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의 수용과
현대수필의 새로운 모색
이유식
- 배화여대 교수, 문학평론가 -
1. 허구 수용의 필요 여부
허구란 사전의 일반적 정의로는 근거도 없는 일을 엮어 만듦이라 되어 있다. 이는 거짓말과는 사뭇 달라 거짓으로 꾸며본 사건이나 일을 말한다 하겠다. 그리고 허구의 문학적 정의라면 특히 소설과 희곡 등에 있어서 실제로 없거나 없었던 일을 작가가 상상력으로 창조하는 일 또는 그런 이야기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소설 같은 장르에는 허구가 아무런 이의 없이 인정된다는 것은 문학원론의 ABC다. 소설은 허구다라는 말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같은 문학 장르이지만 수필 쪽으로 오면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보일 수밖에 없는 개연성이 높다. 그것은 종래의 수필관에서 온 고정관념이나 선입관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필은 ꡐ자기고백의 문학ꡑ이다, ꡐ체험의 문학ꡑ이다, ꡐ사실의 문학ꡑ이다라는 정의가 주는 속박 때문이다. 진솔한 ꡐ자기고백의 문학ꡑ이기 때문에 거짓이 들어갈 수 없고, ꡐ체험의 문학ꡑ이기 때문에 체험하지 않은 일을 체험한 양해서는 안 되며 또 ꡐ사실의 문학ꡑ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일이라면 절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요 생각이다.
물론 이런 정의는 타 문학 장르와의 차이점이나 변별성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서 수필의 이런 속성이나 특성만은 원론적으로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 수필을 창작하는 과정에서라면 어떤 사실을 재구성, 재배열 정도라도 하다 보면 허구 도입의 유혹을 받거나 아니면 부득이 도입하는 경우가 있다. 자기만이 아는 창작과정의 비밀로 함구하고 있을 뿐이다. ꡐ사실의 문학ꡑ이요 ꡐ체험의 문학ꡑ이란 거센 완력 앞에서 누가 감히 이 부분은 사실이 아니고 또 이 부분은 체험이 아니다라고 용기 있게 말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저 독자들이 사실인 양 믿어주기만 바랄 뿐이다.
이런 노출되지 않았던 창작과정상의 비밀이 수필작단에서 공식적으로 거론된 것은 1983년도다. 수필가 정진권은 1980년도에 석사학위 논문으로 「수필문학의 이론 모형 연구」를 쓴 바 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수필이 꼭 사실의 기록 같은 문학이 아니란 점을 강조하기 위해 ꡐ수필은 허구일 수도 있다ꡑ며 그 가능성을 여러 예증을 통해 보여준 바 있다. 결국 이 논문의 이른바 ꡐ허구인정론ꡑ이 촉발되어 김시헌의 반론이 나온 해가 바로 1983년도다. 김시헌은 「수필공원」(통권 제2호)를 통해 「수필과 허구-정진권씨의 구성론을 중심으로」란 글을 통해 정진권의 견해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ꡐ허구 불인정론ꡑ를 폈다. 논전에 불이 붙었다. 뒤이어 역시 같은 해 같은 지면(통권 제3호)에 정진권의 「허구와 수필-김시헌 선생께 답함」이란 반론이 나왔고, 다시 같은 해 같은 지면(통권 제4호)에 김시헌의 재반론 「다시 수필과 허구에 관하여- 정진권씨의 구성론을 재론함」이 나왔다.
이로써 금기시 되어 왔던 수필의 허구론이 한동안 설왕설래 화제가 되기도 했고, 또 이를 계기로 수필계 세미나의 공식적 주제나 토론의 뜨거운 잇슈가 되기도 했으며, 수필론에 관심 있는 이론가나 수필학 교수들도 각자 개인적인 글을 통해 자기 견해를 지금껏 간헐적으로 개진해 왔다.
그래서 이제는 허구의 부분적 인정론으로 대세가 기울어져 있다. 크게 말해 부분 인정론자 쪽에는 정진권, 윤재천, 강석호, 이철호, 정주환, 안성수, 이정림, 강돈목, 이유식 등이 있고, 불인정론자 쪽에는 김시헌, 윤모촌 등이 있는데 특히 김시헌은 허구론 논전 당시의 완강한 허구 불인정론에서 다소 후퇴하여 그 유연성을 보이고 있다.
2. 허구 수용의 범위와 한계
나는 1990년도에 「월간문학」출신 수필가들의 모임인 「대표에세이」동인회의 제3회 세미나에서 「수필의 벽과 그 극복의 길- 창작과정을 중심으로」를 발표하면서 허구의 부분 수용을 제기한 바 있다. 원론적으로는 수필이 ꡐ체험의 문학ꡑ이요, ꡐ사실의 문학ꡑ이니 만큼 어디까지나 체험이나 사실에 충실해야 하겠지만 소설이 ꡐ허구의 문학ꡑ이라고 해서 일체의 어떤 사실이나 체험이 들어가서는 안 되고 100% 허구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개념적 정의에만 지나치게 속박시키는 폭력이 아닐 수 없듯이 수필도 ꡐ체험의 문학ꡑ이나 ꡐ사실의 문학ꡑ이라고 해서 허구가 조금이라도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도 ꡐ체험의 문학ꡑ이나 ꡐ사실의 문학ꡑ이란 개념적 정의를 지나치게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경직된 작법관이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나는 무조건적인 허구의 도입은 인정하지 않지만 예술적 효과나 감동의 창출, 진실의 창출을 위해서라면 최소한의 부분적인 허구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령, 한 편의 수필에 있어서 뼈대가 되고 있는 사건이나 사실 자체를 허구화시켜 사실인 양 내보여서는 안 되겠지만 지엽적이거나 구성적 동기부여라면 허용되어도 무방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덧붙쳐 수필이 비록 ꡐ사실ꡑ에 충실한다 하더라도 100% 사실 위주의 글이어야만 하는 일기문이나 르뽀르따쥬 그리고 다큐멘타리와는 다른 만큼 ꡐ사실의 문학ꡑ이라는 테두리를 크게 훼손시키거나 벗어나지 않는 이상 ꡐ선의의 거짓말ꡑ이란 말이 있듯이 ꡐ선의의 허구ꡑ는 용인된다고 보았다. 수필가는 사실의 충실한 기록자도 아니요 단순한 작문가가 아니라 수필이라는 집을 창조적으로 지어내는 예술가라는 점을 강조해 보았다.
여기서 앞에서 나온 ꡐ부분적인 허구ꡑ를 다시 ꡐ제한적 허구ꡑ ꡐ한정적 허구ꡑ라고 바꾸어 볼 수도 있다. 사실 소설의 전문술어인 ꡐ허구ꡑ란 포괄적 외연의 뜻이 너무 넓은 만큼 수필적 허구라면 겸손하게 좀더 좁혀서 ꡐ허구적 화소(話素)ꡑ라고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수필문학에서 수용할 수 있는 허구가 ꡐ부분적인 허구ꡑ가 되었건 아니면 ꡐ허구적 화소ꡑ가 되었건 간에 그것이 과연 어떤 종류의 수필과 잘 결합되느냐는 문제를 여기서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수필을 일단 중수필과 경수필로 나누어 놓고 보면 허구 수용의 자력성(磁力性)이 강한 쪽은 물론 경수필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보면 주관수필, 개인수필, 서사수필, 콩트수필, 생활수필, 신변수필, 사건수필 쪽이다. 반대로 서정수필, 객관수필, 비평수필, 사색수필, 시사수필, 사회수필, 지식수필 쪽으로 오면 올수록 허구가 끼어들 자리가 없고 또 있어서도 안 된다. 작법이나 구성 그리고 내용상으로 보아 친화성의 원리나 배합의 원리가 통하질 않는다.
그렇다면 친화성의 원리나 배합의 원리가 통하는 수필의 경우라면 과연 그 수용의 범위와 한계는 어느 정도일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나는 앞에서 ꡐ부분적인 허구ꡑ ꡐ제한적 허구ꡑ ꡐ한정적 허구ꡑ ꡐ허구적 화소ꡑ란 용어를 사용해 보았는데 사실은 그 정도가 막연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몇 가지 비유로써 설명해 보는 것이 훨씬 이해가 빠르리라 본다.
첫째, ꡐ당의정론ꡑ이다. 쓴 가루약을 쓰지 않게 먹기 위해 제약과정에서 환(丸)을 만들어 당의(糖衣)를 입힌다.
둘째, ꡐ금반지론ꡑ이다. 반지를 만들 때 100% 순금으로는 안 된다. 합금이 되어야 견고해 지고 일정 형태가 유지되며 나아가 세공도 가능하다.
셋째, ꡐ감초론ꡑ이다. 한약을 지을 때 ꡐ약방의 감초ꡑ란 말이 있듯 반드시 감초가 들어간다. 약효를 높이면서 쓴맛을 없애주는 것이 감초다.
넷째, ꡐ화장술론ꡑ이다. 맨얼굴을 더 예쁘게 보이기 위해 화장품을 바르거나 또는 입술이나 눈썹을 그린다.
다섯째, ꡐ부분 성형수술론ꡑ이다. 전체 성형수술이 아니라 눈이나 코를 좀 멋지게 보이기 위해 성형한다.
여섯째, ꡐ요리론ꡑ이다. 생선찌게를 요리할 때 주 재료인 생선만 가지고 요리하지 않는다. 간장이나 고춧가루 기타 양념은 열외로 하고 부 재료도 들어간다.
예를 들어 본 이 6가지 비유에서 알 수 있듯 주 재료에는 큰 변화와 변형이 없다. 첨가 아니면 약간의 수정․보완 정도다. 맛과 멋 그리고 모양을 내기 위한 기술(技術)적 배려가 따르고 있을 따름이다. 바로 이런 이치나 과정, 그리고 정도가 수필에서 본 허구수용의 범위요 한계라 하겠다.
3. 허구의 종류와 그 기능
크게 보아 우리의 수필계에서는 이제는 허구의 부분 수용이 일반화되어 있고 그 논의도 끝나 있는 상태다.
그렇다면 논의는 논의로서 끝날 일도 아니며 또 공감대적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방관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수용의 구체적 이론화 작업이 있어야 할 일이다. 원론적 학습이 끝났다면 심화학습으로 들어갈 단계다.
그래서 나는 과연 ꡐ수필적 허구ꡑ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또 그 기능이 무엇인가를 시론(試論)삼아 개진해 보기로 하겠다. 앞으로 완성 아니면 완벽한 수필 허구이론의 시학(詩學)정립을 위한 시도일 따름이다. 필요시는 나의 수필창작 과정을 소개하면서 일단 한번 체계화시켜 보기로 하겠다.
허구에는 독자가 전혀 ꡐ인지(認知)할 수 없는 허구ꡑ와 ꡐ반쯤 인지할 수 있는 허구ꡑ가 있다 하겠는데 전자를 ꡐ기법(기술)론적 허구ꡑ나 ꡐ작법론적 허구ꡑ라 칭한다면 후자는 ꡐ수사적 허구ꡑ라 하겠다.
전혀 ꡐ인지할 수 없는 허구ꡑ 즉 ꡐ작법론적 허구ꡑ는 사실과 완전 융합된 허구다. 이에는 구성적 동기부여의 허구, 사건의 수정?보완에 따른 허구, 상상적 허구, 반전(反轉)적 허구 등이 있을 수 있다.
ꡐ구성적 동기부여의 허구ꡑ가 들어가 있는 나의 수필은 「테헤란로 아리랑」이다. 이 작품은 몇 년 전 어느 해 여름 오후, 집을 나서 강남의 테헤란로를 따라 20~30분 정도 걸으면 갈 수 있는 선정릉 공원에 이르는 과정을 얼개로 하여, 순간순간 눈에 보이는 거리의 풍경에다 그 동안 이곳에서 살면서 느낀 생각이나 경험들을 조합시켜 본 작품이다. 서두를 처음에는 ꡐ참으로 오랜만에 테헤란로를 따라 산책길에 나서 본다ꡑ라고 초안을 잡아 보았는데 너무 서두가 밋밋하고 단조로와 구성적 동기를 한번 생각해 보았다. 행선지가 선정릉공원이란 걸 생각하다 보니 문득 8년 전에 가 본 적이 있는 노르웨이 오슬로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각공원 비겔란 공원이 떠올랐다. 사실 그날 나는 여행기를 뒤적이고 있지는 않았지만 여행기를 뒤적이다 비겔란 공원이 나오다 보니 문득 공원으로 산책할 마음이 생겨 산책길에 올랐다고 썼다. 그러고 보니 독자들에게는 내가 가본 적이 있는 비겔란 공원을 잠깐 소개해 줄 수 있는 보너스도 생긴다 싶으면서 한층 글맛이 나는구나 싶었다.
