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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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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    연변 사투리 (ㅇ) 댓글:  조회:5773  추천:1  2015-03-15
          아궁지.아구리 : 아궁이  * 아구리: 아가리 아기차다 : 벅차다   //하루에 다하기는 아기차다. 아다모끼 : 마구잡이로 고집스럽게 억지를 부리는 것, 또는 그런 사람.   아름차다 : 1.힘에 겹도록 정도가 심하다.  // 그 일이 우리한테 차례진 것만으로도 크나큰 행운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우리가 맡아서 하기에는 너무 아름찬 일이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2.너무 과분하거나 벅차다. // 너무나도 아름찬 일이라 뭐라고 고마운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슴다.   아사빼다 : 빼앗다 아수하다 : 아쉽다 아슴챊다.아슴탠타.아심탠타 : 고맙다. 아    시 :  애벌  //래일은 벼논에 아시김을 매야 되니까 일찍 일어나야 한다.   아시아 올림픽 : 아시안 게임  ** 올림픽은 세계 올림픽이라고 한다. 아쓸하다 : 무슨 일을 하기가 께름칙하다.  // 비린내 생선을 손질할 생각을 하니 아쓸하다.  // 이렇게 춥고 비까지 내리는 날에 바깥에 나가려니 너무 아쓸하다.   아    이 : 아니   //아이 가겠다.  //아이 하겠다. 아    재 : 고모. 이모 아즈마이 : 아주머니 아즈바이 : 아저씨. 이모부   아짜아짜하다 : 아차아차하다. 순간적으로 몹시 위태로워 애타고 가슴 졸이게 아슬아슬하다.  // 주인공이 숨어 있는 나무 아래에까지 강도들이 몰려와서 정말 아짜아짜한 순간이었다. 아    츰 : 아침 아치.아채기 : 나뭇가지 아후.아훕.아우 : 아홉    악 쌔 질 : 악다구니 안주군.안즉: 아직 안    지 : 안주   //술안지 안까이.안깐 : 아내. 아낙네   안    쪽 : 연변을 벗어난 다른 곳인데 주로 동북3성(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을 가리킨다.  안쪽 사람 : 연변 바깥에 사는 조선족. 알 기 다 : 알리다 알락거리다 : 알랑거리다 알키와주다.알케주다 : 가르쳐주다. 알려주다    앗아빼다 : 빼앗다 앙    캐 : 암캐 앙    케 : 암컷   앙케수케: 암컷수컷. 또는 여자남자를 낮추어 이르는 말. 얍슬하다 : 얄팍하다 양    백 : 2백  양천: 2천   양만: 2만 안 치 다 : 앉히다   알    골 : 골머리  //그 놈 생각만 해도 알골이 아프단데! 애    군 : 말썽꾸러기  ** 말로 할 때에는 애꾼이라고 하지만 글로 쓰 때는 애군이라고 쓴다. 사기군,말썽군 등도 마찬가지다. 애 나 다 : 애타다. 애터지다.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어 애나 죽겠다. 애끼우다 : 빼앗기다 애    인 : 아내  //각시는 뉘기요?  저는 정길추이 애인임다.    야진(押金) : 나중에 치러야 할 돈이나 그 일부를 미리 내는 것. 또는 물건이나 장비를 빌릴 때  사용료 이외의 돈을 담보로 맡겼다가 물건이나 장비를 반납하면서 맡긴 돈을 되돌려 받는 것.  ** 야진 문화가 매우 발달했기 때문에 필름 현상이나 인화를 맡길 때도 야진해야 하고 공원에서 보트를 빌릴 때에도 야진했다가 보트에서 내린 뒤 맡긴 돈을 돌려 받는다. 전화국에 가서 국제 전화를 할 때에는 3백원 정도를 야진해야 통화 신청을 받아준다. 수신자부담으로 전화 할 때에도 백원 정도는 야진해야 한다.         양고기뀀 : 양고기산적. 흔히 양러우촬(羊肉串)이라고 한다.  ** 본디 신강에서 발달한 음식인데 연변에서도 많이 먹는다. 작고 얇게 썬 양고기를 자전거 바퀴 살대로 만든 꼬챙이에 꿰어서 양념에 발라 숯불에 굽는다. 고춧가루Ⅱ行耐駙〈  맛내기를 몽땅 섞어서 만든 양념을 잔뜩 묻혀 가지고 매워서 입을 후후 불어가며 먹는다. 연기가 나지 않는다고 '무연양고기뀀'이라고 간판을 단 집이 너무 많으니 이건 좀 문제다. 누구와 만날 약속을 할 때에는 정확히 어느 골목 어디서 몇 번째에 있는 무연양고기뀀점이라고 해야지 덮어놓고 어느 골목에 있는 무연양고기뀀이라고 했다가는 몇 군데에 들러 보아야 할지 모른다.     어 느 깔 : 어느 새  //금방 뒤쫓아 나가보았는데 어느깔에 없어지고 말았다. 어럽다.일없다 : 괜찮다. 어르나. 어른아 : 어린이 어망깐에.어망결에 : 얼결에. 얼떨결에. 엉겁결에   어 물 쩍 : 겉보기와 다르게 야무지고 제 할 일을 잘한다는 뜻.  //보기보다 어물쩍하게 제 앞에 노릇을 잘 한다. 어 물 쩡 : 어물쩍. 말이나 행동을 일부러 어물거려 슬쩍 넘기는 모양.   어물쩡어물쩡: 어물쩍어물쩍. 우물쩍우물쩍   어방사하다 : 엇비슷하다 어방치기.어방짐작 : 어림짐작 어부렁집 :  연립주택  **어부렁집에는 보통 대여섯 개의 방이 있고 한 세대에 방 한 칸씩 쓰고 살도록 지어져 있다. 부엌이 따로 없는 연변에서는 가마목이 방 안에 있으므로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어 불 다 :  나누다  //동생하고 어불어 먹어라. 어    시 : 부모 어    애 : 진드기.     어애가 단방귀를 뀌었다: 어쩌다 알아맞추었거나 성공하였거나 좋은 결과가 있는 경우에 농으로 이르는 말  //어애가 단방귀를 뀌어 가지고 한 게지 그냥 잘하는 줄 아니?    어찌람까? : 어떻게 하랍니까?  어찌지도 못하는 게: 어떻게 하지도 못하는 게.  어찌자고: 어떻게 하려고. 언   녕  : 이미. 진작. 일찌감치. //언녕 다 해 놨소.  //언녕 몰라서 그러오?  언녕 몰랐단데! 얼 겅 채 : 얼레미     얼궈토우(二鍋頭): 한 번 술을 거르고 난 뒤 두 번째로 걸러낸 술이라는 뜻. 약간 탄내가 난다고 하나 오히려 그 맛을 즐겼다고도 한다. 값이 싸다는 것도 이제는 옛말이다. 얼궈토우라는 상표를 달고 비싸게 팔린다.    얼레부끼 : 거짓말.  에이,얼레부끼다!: 에이,거짓말이다! 얼 르 재 : 게으름뱅이 얼 리 다 : 달래다  //우는 아이를 좀 얼려라. 얼리우다 : 남에게 구슬림을 당하다. 남의 말에 깜빡 속아넘어가다.   얼빠뜨락또르 : 2.8형 트랙터. 얼빤하다 : 똑똑치 못하고 어리벙벙하다. (술을 먹고)얼큰하게 되다.                //  얼빤한 놈이 술을 얼빤하게 처먹고 얼빤하게 얼빠뜨락또르에 끼와 죽었다.: 덜떨어진 놈이 술을 얼큰하게 처먹고 멍청하게 2.8형 트랙터에 끼여 죽었다.   엄엄하다 : 매우 엄하다. 어마어마하고 으리으리하다.  //천도깨비가 연단에 오르더니 엄엄한 얼굴로 발언을 시작했다. 엇 서 다 : (지거나 양보하지 않고) 엇나가며 맞서다. (시키는 대로) 말을 듣지 않거나 대들다.  //설혹 내 말이 틀렸대도 그렇지,어른이 하는 말에 그렇게 엇서기를 좋아해서야 네가 장차 무엇이 되겠냐?     없이 보다 : 깔보다. 얕보다. //제 앞에 노릇도 못하는 홍용암이란 놈은 그 누깔에도 없이 뵈는 게 있었던지 아랫마을 만득이만 보면 끝까지 쫓아다니며 못살게 군다. 에미나.엠나 : 계집아이. 여자 에미나스나 : 부부를 헐하게 이르는 말. //에미나스나 한 푼도 안 차나고 똑 같소.  //에미나스나 맨날 붙어가지고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모르겠소.              엥 기 다 : (말을) 옮기다. (물건 따위를) 옮기다. 예 조 리 : 종달새 여가리.역카리.여칼 : 가장자리  //그 집이 길여칼에 있소. 여    끼 : 여우 여누.여뉘 : 배웅  //친척들이 왔다 가는데 여뉘하러 갔다오는 길이요.    여 비 다 : 여위다  //빼빼 여비다. 여    쓰 : 여섯 여팔.여파리 : 옆   염    지 : 부추    열    : 쓸개   //곰열. 개열    열대. 열세. 열쒜 : 열쇠 열    콩 : 강남콩 엿    싹 : 엿기름 영    기 : 이엉. 영   ** 평양에서는 이영.   옆 채 기 : 호주머니 예쭝후이(夜總會) : 야총회. 나이트 크럽. 예쓰(夜市) : 야시장. 주로 늦봄부터 가을까지 밤거리에 천막을 치고 열리는 난장. 오 그 래 : 새알심  오그랑죽.오그래죽: 새알심을 넣어 끓인 팥죽 오    놀 : 오늘    오래오래 앉다 : 오래오래 살다 //오래오래 앉으세요! (부모의 환갑날에 자식들이 '오래오래 앉으세요'라고 씌인 액자를 선물하기도 한다.) 오분해르.온할날 : 온하루 오시랍다 : 근심스럽다  //그 일 때문에 오시랍아서 앉아있지 못하겠다.     오새없다 : 철없다 오 양 간 : 외양간 오    유 : 오류. 그릇됨. 잘못. 그릇된 인식. 옥    시 : 옥수수  옥시국시.옥시랭면: 옥수수가루로 만든 국수나 냉면.    올캐. 올찌세미 : 올케 왁    작 : 여럿이 한꺼번에 급히 밀려드는 모양. 한꺼번에 왁자지껄 정신없이 떠드는 모양.  //애들이 왁작 고아대는 통에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듣지 못했다. 왕청같다 : 엉뚱하다  //왕청같은 소리 하지 말라!  //길을 잘못 들어서 왕청같은 데로 갔다.    왜    서 : 어째서   //왜서 나만 아이 된다니? 왜    지 : 오얏(자두)  왜지낭기 : 오얏나무 외    재 : 외상 우껩다.우뿌다 : 우습다    우둑지다 : 몸집이 크고 뚱뚱해서 둔하게 보이는 사람을 이르는 말. 우 월 성 : 우월한 성질이나 특성.  //바로 이것이 우리 사회주의 우월성이다. 우    재 : 농담  //그 나그네 우재를 잘 쓴다.  //우재쓰지 말고 로실하게 말해라. 우점(웃점) : 훌륭하고 좋은 점. //그 녀자는 우점이 많다.  //이 제품은 다른 제품보다 여러 면에서 우점이 많다.    우    정 : 일부러 우    티 : 옷 운동개구리 : 청개구리. 연변에서 청개구리라면 보통 먹개구리 따위를 가리키는 것이기가 쉽다.        웃    방 : 미닫이로 방을 나누고 있으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미닫이문을 만들어 달지 않고 산다. 웃방이래야 문틀로 경계선을 만들었을 뿐이다. 위아랫방을 나누는 들보에는 달력에서 떼어낸 여배우들 사진을 전시하거나,작은 밥상만한 사진틀을 걸어놓고 온 가족들의 사진을 빼곡하게 끼워놓고 있다. 미닫이 문틀로 만들었던 위아랫방 경계목은 옆으로 눕거나 T.V를 볼 때 높직한 베개로 사용되기 마련이다.    웃음집이 흔들거리다.웃음주머니가 흔들흔들하다 : 자꾸 웃음이 나오다. 웃음을 참기가 어렵다. 웅    심 : (사나이의) 큰 마음. 또는 (속에 품은) 큰 뜻. 웅심깊다: 웅숭깊다. 웅 텅 개 : 웅덩이   워디탠나(我的天 )! : 나의 하늘이여! (놀람을 나타내는 소리) 원쑤.원씨 : 원수  **원수라면 국가원수를 가리킨다. 원한이 있는 사람을 가리킬 때에는 반드시 원쑤라고 한다. 웨누깔.웨누깔싸재 : 애꾸눈이   웨    신 : 예순    웬    : 맨   //웬 마지막에 교실을 떠났다. 위 하 다 : 어리하다. 멍청하다  //위하게 생겼다. 으쓸하다 : 무슨 일을 겪거나 어떤 일을 하기가 소름이 끼칠 것 같다.  //뱀같이 으쓸한 새끼가 나보고 웃으면 누가 곱다니? 으쓸한 놈!: 엉큼한 놈! 더러운 놈! 상종하기가 꺼려지는 놈!     은을 내다 : 어떤 일이나 행동이 보람있는 값을 나타내다. 이    껌 : 잇몸 이 날 해 : 하루종일  //이날해를 뭐하고 보냈는지 모르겠다.       2만5천리 장정 : 서기1934년 10월부터 국민당 정부군은 홍군에 대한 '포위토벌'에 나섰다. 1년 동안 싸운 끝에 더는 견딜 수가 없게 된 홍군은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근거지를 버리고 대이동을 시작했다.   서기1934년 10월.모택동이 이끄는 중앙홍군(홍군 제1방면군)도 하는 수 없이 근거지를 버리고 복건성 서부의 장정,영화 강서성 남부의 서금,우도 등지에서 출발하여 이동하기 시작했다. '설산을 넘고 진펄을 지나는 온갖 역경' 속의 2만5천리 장정이었다.   홍군 제1방면군은 광동,호남,광서,귀주,사천 운남 등지를 거쳐 서기1935년 10월 섬서성과 감숙성 사이에 있는 오기진에 도착하였다. 서기1936년 10월에는 홍군 제2방면군과 홍군 제4방면군의 일부 부대도 섬서성 북부에 이르러 홍군 제1방면군,섬북홍군과 승리적으로 회합했다.      이    발 : 이빨. 말할 때에는 이빨이라고 하지만 적을 때에는 반드시 이발로 적는다. 머리를 깎는 것은 반드시 리발이라고 쓰고 그렇게 읽는다. 이 밥 다 : 요긴하다  //이밥을 때는 나물도 식량에 한 보탬이 된다.    이 불 짐 : 예전에는 이불 사정이 퍽 어려워 어느 집에나 여유가 없었다. 추운 지방이라서 그런지 군인들도 담요대신 이불짐을 메고 다닌다. 요즘에도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이 이불짐을 메고 다니는 것을 드문드문 볼 수 있다.   이엉납새.영납새 : 처마 이온.이원 : 이혼 이저는.이자는 : 이제는.     인민공사 : 모택동의 '인민공사가 좋다.'는 한마디 말씀에 따라 서기1958년 전국적으로 인민공사화 바람이 일어났다. 호조조에서 초급농업사,고급농업사로 발전해온 끝에 인민공사화를 이룩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 개 향이 공사로 조직되었다.    인민내부모순 :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사회적모순 가운데의 하나로서 인민들의 이해관계가 근본적으로 일치되는 기초에서의 모순이다. 노동계급내부의 모순,농민계급내부의 모순,지식인내부의 모순,노동계급과 농민계급 사이의 모순,노동자와 농민,지식계급 사이의 모순 등이 있다. 인민정부와 인민대중 사이에도 일정한 모순이 있는데 거기에는 국가의 이익,집체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과의 모순,영도를 하는 자와 영도를 받는 자 사이의 모순 등 서로의 이익과 이해 관계로 계급과 계급 사이,또는 계급과 개인,개인과 개인 사이에도 모순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인 민 복 : 중산복과 비슷하나 중산복은 호주머니를 겉에다 덧대서 드러나게 만들고,인민복은 옷 안쪽으로 들어가게 주머니를 단다. 농민이나 노동자들이 아직도 즐겨 입는 옷이다. 인츰.인차 :  곧. 바로. //걱정 마오. 인차 가겠소.   ** 아침에 전화할 때 인차 오겠다던 사람이 오후에도 오지 않고 이튿날 점심때가 지나서야 오는 일도 없지 않다.    입내내다.입내피우다 : 흉내내다  //말먹재 입내를 내면 너도 말먹재가 된다,응? 입때지개. 입째지개 : 언청이 입 쓰 림 : 입덧 입 살 이 : 먹고 사는 일.  또는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로 겨우 벌어먹는 것.    일 없 다 : 괜찮다.  꺼리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한어로 '메썰.메이썰(沒事)'이라고 한다. 일이 시끄럽게 번져눕다: 일이 더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버리다.  
659    시인 - 홍용암 댓글:  조회:4739  추천:0  2015-03-15
1970년 6월 26일 중국 흑룡강성 출생. 몰락가정 생활극난으로 대학 2학년에서 중퇴하고 상업에 진출. 후에 연변과학기술대학 최고경영자과정 졸업. 16세에 첫시집 "꽃무지개"를 출판한후 조문, 중문으로 중국, 조선, 한국에서 20여권의 저서 출판. 해내외 문학상 20여차 수상. 이밖에 중국에서 "중국100명개혁창업걸출인물", "중국당대 걸출한 인재", "중화창업영재"로 선정. 연변에서 "연길시10대우수청년", "연변10대청년창업새별", "연변청년5.4상장획득자"로 명명. 2002년 연변텔레비죤드라마제작중심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50돐을 맞으면서 시인이 걸어온 인생로정과 창업사를 반영한 텔레비드라마 "흰구름의 길"(상, 하집) 촬영제작. 중화인민공화국 공훈훈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로력훈장 획득. 현재 연변백운그룹 회장, 연변정치협상위원회 위원, 연변청년기업가련합회 부회장, 두만강지역국제합작개발추진회 부회장, 연변아동문학연구회 부회장, 연변조선민족전통례절문화원 부원장, 길림성동북아문화연구원 부원장, 연변장기협회 부주석(6단). 중국아세아태평양지역경제발전연구중심 고급연구원, 중국국제항업조직연구회 고급연구원, 중국화교상업학원 객원교수, 한국 서울게임대학 객원교수. 북경아시예원문화연구원 원사.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홍용암 시인  그를 만나지는 못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가 바쁜 탓이다. 그저 이메일을 통해 받은 시편 정도로 그를 안다.  연변의 작가들을 통해 들은 풍월은 있다. 그는 아래 이력에서 보듯 70년 생이다. 그런 그가 5개 회사를 갖고 있는 연변 조선족의 거부가 될 때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 그렇지, 그런 우여곡절이 결국 그를 문화에 기여하게 하고 연변 문화인들의 풍요한 삶의 일부를 보장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는 연변에서 행해지는 여러 문화 행사에 대해서 많은 기부를 하면서 그 또한 문화인으로서의 본색을 유감없이 보여주듯 틈틈이 시편을 정리해가고 있다고 한다. 그는 연변 최초의 외국어 학교를 세우면서 많은 사람들의 시기 속에서 무난하게 버텨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족이 지배하고 있는 중국이란 나라에서 자치주라고 해서 완전한 자치체제도 아닌 이민족이 그만한 사업을 이루었다는 것은 참으로 장한 일이다. 그러한 일이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엄청난 경계의 대상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남북관계가 좋아지면서는 더욱 그들의 경계가 노골화 되어가고 있고, 주요 부처의 장은 중국 내 거주 교포들이 맡아 하지만, 최소한 서열 2위의 직 정도는 맡아 보는 것이 일상화하는 추세라고 하니, 본국이라 할 남북한에서의 연변에 대한 대응 태도는 어떤 것인지 깊이 있게 생각해 볼 문제인 것이다.  홍용암, 필명 백운, 그야말로 조선적인 닉네임들이 아닌가? 이제 그가 이룬 대업이 중국 내 교포들의 생활과 문화적 토양을 굳건하게 하는 토대가 되도록 우리가 더 많은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어야 할 것이다. 연변조선족 자치주 인민대표위원회 상임위원이며 중국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부장의 말에 따르면 그와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는 공동으로 문예창작학과를 두고, 문학상 등을 제정하는 등에 대한 논의를 수차례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중국 내 공안 당국의 방해로 그 결실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이지 않게 저항의 뿌리는 지속성을 갖고 뻗쳐 내려오는 데 우리는 너무도 작아져 버린 것은 아닌가?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의 등을 돌린 지도 반세기가 지났다. 그런 마당에 남쪽 내부에서의 토착화된 지역 감정의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내적 구심을 더욱 강화하고 우리의 시선을 저 멀리 만주나 시베리아로 돌려 바라볼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어려운 여건 하에서 기업을 일으켜 민족 문화의 내적 자산을 키워가고 있는 젊은 미래의 희망은 우리 민족의 젊은 기상으로 꽃 피어날 것이라 기대하면서 그의 건승을 기원한다.  그의 시가 수작은 아닐지언정, 그의 시의 내면에 담긴 동화적 상상력은 인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이며, 그의 진실한 고백이 담겨져 있는 것 또한 그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창작으로 인정하고 싶다.  하루살이가 되고 싶었던 그 날  홍용암  나는 그 어느 가장 청명한  여름날의 하루살이가 되고 싶었다  우리는 순간적인 그 하루만  사슴처럼 새처럼 사랑했다  이튿날 헤여져야 했으니깐  그 아름답게 사랑했던 하루  그날 새벽 0시에 태어나  자정 24시에 죽었다면  나의 기억속에는  다음날의 비애가 없을 것이다  영원히 그 행복했던 하루만  내 한생에 전부로 길이 남아  그러면 나는 단 하루를 살아도  행운스럽게 길한 날 태여나서  유감 한점 없는 삶을 마칠 것이다....  꽃무덤  무수한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초가을 공원 길거리에  깨끗하게 늙은 어멈 한 분이  떨어진 꽃잎을 쓸어모아 무져서는  한무더기 꽃무덤을 만든다  아무래도 무심히 지나칠수 없다  어쩐지 그 한잎한잎의 꽃무덤이  그 어멈이 스쳐지난 자취같이 보인다  얼마나 아름다운 나날들을  그윽한 향기속에 흩날렸을가...  녀자  가장 가냘픈건  고독한 녀자다  고독한 녀자보다 측은한건  버림받은 녀자다  버림받은 녀자보다 불쌍한건  죽은 녀자다  죽은 녀자보다 불행한건  잊혀진 녀자일게다 까맣게...  물고기  륙지의 자그마한 개울물에 살던  물고기 한 마리가  바다가 번화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꾀죄죄한 개울을 떠나  한번 그곳에 가서 보람있게  버젓이 살아보리라 마음먹었다  항구도시에 이르러  사품치는 바다격류에 휘말려들자마자  물고기는 그만 지각을 잃고말았다...  욕  인간들이  서로 욕지거리 한다  --개같은 것이!  개들도  물고 뜯을 땐  개나라에서  가장 험한 쌍욕을 할 것이다  --인간같으니라구야  에잇 퉷퉷...  홍용암: 필명 백운(白云)  1970년 6월 26일 중국 흑룡강성 동녕현 삼차구향 동방룡촌에서 출생  16세에 첫동시집 「꽃무지개」를 출판  서정시집 「흰구름이 된 이야기」, 「려행자」,  동시집 「나는 시골아이」, 「사슴뿔 나무」등 출판  전국, 성, 주 및 해외문학상 수차 수상  현재 「청춘극장」신문사 사장, 「별나라」특약편집, 연길시외국어학교 등  5개 회사의 리사장, 흑룡강작가협회회원, 연변작가협회회원 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 (서울=연합뉴스) 정연식 기자 = 중국 연변지역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동포시인인 홍용암 씨의 시집 `다리를 놓자"가 지난 5월 말 6ㆍ15 공동성명 5주년을 기념해 북한에서 발행됐다고 중국동포 문학잡지 `도라지" 인터넷 판이 28일 보도했다. 중국 지린(吉林)성 지린시 조선족군중예술관이 발행하는 잡지 도라지 인터넷 판은 북한의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와 평양출판사 `통일문학" 편집국의 6ㆍ15 공동선언 5주년 특별기획으로 발행됐다고 전했다. 시집에는 홍씨가 초중고교 및 대학 시절 썼던 시 93수와 최근에 쓴 5수 등 모두 98수가 수록돼 있다. 사이트는 평양출판사가 장정에서 종이 선택에 이르기까지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시집을 제작했다면서 "조선(북)의 문학잡품집 출판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훌륭하게 잘 만들어진 책"이라고 소개했다. 또 "조선에서 해외 조선인에게 시집을 찍어주는 특혜를 베풀어 준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며 "조선에서 한 시인의 시집 4만 부를 찍기는 처음"이라고 밝혔다. 홍씨의 시에 대해 북한의 평론가 김성희씨는 "분열된 조국을 두고, 갈라진 겨레를 두고 사무치게 터져 나오는 `한"의 정서는 시집의 전반에 눈물의 강이 돼 흘러 넘친다"고 평했다. 시집 발행과 관련, 홍씨와 북한 작가동맹이 지난 2월 협상에 들어가 3월에 정식 합의서를 체결하고 5월 30일 발행했다고 사이트는 전했다. 한편 홍씨는 해외대표단 일원으로 6ㆍ15 남북 공동선언 발표 5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행사에 참가했다고 사이트는 덧붙였다. 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 (서울 = 연합뉴스) 김두환 기자 = 작년(2005년) 5월, 6.15공동선언 발표 5돌을 맞아 북한 측의 특별 배려로 시집 '다리를 놓자'를 펴냈던 중국 조선족 시인 겸 기업가인 홍용암(36)이 평양에서 두 번째 시집 '조국이 나를 부른다면'을 출간했다고 중국의 동포 문학잡지 '장백산' 인터넷 판이 29일 보도했다. 평양출판사는 지난해 장정에서 종이 선택에 이르기까지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다리를 놓자' 초판 4만부를 출판했는데, 북한이 해외 동포의 시집을 찍어주는 특혜를 베푸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장백산에 따르면 지난 5월 6.15공동선언 발표 6돌을 맞아 북한에서 두 번째 시집 '조국이 나를 부른다면'을 출판했는데 여기에는 작년 6월 평양에서 열렸던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한 후 중국으로 돌아와 그해 6월부터 7월까지 한 달 동안 창작한 70여 편의 시가 수록됐으며 시의 주제는 한반도 통일과 애국애족, 항미(抗美)에 관한 것들이다. 홍 씨는 내년 6월 6.15공동선언 발표 7돌을 맞아 북한에서 출판할 기념시집 '역사와 민족 앞에'를 이미 지난해 말 완성해 그 원고를 평양출판사에 넘겨 주었다고 잡지는 전했다. 특히 내년 1월에는 북한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조기천의 장편서사시 '백두산'의 후속편으로 홍 씨가 창작한 장편 서정서사시 '백두산'이 북한 정부가 특별지정한 헌정도서로 출판된다며 "한 해외동포의 시가 이처럼 국가의 큰 중시를 받기는 건국 이래 처음"이라고 잡지는 밝혔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산골에서 태어난 홍 씨는 연변과학기술대학 최고경영자과정을 졸업했으며 연변백운그룹 회장으로 있으면서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중국에서 '중국100명 개혁창업걸출인물', '중국당대 걸출한 인재', '중국당대우수기업가'로 선정됐으며 2002년 연변TV 드라마제작중심(센터)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50돌을 맞아 홍씨가 걸어온 인생역정과 문학 성취, 창업사를 담은 TV드라마 '흰 구름의 길'(상.하)을 제작했다.   민혼의 시인과 민혼을 노래한 시조  ―홍용암 시조집 “역사와 민족 앞에”를 읽고                                                          김춘택     1. 민혼의 골물이 터져     한 문인이 일정하게 주어진 시간에 문학작품을 얼마나 쓸 수 있을까? 문인으로서 가끔씩 이런 질문을 해올 때가 많다. 그래서 주어진 시간을 만들어 문학 작품을 써보기도 했다. 하지만 장담할 수 없는 일이 이 노릇이다. 주어진 시간 내에 문학 작품 몇 편을 쓸 수도 있고 아예 한편도 못 쓸 수 있다.   여기에는 장르적인문제가 있을 것이다. 주어진 시간에 소설을 쓰려면 많이 쓸 수 없을 것이며 시나 시조를 쓰자면 여러 편은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 내에 문학작품을 많이 쓸 수 있는 것은 작가의 재능과 열정이지 장르인 것은 아니다. 재능이 없고 열정이 없으면 아무리 긴 시간이 주어져도 시 한수마저 쓸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일전에 누군가 2년 사이에 시조 수백 수를 썼다고 해서 크게 놀란 적이 있었다. 얼마나 차원이 높은 시조를 썼는지는 몰라도 대단하긴 대단했다. 그러던 와중에 홍용암 시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한 달 사이에 시조 126수나 썼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 비결을 꼭 알고 싶었다. 다행이 홍시인의 그 126수 시조로 묶어진 시조집 “역사와 민족 앞에”를 읽게 되어 그 비결을 알게 되었다.   비결이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의 천재적인 재능도 있었겠지만 더는 막아낼 수는 없는 제방 같은 것이 터진 것이었다. 그것은 민혼이었다. 그의 시조에 내재던 민혼을 읽으면서 함께 민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갇혀서 넘치는 골물은 그 누구의 도움이 없이도 저절로 터진다. 이와 같이 홍시인의 마음속에 갇혀있던 민혼의 골물은 드디어 터지고 만 것이다. 그런 것 보면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126수의 시조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리라.     2. 민혼의 장르 시조에 관하여     시조의 탄생은 고려 말이었다고는 하나 조선 시대에 와서 유형 되고 그 완전한 골격을 이루었으며 우리 민족의 문학유산 및 재부로 되었다. 시조를 사대부와 권력계층의 점유물로 치우쳐 보는 것과 양반집 부인이나 규방의 규수, 및 기생계층이 소일거리로나 프러포즈의 공구로 사용했다는 설에 필자는 극히 찬성하지 않는다. 시조가 시대의 국한을 받은 것일 뿐 절대 계급층의 소유물이나 세도가의 안방 여자들의 장난감은 아니었다.   필자는 조선시대 우리 시조가 대체적으로 세 가지 부류의 문인들에게 속했다고 본다. 그 세 가지 부류의 문인들이란 애국자와 왕권의 버림을 받은 자 및 예술인, 그리고 유식한 여성들이나 기생(이들은 그 시대의 여성 문인들 셈이다.)들이었다.   첫 번째 부류의 문인, 애국문인: 이들의 대표인물로는 김종서, 남이, 이순신 등이 있다. 이들도 역시 권력층이긴 하나 애국적인 충신이다. 이들의 시조는 민혼을 내재한 시조이며 오늘 날까지 민심을 격동케 한다. 이들 시조의 생명은 민혼으로서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한다. 아쉽게도 이들은 전업적인 문인이 아니기에 민혼을 내재한 시조 작품을 많이 남기지는 않았다. 민혼을 부르짖는다는 것은 뼈를 깎는 충혼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며 스스로 자기 생명을 바쳐가는 절규이다.   두 번째 부류의 문인, 권력층 및 예술인: 이들은 조선 시조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데 대개 간신들의 권모술수와 당파분쟁으로 하여 잠시 왕의 버림을 받은 자들과 일부의 예술인들이었다. 당파분쟁으로 잠시 권력층에서 물려난 자들은 대개 유배지나 향촌에서 임금을 그리며 권력 복귀를 꾀했다. 이들 대부분은 다시 권력으로 복귀하기도 한다. 현재 남아온 시조의 대부분이 이들의 작품이기에 시조가 사대부나 권력계층의 점유물이라는 평을 받게 된다. 이외에 일부 예술인들이 시조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윤선도이다.   세 번째 부류의 문인, 여성문인: 시대의 제한으로 말미암아 여염집 여성들 대부분은 글을 알지 못했다. 아무래도 양반가의 여성들이 글을 좀 알고 있는 까닭으로 그들을 주축으로 자신들의 애환을 시조에 담았다. 하지만 양반가의 여성이라 해서 누구나 시조나 읊조리며 산 것은 아니다. 그와 반면에 글귀를 아는 기생들이 많은 시조 작품을 남겼다. 그 시대에 여자로서 시대의 제한을 덜 받은 것이 이 비천한 기생들이었다. 그 시절의 한다하는 남성문인들이 기생집의 단골이니 노랫가락이나 잘하고 시문에 뛰어난 기생들의 몸값이 높았다. 그러니 글이나 아는 기생들이 풍류의 시조나 써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분명하다. 그 대표인물로는 황진이다. 기생들의 시조작품은 기방으로 통해서 후세에 전해졌기에 양반가 여자들이 쓴 시조처럼 훼손도 적었다.   이밖에도 산수를 노래한 시조들이나 효도나 인애를 노래한 시조들이 적지 않은데 그 창작자들의 계층 범위가 고르지 않아 필자는 예를 들지 않으며 또한 본고의 취지가 아니기에 그것들을 일일이 논하지 않는다.       3. 시조에 내재된 민혼을 읽으며     홍용암시인은 조선시대의 김종서나 이순신에 못지않은 민혼시인이다. 그의 시조에 내재된 이미지는 민혼이다. 누구보다도 더 뜨거운 민혼이 그에게 있었기에 그의 시조들은 걷잡을 수 없는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고 그의 시조들 또한 가치가 높은 작품들로 부상했다.   아래에 그의 시조집 “역사와 민족 앞에”에 수록된 시조 몇 수를 읽으며 시조에 내조된 홍시인의 민혼을 감수하기로 한다. 우리에게 민혼을 다시 한 번 심는 계기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일락서산 지는 해는 저무는 내 인생이요, 핏빛 황혼 저녁놀은 타드는 내 심사라, 사무친 망향의 한이 오늘도 불타오르네.”(망향의 한)   망향시조에 속하는 이 시조는 망향의 아픔을 잘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 지는 것은 순리로서 가볍게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국경너머에, 분단선너머에, 두고 온 고향의 그리움은 저녁놀처럼 타고 이 몸이 죽어도 망향을 떨쳐버릴 수 없음을 절규한 것이다. 초, 중, 종장에 각개의 이미지를 만들어 이를 하나로 관통시킴으로서 읽는 자에게 커다란 아픔을 느끼게 한다.   “함께 놀던 송아지들 어디론가 다 가고, 생면부지 얼굴들만 생소하다 나를 묻누?, 고향은 옛 고향이되 타향보다 차갑더라.”(고향 타향)   귀향시조에 속하는 이 시조는 귀향의 쓸쓸함을 상징한 듯 했지만 뒤늦게라도 돌아온 고향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것이다. 세월의 흐름은 사람만 늙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향마저 생소하게 만든다. 나와 같이 어디로 뿔뿔이 흩어져간 고향친구들이나 작고한 고향사람들을 대신해 고향의 오늘을 살고 있는 생면부지 얼굴들은 나와 함께 자라오고 늙어온 사람들의 후손이기에 여전히 반가운 사람들이다. 중장에서의 생소함 이미지와 종장에서의 차갑다는 이미지는 고향애에 대한 따스함의 반전이다.    “산송장이 된 이 어시께 곤두백배 엎드려서, 피눈물로 해 올리는 마지막 네 큰절을, 제사 때 오지 못할 너 고별인사로 받아주마!”(제사)   이산시조에 속한은 이 시조는 이산의 아픔에 몸부림치게 한다. 부모님에게 효도를 못하고 사는 몸은 산송장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이는 효도에 밝은 우리 민족의 속성이다. 죽은 자에게 네 번의 절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불효에 뛰어드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걸 고별인사로 받아준다는 구천에 계시는 부모님의 마음 또한 대견스럽다. 중장과 종장에서 산자와 죽은 자의 대화로 맥을 이어주고 모순을 갈등시킨 기교가 돋보이며 이로써 이산의 아픔을 극치에 이르게 하였다.   “미물 새도 남북으로 자유로이 오가건만, 만물영장 이 내 몸은 어이 가지 못하는가?, 이 한 몸 훨훨 새 되어 조국산천 날고 지고…”(새)   분단시조에 속하는 이 시조는 새들을 빌어서 통일의 염원을 갈망했다. 초장과 중장에서 새와 인간을 비교해 이념의 속박을 질책했고 종장에서 새로 둔갑한 시인이 한반도를 훨훨 날고 있음을 상상해 조속히 이루어질 남북통일을 노래했다.     “멧새는 멧새끼리 사슴이면 사슴끼리, 흰 옷 입은 우리도 백의동포 우리끼리, 좋구나! 한데 어울려 천만년 살고지고…”(끼리끼리)   “6.15”선언시조에 속하는 이 시조는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통일된 한반도를 미리 축복했다. 멧새(월남을 상징)들도 통일했고 사슴(독일을 상징)들도 통일했으니 우리 백의동포는 우리 멋대로 나라 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대단한 착상이다. 우리의 통일은 기필코 시인의 의지와 같이 이루어짐은 필연적이다. 초장과 중장에서 이미 통일 된 두 나라와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한 우리를 비교하고 종장에서 우리의 통일은 그들의 통일보다 더 위대할 것이며 더없는 융성을 가져올 것을 가락으로 자랑했다.   “순간을 살아도 빛나게 살리라, 천 백년을 산단 들 헛되이 살면 뭣하랴, 야공을 헤가르면서 번개처럼 살고 저”(번개)   애국시조에 속하는 이 시조는 남이의 귀뺨을 후려칠 정도로 애국충정이 담겨있다. 한 사람의 생은 역사에서 보면 번개보다 더 살 같은 존재이다. 그런 삶을 아무런 욕심도 없이 그냥 통일된 반도의 하늘이나 헤가르는 번개처럼 살겠다는 시인의 의지에 머리가 숙여진다.   “그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떠는 삼도왜적, 임진전쟁 그 막장도 그 손으로 내렸도다! 전하라 불멸의 업적 천추만대 빛발치리.”(이순신)   영웅 송 시조에 속하는 이 시조는 이신순의 불멸의 업적을 노래했다. 대대손손 그의 업적을 전해서 한 민족의 부강발전을 기원하려는 시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계백장군 결사하던 거친 황산벌에, 신라의 소년장수 관창 목도 떨어졌네, 억만의 창생 목숨이 저 들풀과 같다하리.”(황산벌)   역사시조에 속하는 이 시조는 당나라를 끓어 들인 신라에 맞서는 백제의 계백장군을 노래하면서도 신라 소년장수 관창의 죽음을 헛되지 않음을 칭송한다. 신라의 외세를 끓여 들인 통일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통일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관창의 높은 기개를 추켜들고 억만 창생의 목숨이란 자고로 보잘 것 없으니 나라를 위해 죽고 민족을 위해 죽음이 별빛과 같은 것임을 강조했다. 초장과 중장에서 백제와 신라의 대결을 펼치고 계백과 관창이란 두 인물을 동시에 노래함이 새롭다.   “인생은 자고로 누가 아니 죽으랴만,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수 있으랴, 우국충정 고이 간직해 청사에 길이 빛나리.”(인생)   애족시조에 속하는 이 시조는 민혼 대표사상 격이다. 우리의 옛시조에 이런 풍이 많았으며 또한 시인이 옛 사람의 우국충정으로 돌아가서 한 민족에게 계시를 주려함이 틀림이 없다. 육체는 죽어도 민족을 위한 영혼만이 영원히 살아 있으려고 하는 시인의 민혼 여기서 다시 한 번 치하하고 싶다.     민혼이 내재된 홍용암시인의 시조집 “역사와 민족 앞에”의 출간은 우리 시조단의 새로운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아직 시조에 조예가 깊지 못하고 또 몇 수를 써보지 못한 필자로서 요즘 우리 시조 단에서 평시조요, 엇시조요, 사설시조요 함에 어리둥절하다. 하지만 오늘 홍시인의 고유 시조형식의 시조를 읽고 감내하는 바가 크다. 시조란 그래도 3장 6구의 45자가 기본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현대시조랍시고 기본 틀을 깨고 제 좋은 목소리를 하는 것은 제창할 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홍시인의 시조집 출간을 축하한다. 또한 그의 시조집이 우리 중국조선족시조 단이나 한반도 시조단의 큰 재부로 남기를 미리 기원하는 바이다.   흘러간 낭만의 시대를 다시 찾는 작업                                                                        흰 사슴   1. 화 두   한 작가에게 있어서 소중하게 써놓은 작품들을 20년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내놓게 된다는 것은 그 사유가 어떻든 간에 어딘가 불행한 일이다. 그것도 “하루살이가 되고 싶었던 그날”이란 사랑시집의 거의 전반을 채우는 근 40수에 달하는 분량의 시들이어서 더욱 마음이 아플 것이다. 허구성을 띤 소설작품일 경우에는 20년 후에 빛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럭저럭 위안이 될 일이지만 즉흥성을 띤 시작품들이 20년이 썩 지난 후에 빛을 보았다는 것은 가히 접수하기조차 어려운 애수가 아닐 수 없다.   장장 20년 만에 빛을 본 시들을 감상하는 일은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로서는 어쩌면 한 단락의 추억의 소일거리로 될 수 있을 런지 모르겠지만, 평자에게 있어서 이제 다시 그 시들을 평론한다는 것은 일반경우 큰 소득이 없을 것임을 대체로 감안하는 바이다. 그래도 고집스레 그 시작품들에 대한 평론을 포기하지 않고 기어코 쓰려는 일은 어쩌면 평자 나름대로 홍용암이란 시인의 초기성장과정을 알기 위한데 있지 않을까 하는 목적과 호기심 때문인 것 같다. 적어도 이미 서른 살 중턱을 넘어선 젊은 시인 ― 홍용암의 시작(詩作)발전과정을 알아보는 일에는 필요하고 충분할 것이라고 나는 소신한다.   다시 말해서 오늘 평하는 이 시들은 홍용암시인의 20년 전후의 시작품들로서 “1985년∼1989년 작(作)”이라고 명백히 표명된 것들이다. 꼭 마치 “발레타인, 1884년”이란 상표가 붙은 양주병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의 그런 옛 시들이다. 오래 발효시킨 술이 좋은 술인 것처럼 20년 후에 드디어 시집으로 출간된 홍용암의 이 40수의 시들을 감상하고 음미하고 평하는 작업 역시 어쩌면 흘러간 그 순수와 낭만시대를 되돌아보는 즐거운 일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2. “아래위 논 처녀총각”시대의 감동들    1985년부터 1989년 사이의 중국 조선족사회는 말 그대로 “아래위 논 처녀총각”시대인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 시절 홍용암은 금방 사춘기에 범접한 시절이고 또한 사춘기의 그 짜릿함을 겪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 어린 시인은 혁명적인 열광시대의 끝자락에서 낭만과 순수의 시대가 시작되는 시절에 동년을 보내고 사춘기를 접한 것이다. 문학신동으로 불리었던 그는 이때 벌써 일정한 시작(詩作)재능을 소유, 발휘하고 있었고 또 남몰래 이성에 대해서도 빠금히 어섯눈을 뜨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했기에 그는 당시 자기 나름대로 새 기상을 맞이한 농촌청년들의 순수한 사랑을 주제로 한 사랑 시들도 쓰게 되었다. 남보다 뛰어난 시재로 하여 그는 그 당시의 기성시인들도 무척 이루어내기 힘든 시작품들을 대담히 써낼 수 있었지만 이런저런 원인으로 하여 그때 발표되거나 시집으로 출간되지 못하였다.   시평을 시작하기에 앞서 “아래위 논 처녀총각”시대란 어떤 시대인가 하는 것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 시대는 중국 조선족농촌에 오래 동안 기반을 갖추고 있던 생산 대라는 집체호가 깨지고 호도거리책임제의 시작을 맞이한 생기발랄한 시대이다. 이런 생기발랄한 시대를 접한 농촌청년들은 순박하면서도 열렬하고 도전적인 청춘과 사랑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 잘하는 처녀총각이 모범인물로 되고 사랑과 혼인에까지 그 영향, 그런 의식이 침투되었었다. 그러기에 아래위 논 처녀총각은 모내기경쟁을 하게 되고 또한 그 경쟁이 드디어 사랑으로 싹트고 열매를 맺는 그런 감동의 세월이었다.   그런 세월에 나 어린 시인―홍용암이 쓴 사랑시작품들은 “아래위 논 처녀총각”시대의 감동들을 적어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시작품들이 비록 여태 빛을 보지 못하고 20년간 숨겨져 있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시집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여 그 가치가 어느 정도 떨어져있지만, 조숙한 홍용암시인이 그 시절에 남보다 앞선 사유로 꾸준히 시작(詩作)을 해온 진지한 모습과 그 흔적을 평자는 찾아볼 수 있었으며 또한 저도 모르게 그 진한 감동의 시대를 다시 한 번 함께 가슴으로 느껴보는 그런 즐거운 작업의 일환이 되였음도 자명한 일이다.   그럼 이제부터 평자와 함께 홍용암시인의 시작품속에 내재한 “아래위 논 처녀총각”시대의 감동적 편린들을 좀 더 상세히 감수해보기로 하자.        “아래위 논 처녀총각”시대의 감동적 편린 1:   “아래위 논 처녀총각/ 모내기 경쟁에/ 승벽도 많더니만/ 문득 총각이 다가와/ 넌지시 던지는 말―//  인물 곱고 맘씨 곱고/ 일솜씨 야무지여/ 마음에 들긴 드는데/ 옥의 티랄까 딱 한 가지 흠/ 아하, 키가 좀 작다나?!//  총각이 시물시물/ 건네는 농담에/ 처녀가 쌍까풀눈/ 곱게 흘기며/ 재치 있게 받는 말// 아이참, 싱겁기두/ 키가 작은데 뭐라나요?/ 고추는 작아도 맵고요/ 참새는 작아도 알을 낳고/ 제비는 작아도 강남간대요//”(‘아래위 논 처녀총각’ 전문)   모내기철의 아름다운 시골풍경이다. 아래위에 붙은 두 집의 논밭에서 처녀총각이 모내기를 한다. 그 모내기솜씨들이 어지간하지가 않다. 그래서 승벽심이 많은 두 처녀총각은 서로 뒤질세라 은근히 모내기경쟁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쉬는 참에 총각이 문득 다가와 처녀에게 넌지시 던지는 말이 매우 흥미롭고 또한 처녀가 맞받아주는 대답 역시 더욱 재미있다. 키가 작은 어여쁜 그 처녀가 바로 동네에서 으뜸가는 모내기 군이다. 거기에 반한 총각의 사랑고백은 어딘가 격장법이긴 하나 거기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야무진 처녀의 수완 또한 만만치가 않다. 작다고 예쁘지 않다는 법이 없고 사랑스럽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고추는 작아도 맵듯 참새는 작아도 알을 낳듯 제비는 작아도 강남으로 가듯이 키 작은 그 처녀의 오돌 참은 여간만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모내기 잘하는 처녀총각의 사랑을 이렇게 기교적으로 재치 있게 다룬 것만으로도 그 당시 나 어린 홍시인의 시적재능을 충분히 보아내고도 남음이 있다. 이런 사랑 시들은 이야기성이 짙고 유머성이 짙어 구독하고 나면 기분 좋은 감상이 된다.        “아래위 논 처녀총각”시대의 감동적 편린 2   “티 없이 깨끗한/ 그대 눈동자―맑은 호수// 그 호수에서 떨어지는/ 이슬방울―눈물폭포// 울지 마오, 울지를 마오./ 쏟아지는 폭포수에 맑은 호수 싹―흐려지오.// 그로 하여 미여지는 이 내 가슴/ 내 그 호수를 더없이 아낀다오.//” (‘석별(2)’ 전문)   티 없이 깨끗한 여인의 눈동자를 맑은 호수에 비유함이 아주 생동하다. 사내의 영혼을 빼앗아가는 눈동자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눈동자―호수에서 떨어지는 이슬방울은 눈물폭포이다. 그 눈물폭포가 사내의 마음―맑은 호수에 떨어진다. 그래서 사내의 마음이 혼탁 하는 것이다. 그 혼탁이란 간절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석별의 정이 얼마나 잘 표현된 시인가? 사랑하는 여자는 석별에 울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말을 이렇게 생동하게 에둘러간 기교가 돋보인다. 석별을 앞두고 흘리는 “그대”의 눈물이 내 가슴을 적시면서 미여지게 하고 행복하게 하거니, 그 눈물을 쏟아내는 “그대”의 눈동자―맑은 호수―그것을 더없이 아끼고 사랑할 것임을 노래했다.     “아래위 논 처녀총각”시대의 감동적 편린 3   “산기슭에 감도는 하얀 구름/ 갈라질 때 흔들던 임의 손수건/ 방울방울 눈물이 흠씬 슴배어/ 리별의 회포를 자아냅니다.// 보슬보슬 내리는 초록색 비는/ 임이 수건 쥐어짤 때 휘 뿌린 눈물/ 그 눈물 대지 우에 차고 넘치어/ 그리움도 새파랗게 돋아납니다.//  햇빛에 반짝이는 영롱한 이슬/ 촉촉이 눈물 맺힌 하얀 백일홍/ 슬픔에 흐느끼던 임의 그 모습/ 다시 보듯 가슴 뭉클 그립습니다.//” (‘그리움’ 전문)   임과 헤어질 때 휘 뿌린 눈물이 산기슭에 감도는 하얀 구름에 방울방울 슴배어 자못 이별의 회포를 자아낸다. 이제 하얀 구름에 슴배인 그 눈물은 끝내 비가 되어 대지위에 가득 내리고 그곳에는 그리움도 새파랗게 돋아난다. 또 맑게 갠 날에는 햇빛에 영롱한 이슬이 반짝이는 하얀 백일홍이 피어나기도 하는데 그것은 슬픔에 흐느끼던 임의 모습으로서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나 어린 시인이 그리움을 이렇게 환상적으로 표현함은 남다른 착상이 없이는 전혀 불가능하다.     “아래위 논 처녀총각”시대의 감동적 편린 4   “당신과 나, 두 마음은/ 두 조각 초생 달이죠./ 당신도 초생 달/ 나도 초생 달// 당신과 나, 함께 있으면/ 저 하늘엔 보름달이 둥실 솟지요/ 당신과 내 마음 두 조각 초생 달/ 하나로 합쳐서 둥근달 되었죠.//  당신과 나, 떨어져 있으면/ 저 하늘엔 초생 달만 남지요/ 아마도 당신이 나만 홀로 남겨두고/ 멀리멀리 가버렸기 때문이던가요?!// 참말이지 당신과 나, 함께 있으면/ 달도 둥글고 내 맘도 밝지요/ 당신과 나, 떨어져 있으면/ 달도 처량하고 내 맘도 애달프죠.// 아, 그래서 외로울 땐 밤에 밤마다/ 월궁속의 상아아씨께 물어보아요./ 어쩌면 님과 나, 함께 있도록/ 영원히 이지러지지 않을 수 없는지.//” (‘달(2)’ 전문)   떨어져 사랑하는 당신과 나의 두 마음은 두 조각 초생 달이라고 시인은 고집한다. 해서 당신과 나 떨어져 있으면 저 하늘엔 초생 달만 남게 되는데 그건 아마 당신이 나만 홀로 남겨두고 멀리멀리 가버렸기 때문이라고 역설한다. 그러기 때문에 당신과 나 함께 있으면 달도 둥글고 내 마음도 밝게 되고, 당신과 나 떨어져 있으면 달도 처량하고 내 마음도 쓸쓸해진다. 그래서 외로울 땐 밤에 밤마다 월궁속의 상아아씨께 묻기를 ―어쩌면 님과 나 함께 있도록 영원히 이러지지 않을 수 없는 가고 말이다. 동화적인 이야기로 이별적인 사랑을 다룬 사랑 시로서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아래위 논 처녀총각”시대의 감동적 편린 5   “햇솜같이 나긋한 그대의 흰 손/ 잡으면 금시 부서질 것 같아/ 조심스레 살그머니 쥐었습니다.// 탐스럽게 단물 오른 그대의 입술/ 빨면 스르르 녹아버릴 것 같아/ 조심스레 입술 살짝 대였습니다.// 청류처럼 아련한 그대의 허리/ 조이면 그 채로 휘어들 것 같아/ 조심스레 가분가분 안았습니다.// 들소처럼 우악진 나도 그대 앞에선/ 저도 몰래 온순하고 경건해지거니/ 천사인 그대와는 사랑을 조심스럽게.//” (‘천사와는 사랑을 조심스럽게’ 전문)    무릇 “내”가 사랑하는 여인은 마돈나와 대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마돈나를 제 몸처럼 사랑하는 사내로서는 햇솜같이 나긋한 그대의 손도 잘못 잡으면 부서질 것 같아 조심스럽게 살그머니 쥐게 된다. 