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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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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    여름 시 모음 댓글:  조회:3022  추천:0  2015-02-19
여름 시 모음 청시 - 김달진 유월의 꿈이 빛나는 작은 뜰을 이제 미풍이 지나간 뒤 감나무 가지가 흔들리우고 살찐 암록색(暗綠色) 잎새 속으로 보이는 열매는 아직 푸르다. 비 개인 여름 아침 - 김광섭 비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사랑 - 박형진 풀여치 한 마리 길을 가는데 내 옷에 앉아 함께 간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언제 왔는지 갑자기 그 파란날개 숨결을 느끼면서 나는 모든 살아있음의 제자리를 생각했다 풀여치 앉은 나는 한 포기 풀 내가 풀잎이라고 생각할 때 그도 온전한 한 마리 풀여치 하늘은 맑고 들은 햇살로 물결치는 속 바람 속 나는 나를 잊고 한없이 걸었다 풀은 점점 작아져서 새가 되고 흐르는 물이 되고 다시 뛰노는 아이들이 되어서 비로소 나는 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알았다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오늘 알았다 소년부처 - 정호승 경주박물관 앞마당 봉숭아도 맨드라미도 피어있는 화단 가 목 잘린 돌부처들 나란히 앉아 햇살에 눈부시다 여름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 조르르 관광버스에서 내려 머리 없는 돌부처한테 다가가 자기 머리를 얹어본다 소년부처다 누구나 일생에 한번씩은 부처가 되어보라고 부처님들 일찍이 자기 목을 잘랐구나. 약수터 가는 길 - 한명순 약수터 가는 길, 푸른 숲속 길. 매미소리를 이고 갑니다. 매미소리를 안고 갑니다. 매미소리를 밟고 갑니다. 매미소리를 끌고 갑니다. 푸른 숲속 길, 약수터 가는 길. 여름방 - 김달진 긴 여름날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앉아 바람을 방에 안아들고 녹음을 불러들이고 머리 위에 한조각 구름 떠있는 저 佛岩山마저 맞아들인다. 여름에는 저녁을 - 오규원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마당 위에는 멍석 멍석 위에는 환한 달빛 달빛을 깔고 저녁을 먹는다 … 마을도 달빛에 잠기고 밥상도 달빛에 잠기고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밥그릇 안에까지 가득 차는 달빛 아!달빛을 먹는다 … 남해 금산 - 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브리지스   유월이 오면 난 그 때 온 종일 향기로운 잔듸밭에 그대와 나란히 앉아 산들바람 부는 하늘에 흰 구름 지어놓은 눈부신 높은 궁전으로 날아 오르리.   그대는 노래 부르고 나는 노래 지어주고 아름다운 시를 읽으려네. 우리 집 울안 풀 덤풀 속에 누워 오, 인생은 즐거워 유월이 오면.     - H. 헷세   하늘이 천둥합니다. 뜰 안에 서 있는 보리수 한 그루가 바르르 떱니다. 밤이 늦었습니다.   번갯빛 하나가 둥그런 젖은 눈으로 연못 속에 파랗게 비칩니다.   하늘거리는 줄기에 꽃송이들 달려잇고 낫 벼리는 소리가 바람곁에 스쳐갑니다.   하늘이 천둥합니다. 무더운 입김이 지나갑니다. 나의 아가씨가 바르르 떱니다.       - 랭보   여름의 아청빛 저녁, 보리 날 찔러대는 오솔길 걸으며 잔풀을 밟노라면 꿈꾸던 나도 발밑에 신선함을 느끼리. 바람은 내 맨 머리를 씻겨 줄 것이구.   아무 말도 않고 생각도 않으리라. 그대는 끝없는 사랑 넋 속에 차오르리니 방랑객처럼, 멀리 멀리 나는 가리라. 여인 데리고 가듯 행복에 겨워, 자연 속으로.     - 쉬토름   다시 한 번 내 무릎에 떨어지는 정열의 빨간 장미 꽃송이. 다시 한 번 내 가슴에 파고드는 소녀의 아름다운 그 눈망울. 다시 한 번 내 가슴에 메아리치는 소녀의 거센 한숨 다시 한 번 내 얼굴을 간지럽히는 유월의 뜨거운 여름 바람.     - 타고르   일손을 놓고 잠시라도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잠시라도 당신을 못 보면 내 마음 안식을 잃고 고뇌의 바다에서 내 하는 일 모두 한없는 번민이 되고 말아요.   불만스런 낮, 여름이 한숨 쉬며 지금 창가에 와 머물고 있어요. 꽃 핀 나뭇가지 사이 사이에서 꿀벌들이 잉잉 노래 부르고 있어요.   임이여, 어서 당신과 마주 앉아 목숨 바칠 노래 부르고 싶어요. 신비로운 침묵 흐르는 이 한가로운 시간에.       - 괴에테   사내아이는 보았네, 들에 핀 장미를 그 아침처럼 싱그럽고 아름다움을 가까이가서 잘 보려고 사내아이는 보았네, 기쁨에 넘쳐. 장미여, 장미여, 붉은 장미여 들장미여.   사내아이는 말했네 내 너를 꺾을테야, 들에 핀 장미를. 장미는 말했네, 꺾기만 해봐라 찌를테야. 언제까지나 잊지 않도록 나도 꺾이고 싶진 않은 것을 장미여, 장미여, 붉은 장미여 들장미여   난폭한 사내아이는 꺾었네. 들에 핀 장미를. 장미는 거절하며 찔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울어봐도 소용없는 것을 -- 장미는 꺾이고 말았습니다. 장미여, 장미여, 붉은 장미여 들장미여.     - 이육사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 주절이 열리고 힌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메이스필드   나는 다시 바다로 가련다. 그 호젓한 바다 그 하늘로. 내 바라는 건 다만 키큰 배  한 척과 방향을 잡아줄 별 하나 그리고 바다 위의 뽀얀 안개와 뿌옇게 동트는 새벽뿐.   나는 다시 바다로가련다. 조수가 부르는 소리 세차고 뚜렷이 들려와 나를 부르네. 내 바라는 건 다만 힌구름 흩날리고 물보라 치고 물거품 날리는 바람 거센 날, 그리고 갈매기의 울음 뿐.   나는 다시 바다로 가련다. 그 떠도는 집시의 생활로  갈매기 날고 고래가 헤엄치는 칼날같은 바람부는 바다로.   내 바라는 건 다만 낄낄대는 방랑의 친구녀석들이 지껄이는 신나는 이야기와 오랜 일 끝난 후에 오는 기분 좋은 잠과 달콤한 꿈일 뿐.       - 콕토   내 귀는 소라 껍질 바다소리 그리워라.     - 유치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초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깃대 끝에 애수는 백마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헵벨   여름의 마지막 장미가 피어잇는 걸 보았다. 그것은 금새 피라도 흘릴 것만 같이 붉었다. 뜸해진 나는 지나는 길에 말했다. 인생의 절정은 죽음에 가까운 것이라고 ---   바람의 입김조차 없는 무더운 날 다만 소리도 없이 힌 나비 한 마리 스치고 지나갔다. 그 날개짓 공기가 딱한 것 같지도 않은데 장미는 그걸 느끼고 그만 져 버렸다.    
378    봄 시 모음 댓글:  조회:2900  추천:0  2015-02-19
봄을 위한 메들리 - 시모음| 봄  서정주  복사꽃 피고  뱀이 눈 뜨고  초록 제비 묻혀오는 하늬바람 위에  혼령있는 하늘이여,  피가 잘 돌아 ......  아무 병도 없으면서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새봄․2  김지하  삼월  온몸에 새순 돋고  꽃샘바람 부는  긴 우주에 앉아  진종일 편안하다  밥 한 술 떠먹고  몸 아픈 친구 찾아  불편거리를  어칠비칠 걸어간다  세월아 멈추지마라  지금 여기 내 마음에  사과나무 심으련다.  봄날  이희목  어쩔 수 없이  봄은 다시 와  돌개바람 스쳐간 밭둔덕  하얀 난생이꽃 지천으로 피어나  이런 날엔  내내 입술이 말라 타  무논의 독새풀 위로는  종일토록 부연 바람만 불고 있었다.  早春  김춘수  양지바른 높다란 담장에 등을 붙이고 앉으면  스스로 눈이 감긴다. 오후 두 시  그 때다.  누가 와서 그의 염통에  주사침만한 바늘 하나 콱 꽂는다.  아 소리 한 번 지르고 피 실컷 쏟고  그는 숨이 멎는다.  봄 語錄  김규화  봄,  내가 봄  산에 들에 핀 진달래 개나리를 봄  아지랑이 종달이를 봄  화단의 목련을 봄  볼 것이 많은  봄은 와야 함  꽃은 봐야 웃음이 나듯이  임은 봐야 사랑이 일 듯이  봄은 봐야 누워 있는 만물이  일어남  그런 봄을  내가 봄  봄  목진숙  대지의 속살 헤집고  꿈틀거리는 꿈의 조각들이  철벽의 얼음장을 밀어올린다  겨우내 웅크린 생명의 노래가  실핏줄 같은 냇물의 잠을 깨우고  햇살의 간지럼에 버들강아지가 눈뜬다  때맞추어 불어오는 남풍이  북녘으로 길 떠나는 철새들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4월  임병호  봄에는 사람들이 풀잎이 된다  봄에는 사람들이 나무가 된다  봄에는 사람들이 들꽃이 된다  봄에는 사람들이 산꽃이 된다  봄에는 사람들이 남풍이 된다  봄에는 사람들이 냇물이 된다  사람들 가슴속에서 봄에는 풀잎이 움튼다  사람들 가슴속에서 봄에는 나무가 자란다  사람들 가슴속에서 봄에는 들꽃이 피어난다  사람들 가슴속에서 봄에는 산꽃이 피어난다  사람들 가슴속에서 봄에는 남풍이 분다  사람들 가슴속에서 봄에는 냇물이 흐른다  아아, 봄에는 사람들이 강물로 흐른다  청산으로 일어선다 하늘로 열린다  삼라만상을 품에 안는 대지가 된다  봄을 노래함  -진혼곡  조순애  잔설은 매워도  그래도 난  진달래를 노래한다  언 땅에 가두지 말라  새롭게 깃을 펴고  잠든 창공을 흔들테다  수억의 깃털마다  봄 향기에  취해 날고  봄 빛살  부드러운 애무여  해맑은 영혼이여  멀리 더 멀리  높이 더 높이  멈추지 않을 거다.  봄날은 간다  양병호  청보리 빗질하며  칼바람 서슬 죽더라  殘雪 사이 청산  몽고반점 짙어지더라  입맞춤 혀 내밀 듯  민들레 싹 트더라  하늘의 무게 받아내며  모란꽃 몸 열더라  꿀과 독침 버무려  암펄 수펄 닝닝닝  취한 듯 꽃가루 섞더라  절벽 메아리치는 향기  어영차 함성으로 터지더라  연분홍 옷고름 휘날리며  복사꽃 하염없이 지더라  떨어지는 꽃잎 데불고  시냇물 아득히 흘러가더라  그러면서 봄날은 가더라  뉘엿뉘엿 흘러가더라    
377    단풍 시 모음 댓글:  조회:3601  추천:1  2015-02-19
      가을비 소리  / 서정주   단풍에 가을비 내리는 소리 늙고 병든 가슴에 울리는구나 뼈다귀 속까지 울리는구나 저승에 계신 아버지 생각하며 내가 듣고 있는 가을비 소리 손톱이 나와 비슷하게 생겼던 아버지 귀신과 둘이서 듣는 단풍에 가을비 가을비 소리!                                                                        불국사    그  젖은 단풍나무 / 이면우 아주 오래 전 내가 처음 들어선 숲엔 비가 내렸다 오솔길 초록빛 따라가다가 아, 그만 숨이 탁 막혔다 단풍나무 한 그루 돌연 앞을 막아섰던 때문이다 그 젖은 단풍나무, 여름숲에서 저 혼자 피처럼 붉은 잎 사귀, 나는 황급히 숲을 빠져나왔다 어디선가 물먹 은 포풀린을 쫘악 찢는 외마디 새울음, 젖은 숲 젖 은 마음을 세차게 흔들었다. 살면서 문득 그 단풍나무를 떠올린다 저 혼자 붉 은 단풍나무처럼 누구라도 마지막엔 외롭게 견뎌내 야 한다 나는 모든 이들이 저마다 이 숲의 단풍나무 라 생각했다 그대 바로 지금, 느닷없이 고통의 전면 에 나서고 이윽고 여울 빠른 물살에 실린 붉은 잎사 귀,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누구라도 상처 하 나쯤은 꼭 지니고 가기 마련이다.         내장산 단풍 / 고두현   낙타의 혹을 베자   화산이 폭발했다   오, 내장을 가득 메우는   저 용암.           나무들은 때로 불꽃 입술로 말한다 / 이기철   사랑하는 시간만 생이 아니다 고뇌하고 분노하는 시간도 끓는 생이다 기다림만이 제 몫인 집들은 서 있고 뜨락에는 주인의 마음만한 꽃들이 뾰루지처럼 붉게 핀다   날아간 새들아, 어서 돌아오너라 이 세상 먼저 살고 간 사람들의 안부는 이따 묻기로 하고 오늘 아침 쌀 씻는 사람의 안부부터 물어야지 햇빛이 우리의 마음을 배추잎처럼 비출 때 사람들은 푸른 벌레처럼 지붕 아래서 잠깬다   아무리 작게 산 사람의 일생이라도 한 줄로 요약되는 삶은 없다 그걸 아는 물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흘러간다   반딧불 만한 꿈들이 문패 아래서 잠드는 내일이면 이세상에 주소가 없을 사람들 너무 큰 희망은 슬픔이 된다 못 만난 내일이 등 뒤에서 또 어깨를 툭 친다   생은 결코 수사가 아니다 고통도 번뇌도 힘껏 껴안는 것이 생이다 나무들을 때로 불꽃 입술로 말한다 생은 피우는 만큼 불게 핀다고         너라는 단풍 / 김영재   이제 너의 불붙은 눈 피할 수 없다 감춰야 할 가슴 묻어둘 시간이 지나갔다 그 누가 막는다해도 저문 산이 길을 트고 있다            노인과 단풍잎 / 백거이(당나라)   늦가을 찬바람 을씨년스런 나무 술잔 손에 든 쓸쓸한 노인 취한 모습 서리 맞은 나뭇잎 같아 불그레하지만 청춘은 아니라네          늦단풍 / 장철문   서른 두 가마니 참숯을 들이부었다 뻥 뚫린 풍구와 대장장이의 얼굴이 서쪽으로부터 발그레하다         단풍  / 김창균   그대를 밀며 산에 오른다 산협을 돌아가는 나도 그 곁 아슬아슬 절벽에 평생을 건 너도 다 햇볕이 건너뛴 자리마다 붉다 긴 빨대 같은 길 잘게 믹서된 인간을 서서히 빨며 산은 점점 붉은 피를 수혈하는데 누군가의 뒷 몸을 밀고 가는 나는 단풍 아래서 아프다 마을에 길흉사가 있을 때마다 생의 절정을 건너뛰던 무당처럼 저 원색의 잎들은 제 몸에 주문을 걸며 嚴冬까지 견딜 것인데   또, 산 아래 마을에서는 길고 푸른 작두날을 타는 날이 있겠다 2008년 가을호          단풍 / 류근삼   개마고원에 단풍 물들면 노고단에서도 함께 물든다 분계선 철조망 녹슬거나 말거나 삼천리 강산에 가을 물든다          단풍1/ 박가월   너의 죽음이 국민장이 되는구나 기껏 여름 몇 푼의 그늘 업적은 미비한데 화려한 장례식에 명산은 문상하느라 온 나라가 북새통이다          단풍  / 백석   빨간 물 짙게 든 얼굴이 아름답지 않느뇨 빨간 정 무르녹는 마음이 아름답지 않으뇨 단풍든 시절은 새빨간 웃음을 웃고 새빨간 말을 지즐댄다 어데 청춘을 보낸 서러움이 있느뇨 어데 老死를 앞둘 두려움이 있느뇨 재화가 한끝 풍성하야 시월 햇살이 무색하다 사랑에 한창 익어서 살찐 띠몸이 불탄다 영화의 사랑이 한창 현란해서 청청한울이 눈부셔 한다 시월 시절은 단풍이 얼굴이요, 또 마음인데 시월단풍도 높다란 낭떨어지에 두서너 나무 개웃듬이 외로히 서서 한들거리는 것이 기로다 시월단풍은 아름다우나 사랑하기를 삼갈 것이니 울어서도 다하지 못한 독한 원한이 빨간 자주로 지지우리지 않느뇨            단풍 / 송상욱   이브의 죄를 씻은 몸뚱아리가 꽃처럼 붉어 가을 날 붉은 소문이 하늘을 타고 오른다 그날 능금나무 아래 불칼을 맞고 쓰러진 땅이 붉어 속살이 뜨거운 나무 위에 천둥소리 번져와 붉은 신들이 춤을 추고 있다         단풍 / 신현정   저리 밝은 것인가 저리 환한 것인가 나무들이 지친 몸을 가리고 있는 저것이 저리 고운 것인가 또 어디서는 짐승이 울고 있는가 어느 짐승이 덫에 치인 생채기를 핥고 있는가 저리 뜨거운 것인가            단풍 / 안도현   보고싶은 사람 때문에 먼 산에 단풍 물 드는   사랑   그대에게 가고 싶다, 안도현,1991            단풍  / 유치환   신이 주신 마지막 황금의 가사를 입고 마을 뒤 언덕 위에 호올로 남아 서서 드디어 다한 영광을 노래하는 한 그루 미루나무          단풍 / 이사라   그 여자 단풍드는 여자 어머니 내 속에 서 있는 나무   그 시간 단풍드는 시간 죽음 내 속에 서 있는 나무   그 입술 단풍드는 입술 침묵 내 속에 서 있는 나무   그 몸 단풍드는 몸 詩 내 속에 서 있는 나무   죽을 줄 모르는 죽음으로 살 속의 물과 꿈, 긴 속삭임 다 쏟아내고 내 속에 뼛가루 꽃나무를 꼿꼿하게 세운다                로마 테베레 강          단풍  / 이상국   나무는 할 말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잎잎이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다   봄에 겨우 만났는데 가을에 헤어져야 하다니   슬픔으로 몸이 뜨거운 것이다   그래서 물감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계곡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단풍  / 이자규   알겠네, 기다리지 않아도 편지는 도착하고 계절의 중력은 몸을 낮추어 녹슬어가네 비워질 세상을 이미 알고나 있었는지 이동설계를 긋고 있는 다람쥐는 나무숲 사이를 굴러다니다 떨어져 죽은 동료의 두 귀를 세우네, 들리는가 흐느끼는 안개를 달래며 옆구리를 내주고 있는 절벽의 끝 멀리 누군가의 발에 채인 돌들 부서지며 뒹굴고 서로 부둥켜 안고 서로 상처 핥는 소리 들리는가 장대비 때려 아름다워진 삶의 무늬 칼바람 맞은 몸일수록 뒤척이지 못한 혓바닥 참 붉다, 뜨겁게 제 피멍든 살껍질 일어나 한시절 시뻘건 참회 벌이고 있네 서러움과 아쉬움이 만나서 독버섯이 된 가슴 뼈가 짓이겨진 그리움을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이명처럼 들려오는 강물소리 번개 섞는 소리 내 활화산의 중심에다 구멍을 내고 싶어라 알겠네, 타오르는 것은 언제나 내일과 어제 사이에서 그 존재가 되어가네              단풍  / 이제하   가을이로다 가을이로다 생선처럼 뒤채며 일어서던 목숨이 어찌 볼 수도 없는 허공에서 아으 쓰러지는 목숨이   나무마다 나불어 닢닢이 토하는 핏줄기로다 그래도 못다한 숨결 바작바작 긁어대는 손톱 생채기로다   무엇을 바래 달음질했던 땅 끝에서 하늘 끝에서 되돌아 아득아득 달려오는 세상에   아 단풍이로다 어느 한 곬으로 머리 숙이고 눈물마저 못 뿌린 못난 마음이   쑥대밭으로 엉클리어 마구잡이 타오르는 불길이로다          단풍  / 임영준   앞날이 순탄치 않아   혹독하게 몰아치리라 예감하고들 있어   분기탱천한 구월이 피를 토하는거야             단풍나무 / 유진택   잘 익은 단풍나무 이곳에 안기고 싶대요   한없이 햇살만 달라 손벌리는 산골에서   분홍물로 젖고 싶대요 분홍물로 젖어 절명하고 싶대요   이보다 더 잘 익어 온 산천 분홍물로 물결칠 때까지 끝까지 남아 산주인이 되고 싶대요   외로운 산주인 되어 철없는 아이의 손에 통째로 꺾이고 싶대요 통째로 꺾이면서도 다만 잔잔히 웃음 짓고 싶대요             단풍나무 / 함성호   지나가네 지나가 버리네 그가, 그녀가, 당신이 ㅡ   그냥 지나가 버리네 여기 너무 오래 단풍나무 아래서 그를, 그녀를, 당신을 기다렸네   설레는 손짓은 단풍나무 잎사귀처럼 붉게 물들어가고   단풍나무 붉은 그늘 아래로 사랑이거나 괴로움이거나 골몰한 생각들이 스치고 그냥 지나가 버리네   먼 훗날 그는, 그녀는, 당신은 어느 차가운 바위에 앉아 말하겠지   그 때, (단풍나무 그늘에서) 쉬어가야 했다고   우리가 못 알아보고 그냥 지나쳐 온 생의 기별들이 단풍나무 붉은 그늘 아래로 차곡 차곡 쌓이고 있네              단풍나무 길에 서서 / 장철문   꽃잎이 사선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다 신록의 단풍잎 사이에서 와서 신록의 단풍잎 속으로 떨어지고 있다 사선을 그리며 유성우가 떨어지고 있다 궁창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흙이었으며 흙으로 돌아가고 있다 꽃이었으며 꽃으로 돌아갔었다고 해도 좋다 햇살이 신록의 단풍나무숲을 투과하고 있다 사선을 그리며 사라지고 있다 사라지는 어느 한순간도 잡을 수가 없다 지금이 사라지고 있다 궁창으로부터 궁차으로 사라지고 있다 폭우처럼 사라지고 있다 가슴으로부터 가슴으로 사라지고 있다              단풍 나무  한 그루 / 안도현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 죽여야겠다고 가을산 중턱에서 찬비를 맞네 오도 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하고 너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 단풍나무 혼자서 온몸 벌겋게 달아오르네              단풍나무 한 그루의 세상 / 이영광   자고 난 뒤 돌아앉아 옷 입던 사람의 뒷모습처럼  연애도 결국은,  지워지지 않는 전과로 남는다  가망 없는 뉘우침을 선사하기 위해  사랑은 내게 왔다가, 이렇게  가지 않는 거다  증명서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교정의 단풍나무 아래 앉아 있는 동안  이곳이 바로 감옥이구나, 느끼게 만드는 거다  사람을 스쳤던 자리마다  눈 감고 되돌아가 한번씩 갇히는 시간  언제나 11월이 가장 춥다  모든 외도를 지우고  단 한사람을 기다리는 일만으로 버거운 사람에게  이 추위는 혼자서 마쳐야 하는 형기?  출감확인서 같은 졸업증명서를 기다리며  외따로 선 나무 아래 외따로 앉아 있는  추운 날  붉고 뜨거운 손이 얼굴을 어루만진다  혼자 불타다가 사그라지고 다시 타오르는  단풍나무 한그루의 세상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는 순간이 있고  떨어져서도 여전히 화끈거리는 단풍잎과  멍하니, 갇힌 사람이 있고  인간의 습성을 비웃으며 서서히 아웃되는 새떼들이 있다              단풍놀이 ㅡ 무덤6  / 방우달   예측한 일이지만, 무르익은 갈바람이 불어오자 흠뻑 눈물 머금은 잎들은 밤내 울어버린 것이다 눈으로만 운 게 아니라 가슴으로 팔다리로 발바닥까지 온몸으로 울긋불븍한 빛깔을 흘릴 것이다 맹물로만 운게 아니라 소금의 짠맛도 산새의 구슬픈 노래도 아래로 아래로 지는 바람도 함께 버무려 기나긴 골짜기를 타고 우수수 몸부림치며 흐른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아름답다고 벌떼같이 산으로 모여드는 것이다 단풍들은 그것이 미안하고 미안하고 또 미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잎들은 해마다 가을이면 한꺼번에 울어버리는 것이다            단풍놀 / 서정춘   여러 새가 울었단다 여러 산을 넘었단다 저승까지 갔다가 돌아왔단다           단풍 드는 날 /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일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 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단풍들의 합창 / 허동인   얘들아 울긋불긋 노래하는 저 단풍들을 좀 보아라   제각각 다른 목소리를 내어도 한데 어울리니 합창이 되고 마는구나   이젠 흙으로 돌아가도 좋다며 하늘에도 감사 땅에도 감사 바람에게도 감사   그동안 베풀어 준 모든 이들의 은혜 노래로써 보답한다며   색깔로써 드러내는 저 단풍들의 사부 합창 오부 합창을   얘들아 귀는 두고 눈으로만 보아라           단풍 숲속을 가며 / 오세영     무어라 말씀하셨나 돌아서 옆을 보면 화들짝 붉히는 낯익은 얼굴 무어라 말씀하셨나 돌아서 뒤를 보면 또 노오랗게 흘기는 그 고운 눈빛 가을 산 어스름 숲속을 간다 붉게 물든 단풍 속을 호올로 간다 산은 산으로 말을 하고 나무는 나무로 말하는데 소리가 아니면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하루 해는 설키만 하다 찬 서리 내려 산은 불현듯 침묵을 걷고 화려하게 천자만홍 터뜨리는데 무어라 말씀하셨나 어느덧 하옇게 센 반백의 귀머거리 아직도 봄 꿈꾸는 반백의 철딱서니 시와 시학사. 1999년           단풍을 보면서 / 조태일   내장산이 아니어도 좋아라 설악산이 아니어도 좋아라   야트막한 산이거나 높은 산이거나 무명산이거나 유명산이거나 거기 박힌 대로 버티고 서 제 생긴 대로 붉었다 제 성미대로 익었다   높고 푸른 하늘 아니더라도 낮고 충충한 바위하늘도 떠받치며 서러운 것들 저렇게 한번쯤만 꼭 한번쯤만 제 생긴 대로 타오르면 될거야 제 성미대로 피어보면 될거야   어린 잎새도 청년 잎새도 장년 잎새도 노년 잎새도 말년 잎새도 한꺼번에 무르익으면 될 거야 한꺼번에 터지면 될 거야   메아리도 이제 살지 않는 곳이지만 이 산은 내 산이고 니 산인지라 저 산도 내 산이고 니 산인지라              단풍의 이유 / 이원규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을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붉나무로 나는 단풍으로 온몸이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람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폭설이 내려 온몸이 얼고 얼다가 축축이 젖을 때까지 합장의 뼈마디에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          단풍 편지 / 이제인   불현듯 다녀가라는 편지 받고 씁니다 포기할 수도 쉽게 다가갈 수도 없는 먼 허공의 거리 그 아득함을 글자로나마 채우겠다는 것인지 쓰고 또 지우고 씁니다 하늘허리를 두르고도 남을 빈 말들의 행렬 다시 한 자 한 자 지워 나갑니다 마지막 남은 한 문장 화석이 된 붉은 시간의 잎들 그대 가슴에도 그 불멸이 자라고 있겠지   오늘밤은 꼭 그대 거기 붉게 물든 한 그루 단풍나무로 서 있어야 하겠습니다          단풍, 혹은 가슴앓이 / 이민우   가슴앓이를 하는 게야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대낮부터 낮 술에 취할 리가 없지   삭이지 못한 가슴 속 붉은 반점 석양으로 타오르다 마침내 마침내 노을이 되었구나   활활 타올라라 마지막 한 잎까지 아쉬워 아쉬워 고개 떨구기엔 가을의 눈빛이 너무 뜨겁다          붉은 잎 / 류시화   그리고는 하루가 얼마나 길고 덧없는지를 느끼지 않아도 좋을 그 다음 날이 왔고 그날은 오래 잊혀지지 않았다 붉은 잎, 붉은 잎, 하늘에 떠가는 붉은 잎들 모든 흐름이 나와 더불어 움ㅁ직여가고 또 갑자기 멈춘다 여기 이 구름들과 끝이 없는 넓은 강물들 어떤 섬세하고 불타는 삶을 나는 가지려고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졌었다, 그렇다, 다만 그것들은 얼마나 하찮았던가, 여기 이 붉은 잎, 붉은 잎들 허공에 떠가는 더 많은 붉은 잎들 바람도 자고 물도 맑은 날에 나의 외로움이 구름들을 끌어 당기는 곳 그것들은 멀리 있다. 더 멀리에 그리고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이 그것들을 겨울 하늘 위에 소용돌이치게 하고 순식간에 차가운 얼음 위로 끌어내린다         속단풍 든다 / 이명수   단풍 때문에 가을 한철 술에 젖어 살았다 화양동 계곡 너럭바위에서 계룡산 민박집 층층나무 아래서 함양 읍내 선술집에서 마시고 또 마셨다 혼자서, 여럿이서 노래를 불렀다 ㅡ앞남산 황국단풍은 구시월에 들고요 이네 가슴 속단풍은 시시때때로 든다 노래를 불러도 가슴이 시리다 젊은 날엔 술기운을 못 이겨 얼굴이 단풍 빛깔이었는데 나이 들면 술기운이 가슴으로 파고드는 것일까 사시사철 붉은 미친 단풍 때문에 내 속의 그 요물 때문에 요즘엔 시시때때로 속단풍이 든다             열매 도둑 단풍 도둑 / 하종오   며칠 만에 돌아와 집 안 둘러보니 풀들이 밟혀 작은 길 생겨나 있다 그 새로 난 작은 길 가보니 은행나무 아래서부터 감나무 아래로 가서 멎었다가 대추나무 아래로 가서 멎었다가 뒤란 둔덕까지 가서 멎어 있고 나무마다 가지에 열매 하나 없다 우리 집에는 대문이 없는 데도 올해도 누가 집 뒤에 트럭 대놓고 들어와 대추와 감과 은행 싹 털어 싣고 갔다 단풍 들 무렵이면 내가 집 나가는 짓거리 알고 있는 이웃이 와서 한 짓거리 아니라면 해마다 때 잘 맞출 순 없는 법이지만 혐의를 품지 않기로 한다 나도 산천에는 대문이 없다는 걸 알고 함부로 이곳 저곳 드나들며 나무들이 잎에 맺은 색깔들 눈독 들여와서 마음에 한 자리 깔았으니 피장파장 아닌가 그 새로 난 작은 길 발자국 맞춰 걸어보니 내 걸음 너비와 똑같다 2004년 3월호             오매 단풍 들것네/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한 그루 단풍나무의 잠 / 이은유   한 그루 단풍나무 잠을 잔다 잎 피울 생각도 하지 않고 다른 단풍나무 무성하게 자라도 부러움이 없다 내가 잘 자란 단풍나무 곁에서 감탄한다 그래도 한 그루 단풍나무 잠을 잔다 내 마음이 단풍나무에게로 다가간다 잘 자란 단풍나무 단단한 뿌리를 잠자는 단풍나무한테 옮겨 심는다   단풍나무 내 마음에서 자란다 내 마음이 잠자는 단풍나무를 깨운다 언제부터인가 단풍나무한테서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잘 자란 단풍나무 닮고 싶은 내 마음이 잠자는 단풍나무에게서 잎새를 피우는 거라고 생각한다 잠자는 단풍나무 자라는 동안 깨닫는다 내 마음이 잘 자란 단풍나무에게 먼저 간 것이 아니라 잘 자란 단풍나무 나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것을 나를 깨우고자 한 그루 단풍나무 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을   단풍나무 내 마음에 전해온다 이젠 내가 단풍나무 마음을 읽는다                햇빛과 단풍     김규화   햇빛은 무색이다가도 단풍나무에 가 닿으면 단풍잎이 된다 노랑은 노랑금빛 빨강은 빨강금빛 갠지스강가에 쌓아놓은 나무더미에 빨간 불꽃을 당긴다 빨간 불꽃에 금빛 영혼이 하루종일 번쩍이며 탄다 아무 말 없이 타는 시체 위로 허공에 고루 숨어 사는 햇빛이 모조리 몰리어간다 타다닥 탁탁 단풍무더기 햇빛은 단풍을 좋아해 단풍에 닿자마자 크게 웃어 마릴린 몬로는 입을 약간 벌리고 금빛 머리칼을 신사의 가슴에 올려놓는다 포스터를 보는 18살 소녀도 크게 웃어 웃음소리가 크게 퍼지고 먼 마을로 간 마릴린 몬로가 타는 단풍 속으로 들어와앉는다 햇빛이 심지를 돋운다                                                                       창경궁                                                  창경궁   