ꡐ사건의 수정․보완에 따른 허구ꡑ가 있을 수 있다. 재료(소재)의 미학적 배열이나 재구성, 의미화의 발견이나 주제 형상화에 따른 통일성을 기하려다 보면 어떤 일이나 사건을 축소․확대해야 하는 경우나 가감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때 수정․보완이 불가피할 수 있다. 따라서 이에 상응할 수 있는 허구가 끼어들기 마련이다. 나의 작품 「와이키키 해변의 어느 오후」를 보기로 하자. 하와이 오하우섬 여행기인데 그 중에서 어느 오후 와이키키 해변에서 보낸 일이 하이라이트이다. 여기서 주체험은 그대로 하되 부체험으로서 와이키키 해변에서 만난 한국인 이민 3세의 이야기를 수정․보완해 본 것이다. 그를 통해 하와이 현지 이민자들의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직접 듣긴 했지만 실제로 초기 이민사에 관해서는 들은 바 없었다. 그러나 책에서 읽었던 초기 이민자들의 고생과 한스러움만은 결코 빼놓을 수 없다는 충동이 일어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은 것으로 사실화 시켜보았다. 말하자면 허구다. 그러고 보니 현장감은 물론 생동감이 살아난다는 생각이 들었던 전후사정이 있다.
ꡐ상상적 허구ꡑ는 일반 상상과는 다르다. 수필작품들을 읽다 보면 ꡐ수필적 자아ꡑ가 각양각색으로 이런 것 저런 것을 상상해 보고 있는 장면이 더러 나오는데 그것이 설사 현재나 과거 그리고 미래의 일에 관한 상상일지라도 곧 상상임이 드러난다. 그러나 가령 과거의 일을 재생하는 과정에서 없었던 일을 상상으로 사실화 시켜본다면 그것은 ꡐ상상적 허구ꡑ가 될 것이다.
바로 그런 예를 「내 청춘의 한 슬픈 소녀」란 작품에서 찾아 볼 수도 있다. 가을의 코스모스에 얽힌 수필 청탁을 받고 써본 작품인데 코스모스를 생각하다 보니 문득 섬약하고 청순가련하단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 다음 바로 연상된 것이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잠시 사귀었던 소녀가 떠올랐다. 코스모스처럼 섬약했던 그 소녀는 결국은 폐병으로 저 세상으로 갔다. 이런 옛 기억들이 떠오르자 이를 소재로 지나간 시절 내 청춘의 열정과 애상이 담긴 작품을 써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 써보았던 것이다. 끝을 이렇게 마무리해 보았다.
아마도 지금은 그녀가 천상의 코스모스 들판에 누워 있을 듯싶다. 오늘 나는 그녀가 그 옛날 나의 책갈피에 끼어넣어 주었던 이 지상의 코스모스 꽃잎을 찾아내 그 당시 내 청춘의 열정을 다시 담아 이 가을바람에 실어 보내 보련다.
여기서 ꡐ그녀가 그 옛날 나의 책갈피에 끼어넣어 주었던 이 지상의 코스모스 꽃잎ꡑ이란 부분은 과거재생 과정에서 생각해 낸 순전한 ꡐ상상적 허구ꡑ다. 일부러 이런 허구를 넣어 본 이유는 ꡐ코스모스 들판에 누워있을 듯싶다ꡑ는 상상의 사후 천상세계와 살아있을 당시의 지상의 세계를 코스모스 꽃잎과 연결지우고 싶은 욕구가 불쑥 일었고 또 한편 어느새 훌쩍 늙어버렸다는 내 나이도 셈해 보면서 내 청춘의 열정을 되살려 그 애틋한 심정을 꽃잎편지마냥 바람에 실어보내 보겠다는 작의(作意)에서 취해 본 허구였다.
ꡐ반전적 허구ꡑ는 흥미와 이외의 결과에서 오는 황당함을 살려보기 위한 허구다. 콩트에서 곧잘 이용하는 기법과도 유사하다. 「반딧불의 서정」이란 작품을 통해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이 작품은 유년시절 반딧불이를 잡으려 다닌 경험담을 작품화 시켜 본 것이다. 마을 앞 냇가에 여름밤이면 동네 처녀들이 목욕하러 나오는 은밀한 장소가 있었다. 풋고추들인 우리가 해찰궂게도 그곳으로 반딧불을 잡으러 나간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작품화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멀리서 몇 점의 불들이 깜박이고 있어 그것이 곧 반딧불인 줄 알고 가 보았더니 사실은 반딧불이 아니라 멱감는 처녀들을 훔쳐보며 달아오르는 욕정을 삭히고 있던 동네 총각들의 담뱃불이었다는 이야기를 넣었다. 이것이 바로 호기심과 흥미유발이란 계산에서 일부러 넣어본 ꡐ반전적 허구ꡑ다.
지금까지 나는 ꡐ인지할 수 없는 허구ꡑ 즉 ꡐ작법적 허구ꡑ를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여 설명해 보며 어느 정도 그 기능이나 기능적 효과도 설명해 보았다.
이제는 ꡐ반쯤 인지할 수 있는 허구ꡑ 즉 ꡐ수사적 허구ꡑ를 알아보기로 하겠다. 어떤 일이나 사건을 과소화나 과장화 하려다 보면 그에 따른 수사적 표현이 나오기 마련이고, 또 이에 준하는 과장이나 과소화 된 행동이나 행위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ꡐ수사적 허구ꡑ라 명명해 보았다. 글의 토온이나 필치로 보면 어느 정도 허구가 가미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머 수필, 풍자수필, 실수담 등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경우다. 이희승의 「오척단구(五尺短軀)」 김성진의 「뚱뚱이의 손득(損得)」 어효선의 「어씨지탄(魚氏之嘆)」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말에 쉽게 동의하리라 본다.
4. 허구 수용과 현대수필의 또 하나의 활로
지금까지 나는 수필의 허구 부분수용론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그 수용범위와 한계를 설명해 보았고, 또 시도적이긴 하지만 수용될 수 있는 허구의 종류와 그 기능이나 그 기능적 효과도 살펴보았다.
다시 극단적으로 말해 보건데 수필이란 형태가 사실이나 체험의 있는 그대로의 재현이나 나열이라면 기록일 뿐 작품이나 창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수필을 쓰고, 소설을 쓰고, 일기를 쓰고 보고문을 쓰는 이른바 ꡐ쓰는ꡑ행위는 똑같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또 다른 말 사용의 용례를 보면 일기문, 보고문, 기록문 등은 단순히 작성이나 쓰는 행위에 끝나지만 수필과 소설은 작성이 아니라 만들거나 짓는 행위와 통한다. 수필창작, 소설창작 그래서 창작예술이다.
또 한편 있는 그대로를 재현해 내는 사진과 사진예술이 다르듯 수필이 ꡐ체험의 문학ꡑ이나 ꡐ사실의 문학ꡑ이라고 해서 재현이 아닐진대 문학성이나 예술성을 살려내야만 한다. 이쯤에서 수필에도 ꡐ제한적 허구ꡑ가 용인되는 입지(立地)나 근거가 마련되는 것이다. 소설과는 아주 달리 사실과 허구 사이나 체험과 허구 사이에서 행복하게 융합이나 결합될 수 있는 황금비율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자료의 가공, 가감, 축소나 확대, 수정과 보완, 취사선택 등을 통해 질서화, 일반화, 의미화, 강조화가 이루어져 감동성, 진실성, 흥미성, 예술성이나 문학성 등이 획득된다면 허구야말로 맛과 멋 그리고 모양새를 내주는 당의(糖衣)요, 합금(合金)이며, 감초요 화장품이며, 성형물(成形物)이요 부재료다.
우리는 이제 허구를 독약인 것처럼 겁내거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현대수필이 환골탈태하고 또 한 차원 높은 예술성이나 미학성을 획득하려면 종래의 경직된 수필관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할 것이다. 한 차원 높인 작법론에서 보아 필요불가결의 허구는 반드시 용납되어야 하고 용납되리라 본다. 그렇다고 꼭 허구 만능론을 강조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리하여 앞으로는 반드시 수필의 정의가 ꡐ사실의 문학이나 체험의 문학이면서도 때론 제한된 허구가 용납되는 문학양식이다ꡑ라고 내려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 현대수필의 또 하나의 다른 활로가 열려 있다 할 수 있다.
과연 이런 시대가 온다면 마냥 쉬쉬하며 감추어놓고 있던 작법상의 비밀도 비밀일 수 없을 것이고 또 그 비밀의 공개는 고해성사도 아니요 양심선언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ꡐ제한된 허구ꡑ 수용의 자유를 쟁취했다고 해서 방종해서만은 안 될 것이다. 창작과정상에서 비밀 양심선언은 늘 수반되어야 하리라 본다. 엄격한 금지조항의 준수나 이행은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다. 소설적 허구는 물론 독서의 경험이나 다른 사람의 간접적 경험을 자기체험인 양 자기화시킨 허구는 반드시 추방되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황금비율의 양심을 어긴 수필가도 철퇴를 맞아야 하리라 본다.
ꡐ선의 거짓말ꡑ이 용인되듯 ꡐ선의의 허구ꡑ는 칭찬 받겠지만 ꡐ악의의 허구ꡑ는 거짓말쟁이 수필가란 악담을 들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수필세계 도래를 위해 다같이 나팔을 불어도 보자. 힘차게 전진도 해보자. 노도 저어 나가보자. ¶ì
수필의 정체성과 실험정신
안 성 수
- 제주대 교수․문학평론가 -
1. 서론
이 글의 목적은 수필의 정체성과 실험정신의 상관성을 탐구하여 장르 발전의 길을 모색하는데 있다.
문학의 정체성(identity)과 실험정신은 장르의 운명을 결정짓는 두 개의 축이다. 장르의 고유한 뿌리와 원형을 지속적으로 보존해주는 정체성의 축이 구심력이라면, 장르의 전통을 계승해 나가면서 문학적 지배 영역을 확충해 나가는 실험정신은 원심력에 해당된다.
어떤 장르가 구심력만 강하고 원심력이 약하거나, 거꾸로 원심력만 강하고 구심력이 약하면, 그 장르의 운명은 쉽게 쇠잔하거나 타 장르에 흡수되기 쉽다. 고대 서사시와 중세 로맨스가 그러한 비극적 운명의 길을 걸어간 대표적 희생물들이다. 이들이 주는 교훈은 과거의 전통적 방법과 완고한 이념에만 집착한 채 실험을 두려워하는 장르는 몰락하고 만다는 점이다. 전통에 대한 무비판적 향유보다는 발전적 계승을 위한 실험적 노력이 문학 장르사에 크게 이바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시와 소설의 장르는 끊임없이 자기 개혁의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환경과 독자층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고통스런 도전을 계속해오고 있다. 이에 비해, 수필은 환경의 변화에 둔감한 채 과거의 전통만을 답습하는데 급급하고 있다. 인간과 시대가 변하고 예술과 문화가 발전하는데 수필은 그 흐름을 주도하기는 커녕, 문학사의 주변부에서 수수방관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쪽에서는 새로운 형식의 시와 포스트모던 소설이 쏟아져 나오는데 수필은 고통스런 실험을 기피한 채 전통적인 창작 방법만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의 수필문학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지적은 이런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현대의 수필 작가들이 몰두하고 있는 전통적인 작법과 비실험적 자세는 한계에 이른 듯하다. 100년 전에 비해 별반 달라지지 않은 안이한 집필 태도와 스테레오 타입의 작품들, 이것은 분명 현대 수필이 새로운 시대의 독자를 위한 문학적 소통 매체로서의 책임과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증거로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수필의 정체성과 전통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편견들도 수필의 위기 상황을 부채질하고 있다.
당면한 과제는 일차적으로 수필 작가들이 담당해야 할 몫으로 보인다. 장르 정체(停滯)의 책임을 작가 집단에게만 전가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으나, 수필의 정체성과 전통을 작품 속에 형상화하는 것은 그들이기에 작가들의 실험정신과 사명감의 부재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당대를 풍미하는 시대 정신과 보편적 신화 의식, 그리고 미래의 역사적 변화와 흐름을 미리 감지하여 작품화하기 위한 노력 속에는 항상 전통과 현실 사이의 변증법적 반성과 성찰이 요구된다. 1차 텍스트의 생산자들이 작품을 통하여 장르 발전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창조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한 이러한 논리는 공허한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은 당대의 수필 작가들을 향한 몇 가지 제안을 담게 될 것이다. 먼저 수필 문학의 장르적 전통에 대한 왜곡의 근거를 밝히고, 그를 바탕으로 정체성의 실체를 정리한 뒤, 수필의 장르 발전을 위한 실험적 창작시 작가들이 고려해야 할 몇 가지 관점에 관하여 제시하려고 한다. 그리고, 수필 문학의 미래 또한 작가들의 끊임없는 실험적 글쓰기에 의해 이끌리게 될 것임을 역설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바람직한 수필 문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장르의 구심력을 만들어내는 문학적 정체성과 장르의 원심력을 만들어 내는 실험정신을 양극으로 하여 긴장된 변증법적 자기 인식과 실험적 창작이 필요함을 논증하고자 한다.
