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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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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9    시인 - 전춘매 댓글:  조회:4893  추천:0  2015-03-08
      연변 첫 점역시집 출간   2011/09/03 13:32         연변하상학교는 11월6일 처음으로 점역 시집 를 출판하였습니다. 이번 점역 시집은 북경 민족출판사에서 발행한 연변 조선족 여류시인 전춘매씨의 시집으로 1년여에 걸친 점역끝에 이루어졌습니다. 원 시집은 161쪽 인데 번역 시집은 217쪽으로 늘어났습니다. 연변에서 조선말 책이 점역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전춘매 시인은 중국조선족 여류시회 부회장이며 현재 북경의 민족출판사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29      [출처] 연변 첫 점역시집 출간|작성자 혜흔  리동혁 련작수필"어느것이 먼저냐?"(2010년 제1호~2010년 제12호)가 대상을 받았고 조광명 단편소설"하품"(2010년 제3호) , 전춘매 시 "귀향"(외 3 수)(2010년 제3호) , 김인덕 수필"야장간서회(抒怀)"(2010년 제7호)가 공동 우수상을 받았다. 제31회 "연변문학"상 수상자 전춘매(좌) 김인덕(가운데)  연변문학은  1980 년부터 해마다 당해의 최고의 문학적 성취를 이룬 작품과 작가에게 문학상을 수여하고 있으며 원명 "천지문학상"을 1998년부터 연변문학"윤동주문학상"이라고 이름했다가 올해부터 "연변문학상"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조글로미디어 박군걸 기자  
578    시인 - 심예란 댓글:  조회:4722  추천:0  2015-03-08
  심예란 제2회 연변심련수문학상 수상     심예란시인이 시집 “십자거리에 물처럼 고인 차량들”로 제2회 연변심련수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심예란시인은 연변재정학원 경제관리학부 졸업. 1984년 “연변문예”에 수필 “아버지”를 발표하면서 데뷔하였다.   “두만강여울소리” 시우수상, 제12회 연변지용문학상, “두만강여울소리” 시인상, 진달래문예상 등 굵직한 상을 수상, 현재 연변당위 재정부처장, 연변시인협회 비서장직을 겸하고 있다.   한편 8월 8일, 제5회 심련수문학상 및 제2회 연변심련수문학상 시상식이 한국 강릉문화예술관에서 개최되였고11일에는 한민족사랑문화인협회와 남서대대구시인학교의 “조선족시인과의 만남”도 이어 개최되였다.   김혁 기자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1년 9월 5일     NAME : 허동식             심예란시인의 지용문학 수상시집 를 재미있게 읽었다.   시인의 여러가지 사명과 시인에 의해 창출되는 詩作의 여러가지 공능중에 美창조와 美感은시에 유관된 화제에서의 아주 중요한 요인인줄로 알고있다. 말하자면 시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미창조와 미감표현을 떠나서는 시를 담론할수가 없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시어도 구속된 시공에서는 습관적이고 靜적인것이지만 보다 넓은 시공의 층차에서는 변화적인것이고 動적인것이다. 그 변화적이고 동적인 직접적인 근원은 사회의 변천과 시인의 주관적인 노력이며 그 결과는 시미의 형식적인 변화이다.        심예란 시인의 경우, , 어순의 불균형화 , 이미지의 렵기화 등으로 표현되는 시작들은 어느 정도의 시어의 반역으로 보인다. 시어의 관습과 적인 시 습작법을 벗어나 새로운 詩美를 시도한다.   언어의 변화가 사회변천의 사물이라 한다면 시어의 반역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언어의 이질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개인행위인듯도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사회변화의 양상과 인간이 사회변화에 대한 사회갈망이 내포되여 있을지도 모른다. 심예란 시인의 경우, 그 시작들에 표현되는 시어의 반역에는 우리 시단의 침체상을 보이는 시습작법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갈망이 깃들어 있다.       형식에 대한 부정은 내용에 대한 부정을 초래할수도 있다. 심예란 시인의 시어의 반역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정신세계에 대한 반성의 시작이기를 기도해보기도 싶다.    출처:조글로문학
577    시인 - 허옥진 댓글:  조회:5569  추천:0  2015-03-08
화룡시 허옥진시인 지용문학상 수상     2011년 09월 02일 08:58   연변작가협회, 한국옥천군청, 옥천문화원에서 공동으로 주최하고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가 주관하는 제15회 연변지용제가 8월 24일 연길시문화예술중심에서 펼쳐졌다. 화룡시의 허옥진시인이 시집 《나에게로 돌아온 너》로 제15회 지용문학상을 수상받았다. 시상식에 이어 연길시조선족예술단의 민족풍정무극 “계절의 노래”와 정지용시랑송회가 펼쳐졌다(허국화 기자). 래원: 연변일보 진눈깨비 '복허수에 대하여'  제15회 연변지용제 수상 시인 허옥진   2011년           너에게로 날아든다 새나 나비처럼 근대성 가까이  어둡게 너한테 침몰되는 중 나는 나라고 말할수 없어 사라지기 위해 네가 나를 위한 생리대는  일년에 두번쯤은 족해   복식(複式)의 방안으로  복허수(複虚数)의 실수는 나의 이중성을 떠나는  첫번째 계절이 되였다   자기 카드에 인출된 수량만큼 형태소(形態谕)를 나타냈을 뿐 너의 유배지에서  채 해동되지 못한 표절된 허두가 나의 첫 음성으로  너에게로 반환되여 사라지는 중   설맹(雪盲)으로 지양되지 못한 여백에 공명으로 슴슴해진 언어의 혈액형들 더는 낭설로 너의 밑바닥까지 적시진 않아   잠언으로 환원되지 못한 계절의 쪼각들 환절의 어설픈 주성(走性)으로  너에 향한 회귀성은  겨울을 견딜수 있는  푸르른 땅에 대한 그리움으로 될수 있었다   [출처] 진눈깨비 '복허수에 대하여' |작성자 혜철
576    시인 - 주향숙 댓글:  조회:4165  추천:0  2015-03-08
  (사진:  신인상 수상자들. 좌로부터 박룡길, 주향숙, 조룡기 )  9월 7일,   《연변문학》월간사의 제30회시상식에서 주향숙 시인이 수필   로 수필부문 신인상을 수상했습니다.  주향숙 시인은 일찍 시 으로 두만강여울소리 시인탐구상을 수상한바  있으며 현재 연북소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길림신문 뉴스-----   《연변문학》월간사가 주최하고 한국해외한민족연구소가 후원한     2009년 제30회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이 9월 7일 오전, 연길 백산호텔에서 있었다.    연변이 낳은 민족저항시인 윤동주의 항일독립정신과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윤동주문학상》은    1999년부터 매년 《연변문학》에 실린 작가들의 작품을 뽑아    시상식을 거행하고 있다.     제30회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수상작에는     소설부문에서 홍천룡의 《호박골의 떡호박》이 본상을,      조룡기의 《포장마차 달린다》가      신인상을, 시부문에서 김철의 《휴전선은 말이 없다》가 본상을,      박룡길의 《유리창》이 신인상을,      수필부문에서 리태근의 《깨여진 고향의 반쪽 얼굴》이 본상을,      주향숙의 《내가 내곁에 서서》가 신인상을,      평론부문에서는 우상렬교수의 평론 《현대적인 소설서정》이 본상을      수상했다.       소설부문 본상을 수상한 홍천룡 작가는 수상소감에서       1981년 소설 《구촌조카》로 문학상을 수상한 이래       이러저러한 생활탐구와 모대김때문에       소설창작과 멀어졌던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수상의 영예를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님과        소설을 이쁘게 봐준 평심위원들과 독자들에게 돌렸다.        시상식에는 연변작가협회, 연변주문련, 연변인민출판사,       부분적 민간문화단체의 책임자들과 회원 그리고       언론매체의 기자 등 120여명이 자리를 같이 하였다.               (길림신문 기자 김태국, 안상근)
575    시인 - 김영춘 댓글:  조회:4221  추천:0  2015-03-08
     
574    시창작의 1, 2 , 3. ㅡ 석화 댓글:  조회:4091  추천:0  2015-03-08
시창작의 1, 2, 3.  석 화  1. 모든 말에 리듬을 실어라.  생명의 첫째가는 표현은 호흡이다. 생명은 호(呼)와 흡(吸) 즉 날숨과 들숨의 끝임 없는 반복으로 진행된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무수한 호흡을 반복하며 반복되는 호흡은 리듬을 불러온다. 사람에게 있어 이 숨결은 성대를 울려 소리를 내게 하고 그 소리에 생각을 실어 말이 되게 한다. 말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글이며 말과 글이 가장 아름답게 이루어진 것을 문학이라 부르고 그 문학의 최초와 최후가 시이다. 시는 말 중의 말(詩=言+寺)로서 시와 비시(非詩)를 가늠하는 저울추를 운율(韻律)이라 하여 문학은 우선 리듬을 담은 운문(韻文)과 그렇지 않은 산문(散文)으로 나뉜다.  바벨탑의 상징은 세상이 수많은 무리들로 나뉘고 그 무리들은 각기 다른 말을 한다는 이야기로 민족과 민족언어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 민족언어는 그 해당 민족의 제일 주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특징이다. 하나의 민족은 역사, 지리, 문화의 사회학적 공통성과 함께 피부, 골격, 체질 등 생리학적 공통성을 지니고 있는데 민족언어는 이 모두를 함께 아우르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민족마다 발성법이 다르며 이 자기만의 발성법은 그 민족 나름의 호흡에 의한 성대의 울림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 민족의 언어에는 그 민족의 숨결과 함께 그 민족의 문화, 풍습, 역사와 전통 모든 것이 스며있어 이를 일러 그 민족혼의 가장 기본적인 염색체(DNA)라고 말한다. 따라서 민족언어를 잃은 민족은 모든 것을 잃은 민족이며 역사 속에 버림받고 현실속에 사라진 민족이라고 말하게 된다.  시는 리듬 속에 모든 것을 담아낸다. 모태의 시간을 넘어 아득한 태고로부터 한줄기 핏줄을 타고 흘러온 맥박과 숨결이 시인의 호흡에 이어져 민족어의 운율로 리듬을 타게 된다. 훌륭한 시인이란 이 리듬에 자기 숨결의 호흡을 맞추는 자이며 이 리듬에 자기 심장의 박자를 맞추는 자이다. 조상의 숨결에 핏줄을 대고 그 맥박에 박자를 같이 하여 가슴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리듬이 입에 올라 스스럼없는 경지에 이르는 자, 그 리듬으로 조화로운 운율을 엮어내는 자가 시인이다.  2.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걸어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김춘추)》라는 시구가 있다. 언어는 기표와 기의 즉 말을 이루는 소리 부분인 시니피앙(significant)과 개념을 나타내는 의미 부분인 시니피에(signifier)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름은 그 기표와 기의를 통하여 지칭하는 대상의 형태 및 속성을 지시한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우선 불러주는 이름으로 하여 세상에 존재한다. 해, 달, 별과 꽃과 나비 모두는 그 불러주는 이름에 의하여 우리들에게 인지된다. 물론 《이름값을 못하는 것》도 있고 《이름과 영 다른 것》들도 있지만 그것은 우선 그것 먼저 이름표를 가진 것들과 구별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일 뿐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스러운 것들은 사랑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있다. 민들레, 채송화, 들장미, 함박꽃과 나비, 잠자리, 귀뚜라미, 금붕어와 다람쥐, 꾀꼬리, 종달새와 토끼, 거북이, 사슴… 이들의 이름을 불러보아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습들이 눈앞에 금방 떠오를 것이다. 또 코끼리, 반달곰이나 호랑이, 사자를 불러보아라. 그에 걸맞은 모양이 눈앞에 우렷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 누나와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불러보아라. 가슴 가득 따스한 감동이 물결을 칠 것이다.  머리와 가슴속에 식물과 조류, 곤충류, 어패류와 여러 동물들의 이름을 늘 넣어 다니라. 오늘을 같이 살고 있는 주변 사람이든 역사를 살고 간 옛사람이든 소설이나 드라마 속의 가상적 사람이든 아무튼 그대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들을 항상 불러보라. 그리고 그 모두와 말을 걸어라. 사람이든 다람쥐든 민들레든 또는 나무든 돌이든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걸어라. 수많은 인연이 생겨나고 수많은 이야기가 엮어지고 수많은 감동이 물결 칠 것이다.  우리 겨레는 원래부터 동구 밖 성황당아래의 돌무더기에서부터 집안의 부엌과 뒤 뜰 장독대에 까지 각기 맡은 신들이 따로 있으며 그들을 불러와 말을 나눌 줄 알았다. 유일신적이 아닌 범신론적인 의식을 가지고 세상만물에 모두 신이 있으며 그들 모두와 친해 함께 살아가는 재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서로의 느낌과 경험을 공유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걸어라. 그것들이 마음속으로 다가 올 것이다.  3. 거꾸로 보고 뒤집어 보아라.  하늘이 있고 땅이 있으며 해가 있고 달이 있다. 낮이 있고 밤이 있으며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다. 오른 쪽이 있고 왼쪽이 있으며 바른 것이 있고 그른 것이 있다. 세상은 원래부터 이렇게 자기의 짝을 하나씩 가지고 생겨났다. 세상만물은 모두 상대적인 존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한 쪽만 바라보고 살아왔다. 사물의 뒤편, 반대편의 것은 보지 못하고 아니 보려고 하지 않고 살아왔다. 산이 있고 그림자가 있는데 산만 보고 그림자는 보지 못하거나 그림자만 보고 산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시작은 어느 것의 끝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며 그 끝은 또 새로운 시작을 품고 있다. 정지는 운동의 다른 한 형태이며 운동은 수많은 정지상태가 이어져 이루어 낸 것이다. 나무가 걸어 다니고 사람이 돌이 된다. 물고기가 하늘을 날고 새들이 바다에서 헤엄을 친다. 이렇게 발상의 전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한번 거꾸로 보고 뒤집어 보라. 추상을 구상으로 유기물을 무기물로 또는 그 반대로 생각해 보라. 이것이 메타포(metaphor) 즉 은유와 암유이며 난센스와 아이러니(반어)이며 알레고리(풍유)의 미학이며 패러독스(역설)에 접근하는 길이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어떤 사물을 대할 때, 어떤 현상을 접할 때, 어떤 생각을 할 때 직선적이거나 평면적이 아닌 입체적인 3차원 또는 그 이상의 사유를 진행하며 문제대상의 정면뿐이 아닌 뒤면, 측면과 그보다 많은 면을 동시에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같은 한 그루의 나무를 보더라도 항상 바라보던 시각이 아니라 한번 물구나무서서 올려다보거나 그보다 높은 곳에 올라 내려다보아라. 대뜸 풍경이 바뀌어 질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의 창문을 열어 일반인들 눈으로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풍경을 찾아내어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시인이 마땅히 해야 할 몫이 아니겠는가. 새로운 시각을 찾아 거꾸로 보고 뒤집어 보라는 것이다.  4. 바람을 보는 눈을 가져라.  우리는 세상을 오관을 통하여 느끼고 받아들인다. 외부의 각가지 신호를 눈, 귀, 코, 입과 피부로 느끼고 그것을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감수하고 판단하고 대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밖으로부터 받아들인 신호들 가운데서 시각으로 받아들인 신호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 옛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하였다. 객관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여러 가지 감각들 중에서 시각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말일 것이다.  보라. 밖으로 세상을 보고 안으로 마음을 보라. 보이는 것을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 눈을 떠서 보이는 것만 보아서는 아직 시인이 아니다. 당신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내 눈엔 훤히 보이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 중 하나가 바람을 보는 눈을 가지는 것이다. 바람은 꽃잎을 흔들어 존재를 나타내고 깃발을 펄럭이어 가는 길을 알려준다. 언덕이 파랗게 물들어지면 봄바람의 아랫도리가 보이고 들판이 누렇게 물들어 가면 가을바람의 뒤 잔등이 보인다. 바람은 이렇게 비유로 말하고 바람은 이렇게 상징으로 말한다. 바람은 A를 그냥 A라고 말하지 않는다. 바람은 A는 B이며 C이며 D이며 그 밖의 또 다른 무엇이라고 말한다. 바람은 제 곁의 다른 것을 흔들어 자기를 나타낸다. 이 모두를 바로 보려면 우선 바람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할 것이다. 바람의 무게, 바람의 향방, 바람의 색깔, 바람의 모양을 바로 알아보는 눈을 반드시 가져야 할  것이다.  바람은 자기를 보여주지 않지만 늘 우리 곁에 있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언제나 우리의 곁에 있다. 사랑은 사랑이 만들어 낸 창조물로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눈빛에 비껴 사랑하는 이의 웃음에 담겨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바람을 보는 눈을 가질 때 사랑의 눈이 떠지게 될 것이며 시적 안목도 비로소 열리게 될 것이다.    5. 언제나 나에서 비롯하라.  한편의 훌륭한 시가 한 시대의 정서를 기록하여 위대한 예술품으로 살아있게 되는 것은 시인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한 그 시대의 강렬한 빛줄기가 남겨놓은 흔적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민족의 참담했던 시기를 김소월과 박팔양, 이상화, 이육사, 윤동주등 개개인의 시인을 통하여 느끼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는 김소월의 서정을 이육사의 《절정》에서는 이육사의 격정을 각기 다르게 받아 안게 된다. 같은 시대를 살다간 시인들이지만 그들의 마음을 각기 통과한 시대적 아픔은 각기 부동한 시편을 남겨 놓았고 그것은 다시 다 같이 천고의 절창으로 되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여야 오늘의 시대적 정서가 화인처럼 찍힌 시편을 남겨 백년 뒤에 오는 세월을 감동시킬 것인가. 우리의 시는 현재를 위해 씌어지면서 또한 미래에 읽힌다고 한다. 시인의 창작작업은 모든 예술작품의 창작작업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창작물이 장구한 예술적 생명을 지니기를 갈망하게 된다. 두보, 리백과 같이 송강이나 황진이처럼 그리고 상기의 소월, 상화처럼 오래 읽히고 길이 남는 시를 쓰고자 한다.  여기에 정답이 있을까. 나는 그저 언제나 나에서 비롯하려 한다. 세상은 나로 하여 존재하며 모든 느낌은 나만의 느낌이기 때문이다.
573    시인 - 송미자 댓글:  조회:4654  추천:0  2015-03-08
송미자시인의 첫시집 《당신의 이름으로》출간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0-05-23 10:29:54 ]  5월 22일 오전, 연변시인협회의 주최하에 강동회관에서 《송미자 시집 〈당신의 이름으로〉출간기념회》와 송시인의 제의로 이루어진 《제1회 푸른 오월 시랑송회》가 1, 2부로 나뉘여 진행되였다. 1998년에 《연변일보》에 《고드름》과 《작은  풀》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고 2007 계간대한문학세계 겨울호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등단한 송미자 시인의 첫 시집 《당신의 이름으로》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되였다. 출간기념회에서 송시인이 선배시인들과 가족에 감사를 드리고 있다. 다년간 한국에서 고된 일을 하면서 시에 미쳐 시공부를 견지했다는 송미자는 생활을 바탕으로 인생에 접근하는 시들을 많이 창작하여온 시인이다. 《꽃이 피는 소리》, 《사랑쏘나타》, 《민들레고향》, 《서울의 겨울》, 《비누방울과 아기와 꿈과 인생》, 《당신의 이름으로》 등  6부로 된 시집에는 10여년간 송미자시인이 창작한 84수의 주옥같은 시와 연변대학 김관웅 교수의 평론 《인생을 위한 시》가 함께 수록되였다. 이번 행사에는 연변작가협회와 연변시인협회 회원, 녀성시인협회 회원 그리고 연변대학 종소리문학사 회원들 도합 50여명이 자리를 같이 하였다.
572    시인 - 김경희 댓글:  조회:4605  추천:0  2015-03-08
    해란강문학상 수상자 김경희(오른쪽 첫사람), 량영철 (가운데 사람), 리선애부친(왼쪽첫사람 대신수상자)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19일 오전 일변일보사에서는 13년째 한국 CJ그룹과 함께 펼치는 해란강문학상, CJ상 시상식을 가지고 수상자들에 대한 축하, 격려와 더불어 문학인들 함께 하는 문화축제의 뜻깊은 장을 마련하였다.  이번 시상식의 CJ상 본상에 안도현 량병진 신흥촌의 농민시인 김일량의 시 《여름산은 새소리 따라간다》 , 해란강문학상에 량영철의 단편소설 《비 오는 날의 그래픽》, 김경희의 수필 《계절은 소리없이 다가오나봅니다》, 리선애의 수필 《리별의 연길정거장》등 작품들이 당선되여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마음을 비우고 고향의 청산록수를 친구 삼아 써낸 김일량시인의 자연에 대한 깊은 관찰력과 탁월한 언어구사력, 도시화 산업화의 길목에서 리상과 현실의 처절한 갈등을 겪고있는 조선족사회의 허탈하고 무기력한 일면을 집어낸 량영철작가의 깊은 통찰력, 삶과 죽음사이의 철리를 음미하는 김경희의 철학적 고민, 아름다운 륜리도덕과 현실병페의 모순속에서 그 대안을 찾고있는 리선애의 작가적 정신 등이 각기 수상의 리유로 지목되였다.  《작가는 결국 작품으로 산다》는 중국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조성일 회장의 축사, 문학의 힘은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힘,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 치렬한 삶을 살아가는 작가들에 대한 연변문련 전순자당조서기의 격려, 연변일보사와 함께 13년간 민족의 얼과 자주성을 이어가는 행사에 변함없이 동조해왔고 또 앞으로 10년, 대를 이어 계속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CJ그룹 중국본사 홍성일씨의 다짐, 그런 민족그룹에 고마움을 전하는 연변일보사 리영사장의 감사패증정 등 행사는 민족문화사업에 몸담그고있는 참가자 모두에게 새로운 동력을 심어주었다.                                   (인터넷 길림신문 김청수 기자)
571    시인 - 리순옥 댓글:  조회:5331  추천:0  2015-03-08
2009-09-16 13:51:00,      리순옥시집 출판 6월 8일 연변조선족녀류시회 리순옥회장은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를 방문하여  문화교류와 더불어 자기의 첫 시집 를 조성일회장을 비롯한 추진회 임직원에게 기증하였다. , 한국 '시와산문사'에 의하여 출판된 리순옥의 시집 는 1.바다  2.사람  3.향기속의 이름  4.산에 서면  5.사랑, 그 먼 이름에 6.령혼의 그늘아래 등 6부로 나뉘여 엮어졌다. 리순옥은 1962년에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전업, 연변간호학원 졸업하고 지금은 '연변의학' 잡지사에서 편집으로 사업하면서 시창작에 정진하고있다. 그는 시문학탐구회 우수상, 우수상 등 여러가지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리순옥은 지금 연변작가협회 회원, 연변조선족녀류시회 회장으로 문단에서 활약하고 있다.  오는 6월 17일 오후 3시 연변개원호텔에서 연변작가협회 시창작위원회 주최로 를 개최하게 된다.                                                                                                    KCC   기자 문신                                                          (ㅡㅡㅡ좌측  리순옥 시인) ========================================== 옥천문화원과 중국 연변작가협회는 제19회 연변지용제 지용문학상에 리순옥(53·여·중국 지린성 화룡현)시인의 시집 '피빛두만강-나는 누구인가'를 선정했다. 이 작품에는 리 씨의 5년에 걸친 룽징시, 투먼시, 옌지시, 장백산 등 중국일대 자료수집과 답사를 통해 이민족으로서의 조선족의 삶과 한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이 담겨져 있다.  그녀의 작품은 우리민족의 어제와 오늘과 미래에 대한 끈질긴 탐구로 여성적 섬세함과 생활적 접근의 옷을 입고 전통시가의 맥을 이었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65편의 두만강을 주제로 해 자칫 고루하고 따분한 표현에 갇힐 수 있는 긴 시를 옛날의 풍경과 정서로 차분히 그렸고, 우리 민족의 역사를 시로 개성있게 승화시켰다는 설명이다.  이번 문학상 심사는 연변작가협회의 회원들이 맡았다.  이 상은 옥천문화원이 연변 교포 문학인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키 위해 발표된 시 중에 우수작을 선정해 시상하고 있으며 시집 1000권 발행권을 부상으로 준다.  현재 연변작가협회 이사로 활동 중인 리씨는 시집 별빛 그먼 그리움에, 하늘 그리고 령혼빛찬가와 문집 바람처럼 물처럼을 출판했다. 한국재외동포문학상시우수상,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시본상, 길림신문 두만강문학상시본상,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회 우수상 등 문학상을 여러차례 수상한 경력이 있다. 한편, 시상식은 다음달 (2015년) 9월 8일, 옌지시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홀에서 열리는 제19회 연변지용제 개막식장서 개최된다.  옥천=박병훈 기자  ====================== 19회 중국 연변지용제에서 김승룡(오른쪽) 옥천군문화원장이 지용문학상에 선정된 리순옥 시인에게 꽃다발을 수여하고 있다. [충북일보=옥천] 중국 연변에서 열린 '19회 연변지용제'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원장 김승룡), 중국연변작가협회(주석 최국철)가 공동으로 한 이번 연변지용제는 지린성(吉林省) 옌지(延吉) 일원에서 지난 (2015년) 9월 7일부터 12일까지 개최했다. 연변지용제는 정지용 시인을 기리기 위한 문학제로 정구건 옥천군기획감사실장, 김승룡 문화원장, 안효익 군의원, 최대철 농협옥천군지부, 한경환 옥천교육지원청 교육지원과장, 옥천군문인협회, 일반인 등 50여명의 방문단이 4회 연변지용백일장, 19회 연변지용제, 정지용 문학기행 등을 함께했다. 이 문학제는 옥천문화원과 중국연변작가협회가 옥천 출신인 '향수'의 시인 정지용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유망한 동포 문학인 발굴과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매년 연길시 일원에서 열리는 민족문학축제다.  연변지용제 및 역사문화 탐방단은 7일 연변대학사범분원서 400여명이 참여한 연변지용백일장 개막식을 관람한 뒤 8일 연변대학예술학원 예술극장에서 열린 지용제를 차례로 참석했다. 정구건 기감실장은 인사말에서 "김영만 옥천군수를 대신해 참석하게 됐으며 연변지용제가 벌써 19회가 돼 뜻깊다며"며 "중국의 동포사회에 지용시인의 문학정신을 지속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도록 우리모두가 노력하자"고 강조했다.  이어 최국철 주석은 "옥천군과 문화원 등의 지원으로 연변지용제가 벌써 19회째가 됐다"며 "내년엔 20회인 만큼 성공행사가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1·2부 행사로 나누어 열린 이날 지용문학제는 '피빛 두만간-나는 누구인가'로 지용문학상에 선정된 리순옥(53·중국 지린성 화룡현) 시인에게 상장과 시집 1천여권 발행이 부상으로 수여됐고 앞서 열린 지용백일장 수상학생 50명에게도 상금과 상장이 주어졌다.  아쉬움을 남긴 이들 일행은 행사가 끝나고 윤동주 시인 생가와 9일 백두산 천지 답사, 10일 광개토왕비와 장군총을 11일에는 정지용 시인의기행문인 '화문행각' 작품을 썼던 단둥( 丹東)으로 문학기행도 했다.  마지막 날인 12일에는 안중근 의사가 수감됐던 ' 뤼순감옥', '안중근 박물관' 등을 관람하고 귀국했다. 김승룡 문화원장은 "이번 연변지용제는 연변작가협회, 탐방단 등의 협조로 성황리에 마무리 하게 됐다"며 "내년 20회 연변지용제는 지금까지 부족한점을보완해 더욱 알차고 내실있게 준비토록 하겠다"고 밝혔다.  옥천 / 손근방기자
570    시인 - 최기자 댓글:  조회:4230  추천:0  2015-03-08
최기자 시집 출간 2007-02-14 16:44:42     최기자 시집 출간의식이 2월 7일 연변시인협회와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의 주최로 연길에서 있었습니다. 최기자시인은 이 될 꿈을 가졌다가 시기 농촌에 내려가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는 두 아이 엄마로 된후에 학교를 다녔습니다.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30녀 년래 글농사에서 주렁진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최기자시인은 선후로 중국조선어문 잡지사 부주필,연변조선족녀류시회 초대회장,사단 법인 연변조선족어머니수필회 초대회장 등 직무를 역임했으며 , 시탐구회 우수상을 획득했습니다. 이번 시집 는 거창한 소재를 다룬것이 아니라 시인자신의 주변의 사실 ,가족관계를 다루면서 인간의 존재론적 문제와 인생살이를 묻혀내고있으며 자기의 인생철학과 지조의 미학을 치렬한 삶의 양태,사랑의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최기자시집 《고독은 페경이 없다》 출간     2014년12월01일 09시21분       최기자시인의 두번째 시집 《고독은 페경이 없다》가 일전에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판되여 독자들과 대면하였다. 지난 2007년에 《아침에 머리카락 줏는 녀자》를 펴낸데 이어 7년만이다.   시집에는 근작시 90수와 이미 발표된 가사 20수를 《세월이 치매를 앓다》, 《외짝장갑들은 어디로》, 제3부 《고독은 페경이 없다》, 《그 리유 알때에야》, 《어찌 가히 하늘 우러르지 않을가》, 《노래말 묶음》 등 6개부로 나누여 수록하였다. 연변대학 김관웅교수는 평론 《고독과 시쓰기》에서 《고래희를 지척에 앞두고 펴내는 초기자의 이 시집은 그으 이전의시집이나 수필보다 인생의 본질에 대한 사색이 훨씬 깊어졌고 문학적인 표현도 훨씬 세련되여 문학적품위가 월등하게 높아졌다》고 평가하였다.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를 졸업하고 《중국조선어문》잡지사 부주필로 근무하다가 퇴직한 최기자시인은 연변조선족녀류시회 초대회장, 연변조선족어머니수필회 회장 등을 력임한바 있으며 연변일보《해란강문학상》, 《두만강여울소리》시탐구회 우수상, 《전국가요콩클상》 등 다수를 수상한 경력이 있다.        
569    시인 - 석화 댓글:  조회:5047  추천:0  2015-03-08
    석화 시인 프로필       석화(石華) 약력:   1958년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출생. 중국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부 졸업, 한국 배재대학교 인문대학원 석사졸업, 현재 동 대학원 박사과정 중 연변인민방송국 문학부 주임역임, 월간《연변문학》한국서울지사장 역임. 연변작가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회원. 연변작가협회부주석.     시집: 《나의 고백》, 《꽃의 의미》, 《세월의 귀》연작시 > 외.   수상: 《천지문학상》, 《지용시문학상》, 《해외동포문학상》외.   일본서 석화 시인의 시 연구를 중심으로 한 문학 석사학위 논문 제출이 화제가 되는 가운데,  그의 시가 지난 2월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이 수록,   이어 두번째로 또 석화시인의 시 가요 《정다운 고향(작곡 김승철)》이 국정교과서인 소학교음악교과서 4학년 하권에 수록되었다.  2005년 12월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새로 편찬하여 출판한 이 교과서  는 전국조선문교재심사위원회에서 심사하여 발행하는 의무교육조선  족학교교과서이다. 중국 내 조선족학교에서는 의무적으로 이 교과  서를 사용하게 되며 모든 학생들은 이 교과서의 내용에 따라 수업  을 받게 된다.  석화시인이 가사를 쓴 이 가요작품은 소학교음악교과서 4학년 하  권 제 2과(7페이지)에 수록되었다. 작곡자는 현재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음악프로듀서를 담당하고 있는 김승철PD, 김PD는2003년 50회분 대형음악시리즈 《우리 노래 50년》을 제작, 방송한 공로로 한국방송공사(KBS)의 해외방송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석화시인의 작품이 국정교과서에 수록되기는 2005년 2월에 발행된  중학교 어문교과서 7학년 하권에 편찬된 시 《연변》에 이어 두 번  째이다.  ================  정다운 고향  작사 /석화  작곡 /김승철  잠자리 나래 접는 울바자 아래서  병아리 나래 접는 정다운 고향  그리운 동년을 묻은 곳  언제나 언제나 잊을 수 없네  아 내 고향  그립고 정다운 내 고향  쌍제비 둥지 트는 처마아래서  고추다래 빨간 정다운 고향  어머니 사랑이 깃들은 곳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네  아 내 고향  그립고 정다운 내 고향  앞마을 논벌에 달빛이 흐르면  개구리 합창하는 정다운 고향  꿈마다 찾아가는 그리운 곳  그 어데 가 있어도 잊을 수 없네  아 내 고향  그립고 정다운 내 고향  맑은 물 굽이도는 시냇가에서  버들피리 꺾어불던 정다운 고향  못 잊을 추억이 샘솟는 곳  세월이 흘러도 있을 수 없네  아 내 고향  그립고 정다운 내 고향   조선족 시인 석화, 그와 잠시 걷다 ㅡ시집 를 가방에 넣고                                                                                    서석화         1. 같은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의 시인을 평가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한 권의 시집만으론 지극히 일차적인 형식비평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형식주의 비평은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 작품에 다루어진 사회상, 혹은 그것이 미친 영향 등을 세밀히 분석하고 평가하는 역사주의 비평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일찍이 엘리어트는 "시란 시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닌 시 자체"라고 하여 시를 그 무엇으로부터도 독립된 하나의 '자율적 구조체'로 보았던 형식주의자들의 견해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비평가가 작가를 버리고 작품만을 존중한다면 결국 문학 작품의 자리를 작가 쪽이 아니라 비평가 혹은 독자 쪽에 둔다는 위험을 떠안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어떤 작품이고 그것의 잉태는 여러 정황들의 필연적인 교접에 의한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따라서 그 돌파구 가운데 하나는 작품을 보되 작품의 기저에 있는 여러 상황을 함께 볼 수 있는 관심일 것이다. 개인이 사용하는 언어나 그것을 끌어들이는 감정의 이면에는 그 사람의 삶을 말해주는 역사적인 필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논하고자 하는 시인은 중국 조선족 3세 석화다. 1958년 중국 룡정 출신으로 다른 조선족들보다 비교적 넉넉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1982년 연변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뒤 월간 편집을 맡았다.   등단과 함께 '천지문학상', '두만강여울소리시인상', '진달래문학상', '해란강문학상', '장백산문학상', '아리랑문학상', '압록강문학상', '도라지문학상' 등 연변 자치 주, 성, 국가 급의 문학상과 문예상을 50여 회나 수상함으로써 연변 조선족 사회에서는 일찌감치 자리매김을 확실하게 한 동포 시인이다. 1989년 시집 가 '지용문학상'에 당선됨으로써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 조선족 사회의 대들보 시인이 된 것이다.   시인 석화의 시를 읽기 위하여 필자는 우선 그들 사회에서 활동하는 다른 조선족 시인들의 시를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 치를 어렵게 구했고 참을성 있게 읽어나갔다. 같은 땅 같은 사회에서 이민족이라는 동질의 정서를 같이 노래하는 동료 시인들의 시들을 보지 않고선 시인 석화에 대한 본격 오독의 실수를 면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던 것이다.   그들의 시는 한국시 고유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정한에 뿌리 한 서정성에, 스토리 위주의 시가 일색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칫 깊이 있는 정신의 사유라든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수용의 긍정성을 떨어뜨리는 위험 인자로 작용하는 동시에, 혼자만 갖고 노는 자족의 놀이라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물론 그중엔 황춘옥의 이라든가, 리중의 같이 현대시가 지양해야 할 교과서적인 시 정신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더러는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일상, 그것도 과거에 대한 회상이 주조를 이루고, 자연 현상 하나에도 억지 의미를 돌출해내려는 무리한 감정이입으로 인해 영탄조의 범주 안에 머물게 하는 그들의 시를 보며 필자는 귀하게 얻은 석화의 시집에 나름의 변별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기쁨이었다.   마침내 필자는 동시대를 살고 있으면서 동명의 이름을 가졌다는 남다른 친근함으로 그의 시의 눈과 마음과 심장을 열어보기로 했다. 같이 시를 쓰는 입장이라는 팔자론도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자, 태어나고 자란 곳 그리고 삶의 뿌리가 나와 다른 그가 살고 있는 연길이라는 지역을 탐험하며 조심스럽게 그의 시집 를 열어보자. 이로써 필자는 엘리어트의 말에 약간의 반기를 든 셈이다. "시는 시 그 자체"에다 "시인을 둘러싼 정황 엿보기"를 곁들인 또 한 번의 오독을 용서하시라.   2.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네   우선 그의 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언어의 평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길이라는 사회가 주는 낙후된 풍경이 그의 시에서는 거부감 없이 나타난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필자가 십 년 전 초청으로 동료 시인들과 연길에 갔을 때 우선 느꼈던 점은 발달 이전의 소도시 모습이었다. 1970년대 국내 소도시 풍경을 영화 세트장에서 보고 있는 듯, 생경하면서도 많이 봐왔던 우리네의 옛날 풍경이 거기엔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베이징과는 도저히 같은 나라라고 할 수 없었다. 서울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세련되고 싱싱한 베이징의 풍경. 전설 속을 헤매다 갑자기 뚫고나온 사람처럼 당혹감과 슬픔이 동시에 몰려왔던 기억이 새롭다.   낮은 건물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달린 간판들과 불균형의 글씨체, 그 속을 오가는 빨간 택시들과 택시 수보다 더 많은 자전거들. 그리고 40도를 넘는 폭염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상의를 벗어 던진 런닝 차림의 남자들이 나른한 표정으로 길가를 걸어 다니거나 아무데나 돗자리를 펴고 누워 잠든 모습들. 쉽게 '촌스럽다'고 말해버릴 수 없는 연길 풍경 속에서 같은 민족이라고는 하나 우린 서로에게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언어는 시대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 석화가 가지는 언어의 평이성과 또 나름대로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기법의 시도는 연길이라는 사회의 특수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제대로 읽을 수 없으며, 필자에게 주어진 한권의 시집만으론 도저히 납득 불가능한 그의 화려한 수상 경력 역시 연길과 조선족이라는 두 개의 화두를 풀고서야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각 나라마다 수많은 문학상이 존재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시인이 50여 회나 상을 수상했다는 것에서 필자는 일차적으로 모국을 떠나 있는 사람들의 지독한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상이란 건 축제의 행사이고 축제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을 일시적이나마 하나로 묶는 의미가 있으니 말이다. 