마돈나 같은 여자를 사랑할 때는 경건하게 해야 할 것이다. 들소처럼 우악진 나도 그 앞에선 저도 모르게 온순해지게 되는 것은 천사인 그대와의 귀중한 사랑을 혹시 실수라도 하여 자칫 부스러뜨릴까봐 우려해서이다. 그 누구에게나 자신이 사랑하는 마돈나가 있게 되게 되면 그를 목숨처럼 아끼게 된다.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도 자신이 사랑했던 슬람미 여인을 자신의 병거를 끄는 준마에 비유하지 않았던가?     “아래위 논 처녀총각”시대의 감동적 편린 6   “임은 골랐죠. 참외 한 알/ 나도 골랐죠. 참외 한 알/ 참외 두알 사들고 돌아와/ 임이 한입 뚝- 떼여먹으니 시큼털털/ 내가 한입 뚝- 떼여먹으니 새콤달콤// 비싸게 주고 산걸 버리자니/ 너무너무 아까워 내가 말했죠./ ―고 시큼한 건 내가 먹죠./ 나는 워낙 시큼한 걸 좋아하니깐/ 그리고 요 달콤한 건 임이 자시죠.// 그러자 임이 손을 내저으며/ 시큼한 건 자기가 더 좋아한다네./ 그렇게 서로 쓴 외 먹겠다고/ 옹고집 부리며 밀고 당기다/ 임이 끝내 묘안을 내놓았죠.// ―자, 다툼 말고 이리하기요/ 우리 약속 벌써 왜 잊었소?/ 애초에 우리 둘이 다진 맹세/ 쓰고 단걸 같이하자 하잖았소?/ 지금 마침 쓴 외 한 알 생겼으니/ 우리 함께 똑같이 나누기요.// 나도 만세 두 손 들어 찬성했죠./ 쓴 외 한 알 똑같게 쪼개어/ 임이 절반 내가 절반 나눠먹었죠/ 정겹게 서로 마주 웃음 지으며// 참외 맛은 시큼텁텁 떫었지만/ 마음은 꿀보다 더 달콤했죠.//” (‘쓴 외 한 알’ 전문)   참외장수를 만나게 되여 임하고 둘이서 참외를 사서 맛보는 풍경으로 시작된 사뭇 아름다운 시이다. 가난한 형편에 비싸게 주고 산걸 버리자니 너무 아깝고, 먹자니 괴로운 참외 한 개를 두고 임과 나는 실랑이를 벌린다. 새콤달콤한 것은 서로가 양보하고 시큼털털한 것을 자기가 먹겠다고 우기다가 애초에 고락을 같이하자던 둘 사이의 맹세가 떠오른다. 그래서 그 언약대로 쓴 참외를 둘이서 똑같이 절반씩 나누어먹으니 참외 맛은 비록 시큼텁텁 떫었지만 마음은 꿀보다 더 달콤했다는 이야기이다. 거짓 하나 없는 풋풋한 시의 이미지는 소박하면서도 진솔하여 심금을 울린다.     “아래위 논 처녀총각”시대의 감동적 편린 7   “그대가 매달리는 강아지를/ 정겹게 어루쓸며 애무할 때/ 나는 몹시 그 강아지가 되고 싶었다오.// 그대가 아기를 귀여워/ 품에 꼭 그러안고 볼을 부빌 때/ 나는 다시 애기로 태어나고 싶었다오.// 그대가 라일락 한 송이 꺾어/ 뜨겁게 꽃망울에 입 맞출 때/ 나는 단박 그 꽃이 되고 싶었다오.// 무엇이든 그대의 끔찍한/ 사랑을 받는 것이기만 하면/ 나는 정말 그것이 부러웠다오.// 그토록 샘솟듯 불붙듯/ 사무치게 그대만을 사모하면서도/ 그대 사랑 못 받는 서글픈 나는.//” (‘짝사랑자의 고백’ 전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어쩌면 짝사랑일 것이다.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더더욱 환상적으로 그리게 되고 갈망하게 되고 지어 열광하게 되는 것이다. 그토록 일편단심 “그대”만을 사무치게 애모하지만 도리어 좀 체로 다가 갈수 없는 처지가 정말로 애처롭고 가련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그래서 더더욱 동경이 생기게 되고 집착이 생기게 되며 상처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대”가 매달리는 강아지를 귀애할 때, “그대”가 귀여운 아기를 품에 안아줄 때, “그대”가 라일락 한 송이 꺾어 뜨겁게 꽃망울에 입 맞출 때마다 나는 곧바로 그 강아지, 아기, 라일락꽃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은 아프기만 하다. 그토록 혼신을 다하여 불붙듯 “그대” 하나만을 열연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대”의 사랑을 조금도 받지 못하는 서글픈 나는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 쓰라림을 간절히 하소연하는 시인의 고백은 또 얼마나 진솔한 것인가? 아픈 그 마음을, 아픈 그 충정을 이렇게 진솔하게 표현하기란 정말로 쉽지가 않다. 여기에서는 나 어린 시인의 순수한 사랑을 엿볼 수 있어 자못 진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아래위 논 처녀총각”시대의 감동적 편린 8   “오마하고 약속하고 아니 왔기에/ 그대 위해 어머님 담그어 놓은/ 김치 맛 다 시고 변했다면서/ 총각은 편지에다 원망을 했네.// 총각의 편질 받고 다심한 처녀/ 사흘 후에 답장을 보내왔다네./ 김치 맛 다 변했다니 참 안됐군요./ 하지만 너무 속상해마시라요// 김치야 그 맛이 변하면/ 다시 담그면 그만이지만/ 정붙인 우리 두 마음만 변치 않는다면야/ 그까짓 김치 맛쯤은 백번도 더 변하라지요.//” (‘편지’ 전문)   새 색시가 온다고 어머님은 미리 만단의 준비를 갖추는 게 재래의 법도다. 또한 어머님의 그런 정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그때 사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어머님의 노여움 같은 것을 표현하지 않았다. 아마 어머님은 처녀의 진정이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해서 총각이 처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오마하고 아니 왔기에 그대를 위해 어머님이 담그어 놓은 김치 맛이 다 시게 변했다고 쓴다. 그러자 다심한 처녀가 사흘 후에 보내온 답장은 오히려 신기하고 놀라울 정도로 시원스럽고 의미심장하기 그지없다.   제3자의 각도에서 변함없는 사랑을 노래한 시인의 자세가 가히 창조적이라고 할만하다. 어머님의 정성에 미안하다는 말 표현은 별로 없고 그 무슨 김치 맛이야 변하면 다시 담그면 그만이지만 사랑이 변하면 그게 바로 가장 큰일이란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건 사랑의 마음이다. 즉 우리의 드팀없는 사랑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고 모를 박는다. 참으로 소견머리가 있는 옹골찬 처녀의 형상이 돋보인다.     “아래위 논 처녀총각”시대의 감동적 편린 9   “그대 눈은 까만 머루/ 꿀샘 같은 단 맛을 랑/ 누가 먼저 맛볼까?// 그대 눈은 밝은 진주/ 수정 같은 값진 보배/ 누가 몽땅 가질까?// 그대 눈은 맑은 호수/ 일엽편주 두둥실/ 누가 선참 띄울까?//  정녕―/ 그 머루, 그 진주, 그 돛배/ 그 임자는 누구???// 허―, 그야 물론/ 아무렴 나겠지 나!/ 나만 보면 생글 웃는/ 그 눈 보면 몰라?!!!//” ( 전문)     자고로 동네의 일등처녀를 넘보는 총각들은 한둘이 아니다. 그런고로 그 일등처녀를 두고 마을총각들은 서로 내심 질투하고 경쟁한다. 그래서 누가 먼저 그대 눈―까만 머루를 맛보고, 누가 얼른 그대 눈―밝은 진주, 값진 그 보배를 몽땅 가지고, 누가 선참 그대 눈―맑은 호수에 두둥실 일엽편주를 띄워볼까 하고 내기를 건다.   여럿의 내기 중에 억지를 부리는 자가 취득자가 될 때가 많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의 가슴을 탕탕 친다. 나만 보면 생글 웃는 그 눈을 보면 모르냐고 능청을 부려도 유분수다. 아예 선수를 치는 그 능글맞음이 고약하면서도 부럽기도 하다. 이 시를 다 읽고 나면 아무렴 너니깐 콱―행복해보라고 언감생심 질투를 던져주고 싶은 기분이 돈다.      “아래위 논 처녀총각”시대의 감동적 편린 10   “평소에 생각해둔 말, 차고 넘쳐도/ 정작 만나 그녀와 함께 거닐면/ 꾹― 잠근 자물쇠인 나를 두고/ 그래서 그녀는 벙어리라 합디다.// 그녀 얼굴 보고 싶어 바장이다가도/ 정작 만나 그녀와 마주서면/ 고개조차 못 드는 나를 두고/ 그래서 그녀는 뚝바우라 합디다.// 치솟는 애욕에 몸이 확확 달아도/ 정작 만나 그녀와 함께 있을 땐/ 손목 한번 못 쥐어보는 나를 두고/ 그래서 그녀는 멍텅구리라 합디다.//” (‘그녀는 나를 두고’ 전문)   사랑의 순진성을 잘 표현한 시이다. 어찌나 어리숙하고 줄났는지 자기의 사랑 앞에 당당하게 나설 용기조차 없는 못난 “나”를 두고 그녀는 원망하며 벙어리, 뚝바우, 멍텅구리라고 부른다. 꾹― 잠긴 자물쇠인 “나”, 고개조차 못 쳐드는 “나”, 손목 한번 못 쥐여보는 “나”이기 때문에 그런 “나”를 좋아하는 그녀의 애간장도 여간만 끓어 번지는 것이 아니다. 순수의 시대에만 있는 시골총각의 순백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신선한 시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     이상으로 홍용암시인의 “아래위 논 처녀총각”시대의 감동적 편린 10점을 감수해보았다. 이 10점의 “아래위 논 처녀총각”시대의 감동적 편린들을 슬그머니 조합을 해보니 20년의 세월 속에 묻혀버린 그 “아래위 논 처녀총각”시대가 환히 들여다보인다. 더욱 놀랍게 발견되는 것은 그때 겨우 15살이나 16, 17, 18세에 불과했을 나 어린 시인이 그 시대 청장년시인들도 무척 써내기 어려운 엉뚱한 시작(詩作)들을 저 혼자 말없이 뛰어나게 해냈다는 신기한 사실이다. 먼- 산을 쳐다보고 그림을 그려도 진달래만 잘 그리면 더 이상 바랄게 그 무엇이랴?!     3. 흘러간 랑만의 뒤안길에 살아 숨 쉬는 말 묶음들     홍용암시인이 20년 전에 쓴 사랑 시들은 이미지가 생생히 살아있고 그 낭만시대의 이야기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말 묶음들이다. 이제 그런 랑만의 시대는 먼- 뒤안길로 아득히 사라져갔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제 단박 40고개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을 그 낭만시대의 소중한 이야기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더욱 순수와 랑만이 다 깨진 요즘 세월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아닌가?   더욱 평자는 진작 서른 살 중턱을 넘어섰으나 아직도 혈혈단신으로서 연애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가끔가다 끝없는 짝사랑으로 가슴을 불태운다. 하지만 평자인 나도 분명 20년 전의 그 순수와 랑만의 시대를 누구보다 동경은 하지만 사실상 인제는 얼마 간직하고 있지 못하다. 시대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나도 순수와 랑만이 다 깨진 오염된 오늘의 현시점에서 불신임한 사랑이나 도피적인 사랑의 충격을 받으면서 상기도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마라톤식 사랑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때에 접하게 된 홍용암시인의 20년 전의 사랑 시들은 새삼스레 그 순수와 랑만의 시대를 다시금 상기하게 한다.     홍용암시인의 사랑 시들은 흘러간 랑만의 뒤안길에 살아 숨 쉬는 말 묶음들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이 시들을 읽고 나름대로 벌려온 나의 평은 어쩌면 흘러간 그 랑만의 시대를 다시 찾는 작업일 것이다. 문학작품들이란 시인이나 작자의 의지를 떠나서 읽는 자들에게 낭만과 즐거움을 주는 말 묶음들이 아니던가?!        영원한 사랑의 숨소리 ―홍용암의 소년시집“소년의 비밀”을 읽고                                                      김춘택     나는 숨소리를 듣기 좋아한다. 숨소리는 곧 생명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동물에게도 숨소리가 있고 식물에게도 숨소리가 있다. 인간의 숨소리는 단지 생명의 언어만 아니다. 인간의 숨소리에는 사랑의 언어도 내재해 있다. 동물의 심장은 뛴다. 생명의 순환으로 뛴다. 하지만 인간의 심장은 사랑이라는 존재를 만났을 때 더 세차게 뛰고 영혼을 노래한다.   나는 소녀의 숨소리를 듣기 좋아한다. 또 소년의 숨소리도 듣기 좋아한다. 그것은 그들의 숨소리야말로 이 세상에서 티 없이 깨끗하고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런 숨소리를 자주 듣지 못한다. 그 이유는 내가 이제 불혹의 나이를 바라보게 되고, 소녀소년들하고 함께 뛰놀고 호흡을 하던 그 시절을 너무 많이 떠나왔기 때문이다. 어쩜 소녀소년들의 숨소리를 망각하고 살지 않았는가 싶기도 하다. 그 시절을 떠나 지금까지 들어온 숨소리는 삶의 욕망을 향해 치닫기에 드바쁜 사람들의 숨소리어서 그렇다고나 할까?   바로 그렇게 내 삶에 바빠서 내 숨소리마저 거칠어지고 어떤 오물에 잔뜩 게 발려 진득진득할 때 나는 소녀소년들의 격동에 찬 아름다운 숨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 얼마나 오래만이고 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그렇다고 내가 소년, 소년들이 모여 사는 사춘기 그 시절로 되돌아 간 건 아니다. 오늘 내가 그 숨소리를 듣게 된 이유는 소녀소년들의 사춘기사랑을 담은 홍용암의 시집“소년의 비밀”때문이다.   비록 20년 전에 사춘기를 맞이한 홍용암 개인의 애수를 담은 시집이지만 20년 전, 소녀소년들의 숨소리를 듣는 데에는 큰 장애가 없다. 해서 불혹의 문턱을 넘을 이 시점에 우연하게 만난 홍용암의 시집“소년의 비밀”은 나에게 좋은 선물이 아닐 수 없다.   홍용암의“소년의 비밀”이란 이 시집을 읽는 내내 나는 청신한 공기를 마이고 있었다. 소녀소년들의 숨소리가 호흡하는 곳에는 청신한 공기만 있었기 때문이다. 시집을 다 읽고 난 지금도 나는 소녀소년들의 숨소리의 여운을 듣게 되어 행복하다. 그런 행복을 욕심스레 혼자 독차지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오늘 나는 이 평론을 쓴다. 홍용암의 시집“소년의 비밀”속에 들어있는 국부의 시들을 4개의 이미지로 분류하여 평하는 작업은 소녀소년들의 아름다운 숨소리를 여러분들에게 전달하는 사명이 아닐 수 없다.         1. 봄, 언제나 애수의 계절   홍용암의 시집“소년의 비밀”속에는 봄의 이미지를 다른 시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이 시집에 내재한 사춘기사랑을 노래한 시들 모두가 말 그대로 마음의 봄을 노래한 것들이기에 달리 봄의 이미지를 많이 빌지 않았음은 불 보듯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꼭 봄의 이미지를 불러 평을 하려는 집착은 화두(話頭)를 잡으려는 아집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 아래에 봄이라는 이미지를 빌려서 시작(詩作)을 한 시들을 보기로 하자.    “봄아/ 오지 말아!//  봄아 올 거면/ 가만히 올 거지//  겨우내 풋잠이 든/ 고요해진 소년의 다시 잦은/ 잔잔한 종 가슴은/ 왜 들깨우는 거냐?//  인적기 드문 들판 오솔길/ 만발한 민들레꽃 이파리에/ 아프게 달려있는 눈물/ 그 앞에 사색에 잠겨/ 하염없이 서있는 고독한 소년―//  해마다 이맘때면/ 애모뿐 한 소년의/ 울적한 심사에/ 남몰래 애간장 태우는 줄/ 아느냐 모르느냐?//(‘봄아 오지 말라’전문)”   시의 시작을 봄더러 오지 말라고(1연) 강조한다. 말하려는 구실이 강조된다. 그러면서도 가만히 오라고(2연)라고 한 것은 말하려는 구실을 확실히 하려는 반역이다. 그 다음은 잔잔한 소년의 종 가슴을 왜 들깨우는 거냐?(3연)고 불평을 부린다. 말하려는 구실을 승화시키려는 의도적인 심사다. 민들레꽃 이파리에 아프게 달려있는 눈물, 그리고 그 앞에 하염없이 서있는 고독한 소년(4연)의 형상을 빌어 봄으로 다가온 소녀를 그렸다. 애모뿐 한 소년의 울적한 심사에 남몰래 애간장 태우는 줄 아느냐 모르냐?(마지막 연)고 질문하면서 한 소년의 마음에 봄바람처럼 불어온 소녀에 대해 애틋한 정을 연연한다. 이 시는 소박하면서 순수하고 깨끗한 시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날은/ 내 마음이 아픈 날//  이날따라 추억이/ 더욱 새로워 나 홀로 봄 언덕에/ 조용히 나서/ 거닐어보는 날//  그러면/ 추억의 갈피갈피에/ 지나간 그 옛일이 되살아나//  남몰래/ 울적한 심사에/ 어쩐지/ 저 혼자 속 후련히 한바탕/ 울고 싶어지는 날//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날은/ 내 마음이 아픈 날//  잠자던/ 내 가슴의 호수를/ 세차게 / 휘저어놓고 울면서 떠난―//  잊지 못할/ 가버린 그 봄 소녀가/ 새삼스레/ 그리워지는 날…//(‘봄날은 내 마음이 아픈 날’전문)”   시인에게 있어서 봄은 마음이 아픈 날이고, 외롭게 거닐어보는 날이고, 후련히 한바탕 울고 싶어지는 날이고, 가버린 봄 소녀가 새삼스레 그리워지는 날이다. 봄이 행복한 것은 겨우내 준비된 사람의 몫이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가 없는 시인에게 봄이란 스치는 것이고 아득한 세월이 흐른 훗날에 미련으로만 아픈 봄이 된다. 전반 시에 어김없이, 더욱 새로워, 되살아나, 남몰래, 세차게, 가버린… 등과 같은 형용사와 동사들이 이음어로 씌어졌기에 이 시의 흐름은 청산을 울려내는 벽계수가 굴러 내리는 것 같다. 또한 그 때문에 이미지가 맛깔스럽기도 하다.      “해마다 어김없이 새봄은 오고/ 봄이 오면 민들레도 따라 피지만/ 한번 웃고 두 번 웃고 세 번 다시/ 웃을 줄 모르는 고독한 소년/ 소년의 눈물은 애달픈 눈물은/ 방울방울 꽃잎에 떨어진다네.//  풋내기 소년시절 바친 첫 순정/ 깨끗하고 순결하고 진지했어!/ 꾸다가 채 못 꾸고 깨여진 꿈은/ 가슴속에 한으로 남았어도/ 소중했던 그 시절 그 추억은/ 때때로 세차게 나를 울리네.//  그날의 애숭이 소년은 자라/ 커굴 진 사나이로 변하였건만/ 해마다 봄이면 들판에 나와/ 저 홀로 묵묵히 거닐 인다네./ 지나간 옛일을 돌이키면서/ 해마다 이 봄을 기념한다네.//(‘봄날의 애가’전문)”   준비도 없이 꽃 봄을 만나고 그 꽃 봄을 보낸 소년이 성장의 계절을 거치고 커굴 진 사나이로 변하여도 그 애수에 젖은 꽃 봄을 잊을 수 없다. 그 누구에게 한번쯤은 있을 꽃 봄을 시인이 노래한 것이다. 이 시에는 조용함과 장중함이 깊이 흐르고 있는 것 같다.     “화창한 봄날/ 이제 겨우 번데기 벗어던진/ 꿈 가진 애 나비 한 마리//  요지경 세상이/ 하도나 신비하고 황홀해/ 도취된 두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두리번 살피다가//  갑자기/ 저어기 멀리 어느 한곳/ 필까 말까 수줍게 망울이 진/ 꽃봉오리 한 송이 보았다//  아침이슬 함함히 머금은/ 장미 빛 꽃망울 너무 어여뻐/ 애 나비 그리로 날아가려/ 힘껏 나래 저었건만//  파드득―/ 조금 하늘 날아올랐다/ 아뿔싸, 힘껏 땅에 곤두박질/ 아직은 여린 두 날개 그만 풀떡 풀쳤다//(‘봄날의 이야기’전문)”   스스로 나방을 헤치고 나온 한 마리의 나비는 곧 시인이다. 그리고 요지경 세상에 필까 말까 수줍게 망울진 꽃봉오리 한 송이는 아름다운 소녀다. 아침이슬을 함함히 머금은 장미 빛 꽃망울 너무 어여뻐 탐내던 나비는 결국 여린 날개를 풀치고 만다. 이 시에서 강조된 이미지의 표현은 역시 준비도 없는 사랑이며 이른 사랑이다. 가히 창의적인 시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이상으로 봄을 주제로 한 홍용암의 시 네 점을 감상해보았다. 전반 시집 속에 다루어진 시들의 이미지들이 봄이라고 한다면 이 네 점의 시들은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할 것 같다. 봄을 다른 시작(詩作)이 좀 슬프긴 해도 그나마 황홀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빛을 발산하며 진한 감동을 준다.     2. 별이 된 장미의 이미지   홍용암의 시집“소년의 비밀”에는 별이나 장미의 이미지 같은 것도 그리 많지 않다. 소녀소년의 사랑을 다룬 시집으로서 기대 밖으로 예감되는 일이다. 전 시집에서 겨우 두 수 정도만 찾을 수 있는 아래의 이미지들도 대개 상징적으로 그 모습을 보일 뿐이다. 이런 점으로 하여 홍용암의 소녀소년 시들은 평범하면서도 소박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망각을 위해 나는/ 그 눈이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쓸쓸히 떠나왔다//  그러자 그 눈은/ 내가 떠나온 하늘 우에/ 하나의 새별로 다시 떠올라/ 밤마다 반짝이었다//  천애지각 어디에 가나/ 그 별은 조용히 깜박이며/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나를 지켜보는 별’전문)   사랑했던 소녀를 잊기 위해서 그 소녀의 눈이 닿지 않는 곳까지 쓸쓸히 떠나온 시인에게 소녀의 모습은 더 또렷해만 진다. 이제 소녀는 햇빛의 도움으로 멀리 떠난 시인을 볼 수 없으나 밤하늘의 별로 되어 천애지각 어디서나 조용히 깜빡이며 시인을 지켜본다. 이 시의 시작(詩作) 동기부터 놀랍다. 그리고 짤막한 말 묶음들 속에 내재된 이미지도 기대 이상이다.   “그 소녀의 고운 얼굴이/ 내 하늘의 전부였다/ 그렇게 언제나 날 내려다보며/ 정겹게 반짝이는 새별/ 그러던 그 하늘에/ 별이 흐릿하게 빛을 잃고/ 하염없이 비가 내리던 날/ 나는 그 하늘아래/ 외로운 목동이 되었다/ 구슬프게 피리를 불면서/ 느린 황소의 잔등에 올라앉아 / 오불꼬불 비탈길을 돌아가는―//  목동의 피리소리/ 은은히 하늘가에 울려가던 날/ 입에 피를 문 딱따구리 한 마리/ 어디론가 울면서 날아갔다.(‘애가’전문)”   소녀의 얼굴이 시인의 마음을 지탱해주는 하늘이다. 그리고 소녀의 눈동자는 새별이다. 그러다가 하염없이 비가 내리던 날 시인은 그 하늘 아래 외로운 목동이 된다. 느린 황소의 잔등에 올라앉아 부는 목동의 피리소리를 듣고 입에 피를 문 딱따구리 한 마리 어디론가 날아간다고 한 것은 시인의 깊은 마음의 독백이 아닐 수 없다. 이 시는 퍽 환상적인 면과 신화적 이면을 갖고 있어 시의 상징을 이색적으로 드려준다.   홍용암의 시집“소년의 비밀”속에는 겨우 이 두 수의 별 이미지를 다룬 시가 있을 뿐이지만 별을 이미지를 다룬 그 어떤 시들을 능가하는 매력이 깃들어 있다. 이 두 시에서 별이란 존재는 모두 소녀이다. 그러기에 장미가 별이 된 것이며 장미를 사랑하던 시인이 별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기어코 이런 시작(詩作)으로 시를 만들어간 시인의 동기가 무엇인지 뻔하다. 때문에“나를 지켜보는 별”에서는 소녀가 별이 되어서 날 지켜보고“애가”에서는 별이 된 소녀가 다시 입에 피를 문 딱따구리가 되어 울부짖으며 어디론가 날아가게 되는 것이다. 별이 된 장미의 이미지를 다룬 이 두 시는 오래 동안 독자들의 가슴을 울려주기에 손색이 없다.     3. 동년과 사춘기의 갈림길   홍용암의 시집“소년의 비밀”속에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시들은 동년에서 사춘기의 갈림길을 읊조린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동년으로 허물없이 지내왔던 소녀와 소년들 사이에 알 수 없는 벽이 생기게 된다. 그게 사랑인지 당사자들은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일들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꼭 아담과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금과를 따 먹은 후,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감람나무 잎으로 앞을 가린 그런 현실을 소녀소년 시대를 겪고 있던 시인이 표현해 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다섯 살 난 귀염둥이 네가/ 아장아장 들판에 나왔을 적/ 그때는 내 너에게/ 민들레꽃 한 묶음 꺾어주었지//  그때 그 시절 네 작은 고사리 손에/ 내 꺾어준 아름다운 꽃 한 묶음/ 잊지 못할 그 꽃은 오빠가 네게 주는/ 깨끗한 마음의 꽃이었지//  헌데, 내 오늘 너에게/ 다시 꽃 한 묶음 안겨줄 적/ 네 얼굴은 어이 그리 빨갛고/ 내 가슴은 왜 이리 쿵쿵 뛰느냐?//  바라노니, 소녀야/ 내 내미는 꽃묶음 받을 적/ 향기만 맡지 말고 생각해보려무나./ 그 꽃은 무슨 꽃인지 아느냐?//(‘꽃 한 묶음’전문)”   어릴 적 소녀에게 꺾어주었던 꽃은 오빠가 네가 주는 깨끗한 마음의 꽃이라고 강조하면서 오늘 날, 지금 이 시각에 꺾어주는 꽃은 꼭“불결”한 꽃으로 암시한다. 그러고는 능청맞게 네 얼굴은 왜 그리 빨갛고 내 가슴은 왜 이리 쿵쿵 뛰느냐고 수작을 걸고 향기만 맞지 말고 마음을 읽어달라고 생떼를 쓴다. 대비를 통해서 동년과 사춘기 사이의 강에 다리를 놓는 이 시는 꼭 마치 소녀와 소년이 문자유희 노는 것을 보는 기분이 들게 한다.  “처음으로 오빠에게/ 입술을 도적 맞혔을 적/ 금시 울먹울먹 해졌어요/“오빠”라는 게 이처럼 허락도 없이/ 갑자기 동생을 뽀뽀하는 법도 있나요?/ 너무도 억울했어요!/ 그보다도 부끄러웠어요./ 고개를 숙이고 외면한 채/ 감히 똑바로 오빠를/ 다시금 쳐다 볼 염도 못했어요./ 어느새 눈물이 방울져/ 주르륵 흘러내렸어요.(‘도적 맞힌 첫 입술’전문)”   이 시에서 뽀뽀라는 것이 정조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동년에서 사춘기로의 탈출을 꾀한다. 소년에게 첫 입술을 도적 맞힌 소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은 소녀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이제는 함부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소녀와 소년의 사이에 섬으로 솟는다. “어쩐지 감히/ 오빠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보기 두려워요//  언제부터인가/ 취한 듯 굳어진 듯 황홀히/ 눈 한번 깜빡 않고/ 나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이상한 그 눈길―//  그 눈길은 너무도 뜨거워요/ 마음에 불꽃이 일어/ 모닥불 황황 솟는 오빠의 두 눈/ 방불히 그 눈에서/ 세찬 불길 확―/ 뿜겨져 나와/ 삽시간에 요 내 몸/ 활, 활, 활, 불태워버릴 것 같아요.//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이상해진 야릇한 눈빛/ 어쩐지 감히/ 오빠의 그 두 눈을/ 정말로 마주보기 두려워요.//  두려워요/ 제발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말아요.(‘두려워요’전문)”   너무도 뜨겁고, 삽시간에 요 내 몸을 활활 태워버릴 것 같은 오빠의 이상야릇한 눈빛이야말로 마주보기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 눈길은 소녀의 마음을 유혹하는 것이 더 불안하다. 오빠의 눈빛이 언제부터 저렇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이 시에서의 핵심이다. 하기에 이 시에서 보여주는 것이 동년과 사춘기 사이에 놓인 공간이다.   동년과 사춘기의 갈림길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떠들어댄다. 홍용암의 시집“소년의 비밀”은 바로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머물러 있는 궁전이 아닌가 싶다. 소녀와 소년들이 동년의 문턱을 뛰어넘어 들어간 사춘기의 안방에는 많은 수수께끼와 곤혹들이 장난친다. 그런 황홀지경을 시인이 그려낸 노력은 대견스럽기만 하다.      4. 키스의 흔적   사랑에는 흔적이 있다. 소녀소년들의 사춘기사랑도 예외는 아니다. 그 흔적은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크게는 두 가지뿐이다. 그 하나는 마음속 깊이에 보이지 않게 낙인찍히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입술에 찍히는 키스인데 그것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립스틱인 것이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달콤한 키스가 찍어준 장미 빛 립스틱은 퇴색할 줄을 모른다.  “초가을 황혼/ 창백한 낙엽마냥/ 세차게 바르르 떠는/ 차디찬 내 입술에/ 쓰지도 달지도 않은/ 냉랭한 키스만 남겨주고/ 소년은 돌아섰어라 말없이…//  한 조각 내 마음/ 마지막 불빛마저 꺼가지고/ 그렇게도 우울하게/ 그렇게도 쓸쓸히/ 고독한 긴― 그림자/ 사라지던 그 언덕에/ 오늘도 나 홀로 서서/ 멍하니 못 박힘은/ 못 잊을 그때 그 정/ 추억이 서러우매…//(‘서러운 추억’전문)”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서러운 추억이다. 그 서러운 추억이 곧 키스의 흔적으로 오래 남은 것이 아닌지 모른다. 창백한 낙엽마냥 세차게 바르르 떠는 차디찬 내 입술에 쓰지도 달지도 않은 냉랭한 키스만 남겨주고 소년은 말없이 돌아섰어도 마지막 불빛마저 꺼지고 그렇게도 우울하게 그렇게도 쓸쓸히 고독한 그림자 사라진 그 언덕에 오늘도 나 홀로 멍하니 못 박힘은 곧 떨쳐버릴 수 없는 첫 키스의 흔적이다. 인생이 다 흘러갈 진데 소녀가 어찌 잊으리라. 첫 키스의 그 흔적을…     “불타는 빨간 버들잎은/ 뜨거운 임의 입술//  사랑이 깃든 시내가/ 추억의 버드나무 아래로/ 나 홀로 조용히 거닐면/ 정서 깊은 내 얼굴 입가로/ 차분히 내려앉는 빨간 버들잎 하나 그제 날, 연정에 취해/ 콩콩 뛰는 내 가슴 감싸 안고/ 임이 내게 제일 처음 안겨주던//  달콤한 키스가 아니옵니까?//  오늘도 남몰래 찾아와/ 정처 없이 바장임은/ 못 잊을 그때 그 시절/ 애틋한 풋사랑의 미련으로/ 요 가슴 불태움이 아니옵니까?//(‘빨간 버들잎’전문)   빨간 버들잎이 임의 뜨거운 입술이라고 표현한 시인의 창의에 우선 감탄해야 할 것이다. 시인에 의하여 임의 입술로 상징된 버들잎이기에 사랑이 깃든 시내가 추억의 버드나무 아래에 나 홀로 조용히 거닐면 내 입가로 임의 입술들이 차분히 내린다. 이 시를 읽고 나면 플래시작품을 보는 기분이다. 대개 플래시작품들은 배경이 멈추어 있고 상징들만 움직이게 되어있다. 다시 말해서 버드나무를 올려다보는 시인의 입술은 색 바랜 사진으로 남아있지만 빨간 버들잎은 옛 키스의 흔적으로 시인의 입술을 향해 날아 내리는 것이다. 갑작스레 그런 이미지를 내가 만들어보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위의 두 시에서 다룬 키스의 흔적은 감상적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입술들이 강열한 키스를 받고나면 장미 빛 립스틱이 빨갛게 살아난다. 이 세상에 키스의 신이 살고 있다면 분명 홍용암의 시집“소년의 비밀”속에 안방을 꾸렸을 것이다.                이상으로 홍용암의 시집“소년의 비밀”속에 들어있는 국부의 시들을 4개의 이미지로 분류하여 평하여 보았다. 이제 이 평을 마무리 작업하는 순간에도 소녀소년들의 아름다운 숨소리는 멈출 줄 모른다. 홍용암의 시집“소년의 비밀”속의 공기는 그처럼 청신하다. 해서 이 시집 속에는 소녀소년들의 뜨거운 숨소리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선 이런 시집을 소유하고 있는 홍용암시인이 부럽다. 그 다음은 소녀소년 그 시절에 이루지 못한 그 아픈 사랑을 해온 홍용암시인에게 뒤늦게나마 위안을 보낸다. 내 할 말은 이미 서두에서 했고 또 내 수준에 넘치는 평이라는 작업으로 외람된 발설을 한 연고로 결말을 짧게 두서없이 접는다. 끝으로 진영한시인의“아카시아 소녀”로 결말을 대체한다.   어느 침실을 그리워하였기에 너는 조숙한 숙녀처럼 푸른 잎새는 어데 두고 하얀 꽃잎만 덩그런히 피웠단 말이냐   무엇이 그리도 서러워 불 꺼진 창밖으로 지축을 무너뜨릴 듯한 숨소리를 흘러나오게 하는 것인가   무엇이 그리도 안타까워 까-만 어둠 속으로 작은 가슴 고동케하는 속삭임으로 잠 못 이루게 하는 것인가    
658    4분 33초 ㄷ 댓글:  조회:3394  추천:0  2015-03-15
        로마 숫자가 악장을 가리키고, TACET 는 "silent(침묵)" 라는 뜻의 음악용어로 존 케이지는 세 악장의 길이를 33 초, 2분 40초, 1분 20 초로 하라고 지시한다.   백남준과 존 케이지 (1972년)         [출처] 침묵 4분 33초- 존 케이지 John Cage(US, 1912-1992) 4'33" (1952년)|작성자 panem    
657    4분 33초 ㄴ 댓글:  조회:2766  추천:0  2015-03-15
누구나 연주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한 곡 - 존 케이지의 ‘4분 33초’ 미국의 전위적인 작곡가로 알려진 존 케이지의 작품 중에 ‘4분 33초’라는 작품이 있다. 1952년 발표된 이 작품은 매우 독특하다. 즉 악보가 없이 ‘연주자는 4분 33초 동안 피아노 앞에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앉아 있다가 시간이 되면 조용히 퇴장한다’는 존 케이지의 지시만 적혀 있는 것이다.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기만 하는 곡인 것이다. 이 정도라면 당신도 연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왜 하필 4분 33초일까? 그것은 존 케이지가 절대영도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절대영도는 섭씨 영하 273도. 이를 분 단위로 환산하면 4분 33초가 된다. 아마도 절대영도에서는 음악가의 활동도 정지한다는 의미인 듯하다.  참고로, 이 작품의 첫 공연 때 “이것은 선(禪)이다!”라고 높이 찬양한 평론가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이 곡이 연주되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4 minutes 33 seconds John Cage (작곡자)   I  TACET   II TACET     III TACET   NOTE: The title of this work is the total length in minutes and seconds of its performance. At Woodstock, N.Y., August 29, 1952, the title was 4'33" and the three parts were 33", 2'40", and 1'20". It was performed by David Tudor, pianist, who indicated the beginnings of parts by closing, the endings by opening, the keyboard lid. However, the work may be performed by (any) instrumentalist or combination of instrumentalists and last any length of time. FOR IRWIN KREMEN                               JOHN CAGE   로마 숫자가 악장을 가리키고, TACET 는 "silent(침묵)" 라는 뜻의 음악용어이다. 밑의 글은 존 케이지가 직접 적은 지시 사항이다. 세 악장의 길이를 33 초, 2분 40초, 1분 20 초로 하라는 지시사항이다.   4' 33"의 악보는  소리 없는 음악임에도 악보는 있었는지- 연주자로 하여금  앉아서 전혀 소리 안나게 3악장을-정말 3악장이라는데-  연주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청중은 가만히 앉아서 다른 방에서 종이를 만지는 소리라든가  바깥에서 지나가는 자동차 경적소리에나 집중할 뿐이다. 청중들의 기침 소리나 소근거림이 오히려  이 작품의 구성요소가 된다. 연주 현장에서 우연적으로 만들어진 자연스런 소리들이  결국 이 작품을 구성하면서  이른바 우연성 음악(chance music)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음악인들 사이에 이 음악을 놓고 죠크가 있는데,  예컨대, 이 침묵의 음악에 저작권이 있는가,  이 음악을 고악기로 연주할 수 있는가,  혹은 이 음악의 좋은 연주와 나쁜 연주를 구분할 수 있는가 등처럼  그 예술성, 음악성과 구성에 대한 진지한 비평과 토론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이 곡을 초연했던 연주자는 데이빗 튜터이다.              Cage, John 케이지 (1912.9.5~1992) 미국의 작곡가. 로스엔젤레스 출생.  포모나대학을 졸업하고 H.카우엘, A.쇤베르크에게 작곡을 배웠다.  1936∼38년 시애틀의 코니시스쿨에서 교직생활을 하면서 타악기만으로 앙상블을 조직하고 51년경부터는 독자적인 음악사상에 입각하여 문제작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또 52년 독일의 도나웨신겐에서 개최된 현대음악제에서는 《4분 33초》라는 작품을 발표, 음악에 우연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유럽음악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우연성이나 불확실성은 작곡기법의 하나로서 널리 채용되고 있다.  주요작품으로는 《Imaginary Landscape No.4》(51)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서트》(54∼58) 《Variations I》(58) 등이 있으며, 또 도안악보(圖案樂譜)의 창안 등 독창성 넘치는 활동도 하였다.  
656    4분 33초 댓글:  조회:2396  추천:0  2015-03-14
《4분 33초》는 아방가르드 작곡가 존 케이지가 작곡한 피아노를 위한 작품으로, 연주 시간 동안 아무 연주도 하지 않는 음악 작품으로 유명하다. 동기[편집] 1951년에 존 케이지는 하버드 대학의 무향실을 간 적이 있었는데, 케이지는 그 방이 조용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는 후에 이렇게 썼다.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 두 개의 소리를 들었다. 공학자한테 이 이야기를 하자 그는 나에게 높은 소리는 내 신경계가 돌아가는 소리이고, 낮은 것은 혈액이 순환하는 소리라고 말했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떠나서, 그는 완벽히 소리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소리를 들은 경험을 한 것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도 소리는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도 그것을 계속 있을 것이다. 음악의 미래에 대해서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절대적인 무음은 없다는 발견이 존 케이지로 하여금 《4분 33초》를 쓰게 한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이 미술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존 케이지의 친구 로버트 라우쉔버그(Robert Rauschenberg)가 빈 캔버스를 전시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작품은 걸려 있는 곳의 조명 상태나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그림자 등에 의해 모습이 바뀐다. 이것이 케이지에게 주변의 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소리로 된 빈 캔버스’를 쓰게 만든 영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존 케이지의 이전 작품에도 '침묵'은 중요한 요소로 사용되어 왔다. 그는 라우셴버그의 가 '4분 33초'라는 작품을 제작할 '용기'를 주었다고 언급한바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음악이 뒤처질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존 케이지의 이 혁신적인 작품은 당시 음악계의 주류에서 외면당했고, 이 작품을 통해 새로이 발견된 사운드의 새로운 가능성은 시각예술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면서 오늘날의 탈경계적인 예술양상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작품[편집] 《4분 33초》는 세 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고, 각 악장의 악보에는 음표나 쉼표 없이 TACET(조용히)라는 악상만이 쓰여 있다. 악보에는 음악의 길이에 대한 지시가 따로 없다. 처음 연주했을 때에는 시간을 무작위로 결정하여 1악장을 33초, 2악장을 2분 40초, 3악장을 1분 20초씩 연주하였다. 《4분 33초》는 1952년 8월 29일 뉴욕 주 우드스탁에서 David Tudor의 연주로 초연됐다. 연주자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몇분 뒤 그는 뚜껑을 다시 닫았다. 피아니스트는 뚜껑을 열었다가 다시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Richard Kostelanetz는 실험음악의 권위를 가진 연주자 David Tudor라면 청중들이 우연히 소리를 내도록 유도하는 것이 비음악적인 소리로 작품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 존 케이지의 음악에 부합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연주자와 청중이 소리를 죽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콘서트 홀에는 소리가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아직도 음악의 정의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진다. 분류:  무음 존 케이지의 작품 1952년 작품 포스트모더니즘   둘러보기 메뉴  
655    시인 - 리홍규 댓글:  조회:4160  추천:0  2015-03-14
제3회 심련수문학상 수상자 리홍규(좌)시인과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 김영건주임 리홍규 제3회 심련수문학상 수상       20일,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와 연변시가학회에서 주최한 “제3회 심련수문학상”시상식에서 리홍규의 시집“양파의 진실”이 수상작으로 당선되였다.   작가 리홍규(李洪奎)는 1960년 3월 흑룡강성 방정현 출생하여 1982년 치치할사범대학 수학과를 졸업했다. 수필집 “우리가 살며 사랑하는 방식“ , “하느님은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는가“를 펴냈으며 흑룡강신문수필공모대상,연변문학윤동주문학상, 연변일보해란강문학상등 상을 수상했다. 현재 흑룡강조선어방송국 부국장으로 근무하고있다.   시집에는 도합 80여수의 시를 수록, “추억을 단순히 추억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추억을 려과하고 정화하고 추억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을 통해 력사의식과 민족의식,초월의식을 보여주었고 사실주의 시와 창작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는 점에서 긍정을 받았다”고 평심위원회는 그 선정리유를 밝혔다.   김혁 기자   나에게 있어서 수필이란                                                                       -- 리홍규     시로 시작한 문학공부가 수필로 전향돼 수필을 몇편 써보느라 했지만 정작 수필이란 무엇인가고 생각해보니 별 할 말이 없는듯하다. 하긴 어지간한 문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가 문인이든 아니든 이른바 《수필》이란 글 한편쯤은 어렵잖게 써서 또 어렵잖게 발표까지 할수 있는게 지금 세월이 아닌가! 그만큼 수필은 널리 보급된듯하고 또 그래서 수필은 전과 달리 제 위치를 찾아서 시와 소설과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는듯하면서도 누구나 다 쓰고있다는데서 그 가치가 하락되고있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수 없다.  정말로 수필은 아무나 다 쓸수 있는것인가?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와 똑같은 식의 물음을 던질수밖에 없는게 조금 서글프긴 하지만 그 물음을 한번 던져보게 된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러나 어이없게도 진부하다. 마치 사랑은 아무나 할수 있는것인지는 몰라도 진실한 사랑은 아무나 다할수 있는게 아니다, 라고 말할수 있는것처럼 수필다운 수필 또한 아무나 다 써낼수 있는것이 아니다, 라고 말해야 하기때문이다.  수필다운 수필의 창작을 위해서는 수필문학도 관념갱신을 해야 할것만 같다. 우리 문단에서 시는 20여년전부터 리론과 실천에서 모두 관념갱신을 시도했고 소설도 그럭저럭 새로운 창작방식을 모색하고 실천하며 그나마 성과를 이룩했다고 할수 있지만 수필은 자신의 위치를 정립한 시간부터 얼마 되지 않다보니 관념상 아직 도식화의 틀에 얽매여있는 부분이 적잖은것 같다.  가장 먼저 갱신하고 타파해야 할 부분은 《문이재도(文以載道)》, 이른바 문장은 반드시 어떤 도리나 철리, 리념 같은걸 담아야 한다는것이다. 《문이재도》는 수천년동안 이어져온 중국고전문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이고, 또 지금까지 작가들로 하여금 문학이 문학의 본연으로 문학의 제 위치로 회귀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의 하나로 되고있다. 이는 수필문학에서 가장 돌출하게 나타나고있다.  문학은 시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그것이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창작될 때 그것은 어떤 도리를 설교하고 어떤 관념을 해석하기 위한것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세계를 펼쳐보이기 위한것이고, 작가의 이 세상에 대한 남다른 감수를 표현하기 위한것이며, 우리 인간들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어떤 세계의 가능성을 제시하기 위한것이고,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고난과 그 고난속에서 그걸 이겨내거나 좌절하는 정신세계를 표현하기 위한것이 아닌가. 유독 그 어떤 도리나 관념을 설교하기 위한게 아닐것이다. 도리나 관념을 전달하고 설교하고 강요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 차라리 학문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많은 경우 저도 모르게 작품에 어떤 도리를 설명하고 어떤 철리적인것을 주입시키고 해야만 그 작품이 무게가 있고 깊이가 있고 주제를 승화시켰다고 안심하는데 습관돼있는듯하다. 수필의 경우 한결 엄중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이는 우리 문단뿐만아니라 중국문단 지어 한국문단에서까지 어느 정도 존재하는 현상인것 같다. 중국문화의 전통이 그렇게 만들었고 수필문학의 전통이 그렇게 만든것이다.  또 하나 갱신하고 수립해야 할 부분은 이른바 《진실》에 대한 인식이다. 《진실》이라는 단어만큼 문학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가장 권위적이고 또한 가장 허위적인것은 없을것이다. 특히 수필 혹은 산문문학에서 《진실》이라는것은 하나의 깨뜨릴수 없는 법칙이고 원칙이고 넘어서는 안될 경계선으로 돼왔다. 그런데 지금은 이것이 깨지고있는 추세다. 깨려고 덤비는 작가들이 있고 깨야 하는 정당성을 호소하는 비평가도 있고 또한 《진실》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작가와 비평가들도 적잖다.  사실상 《진실》이라는 그 개념 자체가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작가가 매 한편의 수필작품에 적어놓은 사실이나 감정들은 모두 추억에 의한 지난 력사로서 아무리 《진실》하다고 해도 그것이 글로 씌여질 때는 주관적인 요소가 첨가될수밖에 없다. 더우기 기억 자체는 단편적이고 편면적이고 주관적일 때가 많은데 그것이 바로 《진실》한것이라면 그 《진실성》은 의심스러운것일수밖에 없다. 례컨대 한가지 사건을 서술하며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자의 혹은 타의로 빠뜨려놓을수도 있는데 매우 지엽적인 부분만 적어놓고 과연 그것을 《진실》하다고 할수 있을가. 그래서 수필에서의 《진실》이란 어떤 사실(《진실)이 아닌)에 대한 조합이고 상상이고 심지어는 허구로 될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진실》이라는것이 《허구》라는 개념과 함께 수필과 소설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하나의 척도로 되고있다. 사실 소설과 수필의 구분은 소설은 《사실현장》을, 수필은 《심령현장 혹은 감정현장》을 설치하는데 있는바 수필에서의 《진실》은 심령의 진실이나 감정의 진실에 대한 추구로서 세부적인 사실의 진실성은 별개의것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러므로 수필에서의 진실성원칙은 《진솔한 감정원칙》으로 리해해야 할것이다.  이상 두가지로 살펴본 수필관념의 갱신을 념두에 두고 수필이란 과연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제기해본다면, 수필은 정신세계로의 탐험이고 상상의 세계로의 려행이며 령혼세계로의 모험으로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이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하나의 작업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말하자면 한편의 수필을 창작하는 과정은 하나의 유토피아를 구축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수필다운 수필은 시나 소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발굴이고 부각이며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표현이고 창조라는 것이다.          