376    그림은 있고 향기는 없고... 댓글:  조회:2415  추천:0  2015-02-19
  물 위에 둥지를 튼 꽃 한송이 흔들흔들 넘어질듯   주름진 키위 얼굴에 검버섯 피어있듯 쭈글쭈글 검은 블루베리 둘이 붙어 서로 몸을 의지하듯   하얀 오리는 색깔이 없고 아무도 색칠하려 들지 않고   꽃이 활짝 피어도 향기를 맡을 수 없고 [출처] 시로 쓰는 다이어리) 하루가 삼천육백 오십일 곱하기 이가 되면|작성자 소나여우  
375    퍼포먼스 시집 평설 댓글:  조회:4465  추천:0  2015-02-18
    머리말과 평설 하이퍼, 퍼포먼스, 기타   문덕수     [1] 이선(李仙: 본명 李因仙)은 2007년 ������시문학������신인작품당선작의 종심에서 이선이라는 펜네임으로 등단했습니다. 그 후에 하나은행이 공모한 시부문에 특선(2004), 동서커피문학상 시부문 은상(2004), 웹진의 ������올해의 좋은시������100선에 선정(2011), 제8회 푸른시학상수상(2011)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이선은 현대시인협회 사무국장입니다.(그의 신인작품상 심사한 심상운님이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으로 당선된 후 그를 사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번에 첫 시집 ������빨간 손바닥의자������의 상재를 축하합니다. 말하자면 이 글은 축하하는 머리말과 평설을 겸한 사족(蛇足)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선은 잠자는 시인이 아니라 늘 깨어서 눈을 뜨고 사물을 관찰하고 그 참 모습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톡톡 튀는 시인’입니다. 그의 시에 “하이힐의 또각또각”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만, 그의 톡톡 튀는 발랄한 모습을 연상시켜 그의 시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합니다. “톡톡 튄다”는 무슨 뜻일까요? 사전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바로 이 시인에게 해당되는 몇 가지를 골라봅니다. 1)무엇이 여러 번 터지거나 부러지는 소리, 2)나가다가 여러 번 거치는 모양이나 부러지는 소리, 3)여러 번 튀는 모양이나 소리 등. “여러 번 슬쩍 하는 모양이나 소리”라는 뜻도 있습니다만, “-슬쩍”은 이 시인에게 적용하기 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선이라는 시인 을 특히 괄목(刮目)하는 것은 톡톡 튀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냥 특이하다, 개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차원에서 이선은 톡톡 튀는 시인입니다. [2] 이선은 다소 예언적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것 젖혀두고 이미 유명해진 여러 여류들과 비교하면서 연상해봅니다. 이것은 이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것보다 그녀에게 무엇인가의 기대를 은밀히 나타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프랑스의 여류작가인 조르즈 상드(George Sand, 1887~1961)입니다. 처녀작 『앵디아나』(Indiana)를 비롯하여 100여 편의 소설을 쓴 여류입니다만, 상드와 이선을 등가의 인물로 치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선에게 상드와 같은 많은 작품의 생산을 기대하는 그런 은밀한 소망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선은 가끔 한국의 ‘사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의 신화적 존재인 여류시인 사포(sapphōp, 기원 전 7세기 무렵의 그리스 여성 서정시인)와 연상해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근거 없는 부정적인 소문과 연관짓고 싶지 않으며 다만 사포와 같은 높은 성가(聲價)를 지닌 서정시인이 되기를 바라는 은밀한 소망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나혜석(羅惠錫 1896~1949)은 어떨까도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나 나혜석처럼 가정을 무시하는 페미니즘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선의 부군은 정말 너그럽고 훌륭하고 이선의 시를 소중히 여기며 일가가 모두 그녀의 시의 온상이 되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여러 다른 여류와의 연상작용은 그저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3] 이선의 시는 프리다 칼로(멕시코의 초현실주의 여성화가)의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브르통(1896~1966)이나 데스노스(1900~ 1945) 같은 사람이 아니라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 “칼로” 같은 엉뚱한 인물을 등장시킨 것도 이선의 톡톡 튀는 성격에 그 원인을 돌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프리다 칼로」라는 작품부터 들기로 합시다. 이 작품의 배경은 거의 누드나 다름 없이 얼굴과 두 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발가벗고 있고, 가슴과 배꼽까지 두 유방을 드러낸채 띄엄띄엄 흰 고정대로 감기어 있고 거기에 ‘못’ 같은 것이 꽂혀 있습니다. 엉덩이 이하는 침대 시트 같은 천으로 걸쳐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전신이 못으로 박혀 있음은 주체의 내면적 고통을 암시한 것 같습니다.   “똑바로 서! 총구가 흔들리지 않도록…” 흰 가죽 고정대가 내 몸을 긴장시킨다 서른 번 수술하고 가까스로 살아낸, 성스런 몸 내 몸의 신전 기둥에 열대 모래바람이 탕탕, 못질을 해댄다 (지금, 춥고 아픈데…) -「프리다 칼로·1」에서 이런 대목의 사건 진상은 알 수 없으나 30번이나 죽을 고비에 직면했다가 병원에서 수술로 살아난 절망적인 고통 속에서 30번이나 소생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그림의 주체가 겪은 고통은 물론 이것만이 아닙니다. 특히 “여동생이, 남편 디에고와 잤어...”라는 대목은 이 주체인 내면적 고통의 가중(加重)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프리다 칼로·2」로 옮겨가서 봅시다. 「자화상·다친 사슴」 의 부제가 있습니다. 이 시는 먼저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의 그림을 제시하고, 그 다음에 시가 있습니다. 디카시를 연상하게 합니다. 밀림 속에서 온몸에 화살을 맞은 사슴의 주행 그림입니다. 앞발이 몸 앞으로 내닫고 있고, 두 발이 그 뒤를 따르는 이 모습은, 전신에 화살의 고통이 꽂혀 있는 모습으로 매우 참담함을 느끼게 합니다. 모가지 밑으로 네 개의 화살이 꽂혀 있고, 배와 등에 다섯 개의 화살이 꽂혀 있습니다. 어쨌든 화살의 수가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화살이 영혼의 내면적 고통을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실의 삶의 고통이 역설적으로 암시되고 있습니다. 즉 패러독스의 시입니다. 이 역설의 사슴은 바로 초현실주의의 화가인 프리다 칼로 자신이며 자신의 고통의 현실과 그것을 초월하지 못하고 있는 형이하학적 삶을 그대로 노출시킨 그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보름달 삼킨, 앞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별들의 왕녀인 안드로메타가 가장 사랑한, 라임나무 열매를 훔쳐먹은 죄로, 나는 노새 사슴이 되었다 목자자리, 아르크투르스 별을 영원히 짝사랑하라는 벌을 받았다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 칼로·2」 부분   여기서 프리다 칼로의 그림 「다친 사슴」은 바로 프리다 칼로 자신이며, 동시에 이 시인(李仙)의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은 키, 급한 성격, 갈색 눈, 예민한 입맛,/ 가는 목소리, 큰 창자 길이와 작은 창자 길이,/ 누군가 내 유전자를 조합한 거다”(「셀룰러 메모리」에서. 윗 부분은 이선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동일성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수용하고 있는 작자의 태도에서 이 작자의 자화상의 실존적 상황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도 있습니다. 이 다친 사슴은 벗어날 수 없는 2중의 고통 현실에서 동작(주행)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냥꾼의 표적이라는 점, 둘째는 이 밀림에서의 탈출 불가능이라는 사실, 이러한 겹친 고통 속에서의 삶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고통을 짊어진 동작은 계속하지 않을 수 없는 삶 자체의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1연에 나오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는 바로 프리다 칼로의 남편이면서 멕시코의 유명한 민중화가입니다. 그런데 이 남편은 믿음의 존재가 아니라 프리다 칼로의 작품(「프리다칼로·1」)을 보면 바로 그녀의 여동생과 동침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말하자면 프리다 칼로는 애인인 남편을 여동생에게 빼앗기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자기 몸에 살인적인 많은 화살을 빼지 말라고 타자와 자기에게 다짐하고 있는 것은 고통이 힘들다기보다 오히려 고통을 즐기고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4] 이선의 시집 앞쪽에 「( )와 ( )사이」라는 시에는 ( ), { }, [{((( )))}], 《 》 등의 기호가 보입니다. “너와 나, 사이 강물/ ( ) 안에서/ 넘치지도 않고 유유히 흐른다”의 대목이 보입니다. 너와 나 사이 흐르는 강물, 하늘과 땅의 큰 괄호( { }) 사이로 빌딩이 자라고 있는 장소는 모두 그 형태가 안 보이는 허처(虛處)입니다.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허무나 여백(餘白), 공백(空白)을 여러 가지 괄호(기호)로 처리한 것이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호를 대동하고 사는 존재입니다. 이 시의 3연은 “철길을 홀로 걷던, 그 사이/ 누구의 잃어버린 ( )인가”라고 하는데, 이 대목의 ( )는 상실한 연인 또 헤어진 연인, 혹은 단절된 절친한 믿음 등을 가리킵니다. 즉 상실(喪失), 이별(離 別), 단절(斷絶), 배신(背信) 등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기호를 지닌 실존입니다만, 그 기호에 어떤 의미나 기능을 부여한다는 점은 삶의 뭣인가를 부가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실감하게 됩니다. ( )  { }   [ ] 《 》 이러한 도형을 흔히 기호(sign)라고 합니다. 시에서 이러한 도형을 처음 쓴 시인은 이상(李箱)입니다. 나는 이상을 초현실주의 시인이라기보다 ‘기호시인’으로 간주한다는 말을 다른 논문에서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기호는 오남구(오진현), 김영찬 시인 등이 즐겨 썼습니다만, 이선의 이 기호는 이들과는 또다른 의미의 것입니다. 이러한 기호 쓰기는 시에서 거의 불가피한 것으로 생각되며, 넓은 의미의 하이퍼시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습니다. [5] 이선의 시에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가 있습니다. 부제는 「샤갈의 잠」입니다. 이 시는 이선의 하이퍼적 이미지 만들기의 원인을 알려주는 좋은 보기입니다. 「빨간 손바닥의자」도 매혹적인 하이퍼시입니다.   꽃사과 나무 기둥에 다윗의 비파를 숨겨놓았다 바람타고 줄기타고 하얗게 소리를 지르는 사과나무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의 1연   이 시는 제목부터 하이퍼시입니다. “물고기의 레이스”라는 대목에서, 수족관이나 연안바다나 심해에서 많은 물고기들이 한 방향으로 이동하는 어군을 TV영상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만, 바로 그 어군 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됩니다. 이러한 영상 이미지의 대조에서, 우리는 보이는 어군과 안 보이는 어군의 역설적 대조를 느끼게 됩니다. 이선의 하이퍼시에서 느낄 수 있는 패러독스입니다. 하이퍼시를 패러독스의 시라고 하는 이유의 일단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전봇대 위를 날다”라는 대목의 기발한 초월적 이미지를 느끼게 됩니다. 물고기의 대군(大群)이 이동하는 바다 속의 “전봇대 위”라는 이미지가 가능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지요,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러한 불가능이 가능성의 현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전봇대”는 육지에서만 가능한 이미지입니다만 물고기만의 레이스가 있는 바다에는 육지의 연결에서 여러 가지 이미지를 시 독자는 생산할 수 있습니다. 하이퍼시가 생산하는 신비적 이미지의 온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다음의 ‘꽃사과나무 기둥에 다윗의 비파’를 숨겨놓았다고 합니다. 이선의 하이퍼적 방법의 비밀을 말한 대목입니다. 다윗은 기원전 1000년경 이스라엘의 제2대 왕이며, 통일 왕국의 확립자인 (히)dāid, (영) David(재위 B.C. 999~B.C.966)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통일은 북쪽의 다마스커스에서 남쪽으로는 홍해(紅海)에까지 미쳐 이스라엘의 전성기가 됩니다. 다윗의 도상(圖像)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며, 특히 구약 시편의 작자이고 수금(竪琴)의 명수(名手)로서 악사(樂士)와 무용수(舞踊手)들의 중앙의 왕좌에 앉아 수금을 연주하거나 수금을 손에 들고 춤을 추는 모양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선이 인용한 ‘다윗’은 바로 이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바람 타고/ 줄기타고/ 하얗게 소리를 지르는 사과나무”라는 대목에서 숨겨 놓은 비파가 하얗게 소리지르는 것은 이선의 하이퍼적 감각적인 장치가 어떤 것인가를 추측할 수 있게 하고,(숨 겨 놓은 것은 이선의 하이퍼 이미지 창조의 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옛날 장자(莊子: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의 “천뢰”(天籟)와 “지뢰”(地籟)도 연상하게도 합니다. 장자의 천뢰는 어떤 소리일까요. “너희들은 인뢰(人籟)는 들었지만, 아직 지뢰(地籟)는 듣지 못했지. 인뢰란 피리나 퉁소 소리를 말하는데 이것은 소리를 내는 기물이지. 지뢰라는 것은 바람에 의해서 일어나는 천지의 울림이다. 그것은 나뭇가지를 흔들어서 내는 소리다. 이쪽에서 쪼톡쪼톡 하는 소리가 난다. 저쪽에서 살랑살랑 나뭇잎이 흔들린다. 나무 속에는 구멍이 길게 뚫려 있어서 바람이 와서 그것에 닿으면 소리가 난다. 바람에게 물어보면 바람인 자기가 그 소리를 냈다고 하고, 구멍에게 물어보면 구멍인 자기가 그 소리를 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하면 무엇이 바람을 불게 하고 무엇이 바람으로 하여금 구멍에 닿게 하는가, 다시 말하면 우주의 진정한 지배자(장자는 이를 “진재”(眞宰)라고 한다)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천뢰”(天籟)를 진정으로 듣게 됩니다.” 라고 말한다. 이선의 시는 단지 다윗의 수금 소리만을 듣게 하지 않고, 장자의 “천뢰”(天籟)까지 연상하여 듣게 합니다. 이 시는 물론 1연에서 다윗, 2연에서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 3연에서 신데렐라의 설화 등과 연결되어 하이퍼시로서의 여러 가지 다양성을 풍부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샤갈 꿈이 동시에 이 시인의 꿈입니다. [6] 시 「숨은그림찾기」는 하이퍼시인지 아닌지 잘 분간이 안 되나 그림(‘그림’도 기호의 일종이다)과 언어시와의 융합과 보완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하이퍼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습니다. 그림에서 숨은 그림을 찾는 것은, 시를 수수께끼와 같은 것으로 간주한 작품 (시의 의미 찾기를 무슨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는 것과 같은 식으로 쓰는 시인도 볼 수 있습니다)입니다. 그림도 기호(sign)의 일종이고, 그림에서 숨은 그림을 찾는 것은 꼭 어떤 퀴즈 같기도 하고, 수수께끼 같기도 하고, 어떤 유희(play)가 내재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시가 너무 엄숙한 방향으로 기우는 것을 가능한 한 막는 것 같습니다. [7] 어떤이는 하이퍼시를 “미친놈의 잠꼬대”라고 말하고, 어떤이는 출판기념회 석상에서 “군소리”라고도 말합니다.(한 단체의 수장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의 욕설도 달게 받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만, 시인이면 시의 구조가 무엇인가를 알고 말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이퍼시의 본격적 논의를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는 비유구조로 되어 있고, 모든 시는 비유와 비유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시인을 두고 미친사람의 잠꼬대라는 말은 모든 시인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적인 발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에 의하여 환기된 새로운 인지(認知)의 도식은, 파악할 수 없는 애매한 존재를 납득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서의 인식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납득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서의 인식”이라는 말에 주목해 봅시다. 비유에 의해서 가능해지는 인식은 결코 ‘진실 자체’일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관념시가 그렇고, 관념을 벗어나 탈관념의 시에서도 그렇습니다. 가령 “사람은 갈대다”라는 은유는 결코 사람과 갈대를 완전한 동일성 또는 유사성으로서 납득시키면서 우리의 인식을 바꾸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은유나 상징을 사용해도 사람과 갈대를 그 일부밖에는 동일시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사람과 갈대를 결부시킨 것은 넓은 의미에서 하이퍼적이라고(적어도 처음에는)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빌딩이다”도 하이퍼적 은유입니다만 사람과 빌딩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 관계는 그래도 가능한 연결입니다. “은유는 천재의 표지다”라고 말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의 심성(心性)은 양(羊)이다”도 은유입니다. ‘그’와 양(羊)이 결합되어 있습니다만, 이 경우 ‘그’는 본의(本ム義)이며 양(羊)은 유의(喩義)라고 합니다. 하이퍼시의 경우에 도입되는 양, 강, 바다, 신(神), 표범, 빌딩 등 무엇이든지 유의의 예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이퍼시에 있어서 일반적 스타일입니다. 하이퍼시의 하이퍼성은 시의 일반적 비유 구조를 극대화한 것입니다. [8] 이선은 「프리다 칼로」라는 시를 3편 수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프리다 칼로 그림을 시의 머리에서 제시하고 있는데 프리다 칼로의 그림도 일종의 비유로 생각한 것입니다. 전신에 못이 박힌 칼로나 모가지 밑과 배와 등에 화살에 꽂힌 이 다친 사슴의 그림, 이 그림은 비유(은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를 교유(交喩 diaphor)라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못에 박힌 자화상이나 화살에 꽂힌 사슴은 고통, 신음, 죽음, 절망(絶望) 등의 유추로서 이 그림을 통하여 시인 자신의 처한 환경적, 또는 내면적 고통의 어떤 유사성(동일성)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삶이란 이런 것임을 적나라하게 유추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교유(交喩)라고 할 수 있고, 모든 하이퍼시는 기존의 시가 가지고 있는 유추 구조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리가 나는 것들은 제 속을 비우고 산다」라는 이선의 다른 시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피리, 북, 장고 내장을 모두 비워낸 소리를 낸다 세상 밖으로 제 살을 모두 밀어내고 속을 후벼 파내어 바람의 계단을 밟고 홀로 허공을 울리며 올라가는 소리 -「소리가 나는 것들은 제 속을 비우고 산다」 부분   이 시에선 피리, 북, 장고 등의 악기를, 내장을 지닌 생명체라고 본 것 같습니다. ‘내장’이라는 말이 그것을 암시합니다. 