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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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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    화가 - 한락연 동상 댓글:  조회:2284  추천:0  2015-03-18
  2011년 7월 30일,한락연선생 타계 64주기를 맞으며 룡정시 락연공원에서 동상제막식이 있었다. [출처] 중국 조선족의 걸출한 정치활동가 한락연|작성자 중국시사
699    김학철, 김사량 문학비 댓글:  조회:5083  추천:0  2015-03-18
태항산조선민족영령들  호가장의 김학철 김사량 문학비 기자: [ 김청수 ] [ 길림신문 ][ 2012-10-07 19:21:51  ●중한수교 20돐 특별기획 지난세기 반세기에 걸친 세계반파쑈전쟁에서 우리 조선민족 애국지사들은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 세계평화를 위해 진리의 기발을 높이 추켜들고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중국인민들과 어깨겯고 일본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정책에 맞서 싸워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였다. 중한 수교 20돐을 맞으며 당년 조선민족영웅들의 용감무쌍한 투쟁정신과 애국주의, 국제주의 정신을 기리고 중한 두 나라가 일제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고 민족애를 실현하고저 하나가 되여 함께 싸웠던 우정의 과거력사를 되새겨보고저 지난 6월말 북경대학교 중한대학원생 항일유적지력사탐방팀은 태항산항일전적지를 답사했다. 그들과 함께 동행한 필자는 《태항산에서의 조선민족영령》들의 위훈과 위용을 가슴 뜨겁게 느꼈다. 유적지답사 경로에 따라 《호가장의 김학철 김사량 문학비》, 호가장전투에서 순국한 《4명 렬사, 그들은 누구인가》, 팔로군부총참모장 좌권장군과 조선의용대 지도자 윤세주, 진광화 동지의 사적을 쓴 《혈전의 십자령과 석문촌 〈조선의용군기념관〉》, 태항산의 생활정경과 녀성대오를 소개한 《〈미나리타령〉과 부녀대장 리화림》, 조선의용군 최고지도자들의 역할을 적은 《태항산에서의 무정장군과 정률성》 등 몇기로 나누어 중국공산당의 령도아래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팔로군과 배합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조선의용군》의 영웅사적을 중점적으로 소개한다. 한편 이번 취재에 도움을 준 북경대학교 제5대 한국류학생연구생회와 윤세주렬사기념사업회에 감사를 드린다. 1. 호가장의 김학철 김사량 문학비 지난 6월 29일, 북경대학 중한대학원생 태항산항일유적지 력사탐방일행은 북경으로부터 석가장 원씨현 흑수하향 호가장으로 향발하였다. 중한수교 2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한해를 맞이하면서 중한 두 나라가 일제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고 민족애를 실현하고저 하나가 되여 함께 싸웠던 우정의 과거력사 현장으로, 새세대 젊은이들은 손을 맞잡고 그 력사적 진실을 향해 탐방을 떠난것이다. 탐방일행을 실은 뻐스가 4시간정도 달려 하북성 석가장에 당도하자 이번 력사탐방 해설을 담당할 조선의용군기념관 관장인 상영생선생(한족)과 일행 왕춘향(한족)씨가 함께 차에 올라 동행하였다. 상영생관장은 석가장정치협상회 상무위원으로서 다년간 태항산일대 항일력사와 유적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왔다. 중한수교후 태항산항일유적지를 찾는 한국인들이 늘어나면서 다시금 태항산항일투쟁사에서 마멸할수 없는 공헌을 한 조선의용군에 대한 연구에 살손붙이기 시작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하북성섭현 태항산기슭의 련화산자락에 세워진 조선의용군기념관운영을 담당하면서 조선의용군의 태항산에서의 항일투쟁력사에 대하여 심입되는 연구를 보다 폭넓게 진행하고있었다.왕춘향 역시 조선의용군의 태항산에서의 항일투쟁사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많은 관련 지식들을 학습하면서 헌신적으로 해설사업에 나서고있었다. 그녀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 성장한 화교로서 우리말 해설에 아주 능통한 해설원이였다. 그들의 안내로 뻐스는 곧장 조선의용군이 일본제국주의자들과 맞대결을 펼쳤다는 호가장전적지를 향해 줄달음쳐갔다. 상영생관장은 달리는 차안에서 조선의용군에 대한 설명을 낱낱이 들려주었다. 20세기초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로 조선의 무수한 애국지사와 열혈청년들은 나라를 찾기 위해 중국땅에 망명하여 구국, 애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 7월 7일 로구교사변이 일어나면서 중국의 전면적인 항전의 서막이 열리고 중국내 국공합작이 이루어지자 조선혁명가들을 비롯한 아시아 약소국 혁명가들은 중국의 항일전쟁은 곧 전 아시아 여러 약소국들이 독립의 길로 나아가는 전쟁이라 간주하면서 서로 단합하여 중국항일전쟁을 도와야 한다고 인식을 통일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무한에서 김원봉을 대장으로 하는 조선인무장력량인 조선의용대가 창립되였다. 조선의용대가 건립되는 날 무한팔로군판사처 책임자이며 국민혁명군 정치부 부부장이던 주은래동지가《동방 각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분투하자》는 정치보고를 하였고 국민혁명군 정치부 제3청 청장인 곽말약동지가 축하시를 랑송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적후항일전장에서 활동하는 첫 국제종대로 되였던것이다. 그러나 1940년 국공합작이 파탄되고 국민당의 소극항일과 적극반공이 창궐해지고 부패무능이 드러나 국민당에 환멸을 느낀 조선의용대본부는 중경판사처 책임자인 주은래와 비밀리에 상의하고 남경, 중경, 계림에서 국민당통치구역의 봉쇄선을 뚫고 항일민주근거지인 팔로군해방구로 북상하게 된다. 1941년 7월까지 모진 어려움과 간난신고를 거쳐 마침내 태항산근거지에 집결한 조선의용대는 팔로군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당지 주민들과 하나로 어울리며 가족같이 애대를 받았다. 그들은 경상적으로 각종 업종의 인사들로 사복하고 적구에 들어가 비밀리에 조선혁명단체를 조직하고 대량의 조선인들을 근거지에 와 학습하고 사업하도록 인도하였으며 적구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팔로군을 유력하게 지원하였다. 그들은 또 적후선전공작을 펼쳐나가기 위해 무장선전대를 조직하였다. 무장선전대는 낮에는 주로 준비를 하고 밤이면 적의 점령구로 들어가 군중선전과 적군와해사업을 벌렸다. 마을에 들어서면 무장선전대의 성원들은 분공에 따라 한쪽에서는 군중집회를 열고 반제선전연설도 하고 노래도 배워주고《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단결하여 일본침략자를 물리치자》는 구호들을 바람벽에 쓰고 또 한쪽에서는 적의 또치카 가까이에 다가가 메가폰으로 적군와해선전을 벌렸던것이다. 당시 호가장은 적구와 《접경》하고있는 태항산항일근거지의 최전선이였다. 무장선전을 나온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분대 29명 대원들은 호가장마을에서 일제놈들의 포위공격에 맞서 치렬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4명이 희생되고 2명이 행방불명이 되였으며 그들을 엄호하러 온 당지 팔로군전사 12명이 전사하였다고 한다. 우리 력사탐방일행은 드디여 목적지인 호가장전적지에 당도하였다. 창밖에서는 안개비가 내리고있었다. 대통로길 바른편 바로옆쪽에 김학철, 김사량 문학비가 비속에 호젓이 서있었다. 당시 행방불명이 된 2명중 한명인 김학철선생은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적에게 포로되여 일본 나가사끼형무소에까지 끌려가 고된 고문과 혹형을 받았다. 그는 전향서를 쓰면 다리치료를 받을수 있다는 유혹도 물리치고 다리에서 구데기를 집어내고 나중에 다리를 절단해버리면서도 끝끝내 전향서를 쓰지 않았고 1945년 8.15해방을 맞아 드디여 감옥에서 풀려나왔던것이다. 그후 문화대혁명기간 정치몽둥이에 맞아 또 10년 지옥살이를 하면서 그는 총대신 필을 무기로 잡고 조선의용군에 관한 《격정시대》《항전별곡》《최후의 분대장》등 저서를 집필하여 《우리 력사에서 영원한 사각지대로 남겨질번했던 조선의용군의 항일독립운동력사를 기록》해내였으며 《20세기 신화》와 같은 날카로운 사실주의작품을 써내여 사회불의에 저항하였던것이다. 그는 생전에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는 작가다운 명언을 남겨 후세에 전해가고있다. 그의 문학비 뒤면에는 《밤 소나기 퍼붓는 령마루에서 래일 솟을 태양을 우리는 본다》는 비문이 씌여있었다. 그 비문을 읽으며 우리는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의 위용을 가슴 벅차게 느껴보았다. 거기에는 또다른 문학비 《김사량항일문학비》가 나란히 서있었다. 그앞으로 서서히 다가가 어딘가 서먹한 이름, 《우리 력사에서 잊혀진 이름》에 보다 주의를 돌려 살펴보았다. 문학비뒤면에는 또 이런 비문이 새겨져있었다. 《이십구 용사가 서로 엄호해가며 내달려 올라가 진지를 잡았다는 호가산은 말이 없고 이끼 앉은 바위위에는 락엽만 쌓여있다…》김사량의 《노라만리》에 적혀있는 한단락의 글귀란다. 김사량, 그는 누구인가? 김사량은 워낙 《엄혹했던 시기 몸으로 부딪쳐 직접 일제와 맞선 대표적인 저항작가》로서 그의 항일문학은 오늘날 여전히 학술계의 연구대상으로 되여있었다. 그는 조선 평양에서 초중까지 졸업한 화교로서 1930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호응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36년 동경제국대학독문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1939년 10월 소설 《빛속으로》라는 작품으로 일본최고권위의 문학상 후보에 오른 유망한 작가였지만 1945년 2월 《조선출신 학도병위문단》으로 중국에 파견되여왔다가 북경에서 태항산항일근거지, 조선의용군주둔지로 망명했다. 그 망명과정을 소설로 쓴 작품이 《노마만리》란다. 그는 이 작품에서 태항산근거지에서의 항일활동을 핍진하게 그려내였으며 그는 태항산근거지에서 조선의용군에 참가한다. 그후 그는 6.25조선전장에서 희생되였다. 김학철, 김사량 항일문학비 사이에는 또다른 홍황색의 돌기념비 하나 드팀없이 자리잡고있었다. 그 비문은 다음과 같았다. 《일본군의 기습 포위 공격 / 어둑한 골짜기, 자욱한 총소리/ 그날, 조선의용군 네 전사 / 그들을 구원하려던 팔로군 열두 청년 /이곳에서 전사하였거니/ 이 보리밭 머리에 / 태항산의 돌을 깎아 비를 세우노라 》 중국하북성원씨현인민정부, 중국연변작가협회, 한국실천문학사가 2005년 8월 5일 이 호가장전적지에 세운 기념비였다. 이 기념비뒤로 안개속에 묻힌 호가장마을이 어렴풋이 보였다. 우리 탐방일행은 김학철, 김사량 항일문학비에 생화를 올리고 렬사들을 추모하였다.  
698    김학철 문학비 (도문 장안 룡가미원) 댓글:  조회:4427  추천:0  2015-03-18
             
697    조룡남 시비 댓글:  조회:4415  추천:0  2015-03-18
  연변대학 사범분원 교정에 세워진 “반디불” 동요비   [출처] 저 명멸     연변대학 사범분원 교정에 세워진 “반디불” 동요비   [출처] 저 명멸하는 반디불의 빛처럼|작성자 김 혁   하는 반디불의 빛처럼|작성자 김 혁  
696    최문섭 시비 댓글:  조회:4014  추천:0  2015-03-18
     
695    김례삼 시비 댓글:  조회:4307  추천:0  2015-03-18
                 
694    채택룡 시비 댓글:  조회:3905  추천:0  2015-03-18
                   
693    윤정석 시비 댓글:  조회:4557  추천:0  2015-03-18
           (연길공원 내에서)          
692    동시인 - 강려 댓글:  조회:4023  추천:0  2015-03-18
      강려동시집《또르르 뱅뱅》출간기념모임    2013/09/14 07:29            강려동시집《또르르 뱅뱅》출간기념모임이 지난 9월 13일에 열렸다.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연변작가협회 아동문학창작위원회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이번 모임에 주내 아동문학작가 30여명이 참석했다. 강려는 뇌성마비로  하여 인생의 갈림길에서 방황한적도 있었지만 용케도 역경을 뚫고나와 아동문학의 길에서 자기만의 색갈을 갖춘 동시인으로 성장했다. 이날 출간모임에 참가한 평론가,  아동문학작가들은  떳떳하게 장애와  싸워 이긴 강려의  견강한 삶의 자세를 높이 평가하면서 강려의 동시는 언어가 소박하고 형상이 생동하며 시적인 구성이 간결하면서도 예술적인 특점을 보인다고 입을 모았다.    
691    정판룡 문학비 댓글:  조회:4410  추천:0  2015-03-18
    [출처] 정판룡 문학비 앞에서 |작성자 김 혁         ▲ 연변대학 뒷동산의 정판룡문학비
690    연변 문학비 순례 댓글:  조회:4077  추천:0  2015-03-18
문학비 순례코스는 연변대학 서북쪽 언덕에 정히 모셔진 정판룡 문학비, 연길공원의 동시동네에 세워진 채택룡 시비, 윤정석 시비, 김례삼 시비, 윤동주 시비, 최문섭 시비, 연변사범학원내에 세워진 조룡남시인의 시비, 도문시 장안진 룡가비원에 세워진 김학철 문학비, 한락연 화가비, 도문시 두만강공원에 세워진 정몽호 시비, 김파 시비, 룡정시룡정중학 교정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 룡정 실험소학교에 세워진 심련수 시비, 룡정고급중학 교정에 세워진 김성휘 시비, 룡정시 지신진에 세워진 김창걸 문학비, 룡정시 비암산에 세워진 강경애 문학비, 리태수, 조룡남 시비, 화룡시 선경대풍경구에 세워진 김문회, 현규동, 최룡관, 리근영 시비, 화룡시 로과에 세워진 리욱 시비, 화룡시 서성진 진달래민속촌 내에 세워진 류연산 문학비 ...  연변지역에 이미 세워진 문학비들,ㅡ \\\\\\\\\\\\\\\\\\\\\\\\\\\\\\\\\\\\\\\\\\\\\\\\\\\\\\\\\\\\\\\\\\\\\\\\\\\\\\\\\\\\\\\\\\   중국조선족 문화력사유적비 리스트     리욱시비/ 화룡 로과촌 현규동, 김문회, 최룡관, 리근영 시비/ 화룡 선경대유람구 내 김성휘시비/ 룡정고중 한락연동상/ 룡정 락연공원 강경애문학비/ 룡정 일송정 김창걸문학비/ 룡정 주덕해옛집/ 룡정 윤동주시비/ 룡정중학교 리상설기념비/ 룡정중학교 심련수시비/ 룡정 실험소학교 3.13추모비/ 룡정 서전서숙기념비/ 룡정 실험소학교 김학철문학비/ 도문 룡가촌 정판룡추모비/ 연변대학 뒤산 림민호동상/ 연변대학 교정 주덕해동상/ 연길 박물관 정몽호시비/ 도문광장 김파시비/ 도문광장 “첫수확”노래비/ 왕청중학교 “반디불”노래비/ 연변사범학교 연길감옥터기념비/ 연길예술극장 청산리대첩기념비/ 화룡 백리촌 봉오동전투기념비/ 도문 봉오동 소왕청항일유적비/ 왕청 마촌 김약연기념비/ 룡정 명동촌 “룡호”글자비/ 훈춘 “은사감사비”/ 연길 민주촌 “자치주창립의 노래”비/ 연길 진달래광장 김례삼, 채택룡, 윤동주, 윤정석, 최문섭 등 동시비/ 연길공원  
689    리태수 시비, 조룡남 시비 (룡정 일송정 내) 댓글:  조회:4657  추천:0  2015-03-17
      리태수시인의 시 한수  조룡남시인의 시        [출처] 일송정에서|작성자 설매  
688    선구자의 노래은? 댓글:  조회:4211  추천:0  2015-03-17
    선구자(윤해영 시 / 조두남 작곡)|    작곡자 조두남 선생은 1912년 평양에서 개화사상에 젖은 갑부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미국 콜럼비아대학을 나온 부친은 안창호 선생의 독립운동을 돕다가 투옥되어 그가 18세때 세상을 떠났다. 부친을 여의고 의욕을 잃은 조두남은 21세때 만주로 유랑을 떠났다. 조두남의 회고록「나의 넋두리 나의 세월의 앙금」에 의하면 만주를 방랑하던 1933년, 목단강 주변의 여인숙에 불쑥 찾아와 윤해영이라고 이름을 밝힌 젊은이가꼬깃꼬깃한 종이에 쓰인 '용정의 노래' 라고 쓰인 가사를 내밀었다.   초췌하지만 형형한 눈빛이 독립운동가임을 알 수 있게 했던 청년은 『달포 뒤 찾아와 노래를 배우겠다』며 황망히 떠났으나 그 뒤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조두남은 이 청년에게서 발견한 독립투사의 기상을 기리는 뜻에서 해방후「선구자」라고 제목을 고쳐 붙였다.    1987년 8월 16일 광복절날 특집으로 KBS라디오는 독립운동가 김동삼 일대기를 방송했는데 그가 가곡 '선구자'의 주인공이라고 소개했다.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나라사랑의 충정이 구구절절 베어있는 이곡은 듣는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이곡은 민족의 노래로 애창되는 웅장하고 씩씩한 곡이다.    노래의 유래가 그러하듯 「선구자」가사는 그대로 용정의 모습이다.윤동주의 고향 명동촌을 떠나30Km 가량 북상하면 구릉지대가 끝나면서 탁 트인 평야를 만난다. 두만강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 연길까지의 딱 중간쯤 되는 곳이다.일송정은 이곳 용정 너른 벌에 홀로 우뚝 솟은 비암산 정상에 서 있다.그러나 정작 일송정에 오르면「선구자」의 비장감은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만다. 시멘트골격에 울긋불긋한 색깔을 입힌 중국식 작은 정자가 워낙 생경한 까닭이다.원래 일송정은 가사대로 정자처럼 그늘이 넉넉한 한 그루 푸른 소나무였다. 늠름한 기개와 고절의 표상이었던 노송은 이제 등걸로도 남아 있지 않고 대신 그 자리를 차고 앉은조잡한 정자가 공연히 뻔뻔스러워 보인다. 번듯한 나무 한 그루 보기 힘들어 주변도 썰렁하기 그지없다. 비암산은 서울의 남산정도인 듯한데 주변이 평지인 탓에 상당히 높아 보이며 화강암이 곳곳에 노출된 골산이어서 일찍이 시인 김기림이 「간도의 내금강」이라고 읊었을 만큼 전체적 경관은 상당히 빼어난 편이다. 현지인들이 흔히 범이 웅크린 상으로 표현하는 비암산의 머리부분에 일송정이 있고 허리에 선구자 탑이, 그 아래쪽에 연변TV방송국의송신탑이 서 있다.그러나 지난 1991년 몇몇 한국인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선구자탑은 1년도 채 안돼 민족주의의 발호를 우려한 중국당국에 의해 철거돼 기단만 흉한 몰골로 남아 있다. 비암산에서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용정은 산지에 둘러싸인 분지모양이다.서북쪽 평강령 틈새를 간신히 비집고 나온 해란강이 큰 물줄기로 바뀌면서도시 한가운데로 흘러간다.선구자가 말달리던 강변을 따라 연길과 함께 중국조선족의 양대 중심도시로 성장한 용정의 주택가가 길다랗게 형성돼 있다.용두레우물터는 용정시내 한복판 용정중학부근 삼거리 한켠에 조그만 가로공원으로 단장돼 남아 있다.   「룡정지명기원지우물」이라는 한글이 씌어진 높이2가량의 석탑옆에 이곳의 유래가 자세히 설명돼 있다.  「1880년경 조선이민 장인석·박인언이 우물을 처음 발견해 우물가에 용두레를 세우고 우물이름을 용정이라 했으며 그것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용두레는 우물물을 퍼올리는 장치로그 모양이 용머리를 닮았다 해서 불리는 이름이다.  시내 초입 용문교에는 구름을 타고 비상하는 황금색 용장식이 해란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양편을 치장하고 있다. 최근의 건축물이대개 그렇듯 1988년10월에 만들어진 이 다리의 치졸한 모습도 「선구자」가사에 담긴 깊은 뜻과는 거리가 멀다.