654    시인 - 리창현 댓글:  조회:4096  추천:0  2015-03-14
          시인/ 리창현        1973년 5월 12일, 흑룡강성 녕안시에서 출생.       연변대학 통신학부 졸업.       벽소설『비둘기』로 문단에 데뷔.       수필을 위주로 소설, 시 등 200여 편 발표.       연변작가협회 회원       흑룡강조선족작가 창작위원회 회원.       녕안시 조선족문학가협회 부회장.             『박사컵』교원수필상.      『새별』교원 수필상.      『흑토』문학상 수상.      『우리 사는 세상』생활수기 2등상.       중국조선족소년보사 우수지도교원상 수상.       중국조선족교육 우수논문상 수상.       2008년도 연변작가협회 선진창작일군상 수상.       수필『어제날의 설날이 그립다(「흑토」문학상)』       수필『딸 며느리 그리고 된장과 고추장(현용 고중1학년 조선어문 교수참고서에 채용)』       수필『아늑한 둥지 잔잔한 행복(「우리 사는 세상」2등상 수상)』       수필『빗』도라지잡지에 발표.       단편소설『용팔촌의 봉구』가 연변문학에 발표.       흑룡강성 녕안시 동경성진조선족소학교 교원.
653    시인 - 홍군식 댓글:  조회:4370  추천:0  2015-03-14
             중국조선족 시인/ 홍군식                 1966년 2월 26일 흑룡강성 녕안시 동경성진 출생.                 1990년 북경노신문학원 작가연구생반 과정.                 2004년 북경대학MBA반 수료.                 1982년부터 中, 韓文으로 문학작품 발표                 시집『세기말의 음모』,『361도 고독』출간.                 르포『시대를 클릭하는 CEO들』출간.                 경영관리학논문집『회사가 부르는 인재』,『현장경영』출간                 흑룡강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회원.                 흑룡강조선족작가창작위원회 회원                 중국현대시연구학회 회원.                 중국향토시인협회 회원.                 중국산문시학회 회원.                 세계華文시인협회 종신회원.                    전 흑룡강신문사 편집, 기자                 청도정군문화전파유한회사 총기획.                    미국 체류 중.   고독으로 병든 시계바늘이 부르는 노래     홍군식은 좋을 때보다 미울 때가 더 많은 사람이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항상 근심스럽다. 실수나 하지않을 지, 일이나 저지르지 않을 지, 그래서 난처할 때가 많고 민망스러울 때가 많고 미울 때가 많다. 그렇다고 사람들 많은 데서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눈에 들어오니 보지 않을 수도 없고……그러나 그래서좋다. 소박하고 단순하고 때가 묻지 않아서 좋고 또 부럽다.   홍군식은 자기의 삶을 나름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누가 뭐라고 하든, 누가 좋다고 하든, 누가 나쁘다고 하든, 누가 밉다고 하든, 누가 잘한다고 하든 별로 관심이 없고 자기가 하고 싶고 해야 된다고 하는일들을 나름대로 열심히 하기만 한다.   어쩌면 사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거나 의식하지 않는 듯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사회에 해 될 일은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글도 그렇게 쓰고 시도 그렇게 쓴다.   나름대로, 그렇게 떠올라서, 그렇게 쓰고 싶어서……   왜 그렇게 썼느냐 하면 대꾸도 하지 않는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저 그런 뜻이지요, 쓰여진 대로 읽는 그런 뜻이지요. 그렇게 대답을 한다.   그래서 홍군식의 시는 주제요, 파악이요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시 자체 그것뿐이다.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편하게, 읽히는 대로 읽으면 된다.    두 번 군식이 시 때문에 놀란 적이 있다.   바로 얼마 전에 주부작가의 출판파티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 장소에서 한 할머니가 책이 있으면 달라고 하기에 마침 홍군식의 제2시집 ≪361˚ 고독≫의 샘플(樣書) 몇 권을 금방 받아 손에 들고 있던 차라곁에 있던 할머니들에게 다 나누어 드렸다.   나는 나누어 주면서도 한다 하는 시인들도, 한다 하는 편집들도 읽어 내려갈 수 없고, 알아볼 수 없다는시집을 할머니들이 읽어 보기나 할지, 알아나 볼지, 그저 책을 달라고 하니 주면 되지,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웬걸, 그 중 한 할머니가 며칠이 지난 뒤 전화가 왔다.   “선생님 주신 이 시집 그때 출판파티에 왔던 그 분 시집 맞아요?”   그렇다고 하니 “그런데 그 분은 왜 시를 이렇게 광기(狂氣) 나게 쓴답니까? 그러니까 외롭지요. 너무 발광(發狂)하는 것 같아요, 우리 여기 노인협회 사람들이 다 그럽니다. 너무하답니다.”그랬다.   시인들이 알아보지 못한 홍군식의 시를 할머니들이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 문학을 하노랍시고 주접 떠는 나 같은 놈들은 결국 문학을 떠났었구나, 그렇게 놀랐다.   제2시집을 출판하기 전에 먼저 시고를 보내왔다.   나는 첫 몇 수를 보고 이거 조선족출판사들에서는 출판을 못할 걸, 발표하려면 한 3년 뒤에 보자. 그랬다.   그랬더니 그러면 자기는 한족 출판사를 찾겠는데 그럼 왜 발표를 할 수 없느냐, 왜 한 3년 뒤에야 보자고 하느냐, 그렇게 자꾸만 물었다.  꼭 마치 어린애들 같았다.   나는 어떻다고 말을 할 수가 없어, 그저 내가 그렇게 생각되더라, 그랬다.   그러더니 어느 한번 전화로 잡담을 하다가 갑자기 제의해왔다.   “내 ≪361˚고독≫ 책 제목을 바꾸면 안됩니까? ≪고독이라는 내 새끼≫로 바꾸겠습니다.”    나는 기가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고독이라는 내 새끼≫, 시적 의미, 시대적 관조를 제쳐놓고 소리만 들어도 속이 시원하도록 스트레스를 푸는 시집의 제목이었다. 그러나 나는 안 된다고 했다.   “새끼”가 뭐냐, 그랬다.   그러니 또 왜 안됩니까? 왜 안 된다는 거요, 그렇게 짜증이 나도록 질문을 들이댔다. 꼭 같은 질문을 몇번이고 반복했다.   나는 아무런 원인도 없고, 그저 안 된다면 안된 거다, 그렇게 막아버렸다.   나도 책 이름을 ≪고독이라는 내 새끼≫, 그렇게 달고 싶었다.   그러나 안 된다고 그랬다.     홍군식 제2시집의 샘플을 보기 전에 한번 또 놀란 적이 있다.   첫 번째 시집 ≪세기말의 음모≫ 때문이었다.     한국에 나가 몇 년간 일을 하고 돌아온 친구가 집에 놀러 왔다가 책꽂이에 있는 ≪세기말의 음모≫을보고 “이거 추리소설이니?”하고 물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으나 “그래, 추리소설이지, 20세기 말에 가장 뛰어난 추리소설이지.” 그러면서 한번보라고 주었다.   주고 나서도 전에 책도 별로 보지 않고, 문학에 관심조차 없던 친구가 보기나 할까, 책 낭비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한 달 뒤에 그 친구가 전화가 왔다.   “이 시 쓴 사람 말이야, 어디 오도가도 못하는 사람이니? 딱 집 없는 사람이 쓴 거 같다.” 그랬다.   나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할말을 찾지 못했다.   그렇구나, 우리들이 소위 말하는 “시를 모르는 사람”들이 외려 시를 더 잘 보는 구나……   나는 내가 문학을 몇십년 했답시고 주접을 떨어도 헛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언젠가 맥주를 하면서 홍군식이보고 너 고독하지 않다, 외롭지 않다, 그랬다.   왜? 하고 물었다.   나는 내 친구가 ≪세기말의 음모≫을 보고 전화를 걸어와서 여차여차 말하더라는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나는 좋아하라고 말해주었는데 못나게도 엉엉 울었다.   그리고 한동안 말도 없이 맥주만 들이켰다.  그때부터 전화만 하면 자기가 쓴 시들을 읽어준다.   꼭 한 밤중, 새벽 한시가 지나서야 전화를 걸어온다.   좀 일찍 하든지, 아니면 전화를 짤막짤막하게 하든지, 시는 발표된 다음 지면에서 보든지 인터넷에서보든지 그만 읽으라고 하면 기어코 읽어야 한단다.   때론 듣다가 깜빡 잠들어 버릴 때도 있지만 나야 자든 말든, 자기 읽을 시만 홍군식답게 읽는다.   한번은 ≪저 화냥년 같은 외고집의 장미≫라는 시 때문에 실랑이 질 오래 했지만 자기는 기어코 “화냥년”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랬다.   그래서 ≪저 화냥년 같은 외고집의 홍군식≫이라고 하니 그 제목도 좋구먼 그랬다.   한밤중에 전화를 한 시간씩 받다 나면 짜증이 날 때도 많다.   그래서 “너 전화요금 좀 아껴라.”그러면 “나 언제 부자 되는 거 보았소?” 그러면서 전화를 끊을 줄 모른다.   짜증을 내고 이제 전화 좀 그만 하라, 그런다. 매번 전화가 올 때마다 그런다.   그러나 막상 이틀만 전화가 없어도 또 생각이 나고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궁금해 나게 하는 사람이 홍군식이다.   그런데 요즘의 홍군식은 “식성”이 바뀌었는지 전화를 끊기 전에 꼭 노래를 불러달라고 한다.   “노래 불러주지 않으면 전화 끊지 않습니다.” 이렇게 공갈했다.   그럴 때는 장사익의 “찔레꽃”을 불러준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  찔레꽃처럼 울었지  찔레꽃처럼 노래했지  찔레꽃처럼 춤췄지  찔레꽃처럼 사랑했지  찔레꽃처럼 살았지  찔레꽃처럼 울었지  당신은 찔레꽃  찔레꽃처럼 울었지.”    저기 천만년 원초의 하단전(下丹田)에서 우러나오는, 가슴이 쓸쓸하도록 굵직한 슬픔을 담은 노래를불러준다.  고독과 적막과 쓸쓸함과 슬픔을 한잔의 맥주에 담아 꿀컥꿀컥 마시는 홍군식에게 불러줘 본다.   그러나 두 마디도 부르지 못하고 막히고 만다.   “형, 됐소…… 그것 두 노래라고 부르오?”  그리고는 키득키득 웃는다.  그러나 나는 군식이가 구경 우는 지 웃는 지를 알 수가 없다.        2007년 2월 16일 龍潭山城이 바라 보이는 지린(吉林)의 송화강 뒷자락에서.      
652    시인 - 김선희 댓글:  조회:4045  추천:2  2015-03-14
[두만강여인]김선희시인과 함께하는 시-'마음으로의 동행'       마음으로의 동행       김 선 희   다시 그대에게 돌아갈 때는  꽃으로 남지 않으리   마지막 남은 혈관 속 액체 한방울마저  그대와 합류하여  나를 일으켜 세우던 까막바위   그것은 멀리서 들리는 뱃고동소리였다   그것은 바람에 내리꽂히는 장대비였다  그것은 손을 뻗히면 잡을 수 있는  백사장 모래알이었다  부족한 사랑에도 감사할 줄 아는 이여  나는 그대에게 푸른 바다이고 싶다     ▶연변대학 조선어언어학부 졸업 ▶연변작가협회 회원 ▶현재, 도문시교육국 근무 ▶연변시조상 수상.  ▶중국 조선족 수필상 수상 ▶작품으로 시 수필 등 있음
651    시인 - 황춘옥 댓글:  조회:4289  추천:0  2015-03-14
                                       (중간 황춘옥 시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  ㅡㅡㅡ화룡을 가다  ◇화룡이라는 곳  연길에서 삼일째 되던 날, 먼저 가본 곳은 화룡(和龍)이라는 곳이었다. 연길에서 용정을 지나면 화룡인 것이다. 화룡 가는 길에 저 산등성이에 정자가 하나 보였는데 그것이 「일송정」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가 있었고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었으며, 그날따라 하늘도 맑기가 이를데 없었다.  펼쳐진 들판은 옥수수밭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그게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인상 깊었다. 산비탈에는 연길 특산인 「사과·배농원」또한 즐비해 있었다. 그것은 사과와 배를 접목시킨 특유의 맛이라 한다.  택시를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석화시인을 따라 30분 정도 시간이 소요돼 화룡시 청사에 도착해 조금있으려니까 세 사람의 조선족이 나와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알고보니 석화시인의 고향이 이곳 화룡으로 그의 후배시인이었다. 한국에서 처음 온 나에게 그는 그의 고향 은사시인과 후배 시인을 접견시켜 준 것이다.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화룡시 네거리를 빠져 나오는데 그곳에도 호랑이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무심결에 지나치지 않는 나에게 이런 것들마저 의미있게 받아들여졌다. 연길시가지 네거리에도 호랑이 조각상이 세워져 있듯, 웅혼(雄渾)한 민족기상을 말해주는 듯 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일이 하나 벌어졌는데 택시를 두 대에 나누어 타야 해서 내가 탄 택시는 벌써 도착했는데 다른 택시를 탄 일행이 아직 오지 않는 것이었다. 한참을 기다려 도착했는데 알고보니 불법영업자가 택시운전하다가 그만 경찰에 걸린 모양이었다. 바로 그 택시였는데 손님은 타고 있어서 내리라고 하기에 무엇해 불법 운전사를 내리게 하고 경찰이 몰고서 우리 일행을 이곳까지 태워줬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요금도 줄 필요가 없게 돼 그냥 타고내린 것이 됐다. 우스운 일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 이런 걸 본 우리로서는 신기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칸칸의 방마다 상을 차려놓고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침식을 겸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놓은 것 같았다. 방마다 이름도「대동강」 「모란봉」 「구월산」 「칠보산」 「묘향산」 「금강산」이렇게 써붙여 놓았는데 북한식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연길에서의 「해당화식당」에서도 그러했지만 젊은 북한아가씨들이 접대하는데 어딜가나 한결같이 한복을 예쁘게 차려 입고 있어 민족서정시를 주조(主調)로 써온 나같은 시인에겐 예사로 보이거나 느껴지는 일이 아니었다.  또한 이 처녀들은 북한에서 온 것임엔 두말할 것 없지만 2년 동안 머물다가 북한으로 가며 다시 아가씨들로 교체된다고 했다.  이 모든 식당 운영까지 북한에서는 직접 인민공화국 당국의 정책이므로 공무원 인사정책에 따른 것이라고 할까, 뒷맛이 좀 씁쓸하기는 했지만 한국과 같이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공산사회주의의 체제이니 어떻하겠는가. 또한 그들은 김일성 배지를 달고 있는게 눈에 띄었다.  우리 일행이 석화시인의 소개로 만난 사람은 김문회(61.화룡출신 시인) 시인과 김승종 시인 그리고 황춘옥 시인이었다. 군자삼락(君子三樂)의 하나로 좋은 제자를 꼽듯이 김문회 시인은 석화시인을 두고 좋은 제자 시인이 있음을 자랑했다.  화룡시 제3중학교 교사를 거쳐 화룡시 문화부 창작과에 근무하고 있으며 지난 98년에는「연변문학」에서 주관하는 제1회「윤동주 문학상」을 수상한 원로시인이며 김승종 시인은 화룡시회 주석(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화룡시 농촌신용연합사에 근무하고 있는 젊은 시인이었다.  그리고 황춘옥 시인은 김승종 시인과 같은 시회 회원으로 북경의 중앙민속대학 조선어문과를 졸업, 현재 화룡시청 번역통역관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만주땅에도 가는 곳마다 시심으로 가득찬 이들이 있다는 것, 대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민족의 고유어와 민족정신을 이어가는데 문학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이것(문학작품)마저 없다면 삭막한 삶이 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민족은 있으나 다른 민족의 통치하에 살아간다는 것. 정신적으로 극복하지 않으면 무의미한 삶이 된다는 것이 이곳 만주땅 시인들의 굳건한 자세임에 새삼 놀랐으며 이런 곳에 와보지 않고는 이 현실을 누가 알겠는가 말이다.  이곳에서도 TV는 한국의 드라마를 주로 시청한다고 한다. 「욕망의 바다」 「사랑이 뭐길래」 「질투」등 아주 재미있다고 한다.  문제는 이곳 화룡도 마찬가진데 시골에 가면 장가 못간 총각이 30여명, 거기에 처녀는 1~2명 있을까 말까 하니 심각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처녀들은 가까이는 화룡 연길로, 멀리는 중국본토 또는 한국 일본으로 직장 구해 가버리니 어느 처녀가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해 살겠느냐는 것이다.  큰 규모의 조선족소학교가 두 곳 있는데 14개 반이었던 것이 6년 후가 된 지금은 2개 반으로 학생수가 그만큼 줄어들었으니 심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인 즉 첫째,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과 둘째로는 시골에서 살아갈 처녀가 없다는 것.  이러다간 10년 후에는 조선족들이 터전을 잡아 살아오던 곳들이 희석될 뿐만 아니라 조선족마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 한국의 현실과 비교해 보면 도시문명의 발달로 젊은 층이 도시로 가버리는 현상과 결혼이라는 관념과 자식양육이라는 전통가족 개념이 무너지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어쨌든 제 나라 제 땅이니 인구가 감소하고 고향을 떠난다 해도 그 민족은 그 나라에 있는 것인데 비해 중국 만주땅의 경우 곳곳에 조선족들이 밀집해 집단을 이루고 대대로 살아오고 있는데, 이런 신자본주의 개방화 물결로 가치관이 달라져 가니 그 땅마저 누가 지키며 살아가겠는가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지금 일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만주땅에 살고있는 조선족들은 8.15광복후 모국인 한반도로 가느냐 머무르느냐 망설이다 남은 동포들과 살길을 찾아 한반도를 떠나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온 게 만주땅으로 지금 그 2세, 3세들이라 한다.  우리 일행이 중국여행에서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 두가지를 들라면 그 하나가 음식에서 풍겨나오는 향채 냄새였다. 이것 때문에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 고수풀 씨앗을 기름 내어서 음식에 쓴다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술이었다.  최하 30도에서 최고는 60도에 이르기까지 독한 술을 마신다는 것인데 내 나름대로 판단해 보면 추운 곳에 사니까 체질화 되어서 그럴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 독한 술을 연령.남녀 구분없이 마시는 것 보고 처음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보니 그들은 한국문화가 아닌 이미 중국문화권에 익숙해져 있어서 독한 술에다가 술마시며 담소 나누는게 생활화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점심시간이 그렇게 할애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한국의 경우는 식사와 술마시는게 대체로 따로 되어 있고 담소 나누는 건 식사시간과 달리 다방이나 주점을 찾아 2차로 시간 갖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며 그것도 일과가 끝난 저녁시간에 대부분 이뤄지는 것에 비해 그들은 대낮에 술과 함께 식사시간이 존재하는 풍경이었다.  술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중조화평청사」이곳 식당에서 대화의 시간 역시 독한 술의 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젊은 여성 황춘옥씨마저 거절하기는 커녕 분위기에 부합되게 잘 적응하니까 우리 입장으로 봐서는 신기할 정도였다. 곤혹을 치르는게 우리쪽이었다. 그것도 앞서 밝힌대로 최하 30도이니 독한 술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많은 음식이 들어왔는데 그 모두가 북한요리로서 우리의 입맛과 별반 차이없는 것들이었다.  가는 곳마다 그러했지만 음식도 한 메뉴가 한 접시인데 그 모두가 시켜서 나오는 것들이었다. 우리 한국은 한두 가지 요리 시키면 나머지는 부차적으로(기본적으로) 나오는데 중국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나물무침 하나라도 시켜서 나오는 것이고 하나하나 음식값으로 계산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곳에서도 너무나 푸짐한 대접을 받은건 사실이다.  오후 2시30분 정도 되었을까 석화시인을 따라 온게 북한식당으로 점심먹은 것으로 시간이 급속히 흘러가니까 안타까운 점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는데 황춘옥씨가 나서서 우리를 위층으로 몰고 가는 것이었다. 여기서 약간의 몸싸움(?)도 벌어졌는데 위층 가요방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아니 가요방 가는 것까지 대접하겠다는 것이었다. 우리 입장으로 봐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앞으로 남은 일정도 많기 때문이다. 이날 하루를 이렇게 다 보내버리면 곤란하기 때문이다.「일송정」 「해란강」 「용정중학교」 「윤동주 생가」등이 남아있는데 그건 우리에게 무리였다.  그래서 몸싸움 하다 안되면 사정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내가 나서서 무조건 위층 계단으로 올라가지 않고 아래층으로 계단을 내려가는게 급선무였다. 결국은 계단을 중심으로 서서 내려가는 몸싸움에 이긴 것이다. 그들에겐 참으로 미안했었다. 석화시인은 좋은게 좋다고 빙긋이 웃고만 있을 뿐이었으니.  밖을 나오니까 햇빛도 밝고 하늘은 초가을 날씨같이 푸르고 맑아서 좋았다. 언제 다시 이렇게 만나게 될지는 모르나 아쉬운 작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다시 석화시인과 우리 일행은 화룡에서 용정으로 되돌아오는 택시를 잡아타고 말았던 것이다.   < 대구신문>연재중.   @@     2011년 문학창작 선진집체와 개인 연변작가협회  번역창작위원회, 아동문학창작위원회, 할빈지구창작위원회 등 3개 집체와  홍천룡(소설),림금산(시가),허두남(아동),안수복(산문),우상렬(평론),김련화(번역).양수옥(한문),김학송(연변문학),황령향(천지소소설), 고설봉(길림),량고범(장춘), 장춘식(북경),김창영(심양),김기덕(청도),한영남(할빈), 남영선(목단강),홍순범(절강) 등 17명이 2011년 문학창작 선진집체와 개인에 선정되여 표창을 받았다.   연변작가협회 당조서기 안국현이 김승종시인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650    시인 - 허련화 댓글:  조회:3780  추천:0  2015-03-14
  석화시에서 보이는 패러디수법    허련화     제2회 지용시문학상 당선작인 석화의 시집 《세월의 귀》를 보던 중 나는 심심찮게 보이는 패러디수법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패러디는 현대문학 특히 서사문학에서 주목되는 원리로 부각되고 있으며 오늘날 탈 중심주의 문학관(문학을 배제하지 않는 대신 문학을 전체 문화의 일부로 접근한다는 의미에서)을표방한 문화비평,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시학으로까지 격상된 중요한 비판개념이기도 하지만 중국조선족시단에서는 아직 많이 활용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석화 시는 다분히 연구 가치를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대체 패러디란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시에서 패러디가 필요한 것인가? 패러디는 논자에 따라 하나의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를 조롱하거나 회화화시킨다는 좁은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텍스트와 텍스트 간의 반복과 다름이라는 넓은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전자의 협소한 개념이 과거 문학작품에 대한 조롱이나 경멸을 위해 씌어졌던 시적 장치로서 오랜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면 후자의 개념은 과거의 문학작품이나 관습에 되비추어 봄으로써 문학형식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하는 보다 폭넓은 이해에 기반하고 있다. 패러디는 잘 알려진 원작을 패러디스트의 의도에 따라 개작함으로써 첫째, 원 텍스트의 몇몇 시어나 어구 혹은 문장으로 최대한의 의미를 표출할 수 있는 경제적인 표현방법이고 둘째, 독자의 설득력을 유발하는 전달방식이고 셋째, 어떤 사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어렵거나 그렇지 않으면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기 위해서 원 텍스트를 빌려 간접적이고 완곡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유용성을 가지고 있다. 사실 패러디의 역사는 시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며 고전 시학에서 흔히 사용되던 용사(用事), 환골탈태(換骨脫胎), 점철성금(點鐵成金), 점화(点化), 습용(襲用), 도습(蹈襲) 등이 패러디와 비견될 수 있는 개념들이다. 현대시에서의 패러디가 갖는 특징과 의의는 다원주의 세계관, 탈 중심화의 기교, 이데올로기적 기능, 모순과 이중성의 기교 등으로 요약된다. 연변의 한 평론가가 말하다시피해와 달이 부셔져 무수히 많은 찬란한 별무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냉전의 결속을 비롯한 기존의 모든 가치관이 무너지고 해체되어 새로운 질서를 잡고자 하는 현재 세계의 실정이며 폐쇄적인 사회로부터 개혁개방을 거치면서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사회로 탈바꿈하는 중국의 실정이다. 특히연변은 전통사회로부터 산업사회에로의 진입과정에 기업의 부진과 농촌의 피폐화, 오락문화와 소비문화의 지나친 발전, 가정 관념의 변화와 이혼율의 급증 및 농촌총각들의 결혼난 등 여러 가지 심각한 진통을겪고 있다. 이런 사회적인 현실이 잠재하고 있는 탈 중심적인 사고와 다원주의, 상대주의 사고가 패러디의 원리와 맞물리고 있는 것이다. 패러디는 의식적인 모방의 한 형식으로 과거의 특정한 문학작품이나 장르를 출발점으로 하여 그것의 각색을 현대적 문맥에 삽입시키는 문화적 전략이다. 모방 대상은 문학작품이나 장르뿐만 아니라 타 예술장르, 광고, 신문기사 등 모든 언어화된 텍스트가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패러디의 범주에는 장르에 대한 패러디, 특정 예술가에 대한 패러디, 개별 작품에 대한 패러디, 예술가의 전체 작품의 특징적 양식에 대한패러디 등이 포함된다. 그중 장르 패러디는 중심의 해체가 장르들 사이의 경계선을, 문학과 다른 예술 사이의 경계선을, 문학과 비문학적 담론 사이의 경계선을 그리고 고급예술과 대중예술 사이의 경계선을 붕괴시키고 있는 것이다. 석화 시집 《세월의 귀》에 수록된 80여 수의 시 중 패러디시가 십여 수이며 주로는 설화, 민담, 속담,노래가사, 회화 등 다양한 장르를 패러디한 장르 패러디에 해당하며 일부가 개별 작품에 대한 패러디 시이다. 개별 작품에 대한 패러디와 그 고찰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특정의 장르에 대한 패러디와 그 고찰은한두 편의 개별 작품을 넘어 장르의 자체를 의도적이고 전략적으로 모방한다는 측면에서 사회 문화적인의미가 훨씬 크다고 볼 수가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작품 92―나무꾼과 선녀》 노래가사 혹은 설화를 패러디한 전형적인 장르 패러디 시이다.   백두산 폭포수 밑에서 선녀를 잃어버린 나무꾼이 나무지게를 걸머지고 천지의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빛보다도 더욱 영롱한 네온등불빛이 명멸하는 용정과 연길의 네거리에 와서 잃어버린 선녀를 찾고 있다. 레스토랑, 나이트클럽, KTV룸살롱, 댄스홀, 커피점, 양고기뀀점, 당나귀고기집, 닭곰집, 국숫집, 개탕집, 좌우간 불빛이 번쩍이는 곳은 다 들여다보았지만 잃어버린 선녀는 없다.   선녀를 돌려주세요 선녀를 돌려주세요   어림도 없는 말, 제 발로 아니 제 날개로 훨훨 날아간 선녀를 누가 돌려준단 말인가. 《하늘의 뜻이었기에 서로를 이해하면서》 이제는 물러 갓 맥주병에 이마가 꽃이 피기 전 네 나무지게를 걷어 안고 썩 꺼져버렸! 이 미련한 놈아!   ―《작품 92―나무꾼과 선녀》 전문   이 시에서 보면 나무꾼이 잃어버린 선녀를 찾아다닌다는 기본 상황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설화나 노래에서 선녀가 자기가 살던 고향인 하늘이 그리워 날개옷을 찾아 입고 하늘로 날아올라간데 반하여 시의 선녀는 금전과 향락을 위하여 용정과 연길의 번화가에 와버린다. 또 원작의 나무꾼이 동정과 도움을 받아선녀를 찾아 행복한 결말을 맺는 데 대해 시에서의 나무꾼은 《제 발로 아니 제 날개로 훨훨 날아간 선녀를 누가 돌려준단 말인가, 맥주병에 이마가 꽃이 피기 전 썩 꺼져버렀!/ 이 미련한 놈아》 하는 야유, 조소, 협박의 대상으로 패러디 된다. 이 의도적인 패러디수법을 통하여 시인은 레스토랑, 나이트클럽, KTV룸살롱, 댄스홀, 커피점 등 네온등이 명멸하는 용정과 연길의 네거리로 표상 되는 물질주의를 비판하고날로 팽배하는 물신주의에 의해 기존의 아름다운 가치관마저도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실을 풍자, 비판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처녀들이 해외로 대도시로 선녀처럼 훨훨 날아가 버려 농촌에는 짝을 찾아 헤매는 불쌍한 《나무꾼》들이 너무도 많지 않은가! 도시의 네온등불빛이 천지의 하늘가에서 반짝이는 별빛보다도 어 영롱하다니 무슨 더 할 말이 있는가! 《작품 91―탈출》에서 시인에게 《마주 보이는 것들은 모두가 딱딱하고 빤질빤질하고 윤기 도는 것들뿐》 생명을 가진 것이라곤《개나 돼지나 그와 같은 것들》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도시화와 기계문명을 비판하고 아울러 그로 인한 인정의 메마름까지를 암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에로의 소박한 회귀욕망 때문에 서정적 주인공은 11선 버스의 종점인 뾰족산 밑 서걱대는 갈밭 속으로라도 달려가고픈 충동을 느낀다. 이와 같은 죽어 있는 기계문명에 포위된 일상으로부터 오는 혐오감과 고뇌를 나타내기 위하여 시인은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를 패러디하고 있다. 《한 사람의 작가를 만들기 위해 지난 밤 고통과 절망의 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렇다. 고통과 절망의 부대낌이 없이 어찌 작가, 시인이있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자연을 그리워하고 살아 숨 쉬는 것, 따뜻한 것을 그리워하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타고난 운명이 아닌가! 문명에 대한 회의와 비판은 시집 《세월의 귀》의 주요한 주제 가운데의 하나이며 《작품 25―발음문제》와 같은 시에서 선명하게 나타난다. 양계장 부화기에서 나온 병아리에게서는 알루미늄 냄새가 나고《삐약― 삐약―》 울어야 할 대신 《삐아― 삐아―》 하고 울 줄밖에 모른다. 자동부화기에서 태어난 병아리를 보면서 시인은 《무정란―체외수정―인공배태―실험관아기》를 연상하게 되며 병원의 소독수 냄새를 맡는 것 같고 《엄마― 엄마―》를 《어마― 어마―》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는 것 같은 착각 속에빠지게 된다. 최근에 성공한 크로운기술(克隆技術)은 이런 연상과 걱정이 결코 기인우천(祈人憂天)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벌써 훨씬 이전에 앨빈 토풀러가 예언했듯이 백화점에서 인형을 사듯, 각지의 기호에 맞게 주문한 아기를 구입할 수 있는 날이 문득 우리 인류에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시인이 문명에 대한 회의와 비판은 발전에 따라 인간이 점점 왜소해지고 소외되어 설자리를 잃기 때문이다. 인간의 소외는 현대를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공동이 앓고 있는 치유되기 어려운 병이다. 인간의 소외는 여러 가지 양상을 띠지만 시인은 《작품 39―협박(1996. 11. 10)》에서 나름대로 숫자에 의한 인간의소외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이 시는 특히 아라비아숫자의 패러디로 볼 수 있어 아주 흥미롭다.   1 ,2, 3, 4, 5, 6, 7, 8, 9, 10이 차례로 나와서 《너는 숫자다》라고 한다 나는 《아니다》라고 했다 《222401580704061이 네가 아니냐》라고 한다 《0433-256-2191이 네가 아니냐》라고 한다 《78.2와 173이 네가 아니냐》라고 한다 …   ―《작품 39―협박(1996. 11. 10)》 일부   우선 제목에서부터 숫자 투성이인 이 시에서 222401580704061은 신분증 번호이고 0433-256-2191은전화번호이며 78.2와 173은 각각 체중과 신장임에 틀림없다. 이제 인간은 인간의 본질에 의해 인간인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수의 다양한 조합에 의한 숫자에 의해서 좌우된다. 신분증 번호는 인간이 고도로 짜인사회조직 속의 한 분자일 수밖에 없음을 나타내며 체중과 신장은 나의 속성이기는 하지만 본질이 아닌,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속성에 의해서 때로 대체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인간을 소외시키고얽매는 사회질서, 기계문명, 비본질적인 속성 등을 시적 주인공은 애써 부정하려 하나 나중에는 어이없게도 포기하고 만다. 왜냐하면 10, 9, 8, 7, 6, 5, 4, 3, 2, 1이 거꾸로 나와서 영영 지워버리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로써 인간의 삶이 상술한 것들에 의해 매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조차 없는 상황임을 해학적으로 보여준다. 수학에 대한 패러디는 《작품 36―가감승제와 방정식》에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철근+시멘트+타일+…+땅=벽체 벽체 X 유리 X 페인트 X … X 하늘=빌딩 √빌딩․³√빈병․⁴√소음․…․ⁿ√물=도시 도시÷문패÷전화번호÷…÷공기=사람 사람―사랑―진정―…―달나라=X   ―《작품 36―가감승제와 방정식》 전문   기존의 시어가 포착하지 못하는 현실의 구체성을 새롭게 전달하고 할 때에 패러디스트는 비문학장르를패러디하기도 한다. 이때 시는 형식 파괴나 언어의 뒤틂을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내도록 하고 의미의 난해성과 유희성을 초래하기도 한다. 시 장르와 동떨어진 장르를 원텍스트로 차용할수록 그 새로움의 강도는더욱 증대될 수 있으나 성공적인 시적 형상화를 위해서는 고도의 기술을 요구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다양한 수학공식을 패러디한 이 시는 이상의 일련의 시들을 연상하리만치 전형적인 패러디 시로서 사회와 인간에 대한 시인의 독특한 인식을 표현하고 있다. 시의 제1행은 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다. 철근, 시멘트, 타일과 같은 건축재들을 땅 위에 적절하게 세워놓으면 벽체가 된다는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제2행에서는 많은 벽체, 유리의 복합물에 페인트칠을 하는 등 수식을 하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것이 빌딩이라는 설명이다. 그런 빌딩에 그 빌딩에서 살고 있는 인간이 만들어낸 빈병 같은 쓰레기에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소음과 같은 공해 및 자연으로서의 강물, 눈, 비와 인간이 만들어낸 폐수까지의 복잡한 혼합물이도시의 풍경을 이룬다. 그런 도시 가운데 마치 이름처럼 인간에게 부여된 문패나 전화번호를 가려내면 사람이 된다. 여기에서의 사람은 어느 특정한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고 그런 추상적인 명사에 불과하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이미 소외되고 구체적 인간의 개성을 상실한사람에게서 사랑을 덜고 따뜻한 진정을 덜고 거기서 달나라로 상징되는 희망이나 꿈, 미래에 대한 동경혹은 예술을 덜면 인간은 그야말로 메마르고 괴상망측한 상상하기도 어려운 괴물 같은 존재 X로 되고 말것이라는 것이다. 즉 삭막하고 복잡한 도시 가운데서 소외되고 왜소하나마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그래도 인간에게 사랑과 진정, 희망이나 꿈이 그나마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과 인간애, 이상과 꿈은 도시 인간에게 아직까지 남아 있는 마지막 보루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패러디 시는 유희성, 흥미성, 참신성을 띤다거나 하는 경우에는 수수께끼와 같은 난해성을 띠게 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읽을 용기와 흥미를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다. 석화의 시에서 비문학 장르를 패러디한 것으로는 숫자와 수학공식의 패러디를 제외하고도 미술작품에대한 패러디를 들 수가 있다. 시 《생각하는 사람》은 로댕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을 패러디하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매일 아침 화장실에 들어가 쭈그리고 앉으면 틀림없는 로댕의 그 자세다 어제 하루 들이켰던 온갖 잡동사니와 온밤 꿈자리를 어수선하게 만들었던 끄나풀 끙 끙 아래로 힘을 줄 때마다 눈앞에서 불이 반짝반짝 켜지고 한줄기 도통한 기가 숫구멍으로 뻗힌다 《생각하는 사람》 매일 아침마다 그 자세를 하고 나면 시원하다 후련하다 오늘 또 그 비어 낸 것만큼 무엇이 가득 차겠지만…   ―《생각하는 사람》 중에서   로댕의 조각《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알 정도로 유명한 작품으로서 우리의 눈앞에는 머리를 숙이고 뭔가 깊은 사색에 잠긴 사나이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사고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이요, 인간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숭고하기까지 한 작품을 석화는 자기의 시에서 화장실에서 쭈그리고 앉았을 때의 자세로 차용함으로써 원작을 우습강스럽게 만들어 버린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고상하게 느껴지는 사고하는 자세와 가장 감추고자 하는 동물적인 배설의 자세가 상통하다니 그야말로 아이러니하며 그것을 발견하고 연관을 짓는다는 것은 또 얼마나 기발한가. 그러나 이 시는 단지유희성만을 띠지 않는다. 화장실에서 쭈그리고 앉아 로댕의 자세로 배설하는 내용물이 《어제 하루 들이켰던 온갖 잡동사니와 온밤 꿈자리를 어수선하게 만들었던 끄나풀》인데 이는 이중성을 띠는 언어이다.단순한 생리적인 배설물 이상의 마땅히 버려야 할 정신적인 것까지고 암시하고 있다. 이런 정신적인 오물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가 우리에게 부과한 것이며 또한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겠다. 시인은 패러디수법을 통하여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심각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시의 끝에 시인은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 중 끝 3행을 토 하나만 바꾼 채로 차용하여 인생과 시와 자신에 대하여 돌아보고 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쉬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사회적인 오류에 합류하지 않으나 저도 모르게 영합하여버린 자신에 대해 안타깝고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작품 《세월의 귀 ․2》와 《세월의 귀 ․10》은 속담을 패러디 하여 좋지 못한 사회풍조를 조소하고 있다.   입 닫고 3년에 악니가 나고   눈감고 3년에 속눈 떠지고   귀 막고 3년에 …?   말을 말고 그저 들어라 보지 말고 그저 들어라   ―《세월의 귀 ․2》 전문   이 시는 《귀머거리 삼 년이요, 벙어리 삼 년이라》는 우리말 속담을 패러디한 것이다. 이 속담은 원래여자가 시집가서 남의 말을 들어도 들은 척 만 척하고 하고 싶은 말도 입을 다물고 하지 못하는 시집살이의 고됨을 이르는 말인데 이 시에서는 이 시대 인간들의 명철보신의 사상과 처세술을 풍자하고 또 말하지말고 보지 말고 살아야만 잘 살 수 있는 사회에 대한 혐오감과 고뇌, 개인의 힘으로는 돌이킬 수 없다는체념 등을 보여주고 있다. 《세월의 귀 ․10》에서는 《낮말을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을 시로 패러디하여 자기가느낀바 말하고 싶은 바를 다른 사람의 이목이 무서워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를 폭로하고 있다. 사회적인 세태를 비판한 것으로 《세월의 귀 ․3》을 더 들 수가 있겠다. 고대 중국에 자연에 은거해 있던 한 현인이 소를 몰고 가다가 왕위에 올라달라는 청을 듣고 자기귀가 더러워졌다고 하여 시냇물에 귀를씻고 그 더러운 물을 소가 먹을까 두려워 소를 자기가 귀를 씻은 윗녘에서 물을 마시게 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시인은 이를 패러디하여 그 귀 씻은 물이 짭짭하고 구수하고 들큼하여 끓여놓으면 개성신선로도 울고 갈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 물이 너무도 귀하여 소한테는 아까워 못 먹인다고 한다. 이로부터 깨끗했던 옛날의 사회적인 풍조에 비하여 세속적이고 탐욕적으로 변한 현실을 함축적이고 우회적으로 풍자폭로하고 있다. 시인은 패러디수법을 채용함으로써 자기 시로 하여금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성격을 띠게 하고 있으며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있는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관습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하고 있는 중국조선족시단에서 더욱 소중한 경험이고 개척적인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1998년 10월 12일 연길에서 계간 《장백산》 1999년 제1기   출처(연변모이자 )  
649    詩의 革命...! 과 詩의 革命...? 댓글:  조회:3948  추천:0  2015-03-14