2. 수필의 전통과 정체성
1) 수필의 전통과 오해
수필의 실험정신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수필의 전통과 정체성(正體性)에 대하여 언급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전통과 정체성에 대한 인식 없이 이루어지는 실험은 자칫 장르 자체에 대한 근거 없는 자기 부정이나 논리적 모순을 가져다 줄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흔히, 한국의 독자들 중에는 -일부 타 장르의 작가나 비평가도 예외가 아니지만- 수필 문학의 예술적 위상이나 가치를 타 장르에 비해 폄하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것은 분명 그릇된 편견이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피해는 아직도 한국의 수필 문학계에 가중되고 있다. 특히, 시와 소설에 비해 수필의 미학성이나 철학성이 뒤지는 것으로 인식하거나, 타 장르의 작가들이 그들의 본업 사이에 잠시 창작에 얽힌 넋두리를 감상적으로 늘어놓는 여기(餘技)쯤으로 인식하는 경향도 적지 않다.
물론, 수필이 문단이나 학계에서 시나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게 다루어지고 있는 점은 인정한다해도, 그것이 곧 수필의 문학적 가벼움이나 미학적 가치의 열등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편견과 오해의 배경에는 그동안 독자 대중들에게 널리 회자되어 온 수필의 정의에 관한 수사적 표현들도 한 몫 하고 있다. 이를 테면, ꡒ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수필ꡓ이라거나, ꡒ무형식의 형식이 수필ꡓ이라는 등의 몇몇 선배 작가들이 멋을 부려 쓴 수사적인 말들이 이런 오해를 낳게 한 하나의 원인으로 보인다. 그리고 수필 쓰기를 잡문이나 여기쯤으로 이해하고 있는 문인들과 출판사의 상업적 전략도 수필의 본질과 전통을 흐려 놓는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수필은 쉽게 읽히되, 결코 쉽게 쓰여지는 글이 아니다. 겉보기에는 평이한 글이면서도 의미 있는 삶의 체험을 시적 감수성과 자기 철학, 품위 있고 함축적인 문장 미학에 실어 들려주기 위해서는 수많은 퇴고와 조탁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수필은 단순한 신변잡기(身邊雜記)의 서술을 넘어선다. 자기의 삶에서 터득한 생활철학을 개성 있고 감동적인 주제에 실어 들려주는 문학예술이란 점에서 쓰기가 녹녹치 않다. 또 필자가 자기의 삶의 일부분을 직접 제 목소리로 격조 있게 고백하는 문학이란 점에서도 결코 쉬운 글쓰기가 아니다. 평이한 문장으로 갈무리하되 읽을수록 깊은 글맛과 글멋을 미덕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만인(萬人)을 독자로 한 글이란 점에서 수필은 결코 쉽게 쓰여지는 글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수필은 짧은 글이되 결코 짧은 시간에 쓰여지는 글이 아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진정한 수필은 잡담을 늘어놓는 글이 아니다. 스스로 터득한 삶의 철학과 달관(達觀)의 미학을 격조 있게 형상화시켜 들려주기 위해서는 상당 기간 고통스런 창작의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 소재를 숙성시키고 발효시킨 뒤 견고한 구조위에 적절한 서술의 옷을 입히는 일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수필가 한흑구는 「나무」라는 글을 완성하는데 5년의 세월을 쏟아 부었고, 오창익은 200자 원고지 15매 남짓한 「북창(北窓)」이란 수필을 쓰는데 다섯 달이 걸렸다고 한다. 이런 것이 수필이다.
수필은 시조처럼 틀에 박힌 일정한 형식을 강요하지 않는 대신, 오히려 작품마다 독창적인 새로운 형식의 창조를 요구하는 글쓰기이다. 이 점에서 수필은 다른 문학장르보다 지적 세련미와 장인적(匠人的) 솜씨를 요구한다. 실제로 ꡐ무형식의 형식ꡑ으로 불리는 수필의 형식 미학은 글쓰기의 높은 경지에 도달한 달인(達人)들에게서 구할 수 있는 고도의 능력이다. 수필 쓰기가 어러운 이유 중의 하나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윤오영의 「달밤」은 불과 넉 장의 원고지에 주인공들이 주고받는 극적인 대화 형식과 달밤의 분위기를 통해 독특한 동양적 지성의 분위기와 관조의 경지를 형상화하는데 성공한다.
수필은 작가의 삶을 보여주되 허구적으로 꾸며 쓴 글이 아니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상상력의 힘만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인위적으로 창조하는 글이 아니다. 수필의 중심 이야기는 반드시 자신의 삶에서 끌어와야 한다는 뜻이다. 수필을 상상력으로 꾸며 쓴다면 길이가 짧은 소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이 점에서 수필은 타 장르에 비해 태생적으로 리얼리티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은 운문과 산문의 속성을 포용하되, 그들이 다루지 못하는 중간 영역을 다룬다. 좋은 수필은 시에도 속하고 소설에도 속한다면 과장일까. 수필을 더욱 압축하여 함축적인 언어로 리듬 있게 배열하면 운문이 되고, 사건과 서술을 더욱 복잡하게 구체화하고 덧붙이면 산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시와 소설을 섞어 화학적으로 융합을 시키면 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독특한 문학형식이 태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수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수필의 문장 속에는 세련된 시적 응축과 내포의 미학이 숨어있고 풍부한 시적 감수성이 내재하며, 소설보다 더 생생한 사건과 인물과 주제가 자리잡고 있다. 수필은 이렇게 다양한 문학의 장르적 속성을 함유하면서도 그들과 엄격히 구별되는 특성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수필은 타 장르에 비해 포괄성과 융합성을 보여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수필의 본질이자 전통임을 무수한 수필 작가들이 작품으로 증언하고 있다. 수필 문학의 본질과 전통은 결코 하루아침에 축적된 것이 아니다. 이미, 엘리엇(T. S. Eliot)이 「전통과 개인의 재능」이란 평론에서 주장했듯이, 전통은 역사의식을 내포한다. 작가에게 역사의식은 과거의 과거성에 대한 인식인 동시에, 과거의 현재성에 대한 인식을 포함한다. 뿐만 아니라, 역사의식은 작가의 정신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작품으로 잉태되면서 살아있는 전통으로 계승되는 것이다. 작가의 전통의식은 그의 작품 속에 용해되어 수많은 독자와의 문학적 대화(독서)를 통해서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전달된다. 그렇게 쌓여 계승되어온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문학적 전통의 모습들이다. 전통의 힘은 작품 창조의 순간에 보편적 지향의식으로 작용하면서 내재화된다.
수필의 전통과 본질적 요소에 대해서는 정체성과의 관련성 속에서 보다 체계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오랜 장르의 역사 속에서 작가들이 작품 창작시 유념해야 할 보편적 관습이나 미덕으로 인정 되어온 문학적 속성과 역사의식이 전통이라면, 정체성은 수필을 수필답게 만들고, 수필의 문학적 독자성과 자율성을 견지해온 장르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전통이 장르의 속성을 수평적으로 이끄는 힘이라면, 정체성은 장르의 본질을 수직적으로 환기하는 힘이다. 전통은 작가의 역사의식에 의해 계승되면서 정체성을 실어 나르는 수레와 같은 것이다.
2) 수필의 정체성
본래 정체성이란 아이덴티티(identity)의 역어로서 어떤 대상의 고유한 본성을 일관되고 동일하게, 연속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힘이나 속성을 가리킨다.
정체성을 수필과 연결시켜 보면, 한 마디로 모든 수필 작품에 일관되게 내재해 있는 장르적 본질과 고유성을 일컫는 말이다. 그것은 수필을 다른 장르와 구별할 수 있게 해주는 고유한 본성인 동시에, 수필을 수필답게 만들어 주는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속성들로서 동일성, 연속성, 일관성, 반복성 등을 갖는다.
모든 문학의 정체성은 전통에 실려 시대와 시대를 관통하여 흐른다. 그 불변의 속성들이 문학적 전통을 만들어 내는 본질의 힘이라면, 전통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정체성을 실어 나르는 초역사적 통로가 된다.
필자는 수필의 정체성을 소재의 측면, 화자의 측면, 허구성의 측면, 형식의 측면, 장르의 측면 등 다섯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 수필은 작가의 체험을 기본 소재로 한다.
일반적으로 문학은 상상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상상으로서의 문학은 작가가 꿈꾸는 세계를 허구적으로 창조하여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 행위이다. 따라서 허구적 문학은 핵심 제재까지도 상상력을 동원하여 허구적으로 떠올린 뒤, 개연성 있게 재구성하여 조직한다.
이에 비해, 수필은 전통적으로 작가의 체험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필은 이야기의 근간이 되는 글감을 작가가 직접 자기체험에서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다. 수필을 가리켜 진솔한 ꡐ자기 고백ꡑ의 문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만일 수필의 제재를 자기 체험에서 가져오지 않고, 상상력을 활용하여 전적으로 꾸며낸다면 그것은 진솔한 자기 체험의 고백이 아니라, 허구적 상상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지금까지의 전통에 따른다면, 적어도 수필의 중심 글감은 자기 체험에서 가져와야 된다는 것은 부동의 철칙처럼 보인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수필은 창작 산문이면서도 시나, 소설, 희곡 등의 허구적 상상의 문학과는 다른 비허구적인 체험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상상력에 의해 인공적으로 창조되는 시나, 소설, 희곡 등은 개연성을 중시하는 특성이 있다. 허구성에 의해 꾸며내는 문학은 개연성이라는 객관성을 확보해야만 리얼리티가 자리잡을 수 있고, 사실성이 확보되어야만 독자들의 공감을 획득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수필은 그런 인위적인 노력과 허구적 장치가 필요 없는 순수한 사실 문학의 장르이다. 수필은 전적으로 필자의 직접, 혹은 간접체험을 이야기로 구성하거나 재조직하므로 개연성이나 리얼리티가 기본적으로 소재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필 창작과정에서 허구성이 전혀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수필에서도 미적 감동을 효과적으로 창조할 수 있는 미적 전략과 고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필 작가는 이야기의 근간에 해당되는 기본 골격은 체험에 의존하면서도, 그것을 재구성하여 들려주는 예술적 순서나 방법에서는 허구성의 도움을 받게 된다.
모든 문학작품의 문학성은 기본적으로 언어의 선택과 이야기의 미적 배열방식에서 비롯된다. 같은 이야기라고 해도 어떤 언어를 어떻게 선택하여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주제의 향방이 달라질 수 있다. 헨리 제임스가 ꡐ소설에는 백만 개의 창이 있다ꡑ라고 언급한 것도 언어의 선택 방식과 이야기의 구성 및 조직방식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의 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소재의 차원에서, 수필 문학의 정체성은 작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꾸미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야기의 미적 조직(배열)방법과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수사적 측면에서 동원되는 허구성은 용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 수필은 작가의 실제 목소리로 전달된다.
수필이 다른 산문 장르와 구별되는 두번째 특성은 그것이 작가의 생생한 실제 목소리와 어조(語調)로 들려주는 점이다.
작가가 실제 목소리로 자신의 체험을 들려주면 그것은 고백문학 형태가 된다. 게다가 수필은 자기 자신에게 털어놓는 자기 고백의 형태를 띈다는 점에서 보다 순진무구한 진실성을 보장받게 된다. 자기 자신에게 고백하는 말은 굳이 거짓말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가의 실제 어조와 목소리를 활용하는 수필의 강점이 드러난다. 수필의 고백 형식은 소설처럼 특별한 화자(話者)를 도입하지 않고, 실제 작가가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여타 장르에 비해 비교 우위에 선다.
이러한 서술방법은 이따금 작가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기도 한다. 작가가 자신의 목소리로 사생활을 공개할 때, 일부 독자들이 작가의 삶과 인격을 그릇되게 인식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나 크게 우려할 바는 아니다.
오히려 세련된 작가들은 바로 이런 점을 미적 장치로 활용하여 독자와의 인간적 공감대를 증진시키는 효율적인 통로로 쓴다. 이처럼 수필의 실제 목소리는 이야기의 전달 과정에서 직접적인 감동을 창조하는데 크게 기여할 뿐만 아니라, 장르 차원에서도 리얼리티를 구현하는데 우위를 확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문학이 효율적인 교감과 미적 감동을 창조하기 위해 개연성과 사실성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수필은 이미 독자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는 전략을 구비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시 장르에서도 작가의 주관적 고백의 어조가 채택되지만, 이때 시인의 고백은 허구적 상상의 내용을 고백한다는 점에서 수필과는 다르다. 예컨대, 시의 화자는 퍼소나라는 숨은 화자의 존재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허구적 화자를 통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밖에도 소설이 화자라는 제 삼자를 내세우고, 희곡이 등장인물 각각의 목소리와 행동으로 직접 표출하게 하는데 비해, 수필은 언제나 작가가 자신의 음성을 1인칭 형태로 들려준다는 점에서 특이성을 갖는다.
셋째, 수필의 이야기는 허구적 창작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수필을 제외한 모든 문학 이야기는 허구적으로 창조하였으면서도 사실담처럼 보여주기 위해 ꡐ그럴 듯함의 원칙ꡑ을 동원한다. 허구적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꾸며낸 것이기 때문에 작품과 작가의 삶과의 일치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예켠대, 작가의 실제 삶과 작품 내용의 차이에서 오는 윤리적 책임이나 도덕성도 문제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당연한 문학적 관습으로까지 인정해 준다.