비암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었다던 저녁종소리 그윽했을 용주사도 터조차 알아볼수 없는 주택가로 변해버렸다. 이제는 어디에서도 선구자의 자취는 찾기 힘들다. 용정은 이웃 연길을 뒤쫓는 상업중심지로, 백두산여행길에 반드시 들르는 역사관광지로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가고있다.   오랜정체에서 깨어나 아침마다 용문교의 넓은 시멘트 포장도로를 자전거행렬로 메우는 용정사람들은 달라진 시대의 새로운 선구자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 한국일보 94. 8. 30 기사에서 정리.편집    한편, 국민의 애창가곡 '선구자'에는 그후 작곡자, 작사자 모두에게 좋지 않은 시비거리기 생기기도 했다. 표절시비와 작사자의 친일논쟁등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한 기사를 소개한다.      「선구자」 원제목은 「용정의 노래」” 세계일보 96. 11. 27    장렬한 조국 광복의 웅지를 노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전국민의 애창곡으로 손꼽혀온 가곡 「선구자」의 원제목은 「용정의 노래」였으며 가사도 현재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고 중국에 살고 있는 한 조선족 음악가가 주장,관심을 모으고 있다. 가곡 「선구자」와 관련,이같이 주장하고 있는 사람은 해방 때까지 2년여동안 조두남선생과 중국 흑룡강성에서 음악 활동을 했고,윤해영과는 1944년 처음 만난 후 45년 9월부터 한동안 작사가와 작곡가로 함께 일한 바 있는 김종화옹(75·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작사자로 알려진 윤해영은 국내에서 1933년 어느날 하얼빈에 살고 있던 조두남선생을 찾아가 시 한편을 내어놓으며 곡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 후에 오겠다던 그는 지금도 소식이 없어 세인들에게는 표연히 사라진 「독립군」 쯤으로 인식돼 있다가 91년 이후 변절한 친일 시인이라는 주장이 나와 이 노래의 무분별한 방송 연주에 제동이 걸려왔다. 그러나 김옹의 술회 내용이 맞다면, 윤해영은 현재 불리고 있는 「선구자」의 가사를 쓴 적이 없고,애수에 젖은 동요 외에 「척토기」 「발해고지」 「해란강」 「오랑캐 고개」 「낙토만주」 등의 친일시를 썼기 때문에 「변절」 운운할 필요가 없는 친일시인이며 「선구자」의 작사자는 따로 있다는 얘기가 된다. 김옹은 「용정의 노래」에는 「선구자」에 나오는 「활을 쏘던 선구자」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등의 구절은 전혀 없었으며 그 대신 「눈물의 보따리」 「흘러온 신세」 등 유랑민의 서러움이 주조를 이루었다고 회고했다.<북경=연합>    「선구자」의 수난/작사자 윤해영 변절친일시인 밝혀져 “충격”    조국수복의지를 장렬하게 노래한 「선구자」는 세대와 계층을 뛰어넘어 온 국민이 사랑하는 국민가곡이다.  행사장이나 술자리에서,심지어 운동권집회에서도 불리는 「선구자」는 그러나 작사자 윤해영의 새로운 면모가 알려지면서 시비에 휘말렸다. 작곡자 조두남의 회고를 통해 비장한 청년독립지사의 이미지로 알려진 윤해영이 일제괴뢰 만주국을 찬양· 합리화하는 글을 쓴 변절친일시인이었다는사실이 당시 사료를 통해 지난 91년 처음 알려진 것이다. 「선구자」가 「낙토만주에서 터를 닦는 선구자」로 바뀐 친일시까지 발견돼 이 노래를 아껴온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배신감을 안겨주었다.또 최근 연변대 조선어문학과교수 권철씨(65)는 윤해영이 독립운동가가 아닌 시인이었으며 만주국의 친일조직인 협화협회에서 활동했고, 해방후 함북 회녕으로 가 그곳에서 사망했다고 구체적 행적을 밝혀내 오랫동안 가려졌던 베일을 벗겨냈다.이런 이유등으로 이 노래는 지난해 임정선열5위 영결제전때 조가로 선정됐다가 독립운동 유관단체등의 격렬한 반대로 취소됐다.「선구자」는 작곡시기가 10여년 앞선 박태준곡 「님과 함께」의 모작이라는 표절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2014.11.14 14:30|신고 추천해요1   답변 고마워요 정말로 시인 윤해영(尹海榮)에 관한 자료는 별로 없는 듯 합니다.   윤해영(尹海榮)   일제 강점기에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시인. 함경북도 출생으로 룡정에서 교사로 근무했다는 것 외에는 신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가곡 "선구자"가 항일 정신을 담은 노래로 알려져 대한민국에서 오래 불리면서 이 노래의 작사가로 유명해졌다. 윤해영은 "선구자"의 작곡가 조두남의 회고록을 통해 신비한 독립투사 청년으로 묘사되었다. 조두남은 1932년 "선구자"를 작곡할 때 하얼빈의 한 여관에서 윤해영을 만나 가사를 받았으나 이후 홀연히 사라져 다시 보지 못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만주 지역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영역이 되면서 오랫동안 접근이 쉽지 않아 조두남이 묘사한 내용에 따른 이같은 인식이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당시 조두남과 함께 활동했던 음악인 김종화가 조두남의 회고록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폭로하면서 윤해영의 실제 행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작사자 윤해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 없으나, 원래 선구자의 시는 북간도 용정(龍井)을 배경으로 작시한 것으로 가사 첫머리의 "일송정(一松亭)고개"는 독립투사들이 오가며 쉬던 곳이며, "해란강(海蘭江)"은 그 옆을 흐르던 강 이름이다. 또한, 작곡자 조두남은 당시 망명청년으로서 만주 모란강에서 1933년 21세 때에 이 시에 곡을 부친 것이다. 이 곡은 광복 후 대중들에게 잘 불리어졌다.   윤해영 (시인)
687    윤동주 시비 ㄴ 댓글:  조회:3714  추천:0  2015-03-17
686    윤동주 <서시>의 새로운 해석 댓글:  조회:4874  추천:0  2015-03-17
서시 –윤동주-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n  하늘을 우러러 죽어도 죄 짓지 않으리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n  어린 백성들이 어둠-바람에 흔들리고 위태로우니 왕은 괴롭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n  나의 미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백성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n  그러나 빛과 어둠의 길을 정 반대이니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n  오늘 밤에도 빛이 어둠에 터치 당하고 있다.       ** 윤동주 님의 시 “또 다른 고향”을 먼저 읽으시면 이 “서시”가 좀 더 쉽게 이해됩니다. /   ** 능금은 빛깔도 아름답지만 속살은 또 다르고, 영생의 씨가 있다. 그 님의 시는 그런 능금이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이 그 속살 맛을 못 보니 안타까움이다.   ** 바이블의 창세기의 기술 원리와 같은 2중 글이지만 그보다 더 세련되고, 이야기의 전개-연결이 좋다. 다 함께 공부하고 알리면 세계 문화 유산이 될 수 있는 시이다. /       **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 “가지”가 자식이면 “잎새”는 백성이다. 그리고, 나무는 부모 이자 왕을 뜻한다. 바람(어둠)의 시대에 전체에게 따돌려지는 것이 실질적인 왕이다.   ** 시대의 바람에 모든 백성들이 죄 짓고 덮으니, 어둠에 물들지 않는 선인을 먼저 죽이는 구조 원리 시스템에 전체가 순서적으로 말려들어가 죽는 원리인데, 윤동주 시인은 그것을 알고 괴로워하며 홀로 생명의 길을 가고자 한다. 모든 인생길은 죽어가는 길과 살아가는 길, 즉, 빛과 어둠의 두 길이 있는데, 전체 백성이 죽음의 막다른 길을 선택했다. 이제 따돌림 당하는 왕이 죽으면 전체 백성도 따라 죽게 된다.   ** 시대의 어둠 바람에 모든 백성들이 한 사람을 왕따 시키면, 그 한 사람이 작용반작용 원리에 따라서, 실질적인 빛이자 왕이 된다. 그리고 빛과 어둠은 공존-공멸의 관계가 된다.   ** 척을 지고 있는 어둠이 강하면 그 반작용으로써 빛도 강해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공멸로 끌려가는 것이니,진짜 사랑한다면 빛을 죽이고 홀로 떠나야 한다.   ** 아담과 이브가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으면 “영생”한다. 즉, 아담과 이브는 집단을 뜻하고, 종말의 위기라는 듯이다.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를 “우리” 라 하였으므로 그는 “선진 문명국”을 뜻한다. –창세기3장 말미- /원시국가부터 현대국가까지 인류 역사의 모든 나라가 전쟁을 통해서 태어났다. 달콤한 쥐약-선악과 먹고 덮어서 죽은 쪽의 살아남은 잔당은 조상의 땅에서 멀리 쫓겨나 황무지를 개간해야 한다.       2014-05-26. 오영석(청천)    //   또 다른 고향 –윤동주-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 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 내가 우는 것인가, 내 백골이 우는 것인가,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인가?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짓는다 /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   [해석; 오영석(청천)]       ** 서울에서 연희 전문 시절에 고향으로 돌아온 시인은 마을을 한 바퀴 돌며 어른들과 이웃에게 문안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무관심과 냉대이다. 시대의 변화의 바람에 세상이 깜깜하게 변했다. 이 현상은 서울과 고향 땅이 같은 현상이다.       ** “백골”; 죄 없는 사회적 죽음; 왕따; 왕족; 전체 어둠에 대비되는 극 소수의 빛; 별; ……   **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어떤 현상이나 모습이 일부와 전체가 같다. 즉, 전체가 어둠이다.   **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 어둠은 시대의 변화를 일으키는 바람이다.   ** “풍화작용(風化作用)”; 시대의 어둠-바람에 세상과 사람들이 황폐하게 되었지만 시인은 오히려 곱게, 밝게 되었다. (시인의 연희전문 시절의 기숙사 친구 “정병욱” 씨의 글에서, 윤동주 시인은 “풍화작용” 이 단어가 시어 답지 못하다고, 스스로 불만했다고 한다. )       ** “지조 높은 개”; 지조가 높아서 개가 되었다. 작용과 반작용을 하나로 표현.   **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밤을 새워 어둠에 대하여 글을 썼다. 시인 스스로 딱하다.   **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내가 나를 쫓는다. 내 탓이다.   ** 윤동주 시인은 어둠 바람에 위협 받고 쫓기면서, “내 탓이요” 하면서, 인사도 없이 도망가듯, 고향을 떠난다. 그리고, 전쟁은 패배 측이 추하고, 승리 측이 상대적으로 아름답다.       ** 시인의 시는 당신 스스로 빛이자, 별이자, 왕이자, 위인이다. 당신 스스로 아름답다. “별 헤는 밤”에서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 자랑처럼 파란 풀이 무성할 거외다” 어떤 해설가는 이것을 나르시즘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재 많은 곳에 시인의 시비가 건립되어, 시인의 말대로 되었다.   그 님의 시는 바이블의 어느 대목보다 아름답고 위대하고 향기롭고 심오하다. 그 모든 이유가 “백골” 이 한 단어로 설명된다. 어둠의 시대에 죄 없는 사회적 따돌림. 이것은 빛과 어둠의 작용반작용, 대칭 관계를 뜻한다. 왕따는 어둠의 따돌림-배척으로 된 것이니, 그가 확실한 왕이다.   /       //   십자가 –윤동주-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 첨탑이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 괴로웠던 사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용된다면 /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해석; 오영석(청천)]       ** 햇빛은 시인이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면 시인을 지켜준다. 그 햇빛은 사랑, 정의, 진실, 진리, 생명, 등을 뜻한다.이것은 윤동주 시인 자신을 교회 조직이 막고 있다는 뜻이고, 시인은 그 조직의 꼭대기로 올라가 스스로를 구원할 방법이 없다. 기독교 집안의 일원인 시인이, 무한정 기다려도 불러들여 주의를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당당하고 여유가 있다. “휘파람이나 불며…. “       “로마의 식민지 이스라엘 청년 예수 그리스도가 고국의 신학자들에게 죽임 당함으로써 불멸의 성인이 되었던 것처럼, 윤동주 시인도 그와 똑 같은 경우로서, 기쁘게 아름다운 죽음의 꽃을 피울 것이다. 라는 …. “ 전국적인 왕따는 어찌 됐든, 근본은 영광의 빛이자, 왕이다.           //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 /생략.       --우연히 패전 소식이 들리는데, 나는 슬프지 않으니, 내가 있는 이 다다미-방은 남의 나라가 확실하다. 나는 이제까지 슬픈 시만 써 왔는데, 지금은 기쁨을 적어보아야겠다……           //   태초의 아침 / 1941년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 빨-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 사랑은 뱀과 함께 / 독毒은 어린 꽃과 함께.       -*좋은 남자는 꽃뱀과 , 선녀는 육체부 아들과....  
685    윤동주 시비 댓글:  조회:3917  추천:0  2015-03-17
   
684    김성휘 시비 댓글:  조회:4250  추천:0  2015-03-17
  김성휘 시비 모교에 재건     저명한 시인 김성휘시비재건제막식이 11월 22일, 시인의 모교 룡정고중에서 있었다. 사실주의 시문학의 한봉우리를 이루고 간 조선족문학의 대표적인 시인 김성휘를 기리기 위해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는 동인들의 모금으로  1994년 7월 22일, 시인의 모교인 룡정고중 정원에 김성휘시비를 세웠었다. 2003년, 룡정고중은 교내확장공사때문에 시비를 잠시 철거, 이번에  재건에 나섰다. 재건된 시비는 대리석으로 된 받침돌을 새로 축조하고 그우에   김성휘시인의 시 “시내물”을 음각한 전 시비를  복원했으며 시비 주위에  계단식란간을  둘렀다.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와 룡정고급중학교 주최로  된 시비재건제막식에는 연변작가협회 허룡석주석, 원로시인 설인을 비롯한 문인들과 시인의 유가족, 룡정고중 사생대표 100여명이 참가했다. 제막식에서 연변작가협회 허룡석주석은 “김성휘시인은 중국조선족문단의 대표시인의 한사람으로 중국조선족문단의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했다”고 그의 공적을 치하했고 룡정고중 방송산부교장은 “김성휘시비 재건은 연변문단은 물론 유서깊은 룡정의 문화재 건설에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시비재건의 의취를 밝혔다.  김성휘시인은 1933년 룡정시 백금향 동명촌에서 출생,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 등 력임했으며 중국작가협회 회원, 1급작가로 활약했다. “나리꽃 피였네”, “들국화”, “금잔디”, “장백산아 이야기하라”, “고향생각”, “흰옷 입은 사람아” 등 시집과 장편서사시 “사랑이여 너는 무엇이길래”, “장백산아 이야기하라” 등을 펴냈다. 제1, 2, 3회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상을 수상, 20세기 중국소수민족100명작가평전에 그 이름이 수록되였다. 조선족의 서정시, 서정서사시, 장편서사시 창작과 젊은 시인 양성에서 큰 기여를 한 시인은 1990년 3월 25일 병으로 타계했다.   "종합신문" 08/11/30   김혁   ======================= 김성휘시인 시비 룡정고중에 재건 편집/기자: [ 김창희 ] [ 길림신문 ] [ 2008-11-25 ]  고 조선족 저명한 시인 김성휘시비재건제막식이 11월 22일,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와 룡정고급중학교 주최로  설인 원로시인을 비롯한 30여명 문인과 김성휘시인 유가족, 룡정고중 사생대표 등 6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룡정고중에서 있었다. 룡정고중은 2003년, 운동장확장공사때문에 김성휘시비를 잠시 철거했다가 이번에  재건하면서 대리석으로 된 받침돌을 새로 축조하고 그우에   김성휘시인의 시 《시내물》을 음각한 전 시비를  복원, 그리고 주위에  계단식란간을  만들어놓았다.  연변작가협회 허룡석주석은 중국조선족문단의 대표시인의 한사람인 김성휘시인은 중국조선족문단의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했다면서 부단히 정품창작을 위해 자신을 채찍질 한 김성휘시인의 정신을 배워 우리 문단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룡정고중 방송산부교장은《김성휘시비재건제막식은 연변문단은 물론 유서깊은 룡정고중의 문화재를 건설하는데에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제2기 졸업생인 김성휘시인은 생전에 모교의 발전에 지대한 관심을 돌렸다. 또한  룡정고중선배장학회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는바 그것이 밑거름이 되여 장학회는 이미 620여명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발급하였고 교원들에게도 공로금을 발급하고있다. 룡정고중은 김성휘시인을 영원히 잊지 않을것》이라고 했다. 조선족문학을 위해 혼신을 바친 김성휘시인을 기리기 위해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는 소속 위원들을 중심으로 시비건립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족문학계 100여명 동인들이 모금하는 형식으로  1994년 7월 22일, 시인의 모교인 룡정고중 정원에 김성휘시비를 세웠다. 김성휘시인은 1933년 룡정시 백금향 동명촌에서 출생,  1956년부터 1984년까지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 1985년부터 1990년 3월까지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 등 력임했으며 중국작가협회 회원, 1급작가로 활약했다. 《나리꽃 피였네》, 《들국화》, 《금잔디》, 《장백산아 이야기하라》, 《고향생각》, 《흰옷 입은 사람아》, 《사랑이여 너는 무엇이길래》, 《결백한 사랑》(한어문), 《장백산아 이야기하라》(한어문) 등 시집을 출판했고 제1, 2, 3회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상을 수상했다. 1990년 3월 25일 김성휘시인은 병으로 타계했다. 