시의 발전은 혁명의 방식이 아니라 계승과 창조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김관웅      최룡관 씨는 흑룡강신문에 실린 《제2차 시혁명을 위하여》(2006.5.200),《우리의 거울을 옮겨야》(2006.6.3), 《새로운 제재의 개발을》(2006.17) 등 글에서 해방이후 우리 중국조선족의 시문학의 발전사를 제 마음대로 서술하고 평가를 내리고 시인들을 줄 세우기를 하고 선지자연(先知者然)한 예언도 서슴없이 내던졌다.   김철, 리상각, 김성휘, 조용남 등 문화혁명이전 기성세대의 시들은 이미 우리 시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이들의 시를 대표로 하는 중국조선족의 시문학은 이른바 《제1차 시혁명》의 주력들인 석화, 리성비, 김학송, 리임원 등 이 《네 마리》(최룡관의 개성적인 표현을 존중하여 그대로 답습함)의 척후병의 시창작에 의해 교체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문화혁명 이전의 기성시인들의 시가 우리시문학의 발전을 가로막는《장벽》이 되였듯이 듯이 오늘은 이 《네 마리》척후병들의 시들도 《새로운 장벽》으로 나서고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최룡관씨는 《이것이 오늘의 연변시단의 상황》이므로 《이 상황을 극복하여야 하며 이 장벽을 젖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룡관씨가 고취하고 있는 이른바 《제2차 시혁명》은 바로 이 《네 마리》척후병들의 진부한 시들을 《젖혀버리고》 이들의 시보다 더 생동하고 아름답고 빛나는 시들이 나오도록 하려는 것이 《제2차 시혁명의 길》이라고 그 목적을 명료하게 밝혔다.   그러나 최룡관씨는 결코 석화, 리성비, 김학송, 리임원 등 이 《네 마리》척후병을 포 함한 동세대나 그 선배시인들을 모두 부정한 것은 아니다. 최룡관씨는 자기의 시학관, 기 호 및 친분관계 등에 좇아 김파, 박화, 정몽호, 남영전 같은 시인들은 《제2차 시혁명》의 토대 또는《혁명의 주체》로 인정했다.   《제2차시혁명에서 류파가 형성되는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의 우리 시는 너 무 한곳에 모여 오구작작이다. 시인마다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시의 기치를 들어야 한다. 지난날에 김파시인은 립체시라는 기발을 들었고 박화시인은 주지시라는 기발을 들었고 남 영전시인은 토템시라는 기발을 들었고 정몽호시인은 상징시라는 기발을 들었고 조광명시인 은 선시라는 기발을 들었다. 그들은 모두 성과를 올리였는데 현시점에서 보면 남영전시인 이 따낸 성과가 제일 대단하다. 지난 3월 28일 중국의 저명한 시비평가 사면은 남영전시인 을 고 높이 평가하였다.》   최룡관씨가 제2차혁명의 토대 또는 그 혁명의 주체로 내세운 남영전의 토템시에 대해서 는 이미 언급을 했으니 이 글에서는 김파의 립체시와 립체시론만을 거론하기로 한다. 필자는 김파의 시창작 전체를 부정하지는 않으며 그가 쌓아올린 시창작의 성과에 대해서는 언제나 실사구시하게 평가를 해 왔었다. 이를테면 본인이 적극 추천하여 김파씨의 《욕망》을《중국조선족명시선》에 올렸으며, 또 《우리의 시의 방향제언을 위한 제언》이란 장문(長文)의 시평에서 많은 편폭을 할애하여 김파씨의 《욕망》을 칭찬했다. 그러나 필자는 김파씨의 이른바 《립체시론》에 대해서는 부정적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오래 전부터 《과연 새로운 것인가?》(《문학과 예술》2006.2)등 글에서 김파씨의 이른바 《립체시론》은 서양의 상징시와 상징주의시론 같은 전통시론에서 거듭 반복하여왔던 시학주장을 이른바 《립체시》나 《립체시론》이라고 타이틀만 바꾸었을 따름이라고 지적하면서 그 창의성을 완전히 부정했다.   박화의 주지시나 정몽호의 상징시 역시 기존 동서양 문학전통의 계승이지 결코 정몽호의 완전한 창조라고 평가를 내릴 수 없다. 기치를 들었다고 평가하기 보다는 주지시나 상징시를 선호하고 그 공부를 했다고 해야 적절한 평가일 것이다. 류파가 나오려면 그 류파 나름대로의 독득한 시학주장과 그 시학주장에 따르는 시창작실천이 결부되여야 한다. 공허한 슬로건이나 독창성 없는 시학주장만 가지고서는 안된다. 우리 시단에 류파는 사실은 있다. 그것은 현실참여파와 현실도피파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기치를 내걸지 않고 어떤 동인단체를 결성하지 않았을 뿐이다. 필자는 자신은 바로 현실참여파라고 스스로 인정한다. 필자 그리고 필자와 의견을 같이 하는 우리문단의 적지않은 문인들에게는 현실참여파로서의 올곧은 시학주장이 있다. 하지만 아직은 현실참여의 시창작이 활성화되지 못했기에 명실상부한 현실참여파라고 하기는 어렵다. 필자의 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참여파의 선언서라고도 할 수 있다. 만일 우리 시인들이 이 주장에 동감하여 보다 많은 시인들이 적극적으로 현실참여의 시를 창작하여 하나의 도도한 흐름을 이룰 때 우리시단에도 명실공히 21세기의 중국조선족시문학의 하나의 시문학류파 - 《신현실참여파》가 형성되리고 확신한다.   《기치를 들었다》는 것은 흔히 이 세상에서 제일 처음으로 남들이 들지 않았던 독특한 시문학의 기치를 내들었을 경우에나 사용하는 표현임을 최룡관 씨는 알아야 할 것이다. (물 론 그 명칭의 과학성 여부를 불문에 부친다면 아직까지 이 세상에서 란 기치를 든 사람은 없었으니. 남영전씨의 경우에는 〈토템시〉의 기치를 내걸었다고 표현해도 무방하 다.)   똑 같은 리치로 나타난지 백년이 거의 되는 초현실주의나 의식의 흐름 같은 모더니즘의 일부 수법을 배우고 도입하는 것을 명분이나 리유로 최룡관씨가 이른바 《시혁명》을 고 취하는것 역시 어불성설이다. 시를 전혀 모르는 황소도 웃다가 꾸러기 터질 노릇이다. 우 리민족의 시력사만 보더라도 지난 1930년대 김기림, 김광균 정지용 같은 이들이 이미 많은 장난을 친 적이 있는 모더니즘 시창작이나 시론을 중복하는 것이나 별로 다름이 없으면서 도 왜 굳이 《시혁명》을 고취하는지 알고도 모를 일이다. 이런 사이비《시혁명》은 2차, 3차, 4차, 5차가 아니라 100차를 해도 최룡관씨의 개인의 범위에서만 한정된다면 문제가 없다. 최룡관씨가 모더니즘을 하던지 말더니즘을 하던지 소더니즘을 하던지 필자는 오불관 언이라는 태도를 취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의 시단의 혁명으로 확장하려고 할 때는 문제가 달라지는 것이다.   최룡관씨가 말도 안 되는《제2차 시혁명》의 주체로 부각시킨 이들은 물론 이미 고인이 된 박화나 정몽호 같은 시인들이나 김파나 남영전 같은 60세 좌우의 현역시인만은 아니다 . 이에 대해 최룡관씨는 《제2차 시혁명》의 가상적인 《혁명의 주체》를 등장시키고 있다.   《네마리 척후병보다 다른 새로운 척후병들이 나와야 새로운 시의 길을 개척할수 있다. 네마리 척후병들이 제2차 시혁명에서 그냥 척후병이 되자면 이제까지의 자신을 이겨야 하 며 새로운 나로 다시 태여나야 한다. 그것은 너무나 간고한 작업이여서 그들에게 그것을 요구한다는것은 어찌보면 무리이기도 하다.   그들은 80년대의 청출어람이였다. 21세기에 와서는 그들을 바탕으로 하는 청출어람이 나와야 한다. 물론 이것은 나이와는 관계없고 세대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지만 필자는 그들에게희망을 걸지 않는다. 그들의 아래 세대에 희망을 건다.   그들이 누구인가? 필자의 졸견으로 보면 한영남, 김승종, 김영건, 김현순, 김춘택, 김경희, 심예란, 심명주, 박춘월, 허옥진, 허련화 등 시인들중에서 덩지 큰 시인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누가 되는가는 아직 미지수이다. 이 모든 시인들이 아니고 다른 새로운 시인일수도 있다.》   물론 이런 젊은 세대의 시인들이 아직 시를 쓸 시간이 많으니 선배를 초월하여 훌륭한 시인이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이런 신진시인들은 결코 최룡관씨처럼 혁명의 방법 으로 이 《네 마리의 척후병》에 대해 무모한 을 단행하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가 기성세대 시인들을 《젖혀버리는》식으로 발전될 수도 없거니와 아직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알건대 최룡관씨가 이름을 찍은 한영남, 김영건, 김승종, 심예란, 심명주, 박춘월, 허옥진, 김현순, 김춘택, 혀련화 등 《제2차 시혁명》의 혁명주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은《제2차 시혁명》의 주요한 혁명의 대상들인 석화, 리성비, 김학송, 리임원 등으로부터 지극한 가르침과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고 소문으로 많이 전해 들었다. 마치도 병아리가 어미닭은 졸졸 따라다니듯이 하는 이들이 어떻게 자기들의 선배이자 스승이고 은인들을 혁명하겠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일이다. 혁명의 본의(本意)는 목을 베는 것이니까. 《수호전》이나 《삼국연의》 매 장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상투어를 패러디해서 쓴다면 그야말로 《제2차 시혁명의 대상들인 석화, 리성비, 김학송, 리임원의 위태로운 목숨이 어떻게 되였는가를 알려면 하회를 보아야 할것이다.》   한영남, 김승종, 김영건, 김현순, 김춘택, 김경희, 심예란, 심명주, 박춘월, 허옥진, 허련화 등도 모두 최룡관씨의 《제2차 시혁명》의 주장에 공감하거나 동참할 시인들은 아님을 잘아야 할 것이다. 사실 이들 중에는 시의 대문에 아직 들어서지 못한 초립동이들이 적지 않으며 《제2차 시혁명》을 일으키려는 동기나 그 리론적 준비나 배경도 갖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절대 최룡관씨가 지금 고취하고 있는 《제2차 시혁명》의 주체가 되지 못할 것이며, 또 되려고도 하지도 않을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시혁명의 주체가 없는 시혁명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우에서 최룡관씨가 이름을 찍지 않은 신진 시인들도 많으며 또 이들은 결코 그 시창작의 수준에서 최룡관씨가 이름을 찍은 신진시인들에 비해 짝지지 않다. 이들은 최룡관씨의 시창작주장에 더욱 동조하지 않는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최룡관씨의 《제2차 시혁명》은 애오라지 최룡관씨의 주관적인 발상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대중적인 기반이 없는 공상적인 혁명에 불과하다고 인정한다.   무릇 정치혁명이든 문학혁명이든 성공하려면 명확한 혁명의 대상과 그 혁명을 이끌어나갈 혁명의 주체 그리고 광범한 대중적기초와 충분한 혁명의 조건 및 혁명의 명분과 리유가 갖추어져야 한다.   필자는 최룡관씨의 이른바 《제2차 시혁명》은 이 모든 것이 결여되였거나 불충분하다고 인정한다.   다만 최룡관씨의 혼자만의 주관성과 맹목성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이 《시혁명》이 물거품처럼 사라질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하다.   시를 포함한 모든 문학과 예술의 발전과 진보는 정치혁명처럼 대방을 죽여 버리는 방식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전통에 대한 계승과 창조를 통해 이룩됨을 알아야 한다. 물론 모더니즘의 반전통의 특징을 뚜렷하게는 갖고 있으나  모더니즘의  모든 문학류파가 죄다 반전통의 방식을 취한 것은 아니다. 특히 모더니즘 시문학의 원조인 상징주의와 이미지즘은 사실은 인류의 전통적인 표현수법을 체계화하고 계통화하고 리론화했을 따름이다. 특히 이미지즘은 서양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전통시에서 많은 것을 계승하여 발전시켰지 결코 전통에 대한  혁명으로부터 출발한 것은 아님을 최룡관 씨는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사실 최룡관씨는 자신의 시창작에서 많이 전통에서 배웠으며 결코 혁명을 한적은 단 한번도 없다.  자기도 하지 않았고 또 할수도 없는 시혁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권장하는 의도가 심히 의심스럽다.                                          2006년 6월 20일 연길에서  
648    시인 - 박명순 댓글:  조회:4146  추천:1  2015-03-14
         
647    엄마라는 이름앞에 부쳐... 댓글:  조회:2098  추천:0  2015-03-14
646    시조의 제5의 변혁은 숙제... 댓글:  조회:4279  추천:0  2015-03-14
"가오는 천년 길목에서 시조변혁의 命題"                                  - 장 지 성(시조시인)  이제 바야흐로 가오는 천년의 교차점에 선 우리들은 지나온 천년의 시조의 원류를 더듬어 보고 새롭게 다가올 즈믄해를 맞이할 대변혁의 옹골찬 마음가짐을 준비할 때가 아닌가 한다.  시조의 역사는 처음부터 가(歌)에서 비롯되어 풍류를 즐기는 사대부들의 전유물로 시작되었다.  시대(시절)의 변천에 따라 자신의 감회 및 충절을 여과 없이 전달하는 목적의 수단으로, 창작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임제(1549~1587)가 당시 사대부의 체통을 접고 기녀(技女) 한우(寒雨)를 흠모한 염정시(艶情詩)가 최초의 일관된 시조풍에서의 탈출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를 전후하여 황진이·매창 등 기녀들의 시조가 등장하면서 서민 계층이 시조에 참여하게 되었다.  두 번째의 변혁은 평시조를 일탈한 당시의 파형시 격인 사설시조의 등장이다.  정철의 「장진주사」가 최초로 기록되지만 사설시조의 형성은 17세기말 하층민들이 양반들에게 항거하는 형식으로 확대 발전되었음을 여러 문헌상 짐작할 수 있다.  세 번째의 변혁은 1926년 최남선이 『조선문단』 5월호에 「조선 국민 문학으로서의 시조」를 발표, 시조 부흥 운동을 전개하며 당시 고시조로 답습하여 내려온 ‘하여라’, ‘있노라’ 등 과시적 표기법을 마감한 그의 시조집 『백팔번뇌』가 근대시조의 뿌리내림이다.  네 번째의 변혁은 현대시조로서의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 내려오게 한 이은상·이병기·조운 등을 우리들은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문단에서 시조 장르의 위상은 어떠한가.  어느 때부터인지 ‘시조하다’ 풀이는 “남이 말하는 것을 얕잡아 일컫는 말”로 그 어휘를 비하시켰고 그러한 사전적 의미를 떠나 느릿느릿 말할 때나 비꼬는 말투를 지적할 때 회자됨은 어인 일인가.  이제 시조단 인구도 일천 명을 넘어섰다. 이 중에 혈기 충만한 새로운 지평을 열 많은 시조인들이 있음을 확신하며 다가오는 21세기를 맞아 우리 모두 거듭나는 변용의 깃발을 더욱 드높이 올려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한다.  가을 들판이 풍성하듯 이 달에 많은 시인들이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음을 여러 지면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좋은 시, 읽히는 시조를 대할 때 전율 같은 흥분을 느낀다.  『펜과문학』에 발표된 김준의 「아내의 얼굴」, 최종섭의 「靑山을 보며」, 박옥위의 「안개」, 김해석의 「까마귀의 은혜」, 신웅순의 「내 사랑은·16」과 『서울문학』 2호에 서벌의 「山行」, 엄미경의 「우포늪」, 정정용의 「그대 위한 설악」 및 『월간문학』 11월호에 민병도의 「戊寅日記」, 「粉靑의 노래」, 하순희의 「무학산」, 최혜숙의 「부활의 바다」 등 너무나 풍성하여 어떤 것부터 채과(採果)하여야 할지 지면 관계상 몇 작품만을 언급함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언제나 생활 틈새에/가려 있는 아내 얼굴이/문득 한눈을 팔 듯/낯설게 떠오르다가/분주한 시간 속으로/자취도 없이 사라진다.//어느 땐 반만의 얼굴/초라한 그림자를/거울 앞에 마주앉은/낯익은 모습에서/그래도 잔잔한 호수/저녁놀이 고와라.//허물도 사람인 양/주체스레 넘긴 세월/곰곰이 헤아리면/태산준령도 무색하다/훔쳐본 아내의 얼굴에서/세상일을 알겠구나.  ― 김 준, 「아내의 얼굴」 전문  한 필의 필육을 짤 때 씨줄과 날줄의 바디와 북의 조화로움이 있어야 질감 좋은 천을 생산하듯 이미지의 상호 연관성이 기·승·전·결의 의미를 깨우치게 한다.  우리는 청정한 공기를 원하면서 산소 부족 현상이 있을 때에야 그 고마움을 느낀다. 유무형으로 평생을 뒷바라지하며 사는 고마움을 우둔하게도 아내의 의존도나 신뢰도가 높을수록 잊고 사는 모순을 범한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본 아내의 주름살에서 솟구치는 정을 저녁놀의 비단결로 옷 입히는 극히 제한적이고 수용하기 힘든 영역(?)을 다스린 작품으로 중후감마저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내운 저자 복판 숨이 막혀 빠져나와/산길 오르누나, 許浚 선생 탓을 길을/이런 녘 멧새 소리는 약초 뿌리 빛깔이다.//오르막 끝까지 올라 내리막 내려다본다/길은 꼬불꼬불 막히다가 트이면서/목숨 줄 저와 같음을 새겨 갖게 하는구나.//아무튼 아직은 내 이처럼 살아 숨쉬고/구름은 꼬리 매단 가오리연으로 떠/神醫가 살폈을 골짝 놓치잖고 눈여긴다.//비려라 이 세기말 毒 잔뜩 오른 가슴들/유리잔 대질리듯 맞부딪혀 금들 간다/神醫여, 산삼처럼 숨은 당신 어서 나타내소서.//  ― 서벌, 「山行」 전문  그의 강점은 심연 깊은 서정성 바탕에 그만이 지니고 있는 모더니즘의 실사로 감각적 이면을 들추어내는 투시력에 있다. 그러한 사실성 이미지를 복원하는 주형과 그 주형 속에 용해되어 있는 神鍾의 울림 같은 시적 자아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 산의 대상은 허준의 생체 실험으로 유명한 밀양의 얼음골이어도 좋고 서울 근교의 어느 산이라도 좋다.  산에서 자생하는 모든 것들은 대부분 인체에 유익한 약초가 된다.  그 약초 뿌리를 빛깔로 형상화해 멧새 소리로 비유한 청각적 발상이라던가 멀리 뻗어 있는 흰 오솔길을 생명줄로 그린 시각적 표현법이 동시에 어우러져 누구도 답습하지 못할 ‘구름은 꼬리 매단 가오리연으로 떠’ 있는 발원적 절창을 낳게 된다.  그는 마침내 상처로 얼룩진 불신의 시대에 치솟는 분노를 곰삭이며 처방전을 내리는 화자는 어느덧 백발 성성한 신의가 되어 있음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그곳에 자라나던 햇살들을 보았는가/손끝을 투명하게 튕겨 내던 첫 비상의/우주로 관통하는 빛 날개 가득 눈물겹다.//어둠을 뿌리내린 가시연 걷은 새벽/수면 위로 자욱하게 뼈 울음 부서지고/사랑도 지금은 깊어 건져내지 못할 무게//노랑 부리 흰 부리로 마주 닦는 꽃의 형렬/역사를 다시 지나 맑은 피를 번지며/또렷이 우리를 향해 응시하는 오늘이여.  ― 엄미경, 「우포늪」 전문  기계를 놓았다 그러나 그건 위장의/공복 같은 쓰라림을 버린 것뿐이다/주변을 삐걱거리던 기계를 나왔다.  ― 엄미경, 「기계를 놓았다」  4수 중 첫째 수  상반된 두 유형의 작품이기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늪은 숱한 세월의 매적 작용에 의하여 침전된 토사물로 뻘밭을 이루고, 그 퇴적물 위에 가시연 등 다양한 수초(水草)들이 뿌리를 내리면서 산소 공급으로 스스로를 정화시키는 온갖 생태계의 보고(寶庫)이며 특히 우포늪은 철새들의 도래지이기도 하다. 조금씩 문명의 기름띠에 훼손되어 가는 수면 위로 저어새들의 뼈 울음을 들으며 맑은 피의 수혈을 염원하는 ‘사랑도 지금은 깊어 건져내지 못할’ 애증으로 오늘을 직시하는 무게 실린 작품이다.  반면 또 하나의 작품 「기계를 놓았다」에서는 정형의 틀을 거부하는, 요사이 새로운 변화의 미명아래 서툰 날갯짓을 하고 있는 일군의 선배 시인들의 몸짓을 답습하는 안쓰러움이 엿보이기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시에도 한 호흡과 두 호흡으로 여운(余韻)을 다스리는 내재율이 있듯이 세 호흡으로 응축시켜 마감되는 시조의 경우 이 시에서 어떻게 호흡을 구분하여야 하는지, 음수율을 제쳐놓더라도 음보율의 징검다리 간극을 확대 해석하려 하여도, 종장을 제외한 초장과 중장의 명확한 구분이 요구되는 기형시 형태로 무언가 발상의 전환을 시도하는, 감내하지 못할 이런 오류들이 오늘날 일부 시조풍에 편승되는 경계의 대상이 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상의 선명성도 곁들여 당부한다.  저무는 대지 위를 潑墨으로 다가오는/어둠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언덕에 서면/수건을 머리에 두른 녹두꽃은 지고 있었다.//추억이 되지 못한 잎새끼리 떨고 있는 밤/오랜 꿈을 갉아먹던 시간의 덧니처럼/빈 산을 뜯어먹으며 넘어가는 달을 보았다.//나뒹구는 고무신의 긴 사연에 지친 풀들/과거를 지니지 못한 자 별을 섬기지 못하듯/이별의 자리를 골라 향기나는 꽃을 피웠다.//상처 따라 가는 강이 갈대숲을 일으키고/팔다리를 잃고서도 무릎을 꿇지 않던/그리운 지평 밖으로 날아가는 파랑새를 보았다.  ― 민병도, 「戊寅日記」 전문  「粉靑의 노래」와 함께 『월간문학』 11월호에 발표된 민병도의 작품이다.  그는 이 시대 시조의 한 영역을 일구어 낸 정형의 시인이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혈흔으로 얼룩진 역사의 아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자유시 형태를 흉내내는 형식의 미를 대부분 거부한다. 그러나 그를 보수적인 시인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재적소에 배치한 참신한 시어의 안착은 작품 전체에 튕겨 오르는 감칠맛과 이미지의 결을 빛낸다.  이 시의 화두가 되는 발묵(潑墨)의 의미는 무엇인가. 먹을 충분히 갈지 않을 때 먹물은 번진다. 먹물이 번지는 것은 그 자체가 미완(未完)이요, 녹두꽃과 파랑새의 등장은 동학(東學)의 교주 전봉준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꿈을 갉아먹는 시간의 덧니가 빈 산을 뜯어먹으며 넘어가는 달’의 소멸은 세기말의 쉼표 같은 의미로 넷째 수 초장의 고무신의 등장은 근대, 또는 현대를 클로즈업한 불의에 항거하다 쓰러진 우리들의 사랑하는 민초가 아닌가 한다.  그의 시는 재벌구이로 끝을 내지 않는다. 한 점 티나 일그러짐을 거부하는 장인정신으로 그의 가슴을 데우는 시작의 불잉걸은 더욱 뜨겁게 타오르리라 믿는다.  간밤의 배설물이 하구를 포복한다/침묵을 강요당한 적의에 대하여/녹슬은 갈대 밑둥만 골다공증 앓고 있다.//바닷사람은 함부로 낭만을 말하지 않는다/비끄러맨 밧줄을 푸는 모험적 생의 의미로/아침 해 그물로 끌어 갑판 위에 올린다.  ― 최혜숙 「부활의 바다」 4수 중  셋째 수와 넷째 수  바다의 생태와 그 속에서 삶을 경작하는 작품으로 “잘 가꾼 일만 물이랑에 청어 떼가 툭툭 튀는” 영상 기법의 출렁이는 물결이 눈에 선히 들어온다. 또한 그는 뱃사람들의 허기진 딸국질을 ‘속이 빈 갈대의 골다공증’으로 풀이했고 외처 사람처럼 함부로 낭만을 말하지 않는 어부들의 바다는 여간 폭풍우 속에서도 밧줄을 풀어 출어를 하여야 하고 생명을 담보로 밤마다 집어등을 켜야 하는 고난과 아픔을 명시해 주는 시다. 그러면서 그는 아침이면 만선의 꿈으로 그물을 끌어올리는 희망과 터전의 바다임을 일깨워 주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현장 시조임을 알 수 있다.  새 천년을 순 우리 나라 말로 즈믄해라 한다. 이제 천년의 세월은 무수한 역사를 남기며 서서히 저물어 가고 무언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은 미지의 새 천년의 문이 열린다. 이 달의 넘치는 작품들로 보아 우리 시조단의 앞날은 밝고 또한 많은 시조시인들이 21세기를 향해 선두 주자로 뛰고 있는 모습이 역력히 보인다.  앞에서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일구어 온 시조의 변천사를 밝혔듯이 제5의 변혁(변용)은 우리 시조인 모두의 과제요 숙제인 것이다.  
645    시인 - 오정묵 댓글:  조회:5071  추천:0  2015-03-14
  [이 詩를 말한다](中)오정묵 시-'가을의 소리' 가을의 소리     오 정 묵 남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울움소리에 눈 들어 바라보니 제 고향 찾는  나뭇잎소리로다 싸늘하게 부는 가을 바람소리에 머리 들어 바라보니 뚝뚝 떨어지는 찬 빗방울소리로다   **오정묵 : 용정출신 조선족 시인.한의사.       -오정묵시인이 2006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펴낸 시집『 가을의 소리』에 수록된 표제시 는 전형적인 한 편의 완벽한 서정시다. 이국정서가 흠뻑 묻어있는 이 시에서 우리는 이민족의 그리움을 읽을 수 있어 더욱 감동적이다. 보라, '남으로 날아가는 / 기러기 울음소리에 / 눈 들어 바라보니 / 제 고향 찾는 나뭇잎소리'라 읊었다. 그 기러기 울음소리는 고향을 찾아 날아가는 행위로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제는 늙고 병들어 몸은 못 가도 마음, 혼이라도 고향을 향하는 간절한 이민족의 심사(心事)로 읽히는 것이다. 여기 중첩된 이미지로 나뭇잎 소리가 바스락 거리는데 역시 고향을 향한 간절한 몸짓의 소리인 것이다. 서정시의 비유와 상징의 절창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또한, '싸늘하게 부는 / 가을 바람소리에 / 머리 들어 바라보니 / 뚝뚝 떨어지는 / 찬 빗방울소리'라 읊었다. 역시 가을 바람소리와 찬 빗방울소리의 대비가 돋보이는데 여기에서는 정착해 머물러 살아가고 있는 회한의 심사(心事)가  깊이 배어있는 대목으로 익히는데 가을 바람소리와 찬 빗방울소리가 현실로 인식되고 있다. 이렇게 이주해 살아가는 만주땅 조선민족의 망향을 달래는 가을날인 것이다. 어쩌면 고향에 대한 나아가서는 고국에 대한 간절한 갈망인지도 모른다. (한국 서지월시인/記)           ◇연변 용정의 강덕진료소 소장이기도 한 중국의 명의(名醫)로 알려진  팔도촌 태생인 오정묵시인은 개산툰 간도 사이섬 일대에 두만강변 천평벌의  어곡미를 생산하고 있는가 하면, 용정의 윤동주 생가 왼편 송몽규 문익환 나운규 등  한민족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이 거쳐간 집터를 새로 복원해 문화공간을 조성해  조선민족이 얼과 긍지를 살리는데 기여해 오고 있는 시인이기도 하다.   시 가 서지월시인에 의해 한국의 신문과 문예잡지에 여러 번 소개된 바 있는데 중국  뿐만 아니라 미국 한국에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명의(名醫)로 침술가로서도 명망이 드높다.   [연변일보 2011-02-11 윤완주] 요즘 룡정시 강덕진료소를 꾸리고있는 오정묵의사가 지신진 명동촌에 농가책방을 마련한 훈훈한 미담이 널리 전해지고있다. 룡정시에서 20킬로메터 상거한 룡삼도로앞에 자리잡은 명동촌에는 390여세대가 살고있다. 개혁개방이후 농민들의 생활수준과 생활질이 크게 제고되였지만 농가책방이 없는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았었다. 다년간 사회공익사업과 자선사업에 80여만원을 기부해온  오정묵의사는 유서깊은 명동촌에 농가책방을 마련하기로 작심하고 지난해 여름부터 근 20만원을 투입하여 120평방메터 되는 2층 벽돌기와집을 짓고 멋지게 장식한후 각종 도서 2만여권을 사들여 서가에 진렬했다. 일전에 명동촌에서 있은  농가책방 개장식에서 명동촌당지부 서기 류인동은  금후 농가책방을 잘 리용하여  농민들에게 풍부한 정신적식량을 공급하고 종합자질을 높이며 농민수입을 증대시키는 면에서 많은 역할을 하게 할것이라고 말했다. 소개에 따르면 명동촌은 중국조선족교육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갖고있는 원 명동학교가 있고 또 저명한 반일시인 윤동주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출처(연변모이자 ) 문화 - 오정묵의사 명동촌에 농가책방 마련     
644    시인 - 백진숙 댓글:  조회:4385  추천:0  2015-03-14
[백진숙 시]등산(외 2수) 편집[ 김태국 ] [ 길림신문 ] [ 2012-10-08 16:06:58 ]  토요일(외 2수) 토요일 신나는 친정 나들이   곰방대 입에 문 아버지 웃방에서 일어나며 싱글벙글 반겨주시고   아이구 내 새끼 맨발바람으로 달려나와 얼싸 안아주시는 어머니   봄 여름 가을 겨울 건강해라 아낌없이 주는 사랑   어버이 계신 곳 그 사랑 그리워 하냥 달려가는 길   토요일 산입구에 도착하면 기쁨에 넘쳐 부르는 소리 아버지 어머니 제가 왔어요    별찌   하늘의 버림받은 사나이 지구에도 네 호적은 없다 금덩이같은 지구의 유혹 떨쳐버릴수 없어 마침내 행랑각이 된 너   네가 들려주는 구수한 하늘이야기에 팔베개 베고 누운 지구는 천년잠에 빠졌는데   난 네 호적 가슴에 달고 훨훨 하늘로 올라가 푸른별이 되고싶다 하늘나라 하루밤 행랑각이 될지라도   그림자   나는 한방울의 물도 가진것 없는 가난뱅이 사철 단벌옷 하나여도 나의 삶에 만족하노니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좋을 때나 궂을 때나 당신만을 따라다니는 친구이고싶어라   오늘도 당신과 둘이서 손에 손잡고 웃으면서 허위허위 넘어가는 아리랑 열두고개   로신이여 돌아 오시라 2014년 03월 09일 14시 56분  작성자: 백진숙 로신이여 돌아 오시라      도서관이 새 청사에로의 이사준비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던 작년4월 중순의 어느날이였다. 직장 후배들에게서 낡은 청사를 곧 허문다는 소식을 얻어들은 나는 아침밥을 먹기 바쁘게 사진기를 들고 부랴부랴 도서관으로 향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이미 다 낡아버린 도서관은 마치 지팽이를 짚고 서있는 등굽은 로인네와 같았는데 자기의 사명을 다 했음에도 눈물을 흘리면서 “제발 허물지 마소, 난 아직 할일이 있다우.”하며 서 있는것만 같았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듯 마음이 아파났다.      배움의 전당이였고 늘 푸른꿈을 심어주었던 신성한 곳, 내 젊음이 머물었던 자리, 책 읽기가 좋아서 여러차례 승진의 기회도 포기하고 도서관 사서 노릇만 고집했던 나, 자기 집처럼 늘 아끼고 사랑했던 도서관, 눈물이 금방 떨어지려고 하였다. 얼른 두눈을 감아 버렸다.      나는 사진기를 여러 각도로 바꾸면서 련신 사진들을 찍어댔다. 그러다가 도서관 동쪽켠에 있는 로신동상도 한장 찍으려고 다가가다가 그만 멈춰서고 말았다. 문득 한 독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여 나타났다.      “아Q”같고 “공을기”같고 상림 아주머니” 같고 “광인일기”의 주인공같은 사람 J이다. 왜서인지 그만보면 나는 로신의 글에서 나오는 이 몇몇 인물들이 늘 머리에 떠오르군 한다.      질질 끓는 여름에도 그는 늘 두꺼운 커피색 골덴옷을 입고 겨울에는 때가 낀 자주색 털실 모자에 지난세기 60-70년대 류행되였던 국방색 겨울외투를 입고 다닌다. 해와 달이 바뀌여도 그의 이런 옷들은 바뀔줄 모른다. 글을 쓰는 이 시각에도 로신 동상을 산 로신으로 간주하고 그와만 이야기 하던 얼굴이 안쓰럽게 안겨온다. 이제 이것을 허물어 버린다면 그는 누구와 말하며 또 어떻게 살아갈것인가? 다시 도서관에 발길을 돌릴수 있을것인가?      도서관의 사서들이나 독자들은 그를 “공을기”나 “아Q”나 “상림아주머니”처럼 놀려 주지는 않지만 누구도 말을 걸지 않는다. 이 점이 그를 얼마나 힘들게 했으랴! 그러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하루가 멀다하게 책 보러 다니군 하였다.      10여년전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설날 아침에 맨 먼저 도서관에 온 10명 독자들에게 관장님은 친히 두툼한 목책을 선사하여 설날에도 책을 읽는 그들을 격려해 주셨다. 기타 아홉명 독자들은 모두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로 그쳤으나 그날 그가 받은 감동은 그야말로 컸다. 첫사람으로 열람실에 들어서는 그에게 설 인사를 건넸더니 여직까지 도서관에서 자기와 말을 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며 그렇게 기뻐할줄이야! 목책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내앞에 선 그는 새해 축복을 뜨겁게 해주었다.      “누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기분이 좋아진 그는 말이 많아졌다. 자기는 도서관에 와서 많은 자료를 베끼는데 이 목책을 유용하게 잘 쓰겠다며 몇번이나 거듭 말하였다. 이러는 그가 측은하여 후에는 인사도 스스럼없이 하고 말도 몇마디씩 걸군 하였다.      집에서 도서관으로 또 도서관에서 집으로 가는것이 그의 생활의 전부였다. 베낄것이 뭐가 그리 많는지 온 종일 베끼고 또 베껴서는 그것들을 호주머니 여기저기에 잔뜩 집어 넣는다. 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장이 있으면 점심도 거른채 계속 보군 했는데 어떤때는 퇴근 종소리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다가도 할말이 있으면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로신동상앞에 가서 울분을 토로하거나 격정높이 연설을 하군했다.       한번은 살그머니 동상곁에 다가가서 그의 연설을 들은적이 있다. 세상에! 그보다 더 훌륭한 정치가가 어디 있으며 그보다 더 말 잘하는 연설가가 또 어디 있으랴! 사회의 페단들과 부정부패를 얼음에 표주박 밀듯 얘기하는데 틀린말이 하나도 없었다. 책을 많이 보아서일가 그는 아는것도 많았는데 로신 동상과 말하는것을 빼면  모든것이 정상이였다.      “로신은 하늘나라에 갔기에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마치 낯선사람 쳐다보듯 한참 뜯어 보더니 로신의 간력을 줄줄이 외우고 나서 자기는 오직 로신만 숭배하는데 그는 신선과 같기에 하늘나라에 갔어도 자기말을 다 알아 듣는다며 모든 인민이 잘살고 부강에로 나가자면 그래도 그와 말해야만 된다고 하였다.      문뜩 로신의 “광인일기”에서 형이 자기를 잡아 먹으려 한다고 벌벌 떨면서 갖은 이상한 생각과 말들을 하던 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그만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그러던 몇년전의 어느날, 로신동상 앞에서 또 연설하던 그가 끝내 쓰러지고 말았다. 한 독자의 급한 웨침소리에 달려 나가보니 터진 머리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우리둘은 함께 피를 깨끗히 닦아 주고 정신을 차리자 좋은 말로 집으로 돌려보냈다.      만약 로신의 넋이 살아 있다면 이러는 그가 가여워 아마 많은 눈물을 흘렸으리라. 인사 한마디에도 그렇게 기뻐하는 그에게 나는 왜 빵 한쪼각, 물 한병이라도 사주지 못했을가? 후회되는 마음 금할수 없다.      그런데 그후부터 도서관에 오는 차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얼마후엔 아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또 물어보면 다들 모른다고 한다. 그럼 그도 “공을기”처럼 누구도 모르는 가운데 이미 죽어 버렸단 말인가?      로신은 아니 로신동상은 힘든 이 세상을 외로이 살아가는 j에게 유일한 삶의 끈이였고 정신적 지주였던것이다. 이 정신적지주가 없어지니 불쌍한 그가 그만 삶의 끈을 놓아 버렸단 말인가?      작년 9월, 도서관의 락성식에 참가하였다가 새로 일떠선 멋진 청사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때의 그 희열을 무엇으로 말하랴. 마치 모진 세집살이를 하다가 새 아빠트에 든 그런 기분이였다.      그런데 옥에 티라고 할가 도서관의 이런 선진적이고 우아한 환경임에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함해남을 어쩔수 없었다. 그것은 책과 붓을 들고 서있던 예전의 로신동상이 없는것이다. 원래 낡은 청사는 없어졌지만 그곳의 로신 동상만은 그대로 가져와야 한다고 아니 그것보다 더 크고 멋진것을 새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도서관의 지적인 분위기를 더 한층 높이고 j와같은 독자들도 모여들수 있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우리의 이 세상은 똑똑한 사람이나 정상적인 사람들만 모여사는 곳이 아니다. “아Q”나 “공을기”나 상림 아주머니” 같은 사람 또 J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사는 세상이기도 하다.      도서관은, 도서관의 사서는 자신의 사회적직능과 함께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키워야 하며 부족한 그들도 도서관이라는 이 지식의 바다에서 마음껏 헤염칠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너와 나의 이런 작은 사랑이 모여서 아름다운 세상은 만들어 지는것이다.       로신동상만 세우면 그가 다시 도서관으로 달려 올것같은 생각을 때때로 하군한다. 지금 장애인 열람실도 따로 나왔으니 여기에 높은 인격과 책임감을 겸비한 사서를 안배한다면 그도 도서관에 와서 기쁘게 독서하며 자기의 인생을 즐기것이다.      지난날 참으로 그들을 사랑했던가? 많이 부족했던 어제날을 깊이 반성해본다. "도서관 정문앞에 로신동상을 세웠으면." 이 아이디어가 참신한지 새관장님께 말씀드리려고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리며 나는 진정 높이 웨친다.      로신이여, 돌아 오시라!        
643    시인 - 김영애 댓글:  조회:4474  추천:0  2015-03-14
  출간식 장백조선족자치현민족종교국에서 주최한 김영애 시집《사랑의 색갈》출간식이 일전 장백현정부 5층 상무회의실에서 있었다. 김영애의 시집《사랑의 색갈》은 장백현인민정부의 대폭적인 지지하에 장백현민족종교국과 장백현조선족작가협회에서 자치현 창립 55주년에 올리는 기념도서로서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시집에는 도합 101수의 시가 수록되였다. 시집《사랑의 색갈》주인공 김영애씨는 1974년 장백현에서 출생, 연변제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근 20년간 장백현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에서 조선어편집기자로 열심히 일해왔다. 현재 장백현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조선어부 주임 겸 현조선족작가협회 부주석으로 활약하고있다. 시집《사랑의 색갈》저자 김영애씨 근 20년간 조선말방송사업을 해온 그녀는 사업여가에 소박하면서도 정감이 넘치는 시를 많이 창작해 국내외 여러 간행물에 발표했다. 시집《사랑의 색갈》은 김영애씨가 전에 발표한 시들과 최근년간 창작한 시들을 추려서 묶은것이다. 그의 시를 읽노라면 인간과 자연을 정서적으로 융합시킨 저자의 시적자세가 엿보인다.해와 달, 별, 눈, 비, 바람, 산, 물, 나무, 꽃 등은 누구나 다 볼수 있는 평범한 사물들이지만 저자의 필끝에서는 단순한 자연미에 대한 찬미가 아니라 인생에 대한 사고, 미래에 대한 지향으로 보다 심각하고 철리성있게 부각되고있다. 특히 김영애의 시편들은 부모에 대한 사랑, 남편에 대한 사랑, 자식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광범한 애독자들의 눈길을 끌고있다. 출간식에서 장백현민족종교국 리종률국장은 우선 시집출간에 열렬한 축하를 보내고나서 장백의 조선족작가들이 계속해 더욱 많고 좋은 문학작품들을 창작해 지방경제건설과 우리 민족의 문화사업발전에 기여하기를 바랐다. 출간식에 참가한 여러 부문의 책임자들과 조선족문학애호가들은 시집《사랑의 색갈》에 대해 서로 소감을 나누면서 조선족문학창작사업에 좋은 의견과 요구를 내놓았다. 이날 저자 김영애씨는 사회 각계 조선족인사들의 관심과 아낌없는 사랑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나서 길림신문사 백산기자소와 현조선족중소학교, 현조선족로인협회, 현도서관 등 단위들에 시집을 증정했다. 현인대, 현정협, 현민족종교국, 현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현조선족작가협회의 해당 책임자들과 현내 부분 조선족문학애호가들이 출간식에 참가했다.  /리승국(李承国) 최빈(崔彬) 최창남기자 출처(연변모이자 ) : 評論 - 장백현 김영애 시집《사랑의 색갈》출간식      김영애의 시집이 드디여 고고성을 울리며 세상에 태여났다. 이는 김영애 본인의 영광과 기쁨일뿐만아니라 장백조선족들의 자랑이기도 하다. 김영애의 시집을 내면서 나는 자연 김영애와의 문학적인연을 머리속에 떠올렸다. 20여년전 김영애는 우리 학교(장백현조선족실험소학교)에 실습을 왔었다. 그때 나는 그녀의 단편소설을 읽게 되였다. 소설은 퍼그나 재미있고 특색이 있게 씌여졌다. 알고보니 그녀는 그때 벌써 신문에 여러 편의 시와 수필을 발표한 전도유망한 학생이였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김영애의 문학성장과 문학성과를 옆에서 기쁘게 지켜보았다. 20여년간 김영애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보는 시와 수필을 여러 신문과 잡지에 줄기차게 발표했다. 그녀는 10년전에 벌써 연변작가협회에 가입했고 장백현조선족작가협회 부주석으로 되여 과외작가, 시인의 풍채를 보여주었으며 각종 문학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김영애의 시를 살펴보면 그 어떤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자재적이며 생동하고 재치있다. 김영애의 시는 내용이 풍부하고 감칠맛이 있는것은 물론 언어가 풍부하고 참신하며 생동하다.그의 시는 녀성적인 예리한 감각으로 현실생활을 세심하고도 진실하게 반영하였다. 남자들은 직감이 무딘데 비해 녀성들은 직감이 예리하다고 본다. 녀성으로서의 김영애는 이와 같이 녀성의 예리한 직감의 우월성을 살려 시창작에서 주제의 포착, 언어의 풍부성을 잘 살렸다. 앞으로 시창작에 더 힘을 기울여 더 좋은 시작품을 내놓기를 바란다. /장백현조선족작가협회 황영성부주석 출처(연변모이자 ) : 評論 - 김영애 시집《사랑의 색갈》에 부치는 글   
642    시인 - 김춘택 댓글:  조회:4582  추천:0  2015-03-14
      김춘택(金春澤)   1972년 12월 7일 중국 길림성 안도현 영경향 동성촌 출생. 1997년 연변민족문학원 수료. 시 , 등 다수. 동화집 출간. 전 잡지사 편집. 백천문학 주인장, 자유기고인.  
641    시인 - 최강 댓글:  조회:4185  추천:0  2015-03-14
                                           (좌측 최강 시인 )
640    유형문화재 보호하기!!! 댓글:  조회:5767  추천:0  2015-03-14
1. 염제릉(炎帝陵)의 주전(主殿)은 불에 타고, 능묘는 파헤쳐졌으며, 뼈는 태워져서 뿌려짐. 2. 창힐의 능원은 훼손되고, "열사능원"으로 개조됨 3. 산서성의 순제릉(舜帝陵)은 훼손되고, 무덤에는 큰 나팔을 꽂아놓음 4. 절강소흥 회계산의 대우묘(大禹廟)는 훼손됨. 우임금의 조각상은 파괴됨, 머리와 목이 잘림. 5. 세계불교의 최고보물이라고 불리우는, 석가모니가 살아있을 때 친히 개광(開光)한 삼성상중의 하나일 팔세등신상의 얼굴이 훼손됨. 6. 공자의 묘가 파헤쳐져 편평하게 됨. '대성지성선사문선왕'이라는 비석도 부서져 가루가 됨. 묘비도 부서짐. 공묘의 니태소상도 훼손됨, 공자의 76대손 공령이의 분묘도 파헤쳐짐. 7. 화현 오강변의 항우의 패왕묘, 우히묘와 우희묘도 천여년을 내려왔는데, 묘들이 모두 파헤쳐져 폐허가 됨. 문혁후에 패왕묘에 남은 것은 반쯤 땅에 묻힌 석사자뿐임. 8. 곽거병의 곽묘도 재난을 벗아나지 못함. 향촉과 첨통이 부서진 외에 곽거병의 소상도 하루아침에 훼손됨. 9. 이화원의 불향각이 부서지고, 대불이 훼손됨 10. 왕양명의 문묘와 왕문성공사의 두 개의 건축과 왕양명의 소상이 전부 훼손되고 남지 않음. 11. 고성ㄷ태원의 신임 시위원회는 첫째 묘우를 부수어 전시의 190여곳의 묘우고적을 부수었음. 10여개를 남기고 모두 훼손함. 그의 명에 따라 100여곳의 고적이 하루아침에 훼멸됨. 산서성박물관의 관장이 급히 방림사로 가서 겨우 니소인두를 한무더기 구해냄. 12. 의성 장중경의 소상이 훼손됨. 묘정, 석비도 부서짐. 장중경기념관의 전람품은 하나도 남지 않음. 의성사는 이미 존재하지 않음. 13. 하남 남양의 제갈량의 제갈초려(무후사)의 천고인룡, 한소열황제삼고처, 문도무략의 세개의 석방과 인물소상, 명나라 성화연간에 만든 18개의 유리나한이 모두 훼손됨. 전각의 장식물도 모두 부서짐, 여러 목각 목판도 불에 태워짐. 14. 한중 면현의 고정군산 석비는 제갈량이 지주분자라는 것때문에 훼손됨 15. 서성 왕희지의 능묘와 20무에 달하는 금정관이 거의 평지화됨. 남은 우군사앞에 몇개의 천년된 백송만이 남아 있음. 16. 문성공주가 친히 주재한 송찬간포와 문성공주 두 사람의 소상이 각라사에 있었는데, 훼손됨. 17. 합비에서 대대로 보호해오고 매년 제사지내오던 '포청천'묘가 하루아침에 훼손됨 18. 하남 탕음현 중학생이 악비등의 소상, 동상, 진회등 오간당의 철궤상, 역대로 전해내려오던 비각까지 모두 없애버림. 19. 항주혁명청년이 악비묘를 부숨. 악비의 묘도 파헤침. 그리고 악비의 시신을 불태움. 20. 아라텅간더리 초원에 있는 징기스칸의 능원이 부서짐 21. 주원장의 거대한 황릉석비가 쓰러임. 석인, 석마가 폭약으로 파괴됨. 황성도 깨끗하게 철거됨. 22. 해남도의 천애해각에 명나라 때 해서의 묘가 부서짐, 청백리의 유골도 파헤쳐짐. 23. 호북강릉의 명재상 장거정의 묘도 홍위병에게 파헤쳐지고 뼈가 불태워짐. 24. 북경성내의 원숭환의 분묘가 파헤쳐져 평지가 됨. 25. 여평고리에 안장되었던 명나라 말의 명신 하등교의 사당에 있는 불상이 부서짐. 여평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하등교의 묘도 파헤쳐짐. 26. 오승은의 옛집은 강소성 회안현 하하진 타동항에 있었는데, 폐허로 변함. 27. 홍위병이 포송령의 묘를 파헤침. 묘에는 담배대와 머리아에 책하나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음. 시체는 불태움. 28. 1959년에 세워진 오경재기념관이 문혁때 부서짐. 29. 산동 관현중학 홍위병이 천고의개 무훈의 묘를 부수고 유골을 파헤침. 30. 북경 교외의 은제장에 묻힌 동치, 광서 양황제의 궁정대총관 이연영의 묘를 파헤침. 31. 장지동의 묘가 파헤쳐짐. 32. 하남 안양현의 조간왕 주고수의 묘가 파헤쳐짐 33. 흑룡강 흑하현에 있던 장군묘는 '제왕장상'의 묘라는 이유로 파괴됨 34. 송나라때 시인인 임화정(967-1028)의 묘도 파헤쳐짐 35. 청나라 말의 장태염, 서석린, 추근 및 양내무와 소백채의 사건에 관련된 양내무의 묘도 모두 파헤쳐짐. 36. 강유위의 묘도 파헤쳐짐 37. 절강성 봉화현 계구진의 장개석의 옛집, 장개석 생모의 묘도 파헤쳐짐. 38. 남장현의 항일명장 장자충의 장공사, 장씨의관총과 3개의 기념정이 파괴됨 39. 양호성장군도 국민당반동파로 몰려 묘와 묘비가 훼손됨 40. 신강 투루판의 화염산에 있는 천불동의 벽화도 파괴됨. 41. 산서 운성박물관은 원래 관제묘였으므로 부수어버림. 42. 안휘곽저현 문묘, 산동 래양 문묘, 길림시 문묘도 모두 파괴됨 43. 당나라 고승 보선산의 대소 이탑이 모두 훼손됨 44. 전국최대의 도교성지인 노자강경대와 주위의 근 백개의 도관이 훼손됨 45. 송나라때 구양수의 취옹정기는 소동파가 글을 쓴 것인데, 안휘 제현에 있었는데, 파괴되어 버림.  
