을 2014년 서울 구로에서 선보였다.   1945년 조선반도의 광복과 1949년 중국의 해방이후 동북지역에 100만명 정도 남은 조선인들은 중국의 소수민족 일원인 중국조선족으로 살아갔다. 해방초기 조선족의 아리랑은 조선의 영향을 많이 받아오다가 중국현지에 맞는 가사와 한국의 아리랑과 중국의 아리랑선률을 혼합한 조선족특색의 아리랑을 창출하였다. 여기에는 “새아리랑2”, “장백아리랑”, “연변아리랑”, “장백송”, “장백가요” 등을 들수 있다.   “새아리랑2”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새로운 이 마을에 봄이 왔네/보슬비 내리여 땅이 녹고 흙냄새 구수하다/..../ 뻐꾹새 밭갈이 재촉한다" 가사는 중국의 건국토지개혁정책아래 분배받은 땅에 씨앗을 뿌려가는 농민의 기쁜 심정과 삶의 활력을 표현하였다. “장백의 새 아리랑”의 "장백산마루에 둥실 해 뜨니 푸르른 림해는 / 록파만경 자랑하며 설레이누나/ 칠색단을 곱게 펼친 천지의 폭포수는/ 이 나라 강산을 아름답게 치장하네 /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리아리스리스리 아라리가 났네/..../ 아리아리아리스리스리 아라리가 났네 장백산은 우리의 자랑일세" 가사는 백두산과 장백폭포를 통해 조국 산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였다. 여기에서 아리랑은 기쁨의 아리랑이고 행복의 아리랑이다.   연변가무단은 아리랑을 주제로 가극, 무극을 창작하였다. 1989년에 창작된 대형가극 “아리랑”은 민간에 류전되고있는 “아리랑설”을 기초로 하여 발전시킨것이다. 2016년의 대형무극 “아리랑꽃”은 근 3년간의 시간을 들여 창작하였는데 중국조선족무용가를 창작원형으로 하였다. 꽃의 고유한 속성인 향기에 립각하여 서막 “향기속으로”, 1막 “파란 향기”, 2막 “빨간 향기”, 3막 “하얀 향기”, 4막 “노란 향기”, 종막 “천년 향기” 등 6개 부분으로 나뉘여 립체감을 살리는 현대적이고 몽환적인 조명, 전통악기와 관현악을 결부한 음악과 판소리, 다채로운 무용형식을 아울러 화려한 그림으로 펼쳤다. 플래시백(倒叙)형식으로 예술을 추구하는 한 중국조선족무용가의 인생을 다루었다. 극은 무용가 순희의 해방전부터 지금까지의 파란만장한 예술인생과 피타는 노력으로 우수한 예술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중화대가정속에서 중국조선족의 불요불굴의 정신과 민족의 전통문화를 집중적으로 나타냈고 이를 통해 열정적이고 진취적인 길림성 여러 민족 군중들의 정신면모와 번영발전하고 조화롭게 진보하는 변강의 국면을 표현했다. 제5회 전국소수민족문예공연에서 출중한 표현으로 폭발적인기를 누렸으며 조선족의 열의 높은 매일투표와 함께 고득점으로 금상을 수상하였다.   이상 디아스포라로서의 조선족아리랑은 이주력사를 반영하는 아리랑, 독립운동을 고취하는 아리랑, 내 고향과 내 조국을 찬양하는 아리랑으로 나눠보았다. 이는 조선민족의 근현대력사와 함께 중국 지역의 현실성이 결부된 조선족 특유의 아리랑이다. 조선족아리랑은 조선족의 운명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온 노래이다. 거기에는 이주할수 밖에 없는 한이 서려있고 침략자에 대한 저항이 표현되여있으며 새로운 삶에 대한 신명이 체현되여있다.   조선반도 남북의 삼각점에 있는 중국조선족은 어제도 아리랑을 불렀고 오늘도 부르고있으며 내일도 부를것이다. 그리고 계속하여 아리랑고개를 넘을것이다. 현재 조선반도의 정세에 긴장이 감도는 갈등의 현대판 아리랑고개, 그 해법을 아리랑으로 풀었으면 한다.   아리랑은 조선민족의 유전자 압축파일 같은 존재이다. 현재 50여종의 갈래에 8천여수로 세계로 널리 퍼져있는 아리랑에는 민족정서인 한과 대동정신의 신명과 같은 감성, 하나가 되는 어울림정신이 있다. 민족모순, 국가모순 등을 녹일수 있는 창조적힘과 가치가 내재되여있다. 한국 아리랑을 대표하는 한류의 세계적열풍,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조선의 아리랑대집단체조, 그리고 세계스포츠대회에서 여러차례 남북의 스포츠단일팀의 국가나 응원가로 된 아리랑은 민족과 세계 통합적 이데올로기로서 남북의 화합과 세계 화합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있다.   예술을 넘어서서 아리랑을 부르며 손에 손잡고 마음을 터놓을수 있는 대동과 상생의 한마당, 조선반도 남북이 그리고 세계가 아리랑정신으로 통섭의 장, 세계평화의 장을 열어가는 그날을 바란다.     /// 전월매 략력     소속: 천진사범대학교 한국어학과 부교수     학력: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학박사     저서 《재중조선인 시에 나타난 만주 인식》(역락, 2014), 《한국문학 연구와 교육의 현장》(학술정보, 2016)를 비롯하여 "윤동주와 심연수의 시에 나타난 만주 인식 고찰", "'민족협화'의 허상과 백석의 만주행", "타자와 경계: 한국영화에 재현된 조선족 담론", "중국부상에 따른 세계경제국제질서 재편론 담론-조정래의 장편소설 를 중심으로" 등 국내외 학술지 30여편의 발표론문이 있음.   /인민넷
418    시속에 무르녹아 있는 시어와의 만남을 류의하라... 댓글:  조회:2531  추천:0  2017-04-19
시창작 강의- 많이 읽기와 모든 것들에 대한 사유 / 김송배 1-2. 詩를 많이 읽어 보자 시를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독자로서의 시읽기가 아니라 시에의 올바른 접근을 위한 정독(精讀)을 말합니다. 하루에 몇 권의 시집을 독파하는 것이 아니라, 시 속에 무르녹은 의미와 시어에 유의하면서 음미해보는 것이 시와의 만남을 더욱 가깝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 읽기에서 다음 몇 가지 사항을 유의하면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까요.           ① 시를 정독하라 시는 의미의 전달이 아니라, 시 속에 함축된 의미의 암시나 상징. 그리고 의미의 변용을 통해서 정서적, 감각적인 미적 감동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 시인의 시를 통해서 시인의 미적 감동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어떤 독서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책을 읽고 간접적인 체험으로 지식과 인격을 느끼면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의식으로 지식을 넓혀나가는데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정독은 시를 이해하는데는 가장 효과적이며 적절한 방법입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의미 속에 감춰진 함축적 의미의 발견이나,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는 무엇인가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감명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② 감명을 받았거나 감동을 준 부분은 다시 읽고 재해석을 해보라   시집 한 권을 읽다보면(시집 한 권에는 60~70편의 시가 수록됨) 그 중에 유독 몇 편은 친근감이 가고 감동을 받는 시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일은 내가 직접 쓴 것 같은 것이거나 내가 간직한 시적 상상력, 또는 체험 속에 곰삭은 어떤 의지가 유사하게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이 유사성은 시와의 친숙한 정감을 불러 일으켜서 시인이 그런 체험을 어떤 방법으로 해서 시창작을 성공시키고 있느냐하는 관심입니다. 이러한 관심은 시가 마치 스스로 쓴 듯이 뜯어보고 분석해보며 음미하는 일이 계속되면 스스로 자신이 시작과정을 재구성해 본 것과 같이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이때 자신의 상상력이나 사물을 보는 시각, 그리고 표현하는 방법 등이 부족함을 절감하면서도 이렇게 쓰는 것이 감동을 주는 시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바로 나도 시를 쓸 수 있겠구나하는 잠재력이 이미 발산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입니다. ③ 마음에 새겨지는 시의 행(行)이나 연(聯)은 그냥 음미로 그칠 것이 아니라, 노트에 옮겨 써보는 일도 중요하다.   물론 외워버리면 더욱 좋겠지만 이때 옮겨 적는 과정에서 문득 새로운 무엇을 발견할 수도 있게 됩니다. 이렇게 옮겨 적는 일이 많아지면 자신이 생각했던 시어(詩語)들을 동원하여 바꾸어 본다든지, 몇 마디를 생략해 본다든지, 또는 새로운 이미지(image)를 첨가해주는 일 등은 시창작 연습의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한편 이런 것들이 모작(模作)이건, 창작(創作)이건 간에 시 쓰는 행위가 될 것이며 이 행위야말로 바로 시 쓰기의 경험으로 연결되는 시적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시편들도 그냥 던져버릴 것이 아니라, 이해를 위한 꾸준한 노력이 항상 필요합니다. 어떤 형태의 해석이든 자신의 의식으로 접근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인내가 따라야 합니다. 1-3. 모든 것들에 대한 많은 사유(思惟)가 필요하다. 시는 어쩌면 많은 사유에서 탄생되는지도 모릅니다. 많이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곧 사유하고 사색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다양한 상상력이 동반하게 됩니다. 조그마한 일상생활에서부터 차원 높은 우주관에 이르기까지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사람은 사유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유 속에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하는 인생관이 있으며 일생동안 기필코 성취되어야 할 목표인 꿈과 희망도 있습니다. 시 쓰기에서 많은 사유가 필요한 점도 시인의 정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많이 사유한다는 것은 많은 상상력을 빚어낸다는 뜻입니다. 이 상상력도 진실된 인생의 고민이 담겨져야 합니다. 상상은 결국 나 자신의 정서와 밀접한 관계에 놓입니다. 정서는 모든 사상(事象)에 부딪혀을 때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을 말합니다.   심리적으로는 자극이 되는 대상에서 강하게 일어나는 감정으로서 또는 신체적인 변화가 뚜렸한 것으로서 일정한 상태로 지속되다가 끝나거나 다른 정신상태로 옮겨가는 의식의 과정을 말합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희노애락(喜怒哀樂)과 애오욕(愛惡慾)의 칠정(七情)이 우리의 오관(五官-눈, 귀, 코, 혀, 피부. 우리 몸에서 감각을 일으키는 다섯 개의 기관)을 통하여 경험하는 정신적인 산물이 됩니다. 이러한 정서의 올바른 비축을 위한 사유는 창조적인 상상력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르테면 '겨울나무'를 응시하면서 시적인 사유로 발전하려면 그 추운 겨울을 인내하면서 새봄의 루르름을 꿈꾸는 희망으로 바꾸어보는 사유, 즉 인간이 처해 있는 현실과 미래의 유추로 연관짓는 사유가 필요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잠시 조병화 시인의 말을 들어 봅시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내면의 고독과 싸워 왔다. 그 생(生), 애(愛), 사(死) 그 존재와 생존, 그 순수허무와 그 순수고독과 싸워 왔다. 항거와 순응, 그걸 살아오고 있는거다. 그게 나의 시이며 시론이며 존재 양상인 거다. 인간은 누구나 한정된 자기 수명을 살다 가는 거다. 그 한정된 시간을 견디고 살다간, 또 다른 세계로 이사를 가야하는 거다.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 죽음이 어떻게 사느냐하는 것이 나의 테마이며 나의 작업인 거다 때문에 나는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나를 철학하기 위해서 오로지 사색해 왔을 뿐이다. 나를 세우기 위한 철학, 그 발견과 창작의 철학 속에서 시를 배회했고 시의 이치를 찾았고 그것으로써 시를 써 왔다. 