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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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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첫사랑아, 첫사랑아, 나에게 돌려다오... 댓글:  조회:2210  추천:0  2017-07-24
  + 사랑의 물리학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김인육·시인, 1963-)  + 첫사랑  그대가 꺾어준 꽃,  시들 때까지 들여다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까지  (이운학·시인)  + 첫사랑  한여름 밤  불꽃놀이 축제  그 중에  불발탄  (우순애·시인)  + 첫사랑  그 여름 내내 장마가 다 끝나도록 나는  봉숭아 잎사귀 뒤에 붙어 있던  한 마리 무당벌레였습니다  비 그친 뒤에, 꼭  한번 날아가보려고 바둥댔지만  그때는 뜰 안 가득 성큼  가을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코 밑에는 듬성듬성 수염이 돋기 시작하였습니다  (안도현·시인, 1961-)  + 첫사랑  밤나무숲 우거진  마을 먼 변두리  새하얀 여름 달밤  얼마만큼이나 나란히  이슬을 맞으며 앉아 있었을까  손도 잡지 못한 수줍음  짙은 밤꽃 냄새 아래  들리는 것은  천지를 진동하는 개구리 소리  유월 논밭에 깔린  개구리 소리  아, 지금은 먼 옛날  하얀 달밤  밤꽃 내  개구리 소리.  (조병화·시인, 1921-2003)  + 첫사랑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보았겠지  난분분 난분분 춤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고재종·시인, 1959-)  + 첫사랑과 매화  해마다  첫사랑의 애틋함으로  제일 먼저 매화 끝에  피어나는 나의 봄.  눈 속에 묻어두었던  이별의 슬픔도  문득 새가 되어 날아오네  꽃나무 앞에 서면  갈곳 없는 바람도  따스하여라.  (이해인·수녀, 1945-)  + 첫사랑         막 올리기 시작한 앞머리가  사과 아래에 보였을 때  앞머리에 꽂은 꽃 장식처럼  아름다운 그대라고 생각했지요.  상냥하게 하얀 손 내밀어  사과를 내게 건네주었고  연분홍 빛깔의 가을 열매로  사랑이 처음 시작되었지요.  나의 정신없는 고백의 한숨이  그대 머리카락에 닿을 때에  행복한 그리움의 잔을 그대가  사랑으로 채워주어 마셨지요.  사과밭 사과나무 아래로  저절로 생겨난 오솔길은  누가 밟기 시작해 남아있는지  물어보시니 더욱 그리웠어요  (시마자키 토오손·일본의 시인)  + 첫사랑의 시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열두살이었는데요.  우리 이쁜 여선생님을  너무나 좋아해서요.  손톱도 그분같이 늘 깨끗이 깎고,  공부도 첫째를 노려서 하고,  그러면서 산에 가선 산돌을 줏어다가  국화밭에 놓아두곤  날마다 물을 주어 길렀어요.  (서정주·시인, 1915-2000)  + 첫사랑  나 그대를 사랑하려 합니다.  그대의 낯설지 않은 미소와 눈웃음을 기억하며  그 모든 것이 내 곁을 떠나간다 해도  영원을 약속하렵니다.  그대에게 건네지도 못하는 사랑  나 그대 앞에 나설 용기가 없습니다.  그대에게 내가 누구인지도  애써 밝히지 않으렵니다.  그저 소중히 내 마음의 일기장을 넘기며  오늘 또 한 페이지 그대 모습 그리렵니다.  (문향란·시인, 1971-)  + 첫사랑  첫사랑은 흡연 같은 걸 거야,  처음에는 세차게 빨아들인다.  마시고 난 찌꺼기는  타다가 남은 재,  마신 연기는  가슴속에 심장을 태우고  니코틴이 되어  까맣게 앙금으로 남는다.  그리고 또 남은 연기는  이미 날아갔다.  (이양우·시인, 1941-)  + 첫사랑 그 사람은  첫사랑 그 사람은  입맞춘 다음엔  고개를 못 들었네.  나도 딴 곳을 보고 있었네.  비단올 머리칼  하늘 속에 살랑살랑  햇미역 냄새를 흘리고,  그 냄새 어느덧  마음 아파라  내 손에도 묻어 있었네.  오, 부끄러움이여, 몸부림이여,  골짜기에서 흘려보내는  실개천을 보아라,  물비늘 쓴 채 물살은 울고 있고,  우는 물살 따라  달빛도 포개어진 채 울고 있었네.  (박재삼·시인, 1933-1997)  + 첫키스   너의 입술에서  장미꽃이 피어난다  새들이 날아오른다  새들이 날아가는 호수가 보인다  눈이 예쁜 물뱀 하나 뭍으로 올라온다  꽃밭을 지난다  앵두밭을 지난다  탱자나무 울타리 지나 내게로 온다  흰 벽돌담 넘어 내게로 온다  미끈미끈 내게로 다가오는 어린 뱀은  미끈미끈 내게로 다가오는 너의 혀  두근두근 내 입술에 살을 비빈다  나의 입술에서  빠알간 금붕어들이 쏟아진다  빠알간 코스모스 꽃잎들이 쏟아진다  아 가을이다  나는 손을 쭈욱 뻗어  구름을 따 네 눈에 넣어준다  해와 달을 따 네 입에 넣어준다  하늘 가득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 울려 퍼진다  (함기석·시인, 1966-)  +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어보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가리라  깨끗한 여름 아침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지금보다 더 자주 미소짓고 사랑하는 이에겐  더 자주 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더 자주 안으리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보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상처받는 일과 나쁜 소문, 꿈이 깨어지는 것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벼랑 끝에 서서 파도가 가장 높이 솟아오를 때  바다에 온몸을 던지리라  (장석주·시인, 1954-)  + 첫사랑  아, 누가 돌려주랴, 그 아름답던 날  첫사랑 그때를  아, 누가 돌려줄 수 있으랴  그 아름답던 날의 오직 한 순간만이라도  외로이 나는 이 상처를 키우며  쉼 없이 되살아오는 슬픔에  가버린 행복을 서러워할 뿐  아, 누가 돌려주랴, 그 아름답던 나날  첫사랑 그 즐거운 때를  (괴테·독일 시인, 1749-1832) 
609    시의 첫머리는 독자와 만나는 첫번째 고비이다... 댓글:  조회:1929  추천:0  2017-07-24
  어떻게 첫행을 써야 하는가? / 박제천  시에 있어서 첫머리는 독자와 만나는 첫번째 고비이다. 첫머리에서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없다면 그 작품을 도대체 누가 읽어줄 것인가. 더구나 시는 20행 내외, 길어야 50행 정도이다. 그런만큼 시 독자는 인내심이 없다. 소설이라면 어느 정도 읽어나간 다음에 그 작품에 대한 판별이 서기 시작하지만 시의 경우는 그야말로 짧은 한순간의 눈길로 그 작품을 판단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많은 시인들은 그 첫머리를 특징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온갖 테크닉을 개발하게 마련이다. 아래는 그 첫머리를 유형별로 분석해 본 것이다. 다소 도식적이지만 이러한 기초사항을 눈여겨 봄으로써 자기만의 독특한 첫머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가), 시간을 나타내는 시의 첫행은 매우 일반적이다. 특정한 시간대는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흔히 4계절이나 하루 중 특정한 시간을 제시함으로써 첫행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계절 가운데는 봄이, 하루 중에는 밤이 첫행에서 압도적으로 나타나는 시간이다. 따라서 이런 류의 첫행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복잡하거나 충격적인 어귀를 쓰게 마련이다. 덧붙이자면 단순한 시간대는 피하는 게 현명하다.  ① 봄이에요. 노랗게 목 메이는―이태수 한밤입니다. 자연의 밤―권달웅 ② 이즈막엔―한기팔 어느 새벽―조창환 기인 밤입니다―박용래 ③ 6월 16일은―김영태  ①은 봄이나 밤을 묘사하는 상투적인 표현법에 변화를 가한 예라고 하겠다. 앞은 도치의 방법으로, 뒤는 점층의 방법으로 상투성을 벗어나고 있다. ②는 불특정한 시간대를 설정함으로써 시간에 대한 상상적인 해독이 가능하도록 한 예이다. ③은 오히려 특정한 시간을 제시함으로써 유인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나). 시의 첫행에서 시간을 제시하는 경우보다 공간을 설정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빈도수를 보여준다. 자연 공간 중에서도 산이나 강이 압도적이다. 들과 골짜기, 바닷가, 또는 뜰과 나뭇가지 등등 대체로 시의 모티브가 작품 내부의 공간으로 설정되고 있다.  ① 어딘가에서―윤강로 ② 어머니가 매던 김밭의―이근배 ③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 만큼한 먹오디빛 툇마루가 깔려 있습니다―서정주 사시사철 눈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에서는―김종털  ①은 시간의 제시 방법에서 본 바와 같이 불특정한 공간을 설정함으로써 시의 융통성을 살린 예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첫머리는 다음의 두번째 행이 더 극적이어야 하는 부담을 준다. 또 한 시인이 여러 차례 반복 사용할 수 없다. ②는 시의 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제재(題材)로서 특수한 공간을 설정한 예가 된다. 허나 이 역시 자주 쓰면 상투적이고 도식적일 위험이 있다. ③은 시적 감흥을 위해서 약점을 무릅쓰고 구체적인 사항을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독자들에게 충격을 가하고 있는 예다.  다). 시간과 공간이 첫 행에서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경우는 훨씬 효과적이다. 이러한 표현법은 그만큼 압축되고 간결한 어휘의 구사가 요구되지만 표현상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① 지금 어드메쯤―조병화 ② 12월의 北滿 눈도 안 오고―유치환 ③ 겨울에도 비가 오는 城北洞 기슭―이명수 ④ 나이 스물을 넘어 내 오른 산길은 내 키에 몇 자는 넉넉히도 더 자란 솔숲에 나 있었다―강희근  ①은 불특정한 시·공간을 제시함으로써 막연하고 애매한 기대감을 환기시킨다. ②와 ③은 보다 구체적이다. ②는 ‘북만주’ ③은 ‘성북동 기슭’이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지명이 등장함으로써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또한 ‘눈도 안 오고’와 ‘겨울에도 비가 오는’이라는 관형어절이 특별한 정황을 암시함으로써 갈등을 예고한다. ④는 시간과 공간, 주인공이 한데 어우러진 한 대목을 도입부의 첫머리로 삼고 있어 특이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라). 시의 첫행이 하나의 단어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① 그윽히―허영자 귀여운―김경희 ② 그늘―김현승 누님―서정주 어머니―신석정·양명문 촛불―-황금찬  ①은 부사, 형용사 ②는 명사로 된 첫행의 예들이다. ①은 다음 행에서 어떤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의 출현이 예견되는 표현이다. 우리말의 부사나 형용사는 대체로 시의 첫행에서 자주 쓰이지 않는다. 다음에 수식해야 할 어구가 예견된다는 것은 그만큼 상식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②는 다시 ‘누님·어머니’와 같은 인간 즉 유정물(有情物)과 ‘그늘·촛불’과 같은 무정물(無情物)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다만, ‘누님·어머니’와 같은 경우는 호격조사가 생략되므로 오히려 청각적인 기능이 강화되고, ‘그늘·촛불’과 같은 경우는 회화적인 시적 구성이 예견된다.  마).  시의 첫행이 하나의 단어를 중심으로 수식된다.  ①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김소월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이은상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노천명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이병기  이번 예는 한 단어의 예 가운데 ‘누님/어머니’와 같은 계열에 속하는 한 변형이라고 하겠다. ‘이름/조국’과 같은 추상명사를 의인화시킴으로써 상상력의 변주가 가능해진다.  바). 시의 첫행이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① 이쯤에서 그만 下直하고 싶다―박목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유치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김춘수  이번 예는 앞의 예들보다는 좀더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첫행이 한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 문장의 주어가 1인칭 즉 ‘나’로 되어 있거나 생략된 예들이다. 박목월과 유치환의 경우는 하직과 죽음이라는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박목월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관조하는 듯한 겸양에 찬 어법을, 유치환은 의지적인 어법을 사용함으로써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김춘수는 나와 짐승을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② 풀이 눕는다―김수영 관이 내렸다―박목월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장만영 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황동규 소 한 마리를 잡기로 하였다―송정란  ②의 예는 하나의 문장으로 첫행이 이루어졌으되, 그 주어가 명사어로 된 예들이다. 김수영의 예는 그 주어가 사물이고, 장만영과 황동규는 그 주어를 인간으로 하고 있는 점이 조금 다르다. 그러나 김수영의 ‘풀’은 민족 또는 민중을 상징하고 박목월의 ‘관’도 한 인간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송정란은 소를 통해 시를 상징화하고 있다. 장만영은 ‘길손’이라는 불특정한 주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황동규는 ‘전봉준’이라는 역사상의 인물을 주어로 등장시키고 있다. 최근의 시에 가까울수록 특정한 시간·장소·인물이 시에 등장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대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의 독자적인 개성이 요구됨에 따라 보다 사적인 소재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③ 가난이야 한낱 襤褸에 지나지 않는다―서정주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 사랑은 生 뒤에 온다―정현종  ③의 예들은 3인칭의 주어가 추상 명사로 된 것들이다. ‘가난/사랑/목숨/산다는 것’ 등등에 대한 정의(定義)에 가까운 수사법이 이러한 예들의 근간을 이룬다. 정현종의 경우 두 개의 문장으로서 첫행을 이루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현대시의 발생기에는 그 첫행이 비교적 간결한 경향이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두 개 및 두 개 이상의 복합 문장이 병치되거나 또는 병렬문의 형태로 길어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사). 시의 첫머리를 산문형으로 시작한다  ①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소近處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 꽃나무를熱心으로 꽃을피워가지고섰소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나는막달아났소한꽃나무를爲하여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숭내를내었소―이상 명절날 나는 엄매아배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백석  아).  이밖에도 시의 첫행에 있어서 ‘사랑이 오라 하면·먼후일 당신이 찾으시면·눈 감으면·이 비 그치면’ 등 가정법이 사용되고 있다. 한때 여류 시인들에 의하여 애용되는 것 같았지만 최근에는 관념의 심화에 두드러지게 사용되고 있다.  70년대에 들어, 우리 시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현상의 하나가 시에 대한 다양한 모색이다. 그 중에서도 강우식은 4행시를 보여주었고 그에 반해 산문시, 연작시가 시의 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미당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가 산문시와 연작시의 형태를 보여주었다면, 박제천의 『장자시』는 연작시이자 띄어쓰기를 무시한 의식의 흐름 기법을 도입했다. 그와 더불어 단위 작품에도 산문시가 빈번하게 나타났다. 정진규·박제천 등 60년대 시인들이 자주 쓰는 산문형 흐름은 요즘의 신인들에게 그대로 이어져서 내용의 심화를 이루게 된다.         
608    장마야, 우리들은 널 싫어해... 댓글:  조회:2031  추천:0  2017-07-24
                      + 장마     하늘이여 하늘이여 하늘이시여  억수로 비 쏟아져 땅을 휩쓸던 날.  (나태주·시인, 1945-) + 장마  오뉴월 손님  달갑잖은 손님  잘 치르고 나면  먹구름 속  햇살,  맛볼 수 있다  (김옥진·시인, 전북 고창 출생) + 장마  바람에 누운  풀잎 위로  바쁜 물들이 지나간다     물 속에서  더 짙어진  달개비의 푸른 눈썹     세상은  화해의 손을  저리 오래 흔들고 있다  (강현덕·시인, 1960-) + 장마 장마는  비보다 더 무서운  쓰레기 세례를  퍼부었다  세상은 온통  쓰레기통  집집마다  토해낸  오물들이 즐비하다  하늘의 토악질  장마철엔  우리들도  토악질을 한다.  (류정숙·시인) + 장마  메마른 태양의 이글거리는 빛에  숨죽어 살던 삼라만상의 존재들  한 번 눈물 흘림으로  그칠 줄 모르는 장마가 찾아와  또 다른 숨을 죽여가며 산다.  가뭄과 장마,  한발과 수해  극과 극의 조화 속에  숨죽이며 장마를 맞는다.  기다림의 긴 시간  또 다른 생명들이  홍수로 휩쓸려 떠내려간다.  어찌 나약한 인간의 힘으로  대항할 수 있겠는가.   (윤용기·시인, 1959-) + 장마비 내리는 밤       모두가 잠든 까만 밤  구성진 장마비가 어둠을 채운다  희미한 가로등의 눈썹 끝에 매달린 물방울  부풀어 오른 비만한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산산이 부셔진다  반쯤 열려진 창가에 서서  두 손을 모으듯 가만히 빌어본다  잉태한 교만과 이기심  질긴 탐욕을 꺼내 무게를 덜어내야 한다  순결한 마음과 비워낸 가슴 가득  꿈 하나만 간직하고픈  장마비 내리는 밤  (최다원·화가 시인) + 장마  줄창 울고는 싶었지만 참고  참은 눈물이 한번 울기 시작하니  도저히 멈춰지지가 않는 거지  누군가의 기막힌 슬픔은  몇 날 몇 밤을 줄기차게 내리고  불어터진 그리움이 제살 삭이는 슬픔에  이별한 사람들은 잠수교가 된다  해마다 7월이면  막혀 있던 둑들이 젖어  매일 하나씩 터지는 거지.  (안수동·시인, 강원도 동해 출생) + 장마철 여행 떠나기     며칠을 두들겨대던 빗줄기 끝에  장마는 잠시 틈을 내어 쉬고 있었다.  밤새  길 떠날 이의 가슴엔 빗소리로 엉겨든  불안한 징조가 떠나질 않더니  설핏 잦아든 빗소리가 반가워  배낭을 메고 나선다.  차창에 비치는 산야는 물안개에 잠겨  그윽한데  강줄기에 넘치는 듯 시뻘건 황토 물이  맑고 고요한 물보다 격정을 더하게 한다.  수많은 토사물이 뒤섞여 흘러가는 강물  그 속에 일상의 찌꺼기도 던져 보낸다.  미련 없이.  (목필균·시인) + 장마  습한 바람이 불고  어두운 하늘에서 종일 비가 내린다.  장마의 긴 터널로 들어가고 있나 보다.  장마는  이미 내 안에서 시작되었다.  오랜 아내의 부재 속에서  집 구석구석에 쓰레기가 쌓이고  고장난 세탁기에는  던져 놓은 빨래가 산더미 같다.  한나절이면 음식은 썩어 나가고  저녁이면 멍하니 빈 창가에 앉아  TV를 켜는 것도 잊어버렸다.     이제 나는  맑은 날 틈틈이 빨래를 말리며  햇볕의 소중함을 느낄 것이다.  습기에 상해가는 생의 의욕을 추스르면서  햇볕보다 더 소중한  아내의 귀가를 기다릴 것이다.  (한승수·시인) + 장마 그치고  장마 그치고   허기진 배를 꿈틀거리며  바위틈을 기어 나온  지렁이 한 마리  햇살의 말랑한 젖가슴 만지작거리며  여름 한낮을 물고 포만감에 젖는다  (차수경·시인, 충남 서산 출생) + 장마  빗방울 하나에도  떨어지는 이유가 있네  빗방울 하나에도  잠들지 못하는 이유가 있네  이렇게 하늘이 우는 날  떨어져 멍들은 꽃잎에도  흩어져 내리는 잎새들도  비와 비 사이  서러운 곡예일랑  우산일랑 접어놓고  온몸으로 잔을 드세  슬퍼 누운 꽃잎들에게  하늘이 베풀어주는가  씻김굿의  눈물 한마당  (장성희·시인, 1944-) + 장마  폐허의 담벽 아래, 성스런 신의 병사들이  지구의 왼쪽 관자놀이를 찢는 총성이 울리고  그 피와 살을 받아 핥는  시퍼런 잡초와 갈가마귀의 혀가 비릿하다.  골고다, (우주 배꼽?), 거기, 여전히 신생아들의 울음소리도  들린다지?  안 보았어도 좋을, 흥건히 피에 뜬 조간을 보며  질긴 탯줄을 씹듯 간신히 조반을 삼켰다.  장마가 쉬 그칠 것 같지 않다. (고진하·목사 시인, 1953-)  + 장마  햇볕에 말리고 싶어도 내 마음 불러내어 말릴 수 없다. 더러우면서도 더러운 줄 모르는 내 마음의 쓰레기통 씻어내고 싶어도 나는 나를 씻어낼 줄 모른다. 삶이란 하나의 거대한 착각 제대로 볼 수 없어 온몸이 아프다. (김재진·시인, 1955-) + 장마 뒤     엄마가 묵은 빨래 내다 말리듯 하늘이 구름조각 말리고 있네 오랜만에 나온 햇볕 너무 반가워. (서정슬·아동문학가, 서울 출생)  + 장마 하느님도 우리 엄마처럼 건망증이 심한가 보다 지구를 청소하다가 수도꼭지 잠그는 걸 잊어버린 모양이다 콸콸콸뫌, 밭에 물이 차서 수박이 비치볼처럼 떠오르고 꼬꼬닭도 알을 두고 지붕 위에서 달달 떨고 새로 산 내 노란 우산도 살이 두 개나 부러졌는데 아직도 콸콸콸콸 하느님, 수도꼭지 좀 잠궈 주세요. (조영수·아동문학가, 충남 유성 출생) + 칠월령 - 장마    칠칠한 머리채 풀어  목을 놓아 울고 싶구나  뼈가 녹고 살이 흐물도록  이승 너머 저승까지  모질게 매듭진 인연  그만 녹여 풀고 싶구나. (유안진·시인, 1941-) + 장마 비는 잠시  그치고  내 생각은 영영  잠기고,  (김안로·시인) + 장마  내 머리칼에 젖은 비  어깨에서 허리께로 줄달음치는 비  맥없이 늘어진 손바닥에도  억수로 비가 내리지 않느냐,  비여  나를 사랑해 다오.  저녁이라 하긴 어둠 이슥한  심야라 하긴 무슨 빛 감도는  이 한밤의 골목어귀를  온몸에 비를 맞으며 내가 가지 않느냐,  비여  나를 용서해 다오.  (천상병·시인, 1930-1993) + 장마 바람에 누운  풀잎 위로  바쁜 물들이 지나간다                  물 속에서  더 짙어진  달개비의 푸른 눈썹                  세상은  화해의 손을  저리 오래 흔들고 있다  (강현덕·시인, 1960-) + 장마 무렵  하찮은 말에도 생채기는 생겼다  예전의 넉넉함은 어디로 가고  불평만 습성처럼 쌓이는지  재채기와 콧물과  발열 두통을 호소하던 하늘  끝내 오한으로 드러눕는다  가시 박힌 손톱 밑이 얼얼하더니  터질 듯이 부어오른다.    (김희경·시인)     + 장마 일년에 한 번은 실컷 울어버려야 했다 흐르지 못해 곪은 것들을 흘려보내야 했다 부질없이 붙잡고 있던 것들을 놓아버려야 했다 눅눅한 벽에서 혼자 삭아가던 못도 한 번쯤 옮겨 앉고 싶다는 생각에 젖고 꽃들은 조용히 꽃잎을 떨구어야 할 시간 울어서 무엇이 될 수 없듯이 채워서 될 것 또한 없으리 우리는 모두 일 년에 한 번씩은 실컷 울어버려야 한다 (최옥·시인) + 장마의 추억  어릴 적 장마는 긴 기다림이다  물 새는 지붕과 벽면 곰팡이가  전장의 기념비 같은 커다란 지도를  상처처럼 남겨  고단하게 살아가던 궤적으로 쌓였다  우묵 배미 안마당  정강이 넘게 흙탕물이  문지방에 찰랑거릴 때쯤  붉은 기와 용마루에도 틈이 자라서  하늘이 보이고  천장을 적시며 영토를 넓혀가  물받이 그릇이  방 안 가득하던 시절에도  우리는 강가로 물 구경 갔다  (강정식·시인, 1941-) + 장맛비가 내리면 한 사나흘  나도 물이 되어볼란다  내리는 비만 탓하지 않고 나도 물이 되어볼란다 독방 속에 갇힌 수인(囚人)처럼 단단한 내 마음의 벽안에 갇혀  벽지만 후벼파던 결별의 세월 아, 이제사 나도 물이 되어볼란다 제 모양만 고집하지 않고 담기는 대로 네가 되어주는 자유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 이제사 나도 바다로 가볼란다 (홍수희·시인)  + 장마철을 나는 법   "얘야, 잘 여문 곡식도 장마철엔 벌레 슨다 바깥 공기 들지 않도록 잘 묶어라 차고 서늘한 곳에 두는 것도 잊지 말고 자칫 구멍 나면 다 버려야 한다" 어머니는 오늘도 전화로 나를 보관하는 법 조용히 일러주신다 귀 닫고 입 닫고 제 숨통 틀어막고 버티는 일이 온전하게 잘 사는 것이라고 숨이 막히고 가슴이 끓어도 어머니가 계시는 한 나는 내 삶의 봉지를 구멍 낼 수 없다 (문숙·시인, 경남 하동 출생) + 장마  긴 슬픔이 있는 날에는 장맛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나뭇잎들이 미친 듯이  목놓아 울다보니 시궁창이 범람했다  미움  원망  사랑해서 사랑해서 어쩌지 못한 그리움  폭풍우 휩쓸고 가면  맑은 하늘 쌩긋 미소 짓는다  긴 아픔이 있는 날에는 장맛비 내렸으면 좋겠다  거친 숨소리 바람에 실려 가면  넋이 나간 듯이 찾아오는 쉼표  늦은 오후 뽀얗게 하늘 열렸다  사뿐해진 발걸음  개망초 꽃이 기운 몸을 일으키며  다시 흐드러진다  산다는 건 그런 거야  흔들리며 사랑하며  원망하며 그리워하며  쓰러져도 풀씨 하나 남기는 거야  (오순화·시인)      
607    "시인이 되면 돈푼깨나 들어오우"... 댓글:  조회:1862  추천:0  2017-07-24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기적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 것의 베개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을 씻어 내린다/ 노신(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上海) 호마로(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거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 김광균 ‘노신(魯迅)’  시인은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한 회의(懷疑)로 불면의 밤을 지샌다. 젊은 나이엔 열정 하나로 가난을 이겨냈지만 나이 들수록 생활의 짐이 어깨를 짓누른다. 시인은 노신을 생각한다. 노신은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다 문필로 조국에 기여하겠다며 문인의 길로 들어섰다. 좌·우파 협공을 함께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이념문학을 비판했다. 상업학교를 나온 회사원 김광균은 결국 시작(詩作)을 멈추고 사업가의 길로 들어서 무역업으로 성공했다. 먹고사는 것에 관한 시인들의 방황은 60년 뒤라고 다를 게 없다.  ‘시인 되면 어떻게 되는 거유/ 돈푼깨나 들어오우// 그래, 살맛 난다/ 원고 청탁 쏟아져 어디 줄까 고민이고/ 평론가들, 술 사겠다고 줄 선다/ 그뿐이냐/ 베스트셀러 되어 봐라/ 연예인, 우습다// 하지만/ 오늘 나는/ 돌아갈 차비가 없다.’ / 한명희 ‘등단 이후’  문학지 시 한 편 고료가 3만~5만원. 원로들이나 10만원을 받는다. 시집을 5~6권 낸 중견도 새 시집을 2000부쯤 인쇄한다. 다 팔린다 해도 한 권에 4000~5000원이니 인세로 100만원이 수중에 떨어진다. 100~300권을 자기가 사서 나눠 보는 문단 풍습을 따르자면 적자다. 다른 직업 없이 전업 시인으로 살기란 여간 고단한 일이 아니다.  ‘―MENU―// 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바쉴라르 1,2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 오규원 ‘카프카’  이 커피집 메뉴는 세계적 예술가와 석학들이다. 예술과 철학이 상품화·규격화·도구화한 시대를 빗댄다. 그중 카프카가 가장 싸다. 시인의 제자는 생활인으론 제일 가난한 시인이 되려고 시를 공부하겠다고 한다. 시인은 주변머리 없는 제자가 ‘미쳤다’고 혀를 차지만 속으론 기특하게 여긴다. 이 자조적(自嘲的) 시엔 시인의 자존심이 반어법으로 숨어 있다. 하이데거는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 쓰는 일이고 가장 죄 없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김종삼의 시인론은 거창하지 않다. 가진 것 별로 없어도 착하고 넉넉하고 따뜻하고 슬기롭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시인이라고 말한다. 무구함으로 세상을 떠받치고 삶을 밝히는 풀잎기둥들이 시인이라고.  ‘내가 다닌 대학에는 많은/ 국문학적 얼굴들이 있다. 그중/ 국어학 교수 얼굴들이 흔한 말로 가장/ 고상하고 원만하고 이른바 정품이다/ 막말로 그중 교수답다. 그 다음/ 고전문학 교수 얼굴들이 약간은/ 축 늘어지거나 모가 나거나/ 그렇게 조금씩 비뚤어졌는데/ 이것도 막말로 정품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즉 교수 얼굴이라 해도/ 크게 구라가 아니다. 건데/ 현대문학 교수 얼굴들은, 딱 깨놓고 말해서/ 이건 교수 얼굴이 아니다/ 짓눌려서 짜부라지고/ 모가 나서 날이 서 있고/ 일그러지고 찌그러져, 이건 참말로/ 영 교수 얼굴이 아니다. 건데 건데/ 이상하게도 말이다. 그 짜부라질 대로/ 짜부라진 현대문학적 얼굴들이/ 진짜 얼굴로 다가오는 거 있지/ 대학 다닐 땐 지긋지긋하던 얼굴들이/ 너무너무 보고 싶은 거 있지/ 나이 사십 넘어서니까 그게 바로/ 내 얼굴인 거 있지, 문득문득 그 얼굴들/ 막 껴안아주고 싶은 거 있지/ 건데 건데 말이다/ 그보다 더한 국문학적 얼굴이 있는 거 있지/ 그게 박재삼이나 김수영 같은 얼굴인데/ 중풍병에 걸려 손을 덜덜 떠는/ 말라비틀어진 명태같은 박재삼 얼굴이나/ 내 詩에조차도 침을 뱉아버릴 것 같은/ 독하기가 왜고추 같은 김수영 얼굴이/ 진짜 진짜, 진짜 얼굴로 다가오는 거 있지/ 막, 눈물나게, 다가오는 거 있지.’ / 서림 ‘내 사랑하는 국문학적 얼굴들’  스스로 국문학 교수인 시인은 국문학 전공 교수들을 정품, 준정품, 개성품으로 분류한다. 그중에 시인의 얼굴이 가장 입체적이고 개성적이라고 우스개처럼 품평한다. 진짜 인간적이고 매력적인 얼굴이라고 결론짓는다. 자유롭고 창조적이고 누가 뭐래도 자신만의 개성이 또렷한 사람들이 시인이라는, 애교있는 자찬론(自讚論)이다.  시인은 맹인가수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심안(心眼)으로 꿰뚫어보고, 들리지 않는 우주의 소리를 섬세하게 들어 낸다. 보통사람이 보고듣지 못하는 것에 감응하고 교감한다. 그렇게 해서 시인은 사람들 일상에 새로운 서정의 울림을 불러일으킨다.  ‘이태리 맹인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눈 먼 가수는 소리로/ 느티나무 속잎 틔우는 봄비를 보고 미세하게 가라앉는/ 꽃그늘도 본다. 바람 가는 길을 느리게 따라가거나/ 푸른 별들이 쉬어가는 샘가에서 생의 긴 그림자를/ 내려놓기도 한다. 그의 소리는 우주의 흙냄새와 물냄새를/ 뿜어낸다. 은방울꽃 하얀 종을 울린다. 붉은 점 모시나비/ 기린초꿀을 빨게 한다. 금강소나무껍질을 더욱 붉게 한다/ 아찔하다. 영혼의 눈으로 밝음을 이기는 힘!/ 저 반짝이는 눈망울 앞에 소리 앞에/ 나는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 허형만 ‘맹인가수’  평론가 김재홍은 시인을 이 시대의 곡비(哭婢)라고 했다. 초상집을 돌며 곡소리가 끊기지 않도록 상주(喪主) 대신 곡(哭)을 해주는 노비라고 했다. 시인은 뭇사람을 대신해 시대의 아픔과 슬픔을 통곡하고 사람들의 절망과 좌절, 그리움과 괴로움, 고통과 비탄을 곡진하게 울어준다.  ‘저 여자/ 내 전생의 저 여자/ 부엌 칸 부뚜막에/ 암코양이처럼 걸터앉아/ 막걸리 한 사발/ 꿀물 마시듯 꿀떡꿀떡/ 시퍼런 김치 줄기에 돼지고기 보쌈해/ 야무진 입매 다시는/ 나무비녀 쪽진 머리/ 푸르죽죽한 낯빛의/ 눈꼬리 샐쭉한/ 소복의 저 여자/ 조붓한 어깨 들썩이며/ 아이고 아이고/ 진양조 단조로/ 어수선한 상가(喪家) 분위기/ 휘어잡고 있는/ 저 여자/ 울음을 웃음처럼/ 갖고 노는/ 내 전생의/ 저/ 여자.’ / 이명주 ‘곡비’  시인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맑게 해주고 가슴과 머리를 씻어준다. 때로 사람이 밉고 사는 게 힘들 때 한 편의 시는 무엇보다 큰 위안이다. 연민·진정·사랑으로 열심히 살아라 도닥거려 주는 시인들이 많아서 그나마 이 시대가 살 만하다. 좋은 시에 대한 기다림은 옛 당(唐) 시인을 모시던 시동(侍童)의 마음이다.  ‘주먹코인 저야 베옷 입어 마땅하니(巨鼻宜山褐) 눈썹 짙은 주인님은 글을 지으셔요(龐眉入苦吟)/ 주인님이 시를 노래하지 않으시면(非君唱樂府) 만추의 가슴앓이 누가 알겠나이까(誰識怨秋深).’ / 이하(李賀) ‘시동의 노래(巴童答)'     
606    백합아, 나와 놀쟈... 댓글:  조회:2078  추천:0  2017-07-24
    백합을 소재로 한 시(모음)     * 백합, 백합, 백합               -김언희-   자웅동체 암수 한 몸 지척지간 한배 새끼 나는 나와 생피 붙는다 (불륜의 향기는 코를 찌르고 목을 조르고 눈구녕을 후벼파고) 씩씩거리는 향기의 여섯 발굽에 비끌어매여 이토록 찢어지고 있는 육시처참의 나는     * 백합의 말                  -이해인(수녀 시인)-   지금은 긴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만나 되살아난 목숨의 향기   캄캄한 가슴속엔 당신이 떨어뜨린 별 하나가 숨어 살아요.   당신의 부재조차 절망이 될 수 없는 나의 믿음을   승리의 향기로 피워 올리면   흰 옷 입은 천사의 나팔 소리   나는 오늘도 부활하는 꽃이에요.       * 백합                    -송연우-   모시빛 햇살이 꽃술 속에 앉아 속삭인다   발바닥이 간지러워 제 몸의 무늬 밟으며 꽃으로 피어나고   눈부신 오월 누군가 꽃으로 나팔을 분다   풀벌레, 새 울음에도 시나브로 나는 향기 긴긴 하루       * 백합                    -이금순-   뜰 안의 모란 지고 나면 6월이 기다려진다오.   심신이 지친 이들의 영혼을 달래 주려고 경적을 울리는 나팔을 불어 동서남북으로 불어라. 축배의 노래를 불어라. 행진교향곡을 불어라. 찬송가를 부르자.   갈증을 삼키고 침묵의 소리로 홀연히 피어나는 한 떨기 백합이여! 이 세상 무엇과 비길 것이랴! 홀로 영광과 높음이어라.       * 베란다의 백합                -배인환-   백합 같은 아내가 약혼을 하고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 백합을 한아름 안고 왔다.   시집올 때에는 구근을 가지고 와서 화단에 심었다. 단독주택 화단에서 잘 자라 향기 짙은 꽃을 매년 피웠다.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백합은 화분에 심겨 옮겨졌다. 처음 몇 년은 향기 없는 꽃을 피웠다.   (첫 눈이 내리는데 아내는 겨울 모자를 눌러 쓰고 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간다)   봄이면 그래도 실낱같은 줄기를 계속 밀어올린다.   내년 봄에는 퇴직을 하면 작은 구근을 캐내 야생화 옆에 심어야겠다.       * 백합의 미소                   -유응교-   그대가 때때로 고단한 몸으로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백의의 천사가 되어 조용히 그대 곁에 있는 시간이 저는 무척 행복합니다.   그대가 때때로 외로운 몸으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할 때 하얀 미소를 보내며 정겹게 그대 곁에 있는 시간에 저는 무척 보람을 느낍니다.   그대가 때때로 즐거운 맘으로 창가에 서서 노래를 부를 때 저도 한껏 가슴을 열어젖히고 나팔을 불 수 있는 제 모습에서 저는 삶의 기쁨을 누립니다.       * 백합 향기                        -권달웅-      버스가 화원 앞 정류장을 지날 때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백합 한 다발을 안고 올라왔다.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본다. 새하얗게 언 차창으로는 앙상한 플라타너스가 지나가고 버스에 탄 몇은 쿨룩거린다. 갑자기 버스 안은 백합 향기가 난다.작업복을 걸친 젊은이가 일어나 노인을 부축한다. 콩나물 봉지를 든 아주머니가 흐뭇하게 웃는다. 그 아주머니를 보고 책가방을 든 학생이 웃는다. 나는 그 학생을 보고 웃는다. 변두리로 가는 버스에는 앙상한 플라타너스가 흔들리고 고단한 몇은 웃는다. 누구에게 주려는 백합일까. 밖은 살을 에는 찬바람이 부는데 버스 안은 온통 백합 향기로 가득하다.       * 백합                   -정연복-   땅 속 어둠을 뚫고 솟아오른 빛인가   하늘에서 내려온 빛의 천사인가   네 앞에서 세상의 어둠은 슬슬 뒷걸음치고   네가 있어 아직 세상은 희망의 빛으로 충만하다.   너의 티없는 맑음으로 내 마음 물들고 싶어라   너의 지고한 순수로 내 영혼 멱감고 싶어라   너처럼 너의 모습처럼 깨끗한 사랑을 하고 싶어라.   제아무리 짙은 어둠보다도 더 밝은 빛이여        
605    "해안선을 잡아넣고" 매운탕 끓려라... 댓글:  조회:1959  추천:0  2017-07-24
3. 창의적 표현을 위한 교수 학습방법과 평가 이 장에서는 '주변의 소재로 그리기'라는 시 창작방법을 원용하되 개인의 경험과 문학적 감수성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변용시킨 두 편의 텍스트를 통해 이미지의 선택과 조직, 표현방법이 시 창작교육 상황에서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가를 검토하고 창작주체들의 작품이 생산되는 과정도 검토해보기로 한다. 시 창작교육은 학습자를 비롯한 여러 교육의 변인에 따라 교육 내용이나 수준이 결정되기 때문에 여러 국면을 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본고는 대학교 문예창작학과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수업을 토대로 한 것이며 낮은 단계에서도 적용될 수 있도록 조정되었다.  3-1 교수 학습방법 창작 지도는 동기유발과 지도과정 및 지도 내용이 중요하다. 이런 과정을 수행하기 위해 유의해할 것은 내용이나 주제 중심의 수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수업은 작품을 감상하는 데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나 창작주체의 텍스트 생산방식을 통한 감상과 실제의 창작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창작을 위한 텍스트의 온전한 해석을 위해서는 그 같은 관례적인 해석과 감상의 방법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기형도의 한 편의 텍스트를 예로 들어 논의를 진행해 보도록 한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엄마 걱정]({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위 텍스트는 제7차 교육과정 {중학교 국어} 1-1, '문학과 사회' 단원 '생각 넓히기' 란에 학생작품 [아버지가 오실 때]와 함께 실려 있는데, 그 아래에는 "생활하면서 겪은 일이나 느낀 점을 소재로 삼아 시를 한 편 써 보자."는 지문을 제시하고 있다. 단원의 성격과 관련시켜 볼 수는 있겠지만, 내용만 제시하고 시를 창작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운율과 이미지까지 같이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 텍스트의 교육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아래 수용자의 태도 역시 편향적인 면이 발견된다. 어린 시절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어 본 적이 있습니까? 엄마는 시장에 '열무 삽십 단'을 팔러 나가 언제 올지 모르는 빈 공간에서 말입니다. …… 빨리 돌아와 주었으면 하는 '나'의 마음이 어느덧 바깥으로 귀를 기울이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배추잎 같은 엄마의 피곤한 발소리는 들려오지 않습니다. 해는 저물어가고 '내'가 있는 빈 방에는 정적마저 감돕니다. …… 나는 그만 무서워집니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조그마하고 누추한 빈 방에 팽개쳐진 '나'는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해봅니다. 혼자 침을 묻혀가며 엄마가 올 때까지 지루함과 무서움을 이기기 위해 '나'는 일부러 천천히 숙제를 합니다. 놀이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는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혼자 빈 방에 엎드려  훌쩍거립니다.  이러한 '내' 마음을 아는지 금간 창 틈을 때리며 비가 옵니다. 나는 유년 속으로 들어가 있는 아이입니다. 그러나 2연에 들어서면, 어느덧 훌쩍 성장해 어른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유년의 그 순간, 그 빈 방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홀로 내팽개쳐진 유폐된 공간에서 보내었던 그 유년의 추억을 생각하면 더욱 눈물이 납니다. 어머니가 부재(不在)한 그 공간 말입니다.  확실히 이 시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주체의 고통스러운 회감으로 읽힌다. 즉 자아의 일부로 들어와 앉아 있는 그 시절(의 '뜨거운' 경험)을 통해 자기 정체성(Identity)을 확인하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는 이미지 형상화와 같은 디테일을 통해 얻어지는 거시적인 차원의 것이라 할 때 이 시의 창작과정을 추적하는 데는 일관된 이미지의 조합으로 읽어내는 구성력에 대한 학습이 필요하다. 이 때 수용자에게 필요한 것이 맥락 속에서의 시 읽기이다. 위의 감상이 빠트리고  있다고 판단되는 부분을 이미지 선택과 조직 부분을 중심으로 서술해 보자. 이 텍스트 역시 앞의 텍스트들과 같이 창작주체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 혹은 풍경 내에 있는 주변 소재들-'열무 삼십 단', '찬밥', '배추잎', '윗목'-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고, 마지막(2연)으로 경험을 종합하는 서술의 초점화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다만 독창적인 부분은 창작주체가 방안에서 숙제를 하면서도 열무를 이고 시장에 간 엄마가 언제 돌아오실까 하는 생각에만 사로잡힌 어린이의 심리에 맞춰서 이미지를 구축하고 배열하는 데 있다. 어린이에게는 현실세계(눈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거나 듣는 순간 그것은 자신이 고민하는 것들로 대치된다. 열무가 다 팔려 빨리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나'의 머리 속의 강박은 몰두하는 그 기호(열무)를 연상시키는 감각 이미지들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유사성(선택)이나 인접성(배열)의 혼란을 야기한다. 이 때 '열무 삽십 단'은 "해는 시든지 오래", "배추잎같은 발소리"(열무→배추, 발의 모양과 배추잎의 생김새의 유추 및 피곤의 이미지.) 같은 계열체의 표현을 이끌어낸다. "찬밥처럼 방에 담겨" 역시 밥통과 방의 유사성과 인접성의 혼란에서 기인한 것이다. 해가 지다(a') +열무가 시들다(a") →해가 시들다(A) 와 같은 창조적 사고를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작업은 구체적인 단계에서 사고 능력 향상이라는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또 이미지 구축 단계에서 이미지 선택은 창작주체에게 경향성을 드러내게 해 주기도 하는데, 이 시에서 드러나는 식물성 이미지-열무, 배추잎, 찬밥-는 공간에 홀로 던져진 어린 아이의 수동성, 순수성, 나약성을 드러내는 간과할 수 없는 특징을 형성한다. 이런 형상화 능력은 이미지 조직을 통한 의미구성 교육에서 효과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  이미지는 형태를 만들어내고 정돈을 하며 관계를 맺는 것이다. 또 이미지와 관련을 맺는 다른 이미지와 이미지간의 체계적 연결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경우 새롭고 참신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는지, 그것이 다른 부분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창작주체가 생활하고 있는 세계와 관련하여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고 있는지 등이 검토되어야 한다. 이미지의 구상과 구축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관성 확보를 위한 전략을 따라가면 훨씬 더 깊이 있는 수업을 실행할 수 있다. 주변 소재로 이미지를 구축하고 대상을 초점화하고 있는 또 다른 작품을 수업에 적용시켜 보기로 한다. 이 작품은 앞선 작품들과 같은 방식을 쓰고 있되 소재를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이 작고 구체적이다. 이런 류의 텍스트는 시 창작을 공부하는 학습자들에게는 훨씬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수업효과도 당연히 커진다.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정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 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로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 김영남, [정동진역]({정동진역}, 민음사, 1998)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을 창작주체는 이렇게 밝히고 있는데, 이 진술을 통해 우리는 창작주체가 이미지를 어떻게 구상하고 구축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정동진역 풍경을 그리는 데 모두 정동진역 근처에 있는 소재들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소재들은 실제로 정동진역에 다 있던 것들입니다. 억새꽃, 벤치, 모래사장, 라면집, 소주집, 소나무 등등……. 그래서 열차가 들어오는 역이니까 겨울이 오는 것도 "겨울이…도착…"으로 했고, 라면집도 "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이는 라면집"이고, 소주집도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실제로 라면집을 묘사해야겠는데 구불구불한 소재를 찾으니까 산 능선, 도로, 해안선 등이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주변 소재에 어울리는 게 바로 해안선이었어요. 소주집도 묘사해야겠는데 배, 수평선, 갈매기, 파도 등이 보이더라고요. 이 중에서 파도가 가장 운치 있는 소재로 생각되었어요. 이렇게 주변소재로 둘러대었더니 읽는 사람마다 반하더군요.  이런 시의 창작은 직접 경험 현장 방문을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며, 여행 안내 책자나 사진을 통해서도 충분히 활용하여 봄직한 방법이다. 창작주체는 정동진역의 풍경을 그리는 데 비유의 보조관념이 되는 이미지들을 모두 정동진역 주변에 있는 것으로 선택함으로써 보다 선명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 때 구상된 이미지는 당연히 선택과 배제의 과정을 통해 구축된다. 예를 들어 "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이는 라면집"이라는 표현에서 '해안선'은 구불구불한 속성을 가진 대상들-산 능선, 해안 도로, 해안선 등의 계열에서 선택, 배열된 것이다. 창작주체는 구상단계에서 삼양라면(a')과 산능선(a"), 해안 도로(a"'), 해안선(a) 등 몇 개의 이미지를 추출한 뒤 조정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 단계에서 제일 먼저 제외된 것이 a'이다. 누구나 아는 평범한 것으로는 시적 즐거움과 감동을 줄 수 없다. 다음단계에서 고려된 a", a"'와 a 가운데서는 어느 것을 선택하더라도 신선함은 유지하지만 라면의 모습과 가장 닮아 있는 a가 선택되게 된 것이다.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잔을 주고 받기 좋은 소주집"도, '친구→배, 수평선, 갈매기, 파도→파도'의 이미지 구상단계를 거친 것이다. 다음으로는 일관된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가 하는 검증단계에 들어서는데, 이 때 이미지 계열체를 사용하여 전체 이미지의 흐름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기형도 시에서 적용되었던 것처럼("해는 시든지 오래"), 이 시에서도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열차 이미지, 강조 필자),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천정"(좁고 고즈넉한 이미지) 등 전체 문맥이 조정된다. 창작주체가 이미지의 구상과 구축단계(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생산 방식과 배열하는 방식), 검증 단계(일관된 이미지로 통일하는 문제 등)를 거치면서 미학적으로 새로움을 가진 시로 환골탈태할 수 있는 것이다. 3-2 창작 및 평가 주변의 소재로 이미지 만들기 방식은 당대의 문화적 조건과 함께 자신의 스타일로 수용하기만 하면 그 소재 속에 표출된 이미지들이 다른 공간 속에서 다른 의미의 창출로 개성적인 형태를 띨 수 있으며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이제는 수용자들에게 그 방식을 활용하여 직접 창작하게 함으로써 이 방식의 묘미를 체득하도록 한다. 이 때 초보자들인 창작주체들에게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관건은 쓸 거리로 어떤 환경이나 자료를 제공하느냐에 있다.  자신이 현재 보고 있는 주변의 사물(혹은 공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창작주체의 입장을 고려하여야 한다. 창작주체는 창작을 행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창작교육이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창작과정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창작주체 자신에 대한 이해도 선행되어야 한다. 필자는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이 형광등, 침대, 커튼, 그림 등이 있는 방에 갇혀 한 여자를 그리워하면서 책상에 골똘히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려 보라.", "[엄마 걱정]에서 드러나듯 어린 시절의 자신이 그 공간 속에 들어 있는 집을 주변 소재를 활용, 실감 있게 그려 보라"는 구체적인 창작환경을 제시하였다. 아래는 첫 번째 환경에 응답하여 그린 텍스트이다.  그는 책상과 함께 한 여자를 침대처럼 그리워한다 그의 얼굴은 형광등처럼 창백하지만 마음을 커튼처럼 열어젖히고 밤늦도록 간절함을 족자처럼 그녀를 향해 내걸고 있다 - 황재윤, [사춘기] 이런 작품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 주변 소재를 있는 그대로 활용하여 몇 개의 이미지를 추출한 뒤 구체적인 시 창작 틀에 맞게 그것을 조직하고 재구성하는 훈련을 과정을 거쳐서 생산된다. [사춘기]는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주변 소재를 활용한 이미지 만들기라는 소기의 교육성과를 거둔 예라 할 수 있다. 위의 텍스트에서 책상, 침대, 형광등, 커튼, 족자 등은 창작주체의 창조적 사고의 발현과정을 통해 전혀 새로운 이미지로 거듭나고 있다.  이 텍스트는 아직 비유되는 사물에 따라 동사가 달라지는 등 일군의 이미지를 선택하고 그러한 선택 속에서 일정한 경향성이 형성되는 이미지의 통일성에까지 다다르지는 못했지만 선명한 이미지 제시를 통해 나름의 미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반복된 학습을 통해 영역(공간) 체험의 사실성, 구체적인 묘사, 서사자질 능력이 향상되면서 일정 수준의 텍스트를 산출할 수 있게 된다.  이 때 창작주체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이미지 구상 훈련을 해 나가야 한다. 매너리즘에 빠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창작주체는 전문작가보다 더 참신한 이미지를 구상할 수도 있다. 후속작업으로 "집으로 가는 길의 모습을 그 주변의 소재들을 통해 참신하게 표현하라."는 제목을 주고 그 표현과정을 함께 점검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창작주체의 개성에 맞는 방법론을 터득하는 가운데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작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다. 다음은 이 방식의 대상 텍스트로 활용한 시들에 대한 꼼꼼한 고찰과 이미지 구상훈련을 시행한 후에 생산된 텍스트로 읽힌다. 아침해가 다른 곳보다 일찍 돋는 마을 지문이 박힌 어머니의 옥토와 할아버지의 씨오쟁이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 마을에 가면 만삭의 아낙처럼 배부른 집들 신라인의 진신사리를 모셔놓고  둥그스레한 어깨 서로의 키를 낮추며 울타리도 없이 이웃해 살고 있다 문패와 자물쇠가 없는 마을  항아리 깊숙이 타임캡술을 내장 시키고  가끔 설화들 뛰쳐나와 어둠 쌓인 마을을 돌며 둘러앉은 화롯가에 두런두런 밤새 이야기를 지폈다 밤새들 부는 피리 소리를 들여앉히고 빗살무늬 옹배기에 달빛 물든 차를 우렸다 싸락눈 내리는 골목길에도 더운 김이 저녁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할머니 반짇고리 손때 묻은 말씀들 호젓이 남아 돋을새김 하는 마을 여기서는 미움이나 원망, 절망까지도 향기로운 꽃씨가 되고 있다 할아버지 씨오쟁이 속 씨앗들 봉긋봉긋 천 년 잠을 깨어나는 어머니의 기름진 땅 - 김일용, [古墳群 마을] 이 텍스트는 창작주체 나름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는 차용과 변용으로 조직된다. 구체적으로는 대상 텍스트들 중 주로 [정동진역]을 모방하면서 독자적인 미학으로 승화시킨 경우라 할 수 있다. [정동진역]과 이 텍스트는 시의 구조, 전개방식, 표현법에 있어서 유사하다. 특히 '∼이(가) 다른 곳보다 일찍 ∼는 장소'/ '그 마을에 가면 ∼하는 ∼가 있다'/'∼가 ∼하는 곳(장소)'라는 시 형식과 리듬전개의 방식은 흡사하다. 그러나 패러디적인 글쓰기가  '고분군 마을'이라는 특정의 공간에 맞는 소재의 이미지들로 구축되고 배열되었다는 점에서 이 텍스트는 선행 텍스트와 변별성을 가진다.  이 텍스트를 새롭게 하는 요인은 이미지를 구축하고 시적 문맥에 맞게 조직, 재구성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아침해, 지문, 할아버지의 씨오쟁이, 만삭의 아낙, 배부른 집들, 진신사리, 둥그스레한 어깨'(1연) '항아리, 화롯가, 옹배기'(2연), '반짇고리, 꽃씨, 씨오쟁이 속 씨앗들'(3연) 등 무수히 드러나는 둥근 이미지는 하나의 질서를 형성한다. 이렇듯 유사한 이미지를 통해 유사한 의미망을 구축하는 기법과, 끝 부분에서 "봉긋봉긋 천 년 잠을 깨어나는/어머니의 둥근 땅"이라는 구절을 삽입, 대상을 하나로 초점화하는 방식에서도 선행 텍스트를 나름으로 수용하고 재창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1, 2연에 나타나는 선행 텍스트와의 지나친 유사성, 둥근 계열 소재의 과도 노출, 그것을 하나로 잇는 동사의 연계([엄마 걱정]의 '시들다', [정동진역]의 '도착하다'와 같은) 부족 등은 아직 구상과 이미지 조직 훈련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古墳群 마을]은 이미지가 적절한 주변의 소재를 통해 짜여지며 시를 한 폭의 동양화처럼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시 창작 교육 수업의 실제를 통해서 표현의 측면에서 이 시 창작방식이 효율적이며 실제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4. 맺음말 본고는 먼저 주변 사물에서 이미지를 선택, 구축하는 방식을 시 창작에 활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다. 본고는 수용활동과 창작활동의 통합을 통하여 창작교육의 전체상이 구현될 수 있음에 착안하여 수용과 창작과정에 이미지의 선택 및 실현양상을 같이 적용했다. 여기서 주변 사물은 특정한 작은 공간에서 출발하여 넓은 공간, 같은 문화권 등으로 확산될 수 있는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밝혔다.  본고는 주변 사물이나 소재에서 이미지를 선택하는 대표적인 경우로 백석의 텍스트를 우선 추출하고 이 방식이 후대 시인들의 텍스트에서도 활용되고 있음을 작품을 통해 확인하였는 바, 그 활용양상은 각 창작주체들의 경험과 수용방식에 따라 일정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음도 밝혔다. 다음 단계로 필자는 학습자들에게 이 방법을 어떻게 수용시키고 또 활용하여 창조적인 표현으로 산출할 것인가에 대한 교수 학습방법과 평가 방식을 도출하였다. 그 결과 여기서 시도한 시 창작 교육이 지닐 수 있는 효과를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1. 수용의 측면에서 보면 시적 형상화와 이미지의 질서에 일관성을 유지함으로써 미적 완결성을 크게 돋보이게 하는 할 수 있고,  2. 실제 창작의 측면에서는 1)창작자의 예술적 표현을 촉진시킬 수 있고, 2)상상력을 자극하고, 인지·정의적 사고 능력을 신장시킴은 물론, 3)사고를 명료화시킬 수 있으며, 4)자신의 주변의 사물로 묘사하는 과정을 통해 자아의 정체성을 탐색하게 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특히 창작 주체의 개별 경험과 개성에 따라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을 실현시킴으로써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시적 구조의 모방이나 패러디 혹은 변형을 통한 창작교육의 단계에서 더 나아가 창조적 글쓰기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게 할 수도 있다고 본다.  논의 과정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논문은 선행 텍스트에 대한 후행 텍스트의 영향관계를 밝히는 것이 주 목적이 아니라, 특정한 비유의 선택을 통한 시 창작 방법을 제시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음을 밝힌다. 여기서 제시한 시 창작교육이 현장에 제대로 적용되기 위해서는 다소의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과정의 탐색을 통해서 상호텍스트성에 대한 연구와 이미지 계열체의 일반화 문제 등도 진척될 여지가 충분하다고 본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를 기약한다.    