이에 비해, 수필은 허구성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창작론을 배척하므로 그러한 문학적 관습 또한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작가의 삶과 작품 내용은 일치하거나 적어도 유사해야 한다는 것이 수필의 오랜 전통이자 관습이다.
수필과 허구성의 문제는 일부 작가나 학자들 사이에서 첨예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수필의 본성 유지를 위해 허구성을 배척하자는 주장과 수필의 장르 발전과 미학성 증진을 위해 자유롭게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20년 넘게 대립되어 왔다. 이러한 갈등은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있지만, 수필의 오랜 전통과 정체성의 관점에서 보면 비허구적 창조의 길이 보다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물론 독자에게 미적 감동을 주고 카타르시스 체험과 바람직한 인간성 향상의 길을 교시하는 것이 문학이라면, 허구성은 하나의 효과적인 미적 방법을 제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허구성을 창조의 원리로 활용하는 길만이 완전무결한 글쓰기에 이르는 첩경은 아니다. 그것은 그 길에 이르기 위한 한 가지 가능성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수필을 제외한 모든 문학장르가 허구적 이야기의 창조 행위를 통해 완전한 글쓰기의 꿈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수필은 진실한 삶의 고백을 통하여 글쓰기의 이상향에 도달하고자 한다. 이것은 양자간의 명백한 차이점인 동시에 장르적 특성으로 규정짓는 원리가 되기도 한다.
수필이 지향하는 작가의 체험적 삶에서의 진실 찾기는 인간과 작품의 일치를 요청한다는 점에서 허구의 문학보다 한층 진실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보다 인간적이고 윤리적이며 사실적일 수 있다는 장점도 지닌다. 이에 비해, 허구적 창조의 길을 채택하는 장르들은 나름대로 현실세계에서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꿈과 욕망의 세계를 상상적으로 체험케 함으로써 대리만족의 길을 열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허구적 문학과 비허구적 문학의 길은 나름대로 장단점을 지니고 있지만 양자는 각기 불완전한 한 방법에 불과하다. 바람직한 인간의 길이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완벽한 통일이라고 볼 때, 허구적 문학은 상상력의 힘을 빌어 이상세계를 제시하고자 하고, 비허구적 문학은 현실세계로부터 진실한 삶의 길을 직접 제시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들의 조화를 통해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바람직한 문학의 길을 추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수필이 소설이나 시, 희곡 같은 허구 문학의 반대쪽에서 수 천년 동안 비허구 문학의 길을 걸어온 당위성이 여기서도 발견된다. 수필은 허구 문학이 보여주지 못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예술적 감동과 진실을 창조하는 문학이라는 점에서 그 고유성과 예술적 가치가 존중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허구 배척론과 허구 허용론은 비허구 문학과 허구 문학이라는 문학의 양대 줄기를 형성하면서 상호 보완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어떤 주장이 수필의 장르 발전에 바람직한 길을 제공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일이다. 문제는 어떤 주장이든 장르의 경계선을 해체시켜 수필의 정체성 자체를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특히, 소설처럼 흡수력이 센 다른 산문 장르와 구별될 수 있는 수필의 장르적 특성을 포기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수필의 허구 배척론은 바로 이런 점에서 강점을 지닌다.
그러나 허구를 배척한다고 하여 수필 창작과정에서 허구성이 전적으로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무리 체험적 사실(事實)에 바탕을 둔 문학이라고 하더라도 작가가 체험한 내용을 발생 순서대로 늘어놓기만 해서는 예술성 짙은 작품으로 창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재를 예술적으로 재조직하여 들려주는 이야기의 조직 방법은 작가의 미적 특권이자 문학성과 예술성을 창조하는 핵심원리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수필의 근간이 되는 중심 이야기는 비허구적인 작가 체험에서 가져오되, 그것을 문학적으로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예술적 형상화와 서술을 위한 허구성의 틈입은 용인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된다. 이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술이기를 포기한 사실의 기록에 지나지 않게 된다.
사실성에 의존하는 수필의 전통을 해체하거나 버리자는 주장은 수필의 장르적 특권을 포기하는 길이 된다. 사실적인 삶의 이야기를 글감으로 채택하는 것은 오직 수필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런 특성 속에 수필의 장르적 정체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미학원리가 숨어있다. 어떤 형식이나 창작 원리의 채택이 수필을 더욱 수필답게 만드는 길이 아니라, 타 장르의 모방이나 아류로 전락시키는 길이라면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넷째, 수필은 정형화된 형식이 없다
수필의 무정형성(無定型性), 혹은 무형식성의 개념은 가장 많은 오해와 왜곡을 불러일으킨 것 중의 하나이다.
사실, ꡐ무형식ꡑ이란 말이 주는 자유로움과 손쉬움의 이미지는 창작을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수필 쓰기를 쉽게 생각하고, 장르 자체를 가볍게 여기게 하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왜곡 현상은 실제로 한국의 기성문인들에 의해서도 저질러져 왔다. 걸러지지 않은 감정의 남발과 감상적이고 의미 없는 화려한 말들의 잔치를 통하여 청소년 독자층을 의도적으로 겨냥한 작품들이 상업성과 결탁하여 문자화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수필 쓰기를 마치 문학적 잔재주나 여기쯤으로 간주하는 일부 문인들이 문장력만 있으면 아무런 형식 없이 써도 된다는 통념을 만들어 유행시킴으로써 수필 문학은 상당한 평가절하 현상을 맞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장르 폄하 현상은 문학 지망생들의 등용문인 신춘문예 공모에서 수필 장르를 없앤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물론 현재에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극소수의 지방신문이 있긴 하나, 중앙에서 발행하는 대형 신문사의 신춘문예에서 수필 장르가 사라진 것은 오래이다.
이런 문제의 진원지에 놓여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ꡐ무형식의 형식ꡑ론이다. ꡐ무형식의 형식ꡑ이란 말은 형식이 없는 것이 곧 수필의 형식이라는 뜻보다는 오히려, 틀에 박힌 정형은 없으나 작품마다 그에 어울리는 개성 있는 새로운 형식을 창조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수필의 ꡐ무형식ꡑ론은 수필가에게 자유와 구속의 양면성을 동시에 부여한다. 일정한 형식이 없는 가운데서 작품을 쓸 때마다 독특한 형식을 창조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필을 진정으로 아는 작가들이 수필 쓰기의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과작(寡作)을 일삼는 것도 이런 부담 때문이다. 수필 쓰기가 항상 새로운 미적 형식 창조에 도전하는 실험이 되어야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수필은 장르 자체가 요구하는 고유한 형식이 없는 대신 새로운 작품을 쓸 때마다 독창적 형식의 창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한층 난해하고 지적이다. 기다림을 주제로 한 작품에는 그 기다림을 가장 예술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미적 형식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찾는 일은 단순한 체험적 이야기의 배열만 가지고는 달성할 수 없는 깊고 풍부한 문학 예술적 식견과 창조적 재능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수필 작가에게 무형식의 형식이란 말은 예사로운 권면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무제한적이고도 독창적인 미적 형식의 창조를 요구하는 강력한 속박의 언어가 내재해 있다. 수필의 ꡐ무형식ꡑ의 논리는 명작을 꿈꾸는 수많은 작가들에게 항상 영원한 과제로 남아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새로운 수필을 쓸 때마다 도전의 목표로 주어진다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이 쉽다고만 생각해온 수필이 가장 도전적이고 힘든 장르의 정체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도 이런 점 때문이다.
따라서 수필 작가들은 새로운 작품을 쓸 때마다 새로운 형식에 도전하고 새로운 형식을 창조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이러한 부담은 분명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도전정신으로 이어지고, 그런 창조적 실험정신이 수필 장르를 발전시키고 존속시키는 미학적 촉매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수필의 장인들 중에는 ꡐ무형식이 형식ꡑ이나 ꡐ붓 가는 대로 쓰는 것ꡑ이 수필이라는 왜곡된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애써 빚은 수백 점의 백자를 깨고 비로소 한 점의 작품을 건져 올리는 도공(陶工)처럼 수필가의 장인 정신 속에는 끝없는 실패와 도전, 그리고 치열한 실험정신만이 내재한다. 그런 높은 예술적 경지를 체득한 사람만이 던질 수 있는 말이 곧 ꡐ무형식의 형식ꡑ이나 ꡐ붓가는 대로 쓰는 글ꡑ이란 말이다.
그리하여 지고(至高)의 미의식을 터득한 달관자(達觀者)나 수필의 도(道)를 체득한 자에게 바람직한 수필의 세계는 ꡐ무형식의 형식ꡑ이나 ꡐ붓 가는 대로 쓰는 것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말이 가능하다면, 수필 쓰기는 정녕 무위자연(無爲自然)의 한 철학적 실천일 수도 있으나, 범인의 처지에서 수필 쓰기는 여전히 독창적인 형식을 찾아가는 고행의 길이다.
다섯째, 수필은 산문과 운문의 중간 장르이다
마지막으로 수필의 정체성은 중간 장르적 특성 속에서도 발견된다. 운문의 속성과 산문의 속성을 절묘하게 혼융하여 자신의 특성으로 간직하고 있는 장르가 바로 수필이다. 시의 속성을 뽑아 산문 속에 용해시키고, 산문의 속성을 뽑아 시와 결합시켜 창조해낸 이야기, 그것이 곧 수필 문학이다.
수필은 소설처럼 사건과 배경, 인물, 주제 등을 지니고 있지만 소설처럼 길지 않고, 시처럼 미적 감수성이 실린 함축적인 문장을 쓰지만 시처럼 짧지 않은 산문이다. 수필은 소설처럼 재미있되 소설처럼 꾸며 쓰지 않고, 시처럼 서정적이되 지나치게 함축적이지 않아서 평이하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수필의 미학적 속성은 매우 독특한 것으로서 수필이 운문이나 산문과 무관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이런 속성은 20세기 말에 불어닥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이르러 수필을 닮은 시와 수필을 닮은 소설이 출현함으로써 입증되게 되었다.
수필의 이런 장르적 차원의 독특성은 예술 기원설의 하나인 원시종합예술, 즉 발라드 댄스(Ballad Dance)설과도 무관하지 않다. 문학과 예술의 발생 초기에는 오늘날처럼 분화되지 않고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는 주장인데, 요즘 티브이나 영화 등을 통해 확인되는 미개한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제천의식 등을 빌어서 확인할 수 있다.
원시의 제천의식 속에는 언어와 동작, 소리 등이 혼합되어 있었는데, 언어는 문학으로, 동작은 연극이나 무용으로, 소리는 음악으로 분화․발전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원시인들의 종합예술 속의 언어(말)를 문학 장르와 연결시킨다면 운문성과 산문성이 통합, 혹은 혼융되어 있는 형태가 아닐까 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고대의 운문성과 산문성이 혼재된 원시의 종합예술 형태 속에서 수필의 원초적 양식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문학의 특성들을 본질로써 혼융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시적 요소와 소설적 요소, 혹은 희곡적 요소 등을 복합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통일 문학 형태가 수필로서 가능하다면, 미분화 상태의 원시종합예술 속에서 발견되는 원초적 문학 양식은 수필일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수필은 전통적으로 형식의 자유로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시적 요소와 소설적 요소, 혹은 희곡적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지닌다. 또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와서 소설이 수필화하고, 시가 산문화하는 퓨전문학 형태를 보면서, 수필이야말로 운문과 산문을 하나의 장류 속에 통합시킬 수 있는 중간 장르라고 할 수 있다.
3. 수필의 미래와 실험정신
1) 수필의 미래
지금 한국 수필 문단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의 하나는 수필의 미래에 대한 폭넓은 논의이다. 타 장르에 비해 논의 자체가 싱대적으로 저조하면서 수필의 문학적 가치를 폄시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바람직한 대응책을 강구하는 것은 불가피한 문제로 보인다.
이 문제는 곧 수필의 오랜 전통과 정체성을 유지 발전시키면서 장르 차원에서의 자기 변혁을 위한 모색의 길과도 직결된다. 이러한 논의는 구체적으로 당대의 모든 문학적 소통관계자들의 폭넓은 자기 인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작가 집단의 창작을 통한 왕성하고 풍부한 실험정신과 비평가들의 날카로운 비판 및 가치평가, 문학사가들의 작품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적 자리 매김, 학자(이론가)들의 이론적 체계화 작업, 그리고 독자들의 진지한 독서욕구와 독자반응이 상호 보완적으로 소통되며 영향을 주고받을 때 가시적인 성과를 보일 수 있다.
한국 수필의 미래는 전적으로 이들 다자간의 자기 반성적 노력과 협조 여하에 달려있다. 끊임없이 문학사를 되돌아보는 노력과 장르적 발전을 위한 실험적 자세, 그리고 현재의 문제점을 방관하지 않는 독자들의 관심 속에서만 수필의 미래는 보장받을 수 있다. 이러한 모든 노력들은 통합적인 관점에서 수필의 미래와 장르 발전을 위한 유기적 생존 전략에 다름 아니다. 그 중에서도 작가들의 왕성한 창작을 통한 실험정신과 장인정신은 수필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바로미터가 된다.