이와같이 어떤 사물이건 관념이건 간에 모든 것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하고 의미를 찾아보는 사유, 이러한 사유야말로 시를 쓰기 위한 사유가 아닐까 싶다 ======================================================================       애가(哀歌) 제14  ―프랑시스 잠(1868∼1938) “나의 사랑하는 이” 너는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이” 나는 말했다. “눈이 오네.” 너는 말했다. “눈이 오네.” 나는 말했다. “좀더, 좀더” 너는 말했다. “좀더, 좀더” 나는 말했다. “이렇게, 이렇게” 너는 말했다. “이렇게, 이렇게” 나는 말했다.     그런 뒤, 너는 말했다. “난 네가 정말 좋아.” 그리고 나는 말했다. “난 네가 더 정말 좋아.” “여름은 갔어.” 너는 말했다. “가을이 왔어.” 나는 답했다. 그 뒤 우리의 말은 처음처럼 비슷하지는 않았다. 마침내 너는 말했다. “내 사랑아, 네가 참 좋아.” 매맑고 숭고한 가을날의 노을 눈부신 저녁빛을 받으며. 나는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해주렴.”     조흔파 선생의 한 명랑소설에 이 시의 첫 연이 실려 있었다. ‘이게 다야? 별 싱거운 시도 다 있네’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내 감상이었다. 그런데 그 시구가 오래도록 머리에 남았다. ‘나의 사랑하는 이, 너는 말했다./나의 사랑하는 이, 나는 말했다.’ 짧고 쉽기도 했지만 뭔가 새콤달콤한 맛이 감돌았기 때문이리라. 제목도 지은이도 몰랐던, 내 어린 날의 사랑의 시여라.  사랑에 빠진 두 사람에게 ‘너를 사랑해’ ‘내가 더 사랑해’ 이런 말 외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좀더, 좀더” “이렇게, 이렇게” 연인 둘이 동시에 같은 말을 웅얼거린다. 보는 이가 수줍어지도록 숨 가쁘게 펼쳐지는 사랑의 정경을 시인은 간결하게, 그러나 선명하게 처리한다. 그런데 제목이 왜 애가일까? 그러고 보니 둘째 연에서는 눈이 온단다. 시의 배경은 이제 막 여름이 지난 가을인데 눈이 오다니…. 베개라도 터진 걸까? 아니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횡설수설일까? 어떤 말도 맞장구치던 연인들이 제가끔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하는 건 사랑이 기우뚱거리는 조짐일지도. 그러다 할 말이 뚝 끊기겠지. 사랑의 조락(凋落)을 암시하듯 때는 가을날 저녁, 창밖 하늘에 진홍빛 노을이 가슴을 죄며 퍼져 나가네. 내 사랑아, 다시 한 번 사랑한다고 말해주렴!   시창작 강의-1 (나도 시를 쓸 수 있을까...)   ㅁ 강의를 시작하면서   안녕하십니까? 김송배 시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삶에 있어서 가장 값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이러한 의문은 한번쯤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21세기 과학과 물질문명 그리고 황금만능의 참 살기좋은 세상에서도 우리는 무엇인가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저 답답하다고 한탄만 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마음 한쪽에 응어리진 그 무엇을 풀어봅시다. 여기 문학이라는 약발 좋은 처방이 있으니 이리로 오십시오. 우리는 그토록 쓸모 없을 것이라고만 여겼던 시 한편이 우리의 쳇증을 맑끔히 씻어내리는 비방이 숨어 있었음을 미처 몰랐습니다.   오늘부터 cyan,co.kr에서 새롭게 기획하는 '시창작 강의'에 동참하여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고 향유할 수 있는 시창작의 세계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지 않으시렵니까? 시창작에 대한 의문점을 하나씩 풀어서 나도 시를 쓸 수 있게 되고 나아가서는 시인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방향제시와 그 비법을 공개하리다.   이제부터 차근차근하게 그리고 열과 성으로 강의를 경청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맞게될 것을 확신하면서 도와드리겠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같이 본인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을 수료하고 박목월 선생님이 주관하신 월간 에 신인상으로 등단하여 등의 시집과 시선집과 등 시론집, 등 산문집 그리고 는 시창작법을 간행하고 제6회 윤동주문학상과 제1회 탐미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현재는 한국예총에서 발간하는 월간 주간직을 맡고 있으면서 KBS방송문화센터 시창작반에서 강의를 6년째 계속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함께 시창작에 대한 문제들을 풀어봅시다.   1. 나도 시를 쓸 수 있을까   나도 과연 시를 쓸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은 시를 처음 배우고자하는 시람이나 시를 처음 쓰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공통된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한 마디로 이것이다하고 명쾌한 해답을 제시할 사람을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시 쓰는 일이 수학문제를 풀 듯이 어떤 공식이 있거나 어떤 일정한 틀에 맞추어 넣는 그런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선 다음과 같은 말에 귀를 기울여 유심히 새겨들을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시인이었다.(C.D 루이스)   젊어서 시인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R.M 릴케)   인간은 사랑을 할 때 누구나 시인이 된다(플라톤)   이렇게 본다면 누구나 시적인 자질을 천부적으로 가지고 태어났다는 말이 됩니다. 사실 젊을 때에는 시적인 감성이나 정서 또는 시적인 상상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넘쳐나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이라고 해서 특이한 감정을 가지고 태어났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보다 좀 다른 정서의 반응은 있을지 몰라도 시적인 관심으로 정서를 쌓아서 집중시키면서 성숙되기까지는 많은 수련과 노력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면 나도 시를 쓸 수 있다는 강한 의지와 집념으로 몇 가지 단계를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1-1. 詩 쓰기에 앞서서   시를 배우고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다음 유형에 심리적인 취향이 발동해야 할 것입니다.   ① 시를 우선 좋아해야 한다.   ② 시를 써 보고 싶은 충동이 있어야 한다.   ③ 어떻게 하면 시를 쓸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 꾸준한 학습이 필요하다.       ④ 모든 사물을 보는 것이나 느낌 등이 아름답고 인간적인 측면에서 올바르게 사유(思惟)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전제가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심성에 가득 차 있어야 할 것입니다.이런 것들은 막연한 동경 속의 낭만이나 취향, 그리고 멋이나 사치가 아니라 아주 절실한 표현의 욕구로 인생을 풍요롭게 충족시키는 일생의 각오로 출발되져야 합니다.   흔히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시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시에 흠뻑 빠져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시를 가까이 하다보면 시의 모습도 이해하게 되고 시의 내용이나 진실에 대하여 쉽게 친근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일종의 믿음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믿음은 진실에 대한 시적인 약속이며 시에 대한 약속의 이행으로써 상호 신뢰의 바탕에서 출발하는 시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시적인 관심이나 시적인 생활이 없이는 시에의 접근이 어려우며 또한 친숙해 질 수도 없다는 말이 됩니다.   또한 시를 쓰기 위해서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시를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에 대한 많은 사유(思惟)가 필요하며 그후에는 시 쓰는 연습을 많이 해 보는 것 뿐입니다. 글 쓰기에서 공통으로 제시하는 다독(多讀), 다사(多思), 다작(多作)이 시 쓰기에의 절대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얘기를 나누어 봅시다. 첫 시간이라 어리둥절할지도 모르겠는데 끝까지 인내하는 자에게만 그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안녕히.  =======================================================================     바람 ―신경림(1935년∼ ) 산기슭을 돌아서 언 강을 건너서 기름집을 들러 떡볶이집을 들러 처녀애들 맨살의 종아리에 감겼다가 만화방도 기웃대고 비디오방도 들여다보고 큰길을 지나서 장골목에 들어서서 봄나물 두어 무더기 좌판 차린 할머니 스웨터를 들추고 마른 젖가슴을 간질이고 흙먼지를 날리고 종잇조각을 날리고 가로수에 매달려 광고판에 달라붙어 쓸쓸한 소리로 축축한 소리로 울면서 얼어붙은 거리를 녹이고 팍팍하게 메마른 말들을 적시고 ‘시인 신경림’ 하면 시 ‘농무(農舞)’를 떠올리는 독자가 많을 테다. 특히 ‘민족문학권’ 후배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농무’를 비롯한, 기층 서민들의 한과 애환을 ‘우리끼리 퍼질러 앉으면 삶은 편하고/더러는 훈훈하기도 해서’(시 ‘진도 아리랑’에서)의 정조로 꽹꽹 울리는 농악 리듬이나 남도민요 가락에 담은 선생의 시편들은 ‘원한도 그리움이 되던가?’(시 ‘연어’에서), 그 삶을 지긋지긋하게 잘 아는 이들에게는 물론이고 모르는 이들에게도 가슴 시큰하거나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바람은 안 가는 데 없겠지만 시인의 바람은 나지막하고 허름하고 흔한 곳, 이름 없는 곳으로 간다. 시인의 마음 가는 곳 따라, 돌아서, 건너서, 들러, 감겼다가, 기웃대고, 들여다보고, 지나서, 들어서서, 들추고, 간질이고, 날리고…. 종결 어미 없는 동사(動詞)들로 이어지는 바람의 행로에 재개발이 되려다 만 우리 동네같이 친근한 풍경이 펼쳐진다. 오래도록 비어 있는 점포 유리문에는 지금도 ‘비디오’라는 글자가 적혀 있지. 윤기 없이 까칠한 거리를 ‘흙먼지를 날리고 종잇조각을 날리고’ 달리는 바람. 그러나 봄바람이다. ‘봄나물 두어 무더기 좌판 차린 할머니 스웨터 들추고 마른 젖가슴을 간질이는.’ 삶의 모든 습기 다 거둬가 먼지처럼 가벼이 말라가게 하는 바람, 언젠가부터 선생 시에서 종종 만나는 바람이다. 허무가, 따뜻한 허무가 깃든 바람…. 그러나 인생무상이거나 말거나 삶은 무상하지 않다고, 선생의 시는 그침 없이 거침없이 ‘쓸쓸한 소리로 축축한 소리로’ 우는 바람처럼 ‘팍팍하게 메마른’ 세상을 적신다.   시창작 강의-3(시 쓰는 연습을 많이 해 보자)  / 김송배    1-4. 시 쓰는 연습을 많이 해 보자 처음부터 시라는 틀에 얽매이지 말고 아주 자유스러운 마음으로, 그냥 메모하는 식으로 써야 합니다. 자신이 경험한 일에 대하여 감동했던 것이나 마음 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일들부터 자신의 생각으로만 하나씩 적어 봅니다. 어떤 형식에는 구애받지 말아야 합니다. 설령 문체나 형식이 일기문이 되거나 편지글이 되거나 상관 없이 글로 옮겨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전번 시간에도 말한 바와같이 다른 사람의 시를 읽고 난 후에 내 생각을 가미하여 모방해보려는 의지가 나타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때에 부딪치는 어려운 점은 언어의 부족입니다.