604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것은"... 댓글:  조회:1790  추천:0  2017-07-24
    그대 그리워지는 날에는 - 스템코프스키   그대가 몹시 그리워지는 날에는 함께 한 지난 날들을 떠올리고 함께 할 멋진 날들을 기다리며 하루를 보냅니다 그대 미소가 그립습니다 그대 미소는 나를 사랑한다는 미묘하면서 감출 수 없는 표현임을 나는 압니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따뜻한 위안이 되고 의심과 두려움을 녹여줍니다 또한 그대의 미소는 깊고 진지한 사랑만이 가져다 주는 행복감과 안도감을 나에게 줍니다 그대 손길이 그립습니다 그 어떤 손길보다도 따뜻하고 포근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나는 그립습니다 그대는 나의 반쪽 지금 내가 바라는 삶은 우리 삶의 모든 경험을 아낌 없이 나누는 삶입니다   그래도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 - 로지   사람들은 말하곤 합니다. 이세상에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사랑 그거 별거 아니다. 또는 사랑의 아픔을 겪어본 사람들은 다시는 할게 못된다...등등 우리는 사랑에 대한 여러가지 정의들을 내리곤 하지요. 하지만 제게 있어 사랑은 아름답기만 합니다. 왜냐구요. 사랑을 하고있는 사람들은 그 어느 누구보다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하면서 뒤따르는 고통, 아픔, 이별. 모두다 사랑을 하지 않으면 겪어볼 수 없는 아주 소중한 것들 이니까요. 아픔의 강도가 클수록 그 사랑은 정말 크고 값진 사랑이 아니었을까요? 사랑은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아름답습니다...   그 사람에게선 - 문향란   사랑하는 사람에게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고 싶고  떠나는 사람에게선  가장 슬픈 그리움이고 싶습니다. 자고 나면 잊을까 두렵고  날이 갈수록  망각의 테이프를 두텁게 감을 것 같아  서러워 하늘 한번 쳐다보지만  무언의 입술로 또 한번 절망케 합니다.  끊이지 않는 새벽강의 허리처럼 변치 않고파  서로 멀리 있지만  지나온 길은 그저 허무 뿐  못내 아쉬워 눈물 훔칩니다. 떠나는 사람에게선 가장 슬픈 그리움이지만  그 사람을 진정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아름다운 여인이고 싶습니다.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 조병화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일이 어려서 기쁘리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오늘이 지루하지 않아서 기쁘리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늙어가는 것을 늦춰서 기쁘리 이러다가 언젠가는 내가 먼저 떠나 이 세상에서는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것으로 얼마나 행복하리 아,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날이 가고 날이 오는 먼 세월이 그리움으로 곱게 나를 이끌어 가면서 다하지 못한 외로움이 훈훈한 바람이 되려니 얼마나 허전한 고마운 사랑이런가   그대 앞에 나는 - 김경호   그대 앞에 나는 한 포기 들풀이어도 좋다. 갈밭에서건 봄뜰에서건 나는 혼자여도 좋다. 목숨처럼 삼아온 일도 사랑처럼 지녀온 일도 멀리 바라보면서 이 가을에는 갈대처럼 서 있고 싶다. 버리며 사는 일과 주고 사는 일과 가끔은 잊고 사는 일에 한 때는 표절된 그림처럼 멋적은 시간도 있었지만 묵은 잡지의 때 지난 이야기처럼 눈물 같은 얘기 하나 간절한 말 한 마디도 모를 일로 하고 이 계절에는 혼자서, 나 혼자서 텅 빈 마음이고 싶다. 그리하여 겨울이 오는 날 그대 앞에 나는 마지막 잎새로 남고 싶다.   그대를 마음의 말로 사랑한다함은 - 김득진   나 그대에게 인간의 말로 사랑한다함은 그만큼 그댈 사랑하지 않는다는 얘기요 나 그대에게 사상의 말로 사랑한다함은 어쭙잖은 지식의 가면 놀음이요 나 그대에게 행동의 말로 사랑한다함은 그대보다 내가 더 소중하다는 얘기요 나 그대에게 마음의 말로 사랑한다함은 그 무엇보다 그대가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리움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 고은별   떠나야 할 때 떠나야 할 곳으로 떠날 줄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슬픔일지라도 그 사람을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나의 동반자와 그 사람의 동반자를 위하여 기꺼이 그 자리를 비워둘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니기에 이별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별을 해야 한다는 것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혼자서만 사랑하는 사람의 넋두리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대에게 필요한 사람 - 박흥준   돈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면 난 그대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사람입니다 배운 것이 아주 많아 여러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을 원한다면 난 그대를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겠지요 눈이 부실 정도로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그대가 그려오던 배우자라면 난 그대의 그림자조차도 볼 수 없는 사람이겠지요 하지만 사랑하는 이의 뜻이기만 하다면 기꺼이 자신의 뼈를 깎아 기둥을 세우고 자기의 살을 벗겨 지붕을 만들어 사랑하는 이의 쉴 자리 만들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그대 진정 원하신다면  이 세상 나만이 그대 사랑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겠지요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 천양희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산 넘어버렸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강 넘어버렸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집까지 갔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걸 위해 다른 것 다 버렸지요.  그땐 슬픔도 힘이 되었지요.  그 시간은 저 혼자 가버렸지요.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었지요   그대의 별이 되어 - 허영자   사랑은 눈멀고 귀먹고 그래서 멍멍히 괴어 있는 물이 되는 일이다 물이 되어 그대의 그릇에 정갈히 담기는 일이다 사랑은 눈 뜨이고 귀 열리고 그래서 총총히 빛나는 별이 되는 일이다 별이 되어 그대 밤하늘을 잠 안 자고 지키는 일이다 사랑은 꿈이다가 생시이다가 그 전부이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그대의 한 부름을 고즈너기 기다리는 일이다   그대가 있기에 외롭지 않아요 - 다이안 웨스트레이크   낮이나 밤이나 나는 당신의 존재를 느껴요. 당신은 비록 손을 뻗어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없지만, 내 마음 속에 있는 사랑스런 그대는 언제나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할 때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에게 다가옵니다. 그대가 있기에 나는 외롭지 않아요.  그대 없기에 더 이상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 정구양   사방이 온통 나무일 때 나는 내가 나무인 줄 알았다. 빈 벌판에 비만 내리고 있을 때 나는 내가 비인 줄로만 알았다. 흰 새가 나를 물고 날아 올랐을 때 나는 새가 된 줄 알았다. 지금 나는 없다. 어느 날 그대 다가와 내 안에 강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 나를 만들더니 어디론가 가 버린 지금. 그대 가던 날 그대처럼 나도 떠났나 보다. 그대 없기에 더 이상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603    시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창조성의 요인은 바로 상상력이다... 댓글:  조회:2327  추천:0  2017-07-24
이미지 선택방식을 통한 시 창작 교육* - '주변의 소재로 그리기'를 중심으로 - 손진은 1. 문제의 제기 제7차 교육과정의 문학과목에서 그 이전의 과정과 두드러진 차이점을 보이는 것은 작품의 수용과 창작에 있다. 즉, 제6차 교육과정 문학과목의 주안점이 문학 작품의 이해와 감상에 있었다면 지난 2000년부터 적용되고 있는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문학 작품의 수용과 창작으로 비중이 옮겨가면서 창작이 문학 과목의 중요한 내용으로 설정되었다. 이는 창조성을 기반으로 하는 창작이 훈련에 의하여 향상될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된 기획이라 판단된다. 시 창작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창조성의 요인은 상상력이다. 창조적인 표현과 비유는 상상력에서 연유한다. 이미지는 상상력의 작용에 의해서 생산되기 때문이다. 같은 사물이나 대상을 바라보고서도 사람들이 각각 다르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상상력 때문이다. 코울리지는 상상력을 수동적인 사물(the passive things)과 능동적인 정신(the active thoughts)을 결합하는 매개적 정신능력(the intermediate faculty)으로 정의하면서, 이를 인간의 직관적 인식능력과 관련된 일차적인 상상력과 대상에 대한 인식을 언어로 창조하는 이차적 상상력으로 나누고 이 중 이차적 상상력은 시인의 체험을 자각적으로 언어화하는 과정에 작용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일차적 상상력과 이차적 상상력의 차이는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을 언어로 표현하느냐의 여부에 있다. 그러나 문학교육에서의 상상력은 시인인 주체가 대상을 인식하고 이를 언어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학 작품 창작에서의 상상력'과 실제 문학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작용하는 '문학 작품 수용에서의 상상력'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시 창작 교육의 장에서는 창작과 수용에 작용되는 두 가지 상상력을 통합, 신장시켜주는 모델이 바람직할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본고에서도 창작교육의 과정에서 창작과 수용의 상상력을 통합하는 방향으로 논지를 전개하고자 한다.   본고에서는 창조적 상상력을 유발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로 '주변의 소재로 그리기'라는 방법을 활용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작품들을 창작교육에 활용하고자 한다. 우선 필자는 백석의 텍스트 중 [北新]을 선택하고, 여기서 사용된 창작 방식이 후대 시인들인 문태준, 기형도, 김영남의 텍스트에서 창작주체들의 경험과 수용방식에 따라 개성적으로 표출되고 있음을 밝히며, 수용자들에게 이 방법을 활용하여 창조적인 표현으로 텍스트를 생산시키기 위한 교수 학습방법과 평가 방식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그동안 문학 교육에 관한 논의들 중에서도 문학적 글쓰기 연구를 통해 일반적인 표현교육 내지는 창작교육에 활용할 수 있는 표현방법을 구안해 낸 성과로는 이지호(1997), 최미숙(1997), 최인자(1997) 유영희(1999), 염은열(1999), 김혜영(2000) 등의 연구를 들 수 있다. 이들 논의는 문학작품의 표현방식을 귀납적으로 연구함으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과 표현 방법이 결합되어 있음을 밝힌 사례라할 수 있다. 그러나 각 작가나 작품을 통해 귀납적으로 추출해낸 표현 방식이 보편적인 표현방식으로 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즉 매개에 대한 연구가 보완되지 않는다면 작가마다 독특한 표현방식을 밝혀낸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창작교육에 관한 최근의 논의로서 주목되는 것은 정끝별의 것인데, 그의 일련의 연구는 패러디, 알레고리, 환상(판타지), 그로테스크 등 시학의 변화에 힘입어 부상하게 된 새로운 규범들이나 장치를 통하여 시 교육 방법을 개발하려는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정끝별의 논의는 새로운 시도로서 충분한 의의를 지니고 있지만, 새로운 문화 경향에 대한 이해와 그 문학적 적용에 무게가 놓여 있고, 상상력을 부추기고 창작욕구를 유발하는 그런 핵심화의 원리에는 아직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질 필요가 있다. 전자가 내재적인 관점이라면 후자는 외재적인 관점이라 할 수 있다.  본고는 전자처럼 내재적인 입장에 서 있지만 작가의 작품에서 도출된 표현방식이 보편적인 표현방식으로 화할 수 없었던 기존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를 교육현장에서 적용 가능한 모델을 개발로 연결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아울러 본고는 이런 연계화의 방법을 통해 학습주체들에게 우리 시사의 전통을 함께 체험할 기회를 가지도록 함으로써 외재적인 관점이 가지고 있는 단점도 넘어서려 한다.      본고는 시 텍스트의 창작 방법과 과정을 특정 이미지의 선택과 조직의 원리를 통해 확인하고 특정 시인의 창작원리에서 도출된 방식이 후대의 시인들에게 실현되고 있는 방식을 함께 고찰하며 이의 원리를 보다 정교하게 창작주체의 창작에 활용함으로써 '교실창작'에서는 물론, '문단창작'에도 적용시킬 수 있도록 구안되었다. 교육의 대상자들은 대학 국문학과(국어교육과) 내지 문예창작학과 1학년생들이며 고등학교 학생들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도록 수준을 조정하였다. 아울러 본고는 이미지의 선택과 조직의 원리가 각 단계와 이행과정에서 더욱 구체화되고 보다 정교하게 내재화되는 방법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이는 모델의 개발과 적용이라는 본고의 성격과 창작의 속성상 후대 창작주체들이 앞선 창작주체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새롭고 개성적인 요소들을 산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 이해 및 감상을 위한 적용의 실례 문학교육의 지향은 기본적으로 표현과 이해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문학교육의 지향은 이해의 측면에서 학습자가 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하고 감상하는지에 초점이 놓여져 왔다. 본고에서 텍스트의 생산, 즉 창작에 초점을 맞추려는 것도 이러한 경향을 극복하려는 데 기인한다.  본고에서 이러한 의도로 시도하려고 하는 것은 창작주체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 또는 '풍경' 내에 있는 주변 소재들로 이미지화하는 방식이다. 이 때 대상 혹은 풍경은 '지역' 혹은 '문화권'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 방법은 일찍이 백석이 시도했고 후대의 창작주체들이 계승하고 있는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백석의 이런 창작경향은 그동안 소홀히 다루어 온 감이 있다. 이숭원은 이런 시적 경향을 포함한 백석 시의 특징을 '訥辯의 美學'이라는 말로 통칭하고 그의 시에 주로 사용된 비유법이 주로 직유이며, 이 때 직유는 세련된 비유가 아니라 일상어가 되어버린 관용적 표현이거나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느낌을 주는 것이며, 보조관념은 土俗的인 事物들이 대부분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중요한 지적임에도 초창기 연구라는 난점 때문인지 그는 백석의 은유와 직유를 시어 차원에서만 관찰했을 뿐 언술 차원으로 논의를 확장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백석 시의 비유 구조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권혁웅에 이르러서 이루어지는데, 그는 '은유적인 병렬'과 '제유적인 종합'으로 백석 텍스트의 구문을 읽어내면서 고향의 세부를 탐색하면서도 공동체의 특질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이미지의 선택방식에 대한 고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창작의 측면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창작주체에 의하여 어떻게 이미지가 선택, 구축, 배열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선 한 편의 텍스트를 통해 그 특징을 검증해 보기로 한다.  거리에서는 모밀내가 낫다 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가튼 모밀내가 낫다 어쩐지 香山부처님이 가까웁다는 거린데 국수집에서 농짝가튼 도야지를 잡어걸고 국수에 치는 도야지고기는 돗바늘 가튼 털이 드문드문 백엿다 나는 이 털도 안뽑은 도야지 고기를 물구럼이 바라보며 또 털도 안뽑는 고기를 시껌언 맨모밀국수에 언저서 한입에 꿀꺽 삼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것을 느끼며 小獸林王을 생각한다 廣開土大王을 생각한다 -[北新-西行詩抄 2]({朝鮮日報} 1939. 11. 9.) 백석의 시에서 사물들은 그 자체로 시적 대상이 되어 독특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많은 시에서 그는 주변의 소재들로 이미지를 구축하고 끝부분에 와서 대상이나 사건을 초점화하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창작한다. 이 시 역시 가장 백석다운 시적 표현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돗바늘 가튼 털"을 비롯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가튼 모밀내", "농짝같은 도야지" 등의 직유를 통해 어떤 세련된 표현도 따라올 수 없는 강렬하고 신선한 이미지로 수용자를 압도한다.  돗바늘은 가마니 같이 투박하고 거친 사물이나 피륙을 꿰맬 때 사용하는 굵은 바늘인데, 백석은 그 바늘이 굵고 두껍고 거친 사물을 꿰뚫고 나오는 생명의 강인함을 (배를 뚫고 나온) 털로 묘사한다. '농짝/도야지'의 대비는 그 자체로 이미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재의 결합으로 효과를 배가시킨다. 네 다리가 묶인 채로 거꾸로 걸려 있는 돼지의 모습은 몸피는 굵고 다리는 짧은 농짝과 흡사한 유사성을 지닌다. 이런 이미지를 통해 수용자는 토실하게 살이 올라붙어 굵어진 몸집과, 짧은 다리를 가진 돼지의 모습을 어느 것보다도 선명하고 익살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  백석 시의 깊이에는 이렇듯 수용자들에게 미학적인 즐거움을 제공하여 유희의 세계로 인도하는 부분이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이는 또한 집안의 가축과 기물, 무생명과 생명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역할도 하고 있다.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가튼 모밀내"도 마찬가지다. 후각의 동일성을 통해 수용자는 작품 [국수]에서 나타나듯 식물(모밀)과 어진 인간(정갈한 노친네)을 하나로 결합, 인간미 있는 삶의 체취를 환기해 내려는 창작주체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물론 이 시는 1, 2연의 은유적 병렬을 3연의 제유적 종합으로 이끌어내어 의도된 전체 의미로 대상을 초점화하고 있지만 수용자의 입장에서 눈여겨 볼 가장 중요한 창작원리는 이미지의 선택과 조직의 원리에 있다.  즉 백석은 고향으로 표상되는 농촌공동체의 공간에서 발견할 수 있는 토속적인 사물을 자신만의 독특한 기준에 따라 비유의 소재로 선택함으로써 강렬한 호소력과 범상치 않은 깊이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백석의 시는 수용자에게 순박하고 평화로운 전통세계와 유년에 대한 그리움을 실감 있게 조응해낸다. 아래의 평가는 이같은 모더니스트로서의 백석 시의 특질을 적실하게 짚어내고 있다. 이 같은 뜻에서 白石은 1930년대의 드문 스타일리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고요하고 平明한 추억의 세계를 결코 범속한 것으로 버려두지 않으려고 하는, 이 강인한 고집스러움이 白石詩가 확보한 現代詩史의 뚜렷한 위치가 아닐까. 백석 시의 거의 전편을 흐르는, 작품의 수용자를 공감 속으로 깊이 있게 공명시키는 이런 감동은 긴 산문체 호흡의 도입과 병렬을 포함하는 서술자질 등의 다른 요인들도 많이 작용하지만 이 글에서는 주로 주변의 소재를 이미지로 선택, 배열하는 방식으로 한정하여 논지를 전개한다. 이러한 백석 시의 방법론을 적용시켜 창작한 다음의 텍스트를 통해 이 창작법이 어떻게 후대 창작주체들에게 활용되고 있으며 또 실제창작에서 수용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처음에는 까만 개미가 기어가다 골똘한 생각에 멈춰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등멱을 하러 엎드린 봉산댁 젖꼭지가 가을끝물 서리맞은 고욤처럼 말랐다 댓돌에 보리이삭을 치며 보리타작을 하며 겉보리처럼 입이 걸던 여자 해 다 진 술판에서 한잔 걸치고 숯처럼 까매져서 돌아가던 여자 담장 너머로 나를 키워온 여자 잔뜩 허리를 구부린 봉산댁이 아슬하다 - 문태준,[개미]({수런거리는 뒤란}, 창작과비평사, 2001.) 기어다가 멈춘 개미와 '등멱을 하러 엎드린 봉산댁'을 비롯, '젖꼭지/서리맞은 고욤', '겉보리/건 입', '숯/까만 얼굴'의 비유는 문명 이전의 농촌공동체에서 볼 수 있는 사물과 생명의 세목에서 선택된 것이다. 모든 비유가 주변의 소재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백석 시의 이미지 선택방식과 같은 맥락을 띠고 있는 이 텍스트는 다른 수용자의 눈에도 백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읽히고 있다. 저 30년대의 뛰어난 시인 백석을 오늘날 다시 만난 듯하다. 까만 젖꼭지와 개미의 대비가 기발하고 재미있다. 이 젊은 시인은 이런 해학적이면서도 텁텁한 막걸리 같은 풍경을 곧잘 그려낸다. 문명 이전의 샤머니즘적인 세계도 시인의 눈에 자주 포착된다. 그러나 이 텍스트는 화자 '나'의 개입으로 인해 백석의 텍스트와는 뚜렷하게 변별되는 세계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이 텍스트는 소년시절부터 담장 너머로 봉산댁의 알몸을 지켜보며 자라온 '창작주체'인 나의 성장사로 읽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텍스트는 문명과는 동떨어진 공간 속에 놓여진 소년의 은밀한 엿보기의 양태를 간직한다. 또래집단의 이성으로부터가 아니라 이웃집 나이 많은 '여자'를 통해 성을 깨달아가는 소년의 성장과정으로 시를 이끌어감으로써 이 창작주체는 백석의 영향을 주체적으로 소화하고 독자적인 개성과 미학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이 텍스트는 앞서의 언급처럼 개미, 봉산댁, 끝물, 서리, 고욤, 댓돌, 보리이삭, 겉보리, 술판, 숯 등 고향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목에서 이미지를 선택하고 있고, 그 이미지가 결합되어 나타나는 비유체계 역시 앞 부분의 병렬과 끝부분의 종합 방식, 즉 이미지의 구축과 대상의 초점화 방식에서 백석 텍스트의 창작방식을 원용하고 있다. 여기서 특히 두드러지는 부분은 허리를 구부린 봉산댁의 모습과 기어가다 골똘한 생각에 멈춘 개미의 유비이다. 봉산댁의 검은 피부와 가는 허리, 젖꼭지, 땅에 짚은 두 팔과 다리의 모습에서 기어가다 멈춘 개미의 모습을 읽은 창작주체의 눈에서 수용자는 매우 희극적이면서도 해학적인 양가성과 함께 현장적 생동감 또한 느낄 수 있다.  이는 백석의 '농짝가튼 도야지'라는 비유의 근저에 깔린 발상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으며, '개발코', '안장코', '질병코'의 비유로 연결된 '녕감'들이 투박한 북관말을 떠들어대며 저녁해 속에 사라지는 나타나는 [夕陽]의 생동감과도 그 뿌리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수용자는 이야기적 요소가 가미된 이 텍스트에서 화자인 '나'뿐만 아니라, 나의 눈에 비친 봉산댁이라는 인물의 입체성을 또한 살필 수 있는데, 그녀는 투박하고 거칠지만("겉보리처럼 입이 걸던 여자"), 외롭고 고단한("해 다진 술판에서 한잔 걸치고 숯처럼 새까매져서 돌아가던 여자") 삶을 살아가는, 고향공간에서 흔히 만날 수 있었던 인물로 드러난다. 봉산댁 역시 백석의 [여우난곬族]등에서 드러나는 가난과 슬픔으로 얼룩져 평탄치 못한 삶을 영위하는 인물들과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그러나 교실에서는 이러한 부분까지 수용자들에게 창작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일관된 하나의 원리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소기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이미지의 선택 및 조직 방식 쪽으로 논의를 집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단순하다면 단순한 방식을 통해서도 창의적 표현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 방법을 활용한 장점은 (창작과정을 통해 밝혀지겠지만) 시가 선명하게 되고 초점도 뚜렷하게 되고, 또 할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풀려져 나올 수 있다는 데 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원리를 잘 모르고 거창한 소재와 이야기를 끌어오려 하면서 시의 초점이 흐려지고 난해해진다.  다음 장에서는 이를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602    동물들아, "시의 정원"에서 너희들 맘대로 뛰여 놀아라... 댓글:  조회:2657  추천:0  2017-07-24
  == 동물 == 나는 모습을 바꾸어 동물들과 함께 살았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들은 평온하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안다.  나는 자리에 서서 오래도록 그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땀흘려 손에 넣으려고 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환경을 불평하지 않는다.  그들은 밤늦도록 잠 못 이루지도 않고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지도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의무 따위를 토론하느라 나를 괴롭히지도 않는다.  불만족해 하는 자도 없고, 소유욕에 눈먼 자도 없다.  다른 자에게, 또는 수천 년 전에 살았던 동료에게 무릎 꿇는 자도 없으며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잘난 체하거나 불행해 하는 자도 없다. (월트 휘트먼·미국 시인, 1819-1892) == 야생 피조물의 평화 ==  세상에 대한 절망이 마음속에 자라날 때 나와 우리 아이들의 삶이 어찌될까 두려워 한밤중 아주 작은 소리에도 눈을 뜨게 될 때 나는 걸어가 몸을 누이네, 야생오리가 물 위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내려놓은 그곳에, 큰왜가리가 사는 그곳에 나는 야생 피조물들의 평화 속으로 들어가네 그들은 슬픔을 앞질러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괴롭히지 않는다네 나는 고요한 물의 존재에게로 가네 그리고 느낀다네. 내 머리 위로 낮엔 보이지 않던 별들이 이제 반짝이려고 기다리고 있음을 잠시 세상의 은총 속에 쉬고 나면 나는 자유로워지네 (웬델 베리·시인이며 문명비판가) == 모든 것을 사랑하라 ==   모든 잎사귀를 사랑하라  모든 동물과 풀들을 사랑하라 그 모든 것을 사랑하라 그대 앞에 떨어지는  한 가닥 빗줄기조차도. 그대가 모든 것을 사랑하면  모든 것 속에 담긴 신비도 보리라 그대가 모든 것 속에 담긴 신비를 본다면  날마다 모든 것을 더 잘 이해하리라 마침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대 자신과 세상 전체를 사랑하리라. (도스토예프스키·러시아 소설가, 1821-1881) == 동물원에서 ==  원숭아 원숭아  쇠창살에 갇힌 원숭아  이 바람 맑고 좋은 날을  온종일 우리 속에 갇혀서만 있으니  네 가슴이 얼마나 답답하겠니  이봐요 사람양반  당신은 나를 답답하다 하지만  난 당신이 외려 불쌍하게 보이는구려  허구한 날 아이들은 꾸중 속에  갑갑한 시험과 부자유 속에  여자들은 속박 속에  남자들은 철조망 속에  노인들은 텅 빈 방에  청년들은 감옥 속에  돌처럼 굳어버린 관습 속에  그 모든 세상의 그물 속에  갇혀서도 꼼짝달싹 못하는 인간들이  나는 측은해 보여요  원숭이는 먹다 남은  사과를 와삭와삭 깨물며  야릇한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이동순·시인, 1950-) == 어떤 소통 ==  울타리를 넘어 온 어린 염소 한 마리와 길 위에서 마주쳤다 큰 눈을 가진 어미 염소가  멀리서 불안하게 바라보며 서 있다 '매애' 하고 우는 염소 나도 '매애' 하고 소리를 질러본다 심지 세운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그 사이를 나비 한 마리 지나가고 바람이 지나가도  소리를 잘라먹지는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대화에 긴장하는 논둑 위의 쇠뜨기 풀 다시 '매애' 하고 염소가 나를 보며 운다 나는 그 소리가 담고 있는 말을 알고 있다 '매애' 하고 지르는 내 대답에 염소의 눈이 투명해진다 눈과 눈 사이 가슴으로 지르는 소리와 소리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내 몸에서 탯줄을 끊어내고 나간 이도 못 알아듣는 말을 알아듣는 어린 염소 소통은 사람끼리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허영숙·시인, 1965-) == 원숭이는 날마다 나무에서 떨어진다 ==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날이 있다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원숭이가 진짜 원숭이다  서 있는 나무는 늘 그 나무지만  원숭이는 늘 다른 나무를 탄다  떨어지지 않으면 다시 오를 수 없는 새로운 나무를 위해  원숭이는 나무에서 날마다 떨어진다  오 뛰어내리자  이 황홀한 절망, (이진숙·시인, 1955-) ==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  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복효근·시인, 1962-) == 낙타 ==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신경림·시인, 1936-) == 착한 소 == 시행의 마지막 구절을 막 끝내자  잉크가 다한 볼펜  기진맥진 원고지의 여백에  펄썩 쓰러져 버린다.  편히 쉬어라.  피어리어드는 내 눈물로 찍겠다.  돌아보면 너무도 혹사당한 일생.  경지는 다만 소만이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 동안 참 많은 밭을 갈았구나.  땀과 눈물과  심장에 고인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아낌없이 쏟아내고 너는 지금  후회 없이 이승을 떠나는구나  내 시가 너를 따를 수만 있다면… 잘 갈아 씨 뿌린 밭두렁에  거품을 문 채 쓰러진  착한 소 한 마리. (오세영·시인, 1942-) == 사슴의 뿔 == 사슴의 뿔은 화려하다  소의 그것처럼 단순하지 않고  여러 갈래로 길게 뻗어 허공에 치솟아 있다  이 얼마나 빛나는 무기인가 그러나 사슴은 그런 무기를 지니고 있지만 하나의 뿔도 갖지 못한 늑대 사자 무리들에게 먹히며 산다 아니 이 지상에서 사슴에게 지는 동물은 하나도 없다 풀잎만 씹고 사는 초식동물, 이 선량한 친구에게 먹힐 동물은 아무도 없다 사슴의 뿔은 전투용 무기가 아니다 그러면서 왜 거기에 그처럼 화려히 매달렸는가 그것은 하나의 관이다 무엇을 위한 관이냐고? 암컷들에게 보이기 위한 위용의 관 저 수컷들과의 뿔 겨루기를 보라 덜그럭 덜그럭 사슴의 뿔은 암컷을 얻기 위해서만 힘을 쓴다. (임보·시인, 1940-) == 인간의 웃음 == 불타는 산 시뻘건 불덩이는 뒤를 따라오고 우두둑 떨며 내달리는 가엾은 목숨 가시에 긁히는 게 문제가 아니야 발가락쯤 부러지면 어때 살아야지 어서 빠져나가야지 뒹굴고, 엎어지고, 찢어지며, 오직 살길을 찾아 달리는 토끼 한 마리 그러나 기다리는 건 얼룩무늬 잠바 입은 젊은이가 쥐고 있던 몽둥이 죽음 두 귀를 잡아들고 술안주감 생겼다고 기뻐하는 잔인한 웃음 아, 아내와 자식과 부모와 모두 함께  저 불구덩이 속에 타 죽어야 했는데. (탁동철·아동문학가, 1968-) == 자연을 위한 기도 == 생명의 하느님,  다른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깨우쳐 주소서.  그들이 숲 속에서 겪는 어려움을 기억하겠나이다.  그들이 도시에서 겪는 푸대접을 기억하겠나이다.  당신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보호자, 섭리자의 역할을  우리가 그들에게 보여주게 하소서.  우리가 들짐승을 잔인하게 대하지 않도록 금지하소서.  존경심에서 나오는 부드러움을 우리에게 주소서.  나보다 약한 피조물을 경애하도록 가르쳐 주소서.  모든 생명의 물줄기는 당신의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것.  생명이란 지금도 우리에게는 신비일 뿐,  우리가 짐승과 새와 친하도록 도와주소서.  그들의 배고픔과 목마름, 피곤함과 추위,  집을 잃고 헤매는 고통에 공감하도록 도우소서.  우리의 기도 속에 그들의 어려움도 끼워 넣도록 도우소서.  (조지 마테슨·스코틀랜드 태생의 맹인 선교사)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동물 동시 모음> 박두순의 '다람쥐' 외  == 다람쥐 ==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조그만  도토리도 두 손으로  받쳐들고 먹지요  (박두순·아동문학가, 경북 봉화 출생) == 오리 == 오리 세 마리가 연못에 글 쓰러 간다. 오리는 글 쓰러 갈 때는 꼭 줄을 서 간다. 오리는  참 착한 학생이다. (오순택·아동문학가, 1942-) == 사슴 == 쫑긋, 귀를 세우고 먼  시골학교의  풍금 소리를 듣는다. (손광세·아동문학가, 1945-) == 돼지 ==  고사 상에 오른 돼지가 웃고 있네 몸뚱이는 어디에다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돈 봉투 물려 주니까 입이 더 벌어지네 (곽해룡·아동문학가) == 쥐 ==  쥐는 쥐구멍에 살고 나머지 큰 집은 사람들에게 죄 빌려 줬대요 그래서 그 방값으로 쌀도 고기도 가져간대요 공짜는 없다지 뭐예요 (손동연·아동문학가, 1955-) == 미안해서 == 우리집 밭에서 몰래 배춧잎 뜯어먹다 들켰던 숙자네 닭들 미안해서 미안해서 왕겨 뿌린 밭고랑에 따뜻한 달걀 한 개 놓고 갔다. 숙자 불러내 말할까 말까? (유미희·아동문학가, 충남 서산 출생) == 소·1==  보리짚 깔고 보리짚 덮고 보리처럼 잠을 잔다. 눈 꼭 감고 귀 오구리고 코로 숨쉬고 엄마 꿈꾼다. 아버지 꿈꾼다. 커다란 몸뚱이, 굵다란 네 다리. - 아버지, 내 어깨가 이만치 튼튼해요. 가슴 쫙 펴고 자랑하고 싶은데 그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소는 보리짚 속에서 잠이 깨면 눈에 눈물이 쪼르르 흐른다. (권정생·아동문학가, 1937-2007) == 소 == 소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매를 맞는다. 소는 무거운 짐을 나르는데 매를 맞는다. 소는 말도 잘 듣는데 매를 맞는다. 매 맞는 소를 보면 눈물이 나올라 한다. 우리 소가 아니라도 눈물이 난다. (윤동재·시인, 1958-) == 코끼리의 코 ==  코가 긴 코끼리  생각도 코로 할까.  주르르 코를 펼치면  생각도 주르르 펼쳐지고  도르르 말면  생각도 도르르 말려지고  생각이 건너가  먹을 것도 가져오고  생각이 뻗어가  물을 퍼 샤워도 하고  기다란 코로 하는 생각  펼쳤다가 말았다가  줄였다가 늘였다가  마음대로겠지.  맞아, 그게 자랑스러워  팔락팔락  바람을 부치며  큰 부채 귀가  박수를 치고. (박방희·아동문학가, 1946-) == 염소 ==  구름 동동  하늘이  물에 잠기면  떨리는 음성으로  노랠 부르고  아이들이 놀러 오면  웃겨 주려고  수염 달고  할아버지 흉낼 낸다.  애써 기른 뿔  받아 보고 싶어도  강물과  산과  하늘과 해  모든 게 평화롭기만 해  결국  뿔은 뒤로 구부려  하나의 장식물로  만들고 말았다.          (엄기원·아동문학가, 1937-) == 개구멍을 빠져나가다 == 쥐똥나무 울타리에 난 개구멍을 도둑고양이처럼 살짝 빠져나가다 문득, 누군가 참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한 번도 나무에 똥을 싼 적 없는  쥐와 울타리에 구멍을 낸 적 없는 개와 도둑질을 한 적 없는 고양이가. (신형건·아동문학가, 1965-)      
601    시인은 불확실한 세계의 창을 치렬한 사유로 닦아야... 댓글:  조회:1979  추천:0  2017-07-24
  보편적 정서의 힘  강경희  복잡한 삶의 회로에 갇혀 살다보면 때로는 단순하고 분명한 것들에 이끌리게 된다.  단순함과 분명함이 주는 확실성 때문일 것이다. 비틀림이 없는 세계, 있는 그대로의 실제를 있는 그대로의 실재로 받아들일 수 있는 편안함은 세계를 순간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게 만든다.  변화와 변동의 증폭이 큰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그와는 반대로 변화하지 않는 것, 지속적 쾌감과 일관된 사유를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갈망한다. 이러한 경향은 자명함의 상실, 절대적 진리의 부재가 초래한 불안감에서 비롯된다. 자명한 것은 이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자명함은 오히려 영속적이고 보편적인 것들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발현시킨다. 그것은 어쩌면 불확실성의 위기를 반성적으로 사유하려는 태도일 수도 있다.  한 편의 시를 통해 느끼는 감동은 어떠한 사태에 대한 개념적 판단을 드러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반드시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는 신기성에만 의존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독자의 감성에 적극적으로 호소하는 시는 시인의 특수한 경험을 통해 정서적 친화성과 일치감을 확인할 때 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일종의 정서적 안도감으로 나와 세계가 분리되지 않았다는 삶의 유대성에서 기인한다. 뿐만 아니라 불분명하고 확신할 수 없었던 잠재된 의식을 보편의 감각과 정서로 재인식시킴으로써 일종의 통합된 존재론적 경험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자연과의 친화성을 강조하는 시, 일상생활에 대한 성찰을 드러내는 시는 보다 폭넓은 공감을 확보한다. 이는 마치 복잡한 악보를 일일이 읽어내지 못하더라도 자연스러운 음악의 선율과 리듬에 몸을 맡길 수 있는 현상과 유사하다. 이처럼 서정시의 위력은 논리적 세계를 이성으로 파악하려는 분석적 태도보다는 삶에 내재한 다양한 국면을 일반화와 보편화의 정서로 드러내는 데 있다.  이 세상  천지간에  봄이 불쑥, 찾아와서  아닌 밤중 홍두깨로 박태기꽃 울컥, 피고.  어머니,  흑, 흑, 우신다.  가슴이  처 어 -ㄹ 렁,  한다.  ―이종문, 「봄날」(《현대시학》, 4월호) 전문  겨울의 터널을 뚫고 불현듯 당도한 봄의 숨결은 때로는 난감하다.  "봄이 불쑥, 찾아와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되어 나를 후려칠 때 일순간 잊었던 혹은 잠재되었던 감정이 드러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슬픔의 정서'이다. 어느새 환하게 피어난 봄날의 꽃,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화자는 "울컥"한다. '울컥'이라는 표현이 환기하듯이 마음 한 구석 깊이 감추어진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난다. 이 제어할 수 없이 솟구치는 슬픔의 정서는 봄날의 개화처럼 느닷없이 화자의 마음을 흔든다. "울컥" 피어난 "박태기꽃"은 "흑, 흑" 우는 어머니의 울음소리와 닮았다. 거기엔 어머니의 곡절 많은 생의 고통과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과 '한'으로 표상되는 한국인의 보편적 감정을 이 시는 다시금 일깨운다. 슬픔의 뿌리에는 아픔과 설움, 사랑과 인내, 고단함과 엷은 웃음이 스며있는 인생의 뒤안길이 숨어 있다.  이종문은 이러한 한국인 보편의 정과 한의 감정을 '봄날'의 자연 현상을 통해 비유적으로 그려낸다. 어머니가 토해 낸 울음 꽃은 급기야 화자의 마음까지 요동치게 한다. "가슴이/ 처 어 -ㄹ 렁,/ 한다."라는 표현처럼 당혹스러운 사태에 어찌할 수 없는 북받치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고단한 생, 온몸으로 고통을 감수하면서 인내의 세월을 견뎌왔던 어머니, 참아왔던 설움의 응어리가 "박태기꽃"처럼 일순간 쏟아질 때 화자는 그 세월의 고통을 함께 앓는 것이다. 이처럼 「봄날」은 한국인 심성에 자리잡은 슬픔의 정서를 재확인시킴으로써 보편적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이 시에 묻어 있는 정서가 전통적 울림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바로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를 환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유성 가는 길  번쩍이는 칼날  검은 들판에 비닐하우스들  눈을 찌르는 은빛  시루떡 위에 뿌려진 팥고물처럼  저기 녹지 않은 눈 사이  응달에서 먹다 남은  흙의 맨살들  그 위에 부러진 뼛조각들  흙 속에 뼈다귀를 파묻는 개  모란시장  철망 속에 갇힌 한 무리  녹슨 눈빛들  도마 위 시뻘건 생고기 한 덩이  유성 가는 길  겨울 들판에 놓여져  번쩍이는 은빛  언제나 배후에 숨어 있는  칼날  ―강인한, 「殘雪」(《현대시》, 4월호) 전문  강인한의 「殘雪」은 시각적 현상을 인식론적 의미로 환원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잔설'의 시각적 요소는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된다. "번쩍이는 칼날""비닐하우스"의 "눈을 찌르는 은빛"처럼 강렬한 무채색의 발광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시루떡 위에 뿌려진 팥고물" 사이사이에 드러난 흰색 시루떡의 표면으로 암시되기도 한다.  이처럼 시각적 측면을 다양한 방식으로 강조하는 것은 '잔설'이 단지 자연 현상을 드러내는 기표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강인한에게 '잔설'은 그저 "저기 녹지 않은" 자연의 "눈"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녹지 않은 눈"은 그에게 "칼날"의 이미지로 각인된다.  "칼날"은 찌르고 자르는 속성을 지녔다. 찌르고 자르는 칼날의 이미지는 "모란시장/ 철망 속에 갇힌 한 무리" "녹슨 눈빛들"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포획된 '개들'의 비참함을 통해 극대화된다. 즉, "도마 위 시뻘건 생고기 한 덩이"로 바뀌는 살풍경한 모습은 "칼날"이 의미하는 잔혹성과 무참함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자연의 공간에서 개들은 "흙의 맨살"에서 뒹굴고 사냥하는 본성에 충실한 동물이다.  즉 "흙 속에 뼈다귀를 파묻는 개"처럼 그들은 자신의 생존에 열심을 다하는 순진무구한 대상이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 놓은 육식성의 세계는 "시뻘건 생고기"가 암시하듯 피의 냄새와 살육의 흔적이 가득한 포악하고 잔인한 생존의 현장을 보여준다.  이처럼 강인한은 삶의 현장 이면에 내재한 배후의 진실을 포착하고자 한다. "언제나 배후에 숨어 있는/ 칼날"이라는 말처럼 그는 표면적 사실 너머에 존재하는 삶의 진실을 확인하고자 한다.  때문에 현상적 세계를 응시하는 시인의 시선은 실상 그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려는 인식론적 태도를 반영한다. 사유를 강조하는 시가 흔히 범할 수 있는 오류는 관념의 과도한 개입과 설명적 요소로 인해 시적 미감을 저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강인한은 감정의 적절한 제어, 절제와 압축된 이미지의 선택, 선명한 대비적 색채감을 통해 미적 형상화의 완결성을 드러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백 명의 재상이 나온다는 황계동산에 들어선  백 채의 아파트를 보며  혹 이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 중  인류발전과 조국의 광영을 위해  헌신할 재목이 나올 수도 있지 않겠느냐며  자축도 해주면서  그래, 이제 마흔이 되었으니  스스로 떠나버린 빈 절터에 서 있는 중들처럼  머쓱한 표정은 짓지 말자며  교정의 가문비나무를 베어낸 자리에 서 있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대견하게 보고 있다  ―이창수, 「불혹」(《작가》, 봄호) 부분  개발의 실질적 방식은 재래의 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가 현실의 논리에 의해 붕괴될 수밖에 없는 참담한 사태를 아이러니컬하게 보여준다. "백 명의 재상이 나온다는 황계동산"의 전설은 어느새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백 채의 아파트"로 탈바꿈했다. 도심 개발의 목적은 철저하게 '돈'의 가치와 직결된다.  "백 배"로 오른 "땅값"은 곧 백 배로 남는 "이익"으로 환수되어야만 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논리이다. 이 자본의 논리 앞에서 인간적 가치, 윤리적 이념, 이상적 철학, 전통의 소중함은 말살된다.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을 꿈꾸며 공부했던 '학교'는 그저 지나간 추억과 전통을 회상하는 공간으로 인식될 뿐이다.  "마흔의 나이"가 된 "고등학교 동창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를 위로하는 방식은 "혹 이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 중/ 인류발전과 조국의 광영을 위해/ 헌신할 재목이 나올 수도 있지 않겠느냐며/ 자축"하는 냉소적 조롱의 말들일 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소시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중년의 나이에서 느끼게 되는 자기 한계에 대한 씁쓸한 자기고백이기도 하다.  급속하게 변화되는 도시의 풍경은 한편으로는 인간을 소외시킨다. 전통 공간을 통해 인간은 과거와의 유대성과 현재의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재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오래된 공간들이 파괴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지켜왔던 온전한 삶의 가치마저 폐기되어 버렸다는 상실감과 공허감을 갖게 된다. 또한 전통적 이념과 가치를 지켜낼 수 없다는 자기 한계는 삶의 허무를 가속화한다. 이창수의 「불혹」은 세속의 질서에 편입될 수밖에 없는 자기 연민과 세계 상실의 아픔을 역설의 언어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어둠을 길러  하늘로 올려보낸 두레박  줄 끊어진  두레박,  재개발지구 깨진 지붕에  엎어져 둥둥 뜬 두레박  어둠이 튀어오르는  두레박  혼자 사는 할머니가  마시는 두레박, 엄마  없는 아이들이  손 담그고 노는  두레박  붉은 가위표 담벽마다  어둠의 해골해골들,  첨벙대는 두레박  ―신용목, 「보름달」(《애지》, 봄호) 전문  "재개발지구"의 한 마을을 연상하게 만드는 이 시는 가난이 묻어 있는 초라하고 쓸쓸한 사람들의 내면의 아픔을 눈물겹게 묘사하고 있다. 전래동화나 전설에 나오는 "두레박"은 비루한 현실로부터 인간을 구원해주는 사물로 곧잘 등장한다. 간절히 소원을 비는 사람들은 짐승의 도움이나 신의 허락으로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두레박이 없다면 이 세상은 먼 우주와 단절되어 버린 곳이 유배의 공간이 될 뿐이다.  하지만 현실은 동화의 세계일 수 없다. 때문에 "어둠을 길러/ 하늘로 올려보낸 두레박"은 이미 "줄 끊어진/ 두레박"이 되고 만 것이다. 줄이 끊어졌기에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은 묘연하다. 다만 하늘을 바라보고 자신의 간절한 꿈이 다시금 이루어지길 소망할 뿐이다. 가난한 재개발지구 마을에 둥둥 뜬 두레박은 다름 아닌 "보름달"이다. 여기서 달은 자연의 달이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화 된 달이라 할 수 있다. "혼자 사는 할머니"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달이며, "엄마/ 없는 아이들"의 허전하고 아린 마음을 위로해 주는 따뜻한 달이다. 그러나 또한 재개발지구 위에 뜬 달은 "붉은 가위표 담벽마다/ 어둠의 해골해골들"을 보여주는 죽음의 달이기도 하다.  신용목은 재개발지구의 가난과 위태로운 삶, 누추하지만 소중한 인간미가 살아 있는 마을의 풍경, 그 속에 숨쉬는 나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 깨어진 염원과 비루한 현실을 시인은 두레박이라는 하나의 상징물을 통해 통합해낸다. 신용목의 시의 탁월함은 사물성의 이미지를 풍부한 정서적 변용물로 치환시키는 시적 상상력을 지녔다는 점이다.  두레박과 보름달의 형태적 유사성, 두레박이 암시하는 동화적 세계의 지향, 또한 동화적 세계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는 광포한 현실에 이르기까지 두레박의 상징은 이 세계의 다양한 삶의 풍경을 다채롭고도 일관된 형식미로 통합해낸다.  시인은 현실을 가공한다. 가공된 현실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유는 현실에 내재된 숨어 있는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서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시인은 독설의 언어로 현실을 비판하고, 또 어떤 시인은 풍경의 방식으로 이 세계의 맨 얼굴을 보여준다. 시인의 렌즈에 포착된 세계는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삶의 비의를 발견하는 것이며, 지나가는 사물 속에서 문제적 현실을 읽어내는 것이며, 변화무쌍한 세계의 속도 속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금 고쳐 세우는 성찰의 결과이다. 때문에 불확실한 세계의 창을 끊임없이 닦아내려는 시인의 치열한 사유는 숭고하고 의미 있는 작업인 것이다.  ---------------------  강경희 / 문학평론가. 숭실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2001년 〈문화일보〉신춘문예 평론 당선. 저서 『타자의 언어학』, 『표류와 유출의 상상력』등. 현재 숭실대, 산업대 강사.     
600    초여름아, 너도 더우면 그늘 찾아라... 댓글:  조회:2090  추천:0  2017-07-24
초여름 시 모음         + 푸른 초여름  세상엔 말도 노래도 다 사라진다.  네가 옹아리를 시작하면 ―  물에 뜬 수련, 수련 속의 이슬도 구른다.  꿈꾸듯 네 긴 속눈썹 깜박이면 ―  강보에 싸인 채 요람이 흔들린다.  좜좜좜 네 작은 손등의 푸른 초여름―  (김상옥·시인, 1920-2004) + 초여름  물냄새  비가 오려나 보다  나뭇잎 쏠리는  그림자  바람결  따라 흔들리고  애기똥풀에 코를 박은  모시나비  지상은  지금 그리움으로 자욱하다  (허형만·시인, 1945-) + 초여름  고운 님 얼굴 닮은  마음으로  가만가만 불어오는  명주바람 앞세우고  싱그러운 연초록  잎사귀 사이로  은빛 햇살 쏟아져  아늑거리는 신록의  꿈을 안고  여름 너 벌써 왔구나!  (김용수·시인, 전남 완도 출생) + 초여름  푸른 제복 입은  계엄군처럼 몰려오는 듯하다  신록이 우거진 계곡마다  새소리 요란하고  전신주 피뢰침은  천둥번개 받아들일 준비로  여념이 없다  연둣빛 사연 우체통마다  그득하게 쌓이고  하늘은  먹장구름처럼 찌푸린 채  빗방울 후드득 떨어질 듯 분주하다  구슬땀이 또르르 구르고  아랫도리가 하마 흥건하다  (반기룡·시인) + 초여름  개구리 울음소리 자욱한 밤  윤전기(輪轉機)에서 거듭 찍혀 나오는  신문기사마다 개골개골개골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개구리 울음소리  굵은 활자로 우는 맹꽁이 소리에  초여름 밤은 더욱 소란스레 깊어간다.  (양수창·시인, 1953-) + 설레이는 초여름  철렁이는 초여름  흐르는 강가에 서면  빙어같이 튀어 솟는  그대 향한 그리움  돌아서면  그렇게 귀엽던 당신  가시밭 넝쿨 장미로 피었으니  어여뻐 죽겠네  죽겠네  내 마음 쓸어  편지를 쓰면  펄펄 뛰는 내 가슴  옛 추억 속에  포옹하네  (서문인·시인, 1962-) + 초여름 숲  여린 갈잎이  미풍에 하늘거리고  이름 모를 잡초들  짙은 향을 풍기는  초여름 숲에 누우면  몸은 구름 위로 뜨고  마음은 무아(無我)의  원(原)인간으로 돌아간다.  신(神)은 인간을  숲에서 빚었으리.  보드란 흙에  풀잎 향을 섞었으리.  숲에만 오면  순한 양이 되고  어머니 품보다 더 편안해  언젠가 영원히 돌아갈 품  (박인걸·목사 시인) + 초여름 밤의 비가  개구리 자지러질 듯  밤꽃 향내음 물씬한 교성  하,  부끄러워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그리움     그리움 총총히 박힌  하늘 자락에 걸어놓은 시계가  깜빡 졸다 떨어진  침상에는  설운 초여름 밤이 드러눕는다.     눅룩한 어둠을 가로질러  밤꽃 꺾어 내게 올  그 길에  촛불 하나 켜 놓았었는데     뽀얀 안개 쓱 문지르고  성큼 들어서는 아침,  햇살이  참 눈부셔라.  (이복란·시인) + 초여름 풍경       날이 덥다  보이지 않는 새들이 나무 위에서 지저귄다  새들의 울음소리에 나뭇잎들이 시든다  더운 날 나무에게는 잦은 새 소리가  불안처럼 느껴진다  익어가는 토마토마다 빨갛게 독기가 차 오르고  철길을 기어가는 전철의 터진 내장에서  질질질 질긴 기름이 떨어진다  약속에 늦은 한낮이  헐레벌떡 달려온 아파트 화단엔  기다리는 풀 풀벌레도 없다  아이의 손에 들린 풍선이 터진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고무 타는 냄새가 난다  (김재혁·시인, 1959-)          
599    "내가 죽으면 한개 바위가 되리라"... 댓글:  조회:2631  추천:0  2017-07-24
  시는 묘사여야 하나 진술이어야 하나 이승하 (시인 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   시가 구체적인 이야기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초의 자유시로 일컬어지는 주요한의 [불놀이]는 저녁노을에 대한 묘사가 잘 된 시입니다만 죽은 연인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기에 서사적인 구조, 즉 이야기성을 지닌 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근대시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는 [불놀이]부터 시가 묘사인지 진술인지 우리를 헷갈리게 합니다.    이야기시의 대가는 백석이며, 80년대에 백석의 의의를 부각시키면서 이 야기시론을 전개한 시인은 [대꽃]과 [성에꽃]을 낸 최두석입니다.  80년대 에 이른바 ‘민중시인’으로 불려진 이들은 거의 다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묘 사보다는 이야기성을 강조한 시를 썼습니다. 최근에 나온 김진완의 시집  [기찬 딸](천년의 시작)을 보고 이야기시의 전통이 훌륭히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일단, 묘사와 진술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볼까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바위’ 전문    유치환의 이 작품은 바위의 생김새를 묘사하는 대신 단단하고 비정한 바위의 본질을 잘 파악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는 이야기시 가 아니라 묘사의 시입니다.  이야기라는 것은 줄거리가 있는 법인데 이 시 는 나의 희망과 결심을 피력한 관념 편향의 시입니다.   시인은 단단하고 비 정한 바위의 본질을 생각하고는 바위를 본받고 싶어하지요.  또한 나약한 인간의 본성을 안타까워하면서 삶의 가치를 바위처럼 견고하게 추구하겠 노라고 굳게 마음먹고 있습니다.   묘사의 효과는 시인이 사물을 얼마나 구 체적으로 묘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구체적인 묘사’란 존재와 깊은 관 련을 맺고 있는데, 존재란 것은 인식의 문제로 연결되지요. 전통이나 관습 의 힘 보다는 사물이나 대상을   구체적으로 그림으로써 시가 힘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존재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사물 혹은 대상에 대한 적절 한 묘사가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술, 즉 이야기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배경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왜 하는 것입니까? 내 주장을 펴기 위하여, 결국은 내가 무엇을 주장하여 타인을 설득하고자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한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피는 봄에 사랑을 한 어머니를 눈물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었지 그리하여 너는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픈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늘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 내 사랑하는 동무는.....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네거리의 순이’ 제 2연   흡사 무성영화 시대의 변사 같은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듯이 전개되는 이 시는 카프문학의 맹장 임화가 노동운동의 당위성을 주장하고자 쓴 것입 니다.   비장하고 처절하지만 당대적 의미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 다.  시 자체는 무척 쉽지만말입니다.  ‘이야기시의 대가’라고 한 백석이 풍 경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볼까요.  현대식 표기로 고칩니다.  흙꽃 이는 이른봄에 무연한 벌을 경편철도輕便鐵道가 노새의 맘을 먹고 지나간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가假 정차장도 없는 들판에서 차는 머물고 젊은 새악시 둘이 내린다             -‘광원曠原’전문   제목은 ‘넓은 들판’이지요. 협궤열차가 정거장도 없는 어느 들판에 멈춰 섰는데 내리는 사람은 단 둘, 젊은 색시입니다.   무언가 사연이 있을 법합니 다.  이 시는 비록 풍경을 묘사하고 있지만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시인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지 않고 보따리째로 독자에게 내민 것이지요.  신살구를 잘도 먹더니 눈 오는 아침 나어린 아내는 첫아들을 낳았다 인가 먼 산중에 까치는 배나무에서 짖는다 컴컴한 부엌에서는 늙은 홀아비의 시아버지가 미역국을 끓인다 그 마을의 외딴집에서도 산국을 끓인다                                    -   ‘寂境’전문 이것 역시 백석의 작품입니다.  제목은 ‘고요한 경계’나 ‘고요한 상태’를 뜻하겠지요.  나이 어린 며느리의 출산을 기뻐하며 미역국을 끓이는 이는 홀아비인 시아버지입니다.   남편과 시어머니가 부재하는 이유는 말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웃집 어린 아낙의 출산 소식에 마을의 외딴집에서도 축 하의 뜻을 전하고자 산국을 끓입니다.  고즈넉한 산골마을, 어느 일가의 고 요한 외로움을 가족 간의 정, 이웃 간의 정이 따뜻하게 데워줍니다.   독자의 마음도 따뜻하게 데워집니다.  이 작품은 이야기시의 전형입니다.  하지만 이 시에는 주의. 주장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백석 시의 생명력이 여기에 서 기인하는 것이지요.   시에서는 시적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도 중요하고 시적 진술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성도 중요합니다.   시인에 따라서, 또 시인이 쓰는 각각의 작품에 따라서 비중이 달라질 수 있겠지요.  다음 시간에는 시의 언어와 일 상의 언어는 같은가 다른가를 갖고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가갸거겨 고교구규 그기가 라랴러려 로료루류 르리라   한센병에 걸려 불우하게 살다간 시인 한하운이 쓴 [개구리]의 전문입니 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의 교과서에나 볼 수 있는 한글 자모음의 나열, 그 가운데 몇 개를 뽑아놓았군요.   이 시에 무슨 뜻이 있을까요? 저는 뜻이있다고 생각합니다.   개구리 울음소리를 이렇게 표현해본 것일 수도 있고, 개구리 울음소리와 아이들 글 배우는 소리가 비슷하다고 생각해본 것일 수 도 있고, 자신의 우울한 심사를 개구리 울음소리에 빗댄 것일수도 있습니 다. 마음껏 울 수 있는 개구리의 자유와 울음조차 울 수 없는 자신의 한계 상황을 비교해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신세가 한 철 울다 가는 개구 리와 다를 바 없어, 이렇게 한글 자모음을 빌려 울고 있음을 고백한 것인지 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다르다고요? 여러분의 생각이 물론 맞 는 것일 수도 있지요.   이것이 시이기 때문에 여러 측면에서 해석을 해보는 것이지, 일상용어 의 차원이라면 단순히 한글 자모음을 나열해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어찌 시라고 할 수 있냐고요? 아, 분명히 시입니다.   시인인 한하운 이 시라고 발표했는데 시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시는 의미전달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지 전달, 마음과 정情의 전달을 꾀할 때도 있습니다.  충격도 주고 감동도 주고 깨달음도 줍 니다.   일상어의 목적은 의사소통과 정보전달에 있지만 시어의 목적은 ‘낮 설게 하기’,‘뒤집어 생각게 하기’ ‘일상어 넘어서기’등에 있습니다.   일상어의 세계에서는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가 1:1이 아니면 곤란합니다.   밥이영어meal, prey,one's share처럼 사전에 나오는 의미 중 하나로 쓰이지 않으면 우리 사회에 큰 혼란이 올 것입니다.   밥이 meal을 가리킬 때는 meal만 가리켜야지 meal이기도 하고, prey이기도 하고 one's share이기도 하다면 곤란하다는 거지요.  시인은 ‘밥’이라는 낱말의 사전적인 의미에 충 실하기도 하고 반항하기도 합니다.   특히 시인은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를 1:多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어 중의 밥은 meal, prey, one's share 뿐만 아니라 다른 것까지 포함하기도 하는데, 그런 점을 시어에 애매 성이라고 합니다.   일상어는 명확성을 지향하는 반면 시어는 애매성을 지향 하므로 일상어와 시어는 다르지만 사용되는 언어 자체는 다르지 않습니다.  밥을 일상적으로 쓸 때는 ‘밥’이라고 하고 시에 쓸 때는 ‘법’이라고 하지 않 거든요. 다 ‘밥’이라고 쓰지만 해석은 달리 하게 됩니다.   이런 밥, 부잣집 개라면 안 먹일 거야 기계라도 덜거덕 소리가 날 거야 우리들은 식사를 거부하고 마지막 지점, 옥상으로 모였다                    - 박노해, ‘밥을 찾아’제 1연 이 시에서의 밥은 우리가 끼니때마다 먹는 그 밥과 일용할 양식 정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런 시를 보십시오.    밥으로 苦痛을 만든다 밥으로 시를 만든다 밥으로 철새의 날개를 만든다 밥 으로 오르가즘을 만든다 밥으로 양심가책에 젖는다 밥으로 푸념과 하품을 만 든다 세상은 나쁜 꿈 나쁜 나쁜   밥은 나를 먹고 몹쓸 시대를 만들었다 밥은 나를 먹고 동정과 눈물과 能辯  을 만들었다, 그러나   밥은 希望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밥이 법이기 때문이다 밥은 국법이다 오 밥이여, 어머님 젊으실 적 얼굴이여                     -이성복 ‘밤에 대하여 ’끝부분   국어사전 속에 나오는 밥의 의미만을 가지고는 이 시를 이해할 수 없습 니다.  밥으로 고통. 시. 철새의 날개. 오르가즘등을 만든다고 하는 것도 이상야릇하지만 밥이 나를 먹고 눈물과 능변을 만들고, 밥이 곧 국법이고, 끝에 가서는 “어머님 젊으실 적 얼굴”이라고까지 하니 몹시 혼란스럽습니 다.   이 시에서는 밥이 상징의 기재機才로 쓰였기 때문에 사전적인 의미 영  역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요즈음에는 시인들이 ‘시어’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듯합니다.  소월과 영랑, 백석과 이용악, 미당과 청록파 3인의 시를 보면 정제된 시어 선택이 시 쓰기에 있어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1980년대 초반의 몇 명 시인에 의해 씌어진 해체시(혹은 포스트 모더니즘 시)의 등장 이후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가 아니어도 무방하게  되었습니다.   패러디(남의 작품 변용하기)를 잘하는 사람, 혼성모방(남의 작품 짜깁기)을 잘하는 사람, 몽타주와 콜라주를 잘하는 사람, 펀(pun, 말 장난)의 재주가 있는 사람도 얼마든지 시인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 다.   하지만 시가 언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어는 우리의 정서를 자극 하는 데 이용이 되고, 그렇기 때문에 풍부한 애매성을 지니는 것이 좋습니다.   애매성이란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다라는 뜻이 아니라, 여러 가지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뜻에서 ‘다중의 의미’를 뜻합니다.   자, 이제 ‘같지만 다르다’라는 앞에서 한 제 말의 뜻을 이해하셨습니까?           