시인 석화가 수상한 상의 이름이 모두 모국인 한국의 지명이나 산하를 딴 것이라는 것만 봐도 그들, 조선족 시인들이 가지는 향수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여러 정황들을 이해하고 나서야 필자는 중국 조선족 시인 석화의 시를 형식주의가 아닌 미력하나마 역사 전기적인 입장에서 그의 시가 주는 울림을 동포의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시에 사용된 띄어쓰기나 철자법, 행갈이 등은 원문 그대로 옮겼다. (참고로 이 글은 수년 전 필자가 대학원 재학 중에 임헌영 교수님께 레포트로 제출한 것을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힌다.)   3. 느리게 그러나 같이    그의 시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조국을 떠나 남의 나라에 살고 있는 이방인의 향수가 주조를 이룬다. '도문을 가며 3'이라는 부제가 붙여진 이라는 시를 보면 그런 그의 심경이 극명하게 나타난다.   기실 모두가 저쪽에서 건너온 것이지만 지금은 그저 바라보고있을수밖에 없다   엷은 안개가 가물가물 피어오르는 한줄기 강물, 먼 서쪽나라의 어느 하늘밑을 흘러가는 요단강처럼 우 리는 누구나가 다 한줄기 강물을 갖고 있다   피안 혹은 대안이라 부르는 저쪽켠의 강기슭 아슴푸 레 바라다보이는 저쪽 기슭으로 늘 건너가보고싶지 만 피와 살과 뼈가 너무 무겁다   기실 모두가 다 다시 저쪽으로 건너갈것이지만 지금 은 그냥 그저 건너가보고싶은 생각뿐이다   지금 저쪽 기슭에서 이쪽을 건너다보고 계실 어느 분도 이와 같은 시를 쓰고 있을까                    - 시 전문     피안이란 불교에서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는 일, 또는 그 경지를 말한다. 시인은 그곳에 고국을 두고 있다. 태어나고 자란 곳은 아니지만 이민족이 가질 수밖에 없는 마음의 정처 없음과 본질적 그리움이 이 시의 주조라고 말할 수 있다. 3연에서 "저쪽 기슭으로 늘 건너가보고싶지/ 만 피와 살과 뼈가 너무 무겁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것은 이미 타국에서 정착된 시인의 삶의 뿌리가 너무 깊어 고국이 그리워도 그곳으로 옮겨 심을 수 없다는 한탄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비단 그만의 한탄은 아닐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남의 나라에 뿌리내려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남의 나라라는 현재의 거주지 사이에서의 방황은 공통분모가 아니겠는가.   시인 자신을 형상화한 시로는 이라는 시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센티멘탈한 서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 이 시는 현대 연길 조선족 시인들의 공통적인 시풍이 그대로 배어 있다.     가는길 길손이라 갈길 바빠도   다시 돌아 눈길주며 외우는 이름   어느날 내 이허물 다 벗어놓고   너처럼 피어나랴 이 천지간에     - 시 중에서     그러나 시인 석화에게선 다른 조선족 시인들과 차별되는 점이 있으니, 그것은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형식과 소재의 참신성이다. 이라든가 연작시가 바로 그것인데 에 수록된 다른 시인들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그의 실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자본주의 세례를 받아 물질문명에 편승된 자아의 울림이 뿌리 깊은 향수와 정한을 채색하며 그의 앞으로의 시의 행보를 말해준다.     포도주 오렌지주스 혹은 랭커피 그 이름으로 그는 다시 명명된다       - 시 중에서     철근+시멘트+타일+...+땅= 벽체       - 시 중에서     1,2,3,4,5,6,7,8,9,10이 차례로 나와서 라고 했다 나는 라고 했다 라고 한다 라고 한다              - 시 중에서     자기가 나비인지 나비가 자기인지 누구는 모르겠다 고 했다지만 내가 지금 도대체 정말 무엇 인지 모르겠다 필경 전생에 걸상이나 전화기나 유리창이나 그러한 것들은 아니였겠는데 마주보이는것들은 모두가 딱 딱하고 빤질빤질하고 윤기도는것들뿐이다 개나 돼지나 그와 같은 것들은 하나도 없다             - 시 중에서   위에 인용한 시들은 필자에게 새롭게 도래한 세계를 향한 시인의 시상 확대가 얼마만큼의 표현의 지진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엿보게 한다. 조선족 시인 석화의 특출성은 여기에 있다. 어쩔 수 없이 뿌리 깊은 사회주의적 미학 의식에 바탕을 뒀다고는 하나 새로운 문명 즉 모더니즘적인 요소를 실험하고 있는 그의 시야말로, 조선족의 시가 중국 본토의 시에 비해 형편없이 질이 떨어진다는 혹평을 거둬낼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필자는 그의 화려한 수상 경력에 박수와 함께 동의를 보낸다.   4. 외람된, 그러나 뜨거운   내밀한 정서의 공감만으론 폭넓은 독자와의 의사소통을 기대할 수는 없다. 시가 일방적인 읊조림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치열한 인식과 구체성, 그리고 사물을 바라보는 항상성 유지, 이 모든 것이 결합된다면 조선족 시인 석화는 왕성한 시작 활동과 더불어 우리에게 더 많은 좋은 시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언젠가 모 문학잡지에서 어느 시인의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좋은 시는 좋고 나쁜 시는 나쁘다!" 필자는 선승의 화두와도 같던 그 짧은 문장에 지금까지도 혼란과 함께 주눅이 든다.   잘쓴 시와 못쓴 시에 대한 구별이나 판단은 어느 정도 보편적 수준에서 가능한 일이나, 어떤 시가 좋은 시고 또 어떤 시가 나쁜 시인지는 이십 년 가까이 시를 써오고 있는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다. 그것이 늘 숙제다.    “천지꽃”, 시인의 백년 묵향이 피어나다   글 / 김호림     특기할 일이었다. “천지꽃”이 남쪽 나라 한국에 피어났다. 천지꽃은 진달래를 이르는 조선 함경북도의 방언이다. 이 낱말은 현재로선 거의 연변 일대에서만 통한다. 그런데 “천지꽃”이라는 이름이 한국 교육과학기술부의 검정을 거친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버젓하게 나타났다. 시인 석화의 작품 “천지꽃과 백두산”이 교과서의 과목으로 수록된 것이다. 한국의 교과서에 이처럼 연변 조선족시인의 작품이 등장하는 것은 백년에 한번 피는 꽃처럼 전설로 불릴 정도. 기실 석화의 작품은 교과서에 실린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벌써 여러 편의 작품이 중국의 각종 문학선집과 중소학교의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연변문학예술연구소, 연변대학 등 국내의 유수의 문학예술연구기구와 한국, 일본 등 국외 문학예술연구기구는 이미 석화의 문학창작현상과 작품세계를 연구하고 있다. 석화는 중학교 시절이던 1976년 처녀작을 발표해서부터 지금까지 3천여수의 시를 창작했으며 “나의 고백”을 비롯하여 4부의 시집을 출판, 해내외 각종 문학상과 문예상을 30여차 수상했다. 거기에는 “천지문학상”, “장백산문학상”, “진달래문학상”, “지용시가문학상”, “전국대중가요작품상”, “해외동포문학상” 등이 망라된다. 석화는 조선족시단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일찍부터 해내외에 연변의 “천지꽃”의 향기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의 월계관을 쓴 애송이 1976년 5월 9일은 시인의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저의 첫 작품이 ‘연변일보’에 발표된 날이지요.” 석화는 그제 날의 감회에 잠긴 듯 잠깐 말을 멈춘다. 그날 담임교원 한병춘은 제자의 시가 실린 신문을 학교의 여러 교학연구실마다 들고 다니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다고 한다. 하긴 그럴 만 했다. 신문이나 잡지가 지금처럼 많지 못했던 그때 지면에 작품을 싣는다는 건 “하늘이 별 따기”와 다름이 없었다. 더구나 “연변일보”는 중국 조선족사회의 권위적인 일간지로 여간해서는 넘보기 힘든 간행물이었다. 또 문학도라는 이름 하나로도 선망의 대상이 되던 그 시절의 독특한 풍토였다. 그런데 아직 중학생인 열 일여덟 살의 애송이가 혜성처럼 홀연히 문단에 등극했던 것이다. 한병춘 선생은 바로 석화가 시인으로 성장하는 길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길라잡이였다. 석화는 1958년 대약진 운동 시기 룡정에서 태어났다. 정치운동은 그의 소년기에도 숙명처럼 계속 이어졌다. 훗날 화룡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던 지난 세기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은 동란의 “문화대혁명” 시기였다. 이때 물질적인 배고픔이 있었고 또 정신적인 배고픔이 있었다. “책이라곤 교과서 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중학교에 올라온 후 갑자기 책의 세계가 나타났다. 한병춘 선생의 저택에 서가가 있었던 것이다. 석화는 마치 꽃밭을 찾은 꿀벌처럼 금세 서가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조선의 시인 조기천, 김소월, 박팔양 그리고 러시아의 뿌쉬킨과 마야꼽스끼, 독일의 괴테와 하이네… 이름만 들어도 현혹할 시인들이 뭇별처럼 한꺼번에 등장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오로지 언어로도 감동을 주는 예술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석화가 시를 읽으면서 받은 감동은 실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는 아예 소설이나 극작품은 한쪽에 밀어놓고 시만 찾아서 읽었다. 조기천의 서사시 “백두산”, 서정시 “흰 바위에 앉아서”, “수양버들”, “조선은 싸운다” 등은 아직도 구구절절 기억에 남아있단다. “백락은 천리마를 알아본다.” 한병춘 선생은 석화를 그의 대학친구인 유명한 시인 김문회에게 소개했다. 석화는 이로써 정식으로 시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나중에 “연변일보”에 처녀작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던 것. 시 문학에 대한 사랑은 연변대학에 입학한 후 개인의 시 창작은 물론 문학동아리 “종소리문학사”의 창립 현장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석화는 “종소리문학사”의 초기 창설멤버의 일원이었다. 그는 친구들과 더불어 자주 시낭송모임을 가졌고 자작시를 강판글씨로 찍어냈다. 석화는 련인처럼 시우와 늘 함께 한다는 그 자체로만도 마냥 즐거웠다고 말한다. 대학의 글 마당에서 갈고 닦은 기예는 금방 나타났다. 대학을 졸업하기 바삐 석화는 시 “벗들아, 우리의 이름은 청춘” 등으로 원숙한 시인의 매력을 발산한다.     시인의 꽃의 “장례식” 대학을 졸업한 후 석화는 연변라디오방송국에 기자, 편집으로 배치된다. 이 기간 그는 짧은 몇달 사이에 6부의 녹음테이프(가사)를 출판하는 실적을 올린다. “유병걸노래집”, “구련옥노래집”, “김은희독창집”, “김상운독창집”, “한해연독창집” 등 유명한 조선족가수의 카세트노래특집의 가사는 모두 그가 창작한 것이다. 솔직히 석화는 음악부의 편집이었기 때문에 가사를 쓰는데 월등한 플랫폼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라면 누구더라도 그 자리에 설 경우 가요창작의 “코기러기”로 될 수 있지 않을까. 일찍부터 시 작품으로 명성을 날린 석화에게는 가수와 작곡가들의 청탁이 한시도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 실제 석화는 방송국 입사 전부터 가사창작에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세월과 더불어 오래오래 전해질 그런 노래를 써볼 욕심이 있었지요.” 흰 눈처럼 깨끗한 사랑과 풋풋한 인정세계를 펼치고 있는 가사들은 금세 작곡가의 마음을 사로잡아 오선보를 탔으며 뒤미처 가수의 감미로운 목청에 실렸다. 이때 석화는 그의 창작생애의 황금기를 맞으며 무려 수백 수의 가사를 창작한다. 가요 “동동타령”, “추억의 노래”, “어머님 생각”, “별과 꽃과 선생님”, “동그라미”, “노래를 부릅시다”, “돌다리” 등 가요는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날이 가고 달이 갔다. 방송국에서 근무한지 거의 20년 세월이 흘렀다. 애석한 그 무엇이 노래처럼 늘 가슴 한구석에 맴돌았고 그것이 풀지 못할 응어리로 되어 점점 커졌다. “작품이 그냥 소리로만 만들어지고 책으로 남지 않는 게 늘 아쉬웠습니다.” 마침 연변작가협회 기관지인 “연변문학”에서 편집으로 초청하는 러브콜이 날아왔다. 석화는 그에게 한때 꿈의 향연을 펼쳤던 방송국을 미련 없이 떠난다. 자칫 “가요의 산원”을 포기하는 것으로 비치는 파격적인 전근이었다. 이 무렵 시인의 “자아”에 대한 고민은 하나의 정상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가 창작한 시들은 행마다 뼈를 깎는듯한 시인의 고뇌를 담고 있었다. 시 “우리는 개인가”, “나는 나입니다” 등등으로 그는 스스로 물음을 연방 제기하고 또 나름대로 그에 따른 대답을 찾고자 방황한다. 그의 말을 빈다면 시와 만나는 과정은 자아를 찾아가고 확인하며 구원하는 과정이었다. 드디어 석화는 시단에서 “나의 장례식”을 치르기에 이른다. 필묵을 던지고 문학석사 학위에 도전장을 냈던 것이다. 어제 날의 “시인”을 묻어버리고 새로운 “시인”으로 도약하기 위한 파격적인 행보였다. 2001년 그는 한국 대전의 배재대학교 인문대학원에 들어갔다. 어린 학생들과 함께 수강했지만 그 시간이 그토록 즐거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모든 학과목에서 A학점을 취득, 드디어 2003년 학위론문 “김조규시문학 연구”로 문학석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 기간 석화는 연변대학의 지인과 함께 서울과 지방의 대학, 문인협회에서 중국조선족문학알리기 세미나를 수십회 조직했으며 한국의 여러 간행물과 신문에 중국조선족문학과 관련한 론문을 십여편 발표했다. 2006년 그는 한국학술정보사에 문학평론집 “시와 삶의 대화”를 출간한데 이어 또 연변인민출판사에 “윤동주대표시 해설과 감상”을 펴냈다. 석화는 어느덧 학자풍의 시인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시인의 백년의 묵향(墨香) 운명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귀국한 후 석화가 창작한 첫 시는 또 “연변일보”에 발표된다. 련작시 “사모곡”이다. 그가 한국에서 공부를 하던 기간 연변에 계시던 양친은 모두 세상을 떴다. 부모에 대한 애절한 사랑은 나중에 시라는 이름으로 맺혀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의 석화의 시는 민족의식과 디아스포라를 주제로 삼고 있으며 예전보다 한결 차원이 다른 사고와 경지를 열어 보인다. 시단에는 석화의 또 하나의 “처녀작”이 샛별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뒤미처 발표된 련작시 “연변”도 “사모곡”과 맥을 같이한다. 련작시 “연변”은 연변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과 연변의 풍경, 풍습을 점점의 풍속화처럼 그려내고 있다. 한국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시 “천지꽃과 백두산”은 22편으로 된 이 련작시의 첫 시이다. 석화는 련작시 “연변”의 창작동기에 대해 “류학시절에 한국에서 그리운 북쪽하늘을 넋 없이 바라보던 시간이 있었다.”고 술회한다. 그리운 산천과 그리운 얼굴들이 흰 구름처럼 비껴있을 것만 같은 하늘이기 때문이었다.     “이른 봄이면 진달래가 천지꽃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피어나는 곳이다…”     진짜 머나먼 북쪽의 하늘아래에는 “천지꽃”의 고향이 있었고 또 연분홍의 “천지꽃”이 피어나 있었다. 석화는 충주(忠州) 석씨의 32대손으로 입북 14대이다. 그의 조부는 8세 때인 1911년 함경북도 부령에서 연변의 룡정 장재촌에 이주했다고 한다. 부친은 장재촌에서 태어나 화룡에서 생활했고 모친은 해주 최씨로 도문 출생이었다. “저의 딸은 또 연길 태생이지요.” 석화는 인터뷰 도중에 외동딸의 자랑을 잊지 않았다. 딸 석현은 아빠보다 훨씬 더 이른 소학교 5학년 때 벌써 작품을 발표, 장편소설 “개구장이친구들”을 선후로 중국과 한국에서 출판했다. 석현은 현재 일본 도꾜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단다. 이처럼 조부가 이삿짐을 풀고 양친과 나, 자식을 양육한 연변에 시인은 한없는 사랑과 그리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마을 뒤산에 낮은 언덕으로 누워 계시고 해살이 유리창에 반짝이는 교실에서 우리 아이들이 공부가 한창이다”     시는 또 연변에서 이주민들이 모여 살면서 집단촌이 이뤄지던 정경을 등장시키며 옛 우물인 “룡두레우물”을 시행으로 끌어들여 연변 조선족의 유구한 역사를 이야기한다. “천지꽃과 백두산”은 석화의 가족뿐만 아닌 연변에 이주한 겨레의 백년의 삶과 꿈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겨레의 연변의 백년 이주사가 “천지꽃”에 묵향으로 소담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중국조선족 시인 석화의 작품세계  서석화  1  한 사람의 시인을 평가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한 권의 시집만으로는 지극히 도식적인 형식비평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형식주의 비평은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 작품에 다루어진 사회상 혹은 그것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 등을 세밀히 분석하고 평가하는 역사주의 비평과는 달리 작품 자체의 형식적인 요건들, 작품 각 부분들의 배열관계 및 전체와의 관계 등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일찍이 엘리어트는 "시란 시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닌 시 자체"라고 하여 시를 그 무엇으로부터도 독립된 하나의 자율적 구조체로 보았던 형식주의자들의 견해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비평가가 작가를 버리고 작품만을 존중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결국 문학작품의 자리를 작가 쪽이 아니라 비평가, 혹은 독자 쪽에 둔다는 것으로 이 경우 비평에서 예상되는 결과는 그들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주관주의, 가치의 아나키즘 등에 오히려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돌파구 가운데 하나는 작품 밖에서 유용한 자료를 찾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상의 시정이 될 것이다. 개인이 사용하는 언어나 그것을 끌어들이는 감정의 이면에는 반드시 그 사람의 삶을 말해주는 필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 조선족 3세인 시인 는 1958년 중국 룡정 출신으로 다른 조선족들보다 비교적 넉넉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1982년 연변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뒤, 월간 연변문학 편집을 맡게된다. 등단과 함께 , , , , , , , 등 연변자치 주, 성, 국가 급의 문학상과 문예상을 50여 회 수상함으로써 연변 조선족 사회에서는 일찌감치 자리 매김을 확실히 했다고 할 수 있다. 1989년 시집 , 1993년 시집 등을 간행했으며 본 시집 가 에 당선됨으로써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 조선족 사회의 대들보 시인이 된 시인 의 시를 동시대를 살고 있으며, 같이 시를 쓰는 입장이라고는 하나 태어나고 자란 곳, 그리고 삶의 뿌리가 다른 그가 살고 있는 연변이라는 지역 속에서 이해의 첫 문을 열며 읽어보기로 한다.  2  우선 그의 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언어의 평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연변이라는 사회가 주는 낙후된 풍경이 그의 시에서는 거부감 없이 나타난다. 발표자가 2년 전 연변에 갔을 때 우선 느낀 점은 시각적으로 20여 년 전의 도시 풍경을 영화 세트 장에서 보는 듯한 발달이전의 소도시 모습이었다. 낮은 건물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달린 간판과 불균형의 글씨체, 그 속을 오가는 빨간 택시들, 택시 수보다 더 많은 자전거들, 그리고 40도에 가까운 폭염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상의를 벗어 던진 러닝 차림의 남자들이 나른한 표정으로 길가를 걸어다니던 모습.......  쉽게 촌스럽다고 말해버릴 수만은 없는 개화 이전의 풍경 속에서 같은 민족이라고는 하나 우린 서로에게 이방인이었다. 언어는 시대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 의 시가 가지는 언어의 평이성과 또 나름대로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기법의 시도는 연변이라는 사회의 특수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선 제대로 읽을 수 없으며, 한 권의 시집만으로는 긍정이 불가능한 그의 화려한 문학이력 역시 연변과 조선족이라는 두 개의 화두를 풀고서야 동조할 수 있다.  문학상이 많다는 건 각 나라마다의 특수한 사정이랄 수 있겠으나 아직 사십 중반도 되지 않은 시인이 50여 회나 상을 수상했다는 자체에서 나는 교포들의 지독한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상이라는 것은 축제의 행사이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을 일시적이나마 하나로 묶는 의미가 있으니 말이다. 시인 가 수상한 상의 이름이 모두 고국인 한국의 지명이나 산하를 딴 것이라는 것에서도 그들, 조선족 시인들이 가지는 향수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본 시집 를 읽어가며 나는 정지용이란 대 시인의 이름을 건 상을 수상한 작품으로서 솔직히 미흡한 부분이 너무 많아 이런 나의 생각의 오류를 잡기 위해서라도 다른 연변 조선족 시인들의 시를 같이 읽어보기로 했다. 월간에서 발행되고 있는 연변문학 99년 1년 분량이 연변으로부터 공수되어 왔고, 그것을 읽어나가며 - 절대로 그들 연변 조선족 시인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 시인 석화의 시가 그들 사회에서 가지는 가치와 위상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 긍정할 수 있었다.  그들의 시는 한국 시 고유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정한에 뿌리한 서정성에 스토리 위주의 시가 일색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깊이 있는 정신의 사유라든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수용의 태세보다는 일상, 그것도 과거에 대한 회상이 주조를 이루고 자연현상 하나에도 억지의미를 돌출해 내려는 무리한 감정이입으로 인해 영탄조의 시가 일색을 이루고 있었다. 물론 그 중엔 연변 문학 99년 7월호에 발표된 황춘옥의 이라든가 같은 해 1월호에 발표된 의 같이 현대시가 지향해야할 모범적인 시정신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있었다. 이런 여러 정황들을 이해하고 나서야 나는 시인 의 시를 형식주의가 아닌 미력하나마 역사 전기적인 입장에서 그의 수상경력과 함께 그의 시가 주는 울림을 동포의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3  그의 시는 전편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교포 3세라고는 하나 고국을 떠나 남의 나라에 살고 있는 이방인의 향수가 시의 주조를 이룬다. 이라는 부제가 붙여진 이라는 시를 보면 그런 그의 향수의식이 극명하게 나타난다.  기실 모두가 저쪽에서 건너온 것이지만 지금은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엷은 안개가 가물가물 피여오르는 한 줄기 강물, 먼  서쪽나라의 어느 하늘밑을 흘러가는 요단강처럼 우  리는 누구나가 다 한줄기 강물을 갖고 있다  피안 혹은 대안이라 부르는 저쪽켠의 강기슭 아슴푸  레 바라다 보이는 저쪽 기슭으로 늘 건너가 보고 싶지  만 피와 살과 뼈가 너무 무겁다  기실 모두가 다 다시 저쪽으로 건너갈 것이지만 지금  은 그냥 그저 건너가 보고싶은 생각 뿐이다  지금 저쪽 기슭에서 이쪽을 건너다보고 계실 어느  분도 이와 같은 시를 쓰고 있을가  -피안-  피안이란 불교에서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는 일, 또는 그 경지를 말한다. 시인은 그곳에 고국을 두고 있다. 태어나고 자란 곳은 아니지만 이민족이 가질 수밖에 없는 마음의 정처 없음이 이 시에서는 열반의 세계를 꿈꾸듯 고국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3연에서 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것은 이미 타국에서 정착된 시인의 삶의 뿌리가 깊어 고국이 그리워도 그곳으로 옮겨 심을 수 없다는 한탄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비단 시인만의 한탄은 아닐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남의 나라에 뿌리내리고 살고 있는 교포들이라면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삶의 무대가 되고 있는 현재의 거주지 사이에서의 이방인적인 방황은 공통분모가 아니겠는가? 시인 자신을 형상화한 시로는 이라는 시가 눈에 띈다. 센티멘탈한 서정을 가감없이 드러낸 이 시는 연변 조선족 시인들의 공통적인 시풍이 그대로 배어있다.  가는 길 길손이라  갈길 바빠도  다시 돌아 눈길주며  외우는 이름  어느날 내 이허물  다 벗어놓고  너처럼 피어나랴  이 천지간에  -천지꽃 중에서-  그러나 시인 석화는 다른 연변 조선족 시인들에 비해 다채로운 시작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라든가 연작시가 그것인데, 연변문학에 수록된 다른시인들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참신성과 기발한 소재채택에서 자본주의로 가고 있는 연변의 문화를 체함없이 소화해내고 있다. 바로 여기에 연변 조선족 사회에서 그의 시가 주목받는 이유가 있다. 예술이란 그 분야를 막논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도전정신과 그것을 내것으로 하려는 의지를 필요로 한다. 쉽게 서정이라 불리워지는 자칫 무력한 시풍에서 벗어나 사물을 기호화하고 끊임없이 뻗어 가는 정신세계를 시로 끌어들이려는 그의 노력은 그래서 귀한 것이다.  포도주  오렌지주스  혹은 랭커피  내안의 너  그 이름으로  그는 다시 명명된다.  -유리컵과 사랑학개론- 중에서  철근 + 세멘트 + 타일 + ...... + 땅 = 벽체  벽체 * 유리 * 페인트 * ...... * 하늘 = 빌딩  -작품36(가감승제와 방정식)- 중에서  1,2,3,4,5,6,7,8,9,10이 차례로 나와서  라고 한다  나는 라고 했다  라고 한다  라고 한다  -작품39(협박)- 중에서  자기가 나비인지 나비가 자기인지 누구는 모르겠다  고 했다지만 나야말로 내가 지금 도대체 정말 무엇  인지 모르겠다  필경 전생에 걸상이나 전화기나 유리창이나 그러한  것들은 아니였겠는데 마주보이는것들은 모두가 딱  딱하고 빤질빤질하고 윤기도는것들뿐이다  개나 돼지나 그와 같은 것들은 하나도 없다.  -작품91(탈출)- 중에서  위의 시들에서는 시인의 언어적 탐구가 외적 세계에 대한 응전의 방식과 연관지어보려는 노력과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한국에 사는 우리가 읽어도 전혀 이질감이나 시적 성취도 면에서 떨어지지 않음을 위의 시에서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모더니즘적인 시적 세련됨은 물론이요, 시인의 사물을 바라보는 엄정한 내부의 시선이 항상적으로 유지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집 전편을 논한다면 인식의 치열함이랄까 아직 완전히 자  기 것이 되지 못한 신문물에 대한 낯설음 또한 배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상으로 간략하게나마 중국조선족 시인 의 시를 살펴보았다. 시를 쓰는 것도 어렵지만 남의 시를 바르게 읽어내는 일이야말로 책임이 부과된 만큼의 어려움을 동반하는 힘든 작업이었음을 글을 끝내며 밝힌다. 오독이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끝-                     [출처] "천지 꽃 "시인의 백년 묵향이 피여나다 |작성자 엘리자리
568    시인 - 김응룡 댓글:  조회:4814  추천:0  2015-03-08
김응룡시집 《붉은 잠자리》 출간 편집/기자: [ 김태국 ][ 길림신문 ] 발표시간:2014-06-06  연변시인협회 부회장 겸 비서장인 김응룡시인의 시집 《붉은 잠자리》가 최근에 연변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화룡시 남평진 버들골에서 출생한 시인은 선후로 교원, 덕화향문화소 소장, 연변인민방송국 청소년부 주임, 《연변문학》월간사 시평론실 주임 등을 력임하면서 장편실화소설 《얼의 몸부림》, 《삶의 선택》, 《물속의 불》, 《잔디풀의 작은 사랑》, 번역소설집 《숲속에서 맺은 사랑》 등 다수를 출간하고 한국세계계관시인상, 한국《문예시대》해외동포문학상, 전국동요콩쿠르 1등상 등 다수를 수상한바 있다. 서예박사 서영근씨가 김응룡(가운데)시인의 시로 창작한 작품을 시인에게 증정했다.  석화시인은 《고향, 말없이 바라보는 눈물 젖은 시선-김응룡시인의 시세계》라는 평론에서 친절하고 다정다감하면서도 표현력이 풍부한 시적언어로 작품의 소재와 제재 및 주제를 다뤄내는 능력이 우수한 김응룡시인의 《붉은 잠자리》는 《고향》이라는 시어가 담아내는 공간적이미지와 《인생》이라는 시어가 실어오는 시간적이미지가 서로 어울리면서 엮어진 아름다운 시집이라고 평가하였다. 174쪽 분량의 시집에는 109수의 시가 7부에 나뉘여 수록되였다.     
567    시인 - 김학송 댓글:  조회:4077  추천:0  2015-03-08
  시인의 노래        1 취재대상에 대한 혼잡을 피하기 위하여 문화부에 배당된 시골현장에만 내려가다가 이번에는 대상을 바꾸어 문학계로 눈길을 돌렸다. 연변문학 30년의 성과보고에서도 언급하다싶이 문학계는 개혁개방 30년 동안 그야말로 풍성한 성과를 안아왔고 그만치  성과를 따낸 문학인을 찾기도  쉬운 일이였다. 김학송시인을 찾은 계기는 금번 전국 제9회 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평의에서 시집《사람속에서 사람 그리워》로《준마상(상금 만원)》을 수상했다기보다 타의추종을 불허할 다산시인이라는 점이 더 작용한것이다. 2   김학송(56세)시인은 문학창작에 전전한 30여년 동안 26권의 시집, 에세이집을 펴낸 다산작가이다. 조선족시인중에서도 최다의 시집을 펴낸 김학송시인을 만난건 그가 근무하는 《연변문학》편집부에서다. 다음 취재의 편리를 위해서 그의 주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안해가 석사연구생으로 공부하는  아들의 뒤바라지 하러 한국으로 갔는지라 요즈음은 홀아비생활이라고 서글픈 모습을 보였지만 두 벽면을 메운 서재에서 시인의 서글픔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향기가 은은히 묻어나는 노래하는 시인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1952년, 도문시 월청진 화평촌(곡수촌)에서 6남매 대가정에서 남자항렬 맏이로 태여나고 소학, 중학을 마치고 시골에 하향하던 시기는 10대 후반이였다. 하방한 아버지로 하여 하향지식청년으로 되고 시골에서 논물관리원, 과학시험소조 조장으로 7년을 두루 시골을 배우다가 행운스레 장춘야금학교에가서 지질탐사를 전공으로 배운것은 그의 인생의 새로운 첫번째 전환점이였다. 하지만 배운 전업이 싫어서 도문에 와서 술담배공사, 석유공사,  보위간사, 공청단서기 등 다채로운 직업에서 헤염치다가 그후 연변대학(작가반)에 입학한것이 관건적인 전환점이 된다. 여기에서 김학송시인은 문학이라는 평생의 직업을 선택하게 되고 지금까지 줄기차게 달려온다. 도문시가무단, 연변가무단 창작조를 거쳐 현재는 월간《연변문 학》지에서 시편집으로 사업하고있다. 3 흔히《문화대혁명》의 동란속에서 소년기와 청춘기를 잃어버린 홍위병 세대들을 일컬어서 우롱당한 세대라 한다. 말 그대로 저마다 혼돈씨가 되여 《볼품없이 망가진 얼룩 세월을》칠하면서 우매로 세례당하고 처절한 삶을 살아야 했다. 김학송시인 역시 례외가 아니다. 아버지의 하방, 차도 통하지 않던 오지, 가난, 인간가치의 상실은 그의 젊은 시절의 초라한 초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세월은 후날 시인에게 김학송시인만의 시적언어 확립과 창작경지를 톱는 밑천이 되기도 한다. 인간적으로 약간은 엉뚱한데가 있고 개성이 강한것만치 시창작에서도 전위에 나섰다. 시인의 말을 빈다면 자신의 경력과 천성에 맞는 언어적인 스타일을 빨리 찾아내고 그것을 자신의 독보적인것으로 만드는것을 소명으로 알던 시인의 시어는 쉬운 말로 말하면 벽계수가 흐르듯 경쾌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김학송의 아름다운 시어는 그의 투박한 성격과는 다르다고도 말한다. 영혼의 마찰과 울림이 담긴 소박한, 구체적 형상화의 시를 창작하고 순수하게 마음을 울리는 시. 독자와 호흡을 할수 있는 맑은시, 그러면서도 은은한 무게와 간절한 혼이 침투되여 고도의 진정성을 바탕으로 날개가 있는 시를 창작하여 《중국조선족시단에서 현대시창작의 첨단을 달리는 시인중의 한 사람으로 현대문명에 찌든 이웃도 모르는 도시 , 각박한 인심, 영악한 인간관계에 대한 항변이 여울치고… 오염되지 않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이룬 인류의 요람시대를 창조하려는 갈망 숨쉬고있다.》(조성일)《김학송시인의 절대적가치에의 탐구는 기대와 고통의 련속으로서 그 서정이 아로새겨지고 … 현실적고통을 감내하는 구도적자세가 보이며 전통에의 진진한 승화와 계승의식이 투철하다.》라는 평이 쏟아진다. 한 시인의 시창작과 그의 세계는 시인의 사고의 넓이와 이 세상을 포섭하는 시각의 깊이에 의해서 결정되기도 한다. 특히 1990년대 초기 한국체류는 시인의 문학사고폭을 넓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시인은 빈번한 한국문인들과의 교류, 독서에서 의식의 변화를 추진시켰고 현대시창작실험에 대담하게 달라붙었다. 2년도 안되는 사이에 그는 한국에서 10여권에 달하는 창작시집을 출판하였고 귀국후에도 15권의 시집과 에세이집을 펴내 최다 시집출판기록과 해외 출판에서의 최다기록을 보유했다. 그의 시는 자연의 섭리와 질서속에서 인간의 내면공간의 실존적인 양태를 치렬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표출시킨것으로 특징지어진다. 하기에 시단에 대한 기여도가 있는 시인으로 통하기도 한다. 4   김학송시인에 대해 자상한 소개를 차지하고 굵직한 소개를 하자 해도 편폭이 모자란다. 지금까지 200수에 달하는 가사를 썼는데 그중에는 조선족들이 즐겨부르는《아버지에게 드리는 노래》,《세월은 흘러도》,《고향은 청춘》 등 노래가 있는가 하면 조선족중학교의무교과서에 《태산에 오르며》란 수필이 등재되고 소학교 6학년 의무교과서(상권) 에는 《첫눈》, 하권에는《완두밥》,《박넝쿨》이 등재되였고 1984년-19 97년 동시 《봄비》가 등재되기도 했다. 열독교과서에 실린것까지 합치면 근 20여수(편)의 시와 수필이 등재되는 호황기를 맞기도 했다. 그외에도 연변에서 제일 처음으로 등산팀을 발족시킨 장본인, 수석 (기의한 돌 수집)에 특별한 애정을 쏟고 돌에도 력사와 년륜이 있고 시가 있다고 주장하는 시인이다. 수석관련전문저서도 출판했다. 개혁개방은 문화계에서 가장 빠르게 접수했고 작가들에게는 창작의 호황기를 마련해주었다. 사상의 해방과 작가들의 창작대상에 대한 자유는 문화에서의 개혁개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학송시인도  문뜩문뜩 아버지의 하방년대와 그후 개혁개방이 가정에 가져다준 문학적인 실리를 비유하면서 감개무량한 표정을 보였다. 연변일보     시인의 가치와 효용성   김학송   감동이 증발하고 인정이 추방된 세상에 대체 시인은 필요한 존재인가?   물질만능의 세월에 시는 웬 뚱딴지같은 시란 말인가?   혹자는 이런 의혹을 제기해올수도 있다. 그렇다. 세상은 갈수록 삭막해가고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는쪽으로 급속히 기울어져간다. 정신적인 카오스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있는것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겉에 드러난 현상일뿐 삶의 전부의 본질은 아니다. 사람이 살자면 우선 먹을 밥이 있어야 하고 입을 옷이 있어야 하고 잠잘수 있는 집이 필요하다. 이것은 삶의 기본조건들이다.   그밖에 공기처럼 해살처럼 만질수는 없지만 지극히 소중한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문학이요 음악이요 시이다. 시는 정신의 밥, 정신의 옷, 정신의 집이라고 할수 있다. 여느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문화적인 동물이기때문이다.   단순 의식주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높은 지표을 향한 몸부림이 인간을 시와 문학을 옹호하게 하는것이다.   시는 생활의 품위와 품격을 높여주는 가장 훌륭한 도구이다. 그래서 유사이래 호연지기가 있는 영웅남아들은 거의 모두가 시를 써서 자신의 드넓은 흉금과 드높은 의기를 표현하였다.   허다한 사람들은 시를 가까이 하려다 다가설수 없으니 야릇한 분노와 시기심에서 타매할뿐이지 본심은 그게 아니다. 시가 중요하고 또 대단히 매력적이라는것쯤은 알고있다.   나의 작은 체험으로 보면 시는 시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마음이 보이잖는 곳에 꿈의 집을 짓는 까닭이다. 그 집에는 해와 달이 찾아오고 신선이 춤을 추고 바람이 놀다 간다. 시는 지상과 천상을 련결하는 신비로운 통로이다. 시인의 집은 가난해도 풍요롭다. 시인은 마음의 귀로 듣고 마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다. 하기에 그들에겐 꽃이 웃는 소리, 돌이 말하?소리가 들리고 새와 나무가 흘리는 눈물도 보인다. 모든 사물과 령혼의 대화가 가능하다. 마음의 눈으로 보고 듣기때문이다.   그들은 찰나속의 영원을 보아내며 신과 가장 가까운 친구로 사귄다. 무한히 작은것에서 무한히 크고 위대한것을 보아내며 작은 행복에서 큰 감사와 큰 의미를 깨닫는다. 하기에 속인들이 느낄수 없는 신성한 령역에서 마음은 독립하고 정신은 자유롭다. 하나의 완정하고 독자적인 세계를 갖고 사는게 시인이다. 그들의 삶의 질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보이잖는 거대한 재부를 가진 사람들이다. 하기에 시인은 가난해도 행복하다.    2008년 4월호
566    시인 - 김영건 댓글:  조회:4407  추천:0  2015-03-08
  김영건의 세번째 시집 《아침산이 나에게로 와서 안부를 묻다》출간 모임이 지난 7월 17일 오후 연변인민출판사 민족문정기간행물센터와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의 주최, 화룡시 서성진정부와 화룡시문화관의 후원으로 화룡시 서성진 왕룡촌에서 있었다. 김영건시인의 문우들과 동료, 친구, 일가친척 등 50여명의 하객이 자리를 같이 하였다. 시집 《아침산이 나에게로 와서 안부를 묻다》는 “심지절창”, ‘아오모니 기억”, “바람을 가르는 팡세”, “파페포토 투게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 4부분으로 이루어졌으며 시인이 최근년간에 창작한 112수의 주옥같은 시로 묶어졌다. 한춘평론가는 시집 머리말에서 “김시인은 존재와 부재사이를 왕래하는 인간실존의 량면성을 정직하게 시인하고 인간의 존재를 우주의 존재와 동일시하면서 인간의 부끄러운 실상과 민족의 아픔실상을 묘파하는데 중시를 돌리고있다.”고 설파하고있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하객들은 김영건시인은 역설, 변형과 굴절,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통해 참신한 시적형상을 창조하고있다면서 계속하여 유수한 시작으로 우리 시단을 한결 빛내주기를 바랐다. 김영건시인은 일찍 연변텔레비죤 프로듀서, 감독으로 활약하면서 많은 인기프로들을 창출하였으며 중국 100대방송인, 성 10대 방송인으로 선정되였다. 그리고 전국소수민족 준마상, 중국소수민족최우수방송프로 최우수감독상 등 큰 상들을 수십차나 안아왔다. 현재 김영건시인은 연변인민출판사《문화시대》주필,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 주임, 연변시가학회 회장, 심련수문학상운영위원회 회장 등으로 활약하고있다.                                     도옥 김영건 4번째 시집 펴내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6-06 ]               도옥 김영건시인의 4번째 시집《물결이 구겨지고 펴지는 리유》가 일전에 연       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판발행되였다.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연세대학, 중앙대영상대학원을 수료한 김영건시인       은 연변TV드라마부 편집, 문예부프로듀서, 감독, 주임, “주말극장”, 연변TV음력설       야회 등 각종 문예야회 총연출을 맡은바 있으며 중국 100대 방송인, 길림성 10대       방송인, 전국소수민족준마상, 중국조선족출판문화대상, 길림성두루미상, 연변주       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 유스트문화상, 윤동주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해란강       문학상, 단군문학상 등 상을 수상하였다. 국가1급 감독이기도 한 김영건시인은 현       재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시가창작위원회 주임, 연변시가학회 회장, 연변인민출판       사 《문화시대》 주필 등 직을 맡고있다.           115수의 근작시들을 수록한 시집은 제1부 “구색아리랑”, 제2부 “나무와 물의       대화”, 제3부 “몽접의 호수”, 제4부 “바다와 륙지의 잠언”, 제5부 “세상은 안개숲이       다”로 되였으며 시집 《사랑은 전개가 없다》, 《빈자리로 남은 리유》, 《아침산       이 나에게로 와서 안부를 묻다》에 이어 시인이 4번째로 펴낸 시집이다.           연변대학 우상렬교수는 책머리에 쓴 “충돌의 미학ㅡ아름다운 시세계”라는 글       에서 “그의 시는 이미지로 말한다.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하다.”고 평가하였고 시       인, 평론가 한영남은 “우주를 향한 민족서정의 하모니”라는 평론에서 “김영건시인       의 시는 높은 산정에 올라 인간세태를 굽어보며 우주애적인 세계관으로 민족정서       를 녹여내고있다”고 평가하였다.    
