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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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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    시는 영원한 새로운 실험...탐구... 댓글:  조회:4170  추천:0  2015-03-13
시는 영원히 새로운 실험이다 최룡관 문학이란 무엇이고 시란  무엇이기에 내가 그냥 집착하고있을가? 나는 종종 나에게 이런 물음을 제기한다. 그러면서 내가 왜 그렇게 시를 사랑하고 시를 위하여서라면 모든것을 버릴수 있는 준비가 되여있는지 때론 자신을 의심하기도 한다. 왜 그러느냐고.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소학교부터 초중때까지 과목마다 5점짜리 학생이였다. 아버지는 나를 보고 의학을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 말을 듣지 않고 고중부터 문학도가 되여버리였다. 고중에 올라간 다음에는 1학년부터 류를 나누어 어느 한곳을 뚫어야 한다는 선배들의 조언을 받들고 발을 들여놓은것이 문학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원인이 있었다. 한가지는 기자나 작가의 직업이 자유직업이란것이였고, 다른 한가지는 남평의 허충남과 그의 동생 허봉남이 소년보에 소설을 발표하고 사생들의 우러름을 받는것이 부러워서였다. 고중때 소설을 보느라고 밥표까지 팔아가며 책을 사고 밤을 패워가며 책을 읽던 일이 지금도 눈에 펀하다. 그때 재구도 쳤다. 세계삼대명작이라는 《돈끼호떼》를 보아야겠는데 없었다. 할수없이 현도서관에 가서 보자고 하고는 책을 쥐고 도망쳤다. 그때 책을 보느라고 너무도 애쓴 보람으로 나는 병이 나서 일년 휴학까지 하였댔다.  문화대혁명후 연변일보에서 처음 문학판을 복간할 때 나는 처녀작 《모주석께 드리는 송가》라는 장시를 발표하였다. 신문에 서위동이라는 필명으로 시가 나간것을 보고 나는 가슴이 막 뛰였고 몸에 열이 나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것이 발표된후부터 연길에 계시는 많은 편집선생님들이 나를 찾아와서 고무격려하면서 련속 시를 발표해주었다. 리서량, 김경석, 리상각, 김성휘, 류원무, 김창욱, 장지민, 림원춘, 박창묵 등 선배님들이 우리 덕화의 촌놈들을 시인으로 만드느라고 공력을 몰붓던 일이 력력하다. 그후에는 김호근, 황장석, 조룡남, 김동호, 문창남, 림국웅, 리삼월 등 편집선생님들이 나의 작품을 알뜰하게 보살펴주며 시창작의 길로 나아가게 하였다.   쉰둘을 먹던 해에 나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글을 써서 남평이라는 시골중학교에서 연변일보사로 조동되여왔는데 내 개성이 있는 시를 쓰지 못하였다. 나는 문학공부를 하여야 한다. 나로서의 새길을 개척해야 한다. 그래야 선배들에게, 부모형제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시인이 될수 있다고. 그래서 리상각선생님을 찾아가서 조선문학이라는 한국잡지를 빌어다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거기에는 《현대시를 이렇게 쓰자》는 편집부의 문장이 련재되고있었다. 나는 그 문장을 다 복사하여 읽고읽고 또 읽으면서 현대시방법을 익히느라고 무진 애를 썼다. 그후 한국에 여러번 다녀오면서 교보문고며 동시장이며를 돌아다니며 책만 지고 왔다. 첫길에는 98딸라 벌금까지 하며. 서울에 일곱번 다녀왔지만 나는 롯데백화점을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하였다. 10여년간의 학습과 분투를 거쳐서 나는 나의 과거의 시버릇을 떼버리고 현대시라는 곬으로 파고들어가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시를 위하여 나는 연변일보 문화부 주임을 사임하였고 시를 위하여 나는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비서장을 사임하였고 시를 위하여 나는 55살에 내부퇴직을 하였고 시를 위하여 나는 나의 모든 정력을 몰부어보았다.   나는 내가 쓴 시들의 절반을 너무 사랑하고 내가 쓴 《이미지시창작론》을 너무 사랑한다. 그것들은 나의 피로 씌여진것이라고 감히 말하고싶다. 나는 시를 예술로 보고있고 추구하고있다. 시는 무조건 새로운 사유와 새로운 언어들의 행진이라고 나는 믿고있다. 시인의 붓끝에서 언어들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여난다고 믿고있다. 시는 어떤 사물의 묘사나 모방이 아니고 시인자신의 자아표현이라고 믿고있다. 시는 의미를 전달하여 누구를 교육하려는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그리여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것이라고 믿고있다. 정말 좋은 시는 민족의 한계, 국경의 한계, 당파의 한계를 받지 않는 인류적인것이라고 믿고있다. 문학의 시대와 정치시대는 다르므로 시는 어떠한 이데올로기에도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믿고있다. 시는 인생을 파고드는 일이며 자연의 섭리를 파고드는 일이 아니라고 믿는다. 시는 현실에서 오지만 시에 나타나는 이미지는 현실의 중복도 복사도 아닌 비현실적인것이며 현실을 초월한 환상적인것이라고 믿는다. 시의 핵심은 변형인데 변형을 떠난 시는 3류시로는 될수 있지만 결코 차원이 높은 시로는 될수 없다고 믿는다. 시의 목적은 시일뿐이다. 시인이 시외의 다른 목적을 가질 때는 시가 타락하는 때라고 믿는다.   탐구, 탐구, 또 탐구! 탐구하다가 피안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것이 시인이다.  시는 영원히 새로운 실험이다.  2008년 2월호    
619    시인 - 김일량 댓글:  조회:4641  추천:0  2015-03-13
향토시인 김일량 제17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9월6일 10시41분       한국 옥천문화원 김승룡원장(좌)으로부터 상장을 받고있는 김일량시인(우).   5일, 연변작가협회, 한국 충청북도 옥천군청, 한국 옥천문화원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제17회 연변지용문학제가 연변대학예술학원에서 마련된 가운데 향토시인 김일량의 련작시 “가을밤”이 제17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해 시집으로 출간되였다. 정지용문학상 수상자 김일량은 안도현 량병진 모 촌에서 수십년간 밭농사와 함께 시농사를 지은 시인이다.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 김영건주임은“가을밤”은 참신한 시어로 농촌 가을밤의 풍경과 현실세계를 유기적으로 련결시켜가면서 빈약한 농촌제재를 아름다운 시로 승격시켰다는 점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선정리유를 밝히고나서 “향토시인 김일량은 주변의 삶에 대한 체험을 시적으로 수용하면서 가을이란 총적이미지를 통해 자연과 어우러진 시골의 풍속화를 잘 그려냈다”고 시 “가을밤”을 평가했다.   가을빛과 더불어 짙어가고있는 시상 ——— 땅과 함께 시를 쓰는 농민시인 김일량선생  2007/09/22 흑룡강신문 김일량시인과 그의 안해. 길림성 안도현 량병진 고수촌에 자리잡고있는 농민시인 김일량선생의 집은 헐망하기 그지없는 초가집이였다. 부엌을 빼면 정주와 웃방, 가장집물이라야 찬장, 이불장과 궤짝 2개, 그중 한 궤짝에는 귀중한 책들이 들어있었다. 낡은 텔레비전이 정주 한쪽을 차지하고있었고 앉은뱅이상 하나가 웃방구석에 놓여져있었다. 벽에 걸려있는 색다른 액자 하나가 눈길을 끈다. 상장은 1995년 11월 민속학회 백두분회에서 증정한것인데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다. ‘살아서 글로 싸우고 죽어서 글로 남기라’ 필과 함께 인생을 산다는 뜻깊은 글귀였다. 조금 삐뚠 작은 뙤창으로 밖을 내다보면 마당에서 닭들이 모이를 쫓느라고 분주하고 터밭 저쪽은 강뚝이다. 강뚝에 올라서면 맑은 개울이 조잘거리면 흐르는데 김일량시인은 이 뚝을 오르내리면서 수많은 시를 창작했다고 한다.  새벽이면 목높은 장화를 받쳐신고 소를 멀리 산기슭에 몰아다 매여놓고 낮이면 풀낫을 허리에 차고 논둑을 밟으면서 여물어가는 곡식을 보는것이 요지음 김시인의 재미라고 한다. 금년엔 각별히 벼농사가 풍년이여서 웃음이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였다. 땡볕에 까맣게 탄 얼굴, 투박한 손, 힘 고인 팔뚝... 어디로 보나 김시인의 몸에서 시인의 풍채를 찾아볼수 없었다. 순수한 토배기농민의 멋이 풍기는 촌사람일뿐이였다. 그러나 그의 그 투박한 손에서 아름답고 멋진 시들이 창작되여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CJ상, 제1회 ‘송웅컵’아동문학상, 등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했다. 김시인은 지금까지 400여수의 시를 발표했고 소설, 수필도 적잖게 발표한 연변문단의 중견시인이였다. 요지음에는 또 첫 시집 ‘남자의 피는 술이다’를 펴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문학을 무척 즐겼습니다. 중학시절에 책을 많이 읽었는데 책이 내 손에서 떨어진적 없습니다. 중학시절의 책읽기는 관건입니다. 그때 읽은 책들이 머리속에서 잊혀지지 않습니다. 책이 선생이지요. 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옆에 선생도 없고 하여 홀로 배우느라 끙끙거렸습니다.” 시가 발표되면서 차츰 마을에서는 수재로, 사회에서는 ‘농민시인’으로 불리게 되였다. 김시인은 창작수준을 제고하기 위해 문학리론학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현소재지거나 주에서 꾸리는 통신원강습반, 문학강습반같은데도 부지런히 다니면서 기량을 닦기도 했다고 한다. 낮에 찾아두었던 시종자를 싹틔우면서 웃방구석에서 끙끙거릴 때면 안해는 옆에 슬그머니 다가앉아 어떤 시를 쓰느라고 그러는가 하면서 기웃거린다. 그럴 때면 김일량선생은 희죽이 웃으면서 원고를 내밀어주기도 한다.  김시인의 첫 독자는 언제나 안해였고 안해가 좋다고 하는 시면 어디에 투고해도 합격이였다고 한다. “시인남편 만난것이 행복입니다.” 라는것이 그의 부인의 속심이였다. 시 잘 쓰고 일 잘 하는 남편에 대한 믿음은 각별했다. 남들은 다 땅을 버리고 도시로 간다고 하지만 김시인은 평생을 흙과 함께 살거라는것이였다.  김시인의 시는 “소박하면서도 현대시풍이 넘치며 아름다우면서도 매력적이다. 시구는 장황하지 않고 단일하지만 시의 저변에 생활의 철리가 깔려있다. 해독이 쉽고 랑송도 가능해 애독자가 많다.”는것이 전문가들의 평이였다. “가을이면 시가 잘 씌여집니다. 올 가을에도 좋은 시를 많이 써야겠는데...” 황금물이 들기 시작하고있는 논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벌써부터 흥분하고있었다. 시에 대한 그의 애착은 이제 가을빛과 더불어 더욱 짙어질것이다. /리련화  
618    시인 - 전병칠 댓글:  조회:3998  추천:0  2015-03-13
전병칠시인   서-문학살롱에서 인사드리는 서태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인생의 만년에 첫시집을 들고 나오신 김영택시인의 시집을 두고 얘기나누었는데요. 이번 시간에는 올해 제18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한 전병칠시인의 수상시집을 두고 얘기나눠보도록 하겟습니다. 오늘도 림선생과 함께 합니다. 안녕하세요?   림-네 수고합니다. 서-네 감사합니다. 전병칠시인은 시를 발표한지가 아주 오래된걸로 알고있습니다.  오랜 시인인것만큼 전병칠시인에 대해서 림선생님도 료해가 깊을것으로 알고있는데요. 오늘도 작품감상에 앞서 시인의 프로필부터소개주실가요? 림-네 저와는 한 20년전부터 아는 사이입니다. 1949년 9월 길림성 화룡시 룡문향 연풍촌( 현재 투도진 연풍촌) 출생 1988년 연변대학 함수부 조문학부 졸업 69년1월—73년 2월:  3005부대 15중대 (군복무-철도병) 73년3월—82년8월:  연변와룡강철공장,연변통용기계공장 (전공 ) 82년 9월—88년 5월:  연변군중예술관(“해란강”편집부 편집) 89년 6월—93년 9월: 연변록음녹화출판사 (문학편집, 부사장) 93년 10월—06년 5월;  연변예술집성판공실 (주임. 06년 05월 명퇴)   ◆ 06년 6월 명퇴후: 한국 (주)세진ENG 영업이사로 상해시,장춘시,제남시 등에서 매립장메탄가스발전관련사업을 하다가 그 후 5년간 북경의 조카가 꾸린 중국성윤에네르기국제유한공사에서 회사관리사업을 함. 1976년 시로 문단에 데뷔. 연변작가협회회원   ◆ 시, 가사, 실화문학 등  200여수(편) 발표. 10여수 가사 성 주 급 우수상 수상, 두만강여울소리 시창작 우수상 수상.   ◆ 1999년 (대한민국재외동표재단의 ) 출간 서-전병칠시인은 또 한국영화들을 중국에 인입하기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많이 뛰여다닌 일이 있다면서요?그외에도 환경신문사 등 여러 매체들과 문화단체들의 호상 자매결연 등 많은 일들을 실제적으로 실천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간단히 얘기주시죠?   림-네 1, 1994년-2000년: 연변대외문화예술교류센터 동사장(기업/사랑의 뭐길래 인입). 1994년초부터 “사랑이 뭐길래” 중국내 전지역 방영을 위해 수차 베이징에 다녀 옴.될 수 있다는 마라톤식 인내로 CCTV를 설복,11월21일 끝내는 한국풍화기업(MBC대리)과의 방영권계약 이끌어 냄 (한국에 가보지 못한 상황에서 MBC와의 직접계약 불가능 했음)드라마는 중국내 외국드라마 방영사상 최고시청률을 기록하면서 기나긴 세월 장벽넘어있던 한국의 문화적 이미지를 처음으로 대륙에 심어주고 중국교포사회의 민족적 정체감 및 자부심 확대 그리고 이후의 한류형성에 크게 기여하였음. “애인”, “의가형제” “목용탕집 남자들” 등 한국드라마 중국수출에도 각고한 기여를 함.   2,1997년 11월 2일, 한중 환경언론사중 최초로 “환경공업신문사”(한국)와 “중국환경보”간의 자매결연을이끌어내고 중국환경보 기자단의 한국환경고찰 교류 (1999,5,15~21), 한국환경산업고찰단의 상하이환경고찰 교류(2001, 12, 20~23)등 수차에 걸쳐 한중환경산업교류에 기여를 올리고 1997년부터 오늘까지 “환경공업신문사” 중국주재기자, “21월간환경” 중국 특파원으로 10여만자 원고를 써 한중 환경정보교류에 기여를 함.다년간 효광 등 한국 환경업체의 팜플렛, 제품소개 등 40여만자 번역   3,1999년, 한국내 최초 중국동포백년사- “20세기중국조선족10대사건” (350쪽)을 출판 (재외동포재단총서3). 책은 중국교포 백년이주사를 순수한 역사책으로서가 아니라 10대사건이란 실제, 실명이 있는 애환을통해 보여줌으로써 국내인들의 중국체제,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분야 학술연구에 도움을 주고 민족의 동질성확보에 기여를 함.   4,대한사진예술가협회대구지회(2000, 7, 29)전통민속문화보존회(2000, 6, 16), (2001, 11,12) 한국연극가협회대구지회(2004)등 한국 문화단체 중국경내 자매결연에 기여 함.   5,한국 전통민속문화보존회와 함께 전통예술 중국경내공연 수차조직(2000,11,26 ),(2001,9,1~3,),(2002,8,15~17,),(2003,2004, 2005,2006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50주년 경축 때는 “줄타기”등 전통예술을 연길시 도심 시대광장에서 공연,한국전통예술의 이미지 확산에기여 함.   6, 중국의 “지엔지”(2002), “만족의 샤머니즘”(2003) 등 민간예술인을 한국 내에 입국시켜 수차 예술교류를 진행하였음 서-전병칠시인의 시집이 제18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받게 된 수상리유같은것이 있다면요? 림-이번에 모두 6편의 시집이 올라왔는데 김영건주임은 심사위원회를 대표하여 한 수상이유에서 라고 말했다. 서-네 여러가지 경력도 갖추었고 또 많은 일들을 해놓은 정병칠 시인입니다. 그럼 전병칠시인의 시 를 함께 감상하면서 전시인한테 더욱 가까이 다가가 보도록 하겟습니다.   종려나무       전병칠 라체로 서기에는 너무 가슴이 시려 오리오리 털실을 뽑아 비밀스레 몸을 숨깁니다   가면속에 진실을 묻고 죽는 날까지 지루하게 느린 장단의 탈춤을 춥니다   긴-세월 얼기설기 맺히는 고통과 괴로움 아픔만이 아닙니다 풍진세월 이겨온 아름답고 슬픈 씨나리오 지나가는 바람이 읽고 있습니다 흘러가는 구름이 시청하고 있습니다   서-전병칠시인의 시였습니다. 나무의 특수성을 빌어 인간모습을 적어낸것같은데요. 해설부탁드리겠습니다.   림-전병칠의 '종려나무'는 희망을 향하고자 하는 인간의 참모습과 진솔한 표현이 인상적이었으며 자연의 순리와 인생에 대한 반성이 고무적입니다. 종려나무는 우선 몸을 숨겨야 합니다. 벌거벗고 달아다니는 인간은없습니다. 뭔가를 몸에 가려야 합니다. 너무나 진솔하면 바보취급받고 없수임받기가 일쑤고 살아남기 힘든세상입니다. 그리고 진실은 마음속깊이 감추고 가면속에 버팁니다. 그리고는 오래동안 버텨야 합니다. 참아야 합니다. 조개처럼 인고의 아픔을 씹어삼켜야 합니다. 이런 시간이 오라기에 시인은 을 쳐야한다고 했습니다. 장단에는 빠른 장단, 느린 장단이 있는데 바로 그 느린 장난을 치면서 속세와 맞추어 나가야합니다. 이런 기나긴 고통과 괴로움을 인내하는데 또 그것이 아픔만은 아니랍니다. 거기에도 고통속의 아름다움이 있고 역시 씨나리오같은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즉 인내의  과정이겠죠…이런 과정을 알아주는 이도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바로 자연의 바람과 구름인것입니다. 이렇게 이 시는 비장미가 있으면서 인생에대한 반성, 인고의 아픔 등등이 반죽되면서 결국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진솔함과 참모습이 잘 표현됩니다. 좋은 시였습니다.   서-좋은 시였는데요. 전병칠시인은 시창작에서 새로운 문학관을 보여주려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시에 대한 생각같은것을 좀 얘기주시죠…   림-네 전병칠시인의 문학관: 저에게 있어서 시는 곧 향수이며 인생을 동반하는 사랑하는 녀인입니다. 。。。시는 언어예술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만큼 시 역시 의사소통이란 본질을 떠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자아감각에  홀륭한 시를 썼다고 무릎을 쳐도 타인에게 의사소통이 되지않는 시는 존재가치를 잃은 시로 죽은 시로밖에 볼수 없다고 봅니다. 수십번 읽어봐도 시가 지니고 있는 참뜻을 이해하기 어렵다면 독자들은 시를 멀리할거라는 생각입니다. 맛있고 재미있는 시를 쓰고싶습니다. 시독자들에게 친밀하게 다가서는 그래서 시독자가 내 시의 한편이나 한구절쯤이라도 자기의 노트 혹은 서랍의 한 모퉁이에 옮겨놓을수 있는 그런 시, 독자의 인생살이 아픔과 고달픔을 얼마간이라도 희석해 줄수 있는 소주에 곁드는 쫄깃쫄깃한 북어같은, 한여름 더위를 몰아내는 막걸리같은 그런 시 말입니다. 서-독자들이 알아볼수있는 시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있는데요. 그럼 계속해서 다음시를 감상하겠습니다. 입니다. 함께 감상하면서 그의 독특한 표현방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해의 풍경        전병칠   봄날의 수집던 미소는 지나가는 세월이 다 쪼아먹고 여름날의 설레이던 푸른 꿈은 흘러가는 구름이 죄다 타작을 했네   얼마 남지않은 랑만의  잎을 여린 가지에 칭칭 동여매놓고 서글프게 서있는 나무 그 나무아래 찌든 실개천 살얼음사이로 조용히 피의 넋이 흐른다   서- 세월과 함께 하는 안해의 형상을 그려낸것 같은데요. 해설 부탁드립니다. 림-지금 내앞에 서있는 안해는  없고 한도 없습니다.그러니깐 이미 세월의 자취에 다 묻혀버린거죠. 시인은 여기서 봄날의 수집은 미소는 고 합니다. 지당합니다. 결국 세월 즉 흘러가는 시간이 다 쪼아먹은거죠. 그리고 은 또 흘러가는 구름이 다 타작을 했다고 표현했습니다. 흘러가는 구름 역시 시간을 말합니다. 비유들이참 생동합니다. 이제 은 또 았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여린가지란자식들을 상징할수도 있겠죠. 워낙 얼마남지않은 잎새마저도 자식들 한테 다 칭칭 동여주다 보니 결국 자신한테는 아무것도 없는 앙상한 나무만 남아 지금 서있습니다. 참 늙어가는 안해의  풍경을 실감하고 쓸쓸하게잘 그려냈습니다. 그 앙상한 나무아래에는 또 실개천도 메말라 찌들었다고 합니다. 비참한 풍경을 계속 깊이있게 끌고나갑니다. 앙상한 나무로만 남은 것도 쓸쓸한데 그 아래 겨우 한오리 찌든 실개천만 남았으니 더욱 처참하다고 할수있겠죠. 하지만 마지막 한줄은 힘있고 사색적인 한마디를 딱 박아넣었습니다. 그 찌든 실개천마저도 가을과겨울사이에서 살얼음이 집니다. 헌데 시인은 살얼음사이에서 고 합니다. 이 시에서 제일관건적이고 중요한 한마디입니다. 비록 안해가 자신의 모든 셀레이는 것과 모든 푸들치는 것을 다 털어냈지만도 그 앙상한 나무아래의 살얼음진 실개천사이로 고 합니다. 여기서 피는 생명의 박동을 말합니다. 아직도 그 뜨거운 피가, 모성애로 빛발치고 사랑으로 끓고있는 그 얼마안남았으나 아직도 뜨거운 피의 넋이 계속 밑으로 흐른다고 한건 을 최고도로 위안하고 감탄하고 소리높이 웨친것이라고 할수밖에 없죠. 시의 여기에서 모든 쓸쓸한 풍경을 피의 넋의 호소로 다 깡그리 쓸어버립니다. 결국 초췌해지고 기진맥진한안해의 풍경에다 피의 호소 넋의 웨침을 박아넣은거죠 …이 한마디는 이  시를 고조에로 이끌었고 이 시를살아숨쉬게 하였고 이 풍경을 심화하였습니다.   서- 현실감이 짙은 시라고 생각되는데요. 계속해서 감상할 시는 입니다. 제목부터 이상하게 달아졌는데요. 함께 감상하고 선생님의 해설을 듣겠습니다.   몸 값        전병칠   20원 주고 비행기 려객보험권을 샀네 작은 본전으로 큰 장사를 떠나네   나의 아빠는 아는지 모르겠네 내 몸값이 40만원이라네   나를 낳아준 엄마가 알면 좋아하겠네 날 팔아 자그마한 양옥 한채 살수있다네   누구는 쓸개 하나를 10만원에 팔고 누구는 염통 하나를 20만원에 팔았다던데   내 몸은 팔아야 할지 모르겠네 판다면 어떻게 팔아야 할지 모르겠네   아빠보고 물어봐야겠네 엄마한테 물어봐야겠네   비행기가 하늘을 나네 내 마음도 하늘을 나네   내 몸값이 40만원이라네 날 팔아 자그마한 양옥 한채 살수있다네   서-비행기를 탈때 인신보험을 적고있습니다. 시속에 깊은 내용이 있을줄로 알고있는데요. 해설부탁들리겠습니다. 림—돈을 다 써가며 자식 뒤바라지를 했고 나중엔 장사를 한답시고 집까지 다 팔게 되였단다. 그래서 한번은돈을 몇만원 꿔가지고 비행기에 앉았단다. 헌데 그 20원을 주고 산 사고보험료가 40만원이란다. 차라리 장사를 싹 다 팽개치고 사고나 콱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나의 몸값 40만원이 엄마, 아빠한테 라도보내여 질게 아닌가? 그러면 그분들은 만년에 양옥한채를 사서 양옥에서 살수있잖을가? 만날 나더러 하고 답답해 하시던 노인님네들이…그래서 콱 죽고싶은 그 마음, 그래서 누구는 쓸개10만, 누구는 염통 20만…등을 례로 들어가면서 지금 자기의 몸값 40만원에다 대비적으로 쓴다, 이런 표현을 통하여 살기 어렵고 돈벌기 어려운 인고의 아픔과 그런 마음으로 자신을 부풀리우면서 비행기에 얹혀가는둥둥 뜬 허황한 마음, 허무적인 마음, 등등 여러가지로 복잡한 심리를 아주 잘 표현했다. 아주 생동하고 진실한 감정 …사실주의 작품으로 …알기쉬우면서도 눈물나는 이야기를 잘 잡아서 처리했다. 역시 전병칠시인이생활에 깊이 뿌리내리고 형식은 좀 독특한  시창작 솜씨를 엿보게 하는 작품이다. 서-아주 짧은 비약적인 시속에 현실감을 주면서도 상상력을 도발시킨 좋은 시였습니다. 계속해서 감상할 시는 입니다. 함께 감상하고 선생님이 해설을 듣겠습니다.   사과의 매력       전병칠   사과 한알을 스티브 잡스가 한입 떼먹었다 아담의 사과는 종교를 낳고 뉴톤의 사과는 만유 인력을 발견했고 텔의 사과는 스위 스의 독립을 찾아주었다 이번엔 아시아사람, 구라파사람, 7대주 사람들이 스티브 잡스가 한입 넙쩍 떼먹은 사과에 냄새만 맡고 취했다 세상이 흔들거린다 정말 사과는 황홀한 과일인가 보다 정말 사과는 미인을 닮아 매력적인가 보다 나도 한입 베먹었다 내가 먹은 사과는 아무런 기적도 낳지를 않았다 끼룩끼룩- 배속에서 기러기 강남가는 소리만 났다   서-력사인물들을 떠올리며 시인의 재치를 보여준것같은데요. 해설부탁드리겠습니다. 림-작년도에  그가 갖고 다니던 애니폴(苹果) 핸드폰을 보다가 시상이 떠올랐답니다.    스티브잡스(乔布斯)처럼 그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만 실지로 그런 사업가,발명가가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마치  시인이  사과를 먹었을 때는 배에서 강남가는 기러기 소리만 나듯이말입니다. 스티브잡스는 영어이름인데 중국말로는 乔布斯입니다. 누구나 다 잘아는 분인데요 이분이 전세계의 천가만호에 인터넷을 제공해주었고 우리는 그것으로 반공도 하고 별일다 봅니다, 또 이분이 수억의 이 세상 사람들손에 스마트폰을 쥐여 주어 우리들의 생활을 한결 현대화적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이분이 회사를 꾸릴때회사이름이 생각안나 하던차 옆에 사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과공사라고 했는데 또 사과도 그냥 사과이면너무 흔한 사과여서 넘 평범한것 같아 사과를 한입 뚝 떼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회사 상품의 상표는 바로한입 떼먹은 사과모양입니다. 시인은 바로 여기에서 이 시의 모멘트를 잡은거죠.. 시에서 아담의 사과는 먹지말라는 것도 유혹에 못이겨 또 뱀의 얼림수에 걸려 결국 따먹었는데 그것으로부터 성경의 말씀은 시작됩니다. 그 사과때문에 –선악과 때문에 인간은 죄인이 되고 그로부터 성경의 여러가지 리론이 시작되여 내려갑니다. 뉴톤은 사과나무밑에서 청량하다가 사과 떨어지는걸 보고서 아니, 사과가 왜서 떨어지는가? 무엇이 사과를 끄당기는가며 사색을 거듭하고 연구한 결과 만유인력을 발견해 냈지요 성경에서의 사과란 바로 선악과를 말하겠지요…아담과 이브는 바로 그 선악과를 따먹은후 이 세상의 죄인으로 된거죠..그래서 아담의 후대들인 우리들도 지금 다 죄인으로 살고있죠…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우리들을 하나님앞에가서 기도드리면서 죄를 속죄하라고 하는거죠 …전시인님도 아마 많은 죄를 속죄하면서 사는것 같아요…ㅎ 털의 사과란? 14세기 초 스위스는 오스타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인 총독 '게슬러'의 횡포는 이루 말할수가 없을정도였죠. 그는 길가에 말둑을 박아 그 위에 오스트리아 왕을 상장히는 모자를 걸어놓고 지나가는백성들에게 경례를 강요했습니다. 때마침 윌리엄 텔이 여섯살난 아들을 데리고 그 앞을 지나가면서 경례를하지 않자 '게슬러'는 그 벌로써 아이의 머리 위에 사과를 얹어 놓고 텔이 쏘게 합니다. 텔은 보기좋게 사과를 맞추어서 게슬러를 실망시켰습니다. 하지만 또하나의 화살을 가지고 있던 이유를 궁금해하던 게슬러는 텔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텔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만약 실패를 하였다면 두번째 화살로 당시의 목을 꿰뚫어버리려고 했소"이 말이 단초가 되어 민중의 폭동이 발발하였고 스위스는 독립을 하게 됩니다 나 자신에 대한 자비감보다는 시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스티브잡스같은 한 사람이 되기위해서는 노력을 해야겟지요 한면으로는 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풍자입니다. 똑같이 나도 한입을 떼먹어 보지만 노력이 없이는 시마지막에 쓴것처럼 배에서 기러기나는 소리만 들릴뿐이겠지요. 서-네 이였습니다. 좋은 시였는데요. 계속해서 감상할 시는 입니다.  여기서 는생물체의 일부 또는 전부를 절개하여 그 구조나 각 부분 사이의 관련을 연구하는 일로 생각하면 될것같습니다. 함께 감상하고 선생님의 해설을 듣겠습니다.   해부    전병칠   사르륵-예리한 메스가 배를 짼다 흰 비게덩어리를 헤치고 주먹만한 내 생명의 핵을 꺼내 갈기갈기 오린다 뚝-뚝- 피가 떨어진다 을지문덕의 피도 있다 뺑덕에미 피도 보인다 희뿌연 고름도 흐른다 그리고 그속에서 시물시물 눈이 웃는다 허리가 굽실거린다 침이 발린 입술이 실룩거린다   오리오리 찢기운 살덩이를 다시 봉합하고 천평에 올려놓았다 갈꽃처럼 가볍다 산처럼 무겁다….   서- 전병칠시인의 시였습니다. 우에서 감상한 시들에 비해서 좀 리해하기가 어려운데요. 해설 부탁드리겠습니다. 림-시적 자아는 지금 뭔가 깨치는바가 있어 자기를 해부합니다. 수술칼로 자기배를 가릅니다. 그것도 살잘쪄서 비게가 많이 생긴 그 비게덩어리를 헤치고 그속에서 주먹만한 생명의 핵-즉 심장이겠죠. 그걸 꺼내서는오리오리 찢습니다. 내가 의미없는 허무하고 허황한 내  생명이기에 …결국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다는거겠죠. 그걸 찢고 정리하고 뚜드려 고칩니다. 수리합니다. 그런다음 다시 그걸 넣고 봉합하고 –기워매고 천평에다시 떠봅니다. 가볍습니다. 가벼운 건 결국 쓸데없는 군더더기와 잡생각따위를 제거했다는 뜻이겠죠. 헌데무겁다고 했습니다. 인제야 내가 무게있는 삶을 살아갈수 있을것 같다는 거겠죠 …수술한후에야…심장은 한생명의 발동기이니깐요 결국 시의 형식은 나를 해부했지만 결국 나를 포함한 이세상의 많은 사람과 사회상을 폭로한 시입니다. 우리에께는 정말 을지문덕같은 영웅의 성격도 있고 또 동시에  뺑덕의 에미(심청전의 심학규봉사의 후처)같이 간사한 성격도 있습니다. 이중성격이겠죠. 결국 내가 해부한 은 그처럼 무거우면서도 가벼웠습니다, 왜서 가벼운가 왜서 무거운가 독자들도 저마다 가슴에 손을 얻고 자기의 무게를  심사숙고하겠지요. 형식면에서도 이 시는 독특합니다. 종적으로 력사적인것도 시에 넣었는가 하면 횡적으로 나를 포함한 내 주위의 허황한 사람, 헛된 삶들을 풍자하고 재미하고 해학적으로 쓴것이 참으로 돋보입니다. 역시 해학적이고풍자적인 그의 시특점이 잘 구현된 시라고 생각합니다. 서-네 전병칠시인의 진솔함과 해학과 풍자가 다분히 어린 시들을 감상하노라니 어느덧 약속된 시간도 다 되였네요. 초겨울로 막 달려가는 이 계절 참 푸근한 시향속에 뜻깊은 한순간 보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도 림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림-네 수고하셨습니다. 서-그럼 이것으로 오늘 문학살롱프로 여기서 이만 줄입니다. 이시간 프로편집에 김철운 이였습니다. 저는 다음 시간 다시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노래------
617    시인 - 김철학 댓글:  조회:4274  추천:0  2015-03-13
[스파밸리 한민족시화전]김철학 시-'기다림'   기다림 김 철 학 산모롱이  에돌아서면 외진 강나루   나루터엔 낡은 조각배 비인 그림자       (김철학시인:연변시조시사 사장)
616    동시인 -고 최문섭 댓글:  조회:5404  추천:0  2015-03-13