598    련꽃아, 물과 물고기와 진흙과 함께 놀아보쟈... 댓글:  조회:2286  추천:0  2017-07-24
            가시연꽃의 기도....이민영         길 위에 아직 소멸하지않는 엄니의 숨과 떠날 수 없는 엄니의 온기들이 있었다 그때의 숨소리를 따라 빛의 웃음이 이내 자지면 그 모습은 순간을 파악하려는 듯, 알갱이로는 시원 그 始原인 흔들린 영혼이었다     말은 성찬을 이루고 성모상(聖母像)이 여기는 에덴의 동쪽쯤 어디라고 외치는 찰나 우리들은 그 승화되는 세월의 덧상(想)에서 방관의 한 그룹에 남아 보이지않는 이념으로만 존재했었다 .     여기 슬픈 눈을 아프게하는 것들, 슬픔을 감추고 웃어야하는 눈의 가슴을 아프게하는 것들, 그래서 한없이 멸렬하는 가슴의 학문을 조소해야하는 것들 , 망각이 그대의 귀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담지말라고 애원하던 것들, 기원을 담는 끽연이 흡착되는 사랑의 터널에서 순치(脣齒)로 혀를 깨물던 것들, 어른거르던 날은 뒤돌아보니 과거의 오늘로 회귀해야한다는 것들 , 이제 훌쩍 커버린 세상사람들의 할배와 딸의 미소 속에서 '천년사직의 주몽'을 바라보던 십육인치의 웃음이, 다시 돌아가 되돌아오는 상념의 가슴속에 자유- 잃어버린 날을 찾아가는 것들,     그런 날, 날마다 성찬을 준비하고 성모상(聖母像)이 여기는 에덴의 동쪽쯤     어디라고 외치는 날 지피는 가슴애피를 입맞춤으로 위무하는 것들의, 생사의 모퉁이 마다 몸통은 눕혀지고 숨의 나래는 눕다가는 물결 위의, 외로웠으나 스스로 타는, 그가 귀애하고 사랑한 기도는 스스로 소멸하는 것이라는, 젖몸살 시린 방죽 가운데 옆도 뒤도 돌아보지않아 하늘로만 향해 두손 모으고 있었다.       가시연꽃.... 송종규       호수는 거의 말랐다는 당신이 보낸 엽서 받았습니다 호수 위에 띄우려 했던 가시연꽃은 당분간 우편함 속에 꽂아놓겠습니다 붉은 뻘 흙 꺼칠한 무늬를 내 집 거실 바닥에 그려놓은 걸 보니 지난 밤 악어가 다녀간 듯합니다 반짝 닦인 추억 너머 호수는 지금 얼마나 수런거릴까요 아침에 일어나니 베게가 흠뻑 젖어 있네요 가시연꽃은 조심스레 뿌리 그쪽으로 내리겠죠 이제 그만 오세요 당신 분홍색 꽃잎 등으로 떠받치고       가시연꽃 / 류인서         당신이 보여준 여름 늪지 가시연꽃은 새를 닮았다 봐라, 물의 꽃대 위에 꽁꽁 묶여있는 저것 가시 숭숭한 큰칼을 목에 쓴 사나운 새 한 마리 물 한가운데 갇혀있다 새는 부어오른 목을 바짝 하늘로 치켜든 채 고통스런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내가 아직, 찢어져 꽃핀 저 소리의 갈래길을 헤아리고 있는 동안 검은 울대 위에 얹힌 새의 머리는 피묻은 가시관을 닮아간다       가시연꽃/서안나       가시연꽃은 연못을 건너온 젖지 않는 발이다   연못의 부릅뜬 눈이다 세상은 발 딛는 곳마다 위험하다 잎과 꽃잎의 날카로운 가시들이 자신을 향한 적의였다는 것을 가을이 다 가서야 깨달았다 물결과 물결사이 연못은 주름살만 키웠다 귀를 막아도 들리는 날카로운 연못의 비명들 적은 내부에 있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을 때 물의 마음에 가시가 돋는다       가시연꽃/ 김봉용       오늘 하루만이라도 짙은 물음표로 살고 싶어 이른 아침 우포늪에 가본다 늪 한 복판 물안개 깔린 잎 방석 위 가시연이 홀로 아침을 먹는다 고전으로 한복 차려입은 그녀는 이슬 먹고 꽃을 피운다 한번 묻고 싶다 무엇이 세상 속으로 돌아갈 수 없게 하는지     사랑은 선線을 이어서 길 찾아 가는 것 마음이 와글와글 복잡할 때 한 자리에서 기다려주면 문 열어 줄까       가시연꽃은 1년 초이다. 이듬해 봄에 종자에서 싹이 나야 또 다시 꽃을 볼 수 있다. 가시연꽃의 종자에서 나온 새잎은 늦은 봄이나 돼야 볼 수 있다. 그렇게 늦장을 부려서 언제 잎을 키우고 꽃을 낼까 싶은데도 여름 볕을 받으며 한두 달 사이에 커다란 잎으로 쑥쑥 자라 수면을 덮는다.     늦은 여름 수면 위 무성한 가시로 무장한 꽃대가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면서 예쁜 보랏빛으로 수줍게 꽃이 피어난다.     그 자태는 시인의 표현처럼 ‘고전으로 한복 차려입은’ 모습 그대로다. 그 고귀한 꽃이 ‘세상 속으로 돌아가’ 맵시를 뽐내지 않고 아득한 태고의 적막 속에 스스로를 가둔 까닭은 무얼까.     그나마 살짝 열린 꽃잎도 밤이 되면 다시 닫혀 시원의 꿈속에 빠져든다. 어쩌면 ‘마음이 와글와글 복잡할 때’ ‘짙은 물음표’ 하나를 물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기구원을 모색케 하거나, 가시연꽃의 꽃말이기도 한 ‘그대에게 소중한 행운’을 하나씩 안겨주려는 그윽한 자비의 발로일지도 모르겠다.     닦달 않고 한 자리에서 기다리면 스르르 문이 열릴 수도 있는 일.     1  關西樂府百疊中 七十一疊 / 申光洙       맑은 밤 연꽃 향기피고 달빛 찬 못 얼마동안 길 손이 넔을 잃었다 널판지 깐 부둣가에 붉은 빛 닻 줄 물기슭 다락집 남과 북을 두루 돌았다     치맛자락 날리는 아가씨들 붉은 연꽃 딴다 맑은 달빛 내린 南湖가 아름답네 붉은 연밥 따내니 물결은 어느새 밀려들고 한밤중 서리 머금은슬 심고 돌아가는 배     + 연못가에서    넓죽한 잎 펼쳐 놓고 어서 오게 하시는데  연꽃 말씀 받아 오실 그런 분  안 계신가  저 위에 사뿐 올라앉을 이슬방울 같은 사람 (박종대·시인, 1932-)    + 연꽃    아수라의 늪에서 五萬 번뇌의 진탕에서 무슨 저런 꽃이 피지요? 칠흑 어둠을 먹고 스스로 불사른 듯 화안히 피어오른 꽃. 열번 백번 어리석다, 내 생의 부끄러움을 한탄케하는 죽어서 비로소 꽃이 된 꽃. (이수익·시인, 1942-)    + 연꽃     흐린 세상을 욕하지 마라  진흙탕에 온 가슴을 적시면서 대낮에도 밝아 있는 저 등불 하나 (이외수·소설가, 1946-)    + 연꽃      초록 속살 빈 가슴에  떨어지는 이슬비  수정으로 토해내는  깨끗한 연잎 하나  세월의 틈바구니에  삶의 몸을 닦는다   진흙 깊은 연못  물안개 떠난 자리                   햇살 퍼질 때                  수면 위에 꽃불 밝히고  두 손 모아 합장한다.  (노태웅·시인, 1941-)    + 연꽃       만삭된 몸  풀 날이 언제인지  탱탱 불은 젖가슴  열어볼 날 언제인지  진흙 밭에 발 묻고  열 손가락으로 문 열며  지긋이 마음 다스리더니  또르르 이슬 구르는 날  반야심경 음송으로  꽃잎 하나 연다  (목필균·시인)  + 연꽃     불이 물 속에서도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은 연꽃을 보면 안다. 물로 타오르는 불은 차가운 불, 불은 순간으로 살지만 물은 영원을 산다. 사랑의 길이 어두워 누군가 육신을 태워 불 밝히려는 자 있거든 한 송이 연꽃을 보여 주어라. 달아오르는 육신과 육신이 저지르는 불이 아니라 싸늘한 눈빛과 눈빛이 밝히는 불, 연꽃은 왜 항상 잔잔한 파문만을 수면에 그려 놓는지를  (오세영·시인, 1942-)     + 蓮의 귀    蓮들이 여린 귀를 내놓는다  그 푸른 귀들을 보고  고요한 수면에  송사리 떼처럼 소리가 몰려든다  물 속에 가부좌를 틀고  蓮들은 부처님같이 귀를 넓히며  한 사발 맛있는 설법을  준비중이다  수면처럼 평평한 귀를 달아야  나도 그 밥 한 사발  얻어먹을 수 있을 것이다 (길상호·시인, 1973-) + 연꽃    떨어져야 하느니라  절망의 아득한 절벽 끝에서  시궁창에 뒹굴지라도  주저없이 온몸을 던져야 하느니라  눈 시린 선홍빛 순결만으로  어찌 쉽게 꽃 피우리라 생각하겠느냐  뭇사람의 비웃음도 받아야 하느니라  비난 어린 손가락질쯤이야  어이 못 참아내겠느냐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져  한 세월을 그렇게 살아야 하느니라  천년을 기다려 하루를 산다고 생각해야 하느니라  뻘밭 진흙 속을 사랑해서  시궁창이 오히려 따뜻해질 때  길게 깊은 뿌리를 뻗어야 하느니라  그렇게 또 한 세월을 기다려  넓은 잎 가득히  이슬을 담아낼 수 있는  윤기 나는 綠빛으로 태어난 뒤에야  발갛게 촛불 되어 타올라야 하느니라  (김승기·시인, 1960-)  + 연꽃 - 화산 4   들끓는 용암 속에서  하얀 연꽃 피어날 수 있을까, 사랑이 지극하여 사람을 움직이고  한 마음 기도가 하늘에 닿으면  그대 있는 곳이 천국이 되고  불기둥 속에서 연꽃이 피어난다. 낮달처럼 남이 알아주지 않고  살기 팍팍해도  결코 폭발하지 말아라,  마음 하나 돌이키면  그대는 그 모습 그대로  거룩한 하늘이요  살아있는 부처이기 때문이다. (김윤호·시인, 전북 고창 출생)  + 연꽃처럼      내 얼마만큼 도를 닦아야 너처럼 흐린 연못에서도 맑게 살 수 있니?  우리가 어느 만큼이나 수행을 해야 둥둥 떠다니지 않고 너처럼 마음을 정하니 ?  모두가 어떻게 살아가야 너처럼 더러운 곳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니?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만 보라. 귀로 듣지 말고  가슴으로 들어라.  너는 소리 없이 말을 하고 미소짓는데  나는 무엇이 되어야 너처럼 고귀하게 행동을 하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너처럼 품위를 잃지 않고 환하게 세상을 밝히니?  모두가 몇 만겁이나 고행을 해야 너처럼 늘 엎드려 위대한 하늘을 우러러 사니?  (최이인·시인, 전북 옥구 출생)  + 가시연꽃    너에게 가는 길엔 언제나  청순한 방울소리가 짤랑거렸다  나의 노새는 지치지도 않고  주인을 위해 흥겨운 걸음을 뒤뚱거렸다   이 나이 되도록 촘촘히 가시만 돋은  내 영혼의 정수리를 뚫고  오, 오늘은 눈부신 붉은 꽃이 피었다  (허형만·시인, 1945-)  + 그리운 연꽃 등불 하나 - 變歌 1.   초파일에 그리운 연꽃 등불 하나 너를 위해 달았다  금산사 가는 산굽이 위에서  밤은 별들을 초롱같이 켜달았다  이 여름엔 나도 한 점 혼령이 될거나  눈 부릅뜨고 수묵화 같은 너의 숲을 헤매는  철 이른 반딧불이나 될거나. (한승원·시인이며 소설가, 1939-) + 연꽃우체통    바깥소식 궁금해진  버들붕어 송사리가  연못 속 꽃봉오리,  하나 둘씩 밀어 올린다.  어느새  세상에 앉아  제 몸 여는 빨간 연꽃.  일제히 물고기의  말들이 날아오른다.  사람의 마을 향해  환하게 열려있는  저 꽃은  빨간 우체통  두근거리며 바라본다. 편지를 배달하는  체관 물관 분주하고  글 읽는 말간 눈의  물고기가 보인다.  오늘도  연꽃우체통에  엽서 한 장 넣는다. (배우식·시인, 충남 천안 출생)  + 연꽃과 진주    맑은 밤하늘이라야 볼 수 있는  어린 벗의 그 작은 별처럼  아주 작고 조용한 마음이다.  비 온 뒤에 나타나는  물방울의 축제, 무지개처럼  아주 곱고 수줍은 마음이다. 그 별 안에서, 그 무지개 위에서  너는 너대로 지금까지  나는 나대로 지금까지  서로 다른 꿈을 꾸며 살아 왔다.  묻고 싶군   사람이 꽃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연꽃이 되고 싶다.  묻고 싶군  사람이 보석이 될 수 있을까?  너는 진주를 꿈꾼다. 그 향기 안에서, 그 빛깔 위에서  나는 너 없이도 피어나고  너는 나 없이도 빛날 테지만   어차피 우리는 한 길 위에 있다. (유용선·시인, 1967-)  + 연꽃     돈오의 꽃이여  수줍은 새악시 얼굴이로구나  분홍빛으로 단장하고  잎사귀 호위받으며  아름답게 피어있구나  돈오의 꽃이여  진흙 속에 뿌리내리고 있을지라도  이전투구란  사바세계에서만 싱싱한 단어일 뿐  그곳에서는 얼씬도 못하는구나  꽃봉오리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고  느낌표와 물음표가 교차하다가  마침표로 끝내기가 아쉬워  쉼표를 찍으며 잠시 쉰 후  말줄임표로 묵언정진하다가  처염상정  화개현실이란 의미를 깨닫고 가는구나  돈오의 꽃이여  (반기룡·시인) *돈오(頓悟): 일순간에 깨우침을 얻는 것. 깊고 묘한 교리를 듣고 단박에 깨닫는 것  *처염상정(處染想淨): 더러운 곳에 머물더라도 깨끗한 생각만을 한다는 의미  *화개현실(華開顯實): 꽃과 열매가 동시에 열린다 하여 인과율을 보여줌 연(蓮) 수천만 마리 떼를 지어 날으는 잠자리들은   한 뼘 가웃 남짓한 날빛을 앞에 두고 마지막 타는 안스러이 부서 지는 저녁 햇살을….. 얊은 나래야 바스러지건 말건 불타는 눈동자를 어지러이 구을리며 바람에 흐르다가 한동안은 제대로 발을 떨고 곤두서서 어제 밤 자고 온 풀시 밭을 다시는 내려가지 않으리라고 갓난애기의 새끼손가락보다도 짧은 키를 가지고 허공을 주름잡아 가로세로 자질하며 가물가물 높이 떠 돌아다 니고 있었다. 연못가에서는  인제 마악 자라 오르는 어리디 어린 아그배 나무같이 물 오른 아희들이 윗도리를 벗고 서서 물 가운데 어떤 놈은 물속의 하늘만을 들여다보고 제가끔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허전히 무너져 내린 내 마음 한구석 그 어느 그늘진 개흙 밭에선 감돌아 흐르는 향기들을 마련하며 연꽃이 그 큰 봉오리를 열었다.      –김관식, 전문.    연    꽃아 정화수(井華水)에 씻은 몸 새벽마다 참선(參禪)하는  미끈대는 검은 욕정(欲情) 그 어두움을 찢는 처절한 미소로다 꽃아 연꽃아     -허영자, 전문. 연꽃    하광(霞光) 어리어 드맑은 눈썹 곧게 정좌하여 구천세계 지탱하고  세정(世情)을 누르는 정길 한 묵도  닫힌 듯 열려있는 침묵의 말씀 들린다.   –김후란, 전문. 연꽃    하나의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집단(集團)에서처럼 그것은 어쩌면 뜨거운 신음 같은 것 차라리 입상(立像)같이 차며 향기 없는 미련한 몸짓. 잔잔한 물결로 하여금 이끼가 뜨는 거기 보람은 두고 속으로 거두우기에 충실하여 무거히 가라 않은 꽃이여.                   -박창균, 전문.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엇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 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미당. 서정주, 전문.   양수리(兩水里) 연(蓮) 밭   加平 淸平 푸른 산 빛이 떠내려와 연 잎 되고 驪州 陽平 맑은 물빛이 실려와서 연꽃 됐네  남한강 북한강 둥둥 팔월 한철 뜨는 연 밭  이 저승 보는 법을 연 밭 보듯 바라보자. 슬픈 일 기쁜 일들 짝을 지오 고운 세상  천지도 등불 나들이 연꽃 들고 왔잖은가. 우리도 강물처럼을 흐르다가 서로 만나  산과 물 서로 비추면 연분하여 꽃밭 될까. 한 만평 세월을 펼치면 흔들리는 연밭될까.      –백수. 정완영 전문.   수련화(水蓮花)   수록색(水綠色) 깊은 고궁(古宮) 묵은 연못에 수련화 피었네 활짝 솟았네. 백(白). 황(黃). 홍(紅). 이렇게 잎사귀들이 첩첩히 엉킨 검은 물위에 목욕 단장을 한 시인의 애인들이 여름의 수레를 몰고 일년 한번 외떠러진 고궁을 찾아 왔네. 변함이 없이 변하는 나의 가슴 물기는 가시고 남은 한자리  여름이 쏟아지는 대낮 그늘이 없는 수심(水深)에 물자마리처럼 나는 떠 있네. 백. 황. 홍.      -조병화, 전문.   수련(垂蓮)   수려(秀麗)하구나 추(醜)는  옥빛 물결에 감추고  미(美)만 드러낸 채 영롱여옥(玲瓏如玉) 이슬 머금은 입술. 감히 하늘을 향해 추파를 던지며 웃고 있다니 오만(傲慢)하구나.     –정용진, 전문. 수련    꿈을 긷는 당신의 못(池) 속에 수줍은 듯 떠다니는 한 송이 수련으로 살게 하소서  아침 이슬 속에 피어나서 오후 햇볕 속에 잠드는 당신 다소곳한 한 송이 수련이 되어 당신의 꽃으로 살게 하소서  겹겹이 쌓인 평생의 그리움 푸른 물 위에 풀어놓고 밤마다 별을 안고 합창하는 어두움의 심연에서 건져내게 하소서   -임충빈, 전문. 백합이 기독교의 상징적 꽃이라면, 연꽃은 불교의 상징적 꽃이다. 불교에서 극락세계(極樂世界) 연화대(蓮花臺)란 의미도 큰 뜻을 내포하고 있는듯하다. 잎과 고귀하고 자애로운 꽃은 진흙을 뚫고 물을 솟구치고 올라와 고결한 모습으로 피어난다. 그래서 그런지 꽃말도 “순결”이다.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에 가 있을 때 객고에 시달리던 중 한 미인을 만나 사랑하게 되었는데 충선왕이 연경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연인에게 사랑의 표시로 붉은 연꽃을 선물하였는데 그 미희(美姬)는 연꽃을 남기고 간 충선왕을 오매불망(寤寐不忘) 생각하며 정절을 지키고 먼 후일 이익제(李益齊)가 돌아오는 편에 시한 수를 적어 보내니 “ 떠나실 때 주신 연꽃이 처음에는 붉더니 얼마 안가 떨어지고, 이제는 시드는 빛이 사람과도 같도다. ( 贈送蓮花片 初來灼灼紅 辭枝今幾日 憔倅與人同) 이라 읊었다는데 이는 마치 함경도사로 있을 때 사랑에 빠진 연인 홍랑을 두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최경창에게 홍랑(洪浪)이 건네준 시 한편 ” 묏버들 가려 꺾어 님에게 드리노라 자시는 창밖에 심궈 두고 비온 후 잎 피거든 날인 듯 보옵소서“ 요지 음은 이런 기생들의 낭만과 시정이 없이 악어 핸드백에 몸을 마구 벗어 던지다니, 고결한 선비와 시심을 곁들인 옛 기생들의 모습이 애틋하다. 수련은 연꽃의 동생같이 보이는 애교스러운 꽃이다. 그의 꽃말 “신비”가 의미하듯 빨강, 노랑, 분홍, 흰 꽃이 연못 위에 떠서 연 초록 잎들과 함께 실바람에 춤을 출 때는 넋 나간 사람처럼 멀거니 바라볼 뿐 할 말이 없다. 달밤에 물위에 떠있는 애잔한 모습, 과연 신비에 가깝다. 수련이 달빛을 받으며 아련히 떠오르면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동화 속에 젖게 되는데, 물방울을 구슬처럼 굴리며 물위에 떠있는  연꽃은 싱그러운 처녀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선인들이 그 이름을 부용(芙蓉)이라 부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597    현대시야, 정말로 정말로 같이 놀아나보쟈... 댓글:  조회:2111  추천:0  2017-07-24
현대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나  강인한  좀 심한 말을 하자면 요즘 우리 나라에 시인은 많지만 독자들이 읽어주는 시인의 작품은 드물다고 한다. 또 시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고들 말한다. 과연 오늘의 시는 소월이나 한하운의 시보다 어렵고, 그러므로 읽히지 않고 독자로부터 외면 당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대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고, 현대시의 이해 요령을 알고 싶어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현대시에 무심코 접근하고자 하는 젊은 독자들을 위하여 여기에 한 가지 이론을 소개하고자 한다.  20 세기 최대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는 시의 요소를 네 가지로 설명한 바 있다. 센스, 사운드, 이미지, 톤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 요소에 대한 이해가 해결되면 어느 정도 현대시에 접근하는 하나의 요령에 자연히 터득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1. 센스(sense)  흔히들 "그 친구, 센스가 제법이야." 하는 말을 곧잘 한다. 바로 그것이다. 단순한 감각으로서가 아니라 지적(知的)인 감각을 현대시의 한 요소로 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한다  사람들은 입에서 거미줄을 꺼낸다  그 거미줄에 걸려 죽은 사람의 그림자가  눈감은 것처럼 어두운 세상  …… 그래도  새들이 우는 속을 알아본다  꿈으로 우는 거리를 꿈꾼다  ― 정현종의 '꿈으로 우는 거리'  사람들의 입에서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말. 그 말로 인해서 그 자신이 죽기도 하는 시대. 그것은 바로 자기도 모르게 허공을 날아가다 거미줄에 걸려 목숨을 잃은 작은 날벌레로 비유되고 있다. 사람들은 입에서 거미줄을 꺼낸다. 그 거미줄에 걸려서 죽은 사람의 그림자가 어두운 세상. 말(언어)과 거미줄의 유추라는 이 뛰어난 감각으로 후반의 약간 모호하고 처진 가락조차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시이다. 대체로 현대시는 범속한 상투적 표현을 멀리하고 참신한 감각을 즐겨 표현한다. 봄에 관한 글에서 아지랑이 운운, 한다든가 가을의 시에서 낙엽이 뒹구는 무상한 삶, 운운하는 따위는 우리가 혐오해 마지않는 상투적인 감각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참신한 감각에 갈채를 보낼 수 있는 독자들의 이해력이 요청되는 까닭에 더러는 난해하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싶다.  2. 사운드(sound)  시의 표현 재료는 언어다. 언어는 그러므로 단순한 사상 전달의 매개체가 아닌 음악성을 띤 언어라야 시어가 된다. 많은 현대시가 오로지 현대시라는 이유로 해서 음악성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반성을 요한다고 본다. 언어의 음악성은 독자에게 예술적인 흥분과 쾌감을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좋은 시들이 이러한 음악성, 곧 운율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정형시나 동요의 가락과 같은 외형률보다 미묘한 내재율에 현대시의 묘미가 있다.  허리띠 매는 시악시의 마음실같이  꽃가지에 은은한 그늘이 지면  흰날의 내 가슴 아즈랑이 낀다  흰날의 내 가슴 아즈랑이 낀다.  ― 김영랑의 '4행시'  다 아는 바와 같이 영랑의 시는 음악적인 점에서 가장 아름답다. 물론 위에서 보인 시는 7.5조라는 운율 자체가 이 시의 주된 리듬이기도 하지만 나는 영랑의 시에서 그보다는 섬세한 언어 감각을 취하고 싶다. 영랑의 시는 얼핏 보면 여성적이고 가냘파서 우수를 느끼게도 하지만 그 우수가 사실은 매우 밝고 화사한 편이다. 왜냐 하면 대부분의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시어들이 비음 ㄴ, ㅁ, ㅇ 이나 유음 ㄹ의 구사가 유려하기 때문이다. 비음이나 유음은 밝은 어감을 주는 것으로 ㄱ, ㄷ, ㅂ, ㅅ, ㅈ, ㅊ 등의 무성음 자음이 주는 어둡고 격한 어감과는 대조적이라 할 것이다. 마음실, 은은한, 그늘이 지면, 흰날, 아즈랑이… 이러한 단어들은 입술에서 구르는 영롱한 방울 소리와 같은 음악성을 느끼기에 족한 것이다.  3. 이미지(image)  이미지란 심상(心象) 또는 영상(映像), 형상(形象)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로 시를 읽어 가는 동안 우리의 마음속에 그려지는 그림을 말한다. 현대시는 곧 이미지라고까지 극단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만큼 현대시에서 비중이 큰 요소라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하여 이 이미지를 함부로 남용하거나 혹사하면 시를 망칠 우려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요리에 맛을 내는 양념과 같은 구실을 하는 것이 현대시의 이미지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이미지는 대체로 비유로써 형성되는데 이에는 직유와 은유가 대표적이다.  직유(simile)는 가장 초보적인 단계로 '앵두 같은 입술', '타는 듯한 눈빛'과 같은 비유를 말하며, 은유(metaphor)는 나타내고자 하는 본래의 뜻이 감춰진다는 데서 시가 함축적 의미를 띤다. 일반적으로 은유는 A는 B이다, B의 A, 또는 구체어+추상어 등으로써 나타난다. '괴로움을 질겅질겅 씹는 표정이었다.', '파아란 슬픔이 내리는 거리', '눈물의 빵', '꽃은 한 떨기 거울' 등과 같이 두 가지 이상의 개념이 결합되는 것인데 이게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무턱대고 혼자만이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이미지를 표현한다고 하여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비밀 암호 같은 비유를 써서는 곤란할 것이다.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어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麝香) 방초(芳草)ㅅ 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부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  스며라 배암!  ― 서정주의 '화사(花蛇)'  미당 서정주의 초기를 대표하는 시 중의 하나이다.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뱀이 되었을까.  이 시는 도입부터 충격적인 이미지를 제시한다. 푸른 하늘 아래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달변의 혓바닥 혹은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은 입술. 이러한 색채 이미지는 대단히 강렬한 원색적인 것이다. 마치 에드거 앨런 포의 환상적이며 음울한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시라 하겠다.  이미지 그 자체가 단순히 현대시라는 틀을 고수하기 위해서 쓰여진 시라면 그 시는 이미지 이상일 수 없다. 그런 시는 시가 아니라 이미지에 그치고 마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현대시라고 해서 무조건 난해해야 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  4. 톤(tone)  어조(語調), 시인의 말하는 자세. 똑같은 세 끼 밥을 먹고 살아가면서 우리 인간은 모두 다 똑같은 생활,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지는 않는다. 그 와 마찬가지로 시인들도 시인들 나름대로 인생을 보는 눈이 다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떠한 자세로 인생 또는 세계를 보는가, 어떠한 어조로 말하는가 하는 따위를 '톤'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 편의 시 속에서도 어조에 변화를 주어 표현하는 기교적인 시도를 때로 볼 수도 있다. 가령 처음부터 중반까지는 엄숙한 어조로 말하다가 종반에 이르러 갑자기 톤을 바꾸어 익살스럽게 끝내는 베이소스(bathos) 혹은 안티 클라이맥스(anti climax)라는 방법이 그러한 것이다.  누가 흘렸을까  막내딸을 찾아가는  다 쭈그러진 시골 할머니의  구멍난 보따리에서  빠져 떨어졌을까  역전(驛前) 광장  아스팔트 위에  밟히며 뒹구는  파아란 콩알 하나  나는 그 엄청난 생명을 집어들어  도회지 밖으로 나가  강 건너 밭이랑에  깊숙이 깊숙이 심어주었다  그 때 사방팔방에서  저녁 노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김준태의 '콩알 하나'  이 시인의 작품 속에는 현대시에 으레 나타나는 이미지가 거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낡은 시인가? 그렇지 않다. 기교적인 이미지나참신한 감각이 구사되지 않은 데서 역설적으로 새로움을 찾을 수도 있다. 도시의 역전 광장 아스팔트에 떨어진 콩알 하나. 도회지의 아스팔트로 대표되는 현대 문명의 거대한 폭력 앞에 떨어져 뒹구는 한 개의 콩알은 하나의 생명이며 진실한 인간이다. 그런데 이 콩알은 짓밟히며 잊혀지는 처참한 상황 속에 놓여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 생명의 존재를 알아줄 사람을. 어쩌면 그는 우리가 떠나온 농촌의 쭈글쭈글한 주름 투성이의 시골 할머니인지도 모른다. 농촌과 도시, 혹은 현대의 비인간적 폭력과 인간적 각성의 대비를 이 시는 대단히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이러한 비정한 상황 속에서 시인은 밟히며 뒹구는 소중한 생명을 안고 가서 강 건너 밭이랑에 인간성의 씨앗을 심는다. 강 이쪽의 살벌한 곳을 떠난 강 건너 저쪽이란 의미도 퍽 상징적이다. 이 시는 참다운 삶의 자세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인이 지닌 생명에의 외경 내지 존엄성 인식이 세계를 바라보는 이 시의 톤이다. 한 편의 시가 꽃의 아름다움이나 말하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우울한 비인간화의 시대에 있어서 꽃은 아름다움 이상의 하나의 생명으로써 표현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말한 현대시의 네 가지 요소 ―센스, 사운드, 이미지, 톤을 고루 조화시킨 그러한 시를 우리는 훌륭한 시라고 비로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96    선물아, 네나 "선물꾸러미"를 받아라... 댓글:  조회:2422  추천:0  2017-07-24
+== 선물 ==   눈에 보이는 선물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금새 빛을 바라며  잊혀져갑니다  보이지 않는 선물이 있습니다  선물인지도 모르고 받았던 선물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고요히 흐르며  따뜻하게 적십니다 (박인혜·시인, 1961-) +== 오늘은 내게 선물입니다 == 무거운 눈꺼풀 비비며 맞이하는  어둠이 벗겨지기 시작한 신새벽  반복되는 일상의 창을 열어  낯익은 풍경을 만날 수 있는  오늘은 내게 선물입니다  습관처럼 투박한 머그잔에 커피를 만들고  희미한 갓등 올라탄 먼지 손끝에 묻히며  계절꽃 목 긴 화병에서 은은하게 웃으면  눈가 마음의 주름 하나 생겨날지라도  오늘은 내게 선물입니다  생각이 통하는 책장을 넘기고  세상으로 통하는 조간신문을 들추며  파란 불꽃 위에서 된장국 끓고  밥물 오르는 냄새 집안을 감돌면  채널 고정한 일기예보 쫑긋해지는  오늘은 내게 선물입니다  변함없이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  언제라도 고민을 들어주는 친구  기쁨과 행복, 슬픔과 아픔 함께 나누며  부족함 채워 가는 소중한 하루  오늘은 내게 선물입니다 (김설하·시인이며 수필가) +== 선물 ==  먼 산을 물들이고  동구 밖을 물들이고  건널목을 물들이던  가을이 찾아와  앞마당 모서리가 환합니다  봄날  빗줄기에 등 구부린 민들레꽃  땡볕 여름  매미 울음으로 그늘진 느티나무를  아직 기억합니다  계절의 갈피 속, 방황하고  투정했던 나날  지금 생각해보면 사치였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세월의 뗏목에 밀려 불투명하게 남아있는  지금, 눈물로 얼룩진 강을 따라가는  늦은 후회는 약이 되고  남아있는 시간은 더욱 눈부십니다  내 선물 중 가장 소중한 것은  단 한번뿐인 시간바다  어떤 물고기를 잡을지 궁금한  세월의 물결 출렁입니다 (최대희·시인, 1958-) +== 크리스마스 선물 ==  막 감동의 하이얀 장미 한 무더기가  수줍은 가슴에 미소로 안기더라  겨울의 벌판  서러운 내 형편에  그것은 따뜻한 빛으로 다가온 황홀경  떨리는 촉수들이  동짓달 위에 일제히 일어서고  싱싱한 것들로부터 전이되는 행복  갑자기 뭉툭한 어떤 것의 전율  목이 멘다  아, 사랑은 이렇게 따뜻한 것이구나  평생을 가도 지워지지 않을  화인 하나  가슴 아리게 와 박힌다 (고은영·시인, 1956-) +== 벅찬 선물 == 사랑으로 버무린 한 끼의 식사를 대접받고  한 주의 생활에 배부른 생기를 얻었다  늘 먹는 음식인데 배고픈 밥이 있고  또 배부른 밥이 있음을 그때 알았다  정이 물씬한 안개꽃 선물을 받고  기쁨의 수채향 온 방안에 가득하기를  족히 한 달은 지속하였고  계절에 상관없는 흰색 남방 선물  옷깃에 실오라기 보풀 때까지  두어 해 감동의 불을 가슴 언저리에 지피었었다  선물이 그렇다  받아들고 기쁘지 않은 것 없으며  크고 작은 정성으로 매듭 매여 있지 않은 것 없다  짧게는 며칠을  길게는 수년을 사랑 풀은 녹차처럼  받는 이의 목구멍 속 외로움까지 적셔주는데  하물며  평생의 선물 받은 자의 가슴은 또 어떠하랴  뒤돌아보면  우린 달랑 고추 하나 달고 나온 것 같은데  받은 것 또한 왜 그리 많은지  온몸이 온통 선물 꾸러미다  입과 눈에  머리와 심장에  받은 것이 아니면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내 것인 양 자랑들하고 산다  자랑할 게 없으면 발바닥 두꺼운 거라도 자랑하더라  내가 받은 벅찬 선물  이 땅에서 꽃피워  남을 위한 향기 남기라고 되어 있나니  죽을 때엔 다 놓고 가리라. (김경래·시인, 1963-) +== 꽃씨 선물 == 올봄에도 충북 괴산군 화양계곡의 순박한 꽃씨 몇 개가 우편으로 봄을 알려왔다.  동봉하오는 꽃씨는 보시는 바와 같이 선명한 '하트' 문양을 하고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작은 '안개꽃' 같은 꽃이 '꽈리' 같은 씨방에 세 알의 씨앗을 품었습니다. 넝쿨나무에 넝쿨손이 세 가닥의 손가락을 뻗칩니다. 두 개의 손가락은 무엇인가 붙들고 지탱하며 자라나는 역을 하고 가운데 손가락 끝에는 세 송이의 하얀 꽃이 핍니다. 마치 안개꽃 같답니다. 그리고는 초록 꽈리 모양의 씨방을 만들어 내고 그 속에 씨가 세 알 생겨납니다. 마치 완두콩 같은 씨에 하트 문양이 선명하답니다. 그러다 차츰 검어지다 선명한 사랑을 말한답니다. 마치 사랑의 전령처럼 말입니다. 이들은 서로 손에 손을 잡고 자라나며 결국은 사랑을 온몸으로 표현하기에 작년 정성을 모아 이렇게 마음을 전하며 이 씨앗을 심어 키우시면 기쁜 날, 기쁜 일이 있으시라 보내옵니다.  떠오르지 않는 얼굴이 세상 밖에서 정성스럽게 보내준 넉넉한 사랑, 참으로 아름답구나. 온몸이 향기롭구나.  (박명용·시인, 1940-)  + 반송된 선물  오늘 그대로부터 제 물건 택배로 도착했습니다. 아니, 제 것이 아니라 제가 그대에게 준 선물과 편지들이지만요. 곰인형 주인 잃어 어리둥절하고 나머지 십여 가지 물건들조차 소리 없이 훌쩍거리는 것을 느끼는 제 마음이라니. 아, 사랑이 버림받으면 버림받는 게 어디 이것들뿐이겠습니까.  시간이 폐기처분되고 기억은 추억으로 커져 나가며 모든 기쁨과 눈부심이 슬픔으로 유폐되거나 어둔 창고에 처박혀집니다. 한 세계가 못 쓰게 되고 한 세상이 짓꾸겨져버립니다.  제 모든 것을 묶어 당신은 보냈지만 전 가득한 슬픔을 선물받은 양 그저 가슴 먹먹할 뿐입니다. 그대와 오래도록 함께한 것들이니 함부로 대할 수도 없고. 앞으로 우억우억, 하고 몇 달간을 울며 주인 찾을 곰인형을 어떻게 달랠지 막막하고 머리핀은 제 머리에 어떻게 꽂아 이쁘다고 얼러줘야 할지 참으로 난감합니다. 더군다나 제가 당신에게 쓴 편지는 제가 어떻게 읽어줘야 저 자신이 낙심하거나 죽고 싶어하지 않을는지요.  반송된 제 마음을 넋 놓고 봅니다. 정말 당신은 진퇴양난의 어려운 슬픔을 보내주셨습니다. (김하인·시인, 1962-) +== 나무의 선물 == 겨울 문턱으로 들어서는 가을의 끝자락 쌀쌀한 날씨에 으스스 떨리는 몸으로 오늘 이른 아침  베란다 바깥을 내다보니 빈 가지들뿐인 나무가 하늘 향해 꼿꼿이 서 있다. '간밤에 잘 잤니? 나도 밤새 무사했어. 새날이 밝았구나. 오늘도 우리 힘차게 살아가자.' 입은 없어도  늘 그 자리 제 모습으로 가만가만 속삭이는 나무의  다정한 격려의 말. 아침부터 나무에게서 거저 받은 오늘의 크나큰 선물이다. (정연복·시인, 1957-)   + 세 가지 선물 나에게 선물하고 싶은 것은 단 세 가지 풀무로 달궈 만든 단순한 호미 하나 두 발에 꼭 맞는 단단한 신발 하나 편안하고 오래된 단아한 의자 하나 나는 그 호미로 내가 먹을 걸 일구리라 그 신발을 신고 발목이 시리도록 길을 걷고 그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저녁노을을 보고 때로 멀리서 찾아오는 벗들과 담소하며 더 많은 시간을 침묵하며 미소 지으리라 그리하여 상처 많은 내 인생에 단 한마디를 선물하리니 이만하면 넉넉하다 (박노해·시인, 1958-) + 선물·1 하늘 아래 내가 받은 가장 커다란 선물은 오늘입니다 오늘 받은 선물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당신입니다 당신 나지막한 목소리와 웃는 얼굴, 콧노래 한 구절이면 한 아름 바다를 안은 기쁨이겠습니다. (나태주·시인, 1945-) + 시간의 선물  내가 살아 있기에  새롭게 만나는 시간의 얼굴  오늘도 나와 함께 일어나  초록빛 새 옷을 입고 활짝 웃고 있네요.  하루를 시작하며  세수하는 나의 얼굴 위에도  아침 인사를 나누는 식구들의 목소리에도  길을 나서는 나의 신발 위에도  시간은 가만히 앉아  어서 사랑하라고  나를 재촉하네요.  살아서 나를 따라오는 시간들이  이렇게 가슴 뛰는 선물임을 몰랐네요.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아름다운 선물           내 삶에 그대가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가진 것은  많지 않아도 자주 만나진  비록 못하여도 못 견디게 외로웁거나 때로 기쁨으로 가슴 벅찰 때 전화를 걸면 언제나 거기 있어 목소리만 들어도 반가운 사람 한숨을 지으면 한숨을 짓는 대로 웃음을 웃으면 웃음을 웃는 대로 물어보지 않고도 느끼는 사람 보지 않고서도 나눌 수 있는 사람 삶이란 그렇게 울고 웃으며 함께 걷는 것이라고 나란히 말할 수 있는  그대는  나에게 소중한 선물 그대가 있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홍수희·시인) + 선물의 집 치매로 실종된 쌍둥이 할아버지에게  눈에 익은 과수원 길 한 세트  아무렴 그렇구말구  생일도 잊은 채 고추 따는 아이에게  반가운 친구 한 다스  아무렴 그렇구말구  글 모르는 김서방 회갑 잔치에  글자 없는 책 한 마지기  아무렴 그렇구말구  자식 잃고 먼 길 떠난 친구 부부에게  답장 붙은 편지 한 축  아무렴 그렇구말구  멀리 벨로루시에서 시집온 심약한 소냐에게  약국에서 산 희망 한 갑  아무렴 그렇구말구  (이창기·시인, 1959-) + 거룩한 선물 당신의 입으로 후, 하고 숨결을 불어넣어 당신 빼다박은 나를 만들어놓고 문밖으로 내친 후에 발뻗고 누울 한 평 집도 없이 씨뿌릴 한 뼘 땅도 없이  한 술 뜰 밥도 없이  물 한 모금으로만  거뜬하게 몇 년을 살게 해놓고 덤으로 치유할 수 없는 지독한 병까지 얹어주신 후에 그것도 모자라서 눈물을 모두 흘리게 한 후에 피는 모두 다 빠져나가게 한 후에 내가 들어가 눈을 감고 누워 못만 박으면 될  관을 완벽하게 준비하신 당신 옷 한 벌 가진 것 없는 나를 육신마저 철저하게 빼앗아간 당신 지상에서 더 이상 내려놓을 수 없는 밑바닥에 나를 던져놓고  풀이라도 이끼라도 잡으면서 살과 뼈를 채워놓으라고 명령하는 당신이  마침내 꺼내주신 오늘 하루가 참으로 거룩한 선물 아닌가  (김종제·교사 시인, 강원도 출생) + 선물과 감사  사람들은 남에게서 선물을 받으면 으레 감사의 말을 한다 작고 하찮은 물건 하나에도 고마움을 표현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인생살이가   거반 선물로 채워져 있음을 의식조차 못한다.  탄생 자체가  거저 주어진 신비한 선물이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도 남들의 베풂과 도움의 손길 덕분이요  내 주변의 자연 세계와 내 삶 속의 소중한 사람들 이 모두가 선물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살아간다.  (정연복·시인, 1957-) + 햇빛의 선물  시방 여릿여릿한 햇빛이  골고루 은혜롭게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고 있는데,  따져보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무궁무진한 값진 이 선물을  그대에게 드리고 싶은  마음은 절실하건만  내가 바치기 전에  그대는 벌써 그것을 받고 있는데  어쩔 수가 없구나.  다만 그 좋은 것을 받고도  그저 그렇거니  잘 모르고 있으니  이 답답함을 어디 가서 말할 거나 (박재삼·시인, 1933-1997) + 선물 내 너무 가난하여 그대에게 줄 것이 없네 헤진 마음 한 자락 곱게 다려 보내드리거니 아름다운 사람 만나 눈물 흘릴 일 있거든 접었던 마음 꺼내어 그대 손수건이 되었으면 (강인호·시인) + 선물  누군가가 나에게  낙엽 하나를 선물로 준다면  난 그 낙엽을  곱게 붙이는 노력을 해야 하리  누군가가 나에게  붓 하나를 선물로 준다면  난 그 붓으로  곱게 글쓰는 노력을 해야 하리  누군가가 나에게  뜨거운 마음을 준다면  난 그 마음  가슴 깊이 간직해야 하리 (김옥진·시인, 1961-) + 선물    쌍계사 계곡의 물소리를 청자 매병에 담아 네게 보내노라 그대 붓을 들어 피아골의 구름을 그려보게나 (황금찬·시인, 1918-) + 선물의 집  사랑할 때 우리 마음은  바닥이 나지 않는 선물의 집  무엇을 줄까  어렵게 궁리하지 않아도  서로를 기쁘게 할 묘안이  끝없이 떠오르네  다른 이의 눈엔 더러  어리석게 보여도 개의치 않고  언어로, 사물로 사랑을 표현하다  마침내는 존재 자체로  선물이 되네, 서로에게  사랑할 때 우리 마음은  괴로움도 달콤한 선물의 집  이 집을 잘 지키라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준 것이겠지?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선물  하늘에  태양과 달을 띄운 것은  당신의 큰 선물이다  지상에  물과 바람을 주신 것도  당신의 큰 선물이다  걷는 곳마다  보는 것마다  당신이 지은 것이니  당신의 품안에서 모든 것이 숨쉰다  그 자비와 사랑을 잊고 사는  어두운 자여  자신의 존재가  자신 때문에 살아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라  세상 속  벌레 하나, 풀잎 하나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태어났으니  그 은혜에 감사하라  (박덕중·시인, 전남 무안 출생) + 선물 자, 선물 그가 내민 네모곽 안에 든 하얀 운동화 한 켤레 싸구려 중국산 상표 붙었다. 북망산 떠나면서 꽃상여 매줘 고맙다고 준 동네 할머니 선물 읍내 신발점 가서 털신으로 바꿔 오면 올 겨울 차암 따뜻하겠다. (박래여·시인, 농부의 아내) + 선물 피아노 소리일까                  바이올린 소리일까              가깝게 맑은 악기소리 울린다 너의 선물을 생각하는 나는 감미로운 악기인가 봐 거리로 나갔다. 시장 백화점   선물을 고르기 위해 다리가 휘청거리도록 종일 기웃거렸다                  왜 선물이 그렇게 정해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내 마음을 나는 잘 알지 뭘 살까 생각하는 그 마음을 즐기기 위해 나는 오래 선물을 정하지 않고 행복해 한 거야 선물은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란 걸 선물을 사면서 나는 알았어.                       이 행복한 마음                    바로 네가 준 선물임을 그때 나는 알았어. (신달자·시인, 1943-) + 선물      세상이 내게 준 선물은  내가 쓰는 나의 시  내가 세상에게 주는 선물도  내가 남기는 나의 시  세상이여 영원하거라  내가 남긴 시여 오래 살거라  이 세상은 참 좋은 곳이란다. (나태주·시인, 1945-) + 선물       받는 것은 될수록 줄여서 받고  주는 것은 될수록 늘려서 주리  그대 내게 주시는 것  비록 작더라도  큰 상으로 알고 받겠으니  내가 주는 것 비록 크더라도  작은 별로 바꾸어 받으시라. (나태주·시인, 1945-) + 선물    나에게 이 세상은 하루하루가 선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만나는 밝은 햇빛이며 새소리,  맑은 바람이 우선 선물입니다  문득 푸르른 산 하나 마주했다면 그것도 선물이고  서럽게 서럽게 뱀 꼬리를 흔들며 사라지는  강물을 보았다면 그 또한 선물입니다  한낮의 햇살 받아 손바닥 뒤집는  잎사귀 넓은 키 큰 나무들도 선물이고  길 가다 발 밑에 깔린 이름 없어 가여운  풀꽃들 하나 하나도 선물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지구가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이고  지구에 와서 만난 당신,  당신이 우선적으로 가장 좋으신 선물입니다  저녁 하늘에 붉은 노을이 번진다 해도 부디  마음 아파하거나 너무 섭하게 생각지 마서요  나도 또한 이제는 당신에게  좋은 선물이었으면 합니다  (나태주·시인, 1945-) + 선물       그럴 수 있다면  그대에게  나 진정  좋은 것 주고 싶네  곱고 예쁘고 값이 비싸고  그렇게 눈에 띄는 게 아닌  조용하고 부드럽고 빛나는 것을  그대가 생활의 피로에 싸여  밤 같은 절망에 몸져 앓을 때  그럴 수 있다면  그대에게  나 진정 주고 싶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게지만  분명히 가장 찬란한 선물  을  우체함에  넣고 싶네. (정숙자·시인) + 가장 따뜻한 선물 빙하의 어둠에  여명의 아침이 밝아오는 것  얼어붙은 노숙의 온몸을 녹여줄  해가 둥실 뜨는 것  며칠 굶은 생에게  펄펄 끓는 국밥 한 그릇 건네는 것  벌벌 떠는 이웃에게  두툼한 속옷 한 벌 입혀주는 것  쓰러져 누운 목숨에게  한 사발 죽이 되고  손이 되고 발이 되어 주는 것  사막의 입술에 혀에  물 한 모금 적셔주는 것  서리 내려앉는 방바닥을 데워줄  탄을 부엌에 쌓아두는 것  눈멀고 귀 먹은 것들에게  빛으로 소리로 적선을 베푸는 것  가진 살 몇 점으로  가진 피 몇 방울로  가진 마음 몇 가지로  가장 따뜻한 선물 만들 수 있으니  가진 것 없다고 하지 마라  내가 더 필요하다고 하지 마라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선물의  당신이 있지 않느냐  (김종제·교사 시인, 강원도 원주 출생)      
595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댓글:  조회:2076  추천:0  2017-07-24
3. 시의 세계  문학의 세계에 대해 말하면서 시의 특성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암시 했지만, 시의 초보자들이 제일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시와 시 아닌 것 을 구별하는 일이다. 같은 문학의 범주에 들지만 시와 소설 혹은 시와 희곡은 다른 특성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장르의 이론을 취급할 여 유도 없고, 또한 그러한 이론은 여러가지 까다로운 문제점들을 제기하기 때문에 소박하게 시의 특성만을 요약해보기로 한다. 다른 문학적 쟝르와 구별되는, 시만이 보여주는 특성으로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 들이 있다.*⑧ 첫째로 사고의 단위가 산문의 경우에는 문장임에 비하여 시의 경우 에는 시행 line이 된다. 대체로 모든 시는, 정형시든 자유시든, 행각이 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시인들이 행을 가르는 이유는 소리와 의미의 효과 는 사고와 관계된다. 소설가나 수필가들의 글에서는 이러한 효과가 강  하게 나타지 않는다. 그들의 경우 하나의 사고는 하나의 문장이 끝 날때 완성된다. 이를테면 쓴다는 것은 자신의 강박관념을 질서 있게 정리하는 일이다. 시의 경우가 그러했다.  처럼 사고의 단위는 문장으로 나타난다. 이 글은 쟝 그르니에가 쓴 「알베르 까뮈」(이재형 옮김)의 일부이다. 여기서 그는 두 개의 생각을 진술한다. 하나의 사고는 첫째 문장, 다른 하나의 사고는 둘째 문장으로 로 진술된다. 그렇지만 시인들은 이렇게 문장을 연결하면서 자신의 사 고를 발전시키지 않는다. 김소월의 「가는 길」에서 읽을 수 있듯이 시인들은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처럼 시행들을 연결하면서 자신의 사고를 발전시키거나 완성한다. 그러니까 형태상으로 모든 시는 원칙적으로 행갈이를 하고 있다. 행갈이 의 유형에는 한 행이 한 문장 이상으로 되어 있는 유형이다. 둘째로 행갈이를 한다고 해서 모두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필요 이상으로  산이 많이  나오는  이른바  위산과다증은  세 가지 증세로  나타납니다.  첫째가  속쓰림  둘째가  소화불량  세째가  더부룩함  같은 글은 행갈이를 하고 있지만 시라고 할 수 없다. 이 글은 약을 팔기 위해 위산과다의 증세를 설명한 신문광고의 일부이다. 표제는 「위산과다의 증세」로 되어 있다. 이 글이 시가 될 수 없는 이유는, 형태 상으로는 행갈이를 하고 있지만, 글의 목적이 위산과다증에 대한 객관 적 정보를 전달하고, 또한 그런 증상이 있는 사람들에게 약을 판매하기 위한 실용적 가치만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행갈이를 하지 않는 글로서 이를테면  저물어가는 가을녘은 어쩌면 이처럼 폐부를 찌르듯 감동적인가! 아! 고통스러울 정도로 가슴을 파고든다! 왜냐하면 그 파문이 농도 를 거부하지 않는 어떤 감미로운 감각들이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무한보다 더 예리한 송곳은 없는 법. 같은 글은, 형태상으로는 산문처럼 행갈이를 하지 않고, 문장에 의해 사고가 연결되고 있지만, 엄연히 시라고 불리운다. 이 글은 보드레르 의 산문시 「예술가의 고해의 기도」(윤영애 옮김)의 일부이다. 이 글 을 시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이 글이 가을 저녁에 대한 객관적인 정  보를 전달하거나,우리들의 삶에 실제적인 효율성을 발휘하기 보다는 가을 저녁에 대한 심리적 반응 내지는 시적 명상을 드러내기 때문이 다. 결국 시는 형태상으로는 행갈이의 원칙, 곧 사고의 단위가 행으로 되어 있지만, 형태상의 행갈이만으로는 시의 특성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행갈이의 원칙에 대해서는 이 책의 "시의 리듬"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세째로 산문작가들은 사고의 단위를 연대기적으로 연결하고, 시인들 은 그것을 연상에 의해 연결한다. 산문작가들이 그렇다는 것은 그들의 경우 사고의 단위, 곧 문장들이 계기성에 의해 연결됨을 뜻한다. 다음 글을 살펴 보자.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다. 나는 아파트 앞에서 택시를 기다려 탔다. 택시는 불을 켜고 빈 영동 거리를 달렸다.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제 3한강교를 건널 때 나는 차를 세웠다. 문을 열고 나가자 시원한 공 기가 몽롱한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난간을 짚고 이제 희뿌연 빛을 반사하며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운전기사가 따라 나와 난간에 기대어 섰다. 그 자세로 담배를 피우며 나를 보았다. 날이 밝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누워 난 한겨울 동안 어머니는 취로장에 나가 일했다. 어머니가 집을 나설 때마다 맞았던 그 새벽의 빛깔을 이제 알았다.  이글은 조세희의「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일부이다. 문장이 연결되는 방식은 시간적 질서, 곧 연대기의 순서를 따르고 있으며, 또 한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인과적 질서, 곧 계기성이 드러난다. 그렇지 만 시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이를테면  불이 켜진다  밤이면 집집마다  불이 켜진다  멀리 가까이  우는 듯 속삭이는 듯  불이 켜진다  사랑하는 이들의  사랑하는 이들의  우는 듯 속삭이는 듯  불이 켜진다  같은 시에 드러나는 사고의 연결방식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 시는 김 춘수의 「밤이면」의 전반부이다. 밤이 되어 불이 켜지는 현상을 노래하고 있지만, 사고의 연결은 시간적 질서나 인과적 질서를 따르기보다는 연상의 질서를 따르고 있다. 밤이 되어 불이 켜지는 현상에서 시인은 울음과 속삭임을 연상하고, 다시 거기서 사랑하는 이들의 울음과 속삭 임을 연상한다. 야콥슨은 산문작가란 접촉성을 토대로 문장들을 연결 하고, 시인은 유사성을 토대로 시행들을 연결한다고 말한 바 있다.*⑨ 네째로 산문에는 리듬이 없지만, 시에는 리듬이 있다. 물론 산문의 경우에도 리듬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산문의 경우 그것은 대체로 단편적이거나, 시행의 길이가 아니라 문장구조에 의해 창조된 다. 이와는 다르게 시의 경우 리듬은 한 편의 시를 지배하며 전통적으로는 문장구조보다는 시행의 길이에 의해 창조된다. 시에 있어서의 리 듬문제는 이 책의 "시의 리듬"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끝으로 시는 산문에 비해 압축된 진술의 형식을 취한다. 산문작가들 이 확장적인 방식으로 글을 쓴다면, 시인들은 수렴 혹은 압축적인 방식으로 글을 쓴다. 시인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은, 실증주의자들에 의하면, 우리들의 정신적 에너지를 경제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스펜서는 정신적 에너지의 경제를 모든 문체의 보편적 법칙으로 규정하고, 베잴로프스키는 시적 문체와 산문적 문체를 구별하면서, 전자는 모음생략, 모음제거, 구두점 같은 몇가지 수단으로 산문에서는 불가능한 목적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시적 문체에서는 리듬, 각운 등이 산문이 저지르는 에너지의 낭비를 방지한다고 본다.*⑩ 물론 스펜서나 베젤로프스키의 이런한 견해는 러시아 형식주의 이론가 쉬클로프스키에 의해 비판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형태상으로는 언어의 경제적 사용은 모든 시의 원리가 되고 있다.*⑪ 시에서 언어가 압축적으로 사용된다는 말은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시가 짧아야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시인이 시행들을 암시적으로 처리하며 개인적 경험에 더욱 많은 관심을 둔다는 사실을 뜻한다. 시인들이 자 신의 사고나 느낌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으로는 앞에서 말한 리 듬 외에 비유, 상징, 이미지 등이 있다.     