639    시인 - 박성훈 댓글:  조회:4751  추천:0  2015-03-14
관념의 이미지-박성훈의 시를 논함                                    남철심     추상적인 관념이나 개념들을 감각적인 이미지로 펼쳐주는 것이 현대시의 중요한 특색중의 하나라고 본다. 저러한 시들에서는 추상적인 개념의 라렬로 일변 난해한 것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저러한 것들의 합리적인 규칙들을 장악하기만 하면 그리 까다로운 것도 아니다. 같은 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로 시어를 만든다고 할 때 재래의 시와 현대시의 차이점을 잠간 비교해 보기로 하자. 만일 재리의 시라면 이라든가 의 정도로 씌여질 것이다. 보편적으로 추상적인 단어를 추상적인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일견 재래의 시들을 보면 전혀 추상적인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듯이 보이지만 기실 , , 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많이 쓰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재래의 시들은 전혀 추상적으로 느껴지지 않느가? 이러한 시들에서는 , , 과 같이 극히 보편화에 가까운 쉬운 추상어들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 전체적인 구성과도 관계가 있다고 본다. 다른 한면 현대시들에서는 추상어를 감각적인 이미지로 펼쳐준다. 그런데 그것이 도리여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재래의 시들에서처럼 이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리해할수 있지만 만일 이리고 하면 도무지 리해할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 어째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가? 을 보면 을 수식해주는 이라는 가 구체화되지 않고 있다. 그러니 도리여 그 해석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리해되여 있는 듯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아름다운 추억이냐고 묻는다면 누구도 구체적으로 말할수 없는 것이다. 재래의 시들은 이러한 의문들을 시 전체를 통하여 전부 풀어주는 것이다. 그러니 전혀 난해하지 않고 리해하기도 쉬워지는 것이다. 반면 현대시들에서는 처럼 그 이 구체화 되여있다. 이라는 추상어가 후각적인 것으로 (향기), 시각적 또는 촉각적인 것으로 (붐비다) 되여있다. 이러한 감각기관의 전이가 이직 그러한것에 습관되지 않은 이들에게는 리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단단하고 배기는 온돌방에 누워있는데 습관된 사람이 불시에 폭신폭신한 시몬스 침대에 누워보는 감각이라 하겠다. 폭신폭신하고 편안한 시몬스 침대우에 누웠는데 도리여 허리가 쑤셔나며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현대시를 제대로 감상하고 리해하려면 저러한 훈련과 감각기관의 적응력이 따라서야 하는것이다. 아래에 시 제목이 이상하게 길어진 박성훈의 시 라는 시를 보기로 하자.   아름다운 이름으로 남는다는 것 그만큼 喜恨의 언덕 위에 빨간 그리움으로 서 있는 다는 것   엄마야- 너무 힘들잖아-   향기로 붐비는 기억의 夢圓을 별처럼 바재이며 싱싱하게 엮어온 인내의 꽃다발...    이제 이 계절의 꽃도 질 것이니 아름다운 우리를 지킨다는 것 그것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    엄마야- 시들지 않는 이야기에 피는 노을이 곱구나 박성훈은 두만강시회는 물론 연변시단에서도 흔치않은 관념적 이미지의 시를 쓰는 소수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니 시단에서의 그의 위치를 홀시할수는 없는 것이다. 두만강시회라는 작은 그릅이 지역적인 제한과 문벌적인 차이로 문단에서 홀시당하는 경향이 존재하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사실 중국조선족 시단에서 두만강시회의 회원들을 빼면 30대의 시인들을 정말 몇 사람이나 꼽을수 있는가? 세대적인 단절의 위기를 두만강시회라는 작은 그릅이 지금 이악스레 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두만강시회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기대한다. 말이 잠간 빗나가버렸지만 다시 원문으로 돌아온다. 우의 시를 보면 알수 있듯이 현대시가 리해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원인은 말하고자 하는 관념을 똑바로 밝히지 않고 어떤 암시로 제시해 주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대시는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기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느낌이 해석보다 까다로운데는 어쩔수 없다. 이 시는 문명이라는 간판을 건 현대라는 환경속에서 소외시되고 있는 우리민족 혹은 상실된 인간성의 참 모습을 찾고자하는 노력을 보여준 시이다. 시인은 이러한 관념을 시골의 에 대한 이미지로 그리고 있다. , , , , 과 같은 시어들과 , , 와 같은 시행들이 그러한 관념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또 하나의 례로.   마음에 별을 품고 어둠에 불을 지펴 밝은 파문은 생명으로 둥그러가고...   별이 락엽으로 스치는 몸부림 속에 파란 의문을 띄워 어둠을 건널 다리 하나 놓았으니...  - 시 전문 들이 락엽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것이 이다. 그래서 간신히 초불을 밝혀들고 빛의 를 놓는 것이다. 그러니 그 는 초불이 바람에 가물거리듯이 흔들리는 것이고 초불이 금방 꺼질듯이 당금 무너질지도 모른다. 간신히 오늘을 지탱해 가는 인간삶의 처절함과 그 랭혹함을 보여준 시다. 그것은 하나의 이다. 이러한 는 우리에게 을 갈망하게 한다. 저러한 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정서를 보여준 또 다른 시들로는 , 라고 쓴 라든가 , 라고 쓴 과 같은 시들이 있다. 박성훈의 시들을 보면 , , , 와 같이 시골적인 풍경을 그린 시들이 많고 그의 시에는 또 저러한 농경적인 색채가 짙은 시어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박성훈 시인이 처한 환경이 저러한 속에 제한 되여있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박성훈 시의 특색을 고정시켜줌과 동시에 그의 시를 제한하는 요소로도 되고 있음에는 어쩔수 없다. 널리 세상을 알고 싶고 세월의 깊이를 깊숙히 들여다 보고 싶은 시인에게 있어서 저러한 환경은 하나의 비극에 가까운 것이다. 박성훈의 시를 아무리 보아도 그 사유가 줄곧 한 곬으로만 흐르고 그 사상의 줄기가 줄곧 하나로만 서 있음에는 어쩔수 없다. 환경만 탓하지 말고 많이많이 공부해 둘것을 제의 한다. [출처] 관념의 이미지-박성훈의 시를 논함 |작성자 남철심
638    시인 - 남철심 댓글:  조회:4277  추천:0  2015-03-14
                            (좌측 두번째 남철심 시인) 핸들을 잡은 시인                        남철심       윤청남 시인을 나는 그냥 윤기사라고 불렀던것 같다. 내가 그를 그렇게 부르게 된것은 아마 중국에 있을 때 내가 교통경찰로 근무했고 윤청남 시인이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인것 같다. 윤청남 시인을 처음 만난것이 사업상 관계였고 그때 처음으로 윤기사라고 불렀다. 한번 불러서 버릇된것을 고쳐 부른다는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닌것 같다. 같이 시를 쓰면서 서로 허물없는 사이로 가까이 지내면서 때로는 형이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그러면 더 가깝고 친절해 보일것 같았다. 그런데 좀처럼 형이라고 부를수가 없었다. 역시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지 윤기사라는 부름에 습관되여서 그런것만이 아닌것 같다. 자신보다 십년이나 선배되시는 분을 어느날 불현듯 형이라고 막 부를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기실 윤청남 시인이 나에게 보여준것은 형이 동생에게 베풀어주는 그런것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였다. 내가 보아온 윤청남 시인은 스스로 존경심이 가는 그런 분이였다. 훨칠한 키에 쩍 벌어진 두 어깨. 불깃불깃한 두불엔 항상 사나이 다운 그런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저 눈, 그의 두 눈길은 너무나 연하고 부드럽다. 부드럽다 못해 조금은 쑥스러운 그런 빛을 흘리고 있다. 부드러운 저 한쌍의 눈길을 통해 선하고 선한 시인의 마음이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는것이다. 한번은 윤청남 시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연길에 간적이 있다.  어디까지 왔는지 도중에서 불현듯 차가 멈춰섰다. 그리고 차에서 뛰여내리는 윤청남 시인의 뒤모습이 보였다. 원 일이지? 영문을 모르는 나는 어리둥절해서 차창밖만 내다 보았다. 당풍가라스 너머로 뛰여가는 윤청남 시인의 뒤모습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 앞 멀리서 한채의 소수레가 미친듯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 그런 일이였구나! 뒤따라 나도 차에서 뛰여내렸다.  워낙 놀란 소가 수레를 끈채로 길 한복판으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놀란 소를 막을수 있는 그런 힘이 내게는 없다. 어떡하지? 그런데 어느사이 윤청남 시인이 앞으로 달려오는 소고삐를 잽싸게 잡아쥐고는 날래게 뒤로 낚아채는 것이였다. 그러자 달리던 소가 천천히 멈춰서기 시작했다. 수레가 완전히 멈춰서자 소잔등 너머로 놀란 영감의 꼬부라든 모습이 보였다. 너무 놀라 얼이 나갔는지 수레채우에 멍하니 앉아있을뿐 영감은 감사하다는 말도 못하고 있었다. 정말로 위기일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놀란 소가 마주오는 자동차와 골받이를 하는 날엔 무슨 사고가 날지 상상할수도 없는 일이였다. 윤청남 시인은 그냥 태연했다. 얼핏 들으면 간단한 일 같지만 기실 이 사실은 한 인간의 생명을 구해준 위대한 행위인 것이다. 어느 여름의 늪가에서 내가 윤청남 시인을 일생의 친구로 사귀겠다고 다짐한적이 있다. 그것은 내가 일본에 오기 전해의 여름이였던걸로 생각된다. 친구의 별장에서 술 한잔하고 더위를 몰아내느라고 앞마당에 있는 늪에서 수영을 한적이 있다. 수영이라고 하지만 나라는 인간은 물속에만 들어가면 철저히 바닥까지 가라앉는 놈이다. 물결이 배꼽을 금방 넘어서는 기슭에서 엉기엉기 걸어다니는 것이 나의 수영인것이다. 반대로 윤청남 시인은 물속에만 들어가면 한마리 미꾸라지로 변한다. 어릴 때는 큰 호수에서 반천씩 떠 다녔다고 한다. 그만큼 물재주에는 신심이 있는것이다. 나는 두 다리를 꼬부리고 몰속에 앉아서 모가지만 밖으로 내밀고는 가운데로 자맥질해가는 윤청남 시인을 부러운듯이 바라보기만 했다. 신기하게도 그 깊은 늪 한가운데에 우뚝 서면서 윤청남 시인이 나더러 들어오라고 소리쳤다. 물론 들어갈수야 있지.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게 걱정이여서 그렇지. 나는 질겁해서 밖으로 뛰여나갔다. 그러는 나를 보더니 윤청남 시인이 다시 기슭으로 미끌어 왔다. 그래도 나는 까딱 움직일수가 없었다. 널 위해서라면 난 목숨까지 버릴수 있어. 그때 만일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했더라면 나는 죽어도 믿지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윤청남 시인이 나에게 던져준 이 한마디 말을 나는 그냥 스쳐버릴수가 없었다. 그는 말하면 행동으로 옮기는 성질이다.  이 말은 절대 나를 달래느라고 한 말만은 아닐것이다.  어느 한 순간에 우연히 던진 한 마디 말이지만 나는 그것이 그의 진심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친구를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친구. 그것이 빈 말만이 아니였음을 나는 몇번이고 내 몸으로 경험했다. 내가 일본에 온 뒤 경제난으로 어려운 형편에 있는 우리집 사정을 알고나서 금방 자동차를 판 돈을 그대로 내 부모의 손에 쥐여주던 그 정을 나는 죽어도 잊을수가 없다.  그래서 가난한 내가 일본에서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내 전부의 재산은 친구라고. 내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두만강시회의 친구들과 두만강변에서 작별의 술을 마인적이 있다. 그때 윤청남 시인이 고향을 잊지말라며 술잔에 두만강변의 흙모래를 한줌 부어넣고 나와 함께 나누어 마이던 그 정경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러한 친구들이 있기에 나는 꼭 멋진 모습으로 내고향 연변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지금도 부지런히 달리고 있는것이다. 윤청남 시인은 이렇게 나에게 힘이 되여주기도 했던 것이다. 윤청남 시인의 인간다운 참 모습은 그가 남들에게 베풀어준 사랑의 정에서도 잘 보여진다. 북녘땅에서 살길을 찾아 건너온 한 고아를 자기 집에 데려다 먹여주고 재워주던 사실. 먼 중국의 내지로 팔려가는 북한의 처녀를 목숨을 걸고 빼돌려준 사실… 이것이 바로 인간 윤청남이다. 윤청남 시인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아마 이런 사실들은 잘 모르고 있을것이다. 윤청남 시인은 도처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뒤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인간 윤청남이 이렇하다면 그럼 시인 윤청남은 또 어떻한가. 여기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있다. 어느 봄날. 살구꽃 피는 산기슭으로 한대의 승용차가 느릿느릿 달리고 있다. 우람진 몸매에 얼굴이 불깃불깃한 기사는 운전을 한다기보다는 차창밖으로 스쳐가는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뒤좌석에는 시장어른님이 앉아서 꾸벅꾸벅 좋은 봄꿈을 꾸고 있었다. 어느 더럭바위우에 한그루의 살구꽃이 활짝 피여서 하늘을 가득 덮고 있었다. 사람을 매혹시키는 절경에 취했는지 달리던 자동차가 칙하고 멈춰섰다. 운전석에서 뛰여내린 사나이는 어기영차 산기슭으로 달려가고 뒤에서는 어딜가? 하는 시장어른의 목소리가 따라온다. 산중턱 까지 톱아오른 사나이는 그 자리에 멈춰서서 언제까지고 더럭바위우의 살구꽃과 살구꽃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파아란 하늘을 번갈아 쳐다보기만 한다. 일이 이 정도까지 되자 시장어른도 어쩔수 없다는듯이 차에서 내려 역시 파아란 하늘과 연분홍 살구꽃을 쳐다보며 나름대로의 시흥에 잠겨본다. 다행히도 이분이 바로 시도 쓰고 소설에도 장끼를 보여주던 도문시의 김(이름을 까먹었음)시장님이시였다.  그리고 시장님을 통해 이 사실이 한입두입 전해져 도문시의 아름다운 일화로 남았다. 그래서 나는 윤청남 시인을 발견의 시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의 시적발견은 또 이렇게 얻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시에 대한 그의 추구는 미칠지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의로 가는 시장님을 도중에 버려두고 꽃에 도취되여버릴 지경이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윤청남 시인에게는 딱 한가지 결점이 있다. 뭐냐하면 시는 넘 잘 쓰는데 뛰여쓰기와 철자가 엉망인것이다. 그가 쓴 초고를 보려면 여간 힘든것이 아니다. 한바탕 뜯어보고 맞춰보아야 뭐가뭔지 알린다. 그래서 원고를 보낼때면 옆에 있는 처녀애들이 제가 수개해 드릴가요? 하면 그 나오는 소리가 또 걸작이다. 이것이 시인 윤청남의 멋이다. 최근엔 윤청남 시인이 무슨무슨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바다건너 일본땅에도 연신 날아들어온다. 이러한 사실을 접할 때마다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올것이 왔을 뿐이다. 조금 시간이 늦어서 왔을 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연신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소리도 없는 박수이지만 그것이 공중넘어 윤청남 시인에게 제대로 전해졌으리라고 믿는다. 윤형,  아니 윤기사, 축하합니다! 2003년6월25일  교도 사와라기 학생료에서 [출처] 핸들을 잡은 시인 |작성자 남철심    
637    시인 - 박운호 댓글:  조회:4912  추천:0  2015-03-14
조선족문단에 가로세로 시 탄생돼 화제 기자: [ 최화 ] [ 길림신문 ] [ 2012-11-27 11:09:48 ]  ㅡ시인 박운호 제2시집 《환혼몽기》출간 박운호시인 조선족시인 박운호가 조선족문단에 가로세로 시를 탄생시켜 화제가 되고있다. 가로세로 보는 시란 말 그대로 가로로, 세로로 읽어도 글자 하나 틀리지 않는 똑같은 한수의 시를 가리킨다. 목전 가로세로 시를 창작하고있는 조선족시인으로는 박운호시인이 유일하다. 1955년생인 박운호시인은 길림성 영길사범학교 중문과 졸업, 길림사범학원 력사학부를 졸업한 후 영길현조선족제1중학교에서 교원으로 있다가 현재 광동성 광주시에 거주하며 시를 창작하고있다. 12년전 첫번째 시집 출판에 이어 두번째 시집인《환혼몽기》는 저자가 현실속에서 우리 문화의 맥을 탐색하여 심성수련을 하면서 자기나름대로의 감오를 시줄에 담아 묶은 시집이다. 특히 제2시집에는 우리가 평소 접하는 시외 가로세로 시가 16편이 실려있고 또 이 16편 가로세로 시를 재래식 시형식으로 변용한 시도 함께 실려있다. 저자가 가로세로 시를 창작하게 된 계기는 70년대말쯤 편지에 자신의 마음을 그려보면서 처음으로 가로세로 시를 중문으로 쓴것이였고 그후 한 시인과의 담론에서 아름다운 우리 글로도 가로세로 시를 쓸수 없겠나싶어서 시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하여 지금까지 13년, 가로세로 시를 창작하기 위해선 가장 중요한것이 언어의 련금술사가 되여야 하는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가로세로 시 창작과정에 시론서적, 철학서적뿐아니라 우리 말 대사전을 몇번이고 훑어보며 피타는 노력과 거듭되는 련마를 거치는 과정은 필연이다. 쓰다가 보면 글자 하나가 다름에 따라 내용이 엉뚱하게 바뀌게 되고 구상했던 내용과 다를수 있고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이미지들이 꼬리를 물고 나오는수도 있다. 저자는《시라는것은 썼다고 인차 급급히 발표할것이 아니고 메주를 띄우듯 푹 띄워야 제맛이 난다》며 지금까지 가로세로 시를 100여편도 훨씬 넘게 창작했지만 이 시집에는 16편만 골라 넣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옛날로 돌아가서 천천히 읽는 시의 참모습을 살려내는데 일조했으면 하는》바람을 표했다. 저명한 시인 남영전은 박운호 제2시집《환혼몽기》머리말에서《우리 문단에 화제거리 하나 생겨 경사라 해야 할것이다》며《가로세로 보는 이 특별한 시들은 네모반듯한 크고작은 우주공간, 때때로 고풍스러운 분위기속에서 인생을 담론하고 인생추구를 찾는다. 시는 틀의 형식이 짜여져 띄여쓰지 못하기에 혹간 토와 단어가 헛갈리는 경우가 있을수 있으나 시행의 뜻을 감안하는데 얼마간 사색이 필요한 공간이 있으니 어찌 보면 이것 또한 특별한 시를 읽는 멋이 아닌가 생각해본다》고 평했다. 박운호시인은《우리 문화의 맥을 탐색하여 심성수련을 하면서 시를 쓰는것이 현시대 조선족시인들의 천직이 아니겠냐》며 평생을 시에 사명을 건 이상 금후에도 계속 시창작에 전념할것이라고 표했다. 아래 박운호시인의 가로세로 시 한수를 감상해보자. 만 가                    ㅡ시인과 성녀의 대화 인 생 은 가 고 오 고 생 활 은 고 독 만 이 은 은 히 오 다 담 는 가 고 오 는 해 식 고 고 독 다 해 뜸 뜸 해 오 만 담 식 뜸 들 인 고 이 는 고 해 인 가   ㅁ[길림신문]가로세로시, 조선족문단서 화제작으로 주목 가로세로시, 조선족문단서 화제작으로 주목 기자: [ 최화,신정자 ]  [ 길림신문 ] [ 2012-12-17 15:07:28 ]  ㅡ《가로세로시》창작인 박운호 시 화제로 진지한 토론의 장 조선족문단에 새로운 시 수법을 선보여 파장을 불러일으킨 박운호시인의 《가로세로시》를 화제로 15일 장춘에서 진지하고도 열렬한 토론의 장이 펼쳐졌다. 시인의 탐구적인 문학열성에 탄복 석달전 광주에 살고있는 박운호시인이 12년만에 두번째시집인《환혼몽기》를 출간, 이 시집에는 재래식 시뿐아니라 가로로, 세로로 읽어도 글자 하나 틀리지 않는 똑같은 시 16편이 실려 일시에 우리 문단의 큰 화제거리로 떠올랐다. 이에 현 조선족문단에서 유일하게《가로세로시》를 창작하는 박운호시인의 시세계를 조명하고저 장백산잡지사, 도라지잡지사, 북경민족출판사 주최로 《박운호 환혼몽기 출판 및 세미나》가 펼쳐졌다. 이번 세미나에는 동북3성, 북경, 광주 등지의 문인, 학자, 언론인 등 80여명이 모여 진지하고도 열렬한 토론을 벌였다. 저명한 시인 남영전이 개회사를 하고 중앙민족대학교 오상순교수, 연변작가협회 우광훈주임, 북경민족출판사 박문봉 조문판총편집, 도라지잡지사 김홍란주필, 길림신문사 한정일부총편집, 송화강잡지 구용기주필이 축사를 했다. 발언자들은 시발전에서 새로운 돌파를 가져오기 위해 《12년동안 피를 말린》박운호시인의 탐구적인 문학열성과 시인으로서의 사명감에 경의, 탄복과 찬사를 보냈다. 동시에 우리 시단에 신선함을 선물한 그의《가로세로시》는《우리 문단의 괴사(怪事), 기사(奇事)그리고 경사(庆事)》라며 《우리 말과 글의 아름다움을 증명》하는데서 갖는 의의 등을 제시하며 그의 시집 출간에 진심어린 축하를 보냈다. 《가로세로시》 두고 진솔하고도 다양한 평론 진행 축사에 이어 중앙민족대학 오상순교수의 사회로 문학평론가 최삼룡이《한 도시남자의 자화상》, 길림대학 윤윤진교수가《청운의 꿈과 백의 혼의 그리움의 시화》, 북경제2외국어대학 김영옥교수가《시행으로 그린 삶의 자화상》, 문학평론가 김룡운이《우리 문단의 괴사, 기사, 경사》, 시인 강효삼이《시의 등불을 켜들고 령혼의 고향을 찾아 고행하는 시인》, 도라지잡지사 전경업사장이《고행의 로변풍경과 진아의 회귀》를 제목으로 론평을 하며 각자 주장을 펼쳤다. 론평에서 이들은《재치있고 독창적이고 해학적이다》,《청운의 꿈을 추구하면서 시정이 전개, 집요한 추구로 볼 때 그는 인생의 성공자다》, 《우리의 훈민정음을 가지고 립체적인 마방을 고안해냈다는것은 실로 장거라고 할만하다. 오래간만에 우리 시단에 괴상하고도 신기한 선물을 안겨준 이 시집은 우리 시단의 경사이다》, 《이 가로세로시는 우리가 우주와 자연에 대한 재인식에서 그 어느 면의 신비로운 형상을 알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지 않을가》, 《가로세로시의 참신한 형식에 동양철리까지 잘 담아냈다》등 우점을 주장했다. 한편 가로세로시를 두고 《형식에 대한 추구때문에 시상을 제대로 담지 못할 우려》, 《자칫 언어의 장난》, 《읽기에 어려움》 등 반론도 나왔고 언어사용에서의 산문화경향, 언어적면의 진일보 승화 등도 건의하는 등 허심탄회한 토론의 분위기를 보였다. 우리 글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볼수 있는 시도 이어 연변문학예술연구소 리임원소장의 사회하에 진행된 자유토론에서 김수영, 리만석, 소설가 리혜선, 흑룡강조선어방송국 리홍규부국장, 교원 서정순, 청년작가 조광명, 한영남 등은 박운호 시의 특점과 시인으로서의 인격매력, 가족간 사랑에 대해서도 담론했다. 참석자들은 《가로세로시를 두고 찬반의 론조가 있다 하더라도 문단에서 공적이라 할수 있다》며 우리 글이 가로세로 되는 시로도 볼수 있는 아름다운 글임을 느끼게 되였다며 금후 가로세로시 탐구에서 더 좋은 력작이 나오기를 기대했다. 박운호시인 시인 박운호는 참석자들의 발언에 감사를 표하며 앞으로도《가로세로시란 정형미학의 새로운 길에서 타협과 안주가 아닌 글, 자아갱신을 하면서 분발하는 자아성찰의 글을 계속 써보겠다》며 답사를 했다. 리여천사장은 총화발언에서《많은 탐구와 노력이 깃든 박운호시인의 가로세로시에 박수를 보낸다》며《이번 세미나는 우리 문단을 활성화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했다. 한편 이날 행사에서는 박운호 시작품 랑송 및 이번 세미나에 지지와 성원을 아끼지 않은 광동중강의약유한회사 송동범리사장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장백산잡지사 리여천사장 중앙민족대학 오상순교수 문학평론가 최삼룡 길림대학교 윤윤진교수 북경제2외국어대학 김영옥교수 문학평론가 김룡운 시인 강효삼 도라지잡지사 전경업사장 =========================================== ㅁㅁㅁ [박운호시좌담회2]가로세로시ㅡ우주를 재인식하게 되는 계기 기자: [ 최화 ] [ 길림신문 ] [ 2012-12-17 15:22:18 ]  ㅡ《박운호 환혼몽기 출판 및 세미나》서 저명한 시인 남영전 인사말 저명한 시인 남영전 바깥은 올해따라 특수한 폭설에 추운 날씨지만 여러분이 모인 이곳만은 유난히 따뜻하고 성스러운 문학의 장입니다. 우선 이 성스러운 장이 있게 됨은 박운호선생의 시집《환호몽기》가 출판이되였기때문입니다. 이 시집의 출판을 위해 로고가 많으신 북경민족출판사 조문판 총편집 박문봉선생께 감사드립니다. 이 모임을 위하여 광주, 북경, 료녕, 흑룡강, 길림, 연길에서 장춘을 찾아준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시간이 촉박했고 또한 다망하지만 이번 모임을 위하여 정성들여 론문을 준비해주신 학자, 평론가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비록 론문은 준비하지 않았지만 이번 모임에서 좋은 조언이 있으실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모임에 지지와 성원을 아끼지 않은 광동중강의약유한회사 리사장 송동범선생님과 리춘총경리님께 감사드립니다. 같은 시인이고 친구로서 박운호선생의 시집《환혼몽기》를 읽으면서 시인이 거둔 성과에 기뻐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박운호시인의 창작정신은 우리 문단의 좋은 귀감이고 우리 문단에 주는 계시가 큽니다. 박운호시인에 대한 인상과 그의 작품세계를 제나름대로 간략하게 이야기한다면 첫째, 박운호선생은 시창작의 새로운 돌파를 위해 12년동안 피를 말린 시인입니다. 당나라 말기 시인 두순학(杜荀鹤846-904)은 시창작의 어려움을 두고 이런 시구를 지었습니다.《사부문장에 능한자가 희소하고 어려운것중에 어려운것은 시보다 어려운것이 없노라》(辞赋文章能者稀,难中难者莫过诗). 문학의 상아탑 혹은 문학의 정수라고도 일컫는 시, 정말 좋은 시를 창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2000년 1월, 처녀작 시집을 출판한 박운호시인은 시 창작의 새로운 돌파를 위하여 12년동안 특수한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이 12년동안 그는 많은 책을 읽고 시작법을 연구하면서 150수가 넘는 자유시를 썼지만 서둘러 발표하지 않고 줄곧 묵이고 삭이고 거르는 작업을 반복하였습니다.그의 말을 빈다면《메주를 띄우듯이 푹 띄워 된장냄새가 제맛이 나도록》련마작업을 끈질기게 해왔습니다. 들떠있는 세상, 코앞의 리익에만 급급한 세상에서 이렇듯 차분한 심태로 시를 대한다는것은 하나의 경지가 아닐수 없습니다. 《환혼몽기》에 실린 85수의 자유시는 150수의 시중에서 고르고 깎고 다듬은 작품들입니다. 이 12년동안 그가 새로운 돌파를 위해 피를 말렸다는것은 절대 과언이 아닙니다. 둘째, 박운호선생은 전통문화 가치관에 모를 박고 자신의 령혼과 사회와 대화를 하는 시인입니다. 주지하는바 현실의 엄중성은 전통문화의 소실입니다. 거듭되는 운동으로 전통문화는 산산쪼각이 났고 지금은 땅에 나뒹굴고있습니다. 인간을 인간이라 함은 인간은 지성을 지녔고 도덕이 있기때문입니다. 과학자 흡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인간이 리성을 잃는다면 인간은 야수중에서도 제일 악렬한 야수》라고. 리성과 도덕은 전통문화에 대한 신앙과 전통문화를 행동지침으로 하는데서 오는것입니다. 중국전통문화의 핵심은 유교, 도교, 불교인것입니다. 중국이 고대 4개 문명국중에 유일하게 지금까지 남아있을수 있었던 힘은 곧 유교, 도교, 불교의 전통문화가 있었기때문이라고 외국의 학자들은 입을 모으고있습니다. 박운호시인은 전통문화의 가치를 알고있기때문에, 동양철학 경전문화의 가치를 알고있기때문에 동양철학 경전에 깊이 파고들었고 그로부터 화해와 공존의 철학사상이 시작품의 령혼으로 되고있습니다. 한 시인이 자각적으로 전통무노하로 자신을 수련하고 시의 경지를 승화시킨다는것은 준비있는 시인, 일정한 경지에 도달한 시인이라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시인의 이러한 정신수련을 저는 높이 평가하고싶습니다. 셋째, 박운호선생은 자신만이 가는 독특한 길을 개척하는 고행시인입니다. 시는 구조의 예술이고 언어의 예술이며 이미지의 예술입니다.박운호선생은 고금중외의 작시법을 연구하면서 자신에 알맞는 시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모진 애를 써왔습니다. 그의 67수의 자유시와 18수의 시조는 구조와 언어의 조화로 하나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추구하는 공력이 력력합니다. 특히 가로세로 보는 시는 박운호선생의 시작법탐구에서 성공한 실험작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실험작의 성공은 우리 말과 글의 아름다움을 증명하는데 그 의의가 있고 정형미학의 탐구와 우리 글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탐구하는데 그 창을 열어놓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읽기가 다소 난해하다 하여 글장난이나 문자유희가 아닌가 하고 오해할수도 있지만 좀 꼼꼼히 음미를 하면 하나의 형상과 이미지가 안겨옵니다. 이것은 재래시와 마찬가지로 경지가 있는 시란것을 말해줍니다. 박운호선생이 가로세로 보는 시를 창작할수 있었던것은 30년전 그가 한자로 가로세로 보는 시를 만든 경력이 있었고 지난 90년대말 한국의 시인들과 가로세로 보는 시의 가능성을 론의할 때 마음을 굳혀 12년간의 노력끝에 성공을 이룩한것입니다. 지금도 한국의 어느 한 시동인회는 가로세로 시를 위해 각고를 저버리지 않는것 같습니다. 앞으로 우리 말 문화권내에서 가로세로 보는 시에 대한 탐구는 하나의 풍경선이 되지 않을가 하는 기대를 해보는것도 헛일이 아닐것 같습니다. 저의 예감이라면 이 가로세로시의 가능성은 우리가 우주와 자연에 대한 재인식에서 그 어느 면의 신비로운 형상을 알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쪼록 12년의 끈질긴 노력으로 박운호선생은 화제거리인 시집《환혼몽기》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의 이 모임도 가지게 되였습니다. 박운호선생은 자신의 창작을 이야기할 때 늘 부인의 리해와 지지가 있어 힘이 되였다고 합니다. 그의 말은 우리들로 하여금 운남의 지방 미식인 다리 건넌 도시락(过桥米线)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옛적 한 선비가 다리 건너 있는 서당에서 매일 책을 읽고있는데 점심때면 부인이 따뜻한 점심밥을 선비의 책상머리에 가져다 놓았지만 이 선비는 책 읽는데만 정신을 팔다보니 늘 식은 밥을 먹었다고 합니다. 부인이 하도 안타까와 생각끝에 닭 고은 물로 도시락을 만들었더니 닭기름이 도시락우에 떠있어 도시락이 오래동안 식지 않아 이 선비는 그때부터 따뜻하고 맛있는 점심을 먹을수 있었다고 합니다. 선비의 부인이 만든 도시락이 다리를 건너왔다고 해서 다리 건넌 도시락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박운호선생의 부인 리화선생은 남편의 시창작에 물심량면으로 후원군이 되였습니다. 박운호선생의 성공에는 리화선생의 공로가 절반입니다. 리화선생 또한 광주에서 성공한 기업인입니다. 한쌍의 부부가 이렇듯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었다는것은 우리 민족의 하나의 미담이 아닐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말하면 또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이 있습니다. 박운호선생의 친척들은 거의다 기업을 하는 분들입니다. 집안에 우리 민족의 맥을 탐색하여 심성수련을 하면서 열심히 시를 쓰는 시인이 있는것으로 하여 그들은 영광과 자호감을 가지고있습니다. 그래서 박운호선생에 대한 정신적고무가 큽니다. 이번에 이러한 모임이 있다는것을 알고 박운호선생의 처제부부인 송동범선생과 리춘선생이 기뻐하면서 전적으로 경제후원을 하였을뿐만아니라 그 바삐 도는 기업활동중에 만사를 물리치고 장춘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박운호선생의 장인어르신이 되는 리만석선생님도 기쁨을 금치 못하시고 이 자리를 같이하셨습니다. 시간상 관계로 저의 인사말은 이쯤에서 끝을 내고 오늘 이 모임에 여러분들의 진지하고도 열렬한 토론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ㅁㅁ [박운호시좌담회3]시로 우리 글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기자: [ 최화 ][ 길림신문 ]  [ 2012-12-17 15:33:34 ]  ㅡ화제의《가로세로시》를 창작한 박운호시인을 만나 가로세로시 창작인 박운호시인 《가로세로시 창작으로 우리 글이 아름다운 글이라는것만 증명할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조선족시인 박운호가 조선족문단에 가로세로시를 내놓아 시야비야 화제가 되고있는 가운데 주인공은 이같이 창작의도를 밝히고있다. 15일, 장춘에서 열린 《박운호 시집 〈환혼몽기〉 출간 및 세미나》에서 조선족문단의 작가와 학자들은 박운호의 가로세로시를 주요 화제로 론의했다. 박운호시인은《60을 바라보지만 오늘 이 시각 비로소 문학소년이 된듯한 기분》이라며 부족한 자신의 글을 여러 면으로 연구하고 귀중한 조언을 준 문학인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러면서《가로세로시에서 소통의 단절을 앞세우는듯한 난해하고 모호한 시어들이 있다면 앞으로 꼭 류의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고 표했다. 《시에 미친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 그는 자신도《덜미에 잡힌듯 늘쌍 시에 붙들려있는것 같다》고 한다. 1955년생인 박운호시인은 길림성 영길사범학교 중문과, 길림사범학원 력사학부를 졸업한 후 영길현조선족제1중학교에서 당지부 부서기 사업을 하다가 1991년 광주에서 《하해》하고 지금까지 광주시에 거주하며 시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환혼몽기》는 12년전 첫번째 시집 출판에 이어 저자가 두번째로 내놓은 시집이다. 특히 제2시집에는 재래식시외 가로세로시 16편이 실려있고 또 이 16편 가로세로시를 재래식시 형식으로 변용한 시도 함께 실려있다. 저자가 가로세로시를 창작하게 된 계기는 《70년대말쯤 편지에 자신의 마음을 그려보면서 처음으로 가로세로시를 중문으로 쓴것》이였고 그후 한 시인과의 담론에서 《아름다운 우리 글로도 가로세로시를 쓸수 없겠나싶어서 시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하여 《지금까지 13년, 가로세로시를 창작하기 위해선 가장 중요한것이 언어의 련금술사가 되여야 하는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박운호가 시창작 특히는 가로세로시를 창작한 기본은《유구한 우리 문화의 탄탄한 맥박과 우리 문학의 시적 완미화를 념두에 둔》것이다. 앞으로도《우리 문화의 맥을 탐색하여 심성수련하면서 스스로를 설득하고 자신의 령혼을 부각시켜 다른 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가겠다》는 박운호시인의 타산이다. 범 부 ㅡ 시인과 숙녀의 대화 모 도 감 지 하 오 다 도 무 지 세 상 만 물 감 지 가 한 없 거 든 지 세 한 삶 이 란 거 하 상 없 이 웬 무 요 오 만 거 란 무 해 서 다 물 든 거 요 서 로 천 여 ㅡ시인과 천녀의 대화 결 국 가 도 길 손 일 수 밖 에 없 길 바 래 리 국 화 는 항 상 이 상 국 에 피 고 지 니 일 당 가 는 길 에 한 가 을 이 어 소 나 기 다 내 려 도 항 에 한 물 찬 비 가 이 드 거 니 때 리 고 길 상 한 물 놀 빛 물 든 그 이 선 가 가 다 네 손 이 가 찬 빛 속 에 한 대 로 막 네 네 갈 길 일 상 을 비 물 에 절 인 로 고 다 한 비 길 이 수 국 이 가 든 한 인 고 만 다 른 길 또 길 면 밖 에 어 이 그 대 로 만 산 한 꽃 비 올 손 가 에 피 소 드 이 로 고 다 한 나 비 긋 다 살 고 없 고 나 거 선 막 다 른 꽃 비 그 치 고 펴 야 길 지 기 니 가 네 한 길 비 긋 치 네 비 갈 길 바 니 다 때 가 네 비 또 올 다 고 비 길 길 이 래 일 내 리 다 갈 길 길 손 살 펴 갈 길 머 나 리 당 려 고 네 길 이 면 가 고 야 길 이 나 네 * 저자는 가로세로 보는 시를 통하여 자신의 독특한 풍격을 보여주고있는데 시의 특징으로 말미암아 이 부분에서는 조선말규범에 부합되지 않는 부분을 그대로 두었음. 이중 《천여》는 가로, 세로뿐아니라 대각선으로도 시가 된다고 저자는 밝혔다.                                                       /사진 신정자기자 ---------------  
636    시인 - 김기덕 댓글:  조회:4719  추천:0  2015-03-14
김기덕 시인    2011년06월23일 09시21분   김기덕(Kim Gi Deuk) 시인(poet) △코스모스 시로 중국시단에 데뷔(1981).《문학세계》등단(2001)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길림시작가협회, 청도시연해조선족문인협회 회원 △《문학세계》문학상 금상(시), 중국조선족청마문학상 우수상(시) 수상 △시집『천년이 가도 잠들지 않는 파도』         :: 김기덕1 ( HomePage ) 1950년 2월 21일 출생 1986년~1993년 길림성교하시교육청연구원 1993년~1997년 청도시한국전자기업총무과장 1998년~2000년 청도한국 무역회사경리 1982년에 처녀작 코스모스를 발표한후 지금까지 잡지와 신문에 200여수 작품을 발표 2001년 월간 ≪문학세계≫ 시부문 신인상 당선 중국 작가협회 연변뷴회회원  미주해외문인협회회원  세계문인협회 청도 지회장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도서출판 천우 2002   1월의 밤 1월의 밤  한 해의 처마 밑에  나는 나의 가슴속을  몽땅 밖에 걸어 놓고 조언을  기대하고 싶었습니다  오가는 길손들의 시선을 모아  별빛 밝은 긴긴 이랑을 짓고  천하의 꽃나무들이  열심히 꿈 밭을 가꾸는  1월의 밤을 새기며  두 눈이 멀도록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제일 힘든 강추위가 좋았습니다  그 속에서 진위를 가려내고 싶었고  영하의 강한 의지를 연마하는  1월의 사나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2006년 1월 7일 토요일   2월의 초가집 봄 빛이 그림 그리는 광야에  짚으로 이영을 인 초가집 한 채  문은 바람이 다 뜯어 가버리고  비 오는 날 천정에서 슬픔이 샌다  일년 사계절 펄럭이는 바람의 집  이별의 빗물이 아직 젖어 있는 땅  누군가 마른 들풀을 깔고 한숨 쉬었던  벼 짚 베개 이야기 끝나지 않았다  부엌은 있어도 솥은 없고  구들에는 들새들이 울었던 흔적과  사이다 기억을 한방 널어 놓은  불쌍한 맨발 자욱이 눈동자로 보인다  2006년 1월 26일 목요일   8월의 비 맞는 포옹 한가한 기분이다  오랫동안 기다린 밤  제목은 태산이고  내용은 들과 바다다  머리를 숙이는 논과 밭의  탐스럽게 노오란 정성의 인사  가을의 앞으로 안내하는  향기로운 이미지  언덕에 심은 욕심은 커가고  어른들의 어께는 무거워지고  창가에 성숙의 프로필이 차 넘치는  님과 나 사이에  72도가 흐른다  8월의 고향에 내리는 비  하늘과 땅이 서로 주고 받는  땀 섞인 아름다운 대화 같다  시골의 빨간 돈지갑에  8월의 비가 내린다  2005년 8월 26일 금요일   가을 단추를 열고 가을 단추를 열고  동그란 가을 빗 방울이  기타 음악를 울리며 내린다  목이 마른 메밀 밭에  흰 꽃들이 하늘을 읽는 소리  꿀맛처럼 향긋하고  마음의 단추를 열고 보여주는  가을의 젖가슴  와- 좋다! 그저 좋다!  9월의 꽃 바구니에 생화가 웃는  난도 가을의 단추를 좋아했나 봐  남자의 가슴에  10월이 손 흔든다  참말로 좋아!  말  로  좋  아  2005년 8월 25일 오전 10시 3분     가을 밤의 그리움 얼마나 뜨거운 것 일가  얼마나 보고 싶은 눈동자일가  피 같은 이슬이 맺힌  가을 밤 하늘  밤이 다 갈수록 헬 수 없는  별 총총 그리움 총총  저리도 크고 끝 없는  하늘 편지지에 채우고도  모자랄 그리움의 밤 사연  별마다 글이 되고  그리움의 눈동자가 되여  밤이 다 가도록 못다 쓴 사랑  가을 밤 하늘에도  그리운 밭이 있다  밭에서 기다리는 작은 눈물  하늘을 울리네  내 가슴을 울리네  2005년 8월 25일 목요일   가을 비를 맞으며 가을 비를 맞으며                        김 기 덕  구질구질 가을비가 내리는데  어께를 적시며 섰는  저녁 그림자 하나  진흙이 되여 밤에도 섰습니다  가을 잎과 동무하여  이 세상에 엎드려 젖은 시간과  속 쓰림을 나누는 밤  어디선가 마구 토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지금 처마밑에 선 하나 뜯으며  울고싶은 나의 마음  차라리 누구도 모르게  모든것을 길가에 버려지고 싶은 나  이젠 그것마저 버릴자리가 없는 밤  밤 깊도록 나는 꽁지없는 사연과  진흙을 뭉게듯이 싸우고 있습니다       가을은 그저 좋다 가을은 그저 좋다                김 기 덕  꿈같이 사랑하는 가을을  나는 죽도록 좋아했다  죽어서라도  좋아하는 마음은  누구도 주지않을 것 같다  산새들의 즐거움이  황철나무에서 노랗게 익어가고  황금파도 알찬 열매는  설레이는 감격이 펼쳐진 것 같다  눈부시게 다가선 가을을 생각하면  참으로 좋았다  그리워할수록 목메이게 좋을뿐이다  향기로운 가을 포도에 비낀  좋아하는 나의 모습  그래서 가을 하늘은  가슴처럼 높이 부푸는 가부다     가을의 밥 가을의 밥  무더운 매미의 더운 입김이  뜨겁게 말라붙은 하늘 창가  노오란 가을 빛이 말라 있다  시골에서 올라온 수줍은 연지 볼에  장난 심한 과일 나무 가지인가  8월의 고환이 추-욱 드리워지고  가까히 훔쳐보던 푸른 하늘  발 뒷꿈치를 들고 물러선다  사과, 배, 감, 석류…  깊어지는 배꼽마다  입추의 립스틱 유난히 빨갛고  맑은 길을 쉼 없이 재촉하는  냇물 속에 금빛, 은빛이 반짝거린다  향긋한 체취로 계곡을 가득 채운  풍요로운 가을의 밥 그릇  순이야, 분이야, 여기 와-봐  가을 까치 밥 그릇에  살찐 정자 난자 까만 햇쌀이 되여 있다  2005년 8월 22일 월요일     가자고 하는데 가자고 하는데  하늘이 나더러 가자고 하는데  구름이 나더러 가자고 하는데  강물도 쉼없이 가자고 하는데  바람도 나더러 가자고 하는데  난 가기 싫다 왠지 모르겠다  끝이 없다면 가고 싶은데  끝이 있길래 가기 싫어진다  꽃들도 가고 나무도 가고  해도 가고 달도 가고  다 가고 있는데  난 가기 싫어 서 있는데  누군가 꼭 가야 한다며 나를 민다  뼈 밖에 남지 않았는데  뼈를민다  2005년 9월 20일 화요일     강물이 되어 간다 꽁꽁 얼어버린 돌다리 아래  강물이 되어 뛰어 가는 추억이 있다  긴 긴 겨울 밤 성주 풀이처럼  15년 전 세상을 떠나가신  아버지의 73년 뼈와 넋이  끝없는 강물의 흐름에 맡긴  30년 간절한 독백  경북 영일 앞바다에  달이 두둥실 떠오르면  오매불망 동해의 밝은 모습인가  보름달 같은 둥근 축복이 보인다  주절주절 웃음과 눈물의 속도로  언덕에 앉아 눈 앞을 가리운 고국을 그리며  달 같은 표정으로 강이 되고 싶어서  아버지께서는 정월 15일 날 아침  얼음 아래로 출발을 하시였다  2006년 1월 26일 목요일    
635    시인 - 리태학 댓글:  조회:5354  추천:0  2015-03-14