(이 언어문제는 다음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물론 언어뿐만 아니라 표현반법이 여러모로 서툴지만 읽고 생각한 자신의 진실을 글로 적어봄으로써 자기 세계가 열리고 시 쓰기에 대한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옛날 선배 시인들은 시인이 되기 위하여 습작 원고지 3만장 정도를 휴지가 되도록 썼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의 쓰라린 습작기를 거쳤던 것입니다. 시 쓰기에는 유형(有形)적인 소재이거나 무형(無形)적인 소재이거나 간에 많이 느껴본 습성이 중요하지만 이 느낌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는 느낌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느낌이란 많은 형태의 감정으로 나타납니다. 이 느낌이 깊은 곳에서 받아들여 미적인 감정과 미적인 언어의 조화로 한 편의 시 작품이 창작되는 것입니다. 시는 그 시인의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 앞에서 하는 속임없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구약성서의 시편만이 아니라, 무릇 시는 시인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시에서 거짓말을 하야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것은 신을 기만하는 것이라는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의 말처럼 어떤 소재에서 느낀 솔직하고 진지한 나의 진실이 글로 표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는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시입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어떻습니까. 어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유유히 갈 길을 가는 나그네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밤 하늘에 뜬 구름 사이로 흘러가듯 떠 있는 달의 모습은 얼마나 고적하고 유유합니까. 이런 달의 형상이 작품 속에서 나그네와 연관됨으로써 다른 사람이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며 나그네의 구체적인 모습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옛말에 시이도지(詩爾志)란 말이 있습니다. 시를 쓰거나 읊조리는 것은 자기의 지닌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감정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종호 교수는 정규 문과 대학생 조차도 우리 근대시의 고전인 (박목월, 조지후, 박두진 3인 시집)을 읽어본 경우가 희소하다고 개탄하면서 우리 문학 교육의 현실을 말하고 있어서 위의 [나그네]같은 작품은 겨우 교과서에 수록된 것을 읽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옛날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시 쓰기에는 이런 일도 있구나하는 도움이 될까해서입니다. 고려 때 문신인 정지상과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과는 서로 시적(詩敵)이었습니다.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관군의 사령관이었던 김부식은 정지상이 이 난에 관련되었다하여, 평소에 시 쓰기에 있어서 숙적이었던 정지상을 처형해 버렸습니다.  그 뒤 어느 봄날 김부식은 시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지었습니다. 봄의 정경을 잘 표현한 아름다운 시입니다. 버들은 일천 가지로 푸르고(楊柳千絲綠-양류천사록) 복숭아는 일만 송이로 붉구나(桃花萬點紅-도화만점홍) 그런데 문득 공중에서 정지상의 귀신이 나타나서 김부식의 빰을 갈기며 호령했습니다.  "이놈아, 버드나무가 일천 가지인지, 복숭아가 일만 송이인지 네가 세어 보았느냐? 왜 버들은 실실이 푸르고 복숭아는 송이송이 붉다(楊柳絲絲綠-양류사사록, 桃花點點紅-도화점점홍)라고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나중에 김부식은 어느 절간 화장실에서 정지상의 귀신에게 불알을 잡아당겨 죽었다는 일화가 라는 책에 전해오고 있습니다. 참 절묘한 표현의 차이입니다. 다시 말하면 버드나무 가지의 표현이 일천 개보다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표현이 더욱 좋다는 것입니다. 복숭아꽃의 일만 송이보다는 점점이 그러니까 송이송이 이것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지요. 이와같이 시 쓰기의 연습에서는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정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언어를 매체로 해서 표현하는 일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결국 많이 읽어보고 많이 생각하며 많이 써보는 것만이 '나도 시를 쓸 수 있다'는 신념을 실천하는 길일 것입니다. 앞으로 강의하는 시의 모든 것과 시 쓰기의 모든 것은 나도 시를 쓸 수 있도록 안내하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며 기필코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역량을 길러 줄 것입니다. 지금부터 시의 형상과 그 길이 겨우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음 시간에...... ======================================================================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1960∼1989)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근 25년 만에 기형도 시집을 다시 읽는다. 푸른, 누추한, 구름, 희망, 고통, 불안, 사랑, 청춘, 머뭇거리다, 헤매다, 저녁, 탄식, 죽음…. 이런 시어들이 구름처럼 시인 기형도 형상을 이루며 흘러간다. 내 세대 시인들에게 ‘우리들 청춘은 끝났다’는 고지(告知)이기도 했던 기형도의 죽음.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기형도 시 ‘빈 집’) 그를 묻은 날, 간소한 추도식에서 시인 하재봉이 송별사로 이 시를 읽었다. 그렇게 그는 청춘으로 남고 우리는 나이를 먹었다. 어떤 소설엔가 이런 구절이 있다. ‘죽은 사람은 외롭다. 아무도 그와 사귀려들지 않아.’ 기형도가 살아 있으면 킬킬 웃으며 이런 대구를 지었을 테다. ‘늙은 사람은 외롭다. 아무도 그와 사귀려들지 않아.’ 수많은 독자와 후배 시인이 그의 시를 사랑하고 사귀기 원하니 지금 기형도는 그리 외롭지 않으리라.      화자는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머뭇거리고 헤맨다. 몸은 지상에서, 영혼은 공중에서. 왜? 기형도에게 청춘의 화두랄까 상투어는 ‘사랑’이었던 듯하다.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나’ 그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인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그런데 사실 자기조차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는 자조와 탄식이 자욱하다. 질투밖에 허락되지 않은 사랑에 대해, 어떤 인생에 대해 젊은 시인에게 늙은 내가 들려줄 말이 있을 듯하네….   2. 시는 무엇 때문에 쓰는가   이 바쁜 세상을 살아가면서 시는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쓰는가?  이런 우둔한 질문은 시인들 스스로가 품을 때도 있지만, 일반 사람들로부터 흔히 질문을 받게 됩니다. 분명히 시는 모든 예술의 중심되는 꽃입니다.  그러나 물질문명의 발달과 함께 때로는 무용지물로 낙인이 찍히기도 하는 서글픈 시대에 시인은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적정 시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이러한 염녀를 조금이라도 해소시키고 있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생에 대한 불타오르는 시인의 창조적 정신에서 결실되는 것이니, 대상하는 인생을 보다 아름답게 영위하려고 의욕하고 그것을 추구, 갈망하는데서 제작된다면 그 시인의 한 분신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되었거나 이땅에는 시인이 시를 쓰고 시를 읽는 독자가 있습니다. 이런 말이 시를 쓰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마는 그림은 무엇 때문에 그리느냐, 노래는 왜 부르느냐라는 질문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임니다. 2-1. 시인과 독자   눈을 뜨면 나에겐 풍경이 보인다   눈을 감으면 나에겐 사랑하는 당신의 얼굴이 보인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필립 샤보네의 시입니다. 당신의 사랑스런 얼굴로 변하는 풍경이 눈을 감고 뜨는 순간의 차이가 바로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느끼는 시인과 독자의 마음은 무엇이겠습니까.   황폐되고 삭막한 세상일수록 그 무엇인가가 내 가슴을 데워주고 위무해주는 따스함이 그립습니다. 그림도 있어야 하고 노래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문학, 특히 시가 차지하는 그리움의 비중은 상당합니다.   [말테의 수기]를 쓴 릴케는 아무것도 더 쓸 것이 없는 허탈에 사로잡혀 이 상태를 벗어나 보려고 두이노 성(城)을 찾아 갔습니다. 추운 겨울날 이 성에서 방파제를 왔다갔다 하던 중 그의 머리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듣고 그는 수첩을 꺼내어 "누군가가, 설령 내가 외친다고 해도 천사들들의 서열 속에서 그것을 들어줄 것인가?"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것이 그날 밤 완성한저 유명한 라는 작품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처럼 릴케도 절망과 허탈의 극한 상황에서 천사를 통해서 정신의 폭풍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하듯이 시를 쓰는 이유라고 할까, 시가 있어야 하는 이유를 나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이야기로 풀어 보고자 합니다. ①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말하고 싶습니다.   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감상함으로써 마음 속에 솟아 오른 슬픔이나 공포의 기분을 토해내고 마음을 정화(淨化)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가 지은 에서 '비극은 어떤 행위를 모방한 것으로서 애련(哀憐)과 공포에 의하여 이것들의 정서 특유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고 말한데서 유래되었지만, 시를 쓰고 때로는 시를 읽음으로써 자신의 정서를 정화하는 것입니다. ② 나르시스(또는 나르시시즘-narcissism)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르시소스라고 하는 미청년이 산의 요정 에코의 사랑을 받게 되면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샘물에 비춰지는 자기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하여 영원히 뜻을 이룰 수 없는 운명이 주어졌고 마침내 샘물에 빠져 죽어서 수선화가 되었다는 신화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자신의 용모나 능력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황홀해 있는 마음의 경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도취(陶醉)입니다.   