594    채송화야, 나와 놀쟈... 댓글:  조회:3603  추천:0  2017-07-24
+ 채송화에게는  베란다에서 키우는 작은 채송화 나를 하느님인 줄 안다 비 좀 내려 주세요 바람 좀 불게 해 주세요 가끔 나타나 물조리개로 흠뻑 비도 내려 주고 창을 활짝 열어 시원한 바람도 불게 하는 채송화에게는 내가 하느님이다 (신복순·아동문학가) + 채송화  키 큰 맨드라미가 부럽니  너는 웃는 모습이 귀엽잖아  내 마음의 꽃밭  맨 앞줄에 언제나 세우고 싶은  요 귀여운 꼬마 아가씨야  (심낙수·시인) + 채송화 별무리  지극히 낮은 곳으로  한없이 따뜻한 곳으로  고요히 한 몸 뉘이고 싶어요.  별들이 내려와 앉듯  보석을 흩뿌려 놓은 듯  빛나는 몸으로 있고 싶어요.  초가을 따뜻한 햇볕 하나라도  밤에 내린 고운 이슬 하나라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어요.  (유응교·건축가 시인) + 채송화  키가 작다고 어찌  미녀가 아니랴  칠월 펄펄 끓는 땡볕 아래  충청도 한산 모시 짜는 아가씨처럼  다소곳이 얼굴 붉히는 꽃  두 손 펼쳐 하늘을 우러러  별빛 쏟아지는 캄캄한 밤에도  파도 철썩이는 해풍을 온몸으로 맞으며  자줏빛 순정을 키웠거니  키가 작다고 어찌  순정이 붉지 않으랴  (김종원·시인, 1949-) + 채송화 땅바닥으로 기어기어 목마른 땡볕 아래  일어섰다, 채송화  가로세로 줄지어 선 키 큰 꽃들 사이로  잔돌 밟고 오래오래 쓰러진 핏줄 손목 잡고  어울렸다, 땀 젖은 얼굴들  평생 앉은뱅이꽃으로 피어  빗물에도 목이 잠기는 설움 달래며  지렁이처럼 기어기어 살다 묻히는  숨죽인 꽃인 줄 알았다  장마에 살 썩어들어도  하늘 바라보다 눈멀던 할머니인 줄 알았다  비 갠 뒤 푸른 하늘 이파리흙 툭툭 털며  목마른 땡볕 아래 서늘한 입술 물고  채송화, 일어섰다  (주용일·시인, 1964-)  + 채송화  빨강 노랑 초록 분홍  핑크빛이  땅에 앉아서  넘치지도 좁지도  뽐내지도  흘리지도 아니합니다  혼자서는  채송화라 하지 않고  꽃이라 않고  피지 않고  어깨동무로  오시는 길목마다  님이 됩니다.  (이민영·시인)  + 채송화 갈라진 길바닥 틈새에  꽃 한 송이  배시시 웃고 있었다.  독한 시멘트 길바닥 틈새에  뿌리를 내리고  흙바람 속에서 내민  어여쁜 목숨의 손.  혹독한 상처를 끌어안고  진주빛 별을 가슴에 심은  초록 눈길이  품속처럼 따사롭다.  세상을 이기고  홀로 조용히 빛나는  너의 웃음꽃 송이가.  (구명숙·교수 시인) + 채송화  몽당연필처럼 짤막한 이파리에  송골송골 맺힌 보석함  피었다 지고, 또 피어도  세속에 물들지 않는 작은 소녀  햇살도 모르게  장독대 틈새 묻어 둔 상념  침묵으로 지키는 별빛  별꽃이겠지  빨강, 노랑, 하얀 꿈꾸며  휘파람새 유혹하니  가던 길 멈추고  꽃잎에 내려앉는 휘파람새  (소양 김길자·시인) + 비안도·민박집 채송화 어디서나 현실은 싱겁고 미래는 속기 쉬운데 이곳 채송화만은 그렇지 않다 태양의 남근을 잡고 발버둥치는 채송화의 입술에 색감이 돌고 파도소리가 언덕을 넘어오다 호박잎에 숨는다 (이생진·시인, 1929-) + 채송화 하늘을 우러러보기가  너무 목이 아픈지  가느다란 몸뚱이에  수십 개의 물 돌기를 달고  무거운 팔  나지막이 깔아 놓고  촘촘히 이어진 바람  억지로 내보내며  그래도 새어 나가지 못하고  남은 미아 바람 거두어서  피워 올린다  태양의 씨앗을 꽃술에다 담아  멀미하지 않게 포근히 안고는. (전병철·시인, 1958-) + 채송화·1  언제나 맨 앞에서 줄을 서야 하는 막내아들 녀석이다. 아이들이 꼬마라고 놀린다며 자주 울고 들어오는 막내야, 어쩌겠니. 너는 너일 뿐이야. 네 마음에 품은 꽃이나 정성껏 피우려무나. 키 작아도 대통령 될 수 있고 키 작아도 박사 될 수 있단다. 마침 화단 맨 앞에 줄지어 서서 뜨거운 여름을 용기 있게 극복한 듯 채송화 꽃들이 활짝 함박웃음 지으며 만개하고 있었다. (양수창·목사 시인) + 채송화 ·2  큼직한 선인장 화분에서 간신히 몸 비집고 끼어서 사는 이웃이다. 기(氣) 한 번 펴지 못하고 작은 키에 구부정하게 살던 채송화, 어느 날 선인장보다 먼저 꽃을 피우고 비로소 환하게 웃는 그를 보았다. 아침 일찍 꽃들을 살피다가 마냥 신기롭게 바라보는  아들아, 딸아 너희들은 선인장이 좋으냐. 채송화가 좋으냐. (양수창·목사 시인) + 채송화  비가 내린다.  그칠 것 같지 않다.  비 오는 날, 채송화는  아우성이다.  빗물이 어떻게 꽃이 되는지  보이지는 않지만,  손녀딸에게 채송화를  무어라 설명해 줄까.  생명을, 얘들아  무어라 설명해 줄까.  비가 내린다.  그칠 것 같지 않다.  (김명배·시인, 1932-) + 채송화  창 밑 햇볕 잘 드는 곳에  한 줄로 나란히 줄 서서  도란도란 속살이던 정  꽃잎 이뻐서  아이는 고개 숙이고야 말았지  더 더 고개 숙이고야 말았지  얼마나 채송화 식구들이 어여쁜지  앉은뱅이 채송화 명랑함에  아이는 내내 밝고 밝게 커갈 수 있었던 게야  혼자서도  꽃 닮아 어여삐 여기는 마음 되어  기뻐함과 감사함 배웠으며  꽃 닮아 작고 작은 것들에  시선 줄 줄 아는 참된 즐거움  키워갔던 게야  이제  은빛 머리칼 되어서  그 채송화 도란거리는 정  그리워 참 그리워  모든 작은 것들 속에  꽃으로 피어있는 아기자기함  다시 발견하는 기쁨으로 살아가게 되누나  (정윤목·시인) + 채송화꽃 그녀  애끓는 사랑은  단칸방 신접살이도  달콤했었지만  살다보면 사랑은  세월에 무디어지고  애증으로 엉킨 정도  세월만큼 익어갔는데  노랑꽃 속에  빨간 꽃 속에  키 낮은 잎새 속에  여문 까만 씨앗이  눈물겹도록 작은데  어느 날 문득  폐암말기라는 지아비  사십도 못되어 떠나간다는데  모두들 흘러갈 그 길로  떠나간다는데  먼지같이 작은 씨알이  흩어져 흔적도 없이  그렇게 미운 정까지  털어내며  헤어짐도 아름답게  미소로 보내야 하는데  아깝다아깝다아깝다  엎드려 속울음 삼키는  그녀는 어찌할까  (목필균·시인) + 채송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라면  나지막하게라도 꽃을 피우겠습니다  꽃잎을 달고 향기도 풍기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제 이름을 달지 못하는 꽃도 많습니다  토담 위라도 불만이 있을 리 없지요  속셈이 있어 빨강 노랑 분홍의 빛깔을  색색이 내비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메마르고 시든 일상에서 돌아와 그대  마음 환하게 열린다면 그만이겠습니다  몸을 세워 높은 곳에 이르지 못하고  화려하지 않아도 세상 살아갑니다  (김윤현·시인, 1955-)   + 채송화의 노래   땅에 바싹 붙어사는 나는 땅딸보   작은 몸 작은 고개 힘껏 들어 올려보아도   난쟁이 신세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   그래도 나는 하나도 슬프지 않아   얕디얕은 내 모양 그대로 고맙고 감사할 뿐   비바람 몹시 불어 다른 꽃들이 휘청거릴 때도   나는 그다지 걱정할 게 없다네.   워낙 낮은 나의 자리 나의 존재이니까   아무리 거센 바람도 나를 어찌하지는 못하지 ( 시인 정연복}           * 배준석 시인의 詩로 읽는 세상이야기 14   작아서 큰 곳을 볼 수 있는 낮아서 높은 곳을 그리워하는 ㅡ조 운,『채송화』         채송화   조  운     불볕이 호도독호독 내려쬐는 담머리에   한올기 채송화 발돋움 하고 서서   드높은 하늘을 우러러 빨가장히 피었다.      채송화                               강흐들 고운 옷으로 치장을 하였어도 속에것까지 다 숨길 수는 없어서 더 강렬한 빛의 채송화꽃 그 작은 씨앗으로  어디 다 내려앉으려고 현미경으로나 보아야  속 시원할 그 작은 약속으로  다음 세상을 기약하나  작아서 유난히도 작아서 살아갈 길 욕심내다 이파리에 물을 잔뜩 담고서는  유비무한이라네 채송화        조철호   조선여자로 태어나 칠남매 낳고 키운 죄 마침내 병을 얻었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오늘도 뒤안에서 혼자 울다 자식들에게 들켜버린 속절없는 그 눈빛 낮게 피어 있던 꽃 엄마     채송화처럼 ㅡ김효선.     노을 앞에서 꽃은 입을 닫았다 어디서든 뿌리내릴 수 있다고 큰소리 뻥뻥 치던 막내삼촌 식구 중에서는 제일 못났다고 할아버지께서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얼큰하게 취한 가로등 아래에서 순하디순한 눈빛은 숨겨지지 않았다 눈에 띄지 않는다고 꽃을 피우지 않는 건 아니라고 마당 한 구석에서 입을 닫았던 채송화가 조근조근 따진다 막내삼촌이 집을 떠나던 날 채송화 꽃씨를 한 주먹 따다 마당 한가운데 쏟아부었다   /김효선 시집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에서     꽃 중에서도 가장 작은 키의 채송화, 채송화는 꽃밭에서 맨 앞자리나 가장자리에서 피던 꽃이다. 잡초에 가까운 꽃, 심지 않아도 해마다 마당 틈새마다 돌틈 사이마다 고개 내밀던 생명력 질긴 난쟁이 꽃이다. 화자는 이러한 채송화와 막내삼촌의 패기를 일치시키며 그 연민의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 아무도 눈여겨보거나 고개 숙여 들여다보지 않는 미운 오리새끼 같은, 소외된 오늘날 청년들의 자화상 같기도 하다.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어버린 서글픈 현실이다. 청년 실업자와 알바인생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채송화의 씩씩한 저력을 수혈해 주고픈 시인의 마음이 음미할수록 찡하다. 순하디 순한 청년들의 눈빛이 점점 사납게 충혈되어가는 이 시대에 화자는 채송화 꽃씨 같은 격려의 마음을 한웅큼씩 뿌려주고 싶은 것이 아닐까? 원색적으로 눈에 띄어야만 꽃은 아니다. 비록 키 작고 화려하진 않아도 열심히 저마다 땀 흘리는 채송화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척박해져가는 이 땅에도 희망이 있는 것이리라.     김효선. 제주 서귀포 대정읍 출신. 2004년 계간 로 등단. 시집 /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현 제주대학교. 제주관광대학교 출강.      채송화                                                  김은순 그늘 한 점 없는                                   낮은 몸, 땡볕 온몸으로 받으며 해맑은 웃음 잃지 않고 손사래 치는 울긋불긋 담 밑 채송화 흠뻑 땀에 절어 그늘만 좇던  뒤처진 무거운 발목 붙잡는다 한 계절 스치는 더위도 참지 못하고 어쩌지 못해 허둥대며 시원스레 뻥 뚫린  닿을 수 없는 새파란 하늘만 바라보다  여기저기 뻐근해진 몸 조심스레 구부려 눈인사 나눈다 조금만 힘주어 붙잡으면 짓무르고마는 여리디 여린 손 서로서로 부여잡고 자그마한 몸 그 낮은 자리에서도  왕소금 더위, 몸 사리지 않고 화들짝 웃으며 온 시름 더위 달래주는 한 줌 쏘옥 들어올 만큼 작은 더없이 곱디고운 울 엄니 같은     담 밑에 채송화 (원제 : 가을날)   도종환 시   딸 아이 손을 잡고 성당에서 오는 길 가을 바람 불어서 눈물납니다 담 밑에 채송화 오손도손 피었는데 함께 부른 노래 한 줄 눈물납니다    이준관님의 시 "내가 채송화 꽃처럼 조그마 했을 때"|   내가 채송화 꽃처럼 조그마 했을 때 꽃밭이 내집 이었지. 내가 강아지처럼 가앙가앙 돌아다니기 시작 했을 때 마당이 내집 이었지. 내가 송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 다녔을 때 푸른 들판이 내집 이었지. 내가 잠자리처럼 은빛 날개를 가졌을 때 파란 하늘이 내집 이었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내집은 많았지. 나를 키워 준 집은 차암 많았지     (동 시) 안영훈선생님의 채송화씨   어디 있지? 어디 있지?  어디 있지? 어디 있지?  어디 있지? 어디 있지?  어디다 숨겼더라?  어디더라? 어디더라?  어디지?  어디지?  햇빛이 간지러운 봄날  흙은 온 집안을  뒤지고 있다.   채송화  시 / 무하 정해각  폭염이 내려 쬐는 동녘 뜨락에  솔잎 푸른 치마 총총히 두르고  빨강 겹조고리, 샛노랑 동정  곱게 차려입고  아침에 피였다가 저녁에 시드는 하루살이 채송화야.  철 따라 피고 지는 우주의 섭리 따라  너도 마냥 쫓아 순진하게 따랐는가  누구나 마다하는 삼복 더위 여름철에  너는 어이해 좋은 계절 다 보내고  너 홀로 꽃철 이냥 외로이 피였는가. 너는 정직의 상징인가  그 아니면 못난이의 표상인가 세태를 쫓지 않는 그 우직함이여  너를 보고 다시 진리를 생각하노라. 채송화             시/ 강연옥 체구가 작은 만큼 소원도 작아 그래서 행복이 겹쳐 핀 채송화 바람이 불면 날릴까 걱정하며 부르르 떠는 꽃잎에게 괜찮아  괜찮아 다리 쪼그리고 앉아 말을 걸던 조그만 아이 채송화는 올해도 그대로인데 그 아이도 그대로일까       채송화          시/이 은 협       소나기 지나간 무더운 여름 날   비 맞아 종아리 걷어 올린 채송화 노랑 꽃 머리 대견한 아들보고 빨간 살결 내보이도록 어미는 아랫도리 벗으라 한다     가슴 활짝 열어 꽃피울 땅은 아주 좁은데 햇빛 한 올이 나타나 다른 햇빛 부르러 간 사이 허벅지까지 튀어 오른 흙 툭툭 털어주던 꽃무늬 호랑나비 날개 그림자 안고 낮인데도 마~악 실눈 뜬 천 개의 아기별이 화단에 뜬다.     채송화 시/김진광 햇빛 쏟아지는 어느집 마당 무리지어 피어난 가지각색의 꽃무더기  아기의 손가락 같이 도톰하게 자란  잎들  그 짙푸른 촉수들 어떤 것 혼자 떨어져 핀 것은  어찌보면  볼품이 없기까지해서 꽃이 꽃인지  잎이 꽃인지  하도 혼동스러워 멍청해 보이기까지 한 작디 작은 꽃 김치 국물에 둥실 띄워 마시거나 초장에 살짝 무쳐 먹으면 맛있을 것만 같은 마치 시원한 냉국 같은 꽃 나 어릴 적 학교가는 길  옆집 누나처럼 어느집 마당가에서나 흔하디 흔했던 꽃 절대 꺽지 않았던 꽃                    
문학의 세계 / 이승훈 문학이 노리는 것도 크게 보면 상상력에 의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 함에 있다. 그러나 시를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문학적인 글과 비문학 적인 글의 차이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많은 시의 초보자들이 시를 쓰면서 저지르는 오류 가운데 하나는 문학적인 글과 비문학적인 글을 혼동하는 일이다. 모든 글은 언어를 수단으로 한다. 그렇지만 언어로 표현된 모든 글을 문학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문학적인 글과 비문학적인 인 글을 구별하는 데에는 관점에 따라 여러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겠 지만, 이 자리에서는 크게 방향, 목적, 범주, 평가라는 네 가지 기준에 의해 살펴보기로 한다. *④  첫째로 비문학적인 글의 경우 언어가 외부세계를 지향함에 반하여 문학적인 글의 경우에는 언어가 언어 자체, 곧 자율적인 세계를 지향 한다. 모든 글은 언어로 이루어지며, 언어는 기호 sign에 지나지 않다. 기호란 무엇인가를 대신한다는 특성을 나타낸다. 이를 테면 "산"이 라는 언어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인▲을 대신한다. 따라서 "산" 이라는 언어는 기호로서의 특성을 나타낸다. 모든 언어는 그런 점에서 그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소유하게 마련이다. 또한 기호로서의 언어 는, 스위스 언어학자 소쉬르가 지적했듯이, 소리심상 signifiant과 개 념 signfiet으로 이루어진다.*⑤ "산"이라는 언어의 경우 소리심상은 발음할 때 나는 [S∧N(산)]이며, 개념은 지시대상인 ▲이다. 전자를 기호의 물질성, 후자를 기호의 의미라고 한다면, 모든 언어가 의미를 띨 수있는 것은 개념을 환기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을 소유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호로서의 언어는 모두가 이렇게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어 떤 대상, 곧 지시물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기호로서의 언어는 외부세 계의 대상이 아니라 기호로서의 언어 자체를 지향하는 수도 있다. 미 국의 문학이론가 프라이는 언어적 기호의 이러한 두 방향에 대해 언 급하면서, 기호가 외부세계를 지향하는 것을 원심적 centrifugal 방향, 기호가 기호 자체를 지향하는 것을 구심적 centripetal 방향이라고 부 른 바 있다. *⑥ 그에 의하면 전자는 언어의 축어적 국면 literal phase, 후자는 묘사적 국면 descriptive phase에 해당된다. 축어적 국면에서 언어, 이를 테면 하나의 낱말을 대할 때 우리는 그 언어가 지시하는 지시물 및 낱말과 낱말의 인습적인 관계에 이르기까지 계속 외부세계 를 향한다. 그러나 묘사적 국면에서 하나의 낱말을 대할 때 우리는 그 낱말의 지시물보다는 그 낱말이 글 속에서 만드는 보다 커다란 언어 패턴에 대한 감각을 발전시킨다. 이를테면 "산"이라는 낱말의 경우, 묘 사적 국면에서 우리는 페이지에 기록된 기호의 물질성, 곧 시각적 효 과, 그 기호를 읽을 때 나오는 청각적 효과, 나아가 그 음이 환기하는 이미지나 기억 등에 관심을 둔다. 이러한 효과나 이미지는 모두가 허 구의 세계에 속하며, 그것들은 상상력에 의해 드러난다. 모든 문학적 인 글은 궁극적으로 이렇게 언어기호가 구심적 방향으로 움직이며, 비 문학적인 글은 이와는 반대로 원심적인 방향으로 움직인다. 간단히 그 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  ← sing → → sing ←  ↓ ↑  비문학적인 글 문학적인 글  둘째로 비문학적인 글의 제1 목적이 정보를 전달하거나 어떤 사실 을 논중함에 있음에 비해 문학적인 글의 제1 목적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함에 있다. 비문학적인 글에 속하는 신문기사나 과학논문을 생각 해 보자. 신문기사가 노리는 것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정보전달이며, 과학논문이 노리는 것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정보와, 그 사실에 대한 논리적 증명이다. 그러나 문학적인 글에 속하는 시가 노리는 것은 그 러한 정보전달이나 논증이 아니다. 이를테면 김소월의 「山有花」에 나  오는  山에 꽃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피네  라는 시행에서 시인이 노리는 것은 산에는 봄, 여름, 가을에 꽃이 핀 다는 사실에 대한 정보를 전달함에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이 시에 서 독특한 하나의 심적 공간을 창조하고 있다. 그러한 창조는  山에  山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같은 시행이 보여준다.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다는 말은 시인과 꽃과 의 거리에 대한 어떤 객관적 정보도 드러내지 않으며, 또한 어째서 그 렇게 혼자 피어 있는가에 대한 논리적 증명도 하지 않는다. 이 시행은 외롭게 피어 있는 한 송이 꽃에 대한 시인의 정서적 반응과, 그 반응 을 토대로 하여 전개되는 상상력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山有花」에서 노래되는 세계는 이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독특한 공간이 다. 그러나 문학적인 글이 창조의 세계를 노린다고 해서 어떤 사실에 대한 정보나 논증에 대해 전적으로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 제 1목적이라고 쓴 것은, 이러한 목적이 지배적임을 뜻한다.  세째로 비문학적인 글의 대표적인 유형으로는 신문기사나 과학논문 같은 것들을 들 수 있고, 문학적인 글의 대표적 유행으로는 시, 소설. 희곡 등을 들 수 있다. 원래 문학 literarure 이란 용어는 서양에서는 문자 letter 라는 낱말을 어원으로 하고, 이 문자라는 낱말은 잎사귀 litter 라는 낱말을 어원으로 한다.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잎사귀에 글씨를 새겼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결국 문학은 광의로는 글로 된 일체 의 책을 의미한다. 그렇던 것이 오늘날처럼 문학적인 글과 비문학적인 글을 나누기 시작한 것은, 소위 창조의 개념 혹은 예술의 개념이 제대 로 자리를 잡으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술의 개념을 어디 에 두느냐에 따라 시대적으로 문학적인 글의 범주는 달라질 수 있다. 모울톤같은 문학이론가는 역사, 철학,철학, 웅변도 문학적인 글의 범주 에 포함시킨다.*⑦  네째로 비문학적인 글의 평가기준과 문학적인 글의 평가기준은 다 르다. 비문학적인 글의 가치를 따지는 데에는 유용성. 명백성. 실증성 이 기준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문학적인 글의 가치를 따지는 데에는 이와는 다르게 통일성. 다의성 심미성을 기준으로 한다. 신문기사가 신문기사로서 훌륭한가 훌륭하지 못한가를 따질 때에는 그 기사가 우 리들의 현실생활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가, 그 기사의 문체가 명백한가, 그 기사가 다루고 있는 정보가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가에 관심 을 둔다. 과학논문의 경우에도 그렇다. 이를테면 어떤 식물학자가 "진 달래꽃"에 대해 글을 쓴다고 하자. 그의 글이 논문으로서 가치를 띠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진달래꽃은 진달래의 꽃을 뜻하며, 진달래는 철쭉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관목으로서 꽃은 타원형으로 톱니가 없고, 4월에 엷은 홍색꽃이 3~5개씩 다섯 갈래로 피며 한국 각지 및 일본과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고 써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 글이 고학논문으로서 흠 잡을 구석이 없는 것은 이 글이 우리의 삶에 현실적으로 도움을 주고, 글의 문체가 명백하고, 글의 내용이 객관적 진리를 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의 경우에는, 이를테면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읽을 수 있듯이  寧邊에 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처럼 "진달래꽃"에 대한 객관적 정보, 곧 어떤 실증성도 드러나지 않고, "진달래꽃"의 의미가 명백하지도 않고, 또한 이 글이 우리의 삶에 실용 적 가치를 주는 것도 아니다. 이 시가 가치 있는 것은 한 편의 시로서 통일성을 소유하고, "진달래꽃"의 의미가 여러가지로 나타나며, 독특한 미적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통일성. 다의성. 심미성이 평가 의 기준이 된다.       
592    찔레꽃아, 나와 놀쟈... 댓글:  조회:2420  추천:0  2017-07-24
+ 찔레꽃 사랑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꽃을 피우지 못한다  풀과 나무는 물론 세상 무엇이든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으면  꽃이 피어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마음 넘치고 넘쳐 마침내  찢어진 가슴 열며 상처투성이 꽃  왈칵왈칵 구구절절이 피워내는 것  그리고 아픔이 큰 꽃일수록  고웁고 향기 더 나는 것  사랑은 아프게 해야 한다  꽃이 아프게 피어나듯  가슴이 찢기도록 해야 한다  상처는 정녕코 아름다운 것이므로  아, 저 하늬 길목 갯도랑 찔레꽃  한겨울을 얼마나 아파했을까  온몸 가시에 뚫리는 고통 견디며  누굴 저리 활활 사랑했을까  (양전형·시인, 제주도 출생)  + 찔레꽃의 전설  봄이면 산과 들에  하얗게 피어나는 찔레꽃  고려시대 몽고족에  공녀로 끌려간  찔레라는 소녀가 있었다네  십 여년 만에 고향 찾은 찔레 소녀  흩어진 가족을 찾아  산이며 들이며 헤매다  죽고 말았다네  그 자리에 피어난 하얀 꽃  그리움은 가시가 되고  마음은 하얀 꽃잎, 눈물은 빨간 열매  그리고 애타던 음성은  향기가 되었네  내 고향 산천 곳곳에 피어나는  슬프도록 하얀 꽃  지금도 봄이면  가시덤불 속  우리의 언니 같은 찔레의 넋은  꽃으로 피네.  (최영희·시인)  + 찔레꽃  아프다 아프다 하고  아무리 외쳐도  괜찮다 괜찮다 하며  마구 꺾으려는 손길 때문에  나의 상처는  가시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남모르게  내가 쏟은  하얀 피  하얀 눈물  한데 모여  향기가 되었다고  사랑은 원래  아픈 것이라고  당신이 내게 말하는 순간  나의 삶은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축복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찔레꽃  동산에 오르면  찔레꽃 향기  꽃잎마다  미소짓는  그대의 얼굴  행여나 오실까  뒤돌아보면  보리밭 종달새만  노래부르고  어느 세상  아득한 동리  그대 사는가,  꽃잎만 하얗게  짙어가누나.  (차성우·교사 시인)  + 찔레꽃 이야기  찔레꽃을 아느냐  찔레꽃은 몰라도  찔레꽃 냄새는 알지요  시집간 아낙네들의  얼굴은 잊었지만  그들이 풍겨주던 찔레꽃 냄새  살 냄새는 알지요  유월, 감자바위 골짜기의  찔레꽃을 보러 가요  저마다의 옛이야기  찔레꽃 童話를 들려줘요  (박이도·시인, 1938-)  + 찔레꽃  슬픔이 점령군이 되어  나를 허물기에 그냥 뒷길에 웅크렸네  굳이 말하라 하면  아픔 없는 사랑은 없다는데  나를 용서 못함도  가시를 숨기지 못함도 모두가  사소한 일에 상처 입는 사랑 때문인데  너 보내고 내가 핀들 그게 무슨 꽃이리  너를 사랑하지 않고는  나는 살 수가 없네  이유 하나 제대로 있는 눈물  꽃향기인 양 흘리고 싶어  찔레꽃은  봄 내내 하얗게 울지 않느냐.  (안수동·시인, 강원도 동해 출생)  + 찔레꽃  앙탈도 귀엽던 단발머리 가시내  팔목이 가늘어 호미자루 무겁다더니  돈 많고 잘산다는 서울로 팔려 가서  몸도 마음도 오지리 뺏기고  앙칼지게 가시만 달고 와서는  봄날, 논두렁에 퍼질고 앉아 운다.  해도 기운데 들어가지 않고  오빠 미안해요 퍼질고 운다.  오월 한 달을 하얗게 운다.  (변형규·시인, 1952-)  + 찔레꽃  오솔길 옆에 하얗게 핀 찔레꽃  진한 향기는 없어도  그윽한 눈길로 길손의 발길을  멈추게 하네  연한 가시로 온몸을 감싸고  님 그려 지키는 정절이  한없이 고와 보이네  꽃그늘 밑에 누워 쳐다보는  파아란 하늘은  온통 그리운 님의 얼굴로  가득히 다가오네  연한 새순을 꺾어 입에 씹으며  배가 고파 찔레순을 꺾어 먹든  옛날을 회억하네  희디흰 찔레꽃이 뭉텅이로 핀  그 오솔길  봄바람에 실려 오는 그윽한 향기가  온 가슴을 그리움으로 물들이네  (운경 김선옥·시인)  + 찔레꽃 필 무렵  한밤  가슴이 아픈 소리를 내면서  몇 개의 뼈가 벌떡 일어나 앉는다  제 몸 속에서 튀어나온  비명 소리를 잡기 위하여  마음이 손을 휘저었다  그리움이 벌떼처럼 사방에서 몰려  하얗게 핀 찔레꽃에 앉는다  순간 아찔한 가시에 찔리며  아야야 하고  다시 그 봄 속에 나른하게 눕는다.  (박현태·시인, 1939-)  + 찔레꽃  이 땅의 외지고 외진  산비탈 돌틈을 비집고  하얀 소복차림으로  눈익어 오는 것들  벌 나비 짝해 데불고  달디단 입맞춤으로 젖으며  보잘것없는 사랑의 시대  맑게 깨우치는 것들  세상엔 아직도  한 무리의 사랑이 저렇게 펄펄 살아서  짬도 없이 허리 굽힌 하루를  선들바람으로 토닥이는구나  사람아  사랑은 이렇게 가난한 자의 땅에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오나니  내 사랑을 익히지 않고는  저렇게 펄펄 살아보지 않고는  떠나지 못하겠구나, 죽지 못하겠구나.  (류종호·시인, 1961-)  + 찔레꽃 받아들던 날  오월의 숲에 갔었네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숲속을 찾아드는 햇살은  아기 단풍잎에 떨어져 빛나고  새들은 이 나무 저 가지로 날며 울었네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들이  천천히 흔들리고  우리도 따라 나무처럼 흔들리며  마음이 스치곤 했네  아주 작은 자갈돌들이 뒹구는  숲속의 하얀 오솔길  길섶의 보드라운 풀잎들이  우리들을 건드리며 간지럽히고  나는  난생 처음 사랑의 감미로움에 젖었다네  새로 피어나는 나뭇잎처럼 옷깃이 스치고  풀잎처럼 어깨가 닿고  꽃잎처럼 손길이 닿을 때  우리는 우리도 몰래 손이 잡히었다네  아,  숨이 뚝 멎고  빙그르르 세상이 돌 때  다람쥐 한 마리가 얼른 길을 질러가네  따사롭게 젖어 퍼지는 세상의 온기여  새로 열리는 숲이여 새로 태어나는 사랑이여  서로 섞이는 숨결이여  여기는 어디인가  숲은 끝이 없고  길 또한 아름다워라  우리들의 사랑 또한 그러하리  걷다가, 처음 손잡고 걷다가  한 무더기 하얀 꽃 앞에서  당신은 나에게 꽃 따주며 웃었네 하얀 찔레꽃  오월의 숲에 갔었네  그 숲에 가서  나는 숲 가득 퍼지는 사랑의 빛으로  내 가슴 가득 채웠다네  찔레꽃 받아든 날의 사랑이여  이 세상 끝없는 사랑의 날들이여!  바람 불고 눈 내려도  우리들의 숲엔 잎 지는 날 없으리.  (김용택·시인, 1948-)     * 찔레꽃 - 송찬호   그해 봄 결혼식 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 수년 삶이 그렇데 징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 빛 사기 희미한데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어라 벙어리처럼 하?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나무 덤불 아래서 오월의 뱀이 울고 있다 * * 송찬호시집[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 찔레꽃 - 송기원   처음부터 어려운 길인 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대를 잊는 일이 하도 깊어서  어질머리 흔들리는 봄날 저녁이면  갈 수도 돌아설 수도 없는 그런 지경에서  꿈결같이 사람 냄새를 맡곤 하였습니다.  한 번 돌고, 두 번 돌고, 또다시 도는  그런 산모롱이 아래 아늑한 곳에서는  개 짖는 소리, 된장국 냄새, 밥 짓는 연기 속에서  마을의 불빛들 하나 둘 밝게 켜지고  처음부터 어려운 길인 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대를 잊는 일이 하도 깊어서  갈 길도 돌아설 길도 모두 어둠 속에 묻혀버릴 때  그대 대신에 느닷없는 수천 수만 찔레꽃 송이들  무언(無言), 무언으로 피어올랐습니다.  그렇게 그대 대신에 피어올라서  돌아설 한 가닥 외길 비추어주었습니다. * * 꽃시그림집[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램덤하우스중앙     * 찔레꽃 2 -별들도 궁녀처럼 - 김종해   오월의 며칠은 늦잠을 잘 수 없다 어머니가 이고 오신 달빛 열두 필 한뜸 한 뜸 오려내어 찔레덤불 위에 부려지면 찔레꽃 향기 천지에 가득하다 오월의 며칠 노란 꽃술 흰 드레스로 새벽같이 어머니는 오시고 별들도 궁녀처럼 가만가만 뒤따른다   * 찔레꽃 3 -오월의 며칠은 - 김종해   오월의 며칠은 늦잠을 잘 수 없다 반새도록 하늘에서 별들이 내려와 찔레덤불 위에 하얗게 앉아 있다 알몸으로 웃고 재잘거리는 애기별똥별 주먹이 눈부시다 오오, 귀여운 것 개중에는 내 손주도 몇 앉아 있다.   * 찔레꽃 - 이원수 찔레꽃이 하얗게 피었다오 언니 일 가는 광산 길에 피었다오 찔레꽃 이파리는 맛도 있지 배고픈 날 따먹는 꽃이라오.   광산에서 돌 깨는 언니 맞으러 해가 저문 산길에 나왔다가 찔레꽃 한 잎 두 잎 따 먹었다오. 저녁 굶고 찔레꽃을 따 먹었다오. *    * 찔레꽃 - 공재동  찔레꽃은 서러운 꽃 눈물나는 꽃   배고픈 설움을 뻐꾸기는 알아   학교 갔다 돌아오는 십리 산길에   누나가 따서 먹던 하얀 찔레꽃.   배고파 따서 먹던 눈물의 꽃 찔레꽃.           * 찔레꽃 - 이형기  찔레꽃 피고지는 이 언덕  이고개 혼자넘는  가슴에 함박눈 온다 가고없는 사랑의 먼 그림자는 여름철 그윽한 찔레꽃 향기 설움도 잊었더라 이 모진 세파도 사랑하기 때문에 지켜온 순정 헤어지는 오늘은 혼자 가려네 찔레꽃 한아름 가슴에 안고   그대의 복을 빌며 돌아서는 날 눈 내리는 자하문 추억의 터전 순정일로 외줄기 가고 또 가도 찔레꽃 피는 길은 끝이 없어라   * 고향 찔레꽃 - 박종영 별처럼 서러운 꽃  언제나 고향 언덕배기에서 핀다  청보리 배를 불리는 오월  알싸한 향기는 절망의 벽을 넘어  골고루 후미진 들녘에 퍼진다  달빛 부서지는 외로운 밤  떠나간 이별 하얀 웃음으로 달래는 향기,  그 향기 가슴에 담아보면  순이도 보이고,  철수도 보이고,  어느새,  은빛 왕관으로 치장하는 흘러간 청춘이  높고 푸른 허공에 쏘아 올리는 세월,  그리움이다.   * 봄바람과 찔레꽃 - 곽재구       미워하지 마   사랑해줘 철조망을 넘어온 봄바람이 찔레꽃 덤불에 앉으며 얘기했다 아파하지마 고통이라고 절망이라고 증오라고 생각해 온 것들 그 모든 상실이라고 생각해온 것들에 대하여 다시 눈감고 생각해 줘 찔레꽃이 조용히 눈을 감으며 튀어나온 광대뼈에 눈불빛이 스쳤다 다시 안아줘 누구보다 아름답게 힘세게 부서지게 으스러지도록 다시는 우리 흩어지지 않도록 찔레꽃이 봄바람을 뜨겁게 껴안으며 얘기했다 해일처럼 남쪽에서 봄바람이 불어오고 철조망 아래 쌓인 낡은 뼈들이 오래 아픈 두 눈을 뜨고 있었다 미워하지 마 사랑해 줘 우린 하나니까 끝끝내 헤어질 수 없으니까 대지에 번져가는 봄바람 소리에 구멍 난 철모 녹슨 수류탄 마른 찔레덤불들이 다투어 피어 올라 서로의 가슴에 뜨거운 희망의 낙인을 찍었다       * 찔레꽃 - 장사익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아! 노래하며 울었지 아 찔레꽃처럼 울었지 찔레꽃처럼 춤췄지 찔레꽃처럼 노래했지 당신은 찔레꽃 찔레꽃처럼 울었지 당신은 찔레꽃   * 찔레꽃은 피고 - 신경림     이웃 가게들이 다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난 뒤까지도 그애는 책을 읽거나 수를 놓으면서 점방에 앉아 있었다. 내가 멀리서 바라보며 서 있는 학교 마당가에는 하얀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찔레꽃 향기는 그애한테서 바람을 타고 길을 건넜다.     꽃이 지고 찔레가 여물고 빨간 열매가 맺히기 전에 전쟁이 나고 그애네 가게는 문이 닫혔다. 그애가 간 곳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오랫동안 그 애를 찾아 헤매었나 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 애가 보이기 시작했다. 강나루 분교에서, 아이들 앞에서 날렵하게 몸을 날리는 그애가 보였다. 산골읍 우체국에서, 두꺼운 봉투에 우표를 붙이는 그애가 보였다. 활석 강산 뙤약볕 아래서, 힘겹게 돌을 깨는 그애가 보였다. 서울의 뒷골목에서, 항구의 술집에서, 읍내의 건어물점에서, 그애를 거듭 보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 엄마가 되어 있는, 할머니가 되어 있는,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있는 그애를 보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     하얀 찔레꽃은 피고, 또 지고.   * 찔레꽃 꽃 덤불 -병천에게 - 김용택  아직도 촉촉하게 젖은 눈을 너는 찾지 못했느냐 하얀 찔레꽃이 진다 지는 찔레꽃잎을 따라 어둠 속을 향해 가는 우리들의 손은 얼마나 짧으냐 하얗게 기운 너의 한쪽 어깨가 어둔 강물에 젖는다 인생은, 사랑은, 때로 너무 쓸쓸해서 더는 걸을 수가 없구나 더는 걸을 수 없을 때  너는 술잔을 앞에 놓고 흔들린다  덧없이 흘러가는 봄밤이 외로워  한없이 흔들린다  술잔에 어른거리는  불빛들도 어디에 가 닿지 못해 술잔에 부딪쳐 떨며 사라진다  울지 말거라 울지 말거라 꽃이 지는 찔레나무 찔레꽃 하얀 꽃 덤불처럼 가는 봄날을 울지 말거라 *     찔 레   - 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가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 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 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만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리 늘 말을 잃어 갔다                      
591    상상력의 무늬들은 새로운 세계와 세상의 풍경을 만든다... 댓글:  조회:2030  추천:0  2017-07-24
5 아이가 물통을 들고와 죽은 나무에 물을 준다. 황량한 들판, 홀로 선 앙상한 나무에 물을 준다. 별다른 이유 없이 말을 할 줄 모르는 아이. 물은 준 아이가 나무 아래 눕는다. 기다리는 것이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희생}의 이 마지막 장면은 유명한 상징으로 알려져 있고, 강한 이미지로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닿았다. 우리 현실 속 불안과 황무지와 상실의 이미지와, 그에 대한 희망과 기다림과 구원의 이미지가 강하게 맞물려 굵은 수레바퀴자국을 남겼다고나 할까. 아이는 기억한다. 매일 물을 주어 3년 후에 꽃이 온통 만발했다는 죽은 나무이야기를, 끝없이 노력하면 세상을 변하게 한다는 알렉산더의 이야기를 믿는다. 유일한 소통자는 말을 못하던 아들뿐이었던 알렉산더는 정신병원으로 끌려간 뒤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는 {희생}의 마지막 자막은 [안개 속 풍경]의 결말과 비슷하다. 이는 무엇을 암시하는 말일까. 새로운 소통? 새로운 희망?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장면들은 매우 시적이다. 이 영화에서 우체부인 오토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기다리죠. 무엇인가를." 알렉산더도 말한다. "내 삶은 긴 기다림에 불과했지." 평생 기차역에 서서 기다리는 느낌, 그것이 인생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이미지의 마술사인 타르코프스키는 다양하게 변주되는 환상적인 영상 속에서 끊임없이 속삭인다.  그 내밀한 언어는 절망 속의 희망일 터이다. {희생}은 불안과 단절이라는 구조 속에 있는, 소통과 희망의 한 길목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리라.  황량한 길. 몸뚱이만 남은 나무들이 길을 만들고 있다. 그 길을 두 여인이 서로 기대어 걷는다. 고립되고 단절된 시간과 공간을 '함께' 걷는다. 그래서 사진은 전혀 황량하지 않다. 모순된 충동들 사이로 어떤 조화를 이루는 순간이 작은 믿음을 만들고 있다. 소통은 내 안으로 난 길이고, 또한 함께 가는 길이다. 결국 우리가 찾고자 했던 것은 '함께 걸을 길'이었고, '함께 걸을 그대'였던가. 이렇게 이 사진의 은유는 우리에게 존재의 각성을 가져오고, 또 스스로 위로하는 법을 제시한다. 살아왔고, 살아갈 모든 이유는 '함께'라는 길이었던 것. 이처럼 세계는 카메라의 파인더 속에서 숨겨진 목소리를 낸다. 주변사물과 우리를 이어줌으로 형성되는 수많은 관계와 소통. 그 속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전달하고 전달받으며, 삶을 견디는 방법을 알게 된다. 시나 사진이나 영화에 관한 욕망은 바로 이런 은유의 세계를 통해 한 그리움에 닿고자하는 열망과도 같은 것. 이러한 강렬한 존재를 체험하고자 하는 의지가, 의식보다 원래 시적이라는 무의식의 세계를 통과해 이미지로 전개되는 것이리라.  서정적이며 순수한 예술 영화로 우리가 잃어버린 원초적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작품들은 소박하면서도, 가슴 밑바닥을 뒤흔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1997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체리 향기}는 일상의 사소한 풍경을 통해 삶의 근원적인 질문에 접근한다. 영화 속의 절제된 영상과 단순한 서사구조는 근원적 울림으로 가득하다. 자살을 결심한 40대의 남자가 자신을 묻어줄 사람을 구하기 위해 거리를 헤매는 과정 속에 불거지는 삶의 아름다움. 주인공은 수면제를 먹고 나무구덩이 속에 누워 있을 자신의 시신 위로 흙을 덮어줄 사람을 찾아다닌다. 그의 제의를 받아들인 사람은 세 번째에 만난, 박물관에서 박제를 만드는 노인이다. 제의를 받아들이면서도 노인은 자신이 본 다양한 삶의 아름다움과 살아 있음에 대한 축복을 가르쳐 준다. 노인은 늘 죽음 곁에 사람이라는 것도 하나의 은유이다. 주인공은 결국 삶을 선택한다. 고독과 방황과 기다림은 결국 인간에게 구원이라는 희망을 위하여 있다. 존재의 바닥을 탐구하려는 키아로스타미의 집요한 정신이 내는 커다란 울림. 일상에 숨겨진 삶의 신비를 드러내는 은유의 풀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오마르 카이얌의 4행시에서 더욱 향기로워진다. 인간이여 삶을 즐기려면 죽음이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고 체리 향기를 맡아보아라 6 다시 상상한다. 씨앗 위에 흙을 덮는다. 솜털 투명한 떡잎, 줄기에서 벋어나는 가지, 가지에 부푸는 망울들, 경이에 눈을 치뜨는 꽃술, 잎새를 말갛게 통과하는 햇살, 꽃부리에 유희하는 바람, 다시 씨방 안에 맺히는 씨앗들, 그 씨앗을 받는 그대, 그대 앞에 놓인 길. 그리고 잎보라. 눈부시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진실에 대한 어떤 가치와 순수. 무엇보다 우리는 우주 속에 있는 무한한 은유의 세계를 상실하고 있다. 부단히 반복되는 삶. 이제 어디에서 그 비밀의 세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모든 답은 '그대'이다. 그대는 '희망' 자체니까. 그대와의 소통이 삶의 이유이다. 모든 풍경의 이유이다. 시를 쓰는, 사진을 찍는, 영화를 보는, 아름다운 이유이다. 소통이 씨앗을 뿌리는 일이고 희망이 꽃을 피우는 일이라면 여기엔 기다림이 필요하다. 상상력은 기다림이라는 열에너지. 수많은 이미지가 피고 진다. 결론적으로 꿈이란 소통에의 의지. 그 꿈은 상상력으로 우리의 삶을 교직하고 채색한다. 이 상상력의 무늬들은 새로운 세계와 인식을 열면서 세상의 풍경을 만든다. 은유의 눈동자들이 만들어낸 이 무늬 속에 희망은 이미 예비되어 있을 것. 사람과 사람들이 이 길목에 선다. 그리고 기다린다.  사유를 제시하는 어떤 이미지들 속에서 오늘도 우리는 울림을 듣는다. 북소리 같은 울림이 아니라, 깊은 동굴 속 어둠 어디선가 떨어지고 있는 물방울 같은, 맑은 울림이다.  