은유이긴 하나, 신진(辛進)이 말한 ‘차유’(差喩)로서의 성격을 지닌 것 같습니다. 피리의 내장, 북의 내장, 장고의 내장이라고 하여 생명체로 본들, 결코 본래의 악기(피리, 북, 장고 등)와는 결코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차이를 더 드러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시는 어떤 결론이나 결과를 나타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시라는 것은 진실의 세계로 접근하는 멀고 먼 그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선이 「프리다 칼로·1, 2」에서 아무리 칼로를 유추하여 인용했다고 하더라도(인용해서 비유하는 것을 引喩라고도 한다) 온 전신에 못박힌 것이나 화살이 꽂힌 그 고통은 프리다 칼로라는 화가 자신의 고통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이퍼시의 비유로 도입한 본의는 결코 처음 나타내고자 한 고통과 동일하지도 유사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갈대다”에서 사람과 갈대가 동일하게, 유사하게 같지 않음과 같은 것입니다.   [9] 여기서 신진(辛進:부산동아대학교 교수, 시인)의 “차유”(差喩)에 대하여 언급하여야 하겠습니다. 물론 대만대 인문사회계 고등연구원장인 황준채(黃俊蔡)의 정다산(丁茶山)에 대한 연구논문으로서 다산 250주년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연구논문도 언급해야 하고, 특히 다산의 “사물이 원리에 앞선다”(事先理後)의 정신도 말해야 합니다만 논문을 구하지 못해서 언급을 보류합니다. 신진의 ‘차유’의 제기논문은 「시의 4형 고」(한국시학연구 제16, 2006)인데, 볼프강 카이저(Wolfgang Kaiser)의 ������언어예술작품론������(대반출판사, 1982)에서 언급한 서정시의 세 가지 양식에서 힌트를 받고, 카이저가 제시한 3유형 외에 “거부의 시”를 첨부한 데서, 시의 기본구조라고도 할 수 있는 유추구조인 은유, 환유 외에 차유로서 도입함을 암시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차유론은 최근의 신진의 논저 ������한국시의 이론������(산지니, 2012)에서도 상론되어 있습니다. 신진의 이 논저에서 “차유는 은유와 환유에 대비되며 문자 그대로 차이성의 비유란 의미이다. 은유가 유사성에 의한 대치(substitution)를, 환유와 인접성에 의한 연결(contexture)을 지향한다면 차유는 차이성에 의한 긴장(tension)을 지향한다. 꿈의 작용과 관련하여 추론하자면 응축과 치환이 환유의 원리이고, 상징이 은유의 원리이다. 모순은 차유의 원리가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진(辛進)이 처음으로 제기한 “차유”(差喩, transphor)는 혹시 하이퍼적 이미지의 연결 원리가 차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기인합니다. 거의 확실한 것 같습니다. [10] 이제 이선의 작품을 예로 들어 차유의 실례를 조금 검토해 볼까 합니다. 이선의 시에는 하이퍼시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녀는 체질적으로 하이퍼시인입니다.   우울증 80%로 벽 속에 갇힌, 여자 고양이 아홉 마리 애꾸눈, 절름발이 개 두 마리와 산다 -「점검 안내」 전문   이 작품은 어떻습니까. 하이퍼시입니까. “…벽속에 갇힌 여자”라는 대목은 아날로그 시로 간주됩니다. 갇히지 않고 벽 바깥에 있는 여자와 벽 속에 갇힌 여자와의 관계에서 그 사이에 초월의 의미가 심각하게는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만, 그 다음의 “고양이 아홉 마리” 이하의 대목에서는 초월의 의미가 너무 심각하게 느껴져서 하이퍼시라는 확신이 듭니다. ‘초월’의 의미도 독자의 수용하는 감각의 정도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애꾸눈, 절름발이 개 두 마리와 산다”는 대목은 전연 현실적 가능성이 없고, 그것은 현실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프리다 칼로」에서 프리다 칼로의 「다친 사슴」 같은 그림은 이 작자의 고통 즉 삶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만 이를 비유구조라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전신이 살인적 화살이 꽂힌 상황과 이 시의 작자인 주체(이선)의 고통이 꼭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 경우 고통의 차이성에 관심을 집중하면 이 그림의 도입(보조관념의 도입이며, 본관념은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은 신진 교수께서 제기한 차유(差喩)라고 할 수 없을까요. ‘고통’이라는 추상에서는 유사성이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고통의 구체적 감각은 분명히 차이가 있으니까요. 이렇게 본다면 모든 하이퍼시의 비유는 ‘차유’인지도 모릅니다. 은유나 환유라고 말하기보다는 ‘차유’라고 하는 것이 더 실감이 납니다. 이선의 시에 “페이지가 접혀/ 뇌혈관 어디쯤 파묻혀 있을 니체, 보들레르,/ 도스토예프스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에 도입된 니체, 보들레르, 도스토예프스키 등은 모두 유의(喩義:보조관념)입니다. “뇌혈관 어디쯤 파묻혀 있는 니체”는 뇌혈관 어디쯤 파묻혀 있는 니체적 기질(또는 니체적 이단자의 반 기독교적인 기질) 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하의 보들레르,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은유도 니체의 예와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의 비유는 모두 은유(隱喩)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것이 설사 하이퍼 시의 본질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시의 일반적 비유구조의 틀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은유’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이퍼라고 해서 시의 본질적 구조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하이퍼시의 하이퍼는 은유, 환유, 차유 등의 본질적 구조에서 벗어나 있지 않음을 여기서 강조해 두고자 합니다. 차유는 하이퍼시에서 굉장히 큰 기능을 합니다. [11] 이선의 시는 일률적으로 하이퍼시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시는 매우 다양합니다. 그녀는 하이퍼라는 전제로 시를 쓰지 않습니다. 모더니즘, 이미지즘, 전통시, 낭송시, 드라마 ―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들의 영향이 돋보입니다. 어느 시를 읽어도 톡톡 튀는 이선의 특색이 보입니다. 뭔가 다른 시인들과는 다른 자기만의 특색이 있는 시를 쓰는 시인으로 간주됩니다. 이선의 시에 “나를 쏟아내어도 쓸 것이 없네요,/ 내가 없어요/ 낡은 잔소리 웅얼거리는”(「이력서」)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에 “내가 없어요”라는 시구도 있습니다. “내가 없어요”는 무슨 의미일까요? 자기의 기준을 무화(無化)시킨다는 의미이겠습니다. 시인이 시를 쓰기 위해서 는 먼저 사물존재라는 대상을 보며, 그 대상과 어느 정도의 알맞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자기를 무화시킨 후의 객관적 감각을 기록하게 됩니다. 이 경우 “대상 -언어-시인”이라는 이 관계구도는 대상인식의 형식입니다. 나는 여기서 특히 대상과 주체(시인) 사이의 ‘거리’를 중요시 하고, 이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거리를 무시하고 대상과 시인이 일체(一体)가 되어야 대상을 자기화(自己化)하는 것은, 그것이 서정시 제작의 기본이라고 하더라도 하이퍼시를 쓰기엔 부족한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대상-주체(시인) 사이의 ‘거리’를 가져야 함을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것을 ‘심미적 거리’(審美的距離aethetic distance)라고 합니다. 미국의 1970년대 비평가인 J.C. 랜슴이 주장한 이론입니다. 누가 주장했던 간에 대상과 주체가 접근하여 하나가 되면 대상은 보이지 않고, 또 반대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대상은 조그마한 점으로 소실되어 보이지 않게 됩니다. 대상의 보임에는 여러 가지 객관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아르케올로지(arckeologie)라는 말은 원래 고고학(考古學)을 의미합니다만, 아르케올로지는 ‘시원’(始源)의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앞에서 말한 대상- 주체 사이에 알맞은 거리를 설정하는 것은 하이퍼시의 아르케올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적 틀을 이선은 나름대로 체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필자는 1)하이퍼성(性)은 시의 본질적 구조의 확대라는 점, 2)하이퍼시에서 대상과 주체 사이에 반드시 ‘거리’를 두어야 함을 특히 강조했습니다. 이선의 첫 시집 상재를 축하하면서 이만 펜을 놓습니다.  
374    하이퍼시와 퍼포먼스시 댓글:  조회:4011  추천:0  2015-02-18
퍼포먼스 시와 하이퍼시의 창조적인 공간 속에 펼쳐지는 사유의 세계                  -이선 첫 시집 『빨간 손바닥의자』                                                      심 상 운(시인, 평론가)   1. 들어가는 글    이선 시인의 첫 시집 『빨간 손바닥의자』에 담긴 55편의 시들은 도전적인 자세와 거침없이 펼쳐지는 창조적인 이미지의 공간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 충격은 첫째로, 이 시집의 1부에 수록된 퍼포먼스 시편들이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공연시(perfomance poetry)의 한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구체성이 드러난다. 그것은 작은 현상 같지만 시사적(詩史的)인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된다. 극시나 시극은 스토리를 중심으로 1시간 이상 공연되는 연극의 대본(희곡)이지만, ‘퍼포먼스 시’는 보통의 짧은 서정시를 시인이 5~7분 동안 무대에서 연출하여 보여주는 시이다. 그래서 퍼포먼스 시는 이미 존재하는 극시나 시극과는 성격이 다른 독립성을 갖고 시사적인 면에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 시집의 퍼포먼스 시편들은 ‘공연을 위한 시’의 극적 요소가 창작과정에서 의식적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이 공연을 통해서 시의 이미지를 온 몸으로 시현(示顯)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이선 시인은 자신이 시인이면서 배우라는 투철한 자기인식 속에서 자신의 시를 적극적으로 공연(公演)하고 있어서 다른 시인과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퍼포먼스는, 획일적인 무대에게 주는 나의 문학을 향한 ‘사랑 이벤트’다. 시낭송 퍼포먼스에 대한 사랑, 완성된 무대를 향한 노력과 열정은 평생 내 문학적 목표가 될 것이다.”(시인의 말)라는 그의 말이 시에 대한 열정을 얼마나 뜨겁게 나타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이런 그의 열정적 행위는 1960년대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현실참여시의 깃발을 들고, 큰 충격의 결과를 남기고 간 김수영 시인이“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1968,「詩여, 침을 뱉어라」에서 발췌)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이선 시인의 퍼포먼스 시와 김수영의 현실참여시는 전혀 차원이 다른 곳에 위치하지만 시에 자신의 온 몸을 던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둘째로는 에 대한 도전이다. 그는 21세기 새로운 시론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고 예리한 언어적 감성으로 개성적인 하이퍼시를 써 내고 있다. 이 시집 2부에 수록된  하이퍼시에 대해 그는 “하이퍼시의 목표는 ‘새로움’과 ‘초월적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하이퍼시를 쓰면서 ‘회화성’과 ‘공연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디지털적 영상감각을 도입하여 시를 디자인한다.”(시인의 말)라고 하면서 하이퍼시와 퍼포먼스 시의 창조적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하이퍼시의 영상성을 퍼포먼스 시에 도입하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이 밖에도 3부에서 보여주는「가족(이웃들)」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존재론적 의식 추구와 그늘진 현실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던져주는 전율감도 충격적이다. 4부 「야생화」, 5부「표절시비」등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왜곡된 현실에 대한 그의 불안과 분노, 구원의식은 독자들을 깊은 사유의 공간으로 안내한다. 그러나 이 시집의 시편들은 독자들에게 문제에 대한 친절한 해답을 주는 대신 문제에 대한 ‘화두(話頭)’를 던지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것이 이선 시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작용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글의 제목을 라고 했다. 가상현실과 현실의 이미지에는 무의식 속을 흐르는 사유(思惟)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가. 포퍼먼스 시    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은 언어에서 “기표와 기의는 처음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이 존재한다.”고 했다. 따라서 눈앞에 실재하는 것은 기표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기표의 이미지는 인간의 의식구조와 같이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되어있다.  따라서 무의식(無意識) 속 욕망은 환유의 기표로 부상(浮上)한다. 이선 시인의 퍼포먼스 시는 이런 언어의 특성을 이해하고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현대시의 창조적인 변화의 모습으로 해석된다. 그는 ‘시+공연’의 방법으로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형성된 신명나고 즐거운 새로운 시의 마당을 펼쳐보이고자 한다. 이 시집의 표제가 된 첫 번째 시 「빨간 손바닥 의자」에는 그런 시인의 의도가 표출되어 있다.   눈 덮인 수명산 공원까페, 빨간 손바닥의자/(지금 여기)/앉아있는, 긴 머리 여류시인// 엉덩이를 종일 받쳐주던/ 의자가 그녀를 떠나버린 뒤부터였을까?/ ―뒤가 늘 허전한 그녀//지금 그녀를 떠받들고 있는 손들도/ 언제 갑자기 빼버릴지 몰라,/뒤에서 몰래 꽈당 넘어뜨린, 그 손/ 내리 누르는 엉덩이 힘이 버거운가?/ 지난번보다 빨간 손가락이 아래로 처졌다/ 불안하다,// 문득, 의자가 아픈 손가락을 오므리면?/ 그녀 엉덩이를 빨간 손가락이 비틀면?/ ―샤갈의 추상화, 하얀 탁자 위, 파란 유리컵, / 주르르, 흘러넘치는 헐렁한 물의 엉덩이,/ 한 컵 푸른 사과향기// 하얀 접시 위, 피자 위, 소년의 잘 익은 눈빛 위,/ ―토마토페이스트처럼 붉은 뺨, 소녀/소녀 엉덩이 아래, 의자 엉덩이 아래,/ ―가볍게 눌려 킥킥대는 농담// “빨간 손 줄까?”/ “파란 손 줄까?”// 고무줄 끊던 짓궂은 소년, 새까만 손/ (그때 거기)/ 싱거운 농담도 따뜻했다,// 빨간 손바닥 의자,/ 미끄러지는 늙은 여자의 엉덩이를/ 다시 끌어다 앉힌다// ―「빨간 손바닥 의자」전문    이 시에서 무엇보다 먼저 감지되는 것이 퍼포먼스의 기본이 되는 ‘행위(行爲)’이다. “뒤에서 몰래 꽈당 넘어뜨린”, “문득, 의자가 아픈 손가락을 오므리면?”, “주르르, 흘러넘치는 헐렁한 물의 엉덩이” 등 시 속에서 벌어지는 동적상황이 그것이다. 시인은 리포터의 위치에서 은유와 환유로 형성된 상상의 언어와 행위의 이미지로 하나의 상황을 제시하고 독자(관객)를 그 세계로 유인한다. 그래서 이 시에서 ‘빨간 손바닥의자, 긴 머리 여류시인, 그녀의 엉덩이를 종일 받쳐주던 의자, 샤갈의 추상화, 하얀 탁자 위, 파란 유리컵, 소녀/ 소녀, 미끄러지는 늙은 여자의 엉덩이’ 등은 한 여자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습을 은유와 환유의 이미지로 보여준다. 이런 추상적(抽象的) 상상은 이선 시인의 무의식의 표출이라고 유추된다. 시인은 자신의 무의식을 객관화하여 시적상황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에 의해 불안한 현재, 푸른 사과 향기 같은 환상적인 과거의식, 그리고 빨간 손바닥 의자에서 미끄러지는 늙은 여자의 모습(미래)은 시인자신의 존재의식이 담긴 이미지로 드러난다. 이선 시인은 이 시를 각색(脚色)하여 보여줌으로써 퍼포먼스 시의 한 모델을 제시한다.   9) 뒤에서 몰래 꽈당 넘어뜨린, 그 손/ (7-9행 모션: 의자를 바닥에 꽈당, 소리가 나게 쓰러뜨린다)/ 10) 내리 누르는 엉덩이 힘이 버거운가?/ 11) 지난번보다 빨간손가락이 아래로 처졌다/ 12) 불안하다,/ 13) 문득, 의자가 아픈 손가락을 오므리면?/ 14) 그녀 엉덩이를 빨간 손가락이 비틀면?/ 15) -샤갈의 추상화, 하얀 탁자 위, 파란 유리컵, / 16) 주르르, 흘러넘치는 헐렁한 물의 엉덩이, / 17) 한 컵 푸른 사과향기/ (10-12행 모션: 일어나서 의자를 의리저리 만져본다)/ (의자를 툭툭, 두드려본다)/ (13행 모션: 손을 치켜들어 관객에게 보이며 손가락을 앞으로 오므린다)/ (14행 모션: 손가락을 펴서 엉덩이를 찝는다.)/ (15행 모션: 탁자위의 유리컵을 든다) / (16행 모션: 컵을 들고 물을 주르르, 흘러넘치도록 따른다)/ (17행 모션: 컵을 코에 대고 행복하게 냄새를 맡는다) ―퍼포먼스「빨간 손바닥 의자」부분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도 존재의식의 객관화라는 점에서「빨간 손바닥 의자」와 같은 무의식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추상적인 상상에서 벗어나 “내 정신의 줄기세포는 어디에서 이식받은 것일까?”라는 사실적 화두(話頭)를 제시하고 자신의 존재성을 유전자(遺傳子)로 추적하는 사유가 자유분방한 상상과 결합되어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그리고 시의 화자로 ‘나’를 등장시킨 직접 화법의 기법이 시적감각을 상승시키고 독자와의 거리를 밀접하게 한다.   나의 젖가슴은 보름이면 살이 오르고/ 조금 때는 살이 빠진다,/ 해와 달, 별이 내 줄기세포를 키우는가보다/누군가 나를 지었다, / 작은 키, 급한 성격, 갈색 눈, 예민한 입맛,/ 가는 목소리, 큰창자 길이와 작은창자 길이,/ 누군가 내 유전자를 조립한 거다 // 내 정신의 줄기세포는 어디에서 이식받은 것일까?// 페이지가 접혀, / 뇌혈관 어디쯤 파묻혀 있을 니체, 보들레르, / 토스토에프스키,/ 이사도라 덩컨, 까미유 끌로델, 열기와 헛소리…/ 내 피는 샤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가? / 파랑색 스카프, 파랑색 가방, 파랑색 원피스,/ 나의 詩도 파랑색이다,/ 착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은 나의 詩,/ 나의 詩에는 적도의 피가 들끓고 있는데/ 러셀의 연애론보다 더 겁쟁이인 불쌍한 나의 詩, / 감염되지 않은 단어가 내 시에 한 줄이라도 있을까?/ 내 생각의 껍질까지, 타인의 유전자가 흐른다 / (어머니의 눈으로 본 아버지,)/ (언니의 코로 맡은 돈 냄새,) / 내 몸의 세포조직엔 적도의 바람과 햇빛이 녹아 있다/ (한국인의 조상은 동남아인이라고 흥분하던 KBS,/ 9시 뉴스앵커, 내 두툼한 입술과 주먹코는 분명 남방계다) // 하늘은 초록색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나무들 밑둥 잡고, 땅에다 오늘도 열심히 글씨를 쓴다/ 제 생각을 뿌리째 땅속에다 모두 이식하고 싶은 거다,// 나뭇잎의 떨림을 이식받아 / 바람 앞에 내 줄기가 떨리듯/ 내 굴절된 파장이/혹, 누군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당신 심장 한쪽을 떼어/ 내 할딱이는 심장에 붙여주고 갔듯이, // 지금, 나는 누구의 푸른 눈동자로 응고되어 가는 너를 보는가?//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전문 *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장기이식 후 기증자의 성격과 습성까지 전이되는 현상. 애리조나주립대학 심리학 교수, 게리 슈왈츠(Gary Schwartz)가 처음 발견함.    이 시도 각색한 시를 보여주고 있다. 3인이 등장하는데, 2인은 보조 출연자이고 1명이 주도하는 1인의 포퍼먼스 시다. 시의 내용과 퍼포먼스가 예상치 못하는 결합을 하지만 분위기를 조성하는 효과를 얻는다.   #1 1) 남녀 2명이 무대에 나와서 를 부른다./ 2) 1절― 여자, 2절― 남자, 3절― 남녀 같이/ 3) 1―2절 노래하는 동안 낭송자 1은 파란 의상과 파란색 긴 스카프를 휘날리며/ 무대 아래에서 춤을 추며 행위예술을 한다. / 4) 춤을 추는 사람이 따로 있고, 낭송자는 시만 낭송하여도 좋다./ 5) 스카프를 휘날리며 관객 사이를 뛰어다니며 춤을 춘다./ 6) 파란색 구두를 벗어 무대 옆에 가지런히 놓는다./ 7) 스카프를 앞으로 높이 들고 관객을 스텝을 밟으며 무대와 관객을 가른다./ 8) 다시 스카프를 높이 하늘로 치켜들고 춤을 춘다./ 9) 다시 관객 사이로 뛰어다니며 스카프를 뒤로 휘날린다./ 10) 관객 머리 위로 스카프를 가볍게 휘날리며 무대 쪽으로 나온다.// ―퍼포먼스「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앞부분   「커닝 페이퍼」에서도 시인은 자신의 존재의 모습에 잠입(潛入)하고 있다. “고개가 35도 갸우뚱 기울어버린 모델 쟌느”의 잃어버린 자유와 시인자신의 모습이 무의식의 공간에서 만나는 상상이 이 시의 밑그림이다. 시인은 오랜 시간 모딜리아니의 광기어린 눈과 그의 모델 쟌느에 대한 연민(憐憫)의 이미지를 무의식 속에 넣고 살아 온 것 같다. 그래서 시인이 “나는 몇 세기 동안 타인의 생을 기웃거린 촉매였을까?”라는 독백이 진정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이 시속의 모딜리아니와 쟌느는 자크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 속 타자(他者)의 환유(換喩)로 인식된다. 그것은 또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존재들이 바다에 떠있는 빙산처럼 잠재해 있다는 의미로 확대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커닝 페이퍼’의 의미도 순조롭게 풀린다. 인간의 생각이나 행위는 의식 속의 자기가 아닌 무의식 속의 타자에 의해서 조종된다는 것이다.   이 빠진 단어처럼/ 꽃잎이 톡, 떨어진다/ 나는 꽃잎을 집어들고/ 캔버스 속, 잃어버린 눈동자 속으로 잠입한다// 모딜리아니, 밥줄에 걸려/ 고개가 35도 갸우뚱 기울어버린 모델 쟌느,/ 그녀의 긴 목, 초록색 짝 눈// 내가 매표소에 던진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으론/ 쟌느의 목을 똑바로 세울 수가 없다/ 그녀의 잃어버린 자유를 드로잉 할 수가 없다// 나는 쪽동백 하얀 꽃잎을 몇 번이고 씹는다/ 모딜리아니 광기어린 눈/ (면도칼, 임산부, 붉은 핏방울, )/ 콜록콜록, 내 입속에서 기침하는/ 꽃잎// 씹다가 뱉어놓은 꽃잎, 꽃잎,/ A4 용지에 수북이 배설해 놓은, 설익은 문장들/ 수채화의 밑그림처럼 누워있는/ 커닝 페이퍼,// 나는 몇 세기 동안 타인의 생을 기웃거린 촉매였을까?// ―「커닝 페이퍼」전문   「퍼포먼스―커닝 페이퍼」도 1인 또는 2인의 공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델 쟌느 역할 여자 1.(시낭송자 1, 퍼포먼스 1로 시낭송과 퍼포먼스를 분리할 수도 있다)”그리고 ‘주의 집중’포퍼먼스를 펼친 후, 시낭송을 한다. 