565    동시인 - 림금산 댓글:  조회:4460  추천:0  2015-03-08
림금산 시인의 詩와 함께       시집: “불새”,  “살구꽃 복사꽃” 등 수권 정지용문학상, 해란강문학상, 백두아동문학상, 해외동포문학 안민상 등 수차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이사,  중국조선족소년보사 기자부 부장.     살아간다는 것은   눈물을 버리지 말아라 놋대야에 잘 담아뒀다 화분에 주어라 그러면 눈물을 먹고 꽃은 피여난다 그 꽃에서 풍기는  향기는 눈물냄새가 나리라   아픔을 버리지 말고 하얀 손수건에 잘 싸두어라 그랬다가 가슴에 번열이 날때 꺼내보면 가슴에 봄이 내려앉는다 그 봄이파리에는 고름이  탐스럽게 열릴것이다…   장모님   당뇨병으로 앓던 장모님 어느 날부턴가 한쪽 눈이 멀었다 한쪽 눈이 먼 장모님  다른 한쪽 눈은 더욱 커보인다 근심이 묻혔는지 울음이 숨었는지  한쪽 눈이여서 잘 알리지 않는다 그저 이왕보다 더욱 깊어지고 우묵한 눈이다 한쪽 눈으로만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애절한 바램은 무엇일가? 말한마디 못 번지며 운명하던 그 시각 이미 멀어진 다른 한쪽눈으로  당분이 피처럼 진하게 흘러내린다.   다향(茶香)앞에   가벼운 차잔을 들고 나는 무거운 생을 음미한다 잠간이나마 뜨는 기분을 눅잦히고  한걸음 가까운 사색을 보듬을때 성숙은 내곁에 꽃으로 입을 열고 피보다 붉은 진실은  나의 이마에 화려한 꽃나비를 불러온다   친구야, 다향(茶香)의 말씀앞에   거짓을 눈짓하는건  조금은 부끄러운 소행이거늘 찻닢이 물우에 조용히 펴지듯 진실앞에 우리는 언제나 반듯한 마음안고  차분한 기도(祷告)로 숙연해 지자.   @동포세계신문(友好网報) 제324호 2014년 10월 14일 발행   나와 문학                                                 림금산     꿈으로 아롱진 대학시절     나는 대학입시준비를 할때부터 문학전업을 가려고 윽 별렀다. 일찍 고중시절부터 문학에 심취한 나는도문시 장안진(위자구)에서 룡정고중사회반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하여 룡정북신소학교 교정에서대학입시를 치렀다. 룡정의 공부를 마치고 숙소의 짐들을 꾸려가지고 장안진으로 올때 나는 아직 대학입학통지서도 내려오겠는지 미결인데도 연길에 들려 내가 제1지망으로 써넣은 연변대학조문학부가생각나 특별히 연변대학 언덕에 올라보았다. 나는 그날 연대언덕에 걸터앉아 가고 오는 대학생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조문전업에서 대학시절을 보낼 황홀한 꿈을 꾸어봤다.   과연 얼마 안지나 룡정으로 부터 대학입학통지서가 날아왔다. 나는 꿈에도 그리던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하게 되였다. 대학시절 나는 공부보다는 문학창작의 꿈을 붙안고 계속 독서와 창작을 주업으로삼았다. 그때는 또 주위의 문학창작풍토와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말그대로 최고의 창작분위기였다.조문전업만 보아도 우리 우학급으로 김호웅, 석화, 류연산, 김성우, 김관웅(한어전업),김장혁, 박문봉,김경훈, 조일남, 한창선… 리혜선(한어전업)조성희 등 소설가 시인, 평론가들이 있었고 우리 반급에는소설가 한정화, 수필가 최순희, , 남춘애, 시인 남상수, 윤영애, 김춘산이 있었는가 하면 우리 아래 학급으로는 수필가 리영애, 리춘희,남복실, 김창석,김옥희, 시인 주성화(수학학부), 김춘희, 윤경찬(수학학부) 평론가 우상렬, 리광일 등 분들이 많이도 포진해 있었다.   또 이 때 마침 김철시인을 주도로 한 연변작가협회에서 연변대학과 합의하여 본과학력의 문학반도 개설하였는데 거기에는 이미 창작에서 일정한 성과를 내고있던 김학천,전태균,김학송, 김철호, 우광훈,리선희, 윤림호, 권중철, 류흥식 등 많은 시인, 작가들이 포진하여 있었다. 이런 문학의 대호황기에 나는 그들속에서 진한 문학의 자양분을 맘껏 만끽할수가 있었다.   또 이것뿐만이 아니였다. 우리한테 문학지식과 창작열정을 한껏 불어넣어주었던 연변대학의 쟁쟁한문학교수분들이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로는 정판룡교수를 비롯하여 최윤갑, 현룡순, 림휘, 허호일, 허룡구, 김해룡, 리해산, 박상봉, 현동언, 최건, 김기종, 김만석 등분들이였는데 한쪽으로 문학리론저술과 문학창작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교학을 하였었다. 이런 하좋은 분위기는 나한테도 매일같이 시쪼각을 긁적이게 만들었고 베끼고 암기하고 랑송하도록 하였다. 나는 그때 연변대학도서관의거의 전부의 우리말 시집을 수차 뒤졌으며 문학신문, 만선일보 등 많은 우리 민족문학에 관계되는 자료들을 섭렵하였다.   그때는 문학의 풍토가 하도 농후하여 쩍하면 조문학부를 중심으로 문학동아리 활동을 거세차게 진행하였는데 해마다 몇차례씩 소설창작특강이나 시창작 특강, 시랑송모임을 조직하였다. 그때 자주 연변대학조문학부에 초청받아 오신 분들로는 김학철,김철, 김성휘, 림원춘…등 분들이였다. 우리는 연변대학 본교 4층청사에서 행사를 많이 가졌는데 지어 리욱시인까지 남의 부축임을 받아가면서 시낭송에참가하여 백두산과 사랑에 대하여 읊어 크나큰 감동을 주군 했다.   우리는 또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이면 교실에 모여 자체로 프린트지 “종소리”잡지를 자주 꾸려냈으며우리의 동아리들 잡지에 김철, 김성휘, 리상각 등분들의 시들을 학생작품과 함게 발표하기도 했다. 나는 졸업할때까지 벌써 공개간행물에 시 20여수를 발표하여 대학생으로서는 최고의 발표률을 올렸고연변작가협회에서 아직 학생이기에 회원으로 받지 못하는걸 퍽 아쉬워하기도 했었다. 또 이 무렵 “아리랑”문학지 책임자였던 김성휘시인은 “아리랑”잡지에 머리말까지 달아서 자주 연변대학 학생특집을꾸려주어 얼마나 고마왔는지 모른다.   눈부신 청년시회활동   사회에 나온 후에도 문학그루빠활동은 계속되였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안도현에 배치받아 교편을잡았지만 문학창작은 끊지않고 줄기차게 진행하였다. 계속 각지의 잡지들에 시작품을 투고하고 원고비가 오면 교원들과 함께 술판을 벌리고 작품발표의 기쁨을 한껏 맛보군하였다. 내가 배치받은 학교는안도현 제2고중이였는데 나는 학교에 문학써클조를 꾸려놓고 매일이다 싶이 습작지도를 하는 한편 계속 자신의 글도 써나갔다. 연변인민출판사의 조룡남선생님과 료녕의 “새마을”잡지 박화선생님도 편지로 나의 창작을 많이 고무해주었다. 조룡남시인은 지어 나의 시작품을 “아리랑”잡지에다 한꺼번에7수를 발표해주기도 하면서 시가 잘 익었다고 고무해주었고 연변일보 문예부의 최룡관시인은 여러차나의 시묶음을 발표해주었다. 하여 나는 문인들이 극히 적은 명월진에서도 별로 고독한줄 몰랐었다.   한번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원고비가 왔는데 45원이였다. 옆자리교원들은 나더러 한턱 내라고 해서내가 전교의 남성청년교원들을 거의 불러모았는데 모두들 이상해 하였다. “원고비가 어떻게 45원이나되는가? 4원 50전이겠지…” 그들은 진짜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때 나의 한달 로임이 70여원이였으니 45원이면 반달 로임보다도 더 많으니깐 말이다. 나는 그 돈으로 청년교원들을 다 접대하고도 남았다.   그러던 1년후의 어느날 안도현의 소설가 김희철선생께서 나한테 전화가 왔다. 내가 연변작가협회 회원으로 비준되였다는것이였다. 당시 안도현에는 작가협회 회원이 조선족으로는 나까지 3명이였다. 즉김희철, 리룡득과 나였다. 김희철선생은 그때 당시에 “연변문예”지에 중편소설도 자주 련재하던 아주유망한 소설가였는데 나의 가담으로 안도현문인들의 력량이 가강되였다면서 학교교원숙소에서 홀로지내는 나를 자기집에 초대하여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기도 하였다.   나는 그때 리룡득선생댁에도 자주 가서 음식이랑 얻어먹었고 리룡득선생님은 또 전 현 문학창작경색같은것이 있을때면 나를 심사위원으로 내세워 주기도 하였다. 이젠 작가협회 회원으로 발탁되였고 또 그무렵 내가 연길처녀와 결혼하였으므로 나는 연길에 자주 와서 문인들 회의에도 자주 참가하게 되였고 당시 연길에서 활발하게 펼쳐지던 청년시회활동에서도 주력으로 활약하게 되였다. 석화를 회장으로 하는 우리 연길시청년시회에는 리임원, 김인선, 주성화, 리성비, 차영화 그리고 나까지였는데 후에 주룡이 가첨되였다. 우리는 한주일에 한번꼴로 계속 시토론,시작품합평회같은 활동을 하였는데 그때까지만도 경제여건이 안되여 집집을 순회하면서 맥주놀이를하였다. 지금은 집보다도 음식점이 더 편했지만 그때는 집이 더 편했다. 오늘은 석화네 집, 래일은 임원이네 집, 그 다음은 우리집 이렇게 집집의 술상이 문학교류의 제일 좋은 장소였다. 우리는 또 연길시청년시회를 대표하여 화룡시청년시회(당시 회장은 박장길시인)를 방문하고 도문시청년시회와 함께 들놀이도 가고 하면서 타현의 시인들과도 빈번한 교류를 진행하였다. 우리가 타현에가면 거기의 청년시회에서 우리들을 접대하느라 정성을 보였고 그들이 또 연길에 오면 우리가 그들을접대하느라 돌아쳤다… 세월이 살같다는 말이 그른데 없다. 연길시청년시회에서 활동하던 주요 맨버들은 그때 자식들을 업고안고 들놀이랑 다녔는데 지금은 자식들 모두가 대학까지 다 졸업하고 사회활동에 참가하였으니 말이다. 디지텔시대에 직면한 우리의 후세들은 지금쯤 시같은걸 어떻게 생각할지? 그들한테도 시가 우리때만큼은 중요하게 느껴지지는 않을테고…                                옹달샘 동시회   안도현 제2고중에서 연길에 있는 소년신문사에 전근되여 온후 나는 하는수없이 성인시창작을 위주로하면서도 동시창작도 곁들어 하게 되였다. 나는 동시가 한창 새롭게 번지고 있던 시점에 동시를 시작하였으므로 친구들과 함께 “옹달샘”동시회를 무었다. 내가 회장을 맡고 김학송, 김철호가 부회장을,김현순이 비서장을, 한석윤이 고문을 맡은 “옹달샘”동시회는 몇년간 우리의 동시단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우리는 거의 매주마다 한차례씩 새동시 합평회를 가졌으며 중국조선족소년보, 별나라, 중학생신문, 등에 동시특집을 냈으며 또 이런 신문, 잡지사들에서는 우리의 동시회를 지지해주는 각도에서원고비도 톡톡히 주어 우리의 활동경비에 보태도록 하여 얼마나 고마왔는지 모른다. 후에 우리 옹달샘동시회의 회원들은 많은 우수한 동시들을 창작해 냈고 많은 훌륭한 동시집들을 출판했으며 많은 동시문학상을 섭렵하였다.   두만강여울소리   나는 “두만강여울소리 시가탐구회”에 제6기부터 참가하였는데 처음엔 일반시인으로 참가하였고 후에는 한 10년정도 조직자의 한사람으로 참가하게 되였다.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회”는 모임의 원래 명칭이고 몇년 지나니 “두만강여울소리”로 통하였으며 지금은 그냥 “여울소리”로 통한다. 모임의 명칭만 보아도 세월의 흔적이 력력히 묻어난다. 한번은 룡정시 삼합진에서 1박 2일간 진행하였는데 나는 그때의 감수를 “비내리는 두만강”이란 수필로 써서 연변일보에 발표하기도 했다. 두만강여울소리는 이젠 장장 29년간 28차까지 진행되였다. 해마다 한차씩 진행되는 우리 시단의 대성회이고 대교류의 장이고 시인들의 대만남의 장이다. 내가 참가했던 “두만강여울소리”활동은 정몽호,림연, 최룡관, 석화, 리성비 등이 제일 많이 책임자로 치렀었다. 세월은 많이도 흘러 우리도 이젠 50대에 올라섰고 시단의 중임을 맡았으며 여러가지 이번트를 조직할때가 되였다. 5년전 연변작가협회에서는 나를 시분과 부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이미 20여년이나 이끌어온 시단의 성회-“두만강여울소리”도 이젠 우리들이 조직해야 하였다.   하지만 해마다 한번씩 진행되는 “두만강여울소리”를 어떻게 하면 더 다채롭고 내용이 더 풍부하게 조직할것인가가 고민이였다. 우리 조선족시단에서 “두만강여울소리”라 하면 이젠 해외에서도 소문이 짱한 명브랜드활동인데 말이다. 더우기 동북3성을 포함한 전국의 우리 민족시인들이 대거 참가하는 그런 모임이였고 또 제24차부터는 우리가  처음으로 시가창작위원회의 중임을 맡은후의 첫 행사였으니 신경이 안쓰일수가 없었다.   마침 박장길씨가 화룡시민족식당으로부터 일정한 자금을 후원해 왔다. 우리는 기뻤다. 인맥이 넓은 김영건주임은 화룡시정부에 직접 련계를 달아 “제24차두만강여울소리”를 화룡시정부 회의실에서 거행하기로 협의를 보았으며 연변의 인기배우들과 가수들을 동원하여 회의에 멋진 공연을 선물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처음으로 조직하는 일이 잘되게 하늘이 도와주었는지 김철시인부부도 마침 연길에 와 있을때라 우리의 초청에 의해 직접 화룡에까지 오셨으며 주당위선전부, 화룡시정부 등 정부차원에서 열정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회의 첫날 저녁에는 민족식당에서 개를 앉히고 연회를 베풀었으며 소박하고 멋들어진 공연도 선보여 회의 분위기를 확 잡아왔다. 이튿날 오전에는 탐구시를 심사하는 날이였는데 우리는 김철시인한테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감독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다.    회의군들은 이튿날 연변의 금강산으로 불리우는 선경대를 유람하였고 또 선경대아래동네에 있는 유동림장에 가서 사슴까지 잡아 잔디밭우에다 사슴고기로 큰 연회를 베풀었다. 김철시인은 당장에서 유동림장책임자한테 일필휘지하여 족자까지 써주셨다. 대회는 진짜 성공적으로 잘 되였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늘 뿌듯한 마음이다. 제25차는 안도현만보진 국가급 생태골에 가서 치렀는데 안도현정부에서 최고급호텔을 배치하고 양을 잡아 접대하였는데 량성복부현장이 직접 회의장에 와서 친절한 관심을 보여주어 시인들은 감동을 받았다. 제26차 “여울소리”는 회의 참가자 전원이 먼저 도문시 두만강 강뚝공원에서 정몽호시비 제막식을 마치고 량수진에 가서 1박2일로 치렀다. 끊어진 온성다리밑으로 두만강은 소리없이 흐르며 력사를 써내려갔고 우리들은 다리우에서 시상을 더듬었다. 그번 여울소리가 끝난후 나는 20여차의 “여울소리”정황을 개괄하여 수필을 써서 “여울소리인상기”란 제목으로 북경에 있는 “중국민족”잡지에 발표하여 영원한 력사자료로 남기였다. 제27차 “여울소리”는 화룡시서성진 와룡향에서 치러졌는데 역시 특색을 살려 시인들이 모두 농민들집에 끼리끼리 숙박하도록 했다. 촌장이 시인들을 데리고 이집 저집 안배할때는 마치도 우리가 어렸을적에 해방군대오가 지나다 마을에 들러 하숙할때를 방불히 하였다. 역시 서성진의 진장이 회의에 직접 참석하였고 돼지와 소와 이튿날엔 양까지 잡아서 문인들을 대접하였다. 그번 여울소리는 또 김영건의 시집 “아침산이 나에게로 와서 안부를 묻다”의 출간기념식까지 곁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제28차 “여울소리”는 연길시한성호텔에서 진행되였는데 할빈에서 온 리홍규시인의 심련수문학상수상식까지 곁들어 보기에 너무나 좋았다. 그날 술자리에서는 또 박송천의 소품과 송미자의 시랑송도 있어 분위기가 화끈하였다.     문학살롱 케스트     2009년 가을부터 연변인터넷방송 문학살롱프로에서는 나더러 시에 대한 생방송을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나는 이런건 해본일 별로 없어서 망설이였는데 그럼 몇번만 해달라고 하였다. 나는 한국현대시부터 시작하였는데 좋이 한국명시 200여수에 대한 분석과 명시인 40여명에 대해 소개하였다. 이러구러 1년이 지났다. 방송국에서는 계속 더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나는 하는수없이 로씨야, 영국,독일, 인도의 일부 시인들에 대해서 소개했으며 중국의 “몽롱시”와 현대시인들에 대해서도 10여명을 소개하였다. 또 한해가 지나갔으나 방송국에서는 계속 하는데까지 해달라고 청들었다. 그래서 나는 중국조선족시인 50여명을 소개하였는데 이번에는 또 시창작론에 대해서 강의해 달란다. 또 한해가 지났다. 그래서 이미 만3년째 나는 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물론 좋은 효과를 거둔 방송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방송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생방송을 듣고 흑룡강성 녕안의 최화길, 할빈의 한영남, 리홍규, 산동성 청도의 김기덕,김혁일,심양의 리문호,북경의 전춘매, 연길의 리상각, 리순옥, 김철호, 김영춘, 김창희, 최기자, 리임원, 리성비, 화룡의 리근영,허옥진,김승종, 미국의 홍군식…등등 많은 시인들이 전화나 메일을 보내와 감사의 뜻을 전했다. 역시 우리 시단의 홍보이고 시와 독자들과의 거리를 더욱 가까이 하는 우리 시의 새로운 가능성이라고 생각되여 오늘까지도 나는 계속 이 노릇을 해오고 있는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곤난도 많았다. 한쪽으로 단위에 출근해야 하고 또 기자이니깐 타성으로 외출도 해야하고 나의 글도 써야하고 …방송자료는 대부분 퇴근후나 휴식일에 하다보니 나는 련휴일을 기본상 쉬여보지 못하였고 저녁에는 11시-12시전에 자본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문학과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미치는 나였으니 그런대로 매주 목요일마다 만사를 제쳐놓고 방송국에 달려가군 했다.   한번은 단위에서 도문시 월청쪽으로 들놀이를 갔는데 주임인 내가 안가면 우리 보도부의 성원들이 섭섭해 한다고 가긴 갔는데 그날따라 생방송이 있는 날이였다. 나는 술한방울도 못마이고 점심식사가 끝나자 곧추 택시를 잡아타고 연길로 질주하였다. 그날 생방송은 의외로 잘 되였지만 방송국분들은 내가 도문 월청으로부터 달려온건 누구도 모르고 있다…   또 한해가 다 지나 음력설이 코앞이다. 나는 설날휴식때문에 이번 목요일에는 두번치를 한꺼번에 준비하여 하나는 직접 생방송하고 하나는 록음해야 하기에 또 바빠야 한다. 하지만 문학을 위해서는 붉은 코피가 흘러도 이만한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매번 방송할때마다 방송재료 평균 8천자가량씩 쓰는데 이 3년간 이미 근 150여만자를 썼다…   오늘까지 장장 30년이란 창작생활에 별로 이렇다할 명작은 못써냈지만 그래도 시집 네권과 수필 50여편, 가사 30여수,실화 20여편에 정지용문학상, 해란강문학상, 한얼패수필상, 백두아동문학상, 윤정석아동문학상, 전국청년월간지수필상 등10여차의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도 지니게 되였다. 나는 내가 문학에 빠진걸 종래로 후회한적은 없다. 만약 문학이 없었다면 나의 지금까지의 삶은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슴슴하였을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만약 내가 문학을 떠났더라면 나의 생활은 부로 일정한 윤택은 가미했을지라도 령적으론 사막의 마른 바람같은 그런 생활을 해왔을건 뻔한 일이다. 문학은 나의 령적 삶에 차분한 오아시스를 펼쳐주었고 농익은 와인속에 피빛 장미꽃을 얹어주는 그런 짙은 멋을 주었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또 래일도 문학에 감사를 드릴뿐이다.                                       2013년 2월   \\\\\\\\\\\\\\\\\\\\\\\\\\\\\\\\ 깊은 동시는 깊은척 하지 않는다                       김정도   근간에 나온 림금산의 동시집 “사랑의 동그라미”를 읽으면서 참 좋은 시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걷는 걸음마다 산꽃은 따라오며 핀다   내가 숲속에 숨어 들자 꽃도 숲속에 숨어서 핀다          -(“산길”전문)   이 얼마나 탐스러운 동시인가. 온통으로 동심의 덩어리이다. 기술로 만든 동시가 아니여서 좋다. 농도짙은체험의 소산이여서 가상하기 그지없는것이다. 동심의 눈으로 본 대자연의 경이가 이 시를 낳게 한 체험적바탕일것이다. 계절처럼 산에는 꽃이 핀다. 어디가나 꽃이다. 그처럼 이쁠수가 없다. 그러한 경이로움이 시인의 몸에 천연스레 옮아 꽃의 순수가 한수의 동시로 태여났을것이니 이 어찌 소담하지 않으랴. 유심한 독자라면 누구나 언어의 배면에서 강하게 풍겨나오는 미적인 호소에 압도되지 않을수 없을것이다. 동시 “분계선”도 찾아보기 힘든 수작이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진달래 무궁화   그 부드러운 꽃가지에 언제부터인가 파아란 뱀 한마리가 칭칭 감겼다.          -(“분계선”전문)   분단의 비극을 읊은 시치고는 참 야무진 절창이다. 깊은 동시는 깊은척 하지 않는다.오히려 얕은척 한다.이것이 순수이며 경지이다. 림금산의 일부 동시는 이런 경지에 도달해 있다. 동시 “향기로운 강”을 보면서 림금산의 솜씨에 다시 한번 무릎을 쳤다.   젖빛 다리가 불궈져서   물은 온통 젖내난다.   달랑 고추가 풀어져서 강은 더욱 향기롭다.   매일같이 강을 세탁하는 너희들이 진짜 강의 주인이구나.           -(“향기로운 강” 전문)   이 시집의 최고의 백미로 꼽을수 있는 “향기로운 강”은 중국조선족동시단이 이룩한 새로운 성취로 알고 싶다. 아이들의 달랑 고추, 그것이 풀어져서 향기를 풍기는 강, 참 빼여난 표현이다. 강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눈길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동시는 강에 대한 상상적 표현에서 가볍게 벗어나 높은 미적인 각성에 접근한다. 강에 대한 기묘한 형상화작업을 바탕으로 마지막련에 이르러서는 시의 의미적 령역을 보다 높고 깊은 경지에로 확장시킨다. 읽는 이의 마음마저 세탁되게 한다. 오래만에 맑은 동시의 강에서 목욕을 하고난후련한 기분이다. 현대시의 지나친 기술주의가 병페라고 한다면 림금산의 동시는 체험을 바탕으로 생리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이런 자세를 높이 사고싶다.                     (연변일보 1998년 12월)   ////////////////////////////////////////////////////////////////////////////////////////// 보이는 시, 움직이는 시, 향기 풍기는 시                        -림금산 동시를 조명해본다                                          림  철   어느 학자는 이렇게 말하고있다. “성인문학을 큰것의 아름다움 즉 숭고미나 비장미에 대한 추구와 례찬의 문학이라고 한다면 아동문학은 어쩌면 작은것이 지니고 있는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 발견과 례찬이라고 해도 대과는 없을것이다. 중국어 성구에는 인간의 가장 순결한 마음을 갓난아기의 마음─‘적자지심(赤子之心)’이라고 했고 영국의 랑만파시인 워즈워스는 ‘무지개’라는 서정단시에서 ‘아이는 어른들의 아버지여라’는 유명한 시구를 남기였다.”     림금산시인은1980년대 초 대학시절부터 성인시를 주로 창작하여 지금까지 서정시500여수를 발표하였고 제9회 지용문학상을 수상하고 성인시집 《불새》를 펴냈으며1980년대 후반부터는 중국조선족소년보사에서 기자, 문예편집을 맡아하면서 금쪽같은 많은 동시들을 창작하기 시작하였으며 동시집 《사랑의 동그라미》와 《옹달샘》을 선보이기도 했다.     림금산시인은 바로“작은것이 지니고 있는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 발견과 례찬”을 통하여 자라나는 우리 후대들에게 좋은 심성을 심어주고 미적향수를 안겨주고 있다. 이것 이 바로 아동문학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그의 동시들은 동시마다 동심이 퐁퐁 솟치고 있으며 그림처럼, 영화처럼 독자들의 시야에 펼쳐지며 매 동시마다에 서정이 굽이쳐 흐르고 있어 미적향수를 다분히 느낄수 있다.     그럼 아래에 필자는 몇개 방면으로 나누어 림금산시인의 동시를 조명해보련다.                   보이는 시, 움직이는 시       림금산시인의 동시를 읊조리느라면 동시의 화폭이 눈앞에 생생히 안겨온다. 그의 동시들을 보면 대부분이 시적대상물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없거나 적다. 시적대상물에 대한 직관적인 묘사가 없지만 우리들의 시야에 와닿을수 있는것은 그 시적대상물을 통하여 련상,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그 련상과 상상의 예술적승화를 위하여 비유, 의인, 과장과 환상, 상징, 이률배반의 표현기법을 잘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동시 “새무리”를 보기로 하자. 파아란/하늘 호수/숱한/재재거림이/물결쳐간다// 가다가//가다가/나무아지에/잎으로 열리고// 날다가/날다가/반공중에/파문을 그린다.     하늘을 “파란 호수”로, 날아예는 새무리들을 “재재거림이 물결쳐간다”고 비유하고 있으며 나무아지에 앉아 쉼을 쉬는 새들의 모습을 “나무아지에 잎”으로 열렸다고 묘사하고있으며 새무리들의 날아예는 모습을 “반공중에 파문을 그린다”고 읊조리고 있다. 새무리들의 모습이 하나하나의 아름다운 화폭으로 우리의 시야에 다가오고 있으며 시적대상물이 정적으로가 아니라 살아움직이고 있다.     동시 “해바라기”를 보기로 하자. 노오랗게/목을 비탈더니/까아맣게 염글어/기름을 떨군다// 알알이 불에 탔다/향기마다 가마에 굽혔다/구수한 냄새/코끝을훓는다 감각적이고 동적인 언어로 해바라기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노오랗게 목을 비탈더니” 이 표현은 생활의 론리에는 맞지 않는다. 어떻게 해바라기가 노오랗게 목을 비탈수 있는가? 하지만 시인은 이률배반의 수법으로 해바라기가 “노오랗게 목을 비탈더니 까아맣게 염글어 기름을 떨군다”고 묘사하고 있다. 까아맣게 염근 해바라기종자의 모습을 “기름을 떨군다”고 동적인묘사를 하고있다. “알알이 불에 타 굽혀서 구수한 냄새 코구멍을 훓는다”는 표현은 독자들로 하여금 해바라기가 익어 풍기는 구수한 냄새를 직접 맡아보는 느낌을 준다. 실로 보이면서도 움직이기도 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직접 체험하는 느낌을 주는 동시다. 동시 “가을풍경” 역시 보이는 시, 움직이는 시의 좋은 례로 들수 있다. 노오란 애들이/나무에 바라올라/불장난해요// 빠알간 애들이/비탈에 노오란/편지를 가득 뿌려요// 기슭에선 아직도/파아란 애들이/ 물장난을 그치지 않고// 해님은 따가운/볕을 쏟아/개구쟁이들 엉뎅일 챡챡-   이 동시에서 시인은 단풍든 나무잎을 노오란 애들이 나무에 바라올라 불장난한다고 형상화하고 있다. 단풍든 비탈을 빠알간 애들이 비탈에 노오란 편지를 가득 뿌린다고 형상화하고 있으며 단풍이 채 들지 않은 기슭에선 파아란 애들이 물장난을 하는데 해님이 볕을 쏟아 개둑쟁이들의 엉덩일 챡챡 때련준다고 형상화하고 있다. 비유, 과장, 의인의 수법을 리용하여 가을풍경을 보는듯이 그려주고 있으며 또 가을풍경을 빨갛고 노랗고 파란 애들이 뛰노는 모습으로 동적인 묘사를 하면서 미적향수를 안겨주고 있다. 림금산시인의 동시들의 움직임은 또한 동적인 시어, 터지는 파렬음 사용, 의성의태어활용을 통하여 더욱 생동하게 표현된다. 하아얗다, 찰랑인다, 또오옥-, 화아악-(동적인 언어, 형상화된 시어), 통통 살이 오르다, 태질하다, 토옥토옥, 푹신푹신, 담상담상, 몽-몽-, 한들한들, 우쭐우쭐, (파렬음, 터지는 소리, 의성의태어). 동시 “가을국화”에서도 시인은 노오랗고 하아얀 국화의 모습을 “실눈인 애들이/ 해시시 노오란 웃음을/ 흘리고있다// 곱슬머리 이웃집/곰순이가/ 하얗게 춤추고 섰어요/.마을어구 돌담아래/가을 그득 쏟아붓는/오- 염근 향기 한마당”이라고 묘사하고있다. “노오란 웃음을 흘린다”, “하얗게 춤추고 섰어요”는 이률배반의 수법이다. 과히 그림처럼 펼쳐지고 살아움직이는 동시, 향기 풍기는 동시라고 할수 있다.   동심이 퐁퐁 솟치는 시   림금산시인의 동시들은 그 어떤 시적대상을 단순하게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시적대상물을 통하여 서정적주인공의 감수를 미적으로 전하고 있는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보아진다. 시인은 동시에서 서정적주인공으로서뿐아니라 자기가 직접 동시의 주인공으로 되며 동시속 개구쟁이가 된다. 동시 “파아란 고무신”과 “과수원”은 동년을 묘사한 동심이 퐁퐁 솟는 시라고 할수 있다. 동년에 신고 다니던 고무신에는 낮이면 해빛이 모여들고, 밤이면 별빛이 내려앉고 봄이면 “파란 뻐스”, 여름이면 새끼고기 헤엄치는 “어항”으로, 가을이면 머루다래 담은 “파란 바구니”, 겨울이면 하얀 서리 뽀햫게 서리내리는 고무신, “고향이 들어있고/동년이 숨어있는 신// 언제나 내 맘에/작은 배처럼 떠있는/파아란 고무신”,  참으로 동년의 그림움, 추억으로 다가오는 동시다.     고무신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없어도 시적대상물에 대한 감수를 통하여 동년의 개구쟁이 모습을 보는듯이 그려낸 동시라고 할수 있다.     동시 “과수원”도 과수원에 열린 과일을 기특한 애들이 가지마다 한가득 매여달려 웃고 떠들며 재롱피운다고 읊조리고있다. 그래서 “어느애부터/안아볼가 포동동 살찐/이쁜 애들//너도 나도/ /달려와 안기는/배밭엔 온통/애들천지…”라고 시적대상물 배를 개구쟁이 어린이로 등장시키고 있으며 작자의 감수를 통해 동심을 잘 구현해주고 있다.                         하얀 얼이 살아 숨쉬는 시     림금산시인의 동시들에는 “하얀 이미지”가 숨쉬고 있다. 그의 많은 동시들에는 민족의 하얀 얼이 내비치고 있으며 백의민족의 정서가 슴배여 있다.     동시 “성에꽃”을 보기로 하자. 지난밤 꿈결에/우리 할매/찾아오셨습니다// 하얀머리/길게 풀고/하늘가신 우리 할매// 지난밤 나의/창가에 찾아오시여/숱한 꽃을 피우셨습니다// 간밤에 피여난/할매의 숨결/아침 창문에 가득 웃어줍니다   이 동시에서 시인은 창문에 핀 성에꽃을 “하얀머리/길게 풀고/하늘가신 우리 할매”가 찾아와 피워주었다고 쓰고 있으며 그것을 “간밤에 피여난/할매의 숨결”이라고 읊조리고 있다. 동시 “고향집”에서 시인은 고향집을 “햇 벼짚으로 살짝 새이영 얹은 초가 샛노랗게 구워진 햇 감자”라고 묘사하고 있다. 시골의 고향집에 대한 절절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이 동시에서도 우리는 하얀 이미지를 찾아볼수 있다. 물론 동시에서 고향집을 “샛노랏게 구워진 햇 감자”로 묘사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속에 숨은 벼의 하얀 의미지, 노랗게 구워진 감자속의 하얀 이미지를 엿볼수 있다. 동시 “옛말”을 더 례로 들어보자. “머리/ 하아얀/할아버지 한분이/옛말 하신다//파아란 고무신/하아얀 고무신//두만강/바다섬//철쪼망…//할아버지 한분이/ 옛말하시다가//그대로/북변에/하아얀 산이 되셨다.” 이 동시는 우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을 쓰고 있다. 백설을 떠인 백두산의 모습을 “머리 하아얀 할아버지”로, 할아버지가 하시는 “하야얀 고무신”옛말, “북변의 하아얀 산”이 된 할아버지, 이 동시는 “하야얀 이미지”로 가득차있다. 동시 “할머니(1)”에서도 우리 민족 “하얀 정서, 하얀 이미지”를 잘 창출해내고 있다. 내가 씻은 빨래는/왜서 희지 않을가/할머니 씻으면/하도나 희여서/눈이 부신다//할머닌 흰머리 많아/빨래도 하얗게 하얗게/눈부실걸가 이 동시에서 보다시피 “희다, 희여서, 눈이 부시다, 흰머리, 하얗게, 눈부실걸가” 등 시어들에는 모두 “하얀 이미지”가 내포되여 있다. 이처럼 림금산시인의 동시에는 우리 민족의 하얀 숨결, 하얀 정서, 하얀 모습, 하얀 이미지가 서려있어 읊조리노라면 저도몰래, 고향애와 조상들에 대한 존경, 숭배의 감정이 흘러나온다.   미적향기 물씬 풍기는 시       림금산시인의 동시는 향기 풍기는 시, 아름다운 시로 이름찍을수 있다.    그의 동시들을 읽느라면 미적향수를 다분히 느낄수 있다. 보는듯이, 살아움직이는 시, 동심이 다분한 시로 될수 있고 미적향기 물씬 풍기는 동시들이다. 아래는 “엄마의 손”전문이다.   사랑이/ 찰랑이는/손끝이다// 더움이/떨어지는/손가락이다// 불 지피면/봄날이 된다// 감자알 구우면/함박꽃처럼/터진다// 옥수수 삶으면/밥이 나와/흐드러진다// 밥 지으면/윤나고/국 끓이면/파도친다.       이 동시에서 시인은 “찰랑이는”, “떨어지는”, “지피면”, “구우면”, “삶으면”, “지으면” 등 동적인 시어로 엄마의 모성애가 “터진다”, “흐드러진다”, “파도친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시를 읊노라면 실로 엄마의 모성애를 절감할수 있고 피부로 느낄수 있으며 가슴이 막 활랑인다. 동시 “불구경 가자”에서도 시인은 익은 가을, 활활 타는 가을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그려주고 있다. 가을이 오면/온 마을에/불이 붙는다// 처마밑 고추타래서/일어난 불길은/마당앞 능금알을/빠알갛게 태우고/다락우에 옥수수도/노오랗게 굽는다// 마을을 지나/앞산더기 단풍나무에도/불길은 알차게/매달렸다. 가을이 온 마을의 모습을 “온 마을에 불이 붙는다”고 묘사하면서 “처마밑 고추타래서 일어난 불길은 마당앞 능금알을빠알갛게 태우고 다락우에 옥수수도 노오랗게 굽는다. 마을을 지나 앞산더기 단풍나무에도 불길은 알차게 매달렸다.”는 묘사는 실로 시야에, 가슴속에, 불타는 정서로 피여오르는 시구라고 할수 있다. “고추타래”, “불길”, “능금알”, “빠알갛게 태우고”, “노오랗게 굽는다”, “단풍나무”, “알차게 매달리다” 등 시어들에는 가을의 정열, 시인의 벅찬 정서가 흠뻑 젖어있다. 림금산시인은 이처럼 동시에 시적대상물에 대한 절절한 감수를 시인의 불타오르는 정서로 터지는, 피여오르는, 활활타는 시어로 예술적이미지를 승화시키고 있다. 총적으로 림금산시인은“작은것이 지니고 있는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 발견과 례찬”을 통하여 자라나는 우리 후대들에게 좋은 심성을 심어주고 미적향수를 안겨주고 있다. 그의 동시는 독자들의 시야에 보이는 시로, 살아움직이는 시로, 동심이 퐁퐁 솟치는 시, 터치는 시, 활활 타오르는 시, 미적향기 물씬 풍기는 시로 안겨오고 있다.                            2010년1월25일     
564    시인 - 리임원 댓글:  조회:4389  추천:0  2015-03-08
    백두산 리임원 전설은가고 전설의 언어 껍데기만 남았는데 이제 그 청청한 빛의 소리 언어는 안개처럼 사라질 것인가. 긴 긴 세월 수 많은 전설들을 봉우리마다 뿌리내리면 하나의 민족 하나의 역사 하나의 꿈을 길러오시던 어머니 그러나 이제 아름다웁던 전설은 가고 당신의 세상에서 가장 슬픈 수모의 날들을 참고 견디며 애처로운 어머님의 젖은 눈동자  
563    시인 - 윤청남 댓글:  조회:4408  추천:0  2015-03-08
  시집 “갈밭에 바람자면 갈대는 일어서서” 출간       윤청남 제2 시집 “갈밭에 바람자면 갈대는 일어서서”가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윤청남 제2 시집 “갈밭에 바람자면 갈대는 일어서서”는 윤청남 시인의 제2시집으로서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가 주최하고 한국 강릉심련수선양사업위원회 주관한 제1회 심련수문학상 공모 당선작으로 출간되였다.   시집은 “홍시”등 시인의 100여수의 근작시들을 수록, 심사위원들은 “수상작품집은 언어의 순수성과 우리 글의 아름다움을 잘 살려냈고 현대사회 지인들의 내적갈등과 민족적인 삶의 정서와 애환을 잘 표현하였다.”고 정평했다.   윤청남시인은 시가창작에 정진하여 괄목할만한 성취를 이룩, 선후로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연변제7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한 경력을 가지고있다.   그는 시집의 뒤머리에 적은 수상소감에서 “시는 내 삶의 종교다. 시를 사랑했기에 인정이 가난한 이 세월에도 삶은 다소 풍요롭지않은가. 나는 청빈한 시인이 되지못한것을 후회하지 못한다.”고 자신의 창작관을 밝히면서 시가창작에서 계속 정진할 의지를 표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0년 8월  23일      
562    시인 - 김파 댓글:  조회:4213  추천:0  2015-03-08
돌에 새겨진 《돌의 음악》 문화향기 물씬       2014년 4월 2일              김파시인의 시비제막식 두만강변서 4월 1일 오전, 김파시인의 《돌의 음악》시비 제막식이 두만강변에서 있었다. 아름다운 문화관광도시인 도문시에 2009년에 설립된 정몽호시비에 이어 또 하나의 시비가 세워졌다. 화강암기초돌에 받쳐진 높이 2.6메터, 너비 1.2메터에 두께가 0.5메터인 유백색 대리석시비에는 김파시인의 《돌의 음악》이 조한문으로 정히 새겨졌다. 《돌을 두드리면/ 소리가 난다/ 돌은 부서진 소리가/ 뭉쳐진 덩어리다//바이올린 선률도/ 피아노의 절주도/돌의 부서진 소리를 체로 쳐/ 빚어서 발효시킨 술/ 마시면/ 취한다.》 시비 정면에 새겨진 《돌의 음악》의 전문이다. 일찍 《흰돛》, 《대륙에 묻혀있는 섬》, 《겨울나비》, 《태양의 종소리》등 7권의 서정시집과 《사랑의 별》(서정서사시집), 《천추의 충혼 안중근》(서사시), 《천년고국 고구려》(력사대하시), 《립체시론》(시론집) 등 25부의 작품집을 펴낸 김파시인의 《돌의 음악》시비제막식이 4월 1일 오전 도문시 두만강광장의 두만강가에서 있었다. 1942년 흑룡강성 해림현에서 출생한 김파시인은 도문시 2중과 4중에서 교원으로 있다가 도문시문화국창평실성원으로 근무, 퇴직후 대련에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고있다. 중국소수민족작가협회와 연변작가협회 회원인 김파시인은 시창작외에도 장편소설, 장막가극 등 기타 쟝르의 작품도 많이 창작하였으며 작고한 김성휘시인과 정몽호시인 등과 함께 조선족시단의 시인들의 모임인 《두만강여울소리》를 발기하기도 하였다. 제막식에서 평론가 최삼룡의 《김파의 시비를 세워야 하는 리유》가 대독되였고 최룡관시인, 김룡운평론가, 윤청남시인 등이 축사를 했다. 최룡관시인은 축사에서 지난 2009년에 세워진 정몽호시비와 더불어 두만강가에서 짙은 문화향기를 풍기게 될 김파시인의 《돌의 노래》시비설립에 대폭적인 지지를 준 도문시당위와 정부에 거듭 감사를 드리고 수십년간의 창작생애에서 거둔 김파시인의 성과를 높이 긍정하였다. 답사를 하고있는 김파시인. 김파시인은 답사에서 시비를 세워준 동북아문화연구원과 도문시당위와 정부에 감사를 드리고 《인류는 삶과 사회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물질재부창조와 정신재부창조 두가지를 병견하는데 정신재부의 한개 장르인 문학, 그 가운데서도 시는 생명력이 강한 우월한 정신재부에 속하며 시비는 한 시인의 령혼의 상징으로 빛뿌리게 될것》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민족과 나라, 나아가서는 인류를 위해, 보다 좋은 령혼의 보석을 남기기 위해 여생의 마지막 날숨까지 연소할것을 다졌다. 연변동북아문화연구원(원장 최룡관)의 주최로 개최된 이날 제막식에는 도문시당위선전부의 해당 책임자와 연변시인협회 김응준회장, 연변시조사 김철학회장 등과 동북아문화연구원의 부분적인 회원들 그리고 도문시문련, 도문시문화관, 도문시작가협회 회원 등 20여명이 참가하였다. 길림신문 김태국기자    
561    시인 - 강효삼 댓글:  조회:3989  추천:0  2015-03-08
  시인 강효삼-문학은 인간학이다 “우리 민족 밑바닥의 삶의 현장을 절대 떠나지 않을것이다”             시골 농군의 후줄근한 옷차림에 작달막하고 여윈 체구, 학교때 별명이 ‘오태(误胎)’였다고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로인이 있다. 그가 가는 곳이면 그만의 특유한 해학으로 웃음소리가 넘치게 하고 걸쭉한 육담이 오간다. 그에 또 술 한잔까지 곁들이게 되면 곁에 모인 사람들 모두를 똑 같은 촌로로 만드는 신기한 ‘마술’이 있는 사람. 인기는 어찌나 좋은지 이름만 대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런 사람이 시인이라고 한다. 짜장 별 볼멋 없는 촌로인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아니한 신기한 매력이 있는 사람, 그것도 북방 문단의 사실주의 시의 코치인 사람이있다. 그가 바로 강효삼시인다. 1943년 출생, 1963년 2월 15일 흑룡강신문 ‘진달래문학세계’에 ‘봄이 나간 날’이라는 시로 등단. 동시, 시, 노래말가사. 수필, 등 쟝르의 작품 500여편 발표. 7인 시집 ‘칠색무지개’, 시집 ‘먼 후날. 저 하늘 너머’와 아동시집 ‘봄비’가 있음. 윤동주문학상, 한국 문예시대 해외동포문학상 등 수상 연변작가협회회원, 흑룡강작가협회회원, 현 흑룡강성 상지시 자유기고인. “내가 걸어온 문학의 길은 절망과 희망, 불행과 행운이 겹쳐진것이였습니다. 지금도 로임은 적고 사회적으로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지만 역시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올해까지 문학인으로서의 50년의 길을 걸어왔다고 하는 강효삼시인이 스스로 자신의 문학인생을설명하는 말이다.   “문학은 내 인생의 강심제였다” 강효삼시인이 문학의 푸른 꿈을 꾸게 된것은 소학교 4학년때를 들어야 할것 같다. 당시 상지시신화서점에서 ‘조기천시집’ 등을 학교에 가지고 와 팔았는데 어린 그는 ‘시집이란 시집가는 책인가’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후의 학교 랑송대회에서 강효삼은 조기천의 ‘조선은 싸운다’를 랑송하여 크게 호평을 받았다. 당시는 조선전쟁이 진행될 때여서 그때의 분위기와도 알맞았던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여 그는 문학의 푸른 꿈을 꾸게 되였다. 소학교 5학년때 ‘봄바람’이라는 제목의 동시를 써서 교원의 칭찬을 받았고 교과서에 있는 ‘어린 시인’이라는 글을 배우면서 문학을지향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중학교에 입학해보니, 당시의 상지조중은 문학 분위기가 농후하여 문학 지망생이 많았다. 하지만 키도 작고 나이도 어린 그는 그들속에 끼이기조차 어려웠다. 그래도 당시 조선어문을 가르친 선생님이 많이 고무하여줘 큰 힘이 되였다. 당시 그는 선생님을 따라다니며민간이야기도 정리하면서 점차 문학의 길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후 대약진운동에 회의를 가지고 불만을 표시했던 그는 학교에서 처분을 받고 중퇴하여 생산대에 내려가 일해야 했다. 그러다가 1961년 5월 당시 연수현 평안 성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다시 문학을 꿈이 살아나 습작을 시작했다. 그때 학교때부터 함께문학을 꿈꾸던 김상봉씨(상지시 월성향 사람, 향토시인)를 만났다. 문학을 사랑하나 발표원지를 찾을수 없었던 그들은 문학동아리를만들기로 하고 ‘송화강 문학청년 애호자 단체’를 만들었다. 강효삼이 부회장이 되여 문학 애호자들끼리 만남을 가졌다. 그런데 당시는 나라적으로 계급투쟁을 할 때여서 공안국의 비밀감시까지 받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래도 동아리의 규약 첫 머리에 ‘모택동사상의 위대한 붉은기를 내걸고’라고 써넣었기에 반혁명조직은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으나 그후 이 동아리는 절로 해산되고 말았다. 바로 그때 흑룡강신문에 강효삼의 첫 작품이 발표되여 액막이로 되였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였으며 그후 련거퍼 발표한 ‘공사의 처녀’라는 시는 당시 흑룡강신문사 문학편집이 한어로 번역하여 ‘흑룡강일보’에 발표하면서 의심이 해소되고 공청단 가입까지 비준받게 되였다. 문화대혁명전까지 강효삼은 꽤나 많은 글들을 발표하면서 문학에 재미를 붙히게 되였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반당문예로선의 검은선’이라는 대자보가 나붙어 어렵게 고비를 넘겼고 그후 또 “문화대혁명은 문화에 대한 파괴”라고 불만을 토로한것으로 하여 하루 아침에 현행 반혁명으로 몰리게 되였다. 격리당해 투쟁을 받았고 교사대오에서 쫓겨났으며 리혼까지 당했다. 그는 문학을 했기에 세상을 보는 눈이 있게 되였고 그때문에 교원대오에서 쫓겨 났지만, 또 문학을 했기에 다시 교원대오에 설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으며 후에는 상지시 하동향문화소에 전근하게 되였다고 말한다. 즉 좋아도 문학이요, 나빠도 문학인것이였다.오르막과 내리막의 가파로운 경사를 거듭하는 인생 그라프를 그려오던 나날, 그는 문학을 한것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것이강심제로 되여 어려운 나날을 버틸수 있게 했고 끝내는 볕을 볼수 있게 했다. 그 사이에 그는 1978년에 연변작가협회에, 1980년에 흑룡강작가협회에 가입했고 흑룡강신문의 국경15주년 맞이 응모에서 3등상을탔으며 또 그 작품이 흑룡강성소수민족문학상 3등상을 타게 되였으다. 그리고 그가 쓴 가사 ‘톱질타령’은 흑룡강성의 우수가곡 평선에서 2등상을 타기도 했다. 하동향문화소에서 13년간 근무하던 시절 그는 인생의 황금시기를 맞이해 많은 글들을 썼으며 작가들을 양성하느라 문학살롱을 만들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강효삼이 끝내는 성공했다고 말하는데, 만약 성과로 성공을 론하는게 아니고 하고싶은 일을 했다는 점으로 성공을론할 때 나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문학을 할수 있어 자신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강효삼시인이다.   “문학은 인간학이다” 강효삼시인은 몇십년동안 문학을 하면서 문학이 바로 인간학이라는 점을 절실히 느꼈다고 말한다. “한때는 정치의 구미에 맞추느라 애썼고 마음에 없는 소리도 했지만, 문학이란 인간의 진실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강효삼시인은 문학이란 고통받는 사람들,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야 한다고 말한다. 꼭 사회의 암흑면을 꼬집어야 한다는건 아니지만 문학은 성실해야 하고, 문학은 참되여 하며, 문학인이라면 글에서만 인간이 되여야하는게 아니라, 인간이 되여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인생의 추구이자 문학적 추구라고 하는 그는 글을 쓸수 있는 날까지 우리 민족의 밑바닥 삶의 현장을 절대 떠나지 않을것이라고 한다. 그의 시들을 보면 그의 문학적 추구와 인생적 추구가 들여다 보인다. 강효삼의 시적 추구는 민족 공동체와 민족의 정체성과 동질성이 날로 상실되는 현실에서 회복의지와 발전 전망을 리얼하게 표현하는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예술성 추구를 홀시하는것은 아니다. 그는 진정한 작품은 역시 예술적으로 진미가 나타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현재 고래희의 언덕에 올라선 로인이지만 아직도 배움을 추구한다. “금년 들어서는 동서 고금의 책들중 내가 찾아볼수 있는 책은 다 찾아봅니다. 어떻게 하나 좀 더 배우려는 마음입니다. 배우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바로 즐거움입니다.” 이제 와서 문학이 무엇인가 고쳐 생각해봤다는 그는 문학은 일시적인 취미나 애호가 아니라 심각한 정신적 사업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바른 사랑, 명지한 철학, 깨끗한 량심, 허식 없는 열정, 끝없는 열정, 그리고 욕망과 진취심이 수요된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면쉽게 세상을 허무하게 볼수도 있겠지만 욕망은 필요한것이라고 말하는 시인이다. 그래야 끝까지 문학의 줄을 놓지 않을수 있다고 말한다. 문학적 탐구와 인간적 탐구를 동시에 진행하며 사는 날까지 열정과 욕망을 가지고 문학을 분신으로, 세상을 뻗치는 받침대로, 죽는날까지 문학은 버릴수 없다고 말하는 강효삼, 그야말로 진정 ‘시인’이라는 두 글자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채복숙 기자    
560    명시인 - 푸쉬킨 댓글:  조회:2415  추천:0  2015-03-08
푸쉬킨 1799~1837   러시아의 국민적 시인   모스크바 출생.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확립자이다.  명문 중류귀족의 장남으로 외조부는 표트르 대제(大  帝)를 섬긴 아비시니아 흑인 귀족이었다.    차르스코예셀로의 전문 학교를 졸업한 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외무성에 근무하였다.    시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유배되었는데, 고독하고 불우한 유폐 생활은 도리어 시인에게 높은 사상적·예술적 성장을 가져다 주어, 러시아의 역사적 운명과 민중의 생활 등에 대하여 깊이 살필 기회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푸슈킨의 작품은 모두 농노제 때의 러시아 현실을 정확히 그려 냈으며, 깊은 사상과 높은 교양으로 일관되어, 뒤의 러시아 문학의 모든 작가와 유파는 모두 ‘푸슈킨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등이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서: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달관된 입장으로 인생을 말하고 있는 듯 하나 그 속에 배어있는 우울감은 숨길 수 없다.       신이여, 저를 미치지 않게 하소서.     신이여, 저를 미치지 않게 하소서.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보따리와 지팡이가 나아요 아니, 고생스럽고 배고픈 게 차라리 더 나아요.   그것은 내가 나의 이성을 존중해서도 아니고 이성과 헤어지는 것이 기쁘지 않아서가 아니요.     나 자유로이 둔다면 그 얼마나 활개치며 어두운 숲으로 달려가리!   열병에 걸린 것처럼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고 그 얼마나 자유로이 멋진 꿈에 도취되어 나를 잊으리.     그리고 나의 파도소리에 귀기울이고 행복에 가득차서 빈 하늘을 바라보리니   나 그 얼마나 힘차고 자유로우리 들판을 파헤치고 숲을 휘어뜨리는 회오리처럼.     그런데 불행히도 : 미친다는 것은 페스트보다 더 두려운 일,   곧 갇히고 사슬에 묶이리니,   사람들은 창살 사이로 짐승을 찌르듯 찌르러 올 것이고,     그리고 밤에는 들을 것이다. 꾀꼬리의 울 리는 낭랑한 목소리도 아니고   빽빽한 참나무숲의 웅성거림도 아니고 울리는 것은   친구들의 외침소리, 밤의 파수꾼의 욕설, 사슬이 쩔렁이고 삐걱이는 소리뿐       현실속에서 살고 싶어하는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의 법칙을 떠나고자 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삶에 기쁨과 슬픔등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어 살아가고자 함.         시베리아 깊은 광맥속에 제까브리스트 12월 혁명이후 유형간 사람들에게 보내는 시.                    시베리아 깊은 광맥 속에 그대들의 드높은 자존심의 인내를 보존하소서   그대들의 비통한 노력과 높은 정신의 지향은 사라지지 않으리니.     불행의 신실한 누이, 희망은 암흑의 지하 속에서   용기와 기쁨을 일깨우리니 그 날은 오리니:     사랑과 우정이 그대들에게 닿으리니 깜깜하게 닫힌 곳 빗장을 열고   지금 그대들의 감방 그 굴 속으로 나의 자유의 소리가 다다르듯이.     무거운 사슬이 풀어지고 암흑의 방은 허물어지고 - 자유는   기쁨으로 그대들을 마중나오리니 그리고 형제들은 그대들에게 검은 건네리니.        미래에 대한 신뢰, 정신적인 동지의식.  인생, 사회, 세계 등에 대한 사상이 연결됨.    여기서 '광맥'이란 -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그 노력과 정신은  나중에 또 하나의 보물이 되어 발굴되리라는 의미를 추가한다.    마지막연에서 푸쉬킨은 그대들이 옳은 사람들이니  심판해 달라고 하며 검을 건넨다.     작은 새                        머나먼 마을에 이르러 고향의 풍습을 따라서   매맑은 봄철 축제일에 작은 새 놓아 주노라.     비록 한 마리 새이지만 산 것에 자유를 주고   아쉬운 생각은 없으니 나의 마음은 평화로와라.       제 2행의 고향의 풍습이란 당시 러시아 농민들 사이에는   부활주일이면 새를 놓아주면서 행복을 비는 풍습을 말한다.   제3행의 봄철 축제일은 부활절을 말한다.         태워진 편지     안녕, 사랑의 편지여 안녕.   그 사람이 이렇게 시킨 것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   나는 주저하고 있었던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나의 손은   모든 기쁨을 불에 맡기려고 맹세하였던가...   하지만 이제 지긋지긋하다.   시간이 찾아 왔다.   불타라, 사랑의 편지여!   나는 각오하고 있지,   마음은 무엇에도 현혹되지 않지.   탐욕스런 불꽃은 벌써 너의 편지를 핥으려 한다...   이제 곧.    활활 타올라 타올라 엷은 연기가 얽히면서   나의 기도와 더불어 사라져 간다.   이미 변치않을 마음을 맹세한   반지로 찍은 자국도 사라지고   녹기 시작한 봉랍이 끓는다...   오오, 신이여 일은 끝났다.   검어진 종이는 휘말리고 말았다.   지금은 가쁜한 재 위에   그 숨겨진 자국들이 새하얗게 남고...   내 가슴은 조여진다.   그리운 재여.   나의 애처로운 운명 위에   그나마 가련한 기쁨이여,   내 한탄의 가슴에 영원히 머물러라...  