590    커피야, 너를 마시면 이 시지기-죽림은 밤잠 못잔단다... 댓글:  조회:2562  추천:0  2017-07-24
      + 어느 날의 커피  어느 날  혼자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허무해지고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고  눈물이 쏟아지는데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만날 사람이 없다  주위에는 항상  친구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날 이런 마음을  들어줄 사람을 생각하니  수첩에 적힌 이름과 전화번호를  읽어 내려가 보아도 모두가 아니었다  혼자 바람맞고 사는 세상  거리를 걷다 가슴을 삭이고  마시는 뜨거운 한잔의 커피  아! 삶이란 때론 이렇게 외롭구나.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커피  커피를  마실 때가 좋다.  생각할 시간을 주기 때문이다.  커피는  본연의 자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커트루드 스타인·미국 시인)  + 오후 세시의 커피  오후 세시의 커피는 방장스님의 죽비소리다  뜨거운 한낮 피어나는 배롱나무의 합창이다  그것은 오전 내내 울렸던 요령소리이며  독이 허물 벗어 약이 되는 소리이며  지장보살이 그의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다  나는 쓸쓸히 오후 세시의 커피를 타 마시며  이대로 죽을지라도 허물 벗어  생생한 삶에 이르고 싶을 뿐이다  (고명수·시인, 1957-)  * 배롱나무: 백일홍.  + 친애하는 커피씨  아침에 눈을 뜨니  문득 오늘의 첫마음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밤사이 잠시  고단한 몸을 침대에 뉘였을 뿐인데  어제의 아침처럼  개운하게 맑지가 않으니  그래서 더 이불 속에서 잠시 주춤이네요  분명 어젯밤 눈을 감을 때  오늘도 열정으로 살리라  마음에 새겼는데  몸이 마음을 배신하는 걸까요?  잠시 무감각의 강을 건너와  첫마음 되돌리기  이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제의 바램처럼  오늘도 열정에 살려구요  친애하는 커피씨  당신은 제게 첫마음입니다  그거 아시죠?  (박노해·시인, 1957-)  + 연인 같은 커피     습관처럼  하루에 몇 잔씩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마실 때  함께하는 그대 생각에  목젖을 타고 흐르는  쌉싸래한 향이 오히려 감미롭다  바쁜 일상 속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은  내 마음 뜰 안 연인처럼  보석과 같은 평온한 휴식이다  오늘같이 비 오는 날엔  오랜 습관으로 중독된 커피처럼  그대 생각도 뗄 수 없는 일상이 되어  진한 커피를 또 한 잔 마신다.  (가향 류인순·시인, 경남 진주 출생)  + 한밤에 끓이는 커피  물이 끓어오르면서 주전자가  늑대 울음을 내기 시작합니다  그도 저렇게 울었던 것 같습니다  갈 데 없어 서러운 늑대처럼  사랑을 잃은 그도 저렇듯  우-우우 소리를 냈었지요  못질해 두었던 시간의 가슴을  열어 봅니다 푸르디푸른 별빛!  천 개의 얼음발로 벼랑을 타고 있습니다  아슬아슬 놓였던 발자국마다   일어서는 은빛! 비틀거리는  늑대 가슴엔 아직도 한 개의 달이  우-우우 핏빛입니다  미친 바람이었을 테지요  그 원통한 울림대  밑바닥까지 쑤∼욱 손을 집어넣고  응고 직전의 슬픔 휘휘 저어댔던  회한이 나의 오장(五臟)에서 그의 울음을  검푸른 늑대울음과 합성된  그의 울음, 하늘도 덩달아  울컥울컥 달빛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한혜영·시인, 1954-)  + 커피 리필  가슴으로 당신을 마십니다. 마셔도 마셔도 다함없이 당신이 그리운 건 내 사랑이 계속 리필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날 떠나고 작별을 고했어도 한 삼 년은 너끈히 당신을 가슴으로 마실 수 있습니다. 이토록 저미고 아픈 바에야 물기는 좀 많겠습니까. 눈물로 바닥을 낸다 해도 내 슬픔의 양이 다시 채워지는 건 당신에 대한 내 그리움이 끊임없이 리필되기 때문이죠. 당신…… 다시, 당신을 제게 따라주실 순 없겠습니까. 당신과의 첫 만남과 시작으로 다시 한 번만 제 가슴 가득히 채워주실 수는 없는지요. 커피를 리필시킬 때마다 전 이렇게 당신에 대한 제 사랑도 꼭 리필시키는데.   (김하인·시인, 1962-)  + 커피 한잔  당신과 맨 처음  다방에서 만났던 그날  작은 찻잔 속의  커피 한잔  그 뜨거웠던 것이  미지근하게 되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내 가슴은  긴긴 날의 냉랭함  먼지같이 털어 버리고  운명 같은 사랑의 예감으로  한순간 불타올랐음을  아마 당신은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아침에 바삐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커피 한잔은  꼭 챙겨 마시는  이제는 오래된  나의 사랑 나의 아내여. (정연복·시인, 1957-)   커피 한모금 그리움 한방울                       빛고운/김인숙    커피 한 모금  떠오른 얼굴  환하게  웃고있는 얼굴 하나  목이 메여온다  가슴이 아려온다  커피잔 커피속에서  웃고있는 그사람  젖어오는 눈망울에  똑  똑  연이어 떨어지는  눈물의 정체는  그 리 움   深夜(심야)의 커피/박목월 1 이슥토록 글을 썼다 새벽 세 時(시) 시장기가 든다 연필을 깎아 낸 마른 향나무 고독한 향기, 불을 끄니 아아 높이 靑(청)과일 같은 달. 2 겨우 끝맺음. 넘버를 매긴다. 마흔 다섯 장의 散文(산문-흩날리는 글발) 이천 원에 이백원이 부족한 초췌한 나의 분신들. 아내는 앓고...... 지쳐 쓰러진 萬年筆(만년필)의 너무나 엄숙한 臥身(와신).   3 사륵사륵 설탕이 녹는다. 그 정결한 投身(투신) 그 고독한 溶解(용해) 아아 深夜(심야)의 커피 暗褐色 深淵(암갈색 심연)을  혼자 마신다.   커피 한잔에 담은 고독 / 혜린 원연숙 희미한 가로등 불빛아래  서성이는 외로운 바람소리 진한 커피 한잔에 적막한 밤의 고독 우린다. 목젖을 타고 흘러내리는 한 모금 짜릿한 전율 홀로 외로운 가슴 적시고 진한 향기에 맴도는 아련한 별빛 한 모금 식어버린 찻잔위엔 까맣게  멍울진 우수 어리고 속절없이 찾아오는 애상  가슴에 시린 연민 불러온다 창가에 부서지는 은빛 조각달  하얀 찻 잔위에 내려앉고 희미한 가로등 어깨위로 외로운 그림자 황홀한 고독 머문다   친구야 커피 한잔 하자               지아 성순자 친구야 커피 한잔 하자 가려진 시간 재촉하는 발걸음 멈추고 마음 나누며 쉬고 싶다  친구와 마주 앉아 커피 한잔 하게 태평양 넘는 바람에 너의 따스한 마음과  예쁜 미소도 보내주렴 친구야  커피 한잔 하자. 커피 향처럼 향기로운 그대들 / 한송이   커피 냄새가 코끝에 진하게 풍겨 오는 향긋한 행복한 아침 사랑하는 사람들과 커피 한잔 하면서 하루를 시작해보세요   커피 한잔 행복 나누어 가면서 미소진 얼굴 서로 인사해가며 커피 향처럼 향기로운 그대들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해 보세요   모두 행복한 마음이 될 거 같아요  보글보글 끓는 사랑의 커피 향기 아름다운 미소가 함께하는 시간 기분이 너무 좋다고 말해 보세요   행복으로 함께 열어갈 수 가있는 고 운임들 기분 좋은 하루들 되세요 멋진 그대들 때문에 오늘 하루도 웃으며 사는 하루가 될 거 같네요    커피 한잔의 행복 / 용혜원 지나간 삶의 그리움과 다가올 삶의 기대 속에 우리는 늘 아쉬움이 있다 커피 한 잔에 행복을 느끼듯 소박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작은 일 속에서도 보람을 느끼면 삶 자체가 좋을 듯 싶다 항상 무언가에 묶인 듯 풀려고 애쓰는 우리들 짐깐이라도 희망이라는 연을 삶 한가운데로 날릴 수 있다면 세상은 좀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때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느끼며 미소를 지으며 살아가고 싶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와 같이 / 오광수 아침에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 오늘을 함께하는 당신을 생각하게 합니다. 방안을 가득히 채우는 모닝커피의 향기처럼 당신의 향기는 내 마음을 순수하게 합니다. 눈 지그시 감으며 마시는 커피잔엔 신비로운 내음과 함께 따스한 입술이 전해오고 하얀이 드러내며  조용히 웃고 있을 당신 모습은 나로 하여금 미소를 갖게 합니다. 커피를 따를 때의 그 소리는 내게 들려주었던 노래가 되었고 지금 입속으로 흥얼거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내게 달콤함만 준 게 아닙니다. 쓴맛도 있음을 알게 했습니다. 목안 가득히 힘껏 삼키면서 기쁠 때는 슬플 때를 기억하게하고 어려울 때는 소망을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오늘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은 당신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삶의 향기입니다.   그대와 마주앉아 따뜻한 차 한잔 / 이정하 조용히 내려와 곱게 흩어지는 햇살들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아침입니다. 이러한 날이면  내 마음은 한 자리에 못 있지요. 하지만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욕구만큼이나 내게 부여된 책임이 있어  나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있는 자리에 주저앉고 맙니다. 지금쯤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혹, 아침 커피를 한 잔 하면서 저 찬란하게 부서지는 아침 햇살을 감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나는 오늘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그 조용한 반짝임이 꼭 그대의 편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보잘것없는 나의 글이 힘이 된다니 그 말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지요. 사실은 그대의 편지가 도리어 저 고운 햇살처럼 나를 눈부시게 하는데... 오늘같은 날이면 다른 것 모두  접어두고서 그대와 마주앉아  따뜻한 차 한잔 마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원두커피  가슴과 마음 겹겹  가제를 걸러 떨어지는  다갈색 물처럼  그대 나에게 떨어져  고인다.  나, 당신을 따라  마시며  아늑해지고  행복해져서  다시 당신이 내 안을  채운다.  당신이  세상에 있는 한  끝까지 나는 그윽하게  그대를 비워  사랑을 마신다.  (김하인·시인, 1962-)   + 커피 한잔과 사랑 당산나무 그늘에서  커피 한잔씩 들고  가장 편안하게 앉아서  먼 산을 바라다보며  유유하게 마시는 기분은  당신과 내가 아니면 누가 알랴  하얀 솜털 구름과 먹구름이 번갈아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을 때  흘러간 세월을 마시듯  조금씩 커피를 입에 물고 있었다.  키 큰 나무 위에서 목이 쉬도록  이름 모를 새가 편지를 읽고  훌쩍 떠나 가버렸다  그러나 가슴속에 언제부턴가 머물러 있는  사랑의 바람은 뜨거운 커피향 속에  또 다른 솜털 구름을 피어내고 있다.  (김용관·시인, 1942-) + 커피      사랑한다고 쓸까,  미워한다고 쓸까,  채울 말이 없는 빈 원고지 앞에서  바르르 떠는 펜,  바르르 떠는 손으로  한 잔의 커피를 든다.  달지도 않다.  쓰지도 않다.  단맛과 쓴맛이 한가지로 어우러내는  그 향기,  커피는 설탕을 적당히 쳐야만  제 맛이다.  블랙 커피는 싫다.  커피 잔에 녹아드는 설탕처럼  이성의 그릇에 녹아드는 감성,  그 원고지의 빈 칸 앞에서  밤에 홀로 커피를 드는 것은  나를 바라다보는 일이다. (오세영·시인, 1942-)  + 블랙커피를 마시며  나의 모닝커피에는  설탕을 타지 않는다  날마다 마시는 세상의 물은  담즙보다 더 쓰지 않더냐?  혀의 유두를 소태껍질로 문질러야  개미핥기의 혀가 개미탑을 파헤치듯이  세상의 혓바닥에서 단맛 알갱이를 캘 수 있지 않겠느냐?  나의 이브닝커피에는  프림을 타지 않는다  저물녘 숲속의 나무들 틈 사이는  인도 흑단보다 더 어둡고 촘촘하지 않더냐?  덤불 속 땅굴로 들어가는 뱀  갈퀴 혀처럼 어둠에 익숙해야  저녁 숲길을 두려움 없이 혼자 갈 수 있지 않겠느냐?  눈도 뜨지 못하는 사슴 새끼가  어미 가슴의 젖꼭지를 찾듯이  그대의 캄캄한 입 속에서  사탕무 뿌리를 캐기 위함이다.  (김세영·시인) + 커피 향으로 행복한 아침 원두 커피의 향이  천천히 방안에 내려앉는 아침은  평안한 마음이어서 좋습니다. 헤이즐넛의 오묘함과 맛있는 불루마운틴의 조화로운 향기는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살마저 감동시키고 가끔씩 호흡을 쉬어 긴장케 하는 커피메이트의 맥박 소리는 기다림을 설렘으로 유도합니다 핸드밀로 가루를 더 곱게 만듦은 커피를 쓰고 떫게 만들어 마실 때 나의 욕심과 교만을 깨닫기 위함인데, 한 모금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면  커피 향의 살가운 속삭임이 호흡으로 전해져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이 행복함. 아! 어떻게 미운 마음을 가질 수 있으랴? 따스함과 함께 온 쓴맛이 나중에 내겐 단맛인 것을, 커피 향기가 입안에서 긴 여운으로 남아 있는 이 아침은 어제는 어려웠지만 내일은 반드시 좋은 날이 오는 행복한 오늘의 시작입니다. (오광수·시인, 1953-)    
589    시는 언어로 그린 그림이다... 댓글:  조회:2361  추천:0  2017-07-24
4 은유,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끌여들여, 현실의 거친 벽을 넘어선다. 언어는 오히려 솟아나는 새싹 같은 푸른 마력으로 드러나,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어주는 매듭이 된다. 진실은 더 선명해진다. 이처럼 시적 상상력의 본질을 이루는, 논리 이전의 언어인 은유는 세계를 새롭게 발견하는 열린 사유이다. 언어적 논리를 넘어서서 현실을 더욱 풍요로운 상상력의 세계로 변환시켰다가 다시 창조된 현실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마이클 레드포드의 {일 포스티노} 또한 시적 상상력이 넘치는 한 편의 영상시로 평가된다. 시적인 리듬, 시적인 영상, 시적인 대사 등 시적 표현 양상을 모두 담고 있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건 은유지만 더 우리를 찡하게 하는 것은 은유를 통해 이루어진 네루다와 마리오의 우정과 소통이다. 시에 문외한이었던 마리오는 네루다를 만나면서 삶의 보이지 않는 곳을 응시하는 시적 은유의 세계를 발견한다. 은유가 세계의 또다른 모습, 또다른 환幻의 수많은 단면을 투사하는 무한한 언어의 세계임을 깨달은 것이다. 마치 파도의 포말 하나하나에 비치는 세계처럼 말이다.  마리오의 이러한 시적 체험의 과정은 곧 시가 무엇인지, 시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극적인 질문을 보여준다. '……기타 등등'이 이 세상 다른 것의 은유라면 이 세계는 온통 은유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마리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섬, 작은 파도와 큰 파도, 절벽 위의 바람, 아버지의 서글픈 그물, 신부님이 울리는 교회의 종, 사랑하는 베아트리체의 뱃속에 있는 아기의 심장소리 등등 사소한 일상이 얼마나 큰 은유의 세계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 은유의 눈으로 세상의 진실을 읽으려 했던 마리오는 진정 아름다운 시인의 삶을 살아낸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임시직 우체부였던 마리오는 한편의 시도 쓰지 않았지만 진정한 시인이다. 그는 은유 속에 있는 삶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않았던가. 마리오가 죽고난 다음에야 네루다는 소식이 끊긴 자신에게 보내고자 마리오가 녹음했던 섬의 소리들을 듣는다. 마리오를 생각하며 쓴 한 편의 시는 시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 시가 날 찾아왔다. 난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그게 겨울이었는지 강가였는지 언제, 어떻게인지 난 모른다. 그건 누가 말해준 것도 아니고 책으로 읽은 것도 아니고 침묵도 아니다. 내가 헤매고 다니던 길거리에서 밤의 한 자락에서 뜻하지 않는 타인에게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고독한 귀로에서 그곳에서 나의 마음이 움직였다 네루다는 마리오를 시인으로 인정했다. 아니, 그는 마리오로부터 새로운 은유의 세계를 읽어내었으리라.  이처럼 은유는 언어적 이미지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 긴밀한 마음의 움직임을 만든다. 결국 시적 사유란 현실에 대한 새로운 욕망이며 아름다움에 대한 개혁의지가 될 것이다. 한 편의 시는 은유를 통해 무의식의 세계에서 빛으로 건져낸 서정의 이미지. 그래서 시는 말하는 그림이다.  조그만 샛강이 하나 흘러왔다고 하면 될까 바람들이 슬하의 식구들을 데리고 내 속눈썹을 스친다고 하면 될까 봉숭아 씨를 얻어다 화분에 묻고 싹이 돋아 문득 그 앞에 쪼그리고 앉는 일이여 돋은 떡잎 위에 어른대는 해와 달에도 겸하여 조심히 물을 뿌리는 일이여 ―장석남, [봉숭아를 심고] 부분 봉숭아 씨앗을 심고, 그 싹 위에 조심조심 물을 뿌리는 마음, 그건 생명을 향한, 아름다움을 향한 시인의 의지이다. 언어로 그려진 이 그림을 통해서 푸르고 따뜻한 진실의 한 풍경에 닿는다. 어떤 마음의 울림이 이미지를 통해 만드는 파문. 여기서 우리는 그 존재조건만으로 주어진 현실을 건너, 샛강이라는 은유에 들어갔다가, 새로운 현실을 경험한다. 하나의 언어가 지닌 사전적 의미는 은유를 통해 그 의미가 확장되어 시인 자신만의 구체적 진리를 형성해낸다. 그것이 서정의 위력을 만든다. 이렇듯 어떤 대상들의 뒷모습을 새롭고도 섬세하게 읽어가는 은유의 불빛이 시의 세계고, 사진의 세계이며 영화의 세계이다.  쿠델카의 손목이 보여주고 있는 시간의 은유는 무엇일까. {안개 속 풍경}, 바다에서 건져올린 거대한 동상의 부러진 손목과 비교해 볼만하다. 그 뒤로 펼쳐진 도심의 풍경은 시간 속을 걷는 우리의 기억일 것이다. 기억은 과거와 그 과거를 향하는 현재의식의 결합으로 창조된다. 사진 이미지가 주는 은유는 흔적, 시간, 죽음 같은 것들로 현재 속 과거이다. 사진은 포착한 순간의 우연성과 필연성을 통해 꿈과 픽션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사진의 미학적이면서도 역사적인 힘이 된다. 거기서 작가는 새로운 진실을 캐어내고, 대상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한다. {스모크}라는 영화에서 담배가게 주인은 가게 앞 같은 한 장소를 매일 같은 시간에 십 년 이상을 계속 찍는다. 매일 같아 보이는 일상이지만 그는 그 시간이 얼마나 유일한 순간인지를 알았던 것. 그 시간의 고유성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것이 무엇일까. 찍는 사람과 찍힌 대상이 만나는 찰나적이며 유일한 순간, 그것은 과거의 시간이 아니다. 시간의 풍경 속을 걸어왔고, 걸어가는 중이기에 사진은 지난 일이 아니라, 그 기억이 지시하는 현실을 묻는다. 사진엔 이미 사라진 시간과 존재, 즉 끊임없는 죽음의 이미지가 담겨 있지만, 현재에 이르러 그것은 존재를 재발견하게 의식의 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사진을 찍는다.    
588    담쟁이야, 네 맘대로 담장을 넘어라... 댓글:  조회:2282  추천:0  2017-07-24
     담쟁이 시 모음 == 빨간 담쟁이덩굴 == 어느새 담쟁이덩굴이 붉게 물들었다! 살 만하지 않은가. 내 심장은 빨간 담쟁이덩굴과 함께 두근거리니! 석류, 사과 그리고 모든 불꽃들의 빨간 정령들이 몰려와 저렇게 물을 들이고, 세상의 모든 심장의 정령들이 한꺼번에 스며들어 시간의 정령, 변화의 정령, 바람의 정령들 함께 잎을 흔들며 저렇게 물을 들여놓았으니, 살 만하지 않은가, 빨간 담쟁이덩굴이여, 세상의 심장이여, 오, 나의 심장이여. (정현종·시인, 1939-) == 담쟁이 ==  날마다  조금, 조금씩  기어오르고 있다  담쟁이가.  벽을 타고  창문을 지나  올해는 처마 밑  하늘 향해  솟아 있는 종탑으로  뻘뻘뻘  기어오르고 있다.  종을 치고 싶어서. (이혜영·아동문학가) == 담쟁이 == 준이네가 떠난  빈 집  담벼락 위로  초록 도롱뇽 한 마리가  푸른 혀를  낼름거리며  꿈틀꿈틀 올라갑니다  앞다리를  쑥쑥 뻗으며  뒷다리를  쭉쭉 뻗으며.  바람이 불 때마다  초록빛 비늘이  출렁대며  반짝입니다.  슬금슬금  천천히  천천히  하루하루 커지던  푸른 몸이  어느새  흰 벽 하나를 다 차지했습니다. (오지연·아동문학가, 제주도 출생) == 담쟁이의 편지 - 담에게 ==  네가 없었다면  난 생각지 못했을 거야  잎을 피울 꿈을  너를 만나고 나서  난 알게 되었어  위로 오르는 길을  네가 없었다면  난 그렇게 알았을 거야  난, 넝쿨뿐인 식물인 줄  네 위에서 잎을 피우며  난 알게 되었어  내 넝쿨 안에도 하늘로 오르는  힘이 숨어 있었다는 걸 (정갑숙·아동문학가, 1963-) == 담쟁이덩굴 == 눈발이 날리는  교실 창 밖  바위벽을  감싸고 있는  푸른 실핏줄. 팔딱팔딱  맥박이 뛰고 있었구나! 바위벽이 살아 있었구나! (손광세·시인, 1945-) == 생명 - 담쟁이 ==  벽을 온통 끌어안고  그 사막에 목숨을  뿌리며 뿌리며  뻗어오르는  어둠의 바윗덩이를  끝끝까지 감싸오르며  초록의 불꽃을  손톱 밑마다에서  명멸케 하는 (백우선·시인, 전남 광양 출생) == 담쟁이덩굴 == 천애절벽을 오른다 한 치 두 치 기어오르는 자벌레 하늘 끝에 자일을 건다 다시 내려갈 수 없는 외길 바위에 붙어 잠을 잔다 포타렛지도 없는 암벽 야영 손발 끝으로 더듬는 경전經典 얼마나 더 오르면 그 뜻을 깨우칠 수 있을까 늘 아슬아슬한 길 멀고 먼 면벽수행의 그 길 (임윤식·시인) == 담쟁이 ==  담쟁이 벽을 오르고 있다 다홍빛 불도장 다섯 손가락 싸늘한 담벼락 위에  겨울판화처럼 얼음화석처럼 눈물로 아로새겨지도록 한 손바닥 두 손바닥 천천히 몹시 천천히 붉게 뜨겁게 벽을 오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험한 제 안의 벽을 오르고 있다 제 안의 한계를 오르고 있다 담쟁이는 알고 있는 거다 희망은 항상 벽 너머에 있다는 것을 (홍수희·시인) == 담쟁이 == 내겐 허무의 벽으로 보이는 것이 그 여자에겐 세상으로 통하는 창문인지도 몰라 내겐 무모한 집착으로 보이는 것이 그 여자에겐 황홀한 광기인지도 몰라 누구도 뿌리내리지 않으려는 곳에 뼈가 닳아지도록 뿌리내리는 저 여자 잿빛 담장에 녹색의 창문들을 무수히 달고 있네 질긴 슬픔의 동아줄을 엮으며 칸나꽃보다 더 높이 하늘로 오르네 마침내 벽 하나를 몸 속에 집어넣고 온몸으로 벽을 갉아먹고 있네 아, 지독한 사랑이네 (이경임·시인, 1963-) == 담쟁이 == 온몸으로 너를 더듬어서 변변한 꽃 한번 피워내지 못했지만 상처 많은 네 가슴  내 손으로 만지면서 담장 끝 너를 보듬어 오르다 보면 그때마다 사랑이니 뭐니 그런 것은 몰라도 몸으로 몸의 길을 열다 보면 알 길 없던 너의 마음 알 것도 같아 캄캄했던 이 세상 살고 싶기도 하다.       (손현숙·시인, 1959-)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담쟁이 / 정연복   온 몸이  발이 되어 보이지 않게 들뜨지 않게 밀고 나아가는 저 눈부신 낮은 포복     담쟁이 / 김상기   담쟁이는 벽을 평지로 알고 산다 담쟁이는 벽을 넘는 것이 아니라 평지 끝 절망의 벼랑과 만난다 벽을 놓지 못한 채 제 한 몸 던져 끝끝내 매달려 있는 담쟁이의 벽 하늘에 목숨을 맡긴 채 평지 끝 절망의 벼랑에서 고공투쟁하는 벼랑 끝 절망이 담쟁이의 희망이다      담쟁이덩굴 / 공재동   비좁은 담벼락을  촘촘히 메우고도  줄기끼리 겹치는 법이 없다.  몸싸움 한 번 없이  오순도순 세상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진초록 잎사귀로  눈물을 닦아주고  서로에게 믿음이 되어주는  저 초록의 평화를   무서운 태풍도  세찬 바람도  어쩌지 못한다.      담쟁이 덩굴 / 조원   두 손이 바들거려요 그렇다고 허공을 잡을 수 없잖아요  누치를 끌어올리는 그물처럼 우리도 서로를 엮어 보아요  뼈가 없는 것들은 무엇이든 잡아야 일어선다는데  사흘 밤낮 찬바람에 찧어낸 풀실로 맨 몸을 친친 감아요  그나마 담벼락이, 그나마 나무가, 그나마 바위가, 그나마 꽃이  그나마 비빌 언덕이니 얼마나 좋아요 당신과 내가 맞잡은 풀실이  나무의 움막을 짜고 벽의 이불을 짜고 꽃의 치마를 짜다  먼저랄 것 없이 바늘 코를 놓을 수도 있겠지요  올실 풀려나간 구멍으로 쫓아 들던 날실이 숯덩이만한 매듭을 짓거나  이리저리 흔들리며 벌레 먹힌 이력을 서로에게 남기거나  바람이 먼지를 엎질러 숭숭 뜯기고 얼룩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요, 혼자서는 팽팽할 수 없어 엉켜 사는 거예요  찢긴 구멍으로 달빛이 빠져나가도 우리 신경 쓰지 말아요  반듯하게 깎아놓은 계단도, 숨 고를 의자도 없는  매일 한 타래씩 올을 풀어 벽을 타고 오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지요 오르다 보면 담벼락 어딘가에  평지 하나 있을지 모르잖아요. 혹여, 허공을 붙잡고 사는  마법이 생길지 누가 알겠어요  따박따박 날갯짓하는 나비 한 마리 등에 앉았네요  자, 손을 잡고 조심조심 올라가요  한참을 휘감다 돌아설 그때도 곁에 있을 당신      담쟁이덩굴의 독법 / 나혜경   손끝으로 점자를 읽는 맹인이 저랬던가  붉은 벽돌을 완독해 보겠다고  지문이 닳도록 아픈 독법으로 기어오른다  한번에 다 읽지는 못하고  지난해 읽다만 곳이 어디였더라  매번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다 보면 여러 번 손닿는 곳은  달달 외우기도 하겠다  세상을 등지고 읽기에 집중하는 동안  내가 그랬듯이 등 뒤 세상은 점점 멀어져  올려다보기에도 아찔한 거리다  푸른 손끝에 피멍이 들고 시들어버릴 때쯤엔  다음 구절이 궁금하여도  그쯤에선 책을 덮어야겠지  아픔도 씻는 듯 가시는 새봄이 오면  지붕까지는 독파해 볼 양으로  맨 처음부터 다시 더듬어 읽기 시작하겠지    담쟁이 넝쿨 / 권대웅   김과장이 담벼락에 붙어있다  이부장도 담벼락에 붙어있다  서상무도 권이사도 박대리도 한주임도  모두 담벼락에 붙어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밀리지 않으려고  납작 엎드려 사력을 다해  견뎌내는 저 손  때로 바람채찍이 손등을 때려도  무릎팍 가슴팍 깨져도  맨손으로 암벽을 타듯이  엉키고 밀어내고 파고들며  올라가는 저 생존력  모두가 그렇게 붙어 있는 것이다  이 건물 저 건물  이 빌딩 저 빌딩  수많은 담벼락에 빽빽하게 붙어  눈물나게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담쟁이 사랑 / 이민화   끝없이 타오르는  도벽 같은 탐욕으로 남몰래 담을 타며  밤마다 모의한다  하늘이 내린 형벌이다  중독이다 전염이다 그대 집 다 메워도  그대 맘 곁에 못 가 혹독한 추위에  몸이 얼고 생각이 얼고 기어이  가슴 하나 남긴 채  전설 속에 사라진다 여느 해 그러하듯  여름 가고 가을 오면 움츠린 몸 뒤척이며  피가 먼저 나선다 그래도  그 흔한 사랑이라  차마 말 못한다    담쟁이 그늘 아래서 / 이은림 (7회 여성문학상 당선작)  그래도 세상은, 가쁜 숨결 조금씩이라도 나눠가질 수 있는  튼튼한 잎맥의 담쟁이 넝쿨입니다.  큰 잎은 작은 잎의 손목 잡고 작은 잎은 아직 어린 순을 달고  먼길 가는 나무들처럼 마냥 기인 그림자를 가진 담쟁이 넝클입니다.  서로의 얼굴 그늘로 덮어주거나 혹은 얇은 볕 씌워주면서  옹기종기 어깨 맞대고 등 부딪고 살아가는 넝쿨식물입니다.  북치고 장구치며 한참을 떠들다 가는 한떼의 빗줄기 뒤에서 더욱 실해진 손목 쳐들고  헤매다 보면 우리가 머물 곳은 멀지 않아 어데고 가까운 곳에 둥지틀고  그리고 다시 길을 앞세웁니다 담장을 넘어가는 우리, 땅바닥에 엎드린  우리, 지붕 위에 드러누운 우리, 담벼락에 기대선 우리...... 그러나, 보이는 손마디 붙들고 쫓아가 보면 실상은 한 뿌리를 딛고 서 있는 우리들,  결국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의 길 위에 있었던 거지요  담쟁이 / 최광임 이제 나는 더 이상 벽이 아니다 내 살 속 뿌리를 내리고 키돋움하며 오르는 일 처음엔 나의 알맞은 집은 아니었다 어느날 달그락거리는 뼈만 모여 살던 삶 떡잎의 네 사다리가 되어도 좋을 듯 했다 옆에는 흐드러진 능소화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산다는 것은 내가 너를 만났다는 것이다 다족류의 곤충처럼 셀 수 없는 네 손길은 갈비뼈를 어루만지며 살을 붙이기도 하고 뼈와 뼈를 맞추기도 하고 살과 뼈 사이 아귀틀림을 다듬기도 하며 나를 지워갔다 미처 허공에 줄을 긋지 못한 거미들이 너와 나 사이를 지나쳐 가기도 하였으나 벌레들이 네 몸을 뒤집어 집을 짓고 얼크러진 꿈들을 채우는 일 보며 나 없이 너의 뼈가 되어 살아도 좋았다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계절풍처럼 일정하게 떠나기도 하지만 이내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그길 지워지지 않도록 검게 야윈 금들을 붙잡은 축원 끝나고도 식지 않는 사랑이다 담쟁이 덩굴  / 장성호  우리 동네  오래된 성당 하나가 있네 시간의 그물망이 엉켜붙어 있는 성당의 붉은 벽돌 담장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떨고있는 붉은 입술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에 덴 검은 눈썹 그 상처입은 영혼들을  녹색그물이 부드러운 손길로 감싸주고 있다네 담장 아래 어둡고 습한 그늘에서 자라온 그 뿌리 뽑힌 자들 가느다란 줄기를 맞붙잡고 끈끈한 덩굴손을 뻗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오르고 있다네 중력을 거부하는 성스러운 용틀임 해를 묵힐 수록 빛바랜 줄기에는 가시같은 비늘이 돋혀 붉은 담장과 한몸이 된다네    담벼락 속에 집이 있다 / 손순미  그 집은 담벼락 속에 들어가 있다 햇볕이 아무렇게나 흘러 다니는,  담쟁이덩굴이 꽃처럼 피어있는 담벼락을 열어보면  허물어진 집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담벼락 속으로 집이 도망치던 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집의 내력은 보이지 않고 집이 서 있던 자리,  시퍼런 잡초와 썩어 나동그라진 기둥들 서로의 뼈를 만지며 세월을 굴린다  추억은 남아있을까 항아리를 들여다보면 구름이 누렇게 익어가고  세상은 집이 삭아가는 것을 방관한다  벽 속의 집은 봉긋하게 솟아난다 마당을 건너가는  풍금소리 몸을 찢어 잎을 내 보내는 나무들 투명하게 널려 있는 빨래들  우물 속으로 곤두박질친 두레박이 집 한 채를 다 씻어내는,  집은 벽 속의 곳간에서 제 나이를 꺼내 먹으며 늙어간다  집은 저 벽을 부수고 나와야한다  지문 / 권혁웅    네가 만질 때마다 내 몸에선 회오리바람이 인다  온몸의 돌기들이 초여름 도움닫기 하는 담쟁이처럼 일제히 네게로 건너뛴다  내 손등에 돋은 엽맥(葉脈)은 구석구석을 훑는 네 손의 기억,  혹은 구불구불 흘러간 네 손의 사본이다 이 모래땅을 달구는 대류의 행로를 기록하느라  저 담쟁이에게서도 잎이 돋고 그늘이 번지고 또 잎이 지곤 하는 것이다 풋여름 / 정끝별  어린나무들 타오르고 있어요  휘휘 초록 비늘이 튀어요  풋, 나무를 간질이는 빛쯤으로 여겼더니  풋, 나무 몸을 타고 기어올라  풋, 나무 몸에 파고들어요  가슴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었을까요  어느새 휘감치는 담쟁이 덩쿨은?  온몸을 뒤틀며  뿌드득 뿌드득 탄성을 지르며  풋, 나무 힘줄 세우는 소리  트림하는 풋, 나뭇가지  초여름 저물녘 입술 자국에  겨드랑이부터 뚝 뚝  초록 진땀을 흘리고 있어요  풀물냄새를 풍기는  저 풋, 나무  담쟁이 치마폭에 폭 싸여     
587    시인은 사막에서 려행하는 한마리 락타를 닮은 탐험가이다... 댓글:  조회:2154  추천:0  2017-07-24
3 상상한다. 인간은 죽음을 의식하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꿈을 꾼다. 꿈이 꽃이라면 상상력은 꽃받침이다. 아니 그 반대일까. 어쨌든 인간은 꿈을 꾸기 때문에 소통한다. 소통은 희망이다. 다시 희망은 길이며, 구원이다. 가짜 희망일지라도 필요한 건 희망이 우리를 역동적인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며, 다시 꿈을 꾸게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희망은 모든 이유가 되어준다. 롤랑바르트는 이 시대를 '한 마디로 육체가 없는, 눈만 가진 인간의 사회'라고 정의했다. 이 영상의 세기, 상상력의 그림자는 무수히 분열된다. 끊임없이 확장된 이미지들은 이제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에까지 닿는다. 이미지의 지대는 갈수록 확장되고, 우리는 그 지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탄생과 성장, 죽음까지 이미지로 형성되어 이미지를 통하여 진행된다. 사랑도 희망도 이젠 이미지를 통해 풍경의 몸을 입고서야 우리에게 길도 열리는 것이다.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안개 속 풍경}도 서정적인 한 편의 영상시이다. 대사를 가능한한 응축시킨, 영상미학이 뛰어난 이 영화를 다 보고나면 가슴 속에 아주 투명한 슬픔 하나가 남는다. 그리스. 아버지를 찾아 독일행 열차를 무임승차로 탄 어린 남매.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여행하는 두 아이는 수많은 사건과 풍경에 부딪친다. 눈에 비친 세상은 매우 서정적인 은유로 가득한 장면들로, 느리게 진행된다. 틈틈이 여자아이는 상상 속의 아버지에게 마음의 편지를 보낸다. "우린 왜 그렇게 오래 기다렸을까요.", "정말 멀리 계시네요. 우리는 여행을 계속해요." 두 아이가 무임승차에 걸려 경찰서로 붙들려갔을 때 눈이 오기 시작한다. '눈이 오네' 중얼거리며 사람들은 거리에 나가 정물처럼 서서 눈오는 하늘을 바라본다. 사람들은 또 얼마나 오랫동안 눈을 기다려온 것일까. 마술에 걸린 듯 모두 정지된 화면처럼 서 있는 거리를 두 아이는 자유를 찾아 뛰쳐나온다. 새로운 세계를 예감하게 하는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다. 그리하여 다시 상상 속의 그리움을 향한 여행은 이어진다. 주운 필림조각에서 안개 뒤 멀리에 나무가 있는 풍경을 읽는 유랑극단의 오레스테스. 사실은 아무 것도 없는 필림조각. 그 풀향기 같은 상상력, 그것은 아름다운 은유이다. 꿈과 환상을 포기하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작가는 인간에게 구원의 이미지를 선사하고 싶었던 걸까. 한 군인의 적선으로 남매는 다시 기차를 타고, 마침내 국경에 닿는다. 어둠 속에서 국경의 강을 건너는 아이들. 수비대의 불빛, 울리는 총성. 아침이 오고 아이들은 안개 풍경 속에 있는 나무를 발견한다. 동생이 말한다.  "태초에 어둠이 있었어. 그러다 빛이 생기고……".  남매가 죽었으리라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남매가 달려가는 안개 속 나무밑. 그곳은 결코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상상 속의 그리움, 역설적 희망의 세계이다. 고통스러운 진실을 아름다움으로 간주하려는 것이 비극의 힘이라면, 이는 곧 인간에게 희망을 남겨놓으려는 의지이리라. 그것은 마치 오래 기다린 어둠의 창가에 마침내 오렌지 불빛이 환하게 밝혀진 순간처럼 우리를 따뜻하게 하는 것.  이러한 영상미의 추구는 결국 상상력에 대한 가치 부여에 연결된다. 상상력은 곧 자유와 혁명이며, 탈현실적 상상은 바로 자아의 경계를 뛰어넘게 만든다. 상상력이 인간의 구원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예술에서 나온다. 백일몽이라고 정의되었던 예술 자체가 이미지의 왕국이라는 말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인간의 역사는 상상력의 역사인 것을. 수많은 비행기처럼, 수많은 신데렐라처럼 상상 속 꿈들이 현실로 나타난 게 오늘의 문명인 것을.  자연사 박물관에서 찍은 케르테츠의 사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한다. 묵언. 존재의 내면을 비추듯 숙연한 분위기. 고개 돌린 박제된 새 앞에서 고개를 숙인 남자는 무엇을 생각할까. 다시 소통을 꿈꾸는지 모른다. 잃어버린 자기를 박제된 새로부터 보고 있는 걸까. 새가 날던 숲을, 태초의 어떤 언약을 기억하는 걸까. 언어든 영상이든 이미지엔 삶의 직접적인 체험과 내면의 어떤 원형적인 상상력이 작용한다.  일차적 영역을 벗어나 그것의 상징을 해독하려는 노력은 결국 세상의 어두운 부분을 깨닫고, 삶을 사랑하려는 의지이리라. 여기엔 되돌릴 수 없는 시간만큼이나 긴, 새로운 시간이 다시 놓인다.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서정춘, [죽편·1] 대나무 이미지가 아름답다. 굵고 푸른 대나무 마디에서 끌어낸, 깊은 밤을 달리는 기차. 그 기차는 꿈의 고향인 대꽃 피는 마을로 간다. 이 아름다운 은유를 읽으며 영혼의 어떤 해방감을 느낀다. 어두운 현실이 달려가는 곳은 곧 희망 속의 고향. 기차 이미지는 마치 삽화 같은 현실 속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면서 백년이라는 기다림의 시간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시간은 푸르다.  자기 마음을 이미지로 드러내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이미지와 말은 서로 교환작용을 하며 더욱 풍부해진다. 이미지는 부단한 움직임으로 언어를 낳고, 언어는 끊임없이 이미지를 낳으며 상상력의 바다를 깊게 한다. 자유로운 상상력은 은유를 통해 사유의 장을 확장시키고, 아름다운 내적 언술을 풀어낸다.  이미지의 언어적 보완성은 우리를 그만큼 자유롭게 하는 것.  결국 소통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어떤 서정적인 이미지로 나타났을 때 우리는 우리의 내면 속에 던지는 어떤 울림이다. 그 이미지는 우리 속에서 또 다른 우리를 찾아나서게 되는 표지목이 되고, 그 이미지가 낳는 다른 이미지는 우리를 끊임없이 사막을 여행하는 한 마리 낙타를 닮은 탐험가로 만드는 것이리라.  
586    꽃들에게 꽃대궐 차려주쟈... 댓글:  조회:2271  추천:0  2017-07-24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어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 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전문.   꽃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나리지 않는 그 땅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 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 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城)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이육사, 전문. 꽃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靜寂)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湖心)아     -박두진, 전문. 꽃 갈라진 일도 오라 가라 함도 없이 거기 섰다가 꽃처럼 가던 길 다시 돌아와 비인 자리에 고이 피네 만물 속에 홀로 피는 미소 사랑의 증건가 옛 빛 새로 있음 꽃은 빛 꽃은 마음 꽃의 아름다움 그렇다 떨어진들 어떠리 우리 사이엔 겨울에도 꽃이 있는 걸.     -김광섭, 전문. 꽃 심연(深淵)은 나의 붓끝에서 퍼져가고 나는 멀리 세계의 노예(奴隸)들을 바라본다 진개(塵芥)와 분뇨(糞尿)를 꽃으로 마구 바꿀수 있는나날 그러나 심연(深淵)보다도 더 무서운 자기상실에 꽃을 피우는 것은 신(神)이고 나는 오늘도 누구에게든 얽매여 살아야 한다 도야지 우리에 새가 날고  국화꽃은 밤이면 더한층 아름답게 이슬에 젖는데 올 겨울에도 산 위의 초라한 나무들을 뿌리만 간신히 남기고 살살이 갈아갈 동네 아이들...... 손도 안 씻고 쥐똥도 제멋대로 내버려두고 닭에는 발등을 물린 채 나의 숙제는 미소(微笑)이다 밤과 낮을 건너서 도회의 저편에 영영 저물어 사라져버릴 미소이다     -김수영, 전문. 꽃 꽃은 모든 꽃은 다 웃는 모습입니다 소녀야 다시 소년아 니들도 꽃 모습을 닮아라    -황금찬, 전문. 꽃 바라보면 볼수록 가깝고도 먼 얼굴 꽃이여 그대로 두면 한없이 고이 잠들어 버릴 너는 바람에 흔들리어 피었나니 일찍이 어둠 속에 반짝이던 너의 사념(思念)은 샛별처럼 하나 둘 쓰러져가라 너의 어깨위로 새벽노을이 퍼져옴은 만상(萬象)으로 네 존재의 여백을 채우려 함이려니 너는 영원히 깨인 눈 태양처럼 또렸한 의식(意識)!      -김윤성 전문. 꽃 내 꽃으로 태어나서 자유의 꽃이 되었네 사랑과 노동 사이에서 노동과 자유 사이에서 두 번 다시 진달래는 붉게 피지 않아도 백두산 천지의 봄날이 되어 꽃잎처럼 흩어져간 너를 위하여 내 꽃으로 태어나서 해방의 꽃이 되었네     -정호승, 전문. 꽃 꽃이 되고 싶다. 청초하게 피어 임을 기다리는 그 마음. 벌과 나비가 찾아와 입을 맞추면 수줍어 고개 숙이는 그 순수. 향기를 토하며 열매의 꿈을 가꾸는 애달픈 꽃이여! 나는 그리움 품고 자란 한 송이 붉은 꽃이 되고 싶다.     -정용진, 전문. 꽃 마음속에 박힌 못을 뽑아 그 자리에 꽃을 심는다 마음속에 박힌 말뚝을 뽑아 그 자리에 꽃을 심는다 꽃이 인간의 눈물이라면  인간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꽃이 인간의 꿈이라면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정호승, 전문. 꽃 내 영혼이 타오르는 날이면 가슴 앓는 그대 정원에서 그대의 온 밤 내 뜨겁게 토해내는 피가 되어 꽃으로 설 것이다. 그대라면 내 허리를 잘리어도 좋으리. 짙은 입김으로 그대 가슴을 깁고 바람 부는 곳으로 머리를 두면 선 채로 잠이 들어도 좋을 것이다.      -기형도, 전문. 꽃 이렇게 못 잊을 수틀만 맡겨놓고 아무렇게나 네 마음대로 피는게아니다 사랑하는 가슴의 셈본만 어려워 머리칼 뿌리마저 뽑고 울 적에 아무렇게나 네 마음대로 향기를 갖는게아니다 이렇게 칠석물 같은 울음만 건네놓고 아무렇게나 네 맘대로 지는게아니다 널 담은 눈마저 수정체를 잃고 목숨 하나 없는 땅을 빡빡 기는데 독하구나! 꿀물 끓여 나를 보채던 너의 앙가슴 이제는 하전히 앵돌아져 숨고 달러변 이자보다 독한 꽃이여.   –천승세, 전문. 꽃 아, 언제나 옷 벗고 서있는 너, 춤추는 너 기다리는 너 준비된 너는 성기性器 다 죽을 때까지     ㅡ임창현, 전문. 꽃 깊이 내린 뿌리로 빨아올린 님의 말씀 있는 힘 다 쏟아 거름주어 피운 꽃 덕의 향기 퍼뜨려 벌 나비들 초대한 잔치 꿀 요리 대접하며 말씀으로 수정(受精)한 씨방 사랑을 잉태하여 영원한 생명인 열매 맺을너     -이기윤, 전문. 꽃 1 겨울 찬 서리 어두운 흙을 움켜쥐던 연약한 뿌리들이 오래도록 밀어올린 갈망, 그 눈물 머금은 첫잎이  마침내 한 점 쏟아낸 분홍 각혈. 2 열매, 잉태된 세계의 끝을찾아서 오관의 실핏줄마다 목이마르고 이미 초경의 입술이 열렸다. 3 아, 깨끗한 것마다 누구에겐가 바치기 위하여 저렇게 흔들리는 눈물보다 더 슬픈 웃음들 마침내 씨방마저 열었어라.   –김문희, 전문.  꽃 싱싱한 네 웃음으로 세계는 동이 튼다 싱싱한 네 웃음으로 세상은 눈부시다 싱싱한  네 웃음으로  인생은 아름답다    -김민정, 전문.    
585    무의식적 이미지는 눈부신 은유의 창고이다... 댓글:  조회:2383  추천:0  2017-07-24
소통, 그 은유의 불빛들 김수우(시인) 1 눈, 그것은 눈이었다. 아니, 눈빛이었다. 빈 나뭇가지에 꽃이삭처럼 조롱조롱 눈들이 걸려 있었다. 수많은 눈빛들이 나를 보고 있고, 그 깊은 눈동자마다 내가 서 있었다. 거미줄에 갇힌 듯 나는 꼼짝없이 서서 그 우물 속의 내 모습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단풍잎 한 장이 날아왔다. 그 바람결에 수많은 내가 흔들렸다. 무수한 내 영혼이 모두 출렁였다. 와르르, 어디선가 쏟아지는 웃음소리. 꿈이었다. 그 날은 종일 안개가 깊었고, 은회색 들길을 걷다가, 온몸에 물방울이 피어난 빈 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나뭇가지를 타고 송송히 열린 물방울이 유난히 투명하더니, 그런 꿈을 꾸었다. 어쨌건 내 몸이 몽땅 젖어버린 느낌. 내가 만난 한 세계가 내 속에서 또다른 세계를 만들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경이로움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무를 바라보는 동안 나무도 나를 오래 바라보았음이 틀림없으리라. 작은 나무가 보여준 그 은유의 세계. 결국 꿈은 소통으로 가는 긴 터널이던가. 왜 태어나, 왜 늙으며, 왜 아프며, 왜 죽을까. 그 다음의 싯달타의 고뇌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 '어떻게 말할까'가 아닐까. 아니, 싯달타의 모든 고뇌 자체가 자신과의 소통을 향한 의지였으리라. 소통이 될 때 우리는 삶도 죽음도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 다음에야 희망을 낳을 수 있으니까. 바벨탑이 무너진 후, 인간이 추구해온 것은 소통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눌한대로 대답을 하자. 답은 없다고, 모든 대답은 자의적인 것이라고 미루어두기에는 우린 참 슬픈 족속이므로. 세상의 모든 답은 바로 '그대'이다. 그대는 '희망' 자체니까. 그리고 희망은 '이미지'로 존재한다. 2 수많은 질문을 이미지로 열며 내게 다가온 시. 그건 항상 어느 순간, 강렬한 빛으로 내 뒤통수에 닿았다가 돌아보면 청보라빛 노을로 가뭇없이 서산을 넘는 중이었다. 그 이미지들을 언어로 살려야 하는 시인들의 절박함을 나는 사랑했던가. 문득 곁으로 달려온 존재들의 눈빛들과 부딪친다는 건 하나의 희열이고 절망이고, 절망이면서 희망이었다. 사진도 그랬다. 렌즈를 통해 세계를 들여다보는 사진과 영화는 여러 면에서 시와 닮았다. 표현에 앞서 더 본질적으로 사진과 영화의 문법은 시적 사유와 맞닿아 있다. 방치된 대상에게 언어로 그 존재의미를 회복시키는 작업과, 렌즈를 통해 포착한 대상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의미부여 작업은 동일하다. 표현도구는 다르지만 표현양식은 결국 이미지라는 점도 그렇다. 때문에 시인의 눈과 카메라의 눈은 매우 유사하다. 둘다 섬세하고 자유롭게 무한한 내포를 담아 삶의 중층성을 그려내는 눈동자들이다. 버려진 나무토막이 언어나 렌즈를 통해, 갑자기 살아 푸른 숨을 내쉬는 은유가 되어 세상을 건너가는 다리로 놓이는, 그 놀라움.  브레쏭의 사진에서 보이는 도심의 뒷골목, 고양이와 한 부랑자의 소통과 소외. 그것은 꿈의 통로처럼 보인다. 쓸쓸하면서도 내밀한 언어가 들린다. 사방으로 이어진 골목, 그래, 우린 어딘가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 아주 조심스런 아우라에 붙들린다. 한 장 종이에 인화된 그 시간의 명암과 질감이 전달하는 삶의 강한 실체. 무심한 일상은 파인더 속에서 비로소 존재의 실루엣을 확연히 드러내며 말을 건넨다.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과 절망과 구원이 은유의 세계로 확장되어 드러나는가.  카메라 파인더 속에서 어떤 대상과 부딪칠 때 나는 면회를 신청한 한 수감자의 애인처럼 서글프면서도 그리웁고 고마운 마음이 된다. 소통에서 오는 다행스러움 때문인지 삶이 더 간절해진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대상이 건네는 눈빛을 따라가다가, 숨겨진 원시의 늪에 닿은 듯 가슴떨리는 신비다. 영화도 마찬가지, 카메라 앵글 속에 있는 거대한 눈동자들에 비친 세상은 분명 일상이면서, 일상이 아닌, 현실이면서 현실이 아닌, 은유의 세계를 보여준다. 꿈이야기를 해보자. 꿈이 가진 무의식적 이미지는 상상계의 큰 바탕이며, 수많은 소통의 음성이며, 눈부신 은유의 창고이다. 어떤 함축이 무한한 내포를 지니거나, 어떤 여백이 낭만적인 서정으로 넘칠 때 우리는 '시적'이라고 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은 8개의 에피소드로 나뉜 꿈의 파편들로 매우 시적인 영화라 할 수 있다. 여든에 만든 구로사와의 마지막 작품인 {꿈}은 매우 일본적이며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비현실적 이미지로 구성된다. 유년의 동화적인 이미지부터 묵시론적 악몽이 포함되어 있는 이 작품은 경이로운 이미지와 상징들로 가득하다. 현실원칙과는 다른 논리의 지배를 받는 꿈을 통해 재창조된 세계가 두렵고도 아름답게 펼쳐지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꿈인 와 , 고호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금빛 보리밭 위로 날으는 까마귀떼를 보는 는 시각적 이미지의 정수를 보여준다. 또한 극적 구조를 초월하고 절제된 이미지로 구성된, 자연주의 세계관은 슬프고 기이하기까지 하다. 은유 속에 작용하는 동일화도 있지만 비논리적으로 뒤섞인 은유를 통해, {꿈}은 일상이 삼킨 우리의 본래를 드러냄과 동시에 인식의 한 영역을 흔들어대는 것이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인간이란 꿈을 꿀 때 천재가 된다고 말한다. 꿈은 과감하고 대담무쌍하게, 천재적인 기술로 희망을 표현해낸다. 한 사람의 꿈은 사실 사람들 모두의 꿈이 된다. 그것이 꿈의 힘이며, 마음 밑바닥에 있는 세계의 무한함일 것이다. 결국 꿈이란 삶의 신비를 드러내는 하나의 암시이며, 인간은 그 상상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명시적이든 잠재적이든 상상계를 구성하는 꿈은 일상을 개별성의 세계로, 다시 진정한 보편적 우주를 획득하는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그리하여 삶의 이미지는 더 깊어진다. 바람의 길 위에서, 떠도는 푸른 깃털들을 만났습니다. 길 떠나기 전 그대들의 옛집이 어디냐고 물어 보았더니 모두들 하나같이 대답하더군요. 죽은 청호반새가 우리들 옛집이었다고. ―최승호, [떠도는 깃털들] 방안의 쥐구멍으로 들어갔더니 어릴 때 놀던 학교운동장이 나온다던가,  큰 구렁이와 엉겨 놀다가 책꽂이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어릴 적 꿈은 위 시의 푸른 깃털을 보는 시인의 자연적 깨달음에도 연결될 수 있으리라.  내가 출발한 곳은 어디일까. 죽은 청호반새가 깃털의 실체이듯, 깃털 같은 나의 실체는 청호반새 같은 꿈이 아닐까. 꿈, 그 무한대 상상력의 장은 언제나 현실을 뒤돌아보게 한다. 말하지 못한 것이 꿈으로 나타나듯, 꿈을 통해서 나의 숨은 세계를 마주보게 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성찰은 언제나 먼 지평. 나의 옛집은 어디일까. 위의 깃털들처럼 나의 옛집도 죽은 청호반새임이 분명할 듯.      