시낭송자는 낭송을 하며 동시에 시의 내용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연기를 한다. 시의 내용과 낭송자의 연기가 합치되는가. 그것이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객들의 반응이다.   16) 씹다가 뱉어놓은 꽃잎, 꽃잎, / 17) A4 용지에 수북이 배설해 놓은, 설익은 문장들/ 18) 수채화의 밑그림처럼 누워있는/ 19) 커닝 페이퍼,/ (16행 모션: 꽃잎, 꽃잎, - 관객을 한 명, 한 명 손을 옮기며 지적한다.)/ (17행 모션: A4 용지를 바닥에 흩뿌린다.)/ (18행 모션: 바닥에 눕는다. 태아가 웅크린 자세를 취한다.)/ 20) 나는 몇 세기 동안 타인의 생을 기웃거린 촉매였을까?/ (20행 모션: 허공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멀리 시선을 둔다)/  * 무대조명 천천히 꺼진다.// ―「퍼포먼스―커닝 페이퍼」끝부분   이 외에  일상으로부터 이탈된 예술가의 고뇌를 풍자한「고흐와 설사」,가족의 관계와 자신의 존재 원소(DNA)를 우주적 관점에서 조명하여 하이퍼적인 상상의 세계를 펼친「페르세우스 流星雨(유성우)」, 시인 자신의 현실적 모습을 냉장고 속의 식품으로 비유한 「이력서」, 사랑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열쇠를 잃어버렸어요」, 퍼포먼스 시로만 발표한 「버릇과 타성의 줄다리기」, 퍼포먼스 시로 각색한 이육사의 「광야」와 김소월의 「진달래 꽃」등의 퍼포먼스 시편들이 시적 긴장감과 일상에서 벗어난 신선한 사유의 세계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그래서 그 시편들은 독자들을 유일하고 독특한, 육감적(肉感的)인, 진정으로 유니크(unique)한 시의 열정 속으로 끌어들여 용광로 속의 쇳물로 만들 것 같다.   나. 하이퍼시(hyper poetry)    하이퍼시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불연속적인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다선구조), 동적 이미지를 기본으로, 독백적 서술과 주장과 설득의 거부 등을 통해서 새로운 시 형태를 추구하고 구현하려는 개혁적인 시운동이다.에서 발간한 20명의 시 선집(anthology)『하이퍼시hyper poetry』(2011년 11월 5일 시문학사)는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벌여온 하이퍼시 운동의 결과물로 주변의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이선 시인은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개성적인 하이퍼시를 발표하고 있다. 이 시집에 수록된 「( )와 ( ) 사이에」는 에서 ‘새로운 감각과 발상, 실험의식이 있는 작품’을 선정하여 수상하는 제8회「푸른 시학상」을 수상한(2011년 11월 22일) 작품이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필자는 심사평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선 시인의 「( )와 ( ) 사이에」는 시어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시 속에 ( )를 넣어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숨은 의미를 찾게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 )는 독자참여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공간은 수평적인 위치에서 독자와 시인이 소통하는 현대시의 탈구조적 형태를 구상하게 한다. 내용면에서도 “ ( )작은 괄호, 〔 〕큰 괄호 끼리끼리 몰려다닌다/큰 괄호가 작은 괄호를 [{(((())))}] 삼켜버린다 ”에서는 괄호의 의미가 확대되면서 현대사회의 갈등의 요인이 무엇인가를 도상(圖像 icon)으로 암시하는 시적 깊이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기호시(記號詩)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언어작업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시가 하이퍼적이라는 점은 (  )을 통해 독자와의 소통, 무한한 상상의 확대가 가능하고 시인은 객관적 위치에서 안내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너와 나, 사이, 강물/ ( ) 안에서/ 넘치지도 않고 유유히 흐른다// 하늘과 땅의 큰 괄호 { } 사이로 / 빌딩이 자란다 / 가로수, 긴 괄호∥∥사이로 자동차가 쌩쌩 달린다 / ( )를 치고 ( )를 치고 ( )를 치고/ ( )작은 괄호, 〔 〕큰 괄호 끼리끼리 몰려다닌다 // 큰 괄호가 작은 괄호를 [{(((())))}] 삼켜버린다// 철길을 홀로 걷던, 그 사내 / 누구의 잃어버린 ( )인가? / 쇠파리 몇 마리, 사내 입술에 달라붙어/ ( ) 속, 말을 열려고 버둥댄다 //  입맞춤과 포옹은 ( )를 열고 닫는 것/ 꽃잎 닫혔던 ( ) 화르르, 열린다 // 가로수 귀를 막고 / 《》를 치고/ 위로만 나뭇가지를 뻗는다 //   ―「( )와 ( ) 사이에」전문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샤갈의 잠」은 사과나무⟶사과⟶소녀의 꿈⟶말의 허공으로 이어지는 1, 2, 3, 4 부의 변화가 이미지의 집합적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저녁 새들은/ 해를 쪼아다 나뭇가지에 콕콕 박아 넣는다/ 사과가 빨갛게 익는다”라는 초현실적인 상상의 감각과 현실의 결합이 하이퍼시의 언어감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하이퍼시를 의식하고 쓴 시는 아니지만 발상과 상상과 감각에서 하이퍼시의 요소가 감지된다.      1./ 꽃사과나무 기둥에 다윗의 비파를 숨겨 놓았다./ 바람타고/ 줄기타고,/하얗게 소리를 지르는 사과나무, // 저녁 새들은/ 해를 쪼아다 나뭇가지에 콕콕 박아 넣는다 / 사과가 빨갛게 익는다 // 2./ 사과나무, 제 살을 물어뜯다 지친/ 달빛 잘 익은 밤/ 비명소리, 사과 살만 골라 야금야금 먹는다 / 귀퉁이마다 하얗게 남아있는 이빨자국/ 하늘을 밀어내고/ 허공중/ 사과나무에 매달렸던 아담의 사과들/ 투두둑 떨어진다/ 달이 떨어진다 // 3./ 12시, 소녀가 꿈꾸던 신데렐라의 꿈도 달빛모양/ 땅에 떨어진다/ 펄럭이던 하늘빛 레이스자락/ 땅에 길게 눕는다/ 그 위에 빛이 흥건히 고인다// 4. / 휴식, 휴식이 필요해……/ 말은 말의 풀을 잘라먹고/ 잘라먹은 말의 허공, / 사과 나뭇가지에 끼어있던 햇살/ 휴식, 휴식이 필요해……/ 저것 좀 봐/ 저것 좀 봐/ 두 얼굴의 말이 나를 쫓아 안방으로 달겨든다/ 빨갛고 / 초록인, 어둠 //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샤갈의 잠」전문   「숨은그림찾기」는 숨은 그림에서 연상되는 이야기가 다양하고 자유로운 이미지의 공간을 형성한다. 그리고 가오리, 8분음표, 성냥개비, 버섯, 화살표, 신발 등의 이미지는 숨은 그림 찾기라는 놀이 속 공간에 집합되어 있어서 이미지의 수평적 결합이라는 ‘하이퍼시’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숨은 그림 속에서 연상되는 이야기는 시인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미지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에는 여러 종류의 그림이 캡처되어 있습니다. / 숨은그림찾기는 늘 흥미롭지요? / 자,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해볼까요? (릴렉스 릴‥렉스)// * 온 가족이 환하게 웃는 그림이 인상적이군요./ 그럼, 먼저 가오리를 찾아볼까요? / ―(아, 술안주? 취해서 어머니에게 소주병을 던지던 아버지, 벌름거리는 콧구멍)//* 흠흠,������신발������도 찾아보시죠,/ ―(내 여자 친구에게 빨간구두를 사주고 영화관, 형, 거세해 버리고 싶었‥)// * ������성냥개비������도 어렵지 않게 찾았군요?/ ―(직장 상사가 그녀 엉덩이를 만지네. 나쁜자식! 고추를 확 불질러 버릴‥)/ * 숨은 그림에서 ������8분음표������가 자꾸만 튀어나온다고요? / ―(아이는 무릎을 꿇고 ������멍멍������ 개 짖는 소리를 내요, 친구들 책상 옆… 토끼뜀…어지러워요, 5학년, 담임)// ―「숨은그림찾기」부분    이 외에「귓속말 하기― 때, 시간, 장소, 그리고?」,「보들레르와 은행잎 편지」,「선문선답-모자이크 이미지 」,「잃어버린 동화 1」,「시인을 위하여 -감성스케치」,「빨강 스펙트럼-근친상간 , 성폭력, Red Card??」,「프리다 칼로 1-자화상〮 〮부서진 ․ 기둥」,「 프리다 칼로 2-자화상 ․ 다친 사슴 」,「프리다 칼로 3-자화상 ․ 꿈 」등의 시편에서 이선 시인이 추구하는 하이퍼시를 만나볼 수 있다. 그는 사유과 감정을 하이퍼시에 넣어서 인간의 피가 흐르는 하이퍼시를 쓰려고 한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유리판 같은 냉랭한 이미지만의 시에서 벗어나서 독자와 소통하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하이퍼시와 다른 시와의 차별성을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 하는 점에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타인의 상처에 대한 치유와 하이퍼시의 특성을 결합하고 있는 이선의 시는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빈센트 반 고흐’나 ‘프리다 칼로’는 불행을 딛고 예술을 꽃 피운 화가로 유명하다. 그는 그들을 시에 등장시켜서 그들의 고통과 함께 하고자 한다. 그것이 치유의 한 방법이다. 연작시 「프리다칼로」의 주인공 프리다 칼로는 소녀시절, 전차 사고 후 척추장애로 평생 걷지 못한 불구의 화가다. 그는 평생 남편의 바람기로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그래서 프리다 칼로에 대한 연민은 같은 여성이라는 입장에서 더 적극적인 거 같다.   고통스럽게 미간이 점점 밀려 맞붙는다// ―이 절박한 밤에도 / 선인장 꽃향기, 몸부림친다/ 희롱하듯 헐벗은 내 몸을 부드럽게 스쳐가는, 꽃바람// “여동생이, 남편 디에고와 잤어‥”// 내 자궁은, 알티플라노 중앙고원을 품고 홀로 잠든다/ 새벽안개가 첫눈을 치켜뜰, 때 /―초원이 용설란, 꽃잎 잉태하는 소리// ―「프리다 칼로-자화상 〮〮․ 부서진 기둥」부분   “내 몸에 박힌 화살을 빼지 마세요‥제발”// ―상처는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붓/ ―고통은 잘 섞은, 물감/ 배경처럼 서 있는 멕시코만, 푸른 바다/ 남색꽃 만발한, 클리토리아 초원// 봄이 오면,/ 굳어버린 뿔은 마피미 분지에 내던지고/ 말랑말랑한 새 뿔을 왕관으로 쓰고/ 초원을 힘껏 내달릴 터, /―귀를 쫑긋 세우고// ―「 프리다 칼로2-자화상 〮․ 다친 사슴 」부분    3부 「가족」, 4부 「야생화」, 5부 「표절시비」 에 대한 해설은 줄인다. 그 시편들에도 시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현실의 문제를 포착하고 왜곡된 현실에 대한 불안과 분노, 구원의식, 자기 존재에 대한 추구가 들어 있어서 긴장감과 충격을 주고 있지만 새로운 시의 형태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3. 나가는 글    이선 시인은 자신의 시를 온 몸으로 공연(performance)하는‘행위의 시’를 통해서 현대시의 공간을 확대하는 성과를 보이고 있다. 첫 시집『빨간 손바닥 의자』는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현장에 퍼포먼스 시의 모델을 제시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집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답답한 언어의 틀에서 벗어나서 노래와 춤이 서로 어울렸던 ‘시의 원형’을 재현하려는 ‘현대시’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운동은 원시시대의 예술 정신과 표현 양식을 현대 예술에 접목하려는 원시주의(Primitivism)와 상통한다. 그는 또 하이퍼시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인간의 피가 흐르는 하이퍼시를 창작하고 있다. 유리판 같이 냉랭한 이미지에 사유와 감정을 넣자는 것이 그의 하이퍼시 창작 정신이다. 필자는 그의 첫 시집 『빨간 손바닥 의자』에서 그의 종횡 무진한 상상을 접하고 내심 경이로움을 느꼈다. 앞으로 그의 시가 어떻게 변모하고 어떤 놀라움을 줄지 기대하면서 주마간산격(走馬看山格)의 해설을 줄인다.    
373    하이퍼시 도무미 4 댓글:  조회:4483  추천:0  2015-02-18
      이석주는 70년대 극사실주의(하이퍼 리얼리즘)의 대표적 화가로서 주목받았다. 그의 회화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에 지속적으로 등장하지만 너무나 드러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감춰진 듯한, 그리하여 그 동안 여러 분석에서 의외로 크게 주목받지 못한 채 다른 모티프들과 같은 수준에서 언급되거나 짐짓 무시되기도 했던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간 이미지이다.    그는 왜 상투적인 느낌을 줄 정도로 시계의 이미지, 더 정확히 말해 둥근 시계판과 시간을 가르키는 숫자들, 그리고 시침을 반복적으로 재현시키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의문을 가져보아야 한다. 여기에 반복강박적인 집요한 사유의 흔적이 발견된다. 그의 이미지들은 시간과 그리고 공간에 대한 사유의 흔적이다. 그것은 또한 운동과 정지에 대한 상상력이며, 나아가서 현실과 가상에 대한 고뇌의 얼룩들이다.    클로즈업된 극사실의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매우 비사실적인 이미지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시지각은 사물의 대강의 이미지(윤곽과 특징)들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연결시킨다. 따라서 세부적인 극사실의 이미지가 클로즈업 되는 순간은 사물이 시간의 수평적 흐름을 벗어나서 수직적으로 비약하는 특이한 순간이다. 그것은 선형적인 시간을 벗어나는 순간이다. 그리하여 극사실은 오히려 환상적 효과를 낳는다. 그 곳은 시간의 입자들이 증발해 버린 비현실적인 순수 공간 같은 곳이다. 이석주는 이러한 무시간적 극사실의 공간 속에 시간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그려 넣고 있다. 이것은 무척 이질적이고 당혹스러운 느낌을 준다.    시계판은 그 자체로 매우 모순적인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 즉 지속을 지시하지만 그 자신은 시간을 공간적 양으로 절단한다. 다시 말해서 시계판은 운동이면서 정지이다―이석주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원판이나 바퀴 역시 시계판의 변형 이미지이다. 또한 형태상으로도 시계판은 원이면서 직선(침)이다. 가끔 화살표로도 표현되는 직선의 침은 원을 끊임없이 벗어나려 하지만 끊임없이 원으로 회귀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계판 앞에서 우리는 양가적 모순이 발생시키는 기이한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시계판은 이석주가 탐색하고 있는 시간에 대한 사유를 가장 강렬하게 이미지화 한다.  이러한 느낌은 그의 기차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은 아름다움을 발작적인 것이 일으키는 경이로 보았는데 이러한 발작적 아름다움의 대표적인 경우가 ‘정지된 폭발’이다. 정지된 폭발은 움직이면서도 동시에 정지해 있는 것이다. 그 예로 브르통은 “폐허가 된 처녀림에 수년간 방치되어 있는 고속열차의 사진”과 “몸과 옷의 구분이 희미해질 정도로 빠르게 돌고 있는 탱고 댄서의 사진”을 들었다. 열차가 가진 전진 속도의 기억과 처녀림의 덩굴이 가진 움켜잡는 정지의 힘이라는 모순의 돌연한 만남, 그리고 빠른 움직임이면서 부동의 이미지로 고착된 사진이 야기하는 기묘한 느낌을 우리는 이석주의 기차에서도 익숙하게 만난다.    이석주의 기차는 긴 연기를 뿜으며 먼 곳을 향해 달리고 있지만, 극사실 기법으로 클로즈업된 기차의 이미지에서는 움직임이 사라진다(물론 원경으로 처리된 기차에게서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이석주의 기차는 정지된 먼 여행이다. 시계의 시침처럼 직선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언제나 시계판의 원에 수렴된다(시계판의 원을 도는 기차 그림도 있다). 정지된 먼 여행은 회상이나 몽상의 동력학이다. 이것이 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석주의 비선형적이며 몽상적인 시공간이다.    그러나 그 몽상의 시공간은 순수하지 못하고 불온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도처에 얼룩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얼룩이 몽상의 재현 공간을 방해하고 있다. 이석주의 그림을 일별하다 보면 극사실로 재현된 환영(가상)의 공간 속에 당혹스럽게도 마구 칠해진 초록색의 얼룩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얼룩은 몽상의 시공간을 그 근저에서부터 무너뜨리고 있으며, 얼룩을 통해 의 현실이, 현실의 시공간이 화면으로 끊임없이 개입한다. 마치 몽상을 가로막는 벽처럼. 그렇다. 그의 초기작인 은 이후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다. 그가 창조하는 환영의 시공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벽은 그 안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환영의 공간들이 사실은 어떤 벽면이나 판자의 표면임을 얼룩의 흔적들은 계속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얼룩은 또한 환영의 공간이 사실은 화보의 한 페이지임을 보여주는, 접히는 중간선의 흔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허공에 떠 있는 깃털이나 낙엽도 얼룩의 변형태이다. / 이성희 (철학박사, 시인)  
372    하이퍼모더니즘의 시대는 오는가 댓글:  조회:4654  추천:0  2015-02-18
하이퍼모더니즘의 시대는 오는가                                                            조명제 (시인, 문학평론가)       8월 8ㆍ9일에 있은 현대시인협회 세미나는 여러 모로 기억에 남을 행사였다. 우리 현대시 100주년 기념을 겸해 개최된 하계 세미나의 본 행사지는 안면도 자연 송림 속이었다. 100년은 좋이 묵었을 솔숲 아래에 모여 앉아 먼저 문덕수 선생님의 기조 강연 ?현대시 100년, 두 가지 제언?을 들었다. 선생님은 우리 시가 관념론적 역사주의와 관계론적 형식주의로 맞서 왔으나 지난 100여년 간 현실적으로는 관념적 실체론이 횡행하여 작품의 심미적 형식적 가치가 무시되어 온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고, 앞으로 관계론이나 형식론 쪽으로 눈을 돌려 집중 탐구할 필요성을 강조하셨다.  두 번째로 나선 심상운 시인은 21세기 ‘하이퍼 텍스트 시’의 이해를 위한 주제 ?單線構造의 세계에서 多線構造의 세계로?를 발표하여 관심을 집중시켰다. 하이퍼미디어의 특성에 바탕을 둔 다선구조적 하이퍼시는 디지털 문명 시대의 새로운 소통법이라고 역설하였지만 일부 원로 시인들은 비논리적, 비순차적, 비선형적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 링크의 불연속적 상상의 가지치기가 어떻게 원활한 소통이 되겠느냐고 반박하는 등 잠시 열띤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세 번째로 나선 필자는 ?한국 모더니즘 시의 정통 계보와 현실?을 주제로 발표하였다. 불행한 민족 문학의 사상 대립과 갈등을 허두에서 언급하고, 모더니즘 시운동의 정통 계보와 그 현주소를 짚었다. 특히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하이퍼모더니즘으로의 전개가 문덕수ㆍ김규화 주재의 을 중심으로 이뤄져 온 시사적(詩史的) 의의를 피력하여 공감을 얻었다.  세미나가 끝난 뒤 일행은 지역 시인들의 안내로 낯선 모감주나무 바닷가로 가서 휴식하고, 다시 샛별 해수욕장이라는 곳으로 이동하여 일몰을 감상한 뒤 팬션 식당 ‘신밧드의 모험’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담론하였다. 참석자들은 알선자의 호언장담과는 별개인 음식과 서비스, 숙박 환경 등 모든 면에서 ‘신밧드의 모험’에서의 모험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지난 8월 30ㆍ31일 양일 간에 걸쳐, 가평군 북면 제령리 소재 김용언 시인의 전원주택에서 열린 한국시문학문인회 제28회 ‘주제가 있는 시 낭송회’ 에서도 토론의 주된 화제는 단연 하이퍼시였다. 먼저 문덕수 선생님의 시론 ?사물과 기호?를 읽고 자유로이 질문하고 답변하는 형식이었는데, 하이퍼시의 시대적 배경이나 특성, 창작 방법 등에 대해서 주로 신규호, 심상운, 오남구, 조명제(필자) 등이 해명에 나섰다.   9월호는 비교적 전면에 ‘하이퍼텍스트 시’ 동인의 하이퍼 시집을 싣고 있다. 4월호에 하이퍼텍스트 시 동인지가 예고되고, 5월호에 기획 특집으로 김규화, 심상운, 오남구 시인 등 동인들의 그 첫 번째 하이퍼시가 발표된 이후 두 번째의 기획 특집이다.                할머니 바지 길어요         짚뭉치가발 쓴 하송(下松) 마을 서낭당 돌머리 웃고 있다.         허리가 짧아졌으니까         면사무소 가는 길이 해발 오십미터 소나무고개로 휘는 시절         네 바지가 길다, 얘         상송(上松) 마을 동무와 하송 마을 고모의 수다         몸 살을 뺐거든(요)                       그만 Bar                       Diet Bar                       나의 슬림한 몸매가 부러워요?                       너도 Diet Bar해!         그러면서 그녀는 민다리를 꼰다         추수가 끝나자 찾아든 농악대들         동네 들머리에서부터 지신 밟는 그들의 숭얼숭얼한 웃음         그대의 바지가 길구나         제 높은 구두 뒤축을 부러뜨렸잖아요, 하느님         바람, 햇볕, 볏단 그리고 하늘         그동안 당신이 머리 위에서 누르고 또 눌렀어요         신의 땅 라싸 해발 오천 미터, 경전을 외는 한 무리들                                                     -김규화 ?과학적 이유 세 가지? 전문    우리 현대시가 여전히 ‘2천여 년 전 예수나 석가 시대의 비유, 상징의 기법으로 정서와 관념을 표현해’ 오고 있는 현실에 일침을 가하며 하이퍼텍스트 시운동에 과감히 뛰어든 김규화 시인은 디지털 시대의 하이퍼적 시쓰기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해 가고 있어 주목된다.  이제는 적어도 출신 시인들이나 현대시협의 시인들은 그 동안 발표된 디지털리즘이나 하이퍼 시론과 작품들을 통해 하이퍼텍스트 문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는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 시공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인간의 뇌 구조의 복잡한 그물망처럼 하이퍼시는 합리주의의 근본인 인과적 논리성이나 순차적 질서, 혹은 위계적 시스템을 벗어나 탈중심의 리좀(rhizome) 형태를 구축하며, 일방향적 단선구조에서 쌍방향적 혹은 다방향적 다선구조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관계론적 체계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연상과 공상적 상상력으로 현실과 비현실의 가상공간을 가릴 것 없이 점핑해 가며 텍스트의 마디들을 연결짓거나 병치, 혹은 나열 등의 방법으로 공존시킴으로써 기계론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무한한(4차원적) 상상력과 환상의 세계를 맛보게 한다.   5월호에 이어 이번에도 김규화 시인은 5편을 발표하면서 몇 가지의 하이퍼적 형식실험을 하고 있다. 인용시 ?과학적 이유 세 가지?는 세 가지 상황에서 바지가 긴 이유들을 중심으로 시 구문들의 모듈(module)화, 자유연상적 하이퍼 링크와 시상의 가지치기 등으로 관심을 집중시킨다.  우선 이 작품의 제1연은 조향의 ?아시체(雅屍體)놀이?처럼 외견상 행간의 연결이 무시된 이질적 이미지들로 짜여져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살펴보면 홀수행은 홀수행끼리, 짝수행은 짝수행끼리 의미 맥락이 연결되게 깍지끼듯 구성된 특성을 발결할 수 있다. 일종의 어긋매끼식 병치 구조 형식인 셈이다.  홀수행을 보면 선문답처럼 간결한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할머니와 화자가 서로 상대방의 바지가 길다라고 하면 그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답변하는 형식이다. 제1연의 화자는 아마 날씬한 몸매를 위하여 다이어트를 한 게 분명해 보인다. ‘다이어트로 몸 살을 뺀 슬림한 몸매’는 곧바로 지하철 구내에서 보아온 광고 문구로 링크되고, 그 광고 문구가 그대로 몽타주처럼 편집, 연결된다. 