559    재 복습하는 명언 모음 댓글:  조회:6500  추천:0  2015-03-08
가난한 사람은 덕행으로, 부자는 선행으로 이름을 떨쳐야 한다.(주베르)  가는 자는 쫓지 말지며, 오는 자는 막지 말라.(맹자)  가르치는 것은 두번 배우는 것이다.(주베르)  가시나무를 심는 자는 장미를 기대해서는 안된다.(필페이)  가시에 찔리지 않고서는 장미꽃을 모을 수가 없다.(필페이)  가장 감사해야 할 것은 신이 주신 능력을 제대로 이용하는 것이다.(트릴로프)  가장 깊은 감정은 항상 침묵속에 있다.(토머스 무어 - Thomas Moore)  가장 깊은 진리는 가장 깊은 사랑에 의해서만 열린다.(하인리히 하이네 - 독일 시인 : 1797-1856)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려면, 가장 낮은 곳부터 시작하라.(푸블릴리우스 시루스)  가장 뛰어난 예언자는 과거이다.(바이런)  가장 무서운 사람은 침묵을 지키는 사람이다.(호라티우스 - 로마 시인 : BC 65-8)  가장 부유한 사람은 절약가이고 가장 가난한 사람은 수전노이다.(상포르)  가장 오래 지속되는 사랑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랑이다.(윌리엄 서머싯 몸 - 영국 작가:1874 ~ 1965)  가장 최상의 길은 없다. 많은 사람이 가고 있다면 그 길이 최상이다.(루신)  가장 큰 어려운 일 중 세가지, 첫째는 명성을 얻는 것, 둘째는 생명있는 동안 명성을 유지 하는것, 셋째는 죽은 뒤에도 명성을 보유하는것.(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 오스트리아 작곡가)  가장 탁월한 천분도 무위도식에 의해서 멸망된다.(몽테뉴)  가장 훌륭한 기술, 가장 배우기 어려운 기술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이다.(메이시)  가장 훌륭한 예언은 상식,즉 우리의 원래의 지혜이다.(에우리피데스)  가장 훌륭한 인간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선으 베푸는 사람이다.(마호메트 - 이슬람교창시자:570~632)  가정과 가정 생활의 안전과 향상이 문명의 중요 목적이요, 산업의 궁극적 목적이다.(C.W.엘리어)  가정은 그대가 그곳에 가야만 할 때, 그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곳이다.(R.L.프로스트)  가정은 나의 대지이다. 나는 거기서 나의 정신적인 영양을 섭취하고 있다.(펄 벅 - 미국 작가:1892~1973)  가정은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표시할 수 있는 장소이다.(A.모루아)  가정은 삶의 보물상자가 되어야 한다.(코르뷔제)  가정이 가난하고 신분이 천한 것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고,올바른 진리를 배워 가지고도 실행하지 않는 것이 실로 부끄로운 일이다.(강 수)  가정이란 어떠한 형태의 것이든 인생의 커다란 목표이다.(J.G.홀랜드)  가정이여, 그대는 도덕의 학교이다.(J.H.페스탈로치)  가족, 친구, 조국, 모든 사람을 위해서 힘을 써라. 들뜬 마음, 나약함을 물리쳐라, 용기를 가져라, 강해져라. 즉 남자가 되라.(앙리 프레데리크 아미엘 - 스위스 철학자 : 1821-1881)  가치있는 적이 될 수 있는 자는 화해하면 더 가치있는 친구가 될 것이다.(펠담)  갑작스럽게 착한 사람이 되거나 악인이 되는 사람은 없다.(시드니)  강도는 당신의 돈이나 생명의 어느 하나를 요구한다. 그러나 여자는 그 양쪽을 요구한다.(버클러)  강렬한 욕망을 버리고 싶거든 그 어머니인 낭비를 버려라.(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 Marcus Tullius Cicero)  강을 거슬러 헤엄치는 자가 강물의 세기를 안다.(윌슨)  강한 사람이란 가장 훌륭하게 고독을 견디어 낸 사람이다.(쉴러)  강한 인간이 되고 싶다면 물과 같아야 한다.(노자)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것이다.( )  개선으로부터 몰락까지의 거리는 단 한걸음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사소한 일이 가장 큰 일을 결정함을 보았다.(보나파르트 나폴레옹)  개성과 인간과의 관계는 향기와 꽃과의 관계이다.(시위브)  개조해야 할 것은 세계뿐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 새로운 인간은 어디서 나타날 것인가 ? 그것은 결코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친구여, 그것은 자신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깨달으라.(앙드레 폴 기욤 지드 - 프랑스소설가:1869~1951)  거룩하고 즐겁고 활기차게 살아라.믿음과 열심에는 피곤과 짜증이 없다.(어니스트 핸즈)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렵다. 지혜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성경 잠언)  거지에게 침대를 주면 거지는 보답으로 이를 줄 것이다.(레이)  거짓말은 눈사람 같아서 오래 굴리면 그만큼 더 커진다.(로터)  거짓말을 한 그 순간부터 뛰어난 기억력이 필요하게 된다.(코르네이유)  거짓말쟁이가 받는 가장 큰 형벌은 그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한다는 것보다 그 자신이 아무도 믿지 못한다는 슬픔에 빠지는 데에 있다.(조지 버나드 쇼 - George Bernard Shaw)  걱정없는 인생을 바라지 말고 걱정에 물들지 않는 연습을 하라.(알랭 - 프랑스 철학자)  건강과 부는 미를 창조한다.(H.G.보운)  건강과 지성은 인생의 두가지 복이다.(메난드로스)  건강은 有一無二(유일무이)의 보배이며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 자체까지 내던진다.(미셸 에켐 드 몽테뉴 - 프랑스 사상가:1533~1592)  건강은 행복의 어머니이다.(프란시스 톰슨)  건강을 유지한다는 것은 자기에 대한 의무인 동시에 사회에 대한 의무이다. 오늘날 백살이 넘게 오래 산 사람은 거의 모두가 여름이나 겨울에 일찍 일어난 사람들이다.(푸슈킨 - 러시아 시인 : 1799-1837)  건강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 건강은 모든 자유중에서 으뜸가는 것이다.(앙리 프레데리크 아미엘 - 스위스 철학자:1821~1881)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유베날리스)  검약은 훌륭한 소득이다.(에라스무스)  겁쟁이는 죽음에 앞서서 여러 차례 죽지만 용기있는 자는 한번밖에 죽지 않는다.(셰익스피어)  게으름은 쇠붙이의 녹과 같다. 노동보다도 더 심신을 소모시킨다.(프랭클린)  겨울은 하늘의 물도, 사람의 마음도 돌처럼 만들어 버린다.(빅토르 마리 위고 - 프랑스 소설가 : 1802-1885)  격에 맞지 않는 선행은 악행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엔니우스)  결백한 자와 미인은, 시간 이외에는 적이 없다.(예이츠)  결점 없는 사람을 고르다간 끝내 벗을 얻을 수 없다.(프랑스 속담)  결함이 나의 출발의 바탕이고 무능이 나의 근원이다.(발레리)  결혼도 역시 일반 약속과 마찬가지로 성을 달리하는 두 사람 즉, 나와 그대 사이에만 아이를 낳자는 계약이다. 이 계약을 지키지 않는 것은 기만이며 배신이요, 죄악이다.(L.N.톨스토이)  결혼은 자손 만대의 시작이다.(예기)  결혼이란 경건하고 신성한 결합이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얻어지는 즐거움은 억제되고 진지하며 조심스럽고 양심적인 쾌락이어야 한다.(M.E.몽테뉴)  결혼이란, 독립은 동등하고 의존은 상호적이며, 의무는 상반되는 남녀간의 관계이다.(L.K.안스파)  결혼이란 하늘에서 맺어지고 땅에서 완성된다.(존 릴리)  결혼 전에는 눈을 크게 뜨고, 결혼 후에는 반쯤 감아라.(프랭클린)  결혼 전에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보라. 결혼 후에는 한쪽 눈을 감으라.(토머스 풀러)  결혼하는 편이 좋은가, 아니면 하지 않는 편이 좋은가를 묻는다면 나는 어느 편이나 후회할 것이라고 대답하겠다.(소크라테스)  겸손은 남의 칭찬을 싫어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좀더 넌즈시 칭찬받고 싶다는 욕망에 불과하다.(라 로시푸코)  겸손은 모든 미덕의 근본이다.(P.J.베일리)  겸손은 범인에게는 한갓 성실이지만, 위대한 재능의 소유자인 사람에게는 위선이다.(W.셰익스피어)  겸손은 신이 우리에게 제물을 바치기 바라는 제단이다.(라 로시푸코)  겸손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덕이다.(브하그완)  겸손은 육체의 양심이다.(H.발자크)  겸손이 없다면 당신은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교훈도 배울 수가 있다.(좀 톤슨)  겸손하고 양보하는 마음은 인격을 완성하는데 있어서 절대 필요한 양식이다. 이러한 인격 완성의 양식이 떨어지면 사람들은 교만하고 약해진다.(존 러스킨 - 영국 비평가:1819~1900)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타인을 비난한다. 그런 사람은 다만 타인의 그릇된 것만을 인정한다. 그럼으로써 그사람 자신의 욕망과 죄과는 점점 더 커가는 것이다.(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 미국 시인:1807~1882)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신을 그의 안내자로 삼을 것이다.(번연)  겸손한 자만이 다스릴 것이요, 애써 일하는 자만이 가질 것이다.(에머슨)  경험은 지식의 어머니이다.(브레튼)  경험은 최고의 교사이다. 다만 수업료가 지나치게 비싸다고 할까.(칼라일)  경험이 많을수록 말 수가 적어지고 슬기를 깨칠수록 감정을 억제한다.( )  고난과 눈물이 나를 높은 예지로 이끌어 올렸다. 보석과 즐거움은 이것을 이루어 주지 못했을 것이다.(하인리히 페스탈로치 - Johann Heinrich Pestalozzi)  고난은 인간의 진가를 증명하는 것이다.(에피테토스)  고뇌는 철저하게 경험하는 것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마르셀 프루스트 - Marcel Proust)  고독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괴로움이다. 아무리 지독한 공포에도 모두가 함께 있으면 견딜만하지만 고독만은 죽음과 같다.(콘스탄트 비르질 게오르규 - 루마니아 망명작가 : 1916-1992)  고독은 지혜의 최선의 유모다.(로런스 시테르네)  고독한 것이 두렵다면 결혼을 하지 마라.(체홉)  고립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슬픈자는 타인을 슬프게 한다.(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 프랑스 작가)  고민은 어떤 일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생기기보다는 일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데에서 더 많이 생긴다. 실패를 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성공하고 못하고는 하늘에 맡겨 두는게 좋다.(버트런드 아서 윌리엄 러셀 - 영국 철학자)  고통은 인간의 위대한 교사이다. 고통의 숨결 속에서 영혼은 발육된다.(에센 바하)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쾌락도 주지 않는다.(몽테뉴)  고향을 묻지 말자 우리가 고국에 돌아가게 되면 피차 고향을 묻지 말고 일하자 . 인화와 단결이야말로 국권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뿐 만 아니라 나라가 독립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다.(고당 조만식)  곤란이란 위대한 마음을 키워주는 유모이다.(브라이언트)  공복으로 때를 짐작하고 졸음이 올 때 겨우 끝을 내는 짓을 하지 않는다면 여름날이 얼마나 끝없이 길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스티븐슨)  공손과 인간성과의 관계는, 따스함과 밀초와의 관계와 같다.(쇼펜하우어)  공손이란 가장 친절한 방법으로 가장 친절한 것을 향하고 말하는 것이다.(루이전)  공인된 키스는 훔친 키스보다 감미롭지 못하다.(모파상)  공정하고 바른데는 근거를 두었다면 긍지보다 이익을 주는 것은 좀처럼 없다.(밀턴)  공화국은 사치로 멸망하며, 전제주의 국가는 빈곤으로 멸망한다.(몽테스키에)  과거는 잊어버리고 다른 일에 몰두하자. 이것이 고민의 해결이다.(잭 템프시)  과거에 한 번도 적을 만들어 본 일이 없는 인간은 결코 친구를 가질 수 없다.(테니슨)  과도한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보다 더 시련을 당하게 되는 적은 없다.(레우왈레이스)  과장에는 과장으로 대처하라. 재치있는 말은 상황과 경우에 따라 사용되어야 하며, 이것이 바로 지혜의 힘임을 알라.(발타자르 그라시안 - 스페인 철학자)  관습은 법만큼 현명하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관습은 언제나 법보다 훨씬 보편적이다.(벤자민 디즈레일리 - Benjamin Disraeli earl of Beaconsfield)  관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애의 소유이다. 우리는 모두 약함과 과오로 만들어져 있다. 우리는 어리석음을 서로 용서한다. 이것이 자연의 제일 법칙이다.(볼테르 - 프랑스 사상가 : 1694-1778)  괴로워하거나 불평하지 말라. 사소한 불평은 눈감아 버리라. 어떤 의미에서는 인생의 큰 불행까지도 감수하고 목적만을 향하여 똑바로 전진하라.(빈센트 반 고흐 - Vincent Willem van Gogh)  괴로움을 견디려면 죽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나폴레옹)  교사의 임무는 독창적인 표현과 지식의 희열을 불러 일으켜주는 일이다.(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미국의 물리학자 : 1897~1955)  교육의 목표는 지식의 증진과 진리의 씨뿌리기이다.(케네디)  교육이란 화를 내지 않고, 자신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거의 모든것에 귀기울일 수 있는 능력이다.(로버트 프로스트 - 미국 시인:1874~1963)  구(9)개월이 걸려 인간은 살아갈 준비를 하지만 인간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데는 일순간만으로도 충분하다.(로가우)  국가가 그 권위에의 비판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 하는가가 그 국가가 사회의 충성심을 어느 정도까지 쥐고 있는가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지표다.(해럴드 조지프 래스키 - 1893 ~ 1950 : 영국의 철학자)  국가는 영토와 국민과 법률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토는 어떤 내구적인것으로 이루어지는 유일한 부분이다.(에이브러햄 링컨 - 미국 16대 대통령:1809~1865)  국가는 좋은 생활을 위해서 존재하지 생활만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아리스토텔레스)  국가란 내일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하여 형성되고 생명이 유지된다.(J.오르데가이 가세트)  국가란 어머니와 같은 것이다.(소크라테스)  국가란 인간이나 다름이 없다. 국가도 인간의 가지각색의 성격으로 형성되어 있으므로.(플라톤)  국가란 최고의 도덕적인 존재이다.(H.트라이치케)  국가의 가치는 결국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의 가치다.(J S 밀)  국내 생산성이 다양한 한, 전문화와 무역은 유리하게 된다. 똑같이 국가간에도 적용된다. 국가간의 교역은 우리가 한 財貨(재화)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데 효과적인 방법이며, 국내 생산에만 의존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다.(폴 앤터니 새뮤얼슨 - 미국 경제학자 : 1915-)  군대가 강하면 즉 멸망할 것이요, 나무가 단단하면 즉 부러진다.(노자)  국민이 내일에의 신념을 갖지 않으면 발전은 있을 수 없다.(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 John Fitzgerald Kennedy)  군인은 다른 모든 국민보다 평화를 祈求(기구)한다. 그는 깊은 상처와 전쟁의 상흔을 고통받고, 참아야 하기 때문이다.(더글라스 맥아더 - 미국장군:1880~1964)  군인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질은 철저하고, 완전하고, 거만한 자신감이다.(조지 스미스 패튼 - George Smith Patton)  군자는 기회가 없다고 불평하지 않는다.(에머슨)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세익스피어)  군자의 사귐은 담담함이 물과 같고, 소인의 사귐은 달콤함이 단술과 같다.(장자)  군주는 민중으로부터 사랑받지 않아도 좋지만 원망받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시민들이 생명과 재산에 대한 위협없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만 해준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니콜로 마키아벨리 - Niccolo Machiavelli)  군중이란 설령 좋은 사람만 모인 곳에서라도 동물적인 큰 악한 면만 나타내는 것이고, 인간의 본성적 약점과 잔인성만 보이는 법이다.(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 러시아 작가 : 1828-1910)  굳은 결심은 가장 유용한 지식이다.(나폴레옹)  굴욕적인 신앙보다는 숫제 무신앙인 편이 좋다.(베이컨)  굶주림이 혁명을 낳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도 민중이 먹게 되자 식욕을 얻은 것이다.(니체)  권리는 어느 곳에나 도리를 벗어난 곳에서는 존재할수 없다.(파크)  권세가 인간을 교만으로 이끌어갈 때, 시가 그에게 한계를 상기시켜준다.(케네디)  귀하여! 가라, 달려라, 그리고 세계가 6일 동안에 만들어졌음을 잊지말라. 그대는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에게 청구할수 있지만 시간만은 안된다.(보나파르트 나폴레옹 - 프랑스군인황제:1769~1821)  그날의 일은 그날 해치우는 것이 나의 일상규칙이다.(웨링턴)  그는 시골을 무척 좋아한다. 그런데 실은 그가 시골이 가장 좋아지는 것은 도시에서 시골에 관해 배우고 있을 때이다.(윌리엄 쿠퍼 - 영국 시인 : 1731-1800)  그대는 두개의 손과 한개의 입을 가지고 있다. 그 뜻을 잘 생각해보라. 하나가 노동을 위해서, 다른 하나가 식사를 위해서 있다.(하인리히 리케르트 - 독일 철학자 : 1863-1939)  그대들은 씨를 뿌린다. 거두어들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다. 그대들은 부를 발견했다. 그것들을 모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다. 그대들은 옷감을 짰으나 입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다. 그대들은 무기를 만든다. 쓰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다.(셀리)  그대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있거든, 그가 누구이든 그것을 잊어버리고 용서하라. 그때에 그대는 용서한다는 행복을 알 것이다. 우리에게는 남을 책망할 수 있는 권리는 없는 것이다.(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 러시아작가:1828~1910)  그대의 생활은 그대 자신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는, 그 노력에 따라서 꼭 그만큼의 의미를 갖는다.(헤르만 헤세 - 독일 시인)  그래도 지구는 돈다.(갈릴레오 - G. Galileo)  그릇이 차면 넘치고, 사람이 자만하면 이지러진다.(명심보감)  그 어떤 강제의 의해서 우리들은 결코 행복하게 될 수는 없다.(콜르리지)  극단은 부도덕한 것이다. 그건 사람으로부터 발생한다. 모든 균형은 옳다. 그 것은 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므로.(라 브르예르)  근대는 비극을 희극의 옷속에 감추고 위대한 진실도 평범하게, 혹은 추악하 게 혹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것 이 틀림없는 근대성이란 것 이다.(와일드)  근로가 잠들면 빈곤은 창으로 들어온다.(라이닉)  근면이야말로 태만, 불성실, 빈곤의 세가지 부끄러움을 쫓아줍니다.(볼테일)  근심은 미를 훔치는 도둑이다.(마미언)  근심은 세월을 거치지 않고 백발과 노령을 가져온다.(영국 속담)  금전은 무자비한 주인이지만 유익한 종이 되기도 한다.(유태격언)  긍지는 인간이 입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갑옷이다.(제롬)  기계는 인간을 위대한 자연의 문제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욱 심각한 문제로 인간을 괴롭힐 것이다.(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 프랑스 작가:1900~1944)  기고만장하게 행동하느니보다 허리를 굽히는 것이 슬리로움에 더 가깝다.(윌리엄 워즈워스 - 영국 시인:1770~1850)  기대하지 않는 자는 실망하지도 않을 것이다.(울거트)  기도는 음악처럼 신성하고 구원이 된다. 기도는 신뢰이며 확인이다. 진정 기도하는 자는 원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의 경우와 고뇌를 말할 뿐이다.(헤르만 헤세 - Hermann Hesse)  기둥이 약하면 집이 흔들리듯, 의지가 약하면 생활도 흔들린다.(에머슨)  기분좋은 잠과 부담없는 독서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어느 경우에도 심장의 고동이 부드러워지고 긴장감이 풀리며, 마음은 냉정하게 된다. 최선의 독서법은 잠자리 곁에서의 독서이다.(林語堂 - 중국문학가:1895~1976)  기억은 종종 어리석음의 속성이다. 그것은 무거운 정신의 소유자의 것으로서, 그들에게 지워짐으로써 주저앉을 정도로 그 무거움을 더하게 만든다.(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 - Francois Auguste Rene, vicomte de Chateaubriand)  기와 한장 아껴서 대들보 썩는다.(한국 속담)  기회는 새와 같은 것, 날아가기 전에 꼭 잡아라.(스마일즈)  기쁨을 그 자신에게 묶어두는 사람은 날개달린 인생을 파괴한다. 그러나 기쁨이 날아갈 때 그것에 키스하는 사람은 영원한 해돋이에서 산다.(윌리엄 블레이크 - WIlliam Blake)  기쁨을 주는 사람만이 더 많은 기쁨을 즐길 수 있다.(알렉산더 듀마)  깃털보다도 가벼운 것은 - 먼지다. 먼지보다도 가벼운 것은 - 바람이다. 바람보다도 가벼운 것은 - 여자다. 여자보다도 가벼운 것은 - 아무 것도 없다.(뭇세)  깊고 무서운 진실을 말하라. 자기가 느낀 바를 표현하는 데 있어 결코 주저하지 말라.( )  깨끗한 의복은 좋은 소개장.(영국속담)  깨닫기만 하고 실천을 안하면 깨달음이 아무 소용없다.(힐티)  꿈을 품고 무언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시작하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용기 속에 당신의 천재성과 능력과 기적이 모두 숨어 있다.(괴테)  끝나 버리기 전에는 무슨 일이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 Marcus Tullius Cicero)  나는 간소하면서 아무 허세도 없는 생활이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최상의 것. 육체를 위해서나 정신을 위해서나 최상의 것이라고 생각한다.(알베르토 아인슈타인 - Albert Einstein)  나는 감사하며 미안해하는 새앙쥐처럼 '찍찍' 하지 않고 나의 직업에 자만심을 가지고 사자처럼 외치고 싶다.(존 어니스트 스타인벡 - 미국 소설가:1902~1968)  나는 나 자신을 빼놓고는 모두 안다.(비용)  나는 내가 알기 원하는 것을 배우려면 늙어야 하겠고, 내가 아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젊어야 하겠다.(조제프 주베르 - Barthelemy Catherine Joubert)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요, 나는 내 마음의 선장이다.(윌리암 어네스트 헨리)  나는 대단한 인간이 아니다. 노력하는 노인일뿐이다.(넬슨 롤리랄라 만델라 - 남아공 대통령)  나는 비극을 사랑한다. 나는 비극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어떤 아름다운 것이 있음으로해서 비극을 사랑한다.(찰리 채플린 - 미국 희극배우 : 1889-1977)  나는 세계 시민이다.(디오게네스 - Diogenes)  나는 아무래도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여행하는 사람, 한 개의 편로(遍路)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당신들인들 그 이상이겠는가.(요한 볼프강 폰 괴테 - 독일 문호 : 1749-1832)  나는 알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따라서 나는 이 세상을 떠날 때도 알몸으로 가지 않을 수 없다.(미겔 데 사아베드라 세르반테스 - 스페인 소설가 : 1547 ~ 1616)  나는 언제나 친구나 조국을 위하여 목숨 바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호라티우스 - 로마 시인:BC65~8)  나는 여자의 맹세를 물에 적어놓는다.(소포클레스)  나는 완고한 덕보다는 융통성이 있는 악덕을 좋아한다.(몰리에르)  나는 완미한 덕보다 융통성 있는 악덕을 더 사랑한다.(모리에르)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은 일을 해 보고 죽게 하소서 ! (백범 김구)  나는 이제까지 토지를 사랑해왔다. 토지는 언제나 인간보다 좋은 것이었다.인간은 일시적으로 겨우 소수의 사람들밖에 관심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헤밍웨이 - 미국작가:1899~1961)  나는 인간이었다. 그것은 싸우는 者(자)란 것을 의미한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 독일 문호 : 1749-1832)  나는 인내하는 데에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욕심을 부리는 데에는 마음을 둔하게 하고 있다. 다만 내가 구할 수 있는 방향에서 손에 닿는 것을 구할 뿐이다.(미셸 에켐 드 몽테뉴 - 프랑스 사상가)  나는 인생 속에서 네가지 金言을 익혔다. 남을 해롭게 하는 말은 결코 하지 말라.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 충고는 하지말라. 불평하지 말라. 설명하지 말라.(R. F. 스콧 - 영국 탐험가:1868~1912)  나는 일찍이 고독만큼 사이좋은 친구를 찾아 본 일이 없다.(H D 도로)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우두머리)를 죽이기로 맹세하나 이다.(이봉창 열사)  나는 타인의 고통에 동정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즐거움에 공감할 수 없다. 타인의 행복에는 무엇인가 기묘하게 지루한 감이 든다.(토머스 헨리 헉슬리 - 영국 자연과학자:1825~1895)  나는 평화의 수단으로서 밖에는 아직 전쟁을 주장해 본 일이 없다.(유리시즈 그란트)  나는 하나의 법칙, 즉 분명해야 한다는 것만 안다. 내가 분명하지 않다면 모든 내 세계는 無(무)로 허무하게 사라진다.(스탕달 - 프랑스 소설가)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 있다.(도산 안창호)  나라의 질서가 바로잡혀 있을때에는 돈이나 지위가 없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된다. 그러나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돈이 있고 지위가 높다는 것은 수치이다.(공자 - 孔子 : 유교의 시조)  나로서는 어느 목적지에 가고자 여행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가기 위해서 여행한다. 나는 여행을 위해서 여행한다. 중요한 것은 이동하는 것이다.(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 영국 소설가:1850 ~ 1894)  나를 가장 잘 아는 자를 친구로 하고, 나를 가장 잘 모르는 자를 적으로 삼 는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보 나르)  나쁜 책을 읽고 몸을 버렸다는 어느 소녀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워커)  나에게 자유를 다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다오.(패드릭 핸리)  나의 실제적인 독서 법칙은 세가지다. 첫째, 1년이 지나지 않은 책은 읽지 않는다. 둘째, 유명한 책만 읽는다. 셋째, 좋아하는 책만 읽는다.(랠프 월도 에머슨 - 미국 시인 : 1803-1882)  나의 음악은 어린 아이들과 동물들이 가장 잘 이해한다.(스트라빈스키)  나의 인생 신조는, 일로 즐거움을 삼고 즐거움을 또한 나의 가장 큰 일로 삼 는 것이다.(아이론 바하)  나의 취미는 귀족적이고 나의 행동은 민주적이다.(위고)  나이는 사랑과 같아 숨길 수 없다.(데커)  낙천주의자는 모든 장소에서 청신호밖에는 보지 않는 사람. 비관주의자는 붉은 정지신호밖에는 보지 않는사람. 그러나 정말 현명한 사람이란 색맹을 말한다.(슈바이처)  낙천주의자는 우매하고 비관주의자는 무정하다.(콕토)  날이 밝기 직전에 항상 가장 어둡다.(풀러)  남녀 관계란 두 사람만이 저녁식사를 세 번씩이나 갖고도 아무 일이 없을 때는 단념하는 것이 좋다.(고즈 야스지로)  남에게 부정하게 대하지 말 것이며, 남이 나에게 부정하지 못하게 하라.(마호메트 - Mahomet)  남은 많이 용서하되 자신은 결코 용서하지 말라.(푸블릴리우스 시루스)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있는 자이지만 자기를 아는 사람이 더욱 명찰한 자이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는 자이지만 자기 스스로를 이기는 사람은 더욱 강한 사람이다.(노자)  남을 정면으로 비난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를 망신시키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비난하는 것은 불성실하다. 덕을 기만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 러시아 작가:1828~1910)  남의 위험에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교훈을 끌어내라.(푸블리우스 아페르 테렌티우스 - Publius Terentius Afer)  남의 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잘 알고있는 사람은 더 총명한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이겨내는 사람은 그 이상으로 강한 사람이다.(노자 - 중국 사상가:BC604 ? ~ ?)  남의 학설을 변론함에 있어 먼저 그 입장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 근본 자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어구에 얽매이거나 문자에 구애되어서는 안된다. 그 이론 자체가 드러나지 않고, 가리워 보이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정제두)  남이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어떤때는 무한한 동정심이 샘솟지만 또 그것을 보고 가장 참혹한 기쁨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아르투어 쇼펜하워 - 독일 철학자:1788~1860)  남이 나를 속인다고 하지말라. 사람은 늘 자기가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대의 생각이 일부러 올바른 중심을 벗어나서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요한볼프강 폰 괴테 - 독일의 철학자)  남자가 야생동물이면 여자는 이 야생동물을 길들이는 자이다.(폴리스 바이언)  남자끼리는 원래 서로가 무관심하 것이지만 여자란 태어나면서부터 적이다.(쇼펜하워)  남자나 여자의 교양의 시금석은 싸울때 어떻게 행동하는가이다.(조지 버나드 쇼 - 영국 작가 : 1856-1950)  남자는 마음으로 늙고 여자는 얼굴로 늙는다.(서양 속담)  남자는 언제나 여인의 첫사랑이 되고 싶어한다. 여자는 남자의 마지막 낭만이 되려고 한다.(와일)  남자는 인생을 지나치게 빨리 깨닫고, 여자는 인생을 너무나 늦게 알게 된 다.(와일드)  남자는 자기 자신의 비밀보다는 타인의 비밀을 한층 굳게 지킨다. 여자는 그와는 반대로 타인의 비밀보다는 자기 자신의 비밀을 더욱 잘 지킨다.(라 브뤼에르)  남자들은 자기보다도 못한 것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보잘것없는 것, 더 러운 것, 불명예스러운 것, 그런 것까지 사랑하실 수 있어요. 허지만 저희 들 여자는 사랑하고 있을 때는 그 사람을 존경하는 거예요. 만약 그 존경을 잃어 버린다면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오스카 와일 드)  남자란, 말하며 접근할 때는 봄이지만 결혼해 버리면 겨울이다.(셰익스피어)  남자의 마음은 대리석과 같고 여자의마음은 밀림과 같다.(세익스피어)  남자의 사랑은 그 인생의 일부이고 여자의 사랑은 그 인생의 전부이다.(빠 이론)  내가 가장 사랑하는 덕이 있다. 단 하나, 그 이름은 '자유'라고 한다.(헷 세)  내가 소라고 말하면 그것은 소가 되고, 내가 말이라고 하면 그것은 말이 된다.(장자)  내가 십오(十五)에 학(學)에 뜻(志)을 두고, 삼십에 서고.(공자 - 孔子)  내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는 나로 하여금 헛되이 살지 않게 하라.(에머슨)  내가 알고 있는 한도에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은 남몰래 어떤 좋은 일을 해 놓고 나서, 그것이 우연히 여러 사람에 게 알려진다는 일이다.(램)  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칭찬해 주는 사람은 좋은 친구다.(이 언)  내가 처한 모든 땅에서 내가 당한 모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자.(루터)  내기는 탐욕의 아들이며, 부정의 형제이며, 불행의 아버지이다.(워싱턴)  내 비장의 무기는 아직 손 안에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나폴레옹)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나폴레옹)  내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당신의 과거는 쫓아버려라.(오슬러)  내일의 모든 꽃은 오늘의 씨앗에 근거한 것이다.(중국 속담)  내일의 현실에 대한 유일한 제한은 오늘의 의구심이다. 강하고 적극적인 신념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자.(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 미국 32대 대통령)  내 자신의 무식을 아는 것은 지식에로의 첫걸음이다.(바이런)  내 차라리 하룻동안 계율을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백년 동안 계율을 깨뜨리고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자장)  냉소자란 어떠한 사람인가. 모든것의 가격을 알면서 어느 것의 가치도 모르는 사람이다.(오스카 핑걸 오프레어티 윌스 와일드 - 영국 작가:1854~1900)  너는 네가 가장 가까이 있는 의무를 수행하라.(킹그슬리)  너무 많다는 것은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무 건강한 사람같이 심한 병자는 없다.(로맹 롤랑 - 프랑스 작가:1866~1944)  너의 위대한 조상을 본받아 행동하라.(드라이든)  너의 의무를 다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님에게 맡겨라.(코니일)  너 자신을 다스려라. 그러면 당신은 세계를 다스릴 것이다.(중국 속담)  너 자신을 아는 것을 너의 일로 삼으라.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교훈이다.(미겔 더 사아베드라 세르반테스 - 스페인 소설가:1547~1616)  너 자신을 알라.(소크라테스 - Socrates)  넌 자신을 누구에겐가 필요한 존재로 만들라.누구에게든 인생을 고되게 만들지 말라.(에머슨)  네가 고독했을 때, 나는 가장 고독하지 않다.(키케로)  네가 아무리 자연의 문을 세게 두드려도 자연은 너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대답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 러시아 작가:1818~1883)  노년은 청춘에 못지 않은 좋은 기회이다.(롱펠로우)  노동은 생명이요, 사상이요, 광명이다.(위고)  노동은 인류를 괴롭히는 온갖 질병과 비참에 대한 최고의 치료법이다.(토마스 칼라일 - 영국비평가,역사가:1795~1881)  노동은 인생을 감미롭게 한다. 노동을 미워하는 자만이 고뇌를 맛본다.(월 헤름 브르만)  노력을 중단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그것은 습관을 잃는다. 습관은 버리기는 쉽지만 다시 들이기는 어렵다.(빅토르 마리 위고 - Victor Marie Hugo)  노령에 활기를 주는 진정한 방법은 마음의 청춘은 연장하는 것이다.(콜린즈)  노병(老兵)은 결코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맥아더 - D. Macarthur)  논리와 상식은 다르다.(하버드)  논리의 결핍은 괴롭다. 지나친 논리는 싫증나게 한다. 인생은 논리를 회피한다. 논리만으로 이루려하면 인위적이며 어색하게 된다.(앙드레 폴 기욤 지드 - Andre Paul Guillaume Gide)  논쟁에는 귀를 기울여라. 그러나 논쟁에 끼여들지 않도록 하라. 아무리 작은 말이라 할지라도 노여움이나 격정이 일어난다는 것을 경계하다.(고리키 - 러시아소설가:1868~1936)  높이 나는 새가 멀리본다.안톤 쉬나크의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말로 당연히 높이 날아 올라야 멀리 볼수 있다는 내용을 높이 높이 날고자하는 한 갈매기의 꿈에 비유한 말.- 맘속행복 (lcw1999@hanmail.net) 님 문의.  뇌물로 얻은 충성은 뇌물로 정복된다.(세네카)  누가 가장 영광스럽게 사는 사람인가? 한번도 실패함이 없이 나아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다시 일어나는 데에 인간의 참된 영광이 있다.(스미스)  누구나 단번에 비상한 악인이 되는 일은 없다.(유베나리우스)  누구나 오래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누구를 막론하고 나이는 먹기 싫어한다.(스위프트)  누구든지 크나큰 시련을 당하기 전에는 참다운 인간이 못된다.(레오랄지이)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누구를 위해서도 입을 열지 말라.(윌리엄 셰익스피어 - 영국극작가:1564~1616)  누구 한 사람 아는 이 없는 곳에서 사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헤르만 헤세 - 독일 시인:1877~1962)  눈물과 함께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참다운 맛을 못본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 독일의 문호:1749~1832)  눈물을 흘리면서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참맛을 알 수 없다.(괴테)  눈 오는 길을 걸어갈 때 발걸음 함부로 하지말지어다.오늘 내가 남긴 자국은 드디어 뒷 사람의 길이 되느니.눈보라 치는 조국의 암담한 운명을 맞아 자신의 안위와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후세에 이어줄 역사를 강조하며 백범 김구 선생께서 주로 쓰셨다고 합니다.(서산대사의 禪詩)  눈을 감아라. 그럼 너는 너 자신을 볼 수 있으리라.(버틀러)  늑대는 이빨을 잃어도 그 천성은 잃지 않는다.(풀러)  늘 원대한 포부가 나를 인도하고, 깊은 사상이 나의 행동을 인도해야 한다. 조그마한 목전의 감정이 내 마음을 지배하고 얕은 생각이 나의 행동을 명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아르투어 쇼펜하워 - Arthur Schopennauer)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려고 생각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충분히 살펴보아야 한다.(몰리에르)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람은,먼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매신저)  다른 사람의 속마음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속마음으로 들어오도록 하라.(아우렐리우스)  다른 사람이 말하는 일에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되도록 말하는 상대방의 마음속으로 파고들도록 그대 자신을 길들이게 하라.(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로마 황제:121~180)  다른 사람이 성공한 일은 누구나, 언제든지, 어디에서건 성공 할 수 있다.(쌩 떽쥐베리 [Antoine de Saint-Exupery] :1900-1955)  다른 인간을 증오하는 댓가는,자신을 더 적게 사랑하는 것이다.(클리버)  다리에 의지하는 농민이 무릎에 의지하는 신사보다 고결하다.( )  다시 한번이라는 어리석은 말을 내게는 하지 말라.(미라보)  다정하고 조용한 말은 힘이 있다.(에머슨)  단순하지만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세가지 열정이 나의 삶을 지배해왔다. 그것들은 사랑의 열망과 지식의 탐구와 고난을 겪고 있는 인류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동정심이다.(버트런드 아서 윌리엄 러셀 - 영국 철학자:1872 ~ 1970)  단지 돈만을 위해 결혼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고, 단지 사랑만을 위해 결혼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새뮤얼 존슨 - 영국시인,비평가:1709~1784)  단 하나의 하늘에 올려진 고마워하는 생각이 완전한 기도이다.(레싱)  달콤한 사랑이여...아아, 네게 날개가 없었으면 좋겠는데 .(아이텐드르프)  담화는 마음의 보다 즐거운 향연이다.(호메로스)  당나귀는 긴 귀로 구별할 수 있으며 어리석은 자는 긴 혀로 구별할 수 있다.(유태 격언)  당신은 모든 사람들을 잠시동안 속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을 항상 속일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을 항상 속일수는 없다.(에이브러햄 링컨 - Abraham Lincoln)  당신은 바로 자기 자신의 창조자이다.(카네기)  당신은 의지의 주인이 되라. 그리고 당신은 양심의 노예가 되라.(유태 속담)  당신은 항상 영웅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항상 사람은 될 수 있다.(괴테)  당신의 인생은 당신이 하루종일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달려있다.(에머슨)  당신의 정신을 위대한 사상으로 기르라. 영웅을 믿는 일이 영웅을 만들어 낸 다.(밴자민 디즈렐리)  당신의 정열을 지배하라. 그러지 않으면 정열이 당신을 지배할 것이다.(호라티우스 - 로마시인:BC65~8)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이 전문가의 지식과 다르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 두 사람 중 한사람은 학자인체 할 뿐이기 때문에.(올리버 웬들 홈스 - 미국 시인:1809~1894)  당신이 누군가를 배반 한다면, 당신은 또한 당신 자신을 배반하는 셈이다.(싱거)  당신이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루시우스 아니에우스 세네카 - 로마 철학자 : BC4 - AD65)  대도시에서는 우정이 뿔뿔이 흩어진다. 이웃이라는 가까운 교제는 찾아 볼 수 없다.(프란시스 베이컨 - 영국 정치가:1561 ~ 1626)  대부분의 사람들이 커다란 야망으로 시달리지만 않는다면 작은 일에 성공하련만.(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 미국 시인 : 1807-1882)  대자연은 인간이 사는 거리와 멀리 떨어져 자연만이 혼자 있을 때 가장 번 영한다.(솔로)  대장부란, 인이라는 천하의 넓은 집에 살고, 예라는 천하의 바른 위치에 서서, 의리라는 천하의 큰 도를 행하는 것이다.( )  대지는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寶庫(보고)다.(토마스 제퍼슨 - 미국대통령:1743~1826)  대학은 직업을 위한 훈련학교로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교양따위에는 전혀 무관심한 전권주의자들이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버트런트 아서 윌리엄 러셀 - 영국 철학자 : 1872-1970)  대화는 학생들의 실험실이요,작업장이다.(에머슨)  대화시의 신중은 웅변보다 더 중요하다.(그라시안)  덕(德)은 중용(中庸)을 지키는데 있다.(아리스토텔레스 - Aristoteles)  덕이 없는 아름다움은 향기 없는 꽃이다.(프랑스 격언)  덕행은 스스로를 정당화하면 가치가 떨어진다.(볼테르 - 프랑스의 사상가 : Voltaire)  도가 지나친 겸손은 허영심이다.(폰 코체뷰에)  도박을 즐기는 모든 인간은,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서 확실한 것을 걸고 내기를 한다.(파스칼)  도중에서 던져버린 일, 손을 대지 않고 방치해 둔 일은 이윽고 산처럼 쌓인 일이 되어 사람을 괴롭힌다.(베메르길리우스 - 로마의 시인 : BC 70-19)  독립은 선전만으로 될 수 없고 허장성세(虛張聲勢) 만으로 될 수 없다. 