683    추억거리 몇점 댓글:  조회:1801  추천:0  2015-03-17
김성휘시비를 찾아서  
682    詩碑의 是非 댓글:  조회:3911  추천:0  2015-03-17
  김성휘시비(诗碑)의 시비(是非)문제 조성일 김성휘(1933―1990)씨는 우리 조선족이 낳은 대표적인 당대시인중의 한 사람으로서 조선족의 서정시, 서정서사시, 장편서사시 창작과 젊은 시인 양성에서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1955년에 처녀작 서정시 “첫 괭이”로 문단에 데뷔하여서부터 1990년 3월 타계하기전까지 파란 많은 세월에 시창작에 목숨을 걸고 동분서주하였다. 그는 평생에 시집 《나리꽃 피였네》(1997. 7), 《들국화》(1982. 5), 《금잔디》(1985. 8), 《고향생각》(1989. 8), 《흰옷 입은 사람아》(1989. 8) 등과 장편서사시 《장백산아 이야기하라》(1979. 9), 장편서사시 《사랑이여 너는 무엇이길래》(1989) 등을 출간하여 우리 조선족시단에 선물하였다.  김성휘씨의 시창작로정을 추적해보면 좌적사조가 살판치던 지난 세월, 특히 20세기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그는 그 당시의 “조류”에 휘말려 이데올로기에 밀착된 “송가”창작에서 자유로울수가 없었다. 새로운 력사시기에 진입한후 우리 시문학이 이데올로기의 전성통(传声筒)으로부터 시문학의 본연에로 획기적인 전이를 해야 할 막중한 과제가 제기된 긴요한 관두에 시인 김성휘씨는 새로운 문학사조의 참조계에 기대여 지난날 자기 창작에 대한 치렬한 반성과 점검을 하면서 렴가적인 “송가”와 경직된 “팔고식”시풍을 버림과 더불어 현대시창작에 입문하려고 창의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는바 새로 창작하는 자기의 시작품에 현대시의 이미지 도입, 상징과 은유 등 기법을 활용하기에 신경을 세워 가시적인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창작성과에 대해 불만족하면서 인생과 창작의 길에서 더욱 새롭고 더 높은 고봉에로 등반하려고 마음속깊이 다졌다.  나는 걸어간다  죽음을 다 모르고  사랑을 다 모르기에  지금도 걸어간다  성실을 지팽이로   그것이 분질러지도록  멀리 가고만싶었다  갈수록 하늘은 높아지고   갈수록 별은 밝아져   걸으며 걸으며 부자가 되고싶었다 기차길, 자동차길 다 버리고  술놀이 꽃놀이 다 잊고  바람과 비와 한줄에 간다  먼저 간 친구들 무덤을 지나  동아선 이웃과 작별을 하고   기다려주는이 없는 길을   가다가 맥이 진하면   두만강 물새울음 가슴에 모아   선채로 굳어져 돌이 되려 나는 간다                    ―서정시 “나는 걸어간다”                             (시 전문 1990. 2) 염라대왕은 시인의 삶에 너그러움을 베풀지 않았다. 시인 김성휘는 너무 일찍 우리와 영별하였다. 시적천부를 가졌으면서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너무 일찍 타계함으로 하여 자기의 새로운 시학관의 본격적인 실천화와 현대시의 실험을 성공적으로 완수할수 없었다. 말하자면 그는 시문학의 구태(旧态)에서 철저히 탈피할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우리 조선족시문학이 지난날의 경직되고 직설적인 예술기법과 렴가적인 “송가풍”의 질곡에서 벗어나 현대시에로 전환함에 있어서 선두주자적인 역할을 수행한 유명한 “과도기 시인”이라고 조심스럽게 평가해본다.  김성휘씨의 시창작실천을 더듬어보면 그의 시의 대상과 소재를 대체로 자기의 고향사람들속에서 고향의 자연과 풍물속에서 구하고 선택하고 거기에서 시적령감을 퍼내고 미적정서와 향기로운 시취를 일궈냈다. 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향토시인”이라고도 일컫는데 필자도 동감이다.   김성휘씨는 새로운 력사시기의 초기에 시창작에서 선두주자의 한 사람으로 우리 시문학의 발전에 박차를 가했을뿐만아니라 조선족문단 특히 조선족시단을 이끄는 인솔자의 역할을 하였으며 시문학에서의 젊은 유망주들에게 애정을 몰부은 스승이기도 하였다. 하기에 그를 따른 사람들이 많았다.    김성휘씨의 이런 성과를 피부로 절감한 감동된 림원춘, 림연, 최홍일, 최룡관, 김인선, 석화 등을 비롯한 우리 문단의 지성인들은 김성휘시인의 공덕을 기리고저 그의 시비 세우기에 나섰다.  시인 김성휘가 타계(1990년 3월 25일)한 이튿날부터 김성휘시비를 세울 문제를 토의하면서 여러모로 되는 어려운 준비작업을 거쳐 1994년 5월 31일에 민간차원에서 김성휘시비위원회를 건립하였다. 주임: 최룡관  부주임: 김인선, 석화, 조룡남   위원: 최삼룡, 림연, 김응준, 김동호,         주천을(당시 룡정고중 교장)  재무: 임만설 김성휘시비위원회가 성립되여 일을 시작하자마자 시비 세울 아이디어를 제기할 때부터 일어났던 찬반의론이 더욱 가렬화되였다. 어떤분들은 뒤에서 김성휘시비를 세우는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였고 어떤분은 신문을 통해  반대의견을 천명하였다. 이를테면 한 문인은 “시비박물관”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김성휘시비건립에 반대의견을 토로했다. 단칸방 세방살이에 목을 걸고 죽을 지경으로 사는 우리의 겨레들이 수두룩한 이 마당에 산 사람의 렬악한 주택사정은 아랑곳없이 죽은 사람의 일에 인력과 물력을 아끼잖겠다는분들의 량식(良识)― 사회인으로서의 량식―에 나는 의문을 품지 않을수 없다. 한 지성인으로서 말이다. 그리고 한마디― 좀 아플지는 몰라도― 물어보지 않을수 없다.   당신들은 버젓한 살림집을 갖구계시니까 남의 일은 꿈만하시죠? 김성휘시비위원회는 여론의 비난, 경제적인 어려움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통지문을 낸다, 장소를 정한다, 설계도를 그린다, 모금한다, 조각한다 등등 복잡다단한 작업을 힘차게 밀고나갔다. 하여 한달 남짓한 짧은 시간내에 흰 대리석 김성휘시비를 제작하여 1994년 6월 28일에 김성휘시인 모교인 룡정고중교정에 세웠다. 이 시비는 동북3성 100여명 문인들과 기업인들의 정 배인 모금과 두터운 후원으로 이루어지게 되였다.  시비는 높이 2메터 25센치, 너비 1메터 60센치로 구축되였는데 비석 밑부분에는 생전에 자연을 즐기였던 김성휘시인의 기호와 그의 시집 제명을 따서 들국화송이가 각인되여있고 웃부분의 하얀 대리석에는 김성휘의 시편중에서 선정해낸 서정시 “시내물”(1980. 1. 23)의 전문이 새겨졌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시내물의  흐름을  찬히 보아라 천리만리  먼먼길도  자신만만타 흐르고  흐르고  내처 흐르며 한생을  말쑥하게  가는 나그네 김성휘시비제막식은 1994년 7월 22일 김성휘시인의 모교 룡정고중교정에 세워진 김성휘시비앞에서 성황리에 거행되였다. 제막식에는 동북3성에서 모여온 작가, 시인, 평론가, 기업가 및 시인의 가족과 친우들 그리고 룡정고중 사생 등으로 200여명이 참석하였다. 제막식에서는 림원춘의 개막사, 최삼룡, 김기형(당시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등의 연설이 있었다.  중국의 고대문헌인 류협의 《문심조룡(文心雕龙)》은 비(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비란 비(埤)의 뜻이다. 상고시대의 제왕들은 하늘과 땅에 보고하는 말들을 기록하여 그것을 하늘과 땅에 알리는 의식을 거행했었다. 이때 비석을 세움으로써 산악의 높이를 더 늘어나게 하였으니 이를 가리켜 비(埤)라고 부르는것이다. 주(周)의 목왕(穆王)은 엄산에 올라갔을 때 산우의 돌에 기념으로 몇 글자를 적었는데 이것 역시 고대적인 의미에서의 비라 할수 있다. 또 종묘의 중심부에 위치한 정원의 뜰에 비가 있는데 이것은 동쪽과 서쪽에 해당하는 두 기둥사이에 세워진것으로서 단지 제사에 쓰일 희생(牺牲)을 메여놓기 위한것이였기에 거기에서 어떤 업적이나 미덕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수는 없다. 그러나 공훈을 기록할 그릇이 점점 부족하게 되자 후대에는 비석으로 대체되기에 이르렀다. 금속 대신에 돌을 사용하게 된것은 그것 모두가 영원불멸을 나타내기때문이다. 그리고 원래 종묘안의 물건이던 비가 무덤에 세우는 물건으로 된것은 평평한 무덤에 흙을 쌓아올려 그 높이를 더한것과 같은 리치이다. 비를 세우는 이런 기풍은 후세에 전승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발양되고있는것이다. 비의 종류는 그 재료에 따라 금비(金碑)와 석비(石碑)로 나누며 비문의 내용에 따라 순수비(巡狩碑), 기적비(记绩碑), 신도비(神道碑), 릉비(陵碑), 묘비, 송덕비(颂德碑), 기념비, 정려비(旌闾碑), 유허비(遗墟碑), 척경비(拓境碑)… 등으로 나눈다.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 민족이나 나라에 기여가 큰 저명인사의 기념비나 시비거나 송덕비를 세워 수비립전(树碑立传)하고 가공송덕(歌功颂德)하며 그들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교양에 이바지하는것은 제창할바이다. 이런 기풍은 금전으로 바꿀수 없는 아름다운 기풍이요 정신문명건설의 하나의 장거이다. 한세기를 웃도는 파란만장한 세월에 훌륭한 문학거장이나 지성인들이 배출되였다. 하여 우리 조선족문단에서는 리욱시비, 김창걸문학비, 김성휘시비, 정판룡문학비, 채택룡문학비, 김학철문학비 등을 세워 그들의 문학정신을 기리고있는것이다. 이런 기념비 세우기에 앞장섰던 문인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                                                                             2007년 12월      시비(诗碑)의 시비(是非)                                               박 화 마침내 김성휘시비가 일어섰다. 문인, 기업인, 가족들의 뜨거운 마음들이 오뉴월 서리치는 말썽을 이겨내고 끝끝내 일떠세운 장거이다.   그것이 장거라 함은 “남에 김영랑, 북에 김소월하였더니 이제 연변에 김성휘”가 나왔다고 평하는 문인까지 있듯이 우리 글 문학권에 명성 높던 시인의 시비는 그 개인에 대한 기념비로 된다기보다도 우리 문학의 발전에 기여한 그 공로와 로고를 옳게 평가하고 잊지 않는다는데 더 큰 뜻이 있기때문이다. 무릇 우리의 문학과 예술과 학술에 기여가 큰분들은 세세대대 존경하고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그 형식중의 하나가 조촐한 기념비를 세우는 일이다.   어떤분은 그러다가 기념비의 수풀이 일어서서 땅이 좁아지면 어쩔랴고 신랄한 풍자까지 하였으나 하늘이 무너질가 겁내는 기국사람으로는 되지 말아야 할것이다. 오히려 기념비를 세워 길이길이 칭송할수 있는 작가, 시인, 예술가, 리론가… 등이 더 많이 나와 더 많은 기념비를 세울수 있게 된다면 우리의 문명건설을 위해 얼마나 다행한 일이 되겠는가?  면적이 연변과 어슷비슷한 한국에는 시비와 문학비만 해도 무려 80개가 세워졌지만 땅이 좁아지기는커녕 문학에 대한 사회의 높은 관심도를 과시하면서 세계에로 진출하고있다. 비록 조촐한 기념비이지만 현역작가군에게는 고무력이 되고 후배들에게는 분투의 길잡이가 된다. 비여있는 공간에는 예술적인 장식물이 생겨나 자연환경을 미화하고 정신생산에 대한 사회적존경도를 높이는 사회정화작용을 하여 적어도 일거사득이 되는데 이 좋은 일을 왜 마다해야 하겠는가?  문인상경(文人相轻)이란 고질된 악습이 문인상경(文人相敬)이란 고상한 품격으로 바뀐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정치가, 교육가의 기념비나 반신상이 세워질 때는 야단치지 않던것이 연변문단의 저명한 시인의 시비에는 왜 말썽도 많았는지 지금도 리해되지 않는다. 세세대대 그 정신적, 심의적 영향력을 일으킬 훌륭한 작품들을 깊이 남겼거나 문학 자체의 발전을 위한 길에 새로운 기여가 있어 후세에 영향주는 공로가 있다면 그것은 기념할 가치가 있는것이다.   더구나 리해되지 않는 일은 민가차원에서의 이러한 장거가 한때는 정부차원에서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는 사실이다.   부모님 산소에 비석을 세우는 기념은 간섭하지 않다가도 문단에서 자발적인 기념은 왜 간섭해야 하는가? 작가가 과연 “인체령혼의 공정사”여서 지식을 존중하고 지식인을 존중한다는 구호가 입에 발라맞춘 말이 아니고 피와 살이 되였다면 과연 이런 일이 생길것인가? 정신문명건설은 구호뿐만아니고 하나하나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일로 이루어질것이다.   무릇 유공자는 사회적존경을 받아야 하고 그 존경은 또한 말로만 그쳐서는 안될것이다. 무엇이나 실속있게 되여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기풍이야말로 금전으로 바꿀수 없는 훌륭한 기풍이다. 이러한 기풍을 수립함도 정신문명건설의 한 내용인것이다. 그래서 명성 높던 시인의 사후에 조촐한 시비 하나쯤 세우는 일은 마땅한 일이고 이런 형식에 내재된 정신적내용은 길이길이 이어가고 빛내여야 할것이다.   시비 하나만으로도 깊은 사색을 자아내거늘 다른 일에는? 한번 생각해볼만한 문제인것 같다.                                                        1994년 7월 31일                      (《문학과 예술》 1994년 11,12월호 7페지)  2008년 9월호  
681    리욱 시비 댓글:  조회:4280  추천:0  2015-03-17
화룡시 남평진 호곡령에 세워진 리욱 시비ㅡ     연변일보 문예지에 "조선족작가 문학비 순람"을 기획하고 시우들과 호곡령 리욱시비앞에서   (좌로부터 한영남 시인, 김혁 소설가, 류재학 사진작가, 리해룡 시인)     중국 조선족시문학의 정초자 리욱의 생애 리욱 (원명 리장원)은 1907년7월15일 러시아 불라디보스토크 신안촌(고려촌)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모와가족들은 일찍 중국 길림성 화룡현 강장동 일대에 이주하여 살았는데 생활난으로 이리저리 떠돌며 러시아 원동지역에 까지흘러갔다가 리욱이 3살나던해인 1910년 봄, 다시 중국 길림성 화룡현 로과향 서호촌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리욱의 할아버지는 원든에 이름이 높은 한학자로서 마을이이들을 모아 서당을 꾸렸는데 리욱은 어린시절부터 할아버지의 슬하에서 “천자문”과 “소학”및 한시를 공부하였다. 리욱은 1923년4월 룡정 동흥중학교에 편입하여 공부하였고 이듬해인 1924년, 훈춘창동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는 한편 농촌의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해 처녀작 시 “생명의 선물”을 “간도일보”에 발표하며 시작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 그는 또 지역신문 “민성보”의 기자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시 “눈”, “봄비”, “죄수”, “분노의 노래”, 소설 “파경”을 쓰고 일부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1년 부모님이 계시는 서호촌 마을에 돌아와 1935년까지 농사도 짓고 서당도 꾸리고 마을의  야학을 돕기도 하면서 문학공부에 정진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며 그의 시 창작도 일약 전성기에 진입하였는데 초기 시 대표작들도 이 시기에 완성되였다. 이 시기 그는 시 “님 찾는 마음”(1930) “송년사”(1935) “북두성”(1937) “금붕어”(1939) “모아산”(1939) “새화원”(1940)등을 창작하여 신문 “만선일보”잡지 “조광”. “조선지광”등에 발표하였다. 이 시기 그는 학성, 월촌, 홍엽, 단림, 산금, 월파 등 다양한 필명을 사용하였다. 리욱은 1936년 “조선일보” 간도특파기자가 되였고 일제에 의해 1940년8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이 페간되자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 1942년 그는 리학성이라는 이름으로 연길에서 간도와 만주지역 시인들의 합동시집 “재만시인선”을 편찬하여 발간하였으며 김조규가 편집한 종합시집 “재만조선인시집”에 리학성의 이름으로 시 “나의 노래”, “철쭉화”, “오월”, “락엽”, “별” 등을 발표하였다. 1945년 고향에서 광복을 맞은 그는 자기의 필명을 다시 “해 뜨는 모양”, “득의 한 모양”, “아침 해 욱”으로바꾸고 새로운 시대의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 시기 그는 “간도예문협회” 문학부장, “동라 문인동맹” 시문학분과 책임자, “연길중소한문회협회” 문화국장 등 직을 맡으며 주요한 역활을 담당하였다. 그는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동북군정대학에 다녔고 1947년 첫 서정시집 “북두성” 간행하였다. 1948년 동북군정대학을 졸업한 그는 연길 “대중”잡지 주필 겸 연변도서관 관장을 맡으며 1949년 두번째 서정시집 “북륜의 서정”을 간행하였다. 리욱은 1951년부터 연변대학에서 “세계문학사”를 강의하면서 시인과 교육자의 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문학의 후대양성에 일생을 다하였다. 1956년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고 1957년 시집 “고향사람들”(북경민족출판사), 장시 “연변인민의 노래(한문)”(북경작가출판사)를 간행하였고 1959년 시집 “장백산하”(북경작가출판사)를 간행하였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진행된 중국에서의 “10년 대 동란”으로 일컨는 문화대혁명기간 시인 리욱은 “반동문인”, “반동학술권위” 등으로 몰려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1980년 칠십 고령에 이른 시인은 자신이 일생동안 진행해온 시창작의 정수를 모아 “리욱시선집”(연변인민출판사)을 엮었다. 1982년 장편서사시 “풏운기(1부)” 발표하였고 이 작품 제2부의 집필중 1984년2월6일 뇌익혈이 발생하여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인의 추도식은 전례없이 장중한 규모로 연변대학 대강당에서 진행되였으며 1988년7월25일 시인의 탄신 81돐을 기념하여 시인이 세살때 강보에 쌓여 두만강을 넘어온 화룡 로과 호곡령 산상에 시인의 시비가 세워졌다.  
680    두만강을 따라... 댓글:  조회:5713  추천:0  2015-03-17
  군함산자락, 두만강가에 자리잡은 숭선진은 비록 조선족인구의 대대적인 이동으로 빈집들이 많았으나 고성리통상구와 홍기하표류, 군함산과 두만강발원지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면서 비교적 활기를 띤 모습이다. 홍기하표류는 19일에 개장한다고 하여 구경하지 못하고 쏟아지는 비 때문에 일찌감치 군함산밑에 자리잡은 숭선나눔산장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 두만강의 첫 번째 통상구. 조선으로부터 무역물자들이 숭선통상구 다리를 통하여 중국으로 들어오고 있다. 저 멀리 뒤에 보이는 것이 바로 유명한 군함바위이다.      고성리통상구에 서 본 군함산의 웅장한 모습     숭선나눔산장앞 두만강가에 세워진 고풍스런 정자, 두만강의 맑은 물이 인상적이다     ▲숭선의 홍기하공원 뒷산에는 천길폭포가 쏟아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       전초(낚시터)는 숭선진과 46킬로미터, 두만강발원지와 10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다. 20세기 70년대에 두만강 상류에 나무평상으로 지어진 이곳을 중국에서는 전초라고 부른다.   유명한 김일성낚시터. 물이 맑고 꽤 깊었는데 물속의 고기도 볼수 있었다. 1939년 5월 21일, 김일성이 항일부대를 이끌고 밤을 지낸 숙영지이다. 1962년 김일성은 이곳을 찾아와 낚시를 하면서 김일성주체사상을 구상했다고 한다. 1971년 9월 4일에는 김정일이 낚시를 하면서 혁명사상을 위대한 김일성주의로 정식화 할 원대한 구상을 무르익힌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북한에서는 이곳을 애국주의 선전기지로 지정했는데 해년마다 수만명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참관하고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두만강은 완만하게 흘러오다가 김일성낚시터부터 갑자기 파도치며 흘러간다. 두만강발원지 두만강발원지풍경구는 장백산동쪽줄기가 뻗어있는 중조변경에 위치해 있는데 장백산북쪽언덕 산문과 35킬로메터, 숭선진과는 56킬로메터 상거해있다. 2002년 12월 화룡림업국에서는 광평림장에 면적이 12636헥타르에 달하는 두만강발원지국가삼림공원을 건설했다. 공원은 두만강발원지와 두만강협곡풍경구 두가지 내용으로 되여 있는데 두만강협곡은 시간상관계로 답사하지 못하고 달리는 뻐스안에서 구경하는것으로 대체했다.                         중국쪽에서 흘러오는 무수린하 두만강발원지는 장백산 백두봉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몇갈래의 시내물이 모여 형성되였다. 조선의 홍토산에서 약 3킬로메터 흘러온 홍토산수와 중국쪽에서 흘러온 무수린하가 합류하여 중조 두 나라의 변경선으로 되는 두만강을 이룬다. 합수목은 길이가 2메터, 넓이가 1.5메터가량이며 타원형모양인데 이를 이름하여 두만강발원지라 부른다.       69(1)분비 두만강발원지부근에는 중북 두나라에서 69호 국계비를 세웠는데 69(1), 69(2), 69(3) 등 3개의 분비로 나뉘여 두 나라가 공유하는 삼각형구역을 형성하였다. 이를 이름하여 《3각계비》라 부르니 유람객들은 이곳에서 한발자국만 내디뎌도 국경을 넘어서는 신기하고도 짜릿한 황홀경에 빠져본다.   원지(선녀늪) 원지는 장백산동부 부쿠리산아래에 위치하여있으며 두만강관광코스의 하나이다. 장백산북쪽산문에서 33킬로메터, 숭선진과 58킬로메터 떨어져 있으며 안도현 백하림업국에서 관리하고있었다. 길이가 260여메터 넓이가 180여메터되는 원지에는 아름다운 전설이 있다. 오래전 천궁의 3선녀는 원지의 아름다운 풍경과 맑은 물에 취하여 늘 내려와 목욕하군 하였다. 어느날 3선녀가 또 원지에 와서 목욕을 하였는데 까치 한 마리가 주과를 물어다가 셋째 선녀의 옷에 떨구었다. 셋째가 반짝반짝 빛나는 주과를 입에 물고 놀다가 조심하지 않아 꿀꺽 삼켰는데 그만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짙은 눈썹에 큰 눈, 매부리코에 입이 컸는데 생김새가 비범하였다. 그 아이는 태여나면서 말할줄 알고 뜀박질도 하였다. 선녀는 아들에게 시문과 병서를 가르치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들려주었다. 아들이 성장하자 선녀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내가 주과를 먹고 낳았으니 성은 아이신줴로요 이름은 부쿠리옹순이니라. 너는 하늘의 뜻을 받들고 인간세상에 왔으니 커서 하늘의 뜻에 따라 나라를 다스려야 할지어다.》 그 아이가 바로 아이신줴로가의 시조라고 한다. 훗날 청조정부는 원지를 룡을 낳은 성지로 봉하고 장백산을 만족의 발상지로 봉했다고 한다.