언어유희적이며 경쾌한 문구의 그 ‘슬림한 몸매’의 주인공은 다음 연의 첫 행을 이룬다.  ‘그러면서 그녀는 민다리를 꼰다’와 그 다음 행은 내적 맥락의 연속성을 볼 수 없는 단절적 구조로 되어 있다. 굳이 연결고리를 찾는다면 ‘민다리를 꼰다’의 ‘꼰다’이다. 다리를 꼰다에서 새끼를 꼰다로 불연속적 하이퍼 링크가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추수가 끝나고 새 지붕을 이거나 가마니를 짜기 위해 새끼꼬기에 들어가는 시절 농악대들이 지신을 밟으며 마을의 집집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이하 땅신(지신)에서 높은 곳의 신 하느님으로, 하느님에서 하늘로, 높은 하늘에서 누르기로, 신기(神氣)를 가장 먼저 가장 강력하게 받게 되는 신의 땅 하면 해발 5천미터 티베트의 라싸, 가난한 그곳 사람들이 끊임없이 경건히 경전을 욀 때, 해발 5십미터 소나무 고갯길의 이 땅에서는 몸매 만들기(몸짱)에 목메고 있는 현실로 링크하여 시공과 의식, 무의식을 넘나들고 건너뛰며 집합적 결합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편의상 이렇게 해석해 보았지만, 작가의 자유분방한 하이퍼적 상상과 의식의 흐름을 어떤 틀에 가두어 해석할 수는 없다. 미국의 한 비평가는 “모든 글읽기는 오독이다.”라고 한 바 있지만, 특히 하이퍼시의 경우 글 읽기의 최종적 이해는 독자 각자의 즐거운 몫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의 다른 작품 ?달팽이와의 대화?는 교통신호를 기다리고 건너는 사이 달팽이를 기른다는 맹인 아이와 나눈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달팽이 기르기의 특이함이나 신기함도 시읽기의 재미를 더해 주지만, 지극히 사실적인 대화에서 관념을 찾아 볼 수 없는 특성을 보인다. 마치 교통 신호처럼 하나의 기호가 되고 캐릭터(달팽이)가 되어 아이는 ‘달팽이 길로 사라진다.’ 나머지 세 편 ?빨강보다 더 빨강? ?떡갈나무 많아? ?쪽공원의 쪽공간?들도 시어의 어감이나 감각적 이미지의 분방한 연상으로 다채롭게 완성시켜 놓았다.    순식간에 내 눈의 자동 셔터가 찍은 한 컷의 동영상. 2008년 5월 25일 정오 일행들과 북한산 사모바위 틈에 뿌리 뻗어 만개한 라일락 꽃 짙푸른 향기에 취해 있을 때, 햇빛 환한 비봉碑峰쪽으로 휘익 날아가던 은백색 깃털들. 야아,  소리 지를 틈도 주지 않고 반짝이는 빛을 던지며 10분의 1초의 속도로 내 시야 를 벗어나는 은빛 부챗살. 그 반짝이는 부챗살은 화창한 초여름 날 산이 사람들에게 보내는 경쾌한 UFO? 그럼  지금 산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무성하게 돋아난 녹색 이파리들이 노랑 하양 보라꽃들과  어우려져 한창 신명나는 판을 벌이고 있는 중! 12월 아침 아이들과 식탁에서 죽은 닭의 살점을 포크로 찍어 먹으며, 빈센트 반 고흐의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 사이프러스와  찬란한 별밤 길 그림을 보고 있을 때, 소리 없이 도시 전체를 점령해버린 은백색의 젊은 눈들. 질주하는 차바퀴에 깔린 눈들의 몸에서 나온 맑은 피는 도로에 줄줄 흐르고, 아이들은 포크를 던지고 와아, 환성을 지르며 공터로 뛰어나가고, 도시는 하루종일 은백 색의 축제. 너는 지금 사람들의 무의식無意識 속 공간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환한 불꽃들을 팡팡 터뜨리는 UFO의 고향을 찾아 네팔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해발 5000미터가  넘는 백색고산지대白色高山地帶. 그곳은 어떤 것이든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지점. UFO의 탄생지는 그곳 새파란 공기층 속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심상운 ?은백색 미확인 비행물체? 전문    견고한 이미지의 모더니즘 시를 써 오던 심상운 시인은 오남구 시인의 디지털리즘 선언 무렵부터 동참, 디지털 시론과 최근 하이퍼 시의 이론을 함께 개척해 가면서 시적 경향을 그런 쪽으로 급선회하여 작품을 제작해 오고 있다.   인용한 시 ?은백색 미확인 비행물체?는 순간 포착의 한 이미지를 좇아 의식, 무의식의 자유분방한 연상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신록의 5월 북한산 산행에서 바람에 물결처럼 뒤집히며 비봉(碑峰)쪽으로 몰리는 나뭇잎들의 풍경을 ‘은백색의 깃털’ 이미지로 순간 포착한다. 그 은백색 깃털은 ‘은빛 부챗살’로 전이되고, 그 환상적인 아름다움은 ‘경쾌한 UFO’로 건너뛴다. 이 은빛 이미지의 파노라마는 어느 12월의 식탁에서 닭고기를 먹으며 반 고흐의 그림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을 보고 있을 때, 소리 없이 도시 전체를 덮어 버린 강설(降雪), 곧 ‘은백색의 젊은 눈들’로 가지를 치며 링크된다.   그 ‘은백색의 축제’는 만년설의 나라 네팔의 ‘해발 5000미터가 넘는 백색 고산지대’로 뛴다. 시인은 숨 쉬기조차 어려운 고지의 ‘새파란 공기층’이야말로 끝없는 공상과 환상을 불러 일으키는 UFO의 탄생지가 아닐까라는 상상으로 텍스트를 마감한다. 별이 빛나는 길 그림을 보고 있을 때 바깥은 어느새 구름끼고 소리없이 눈이 내려 도시를 덮어 버린 대조적 풍경과 약간의 가지치기 외에는 주로 연상에서 연상의 확산으로 이어진 하이퍼 링크를 보여 준 작품이다.  시인의 다른 작품 ?사각 스크린?도 스크린 같은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의 역동성을 모티브로 무한 상상을 환상적으로 펼쳐 낸 작품이며, ?그림 또는 링크? ?파란색 기차? ?헤드라이트? 등도 스타일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배들녘은 풋벼의 바다, 아침 고요로운 지평선에 풍! 떠올랐다가 풍선처럼 서서히  내려오고 있는 붉은 사과, 동진강 하구에서 쌀을 실으러 거룻배가 들어왔었다는 ‘배들이’  들판! 손에 든 들판은 피켓! 손해난 ‘배 들이’어서 빚으로 들들 볶일 판 피켓 들고 전봉준이 들이칠 판, 숨을 멈추고 있는 풋벼의 바다 황혼에 내가 주먹 속에 받아 쥔 해 사과를 굴린다, 굴러가며 가르마 같은 선을 긋는다 선을 따라 불이 화~ 화~ 일어난다                                                                   -오남구 ?사과? 전문    번쩍이는 의식과 감각의 오남구 시인은 일찍이 시의 관념 파괴와 시작 과정의 심리적 현상을 수학적 논리로 증명해 왔으며, 디지털 시대의 문화 논리를 재빠르게 접수하여 디지털리즘을 선언하고 작품적 실천을 주도함으로써 시단의 주목을 받아 왔다. 그리고 비록 미국보다 20여년 뒤의 일이요, 우리에게 하이퍼 문학이 소개된 이후 5?6년 뒤의 일이긴 하나 그는 우리 문단에 하이퍼텍스트 시를 논의의 중심에 올려 놓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더러 즉흥적이고 산발적이거나, 때로 단편적인 이론을 가다듬고 체계를 잡을 수 있도록 코치하고 논리적 뒷받침을 해 준 이는 문덕수 시인이다. 특히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당연히 전자하이퍼 문학을 말하는 것인데, 그와 구별되는 종이하이퍼 문학을 문덕수 시인이 천명해 줌으로써 하이퍼시 논의의 획기적 진전을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오남구 시인은 이번에 ?사과? ?관광버스? ?젓가락? ?신호등? ?약수터?의 5편을 선보이고 있다. 시상 전개의 재치와 언어에 대한 감각, 그리고 문장의 팽팽한 긴장미가 오남구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예시 ?사과?를 보면, 자유로운 언어놀이, 의미의 전이와 전복, 풍자적 반전 등 하이퍼 링크의 두드러진 개성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동진강 상류 ‘배들녘(조선 후기 조병갑이 물세를 받다가 농민들의 저항을 받아 동학란을 자초한 만석보가 있는 들녘이다)’, 그 배들녘은 지금 한창 자라는 풋벼로 바다 같은 풍경을 이룬다. 화자는 마치 역동적인 동해의 일출처럼 풋벼의 아침 지평선 위로 해가 ‘풍!’하고 솟아올랐다가 서서히 빛을 확산하는 모양이 거대한 붉은 사과 같다고 인식한다. ‘배들녘’은 원래 ‘동진강 하구에서 쌀을 실으러 거룻배가 들어왔었다’고 해서 ‘배들이’ 들판이라 이름지어진 곳이다.   시인은 그 ‘배들이 들판’이라는 말에서 ‘들판’의 동음 어의 뒤집기의 연상 링크로 의미의 맥락을 전복시켜 동학란의 역사적 상황으로 전환시켜 나간다. 그러니까 ‘들판(野外/平野)→들판(擧板)→피켓’으로 연상작용을 펼쳐 간다. 그 사이에 거룻배들이 드나들었다는 뜻의 ‘배들이’ 역시 의미 연상의 가지치기를 하여 ‘손해 난 배’ 들로 뒤집고, 그 적자를 본 배들은 빚 독촉에 ‘들들 볶일 판’의 ‘들판’으로, 다시 들판피켓을 들고 ‘전봉준이 들이칠 판’의 ‘들판’으로 분방하게 링크해 간 것이다.   이렇듯 숨가삐 언어유희로 전의(轉義)시켜온 다음 고요한 바다(수평선) 같은 풋벼의 들판으로 돌아가 황혼녘 지는 해를 사과처럼 주먹 속에 받아 쥐고 굴린다. ‘주먹 속에 받아쥔 해 사과를 굴린다’의 ‘굴린다’는 말은 지금까지 어의를 연상에 의해 이리저리 ‘굴려’ 온 것과 동일선상에 놓여 통합된다. 끝 부분의 가르마 같은 선을 따라 불이 화~ 화~ 일어난다라고 표현한 대목은 이 작품의 집합적 의의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간 동학란 이미지로 결집됨을 말해 준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약수터?는 마치 한 폭의 동영상의 상황화(狀況畵) 같기도 하고, 짤막한 상황극 같기도 한 재미를 던져 준다. 해돋이 무렵의 약수터 풍경은 그림 같다. 물을 받으며 (옆에 빈 자리가 있는) 장의자에 앉은 노인 셋이 기호화된 캐릭터로 등장한다. 캐릭터 ‘빨간 딸기코’가 침묵을 깬다. “왜 걔가 안 보여?”, 캐릭터 ‘낡은 골프모자’와 ‘굵은 테안경’이 지극히 간결하고 천역던스럽게 “그러게 말여” “갔나 벼”라고 주고 받고는 다시 말없이 앉아서 제 각기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던져 놓고 있다. 수다는커녕 이런저런 말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노년, 한두 마디로 수천 마디에 값하는 행간을 읽어내는 나이의 상황극을 완결짓는 것은 끄트머리에 등장하는 캐릭터 ‘반백의 꽁지머리’이다. 그는 ‘구릉에서 약수터로 내려와 페트병 하나를 놓고 몇 번 팔 굽혀 폈다가 빈 의자 끝에 앉는다.’ 사실적 상황의 절묘함은 더 이상 언급을 요하지 않는다. 그리고 작자의 말에 의하면, 셋째행에 있는 ‘해가 반사경처럼 약수터를 환히 밝혀 놓는다.’는 진술은 떠오르는 해가 한 캐릭터의 대머리에 비침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숙연함과 코믹함이 작가 특유의 절제미로 잘 버물러진 한 편의 시로 보인다.  지금까지 하이퍼시 텍스트를 접해 온 시인들 가운데는 이념과 용어, 이론과 작품, 자기 모방과 유행어, 감동 부재 등의 문제를 지적하며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는 이들이 없지 않다. 이런 문제는 하이퍼시를 쓰고 있는 당사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논의되는 문제점을 해결하고 난관을 차근차근 극복해 나갈 때 하이퍼 모더니즘의 시대는 보다 빨리 열릴 것이다.  원로 김광림 시인의 ?바위벽에 드러난 얼굴? ?八旬이란? ?외톨이? 등 지극히 절제된 세 편은 세상과 사물을 대하는 연륜의 깊이와 무심, 젊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흔히 보게 되는 요설이나 겉멋, 군더더기, 손끝 기교를 전혀 볼 수 없는 담백함과, 거울 같은 시심을 직면케 한다. 그 중 ?외톨이?는 세상 잡사를 초월한 아득한 시적 경지를 보여 준다.     외가지/끝에/앉아 있는/새야/참 새야/이제 그만/조잘댈/대상도 없어/아득히/정처없이/ 바라보기만 하는/나 같은/것아                                                                 -김광림 ?외톨이? 전문    이것이야말로 정신의 하이퍼 링크이며 절제된 텃치의 자화상이요, 8순의 시인이 쓴 원숙한 자작시론이 아닌가 싶다. ‘이제 그만/조잘댈/대상도 없어/아득히/정처없이/바라보기만 하는/나 같은/것아.’ 같은 경지에 매료되다 보면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최근의 관심사인 하이퍼시 특집에 집중하게 된 까닭에 심도 있게 논의하지는 못하지만, 김기성의 ?천직?, 신작시집 중 김윤희의 ?비의 포식?, 김순진의 ?복어 화석?, 이선의 ?누드크로키? 등을 재미있게, 혹은 인상 깊게 읽었다. 그리고 현대시협 세미나 때 거론된 신인 김용인(7월호 당선) 시인과 시문학문인회 시낭송회 때 참석하여 의외의 면모로 주목받은 이옥교(7월호 당선) 시인의 데뷰 작품을 정독하였다. 김용인의 심오한 개성과 이옥교의 예리하고 간결한 시정(詩情)에 박수를 보낸다.      
371    하이퍼시 도우미 3 댓글:  조회:4288  추천:0  2015-02-18
하이퍼시대 시 예술의 방향   한강아리랑을 통해서 살펴본다...---   정보, 네트워크, 인터렉티브, 융복합 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활용하는 작업들이 주목받고 있다. 조형면에서는 돌덩이, 석고 덩어리로서의 조각에서 더 나아가 컴퓨터, 로봇, 스마트폰과 같은 형태의 정보 유기체로서의 작품에 시선을 돌리고 있다. 음악, 시각예술에 있어서도 감각적인 감흥을 일으키는 예술의 꽃으로서의 단계에서 더 나아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사고를 이끌어내는 정신의 꽃으로서의 작품, 매체 활용 면에서도 단일 매체에서 더 나아가 융복합예술, 인터렉티브예술에 관심이 돌려지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현실을 이루고 있는 지능형테크놀로지를 활용하고 반영할 때, 우리의 삶과 정신을 이끌어가는 예술 본연의 역할을 찾아갈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리라   혁명의 시대다. 스마트폰을 쓰고 있다. 첨단과학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뇌스캔을 예고하고 있다. 빅데이터에 의한 미래예측 시대를 열고 있다. 로봇, 사이보그는 우리의 현실이다. 달라졌다. 그에 비해서 우리 몸은 달라지지 못한다. 짐승과 인간의 몸, 생체구조는 다름이 없다. 영혼도 별도로 없다. 컴퓨터와 인간은 유난히 닮아가고 있다. 우주로 뻗어나가고 있다. 힉스등을 캐내고 있다.   그런데 비해서 우리의 몸은 달라지지 못하고 있다. 따라가지 못한다. 우리의 뇌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과학의 진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는 이미 지능형테크놀로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구조를 거의 전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우리는 이를 활용하고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클릭, 검색, 답글 하나까지 모두 데이터화되고 분석되고 처리된다.   정보화사회, 지능형 테크놀로지 시대, 네트워크 시대, 융복합시대, 첨단과학시대, 생명공학시대, 이러한 생활환경을 반영하고 이를 제대로 표현해내는 역할이 필요하다. 시예술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퍼 시예술 운동은 이러한 생활환경, 지능형 테크놀로지, 네트워크, 융복합, 첨단과학 환경 속에서 태어난 시예술운동이다.   이러한 여건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활용하고 이를 시예술로 표현해냄으로서 정신의 꽃을 피워내는 일이리라   [출처] 하이퍼아트 시문학으로서의 멀티포엠아트'한강아리랑'|작성자 장경기 하이퍼시대 시 예술의 방향   한강아리랑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하이퍼시대 시 예술의 방향  정보, 네트워크, 인터렉티브, 융복합 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활용하는 작업들이 주목받고 있다. 조형면에서는 돌덩이, 석고 덩어리로서의 조각에서 더 나아가 컴퓨터, 로봇, 스마트폰과 같은 형태의 정보 유기체로서의 작품에 시선을 돌리고 있다. 음악, 시각예술에 있어서도 감각적인 감흥을 일으키는 예술의 꽃으로서의 단계에서 더 나아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사고를 이끌어내는 정신의 꽃으로서의 작품, 매체 활용 면에서도 단일 매체에서 더 나아가 융복합예술, 인터렉티브예술에 관심이 돌려지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현실을 이루고 있는 지능형테크놀로지를 활용하고 반영할 때, 우리의 삶과 정신을 이끌어가는 예술 본연의 역할을 찾아갈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리라   혁명의 시대다. 스마트폰을 쓰고 있다. 첨단과학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뇌스캔을 예고하고 있다. 빅데이터에 의한 미래예측 시대를 열고 있다. 로봇, 사이보그는 우리의 현실이다. 달라졌다. 그에 비해서 우리 몸은 달라지지 못한다. 짐승과 인간의 몸, 생체구조는 다름이 없다. 영혼도 별도로 없다. 컴퓨터와 인간은 유난히 닮아가고 있다. 우주로 뻗어나가고 있다. 힉스등을 캐내고 있다.   그런데 비해서 우리의 몸은 달라지지 못하고 있다. 따라가지 못한다. 우리의 뇌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과학의 진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는 이미 지능형테크놀로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구조를 거의 전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우리는 이를 활용하고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클릭, 검색, 답글 하나까지 모두 데이터화되고 분석되고 처리된다.   정보화사회, 지능형 테크놀로지 시대, 네트워크 시대, 융복합시대, 첨단과학시대, 생명공학시대, 이러한 생활환경을 반영하고 이를 제대로 표현해내는 역할이 필요하다. 시예술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퍼 시예술 운동은 이러한 생활환경, 지능형 테크놀로지, 네트워크, 융복합, 첨단과학 환경 속에서 태어난 시예술운동이다.   이러한 여건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활용하고 이를 시예술로 표현해냄으로서 정신의 꽃을 피워내는 일이리라   [출처] 하이퍼아트 시문학으로서의 멀티포엠아트'한강아리랑'|작성자 장경기    
370    하이퍼시의 도우미 2 댓글:  조회:4089  추천:0  2015-02-18
  시작 노트 김규화         세상의  모든  사물은  의미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  ‘의미’라는  말은  ‘언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의미는  언어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세상  만물에는  모두  언어가  있다. 언어는  사물에  붙은  의미이고  그 의미는 관념으로 성장한다. 위의  말은  완전히  맞는  말이  아닐  수도  있다. 언어  수의  한계가  모든  사물을  대신하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학· 과학 기호도  생겼으며, 언어 예술인  시에서는  비유가  발생하는  계기가  된다. 과거  유아시절의  꿈  같은  아름다운  기억과  철학자의  심오한  사유  등은  언어가  없이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우리가  보고  느낀  것을  언어가  연결시켜 주지  못할  적에는  기억하거나  사유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일 찍이  프로이트가  하였다. 언어는  언어  자체로는  홀로  설  수  없다. 어디까지나  사물에  꼭  붙어서야, 혹은  관계되어서야  비로소  선다. 세상 이  처음  열릴  때  사물이  있었고, 후에  언어가   있었다고  구약성서에서는  말한다. 하느님이  만물을  만들고  아담 이  언어로써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인간 세계에서  언어란  무엇일까. 20세기  전반의  초현실주의  시인  트리스탄 차라는  그의  시에서,  “만약 낱말(즉  언어)이라는  것이  마치  봉투나  포장지에  붙은  우표처럼  사물에  붙은  딱지에  불과하다면  거기에  남는  것은  먼지 와  몸짓 뿐이며  이  세상에는  기쁨도  슬픔도  없을  것”이라고  읊었다. 사물에  붙은  ‘딱지’는  사물  자체도  아니고  사 물의  성질과도 일치할  수  없는  다분히  형식적이고  자의적인  것이기  때문에  떼내버려도  되는  ‘먼지’나  ‘몸짓’  같은  하찮은(?) 것이겠다. 먼지나  몸짓은  시니피에(의미)와  시니피앙(소리)으로  이루어진  기호이고  그러한  기호는  언어라고  불린다. 우리는  그  언어로써  시를  쓴다. 언어가  없는  시를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언어의  두  요소  중의  하나인  시니피앙  즉  소리(청각 영상)를  너무  홀대했던  것  같다. 과거의  내  시는  무거운  의미로  뒤덮였었다. 가령  고독,  불안,  생명  같은  관념   말이다. 이  세상에는  무가치한  관념의  압력이  너무  많다. 그러한  의미를  시에서  가급적  빼고  싶다. 사물의  본래적이고   적나라한  이미지는  언어라는  형식을  벗어나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가  음악의  선율이  아니고  미술의   선과  색채가 아니며  오직  언어일진대  그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그래서  나는  단지  그런  무의미의  상태를  동경하 는  것 만으로  나의  시작 태도는  성과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십여 년  전  대만의  한  시낭송회에서  중국어 시 낭송을  들을  때, 뜻은  전혀  알  수  없으나  소리의  사성인  평·상·거· 입성과  어조만으로도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  후로  나는  가끔씩  틀어 놓고  귀에  익숙한  우리 말의  의미를  빼 버리고  소리만  듣는  시도를  해보거나  혹은  전혀  알아 듣지  못하는  외국어의  화면을  보면서  ‘소리’만  듣는  즐거움 도  맛본다. 나는  될  수만  있으면  모든  존재의  기표로  시를  쓰고  싶다. 언어학자  소쉬르가  말하는  시니피앙, 즉  ‘소리  이미지’로  쓰고  싶다. 기표의  동일성 (예를 들어  ‘등’은  등불, 등꽃, 사람의  뒷등  등)의  연결은  하이퍼시의  이미지를  만드는  에너지가  된다. 이  이미지들은  서로  연관성  없이  현실 세계와  상상(혹은 가상) 세계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서  리좀을  만들고  구절과  구절, 행과  행, 연과  연의   단위로  다층적 구성을  이루는 (나의) 하이퍼시가 된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오늘날, 사람들은  아날로그적인  자연을  떠나  환상적인  가공세계의  마력에  빠져들어 버렸다. 인터넷이나  TV  등이  보여 주는  하이퍼적 세계에  모두  미혹되어  있다. 시도  하이퍼적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 은  시대의  탓이라고  하겠지만…….  
369    시; 당신의 뇌는 건강합니까 댓글:  조회:2185  추천:0  2015-02-18
  에는 여러 종류의 그림이 캡처되어 있습니다.   숨은그림찾기는 늘 흥미롭지요?  자,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해볼까요? (릴렉스 릴‥렉스)   * 온 가족이 환하게 웃는 그림이 인상적이군요.   그럼, 먼저 가오리를 찾아볼까요? - (아, 술안주? 취해서 어머니에게 소주병을 던지던 아버지, 벌름거리는 콧구멍)   * 흠흠,������신발������도 찾아보시죠, - (내 여자 친구에게 빨간구두를 사주고 영화관, 형, 거세해 버리고 싶었‥)   * ������성냥개비������도 어렵지 않게 찾았군요? - (직장 상사가 그녀 엉덩이를 만지네. 나쁜자식! 고추를 확 불질러 버릴‥)   * 숨은 그림에서 ������8분음표������가 자꾸만 튀어나온다고요? - (아이는 무릎을 꿇고 ������멍멍������ 개 짖는 소리를 내요, 친구들 책상 옆… 토끼뜀…어지러워요, 5학년, 담임)   * 어렵게 숨은 그림에서 ������버섯������을 찾았군요? - 등굣길, 버섯머리 소년, 50원짜리 동전을 주워요. 친구 “L”이 돈을 잃어버렸다고 울어요. 나는 사탕을 사먹고 들판에서 메뚜기를 잡아요. 나는‥ 더 이상 학교에‥가지 않‥아(시장, 아이스케키통)      PS:   미간을 찌푸리지 마세요, 릴렉스        경계심을 풀고 당신도 함께 놀이를 즐겨보시죠?         “오, 제발! 죄책감이나 부담감은 갖지 마시길!”                  에는 어머니의 도시락이 없는데,         이상하게 어머니의 도시락이 발견되지는 않나요?         게임을 계속하시죠, 갑자기 게임을 멈추면 프로이드 아저씨가         광레이저 돋보기로  당신의 과거를 추적하여         표본을  학계에 제출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뇌는 건강합니까?  