고대를 풍미했던 서사시가 전성기에 누리던 장르의 힘을 유지발전시키지 못하고 그 전통의 뿌리를 소설과 서정시에게 넘겨준 것은 한 마디로, 장르의 정체성을 변화하는 시대정신 속에서 계승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세의 로맨스가 전성기의 힘을 유지하지 못하고 그 뿌리와 전통을 소설에게 빼앗긴 것도 장르의 전통을 새로운 시대 정신에 맞게 진화시키면서 능동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필의 운명도 같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새롭게 다가오는 시대 정신이나 대중의 욕구와 상호 교통하면서 장르의 정체성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은 곧 수필의 전통을 이어나가는 일이다. 특히, 창작을 통한 장르 발전을 위한 실험 정신은 엘리엇(T. S. Eliet)이 주장했던 것처럼 역사 의식과 시대 정신을 골수에 깊이 간직한 채 전통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작가들의 중대한 창작의식과 사명의식 속에서 피어날 수 있다.
2)수필가의 실험정신
장르 차원에서 볼 때, 수필 작가들의 실험정신은 필연적인 생존전략이자 발전의 원동력이다. 작가들의 실험적 창작은 자발적인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자기 변혁의 몸부림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장르의 미래를 준비하고 개척하는 일이다.
생존 전략의 차원에서 추구되는 실험적 창작 정신의 발현은 철저한 변증법적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 질 때 바람직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러한 자기 모색은 모든 시대의 모든 수필인들에게 주어진 영원한 과제이자 사명이다. 특히, 수필 작가들은 장르 발전을 이끄는 실험적 창작의 선두에 서있는 자들이다.
다양한 실험 과정에서 수필 작가들이 우선적으로 명심해야 할 것은 전통과 정체성의 발전적 계승을 위한 실험 범주의 설정 문제이다. 작가들의 실험 작업은 필연적으로 두 가지 차원에서의 선택을 필요로 한다. 즉, 장르의 전통과 정체성까지도 변혁과 실험의 틀과 대상 속에 포함시키는냐? 아니면, 그들의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보완의 수준에서 부분적이고 부차적인 발전과 실험을 꾀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면한다. 전자가 적극적 실험의 태도라고 한다면, 후자는 소극적인 태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장르의 전통과 정체성 자체를 실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자기 모순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장르의 전통과 정체성의 훼손은 곧 칸트가 예술의 자율성을 위해 제기한 무목적적합목적성(無目的的 合目的性)의 이론에도 위배된다. 예컨대, 자기의 존재 목적을 상상한 문학은 반드시 그보다 힘이 센 타 장르에 흡수되거나 그 존재 자체를 상실함으로써 전통과 정체성을 잃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수필 장르를 위한 바람직한 실험은 전통과 정체성의 보완적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이차적 실험이 되어야 한다. 그 길은 곧 전통과 정체성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새 시대의 이념과 당대인들의 예술 철학적 욕구를 반영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될 것이다.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반영하지 못한 문학 장르나, 새로운 시대의 철학적 이념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문학 장르는 결국 살아남지 못한 채 소멸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환상성과 유토피아적 이상성을 본질로 갖고 있던 중세의 화려한 로맨스가 사실주의 시대를 맞아 죽음을 고한 것은 바로 그런 모델이 되고도 남는다. 엘리엇의 말처럼, 과거의 과거성에 대한 인식과 과거의 현재성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한 발 더 나아가, 다가올 미래 정신에 대한 인식까지 내포하는 힘을 지닐 때, 수필의 미래는 고대 서사사나 중세 로맨스의 전철을 밟지 않고 새로운 전통 계승의 길을 개척하게 될 것이다.
3) 실험적 창작의 길
장르 발전을 이끄는 키는 일차적으로 작가들이 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훌륭한 새 이론이 나오고, 독자들의 새로운 문학적 요구가 제기된다 해도 그것을 작품으로 수용하여 작품화하지 않는 한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이처럼 창작을 통한 장르 실험은 궁극적으로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지만, 그 아이디어는 작가의 단독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비평가와 이론가, 문학사가, 그리고 독자 대중의 유기적 소통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창조적 정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작가의 실험적 창작은 문학사적 맥락에서 기존의 작품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바탕으로 한 보완적인 의미에서의 도전적 성격을 띤다. 기존 작품과 현존하는 작품에 대한 유기적 반성과 성찰은 한 마디로 변증법적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자기 인식과 실험정신은 당대를 풍미하는 보편적 시대정신과 작가의 치열한 역사의식, 그리고 독자들의 수용적 욕구 등을 종합적으로 면밀하게 파악한 상황에서만 현실화될 수 있다.
인간과 시대와 환경의 끝없는 조우와 갈등이 영원한 문학적 탐구의 과제라면, 문학은 유기적이고 다극적 갈등의 한 복판에 서서 늘 독자와 만나야 한다. 그러한 만남을 통해서 문학은 독자와의 상호 텍스트적 교감을 주고받으면서 스스로 설 땅을 굳건히 확보할 수 있다. 나아가, 변화하는 시대, 다가올 역사적 흐름에 적응하려는 독자 대중의 노력, 그리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 보다 가치롭게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인간들의 삶을 작품화하고자 하는 작가들의 노력 속에서 문학은 변증법적 발전의 실타래를 풀 수 있다.
어떤 문학 장르가 번창하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시대정신과 역사적 환경을 당대의 보편적 신화소와 연결시켜 파악하면서, 독자들의 문화적 코드를 정확하게 인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새로운 정신과 문화적 욕구를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문학적 기법과 형식, 구조, 문체 등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포괄적인 모색과 노력은 새 시대에 적응하여 살아남기 위한 문학 장르 차원의 생존 전략이자 도전의 길이다. 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도전과 모색이 없는 문학 장르는 결국 시대 및 독자와의 조응에 실패함으로써 노쇠해 버리거나 유사 장르의 도전에 직면하다가 자취를 감추게 된다.
문학이란 본질적으로 시대, 인간, 환경의 삼각관계가 만들어 내는 의미 찾기에 다름 아니다. 모든 시대는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을 만들어 내고, 그것이 인간의 차원이나 우주(자연)의 차원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유기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작가의 사명에 해당된다. 이 시대의 수필 문학이 변화무쌍한 당대의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담아낼 수 있는가의 문제는 생존 전략적 차원에서도 반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제, 결론적으로 장르 실험의 차원에서 수필 작가들이 창작시 고려해야 할 점에 대하여 언급해 보기로 하겠다. 구체적인 방법을 내놓기보다는 문제 제기의 수준에서 몇 가지만 포괄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실험적 창작시 작가들이 어떤 방법과 양상을 취해야 하는가는 전적으로 작가들의 몫이자 특권이기 때문이다.
첫째, 이야기의 조직 방법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판에 박힌 이야기 방식만 가지고는 세련된 독자들의 감동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새롭고 낯선 이야기의 조직방식은 미적 감동의 충격을 증진시키고 강화하는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조직원리 자체가 새로운 이야기 형식을 창조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쓸모가 있다. 이는 ꡐ무형식ꡑ의 논리를 장르적 정체성의 한 측면으로 갖고 있는 수필의 이념과도 어울린다.
이러한 실험정신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70여 년 전에 이미 주장한 ꡐ낯설게 하기ꡑ의 미학 정신과도 연결된다. 늘 빈번하게 사용하여 익숙해진 이야기 조직 방식만 가지고는 독자들의 상투성과 감각적 타성을 깰 힘이 없다. 독자들의 완만한 감각과 감성의 상투화를 깨지 못하는 한 신선한 감동의 충격은 요원한 일일 수밖에 없다. 독창적이고 낯선 이야기 짜기 방식이야말로 새로운 감동을 창조하는 방법이자 형식 원리가 될 수 있다.
둘째, 다양한 이야기 전달 기법과 미적 장치에 대한 실험적 연구가 필요하다. 문학의 기법과 장치들은 흔히 이야기 조직의 보조수단으로 활용되지만, 문학적 이야기 구조에 역동성을 불어넣고 이야기의 의미구조에 다양한 상징과 변용력을 부여하여 주제의 형상화와 미학성 증진에 크게 기여한다. 예를 들면, 두 이야기를 병치시키는 방법으로 의미와 상징의 울림을 강화한다든가, 몽타주를 활용하여 입체적 의미공간을 확보한다든가, 콜라주를 통하여 생생한 현장감을 제공하는 것도 새로운 수필 문학의 의미공간을 구축하는데 기여하리라고 본다.
셋째, 다양한 형식과 매체의 다중적이고 다층적 사용도 권장할 만하다. 수필과 영상미학을 혼용하여 CD나 DVD로 제작하고, 수필을 작가의 음성으로 직접 낭송하는 녹음방식도 독자의 상상력과 사실성을 강화시키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편지의 형식과 희곡의 형식을 혼합하고, 음악의 소나타 형식을 액자의 형식과 병행하고, 미술의 기법과 시의 형식을 혼용하고, 수사관의 심문 형식과 자기 고백을 오버랩 시키고, 음악의 대위법과 건축의 공간기법 등을 활용한 역동적인 의미 생성방식 등은 분명 새로운 수필의 미적 전달체계를 제공할 것이다. 실험 방법은 무궁무진하지만, 수필 형식은 내용이면서 동시에 주제를 전달하는 의미구조라는 점에서 형식과 의미는 유기적인 통일성을 지녀야 한다.
넷째, 수필의 문장과 문체에 대한 연구도 실험 대상이다.
문학은 결국 언어로 형상화하는 시간예술이다. 문장과 문체는 고정되어 있는 것보다는 작품의 형식과 내용에 걸맞게 늘 변용 시켜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주제와 구조와 분위기에 따라 그들을 전달할 수 있는 언어 형식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모든 작가들의 꿈이자 이상이다. 작가들은 새로운 작품을 쓸 때마다 새로운 형식 실험과 문장 실험을 의도하지만 쉽지 않음을 고백하곤 한다. 한 작가가 쓰는 모든 작품이 동일한 문장 감각과 동일한 문체를 가지고 있다면 기본적으로 형식 실험에 실패했다는 증거이다.
1995년에 타계한 소설가 김동리의 문체가 청년기에 완성된 후 발전을 하지 못한 것은 그의 문학세계를 확충하는데 큰 장애로 작용했음을 저적하는 비평가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궁극적으로 작가의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는 언어 체계와 스타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허구성의 적절한 실험적 활용도 연구 대상이다.
언어를 매체로 하는 어떤 문학적 글쓰기도 허구성의 완전한 배제는 불가능하다. 수필이건, 소설이건, 시이건 간에 언어의 논리적 거리(logical distance)를 불식시키지 못하는 한 완벽한 사실의 전달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실제로 자기가 직접 체험한 소재를 언어로 재구성하여 들려주는 과정에서도 다소간의 허구가 끼여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현실이 이렇다면, 완벽한 허구성의 배제를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또 수필의 정체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문학성과 미학성을 증진시킬 목적으로 허구성을 적절하게 부분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작가의 미적 특권이기도 하다. 허구성을 전적으로 풀어놓으면 소설과 수필, 수필과 희곡의 경계선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요즘 들어 엽편(葉片)소설이니, 장편(掌篇)소설이니 하여 수필보다 더 짧은 소설이 유행하는 것을 보면서 지나치게 완고한 허구성의 배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기본 줄거리는 작가의 자기체험에서 가져오고, 그것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미적 감동과 문학성 증진의 목적을 위해 허구성을 다소 활용하는 것은 수필 세계의 발전에 기여하리라고 본다.
고답적인 자세로 일관하면서, 과거의 전통에만 뿌리를 박고 있거나 장르 실험을 배제한 문학은 어떤 경우에도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4. 결론
수필의 정체성과 실험정신은 수필 문학의 장르적 발전을 가져다주는 두 축이다. 정체성의 힘이 장르의 뿌리와 원형을 보호 유지하는 구심력의 축이라면, 실험정신은 새로운 전통을 개척하면서 새로운 수필의 장르적 영역을 확충해 나가는 원심력의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축의 유기적 상호성은 수필 문학 발전의 이념적 근간이 되면서 작가들이 명심해야 할 양가적 가치가 되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수필 문학의 장르적 전통에 대한 왜곡의 근거를 밝히고 그를 바탕으로 한 정체성의 실체를 정리한 뒤, 수필의 장르발전을 위한 실험적 창작의 필요성을 방법의 차원에서 제기하려고 노력하였다. 수필의 전통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편견들이 수필의 정체성의 약화 현상을 가져왔고, 그로 인하여 독자는 많으나 수필의 미래는 오히려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기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런 문제 의식으로부터 수필의 도전적인 실험정신이 요청됨을 역설하였다.