679    자랑스러운 고향사람 댓글:  조회:5167  추천:0  2015-03-17
연변의 딸 방춘월 제자들과 함께 고향서 한무대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11월20일 08시41분    조   17일, 천진음악학원 성악교수인 방춘월과 그의 제자들이 함께 꾸민 음악회가 연변대학 예술학원 연주홀에서 열렸다. 천진음악학원, 연변대학 예술학원, 가목사대학 음악학원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이번 음악회는 천진음악학원의 성악교수인 방춘월과 그의 제자들이 무대에 올라 17곡의 명곡을 부르는것으로 화려하게 펼쳐졌다. 이날 음악회에서 방춘월교수는 국가 1급 지휘가였던 안국민선생이 작곡한 《밀림은 푸른 바다 나는 갈매기》를 불러 고향 연변에 대한 그리움을 표달했다. 1973년에 화룡시 로과진에서 태여난 방춘월은 1990년대초에 연변인민방송국 음악기둥프로인 《대중무대》에 출연해 청중들의 호평을 받으면서부터 성악공부를 시작했고 1995년중국음악학원 가극학부에 진학, 4년후 학업을 마치고 중앙민족악단에 배치받았다. 2007년에 서울대학 음악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방춘월은 귀국하여 천진음악학원 성악학부의 성악교수로 교편을 잡게 되였다. 몇년간 그가 양성한 다수의 제자들은 중앙가극원, 중국가극무극원, 국가대극원, 중앙민족악단 등에서 배우로 활약하고있는가 하면 국내외 대형콩쿠르에서 수상한 제자도 여러명 된다. 방춘월교수는 전후로 그리스에서 개최된 제11회 아테네국제성악콩클에서 1등상을, 전국 9대 예술대학 가극콩쿠르에서 청년교원조 1등상을, 이딸리아 로마에서 개최된 성악콩클에서 1등상을 수상한적 있다. 길림신문  
678    陰과 陽 댓글:  조회:1953  추천:0  2015-03-17
[ 2015년 03월 17일 08시 53분   조회:3598 ]   벨지크 Flemish 마을에서 그 어느 한 순간...
677    시평 절록/ 김관웅 댓글:  조회:4899  추천:1  2015-03-15
김관웅 시평 절록부분,ㅡㅡㅡ 최룡관씨가 말도 안 되는《제2차 시혁명》의 주체로 부각시킨 이들은 물론 이미 고인이 된 박화나 정몽호 같은 시인들이나 김파나 남영전 같은 60세 좌우의 현역시인만은 아니다. 이에 대해 최룡관씨는 《제2차 시혁명》의 가상적인 《혁명의 주체》를 등장시키고 있다.  《네마리 척후병보다 다른 새로운 척후병들이 나와야 새로운 시의 길을 개척할수 있다. 네마리 척후병들이 제2차 시혁명에서 그냥 척후병이 되자면 이제까지의 자신을 이겨야 하며 새로운 나로 다시 태여나야 한다. 그것은 너무나 간고한 작업이여서 그들에게 그것을 요구한다는것은 어찌보면 무리이기도 하다.  그들은 80년대의 청출어람이였다. 21세기에 와서는 그들을 바탕으로 하는 청출어람이 나와야 한다. 물론 이것은 나이와는 관계없고 세대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지만 필자는 그들에게 희망을 걸지 않는다. 그들의 아래 세대에 희망을 건다.  그들이 누구인가? 필자의 졸견으로 보면 한영남, 김승종, 김영건, 김현순, 김춘택, 김경희, 심예란, 심명주, 박춘월, 허옥진, 허련화 등 시인들중에서 덩지 큰 시인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누가 되는가는 아직 미지수이다. 이 모든 시인들이 아니고 다른 새로운 시인일수도 있다.》  물론 이런 젊은 세대의 시인들이 아직 시를 쓸 시간이 많으니 선배를 초월하여 훌륭한 시인이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이런 신진시인들은 결코 최룡관씨처럼 혁명의 방법으로 이 《네 마리의 척후병》에 대해 무모한 을 단행하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가 기성세대 시인들을 《젖혀버리는》식으로 발전될 수도 없거니와 아직은 그런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알건대 최룡관씨가 이름을 찍은 한영남, 김영건, 김승종, 심예란, 심명주, 박춘월, 허옥진, 김현순, 김춘택, 혀련화 등 《제2차 시혁명》의 혁명주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은《제2차 시혁명》의 주요한 혁명의 대상들인 석화, 리성비, 김학송, 리임원 등으로부터 지극한 가르침과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고 소문으로 많이 전해 들었다. 마치도 병아리가 어미닭은 졸졸 따라다니듯이 하는 이들이 어떻게 자기들의 선배이자 스승이고 은인들을 혁명하겠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일이다. 혁명의 본의(本意)는 목을 베는 것이니까. 《수호전》이나 《삼국연의》 매 장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상투어를 패러디해서 쓴다면 그야말로 《제2차 시혁명의 대상들인 석화, 리성비, 김학송, 리임원의 위태로운 목숨이 어떻게 되였는가를 알려면 하회를 보아야 할것이다.》  한영남, 김승종, 김영건, 김현순, 김춘택, 김경희, 심예란, 심명주, 박춘월, 허옥진, 허련화 등도 모두 최룡관씨의 《제2차 시혁명》의 주장에 공감하거나 동참할 시인들은 아님을 잘아야 할 것이다. 사실 이들중에는 시의 대문에 아직 들어서지 못한 초립동이들이 적지 않으며 《제2차 시혁명》을 일으키려는 동기나 그 리론적 준비나 배경도 갖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절대 최룡관씨가 지금 고취하고 있는 《제2차 시혁명》의 주체가 되지 못할 것이며, 또 되려고도 하지도 않을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시혁명의 주체가 없는시혁명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우에서 최룡관씨가 이름을 찍지 않은 신진 시인들도 많으며 또 이들은 결코 그 시창작의 수준에서 최룡관씨가 이름을 찍은 신진시인들에 비해 짝지지 않다. 이들은 최룡관씨의 시창작주장에 더욱 동조하지 않는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최룡관씨의 《제2차 시혁명》은 애오라지 최룡관씨의 주관적인 발상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대중적인 기반이 없는 공상적인 혁명에 불과하다고 인정한다.  무릇 정치혁명이던 문학혁명이던 성공을 하자면 명확한 혁명의 대상과 그 혁명을 이끌어나갈 혁명의 주체 그리고 광범한 대중적기초와 충분한 혁명의 조건 및 혁명의 명분과 리유가 갖추어져야 한다.  필자는 최룡관씨의 이른바 《제2차 시혁명》은 이 모든 것이 결여되였거나 불충분하다고인정한다.  다만 최룡관씨의 혼자만의 주관성과 맹목성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이 이 물거품처럼 사라질것이라는 것은 불보듯 하다.                                                                                                                          2006년 6월 20일 연길에서 출처(연변모이자 ) : 김관웅 - 최룡관씨의 그릇된 시학관을 반박함 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 김관웅 시평 절록부분,ㅡㅡㅡ  한국 황지우의 《無等》이라는 작품이다. 활자배렬에 의하여 무등산의 형태를 추상하여 기하학적 도형으로 그린 것이다. 활자로 그린 피라밋 같은 삼각형의 추상도형은 모든 산의 일반적인 추상도이지만, 렬거된 단어나 어구의 집합군이 표준언어의 문법을 파괴하고, 시의 관습화된 일반적인 형식까지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과격한 실험에도 불구하고 추상화된 활자도형과 어휘군이 암시하는 의미집단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기교는 한국에서는 리상이 시도한바 있고 1950년대는 구체시 확산운동이 확산되어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를테면 구상, 황지우 등과 오늘날 연변의 최룡관 같은 시인들에게도 그 영향의 여파가 미치고 있다.   최룡관은 황지우(1954 -  )의 「무등(無等)」이란 시를 접할 가능성은 충분하게 있다. 그것은 최룡관이 문덕수의 『시론』을 읽었다고 술회했는데12), 바로 이 시론에서 황지우의 시를 실례로 들면서 고착심상에 대해 설명을 했던 것이다.13) 물론 황지우의 시집을 통해서도 접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한춘, 최룡관, 김승종 등 시인들과 최삼룡, 김룡운, 정몽호 등 시평가들의 한국을 중개로 한 모더니즘의 수용은 모방 → 여과 → 문화해석→ 신 시양식의 창조라는 과정을 겪었다.   이들의 모더니즘에 대한 모방은 우선 모더니즘시문학의 예술적가치에 대한 인정으로서 이질적인 문화로서 자신의 시창작의 가치를 확증해보자고 한 노력이였다. 그러기에 최룡관 같은 이는 모더니즘의 초현실주의 시만 시라고 하고 다른 시는 시가 아니라는 이상한 주장을 펼치기까지 했다. 이처럼 이들은 자신의 가치표준에 좇아 한국 현대시와 현대시론을 나름대로 선택하여 나름대로 해석하였다. 즉 문화여과를 하여 수용했던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한 것은 중국에서 오래 동안 지속되였던 시문학의 정치도구화와 시의 정치사상성에 대한 일면적인 강조에 대한 반동으로부터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탐미주의적인 경향은 력사의 격변기에 처해 있는 중국조선족의 생존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임을 많은 평자들은 인정하고 있다.    출처(연변모이자 ) : 김관웅 - 중한수교 이후 중국조선족시문학에 끼친 한국 시문학의 영향(일부분)     
676    "시지기 - 죽림"의 詩와 관련하여ㅡ(김관웅 평론) 댓글:  조회:4452  추천:1  2015-03-15
  《류행 따르기》와 《전통 지키기》 김 관 웅   회의 주최측(연변작가협회 시창작위원회)에서 사전에 청하지도 않았고 발언을 해달라는 요청도 없다가 두시간 전인 오늘 아침에 갑자기 전화로 회의에 참석해 달라고 통지를 하여 전혀 준비가 전혀 없는 상황입니다. 귀만 가지고 배우려는 동기로 이 회의에 참석했는데 사회자님께서 발언을 해달  라고 부탁하니 황송하고 당황하기 그지없습니다. 다행히 사전에 김승종의 시집을 보았으니 할 말은 좀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앞에서 발언한 여러분들처럼 체계가 잡힌 론문  이 아니라 피상적인 소감밖에는 말씀 올릴수 없음을 널리 량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평자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주의리론으로 김승종의 시를 평하기도 하셨습니다  만 저는 의견을 같이 할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평론현상 자체만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주의에 들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주지하다싶이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의 핵심적인물인 데리다(1931-- )의 헤체주의리론  중에는 《열독의 해체(解構閱讀)》도 있습니다. 데리다는 전통적인 열독과 포스트 모던적  인 열독을 구분하면서 다음과 같이 인정하였습니다. 전통적인 열독방식의 목적은 진리를  찾고 작자의 원의(原意), 즉 원래의 뜻을 충실하게 해석함으로써 독자와 작자 사이의 의사 소통을 도모하는것인데, 이렇게 하다 보면 독자는 작자의 노복(奴僕)이 되고 만다는것입니 다. 이런 까닭에 데리다는 열독을 쾌락을 찾는 유희로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문예작품에 대한 열독과 감상은 그 원의(原意)나 본의(本意)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독(誤讀)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즉 독자의 주관적인 창조성을 발휘할 것을 강조하 면서 텍스트(즉 본문)중의 기의점( 意點)을 찾아내고 자기의 리해와 자기가 수요하는 내  용을 덧붙이거나 부연(敷衍)하여 텍스트의 내용에 새로운 의의가 생겨나거나 본래의  의의가 확장되게 함으로써 의의가 확산되게 하는 열독으로 되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승종의 시를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해석한 것은 대단한 주관적창조성을 발휘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김승종의 시작품에 담긴 원의와 본의와는 무관하게 김승종의 시를 해체주의적 으로 해석하셨는데 이는 분명히 김승종의 시에 대한 오독(誤讀)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 리 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김승종은 데리다의 해체주의리론은 알지 못하고 있을뿐만 해체주의시를 쓴는다는  명확한 창작의식과 동기를 가지고 시창작을 한것도 아님은 본인도 승인하고 있습니다.  둘째, 그러면 김승종이 비록 해체주의리론에 대한 의식적인 리론공부는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시인의 예민한 직각으로 해체주의의 본질을 통찰했거나 해체주의리론대가 데리다 와 비슷한 사색의 경지에 오른것인가? 대답은 역시 《아니올시다》입니다.  그러면 김승종이 마치도 눈 멘 고양이가 죽은 쥐와 맞부딛치듯이 해체주의시와 맞부딛  치게 되였을가요? 이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확률이 아주  낮다고 생각합니다.  김승종을 포함한 우리 연변 조선족들이 비록 아직은 후기공업화시회에서 살고있다고는  할수 없으나 후기공업화사회, 정보화사회, 세계일체화 추세의 흐름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  고있는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지난 세기 70년대에 프랑스에서는 데리다의 해체주의의 붐이 일었습니다. 데리다의 해  체주의는 철저한 회의주의(懷疑主義)와 허무주의(虛無主義), 상대주의 특징을 보여줌으써 포스트 모더니즘사조의 핵심으로 인정 받고 있으며 지금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있는것  만은 사실입니다. 영향을 미칠수 있는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동양사회도 력사적전통으  로 보나 현실적으로 보나 해체주의의 사회심리적기반인 회의주의와 허무주의, 상대주의가 자생(自生)할수 있는 사회심리적인 토대가 마련되여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일부 평자  들이 김승종, 김문학 등 요즘의 많은 문학현상들을 데리다의 해체주의리론으로 분석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그 단적인 실례가 아니겠습니까.  서방 후기공업사회의 산물인 해체주의가 우리 동양의 오늘날 현실사회에서도 공명을 일  으키고있는 까닭은 첫째로는 동양의 문화전통에서 찾을수 있습니다. 세상만사는 돌고 도는 가 봅니다. 가장 새롭고 전위적이라는 데리다의 《해체주의열독리론》과 궤를 같이 하는  견해는 이미 2천여년전의 중국에도 나타났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낡고 진부하다는 중 국전통문론이 가장 새롭다고 할수 있습니다. 적어도 데리다보다는 2천여년이나 먼저 《해  채주의 열독리론》과 비슷한 명제를 내놓았으니 말입니다.  중국 고대 시론에는 《시무달고(詩無達 )》라는 명제가 있습니다. 이 성구에서 달고(  達 )는 해석이라는 뜻이니, 글자대로 풀이를 한다면 시에는 명확한 해석이 있을수 없다는 뜻입니다. 즉 시는 똑부러지게 해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을 문학적용어로 풀이를  한다면 시감상함에서의 심미적차이성이라고나 해야 할것이다. 《오뉴월에 오이를 꺼꾸로  먹어도 다 제나름》이라는 우리 속담과 통하는 말입니다.  김승종의 시집 《보리 한알과 등록되잖는 R와 일회용 삶》은 우선 제목부터가 제나름대  로 해석할수 있는 소지를 충분히 가지고있습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히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혹자는 모더니즘에 가져다 붙이고 혹자는 심지어 포스트 모더니즘에 가져다 붙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죄다 그 사람의 개인의  의견일 따름이지 똑부러지는 해석, 유일 정확한 해석이라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똑부러지는 해석, 유일 정확한 해석이 아니더라고 해도 자기의 해석을 밑받침하는  충분한 론거가 있으면 그런 시평은 그래도 수준급이라고 해야 합니다. 충분한 론거를 제시 히지 못하고 김승종의 시에 모더니즘 혹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는데 대 해 필자는 견해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주관적인 해석이라고 해도 돼지자리에서 개  꿈을 꾸었는데 천자가 될 룡꿈을 꾸었다고 해몽한다면 그것은 빗나가도 너무 빗나간 해몽  일것입니다.  시란 흔히 그 함의가 드러나있지 않는 함축미와 암시적기능을 높이 사기에 감상과정에  서 독자의 련상적작용이 그 어느 쟝르의 문학보다도 더 절실히 요청되고 아울러 감상자들  의 심리, 정감이나 지식수준 같은것이 부동하기에 동일한 시라고 해도 감상자들이 부동함  에 따라서 부동한 해석이 나올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감상의 차이성을 반드시 승인해야 합 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감상의 공동성 혹은 감상의 객관적표준을 부인하는것은 언어도단  이 아닐수 었습니다. 《오뉴월에 오이를 꺼꾸로 먹어도 다 제나름》이기는 하지만 꺼꾸로 먹으면 확실히 쓰고 또 그 맛이 쓰기에 대부분사람들은 꺼꾸로 먹지 않습니다.  최룡관님은 김승종의 이른바 《실험정신》을 높이 평가하면서 《현대시 정초자의 한사  람인 리상시인을 떠올리는 그런 스찔이 매우 다분하다》고 격찬하였습니다. 이 평가의 실  사구시의 여부를 떠나서 김승종의 사부(師父)로서의 최룡관님의 편애정도는 문단의 제씨  들도 리해하고 넘어가야 할줄압니다. 