368    탈관념의 꿈꾸기 댓글:  조회:4277  추천:0  2015-02-18
  [하이퍼텍스트 시론 1]     탈관념의 꿈꾸기(Image-dream) ― 시집 「실험실의 미인」을 중심으로     吳南球 (시인, 평론가)     ❙ 들어가며 ❙현대시가 ‘해체에서 통합’으로 가고 있다. 해체된 언어(조각, 유니트)가  다시 통합되는 원리는 무엇인가?,'탈-관념의 꿈꾸기(Image-dream)'는  일종의 초현실로서 저절로 통합되어 자동기술 되는 ‘탈-관념'의 시 쓰기이다.     1976년, '시인의집' 모임에서 현대시의 ‘수학적 존재 증명’을 얘기하곤 했다. 모임이 활기를 띠기 시작할 무렵 한성례씨가 찾아왔다. 분위기가 갑자기 환하게 느껴지는 용모였다. 가까운 문우들에게 필자가 이 모임을 탈관념의 ‘실험실’이라고 말했는데, 그의 시를 살펴보니 ① 탈관념의 선언에 영향을 받은 존재론적인 것과 ② 탈관념의 언어여행, 또는 감각여행의 감성훈련 과정에서 비롯된 것과 ③ 탈관념 그 습작과정에서 쓰여진 것과 ④ 수학여행이라는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시고(詩稿)들을 읽어보니 모던이스트 중에서도 모던이스트로 그 문명비평적인 쎈스의 풍자와 기지들은 많이 지나칠 정도여서 내게 씨(氏)가 시골사람이라는 걸 아조 잊어버리게까지 하고 있다.”   미당(서정주)이 한성례씨의 시집에 붙인 서문의 글이다. 이 말이 아니라 해도 시를 읽어보면 독자는 깨뜨려진 어떤 낮선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시는 표백제로 얼룩진 물감을 탈색해서 이제 막 내어놓는 옥양목 같다고나 할까, 고정관념이 깨뜨려지고 있는 시어들은 낯설고 싱싱하다.     한 가름, 탈관념 선언에 영향을 받은 시   당시 탈관념의 실험을 시작하면서 모임에 내세울 새로운 이슈를 선언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미당을 찾아가서 자문도 구하고 노장사상(老莊思想)도 읽었다. 동경대전(東經大全)도 다시 읽었다. 숙고한 끝에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평소의 소신대로 한국적인 사상에 기초한 선언문을 작성한다. 그 해가 1980년 1월 무렵이었다. 후에 그 일부가 경구(警句)처럼 동인지 표지에 한동안 게재된다. 그 표지에 써 놓은 글은 이러하다.   “신은 시인 앞에 오면 한 낱의 낱말이다. 시인은 낱말을 죽이고 또 창조한다.”   이 같은 문구는 동인들 중 크리스천들에게는 충격적이 아닐 수 없었다. 필자는 시를 쓰는 ‘주체’에 대해서 ‘신이 아니라 사람, 즉 시인’이라는 등, 시의 본질이 되는 요인들을 하나하나 담론해 갔는데, 물론 그 선언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내용이었다. 그것이 바로 다음 항에서 말하는 탈관념의 논리를 구축해 가는 ‘쓰레기통 문답’ 또는 ‘함수f(x) 시론’인데, 지적이고 논리적이던 한성례씨는 이러한 시론을 좋아했다. 이 무렵 그는 갈등하며 시적인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당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관념적 허구’로서 절대자를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허무감’을 느꼈고, ‘막막한 신천지에 서듯’ 외로움을 타고, 불안・초조 등의 실존주의적 경향이 나타났다. 다음의 시를 보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그가 드디어 동양적인 사고로 ‘직립’하여 바로 서는 자존적인 자의식을 갖게 된다. 그래서 서구화된 우리 현실을 바로 직시하고 절망과 고뇌를 반복한다.     1.「무풍대에서」에 나타난 자아, 그 직립   「무풍대에서」그가 자아의 눈을 뜨고 바라본 진실은 무엇인가? 시를 보자.   종소리 속에서 느릿느릿  뚝 뚝 떨어져 내리는 관성만 남은 일상 더듬이가 필요한 날에는 볕이 드는 쪽과 음지를 혼동한다.   낯선 바람 원점 향해 위치 변동 꽉 채우고 있는 물먹은 공기 빠져나갈 출구가 없다. ─「무풍대에서」중에서    첫째, 사고가 신의 세계에 갇혀 “종소리 속에서 / 느릿느릿 / 뚝 뚝 떨어져 내리는” 그런 관성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정작 옳고 그름의 이성적인 ‘더듬이’의 가치 판단이 필요할 때마다 그 관성으로 인하여 그 판단이 혼동된다. 둘째, ‘낯선 바람’조차 불지 않는 곳이라고 파악되는 ‘무풍대’이지만 ‘낯선 바람’이 태동한다. ‘낯선 바람’이란 시인이 의식한 ‘새로운 것’ 즉 서구적이 아닌 동양적인 의식의 ‘새 바람’이다. 그런데 우리 삶의 현실이란 서구 정신문화가 포화된 상태로서, “꽉 채우고 있는 / 물 먹은 공기”로서, ‘새바람’의 출구도 없는 무풍지대로 인식된다.   구겨져 쓰레기통 속에 곤두박질하는 멍한 하늘 그 언저리는 꼭  지평에 맞닿아 숨죽이고 있다.   직립한 바람은 직립한 바람끼리 손잡고 있는 무풍대에서    껌딱지로 도배된 기지촌의 포도처럼 사인 코사인의 귀를 맞추며 덕지덕지 하품으로 이어 놓는다. ─「무풍대에서」중에서    셋째, 그는 이 현실을 직시하면서 절망을 느낀다. “구겨져 쓰레기통 속에 / 곤두박질하는 멍한” 하늘을 본다. 또 죄지은 듯이 “꼭 / 지평에 맞닿아 숨죽이고” 있고, ‘기죽은 초라한 자아’ 그 실존의 위기를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시인으로서 ‘직립’ 하여 ‘바로 서는’ 자의식의 입지(立志)를 한다. 물론 ‘기지촌’, ‘껌딱지’의 서구적 극한 상황에서도 의연한 의지로 견디어야 하는 숙명이다. 이제 그는 무풍대에서 직립한 바람의 존재로서 홀로 서 있다.     2. 「벼랑 끝에서」의 춤   신을 ‘관념적 허구’로 파악하고 ‘절대자’를 부정했으나, 그는 아직 확고하지는 못하다. 그래서 실로 한성례씨는 두려움 속에 있다. 신천지에 서듯 막막함과 불안・초조의 벼랑에 서게 된다. 이때 ‘춤’을 추게 되는데, 불안・초조로부터의 극복과 탈출을 위한 몸짓이다. 이 절대 고독상황에서 손잡아 주는 것은 새로운 의식의 ‘어설픈 바람’ 뿐이며, 그 절실한 모습에 비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낭떠러지에 서서 춤을 춘다. 동작보다 언제나 한 템포 느린 음악   아래로부터 걷어 올라온 바람이 어설프게 손잡아 준다.   언제부터였을까  엄청난 배반의 현실에도 때때로 풋풋한 여명을 맛보곤 한다.   내 가슴 속에 출렁이는 배 한 척 무거운 방황은 젊은 날의 피를 낭비하는 것이라 해도 음울한 예정론에 기대를 걸고 출항을 서둘렀다.   이제 나이 드는 것이 타락의 나이테라면 차라리 돌아가지 말아야지   벼랑 끝에서 느릿느릿 춤을 춘다. ─「벼랑 끝에서」전문     3.「불완전 명사의 저녁」에 나타난 존재   눈을 뜬 자아, 그래서 막 태어난 '불완전 명사'로 나타난 존재! 그 직립에 의한 행보는 방황과 갈등이다. 벼랑에서 새로운 출항을 하게 되지만 이는 불안한 항해로서 익숙지 못한 실존주의자의 삶이다. 좌절과 불안과 머뭇거림의 연속이다. 그의 사상은 불투명한 상태로 “시침을 살피며 얼룩진 돛”을 내리는 “머무는 일이 불투명해서” 늘 갈등 한다.   터널로 빠져 드는 녹슨 연기 시침을 살피며 얼룩진 돛을 내린다. 철분의 붉은색 앙금으로 가라앉히고 머무는 일이 불투명해서 늘 자맥질처럼 움직인다.   퇴색된 석양 언저리에서 태우며,  가늘게 남은 내 생의 나머지 끈을 푸는 저녁   줄자로 잴 수 없는 문화의 어정거리는 습성  그 물결을 거스르지 못한다.   터널로 빠져드는 녹슨 연기 아우성으로 떠는 흐느낌이다. ─「불완전 명사의 저녁」 중에서   그러면서, “가늘게 남은 내 생의 / 나머지 끈을 푸는 저녁”으로 그의 존재(存在)를 확인하며, “줄자로 잴 수 없는 / 문화의 어정거리는 / 습성”을 꼬집어 “물결을 거스르지 못한다”고 스스로 질타한다. 존재자의 갈등! 바로 진실과 연민을 느끼게 하는 시인, 그 인간다움이다. 이러한 그는 「도편수의 노래」에서 스스로의 배-새로운 출항을 위한 도편수가 되기도 하고, 줄타기 하는 삶의 곡예사로서 ‘땅에 발 디디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다.      두 가름, 언어여행 또는 감각여행의 감성훈련에서 비롯된 시   이렇듯 그가 사물에 대한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험을 했는데, 그것은 ‘최면을 통한’ 자동기술(自動記述) 훈련이었다. 그 한 가지 내용을 보면,   “자, 자세를 가다듬고 눈을 감는다. 편안히 호흡을 고른다. 깊이 숨을 들이 마신 후에 아랫배에 지긋이 힘을 모은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숨을 쉰다. 1초, 2초, 3초……. 이제 감각여행을 떠난다. 태양! 태양을 마음에 그린다. 태양을 향해서 몸이 둥둥 떠간다. 경비행기 속도로 간다. 빛의 속도로 간다고 생각한다. 1초, 2초, 3초…. 태양! 태양이다! 느껴본다. …뜨겁다. …탄다!…… 눈을 뜬다.”   대강 이런 식으로 실험을 했는데 그 성취는 괄목할 만 했다. 눈을 떴을 때는 대체로 들뜬 상태가 아니면 착 가라앉은 상태였다. 공통점은 한결같이 마음이 가벼워졌고 바라보는 사물들이 움직인다고 했다. 여기서 ‘움직인다’는 것은 느낌을 말한다. 몇 분 전만 해도 무심히 무감각하게 보아 넘겼던 커피잔, 스푼, 화분, 의자 등이 새로운 정서로서 움직인다. 그 성취 정도는 사람들마다 각기 달랐다. 불교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비교적 강렬하고 빠른 반면에, 서구적인 종교와 철학, 지식의 깊이가 강한 사람은 그 성취가 느렸다. 그의 시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는 그 즈음 겪은 갈등과 실험을 꾸밈없이 쓰고 있는데, 드디어 관념이 깨어지는 그의 꿈꾸기(Image-Dream)는 ‘황홀한’ 첫 시적 경험을 한다.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태양으로 떠난다 해서 따라나섰다.    ─ 타버린다 ─ 는 감각은 없어지고 경비행기로 출발한 우주여행은 그저 행위로만 남았다   기착지는 태양 뜨거움보다는  황홀한 색채에 질식당했다.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전문   당시 그는 자동기술의 감성훈련에 적응이 늦었던 것 같다. 개성이 강할 뿐만 아니라 지적인 서구적인 합리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자신의 곤혹스런 입장을 “태양으로 떠난다 해서 따라나섰다”로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턴가 늘 도로(徒勞)의 작업이던 ‘꿈꾸기’가 첫 느낌을 얻게 된다. 자연스러운 “기착지는 태양”으로서, 첫 시적(詩的) 체험인 “황홀한 색채에 질식” 당하는 희열을 맛본다. 이후 그는 초현실적인 감각의 시 쓰기가 익숙해진다.「구의역에서」,「변주곡에 대한 상상 연습」 등의 다양한 시각을 갖게 되고, 또한「방」,「장마」에서는 빗줄기의 기하학적인 선(線)이 꿈처럼 펼쳐지며 새로운 시세계를 열고 있다.     1.「구의역에서」의 우주적인 시점   이러한 ‘탈관념의 꿈꾸기’를 체험한 사람들은 우주적 감각인 둥둥 떠가는 ‘느낌’이 자유로워진다고 한다. 「구의역에서」는 시점의 ‘일상성 벗기’라는 ‘감성훈련’으로 빚은 큰 성과다. 그가 바라보는 사물(역, 길, 사람 등)이 둥둥 떠다니며 지구의 자전에 따라 시각이 바뀐다. 낮에 바로 서 있던 물건이 밤이면 거꾸로 처박히는 모습이 된다. 이 시는 바로 우주적인 시각에서 본 움직임인데, 탈관념의 꿈 중 하나이다. 한성례씨에게는 그녀 인생의 무대, 그 지구가 자전함에 따라 바로 서기도 하고 거꾸로 서기도 한다.   둥둥 떠가는 구의역 내 앞에 누워 있는 길. 뱉어낸 사람들 물살로 흘러 흘러서 무시로 흩어져 간다.   질주하던 길이 문득 산 밑에 가서 머문다. 시선 끝으로 길 한 줄기 붙잡으면 녹음이 앞서 무질러 오고 밀려드는 차 물결   쏟아질 듯 곤두박힐 듯 가로수 함께 일렁이다가 몇 개로 틀어지고 조각난 풍경 판토마임의 내가 거꾸로 서서 자막 속을 걸어간다. ─「구의역에서」중에서    그는 우주적인 감각이 자유로워졌고, 그에 따라 무한하게 시의 세계가 확장된다. ‘가로수와 함께 일렁이기도’ 하는 판토마임 속의 자신을 확인하면서 눈을 뜬 현실로 되돌아 와서 다음과 같이 ‘구의역’을 직시한다.     잠시 눈 뜬 플랫폼, 흘러 흘러서     투사되듯 입력(入力)되는 곳 구의역.  ─「구의역에서」 중에서     2.「변주곡에 대한 상상 연습」의 전전반측   전전반측(輾轉反側)하는 시인의 정(情)은 무엇일가? 그는 밤을 지새우고 있다. 그러면서 갈증 같은 향수를 느끼고, 그때 “기지개 켜는” 의식이 꿈꾸기를 한다.     산과 들, 강물 걸어 넘는다.   그 끝은 평행선 한 가닥 분실된 몇 낱 낯선 어둠에 섞여 보이지 않고 ─「변주곡에 대한 상상 연습」 중에서   몽롱한 의식 상태의 그의 ‘꿈꾸기’는 비몽사몽간 눈앞에 고향산천을 그려보지만 원근 속에 하나의 점이 되어 소멸돼가서 끝이 보이지 않고, 다만, “멍든 석양의 조각들이 / 도시 꼭대기에 차양처럼” 매달린 메커니즘의 현대문명 속의 삭막함만이 남는다. 현대인의 짙은 외로움이 드리워져 있다.      3.「장마」에서의 기하학적인 선   1980년대의 답답한 현실은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현실을 탈출하려는 꿈꾸기가 이루어지는데, 이때에 기하학적인 선으로 나타나는 빗줄기는 대단히 시원하고 자유분방하다.     빗줄기 속에서 뻗어 내린 흰 꼬리 화살 화살은 내게 일제히 달려든다.  몸짓으로 털고 몸짓으로 도망하고 또는 몸짓 거부로 넘어지는 행위   시대의 재채기 최루탄의 화살이 쏟아져 내린다. ─「장마」중에서    그의 시는「장마」에서 안정(安定)되고 한 단계 더 세련되었다. 빗줄기로 시작한 ‘꿈꾸기’가 “시대의 재채기 / 최루탄의 화살이 쏟아져 내린다”로서, 현실과 이어져 있다.     세 가름, 탈관념의 자동기술된 시   1. 수학적 시론의 전개   탈관념의 ‘꿈꾸기(Image-dream)’는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리는데 있어 새로운 질서의 공감각과 방향이 있어야만 망상이 되지 않는다. 필자는 그 질서는 ‘자연’에서, 그 방법은 ‘직관’이라고 설명했는데, 이것은 실험에 의한 체험적 소신이었다. 고정관념의 ‘깨뜨림’은 습작을 위한 중요한 과정으로서 상당기간 대화법으로 실험을 도왔다. 그때 집약된 내용이 ‘쓰레기통 문답’ 또는 ‘함수f(x) 시론’이었다. ‘쓰레기통 문답’은 이러했다.   ‘꽃 한 송이를 들고 신인들에게 보인다. “이게 뭡니까?”라고 묻는다. “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때 필자는 쓰레기통에 꽃을 던진다. 그리고 “쓰레기입니다”라고 말한다. 누군가 그 얘기를 듣고 와서 “쓰레기입니다”라고 대답하면 “이게 왜 쓰레기통입니까? 꽃이죠!”라고 무안을 주었다.’   이 쓰레기통 문답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첫째, 사물에 대한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려서 신선한 충격을 경험하게 하고 둘째, ‘꽃’이라는 이름이 쓰레기통(박스) 속에 들어가면 순간 ‘쓰레기’가 됨으로써 허무하게 관념(의미)이 바뀌는 것을 보여 준다. 셋째, 청각이나 시각 등 오감으로 느낀 사물에 대한 정서와 감정이 시시각각 변하며 각기 다른 언어로 표출된다는 것을 쉽게 이해시킨다. 그럼으로써 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체가 각기 다른 ‘의식의 함수 f(x)다’ 라는 가설로 유도시킨다. 당시 한성례씨는 이러한 수학적 시론의 전개를 신선한 충격으로 공감하고 받아들였다. 필자는 보다 체계적으로 시론을 정립해 가며, 그 가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설명했다.   “시인의 삶이 f(x)면 시는 그 도함수(기울기)이다. x는 ‘만남(사물)’의 변수, y는 의식 공간이다.”             2. 의식의 단면   어느 날 좌표평면 상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타나는 순간변화(의식의 단면)를 발견했다. 수학적 시론의 가설을 구체화시켜 x축과 y축으로 하는 평면좌표를 그렸는데, x축은 시간의 만남(시간적인 흐름 속에서의 만남)이고, y축은 그때그때의 ‘의식 공간’으로 구성했다. 다음은 한 ‘시인(한성례씨)’과 남산’의 ‘만남을 함수관계’로서 그 의식(체험)을 나타내 보았다.   [예] 만남의 요소-남산   ① 20대의 한 시인이 1974년 1월 처음 남산을 보았다. 이후 계속 보게 된다. 그 높이를 300m쯤으로 직감한다. 이를 y축 3에 표시한다. ② 그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동진강변의 평야지대에 살았다. 그가 산을 보아온 일상적인 의식체험은 100m 쯤의 야산들이었다. 이를 y축 1에 표시한다.            위의 ‘가나다라’ 선은 시인이 사물을 만나서 느낀 의식의 그래프이다. 이것은 의식(체험)의 한 단면이고, 여기에서 수평을 이루고 있는 선분 ‘가나’와 ‘다라’는 늘 바라보았던 일상적인 것인데, ‘반복된 사건의 일상성’이다. 그런데 상경하여 남산을 접한 어느 순간, 그 일상성이 깨뜨려지는 수직의 선분 ‘나다’가 나타난다. 이 순간의 의식(느낌)은 긴장이나 시적 충동으로 설명될 수 있다. 나는 이를 ‘일상성의 깨뜨림’이라 했고, 수평의 선분 ‘가나’ ‘다라’를 반복된 사건의 고정관념을 나타내는 ‘일상성의 직선’ 이라고 했다. 이로써 좌표평면 상에 시의 존재(기울기)가 나타나는데, 바로 선분 ‘나다’로서 긴장의 정도를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 ‘나다’의 선분은 앞의 가설인 함수 f(x)의 ‘시간 x축’과 ‘의식 공간 y축’으로 하는 좌표 상에 나타난 ‘순간변화’이다. 그래서 이것을 의식의 ‘순간변화’ 또는 ‘순간변화율’이라고 이름 붙였고, ‘느낌의 기울기’라고 했다.  이렇듯 '만남의 자극과 반응’으로 나타난 ‘순간변화율’로서 그 존재를 확인하고, ‘만남이라는 사건’에 착안하여 집합과 조합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시공에서 사물과의 만남은 무수히 진행되고 의식은 집합적으로 결합된다.’ 이처럼 시공의 개념에서 접근하여 수학적인 방법으로 좌표 위에 '나'의 존재(의식)를 나타내고, x축을 시간의 흐름, y축을 의식공간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x축과 y축 사이에 무수히 진행되는 ’만남의 사건‘을 변수 x로 가정하였다. 그래서 자동기술의 시는 무수히 사물과 만나면서 이뤄진 체험이 잠재했다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은 초현실주의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초현실 시 쓰기인 탈관념의 ‘꿈꾸기’를 하면서 시의 ‘질서는 자연에서, 방법은 직관’이라는 방법론을 제시하게도 되었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란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자연스러움’은 곧 시를 평가하는 척도가 되었다.     3. 그 습작과정에서 쓴 시,「서울의 큐비즘」   그는 그때까지 ‘매끈한 시’, ‘잘 다듬어진 시’가 좋은 시라는 소박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문예부장으로 활동하며 고교생 대상의 여러 시문학상도 수상하고 나름대로 시에 식견이 있다고 여겼던 그에게 탈관념은 커다란 충격과 혼란이었다. ‘깨뜨림’을 당한 멍한 상태라고 할까, 아무튼 이로 인하여 시적방황이 시작되었는데, 그 와중에서 처음으로 자동기술 되어 나온 작품이 ‘서울의 큐비즘’인 것으로 기억된다. 이어서 ‘지하도 풍경’도 발표했는데, 두 작품이 각각 문학지 ‘신인문학상’과 ‘대학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에게는 기념비적인 작품들이다.     핏빛 바람 갈대숲 안고 달아나는 소나무 하늘은 꽃씨 눕힌다. 누이의 속치마 능선을 타고 호랑나비 하늘을 앓는다. 소나무 허리 껴안은 거문고 울음과   한강변 세 살 난 잠실동 아이의 맏연습  아파트 아파트 우리 집은 아파트 충무로 1가에서 떠돌던 바람 소리 내어 돌아가고   호랑나비 푸득 푸드득 날개 짓 하는 하오는  종합전시장 앞 14차선 도로 악을 쓰며 누워 있다. 맨드라미 노을 넘실거리고   서울의 꿈은 유리알 맑은 모래처럼 내 온몸을 휘감는다. 남산 중턱에 해가 허리를 반쯤 걸치고 앉아 있다. ─「서울의 큐비즘」 전문   우선 시에 나타난 어휘들을 집합(集合)해 보면, "달아나는", "앓는다", "울음", "맏연습", "떠돌던", "악을 쓰며", "허리를 반쯤 걸치고" 등의 말들이 모이는데, 이것들은 모두 그 즈음의 그의 갈등에서 생성된 것으로서 인위적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표출, 순열(順列)된 것이다. 시 자체는 좀 생경스러우나 일대 혁신의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 미화되거나 인위적으로 포장됨이 없이 시인의 솔직한 진실(감정)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감이나 확신이 없다. 긍정 반 부정 반의 자세로서 엉거주춤한데,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남산 중턱에 해가 허리를 반쯤 / 걸치고 앉아 있다”의 표출이 그것이다. 그의 신경세포가 ‘반쯤’의 어중간한 상태를 자의식하고 있는 가운데, 해의 한 시점인 반쯤 앉은 상태가 강한 이미지로 입력되었다가 자동기술(순열)된 것으로 이해된다.     네 가름, 삶 언어의 집합・조합・순열의 묘    1. 언어의 표현   시인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물과 만나며 느끼는 자극(느낌→의식)을 y 라고 하고, 사물과 만나는 시간 x를 변수로 하는 의식의 함수 y= f(x)를 가정할 때, 어느 시점의 자극(만남)과 반응(의식)을 나타내는 순간변화율(기울기)이 있다. 즉 사물과 만나는 '의식(느낌)의 변화율'이 있다. 이것을 필자는 '의식의 기울기'라 하고, '긴장' 또는 '흥분' 등의 파동을 나타내는 '시의 순간 변화율'이라고 했다. 곧 시를 어떤 순간 변화율인 '생명의 파동'으로 보았다. 그래서 언어로 표현 기술되었을 때, 이 기울기(시라는 순간변화율)는 생명적이므로 의식 또는 잠재의식 속의 언어(하이퍼텍스트)는 어떤 생명의 존재질서 위에 있으며 이것은 자연스럽게 집합, 조합, 순열된다. 그래서 벤다이어그램으로 이를 도표화해서 보면 ‘언어A, 언어B, 언어C’의 표현을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그림]언어의 집합   도표를 살펴보면, 언어의 합집합인 최대공배수 ①A∪B∪C와 공통집합인 최대공약수 ②A∩B∩C 등의 모양이 나타난다. 합집합은 세 단어가 나타낼 수 있는 의미 내용의  최대로서 표현의 L.C.M이고, 세 단어가 의미 내용을 공통으로 가지는 빗금 친 부분의 공통집합은 표현의 G.C.M이다. 이 G.C.M으로써 보편적인 언어의 의미가 구성된다. 그러나 이 의미는 독자(평론가)에게 수용되고 물론 그의 체험에 의해 재구성된다.   2. 시 해설은 적분   이상의 수학적 시론의 전개는 동인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것을 바탕으로 실험습작을 했다. 그에 따른 시의 성취나 그 가치는 별도로 하고, 당시 탈관념의 ‘꿈꾸기’에 몰두했던 한성례씨의「지하도 풍경」의 한 예문을 분석해서 정리해보겠다.   범람하는 성욕의 용설란들 남아프리카 지도가 피를 흘린다. ─「지하도 풍경」 중에서   위의 예문에 “범람/ 성욕 / 용설란 / 남아프리카지도 / 피” 다섯 개의 단어가 있다. 이것은 시인이 사물과 만남(사건)으로써 생긴 단어들인데 긴장과 흥분 등 느낌의 기울기(미분)를 갖는다. 이것은 삶의 한 시점이 미분된 것이고 의식 또는 잠재의식 속의 언어(하이퍼텍스트)이다. 이 단어들이 독자(평가)에게 수용되고 해설될 때 시적체험이 되고 시인의 삶이 된다. 그러므로 해설은 곧 ‘적분’이다. 표현되는 내용은 집합, 조합, 순열된다. 여기서 표출되는 내용을 도표화해 보면,                       예문의 ‘집합① 범람하는 성욕의 용설란들, 집합② 남아프리카 지도가 피를 흘린다.'를 보자. 그림 ①처럼, ‘범람∪성욕∪용설란’의 집합과 그림 ②처럼, ‘남아프리카 지도∪피’ 의 합집합은 단어들이 갖는 상징과 이미지 등 표현의 모든 범위를 갖는다. 그리고 단어들의 내용이 겹치는 부분인 공통집합(빗금)은 특별한 의미를 만들고 공감을 얻는다. 그런데 집합 ③에서 한 행 한 행의 내용 표현이 문장을 이루고, 다시 조합, 순열로서 한 편의 시를 완성해 간다. 이와 같이 언어, 즉 의식 또는 체험으로 연결된 잠재의식 속의 단어(하이퍼텍스트)는 시인을 통해서 다시 집합, 조합, 순열해서 통합된 하나의 질서를 이룬다. 그림과 같이 ‘범람∩성욕∩용설란’으로 공통집합 되면 시인 개체 안에서 자동으로 이미지나 의미가 결합되어 생명의 질서(정서)를 갖고서 표출된다.    3. 언어의 징검다리 건너기   이렇듯 해체에서 통합으로 가는 원리는 미래 시의 새로운 항해에서 나침판이 되어줄 수도 있다. 구문론을 과감하게 파괴(탈-관념)하는 시가 길을 잘못들 경우 난해한 미로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그래서 해체된 언어들은 어떤 질서로 통합되어야 한다. 그의 시 ‘옵니버스 율’은 시인(생명)의 어떤 질서를 내포한 무의식의 흐름이고, 그 흐름의 경로(항해 -‘탈-관념의 꿈꾸기’)가 나열됨으로써 정서(질서)가 표출되었다.   햇살 빠른 음률이 피어 회부럭담 아이들 어깨 너머로 프리즘에 갈리는 하얀 겨울 햇살은 나비의 눈물같이 산 빛 초록초록 꽃밭동 머슴애의 논갈이 뒤꿈치에 펼치어 흔들리는 들판 새까만 기적의 음률이 간다   ─「들판」 전문   ‘산 빛 초록촉록 꽃밭동’ 에는 조사가 없다. 다른 행에서도 주어, 술어 등의 구문론이 다수 파괴되어 있다. 그래서 일반적인 시에서 보이는 선형성(線形性)이 없다. 비선형적이다. 또한 앞뒤의 문장이 원인과 결과, 논리가 없고 순차적이지 않다. 이 텍스트는 전통적인 텍스트에서 벗어난 하이퍼텍스트 적이라 할 수 있다. 끊어져 있는 마디가 무작위로 배열되어 있다. 그래서 독자가 이 시를 읽을 때는 징검다리를 건너가듯 언어의 마디와 마디를 뛰어 읽어가야 한다. 이때 독자는 단절된 마디와 마디 사이의 틈을 뛰는 스릴을 맛볼 수 있고, 그 공간에서 자신만의 상상을 펼칠 수도 있다. 또한 시의 행갈이 순서도 자유로워서 역순 뿐 아니라 얼마든지 행을 뒤섞어 읽어도 이미지가 선명하다.   새까만 기적의 음률이 간다 펼치어 흔들리는 들판 머슴애의 논갈이 뒤꿈치에 산 빛 초록초록 꽃밭동 햇살은 나비의 눈물 같이 프리즘에 갈리는 하얀 겨울 회부럭담 아이들 어깨 너머로 햇살 빠른 음률이 피어   그는 이러한 시들의 묶음을 ‘옴니버스 율’이라고 했는데, 행이나 구문에 이미지나 표현이 묶이지 않고 한 행 한행 독립적으로 배열된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옴니버스이므로 한 줄 한 줄 독립된 이미지의 마디를 다시 독자가 재배열해서 읽어도 된다. 그런데 위와 같이 역순으로 배열된 텍스트가 더욱 선명한 이미지를 보이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원본 텍스트보다 역순 텍스트인 메타텍스트가 더 하이퍼텍스트 적이고, 특히 선형성과 순차적인 배열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가 행한 이 실험은 모더니즘 시의 한 가닥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 나가며   탈-관념의 꿈꾸기는 우주적(하이퍼) 공간이다. 그의 시「구의역에서」에서 보이는 부유하고 있는 모습이 그러하고,「태양을 향해 날아갔다」에서도 현실감각이 사라진 공간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시적 꿈꾸기는 사이버세계의 ‘경로’로 이해할 수 있다. 별과별을 잇는 상상의 ‘링크’가 있고, 그 링크를 계속 따라가는 궤적과 같은 그런 경로다. 은하계의 ‘북두칠성’을 보자. 하나하나는 멀리 떨어진 별이다. 우리의 상상은 일곱 개의 별을 이어 놓고 이 별자리에 ‘북두칠성’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의 시를 이처럼 우주 공간의 ‘경로’로 이해해도 되고, 봄날에 꽃과 꽃을 옮겨다나며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나비의 ‘경로’에 비유해도 된다. 이러한 시 쓰기는 인간의 뇌 속에 잠재해 있는 기억의 소자(원소)들 사이를 흐르는 의식의 흐름과 흡사하다. 시를 ‘의식이 흐른 하나의 경로’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흥미롭다. 현대시가 ‘언어를 해체한다’고 해도, 해체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시인의 의식을 표출하는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 그 중에서 특히 경로를 통해 표출된 정서나 음률은 시의 바탕을 이룬다. 한성례씨의 탈-관념된 시가 정서와 음률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시대를 뛰어 넘어 언제든 수준 높은 독자와 만나게 될 것이다.(完)    
367    현대시의 길 열기 댓글:  조회:4616  추천:0  2015-02-18