수필의 장르적 정체성으로는 자기 체험을 소재로 하는 점, 작가의 실제 목소리와 어조를 사용하는 점, 허구성을 기본적으로 배척하는 점, 운문과 산문의 속성을 혼용하는 중간 장르라는 점, 무형식의 형식 실험 등을 꼽았다. 그리고 이러한 장르적 정체성을 보유하면서도, 독자층에는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편견과 형식없이 아무렇게나 써도 수필이 된다고 믿고 있는 점, 그리고 타 장르의 작가들이 여기 삼아 수필의 본성과 무관한 작품을 남발하면서 수필의 장르적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음을 지적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필 작가들 또한 안이한 전통의 향수에만 젖어 실험적 도전을 게을리 함으로써 수필 문학의 위기를 맞고 있음을 논증하려고 힘 썼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야기의 조직 방법과 다양한 기법과 문학적 장치의 실험, 다중적이고 다층적인 형식의 혼용, 문장과 문체에 대한 청조적 실험, 허구성에 대한 융통성 있는 수용 등을 실험의 대상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창작 차원의 적극적이고 다양한 실험 없이는 정체성의 계승이 어렵고, 정체성의 계승 발전을 위한 적극적 노력 없이는 수필 문학의 미래가 밝지 않다는 주장을 폈다.
결국, 수필 문학의 발전은 장르의 구심력을 만들어내는 문학적 정체성과 장르의 원심력을 만들어 내는 실험정신을 양극으로 하여 생성되는 긴장된 변증법적 자기 인식과 성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ì
수필문학에서의 허구 수용문제와
현대수필이나아가야 할 방향
송 명 희
- 부경대교수․문학평론가 -
1. 허구 수용 논쟁은 소모적
수필문학에서 허구 수용 문제와 관련한 논쟁에 관한 결론은 한 마디로 허구 수용 문제를 논의하는 일 자체가 소모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은 그것이 어떤 장르가 되었든 만들어진 허구의 세계이다. 이때 허구라고 하는 개념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작가에 의해 그럴 듯하게 만들어진, 즉 가공의 세계라는 뜻이다.
흔히 수필문학에서 허구성 논쟁은 허구라는 개념을 자신이 경험하지도 않은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내어 쓴다는 의미로 지나치게 단순화시켜서 받아들이는 데서 발생한다. 무릇 문학에서의 허구는 거짓과 동의어가 아니며, 따라서 비난되거나 회피하여야 할 요소가 아니라 문학적 감동과 진실을 배가시키기 위해 선택되는 문학적 장치요, 기술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수필도 문학인 이상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로 허구성을 수용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수필이 단순한 신변잡기를 넘어서서 문학적으로 보다 세련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허구성 수용에 적극적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허구성 수용 문제를 양식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이라는 두 측면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자.
2. 양식적 측면에서의 허구성
소설(novel)은 명칭 면에서 픽션(fiction), 즉 허구라고도 칭하는데, 그것은 있을 법한 이야기, 지어내고 꾸며낸 이야기, 즉 허구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허구야말로 소설이란 장르의 가장 큰 변별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자서전 연구로 20여 년을 바쳐온 프랑스의 필립 르죈(Philippe Lejeune)은 『자서전의 규약』에서 자서전은 저자와 화자, 그리고 주인공 간의 동일성이 성립해야만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에 소설은 저자와 화자-주인공이 동일하지 않음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 그리고 이야기의 내용이 허구임이 증명될 것 등을 규약으로 제시했다. 즉, 소설의 허구적 성격은 화자-주인공이 저자와 동일인이 아닌 가공의 존재라는 점과 이야기의 내용이 만들어진 허구라는 점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소설뿐만 아니라 희곡을 비롯하여 서정장르인 시도 허구적 성격의 장르이다. 즉, 시의 화자(persona)는 그저 텍스트 속의 화자일 뿐 시인인 저자와 동일인이 아니다. 가령,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의 화자를 여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시를 쓴 김소월과 한용운은 잘 알다시피 남성이지 않은가. 남성인 김소월과 한용운이 여성화자라는 허구의 가면을 쓰고 시를 썼다고 해서 그들을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으며, 마찬가지로 「진달래꽃」과 「님의 침묵」에서 진술된 내용을 거짓말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진달래꽃」과 「님의 침묵」은 ꡐ이별ꡑ의 슬픔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시적으로 승화시킨 탁월한 작품으로 한국인의 가장 큰 애호를 받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김소월과 한용운은 이별의 슬픔을 보다 감동적이고 진실되게 표현하기 위해서 실제작가의 젠더(gender)와 다른 여성화자를 선택하는 시적 기술을 취하고 있으며, 이것이 시적 감동을 분명 배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시에서 다루고 있는 이별이란 소재가 소월이나 만해의 현실에서의 직접체험 여부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르죈식으로 말해보자면 저자와 화자가 다르다는 점에서, 또한 시의 내용이 저자의 실제체험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고 만들어진 허구라는 점에서 시는 허구적 장르이다.
구조시학에서는 실제작가와 구별되는 내포작가 및 화자를 명확히 구분하는데, 내포작가는 작가의 진술 토대 위에 재구축된, 오직 텍스트 안에서만 존재하는 작가이다. 이 내포작가의 가치관이나 태도는 반드시 실제작가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화자는 내포작가와 서사물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로서 서술된 사건에 참여하거나 혹은 그것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인물로 가정된다. 화자는 작품 속에 극화되어 있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여전히 텍스트 안에 존재한다.
수필장르에서 양식적 측면의 허구성 수용이란 서사적 양식의 차용을 의미한다. 서사(이야기, narrative)란 일차적인 의미로 ꡐ사건의 서술ꡑ을 뜻한다. 서사의 필수적인 요건은 이야기의 내용과 이야기하는 역할 즉 화자이다. 즉, 사건(event)이라는 내용과 서술(narration)하는 행위에 의해 서사는 성립한다. 그리고 서사물은 서사행위가 결과시킨 것, 일련의 현실 또는 허구적 사건들과 상황들을 시간 연속을 통해 구성해 낸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서사적 양식에 의존하는 서사물에는 소설을 비롯하여 서사시, 극, 신화, 전설, 역사와 같은 것이 있는데, 이것들은 비언어적 양식에 의존하는 영화, 뮤지컬, 뮤직 비디오 등의 비언어적 서사물과 구별하기 위해 언어적 서사물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언어적 서사물에 서사적 수필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필에서 재미와 감동을 확대하기 위해서 서사적 양식을 수용한 예는 오래 전부터 있어온, 또한 흔히 있는 일이다. 여기서 예를 들어보자.
내가 동경을 떠나던 날 아침, 아사꼬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고 있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선생 부인은 웃으면서 ꡒ한 십년 지나면 좋은 상대가 될 거예요ꡓ 하였다. 나는 얼굴이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사꼬에게 안데르센의 동화책을 주었다.
- 피천득의 「인연」에서
적막한 아스팔트 위에는 불규칙하게 밟는 나의 발자국소리만 울리었다. 부상당한 병정들을 실은 적십자 자동차 하나가 지나간다. 아마 그가 있는 병원으로 가나 보다 하고 바라다보았다. 빨간 불길이 솟아오른다. 그리고 그 위로 안개 같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불자동차소리도 났다. 북사천로에 불이 붙은 것이다. 불덩이 튀는 소리와 아우성 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일본 육전대 방색 가까이 왔을 때 패- 하고 탄자소리가 난다. 이어서 기관총을 내두른다. 나는 그 자리에 섰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 오분이 지났을까, 총소리는 그쳤다. 나는 그가 지금 근무하고 있는 시내 클리닉에 도착하였다.
그는 내 손을 잡으며,
ꡒ위험한 곳에 어떻게 오셨어요.ꡓ
그는 나를 자기 일하는 방으로 안내하였다. 총소리 대포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ꡒ고맙습니다. 그러나 저는 책임으로나 인정으로나 환자들을 내버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ꡓ
나는 그의 맑은 눈을 바라보았다.
- 피천득의 「유순이」에서
「인연」은 우리 수필문학사에서 중요하게 평가되는 피천득의 대표적 수필이다. 피천득은 일본여행에서 만났던 아사꼬의 이야기를 쓴 「인연」에서만이 아니라 중국 상해에서의 유학시절에 만났던 간호사 ꡐ유순이ꡑ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유순이」라는 수필에서도 허구적 양식을 차용하고 있다. 「인연」과 「유순이」란 두 작품에서의 1인칭의 화자는 분명 실제작가인 피천득과 동일인물이다. 하지만 이 수필에서 그리고 있는 사건의 중심인물(주인공)은 아사꼬와 간호사 유순이로서 저자-화자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르죈식으로 말하자면 저자와 화자는 동일인이지만 주인공은 동일인이 아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내용, 즉 아사꼬와 유순이라는 여성과의 만남은 저자가 직접 경험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즉, 내용은 허구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양식적 측면에서 두 작품은 허구성을 차용하고 있다. 즉, 사건이 있고, 서술하는 화자가 있다는 점에서 서사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마치 1인칭 관찰자 서술의 소설처럼. 하지만 두 편의 수필은 그리고 있는 내용이 작가 피천득이 직접 경험한 사실이라는 점에서 소설은 아니며, 길이도 짧아 서사적 수필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이처럼 피천득의 수필은 경험적 사실을 허구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보다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인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수필에서 허구성 수용은 수필의 내용을 보다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인상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기술적 장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수필문학은 초창기부터 허구적 요소를 적극 수용하여 왔음을 원로수필가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21세기에도 여전히 허구 수용문제가 쟁점이 된다는 것은 부적절하고 소모적인 논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3. 내용적 측면에서의 허구성
수필문학에서 허구 수용문제는 수필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만을 적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의 문제와 늘 상충해 왔다. 즉, ꡐ경험한 사실ꡑ의 범주를 너무 제한적으로 생각한 데서 발생한 오해이다.
필자가 이미 발표한 「수필문학의 허구성」(수필과 비평 99년 7-8월호)이란 글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 수필의 허구성은 환상성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험적 사실 위에 상상적 환상적 요소가 부가됨으로써 수필세계는 더욱 풍부해진다. 즉, 경험적 자아를 넘어서는 내적 자아의 표현, 심적 현실의 표현이 그것이다. 인간의 자아는 밖으로는 외적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안으로는 나의 마음, 즉 내적 세계와 관계를 맺도록 되어 있다. 심리학에서 외적 세계와 관계를 맺는 인격을 외적 인격이라고 부르며, 내적 세계와 관계를 맺는 인격은 내적 인격이라고 부른다. 내적 인격은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내적 인격은 인간의 무의식에 눈을 돌리게 만든다.
프로이트(S.Freud)에 의하면 무의식이란 의식으로부터 억압된 것, 망각된 것, 미처 의식되지 못한 심리적 내용,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의식에 의해서 인식되지 못한 채 정신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다. 칼 융(C.G.Jung)은 무의식이란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 모르고 있는 미지의 정신세계라고 정의했다. 즉, 무의식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정신세계이다. 자아가 무의식의 내용을 파악하고 그것을 의식화하고자 하면 할수록 무의식은 그의 창조적인 암시를 더욱 활발히 내보내게 된다. 어찌 보면 문학은 자아로 하여금 무의식의 세계에 눈을 돌리게 하며, 그 깊은 층으로 인간을 유도함으로써 창조성을 발휘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필에서 환상성이란 수필가가 체험한 경험적 자아만이 아니라 잠재된 욕구와 무의식적 욕망에 대한 상상적 표현과 미답의 정신영역에 대한 탐구를 의미한다. 문학은 바로 내적 무의식적 꿈을 언어를 통해서 드러냄으로써 창조성을 발휘하는 예술이다. 그리고 언어로 드러낸다는 것은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수필이 사실성을 떠나 허구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로 지평을 넓힌다는 것은 인간의 내적 자아, 무의식적인 측면을 드러내고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러한 수필을 경험적 자아만을 표현하는 리얼리즘 수필과 구별하여 모더니즘 수필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것이다. 무턱대고 있지도 않은 가공의 사실을 창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인간의 잠재의식, 무의식, 미답의 정신영역을 드러냄으로써 사실성을 넘어서는 인간의 내적 진실을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무의식은 직접 관찰이 가능한 정신현상이 아니라 일종의 관념적인 대상, 어떤 경험사실들에 대한 일련의 연역과 귀납의 결과로서 존재하고 정의되는 실체를 가리키며, 우리의 정신현상내에 결핍되어 있는 어떤 것이라고 장 벨맹 노엘(Jean Bellemin-Nol)이 규정했듯 그것은 외적으로 직접 경험한 사실과는 구별되는 정신영역이다.
모더니즘 문학의 가장 대표격인 심리주의 소설은 인간의 진실은 인간의 외면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세계, 즉 잠재된 무의식의 세계 속에 더 큰 진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리얼리즘 소설이 그때까지 구축해 왔던 이론을 전복하며, 베르그송의 시간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윌리암 제임스의 의식의 심리학 등의 영향과 이론을 토대로 하여 그때까지 빙산의 일각과도 같던 외적 세계와 의식의 세계만을 다루던 태도를 벗어나 물 속에 잠긴 잠재된 인간심리, 즉 무의식이라는 더 큰 진실의 세계를 그리는 데 기울어져 갔다. 심리주의 소설은 의식의 흐름, 내적 독백, 자동기술과 같은 기법을 즐겨 사용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기법상의 문제가 아니라 모더니스트들의 인생관과 소설관에서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상징주의 시와 인상파 화가에게서 비롯된 모더니즘은 문학에서는 1910년대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부터 시작된다. 유진 런(E.Lunn)에 의하면 모더니즘은 첫째, 미학적 자의식과 자기반영성을 중시하며 창작하는 과정 자체를 탐구한다. 둘째, 베르그송의 주관적 시간철학의 영향으로 과거 현재 미래로 진행하는 서술적 시간구조가 약화되는 대신에 시간적 동시성, 병치 또는 몽타즈를 즐겨 사용한다. 셋째, 패러독스, 모호성, 불확실성을 특징으로 한다. 넷째, 개성, 통합적 주체의 붕괴와 비인간화를 특징으로 한다.