우리 속담에 《고슴도치도 제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 》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리상(李箱)을 현대시의 정초자라고 한 최룡관님의 말씀에는 좀 어페가 있는것 같  습니다. 리상도 근원적으로 따져보면 현대시의 정초자라고 할수 없습니다. 표현주의나 초  현실주의 같은 구미 모더니즘 문학의 영향을 받아 그런 이상한 시나 소설들을 쓰게 된것이 니, 리상의 완전한 창조나 실험은 아닙니다. 리상이 이상(異常)한 존재로 지금까지 조선현 대시문학사에서 줄곧 대접을 받아오고있는 까닭은 적어도 조선에서는 이전에나 그 당시에  나 볼수 없었던 《이상한 시나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즉 1930년대의 조선이라는 이 특  정한 사회적시공간에서의 실험정신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실험정신》의  개념을 어떻게 정립해야 옳을가요? 필자는 《실험정신》은 《절대적실험정신》과 《상대적 실험정신》으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고 인정합니다. 전자는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하거나 세상에서 누구도 해보지 못한 바를 처음으로 실천해본것을 뜻하고, 후자는 선인들이 이미 실험을 해보았으나 자기가 처해있는 특정한 시공간속에서 선인들의 실험한바를 중복하거나 부연하거나 확장하거나 발휘하는것을 뜻한다.  그러면 김승종에게 《실험정신》이 있다고 할수 있겠습니까?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참으  로 《절대적실험정신》은 없으나 《상대적실험정신》은 조금은 있다고 해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상대적실험정신》은 흔히 《실험정신》이란 타이틀을 붙이지 않고 답습이나 모방 또는 경우를 봐서는 표절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여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 실례를 하나만  들어 보기로 합시다.  시를 문자부호의 단순한 라렬로 생각할것이 아니라 시각적인 도형(圖形)을 도입함으로써  시와 회화(繪 )를 결합시키려는 시도는 중국에서는 이미 천년도 넘는 옛날에 시작되였  숩니다. 본세기초의 이딸리아나 로씨야의 미래주의 시문학창작에서는 문자부호로 이루어진 시행을 조작하여 도형을 만들어 보려는 실험이 백년전인 본세기초에 이미 시작되였습니다  . 그 첫사람은 이딸리아의 아폴리네르인데, 그의 시 《비가 내린다》는 시행을 하늘에서  비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는것처럼 배렬했습니다. 로씨야의 마야꼽스끼는 이폴리네르는  이러한 실험을 계승하고 발휘하여 계단식으로 시행을 조작하기도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 절대적실험정신》의 범주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원로시인 구상선생도 한때는 시행 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도 하였는데, 지금 아무리 유명한 시인으로 대접을 받고있다고 해도 이런 장난을 실험으로 치부할수 없으며 모방이라고 할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국  조선족시단의 박화나 최룡관 등 제씨들이 이미 이런 모방을 많이 해왔으니 김승종이 시행  배렬 면에서 아무리 고심참담 경영을 한들 《실험정신이 있다》는 평가를 듣기는 아주 어  려울것입니다. 그리고 수자를 시적인 이미지로 만들어 보려는 노력이 이미 서양의 미래파  시인 아폴리네르의 《69 6666…69…》라는 시에서 보여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리상도 이러한 서양 모더니스트들의 영향을 입어 1933년 서울종로거리에서 경영했던다방의 이름을 《69다방》이라고 시큰둥하게 짓기도 했거니와 몇년전에 연변의 석화시인도 자기의 시에  난삽한 수학공식들을 삽입하여서 물의를 빚어내기도 했습니다.  김승종 본인은 자신의 시행배렬과 아라비아수자나 수학공식의 도입을 두고 아주 새롭다  고 자아감각이 좋을지도 모르지만 연변, 한국 나아가서는 세계적인 안광으로 볼때 이러한 잔재주는 재주가 아니며 형편없는 낡투입니다. 재주를 피우려다가 메주를 쑬수도 있음을  잘 알아야 할것입니다. 참새가 황새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질수도 있  다는 것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때지난 실험을 《실험》이라고 칭친하는것은  동기여하를 불문하고 한 젊은 사람을 그르칠수 있음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로신선생이 언  녕 경고한적이 있는 봉살(捧殺)―올리춰주어서 죽이는것임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이는 욕  해서 사람을 죽이는 마살(罵殺)보다 위해성이 더 큰것입니다.  시는 기교나 형식 면에서 실험도 중요하지만 내용 면에서의 실험이 더욱 중요한 줄로 압  니다. 내용 면에서의 실험정신은 모더니즘의 원조(遠祖)인 보들레르가 《나한테 똥을 달라 ! 그러면 나는 그 똥으로 황금을 만들테다!》라고 소리 지르면서 시의 소재와 내용 면에서 전통을 반대하고 세상을 놀래우는 《이상한 주장》이나 《괴상한 구호》를 부르짖는 방식  으로도 체현할수 있지만, 또 전통을 고수하고 전통을 가꾸고 전통을 고수하는 방식으로 체 현할 수도 있습니다. 표신립이(標新立異)--새로움을 표방하고 이상함을 내세우는것을 통해 체현될수 있을뿐만 아니라, 또 일상생활에서 생기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진실하고 가장  꾸밈없는 감정이나 생각을 아무런 괴상한 재주를 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표현하는것을 통 해서도 체현될수 있습니다. 후자의 가장 좋은 실례로는 한국의 천상병님이나 연변의 젊은 문학도들이 익숙히 알고 있는 황송문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평상심은 바로 도이다(平常心是道)》라고 하고, 동양시론에서는 《대기교(大技巧)는 무기교(無技巧) 》라고 한것 같습니다. 그러면 황송문님의 시 《간장》을 실례로 들어 보기로 합시다. 우리 조용히 썩기로 해요  우리 기꺼이 죽기로 해요 토속의 항아리 가득히 고여  삭아 내린 뒤에  맛으로 살아나는 삶  우리 익어서 살기로 해요 안으로 달여지는 삶  뿌리 깊은 맛으로  은근한 사랑을 맛들게 해요 정겹게 익어가자면  꽃답게 썩어가자면  속맛이 우러날 때까지는  속삭는 아픔도 크겠지요  잦아드는 짠맛이  일어나는 단맛으로  우러날 때까지  우리 곱게 곱게 썩기로 해요  우리 깊이 깊이 익기로 해요 죽음보다 깊이 잠들었다가  다시 깨여나는  부활의 륜회 사랑 위해 기꺼이 죽는  인생이게 해요  사랑 위해 다시 사는  재생이게 해요  ―황송문 《간장》 전문 이 시는 가장 토속적인 간장을 이미지화하였고 전통적인 상징수법을 사용한것 외에는 아  무런 현란한 기교도 부리지 않았습니다. 이 시는 얼핏 보면 그야말로 토속의 간장처럼 아  무 새로움이 없는둣 합니다. 그러나 가장 새로움이 넘치고 웅숭깊은 내용을 담고있는 시이 기도 합니다. 죽움과 재생(death ad rebirth)의 신화적원형의 암시를 통해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추구한 시입니다.  우리 연변은 시골입니다. 시골사람들이 시골사람다운 시를 쓰면 그것이 오히려 세상사람  들에게 새로움으로 다가설것입니다. 소화도 하지 못한 모더니즘이요 포스트 모더니즘이요 하면서 시골에서 류행만 따르다 보면 오히려 중세기의 기사차림으로 모험길에 나선 동키  호테처럼 세상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입니다. 동양의 시골 촌놈이 빠리의 패션쇼에 어색한 양장차림으로 나서면 빈축(嚬蹙)을 사기 십상입니다. 다들 세계적인 류행을 따를  때 홀로 민족적인 전통을 지키는것도 하나의 새로움과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방법으로 될  수도 있습니다. 다들 양장을 할때 한복을 입고 나서면 오히려 그 차림새가 더 세인들의 이 목을 끌수 있습니다. 이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중심의 해체》의 리론에도 맞는다고 생  각합니다.  가장 지역적인것이 가장 민족적인것이 될 수 있고 가장 민족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으로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래의 말로 저의 발언을 마치려고 합니다.  새것이 낡은것일수 있고 낡은것이 새것일수도 있습니다. 새것이라고 해서 다 아름다운것  은 아니고 낡은것이라고 해서 다 추한것은 아닙니다. 2002년 1월 29일 연길에서 출처(연변모이자 ) : 김관웅 - 《류행 따르기》와 《전통 지키기》     
675    그 어느 한때는,ㅡㅡㅡ 댓글:  조회:5736  추천:0  2015-03-15
제24회 《두만강여울소리》시탐구회가 화룡서        제24회 《두만강여울소리》시탐구회가 연변작가협회시가창작위원회와 연변작가협회평론분과의 주최하에 8월 18일부터 19일까지 화룡시에서 열렸다.  24년전 정몽호, 김파, 김성휘 등 시인들의 발기로 시작된 《두만강여울소리》시탐구회는 그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줄곧 열려왔는데 특히 이번 제24회는 연변작가협회 제8차대표대회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시가탐구회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자못 컸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이번 시가탐구회 역시 탐구, 화합, 조화, 정진, 창조의 정신을 추켜들고 전국 각지에서 온 60여명 시인, 평론가들이 참가하였다. 개막식이 있은후 전체 회의참가자들은 유람명승지 선경대를 답사했고 저녁에는 화룡출신 가수, 배우들과 화룡예술단의 배합으로 문예공연도 관람했다. 19일에 있은 응모작 합평회에서는 최삼룡의 《조선족시문학과 중국시문학의 비교에서 본 현대의식》, 전국권의 《우리 시에 대한 관조와 나름대로 사색》, 김경훈의 《두만강여울소리탐구시작품에 대한 조명》 등 론문이 발표되였고 최삼룡, 김경훈, 조룡남, 전국권, 최룡관, 리임원, 김영건 등 7명 심사위원과 연변작가협회 주석 허룡석과 저명한 시인 김철의 감독하에 김창희의 《짝퉁서비스 맛보세요》, 박장길의 《고목》, 김일량의 《가을밤》, 김승종의 《무루의 한 극에서》 등 4수를 우수작품상으로 양화의 《그대는 지금 어떤 옷을 걸치셨습니까》를 신인상으로 선정하고 시상하였다. 회의참가자들은 올해의 작품들이 예년에 비해 한층 세련되고 그 수준도 제고되였다고 입을 모았다. 이번 제24회 《두만강여울소리》 시가탐구회는 화룡민족호텔의 후원으로 진행되였다. [인터넷길림신문 2007-08-21 오전 10:08:03/량영철]  : - 제24회 《두만강여울소리》시탐구회가 화룡서   
종이책     교보문고 책소개 김승종의 시집. 소시민의 팍팍한 삶을 시어를 되풀이함으로써 빚어지는 운율에 실어 노래했다. 외롭고 쓸쓸하다는 말 없이 외롭고 쓸쓸한 세상살이를 비춰주는 시작들이다. [한국 교보문고 제공] 목차   머리말/ 시음병자와 얄미운 시란 놈과 그 잠언1  1.구혼광고  2.찬란한 대화  3.신 혈의 루  4.소리치는 계곡  후기/ 시음병자와 얄미운 시란 놈과 그 잠언2 [한국 교보문고 제공]     보리깜부기와 구혼광고와 흰 그림자의 삶 저자 김승종 지음 출판사 신세림 | 2004.12.30 형태 판형 B6 | 페이지 수 128 | ISBN 정가 판매중지 찜하기   이 책은 어때요?0명 참여 평점 :0.0 필독 비추12345678910필독   이 책을 언급한 곳 리뷰 0 | 서평 0 | 블로그 0 북토크(총 0건)  이 책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주세요.      
673    시인 - 최룡국 댓글:  조회:4284  추천:0  2015-03-15
                                         (우측 첫번째 최룡국 시인) 비가  최룡국  별빛도 검은 밤하늘아래  내 령혼의 외로운 초불밑에서  타오르는 아픔을 읽는다  뼈 마디마디 멍든 가슴속  하나의 피줄기를 세차게 울먹이며  한송의 꿈으로 하얗게 피여나는  아름다운 슬픔을 흐느낀다  둘도 없는 사랑의 땅  내 마음의 꿈나라에서  밀여오는 무궁화꽃 향기 눈물짖고  흩어진 모습들이 깊은 상처  나의 표정을 거울같이 깨고있다  헤여짐에 응어리진 그리움  만남으로 풀릴수 없어  할아버지 전설은 유언처럼 쓸쓸이 남아있고  하늘마저 흔적없이 달라지는  죽음보다 진한 아픔을 따라  내 육신도 비참히 무너지고있다  ********  최룡국 략력:  1956년 길림성 왕청현에서 출생. 연변대학 졸업후 근 10년간 연변작가협회에서 창작활동을 함. 시집으로는 《가끔은 아침이슬처럼 맑고 투명한 사람을 만나고싶다》, 《아버지의 말소리》가 있고 역서로는 《슬픈 우리 젊은 날》, 《북도시선》, 《중국현대산문선집》 등 20여권이 있음        오늘시집 (15) 가끔은 아침이슬처럼 맑고 투명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최룡국 시집 1992년 초판 출판사 : 오늘  발행일 : 1992.4.30 초판  저 자 : 최룡국 
672    시인 - 리련화 댓글:  조회:4297  추천:0  2015-03-15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와 한국윤동주문학상제정위원회가 공동주최한 제2회 《윤동주문학상》시상식이 2월 28일 오전 연길시 세기호텔에서 개최되였다. 시상식에서 리련화시인이 《조각달》로 동시상을, 방산옥시인이 《밤》으로 신인상을 수상하고 한국의 김상회시인의 《사람의 심성》과 미국에 체류중인 조선족시인 강동환의 《피겨 소나타》가 대상의 영예를 지녔다. 동시상 수상자 리련화 (가운데)
671    시조시인 - 최혜숙 댓글:  조회:4355  추천:0  2015-03-15
      장백산 울 어매여 -연변시조협회 수상작(2004년)   힘장수 낳아 키운 장백산 울 어매여   새 천년 세월에도 장수 많이 낳으시되     형제간 칼부림하는 장수만은 낳지 마소   최혜숙(의학박사)          
670    시인 - 박룡철 댓글:  조회:3972  추천:0  2015-03-15
아침세수 ○ 박룡철 세면기의 수도물을  손바닥에 고여 담고  등을 굽혀 얼굴을  가져다댑니다 손바닥안에 쏙 들어오는  어제의 내 얼굴이  오늘의 찬물에 젖어  손가락사이로 빠져나갑니다 때묻지 않고 산다는건  참으로 어려운 일 비누거품을 칠하고  아직 남아있는  어제의 흔적들을  조물조물 문질러버리고 그리고나서 흘깃  거울을 쳐다봅니다 물방울 숭숭 달고섰는  또 이리 시원한 아침이  그 속에 비끼여  말쑥하게 흐릅니다
669    시인 - 김미화 댓글:  조회:3892  추천:0  2015-03-15
  연변대학 前 총장 손동식(孫東植), 제2회 “민초 해외문학상” 차상수상자 김미화(金美花) 시인
668    동시인 - 김성룡 댓글:  조회:3904  추천:1  2015-03-15
현대동시의 창작비결   ㅡ 김성룡 동시집 를 보고 최룡관     한국에서 출판한 김성룡의 동시집 를 보았다.  한국에서 출판하고 한국에서 아동문학상을 받은 시집이다.이로서 한국 작가들과 어깨나란히 하고 문학상을 못타던 중국 조선족 문학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참으로 경하할만한 일이다. 어떻게 이 동시집이 이런 영광을 지니였는가. 그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현대시 기법을 동시 창작에 주입한데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현대시는 상징과 은유를 기초로 하여 창작한다. 상징과 은유라는 이 기초를 떠난 동시는 현대동시라고 말하기 여렵다. 성룡 시인은 에서 이 작업을 뛰여나게 하였다. 상징과 은유를 뛰여나게 하는 작업은 주요하게 짝을 찾는 작업을 잘 하는 것이다. 짝이란 산을 쓴다면 직접 산을 쓰지 않고 산에서 받은 감수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사물이나 새로운 사실을 찾아서 동시를 쓰는 방법을 말한다. 이러한 작업은 현대동시를 창작하는 비결이라고 할수 있다. 아래에 성룡시인이 어떤 방법으로 시적 짝을 찾았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1.색갈에 의한 짝 설정  세상 사물은 모두 색깔이 있다. 색갈은 사물이 자기 존재를 나타내는 표현방식의 하나이다. 금은 노란색 , 은은 은빛색, 하늘은 푸른색, 소는 누른 색...아뭏든 색깔이 없는 사물이 없다. 한 사물의 색깔은 고정불변이 아니다. 지구와 계절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흙은 어떤 곳에서는 붉으레한 색깔이고 어떤 곳에서는 검은 색깔이기도 하다. 나무잎은 금방 피여날 때 연두빛이고 여름이면 짙푸른 색깔이다가 가을에는 빨간 노란 단풍이다가 겨울에는 갈색이 되기도 한다. 지구가 울긋불긋 아름다움은 바로 이러한 천태만별의 색깔의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성룡시인은 색깔에 천착하여 짝을 찾으면서 동시를 써내려 갔다.  하얀 눈  한덩이 굴리고 굴리면  큰  눈덩이 된다  하늘에서 구름이  큰 눈덩이로 내리면  얼마나 무거울가?  하아얀 눈은  착한 하늘의 마음이  땅우에 가볍게 내려진  하아얀 종이이다.  -- 전문  비처럼  주루루-  주루루-  비지땀  흘리며  하늘을 청소하던  구름  너무  너무  더워서  하늘에 벗어놓은  빠알간  모자다  --전문  버드나무  기우뚱 내려다 보는데  하아얀 머리  할머니  비 내린 후  진흙속에  발이  빠진채  -- 첫두련  내린 눈을 하얀 종이라 하고 비온 뒤의 태양을 빨간 모자라 하고 민들레를 할머니라 함은 색깔에 의한 시인의 상상이라 하겠다. 눈과 종이는 다 같은 흰색갈이라는데 동일성이 있고 빠알간 모자와 태양의 색깔은 모두 빨간 색깔이라는데 동일성이 있고 민들레 꽃과 할머니 세여진 머리는 하아양 색깔이라는데 동일성이 있는 것이다. 성룡시인은 이질적인 사물의 동일성을 색깔로부터 유추하고 짝을 찾아서 동시를 만들고 있다.  동시를 창작할 때 색깔이 같거나 비슷한 곳에 안목을 돌려 시적 짝을 설정하고 써내려가는 것은 좋은 동시를 쓰는 비결의 한가지라고 할 수 있다.  2.모양에 의한 짝 설정  성룡 시인의 시작법에서 모양에 의한 시적 짝을 설정한 것이 두변째 비결이라 하겠다.  다 아시다시피 세상사물은 모두 자기 모양이 있다. 모양은 색깔보다 더 천차만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지구에 60여억 인구가 살고있는데 찬찬히 뜯어보면 모양이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모양을 꼭 붙잡고 동시 짝을 설정하는 것은 동시 창작 비결의 한가지라겠다. 성룡시인의 동시를 살펴보자.  