                        (우측 최문섭 동시인) 동시집 “물노래 돌노래” 출간       최문섭의 동시집 “물노래 돌노래”를 일전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시집은”물노래 돌노래”, “꽃바람 꽃이슬” 등 여섯개 장절로 나뉘여 87수의 동시를 수록, 다양한 수법, 생동한 필치로 톡톡 튀는 동심의 세계를 보는듯이 구사하고있다.   시인은 “인생의 칠십고개를 올라서면서 일곱번째 동시집을 묶어보았다. 동시에 대한 애착은 사람을 젊어지게 할수 있다. 겉은 늙어도 속이 파랗게 젊으면 영원한 아이로 살수 있다. 나는 영원히 아이들속에서 사는것이 소원이다.”고 동시집에 자신의 창작관을 밝혔다.   최문섭시인은1942년 조선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출생하여 다년간 출판계에서 사업, 일찍 연변인민출판사 아동문예부 주임, 아동문학총서”별나라” 주필, 편심 등을 력임했다. “구름기차”, “물수제비”, “새싹은 햇병아리”, “불에 타버린 인생” 등 시집, 동시집을 펴냈으며 연변주정부 문학상,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 전국소수민족문학상, 한국 방정환아동문학상 등 문학상을 수상했다.   “물노래 돌노래”는 시인의 7번째 동시집이다.   김혁 기자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1년 9월 19일    (우측 최문섭 동시인)     고 최문섭의 문학인생을 기리는 행사 펼쳐져       고 최문섭 동시인의 타계 1주기를 맞아 "최문섭의 문학과 삶"기념행사이 지난 4월 19일 연길시 삼꽃빌딩에서 있었다. 연변작가협회아동문학창작위원회,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연변조선문독서사협회, 연변아동문학연구회, 연변조선족아동문학학회가 공동주최한 기념행사에서는 고 최문섭선생의 문학세계에 대한 특별조명을 통하여 동시창작, 동시조 개척과 청소년문화사업 그리고 민족출판사업에서 이룩한 성과와 새 세기 조선족아동문학의 번영과 발전에 기여한 영향에 대하여 긍정하고 조선족아동문학 특히 개혁개방이후 30년래 조선족아동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최문섭선생의 위치에 대해 탐구하고 평가했다. 연변작가협회아동문학창작위원회와 연변조선문독서사,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에서 는 4월 20일부터 1개월간 연길공원 동시동네에서 “고 최문섭 동시회전”을 펼치게 되며 연길공원 동시동네에 최문섭선생의 동시 “콩나물”시비를 세우게 된다.   고 최문섭 동시인은 1942년 10월 27일 조선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출생, 연변인민출판사 소년아동문예편집실 주임, “별나라’총서 주필등을 력임했다. 저서로는 동시집 “구름기차”, “물노래 돌노래”등 12권이 있으며 “20세기 중국조선족아동문학선집”, “황구연전집”등 수백권을 편집했다. 중국소수민족문학상, 진달래문예상, 한국방정환문학상, 전국 “3가지 100개” 도서풀판공정상, 전국 백종우수민족도서상 등 상을 수상했다.   김혁 기자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년 4월 29일   최문섭“콩나물동시비”를 말한다                                                                                                 강 길     언젠가 나는 “이런저런 동시를 보고 한마디”란 글을 써서 조글로 사이트에 올렸다. 네트즌의 반영은 한 사람인가 시원하게 잘 썼다고 호응하고 반대하거나 부동한 의견은 오르지 않았다. 최문섭의 동시 “콩나물”은 내가 비평한 동시중의 한수이다. 노란/음표들이/ 실눈을 뜨고 /줄지어 서있다// 하얀 /동요가 /시루안에  빼곡이 /차고 넘친다 보다싶이 2련 8행으로 된 동시다. 우리가 작곡가를 보고 콩나물대가리를 그린다고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음표가 콩나물대가리를 닮았기때문이다. 그러니 콩나물을 보고 음표를 련상할수도 있겠다. 그런데 콩나물이 줄지어 서있다? 마치도 소학생들이 운동장에 줄지어 서있는듯이? 최문섭이 무슨 콩나물시루를 보고 이 동시를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물을 먹고 무더기로 자라올라오는 콩나물은 보았지만 줄지어선 콩나물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시루안에 금도 아니고 은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똥도 아닌 동요가 빼곡이 차고 넘친다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콩나물대가리=음표  음표=동요 고로 콩나물=동요   이는 최문섭의 사유방식이다. 콩나물대가리가 음표를 닮았다 해서 콩나물=동요라고 한것은  억지가 아닐수 없다. 최문섭의 론리가 성립된다면 시루안에 동요뿐만 아니라 한국노래, 조선노래,중국노래,일본노래도 가득 차있다고 해도 무방할것이다. 그렇다면 동요가 차있다는 주장이 독특한 시적발견으로도 될수 없을것이다. 동요는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다. 최문섭이  시루속의 콩나물을 보면서 노래소리도 들었다는것은 환각일뿐이다. 콩나물은 우리 민족만 키워먹는것이 아니고  한족 등 다른 민족들도  키워먹는다.  하얀 동요든 노란 동요든 검은 동요든 시루안에 동요가 차고 넘친다는것은  얼토당토 않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전성호는  "아동문학연구문집" (202쪽)에서 최문섭의 "콩나물"에 대해 "이 동시에서 콩나물의 하얀 줄기를 시각적인 감수로부터 청각적인 감수로 전이시켜 동요라고 명명한 시인의 이 비약은 콩나물자체를 음표에 비기는 세속적인 관습과 이어지고있는데 독자들에게 생동감을 안겨주면서 역시 신묘한 착상이고 자연스러운 전개이며 발견이라 인정된다." 하고 김만석은 "중국조선족동시발전과정과 2000년대중국조선족동시"란 글에서 최문섭의 "콩나물"에 대해 "여기서 원관념 '콩나물'을 보조관념 '음표'로 둔갑시키고  그 다음 회화적인 시루안에 빼곡한 콩나물의 정적인 형상을 '하얀 동요가 차고 넘친다'고 청각적인 형상으로 엉뚱한 승화를 시킨 여기에서 이 동시의 매력적 형상이 한결 돋보인다"고 하였는데 전성호의 "이 비약"이나 김만석의 "엉뚱한 승화"는 모두 생활론리를 떠난데서 비롯된것이다 연변작가협회아동문학창작위원회,연변조선문독서사,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는 최문섭 별세 1주기를 맞아 4월 20일부터 1개월간 연길공원 동시동네에서 “콩나물”을 비롯한 14수의 동시로  “고 최문섭 동시화전”을 열었다고 한다. “콩나물”은 최문섭의 대표작이 될수 없다.       또한 연변작가협회의 위탁을 받고 지난해 연길공원 동시동네에 최문섭의 “콩나물”동시비를 세우게 된다고 했었는데 올해 최문섭 별세 2주기로 밀어놓았다고 한다.       동시 “콩나물”은 2003년에 출판된 최문섭동시집 “물수제비”에 수록된 작품이다. 최문섭이 그 “콩나물”을  책의 뒤표지에까지  박아놓은것을 보면 스스로 인정한 최문섭의 대표작인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콩나물”을  강길- 나는 작품이 아니라고 호된 비평을 한것이다.그러나  아직까지 누구도 내가  볼수 있도록 나의 관점을 반박한 글을 어디에도 올린 사람은 없다. 하지만 조직적으로 “콩나물” 동시화전을 펼쳤거나 “콩나물”동시비를 세우고있다. 이런 조직적행동이 옳바르게 진행된 행사인지 세번 다시 생각해보기 바란다. 돌에 새겨놓것은 마사버릴수는 있어도 지워버릴수는 없다. 어느 학교의 “반디불”동요비에는 “살금살금 뛰여라“ 쯤으로 되여야 할것을 “살금살금 기여라”로 새겨놓았을것이다. 연변사전이나 조선사전이나 한국사전이나 어느 사전을  뒤져보아도 “기다”의 뜻풀이는 “배를 바닥에 붙이고 움직여 나아가다”로 되여있다. 그러니 기여서 어떻게 공중에 날아다니는 반디불을 잡을수 있겠는가?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옳바른 단어사용 교육도 책임져야 한다. 하나의 단어도 이럴진대 전반 시적착상이 엉망인 동시를 돌에 새겨 “콩나물”동시비를 버젓이 세운다는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 연길공원 동시동네에는  김례삼,채택룡, 윤동주,윤정석  네분의 동시비가 세워진걸로 나는 알고있다. “고개길”, “병아리”, “앵코타기”는  모두 연변에서 세월과  더불어 생명력을 이어온  명동요이다. 그속에 최문섭의 “콩나물”동시비가 세워진다면 연길공원 동시동네가 잡동사니동네로 되고말것이다.   동시비는 돈만 있으면 세워지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동시에 대한 긍정일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에 대한 긍정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우리 문단의 력사적기념비로 살아 남아야  할것이다.     고 최문섭 동시화전 연길에서                                                                                                      2013년 04월 20일                     최문섭시인의 별세 1주기를 맞아 어제 기념모임에 이어 오늘 또 이 연길공원 동시동네에서 펼쳐졌습니다.  연변작가협회아동문학창작위원회와 연변조선문독서사협회,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에서는 최문섭시인의 수많은 주옥같은 동시가운데서 , , , , , , , , , , , , , 등 10여수를 선정해 동시화전를 펼쳤습니다.    최문섭 시비 연길공원에 낙성   2014/05/01 20:08           최문섭 시비가 4월19일 타계 2주기를 맞으면서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회장 한석윤)의 주최로 4월19일,연길공원에 낙성되었다. 1942년 10월 27일 조선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출생한 고 최문섭 동시인은 연변인민출판사 소년아동문예편집실 주임, “별나라"총서 주필 등으로,동시집 “구름기차”, “물노래 돌노래”등 12권을 펴냈으며 “20세기 중국조선족아동문학선집”, “황구연전집”등 수백권을 편집했다. 고 최문섭 동시인은 생전에 중국소수민족문학상, 진달래문예상, 한국방정환문학상, 전국 백종우수민족도서상 등 상을 수상한 화려한 경력의 문학인이다. 최문섭 시비에는 그의 동시 “콩나물”이 새겨져 있다. 한석윤 회장은 “고 최문섭 동시인은 지난 세기 80년대에 구호식,설교식에 빠져있던 우리의 동요,동시를 시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동시는 우선 시여야 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동시혁명에 뛰어들었던 시인이었다”고 평가하고 나서 “이번 시비에 새겨넣은 동시 ‘콩나물’과 같은 예술적인 향기가 물씬 풍기는 참신한 동시로,조선족동시단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으면서 자기만의 독특한 동시 봉우리를 이루어 놓았고 자기의 창작실천과 편집사업 그리고 아동문학의 발전과 번영에 지울 수 없는 기여를 했다”고 역설했다. 최문섭시비는 연길공원 동시동네에 세워진 다섯번째 시비이다.     [출처] 최문섭 시비 연길공원에 낙성|작성자 동녘해    
615    동시인 - 김득만 댓글:  조회:4728  추천:0  2015-03-13
동시인 ㅡ" 김득만":   ● 1940년 9월 18일 함경남도 북청 출생, 1960년 연변대학 어문학부 졸업 ● 지은 책으로는 동요동시집                                            등 16권 ● 옮긴 책으로는 장편소설 영화문학극본 등 10권 ● 25년간 등 국내외 상 도합 56차, 99수 수상 ● 현재 연변인민방송국 고급편집 (정교수급), 중국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이사 및 아동문학창작위원회 위원장 23년 역임,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상무이사 및 부비서장,     연변교육출판사 잡지 고문,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잡지 고문 ● 중국작가협회 제6차 전국대표대회 대표 (2001.12) ● 이름,약력과 업적이 등 20여책에 오름 ● 대한민국 종합문예지 낙동강문학 명예주필로 위촉(2010. 06.05)   일시: 2010년 6월 5, 6일 장소: 중국 안도현시 명월진 광장 , 중국 연길시 록원호텔 면담 및 자료정리 : 김인강 낙동강문학 주필     2010년 6월 3일부터 6일까지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민의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계획된 제2회 한중시화전이 한국시민문학협회와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도문시문학예술연합회의 공동주최로 두만강과 백두산에서 개최되었다. 한국문단에서는 성군경 시인을 비롯하여 총 6명 문인들이 訪中 참가하여 연변지역에서 활동하는 한민족 동포문인들과의 문학교류기반을  더욱 돈독히 하였다. 그때 그 곳에서 만난 조선족 문인들 중 유난히 순수한 표정으로 열정을 다해 사회를 보시는 분이 계셨다. 바로 그 유명한 아동문학가 김득만 선생님이셨다. 연변지역 소학교(초등학교) 교과서에 그의 동시와 동요가 지속적으로 실리는등  명성이 자자했지만, 한국에서는 '방정환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것 외에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한 평생을 동시에만 몰두하신 선생님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글을 쓰는 한국문인이라면 충분히 궁금증과 매력을 느끼고도 남음일 것이다. 한국문인과 중국문인이 공동개최하는 국제시화전에 참가하려고 몰려드는 문인들의 열의로 말미암아 김득만 선생님과  낙동강문학의 밀회는 넉넉하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도 백두산이 있는 안도현시 명월진광장 뙤약볕 아래서 그리고 우리가 여장을 푼 연길시 한 호텔로비에서 짧지만 두번의 면담이 가까스로 이루진 것은 뜻이 있으면 길이 있음을 증거하는 일이었다. 김득만 선생님께서는 6월6일 아침 일찍 우리가 묵는 숙소로 걸음하여 귀국선물로 자신의 동시집을 주셨다. 그때 선물로 받은 김득만 선생님의 저서와  그곳에서 수집한 자료[ 연변라디오TV신문 예술인생편]를 토대로 중국연변조선족자치구 새싹 사랑의 대명사 "童시인 김득만"선생님을 사랑문학특집편으로 발간되는 낙동강문학 9호의 지면을 빌어 소개한다.   童시인 김득만     < 아동문학창작의 외길을 고집하는 사람--중국조선족 저명한 아동문학작가 김득만 선생님을 찾아서>   한 시골뜨기의 야심찬 문학꿈   1940년 9월 18일. 조선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난 김득만은 세살 때 아버지를 따라 두만강을 건너 중극 왕청현 천교령진 신안촌으로 이주해 그 곳에서 꿈 많은 동년을 보내며 아동문학창작을 향한 꿈을 야심차게 키웠다. 마을에서 20여리 떨어진석두촌 소학교로 통학하던 시절에는 도중에 사나운 개한테 쫓겨 엉덩이에서 달그락거리던 도시락을 빼앗기는 날이 비일비재였다. 그런 날이면 하루동안 쫄쫄 굶어야만 했던 힘든 고학길이었지만 그래도 어린 김득만에게 학교는 커다른 유혹이었다. 다름아닌 한달에 한 번 어김없이 찾아주는 반가운 손님 '소년아동' 잡지와의 설레이는 만남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단체로 주문한 달랑 한 개 뿐인 잡지를 받아보는 날이면 김득만은 세상 모든 것을 독차지한 기분이었다. 잡지 속에 싫린 매 하나의 내용들을  거의 숙달할 지경으로 읽고 또 읽어 가노라니 그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아동문학의 씨앗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구가 순통치 않고 누구 하나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어도 그는 자신만의 창작수첩에 열심히 아동문학의 꿈을 그려갔다. 서발막대 휘둘러야 거칠게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살림에 7형제를 키우며 허리가 휠 지경이었던 부모님들은 학업의 기회를 맏이인 김득만에게 주었고 그 때부터 여섯동생들은 공부는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부모님을 따라 농사일을 시작해야 했다. 동생들에 대한 미안함과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김득만은 더욱 끈질기게 학업에 몰두했으며 방학이면 석탄 부리우는 일, 목재운반 등 육체노동을 마다하지 않으며 자체로 학비를 마련했다.   동심에 물든 20대   20살이 되던 해 드디어 김득만의 처녀작인 동시 이 고고성을 울렸다. 잡지에 버젓이 찍혀나온 자신의 처녀작을 보며 눈굽을 찍는 부모님과 그런 오빠를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는 여동생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선택에 자부심을 느꼈다. 20살 사나이가 하필이면 아동문학을 고집했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김득만 선생님은 어려서 맛보았던 아동문학의 묘미때문에 다른 길을 선택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며 고집스런 웃음을 지어보였다. 처녀작을 시작으로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5년간 그는 연속 13수의 동시들을 발표했다. 1966년 연변대학 중문계를 졸업하고 연변연극단에 취직했지만 잇달아 문화대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그는 '빈하중농재교육'과 '로동계급재교육'이라는 왕청현 복흥농장에서 1년간 감자농사를 지었고 또다시 왕청현 기름공장으로 옮겨 1년간 콩기름을 짰다. 2년 후 복귀한 그는 연변주영화발행공사에서 번역사업에 종사하며 본격적으로 문학창작에 몰두했다. 1972년 무더운 여름, 우연히 들린 한 농촌마을에서 그는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샘을 파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윽고 샘물이 퐁퐁 솟아오르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아이들이 환호하고 군인들과 마을 사람들이 더불어 서로를 얼싸안으며 눈굽을 찍는 모습을 보는 순간, 김득만 선생님은 뭉클한 감동과 함께 거센 창작의 파도가 몰려옴을 느꼈다. 눈앞에 펼쳐진 모습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그는 부랴부랴 종이장에 적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된 동요 은 당시 폭발적인 인기몰이를 하며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애창가요로 널리 보급되었다.   맑은 샘   모래알 굴리면서 솟아오르는 동구앞 청바위 밑 맑은 샘은요 삼복철 무더운 날 야영의 길에 해방군대 아저씨들 파주셨지요 아~ 수정같이 맑은 샘은요 군민의 정을 담아 솟아납니다   우리는 학교를랑 오갈때마다 쉼업이 솟구치는 샘물터에서 시원한 물 마시고 목청돋우어 3대규률 8항주의 노래불러요   김득만 선생님의 필끝에서 탄생된 건 동요동시 뿐 만이 아니었다. 1974년 가을, 저명한 작곡가 정준갑 선생님과 함께 찾았던 화룡현 숭선진에서 두 사람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드넓은 평강벌과는 달리 그 곳의 논은 대부분 아찔한 산꼭대기에 있었는데 가을을 맞아 산꼭대기는 풍년든 벼파도로 설레이었다. 농민들의 말에 의하면 청바위를 동강내고 강물을 에워다가 양수기로 물을 산꼭대기까지 끌어 올리는 것이 이곳 농사의 독특한 점이란다. 이같은 전설적인 장면에 두 사람은 동시에 끓어오르는 창작의욕을 느꼈다. 이틀 후 김득만 작사, 정준갑 작곡으로 된 가 드디어 고고성을 울렸다. 노래는 시작과 더불어 무서운 속도로 전파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주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청중들의 에대를 받고 있다.   50성상에 영글진 창작의 열매   1980년 김득만 선생님은 중국조선족소년보사의 문예편집부 주임으로 부임되어 발탁, 1996년에는 고급편집직함을 받았으며 장장 16년간 아동문학을 위해 몰두했다. 1985년부터 2007년까지 무려 22년동안 연변작가협회 아동문학창작위원회 주임으로 활약하며 아동문학발전에 땀등이를 쏟았고 근 50여 명의 신인작가들을 양상해냈다. 따라서 김득만 선생님은 "연변진달래문예상", "중앙문화부상","백두아동문학상", "방정환 문학상" 등 국내외 도합 60여차의 상을 휘쓸며 일대 돌풍을 불러 일으켰다. 그 동안의 영예를 증명이라도 하듯 8수의 동시가 소학교 조선어문교과서에 필수과로 수록되었으며 20여수의 동요는 음악교과서에 수록되어 아이들의 애창가요로 널리 전해지고 있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된 동요동시는 무려 1500여수 을 비롯해 16권의 동요동시집, 1권의 문집, 1권의 시가집이 출판되면서 그는 명실공히 아동문학계의 다산작가로 이름을 새겼다. 조선족사회의 일대 문호였던 고 김학철 선생님은 1990년에 발표한 "동심탄만"이라는 글에서 김득만이 꼬마들의 인기를 그는 대장이라고 표현하고 나서 "누가 만약 나더러 문학상의 시상자가 되어달라고 한다면 나는 첫 상을 김득만에게 수여하고 싶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그는 아동문학창작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창작의 밑거름은 가족의 사랑   아동문학창작의 외길에 평생을 바쳐온 김득만 선생님은 자신의 창작생애에서 아내가 힘의 원천이고 동력이었단다. 아내 김봉선과는 대학시절 교내 배구장에서 처음 만나 뜨거운 사랑에 빠졌고 7년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홀몸으로 어린 두 딸을 키우며 힘든 인생을 살아오신 장모님에게 만년의 즐거움을 안겨주기 위해 그는 결혼과 동시에 장모님을 신혼집으로 모셔왔고 수십년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그런 남편이 내심 고마웠던 아내는 남편이 창작에 몰두할 수 있도록 가정의 모든 중임을 가냘픈 어깨에 짊어진 채 원망 한마디 없이 든든한 뒤심이 되어 주었다. 그런 아내가 김득만에게는 힘의 원천이고 동력이었다. 매번 한 편의 원고가 완성될 때마다 그의 첫 독자는 항상 아내였다. 남편의 작품을 한자 한자 곱씹어 읽으면서 그녀는 때로는 뼈와 살이 되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때로는 모질도록 혹독한 평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내의 엄격한 '심사관문'을 거쳐 하나 또 하나의 작품들이 속속 탄생되었으며 아내의 심사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채 이 세상 빛도 보지 못하고 사라진 작품들 또한 적지 않다며 김득만 선생님은 또다시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아내의 신체가 요즘들어 자주 적신호가 울려 가슴이 아프다. 유달리 여행을 즐기는 아내가 남편에게 동반여행을 제의할 때마다 그 돈이면 책 한 권을 더 내겠다며 모질게 아내의 제의를 거절했던 자신이었고 그럴때마다 시무룩해 뒤돌아서던 아내의 뒷모습이 이제와서 더욱 짜릿하게 가슴에 와닿아 미안하기 그지 없단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미봉할까 싶어 요즘은 집안 청소를 도맡아 나섰으며 저녁 뉴스프로를 함께 시청하면서 열띤 토론을 벌이는가 하면 아내가 즐겨보는 의학방면의 서적들을 사다가 함께 연구하는 것이 이제는 일상이 돼버렸다. 창작외에는 그 어떤 흥취나 애호도 가져 본적이 없다는 김득만 선생은 요즘 두 손자의 재롱에 노년생활이 더욱 풍부해졌단다. 아울러 2005년에는 책 갈피갈피에 손자들의 귀여운 모습을 사진재료로 담아 동시집 을 출간해 한 평범한 할아버지의 거룩한 손주사랑을 기록하기도 했다.   마를줄 모르는 창작의 샘   현시기 아동문학에 어떤 폐단이 존재하냐는 기자의 물음에 김득만 선생님은 무거운 표정으로 아동문학작가대오가 점차 노령화에 진입하고 신생력량이 적어지는 현실이 안타까우며 대부분 아동들이 민족문학의 중요성과 독서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관계로 글짓기 수준이 현저히 차해지는 참담한 현실이 가슴아파 견딜수가 없다고 터놓았다. 아울러 현시대 아동문학작가를  꿈꾸는 햇내기 작가지망생들은 될수록 아이들과 많이 접촉하고 문학서적을 많이 탐독하며 늘 창작을 염두에 두어야 진정한 아동문학작가로 성장 할 수 있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아이들을 위한 동요동시 창작에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라는김득만 선생님이라는 작품집을 출간해 아이들이 365일을 동요동시와 함께 즐길 수 있는 활무대를 제공하고 싶다는 꿈과 함께 오늘도 내일도 동심에 살고 동심에 죽을것이라며 호탕하게 웃는 김득만 선생님, 진정 아이들을 위한 문학창작의 길에서 하나 또 하나의 알찬 열매가 탱글탱글 영글어 가리라는 것을 가지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짧은 기사로 선생님의 70평생 삶을 다 알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뭔가 모자라는 듯한 느낌. 더 깊이 알고 싶은 욕구. 돌아오는 날 아침에 받은 선생님의 동시집 세권 을 바로 펼쳐 들었다.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고 다시 아이가 되어 있는 듯한 느낌. 맑은 심성과 반짝이는 눈빛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글들이 나올 수 있을까?   동시집 머릿글로 한석윤 선생님께서 올려놓은 글을 참고해 본다.   『선생님은 우리 아동문단의 이름난 문인입니다. 1960년 4월 동시 으로 문단에 데뷔한 선생님은 지난 40여년간 동요동시집 를 비롯하여 아홉권의 동요동시집을 펼쳐내었는데 우리 조선족 아동문인들 치고 그처럼 많은 동요동시집을 출간한 동시인은 한명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쓰신 동요, 동시 가운에 80여수가 국내와 국외의 공모에서 각종 상을 받으셨고 그렇게 수상작품을 모아 까지 묶을수 있었습니다. 이는 선생님의 문학재능을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또한 선생님이 쓰신 동요들에 많은 작곡가들이 앞다투어 곡을 붙이고 그런 동요곡들이 지난 40년간 아이들에게 애창되어 오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동요로 을 묶었는데 그 책을 펼쳐보면 동원된 작곡가만 하여도 작곡계의 최고수준을 대표하는 허세록, 최삼명, 동희철, 김덕균을 비롯하여 백명이 훨씬 넘으며 그 가운데의 적지 않은 동요들이 주오학교 음악교재와 과외보충교재에 들어가 있습니다. 김득만 선생님은 이처럼 이름난 아동문학가일 뿐만 아니라 저명한 청소년신문방송편집가이고 문학활동가이기도 합니다. 이후의 20여년간 선생님은 의 북간과 조선족청소년방송의 부흥을 위하여 남다른 공헌을 하여왔고 또 이런 공적과 능력을 인정받아 청소년신문방송일군으로는 제일 첫사람으로 고급편집(정교수급에 해당함)직함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1985년부터 지금까지 해수로 장장 20년 동안 연변작가협회 아동문학분과의 주임을 연임해오면서 새로운 시기 아동문학의 부흥과 작가대오의 양성을 위하여 그 누구도 마멸할 수 없는 공적을 쌓아왔습니다. 선생님이 주도한 아동문학분과는 모두가 공인하는 모범분과로 칭송받았고 선생님 자신은 그런 공로로 우수조직자상, 청소년문화진흥상을 받아안기도 하였습니다. 물질문명의 비약적인 발전과는 반비례로 점점 삭막해만 가는인정세태속에서 선생님의 동시는 따스한 동심으로 우리 마음을 녹여주고 미래에 대한 한가닥 밝은 소망으로 우리 앞길을 헤쳐주면서 짜릿한 감동으로 우리 가슴에 안겨오고 있습니다.』   다음은 동시집 머릿글에서 선생님께서 겪으신 고민도 잠시 살펴보았으면 한다.   선생님께서는 동요를 많이 쓴 것으로 하여 오히려 한시기 고민기를 겪기도 하셨다. 동시인들치고 동요와 동시를 병행하여 쓰지 않는이가 거의 없다. 동요와 동시는 모두 동심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 표현 형식상 운율면에서 기본율과 자유율의 구분으로 하여 갈라질 뿐이다. 동요는 어디까지나 시로 되어야 하지만 어쨌든 곡을 지어 불러야 하기에 기본적인 운율만은 지켜야 한다. 때문에 동요를 많이 쓴 사람은 동시를 쓸 때 그 고정적인 틀에서 벗어나기 힘겨워 한다. 김득만 시인은 한시기 동시창작에서 잠시 뜸을 두고 무던히도 고민하면서 재래의 틀에서 벗어나려고 살을 깎고 뼈를 깎는 탈바꿈의 모지름을 썼다. 곡식을 많이 짖느라면 더러는 쭉정이가 있듯이 김득만 시인이 비록 많은 동요동시집을 펴냈지만 그 가운데 채 여물지 못한 쭉정이가 있는 것으로 하여 무척 가슴 아파하며 고민하기도 하였따. 고민이 있으면 해탈이 있기 마련이다. 지난해 펴낸 이 바로 장기간 고민끝에 내놓은 해탈의 산물이며 이전의 동요동시집과 색다르게 탈바꿈한 동시집이었다. 그리하여 동시단의 반향이 대단히 컸다. 하기에 최룡관 시인은 평론에서 이렇게 썼다. - 최문섭 님의 머릿글 중 -     모든 곳에서 성공한 이들의 공통점은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문학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선생님의 삶을 엿보면서, 글을 쓰고 있는 우리들은 뼈마디의 고통을 느낄만큼 노력하였는지, 다시 한번 되돌아 볼 일인것 같다. 선생님께서는 동시집 을 펴내고 그것으로 한국 아동문학의 최고상인 을 수상하셨다. 그 전문과 제16동시집 대표작 을 함께 감상해 보며 각박했던 삶에 잠시라도 순수하게 뛰어 놀 수 있기를 바래본다. 미흡하나마 선생님의 동시세계 꿈밭에서 함께 할 수 있었음에 감사드리며 건강과 행운과 또 멋진 다음작 열매를 기다려 본다.   *.고드름            김득만   두메골 초가집   처마끝에 매 달 린   하아얀 고 드 름   겨울할배 두고 간   하아얀 지 팽 이     *.벙어리 장갑              김득만   손가락 다섯 형제중   맏형은 보나마나 독방 차지   네 동생은 물으나마나 큰 방 하나   동생들은 함께하서 오순도순   맏형은 홀로라서 벙어리신세                                                             김득만 童시인 ,김인강 낙동강문학 주필   童시인 김득만 선생님의 고향은 함경남도 북청이다. 원래 삼살 또는 청주로 지칭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  충청도의 청주와 지명이 같다고 하여 북쪽에 있는 청주라는 뜻으로 북청으로 개칭되었다.  그 옛날, 넓은 북청평야에서 곡식이 수확되는 가을이면 북청사자놀이가 질펀하게 펼쳐졌다. 북청사자놀이는 우리 민족의  중요 무형문화재중 하나이다. 김득만 시인이 태어나기 전인 1924년 함북 경성출신의 시인 김동환이 동아일보에 발표한 시"북청 물장수"의 마지막 구절(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이 1940년에 태어난 김득만 선생님을  지칭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본다.  이제 한민족은 시련의  역사를 딛고 안녕과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 송화강 강변에서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천상의 꽃을 선물 하던 김시인께서, 고희를 넘겨 낙동강 강변 새싹들에게 백두산 천지물을 선물 하기 위해 낙동강문학 명예주필을 기꺼이 맡으신 것은 하나일 수밖에 없는 한민족의 숙명이자 이 시대 새로운 길조로 다가온다.       
614    동시인 - 림철 댓글:  조회:3847  추천:0  2015-03-13
  림철동시집 《아기풀과 아기꽃》 출간   2014-07-22 06:10:18,         연변작가협회 회원이며 중국조선족소년보사 문학편집인 림철시인의 동시집 《아기풀과 아기꽃》이 일전에 한국 도서출판샛별에 의해 출판발행되여 독자들과 대면하였다.   《동물나라, 식물세계》, 《사계절편지》, 《동심이 퐁퐁 솟는 자연》, 《아기마을》, 《하늘동네》, 《곱돌장사귀》, 《하얀 넋》, 《동심에 비낀 세상》 7개 부분으로 나뉜 동시집에는 총 118수의 동시가 수록되였고 동시의 내용에 따라 삽화나 사진을 배합하여 동시내용이 더욱 잘 전달되게 하였다.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를 졸업한 시인 림철은 1980년대부터 300여수(편)의 동시, 동요, 아동소설, 동화를 발표하였으며 아동문학관련 평론과 론문 20여편을 발표한 다산 아동문학 작가이다. 저서로는 《중국조선족아동문학작가작품론》, 《2000년대 중국조선족아동문학평론집》 등이 있다.                                [길림신문]  
613    시인 - 주룡 댓글:  조회:4259  추천:0  2015-03-13
문  (외1수)          *주룡  문은  인연이 맞지 않아 침묵한다  문은  새로운 세계를 탄식하며 열린다  문은  아츠러운 비명속에서 닫긴다  문은  모든 평화를 지키기에 가능할가  문은  절망적인 갈망도 소통시킬것인가  실존의 확증인듯 문은 움직인다  나가려는 사람앞에  움르러드는 사람앞에  문은 항상 철학을 꿈꾸듯  세계를 향해 망설인다  --------------  연장선  홀로 오래동안 서있었다  홀로 서있은 사실은 명백하였다  그리고 새가 운것은 진실이였다  홀로 강물의 흐름을 느꼈다  그 시각 옛날과 오늘을  크게 강조해주려고는 아니했다  홀로 영원한 바래임이 그리웠다  그속에서 음악은 둘이 아님을 확인했다  홀로 마찬가지의 둘이 아닌 오늘을 생각했다  그리고 홀로 래일에 동화될  오늘이 애틋해졌다  갈, 봄, 여름, 가을과 겨울에  홀로 무엇 좀 남기고싶었다  허나 홀로 남을수 없는 세계다  밤은 려명을 위해  파도는 조수를 위해  홀로 낯설음이 되는것이다  홀로 오래동안 서있었다  하나인 저 공간의 비극을 위하여  홀로 스스로의 자세를 꿈꾸었다  -----------  주룡 시인 략력:  1964년 안도현에서 출생,  시 가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수상,  노래 을 쓴 작사가.    현재 연변가무단 부단장.