이렇게 시를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 모두가 시를 통하여 정화하거나 도취에서 어떤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시가 이 시대에 필요하거나 또 시를 써야 한다는 어눌한 생각에서 시쓰기의 출발은 시작 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이탈리아에서는 사분오열(四分五列)된 땅덩어리가 통일을 갈망하는 그 나라 국민에게 '이탈리아 자신'이라고 외친 단테(유명한 의 저자) 뿐만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때 러시아가 독일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풍전등화(風前燈火)가 되었을 때 스탈린은 반동 시인으로 낙인을 찍었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푸쉬킨의 애국 시집을 황급히 인쇄하여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읽게 하여 병영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는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시인들도 일제 강점기때 장한 모습들을 살필 수 있습니다. 잘 아는 바와같이 '황홀한 천재' 이상(李箱)과 뮤우즈의 사도(使徒) 운동주는 이름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왜경에게 피검되어 옥중에서 조국의 제물이 되었으며 이상화의 피끓는 애국시는 당시 나라를 잃은 국민들에게 꿈을 주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돈도 되지 않고 명예도 되지 못하는 시쓰기는 여러 가지 악조건에서도 여전히 시를 버리지 못하고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큰 보람과 희열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2-2. 시의 목적   시는 아름다움이나 진실, 나아가서는 구원을 찾는 인간의 순수하고 진솔한 표현입니다. 시는 그만큼 인간의 정신을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시를 쓰는 사람은 어떤 목적을 염두에 두고 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사회의 병폐를 '뿌리 뽑기 위해서'라든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라든지 하는 거창한 목표를 내걸고 시를 쓰는 사람이 간혹 있을지 몰라도 만약 있다면 이는 정치인이나 종교인이 되었어야지 굳이 시인이 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는 어디까지나 시적인 감동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어서 쓰게 되는데 이 감동은 바로 표현의 의욕을 자아내게 되며 한 편의 시가 씌어졌을 때 비로소 이 표현 의욕은 충족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쯤에서 김광균의 시 [설야](雪夜) 한 편을 읽어 보면서 다음 이야기를 계속 합시다.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함밤 소리 없이 흩날리뇨 처마끝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자췬 양 흰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졸로 가슴이 메어 마음 공허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찬란한 의상을 하고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라 밤 사이 흰 눈이 내리는 것을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과 '서글픈 옛자췬 양' 감동하기도 하고 '머언 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로' 감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눈'이라는 통속적인 소재가 시인의 감동과 만나면 무한대의 신비한 표현의 의욕과 그 표현을 통한 우리의 정신적인 충족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함께 이야기해 보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안녕히.    ==============================================================================       찾습니다  ―이영혜(1964∼ ) 부풀린 어깨에 가끔씩 포효 소리 제법 크지만, 낮잠과 하품으로 하루를 때우는, 허세의 갈기 무성한 수사자 말고 해만 넘어가면 약한 먹잇감 찾아 눈에 쌍심지 돋우는, 뱃속까지 시커먼, 욕망의 윤기 잘잘 흐르는 음흉한 늑대 말고 훔친 것도 좋아, 높은 놈 먹다 버린 것도 좋아, 패거리로 몰려다니길 즐겨 하는, 웃음도 비열한 하이에나 말고 수천 권 뜯어먹은 지성인 척 턱수염 도도하게 으스대지만, 강자 앞에선 아첨의 목소리로 선한 초식동물인 척하는, 이중인격 비굴한 염소도 말고     아무 데서나 혀 빼고 군침 흘려 대며, 할 소리 안 할 소리 쓸데없이 짖어 대거나 아무나 물어뜯는, 날카로운 야성의 송곳니는 유전자에서 사라져 버린 지 오래인,잡개는 더욱 말고 높은 하늘 향해 한 자세로 한 몸 꼿꼿이 세운 한 향기 한 품위로 천지를 채운 저 키 큰 금강송 같은 식물성 남자 하나 찾습니다 평생 배필로 삼아 생을 다해 자취도 없이 사라져 그 몸 이룬 탄소 원자 소멸할 때까지 한마음으로 사랑하겠습니다     연락 주시면 후사하겠습니다 배필을 구하는 광고 형식으로 남자들의 지질함을, 행갈이 하기도 아깝다는 듯이 줄줄이 산문으로 성토하는, 아니 한탄하는 화자다. 숫기라고는 하초에만 몰려 있지, 그 무책임과 허세와 위선과 비열함과 약삭빠름이라니! 멀쩡한 여자는 많은데 멀쩡한 남자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게, 결혼을 원하면서 미혼으로 서른을 훌쩍 넘긴 여자 후배에게 마땅한 상대가 없나 머리를 모으는 자리에서 나온 우리 여자들의 중론이다. 일찍이 소설가 우선덕 선생님의 할머니께서도 “세상에 여자만 한 남자는 없다”고 하셨다지. 그럼 이 세상에 멀쩡한 남자는 아주 없단 말인가? 있긴 있으나 일찌감치 ‘여우들’이 낚아채 갔다. 화자가 운문으로 각별히 흠모의 정을 바치는 ‘저 키 큰 금강송 같은 남자’도 이미 장가를 갔을 테다. ‘동물의 왕국’ 인간사여라. 여자들은 다 멀쩡하냐고 입술을 삐죽거리고 실룩거릴 남자들이여, 물론 그렇지 않다. ‘남자 같은’ 여자도 드물지 않다. 뭐, 우리들 여자끼리의 지나가는 이야기.  
417    [시문학소사전] - "산문시"란?... 댓글:  조회:3059  추천:0  2017-04-19
 (요약) = 서정시의 특질을 모두 담고 있으면서도 산문처럼 보이는 짧은 글.   산문시 형식은 자크 베르트랑(알로이시우스)의 〈밤의 가스파르 Gaspard de la nuit〉(1842)를 통해 프랑스 문학에 소개되었다. 베르트랑의 시는 그당시에는 별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그가 19세기말 상징파 시인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보들레르의 〈소산문시 Petits Poèmes en prose〉(1869, 뒤에 〈파리의 우울 Le Spleen de Paris〉이라는 제목이 붙음)로 입증되었다. 산문시라는 명칭은 이 작품에서 유래한 것이며, 스테판 말라르메의 〈여담 Divagations〉(1897)과 아르튀르 랭보의 〈일뤼미나시옹 Illuminations〉(1886)은 프랑스에서 산문시를 확고하게 정착시켰다. 이밖에도 20세기로 넘어갈 무렵 산문시를 쓴 시인들로는 폴 발레리, 폴 포르, 폴 클로델 등이 있다. 독일에서는 19세기초에 횔덜린과 노발리스가, 19세기말에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산문시를 썼다. 20세기에는 프랑스의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의 〈산문시 Poèmes en prose〉(1915)와 생종 페르스의 작품들에서 산문시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Daum백과] 산문시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16    하나가 여럿이고, 여럿이 하나이다... 댓글:  조회:2470  추천:0  2017-04-19
'서정시 동서고금 모두 하나'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소설이 '一卽多'(일즉다)라면, 서정시는 '多卽一'(다즉일)이다. 소설은 사람은 누구나 사람이면서 얼마나 다르게 사는지 보여준다. 서정시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을 알려준다." 국문학계 원로인 조동일(78) 서울대 명예교수는 불교 화엄철학의 세계관인 '일즉다 다즉일'(하나가 여럿이고, 여럿이 하나이다)을 가져와 소설과 서정시의 지향점을 명확하게 대비시킨다. 소설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겪는 체험을 보여주는 반면, 서정시는 서로 다른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자아로 끌어들여 속마음이 하나라는 점을 내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동서양의 이름난 서정시들을 속마음의 성격에 따라 나눠 묶은 시선집 '서정시 동서고금 모두 하나'가 최근 출간됐다. 실향·이별·유랑·위안·자성·항변 등 주제별로 100여 편씩 6권에 싣고 작품마다 해설을 달았다.     독일 낭만주의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고향'에서 "나를 키워주던 그대 거룩한 강가여,/ 사랑의 괴로움을 진정시켜주겠나."라며 고향으로 돌아가 위안을 얻고자 한다. 100여 년 뒤 김소월 시인도 "죽어서만은 천애일방 헤매지 말고/ 넋이라도 있거들랑 고향으로 네 가거라."라고 썼다. 고향 상실은 결핍의 일종이고 실향시는 이 결핍을 보완하려는 시도라고 조 교수는 설명한다. 서정시의 주제는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에서 시작해 먼 곳으로 가 유랑하고 시에서 위안을 얻는 데까지 나아간다. 시인 노릇에 대한 자성과 그릇된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항변이 뒤따른다.   세계의 부조리, 그에 대한 투쟁 의지를 속마음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저항·참여시도 엄연한 서정시다. 조 교수는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와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자유'를 나란히 놓는다. 표절 시비로 비화할 만큼 빼닮은 두 작품의 차이를 조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면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총체적 자유를 말할 수 있는 여유가 김지하에게는 없었다. 엘뤼아르의 초현실주의는 상상과 연상의 공중비행을 가능하게 했으나, 김지하는 사실주의의 노선을 견지하면서 탄압을 무릅쓰고 부당한 현실과 대결해야 했다." 조 교수는 현역 시절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 등 저서로 서사문학을 체계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에 시 짓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면서 상징주의 시에 심취했다"는 소회를 보면 서정시에 대한 애정도 남달라 보인다. 조 교수는 "상징주의 시를 시가 되게 번역해 공감을 나누고 싶은 소망을 오랫동안 간직하다가 이제야 조금 실현한다"며 "소설을 편애한 잘못도 바로잡고 시정하고 싶다"고 말했다
415    절대적으로 정신을 차려야 할 편집들께= "표절은 절대 금물" 댓글:  조회:2734  추천:0  2017-04-18