줄줄이  줄줄이  내리는 비  양떼를 집으로 모는  천줄기  만줄기  채찍  양떼는 앞에서 뛰고  신 한짝 잃은 모동은  뒤에서 따르고  급하게  급하게  내리는 비  양떼도  목동도  함께 집으로 몬다  -전문  한쪽은 백두산 메고  한쪽은 바다를 멘  길고 긴 멜대  천년만년 메여도  무거운줄 모르는  멜대  그래도  바다가 더 무거운가봐  바다 쪽으로 기울어진  멜대  - 전문  외가집 가는 길은  뱀처럼 우불구불  비탈지며 가는  산길  외가집 이사 갈가  산간 마을을  꽁꽁 묶어놓은  바줄이다  - 점문  참 재미있고 매력적이고 나무랄 데 없는 동시들이다. 비가 채찍으로 둔갑하고 두만강이 멜대로 둔갑하고 외가 집으로 가는 길이 포도청 바줄로 둔갑한다.  이것이 바로 시적 발견이며 시적 사상이다 시적 사상은 우리들이 보통 말하는 사상과 다르다. 시적 사상은 시인이 사물을 보는 새로운 눈길에서 생성된다. 시적 발견속에 시적 사상이 있는 것이다. 시에서 새로운 발견이 없으면 사상도 없다. 이런 시를 언어유희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상기한 세수의 동시에서 성룡 시인이 추구한 새로운 시적 사상은 모양이 비슷한 것으로부터 착안하여 동시를 쓴데 있다. 물론 비와 채찍, 두만강과 멜대, 외가집 가는 길과 포도청 바줄은 완전히 다른 사물이다. 하지만 이 사물들 사이에 모양이 비슷한 점이 털끝만치도 없다고는 할수 없을 것이다. 얼핏 생각해도 우리 앞에 모양이 바슷한 영상이 떠오른다.  모양으로 착안하여 이질적인 사물의 동질성을 추구하고 시적 짝을 찾아 동시를 쓰는 것은 현대 동시 창작의 또 하나의 방법이며 비결이라 하겠다.  3.소리에 의한 시적 짝 설정  성룡 시인의 시에서 소리에 의한 시적 짝을 설정하는 것은 모양이나 색깔처럼 많지는 않다.  세상 사물은 모두 소리를 낸다. 소리가 없는 사물이 없다. 자체의 소리가 있을 뿐만 아나라 타자의 영향속에서 내는 소리도 있다. 사물의 질과 량의 변화, 움직임의 변화에 의하여 내는 소리가 다르다. 인간은 이러한 소리를 듣기도 하고 못 듣기도 한다.  시란 모종의미에서 말하면 이질적인 사물의 동질성을 해석하는 것이라고도 할수 있다.그러할 진대 사물의 소리의 대비를 통하여 소리들이 갖고 있는 동일성으로 짝을 설정하느것은 현대동시 창작의 또 한가지 비결이라 하겠다.  동그란  집안에  스님 셋이  아미타불-  목탁을 두드린다  뚝...  딱...딱...  뚝딱...뚝딱...뚝딱...  득도  못한 스님의  목탁소리  요란하다  - 전문  아이가 무엇인가  빠드득  씹으며  지나간다  아이가 지나간 뒤에  작은 입으로  듬-벙  듬-벙  눈을 뜯어 먹은 흔적  송송  송송  송송  - 전문  임신한 것처럼  배속에 말이  꽉 차있으면서도  말 한마디 없는  벙어리 아이  배속을 텅비게  털어버리고  공기를 꽉 채워 넣고  알금알금 씹어주니  말하지 않던 벙어리아이  개글개글 말한다  - 전문  묘한 시들이다. 간단하면서도 여위지 않은 사상을 갖고 있는 동시들이다.  시계가 세 스님으로 탈바꿈하고 발자국이 입자국으로 탈바꿈하고 꽈리가 벙어리아이로 되었다가 개글거리는 아이로 탈바꿈한다. 무엇에 의하여 이런 탈바꿈이 생기는가. 그것은 소리에 의한 동시짝을 설정하여 생겨난 것이다. 세개의 시계바늘 가는 소리 똑딱, 중이 두드리는 목탁소리 뚝딱. 엄격하게 물리적으로 따지면 시계소리와 목탁소리는 완전히 다른 소리이지만 상사한 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 비슷한 점을 성룡 시인은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시계바늘이 셋이니싸 중도 셋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동그란 시계를 동그란 절당이라고 한 것은 모양으로 유추해낸 것일 것이다. 동시 짝들의 이런 중첩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따로 이야기하기로 하자.  일반적으로 말해서 동시의 짝을 소리로 찾는 것은 다른 방법으로 찾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것은 소리가 가시적인 사물인 것이 아니라 청각에 의하여 전달되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것 ,개념적인 것, 실재하지 않는 것을 그림처럼 떠오르는 이미지로 마들어내는 것은 시인의 몫이며 시인의 재간이며 예술이다. 성룡 시인은 바로 이런 기교를 터득하였다고 하겠다.  4.움직임에 의한 짝 설정  세상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물을 말해보라 하면 천진한 아리들은 산이라고 자신만만해서 대답할 것이다. 대답이 틀린다. 혹자는 바위라고 틀린 대답을 할 수도 있다. 세상에 움직이지 않는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가 하루에 10만 8천리을 자전한다고 해서 틀린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은 죄다 자체의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위도 세월이 지나면 흙으로 되지 않는가. 움직임이 인간의 시야에 의하여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에 의거하여 사물이 움직인다거나 움직이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것은 미상불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동시를 쓸 때 움직임을 포착하여 동시 짝을 설정하는 것은 또 다른 현대동시 창작의 비결이라 하겠다. 나젊은 시인 김성룡씨는 에서 이 방면의 동시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바다는  두터운 책이고  파도는  번지는 페지이다  번졌다  넘기는 파도  공부하려는  바람은  아직 책장을 제대로  번져 넘길 줄 모른다  - 전문  하아얀 운동자에서  아이들의 손에서  외발로  발자국을 찍으며  뛰는 아이  착한 애와 사귀면  착해지고  둔한 애와 사귀면  둔해지는  자기 주장 없이  물위의 갈대 같이  노는 아이  -전문  태양 할아버지  구름 나무를 켠다  하늘 학교 지으려  바삐 서둔다  하늘에서  하아얀 톱밥  부실부실 내린다  - 첫 두련  성룡 시인의 시집에서 움직임으로부터 착안하여 창작된 동시가 다섯편이다. 편수는 많지 않지만 편편이 깔끔하다.  우에 례를 든 동시에서 파도는 책페이지로 변형되고 연필은 외다리 뛴 아이로 변형되고 푸실푸실 내리는 눈은 톱밥으로 변형된다.이러한 변형의 설정이 바로 움직임으로 포착한것이다.파도와 책페이지, 연필과 외다리 뜀 하는 아이, 눈 내림과 톱밥이 떨어지는것들 슬쩍 대비만 해도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기 어렵지 않다. 짝을 찾을 때 우리는 일상성과 기성론리속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엉뚱한 동시가 나올수 없다. 짝을 설정할 때 사물과 사물 사이의 질적 거리가 멀면 멀수록 좋다.일상적이 아닐수록 좋다. 짝의 설정은 그 시인만이 찾은 짝이여야지 남들이 이미 찾아놓은 것은 매력이 없다 .  파도는 책페지요, 연필은 외발뜀 하는 아이이요, 눈은 톱밥이요 하는 것들이 우리들에게 감명 깊게 안겨오는 것은 그 짝들의 설정이 모두 일상성과 기성의 론리성을 벗어난데 있는 것이다 모두가 공동한 감각, 공동한 개념속에는 시가 없으며 신비성도 매력도 죄다 제로다.  5.성질에 의한 짝 설정  이 세상에 사물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사물마다 자기의 독특한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산은 우뚝 솟아있고 물은 아래로만 흐른다. 사람은 밥을 먹고 소는 풀을 먹는다.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열매가 익는다. 이러한 것은 모두 성질의 일종이다. 한가지 사물에 한가지 성질만 있는 것도 아니고 경우에 따라 다른 성질을 가지기도 한다. 성질은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한다.성룡시인은 이런 성질을 시인의 눈으로 괄목하고 시를 쓰고 있다.  우르릉  우르릉  기적소리 흘러간다  비아이들 싣고 흘러간다  구름기차 서지고 않았는데  성급한 비아이들 자  자꾸만 자꾸만 ...  뛰  여  내  린  다  - 전문  가까이 가 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먼데서 보면  분명 품고 있다  없는 것 같은데  항상 있는  엄마의 사랑  - 전문  겨울이면  강도 추운가봐  얼음으로 문을 ㄴ만들어  꽁꽁 닫아버린다  한계절 동안 문풍지 봉한 듯이  꽁꽁 닫혔던 문  봄이 온다는 소식에  얼음문 산산이 부수고  애들 뿌린 돌을  풍덩-  풍덩-  들어오게 열어준다  - 전문  비는 구름속에 있으나 방울로 떨어져야 비가 된다. 떨어지지 않으면 비인 것이 아니라 구름이다. 차에 앉으면 꼭 내려야 한다. 목적지에 도착해도 내리지 않는 손님은 아마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이것을 일종 성질이라 할 수 있다. 안개 낀 산에 서면 안개가 산을 품은 것이 보이지 않지만 멀리서 보면 보인다. 엄마의 사랑도 보이지 않지만 항상 자식을 품어주고 있다. 이것을 일종 성질이라 해도 무방하리라.강이 얼면 얼음이 문이 되어 닫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방하다. 봄이 되면 얼음은 녹아 물은 녹아 다시 자신의 몸을 드러낸다. 이것도 성질이다.  성룡 시인은 이런 성질로부터 비방울은 아이들로, 안개를 엄마의 사랑으로, 강얼음을 꼭 닫긴 문으로 짝을 설정하여 동시를 썼다.  짝을 설정한 다음 어떻게 동시를 써내려 가는가 .짝을 설정하여 동시를 써내려 간 성룡 시인의 시를 보면 크게 두가지가 있다.한 가지는 처럼 론리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나 처럼 서사적으로 풀어 나가는 수도 있겠다. 또한 서사적 진술과 론리적 진술을 혼합시켜 풀어나가는 수도 있겠다. 움직임으로 짝을 설정한 이 그러하다. 이것은 론리적 진술이고 이하는 기본상 서술적 양식이다. 성룡 시인은 경우에 따라 서술형식을 령활하게 알맞게 다루고 있다겠다.  6.의인화로 짝 설정  의인화의 수법은 시적 작업의 고로한 수법이다.  성룡 시인의 시집에는 의인화의 짝 설정이 제일 많다.  인간이 현대문명을 발전시키면서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간 자신이 략탈자로 전락되고 있는 오늘의 시대에 의인화적인 시작업은 더욱 중시를 받아야 할것으로 알고 있다.세상의 모든 사물과 인간은 이 지구에서 평등하게 존재할 권리가 있는 생명체이다. 그러나 인간은 평등권리를 제멋대로 유린하면서 배부를 줄 모르는 탐욕을 채우려고 허둥대고 있다. 중국의 외교정책에 평화공처 5항원칙이 있듯이 우리도 인간밖의 사물들과 평화공처 원칙이 있어야겠는데 인간은 원칙이 없다. 더러 있기는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집행하려 하지 않는다. 의인적인 각도에서 짝을 설정하는 것은 친절성, 평등성, 평화공존성에 유리하다. 인간과 이 세상의 사물이 한집안 식구같은 화목을 도모하는데 유리하겠다.  징검돌 딛고  맑은 시내물에  아침 세수 하는데  물속 내 얼굴  나보고 웃는다  차알싹-  귀쌈 하나 쳐놓고  재미 있다 웃는데  시내물속 내 얼굴  노여움도 모르고  함께 웃는다  - 전문  옷걸이에 걸린  엄마의 고운 치마  빨래줄에서 춤을 춘다  바람의 음악장단에  잘도 맞추어  땀방울을 휘휘 뿌리며  나플나플 춤도 잘 춘다  바람이 힘들다고 가버리니  춤 추던 엄마의 고운 치마  음악반주 없다고  고개 숙이고  서있을뿐  무대에서 내리기 싫어한다  - 전문  까만 하늘은  반들반들  얼음판  별아이 하나  쭉-  미끄럼 타면  너무  멀리  미끄러져  내  려  가  지을 찾아가지 못하는  별 아이  -전문  물 속 내 얼굴, 엄마의 치마, 집을 찾아가지 못하는 별 아이는 모두 인간 밖의 사물이다. 이 인간 밖의 사물들에 의인화의 수법을 부여함으로써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다. 의인화의 수법은 아이들 가슴에 제일 잘 받아지고 아이들사이에서 제일 잘 흐른다고 할 수 있다. 그들한테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친구이고 형제이다.  모든 동시는 의인화의 수법에 물 젖어 씌여 져야 친절하고 감칠맛이 난다. 인간 밖의 사물을 의인화하여 동시를 쓰는 것이 재래의 수법이라고 무시해서는 절대 안 된다.문제는 어떻게 새롭게 발견하고 창조하여 쓰는가에 관계된다. 성룡 시인처럼 새로운 안목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류사성을 벗어난다면 얼마든지 훌륭한 동시를 써낼 수 있다는 것을 명기하여야 한다. 맞으면서도 웃는 내물 속의 내 얼굴, 바람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다가 바람이 잦으니 고개를 숙이고 무대에서 내릴 념을 하지 않는 엄마의 치마, 얼음판에서 미끄럼질하다가 너무 떨어져 집을 찾아갈 수 없게 된 별 아이, 이러한 것들은 이미지 생신성, 기의성으로 원 사물과는 모습을 틀리게 하고 있다. 의인화의 수법의 승패의 관건은 시인의 새로운 시각이 어떠한가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할수 있다.  7.법칙으로 짝 설정  사물의 발전에는 법칙이 있다. 누구도 어길수 없는 법칙이 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자기의 법칙에 의하여 움직인다. 법칙을 떠나서 발전하는 사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도 법칙이고 보름날에 둥그런 달이 뜨는것도 법칙이고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는것도 법칙이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도 법칙이다.이러한 법칙은 그누구의 의사에 의하여 고쳐지는 것이 아니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지고무상한 것이다. 성룡 시인은 이런 사물의 법칙에 의거하여 동시 짝을 설정하면서 동시를 쓰고 있다. 이것도 동시창작의 또 하나의 비결이라겠다.  꼬리만 있는 올챙이  도랑물 올챙이  태양 주으러  꼬리를 흔들흔들  까불며 간다  가다가다가  뒤 발 두 개 줍고  가다가다가  앞발 두 개 줍고  가다가다가  청개구리 한 마리 주었다  가다가다가  태양은 못 줍고  가다가다가  자기를 깜쪽같이 잃어버렸다  - 전문  가을 할아버지  쉭-  바람총 쏜다  나뭇가지에 앉았던  노랑새  빨강새  모든 새들  그 총에 맞아  팔  라  락  떨어진다.  - 전문  흙이불 쓰고  곤히 잔다  해님이 깨워도  계속 잔다  봄비가 적셔줘도  계속 잔다  봄바람이 가겠다니  쏘옥-  파랑손 내밀어 잡으며  일  어  선  다  - 전문  올챙이가 자라서 개구리 되고 가을 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지고 풀씨가 봄이면 새싹으로 자라나는 것은 사물 법칙의 반영이다. 세상 사물은 모두 법칙에 의하여 발전할 뿐만 아니라 법칙에 의하여 서로 어울리게 된다. 일상적으로 말하면 성인시도 그렇고 동시도 그렇다. 모두 사물의 법칙을 존중하여 시를 쓰게 마련이다. 성룡 시인은 사물의 법칙을 존중하고 사물의 법칙에 의거하여 동시의 짝을 찾아서 시를 쓰는데 류의하고 있다. 그렇게 쓴 동시들이 상기한 동시들인데 우리는 여기서 법칙에 의거하여 동시를 쓰는 것은 현대동시 창작의 한가지 훌륭한 비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7.중첩적 짝 설정  우에서 일곱가지 방면으로 성룡 시인이 짝을 설정하여 동시를 쓴 비결을 알아보았다. 한수의 동시는 한가지 짝을 설정하여 쓸 수도 있고 두 가지 이상의 짝을 설정하여 창작할 수도 있다. 짝을 한가지를 설정하였는데 그것이 색깔이다 모양이다 하고 분별할 수도 있지만 어떤 짝들은 이런 것도 되고 저런 것도 된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는 경우도 있다. 성룡 시인이 해를 구름이 벗어놓은 빨간 모자라고 짝을 설정하였는데 우리는 우에서 색깔에 의하여 설정한 짝으로 해석하였다. 이런 설정은 꼭 색깔에 의한 설정이라고만 할수 없다. 모자 모양도 둥그렇고 해님 모양도 둥그러니까 모양에 의한 짝 설정이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말이 빗나가는 같은데 본제로 돌아가자. 한수의 동시에서 짝을 설정할 때 한가지 짝을 설정하는것보다 여러 가지 짝을 설정하는 것은 동시의 내용도 더 풍부해지고 깊이가 더 깊어지고 동시의 폭이 더 넓어지게 한다고 하겠다.  파아란 바다는  파아란 비단천  파도는 비단천에  잡힌 주름이다  륜선들이 바다에서  비단천의 주름을 펴느라  왔다  갔다  다리미질을 한다  - 전문  하아얀 눈  움켜지면  꽃봉오리다  개구쟁이 몸에  맞으면  하얀 꽃으로 핀다  까르르 웃음소리  땅위에  꽃이파리 하얗다  - 전문  에서 1련은 색깔에 의한 짝이고 2련은 모양에 의한 짝이고 3련은 움직임에 의한 짝이라고 하겠다.  에서 1련은 모양에 의한 짝이고 2련은 모양과 색깔이 겹쳐있는 짝이고 3련은 성질에 의한 짝이라겠다.  짝은 잘 설정만 하여도 시가 될 수 있다. 에서 하는 것들을 따로 따로 제목을 내고 짝만 맞추어 놓아도 동시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짝은 독립성이 매우 강한 이미지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동시에서 짝의 중요성을 읽을수 있다. 성룡 시인의 에서 중첩된 짝들로 구축된 동시가 여러 편인데 모두가 쟁쟁한 소리가 난다. 중첩된 짝으로 씌여진 동시는 특별히 립체감이 더 가미되여 독자로 하여금 시는 이렇게 씌여져야 하겠구나 하는 탄성을 지르게 한다.  짝의 설정에는 틀이 없고 울타리가 없고 자유자재로와야 한다. 시인은 상상에 의하여 시를 쓴다. 시인의 상상력이 한계가 없는 것처럼 짝의 설정도 한계가 없는 것이다.  짝은 시를 낳는 모체이다.  짝을 찾아 시를 쓰는 것은 현대시 창작의 한 부류의 수법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사물이 무한히 변화되고 있는만큼 현대시 창작방법도 변화되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짝을 설정하는 것은 새롭고 선진적인 방법이라고 믿어진다.  성룡 시인의 는 동시 우수작들이 운집해 있는 시집으로서 시인이 리용한 수법들은 우리 현대동시창작의 거울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나름대로 김성룡 동시집 를 살펴보았다. 결함도 있다. 어떤 시는 리념적인 것이 다분하거나 언어가 세련되지 못하거나 구성이 째이지 못한 것들이 있는가 하면 짝들의 류사성도 있어 따분한 감이 없지 않다. 시인의 새로운 지평을 기대해 본다.    