612    시인 - 방순애 댓글:  조회:4566  추천:0  2015-03-13
  연변 첫 하이퍼시집인 《시간은 원이 되여》(방순애 작) 출간기념회가 연변동북아문화연구원의 주최로 8월 23일 오전 연길시 한성호텔에서 있었다. 2003년 친구의 권고로 백일장에 나갔다가 수상작 랑독을 들으면서 (아, 글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수 있구나)하며 감동에 눈물을 머금었던 방순애(55세)씨는 그것이 계기가 되여 꾸준히 독서, 1년에 2백여권의 책을 독파하면서 지식을 습득하고 2004년 수필 《내 사랑 내 곁에》가 제2회 전국 조선족어머니수필공모에서 수상하는 등 활약을 펼치며 문학의 꿈을 싹틔운다. 감사의 말을 하고있는 방순애시인 시집평론을 하고있는 최삼룡평론가. 방순애씨는 2012년 우연한 기회에 시와 접촉, 최룡관시인으로부터 하이퍼시를 배우고 쓰게 되였고 무의식속에 숨겨진 존재를 끄집어내고 희열과 고뇌에서 언어를 찾아 힘을 쏟아넣게 되고 그것이 결실을 맺어 오늘 시집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고 경과를 이야기하였다. 이날 출간식에서 최삼룡평론가가 서평을, 최룡관시인이 총화발언을, 연변작가협회 허룡석주석과 단풍수필협회 김운일회장 등이 축하의 말을 하였다. 출처(연변모이자 )
611    시인 - 방산옥 댓글:  조회:4616  추천:0  2015-03-13
10월 18일, 방산옥 하이퍼시집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세미나가 평론가 시인 등 2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연길 한성호텔에서 열렸다.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의 주체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김파시인, 김룡운평론가, 김철호시인 등이 방산옥의 하이퍼시집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김파시인은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에 대해 "방산옥의 하이퍼시집은 전위성, 개척성, 창조성, 개성성이 돋보이고 전반 시풍격이 대단히 기발하고 대담하며 정열적이면서도 상상력이 풍부하며 움직이는 시어로 이미지가 번쩍이기에 흡인력이 강한 시집이다면서 지금까지 그 누구도 쓰지 않은 주역과 의학을 생활과 융합시켜 쓴것은 방산옥시인의 “개성적시령토”로 인정할만다고 평했다. 언어의 조합면에서 “새들의 알까는 소리가 보이고” “약초들의 쓴맛이 들린다”에서 “소리”는 청각인데 “보인다고”고 시각화하고 “슨만”은 미각인데 “들린다고"고 청각화했다면서 추상어를 구상어로 전환시켜 5감으로 감지할수 있게 함으로서 “되지 않는 말을 되는 말로” “무이미지를 유이미지로”전환시켰다며 강압적인 폭력조합에 긍정을 표했다.   그렇다면 평론가 김룡운은 방산옥과 그의 시집에 대해 어떻게 평가했을가?   김룡운평론가는 “불가사의, 그속에서 숨쉬는 생명시학”이라는 제목으로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 에 대해 평했다. 김룡운평론가는 “방산옥의 하이퍼시집은 조선족시단에서 방순애의 하이퍼시집(시간은 원이 되여)다음으로 내놓은 두번째 하이퍼시집이다.”며 방산옥의 시는 불가사이, 그속에서 숨쉬는 생명시이다고 평가했다. 45년간 록색생식의학연구에 몰입하면서 수많은 아가들을 선물하였고 건강한 삶, 행복한 짝을 지어주었던 의학자가 이번에는 그 자신이 문학과 열광적인 짝짓기를 하여 예쁘고도 포동포동한 아기-하이퍼시짐을 낳았으니 실로 경하할만한 일이다.”며  60이 넘어 출산한 산모-방산옥을 경하하려고 이자리에 앉았다고 말했다.   그는 폭력적인 언어조합에 대해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신비평에는 언어의 폭력조합을 아이러니견제와 균형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적당한 견제와 균형은 시 앙금을 증강시키고 사색의 심도와 광도를 확대하여 시의 품위를 높이지만 지나치면 미궁에 빠지게 된다. 일반적인 시도 잘 읽혀지지 않은 시대인데 하물며 수수께끼같은 시야 더 말할나위가 있겠는가. 독자의 외면은 너무나 당연할것이다. 그러므로 언어의 폭력조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것은 무리라고 지적했다. 김철호시인은 방산옥의 시를 례로 들면서 시를 통한 성적인 표현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성에 대한 표현은 금지구역이 아니다. 인류에게 가장 아름답고 비장한 행위이다”며 방산옥은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시를 썼다고 평했다. 방산옥은 " 본 시집 출간이 촉박한건 사실이지만 이는 단지 2년동안 배움 총화글에 지나지 않는다. 제 나이는 69세가 아니라 2세이다. 시를 접한지 2년밖에 안되기때문이다.시를 배우는것은 내 '짝'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이다. '두뇌에 아빠트를 짓겼다.'고 시에서 밝힌바 있다. 시를 배우는 목적은 두뇌 개발, 두뇌건강을 위해서이지 명인이 되자고 배우는것이 아니다. 동시를 배우고 쓰면서 어린시절로 돌아간 기분이고 하이퍼시를 배우면서 '시'와 련애를 하는 기분이다. 마음껏 날아다니면서 시를 쓰니 마음이 젊어지는것 같다. 그래서 항상 석양은 푸르싱싱하다고 말한다.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시를 배우라고 권하고싶다."며 오늘 좋은 말씀 잘들었고 마음 깊숙이 간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글로미디어 문인숙기자      
610    시인 - 조광명 댓글:  조회:4337  추천:0  2015-03-12
        중국조선족 시인/ 조광명       중국 길림성 유수시 출생     1986년부터 문학작품 발표 시작.     중국 연변작가협회 회원.     문학상 다수 수상.           대표작: 죽어서 껍질 반 장도 남기지 못할 몸이요, 평생 시 공부에 죽어서 한 줄 시 남기지 못해도 여한은 없을 터.   프로필과 대표작                  조광명   며칠 전, 정말 문학에 미쳐서, 문학 이외에는 할 짓이 없어서 문학에만 빠져있는 한 재간둥이 친구가 인터넷에 문학카페를 하나 지어놓고 그 카페에 못난 나를 기어코 소개해 올려준다면서 내 상세한 프로필과 내 대표작 목록, 그리고 작품 수편 등을 요구해온 적이 있다.   작품이야 좋든 나쁘든 발표한 것들이 꽤 되니까 인터넷상에 떠도는 내 작품 중 아무거나 긁어다 올리고픈 대로 올리슈 하고 카페 주인장의 처분에 맡겼지만, 상세한 프로필과 스스로 대표작이라고 인정되는 작품목록을 적어 보내달라고 하는 데는 많이 난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광고가 난무하는 시대, 가난한 글쟁이일지언정 자기홍보라도 잘해야 싸구려 글이나마 그래도 잘 는 거니까 무료로 홍보해주겠다는데 얼마나 좋냐, 요구하는 대로 보내주면 될 걸 과히 난감해 할 필요까지야 있었냐고 의아해할 분들도 있을 수 있겠으나,그러나 그 친구가 메신저에 적은 구절을 그대로 옮기면 내 난감함을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도 프로필 달랑 넉 줄입니까? 이번엔 안됩니다. 수상작품명이랑 수상연도랑 상세하게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대표작품명도 상세히 보내줘야 합니다.   어떤가? 좀 생어거지 투가 아닌가. 무조건 어떻게 보내야 한다는 은 치고는 너무 내리먹이는 어거지가 아닌가.   ㅎㅎ, 속으로 웃었다. 이 친구 나를 잘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직 날 잘 모르고 있군. 그리고 그 웃음 뒤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프로필부터 짚고 넘어가자. 참말로 내 프로필이란게 달랑 넉 줄밖에 안된다. 다시 여기에 중복해 적어봤자 정말 달랑 넉 줄, 그 이상은 더 적을 게 없다. -1986년부터 문학작품 발표 시작 -수차 수상. -시집  출간 -현재 청도 거주.   이상이다. 굳이 행을 나누니까 그나마 넉 줄이지 행을 나누지 않고 이어서 적으면 기껏해야 한 줄 반밖에 안될 것이다.   다른 프로필도 아니고, 문학인으로서의 내가 내 작품 뒤에 적을  프로필로는 이상 넉 줄밖에 정말 더 적을 게 없다. 그만큼 문학인으로서의 내 글짓기 농사 20여년이 거의 무깍지 농사로 일관해 왔다는 뜻도 되겠으나, 내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 1986년에 처녀작을 발표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내 이름 세 글자를 박아서 발표된 작품이 수량 상으로는 꽤 될 것 같은데, 정작에 내 기억에 남는 내 작품 속의 글 구절이나 글 제목 같은 건 거의 없으니, 그나마 처녀작이 발표될 때의 그 설레임이 그 발표연도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진 것만 해도 고마울 따름이다.   그리고 수상 경력도 몇 번은 있지만, 그건 내 글이 잘 나서 보다도 못난 글을 이쁘게 봐주고 뽑아준 편집선생님들과 평심위원들의 선택의 덕분이지, 스스로 정작 내 자신의 글을 다른 사람들의 글과 비겨봐서 과연 내 글이 잘되어서 상을 탔구나 하고 생각해 본적은 한 번도 없다. 그리고 사실 말이지 우리 문단이란 게 작가협회 회원증을 그 무슨 명찰처럼 소지하고 있는 사람은 수 백 명 되는 줄로 알지만, 정작 글 농사에 매달려 열심히 우리 문자로 밭이랑을 가꾸는 작업에 땀 쏟는 이는 통틀어 몇 명 안 되는 것도 사실이니, 글 농사 몇 년 열심히 지으면 그게 기특해서 이런 저런 상을 설치한 문예지에서 격려의 차원에서 상을 한 두 번 주는 것도 사실 아닌가. 정말 작품이 뛰어나서 수상한 분들에게 모욕이 되는 망발일지 모르지만, 내 경우에는 아직 문학에 제대로 입문도 못한 놈이 하도 문학 문학 하면서 열성을 부리니까 그게 기특하고 안쓰러워서 편집선생님들과 평심위원들이 격려의 차원에서 상이라는 영광을 안겨주었겠지 하고 생각할 뿐이다. 행운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지나면 그만, 영원으로 이어지지 않는 게 행운 아닌가.   그 행운을 수차례 받아 안았을 때의 고마운 마음은 간직하고 있어야 하겠지만, 그러니까 수차 수상했던 기억은 있지만, 대체 어느 작품으로 언제 수상했던 지는 사실 잘 기억에 남아있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걸 기억하고 있어선 뭘 하랴. 결국은 별거 아닌 게 상에 걸렸던 것을. 혹자는 이것을 내 건방짐으로 타매할 지도 모르겠으나 건방짐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데 어쩌랴. 기억할 필요도 없어서 아예 기억하지 않고 있었는데 어쩌랴.   혹시 수상도거리호가 되어 해 마다 수 십 개 문학상을 혼자 도맡아 수상하는 정도라면 장부책 관리하듯 전문 따로 수상경력을 적어놓는 기록부 같은 걸 만들어서 일이삼사 하고 빠뜨리지 않고 적어놓는 열성을 부릴 수도 있겠으나 이건 가뭄에 콩 나듯 몇 년에 어쩌다 한 번씩 수상의 영광을 지니는 것이니 굳이 그런 기록부 같은 걸 만들 일도 없다. 그렇다면 기억에 의존해야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내 기억이란 게 자기 핸드폰 번호도 제대로 기억을 못해서 혹간 누가 내 핸드폰 번호를 물어오면 멍 하고 한참 머릿속을 뒤집어야 하군 하는 나의  수준이니 어찌하랴...게 그 소중한 문학상에 관한 상세한 정보 같은 것들은 기억의 뒷골목으로 시집보내버리고 말고 있는 자신을 이렇게 변명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와 놓고는 어느 구석에 처박아놓고 있는 지도 모르는 상패 혹은 수상증서들을 다 뒤져서 일일이 재확인 작업을 진행해서 상세한 프로필 작성 작업을 하기에도 귀찮으니 위에서처럼 달랑 넉 줄밖에 더 적을 게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말이지 내 주제이면 넉 줄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만큼 사회상에 지명도도 없고,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어떤 화려한 타이틀 같은 것도 없는 놈이니 텅 빈 놈은 텅 빈 대로 짧은 프로필로 살면 그만이 아닌가. 정말 어데 나가서 내가 조광명이요 고래고래 소리질러봤자 어, 니가 그 조광명이냐 하고 알은체 해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고, 반갑다고 달려와 손잡고 흔들어줄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니, 빈 깍지 인생은 빈 깍지 인생답게 빈 껍질 같은 넉 줄이래도 너무 충분하지 않은가. 그나마 고마운 거지, 내 이름자 세 글자 뒤에 그 넉 줄이라도 적을 게 있다는 게. 죽어서 한 줄기 연기로 사라지고 말 줄 알지만, 혹시 마지막으로 흩날리는 그 연기라도 아쉬워하는 그 누군가가 있을 거라면, 그 누군가가 종이에 하는 글줄이라도 적어서 함께 불태워 연기로 날려 보내줄 거라면 미리 고마워서 절이라도 드리고플 뿐이다.   그리고, 대표작에 관해서다. 그 친구에게 제발 믿어주쇼 하고 빌었다. 정말 나에게는 내 마음에 들어 내가 기억할 정도로의 대표작이란 게 없다고.   -왜 없습니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작품만 해도 수두룩한데... -그건 당신이 기억한 거고, 난 내 마음에 만족할 정도로 기억하고 있는 작품이 없는 게 사실이니까...   또 이란 단어를 쓸 수밖에 없다. 이렇게 내 언어의 곤궁을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너무 느끼고 있다. 그러나 사실이란 단어를 대체할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지금까지 글 농사 이십여 년이지만, 그러나 아직도 문학이 뭔지 깨우치지 못하고 그 구도의 길에 갈팡질팡 하고 있는 게 내란 놈의 꼬락서니다. 문학과 글쓰기라는 이 도를 깨우치기에 나는 아직 멀었다는 얘기다. 그런 내게 대표작이란 게 있을 수 있겠는가. 아직도 나는 술래라는 그 허상을 쫓아 진지하게 놀음에 빠져있는 어린애처럼 문학이라는 이 늪에 빠져 허우적이기만 하는, 수영도 바로 못하는 풍덩 수준의 초짜인 것이다. 문학의 초년 입문생에 다름 아니다.   살아서 아니라, 죽어서라도 남들이 영영 기억해 읽어줄 글 한 편이라도 남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내 허망한 욕망인 줄 안다. 죽어서 반 장 껍질도 남기지 못할 줄 알면서도 열심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놈이니, 죽어서 한 줄 글줄도 남기지 못할 줄 알면서도 아무런 여한이 없이 지금의 내 글짓기 작업에 재미를 느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나마 굳이 대표작이란 게 있을 수가 있다면 그건 내 죽은 뒤에 남들이 인정해줘서 타이틀 붙여주는 거지, 멀쩡히 살아있을 때 스스로 자기 작품을 대표작이라고 이름붙여 내놓는다는 건 내 주제에는 스스로의 주제파악이 잘되지 않아서 불가한 작업니다.   이런 내게 그 친구가 과 을 요구해 오는 를 부렸으니 내가 얼마나 난감했겠는가. 난감했지만, 나는 하는 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나의 그 을 그 친구가 건방짐으로 받아들였다 해도 방법 없다.   없는 놈이 있는 체 해봤자 털어 먼지밖에 더 없는 걸 나 자신은 잘 아니까. 짧은 나를 스스로 올리춰봤자 일 미터 칠십에도 미치지 못하는 단신인 줄 나는 잘 아니까. 나는 아직도 문학의 길에 아장아장 걸음마 익히는 못난 새끼오리이니까.   아장아장이라는 귀여운 단어를 스스로에게 선물하며 구구한 변명을 줄인다.   이천구년 사월 칠일 청도 문우재서.  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           시인이 벽을 만나면                  사진/시 조광명       이 시대 가난만큼 널린 시 그 시를 주으러 길에 나섰지 흔한 시들은 길에 가래침처럼 뱉어져서 행인들의 발에 밟히다 공기 속에 먼지로 부유하고 하늘을 땅처럼 날다가 땅을 하늘처럼 내려앉고     재밌군 재밌어 이 신성한 시의 왕국에 가장 흔한 건 싸구려 시 시인은 맨발의 거지로 녹 쓴 놋쇠숟가락 하나 들고 시를 주 시를 주 밥알보다 천한 시를 주 때 묻은 발에 흰 밥알 하나 태양처럼 묻히고 금방 어둠과 흘레 마친 아침의 태양을 히멀겋게 바라보며 재밌군 재밌어 시가 배가 고팠어 배가 홀쭉한 승냥이처럼, 눈에 파란 불 켜고 오만한 꼬리 도고한 깃발처럼 높이 쳐들고 그래, 모든 사랑하는 것을 노려봐야지 지켜야지, 시인의 몫으로     이 세상서 가장 위험한 건 추위를 두려워 않는 겨울의 시 배고픔을 두려워 않는 가난의 시 그리고 칼을 두려워 않는 검객의 시 시를 바치리 시대의 제단엔, 항상 칼 대신 시를, 밥 대신 시를, 생화 대신 시를.     아무런 낙서도 씌어있지 않는 벽은 시에 대한 모독, 그 벽에 시인은 침을 뱉어서라도 왜곡된 사랑 그리듯 시를 써야 하리 시인의 몸뚱이보다는 차갑지만 그러나 하늘처럼 흐르며 항상 우리의 운명처럼 떡 버티고 섰는 벽에.     청도 문우재서    
609    시인 - 박문파 댓글:  조회:5083  추천:0  2015-03-12
                                           (우측 박문파 시인) 천지물 어머님 이처럼 조용한 세상도 있나요 부서지지 않은 하늘들이 한마당 파아랗게 모였네요 이제 어머님 뿌리 고운 꽃사슴처럼 찾아오면 우린 끼리끼리 어울린 족속 한세상을 편히 살고 싶지 않으세요 그리하여 어머님 비단결 천지물에 현주소 수놓고 꽃구름처럼 모이는 길손 붙잡기 하얀 숨결들이 비끼는 술래잡이 놀곱아지겠죠. ........................................... 제3회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 가작  박문파(중국) 출처 [재외동포뉴스] . [출처] 천지물|작성자 주영수인사랑  
608    시인 - 김창희 댓글:  조회:4395  추천:0  2015-03-12
상금도 시를 쓰는 시우가 부럽다                                    김창희   2006년 1월 3일 할빈 중앙대가에 쓸리다 오랜만에 서점가에 끌려 2005년중국시가정선이라 이름 한 시집을 골라잡고 오랜만에 시고랑을 빗질한다 소학생이 장편소설 읽듯 훑어보다 세집살이에 옹송거리면서도 등이 휘지 않는 시우의 파리한 얼굴이 읽혀진다 세월에 살면서도 세월의 중앙을 범하지 못하고 오늘도 시를 끄적이며 삶의 그림자 흉내내는 장하고 용한 시우가 부럽다 누구라 할것없이 빚진것도 없으면서 늘 마음 하가득 근심을 지고가는 달팽이처럼 훔쳐본 세상을 세상의 모든것이나 한듯이 으시대며 알았다는듯 머리를 주억대는 파리처럼 왜 그리 소심하게 용감하게 사를수 있을가 부쉬낀, 조기천, 김소월, 마리아 릴케,리상, 윤동주, 북도, 이싸… 사실주의, 이미지즘, 초현실주의, 신사실주의,포스터모더니즘 맑스, 모택동, 칸트, 니체, 베르그송, 사르트르 조선시, 조선족시, 중국시, 한국시… 짬뽕으로 말아먹으며 기신기신 헐레벌떡 콜록쿨룩 오늘까지 붙어온 살아온 시우가 눈물 아니라 코물이 나게 피물이 나게 감사스럽다 사재를 틀어 시집을 만들고 나팔꽃처럼 바지랑대에 따라오르며 해빛인양 향기를 피우며 한무리 잊혀진 족속속에 살면서도 마음은 지구의 중심에 사는 유치원어린이보다 유치하지 않고 김삿갓보다 해학적이고 황소보다 고집이 센 시우가 부럽다 2006년 추운 할빈 겨울을 나며 2005년중국시가정선을 에어콘해 언손 녹여보다 언제면 파리한 얼굴의 시우의 시도 이 시집 한자리 녹일수 있을가 중얼대본다 왜소한 시우의 모습이 삶에 부닥껴 부황 든 비대한 내 그림자보다 너무 살가와 할빈의 겨울이 푸근해진다. 2006.1 출처(연변모이자 )
607    시인 - 주성화 댓글:  조회:4932  추천:0  2015-03-12
현재 한국 한림대 언론정보학 박사과정을 하고 있는 주성화 시인의 시집 가 한국학술정보출판사에서 출간되였다.     고 말하고 있는 주성화 시인은    오랜 기자생활을 해온 사람으로서 그만의 독특한 통찰력으로 이 세상을 가슴에 담아두고 또한 거기에서 느낀 바를 철학적 깊이가 있는 시로 독자들에게 선물하는 시인이다.     주성화 시인은 또한 최근 를 출간하였다.   주성화 시인 ‘중국조선인 이주 사진첩’(1권) 출간     2009.                     ‘중국 연변역사학회’의 기획과 한국재외동포재단의 후원 하에 주성화 시인이 수집하고 편찬한 ‘중국조선인 이주 사진첩’(1권)이 지난 3월 중순에 한국학술정보(주)에서 출간하였다.   총 4권으로 기획된 ‘중국조선인 이주 사진첩’은 건국 전 중국조선족의 이주, 사회, 문화, 교육, 위생, 종교, 경제, 금융, 교통, 투쟁, 민속 등 각 분야를 포함하고 있어 역사분야뿐만 아니라 중국조선족 전반 사회 연구에 가치 높은 사료를 제공하게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올해 10월 한국학술정보에서 제2권을 출판할 예정이다.   중국 연변대학 김병민 총장은 추천사에서 “19세기 60년대 조선북부 지방의 흉년을 계기로 조선인의 중국으로의 대량 이주가 시작되어 현재 중국조선족은 이미 150여년의 이주 역사를 갖고 있다”며, “지난 세기 20~40년대 사진은 지금처럼 생활 향수의 수단이 아니라 기념 적이고 기록적인 의의가 차분하였고 또 고달픈 생활난과 전쟁, 자연재해로 인한 잦은 이동, 그 후에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정치연건 등 여러 요인으로 하여 오늘날 당시 사진의 발굴과 정리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하고 나서, 앞으로도 ‘중국조선인사진첩’이 “조상들의 진실한 삶의 기록을 통하여 후세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새로운 삶의 가치를 재정립하고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바탕으로 중국조선족의 오늘과 미래에 대하여 발전방양을 제시하고 문화가 있는 민족으로 거듭나기 위한 사명감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주성화 시인은 연변대학교 수학학부 졸업생으로, 한국 한림대학교 대학원 언론정보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현재 인터넷 해란강닷컴 주필.   주성화 시인의 저서로는 ‘연변인구연구’, ‘연변인구통계자료집’, ‘연변조선족자치주지’인구편, ‘중국조선인 이주사’, ‘숲에 떨어지는 해와 빛을 잃은 무리’(시집), ‘중국문화풍경’ 등이 있다.          
606    시인 - 최화길 댓글:  조회:4427  추천:0  2015-03-12
        중국조선족 시인/ 최화길         1962년, 림구현 룡조향 흥풍촌에서 출생.         연변대학 조문전업(함수) 졸업.          시, 수필, 동시 등 400여 수(편) 발표.         연변작가협회 회원.         흑룡강조선족작가창작위원회 회원.         녕안시조선족문학가협회 회장.         현 녕안시조선족중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         흑룡강성소수민족문학상.         흑룡강『흑토문학상』시부분 대상.         한국『월간아동』신인상.         백두아동문학상.         2003년 시집『봄날의 사색』출간.       최화길 동시집"해님의 낚시질"출간         물에 던지는 낚시질이 아니라 낚시도 미끼도 없는 낚시질   하늘에서 땅까지 드리운 낚시질 낚시대 없이도 잘도 낚는다   해볕 물고 뾰족뾰족 돋아나는 애기풀 해님이 낚아올린 파아란 물고기   최화길 동시집 “해님의 낚시질”이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동시집에는 “고드름” ,“사랑의 산수”, “우리 집의 사계절”,“나의 선생님” 등 97편의 동시가 수록, 저명한 동시인 한석윤은 동시집의 꼬리말에서 "창신적이고 참신하며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동심적상상이다." 라고 평했다.   최화길시인은  1962년, 림구현 룡조향 흥풍촌에서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  현재 흑룡강성 녕안시조선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시, 수필, 동시 등 400여 수(편) 발표하였으며 2003년에는 시집 “봄날의 사색”을 출간하였다. 연변작가협회 회원, 흑룡강조선족작가창작위원회 회원으로서 흑룡강성소수민족문학상,  흑룡강신문”흑토문학상” 시부문 대상, 한국월간아동 “백두아동문학상”등 상을 수상한바 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0년 9월 12일  
605    시인 - 리호원 댓글:  조회:4699  추천:1  2015-03-12
      (리호원시인:하얼빈「송화강」주필)     일전 흑룡강성제3기소수민족문학상 평선결과가 발표되였다. 평선에 참가한 126부(편)의 작품들중 28편의 우수작품이 입선, 그중 리호원시인의 시묶음《불멸의 상상》이 1등상을 수상했다. 김동규작가의 중편소설《촌놈》, 김춘실수필가의 《남편 키우는 재미》(수필집)가 2등상에 당선되였다. 이외 신금화작가의 동시집《청개구리 셈세기》, 남영선작가의 잡문집《이슬》, 주영애작가의 수필집《백양나무》가 3등상에 당선되였다. 평선에 참가한 작품들은 2007년 1월 1일부터 2009년 12월 31일사이에 발표된것으로 소설, 수필, 보고문학, 시가, 민간문학, 잡문 등 다양한 쟝르가 포함되여있다. 한어로 된 작품들로는 진옥겸의 장편소설《삽수령》(插树岭), 오수충의 장편소설《림해 회민공대》(林海回民工队)가 1등상을 수상했다./채복숙 [래원:길림신문 2011-1-17 최화]                                                        (동그라미 사진 우측 리호원 시인)     (흑룡강신문=하얼빈)지난 6일 상지시조선족중학교 5층 소강당에서 ‘'12.9' 기념활동 및 고 한춘시인(본명 림국웅) 소장도서 기증식이 열렸다.   지난 7월 한춘시인은 자신이 일생동안 지혜의 언덕으로 아껴왔던 도서 3000여권의 거취에 대해 고민하던중 제자 리호원씨에게 모교인 상지시조선족중학교에 기증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타계했다.   학교측은 고 한춘시인의 도서 기증이 모교와 재교생들에게 큰 의의가 있는만큼 '12.9' 기념일을 택하여 '12.9' 기념활동과 더불어 도서기증식을 진행했다.   또한 고 한춘시인의 동창이자 중학교때부터 같이 문학써클에 어울렸던 김상봉시인을 초청하여 시인의 일생에 대한 문학적 평가와 사회적 평가를 청취했다.   학교측은 또 고 한춘시인의 유가족에게 감사패를 전달, 리호원씨가 가족을 대신하여 감사패를 받았다./호문 리대무 출처(연변모이자 )
604    시인 - 한영남 댓글:  조회:5497  추천:1  2015-03-12
         중국조선족 시인/ 한영남        1967년 2월 21일 중국 길림성 안도현 출생.        중학생시절부터 시작품 발표.      1986년 시“소원”을『연변문학(당시「천지」)』에 발표.      1988년~1992년 중학교 교원.      1992년~1999년 자유기고인.      1999년~2000년『문학과예술』잡지 업여편집.      2000년~2002년『류학과 생활』신문 편집.      2002년~2004년 연변인민출판사『별나라』잡지사 편집.      2004년~2007년 흑룡강신문사 문화, 작품, 요리, 전통, 스포츠 담당 편집 기자.      2007년~2008년 자유기고인.      2008년부터 현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조문편집실 편집.       작품으로 “우리 서로 얘기 좀 합시다”, “꼭 날려고 하는 자에게는 굳이 날개가 필요없다”, “우리는 그를 뱀의 련인이라 부른다”, “굳이 네가 불러주지 않아도 수선화는 꽃으로 아름답다”, “무깍지동네”, “철남으로 가면 죄송합니다 전화를 만날 수 있다”, “혹시 사랑을 해본적이 있습니까”, “환절기에 건강을 주문받습니다”, “세수거부반응”, “섬둘레 가는 길”, “보리밭은 바람 아니더라도 설레이는 것을” 등 시, 수필, 평론, 소설 300여 만자 발표.       시집『하느님 눈을 너무 깊이 감으셨습니다(2006년)』 출간.       “백두산기슭의 인삼학교” 로 전국중학생우수지도상(1989년) 수상.     시 “콩서리” 로 연변일보 제일제당상(1997년) 수상.     동시 “사춘기” 로 중국조선족동시탐구상(2000년) 수상.     시 “가을이면 푸른 하늘을 걸어서 오시는 당신” 으로 중국조선족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상(2002년) 수상.     시 “내게 꽃멀미나 시켜라” 로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상(2004년) 수상.     시 “갈대는 저렇게 싱거워가지고” 로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신인상(2003년) 수상.     수필 “혹시 사랑을 해본적이 있습니까” 로 제2회중국조선족수필상(2006년) 수상.     수필 “혹시 사랑을 해본적이 있습니까” 로 제3회도라지장락주문학상(2006년) 수상.       중국 연변작가협회 회원, 흑룡강성작가협회 조선족창작위원회 회원. 중국연해조선족문인회 회원.        둥베이 설한풍에 홍매화 서너점 피어 -김학천 시인의 조한문시에 머물러   한영남           지난 세기 90년대 초였을 것이다. 어느 날 시인 김형네 집에 갔더니 김형이 연변일보를 뒤적이다가 “어? 김학천이란 사람 작가협회 주석이 됐네.”한다. 그래서 “김학천이 누구요?”하고 되물은즉 돌아온 대답이 이러했다. “날고 뛰는 소식통이라는 니가 모르는 걸 내가 어찌 아니?” 그리고 그 뒤 연길에서 무슨 세미나던가 출간기념식이던가에 참가했다가 그야말로 주석대에 앉아 있는 김학천 작가협회 주석을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내 문인리스트에는 아직 김학천이란 사람이 올라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몰라도 유분수지. 후에 나는 작가협회에 갔다가 김학천선생이 내게 선사해주는 시집도 받아보았고 술상에서 담소를 할 수 있는 기회도 더러 생겼었다. 알고보니 나보다는 까마득히 앞선 선배시인이었다. 그것도 중문과 조문으로 막힘없이 시를 써낼 수 있는! 그리고 나는 연길에서 각종 문단활동에 참가하면서 늘 김학천시인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고 그렇게 만나게 될 경우 김시인은 늘 내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어, 영남이구만. 전번 시 좋습데!”라는 칭찬도 가끔 섞어서… 후에 나는 할빈으로 자리를 옮겼고 풍편에 김시인이 중문 시집을 출간했다는 소식도 들었고 작가협회 주석자리를 내놓고 중국조선족소년보 사장으로 임직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나는 김학천시인이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상관할 수도 없다. 그러나 문학만은, 시만은 버리지 말아주십사 속으로 빌고 빌었다. 그러던 지난 4월 후배문인 김춘택한테서 김학천시인의 시에 촌평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나로서는 거의 황당 자체였고 그래서 시간을 빙자하여 점잖게 사양하고 말았다. 헌데 이 친구가 꽤 검질긴데다 누구누구는 무슨무슨 일이 있어서 안되고 누구누구는 어찌어찌하여 안된다는 둥 이런 저런 이유과 구실과 핑계를 대서 기어이 나한테 골을 떠넘기고 말았다. 그래서 접수한 평인데 피일차일 미루었던 것은 솔직히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중문에는 자신이 없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으로까지 와서 하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글을 시작하기로 했다. 본 촌평에서 시에 대한 이해는 한글에 많이 의지했고 시적인 포착은 중문에 많이 기대었음을 미리 고백해둔다.     한글시로의 접근   는 짙은 동북특색의 세밑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얀 눈에 두툼히 뒤덮힌 은색의 세계, 그속에서 집집마다 내걸리는 붉은 초롱, 하늘을 진감하는 폭죽소리…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동북의 설풍경이다. 마치 하얀 화선지에 번지는 수묵화처럼 짙은 묵향이 압도적이다. 그런데 시인은 시에서 동년, 회상, 동경, 미래 등 낱말들를 앞세워  고 설파하고 있다. 설이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살 씩 더 먹는 연례행사이고 이 연례행사를 거치면 어른들은 더 늙을 것이고 아이들은 더 희망에 부풀 것이다. 그것을 시인은 가장 소박한 낱말들에 편승하여 시적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핍진하게 묘파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써도 시는 충분히 한폭의 풍속도를 보여주었다는 데서 일단 성공적인 시로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인은 한술 더 뜬다.  이것이야말로 이 시의 핵이요 이 시를 업그레이드시킨 장본인이다. 이 구절에서 혹자는 인생 무상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고 혹자는 게으른 지난날을 반성하고 새로운 출발을 기약할 수도 있을 것이며 혹자는 시공의 철학으로 깊은 사색에 천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이 시에서 보여준 메시지는 이처럼 다양한 바 마치 프리즘으로 한 수의 시를 보는 것처럼 보는 이의 자세와 각도에 따라 다양한 색상과 이미지가 연출되고 있다. 는 거대한 장기판을 사이에 둔 옛 선인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초하와 한계를 사이에 두고 시인은 역사의 갈피를 뒤적여 본다. 거기에서 시인은 이상은을 만나고 유우석을 만나며 형양의 이야기와 당송의 경전들에 심취하기도 한다. 그리고 역사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찰나 시인은 머나먼 창상을 뒤로 하고 심장이 세차게 고동치는 새로운 풍경을 마음속 깊이 새겨넣는다. 시는 역사와 현실을 넘나들며 중원땅에 역사를 적어왔던 선인들에 대한 추억을 통해 오늘날의 행복과 내일의 아름다운 꿈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중원땅을 그대로 신주의 대지로 환원시켜보면 시인의 시상이 얼마나 거대하고 거창하고 거침없는가를 알 수 있다. 시인은 한 수의 시로 중화문명의 5천 년을 담아내면서 그 앵글속에 미래까지 투영시키고 있다. 이란 시를 만난다. 시인이면서 서예가인 김학천선생은 서예에도 독보적인 탐구를 거듭해오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이란 시에서 우리는 시인의 서예에 대한 사랑의 마음과, 난정에 모셔져 있는 왕희지선생의 서예작품에 대한 경모의 심정과, 난초와 청죽과 곡경으로 일컬어지는 중화문명의 전설적인 문화 이미지를 만나게 된다. 시는 묵직한 시상으로 창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세월을 더듬으며 서예의 정화를 읊조리고 있다. 어쩌면 시 못지 않게 서예를 사랑하는 시인의 감정의 발로이리라. 하기에 시에서는 서정이 툭툭 뿌려져 활달한 필치로 씌어진 서예작품마냥 독자들에게 예술적 향수를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중문시로의 접근   우선 한마디로 요약해 둘 것은 김학천시인의 시는 중문으로 읽어야 참맛이라는 점이다. 중문시의 특점은 익히 알고 있다시피 많은 여백(공간)을 주어 독자들이 매우 천천히 호흡하면서 시상속에 완전히 용해된 채 시를 읊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에서는 매 연의 첫 행을 세 글자 내지 다섯 글자로 하면서 절제된 시어로 독자들에게 사색의 공간을 충분히 열어주고 있다. 또 한글보다 중문으로 더 어울리는 , , ,  등 낱말들은 시맛과 운맛을 더해주면서 시적 승화에 이바지되고 있다. 에서는 , , 라는 시구로 장기판의 확대를 통한 역사고증, 형양의 고전을 통한 오늘과의 접목, 사진기 앵글을 통한 역사와 현실의 공명을 꾀하고 있다. 중문이기에 비로소 가능한 시어의 절제미는 시행 사이에서 쪽잠이라도 잘 수 있으리만치 여유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  등은 비슷한 소리빛깔의 반복으로 시에 더욱 청명한 울림을 실어주면서 시의 맛빛깔을 산뜻하게 해주고 있다. 또 상기 두수의 시에서도 언급했거니와 시 에서도  두 글자짜리 시어 세개를 3행으로 만들어 거두절미한 극한 절제미를 보여주고 있다.   모두어 보면 김학천시인은 상기 3수의 시에서 언어의 절제미, 시상의 거창함, 내용의 통속화, 세태의 전형화를 실현하면서 시적 승화에 성공하고 있다. 부연하고 싶은 것은 한글로의 다듬기에 좀 더 애정을 가진다면 보다 나은 한글시로 완성되지 않았을가 하는 노파심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기 3수의 시는 요즘 우리 조선족 시단에서는 보기 드문 컬러국화-둥베이 설한풍 속에서 피어난 붉은 매화 서너점을 보여주었다는데서 후배시인으로서 존경이 가는 대목이다. 시인의 또 다른 작품을 또 만날 수 있기를 빈다.           글이 곧 그의 얼굴인 시인 ―한영남의 특집 인상 장춘식     글을 통하여 한영남이라는 이름을 안건 꽤 오래 되였지만 정작 만나본것은 최근의 어느 문학상시상식장에서였다. 시상식이 끝나고 뒤풀이를 하면서도 그는 줄곧 문학을 이야기하고있었다. 조금은 슬픈 일이기도 하지만 요즘 문학인의 모임치고는 보기 드문 풍경이였다. 그만큼 그는 문학에 푹 빠진 사람이라는 인상을 짙게 받았던것이다. 이번에 쓴 글들을 읽어보니 그런 인상이 어느 정도 현실로 느껴지기도 한다.   옛사람들도 시언지(詩言志: 시는 뜻을 표현한다)라고 했으니 글속에 글쓴이의 사상이나 성격, 기호, 의식 등 개인적인 모습이 나타나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한영남처럼 글이 곧 그 얼굴인 시인은 그리 흔치 않은것 같다.   나는 한영남에 대해 잘 모른다. 최근에 한번 만난 외에는 작품도 별로 읽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창작소감 《바람아 불어라 나는 간다》를 읽으면 그냥 일문지하(一文之下)에 인간 한영남, 그리고 시인 한영남을 다 알아버린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글속에 글쓴이의 성실성과 진지함이 배여있다는 말이 되겠다. 문학의 길에 들어서서 한 시인으로, 작가로 성장하는 동안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모든 스승과, 친구와 문우들, 그리고 문학사조들, 선배문인들이 두루 거론됨으로써 오늘의 시인 한영남이 있게 되기까지 그에게 밑거름이 되고 자양분이 된 모든 요인들을 솔직담백하게 고백하고있는것이다.   그러한 성실성과 진지함은 수필에서도 잘 드러난다. 《애연가의 정조》에서 한영남은 《애연가들은 나름대로 스스로 를 지키는게 대개 상식이다. 비싸든 싸든 나는 이 담배만 핀다는 고집을 내세우고 열심히 한가지 담배만을 선호》한다고 하고는 자기만의 흡연습관을 자백한다. 《남들이 중시를 돌리지 않던 이른바 새로운 담배들을 찾아다녔다.》는것. 어쩌면 수집가적인 취미인지도 모르지만 새로 나온, 혹은 남들이 보지 못한 《담배를 호주머니에 넣고 친구들이 모인 장소에 갔다가 척 내놓으면 모두들 첨 보는 신기한 눈매로 담배를 바라보았고 그런 그들의 눈길을 바라보는 나는 무슨 큰일이나 한것처럼 속이 후련해나기도 했다.》는것이다. 담배의 맛보다는 담배에 관련된 문화에 애착하고있다는 말로 리해해도 무방할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흡연습관은 혹 희신염구(喜新厭舊) 즉 낡은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한다는 비난을 살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일까? 한영남은 《담배에 대한 배신은 상상할수도 없다./그리고 담배에 대한 정조는 절대로 지키지 않는 반면 내 삶의 정조는 꾸준히 지키면서 살아갈 작정이다./시에 대한 내 애정만큼이나 담배를 사랑하니깐.》 라고 수필을 끝맺는다. 담배에 대한 사랑과 시에 대한 애정을 등치시킨 반면에 흡연습관에서의 희신염구와 삶에 대한 정조지키기는 대조시킨다. 앞의 창작소감과 연관시켜 생각해보면 한영남에게 있어 시 혹은 문학과 삶은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할수가 있다.   그러한 문학=삶의 이미지는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주인공이 문학에 인생을 맡긴 남성으로 설정되여있는것이다. 《여기까지 써놓고나서 그는 이게 소설이 될수 있겠냐고 머리를 갸우뚱했다. 그래서 이웃에 앉은 동료인 선미양한테 틈을 타서 슬쩍 보여주며 의견을 들었다.》 소설에 나오는 이런 문장들도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그런데 이런 소설의 분위기는 《그런데 언젠가 쓰기 시작했던 소설이 하나 미완성으로 남아있길래 그걸 정리하면 될듯 싶어서 다시 읽어보았다. 그래서 완성된게 이다.》라는 《창작소감》의 술회와 맞물려 작가가 지금 소설을 쓰고있음을 독자에게 반복 각인시켜준다. 이런 서사기법은 한영남이라는 작가 본인의 삶과 문학의 일치성을 강조하는 의미 외에 문학은 곧 삶의 표현이라는 객관적인 의미를 독자에게 일깨워주는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소설은 그렇게 독자에게 고백하고나서 다시 기자인 작가 한영남의 직업적인 삶과 연결시킨다. 자신이 작성한 톱기사가 부장이나 총편집선에서 부정되였을 때 뚫린 구멍을 메꾸는 자신만의 비결, 즉 《톱기사2세》 비법을 흥미진진하게 소개한다. 그러던 작가는 주인공의 이름 정신팔을 여러번 들먹이며 《강원도》라는 나먹은 신참 기자와 술을 마시며 제법 심각한 이야기를 나눈다. 《강원도》의 두루뭉실 삶의 법칙과 섬을 탈출하려는 정신팔의 탈출욕구가 그것이다. 