584    유채꽃아, 나와 놀쟈... 댓글:  조회:1988  추천:0  2017-07-24
유채꽃 바다 / 이향아     유채꽃 보러 그와 갔었다  남쪽 섬 제주도  초봄이었어  우리는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지   유채꽃처럼  유채꽃처럼 하늘하늘 웃는 얼굴로  아린 듯 슬픈 듯 가슴이 조였었지 유채꽃은 지칠 듯이 아슴한 바다  빠져 죽고 싶은 바다였었지  함께 죽는다면야 죽고 싶었지       유채꽃  / 초 월 수평선 너머 물새들도  순풍에 한가로이 노닐다  지나는 화물선 뱃머리에  몸을 맡기고,  어부들은 고기잡이에  여념없지만 떨리는 손길이  바빠 질 때 꾸역꾸역 해가  바다 속으로 기울면 우린  황금빛으로 물든다.  어느새 바람은  동백꽃을 잠재우고 노란  유채꽃과 개나리를 깨운다.  남쪽 끝자락 제주로부터  봄소식이 들려온다.     유채꽃 밭 / 임영준   노랑이면 다 노랑인 줄 아세요  유채꽃밭 한번 찾아보세요  만발했다는 말 가끔 쓰시나요  그 곳을 제대로 보고나서나 쓰시지요  그때 그녀와 함께 바라보던  유채꽃밭에서  아롱거리던 현기증을  우리 사랑의 증표인 줄만 알았지요  웬만한 열정이 아니라면  엄벙덤벙 유채꽃밭 가지마세요  일평생 뿌리내린 잔상으로  모호하게 헛디딜 때가 많답니다  어지간한 사이가 아니라면  유채꽃밭에서 오래 머물지도 마세요  그 시절이 하염없이 파고들어  자꾸만 돌아가고 싶어질 겁니다           유채꽃 필 무렵 / 반기룡 움켜쥐면 쥘수록  노란 물감이 파레트 위에서 정사를 시도한다  흥건히 파고드는 물줄기 앞에  노란  저고리 전율을 하고  겨우내 움츠렸던 이목구비 활짝 열면  온 천하가  제주도처럼 환하다  유채 밭 이랑마다  푹 익은 꽃으로 애무를 하고  자분자분 비벼대는 입김은  노란 가문에 족보처럼 파고든다    유채꽃 흔들릴 때 /유응교  바람 앞에  흔들리지 않는 게  어디 있으랴  갈대도  하염없이 바람에 흔들리고  그대의  옷자락도 바람 앞에 흔들리네.  그러나 그대여  우리의 사랑은  흔들려서는 안 되리.  길고 긴 겨울  어두운 고통의 터널을 나와  이제 따뜻한 봄을 맞이하였으니  그때 다짐하며 함께 잡은 손  언제나 놓지 말고  걸어가야 하리.  거세게 부는 바람 앞에  흔들리지 않은 사람 어디 있으랴  그러나 그대여  그대는 결코 바람 앞에  중심을 잃고 흔들려서는 안 되리. 끝없이 유혹의 손짓을 보내는  노란 욕정의 파도위에서  그대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되리.  우리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유채꽃 /조성심     봄날  소금끼 실은 바람 속에서  까실한 이파리 말리며 무더기로 피어  해를 바라고  달을 바라다  오지 않는 님  이젠 지쳐 버렸다고 소리쳐 볼라요.  볼 수 없으메  생각하지도 않으리라던  까맣게 멀어져버린 그대 모습이  바람타는 오늘  배 밑에서부터 덩어리로 뭉친 그리움으로  목이 꺽꺽이도록  이리 섧게 차고 올라온다요.  바람에 흔들리며  화분도 향기도 모두 날려보냈는데  그대 기리는 심사는  도무지 덜어지지가 않소.  다시 또 받아 안아야 되는가 보오.  아마 더 많은 세월을  깊은 곳에 묻어야 하는가 보오.     유채꽃 하늘 닫쳤던 하늘이 문을 열면 그대의 손길처럼 부드러운 강 언덕 위에 그리운 발길들이 몰려와 초록 물감을 푼다. 여기저기서 끝없이 흔들어대는 손길들 바람이 멎어도 가슴이 떨리고 굳었던 마음이 금시 황금물결로 출렁인다. 오월 언덕에는 그리운 사람은 그리움으로 애타는 사람은 심한 갈증으로 슬픈 사람은 꽃잎 같은 눈물로 섰을 일이다. 동구 밖 유채 밭에 나서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길들은 온통 금모래 빛이다. 낮에는 땅에서 별빛으로 밤에는 하늘에서 꽃 보라로 피어 오르는 유채꽃. 끝없이 흔들어 대던 그 손길 못 잊어 바람이 멎어도 가슴이 떨리고 굳었던 마음이 금시 황금물결로 출렁인다.     -정용진,                          유채꽃 하늘 닫쳤던 하늘이 문을 열면 그대의 손길처럼 부드러운 강 언덕 위에 그리운 발길들이 몰려와 초록 물감을 푼다. 여기저기서 끝없이 흔들어대는 손길들 바람이 멎어도 가슴이 떨리고 굳었던 마음이 금시 황금물결로 출렁인다. 오월 언덕에는 그리운 사람은 그리움으로 애타는 사람은 심한 갈증으로 슬픈 사람은 꽃잎 같은 눈물로 섰을 일이다. 동구 밖 유채 밭에 나서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길들은 온통 금모래 빛이다. 낮에는 땅에서 별빛으로 밤에는 하늘에서 꽃 보라로 피어 오르는 유채꽃. 끝없이 흔들어 대던 그 손길 못 잊어 바람이 멎어도 가슴이 떨리고 굳었던 마음이 금시 황금물결로 출렁인다.     -정용진,          
583    음유시는 문자와 멜로디와의 두개 세계를 아우르는 시이다... 댓글:  조회:2047  추천:0  2017-07-24
『현대시학』의 기획사업인 그 두 번째 자리가 란 이름으로 마련되고 있다.  물론 그 자리에선 네루다의 시도 불려지고 낭송되겠지만 음유시가 케케묵은 미분화시대의 무슨 원시적 유물이 아니라 엄연한 현대적 장르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거기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네루다가 누군가. 우리에게도 친숙한 1971년 노벨 문학상 수상의 현대시인이 아닌가. 음유시가 왜 이처럼 현대적 장르로서의 가능성을 지닐 수 있는가. 오늘의 문자문학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또다른 향유에의 갈망이 오늘의 삶 속에서 이미 싹트고 있으며, 오늘의 시가 본질적으로 탈환해야 할 요소가 거기 있을 수 있겠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기타가 시에게 말한다 내가 널 종이에서 꺼내 줄게 현의 부드러운 바람이 쇠사슬을 부수면 넌 더 이상 포로가 되지 않을 거야 두 손이 묶여서 흰 초원 위에 버려져 말을 잃어버린... 시야 깨어나라 아침을 열어라 소리의 동지인 내가 널 이렇게 일츠키고 있잖니 -⌈기타가 시에게⌋ 전문 위 시는 니카라구아 음유시인 살바도르 카드데날의 시다(김홍근 옮김). 위의 시가 말하고 있듯 오늘의 시는 적잖이 도구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로서의 자율성을 잃고 있다는 뜻으로 형태적 산문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산문적 삶의 와중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시들이 너무 많다는 뜻이다. 이 말은 문자가 없던 시대, 이른바 구비문학의 시대로 퇴행하자는 주장을 전제로 한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그 시대는 노래와 시가 분리되지 않았던 그야말로 의 시대일 수 있었고, 누구나 함께 시를 향유할 수 있는 가장 행복했던 문학의 공존기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원시적 미분화의 상태일 따름이다. 아기의 눈동자가 순수 그 자체이며 아기의 말이 엉뚱하다고 해서 그 자체가 시는 아니듯이 말이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여지를 제해 놓고 보면 위의 말이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문자문학, 문자시로서 오늘의 시는 바로 그의 몸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의 원형질 가운데 어느 한쪽에만 지나치게 기대 온 반편(모자람, 바보의 뜻도 포함해서)의 양식이었다는 혐의가 짙다고 보지는 않는가. 너무 읽기만을 강요하지 않았던가. 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를 위한 또 하나의 기능을 망각해 왔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 소리! 소리가 없었다. 특히 오늘의 우리 한국 현대시는 그간 이른바 말 만들기, 수사법, 이미지 만들기에만 줄곧 매달려 왔다. 그것만이 현대성이라는 생각으로 알맹이 없는 방법적 추구에만 함몰해 있었다. 가시적인 구조물이 모두라고 생각해 온 혐의가 짙다. 가 없다는 것은 이 없다는 뜻이다. 가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서정성의 상실을 뜻한다. 문자만으로 다가간다는 것은 논리와 계산을 동반한다는 뜻이며, 소리로 다가간다는 것은 리듬과 멜로디로 다가간다는 뜻이다. 그만큼 생체적이어서 에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에코는 본래 소리의 본질이다. 이 두 개의 세계를 아우르는 자리에 시가 있다. 그게 시의 자율성이다. 음유시는 음유시 대로의 독립된 장르가 되어야 하겠지만 거기엔 바로 소리! 소리가 있다.
582    풀꽃들아, 너희들도 너희들 세상을 찾아라... 댓글:  조회:2077  추천:0  2017-07-24
      ------   + 풀꽃들  풀이란 풀들  모두 꽃을 피우더라  이름 아는 풀들  이름 모르는 풀들  모두 꽃을 피우더라  참말이지,  아름답지 않은 꽃이 없더라  아름다워 눈이 부시더라  (서정홍·농부 시인, 1958-) + 풀꽃 우린 늘 헐레벌떡 쉴새없이 발을 굴렀다 정신없이 달리기만 하다가 멈추어진 그 자리에서 이름 모를 풀꽃을 만났다 향기도 없고 빛깔도 없이 다만 하얀 웃음만 가득 담고 있었다  (진명희·시인, 1959-) + 똥풀꽃     방가지똥풀꽃  애기똥풀꽃  가만히 이름을 불러 보면  따뜻해지는 가슴  정다워지는 입술  어떻게들 살아 왔니?  어떻게들 이름이나마 간직하며  견뎌 왔니?  못났기에 정다워지는 이름  방가지똥풀꽃  애기똥풀꽃  혹은 쥐똥나무,  가만히 이름 불러 보면  떨려 오는 가슴  안쓰러움은 밀물의  어깨.  (나태주‥시인, 1945-) + 풀꽃  풀씨는  궂은 땅 마다 않고  꽃을 피운다  하늘의 뜻 받들어  푸른 빛깔 피워낸다  바람에 꺾임 없이  가늘게 살다가  이 세상 한 구석  밝은 빛 밝혀  어둔 마음 한 자락씩 지워내고  아무도 몰래  비탈진 자리  조용히 시드는 것을  (박덕중·시인, 1942-) + 풀꽃  민들레꽃을  30분의 1로 축소하면  저 꽃이 될까.  잔디풀 사이로  가늘게 치밀어 올라  이제 막 피어난 자잘한 풀꽃!  별보다도 작은 꽃둘레건만  별처럼 또렷한 샛노란 꽃잎,  사나흘이면 소멸해 버릴 이름도 없는 저 별은  몇백 몇천 광년의 기약 끝에  드디어 여기  나타났는가.  그 가늘디가는 천공의 선율은  적막한 내 뜰을 한껏  설레이게 한다.  (김종길·시인, 1926-) + 우도의 풀꽃       저 멀리서 날아온 꽃씨가   우도에서 뿌리를 내리면  우도의 민들레가 되고  우도의 엉겅퀴가 되고  우도의 제비꽃이 된다.  푸른 바닷바람을 맞고  철썩이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우도의 풀꽃은  이름을 갖고 다시 태어난다.  너른 잔디밭을 수놓은  우도의 풀꽃은  작은 꽃잎을 나풀거리며  그가 키운 사랑을  찾아온 나그네에게 건넨다.  어디서나  그대가 살아가고 있는 곳이  그대가 수놓을 꽃밭이라고.  (조성심·시인, 전남 목포 출생) + 풀꽃 연가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풀은 풀대로 나는 나대로  변할 줄 모르는  풀하고 나는 아무래도  고향이 같은가 봐  도시에 살아도  먼 산 구름만 바라보다  해지면 어머니 품속 같은 흙이 좋아  흙을 베고 잠에 드는 풀꽃  내 고향은 심심산골 단양  너의 고향은 어디더냐  도시에 몇십 년을 살아도  풀 티,  산골 티를 못 벗는  풀과 나는 아무래도  본래부터 같은 부류였나 보다. (최영희·시인) + 애기똥풀꽃의 웃음  꽉 막힌 추석 귀향길이었다.  참아온 뒤를 보지 못해  다급해진 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산골 외진 숲 속에 뛰어들었다.  벌건 엉덩이를 까내리자  숲 속에 숨었던 청개구리가 뛰어올랐다.  향기로운 풀내음 속에서  다급히 근심거리를 풀기 위해  안간힘 쓰는 소리를 듣고  풀벌레들이 울음을 뚝 그쳤다.  (쉿! 조용해! 무슨 소리가 났지?)  이 삼라만상의 갖가지 일에 부딪치면서 살다보면  더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참으며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처럼  참으로 힘드는 건 똥 참는 일이다.  참으로 시원한 건 똥 싸는 일이다.  숲 속의 애기똥풀꽃이 노랗게 웃었다.   (권달웅·시인, 1944-) + 풀꽃은 풀꽃끼리  풀꽃은 풀꽃끼리 외롭지 않네.  가난이야 하나님이 주신 거  때로는 슬픔의 계곡까지 몰려갔다가  저리 흐르는 게 어디 바람뿐이랴 싶어  다시금 터벅터벅 되돌아오긴 하지만  도회지 화려한 꽃집이 부러우랴  밤안개 아침 이슬 모두 함께이거늘  풀꽃은 풀꽃끼리 외롭지 않네  외로움이야 하느님이 주신 거  사람 속에 귀염받는 화사한 꽃들은  사람처럼 대접받고 호강이나 하겠지만  때로는 모진 흙바람 속에  얼마나 시달리며 괴로워하리.  때로는 무심히 짓밟는 발에 뭉개져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리.  시르렁 시르렁 톱질한 박일랑  우리사 연분 없어 맺지 못해도  궂은 날 갠 날도 우리 함께이거늘  풀꽃은 풀꽃끼리 외롭지 않네.  (허형만·시인, 1945-) + 풀꽃의 힘  기름진 넓은 들에 봄날이 오면  흐드러지게 피는 자운영꽃.  농사의 밑거름이 되기 위하여  봄의 끝에서 죽음 속으로 몰락하면서도  꽃은 숙명이라고 슬퍼하지 않는다.  풀꽃은 썩 아름다우나 세상을 유혹하지 않고  왜 그다지 곱게 치장하는지  세상을 위해 온몸을 눕히면서 희생하는지를  말하려하지 않는다.  세상사람들은 날마다 치장하면서  풀꽃처럼 세상을 위하지도 않고  난센스로 풍성한데  풀꽃의 위대함은  한마디 불평 없이  아무런 항거 없이  농부의 쟁기보습 밑으로 몸을 눕히는  자유로움이며  봄이 오면 어느 날 살며시  쓰러졌던 그 자리를 다시 찾아오는  부활이다.  (이풍호·시인, 충남 예산 출생) + 풀꽃  아가 손톱 만한 이름 없는 풀꽃 하나 인적 드문 곳에서 온몸으로 웃고 있다 삶은 많이 고달파도 삶은 더없이 아름다운 거라고 말없이 소리 없이 얘기하고 있다. 나도 한 송이 풀꽃으로 살아야겠다 그저 나만의  빛깔과 모습으로 세상의 어느 모퉁이 한 점 무명(無名)한 풍경으로 조용히 피었다 총총 사라지고 싶다. (정연복·시인, 1957-)         풀꽃 1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   풀꽃 2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을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   ​풀꽃3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봐 참 좋아   (나태주·시인, 1945-)                      
581    시인은 은유적, 환유적 수사법으로 시적 세계를 보아야... 댓글:  조회:2297  추천:0  2017-07-24
3-1. 등기된 언어질서 읽어내기 순수한 원형의 공간을 지향하면서 순수한 언어를 꿈꾸는 시인의 의식은 자신의 진정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는 평가할 만하지만 자신의 관념속에서 언어와 삶을 추상화시켰다는 것은 현실의 음영을 틈입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다분히 문제적이다. 순수한 언어, 투명한 심상의 세계를 다루는 언어들은 추상적인 세계에서만 가능하며 현실의 구체적인 형상을 통한 인식이라는 문제가 자신의 관념속에서만 「위험하게」채색될때 한 개인의 삶은 표백될 수 밖에 없다. 세번째 시집 「王子가 아닌 한 아이에게」에서부터 시인은 일상의 구석 구석을 대상화시키면서 관념의 개념적 인식에서 탈피, 현실로 무게중심이 바뀌어가는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楊平洞에서 가장 가까운 역은 永登浦. 永登浦에서 11시 열차로 사랑하는 서울을 떠남.    내 사랑은 두고 서울만 떠남. 좌석이 없어 입석을 구입, 맥주를 마시는 핑계로 식당차에     편히 앉음. 떠나며 돌아보니 속옷 바짓가랑이가다 나온 永登浦가 떠나는 나를 보더니 한    번 픽 웃고 돌아섬. 떠남. 역사의서울, 꿈의 서울, 여자의 서울                                                           -「한 나라 또는 한 女子의 길」에서 시의 화자는 이제 양평동으로 영등포로, 거리로, 남산으로, 버스 정거장으로 자신의 존재를 풀어 놓는다. 관념의 입김이 지배적인 초기시들과는 달리 시어선택이 상당히 대조적임을 눈치챌 수 있다. 기차의 식당차, 술집 뒷골목, 쇼핑센터같은 도시적인 삶의 공간들과 이에 수반되는 세목들이 시의 소재가 되고 시인은 현실속으로의 적극적인 진입을 시도한다. 시인은 「양평동」 연작을 쓸 무렵부터 시의 힘에 대해 확신하면서 시의 순수성이 마주친 현실을 시 안에 수용하기 시작한다. 그는 부정적인 세계의 모습, 일그러진 현실의 이면을 들추어내면서 자본주의적인 삶의 양태가 가장 고도화된 도시공간에 초점을 둔다. 무질서와 타락, 자본으로 넘실거리는 도시공간은 현대 산업사회의 기형적인 구조에 의해 획일성과 자동성을 고유한 존재방식으로 부여받는다. 시인은 이러한 부정적인 세계의 모습을 시의 현실로 시화(詩化)한다. 「커튼을 걷고 창밖을 내다봄. 거리는 오늘도 安寧함. 安寧한 거리에 하품나옴」(「나의 데카메론」)이라거나, 「어제 나는 술을 마셨고/마신 뒤에는 취해서 유행가/몇 가닥을 뽑았고/그래서 세상이 형편없어 보였고 또/세상이 형편없었으므로 안심하고/네 다리를 쭉 뻗고 잤다」(「빈약한 상상력속에서」)에서처럼 그가 몸담고 있는 도시속에는 수동적이고 사물화된 우울한 일상의 모습이 넘쳐 흐른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부정적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거나 수락하지는 않는다.    幻想. 흔들리는 나무 잎사귀. 실바의 펠리시아노 기사담 다시들다 팽개침. 등기되지 않    은 현실, 幻想. 등기되지 않은 현실속으로 뛰어듦. 갑옷,투구, 방패 손질함. 스스로 구속할    자기의 이름들을 구함.        -「등기되지 않은 현실 또는 돈키호테 略傳」에서 시인은 투구와 방패를 메고 「등기되지 않은 현실」속으로 뛰어드는 현대의 돈키호테이다. 그 환상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등기된 현실만을 보게 될 때 시인은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는 획일적인 판단과 시각을 강요하는 제도화된 현실을 「등기된 현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정작 시인이 투시해야 할 것은 「당신의 눈에도 보입니까. 등기되지 않은 현실」이라고 되묻듯이 그 등기된 현실이 아니라 「등기되지 않은 현실」 -현실과 대립되는 환상, 꿈 이상같은- 환상극의 현실이다. 환상과 현실이 전도된 돈키호테의 희극적인 모습속에는 일그러져 있는 사회의 비극성과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 이제 시인은 그 모순된 현실속에서의 억압적인 삶을, 등기화된 언어질서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작업으로 나아간다.    시는 추상的이니 구상的은 오해마라. 시인은 病身이니 안 病身은 오해마라. 지금 한국은    散文이다. 정치도 散文 사회도 散文 시인도 散文이다. 散文的이기 위한 전쟁시대, 시인들    이 전쟁터로 끌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끌려가는 시인의 빛나는 制服, 끌려가지 못하는 病    身들만 남아 制服도 없이 아, 시를 쓴다.                          -「詩人들」에서 중기로 접어든 오규원의 시는 「산문적」인 삶에 대해 예리한 시선을 보낸다. 70년대. 고도경제 성장과 산업화의 물결속에서 「잘 살아보자」는 자력갱생의 성장 이데올로기 깃발만이 맹목적으로 휘날리던 시절. 급속한 사회변동과 자본주의의 거센물결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개인의 실존은 위협받거나 위태롭게 흔들린다. 현실의 억압을 견디기에는 전통적인 시 양식이 무력할 수 밖에 없다는 일종의 좌절감이 깔려 있는 이 시는, 당시 오규원의 시적 입지점을 드러내주는 시론이기도 하며 이후의 시의 향방을 예고해주는 징표가 되기도 한다. 이런 삶 속에서 오규원의 시는 본격적인 「산문화」의 경향을 보이게 되는데, 그것은 필연적인 과정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시양식으로서는 도저히 현실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세계는 복잡하고 추악하게 뒤틀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조리하고 타락한 세계를 냉철하게 바라보는 시인의 지적인 양식은 점차 사회 비판력을 얻게 되며, 그는 어떻게 현실에 새롭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의식을 반어나 패러디 같은 양식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속하는 시들은 대부분 희화적인 어조와 본격적인 일상어를 채용하고 있는데, 이로써 현실과 세계에서 오는 갈등과 중압감에 대응하는 방식을 드러낸다. 이제, 시인은 모든 「기교」를 동원해 현실과 맞닥뜨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3-2. 현실을 방법적으로 드러내기-시쓰기의 기교 사랑이 技巧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나는 사랑이란 이 멍청한 명사에 기를 썼다. 그리고 이 同義反復이 이 시대의 후렴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까지도 나는 이 멍청한 후렴에 매달렸다.                  -「사랑의 技巧. 2」에서 시인은 현실속에 침윤된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고 인정하면서, 그러한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에 대해 반성적인 인식을 개입시킨다. 그래서 그에게는 「기교주의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사랑이 곧 기교라는 등식, 이 「멍청한 명사」에 매달린 화자는 사랑도 꿈도 시쓰기도 그 결과가 비참한 것임을 반어적으로 깨닫는다. 「슬픔의 기교」는 그에게 곧 시의 「패배」를 의미한다. 그러나 오규원은 기교 그 자체를 시화하거나 추구하는 시인이 아니다. 그가 기교를 시화한다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시작(詩作)행위에 대해 매우 명징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즉 자신의 시작의 의미를 반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방법적으로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방법적 긴장」은 그의 시작 행위의 숨겨진 원리이며, 현실에 대한 시적 주체의 인식을 심화시켜 주는 계기로서의 적극적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그에게 기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가 말하는 기교는 변화하는 세계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표현하기 위해 생겨나며 타락한 현실, 타락한 언어가 가진 허위의식을 드러내려는 전략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을 규정짓고 있는 삶과 세계에 우회적인 태도, 즉 시는 언제나 「너의 패배가 아닌 나의 패배」라는 자조적인 진술을 통해 현실과의 의식적인 긴장된 거리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침묵의 상징시대, 동사가 없는 시대, 물먹이기 시대」(「물에 물먹이기」에서)의 한 복판에서 현실적으로 순수한 언어란 불가능한 것임을 고통스럽게 깨달으며 「아직도 서정시가 씌어지는」 현실을 「신기해」한다. 현실은 시인에게 부정적이고 대립적인 것이며 타락한 세계에서 왜곡되지 않은 언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태도는 현실과 시가 상호대립적인 관계에 놓여있다는 믿음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초기시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오규원은 「배반을 모르는 시가 있다면 말해보라. 의미하는 모든 것은 배반을 안다. 시대의 시가 배반을 알 때까지 쮸쮸바를 빨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을 시라고 하면 안되나」(「버스 정거장에서」에서)라고 반문하면서 일상의 공간에서 시의 의미공간을 더 넓히고자 한다. 다시 말해, 관습적이고 상투적인 시양식으로부터 탈피할 적극적인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것은 파편화된 현실을 파편화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상상력과 현실의 긴장관계를 끝까지 견지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그는 기존의 규범적 사고와 언어적 질서를 거부하면서 새로운 인식과 지평의 전환을 보여주는데, 이렇게 현실과 대결하는 시적 정신은 더욱 팽팽한 긴장을 수반하며, 그를 점점 더 「싸움」의 복판으로 나아가게 한다. 3-3. 기능화 된 언어를 전복시켜 해석하기-방법적 인용 ♀♀ 중간생략 ♀♀ 시인이 한창 원기왕성한 시절, 광고문구나 CF를 방법적으로 인용한 일련의 상품 광고시는 도구화된 사회에서 기존의 시 언어가 아닌 도구화된 형태의 글쓰기, 즉 새로운 미학적 모험이라는 전략으로 맞선다는 점에서는 가히 선구자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시적인 탐구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문학적 언어」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순수한 문학적 언어에 관심을 가지기에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와 자아 사이의 긴장된 갈등을 첨예하게 보여주는 문제가 더 절박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4. 현상의 시학적 탐색-「날(生)이미지」로 1991년에 출간된 『사랑의 감옥』과 1995년에 출간된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에서 시인은 다시 「문학」으로 되돌아온다. 다시 문학적 언어의 문제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는 것이다. 오규원의 반어적 어법이나 광고 패러디시는 시의 의미공간을 보다 확산시키고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와 정치적인 억압을 날카롭게 풍자,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당대적인 의미를 얻었지만, 고도로 다원화되는 혹은 변화되는 현실 사회에 광고형식의 기능적인 언어로는 더이상 맞설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언어화된 현실의 힘을 빌려 세계의 허구성과 절대적 의미를 해체하고자 하는 중기의 문명비판시들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비전을 확보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이미 광고라는 기능화된 형태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들에게 그것은 비슷한 방식의 체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바로 그로 하여금 다시 「언어」의 문제로 돌아가게 만들었을 것이다. 시쓰기와 시적 방법론에 유난히 예민했던 오규원은 파편화된 형태로 파편화된 사회에서의 시쓰기란 더 이상 적절한 방법이 아님을 쉽게 간파했을 것이다. 도구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언어를 「해석과 환원」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던 오규원의 시들은 이제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게 되는데,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자신의 관념으로 해석해 오면서, 우리의 삶에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실재를 창조하는 기제가 다름아닌 은유의 원리라고 파악했다. 그러나 은유적인 해석은 일종의 명명(命名)행위이며 어느 정도 정형화된 사고의 틀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세계를 왜곡할 수 있는 모순과 위험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삶의 다양한 양상을 획일적으로 재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를 왜곡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현실의 세목을 개념화시켜 해석하고 나열해오던 기존의 은유적인 방법론을 반성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시선과 현상을 중시하는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그 질문과 반성은 초기시에서 던져지던 관념적인 형태, 혹은 중기시에서 던져지던 도구화된 형태의 것이 아니라 보다 실체화된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요한다. 한 남자가 가운데가 접힌 식단표 사이로 머리를 박는다 한 여자가 즐거운 얼굴로 남자의 세계를 건너다본다 건너다보는 세계는 아름답다-고 누가 말했다면 나는 이 순간을 위해 믿고 싶다 그 사이 벽을 타고 기어내려 오던 ··고고한 가락은 힘에 부치는지 여자의 목을 잡고 늘어진다 오오 나는 당신께 사랑을 원하지 않았어요- …… 남자는 다시 식단표 사이로 고개를 처박고 여자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가볍게 톡톡친다 세상이 저렇게 가볍게 톡톡 울린다고 누가 말했다면 이 순간을 위해 내가 믿지 못할 이유를 누구에게 물어보랴?                          -「세계는 톡톡 울리기도 한다」에서 우리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는 남녀의 모습을 즐겁게 연상할 수 있다. 손가락으로 식탁을 가볍게 「톡톡」치는 여자의 이미지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마주 앉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투명한 세상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이 두 시집에는 유난히 의성어가 많이 등장하는데, 「톡톡」이나 「툭툭」 「척척」 「쭐쭐」이라는 의성어마저 일종의 부피감을 느끼게 한다. 일상의 삶을 가볍게 흐르도록 만드는 시인의 감수성은 「톡톡」이라는 의성어에까지도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사물과 현상 그 자체를 보다 투명하게 인식하려는 태도와 깊이 맞물려 있으며, 시인은 이런 시선으로 아름답고 선명한, 그러면서 유의미한 삶의 한 장면을 인식의 선반위에 진열하고 있다. 뱃속의 아이야 너를 뱃속에 넣고 난장의 리어카에 붙어서서 엄마는 털옷을 고르고 있단다 털옷도 사랑만큼 다르단다 바깥 세상은 곧 겨울이란다. …… 오 그래 그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 너를 데리고 가려 한단다 그렇게 한동안 견뎌야 하는 곳에 엄마가 산단다 언젠가는 털옷조차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뱃속의 아이야 너도 태어나서 알게 되고 이 세상의 부드러운 바람이나 햇볕 하나로 너도 울며 세상의 것을 사랑하게 되리라 되    리라만                          -「사랑의 감옥」에서 시인은 길 위에 펼쳐진 소박한 삶에서 의미의 공간을 확장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난장의 리어카에 붙어서서」엄마는 뱃속의 아이에게 「어찌이 추운 세상을 다 막고 가릴 수 있겠느냐.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 너를 데려 가」겠다고 말한다. 추위와 가난, 고통으로 얼룩진 이 척박한 세상은 견고한 감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마가 고르는 「구멍 숭숭한 털옷 안의 집」이야말로 삶의 고통과 갈등을 무화시킬 수 있는 사랑의 공간인 것이다. 그곳에는 아무리 갇혀 있어도 힘들거나 외롭거나 고통스럽지 않기에 뱃속의 아이는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구멍 숭숭 뚫린 남루한 털옷,- 「사랑의 감옥」은 삶의 긍정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해방의 이미지 공간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여성의 모성애를 세계에 대한 희망과 사랑으로 변주시킨 이 작품에서 우리는 삶의 긍정과 희망이야말로 감옥같은 현실을 넉넉히 감싸안을 수 있는 동력이 된다는 시인의 전언을 읽어낼 수 있다.           ♀♀ 중간생략 ♀♀    버스 정거장 푯말이 하나 있다 쇠기둥과 나란히 선 한 사내의 얼굴도 팻말처럼 동그랗    다 동그랗고 차다 차들이 다니는 길 안쪽 경흥공업 주식회사 건물은 사철 푸른 나무 울타    리가 꽉꽉 지키고 있다. 스포츠형 머리의 학생이 휘파람을 불며 사철나무 아랫도리를 구    둣발로 내지르고 있다.         --「외곽」에서 시인은 풍경의 한 장면과 사물을 단편적이면서도 기계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앞의 작품들에서는 객관적인 익명의 정조만이 감돌뿐 시인의 존재는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그의 언어는 이제 관념을 제거한 상태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런 언어를 그는 「대체관념」이라는 용어로 부르기도 한다. 재해석이나 재구성이 아닌 의미가 정해져 있는 형태가 아닌 다른 어떤 것. 명명하거나 해석되기 이전의 알몸의 사물과 현상. 이것을 시인은 「날(生)이미지」라고 밝히고 있다. 시인은 명명하고 해석할때 중심축으로 쓰는 은유적 수사법을 버리고 사물을 묘사할때 쓰는 환유적 수사법을 중심축에 두면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일체의 관념을 거부하고 시를 쓰겠다는 이유는 언어가 이데올로기에서 파생된 의미로 왜곡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의미는 존재의 진실을 은폐하며 사물과 세계를 훼손시키고 파편화시킨다.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독재라는 정치적 메타포와 같다. 여기서 시인과 독재가는 근본적으로 만난다」(「네 개의 노트」)고 한 산문에서 이미 시인 자신이 밝혔듯이 이데올로기적인 의미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그 허구성을 파기하는 방법은 자신과 세계를 구속하지 않는 살아있는 현상을 지향하는 것이다. 언어로부터 혹은 인간의 일정한 시각으로부터 의미의 개입을 배제하는 것은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획일적인 의미의 공간을 지워나가고 언어에 자유를 불어넣을 것. 그것이 최근의 오규원이 보여주고 있는 작업이다. 5. 나아가면서:언어가 창조한 「해방의 이미지 공간」 우리는 언어의 관념성에서 출발한 오규원이 그의 시작 과정에서 어떻게 그 관념성을 반성하고 물신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나아갔으며 또 끊임없는 방법론의 갱신에 따라 현상의 탐구로 나아가게 됐는지를 살펴보았다. 시종일관 「언어」라는 문제를 중심축에 두고 70·80년대 자본주의의 기능화된 사유구조와 파편화된 현실에 맞서는 대결의지를 보여주던 시인이 90년대의 변모를 거쳐 최근 시집에서 관념과 의미를 배제한 「날(生)이미지」를 운용(運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날(生)이미지」는 시인의 언급을 빌리자면 「정해져 있는 의미가 아니라 활동하는 이미지」일 뿐이므로 세계를 함부로 구속하거나 왜곡하거나 파편화시키지 않는다. 사물이나 현상 그 자체가 가지는 한 순간의 이미지를 환유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세계의 현상을 획일적인 관념의 틀속에 가두지 않으려는 시인의 노력은 초기부터 탐구해왔던 죽은 관념이나 죽은 언어와의 싸움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관념의 껍질을 벗겨나가는 것. 사물이나 현상을 내쪽으로 끌어당겨 해석하기보다는 시인 스스로 현상을 향해 자신을 열어 보이고 수용하는 것. 그리고 의미의 세계보다는 실체의 세계를 지향하는것. 이것이 오규원이 도달한 시적 여정의 한 결론이다. 그 살아있는 의식속에는 시인 스스로 「톡톡」치면서 열어보인 우주의 공간이 꿈틀거리는 삶이 스며들어 있다. 나도 그 「톡톡」두들긴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언어가 창조한 시원(始原)의 공간속에서 새롭게 열린 사물과 세계를 꿈꾸고 싶다.      
580    풀들아, 너희들 세상이야... 댓글:  조회:2370  추천:0  2017-07-24
  + 들풀 허구한 날 베이고 밟혀 피 흘리며 쓰러져놓고 어쩌자고 저를 벤 낫을 향기로 감싸는지… 알겠네 왜 그토록 오래 이 땅의 주인인지 (민병도·시인, 1953-) + 풀꽃 오다가다 마주치면 늘 반가운 얼굴인데 어쩌니?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너의 이름도 몰라 그래도 자꾸만 뒤돌아보이고 어느새 가슴에 들어와 앉은 꽃. (김재수·아동문학가) + 그냥 풀처럼 매일 오후 두 시가 되면 나는  홍은동에 있는 작은 산을 오른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일은 잠시 접어두고  내 몸이 원하는 일만 할 뿐이다  먹는 일 자는 일 노는 일도 있지만  몸을 햇볕에 내놓아 쪼여주고  숲으로 들어가 산소를 마시게 하고  눈에는 푸른 하늘 파란 나무를 보여준다  몸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오직 생명이니  그 원을 들어주려고 나는 매일  혼자 이 적막한 산을 오르내린다  그냥 풀이 바람에 나부끼듯이  (김종희·시인, 1937-) + 겨울풀  들새의 울음도 끊겼다  발목까지 차는 눈도 오지 않는다  휘파람 같은 나들이의 목숨  맑은 바람 앞에서  잎잎이 피가 돌아  피가 돌아  눈이 부시다  살아 있는 것만이  눈이 부시다.  (이근배·시인, 1940-)  + 심검(心劍) 풀을 뽑다 손가락을 베였다  풀잎도 날을 곧추세우면  한 자루 훌륭한 劍이 된다는 것을  손가락 피를 빨며 알았다  풀은 드러나지 않게  바람에 맞선다  제 한 몸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풀은 劍을 뽑는다  풀은 공격적이지 않고  다른 영역을 탐내지 않고  풀은 풀을 베지 않는다  (고영·시인, 1966-) + 풀들의 언어  풀이 말을 한다  하루종일 하고 또  듣는 이 없어 눈물 달고  말한다  아침  이슬  눈물 아, 싱그러워지면  풀은 고개 숙여  한없이 함초롬해진다  (정윤목·시인, 충북 보은 출생) + 풀 한 포기 만나는 일  비 내린 오후 수북히 자란 풀밭을 지나다가 싱그런 향기에 발을 멈춘다 멀리서만 보던 풀을 고개 숙여 본다 밟기만 하던 풀,  드러누우면 침대가 되고 뛰어놀면 운동장이 되지만  개미에게 집을 주고 지렁이에게 먹이를 주는 풀, 바람 불면 넘어지고 비 오면 고개 숙여 더 낮아지는 풀, 다 자란 자식 잃고 밤새도록 기도로 몸을 낮추던 단칸방 김 노인 텅 빈 가슴에  아침 햇살 쏟아지면 파릿파릿 얼굴을 편다 깎고 깎아도 다시 솟는 풀처럼 상처 먹고사는지 멀리서도 여윈 팔을 흔든다 오월의 하늘은 저리 높은데 풀 한 포기 만나는 일은 고개를 숙여야 한다 (유상옥·재미 시인) + 꽃과 풀  세상 사람들은 눈에 확 들어오는 예쁜 꽃을 좋아합니다 길가의 풀들에게는 별로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풀의 겉모양은 꽃보다 훨씬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깜빡 잊고 있는 게 있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답던 꽃은 어느 틈에 벌써 지고 없어도 못생기고 투박한 풀은  아직까지도 건재하다는 것.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도  굳세게 자라고 살아가는 풀은 오가는 발길에 채이고 밟히고 거센 비바람과 눈보라와 태풍이 몰아쳐도 온몸이 상처투성이 될지언정  뿌리째 뽑히지는 않아 잠시 고개 숙였다가는 힘차게 다시 일어선다는 것을. (정연복·시인, 1957-) +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시인, 1945-)  + 풀꽃  세상길 오다가다  나도 법문 같은 개소리  몇 마디쯤 던질 줄은 알지만  낯선 시골길  한가로이 걷다 만나는 풀꽃 한 송이  너만 보면 절로 말문이 막혀 버린다  그렇다면  내 공부는 아직도 멀었다는 뜻  (이외수·소설가, 1946-)  + 풀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풀이 되어 엎드렸다  풀이 되니까  하늘은 하늘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햇살은 햇살대로  내 몸 속으로 들어와 풀이 되었다  나는 어젯밤 또 풀을 낳았다  (김종해·시인, 1941-)  + 들풀  세상이 싫고 괴로운 날은  바람 센 언덕을 가 보아라  들풀들이 옹기종기 모여  가슴 떨고 있는 언덕을  굳이 거실이라든가  식탁이라는 문명어가 없어도  이슬처럼 해맑게 살아가는  늪지의 뿌리들  때로는 비 오는 날 헐벗은 언덕에  알몸으로 누워도  천지에 오히려 부끄럼 없는  샛별 같은 마음들  세상이 싫고 괴로운 날은  늪지의 마을을 가 보아라  내 가진 것들이  오히려 부끄러워지는  한 순간  (이영춘·시인, 1941-)  + 족필(足筆)  노숙자 아니고선 함부로  저 풀꽃을 넘볼 수 없으리  바람 불면  투명한 바람의 이불을 덮고  꽃이 피면 파르르  꽃잎 위에 무정처의 숙박계를 쓰는  세상 도처의 저 꽃들은  슬픈 나의 여인숙  걸어서  만 리 길을 가본 자만이  겨우 알 수 있으리  발바닥이 곧 날개이자  한 자루 필생의 붓이었다는 것을  (이원규·시인, 1962-)  + 들풀  방금  손수레가  지나간 자리  바퀴에 밟힌 들풀이  파득파득  구겨진 잎을 편다.  (권영상·아동문학가, 1953-)  + 작은 풀꽃  후미진 골짜기에  몰래 핀 풀꽃 하나  숨어 사는 작은 꽃에도  귀가 있다.  나직한 하늘이 있다.  때때로  허리를 밀어 주는  바람이 있다.  초롱초롱 눈을 뜬 너는  우주의 막내둥이.  (박인술·아동문학가)  + 풀꽃의 노래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굳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좋아  바람이 날 데려가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  하고 싶은 모든 말들  아껴둘 때마다  씨앗으로 영그는 소리를 듣지  너무 작게 숨어 있다고  불완전한 것은 아니야  내게도 고운 이름이 있음을  사람들은 모르지만  서운하지 않아  기다리는 법을  노래하는 법을  오래 전부터  바람에게 배웠기에  기쁘게 살 뿐이야  푸름에 물든 삶이기에  잊혀지는 것은  두렵지 않아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이해인·수녀, 1945-)  + 들꽃 같은 시  그런 꽃도 있었나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이 더 많지만  혹 고요한 눈길 가진 사람은  야트막한 뒷산 양지바른 풀밭을 천천히 걷다가  가만히 흔들리는 작은 꽃들을 만나게 되지  비바람 땡볕 속에서도 오히려 산들산들  무심한 발길에 밟히고 쓰러져도  훌훌 날아가는 씨앗을 품고  어디서고 피어나는 노란 민들레  저 풀밭의 초롱한 눈으로 빛나는 하얀 별꽃  허리 굽혀 바라보면 눈물겨운 작은 세계  참, 그런 눈길 고요한 사람의 마을에는  들꽃처럼 숨결 낮은 시들도  철마다 알게 모르게 지고 핀다네  (조향미·시인, 경남 합천 출생)  + 작은 들꽃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너나 나나 이 세상에선  소유할 것이 하나도 없단다  소유한다는 것은 이미 구속이며  욕심의 시작일 뿐  부자유스러운 부질없는 인간들의 일이란다  넓은 하늘을 보아라  그곳에 어디 소유라는 게 있느냐  훌훌 지나가는 바람을 보아라  그곳에 어디 애착이라는 게 있느냐  훨훨 떠가는 구름을 보아라  그곳에 어디 미련이라는 게 있느냐  다만 서로의 고마운 상봉을 감사하며  다만 서로의 고마운 존재를 축복하며  다만 서로의 고마운 인연을 오래오래  끊어지지 않게 기원하며  이 고운 해후를 따뜻이 해 갈 뿐  실로 고마운 것은 이 인간의 타향에서  내가 이렇게 네 곁에 머물며  존재의 신비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짧은 세상에서  이만하면 행복이잖니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너는 인간들이 울며불며 갖는  고민스러운 소유를 갖지 말아라  번민스러운 애착을 갖지 말아라  고통스러운 고민을 갖지 말아라  하늘이 늘 너와 같이하고 있지 않니  대지가 늘 너와 같이하고 있지 않니  구름이 늘 너와 같이하고 있지 않니  (조병화·시인, 1921-2003)  + 들꽃  찬바람 불어오는  겨울 문턱에서도  꽈악 끼어 붙은  보도 블록 사이에서도  들꽃 한 송이는  피어납니다.  (김창근·시인)  + 들꽃에게  어디에서 피어  언제 지든지  너는 들꽃이다  내가 너에게 보내는 그리움은  오히려 너를 시들게 할 뿐,  너는 그저 논두렁 길가에  피었다 지면 그만이다.  인간이 살아, 살면서 맺는  숱한 인연의 매듭들을  이제는 풀면서 살아야겠다.  들꽃처럼 소리 소문 없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었다 지면 그만이다.  한 하늘 아래  너와 나는 살아있다.  그것만으로도 아직은 살 수 있고  나에게 허여된 시간을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냥 피었다 지면  그만일 들꽃이지만  홑씨들 날릴 강한 바람을  아직은 기다려야 한다.  (서정윤·시인, 1957-)  + 나누기  풀꽃의 어깨가 차가워지고 있을 때  해님은 따스한 체온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기운 차린 풀꽃은 지친 꿀벌을 불러  "쉬었다 가렴"  예쁜 꽃 의자를 내어 주었습니다.  꿀벌은 마당 한쪽 빌려 준 할아버지에게  꿀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심효숙·아동문학가)  + 더하기  들이 심심해하고 있을 때  꽃이 한 송이씩 피었습니다.  들의 눈길이 온통 그리로 쏠리고  들의 귀가 온통 그리로 열렸습니다.  꽃이 심심해하고 있을 때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왔습니다.  꽃들의 눈길이 온통 그리로 쏠리고  꽃들의 귀가 온통 그리로 열렸습니다.  들과 꽃은  셈을 시작했습니다.  더하기 고요함  더하기 평화로움  더하기 아름다움…  온통 더하기 더하기만 했습니다.  (박두순·아동문학가)  + 잠시 눕는 풀  풀은 조용하다. 흔들리고  싶지 않아서 뿌리의 정적 쪽으로  마음을 눕히고 풀은 조용하다. 바람은  흐린 하늘을 쓴 소주처럼 휘저으며  벌판을 들끓는 아픔으로 흔들며  온다. 흔들리지 않으려는 것과  흔들며 지나가는 것 사이의  긴장은 고조된다. 시간은  어디론가 숨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바람은 오고  잠시 풀은 눕고,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것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다. 오늘의  풀은 지나가는 바람에 몸을 눕히지만  끝내 바람은 흙 속에 숨은  풀의 흰 뿌리를 흔들지 못한다. 종일을  빈 벌판은 푸른 모발을 날리며  엎드려 있고 종일을 빈 벌판은  통곡을 하며 엎드려 있고  또 다시 바람은 불어오고  풀은 잠시 눕고 다시 풀은  일어서며 풀은 조용하다  (장석주·시인, 1954-)  + 들풀  들풀처럼 살라  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  무한 허공의 세상  맨 몸으로 눕고  맨 몸으로 일어서라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머물라  언제나 빈 마음으로 남으라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라  그리고는 침묵하라  다만 무언의 언어로  노래 부르라  언제나 들풀처럼  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  (류시화·시인, 1958-)  + 들꽃의 노래  유명한 이름은  갖지 못하여도 좋으리  세상의 한 작은 모퉁이  이름 없는 꽃이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몰라봐도 서운치 않으리  해맑은 영혼을 가진  오직 한 사람의  순수한 눈빛 하나만  와 닿으면 행복하리  경탄을 자아낼 만한  화려한 꽃은 아니더라도  나만의 소박한 꽃과 향기로  살며시 피고 지면 그뿐  장미나 목련의 우아한 자태는  나의 몫이 아닌 것을  무명(無名)한  나의 꽃, 나의 존재를  아름다운  숙명으로 여기며 살아가리  (정연복)  +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윌리엄 블레이크·영국 시인, 1757-1827) + 들꽃 들꽃은  들이 좋아  들에서 모여 사네  이른 아침  이슬방울 거울 삼아  담소로이 피어 있어  오가는 사연들을  고스란히 주워 모아  향기 되고 빛깔 되니  아, 그 모습 영롱쿠나  (김옥진·시인, 1962-)  + 들꽃  한 모금 생수 길어  갈증 푸는 새벽 풀 섶  우연히 마주친 눈  숨소리도 낮춘 그녀  티 없는  하늘 끌어안고  심호흡을 하고 있다  세상에 이름 없는 이  어디 있을까만  있는 듯 없는 듯이 사는 이도 여기 있네  문패 건  정원(庭園)에 핀다고  내세우던 부끄러움  밤이슬 머금고서 촉촉이 젖은 입술  넌지시 물어보면  제 이름 밝힐 듯도 한데....  다가가  눈빛 맞추면  내 안에서 피는 꽃.  (경규희·시인) + 들풀 옆에서  이름 없는 들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별 경치도 볼 것 없는  그곳으로 나가  나는 풀빛 울음을 혼자 울 거야.  환한 저승 같은 꽃빛깔 앞에  차라리 눈이 부시어  어질어질 눈을 뜨지 못하면  하는 수 없지,  나를 안심하고  눕게 하는 것  포근한 그 들풀 옆에서나  나는 멍청한  내 눈물 속 하늘을 가질 거야.  그리고 꽃이여  진실로 아름다운 꽃이여  나는 너를 미워하지도 못할 거야.  (박재삼·시인, 1933-1997) + 들꽃 세상 들풀같이 많은 사람들 속에  들꽃처럼 피어나는 사람 있습니다. 흐르는 물처럼 세월처럼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 있습니다. 구석진 자리에서 조금은 외롭더라도 철저하게 자기를 만들어가면서 세상을 향하여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있습니다. 활짝 핀 꽃잎은  찡그리는 법을 모릅니다. 자기만의 향기와 자기만의 사랑으로 어둠 속에 빛이 되어 들꽃으로 활짝 피어 있는 사람들 스스로를 태우고 촛불처럼 참 아름답습니다. 우리 사는 세상 하나같이 들꽃으로 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김송연·시인) +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피었다가 지리라 바람으로 피었다가 바람으로 지리라 누가 일부러 다가와 허리 굽혀 향기를 맡아준다면 고맙고 황혼의 어두운 산그늘만이 찾아오는 유일한 손님이어도 또한 고맙다 홀로 있으면 향기는 더욱 맵고 외로움으로 꽃잎은 더욱 곱다 하늘 아래 있어 새벽이슬 받고 땅의 심장에 뿌리박아 숨을 쉬니 다시 더 무엇을 기다리랴 있는 것 가지고 남김없이 꽃 피우고 불어가는 바람 편에 말을 전하리라 빈들에 꽃이 피는 것은 보아주는 이 없어도 넉넉하게 피는 것은 한평생 홀로 견딘 그 아픔의 비밀로 미련 없는 까만 씨앗 하나 남기려 함이라고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피었다가 지리라 끝내 이름 없는 들꽃으로 지리라 (이현주·목사 시인, 1944-) + 꽃 중의 꽃 - 들꽃을 노래함  세상의 모든 꽃들은  저마다의 모양과 색깔을 뽐내지만 그 중에 제일은 아무래도 들꽃이다 산이나 들에서  절로 나고 자라는 꽃 눈에 잘 띄지 않아 무심코 스쳐 지나기 쉬운 꽃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 눈에는 들꽃이 으뜸으로 예쁘다. 장미의 황홀한 미모도 목련의 우아한 자태도  있는 듯 없는 듯 살그머니 피었다 지는 이름 없는 들꽃의 조용한 기품(氣品)에는 미치지 못한다. 세상에는   꼭 들꽃 같은 사람도 있다. (정연복·시인, 1957-)          
579    시인은 날(生)이미지를 자유롭게 다룰 줄 알아야... 댓글:  조회:1943  추천:0  2017-07-24
  해방의 언어 그 날(生)이미지를 찾아가는 시적 여정 …오규원論- 이연승 1. 들어가면서:시적 「언어」의 폐허와 시인의 자리 짧은 시간동안 급속한 정치, 경제, 문화적 변혁을 치러야 했던 우리 사회는 이제 새로운 전환기에 놓여있다. 지난 시대의 「중심의 담론」은 붕괴 되었고 다양한 문화현상들이 분산된 지형도를 그리면서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 90년대 중반을 가로지르면서 탈중심, 다원주의, 대중문화, 일상, 생태학같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고 기존의 시각과 삶의 양식을 해체하려는 물결이 등장한 것은 분명 변화하는 우리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응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상적인 유행에 민감한 저널리즘과 컴퓨터를 비롯한 영상 산업의 폭발적 팽창, 그리고 세속적이고 일상화된 욕망의 분화구 사이에서 90년대의 분방하고 다발적인 논의들은 체계적인 사회, 문화적 맥락으로 조성되지 못한채 파편화되어 있다. 전망이 불투명한 사회속에서 문학은 지루한 소모품으로 전락하거나 감각적인 새로움을 요구하는 대중의 욕망에 편승하여 상업적 생산과 소비의 유통구조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기도 하다. 나는 삶의 진정성이 외면당하는 가치부재의 현실, 경건성이 질식당하는 문학판에서 문학이 책임질 수 있는 몫은 무엇인지를 새롭게 자문한다. 우리가 문학에서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언어」를 매개로 한 비판적인 사유의 치열함과 부단한 자기 갱신으로 거듭나는 정신적 모험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중견시인을 만난다. 지각변동과 같은 급속한 사회변화속에서도 시종일관 「언어」라는 주제에 집요하게 자신을 쏟아붓고 있는 시인. 그는 우리 시단에서 30년 가까이 언어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고민을 통해 시형식, 시예술의 다양성과 새로움을 모색해 온 오규원이다. 새롭다는 것은 곧 한 시대의 전위적 측면을 의미할진대, 그에게 새로움이란 항상 새로운 감성의 체계와 새로운 긴장의 창조라는 시적 전망의 개진으로 이어져왔다. 최근 시집 자서(自序)에서 시인은 『모든 존재는 현상으로 자신을 말한다. 참된 의미에서, 모든 존재의 언어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도 그 현상의 하나이다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집이 그 이전의 시집들과 다른 특성을 보이는 것은 「현상」에 대한 시적 탐구가 하나의 미학적 방법론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규원 시를 관통하는 「언어」라는 문제는 그의 시세계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그리고 최근의 인식상의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상 자체에 대한 탐구와 그가 실험하는 「날(生)이미지」란 무엇인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들이다. 이런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이 글에서는 그의 초기시부터 근작시까지를 살펴보도록 한다. 자신이 쓰는 모든 시는 「해방의 이미지」라는 그의 시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들을 꼼꼼이 뜯어 읽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 작업을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세계와 삶에서 질문된 「언어」를 투사하면서 자신을 새롭게 열어나가는 오규원의 시적 행로를 다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2. 언어화된 추상의 세계, 「吳氏의 마을」 오규원의 시적 언어의 특징은 우선, 그 언어가 구체적인 현실세계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물론 시는 현실의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변형이며 재창조이다. 언어에 대한 순수한 믿음이 대상세계를 보여줄 수 있다는 확신으로 자리잡고 있던 초기시. 시인은 「나를 확신하기 위하여 나의 말을 믿」으며 「萬象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나의 말을 믿는다」(「말-속 순례10」에서)라고 쓴다. 그가 시종일관 「말」이라는 시의 질료를 문제삼고 시에 대해 되묻는 것은 「확실하게 형체를 드러내는」 확신을 가지려고 하는 자기 욕망의 소산이다. 시인은 언어를 매개로 해서 관념과 사물을 자신의 시적 공간속에서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매우 비유적이고 수사적인 초기의 작품들에서 시인은 시적 대상에 독특한 입김을 불어넣고 있는데, 그는 비록 독립적인 사물의 존재를 포착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실제 사물이 환상이든 아니든간에, 사물들이 관념속에서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 고요한 환상의/출장소/뜰, 뜰의 달콤한 구석에서/언어들이/쉬고 있다. 추상의 나뭇가지에/살고있는 언어들 중의/몇몇은/위험한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다/떨어져 죽고. 나의/고장난 수도꼭지에서도/ 뚜욱 뚜욱/언어들이 죽는다. 건강한 언어의/아이들은 어미의 둥지에서/알을 까고, -「몇 개의 현상」에서 우리는 이 작품에서 하나의 메시지를 포착하기 이전에 관념적인 분위기로 채색되어 있는 두 개의 현상-「달콤한 구석에서 쉬고 있」으며, 「위험한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다 떨어져 죽」는 시니피앙의 움직임을 목도한다. 그의 언어는 현실 혹은 실재라는 시니피앙을 지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시니피앙을 차용해 독자적이고 원형적인 제3의 세계를 창조하려 한다. 그가 꿈꾸는 언어, 순수한 언어가 살아 숨쉴 수 있는 원형의 공간은 「고요한 환상의 출장소」이다. 그 추상적인 공간은 구체적인 현실의 음영이 제거된 「환상의 땅」으로 상정되며, 현실과는 대립되는 곳으로 그려지고 있다. 「환상의 땅」에서 언어는 훼손되기 이전의 순결한 시간과 공간을 지향하지만, 실제 현실 속에서 그 언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의 의식 속에서 이것은 가능해지며 「의식의 먼 강변에서/출렁이는 물결 소리로/차츰 확대」되거나 「소멸을 딛고 일어」나 자유로운 질서 속으로 흩어져, 완전한 존재로 빛나기도 한다. 그러니까 초기의 오규원이 열망하는 순수한 언어는 그의 관념 속에서 조형된, 추상의 공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투명한 심상의 바다 속에 사는 낱말은  외로운 몇 사람이 늘 서 있는 그 배경만큼 조용히 사색의 귀를 열고 있다                 -「현상실험- 別章」에서 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언어는 추상적인 공간-「투명한 심상의 바다」에서 「사색의 귀」를 열어놓거나 땅 위에서 「조용히 쉬며 빛」난다. 타락한 현실 속에서 언어는 본래의 순수성을 잃어버린다. 시인은 사물의 핵(核)을 간직하고 있는 절대언어를 꿈꾸고 있지만, 이런 언어는 현실과는 괴리된채, 그저 「흔들리」거나 「비키니 스타일로 벗어버린 대낮의 감미로운 피부」로 떠돌 뿐이다. 이 환상적인 영역에서 시인은 언어를 끌어들여 확정된 의미구조 속으로 가두어 둘 수 없다. 말은 그 자체로 자유로우며 「언어의 뚜껑을 열고 나와 다시 독립」하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문학사를 읽은 후 지금까지 에밀리 디킨슨을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그녀의 신    장, 머리칼의 길이, 눈의 크기, 그런 것은 하나 모른다. 그녀의 몸에 까만 사마귀가 하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가끔 그녀의 몸에 까만 사마귀가 하나 있다고 시에    적는다.                  -「시」에서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한 인물에 대한 시선은 「시」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투사시키면서 굴절되어 나타나는데, 「시」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작품은 그가 시를 대하는 태도를, 세계를 해석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한 편의 시가 실제의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인물을 그대로 형상화시키거나 지시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의 이미지를 구상하고 여기에 자신의 관념을 육화시킨다. 에밀리 디킨슨의 몸에 「까만 사마귀가 하나 있다고」 자신의 시에 적는 것. 이것은 자신이 꿈꾸는 언어로 세계를 해석하며 관념화시키겠다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실제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까만 사마귀가 있는 그녀의 모습은 시인의 관념 속에서 새로운 시적 향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꿈꾸는 시의 세계는 어떠한가. 詩에는 무슨 근사한 얘기가 있다고 믿는 낡은 사람들이/아직도 살고 있다. 詩에는 아무 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우리의 生밖에 믿고 싶어 못 버리는 사람들의 무슨 근사한 이야기의 幻想밖에는.         -「龍山에서」 자원전쟁시대 유류전쟁시대 그러나 걱정마라, 우회전쟁시대,  이 글은 패배전쟁시대의 시 얘기가 아니니 오해마라. 시인의 나라는 높은 산 골짜기에 있다.                 -「시인들」에서 순수한 언어, 순수한 시의 세계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곳- 「높은 산 골짜기」에 존재한다. 그 세계는 「환상」의 세계이며 현실적인 가치와는 위배될 수 밖에 없는 공간이다. 따라서 시인은 「시에는 아무 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생밖에」라는 선언적인 진술을 통해 시의 세계가 풍요롭고 초월적이라는 기존의 관념을 뒤집고, 시와 대립되는 현실이 얼마나 위악적인지를 우리에게 되묻는다. 그러나 그는 시인이기 때문에 언어를 버릴 수 없다. 언어와 삶, 현실과 순수성의 대립에서 비롯되는 딜레마는 오규원에게 더욱 절박한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 「안녕」치 못한 시대, 「패배전쟁시대」, 그리고 일상화된 억압의 현실 속에서 절대적으로 순수한 언어가 유지되기는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시와 삶의 대립에서 삶의 패배를 읽어내지만, 순수한 언어에의 믿음과 타락한 세상이 빚어내는 팽팽한 긴장 사이에서 순수한 언어를 갈망하는 것이야말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며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힘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언어의 명징함, 그리고 의식의 깨어있음이야말로 자신의 존재 좌표가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잦다. 오늘도 감기지 않는 내 눈을 기다리다 잠이 혼자 먼저 잠들고, 잠의 옷도, 잠의 신발도 잠의 文碑도 먼저 잠들고 나는 남아서 혼자 먼저 잠든 잠을 내려다본다. …… 남들이 시를 쓸때 나도 시를 쓴다는 일은 아무래도 민망한 일이라고 나의 시는 조그만 충격에도 다른 소리를 내고         -「남들이 시를 쓸 때」에서 시인은 쉽게 잠들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인의 의식이란 깨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남들이 시를 쓸 때 나도 시를 쓰는 일」은 「민망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실존적인 삶을 포기하고 훼손된 현실과 제도화된 가치에 스스로를 던져놓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이야말로 바로 시쓰기의 원동력이다. 시인은 순수한 의식과 진정성을 되묻고 이것을 추구한다. 그에게 안정을 부여하는 언어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현실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꿈을 간직할 수 있는 내적인 동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깨어서 견뎌야 하며 자신의 의식을 일깨워 건강한 언어를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정신성을 벼려나감으로써 시의 세계를 현실과는 동떨어진 순수의 세계에 두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이 시대의 純粹詩가 음흉하게 不純」해지는 것은 언어의 순수함에 대한 갈망이 현실속에서 와해되어 버릴만큼 현실은 타락했고 자신은 현실속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오규원은 언어를 믿는 것이 자신의 소외를 상쇄시켜 주리라 믿었고 이것은 세계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시적 주체의 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었다. 오염된 현실 속에서도 타락하지 않은 완전한 존재, 진정한 가치를 잃지 않는 것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언어의 순결성에 대한 시인의 의식은 길들여진 관념이나 제도화된 가치, 그리고 굳어진 언어와의 싸움이라는 전략적 의미를 띠고 수행된다. 그의 시작(詩作)은 언어화된 현실의 힘을 빌려 세계를 인정하면서 거부하고 거부하면서 인정하는 긴장과 갈등의 양극을 순회하면서 새롭게 펼쳐진다. ----------------------------------------------------------------------------------------------------------------------------------------------------       하늘 ―박두진(1916∼1998)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본다. 늘 거기 있는 하늘, 그러나 늘 같지 않은 하늘. 오늘은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은회색, 막을 씌운 듯한 하늘에서 햇살이 뿌옇게 쏟아지고 있다. 시심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눈길 한 번 끌지 못할 하늘이다. 글쎄, 미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조각칼을 대고 싶을 것도 같다. 저 덤덤한 질료일 뿐인 하늘의 막을 긋고 벗겨서 뭔가 근사한 형상을 탄생시킬 것도 같다. 시각예술가들은 다른 분야 예술가보다 덜 감상적이다. 그들은 저 스스로가 세계여서 창작 대상과 정을 교류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공격하고 굴복시키고 다스리는 것 같다. 우리네 마음 여린 시인만큼 날씨의 영향을 받지도 않으리라. 하늘은 늘 거기, 우리 머리 위에 있는데 ‘머얼리서’ 온단다. 화자는 하늘 한 번 쳐다볼 여유 없이 살았나 보다. 어느 날 문득 바라본 초가을 하늘이 어찌나 파랗고 맑은지 화자는 눈을 떼지 못한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화자는 풍덩 뛰어든다. 아, ‘가슴으로, 가슴으로/스미어드는 하늘/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처음에는 ‘여릿여릿 머얼리서’ 오던 하늘이 출렁출렁 푸른 호수로 눈에 가득 차고, 코로 허파로 스며들고, 입으로 목구멍으로 배 속으로 흘러들어온다. ‘하늘을 마신다./자꾸 목말라 마신’단다. 그런 줄 모르고 살아왔지만 화자는 푸른 하늘이 고팠던 것이다. 향기롭지도 않고 메마른 도시 일상인의 갈증을 시원스레 풀어주는 청량한 하늘! 우리 가끔이라도 하늘을 보자. 사람들은 왜 하늘의 별을 보며 그리움을 느끼고, 죽으면 저 하늘로 돌아간다고 생각할까. 정말 우리는 우주 저편에서 온 것일까. 아무리 봐도 싫증나지 않는 하늘….        