한 저명한 문학평론가가 시인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표절 작품이라고 주장해 파문이 일고 있다.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논란과 맞물려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평론가 황현산은 자기 트위터에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게 (폴) 엘뤼아르의 표절인 걸 알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민주화의 대의가 중요했기 때문. 지금 생각하면 그게 잘한 일이었는지 묻게 된다. '타는 목마름으로'를 온전하게 살린 것은 이성현의 작곡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와 문학평론집 '잘 표현된 불행'으로 유명한 황현산은 현재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유명 평론가다. 그가 트윗에서 언급한 엘뤼아르 작품은 '자유'. 황현산의 지적대로 '타는 목마름으로'와 '자유'는 주제는 물론이고 어투 등에서도 빼다 박을 정도로 닮았다. '내 학생 때 공책 위에/ 내 책상이며 나무들 위에/ 모래 위에도 눈 위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읽어본 모든 책상 위에/ 공백인 모든 책상 위에/ 돌, 피, 종이나 재 위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숯칠한 조상들 위에/ 전사들의 무기들 위에/ 왕들의 왕관 위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밀림에도 사막에도/ 새 둥지에도 금송화에도/ 내 어린 날의 메아리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밤과 밤의 기적 위에/ 날마다의 흰 빵 위에/ 약혼의 계절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내 하늘색 누더기 옷들에/ 곰팡 난 해가 비친 못 위에/ 달빛 생생한 호수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들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림자들의 방앗간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새벽이 내뿜은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또 배들 위에/ 넋을 잃은 멧부리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구름들의 거품 위에/ 소낙비의 땀방울들 위에/ 굵은 또 김빠진 빗방울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형상들 위에/ 온갖 빛깔의 종들 위에/ 물리적인 진리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잠깨어난 오솔길들 위에/ 뻗어나가는 길들 위에/ 사람 넘쳐나는 광장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켜지는 램프 불 위에/ 꺼지는 램프 불 위에/ 모여 앉은 내 집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겨울의 또 내 방의/ 둘로 쪼개진 과실 위에/ 속 빈 조가비인 내 침대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주접떠나 귀여운 내 개 위에/ 그 쫑긋 세운 양쪽 귀 위에/ 그 서투른 다리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내 문턱의 발판 위에/ 정든 가구들 위에/ 축복 받은 넘실대는 불길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사이 좋은 모든 육체 위에/ 내 친구들의 이마 위에/ 내미는 손과 손마디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놀란 얼굴들의 유리창 위에/ 침묵보다도 훨씬 더/ 조심성 있는 입술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파괴된 내 은신처들 위에/ 허물어진 내 등대들 위에/ 내 권태의 벽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나는// 욕망도 없는 부재 위에/ 벌거숭이인 고독 위에/ 죽음의 걸음과 걸음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다시 돌아온 건강 위에/ 사라져 간 위험 위에/ 회상도 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그리고 한 마디 말에 힘입어/ 내 삶을 다시 시작하니/ 너를 알기 위해 나는 태어났다/ 네 이름지어 부르기 위해// 오 자유여'(폴 엘뤼아르의 '자유' 전문)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전문) 20세기 프랑스의 대표 시인인 엘뤼아르는 초현실주의 작품을 쓰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을 계기로 정치색을 강하게 품은 작품을 쓴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에 적극 참여했을 정도다. 평화와 자유, 정의를 관통하는 엘뤼아르 작품 중에서도 대표적인 게 '자유'다. 1942년 영국 공군은 엘뤼아르의 시집 '시와 진실'을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에 뿌리기도 했다. 이 시집의 맨 앞에 실린 작품이 '자유'다. '타는 목마름으로'는 대표적인 저항시인이었던 김지하가 엄혹한 유신시대의 억압 속에서 민주주의를 열망한 작품. 숨이 막힐 듯한 시대적 상황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절규하는 문체로 풀어낸 한국문단?대표적인 사회참여시다. 사실 '타는 목마름으로'가 '자유'의 표절작이라는 주장은 진작 제기됐다. 시인 노태맹은 올 초 한 지방지에서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는 엘뤼아르의 '자유'라는 시를 대 놓고 베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두 시가 워낙 유명한 만큼 시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타는 목마름으로'가 '자유'의 표절작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일반인은 왜 이 같은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일까. 전태흥 미래티앤씨 대표가 2013년 1월 한 지방지에 기고한 글에서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며칠 전 페이스 북에서 친구가 쓴 글을 읽었다. 그 글은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시인인 폴 엘뤼아르의 시 '자유'와 한국에서 오랫동안 저항시인(무엇에 저항했는지는 모르지만)으로 불린 김지하의 대표 시 '타는 목마름으로'를 비교한 것이었다. 그 글의 내용은 한마디로 김지하의 시가 폴 엘뤼아르의 시를 베낀 것인데 이미 오래전에 '자유'라는 시가 한국에 소개되었고 그 시를 읽은 사람들이 김지하가 그 시를 표절한 것을 알면서 침묵한 것은 표절의 명백한 공범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어 친구는 우리가 그동안 김지하라는 이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주저해 왔던 것은 젊은 날 자신이 지켜왔던 것들을 잃지 않으려는 일종의 보상심리와 같다고 썼다. 전적으로 동의한다.""민주화의 대의가 중요했기 때문"에 모두들 표절인 걸 알고서도 침묵했다는 황현산의 글과 일맥상통하는 주장이다. 한 문인은 "표절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이 있다는 이응준의 지적은 김지하의 사례에도 유효하다"고 말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응준은 최근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 - 신경숙의 미시마 유키오 표절'이란 글을 기고해 신경숙의 소설 '전설' 중 한 문단이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憂國)'의 한 문단을 거의 베끼다시피 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찬미 기자 ////////////////////////////////////////////////////////////////////////////////////////////////////////// 신경숙의 표절 사건으로 김지하의 표절 또한 도마에 올랐다. 70년대 저항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가 폴 엘뤼아르의 를 표절했다는 것이다.  두 시의 원문을 비교해보자. 자유   / 폴 엘뤼아르   나의 학습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책장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황금빛 조각 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밀림과 사막 위에 새둥우리 위에 금작화 나무 위에 내 어린 시절 메아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밤의 경이 위에 일상의 흰 빵 위에 약혼 시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나의 하늘빛 옷자락 위에 태양이 녹슬은 연못 위에 달빛이 싱싱한 호수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들판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리고 그늘진 풍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새벽의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배 위에 미친 듯한 산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구름의 거품 위에 폭풍의 땀방울 위에 굵고 멋없는 빗방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모든 것 위에 여러 빛깔의 종들 위에 구체적인 진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살포시 깨어난 오솔길 위에 곧게 뻗어나간 큰 길 위에 넘치는 광장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불켜진 램프 위에 불꺼진 램프 위에 모여 앉은 나의 가족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둘로 쪼갠 과일 위에 거울과 나의 방 위에 빈 조개 껍질 내 침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게걸스럽고 귀여운 나의 강아지 위에 그의 곤두선 양쪽 귀 위에 그의 뒤뚱거리는 발걸음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 문의 발판 위에 낯익은 물건 위에 축복된 불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균형잡힌 모든 육체 위에 내 친구들의 이마 위에 건네는 모든 손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놀라운 소식이 담긴 창窓가에 긴장된 입술 위에 침묵을 초월한 곳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파괴된 내 안식처 위에 무너진 내 등대불 위에 내 권태의 벽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욕망 없는 부재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회복된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自由여.     폴 엘뤼아르   폴 엘뤼아르 (Paul Eluard, 1895년 12월 14일 ~ 1952년 11월 18일) 는 프랑스의 시인. 본명은 외젠 에밀 폴 그랭델 (Eugene Emile Paul Grindel)이다.  다다이즘 운동에 참여하고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시인은 영감을 받는 자가 아니라 영감을 주는 자'라고 생각했다. ' 자유'라는 시로 유명한 시집 《시와 진실》, 《독일군의 주둔지에서》 등은  프랑스 저항시의 백미로 알려져 있다.   