거실에 정원 가꾸기     2015년01월20일           리태학   어느날 “해란강닷컴”의 기자가 우리집을 방문하고 내가 7, 8년간 공을 들여 만들어 놓은 실내정원을 보자 사진을 찍어 홈페이지에 올리고 여러사람들에게 소개하겠다고 하였다.    지금 우리들 대부분의 주거환경이 아파트여서 집집마다 뜰이나 정원을 갖추기 어렵고 또한 겨울철에 푸른 나무가 자라고 풀과 잔디가 자라는 미니정원을 집안에 들여놓으면 가습기가 필요없이 실내습도 잘 조절하고 유지할수 있어 여러가지로 좋겠다는 말이다.      퇴직하고 나서 소일거리로 손을 보아온것이 이렇게 여러분들의 가정에 좋은 효과를 가져올수도 있다고 하니 나도 기쁘다. 하여 나의 경험을 몇글자적어드리니 관심있는 분들이 실내정원을 가꾸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거실에 정원을 가꾸는데 관건은 우선 운치있고 가뭄에 잘 견디고 내수성이강한 수종을 선택하는것이다.  화초시장에 가면 가뭄대처능력이 뛰여난 나무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호주송이 으뜸이다. 집을 비워두고 달포 남짓 외출하였다고 돌아와도 그냥푸르게 자라난다.  다음은 물을 잘 먹고 항상 푸르싱싱한 용나무가 있는데 값도 저럼할뿐만아니라 수관(树冠)을 마음대로 굽힐수 있어 실내정원가꾸기의 훌륭한 소재가 된다.       물론 등이 구부정하고 자람새가 멋진 소나무도 있지만 그런 소나무는 수십년의 세월을 대가로 완성되는것으로 값도 만만치 않아 선뜻 들여놓기 쉽지않을것이다.  나무를 선택할때 수관이 그냥 우쪽으로 뻗은것보다는 옆으로 형태를 갖추면서 기이한 모양을 한것을 고르는것이 좋다. 수관이 마음에 안 들면 나무에 아접시키고 철사로 자람새를 통제하여 상상속의 멋진 나무로 다시 태여나게 할수 있다.  이런 수종으로는 적목(赤木)이 좋다. 줄기의 생김새에 맞는 적목을 적당히가공하면 년륜이 쌓인 고목줄기로 변신시킬수 있다. 나무는 세월을 속이지않지만 사람은 나무의 나이를 조절하는 예술적능력을 가지고 있기때문이다.  멋진 나무를 얻은 다음에는 그 주변을 꾸밀 돌이 필요하다. 연길시내의 화초시장이나 난전들을 살펴보면 문양이 독특하고 자연미가 뛰어날뿐만 아니라 가격도 저렴하여 거실에 실내정원을 가꾸는데 안성맞춤한 돌들을 쉽게 찾을수 있다.  이런 돌들로 자기 취미에 맞게 봉우리를 만들거나 벼랑을 만들어 산천경개를 거실에 들여 놓을수 있다. 질감이 강한 바위산 두 세개를 만들고 보탑이나 정자 등 소품을 올려 놓을 위치를 정한다.      연길화초시장에는 백산에서 들여온 돌들이 많은데 표면에 모공이 많아서색갈을 잘 받아들이고 접착제도 잘 흡수하는 특점이 있다. 이렇게 완성된바위산은 천연적질감을 가지고 있어 마치도 대자연의 명산대천을 거실에그대로 옮겨놓은듯한 정경을 연출할수 있다.  실내정원가꾸기에 있어서 나무와 바위산이 자리를 잡고 형태를 갖춘 다음에는 그 구석구석을 차지할 소품을 구하는것이 또 하나의 비결이다. 중국고전풍경의 정자와 루각, 불교사찰, 서장의 라마탑, 유럽의 성채, 풍차 그리고 우리 민족의 옛풍경을 구현하는 삼간초가나 방아간 등 다양한데 전반적인 구조에 맞게 소품을 잘 선택하여야 한다.        거실에 실내정원이 자리할 위치는 남쪽 창문곁이 제일 좋다. 해빛이 잘 들어와 나무와 화초, 잔디들이 잘 자라는 조건을 갖추고있기때문이다. 또한실내정원은 립체적인 구조인 만큼 정면과 측면의 배치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집에 들어서는 사람이 어느 각도로 보거나 자연스럽고 편안하게안겨와야 한다. "해란강닷컴" ㅡ 려화, 박군걸 기자     *산의 가르치심 외 1편                                            리태학 명산뿐이 아니다 산이란데 들며는 말소리 낮추고 재채기도 조심하자 수시로 변하는 구름의 저 안색 살펴라   나무들의 설레임소리 곤충들의 울음소리로 내리는 비속에 안개속에 덮어두고 요란한 물소리들은 계곡으로 밀어낸다   고즈넉한 안녕이 분별없이 깨지면 천둥을 불러 산사태 안겨주는 산들의 가르치심은 무거운듯이 가볍다      *봄이 피는 할머니     불편한 로구를 끌고 어느 산발 헤매이시며 망울 고운 진달래나무 꺾어 오셨수 은은한 향이 감도는 시골장터 좌판앞.   자름자름 묶어온 춘삼월 봄빛은 잘랑이는 동전속에 저무는 세상이지만 모른체 거스름돈도 안 받는 이 있어 환하다.   리태학 약력 1947년 화룡출생. 1983년 연변대학 조문학부(통신) 졸업. 선후로 교원, 기자, 문학편집에 종사. 작품집 《악어섬에서의 격전》,《북극갈매기》,《고고학의 새기원》등 다수 출간. 현재 연변인민출판사 근무. ♬동요반주♬     여유와 멋, 그 유려한 가락에 담아내는 서정                    ― 리태학시조시인의 작품세계                                       석화 1. 시조는 수백년간 우리 겨레의 넋과 멋과 흥을 담아온 고유한 전통적시가양식의 하나이며 초장, 중장, 종장의 3장 6구 4보격(三章 六句 四步格) 기본형태를 가진 우리문학의 유일한 정형시이다. 일찍 고려시기에 정형시로서의 그 기본적인 틀을 이루어낸 시조문학은 조선조 5백년의 유구한 세월을 넘어 근, 현대의 시간과 함께 갈고 닦고 다듬어져오면서 고유한 운률형태를 고집하는 평시조와 운률상의 일부 파격을 시도하는 엇시조, 사설시조등으로 발달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문학의 소중한 유산인 시조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3장 6구 4보격의 그 정형적인 틀로 하여 오늘에 이르러 현대인들의 다양한 삶의 양식과 넘쳐나는 정서를 담아내는데 여러 가지로 구속된다고 여기는 일부 사람들에게 외면되고 충분한 중시를 받지 못하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시조문학창작대오가 충실하지 못하고 시조문학작품의 발표지면이 협소하며 시조애호자들 저변층확대가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이처럼 황량하고 척박한 빈터와도 같은 거친 환경속에서도 다행히 1993년 10월, 《연변시조시사》가 성립되고 현재까지 15년에 이르는 기간 꾸준한 노력으로 시조문학의 부흥을 꿈꾸어 오면서 시조문학강좌 진행, 청소년시조백일장 개최, 시조문학상 제정 및 포상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침과 동시에 《중국조선족시조선집》(민족출판사, 북경, 1993년), 《다시 만나도 그리운 사람》(료녕민족출판사, 심양, 2002년), 《시조마을》(도서출판 모리슨, 한국 서울, 2004년), 《하늘의 소리》(연변인민출판사, 연길, 2007년)  등 시조작품집을 간행하여온 것은 특기할만한 사안이 아닐수 없다. 이와 동시에 많은 시조시인들이 개인시조작품집을 출간하여 시조문학의 번영과 발전에 이바지하여온 것은 또한 잿더미 속에 불씨로 남아있던 불더미에 마른 장작을 보태여 그 불길이 하늘높이 활활 타오르게 하는것에 다름없다. 그런면에서 리태학시조시인의 본 신작시조집 발간은 바로 우리시조문학에서의 설중송탄(雪中送炭)으로 하늘가득 피여오르는 시조문학화토불 불더미에 불길을 보태는 굵직한 장작같은 사건으로 그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는 최근 몇 년간 의욕적인 창작활동으로 많은 시조작품을 써내고 여러 문학지와 신문문학면에 질적으로 훌륭하고 수적으로 많은 시조작품을 발표하면서 왕성한 창작력을 보여주고 있는 리태학시조시인에 대하여 주목해 볼 필요성이 있다.     2. 천애의 바람과 구름들이 서로 만나 부둥키고 속살 섞어 빚어내는 조화는 섬섬한 기운이 서려 보는 눈이 황송타   갈라지고 부딪침을 거듭하던 지맥이 기암으로 높이 솟아 하늘과 정 나눌 때 앵돌아 누운 북두성 오로라가 어루쓸고   명산정기 받으려고 구름같이 모인 인파에 부대끼다 하얗게 머리 센 성산은 절경을 보일듯말듯 가려서 내비친다   ― 《백두산》 전문   제1회 한중민족시포럼(2007)에서 영광의 대상을 수상한 작품 《백두산》이다. 작품에 담은 내용이 폭이 넓고 기백이 크고 웅장하면서도 또한 한편으로 장난기 가득하게 한눈을 은근슬쩍 감아보는 여유의 멋까지 부리는 시인은 시조대상수상이라는 그 아름찬 영광을 한몸에 받아 안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평시조를 기준으로 시조는 3행 6구 4보격의 정형시로 규정한다. 즉 시조는 형태상 3행으로써 1련을 이루고 있으며 각 행은 4보격으로 되어있고 이 4보격은 다시 두개의 숨묶음으로 나뉘어져 그 중간에 사이쉼을 넣어 6구를 이룬다. 작품 《백두산》은 바로 이와 같은 시조의 고유한 정형률을 만족시키면서 나름의 유장한 흐름을 이루어내었다는데 우선 높은 점수를 매기게 된다.  시조의 음수률은 음보(音步)의 개념으로 그 정형성을 규정할수 있고 음보는 련속하는 순간의 시간적등장성(時間的等長性)을 뜻하는 운률과 그 등장성을 력학적으로 부동하게 조절하는 조직인 률동으로 이루어지며 시조의 정형성은 바로 이러한 음보의 규칙적인 반복에 의하여 규정된다. 그리고 시조률격의 기본단위가 되는 고리마디가운데서 출현빈도와 음절수의 평균치로 보아 4음절로 된 음보를 평음보(平音步), 그보다 작은 음보를 소음보(小音步), 큰 음보를 과음보(過音步)라고 하여 시조의 일반적인 률격형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할수 있다.          제1음보    제2음보    3음보    제4음보 제1행  소(평)      평        소(평)     평 제2행  소(평)      평        소(평)     평 제3행  소         과         평        소(평)   이를 또 다음과 같이 제시할수 있다.   초장 :  3(4).   4.   3(4).  4. 중장 :  3(4).   4.   3(4).  4. 종장 :  3.      5.   4.    3(4).   음보는 초장, 중장, 종장 각장이 4음보로 되어있으나 다만 종장의 둘째 음보만은 5음절로 되어 있어서 3음절 혹은 4음절보다 호흡이 길다. 여기서 시조는 종장 초구《3자》는 반드시, 그  다음의 《5자》는 되도록 지키도록 되어있다는 특성이 드러난다. 종장은 평명한 련속성을 차단하여 호흡을 비대칭적으로 긴장시켰다가 풀어줌으로써 작품을 완결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종장의 전반부가 지닌 《소음보―과음보》의 불균형한 구조는 여기에 시간적긴장이 고이도록 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후반부는 여기에 이어지는 이완(弛緩)의 흐름을 형성하여 한편의 작품을 마무리하도록 정형화한다. 그리고 시조의 이 3음보 내지 4음보의 률격은 우선 우리말의 전통리듬이다. 우리말은 첨가어이기 때문에 체언과 용언에 조사나 어미가 붙어서 한 어절이 대개 3음절 내지 4음절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또한 음보률의 개념으로 설명된다. 음수률은 음절수가 고정되어야 합리적인 률격개념으로 정립되는데 반하여 우리 시가의 경우 음절수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음절수의 구애를 받지 않는 음보가 작품의 실제와 부합되는 합리적인 률격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합리성은 률동의 차원에서뿐만이 아니라 시조가 원래 악곡의 가사라는 사실을 감안해서 음악과 관련지어서 분석해 보면 더욱 그 타당성이 드러나게 된다. 악곡리론에 의하면 마디가 모여서 동기가 되고 동기가 모여서 작은악절이 되고 작은악절이 모여서 큰악절이 된다. 여기에서 악곡리론을 시조의 률격과 관련 지운다면 마디는 음보에, 동기는 구에, 작은악절을 행에, 큰악절은 련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시간적 등장성(等長性)에 근거한 음보란 바로 음악의 박자개념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마디》마다 박자가 같아야 된다는 악곡의 원리는 휴지가 나타나는 《음보》의 시간량이 같아야 된다는 시조의 원리로 련결되는 것이다. 음보란 이렇게 휴지에 의해서 구분된 문법적 단위 또는 률격적단위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휴지가 일정한 시간적 길이마다 나타나는 것이 음절수가 같기 때문이 아니라 률독을 할 때 호흡에서의 같은 시간적 길이 때문인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음보는 3음절 내지 4음절을 휴지의 일주기로 하여 동일한 시간분량을 지속시키는 동시성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조의 원래모습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조(時調)라는 말의 시는 글귀를 의미하는 시(詩)가 아니라 때를 의미하는 시(時)이고 《균형잡히다》, 《어울리다》 등 의미를 가진 고를 조(調) 역시 음악, 음률을 지칭하는 말로서 이런 점에서 시조란 말은 음악 즉 노래를 강조한 용어이다. 따라서 시조(時調)란 당대의 가락이라는 뜻이고 오늘의 용어로 말하면 이른바 류행가이다. 시조는 당대 류행하는 가락이란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조의 시원적의미는 《시체노래》 곧 새로운 악곡 또는 새로운 시형식의 노래라는데로부터 온 것으로 《시조의 명칭으로 사용되였던 시가, 가곡, 가요, 영언(永言) 등이나 신성(新聲), 신조(新調), 신번(新飜) 그리고 시절가, 시절가조, 시조 등은 모두 음악과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명칭의 변화는 바로 악곡의 변화발달과 깊은 관련을 갖고있는 것이다.》(《한국문학개론》, 김승찬 외, 139페지, 한국 삼지원, 1999년.) 3장 6구 4보격의 기본형태를 보장하면서 시조의 정형성을 고집하는 리유는 바로 이와 같이 시조의 원래 모습을 복원하여 그 특성을 바로 드러내려는데 있다.     3. 시조(時調)는 원래 노래와 함께 태어나고 노래가 함께 어울려왔었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차츰 노래와 분리되고 이제는 노래의 성격보다 문학적인 특성이 더욱 강조되는 시(詩)가 된다. 그것은 현대시의 보편적인 원리와 같이 처음의 노래와 음악에 뿌리를 둔 리듬에 대한 강조에서부터 이제 지금와서는 메타포와 이미지를 강조하는 문학의 특성을 띄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詩)라는 말은 말씀 언(言)과 절 사(寺)로 되어 있다. 한자에서의 시(詩)는 언(言)과 사(寺)를 결함해 완성한 글자다. 그러나 여기서의 사(寺)는 사원(寺院)과 무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말의 사원(寺院)》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원래는 말씀 언(言)과 관청 시(寺)로 되어 있지만 후에 그렇게 변했기 때문에 그렇게 읽을 수도 있으나 이렇게 정의하면 이상한 해석이 된다. 그것은 시를 정의한답시고 말씀 언(言)과 절 사(寺)를 강조하면서 시는 언어로 된 사원이고 따라서 시는 세속을 떠난 초월적이고 신성한 공간이라고 말한다면 이런 해석이나 주장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감상적인 견해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시라는 용어는 말씀을 뜻하는 언(言)과 관청을 뜻하는 시(寺)로 되어 있고 이 관청 시(寺)가 후에 절을 뜻하는 사(寺)가 된다. 이 사(寺)자 역시 분석하면 갈 지(之)와 법도 촌(寸)으로 되어 있고 그런 점에서 일정한 법도로 일을 해 나가는 관청을 의미하고 후에 불교가 들어왔을 때 관청에서 불법을 논한 까닭으로 절을 의미하게 된것이다. 시는 《시언지(詩言志)》라는 말이 있듯이 마음에 있는 뜻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라는 말이 관청 시(寺)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법도로 일을 한다는 의미이고 결국 시는 마음속에 있는 뜻을 운률(寺)에 맞추어 말(言)로 표현하는 글(詩)이다. 그리고 법(法)은 률(律)과 통하고 률(律)은 시의 경우 음률(音律)이다. 여기서 말씀 언(言)은 《음조가 고른》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고 사(寺)는 지(持)의 원자인 만큼 《손을 움직여 일한다.》는 뜻으로 보거나 아니면 뜻 지(志)와 같은 글자로 보아 《뜻이 일정한 방향을 향하여 똑바로 나간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 우리시의 유일한 정형시이면서 현대시의 한 부분이 되고 있는 시조에 있어서 자수률을 지킨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상(詩想)의 전개과정도 매우 중요하다. 시조는 민요에서 발전했다는 견해, 한시 5언절구나 7언절구에서 발전했다는 의견 등 그 기원설은 구구하다. 그 기원설은 어찌되었건 시상의 전개과정은 한시 절구와 흠사한 데가 없지 않다. 한시 절구는 기(起), 승(承), 전(轉), 결(結)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시상전개과정의 굴곡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기》는 시작이요, 《승》은 그것을 이어받아서 부연, 전개하고 《전》은 전개된 시상을 한 번 크게 전환시키며 《결》은 끝맺는 것이다. 시조의 시적형상의 형성과정도 대체로 이와 같으나 종장은 전결(轉結)을 포함한다. 특히 전결의 단계인 종장이 초장과 중장의 시상을 통일하면서 그것과는 거리가 멀거나 모순 되거나 이질적인 것이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시조의 이러한 성격은 비록 짧은 3장의 형식이지만 그 속에 많은 사상과 감정의 극적 갈등의 효과를 수용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리태학시조시인은 자기의 작품에서 시조의 정형적인 기본운률을 지키고 완성시키는 한편 작품의 시적 형상성을 높이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으면서 참신한 이미지창조에 심혈을 모았다.   줄줄이 꿰여드리운 다락안 홍시마다 못다 푼 열두시름 연등으로 불밝혀서 가을철 한때는 날에 날마다 부처님 오시는 날   안으로 삭인 정성 까맣게 눞혀놓고 내돋치는 분가루 향으로 삼아도 민초들 공양에 바빠 못다 드린 백일기도   ― 《곶감》   가을철 노오란 곶감이 줄줄이 드리운 농가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시인이 살고 있는 여기 북방에는 감나무가 자라지 않아 곶감을 만드는 시골풍경을 만날 수 없었겠지만 시인은 아마 감빛으로 환한 남국의 풍경을 사진에서 아니면 텔레비죤프로같은데서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이 풍경을 시인은 다시 언어로 그림그린다. 시골농가의 처마아래 련이어 대롱대롱 드리운 동그스럼한 알알의 감열매는 어느덧 부처님오신날의 연등으로 불이 켜지고 가내의 무사평안과 세상의 무사평안을 비는 백일기도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표현은 1차적인 감정의 발로가 아닌 물빛이 번지는 생생한 이미지의 창조로 우리들에게 오래동안 잊혀지지 않을 화폭을 그려주어 인상이 깊게 한다.   한여름 켜대던 풀벌레 톱질소리   다친데 하나 없는 푸름만 남겨놓고   여울목 흰 톱밥으로 소리없이 스러졌다   ― 《풀벌레소리》   이번에는 소리의 그림을 그리였다. 잔디 푸른 한여름의 벌판과 숲은 풀벌레들의 세상이며 풀벌레들은 소리로써 각기 자기의 존재를 알린다. 쓰르라미, 매미, 딱정벌레, 귀뚜라미… 이들은 모두 자기의 악기들을 열심히 연주하여 한여름의 교향곡을 완성한다. 그리고 풀벌레들의 《전원교향곡》은 마침내 《다친데 하나 없는/ 푸름만 남겨놓고》 한부의 악곡을 완성한다. 이와 같이 청각적이미지로 그려내는 참신한 시상은 현대시의 묘미를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것이 시이며 또한 시조운률의 정형격에 담긴 절제의 미로서 현대시조의 참 멋이다. 이와 같은 시인의 노력은 우리의 현대시조의 지평을 저 멀리로 아득히 넓혀 가는데 일조하게 될 것이다.     4. 그러면 현대시와 시조의 차이는 무엇이며 현대시와 구별되는 시조의 특징은 무엇인가. 우리는 시조의 특징을 우선 무엇보다 시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와 멋에서 찾아야 할것이다. 즉 우리는 시에 타고 흐르는 정서가 슬픔이든 기쁨이든 춤사위로 변용될 수 있는 융통성이 시조의 성질이며 현대시와 구별되는 시조다운 여유와 멋이라고 말할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여유와 멋이 바로 시조가 구비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특징으로서 이것이 없으면 비록 3장 6구 4음보의 정형률을 구비하였다고 하더라도 시조라고 이름 부를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3장 6구 4음보의 정형률은 우선 넘치는듯하면서도 넘치지 않고 그치는 듯 하면서도 그치지 않는 유장한 흐름을 이뤄내면서 우리의 호흡에 가락을 실어주고 어깨와 팔다리에 춤사위를 실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 고전문학의 한 표현형태인 《풍류》에도 그 맥이 닿아 있다. 애끊는 서러움의 《풍류》― 얼핏 서러움과 풍류가 모순되여 보이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춤사위도 풍류의 정신에서 유로된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어깻짓 발짓 따위의 춤사위로 서러움을 대신 표현하는 수는 그다지 드물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슬픔이든 기쁨이든 결을 타고 흐르는 정서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어떤 필름 같은 것에 투과된 듯한 느낌에서 우러나온다.   공수래공수거는 청산도 익히 아니 가진 것 빛난 것 상석밑에 깔아두고 제상에 오른 메뚜기 보듬는 법 배우리라   ― 《순례일지》 부분   농담(濃淡)이 번져가는 아른한 산발 타고 세월은 수묵화로 드리워졌는데 락관이 찍힌 자리엔 매지구름 왜 떴노   ― 《먼 산》 부분   흐르는 강물 한곳 눈박아 보노라면 내쪽이 강물되어 우쪽으로 흐르고 착각의 물거품새로 삭정이만 빙빙― 돈다   ― 《산중메모》 부분   리태학시인의 시조작품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건드러진 구절들과 자주 만나게 된다. 이것은 리태학시인이 우선 우리의 고시조로부터 시조다운 흥건한 여유와 멋, 진짜 시조다운 여백의 매력을 배우고 느끼는데 소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뭔가 허전한 듯싶을 때가 사실은 여백이 꽉 찬 것일 때가 많다. 화선지에 매화를 칠 때 줄기 위에 곁가지를 하나 더 심어 넣을까 말까 수십 차례 망설이다 끝끝내 참는 마음이 시조의 마음인 것이다. 그 텅 빈 채로, 허허로운 채로 내버려둔 공간은 비로소 시조다운 여유와 멋이 샘솟는 우물이 된다. 그것이 시조의 핵(核)이다. 다시 말해 시조다운 여유와 멋을 감칠맛 있게 살려내야만 비로소 시조다운 시조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리동인의 유화 〈광야〉에 부쳐》라는 부제가 첨부된 작품 《들녘찬가》를 읽고 지나가지 않을수 없다. 리동인은 리태학시인의 아들이며 이미 국내외 화단에 일정한 성망을 쌓은 청년화가이다. 아들이 그린 미술작품에 아버지가 글을 적어 보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완성된다. 화가아들의 유화작품에 시조시인아버지의 시조작품이 얼마만큼 조화로운 하모니를 이루어내는지 이제 우리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봄가으내 지친 들녘이 흰적삼 여민채 낮다란 언덕 베고 말없이 누웠는데 까마귀 가옥(佳玉)소리가 뜻깊어 듣기 좋다   황토색 얼 비치는 드럼길 논코마다에 환락에 주절거리넏 흐름이 굳어지고 풍설은 막힌 그 흐름 푸느라 맥이 진했나   드문히 보이는 청자색 등황색 반점은 저 한몸 사르고 열반에 고이 든 들녘이 남기고 가신 사리구슬인가   오다가 돌아서고 돌아섰다 또 오는 눈송이는 무엇을 그리 저어하는가 수억의 부도탑 들녘을 감싸주거라   ― 《들녘찬가》   이외 리태학시인이 자기의 시조작품의 창작에서 력사적문물과 사건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하는 작품들 (《장명등》,《흥개호》,《순례일지》,《사이섬》,《도자기 5천년사》 등)과 시조작품속에 자신의 생활과 자기주변의 생동하는 여러 모습들을 담아내는 작업들로 이루어낸 작품들(《안해》,《봄을 파는 할머니》,《삼륜차부》,《어떤 TV광고》,《두메농가》 등)에서 보여지는 소재와 제재와 주제의 폭을 넓혀가는 노력은 목하 우리 시조문학이 안고 있는 과제를 풀어가고 한 층 더 높은 단계에로 오르는데 모두 유익한 계발이 될 것이다. 리태학시인의 신작시조시집의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늘 반가운 기별을 전해주기 바란다.   리태학시조집 《잔설서곡》 방송시간: 《라디오책방》 2009년 11월 1일   MC : 김계월 GUEST : 석 화   ㅡ M ㅡ   M : 안녕하세요? 연변위성방송 라디오책방에 김계월입니다. 오늘은 시조 한 편으로 라디오책방 문을 열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눈 뿌리 빼는 현란함이 싫어서 그냥 가무스레 엷은사 두르고 선 원색임에 열리는 새벽빛 속에 내가 먼저 있었다. 들뜨는 밝음은 구름덮어 멀리하고 가시돋혀 뚫어준 숲사이의 빗줄기따라 싱싱한 꽃잎파리가 지천으로 피어난다. 네, 리태학시인의 시조 흑장미. 박사생이 된 딸에게 쓴 시조였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시조에 대해서 리론적으로 설명을 드렸죠? 시조는 수백년간 우리 겨례의 넋과 멋과 흥을 담아온 고유한 전통적 시가양식의 하나입니다. 초장 중장 종장에 3장6구 사보격의 정형시라는 틀을 갖고 있다는 것이 참 인상적이였는데요. 오늘 시인 석화선생님을 모시고 이 대학시인의 시조집 잔설서곡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사나누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G : 예, 안녕하십니까? M : 예, 반갑습니다.   G : 예, 반갑습니다.   M : 네, 시조의 형식에 대해서 저희들이 언젠가 설명을 아주 깊게 드렸죠?  G : 그렇죠. 초장중장종창 3장6구 사보격의 전통정형시다. 라는 것이죠?  M : 그 정형시다. 정제된 운률을 기본으로 한다라는 점에 정말 그 마음이 확 끌렸는데. 오늘 또 다시 시조에 대해서 말씀을 주신다니까 기대가갑니다.  G : 네, 리태학시인의 시조집 , 이 작품 집은 2008년 3월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서 출판되였습니다. 이 시조집은 모두 4개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요. 제1부  제2부 제3부  제4부  등입니다. 그럼 먼저 이 시조집의 표제로 된 을 감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작품 부탁드립니다. M :   ㅡ M ㅡ     차디찬 시간들이 누그라진 음지에 혀를 빼문 마파람이 상녀타고 내리면 새 하얀 련민하나 눈물 짓는 윤3월   맵짠 서슬 잠재운 시허연 봉분우에 실바람 타고 온 맵새에 고운 깃털이 귀거래사를 쓰느라 여념이 없고   겨울이 머물다간 마지막 자리  잔설은 춘풍앞에 투명한 피 흘리며 봄풀이 일어서는 소리를 신경살려 듣는다.   ㅡ M ㅡ   G : 네, 이었죠?  이렇게 매듭지어지는 작품이죠? 시조는 이렇게 3장6구 사보격의 그 정형적인 틀을 기본으로 하죠. 음본은 초장 중장 종장 각장이 사음보로 되어있으나 다만 종장의 둘째 음보만은 오음절로 되어있어서 삼음절 혹은 사음절보다 호흡이 길지요. 즉 다시 말하여 시조는 형태상 3행으로써 1련을 이루고 있으며 각 행은 사보격으로 되어있고 이 사보격은 다시 2개의 소흥 묶음으로 나뉘어져 그 중간에 사이심을 넣어 6구를 이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시조의 삼음보 내지 사음보의 율격은 우선 우리 말의 전통리듬에서 온것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우리말은 첨가어이기 때문에 체언과 용언에 조사나 어미가 붙어서 한어절이 대개 삼음절 내지 사음절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음보율의 개념으로 설명할수 있는데요. 음수율은 음절수가 고정되어야 합리적인 율격개념으로 적립되는데 반하여 우리의 시가의 경우 음절수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음절수의 구애를 받지 않은 음보가 작품의 실제와 부합되는 합리적인 율격 개념으로 설명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작품 한편 감상하고 이야기를 계속 해볼가요?   M : 네, 좋습니다.   G :  부탁드립니다.   M :   ㅡ M ㅡ     귀밑에 새치머리 한결 돝보이는 날 겨울 이로 다가서는 먼산우에 눈길 언고 산까치 배바닥 털이 왜 하얀지 알고 싶어   롱담이 번져가는 아른한 산발타고 세월은 수묵화로 드리워 졌는데 락관이 찍힐 자리엔 메지구름 왜 떴노   여백을 남길세라 그려온 인생 여정 맞춤 맞춤 물안개로 피우고 지우며 먼산이 보내는 넋이 노을로 덧칠하노라   ㅡ M ㅡ   G : 네,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이지요?    M : 네, 그럼요. 국화 또는 동양화같은 한 폭의 그런 그림이 안겨옵니다.   G : 그렇죠? 그리고 그 그림속에는 능청능청한 가락이 또 담겨져 있네요.   M : 그야말로 고전적인 멋과 또 흥청흥청한 여유와 또 거기에 유려한 가락까지 아주 다분하게 느껴집니다.  G : 모두 함게 담겨져 있죠? 네, 시조는 이렇게 원래 노래와 함께 태어나고 노래와 함께 어울려 왔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차츰 노래와 분리되고 이제는 노래의 성격보다 문학적인 특성이 더욱 강조되는 시로 된것입니다. 여기서 시조의 원래 모습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죠. 시조라는 말에서 시는 글귀를 의미하는 자, 즉 다시 말하면 말씀언변의 자가 아니라 때를 의미하는 시간 자, 다시 말하면 나릴 변에 절간 사자 시간 자를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조에서의 자는 균형이 잡히다 어울리다 등 의미를 가진 고를 자를 씁니다. 역시 음악 음률을 지칭하는 말로서 이런 점에서 시조라는 말은 음악, 다시 말해서 노래를 강조한 용어입니다.따라서 시조는 당대의 가락이란 뜻이고 오늘의 용어로 말한다면 이른바 류행가란 말이죠. 시조는 당대의 류행하는 가락이란 의미이기 때문이죠. 이렇게 시조의 시원적인 의미는 노래로서 곧 새로운 악곡 또는 새로운 시 형식의 노래라는데서 부터 왔습니다. 시조의 명칭으로 사용되였던 시가, 가곡,가요, 영언 등이나 신성, 신조, 신번 그리고 시절가, 시절가조, 시조등은 모두 음악과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명칭의 변화는 바로 악곡의 변화 발달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이러러 우리 시의 유일한 정형시이면서 현대시 한부분이 되고 있는 시조에 있어서, 자수율을 지킨 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상의 전개과정도 매우 중요한것입니다. 리태학시조 시인은 자신의 작품에서 시조의 정형적인 기본 음율을 지키고 완성시키는 한편 작품의 시적 형상성을 높이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으면서 참신한 의미지의 창조에 심열을 모았습니다. 그러면 리태학시인의 작품 를 감상하고 계속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작품 부탁드립니다.   M :   ㅡ M ㅡ   한 여름 켜대던 풀벌레 텁질 소리 다친데 하나없는 푸름만 남겨 놓고 여울 목 흰 톱밥으로 소리 없이 쓰러졌다.   ㅡ M ㅡ   G : , 소리로 그림을 그렸죠?   M : 네, 아주 짧지만 정말 내포되여 있는 그 함의가 깊은것 같애요.   G : 그렇죠. 작품은 잔디풀은 한 여름의 벌판과 숲은 풀벌레들의 세상이며 풀벌레들은 소리로 각기 자기의 존재를 알리고 있습니다. 쓰르라미, 매미, 딱정벌레, 귀뚜라미 이들은 모두 자기의 앞길을 열심히 연주하여 한 여름의 교향곡을 완성하고 있죠. 그리고 이런 풀벌레들의 교향곡은 마침내 다친데 하나 없는 푸르름만 남겨놓고 한부의 악곡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청각적 이미지로 그려내는 참신한 시상은 현대시의 묘미를 그대로 그려내고 있죠. 또한 시조 운률의 정형격에 담긴 절제의 미로서 현대의 시조의 참 멋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시인의 노력은 우리의 현대시조의 지평을 아득히 ?여가는데 일조하고 있죠.   M : 네,  정말 시조는 아주 짧지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 풀벌레 소리로 여름의 풍경을 아주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그렸어요. 자 그러면 현대시와 이 시조의 차이는 무엇이고 현대시와 구별되는 시조의 구별점은 어떤 것인지 좀 듣고 싶습니다. 우리는 시조의 특성을 우선 무엇보다 시조에서만 느낄수 있는 여유와 멋에서 찾아야 할것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시조와 현대시의 구별점이라고 볼수 있겠죠? 즉 우리는 시에 타고 흐르는 정서가 슬픔이든 기쁨이든 춤사위로 변형될수 있는 융통성이 바로 시조의 성질이며 현대시와 구별되는 시조다운 여유와 멋이라고 말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유와 멋이 바로 시조가 구비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특징으로서 이 것이 없으면 비록 3장6구 사음보의 정형율을 구비하였다 하더라도 시조라고 이름부를수 없을것입니다. 그것은3장6구 사음보의 정형율은 우선 넘치는듯 하면서도 넘치지 않고 그치는듯하면서도 그쳐지지 않는 유장한 흐름을 이루어 내면서 우리의 호흡에 가락을 실어주고 어깨와 팔 다리에 춤사위를 실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리태학시인의 작품 를 감상하면서 방금 말씀드린 내용을 되새겨 보기 때문입니다. 작품 부탁드립니다.   M :   ㅡ M ㅡ     바르게 깨여나라나는 정각사의 범종소리 육정산 호수가에 무리랑을 이뤄갈때 이 몸은 부표로 둥실 떠 이승 저승 넘노닌다   어깨를 포개고 살을 비빈 억새숲이 뼈시린 눈보라를 석둥우에 불 태우고 종다리 타는 헌불은 아지랑이 몰고 온다   공수레 공수거는 청산도 익히 알아 가진것 빛난것 산성밑에 깔아 두고 재상에 오른 메뚜기 보듬는 법 배우리라.   ㅡ M ㅡ   G : 예, . 건들건들한 구절들이 참 인상적이죠. 리태학시인은 이렇게 우리 시에 고 시조로부터 시조다운 흥건한 여유와 멋, 그리고 여백의 매력을 배우고 느끼는데 소홀하지 않았습니다.뭔가 허전한듯 싶을때가 사실은 여백이 꽉 찬 것일때가 많죠. 화선지에 매화를 질때 줄기우에 곁가지를 그려넣을가 말까 수십차례 망설이다가 끝내 참는 마음이 바로 시조의 마음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텅빈채로 허허로운채오 내버려두는 공간을 비로소 시조다운 멋이 깃들이는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M : 네, 정말 시조는 음미할수록 매력적이네요. G : 그렇죠. 여기서 참 재밌는 작품 한편 감상하고 가야겠는데요. 라고 제목한 시인데요. 이 작품은 시조시인 리태한 시인이 자기의 아들 이동인군에게 주는 작품입니다. 일단 한번 감상하고 말씀나누도록 하겠습니다.   M :   ㅡ M ㅡ     봄가운에 지친 들역이 흰 적삼 여민채 낮다란 언덕빼고 말없이 누웠는데 까마귀 까욱소리가 뜻깊어 듣기 좋다.   황토색을 비추는 두렁길 논코마다에 환락에 주절거리던 흐름이 굳어지고 풍설은 막힌 그 흐름 푸느라 맥이 지냈나   드문히 보이는 청자색 등황색 반점은 저 한몸 사르고 열반에 고이던 들녘이 남기고가신 사리구슬인가   오다가 돌아서고 돌아섰다 또 오는 눈송이는 무엇을 그리 저어하는가 수억의 부두 담내려 들녘을 감싸주거라.   ㅡ M ㅡ   G : 예, 죠.  M : 네, 이 를 음미하면서 보니까 정말 어디에선가 많이 익숙히 느껴왔던 그런 풍경이 떠오르네요.   G : 예, 그렇죠. 바로 이 작품은 리태학시인이 아들 이동인군이 라고 제목한 유화작품에 쓴 시입니다. M : 아, 네~ 어쩐지 이 이동인군이 비암산에 올라 평강벌과 해란강을 그려낸,  G : 그 모습을 담은 유화작품이죠. 이 유화작품은 수년전 국내의 이름난 미술전람에 입선되여 상을 받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런 그림과 시의 만남, 이 속에서 또 아까 말씀드렸던 이미지와 함께 흥청흥청 넘쳐나는 가락, 이런것이 모두 모아져서 한편의 시조작품을 이룬것이죠.   M : 네, 오늘도 참 재미있게 리태학시인의 시조집 을 감상해봤습니다.  G : 그리고 그 에 담겨있는 유려한 시조의 음률도 함께 느껴봤죠.  M : 네, 그렇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G : 감사합니다.   M : 라디오책방 오늘은 여기에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저희 라디오책방은 인터넷에서 다시 들으실수있습니다. www.ybrt.cn 으로 들어오셔서 다시 듣기에서 라디오책방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 뵐게요.   ㅡ M ㅡ   나더러 시조시단의 《새싹》이라는데... 리태학 30년전 달랑 시조 《적선당 허울벗기노라》 한수만 내놓고 자취를 감췄다가 한 3년전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시조창작에 몰입하였다. 하여 주변의 동료들로부터 의론이 무성했다.   그것도 그럴것이 근 30년동안의 문학창작경력은 주요하게 아동소설창작으로 채워져왔으며 동시, 동화 그리고 수필과 가사 등 쟝르의 작품들은 간간히 발표하여왔으나 시조작품은 그간 한편도 내놓지 못했기때문이다. 그러다가 얼마전부터 마치 터진 보뚝물처럼 쏟아내는 나의 시조작품을 두고 일부 내실을 모르는 이들로부터 시조문학의 《새싹》이 나타났다는 평을 듣기까지 한것이다.   그러고보니 나로서도 어리벙벙해지는것 같다. 사실 그간 시조작품을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시조작품에 애착을 가지고 많이 읽었으며 또 수첩에 적지 않게 적어놓기도 하였던것이다. 그러다가 이순의 나에 가까워오자 현재 나의 성격에 맞는것이 시조라는 이 정형적이고 고전적인 쟝르라고 생각되여 혼신을 다하여 시조작품창작에 매진하게 된것이다.   사실 내가 시조작품과 만나게 된것은 소학교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러니 50년의 시조사랑인 셈이다. 양사언의 《태산이 높다 하되》와 황진이의 《동지달 기나긴 밤에》그리고 태종과 정몽주의 《하여가》, 《단심가》 등은 나어린 나에게 문학이란 이름의 세계와 우리 운률의 감동을 안겨주는 큰사건이였던것이다. 짧은 삼행시속에 묻어둔 교훈과 탁월한 묘사력은 우리 선조 시조시인들에 대한 경외감을 심어준 첫 번째 계기가 되였던것이다.   그후 나는 많은 책을 찾아 닥치는대로 읽으면서 공부하다가 화룡고중시절에는 문학에 재능이 있는 허봉남, 김응룡 등 친구들을 만나게 되여 본격적으로 문학공부를 시작하게 되였다. 하지만 청운의 꿈이 바야흐로 깃을 막 펼치기 시작하는 때에 우리 나라 력사상 《전례없는 시기》인 문화대혁명을 만나게 되여 모든 꿈을 접고 《광활한 천지》로 나가게 되였다.   귀향하여 고향마을에 돌아온 나는 스무나무살적부터 목재판, 민공판을 떠돌아다녔으며 이것은 또한 학창시절 문학의 꿈을 다시 깨우쳐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허리까지 빠져드는 밀림의 적설을 헤치고 삼림청리작업을 갔다가 귀틀집에 돌아오면 온몸이 푹 젖었다. 지붕이 엉성하여 종지굽만치 뚫어진 천정으로 하늘의 찬별이 떠는게 보였다. 방 한복판에 눕혀놓은 드럼통에서 굵직한 장작들이 세찬 불길을 피워올리면 피가 한동이씩 고인 젊은이들은 혈기와 열기를 이기지 못하여 웃통을 몽땅 드러내고 배갈사발을 돌린다. 밀림의 목재군들은 술 한사발에 돼지고기 반사발씩 앞에 받아놓고 흥겨운 입담을 벌렸다. 생활경력이 특이하고 견문이 넓으며 잔재주까지 있는 그들은 저마다 무림소설속의 호남아 같았으며 그들과 함께 하는 목재판 하루하루의 밤은 생활대학교의 강의실로 되였다.   그중에 특히 옛말 잘하고 민요가락 잘 넘기는 김현수란 친구가 하루는 생전 듣지도 못하던 무슨 창을 한다고 해서 귀를 기울인적이 있다. 내용은 어떤 집을 지었는데 반칸에는 명월을 모시고 다른 반칸에는 청풍을 모셨는데 청산을 모실데 없어 사방에다 두고본다는 뜻이였다. 청빈한 생활을 해학적으로 묘사한것이 신통하기도 하거니와 말 한마디를 길게 구슬프게 뽑아 넘기는것이 어찌나 멋있던지 언 발가락이 아픈것도 몰랐다.  이것이 내가 현실생활에서 처음 접촉한 시조였다. 참말 고단한 생할에서 여유의 멋을 즐길수 있는것은 시조가 아닌가 싶었다.  그후 나는 연변대학 중문학부 단기훈련반에서 반년 공부하고 룡문중학교 어문교원이 되였다. 그때는 문화대혁명 후기여서 교과서가 마땅치 않아 자체로 편찬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공자, 맹자를 비판하는것은 중학교 교원인 나도 아리숭한것이 많은데 하물며 어린 학생들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랴. 그래서 나는 신문, 잡지에서 오려낸 자료에서 몇부분 택하여 아이들이 알기 쉽게 문장을 꾸미는 작업을 하게 되였다. 이럴 때는 그 어떤 쟝르보다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춘 시조가 적격이라고 생각되여 그 내용을 시조로 담아보았다. 먼저 학생들에게 시조의 개념, 형태를 설명하고 초장과 중장에서 결론을 이끌어낼만한 사실을 압축, 요약하여 보여주었다. 이것이 쉽지 않은것이였지만 학급 70여명의 아이들이 너 한마디, 나 한마디, 내 한구절, 너 한구절 놓는바람에 양화의 실례로부터 본 공자의 선지선각론을 비판하는 시조 한수 탄생하게 되였다.   당시 우리 학급에는 김동춘, 신현철, 장하도 등 문학적기질이 돋보이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시조를 처음 접했지만 꽤나 잘 써내여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으며 교내작문선집에 실리기까지 하였다.   문학쟝르로 당시 정치임무인 《비림비공(批林批孔)》하니 학생들이 재미있어하고 효과가 커지자 나는 이번에는 이 내용들을 만담이라는 형식에 담아보고저 하였다.  당시 모주석은 공화국주석제를 두지 말자고 했다. 류소기가 그 자리에 앉아서 《사단》을 일으켰으니 그와 같은 경우가 재발될것을 우려한것 같았다. 그런데 림표는 공화국주석제를 두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려고 하였다는것이다. 그 본질적인 목적은 자기가 그 주석자리에 앉아보자는것인데 그 음모를 분쇄하고 성토하는것이 당시 중대한 정치임무였던것이다.   그래서 나도 모주석의 편에 서서 림표의 죄행을 폭로, 비판하는 내용을 만담에 담아내려 시도하였다.   만담이란 쟝르는 동음이의어를 잘 사용하여 웃음을 폭발하게 하는 기교도 있다. 그리하여 나는 《주석》이라는 말에 력점을 두고 뜻풀이를 하는 형식으로 만담을 엮어내려갔다. 기둥 주(柱)자에 자리 석(席)은 《주석》이요, 도야지 저(猪)에 자리 석(席)은 한어로 《주석》과 발음이 비슷하여 돼지자리이라…는 식이였다. 당시 나의 눈에는 림표일당이 주석자리를 가지고 다투는것으로서 이것은 모주석을 반대하는 행위로 마땅히 비판해야한다고 여겼던것이다.   이 만담을 학생들에게 읽어주니 모두들 재미있다고 하면서 림표일당의 본질을 알기 쉽게 표현하였다고 좋아했다. 또한 그후 공사의 선전위원이 이 만담원고를 등사까지 하여 각 촌에 배포하여 문예공연종목으로 련습하게 하였으며 현문예회보공연무대에까지 올렸다. 그런데 현의 일부 간부가 보는 관점은 이와 달랐다. 당시 당의 주석은 모주석이기에 자칫하면 당주석과 공화국주석과의 관계를 혼동할수 있기에 문제가 있다는것이였다. 이 문제가 이쯤에서 깔아버리면 아무일도 없었을것을 이 작품이 모주석을 공격하는 반동작품이라는 얼토당토한 모자를 씌워 비판대회를 열었다. 모주석께 무한히 충성한다는 그 사람들은 모든것을 무한히 끌어올리는데 습관이 되여있어서 이 작품을 비판하는 활동을 보름이나 벌리다가 나중에 주급 령도에서 제지하는바람에 제풀에 끝나버렸다.   그때가 문화대혁명의 결속단계여서 다행이였지 그렇지 않았더면 나도 얼빤하게 《반혁명모자》를 얻어쓰고 일생을 말아먹을번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큰 충격을 받은 나는 소중하게 간직하고있던 금촉만년필을 꺾어버리고 다시는 글 같은 것은 쓰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절필상태가 몇년 지속되다가 하루는 당시 《연변일보》 문예면을 관장하시던 김경석선생님이 화룡에 오셨다가 나를 찾는다는 전갈을 받게 되였다. 화룡에서 문예창작강습반을 열었는데 와서 참가하라는 통지였다. 그 험악한 일을 겪고나서도 문학에 대한 집념이 그래도 남아있었던지 나는 화룡창작학습반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다시 만년필을 찾아쥐고 화룡에 갔다. 거기서 나의 첫 시조작품이 완성되였는데 제목은 《적선당 허울 벗기기》였다.  황세인 적선당에 선을 얼마 쌓았길래  어린 시얼 머리 희고 양백로도 세상 떴나  적선당 허울 벗기니 죄악만 남았더라  이 시조작품이 《연변일보》에 발표된후 나는 화룡현방송국문예조로 전근되였다. 나는 부지런히 시짓기에 골몰하려 작심하였다가 우연한 기회에 연변인민출판사 소년문예편집실 편집선생님들을 만나게 되였다. 그때 쓴 동시 《나비를 날리던 애야》를 보던 편집선생은 내가 아동문학에 소질이 있다고 하면서 아동작품을 많이 쓰라고 격려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3여년간 30여편의 아동문학작품을 써내고 1988년에 아동문학작품집 《북극갈매기》를 펴내게 되였다. 또한 이것이 계기가 되여 나는 다시 연변인민출판사에 전근되여 아동문학편집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후 사업관계로 아동문학에 모든 정열을 바쳐갔으며 《악어섬에서의 격전》, 《고고학의 새기원》 등 아동문학작품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나는 가끔씩 작가협회의 회의 같은데 참석하기도 하는데 일부 장난끼있는 친구들이 나를 보고 《왜 애들대장이 버릇없이 어른들 모임에 나타나는가. 자네도 성인문학을 알아?》라고 하는것이다. 그것은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거개 아동문학관련자들이여서 나를 다만 아동작가로만 취급하는 경우가 많았기때문이다. 이런 경우를 겪으면 은근히 반발심이 생겨 《내가 하지 않아서 그렇지 하면 자네들보담 더 잘할걸세.》라고 대답을 주고나서 내 적성에 맞는 시조문학으로 그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비록 오래동안 손을 놨지만 시조에 대한 사랑은 다시 불타올라 많은 우수한 국내외 시조작품을 찾아보기도 하고 우리 선조들의 명작들도 다시 찾아보면서 필봉을 다시 벼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내가 몇수 극적거려본 글은 근본상 시조작품이라 하기 힘든것으로 소학교애들 수준에나 미치는듯하였던것이다. 어쩌다 눈에 본것을 깊은 사색이 없이 적어갔기에 그저 어디에 오르니 어떠어떠하더라는 식의 구태의연한 작품이 되고 만것이였다. 이런 창작태도에 안주해있는 내가 한심스럽기도 하였다.   하여 나는 본격적으로 시조관련 서적과 잡지들을 찾아보고 리론공부도 다시 하였다. 특히 한국신춘문예입선작품들을 읽어보면서 깨우친바가 많은데 이런 작품들을 읽어보는 순간 시조작품의 깊이와 무게 그리고 살아숨쉬는 치밀한 언어구사능력에 주목하게 되였고 그 기법들을 하나씩 나의것으로 소화하기에 노력하였다.   현대시조란 어떻게 씌여져야 한다는것을 초보적으로 터득하면서 사물을 보는 시각이 차츰 바뀌기 시작하였으며 나의 부족점들을 통절하게 느끼고 새로운 시조작품의 창작에 눈뜨기 시작하였다.   례로 나는 다섯번이나 백두산에 올랐지만 시조 한편 못 썼다. 무엇때문이였을가? 그 비단결 같은 폭포수와 신선이 깎아놓은 산봉오리 등 남들이 이미 다 한 말을 다시 곱씹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그저 한가지 느낌으로 《섬섬한 기운이 어려 보는 눈이 황송》하다는 감각뿐이였다. 그러나 시각이 바뀌니 이런 구절이 이어서 떠오르게 되었다. 《부딪침을 거듭하던 지맥이 성산으로 높이 솟아》 질투를 느끼던 북두성이 《앵돌아 누울 때》 찬란한 오로라가 《등을 어루쓰는》 정경도 눈에 함께 보이는듯하였다. 이렇게 나는 시조 《백두산》을 비로소 완성하게 되었다.   이제 곧 출간될 나의 시조집의 제목은 《잔설서곡》이다. 이 책의 제목이 된 이 작품이 씌여진 경우도 이와 다름없다. 그것은 2005년 2월경이였다. 어느 하루 내가 편집실창문에서 밖을 바라보노라니 앞건물 뒤쪽 후미진 곳에 허연 눈이 그대로 쌓여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이제 따뜻한 봄이 오면 곧 사라질 잔설의 신세가 애처롭기만 하였다. 그러나 잔설이 녹은 그 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이 다시 태동할것이 분명하였다. 그래서 나는 《잔설이 더운 피 흘릴 때 봄풀이 일어서는 소리를 신경살려 듣는다》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되였다. 이 구절을 본 한 편집실의 젊은 친구가 이런 건의를 하는것이였다. 우선 제목에 《서곡》을 보태고 《더운 피》라는 단어대신 《투명한 피》로 바꾸는게 좋겠다는것이다. 나는 그 친구의 말에 수긍이 가서 대뜸 그 친구의 건의대로 원고를 고쳐보았다. 그러고 다시 보니 훨씬 이미지가 돋보였다. 현대시를 창작하는 젊은 시인들은 시적공간이 넓고 사유가 다채로와 언어구사에서도 날카로운 점이 있다. 이는 우리 시조시인들에게 계발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신작을 쓰게 되면 주변의 젊은 친구들의 의견을 귀담아들어본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계발을 받기때문이다.   이렇게 창작된 시조가 3년사이 근 100여편에 이르게 되였다. 그리고 이 작품들로 시조집 한권 출간할 욕심도 생기게 되였던것이다. 그러나 정작 시조작품집을 묶으려고 원고를 정리하면서 운률과 이미지에서 부족한 작품이 수두룩한것을 발견하게 되였다. 하여 아깝지만 10여수의 작품을 원고더미에서 덜어내지 않을수 없었다. 자기도 자신이 없는 작품을 시조라고 내놓으면서 편수만 불린다는것은 이제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루가 되기때문이다.  여기까지 적으면서 나의 시조사랑의 궤적을 되돌아보았다. 남들이 말하는것처럼 내가 시조시단의 《새싹》인지는 알수 없지만 아무튼 수십년간의 시조사랑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한것만은 틀림없다. 나더러 시조시단의 《새싹》이라 하는데 그렇든 그렇지 않든 훌륭한 시조시인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결심은 흔들림이 없다. 늘 새로운 모습을 보이는 영원한 《새싹》이라면 더욱 좋지 않겠는가. 지켜봐주시기 바란다.   2007년 11월   2007년 12월호
634    시인 - 김인선 댓글:  조회:4829  추천:1  2015-03-14
                                              (우측 김인선 시인, 좌측 석화 시인) 회억과 축하                    —청년시인 석화의 첫 시집《나의 고백》을 받고                                                                                         김인선   상해에 갔다가 돌아오니 석화의 첫 시집 《나의 고백》이 나를 기다렸다. 큰 봉투에 넣어 나의 책상우에 가져다놓은것이였다. 너무나도 눈에 익은 시들이였다. 한수한수 주옥같은 시들을 보노라니 나의 눈앞에는 석화의 우둑진 몸집이 떠올랐고 귀에는 석화의 웅글진 목소리가 맴을 쳤다. 내가 연변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석화가 이미 조문학부 3학년 학생이였다. 그때 마침, 연변대학 학생들이 자체로 “종소리”란 문학써클을 조직하였는데 나와 석화도 초청을 받아 참가하게 되였다. “종소리”문학써클이 설립되던 날이다. 모두들 자기소개를 했기에 신문잡지에서 이름만 익숙히 보아오던 사람들이라 인ㅊ츰 알게 되였다. 회의가 끝나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으나 나와 석화만은 서로 약속도 없이 그자리에 앉아 조용히 만나기를 기댜렸다. 아마 그 모슨 보이지 않는 선이 우리 둘의 마음을 서로 한데 이어 동여매놓은 모양이다. 그날 우리 둘은 시내로 나와 유보도로 걸어가며 시에 대해 끝없이 담론했고 저녁엔 식당으로 들어가 취코록 마시며 마음을 주고 받았다. 그날부터 우리 둘은 서로 찾아 다니며 함께 교정의 라이라크숲속에, 운동장에, 교사옆 풀밭에 영원히 지울수 없는 발자국을 남겼다. 1958년 7월 4일, 룡정에서 태여난 석화는 소학교와 중학교를 화룡에서 다녔다. 중학시절에벌써 《연변일보》에 처녀작을 발표한 석화는 지금까지 시 150여수, 가사 200여수, 수필 5여편을 국내외의 신문간행물, 출판물과 방송 및 텔레비죤에 발표하였다. 그가운데 시 “나의장례식”은《아리랑》문학상을, “벗들아, 우리의 이름은 청춘”은《연변일보》응모상을, “우리는 개인가”는《두만강여울소리》시인상을, “도시속의 시골사람들”은《압록강》문학상을, 수필 “천안문광장에 시들이 날아든다”는《연변일보》수필문학상을 탔다. 그외에도 가사 “눈우에 쓴 이름”이 연변주정부《진달래》문예상을, 가사 “동동타령”, “얼른가요”가 연변예술절작품상을, 가사 “바람타령”, “어머니생각”이 제1차전국조선족성악콩클작품상을 가사 “사랑은 영원히”, “누나생각”, “명랑히 삽시다”, “돌다리” 등이 연변인민방송국《내가 즐기는 노래》추천상을 탔다. 전국제1차조선족성악콩클작품평의 위원, 흑룡강음악가협회, 흑룡강방송국《익강컵》가요작품콩클작품평의 위원을 담당한적이 있었던 석화는 중국 북경국제방송국의 취재를 받았으며 또 30여분간의 프로로 그가 작사한 가요들이 소개되였다. 석화는 또《연변일보》에“가사문학의 새 지평선을 향하여”란 제목으로 소개되였고 연변텔레비죤프로의 청년작가특집에도 소개되였으며 전국제3차청년작가회의에도 참가하였다. 석화의 시 “나의 장례식”, “담배”, “김삿갓아저씨 디스코를 추신다”등이 평론계의 주목을받아 신문잡지들에 평론문이 실렸다. 석화는 시창작에서뿐만아니라 가사창작에서도 커다란 성과를 따냈다. 그는 중국 북광음향출판사에서 출판한 노래테프 “주소없는 편지”(김은희 노래), “진짜사나이”(리호원 노래), 기타가수 김상운외 윤행성, 구련옥, 한해연, 유병걸,림송철 등이 부른 노래의 10여개 테프의 가사와 록음테프 “연변의 노래”의 설화, “중국10대가수연창회” 각본을 썼다. 평론가 최삼룡선생은 시집의 서문인 “석화와 그의 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의 고백》, 이 시집 이름이 벌써 청년시인의 주체의식의 각성을 잘 과시하고있다. 다른 사람의 얼이 아니라 “나의 얼”, 다른 사람의 노래가 아니라 “나”의 노래, 다른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나”의 고백이라는것을 석화는 세상사람들에게 힘주어 내세우고싶던 모양이다. 바로 여기에 새로운 력사시기에 성장한 청년시인들의 새로운 철학이 있으며 새로운 미학이 있으며새로운 시가 있는것이다. 여기까지 쓰고나니 한가지 일이 떠오른다. 대학시절의 어느날, 업간체조시간에 여럿이 빙 둘러서서 배구뽈으 ㄹ가지고 노는데 석화가문득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찾아왔다. 내가 알은체 하자 석화는 보풀이 인 나의 눈에 너무나도 익을 자그마한 목책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나에가 갓 쓴 “나의 노래”란 시를 조용히읽어주는것이였다.   나는 이 땅에 노래부르기 위해 태여난 사람   허나 그 노래는 다만— 그리운 님. 님에게만 바쳐지는것이랍니다.   석화는 우수한 청년시인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좋은 시 한 수 쓰고는 서로 기뻐하며 축하해주던 그때처럼 나는 석화의 첫 시집《나의 고백》을 받아안고 석화에게 충심으로 되는축하를 보내며 앞으로의 문학창작에서 열매로 가득찬 새 언덕에 오를것을 간절히 바라는바이다.   《길림신문》1990년 5월 3일 목요일 제3면    