그러나 섬을 탈출하고싶어하는 정신팔의 탈출욕구는 섬을 탈출해봐야 또 섬일뿐이라는 《강원도》의 지적에는 힘없이 무너진다. 그래서 아마 소설 제목이 《섬둘레 가는 길》로 되여있는지도 모른다. 기껏 답답한 삶을 탈출하고자 하는 욕구가 알고보니 자신이라는 섬과 다른 사람이라는 또다른 섬이 근접한 《섬둘레》에 위치한 상태라는것이다. 그리고 소설에는 《어처구니들의 이야기1》이라는 부제목이 달려있다. 우리 삶의 참모습이 그러하다는 말로 리해해도 무방할것이다. 어디 가서 돈벌이하며 굴러다니다가 나이 들어 멋부리며 편히 살고자 신문사 기자가 되여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신문사 상하 모두를 매수하는, 《시시한 인간》 《강원도》지만 그래도 원칙있고 지조있게 산다고 자부했던 자신이 어딘가 통하는데가 있어 만취하도록 술을 마신다는것. 이것은 우리의 현재 삶이 그렇고 그렇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현재 그렇게 돌아가고있는 우리 사회의 인생관이 투영된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삶을 달갑게 살려고 하지 않는다. 《담배와 더불어 묻어나온 라이터는 분명 어떤 노래방 전화번호가 또렷하게 밝혀져있는 선미양만치나 예쁘장하고 말숙한 새 라이터였다.》라는 결구의 표현에서 우리는 이점을 확인할수 있다. 일회용라이터를 달포나 쓸 정도로 변해버린 정신팔이라는 주인공이 다시 헤픈 정신팔이로 되돌아갔기때문이다.   사실 소설의 앞부분에 나오는 주인공의 헤픈 씀씀이에 대한 긴 묘사는 일종의 장치라 할수 있다. 《그는 돈이란 필요이상도 필요이하도 아닌 존재로 알고있었다.》는 표현은 주인공의 순수에의 지향성을 드러낸것이고 일회용라이터를 달포나 썼다는것은 그런 순수에의 지향이 흔들린다는 말이 될것이다. 소설의 이야기가 그 라이터이야기에서 전개된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주인공은 그 낡은 일회용라이터를 잃어버리고 새 일회용라이터를 얻는다. 《강원도》의 두루뭉실 론리에 끌려가는것 같다가 다시 순수에의 지향을 되찾아가는것이다.   이른바 시장화사회에서 문학인이 겪는 갈등은 세속적인 삶과 순수에의 지향간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런 문학인의 심적인 갈등을 직접 드러낸것이 이 소설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갈등을 객관화시키지 못한것이다. 한영남이 시인이기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것인지도 모른다. 주제의식을 사건속에 용해시지 못하고 기본적으로는 서술자의 심리적인 고백을 통해 표현한것이다. 거기에 다분히 시적인 구조와 은유의 결합이 가미됨으로써 전체적으로 소설이라기보다는 산문으로 쓴 서사시라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 작가의 숙제가 될것이다.   그러나 앞의 이야기로 되돌아와서 보면 한영남은 원래 그런 시인인지도 모른다. 글이 곧 그의 얼굴인 시인, 혹은 글속에 그 자신이 통채로 드러나는 시인이 한영남인것이다. 얼마전에 만났던 한영남의 인격과 여기 올라온 글 세편에서 나는 그것을 확인할수가 있었다.       * 문학격월간지 에 게재. --저자   한영남의 시에 대한 단평 장춘식       「그날의 커피향은 오늘도 입가에 머물고」: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더 아름답다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왜 “비도 없이 축축한 날” 따뜻한 커피를 함께 마셨음에도 그대로 헤여지고 말았을까? 서로의 마음을 드러낼 용기 부족 때문에? 혹시나 당할 거절에 자존심이 상할까봐?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냥 현대인의 무심함 때문에? 하여간 헤여진 지금은 따뜻한 커피향기처럼 아름다운 추억이 되여있다.     「오늘은 왜 그 아픈 사람이 떠오르나」: 「커피향」의 이미지와 연관된 감수이다. 헤여진 사랑의 아름다움을 되뇌인다. 인생은 어쩌면 그러한 아쉬움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완성이 아닌, 부족함 때문에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항상 그 부족함을 채워넣기 위해서 말이다.     「어떤 저녁」: 중년남녀의 맛이 간 사랑에 대해 자조하고 있는 것 같다. 꽤 시일이 지난 부부의 사랑은 이제 격정과 애절함이 사라진 관습적인 사랑이 되여 버린다. 그러나 일부일처제를 거부하지 않는 한 그러한 관습에서 탈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격정이 사라진 부부의 사랑도 나름대로의 행복을 제공해준다. 귀속감과 안전감이다. 그래도 그것에만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니 어찌하랴. 이쯤에서 앞 두 편의 시에 표현된 아쉬움의 미학이 연유된 것은 아닐까?     「당신은 늘 비와 함께 온다」: 그래서 화자는 일상의 따분함과 사랑에 대한 상실감을 추적거리는 비와 함께 떠오르는 사랑에 기탁한다. “아무나를 향한 나의 사랑”이다. “세상이 보다 아름다워”진다는 것은 화자의 희망사항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세상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예 어떤 구체적인 그림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언제나 그렇게 보다 아름다운 세상, 보다 아름다운 사랑을 원하는 것이니까.     상재한 한영남 시인의 시작품 4편 중 압권은 첫편 「그날의 커피향은 오늘도 입가에 머물고」이다. 여러가지 상상의 여백을 제공하면서 화자의 정서속에 독자의 정서를 이입시키는 매력이 돋보인다. 산문시로서의 장르적인 특성도 독자의 정서를 끌어들이는데 한몫 하고 있다. 그런데 나머지 3편은 주제의식에 비해 시적인 정서화가 미흡한 것 같다. 기우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어의 지나친 통속화 또한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한다. 시어가 너무 어려워도 문제이지만 너무 쉬워도 문제이다. 너무 쉬우면 의미의 단순화가 걱정이고 너무 어려우면 의미 파악의 어려움이 걱정이다. 이른바 통속성과 난해성의 문제가 되겠다.     우리 시는 80년대 이전까지 의미의 단순화가 문제가 되었지만 아무래도 그 반동인 듯 80년대 이후에는 난해시가 점차 주류를 이루어 온 것 같다. 이런 문학사적인 흐름에서 볼 때는 통속성이 오히려 미덕이 될지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도를 넘어서 요즘 유행하는 가요의 가사처럼 되어 버린다면 그것 또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상대적으로 통속적인 시작품에서는 의미의 단순화를 극복해야 할 것이고 난해시의 경우에는 독자의 이해를 위한 배려 장치가 시인의 과제가 되지 않을까 한다.     한편 시 쓰기에서는 비유와 상징, 이미지 등의 여러 기법을 통하여 시인과 독자 사이의 정서적 공명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시를 쓰는 시인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한 창조적 의미의 창출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이론적으로 도출해내기 어려운 삶의 이치를 시인의 감성을 통해 창출해내는 것, 거기에 시라는 문학장르의 또다른 생명력이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영남 시인   신금철-문학살롱 진행을 맡은 신금철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북방시인 최화길과 그의부분적 작품을 살펴보았는는데요 이번 시간에는 역시 북방시단을 주름잡고 있는 한영남시인에 대해서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겠는데요 한영남 시인은 연변에서 오래동안 시창작생활을 알고있는데요 언제 할빈에 갔댔어요먼저 한영남시인의 프로필부터 살펴볼가요?   림금산-네 한영남시인은 1967년 2월 21일 길림성 안도현 명월진 출생. 그가 학창시절일때 많은 문인들이 그의 옆에 나타났습니다. 김룡운, 림금산, 김창희, 김현순 등이 모두 안도에서 생활, 한영남시인은 또 이분들과 많이 접촉. 그러면서 차츰 문학을 자신의 인생목표로 삼음. 고중2학년때인가 작문써클을 책임진 어문선생이 그의 작문을 보고 정서가 괜찮으니깐 시도 써보라고 했답니다. 그후부터 서점가에서 팔리고 있던 조선문으로 된 시집들을 모조리 사서 읽어보았다.임효원, 설인, 김성휘, 김철, 이상각, 김태갑 등 시인들의 시집과 종합시집까지 십여권을 읽어보면서 많이 모방을 해보았다. 조기천, 마야콥스키, 이싸콥스키 등 시인들의시를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고 또 그들의 풍격도 모방해보았었다.   1989년이던가. 안도에서 김현순(현재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근무. 학창시절부터 알게된 친구)이 소개해서 김창희시인을 알게되었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같이 머리 맡대고시고 문학이고 고아대면서 술도 엄청 마셨다. 무직업자라고 네가 무슨 돈 있나 하면서무작정 김창희시인만 술을 사군 했단다. 김창희는 그의 문학의 길에 미친 영향이 컸단다   그때 김용운선생(후엔 『문학과 예술』잡지에서 편집으로 근무)이 안도문화관에 오게 되고 그분한테 본격적으로 시에 대한 가르침을 받게 된다. 또 김현순이 림금산이가 가져다준(당시 김현순은 림금산이 직접 어문을 가르치는 학생이고 그와 특별히 가까운 사이였으니깐 연길서 가져온 『한국명시』녹음테프를 주었는데 또 한영남이도 김현순과 많이 접촉할때이니깐 함께 들으면서 많이 깨쳤다.) 시를 이렇게도 쓰는구나 싶었다.   언어의 폭력적 조합이니 낯설게 하기니 하는 것들도 그 무렵 알게 되었다. 김창희는이미 철학책들을 많이 섭렵했기에 문학유파니 주의니 하는 것을 많이 알고 있었다. 사실 그때는 시인이 시만 쓰면 되지 그런게 왜 필요할까 하면서 왼고개를 틀기도 했단다.   1989년과 1992년 하늘같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저 세상으로 보내드리면서 직업도 날리고 1996년에는 부모들이 남겨준 빈집을 홀로 지키고만 있을수 없어 누님이 계시는연길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서 김혁소설가를 만난다. 그리고 김혁소설가가 애지중지 소장해두고있던 그많은 책(수천 권)들을 두루 독파하기 시작했다. 이미 소설가로 자리를 굳힌 김혁은 문단의 소설가요, 시인이요 하는 사람들을 거의 다 알고 있었는데기회 있을 때마다 그를 데리고 다니며 일일이 소개해주고 술상에 끼워주곤 했단다. 많은 걸 보았고 많은걸 배웠고 많은걸 사색하고 많은걸 깨쳤단다. 한국시인 이상한테 심취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단다. 이싱시인의 일대기를 담은 『금홍아 금홍아』라는 테프를 보면서 울기도 했단다. 『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을 보면서 참 잘 만들었다고 감탄도 했단다. 그 두 테프는 지금도 비디오테프로 그가 소장해두고 있단다.   신금철—중학시절부터 시를 발표했다면서요? 후엔 또 어떤데서 사업했습니까? 림금산—네 중학생시절부터 시작품 발표. 고3때 처녀작 시 (1986년) '연변문학'(당시 '천지')에 발표.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중학교 교원-안도현송강6중. 어문교원.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자유기고인. 시공부. 시습작.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류학과 생활'신문 편집.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연변인민출판사 '별나라'잡지사 편집. 2004년부터 2007년까지 흑룡강신문사 문화, 작품, 요리, 전통, 스포츠 담당 편집 기자. 2008년부터 2010년까지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조문편집실 편집. 2010년부터 현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잡지 주필.   신-그렇다면 한영남시인에게는 어떤 작품들이 있고 또 어떤 상들을 수상했습니까? 이 방면에 대해서 좀 소개해주시죠 림-네 주로 시와 수필을 많이 창작했는데요 '우리 서로 얘기 좀 합시다', '꼭 날려고 하는 자에게는 굳이 날개가 필요없다', '우리는 그를 뱀의 련인이라 부른다', '굳이 네가 불러주지 않아도 수선화는 꽃으로 아름답다', '무깍지동네', '철남으로 가면 죄송합니다 전화를 만날수 있다', '혹시 사랑을 해본적이 있습니까', '환절기에 건강을 주문받습니다', ‘세수거부반응’, ‘섬둘레 가는 길’, ‘보리밭은 바람 아니더라도 설레이는것을’ 등 시, 수필, 소설, 실화, 평론 500여만자 발표. 시집 '하느님 눈을 너무 깊이 감으셨습니다'(2006년) 등 출간.   수상작품들로는 시 '콩서리'로 연변일보 제일제당상(1997년) 수상. 동시 '사춘기'로 중국조선족동시탐구상(2000년) 수상. 시 '가을이면 푸른 하늘을 걸어서 오시는 당신'으로 중국조선족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상(2002년) 수상. 시 '갈대는 저렇게 싱거워가지고'로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신인상(2003년) 수상. 시 '내게 꽃멀미나 시켜라'로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상(2004년) 수상. 수필 '혹시 사랑을 해본적이 있습니까'로 제2회중국조선족수필상(2006년) 수상. 수필 '혹시 사랑을 해본적이 있습니까'로 제3회도라지장락주문학상(2006년) 수상. 시 ‘나는 물이다 내게 무슨 상처랴’로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본상(2009년) 수상. 시 ‘섬’으로 중국조선족연해문학상 본상(2009년) 수상. 론문 ‘ 수필 ‘에밀레종은 얼마를 더 울어야 하나’로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본상(2011년) 수상.   신금철—공부는 어떤 공부들을 했습니까? 그리고 지금은 어떤 직무들을 맡고있습니까? 림금산—네   1986년 안도현제2고중 졸업후 1998년 연변작가협회 제3기문학강습반 수료(졸업장 흭득). 2005년 흑룡강성에서 조직한 전국통일 기자학습반 수료(기자증 획득). 2010년 중국중앙간부학교 출판인(총편급) 강습반 수료(졸업장 획득).   중국 연변작가협회 회원, 흑룡강성조선족창작위원회 회원, 미국 '해외문학' 중국지역 회원, 흑룡강성조선족시조사랑회 비서장, 중국조선족문학우수작품집 편집위원, 중국조선족 연해문인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회원 등.   림-지금은 행복하게 살고있다. 장가들어 아들을 낳고 (아이 첫돌잔치에 나도 갔댔다.세수하기 싫어한다. 전문 자기가 세수하기 싫어하는 걸 제재로 쓴 수필도 있다. 창작방면에서 사유가 좀 독특하고 기발하고 유모적이다. 말할때도 늘 유모아를 섞어서 말하길 좋아한다. 한번은 연길에 있는 그의 누이집에 갔댔는데 사발로 술마이면서 시습작품 높이 쌍아놓고 읽는데 ..기가 막히였다. 거의 천여수 되는것 같았다.)   신금철-그럼 먼저 한영남시인의 시 “한복”을 함께 감상하고 그 해설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복              한영남   선연한 빛 빛이 어우르고 부드런 선 선이 물결쳐라 잦은 휘모리인양 홋홋 경사지다가 진자주 태깔을 불러 가리마낸 옥결을 감싸라 조용히 입다문 웃단으로 더욱 가늘어진 하얀 목 스칠듯 노을치는 치마기슭으로 더욱 작아진 하얀 버선발 아아 내 누이의 고운 체취여   림금산-해설 우리민족 녀성들이 자주 입는 한복을 썼는데요 한복입은 누님같은 여인의 밝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아주 섬세하고 깔끔하게 묘사했습니다. 여기서 선의 물결, 웃단, 가늘어진 하얀 목, 스칠듯 노을치는 치마기슭, 작고 하얀 버선발, 누이의 고운 체취 등 시어와 시구들로 한복입은 우리 민족녀성의 단아한 모습을 속사하듯 생동하게 핍진하게 그려냈습니다. 가볍고 부드럽고 향기롭고 깔끔한 묘사기법이 아주 돋보이는 훌륭한 시라고 봅니다.   신금철- 다음은 시 “나는 물이다 내게 무슨 상처랴”를 함께 감상해보겟습니다   나는 물이다 내게 무슨 상처랴                    한영남   나는 물이다 내게 무슨 상처랴 내내 흐르다가 돌을 만나면 으깨지고 나무 만나면 베여지고 산을 만나면 돌아가고… 그러나 내게 무슨 상처랴 짐승들은 철버덕거리며 나를 희롱하고 자그마한 풀가지마저 내게 칼질하고 사람들이야말로 아무렇게나 나를 찢고 베이고 갈라놓고… 해도 실로 나는 물이다 내게 상처를 바라지 마라 해아래 말리워도 좋다 오물을 퍼부어도 괜찮다 나는 물이다 아파서 속울음 울어도 눈물조차 보이지 않는 아아 그리고 차마 상처도 입지 못하는   신금철-상처를 많이 받은 자신을 물에 비유하여 쓴 시같은데요 어떻습니까?   림금산-해설: 네 그렇습니다. 사실 제목에서처럼 자기를 물이라고 한건 상처가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의 상처가 너무 많아서였지요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텅빈 집을 지키고 앉은 그가 또 그때는 직업마저 없었던지라 7-8년 자유기고인으로 겨우 지탱해 가면서 많은 외적, 심적 고통을 감내했지요 허나 물은 아무리 찍고 깎고 오리고 해도 상처자국이 알리지 않지요 그렇다고 물에게 상처가 없어서가 아니죠 시에서 쓰다싶이 “돌을 만나면 으깨지고 나무 만나면 베여지고” “짐승들은 철버덕거리며 나를 희롱하고 자그마한 풀가지마저 내게 칼질하고 사람들이야말로 아무렇게나 나를 찢고 베이고 갈라놓고…” 또 “해아래 말리워도 좋다 오물을 퍼부어도 괜찮다” 등 이런 많은 마음속의 상처를 입었지만 시인은 결코 그걸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지요 마치도 물처럼 말입니다. 물이 누가 자기한테 돌을 던져도 찍어놓아도 밟아놓아도 피하지 않는것처럼 말입니다. 시인이 극구 자기를 물이라고 우기는것은 자기가 이 많고많은 상처를 속으로 삭히면서도 결코 비겁하게 아프다고 내색을 내지않는 “아프다고 속울음은 울어도 결코 눈물조차 보이지 않는” 또 그것에만 그침이 아니라 그것을 맞받아 나아가려는 그런 강한 의지를 말하기위해서 극구 자기를 물이라고 우기는거지요 “세상이 나한테 아무렇게나 해바라 나는 물이길래 결코 고민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을것이라는 그런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거지요 신-다음은 역시 한영남시인의 주목되는 시, 민족성이 아주 강한 시 “나는 조선토종이다”를 함께 감상하고 림선생의 해설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조선토종이외다             한영남   이제부터 나를 부를양이면 아리랑이라 불러주오 엄마의 배에서 떨어져나와 강보에 싸일적부터 숙명처럼 하아얀 색 물려받은 놈 조그만 발바닥 퇴마루에 타박타박 찍을적부터 엄마아빠 가갸거겨 익혀온 놈 이제부터 나를 부를양이면 도라지나 더덕이라 불러주오 아무래도 나는 배달의 한 놈이요 단군과 주몽의 피를 이어받은 놈이요 락동강을 젖처럼 빨며 커온 놈인것을 무궁화 만발한 삼천리에서 춘향과 심청을 자랑하며 론개의 지조에 머리도 숙일줄 아는 놈인것을 옹배기속 텁텁한 탁배기에 찝찔한 명태쪽지면 닐리리와 양산도를 섞을수 있는 놈인것을 이제부터 나를 부를양이면 가야금이나 퉁소라 불러주오 쪽지게 진 할배에게 엉덩짝도 맞아본 놈 할매의 물함지에 안겨 때도 씻어본 놈 두루마기 치마자락에서 성황당냄새도 맡아본 놈 황소같은 놈 민들레같은 놈 그리고 김치나 썩장같은 놈 이제부터 나를 부를양이면 풍산개나 진돗개라 불러주오 아니 차라리 나를 조선토종이라 불러주오   신금철-민족의식이 아주 강하면서도 어딘가 시원하고 참 신선한 느낌을 주는 그런 시같은데요 아마 우리 민족이면 모두 좋아할것같은 그런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떻습니까?   림금산—해설:네 저도 이 시를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점차 나이들면서 점점 민족적이고 향토적인데로 마음이 끌리는데요 제가 독자라할때 저의 구미에도 아주 잘 맞는 문화적 음식같아요. 이 시는 짙은 민족적인 맛을 풍기는 향토적인 시입니다. 그 언어도 대표적이고 가장 독특한 민족적인 사물과 언어(명사)들을 골라잡았는데 아주 가관. 언어와 명사—아리랑, 하얀 색, 퇴마루, 가갸거겨, 도라지, 더덕,단군, 주몽, 락동강,무궁화, 삼천리, 춘향, 심청, 론개, 옹배기, 탁배기, 명태쪽지, 닐리리와 양산도,가야금이나 퉁소,쪽지게,함지, 두루마기, 치마자락, 성황당,황소,민들레, 김치나 썩장, 황소, 풍산개나 진도개, 조선토종…등 무려 30여개의 우리 민족 명사를 라렬하였다. –한수의 시에서 이렇게 많은 민족적 명사를 배렬한것 사례가 거의 없는줄로 안다.-물론 한국의 백석시인같은 분들은 더 많이 라렬했지만 우리 시단의 경우는 극히 드물다. 련을 나누지 않았지만 사실 “이제부터 나를 부를양이면 …” 3번이나 써서 살술한 명사들을 3개부분으로 나누어서 차츰 고조로 이끌어 갔는데 결국 말하자는건 나는 음식이나 복장이나 배운 글이나 부르는 노래나 사랑하는 자연경물이나 또 쓰는 도구나 악기나 흥취나 모두가 우리 민족을 떠날수 없고 떠나서는 살수가 없을 정도로 간절한 그 마음을 토로한것이다 피는 못속이고 확실한 조선토종인 나는 자랑스럽고 위대하다는 것 더 나아가서는 우리 민족과 우리의 풍속, 우리민족의 혼백은 위대하고 영원하다는 것을 호소햇다. 시적 기법에서 이 모든 민족적인 명사를 자기몸에 다닥다닥 붙여놓았고 자기를 이런 민족적인 명사로 화했다. 저레 자기를 아리랑이라 불러다든가 진돗개나 풍산개라 불러라든가 등 자기 온몸과 마음이 훙휘가 그대로 조선민족으로 화해버림을 썼다. 그리고 아주 재미있고 박력있게 물처럼 좔-좔- 흘러내렸다. 그래서 읽는 사람의 입에 잘 오르고 거침이 없다 민족성서가 아주 강하고 맥맥히 굽이친다. 이런 시들은 자추주 창립 60돌을 맞는 이때 더욱 애창되고 널리 읊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다.   신금철-다음은 한영남시인의 연변일보 제일제당상 수상작 “콩서리”를 함께 감상하고 해설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콩서리   한영남    사람들이 콩을 볶아먹고있다   콩을 볶은 사람이 세줌을 가지고 불을 땐 사람이 두줌을 가지고 콩을 씻은 사람이 한줌을 가지고나니 콩을 가져온 사람의 몫이 없어졌다   아니다아니다아니다 다시하자다시하자다시하자   이번에는 콩을 가져온 사람이 세줌을 가지고 콩을 씻은 사람이 두줌을 가지고 불을 땐 사람이 한줌을 가지고나니 콩을 볶은 사람의 몫이 없어졌다   틀렸다틀렸다틀렸다 다시하자다시하자다시하자   그럼 제일 고생한 사람이 많이 가져라(고생은 나두 했다) 제일 나이 많은 사람을 많이 주자(아래 사람을 사랑할줄도 알아야지) 제일 힘 센 사람이 많이 가지기다(짐승처럼 그게 뭐니) 지식이 많은 사람이 많이 가져야 한다(되게 잘난체 하고있네) 무기명투표 거수가결로 하자(수분이 많다 불투명하다) 잘생긴 사람이 더 가지기다 키차례로 하자(억울하지 암 억울하구말구)   할수없이 제일 원시적인 방법으로 콩을 가져온 사람이나 콩을 씻은 사람이나 불을 땐 사람이나 콩을 볶은 사람이나 똑같이 한줌 한줌 한줌 한줌 나누고보니 콩이 두줌 남았다 그것을 다시 반줌 반줌 반줌 반줌 나누어가지고 모두들 흡족해서 냠냠냠냠거리는데   콩볶이를 해먹자고 제의를 하고 콩을 가져까지 온 사람은 아무래도 뭔가 찜찜한게 솔직히 덜 좋았다   사람들이 콩을 맛있게 볶아서 더럽게 나눠먹고있다     신금철—연변일보에서 제일제당상을 수상한 시라고 하는데요 시가 어딘가 사회적으로 많이 관심하는 문제를 다루었는데 아주 신선한 느낌을 주는 감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데요 어떻습니까?   림금산—해설: 이 시는 제일제당상을 수상하여 저그만치 인민페 만원을 받아안은 작품입니다. ㅎ 수선 제재면에서 우리 삶에 아주 민감한 노누문세를 다쳤다. 그리고 일반적인 경우 이런 문제를 시같은데서 썩 적게나 혹은 거의 안다치던 제재이니 더구나 신선한 감을 안겨주는 내용이다. 수선 내용면에서 신선하다. 주제는 불합리한 분배문제이다. 사실 사업단위같은데서의 개혁은 지금도 철저하지 못한면이 아주 많다. 늘 놀고먹는 사람이나 매일 바삐 뛰는 사람이나 다 비슷한 로임을 탄다. 또 물덤벙 술덤벙 뚜기는 많이 뛰나 일축은 못내는 사람도 있다. 온 한달동안 뛰였지만 실제해결을 못본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들은 전화 한통으로 10만 100만 해결하는 능력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분배할것인가? 뛰지도 않고 문제도 못해결하는 사람을 많이 주겠는가? 계속 뛰기는 뛰지만 문제를 해결못하는 사람을 많이 주겠는가? 아님 별로 뛰지않지만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을 많이 주겠는가? 우리 사회의 불합리한 분배문제를 아주 적라라하고 신랄하게 풍자했다. 사실 우리 사회에는 아주 불공평한 일분배와 돈분배가 비일비재로 페단을 낳고 있다. 적게 일한 사람이 더 탄다든가, 적게 일하나 많이 한 사람이나 비슷하게 탄다거나 어쨌던 불공평하다.   제1련에서는 문제의 제기 제2련에서는 첫번째 분배 제3련에서는 첫번째 분배제도를 부정했다 제4련에서는 두번째 분배 제 5련에서는 두번째 분배제도를 부정 제6련에서는 각종 분배방안과 제안, 의견과 그 반대의견을 쭉 라렬함 제7련에서는 세번째 분배제도-즉 원시적인 방법인 평균분배제도로 다시 돌아옴 제8련에서는 세번째 분배제도에 대한 즉 평균분배제도에 대한 의견-결국 역시 부정 제9련에서는 끝내 새로운 정확한 분배제도를 개혁해내지 못한데 대한 풍자 조소 비판.   시가 분식이 없고 간단 명료하면서도 예리하게 또 시적 기교에서는 따분하지 않고 신선하고 시원한 감상적 효과 발생. 아주 층차가 분명하고 짜였으면서도 착상이 기발하고 또 사유가 정연하게 전개되였다. 진짜 로년 장년 청년 소년까지도 다 읽을수 있고 알아볼수 있고 마지막 련에서는사색하게 하는 그런 시원하고 가쁜한 효과를 발생. 모두 읽고난 후엔 “시원히 잘 짚었다”고 말할수있는 그런 시이다. 제일제당상을 받았고 (인민페 만원…) 신금철-그렇다면 한영남시인의 시작품 예술적 특성을 몇마디로 귀납한다면 어떻게말할수 있을가요?   림금산- 한영남시의 예술특점 1. 지극히 민족적이고 토장냄새가 짙다    “나는 조선토종이다”라든가 “한복”같은 작품 2. 창작기법이 따분하지 않고 아주 신선하다. 알기가 쉬운편이고 물처럼 흐르고 읽고나면 마음이 시원하고 개운한 감을 느끼게 만든다. 아마도 시의 시장조사도 좀 연구한듯한 감도 나고 또 그렇다고 속되거나 얕지도 않다. 폭도 넓고 시대적 깊이같은것도안받침돼 있다. 3.시적언어가 잘 정제되여있다. 군더더기가 없고 미끈하고 세련되였다. 너무 바쁜 시어가 거의 없고 청산류수처럼 쭉- 빠져나온다. 낭송하기에도 좋을것 같다. 이런 몇가지가 한영남시작품이 다른 시인들 시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예술적 특점이아닌가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신금철-네 어느덧 약속된 시간이 다 되여가는데요 오늘은 극히 개성적인 시창작기법을 뽐내고 있는 중견시인 한영남과 그의 부분적 시들을 살펴보았는데요 시청자여러분들은 한영남시인의 또다른 독특한 시맛을 느꼈으리라 믿고싶습니다.네 오늘도 림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림금산-네 수고많았습니다.   신금철-그럼 이것으로 오늘 문학살롱프로 여기에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이시간 프로편집에 김철운이였습니다.       [출처] 한영남의 시에 대한 단평|작성자 반벽거사
603    시인 - 리성비 댓글:  조회:4654  추천:0  2015-03-12
리성비 제4회 동심컵아동문학상 수상 기자: [ 김창희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08-08-29 15:14:52 ]  연변인민출판사 《아동문학》편집부, 연변조선족자치주조선족아동문학학회, 한국 계몽아동문학회가 공동 주최한 제4회 동심컵아동문학상시상식이 8월 29일, 백산호텔에서 개최, 연변민간문예가협회 상무부주석으로 근무하는 리성비시인이 동시 《비온 하늘에는(외 5수) 》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리성비시인은 수상소감에서 가슴속에 동심을 심고 알뜰히 가꾸면서 사시절 꽃피워가는 시인은 행복한 시인이라면서 주로 성인시를 쓰는 자신에게 동시상수상 영예를 안겨준 평심위원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시상식에 참석한 동시인들은  성인시 시인들이 동시창작에 뛰여드는것은  동시창작력량을 강화하는데 유조하다고 입을 모았다. 조선족아동문학의 질적향상을 취지로 설립한 동심컵아동문학상은 한국 계몽아동문학회 문삼석회장의 후원으로  지속되고있다. 수상자 리성비(앞줄 왼쪽 네번째 )시인과 시상식참가자들. 여기서 잠깐 리성비 시인을 소개하면, 나는 조선족인 리성비 시인을 이곳에 와서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됐는데, 이름이 특이할 뿐만 아니라 나하고 의형제를 맺은 석화 시인의 시에 등장하기도 해, 내가 평소 그 시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 있어서 더욱 기억나는 시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연길의 조선족 시인인 석화 시인의 따뜻한 시정(詩情)이 담긴 ‘이 가을에는 성비형’이라는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서늘한 하늘  감수 깊은 가을이 오면  시가 잘 씌여진다는  우리 시인 성비형  옷 벗는 나무의 고독을 찾아  락엽을 노래하고  남으로 날아가는 기러기행렬  그 사라져가는 울음소리 쫓아  운률도 곱게 다듬어  좋은 시 많이 쓰는  성비형  이 가을에는  고개 좀 쳐들고  저기 푸른물 못벗는 콩밭과  쭉정이 썰렁한 논벌  그리고 그곁에 쭈크리고 앉은 우리 칠촌아저씨  꺼질듯 타들어가는 담배불에  눈길을 돌려봐주시구려  마음 착한 성비형  타박타박 산길을 밟는  우리 누나들의 버들광주리에  까만 머루 몇송이나 들어있는지 봐주고  보짐을 꿍져이고  장거리 찾아가는  동네아줌마들 입가에  걸직한 롱담과 까르르 맴돌던 웃음소리  다시 얹어주시구려  마음 고운 성비형  그리고 새뽀햔 먼지 일구며  살같이 달려가는 현정부찝차와  성급한듯 어깨를 스치며 지나쳐버리는  촌주임어른의 향방이 어데인지  지켜봐주세요  마음 바른 성비형  이 가을엔  가슴이 서늘한 시보다  따뜻한 입김같은 시 한편을  더 써주시지요  우리 시인 성비형  -석화 시 ‘이 가을에는 성비형’ 전문.  특히, 한 인물을 두고 쓴 시인데 문장을 매만지는 솜씨가 뛰어나고 감각적이며 신선한 표현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는 형국 다름 아니다.  그것도 ‘서늘한 가을’을 모티브로 해서 짙은 서정성과 향토색 짙은 질감들을 노래하고 있는데 느낌만으로 충족시켜주는 게 아니라 서민적 삶의 풍경들까지 합세해  ‘우리 시인 성비형’, ‘운률도 곱게 다듬어/ 좋은 시 많이 쓰는/ 성비형’, ‘마음 착한 성비형’, ‘마음 고운 성비형’, ‘마음 바른 성비형’, ‘우리 시인 성비형’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덕담을 소재로 하면서도 인간미가 철철 넘쳐흐르는 시이기에 소개하는 것이다.  누가 이런 절창의 시를 소개하겠는가 하는 생각조차 들지만 이런 시가 우리 한국땅에도 전파되었으면 싶고, 만주 연길땅엔 이런 모습들의 시인들이 시를 쓰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도 앞서니까 말이다.  ‘옷 벗는 나무의 고독을 찾아/ 락엽을 노래하고/ 남으로 날아가는 기러기행렬’이라는 구절에서도 그냥 스케치식의 표현이 아니라 무언가 찡한 심상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으면서 ‘운률도 곱게 다듬어/ 좋은 시 많이 쓰는/ 성비형’과 같이 멋진 비유적 조화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이뿐만 아니다. ‘저기 푸른 물 못벗는 콩밭과/ 쭉정이 썰렁한 논벌/ 그리고 그곁에 쭈크리고 앉은 우리 칠촌아저씨/ 꺼질듯 타들어가는 담배불에/ 눈길을 돌려봐주시구려’에서는 서민적 고뇌까지 지닌 시인의 눈길이고, ‘타박타박 산길을 밟는/ 우리 누나들의 버들광주리에/ 까만 머루 몇송이나 들어있는지 봐주고/보짐을 꿍져이고/ 장거리 찾아가는/동네아줌마들 입가에 /걸직한 롱담’ 등에서는 시골인심을, 그리고 ‘살같이 달려가는 현정부찝차와/ 성급한 듯 어깨를 스치며 지나쳐버리는/ 촌주임어른’에서 풍기는 인물상에 대한 현실감각 은 그 모두를 아우른 인간적인 성비형에 귀결시키고 있다.  어찌보면 시인이란 사회적 높낮이를 하나의 통념으로 일관되게 바라보는 진실한 눈을 가진 존재로 석화 시인은 이 시에서 그런 것을 훌륭하게 소화해 내고 있으며 그 대상을 성비형으로, 그러니까 성비형이 그런 시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좋은 시 한 편이 좋은 벗 하나 얻은 것 못지 않다면 틀린 말일까. 시를 쓰면서 자연이나 사물 그 자체만을 가지고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자연이나 사물의 대상을 모두 끌어들여 한데 잔치를 벌이고 있는 풍요로운 마당이 바로 ‘이 가을에는 성비형’이라는 이 시가 아닌가 한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간행된 리성비 시인의 시집 ‘이슬꿰는 빛’에 수록되어 있는 ‘보름달’이라는 시를 보자.  계수나무 가지에  부엉이  그 눈이  유난히 밝다  감는 데 보름  뜨는 데 보름  산에 산에 산쥐  들에 들에 들쥐  한쪽 눈은 저쪽 세상 비추고  한쪽 눈은 이쪽 세상 비추다  보름달을 읊은 작품이나 보름달 자체를 두고 읊은 것이 아니라는데 이 시의 비중이 있어 보인다. 보름달의 생성과정을 ‘두고 감는 데 보름, 뜨는 데 보름’ 이라는 표현도 참신하거니와‘산에 산에 산쥐, 들에 들에 들쥐’라는 어떻게 보면 난데없는 이미지가 들어와 앉아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그처럼 이쪽과 저쪽이 차오르고 기우는 달의 생성의 법칙이 그것인 것이다.  더욱 의미를 심화시켜서 ‘한쪽 눈’이 될 때는 ‘저쪽 세상’ 비추고, 또 다른 한쪽 눈이 되었을 때는 ‘이쪽 세상’ 비추어 상현달과 하현달의 이미지를 의인화해서 심도있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게 합치면 바로 ‘보름달’인 것이다. 부엉이의 눈이 유난히 밝다는 것은 보름달의 밝음의 의미를 더욱 강조함이며 그런 보름달 뜨는 밤엔 부엉이가 우는 것이다. 아, 조선족시인인 리성비 시인의 이런 기막힌 시가 있음도 이번 연변땅에 와서 알았던 것이다. 어쨌든 연변땅 즉 연길의 두 시인의 앎에 대해 나는 아주 복되게 생각하는 것이다.  (서지월 記)
602    시인 - 김현순 댓글:  조회:4798  추천:0  2015-03-12
봄아이(외 4수)     □ 김현순                                 봄아이는 파란 잔디를 깔고 누워 하늘을 본다     바다같은 푸르름의 세상에 꽃으로 피여나는 새하얀 솜구름을 본다     그 솜구름을 보는 아이의 눈엔 송이송이 구름이 하아얀 꿈덩이로 둥―둥 떠온다   봄아이는 눈 감고 생각에 잠기여본다     홀연, 세상은 문득 천지가 뒤집혀     넓다란 잔디밭이 하늘이 되고 봄아이는 솜구름이 된다                 바람         바람속에는 수많은 소리가 난다     귀 기울이면 시내물의 흐느낌소리 미류나무의 가벼운 몸부림소리     때로는 눈 많은 잠자리의 고민 섞인 한숨소리…     다시금 귀 기울이면 뒤동산 기슭에 흘리고 온 어린 시절 나의 꿈소리                   봄날         간질간질… 개구쟁이 봄바람의 간질굼     콩 콩… 뽀얗게 살오른 버들개지 참지 못하고 짖어댄다     토옥토옥… 연분홍 진달래 참지 못하고 향기 터친다     간질간질… 개구쟁이 봄바람의 간질굼     활짝활짝… 참지 못하고 계절이 열린다                   그리움         투명한 가을 한자락 살며시 열어보면 금새 화끈하게 다가서는 잘익은 향기     따스한 해살에 사글사글 윤이 나는 황금빛 풀잎이다가 나무잎이다가 바람이다가 사랑이고마는 배암같은 향기 한줄기 소올솔 품속을 파고들면     앗, 뜨거… 지난 주일 전학해간 순희생각도 빠알간 능금알처럼 잘도 익는다           꽃망울         탱탱 부푼 가슴 감추느라 옷을 입어도     따스한 햇볕이 찾아와 한겹 두겹 벗겨내는데사 ...     빨강 노랑 하양 살진 가슴 드러내놓고 수집어 향기 풍길 때   능청스런 바람도 지나가며 스을쩍 부푼 가슴 만지여본다  
601    그때 그때는,ㅡ 댓글:  조회:1914  추천:0  2015-03-12
  2004년도 아동수필탐구회     2004년 10월 1―3일, 화룡시 선경대에서 아동수필탐구회를 가졌다. 14명의 부분적아동문학작가들로 조직된 이번 탐구회에서는 수필의 개념에 대한 리해와 수필의 종류에 대한 심도있는 인식을 가져왔으며 서정수필에 대한 탐구방향을 제시하였다. 14명의 18편 작품을 놓고 열렬한 탐구끝에 연변인민출판사 《별나라》편집부의 편집 박영옥의 수필 《아버지》가 최우수작품으로 선정되여 상패와 더불어 상금을 타게 되였다.   ------------------------ 선경대에서의 활동장면   선경대에 오르며   선경대의 전설을 찾아     수상의 영예를 안고  
600    시인 - 김창영 댓글:  조회:5049  추천:0  2015-03-12