파리 북쪽 생드니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폐결핵으로 공부를 중단하고 스위스 다보스에서 요양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1911년 ~ 1913년 요양소에 있을 때 보들레르, 아폴리네르 등 프랑스 시인들과  휘트먼 등 미국 시인들에 자극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였다가 독가스로 폐를 다쳐 평생의 고질(痼疾)이 되었다.  1917년 러시아인 안내 갈라를 만나 결혼했지만,  그녀는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를 사랑하게 돼 1924년에 그를 떠났다.  1934년 마리아 벤즈와 결혼했지만, 그녀 역시 파블로 피카소와 염문을 뿌렸다. 전후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등과 쉬르레알리즘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스페인 내전 때 인민 전선에 참가하여 레지스탕스로서 활약하였다.  1952년 11월 18일 과로와 협심증으로 숨을 거뒀고, 파리 페르라셰즈 묘지에 안장됐다.   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와 자유(엘뤼아르)의 작품 설명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갈망] 엘뤼아르의 ‘자유’는 모든 사물에 '자유'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세상 모든 만물이 자유로워야 할 소중한 존재임을 나타내는 시로, 폭압적인 정치 상황에서 민주 또는 자유를 열망한다는 점에서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와 유사하다.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와 자유(엘뤼아르)의 핵심 정리   타는 목마름으로 자유 갈래 자유시, 서정시, 참여시 자유시, 서정시 성격 의지적, 비판적, 저항적 서정적, 저항적, 의지적 제재 민주주의 자유 주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자유를 향한 열망 특징 ① 민주주의를 ‘너’로 의인화하여 표현함. ② 반복, 점층, 상징, 역설적 표현을 사용함. ③ 격렬한 시어와 강한 의지적 어조를 사용함. ① 시구 반복과 나열을 통한 주제 표현 ② 대상을 의인화하여 표현함.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와 자유(엘뤼아르)의 이해와 감상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이 시는 민주주의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타는 목마름’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자유 이 시는 엘뤼아르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 점령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하면서 발표한 저항시로, 원래는 ‘단 하나의 생각’으로 발표되었다. 자유에 대한 시인의 열망을 매우 강렬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시인은 초등 학교 시절부터 현재까지, 지상의 미세한 사물에서 저 하늘에까지 모든 것에 자유를 쓰고 있다. 이처럼 ‘자유’라는 이름을 20연에 걸쳐 쓰고 있는데, 특히 매 연의 마지막 행에는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라는 시구를 동일하게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에도 불구하고 자유라는 이름을 쓰는 그 구체적인 사물들을 새롭게 등장시켜 오히려 상승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시인이 모든 사물 위에 ‘자유’라는 이름을 쓴다는 것은 곧 모든 사물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명명한다는 것과 같다. 시인은 기본적으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자유로워지기를 열망하고, 아울러 그 열망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414    그대들의 마음속엔 어떤 나무를 심었는가?!... 댓글:  조회:2093  추천:0  2017-04-18
           위진남북조시대에  생존했던  중국의  자연(전원)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은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놓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  이라고  호를  삼았다.   柳 자는  의   저자, 랴오원하오(廖文豪)의  해석에 의하면,   '애틋하게  이별하는  나무'라   한다(김락준 옮김,  한자나무,  아템포,  2015,  p.103).   하지만,  도잠이  41세에  관직과  속세를  떠나게  된  심정  때문이라기  보다는  자연과  벗하기  위해서  버드나무를  심었던  것  같다.   도연명은  이란   짧은   글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관과   생활관을   집약적으로   표현하였다.   자시자종(自始自終),  즉 시작이   있으면   마침이   있다는   스스로   그러한   삶을   살다   귀천하였다.   반면,  영국의  계관시인 ,  알프레드  테니슨경(Alfred Lord Tennyson, 1809~1892)의  저택  앞에는  큰  오크(oak ; 떡갈나무나  졸참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시인은   82세에  오크의  춘하추동을  예찬한   시, 'The Oak' 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인생을  오크처럼  살라  당부한다.  테니슨경은   오크의   겨울을   인생의   노년기에   비유하면서,   오크가   잎을   다   벗지만   '적나라(赤裸裸)한  힘',  즉   입고   있던  옷을   다   벗은   뒤에도   남아   있는   힘,   나력(裸力, naked strength)을   지녀야   함을   강조한다(윤석철, 삶의 정도, 위즈덤하우스, 2017, p.181).   나와   너   그리고   그대들의   집   앞에는   무슨   마음의   나무(吾心之木)를   심었는가?   출처:[금재설화(錦載屑話)]
413    <화투> 잡설시 댓글:  조회:2464  추천:0  2017-04-18
옛부터 우리 조상들은 풍월을 좋아하고 자연을 좋아했다...  아주 즐거운 여가문화에...음악이란 항상끼어 있었으니...  고려말부터 조선시대 양반들사이 유행했던..  시조부터 현대시와 가요까지...  화투로 보는 우리문학을 기술하겠다...  일단 고려말기로 올라가자...  고려시대 유명한 탓자(화투꾼..) 정몽고의 시조를 엿보겠다...  * 단 심 고 *  이 몸이 죽어 죽어 광도못팔고 고쳐 죽어,  청단에 홍단되어 피박이라도 있고 업고,  쓰리고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 작품 해설 : 네명이서 치는데..하도 패가 안들어와서..광도 못팔고  계속죽다가.  한판꼈더니 청단에 홍단을 멋지게 성공하고...피박까지 씌울수 있  을것 같은 상황에서..쓰리고를 부르기 위해..눈에 불을 켜고 치는  한 남자의 피맺힌 절규를 엿볼수 있다...  정몽고 (고려말기 ~ ?) 고려 말기..화투판의 대가로써..광팔때 쌍피도  팔수있게 하는 새로운 화투판에 끼라는 설득을 끝까지 거부하였는데  하루는 돈따가지고..집에 돌아오다가..다리위에서..화투  짝으로 뒤통수를 맞아 암살당했다고 한다..  우리는 정몽고와 한때 쌍벽을 이루던 광팔때 쌍피도 팔자는 개혁화투파인  이광원의 시조를 살펴봐야겠다...  * 하 여 고 *  광판들 어떠하며 쌍피판들 어떠하리.  팔공산 똥쌍피 같이판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광팔아 오광까지 누리리라.  * 작품 해설 : 고려말기 화투판의 대가 정몽고를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여..광팔 때 돈을 더 많이 벌어보겠다는 내적 심정이 가미된  글로써..팔광에 똥쌍피를 끼워 파는 장면에서는 상황에서..갈등이 점차 고조  되며 광다섯개를 잡아 팔겠다는..그의 의지에서 돈에 환장한..한 남자의  굳센 의지를 엿볼수 있다...  이광원 (고려말기~조선초기) 어릴적부터..싹쓸이에 소질이 있어 비범함을 과시  했던..이광원은 정몽고와 고려시대 화투패거리의 양대 산맥이었고..정몽고를  없앤 공로로..조선최고의 탓자집안의 대들보가 되었으나..아버지가 자기에게  선을 안시켜주고 형에게.. 선의 자리를 물려준채 화투계를 떠나자...가족들의  화투판에서 모두에게 피박을 씌워..형제간의 피터지는 피싸움의 계기를  만들었고..결국에는 조선최고의 탓자집안의 선을 잡게되었다..  그의 셋째아들이 청단,홍단을 한글로 창제하여..우메한 백성  들을 구제한..그 유명한 세종단왕이시다...  이제까지..하여고를 감상했다..그런데..90년대에 폭팔적인 인기를  얻었던..고태지와 광파는아이들도 하여광이라는 노래를 2집에  수록하였으니...한번..하여고와  비교하며..음미해 보도록 하자...  * 하 여 광 *  싹쓸이로 모든걸 뺏겨 버렸던 내피가  다시내게 돌아오는걸 느꼈지  광은 언제까지나 나만의 나의 주무기라  믿어왔던 내생각이 틀리고 말았어.  깨진고도리는 필요가 없어.  이제는 새를봐도 아무런느낌이 없어.  광에게 항상 시선을 멈추었던  예전에 내모습과...  쌍피를 바라보던 내모습과....  청단의 모습이...  모든게 그리워 진거야 지금 나에겐...  똥을 볼때마다 내겐 가슴이 떨리는 그느낌이 있었지....  난 그냥 똥에 똥쌍피를 던진거야...고우고우고우고우고..  비홀로 있을때조차...쌍피를 기다린다는 설레임에  언제나 기쁘게맘을 가졌던거야...고우고우고우고우고..  부풀은 내 패중엔 항상 멧돼지가 있었어  하얀담요에 칠자세장을 가득 싸고서  이제는 피먹은 애들을 위해 남겨둔 것이 있어..  해맑은 한장씩이 담긴 맷돼지...  난 그냥 이대로 피박을 쓰는가..  난 그냥 이대로 첫뻑을 하는가...  난 그냥 이대로 오링이 나는가...  난 그냥 돈꾸러가는 내모습이 너무나...  이렇게 돈을 꿔버린..나를 두고 화장실가지마..  하지만 나는 기다려..애들 다시 돌아올 날까지...  담요위에서...  * 작품 해설 : 처음부터 싹쓸이 당해서..피를 뺐겼으나..다시 싹쓸이로 피를  되받아오는 불굴의 투지를 가진 주인공..광,고도리,청단이 모두 깨진  시점에서.. 똥쌍피를 쥐고 있던 주인공은 고를 부르고 비쌍피로 투  고를 불렀지만.. 칠자로 싸고 말았다...완전 망했다고 생각을 하게  하는 장면이지만..주인공은 돈줄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자신이 맷  돼지가 그려진 칠자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주인공은 멧돼지를 내  고 한장씩 받으려고 하지만...앞에서 스톱을 하는 바람에 독박이라  는 시련을 다시 격게된다...하지만..다시 돈을 꿔서 새로 시작하려  는 새출발의 마음을 가진다..하지만..패거리는 화장실을 핑계로  도망가고 주인공은 자신의 돈을 딴 애들이 다시돌아오기만을 기다  린다는..불교의 윤회설이 담긴...예술적인 노래라 할수 있다...  고태지와 광파는 아이들(1970 ~ 현재) 못먹어도 고를 부르는 고태지가..초상집  에서..화투를 치다가...광만 파는 얍실한 애들을 만나..얍실하  다고 싸움을 하다가..술한잔하고..당구장가서 화투로 씩스볼을  치다가...친해져서...결성한그룹..히트곡으로는 `환상속의 고도  리`,`난 쌌어요`,`파토 이데아`,`오광을 꿈꾸며`,`Come Back  HwaTuPan` 등이 있다..  갑자기 현대가요로 시점이 바뀌었으나...  일제시대 한글말살정책을 받으면서도...  세종단왕의 뜻을 이어받아...  청단..홍단이 한글로 쓰여진 화투패로 고스톱을 치던 이들이 있었으니...  청단을 주무기로 하는자,홍단을,고도리를,광을,피를 주무기로 하는자 할것  없이..  모두 모여 민족화투 대표...33인이 모여서..상가집으로 위장한 후  밤새도록 화투를 쳤다고 한다..  이들은 3.1 고도리 만세 사건을 일으켰고...  만주에서도 꾸준히 돈을 따서...독립운동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그럼 만주에서 돈을따던 정피용탓자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적은시를  잠시 감상해 보도록 하겠다...  * 쓰리고 수 *  넓은 담요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삼광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맷돼지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따닥을 하는곳.  