667    시인 - 허동식 댓글:  조회:4590  추천:1  2015-03-15
    아리랑     허동식     민요로 부르기에는 가슴에 손을 얹고 감히 생각을 한다     님이 넘는 재로 알기에는 천년을 제단에 놓고 감히 울어도 본다     작은 곡조 하나에도 긴 여운 하나에도     하늘을 내리는 찬바람이 보인다 황토를 씻어가는 강물이 들린다     아주 말하는 한일까     싫다면 만세라도 부르랴         ▲1966년 길림성 화룡 출생. ▲1990년 북경재정무역학원 졸업. ▲2001년 시집 간행. ▲2007년 중국 장백산문학상 수상. ▲2007년 장백산문학상 수상시집 간행. ▲현재, 감숙성 란주시 기쁨여행사 사장   여름에 모아산을 가면                                                               (흑룡강신문=하얼빈)                                                                   (란주) 허동식       여름에 모아산을 가면 세전벌을 지키는 멀고 가까운 산들이 어릴적 기억에 푸르른 풍경을 건들어진 음악으로 만들어서 둥기당 둥기당 튕기고 있었다     여름에 모아산을 가면 일본을 사는 남철심 시인의 시문(詩文)에까지 멋들어지던 가 가둑나무 가지에 주렁지고 있었고 아직은 세련되지 않았다는 서울말씨들이 나란히 흔들리고 있었다     여름에 모아산을 가면 내가 코물을 빨아먹으며 클적에는 시집장가 가는 사람들마저도 좋아하였던 국방색 곤색은 눈에 보이지를 않았고 온갖 색상들이 숲속을 물결치고 있었는데 나는 고향사람들 울긋불긋 옷차림에 화려하다는 상표를 붙여주면 좋을가 아니면 괜찮은 인생을 산다는 딱지를 붙여주면 좋을가고 싱거운 생각을 짜게 하였다     여름에 모아산을 가면 앞을 걷는 형의 발에서 수입제 등산용 신발이 큼직하게 번뜩거리고 있었는데 나는 로무를 하다가 귀국한 형의 아픈 허리를 쳐다보며 형의 어깨에 수입제 배낭이 덜렁거리고 형의 발에 이 아닌 뚱뚱보신이 편하다 한들 왜 그런지 왜 그런지 세상만사중의 어떤 변화는 싫다는 생각을 굴려보았다     익숙하던 풍경이 적잖게 낯설어지고 흑토와 찬바람 이던 말씨가 투박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말씨로 변해가고 단조롭던 옷차림이 만국기로 바뀌여 가는것은 나의 재간으로서 견디여 낼수는 있다 그리고 형을 포함하는 고향사람들이 신물나는 가난을 국방색과 곤색처럼 벗어내치는 일은 좋아한다     그런데 여름에 모아산을 가면 장백호랑이 조각상 아래에 두런두런 들려오는 --이번까지 나가면 5번째인데 집생각이 나면 사람이 미쳐버린다우! 하는 고향사람들 이야기와 --형은 다시 나가면 거의 10년째인데 언제면 마무리요? 하는 나의 말과 형이 슬며시 꺼내놓는 --너는 래년 에 집으로 나올만 하니? 에는 고향사람들과 형과 나의 정처없이 떠도는 외로움과 그리움이 서시장 랭면사발에 들어있는 처럼 듬뿍듬뿍한것은 왜 그런지 왜 그런지 나는 견디여 낼수가 없었다     여름에 모아산을 다시 가본것은 아마도 반년전 일이다 오늘은 시같지도 않은 시를 긁적거리며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어느덧 겨울의 이 위이잉 위이잉 운다 그런데 이 겨울은 고향의 겨울이 아니고 란주의 겨울이다     밤에 꿈을 만들어서라도 모아산을 가면 나는 구불구불 산길을 헤매이고 있었고 내려다보이는 세전벌은 크고 넓어서 또다시 둥기당 둥기당 풍경이였으나 태줄을 묻어둔 화룡으로 올라가려면 서성에서 넘어서야 목도고개가 보이지 않아서 나는 안타까웠고 그래서 질끔 울었던것 같다.       계급과 민족 초월하는 인간영성     실리때문에 가짜예술 취급 받아   어릴 때 '홍색낭자군' 영화를 몇 번이나 구경했던가? 나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남패천이라는 놈은 가증스러웠고 또 발레 가무극 '홍색낭자군'을 쳐다보면서 우리 시골애들은 다리를 건뜻건뜻 높게 들어보이는 홍상천인지 하는 사람을 두고 '에그, 사타구니 찢어지겠다'를 부르짖었다. 애들은 물론 시골어른들을 상대해서도 홍상천이 다리를 놀이감처럼 놀리는 장면들은 이야기거리가 너무나도 단조롭고 오락성이 적어서 재미가 없었다.   그러나 '홍색낭자군'은 발레 오페라라는 시각에서만 보면 명작이 아닐 수가 없고 대작이 아닐 수가 없다. '사타구니 찢어지는 것들'이 바로 발레의 극치이고 서방세계의 발레와 중국 고전희곡중의 정화들이 유기적으로 조화된 것들이다. 남패천을 대표로 하는 지주계급의 악착함을 죄다 무시하고 홍상천과 여주인공 오경화의 영웅적인 기상을 죄다 무시하고 시대적인 배경과 사회정치적 배경을 죄다 무시해도 '홍색낭자군'은 사실 발레극의 경전이다. 말하자면 예술의 일맥인 형식미의 하나인 무의 극치에 오른 것이다.   내용을 떠난 형식미는 존재의 가능성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적어도 발생의 가능성을 잃게 된다. 그런데 왜 수많은 예술품들이 나중에는 내용과는 아주 상관이 없이 오똑하게 존재하여 인간영성의 눈부심을 표현하고 또 인간들의 매혹을 독차지하게 되는 것일까? 그 영문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다.   도구적 이성이 주류의식으로 된 사회에서는 계급성이요 민족성이요 하는 것들만이 울부짖고 가치적 이성은 가끔 수욕을 당한다. 그러면서 계급과 민족을 초월하여 공존하는 인간영성이라는 것은 실리때문에 가짜예술이라는 평판을 받는다. 그러나 그런 구체적인 세부를 무시하면 어느 개인도 조직도 민족도 나라도 필경은 인간영성미에 대한 추구를 멈추지는 못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고려청자도 고려백자도 조선반도에서의 탄생과도 관련이 크지 않게 다만 인간영성의 걸작으로서 세인들의 찬탄을 받는다. 윤동주시인의 시작들도 그가 중국 조선족시인이든 한국시인이든 상관이 없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다. 출처(연변모이자) : 칼럼 - [허동식] 예술의 일맥인 형식미와 인간영성  광란의 밤 고뇌하는 사나이                     ―허동식의 ≪무색여름≫을 읽고                                          2001년급 조선문학 석사연구생 김영수  ≪무색여름≫ 저자 략력  필명 허암  1966년 화룡현 토산에서 출생  1990년 북경재정무역학원 졸업  80년대초부터 시작품 발표  현재 란주에서 관광업에 종사  ≪무색여름≫의 저자 허동식은 재기가 있는 청년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연변문단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다. 필자는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출판한 그의 시집 ≪무색여름≫을 어느 따스한 여름날에 감명깊게, 그러나 서늘하다 못해 섬뜩한 느낌마저 받으며 읽은적이 있다. 그만큼 그의 시는 필자에게는 신선하고도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처절한 고독과 외로움이 찾아오는 밤, 그에 어울리는 시어들의 광란적인 야간비행, 주위를 둘러보면 삭막한 황야와 스치는 바람, 이 밤과 바람에 허무의 긴 모가지를 드리우고 핀 꽃을 큰발로 힝힝 짓밟으며 철저히 고뇌의 오르가슴을 느끼는 한 사나이가 있다.  그 사나이가 바로 ≪무색여름≫의 저자 허동식 시인이다. 필자는 비록 그를 한번도 만나본적이 없지만 그러나 그의 시에서 필자는 번뜩이는 한 젊의 지성의 미와 시혼을 발견하였으며 삶에 대한 참사랑을 느낄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주로 서정적주인공의 허무의식과 허무에 대한 대응자세가 기본 모티브가 된다는 전제하에 허동식의 시세계를 단계적으로 고찰하여 그의 시세계의 실체는 무엇이며 그의 시의 예술성은 어디에 있느냐를 밝히는데 있다.  그의 많은 시편들은 과격한 언어이미지의 사용과 시인의 치렬한 정서적충동 및 삶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력력히 담은 시라고 할수 있다. 그가 서두에서 ≪실말이지만 20대 나이에 소위 〈무색여름〉을 감상하는 일은 저에게는 힘이 부치는 일이였고 또 어느정도 불행한 일이였습니다. 바람도 들지 못하는 작은 방안에서 우리에게 차례진 가난의 이름도, 정체도, 깊이도 잘 모르고 이미 썩기 시작한 가난의 송장을 해부한다고 서두른 마음의 작업이 〈무색여름〉입니다.≫ 라고 밝히고 있다.  밤마다/대들보마다/목메는 바줄마다/죽어도/거슨 눈으로/구멍 든 별빛/우러러/낑낑 죽는다/. 삭막한 들녘 어디에서/언젠가 아니면 오늘인가/심장은 빼앗겨/시뻘건 혀마저 빼물고/죽어야만 하는걸가/. 뚜껑 같은 하늘아래/불이라도 질러야 할/습관된 죽음이 흘러넘친다. (전편) 〈습관된 죽음〉  우선 이 시를 살펴보면 한마디로 말해서 광란의 밤이요, 악마적인 이미지의 시어들로 장식되여 있다. 서정적주인공은 밤마다 바줄에 목을 메고 혀를 빼물며 죽음의 련습까지 한다.  캄캄한 밤/저의 마음은/무색여름에/먹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울지를 마세요/다만/계절의 무덤에 핀 꽃을/큰 발로 힝힝 짓밟아/피를/흔건히 내고싶습니다/, 밝은 한낮도 좋고/ 우거진 기분도 좋지만/신물나는 뺑뺑 돌림만이/ 죽도록 싫은건/어찌합니까. (전편) 〈무색여름〉  역시 캄캄한 밤이다. 아울러 여름은 오색령롱한 색체의 조합으로 응당 아름다워야 하겠지만 서정적주인공에게는 무감감하게 안겨오고 모든 것이 단조로운 나머지 신물이 날 지경이다.  두편의 시는 일관된 권태와 허무, 나아가서는 죽음의 예고가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시적화자는 외로운 밤의 죽음속에서 마지막 광란과 발악과 같이 불을 지르고 꽃을 밟아 피를 낸다고 하다싶이 불이나 피는 진붉은 색으로 강렬한 생명적 충동과 욕구를 나타내고 있다.  필자는 그의 시에서의 첫 단계는 바로 삶의 허무와 권태로움에 대한 시인의 분노와 반항의식을 보여주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 분노와 저항은 결코 허무라는 유령을 다스리지 못하였고 맹목적이였을뿐이였다. 파괴라는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잠시간 울분해소의 마음은 가져오지만 결코 시적화자의 몸부림은 허무의 심연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시인은 이제 허무를 다스리기 위한 려행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것은 아늑하고 몽롱한 〈몽경〉으로의 려행이였다. 지친 나머지 허무라는 보따리를 허위허위 질머지고 어머니의 모태처럼 편안한 요람의 몽경속으로 안주하고저 한다.  황혼이 깃들 때/ 한그루 나무의/날개 없는 꿈이/안개에 묻힌다/, 기러기 우는 시절/강물은/락엽 싣고/멀리도 가누나/, 네가 한그루 시인이라면/고독은 한수의 시/바다는/어째서 그곳에 있을가. (전편) 〈몽경2〉  자세히 살펴보면 은유와 상징적이미지 원형적이미지로 전편이 화려하게 장식된 시이다. 1련은 허무의 상황속에서 희망이란 기대할수 없고 자신인 시적화자는 안개가 묻힌 꿈으로 숨는다는 것이다. 2련에서의 강물은 시간의 상징으로 죽음을 의미하는 락엽은 싣고 가며 이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무상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제 시적화자는 3련에서 바다를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 다수의 ≪몽경≫계렬의 작품들에는 바다가 등장한다.  그렇다/이야기는 흐린 꿈일가/하늘, 바다 그리고 수평선/이는 그중 ≪몽경1≫에서 나오는 마지막 구절들이다. 바다의 원형은 모든 생명의 어머니, 정신적신비, 무의식의 세계이다. 아늑하고 요람같은 몽경속에서 바다를 만나지 않으면 안되는 리유가 여기 있다. 허무의 이야기는 꿈과 하늘, 바다와 아득한 수평선의 몽롱함속에서 잠간은 희석되고 무마될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잠간일뿐 그닥 여의치가 않다. 자기 움추림에 젖어들어 아늑함과 허무를 달랜다는 것은 시인의 말처럼 /너와 나는 /잃은 것은 없다만/찾음의 비겁은 있다. (3련) 〈몽경6〉는 것이다.  /가자, 손잡고/바다가에 서보자/낮과 밤의 교역을/웃어보자. (마지막 련) 〈몽경8〉이제 시적화자는 곤곤한 요람의 꿈속에서 깨여나 기지개를 죽 펴며 현실을 바라본다. 그러나 아늑함의 관성을 벗어버리지 못한채 허무의 극복을 이제는 여유로운 사랑에 안주하려는 마음가짐을 기루고 있다.  동서남북이 사랑 한자로 빛나고/그것을 가슴 뿌듯이 받아안으며/만경창파에 돛이 하얗게 날리고/별하늘엔 무지개 찬연히 걸린다. 〈동서남북〉(2련)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이상 시적화자가 즐겨 애용하던 악마적이미지나, 과격한 남성적인 용어는 잠간 유보된채 부드럽고 원순한 이미지의 시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여직껏 음침하고 냉소적이였던 우리의 시적화자에게도 마음 한구석은 살뜰학 로맨틱한 부분이 없지 않고 있다는점이 자못 신기하다. 또한 이 사랑은 ≪비속의 코스모스≫에서 〈잘 번진 모습 청초하다〉는 〈목이 긴 가시내〉, 〈호령이 쩡쩡 울리고〉〈저만을 지켜주는〉어머님, 다정다감하고 어여쁜 안해, 〈봄이 막 오는 창가에 서면〉〈흰 돛 타고 어여삐 오신〉다는 누나, 어머니가 계시고 시적화자에게 그리움을 알뜰이 심어주는 고향이 미소하며 서정적주인공을 아기같이 포옹하고 달래주는 폭넓은 사랑이다. 때문에 이 시편들에서 역시 몽경속의 아늑함과 같은 정서와 부드러운 이미지의 전개, 무성한 동년의 추억과 전설들이 내포된 속에서 시적화자는 따스한 안위를 받는다. 상응한 시편들은 ≪비속의 코스모스≫외에 ≪장식≫, ≪동서남북≫, ≪어머님전상서≫, ≪남쪽≫, ≪고향≫, ≪마음에 닿는 풍경≫, ≪누나≫등이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서정적주인공은 항상 삶의 허무의식에 사로잡히고 있다. 그가 고민하는 것은 이제 여직껏 허무극복의 려행을 통해서, 그리고 보다 성숙된 의식차원에서 고려되는 인간실존의 본질에 대한 문제였다. 모든 사랑은 유한된 사랑이고 마음이 움직인다는 자체 역시 마음의 표면현상이라고 불자는 말하는만큼 이러루한 사랑은 결국은 흘러서 흔적없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죽을때까지 인간을 괴롭히는 허무라는 유령이였다. 따라서 작품 ≪함정≫제목자체는 깊은 상징적의미를 띠고 있다. 시적화자는 닫힌 마음이라는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성한 꿈과 옅은 눈물로 보내고 있다.  북풍이/색잃은 손수건처럼/영글지 못한 하늘 귀퉁이에/떠온다/닫힌 마음은 열리지 못하고/꿈은 무성하나 눈물은 옅다/ (1련) /그러나 할배야/성인 된/지금은/네가 죽던 광경만이 보고싶다/할배야, 내 할배야/너는 어떻게 죽었나/나는 또 어떻게 죽어야 하나. (3련) 〈함정〉 주지하다싶이 닫힌 마음 그 자체는 자재적인 존재요, 타인과의 거리감이 유보되는 존재이다. 그리고 시인은 작품의 결말에서 /너는 어떻게 죽었고/나는 또 어떻게 죽어야 하나/ 라는 물음을 련속 제기함으로써 인간의 존재와 더불어 인생의 허무에 대한 이의와 회의를 제출하고 있다.  그렇지만 시적화자는 물음만 제기하였을뿐 아직도 본질의 깊이에는 이르지 못하였고 극복하고저 하면 할수록 허무의 심연은 더욱 깊기만 하였다.  굶주린 늑대의 무리같이/낮과 밤 등어리를 타고 넘어/넘치고 있다/ 삼키고 있다/, /구월은 손들어/ 종을 울리려 하나/귀가 없다/슬픈 잠꼬대의/무지만 껑충하다/, /주여, 버리나이까/애들의 죽음은 애원뿐/칼점 같은 통곡은 어디로 갔을가. (전편) 〈범람〉 보다싶이 시적화자는 그 어느때보다 고통스러워한다. 〈굶주린 늑대〉, 〈칼점 같은 통곡〉, 〈죽음〉, 〈삼키다〉등 악마적 이미지는 제목 그대로 시전편에 범람하고 있다. 악착같이 달려드는 허무와 권태의 습격속에서 애들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더 무기력하고 고립무원한 상황을 제시한다. 〈주여, 버리나이까〉라는 용어를 사용하기까지 심각하게 되어있다.  또 결말부분에서 〈애들의 죽음은 애원뿐/칼점 같은 통곡은/어디로 갔을가〉라는 반문을 제기함으로써 그 이상 더 나아갈수 없는 인간의 허무, 고독의 극한 상황을 제시한다. 실로 시적화자에게 인간실존에 대한 의미가 문제시되였던만큼 그에 정비례하여 허무에 대한 시적화자의 체험도 극점에 도달하게 되었던것이다. 이것을 얼마나 잘 설명해주냐하는 것은 큰 편폭을 차지하는 ≪밤의 시≫로서도 알수 있다.  밤의 창문을 닫고/낮의 이름을 부르면/낮도/천근 호흡과/피의 처절썩 흐름으로/대답한다. (15련) 〈밤의 시〉  허무가 극점에 도달하였을 때 그 체험이 철저함으로써 시적화자는 이제 허무에 대한 대응자세가 다르게 변화되는 계기를 안아온다. 마치 체념이 철저해질 때 삼라만상의 근원을 바라볼수 있는 관조의 눈이 열리는것과 같다.  지치여서 부르던 배노래는/띠염띠염 사라지고/천년을 헤매이던 돛배는/닻을 내린다/ (략) /가슴에 얹은 손이 떨림은/ 퇴색된 빛이 여직 날림은/세월의 지꿎은 돌아봄이다/찬란한 벽화를 깨여보자. (1련의 부분) 〈연역시대〉  천년을 헤매이던 돛배가 닻을 내림으로서, 돌아다 보는 세월의 지꿎은 벽화를 깨여봄으로써 시적화자에게서 우리는 무언가의 변화와 기대를 가져보아도 바람직한 것이다.  네가 이야기하는 바다는 물이다/ 세월이 가면/어떤 매듭이든지 풀려지고/어떤 고집이든디 녹는다는/아름다운 내용을/밤낮으로 설레이는 바다/ (2련) 네가 들려주는 바다는 이미지다/ 날이 밝으면/밤에 키운 고독과/깊이 품어온 아픔을/빨간 해살사이 갈매기 울음아래/곱게도 물들이는 바다. (3련) 〈바다이야기〉.  시적화자는 내면의 고름덩이같은 고독과 아픔을 표면화시킨다. 그 고독과 아픔을 바다에 빠알갛게 물들이고 바다는 또 어떠한 매듭이나 고집의 옹이를 녹여주며 아름답게 설레이고 있다. 여기서 역시 바다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지나온 모든 허무와 고독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바다같이 포용하려는 슬기로운 지혜의 눈이 약간씩 트이고 있다. 허무에 대한 거부의 격렬한 몸부림이나 회피보다도 넓은 포옹으로 다스릴 때 시적화자에게는 무색여름이 아닌 ≪봄의 깊이≫를 즐기는 여유로움도 다소간 생긴다. 시적화자는 무진한 깊이를 가지고 있는 봄의 깊은 정서속 호흡속으로 첨벙첨벙 아이처럼 자맥질을 하고 싶어한다. 이밖에도 상응한 작품 ≪눈이 오던 날≫, ≪무제(6)≫등이 있다. 허나 수시로 침습하는 허무의 음영과 그림자는 소실되지 않은채 간헐적으로 시적화자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음침하고 섬뜩한 ≪백양정의 추억≫을 안겨드리기에 충분하다.  이제까지는 이 시집의 제 1집으로부터 제 6집까지 대부분 그가 대학교 시절에 쓴 시들을 단계적으로 고찰하였다. 지금까지는 우리 역시 서정적주인공과 더불어 허무와 외로움 극복의 려행을 함께 하여 온셈이다. 제 7집 ≪순례≫는 시인이 근간에 려행하면서 쓴 시이다.  이 시기는 아마 시인이 란주에서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업상의 여건으로 여기저기 려행을 하면서 쓴 시들일 것이다. 대학이란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생활과 함깨 사회인의 역할을 다하며 쓴 시들이라는 점에서 필자의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순간도 우리는 서정적주인공과 함께 광대무변한 자연의 려행과 순시를 통하여 그가 대학시절에 그렇게 뼈저리게 체험하였던 삶의 허무와 외로움은 어떻게 극복의 그라프를 그려나가며 그가 오늘의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어떤 또다른 육성을 가졌는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와서는 시인은 상당히 변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종종 생활에서 마음이 답답하고 생활에 실증을 느낄 때 주변사람들로부터 려행을 권고받는다. 려행을 통하여 대자연의 운치를 마음껏 감상하고 그 초연함에 마음도 따라서 넓어지며 자연의 심성을 닮으려는 마음도 있는 것이다. 허동식 시인의 경우 대학이란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생활을 한다는 자체와 사업상의 리유로 주어진 려행생활은 그에게 드넓은 시야를 트여주는 동시에 시적변모의 양상을 가져오기에 충분한 것이다.  서정적주인공은 순례 편에서 자연의 심성 그대로 생활을 대하고 차분한 자아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밤이면/화석은 무너지는 고독속에서/두터워지는 먼지속에서/흙이 나무로 되고 나무가 돌이 되고 돌이 흙으로 되는/이미지를 도란도란 이야기하여/외로운 마음을 잘도 달래주었다. (1련의 부분) 〈화석〉  알타이산에서 주었다는 계수나무 화석쪼각이 흙이 다시 흙으로 되는 이야기를 하며 시적화자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흙-나무-돌-흙〉이 된다는 자연의 소리없는 륜회, 바다가 륙지가 될 오랜 시간동안 너무나 고요히 변화하는 모습, 절로절로의 자아변모와 초연스런 자연의 모습앞에 인간의 허무나 외로움이란 한갖 보잘것없는것에 불과하다. 기나긴 세월동안 온갖 고행을 겪어온 수행자와 같이 화석이 들려주는 지혜의 육성에 시인은 귀를 기울인다. 따라서 시인은 ≪타클라마칸≫사막에서 진한 감동을 느끼며 장엄한 선언서를 랑독하고 있다.  타클라마칸은 도고한 탄생이다/온갖 습기는 하늘에 날리고/령혼의 흉터를 지워주는/새롭게 시작되는 탄생이다. (4련) ≪타클라마칸≫ 이는 다름아닌 시인의 새로운 탄생지이다. 자연의 태고연하고 타클라마칸의 드넓은 심성을 닮고있는 시인의 새로운 탄생인 것이다.  순례편에서는 인간삶의 허무나 외로움은 더 이상 기승을 부리지 않는다. 웅장하고 거대한 자연물들인 고원이나 산맥, 호수, 사막, 하천 등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주제상으로도 자연의 태고연함과 웅위로움을 노래하였고 그 자연의 심성에 취해 서정적주인공은 진한 감동은 적고 있다. 상응한 시편들로는 ≪파미르≫, ≪돈황≫, ≪타클라마칸≫, ≪진령산맥≫, ≪청해호≫, ≪황하≫ 등이 있다. 허나 전반 정서적흐름을 놓고 볼 때 허무와 외로움, 고독의 정서는 작품의 밑바닥에 깔려 무언가의 묵직하고 침울한 분위기를 조성해주고 있다. ≪내가 사는 도시≫, ≪상형문자≫ 등 시편들은 이 점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특히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현대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자연과는 동떨어진 도시인들의 찌든 심태를 상징의 수법을 빌어 함축성있게 그리고 있다.  허동식시인은 유난히도 인간삶의 허무와 외로움에 모대기였던 시인인 것 같다. 그의 시는 대체로 파괴적이미지나 악마적이미지, 상징적이미지를 창조함으로써 특정한 시대 썩기 시작한 가난의 송장을 해부한다고 말하다싶이 그는 날카로운 메스를 들고 삶의 허무를 철저하게 해부하고 극복하고저 한다. 또한 오늘의 시대를 살아감에 있어서 허동식시인은 나름대로의 생활을 영위하는 지혜를 터특하였고 그것을 시상에 용해시켜 나만의 독특한 모습, 이 시대의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허동식 시인은 함축되고 칼날같은 시어의 구성과 함경도지방의 거센 사투리를 사용하여 남성적인 야성의 미적세계를 개척하였고 거치른 언어구사에 의한 각종 이미지 창조에 주력하고 있다.  필자가 흥미롭다고 여기는 것은 시인의 작품전편을 걸쳐 절대적인 밤의 세계가 펼펴져 있는 것이다. 밤이라는 것은 어둠과 흑색을 의마하며 흑색의 원형은 혼돈, 신비, 미지, 죽음, 우울, 무의식의 세계이다. 따라서 허동식시인의 작품에서 서정적주인공은 왜 죽음의 의식에 사로잡혔으며 정서적으로 처절한 슬픔과 우울, 그에 따르는 파괴적인 행위와 격렬하고 공격성적인 행위조차도 서슴없이 저질렀는가에 대해서도 해명이 된다. 물론 이것은 외부적으로부터 오는 허무에 대한 치렬한 대항과 몸부림으로 여직껏 설명되여 있지만 다른 한 측면으로 시인 자신의 심층깊이 내재한 무의식측면을 관조하는것도 전반 시작품에 대한 해석에 도움이 될수 있는 것이다. 뿐더러 이런 현상들은 비단 그의 시의 결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창조의 근원적인 원동력과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잡아 비틀면/너의 숨기가/검은 피같이/뚝뚝 흐를 것이다/, /거리에 활개치는/악의 부름속에/바람이/온갖 탈을/훌렁 벗긴다/, /그러면 너는/머리숙여 합장하고/너무나 억울하다/고웁게 인사한다.  이는 ≪밤≫의 전편으로서 그야말로 광란적인 밤이요, 온갖 보이지 않는 음모가 숨어있을 것 같은 밤이다. 서정적주인공은 이 밤의 어둠속에서 격렬한 몸부림과 공격적인 행위를 감행한다. 또한 피의 이미지가 전개되는데 피의 원형은 긍정적인 면에서는 힘의 상징이고 부정적인면에서는 죽음의 상징이다. 이런 죽음이면서도 동시에 재생을 의미하는 원형적상황은 밤의 원형적상황과 더불어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심층적인 심리기반을 말해준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은 매개인의 인격중에는 네가지 원형이 있는데 그중의 한가지 원형은 바로 음영(阴影)이라는 것이다. 음영은 인간의 심령중에서 가장 암흑하고 깊숙한 부분으로서 집체무의식중 인류의 조상에게서 유전되여온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가장 원초적인 공격성과 격정을 띠게 하고, 광렬적인 경향에 치우치게 하며 동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창조성과 생명력에 충천되여 있게끔 한다. 음영을 억제하고 배척하는 것은 한 인간으 인격을 창백하고 무력하게 만든다고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시작품의 전편에 걸쳐 전개되는 밤의 이미지나 상황적제시 및 그에 따르는 일련의 공격성적인것과 격정적인 행위가 각종 이미지로 강렬하게 전개되고 활력소를 이루는 것은 시인의 무의식측면인 음영의 조종이요, 투영이라 할수도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시에서 악마적인 시어들로 장식되여 있는것도 그만의 독특한 시적인 풍격이 되는 동시에 우리 개개인 인간들의 무의식의 공동된 부분, 집체무의식을 대변하였다고 하여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허동식 시인은 아직도 청년시인이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그의 시집들에서는 아직 심도깊은 철학적사고가 결여되고 어떤 시는 너무나도 쉽게 씌여지고 관념성에 치우쳤는가 하면 조잡한 시어들과 불필요한 감정과 정서를 류출하고 있다. 이를테면 시 ≪수인≫, ≪별빛≫과 ≪도예≫와 같은 작품들이다. 그리고 보다도 존재적 삶이 가지는 여유로움에서 〈바람맞은 꽃〉이 아니라 생활의 싱싱한 꽃을 노래하였으면 하는 기대도 없지 않다.  비가 멎은 어느 아침/회색 하늘에 울리던/례베소리 긴 여음이/허공에 던진 돌맹이가/시야에서 사라져 가듯이/툭 끊기여 가면/모스크의 둥근 지붕에 열린/외로운 초생달을 떠나/번뜩이는 해빛속을/살처럼 솟구치는 비둘기에/가슴이 떨린다. (전편) 〈모스크와 비둘기〉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시구이다. 두고두고 음미할수 있는 아름다운 의경과 감동을 읽는이들에게 선물한것에 대하여 마음의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다. 또한 날카롭게 번뜩이는 해빛속을 살처럼 솟구치는 비둘기처럼, 더 아름다운 자유의 사세계로 한번더 번뜩이는 비상을 시도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666    시인 - 천애옥 댓글:  조회:4312  추천:0  2015-03-15
     고려대가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27일 실시한 ‘전국 외국인 한글 백일장대회’에서 중국교포 3세인 이미옥(李美玉·여·22·서울대 국어교육과)씨가 최고상인 문화관광부장관상을 받았다.     그는 800여 명의 외국인이 참가한 백일장에서 제시된 제목 ‘고향의 봄’에 맞춰 고향 연변(延邊)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추억을 풀어냈다.     “중국 교포들은 자신이 중국사람인지 한국사람인지 혼란스러워 해요. 어릴적 옌벤이 나의 고향인가 고민했었죠. 그런 경험과 생각을 담담히 적었습니다.”    그는 연변라디오 한국지사에 근무하는 어머니를 따라 2000년 3월 한국에 왔다. 이씨는 평생 문학도(文學徒)로 남겠다고 꿈꿨고 결국 국어를 전공하게 됐다. 그의 어머니 천애옥 여사는 시인으로, 1999년 연변일보가 주최하는 해란강, 제일제당상 시 본상을 수상한바 있다.    