수필이란 문학장르가 아직껏 직접 경험한 세계만을 다룬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다면, 이는 우리의 시나 소설 장르가 90년대부터 모더니즘의 시대를 지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 속에 놓여져 있는데도 수필만이 유독 모더니즘의 전 단계인 리얼리즘 단계에 지체되어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동쪽 복도를 지나 아랍풍의 무늬가 새겨진 문을 빠져 나올 때였다. 한 무리의 인도인 관광객이 내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그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 앞에 가는 한 여성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ꡒ미라, 이다르 아이예(미라, 이리 와 봐)!ꡓ
그 소리에 한 처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어떤 계시와도 같은 울림이 나를 흔들었다. 아, 그렇다. 내가 전생에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은 미라였다. 이제 모든 것이 생각났다. 그녀의 얼굴까지도, 그리고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의 그 표정과 웃는 모습까지도!
내 마음은 소리쳐 그녀를 불렀다.
ꡒ미라!ꡓ
그 이름이 성의 복도에서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기둥들 사이에선 아직도 그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녀를 만지기 위해 나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현생 속에 존재하고 있었고, 그녀는 전생 속의 사람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와 나 사이엔 한 생이라는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가로놓여 있었다.
나는 환영 속의 미라와 함께 성의 복도를 달려가 다시 야무나강이 내려다보이는 망루로 올라갔다. 오렌지색 석양이 서서히 강을 물들이고 있었다. 밀려오는 기억들을 주체하지 못해 나는 성벽 아래 쪼그리고 앉았다.
- 류시화의 「전생에 나는 인도에서 살았다」에서
인용한 수필은 류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1997)에 수록된 「전생에 나는 인도에서 살았다」의 한 대목이다. 인용한 부분이 소설의 한 장면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 인용한 대목은 영락없이 1인칭의 화자가 전생에서 사랑했던 여인을 만난 사건에 대한 서술이다. 이 작품은 양식적 측면에서 허구성을 채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 측면에서도 환상성을 띰으로써 허구적 성격이 매우 강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지극히 모호하다. 현실의 화자인 내가 전생의 연인을 만난 환상적 사건은 기존의 사실성에 얽매인 수필에 대한 관념을 전복시킨다. 류시화는 시간적으로 현재와 전생이란 먼 과거 시간의 병치, 객관적 시간관념의 붕괴, 미지의 세계인 전생에 대한 무의식, 여행지 인도에서 만났던 한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환상적 욕망 같은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현실세계에서 충족할 수 없는 결핍과 그 결핍을 메우려는 무의식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결핍된 욕망을 언어로써 메우려는 무의식을 드러냈다고 해서 이를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류시화는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서 유려한 문체와 더불어 허구적 요소를 양식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 양면에서 유감없이 발휘함으로써 이 산문집을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4. 상상력의 확대와 현대수필이 나아가야 할 방향
상상력이란 과거에 느꼈던 원물(原物)의 이미지를 재생하는 능력으로서 과거 감각의 이미지를 그대로 옮겨오는 재생적 상상력(reproductive imagination)과 여러 원물들에서 추출된 요소들을 결합해서 새로운 합일체를 구성하는 생산적 상상력(productive imagina-tion)으로 제임스(W. James)는 나눈 바 있다. 제임스가 말한 재생적 상상력은 과거 경험했던 감각적 영상이나 인상이 그대로 나타나는 경우인 반면 생산적 상상력은 그 경험한 요소들이 새롭게 결합해서 창조적 통일성을 이루어 나타난다는 점에서 창조적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술에 있어서의 상상력이란 인간의 체험적 여러 요소들의 결합에 의해서 발생되는 것이기 때문에 체험 없이는 상상력 역시 구성될 수 없다. 한편 콜리지(S.T. Coleridge)는 상상력을 1차적 상상력과 2차적 상상력으로 구별했는데, 1차적 상상력이란 무한한 자아의 영원한 창조활동이 인간의 한정된 정신 안에서 솟아오르는 무의식적 정신작용을 가리키며, 2차적 상상력은 무제약적인 1차적 상상력을 이념화하고 통일하려는 인간의지가 가미된 지성적이고 사회적인 정신작용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러스킨(J. Ruskin)은 정신이 사물의 진실을 뚫고 들어가 진실을 바라보는 통찰적 상상력, 서로 분리하면 부적당한 두 개의 관념을 결합시키고 통일시키는 인간지성의 기계적 능력인 연합적 상상력, 대상을 명상하는 가운데 사상과 정서가 나타나서 체험 전체를 통일해서 표현할 수 있는 명상적 상상력 등으로 상상력을 구분한 바 있다.
현대수필이 나아갈 방향과 관련하여 제임스, 콜리지, 러스킨의 상상력 이론을 원용하여 논의해 보겠다. 그 동안 한국 수필은 과거에 경험했던 영상이나 인상을 그대로 옮겨오는 재생적 상상력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ꡐ허구성 수용ꡑ 같은 논쟁으로 에너지를 낭비해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앞으로는 재생적 상상력보다는 경험적 요소를 새롭게 결합해서 창조적 통일성을 이루는 생산적 상상력이 더욱 요구된다. 또한 콜리지가 말한 1차적 상상력, 즉 무한한 자아의 무의식적 정신작용을 수필창작에 적극 활용해야 한다. 또한 수필문학에서 지성적이고 사회적인 정신작용인 2차적 상상력도 더욱 요청되는바, 수필이 신변잡기적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적 폐쇄성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지적 사회적 상상력이 요청되는 지적인 수필, 사회성이 강한 수필도 다수 나와야 한다는 점에서 지성적이고 사회적인 2차적 상상력이 더욱 요청된다고 본다. 법정 스님의 수필은 불교적 명상이 주요한 개성으로 드러남으로써 수많은 고정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이는 법정 스님이 불교적 사유를 통해 대상을 명상하는 가운데 사상과 정서가 결합되어 통일성을 이루는, 러스킨이 말한 명상적 상상력이 풍부한 수필을 쓰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우리의 수필은 제한적인 경험과 사실의 나열에서 벗어나서 사실을 뚫고 들어가 진실을 바라봄으로써 주제를 심화시키는 통찰적 상상력도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다양하고 풍부하고 깊이 있는 상상력으로 수필의 깊이와 문학성을 더욱 보강해야만 한다.
5. 변화에 유연성을 갖자
허구적 구성과 허구적 인물의 설정을 배제하며, 작가의 도덕적 비전과 기자의 경험적 시각을 결합한 새로운 소설적 경향인 뉴저널리즘 소설은 소설의 가장 큰 변별성인 허구성을 배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소설계에서는 이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소모적 논쟁을 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오히려 소설의 새로움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메타소설은 실제작가가 화자로 직접 등장하며 소설쓰기의 과정, 즉 제작과정을 노출시킴으로써 소설형식이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가공품임을 환기시키는데, 이는 기존의 소설적 관습을 전복하는 새로운 소설쓰기 방식이다. 기존에 소설은 허구이면서도 허구라는 사실을 감춤으로써 독자들의 동일시를 끌어냈다면 메타소설은 소설에서 재현된 현실이 한낱 언어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 허구라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허구와 현실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허구와 현실은 호환 가능한 것임을 입증하고자 한다. 메타소설 역시 뉴저널리즘 소설과 마찬가지로 소설의 기존 관습을 해체했지만 그것 역시 소설의 새로운 양식, 포스트모던 소설의 한 양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현대에 들어와서 소설은 기존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실험적 경향이 강하다. 즉, 현대의 소설가는 사건을 만들어내는 일에서보다는 사건을 증언하고 보고하는 일에 더욱 매력을 느끼고(뉴저널리즘 소설),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소설가 자신을 이야기하고자 하며, 소설 쓰기와 소설에 관해서 사고하고자 하는 자의식을 드러낸다.(메타소설) 그리고 창조적 상상력에 고갈을 느낀 탓인지 과거의 작품을 패러디한다.(패러디소설) 이제 소설의 가장 중요한 변별성으로 여겨지던 허구와 비허구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계가 이런 사실에 대해 소설의 결정적 과오나 결함으로 간주하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새로움으로 적극 수용한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끝없이 새로움과 독창성을 추구하는 것이며, 부단히 기존의 형식과 내용을 해체하고 전복하는 데서 새로움과 발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수필만이 유독 새로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부단한 저항에 부딪혀야 하는 것일까? 이제부터는 그 저항이 수필의 새로움을 저해하며, 수필문학의 발전을 장애하는 요소라는 점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작품의 새로움, 예술성, 재미, 감동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식과 내용에 대한 실험적 모색과 부단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설이나 시로부터 또한 타 예술로부터 많은 것을 차용하고 수용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모름지기 수필문학은 변화에 유연성과 적극성을 가질 때에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새겨두자. ¶ì
수필의 허구도입의 논란과
현대수필의 나아갈 방향
도 창 회
- 전 동국대 교수․수필가 -
1. 수필의 이론 定立에 있어 固定觀念의 타파와 수필의 虛構性에 대하여
필자는 최근 많은 세월동안 수필의 이론정립에 성행되었던 고정관념들을 깨어 버리는 게 우리 수필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생각해 본다. 알게 모르게 우리 수필문단에 무슨 상투문구처럼 용인되어 온 이런 고정관념들이 무엇 때문에 필요한지를 알 수 없다. 필자는 증오를 넘어서 분노까지 일으킬 정도로 안타깝다. 그러면 그런 고정관념의 상투문구를 열거해 보고자 한다.
수필을 ꡐ관조의 글ꡑ이란 고정관념의 상투문구로 치켜드는데 수필이 사색이나 창조의 글로 못가거나 갈 수 없다면 이를 어찌하나?
수필을 ꡐ상상(想像)의 글ꡑ이라고 명명해 놓고 수필의 허구성(fiction)을 배제하면 무엇으로 수필의 문학성을 꾀하려는가?
수필을 ꡐ일인칭의 글ꡑ 또는 ꡐ자조의 글ꡑ로 치켜세우는 바람에 자조(自照)의 영역을 벗어난 수필이 사이비 글로 몰린다면 그 죄를 누가 지려는가?
수필을 ꡐ주관적인 글ꡑ 또는 ꡐ개성문학의 소산ꡑ이라고 강조하는데 주관이나 개성이 배제된 객관성이 강한 몰개성적인 명작이 나왔을 때는 무엇으로 변명하려는가?
수필을 ꡐ광범위한 장르의 글ꡑ이라고 우겨대어 일기문, 여행기, 예찬 글, 심지어 논설문까지 모두 수필이라고 한다면 수필의 예술성(문학성)은 어디서 찾으며 그런 따위의 글을 읽고 과연 문학성의 여운을 맛볼 수 있을까?
수필장르의 확대설인가, 축소설인가, 어느 쪽이 더 진정 우리 수필의 문학성 창달에 이바지할까?
수필을 서정성을 강조한 나머지 서정수필을 하늘 같이 받드는데 서정수필 외의 수필은 전혀 감동을 주지 않는다는 그런 보장이 어디 있는가?
수필은 ꡐ사실적(寫實的)인 글ꡑ로 치부하는데 수필이 창작품 일진데 창조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수필정의에 대한 원의(原義)적 즉 실험적 창작이 어찌 나올 수가 있는가?
수필도 문학일진데 여타 장르에 영향을 입혀온 문학사조나 운동을 외면한다면 어떻게 유미주의(唯美主義) 수필작품이나 또는 이미지즘의 수필작품등이 나올 수 있을까?
이상 질문형식으로 타진해본 질책이지만 필자는 근래 유행해서 그 타성이 골수에 박힌 그런 고정관념의 상투문구들을 싹 없앴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왜 이런 용귀들이 우리 나라에서만 또 우리 수필문단에만 성행을 하는지 모르겠다. 근거를 댈 수도 없는 공언(空言)들이 왜 난무하는지 통 모를 일이다. 이젠 수필의 문학성을 위하여 이런 고정관념의 상투문구들로부터 해방되어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 예서 다시 수필에 허구성 도입 여부에 관한 논란을 새겨보기로 하자.
첫째, 수필에 허구(lie가 아닌 fiction)를 도입함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수필에 허구가 들면 소설이 되어버린다는 염려를 강조한다. 과연 수필이 허구의 일부를 도입한다고 수필이 소설이 될까부냐? 그런 염려는 붙들어 매어도 될 것 같다. 어떤 수필가들에게나 물어보라, 있는 사실(事實) 곧이 고대로 수필을 쓰는 사람이 과연 있는가를. 특히 내레이션(이야기)이 들어있는 수필에서 누가 곧이 고대로 썼다고 한들 그 말을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둘째, 수필은 진실된 글이라고 해서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허구(fiction)는 거짓말(lie)이 아니다. 거짓말은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것, 또 해서는 안 되는 나쁜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허구성이 바로 그런 뜻의 말인가. 그렇지 않다. 소설이나 수필 또는 시에서 쓰는 허구(fiction)는 ꡐ있을 법한 진실ꡑ 즉 가공(架空)의 진실(眞實)을 의미하는 것이다. 진실로 친다면 사실적(寫實的) 사상(事象)보다 어쩌면 허구적인 사상이 더 진실성(truth)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아진다. 허구가 거짓뿌랭이가 아님을 강조해 둔다.