578    봄아, 봄아, "봄꽃바구니" 한트럭 보내 줄게... 댓글:  조회:2346  추천:0  2017-07-24
      봄에 관한 시 모음                                             봄 김기택         바람 속에 아직도 차가운 발톱이 남아있는 3월 양지쪽에 누워있던 고양이가 네 발을 모두 땅에 대고 햇볕에 살짝 녹은 몸을 쭉 늘여 기지개를 한다 힘껏 앞으로 뻗은 앞다리 앞다리를 팽팽하게 잡아 당기는 뒷다리 그 사이에서 활처럼 땅을 향해 가늘게 휘어지는 허리 고양이 부드러운 등을 핥으며 순해지는 바람 새순 돋는 가지를 활짝 벌리고 바람에 가파르게 휘어지는 우두둑 우두둑 늘어나는 나무들       봄 김광섭   얼음을 등에 지고 가는 듯 봄은 멀다 먼저 든 햇빛에 개나리 보실보실 피어서 처음 노란 빛에 정이 들었다   차츰 지붕이 겨울 짐을 부릴 때도 되고 집 사이에 쌓인 울타리를 헐 때도 된다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가장 먼 데서부터 시작할 때도 온다   그래서 봄은 사랑의 계절 모든 거리가 풀리면서 멀리 간 것이 다 돌아온다 서운하게 갈라진 것까지도 돌아온다 모든 처음이 그 근원에서 돌아선다   나무는 나무로 꽃은 꽃으로 버들강아지는 버들가지로 사랑은 사람에게로 산은 산으로 죽은 것과 산 것이 서로 돌아서서 그 근원에서 상견례를 이룬다   꽃은 짧은 가을 해에 어디쯤 갔다가 노루꼬리만큼 길어지는 봄해를 따라 몇 천리나 와서 오늘의 어느 주변에서 찬란한 꽃밭을 이루는가   다락에서 묵은 빨래뭉치도 풀려서 봄빛을 따라나와 산골짜기에서 겨울 산 뼈를 씻으며 졸졸 흐르는 시냇가로 간다         봄 반칠환   저 요리사의 솜씨 좀 보게 누가 저걸 냉동 재룐줄 알겠나 푸릇푸릇한 저 싹도 울긋불긋한 저 꽃도 꽝꽝 언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라네 아른아른 김조차 나지 않는가     봄 서정주   복사꽃 피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뜨고 초록색 비 무처오는 하늬바람우에 혼령있는 하늘이여 피가 잘 도라...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 일좀 슬픈 일좀, 있어야겠다                           봄 오탁번   소쩍새는 밤 이슥토록 울고 조롱조롱 금낭화 붉은 꽃잎이 짙다   너비바위 틈에 피어난 개미딸기 오종종 오종종 노란 꽃잎이 여리다   하늘 높이 뜬 솔개 눈씨에 참새도 오목눈이도 찔레넝쿨 사이로 숨는다   하느님이 수염에 묻은 황사를 턴다 붕어들이 알 낳느라       몸을 떨며 피 흘린다        봄날 생각                          곽진구  저 조팝꽃 좀 봐라  봄이 왔다고  머슴 똥 싸듯이 흐드러지게  잔치 날 흰쌀밥 꽃 같은 꽃을 울타리에  고봉으로 쏟아내고 있다  저 꽃의 피는 모양새를 보면  아이 한 둘쯤을 낳고  사내의 성질도 적당히 다룰 줄 알고  인생의 아픈 때가 비껴가지 못해 살짝 살짝 껴 있는,  그래서 뭔가를 생각할 적마다 생각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몰래 흘린 눈물이 한 됫박쯤 되는,  아직은 큰집 노릇을 톡톡히 하는  마흔 살 짜리 우리 집 질부(姪婦)의 눈빛 같기도 하다  나는 오늘 마루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저 꽃 앞에서 무수히 망설였을 홀로 사는 형수를 생각한다  자식 때문에 저 꽃울타리를 함부로 넘지 못하고  머뭇머뭇 돌아섰을  그 발걸음을 생각한다                         봄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 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봄 유안진   저 쉬임없이 구르는 윤회의 수레바퀴 잠시 멈춘 자리 이승에서, 하 그리도 많은 어여쁨에 흘리어 스스로 발길 내려 놓은 여자, 그 무슨 간절한 염원 하나 있어 내 이제 사람으로 태어 났음이랴   머언 산 바윗등에 어리운 보랏빛, 돌각담을 기어오르는 봄 햇살 춘설을 쓰고 선 마른 갈대대궁 그 깃에 부는 살 떨리는 휘파람   얼음 낀 무논에 알을 까는 개구리 실뱀의 하품소리, 홀로 찾아든 남녘 제비 한 마리 선머슴의 지게 우에 꽂혀 앉은 진달래꽃...   처음 나는 이 많은 신비에 넋을 잃었으나 그럼에도 자리잡지 못하는 내 그리움의 방황 아지랭이야, 어쩔 셈이냐 나는 아직 춥고 을씨년스런 움집에서 따순 손길이 기다려지니   속눈썹을 적시는 가랑비 주렴 너머 딱 한번 눈 맞춘 볼이 붉은 소년 내 너랑 첫눈 맞아, 숨바꼭질 노니는 산골짜기에는 뻐꾹뻐꾹 사랑노래 자지러지고   잠든 가지마다 깨어나며 빠져드는 어리어리 어지럼증, 산 아래 돌부처도 덩달아 어깨춤 추는, 시방 세상은 첫사랑 앓는 분홍빛 봄       봄 윤동주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도르 시내 차가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三冬을 참어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봄 정지용   외ㅅ가마귀 울며 나른 알로 허울한 돌기둥 넷이 스고 이끼 흔적 푸르른데 황혼이 붉게 물든다   거북 등 솟아오른 다리 길기도 한 다리 바람이 수면에 옴기니 휘이 비껴 쓸리다 1호 1932년 4월호     봄 천양희   그 자리가 비었어도 밖엔 봄이 충분하였다 나 혼자 있어도 밖엔 봄이 충분하였다 충분한 봄으로 그 시간을 채웠다 작가.2003년   라일락       봄 홉킨스   봄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이름 없는 풀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파릇파릇 아름답게 자라고 티티새의 알은 낮은 하늘 갈아 티티새 자신은 메아리치는 숲을 노래로 울리며 귓전은 때려 그 소리를 들으며 벼락을 맞은 듯하고 윤기 도는 배나무 잎사귀와 꽃잎은 하늘을 닦아 내어 푸르름이 다가오는 풍요로움 뛰노는 어린 양들은 깡충 거리나니 이 생기 넘치는 활력과 기쁨은 무엇이던가 에덴 동산에서 비롯된 대지의 감미로운 흐름이니 그것을 차지하여라, 소유하거라, 그것이 죄 때문에 싫어지고 흐려지고 더러워지기 전에, 주 그리스도여 소년 소녀가 지닌 바 티 없는 마음과 5월의 날을 동정녀의 아들이여 당신이 선택하시고 그 무엇보다도 값어치 있는 것을 가지게 하라 Gerard Hopkins(1844-1889) 영국의 성직자이며 시인       봄 황인숙   온종일 비는 쟁여논 말씀을 풀고 나무들의 귀는 물이 오른다 나무들은 전신이 귀가 되어 채 발음되지 않은 자음의 잔뿌리도 놓치지 않는다 발가락 사이에서 졸졸거리며 작은 개울은 이파리 끝에서 떨어질 이응을 기다리고 각질들은 세례수를 부풀어 기쁘게 흘러 넘친다 그리고 나무로부터 한 발 물러나 고막이 터질 듯한 고요함 속에서 작은 거품들이 눈을 트는 것을 본다   첫 뻐꾸기 젖은 몸을 털고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고흐 ㅡ 복숭아꽃   봄날 김종길   골목의 흰 목련 꽃송이 수틀 위에서처럼 눈을 뜨고   한나절 젖빛 운애 속에 몸풀고 돌아누운 북한사   번데기처럼 나온 애벌레인가 나도 꿈틀거린다 눈을 뜬다     봄날 김기택   할머니들이 아파트 앞에 모여 햇볕을 쪼이고 있다 굵은 주름 가는 주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햇볕을 채워넣고 있다 겨우내 얼었던 뼈와 관절들 다 녹도록 온 몸을 노곤노곤하게 지지고 있다 마른버짐 사이로 아지랑이 피어오를 것 같고 잘만 하면 한순간 뽀오얀 젖살도 오를 것 같다 할머니들은 마음을 저수지마냥 넓게 벌려 한 철 폭우처럼 쏟아지는 빛을 양껏 받는다 미처 몸에 스며들지 못한 빛이 흘러 넘쳐 할머니들 모두 눈부시다 아침부터 끈질기게 추근대던 봄볕에 못이겨 나무마다 푸른 망울들이 터지고 할머니들은 사방으로 바삐 눈을 흘긴다 할머니 주름살들이 일제히 웃는다 오오 얼마 만에 환해져 보는가 일생에 이렇게 환한 날이 며칠이나 되겠는가 눈 앞에는 햇빛이 종일 반짝거리며 떠다니고 환한 빛에 한나절 한눈을 팔다가 깜빡 졸았던가 한평생이 그새 또 지나갔던가 할머니들은 가끔 눈을 비빈다       봄날 김용택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 잡고 매화꽃 보러 간 줄 알아라     봄날 송수권   앵두꽃이 피었다 일러라 살구꽃이 피었다 일러라 또 복사꽃이 피었다 일러라 할머니 마루 끝에 나앉아 무연히 앞산을 보신다 등이 간지러운지 자꾸만 등을 긁어신다 올해는 철이 일들었나 보다라고 말하는 사이 그 앞산에도 진달래꽃 분홍 불이 붙었다   앞대 개포가에선 또 나죽한 뱃고동이 운다 집집마다 부뚜막에선 왱병이 울고 야야, 쭈꾸미 왱병 ㅡ 식초병 배가 들었구나 , 할머니 쩝쩝 입맛을 다신다 빙초산 맛이 입에 들척지근하고 새콤한 것이 달기가 햇뻐꾸기 소리 같다   아버지 주꾸미 한 뭇을 사오셨다 어머니 고추장 된장을 버물 또 부뚜막의 왱병을 기울이신다 주꾸미 대가리를 씹을 때마다 톡톡 알이 터지면서 아삭아삭 씹히는 맛, 아버지 하신 말씀 니 할매는 이 맛을 두고 어찌 갔을거나   환장한 환장한 봄날이었다 집집마다 부뚜막에선 왱병이 오도방정을 떨고 앞대 개포가에선 또 나즉한 뱃고동이 울었다     봄날 송찬호   봄날 우리는 돼지를 몰고 냇가에 가기로 했었네 아니라네 그 돼지 발병을 했다 해서 자기의 엉덩짝살 몇 근 베어 보낸다 했네   우린 냇가에 철판을 걸고 고기를 얹어 놓았네 뜨거운 철판 위에 봄볕이 지글거렸네 정말 봄이었네 내를 건너 하얀 무명 단장의 나비가 너울거리며 찾아왔데 그날따라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더없이 향기로왔네   이제, 우리들 나이 불혹이 됐네 젊은 시절은 갔네 눈을 씻지만, 책이 어두워 보인다네 술도 탁해졌다네   이제 젊은 시절은 갔네 한때는 문자로 세상을 일으키려 한 적 있었네 아직도 마비되지 않고 있는 건 흐르는 저 냇물 뿐이네 아무려면, 이 구수한 고기 냄새에 콧병이나 고치고 갔으면 좋겠네   아직 더 올 사람이 있는가, 저 나비 십리 밖 복사꽃 마을 친구 부르러 가 아직 소식이 없네 냇물에 지는 복사꽃 사태가 그 소식이네   봄날 우린 냇가에 갔었네, 그날 왁자지껄 돼지 멱따는 소리 들리지 않았네 복사꽃 흐르는 물에 술잔만 띄우고 돌와왔데       봄날 신경림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이 늙은 소나무 아래서 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판다   벚꽃잎이 날아와 앉고 저녁놀 비낀 냇물에서 처녀들 벌겋게 단 볼을 식히고 있다   벚꽃 무더기를 비집으며 늙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 하얀 달이 뜨고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이 딸이   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파는 삶의 마지막 고살   북한산 어귀 온 산에 풋내 가득한 봄날   처녀들 웃음소리 가득한 봄날       봄날 심재휘   새들이 깃털 속의 바람을 풀어내면 먼 바다에서는 배들이 풍랑에 길을 잃고는 하였다 오전 11시의 봄날이 이렇게 무사히 지나가는 것은 저 작은 새들이 바람을 품으며 날기 때문인 걸 적막한 개나리 꽃 그늘이 말해줘서 알았다 이런 때에 나는 상오의 낮달보다도 스스로 민들레인 그 꽃보다도 못하였다 나를 등지고 앉은 그 풍경에 한엇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나는 바보 같았다       봄날 이동순(1950 - ) 김천.   꽃은 피었다가 왜 이다지 속절없이 지고 마는가 봄은 불현듯이 왔다가 왜 이다지 자취없이 사라져버리는가   내 사랑하는 것들도 언젠가는 모두 이렇게 다 떠나고 끝까지 내 곁에 남아 나를 호젓이 지키고 있는 것은 다만 빈 그림자뿐이려니 그림자여 너는 무슨 인연 그리도 깊어 나를 놓지 못하는가   이 봄날엔 왜 그저 모든 것이 아쉬웁고 허전하고 쓸쓸한가 만나는 것마다 왜 마냥 서럽고 애틋한가       봄날 이수지   기타를 치고 싶었다 日語도 배우고 싶었다 잘래희망 란에는 언제나 디자이너라고 적어넣었다 우리집 가장은 소주병과 약봉지였다 삼청교육대에서 씀바귀 같은 절망을 키우고 돌아온 아버지는 어느 날 소주병이 되어 세상 밖으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정부 보조금으로는 뇌종양에 걸린 엄마의 약값조차 보조하기 힘들었다 학교에서 오자마자 빨아 널은 체육복, 하얀 체육복이 벌써 말라기네 ... 봄날이 오긴 왔네, 팔락팔락 ...자꾸 잠이 오네. 운동화는 오래 전에 닳아버렸네... 돈꾸러 갔던 엄마가 때가 훨씬 지나 돌아왔을때 전기밥솥엔 저녁밥이 그득했다 밥은 식어 있고, 전기 코드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불 꺼진 방문 앞에 한참을 목발처럼 서 있었다   피자마자 시들은 꽃무리처럼 누렇게 흔들리는 저녁밤 아무도 밥을 퍼먹지 못한 그 밤 꽃잎 같은 밥알들이 흩어지며 소리 없이 강물로 흘러 들어갔다 강바닥에 강물 위에 밥주걱처럼 꽂혀 있는 달빛 바람이 불때마다 수면 위로 무심히 퍼올려지는 밥 냄새 ...같은 봄꽃들 아무리 퍼먹어도 퍼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봄밤         벚꽃이 훌훌      - 나태주     벚꽃이 훌훌 옷을 벗고 있었다 나 오기 기다리다 지쳐서 끝내 그 눈붓니 연분홍빛 웨딩드레스 벗어던지고 연초록빛 새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봄이 올 때까지는 - 안도현    보고 싶어도 꾹 참기로 한다. 저 얼음장 위에 던져놓은 돌이 강 밑바닥에 닿을 때까지는       봄은 고양이로다       -이장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의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 봄은 전쟁처럼 산천은 지뢰밭인가 봄이 밟고 간 땅마다 온통 지뢰의 폭발로 수라장이다. 대지를 뚫고 솟아오른, 푸르고 붉은 꽃과 풀과 나무의 여린 새싹들. 전선엔 하얀 연기 피어오르고 아지랑이 손짓을 신호로 은폐 중인 다람쥐, 너구리, 고슴도치, 꽃뱀--- 일제히 참호를 뛰쳐나온다. 한 치의 땅, 한 뼘의 하늘을 점령하기 위한 격돌, 그 무참한 생존을 위하여 봄은 잠깐의 휴전을 파기하고 다시 전쟁의 포문을 연다. (오세영·시인, 1942-) + 봄을 위하여  겨울만 되면  나는 언제나 봄을 기다리며 산다. 입춘도 지났으니 이젠 봄기운이 화사하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도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고 했는데 내가 어찌 이 말을 잊으랴? 봄이 오면  생기가 돋아나고 기운이 찬다. 봄이여 빨리 오라.  (천상병·시인, 1930-1993)  + 이른봄의 서정 눈 속에서도 봄의 씨앗은 움트고 얼음장 속에서도 맑은 물은 흐르나니 마른 나무껍질 속에서도 수액은 흐르고 하나님의 역사는  죽음 속에서도 생명을 건져 올리느니 시린 겨울밤에도 사랑의 운동은 계속되거늘 인생은 겨울을 참아내어 봄 강물에 배를 다시 띄우는 일 갈 길은 멀고 해는 서산 마루에 걸렸어도 겨울이 지나면 봄은 오게 되어 있나니 서러워 마라 봄은 겨울을 인내한 자의 것이거늘 (김소엽·시인, 1944-) + 그 해의 봄  새벽에 나와  밤에 기어들고  때때로 외지에 나가  내 전심전력 쏟으며  영토를 넓히고 있을 때  울안의 나무란 나무  풀씨란 풀씨 모두가  음모를 꾸미고 있었느니  바람 불면 손을 흔들거나  눈 쌓이면 어깨를 늘어뜨려  평온을 위장한 채  거사를 획책하고 있었으니  그때 일신상의 화급한 문제로  집을 비웠다가 돌아온 날 정오  울안에서 일제히 함성이 터졌느니 철쭉꽃 애기사과꽃 새싹이란 새싹  모두가 일제히 발을 굴러  그 해의 봄은  둑 터진 강물이었느니  (주근옥·시인, 충남 논산 출생) + 해마다 봄이 되면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쉼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둑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조병화·시인, 1921-2003) + 봄 주의보 보드라운 손길이 쓰다듬고  응축된 눈물이 대지를 적셔야만  새순이 솟아나온다  화사한 능선에 얼핏 현혹되어  섣부르게 치마 올리고  옷고름 풀지는 말았으면  가슴을 열고  오롯한 씨앗을 품어주는 것은  투명한 햇살과 초록숨결뿐이다  (임영준·시인, 부산 출생) + 봄 편지 하얀 민들레 꽃씨 속에  바람으로 숨어서 오렴  이름 없는 풀섶에서  잔기침하는 들꽃으로 오렴  눈 덮인 강 밑을  흐르는 물로 오렴  부리 고운 연둣빛 산새의  노래와 함께 오렴  해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게 살아오는 봄  진달래 꽃망울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말없이 터뜨리며  나에게 오렴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꽃 먼저 와서  횡단보도 신호들이 파란불로 바뀔 동안 도둑고양이 한 마리 어슬렁어슬렁 도로를 질러갈 동안 나 잠시 한눈팔 동안, 꽃 먼저 피고 말았다 쥐똥나무 울타리에는 개나리꽃이 탱자나무에는 살구꽃이 민들레 톱니진 잎겨드랑이에는 오랑캐꽃이 하얗게 붉게 샛노랗게, 뒤죽박죽 앞뒤 없이 꽃피고 말았다 이 환한 봄날 세상천지 난만하게 꽃들이 먼저 와서, 피고 말았다 (류인서·시인, 경북 영천 출생) + 새봄·3 겨우내 외로웠지요 새봄이 와 풀과 말하고 새순과 얘기하며 외로움이란 없다고 그래 흙도 물도 공기도 바람도 모두 다 형제라고 형제보다 더 높은 어른이라고 그리 생각하게 되었지요 마음 편해졌어요 축복처럼 새가 머리 위에서 노래합니다. (김지하·시인, 1941-) + 저 못된 것들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 나를 꼬드기네 어깨에 둘러맨 가방 그만 내려놓고 오는 차 아무거나 잡아타라네 저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 나를 충동질하네 멀쩡한 아내 버리고 젊은 새 여자 얻어 살림을 차려보라네 저 못된 것들 좀 보소 흐르는 냇물 시켜 가지 밖으로 얼굴 내민 연초록 시켜 지갑 속 명함을 버리라네 기어이 문제아가 되라 하네 (이재무·시인, 1958-)  + 어느 봄날  청소부 김씨  길을 쓸다가  간밤 떨어져내린 꽃잎 쓸다가  우두커니 서 있다  빗자루 세워두고, 빗자루처럼,  제 몸에 화르르 꽃물 드는 줄도 모르고  불타는 영산홍에 취해서 취해서  그가 쓸어낼 수 있는 건  바람보다도 적다  (나희덕·시인, 1966-) + 봄볕, 환한  교양학관 뒷편 잔디밭 꽃그늘에서 재잘거림이 나뭇잎 깨워 연푸른 빛을 띄게 한다거나 덩그라니 큰 사무실에서 컵라면 먹으며 창 밖 분수대로 외로움을 끌어올린다거나 중앙시장 먹자골목 한 줌 들어오는 하늘빛에 아줌마들 욕지거리 더 높아진다거나 바람이 바람이게 그늘이 그늘이게 눈물이 눈물이게 할 수 있는 저 부끄러운 봄의 속살 우리를 하나로 묶는 무언의 힘 (김형진·시인, 1949-)  + 순서 맨 처음 마당가에 매화가  혼자서 꽃을 피우더니 마을회관 앞에서 산수유나무가 노란 기침을 해댄다 그 다음에는 밭둑의  조팝나무가  튀밥처럼 하얀 꽃을 피우고 그 다음에는 뒷집 우물가 앵두나무가 도란도란 이야기하듯 피어나고 그 다음에는 재 너머 사과밭 사과나무가 따복따복 꽃을  피우는가 싶더니 사과밭 울타리 탱자꽃이 나도 질세라, 핀다 한 번도 꽃 피는 순서 어긴 적 없이 펑펑, 팡팡, 봄꽃은 핀다 (안도현·시인, 1961-) + 봄이 오는 소리  가지마다 봄기운이 앉았습니다.  아직은 그 가지에서  어느 꽃이 머물다 갈까 짐작만 할 뿐  햇살 돋으면  어떻게 웃고 있을지  빗방울 머금으면  어떻게 울고 있을지  얼마나 머물지  어느 꽃잎에 사랑 고백을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둠 내리는 시간에도  새로움 여는 봄의 발자국 소리에  마음은 아지랑이처럼 들떠만 있습니다  돌...돌...돌...  얼음 밑으로 흐르는 냇가  보송보송 솜털 난 버들강아지  이 봄에 제일 먼저 찾아 왔습니다 (최원정·시인, 1958-) + 약속의 봄 키를 조금 낮추고  아니, 쪼그리고 앉아서 보면  봄이 왔네 봄.  논둑 길 돌아 밭으로 가는 길가로  벌써 봄이 와 있네.  우리 아베 쉰 머리카락 마냥  듬성듬성하게 헝클어진 빛 바랜  풀들 속에서  쑥이랑 냉이 씀바귀 잡풀들이  겨우내 땅속에서 쓴 물 빨아먹고  비죽비죽 돋아나네, 이 어린 것.  살아있었노라고 눈 틔우네  봄은 참으로 고마운 약속  씨앗을 품고 온몸으로 겨울을 견뎌낸 대지와  거짓말처럼 씨앗이 밀어 올려낸 약속  보면 볼수록 눈물겨운 약속  대지가 어지러운 열로 몸이 붓기 시작하는 이유를  내 이제 알 것도 같네.  (성낙일·시인, 1973-) + 참 좋은 봄날 실비는 오지요. 꽃밭은 젖지요. 이제 보니 달팽이 한 마리가 꽃밭에 심은 옥수수 줄기를 타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기어갑니다. 기어가서 마침내 오를 수 있을 만큼 올라간 것일까요 이제 그만 하는 걸까요. 그쯤에서 알맞게 휘어진 잎사귀 하나 초록빛 꽃 붙들고 앉아 하루 종일 있을 모양입니다. 제 한 몸 잠적하기에는 참 좋은 봄날입니다. (구종현·시인, 1943-) + 씨앗 하나가  꼼틀 꼼틀 태기가 있었나보다 햇볕의 담금질로 해산할 모양이다 어둠을 꼬박 지새운 길에서 산통 때문에 이리저리 몸을 가누고 있다 은하수 같은 꿈을 왈칵왈칵 쏟아 놓고 꽃밭인 듯 가슴 졸인 머리를 빠끔히 내민다 해산의 꿈들이 어둠을 헤엄쳐와 줄줄이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탄생 꽃잎 하나 살며시 열고 햇살이 내려와 앉는다 가슴으로 빨려들 듯 봄이 반짝인다  (문근영·시인, 대구 출생) +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봄이 꽃나무를 열어젖힌 게 아니라 두근거리는 가슴이 봄을 열어젖혔구나 봄바람 불고 또 불어도 삭정이 가슴에서 꽃을 꺼낼 수 없는 건 두근거림이 없기 때문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반칠환·시인, 1964) + 봄날 얼음장 밑으로  시냇물이 실뱀처럼 스르르 몸을 푼다 버들강아지 금빛 은빛 햇살 모아 보송보송 하얀 솜털 고른다 새싹이 목 길게 빼고 두리번두리번 늘어나는 가족 얼굴 익힌다 대문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개나리 으스스 추운지 햇볕 치맛자락을 끌어다 덮는다 (조미선·시인, 경남 진주 출생) + 아름다운 곳  봄이라고 해서 사실은  새로 난 것 한 가지도 없다  어디인가 깊고 먼 곳을 다녀온  모두가 낯익은 작년 것들이다  우리가 날마다 작고 슬픈 밥솥에다  쌀을 씻어 헹구고 있는 사이  보아라, 죽어서 땅에 떨어진  저 가느다란 풀잎에  푸르고 생생한 기적이 돌아왔다  창백한 고목나무에도  일제히 눈펄 같은 벚꽃들이 피었다  누구의 손이 쓰다듬었을까  어디를 다녀와야 다시 봄이 될까  나도 그곳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  (문정희·시인, 1947-) + 우리나라 꽃들엔  우리나라 꽃들에겐 설운 이름 너무 많다 이를테면 코딱지꽃 앉은뱅이 좁쌀밥꽃 건드리면 끊어질 듯 바람 불면 쓰러질 듯 아, 그러나 그것들 일제히 피어나면 우리는 그날을 새봄이라 믿는다 우리나라 나무들엔 아픈 이름 너무 많다 이를테면 쥐똥나무 똘배나무 지렁쿠나무 모진 산비탈 바위틈에 뿌리 내려 아, 그러나 그것들 새싹 돋아 잎 피우면 얼어붙은 강물 풀려 서러운 봄이 온다 (김명수·시인, 1945-) + 봄에 소박하게 질문하다  몸 풀린 청량천 냇가 살가운 미풍 아래 수북해서 푸근한 연둣빛 미나릿단 위에 은실삼단 햇살다발 소복하니 얹혀 있고 방울방울 공기의 해맑은 기포들 바라보는 눈자위에서 자글자글 터진다 냇물에 발 담근 채 봇둑에 퍼질러앉은 아낙 셋 미나리를 냇물에 씻는 분주한 손들 너희에게 묻고 싶다, 다만,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산자락 비탈에 한 무더기 조릿대 칼바람도 아주 잘 견뎠노라 자랑하듯 햇살에 반짝이며 글썽이는 잎, 잎들 너희들에게도 묻고 싶다,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폭설과 혹한, 칼바람 따윈 잊을 만하다고 꽃샘추위며 황사바람까지 견딜 만하다고 그래서 묻고 싶다,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엄원태·시인, 1955-) + 그대 생의 솔숲에서  나도 봄산에서는 나를 버릴 수 있으리 솔이파리들이 가만히 이 세상에 내리고 상수리나무 묵은 잎은 저만큼 지네 봄이 오는 이 숲에서는 지난날들을 가만히 내려놓아도 좋으리 그러면 지나온 날들처럼 남은 생도 벅차리 봄이 오는 이 솔숲에서 무엇을 내 손에 쥐고 무엇을 내 마음 가장자리에 잡아두리 솔숲 끝으로 해맑은 햇살이 찾아오고 박새들은 솔가지에서 솔가지로 가벼이 내리네 삶의 근심과 고단함에서 돌아와 거니는 숲이여  거기 이는 바람이여, 찬 서리 내린 실가지 끝에서 눈뜨리 눈을 뜨리 그대는 저 수많은 새 잎사귀들처럼  푸르른 눈을 뜨리 그대 생의 이 고요한 솔숲에서 (김용택·시인, 1948-) + 봄은 굳었던 관절이 부드러워지듯  봄은 가까이 더 깊숙이 들어왔다  걸음이 빨라지고  얼굴 가득 미소가 번져나는,  꿈꿀 준비가 되어 있는 자와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는  욕심 없이 건강해질 수 있는 계절이다 봄은  오,  그 누가 첫사랑 같은 설렘 가득한 봄날에  희망으로 가는 통로를  행복으로 가는 첫 계단을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집중할 수 없는 순수와 열정은 가라  거짓사랑도 가라  (이희숙·시인, 1964-) + 봄날과 시 봄날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시가 씌어지기나 하나 목련이 마당가에서 우윳빛 육체를 다 펼쳐보이고 개나리가 담 위에서 제 마음을 다 늘어뜨리고 진달래가 언덕마다 썼으나 못 부친 편지처럼 피어있는데 시가 라일락 곁에서 햇빛에 섞이어 눈부신데 종이 위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씌어진 게 시이기는 하나 뭐  (나해철·의사 시인, 1956-)      
577    시인은 그림자의 소리를 들을줄 알아야... 댓글:  조회:2066  추천:0  2017-07-24
  -허공의 시학 존재와 존재 사이… 허공에 숨은 빛을 보다 화가의 눈으로 세상을 새롭게 날이미지로 읽어내     오규원 시의 화자들은 주변의 사물을 꼼꼼히 바라보며 제 망막에 도달한 빛을, 시인이 날이미지라고 부르는 그 빛의 느낌을 언어로 옮긴다. 상투적이지 않게, 새롭게 본다는 점에서 오규원은 견자다. 오규원(64)은 한 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준 시학 교사이자 시학자다. 유사성에 바탕을 둔 은유체계에서 인접성에 바탕을 둔 환유체계로의 이행, 개념적 사변적 의미에서 벗어나 날것으로서의 사물현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날이미지’의 직조 같은 것이 최근 10여 년 그가 벼려온 시학의 핵심이다. 그는 그 과정에서 “시인은 이미지의 의식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미지의 의식이다. 그리고 이미지가 세계의 구조를 결정하는 한에서 나는 세계의 구조를 결정하는 의식이다”라는 우아한 선언을 제출한 바 있다. 이 선언은 시인 나름의 견자(見者) 시론의 고갱이라 할 수 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에 대한 시인의 의지나 욕망을 의심할 이유가 없는 만큼, 최근에 나온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2005. 이하 ‘새와 나무’)를 견자 시론의 옹근 실천으로 보아도 좋겠다. 그렇다는 것이 이 시인-시학자의 작품을 곧이곧대로 이 시학자-시인의 가르침에 따라 읽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오규원 자신의 말마따나 은유에서 환유로의 이행은 중심과 주변의 자리바꿈일 뿐이다. 은유가 가뭇없이 소멸하고 느닷없이 환유라는 신천지가 눈앞에 펼쳐지는 사태는 아닌 것이다. 실상 은유를 팽개친다면, 그가 ‘느낌의 구조화’라고 정의한 ‘(시적) 묘사’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개념이나 사변 이전의 ‘날이미지’라는 것도 그렇다. 설령 그런 순수한 이미지라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언어로의 재현 통로에는 무수한 개념과 사변의 병균들이 우글거리고 있어서, 말끔히 살균 처리된 위생공간으로서의 ‘날이미지시’가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돌아간 평론가가 조금 다른 맥락에서 거론했듯, 진실이란 결국 진실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 현상을 관념이나 사변으로 비틀지 않고 고스란히 옮겨놓으려는 시인의 안간힘은, 그러므로, 진실화 과정인 동시에 진실에의 착지(着地)이기도 하다. 시인의 그런 진실화 과정을 염두에 두고, 그러나 거기에 얽매이지는 않은 채 ‘새와 나무’를 읽어보자. 시인은 자서(自序)에서 이 시집을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이런 물물(物物)과 나란히 앉고 또 나란히 서서 한 시절을 보낸 인간인 나의 기록”으로 규정하고 있다. 시인은 ‘날이미지’를 “개념화되거나 사변화되기 전 두두물물(頭頭物物)의 현상”이라 정의한 바 있으므로 이 자서는 날이미지 시론의 되풀이랄 수 있지만, 바람결에 들은 그의 투병 소식 탓에 물물이라는 말이 문득 을씨년스럽다. 실제로 이 시집에는 화자말고는 사람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이따금 드러난다고 해도, 그들은 풍경의 일부분, 곧 물물일 뿐이다. 시인은 그런 물물과 나란하다. 그는 물물을 내려다보지도 않고 올려다보지도 않는다. 그는 근대적 인간중심주의자도 아니고 원시적 물신숭배자도 아니다. 물물과 나란히 앉아서, 또 나란히 서서 시적 자아는 무엇을 하는가? 그는 본다. 그는 주변의 사물을 꼼꼼히 바라보며 제 망막에 도달한 빛을, 시인이 날이미지라고 부르는 그 빛의 느낌을 언어로 옮긴다. 그러니까 ‘새와 나무’는 물물의 시집이자 빛의 시집, 가시광선의 시집이다. 이 시집이 견자의 언어인 만큼, 그 언어가 빛의 언어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시인의 눈은 인상파 이후 화가의 눈이다. ‘새와 하늘’에 묶인 시들은 죄다 접속조사 ‘와/과’로 묶인 명사 둘을 제목으로 삼고 있다. 이 엉성한 접착제 ‘와/과’는 어쩔 수 없이 이음매를, 사이를 남긴다. 시인이 공들여 바라보는 것은 바로 이 ‘사이’다. 이 ‘사이’는 “강과 나 사이 강의 물과 내 몸의 물 사이”(‘강과 나’)에서처럼 공간적이기도 하고, “새가 날아간 순간과 날아갈 순간 사이, 몇 송이 눈이 비스듬히 날아 내린 순간과 멈춘 순간 사이”(‘뜰과 귀’)에서처럼 시간적이기도 하며, “강의 물과 강의 물소리 사이”(‘강과 둑’)에서처럼 감각적이기도 하다. 이 사이는 비어있음이고, 침묵이자 허공이다. 그리고 “침묵과 허공은 서로 잘 스며서 투명하다”(하늘과 침묵). 이 투명한 침묵과 허공은 라이프니츠가 존 로크를 비판하며 거론한 ‘빈 서판’(타불라 라사) 같은 것이다. 침묵은 “잎에 닿으면 잎이 되고/ 가지에 닿으면 가지가 된다”(‘하늘과 침묵’). 허공은 “나무가 있으면 나무가 됩니다/ 나무에 새가 와 앉으면 허공은 새가 앉은 나무가 됩니다”(‘허공과 구멍’). 여기서 우리는 ‘새와 나무’의 핵심 어휘 ‘허공’에 다다랐다. 실상 ‘새와 나무’는 허공의 시집이라 할 만하다. ‘새와 나무’에서 허공의 이미지를 찾을 수 없는 작품은 거의 없다. 이 허공의 이미지가, 한 발 물러서 세상을 관조하는 시인의 지적 견고함에도 불구하고, 시집 전체를 가슴 시린 적막의 정조로 물들인다. ‘새와 나무’의 공간은 결코 어둡지 않다. 어둡기는커녕 하얗게 밝은데도, 적막하고 스산하다. ‘새와 나무’에서 허공은 위에 인용한 시에서처럼 곧이곧대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사이, 침묵, 캔버스, 천지간, 하늘, 시간, 유리창 따위로 변주되기도 한다. 그 허공은 부재하는 존재이자 존재하는 부재다. 그것은 배경이자 전경이다. “나무들은 모두 눈을 뚫고 서서/ 잎 하나 없는 가지를 가지의 허공과/ 허공의 가지 사이에 집어넣고 있습니다”(‘새와 나무’) 같은 시행에서, ‘가지의 허공’과 ‘허공의 가지’는 예컨대 ‘루빈의 술잔’이나 ‘마하의 책’ 같은 일종의 반전도형(反轉圖形: reversible figure)이라 할 만하다. 아닌게아니라 시집 ‘새와 나무’의 뛰어난 묘사들은 드물지 않게 반전도형을 연상시킨다. “빗방울 하나가 유리창에 척 달라붙었습니다// 순간 유리창에 잔뜩 붙어 있던 적막이 한꺼번에 후두둑 떨어졌습니다”(‘유리창과 빗방울’) 같은 시행에서도, 상투적으로는 배경이 돼야 할 적막(침묵)이 전경이 되고, 전경이 돼야 할 소리가 배경이 된다. 적막이 후두둑 떨어진다! 경이로운 광경이다. 루빈의 술잔에서처럼 형(形: figure)과 지(地: ground)가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규원의 날이미지란 살아있는 이미지, 진짜 이미지, 본질에 닿아있는 이미지라기보다 상투적이지 않은 이미지, 익(숙하)지 않은 이미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오규원은 새롭게 본다. 그가 옳게 보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옳음은 인간의 인식 능력 너머에 있는지도 모른다. ‘새와 나무’의 작품 하나하나에는 일급 화가의 터치가 묻어난다. 심상한 풍경이 시인의 눈에는 얼마나 심상찮게 보이는가의 한 예로 ‘아이와 망초’라는 작품을 찬찬히, 그러나 시학자의 가르침 바깥에서 읽어보자. “길을 가던 아이가 허리를 굽혀/ 돌 하나를 집어들었다/돌이 사라진 자리는 젖고/ 돌 없이 어두워졌다.” 돌이 사라진 자리가 젖었다는 것은 들린 돌이 옴폭 남긴 공간이 축축하다는 뜻이겠지만, 독자는 거기서 정든 돌을 떠나보내는 구멍의 젖은 눈시울을 떠올릴 수도 있다. 넷째 행의 돌 없는 어둠에서도 독자는 구멍의 어두운 정조를 읽자면 읽을 수 있다. “아이는 한 손으로 돌을 허공으로/ 던졌다 받았다를 몇 번/ 반복했다 그 때마다 날개를/ 몸 속에 넣은 돌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수직 운동을 되풀이하는 돌멩이에서 숨겨진 날개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나이 지긋한 시인의 젊은 감각이 싱그럽다. 시인 자신은 어느 자리에서 이 대목을 ‘환상적 날이미지’라 규정한 바 있다. “허공은 돌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스스로 지웠다.” 그 지움 때문에 허공은 옛 허공과 똑같아 보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전후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이제 그 허공은 어떤 돌멩이가 지나간 허공이고, 그 사실을 지웠다고 하더라도, 지웠다는 사실 자체는 영원히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의 손에 멈춘 돌은/ 잠시 혼자 빛났다/ 아이가 몇 걸음 가다/ 돌을 길가에 버렸다.” 아이가 돌 하나를 집어 들어 장난을 하다 길가에 버린 것은 무심코 한 일일 터이다. 그러나 그것은, 굳이 혼돈이론의 나비효과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주에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기도 하다. 아이는 자신의 무심한 행동으로 젖은 자리를 만들어내고, 존재와 부재를 교환하고, 허공과 돌을 조우하게 했다. 그것은 무한한 인과의 사슬을 통해 우주에 커다란 변화를 만들어낼지 모른다. “돌은 길가의 망초 옆에/ 발을 몸 속에 넣고/ 멈추어 섰다.” 이 역시 시인이 환상적 날이미지라 지목한 대목이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돌에서 시인은 돋아난 발을 본다. 그 돌이 멈추어 설 때, 시인은 (돌의) 몸 속으로 들어간 발을 본다. 새롭게 본다는 점에서, 이미지가 사고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오규원은 과연 像渼? ◎ 9월과 뜰 8월이 담장 너머로 다 둘러메고 가지 못한 늦여름이 바글바글 끓고 있는 뜰 한켠 까자귀나무 검은 그림자가 퍽 엎질러져 있다 그곳에 지나가던 새 한 마리 자기 그림자를 묻어버리고 쉬고 있다   -----------------------------------------------------------     그림자라는 고도  ―신영배(1972∼) 그림자를 기다린다 나무 밑이다 그림자의 방향을 본다 바람이다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는다 어깨가 들어간다 머리통이 들어간다 불룩하다 그림자의 소리를 듣는다 비다     그림자의 색깔을 본다 불이다 주머니 속으로 발을 넣는다 다리가 들어간다 골반이 들어간다 불룩하다 그림자의 냄새를 맡는다 꽃이다 그림자의 맛을 본다 하수구다 주머니가 툭 떨어진다 (사라지며) 그림자를 기다린다 동네에 서 있는 이동도서관에서 시집 몇 권을 빌렸다. 그중 한 권이 이 시가 실린 신영배 시집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다. 정말 시를 잘 쓰는구나! 흠뻑 빠져서 읽었다. 그의 다른 시집 ‘기억이동장치’랑 ‘물의 피아노’도 찾아 읽고 싶었다. 이렇게 매력적인 시를 쓰는, 시집을 세 권이나 낸 시인을 나는 여태 이름도 몰랐다. 반성한다.   빛이 있는 곳에서 물체에는 그림자가 생긴다. 그 그림자를 호기심이나 두려움을 갖고 대하던 시기가 누구에게나 있지만 어느덧 우리는 그림자를 과학적 현상으로만 받아들이고 관심을 거둔다. 그런데 ‘그림자의 소리를 듣는다/비다//그림자의 색깔을 본다/불이다’라니! 시인의 감각적인 묘사로 영혼이 옮겨 붙은 듯 그림자의 세계가 생생히 살아난다. 이 시의 열쇠 말은 ‘그림자’와 ‘주머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는 행위는 자기 세계를 보호하려는, 혹은 자기 존재를 보이지 않게 하고 싶은 심리를 나타낸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에게 손을 넣을 호주머니는 얼마나 큰 위안인가. 그림자의 세계에서는 주머니에 발도 넣을 수 있다. 화자는 아주 숨지는 않는다. 그림자로 숨고, 주머니의 불룩함으로 숨는다. 냄새 향기로운 그림자에서 하수구 맛을 보는 순간, 그림자가 쑥 벗겨져 사라지고 화자는 주머니에서 굴러떨어진단다. 내공 깊은, 참신하고 독특한 시다.        