독립의 가장 근본적 요소는 각성한 민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중의 교양에 총력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2천만민중이 총궐기하여 독립을 부르짖게 되면 한국의 독립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서재필 - 개화기 정치가-독립운동가 : 1864-1951)  독립이 자유롭게 사는 조건이라면 여자는 결혼해서는 안된다.(자멘 그리어)  독창성의 장점은 참신이 아니라, 성실이다. 믿는 사람은 독창적인 인간이다.(토머스 칼라일 - 영국비평가,역사가:1795~1881)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이라 불리는 상품은 없다.(헨리 벤 다이크)  돈은 진정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건전하고 성공적인 개인과 국가의 도덕은 이 사실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조지 버나드 쇼 - George Bernard Shaw)  돈은 최선의 종이요 최악의 주인이다.(프란시스 베이컨 - 영국 철학자 : 1561~1626)  돈이란 훌륭한 하인이기도 하지만, 나쁜 주인이기도 하다.(프랭클린)  돈이 많아지면 곧 미덕은 감소된다.(베베르)  돈이 있어도 이상이 없는 사람은 몰락의 길을 밟는다.(도스도예프스키)  동정은 최고의 모욕이다.(프리드리히 빌헤름 니체 - 독일 철학자:1844~1900)  두려운 것은 죽음이나 고난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  두 사람의 개성의 만남은 두가지 화확물질의 접촉과 같다, 반응이 있으면 둘 다 변화한다.(융)  두 사람의 머리는 한 사람의 머리보다 낫다.(헤이우드)  두 여인을 화합시키기 보다는 유럽 전체를 화합시키는 편이 쉽다.(루이 14세)  때가 오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시간은 진리의 아버지이다.(타블레)  또 다시 역사를 말살하고 조상을 모욕하는 어리석은 후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자기의 무능과 태만과 비겁으로 말미암아 자손 만대에 누를 끼치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이 역사적 사명을 깊이 통찰하고 지성일관 그 완수에 매진해야 할 줄로 안다.(장 준하)  로마에서 신문의 검열이 있었다고 하면 우리는 오늘날 호라티우스나 키케로의 철학적 산문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볼테르 - 프랑스 사상가:1694~1778)  마냥 슬픔에 잠긴다는 것은 위험하다. 용기를 빼앗아 갈 뿐 아니라 회복하려는 의욕마저 잃게 하기 때문이다.(앙리 프레데리크 아미엘 - 스위스 철학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쳐라. 그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않으리라.(성경)  마음보다 더 잔인한 무기는 없다.(장자)  마음에 고민이 있는 자의 하루는 낱낱이 어려운 일뿐인 것이다.(구약성서)  마음을 비우면 건강해지고 정력이 넘친다.(노만 필 박사[미국의 목사]의 저서 [적극적인 사고방식] 에서)  마음의 고통은 육체적 고통보다 훨씬 크다.(사일러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성경)  마음이 어둡고 산란할 때엔 가다듬을 줄 알아야 하고, 마음이 긴장하고 딱딱할 때엔 놓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어두운 마음을 고칠지라도 흔들리는 마음이 다시 병들기 쉽다.(채근담)  마음이 어진 사람은 조그마한 집에 살아도 행복하다.(홍자성)  마음이 없으면 보고도 안 보이고 들어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중국고전)  마음이 재촉하고 이성이 허용하는데도 모험을 두려워하는 자는 겁쟁이요, 자기 의도에서 멀리 벗어나 모험하는 자는 노예이다.(하인리히 하이네 - Heinrich Heine)  만 가지 이치, 하나의 근원은 단번에 깨쳐지는 것이 아니므로 참마음, 진실된 본체는 애써 연구하는데 있다.(이황)  만나고, 알고, 사랑하고, 그리고 이별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슬픈 이 야기이다.(콜르리지)  만물의 근원은 물.(탈레스 - Thales)  만물의 근원은 불.(헤라클레이토스 - Herakleiros)  만물의 근원은 원자.(데모크리토스 - Demokritos)  만약 급히 서두르려면 돌아 가는 길로 가라.(영국속담)  만약 자기의 의견을 들어주는 합법수단이 거절되었을 때에는 국민은 폭력으로 호소할 권리가 있다.(앙드레 모루아 - 프랑스 작가 : 1885-1967)  만약 제군이 노예의 목에다 쇠사슬을 감는다면, 그 쇠사슬의 한 끝은 제군의 목에 얽혀 붙을 것이다.(에머슨)  만약 제군이 돈의 가치를 알고 싶으면 나가서 얼마간의 돈을 빌려 보라.(프랭클린)  만약 좋은 펜과 좋은 잉크와 좋은 종이가 있다면 문제없이 걸작을 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이다.(앙드레 폴 기욤 지드 - 프랑스 소설가 : 1869-1951)  만약 평화가 명예로써 유지되지 못한다면, 그런 평화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러셀)  만일 자유 사회가 가난한 다수를 도울수 없다면 부유한 소수도 구원할 수 없다.(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 John Fitzgerald Kennedy)  많은 불행은 난처한 일과 말하지 않은 채로 남겨진 일 때문에 생겼다.(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 러시아 작가)  많은 벗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의 진실한 벗을 가질 수 없다.(아리스토텔레스)  많은 사람이 충고를 받지만, 오직 현명한 자만이 충고의 덕을 본다.(푸블릴리우스 시루스)  많은 사물중에서 가운데가 제일이다. 내 위치도 가운데가 되게 하라.(포킬리데스)  많은 친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의 친구도 없다.(W 글라임)  많이 가진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손에 넣는다. 조금밖에 갖지 못한 사람은 그것마저 빼앗긴다.(하인리히 하이네 - 독일시인:1797~1856)  말도 행동이고 행동도 말의 일종이다.(에머슨)  말로하는 사랑은 쉽게 외면할 수 있으나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랑은 저항할 수가 없다.(무니햄)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잡초로 가득 찬 정원과 같다.(하우얼)  말 수가 적고 친절한 것은 여성의 가장 좋은 장식이다.(톨스토이)  말은 행동의 거울이다.(솔론)  말이 입힌 상처는 칼이 입힌 상처보다 깊다.(모로코 속담)  말하는 것은 지식의 영역이고 듣는 것은 지혜의 특권이다.(올리버 웬들 홈스 - Oliver Wendell Holmes, Jr.)  말하자마자 행동하는 사람, 그것이 가치있는 사람이다.(엔니웃스)  말 한 마디가 세계를 지배한다.(쿠크)  맹세는 말에 지나지 않고 말은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버틀러)  머리 위에는 별이 반짝이는 하늘, 내 마음에는 도덕률.(칸트 - I. Kant)  먹는 것은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함이요, 입는 것은 남을 즐겁게 하기 위함이다.(벤저민 프랭클린 - 미국 정치가 : 1706-1790)  먼 곳으로 항해하는 배가 풍파를 만나지 않고 조용히만 갈 수는 없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독일 철학자)  명성은 젊은이에게 광채를 주고, 노인에게는 위엄을 가져다 준다.(랠프 월도 에머슨 - 미국 시인:1803~1882)  명성을 얻은 예술가는 그 때문에 괴로워한다. 따라서 그들의 처녀작이 때로는 최고다.(루트비히 판 베토벤 - 독일 작곡가:1770~1827)  모두들 다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일체가 이유가 없어도 자기 고집 때문에 자 살하는 것은 나뿐이다.(도스토예프스키)  모든 개량과 진보의 근본은 근로이다.(카네기)  모든 개성에는 제각기 아름다움이 있다.(영국 사상가 에머슨)  모든 국가의 기초는 그 나라 젊은이들의 교육이다.(디오게네스)  모든 기술 중에서 제일이며 가장 존경을 받는 것은 농업이다.(장 자크 루소 - 프랑스 사상가 : 1712-1778)  모든 날 중 가장 완전히 잃어버린 날은 웃지 않는 날이다.(샹포르)  모든 사람에 대해서 친구인 사람은 누구에 대해서도 친구가 아닌 것이다.(이 언)  모든 사람은 자기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할 권리가 있으며, 또 그 진리를 위해 자신을 불태울 권리를 가지고 있다.(새뮤얼 존슨 - Samuel Johnson)  모든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찬양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이다.(사무엘 존슨)  모든 사람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불행위에 세워진다.(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 러시아 작가 : 1818-1883)  모든 양서를 읽는다는 것은 지난 몇세기 동안에 걸친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것과 같다.(데카르트 - 프랑스 철학자,수학자:1596 ~ 1650)  모든 위대한 사업에도 최초에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던 것들입니다.(카알라일)  모든 위대한 진리는 처음에는 모독의 말로 출발한다.(조지 버나드 쇼 - 영국 작가 : 1856-1950)  모든 일은 계획으로 시작하고, 노력으로 성취되며, 오만으로 망친다.(관자)  모든 일은 어려운 고비를 넘겨야 쉬워진다.(풀러)  모든 일을 용서받는 청년기는 아무것도 스스로 용서치 않으며, 스스로 모든 일을 용서하는 노년기는 아무것도 용서 받지 못한다.(조지 버나드 쇼 - George Bernard Shaw)  모든 자기학대의 감정은 체념이 부족한 까닭이다. 자기학대의 감정은 자기를 다칠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남을 다치게 한다.(버트런드 아서 윌리엄 러셀 - 영국 철학자)  모든 죄악의 기본은 조바심과 게으름이다.(카프카)  모든 지식중에서 결혼에 관한 지식이 가장 늦어지고 있다.(발자크)  모든 행복한 가족들은 서로 서로 닮은 데가 많다. 그러나 모든 불행한 가족은 그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불행하다.(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 러시아 작가:1828 ~ 1910)  모든 혁명은 우선은 한 사람의 인간이 생각해 낸 하나의 사상에 지니지 않 았던 것이다.(에머슨)  모략, 중상만큼 빠른 것이 없고, 쉽게 발설되는 것도 없고, 빨리 받아들여지는 것도 없고, 널리 퍼지는 것도 없다.(마르쿠스 톨리우스 키케로 - 로마 정치가 : BC 106-43)  모방에 의해서 위대하게 된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었다.(사무엘 죤슨)  모범은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교훈이다.(  
558    순 우리 말 어원을 찾아... 댓글:  조회:5260  추천:0  2015-03-08
소리리론으로 풀어본 순 우리말 어원   ^^     ※ 9자음(초성) ※ 9자음(종성) ※ 6모음 ① [ㅇ] : 원천 ① [ㅇ] : 큰울림 ① [ㅏ] : 東(동방태양), 앞 ② [ㄷ] : 다음 ② [ㄷ] : 닫힘 ② [ㅓ] : 西(서방태양), 안   [ㅌ] : 특징   ③ [ㅅ] : 속도 ③ [ㅗ] : 南(남방태양), 위   [ㅅ] : 솟음↑, 시작, 씨   ④ [ㄴ] : 진행 ④ [ㅜ] : 北(북방태양), 밑   [ㅈ] : 조금(솟음↑),중앙,저장   ⑤ [ㅂ] : 받음 ⑤ [ㅡ] : 진행   [ㅊ] : 처음(솟음↑),초월(솟음↑) ⑥ [ㅁ] : 마침 ⑥ [ㅣ] : 마침   ④ [ㄴ] : 내림↓, 눕다 ⑦ [ㄱ] : 가름 ⑤ [ㅂ] : 발산 ⑧ [ㅍ] : 평선   ※ 조합모음   ⑥ [ㅁ] : 뭉침 ⑨ [ㄹ] : 울림, 생명 ⑦ [ㄱ] : 곡선, 굽음 [ㅐ] : 양성 마침 ⑧ [ㅍ] : 평선 [ㅔ] : 음성 마침 ⑨ [ㄹ] : 울림 [ㅘ] : 높고 넓음 [ㅝ] : 깊은 내면   ============================================================= ※ 아버지   아버지 = ㅇ(원천) + ㅏ(밖) + ㅂ(빛) + ㅓ(얻다) + ㅈ(씨) + ㅣ(존재) ㅇ : 원천 ㅏ : 집밖 ㅂ : 빛 ㅓ : 얻다 ㅈ : ㅈ은 ㅅ과 같은 의미로 시작(씨)의 의미를 지님 ㅣ : 존재를 의미하는 모음 ㅣ : 아버지, 어머니, 돼지, 개, 고양이, 망아지, 송아지, 쥐, 호랑이, 나비처럼 맨 뒤에 붙는 존재를 나타내는 모음   해설) 아버지 : 밖(ㅇ,ㅏ)에서 빛(ㅂ)으로 일군 곡식을 벌어(ㅓ)드리고 씨(ㅈ)를 생산하는 존재(ㅣ)   ※ 어머니   어머니 = ㅇ(원천) + ㅓ(음성) + ㅁ(집안) + ㅓ(음성) + ㄴ(눕다) + ㅣ(존재) ㅇ : 원천 ㅓ : 집안 ㅁ : 집안에서 아버지가 벌어온 것을 잘 모아 관리하는 의미 ㄴ : 눕다의 의미 ㅣ : 존재   해설) 어머니 : 집 안에서(ㅇ,ㅓ) 아버지가 벌어온 것을 잘 모아(ㅁ) 집안(ㅓ)에서 관리하고 누어서(ㄴ) 씨를 받는 존재(ㅣ)   ※ 남편   남편 = 남(남방태양) + 편(방향) 남 : 남방태양, 중천태양으로 가장 높고 가장 밝은 태양, 남편은 가장 높고 가장 밝은 존재 편 : 방향   해설) 남편 : 가장 높고(남방태양) 가장 밝은(남방태양) 분(방향)   ※ 마누라   마누라 = ㅁ(모음) + ㅏ(하다) + ㄴ(눕다) + ㅜ(밑) + ㄹ(명령) + ㅏ(하다)   ㅁ : ㅁ은 아줌마, 엄마, 마누라, 마마처럼 여성을 부를 때 사용되는 자음입니다. ㅏ : 하다 ㄴ : 씨를 받기 위하여 눕다 ㅜ : 밑 ㄹ : 울림소리로써 명령의 의미가 담겨있는 자음, 하라~~~ ㅏ : 하다   해설) 마누라 : 남자가 여자를 부르는 소리로 여보 마누라~~~ 의 의미는 여자(ㅁ,ㅏ)여 누(누)어라(라)~~~ 소리입니다 ===> 이것 읽고 ..쩝,,,,   ※ 아내   아내 = ㅇ(원천) + ㅏ(하다) + ㄴ(안) + ㅏ(하다) + ㅣ(존재)   ㅇ : 원천 ㅏ : 하다 ㄴ : 내부 ㅏ : 하다 ㅣ : 존재   해설) 아내 : 원천(ㅇ)의 존재로 집 안(ㅏ,ㄴ)에서 일을 하(ㅏ)는 존재(ㅣ)   ※ 아기   아기 = ㅇ(원천) + ㅏ(원천) + ㄱ(굽음) + ㅣ(존재) ㅇ : 원천 ㅏ : 원천 ㄱ : 곡선, 서지 못하고 곡선으로 기어(굽어) 움직이는 ㅣ : 존재   예) 아기 : 가장 원천적(ㅇ,ㅏ)인 존재로 서지 못하여 기(ㄱ)어 움직이는 존재(ㅣ)   ※ 노인   노인 = ㄴ(눕다) + ㅗ(위) + 인(人) ㄴ : 눕다, 나이가 들어 자꾸 눕기 때문에 눕다의 의미가 들어 있는 ㄴ자음이 사용되었음 ㅗ : 노인은 나이가 많은 존재이기 때문에 위분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된 모음 ㅇ : 원천 ㅣ : 사람 ㄴ : 종성자음   해설) 노인 : 자꾸 눕는(ㄴ) 나이가 많이(ㅗ)든 인간(인)   ※ 할아버지   할아버지 = ㅎ(원천) + ㅏ(원천) + ㄹ(생명) + 아버지 ㅎ : 원천 ㅏ : 원천 ㄹ : 생명 아버지 : 아버지   해설) 할아버지 : 아버지보다 더 높은(ㅎ) 분 아버지보다 높은 분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ㅇ의 강조음인 ㅎ을 사용하였습니다   ※ 성인   성인 = ㅅ(솟음) + ㅓ(내공) + ㅇ(큰 울림) + 인(人)   ㅅ : 똑 바로 정신이 선 사람 ㅓ : 내공, 내면이 아주 굳건히 정립된 상태 ㅇ : 완성 ㅇ : 원천 ㅣ : 선 사람 ㄴ : 종성자음   해설) 성인 : 마음이 똑바로 서서(ㅅ) 내면(ㅓ)이 완성된(ㅇ) 존재로 어떠한 유혹에도 잘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인간(인)   ※ 형   형 = ㅎ(원천) + ㅕ(밝음) + ㅇ(큰울림) ㅎ : ㅇ의 강조음으로 원천의 강조 소리 ㅕ : 열림, 모든 일에 마음을 열어 두루 관장하는 ㅇ : 큰 울림, 집안에서 가장 크게 울려야 하는 존재   해설) 형 : 집안에서 자식 중 가장 원천적(ㅎ)이며 가장 열린(ㅕ) 마음으로 크게 울려(ㅇ)야 하는 존재   ※ 동생   동생 = ㄷ(다음, 뒤) + ㅗ(위) + ㅇ(큰울림) + 생(生) ㄷ : 형 다음으로 태어난 존재기 때문에 선택된 자음 ㅗ : 위 ㅇ : 큰 울림, 형 다음으로 크게 울려야 함 ㅅ : 생기다 ㅏ : 나오다 ㅣ : 마침모음 ㅇ : 끝 울림   해설) 동생 : 형 다음(ㄷ)에 도(ㄷ,ㅗ)달된 존재로써 형 다음으로 크게 울려야 하는 존재+생(生)     ※ 사내   사내 = ㅅ(싸다) + ㅏ(하다) + 내(내보냄) ㅅ : 씨 ㅏ : 싸다 ㄴ : 나오다 ㅏ : 하다 ㅣ : 존재   해설)사내 : 씨를 싸(ㅅ,ㅏ)서 내보내(ㄴ+ㅏ)는 존재(ㅣ)   ※ 누이   누이 = ㄴ(눕다) + ㅜ(밑으로) + ㅣ(존재) ㄴ : 눕다 ㅜ : 밑 ㅣ : 존재   해설) 누이 : 씨를 받기 위하여 눕(ㄴ,ㅜ)는 존재(ㅣ) 중국에서는 여자를 뉘라고 소리내고 있음, 우리나라는 녀(女)로 불리고 있음     ※ 아저씨   아저씨 = ㅇ(원천) + ㅏ(양성) + ㅈ(저장) + 씨(존재) ㅇ : 원천 ㅏ : 양성 ㅈ : 씨를 저장함 ㅆ : 씨 ㅣ : 존재   해설) 아저씨 : 양성(ㅇ,ㅏ)적 존재고 씨를 저장(ㅈ,ㅓ)하고 있는 존재(씨)     ※ 아가씨   아가씨 = ㅇ(아름다운) + ㅏ(하다) + ㄱ(곡선) + ㅏ(하다) + 씨(존재) ㅇ : 아름다운 ㅏ : 하다 ㄱ : 곡선미 ㅆ : 씨 ㅣ : 존재   해설) 아가씨 : 아름다운(ㅇ,ㅏ) 곡선미(ㄱ)를 드러내(ㅏ)는 여인(씨)   ※ 아주머니   아주머니 = ㅇ(원천) + ㅏ(원천) + ㅈ(저장) + ㅜ(안) + 머니(엄마) ㅇ : 원천, 아기 ㅏ : 하다 ㅈ : 저장하는 ㅜ : 몸안 머니 : 엄마   해설) 아주머니 : 아기(아)를 몸 안에 저장(ㅈ,ㅜ)했던 엄마(머니)   ※ 사위   사위 = ㅅ(씨) + ㅏ(하다) + 위 ㅅ : 씨 ㅏ : 하다, 싸다 위 : 씨를 싸기 위하여 위에 있는 사람   해설) 사위 : 씨(ㅅ)를 쌀(ㅏ)때 위(위)에 있는 남자   ※ 며느리   며느리 = ㅁ(뭉침) + ㅕ(열다) + ㄴ(눕다) + ㅡ(평지) + ㄹ(생명) + ㅣ(존재) ㅁ : 씨를 뭉치는 구멍 ㅕ : 양성모음이 추가되어, 열다 ㄴ : 눕다 ㅡ : 바닥 ㄹ : 생명 ㅣ : 존재   해설) 며느리 : 씨를 받기 위하여 구멍(ㅁ)을 열(ㅕ)고 누(ㄴ,ㅡ)워서 씨(ㄹ)를 받는 여인(ㅣ)   ======================================
557    아빠, 엄마 어원 댓글:  조회:4843  추천:1  2015-03-08
아빠 엄마 어원   환단고기에 나오는 환국이 진정 현 인류인 문명의 시원국이라면, 오늘날 인류의 시원에 대해서도 뭔가 설명을 해야 하지 않을까? 「환단고기」하편에는 현 인류의 조상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원동중은 『삼성기』를 어떻게 시작하고 있는가? 『삼성기』 하편의 첫 문장을 다함께 읽어보자.   人類之祖(인류지조)를 曰那般(왈나반)이시니 初與阿曼(초여아만)으로 相遇之處(상우지처)를 曰阿耳斯비(왈아이사비)라.   “인류의 조상을 나반(那般)이다 처음 아만(阿曼)과 서로 만난 곳은 아이사비(아이 숲,원시림)라고 하는데, 꿈에 천신의 가르침을 받아서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구환(九桓)의 무리는 모두가 그의 후손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광명족인 환국의 9환족은 바로 인류의 시조인 나반과 아만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류의 시조인 한 남자(나반)와 한 여자(아만)가 바이칼호에서 서로 떨어져 살다가 꿈에 천신의 가르침(神敎)을 받고 바이칼호를 건너 바이칼호 부근 아이시타에서 만나 결혼했다는 것이다.   나반과 아만 이 두분이야 말로 유대민족이 말하는 약 6천년전의 아담과 이브보다도 수천년이나 앞선 현 인류의 진정한 시조라는 것이다.   원동중은 삼성기에서 인류의 조상이 ‘나반’ 과 ‘아만’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밝히고 있다. 인간이 태어나서 처음 찾는 소리가 ‘아빠, 엄마’다. 서양에서도 ‘파파, 마마’, 소리가 거의 같지 않은가.   지금부터 한 20년 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의 이 모(某) 교수가 중앙일보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어원이 ‘나반’과 ‘아만’이라는 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   알타이어 전문 연구가인 그는 “아빠”, “엄마”의 어원이 바로 나반과 아만이라고 한다. (중앙일보 기재).   나반-> 나바이-> 아바이-> 아빠 아만-> 아마이-> 어마이-> 엄마     아빠’는 ‘아버지’를 뜻하는 유아어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낳은 어머니의 남편을 이르는 말이며, 한편으로 어떤 일을 처음 이룬 사람을 뜻하기도 합니다.   ‘아빠’는 아기들이 ‘ㅁ’ 다음으로 잘 발음하는 ‘아’ 혹은 ‘압’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아기들은 ‘아’보다는 ‘압’을 많이 발음하는데 이는 입을 벌렸다가 다물 때 침이 가득 고인 상태에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바꿔 말하면 침이 가득한 벌린 입을 (본능적으로 침을 삼키려고) 다물 때 생기는 소리입니다.   부모는 이점을 감안하여 아기에게 아버지의 존재를 ‘아바’로 가르쳤으니, ‘압아→아바→아빠'로 변화된 것입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다른 문화권에서도 비슷한 원리에서 아버지를 뜻하는 말이 만들어졌습니다. 영어 papa(파파), 몽골어 ‘아버’가 모두 그런 사례들입니다.   한편, 아버지는 ‘아바’에 사람을 지칭하는 토씨 ‘지’가 붙어 이뤄진 말입니다. 이후 ‘아바지’가 ‘아버지’로 바뀌었으며, 북한의 일부 지방에서는 아직도 ‘아바지’로 부르고 있습니다.    
556    가장 아름다운 순 한글 말 댓글:  조회:5392  추천:0  2015-03-08
"가장 아름다운 순 우리말은 `미리내`       KBS 방송문화연구소는 한글날을 맞아 한글에 대한 시청자 인식을 조사한 결과 가장 아름다운 순 우리말로 `미리내(은하수)`가 뽑혔다고 8일 밝혔다. 응답자들은 가장 아름다운 순 우리말로 1. 미리내 (12.9%), 2. 시나브로 (8.6%), 3. 사랑 (6.3%), 4. 가람 (5.5%), 5. 누리 (3.3%)                  등을 차례로 꼽았다.   시나브로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이라는 뜻이며, 가람은 강, 누리는 세상을 뜻한다. 또한 인터넷에서의 한글 오염과 훼손은 `매우 심각하다`(79.4%) `어느 정도 심각한 편이다`(17.7%) 등 거의 모두(97.1%)가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글날의 법정 공휴일 지정에 대해서는 `지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75.9%로, 국경일만으로도 충분하다`(21.1%)보다 월등히 많았다.  
555    순 한글 말 - <시나브로>의 뜻은? 댓글:  조회:6172  추천:0  2015-03-08
답변 고마워요   순 우리말 입니다.   시나브로 : 부사(副詞).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 쌓였던 눈이 시나브로 녹아 없어졌다.     - 물려받은 재산을 시나브로 다 없앴다.     - 바람결에 가랑잎이 시나브로 떨어져 몇 개가 내 머리 위에 쌓였나 보다.     - 퇴직한 지 일 년 만에, 내 아내가  퇴직금 1억 원을 시나브로 다 써 버렸다.                 - 송편을 빚으면서 미리 만들어 놓은 빈대떡 한 접시를 시나브로 다 먹어치웠다  
554    아버지 어원 댓글:  조회:5466  추천:0  2015-03-07
아바시[父](korean)의 어원 아바시 [명사][방언]‘아버지’의 방언(경남).      아버지 아빠는 두음탈락[ㅂ,ㅍ,ㅁ]형과 [ㅂ,ㅍ,ㅁ]탈락하지 않은 형으로 구분될뿐 세계어의 뿌리는 동일어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스펜서 웰즈 박사가 현재 세계 각국 사람들의 혈액을 채취해DNA를 분석함으로써“현생인류가 어떤 경로를 통해 세상에 퍼져 나갔는지”를 알아보는'인류의 여정'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는 물론(The jourey of man)이라는 책을 내어,이제까지 과거의 학설을 뒤집는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20만년전 남아프리카에서 출현한 현생인류는5~6만년 전부터 이동을 시작해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어족(M173)은35,000년전 분리되어 유럽으로 서진했고,인디오(M242->M3)는 북동진해서 알류우산열도를 건너 남아메리카까지 이동했으며,우리민족(M122)은 힌두쿠시와 히말라야 사이로 동진하여 남중국을 거쳐 황해(현재 평균 해수면44m이지만,뷔름빙기에는 육지의 빙하가 쌓여 해수면이159m가 낮아 제주까지 육지)로 걸어서 한반도로 들어왔고 (M130)은 동남아 해안으로 일본을 거쳐 북미로 1만 년 전에 걸어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DNA염색체가 같은 현생인류가 한조상의 뿌리라면 기본적인 언어는 같다는 증거가 되며,   아래 집필에서 스펜서 웰즈박사의 주장처럼 음운변이를 추적해 세계 최초로 한글로 현생인류의 말(세계어)이 같은 말임이 입증된다.                    아버지[父], 아빠[父]는 씨앗[種子]의 어원이다.  
553    비 관련 시모음 댓글:  조회:3049  추천:0  2015-03-07
        비 관련 시 모음     거리에 비 내리듯   거리에 비내리듯 마음 속에 눈물 흐르네 속에 스며드는 외로움 무엇이런가? 땅 위에, 지붕 위에 내리는 부드러운 빗소리 울적한 가슴을 위한 아, 비의 노래여! 낙담한 이 가슴에 까닭없이 눈물 흐르네 무엇이! 배반은 없었다고? 이 슬픔은 까닭도 없네 사랑도 미움도 없이 왜 이다지도 마음은 아픈지 이유조차 모르는 일이 가장 괴로운 아픔인 것을!     베들렌느(1844-1896)           거리에 가을비 오다     노란 우산 아래로 장화의 물방울을 튀기며 나는 거리로 나선다 비는 말하기를 좋아한다 자, 나는 들으마, 너는 말하라 나는 외로운가 보다 나는 누구로부터 위로의 말을 듣고 싶은가 보다 풋내기 시인처럼 앞뒤 운이 맞지 않는 네 말소리에 나는 열중한다 얼간이처럼 바지가 다 젖을 정도로 나는 외로운가 보다 길가에는 젖은 발들이 흐른다 젖은 발들이 내 쓸쓸한 발등을 밟는다 나뭇잎들이 비의 말을 따라 흉내를 낸다 앵무새처럼 남의 말을 따먹으며, 나뭇잎은 나보다 더 외로운가 보다 항상 나에겐 낯설기만 한 비의 알파벳 이국 처녀의 눈처럼 파란 비 오는 가을 풍경 나는 누구를 방문할 일도 없는데 꽃집에 들러 꽃을 산다 주정뱅이처럼 꽃을 보고 혼자 지껄이는 나는 형편없이 외로운가 보다     이 준관           겨울비1   먼 바람을 타고 너는 내린다 너 지나온 이 나라 서러운 산천 눈 되지 못하고 눈 되지 않고 차마 그 그리움 어쩌지 못하고 감추지 못하고 뚝뚝 내 눈 앞에 다가와 떨구는 맑은 눈물 겨울비, 우는 사람아   박 남준          그렇게 속삭이다가   저 빗물 따라 흘러가 봤으면 빗방울에 젖은 작은 벚꽃 잎이 그렇게 속삭이다가, 시멘트 보도 블록에 엉겨 붙고 말았다 시멘트 보도 블록에 연한 생채기가 났다 그렇게 작은 벚꽃 잎 때문에 시멘트 보도블록이 아플 줄 알게 되었다 저 빗물 따라 흘러 가봤으면 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 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 블록에서 낮은 신음소리 새어나올 때까지   이 성복          마른 잎 두드리는 빗방울 하나     마른 잎 두드리는 빗방울 하나 느릿느릿, 오래도록, 그 빗방울은 늘 한 장소에서 두드리고 다시 또 일념으로 두드린다.... 초췌한 이 마음을 두드리는 그대 눈물 한 방울 느릿느릿, 오래도록 그 괴로움은 늘 한 장소에서 시간처럼 집요하게 소리 울린다 하지만 그 잎과 마음에는 밑빠진 공허가 안에 들어 있기에, 나뭇잎은 빗방울을 끝없이 받아내고 견딜 것이다 마음도 송곳같은 그대를 끝없이 받아내고 견딜 것이다   프란시스 잠               비1 가라고 가라고 소리쳐 보냈더니 꺼이꺼이 울며 가더니 한밤중 당신은 창가에 와서 웁니다 창가 후박나무 잎새를 치고 포석을 치고 담벼락을 치고 울더니 창을 열면 창턱을 뛰어 넘어 온 몸을 적십니다   이 성복 시집 문지. 2000년           비 적막강산에 비 내린다 늙은 바람기 먼 산 변두리를 슬며시 돌아서 저문 창가에 머물 때 저버린 일상 으슥한 평면에 가늘고 차운 것이 비처럼 내린다 나직한 구름자리 타지 않는 일모日募 텅 빈 내 꿈의 뒤란에 시든 잡초 적시며 비는 내린다 지금은 누구나 가진 것 하나하나 내놓아야 할 때 풍경은 정좌하고 산은 멀리 물러앉아 우는데 나를 에워싼 적막강산 그저 이렇게 빗속에서 저문다 살고 싶어라 사람 그리운 정에 못 이겨 차라리 사람 없는 곳에 살아서 청명과 불안 기대와 허무 천지에 자욱한 가랑비 내리니 아 이 적막강산에 살고 싶어라   이 형기           빗소리 빗소리를 듣는다 밤중에 깨어나 빗소리를 들으면 환히 열리는 문이 있다 산만하게 살아온 내 인생을 가지런히 빗어주는 빗소리 현실의 꿈도 아닌 진공상태가 되어 빗소리를 듣는다 빗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반가운 일이냐 눈을 감으면 넓어지는 세계의 끝을 내가 간다 귓 속에서 노래가 되기도 하는 빗소리 이 순간의 느낌을 뭐라고 표현할까 빗소리를 듣는다 빗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반가운 일이냐 박 건호   한누리미디어. 2007년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단다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단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과거가 비가 오는 거리를 혼자 걸으면서 무언가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란다 낙엽이 떨어져 뒹구는 거리에 한 줄의 시를 띄우지 못하는 사람은 애인이 없는 사람이란다 함박눈 내리는 밤에 혼자 앉아 있으면서도 꼭 닫힌 창문으로 눈이 가지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덫을 모르는 가엾은 사람이란다   조 병화       비 오는 날   비오는 날, 전에는 베들렌의 내 가슴에 눈물의 비가 온다고 그 노래를 불렀더니만 비오는 날 , 오늘 나는 하고 말 뿐이다 비오는 날, 포플러 나무잎 푸르고 그 잎 그늘에 참새무리만 자지러진다 앞에 앉았던 개고리가 한 놈 쩜벙하고 개울로 뛰어내린다 비는 싸락비다, 포슬포슬 차츰 한 알, 두 알, 연달려 비스듬이 뿌린다 평양에도 長別理, 오는 비는 모두 꼭 같은 비려니만 비야망정 전일과는 다르도다, 방 아랫목에 자는 어린이 기지개 펴며 일어나 운다, 나는 하며 금년 세 살 먹은 아기를 품에 안고 어른다 석양인가, 갓틈 끝 아래로 모여드는 닭의 무리, 암탉은 찬비 맞아 우는 오굴쇼굴한 병아리를 모으고 있다 암탉이 못 견디게 꾸득인다, 모이를 주자   김 소월(1902 - 1934.12.24)       비오는 날 날은 춥고 어둡고 쓸쓸하여라 비는 내리고 바람은 그치지 않고, 허물어지는 벽에는 담쟁이 덩굴, 바람이 불 때마다 잎을 날려가네 날은 춥고, 쓸쓸하네 내 인생도 춥고, 어둡고, 쓸쓸하네 비는 내리고 바람은 그치지 않네 내 생각은 허물어지는 과거의 담벽에 붙어 불어오는 질풍에 젊음의 꿈을 날려 보냈네 날은 어둡고, 적막하네 슬픈 가슴이여, 조용하라! 불평은 그만하라! 먹구름 뒤에는 밝은 태양이 비치고 있다 그대의 운명도 예외는 아닌 것! 모든 사람의 운명에 얼마의 비는 내리는 것 인생이 어둡고 쓸쓸할 때도 있는 것!   롱펠로우         비오는 날   잠실 롯데백화점 계단을 오르면서 문득 괴테를 생각한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생각한다 베르테르가 그토록 사랑한 롯데가 백화점이 되어 있다 그 백화점에서 바겐세일하는 실크옷 한벌을 샀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친구의 승용차 소나타lll를 타면서 문득 베토벤을 생각한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3악장을 생각한다 그가 그토록 사랑한 소나타가 자동차가 되어 있다 그 자동차로 강변을 달렸다 비가 오고 있었다 ...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얼굴을 묻은 여자 고흐의 그림 '슬픔'을 생각한다 내가 그토록 사랑한 '슬픔'이 어느새 내 슬픔이 되어 있다 그 슬픔으로 하루를 견뎠다 비가 오고 있었다...   천 양희       비오는 날에 오는 저녁   비가 오는 날에도 저녁은 오네   비가 등꽃을 때리면 저녁은 등꽃을 감싸네 묵정밭 보이는 마루에 앉아서 밥 먹다가 눈 깜박이네, 꽃잎들 폴폴폴 다시는 수저를 들지 못하겠네 입가심도 하지 않고 등나무 밑으로 가서 어스름에 젖는 빗방울에 젖어 빗방울에 젖는 어스름에 젖어 落魄  십 년 보네 비가 오는 날에도 저녁은 오네 비가 밭으로 스며들면 저녁은 밭으로 내려앉네 빗물 고이면 일이 년 전에는 흙 묻은 아랫도리옷 빨고 삼사 년 전에 밥그릇 씻었네, 밤 되기 전에 묵정밭 물끄럼 보다 비 그치면 갈아엎고 뿌릴 풋나물 씨앗값 속셈하네 비가 오는 날에도 저녁은 오네 비가 마당으로 흐르면 저녁은 마당에 가만히 있네 빈 주머니에 손 넣고 마당 걷네. 해마다 알곡 거두어들여도 늘 비어 있던  집 안 구석구석에 간만에 차고 넘치는 빗소리 듣네. 저녁도 가득하여서 어둠 출렁거리며 내쉬는 가쁜 숨소리 듣네. 가슴 흥건하여서 마루에 올라 앉네 비가 오는 날에도 저녁은 오네 비가 처마 아래로 떨어지면 저녁은 처마 위로 올라가네 밥상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 전등 켜네 적막이 훤하니 그걸 낙백한 은둔자의 전 재산으로 알아서 빗물이 집 떠받들고 어둠이 집 드네 몸 가누지 못해 다신 비도 보지 못하고 저녁도 보지 못하고 일찍 잠드네   하 종오             비 온 뒤 아침 햇살   나뭇잎 씻어줄래 투명하도록 푸르게 씻어줄래 푸른빛 타오르게 불태울래 별들의 몸에도 붙어 반짝이며 날아갈래 죽은 나무에도 척 붙어 쓰다듬을래 바위에도 내려앉을래 거름 더미에도 내려앉을래 눈부시게 민들레 노란 꽃처럼 한 송이 노란 꽃처럼 세상을 그렇게 만들래   유 승도(1960 - )         빗소리는 길다   저 긴 빗소리 창을 열고 들어오지 못한다 저 슬피 어둠 속에서 떠돌고 있는 것들이 기억하노니 내 청춘 아닌 것들 없으나 더는 젖지 않겠다 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힘껏 누워 있다 이 긴 빗소리 밤새도록 다 풀려 나간다   문인수           서정抒情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무에 걸린 바람도 비에 젖어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 내 팔에 매달린 너 비는 밤이 오는 그 골목에도 내리고 비에 젖어 부푸는 어둠 속에서 네 두 손이 내 얼굴을 감싸고 물었다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장 뜨거운 목소리로   전 봉건           細雨 옻나무 가지를 만지듯 말을 내어놓는 말더듬이를 이런 날 만나보겠다 아슬아슬한 간격이다 이렇게 가늘은 비 내려 무언가 반송해야 할 우편물을 찾는다 샐비어, 샐비어 빨간 허리가 가늘다   문 태준 창비.         숲에 내리는 비   조용해 주오 숲 속에 이르니 이제 여기엔 인간의 목소리 들리지 않고 다만 새로운 소리 물방울 소리와 나뭇잎 소리만 저 멀리서 들려오나니 들으세요 흩어진 구름에서 비가 내리는구려 여름 더위에 찌들어진 상록수 나뭇가지에 소나무 솔잎에 비가 내린다 성스러운 이 나무들에 찬란한 노란 꽃송이 위에 모든 풀 위에 비가 내린다 우리의 즐거운 얼굴에 가리지 않고 있는 우리들 손에 우리의 가벼운 옷에 아무 관심이 될 수 없으며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는 그들로부터 항상 멀리 도피하고 있노라 내 고향 땅이건만 나는  혼자이며 이방인으로 이 봄을 지내는도다 이 마을의 축제날 해는 져서 저녁이 다가오니 사람들은 축연을 열게 되고 조용한 대기를 뚫고 종소리와 축포소리 울리며 그 소리는 집에서 집으로 멀리까지 전해지는구나 모든 이들은 예복을 입고 집을 나서 거리로 쏟아지니 젊은 남녀는 서로서로 쳐다보며 즐거워하더라   Gabriele D'Annunzio(1863-1938) 이탈리아           아궁이 속 빗소리   빈집 아궁이에 오그리고 앉아 불 지피는데 머리마저 아궁이 속에 밀어넣고 솔가지에 후후 입김 불어넣는데 매운 연기 제 젖은 눈물만 토해낼 뿐 어쩌자고 불꽃 하나 일렁이지 못하고 습한 물기로 흐려지는지 어쩌자고 아궁이로 밀어넣은 눈두덩에선 불꽃보다 물꽃이 더 튀는지 장작보다 더 바짝 마른 나를 집어넣고도 나는 타지 않고 나는 타지 않고 냉갈 냄새에 전 아랫목에 앉아 대숲이 가득 들어찬 창문을 바짝 당겨놓고 매운 벽도 끌어다 등짝에 붙인 채 깊어지는 빗소리를 듣는다 아궁이 속 빗소리 하염없이 듣는다 사람이 들지 않은 여러 해째 아마도 이런 소리였을 것이다 빈집이 저 홀로 긴밤 지새울 때  서까래 한쪽 어깨가 기울고 문지방까지 쑥부쟁이만 들고 날 때 내리는 빗소리 따라 맵고 젖은 불길로 툭,  투둑 툭, 울었을 터이다     정 영주   말향고래. 실천문학사.2007년           여우비   햇살인 줄만 알았던가 어떻게 햇살이기만 하겠는가 그대 다문 입가에 느닷없이 찬 빗방울 떨어질 때 고개 들어 샅샅이 바라보라 나 언제나 그대 눈과 손과 귓가에 가볍게 닿으려는 환한 햇살이지만 이 햇살엔 그대와 나를 적실 수 있는 위험한 비가 감춰져 있는 것을   이 선영 일찍 늙으매 꽃꿈> 창비.2003년         우산 속으로 비 소리는 내린다 우산은 말라가는 가슴 접고 얼마나 비를 기다렸을까 비는 또 오는게 아니라 비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위해 내린다는 생각을 위하여 혼자 마신 술에 넘쳐 거리로 토해지면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정작 술 취하고 싶은건 내가 아닌 나의 나날인데 비가 와 선명해진 원고지칸 같은 보도블록 위를 타인에 떠밀린 탓보단 스스로의 잘못된 보행으로 비틀비틀 내 잘못 써온 날들이 우산처럼 비가 오면 가슴 확 펼쳐 사랑 한 번 못해본 쓴 기억을 끌며 나는 얼마나 더 가슴을 말려야 우산이 될수 있나 어쩌면 틀렸는지도 모르는 질문에 소낙비에 가슴을 적신다 우산처럼 가슴 한 번 확 펼쳐보지 못한 날들이 우산처럼 가슴을 확 펼쳐보는 사랑을 꿈꾸며 비 내리는 날 낮술에 취해 젖어오는 생각의 발목으로 비가 싫어 우산을 쓴 것이 아닌 사람들의 사이를 걷고 또 걸으면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함 민복                 장마   비는 하염없이 마당귀에 서서 머뭇거리고 툇마루에 앉아 있으니 습습하다 목깃 터는 비둘기 울음 습습하다 어둑신한 헛간냄새 습습하다 거미란 놈이 자꾸 길게 처져 내렷다 제 자리로 또 무겁게 기어 올라간다 두꺼비 한 마리가 느리게 가로질러 가는 ...  어머니 콩 볶으신다  비는 하염없이 마당귀에 서서 머뭇거리고   문인수           화투   슬레이트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똑 또 똑 떨어지구요 창에 기울은 오동꽃이 덩달아 지네요 종일 추녀물에 마당이 파이는 소리 나는 차 배달 왔다가 아저씨와 화투를 치는데요 아저씨 화투는 건성이고 내 짧은 치마만 쳐다보네요 청단이고 홍단이고 다 내주지만 나는 시큰둥 풍약이나 하구요 창 밖을 힐끗 보면 오동꽃이 또 하나 떨어지네요 집 생각이 나구요 육목단을 가져오다 먼 날의 왕비 비단과 금침과 황금 지붕을 생각하는데 비는 종일 슬레이트 지붕에 시끄럽구요 팔광을 기다리는데 흑싸리가 기울어 울고 있구요 아저씨도 나처럼 한숨을 쉬네요 이 매조가 님이라는 건 믿을 수가 없구요  아저씨는 늙은 건달이구요  나는 발랑 까진 아가씨구요 한심한 빗소리는 종일 그치지를 않구요   최 정례;  
552    명시인 - 괴테 댓글:  조회:4679  추천:0  2015-03-07
시목록 신비의 합창  첫사랑  그대 곁에서  사랑하는 사람 가까이  동경(憧憬)  이별  슬픔의 환희  내 그대를 사랑하는지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우리는 함께 생각하고 느껴요  사랑의 독본  들 장 미  나그네의 밤노래  5월의 노래  거룩한 갈망  미뇽(Mignon)  가뉘메트  마왕  눈물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자  툴레의 임금님  프로메테우스  ~~~~~~~~~~~~~~~~~~~~  신비의 합창  지나간 모든 것은  한갓 비유일 뿐,  이루기 어려운 것 여기 이루어졌으니.  글로 쓰기 어려운 것이  여기 이루어졌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라가게 한다.  Chorus Mystics  - Johann Wolfgang von Goethe  Each thing of mortal birth  Is but a type  What was of feeble worth  Here becomes ripe.  What was a mystery  Here meets the eye;  The ever-womanly  Draws us on high.  ~~~~~~~~~~~~~~~~~~~~  첫 사 랑  아 - 누가 그 아름다운 날을 가져다 줄 것이냐,  저 첫사랑의 날을.  아 - 누가 그 아름다운 때를 돌려 줄 것이냐,  저 사랑스러운 때를.  쓸쓸히 나는 이 상처를 기르고 있다.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한탄과 더불어  잃어 버린 행복을 슬퍼한다.  아 - 누가 그 아름다운 날을 가져다 줄 것이냐!  그 즐거운 때를.  Verlust  - Johann Wolfgang von Goethe  Ach wer bringt die schonen Tage,  Jene Tage der ersten Liebe,  Ach wer bringt nur eine Stunde  Jener holden Zeit zuruck:  Einsam nahr ich meine Wunde,  Und mit stets erneuter Klage  Traur ich ums verlorne Gluck.  Ach wer bringt die schonen Tage,  Jene holde Zeit zuruck!  ~~~~~~~~~~~~~~~~~~~~  그대 곁에서  나 그대가 생각납니다.  태양의 미미한 빛살이  바다 위에서 일렁거리면  나 그대가 생각납니다.  달의 어렴풋한 빛이  우물 속 그림자로 출렁거리면  나 그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먼 길에 먼지에 일게 되면  나 그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슥해진 좁은 길 위에서  나그네가 떨고 있으면  나 그대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요란한 소리로 높은 파도가 밀려 올때면  나 그대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모든 것이 숨죽인 공원을 거닐 때면  나 그대 곁에 있습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대는 늘 내 곁에 있습니다.  태양이 가라앉고  잠시 후 별이 빛날 것입니다.  아아, 그대가 저 하늘의 별일 수만 있다면.  ~~~~~~~~~~~~~~~~~~~~  사랑하는 사람 가까이  희미한 햇빛 바다에서 비쳐올 때  나 그대 생각 하노라.  달빛 휘영청 샘물에 번질 때  나 그대 생각 하노라.  저 멀리 길에서 뽀얀 먼지 일 때  나 그대 모습 보노라.  어두운 밤 오솔길에 나그네 몸 떨때  나 그대 모습 보노라.  물결 높아 파도 소리 아득할 때  나 그대 소리 듣노라.  고요한 숲 속 침묵의 경계를 거닐며  나 귀를 기울이노라.  나 그대 곁에 있노라, 멀리 떨어졌어도  그대 내 가까이 있으니  해 저물면 별아, 나를 위해 곧 반짝여라  오오 그대 여기 있다면.  ~~~~~~~~~~~~~~~~~~~~  동경(憧憬)  내 마음을 이렇게도 끄는 것은 무엇인가  내 마음을 밖으로 이끄는 것은 무엇인가  방에서, 집에서  나를 마구 끌어 내는 것은 무엇인가.  저기 바위를 감돌며  구름이 흐르고 있다!  그곳으로 올라갔으면,  그곳으로 갔으면!  까마귀가 떼를 지어  하늘하늘 날아간다.  나도 그 속에 섞여  무리를 따라간다.  그리고 산과 성벽을 돌며  날개를 펄럭인다.  저 아래 그 사람이 있다.  나는 그쪽을 살펴본다.  저기 그 사람이 거닐어 온다.  나는 노래하는 새.  무성한 숲으로  급히 날아간다.  그 사람은 멈춰 서서 귀를 기울여  혼자 미소 지으며 생각한다.  저렇게 귀엽게 노래하고 있다.  나를 향해서 노래하고 있다고,  지는 해가 산봉우리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건만,  아름다운 그 사람은 생각에 잠겨서  저녁놀을 보지도 않는다.  그 사람은 목장을 따라  개울 가를 거닐어 간다.  길은 꼬불꼬불하고  점점 어두어진다.  갑자기 나는  반짝이는 별이 되어 나타난다.  저렇게 가깝고도 멀리  반짝이는 것은 무엇일까.」  네가 놀라서  그 빛을 바라보면,  나는 너의 발 아래 엎드린다.  그 때의 나의 행복이여!  ~~~~~~~~~~~~~~~~~~~~  이 별  입으로는 차마 말 할 수 없는 이별을  내 눈으로 말하게 하여 주십시오  견딜 수 없는 쓰라림이 넘치오  그래도 여느 때는 사나이였던 나였건만  상냥스러운 사랑의 표적조차  이제는 슬픔의 씨앗이 되었고  차갑기만 한 그대의 입술이여  쥐여 주는 그대의 힘 없는 손이여  여느 때라면 살며시 훔친 입맞춤에조차  나는 그 얼마나 황홀해질 수 있었던가  이른 봄 들판에서 꺾어 가지고 온  그 사랑스런 제비꽃을 닮았었으나  이제부터는 그대 위해 꽃다발을 엮거나  장미꽃을 셀 수조차 없이 되었으니  아아 지금은 정녕 봄이라는데 프란치스카여  내게만은 쓸쓸하기 그지없는 가을이라오  ~~~~~~~~~~~~~~~~~~~~  슬픔의 환희  마르지 말아라, 마르지 말아라  영원한 사랑의 눈물이여!  아아, 눈물 마른 눈에 비치는 이 세상이란  얼마나 황량하며, 그 얼마나 죽은 것으로 보이랴!  마르지 말아라, 마르지 말아라  불행한 사랑의 눈물이여!  ~~~~~~~~~~~~~~~~~~~~  내 그대를 사랑하는지  내 그대를 사랑하는지 나는 모른다.  단 한번 그대 얼굴 보기만 해도,  단 한번 그대 눈동자 보기만 해도,  내 마음은 온갖 괴로움 벗어날 뿐,  내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하느님이 알 뿐  내 그대를 사랑하는지 나는 모른다.  OB ICH DICH LIEBE  Ob ich dich liebe, weiss ich nicht.  Seh" ich nur einmal dein Gesicht,  Seh" dir ins Auge nur einmal,  Frei wird mein Herz von aller Qual.  Gott weiss, wie mir so wohl geschicht!  Ob ich dich liebe, weiss ich nicht.  ~~~~~~~~~~~~~~~~~~~~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내 가슴의 슬픔을 이해합니다.  홀로  이 세상의 모든 기쁨을 등지고  머언  하늘을 바라봅니다.  아, 나를 사랑하고 나를 알아 주던 사람은  지금 먼 곳에 있습니다.  눈은 어지럽고  가슴은 찢어집니다.