                                                          (우측 김창영 시인)   시인 김창영씨의 첫시집 《산처럼 물처럼》이 최근 료녕민족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시집은 “제1부 내가 눈을 감아도”, “제2부 그것은 전혀 생각밖의 일이였다”, “제3부 바다가 노래하는 곳에”, “제4부 죽음이 꽃같은 시간” 등 네개 부분으로 나누어 그동안 창작한 수작들을 수록했다.     저자는 머리글에서 “버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욕심 한번 내봤다”, “그나마 버려야 할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가는것을 어쩔수 없다”면서 “시를 쓰면서 한줌의 재로 남을, 그 한줌의 재마저 바람결에 날려버릴 자신의 존재를 터득했기에 못나고 부끄러워도 그 모든것이 사랑”이라고 출간의도를 밝히였다.     한국시인이며 문학박사인 정연수씨는 평론에서 “김창영시인은 비록 낮은 목소리지만 분명한 시정신으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이끌어왔다… 김창영시인은 지나칠만큼 죽음에 천착하고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미지는 결코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잊지 않았기에 가능했다.”면서 “그의 시속에서 일관되게 관통되는것은 인정찾기, 고향찾기, 바다와 죽음에 대한 천착을 통한 삶의 근원적본질찾기였다.”고 평가했다.     김창영시인은 1967년 길림성 집안에서 태여나 연변제1사범학교를 졸업했고 그동안 시와 수필 300여수(편)를 창작했다. 김창영시인은 연변작가협회 리사, 료녕성작가협회 회원으로서 현재 료녕조선문보 기자부 주임으로 근무하면서 심양시조선족문학회 사무국장 등 사회직무도 맡고있다.       김룡호 기자     인터넷료녕신문  2011-08-19     서탑의 력사적의미와 시적인 상징성 ―김창영의 련작시 《서탑》 장춘식   1. 시작하면서   김창영의 시는 우리가 늘 먹는 된장이나 김치와도 같이 소박하면서 깊은 맛이 있다. 화려한 수사도 별로 없고 모더니즘의 특징이라 할수 있는 난해함도 없다. 그러나 술술 읽히면서 읽고나면 거기에서 뭔가 우리의 가슴을 저리게 하는 깊은 의미, 깊은 맛이 느껴진다. 이번에 묶은 시집 《서탑》 련작시 99편은 그의 이러한 소박하면서 깊은 맛을 집대성한 작품들로 이루어졌다. 100편이 아닌 99편, 많다는 의미가 될것 같기도 하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으로 리해해도 될것이다. 하긴 저 서탑아래 도라지꽃이 피는 한, 즉 조선족의 흔적이 존재하는 한 김창영시인의 시상도 끝나지 않을것이다. 련작시는 우리 시단에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그러나 김창영의 《서탑》 련작시처럼 방대한 규모의 련작시는 흔치 않다. 석화시인의 련작시 《연변》이 31편으로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지만 김창영의《서탑》의 3분의 1밖에 안된다. 의미있는것은 두 련작시 모두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장르적으로 두 련작시는 전례가 없는것이여서 1980년대 리욱, 김철, 김성휘 등의 장편서사시가 하나의 붐을 이루었던것처럼 장르적혁신의 붐을 일으키지 않을까하는 기대감도 없지 않다. 시인이 관심을 두고있는 주제의식을 중심으로 시집의 의미와 가치를 살펴본다.   2. 공동체의 정체성 확인 욕구   련작시의 최초발상은 아무래도 조선족의 상징, 이주민의 상징으로서 비롯된것처럼 보인다. 서탑과 서탑거리는 료녕성 특히 심양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졌고 이는 사실상 연변과 마찬가지로 중국내 전반 조선족의 상징이기도 하기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99편에 달하는 련작시의 거의 반 이상이 민족 정체성의 리해와 확인의 경향을 드러낸다.   1) 기억속의 력사와 그 상징성 시집의 작품에는 기억속의 력사적 흔적들이 많이 나온다. 10여편이 이런 소재를 다루고있다. 가령 3번 작품의 량세봉장군에 대한 기억, 4번과 64번 작품의 조선족의 이민과 벼농사를 통한 정착의 력사적기억, 5번 작품의 새끼골목의 유래, 15번 작품의 백석시인의 기억, 16번 작품의 “봉천국밥집”의 유래 등이 이에 속한다. 15번 작품은 “시인 백석을 그리며”라는 부제를 달고 작품 전체적으로 북관 즉 우리의 이민지인 동북땅에 대한 백석시인의 인상과 느낌을 재현해내는데, 수십년이라는 시간적차이를 두고 하나의 같은 공간속에서 벌어졌던 두 시인의 느낌은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의 공간을 마련해준다. 어떤 의미에서는 력사와 현재의 시간을 하나의 공간속에서 통합시켰다고 보아도 대과는 없을것이다. 그러한 시인의 상상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 력사와 오늘의 삶을 동시에 느낄수 있기때문이다. “류치환의 ‘절도(絶島)’에 답하여”라는 부제목이 붙은 32번 작품에서는 일제강점기 이민시인 류치환의 이민지에 대한 느낌 혹은 정서와 김창영시인의 오늘의 이민지의 느낌을 대조시키고있다. “외로운 絶島”라는 류치환의 만주국치하 동북땅의 쓸쓸하고 고독한 느낌에 대해 시인은 “해빛 찬란한 광야의 하루”라는 표현으로 대조시킨다.력사와 오늘 현실의 시간적거리감이 느껴지면서 동시에 수십년이라는 시간이 지난후 바뀌여진 정착지의 삶의 양상이 체험적으로 다가온다. 《봉천국밥집》이라는 부제목이 붙은 16번 작품과 “화평구중흥가31번지”라는 부제목이 붙은 39번 작품에서는 조선족이 현재 살고있는 정착지의 력사적인 기억과 상징성이 보다 무게감있게 다가온다. 남편을 항일투쟁에서 잃은 8명의 독립군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개장했다는 “봉천국밥집”의 유래를 특별히 제시한 16번 작품에서는 오늘날 우리 조선족의 정착이 얼마나 뼈아픈 대가를 치렀는지를 기억하게 하며 39번 작품에서는 다시 옛 봉천의 조선인 부호 김창호가 살던 주택을 들어 그러한 력사적기억을 립체적으로 확산시킨다. 이런 기억이 시인의 상상력을 자극한것은 그것이 우리의 기억, 선조들을 통해 우리의 무의식속에까지 침투된, 수많은 상징과 암시를 동반한 기억이기때문이 아닐까 한다. “논밭을 바라보며”라는 부제목이 달린 4번 작품과 “새끼골목”이라는 부제목의 5번 작품, “북운하 서정”이라는 부제목의 64번 작품을 통해 우리는 시인의 그러한 인식을 확인할수 있다. 맨주먹으로 강을 넘어 남의 나라 땅에 몸을 맡긴 우리의 부조들은 거의 벼농사기술 한가지로 이땅에 정착할 밑천을 마련했고 그렇게 수많은 피와 땀을 이땅에 뿌리는 동안 몇세대를 걸쳐 오늘에 이르게 되였던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력사적기억을 끊임없이 더듬어보고 감개무량해한것은 력사적기억 그 자체만에 대한 관심때문은 아닌것 같다. 그러한 력사적기억의 재생에는 항상 오늘의 우리가 엮여지기때문이다.   2) “나”와 “우리” 확인의 콤플렉스 사실 시집 전체적으로 시인 김창영이 서탑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것은 오늘의 우리, 우리라고 표현되는 조선족의 존재감에 대한 확인 콤플렉스라 할수 있을 정도로 이 부분에 해당되는 작품이 량적으로도 많고(20편이 넘는다) 정서적으로도 가장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러니까 앞항에서 살펴본 력사적기억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우리” 확인의 콤플렉스에서 비롯되였다고 볼수도 있을것이다. 련작의 첫편에서 이점은 벌써 확인된다. “어제밤 꿈속에서 부르던/할아버지가 그리워/이른 새벽 서탑을 찾는다”는 표현은 련작시 전체의 창작동기를 제시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태여나 얼굴조차 보지 못한 할아버지”의 목소리―“너 이놈, 서탑을 가슴에 심거라!”가 “탑아래서 탑의 언어에 귀 기울이다”는 표현과 겹쳐지면서 “나”와 “우리”의 정체성 확인의 욕구를 충분히 드러내고있기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서탑은 이민민족인 “우리”의 상징으로서 시인의 의식과 정서를 자극하고있다는 말이 되겠다. “묘향산 모란봉”(이북땅을 상징)을 거쳐 “한라산”(이남땅을 상징)에 이른다고 한것은 앞의 “현풍할매곰탕집”이라는 식당 이름과 련관시켜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상호(商號) 명칭이 분명하지만 이를 통해 고국의 산천, 고국땅을 표현하고자 한 시인의 의도 또한 뚜렷하다. 그렇게 보면 이 작품에서는 “나” 혹은“우리”를 조선반도에서 이주해 서탑으로 상징되는 중국땅의 정착지에 정착해 살아가는 공동체로 보고 이를 스스로 확인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게 다가온다. 이점은 2번 작품에서 “우리”를 가슴에 “하얀 도라지꽃”을 피운 공동체, 즉 고국의 동포와는 구별되는 존재로 인식하는 점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이 작품에서는 또한 서탑이 “행인들의 가슴속에 탑으로 우뚝 솟았다가” “거리로 드러누웠다”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탑이 “드러누웠다”는 표현은 련작시 전체적으로 5-6곳에 등장하는데, 이는 시인의 기교적인 기호와도 관련되겠지만 그 “드러누웠다”는 표현이 “우리”의 정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고 할 때 거기에는 뜻깊은 상징성이 동반된다. 그리고 이 상징은 련작시 전체적인 상징―서탑=조선족=자랑스런 정착민공동체의 의미를 띠게 된다. 왜 서탑이 시인의 의식속에서 그토록 절실한 의미를 가지고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우리”로서의 정체성 확인의 욕구는 다각적으로 이루어진다. 27번 작품에서 시인은 서탑이 “여기에 이렇게 서있음은/서러움인가 자랑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해놓고는 “쪽박차고 압록강 건너야 했던 비운”이 지금까지 남아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서러움이 되겠지만 “다시금 엮어가는 우리네 삶”은 오히려 자랑이 된다고 말한다. 정체성 확인의 한 방법이 될것이다. 그리고 다시 “조선문서점”이라는 부제목이 붙은 28번 작품에 오면 고국과의 관련, 혹은 민족적인 정체성을 인정한다. “서탑대랭면점”이라는 부제가 붙은 31번 작품에서는 랭면사랑을 통해 또다시 민족적정체성을 확인한다. “북릉공원놀이”라는 부제목의 42번 작품은 심양의 조선족들이 왜서 북릉공원놀이에 그처럼 애착을 가지는지를 통해 공동체의 자기확인의 욕구를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 43번 작품에서 “백두에 이르는 진달래 꽃길과/한라에 이어지는 무궁화 꽃길이 보인다”는 표현은 우리 공동체의 이중적인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시인의 독특한 감수성의 소산이라 하겠다. 이처럼 시인은 “우리”로서 조선족공동체의 자기확인을 통해 우리 삶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있는바 여기에서 서탑은 항상 그 상징 혹은 가치의 중요한 이미지로서 독자의 정서를 자극한다.   3) 위기 맞아 다지는 마음 그러나 공동체로서의 자부심과 가치의식은 시인에게 있어서도 항상 자신감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도시화를 맞아 분해되는 우리 공동체의 현실앞에서 이런 문제성은 자연스럽게 도출되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그러한 위기상황을 맞아 좌절하고 한탄만 하지는 않는다. 서탑의 이미지 혹은 상징에는 그러한 위기를 해소하고자 하는 의욕, 혹은 자기다짐의 의식들이 다수 드러난다. 그런데 시인의 위기의식은 련작시의 초반에서는 별로 나타나지 않다가 중반에 접어들면서 점차 강화되는 추세를 보인다. 도시화시대를 맞아 민족공동체가 맞은 위기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있음을 말해준다. 가령 34번 작품에서 시인은 위기의식과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처음으로 드러내고있다. 그것도 “오랜세월 삼복 폭염아래/탑이 열병을 앓는다”는 표현에서 볼수 있듯이 최근의 위기만이 아닌, 조선족이 겪어온 시련과 고난의 전 과정을 포함하고있는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오늘의 위기도 물론 포함될것이지만.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시련, 위기의 극복을 “흐린날 뼈속에 스며든 랭기를 삭히는 일”로 보고 “가린것 하나 없이 온몸 내맡기고/열받아 깡그리 녹아내렸다가/이 땅에 다시 일어서는것”이라 락관한다. 이런 시인의 락관에는 이민과 정착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른 우리의 력사적저정이 바탕이 되였을것이다. 37번 작품에서도 시인의 락관적인 정서에는 과거 백수십년의 력사적경력이 바탕에 깔려있지만 미래의 불투명성에 대한 시인의 걱정은 조금 깊어진것처럼 보인다. “시작이 보이지 않는것처럼/끝도 없을거야”라는 첫 2행이 은유하는것은 과거의 시련보다는 현재의 위기의식이다. 그러나 시인이 다지는 마음은 여전히 락관적이다. “보이지 않는 끝은/더 높이 솟아/보일 때까지 더 솟는것이야”라는 마지막 련의 표현이 그렇다. 물론 이런 시인의 락관은 “뒤돌아보면/지금 뒤돌아보이는것까지가/참으로 소중한거야” 라는 표현에서 볼수 있는것처럼 상당히 철학적인 자신감, 혹은 강력한 문화적능력이 뒤받침해주고있다. 그리고 40번 작품에서 그러한 위기극복의 다짐과 락관적인 정서는 고조를 이룬다. 비록 “떠나야 했던 걸음에/서러움 있었을망정” 즉 이민의 출발과 과정에는 고난과 시련, 그리고 그로 인한 서러움이 있었지만 “저 끝간데 없는 벌판에 피여난/복된 벼꽃파도”처럼 “저 서탑가에 정다운/‘나의 살던 고향’가락”처럼 이제 서러움은, 적어도 과거의 서러움은 아니며 “해빛고운 날 날마다/해빛처럼 살 일이다/여기서 고향처럼 살 일이다” 라는 표현에서 보는것처럼 우리의 삶, 공동체의 삶은 궁극적으로 락관적이라는 시인의 정서, 의식에는 변함이 없다. 50번 작품도 비슷한 정서를 드러낸다. “따스한 봄바람뿐이였다면 오늘의 이 모습/하늘아래 당당히 자랑할수 있었을가”는 오늘날 시인의 락관주의의 원인이 될것이고 “인제 또 언제까지 오늘까지 온것처럼/그냥 이대로 이럴수밖에 없을지 모르는거야”에서는 미래 공동체 운명의 불투명성에 대한 걱정과 반드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드러나고있다. 그리고 67번 작품에서는 다시 한번 “꽃처럼 웃으며 살아가는 일이다” 라는 마지막 시행이 의미하는것처럼 서러움 딛고 굳건히, 끈질기게 그리고 락관적으로 살아가려는 공동체의 의지가 시인의 정서에 녹아있다. 김창영에게 있어 서탑은 시련을 이겨낸 “우리”이고 “드러누운” 서탑은 이민지에 정착하고 뿌리내려 해빛처럼 밝게, 꽃처럼 웃으며 살아가는 조선족공동체의 다른 표현이다. 비록 도시화시대를 맞아 공동체의 분해라는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있는 서탑처럼 조선족공동체 또한 끝까지 버티고 살아갈것이라는것, 그리고 이런 끈기와 힘은 백수십년 시련과 고난의 력사적과정을 거쳐 형성된 정체성과 그 정체성을 결성시킨 문화적, 생활적 능력이라는 점, 이것이 김창영시인이 축조한 서탑의 상징성 혹은 이미지의 내포가 될것이다.   3. 돌아갈길 없는자의 서러움―향수   다시 돌아갈수 없는 혹은 돌아갈길 없는 고향, 이는 이민기 우리 시인들의 중요한 정서적표현이였다.이제 이민의 제3, 제4 심지어 제5 세가 우리 민족공동체의 주류가 된 상황에서도 이러한 고향상실의 서러움 혹은 향수는 여전히 무거운 삶의 짐이 되고있다. 디아스포라의 공통된 체험이요 정서라 하겠다.   1) 망향과 향수의 처절함 “바다물이 마를가/그리움은 끝없어라”로 시작되는 20번 작품은 그리움을 그냥 추상적으로 표현하고있다. 그러나 간절한 소망이 탑으로 굳어졌다는 표현은 그 상징적인 의미가 단순하지 않다. 개인적인 소망을 공동체의 소망으로 승화시키고있기때문이다. 특히 “내 간절한 소망은 탑으로 굳어지고”에서 굳어졌다는 표현은 소망의 간절함을 충분히 드러냈다 하겠다. 그렇다면 이처럼 간절한 소망은 무엇이며 또 왜 그토록 간절할까? 상기 작품의 마지막 련에 나오는 “아득한 수평선 우러러/눈 먼 마음 어찌할거나?”에서도 대개는 그 소망이 고국에 대한, 혹은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임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너무 추상적이여서 그냥“짐작”할수 있을뿐이다. 그러나 21번 작품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고국에 대한, 고향에 대한 망향 혹은 향수의 정서가 구체화되고있을뿐만아니라 대를 이어 유전되는 그리움을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의 “가고프다”와 “보고싶다”에서 화자 세대의 “그립다”로, 다시 “예서 태여나 자란 내 아들은/말없는 탑과 탑너머 저쪽산을/아버지처럼 나처럼 기억이나 할까?”라는 걱정까지를 포함한 그리움의 궁극으로 드러내고있다. 그러한 그리움, 향수는 22번과 44번 작품에 이르러 고조를 이룬다. 그리고 왜서 그러한 그리움이 그토록 절실한지를 확인시켜준다. “해와 달이 엇갈아 뜨고 져도/받아주지 않는 야속함에/돌아갈수 없는 아쉬움이 겹쳐” 가슴에 응어리지고 가시마저 끼여있다는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서러움은 력사적으로 응어리진것이다. 44번 작품에서 “서러움 하나는 하찮은것 같아도/내 가슴속 깊은 곳에 종기로 곪고 곪아 터져/닦아도 닦아도 아물길 없”다. 여기서 서러움은 바로 “아직도 남아있다 돌아갈길 없는 서러움이”라는 마지막 행에서 표현된 망향과 향수의 서러움이다. 결국 이것이다. “돌아갈수 없는 아쉬움”, 고국, 고향은 거기 그대로 있지만 세대가 바뀌고 강산마저 바뀌여 돌아갈수 없는 상황, 그것이 이민초기의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돌아갈수 없는 아쉬움”과는 또다른 “돌아갈수 없”음인것이다. 거기에서 서러움을 동반한 절실한 망향과 향수의 정서가 자라고 솟아나는것이다. 그리고 선조들의 서러움은 지금까지도 유전되여내려오고있는것이다.   2) 분단의 아픔을 앓는 디아스포라 돌아갈수 없는 고국에 대한, 고향에 대한 정서는 이제 고국과 고향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된다. 24번 작품에서 “탑 이쪽을 저쪽처럼 보고/탑 저쪽을 이쪽처럼 보리”라는 마지막 2행의 표현은 탑의 이쪽과 저쪽을 넌지시 고국땅의 남과 북으로 은유하고 그에 대한 화자의 관심을 드러낸다. 그리고 48번 작품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고국의 아픈 현실에 대한 가슴앓이를 드러낸다. “탑이 소근대는 소리를 들으면/온통 겨울이야기 차가움이다”라는 첫 2행의 표현에서 “겨울이야기”는 고국땅의 안타까운 현실, 가령 분단의 현실이나 분단으로 인해 벌어지는 여러가지 안타까운 사건, 사실들을 은유할것이다. “참으로 오랜 세월/그리운 고향소식 듣는것조차 죄되여”라는 중간 2행과 마지막 3행 “고향의 봄바람이 아직도/여기에 불어오지 못하기때문/아득한 기다림이여라!”에서 이를 확인할수 있다. 여기서 특히 “아득한 기다림이여라!”는 마지막 시행은 시작자아가 얼마나 고국의 “봄바람” 혹은 그리운 소식을 기다리고있는지, 말을 바꾸면 얼마나 고국의 통일이나 눈부신 발전을 기대하고있는지를 드러내고있다. 시인의 향수속에 남북분단의 현실이 얼마나 가슴아프게 인각되여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51번 작품이다. 서탑아래서 귀를 기울이면 정답게 속삭이는 조선팔도 말씨, 사투리의 말잔치를 즐겁게 들을수 있고 친구하며 다정하게 지내지만 고국에 가면 서울과 평양, 각각 저들끼리 논다는것이다. 그 안타까운 마음은 “서울 평양 두분 특별 손님 모셔와/함께 더불어 사는 모습 보여주면 좋을까 몰라”라는 마지막 2행에서 잘 드러난다. 62번 작품에 가면 이런 분단의 아픔에 대한 가슴앓이는 남북통일에 대한 열망으로 승격된다. “한라에서 백두 가는 길/언제면 열릴까나?”라는 첫 2행의 상징적의미는 구태여 설명이 필요하지 않겠거니와 시적자아는 남북통일의 위업을 그냥 열망에 그친것이 아니라 “꽃피는 탑의 고향에/한라 백두의 얼” 심고 “금강 설악의 혼 살리자”고 호소한다. “버려진 신세여도/버릴수 없는 그곳”이기때문이며 또 상기51번 작품에서 확인된 “탑이 낸 길”, “탑의 마음따라”, 즉 남북에 고향을 둔 조선족들이 “친구하며 다정하게 지”내는 공동체의 지혜를 모아 고국의 통일에 힘을 보태겠다는것이다. 물론 조선족공동체가 생존하며 쌓은 지혜가 남북통일에 충분히 귀감이 될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수십년간 얽히고설킨, 얼음처럼 얼고 돌처럼 굳어진 남북의 마음을 깨치고 녹여낼 힘이 우리에게 과연 있는지는 더러 의심되기도 하지만 시적자아의 소원과 열망, 그 소원과 열망의 간절함은 인정하지 않을수 없겠다. 고국과 고향에 대한 사랑, 그리움의 처절함은 49번 작품에서 다시 확인할수 있다. “아득한 외로움이여/아리랑 열두고개 불러 부르다/목까지 쉬여” 노래가락마저 쉴 정도로 시적자아는 그리움에 몸을 태운다. 그리고 “아지랑이 춤추는 봄날/봄의 노래는/가슴속에 묻어두었다”고 절규한다. 디아스포라의 슬픔이요 한맺힌 외로움이 여기에 있을것이다.   정확한 통계는 내기 어렵겠지만 보수적으로 짐작해도 조선족의 반수 정도가 한국에 다녀왔다고 볼수 있다. 그렇다면 고향에 “돌아갈길 없는 서러움” 혹은 최초의 이민으로 유발된 향수병은 기본적으로 해소되였다고 볼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것은 큰 착각이다. 미처 조상의 고향에 가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백년이상 유전되면서 오늘까지 내려온 “향수병”을 해소하기 위해 다녀온 고향이 사실상 상상속의 고향이 아니기때문이다. 고국도 변했지만 우리도 변했고 따라서 유전적으로 내려온 “향수병”은 어쩌면 영원히 치유될수 없는 디아스포라의 슬픔이 되고말았는지도 모른다. 다른 측면에서 망향과 향수, 고국의 분단을 아픔으로 앓는 마음은 사실상 조선족의 정체성의 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 항의 상징성 혹은 이미지 또한 앞항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공동체의 정체성 확인, 혹은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기확인의 의미가 될것이기때문이다.   4. 탑의 또 다른 이미지―삶의 진리의 상징   지금까지 우리는 서탑의 민족적상징의 문제에 대해 론의해왔다. 비록 련작시의 중심의제 혹은 핵심적인 주제가 공동체의 삶에 대한 관심인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한정된것은 아니다. 시집에서 서탑은 민족적상징의 문제외에도 일부 인류공동의 삶의 문제를 상징하기도 한다. 시인이 비록 서탑을 주로 조선족공동체의 상징체계로 인식하고있는것은 사실이지만 시인은 조선족공동체의 구성원이기 이전에 한 인간, 즉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와 의식을 가진 개체이기도 하기때문이다.   1) 력사의 무게감과 삶의 허무 그리고 달관 시인의 이러한 개체적인식 혹은 보편적인 가치는 력사의 무게감과 삶의 허무에 대한 정서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11번 작품에서 화자는 “스님들 떠나고/탑은 말이 없다”고 하고는 “내 눈에 보이는건/빈 하늘뿐”이라 하여 력사의 무게와 삶의 허무의식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허무는 공허나 상실감은 아닌것 같다. “내 마음 하늘처럼 비여/바람 한점 일지 않는/호수인양 고요하느니”에서는 삶의 공허나 역사의 허무함이 상실감으로가 아니라 달관적인 세계인식에 이르고자 하는 의식의 방향이 엿보인다. 그러나 첫 련을 거의 그대로 중복한듯한 마지막 련의 “이제 더는/탑도 없고/스님도 없어라” 라는 표현은 허무의식이 또다시 강화되면서 이른바 우주적인 괴로움을 드러내고있다. 이러한 허무의식이 불교적세계관과 닿게된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일인지도 모른다. 14번 작품에서 이점은 잘 드러난다. “비우고서 있는듯 없는듯/서있는 일/누운듯이 서있는 일”이라는 마지막 3행의 표현은“심즉공”이나 “시즉공”처럼 비움과 무위를 추구하는 불교적세계관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것이“탑에서 눈길 거두고/마음에서 탑을 비우는 일이란/탑의 그 공간에/나를 세우는 것이다”라는 첫 4행의 의미와 서로 호응하여 집착을 버려야 무위정적(無爲靜寂)에 이를수 있다는 불교적가치, 어쩌면 달관의 경지에 대한 화자의 인식을 보여준것이라 할수도 있다. 25번 작품에서는 그러한 시인의 인식이 인간의 인식의 한계, 인간관계의 측면에까지 확대된다. 마음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읽지 않는다면 대상을 보지도, 읽지도 못할것이거니와 대상의 뒤켠에서 대상의 마음을 읽는 다른 마음이 있다는것은 더구나 알지 못한다는것, 그 마음의 눈이란 바로 무위나 달관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시인의 달관에 대한 인식, 삶에 대한 가치추구는 33번과 35번 작품에서도 불교적인 가치관과 겹쳐지면서 어떤 깨달음, “돈오(頓悟)”의 경지를 드러낸다. 33번 작품의 “미미한것 하나 하나도/해빛같은 귀중한 존재임을/조용히 일깨운다” 라는 표현에서 읽을수 있고 35번 작품에서는 “내 생각의 천만갈래 길들이 알고보니/내가 걸은 그 단 한갈래로 이어진것을”이라는 다분히 철학적인 상징으로 표현된다. 물론 이런 시인의 인식은 “탑”과 항상 련관성을 가진다. “그곳 내 생각의 끝마다에/탑 하나씩 서있을까?”가 그렇다. 달관에 이르고자 하는 시인의 집착 혹은 명상은 38번 작품에 이르러 다시 그 경지가 무엇인지를 확인해준다. “눈뜨고 하늘 올려다보면/참으로 높아보이나/눈감고 느끼면 내 손/하늘에 닿아있는것처럼”에서는 앞에서 언급했던 “마음의 눈”의 법칙을 재확인하고있고 “탑도 없고 하늘도 없고/나도 없어라” 라는 마지막 2행의 표현은 인간이 무에서 왔다가 무에로 되돌아가는 세상의 섭리를 상징할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내 서탑가를 거닐다가 잠간 멈춰서서/그대 우러러 생각한것은/그대 딛고 선 이 땅의 기운과 하나되여/머리우 하늘에 닿아 마침내” 라는 불교적 명상을 통해 얻어진것처럼 보인다. 56번 작품에서 “언제 또 허물어지는 일 있더라도/리유도 묻지 말고 서러워도 말자/눈감고 생각마저 비우고/나마저 있는듯 없는듯, 또 무엇이 필요한가” 라는 첫 련의 상징성은 여전히 “공(空)”이라는 불교적세계관과 닿아있다. 결국 시인은 비움, 무위 등 불교적인 가치를 통해 달관의 경지를 실현할수 있다고 인식하고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탑의 묵묵부동에서, 탑의 불교적의미에서 명상을 통해 얻어진것처럼 보인다.   2) 일상탈출의 욕구 “공”이나 “무위”에 대한 가치인식에도 불구하고 현대문명의 끊임없는 유혹은 쉽사리 떨쳐버릴수 없는 모양이다. 물론 현대인의 삶은 문명의 추구와 탈출의 욕구라는 두가지 서로 모순된 정서를 배태하고있다는 사실을 상기살 때 이것 또한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17번 작품에서 밤과 낮이 바뀐 현대인의 삶은 상당정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표현되고있다. “낮달이 눈물을 떨군다” 라는 표현이 그러한 시적자아의 정서를 대변해준다. 그리고 19번 작품에서는 그러한 문명비판의 정서가 일상탈출의 욕구와 비움과 무위에의 추구로 비약한다. 여기서 “가끔은 이사하는 생각을 가져본다”는것은 일상탈출 즉 현대문명에 대한 피로감을 드러낸것이 분명하다. 흔히 이런 류형의 일상탈출의 욕구는 그냥 욕구에 그치거나 잠시적인 일탈의 욕구로 변질하기도 하지만 김창영시인의 일상탈출은 “빈 공간 빈 터 찾아” “이사길에 버리고 버려/말끔히 비여서 마침내 가벼워진 마음”이라는 표현에서 확인할수 있는것처럼 “자기비움” 혹은 “무위”의 경지를 가상목표로 한다. “내 터는 따로 없다”는것은 속세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경지가 되기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이 애초에 정해놓은듯한 경지와는 달리 현대의 문명은 끊임없이 시인을 유혹한다. 46번 작품에서 “과욕이 한껏 부풀은 내 마음”이나 88번 작품에서 “무엇엔가 자주 흔들리는 내”가 그렇다. 그러나 화자의 이러한 세속적인 욕구, 현대문명의 대표적인 욕구인 물질에 대한 유혹은 동시에 탑의 “주어진 고만한것에 참으로 만족하는” “당당한 너의 모습”에 의해 제어되고 억제된다. “이제라도 값 따지지 말고 저당잡혀야 겠다”는 마음다짐이나 “더는 흔들리지 않기 위해/흔들릴 때까지 흔들리기로 한다” 라는 자기 검증은 그러한 시인의 의지를 대변할것이다. 그러니까 김창영시인에게 있어 서탑은 공동체의 상징으로서만이 아니라, 탑이라는 보편적인 이미지로서도 중요한 시적인 상관물이 된다는 말이 되겠는데, 여기서 비움이나 무위라는 불교적인 가치관은 시인이 달관에 대한 인식을 대표하는 경지가 될것이다.   6. 마무리   전체적으로 김창영의 《서탑》 련작시에서 서탑은 우리의 선조들과 우리 자신들마저 포함한 이주민을 상징한다. 이주민의 력사적기억, 돌아갈수 없는 고향에 대한 향수, 심지어 일상의 탈출욕구와 우주적외로움마저 탑은 받아준다. 서탑의 상징적인 의미가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도 하고 자랑스럽게도 하며 때로는 슬프게도 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99편의 시작품을 여러해를 두고 쓰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시인의 립장이나 주제의식은 거의 변화가 없다. 이 시들을 쓰기 시작한 동기가 오랜 세월 시인의 의식속에서 발효되다가 련작시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볼수가 있다. 하지만 무르익은 주제의식이라는 측면에서는 장점이 되기도 하겠지만, 시를 쓰면서 더러 의식의 변화가 있음직하기도 한데 너무 변화가 없다는것은 오히려 약점이 될수도 있다. 혹 력사의 무게를 담아내겠다는 시인의 강박의식이 주제의식의 변화를 제약한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 더러 여유를 가지고 좀더 가벼워진 마음, 열린 마음으로 서탑의 새 력사를 쓸수는 없을까 기대해본다. 본고의 서두에서 김창영의 시는 된장이나 김치처럼 소박하면서 깊은 맛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소박하다는것은 다른 말로 하면 단순하다는 표현도 가능하여 약점이 될수도 있다. 화려함에 흔히 동반되는 거추장스러운 군더더기를 제거했다는 측면에서는 장점이 되지만 현대시의 많은 표현기교들이 결여되여있다는 측면에서는 약점이 될수도 있는것이다. 현대시의 핵심적인 특징은 이미지의 전략적인 사용이다. 리성적인 주제발굴로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창조적의미들이 시인의 감성을 통해 시인자신마저 감지하지 못하는 중에 드러날수 있는것이 바로 이미지즘의 장점이 아닐까 한다. 물론 기교라는것은 필수라기보다 선택의 문제가 되지만 오늘의 수준을 넘어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다는 의미에서는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출처] 서탑의 력사적의미와 시적인 상징성-김창영의 련작시 |작성자 반벽거사  
599    시인 - 김룡호 댓글:  조회:4530  추천:0  2015-03-12
장기판                  김룡호    전쟁은 끝났다  페허만 남았다    모든 지략과 모략이  멈춘 자리    말이 달리던 길엔  먼지가 내려앉고    왕을 잡던 자리  이젠 차갑구나    마시다 버려진 물병엔  회한만 가득    승자의 희열은 짧고  패자의 아픔은 길다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의 전쟁에 비유해 만들어진 장기판이다. 실제 전쟁터엔 나가지 않더라도 항우와 유방이 되어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람들, 흥미진진하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싱그운 법, 이웅다웅하며 살아봤자 일장춘몽이러니. (서지월시인)  
598    작다 크다... 댓글:  조회:1928  추천:0  2015-03-12
597    명시인 - 프랑시스 퐁주 댓글:  조회:3601  추천:0  2015-03-12
나비   프랑시스 퐁주       줄기에서 정성껏 만들어진 당분이 잘 씻기지 않은 컵 모양의 꽃의 바닥까지 솟구쳐 오를 때------ 땅에서는 대단한 역작이 이루어져 나비가 갑작스레 날아오른다. 그러나 애벌레로서 눈멀어 있고 아직 검은 머리를 지니고 있던 때와, 대칭의 날개가 타오르던 그 완전한 폭발에 의해 여위어진 몸통을 지녔던 때처럼, 그 후로도, 여기 저기 헤매는 나비는 단지 그 생애의 여정에 따라 혹은 그 비슷하게 자신을 내맡긴다. 날아다니는 성냥, 그 불꽃은 전염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것은 너무 늦게 다가와서는 이미 피어버린 꽃들을 확인할 뿐이다. 상관없지. 점등부처럼 행동하며 꽃마다 남아있는 기름의 잔량이라도 확인하니까. 나비는 쇠약한 누더기 몸을 이끌고 와서 꽃부리에 얹고, 애벌레 시절 줄기 아래서의 기나긴 굴욕을 복수한다. 대기 중의 조그만 범선은 수많은 꽃잎 사이에서 시달리며 정원을 배회한다.     * 프랑시스 퐁주, 청하         양초(La bougie)  프랑시스 퐁주(Francis Ponge)  밤은 때때로 이상한 나무를 되살아나게 해 그 나무의 빛이 어두움으로 가득찬 방들을 분해한다.  그 나무의 금잎은 새까만 육각(肉角)에 의해 흰 대리석 기둥의 파인곳에 태연히 붙어있다  초라한 나비들은 숲을 흐리게 비추는 높이 뜬 달보다는 이것을 선호하여 공략한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이내 불에 타고 지쳐 모두가 혼미에 가까운 광란상태에서 전율한다 그렇지만 양초는  첫 연기에 치솟음으로 책 위에 빛의 반짝임을 통해 독자에게 용기를 주고- 이윽고 받침대로  기울어져 자신의 자양분 속으로 녹아내린다      *프랑시스 퐁주( Francis Ponge) 1899-   프랑스 몽텔리 출신의 시인. 퐁주의 시학:  인간 중심의 관념이론이나 위선적인 휴머니즘에 종속되어 희생당해온 사물들의 편에 서겠다고 천명한 바 있는 독특한 시인이다. 사물들 편에 서는 시인의 태도에 의해 씌여진 그의 시편들은 대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묘사이다. 그러나 사물들에 자신의 추억이나 애상, 초월적인 관념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단지 사물 그 자체의 특성만을 보여줄 뿐이다.   Francis Ponge는 1899년 프랑스 남부 몽펠리에서 태어나 아비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0년대에 앙드레 브르통 Andre Breton과 함께 초현실주의 문학 운동에 가담했고, 1944년부터는 공산당 신문 의 문학 면을 담당했다. 작품집으로 (1942), (1961), (1965) 등이 있다.           테이블 - 프랑시스 퐁주   단언하건데 책세상은 결코 돈을 벌지 못하리라! 이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많이했다. 책은 항상 그런것처럼 알라딘에서 책세상 책을 무더기로 사면서 그냥 구매한 책이다. 그래서 펴보기 전에는 절대 무슨 내용인지 알지못했다. 물론 작가 역시 생전 처음듣는 낮설은 이름이었다.   책은 본문이 100P(그것도 충분한 여백과 그림을 포함하여). 판본에 관한 내용이 30P (이것도 마찬가지로 여백이 장난이 아님). 하지만 글은 이 얄팍한 책의 무게는 1000P는 족히되는 죽기전에 한번은 읽어야 할 그런 내용이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계탔다.)   이 책은 "테이블"이라는 사물에 대한 시인의 언어 유희였다. 작자가 사랑하는 프랑스어에 대한 치밀한 분석 (작자이름도 얼마나 프랑스적인가! 프랑시스 퐁주)   테이블 - (일반적으로) 네 다리 위에 수평으로 견고하게 세워진             나무판으로서 팔꿈치를 댈 수 있다.   테이블 - 그것은 가구중에 하나일 뿐이며, 필수적으로 다른              가구를 필요로한다, 앞에 놓아야 할 의자나 접는 의자              또는 안락의자와 같은 가구를,              또는 침대나 긴 의자 같은 다른 가구를              그리고 어떤 아파트에서처럼 자연이 없는경우, 램프같은 다른가구도..   테이블 - 그것은 다른 재료로 되어 있을 때는 필히 명시해야한다.              (돌 테이블, 유리 테이블과 같이) 만약 밝히지 않으면,              그것은 나무로 된 것이다.     테이블 - 펜으로 보면 그것은 땅이다.   테이블 - 내가 그것에 기대는 방법에 의미가 있다.   테이블의 매력은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멋진 말들이 너무 많이 나오는 기가막히게 아름다운 글이다. 이 말들을 만들기 위해서 ( 그가 작성한 본문은 65P이다.) 이 글을 평생동안 다듬어 왔다는데 기가 찰뿐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의 솔직한 심정 -  미치지 않고서는 절대 이런 글을 쓸 수 없다. 글을 쓰다보니 언젠가 에코의 글에서 그의 이름을 들은것 같다. 기호학자이니 언젠가 책에서 언급했던것 같다. 찾아볼까 하다가 포기한다. 한두권이여야지.......   문학이란 끝이없다. 그래서 행복하다.  새 -프랑시스 퐁주(1899~1988)   가는 화살 또는 짧고 굵은 투창, 지붕 모서리를 에둘러가는 대신, 우리는 하늘의 쥐, 고깃덩이 번개, 수뢰, 깃털로 된 배, 식물의 이,                                         때로 높은 가지 위에 자리잡고,                                         나는 그곳을 엿본다,                                                                                   어리석고,                                         불평처럼 찌부러져서 …… ; 공중을 활강하는 새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뛴다. 상승 기류를 타고 포릉포릉 나는 새들에 늘 경탄한다. 이 경이로운 존재들, 이 사랑스럽고 하염없는 자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새들이 뼛속이 텅 빈 골다공증 환자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새들은 씩씩하게 공중을 주름잡는다. 푸른 궁륭의 자식들, 가장 작은 분뇨제조기, 작은 혈액보관함, 좌우 날개를 가진 무소유의 실천자, 바람이 띄우는 작은 연들, 발끝을 딛고 춤추는 공중의 발레리나들, 은행 잔액이나 국민연금 따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통 큰 백수들! 한편으로 새들은 “하늘의 쥐, 고깃덩이 번개, 수뢰, 깃털로 된 배”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출처] 테이블 - 프 나비   프랑시스 퐁주       줄기에서 정성껏 만들어진 당분이 잘 씻기지 않은 컵 모양의 꽃의 바닥까지 솟구쳐 오를 때------ 땅에서는 대단한 역작이 이루어져 나비가 갑작스레 날아오른다. 그러나 애벌레로서 눈멀어 있고 아직 검은 머리를 지니고 있던 때와, 대칭의 날개가 타오르던 그 완전한 폭발에 의해 여위어진 몸통을 지녔던 때처럼, 그 후로도, 여기 저기 헤매는 나비는 단지 그 생애의 여정에 따라 혹은 그 비슷하게 자신을 내맡긴다. 날아다니는 성냥, 그 불꽃은 전염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것은 너무 늦게 다가와서는 이미 피어버린 꽃들을 확인할 뿐이다. 상관없지. 점등부처럼 행동하며 꽃마다 남아있는 기름의 잔량이라도 확인하니까. 나비는 쇠약한 누더기 몸을 이끌고 와서 꽃부리에 얹고, 애벌레 시절 줄기 아래서의 기나긴 굴욕을 복수한다. 대기 중의 조그만 범선은 수많은 꽃잎 사이에서 시달리며 정원을 배회한다.     * 프랑시스 퐁주, 청하         양초(La bougie)  프랑시스 퐁주(Francis Ponge)  밤은 때때로 이상한 나무를 되살아나게 해 그 나무의 빛이 어두움으로 가득찬 방들을 분해한다.  그 나무의 금잎은 새까만 육각(肉角)에 의해 흰 대리석 기둥의 파인곳에 태연히 붙어있다  초라한 나비들은 숲을 흐리게 비추는 높이 뜬 달보다는 이것을 선호하여 공략한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이내 불에 타고 지쳐 모두가 혼미에 가까운 광란상태에서 전율한다 그렇지만 양초는  첫 연기에 치솟음으로 책 위에 빛의 반짝임을 통해 독자에게 용기를 주고- 이윽고 받침대로  기울어져 자신의 자양분 속으로 녹아내린다      *프랑시스 퐁주( Francis Ponge) 1899-   프랑스 몽텔리 출신의 시인. 퐁주의 시학:  인간 중심의 관념이론이나 위선적인 휴머니즘에 종속되어 희생당해온 사물들의 편에 서겠다고 천명한 바 있는 독특한 시인이다. 사물들 편에 서는 시인의 태도에 의해 씌여진 그의 시편들은 대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묘사이다. 그러나 사물들에 자신의 추억이나 애상, 초월적인 관념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단지 사물 그 자체의 특성만을 보여줄 뿐이다.   Francis Ponge는 1899년 프랑스 남부 몽펠리에서 태어나 아비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0년대에 앙드레 브르통 Andre Breton과 함께 초현실주의 문학 운동에 가담했고, 1944년부터는 공산당 신문 의 문학 면을 담당했다. 작품집으로 (1942), (1961), (1965) 등이 있다.       나비   프랑시스 퐁주       줄기에서 정성껏 만들어진 당분이 잘 씻기지 않은 컵 모양의 꽃의 바닥까지 솟구쳐 오를 때------ 땅에서는 대단한 역작이 이루어져 나비가 갑작스레 날아오른다. 그러나 애벌레로서 눈멀어 있고 아직 검은 머리를 지니고 있던 때와, 대칭의 날개가 타오르던 그 완전한 폭발에 의해 여위어진 몸통을 지녔던 때처럼, 그 후로도, 여기 저기 헤매는 나비는 단지 그 생애의 여정에 따라 혹은 그 비슷하게 자신을 내맡긴다. 날아다니는 성냥, 그 불꽃은 전염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것은 너무 늦게 다가와서는 이미 피어버린 꽃들을 확인할 뿐이다. 상관없지. 점등부처럼 행동하며 꽃마다 남아있는 기름의 잔량이라도 확인하니까. 나비는 쇠약한 누더기 몸을 이끌고 와서 꽃부리에 얹고, 애벌레 시절 줄기 아래서의 기나긴 굴욕을 복수한다. 대기 중의 조그만 범선은 수많은 꽃잎 사이에서 시달리며 정원을 배회한다.     * 프랑시스 퐁주, 청하         양초(La bougie)  프랑시스 퐁주(Francis Ponge)  밤은 때때로 이상한 나무를 되살아나게 해 그 나무의 빛이 어두움으로 가득찬 방들을 분해한다.  그 나무의 금잎은 새까만 육각(肉角)에 의해 흰 대리석 기둥의 파인곳에 태연히 붙어있다  초라한 나비들은 숲을 흐리게 비추는 높이 뜬 달보다는 이것을 선호하여 공략한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이내 불에 타고 지쳐 모두가 혼미에 가까운 광란상태에서 전율한다 그렇지만 양초는  첫 연기에 치솟음으로 책 위에 빛의 반짝임을 통해 독자에게 용기를 주고- 이윽고 받침대로  기울어져 자신의 자양분 속으로 녹아내린다      *프랑시스 퐁주( Francis Ponge) 1899-   프랑스 몽텔리 출신의 시인. 퐁주의 시학:  인간 중심의 관념이론이나 위선적인 휴머니즘에 종속되어 희생당해온 사물들의 편에 서겠다고 천명한 바 있는 독특한 시인이다. 사물들 편에 서는 시인의 태도에 의해 씌여진 그의 시편들은 대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묘사이다. 그러나 사물들에 자신의 추억이나 애상, 초월적인 관념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단지 사물 그 자체의 특성만을 보여줄 뿐이다.   Francis Ponge는 1899년 프랑스 남부 몽펠리에서 태어나 아비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0년대에 앙드레 브르통 Andre Breton과 함께 초현실주의 문학 운동에 가담했고, 1944년부터는 공산당 신문 의 문학 면을 담당했다. 작품집으로 (1942), (1961), (1965) 등이 있다.       랑시스 퐁주 - 책세상 - 허정아 옮김.|작성자 김남혁  
596    시인 - 김문세 댓글:  조회:4803  추천:0  2015-03-12
제13회 연변지용제 개최 기자: [ 김성걸 안상근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09-09-02 15:30:35 ]  연변작가협회와 한국옥천군, 옥천문화원이 주최하고 연변지용제 운영위원회가 주관하는 제 13회 연변지용제가 9월1일 오후 연길에서 있었다. 《정지용문학상》수상자 김문세(오른쪽) 시인 김문세의 시 작품집《산책이 끝나면 만남도 리별이다》가 제 13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했다. 김문세시인은 전통적인 예리한 시필로 외국에로의 진출과 농촌의 황페화, 민족의 생존에 관한 우려 등 현실생활의 구석구석을 파헤치면서 작자의 모순된 심태와 아픔을 호소하기도하고 빛나는 정감을 발산하면서 민족의 래일서정을 토로하기도하여 평의심사위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최종 수상작으로 뽑혔다. 올해까지 이미 13회째 거행되고있는 《정지용문학상》은 이미 중국조선족 사회에 뿌리깊은 문학상으로되였으며 영향력이 큰 문학상의 하나로 자리매김되고있다.