21세기 현대시의 길 열기-           「디지털 시」에 대한 이해            --디지털 시의 원리와 언어의 특성                                            심 상 운   1. 들어가는 글-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    21세기 문화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은 디지털(digital)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디지털 감각, 디지털 시를 말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다. 따라서 디지털이 펼치는 놀라운 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디지털 시대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참여가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의사소통 방식은 아날로그 형식에서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여기서 생기는 모든 변화를 통틀어 디지털 혁명이라고 한다. 혁명이라는 과격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컴퓨터 체계와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시스템 변화 때문이다. 즉 CD, 정보통신기기, 휴대폰, 개인컴퓨터(P.C.), 인터넷(Internet), 통신위성, 광섬유, HDTV, 디지털 영상 등, 영상을 공학적으로 처리하는 영상공학, 영상신호처리(Image Signal Processing) 등의 영역은 현대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를 밑바닥에서부터 뒤바꾸는 근원적인 동력이 되어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부지불식중에 생활 패턴, 사고방식, 감각, 감성, 언어 등에 변화를 겪으며 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변화의 현상을 디지털 문화라고 하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고 사는 사람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디지털 세대라고 한다.  인터넷 네트워크 속의 이 세대는 새로운 정보기술의 활용능력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디지털 세대의 특성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요인에 의해서 움직이고, 소외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집단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강한 독립성과 감성을 드러내며, 지적 개방성을 나타낸다. 자유로운 표현, 확실한 소신, 혁신적 태도, 탐구정신, 즉각적인 반응, 공동 관심사에 대한 민감성은 햄릿 같은 아날로그 시대의 세대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들은 익명성에 숨어서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선입견에서 해방되어서 세대와 성(性)을 뛰어 넘기도 한다. 그리고 파도와 같이 무분별한 군종성(群從性)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만이 통용하는 상징이 있으며 언어(문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용 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하는 자기표현에도 익숙하다. 따라서 그들은 귀에 대응하는 라디오, 눈에 대응하는 신문 등 하나의 미디어에 하나의 감각능력으로만 대응하는 아날로그 시대의 ‘감각분할’ (그것을 한쪽으로의 미디어에 치중하는 모노미디어 Monomedia 라고도 한다.)의 불완전성에서 벗어나서 디지털의 ‘감각통합의 시대’ 에 사는 세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의 몸 안에서 오감을 자유로이 융합하듯 하나의 미디어 안에서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 데이터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자재로 혼융하여 저장, 전달, 재생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통제 범위를 넘는 전달성과 재생(재창조)성은 그 한계를 규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고대 중국의 한 황제가 궁정 수석 화가에게 “벽화 속의 물소리가 잠을 설치게 한다.”고 궁궐에 그려진 벽화를 지워버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인간은 원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등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감각능력을 응집시켜 수용하는 감성통합의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을 향유할 수 있는 현대인의 자질로 연장된다.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변화의 중심 원리와 특성(디지털과 컴퓨터의 특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시 창작의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은 현대시의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 이유는 시란 대상에 대한 정서의 표현이고, 새로운 해석이고, 이름붙이기이고, 혼란한 생각들을 질서화 하여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는 현대시의 이론에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이 과거와 같이 언뜻 그대로 동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전통적인 서정시나, 지성의 기능을 우월하게 내세우는 모더니즘 시의 일반적인 경향에 대한 반동(反動)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은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끌려가고 설득을 당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따라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해방시켜서 의미보다는 감각과 이미지의 예술로 전환시키고 독자에 대한 일방적인 설득이 아닌 독자 참여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시의 방법론은 시대적인 당위성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성을 탐구․수용하고 그것을 현대시의 표현기법으로 활용하는 것은 현대시의 새로운 길 열기라고 말할 수 있다.   2. 디지털의 컴퓨터 공학적 특성   디지털은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digitus’에서 숫자 ‘digit’, 2진법을 의미하는 ‘digital’이란 단어로 형성되었으며, 모든 계산을 ‘0과 1’, ‘켜짐과 꺼짐(on-off)’, ‘있음과 없음’의 구조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아날로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료를 1,2,3,4,5,6...과 같은 연속적인 실수가 아닌, 특정한 최소 단위를 갖는 이산적인 수치를 이용하여 처리한다. 이런 원리를 지닌 컴퓨터의 정보처리 방식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의 특성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디지털은 정수로 이루어진 최소 단위들(unit)이기 때문에 분리와 합성에 의한 변화가 자유롭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운용되는 아날로그에 비해 디지털은 숫자나 문자로 표시되는 *데이터(data)에 의해서 불연속적인 변화를 순간적으로 구현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카메라에서 화소(畵素)는 화소(畵素)의 위치와 색상을 숫자화 한 데이터에 의해서 구현된다. 이 데이터는 소리의 높이 성량 음색 등도 숫자로 처리하고 보존하기 때문에 언제나 정확한 소리의 재생과 전달이 가능하다.  수리적(數理的) 데이터로 처리되는 이 최소 단위들(unit)은 컴퓨터에서 문서와 통계 자료 뿐만이 아니라 음성 및 영상 자료까지 재편집 재창조를 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을 편집(edit)이라고 하는데, 사용자가 컴퓨터를 이용하여 어떤 문서를 작성하거나 흩어져 있는 여러 자료들을 필요한 형식에 맞추어 재배열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 편집을 하기 위해 이용되는 워드프로세서 등의 편집 도구를 편집기 또는 에디터(editor)라고 한다. 따라서 디지털은 복제, 삭제, 편집이 간편하며, 복사물과 원본의 차이가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 최소 단위들의 결합과 분리 즉 편집은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만들어내는 컴퓨터 그래픽의 기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컴퓨터그래픽은 어떤 그림의 부분을 떼어내고 다른 것들과 합성시켜서 원래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때 그림의 의미도 바뀌게 된다. 또 은행나무 뿌리와 버드나무의 줄기와 벚나무의 꽃을 합성(집합적 결합)하여 새로운 나무를 만들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이런 변형은 실제 생명체의 유전자(DNA) 조작(생명공학)에 의해서 가능하지만, 디지털의 가상현실에서는 데이터의 조작(최소 단위들의 수리적 조합과 분리)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구현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그림을 형성하는 단위의 데이터 속에는 원래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탈-관념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인 근거가 존재한다. 이 가상현실의 세계는 가상적인 세계를 현실로 착각하게 한다. 영화 에 나오는 동물들은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 만든 그림이다.  이 “버추얼”의 영상은 색깔, 모양 등을 마음대로 변화시킨다. 어떤 사람이 누워 있을 때, 그의 옷을 바꿔 입히기도 하고, 옷의 색깔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그 사람의 얼굴 팔 다리 등을 바꿀 수도 있다. 또는 그 사람의 주변 환경을 마음대로 바꿀 수가 있다. 또 현실세계의 소리의 일부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등)를 채집하여 그것을 여러 음계의 소리로 확대․변형시키기도 한다. 아직 후각의 디지털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그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아날로그 시대에는 사진이 사실 확인의 증거가 될 수 있었지만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될 뿐이다.   이런 디지털의 기능들은 모듈(module)화에 의해서 더 효과적으로 운영된다. 컴퓨터의 여러 부분에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로서 작용하는 모듈은 시스템을 구성하는 독립적 단위가 되어서 기능의 효과를 높이고 더 분화된 독자적 역할을 수행한다. 모듈은 컴퓨터에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중앙통제의 시스템에 의해서 일괄적으로 정보가 처리(입력, 편집, 출력 등)될 때, 한 부분의 기능이 장애를 일으키면 그 장애로 인해서 전체적인 장애현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그런 비능률적 중앙통제의 기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기능을 분산하고 독립시켜서 시스템 전체의 능률을 강화하고 장애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구조가 컴퓨터의 모듈이다. 이 모듈은 건축 재료의 효과적인 사용을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을 컴퓨터에서 프로그램 시스템의 구조에 응용한 것이다. 정밀한 조직의 네트워크 속에서 다른 부분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운용과 독립성을 갖는 모듈화의 특성은 새로운 프로그램(시스템)을 만들 때, 이미 만들어진 모듈을 가져다 쓰면 된다는 재사용성과 다른 부분과 연관이 없이 자기 일만 수행하기 때문에 기능을 고도화하고 확대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모듈은 새로운 프로그램(모듈)을 생산하는 모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듈은 객체지향성에 의해서 독립된 영역을 구축한다.  디지털의 자료(데이터)는 아날로그에서 채집한 자료(화상, 소리 등)를 바탕으로 성립된다. 그것을 샘플링이라고(sampling 견본추출) 하는데, 아날로그의 소리가 디지털로 변화될 때 아날로그에 있던 노이즈(noise 잡음) 현상은 말끔히 제거된다. 그것은 디지털의 명료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은 감각자체의 변화가 아니고 기법의 변화에 한정되기 때문에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은 아날로그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단절적 현상(초기의 계단현상)은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현상(경사진 언덕)으로 점차 복귀된다. 그것은 디지털시계가 외형상으로는 아날로그시계의 모양을 닮아 가는 것과 같다. 이 밖에 아날로그는 고갈되거나 변질되는데 비해 디지털은 무한히 재사용해도 고갈되거나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도 디지털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이터(data- 컴퓨터가 통신, 해석 및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형성된 사실 및 개념의 표현을 어떠한 조건, 값 또는 상태로 나타내는 숫자나 문자)   3. 현대시에 나타난 디지털적인 요소   가, 이상(李箱)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현대시에서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만큼 난해하면서도 많은 연구 과제를 던져주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시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시(難解詩)로 꼽히는 시가「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다. 이 시가 난해한 이유는 현실적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의 방법과 의미가 생산되었으며 앞으로도 누구나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은  디지털의 특성과 만날 때 선명하고 명료한 공간이 된다. 그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것. 2) 이 시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에도 감염되지 않아서(탈-관념) 분리와 결합을 통한 변형이 자유롭다는 것. 3) 이 시의 언어들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4) 이 시가 표현하는 것은 가상현실의 영상 즉 추상적인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라는 것. 5) 이 시는 컴퓨터 그래픽의 자유로운 그림 바꾸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아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  -----이상(李箱)「烏瞰圖」(詩第一號)전문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을 나타내는 이 다섯 가지의 개념에「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를 대입해보면 이 시가 안고 있는 새로운 시의 공간이 열린다. 먼저 이 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도로(道路)를 질주하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들(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에 대한 해석이다. 그 아해(兒孩)들을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첫 번째 특성에 대입하면 그들은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object)라는 디지털적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시 속의 아해(兒孩)들를 수식하는 제1,제2,제3....제13이라는 서수(序數)에도 어떤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그것은 이 서수(序數)가, 작가가 임의로 지정한 추상적인 숫자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의 아해를 제2의 아해로 바꾸어도 되고 제3의 아해를 제10의 아해로 바꾸어도 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서수(序數)로 표시된 이 시의 아해(兒孩)들은 시인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의미와 무의미의 이중적 이미지가 들어 있는 재료(object)라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를 “������공포������라는 단 한 가지 감정원소로 환원된 추상적 부호집단”이라는 문덕수의 해석도(「이상론(李箱論)」)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라는 디지털적 해석에 수용된다. 그의 해석은 이 아해(兒孩)들이 캐릭터(character)의 원소(元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들은 “추상적 부호집단” 즉  디지털의 데이터(숫자나 문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컴퓨터 프로그램의 객체지향적 모듈의 특성과도 부합된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이 시에는 연극적인 캐릭터의 액션과 작가의 일방적 개입만 있을 뿐 언어단위들의 논리적인 연결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이 시 속에는������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등장해야 하는지, 13인의 아해(兒孩)들이 도로를 질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처음에는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고 했다가 끝에서 왜 길은 뚫린 골목길이라도 적당하다고 하는지, 그리고 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지, 왜 다른 사정이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는지������등 작가의 일방적인 개입 외에 사건의 배경이나 원인을 알 수 있는 어떤 논리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언어들이 표현하는 것은 문제만 제시하고 해답을 독자의 사유와 상상에 전부 맡기는 간화선(看話禪)의 화두(話頭) 같은 기능을 하는 순수한 가상현실의 동적인 그림이며 그것을 조정하는 시인의 심리적인 의도만 드러내는 추상화 된 그림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인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은 탈-관념의 가상현실이라고 해석된다. 그 해석을 확대하면 이 시 속의 화자는 연극의 연출자와 같은 입장이 되어서 자신의 그림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행위자에 그치고,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시는 텍스트(text)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 (受容美學,Rezeptionsasthetik)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때, 디지털의 가상세계를 전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독자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함정이나 속임수같이 생각되었던 이 시의 끝부분������(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의 진술기법(陳述技法)도 쉽게 풀리게 된다. 앞의 내용을 번복(飜覆)하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이 끝 구절은 컴퓨터 그래픽의 그림 바꾸기 즉 디지털 적인 변형의 자유로움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1930년대의 이상(李箱)이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인식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건축기사였던 이상(李箱)이 건물의 치수·비율·구조 등을 조정하기 위해 임의로 정하던 단위인 모듈(module)의 개념을 현대시의 구조 즉 “집합적 결합”(문덕수-「나의 시쓰기」『문덕수 시전집』에 수록) 속에 끌어들인 것이라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이 건축용어의 모듈(module) 개념은 현대 컴퓨터에 응용되어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라는 단위(unit)로 쓰인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兒孩)와 무서워하는 아해(兒孩)도 시적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대상에 옷 입히기” 이상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시에 등장하는 아해(兒孩)들의 수효를 2~3명 더 늘이거나 줄여도 좋고 길은 막힌 골목길이나 뚫린 도로(道路)나 모두 가능하다는 가정(假定)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오감도(烏瞰圖)」를 인류문명 위기의 암시란 관점으로 해석하여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를 최후의 만찬의 예수와 12제자”로 인식하고 이해한 임종국의 견해(『이상전집(李箱全集)』)나,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기간의 10개월을 제10의 아해(兒孩)까지로 보고 이 시를 “생명의 탄생과 관념이 성장․분화․심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오남구의 견해를 (『이상(李箱)의 디지털리즘』) 이 시는 의미의 큰 격차에도 불구하고 모두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 까닭은 아무런 고정관념이 들어있지 않은 백지상태 같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즉 디지털의 영상(이미지)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고 이야기를 붙이는 것은 독자의 자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미 붙이기는 그들의 상상력과 분석력과 체험, 지적수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약 선입견(先入見)을 가지고 이 시의 순수 이미지를 지식이나 관념으로 덧칠을 해서 옳다거나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와 판단의 잣대로 가름한다면, 이 시의 끝부분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로(迷路)의 비밀로 남을 수도 있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이다. 이 데이터의 기호와 숫자들은 각자의 기능은 있지만 고정된 의미가 없다. 그것은 디지털 시에서 탈-관념된 언어 단위와 같다. 이 단위들은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와도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열린 공간과 열린 사고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를 디지털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시의 공간이 얼마나 넓어지는가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오남구의 성과도 높게 평가된다. 그는 이 시에서 “아해들” 또는 “아해들의 움직임을” 디지털의 최소단위(unit)의 표현 즉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의 점(dot) 또는 화소(畵素)로 직관하고������관념의 제로 포인트(무의미, 탈-관념)������라는 시의 새로운 관점을 찾아냈기 때문이다.(오남구의「이상의 디지털리즘」 범우사) 이 시에서 이상(李箱)이 창조한 시적공간은 현실세계와 연결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추상화된 현실의 그림이 들어 있는 공간일 뿐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현실의 정서나 감각은 찾아볼 수 없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대시키는 사유의 공간만 보인다.  요컨대, 이 시의 언어들은 관념이 전혀 묻지 않은 순수한 인지단계의 언어들이라는 것과 그 언어들을 조정하는 이상(李箱)의 사고(思考)가 탈-관념된 사고라는 것은 이 시의 해석과 감상에 무엇보다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러나 이 시에 대한 이런 접근은 이 시가 이상(李箱)이 디지털적인 탈-관념과 상상의 언어로 그려낸 단순한 액션(action)의 그림(가상현실)이며, 그의 개성적인 사고(思考)가 창조한 짧은 허상의 드라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어떤 의미도 없다는) 관점 즉 디지털적 관점에 의한 해석일 뿐이다. 또 다른 해석의 방법이 나올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다른 시를 읽어보자.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쥐었을때 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 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어부딪는다.내팔은그사기 컵을사수(死守)하고있으니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 과흡사한내骸骨이다.가지났던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 전에내팔이或움직였던들洪水를막은백지白紙는찢어졌으리라.  그러나내팔은如前히그사기컵을死守한다.                         -----「오감도(烏瞰圖)」「詩第十一號」 전문     에도 가상현실(假想現實)의 이미지(동영상)가 들어있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난데없는팔하나가접목(접목)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락에메어부딪는다/산산이깨어진것은그럼사기컵과흡사한내해골이다.“라는 영상언어가 그것이다. 이 그로테스크한 영상언어는 사기 컵을 사수(死守)하는 내 팔과 사기 컵을 깨뜨려버리려는 또 하나의 팔(돋아난 팔)의 대립과 갈등을 디지털적 변형의 그림(graphic)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이 시인의 내면적인 심리현상과 관련된다는 암시를 던진다. 그러나 이상(李箱)은 이 시에서도 「오감도(烏瞰圖)」같이 액션(action) 이외에 아무런 단서도 남겨놓지 않고 자신의 관념을 숨기고 있어서 이 시에 등장하는 팔이나 사기 컵, 해골 등에서 어떤 관념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의 언어들은 가상현실의 영상 속에서 캐릭터의 구실을 하는 도구(재료)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래서 ”내 팔“ ”돋아난 팔“ ”사기 컵“ ”해골“ 그리고 사기 컵을 깨뜨리는 행위와, 사수하는 행위, 깨어진 것은 사기 컵이 아니라 자신의 해골이었을 것이라는 시 속 화지(나)의 진술은 시의 공간을 확장하고 탈-관념의 가상공간을 만드는 디지털 시의 원소(元素)가 된다. 그리고 이 시에 의미공간을 여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 공간 속에는 독자들의 다양한 상상이 수용된다. 오남구는『이상의 디지털리즘』에서 “사기 컵은 해골과 흡사하다. 시각적으로 흰색과 빛나는 모양이 있고, 내용적으로 물을 담고 관념(생각)을 담는 유사성이 있다.“라고 하면서 ”깨뜨려진 것은 사기 컵과 흡사한 관념의 해골(환상)일 뿐, 집착하고 있는 손에 ������실제 꼭 쥐고 있는 컵(고정관념)은 깨어지지 않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의 해석은 이 시가 감추고 있는 숨은 의미에 근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그런 해석은 독자로서의 일방적인 해석일 뿐,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는 언제나 남아있다. 이 시에서도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시의 내용(시인의 심리현상 등)이 아니라,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탈-관념의 이미지다. 그것이 이 시에서 발견되는 디지털적인 요소다.   나, 문덕수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어닥칠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 전문    문덕수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도 디지털의 특성을 찾아낼 수 있다. 그 단서는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유리컵 세 개.”와 “열린 문으로는/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에서 발견된다. 이 장면은 어떤 의미에 감염되지 않은 탈-관념의 영상언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시인의 의식이 만들어낸 가상현실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의 최소 단위들 “빨간 저녁 놀, 재떨이, 유리컵 세 개, 라이터 ,청자 담배. 육각형 성냥갑, 한 사나이 등”은  분리와 합성이 가능한 집합적 결합이라는 것. 그리고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모듈)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재떨이를 물주전자로, 라이터를 핸드폰으로, 유리컵을 사기 찻잔으로, 청자 담배를 신문지로 변경시키고, 사나이를 20대 젊은 아가씨로 바꾸어도 시의 성립에 영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 시에 등장하는 소재에는 어떤 관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가상현실은 순수한 이미지로 이루어진 생동하는 사물성의 공간이 되고, 독자들의 상상과 의미 붙이기가 무한정 허용되는 세계로 확대된다. 