633    시인 - 김성우 댓글:  조회:4492  추천:0  2015-03-14
[경북일보]「아침시단」 (2011년 7월 11일,월요일자) 김성우 시- 돌   김 성 우 당신만큼 가식이 없었으면 당신은 가식이 없다 드러낸 대로 벌거벗은 채로 씁쓸하니 대범하다 어떤 때는 억울하게 얻어맞고 터지고 갈라져서 만신창이 되어도 붕대 감을 줄도 모르고 엄살도 모르고 현대멋으로 양장할 줄도 모른다 꽃이면 꽃인가 보다 나비이면 나빈가 보다 나는 돌인가 보다 이런 식으로 화려한 경력을 꾸밀 줄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의 속마음 누가 알랴 당신의 꿈은 더욱 모른다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근무,시인, 퇴임.     -돌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세계는 인간세상 다름 없다. 그러나 돌은 생각이 없는게 아니라 사상을 모르는게 아니라 단지 침묵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질문인가. 돌이 모여 성(城)이 되고 산을 만드는 것을! 인간은 가고 없어도 돌은 몇 천년을 견디며 역사의 산 증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글 : 서지월시인)      
632    시인 - 고 리명재 댓글:  조회:4227  추천:0  2015-03-14
지평선   하늘가 지평선 아득한 저쪽에 휘연히 밝으려는 대지의 려명을 보라, 그 빛에 들으라 그 마음으로 웨쳐라 힘찬 성대로 달려라 해가 뜰 지평선으로 막힐것 없는 새벽의 대지에서 젊음의 노래를 높이 부르라   1940년 봄 리명재 시인  
631    <<두만강여울소리>>는 영원히... 댓글:  조회:4174  추천:0  2015-03-14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의 흐름  정몽호  그 누가 말했던가 《시는 강물》이라고. 《두만강여울소리》가 흘러 20년, 절벽의 에돌이에 사품치는 사색을 드리우고 날아예는 물새들, 정서깊은 의상들이 펼치는 생소로운 세계…  동북3성 조선족시의 탐구회—《두만강여울소리》가 도문에서 열리게 된것은 어찌보면 우연한것 같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중국조선족 시 발전의 필연성의 결과로서 력사적인 해탈과 지역성적인 각성이 새로운 시 형식의 탄생을 잉태하고있는것이였다. 진리의 표준에 대한 토론은 세계관에서 관념해방운동이였다. 권위자의 리론에 대한 간단화와 절대화에서 해방되는것은 문예관해방을 예고하는 새벽종소리였다. 진리는 실천의 절대성과 상대성의 모순속에서 발전한다. 예술은 창작실천의 절대성과 상대성의 모순속에서 자기의 발전규률을 더듬어간다.  관념해방은 자아성찰을 동반한다. 시인들을 놓고말하면 이것은 뼈저린 몸부림이였다. 한때 우리에게는 이름도 성도 없었다. 성도 《정치》요 이름도 《정치》였다. 개성이 없는 삶, 개성이 없는 시, 참말로 처절한 비극이였다.  바로 이런 몸부림과 해탈속에서 도문에 살고있는 시 애호자들(김파, 길철학, 김수복, 정몽호 등)은 80년대초부터 살릉식으로 시 토론을 했다. 시는 예술이지 정치가 아니기에 시의 본체로 돌아가서 감정의 표현형식을 탐구하는데 중심을 두었다. 그들은 중국시들의 새로운 형태와 서방시들의 이미지형태를 참고하면서 자기의 창작사유가 굳어져 객관사물을 재현하는데 머물러 있다는것을 느꼈다.  도문시 당교에서 교학하던 정몽호가 도문시문련 비서장 겸 문화관 관장으로 임명되여오자 그들의 창작활동은 더 활발해졌고 조직적인 활동으로 전이되였다.  제1회《두만강여울소리》  1984년 《5.4 청년절》을 맞으면서 도문시문련에서는 연변시인들을 모시고 중학생들과 함께 시랑송모임을 가질 준비를 했다. 5월 3일 오후, 김성휘(원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는 임효원(원로시인)선생님을 모시고 도문으로 왔다. 김파와 김성휘, 임효원, 정몽호 등 네사람은 시랑송과 작품토론을 할 문제를 상의했다. 랑송회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달겠는가? 생각끝에 김성휘가 《두만강여울소리》라 달자고했다.  김성휘가 사회하고 임효원선생님부터 자기의 탐구작을 랑송했다. 따라서 앉은 순서로 김파, 김문희, 김철학, 정몽호, 김성휘가 랑송하고 서로 시적 감정을 교류했다.  5월 4일, 김철, 김동호, 최문섭, 리행복, 림창연 등 시인들이 더 가첨하여 도문시 고무공장구락부에서 《두만강여울소리》의 이름으로 시인들과 중학생들의 랑송모임을 가졌다.  저녁에는 정몽호집에서 온돌사교무가 있었다.  제2회《두만강여울소리》  제2회 모임은 사전에 준비가 충분했다. 제1회 모임이 끝난후 김성휘, 김파, 정몽호 등은 여러가지 문제를 토의했다. 참가범위는 연변 외 동북삼성으로 하고 주체단위는 연변작가협회와 도문시문련이 련합으로 하기로 했다. 시인들 외에 평론가들도 참석해야 모임의 질을 보장할수 있다고했다. 또 작품발표를 위해서 잡지와 신문, 방송단위도 청하기로 했다. 준비위원회를 토론했는데 7명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김성휘(작가협회), 리상각(연변문예), 김동호(연변문예), 림창연(문학과 예술), 최룡관(연변일보), 조룡남(아리랑총서), 정몽호(도문시문련).  자금문제는 정몽호가 책임지고 후원인을 물색했다. 도문시정치협상회 김학관주석, 도문시민족사무위원회 주임 허상근, 시선전부, 민족사무위원회의 지지와 협찬이 있었다.  시간: 1985년 6월 6일~10일  지점: 도문시  참가인수: 30여명(연변, 길림, 목당강, 할빈지구)  주제 시관념의 개방  1. 전통과 계승.  2. 현대시의 사고방식과 우리 시문학.  6월 6일, 우리 시의 현상태를 분석하고 한국의 현대시 한수를 놓고 분석과 쟁론이 있었다. 저녁에는 《두만강여울소리》라는 제목으로 참석한 사람들은 제각기 시를 써서 대회측에 바쳤다. 시를 바친 사람은 18명이였다.  제2회 모임에서는 시의 특수성을 강조했다. 시란 언제나 작자의 주관세계의 정서적인 표현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자아의식을 제고하며 현대식 사유방식을 수립해야 한다고들 했다. 그러자면 시인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인식능력을 제고하기 위해서 새로운 사조들을 학습해야 한다고들 했다.  제3회《두만강여울소리》  시간: 1996년 6월 16일~20일  지점: 도문시  참가인수: 40여명(심양지구를 포함).  운영경비: 도문시문련에서 모금한것을 위주로 흑룡강성민족출판사, 연변인민출판사, 연변작가협회, 도문철로교육위원회 등 단위에서 협찬.  제3회《두만강여울소리》는 우리 시단에 처음으로 격렬하게 전개된 《백가쟁명》의 탐구회였다. 모임에는 28수를 탐독했고 중심으로 김정호의 시 《추억》을 놓고 쟁론이 분분했다. 우리 조선족시단으로 놓고말하면 개혁개방후 처음으로 창출된 몽롱시였다.  고요한 샘물우에 / 둥근 달이 조용히 선다 / 두 줄기 그리움이 / 깊이 뿌리내랜 가운데 / 뿔 달린 사슴 하나 / 생동한 꿈이 되어 서있다 / 성숙된 꿈속에 / 아득한 그의 모양이 몽롱히 비칠 때 / 락엽 몇잎이 소리없이 / 지친 생각위에 떨어진다.  — 김정호 《추억》 전문  이 시를 놓고 제3회《두만강여울소리》에서 쟁론이 끝난것이 아니라 신문과 잡지에서도 쟁론을 벌렸다. 특히 잡지 《문학과 예술》에서 1년동안 부동한 견해를 실었는데 결론은 짓지 않았다.  제4회《두만강여울소리》  시간: 1987년 6월 4일~8일  장소: 도문시  참가인수: 30여명(동북3성 시인과 평론가)  운영경비: 도문시문련 모금. 도문시 리종덕 헌납. 그외 연변교육출판사, 흑룡강민족출판사, 연변작가협회, 도문철도분국교육위원회 협찬.  북경에서 김철, 한창희 장춘에서 남영전씨가 축전을 보내왔다.  회의에서는 사전에 22명 시인들의 탐구작을 묶어서 나누어주고 처음으로 무기명투표방식으로 수상작 5수를 선정. 김성휘의 시 《흰옷 입은 사람들》, 김정호의 시 《희망》, 조룡남의 시 《벗의 무덤앞에서》, 최문섭의 시 《땅》, 김학송의 시 《봄•산촌•아이들》.  모임에서는 수상작품을 분석하면서 시의 개척은 사유의 개척이며 표현의 개척이라는것을 그리고 사유의 개척은 백화제방의 인식론적기초로 된다는것을 느꼈다.  제5회《두만강여울소리》  시간: 1988년 6월 10일~13일  장소: 도문시  참가인수: 40여명  운영경비: 4차와 같이 해결했고 그외에 리종덕경리가 《장수문학상》의 이름으로 손시계 6개를 수상자들에게 선물했다.  제5회에서는 문학평론의 질적제고를 위해 평론우수작도 뽑기로 했다.  시랑송모임은 제1회부터 설정했는데 그번 회의에서도 도문시 중학생들과 함께 시정부구락부에서 랑송모임을 가졌다. 랑송모임에는 리근전주석과 리정문선전부장이 참석.  모임에서는 탐구작 20수와 평론 4편을 탐독하고 시5수와 평론 한편이 수상했다.  수상작: 최룡관의 《엄마야》, 김성우의 《랄라리인생》, 리임원의 《떠나버린 풍경》, 석화의 《나와 나의 동갑들에게— 우리는 서른살 개띠다》, 김학송의 《하늘에서 보는 땅》, 한춘의 평론 《감정에는 국경선이 없다— 북방시단의 망향시에 대한 고찰》.  제5회 모임이 끝난후 지도부에서는 6회모임을 토의했다. 제6회부터는 연변 8개시(현)를 돌면서 개최하기로 했다. 먼저 룡정으로 지점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제6회《두만강여울소리》  시간: 1999년 6월 17일~20일  장소: 룡정시 산합진  참가인수: 30여명  준비위원회: 한수동, 김재권, 김응준, 리광평, 리룡남, 림창연, 정몽호,  최삼룡  협찬: 룡정시민족사무위원회, 룡정시문련  후원: 룡정시인민정부  제6회와 제7회모임을 위하여 림창연이 동분서주하고 경제문제, 활동지점, 활동내용 등을 조직했다.  활동내용: 시 평론발표, 시 평의, 시 토론, 좌담.  20일 오전, 윤동주묘지 배알. 오후, 룡정시고중에서 시랑송 모임.  시 평선은 22수중에서 5수를 우수작으로 선정.  김정호의 시 《백지 한장》, 최룡국의 시 《비가》, 김철학의 시 《중년생각》, 림금산의 시 《산으로 가는 소녀야》, 박문봉의 시 《밤》.  제7회《두만강여울소리》  시간: 1990년 6월 22일~25일  장소: 룡정시  참가인수: 30여명  준비위원회 주임: 리상각, 리준일  위원: 김동호, 김재권, 리용남, 림창연, 석금철, 신학산, 장정일,  정몽호, 조룡남, 최삼룡.  협찬: 룡정시민족사무위원회, 룡정시문련  후원: 룡정시인민정부  활동내용: 두만강답사와 참관, 김성휘 옛집 참관, 룡정의 노래창작모임, 룡정고중학생들과 시랑송.  작품토론정황: 구체적으로 작품을 분석하면서 탐구했지만 쟁점은 자유화와 몽롱시관계문제였다. 몽롱시가 군중을 탈리하는것은 시실이지만 자산계급자유화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번 모임에서는 여러가지 원인으로 우수작을 선정하지 않았다.  제8회《두만강여울소리》  시간: 1991년 6월 20일~24일  장소: 훈춘시  참가인수: 30여명  후원: 훈춘시인민정부  활동내용: 장령자 견학, 훈춘의 노래 모임, 당창건 70돐기념 랑송회.  시탐구토론의 중심의제는 주선률, 주선률의 필요성, 주선률의 내용과 주선률을 어떻게 노래할것인가 등 문제들을 토의했다. 주선률이란 처음 듣는 개념이여서 처음에는 생소한 감을 주었으나 주요모순과 차요모순의 철학적인 견해로부터 리해가 갔다. 또 주요모순과 차요모순의 련계로부터 주선률만 노래할것이 아니라 기타 제재도 노래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이번 모임에 내놓은 20여수의 시 작품가운데 독창성과 예술성이 높은 작품들도 있었으나 평선은 하지 않았다.  제9회《두만강여울소리》  시간: 1992년 6월 12일~14일  장소: 훈춘시  참가인수: 30여명  후원: 훈춘시인민정부  준비위원회: 리춘식, 박영숙, 최성우, 리상각, 박문화, 정영석, 최충은, 허룡,  최삼룡, 전국권, 리삼월, 김응준, 김동호, 김광명, 김성우.  활동내용: 평론발표와 좌담 (최삼룡, 전국권, 리삼월이 평론을 발표).  탐구시 20여수.  중심의제는 개혁개방과 시창작문제. 개혁개방은 문학창작의 사회적인 큰 문을 열어주고 사상해방의 필연성을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창작사상이 아직도 해방되지 못하고 전통적인 사유방식에서 탈리하지 못한것이였다. 다른 한 방면은 현대파사조에 대한 식별능력이 차한것이였다.  이번 모임에서도 우수작을 평선하지 않았다.  시인 일요일에는 훈춘시 사타자를 참관.  훈춘시 제1고중에서 시랑송.  제10회《두만강여울소리》  시간: 1993년 6월 25일~26일  장소: 도문시  참가인수: 40여명  준비위원회: 조룡남, 김동호, 림연, 최룡관, 리상각, 정모호.  활동내용: 《두만강여울소리》기념비 제막식(연변에서 처음으로 되는 시탐구회의 기념비). 오후에는 시작품을 토론. 주제는 시대성과 창작문제. 이번 탐구작품들중에는 좋은 작품들이 있었으나 역시 평선을 하지 않았다.  제11회《두만강여울소리》  시간: 1994년 6월 10일~12일  지점: 도문시  참가인수: 40여명  후원: 도문시인민정부, 리종덕경리, 기독교의 김영일장로.  활동내용: 정몽호 제10회《두만강여울소리》 를 회고, 10년동안의 시창작 로정과 현황을 담론, 《두만강여울소리》기념비를 참관, 도문시5중에서 시랑송모임.  탐구작 20여수중에서 우수작 3수를 평선.  김동진의 《황혼의 락엽》, 리임원의 《여름의 풍경》, 조광명의 《가수》.  제12회《두만강여울소리》  시간: 1994년 6월 21일~23일  지점: 화룡시  참가인수: 30여명  주최: 시분과, 평론분과  후원: 화룡시인민정부  활동내용: 선경대 유람, 작품토론, 우수작품 평선. 시 17수중에서 3수를 평선하고 평론 5편중에서 한편을 평선.  우수작: 리성비 시 《님》, 리임원 시 《시골》, 석화 시 《돌 하나—《두만강여울소리》시비 제막에 부쳐》.  회의에서는 현대파시의 결함을 지적하고 알기 쉬운 시를 쓰자고했다.  제13회《두만강여울소리》  시간: 1996년 6월  지점: 화룡시  참가인수: 30여명  주최: 시분과, 평론분과  후원: 화룡시샘물돌나라공장 경리  작품 20수. 시 3수를 우수작으로 평선.  석화 시 《거울을 닦습니다》, 림금산 시 《산의 풍경》, 김문회 시 《비 내리는 도시》.  제14회《두만강여울소리》  시간: 1997년 6월 18일~20일  지점: 화룡시아동저수지  참가인수: 30여명  주최: 시분과, 평론분과  모임에서는 시 15수와 평론 4편을 토론했는데 시 3수와 평론1편을 평선.  허룡구 시 《봄날에》, 석화 《그날의 외출》, 김동진 시 《펑펑 함박꽃》, 정몽호 평론 《반쪽이래도 제맵시다》.  제15회《두만강여울소리》  시간: 1998년 6월 25일  지점: 연길시  참가인수: 40여명  주최: 시분과  활동내용: 6월 25일 연길백산호텔에 시인들과 평론가들이 모여 《두만강여울소리》에서 수고한신 로시인들에게 풍경화 한폭씩 드리고 좌담. 로시인들로는 김동호, 김응준, 리상각, 조룡남, 정몽호였다.  제16회《두만강여울소리》  시간: 1999년 6월 4일~5일  지점: 돈화시  참가인수: 40여명  주최: 시분과, 평론분과, 돈화시민족사무위원회  활동내용: 정각사, 발해국 저혜공주 묘지 참관.  작품토론: 시4수와 평론 1편을 평선.  김철학 시 《도약》, 김학천 시 《1999년 4월 22일》, 리상각 시 《돼지귀에 경읽기》, 김학송 시 《산일기》, 김관웅의 평론 《오늘 중국조선족시인들은 무엇을 써야 한다?》.  제17회《두만강여울소리》  시간: 2000년 6월 27일  지점: 안도현 명월진  참가인수: 30여명  주최: 시분과, 평론분과  활동내용: 탐구작 토론과 평선. 평론가들의 기조 발언.  30여수 시에서 3수가 평선.  리순옥 시 《바람》, 김철호 시 《어느 즐거운 날》, 김현순 시 《산에 가는 리유》.  제18회《두만강여울소리》  시간: 2001년 6월 15일~16일  지점: 안도현 석문진  참가인수: 30여명  주최: 시분과, 평론분과, 안도현석문진정부  활동내용: 주제는 생태환경과 생명관계. 시 탐구작 토론전에 김성호의 《생태환경과 생명문화》보고를 청취. 한국 황송문교수의 《시인과 시》란 특강.  작품평선에서 시 3수를 선정.  김추월 시 《대비》, 김현순 시 《나뭇잎》, 최기자 시 《강자의 미로》.  제19회《두만강여울소리》  시간: 2002년 6월 5일(세계환경일)  지점: 연길시  참가인수: 40여명  주최: 시분과, 평론분과, 연길시환경보호국  주제: 생태환경과 생명시  활동내용: 최삼룡의 《생명시 개설》을 청취. 우리의 생명시의 양상을 자유토론. 《자연의 목소리》라는 이름으로 연변1중에서 시랑송모임. 시 3수를 평선.  정몽호 시 《꾀꼴새》, 김학천 시 《둥근 세상과 별로 둥글지 않은 인간》, 김문세 시 《무제》.  제20회《두만강여울소리》  시간: 2003년 5월  지점: 도문시  참가인수: 50여명  주제: 회고와 전망  이번 모임은 《두만강여울소리》 20돐 기념행사로 된다. 이 기념행사를 위해서 수상작품집을 출판. 시 30여수중에서 4수를 선정.  김경희 시 《고요한 일상에 이는 무늬》, 한영남 시 《가을이면 푸른 하늘을 걸어서 오시는 손님》, 윤청남 시 《내 마음》, 주향숙 시 《바람》.  20회 모임에서 18회의 탐구작과 수상작품을 읽으면서 20년동안의 중국조선족시단의 흐름을 다시 한번 진맥하게 되였고 또 《두만강여울소리》 발기와 과정을 회고하게 되였다.  1. 우리는 반영론을 부정하는 바람속에서 기계적인 반영론을 비판하면서 능동적인 반영론을 문학의 본질로 견지해왔다. 능동성이란 대상의 객관성을 긍정하면서 주관성, 초월성, 인화성(人化性), 상상성을 규률로 보는 반영이다. 이것은 우리 시가 다양화한 창작방법을 승인하고 제창하는 인식론적기초다.  2. 우리 시는 다양화한 흐름속에 제 갈기를 세우며 제 노래를 부른다. 현실주의 작품으로는 최룡관 시 《엄마야》, 김성우 시 《랄라리 인생》등 시편이 주는 계시가 크다. 현실주의 창작방법으로 좋은 작품을 쓸수 있는데 우리는 현실주의창작방법의 능동성에 대한 연구가 빈약하다.  랑만주의창작방법으로서는 김철학 시 《도약》이 돋보인다.  현실주의와 상징이 결합된 작품으로는 석화 시 《나와 나의 동갑들에게— 우리는 서른살 개띠다》와 김성휘 시 《흰옷 입은 사람들》 등이다.  랑만과 상징이 융합된 작품으로는 김학송 시 《하늘에서 보는 땅》이다.  상징주의창작방법으로 쓴 시로서는 김정호 시 《추억》과 《백지 한장》, 김문희 시 《비 내리는 도시》, 김동진 시 《펑펑 함박눈》, 조광명 시 《가수》, 석화 시 《돌하나》, 《두만강여울소리 기념비에 부쳐》, 김경희 시 《고요한 일상에 이는 무늬》 등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표현주의 작품으로는 김철호 시 《어느 즐거운 날》이다. 지금 우리 시단에 표현주의 작품이 적은데 김철호 시는 하나의 창작방법을 제시해준다. 기괴하고 황당한 수법은 매력적이다.  생태시로서는 리임원 시 《떠나버린 풍경》이다.  우리 시작품은 상을 받은 작품이라하더라도 결함이 적지 않다. 문학의 심미목적은 심원한 의경창조다. 인생감, 력사감, 우주감이 심원한 작품이 적다. 의경창조보다 언어창조에 힘쓴 작품들이 있다. 유미주의경향을 극복해야 할것이다.  제재방면에서 민족의 현실을 쓴 작품이 많지 않다.  2003. 3. 15   
630    시인 - 리문호 댓글:  조회:4958  추천:0  2015-03-13
[생활의 지혜] 五福이란?       글 •리문호  시인/심양조선족문학회 부회장, 심양 시조문학회 부회장      이란  본래 의 에서 나온 말이다. 사람들은 오복을 많이 말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오복이 무었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한국에 있는 동안 한 대회에서 강연하면서 물어 보았더니 무슨 치복이요, 처복이요, 자식복이요 하며 각기 부동한 답복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오복이란 무었인가를 조금이라도 알릴 필요성을 느껴 아래에 서술해 보려 한다.    첫째 복은 장수(長壽 )이다.  즉 오래 살아야 한다. 인명무상(人命無常)이란 말이 있다. 어떤 이는 태아로 죽고, 자라면서 요절하고, 자연 재해와 각종 사고, 병으로 제명에 살지 못 하고 죽는다, 특히 현대에 와서는 환경의 오염과 생태의 파괴로 인해 각종 질병이 인류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 그리고 병충해와 먹거리를 쟁탈하면서 농약을 많이 써 우리가 영양소를  섭취하는 음식과 밥상도 안전하지 못하다. 내가 알기로는 축산에서 항생제를 많이 쓰기에 내성균이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또한 무균 육아는 오히려 아동의 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는 장수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장수는 재부와 학식, 직위와 총명재질, 미모와는 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란 말이 있다. 수명은 유전적 인소와 생활 습관, 생활 환경과 마음 갖춤과 관계가 있다. 현대 의학의 발전과 생활에서 질의 개선은 장수의 조건을 열어 놓는다. 무병장수는 무릇 이 세상에 온 사람들의 바람인것이다.     둘째 복은 부귀(富貴)이다.   부귀는 상대적 부귀와 절대적 부귀가 있다. 물질 재부의 향유는 상대적 부귀요 마음의 부귀는 절대적 부귀이다. 물질 재부가 많고 관직이 높다고 해서 다 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부귀는 오히려 화근이될수 있다. 관직이 높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비리로 인해 패가망신 한다.정신적 재부를 가지고 여유있게 살아 가는 사람이 복이 있다. 정신적 재부를 인(仁), 의(義), 리(理), 지(智), 신(信)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물질적 재부와 정신적 재부를 다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부귀하다고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보기가 드물다.   세째 복은 강녕(康寧)이다.   편안 할 강에 편안 할 녕이다. 심신이 편안해야 한다는 말이다. 7정6욕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고 있다. 현대 생활의 압박감, 빠른 절주, 노동과 휴식의 불균형, 등은 사람들의 심신을 해치고 있다. 망상증과 우울증, 정신분렬증 상사병 등 자살률이 높은것도 이 원인의 하나이다. 탐식, 탐욕, 시기, 질투, 그리고 일에 부닥치면 자기 부터 생각하는 소극적인 부면(負面) 성격의 소유자는 강녕할 수 없다. 모든 사물에 적극적인 태도, 열정적인 태도, 대범한 여유를 가지며 베풀줄 알고  버릴줄 아는 사람만이 강녕할수 있다. 즉 자기의 심신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강녕할수 있다. 이황 선생의 은 마음을 다스리는 좋은 교재이다.      네째 복은 호덕(好德)이다.   좋은 덕이란 세가지 방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덕을 쌓고 덕을 베풀고 덕을 입는것이다.    덕이란 무엇인가 ? 에서는 지(智), 인(仁), 용(勇)  세가지를 합쳐 덕이라 하였다. 그 중  인애(仁愛)가 없으면 지와 용은 사회를 위해한다고 하였다   에서는 온(溫,온화하고 유연한 것), 량(良선량하고 인자한 것 ), 공(恭성근하고 공경한 것), 검(儉,검소하고 근로한 것), 양(讓겸손하고 사양하는 것) 이라고 하였다.    호덕이란 자기 자신에 대해 덕을 쌓아야 할 뿐만 아니라 부모, 처자, 친척, 옆집, 친구동료들 에게도 덕을 쌓고 베풀고 덕을 입어야 한다. 이는 사회 공동체에서 한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 받을 수 있는 기본 범주이다.  나는 재부를 모으는것 보다 자녀 교육이 가장 큰 로후 대책이라고 말한적이 있다. 우리 주위에는 비록 한 때는 가난했지만 자녀 교육을 잘 시켜 로후를 여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그러나 한 때는 부유했지만 자녀 교육을 홀시 한데서 무너진 가정도 허다하다.     다섯째 복은 선종(善終)이다.   고종명(考終命)이라고도 하는데 죽을 때 잘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죽음에는 여러가지 죽음이 있다. 정의를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죽는 헌신적인 죽음은 영광스런 죽음인것이다. 사고로 인해 죽는 죽음은 불의의 죽음인것이다. 사회에 죄를 지어 사형 당하는 죽음은 개 죽음이다.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는 죽음은 비명인 것이다. 자살로 죽는 것은 경생의 죽음이다.    총적으로 사람은 죽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보편적 의미에서의 선종은 자연사인 것이다. 즉 늙어 죽는 것이다. 죽을 때 장기적으로 고통에 시달리다 죽는것은 선종이라 말할 수 없다. 빚 더미에 앉아 죽는것은 선종이라 말할수 없다. 전통적 관념에서 객사도 선종이라 말할수 없다. 지금은 고독사가 많은데 선종이라 말할수 없다. 좀 애매한 말로 말하면 여유롭게 살다가 여유롭게 고스란히 죽는것이 선종이다.   사람마다 다 오복을 완벽하게 갖추기란 쉽지 않다. 인생에 대한 존재 가치의 인식에 따라 태도와 내용도 변화가 있다. 즉 매 사람의 세계관과 인생관, 가치관에 의해 오복에 대한 리해도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 마다에게 오복이 래림하기를 바란다.   제11회 연변지용제가 연변TV방송국에서 기자: [ 량영철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07-08-28 09:59:55 ]  (우측 두번째 리문호 시인) 연변지용제운영위원회 주관, 한국옥천군청 옥천문화원 주최로 《제11회 연변지용제》가 26일 오후 연변TV방송국 제1스튜디오에서 열렸다. 이번 지용제는 왕년과 같이 제1부 문학제와 제2부 음악제로 나뉘였는데 문학제에서는 료녕적 시인 리문호의 시집 《자야의 골목길》출간식과 함께 제11회 지용문학상 시상식이 있었고 제2부 음악제에서는 연변가문단, 연변연극단, 연길시구연단, 연변대학 예술학원, 연변방송국과 연변TV방송국 방송예술단, 중앙소학교 등 여러 문화단체와 학교에서 1시간 반가량 축하마당을 펼쳤다. 문학제에서는 연변지용제 운영위원회 허룡석회장이 《새로 탄생된 연변작가협회 제8기주석단이 맞이하는 첫 지용제문학상》인만큼 그 의의가 사뭇 깊다고 말했고 수상자 리문호시인은 《시의 갈림길에서 피투성이로 얼룩져 방황하면서 시문학의 전통성과 사실주의방향의 발전을 위해 노력을 시도하기도 했다. 본 시집은 나의 혈흔이라 말할수 있다》고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제2부 음악제에서는 중앙소학교 어린이 46명이 출연한 《장고춤》이 이목을 끌었고 허광, 조만천, 임향숙, 렴수원 등의 열창이 흥을 돋구었으며 김문혁, 김경화의 소품 《동창생》은 현시대 리산가족의 비극을 그린 작품으로 관중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특히 리혜자(시 《유리창》), 오려란(시 《붉은 손》), 김일광, 고후자(시 《향수》)의 수준급시랑송은 참가자들의 절찬을 받았다. 리문호 시집 ”달구지길의 란” 출간       리문호의 다섯번째 시집 “달구지길의 란”이 료녕민족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달구지길의 란”은 시인이 근년에 창작한 131수의 시작품을 7부로 나누어 묶었다.   리문호시인은 길림성 집안현 태상촌에서 출생, 1970년 “연변문예”에 처녀작을 발표하면서 데뷔했다. 시집으로는 ”달밤의 기타소리” ,”징검다리”, ”팔공산 단풍잎” (한국), ”자야의 골목길”등이 있으며  “정지용문학상”등 굵직한 상들을 수차 수상했다.   연변작가협회 회원, 로녕성 작가협회 회원으로서 심양 조선족 문학회 시분과 주임직을 맡고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1년 5월 2일    
629    시인 - 박설매 댓글:  조회:3959  추천:0  2015-03-13
인간과 인생의 사이에서 (박설매.작) 누구는 내가 없는게 없다고 한다 집안좋고 학벌좋고 직업좋고 인물좋고 내가 나를 보면 아무것도 없다 돈도 없고 애인도 없고 빽도 없고 수단도 없고 구경 있는지 없는지 나도 모르겠다 간혹은 사는게 참 재미있다 자유와 풍족과 성취의 즐거움을 맛볼 때 사랑하고 사랑을 받을 때 그리고 더러는 질투를 받을 때까지도 간혹은 사는게 참 허무하다 창궐한 비리와 불공정을 마주하고 무기력한 개인을 느낄 때 세월과 력사속에 숙명적인 인생과 죽음을 느낄 때 그리고 더러는 너무 편안하기만 할 때에도 구경 재미있는지 허무한지 나도 모르 겠다 이런 내가 이렇게 인생을 사는것은 구경 무엇때문일까 무엇을 위해서일까 무엇이여야 할까 모종의 방식에 인간을 붙이고 모종의 시각에 인생을 붙이여 인간과 인생의 사이를 넘나들며 아무리 아무리 찾아도 확답이 없다 혹시 인간은 인생의 정답이고 인생은 인간의 정답일지도   (장백산잡지)
628    시인 - 고 김정호 댓글:  조회:4274  추천:0  2015-03-13
      2014/10/29 11:34 꿈많던 조선족 작가 유작 … 고선지 뒤늦게 출간 교통사고로 숨진 김정호의 한 풀어주려 부인이 마무리 작업 중국 사서 토대로 3부작 역사소설에 고선지 장군 일대기 그려 고구려 유민의 후예(後裔)로 태어나 당나라 장수로 이름을 떨친 고선지(高仙芝)의 삶이 조선족 출신 귀화작가가 남긴 유작을 통해 되살아났다.     쓴 故 김정호 작가   2012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작가 김정호(당시 63세)가 심혈을 기울여 쓴 3부작 역사소설 (도서출판 미르)가 최근 출간됐다. 중국동포 출신 문인답게 중국어와 한국어는 물론 한문에도 능했던 김씨는 중국 사서(史書)인 등을 토대로 150여 명의 역사 속 인물들을 지면 위로 불러냈고, 고선지 장군의 일대기는 이들과 함께 화려하게 그려진다. 소설은 으뜸가는 무예 실력으로 주목을 받은 소년 시절로 시작해 고선지가 장군으로서 우뚝 서는 고구려인의 기개를 담았다. 티베트군을 격파한 서역 파미르 원정과 이슬람군과 맞선 탈라스 전투 등 고선지의 활약상이 무게있게 다뤄진다. 작가는 생전에 써놓은 머리말에서「소설을 쓰기 위해 당대에 고선지가 활약했던 중국 서부를 수년간 오갔다」고 했다. 2008년 시나리오 청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소설 집필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으나 고된 과정 속에 해가 여러번 바뀌었다」고도 술회했다. 고선지(高仙芝)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에서 유민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후세에도 세계적인 명장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전쟁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한다. 헝가리 태생 영국 고고학자 마크 아우렐 스타인은 을 한니발이나 나폴레옹의 원정보다 위로 평가했다. 그런 인물의 삶을 소설로 녹여내기가 막막했다는 게 생전 작가의 얘기다. 서울대 백낙청 명예교수는 서평을 통해『시인이자 소설가, 평론가, 번역가로서 한국문학에 값진 이바지를 하던 김정호 선생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은 못내 안타까운 일』이라고 토로하면서도『다행히 작고하기 전에 그가 완성해놓은 소설이 간행되니 반갑기 그지없다』며 소설 출간에 의미를 뒀다. 작가는 생전 백낙청 교수의 문학평론집을 비롯해 고은 시인의 등 국내 여러 문인의 글을 중국어로 번역해 널리 알리기도 했다. 그의 소설이 뒤늦게나마 빛을 보게된데는 아내 김수안의 노력이 컸다. 2006년 남편과 함께 귀화한 김씨는 사랑하는 이가 母國 文人으로 꽃을 피울 무렵 돌연 사고로 떠나면서 가슴 찢어지는 슬픔을 안게 됐다고 했다. 평생을 함께했던 반려자를 잃은 것은 물론 文人으로서 도드라졌던 능력도 더는 볼수없게 됐기 때문. 그는 남편이 떠난 자리에 남은 소설 의 원고를 다시 꺼내봤다고 한다. 비록 세상에는 없지만 남편, 그리고 모국에서 글을 쓰고 싶어했던 작가의 한을 풀어주고 싶었고, 그렇게 소설 출간작업이 시작됐다고 했다. 하지만 소설 출간을 준비하는 동안 또 다른 비극이 찾아오기도 했다. 지난 5월 일어난 고양 버스터미널 화재 현장에서 큰아들을 잃는 변을 당한 것. 김씨는 10월29일『너무도 어려웠던 시간을 보내왔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역사소설 이후로 남편의 생전 작품을 출간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피력했다. 1949년 중국 지린(吉林)성에서 태어난 작가 김정호는 옌볜(延邊)대학을 졸업한 뒤 1980년 중문(中文) 창작으로 현지 문단에 등단했다. 그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는 등을 받는 등 현지 문학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 (서울=연합뉴스) 양정우 기자    故 김정호 작가의 역사소설 2012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작가 김정호가 심혈을 기울여 쓴 3부작 역사소설 가 출간됐다             김정호시인 중조문 대조 2011년 05월 19일  작성자: 허동식 梦的足迹                        꿈의 발자취 金正浩                                   김정호 1                          1 我曾是一朵云               나는 한송이 구름이였다   当苍天的梦破碎时           푸른 하늘 꿈이 깨여질 때 我便降落到大地             땅우에 하락되였다 十年                       10년 年年垒起的雪人周围         해마다 만들어놓는 눈사람 주위에 人与兽的脚窝               사람과 짐승의 발자국들이 重叠了黑白不清的照片       흑백이 뒤섞인 사진들을 겹쳐놓았다 我的脚印                   나의 발자욱은 忘却疼痛                   아픔을 잃고 睁着麻木的眼睑             감각을 잃은 눈길을 뜨고 躺着                       누워있다 旁边                       곁에는 是生锈的青春墓碑           녹이 쓴 청춘의 묘비가 서있다   2                           2 白花花的雪花               하얀 눈송이들은 是梨花迷人的梦么           배꽃의 아름다운 꿈이런가 白色的梦中                 흰 꿈속에서 我的笑                     나의 웃음이 飘飘摇摇                   흩날린다 落地雪白雪白似             땅에 하락되는 그것들은 没有价格的香粉             가격을 모를 분가루로 보인다     远处                       멀리 孤独的烟囱                 외롭게 서있는 굴뚝에는 升腾                       흰 연기가 缕缕白雾                   모락모락 피여오른다   3                           3 我这树叶                   나라 나무잎 被大树的咳嗽               아름드리 나무가 기침을 할 때 震落下来                   땅에 떨어진다 随秋风 被                  가을바람에 싣겨 带到安徒生的童话中         아데르쎈 동화속에 잠겨든다 突然                       갑자기 被狗叫声罩住               전해오는 개짖음 소리에 지지눌려 停留在田埂上               밭두렁우에 머무른다     我的心                     나의 마음은 被冻僵的田埂               차디찬 밭두렁우에 깔려 压碎了                     산산 조각나고 在射来的阳光里             내리쬐는 해빛속에 腐烂了                     무더기 거름으로 一堆肥料                   썩어버린다 探出一支新芽               새싹 하나가 哦 好冷                    아 춥다고 부르짖는다 4                          4 醋睡在                     눈사람 광장에서 雪人广场里的脚印           곤하게 잠자던 발자욱들이 醒来了                     깨여난다 醒来穿着皮鞋               두를 신고 狂热地读着                 큰 거리 광상곡을 大街随想曲                 미친듯이 읽는다   我该穿什么样的鞋好呢       나는 무슨 신발을 신어야 할가 脚趾缩进                   낡아빠진 운동화에 破旧的运动鞋               큰 발을 집어넣고 正在踌躇                   주밋거릴 때 远处                       멀리에서 响起了                     종소리가 钟声                       들려온다   5                          5 一轮明月                   휘영청 밝은 달이 漫游天庭                   밤하늘을 노닌다   是哪个猴子在敲锣           어느 원숭이가 꽹과리를 쳐서 山里的动物                 산속의 짐승들더러 纷纷跑过来                 앞을 다투어 뛰쳐나와 赏月                       달구경을 벌리게 하는가   一阵齐唱摇晃夜晚           짐승들 합창소리가 밤하늘을 흔들 때 我这候鸟来个和声吧         나라는 철새는 화음이라도 부르자 我的发声怎么总是           그런데 나의 목소리는 어째서 # 和b                       # 와 b뿐이고 老是跳着跳板               언제나 훌쩍훌쩍 뛰여넘기만 하는걸가   6                                   6 当奔泻的悲愤                       줄기찬 슬픔들이 在山崖                             산벼랑에서 铸成一只长剑时                     검을 벼릴 때 我                                 나는 겨울의 눈을 一摄冬雪                           한웅큼 잡아들고 哭泣了                             슬피 운다   雪被泪水融化了                     적설이 눈물에 녹는다 也带着昨日                         어제날도 녹아버린다 光灿灿的谎言                       빛나는 거짓말도 哭醒后                             울다가 깨여나면 我变作了                           나는 한점의 一星泥土                           흙으로 된다   7                                   7 我是一只小松鼠                     나는 한마리 다람쥐 轻轻地踩着夏天走进深谷             여름을 밟고 산골짜기로 간다 发现有几只白眼                     흰 눈동자들이 将今天的记忆                       오늘의 기억을 冷藏在它的心底                     마음속에 냉장함을 발견한다   一股凉气                           차딘간 공기가 把残忍的回忆                       잔인한 추억들을 吹向                               땀구멍들이 있는 곳으로 所有有毛孔的地方                   보낸다  발산하게 한다   8                                   8 大街阳光的河床上                   거리는 해빛이 있는 강곬이다 流着变色镜                         수많은 선글라스들이 흐른다 我也戴上了一副                     나도 선글라스를 끼지만 可一只镜片有裂纹                   안경알 하나에는 금이 실렸다   我漂流着                           나는  그 흐름속에 부대끼면서 这时我想起了小舟                   작은 쪽배 하나를 생각해본다 想起了卓别林的尖皮鞋             챠플린의 뾰족한 신발도 생각해본다   9                                   9 我怎么光着脚                        나는 왜서 맨발일가 跑到海滩来了                        신발도 없이 바다가로 달려왔을가 是来找伊索的寓言                    이소프의 우화를 찾아온걸가 还是找祖父祖母的故事        할아버지 할머니 야야기를 건질러 온걸가   我奔跑过去                          나는 바다가에서 抓一把闪光的东西                    반짝이는것을 한웅큼 주어든다 可那不是沙金呵                      그것은 싸락금이 아니다 不是                                싸락금이 아니다   这时我的心变成岛屿了                이 시각 나의 마음은 岛屿上空                            섬으로 솟아오르고 섬우의 하늘에는 飞过来一只海燕                       한마리 갈매기가 날아예누나 海燕碧绿碧绿的声音                   푸르른 갈매기 울음소리는 象旗帜般飘飘杨杨                     깃발처럼 나붓기누나   10                                  10 是谁在编排                          그 누가 风与石头的故事                   바람과 돌의 이야기를 제조하는걸가 制作一个又一个梦                    하나하나의 꿈들을 시리즈로 梦的系列片                          제조하느는걸가   我看着看着                     꿈을 제조하는 생산라인을 바라보면서 有些累了                            나는 어딘가 해나른하다 困                                  고달프다   11                                   12 鲁宾逊你把我带到哪儿了          로빈손은 나를 어디로 데리고 온걸가 喧闹的大街                         혼잡한 거리에는 熟人都带了假面具                   익숙한 얼굴들은 탈을 쓰고 있다 没带的全是陌生人      탈을 쓰지 않은 이들은 얼굴을 모를 사람들이다 为寻找我的名字                     나는 나의 이름을 찾기 위하여 我却丢掉了鞋                       나의 작은 운동화를 잃어버렸다 为寻找我的朋友                     나의 친구들을 찾다가 我却迷了路                         길을 잃어버렸다   穿过                               습기찬 시장거리를 지나가면 湿流流的市场                       나는 我觉得                             모든 사람 얼굴들이 面孔一个个                         바람처럼 형체없다는 犹如风                             느낌을 没有模样                           앓아야 한다   12                                 12 天上飘浮                           하늘에는 一支古老的歌                       흘러간 옛노래 한곡조 떠돌고 一个苍白的回忆                     창백한 추억이 떠돌고 있다   我是风筝                           나는 작은 연이다 春天生了我这只小鸟                 봄이 낳은 한마리 작은 새이다   不知是线绳断了                     연줄이 끊어진것일가 还是放长了                         아니면 연줄을 길게 놓아준것일가 管他呢                             물어볼것도 따질것도 없다 我要再飞一程                       나는 또 날어야 하리 去寻找白云底下                     흰구름속에 묻힌 我生命的赞歌                      나의 생명의 노래를 찾아내야 하리   13                                 13 无数点与线                         무수한 점과 선들이 丰富了地球的故事                   지구 떵덩어리 이야기를 엮는다   我从一条线走向另一条线       내가 이 선에서 저 선으로 뛰여넘어가면 天空有一束极光                     하늘에는 斑斓如霞                           오로라가 찬란한 무지개로 걸린다 泪与歌的呼唤              눈물섞인 울부짖음과 노래섞인 울부짖음이 又一个交叉扭在                    서로 부등켜안고 光与血中燃烧起来                   빛과 피속에서 불타오른다 在那一片燃烧中                     그 불타오름에 升腾起太阳一轮                     해가 껑충 튕겨오른다   我乘太阳到太空              나는 태양을 따라 하늘우  태공에 오른다 极光不见了                         아래에는 오로라가 없고 地上的无数点与线                   지구에 얽힌 무수한 점과 선들이 朦胧地呈现出一张网                 하나의 몽롱한 그물을 만들고 있음을 본다 而看清了                           내가 서있던 교차점은 我那交叉口是                       피붉은 종지부임을 一个血红血红的                     발견한다 句号   1986年 写于延吉                      1986년 연길에서    
627    시인 - 신현철 댓글:  조회:4775  추천:0  2015-03-13
성명: 신현철 필명:초향 프로필: 1960년 4월 3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룡문향 장인촌에서 출생. 연변제1사범학교 졸업.1981년부터 10여년간 교육사업에 종사. 수십편의 교수론문을 발표.  150여수의 시와 100여편의 수필을 발표. ,,, 등 6편의 수필이 각종 문학상을 받음.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회원, 중국조선어문교수연구회 리사. 전편집부 주임. 현재 한국 체류중.     지금으로부터 6~7년전 우리 조선족시단에는 신현철이라는 이름의 젊은 시인이 자주 나타나 문학자들의 시면을 장식하군했다. 화룡 룡문향 장인골이라는 아주 깊은 시골에서 출생한 향토시인은 그후 연길로 전근, 소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다가 “조선족중학생보” 부주필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날엔가 그는 갑자기 문단을 떠나버렸다. 문인들의 기억속에 점점 사라지다가 일전에는 그의 행적을 아는 사람조차 별반없을 정도로 철저히 외면당하는듯했다. 외국으로 나갔다거나 아니면 가정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한다는 등등 여러 가지 설이 많았다. 그러던 그가 지난달 한국에서 시집 “시린 령혼의 새벽”을 출간하며 시의 재기를 선포하고 나섰다. “지금까지 20년간 시를 쓰는 과정을 통해 내가 살고있는 세상에 대해 조금씩 알기 시작했고 수시로 엷어지는 내 인생을 자꾸 반성해보군 하였다. 시인은 무리속에서도 외로움을 느끼며 행복속에서도 아픔을 감지한다. 외롭고 고독하고 절망이 비명으로 터질 때 그 모진 아픔속에서 시는 비로소 누룩이 죽으며 남긴 향긋한 술처럼 신비롭고 거세차게 발효한다.” 그의 말처럼 그는 그간 시인이 필수인 고독과 외로움을 공부했을가. 그의 시집에 수록된 시 “바퀴”나 “나는 어디에 있는갚... 하는 등 많은 시편들에서 그는 “시린 령혼의 새벽”을 깨닫고 자아를 새롭게 느낄수 있는 각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간 별일없이 세월을 보냈다는 변명처럼 그는 기실 자기성찰과 반성을 하며 탈피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동안 쉼없는 시창작을 호로 한 흔적이 이제 그의 시집에 고스란히 담겨져있다. 리상각시인은 시집의 머리말에서 “시인은 감성적인식에 그치지 않고 서정의 깊이를 파고든다. 기교나 언어장난에 빠지지 않고 시의 무게를 가늠할수 있는 무거운 시구들을 창출해내는 솜씨로 허와 실을 떠난 고무풍선같은 가벼운 묘사가 아니라 진실성과 삶의 뿌리에 바탕을 둔 알찬 시편들을 써내고있는바 그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으며 장래가 촉망되고있다”고 찬사를 보내고 있다. 정말 이제 그동안의 정적을 깨고 신현철씨가 우리 시단에서 다시 시의 나무로 떳떳이 설수 있을가. 신현철씨는 겸손한 자세로 “아직도 배우고있다”고 말하지만 그의 시집과 최신작들을 보면 그 작업은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다. 시단에 화려하게 복귀하는 신고식을 그는 자기 시집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연변일보 리임원기자 2005년 06월 17일      
626    시인 - 고 김태갑 댓글:  조회:4395  추천:0  2015-03-13