595    시인 - 석문주 댓글:  조회:4729  추천:0  2015-03-11
                             (우측 석문주 시인)   뿌리 있는 시인   김관웅         석문주는 아직까지 우리 시단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다.   그만큼 떠들지 않고 조용히 생활에 시의 뿌리를 내리고 자기식대로 건강한 시정신을 일궈내는 시인이다.   석문주시인은 1960년 화룡현 덕화향 상화촌에서 태여나 14살에야 기차를 구경하고 12세에 전기불을 만난다. 화룡에서 뻐스로 2시간 하고도 다시 도보로 30여리를 걸어야 하는 두만강가의 두메산골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청산과 동무하고 흙에서 뛰놀면서 그곳에서 소학교를 마친다. 손위로 누나 넷, 집안의 귀동자로 3대독자로 태여나 금이야 옥이야 자랐지만 그의 천품은 이런 안일함에서도 결코 자만심 같은것은 키우지 못하고만다. 중학교때에 어머니를 여의는 불행도 겪으며 결코 순탄치만은 않은 청소년기를 보낸다.   이런 경력이 시인의 경력이 최초의 뿌리가 된다. 그후 장춘전력학교를 졸업하고 유수천발전소에서 통계사로 근무하다가 연변전업국 산하 한 변전소에서 로동자로 쭈욱 지금까지 일해오고있다. 그의 경력이 보여주다싶이 그는 조선족시단에서는 아주 드물게 오리지널 로동자시인에 속한다. 이것이 그의 또 다른 뿌리를 형성한다. 1988년에 연변대학 조문학부(자습)에서 계통적으로 문학을 공부할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이것이 그의 시의 뿌리를 더 굵어지게 한다.   석문주시인은 됨됨이가 정직하고 진솔하며 비교적 조용한 천성이다. 하기에 처녀작을 1981년에 발표한 뒤로 지금까지 멈춤없이 시를 써오고있는데도 시단에선 잘 알려져있지 않고 그 흔한 문학상 한번도 타본적 없는 무명시인이다.   기실 유심히 살펴보면 그의 시는 매편마다 독특한 개성이 보이며 시를 엄숙히 다루는 깊은 사색이 묻어난다. 특히 새로운 발견을 중시하고 이미지화에 알심을 쏟고있는 건강한 시정신을 지닌 시인임을 알수 있다.   우리 시단의 일부사람들과는 달리 오랜 시간의 고행으로 차곡차곡 시의 뿌리를 키워온 그 정신이 대단히 돋보인다. 똑 마치 산삼이 자라듯, 진짜 시인은 생활의 흙속에 시정의 씨앗을 두고 천천히 인생의 비바람과 고난의 이슬을 머금고 조금 조금씩 서정의 뿌리가 자라나게 된다. 과정이 필요한것이다. 쾌속성장은 산삼이 아닌 양삼이 되는 길이라고 하겠다.   25년이란 긴 수행으로 하루도 멈춤없이 시를 사고했고 시를 생활화했고 적잖은 력작을 발표했음에도 세상의 평가는 린색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것에 련련치 않고 계속 부지런히 시작에 정진해왔다. 이 점이 돋보인다.   첫째, 석문주시인의 시적소재는 대부분 보편성과 객관성을 띠고있으며 의인, 비유, 대조 등에 동원된 소재는 지극히 참신한 시적감각에 바탕을 두고있다. 이를테면 석문주시인의 시작들에서 소재가 된것들은 버드나무, 돌배나무, 흰눈, 새, 베개 등 가장 보편적인것들이며 또한 이런 소재들은 확실하고 정확하고 생활의 론리에 맞고 타당성이 있어 객관성을 잃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석문주시인의 시는 일상적인 어법과 문맥에 맞는 론리성을 갖고있으며 따라서 독자들에게 심미적인 피곤을 주지 않고 평이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석시인의 시는 결코 너무나 보편성과 객관성에만 집착하여 참신성을 잃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키스》에서는 동서고금의 많은 시인묵객들이 흔하게 시적소재로 채용했던 보편적인 소재인 키스를 《불꽃 튕기는 용접을 통한 두 물체의 접합》이라는 객관현상을 통해 표현함으로서 독자들에게 참신한 느낌을 주고있으며, 《마음에 날아드는 새》에서는 감정이입의 수법을 동원하여 고국의 돌, 풀, 나무 같은 자연대상에 시적자아의 주관적인 감정을 투사하여 이런 자연대상들속에서 우리 한글의 자모음의 모양을 보아내는 지극히 참신한 감각에 바탕을 둔 소재를 리용하고있어서 독자들에게 참신성과 진한 감동을 준다. 필자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이미지조합보다는 석문주시인처럼 시에서 보여지는것처럼 자연스러운 이미지조합을 더욱 선호한다. 둘째, 석문주시인의 시들에서 독자들은 진실한 정감을 느낄수 있다. 주지하다싶이 서정시(抒情詩)의 성(姓)은 정(情)이다. 석문주시인은 무병신음의 시를 멀리하고 진실한 정감이 우러나온 서정이 깊은 시를 쓰고있다. 《고향의 버드나무》, 《고향의 돌배나무앞에서》에서는 고향에 대한 다함없는 향수를, 《마음에 날아드는 새》에서는 조상의 뼈가 묻혀있는 고국에 대한 그리웠던 정을, 《하얀 눈밑에는》에서는 겨울날 설경을 통한 마래에 대한 희망을 진솔하게 표현하고있다. 하기에 비록 다산시인은 아니지만 삶에 젖은 그의 시편은 인간의 호흡이 느껴지고 인간의 진실한 감정을 피부로 느낄수 있게 해준다.   셋째, 석문주시인의 시에서 참신한 시적발견에 의한 진실하고 생동한 이미지나 이미저리를 접할수 있다. 석시인은 가급적이면 자신의 뜨거운 정감을 직설이 아닌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려고 애쓴 흔적이 도처에서 보인다. 이를테면 《키스》에서는 인간 남녀의 뜨거운 사랑을 로동자시인답게 로동현장에서의 철물의 용접장면을 객관적상관물로 하여 이미지화를 통해 표현하고있음이 돋보이며, 《베개의 고백》에서는 의인화의 수법을 동원하여 시적자아로 등장한 베개의 고백을 통하여 인간의 꿈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그 수법이 아주 돋보인다.       우리는 석문주시인의 시는 형상, 서정, 철리의 이 3자의 통일을 기한 참된 시의 면모를 갖추고있음을 보아낼수 있다.   유년기의 시골과 흙과 물과 산속에서 얻어진 귀중한 서정의 씨앗이 서서히 자라나 무성한 시의 숲을 가꿔낸것이다. 그의 시에는 인간의 따뜻한 가슴과 진솔한 서정이 아름다운 언어로 피여나 우리 모두를 감동시킨다.   조금도 척하지 않고 모든 몰리해와 푸대접에도 원망의 말 한마디 없이 꾸준히 시의 터전만을 가꾸어온 석문주시인의 인간다움이 유난히 우리 시단에 시사하는바가 크다고 보아진다. 과정은 무시하고 평가 받기에만 급급해 뿌리 없는 시를 들고 나와 큰 상을 억지로 받아안고는 득의양양해하는 시단의 일부 사람들과는 많이 대조적이다.  생활이라는 이 비옥한 토양에 시의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석문주시인의 대성을 기대해보고싶다.    2006년 7월 15일 연길에서   
594    시인 - 고 임효원 댓글:  조회:4005  추천:0  2015-03-11
[임효원-시인]      
593    시인 - 고 송정환 댓글:  조회:4528  추천:0  2015-03-11
  송정환의 창작과 연구 다시 보기 장춘식     우리 시인이자 사학자인 송정환선생이 작고한지도 벌써 16년(2007년도) 세월이 흘렀다. 선생은 54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면서 우리에게 《풀피리》(연변인민출판사, 1982), 《사랑의 페허위에》(도서출판 高句麗, 2001) 등 시집 2권과 《짜리로씨야의 조선침략사 개요》(료녕인민출판사, 1982; 한국 범우사, 1990년 개정재판), 《조선사화총서》(전4권, 료녕인민출판사, 1983~1985), 《안중근전》(료녕민족출판사, 1985), 《조선갑오농민전쟁》(상무인서관, 1987) 등 7권의 력사서, 그리고 소설, 수필, 문학평론 등 기타 문학작품 및 사학론문 다수를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21세기라는 시점에서 선생의 문학적성과와 학문적업적을 되돌아보는것은 우리 민족성 보전과 정체성의 확인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시문학창작의 특징과 전개     송정환의 문학창작은 시를 중심으로 소설, 수필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이루어졌다. 시기별로는 크게 세 단계를 거치는데 첫째시기는 청년시절인 1950년대말~1960년대 초반이고 둘째시기는 개혁개방초기 즉 1970년대말 1980년대초반이며 세번째시기는 그후 작고하기전까지의 시기이다.   첫째시기의 시들은 청춘의 정열과 감성이 넘쳐나고 거기에 신중국 건국후 격정적이고 조금은 유아적인 정치적담론이 호응되여 표현되였다.   처녀작으로 알려진 시 《춘희의 초상》(1956)은 시인이 19세 되던 해에 발표한 작품인데 이 시에는 새시대 고향건설에 나선 춘희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희망에 가득찬 젊은이들의 삶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그려보이고있다.   제1련에서는 화가의 시각으로 춘희라는 새내기 농사군의 외적인 모습을 그리고나서 제2련에서는 행동하는 춘희의 정열적인 모습을 그린다. 상당히 서사적인 묘사속에 드러난 춘희의 이미지는 미래에 대해 희망과 기대로 충만되여있고 따라서 전반적인 시의 분위기는 밝다. 정열과 감성이 뚜렷하며 현실에 대한 인식은 매우 긍정적이다. 여기서 춘희의 초상은 동시대 청년들의 초상이라 할수가 있어 다분히 전형성을 지녔다 하겠다. 작품의 마지막 4행만 보더라도 이점은 잘 드러난다.     그렇습니다. 화가들은 못그릴것입니다   처녀의 새별눈동자에 담긴 모든것,   두드러진 앞가슴에 품은 모든것,   정녕 이것만은 그려내지 못할것입니다…     삶에 대한 기대감, 흥분 같은 정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조국의 모습에 대한 찬미에서도 잘 드러난다.     공장지구의 높은 굴뚝과 건물우로   동녘하늘은 구름과 연기로 자욱한데   구름새로 황금의 부채살 활짝 펼치며   타끓는 아침해 우렷이 솟아오르네     《장춘교외의 아침》의 첫 련인데 굴뚝과 연기는 력동적인 우리 사회의 상징이 될것이고 거기에 아침, 아침해는 생기에 넘치는 청춘의 정열을 상징한것이다. 이 작품뿐만아니라 《안강의 이른아침에》를 비롯하여 이 시기 다른 작품들도 비슷한 분위기를 전달한다. 《장춘교외의 아침》의 마지막 련에서 그러한 시인의 기대와 희망은 직설적으로 표현된다.     생활이 바로 시며 노래인 여기   약동하는 교외의 대지 광활한 무대우에서   아침, 그것은 영예론 하루의 서막이여라   태양, 그것은 시대의 찬란한 조명이여라!     새사회, 새생활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그것을 가능케 해준 조국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조국》, 《조국의 수도에서》, 《영광이 있으라, 조국이여!》 이때 시인의 정체성은 민족성보다는 국민성에 맞추어져있다. 50-60년대 우리 시단에 조국에 대한 찬가가 류행했던 사실을 돌이켜볼 때 송정환의 작품들이 그러한 류행을 한층 고조시켰다는 느낌마저 든다. 물론 20대의 젊은 시인답게 이 시기 송정환의 시에는 사랑에 대한 어렴풋한 감정이 표현되기도 한다. 《무지개》, 《실련자에게》, 《사랑의 그림자》 등이 이에 속하는데, 이런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 밑바탕에 깔린 시에서마저 새사회에 대한 기대감이 강한 정서로 표현된다. 그만큼 당, 조국과 희망에 넘치는 새사회의 삶에 대한 시인의 감정은 진실했고 소박했다는 말이 될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정열과 기대에 부풀었던 시인의 정서는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한결 성숙해진다. 물론 제2단계 시창작도 문화대혁명이라는 암흑을 뚫고나온 해방감에서 시작된다. 첫번째 시집 《풀피리》중 《원혼이 된 시인에게》항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부분 이 류형에 속한다.   우선 《좋다!》에서는 봄을 맞은 자연의 풍경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이 봄은 그냥 자연의 봄이여서 좋다고 한것만은 아니다. 첫 두 련을 인용해보이면 이점은 금방 알수 있다.     이른봄, 해빙기   집채같은 성에장 떠이고   봄물결 도도히 흘러가는데   들려와라 시성의 목소리   ―좋다!     겨우내 짓밟힌 강기슭   짐승들 쏘다니던 발자국은   아직도 저렇게 어지럽다만   산간을 울리며 굽이치는 봄물결   이 봄이 나는 좋다!     특히 제2련에서 어지러워진 강기슭에 대한 묘사는 4인무리에 의해 어지러워진 이 땅 겨울의 흔적이 분명하다. 그래서 더구나 시인은 이 봄이 좋다고 큰소리로 웨친것이다. 그러나 기쁨이나 즐거움만 있는것은 아니다. 《원혼이 된 시엔에게》라는 시에는 그 매서운 겨울이 우리 사회에 남겨준 뼈아픈 상처를 상기시키고있다. 《풀피리》의 《잊을수 없는 어제날의 생각》항에 수록된 작품들에서는 그러한 상처의 흔적을 원천적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문화대혁명속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일들, 비정상적인 현상들을 재현하여 검토하고 비판하고있는것이다. 심지어 몇편 안되는 단편소설중 《정인군자》라는 작품에서도 이러한 문화대혁명의 상처 혹은 그속에 로출된 인간성의 문제를 다루고있다. 이른바 혁명위원회 주임이라는 자의 마음속에 도사리고있는 《악마》를 끄집어내여 비판하고있는것이다.   이런 반성과 비판을 통한 력사인식을 표현하고나서야 비로소 시인은 이제 불혹의 나이에 느끼는 삶의 긍지감과 행복감을 드러낸다. 《사랑시를 두고》를 비롯하여 《풀피리》의 《사랑의 그림자》항에 수록된 작품들에는 이러한 시인의 삶에 대한 애착과 긍지감이 표현되여있다.   그러나 이때쯤에 와서 송정환의 시들은 왕년의 정열과 생기를 잃기 시작한다. 형식적인 모색의 기회를 놓친것이다. 이 시기에는 우리 문단에서도 모더니즘시운동이 확산되면서 시적인 지형의 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송정환은 거기에 합류하지 못하였다. 아쉽다 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송정환은 또다른 측면에서 새로운 모색을 시도한다. 력사에 대한 재음미가 이에 속한다. 사학자라는 송정환의 또다른 신분과도 관련되는 이 모색은 송정환의 시창작에서 셋째 단계가 되는데, 이 시기에 오면 그의 작품들에는 지천명의 깨달음과 인생의 무게감에 대한 인식, 그리고 조선족으로서 정체성 확인의 욕구들이 끊임없이 표현된다.   《사랑의 페허위에》는 1988년에 쓴 사랑시이다. 그러나 제목에서도 시사해주는 바와 같이 꿈같은 환상적인 사랑의 애탄 그리움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아쉬움과 그를 통해 깨달은 삶의 무게감이다. 그런 무게감은 마지막 련에서 잘 드러난다.     꿈나라 무너진 돌각담위에   달빛은 이 밤도 춤추며 내리는데   이끼 돋은 사랑의 페허위에   추억은 다시 안개되어 꿈틀거린다     《용수평 작은 골목길》이나 《달처럼 별처럼》, 《가을밤에》와 같은 다른 사랑시들도 옛날의 사랑시와는 의미가 다르다. 오히려 인생의 무게감이 사랑시로 표현되였다고 하는것이 나을것이다.   사랑시에서뿐만이 아니다. 《이름 석자 아끼여》는 명예에 대한 시인의 깨달음을 시화한것인데 여기서도 삶의 무게감은 뚜렷하다. 《구름처럼 덧없는 일생에/강물처럼 부지런히 옥토를 적시며/짧은 생을 보람있게 살아가리라/이름 석자 때가 묻지 않게 하리라!》 짧은 삶을 값지게 보내려는 시인의 의지가 담겨있다. 《나 흙으로 돌아간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든 시인은 삶의 끝을 예감하기라도 한듯 1989년에 쓴 이 시에 삶과 죽음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고백하고있다.   삶의 무게감은 정체성 확인의 욕구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욕구는 우선 시인이 사학자인 관계도 있겠으나 고구려와 발해국에 대한 남다른 감정으로 드러난다. 《고구려 옛터에서 읊은 시》라는 시묶음에 묶인 3편의 시에서는 집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고구려의 옛 흔적들을 이곳에 정착한 이주민의 후예의 시점에서 되새기고있다. 이보다 작품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바로 《발해국 옛터에서》라 하겠는데, 발해국 옛터의 폐허를 보며 망국의 설음과 인생의 무상함, 정체성의 문제를 두루 내포시키면서 담담한 어조로 시적인 감흥을 유발하고있다.   우리 조선족이 살고있는 땅에서 벌어진 우리 조상의 력사에 대한 되새김, 그것 자체가 조선족시인으로서는 하나의 정체성 확인 과정이다. 《할빈 역두의 아침》, 《역사는 울고있었네-안중근의사가 수감돼있던 여순감옥에서-》, 《장고봉 기슭을 지나면서》 등 우리의 현대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소재를 시속에 용해시킨것도 같은 리치라 하겠는데, 그러나 송정환은 자신의 정체성 확인 욕구를 력사 되새김이라는 의미에서만 드러낸것은 아니다. 이민의 이미지를 표현한 시작품에서는 좀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추억따라 세월따라-수필가 이계향여사 이게-》라는 작품은 일면 재미동포 수필가 리계향의 중국행을 그린것처럼 보인다. 사실이 그렇기도 하지만 작품의 초점은 다른데 있다. 《고국을 등지고 쫓겨와 살던/저 먼 옛날 옛적엔/산설고 물설은 타향이었건만/오늘은 사무차게 정다운/사무차게 정다운 두번째고향…》 리계향의 운명이 우리 이주민의 운명과 같은 지평을 가졌다는 사실에 시인의 의식은 맞춰져있는것이다. 남을 통하여 자기를 드러낸셈이다. 《두만강의 여울소리》에서는 다시 그 매개체가 두만강이 되고있다. 《그것이 살길찾아 눈물의 강 건너/쪽박차고 쫓겨오던 그 시절/북간도 서간도 저 먼 북만벌/그리곤 바람세찬 시베리아에서/그것은 진정 겨레의 곡성이였다/두만강 철썩이는 여울소리…》 상기 《추억따라 세월따라》에서와 비슷한 시의식이지만 표현은 훨씬 직접적이다. 그만큼 시인 로년에 정체성 확인의 욕구가 강했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송정환 시창작의 전개과정을 3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제1단계의 시들은 청춘의 정열과 감성속에 당대의 정치적인 담론들을 담아내고있고 제2단계의 시들은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성과 비판, 그리고 이를 탈출한 해방감을 표현하고있으며 제3단계에서는 인생의 무게감과 정체성 확인의 욕구들을 표현하고있다. 그런데 이러한 3단계의 문학적 전개과정과는 무관하게 송정환의 문학인생 전반을 관통하는 시적인 맥락이 있다. 그것이 뭐냐면 바로 고향의식이다. 이러한 고향의식은 앞에서 론의된 정체성 확인의 욕구와도 관련되는바, 이중적 정체성을 소유한 조선족시인으로서 고향은 그러한 이중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한 모티브가 되기까지 한다. 송정환뿐만 아니라 우리 시인이나 문학인들이 항상 고향을 중요한 이미지로 문학작품에 표현하고있다는 점도 이런 측면에서 리해가 된다.   송정환은 시인이지만 단편소설도 3편 발표하였다. 뛰여난 성과작이라 보기는 어렵지만 시작활동의 한 보완의 형태로서 의미가 있다. 1986년 전반기부터 1987년 전반기까지 일년여 기간에 《주택문제》(《북두성》, 1986.2), 《정인군자》(《장백산》, 1986.5), 《빼앗긴 첫사랑》(《장백산》, 1987.3) 등 3편의 단편을 발표하는데 주제적측면에서는 기본적으로 시작활동에서 다룬것들과 다르지 않다. 《주택문제》에서는 제목에서 시사하는바와 같이 개혁개방초기 심각한 주택난의 문제를 바탕에 두고 개혁과 개방의 바람과 더불어 점차 바로잡혀가는 우리 사회 시비곡직의 문제를 재현하였다. 그리고 《정인군자》에서는 문화대혁명기간 한 5.7간부학교 혁명위원회 주임 오운룡의 겉 다르고 속 다른 《정인군자》의 이미지를 잘 그려냈다. 문화대혁명기간 존재했던 림시정권의 부당성과 부패상을 드러낸것이다. 또다른 소설 《빼앗긴 첫사랑》은 좀더 복잡한 소설적인 장치들을 동원하고있다. 출신제일주의 사회의식때문에 빼앗긴 사랑을 그리면서 첫 련인의 딸을 등장시킴으로써 현실과 과거의 삶이 얽혀지면서 소설적인 긴장감을 조성한것이다. 소설에서는 특히 두 련인이 모두 딸 이름을 《아려》 즉 하르빈 역두에서 이등방문을 쏜 독립투사 안중근 부인의 이름을 따옴으로써 안중근 투사에 대한 작가의 강한 존경심을 엿볼수가 있다.   그러니까 송정환은 잠간의 《외도》를 통해 시작활동으로 이어온 주제들을 소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시작활동에서 남겨진 아쉬움을 보완하고자 했던것으로 보인다.     력사연구와 정체성 확인     송정환은 시인이면서 동시에 사학자이기도 하다. 그의 직업도 사실은 사학도로서의 연구에 관련되는것이였다. 그만큼 그의 사학연구의 업적은 눈부시다.   송정환은 일생동안 7권의 사학 관련 저서를 출간하였다. 가장 먼저 출간한 저서는 오늘까지도 학계에서 중요 참고자료가 되는 《짜리로씨야의 조선침략사개요》이다. 한국 범우사에서 재판까지 한것을 보면 이 연구서의 가치가 상당수준임을 짐작할수가 있다.   이 저서는 책 서언을 쓴 박문일도 지적하고있는바와 같이 《짜리로씨야의 조선침략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는 오늘 이때까지도 기본상 처녀지로 남아있다고 말할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송정환동지의 이 저작은 …(중략)…하계의 공백을 미봉함에 있어서 초보적이나마 반가운 성과를 올렸다고 믿어진다.》 그렇다면 짜리로씨야의 조선침략 력사에 대한 연구는 왜 공백을 이루었을까? 저자 자신은 이러한 연구의 부진상태를 우선 짜리로씨야의 침략방식에서 찾고있다. 《조선에 대한 짜리로씨야의 침략과 팽창은 다른 렬강들이 조선에 대한 침략이나 또 짜리로씨야자신이 다른 나라들에 대한 적라라한 무력적침공정책과는 달리 대체로 하고 인 방식으로 진행되였다.》이처럼 조금은 《온화》하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기때문에 그 침략력사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절실하지 않았다는것이다. 그러나 사실 짜리로씨야의 조선침략은 중국이나 일제와의 각축을 동반하였던바 조선근대사의 진행과정에 짜리로씨야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이런 시각에서 송정환은 200쪽 남짓한 짧은 저서에서 짜리로씨야와 조선반도 및 주변국들간의 관계사를 추적하면서 일제의 조선 식민화 추진과정에서 짜리로씨야의 점진적인 침략이 미친 영향을 개괄적으로 제시하고있다. 우리의 근대사를 리해하는데, 특히 뼈아픈 망국사를 리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짜리로씨야의 조선침략사개요》가 순수 력사연구서라면 또다른 저서인 《조선사화총서》(전4권)는 문학자요 사학자인 저자의 신분에 걸맞는 작업이라 할수 있다. 우리 민족의 반만년 력사를 다분히 문학적인 표현방식으로 제시하고있기때문이다.   총서의 제1권은 제목을 《해동의 세나라》라 하고 고조선에서부터 삼국에 이르는 고대사를 문헌자료에 근거한 사화로써 풀어나가고있다. 제2권은 제목을 《송악산 줄기줄기》라 하고 통일신라에서 고려조에 이르는 시기의 력사를 기록한 사화를 제시하고 제3권은 《한양성의 종소리》라 하여 리조초기부터 리조중기에 이르는 력사를 펼쳐보이고있다. 제4권은 《피바다 삼천리》라 하고 리조후기부터 시작된 피비린 근대사, 봉건왕조의 종말과 근대식민지시대의 력사를 제시하고있다.   일부에서는 이 저서를 저평가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본격적인 력사연구서가 아니라 이야기 위주의 사화집으로 되여있다는 리유에서일것이다. 그러나 력사서가 꼭 딱딱해야 한다는 도리는 없다. 오히려 쉽게 읽으면서 력사를 알아가는것이 일반독자에게는 더 유익하다 해야 할것이다. 고조선에서 삼국시대를 지나 통일신라, 고려, 조선왕조를 거쳐 근대에 이르는 반만년 조선사를 대표적인 사화이야기를 통하여 재미있게 보여준것, 아직 우리 이민사마저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통속적인 력사교양의 방법은 어쩌면 딱딱한 력사서보다 더 유익할지도 모른다. 또 비록 비슷한 사화들이 여기저기에 수록되여있지만 그것을 송정환의 력사인식에 따라 배렬하고 엮어놓음으로써 력사저서로서의 의미를 충분히 갖추었다고 보여진다. 더구나 여기에는 문학에 깊은 조예를 갖춘 송정환의 독자적인 연구스타일이 반영되기도 하여 남다른 교양효과를 가지기도 한다.   《안중근전》과 《조선갑오농민전쟁》은 자료를 구하지 못해 좀더 자세한 론의는 접을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안중근에 관련된 자료는 력사실화 《할빈역두의 총소리》(《장백산》, 1982.4)가 있어 얼마간의 발언권을 얻었다.   사실 송정환의 안중근에 대한 관심은 남다른데가 있다. 단편소설 《빼앗긴 첫사랑》에서 주인공의 첫사랑 과정에는 안중근 관련 연극이 중요한 매개가 되여있다. 심지어 안중근 부인의 이름을 따서 자기들 딸의 이름을 《아려》라 짓기로 약속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실제로 두 련인은 결혼을 못하지만 각자의 딸들 이름을 《아려》로 짓기도 한다. 안중근에 대한 송정환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뿐이 아니다. 송정환의 시작품에도 안중근을 기념한 작품이 2편이나 있다. 《역사는 울고있었네-안중근의사가 수감돼있던 려순감옥에서》와 《할빈역두의 아침》이 그것이다. 전자는 안중근의사가 의거를 단행한후 수감됐던 감옥을 돌아보며 의사의 업적을 기린 작품이고 후자는 안중근의사의 의거의 자리였던 하르빈 역두에서 의사의 장거를 노래한 작품이다. 그리고 력사실화의 형식으로 쓴 《할빈역두의 총소리》에서는 식민지 백성의 원한을 담아 원쑤의 가슴에 총탄을 안긴 안중근의사의 의거 과정을 거의 소설적인 구조를 통해 그려내고있다. 인물의 담대하고 의로운 성격과 장엄한 분위기를 잘 그려낸 이 작품을 통하여 우리는 어느 정도 《안중근전》의 모습을 짐작할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니까 송정환의 력사연구는 력사연구의 가치로서뿐이 아니라 문학자로서의 개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조선사화총서》는 당연히 력사적 사실이나 야사의 사실들을 거의 문학적인 방식으로 드러냈다고 볼수 있거니와 안중근의 사적을 다룬 실화 《할빈역두의 총소리》, 그리고 그것을 좀더 심도있게 다룬 《안중근전》 역시 송정환의 문학적인 공력에 힘입은바 적지 않다.     문학과 력사학사이에서의 고민     송정환은 문학과 사학사이에서 항상 갈등을 겪어왔다. 그러한 갈등은 소년시대에 벌써 씨가 뿌려졌던것 같다. 소학교 5-6학년때부터 력사와 어문에 특별한 흥미를 가졌던것이다. 이런 그의 갈등과 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은 송정환 평생을 두고 이루어졌다. 《문학과 력사학의 갈림길에서》(《갈매기》, 1988.1)라는 글에는 그러한 송정환의 고민이 잘 드러나고있다.   비록 전통적으로 문학과 사학은 서로 얽혀있으나 학문이 세분된 현대사회에서 그러한 관련성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결국 송정환은 이 문학과 사학의 갈등을 정체성의 확인이라는 보다 높은 차원의 실천을 통해 극복했다. 시문학창작에서 정체성 확인은 이땅에 남겨진 고구려, 발해 등 조상의 력사 흔적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여 이민의 력사에 대한 관심에서 완성된다. 그리고 사학분야에서의 정체성 확인은 《조선사화총서》에서 민족력사지식이 전무한 우리의 신세대에게 민족사의 전통을 알기 쉽게 제시하고 《짜리로씨야의 조선침략사개요》에서 우리 삶의 현장과 관련된 현대사의 한 단면을 제시한데서, 그리고 《안중근전》을 통하여 이땅에서 이루어진 독립투사의 위업을 그려냄으로써 이루어진다. 혹 어느 한 분야에서 정진했더라면 보다 나은 업적을 쌓았을것이라 볼 사람도 있으나 두 분야의 관련성속에서 이민민족으로서의 정체성 확인을 통하여 겨레에게 삶의 한 좌표를 제시해주었다는것은 큰 기여가 아닐수 없다. 송정환의 창작과 연구를 되돌아보며 이점을 다시금 상기시키고싶다.   송정환 자신은 이점을 사학과 문학의 불가분리의 관계에서 찾고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그 어느때보다도 더욱 민족의 얼, 민족의식, 민족전통 등 민족적인것을 고창하고있는데 민족의 력사를 모르고 어찌 민족적인것을 써낼수 있겠는가!》《우리 중국조선족문학도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국가적 내지는 국제적인 공인을 받자면 반드시 자민족의 력사에 대한 투철한 리해가 있어야 할것이라고 생각된다.》(이상 《문학과 력사학의 갈림길에서》, 《갈매기》, 1988년 1기에서)   어떻든 송정환은 창작과 연구의 병행을 통하여 우리의 민족성 보전과 정체성의 확인에 초점을 맞춰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상의 론의를 통해 확인할수가 있다. 후학들이 본받을바라 하지 않을수 없다.      *
592    시인 - 고 김문회 댓글:  조회:4629  추천:0  2015-03-11