665    시인 - 리승호 댓글:  조회:4176  추천:0  2015-03-15
리승호시인은 시집 《안해》를 내놓아 장백산 《모드모아문학상》을 수상, 문필회 고문인 박선석소설가는 7년 반을 분투하여 170만자의 장편대하소설 《쓴웃음》을 써내여 장백산 《모드모아 문학상》을 수상했고 2년 반동안 글농사를 지어 장편련재소설 《재해》를 세상에 내놓았다. 협회 부주석 류시홍(70세)시인의 시묶음, 그 외에도 여러 회원의 많은 작품들이 국내외 신문, 잡지, 방송프로를 통해 널리 공개되였다.
664    껍데기는 가거라... 댓글:  조회:5090  추천:0  2015-03-15
연변작가협회 제8기 리사회 리사명단(총94명)                                                                            1, 소설창작위원회(16명)  허룡석、림원춘、최홍일、최국철、김혁、조성희  김옥희、김호근、리혜선、허련순、우광훈、류연산, 김영자、량춘식、량영철、류원무   2, 산문창작위원회(10명)  리성권、리선희、리영애、허영순、채영춘、강정숙,  김삼、정호원、정창권、리원철   3, 시가창작위원회(17명)  리임원、리성비、석화、김학송、림금산、박장길,  최룡관、윤청남、김영건、리순옥、김현순、김승종,  김영춘、주룡、리상각、조룡남、최룡국   4, 아동문학창작위원회(10명)  한석윤、김득만、김철호、전춘식、최청길、최동일,  최상철、허춘희、한정남、허송절   5,평론창작위원회(10명)  조성일、전국권、김병민、김호웅、김성호、김관웅  리광일、김경훈、조일남、우상렬   6,한문창작위원회(14명)  리광의、류전룡、후려걸、김학천、애귀생、황령향  서진청、우뢰、채시봉、양수옥、리향숙、강영문  우요동、김신후   7,번역창작위원회(6명)  진설홍、김련란、성룡철、리옥화、김봉민、주하   8, 산거지구창작위원회(11명)  북경지구창작위원회: 김훈、장춘식、남복실  료녕지구창작위원회: 림금산、김창영  할빈지구창작위원회: 리홍규、박일  목단강지구창작위원회: 김두필  장춘지구창작위원회: 리여천  길림지구창작위원회: 김홍란  통화지구창작위원회: 리승호  -----------------------------------------------------------------------------------  
663    동시인 - 윤동길 댓글:  조회:4579  추천:0  2015-03-15
     앞줄 가운데, 윤동길 시인 [서울=동북아신문] 연변조선족 아동문학학회와 화룡시 작가협회의 주최로 윤동길의 동시집  출간 기념식이 2월 28일에 연길 고려원에서 개최됐다.  윤동길 시인은 환갑생일을 맞으며 첫 작품인  를 책으로 펴낸 뒤를 이어 이번에 또 첫 동시집을 출간 했다.  윤동길의 위 동시집은 6부로 나누어 졌는데 도합 103수의 동시가 수록되었다. 그는 회갑을 넘어서 동시단에 뛰여들었지만, 그의 시에는 파란 동심이 넘실거리고 있다. 그의 시들은 그의 동년시절의 추억이 아닌, 이 시대 아이들의 살아 숨쉬는 동심에 포커스를 맞추고 이 시대 아이들의 아픔과 기쁨과 욕구를 다루고 있기에 애들의 동심으로 바짝 다가서고 있다.  이날 출간의식에서 윤동길시인은 “동북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원으로 10여년, 법관으로 근 30년 근무를 하면서도 항상 ‘어린이’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살았왔으며 우리 민족 어린이들을 위해 동시, 동화를 책으로 써내는 동시인,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퇴직 후에는 그 꿈을 실현하려고 문단의 지각생으로 문학창작학습반을 다니면서 부지런히 시창작 기교를 닦았으며, 마침내 이번에 동시집 을 펴내게 되었다고 소감을 밝히였다. 출간식에서 연변동북아문화원 최룡관 원장은 “엉뚱한 궁리와 그 표현 및 기타”를, 문학평론가 김룡운 선생이 “윤동길시인의 동시세계”란 기조발언에서 "윤 시인의 시는 환상적인 것이 특징적이였다"고 높이 평가를 하였다.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한석윤 회장은도 축사에서 “윤동길 시인은 회갑년도 몇 년이 지난 예순다섯의 할아버지이지만 그의 동시들은 코흘래기 아이들의 동심에 푹 젖어 있다. 실로 동심적 상상, 동심적 시각, 동심적 비유가 아침이슬을 함뿍 머금은 신새벽 나팔꽃처럼 싱그럽다. 또 그래서 돋보인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출처] 윤동길 시인 출간식 연길에서|작성자 초심  
662    시인 - 고 허흥식 댓글:  조회:4513  추천:1  2015-03-15
... 우리 답사팀일행은 룡정시가지에서 3선 뻐스를 타고 약수동에서 하차했다. 이름 그대로 유명한 약수샘물터가 자리하고 있어 불러지게 된 지명이다. 여기에 “수침툰(水枕屯)”이란 마을패쪽이 보였다. 시가 숨 쉬고있는 마을이 분명하다. 시골 약수동은 대개 세상을 멀리하는 선비나 묵객들이 자주 찾았을 거고 그 약수가 흘러 홍진(红尘)을 멀리하는 소리에 어진 선비는 갈 길을 잃고 물소리를 베개 삼아 지친 몸을 던져 자아의 나라에서 즐겼을것이다. 무엇을 보았을가?…혹시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거다. 궁금한 일이어라.   언덕 올라서 얼마 걷지 않아 길 바로 오른편 잡초속에 허흥식시인의 묘비가 있다. 연변에서 흔히 볼수 있는 수수한 비석이 잠자고있는 주인이 분명 시인임을 말해준다. 시인은 룡정 태생으로서 농민과 농촌에 애착을 보이는 소박한 시가 돋보였다. 비석 뒤면에는 그의 대표작 《우리는 촌놈이다》가 새겨져있다. 비석은 미망인 박인숙녀사가 세웠다. 오후 1시가 되여서야 대포산아래에 닿았다.   대포산도 장관이지만 대포산 정상에 서니 눈앞 광경이 장관이였다. 화룡, 룡정, 연길이 한눈에 안겨왔고 비암산, 마제산 그리고 해란강경기장, 모든것이 발아래에 있었다. 하늘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까닭이었을가. 대포산에 부는 바람은 열기 없이 시원했고 거세고 머리를 맑게 했다. 지금 대포산의 앞으로 뻗어나온 포신부분은 1939년도 은진중학교 학생들이 남긴 대포산 소풍 옛 기념사진과 대비하면 거의 차이가 없다. 대포산에 대해서는 이런 일화가 전해지고있다.   룡정에는 당시 간도 일본총령사관(옛터는 현 룡정시정부)이 있었다. 그때 룡정지역에서 화재가 련이어 발생했다. 1911년 5월 9일 심야, 룡정 일본총영사관과 일본인 집거구에 화재가 발생하여 90여채 가옥이 재더미로 되였다. 1916년 1월 16일 룡정에는 또다시 화재가 발생했고 1922년 11월 27일 발생한 화재로 인하여 간도총영사관은 전소하여 부득이 3년 6개월 후에 신축 건물로 옮겨갔다.   룡정 일본총령사관측은 풍수에 능한 사람을 청하여 방토를 구했더니 멀리 보이는 대포산 포신이 총령사관건물을 겨냥하고있으니 그 포신을 없애라는것이다. 일본군은 박격포로 대포산을 폭격하였으며 긴 포신은 끝내 끊어져나갔다. 대포산에서 대포바위가에 선 우리들의 검은 머리카락이 찬 바람결에 흩날렸다, 광야의 기발처럼. 출처(연변모이자 ) : 주성화 - 룡정을 호위하여 둘러선 유서깊은 대포산 ///////////////////////////////////////////////////////////////////////////////////////   ​   . 칼럼 .    요절 문인   김혁 ​ ​ ​ ​ ​               ​ ​ ​ ​ 이상과 그의 친필 ​   ​ 인터넷 서점으로 올해의 “리상 문학상수상작품집”을 구매했다. 일주일만에 도착한 책을 들고 생각이 갓길로 빠졌다. 정작 표지 옹근 전체를 커다랗게 장식한 녀수상자의 아릿다운 얼굴보다는 그 웃가녁에 덩그마니 그리고 자그맣게 박힌 시인 리상의 모습을 멀끄러미 들여다 보았다. 1937년의 이른 봄, 일본 도꾜제국대 부속병원에서 폐결핵이 악화된 한 시인 2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폐병의 절망을 안고 기생과 동거하며 난해한 초현실주의 시 ‘오감도’와 소설 ‘날개’를 써내 천재적 면모를 보였던, 카페 경영에 실패하고 절망끝에 건너간 도꾜에서 “멜론이 먹고 싶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생을 접고 만 리상(李箱)이다. 리상외에도 김소월, 라도향, 최서해, 강경애, 전혜린, 모파상, 뿌쉬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로요(路遥), 소홍(萧红), 고성(顾城), 왕소파(王小波)등 우림문단, 세계문단사에는 그 재능을 다 펴지못하고 일찍 스러진 “별”들이 그렇게도 많다. 요절 (夭折)여기서 요(夭)자는 무성하다, 절(折)은 부러지다는 뜻이다. 싱싱함과 향기를 채 뿌리지못하고 꺽이고 말았다는 그 뜻말에 조차 애통함이 깊이 담겨 있다.   ​장편력사기행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 물”을 집필,련재하던 몇해전 답사차로 룡정 대포산을 오르다가 길녘에서 뜻밖에도 익숙한 이름의 묘소와 마주쳤다. 허흥식 시인의 유택(幽宅)이였다. 하냥 질박한 모습에 고향산천을 주제로 한 많은 수작들을 련줄로 펴낸 그와의 인연은 “연변일보”문화부에서 기자로 뛰던 시절 내가 편집한 그의 수필 한편이 향토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면서 이어졌었다. 그의 졸사(猝死)에 망연함을 금치못했던 당년의 기억이 떠오른다. 마른 풀잎속에 말없이 방치된 그 묘소앞에 가던 길을 멈추고 묵도를 드렸었다. 우리 문단에도 안타깝게 요절한 문인들이 적지 않다. 류연산, 윤림호, 박향숙, 남주길, 조은철, 윤광수… 병환으로, 사고로 애닯게 일찍이도 간 그이들의 이름을 떠올리는것만으로도 눈시울이 젖어 오른다.     해외에서는 요절문인들에 대한 추모방식이 정례적으로 진행되고있다. 주기를 꼭 챙겨 기념하고 요절문인 작품집도 내고있다. 우리 역시 작고문인들을 추모하고있지만 가족이나 몇몇 친구들의 작은 방식으로만 그칠뿐 보다 장중하고 조직적인 추모 방식은 결여되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생의 황홀에만 매몰되지 말고 그늘속 죽음에도 눈길을 주라”하고 어느 한 학자는 말 했다. 작고문인들에 대해 정례적으로 눈길을 돌리고 그이들이 우리 문단사에 남긴 업적을 기리는것은 문단의 전승과 발전에도 필수적인 례식이 아닐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이들을 추억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보다도 그이들이 남긴 작품을 읽는것일것이다.   2014년 3월 7일 -      “청우재(聽雨齋)”에서   “도라지” 2015년 3월호           시인  -윤동주 시인의 영정 앞에서-    투사이고  시인이고 하는  당신을  나는  투사보다 먼저  윤동주 시인으로 알고 싶습니다.  투사란 의미는  쇠덩이로 주조된  너무 강한 형상의 표현이며  시인이란 뜻은  무한한 공간을 열어주는  감정의 울림이기 때문입니다.  백의민족의 혈흔사책에는  투사의 이름은 두루 많아도  가장 처절한  암흑시기에  결백한 이념의 시세계를  구상한 그런 시인은  당신 혼자 아닌가 생각되어서입니다.   (이 작품은 1998년 북경 민족출판사에서 나온 허흥식 시인의 시집 「용드레우물」에 수록되어 있으며 1991년 작입니다.) ============================   서명/저자사항 용드레우물 : 허흥식시집 저자 허 흥식 발행사항 북경 : 민족출판사, 1998 형태사항 279 p. ; 23 cm. ISBN 710503002X 자료유형 일반단행본   허흥식 약력: 1942년 길림성 화룡시 투도진 출생.  1963년 시《새벽》으로 대뷔. 시집《용드레우물》출간. 1997년 8월 타계. 수양버들 허홍식 오랑캐령 넘어 흰 옷이 흘린 즐벅한 땀속에 깊숙이 뿌리 박고 이끼 핀 돌틈새로 샘 길어 마시며 질긴 명줄 굵게 가꾼 먼 옛말이 아름드리 줄기로 선다 코신 신은 초록의 단오날은 호사스런 그네줄에 매여놓고 농악소리 기발처럼 흔들어 풍긴 민속놀이 재미가 실가지로 흔든다 밤새 울음 잔잔히 지르밟는 숫된 사랑의 부끄러운 숨소리 인생길 꽃수레에 태워주고 명랑한 달빛 풀어 병풍 두른 자애의 심사 푸른 잎 된다 오붓한 동네의 마알간 인심 한점 재티도 묻지 못하도록 하늘 쓸어내고 땅 닦아가며 한동이 탁주를 마셔 취한듯 좋은 사람들 부둥켜 안고 주정한다   [출처] 이해와 오해 ? 영화 「동주」를 보면서|작성자 신문이 즐겁다  
661    삶은 짧고 문학은 길고... 댓글:  조회:2560  추천:0  2015-03-15
미니 칼럼   요절문인                             김혁     1937년의 오늘, 일본 도꾜제국대 부속병원에서 폐결핵이 악화된 한 시인 2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폐병의 절망을 안고 기생과 동거하며 난해한 초현실주의 시 ‘오감도’와 소설 ‘날개’를 써내 천재적 면모를 보였던, 카페 경영에 실패하고 절망 끝에 건너간 도꾜에서 “멜론이 먹고 싶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생을 접고 만 리상이다. 리상외에도 김소월, 라도향, 최서해, 강경애, 전혜린, 모파상, 뿌쉬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路遥, 萧红, 顾城,王小波등 세계문단사에는 그 재능을 다 펴지못하고 일찍 스러진 “별”들이 그렇게도 많았다. 요절(夭折), 여기서 요(夭)자는 무성하다, 절(折)은 부러지다는 뜻이다. 싱싱함과 향기를 채 뿌리지못하고 꺽이고 말았다는 그 뜻말에 조차 애통함이 깊이 담겨 있다.   일전 답사차로 룡정 대포산을 오르다가 길녘에서 뜻밖에도 허흥식 시인의 묘소와 마주쳤다. 무성한 풀잎속에 쓸쓸하게 방치된 그 묘소앞에 가던 길을 멈추고 머리숙여 묵도를 드렸었다. 우리 문단에도 안타깝게 요절한 문인들이 적지 않다. 류연산, 윤림호, 박향숙, 남주길, 조은철, 윤광수… 병환으로, 사고로 애닯게 일찍이도 간 그이들의 이름을 떠올리는것만으로도 눈시울이 젖어 오른다.     해외에서는 요절문인들에 대한 추모방식이 정례적으로 진행되고있다. 주기(周忌)를 꼭 챙겨 기념하고 그이들을 위한 문학비를 건립하거나 랑송회를 열며 또 요절문인 작품집도 내고있다. 우리 문단 역시 작고문인들을 추모하고 있지만 가족이나 몇몇 친구들의 작은 방식으로만 그칠뿐 보다 장중하고 조직적인 추모 방식은 결여되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생의 황홀에만 매몰되지 말고 그늘속 죽음에도 눈길을 주라”하고 어느 한 평론가는 말을 했다. 작고문인들에 대해 정례적으로 눈길을 돌리고 그이들이 우리 문단사에 남긴 업적을 기리는것은 문단의 전승과 발전에도 필수적인 례식이 아닐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이들을 추억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보다도 그이들이 남긴 작품을 읽는것이다.   2014년 3월 7일   “聽雨齋”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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