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내 가슴의 슬픔을 이해합니다.  ~~~~~~~~~~~~~~~~~~~~  우리는 함께 생각하고 느껴요  산과 강, 도시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일까요?  그러나 우리가 비록 헤어져 있을지라도  우리는 함께 생각하고 느끼며  영혼이 가까이 있는 그 누군가가 있음을 알고 있다면  이 세상은 사람이 살고 있는 정원이 될 것입니다.  ~~~~~~~~~~~~~~~~~~~~  사랑의 독본  책 중에  가장 오묘한 책,  사랑의 책을  나는 차분히 읽어 내려갔습니다.  기쁨을 말하는 페이지는 적었고  한권을 읽는 동안  괴로움만 계속되었습니다.  이별은 특별히  한 장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재회에 대해서는  아주 짧은 단문으로 말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고뇌는  전편에 걸쳐 매우 긴 설명이 붙어 있었고  끊임없이 이어져 갔습니다.  오오 시인이여,  마침내 그대는 정답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풀 수 없었던  그 문제는 결국  다시 만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  들 장 미  한 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장미  그리도 싱그럽고 아름다워서  가까이 보려고 재빨리 달려 가,  기쁨에 취하여 바라보았네.  장미, 장미, 빨간 장미  들에 핀 장미  소년은 말했네. '너를 꺾을 테야  들장미야!'  장미는 말했네. '너를 찌를테야  끝내 잊지 못하도록.  꺾이고 싶지 않단 말이야'  장미, 장미, 빨간 장미  들에 핀 장미.  짖궂은 아이는 꺾고 말았네  들에 핀 장미  장미는 힘을 다해 찔렀지만  비명도 장미를 돕지 못하니,  장미는 그저 꺾일 수 밖에.  장미, 장미, 빨간 장미  들에 핀 장미.  ~~~~~~~~~~~~~~~~~~~~  나그네의 밤노래  모든 산봉우리위에  안식이 있고  나뭇가지에도  바람소리 하나 없으니  새들도 숲속에 잠잔다.  잠시만 기다려라  그대 또한 쉬리니.  The Wanderer"s Night-Song  - Johann Wolfgang von Goethe  THOU who comest from on high,  Who all woes and sorrows stillest,  Who, for twofold misery,  Hearts with twofold balsam fillest,  Would this constant strife would cease!  What are pain and rapture now?  Blissful Peace,  To my bosom hasten thou!  ~~~~~~~~~~~~~~~~~~~~  5월의 노래  밀밭과 옥수수밭 사이로,  가시나무 울타리 사이로,  수풀 사이로,  나의 사랑은 어딜 가시나요?  말해줘요!  사랑하는 소녀  집에서 찾지 못해  그러면 밖에 나간 게 틀림없네  아름답고 사랑스런  꽃이 피는 오월에  사랑하는 소녀 마음 들 떠 있네  자유와 기쁨으로.  시냇가 바위 옆에서  그 소녀는 첫 키스를 하였네  풀밭 위에서 내게,  뭔가 보인다!  그 소녀일까?  May Song  - Johann Wolfgang von Goethe  BETWEEN wheatfield and corn,  Between hedgerow and thorn,  Between pasture and tree,  Where"s my sweetheart  Tell it me!  Sweetheart caught I  Not at home;  She"s then, thought I.  Gone to roam.  Fair and loving  Blooms sweet May;  Sweetheart"s roving,  Free and gay.  By the rock near the wave,  Where her first kiss she gave,  On the greensward, to me,--  Something I see!  Is it she?  ~~~~~~~~~~~~~~~~~~~~  거룩한 갈망  현자에게가 아니면 말하지 마라  세속 사람은 당장 조롱하고 말리니  나는 진정 사는가 싶이 살아 있는 것을  불꽃 속에 죽기를 갈망하는 것을 찬미한다  그대를 낳고 그대가 낳았던  사랑을 나눈 밤들의 서늘한 물결 속에서  그대 말없이 타는 촛불을 보노라면  신비한 느낌 그대를 덮쳐 오리  그대 더 이상 어둠의 강박에 매이지 않고  더 높은 사랑의 욕망이 그대를 끌어올린다  먼길이 그대에겐 힘들지 않다  그대 마술처럼 날개 달고 와서  마침내 미친 듯 빛에 홀리어  나비처럼 불꽃 속에 사라진다  죽어서 성장함을 알지 못하는 한  그대 어두운 지상의 고달픈 길손에 지나지 않으리  The Holy Longing  Tell a wise person, or else keep silent,  because the mass man will mock it right away.  I praise what is truly alive,  what longs to be burned to death.  In the calm water of the love-nights,  where you were begotten, where you have begotten,  a strange feeling comes over you,  when you see the silent candle burning.  Now you are no longer caught in the obsession with darkness,  and a desire for higher love-making sweeps you upward.  Distance does not make you falter.  Now, arriving in magic, flying,  and finally, insane for the light,  you are the butterfly and you are gone.  And so long as you haven't experienced this: to die and so to grow,  you are only a troubled guest on the dark earth.  (Johann Wolfgang von Goethe)  Translated from the German by Robert Bly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로버트 블라이 번역  ~~~~~~~~~~~~~~~~~~~~  미뇽(Mignon)  당신은 아시나요, 저 레몬꽃 피는 나라?  그늘진 잎 속에선 금빛 오렌지 빛나고  푸른 하늘에선 부드러운 바람 불어 오고  감람나무는 고요히, 월계수는 드높이 서 있는  그 나라를 아시나요?  그 곳으로 ! 그 곳으로 가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오 내 사랑이여 !  당신은 아시나요. 그 집을? 둥근 기둥들이  지붕 떠받치고 있고, 홀은 휘황 찬란, 방은 빛나고,  대리석 입상(立像)들이 날 바라보면서,  "가엾은 아이야, 무슨 몹쓸 일을 당했느냐?"고 물어 주는 곳,  그 곳으로 ! 그 곳으로  가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오 내 보호자여 !  당신은 아시나요, 그 산, 그 구름다리를?  노새가 안개 속에서 제 갈 길을 찾고 있고  동굴 속에는 해묵은 용들 살고 있으며  무너져 내리는 바위 위로는 다시  폭포수 내려 쏟아지는 곳,  그 곳으로 ! 그 곳으로  우리의 갈 길 뻗쳐 있어요. 오 아버지, 우리 그리로 가요 !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  가뉘메트  아침놀 가운데인 양  나를 에워싸 작열한다.  그대, 봄이여, 사랑하는 것이여!  수천의 사랑의 기쁨 더불어  그대의 영원한 열기  거룩한 마음  내 가슴으로 밀쳐든다.  끝없이 아름다운 것이여!  하야 내 그대를 끌어 안고자,  이 품안으로!  아, 애태우며  그대 가슴에 내 누우면,  그대의 꽃, 그대의 풀포기  내 가슴에 밀려든다.  사랑스런 아침 바람  내 가슴 속 불타는  갈증을 식혀주면,  바람결에 나이팅게일 사랑스럽게  안개낀 골짜기에서 나를 향해 우짖는다.  곧 가리라! 가리라!  그러나 어디로? 아, 어디로?  위를 향해, 위를 향해서이다.  구름은 아래로 떠오며, 구름은  그리운 사랑으로 내려 온다.  나에게로, 나에게로 오라!  너희들의 품에 안겨  위를 향해서  에워 싸고 에워 싸이어!  위를 향해  그대의 가슴에 안겨  자비로운 아버지여!  GANYMED  Wie im Morgenrot  Du rings mich angluehst,  Frueling, Geliebter!  Mit tausendfacher Liebeswonne  Sich an mein Herz draegt  Deiner ewigen Waerme  Helig Gefuehl,  Unendliche Schoene!  Dass ich dich fassen moecht'  In diesen Arm!  Ach, an deinem Busen  Lieg' ich, schmachte,  Und deine Blumen, dein Gras  Draegen sich an mein Herz.  Du kuehlst den brenneden  Durst meines Busens,  Lieblicher Morgenwind,  Ruft drein die Nachtigall  Liebend nach mir aus dem Nebeltal.  Ich komme! Ich komme!  Wohin? Ach, wohin?  Hinauf, hiauf strebt's,  Es schweden die Wolken  Abwaerts, die Wolken  Neigen sich der sehnenden Liebe,  Mir, mir!  In eurem Schosse  Aufwaerts,  Umfangend umfangen!  Aufwaerts  An deinem Busen,  Alliebender Vater!  * 가뉘메트 ; 아폴로의 독수리를 따라 하늘로 올라간 미소년  ~~~~~~~~~~~~~~~~~~~~  마왕  이 늦은 밤 어둠 속, 바람 속에 말타고 가는 이 누군가?  그건 사랑하는 아이를 데리고 가는 아버지다.  아들을 팔로 꼭 껴안고,  따뜻하게 감싸안고 있다.  "뭣 때문에 얼굴을 가리고 무서워 하느냐?"  "보세요, 아버지, 바로 옆에 마왕이 보이지 않으세요?  왕관을 쓰고 옷자락을 끄는 마왕이 안 보이세요?"  "아이야, 그건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란다."  "오, 귀여운 아이야, 너는 나와 함께 가자!  거기서 아주 예쁜 장남감을 많이 갖고 나와 함께 놀자.  거기에는 예쁜 꽃이 많이 피어있고  우리 엄마한테는 황금 옷이 많단다."  "아버지, 아버지, 들리지 않으세요?  마왕이 지금 제 귀에 말하고 있어요."  "조용히 해라 내 아가야, 너의 상상이란다.  그건 슬픈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란다."  "귀여운 아이야, 자, 나와 함께 가자꾸나.  나의 딸들이 널 예쁘게 돌봐주게 하겠다.  나의 달들은 밤마다 즐거운 잔치를 열고  춤추고 노래하고 너를 얼러서 잠들게 해줄거다."  "아버지, 아버지, 저기에 보이지 않으세요?  마왕의 딸들이 내 곁에 와 있어요."  "보이지, 아주 잘 보인단다.  오래된 회색 빛 버드나무가 그렇게 보이는 거다."  "귀여운 아이야 나는 네가 좋단다. 네 귀여운 모습이 좋단다.  네가 싫다고 한다면 억지로 끌고 가겠다."  "아버지, 아버지, 마왕이 나를 꼭꼭 묶어요!  마왕이 나를 잡아가요!"  이제 아버지는 무서움에 질려 황급하게 말을 몬다.  신음하고 있는 불쌍한 아이를 안고서.  가까스로 집마당에 도착했으나  팔 안의 아이는 움직이지 않고 죽어 있다.  The Erl-King  - Johann Wolfgang von Goethe  WHO rides there so late through the night dark and drear?  The father it is, with his infant so dear;  He holdeth the boy tightly clasp"d in his arm,  He holdeth him safely, he keepeth him warm.  "My son, wherefore seek"st thou thy face thus to hide?"  "Look, father, the Erl-King is close by our side!  Dost see not the Erl-King, with crown and with train?"  "My son, "tis the mist rising over the plain."  "Oh, come, thou dear infant! oh come thou with me!  Full many a game I will play there with thee;  On my strand, lovely flowers their blossoms unfold,  My mother shall grace thee with garments of gold."  "My father, my father, and dost thou not hear  The words that the Erl-King now breathes in mine ear?"  "Be calm, dearest child, "tis thy fancy deceives;  "Tis the sad wind that sighs through the withering leaves."  "Wilt go, then, dear infant, wilt go with me there?  My daughters shall tend thee with sisterly care  My daughters by night their glad festival keep,  They"ll dance thee, and rock thee, and sing thee to sleep."  "My father, my father, and dost thou not see,  How the Erl-King his daughters has brought here for me?"  "My darling, my darling, I see it aright,  "Tis the aged grey willows deceiving thy sight."  "I love thee, I"m charm"d by thy beauty, dear boy!  And if thou"rt unwilling, then force I"ll employ."  "My father, my father, he seizes me fast,  Full sorely the Erl-King has hurt me at last."  The father now gallops, with terror half wild,  He grasps in his arms the poor shuddering child;  He reaches his courtyard with toil and with dread,--  The child in his arms finds he motionless, dead.  ~~~~~~~~~~~~~~~~~~~~  눈물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자  슬픈 밤을 한 번이라도  침상에서 울며 지새운 적이 없는 자,  그는 당신을 알지 못하오니,  하늘의 권능이시여.  당신을 통하여 삶의 길을 우리는 얻었고  불쌍한 죽을 자들 타락케 하시어  고통 속에 버리셨으되,  그럼에도 저희는 죄값을 치르게 됩니다.  WHO Never Ate With Tears His Bread  - Johann Wolfgang von Goethe  WHO never ate with tears his bread,  Who never through night"s heavy hours  Sat weeping on his lonely bed,--  He knows you not, ye heavenly powers!  Through you the paths of life we gain,  Ye let poor mortals go astray,  And then abandon them to pain,--  E"en here the penalty we pay,  ~~~~~~~~~~~~~~~~~~~~  툴레의 임금님  옛날 예적 툴레에 한 임금님이 사셨지,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정성을 바쳐  사랑하던 왕비가 세상을 떠나며  황금 술잔 하나를 남기고 가셨지.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어서  잔치 때마다 그 잔을 쓰시고  그걸로 술을 드실 때마다  계속 눈물을 흘렸지.  돌아가실 때가 가까워 지자  다스리던 고을들과 온갖 것들을  세자에게 물려주셨지만  금 잔만은 그러지 않았지.  임금님은 왕궁 잔치를 열었는데  바닷가 높은 성 안에  선조들 대물려 온 넓은 연회장에  기사와 귀족들 모두 불렀지.  늙으신 임금님은 거기에 서신 다음  그 잔으로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드시더니  그 성스러운 잔을 들어  바닷물로 힘껏 던지셨지.  임금님은 잔이 떨어지는 것과, 물이 들어가고  바다밑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신 다음  눈을 영원히 감으시고  다시는 마시지 않으셨네.  The King Of Thule  This ballad is also introduced in Faust  - Johann Wolfgang von Goethe  IN Thule lived a monarch,  Still faithful to the grave,  To whom his dying mistress  A golden goblet gave.  Beyond all price he deem'd it,  He quaff'd it at each feast;  And, when he drain'd that goblet,  His tears to flow ne'er ceas'd.  And when he felt death near him,  His cities o'er he told,  And to his heir left all things,  But not that cup of gold.  A regal banquet held he  In his ancestral ball,  In yonder sea-wash'd castle,  'Mongst his great nobles all.  There stood the aged reveller,  And drank his last life's-glow,--  Then hurl'd the holy goblet  Into the flood below.  He saw it falling, filling,  And sinking 'neath the main,  His eyes then closed for ever,  He never drank again.  We wouldn"t enjoy the sunshine  If we never had the rain.  We wouldn"t appreciate good health  If we never experienced pain.  ~~~~~~~~~~~~~~~~~~~~  프로메테우스  제우스여, 그대의 하늘을  구름의 연기로 덮어라!  그리고 엉겅퀴의 목을 치는  어린이처럼  참나무나 산정들과 힘을 겨뤄라!  그러나 나의 대지는  손대지 말고 내버려둬야 한다  그대가 짓지 않은, 나의 작은 집과,  불길 때문에 그대가  나를 질투하는  나의 화덕도  나는 태양 아래에서  신들인 그대들보다 가엾은 자들을 알지 못한다.  그대들은 제물과  기도의 숨결로  간신히 먹고산다.  대단한 분들이여  그리고 만일 어린이들과 걸인들이  희망에 부푼 바보들이 아니었던들  그대들은 굶주렸을 것을.  나 역시 어린애여서,  들고 날 곳을 몰랐을 때,  나는 당황한 시선을  태양을 향해 돌렸다. 마치 저 하늘에,  나의 탄식을 들어 줄 귀가 있고,  압박받는 자를 불쌍히 여겨 줄  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있는 듯이.  그러나 누가 거인족의 오만에 대해서  나를 도왔으며,  누가 죽음과  노예상태에서 나를 구했던가?  거룩하게 불타는 나의 마음이  이 모든 것을 성취하지 않았던가?  그러고도 젊고 선량한 마음은,  기만당하여, 구원에 감사하며  천상에서 잠든 자를 열애하지 않았던가?  그대를 존경하라고? 왜?  그대가 이전에 한 번이라도  짐을 진 자들의 고통을 덜어 준 적이 있는가?  그대는 이전에 한 번이라도  겁먹은 자들의 눈물을 달래 준 적이 있는가?  전능의 시간과  나의 주이며, 그대의 주인인  영원한 운명이  나를 사나이로 단련하지 않았던가?  꽃봉오리의 꿈이 모두  성숙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삶을 증오하고,  황야로 도주할 것이라고  그대는 착각하는가?  나는 여기에 앉아, 나의 모습에 따라,  인간들을 형성한다.  괴로워하고, 울며,  즐기고, 기뻐하는,  나와 같이  그대를 존경하지 않는  나를 닮은 족속을.  Prometheus  - Johann Wolfgang von Goethe  Bedecke deinen Himmel, Zeus,  Mit Wolkendunst  Und ube, dem Knaben gleich,  Der Disteln kopft,  An Eichen dich und Bergeshohn;  Mußt mir meine Erde  Doch lassen stehn  Und meine Hutte, die du nicht gebaut,  Und meinen Herd,  Um dessen Glut  Du mich beneidest.  Ich kenne nichts Armeres  Unter der Sonn als euch, Gotter!  Ihr nahret kummerlich  Von Opfersteuern  Und Gebetshauch  Eure Majestat  Und darbtet, waren  Nicht Kinder und Bettler  Hoffnungsvolle Toren.  Da ich ein Kind war,  Nicht wußte, wo aus noch ein,  Kehrt ich mein verirrtes Auge  Zur Sonne, als wenn druber war  Ein Ohr, zu horen meine Klage,  Ein Herz wie meins,  Sich des Bedrangten zu erbarmen.  Wer half mir  Wider der Titanen Ubermut?  Wer rettete vom Tode mich,  Von Sklaverei?  Hast du nicht alles selbst vollendet,  Heilig gluhend Herz?  Und gluhtest jung und gut,  Betrogen, Rettungsdank  Dem Schlafenden da droben?  Ich dich ehren? Wofur?  Hast du die Schmerzen gelindert  Je des Beladenen?  Hast du die Tranen gestillet  Je des Geangsteten?  Hat nicht mich zum Manne geschmiedet  Die allmachtige Zeit  Und das ewige Schicksal,  Meine Herrn und deine?  Wahntest du etwa,  Ich sollte das Leben hassen,  In Wusten fliehen,  Weil nicht alle  Blutentraume reiften?  Hier sitz ich, forme Menschen  Nach meinem Bilde,  Ein Geschlecht, das mir gleich sei,  Zu leiden, zu weinen,  Zu genießen und zu freuen sich,  Und dein nich zu achten,  Wie ich!  ~~~~~~~~~~~~~~~~~~~~  - 괴테 (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  독일의 시인·작가. 고전파의 대표자이다.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출생. 부친에게서 엄한 기풍을,  모친에게서 명랑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예술가적 성격을 이어 받았고,  부유한 상류가정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아 뒷날의 천재적 대성(大成)을  이룰 바탕을 마련하였다.  괴테는 독일의 시인,비평가,언론인,화가,  무대연출가,정치가,교육가,과학자.  세계문학사의 거인중 한사람으로 널리 인정되는 독일 문호이며,  유럽인으로서는 마지막으로 르네상스 거장다운 다재다능함과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 인물이다.  그가 쓴 방대한 저술과 다양성은 놀랄 만한 것으로,  과학에 관한 저서만도 14권에 이른다.  서정적인 작품들에서는 다양한 주제와 문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허구문학에서는 정신분석학자들의 기초자료로 사용된 동화로부터  시적으로 정제된 단편 및 중편소설(novella)들.  의 "개방된" 상징형식에 이르기까지  폭넓음을 보여준다.  희곡에서도 산문체의 역사극.정치극.심리극으로부터  무운시(blank verse) 형식을 취한 근대문학의 걸작 중 하나인  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는 82년간의 생애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적인 경지의 예지를 터득하기도 했으나,  사랑이나 슬픔에 기꺼이 그의 모든 존재를 내어 맡기곤 했다.  내적 혼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상적인 생할 규율을 엄수하면서도  삶, 사랑, 사색의 신비가 투명할 정도로 정제되어 있는  마술적 서정시들을 창조하는 힘을 잃지 않았다.  .......  마침내 그에게는 원하는 대로 창조력을 샘솟게 하는  자신조차도 신비스럽게 여긴 재능이 생겨나 60년 가까이 노력해온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죽기 불과 몇 달전에 완성한 전편은  괴테의 반어적인 체념이 덧붙여져 후세 비평가들에게 전해졌는데  이 작품의 마지막 2행연구(couplet)  "영원히 여성적인 것은 우리를 끌어 올린다"는  인간존재의 양극성에 대한 괴테 자신의 감성을 요약한 말이다.  여성은 그에게 있어 남성의 영원한 인도자요 창조적 삶의 원천인 동시에  정신과 영혼의 가장 숭고한 노력의 구심점이었다.  괴테에게는 상호 배타적인 삶의 양극을 오가는  자연스러운 능력과 변화 및 생성에 대한 천부적 자질이 있었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상반된 경향들을 자연스럽게 조화시미는 가운데  타고난 재능을 실현해가는 성숙의 과정이었다.    
551    괴테 명언 모음 댓글:  조회:5930  추천:0  2015-03-07
♣ 괴테 명언 모음 ♣           - '꿈과 '희망'에 관하여 -   ♣  희망만 있으면 행복의 싹은 그곳에서 움튼다. --♣   ♣  희망은 제2의 혼이다. 아무리 불행하다 하더라도 혼이 있으면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혼이 있으면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   ♣ 꿈을 계속 간직하고 있으면 반드시 실현할 때가 온다. --♣   ♣ 괴로움을 남기고 간 것을 맛보라! 고난도 지나고 나면 감미롭다. --♣   ♣ 고통이 남기고 간 뒤를 보라! 고난이 지나면 반드시 기쁨이 스며든다. --♣   ♣ 그대의 마음속에 식지 않는 열과 성의를 가져라. 당신은 드디어 일생의 빛을 얻을 것이다. --♣   ♣ 무슨 일에든지 희망을 거는 것은 실망을 하는 것보다 낫다. 왜냐하면, 어떠한 일이든지 꼭 가능하다고 믿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 그래, 어떻든 간에 인생은 좋은 것이다.--♣   ♣ 시간이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지 말라! 게을리 걸어도 결국 목적지에 도달할 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하루하루 전력을 다하지 않고는 그날의 보람은 없을 것이며, 동시에 최후의 목표에 능히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   ♣ 불에 피운 향이 인간의 생명을 상쾌하게 하는 것처럼 기도는 인간의 마음에 희망을 북돋워 준다.--♣   ♣ 하늘은 필요할 때마다 은혜를 베푼다. 신속히 이것을 포착하는 사람은 운명을 개척한다. --♣   ♣ 마지막에 할 일을 처음부터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이 만들어질 것인가는 처음부터 결정된다. --♣   ♣ 모든 것은 젊었을 때 구해야 한다. 젊음은 그 자체가 하나의 빛이다. 빛이 흐려지기 전에 열심히 구해야 한다. 젊은 시절에 열심히 찾고 구한 사람은 늙어서 풍성하다. --♣   ♣ 현재에 열중하라. 오직 현재 속에서만 인간은 영원을 알 수 있다. --♣   ♣ 확실한 일을 실행할 힘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   ♣ 당신이 만약 참으로 열심히라면 "나중에"라고 말하지 말고, 지금 당장 이 순간에 해야 할 일을 시작해야 한다. --♣   ♣ 앞길에 아름다운 희망이 있으면 이별도 축제와 같다.--♣          - '사람' & '인생'에 관하여 -   ♣ 인생은 항상 방황하고 있다. 방황하고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 당신은 항상 영웅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항상 사람은 될 수 있다. --♣ ♣ 성격은 인격에 의한 것이며 재능에 의한 것은 아니다.--♣   ♣ 사람들은 누구나 친구의 품안에서 휴식을 구하고 있다. 그 곳에서라면 우리들은 가슴을 열고 마음껏 슬픔을 털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 ♣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하여 신념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일을 실행할 만한 힘을 모두가 다 가지고 있는 법이다. 자신에게 그같은 힘이 있을까 주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 --♣   ♣ 사람의 성격이 가장 잘 나타날 때는 누군가와 마주 대하여 말하고 듣고 웃을 때다. --♣   ♣ 사람의 욕망은 내버려두면 한이 없다. 끝없는 욕망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자기 욕망에 한계를 갖는다는 것은 목표를 분명히 가진 것이 된다. --♣   ♣ 신문을 읽지 않으면 나는 마음이 태평하고 자못 기분이 좋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남의 일에만 신경을 쓰고 자기 눈앞의 의무는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   ♣ 불의(不義)를 발견하기는 매우 쉬운 일이다. 불의는 남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진리를 발견하는 것을 어렵다. 사람이 발견하고자 애써야 할 것은 이러한 진리이다.--♣   ♣ 무엇이 어찌되었거나 인생이란 것은 좋은 것이다. --♣   ♣ 누구나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미 경험한 선배의 지혜를 빌지 않고 실패하며 눈이 떠질 때까지 헤매곤 한다.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인가. 뒤에 가는 사람은 먼저 간 사람의 경험을 이용하여, 같은 실패와 시간낭비를 되풀이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선배들의 경험을 활용하자. 그것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 것이다. --♣   ♣ 보람있는 일에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지혜이다. 그 일을 방해하는 것들을 정복해 나가는 것이 곧 생활이다. 정복이 없이는 생활의 내용을 얻지 못한다. 우리의 하루는 정복의 노력으로 빛나야 한다.--♣    ♣ 30분이란 티끌과 같은 시간이라고 말하지 말고 그 동안이라도 티끌과 같은 일을 처리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   ♣ 무식한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허위의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두려워하라. --♣   ♣ 과오는 인간에게만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과오는 자기 자신이나 타인, 사물에의 올바른 관계를 찾아내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과오나 허물은 일식이나 월식과 같아서 평소에도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나 보이지 않다가, 비로소 그것을 고치면 모두가 우러러보는 하나의 신비한 현상이 된다. --♣   ♣ 세상에는 어느 하나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과오도 범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 있다.  ♣ 비겁자는 안전한 때에만 위압적으로 나선다. --♣   ♣ 과거를 잊는 자는 결국 과거 속에 살게 된다.--♣   ♣ 커다란 위험이 가로놓인 것은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상반하고 있을 경우이다. --♣   ♣ 항상 사람들은 '옛 사람을 연구하라'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 세계에 주의하고 그것을 표현하도록 힘써라!' 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왜냐하면 옛 사람도 그들의 생존 중에 그렇게 한 것이므로.--♣   ♣ 신만이 완벽할 뿐이다. 인간은 완벽을 소망할 뿐이다.--♣           - '예술' 에 관하여 -   ♣ 꽃을 주는 것은 자연이고 그 꽃을 엮어 화환을 만드는 것은 예술이다. --♣   ♣ 세상에서 해방되는 데에 예술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또한 세상과 확실한 관계를 갖는 데에도 예술을 통하는 것이 가장 좋다. --♣   ♣ 감정과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 예술은 참된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   ♣ 문학은 단편의 지편紙片이다. 세상에 일어난 일과 세상에 말해진 말 가운데 극히 작은 부분이 쓰여져 있다. 그 쓰여진 것 중에서 극히 작은 부분이 남아 있을 뿐이다. --♣   ♣ 미(美)는 감춰진 자연법칙의 표현이다. 자연의 법칙이 미에 의해서 표현되지 않았다면 영원히 감춰져 있는 그대로일 것이다. --♣   ♣ 미(美)는 예술의 궁극의 원리이며 최고의 목적이다.--♣   ♣ 반드시 진리가 구체화할 필요는 없다. 진리가 우리의 정신 속에 깃들이고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그리하여 종소리처럼 힘세고 자비롭게 공기 속에 울리기만 하면 충분하다. --♣ ♣ 백만 명의 독자도 기대하기 어려운 작가는 단 한줄의 글도 쓰지 말아야 한다. --♣   ♣ 시인은 진실을 사랑한다. 시인은 반드시 그것을 느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   ♣ 법률의 힘은 위대하다. 그러나 필봉筆鋒의 힘은 더욱 위대하다. --♣   ♣ 나는 시를 만든 것이 아니다. 시가 나를 만든 것이다.--♣       - '자아발견' & '행복'에 관하여-   ♣ 슬픔은 가끔 행운에서 발생한다.--♣   ♣ 생각하는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행복은 캐낼 수 있는 걸 캐내고, 캐낼 수 없는 것을 가만히 우러러보는 일이다.--♣   ♣ 기쁘게 일하고, 해 놓은 일을 기뻐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은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습득할 수 있지만 나의 마음만은 오직 내 자신의 것이다. --♣   ♣ 고난이 있을 때마다 그것이 참된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   ♣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인가? 남의 장점을 존중해 주고 남의 기쁨을 자기의 것인 양 기뻐하는 자이다.--♣   ♣ 자기 집에서 자기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다.--♣   ♣ 순간은 참으로 아름답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 공부하고, 일하고, 노력하는 이 순간이야말로 영원히 아름답다. 순간이 여기 있으리라. 내가 그와 같이 지낸 과거의 날들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으리라. 이러한 순간에야말로 나는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   ♣ 행복한 인간이란, 자기 인생의 끝을 처음에 이을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   ♣  사람의 최대의 행복은 인격이다. --♣   ♣  눈물과 더불어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자는 인생의 참다운 맛을 모른다.--♣   ♣ 나는 인간이었다. 그것은 싸우는 자란 것을 의미한다.--♣   ♣ 남에게 기만당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스스로 자기를 기만하는 것이다. --♣   ♣ 훌륭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나이를 먹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실수를 범하려 할 때마다 그것은 전에 범했던 실수란 것을 깨닫게 된다.--♣   ♣  남의 좋은 점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남을 칭찬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남을 자기와 동등한 인격으로 생각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 타인을 자기 자신처럼 존경할 수 있고, 자기가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을 타인에게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참된 사랑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그 이상 가는 사람은 없다. --♣   ♣ 마음에는 예의란 것이 있다. 그것은 애정과 같은 것이어서 그같이 순수한 예의는 밖으로 흘러나와 외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두 가지 평화로운 폭력이 있다. 즉, 법률과 예의범절이다. --♣   ♣ 몸가짐은 각자가 자기의 모습을 비치는 거울이다.--♣       - '남'과 '여' & '연애'와 '사랑'과 '결혼'에 관하여 -   ♣ 남자는 세계가 자신이지만, 여자는 자신이 세계다. --♣   ♣ 결혼 생활은 참다운 뜻에서 연애의 시작이다.--♣   ♣ 고상한 남성은 여성의 충고에 따라 더욱 고상해진다.--♣   ♣ 결혼 생활은 모든 문화의 시작이며 정상頂上이다. 그것은 난폭한 자를 온화하게 하고 교양이 높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온정을 증명하는 최상의 기회이다. --♣ ♣ 가장家長이 확실하게 지배하는 가정에는 다른 데서 찾아 볼 수 없는 평화가 깃든다.--♣   ♣ 남자가 젊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지성과는 전혀 별문제다. 여자의 아름다움, 젊음, 애교, 성격, 단점, 변덕, ... 그 밖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러가지를 좋아하지만 결코 여성의 지성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이미 사랑이 깊다면, 지성은 우리들을 연결하는 역할도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불타오르게 하고 정열을 불러일으키는 힘은 지성에게는 없는 것이다. --♣   ♣ 여성을 소중히 지킬 수 없는 남자는 여성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  사랑하는 사람의 결점을 장점으로 볼 수 없는 사람에게는 진실된 사랑이란 없다.--♣ ♣  나는 나의 모든 것이 갖고 싶다. 모든 것을 그녀와 나누어 갖기 위해서.--♣   ♣ 20대의 사랑은 환상이다. 30대의 사랑은 외도이다. 사람은 40세에 와서야 처음으로 참된 사랑을 알게 된다.--♣--♣   ♣  그대의 것이 아니거든 보지를 말라! 그대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라면 보지를 말라! 그래도 강하게 덤비거든, 그 마음을 힘차게 불러 일으키라! 사랑은 사랑하는 자에게 찾아 갈 것이다.--♣   ♣  자연의 극치는 사랑이다. 사랑으로써만 인간은 자연과 친할 수 있다.--♣   ♣ 사랑하는 것이 인생이다. 기쁨이 있는 곳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합이 이루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합이 있는 곳에 또한 기쁨이 있다.--♣   ♣ 사랑하는 자에게 행복이 있으라, 그대를 구원할 슬픈 시련에 견딘 자여! 행복이 있으라!--♣             - 그 외의 명언들 -   ♣ 한 가닥 머리카락조차도 그 그림자를 던진다.--♣   ♣  가장 유능한 사람은 가장 배우기에 힘쓰는 사람이다.--♣   ♣ 가설은 건축공사가 진척되고 있는 동안 건물주변에 여러 가지로 구축되어 건물이 완성되면 제거되는 발판에 불과하다.--♣   ♣  현자에게 잘못이 없다면 어리석은 자는 절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 나는 죄와 더불어 실책을 미워한다. 특히 정치적 실책을 한층 더 미워한다. 그것은 수백만의 인민을 불행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기 때문이다.--♣   ♣  나누어 통치하라는 말은 훌륭한 표어다. 합병하여 지도하라는 말은 더 나은 표어이다. --♣ ♣ 나에게 혼자 파라다이스에서 살게 하는 것보다 더 큰 형벌은 없을 것이다.--♣   ♣  모든 국민은 각자 자기의 천직에 전력을 다하라.--♣   ♣ 한 군데 머물러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무가 아닌 이상 모든 것은 움직이고 있다. 이것이 조국에 봉사하는 길이다.--♣   ♣  부정한 것이 부정한 방법으로 없어지는 것보다는 부정이 행해져 있는 편이 오히려 낫다.--♣ ♣  상세히 검토해보면 모든 철학은 지리멸렬한 언어로 번역된 상식에 지나지 않는다. --♣   ♣  생명은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발명이며, 죽음은 더 많은 생명을 얻기 위한 기교이다.--♣   ♣  선(善)을 행하는 데는 나중이라는 말이 필요 없다.--♣   ♣  선의의 말이 좋은 장소를 점령한다면 겸허한 말은 보다 좋은 곳을 점령한다.--♣   ♣  신앙은 모든 지식의 시작이 아니라 끝이다.--♣   ♣  신앙의 가장 사랑스러운 자식은 기적이다.--♣      
550    랑만, 사실, 상징주의 댓글:  조회:2981  추천:0  2015-03-07
Les Fleurs du mal = A Flower of evil     위고의 은 낭만주의로 알려져 있습니다. 괴테의 또한 낭만주의입니다. 프랑스혁명 쯔음입니다.             빌린 목걸이를 잃어 버린 아줌마가 힘들게 오래도록 번 돈으로 목걸이를 사는데, 그거 가짜야란 이야기를 듣게 되는 모파상의 , 고아가 험난한 길끝에 부자의 양자가 되는 디킨스의 등이 낭만주의 다음에 이어지는 사실주의입니다.             상징주의가 이어집니다. 어떤 이는 이를 감성과 이성의 시계추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낭만과 상징은 감성이고, 사실은 이성으로 말입니다. 상징주의를 살펴보다 보면 이라는 말이 꼭 나옵니다.        
549    보들레르 시 표절작? 댓글:  조회:4638  추천:1  2015-03-07
말라르메와 보들레르 시가 표절작이라고? 툴바메뉴 스크랩 오류신고 프린트 기사공유하기 facebook twitte     겨울 여행/어제 여행 조르주 페렉·자크 루보 지음,      피에르 바야르의 은 시기적으로 앞선 작가가 나중 작가의 작품을 ‘표절’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엉뚱하면서도 흥미로운 주장을 담은 책이다.   이 책 앞부분에서 바야르는 “예상 표절이라는 개념을 고안해낸 건 울리포(잠재문학작업실)다”라고 밝힌다. 울리포는 프랑스의 실험적 문학 집단으로 조르주 페렉, 레몽 크노, 이탈로 칼비노, 마르셀 뒤샹 등이 속해 있었다.   조르주 페렉이 1979년에 처음 발표한 짧은 소설 은 바야르에게 예상 표절 개념에 관한 영감을 준 바로 그 작품이다. 이 소설 주인공인 문학 선생 뱅상 드그라엘은 1939년 8월 어느날 동료 드니 보라드의 집 서재에서 이라는 소책자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일인칭 시점으로 쓰인 이 소설을 읽자 “마치 눈앞에 있던 문장들이 갑자기 그에게 친숙한 듯했고,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듯했으며, 문장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거의 같은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어디선가 읽은 것 같기도 한, 어떤 문장에 대한 또렷하면서도 흐릿한 기억이 떠오르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는 겹쳐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요컨대 이 소설 속 문장들은 랭보와 말라르메, 로트레아몽, 귀스타브 칸, 베를렌 같은 유명 시인들의 시 구절을 베끼거나 살짝 변형시킨 것들로 보였는데, 문제는 이 책이 이 시인들의 활동 시기보다 앞선 1864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 드그라엘은 “로트레아몽, 제르맹 누보, 랭보, 코르비에르 그리고 다른 많은 시인들이, 단 한 편의 작품 안에 이후 서너 세대의 작가들이 양분으로 삼을 열매들을 모아놓을 수 있었던 천재적이고 불우한 한 시인의 표절자에 지나지 않았음을” 확신하지만, 의 지은이 위고 베르니에와 그의 작품에 관한 30년 가까운 추적과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만다.   역시 울리포 멤버인 자크 루보가 1992년에 처음 발표한 은 페렉 소설 을 계승·발전시킨 작품으로 문학적 대화와 유희의 흥미로운 사례를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드니 보라드의 아들로 존스홉킨스대학 프랑스 문학 전공 교수인 데니스 보라드는 페렉의 을 읽고 위고 베르니에의 삶과 문학에 관한 탐구에 나선다. 고모의 도움으로 그는 위고 베르니에의 또 다른 책 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는데, 추가 자료를 통해 드러난 사실은 또 다른 충격을 준다. “보들레르의 이 베르니에의 의 완벽한 표절작”이었던 것. 루보는 속 여러 작품의 구절들을 헤쳐 모아 놓은 듯한 베르니에의 시들을 열거한 다음, “1857년 6월25일, 출간이 예정되었던 최초의 날짜에서 이틀이 지난 후, 파리에서 샤를 보들레르의 초판이 판매되었다”는 사실을 들어 보들레르가 베르니에의 시들을 베꼈다고 주장한다. 베르니에를 베낀 것이 보들레르만은 아니어서 루보는 “모두가 그 책을 읽었다. 모두 그 책을 베낀 다음, 틀림없이 모두 없애버렸을 것이다”라는 과감한 결론으로 나아간다.   페렉의 과 루보의 은 프랑스에서 1997년에 한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는데, 지난해에는 역시 이 이야기를 이어 쓴 울리포 구성원 열다섯명의 ‘공동창작소설’이 이라는 제목으로 나오기도 했다.