                                (우측 시인 김문회)       사랑의 이미지 /김문회   침묵으로 향수하는 미화였다. 불살이 일천공 하루밤 굽으로 지핀 모닥불이였다.   한순간을 위한 억만 순간의 인내는 찬란한 꽃송이 되여 피를 쏟는 태양으로 활짝 피는 거다.             시인이며 중학교 조선어문선생님 김문회선생님(작고)의 시 가 화룡 선경대 바위에 새겨져 있음.   >   김문회시인과 시 “꽃나무아래에서”   MC : 김계월 GUEST : 석 화   ㅡ M ㅡ   M : 안녕하세요? 연변위성방송 라디오책방에 김계월입니다. 오늘도 시인 석화선생님을 모시고 여러분들을 아름다운 시 세계속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자 어떤 작품과 어떤 시인을 소개해주실지궁금하시죠? 네, 먼저 인사부터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G : 안녕하십니까?  M : 네, 반갑습니다.  G : 반갑습니다.  M : 네, 오늘은 김문회 선생님을 소개해 주신다구요?   G : 예, 오늘은 김문회 시인과 그의 시 작품을 준비했습니다. 김문회시인하면 시단의 많은 분들은 굉장히 익숙한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을것입니다. 비록 현재는 우리 곁을 떠나셨고, 이제는 몇년 되죠? 2004년 7월에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M : 그렇죠? 3여년의 시간이 흘렀네요.  G : 그러나 김문회 시인이 남겨놓은 아름다운 시편, 그리고 시적인 문학정신, 시 정신이겠죠? 우리시단에 많은 영향력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우리 시가 오늘 발전하고 또 래일의 더 큰 발전을 위해서는 항상 우리 시단의 이런 자기 마지막 생명까지 다 바쳐서 시에 터받을 일쿼 놓은 선배 시인들, 앞서간 분들의 문학을 다시 되새겨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 그럼 김문회 시인의 시한편을 감상하면서 김문회 시인의 시 세계속으로 한걸음 한걸음 들어가 볼까요?  M : 네, 좋습니다.  G : 네, 한편 부탁드립니다. 라는 시죠?   M : ㅡ M ㅡ     꽃나무 아래에서 봄과 동무한다   향상하는 생이 풍겨오는 입김이다   하아얀 이파리의 웃음은 하늘과 땅새에서 흔드는 화면   다치면 부서지리 시선으로 가늠해보는 세월의 무게속에 내음으로 만져보는 행운의 두께   나비 한마리 꽃잎같은 날개를 들린 하늘과 같은 방향우에 고정시키고 멀리 흘러갈때 저기 구름쪽에서 옥색을 이기는 장미의 빛이 내 마음 얕은 골짜기로 꿈을 뿜어온다   꽃나무 아래에 가늘이 익는 순간이다   ㅡ M ㅡ   M : 네, 참 아름다운 한편의 시네요.  G : 그렇죠? 바로 그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속에 그 꽃나무 아래서 그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겁니다. 그 느낌을 우리가 김문회 시인은 나비 한마리 꽃잎같은 날개를 들린 하늘과 같은 방향우에 고정시켜놓고 멀리 흘러갈때 이런 참 고요하면서도 아늑한 경치를 그려놓고 있죠? 이런 시인의시 작품에서 보여진 바와 같이 시인의 시각은 상당히 객관적이고 참 생신한 비유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보면 이 시속에서 표현되는 시어들을 한번씩 찾아볼까요 1련에 있었던 풍겨오는 입김, 두번째 련에서의 이파리 웃음, 또는 네번째 다섯번째 련의 나비 한마리 장미빛 이런 풍경들이 한데 어우러져 한폭의 수채화를 그려내고 있는것입니다. 특히 이 시에서 주목할 부분은 제 5련으로서이 부분은 1련부터 4련까지가 전체적으로 사물과의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거리를 유지해왔다면바로 5련에서는 그 객관적인 우주 자연물을 내 마음의 얕은 골짜기로 끌어드림으로써 자연과의 합의를 이뤄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면 저기 품속에서 내 마음 얕은 골짜기로 이렇게 전이되고 있죠? 또 장미빛이 뿜어오는 꿈 이 내음이라는 시적인 이미지로 또 변이되고 있고 이렇게 봄에서부터 꽃이펴서 가을로 이어지는 이런 부분들이 시에서 어떤 그 새로운 생신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들이 잘 형성화된 시 작품 한편이 있습니다.   M : 아, 그렇네요.   ㅡ M ㅡ     차츰차츰 새벽이 영글어 오는 하늘의 푸른 한쪼각을 우러른다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별들의 아픔 곁에 바야흐로 다가오는 서광의 경망앞에 어제의 나를 세워놓고 직시한다   만신창이다 얼굴도 몸뚱아리도 보이는데도 가리운곳도 죄다 죄다 빠짐없이 깡그리   오장육부는 어데라 없이 근질거리고 쏘아대고 머리통이 당장 터질란다   그래도 금시 어두워오는 눈을 가까스로 치뜨고 하늘을 본다 하늘의 푸른 한쪼각을 우러른다   뭇새들의 열창에 귀 기울이며 히끔 열려오는 삼라만상과 더불어 한 귀퉁이 마알갛게 익어오는 오늘의 수집음   나를 일으켜 세운다 고맙게 부축해준다 그때면 아픔을 잃고 사라진 별들 그자리에 자신을 기척없이 조용히 다시 세워본다   ㅡ M ㅡ   G : 네, 그렇습니다. 시인은 이 시 속에서 푸른 하늘 한 쪼각 우러러 자신의 모습을 다시 확인하고 자신의 모습을 다시 일으켜세우고, 그 부분에서 우리가 자아를 다시 찾는 부분에서 자아의 대상점을하늘에 두고 하늘의 푸른 빛으로서 내 현재의 이미지를 찾아보는 그런 부분입니다. 이런 부분들이아까 말씀드렸던 부분처럼 생신한 이미지, 어떤 그 시적인 화폭을 만드는데서 참 좋은 모범을 보여주는 부분들이죠. 한편의 시가 더 있는데요. 시는  시인들의 모임이 있어요.해마다 진행되는 시인들의 시 탐구회의인데 거기서 우수작품으로 선정되였던 시입니다.  M : 네, 네요?  G : 그렇습니다.    M : ㅡ M ㅡ     기쁨의 빗물이 슬픔의 눈물이 도시 거인의 머리와 가슴과 잔등을 타고 흐릅니다   해빛과 비를 꺼리는 조심성들은 손바닥만한 비닐하늘속에 안녕을 만족하고   움직이는 작은 집들은 평소의 그 높은 겸손을 창밖에 휘뿌리며 높은 성벽ㅇ로 빗줄기를 젖히며 질러갑니다   처마와 처마에 잇닿인 오랜 외면은 상상과 상상 마주앉은 불 신임은 가게와 가게 가지런한 아니꼬움은 행인과 행인 밀치는 넉두리는 하늘에서 멀리 땅에 뻗은 긴 발에 막혀 잠시동안 아물아물 합니다   비다 비다 복새판에 언뜰 나타났던 웃음마저 빗물과 더불어 싸악 닦아버리면   소리는 원래의 소프라노 되고 색조는 수요에 따라 빨주 노파 푸남보   도시에 내리는 비의 장점은 한순간을 마음 달래는데 있습니다   ㅡ M ㅡ   G : 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김문회시인의 시에서 우리가 항상 접하는 생신한 느낌은 바로 이와 같이우리 생활속에 우리가 늘쌍 보고 느끼고 듣고 있는 생활을 시로 그대로 끌어드리는거거든요? 바로이 시도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의 한 여름에 폭우가 내리는 도시풍경을 그린거죠? 그 속에서 우리 삶의 정말 북적북적하고 다채롭고 거기에서 많은 변화 많은 희망을 꾸며가고 있는 그런 부분들을 한폭으로 담아내고 있는것이죠.   M : 그렇죠? 이제 인간관계에 얽힌 이런 생활의 모습도 그대로 담아냈네요.   G : 그렇죠? 빨주노파푸남보, 이것이 바로 무지개 빛갈이거든요? 그럼 우리의 삶은 우리의 생활은바로 이렇게 다채롭고 풍부하다는거 거든요? 이런 것이 바로 어느순간에 도시에서 내린 폭우가 지나간 다음에 하늘에 걸리는 무지개빛갈이거든요? 이와 같이 김문회시인의 시는 항상 우리 주변 생활에서 느끼고 마주치고 겪고 있는 그런 세절들이 세화되는데, 그것이 단순하게 세화로 넘어가는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발견으로써 새로운 느낌으로써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이 시에, 김문회시인의우수한 특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부분들이 주변의 생활을 시화하는데 어떻게 시화할것인가 처음에 말씀드렸죠?  그 시에서도 표현하다싶이 나비의 날개와 하늘의 수평이고요하게 떠있는 그런 장면들은 참 특이한 장면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김문회시인의시 한편 더 감상해보겠습니다.   M : 네, 자연과 많이 어우러지는 그런 시편인것 같아요.  G : 그렇죠. 자연속에서 또 아까 도시의 비를 쓰면서 그 자연속에서 또 어떤 새로운 현대적인 생활도엮어내고 그런 부분들이 참 재치가 있는 부분들이죠?   M : 네, 그럼  함께 감상하시죠?    M : ㅡ M ㅡ     이 봄 우리 다같이 손에 손잡고 애어린 새싹으로 피어납시다   겨울이 달그당 풀리는 저 냇가에 눈을 뜨는 버들 개지로 엉뚱스레 돋는 한떨기 파아란 잔디로 환호하며 일어섭시다   그리고 우리모두 명절처럼 분주한 이 봄날 아침 조용한 약속을 마음밭에 파종합시다   머언 하늘에 쟁쟁한 명상에서 우리 서로의 얼굴을 더듬어내고 대지를 누르는 무거운 침묵속에서 태산같은 자세를 익혀가면서   그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세상은 괜히 넓기만 해서 저만큼 일어서기도 힘겨운 계절   부드럽게 불어오는 한올의 바람도 나누어 가질 아량과 너그러움을 안고   저 못된 매 바람에 방자와 네굽날리는 개천의 어리광도 뜨겁게 푸욱 받아드리는 자연의 조화를 배워둡시다   이 봄 당신과 나 우리 다같이 또 한번 새싹으로 이쁘게 태어납시다   랭혹한 여름도 함께 해치고 풍요 설레는 저 황금의 언덕 우리 가까이 다가 설 그때까지   ㅡ M ㅡ   G : 수고하셨습니다.  M : 아, 참 멋집니다.  G : 그래요. 봄날의 약속이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도시속에서는 비가 오고 들판에는 바람이 불어도 우리 봄날에는 봄날의 약속을 하고 그 약속으로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면서 우리의 삶을이끌어가자 하는 그런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시입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표현에서는 자기적인새로운 발견을 계속 이끌어오는 그런 부분들이 우리 김문회시인의 시에서 참 아름다운 현상이라 볼수있거든요?   M : 이 구절이 참 마음에 와닿는데   G : 그렇죠? 봄날이면 괜히 부산스럽고 여러가지가 새로운 수많은 생각들이 한데 웅켜있죠? 그러면서 오히려 조용한 자기 마음을 가다듬는 조용한 시간을 가지면서 아, 내 이 한해는 이제부터 시작되는 이 한해는 어떠 어떻게 살아가야겠구나, 이런 것을 결국에는 봄날의 약속은 자기와의 약속이죠?자기 자신과의 약속.  M : 뭐 금년 한해 어떤 어떤 계획을 정말 잘 세워서 한해를 아주 깔끔하게 아주 의의있는,  G : 그런 약속이, 자기와의 약속이 이뤄져야만 여름, 가을에 와서 풍성한 수확을 거둘수 있다 이런것들입니다. 또한 이런 뜻이 여기에 참 재밌는 시 한편 있는데요.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슬이 딩구는 모습에서 시인은 무엇을 봤을가요?   M :   ㅡ M ㅡ     이슬이 풀잎에서 딩구는 모습 이슬이 사는 모습에서 나를 보는 아픔입니다 딩굽니다 동그랗게 딩굴다가 흩어지는 모습에서 나를 보는 깨달음입니다 청신을 낳고 새날의 태양을 굴리다가 영원에로 가는 운동의 진짜 희롱에 놀랍니다   이슬에 하늘땅이 비쳐있고 이슬의 탄생과 사멸 그 어간에 우주의 온 얼굴이 다 보입니다 이슬이 나를 담듯 나는 당신과 당신 주변의 큰 세상을 포괄하고 섰습니다.   ㅡ M ㅡ   G : 그렇습니다. 참 멋있죠? 이 시는 바로 이슬과 나를 하나로 보는 몰아일체사유의 이미지가 그려져있는 것입니다. 이슬을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슬을 통해서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그 이슬로서, 이슬을 통해서 또 자기를 다시 보게 되는것이죠? 여기에서 ,또 을 얻게 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한방울의 이슬속에서 을 다 본다고합니다. 이런 부분들이 시적인 상상력 시인의 참 대단한 의미가 되는 부분들이죠? M : 네, 보통 저희들 같은 경우는 이슬이다 그러면 참 아름답다 깨끗하다 그런 의미지로 많이 받아들이잖아요?  G : 그렇죠. 아침의 순간에 ?혔다가 사라지는 이슬속에서 자아를 찾고 자아를 찾아서 또  세상을 다시보는 그런 안광이 우리 김문회시인의 참 시적인 재치라 하겠죠? 방금 김계월아나운서가 여러편의시를 소개해주셨는데요. 거의가 맑고 밝고 명란한 그런 부분들이었죠?  M : 너무 깨끗한, 너무 잔잔한 흐름이면서,   G : 천리고 이미지는 새롭고 이런 부분들이 우리 시가, 정말 한차원 높은 단계로 오를수 있는 이런부분입니다.  M : 네, 인생을 살면서 또 자신을 좀 반최해보고 싶다, 반성해보고싶다라고 하면 김문회시인의 시를쭈욱 읊어보면 깨끗한 자신을 다시 만들어갈수 있을것 같아요.  G : 우리 그 선생님은 지금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다행히 아름다운 시편들을 우리에게 남겨주셔서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M : 정말 그렇습니다. 자, 이렇게 오늘 주옥같은 시편들, 김문회선생님의 작품을 소개해주셔서 너무나 고맙습니다.  G : 감사합니다.  M : 라디오책방 오늘은 여기에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 뵐게요.   ㅡ M ㅡ  
591    시인 - 리근영 댓글:  조회:4758  추천:0  2015-03-11
  고독한시인은 가슴에 별을 줏는다 (2009-3-5 19:12:07)   1   이시는 연변의 농민시인 리근영의 “갈대밭에서”란 명시다. 시골의 촌옹이 거친 일밭에서 주은  시라고 도무지 믿기 어려울만치 주옥 같은 시다. 그래서 리근영시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상식선이 파괴된다. 농민시인중에서 안도의 김일량시인과 쌍벽을 이루는 리근영시인은 올해 70세로 로구[老身]의 몸에도 가슴으로 시의 통렬함을 완성하는 중견시인이다.   1939년화룡시 광덕촌에서 태여나 소학을 마치고 가정의 중임때문에 귀농하여 농사일에 전전하면서부터 현재까지(현재 화룡시에 거주)  중국에서 신분을 나타내는 호적등본에 농민으로 자리를 잡아온 리근영시인은 지금까지 시를 쓰는 농민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800여수에 달하는 시와, 수필, 소설, 동요를 지상에 등재하면서 문단에서 시인의 자리를  굳혔다. 시인은 지난해 화룡시정부에서 4명의 화룡적 시인(최룡관, 박화, 리근영,김문회)의 업적을 기리여 선견대에 세운 공적비(시비)속의 주인공으로 남았고 시비에 “고사리”란 대표시를 새겨넣을만큼 업적도 풋풋하다.   하지만시인의 인생은 그렇게 순탄한편도 아니고 풍파도 많았다. 더우기 문학수업에서 사회간접지식으로 남는 박람도 없다. 아직까지 만리장성을 넘어본 일도 없고, 비행기도 타본 일이 없고, 바다물에 손을 적셔본 일도 없다. 50여년전에 길림성 제1차 청년작가대표대회 참석차로 장춘에 한번 가본것이 고작이다. 그후 지금까지 연변외로 떠나본적이 없는 알뜰한 “구석사람”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십여평방메터가 되는 집에 기거하는데 한쪽 벽면을 꽉 채운 3000여권의 도서외에는 값나가는 가장집물도 없다. 그야말로 두드리면 먼지만 풀썩거리는 빈털터리 시인이다. 연변이란 좁은 변연지구에서, 더구나 10여평방메터 되는 좁은 공간에서 농민시인은 고독하게 세월을 보냈고 평생동안 지속된 그 고독한 세월속에서 가슴에 “바람과는 무게를 비기지 않는다”,“구름과는 높이를 다투지 않는다”와 같은 주옥 같은 시편을 안고 처절하게 살아왔다.   2     1958년,  시인은“나의 시”로 문단에 고고성을 울리면서 등단했다. 시인의 시는 시종일관하게 자연과 인간과의 철학적인 련계를 찾고 특히 자연물에 대한 내재적인 관찰을 통하여 인간들의 내면세계와 접목시켜 치밀하게 그려내는데서 그 재간이 드러났다. 나무와 산, 하늘과 구름, 산새, 바람, 들풀에 대한 거시적인 조감을 통하여  시인의 가슴으로 나름의 의미지를 구축했고 독창적인 언어와 기법을 동원하여 시가 무엇인지를 가장 근접하게 잘 보여준 시인으로 떠올랐다. 특히 나무라는 자연물을 통하여 밑바닥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시인의 삶을 지성적인 사색으로 한차원 끌어올리고 역경속에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고 꿋꿋히 뻗쳐오는 자신의 인생과 그속에서 단단하게 다져진 인격도야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보이면서 자신의 생활적인 제한성에서 뛰쳐나왔다. 초월의식이다. 리근영의 시에는 자기의 궁립한 삶, 불우한 운명에 대한 넉두리가 없다. 시편마다 초탈의식으로 관통되고 자아를 찾고 홀로 서는 인간을 그려 생명에 대한 끈질긴 욕구와 관조, 사랑, 나아가 인간운명에 대한 찬가로 일색했다. 시인은, 시인은 노래 부른다 함은 리근영시인을 두고 생겨난 말이다.   리근영시인은어느때 보나 조용하다. 문학관련 회의에 참가해도 발언 한마디 없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다가 조용히 자리를 뜬다. 이런 사람들은 흔히 사람들에게 잊혀가는 존재가 되지만 리근영시인만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자리를 떠나도 자기의 존재를 산처럼 나타내는데 이 존재감이 바로 시다. 구차한 촌옹이지만 세월의 년륜을 초탈하여 새처럼 하늘을 향하는 날고 픈 비상과 사회의 정의, 생명의 가치에 대한 신념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시 쓰기를 견지했고 그 시쓰기가 리근영시인과 세상을 잇는 끈으로 되였다 시인이 말하다싶이  시가 있고 시세계를 탐구할수 있어서 삶을 연장한다고 한다.어딘가 약간 비장하게까지 느껴지는 생이다. 문학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지만 리근영만치 시골에서 순 자학으로 시를 쓰는 시인도 드물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편집부에서는 어디에서 베꼈나 의심할 정도로 갈피를 잡지 못한다고 했는데 필자도 이런 경우를 당해보았다. 리근영시인을 모르면 흔히 발생할수 있는 헤프닝이다.   이런시세계를 구축한것만치 몇년간 시인은 굵직한 상을 두루 편력하는 전적을 보이기도 했다. 해란강문학상 2차, 한국세계계관시인문학회 제5회 공모에서 “끝난 이야기”로 미래상을 획득했고 연변시 조사문학사 제9회 시조상을 수상했다. 문인세계에서도 교활성이 작동되고 안면보기가 류행되는 시기 취재를 해도 기자들에게 점심밥 살 돈도 없어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고  취재기자가 되려 점심을 사지만 이런 시인이 더 많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기자는 취재를 끝내고난 후기다. 화룡에는좁은 공간에서 삶을 영위하고 밤마다 고독을 태우면서 가슴에 시를 담고 별을 줏는 촌옹- 리근영 옛 시인이 있다.   글/사진 최국철 윤현균 기자       리근영 략력: 출생: 화룡시광덕 1958년 문단데뷔 시. 시조, 동시 800수, 소설, 수필, 잡문 등 100여편 화룡시 국가중점 풍경구 성경대에 시비 《고사리》가 있음. 가곡 15수 발표. 각종 문학상 15차, 우수도서 1부(시집) 1966년 전주 신문방송 통신원 대표대회 대표 1966년 길림성 제1차청년작가대표대회 대표 1970년~2003, 화룡시문련 3,4,5차 대표대회대표 2007년, 연변작가협회 회원대표대회 대표. 《바람과는 무게를 비기지 않는다》(시집) 《구름과는 높이를 다투지 않는다》(시집) 《굴리는 묘리와 굴리는 기교》(시조집) 《생명과 그 공존원리》(장편생태시) 시《고추》, 《갈대밭에서》명시집에 올랐음. 중국 연변작가협회 회원 중국 연변시인협회 회원 연변생태문화예술협회 회원 중국 연변로교수협회 음악문학연구소 회원
590    시인 - 고 박화 댓글:  조회:4226  추천:0  2015-03-11
            ( 한국 종로서적 1989년 초판) //////////////////////////////////////////////////////////////////////////////////////////////////////////////////////////// 눈 내리는 아침길               리문호     2001년 11월 말경에 대형문학간물  잡지사 남영전 사장께서 박화 선생에 대한 추모의 글을 써달라는 원고 청탁이 왔다.나는 박화선생의 시집 를 뒤져보다가 시인에게는 시로 추모하는 글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서재에서 혼자 고요히 담배를 피우며 박화선생에게 걸맞는 시상을 상상하며 접촉했던 추억의 현장으로 기억을 더듬기 시작 한다.   70년대 후반 박화선생님이 룡정에서 료녕민족출판사에 조동되여 왔지만 나와는 아무 인적관계가 없었다. 내가 다시 시단으로 돌아온 후에도 가끔 회의 석상에 서로 비쳤을뿐 인사를 건네고 이렇다할 담론은 없었다. 머리 를 길게 기르고 촘촘한 얼굴에는 과묵한 거만이 나의 인상을 흐렸는지도 모른다.     99년 상반년 나의 첫 시집 가 정리되여 료녕민족출판 사 정철선생님께 찾아갔다. 정철선생님은 이전부터  하며 나를 훈계하였다. 드디어 시집 원고를 정철선생님께 보였더니 하고 묻는것이였다. 라고 하자 박화선생의 집 전화 번호를 알려주며 전화해 보라는 것이였다. 박화선생님은 이미 정년퇴직하여 더 부담을 끼치기 싫었고 더우기 인상이 그렇지 않아 꺼림직하였다. 그러나 첫 시집을 낼때는 많은 고민이 뒤따르는 것이다. 첫 시집의 출판은 금후의 시창작에 적극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고 다른 반면으로는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에 치여 다시 시를 쓰지 못 하고 필을 꺽을수도 있다. 이런 우려 끝에 박화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박화선생님은 쾌이 승락하시고 원고들을 섬세하게 검토하고 문자 수정을 해주시면서 고 평가해주셨다.이에 나는 신심을 얻고 드디여 김성규의 편집에 의하여 99년 6월에 시집을 출판하였다.박화선생은 료녕 조선문보 문예부간에 평론까지 내 주셨다.   박화선생님께서 나의 자택으로 몇번 오셨는데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물론 시에 대한 담론이 많았다. 이렇게 접촉하면서 박화선생님에대한 나의 성견은 말끔히 가셔지고 마음이 어지고 자상한 분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한번은 류광순 시인과 함께 소가툰 남쪽에 있는 사방태 양어장에 낚시 하러  모시고 같다. 잉어 둬마리를 낚아 올고는 우리 보고 낚으라며 자기는 논두렁을 걸어 다니는 것이였다. 때는 봄이라 해토된 논두렁은 흙이 부드럽고 복신복신했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신록의 청향과 촉촉히 슴배여 오는 구수한 흙향이 어우러져 신선하고 상쾌했으리라.도시의 딱딱하고 메마른 아스팔트길을 몇십년 걸오면서 그는 주지시란 것에 권태를 느꼇는지도 모른다.   어느날 오후였다. 박화선생님께서 나에게 전화가 왔다.  나 혼자 독수공방 하니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히 있다가 가는 곳이므로 많은 문인들이 찾아 오는 줄 아는것이였다.그날 저녘 류광순을 찾아 두분을 모시고 밥점에 갔다. 박화 선생님은 맥주에 소주를 타서 마셨다. 이렇게 대여섯 컵을 마셔야 술 기별이 몸에 가닫는 모양이다. 나는 술을 마시지 못해 술 컵을 들었다 놓았다 할뿐이다 취하여 집으로 올때는 얼마 남지 않은 찌끄러기 반찬을 비닐 봉투에 담아가자 는 것이다. 집에 온후에도 또 맥주에 소주를 타 마신다. 체구가 웅장한 권철교수님도 주량이 컷지만 취하였고 맥주 한상자를 타고 앉아 마시는 배포가 있는 류광순도 폴싹해졌다. 새벽 두시가 되여 잠들기 시작했는데 우리 집은 이리 저리 코를 드렁드렁 골아대는 것이 마치 증기를 뿜는 기차 대구리같았다 술 냄새가 온 방을 시큰하게 진동하였다.   박화 선생님은 나와 시를 이야기하다가 이런 말씀을 한적이 있다. 사람들은 자기를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말은 으로 남기 싶었기 때문이라 나는 분석한다. 물론 그의 일생도 모든 시인처럼 평탄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박화선생께서 입원 하였을때 몇번 문안 갔지만   박화선생님의 영결식에 나는 사정이 있어 참가하지 못 하였다. 가시는 그날 아침에는 첫눈이 한 송이 두 두송이 떨어 졌다. 엷게 쌓인 눈길을 그는 조용히 가셨다. 나는 이란 추모시를 잡지 2002년 1기에 발표하는 것으로 그의 명복을 빌었다.   눈 내리는 아침길    - 박화선생님을 추모하여  
589    시인 - 고 문창남 댓글:  조회:4642  추천:0  2015-03-11
    민족출판사에서 출간된   발해바다 물결너머 출렁이는 문인의 령혼                           * 한춘           우리 문단에서 시단의 ‘열혈시인’이며 수필문학의 개척자이며 소설계의 정서파인 문창남 문인이 지난 10년전(1996년) 53세를 일기로 우리곁을 떠나고 그의 유골이 진황도 발해바다에 뿌리졌다.  문창남 문인의 작고 10주년을 맞는것을 계기로 한때 창녕집단에서 선전부장을 담당한 문창남의 비서로 있었던 후학 안영수가 ‘문창남문집’ 간행발기자가 되여 선배를 기념하고 스승의 업적을 정리하고 문인을 새롭게 조명한다는 문학도의 진정을 살려 출판비용을 마련, 드디여 지난 11월 민족출판사에서 ‘문창남문집’(전 5권)을 출판하는데 이르렀다.  ‘문창남문집’의 출간은 아래 두 방면에 의의가 있다.  첫째 이번 대형도서 ‘문창남문선’은 조선족사회 최초의 민간모금으로 이뤄진 작가문집으로서 안영수 발기인과 의기투합이 된 겨레의 젊은이들(조충복, 서명, 박양, 김정섭, 김창영, 현룡남, 안협)이 힘을 모아 문집출간에 이르렀다. 이 사실은 문단에 제시하는바가 크다. 우리의 문화유산은 우리의 힘을 모아 정리한다는 이 발상이 새롭고 돋보이며 감사한 일이다.  둘째 우리 문단에서 어느 한 작자의 작품 총괄 문집을 출판한 전례가 없는 공백을 깨고 한 작자를 문집형태로 집중조명할수 있는 편리한 조건을 제공하여 주어 문창남연구에 큰 도움이 될것이다. 우리 문단에 굵은 발자취를 남기고 간 문인들의 작품을 문선으로 출판하는것은 문학유산을 정리하는 작업이다. 이것은 후대들이 공유할수 있는 귀중한 정신적 자산 내지 밑거름을 정리, 축적하는데’ 큰 기여를 할수 있을것이다.  전집에 가까운 장장 150만자에 달하는 ‘문창남문집’은 고인이 생전에 공개지면에 이미 발표한 작품을 쟝르에 따라 편성했다. 제1권은 시집(해설문 산천), 제2권은 수필집(해설문 서영빈), 제3권은 중단편소설집, 제4권은 장편소설 ‘흰돛’제1부, 제5권은 장편소설 ‘흰돛’제2부로 편성했다.  ‘문창남문선’간행발기자 안영수는 ‘문집을 엮으며’라는 발기문에 문창남 문인이 창녕에 있을 때 원래의 창작계획을 포기하고 새로 신작 장편소설(전 3부 설정) 제1부(56만자)를 창작했는데 그 추고가 류실되여 소설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파악이 미비할수 있어 소설 해설문을 조직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문창남시인은 투옥, 실련, 조기사망 등 참으로 불행했지만 그는 또한 복도 많은 사람이다. 그를 항상 존경하여온 제자 안영수씨가 그가 못다한 일을 훌륭하게 해내여 마침내 ‘문창남문집’이  출간되였다. 발해바다 물결너머 출렁이는 문인의 혼은 우리의 심금을 울리며 그제날 우리가 걸어온 삶의 자세들을 전달해주는 싱그러운 문학의 향기를 자아올릴것이다. 1. 문창남 략력 및 관련내용  략력  조선족시인, 작가. 필명은 문암, 바위  1944년 1월 15일 길림성 길림시에서 출생  1967년 연변대학 중문학부 졸업  1967년- 1977년 반혁명분자의 루명을 쓰고 옥중생활  1979년  1991 년 길림시 《도라지》 잡지사 편집  1991년부터 중국 창녕그룹 선전부 부장  1996년 7월 6일 하북성 진황도시에서 간암으로 별세  중국 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리사, 중국 소수민족작가학회 리사  대표작으로 서정시 《도라지》, 수필 《동집게》 , 중편소설 《옥중비사》  등이 있음.  2. 문창남문집 출간에 깃든 일화  우리 민족문학사에서 친지들이 자체로 모금하여 작가의 문집을 출간하여 내놓은 례는 거의 없었다. 문창남씨의 문집은 작가의 문하인이고 제자인 안영수씨에 의해 출판되였다.  금년에 38살에 나는 안영수씨는 길림성 교하사람이다. 일찌기 문학에 남다른 애호가 있었으며 연변대학 중문학부에 입학하여서는 문창남시인을 마음속의 스승으로 정하였다.  그 리유는 안씨가 교하에서 소수민족이라는 리유로 멸시를 받으며 자라온것과 문창남씨의 작품은 언제나 민족의 얼을 지키고 민족과 전통의 우수성을 지켜가려는데 기본 사상이 있어 공명을 얻었다는것이다. 그러던 어느 방학에 자기가 쓴 수필을 가지고 문창남시인을 찾아 갔다. 그 만남에서 시, 수필에 대한 작가의 해박한 지식, 진실성, 폭과 깊이가 있는 선생의 작품세계와 더불어 한없이 호방한 그의 성격에도 매료되였다.  이때로부터 스승으로 모시고 작품의 지도를 받기도 하고 일상의 문제들에 대해서 서로 열띤 토론도 하였다.  안영수씨가 대학을 졸업한후 교하의 교원으로 배치 받았으나 문창남은 그를 당시 자기가 편집으로 있는 길림 《도라지》잡지사에 근무시키려 한다. 안영수를 보고 길림 어디도 좋으니 호구만 옮겨 놓으라고 《명령》한다. 충실한 제자인 안씨가 각고의 노력끝에 몇달만에 길림학교 교원으로 호구를 옮기고 문창남을 찾아갔는데 그때 문창남은 창녕그룹으로 이적하느라 이사준비가 한창이였다. 그래서 다시 선생을 따라 창녕그룹으로 가서 문창남의 비서로 근무하게 된다.  문창남은 이때 창녕에서 그룹 회장인 석산린의 가정을 모델로 조선족의 이민사, 투쟁사, 개척사를 망라하는 12부 작의 력사대하소설을 기획하고 있었다.  그러던 1996년 문창남은 간암 확진을 위해 1년전 회사를 그만둔 안영수를 찾아 북경에 온다. 그때 안영수씨가 롱담으로 간암이 아니다. 만약 선생이 세상을 뜨게 되면 내가 선생의 전집을 만들어 드린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해 7월 문창남선생이 간암으로 세상을 뜰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그리하여 안영수씨의 롱담은 진담으로 되고 늘 마음속으로 스승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였다고 한다.  그후 안영수씨는 사업이 순탄치 않아 방황하게 되며 다시 한국 성균관대학에 류학의 길에 오른다. 그때 그는 한국의 언론재단을 통해 가급적 비용부담이 없이 전집을 출간할 계획을 세웠다가 그것이 스승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립장을 바꾸어 자체로 출간하기로 마음 먹었다. 근 2년간의 자료 확보, 고증끝에 스승의 별세 10주년을 맞으며 문창남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후원회를 조직하고 그들의 도움으로 문집으로 세상에 내놓게 되였다.  3. 문창남선생에 대하여  문단에서는 문창남선생이 창녕그룹으로 자리를 옮기자 작가로서 붓을 꺽고 기업총수의 일가를 형상하는 어용문인으로 전락되였다는 설, 및 창녕을 그만둔 리유에 대한 억측과 설이 란무하였다.  안영수씨가 곁에서 근 2년 함께 일하며 묵격한 바로는 문창남선생은 절대로 그렇게 개인의 가족사나 써서 아부하며 살아갈 인간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우연한 기회에 석산린씨를 알게 되고 여러번 만나 담화하는 과정에 서로의 마음이 맞게 되였다고 한다, 석산린씨와 해후에서 알게된 바로는 옥중생활을 같은 시기 같은 감옥에서 하였다는것. 당시에는 서로 몰랐지만, 문선생이 석씨를 만났을 당시 석씨는 기업이 상승일로를 거듭하는때라 기업의 홍보와 개인의 홍보가 필요했고 민족의 발전사를 력사대하적인 소설로 쓰기를 갈망하던 문선생으로서는 석씨의 가정 환경, 이민사, 감옥살이, 기업창설, 성공 등 일로가 중국조선족 근 100여년 이민사의 주인공으로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모델로 한 소설을 쓰기 위해 창녕으로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흰돐이라는 제목으로 력사소설 1, 2권을 쓰게 되였다. 그러나 문단의 전반적인 생각은 아직도 미묘한것이 사실이다.  그에 안받침하듯이 문창남선생이 창녕을 그만두게 된 원인, 병마에 시달리며 쓴 근 70만자에 달하는 원고를 창녕측에서 내놓지 않은 리유, 이번 문집출간도 이미 통보를 받아 알고있음에도 창녕에서 협조가 없는 사실 …              -물소리 새소리-문창남 작사, 김창호 작곡, 박연 김선희 노래.        