576    금낭화야, 나와 놀쟈... 댓글:  조회:1753  추천:0  2017-07-24
금낭화  6월, 어머니는 장독대 옆에 틀니 빼놓고 시집을 가고 싶은가 보다 장독 항아리 표면에 돋은 주근깨처럼 자잘한 미련도 없이 어머니는 차랑차랑 흔들리는 고름으로     신방에 들고 싶은가 보다 (안도현·시인, 1961-)         금낭화차   시 / 이청리   널 떼어 놓고 오는 날부터 하늘도 세상도 허물어졌다 무엇으로 쌓아 올릴 수 없어 술로만 칸칸 쌓아 올리는 날들 네가 소리없이 종소리를 울렸다 내 가슴은 쿵쿵 울려 기다리는 일이 슬픔을 통과 하는 일이었까 만날 기약도 없었는데 기다리는 나는 모두 통과 하는 걸까 이 세상 모든 것이 너였고 너로 보였고 너로 생각되었고 너로 꿈꾸게 되었고 너로인해 사는 일이었다 수많은 종을 달고 있는 금낭화가 소리없는 바람에도 울리듯 지금 앉아서도 듣는다 잔을 들면           
575    시인은 절대 관념이나 정서의 노예가 아니다... 댓글:  조회:2042  추천:0  2017-07-24
미적 거리 1. 거리와 감상미학 (1) 거리의 현상학: 사건에 대한 개입도의 차이, 즉 심리적 거리의 문제 Jose Ortega Y. Gasset(오르테가)의 예화 한 저명인사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들 1) 아내 : 남편의 죽음을 자신 내부에서 체험, 즉 사건의 '일부'가 됨. 사건과 인격이 일체가 됨. 2) 담당의사 : 직업적 양심의 면, 인격적 심정 면에서 사건을 인식. 사건에 일부 '개입'함. 3) 신문기자 : 직업상의 의무로 사건을 '관찰'함. 감정적 관여가 아니라 방관의 입장. 명문으로 기사화에 관심이 있음. 4) 화가(우연히 들름) : 죽음의 '장면'을 볼 뿐, '사건'은 관심 밖임. 단지 외재적 시각적 현상에만 관심을 둠. (2) 심리적 거리(Psychic distance) E. Bullough(Psychic Distance as a Factor in Art and Aethetic Principle)의 설명 심리적 거리란 미적 관조의 대상과 이 대상의 미적 호소로부터 감상자 자신을 분리시킴으로써, 즉 실제적 욕구나 목적으로부터 그 대상을 분리시킴으로써 획득된다. 2. 거리와 창작미학 (1) 양식적 상상력 "시 자체는 여러 가지 예술적 장치(리듬, 어조, 이미지, 형태)와 시어에 의해 독자가 그 시를 심미적으로 향수하도록, 즉 감상에 필요한 어떤 거리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하나의 암시적인 방향체계를 마련한다."         --다이치(D. Daiches) - 시인은 관념이나 정서의 노예가 아니다. 이 위험한 재료를 다스리는 인간이다. - 시의 내용이 되는 정서나 사상은 형식과 융합되어 나 이 되어야 한다. - 양식적 상상력(stylistic imagination) : 대상을 형식화하고 대상으로부터 심리적 거리를 두도록 하는 작용하는 상상력  - 휠라이트 - 언어는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이다. 따라서 내적 표현적 충동과 외적 시형식 사이의 '알력'은 시인이 창작과정에서 불가피 겪게 되는 일이다.   * 율격을 맞추기 위해 단어를 바꿔야 되는 경우 * 미술작품을 바라볼 때에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   - 액자 안의 것만을 시야에 받아들여야 한다.   - 거리가 부족하면, 세부는 보지만 전체는 보지 못한다.     * 우리가 지구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거리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2) 부족한 거리조정과 지나친 거리조정 부족한 거리조정(underdistancing) : 제재에 대한 시인의 심리적 거리가 아주 짧은 경우. 시인이 감정을 양식화하지 않고 직접 발화하는 절규의 형태. 즉 시의 감상성(感傷性)이다. 1920년대 한국의 감상적 낭만시가 대표적이다. 오 괴로운 나의 넋이여! 머리에서 발톱까지 불순한 너의 짓밟음이여! 광명의 한낮을 암흑의 한밤으로 바꾸어 사는, 오, 나의 슬픔! 돌아가거라. 밤의 나라로, 오, 불순하 나의 피! -- 김형원, 중에서 **감정적 거리는 제재와 언술 사이의 시간적 거리에 비례한다. 즉 시간이 흐를수록 제재에 대한 객관적 입장이 강화된다 지나친 거리조정(overdistancing) : 제재에 대하여 지나친 심리적 거리를 둘 경우, 즉 제재에 대해 시인이 냉담한 태도를 말한다. 관념적인 시, 분열적인 시가 될 수 있다. 고즌 므스 일로 퓌며서 쉬이 디고 플은 어이하야 프르는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티 아닐손 바회 뿐인가 하노라 -- 윤선도, 중에서 거리조정이 잘 된 경우 : 경험적 자아를 억제한 고전주의적 절제의 미학에 입각하여 주지적 태도를 보일 경우(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 정지용, 중에서 **이 시의 제재는 "아들을 잃은 슬픔"이다. 이러한 제재는 거리조정을 부족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시는 그러한 감정을 절제하고 승화시켜 예술적으로 완성감이 있는 시편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때 제재에 직접적 상관이 없는 독자들도 감동과 예술적 공감을 가지게 된다. **유사한 경우로 김현승의 이 있다. 이 작품도 아들을 잃은 슬픔이 제재가 되는데, 이를 종교적 심성으로 승화시켰다. (3) 성실성과 실존적 장르 - 서정시는 실존적(existential) 장르이다.     cf. 서사양식, 극양식은 허구적 인물창조 - 공자의 론. 톨스토이의 예술론(개성론) - 경험적 자아와 시적 자아를 동일시하는 태도 - 19세기 낭만파의 - 현대적 시관은 이러한 성실성에 대해 부정적(몰개성론) - 경험적 자아와 시적 자아의 동일시에 부정적 - 동일성의 고백적, 자전적 스타일 자체가 책략이며, 탈을 반영한 것이다. - 극단적으로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는 그가 전혀 느끼지 않은 것을 강렬하고 풍부하게 표현한다. 내면적 거리(G. Poulet) (4) 객관적 상관물과 시인의 두 얼굴 **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s)은 T.S. Eliot의 표현임. - 시는 정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고, 정서로부터의 도피이며,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다.  - 엘리어트는 "현대문명사회를 구원하는 길은 가톨리시즘이다" 주장 - 경험적 자아= 고통 받는 인간(Man who suffers) not 창조하는 자아 - 이러한 경험적 자아에 대한 혐오와 불안에서 기인한 것 - 몰개성론 - 경험적 자아를 억제하고 정화하는 것, 참다운 자기 희생 강조 - 몰개성론으로 발전 "예술의 형태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의 방법은 '객관적 상관물'을 발견하는 데 있다. 환언하면, 특수한 정서의 공식이 되고, 독자에게 똑같은 정서를 환기하게 되는 일련의 사물, 상황, 사건이다." 3. 거리의 표현기법 (1) 서열의 역전 인간적 시점: 사물에 대하여 서열의 질서를 부여 인간->생물->무기물 비인간적 시점: 이 서열의 역전, 현실과의 심리적 거리를 최대한으로 팽창시킴 인간들 속에서 인간들에 밟히며 잠을 깬다. 숲 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이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본다. 남의 속도 모르고 새들이 금빛 깃을 치고 있다. --김춘수, 전문 화자의 인간에 대한 혐오감과 상수리나무에 대한 애정 표현한 작품(비인간적 시점) 비인간화의 기법: 이미지들의 느닷없는 결합(몽따쥬, 콜라쥬, 자동기술법, 데빼이즈망, 병치) 몽따쥬: 편집은 프랑스어로 "montage"라고도 한다. 몽타쥬란 사진술에서는 사진합성법, 합성사진을 의미하며, 움직이는 영화나,비디오에서는 영상들을 "구성한다""쌓아올린다""조립한다"등의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한다. 어원은 여러 가지의 영상을 한 화면 내에 짜 넣는다는 사진용어였으나, 쿨레쇼브, 프도프킨, 에이젠쉬쩨인등의 러시아 형식주의 감독들에 의해 영화에 도입되면서 쇼트들의 조합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다른 예술작품 처럼 어떤 사상이나 관념, 감정등이 하나의 화면구성 뿐 만 아니라 몇 개의 연속된 쇼트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실험한 것이 몽타쥬이론이다. 몽따쥬 그림의 예 콜라쥬: 프.collage. "붙이다"는 뜻의 coller로부터 유래). 1912년 이후 미술에서 사용하는 개념으로 종이, 돌, 쇠조각 등 이물질을 그림에 붙이는 것을 의미한다. 1950년 이후 유행한다. 비슷한 말로 몽타쥐(montage)라는 말도 사용된다. 음악에서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음악들이나 소음(말, 기계소리, 자연의 소리)들을 재료로 사용하여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1960-70년대에 많이 사용되었다. 짐머만, 베리오, 카겔, 베리오, 슈니트케 등의 작품에 나타난다. 콜라쥬 그림의 예 데뻬이즈망: 우연적인 두 단어가 접근되는 지점 즉 두 개의 전도체 사이에서 발생되는 전위차(電位差)의 작용에 의한 이미지의 광채(lumiere d'image)를 추구하는 초현실주의 시의 미학을 데뻬이즈망(depaysement)이라고 하는바, 이 수법을 보다 효과적으로 살리는 방법으로 ‘아시체 놀이(Le cadavre-exquis)’가 있다. ‘아시체놀이’는 1925년 빠리의 사또오 가(街) 54번지 고색창연한 집에서 생겨났다. 그것은 유희의 일종으로 먼저 글을 쓴 몇 마디 말을, 각 요소가 가능한 역설적 형태로 충돌하도록 결합시켜, 처음부터 조리(條理)를 벗어난 인간의 전달행위가 최대한의 모험을 기록하는 정신에까지 달할 수 있는 유희다. 누구나 협력 혹은 예비적 협력을 바랄 수 없는 상태에서, 여러 명의 참가자에게 한 문장씩 돌아가며 쓰게 하는 종이 접기 놀이로서, 이 놀이에서 최초로 얻은 문장에서 취해진 것이 “우아한//시체는//새 포도주를//마실 것이다(Le cadavre-exquis-boira-le vin nouveau)”였다. 데뻬이즈망 미술작품의 예  한국시의 Tension에 관한 연구(이건청): 주지하는 대로 인간적인 시점을 배제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이미지들의 느닷없는 결합이며 데뻬이즈망depaysement은 슐레알리스트들에 의해 실험된 후 현대 예술 전반에 두루 쓰이는 표현 기법이 되었다. 데뻬이즈망은 기존의 의미를 버리고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니도록 의미론적 변화를 시도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시에 있어서의 데뻬이즈망은 상식적이고 타성적인 연상 작용을 과감히 거부하고 발견적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창작에 더없이 중요한 것이다. 한 편의 시 속에서 데뻬이즈망의 효과가 고조되어 나타나게 되는 경우는 비유, 상징, 알레고리 등 여러부면을 들 수 있을 것이고, 또한 한 편의 시에서 제목과 본문 작품사에에서도 발생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구자는 작품 창작상에 활용될 수 있는 데뻬이즈망 효과와 거기서 찾아낼 수 있는 긴장의 양상들을 고찰해보려 한다.  자동기술법(automatism):  초현실주의자들은 논리적 사고 이전에 있는 혼돈 상태 또는 논리적 사고를 벗어난 모든 의식 상태, 이를테면 원시인들의 신화, 꿈과 환상, 광기, 불가사의, 정신병 환자들의 환각 증세 같은 것들에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와 오류, 꿈과 현실, 이성과 광기라는 전래의  구별이 부질없다 하면서 정신병 의사들이 말하는 과대망상증, 정신분열증, 히스테리 등의 현상을 연구했다. 그리고 프로이드의 선례에 따라 꿈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연상작용을 기록하려 했다. 그들이 사용한 '자동기술법'은 계시적인 무질서 속에서 부조리함이나 부적절함에 전혀 개의치 않고 해방된 의식 속에 쌓이는 문장들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이다. "말이건 글이건 아니면 그 어떤 수단에 의해서건 사고의 진정한 작용을 표현하려는 심리적 자동현상, 이성의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고, 미학적이거나 도덕적인 어떤 규약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고의 받아쓰기이다."  (2) 소외기법 낯설게하기(defamiliarization) : 러시아형식주의자들의 예술 원칙 일상언어, 규범문법의 파괴, 전통 율격, 전통 미적 규범 파괴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소. 근처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열심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위하여그러는것처럼나느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내었소. --이상, 전문 이 시에서의 낯설게하기 현상들; - 띄어쓰기 무시 - 문장과 문장 사이의 논리성 결여 - 꽃나무와 화자 연결의 유추 몽따쥬 수법(모더니즘시의) : -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폭력적으로 결합시키는 방법. 소외 기법의 일종이다. - 같은 시공간에 존재할 수 없는 사물들의 결합. 원래의 장소에서 사물 추방 바다 밑에는 항문과 질과 그런 것들의 새끼들과 하나님이 한 분만 계시더라 --김춘수, 일부 비인간화는 현실로부터 심리적 거리를 최대로 팽창시킨 예술방법 화자의 인간적 감정 철저하게 배제, 객관적 상관물 사용 화자와 진술하는 대상 사이에 확연한 거리(객관성의 어조) (3) 구조와 반구조 구조: 문학과 현실을 구분하는 경계선.(시작-중간-끝 vs 일상의 산만함) 기승전결의 구조(시상 전개의 전통적인 구조화, 시조의 대표적 구성법)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는 바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엇디 살라 하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잡사와 두어리마나난 선하면 아니 올셰라 셜온 님 보내옵노니 가시는 듯 도셔오쇼셔 --고려속요 결말맺기의 구조화는 '목적론적 세계관'과 연관됨. 봉함체(enveloped style: 수미쌍관 의장법) -김영랑의 이 대표적 현대시는 개방형식을 지향하며, 결말맺기의 수단들이 점점 극소화하는 현상을 보임 모더니즘의 실험시에서는 '반결말' '반구조'의 경향을 보임 문학과 인생의 전통적 경계선이 붕괴됨을 반영 -> 시적 리얼리즘 지향과 연관 -장경린, 이 대표적 (4) 서술시와 묘사시 서술시(narrative poem): 이야기를 노래한 것. 이야기시. 장르개념(서정, 서사)이 아니라 형식개념이다. 행위에 의해서 시적 긴장이 창조되고, 그 행위의 이야기가 객관적 상관물이 되는 것 살아 있는 실제의 인간 포괄(배제의 원리가 아님) 인간의 행위나 생생한 삶의 모습에 의해 인간적 의미나 감정을 표현(인간적 시점) 이야기는 줄거리를 통해 인물과 사전 재현(모방적 양식) 화자와 대상(사건) 사이의 거리 확립(객관성의 양식) 화자가 청중에게 전달하고 보고하는 양식(보고의 목소리) 한국시가의 전통이었음(공무도하가, 처용가, 헌화가, 서동요, 쌍화점, 만전춘, 정읍사, 사설시조 근대시의 서사시들이나 백석의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음. 70년대: 현대시의 장시화와 결부되고, 민중문학을 표방. 서정주의 도 서술시의 의도를 지닌 것. 서술시는 시의 난해성 극복 장치 서술시는 리얼리티 확보의 가능성을 열어줌 서술시의 결과 장시화(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보라!) 서술시 vs 묘사시 (문체 차이, 제재 차이) 묘사시: 대상과 대상의 특질을 다룸. 이미지가 지배소. 30년대 모더니즘 시에서 찾아볼 수 있음(회화시, 사물시 형태로) 정밀한 묘사를 통해서 대상과 거리 유지. ---------------------------------------------------------------     수술 전야  ―박덕규(1958∼ ) 입원하러 가기 전날 밤 갚아야 할 빚을 다 적어 놓아야겠다고 몰래 스마트폰 빛을 밝히며 책상 앞에 앉았다가 서랍에서 발견한 십 년 전 낙서. 그 시절 원인 모를 복통에 시달리며 배를 움켜쥐고 쓴. 하느님, 제가 일 잘 하는 사람인 줄 알고 빨리 불러 일 시키실 작정을 하시면 곤란해요. 하느님, 아직 처리할 게 많아요. 제발 빚 좀 다 갚고 가게 해 주세요. 하느님, 아니 하나님이라도 좋아 제발 십 년만 더 살게 해 주세요.      상태가 위중하건 그렇지 않건 수술을 받는 건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그 전날 밤, 식구들 모르게 책상 앞에 앉는 화자. 혹시 잘못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비장한 마음으로 그가 적으려는 것은 ‘갚아야 할 빚’의 목록이다. 종이를 찾으려 서랍을 뒤적이다가 ‘발견한/십 년 전 낙서’, ‘하느님, 아직 처리할 게 많아요./제발 빚 좀 다 갚고 가게 해 주세요’! 제가 중병에 걸린 것만 같았던 그때 화자는 모든 신을 향해 애걸했었다. 그러니 ‘제발 십 년만 더 살게 해 주세요’! 무사히 수술을 마친 뒤에 화자는 십 년 세월에도 달라진 게 없는 저 자신을 씁쓸한 미소로 돌아본다. 막다른 상황에 처하면 우리는 신을 부르고 맹세한다. 이 고비만 넘기게 된다면 새로 태어난 듯 살리라고. 그 맹세를 지키는 사람은 드물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화자에게 이후 ‘십 년만 더’ 주어지면 충분할까? 아일랜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묘비명을 이리 남겼단다. ‘어영부영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게 사실이라면 재능을 활짝 펼치며 명예와 부를 누리다 95세에 세상을 뜬 사람이 ‘어영부영’했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제 삶은 늘 짧게 느껴지고 제 죽음은 언제라도 이른 법. 매우 공감이 가는 시다. 나도 삶을 정리할 시간 없이 죽을 것 같은 병세로 입원한 적이 있다. 뜻밖에도 죽는 게 무섭지 않았다. 나 없이 남겨질 세 고양이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고 못 갚은 빚이 무겁게 마음을 짓누를 뿐이었다. 죽기 전에 기껏 빚 걱정이나 하다니 인생 누추하다고? 소크라테스도 닭 한 마리를 갚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지. 빚을 많이 진 사람에게는 죽음의 공포도 사치라네.
574    춘향아, 도련님 오셨다... 댓글:  조회:2349  추천:0  2017-07-24
ㅁ상사보(相思譜)    - 춘향별사(春香別詞) 3 -                                          곽진구  봄이 오면  녹음이 무성한 왕대 숲이 집안으로 들지 못하도록  골을 치고 돌담을 만들어 놓으면,  대나무는 그걸 알아차리고 더는 침범치 아니하고  담을 따라 어린 순(筍) 잡고 돌며  고운 댓잎을 반듯하게 뽑아 올리곤 합니다  담 하나 넘으면 그만인 것을,  그 짓은 차마 못하겠다고  뒷담에 서성이다가 돌아가곤 하는 것이  어디 말없는 저 대나무뿐이겠어요  보세요, 봄 향기에 이끌려 와선  더는 안되겠다고 마음의 금을 그어놓고  담 없는 담 너머에서  제 가슴팍만 쳐대 싸는 도련님,  도련님의 눈빛도 꼭 그러합니다                     오작교                             곽진구   하늘에만 있어야 할 다리가 땅에 내려와 버젓이 다리 행세를 하는 걸 보면 그도 그럴 듯해 까막까치는 하늘에 놓아두고 그 마음만 갖고 내려와 사랑하는 이의 눈과 눈 속에 화안히 다리를  놓고 있는 걸 보면 그도 그럴 듯해   봐라, 봄날 쑥내음 같은 아스라한 마음들이 다투어 다리를 건너 고운 눈빛 속에 숨는구나 덩달아 푸른 댓잎 같은 여린 비수의 끝도 슬쩍 내비추고     춘향(春香)과 이도령(李道令) - 김소월 평양(平壤)에 대동강(大同江)은 우리 나라에 곱기로 으뜸가는 가람이지요 삼천리(三千里) 가다 가다 한가운데는 우뚝한 삼각산(三角山)이 솟기도 했소 그래 옳소 내 누님, 오오 누이님 우리 나라 섬기던 한 옛적에는 춘향(春香)과 이도령(李道令)도 살았다지요 이편(便)에는 함양(咸陽), 저편(便)에 담양(潭陽), 꿈에는 가끔가끔 山을 넘어 오작교(烏鵲橋) 찾아 찾아가기도 했소 그래 옳소 누이님 오오 내 누님 해 돋고 달 돋아 남원(南原) 땅에는 성춘향(成春香) 아가씨가 살았다지요 다시 밝은 날에―춘향(春香)의 말2 - 서정주 신령님, 처음 내 마음은 수천만 마리 노고지리 우는 날의 아지랭이 같았습니다. 번쩍이는 비늘을 단 고기들이 헤엄치는 초록의 강 물결 어우러져 날으는 아기구름 같았습니다. 신령님, 그러나 그의 모습으로 어느 날 당신이 내게 오셨을 때 나는 미친 회오리바람이 되었습니다. 쏟아져 내리는 벼랑의 폭포,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령님, 바닷물이 작은 여울을 마시듯 당신이 다시 그를 데려가시고 그 훠―ㄴ한 내 마음에 마지막 타는 저녁 노을을 두셨습니다. 그리고는 또 기인 밤을 두셨습니다. 신령님, 그리하여 또 한번 내 위에 밝는 날 이제 산골에 피어나는 도라지꽃 같은 내 마음의 빛깔은 당신의 사랑입니다. (시집 , 1956) 춘향유문(春香遺文)-춘향의 말 3 - 서정주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만나던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 길 땅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예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부을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예요. (시집 , 1956) 춘향(春香) - 김영랑 큰 칼 쓰고 옥(獄)에 든 춘향이는 제 마음이 그리도 독했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 옛날 성학사(成學士) 박팽년(朴彭年)이 오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원통코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 옥방(獄房) 첫날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서름이 사무치고 지쳐 쓰러지면 남강(南江)의 외론 혼(魂)은 불리어 나왔느니 논개(論介)!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貞節)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만 옥사(獄死)한단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학도(卞學徒)의 흉칙한 얼굴에 까무러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주는 도련님 생각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마디 문지르며 눈물은 타고 남은 간을 젖어 내렸다 버들잎이 창살에 선뜻 스치는 날도 도련님 말방울 소리는 아니 들렸다 삼경(三更)을 세오다가 그는 고만 단장(斷腸)하다 두견이 울어 두견이 울어 남원(南原) 고을도 깨어지고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18호, 1940.7) 두견(杜鵑) - 김영랑 울어 피를 뱉고 뱉은 피는 도루 삼켜  평생을 원한과 슬픔에 지친 적은 새, 너는 너른 세상에 서름을 피로 새기러 오고, 네 눈물은 수천(數千) 세월을 끊임없이 흐려 놓았다. 여기는 먼 남(南)쪽 땅 너 쫓겨 숨은직한 외딴 곳, 달빛 너무도 황홀하여 호젓한 이 새벽을  송긔한 네 울음 천(千)길 바다 밑 고기를 놀래이고, 하늘가 어린 별들 버르르 떨리겠고나. 몇 해라 이 삼경(三更)에 빙빙 도는 눈물을 씻지는 못하고 고인 그대로 흘리웠느니, 서럽고 외롭고 여윈 이 몸은 퍼붓는 네 술잔에 그만 지늘꼈느니, 무섬증 드는 이 새벽까지 울리는 저승의 노래, 저기 성(城) 밑을 돌아나가는 죽음의 자랑찬 소리여, 달빛 오히려 마음 어둘 저 흰 등 흐느껴 가신다. 오래 시들어 파리한 마음마저 가고지워라. 비탄의 넋이 붉은 마음만 낱낱 시들피느니 짙은 봄 옥 속 춘향(春香)이 아니 죽었을라디야 옛날 왕궁(王宮)을 나선 나이 어린 임금이 산골에 홀로 우시다 너를 따라 가시었느니 고금도(古今島) 마주 보이는 남쪽 바닷가 한많은 귀향길 천리 망아지 얼렁소리 쇤듯 멈추고 선비 여윈 얼굴 푸른 물에 띠웠을 제 네 한(恨)된 울음 죽음을 호려 불렀으리라 너 아니 울어도 이 세상 서럽고 쓰린 것을 이른 봄 수풀이 초록빛 들어 풀내음새 그윽하고 가는 댓잎에 초생달 매달려 애틋한 밝은 어둠을  너 몹시 안타까워 포실거리며 훗훗 목메었느니 아니 울고는 하마 죽어 없으리 오! 불행(不幸)의 넋이여. 우거진 진달래 와직 지우는 이 삼경의 네 울음 희미한 줄 산이 살풋 물러서고 조고만 시골이 흥청 깨어진다. 자연(自然)-춘향이 마음 초(抄) 2 - 박재삼 뉘라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사랑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 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시집 , 1962) 수정가 - 박재삼 집을 치면, 정화수 잔잔한 위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의 선선한 우물집이었을레. 또한 윤이 나는 마루의, 그 끝에 평상의, 갈앉은 뜨락의, 물냄새 창창한 그런 집이었을레. 서방님은 바람 같단들 어느 때고 바람은 어려울 따름. 그 옆에 순순한 스러지는 물방울의 찬란한 춘향이 마음이 아니었을레. 하루에 몇 번쯤 푸른 산 언덕들을 눈아래 보았을까나. 그러면 그때마다 일렁여 오는 푸른 그리움에 어울려, 흐느껴 물살짓는 어깨가 얼마쯤 하였을까나, 산과 언덕들의 만리 같은 물살을 굽어보는, 춘향은 바람에 어울린 수정빛 임자가 아니었을까나. 5월의 노래 - 송수권 누이야 너는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가 오월의 저 밝은 산색이 청자를 만들고 백자를 만들고 저 나직한 능선들이 그 항아리의 부드러운 선들을 만들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누이야 너 또한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네 사는 마을 저 떠도는 흰구름들과 앞산을 깨우는 신록들의 연한 빛과 밝은 빛 하나로 넘쳐흐르는 강물을 너 또한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푸른 새매 한 마리가 하늘 속을 곤두박질하며 지우는 이 소리 없는 선들을, 환한 대낮의 정적 속에 물밀듯 터져오는 이 화녕끼 같은 사랑을 그러한 날 누이야, 수틀 속에 헛발을 딛어 치맛말을 풀어 흘린 춘향이의 열두 시름 간장이 우리네 산에 들에 언덕에 있음직한 그 풀꽃 같은 사랑 이야기가 절로는 신들린 가락으로 넘쳐흐르지 않겠는가 저 월매의 기와집 네 추녀끝이 허공에 나뜨는 날. 단오 - 이수익 음오월에도 초닷새 수릿날엔 아내여, 그대는 춘향이가 되라. 그러면 나는 먼 숲에 숨어 들어 그대를 바라보는 이도령이 되리라. 창포를 물에 풀어 머리를 감고 그대는 열 일곱, 그 나이쯤이 되어 버들가지엔 두 가닥 그넷줄을 매어 그대 그리움을 힘껏 밟아 하늘로 오르면,  나도 오늘밤엔 그대에게 오래도록 긴 긴 편지를 쓰리라. 하늘로 솟구쳤다 초여름 서늘한 흰구름만 보고 숨어 섰던 날 보지 못한 그대의 안타까움을 내가 아노라고…… 그대 잠든 꿈길 위에 부치리라. 춘향의 노래 - 복효근 지리산은 지리산으로 천 년을 지리산이듯 도련님은 그렇게 하늘 높은 지리산입니다 섬진강은 또 천 년을 가도 섬진강이듯 나는 땅 낮은 섬진강입니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지리산이 제 살 속에 낸 길에 섬진강을 안고 흐르듯 나는 도련님 속에 흐르는 강입니다 섬진강이 깊어진 제 가슴에 지리산을 담아 거울처럼 비춰주듯 도련님은 내 안에 서있는 산입니다 땅이 땅이면서 하늘인 곳 하늘이 하늘이면서 땅인 자리에 엮어가는 꿈 그것이 사랑이라면 땅 낮은 섬진강 도련님과 하늘 높은 지리산 내가 엮는 꿈 너나들이 우리 사랑은 단 하루도 천 년입니다    
573    좋은 시는 그 구조가 역시 탄탄하다... 댓글:  조회:1951  추천:0  2017-07-24
좋은 시의 구조  좋은 시는 역시 그 구조가 탄탄하다. 독자와 만나는 첫행이 우선 독자를 끌어당길 수 있는 흡인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한 흡인력은 놀라움에서 발생된다. 놀라움이란 한마디로 말해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다. 독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그야말로 이럴 수가! 탄성이 나올 수 있는 첫머리라야 비로소 독자를 만날 수 있다.  상투적인 도입부, 뻔히 아는 사실, 개인적인 감상, 시덥잖은 현실 비판, 관념적인 푸념 따위로 시작되는 작품은 그 구조상 도입부를 이어받아 증폭시킬 수 없는 취약점을 처음부터 부담으로 갖게 된다.  좋은 도입부로 시작되면 그다음의 본문 내용도 순탄하게 확장이 되고 마무리를 자연스럽게 전환시켜 내용의 증폭을 이루게 된다. 이 경우는 하나의 작품이 곧 그 제작자인 시인의 개성과 맞물려 있으므로 별다른 요령이 있을 수 없다. 예시작품을 통해 한편 한편 직접 독자가 음미하기를 바란다.  잠실 1단지에서 혜화동까지  나를 태운 69번 버스는  아파트 숲을 돌고 돌아  자동차 숲을 달리고  버스 뒷칸에 앉은 나는  나의 집  나의 직장  나의 통장  나의 입맛  온통 나의 숲에 빠진다  밤나무와 참나무  엉겅퀴와 칡넝쿨이 엉켜 있는 숲  그 건너편에  박 철수씨 이 준태씨  최 영자씨 김 정숙씨가 모여 사는  우리 동네가  있고  숲은  있는 그대로 그렇게  밤나무는 여기 참나무는 저기  이웃하며 사는데  나무만 바라보는 나는  허구헌날 이삿짐을 부린다  당신을 외면한다  내 언제 숲을 볼수 있겠나  내 언제 숲이 될 수 있겠나  -신술래 '숲'  신술래의 시는 일상의 경험을 교묘하게 시에 녹여넣고 있다. 도입부부터 89번 버스노선을 삽입함으로써 자동차와 숲이라는 이질적인 단어가 한데 어우러진다. 그것은 실로 충격적인 결합인데도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조그만 놀라움으로 우리 앞에 다가선다. 또한 시의  중반에 자연스럽게 이웃들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사람들마저 밤나무나 참나무로 만들어 버리는 원숙한 기교를 보여주고 있다.  한밤에 쫓기듯 빨래를 하다가  내가 왜 이 한밤에 빨래를 하는가-  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쫓기듯이  말이 말장난을 하다가 말을 놓치고  말을 타고  줄행랑을 놓는다.  나는 사면에 벽을 쌓아  하늘을 지붕 삼은 말의 집에 갇혀.  벌떡 드러눕는다  빨래가 밀리면 초조하다.  말이 밀리면 불안하다.  부걱부걱 거품내며 빨래를 하면  말이 거품 속에 녹아  물과 사귀고  거품이 물에 녹아.  달아난다  한밤에 쫓기듯 빨래를 하다가  내가 왜 이 밤중에 빨래를 하는가-  라고 생각한다.  말의 때국물은 누구 차지인가-  말의 깨끗한 입성은 정말  누구 차지인가─  -전영주 '한밤에 쫓기듯 빨래를 하다가'  전영주의 시는 앞의 신술래처럼 '빨래'라는 일상사를 한밤에 하는 것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호기심을 유발한다. 그러나 시인의 자문자답은 '말'이라는 관념으로 슬그머니 넘어간다. 독자의 기대를 끝까지 배반함으로써 자신의 말을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나는 오른 팔에 청색 안료를 깊게 찔러 넣었다 바늘구멍에 물  감 칠한 실을 꿰어 살을 떠 나갔다 내가 삶이라고 떠 나가는 곳에  괴로움이 있었다 내가 삶이라고 떠 나가는 곳에 미움이 있었다 내  가 삶이라고 떠 나가는 곳에 몸부림이 있었다  그것은 길 위에 길을 밟고 떠나는 순례자의 십자가 문신이었다  십자가 속의 눈물이었다 수증기가 되어 사닥다리를 타고 끝없이 위  로 올라가고 싶은 소망이었다  그것은 푸른 들판을 질주하는 뿔 달린 손 저주의 문신이었다  붉은 혓바닥 날름거리는 뱀이었다 어둠이었다 무엇이든 내던지고  싶은 초특급 태풍 미어리얼 제19호였다  스키타이 황금전 전시회 벽에 나란히 체중이 실려 걸려 있다  4세기 오른쪽 팔 옆 20세기 나의 오른쪽 팔  가랑잎 소소히 밟고 찾아온 박물관에서  흐물흐물 흐물어진 내가 다시 태어나는 찰나  아그배 열매는 더욱 붉어졌다  -한리나 '문신'  한리나는 문신이라는 조금은 낯선 소재를 도입하고 있다. 그 동기는 역으로 마무리에 보여주는 스키타이 전시회이다. 그럼으로써 문신에 관한 그의 상상력에 대해 타당성과 설득력을 얻는다. 다만 두 번째 연의 십자가와 눈물의 대비가 약하다는 게 흠이다.  산 그늘에 숨어 살던 쑥부쟁이의 웃음소리  빙벽에 달라 붙어 있다  눈을 크게 뜬다  눈이 활짝 열린다  하반신이 썩어 시꺼멓게 흐르던 물줄기들  은빛으로 아름다이 갇혀 있다  상처 투성이의 위벽들도 비장하게 꿈틀댄다  (흰 빛은 모든 빛의 죄를 다 용서하는구나)  산비탈 저쪽에서 쫓겨온 바람들이  꽝꽝 꽝 못을 친다  못을 밟고 올라선다  새 숨소리 손끝에 묻어 난다.  물이면서 불, 불이면서 물인  이 우주의 먼지 사이로  빙벽에 달라붙는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미세한 가루가 된 내 물소리.  -하영 '빙벽 혹은 화엄'  하영의 빙벽은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운 시다. 하반신이 썩은 물줄기라는 섬뜩한 표현과 상처투성이의 위벽들을 대비시킴으로써 그의 영혼이 겪고 있는 고통을 극대화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흰 빛은 모든 빛의 죄를 용서하는구나'라는 잠언투를 활용함으로써 고통을 순명으로 바꾸는 화엄을 이루어내고 있다. 시예술이란 이래서 묘미가 있는 것이리라.  마음 하나 바꾸면 되는 일이다. 베보자기 펼쳐 놓고 약탕관 옆  에 놓고 다짐한다. 평생 허덕이는 몸살이는 네 탓도 아닌 일. 탕약  을 밤낮으로 달여 보아도 마음 스스로 졸이는 일.  내 지닌 것은 죄다 내어 주마. 그렇게 맛배기로 순하게 진국만  술술 빼어주면 될 일. 허전한 껍데기. 히나리같이 가벼운 찌끼를  아무 데나 뿌렸다. 고단히 썩어지면 될 일을 웬지 바둥댔다. 뭔지  버텼다. 부둥켜 안고 뒹굴었다.  (죄다 거두어 들이시지요. 흙의 색깔을 삭혀 새김질하시지요.  짙은 유록색 푸성귀의 마른 열매도, 익모초의 쓰디쓴 원뿌리 저 싱  싱함도 은행빛의 투명함 쌉쌀함도, 몹쓸 것 그 안에 죄다 우려져  보이는데요.  노여움의 빛 서러움의 빛깔을 진하게 거두고 저 깊은 속내 이  야기 아구리를 봉한 채 뜨거운 옹관 속 거뜬히 건너 가시지요.)  물기란 물기는 물에게 자리를 비워주는 일(베보자기를 뒤집어  썼다.) 잣대로 목 질끈 동여매었다. 목줄을 조였다. 비틀었다.  평생 얽히고 설킨 그물줄기를 갈가리 찢어 던졌다. 감탕을 쳤  다. 텁텁한 떫은 삶이라니 어둠의 진흙떼기 그 바닥을 한 입에 한  치씩 떼어내 꿀걱 받아 삼킨다.  -노혜봉 '더늠'  노혜봉은 '더늠'이라는 판소리 용어를 제목으로 차용함으로써 시의 오브제로 삼은 탕약이 실은 삶 그 자체임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는 시인의 의도대로 시를 읽을 수밖에 없는 자력에 끌리게 된다.  시의 제목이 충분한 효과를 거둔 예이기도 하다. 하나의 오브제가 갖고 있는 정보는 대단히 많다. 그 중에서 필요한 것만 골라 쓰는 노혜봉의 기교는 범상한 것이 아니다.  사랑니가 쑤셔올 땐 매운탕을 끓인다  찬바람에 제 살을 다독이며 꼼지락대는 가을게를 사다  얼큰하고 구수한 매운탕을 끓인다  날씨가 추워지면 사랑니는 아려오고  가을게는 살이 찌고  뼛속 깊이  관절 마디마디 샛바람소리 들리고  방풍막이를 못한 가슴에선 창틀이 흔들리고  닫아 걸고 잠그어도 걷잡을 수 없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는 흙바람 모래바람  흐린 하늘은 눈발을 준비하고  난  펄펄 끓는 뜨거운 국물로 뚫린 가슴을 달래고 채우고  덥혀준다  -이섬 '가을게 사랑니'  이섬의 시는 미소를 띄게 한다. 가을게로 끓이는 맛있는 매운탕도 시로 쓸 수 있다니...... 그리고 그것을 좋은 작품으로 매만져내다니 참으로 훌륭한 솜씨가 아닐 수 없다. 시란 것은 따지고 보면 따질수록 어렵고 우리와 전혀 무관한 괴물로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나 이섬의 이런 시를 읽다보면 그런 우리의 무섬증은 괜한 현학이 아닐까.  오늘도 봉은사 대웅전 뒤 몇 개의 계단을 오르면 주목숲 속 단  정히 앉은 북극보전北極寶殿, 저녁 예불을 드리고 백팔 참회로 찬  숨을 돌리며 나를 찬찬히 꺼내 보는 곳,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소  리를 즐겨 듣는 곳, 더러 치밀어 오르는 홧덩이를 슬그머니 꺼내놓  고 오는 곳, 오늘 이 곳에서 다른 날은 몰랐던 풍경 속에 매달린  물고기, 산 속에 있다는 생각도 버리고 공중에 매달려 있다는 생각  도 없이 그저 무심히 흔들릴 뿐 그 맑은 소리를 들으면 더더욱 날  수 없는 물고기 몸이라는 생각마저 없이 무심히 매달려 있다 유정  有情한 삶 속에 말 한마디 눈짓 하나에도 태산이 하나 왔다갔다하  는 내 가슴속을 생각했다 나를 버리지 못하는 그 나를 한동안 세워  놓고.  -안정환 '北極寶殿'  안정환은 절과 절 중에서도 북극보전이라는 특정한 장소를 제시함 으로써 기대감을 갖게 한 다음 절의 풍경에 매달려 있는 물고기를 오브제로 불러들임으로써 시의 효과를 높였다. 시에 소도구로 사용하는 오브제란 이렇듯 간단한 것이면서도 의미를 확대할 수 있는 것이 좋다. 시란 사실 시인의 관념이 아닌가. 그러나 그 원관념을 그대로 제시한다면 푸념으로 그칠 공산이 크다. 안정환은 불교적인 오브제를 갖다 씀으로써 자연스럽게 삶에 대한 그의 견해에 힘을 불어넣는다.  물이 되어 떠나자면  노래도 할 줄 알아야지  춤도 출 줄 알아야지  강이 되어 흐르자면  모래성 허물 줄도 알아야지  어지간한 자갈쯤 둥글릴 줄 알아야지  기슭에 잔뜩 자라 있는 잔가지 덩굴 밑둥 베어내고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길을 내며  바다에 닿아  칼을 버리는 빗줄기들  바다가 되어 지축을 떠받치자면  기암절벽, 무수한 섬을 품을 줄 알아야지  발이 푹푹 빠지는 땅끝 뻘밭에  철썩, 끊임없이 끓는 혀를 올릴 줄 알아야지  다가가 건드려 보면  한때의 모래성  하나의 섬으로 벗어 놓고  단단해져만 가는 긴 잠의 껍질 속을  빠져나가는 물방울 몇 개 보인다  -곽정례 '새우'  곽정례는 퍼스나를 숨겨놓은 채 새우를 오브제로 설정함으로써 새우와 관련된 분위기를 마음대로 갖다 쓸 수 있는 자유와 새우를 통해 하고 싶은 말, 새우에게 하려는 말이라는 이중적인 구조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따라서 세밀하게 보면 자칫 차질이 일어날 것같은 과장된 상상력이 오히려 작품을 흥겹게 읽을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먼 바다 파도 싱싱한 날  파도는 절지도 않아  간이 잘 밴 물고기들은 살이 단단해 물에 풀리지 않아  죽어도 썩지 않아  섬들의 뿌리는 소금기둥일까  어느 날 흩어져 섬들이 둥둥 떠다니지 않을까  물좋은 배추 한 접 칼집 꽂아  바다 한자락에 담그면  밤새 출렁이머 골고루 절여 짐.  바다가 들어박힌 배추김치는 어떤 맛일까  뭍으로 처음 올라온 생명체는 제 몸이 마르자  두 눈을 뜰 수 있었다.  짭짤한 눈물. 눈물주머니는 바다로 향한  마지막 그리움  -고옥주 '즐거운 상상'  고옥주의 시는 단아하면서도 그 깊이에 치열한 시정신을 갈무리하고 있다. 예컨대 '파도는 절지도 않아/간이 잘 밴 물고기들은 살이 단단해/물에 풀리지 않아'와 같은 시귀에서 보여주듯 사물의 정수를 한 눈에 꿰뚫어 보는 직관과 그것을 동시에 담담하게 연출해내는 능력이야말로 비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       강가 ―이용악(1914∼1971) 아들이 나오는 올 겨울엔 걸어서라도 청진으로 가리란다 높은 벽돌담 밑에 섰다가 세 해나 못 본 아들을 찾아오리란다 그 늙은인 암소 따라 조밭 저쪽에 사라지고 어느 길손이 밥 지은 자췬지 그슬린 돌 두어 개 시름겹다 시집 ‘오랑캐꽃’에는 이용악이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쓴 시들이 수록돼 있다. ‘강가’는 그중 하나다. 1939년이면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해이고,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해 전쟁이 태평양으로 확대된 때가 1941년 말. 그러니까 전쟁은 나라 밖에서 벌어졌지만 식민지에 대한 수탈이 극도로 치닫기 시작한 시기에 쓰인 시다. 노인은 암소한테 물을 먹이러 강가로 몰고 나왔을 테다. 그 김에 등짝이랑 뱃구레랑 엉덩이에 말라붙은 오물도 씻어주고 있었을 테다. 누가 먼저 말을 걸었는지, 어느새 노인은 초면의 화자에게 속에 담긴 말을 털어놓는다. (노인의 떳떳한 발설로 짐작건대)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 갔을 아들, 청진까지 갔다 올 차비를 마련하기 힘겨운 가난. 갈 때는 혼자 겨울 삭풍을 헤치고 걷겠지만, 아들과 함께 돌아올 때의 차비는 꽁꽁 여퉈 놓으셨으리라.     조밭은 어쩐지 논이나 밀밭보다 풍요롭지 않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암소도 비쩍 말랐을 것 같다. 시 전편에 쓸쓸한 가난과 시름겨운 유랑의 기운이 자욱하다. 어느 길손인가 이 적빈한 마을의 강가에서 돌 두어 개 모아 불 지피고 밥을 지어 먹고 지나갔구나. 노인도 청진 가는 길에 어느 길섶에서 밥을 지어 드시게 될 테다. 화자도 정처 없이 떠도는 중이었을 테다. 그런데 시 속의 ‘그 늙은이’는 어머니일까, 아버지일까? 어머니일 것 같다. 이 늙은이의 결기는 간절한 모성이다.  
572    아카시아야, 나와 놀쟈... 댓글:  조회:2262  추천:0  2017-07-24
                  ♥ 아카시아꽃 / 이해인             향기로 숲을 덮으며 흰 노래를 날리는 아카시아꽃 가시 돋친 가슴으로 몸살을 하면서도 꽃잎과 잎새는 그토록 부드럽게 피워 냈구나 내가 철이 없어 너무 많이 엎질러 놓은 젊은날의 그리움이 일제히 숲으로 들어가 꽃이 된 것만 같은 아카시아꽃 ===============================================================================   ♥ 아카시아 / 김사인   먼 별에서 향기는 오나 그 별에서 두 마리 순한 짐승으로 우리 뒹굴던 날이 있기는 했나 나는 기억 안 나네 아카시아   허기진 이마여 정맥이 파르랗던 손등 두고 온 고향의 막내누이여 =============================================================================== ♥ 아까시 꽃  우리 아버지 할매  봄양식 떨어지면  하얀 사기 밥그릇에  하얀 쌀밥처럼  수북수북 담아  밥 대신 먹었다던  하얀 아까시 꽃  올해도 잊지 않고  하얗게  하얗게 피었습니다.  (권오삼·아동문학가, 1943-) =============================================================================== ♥ 아카시아 꽃  때묻은 동정처럼  겉으론 추레해도  바람에 밀려오는  향기가 그윽하다.  나비도 하얀 나비만  꽃을 알고 사귄다.  (김시종·시인, 1942-) =============================================================================== ♥ 아카시아 꽃 / 송엽 박 기선 푸른 나무숲 속 송알송알 피어난 백옥의 향 가득 하구나 따스한 햇볕 품어 앉고 살랑이는 미풍에도 아름다운 꽃이여 벌 나비 날고 산새들도 노래하는 초원의 펼쳐진 꿈이여. =============================================================================== ♥ 아카시아 꽃 필때/김사랑  초록의 보릿대공 흔들리는 밀밭근처 하얀 아카시아가 필 때면 순이가 생각납니다 그 꽃잎만큼 향그럽고 그 꽃잎만큼 상큼하고 그 꽃잎만큼 순결하던 그녀가 오늘따라 생각납니다 아카시아잎을 따서 가위바위보 하면서 좋아한다 싫어한다 꽃점치면서 마음 한자락 주었습니다 올 해도 아카시아 꽃은 피는데 아직도 그 마음을 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언제쯤 그 마음을 돌려 줄까요 영영 돌려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녀가 사는 곳을 알지 못하고 바람에 거처를 물어봐도 세상 어디인지 모른다네요 아카시아꽃만 환하게 피었습니다  =============================================================================== ♥ 아카시아를 위한 노래  가자. 이젠 기다림도 소용없어  만개한 오월이 너를 끌고  더 길어질 그림자 속으로 들어갈 걸  쪼로록 쌍으로 줄지어 펴진 잎새 사이  총총히 하얀 꽃 숭어리 흐드러져도  떠날 사람 다 떠난 텅 빈 시골길  네 향기 분분한들 누가 알까  가자. 눈먼 그리움도 소용없어  우거진 초록이 너를 안고  더 슬퍼질 추억 속으로 들어갈 걸  잉잉대는 꿀벌 날갯짓 바쁜 꽃잎 사이  까르르 웃어대는 하얀 향기 흐드러져도  잊을 건 다 잊은 텅 빈 산길에  네 마음 젖었다고 누가 알까  (목필균·시인) =============================================================================== ♥ 아카시아꽃  쑥죽 먹고 짜는  남의 집 삯베의  울어머니 어질머리.  토담집 골방의  숯불 화로 어질머리.  수저로 건져도 건져도 쌀알은 없어  뻐꾸기 울음소리 핑그르르 빠지던  때깔만은 고운 사기대접에  퍼어런 쑤죽물.  꽃이라도 벼랑에  근심으로 허리 휘는  하이얀 아카시아꽃 피었네.  (나태주·시인, 1945-) =============================================================================== ♥ 아카시아꽃  앞산의 뿌연 꽃  5월의 아카시아는  솔숲에 엉기어  안개처럼 피어난다  뒷산의 뿌연 꽃  5월의 아카시아는  찔레에 엉기어  구름처럼 피어난다  아카시아 꽃으로  메워진 골짜기마다  벌과 나비들이  잔치를 벌인다  (김동리·소설가, 1913-1995) ♥ 문학사상 1998년 7월호에 공개된 미발표 유작시  =============================================================================== ♥ 아카시아 향기에 취해  싱그러운 오월 아침  스치는 아카시아 향  수줍은 그리움 피어올라  아련한 추억 여행 떠난다  꽃잎 훑어 입 안 가득  달콤한 꽃향기에  함박웃음 지었던  학창시절 등굣길  과수원 길 따라  하얗게 피어 있던  어릴 적 아카시아꽃  상큼하고 아름다운  순백의 오월 천사  해맑던 그 시절  순박한 고향 그리워  설익은 꽃 향에 취해  가슴 깊이 묻혔던  옛 추억을 펼쳐 본다  (유명숙·시인, 1960-) =============================================================================== ♥ 아카시아 꽃 필 때 이제는 다시 못 올 꿈같은 기억의  낯익은 향기에  가슴 두근거리며 고개를 드니  아카시아 꽃이 가까이 피었습니다  하얀 꽃 엮어서 머리에도 쓰고  향기가 몸에 베일만큼  눈 지그시 감고 냄새를 맡던  얼굴 하얗던 사람  봄 햇볕이 따스한데도  그대를 생각하면  왜  눈물부터 날까요  호호 입으로 불고 옷에다 닦아서  당신을 가득 묻혀 내게 준 만년필은  몇 번 이사하면서 잃어버리고  아픈 가슴만 망울졌습니다  이젠 당신의 얼굴을 그리려해도  짓궂은 세월이  기억하는 얼굴을 흩으면서  아내와 비슷한 얼굴로 만듭니다  올해도 아카시아 꽃이 피었습니다  당신에게서 풍기던 향기가  올해도 나를 꿈의 기억으로 보냅니다  혼자서 하얀 꽃을 보면서 말입니다  (오광수·시인, 1953-) =============================================================================== ♥ 아카시아꽃·1  유월에도  함박눈 내리는가.  까마득히 푸른 가지 끝까지  하얗게 쌓이는 구름 빛 축복.  달빛처럼 교교히 퍼지는 향기는  내 어린 시절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던  어머님 품 같은 고향 내음.  꽃눈이 온다.  겨울 봄 다 보내고,  유월의 상흔 덮으려  하얀 아카시아 꽃  봄비 따라 내려 쌓인다.  (최제형·시인, 1954-)  =============================================================================== ♥ 아카시아 꽃  5월은 계절의 여왕  신록의 화려한 옷을 입었다  창밖엔  온통 은은한 우윳빛  아카시아 꽃이 손짓한다  눈 내린 듯 하얗게  줄기 따라 피는 꽃이 아름답다  앉아서 바라만 보기엔  가슴이 뛴다 설렌다  가자!  손잡고 함께 가보자  따뜻한 가슴을 열고  시골 아낙네의 웃음 같은 꽃  시샘 없이 다투어 피고  향기도 더할 나위 없는데  앞산 소쩍새는  왜 저리 울어대는가.  (김용진·시인, 1939-) =============================================================================== ♥ 아카시아 꽃그늘에 앉아 아카시아 흐드러진 꽃그늘에 앉아 너를 생각한다. 맘 하나 툭툭 터트려 열어버리면 이토록 향기롭지 않느냐 오월 아카시아 가지마다 벌떼가 날아드는 건 아카시아 꽃 입술마다 농익은 맘의 단물을 머금고 사랑의 언어를 속삭이는데 얼마나한 서로의 행복이겠는가. 맘의 빗장은 애초부터 쓸모가 없음이야 참 인생은 맘의 문부터 활짝 열어놓고. 맘 하나 툭툭 터트려 열어버리면 이토록 향기롭지 않느냐 (허영미·시인, 1965-) =============================================================================== ♥ 아카시아 꽃  겉은 하얗게 여위었으나  향기는 터진  코피 빛깔이다.  알레르기 비염환자는  가까이 할 일이 아닌 것이  재치기가 도질 것이다.  법당 창이 훤히 열리고  향촛대에 아카시아 향이  가득하다.  부처님의 재치기를  큰스님은  듣지 못했다.  (진의하·시인, 전북 남원 출생) =============================================================================== ♥ 아카시아 나무에게  사실 나는 상상도 못했어  앙상한 가지에 마른 가시를 볼썽사납게 달고 있던 너에게서  이토록 달콤하고 부드럽고 향기 가득한 꽃이 피리라고는  정말 미안하구나 아카시아 나무야  어린 시절 주린 배를 채워 준 것도 너였고  나의 예쁜 첫사랑 계집애한테 선물을 만들어 준 것도 너였는데  정말 미안하구나 아카시아 나무야, 그만 까맣게 잊고 있었어  너는 아직도 산골에 남아 네 몸을 태워 가난한 이들의 추운 방을 데우는구나  너는 너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쳐 꿀벌을 기르고 정말 향기로운 꿀을 만드는구나  지난겨울의 가난과 고난은 너의 가시와 함께 꽃이 되고 꿀이 되는구나  네 몸의 가시는 너의 소중한 무엇을 지키기 위한 뜨거움이었구나  나무야, 나무야, 아카시아 나무야  이제서야 내 몸에도 가시가 돋는 이유를 알 것 같구나  나무야, 나무야, 5월의 아카시아 나무야  맨살로 다가가 피가 나도록 그 가시에 찔리고 싶은  (김시천·시인, 1956-)  =============================================================================== ♥ 5월의 아카시아 향기 / 신경희 아카시아 꽃잎에서  박하향기가 납니다. 새초롬이 흩어지는 꽃잎속에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소리  바람소리 적적한데 적자색 나무가지의 수양버들 휘청휘청 누구를 위한 몸짓인가.   저녁노을 숨쉬는 언덕위에 발길 닿는 데로 이방인처럼 다녀간 민들레 당신의 흔적이 뿌리 깊습니다. 아카시아 향기  파르르 흔들리는 나무 그늘 아래서  마음 고단한 나는 지금, 당신을 생각합니다. =============================================================================== ♥ 아카시아 피는 언덕 / 임숙현       물빛 고운 가슴  하얀 그리움 이루고 햇살의 온화함으로  주렁주렁 매달았습니다 꽃비되어 사라진 가지마다 연둣빛 푸른 옷 갈아입어 예쁜 사랑 그리며  행복을 묶어놓으니 기다림은 향기롭게 퍼져 순백의 맑은 사랑을 줍니다 아름다운 가슴을 걷기 위한  사랑은 늘 햇살이 되어 웃음 주고 아카시아 피는 언덕엔 바람 따라 찾아드는 당신의 향기 있어. 그리움 펼쳐 사랑 부르고 초록 물결 출렁이는 가슴 당신과 걷고 싶습니다 ===============================================================================   ♥ 아카시아 꽃 / 이재옥  산기슭 솔바람에  속삭이듯 일렁이는  아카시아 꽃송이의  탐스러운 향연  바람에 안긴 그 모습  구름에 실려 내리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인가  바람 속에 담아 보낸  그윽한 향기  은밀히 풍기는  첫사랑의 달콤한 향 같구나. ===============================================================================   ♥ 아카시아 꽃 그늘에 앉아 / 허미영 아카시아 흐트러진 꽃 그늘에 앉아 너를 생각한다 맘 하나 툭 툭 터트려 열어버라면 이토록 향기롭지 않느냐 오월 아카시아 가지마다 벌떼가 날아드는 건 아카시아 꽃 입술마다 농익은 맘의 단물을 머금고 사랑의 언어를 속삭이는데 얼마나 서로의 행복이겟는가    맘의 빗장은 애초부터 쓸모가 없음이야 참 인생은 맘의 문부터 활짝 열어놓고 맘 하나 툭 툭 터트려 열어버리면 이토록 향기롭지 않느냐 ===============================================================================   ♥ 아카시아 길 / 서정윤 슬픔이 있는  너의 모습이 좋아라  눈물 흐르는  너희 향기가 아파라  호젓한 아카시아 길  홀로 걸으며  주렁주렁 늘어진  나의 슬픔들  온 산을 덮으며 타오르는데  잠시 바람에도 흐느끼는 향기  내 마음 그 어디를 찾아 흐르나  슬픔이 있는  너의 모습이 좋아라  눈물 감추는  너의 향기가 아파라                                                          
571    시를 쓰는것은 하나의 고행적인 수행이다... 댓글:  조회:2112  추천:0  2017-07-24
  단계적인 시 창작 훈련  이형기님의 '당신도 시를 쓸 수 있다.' 참고  우선 나무를 바라보는 시각을 9단계로 나누어 적어보자.  1. 나무를 그냥 나무로 본다.  2. 나무의 종류와 모양을 본다.  3.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다.  4. 나무의 잎사귀들이 움직이는 모양을 세밀하게 살펴본다.  5. 나무 속에 승화되어 있는 생명력을 본다.  6. 나무의 모양과 생명력이 상관관계를 본다.  7. 나무의 생명력이 뜻하는 그 의미와 사상을 읽어본다.  8. 나무를 통해 나무 그늘에 쉬고간 사람들을 본다.  9. 나무를 매개로 하여 나무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  이것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실제 나무에 관한 시를 써보자.  1단계에서 4단계까지는 나무의 외형을 관찰하는 단계이다.  나무는  미세한 바람의 요구에도  잎새를 흔들어  고이 간직한  금빛 비늘을 나누어준다.  ※나무의 아름다운 모습을 형상화하여 표현함.  5단계에서 7단계까지는 나무의 내면을 바라보는 단계이다.  겨울 바람은 눈비를 몰고 와  소나무의 옷자락을  거머쥐고 거칠게 흔들어 보지만  푸른 눈매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고  눈 들어 겨우내 하늘만 쳐다본다  ※소나무의 지조를 형상화하여 표현함.  8단계에서 9단계까지는 나무를 매개로 해서 다른 세계를 보는 단계이다. 가장 고차원적인 단계로서 상상력이 가장 풍부한 사람이 쓸 수 있는 경지이다.  겨울 나무  품팔이하는  엄마의 늦은 귀가,  오누이는 밤새  산짐승 소리를 들으며,  문풍지 찢어진 틈새에서 우는  낮선 바람 소리 들으며  자정이 넘어서까지  오돌오돌 떨고 있다  눈 내리고 세찬 바람 부는  두메 산골  오막살이에서  ※ 세찬 눈보라에 밤새 떨고 있는 겨울 나무를 형상화함.  우리는 시를 쓸 때 사물의 외형적인 단계에서 끝맺지 말고, 내면적인 단계, 나아가서는 그 사물을 통해 다른 세계까지 볼 수 있는 단계로 나가야 한다. 이것은 상상력에 있어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시를 쓰는 노력을 성실히 수행 하여 풍부한 상상력을 자아내고 그 산물로 훌륭한 한 편의 시를 창작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야 한다.  ※ 단계를 구분하여 적은 시는 순수한 개인 창작물로 예를 든 것이다.  -------------------------------------------------------------     은혼 ―김명인(1946∼) 바닥의 무료까지 지치도록 퍼낼 생(生) 거기 있다는 듯 모든 풍경들 제 색깔을 마저 써버리면 누런 햇빛 알갱이들 강을 싸안고 흩어지는 것 같아 물소리 죄다 흘러 보내더라도 더는 못 가게 마음 방죽 쌓아 너를 가둔다 잎들을 얽으려 할 때 햇살들이 마구 엉겨 붙어서 초록 기억으로 흠뻑 젖었던 적은 없느냐? 그때에도 사나운 이목, 다리 아래 격랑보다 더 두려웠다 나는 무슨 워낭으로도 네 베틀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어서 갈바람 낙엽 행낭에 담아 세월이라 부친다 받아 보거든 은하 물살 거세었음을 알리라 머리 위로 깃털 빠진 까막까치들 날아간다 길 아닌 길도 땅 위의 것이라고 이제 내가 겨우 깨쳐서 놓고 있는 징검다리, 저문 혼례 그 언저리나 맴도는 이 가을날 꿈같이, 빛같이 ‘견우와 직녀’는 견우성과 직녀성, 두 별에 얽힌 이야기다. 근면한 목동 견우와 베 짜는 처녀 직녀가 결혼을 했는데, 알뜰살뜰 살림을 일구지 않고 사랑에 빠져 일을 작파하자 하늘의 왕이 그 둘을 은하의 동서 양끝으로 갈라놓았다고 한다.  둘의 슬픔을 보다 못한 까치와 까마귀가 1년에 한 번 하늘로 날아올라 가 은하수에 다리를 놓아줘서 만나게 해준다는 날이 칠월 칠석이다. 그 하루를 제외한 1년 내내 상대를 그리며 살아가는 은하의 사랑! 직장에 매여 서로 다른 나라에 살면서 휴가철에나 만나는 글로벌 연인들이 떠오른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꼭 맞지는 않나 보다. 화자는 견우고 그의 반려자는 직녀다. 날마다 만나도 1년에 한 번 만나는 직녀처럼 당신이 그립고 애틋하단다. 이 사랑의 스케일! 은혼(銀婚)이 돼도 식을 줄 모르는 부부애다.      젊었을 때는 꽃이련만 이제 낙엽을 바치옵니다, 내 저문 혼례의 반려자여. 이 시는 은혼이 된 부부들의 애송시가 될 만하다. 결혼한 지 25년 된 것이 은혼이다. 25년이 지나도 날마다 애틋하다니, 사랑은 호르몬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일설을 뒤엎는다. 갈바람 치는 세월을 함께 헤쳐 온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이 시를 읽으며 눈시울 뜨거워질 부부도 있으리. 이혼율 높은 이 시대에 이렇게 긍정적인 감정의 시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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