548    보들레르 시모음 댓글:  조회:3861  추천:0  2015-03-07
보들레르 1821~1867    초기 보들레르의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는 나이 많은 홀아비로서 1819년에 지참금이 없는 젊은 여자와 결혼했다. 결혼을 통해 사치와 안정을 얻기 원했던 이 여자는 그 꿈을 단념하고 프랑수아 보들레르와 결혼한 것이다. 보들레르는 그들의 유일한 자식이었고, 어머니는 타고난 열정적 기질로 외아들에게 헌신적 애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은퇴하여 상당한 연금을 받게 된 아버지는 교양있는 사람이었고, 상당히 우수한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했다. 그는 4~5세밖에 안 된 아들에게 형태와 선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법을 가르쳤는데, 이때 쌓은 미적 취향이 나중에 보들레르가 19세기의 가장 주목받는 예술 비평가로 성장한 요인이 되었다.   1827년 2월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가 죽자 어머니는 1828년 11월에 자크 오피크라는 군인과 재혼했는데, 재혼할 당시 이미 계급 높은 장교였던 오피크는 그후 장군까지 승진했고, 외국 대사와 상원의원을 지냈다. 오피크는 의붓아들이 규율을 배우기를 원했기 때문에, 1832년 그를 리옹에 있는 왕립 중학교의 기숙 학생으로 들여보냈다. 학교 생활은 엄격한 군대식 일과에 따라 이루어졌지만, 이곳에서 그는 행복했던 듯하며 몇 개의 상을 타기도 했다. 그는 또한 언어에 대한 감수성을 보이기 시작했고, 자신의 문학적 표현 양식을 개발했다. 1836년 의붓아버지가 파리로 전근하자 그는 루이르그랑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아버지는 그가 '학교에 명예를 가져올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그는 아버지의 소망을 실현하는 대신 걸핏하면 규율을 어기는 불량 학생이 되었다. 선생들이 보기에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허세'를 부리고 엉뚱한 역설의 재능을 개발하는 조숙하고 타락한 비행 청소년의 표본이었다. 그는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고, 자신이 천성적으로 고독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1839년 '바칼로레아' 시험에 합격한 뒤, 그는 의붓아버지가 마련해준 외교관 자리를 마다하고, 글을 써서 살아갈 작정이라고 발표하여 어머니를 놀라게 했다. 그가 가장 간절히 원한 것은 자유, 즉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고 라탱 구역의 대학생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여유였다. 미래의 많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법과대학에 등록해,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1840년까지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가 아편과 대마초를 탐닉하고, 훗날 죽음의 원인이 된 성병에 걸린 것도 이무렵이었을 것이다.   1841년 의붓아버지는 그를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들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인도로 보냈다. 그는 아들을 적어도 2년 동안 인도에 머물게 할 작정이었다. 보들레르는 6월 9일에 출항했지만, 항해가 따분해지자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행동으로 다른 승객들을 아연실색하게 하면서 즐거워했고, 배가 풍랑을 만난 뒤(이때 보들레르는 놀랄 만큼 용감하게 행동했음) 수리하기 위해 모리셔스 섬에 입항하자 더이상 배를 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사람들의 설득으로 레위니옹 섬까지 갔지만, 거기서 다시 고국으로 가는 다음 배를 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1842년 2월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항해와 모리셔스 섬에서 3주일 동안 머문 경험은 그의 상상력을 더욱 깊고 풍부하게 해주었으며, 그는 이때 얻은 이미지를 시에서 끌어내곤 했다. 그는 동양에 대한 이 유일한 체험을 결코 잊지 않았고, 동양에 대한 신비주의적 동경을 간직했으며, 이런 동경은 그의 시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항해를 떠날 때 그는 아직도 자기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지 못하는 소년이었으나,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그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그의 상상력에는 불이 붙었고, 시인이 되겠다는 결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1842년 4월에 성년이 되어 아버지가 남겨준 재산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자, 그는 타고난 낭비벽을 만끽하기 위해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좋은 옷을 사들이고 생루이 섬의 로죙 호텔에 있는 아파트를 값비싼 가구로 꾸미느라 무분별하게 돈을 썼으며, 그당시의 전형적인 '멋쟁이'(당디) 생활을 시작했다. 사업이나 경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그는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유산을 큰 재산으로 생각했고, 사기꾼과 고리대금업자의 먹이가 되어 이후 평생 동안 그를 괴롭힐 빚더미에 올라앉을 준비를 했다. 그가 괴짜이고 허풍쟁이이며 부도덕하다는 평판이 난 곳은 로죙 호텔에 살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싶어했다는 점에서는 그당시 파리에 살고 있던 대다수 시인이나 예술가들도 그와 다를 바가 없었다.   1844년 보들레르는 장차 그에게 수많은 불행을 가져다줄 혼혈 여인 잔 뒤발과 관계를 맺었다. 한때 그는 잔을 열렬히 사랑했고, 잔의 잔인함과 배신 및 어리석음에 절망하여 자살을 기도한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떤 면으로는 여전히 잔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잔은 그의 첫번째 연시 〈검은 비너스〉 연작에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는데, 이 시들은 프랑스어로 된 성애시(性愛詩)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에 속한다.   시간 여유가 충분하고 걱정거리가 없었던 이 초기 시절에 보들레르는 〈악의 꽃 Les Fleurs du mal〉을 이루게 될 거의 대부분의 시들을 썼다. 이 시집은 레즈비언에 관한 시, 반항과 퇴폐에 관한 시, 그리고 노골적인 성애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이때 들라크루아와 쿠르베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을 알게 되어 그림에 대한 지식을 얻었는데, 이런 지식은 장차 그의 예술 비평에 탁월함과 독창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그가 2년 만에 유산의 절반을 탕진하자 그의 가족은 1844년초에 그의 나머지 재산을 신탁하라는 법원의 판결을 받아냈고, 그는 매달 들어오는 신탁수익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의 자유를 끝장내는 이런 조치에 어머니가 동의했다는 사실은 보들레르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그의 가족은 보들레르의 사정도 잘 알지 못한 채, 그의 장래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그가 독립성을 회복하는 것을 막았다. 아직도 빚더미에 짓눌려 있는 보들레르는 자신에게 허용된 연간수입 75파운드로는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었으므로 빚을 갚기 위해 다시 돈을 빌려야 했다. 상황이 이처럼 갑자기 변하자 그의 사치스럽고 무사태평한 생활도 막을 내렸다. 그의 운명은 제한된 수입에 얽매인 채 궁핍과 고난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작가가 되고 싶은 아들의 소망을 막으려고 애쓰는 부모가 어쩌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가족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더욱 깊어졌다. 사춘기에 겪었던 조울증이 되살아났고, 그가 '우울'이라고 부른 기분이 더 자주 그를 덮치게 되었다. 위대한 우울의 시 가운데 첫번째 작품을 쓴 것도 바로 이무렵이었다. 그의 친구들 중에는 그보다 훨씬 더 불행한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그는 고통받는 인류에 대한 동정심을 키우게 되었다. 많은 친구들의 혁명적 이상주의에 매혹된 그는 1848년 2월혁명에 가담했고, 이 혁명은 성공하여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한편 그는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로 결심하고 직업작가가 되었다. 그가 처음 발표한 작품은 1845년 파리 현대 미술전에 대한 평론이었다. 이 예술비평은 날카로운 판단력과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을 보여주었으며, 그가 이미 현대 예술의 방향에 대해 예견하고 있었음을 시사했다. 그의 예술비평인 〈1846년 현대미술전 Salon de 1846〉은 미학적 비평의 이정표이다. 이 평론에서 그는 단순히 전시회를 설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하는 한편, 그림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명암으로 이루어진 고유한 화음을 가지며 자연의 색깔에는 음악적인 가락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가 나중에 확립하게 될 자연과 예술의 '조응'(照應 correspondances)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1845, 1846년에는 몇 편의 시가 아방가르드 잡지들에 발표되었고, 그는 이런 잡지에 논설과 평론도 기고했다. 1847년 그는 유일한 장편소설이며 자전적 작품 〈허풍선이 La Fanfarlo〉를 발표했다. 훨씬 오래 전에 쓰기 시작한 이 작품은 자신이 로죙 호텔에서 사치스럽게 살고 있었을 때의 인간 됨됨이를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흥미롭다. 보들레르가 1848년 6월혁명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역할을 맡은 뒤 1849년 12월까지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고, 그가 왜 1849년 12월에 디종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곳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1850년에는 여느 때처럼 가난하고 불행한 모습으로 파리에 돌아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개심한 증거를 보일 때까지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조차 거부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자극하여 정규적인 직업을 갖게 할 작정이었다. 보들레르도 얼마 동안은 열심히 일했지만 이것은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나버렸고, 그는 어머니의 엄격함 때문에 더욱 용기를 잃었다. 그는 많은 논설을 구상했지만 1편도 쓰지 못했고, 쓰기 시작한 것은 많았지만 1편도 끝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경험과 고통의 세월 속에서 그는 위대한 창조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그의 본성은 더욱 풍부해졌고,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851년 12월에 쿠데타를 일으킨 뒤로는 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잃어버리고 원숙기의 개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중기 보들레르의 원숙기는 그가 1852년초에 에드거 앨런 포의 글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당장 포의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가 포에 대해 쓴 첫번째 평론(이 글은 영어가 아닌 외국어로 씌어진 포에 대한 첫번째 평론임)은 〈르뷔 드 파리 Revue de Paris〉지 3·4월호에 발표되었고, 그후 그는 포의 작품을 번역한 여러 편의 글을 평론지에 실었다. 그중 하나인 〈까마귀 The Raven〉는 그가 번역한 유일한 시였다. 1852~65년 그는 포의 작품을 번역하고 그에 대한 평론을 쓰는 일에 몰두했다. 〈기담(奇談) Histoires extraordinaires〉은 1856년에, 〈새로운 기담 Nouvelles Histoires extraordinaires〉은 1857년에, 〈아서 고던 핌의 모험 Aventures d'Arthur Gordon Pym〉은 1858년에, 〈외레카 Eureka〉는 1864년에, 그리고 〈괴기담 Histoires grotesques et sérieuses〉은 1865년에 나왔다. 처음 두 작품에는 포를 해설한 긴 서문이 딸려 있다.   이 책들은 번역서로서 프랑스 산문의 고전이다. 보들레르의 어머니는 영국에서 망명자의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어렸을 때 영어를 배웠다. 그는 포한테서 자신과 똑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 그리고 그가 추구하고 있던 결론에 이미 독자적으로 도달한 사람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포를 통하여 자신의 미학 이론과 시의 이상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1852년 4월에 보들레르는 잔 뒤발을 떠났다(실제로는 끝내 그 여자한테서 벗어나지 못했음), 그러나 그는 여자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랑할 여자를 찾다가 여배우 마리 도브룅에게 접근했다. 마리가 그를 거부하자 유명한 미인이며 일찍이 화가의 모델이었던 아폴로니 아글라에 사바티에에게 구애했다. 사바티에는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의 친구로서 보들레르와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사바티에는 그의 〈하얀 비너스〉 연작에 영감을 주었다. 1854년 그는 다시 마리 도브룅과 관계를 맺었고, 그녀로부터 영감을 얻어 〈초록빛 눈의 비너스〉 연작을 썼다. 이 두 연작에 포함된 시는 대부분 그의 예술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한 작품들이다.   포의 작품 번역가로 또한 예술비평가로서 차츰 명성이 높아지자, 마침내 그는 자신의 시를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1855년 6월 보수적 낭만주의의 요새인 〈르뷔 데 되 몽드 Revue des Deux Mondes〉지는 보들레르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제출한 18편의 시를 발표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보들레르가 이 시들을 고른 이유는 그 표현 방식과 주제가 독창적이고 놀랄 만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시들이 발표되자 그는 악명을 얻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1857년 봄에 다시 9편의 시가 〈르뷔 프랑세즈 La Revue Française〉지에 실렸고 〈아르티스트 L'Artiste〉지에도 3편이 실렸다. 그리고 6월에는 〈악의 꽃〉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시집 때문에 보들레르와 그의 친구인 출판업자 풀레 말라시스 및 인쇄업자들은 외설과 신성모독죄로 모두 기소당했다 (→ 검열). 이 유명한 재판에서 그들은 유죄 선고를 받고 벌금을 물었으며, 6편의 시가 발표 금지되었다. 이 조치는 1949년에야 겨우 해제되었다. 몇몇 독자들은 보들레르의 의도와 완전한 예술성을 이해하고 높이 평가했지만, 몇 세대 동안 〈악의 꽃〉은 여전히 타락과 불건전 및 외설의 표본으로 남아 있었다. 보들레르는 1861년 〈악의 꽃〉을 대폭 증보한 개정판을 출판했지만, 금지된 시는 삭제했다. 이 금지된 시들은 1866년 벨기에에서 출판된 〈유실물 Les Épaves〉이라는 시집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개정판을 더 증보한 제3판을 준비하고 있던 1866년에 보들레르는 온 몸이 마비되었다. 이 책은 그가 죽은 뒤 친구인 샤를 아슬리노가 출판했지만, 그것은 아마 보들레르가 구상했던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보들레르가 시집에 넣으려고 계획하지 않았던 몇 편의 시와 1866년 〈현대의 파르나스 Le Parnasse Contemporain〉에 처음 발표되었던 6편의 〈새로운 악의 꽃〉도 포함되어 있다.     후기 그가 큰 기대를 걸었던 〈악의 꽃〉이 실패한 것은 보들레르에게 쓰라린 충격이었고, 그의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은 갈수록 커지는 좌절감과 환멸 및 절망으로 어두워졌다. 사바티에와의 정신적 사랑은 슬프게 끝나버렸고, 1861년 마지막으로 헤어진 잔 뒤발은 여전히 그에게 부담과 걱정을 안겨주었다.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이 시기에 씌어졌지만, 책의 형태로 출판된 것은 거의 없었다. 일부는 정기간행물에 발표되었다. 〈1859년 현대미술전 Salon de 1859〉은 〈르뷔 프랑세즈〉에, 〈리하르트 바그너와 파리에서 공연된 탄호이저 Richard Wagner et Tannhäuser à Paris〉는 〈르뷔 외로펜 La Revue Européene〉(1861)에, 〈현대 생활을 그리는 화가 Le Peintre de la vie moderne〉(데생 화가인 콩스탕탱 기)는 〈피가로 Le Figaro〉(1863)에, 그리고 시집 〈파리의 우울 Le Spleen de Paris〉을 엮기 위해 쓰고 있던 산문시들은 여러 신문에 나뉘어 발표되었다. 이 마지막 산문시는 보들레르가 유독 아꼈고 오랫동안 손질해온 작품이었다. 그는 마지막 쓰러지기 직전에도 여전히 이 시를 다듬고 있었다. 알로이시우스 베르트랑의 〈밤의 가스파르 Gaspard de la nuit〉에서 착상을 얻었지만, 주제는 같은 시기에 쓴 그의 운문시 주제와 같고, 작품의 분위기는 나이들고 깊은 우울증에 빠진 보들레르의 만성적인 염세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이 산문시들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근대 도시 파리에 대한 그의 감정, 그리고 파리의 거리를 헤매는 낙오자들과 버림받은 부랑자들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악의 꽃〉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표현하고 있다.   1860년 풀레 말라시스는 대마초와 아편의 효과에 대한 보들레르의 연구 논문 2편을 〈인공 천국 Les Paradis artificiel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고, 1861년에는 〈악의 꽃〉 개정판을 냈다. 1862년 그는 파산을 선고받았다. 보들레르는 그의 출판업자의 실패에 말려들었고, 경제 사정은 절망적일 만큼 어려워졌다. 빚쟁이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리고 출판을 준비하고 있던 작품들의 판권을 팔기 위해 1864년 벨기에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이 여행은 실패로 끝났고, 그는 한 건의 출판계약도 맺지 못했다. 특히 미학이론을 규정한 평론집을 출판하고 싶어했는데, 이 책의 출판계약에 실패하자 그는 몹시 낙담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로 간주했기 때문에 평론도 시 못지 않게 중요했다. 그의 시를 충분히 음미하려면 예술의 본질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이해해야 한다. 그의 시는 모두 그의 견해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결정체이며, 평론은 예술 작품의 본질과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원리에 대한 명상이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창조적 예술가라면 결국 모두 비평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즉 예술가는 평론을 통해 자신의 시를 해설하고, 자신의 미학을 연장하여 시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벨기에의 나무르에 머물고 있던 1866년 2월 보들레르는 병세가 악화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1867년 8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에서 추모 연설을 해달라고 부탁받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부탁을 받아들인 사람은 아슬리노와 시인인 테오도르 드 방빌뿐이었다. 이 두 사람은 그의 가장 오랜 친구였다. 보들레르는 인정받지 못한 채 죽었고, 그의 글은 대부분 출판되지 않았으며, 이전에 출판된 것들도 절판되었다. 그러나 시인들 사이에서는 곧 의견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미래 상징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은 이미 그의 추종자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그는 19세기 프랑스 시인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숭배자들은 그가 서유럽 전역의 감수성과 사고방식 및 글 쓰는 방식에 혁명을 일으켰고, 그의 미학이론이 형성된 시기는 시의 역사와 예술의 역사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상징주의 운동은 바로 이 이론에서 원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1.  주요작품: 악의 꽃(Les Fleurs du mal)1857,          파리의 우울(Spleen de Paris)          평론집 -낭만파 예술,심미적 호기심 등           신들린 사나이                         해가 검은 베일에 가려졌다. 너도 해처럼 오, 내 생명의 달아! 그림자에 포근하게 싸여라;   네 멋대로 자거나 한 대 피우라; 잠자코, 시름에 겨워, 권태의 심연에 송두리째 잠기도록 하라;     나는 너를 이처럼 사랑해! 그러나 네가 오늘, 그림자 벗어나는 이지러진 천체처럼,   광란으로 붐벼대는 곳들에서 으스대고 싶다면, 그것도 좋다! 귀여운 비수야, 네 칼집에서 솟아나라!     샹들리에 불꽃으로 네 눈동자에 불을 켜라! 시골뜨기들 눈초리 속에서 욕망을 불붙여라!   병들었건 극성스럽건, 너의 모든 것이 내게는 기쁨이니;     네가 바라는 것이 되라, 검은 밤이건, 붉은 새벽이건;   소름끼치는 내 온몸에서, 오, 내 귀여운 베엘제불, 너를 숭배한다!고, 외치지 않는 세포는 하나도 없구나!       떠나가는 집시들                       어제 길을 떠났네, 미래를 점치며 불타는 눈동자를 한 부족   아이들을 등에 업지 않았으면, 혹은 축 늘어진 유방의 준비된 보물을 그들의 엄쳐흐르는 식욕에 내맡긴 체.     번들거리는 무기를 어깨에 멘 사나이들, 식구들이 옹기종기 탄 수레를 따라 걸어가네.   침울하게 미련을 갖고 이미 사라진 환상에 무거워진 눈으로 허공을 들러보며.     귀뚜라미는 감추어져 있는 모래 구멍 속에 숨어 그들의 행렬을 보며 한층 크게 노래 부르네.   대지의 신은 그들을 사랑하여 푸른 초목을 번창시키고.     그 길손들 앞에는 바위에서 샘이 솟고 사막이 꽃을 피우니,   그들을 맞기 위해 다가올 짙은 어둠의 왕국은 열려 있었네.       고양이              이리 오너라, 내 귀여운 나비야, 사랑하는 이 내 가슴에 발톱일랑 감추고   금속과 마노가 뒤섞인 아름다운 내 눈 속에 나를 푹 파묻게 해 다오.     너의 머리와 부드러운 등을 내 손가락으로 한가로이 어루만질 때에   전율하는 너의 몸을 만지는 즐거움에 내 손이 도취할 때에     나는 내 마음속의 아내를 그려보네.   그녀의 눈매는 사랑스런 짐승 너의 눈처럼 아늑하고 차가워     투창처럼 자르고 뚫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미묘한 숨소리, 변덕스런 향기 그 갈색 육체를 감도는구나.       돈 후안은 지옥으로                   돈 후안이 삼도천으로 가서 샤롱에게 뱃삯을 치르자   한 우울에 젖은 거지가, 앙티스테느처럼 거만한 눈초리를 한 채 거센 복수의 팔로 노를 잡았네.   늘어진 유방과 구멍난 옷자락을 내보이고 여인들은 캄캄한 하늘 아래 몸부림치며   제물로 바쳐진 한 무리의 짐승들처럼 긴 신음소리 그의 뒤에서 내고 있었네.   스가나렐은 호탕이 웃으며 돈 내라 야단이고 한편에서는 헤매는 죽은 모든 인간들에게   백발로 덮인 자신의 머리칼을 비웃던 그 뻔뻔스런 아들을 가리키네.       이 밤에                       오늘 저녁 무엇을 말하리, 가엾고 외로운 넋이여. 내 전에 시든 가슴, 무엇을 말하리.   그 성스런 시선이 어느날 그대를 다시 환하게 한 너무나 아름답고, 지극히 어질고, 가장 사랑스런 그녀에게!   ---그녀를 칭송함에 우리는 자랑으로 삼으리. 그녀의 유연함만한 것은 이 세상에 없으리라.   그녀의 정신에 싸인 육체는 천사의 향기를 지니고 그녀의 눈길은 우리를 광명으로 감싸주네.   어둠 속에서나 외로움 속에서나 거리에서나 군중 가운데서나   그녀의 환상은 햇불처럼 빈 하늘에서 너울거리네.   그 환상이 가끔씩 부탁하기를 "나는 아름다워 명하노니, 오직 나를 위해 아름다움만을 사랑하라   나는 수호 천사요, 뮤즈이자 마돈나이나니!"       깊은 심연 속에서                             내 마음 떨어진 캄캄한 심연 밑바닥에서, 연민을 비나이다, 내 사랑하는 유일한 그대여.   이건 납빛 지평선의 침울한 세계, 거기서 어둠 속에 공포와 모독이 떠돌고,     열 없는 태양이 여섯 달을 감돌고, 또 여섯 달은 어둠이 땅을 덮으니,   이건 극지보다도 더 헐벗은 고장, -짐승도, 개천도, 푸르름도, 숲도 없구나!     그런데 이 얼어붙은 태양의 차가운 잔인성과 태고의 과도 같은 이 광막한 어둠보다   더 끔찍스런 것 세상에 없어라.     멍청한 잠속에 잠길 수 있는 더 없는 더러운 짐승 팔자가 샘나는구나   그토록 시간의 실타래는 더디 풀리네!    
547    명시인 - 보들레르 댓글:  조회:3350  추천:0  2015-03-07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프랑스어: 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년 4월 9일 - 1867년 8월 31일)는 프랑스의 비평가이자 시인이다.   목차     1 생애 1.1 어린 시절 1.2 작가 데뷔 1.3 《악의 꽃》 1.4 내리막길 1.5 말년 2 보들레르와 상징주의 3 대표시     §생애[편집] §어린 시절[편집] 보들레르는 1821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François Baudelaire)는 환속한 사제이며 아마추어 화가였는데 1827년, 보들레르가 6살 때 사망했다. 보들레르는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상속받았다. 어린 보들레르를 위해 가족 내에서 유산 관리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보들레르는 삶 내내 이로부터 모멸감을 느꼈다. 남편보다 34살 어렸던 고아출신으로 알려진 보들레르의 어머니 카롤린 뒤페(Caroline Archimbaut Dufays)는 이듬해 권위 의식이 몸에 밴 오픽 소령과 결혼한다. 보들레르와 그의 어머니와의 관계는 가깝고도 복잡한 것이었고, 이 관계가 그의 삶 내내 계속되었다. 그는 후에 말한다. "나는 그녀의 고결함 때문에 나의 어머니를 사랑했지요. 나는 조숙한 댄디였습니다."[1]:13–14 그는 또 그녀에게 쓴 편지에서 “어린 시절에 당신을 열렬히 사랑했던 기간이 있었습니다.”라고 쓰기도 했다.[1]:16 보들레르는 리옹에서 교육받았다. 리옹 왕립기숙학교의 학생이 되면서 그는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생활해야만 했으며, 그의 성적이 떨어지면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의붓아버지의 엄격한 방식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보들레르는 이 시간들을 회상하며 이렇게 썼다. "탈속의 잔인한 시간에 대한 떨림, … 비참하고 버려진 어린시절 에 대한 불안, 강압적인 학교친구들에 대한 증오, 그리고 마음의 고독."[1]:30,32 14살 때 학급 친구는 보들레르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다른 어떤 학생들보다 세련되었으며 독특했지요… 우리는 훌륭한 문학 작품에 대한 취향과 공감, 조숙한 사랑으로 서로 묶여있었습니다."[1]:35 후에 그는 파리의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의 기숙생으로 편입하게 된다. 보들레르는 공부에 대해서는 산만하고, 이따금 성실했으나 게으른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 당시에 전국 경시대회 라틴시 부문에서 장려상을 수상하고 프랑스시 부문에서 2등상을 수상하는 등 문학에 유별난 재능을 보였다.[2]:8 18살에 보들레르는 "우아한 성품, 때로는 신비주의에 빠져있고 때로는 비도덕성과 냉소(과도하지만 오직 말로만 이루어지는)로 충만해있음"[1]:42이라고 묘사되었다. 그는 졸업 직전 학급 친구가 수업 시간에 그에게 보낸 쪽지를 선생님께 보여주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한다.[2]:8 그러나 그 이후에도 가정교사의 도움으로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 없이 파리 법과대학에 등록한다. 그는 그의 형에게 말했다. “나는 내가 그 어떤 직업에도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그의 의붓아버지는 그가 법관이나 외교관이 되기를 원했지만 그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2년간의 불규칙적인 생활 속에서 그는 많은 보헤미안 화가들과 작가들을 만난다.[1]:46 보들레르는 사창가를 드나들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입학 이전에 이미 처음으로 성병에 걸렸다. 그는 유대인 매춘부였던 사팔뜨기 사라(Sarah la Louchette)와 관계를 맺었으며 돈이 바닥나면 그의 형과 함께 살았다. 그는 돈이 생기면 바로 써버렸고, 옷을 사기 위해 많은 빚을 냈다. 1841년 의붓아버지는 그를 환락가에서 건져내서 새사람으로 만들려는 희망에서 그를 인도의 콜카타로 보낸다. 그러나 그 고된 여행은 문학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보들레르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고, 그가 지금까지 가져왔던 삶에 대한 태도도 바꾸지 못했다. 결국 보들레르는 레위니옹 섬의 생드니까지만 갔다가 프랑스로 돌아온다. 이 여정에서 그는 열대의 강렬한 풍경에 매료되고 이는 후에 그의 시의 소재가 된다.[2]:10–11 곧 보들레르는 철학적으로 사색하고 그의 출판되지 않은 시들을 낭송하기 위해서 선술집으로 돌아간다. 21살 때 그는 십만 프랑이 넘는 상당량의 재산과 4군데의 땅을 상속받으나 25개월 만에 절반 가량을 탕진해버린다. 그의 가족들은 절망에 차서 금치산선고를 하고 그의 돈을 법정후견인인 앙셀에게 맡겨 1년에 일정량의 연금을 받도록 한다.[1]:71 이 기간 동안 그는 낭트에서 온 매춘부의 딸이며 아이티 태생 흑백혼혈인 잔 뒤발(Jeanne Duval)을 만나게 되고 그녀는 보들레르에게 있어 가장 긴 기간 동안 애인으로 남는다. 그의 어머니는 뒤발을 “모든 방법으로 그를 고문하는” “검은 비너스”이며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여자로 묘사했다.[1]:75 §작가 데뷔[편집] 1843년 그는 아직 어떤 글도 출판하지 않았지만 예술계에서 그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책과 예술 작품, 골동품들을 사들이는 댄디로 통했다. 1844년쯤에 그는 앞서말한 것처럼 친아버지의 유산의 절반을 탕진하였고, 정기적으로 어머니를 찾아가 그가 작가로 성공할 수 있도록 돈을 요청했다. 그는 이 시기에 오노레 드 발자크를 만났고 후에 《악의 꽃》에 나타날 시들을 쓰기 시작했다.[1]:83 첫 번째로 출판된 그의 작품은 《1845년의 살롱》이라는 예술 비평이었고 그 대담성 때문에 이 책은 출판 직후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들라크루아를 높이 사는 것과 같은 그의 비평들은 그 당시에 새로운 것이었으나 그때부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보들레르는 그 자신이 견문이 넓고 열정적인 비평가임을 증명해내었으며 더 큰 예술계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1]:95 그러나 그 해 여름에 그의 얼마 안되는 연금과 쌓이는 빚, 외로움, 불투명한 미래에 절망하여, 그 자신에 의하면 “잠이 드는 것의 피곤함과 깨어나는 것의 피곤함은 견딜 수 없는 것”이기에 그는 그가 상속한 돈의 나머지를 모두 뒤발에게 남기기로 하고 자살을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의지를 잃어버리고 칼로 자신을 상처냈을 뿐이다. 그는 회복기간 동안 그의 어머니에게 방문해달라고 간청했으나 그녀는 이를 무시해버렸다.[1]:101–102 잠시 동안 그는 머물 곳이 없었으며 그의 부모들은 그의 불쌍한 상태에 다시 연민을 갖기 시작하기 전까지 보들레르와 소원하게 지냈다. 1846년에 보들레르는 그의 두 번째 살롱 평론을 쓰고 낭만주의의 변호사와 비평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가 낭만주의 예술가의 선두주자로서 들라크루아를 지지한 것은 세간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1]:110 이듬해 보들레르의 소설인 《라 팡파를로》가 출간되었다.[2]:56 보들레르는 1848년 혁명에 참가했다.[1]:127 몇 년동안 그는 공화당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정치적인 성향은 확고한 확신이기보다는 감정적인 상태였기에 프루동의 무정부주의로 돌아섰다. 그의 의붓아버지 역시 혁명에서 잡혔으나 교수형에서 살아남았다. 또 새 정부는 왕족에 대한 그의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그를 터키로 가는 비밀 사절로 임명했다.[1]:125 1850년 보들레르는 악화된 건강과 많은 빚, 비정기적인 창작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는 종종 거처를 바꾸고 자주 돈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며 그의 어머니와 불편한 관계를 계속했다. 그는 감당하기 힘든 많은 작업을 떠맡았으나 에드거 앨런 포의 책을 번역을 끝마쳤다.[1]:181 보들레르는 어린 시절에 영어를 배웠고 포의 단편과 같은 괴기 소설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 중 하나이며,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악의 꽃》[편집] 보들레르는 느리고 까탈스러운 작가였고 종종 게으름과 감정적인 고통과 병환으로 작업을 미루곤 했다. 결국 1857년에 가서야 그의 첫 시집이며 가장 유명한 작품인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이 출판되었다.[1]:191 이 시들 중 몇 편이 이미 《르뷔 데 되 몽드》(Revue des deux Mondes)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적은 수의 안목 있는 독자들만이 《악의 꽃》을 읽었으나 시들의 주제는 큰 이슈가 되었다. 다른 작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고 막대하며 예측불허였고, 선망과 정의할 수 없는 두려움과 뒤섞여” 있었다.[1]:236 그 당시 《보바리 부인》의 소재를 다룬 방식이 풍기문란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았던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보들레르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은 낭만주의를 새롭게 할 방법을 찾아냈소. 당신은 대리석만큼 견고하고 영국의 안개처럼 예리하군요."[1]:241 이 시집의 주요한 테마인 섹스와 죽음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또한 레즈비언 관계, 성스럽고 불경한 사랑, 변형, 우울, 도시의 붕괴, 사라진 순수성, 삶의 억압성 등의 주제를 다뤘다. 노스탤지어를 일깨우는 후각과 향기의 이미지가 이 시집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1]:231 그러나 이 시집은 불건전하다는 이유로 그 시대의 주류 비평가들 사이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몇몇 비평가들은 그의 시 몇 편을 “열정과 예술, 그리고 시의 대작들”이라고 칭했으나 다른 시들은 판매 금지를 위한 법적 제제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1]:232-237 보들레르를 고발했던 비평가 하바스는 《르 피가로》에 이렇게 썼다. “이 시집에서 흉측하지 않은 것이라곤 이해 불가능한 것들뿐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타락한 것들뿐이다." 그러자 보들레르는 이 항의에 대한 대답으로 그의 어머니에게 예언적인 편지를 썼다. “ 어머니는 내가 항상 문학과 예술이 도덕으로부터 독립적인 목적을 추구한다고 생각해왔던 것을 압니다. 내게는 구상과 스타일의 아름다움이면 족합니다. 그러나 당신도 알게 되겠지만, 이 《악의 꽃》이라는 책은, 차갑고 불길한 아름다움을 입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노와 인내로 쓰인 책입니다. 게다가 이 책의 긍정적인 가치의 증거물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말하고 있는 악 안에 있습니다. 이 책은 사람들을 화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느껴야 하는 고통이 두려워 나는 그 증거들 중 삼분의 일 가량을 잘라버렸습니다. 그들은 내게서 모든 것을 부정합니다. 발명의 정신과 심지어 국어에 대한 지식까지도. 나는 이 모든 바보짓꺼리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미덕과 단점을 지닌 이 책이 문학적 소양이 있는 독자들에게 빅토르 위고나 테오필 고티에 심지어 조지 고든 바이런의 명시들과 나란히 기억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1]:238 ” 보들레르와 그의 출판업자들은 풍기문란죄로 고소당했고 결국 벌금을 물게 되었으나 수감형에 처해지지는 않았다.[1]:248 이 6편의 시는 이후에 브뤼셀의 다른 출판사에서 《잔해들》(Les Épaves)이란 제목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1861년에 6편이 삭제된 상당한 양의 시가 첨가되어 《악의 꽃》의 또다른 판본이 출판되었다. 많은 유명인사들이 보들레르 뒤에 결집하여 법원의 판결을 비난하였다. 보들레르가 탄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벌금은 감해졌다. 거의 100년이 지나서 1949년 5월 11일, 보들레르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졌고 그의 삭제된 6편의 시가 프랑스에서 다시 출판되었다.[1]:250 §내리막길[편집] 1858년 보들레르는 파리를 떠나 바닷사의 옹플뢰르에 정착하려 하나 잘 되지 않는다. 다음해 잔 뒤발이 중풍 발작을 일으키고 반신불수가 되자 보들레르는 그녀를 보살피기 위해 그녀와 동거한다. 1860년까지 보들레르는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인 《고든 핌의 모험》을 번역하고, 작가론 와 라는 평론 한 편을 쓰는 등 작문활동을 계속한다. 1861년 잔 뒤발의 또다른 애인이 그들의 집에서 동거하게 되자 그는 뒤발을 떠난다. 그는 이런 상황과 매독의 재발, 상처받은 자존심과 좌절된 창작욕으로 자살 충동을 느끼고, 빚을 갚기 위해 발표되지 않은 작품의 저작권까지 모두 팔아버린다.[2]:24–27 1861년 그는 "진정한 문인이 부끄러워하지 않고 바랄 수 있는 유일한 명예란 아카데미 회원이 되는 일"이라며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입후보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내 그것이 광기어린 실수임을 깨닫게 되는데 이때 당대 문단의 실세였던 비평가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 역시 보들레르의 입후보를 맹비난하고 공개적으로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 보들레르는 처음에는 그의 주장에 반대하나 결국 그의 요구를 받아들인다.[2]:27-28 §말년[편집] 말년에 보들레르는 자주 자살을 생각했고 어머니와 뒤발을 걱정했다. 그는 프레스 지에 《파리의 우울》에 담길 그의 산문시들을 발표하고, 또 《들라크루아의 작품과 생애》, 《현대 생활의 화가》를 쓰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시는 이내 "독자들을 권태롭게 한다"는 이유로 중단된다.[2]:29-31 1864년 빚에 쪼들리던 보들레르는 브뤼셀에 가서 책을 출판하고 강연을 하려하나 출판업계는 그에게 냉담했다. 그 시기에 스테판 말라르메와 폴 베를렌가 보들레르를 찬양하는 글을 기고하며 보들레르는 상징주의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보들레르는 이를 반기지 않고 되려 경계하며 귀찮아한다.[2]:31–33 이 시기에 보들레르는 이미 계속되는 성병과 중풍으로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있었으며 여전히 빚에 쪼들리고 있었다. 결국 그는 요행원에 지내다 파리로 돌아오게 되고 1867년 8월 사망한다.[2]:33–34 §보들레르와 상징주의[편집] 상징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부득이하게 기술상의 난점에도 불구하고 문학사조간의 상호 관계를 일별해 보아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상징주의는 이전의 낙관주의에 기초한 사조 혹은 사회사상들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 태동하였다. 즉 사회사상으로서의 사회주의(socialisme), 과학만능주의(scientisme), 실증주의(positivisme)은 상징주의가 행할 ‘모든 가치 전도’의 대상이었다. 또한 상징주의 이전 시기를 풍미했던 고답파(le Parnasse),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는 후자에 대해서는 상징주의가 적극적인 부정만을 행하였다고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상징주의는 고답파의 유미주의 선언처럼 보이는 저 전언,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의 개념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기에 보들레르는 자신의 《악의 꽃》을 테오필 고티에에게 헌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 문학의 상징주의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에 앞선 고답파의 시론을 검토해보는 것이 유용하다. 고답파는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사물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정확하게 보고 그것을 시 속에서 형상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즉 과학과 예술의 행복한 결합을 꿈꿔온 고답파의 고티에에게 있어 예술가는 놀라우리만치 정확한 눈과 손의 확실성을 가지고, 마치 그림이 실현할 수 있음직한 정확하고 고유한 느낌을 말로 형상화시키는 사람이다. 하지만 고답파는 시의 회화적 조형성에 지나치게 치중한 나머지, 시를 통한 형이상학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바로 이 지점이 상징주의의 정신주의(spiritualisme)가 부재하는 지점이며 고답파가 종국에는 현실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요약해보자면, 고답파에게 있어 예술의 이상은 칸트 미학에서 말하는 일종의 ‘무관심적 쾌’ 혹은 ‘예술의 무목적성’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시인의 주관성을 중시하기보다는 고대의 테크네(τέχνη)적 예술 개념을 고수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독일 낭만주의에 있어 30년 전쟁이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듯, 프랑스 문학사에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의 참패가 미치는 영향 또한 그러하다. 보불전쟁에서의 패배는 상징주의를 태동시키는 물적 토대로 작용하였는데, 이는 이전 프랑스에 팽배했던 진보에 대한 일련의 낙관이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프랑스의 예술적 기운은 퇴폐주의(décadentisme)을 거쳐 드디어 상징주의로 이행하게 된다. 우선 상징주의의 현실 인식은 상징주의에 있어 현실은 하나의 가상으로 존재하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플라톤주의(platonisme)의 영향 아래에 있다. 하지만 상징주의와 플라톤 철학 사이의 변별점은 개개의 현상 속에 하나의 본질로서의 관념(idée)이 상징주의의 세계관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 철학이 세계의 이원론적 구조를 상정했다면 상징주의는 더 나아가 이원론(dualisme)으로부터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일원론적 세계로 이행하고자 한다. 상징주의의 초월적 세계 인식은 가상의 현실, 즉 ‘상징의 숲’을 시인이 직관을 통해서 해독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내부에 본질로서의 관념을 내포하고 있는 현상으로서의 세계는 완전하게 자족적인 존재(ens a se)가 되지는 못하나 인식주체, 즉 시인이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를 통해 하나의 실상적인 존재자로 도약하게 된다. 따라서 상징주의는 현실 세계를 초월하고자 하지만 현실 세계자체를 폐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 세계야말로 시인에게 ‘때때로 모호한 말들을 새어 보내며, 친근한 눈길로 그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보들레르의 《조응》에서)이자 시인에게 상징을 통해 자신의 존립성과 진실성의 빛을 발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상징은 하나의 기호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의미이다. 물론 일반 언어와 상징 언어 양자가 공히 기호이면서 의미이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의 양태이다. 상징은 단순히 약속되고 정태적인 기호라는 정의에서 탈피하여 배후에 스스로가 지닌 은폐되고 명료하지 않은 형이상학적 본질(또는 관념)이 파악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역동적인 기호인 것이다. 그렇기에 상징이 유추나 암시를 통해 기호로부터 의미에로의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초월을 감행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되풀이하자면, 상징이라는 것은 해석자가 부재하고 그와의 관계 속에 존재하지 못한다면 한갓 의미 없는 대상에 불과할 따름이다. 앙리 페르의 정의를 인용하자면, ‘그러므로 상징은 하나의 기호이되, 그 빛을 받고 감동하여 그 뜻을 이해하고자 하거나 그 신비를 캐내고자 하는 사람에 의해 해독되고 설명되기를 요구하는 기호’인 것이다. §대표시[편집] 교응(Correspondances) “ 자연은 살아 있는 기둥들이 때때로 모호한 말들을 새어 보내는 사원. 사람들은 친근한 눈길로 자기를 지켜 보는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그곳으로 들어간다. 어둠처럼 빛처럼 드넓으며 컴컴하고도 심원한 통일 속에서 긴 메아리 멀리서 섞이어 들듯 향과 색과 소리가 서로 화답하네. 어린 아이들의 살처럼 싱그럽고 오보에처럼 달콤하고, 초원처럼 푸르른 향내들, 또 그밖에도 썩고 풍만하고 의기양양한 것들. 정신과 향기의 교통을 노래하는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끝없는 사물들의 확산을 가진다. ” 취해라 (Enivrez-vous) “ 언제나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이다. 그대의 어깨를 짓부수고 땅으로 그대 몸을 기울게 하는 저 '시간'의 무서운 짐을 느끼지 않기 위하여, 쉴새 없이 취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술이건 시건 또는 덕이건, 무엇에고 그대 좋도록. 그러나 다만 취하여라. 그리고 때때로, 궁전의 섬돌 위에서, 도랑 가의 푸른 풀 위에서, 그대의 밤의 침울한 고독 속에서, 그대가 잠을 깨고, 취기가 벌써 줄어지고 사라져 가거들랑, 물어보라, 바람에, 물결에, 별에, 새에,시계에, 사라져 가는 모든 것에, 울부짖는 모든 것에, 흘러가는 모든 것에, 노래하는 모든 것에, 말하는 모든 것에, 물어보라, 지금은 몇 시인가 를. 그러면 바람도, 물결도, 별도, 새도, 시계도, 그대에게 대답하리, "지금은 취할 시간! '시간'의 학대 받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취하여라! 술이건, 시건, 또는 덕이건, 무엇에고 그대 좋도록."  ”  
546    명시인 - 랭보 댓글:  조회:5227  추천:1  2015-03-07