그 쓰리고가 차마 꿈엔들 잊힐 리랴.  싹쓸이에 피가 식어지면,  비인 담요에 뒤집는 소리 고를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눈에 불을켜고 화투짝을 때리시는곳.  그 쓰리고가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담요위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청단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폭탄을 찾으려  풀섶이슬에 한장씩 휘적시던 곳.  그 쓰리고가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담요에 춤추는 멍텅구리같은  검은 팔공산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눈길을 등에 지고 광을 팔던 곳.  그 쓰리고가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꽃힌 화투짝  알 수도 없는 48+1 로 발을 옮기고,  서리 독수리 우지짓고 지나가는 초라한 고도리,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쓰리고가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작품 해설 : 만주에서 한창 끗발 날리던 주인공이 고향에서..쓰리고로  엄청난 돈을 잃던 생각을 하는 시다...후렴구가 쓰리고로 인한 아픔을  더해주고 있다...고향에서 가족들끼리 옹기 종기 둘러앉아 화투를  치던 생각을 적은 시다...마지막 연에서...영화 48+1에서나 볼수  있는 화투짝 던져서 천장에 꼽기..가 나와서..탓자집안의 무서움을  더해주고 있다..  정피용 (1902 ~ ? ) 일제시대 충북 최고의 탓자로써 일본으로 유학해서.. 일본인 이노무새끼와 브라질의 자꾸 광팔래를 이겨 화투계의 대부로  군림하다가 6.25때 북으로 납치되어 생사를 모름...  ㄱㅇㅅ 월남뽕치다가..돈을따서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서  사라졌다는 설도 있슴       
412    서사시는 敍事詩로서 장시(長詩)이다... 댓글:  조회:2158  추천:0  2017-04-18
서사시(敍事詩)의 내력에 대하여  서사시의 주요 특징을 설명하자면 , 사실의 서술성, 영웅에 대한 시, 대중의 추앙적 인물이 주제, 영웅이나 집단적 운명과 사실적 기록을 이야기 하는 점, 성장의 서사시에서는 고대와 중세의 사건을 기록한 서사시, 민족 감정을 그린 서사시, 작자미상이고, 기존의 민간 전설과 신화를 작자 창의를 가지고 그대로 옮겨 쓴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앞에서 언급한바가 있다.  서사시(epic)라는 것은 대개가 사건을 서술하는 장시(長詩)의 경우를 지칭한다. 서사시는 반드시 역사적이거나 사건적 전말을 토대로 전개되어야 하고, 거기 개입된 인물이 등장하여야 하고, 그 인물의 역활이나 행동이 비춰져야 하고, 반드시 그 인물이란 영웅적(英雄的)이어야 한다는 점이 서사시의 개괄(槪括)이다.  이로서 역사, 신화를 배경으로 함은 당연하다.  이렇게 볼 때 서정시 와는 천차한 것이다. 서정시는 개인의 사상이나 감정을 토대로 하지만 서사시는 개인의 감정이나 사상 따위는 차치하고, 역사 집단 사회적 사실, 영웅적인 사람들의 이야기, 일대 사건의 전말을 그린 객관시(客觀詩)라 할 것이다.  여기서 그 예를 들자면 트로이 전쟁의 희랍군 총사령관 아가멥논과 용장 아킬레스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순신장군, 연개소문 등등 많은 영웅들의 일화가 있는 데 이를 토대하여 객관적 관점에서 시를 쓴다면 이것이 서사시라 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집단이 공적으로 주어진 문예요원의 시가 그 나름의 시대적 주인공을 배경을 토대로 쓴다면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일대 서사시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사건이나 인물이나, 인물의 행동이 표출되지 않는 장시(長詩)는 서사시라 할 수가 없다.  우리의 서사시가, 아니 장시가 모두 서사시라 한다면 대단한 오류이다.  그러면 현대를 토대로 하는 시대적 시를 서사시라 할 것인가?  이는 성격에 따라서 구분된다. 시대적 영웅스런 인물을 배경으로 쓴다면 서사시가 될 수 있다. 영웅의 행동을 찬양하거나 그의 활동을 그려 쓰는 시라면 서사시가 될 수 있다. 우리 현대시에서는 극히 드믄 예이나 김동환(金東煥)의 과 김용호(金容浩)의 . 김해성의 이 있고, 근래에는 신동엽(申東曄)의 . 필자의 (문학의 즐거움에 연재중) 등이 예이다.  1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 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 쓴 검은 순사가  왔다- 갔다-  오르명 내르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밀수(密輸出) 마차를 띄어놓고  밤새이며 속태이는 아낙네  물레 젓는 손도 맥이 풀려서  파! 하고 붙는 어유(魚油) 등잔만 바라본다  북국의 경울 밤은 차차 깊어가는데  2  어디서 불시에 땅밑으로 울려나오는 듯  "어-이" 하는 날카로운 소리 들린다.  또 저쪽으로 무엇이 오르는 군호라고  촌민(村民)들이 넋을 잃고 떨 적에  처녀(處女)만은 잽혀오는 남편의 소리라고  감슴을 뜯으며 긴 한숨을 쉰다-  눈보라에 늦게 내리는  영림창(營林廠) 산림(山林)실이 벌부(筏夫) 떼 소리언만  3 聯은 생략-  -김동환의 시-  -前聯 생략-  //  맏아들 회(艸+會초두변에 모둘회자)와 조카 완(莞)을 불러/방패(防牌)로 몸을 가리라 하고/ 배 위에 누운 채/조용히 마지막 일르는 순신(舜臣)//  -이하 생략-  -김용호의 16章에서  장군 이순신(李舜臣)이 노량 앞바다에서 전사하는 장면 만 부각해 보았다.  적을 무찌르고 무찌르는 절박한 장면을 사진을 찍 듯이 객관적으로 표출하였다.  작자의 감정은 배제하면서 사건의 전말을 그대로 그려내고자 한것이다.  -前聯 생략-  언제  끝날지 모르는  농민혁명의 서곡은  반도(半島)에 그 첫 모습을  댔다.  엽총  화승총  장도칼  쇠스랑  괭이  낫  호미  죽장  울둘목  성난 밀물처럼  관아를 향해  달려 들었다.  울둘목 그렇다 목포에서 배타고  제주 가본 사람은 알리라  쏜살처럼 달리는 그  -이하 생략-  -신동엽의 -  이 시 금강(錦江)은 동학혁명을 제재로 한 것이다.  주제의식이 충실하고 객관화 하는데 나무랄 데가 없는 작품이다.  서사시는 가급적으로 설명적인 군데 군데를 삽입치 않을 수가 없다.  너무 시적으로 함축 시킨다면 서사적 향취가 흐려진다는 결점이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회사실화적 그림을 그리려며는 충분한 고증이 필요한다는 점도 배제 하여서는 아니된다.        서사시는 한 민족이나 국가의 운명을 걺어지고 있는 영웅적인 존재를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그가 주도하거나 참여한 건국, 전쟁, 혁명, 천재지변 등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장중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서술하는 시이다   국경의 밤 1925년에 발행된 김동환(金東煥)의 첫 서사시집이다. 표제작 은 두만강의 겨울밤을 배경으로 밀수를 떠난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의 애타는 마음을 통해 일제 치하 우리 민족의 비운을 노래한 서사시이다. 우리나라 근대 문학사상 최초의 서사시라 할 수 있다. 전문 3부 72절로 된 장시로서, 조국을 상실한 민족의 비애와 애환을 잘 드러낸다. 시집 《국경의 밤》은 민족주의적인 사상과 북국적인 정열이 융합된 낭만적인 특성을 지닌 서사시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남해찬가 1957년 인간사에서 발간된 서사시집 『남해찬가』에 수록된 김용호의 장편서사시.   총 1942행의 방대한 이 작품은 서시와 1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분량은 김동환의 서사시 「국경의 밤」(931행)과 비교할 때 상당한 양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은 저자 자신이 후기에서 "여기에 이순신이란 분이 계십니다. 이런 높고 크고 깊은, 말하자면 형용하기 어려운 훌륭한 분이 당시에 계셨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오래 동안 나는 임진왜란을 통해 이 어른의 사람된 품과 행적을 살펴 너무나 엄청난 이 인격 앞에 망연자실도 했고 때로는 치미는 울분 때문, 자신을 갖다 둘 곳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한 데서 드러나듯이, 이순신 장군을 민족과 역사의 모범적인 모델로 삼아 민족적인 서사시를 완성하고자 한 시인의 뜻을 담고 있다.   총 17장 중, 제1장에서는 이순신의 탄생을, 제2장에서는 부산의 함락을, 제3장에서는 전라도 좌수영의 군사회의 장면을, 제4장에서는 합포 등에서의 승전을, 제5장에서는 원균 등 서인의 모함을, 제6장에서는 누명을 쓰고 서울로 압송 당하는 장면을, 제7장에서는 누명을 벗게 된 사연을, 제8장에서는 원균의 방탕함을, 제9장에서는 이순신의 불굴의 투쟁을, 제10장과 11장에서는 노량해협에 진을 치고 장렬하게 적을 쳐부수는 장면을, 제12장에서는 아들의 사망소식을 접한 이순신의 고뇌를, 제13장에서는 명나라 장수가 감복당한 장면을, 제14장에서는 다시 일어난 한산도에서의 투쟁을, 제15장에서는 노량 앞 바다에서의 비장한 마지막 투쟁장면을, 제16장에서는 그의 장렬한 죽음을, 그리고 제17장에서는 오늘을 살아갈 백성의 결의를 묘사하고 있다. 「남해찬가」는 비록 평면적인 구성과 묘사로 인하여 서사시의 묘미를 백분 살려내지는 못하였으나 역사적인 인물 이순신에 대한 시인의 뜨거운 애정이 돋보이며, 이후의 우리 서사시가 발전하는 데 디딤돌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411    사상 최초이자 최고의 서사시를 지은 시인 - 호메로스 댓글:  조회:2514  추천:0  2017-04-18
    사상 최초이자 최고의 서사시를 지은 시인 호메로스 Homeros(Homer), 기원 전 8세기경         호메로스는 누구인가? 고대 그리스의 작가이며, 서사시 와 의 저자이며, 일설에 따르면 시각장애인 음유시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모두는 ‘사실’이 아닌 ‘전설’이며, 그의 서사시만큼이나 오랜 세월 구전되어 온 이야기일 뿐이다. 호메로스가 누구인지는 물론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두 편의 서사시를 정말 그가 썼는지 아닌지도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오늘날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이라고는 호메로스라는 인물에 관해 전혀 ‘모른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호메로스에 관한 갖가지 전설들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호메로스는 한 사람인가? 여러 사람인가?   호메로스가 시각장애인으로 여겨진 까닭은 의 제8권에 등장해 트로이 전쟁을 노래하는 음유시인 데모도코스와 관련 있어 보인다. 어쩌면 그것이 저자 호메로스의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한 사람도 있었으리라. 실제로 그 당시 사람들은 시각장애인이 앞을 보지 못하는 대신 기억력이 더욱 비상해진다고 생각했다. 그의 출신지 또한 정확하지 않아서, 이오니아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국가 일곱 군데가 저마다 '호메로스의 출생지'임을 자처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와 에 나온 여러 지명들의 실제 위치를 두고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논의가 오간다. '호메로스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이후 고전 문학사에서 ‘호메로스 문제’로 지칭되는 갖가지 질문과 답변을 낳았다.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논제는 호메로스가 한 사람이냐 여러 사람이냐 여부에 집중된다. 일각에서는 양대 서사시에 등장하는 이런저런 불일치를 지적하며 이것은 호메로스가 여러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그러면 또 일각에서는 이런저런 유사점을 지적하며 이것은 호메로스가 한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반박한다. 