세째, 허구를 배척하는 사람들은 수필에 쓰여지는(用) 것은 상상(想像)이지 허구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왕왕 찰스 램의 작품 「Dream Children(꿈속의 아이들)」의 얘기를 허구가 아니고 상상이라고 둘러대는 것을 본다. 허구는 허구이고, 상상은 상상이다. 어느 누구가 허구와 상상을 못 구분할까? 앞서 말한 것처럼 허구(fiction)은 ꡐ있을 법한 진실(what seems to be)이고, 상상(imagination)는 상상 그것인 것이다. 어찌 허구와 상상이 대비가 되는가? 허구, 곧 있을 법한 진실은 상상을 통하여 발생된다. 다시 말하면, 허구가 상상의 소산이란 말이다. 찰스 램이 발표한 작품 「꿈속의 아이들」은 처음부터 허구로 계획된 작품이다. 램은 홀아비로 살아왔기에 자식들이 없다. 마치 그는 자식이 있는 것처럼 허구로 수필을 썼던 것이다.
이 작품이야말로 ꡐ있을 법한 진실ꡑ, 곧 픽션의 줄거리다.
찰스 램이 있지도 않은 일을 있음직하게 fiction을 사용해서 꾸며 썼는데 마지막에 깨어보니 꿈이었다고 말해서 그럼 그 얘기가 정말 꿈이라고 믿는 바보가 있을까. 이를 픽션이 아니라 상상이라고 고집하는 사람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픽션이 상상의 소산일진데 허구가 상상을 통하여 나온 것을 부정할 생각인가? 따라서 허구와 상상을 못 구분하는 것처럼 망발을 하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는 노릇이다.
넷째, 우리 수필문단중 어느 수필단체의 세미나모임에서 수필은 사실적(寫實的)인 글이며 허구가 도입된 글은 수필이 될 수 없다고 단정지었다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망발이다. ꡒ지구는 정지해 있다ꡓ고 재판장이 판결했다고 해서 지구가 돌지 않던가? 어림반푼 없는 소리다.(피천득 선생이 말했다 싶이) 있는 사실(事實) 그대로 썼든, 허구를 조금 섞어 썼든 그게 진실에 접근하거나 진실에로의 승화가 되었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문제는 사실(寫實)이냐 허구냐가 아니라 작품의 진실성(眞實性)에 있다고 할 것이다. 문제는 있는 사실 그대로 썼든 있을 법한 진실로 썼든 그 작품이 진실(truth)에로의 회기 또 승화가 되면 된다. 고쳐 말하면, 사실(寫實)이든 허구(虛構)이든 수필만 되면 되는 것이 아닌가.
2. 현대수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 보자
① 현대수필 방향을 모색하기 전에 먼저 수필의 창착성에 대해 말해보자. 수필작품은 어디까지나 재생적 상상(reproductive imagina-tion)의 소산이 아니라 창조적 상상(creative imagnation)의 소산임을 바로 알자. 코올리쥬가 말한 제1차적 상상(primary imagination)이 아니라 제2차적 상상(secondary imagination)의 소산이란 말이다. 제2차적 상상이 창조적 상상이다. 시, 소설, 수필, 희곡 등 모든 장르의 문학작품은 한결같이 창조적 상상의 소산임은 말할 것도 없다. 재생적(再生的) 상상이라 함은 옛적에 있었던 기억을 있는 그대로 떠올리는 상상을 말하는 것이고, 창조적인 상상은 글자 그대로 문학 창작에 필요한 상상으로 사고(思考)나 이성(理性)에 호소해서 감각적인 인상들(sensory impressions)을 재구성해 내는 상상을 말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정신적 심상들(mental images)인데 이 심상(心像)들의 재결합이 창조성의 기저(基底)가 된다는 것을 유의해야 된다. 수필문학도 재구성해 내는 상상의 소산작품임을 명념해야 한다. 문학적 창작성(creativity)은 그 사람의 뛰어난 상상력에 의존한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수필작품을 쓸 때 작가의 체험에다 바탕을 두고 출발한다. 이 체험들은 모두 작가의 몸 속에 녹아들어 수필의 제재(題材)로 사용된다. 우리가 한 편의 수필을 쓸 때 체험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서술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체험의 사실적 전사(轉寫)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겪은 체험을 수필화할 때는 반드시 상상력에 의존하도록 되어 있다. 체험의 사실(事實)에서 주제(主題) 등을 발견할 때는 반드시 상상력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상상이 창조의 능력이라고 말한 것은 앞서 말한 창조적 상상이 문학에 소용됨을 뜻하는 것이다. 수필을 혹여 사실적인 진실을 강조한답시고 수필의 픽션 배재를 전적으로 들고나오면 바로 재생적 상상 아닌 창조적 상상의 재구성의 문학성을 잃게 될 염려가 있음을 알자.
② (尹五榮선생이 말한 대로)수필이란 어떤 것이냐가 문제가 아니고 수필이 어떻게 해야 문학이 되느냐가 문제다라고 한 말을 기억한다. 필자도 이 문제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떤 수필이 문학수필이냐가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를 놓고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수필장르의 범위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수필의 문학성을 위해 하나는 수필 범위를 확대하자는 편이고 또 하나는 수필 범위를 축소하자는 편이다. 확장편에서는 서간문, 일기문, 여행기, 감상문, 예찬문 등의 수필류를 수필 범주에 넣자는 의견이다. 진정 작가적 입장에서 이런 류의 글들을 수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초창기나 모색기에 이런 류의 글들을 수필범주에 넣었다손 치더라도 오늘날에도 과연 이런 글들을 문학수필이라고 명명(命名)해야겠느냐? 내 말은 그 말이다. 요새 와서 생활의 여적을 쓴 글들, 감성의 조각들을 모운 글들, 교훈 따위를 늘어놓은 글들, 자기 인생타령을 쓴 글들을 또 어떻게 문학수필이라 일컫겠는가? 실로 심각한 문제이다. 어쩌면 수필의 범위를 극도로 좁힘으로써 오히려 문학수필이 나오지 않을까도 싶다.
③ 우리 수필 아니 수필장르도 다른 장르의 글처럼, 다시 말하면 시 장르나 소설 장르처럼 문학이론, 문학사조, 문학운동을 받아들여 그 이론, 그 사조, 그 운동에 입각한 수필작품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유미주의 시나 유미주의 소설이 있듯이 유미주의 수필작품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서정시, 서정소설, 서정수필이 있는 거와 같이 상징시, 상징소설이 있다면 상징수필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전위수필, 이미지즘의 수필, 주지수필 등 문학사조나 문학운동에 입각한 작품이 나와야 하리라고 본다. 옛 분네가 그런 수필을 못 썼다해도 오늘날 적어도 문학지식이 다양한 작가들은 충분히 그런 창작품을 저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또 이에 따른 문학 비평가들도 우리 수필작품을 멀리 바라다 보고 비평해야 옳을 것이다.
④다음, 우리 수필문단에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대중수필이냐 문학수필이냐 두고 논란을 거듭해오고 있다. 어떤 이는 대중에게 잘 읽히우는 대중수필을 쓰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우기고, 다른 한 쪽은 돈벌이가 안 되고, 읽는 사람이 없더라도 진정한 문학수필을 써야 한다고 우긴다. 다른 장르의 문학에서도 문학의 대중성은 크게 논란이 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전자매체의 시대에 무슨 소리인가, 대중이 읽지 않는 작품은 써서 무엇하느냐고 큰 소리친다. 어떤 이는 단 한 사람이 읽어도 좋으니 그게 진정한 문학이라면 나는 그 길을 택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물론 양자의 입장에 부합된 작품이 나오면 더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하지 못한 게 현실이다. 허나 인류의 보고(寶庫)가 될만한 작품이 처음부터 많은 독자를 데불고 태어나지 않았음을 상기해 주기 바란다.
항상 양(量)보다 질(質)이 우선하는 이치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⑤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또 있다. 우리 수필관과 서양수필관이 다르다는 것 그것이다.
우리의 전통수필관은 대개 서정수필을 선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시다 시피 서양수필관은 유머수필을 좋아한다. 서양 수필은 유머나 위트가 없으면 수필 축에도 못 낀다.
그러나 우리 수필은 감성어린 서정수필에 반해 있다. 허나 어떻게 보면 서정수필만 고집하다 한국적 수필이란 태두리를 영영 벗어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우리 수필이 세계성을 얻으려면 우리의 전통적인 수필인식이나 사고를 빨리 벗어나야 한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국부적인 발전만 꾀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리라. 이는 곧 한국 수필의 체질개선이 필요하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수필관의 고정과념을 과감히 깨버려야 발전이 온다. 세계성에 입각한 우수한 수필을 써야 우리의 장래가 보장된다고 본다. ꡐ우리 것이 최고의 것이다ꡑ라는 고루한 사고는 버릴 때다. 그러면서도 개인의 독창적이고 천재성을 가미하는 작품은 명작이 되리라고 본다. 치열한 산고를 치루며 일탈한 작품을 써야 각광을 받는 작가가 되리라고 본다.
⑥ 또 현대수필에 문제가 되는 것은 시대성이다. 그 시대 작가가 쓴 작품은 그 시대성을 모면할 수 없다고 엘리어트가 「전통론」에 말한 바 있다. 그 시대 서정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작가는 그 시대의 서정으로 쓴 작품이 될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살면서 시대정신을 반영한 작품을 외면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작가의 작품은 작가가 산 시대와 환경과 결코 무관할 수 없음은 재천명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 수필도 시나 소설처럼 시대성을 외면해서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어느 시대에 속해 있고, 그 시대에 속해있는 작가가 쓴 작품은 그 시대의 소산이다.
⑦ 다음은 작가의 작품의 작풍(作風)의 변신(變身)이다. 변신은 형식, 내용, 사상의 변신을 말한다. 우리가 목격한 바이지만 시인들은 자기의 작품에 끊임없이 변신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서정주 시인은 「국화 옆에서」에서부터 사물화(事物化)함으로 「冬天」으로 변신하고, 다시 「화사」의 상징시로 몸을 바꾼다. 또 다시 그는 상징시에서 「신라초」로 영원과 진리에로의 회귀를 꿈꾼다. 이렇게 시인은 작품에 변신을 해가는데, 그러나 우리 수필작가는 단 한 사람도 그의 수필 작품에서 변신하는 걸 보지 못했다. 왜 그럴까? 수필이란 장르적 본질 때문인가? 그도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작품에 변신을 꾀하지 않는가. 필자는 우리 수필작품에도 얼마든지 개인의 변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개인의 변신은 우리 수필문단 모두에 영향을 끼치고 또 우리 수필문단을 발전시키는 터전이 마련된다. 개인은 끊임없는 변신으로 개성있는 명작을 남기길 바라마지 않는다.
⑧ 또 문제가 있다. Formal Essays와 Informal Essays를 쓰는 작가가 따로 있는데 인포말리스트는 많으나 포말리스트가 전혀 없다는 게 우리 수필계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격식을 갖추어 길게 쓰는 철학수필, 곧 Formal Essays가 그리운 요즈음이다. 사고가 깊은 철인(哲人)들이 이런 수필을 시도하면 좋을 것이다.
모두 사수필(私隨筆)만 쓰다보니 포말 에세이가 없어 마음 한 구석 섭섭함을 금할 길 없다. 우리는 언제쯤 미국의 에머슨 같은 포말리스트가 나올까 감감하다.
⑨ 끝으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말은 작가는 애오라지 명작(名作)을 남겨야 한다.
수필을 쓰되 수작(秀作)을 쓸려고 노력하다 보면 매스터 피스가 나올 수도 있다. 명작은 창조적 상상의 미적 형상화로 재구성된 문학수필을 말한다. 작가는 한 평생 동안 한 편이라도 명작을 남기고 싶어한다. 우리 나라의 수필가가 문인협회에 등록된 숫자만 해도 1,200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 많은 수필가들 중에 명작을 쓴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아마추어리슴을 벗어나 프로의 의식으로 치열하게 창작정신을 살리면 반드시 명작 몇 편은 쓰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개인을 살리고 또 우리 문단 전체을 살리는 길은 명작의 생산에 달렸다. 아무리 수필가 많고, 그 많은 수필가가 쓴 수필이 많다해도 그 중에 명수필이 없다면 그 수필들을 무엇에 쓰랴. 우리가 추구하는 최고의 정상은 가장 훌륭한 예술작품의 생산임에랴, 말을 해서 무엇할까. 비옵건데 끊임없는 노력으로 휼륭한 수필작품을 생산하여 자신을 빛내고, 나아가 한국 수필문단의 획기적인 발전을 기해주길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