1871.5.15 시인 드메니에게 '견자의 편지'를 써서 보내다       천재란 단지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각고의 노력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는 단순히 ‘성실한’ 정도를 넘어서서 ‘미칠 정도’로 노력한다. 아르튀르 랭보가 그랬다. 어린 시절부터 랭보는 마치 글자를 먹는 염소와 같았다. 그는 라틴어 고전과 프랑스 현대문학 작품을 읽고 또 읽고, 그 뼛속까지 외우기를 거듭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시인이 되었다.       1871년 5월 랭보는 시인으로서 자신의 세계관을 밝히는 중요한 편지 두 통을 쓴다. 13일에는 담임선생이자 학창시절의 최고 멘토였던 조르주 이장바르에게 편지를 써보냈으며, 15일에는 스승의 친구이자 시인인 폴 드메니에게 또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두 통의 편지에 모두 자신이 쓴 시를 동봉했다. 랭보의 ‘견자의 편지’는 바로 이 두 통의 편지를 말한다. 두 통의 편지에 랭보는 독특한 시론(詩論)을 피력하면서 자신이 ‘견자’(見者, voyant)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견자’는 랭보의 시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열쇠어가 되었다.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예고한 편지 - “시인은 의식적으로 자신을 견자로 만듭니다.”       이장바르는 랭보에게 아버지와도 같은 스승이었고, 드메니는 랭보의 습작 시절에 힘이 되어준 시인이었다. 이장바르에게 보낸 ‘견자의 편지’는 간결하고 함축적인 데 비해, 드메니에게 보낸 편지는 시와 시인에 대한 랭보의 생각이 상세하게 담겨 있는 체계적인 시론이었다. 랭보는 드메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감히 견자이어야 하며, 의식적으로 견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랭보의 시 의 육필 원고 일부       “시인은 모든 감각의 오랜, 엄청난 그리고 추리해낸 착란에 의해서 자신을 의식적으로 견자로 만듭니다. 사랑과 고통, 광증의 모든 형태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시인은 그 자신을 추구합니다. 자신 속에 모든 독소를 걸러내어 오직 그 정수만을 간직하려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신앙과 초인적인 모든 그의 힘이 필요한 말할 수 없는 고역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가장 위대한 죄인 가운데 가장 위대한 범죄자, 가장 위대한 저주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상의 박식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가 미지 세계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왜냐하면 그는 그의 영혼을 단련해서 가꾸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 누구보다도 풍요해진 영혼을!       그는 미지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미쳐 날뛰며 자기 환각들에 관한 지식을 상실하고 말 때에 그는 반드시 그 환각들을 볼 것입니다. 그는 지극히 엄청나고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사물들에 의한 약동 속에서 죽어도 좋습니다. 그때에는 가공할 만한 다른 작업자들이 올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쓰러진 바로 그 지평선에서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이준오 역)       이 편지들은 랭보가 앞으로 ‘견자’로서 세계를 자유롭게 항해하겠다는 출사표였다. 아버지와 같은 자신의 스승들에게 성장한 자신을 보여주면서, 사랑받고 싶다고 외친 외로운 소년의 애정 표현이기도 했다. 시의 길을 가는 랭보에게 길잡이 역할을 해온 이장바르와 드메니였지만, 랭보의 갑작스런 비약은 적지 않게 당황스런 것이었다. 그들은 랭보를 이해하지 못했고, 랭보에게 현실을 고려하여 인내심을 가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미 랭보는 돌아올 수 없는 세계를 향해 강을 건너고 있었다. 강을 건너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을 것이었다. 그 세계를 향한 힘찬 고동소리가 바로 ‘견자의 편지’였다.         지적 욕구와 탐구정신, 엄청난 욕망 아래 감춰진 나약함과 억제된 에너지                                                                            첫 영성체를 받던 날 12살의 랭보(1866)       아르튀르 랭보의 처녀작은 (1869년 작, 1870년 1월 발표)이다. 이전에 라틴어로 쓴 시가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문학작품으로 쓴 것이라기보다는 학습의 일환으로 쓴 것이었다. 첫 작품이 보통 시인의 내면을 비치는 거울이 되듯이 이 작품 또한 랭보의 내면에 숨어 있는 고아의식을 발현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드센 아내가 싫어 집을 떠나버렸고, 아버지 없는 자식들을 키우느라 어머니는 과도하게 엄격하였다. 아르튀르의 형제로는 형 프레데리크, 여동생 비탈리와 이자벨이 있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교육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하지 못한 아르튀르 랭보는 채워질 수 없는 결핍감으로 시달려야 했다.       학창시절의 랭보는 항상 우수한 학생이었다. 특히 라틴어를 배우고 암송하는 그의 솜씨는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는 놀랄 만한 기억력으로 라틴어로 된 글 여러 쪽을 어렵지 않게 암송했다. 그는 라틴어 시의 구성을 유심히 분석해보고, 그 속에서 단어의 유희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맛보았으며, 라틴어 시의 창작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남들은 가장 어려워하는 과목을 랭보는 오히려 즐겼다.       특히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와의 만남은 특별했다. 중학교 시절, 교장 선생님이 랭보를 학술경연대회에 내보내기 위해 담임인 아리스티드 레리티에로 하여금 그를 특별 지도하게 했다. 랭보는 자연스럽게 담임이 좋아하는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세계에 푹 빠지게 된다. 베르길리우스를 읽으며 랭보는 시의 창작 기법을 음미하고, 원문과 프랑스어 번역문을 비교하면서 그 차이를 하나하나 맛보았다.       베르길리우스의 와 의 차이를 간파해내는 랭보의 예지는 이미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농경시도 전원시와 배경도 다르지 않고 작자의 자연에 대한 사랑도 여전하지만, 농경시에 오면 ‘일’이 ‘시’를 밀어내고 있음을 예리한 소년은 날카롭게 간파해냈던 것이다. 그는 베르길리우스 외에도 수많은 대가들의 작품을 탐독했고, 그들의 저서 속에서 들끓는 이미지들을 발견해나갔다. 그것은 세계 창조의 이미지였고, 묵시록과 대홍수의 이미지였으며, 태초와 종말의 이미지였으며, 천국과 지옥의 이미지였다.       1870년 수사학 반의 담임 교사로 온 조르주 이장바르는 학창시절의 랭보에게 가장 중요한 스승이었다. 이장바르는 랭보의 지적 욕구와 탐구정신, 엄청난 욕망 아래 감춰진 나약함과 억제된 에너지를 꿰뚫어보았다. 랭보 또한 진보적인 스승의 세련된 정신세계와 열린 사고방식을 존경했다. 이장바르를 통해 엘베시우스와 장 자크 루소를 알게 된 랭보는 내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19세기 프랑스 화가 팡탱 라투르의 그림 의 일부로 폴 베를렌(왼쪽)과 랭보(가운데)가 나란히 앉아 있다.       무엇보다 이장바르가 구독한 에서 발견한 프랑스의 많은 시인들의 시세계는 랭보에게 문학에 대한 열정을 한껏 키워주었다. 특히 샤를 보들레르는 랭보에게 신이 되었다. 보들레르를 통해 랭보는 시인이란 평온한 영혼의 소유자가 아니며, 시란 세계에 대한 반항이자 금지된 세상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꿰뚫어보는 강렬하고도 예민한 투시력을 갖춘 시인의 출현이 임박했던 것이다.         폴 베를렌과의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파국 맞은 '시인의 사랑'                                                                                폴 베를렌이 스케치한 랭보의 모습(1872)       1871년 5월 ‘견자의 편지’에 대한 드메니의 답장이 늦어지자, 아르튀르 랭보는 자신이 견자의 편지에서 실제 ‘견자’로 지목했던 몇 명의 시인 중에서 테오도르 드 방빌을 대화 상대로 선정했다. 방빌에게 편지를 써놓고 기다리는 동안,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친구 샤를 브르타뉴의 입에서 시인 폴 베를렌에 관한 얘기가 튀어나왔다. 베를렌은 랭보가 ‘견자의 편지’ 말미에서 고답파시인 중에서 진짜 시인으로 꼽은 견자였다. 브르타뉴는 뜻밖에도 베를렌과 친분이 있는 친구였다.       브르타뉴에게서 베를렌의 연락처를 안 랭보는 곧 베를렌에게 편지를 썼다. 아울러 시 을 필체가 좋은 친구 들라에에게 베껴 적도록 하여 동봉했다. 편지를 보낸 지 나흘째가 되자 초조해진 랭보는 또 를 동봉하여 두 번째 편지를 보냈다. 9월 초, 드디어 베를렌의 답장이 브르타뉴의 집 주소를 통해 랭보에게 날아들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위대한 영혼이여, 어서 오시오. 우리는 당신을 원하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 는 파리에 도착한 랭보가 기차에서 내리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베를렌과 랭보의 운명적인 만남이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랭보는 파리의 시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새로 쓴 대작 를 들고 베를렌을 향해 성큼 다가섰다. 그것이 그들에게 커다란 축복이었으나 엄청난 저주였음을 두 사람은 알고 있었을까? 그들은 문학적으로 서로에게 깊이 매료되었고 더불어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다정다감한 어머니의 정도 느껴보지 못한 랭보가 더 적극적이었다.       베를렌은 랭보와 아내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2년이 채 되지 않아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었다. 1873년 7월 10일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격분한 베를렌이 랭보를 향해 총을 쏘았던 것이다. 두 발의 총알 중에서 한 발이 랭보의 왼손에 상처를 입혔다. 베를렌은 기소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랭보는 로슈로 돌아와 나중에 그의 대표작이 되는 연작 을 쓴다. 10월에 이 출간되었으나, 그 책은 프랑스 문단과 독자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1874년에는 전에 썼던 을 정리하면서 새로 쓰게 된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랭보는 시작활동을 중단하였다.       랭보의 시는 대상에 대한 상투적인 접근에서 벗어나 모든 감각이 뒤틀렸을 때 보이는 새롭고 놀라운 사물의 현현을 시적 이상으로 삼았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랭보의 시가 프랑스 문학사 속에서 두 가지 점에서 새롭다고 지적했다. 하나는 세련된 과장법을 음절 단위의 리듬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전통이었던 프랑스 시에 대한 대담한 반항이었으며, 또 하나는 기독교 정신에 기반을 둔 유럽 문명 자체에 대한 문학적인 회의였다. 랭보는 예리한 송곳 같은 시선으로 사물의 핵심 속으로 파고들어갔으며, 그 이면에 숨은 본성을 꿰뚫어봄으로써 예언자적인 시인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랭보의 출현은 이처럼 프랑스 문학사에서 대단히 획기적인 일이었지만, 그가 활동하던 시대는 그에게 조명을 비출 여유가 없었다.         "나는 미지에 도달합니다" - 세계를 떠도는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베를렌은 랭보에게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자신의 별명답게 랭보는 안주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감옥에서 나온 베를렌이 랭보에게 신앙을 권했을 때도 랭보는 거절했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랭보는 안주하지 않았던 것이다. 1875년에는 걸어서 이탈리아에 가서 밀라노에서 머물기도 했다. 1876년에는 네덜란드의 식민지 용병으로 자원해 하르데르베이크에서 머물다 자바로 떠났다가, 8월 15일 탈영하여 희망봉과 아일랜드를 거쳐 12월 중순 샤를빌에 도착했다. 1878년에는 키프로스 섬의 채석장에서 일자리를 얻지만, 이듬해 5월 장티푸스에 걸려 로슈로 돌아온다. 9월이 되자 다시 떠나지만 마르세유에서 병이 재발해 돌아왔다. 1881년부터는 에티오피아의 여러 지역을 돌면서 상인이자 탐험가의 삶을 산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방랑벽이 랭보의 피 속에서 뜨겁게 돌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하라의 랭보(1883)     에티오피아에서 커피와 무기를 판매하는 사업을 했다.       난 쏘다녔지, 터진 주머니에 손 집어넣고,   짤막한 외투는 관념적이게 되었지,   나는 하늘 아래 나아갔고, 시의 여신이여! 그대의 충복이었네,   오, 랄라! 난 얼마나 많은 사랑을 꿈꾸었는가!     내 단벌 바지에는 커다란 구멍이 났었지.   ㅡ꿈꾸는 엄지동자인지라, 운행중에 각운들을   하나씩 떨어뜨렸지. 내 주막은 큰곰자리에 있었고.   ㅡ하늘에선 내 별들이 부드럽게 살랑거렸지.     하여 나는 길가에 앉아 별들의 살랑거림에 귀기울였지,   그 멋진 구월 저녁나절에, 이슬 방울을   원기 돋구는 술처럼 이마에 느끼면서,     환상적인 그림자들 사이에서 운을 맞추고,   한 발을 가슴 가까이 올린 채,   터진 구두의 끈을 리라 타듯 잡아당기면서!     -아르튀르 랭보, 「나의 방랑생활」 전문 (김현 역)       랭보의 방랑벽은 진정한 견자가 되기 위한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견자의 편지’를 들추어보자.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선 자기 자신을 완전히 깨닫는 일입니다. 그는 그의 영혼을 추구하며, 그것을 검토하며, 시련을 가하고 가르쳐갑니다. 자신의 영혼을 알고 나서는 그것을 가꾸어가야만 합니다. (……) 소중한 일은 영혼을 기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곰프라치코스(스페인의 전설에 나오는 괴물로 얼굴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험상궂으며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를 본따서 말이죠.”       랭보는 자신의 영혼을 검토하고 시련을 가하기 위해 끊임없이 방랑을 일삼았다. 그렇게 하면 영혼을 기괴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방랑이 “지극히 엄청나고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사물들에 의한 약동”을 제공하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방랑은 곧 반항이었다. 그것은 정착의 꿈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나약한 정신에 대한 거부였다. 미국 듀크 대학교 불문학 교수였던 월리스 파울리는 이렇게 말했다. “랭보는 일상에 반항했다. 철이 들면서 그는 가족(정확히는 가족 중의 한 사람)에게 반항했고, 샤를빌 중학교의 교사들에게 반항했고, 노트르담 교구 소속 성당의 사제들에게 반항했고, 샤를빌이라는 지역 사회에 반항했고,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급기야 19세기 프랑스 시단에 반기를 들었다.”         한쪽 다리를 절단했지만 전신으로 퍼진 암세포를 막을 수 없었다                                                          시집 과 이 실린 프랑스 폴리오 문고       너무도 뜨겁게 살았던 나머지 랭보의 생애는 일찍 저물게 된다. 1891년 연초에 랭보는 오른쪽 무릎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다리가 심하게 부어오르자 랭보는 들것에 실려 중간 거점으로 삼곤 했던 아라비아 반도의 아덴으로 간다. 그곳에서도 병을 고칠 수는 없었다. 고국에 돌아와 마르세유의 콩셉시옹 병원에 입원한 랭보는 한쪽 다리를 절단한 후 로슈로 갔지만, 다시 악화되어 병원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제 전신으로 퍼진 암세포를 막을 길은 없었다. 1891년 11월 10일 젊은 시인 아르튀르 랭보는 ‘지옥의 계절’을 굵고 짧게 보낸 후 ‘천국의 계절’을 향해 갔다.       아르튀르 랭보가 ‘견자의 편지’에서 샤를 보들레르를 ‘최초의 견자이자 시인의 왕이며 진짜 신’이라고 했듯이, 랭보는 보들레르의 가장 창조적인 계승자였다. 보들레르로부터 시작한 프랑스 상징주의는 베를렌을 거쳐 랭보에게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으며, 스테판 말라르메 와 폴 발레리를 통해 현대시의 또 하나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특히 랭보의 파격적인 시는 현대시의 혁명이었다.       보들레르를 현대시의 기원이라고 하지만 그의 다양한 실험이 랭보에게서 더욱 분명하게 증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보들레르의 시집 은 내용은 자유롭되 형식은 전통에 반한 것은 아니었다. 랭보의 연작에 이르면 내용과 형식이 모두 어떤 격도 따르지 않는다. 보들레르가 혁명의 시작이라면 랭보는 혁명의 완성이었던 것이다.       그가 일생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를 창작한 기간은 15~20세의 약 5~6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단 5년 동안에, 그것도 10대의 소년으로서 전 세계 시문학의 중심에 우뚝 선 그는 진정으로 천재였다. 천재는 자신이 5년 동안에 이룩한 업적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평생 걸리는 일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 또한 랭보가 절필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엄밀히 말하면 20세 이후에도 랭보는 시를 썼다. 20세 이전에 펜으로 시를 썼다면, 그 이후에는 몸으로 시를 썼던 것이다. 펜으로 쓴 시는 깊이 있게 연구되어왔지만, 몸으로 쓴 시는 아직도 세심한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몸으로 쓴 시가 더 난해한 것일까?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랭보』, 클로드 장콜라 저, 정남모 역, 책세상, 2007.                                                                 랭보의 시를 이해하기 힘든 독자에게 클로드 장콜라의 『랭보—바람구두를 신은 천재 시인』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랭보의 삶은 그의 시와 비슷하다. 이 책은 랭보의 모든 것을 놀라우리만치 꼼꼼하고 흥미롭게 정리한 평전이다. 어린 시절의 랭보가 어떻게 공부했는지, 그의 문학사상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 시절의 삶에 대해 이 책은 매우 친절하고도 섬세하게 전해준다. 이 평전을 읽고 랭보의 시를 읽으면, 그의 작품이 더 이상 어렵지 않을 것이다.         『랭보 지옥으로부터의 자유』, 삐에르 쁘띠피스 저, 장정애 역, 홍익출판사, 2001.         삐에르 쁘띠피스의 『랭보—지옥으로부터의 자유』는 상상력을 풍부하게 가미하여 극적으로 구성한 평전이다. 이 책을 통해 좀 더 편안하게 랭보의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에필로그에 따르면, 랭보가 죽은 후에야 여동생 이자벨은 비로소 오빠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주 잠깐씩만 집에 들르곤 했던 오빠가 밖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가 오빠의 사후에야 랭보를 알았듯이 세계 또한 그러했다. 랭보는 사후에야 진정으로 이해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롤랑 드 르네빌르의 『견자 랭보』(이준오 옮김, 문학세계사, 초판-1983/중판-1992)는 저자의 소르본 대학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하여 펴낸 책이다. 이 책은 랭보의 시 속에 담긴 사상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 동양적인 신비 사상과 시인의 예언자적인 면모를 깊이 있게 분석하였다. 무엇보다도 반가운 것은 랭보가 1871년 5월 15일에 드메니에게 쓴 견자의 편지 전문이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반역의 시인 랭보와 짐 모리슨』, 월리스 파울리 저, 이양준 역, 사람들, 2011.         그 밖에도 랭보와 베를렌의 삶을 함께 조명한 『저주받은 시인들』(앙리 뻬이르 지음, 최수철・김종호 옮김, 동문선, 1985)과 『랭보와 베를렌느 비교론』(이준오 편역, 예림기획, 1999), 랭보를 존경했던 가수 짐 모리슨과 랭보의 정신세계를 비교한 『반역의 시인 랭보와 짐 모리슨』도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랭보의 거의 모든 작품이 번역되어 다양한 판본으로 출간되어 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시를 번역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번역시를 읽다보면 번역에 불만을 갖게 되기 쉽다. 그러나 완벽한 번역이라는 불가능한 꿈을 꾸는 그들에게 마땅히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차창룡 | 시인, 문학평론가. 글을 쓴 차창룡은 1989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됐으며, 제13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고시원은 괜찮아요』『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등 다수의 시집으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545    릴케과 보들레르 댓글:  조회:2664  추천:0  2015-03-07
  가을의 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주여, 때가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녁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命)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 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를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메일 것입니다.                         Franz von Stuck - Tilla Durieux as Circe       오 '아름다움'이여! 악마 같으면서도 숭고한 그대 눈길은 선과 악을 뒤섞어 쏟아부으니. 그대를 가히 술에 비길 만하다.   그대는 눈 속에 석양과 여명을 담고 폭풍우 내리는 저녁처럼 향기를 부린다. 그대 입맞춤은 마약, 그대 입술은 술 잔, 영웅은 무력하게 하고, 어린애는 대담하게 만든다.   ---   그대는 닥치는 대로 기쁨과 재난을 흩뿌리고, 모든 것을 지배하되,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Franz von Stuck - Circe           '아름다움'이여 그대는 죽은 자들을 비웃으며 그 위로 걸어간다 그대의 보석 중 '공포'도 매력이 못하지 않고, 그대의 가장 비싼 패물 중 '살인'이 그대의 거만한 배 위에서 요염하게 춤춘다.   현혹된 하루살이가 그대 촛불에 날아가 탁탁 타면서 말한다. "이 홧불에 축복을!" 하고. .....   빌로드 같은 눈을 가진 요정이여, 운율이여, 향기여, 빛이여, 오 내 유일한 여왕이여! 보들레르 '악의 꽃 - 아름다움에 바치는 찬가' 中                 Wright Barker -Circe 1900           요정 키르케! 만물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 태양신 헬리오스와 바다의 요정 페르세의 딸로 키르케는 ‘독수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녀는 눈부신 외모와 인간을 동물로 바꾸는 마법으로 유명했는데 전설의 섬 아이아이에(Aiaie)에 살면서 그 섬에 오는 사람에게 마법을 걸어 동물로 변하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스의 최고의 영웅인 오딧세우스마저 자신의 성적 매력으로 굴복시킨 그녀의 매력은 너무도 유명하다.               Pier Francesco Cittadini - Circe and Odysseus           트로이 함락 후 영웅 오디세우스는 부하와 함께 귀국 도중 이 섬에 배를 대었다. 제비를 뽑아 23명의 부하가 선발되어 에우릴로코스를 대장으로 이 섬의 탐험에 나섰다가 키르케의 저택에 당도하였다. 문 앞에는 늑대와 사자가 있어 그들에게 달려들어 놀라게 했으나, 그녀는 일행을 맞아들여 환대하면서 약을 탄 술을 마시게 한 다음, 지팡이로 때려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모두 돼지로 만들어 버렸다. 멀리서 이를 보고 있던 에우릴로코스의 급보를 접한 오디세우스는 단신으로 부하의 구조에 나섰다.              John William Waterhouse - Circe offering the Cup to Ulysses 1891             지금도 서양에서는 남자가 여인의 육체에 넋을 빼앗길 때면 '키르케에게 홀렸다'는 비유를 한다. 그녀의 냉혹한 아름다움은 이 그림에서 절정에 달한다. 알몸이 훤희 드러난 옷을 입은 요염한 키르케가 오디세우스에게 마법의 술잔을 내밀며 유혹을 한다. 왼손에 놓이 쳐든 막대기는 마술 지팡이다. 마법의 술에 위한 남자를 이 막대기로 치면 금새 훙측한 돼지로 변해 버린다. 키르케의 발치에 몽롱한 눈을 치뜬 채 널브러져 있는 돼지도 마법에 걸린 희생물이다. 경계심을 잔뜩 품은 얼뜬 오디세우스의 얼굴이 키르케의 등뒤에 놓인 커다란 거울에 어렴풋이 비친다. 그리스 최고의 영웅이라는 명성을 간 곳 없고 마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기색이 역력하다. 키르케의 눈부신 자태는 화면을 압도할 만큼 크고 당당한 반면 영웅의 모습은 초라하고 왜소하게 그린 것도 그녀의 유혹이 그만큼 치명적임을 말하는 것이리라.               John William Waterhouse - Circe Invidiosa 1892             워터하우스가 그린 위의 키르케는 마녀의 관능미가 얼마나 농염한가를 잘 보여 준다. 위의 그림은 질투심으로 독기를 품은 여인의 잔인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지금 이 장면은 연못에 마법의 약을 붓는 살벌한 키르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질투로 눈에 가득 독기를 품고 이를 악무는 키르케의 표정에서 오싹한 한기보다는 에로티시즘의 극치가 느껴진다.   키르케에게 이토록 강렬한 질투심을 불러일으킨 남자는 바다의 신 글라우코스다.                 John William Waterhouse - Circe               글라우코스는 아름다운 처녀 스킬라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만 상사병이 났다. 짝사랑에 애가 탄 글라우코스가 사랑의 열병을 이기지 못해 키르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자,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사랑의 화살이 키르케에게 꽂혔다. 당황한 글라우코스는 자신의 유일한 사랑은 오직 스킬라뿐임을 못박고 키르케의 구애를 냉정하게 거절했다.                 Neer, Eglon van der - Circe punished by Glaucus Scylla into a monster change 1695             질투심에 파랗게 질린 키르케는 스킬라가 평소 목욕을 즐기는 연못에 마법의 약을 풀어 그녀를 머리 여섯 달린 흉측한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                   Nicolas Regnier - Circe         키르케는 신비한 매력을 남성의 몸과 마음을 뺏어 파멸시키는 요부의 전형이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남자를 사로잡는 여성의 강력한 힘은 마법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마법에 걸리지 않고서야 그토록 멀쩡하던 남자가 제 정신을 잃고 집안과 명예, 자존심을 내팽개친 채 욕정에 빠질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544    서구 현대시 시조 - 보들레르 댓글:  조회:4396  추천:0  2015-03-07
  서구 현대시의 시조 보들레르, 그리고『악의 꽃』     낭만주이 정신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낭만주의의 결점을 뛰어넘었던,   이후 오게 될 상징중의, 초현실주의, 현대시에 길을 터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보들레르 유일의 시집     보들레르는 많은 시집을 남긴 시인이 아니다. 소산문 시집 『파리의 우울』을 제외하고는 단 한 권의 시집,『악의 꽃』을 남겼을 뿐이다. 그는 단 한 권의 시집 속에 그의 삶의 경험의 정수를 쏟아놓았고, 이 시집으로 후에 '현대시의 시조'로 불리게 된다.『악의 꽃』은 삶의 어느 특정한 시기에 씌어진 것도, 짧은 시간의 산물도 아니다.『악의 꽃』의 역사는 보들레르의 삶의 역사를 동반했다는 점에서도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진다. 문학 활동이 지속되었던 근 이십오 년 내내 그는 이 한 권의 시집에 집착하며, 그 완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857년 보들레르가『악의 꽃』을 발표했을 때 그 시대의 누구도 이 시집의 놀라운 독창성을 주목하지 못했다. 이 책에 담긴 기이하고 대담한 주제들, 빅토르 위고가 말한 '새로운 떨림'과도 같은 신선하고 파격적인 감수성,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영혼의 전율, 그리고 매혹적인 음악성……    그 시대는 이 모든 감동을 같이할 감각을 갖추지 못했다. 시대적 감수성이라는 점에서『악의 꽃』의 시인은 한 세계를 앞질러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보들레르는 실로 오랜 세월 '저주받은 시인'으로서의 불행을 벗어나지 못했고,『악의 꽃』은'소수의 행복한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은 채 독자층을 한껏 넓혀갔고, 후세는 이 책을 '현대시의 복음서'  부르기를 서슴치 않는다.  『악의 꽃』은 연금술사가 용광로에 집어 넣은 수 많은 재료로부터 귀중한 금속을 추출해낸 것처럼, 그가 문학과 예술의 세계로부터 얻은 풍부한 체험으로부터 정수만을 뽑아낸 것이다.                                                                                                     -『악의 꽃』표제에서   *******************************************************************************************       시체   LNE CHAROGNE         기억해보라, 님이여, 우리가 보았던 것을,             그토록 화창하고 아름답던 여름 아침;   오솔길 모퉁이 조약돌 깔린 자리 위에               드러누워 있던 끔찍한 시체,     음탕한 계집처럼 두 다리를 쳐들고,               독기를 뿜어내며 불타오르고,   태평하고 파렴치하게, 썩은               냄새 가득 피우는 배때기를 벌리고 있었다.     태양은 이 썩은 시체 위로 내리쬐고 있었다.                알맞게 굽기라도 하려는 듯,   위대한「자연」이 한데 합쳐놓은 것을                백 갑절로 모두 되돌려주려는 듯;     하늘은 이 눈부신 해골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어나는 꽃이라도 바라보듯.   고약한 냄새 어찌나 지독하던지 당신은                풀 위에서 기잘할 뻔했었지.     그 썩은 배때기 위로 파리떼는 윙윙거리고,                 거기서 검은 구더기떼 기어나와,   걸쭉한 액체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살아 있는 누더기를 타고.     그 모든 것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밀려나갔다 하고,                그 모든 것이 반짝반짝 솟아나오고 있었다.   시체는 희미한 바람에 부풀어올라,                아직도 살아서 불어나는 듯했다.     그리고 세상은 기이한 음악 소리를 내고 있었다,                흐르는 물처럼, 바람처럼,   또는 장단 맞춰 까불리는 키 속에서                 흔들리고 나뒹구는 곡식알처럼.     형상은 지워지고, 이제 한갓 사라진 꿈,              잊혀진 화포 위에   화가가 기억을 더듬어 완성하는               서서히 그려지는 하나의 소묘.     바위 뒤에서 초조한 암캐 한 마리                성난 눈으로 우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놓쳐버린 살점을 해골로부터               다시 뜯어낼 순간을 노리며,     -허나 언제인가는 당신도 닮게 되겠지,               이 오물, 이 지독한 부패물을,   내 눈의 별이여, 내 마음의 태양이여,                내 천사, 내 정열인 당신도!     그렇다! 당신도 그렇게 되겠지, 오 매력의 여왕이여,               종부성사 끝나고   당신도 만발한 꽃들과 풀 아래               해골 사이에서 곰팡이 슬 즈음이면.     그때엔, 오 나의 미녀여, 말하오,                 당신을 핥으며 파먹을 구더기에게,   썩어문드러져도 내 사랑의 형태와 거룩한 본질을                 내가 간직하고 있었다고!             살인자의 술   LE VIN DE LASSASSIN       아내가 죽어 나는 자유다!   그러니 나는 실컷 마실 수 있다.   돈 한 푼 없이 집에 돌아오면   그녀의 고함 소리 내 가슴을 찢었지.     왕 못지않게 행복하구나;   공기는  맑고 하늘은 기막히다……    내가 아내에 반했을 때도   이런 여름이었지!     나를 쥐어뜬는 이 끔찍한 갈증을   풀어주자면 필요할 거다,   아내의 무덤을 채울 만큼의 술이,   - 아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데,     아내를 우물 깊은 곳에 던져버리고   그녀 위에 샘 가의 돌멩이들을   모조리 집어넣기까지 했지.   - 이런 일은 할 수만 있다면 잊고 싶다!   아무것도 우리 사이에 떼어놓을 수 없다고   맹세한 사랑의 이름을 내세워,   우리 사랑의 절정의 행복한 시절처럼   서로 화해하자고,     어느 날 저녁 아내에게 애원하여,   으슥한 거리로 불러냈었지.   아내는 나타났지 뭐야!- 정신 나간 계집 같으니라고!   하긴 우리 모두 좀 정신이 나갔지만!     비록 몹시 지치기는 했지만,   아내는 여전히 어여뻤다!   나는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지! 그래서   삶을 끝내! 하고 난 말했다.     아무도 이런 내 마음 모르리.   어리석은 주정뱅이들 중   누구인들 그 병적인 밤   술로 수의를 만들 생각을 했으랴?     쇠로 만든 기계처럼   끄떡없는 주정뱅이 따위는   여르밍고 겨울이고 한번도   진정한 사랑 해보지 못했지.     검은 마력과 그 지옥 같은   공포의 행렬, 독약병과 눈물,   그리고 쇠사슬과 뼈다귀   소리가 따르는 진정한 사랑을!     - 나는 이제 자유로운 홀아비다!   이 밤 죽도록 마시고 취해;   두려움도 후회도 모르는 채,   땅바닥에 아무렇게 드러누워,     개처럼 잠들라   돌이며 진흙 가득 실은   수레바퀴 무거운 화물차가     죄 많은 내 머리 박살을 내건,   내 몸뚱이를 두 동강이 내건, 「신」이고「악마」고「영성체대」고   아무것도 겁날 것 없다!  
543    숫자로 살펴본 노벨상 110년 댓글:  조회:4870  추천:0  2015-03-05
숫자로 살펴본 '노벨상 110년' 수상 거부자 6명..시상식 불참자는 3명 (스톡홀름 AFP=연합뉴스) 노벨상이 올해로 110번째 '생일'을 맞았다.    지난 1901년 이래 생리의학과 물리, 화학, 문학, 평화, 경제 부문 등 총 6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공로자들에게 매년 수여됐던 노벨상의 '110년 발자취'를 숫자로 정리해본다.    ◇ 241 = 사상 최다 후보자 수  올해 노벨상 후보에는 개인 188명과 단체 53개가 후보로 추천돼 역대 최다 후보자 수라는 기록을 세우게 됐다. 전문가들은 후보자 가운데 올해 초부터 계속된 '아랍의 봄' 참가자들도 포함돼 있다며 이들의 수상이 유력할 것으로 내다봤다.          ◇ 90·25 = 수상자 가운데 최고령자와 최연소자의 나이  러시아 태생의 미국 국적 경제학자인 레오니트 후르비치는 지난 2007년 당시 90세의 나이로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반면 영국의 윌리엄 로런스 브래그는 지난 1915년 25살 때 물리학상을 받았다. 이는 지금까지 최연소 노벨상 수상으로 남았다.    한편, 생존 수상자 중 최고령자는 지난 1986년 생리의학상을 받은 이탈리아의 리타 레비 몬탈치니. 그녀의 현재 나이는 102세다.    ◇ 3 = 상패 못 받은 수상자의 수 중국의 인권운동가 류샤오보(劉曉波)는 2010년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당시 중국 당국에 의해 구금돼 상장과 상패를 받지 못했다.    1991년 평화상 수상자였던 미얀마의 민주화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도 시상식이 열릴 당시 가택연금에 처해 있었고, 1936년 평화상 수상자인 독일의 카를 폰 오시에츠 역시 나치가 출국을 불허해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 6 = 수상을 거부한 사람 수 1973년 당시 베트남 총리였던 레둑토는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과 베트남전 종전 협상을 진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키신저와의 공동 수상을 거부했다. 장 폴 사르트르도 1964년 문학상 수상자로 뽑혔지만 거절했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상을 거절한 사람들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의 횡포로 리하르트 쿤(1938년 화학상)과 아돌프 부테난트(1939년 화학상), 게르하르트 도마크(1939년 생리의학상) 등 3명이 수상을 포기했다.    '닥터 지바고'를 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도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에 지명됐지만 소련 당국의 지시로 수상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 41:776 = 역대 수상자 중 여성과 남성의 비율 1901년 이래 노벨상을 받은 여성의 수는 41명이다. 이 가운데 마리 퀴리는 1903년(물리학상)과 1935년(화학상) 두 번에 걸쳐 수상했다.    지금까지 노벨상을 받은 남성의 수는 여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776명이다.
542    노별상 수상 거부자들과 그 리유 댓글:  조회:4374  추천:0  2015-03-05
노벨상 수상 거부자와 이유   2002년까지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수상자는 아래의 총 6명입니다. 1. 리하르트 쿤: 화학상, 1938년, 독일, 카로티노이드 및 비타민 연구 2. 아돌프 부테난트: 화학상, 1939년, 독일, 성 호르몬 연구 3. 게르하르트 도마크: 생리의학상, 1939년, 독일, 프론토질의 항균 효과 4.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문학상, 1958년, 소련, 소설가/시인 5. 장 폴 사르트르: 문학상, 1964년, 프랑스, 철학자/극작가 6. 르 둑 토(黎德壽): 평화상, 1973년, 북베트남, 베트남 분쟁 해결 이들의 수상 거부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1, 2, 3(리하르트 쿤, 아돌프 부테난트, 게르하르트 도마크 ): 외부 압력 때문 1937년 아돌프 히틀러는 1935년 당시 독일의 정치범이었던 반나치 저술가 에게 평화상을 수여한 데 격분해 향후 독일인들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린 바 있다.  * 4(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정치적인 이유 장편소설 〈의사 지바고 Doctor Zhivago〉로 1958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소련 내에서 커다란 반대가 야기되어 수상을 거부했다. 러시아 혁명의 잔혹함과 그 여파 속에서 펼쳐지는 방황, 정신적 고독, 사랑을 서사적으로 기술한 이 소설은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소련에서는 비밀리에 번역본으로만 유포되었다. 1956년 파스테르나크는 큰 기대에 부풀어 모스크바의 유력한 월간지에 소설 〈의사 지바고〉를 기고했으나 "10월혁명과 혁명의 주역인 인민, 소련의 사회건설을 중상했다"는 비방과 함께 거부당했다. 1957년 이 소설은 이탈리아의 출판사를 통해 서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파스테르나크에게서 저작권을 사들인 그 출판사는 '수정을 위해' 원고를 되돌려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영역본이 출간된 1958년에는 이미 18개 국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노벨상 수상 소식이 알려지자 소련에서는 파스테르나크 탄핵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작가동맹에서 제명되었으며 생계유지의 수단마저 빼앗겼다. 공공 모임에서는 그를 국외로 추방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는 제1서기장 흐루시초프에게 "조국을 떠난다는 것은 내게 죽음을 의미한다"라는 취지의 탄원서를 써보냈다. 그는 페레델키노의 집에서 암과 심장병에 시달리며 여생을 보냈다.  * 5(장 폴 사르트르 ): 본인 의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르트르는 프랑스 정치운동에 적극적 관심을 보였고 공공연하게 좌익으로 기울었다. 또 비록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소련에 대한 열렬한 찬양자가 되었다. 1954년에는 소련·스칸디나비아·아프리카·미국·쿠바 등을 방문했다. 그러나 1956년 부다페스트에 소련 탱크가 진입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희망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그는〈현대〉에〈스탈린의 환상 Le Fantome de Staline〉이란 긴 글을 써서 소련의 침공과 모스크바의 독재에 굴복한 프랑스 공산당을 모두 비난했다. 몇 년이 지나 이러한 비판적 태도 때문에 '사르트르적 사회주의'란 형식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새로운 주요저서〈변증법적 이성 비판 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1960)에서 표현되었다.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착수했고 소련식 변증법은 살아날 수 없음을 발견했다. 그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가 당대의 유일한 철학이라고 믿었지만, 마르크스주의는 화석처럼 굳어졌으며 특정 상황에 적응하는 대신 그 특정 상황을 미리 정해진 보편성에 따라 억지로 짜맞춘다고 인정했다.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는 그 근본적·일반적 원칙이 무엇이든 다른 구체적 실존상황을 인정하는 법과 인간의 개인적 자유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변증법적 이성비판〉은 빈약한 구성이 문제이지만 지금보다 좀더 관심을 끌 만한 인상적이고 유려한 책이었다. 그는 이 책의 제2권을 기획했다가 포기했다. 대신〈말〉을 출판할 준비를 했는데, 이 책이 1964년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 것을 알고는 수상을 거부했다.  * 6(르 둑 토(黎德壽) ): 본인 의사 1973년 헨리 키신저와 함께 노벨 평화상 공동수상자로 지명되었으나 거절했다.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창당 일원이었으며 정치적 활동 때문에 프랑스 정부에 의해 투옥되었으나 1940년 중국으로 탈출했다. 1945년 하노이로 돌아와 공산당인 베트남 노동당 재건과 공산반란 단체인 베트민을 창설하는 데 기여했다. 1955년부터 베트남 노동당의 정치국에서 일했고 1976년부터는 노동당에서 공산당으로 명칭이 바뀐 베트남 공산당 정치국의 일원이 되었다. 1968~73년 파리 평화회담에 월맹측 대표단 특별 고문으로 파견되어 1973년 베트남 종전을 위해 활약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중에는 대표단의 수석 대변인이 되었다.  참고로, 지정된 날짜 전에 수상을 사양하거나 거부할 경우에 상금은 기금으로 환수됩니다. 수상을 거부했던 사람이 나중에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금메달과 상장을 찾아간 사례도 있었지만 상금은 이미 기금에 환수된 뒤였기 때문에 돌려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편, 각 부문별 상금은 1,000만 스웨덴 크로나(약 94만 3,000달러, 2001년 현재)라고 합니다. 이상, 도움이 되셨기를...    
541    력대 노벨문학상 수상작 목록 댓글:  조회:4935  추천:0  2015-03-05
        ▲ 2007년 도리스 레싱(영국.소설가) - '마사 퀘스트' '다섯' ▲ 2006년 오르한 파묵(터키.소설가) - '내 이름은 빨강' '하얀성' ▲ 2005년 해럴드 핀터(영국.극작가) - `축하' `과거 일들의 회상' ▲ 2004년 엘프레데 옐리네크(오스트리아.소설가)- '피아노 치는 여자' '욕망' ▲ 2003년 J M 쿳시(남아공.소설가)- '불명예' ▲ 2002년 임레 케르테스(헝가리.소설가)- '운명' ▲ 2001년 V. S. 네이폴(영국.소설가)- '도착의 수수께끼' ▲ 2000년 가오싱젠(중국.극작가)- '영산(靈山)' ▲ 1999년 귄터 그라스(독일.소설가)- '양철북' ▲ 1989년 카밀로 호세 세라(스페인.소설가) - '파스쿠알 두아르테 일가' ▲ 1988년 나집 마흐프즈(이집트.소설가) - '우리 동네 아이들'  ▲ 1987년 요세프 브로드스키(러시아계 美.시인) - '소리 없는 동네'  ▲ 1986년 월레 소잉카(나이지리아.소설가) - '늪 지대 사람들'  ▲ 1985년 클로드 시몽(佛.소설가) - '사기꾼'  ▲ 1984년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체코슬로바키아.시인) - '프라하의 봄'  ▲ 1983년 윌리엄 골딩(英.소설가) - '파리 대왕'  ▲ 1982년 가르시아 마르케스(콜롬비아.소설가) - '백년 동안의 고독'  ▲ 1981년 엘리아스 카네티(英.소설가) - '眩暈'  ▲ 1980년 체스와프 밀로즈(폴란드.시인) - '한낮의 밝음'  ▲ 1979년 오디세우스 엘리티스(그리스.시인) - '방향'  ▲ 1978년 아이작 싱어(美.소설가) - '고레이의 사탄'  ▲ 1977년 비센테 알레이산드레(스페인.시인) - '마음의 역사'  ▲ 1976년 솔 벨로(美.소설가) - '희생자'  ▲ 1975년 에우제니오 몬탈레(伊.시인) - '기회'  ▲ 1974년 H.마르틴손(스웨덴.시인) - '아니 아라 ' E.욘손(스웨덴.소설가) - '해변의 파도'  ▲ 1973년 패트릭 화이트(濠洲.소설가) - '아주머니 이야기'  ▲ 1972년 하인리히 뵐(獨.소설가) - '기차는 늦지 않았다'  ▲ 1971년 파블로 네루다(칠레.시인) - '황혼의 세계'  ▲ 1970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舊소련.소설가) - '수용소 군도'  ▲ 1969년 새뮤얼 베케트(아일랜드.소설/극작가) - '고도를 기다리며'  ▲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日.소설가) - '雪國'  ▲ 1967년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과테말라.소설가) - '과테말라 전설집'  ▲ 1966년 S.요세프 아그논(이스라엘.소설가) - '출가' 렐리 사크스(스웨덴.시인) - '엘리'  ▲ 1965년 미하일 솔로호프(舊소련.소설가) - '고요한 돈강'  ▲ 1964년 장 폴 사르트르(佛.철학가.작가) - '구토'  ▲ 1963년 게오르게 세페리스(그리스.시인) - '연습장'  ▲ 1962년 존 스타인벡(美.소설가) - '에덴의 동쪽'  ▲ 1961년 이보 안드리치(유고슬라비아.시인) - '드리나강의 다리'  ▲ 1960년 생존 페로스(佛.시인) - '찬가'  ▲ 1959년 살바토레 콰지모도(伊.시인) - '시인과 정치'  ▲ 1958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舊소련.소설가) - '닥터 지바고'  ▲ 1957년 알베르 카뮈(佛.소설가) - '이방인'  ▲ 1956년 J.R.히메네스(스페인.시인) - '프라테로와 나'  ▲ 1955년 H.락스네스(아이슬란드.소설가) -'독립된 백성'  ▲ 1954년 어니스트 헤밍웨이(美.소설가) -'무기여 잘 있거라"  ▲ 1953년 윈스턴 처칠(英.정치가) - '제2차대전 회고록'  ▲ 1952년 프랑수아 모리악(佛.소설가) -'테레즈 데케르'  ▲ 1951년 P.라케르크 비스트(스웨덴.소설가/시인) - '바라바'  ▲ 1950년 버트런드 러셀(英.철학자) - '권위와 개인'  ▲ 1949년 윌리엄 포크너(美.소설가) - '음향과 분노'  ▲ 1948년 T.S.엘리엇(英.시인) - '황무지'  ▲ 1947년 앙드레 지드(佛.소설가) - '좁은 문'  ▲ 1946년 헤르만 헤세(스위스.소설가/시인) - '데미안'  ▲ 1945년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칠레.시인) - '비수'  ▲ 1944년 J.V.옌센(덴마크.소설가/시인) - '긴 여행' ▲ 1927년 앙리 베르그송(프랑스.철학자) - '물질과 기억' ▲ 1923년 윌리엄 예이츠(아일랜드.시인) - '환상' ▲ 1915년 로맹롤랑(프랑스.소설가) - '장 크리스토프' ▲ 1913년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인도.시인.철학자) - '기탄잘리' ▲ 1907년 러디어드 키플링(영국.시인.소설가) - '정글북' ▲ 1901년 쉴리 프뤼돔(프랑스.시인) - '스탕스와 시'   
540    러시아 시인 - 조지프 브로드스키 댓글:  조회:4469  추천:0  2015-03-05
조지프 브로드스키(Joseph Brodsky)  본명은 Iosip Aleksandrovich Brodsky.  1940∼1996. 러시아 태생의 시인.  1987년 중요한 서정적 비가(悲歌)들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5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그때부터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레닌그라드 문단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나 독립적 성향과 꾸준하지 못한 작품활동으로 소비에트 당국으로부터 '사회주의의 기생충'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1964년 5년간의 중노동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비중 있는 작가들이 이 판결에 이의를 제기한 덕택에 1965년 사면받았다. 1972년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후 계속 그곳에서 살았고 1977년 미국시민권을 얻었다. 1972∼80년에는 중간중간 미시간대학교와 앤아버대학교의 거주시인으로 있었고 그밖의 다른 학교에서도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그의 시는 개인적 주제들을 담고 있으며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 같은 보편적 관심사를 강렬하고 사색적인 필치로 다루고 있다. 러시아어로 쓰인 초기작품 가운데는 〈운문과 시 Stikhotvoreniya i poemy〉(1965)·〈황야의 정거장 Ostanovka v pustyne〉(1970)이 대표적이다. 이들 작품을 포함한 다른 작품들이 조지 L. 클라인에 의해 영역되어 〈시선집 Selected Poems〉(1973)으로 나왔는데, 특히 유명한 〈존 던을 위한 비가 Elegy for John Donne〉도 실려 있다. 러시아어와 영어로 쓰인 중요한 작품으로 시선집 〈연설의 일부 A Part of Speech〉(1980)·〈20세기의 역사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1986)·〈우라니아에게 To Urania〉(1988)와 산문모음집인 〈1보다도 작은 Less than One〉(1986)·〈슬픔과 이성에 대해 On Grief and Reason〉(1995)를 꼽을 수 있다. 이탈리아의 도시 베네치아와 자신의 인연을 조용하면서도 치밀한 문체로 다룬 산문인 〈Fondamenta degli Incurabili〉(1991)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수작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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