“고향길”, 웃음소리 넘쳐나는 정다운 길에서 들려오는 즐거운 가락   문학예술은 인간생활을 구체적이고 진실하게 반영한다. 다시 말하면 문학예술은 인간성격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 생활화폭을 통하여 현실을 반영한다. 문학예술의 한 형태인 가요작품도 마찬가지로 진실성과 형상성을 그 생명으로 한다. 즉 현실생활이 진실하게 반영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작사자, 작곡자가 예술적으로 발굴하고 창조한 아름다운 형상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노래시로서의 가사는 서정시의 정수이다. 가사는 노래로 불리는 자체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주제의 독창성을 구현하거나 독자적인 문학적 특성을 갖추어야하는 면에서 시와 구별되는 점이 없다. 시가 없는 가사에 좋은 곡이 붙을 수 없다. 가사에 시가 없다는 말은 곧 시적발견이 없다는 말이고 시적발견이 없는 가사에 주제의 독창성이 있을 리 만무하다. 독창성이 없는 가사는 어디선가 듣던 가사로 인정되므로 자체의 생명을 잃게 된다.  독창적인 시적주제는 우리들이 다같이 체험하고 있는 생활의 이모저모에서 숨쉬고 있다. 문제는 생활체험의 진실로 시적주제를 포착하고 그것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시적주제를 포착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활을 관찰하는 시인의 심장이 뜨겁고 그 시적안목이 예리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시세계를 독창적으로 개척한다는 것은 알려지지 않는 시적대상을 노래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그 속에서 아직은 누구도 감득하지 못한 시적주제를 포착하여 그것을 생활체험의 진실로 형상화하는데 있다.    봄이면 민들레꽃 노랗게 피는 고향의 들길이 나는 좋아라  하늘에는 종달새가 노래 부르고 사원들의 웃음소리 넘쳐나는 길   날마다 해마다 걷고 걸어도 언제나 걷고 싶은 내 고향 길이여 봄이 오면 뜨락또르 밭갈이하고 가을이면 황금산을 싣고 오는 길   산 넘고 물을 건너 북경에 닿은 변강의 고향길이 나는 좋아라 해해년년 풍년소식 전해주면서 따사로운 당의 사랑 싣고 오는 길   김태갑 작사, 안계린 작곡의 가요 “고향길”은 누구에게나 생소하지 않고 누구나 다 걸어본 고향길에서 남들이 보아내지 못한 시적주제를 포착하였다. 민들레꽃 노랗게 피고 사원들의 웃음소리 넘쳐나는 고향길, 심산벽곡에 뻗은 수수한 길이라 하여도 그 길은 북경과 이어져있고 그 길에는 행복을 수놓아주는 당의 사랑이 슴배여있다는 진리를 소박한 언어로 말하고 있다.  이 노래의 가사를 쓴 시인 김태갑 (934-1995)은 1934년 9월 30일 흑룡강성 녕안현 출생하였다. 1956년 연변대학 어문학부를 졸업하고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 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 부주석, 《예술세계》잡지 주필,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가 1995년 지병으로 연길에서 돌아갔다. 그는 료녕민족출판사에서 시집 《고향길》(1982)을 출간한 이외《민요집성》(한국문화사, 1996), 《조선족전설집》(민족출판사,  1991), 《항일전설설화집》(연변인민출판사, 1992), 《불타는 십자가》(민족출판사,  1992.) 등  많은 저서를 출간하였다.  김태갑시인의 가사작품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우선 진한 민족특성에서 표현된다. 가사의 언어도 역시 민족의 일상용어를 기초로 구현되는데 가요의 가사작품에서는 그것이 노랫말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우리민족의 민요와 설화에 익숙한 시인은 우리의 구두어와 민요에서 부단히 생명력이 있는 언어를 발굴하고 선택하여 자기의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표현력을 높였다. 그는 어디까지나 우리민족의 언어생활에 깊이 뿌리내리고 우리민족의 입에 잘 오르는 낱말을 알심들이여 골라 써서 자기의 시어를 풍부히 하였다. 언어는 사용되는 위치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며 가치가 달라지며 지어 질이 달라진다. 시인은 생명력이 강한 구두어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런 언어들은 보석처럼 반짝이면서 가사의 표현효과를 높이고 생활미를 돋구었다. 또한 의식적으로 화려한 언어를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민의 생활을 반영하는데 알맞은 어휘를 힘써 고르고 가장 평이하고 가장 세련된 언어로 가장 생동한 예술형상을 창조하였다.  김태갑시인의 가사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우리말에서의 고유어를 잘 다듬어낸 데서 나타난다. 그는 고유어를 쓸 수 있는 경우에는 절대로 한자어를 쓰지 않았다. 우리말은 역사적으로 고유어와 한자어가 혼용되어왔는데 우리말 고유어는 한자어에 비하여 유창하며 고저장단이 뚜렷하고 억양도 좋으며 듣기에도 아름답고 귀에 듣기에도 편하고 입에도 잘 오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그의 노랫말은 유창하고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색채가 짙고 시형상의 개성적이고 아름다웠다.  김태갑의 가사작품의 다른 하나의 특징은 운률적 작업에서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데서 나타난다. 가사는 노래하는 시며 시의 가장 뚜렷한 특징과 가장 본질적인 속성은 운율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시인은 가사작품에서 우리 민족시가의 운률조성의 원리를 창조적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하는데 큰 노력을 경주하며 운율조성의 여러 가지 보조수법을 예술적으로 배합하여 자기만의 독특한 운률형상을 창조하였다.  우리민족은 자기의 미학요구에 적응되는 민요, 향가, 시조, 가사, 창가 등 여러 가지 민족시가형식을 창조하였는데 그의 가사에는 이와 같은 민족시가형식의 전통운율이 훌륭하게 계승되고 발전되었다. 그의 가사작품에서 우리는 우선 민요에서 표현되는 비교적 짧은 시행, 절제된 시련을 구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고전시가의 대구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운율의 유창한 흐름을 보장하였다. 그의 가사를 살펴보면 그 어느 구절을 빼버리거나 어떤 구절을 더 보태 넣으면 대응이 형성되지 않아 운률이 흩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의 작품에서 대응하는 내외구 다시 말하여 바깥구와 안구들이 각각 운율조성의 최저단위를 이루어 사람의 호흡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이 우리 민족시가의 운률적 관습이다. 이 작품의 1절과 2절의 “하늘에는 종달새가 노래 부르고/ 사원들의 웃음소리 넘쳐나는 길”과 “봄이 오면 뜨락또르 밭갈이하고/ 가을이면 황금산을 싣고 오는 길” 처럼 그는 의식적으로 작품에서 내외구를 대응시켜 운률감을 조성하고 입에 잘 오르게 하였다. 그리고 압운과 반복법, 전도법, 의성의태법, 수사학적질문 등 보조적수법을 충분히 응용하여 시대에 맞는 고상하고 발랄한 새로운 운율을 개척하고 자기의 창작적 개성을 뚜렷이 살려나갔다. 이 작품에서 매절의 마지막 어휘를 “길”로 매듭지으면서 작품 속에서의 각운의 효능을 최대한 발휘하였는데 이는 우리 가요작품에서 거의 유일무이한 표현으로 가사창작실천에서 이뤄낸 하나의 절창이라고까지 높이 평가할 수 있다.(석화 記)  
625    시인 - 한동해 댓글:  조회:3599  추천:0  2015-03-13
         한동해韓東海 시조시인의 대표작 5편 감상 //   ^한동해 시조시인     ----------------------------------------------------------------------------------------------   한동해韓東海 시조시인의 시 5편 감상   ------------------------------------------------------------------------------------------------   한동해(韓東海) 약력 1938년 중국 화룡시 출생 1998년 중학교 고급교사 퇴임 1960년대 초부터 시, 시조 가사, 동요 등 창작 각종 장르 작품 800여 편 발표 30여 차 각급 상 수상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회원         보름달 (외 4수)                                                   설맞이 즐거워라 만리창천 달려왔나   걸싸게 풍운헤쳐 천가만호 비쳐주니   보름달 널 첨앙(瞻仰)하여 억만창생 행복해라             청명    저 하늘 청청한데 이 마음 침침(沈沈)하야   선산(先山)에 가토(加土)하니 더 무겁지 않으신지   인세(人世)에  영별이 없다면 피눈물이 있으랴                               추석 단풍   저 하늘 가신 길에 들불을 지폈느냐            애달피 흘린 눈물 단풍잎 물들었냐             아마도 귀체(貴體)는 갔어도 넋은 남아 불타나봐                 아버지                                                   씨앗을 곱게 심어 애솔을 키웠난다          눈비에도 꺾일세라 버팀목 되였으매                     아버지 동량을 키운 푸른 요람 산지기              첫눈                                                                                                                                  1 그 누가 옥돌 갈아 대지에 뿌려주나?                 수목은 옥수(玉树)련듯 산발은 백사((白蛇)련듯                 하늘아 네가 갈고갈아 첫사랑을 뿌리누나     2 저 하늘 천리 빙설 그 누가 깎아내나?   날리는 눈보라여 감뛰는 산발이여           하늘아  네가 깎고 깎아 은빛 세계 펼치누나           ---------------------------------------------------------------------------------------------------------------------   *중국 연변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동해 시조시인은, 내가 문학인으로서 만난 적도 없고, 그 누구로부터 소개를 받은 적도 없는 문사(文士)이다. 다만, 초라하기 짝이 없는 ‘동방문학’ 카페를 통해서 간간이 자작시(自作詩) 올리는 것을 보았을 뿐. 따라서 그에 대해 아는 바도 들은 바도 없는 상태다.   그런데 그의 작품을 한 편 한 편 음미할 때마다 그의 문장이 아주 깔끔하게 정리 정돈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장이 정리정돈 되었다는 것은, 단정하게 옷을 입었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그의 생각과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상태에서 지나치게 외쳐대지 않고, 허풍떨지 않고, 구걸하지도 않는, 절제된 심기가 녹아들어있음을 뜻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솜씨로 빗대어 말할 것 같으면, 몸에 좋다는, 아주 특별하고 귀한 식재료를 가지고 온갖 양념을 듬뿍 넣어 그 맛을 화려하게 내보이면서 뿜어대는 그런 요리법이 아니다. 어쩌면, 흔하디흔한 식재료를 가지고 양념도 적게 사용하면서 소박하지만 깊은 맛깔을 내는, 그런 요리법을 구사하는 무명 요리사인 셈이다.   문제는, 요즈음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호를 만족시켜 주는, 화려하게 포장된 맛을 즐기기 위해서 아우성인 것이 현실인데, 그는 소인만큼이나 그와 무관한 듯 반대 방향으로만 가는 것 같다. 혹, 세상 사람들 눈 밖에 있어 끝까지 외면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데 기우(杞憂)이기를 바랄 뿐이다. 조용조용 말로 하면 안 되니까 소리를 외치되 그것도 다중(多衆) 앞에서 온갖 치장을 요란스레 한 채 목이 터지라고 외쳐대야 하는 세상인데 아랑곳하지 않고 외진 곳에 살면서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노래나 읊조리는 소박한 한사(寒士)의 쓸쓸함을 보는 것 같다.   위 다섯 편의 작품은, 동방문학 10월호[통권 제76호]에 특별히 소개하기 위해서 청탁한 원고이다. 남의 눈과 귀를 빌려 사는 사람이 아닌, 자신들의 눈과 귀로써 살아가는 사람들이 먼저 감상하기 바란다.   2014. 09. 13. -동방문학 발행인 겸 편집인 이시환  
624    시인 - 김경석 댓글:  조회:4967  추천:1  2015-03-13
김경석 담시집 “백일홍” 출간     김경석 담시집 “백일홍”이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담시는 일정한 설화적 슈제트를 가진 자유로운 서정서사시, 이야기시를 가리켜 말한다. 담시는 13세기 북부프랑스에서 산생되여 로마제국에서도 창작되였으며 14세기에는 영국의 민간에서 보급, 북부유럽에서도 씌여졌으며 19세기에는 로씨야에 대두되였다.   중국조선족의 담시창작은 조선시문학과 그를 통한 쏘련시문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수 있다. 50년대로부터 온양되면서 서사적요소를 도입한 시들이 담시형태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 60년대로부터 담시라는 이름으로 창작의 열조를 보이다가 60년대 중기 정세의 변화와 더불어 자취를 감추었다.   시인은 시집의 머리에서 “50년대에 접촉하여 60년대에 쓰기 시작, 시문학 쟝르의 다양화의 필요성과 절박성을 절감하여 다시 붓을 들게 되였다. 담시에 대한 리론적연구와 창작이 아직 잠잠하지만 시령역의 확대, 쟝르의 다양화와 더불어 활기로운 국면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고 문단에서 흔치않은 쟝르의 담시집 출간의 의취를 밝혔다.   담시집 “백일홍”은 60년대로부터 근년에 이르기 까지 시인이 가담가담 써온 담시 31수를 추려 “봄날의 영광”, “화목한 세상”, “혈전의 년대”, “항쟁의 불길”, “신비한 전설”등 5부로 분절하여 묶고있다. 김경석시인은 1937년 연길시 의란진에서 출생, 연변대를 졸업한후 장기간 신문활동에 종사했다. 현재 길림성조선문신문간행물 심사열독원으로 있다.     저서로는 시집 “파란 수건”, 동요동시집 “빨간 리봉” 시조집 “할미꽃”, 리론저서 “민족신문학론”, 기자문선 “사랑의 표징” 그밖에 “고향산 기슭에서” 등 가곡작품 수십수가 있다. 전국, 성, 자치주 상 10여차를 수상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08/7.14     장편서사시집 “불사조” 출간       장편서사시가 잊혀지고 지어 소외되고있던 시단에서 항일투쟁을 소재로한 장편서사시 “불사조”가  출간되여 화제다. 김경석시인의 장편서사시집 “불사조”가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장편서사시”불사조”의 소재는 대학시절 항일투사들의 혁명회상기 수집, 정리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있던 1950년대 후반기에 발굴, 1979년에 탈고한 뒤 다음해 문예총서 “아리랑”창간호에 부분적내용을 발표했으며 그후 여러차례의  수정작업을 거쳐 드디여 출간되게 되였다. 서사시는 20세기 30년대 장백산지대에서 펼쳐졌던 가렬처절한 항일유격투쟁을 력사적배경으로 항일투사들의 혁명적영웅주의정신, 락관주의정신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인생관, 가치관을 예술적으로 구현하고있다.   시인은 머리말에 “12.5”계획의 첫해이자 공산당 창건 90돐, 신해혁명 100돐을 맞는 특별한 해에 “불사조”가 태여나서 감개무량한 심정이라고 밝혔다.   김경석시인은 1937년 연길시 의란진에서 출생, 연변대를 졸업한후 장기간 신문활동에 종사했다. 저서로는 시집 “파란 수건”, 동요동시집 “빨간 리봉” 시조집 “할미꽃”, 리론저서 “민족신문학론”, 기자문선 “사랑의 표징” 그밖에 “고향산 기슭에서” 등 가곡작품 수십수가 있다. 전국, 성, 자치주 상 10여차를 수상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1년 6월 20일       김경석시인이 있어 우리는 빈곤하지 않다         조 회:23        글크기: 【字体:大 中 小】        시간:2011年07月11日    바위틈에 우뚝 솟은 청송, 산비탈엔 진달래 만발하고 아아한 창공엔 수리개 날아옌다. 김경석시인이 최근 출간한 장편서사시《불사조》는 책표지에서 풍기는 포스부터 남다르다. 그리고 간만에 마주하는 서사체의 시는 자유로운듯 틀에 째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그 흐름을 끊을수가 없다. 한 혁명투사의 굴곡적인 스토리가 작품 전반에 강렬하게 휘몰아치기때문이다.          불굴의 투사는 죽지 않는다 《불사조》는 20세기 30년대 후반기 장백산지대의 항일전쟁을 력사적배경으로 조선족혁명투사를 형상화한것이다. 중화민족의 생사존망을 다투는 긴요한 관두에 침략과 반침략, 혁명과 반혁명, 정의와 불의간의 모순투쟁을 한 측면으로 반영함으로써 공산당의 령도하에 진행된 항일유격전쟁, 반제민족해방투쟁의 형세를 펼쳐보이고있다. 주인공 리철수는 고아로서 어려서부터 머슴살이의 서러운 삶을 살았다. 천대받던 신세의 그는 불공정한 인간관계에 대한 불만과 압제자에 대한 반항심을 품고 자유를 찾아 탈출하며 곧이어 밀영의 유격전사로, 공산당원으로 거듭난다. 불행히도 그는 밝은 새날을 기다려내지 못하고 일제침략자들에 의해 생매장을 당한다.  “구뎅이 메워지는 흙속에서/ 불쑥 주먹이 솟는다!/… / 오 철권, 불멸의 철권이여!/ 밀림의 항일용사들 영웅과 더불어/ 철권을 휘두르며 원쑤와 싸우리라/ 끝까지 싸워서 승리하리라!” 그는 희생됐지만 죽지 않았다. 생사의 관두에 굴함없이 위국충절을 지키며 몸은 비록 죽었지만 불굴의 정신만은 영원히 남아 후세사람들에게 전해지고있다. 그래서 김경석선생은 그의 이름을 “불사조”라 달았다.         철권(铁拳)이 탄생하기까지 장편서사시 《불사조》의 소재는 김경석선생이 대학시절 항일투사들의 혁명회상기 수집, 정리 작업이 한창 활발히 진행되고있던 1950년대 후반기에 발굴한것이다. 그 시기 김경석선생은 취재를 통해 수많은 항일투사들의 이야기를 접하지만 그중에서도 머리에 관통상을 입은 한 투사가 생매장당하면서도 흙속에서 주먹을 불쑥 내밀어, 불멸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는 사적에 큰 감동을 받게 된다.  이를 작품화하기 위해 김경석선생은 다시한번 취재길에 나섰고 당시의 상황을 아는 마을로인들을 찾아서 구구절절 귀를 기울이며 자료를 수집했다. 그 과정에 마을의 허름한 창고에서 모기에게 장밤 물어뜯기기도 하고 끼니를 에때울데가 없어 몇끼를 굶기도 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랭수 한모금 마신것이 탈이 나 위생소에 실려가기도 했다. 이렇게 어려운 조건을 극복해가며 항일투사들의 사적을 수집, 드디여 “철수”라는 개성이 강하고 전형적인 항일투사의 캐릭터가 탄생했고 작품구상이 무르익어갔다.  여러가지 원인으로 작품창작의 진전이 굼뜨던중 1970년대말 문예의 새봄을 맞으면서 김경석선생은 동력을 얻고 미구에 작품을 완성했다. 탈고된 이 작품은 1980년 10월 북경민족출판사에서 출판하는 문예총서 《아리랑》  창간호에 부분적인 내용이 발취되기도 했었다. 작품은 발표된후 원로작가 리욱선생을 비롯한 시단, 문단의 인사들한테서 긍정과 축하를 받았다. 김경석선생은 이를 고무격려로 간주하고 그후 많은 시간을 들여 다섯차례나 대수정작업을 벌렸으며 “철권”은 드디여 당창건 90돐과 신해혁명 100돐 기념일에 즈음하여 “불사조”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고고성을 울리게 되였다.        무엇으로도 따질수 없는 문학적가치 《불사조》는 김경석선생이 퇴직후 출간한 15번째 책이다. 그의 작품집들을 살펴보면 쟝르가 다양한것이 특점이다. 시집, 동요동시집, 가사집, 대중가요집, 리론저서, 신문언론집, 번역저서 등 외에도 우리가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담시집, 시조집, 장편서사시 등이 눈에 띈다. 시는 시대를 떠나서 존재하기 어렵다. 하지만 김경석시인이 창작노트에 적었듯이 본 민족 시가의 우수한 전통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얽매인다면 민족시가의 번영기를 맞이하기란 어려울것이다.  현재 우리 주변에서 장편서사시거나 담시, 시조 등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이같이 안타까운 시점에 고맙게도 김경석선생이 장편서사시 한권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잊혀질법한 시의 쟝르를 다시한번 각인시켜주고 그 맥을 이어나가기 위한 책임감을 안고 써낸 이 책은 돈이나 그 무엇으로도 따질수 없는 문학적가치를 품고있는것이다.  그 어느 하나도 버릴것이 없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학재부, 그러나 점차 메말라가는 그 맥을 이어나가기 위해 묵묵히 필을 놀리는 김경석선생이 드팀없이 서있어서 우리는 전혀 빈곤하지 않다.   리련화기자 래원:연변일보                                       1950년대 시조창작의 발단                          -차녕호의 시조 “길”에 대하여                                                                                                                   김경석      20세기 5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우리 연변의조선족시단은 당의 “백화만발 백가쟁명’문예방침의 인도밑에 서정시, 번역시, 서정서사시, 가사, 번역가사, 구전민요, 신민가 등 다양한 쟝르들로 시의 화원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시인들은 력사적사명감을 지니고 시대와 보조를 함께 하면서 사회주의 건설의 들끓는 현실생활을 반영하는 문학작품을 적지 않게 창작하였다. 서정시를 쓰지 않으면 신민가를 썼고 민족문화유산인 구전민요들을 발굴, 수집, 정리하지 않으면 신민가를 써서 신문간행물에 발표하였다. 이런 시기에 남달리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형시인 시조를 창작하여 시의 화원에 이채를 돋구어준 시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차녕호씨이다.      연변대학 어문학부 조문전업에서 재학중이던 그는 1957년 6월15일부 《연변일보》의 《꽃동산》문예부간에 시조 “길”을, 10월22일에는 시조 “철벽”을 련속 발표하였다. 그가운데서도 시조 “길”은 내용으로나 형식으로 보아도 그의 대표작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고 보아진다.                   가오던 옛길이라 수이 간다 장담 말라                진펄엔 논길 나고 들판마다 새길이니                 가는 길 안단 말 말고 물어 가야 하리라        이것이 시조 “길”이 전문이다. 그 내용을 풀이해보면 이러하다. 즉 예전부터 늘 가고 오던 길이라고 해서 쉽게 갈수 있다고만 자신있게 말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진창벌이 논이 되여 논길이 새로 나고 길이라곤 볼수 없던 들판에도 새 길들이 뻗었기에 쉬이 갈수 없게 되였기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안다는 말을 했다간 제 갈길을 찾지 못할수 있으니 물어서 갈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실로 시조의 풍미가 짙은 정형시이요 3장6구로 시대의 변혁을 구가한 평시조이다.      우선 이 시조는 50년대 후반기 발전하는 사회주의 건설의 현실을 예술적으로 진실하게 반영하고있다.     1957년은 우리 나라 제1차 5개년계획의 마지막해로서 1953년부터 시작된 국민경제계획은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었다. 5년간 전국적 고정자산투자는 도합 611,6억원 완성하였고 국민수입은 년평균 8.9% 장성되였으며 인민생활수준은 년평균 4.2% 제고되었다. 우리 나라 농촌은 초급사로부터 고급사로 이행발전하였고 농민들의 생활수준도 날로 향상되고 농촌의 옛모습은 점차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연변의 농촌도 례외가 아니였다. 작자는 바로 이런 변혁의 현실을 시조에 형상화하여 반영하고있다.        다음으로 이 시조는 기, 승, 전, 결의 구성과 대비적수법 및 조리있는 언어구사로 주제를 체현하고있다. 기구(起句)인 초장에서 옛길을 제시한후 승구(乘句) 및 전구(转句)엔 종장에서 진펄의 논길, 들판의 새길을 제시해 뚜렸한 대비를 아루게 함으로써 예전과 다른 변혁의 오늘을 강조하면서 사회주의건설의 발전추세를 형상화하엿으며 결구(结句)인 종장에서 가고 오며 익숙했던 길이 변하고 없던 길이 생겼으니 안다는 말 대신 걸음마다 물어가야 한다는 생활의 리치, 말하자면 변혁의 형실에 직면한 인간의 내재적자세를 제시하고있다. 독자들은 이 결구에서 “아는 길도 물어가라’는 속담을 련상하게 될것이며 나아가서 한 나라, 한 민족, 한 사람의 나아가는 길도 주관적판단보다 객관적법칙에 맞게 택해야 목적을 이룰수 있다는 철리를 감득하게 될것이다.       다음으로 이 시조는 형식면에서 고시조의 음절작시법에 좇아 구성함으로써 예스러운 풍미와 현대적미감을 다분히 체현하고있다. 이 시조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초장 “3•4/4•4”            중장 “3•4/4•4”            종장 “3•5/4•3”        보는바와 같이 초장 첫구는 “3•4”조로 시작했고 초장 두번째 구와 중장 두번째 구에서는 모두 “3•4”조 형태의 앞 3음절에 한음절씩 더 첨가하여 “4•4”조로 구사학있으며 시조구성의 핵을 이루는 종장은 제대로 “3•5/4•3”조를 지킴으로써 시조의 예스러운 풍미와 현대적인 미감을 다분히 느끼게 하고있다.       오늘 우리의 독자들이 추구하는 시조란 조상들이 물려준 민족의 문학형식에 발전하는 오늘의 시대적내용을 생동한 형상으로 삼고 예스러우면서도 현대적미감이 나며 생활의 교훈과 힘을 주는 정형시이다. 이 면에서 시조 “길”은 비교적 성공한 작품이라 할수 있다. 따라서 시조 “길”은 50년대의 시단에 시조라는 쟝르가 창작의 맹아상태에 있을 때 남먼저 선을 보임으로써 시단과 광범한 독자들의 주의력을 환기시키고 시조창작의 발단으로 되여 이후의 시조창작에 촉매역활을 놀았다고 보아진다. 시의 화원에 시조문학의 아릿다운 꽃을 피우려는 이들에게 시조 “길”은 의연히 리로운 계시를 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05년7월 1일           출처: 김경석 저 《문학창작과 표현수법》                                        시조 초장 첫구의 가변성                                -14~15세기 시조에 대한 고찰                                                                                                        김경석         15세기 이전 고려시대의 시조 14수와 15세기 조선 건국초기의 시조 33수 도합 47수를 읊고 고시조(평시조)의 3장6구 구성법에 좇아 첫구를 고찰해본 결과 우선 다음과 같은 부류의 수자를 발견하게 되였다.      1, “3•4”조로 된 첫구 24수      2, “3•5”조로 된 첫구 14수      3 , “3•6”조로 된 첫구1수     도합 39수 시조의 초장 첫구가 3음절로부터 시작하였는바 이런 시조가 47수가운데의 83%로서 다수를 차지하였다.     다음으로 초장첫구의 전통적구성법 “3.4”조를 파격한 시조도 있었다.      1, “2•4”조로 된 첫구 5수      2 ,“2•5”조로 된 첫구 1수      3, “4•4”조로 된 첫구 1수      4, ‘4•5”조로 된 첫구 1수      도합 8수 시조의 초장 첫구가 2음절 아니면 4음절로 시작하였는바 이런 시조가 47수 가운대의 17%로서 적은 수자를 차지하였다.      상술한 분석과 수자적대비로부터 아래와 같은 긍정적판단을 도출해낼수 있다.      첫째, 시조 초장 “3•4/3•4”의 구성법에 준한 첫구 “3•4”조는 우리 시조의 작시법에서 기본으로 된다.     둘째, 시조 초장 첫구 “3•4”조는 부득이한 경우 음절의 증감형태를 나타낼수 있다.           시조 초장 첫구의 가변성이란 바로 상대적으로 고정적인 “3•4”조를 파격하여 음절떼의 앞뒤에 음절수를 증가 혹은 감소시키는 현상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런 가변성은 “부득이한 경우”라는 전제조건이 지어져있음을 잊지말아야할것이다.      아래에 시조 초장 첫구의 가변성에 대하여 진일보 고찰해 보기로 한다.         1, 초장 첫구의 음절감소현상         첫구의 음절감소현상이란 “3•4”조가 “2•4”조 혹은 “2•5”조로 앞의 한음절이 축소된 상황을 말한다. 여기서 “2•5”조는 축소와 증가 현상을 동시에 나타내고있다.       (1)”술을 취케 먹고/오다가 공산에 지니”     이것은 조준(赵浚 ?-1405년)의 시조 초장이다. 해설하면 “술을 취하게 마시고 돌아오다가 빈 산에 쓰러져 잠드니”라는 뜻이다. 초장 첫구가 “2•4”조로 된것은 첫구절인 “술을”을 한음절 명사”술”에 한음절 토 “을”을 결합시켰기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조에서는 “2•4”조가 부득이한 경우라고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술”을 “소주”, “청주”, “곡주” 등 2음절 명사로 대체해도 그 뜻을 전달함에 손색이 가지 않을뿐더러 “3•4”조의 기본구성법을 지킬수 있기때문이다.      ﹝2﹞”내해 좋다 하고 남 싫은 일 하지 말며”     이것은”변계량(卞季良,1369-1430년)의 시조 초장이다.”그 뜻인즉 “나에게 좋다고 하도 남이 싫어하는 일은 하지말며”라는것이다. 옛사람들의 언어행위에서 “나해”는 “나에게”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초장 첫구는 “2•4”조로 되었지만 기실은 “3•4”조나 다름없다. 이 시조 초장 역시 “부득이한 경우”와는 련관되지 않는다.        (3)“초산﹙楚山﹚우난 호﹙虎﹚와 패택﹙沛泽)에 잠긴 룡﹙龙﹚이”    이것은 리지란﹙李芝兰,1332-1402년﹚의 시조 초장이다. 그 뜻을 풀이하면 “초산 호”는 초패왕 항우(项羽)를 가리키고 “패택에 잠긴 룡”은 한(漢)나라 고조(高祖)인 류방(刘邦)을 가르킨다. 이 시조는 중국력사에서 제재를 빌어 진(秦)을 추격하는 초(楚)의 항우와 한(漢)의 류방의 기세를 반영한것으로서 명사 “초산”에 여격토 “에”를 가첨하여 “초산에 우는 호와”라고 해도 뜻을 나타냄에 아무런 손색도 없거니와 초장 첫구 “2•4”조도 자연스레 “3•4”조로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이 시조 초장도 “2•4”조로 시작하게 된 부득이한 조건이 지어지지 않는다.        ﹙4﹚“암반(岩畔)) 설중고죽(雪中孤竹)) 반갑도 반가왜라”      이것은 서견﹙徐甄﹚의 시조 초장이다. 여기서 “암반”은 바위옆, 바위가의 뜻이고 “설중고죽”은 눈속에 외로이 서있는 대나무를 가르킨다. 말하자면 “바위옆 쌓인 눈속에 외로이 서있는 대나무 반갑기도 반갑구나”라는 뜻이다. 이런 내용을 한자 그대로 섞어 “암반옆 설중고죽 반갑도 반가왜라”라고 써도 그 뜻 전달에 손색이 없거니와 초장의 원 “2•4”조를 “3•4”조로 구성되게 할수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한자를 ?다고 해도 쓰는 작자에 따라 “2•4”조 또는 “3•4”조로 얼마든지 할수 있음을 보아내기 어렵지 않다. 이 경우에도 부득이한 사정을 운운하기 어렵다.        ﹙5﹚”객산문경﹙客散门扃﹚하고 풍미월락﹙风微月落﹚할제”      이것은 하위지(何伟地, ?-1456년)의 시조 초장이다. 여기서 “객산문경”은 손님이 흩어져 간뒤 문을 닫는다는 뜻이다. 한자”경(扃)은 빗장 경, 닫을 경이라고 일컫는다. 한자로 쓴 탓에 초장 첫구가 “2•4”조 형태로 되였지만 만약 조선말로 풀이해 다듬어 “손님들 떠나가고 미풍에 달이 질제”라고 쓴다면 “문을 닫고”라는 말을 생략했을뿐 전달하려는 기본뜻은 변함없다. 따라서 초장 첫구가 “3•4”조로 될수도 있다. 하지만 작자가 한자사용을 고집하고 생략도 원치 않는다면 그냥 “2•4”조로 될수 밖에 없으며 지어는 “손님 가자 문을 닫고”라고 “4•4”조로 변할수 밖에 없다.        ﹙6﹚”금생려수(金生丽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이것은 박팽년(朴彭年, 1417-1456년)의 시조 초장이다. 여기서 “금생려수()란 금은 려수에서 난다는 뜻이고 려수는 중국에 있는 강을 말한다. 이 한자 네 글자는 《천자문》에도 있는바 한자 그대로 따왔기에 초장 첫구가 “2•5”로 되었다. 하지만 이것을 조선말로 표현한다면 “려수에 금이 난들 물마다 금이 나며”로 쓸수 있을것이다. 그러면 “2•5”조가 자연히 “3•4”조로 변해지게 될것이다.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한자의 구성사용이나 한음절 명사에 한음절 토가 결합된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 초장 첫구는 음절감소현상을 보이게 되며 언어구사의 령활성 여하에 따라 기본음절구성법에 준할 여지도 없지 않다는 점을 알수 있다.        2, 초장 첫구의 음절증가현상       첫구의 음절증가현상이란 “3•4”조가 “4•4”조 혹은 “4•5”조로 앞에 한음절씩 증가된 상황을 말한다. 여기서 “4•5”조만은 음절떼의 앞뒤에 각각 한음절씩 더 증가되였다.       ﹙1﹚”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      이것은 김종서(金宗瑞, 1390-1453년)의 시조 초장이다. “장백산”은 3음절로 구성된 고유명사인데 격토 “-에”가 붙어 4음절로 되였다. 이런 경우에는 부득이 “4•4”조로 시작하지 않을수 없다. 하지만 3음절 고유명사라고 해도 토가 붙지 않는 경우 이를테면 “장백산 깊은 숲에…”라고 할 때엔 의연히 “3•4”조로 서두를 뗄수 있다.        ﹙2﹚“록의상제(绿耳霜啼)) 살지게 먹여 샘물에 씻겨 타고”      이것은 최영(崔莹, 1316-1388년)의 시조 초장이다. 여기서 “록이”는 한자로 “绿耳“ 혹은 “绿駬”라고 표기하였는데 천리마, 준마를 말하고 “상제(霜啼)”는 날랜 말발굽이라는 뜻인데 “천리마”혹은 “준마”를 대체해 쓰고 또 “먹여”를 생략하여 “준마를 살찌워서 샘물에 씻겨 타고”라고 한다면 원뜻을 전달함에 손색이 없을뿐만아니라 한어성구로 하여 “4•5”조로 되던 초장 첫구를 “3•4”조로 할수 있다.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초장 첫구의 음절증가현상은 한자어사용, 한어성구의 리용 및 3음절 명사에 격토가 붙는 경우에 산생되고있다.        시조 초장 첫구의 음절수 증감현상고찰로부터 다음과 같이 귀납해 말할수 있다.      첫째, 시조 초장 첫구의 가변성은 기본적구성요소인 “3•4”조의 음절떼에서 음절수의 증감에 따라 변형되는 현상이다.      둘째, 시조 초장 첫구의 가변성은 한음절 명사에 한음절 토가 붙거나 한어성구의 앞음절떼가 2음절로 놓일 때 음절감소현상으로 표현되고 3음절 이상의 명사, 고유명사에 한음절 토가 붙거나 4음절 한어성구를 사용하게 될 때 앞음절떼가 4음절 이상의 음절증가현상으로 표현된다.     셋째, 시조 초장 첫구의 가변성도 “3•4”조의 기본음절작시법과 시조의 풍미 구현을 전제로 하여야 하며 변형을 위한 변형이 되여서는 안된다.      문학은 언어의 예술이며 시인은 언어의 탁마사이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형시인 시조 및 그 작자도 레외일수 없다. 고려, 조선조 시기의 17%를 점한 시조처럼 초장 첫구의 가변성에 좇아 시조를 쓸수 있지만 그것이 기본적인 작시법이 아니였음을 감안하고 부득이한 경우외에는 될수록 기본음절수에 맞춰 써야 한다. 특성이 있는 시조가 현대 단시거나 “4•4”조의 민요로 변태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풍부한 우리 말 보물고에서 예스러우면서도 현대적미감에 맞는 문학어를 골라 진정한 우리 민족의 정형시(시조)를 쓰기에 힘써야 한다는 점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2005년 6월25일         출처: 김경석 저 《문학창작과 표현수법》       [                                     1950년대 시조창작의 발단                          -차녕호의 시조 “길”에 대하여                                                                                                                   김경석      20세기 5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우리 연변의조선족시단은 당의 “백화만발 백가쟁명’문예방침의 인도밑에 서정시, 번역시, 서정서사시, 가사, 번역가사, 구전민요, 신민가 등 다양한 쟝르들로 시의 화원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시인들은 력사적사명감을 지니고 시대와 보조를 함께 하면서 사회주의 건설의 들끓는 현실생활을 반영하는 문학작품을 적지 않게 창작하였다. 서정시를 쓰지 않으면 신민가를 썼고 민족문화유산인 구전민요들을 발굴, 수집, 정리하지 않으면 신민가를 써서 신문간행물에 발표하였다. 이런 시기에 남달리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형시인 시조를 창작하여 시의 화원에 이채를 돋구어준 시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차녕호씨이다.      연변대학 어문학부 조문전업에서 재학중이던 그는 1957년 6월15일부 《연변일보》의 《꽃동산》문예부간에 시조 “길”을, 10월22일에는 시조 “철벽”을 련속 발표하였다. 그가운데서도 시조 “길”은 내용으로나 형식으로 보아도 그의 대표작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고 보아진다.                   가오던 옛길이라 수이 간다 장담 말라                진펄엔 논길 나고 들판마다 새길이니                 가는 길 안단 말 말고 물어 가야 하리라        이것이 시조 “길”이 전문이다. 그 내용을 풀이해보면 이러하다. 즉 예전부터 늘 가고 오던 길이라고 해서 쉽게 갈수 있다고만 자신있게 말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진창벌이 논이 되여 논길이 새로 나고 길이라곤 볼수 없던 들판에도 새 길들이 뻗었기에 쉬이 갈수 없게 되였기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안다는 말을 했다간 제 갈길을 찾지 못할수 있으니 물어서 갈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실로 시조의 풍미가 짙은 정형시이요 3장6구로 시대의 변혁을 구가한 평시조이다.      우선 이 시조는 50년대 후반기 발전하는 사회주의 건설의 현실을 예술적으로 진실하게 반영하고있다.     1957년은 우리 나라 제1차 5개년계획의 마지막해로서 1953년부터 시작된 국민경제계획은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었다. 5년간 전국적 고정자산투자는 도합 611,6억원 완성하였고 국민수입은 년평균 8.9% 장성되였으며 인민생활수준은 년평균 4.2% 제고되었다. 우리 나라 농촌은 초급사로부터 고급사로 이행발전하였고 농민들의 생활수준도 날로 향상되고 농촌의 옛모습은 점차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연변의 농촌도 례외가 아니였다. 작자는 바로 이런 변혁의 현실을 시조에 형상화하여 반영하고있다.        다음으로 이 시조는 기, 승, 전, 결의 구성과 대비적수법 및 조리있는 언어구사로 주제를 체현하고있다. 기구(起句)인 초장에서 옛길을 제시한후 승구(乘句) 및 전구(转句)엔 종장에서 진펄의 논길, 들판의 새길을 제시해 뚜렸한 대비를 아루게 함으로써 예전과 다른 변혁의 오늘을 강조하면서 사회주의건설의 발전추세를 형상화하엿으며 결구(结句)인 종장에서 가고 오며 익숙했던 길이 변하고 없던 길이 생겼으니 안다는 말 대신 걸음마다 물어가야 한다는 생활의 리치, 말하자면 변혁의 형실에 직면한 인간의 내재적자세를 제시하고있다. 독자들은 이 결구에서 “아는 길도 물어가라’는 속담을 련상하게 될것이며 나아가서 한 나라, 한 민족, 한 사람의 나아가는 길도 주관적판단보다 객관적법칙에 맞게 택해야 목적을 이룰수 있다는 철리를 감득하게 될것이다.       다음으로 이 시조는 형식면에서 고시조의 음절작시법에 좇아 구성함으로써 예스러운 풍미와 현대적미감을 다분히 체현하고있다. 이 시조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초장 “3•4/4•4”            중장 “3•4/4•4”            종장 “3•5/4•3”        보는바와 같이 초장 첫구는 “3•4”조로 시작했고 초장 두번째 구와 중장 두번째 구에서는 모두 “3•4”조 형태의 앞 3음절에 한음절씩 더 첨가하여 “4•4”조로 구사학있으며 시조구성의 핵을 이루는 종장은 제대로 “3•5/4•3”조를 지킴으로써 시조의 예스러운 풍미와 현대적인 미감을 다분히 느끼게 하고있다.       오늘 우리의 독자들이 추구하는 시조란 조상들이 물려준 민족의 문학형식에 발전하는 오늘의 시대적내용을 생동한 형상으로 삼고 예스러우면서도 현대적미감이 나며 생활의 교훈과 힘을 주는 정형시이다. 이 면에서 시조 “길”은 비교적 성공한 작품이라 할수 있다. 따라서 시조 “길”은 50년대의 시단에 시조라는 쟝르가 창작의 맹아상태에 있을 때 남먼저 선을 보임으로써 시단과 광범한 독자들의 주의력을 환기시키고 시조창작의 발단으로 되여 이후의 시조창작에 촉매역활을 놀았다고 보아진다. 시의 화원에 시조문학의 아릿다운 꽃을 피우려는 이들에게 시조 “길”은 의연히 리로운 계시를 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05년7월 1일           출처: 김경석 저 《문학창작과 표현수법》   출처] 김경석 담시집 “백일홍” 출간|작성자 김 혁  
623    시인 - 황상박 댓글:  조회:4194  추천:0  2015-03-13
[모닥불문학]황상박 시'내 고향 오솔길' 내 고향 오솔길   황 상 박 곱게 핀 함박꽃  반겨 웃는 산기슭에 안개 타고 내렸나  숲속에 숨었나 산나물 돋아나는  오솔길은 걷기도 좋아 포동진 애고사리  손잡고 놓지를 않네 **연변가사협회 회장.     연변가사전문지「해란강여울소리」주필.     -중국 만주 연변땅에도 가면 시가 있고 노래가 있다. 달마다 연변가사전문지「해란강여울소리」를 발간 해 오고 있는가 하면, 연변의 정서를 노래말로 읊고 있는 대표적인 시인이 황상박선생이시다. 한국정서 보다 북한정서의 영향을 오랜 세월 많이 받아온 터이지만 그러나 한민족공동체의 숨결이 노래속에서도 배어나오고 보면 말이다.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피어나는 뭇 꽃과 풀들의 생명들과 함께 해온 질긴 민족임을 알 수 있다. (글 : 서지월시인)       윤동주의 고향 용정에서 반시기 동안 꾸준히 시 창작을 해온 시인이 있다. 현재 가사전문지 ‘해란강여울소리’ 주필로 뛰고 있는 황상박 선생이 그 주인공이다. 황상박, 하면 먼저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황상박 작사 한국화 노래- 로 80년대 연변과 중국 조선족사회를 휩쓸었던 서정적이고도 감미로운 노래.     곱게 핀 함박꽃 반겨 웃는 산기슭에  안개 타고 내렸나 숲속에 숨었나 산나물 돋아나는 오솔길은 걷기도 좋아 포동진 애고사리 손잡고 놓지를 않네 … …   황상박 선생은 19살 밖에 안 된 나이에 벌써 연변일보에 처녀작 ‘대돌을 판다’를 발표하였다. 동녘하늘에 노을이 피고 / 검은산 기슭에 아침연기 걷히면 / 온 마을이 떨쳐나 / 사원들 공사장에 모이었다… 소박한 언어로 당시 연변 공사마을 정경을 그린 서정시이다.   용정 팔도 고향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그는 연변1중 전신인 연변 제2고급중학에 입학, 그런데 2학년에 그만 가정 난으로 중퇴를 하고 말았다. 그래도 시인이 되려는 꿈은 접을 수 없었고, 처녀작을 낸 뒤 팔도창작조 책임자로 뛰면서 마침내 등사본잡지 ‘구수하’의 주필이 되었다. 1962년, 그는 서정시‘형제바위’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10돐 우수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황상박 선생은 선후로 팔도향 우전국 우편배달부, 도서발행원, 용정시방송국 기자 등으로 뛰면서 본직사업에 성실히 근무하는 한편 작가로서의 범상치 않은 성장을 거듭해왔었다. 1960년대 초반 20대의 한창 나이에 연변일보, 연변문학 등 간행물에 시와 민가, 산문, 수필 등 작품 100여 편을 발표하였다. 1965년은 더욱 잊을 수 없는 한해였다. 당해 11월, 황상박 선생은 연변의 5명 대표와 더불어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국과외청년창작적극분자 대표대회에 출석해 주은래, 주덕, 엽검영, 양상곤, 하룡 등 중앙수장들의 친절한 접견을 받고 요지 “일도 잘하고 글도 잘 쓰겠다!”는 내용으로 대회발언을 하는 영예까지 지니게 되었다.  황상박 선생의 창작활동은 중년세대에 왕성기를 보이었다. 특히 나서 자란 고향땅의 구수하, 형제바위, 도끼봉, 고향산에 나는 화초, 산나물, 산열매들을 노래하고 싶은 충동을 받아 단번에 써낸 ‘내 고향 오솔길’은 작곡이 되어 나오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작곡가 최삼명선생이 시골사람들의 산 모습이 그대로 어려 있는 가사에 곡을 달았는데 1980년 겨울에 연변가무단 한국화가 무대에서 첫 선을 보이자 단 한주일 사이 연변방송국에서는 이 노래를 듣고 싶다는 청중의 편지 79통을 받았다. 절박한 사태 앞에서 방송국(그때는 텔레비가 없었음)에서는 편집과정이 없이 무대실황을 그대로 방송에 내보냈는데 대성공이었다.  ‘내 고향 오솔길’은 연변은 물론 조선족사회에 널리 애창되었다. 20여년이 지난 오늘도 이 노래는 이 땅의 우리 겨레가 즐겨 부르는 명곡으로 자리매김하리만치 1982년도에 벌써 국가문화부 1등 상을 수상했다.   황상박 선생은 다산작가이었다. 시, 가사, 수필, 소설 등 장르의 글 근 1000여 편을 써냈었다. ‘꽃 따라 천리 길’, ‘전화벨소리’, ‘새벽종다리’, ‘탈곡타령’ 등 애창곡도 많았다. 3인 시집 ‘산향의 봄빛’, 향토전설집 ‘금망아지’ 등 4권은 여러 부류의 문학상을 수상했었다. 아울러 본직 사업도 훌륭히 해왔었다. 자치주, 성 노동모범, ‘전국선진생산자’ 등 영예를 따내기도 한 것이다.   현재 황상박 선생은 일흔 고령을 넘기었지만 연변에서 유일한 가사전문지 ‘해랑강 여울소리’를 발간하고 있다. 향토문학을 살리고 향토의 정을 아름다운 운률로 연변 땅에 길이 남기려는 시인의 소박한 염원이 윤동주의 고향에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622    시인 - 리해룡 댓글:  조회:4202  추천:0  2015-03-13
    연변일보 문예지에 "조선족작가 문학비 순람"을 기획하고 시우들과 호곡령 리욱시비앞에서   (좌로부터 한영남 시인, 김혁, 류재학 화룡시 박물관 관장, 리해룡 시인)   (1998년)  
621    시인 - 심정호 댓글:  조회:5053  추천:0  2015-03-13
    출간모임은 연변작가협회 연변시인협회에서 주최하고 룡정시  개산툰진 정부에서 협찬했습니다.   심정호 시인 (왼쪽> 개산툰진 정부에 작품집을 증정   심정호시집 출간모임이 오늘 연길에서  있었습니다.    심정호 시인은 1963년 를 에 발표하면서 등단했습니다. 그후 시인은 수십년간 농업로동에 종사하는 한편 개산툰진 통신협회 회장, 룡정시 보도중심 주임. 여러 신문 특약기자로 활약하면서 문학창작을 견지했습니니다. 2006년 시인은 연길로  이주해오면서 고향사람, 고향산천 의미를 되새길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며 이를 문학작품에  반영했습니다. 심정호시인은 어곡전을 비롯해 개산툰의 력사를 알리는데도 일정한 기여를 했습니다. 시집 은 ,,,,,등 6개 부분으로 나눠 시 100여수를 수록했습니다. 그중 2천년에 들어서서 창작한 시가 반수이상을 차지합니다. 시집 은 2011년 출판된 지방지 에 이어 심정호시인이 펴낸 두번째 작품집입니다.   연변 문단의 부분적 작가, 시인들과 개산툰진 당위, 정부 책임자 그리고 심정호시인의 고향친구들이 출간모임에 참가했습니다.   사진/글: 연변인터넷방송 리은파기자     심정호시인 《두만강은 흐른다》 출간     2011년 03월 21일 11:04   심정호시인이 4년 남짓한 시간을 들여 수집, 정리한 개산툰의 력사자료들로 묶어진 《두만강은 흐른다》가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개산툰에서 나서 자란 심정호시인은 한손에 호미를 쥐고 한손에 붓대를 잡아온 향토시인, 농사일의 여가를 타서 문학작품창작에 전념해왔다.  저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개산툰이란 이 고장을 깊이있게 료해하도록 하고싶었고 그 와중에 애국주의교양면에서도 한권의 유용한 향토교재로 될수 있는 책을 펴내고싶었는바 그래서 묶어낸 책이 《두만강은 흐른다》이다. 원 연변일보사 오태호총편집은 서문에서 “혁명전통교양의 교재로서, 향토교양의 교재로서, 더 나아가 애국주의교양의 교재로서 모자람이 없는 책인바 지난날의 력사를 공부하고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며 미래에 대한 비전을 키우는데 밑거름으로 될수 있다”고 평가하고있다. 27만자에 달하는 이 책은 지역명칭의 유래로부터 시작하여 반일투쟁, 민족교육, 해방후의 개황, 어곡전 등 총 7장으로 구성되여있다. 그리고 개산툰에 깃든 전설들도 부분적으로 수록되여 읽는 재미를 더해주고있다.  연변일보 (편집: 김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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