어느 고전학자의 지적처럼 공격하는 쪽이나 방어하는 쪽이나 감탄스러울 정도로 훌륭한 논리와 근거를 동원하므로 서로 갑론을박하는 와중에서 원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장점도 있다. 호메로스에 대한 이해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20세기 중반, 양대 서사시가 문자로 정착되기 이전부터 구전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설명이 나오면서부터였다. 우리나라의 판소리 같은 경우에도 대본으로 정착되기 전에 오로지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시기가 있었고, 그 와중에 약간씩의 첨삭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양대 서사시의 저자 역시 그 이전의 수많은 서사시 시인들이 만들어 놓은 단편을 가져다가 하나의 일관적이고 커다란 직조물로 이어 붙였을 것이다. 이로써 호메로스가 여러 사람이라는 주장은 사실상 힘을 잃었고, 양대 서사시의 창작자라기보다는 완성자, 또는 기록자인 한 사람의 호메로스를 바라보는 시각이 대두했다. 하지만 “호메로스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답변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다만 대개는 전설의 주장처럼 “고대 그리스의 시각장애인 음유시인으로, 와 의 저자”가 있었다고 편의상 가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그에 관해서는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인류사에 남긴 가장 크고 또 가장 훌륭한 업적의 가치를 폄하할 수는 없다. 그 업적이란 바로 그의 양대 서사시를 말한다.   사상 최고의 서사시 와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서사시 와 는 서양 문학의 최초이자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기원전 8세기경에 구전으로 성립되고, 기원전 6세기경에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추정되므로 지금으로부터 무려 수천 년 전의 작품이지만, 이 작품들이 지닌 감동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줄어들지 않는다. 물론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사실 하나에만 경탄이 집중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토록 오래된 작품이 그토록 짜임새 있는 구조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경탄을 자아내는 것이다. ▶호메로스와 길잡이 소년. 프랑스의 화가 윌리엄 부게로의 1874년 작. 는 트로이와 그리스 간의 전쟁을 다룬 서사시다. 황금 사과에서 비롯된 ‘세 여신의 불화’와 ‘파리스의 선택’, 지상 최고의 미녀 ‘헬레네의 납치와 도주’로 시작돼 ‘트로이의 목마’로 끝난 이 전쟁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는 이 유명한 신화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하지는 않는다. 어느 고전학자는 어린 시절 번역본을 선물 받고 나서 그 책을 판매한 서점 주인이 사기를 친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그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가 그 책에는 전혀 안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의 기원과 경과에 관한 설명이 나오긴 하지만, 시간 순서가 아니라 중간에 회고 방식으로 설명되며, 이것은 그리스 서사시의 특징인 동시에 그 영향을 받은 유럽 역대 서사시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대신 는 10년여에 달하는 트로이 전쟁 가운데 단 며칠 동안의 이야기에 집중된다. 이 서사시의 실제 주인공은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다. 서두에서 아킬레우스는 그리스 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싸우고 나서 더 이상 전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이후 그리스 군은 헥토르가 이끄는 트로이군에게 처참하게 유린당하며,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앞서의 맹세를 철회하고 전투에 복귀한 아킬레우스는 결국 헥토르를 죽여서 원수를 갚는다. 그 와중에 아가멤논, 오디세우스, 아이아스, 디오메네스, 헥토르, 아이네이아스, 프리아모스 등 양편의 주요 영웅들의 용맹과 지략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전투를 감상하며 종종 여기저기 참견하는 신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는 흔히 의 속편으로 간주되지만, 역시 두 편의 내용이 곧바로 이어지진 않는다. 의 마지막 장면 이후, 계속된 전쟁의 와중에서 아킬레우스는 ‘아킬레스 건’에 화살을 맞고 죽으며, 트로이는 ‘트로이의 목마’에 속아 무너진다. 승자들은 저마다 전리품을 잔뜩 챙겨 고향으로 향하는데, 오디세우스는 이런저런 불운이 겹치며 10년 동안이나 더 바다를 떠도는 신세가 된다. 역시 처럼 이야기가 중간에서 시작되어 과거를 회고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바다 요정 칼립소의 섬을 떠나 알키노스 왕의 궁전에 도착한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모험을 회고하는 긴 이야기가 끝나면, 드디어 고향에 돌아간 그가 오랜 세월 동안 자기 집을 유린한 자들에게 복수하고 아내와 재회하는 것으로 서사시는 마무리된다. 그 웅장함이며 긴박감에 있어서는 에 미치지 못하지만, 는 오랜 방랑 생활 동안 주인공이 맞닥트리는 갖가지 기이한 사건과 사물 ― 대표적인 것이 감미로운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하는 세이렌, 오디세우스 일행을 가둬두고 한 명씩 잡아먹는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 폴리페모스, 파이아케스에 도착한 오디세우스를 구출해준 나우시카 공주, 돌아오지 않는 남편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며 구혼자들을 속이기 위해 매일 베를 짜고 또 풀었던 정숙한 여인의 대명사 페넬로페, 텔레마코스에게 부친 오디세우스를 찾아가는 방법을 조언하는 멘토르 등 ―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또 수많은 비유를 낳은 바 있다. 분량으로 따지면 쪽이 더 많지만, 내용의 풍부함으로 보면 가 단연 압권이다.   호메로스의 영향력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계속된다   미국의 저술가이며 독서 관련 에세이로 유명한 클리프턴 패디먼은 호메로스의 에 관한 글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적을 한 바 있다. 우선 그는 100만 명의 병력과 6000여 척의 선박이 동원된, 20세기 중반 당시로는 사상 최대의 군사 작전이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예로 들면서, 그 작전의 최고지휘관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회고록을 읽어보아도 한 줌밖에 안 되는 청동기 시대 부족들 간의 전투를 기록한 만큼의 웅장함이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건 결코 아이젠하워 장군의 잘못이 아니다. 다만 그가 호메로스가 아니었을 뿐이다.” 패디먼의 이 말은 호메로스의 위대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호메로스의 탁월함은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를 할 때에 더욱 두드러진다. 양대 서사시에는 수천 년 세월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에 호소하는 훌륭한 묘사가 수두룩하다. 가령 에는 분노의 창칼로 적을 도륙하는 영웅들의 무용담뿐만 아니라, 그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들의 불운도 묘사되어 있다. 창에 맞아 피를 내뿜으며 땅에 쓰러진 아무개의 아들 저무개가 고향에 두고 온 부모와 처자를 뒤로 하고 하데스(저승)로 떠났다는 참혹하고도 구구절절한 묘사 앞에서 독자는 새삼스레 전쟁의 의미를 되묻게 된다. 그런 면에서 는 사상 최초의 ‘전쟁문학’인 동시에 ‘반전문학’이기도 하다. 이처럼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에는 차마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상당히 ‘많은 것’이 들어 있다. 호메로스의 가장 우수한 후계자인 베르길리우스의 는 로마 시대인 1세기경에 나왔다. 에도 잠깐 등장했던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이아스가 고향을 잃고 방랑하다가 오늘날의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훗날 로마의 시조가 된다는 일종의 건국신화를 담고 있는데, 전반부의 여섯 장은 의 모범을 따라 트로이에서 이탈리아까지의 여행을 설명하고, 후반부 여섯 장은 의 모범을 따라 이탈리아의 토착 부족과 벌인 전쟁을 설명한다. 하지만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차이는 호메로스와 아이젠하워의 차이만큼이나 현격하다. 이 역시 베르길리우스가 못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호메로스가 너무나도 탁월한 것뿐이다. 호메로스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려는 시도는 현대에 와서도 계속되었다. 오디세우스의 라틴어 식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1922)는 의 내용과 구조에 착안해서 20세기 더블린의 하루 동안의 사건을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묘사한 작품이며, 종종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추앙된다. 그런가 하면 199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데릭 월콧은 호메로스의 에스파냐어 식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서사시 (1990)를 펴내 격찬을 받았다. 여기서는 아킬레우스, 헥토르, 헬레네를 연상시키는 등장인물들이 카리브 해의 작은 섬나라이며 월콧의 고국인 세인트루시아 토착민으로 묘사된다. 그 외에도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의 제목과 내용은 물론이고, 심지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1984)의 주인공 소녀의 이름도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가 없었으면 나올 수 없었으리라. 이것만 보아도 호메로스의 영향력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그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으며,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글 박중서(출판기획자, 번역가) 박중서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인 와 등 수십 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1만 권이 넘는 책을 소장하고 있으며, 독서 관련 칼럼을 쓰고 있다. , 등 인물 논픽션을 번역, 외국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인물과 역사>인물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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