588    시인 - 고 설인 댓글:  조회:4341  추천:0  2015-03-11
                                                                                          (우측 설인 시인) 시인이 2009년에 펴낸 시집 《들국화》, 《고향사람들》. 답사를 하는 설인선생. 참가자들과 함께. 후배시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원로시인 설인(가운데)선생.   설인선생의 창작은 조선족시가사의 변천사 의미   8월 8일 오전, 중국조선족의 대표적인 시인이며 해방전으로부터 시작하여 해방후 그리고 개혁개방이후에 이르기까지 줄곧 문학창작을 견지해온 원로시인 설인(본명 리성휘)선생의 탄생 90주년 기념 학술토론회가 연변작가협회와 연변대학조선문학연구소의 주최로 50여명 문인과 선생의 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연길시 라경호텔에서 개최되였다. 시인 설인은 1921년에 연길에서 출생하여 1943년 일본 와세다대학문과를 수료하고 선후로 소학교 교원, 잡지사 편집, 대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수많은 우수한 시작품을 창작하였다. 그는 현재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시조시사, 연변시인협회 고문을 맡고 있으며 《봄은 어디에》, 《먼동이 튼다》, 《설인시선》, 《들국화》, 《고향사람들》 등 문학저서와 《문학개론》, 《문학론고》 등 리론저서외 《시인 김조규의 재만시초》 등 평론 십여편을 발표하였다. 이번 기념학술회에서는 연변대학조선문학연구소 김경훈교수의 《해방전 설인 시세계 연구》와 절강성 월수외대 류은종교수의 《시인 설인의 들국화 사랑》이 기조론문으로 발표되였고 김운일, 김응준, 장정일, 김철학, 김동진, 리상각 등 평론가와 시인들이 자유발언의 형식으로 시인의 생애와 문학창작에서 거둔 성과를 재조명하였다. 설인선생은 자신의 70여년의 창작활동을 재조명해주는 이런 뜻깊은 모임을 조직해준 후배문인들과 제자들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놀라운 기억력과 입담으로 필명 설인(雪人)에 깃든 이야기와 일부 시를 창작할때의 경과를 감명깊게 이야기하여 참가자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였다. [길림신문 2011-8-8 김태국]  
587    시인 - 고 현규동 댓글:  조회:4558  추천:0  2015-03-11
  현규동   그분의 시를 애독할때면 젊음의 피가 팔팔 끊는 청년시인으로 생각했었다.그런데 왠걸 만나보니 육십을 넘기신 분이셨다 작달만한 키에 말씀이 적었고 미소가 적었다.두번 만나서 만난 장시간의 대화가운데 그의 이왕지사를 약간 요해하게 되였는데 그이는 원래 조선작가 동맹에 있었는데 후에 중국에 건너왔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화룡땅에 뿌리를 박게 되였다한다 .그는 자신이 시를 위하여 분투한 인생은 실패의 인생 시를 선택한거도 매우 후회를 하셨다 .자연 시와 인생 성공과 실패는 우리가 나눈 중심화제로 되였다. 지금까지 시집한권도 출판못한 불안감과 전생을 깡그리 바쳐가며 시에 전념한 수고보다도 차려진 것이 너무도 작고 작다는 불평이였다 .이젠 시란 말만 나와도 괴로워 하는 듯한 현규동시인.현재 진행중인 현대시에 대해서도 줄열히 꾸짖으면서 책임감이 없는 창작태도에 대한 비판을 10차 (두만강 여울소리)시가탐구회에서도 열변을 토했다면서 대단히 격분해 하셨다 .조약은 있어도 너무 현실과 이탈한 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불편한  눈 때문에 독서도 곤난하다면서 여생에 크게 창작열정을 내비치지않는 현규동시인 나는 처음 문학인으로서의 성공과 실패의 모순속에서 방황하는 한 선배시인의 모순된 심리를 엿보게 되였다 . (한국 대구 서지월 시인 記)  
586    시인 - 김학천 댓글:  조회:4406  추천:0  2015-03-11
        길림성 돈화시 출생.    연변대학 졸업.    시집“꿈 많은 봇나무 숲”등 다수.    전국 제4차, 제7차 소수민족문학상 등 다수 수상.    제7기 전 연변작가협회 주석.    전 중국조선족소년보사 사장 겸 총편.    중국작가협회 위원.    국가 1급 작가.   ㅁ[흑룡강신문]시의 풍격을 소중히 살리는 김학천                      (흑룡강신문=연변 김명록 연변지사장 보도) 국가 1급 작가이며 중국조선족소년보사 사장 김학천 선생은 다섯 번째 시집으로 '어느 날과 어떤 때의 어떤 느낌(조문)'을 최근에 출간했다. 여섯개 부분으로 묶은 이 시집에 135수의 시가 수록되었다. 첫 부분에서는 어느 날과 어떤 때 어떤 느낌을 진실하게 서술했으며 두 번째 부분에서는 여행시를 읊었으며 제3부분은 조국의 명승지를 노래했으며 제4부분은 고향에 대한 정서를 토로했으며 제5부분은 시인의 인생여정을 회고했으며 제6부분은 중국조선족의 운명에 대한 사색과 미래에 대한 축복을 여실히 반영했다.   평론가 최삼룡 선생은 이 시집에 대한 평론에서 "김학천의 시는 주제사상이 풍부하고 다양함으로써 민족의 운명에 대한 사색, 생명존재의 곤혹에 대한 표현, 후현대화시대에 닿은 인류의 충돌과 화합에 대한 사색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 송가도 있고 고향의 노래도 있다."고 썼다. 김학천 선생은 '어느 날과 어떤 때 어떤 느낌' 시집의 이미지창조에서 자연풍경과 인문경관의 시적인 융합으로 표현시킨 것이 특출한 특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김학천 선생의 시에서 순간적인 존재에 대한 포착은 상당히 심각한 철리적 사색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이다.   김학천 선생은 연변작가협회에서 주석을 담임한 기간에 정품창작을 주체로 문학평론과 문학번역에 치중하면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취득하여 수차 중국작가협회의 충분한 인정과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선후로 한문시집 '찬연한 계절', '세기 영마루를 넘어 홀로 가다', 조문시집 '꿈 많은 봇나무 숲', '봇나무 숲 정결'을 펼쳐냈으며 번역시집으로는 '민들레', '천지에 대한 사랑', '하늘은 유원지' 등 10권도 넘는다.   그리고 그가 작사한 '장백송', '연변서곡', '장백연가' 등 일련의 가곡은 연변 나아가 해내외의 높은 찬양을 받고 있다. 지금 그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돌기념을 위해 대형광장예술표현문학교본인 '연변찬가'를 초안하고 있다.   한족이 거의 대부분인 돈화시에서 태어났고 통화사범학교, 연변대학 중문학부를 졸업한 김학천 선생은 조문창작과 한문창작, 번역창작을 동시에 자유롭고 능란하게 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문학자질을 품고 있으며 조문, 한문으로 엇갈아 시집을 출판하는 면에서 그 누구보다도 특기를 보이고 있다. 그가 예리한 눈길로 사물을 관찰하고 민감한 사유로 시구를 더듬는 그의 시는 자유분방하고 논리성이 강하고 견해가 독특하고 붓끝이 유창하고 경전 인용이 타당하고 언어표현이 세련되었다. 하기에 하이난대학교의 저명한 문학평론가 이홍연 교수는 몇 해 전에 전국소수민족문학상을 수상한 저서 '중국당대소수민족문학사론'에서 김학천의 문학업적을 완전한 한개 장절로 편저하면서 '김학천시대와 함께 하는 특별히 독보적인 시인'이라고 제목을 달아주었으며 한국의 저명한 평론가 홍기삼 교수도 김학천의 시집 '봇나무 숲 정결'에 붙인 평론에서 "서정적 감흥을 산출하는 심미적 원천은 주로 인공적세계가 아니라 자연의 상태가 중심을 이룬다."고 지적했다.   조한문에 조예가 깊은 김학천 선생은 한문으로 시창작을 하여 중국 주류문단의 주목을 환기시켰으며 또 조문으로 시창작을 하여 민족에 대한 애정을 현시함과 아울러 조문과 한문을 서로 옮겨 번역하여 두가지 문자와 언어의 교류와 소통의 다리를 놓아줌으로써 마멸할 수 없는 업적을 쌓았다. 그는 제4기전국소수민족문학상에서의 번역상, 제7기전국소수민족문학상에서의 한문시집상, 한국 제4기문학광장 문학상 등 국가급 문학상을 획득했으며 그의 문학업적은 '중국시인대사전', '중국당대문예가사전', '중국당대소수민족문학사론', '세계화인문학계 명인록'에 수록되었다. 지금 김학천 선생은 중국소년아동출판사업자협회 부회장,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문학위원회 위원, 중국시가학회 이사, 연변주정협 위원, 연변문화예술발전추진회 회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김학천시인이 조선족의 저명한 시인인 고 김성휘선생의 작품들을 선별하여 번역, 《김성휘서정시선》을 출간하였다. 역자 김학천씨는 일찍 연변대학 중문학부를 졸업했으며 연변작가협회 주석 겸 당조서기, 연변사회과학계련합회 주석 겸 당조서기를 력임했다. 현재 중국조선족소년보사 사장 겸 총편집이며 국가1급작가이다.   조선문시집, 한문시집, 번역시집을 다수 출간했으며 제4기, 제7기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준마상(각각 번역분야와 한문창작분야)을 수상했다.   김학천시인은 머리말에서 김성휘선생의 작품은 격정, 진심, 서정으로 가득차있으며 김성휘선생은 격정으로 생명을 불태웠던 시인이라며 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또한 김성휘시인을 료해하면 그 시대 조선어창작이 위주를 이루던 중국조선족시단의 대체적인 정황과 수준을 가늠할수 있는바 선생의 주옥 같은 작품들을 번역하여 더욱 많은 독자들이 조선족의 우수한 시인을 료해하게 하려는 마음에서 선생의 작품을 번역하게 되였다고 피력했다.   책은 “제1부 백합이 피여나는 계절”, “제2부 고향의 해와 달”, “제3부 백의민족의 정서”, “제4부 행복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것”, “제5부 영원을 향해” 등 5부로 나뉘였으며 이 번역시선집으로 인해 김성휘선생의 작품 및 문학생애에 관한 연구는 그 범위와 깊이 면에서 또 한층 새로운 돌파를 가져왔다고 평가되고있다.   리련화기자   연변일보 2010.12.12  
585    동시인 - 허송절 댓글:  조회:4239  추천:0  2015-03-11
        [대구신문/시가 있는 창]   아침/ 허송절 따가닥 따가닥  채소 써는 소리  마지막 별님 쫓고  보글보글 장 끓는 냄새  덜 깬 해님 깨운다.  아롱다롱  꽃사발에  하얀 사랑 피워놓은  엄마는 아침이다  아침은 엄마다  *길림성 도문 거주 시인.    - 중국 길림성 도문에 거주하는 여성시인의 아주 맛깔스런 시 한 편을 소개하겠다. 중국 조선족학교 교과서  4학년 하권에 수록된 동시인데, 우리네 토속정서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어서 더욱 친근감을 주고 있다.  신새벽일 것이다. 엄마가 일찍 잠에서 깨어나 아침식사 준비를 하는데  '채소 써는 소리'에 '마지막 별님 쫓'는다는 대목과   '보글보글 장 끓는 냄새'에서는 '덜 깬 해님 깨운다'에서 다같이.시간적 이미지를 구사한 것이 아주 놀랍다. 아침이 밝아옴을 섬세한 필체로 읊고 있다.  그래서 '엄마는 아침이다/아침은 엄마다'라는 귀결에서 보이듯, 그렇게 아침이 밝아온다는 것이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아주 명료한 수사법으로 엄마의 아침식사 장만으로 하루가 시작됨을 동심의 눈으로 본 것이다. 우리에게는 잊혀진 풍경이 된 것 같은데 아직 두만강의 조선족들에게는 살아있는 현장으로 재현되고 있으니 자랑스럽다 아니할 수 없는 일이다.   (서지월시인/記) 
584    시인 - 황정인 댓글:  조회:4339  추천:0  2015-03-11
      ◆도문 황정인시인, 2009년「비호컵」賞 수상!!   ㅡ축하합니다^^ 길림신문사와 한국 대구대학교에서 공동 주최하는「비호컵」 공모전에서 도문에 거주하는 황정인시인의 시 이 2009년 「비호컵」賞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비호컵」이란 한국 대구대학교를 상징하는 심볼이 날으는 호랑이(비호飛虎)로 거기서 따온 것입니다.   **   [2009「비호컵」수상시] 별 황 정 인(길림성 도문) 겨울 밤 하늘에는 봄,여름,가을이 지나간 노래소리 들리고 탱탱 영글어 튀는  꿈들로 가득 차 있다. 꿈을 부르는  깊은 밤 땅에는 별이 내리는 소리 잠 깨어 밤 새워가며 어둠속 숨어버린 너를 찾아 헤매인다.    + + + + +
583    시인 - 려순희 댓글:  조회:3980  추천:0  2015-03-11
      제1회 리상화문학상 수상자 려순희(가운데 사람) 한국 리상화기념사업회와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제1회 리상화문학상 시상식이 12월 14일 오전 연길시 상우호텔에서 개최되였다.   시상식에서 홍현기(한국 대구)화백이 리상화문학상 설립 경과보고를 하고 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최룡관회장이 심사보고를, 김철호시인이 주최측을 대표하여 리상화시인을 소개하였다. 려순희시인의 서정시 《고요》가 《변형이 새롭고 다선, 다주제를 시에 용해시키면서 잔잔히 내리는 보슬비와 같고 바이올린 독주의 가냘픈 소리같고 졸졸 흘러 내리는 시내물 같다》는 평을 받고 제1회 리상화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였다.         리상화(1901-1943)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우리민족의 천재적인 시인으로 1920년대부터 우리민족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준 시인중의 한사람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 《나의 침실로》 등 그의 시들이 조선족중학교의 《조선어문》교재에 50여년간 수록되면서 조선족사회에서 리상화는 리륙사와 김소월 등과 함께 손꼽히는 저항시인으로 되였다.   시상식에는 연변작가협회 주석 허룡석, 연변단풍수필회 회장 김운일, 연변시조협회 회장 김철학,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회장 한석윤, 연변시인협회 부회장 김응룡과 문학평론가 최삼룡 등 30여명이 참가하여 리상화문학상 설립을 축하하고 려순희시인의 수상을 축하하였다.    
582    시인 - 박춘월 댓글:  조회:4333  추천:1  2015-03-11
"문단6적" 3김3조가 일으킨 "21세기 연변문화대혁명" 성찰     Hit : 4052 , Vote : 21            [2009/06/23]            [편집자의 말]    일명 "6적"으로 불리는 김관웅, 김호웅, 김학송, 조성일, 조성희, 조일남 등 중국 조선족 연변문단의 학자, 교수, 평론가, 문학편집일군들로 무어져 있는 기성문학세대가 2006년에 중국조선족문학의 중심지 연길에서 『록(綠)』이라는 한편의 시를 두고 발생하였던 정상적인 문학쟁명(이하 『록(綠)』사건으로 약칭함)을 문화대혁명식의 정치투쟁으로 몰아갔던 비화가 새롭게 제출되면서 집중적으로 이 사건의 전후시말을 돌아본다.     옛 성현께서도 '전사불망, 후사지사' (前事不忘 後事之師)라고 했듯이, "6적'의 3김3조 본인들에게는 부끄러운 한단락의 과거사가 될수있으나 본지가 이 사건을 집중조명하는 것은 오늘날까지도 "6적"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이들 3김 3조가 자기들의 기득권 세력을 지키기 위하여 성장하고 있는 새일대 문학청년들을 공격하고 압살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연변문단을 좌우 농단해온지 수년째나고 있는 "6적"은 해외로 나간 조선족작가들인 일본의 김문학에게는 "친일매국역적", 미국의 유순호에게는 "반화세력, 반중국분자" 한국의 장혜영에게는 "불법체류자" 등 감투를 씌우고, 오늘날은 "연변문학" 편집부의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하여 사이버문학 네티즌들에까지 나쁜 메타포를 던지면서 반화세력쪽으로 몰아 매도하는 악행을 멈추지 않고 있다.     "6적"의 이와같은 비정상적인 문화반상현상(文化反常現象)은 결코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며 13억 중국인민의 기억속에 악몽으로 남아있는 반인류적인 문화대혁명의 잔재와 유령이 21세기에까지도 연변조선족문단사회에서 계속 범람하고 있음을 여실하게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것의 가장 좋은 사실이 우리가 오늘 돌아보게 되는 『록(綠)』사건이다.     본지는 당시 이 시가 "연변일보" 제일제당 해란강 문학상 수상작품으로 평선될 때 평심위원으로 참가하였던 평심위원들과 다수 관련자들에게서 청취한 인터뷰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한 사실의 전후시말에 대하여 계렬로 소개한다. 루락된 부분이나 사실과 일부 부합되지 않은 부분은 계속 보충하여 드릴 것임을 약속한다.     오늘 발표하는 원고의 기술자는 『록(綠)』사건 관련자의 한 사람으로써 이에 대하여 역시 동 관련자가 되는 "6적" 3김 3조의 반론과 비판을 환영하며 발고하여오실 경우 언제든지 대서특필하여 드릴 것을 약속한다. (니카편집진)                                             21세기 연변문화대혁명 성찰                        [ 박춘월의 시 『록(綠)』을 놓고 벌어진 쟁론에 대한 회고]    연변의 나어린 과외시인 박춘월이 2005년 11월 4일 시《록》을 발표하였다.    그 전문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록 /  박춘월    태초 에덴의 잎사귀가 짜낸 도포    몇천년 걸어오며 나붓긴다    그 펄럭임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강가에서 호수같은 날개옷 주어입고    도포속으로 들어간다    현관에 놓인 풀꽃으로 엮은 신 신는다    도포의 서랍에는 새소리 많아    몇알 꺼내 호주머니에 넣고    도포 뒤울안 시원한 그늘 속    무더기로 쌓인 벌레울음 파헤치면    웬 오솔길 입구에 서게 된다    순간    오솔길 깊이 빠져들어 갈 때가 있다    에덴동산에 들어갈 때가 있다!     이 시가 나간 뒤 거의 3개월이 지난 다음 2006년 2월 초 《연변일보》는 2005년을 총화하는『제일제당상』과 『해란강문학상』 수상작품을 평심하게 되였는데 그 평심에서 박춘월의 시 『록』은 최고의 평가를 받고 『제일제당상』 수상작품으로 결정되였다. 그때 평심위원으로는 연변대학의 허휘훈교수, 김경훈교수, 평론가  장정일, 최삼룡, 원 《연변일보》 문예부 주임 최룡관이였다.    그리고 계획대로 2006년 2월 말인가, 수상의식을 하였는데 한국에서 제일제당의 모 처장이 와서 상패와 상금을 주고 평심위원회를 대표하여 김경훈교수가 평심보고를 하였다. 박춘월이 상패와 상금 인민폐 만원을 받았다.    그후 연변대학의 김관웅교수가〈박춘월의 시《록(綠)》에 대하여〉를  2006년 3월 8일 자기의 홈폐지『우리동네 문학동네』에 발표하였다. 그 글 전문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서명은 「최진사」로 되였다. 그러나 최진사가 김관웅이라는것은 증명할 필요없다. 세인들이 다 안다.     시평 /  박춘월의 시《록(綠)》에 대하여 / 최진사    연변의 이름 없는 무명의 여자 박춘월이 50년도 시를 더 쓴 할빈의 노시인 리삼월 선생을 제치고 시의 월계관을 쓰고시상대에 올라섰을 때 필자는 좀 아연해지기는 했으나 수선 시를 보지도 못했으므로할말은 없었다. 물론 박춘월외에도 1년 동안 ㅜ연변일보에 시를 ㅅ발표하한 이들 중에는 내가 알건대 중국조선족시단에서 한 두 손가락안에 꼽히는 이들도 없지 않았으나 모두 상 씨름에 붙지도 못하고 대 애기씨름ㅡ 초선에서 락선되였으니 박춘월의 시가 대단하기는 대단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의혹과 호기심을 금할수 없었다. 거의 한달이 지난 뒤에야 박춘월의 그 유명한 시를 접할수 있는 영광을  가질수 있게 되였다. 혼자서만 감상하는게미안하여 네티즌 여러분들에게 이 아름다운 감상의 기회를 드리고자 아래에 그대로 옮긴다.       태초 에덴의 잎사귀가 짜낸 포도     몇천년 걸어오며 나붓긴다     그 펄럭임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강가에서 호수같은 날개옷 주어입고     포도속으로 들어간다     현관에 놓인 풀꽃으로 엮은 신 신는다     포도의 서랍에는 새소리 많아     몇알 꺼내 호주머니에 넣고     포도 뒤울안 시원한 그늘 속     무더기로 쌓인 벌레울음 파헤치면     웬 오솔길 입구에 서게 된다     순간     오솔길 깊이 빠져들어 갈 때가 있다     에덴동산에 들어갈 때가 있다!                                                                         ㅡ 박춘월《록(綠)》 전문     오이는 거꾸로 먹어도 제맛이라는 말이 있지만 필자가 박춘월의 시를 감상하는 구미도 필자나름대로임을 먼저 성명하고 하회로 넘어가고자 한다.    우선 시적인 주제를 본다면 《록(綠)》이라는 제목이 보여주다시피 ㅍ추름에 대한 례찬이라고 해석석할수 있다.    푸름은 청춘, 젊음, 생명을 련상할수 있으니 읽는 이들이 자기의 련상이 닿는 대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푸름에 대한 례찬은 시나 수필에서 흔하게 보는 주제적 표현이기는 하지만 이렇다고 주제적발견이 없다고 평하할 생각은 도무지 없다. 다만 이 시의 시적주제에서 우리는 현실성, 사회성을 느낄 수는 없다. 여기에는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의 진실한 감정과 감수가 증발되여있다. 다만 어슴푸레 전해오는 것은 한장에서 덜깬 여자의 잠내 나는 아리송한 잠꼬대뿐이다.    다음으로 이 잠꼬대와 같은 이 시의 시적표현을 살펴보기로 하자.   《포도》는 이 시의 핵심적인 이미지다. 다만 포도는 포도나무의 열매를 말하는지 포도덩쿨 숲을 말하는지 분명치는 않지만 이 《포도》는《태초의 에덴의 잎사귀가 짜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포도》가《몇 천년 걸어오며 나붓긴다? 그 펄럭임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고 한것을 보면 한 알 한 알의 포도알을 가리킨것이 아니라 전반 포도넝쿨 혹은 수많은 포도넝쿨로 이루어진 포도원이나 포도넝쿨로 이루어진 록색장랑(綠色長廊)을 다 가리킬 소지도 있음을 알 수 있다.몽롱시인 까닭에 몽롱하게 표현했거니할 수도 있지만  포도속으로 들어간다니 역시《자그마한 포도알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꿈이나 환각을 쓴 것은 아니게숏는가 생각해 본다.    제3련에서 아마도 시적인 자아가《현관에 놓인 들꽃으로 엮은 신을 신는다》고 했다. 역시 몽환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이어서는《새소리》라는 청각적이미지를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이미지로 전환시켜 시적인 자아가 《새소리》를 《몇알 꺼내여 호주머니에 넣는다.》 아무리 통감의 원리로 해석을 한다 해도 《포도의 서랍에는 새소리 많다》고 했거나 《새소리》를 《몇알 꺼내여 호주머니에 넣는다.》 고 표현항 것은 내 귀에는 어색하게만 들린다.물론 내 귀가 절대적인 표준은 아니다.     제4련에는 역시 3련과 비슷하게 벌레울음소리라는 이 청각적이미지를 시각화, 촉각화시켜 표현한다. 여기서《무더기로 쌓인 벌레울음 파헤치면/웬 오솔길 입구에 서게 된다.》고 표현한 것은 그래도 우의 표현보다는 낫게 보인다.    제5련은 포도넝쿨이 어울린 록색장랑(綠色長廊)을 에덴동산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표현하고있다. 록(綠)-푸름이란 이 색해를 포도(혹은 포도숲 혹은 포도넝쿨로 이루어진 록색장랑)라는 사물을 동원하여이미지화 혹은 이미저리화한 시작이라는 분석은 가능케 한다.그리고 시적인 주제가 각기 나름으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어서 시적인 여운도 없는 것은 아니라고 점수를 후하게 줄 수도 있다.초학자의 시로서 , 습작으로서 이만하면 락제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보려고 애 써서 후하게 점수를 준다고 해도 이 시에는 시대적 색조와 많은 사람들의 공명을 일으킬 공명대를 갖추지 못한 개인적인  협소한 감정을 읊조린 시이다. 그래서 이 시는 별로 독자들에게 별로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그리고 이미지화도 난삽하고 몽롱하여 독자들의 눈앞에 잘 다가오지 못한다. 이보다 더욱 중요하 것은 자연스러움이 결여되여 있다는 점이다. 억지로 이미지화를 한 흔적이 력연하여 자연스러움의 미를 상실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록(綠)외의 기타 2수에서도 이런 문제들이 보인다. 총적으로 신인을 격려하는것은 옳지만 이 정도의 시작을 가지고 대상을 받는다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 것이 아니겠는가?    2005년《연변일보》에 발표된 다른 이들의 다른 시작들에 비해서 과연 톱자리에 올라설만 한 시이겠는가는 정말 잘 따져보아야 한다.     상주기와 줄 세우기를 잘 못하면 문단의 정상적인 질서가 깨여지게 되는 것이다.  이 몇 년 동안 우리서의문단에 상주기와 줄 세우기에 늘 문제가 많아서 얼마나 식글벅적했었는가? 모방작, 표절한 작품이 오히려 거듭거듭 상을 타는 경우마저 있었으니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2006년 3월 9일 연길에서    ※ 철자와 띄여쓰기는 완전히 김관웅의 원문대로 하였다.    이 글이 나가자 마자 우선 작자 박춘월의 강렬한 불만을 자아냈고 며칠 고민끝에 박춘월은 김관웅을 연길시법원에  기소하게 된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박춘월의 불만은 근거가 충분했으며 변호사들도 기소하면 박춘월이 완전히 승소할수 있다고 분분히 나섰다. 다른 말은 하지 말고 대학교 교수이고 박사도사라는 사람이 남의 시에「도포」를 「포도」로  해석한 이 한점만 가지고도 사람들의 분개를 자아낼수 있었던것이다. 시의 원문에 「도포」라는 단어는 전후로 4차 나오는데 김관웅은 자기의 시평에서 전문을 인용하면서 4차 모두 「포도」라고 고치고 그 아래 평론에서도 「포도」라고 하면서 마구 해석하였다. 이것을 어찌 한 교수의 실수라고 볼수 있겠는가. 몽둥이를 휘둘러 사람을 마구 때려잡는 습관된 행동의 발로된것이다.    다음 김관웅의 시평은 《연변일보》 문예편집실과  지도부의 강렬한 불만을 자아내게 되였는바  그들은 박춘월의 기소를 뒤에서 지지하게 되였다. 이런 와중에 이번 수상작품의 평심위원이였던 평론가 최삼룡이 박춘월의 시를 호평하는 평론을 《연변일보》에 발표하였다.  그 전문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록색의 마력과 비반복적인 이미지 / 박춘월의 시 《록(綠)》을 평함 / 최삼룡    자연이란 이 거편의 저술을 독해하는것은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과업의 하나이며 또 영원한 과업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인류의 물질적재부의 기본적인 래원이며 역시 정신적창조의 중요한 대상의 하나로 되기때문이다.    자연은 시에서도 시종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바 영국의 중세기 시인 드라이든 죤 (dryden john)이 말했듯이 시란 자연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시에서 자연을 다룬다는것은 어느 의미에선 시 전체를 다룬다는것과 같다. 그래서 모든 시리론들은 어쩔수 없이 이미지와 자연이라는 두가지 요소를 항상 론의하게 된다. 그중 자연의 개념은 시리론의 주재인 동시에 제재로서 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다.    시의 제재로서 자연은 수천년의 시발전사에 수많은 산시(山詩)와 풍물시(風物詩)를 남겼으며 현대에 와서도 쇠락하는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다.    박춘월의 《록(綠)》(《연변일보》2005년 11월 4일) 이 바로  자연을 제재로 한 시로서 록색의 마력을 만끽하면서 생명의 활력을 읊조린 한수의 현대주의적 풍물시라고 칭할수 있다. 모두 5련 14행으로 된 이 시에서 우리는 록수청산에 몸을 담그고 록색을 만끽하는 화자를 만나볼수 있다.    시는 군더더기가 없이 첫구절부터 청산록수를 바라보는 화자의 느낌을 《태초 에덴의 잎사귀가 짜낸 도포》라고 자기의 느낌을 터쳐놓는다.    여기서 에덴의 동산의 잎사귀란 바로 아담과 이부가 부끄러운곳을 가리웠던 올리브나무잎을 가리키는데 바로 그 색깔이 록색이다. 이 잎사귀로 짜낸 도포(道袍. 포도가 아님을 명심할것―필자 주, 이 필자 주는 신문에 나갈 때 삭제당했음. 필자주 2009,6,22 )는 바로 화자가 몸을 담그고 있는 청산록수를 파랗게 물들인 록색의 은유적인 표현이다. 여기서 화자의 상상에 의하여 록색은 산과 물이 떨쳐입은 례복의 겉옷으로 되였다.    아래에서 시인은 《몇천년 걸어오며 나붓긴다/ 그 펄럭임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고 하면서 생명의 원색으로서 록색의 의구함과 록색과 더불어 강처럼 흐르고 바다처럼 설레이는 생명의 활력을 읊조리였다. 화자는 시의 2련. 3련. 4련에서 도포속으로 들어가면서 즉 다시말하면 록색의 마력에 빠져들어가면서 자연을 망끽하는 자신을 쓰고있다.    제2련. 푸름속으로 들어가는 화자의 마음은 푸른 날개옷을 떨쳐입고 날아간다. 누구라도 한번쯤 한여름철에 산과 물의 푸르름에 몸을 담궈본 사람이라면 록색의 날개옷을 입고 날아가는듯한 화자의 즐거운 마음을 리해할수 있을것이다.    제3련. 한걸음 한걸음 산속으로 들어가는 화자의 발밑에는 숫한 풀꽃이 밟히우는데 화자는 이것을 《현관에 놓인 풀꽃으로 엮은 신 신는다.》라고 표현하였다. 여기서 《현관(玄關)》은 집채의 정면에 낸 문간이니 아직 집안에 채 들어가지 못한 장소 즉 청산록수의 깊은 곳까지 가기전의 길임을 은유적으로 나타냈으며 《풀꽃으로 엮은 신》은 바로 풀빛이 신까지 곱게 물들게 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제4련. 시원한 나무그늘에서는 가지각색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데 화자는 《벌레울음》을 《무더기로 쌓인》이라는 시각적이미지로 형용했으며 통감으로 소리를 듣는다고 하지 않고 파헤친다고 표현하였다.    제5련. 오솔길을 따라 산으로 깊이 들어가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호젓하고 무서운 느낌이 들만큼 쓸쓸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에덴의 동산. 생명이 탄생하는 태초의 경지에 들어서기도 한다. 이렇게 시의 마지막 련에서 화자는 록색의 황홀경에 깊이 빠지면서 생명의 원색과 생명의 신비에 대하여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이와 같이 시인은 이 시에서 자연의 마력을 만끽하면서 폭발하는 시인의 생명의 활력과 시적순발력, 자연의 다양하고도 오묘한 언어를 읽어내려가는 능력 그리고 다양한 수단과 기교로 느낌과 깨달음을 시적으로 포장하는 재간을 보여주었다.    대체적으로 자연을 외면하면서 살아가며 또 자연과 등지고도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이 시는 약간의 느낌과 깨달음을 줄수있을것이다.        이 시에서 돋보이는것은 시인은 성공적인 낯설게 하기이다. 낯설게 하기란 이 명제는 로씨야의 형식주의자들의 주장중에 관건적인 명제인데 한마디로 예술이란 대상을 낯설게 하여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어야 한다는것이다. 이 명제는 후에 사실상에서 많은 현대주의자들의 주장으로 되였다.    박춘월의 시 《록》에서 《도포》,《날개옷》,《신》,《현관》,《호수》,《도포의 서랍》,《새소리…몇알》 등 시어는 모두 낯설게 하기의 결과이다.    이러한 낯설게 하기는 이 시의 이미지를 비반복적인것으로 되게 하였으며 전편 시로 하여금 새롭고도 신선하고 감칠맛이 나게 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시적성공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관건의 하나는 시인이 얼마나 새롭고 적절한 이미지를 창조하느냐에 달린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에서 이미지의 창조는 성공적인 실험이였다고 평가할수 있다.    그러나 중국조선족에게는 아직까지 모더니즘시에 길들여진 독자가 많지 못하다. 그러므로 《록》에 대한 의론도 분분하고 찬사보다 비난이 더 많을수 밖에 없다. 프랑스의 작가 프루스트(PYOUST)는 《실험주의에 대하여 》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모든 실험의 가치는 서로 같지 않다.가장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실험이 왕왕 가장 가치가 있는것이 아니다. 하지만 가장 가치가 없는 실험이라도 전혀 쓸모가 없는것이 아니다.》    이러한 말씀에 힘입어 나는《록》의 시적인 성공에 대하여 기뻐할뿐만아니라 여기서 박춘월시인의 창조적 노력과 실험정신을 높이 평가하고싶다.                                                                                              2006년 3월 20일   그후 김관웅과 조성희의 사돈되는 중공연변주위 선전부 부부장이 동원되고 작가협회 신임 주석 허룡석이 출면하여 박춘월에게 기소를 취소할것을 제의하고  또 김학송이라는 시인과 김해룡이라는 연변대학의 교수가 박춘월의 시를 종교시라고 하면서 연변일보 문예편집실과 이번 수상작품의 평심위원들과 평론가 최삼룡을 바판하는 글을 사이버에 공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박춘월은 기소를 취소하게 되고 이른바 타협하는 회의에는 박춘월측에서는 박춘월과 변호사 한분이 참가하고 저 쪽에서는 작가협회 허주석, 김관웅, 김호웅, 조성일 등 6~7명이 참가하였다.    김관웅이 그 자리에서 사과를 표시했고 그랬기에 박춘월이 기소를 취소한다고 태도표시를 했는데 그후 김관웅이는 자기는 사죄한적이 없다고 도처에 다니면서 떠벌린다는것이다. 이에 박춘월이는 그날 타혐회의 전 과정을 나는 록음해 두었는데 그번 회의의  유력한 증거물로 될것이다. 그리고 정말 김관웅이 사죄하지 않았다면  이 록음테프를 풀어보자, 다시 기소비를 몇천원 더 쓰면서라도 진짜 재판놀음을 벌리고 김관웅을 피고석에 올려세울 생각이다라고 말한다.      이상 3년전에 있었던 시《록》을 놓고 벌어진 쟁론과 무산된 재판놀음에 대한 과정에 대한 보고를  세인들에게 참고로 제공하는바이다.                                                                                        2009년 6월 22일 밤 10시                                                   
581    시인 - 심명주 댓글:  조회:4505  추천:0  2015-03-11
    9월4일 오후,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홀에서 있은 제10회 연변지용제 및 음악제에서 청년시인 심명주의 시집《간밤에 꽃이 피였습니다》가 지용제문학상 수상작에 당선되였다. 심명주는 현재 연변일보 《종합신문》의 기자이며 길림대학 외국어학부를 졸업, 2003년도에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을 수상한적이 있다.  연변지용제운영위원회 회장 김학천은 심명주시인은시단에서 이름이 별로 눈에 띄우지 않았던것도 있겠지만 더우기는 연변지용제 문학상의 10년력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녀성수상자라는 점이 평심위원들을 놀라게 했다고 지적. 그러나 단 20수의 응모시작품을 보나 전반 평심과정을 보나 너무나 수상자격이 당당하고 떳떳하다는것을 천명하고 싶다고 하면서 심명주시인의 당선은 심명주자신은 물론 많은 시인들에게도 경희로우며 준비가 되여있는 시인은 조만간에 나타나기 마련이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우리는 반드시 우리문단에 끊임없는 력작의 창출과 보다 훌륭한 인문환경속에서의 신인배출을 위해 더욱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할것이며 또 그것을 위해 환호해야 할것이다고 강조했다. 한국 옥천군청과 옥천문화원이 주최하고 연변작가협회가 주관하는 연변지용제는 올해까지 이미 10년철을 잡는데 정지용시인의 문학정신을 다시 한번 더듬어보고 그의 나라와 민족과 고향을 사랑하고 자연과 인생과 평화를 사랑하며 정의를 호소하고 진보를 소망하는 평생추구를 거울로 삼아 문학의 사명과 문인의 량심을 분명히 확인해 보는데 취지를 두고 있다. 심명주시인은 수상소감에서 《새 한마리만 그려넣으면/남은 여백 모두가 하늘이여라》는 자기시의 문구를 인용하면서 시인의 남은 여백의 인생에 늘 시가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램을 소망하기도 했다. 연변지용제에서 력대로 수상한 수상자들로는 제1회 리임원, 제2회 석화, 제3회 김학송, 제4회 리성비, 제5회 김영건, 제6회 박정웅, 제7회 윤청남,제8회 최룡관, 제9회 림금산, 제10회 심명주등이다.   안상근기자 200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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