그러나 이 시는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보다 독자의 상상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넓지 않다. 그 까닭은 이 시는 현실세계에서 직접적으로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계의 자료들은 아날로그에서 샘플링 된 자료다. 샘플링의 방법은 1차적인 방법과 2차적인 방법으로 구분된다. 1차적인 방법은 직접 현실세계를 사진 찍듯이 하는 샘플링 방법이고 2차적인 방법은 추상적인 상상을 통해서 샘플링 하는 방법이다. 이 때 1차적 방법은 독자가 들어갈 시적공간은 제한되지만 현실과 현장이라는 생명의 감각에 더 접근되어 있어서 정서의 표현이 살아난다. 이에 비해서 2차적인 방법은 추상적인 상상의 공간을 무한대로 펼치면서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열어놓아서 독자가 들어 갈 수 있는 시적 공간은 무한히 넓어질 수 있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성의 세계는 현실적인 생명감각에서 멀어지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의 조작성이 쉽게 드러난다. 따라서 시의 정서도 조작된 정서가 된다.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은 1차적 방법에 해당하는 시이고,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는 2차적 방법에 해당되는 시라고 판단된다.   4. 디지털 시의 성립과 조건   가. 디지털 시의 개념과 근거 디지털(digital)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각에 호응하려는 시운동을 디지털리즘이라고 이름붙이기를 해 본다.(2003년 「디지털리즘」1집에서 오진현 시인이 디지털리즘 선언을 함) 그리고 이를 넘어서서 디지털적인 시각, 사유, 지각, 감성, 정서, 언어 등을 망라하여 그것을 현대시에 흡수하여 언어표현의 방법으로 활용하고, 새로운 상상(시각)과 감각과 감성과 사유의 영역을 열어 보이는 시를 즉 디지털 시라고 개념정의를 한다.  그런데 디지털 시의 성립에서 짚고 넘어야 할 문제는 디지털의 특성과 시가 결합할 때, 디지털 시는 기성의 시와 어떤 차별성을 갖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의 성립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날로그 시(디지털 시에 대응하는 시로 기성의 시를 의미함)나 디지털 시나 공통적인 것은 시의 현실은 현실자체가 아니고 샘프링(sampling 견본추출)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원래, 현실 그 자체에서 벗어난 가상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샘플링이나 가상현실은 디지털 시만의 특성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디지털 시의 특성은 기성의 시와는 다른 표현방법에서 찾게 된다.  그래서 디지털 시는 탈-관념을 기본조건으로 하는 분리와 합성이 가능한 언어단위들(unit)에 근거(根據)를 두게 된다. “탈-관념은 글자 그대로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대상의 의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지각(知覺)을 감지와 인식(의미형성 이전의 의식의 분별작용)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표현에서 대상에 대한 어떤 감정이나 판단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즉 감정, 판단, 배경의미의 유보를 뜻한다. 그것은 지각(知覺)을 사고(思考) 이전의 단계로 내려서 순수인지(純粹認知)의 세계로 낮추는 것이다. 이 때 대상은 그가 태어날 때의 상태로(원래의 상태)돌아 가게 되고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주체들은 대상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탈-관념에서는 꽃은 식물학적인 꽃으로, 길은 도로의 의미로, 숲이나 나무도 자연 그대로의 숲이나 나무로 인식되고 표시된다. 여기에 관념의 표현 방식들 -상징, 암시, 풍자 등-은 발붙일 수가 없다. 이렇게 사물에 붙어있는 의미가 다 벗겨져서 의미(관념)의 제로 포인트로 돌아가면 어떤 의식현상이 생길까. 그런 상태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그것은 시인들이 원시상태의 인간으로 돌아가서 사물을 접촉하는 것과 같다.“ (심상운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2006, 8 월간 )  이런 무의미의 탈-관념 언어들이 디지털 시의 근거가 되는 이유는 디지털 시가������의미의 예술������(최재서「문학원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 순수한 영상언어의 시가 되기도 하고, 시의 공간을 확장시키고, 한 편의 시가 하나 또는 몇 개의 언어단위로 표현되면서 통사적 원칙에서 벗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은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위치에서 이미지의 변형과 다시점의 세계가 들어 있는 미완성의 시(설계도)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하고,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그들이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가 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의 원형은 1930년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의 (시제1호)와 1950년대 조향의「바다의 층계層階」에서 발견된다.   나, 디지털 시의 표현 방법   이런 원칙을 기본으로 할 경우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시의 새로운 표현방법은 크게 네 가지로 파악된다. 그 중 첫 번째의 방법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 1호)에서 구현된 독특한 추상화 기법이다. 탈-관념된 언어 단위들을 사용하여 시인이 상상한 현실의 추상화를 그려서 보여주고 작가의 개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화두를 던져 주는 시의 기법은 디지털적인 구조에 맞는 기법이다. 특히 시 속에 시인이 창조한 캐릭터를 등장시켜서 어떤 동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은 언어의 환상적인 면(언어유희)에서도 새로운 감각과 상상을 창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두 번째 방법은 염사와 접사의 방법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염사와 접사는 현실이 반영(反映)된 마음속의 직관상을 사진 찍 듯이 찍는 것이기 때문에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적 샘플링 기법이 된다. 염사는 직관을 통해서 내면에 잠재된 대상을 드러내는 방법이고, 접사는 외면 세계에 대한 직관과 시각적인 접근을 통해서 원근법을 깨뜨려버리고 대상의 실상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이 염사와 접사는 병적인 망상(妄想)이나 터무니없는 환상(幻像)과는 구별된다. 염사와 접사는 선적(禪的)인 의식 즉 고도의 집중된 정신의 현상 속에서 발생한 투명한 의식의 그림이다.  세 번째의 표현 방법은 사물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과 사물의 충돌, 사물과 사물의 융합 등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이런 사물성의 이미지 세계는 사물성의 감각을 포착하여 직관의 영상으로 떠올리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 시는 사물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반영(反映)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시가 된다.  네 번째 표현방법은 대상의 순간적인 포착과 포착된 영상자료들의 변형으로 상상의 세계를 확대시키는 이미지의 세계다. 이것은 디지털 시의 독특한 표현방법이 된다. 이 때 시인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공감각 등을 융합하여 감각의 통합적인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 이런 감각의 통합은 디지털 언어의 감각이 된다.  이 네 가지의 표현방법의 중심에는 샘플링 된 현실이 들어 있다. 샘플링 된 자료(이미지)는 하나의 독립된 단위를 형성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단위들의 결합이나 연결 방법이다. 아날로그 시는 대부분 관념 또는 사유의 연속적인 연결(인과관계)방법을 선호한다. 그것은 논리적인 연결로 의미(관념)와 정서를 표현하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보다는 감각이나 이미지를 드러내는데 더 중점을 두는 디지털 시는 단위와 단위의 연결을 “집합적 결합”으로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 탈-관념된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것에서 디지털의 불연속 적인 것으로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와 뒤섞이기가 가능해진다. 그것은 이미지를 컴퓨터의 그래픽처럼 자유롭게 결합하기도 하고 합성할 수 있으며 반대로 이미지의 분리도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언어 단위들 사이에는 간섭(干,interference) 과 잔상(殘像, afterimage) 현상이 발생하여 아날로그 시와 같은 효과를 구현한다. 이러한 결합은 단위의 조합을 바탕으로 운용되는 디지털의 성격과도 부합된다.  따라서 디지털 시는 컴퓨터의 모듈과 같이 시의 언어단위를 독립적인 단위로 인정한다. 그것은 위에 제시한 시인의 추상적인 현실 이미지, 염사․접사, 사물성의 이미지, 영상자료의 변형으로 포착하는 감각 등이 그 자체로 한 편의 시(하나의 시스템)를 형성하기도 하고 집합적 결합을 이룬 종합적인 구조의 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집합적 결합은 “대상의 결합이나 구성방법의 종류를 다양화할 수 있고, 구문과 비구문, 의식․무의식의 경계와는 관계없이 시의 구성 영역의 공간을 무한히 넓힐 수 있다.”(문덕수-「문덕수 시전집」“나의 시쓰기-물리주의와 집합적 결합”에서)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 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때 모듈화 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다음은 디지털 시의 정서다. 디지털은 정서나 감각의 변화가 아니고 기법의 변화이기 때문에 아날로그적인 정서와 감각에서서 멀어질 수가 없다. 그러나 디지털 시는 아날로그와는 구분되는 독특한 정서를 드러낼 수 있다. 샘플링 된 현실은 사실이 아니고 마음 속 화면에 반영(反映)이 되어서 나타난 현실의 일부분이다. 그 반영 속에는 시인 자신의 의식(관념)의 그림자가 들어있다. 그래서 그것을 순수한 탈-관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현실과 밀착된 마음의 영상은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디지털의 생동하는 감각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이 생동하는 감각은 추상적인(현실이 제거된)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가 아니라, 현실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가 된다.   다시 말하면 디지털 시의 정서는 샘풀링의 과정을 거쳐서 재생 될 때 이미지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관념의 위로 솟아올라온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맑은 정서다. 따라서 시의 밑바닥엔 관념의 그림자가 남는다. 그래야 인간적인 시가 탄생할 수 있고, 그 시에 담긴 정서는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는 기능을 가진 맑은 정서가 될 수 있다. 자연을 소재로 했을 때 디지털 시는 관념이 가라앉은 후에 떠오르는 맑은 향기 즉 원래의 자연향기를 풍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정화된 상태의 자연 본연의 향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굳이 정서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샘플링의 과정을 거쳐서 재생되는 탈-관념의 디지털 시의 정서는 독자들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정화시키는 힘을 드러낸다. 그러나 추상적인 상상을 통한 간접적인 샘플링의 방법으로 구성된 디지털 시에는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가 생길 수도 있다.    다. 디지털 시의 조건 디지털 시의 새로운 표현방법의 모색에 전제되는 조건은 디지털 시는 시 본래의 특성(아날로그의 특성)을 훼손시키지 않아야 하며 보통의 시와 같이 읽히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가 실험시라는 껍질을 깨고 나와서 감각만이 아니라 시가 사유와 정서의 표현이라는 일반적인 시의 조건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디지털 시가 일반적인 시와 조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은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이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디지털 시의 근원(기본원칙)과 전제조건을 만족시키고 디지털 시의 특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은 무엇일까? 그것을 열 가지로 구분하여서 다음과 같이 정한다.    1) 디지털 시는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한다. 언어 단위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을 근간으로 한다. 따라서 그 언어 단위는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요소 즉 객체지향의 모듈(module)화가 이루어 질 수도 있다.(예시작품: 문덕수의「꽃잎세기」,오남구의「푸른가시짐승-빈자리x.3」,심상운의「빈자리-낮12시25분」)  2) 디지털 시는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하지만 탈-관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인지단계의 관념은 수용한다. (심상운「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2006, 8 월간 참조)  3) 디지털 시는 현실을 직접 샘플링(1차적 방법)한 자료로 생성된 시와 추상적(2차적인 방법) 샘플링을 통해서 구성된 시로 구분한다. 그러나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디지털 시에는 샘플링(sampling견본추출)된 현실세계가 극소화될 수도 있다.  4) 디지털 시는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순간포착 등)과 사물성의 순수 이미지를 중요한 요소로 한다. 사물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의 순수 감각을 드러내고 사물의 충돌과 융합 등을 보여주는 방법은 디지털 감각과 영상언어의 산실이 된다. 이러한 영상언어는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5) 디지털 시는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하는 과정에서 탈-관념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을 아날로그의 노이즈(noise 잡음) 제거라고 한다. 그러나 시인의 심리적 현상 속에 들어 있는 관념의 그림자가 남는 것은 허용한다. (예시 작품: 심상운의「검은 기차 또는 흰 비닐봉지」)  6) 직관을 통한 염사와 원근법을 깨뜨리고 실상에 접근하는 접사는 디지털 시의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샘플링의 방법이다. 따라서 더 많은 방법들이 원용될 수 있다. (예시 작품 :오  남구의 「밤비」)  7) 디지털 시의 정서는 현실이 제거된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와 현실(관념)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로 분류한다. 증류수 같은 정서의 대표적인 작품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의 (시제1호),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의 시는 송시월의 「입춘무렵」을 예시작품으로 들 수 있다.  8) 디지털 시는 단일한 시점과 감각과 정서만 고집하지 않고 다시점, 다감각, 다정서의 통  합된 감각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개념에서 디지털의 불연속적인 개념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와 뒤섞이기도 시 속에서 구현될 수 있다. 이런 감각의 다층구조의 예시작품으로는 오남구의 「경운동 88번지로 간다-염사」를 들 수 있다.  9) 디지털 시는 작가(시인)가 만들어낸 완성품의 시에서 벗어나 독자가 참여하여  각자의  사고와 인식과 감정과 감각이 들어가서 만들어 내는 독자 참여의 열린 시를 지향한다. 그 바탕에는 텍스트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受容美學, Rezeptionsasthetik)이 들어있다. 이 때 시인은 시의 설계도를 제시하고 그것의 자유로운 변형을 보여줌으로써 독자 참여를 유도하는 연출자가 된다.  10) 디지털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지향한다. 그래서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면서  계속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가상현실의 감각을 독자에게 전해야 한다. 그 가상현실은 환상도 되고 꿈도 되지만 현실의 절실한 감성과 정서를 전하는 것에 가치를 둔다. 움직이는 이미지의 예시작품으로는 오남구의「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을 들 수 있다.  이 열 가지의 조건은 한 작품 속에서 서로 조화로운 비중으로 구현될 수도 있지만 한두 가지의 조건만으로도 작품을 형성할 수 있다.   라. 예시 작품에 대한 디지털적 독해(讀解) 다음은 와 에서 예시작품으로 거론된 시에 대한 디지털적 독해다. 예시된 시들은 탈-관념의 세계를 보여주는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 시와 2000년대 이후 디지털 시의 방법론을 의식하고 쓴 작품이다. 그래서 앞에 제시한 열 가지의 조건(방법)에 대입하여 디지털 시의 가능성을 진단해보고 새로운 감상과 해석의 길을 열어보는 것은 실제의 창작을 위해서도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낡은 아코오딩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바다의 층계(層階)」전문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이 시는 시가 “의미의 예술”(최재서「문학원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서 탈-관념의 순수한 영상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불연속적인 각 연의 언어들은 집합적 결합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시의 각 연은 서로 독립적인 관계 즉 객체지향성(모듈)을 드러낸다. 그것은 시인이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입장에서 독자에게 “보여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5연 는 통사적 구문에서 벗어난 시의 한 형태를 보여주면서, 단위(단어, 구문)들의 충돌과 간섭을 통한 감각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전체적 면에서 구성이 산만하다. 그 원인은 이 시에 숨어 있는 시인의 의식(의도)이 시 전체를 통제(관통)하지 못한 때문인 것 같다.   마을을 덮은 코스모스 덤불 아무거나 한 송이 골라 꽃잎을 열심히 세어 본들 나비처럼 머무를 수야. 대추나무 밑동을 감고 한창 뿌득뿌득 기어오르고 있는 나팔꽃 푸른 것은 깔때기 모양 흰 것은 나팔주둥이 한 잎 두 잎 세 잎 네 잎 다섯 여섯 세어보지만 실은 한 송이일 뿐이다. 돌담을 돌자 앞장선 나비는 오간 데 없고 순하고 야들야들한 연보라 무궁화꽃 그 한 송이의 여섯 개 꽃잎을 확인한들 내 어쩌랴 어쩌랴. 해바라기는 서른네 개의 황금 꽃잎을 둥글게 박고 들국화는 서른아홉 개로 쪼개진 보랏빛을 빽빽이 둘렀거늘 내 어찌 머무를 수야. -------문덕수「꽃잎세기」전문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디지털 시의 탈-관념된 언어 단위(unit)들은 결합을 통해서 대상의 모습(현상)을 드러내지만 분리(해체)를 통해서 존재의 본질을 확인하게 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나팔꽃은 여섯 잎, 무궁화꽃 여섯 잎, 해바라기 서른 네 개의 꽃잎, 들국화 서른아홉”이라고 대상을 구성하는 작은 부분들을 분리하고 숫자화 함으로써 색(色)과 공(空), 결합과 분리의 경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구상적인 자연현상을 추상적 디지털 언어로 환원하는 작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문덕수는 이러한 시적 형상의 방법론을 그의 시론 「나의 시쓰기-물리주의와 집합적 결합」에서  “사물이나 대상 하나하나를 1,2,3,4,5.......와 같은 추상적 기수(基數)로서 개개의 구체적 특성을 추상화할 수 있고, 추상된 그 대상을 결합하여 한편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으며, “이러한 방법을 나는 역시 인접학문의 용어를 빌어서 “집합적 결합”이라고 명명해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통찰은 디지털을 형성하는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의 의미 즉 디지털의 최소의 단위의 개념을 인식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이 시는 디지털 시의 본질인 단위의 분리와 결합의 원리를 보여준 시라고 판단된다. 이 시에서 ”나팔꽃, 무궁화꽃, 해바라기, 들국화“는 디지털 시의 구조를 형성하는 부분 단위(module)가 된다.   간밤, 회색담장 ������회색������을 헐고 푸른울타리 ������푸른������을 세웠다. 반짝이는 인동의 사금파리������반짝������을 빼고 가시장미������가시������를 올 렸다. 갑자기 ������푸른가시������짐승이 나와서 달빛을 갈갈이 찢고 온 밤을 으르렁댔다. 다시 ������푸른������을 밀고 가시장미������가시������를 내리고 비워 둔 빈자리 x. 아침, 울타리에 구름 한 쪼각 앉아서 쫑긋 꼬 리를 들었다가 사라진다.  --------오남구「푸른가시 짐승 -빈 자리x.3 」전문    이 시의 중심점은 빈자리 x의 무한한 변신이다. 빈자리에 무엇이 채워지느냐에 따라서 감각과 상상의 세계가 바뀐다. 이렇게 바뀌는 것(분리와 결합)이 탈-관념된 디지털 단위들의 특성이다. 만약 어떤 고정된 의미가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면 감각과 상상의 변신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변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탈-관념된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꾸벅꾸벅 졸던 중년 여인이 빠져나간 빈자리에 노란 꽃다발을 들고 앉은 꽃무늬 스카프의 아가씨   두 꽃의 향기가 흥건하던 자리에 머리에 무스를 바른 청년이 앉는다 그의 핸드폰이 뿜어내는 경쾌한 소리   순간, 나는 조금씩 발을 들썩이고 파랗게 살아나는 오래된 바다 흰 목덜미의 그녀는 노란 유채꽃 밭을 뛰어가고 있다   그가 훌쩍 일어서서 나간 뒤 하나의 공간으로 돌아간 진홍빛 우단의 빈자리 그 위로 눈부신 햇빛과 신록新綠의 그림자가 번갈아 앉았다가고   낮 12시 25분 전동차 안은 계속 섭씨 20도의 환하고 푸른 공기 속에 있다        ------ 심상운 「빈자리 -낮 12시 25분」전문        이 시도 오남구의「푸른가시 짐승 -빈자리x.3 」같이 빈자리 즉 최소 단위(unit)의 변화에 따라서 바뀌는 감각과 상상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전동차 안의 풍경과 감각, 시인의 상상이 생동하는 느낌을 풍기고 있다. 그것은 이 시 속에서 언어 단위들의 집합적 결합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적인 감각의 흐름이 시의 저변을 흐르는 시인의 의식과 조화를 이루어 이미지의 생명력을 형성하는 원천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驛 승강장엔 선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표지판이 쓰러져 있다. 그가 쏟은 핏덩이가 시멘트와 자갈에 묻어 있다. 역무원들은 서둘러 소방 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검은 기차를 타고 떠났다고 했다.)   나는 그가 타고 간 기차의 빛깔을 파란 색으로 바꾸었다.   그때 어두운 바닥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먼지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안고 간 눈물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이었을까?)   (그는 드디어 눈물이 없는 세계를 발견한 것일까?)   2006년 7월 21일 오후 2시 23분 서울 중계동 은행 사거리 키 6m의 벚나무 가지 위로 하얀 비닐봉지 하나가 날아간다.     -----------심상운 「검은 기차 또는 하얀 비닐봉지」전문    이 시는 지하철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접사와 염사를 통해서 샘플링한 시다. 샘플링 하는 과정에서 사건은 단순화되었으며 탈-관념이 되었다. 그러나 “검은 색과 푸른 색, 하얀 색”의 색채가 의미하는 관념과 “눈물”이라는 관념의 그림자는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남아서 시의 정서가 되고 있다. 그 정서형성의 원리 속에는 디지털 시에서도 관념의 완전한 제거는 시를 성립시키는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과 인지단계의 관념은 오히려 디지털 시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이 시에서도 장면의 변화는 내면적인 의식의 흐름과 디지털의 감각과 상상을 표현하는 중심이 된다. 그리고 단위들의 집합적 결합이 간섭(干涉, interference)과 잔상(殘像, afterimage)을 통해서 이미지 형성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오남구 「밤비」전문    이 시의 중심은 직관을 통한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샘플링이다. 그 잠재의식 속에는 현실이 들어 있다. 그것을 염사와 접사로 나누면 잠재의식 쪽에 더 가까운 것을 염사라 하고 현실 의식 쪽에 가까운 것을 접사라고 한다. 염사와 접사는 대상을 사진 찍 듯이 순간적으로 받아들여서 이미지로 재생하는 샘플링의 방법이다. 이 기법은 디지털 시의 기본적인 표현 방법이다. 이 기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정신의 집중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시에도 비 오는 밤에 시인의 잠재의식 속에 떠오르는 영상들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관통하는 의식의 에너지가 들어있다.     햇살에 찔린 잔설 한 토 막, 눈물을 흘린다   몸 트는 나무 가지에 마른 풀잎에 반짝 띄우는 문자 메시지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   눈이 푸른 휘파람새 한 마리 느닷없이 한참을 기우뚱이는 내 머리 위로 휘이익-푸른 선율을 그으며 날아 간다 온 몸이 간지럽다   -------송시월 「입춘 무렵」전문    이 시에는 디지털적인 감각과 정서가 선명하게 들어난다.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에 들어 있는 감각은 디지털적인 명료한 감각의 표현이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다. 이 데이터는 디지털 시에서 아날로그 시보다 현장의 감각을 정확하고 명료하게 표현하는 탈-관념된 언어단위가 된다. 이와 함께 휘파람새의 순간적인 움직임은 장면 변화의 동영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디지털 시의 투명한 의식과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맑은 정서의 단면(斷面)을 보여주는 감각적인 기법이다.    461120-10675xx吳鎭賢  2002년 12월 29일 57세로 살아 있음.  빨간 싱호등이 켜졌다가 파란 신호등이 켜졌다. 뇌세포의 신 경체계가 잘 유지된다. 오늘 경운동 88번지에 도착할 시간 10분 남았고, 잠깐 내 모습의 환영, 팔순 노구가 앞을 멈칫멈칫 가다가 쉰다.  말없이 손을 내밀어 잡는다. 이 때 번쩍 뇌세포에 녹화된 화면 이 켜진다. 2002년 12월 24일 밤, 행렬이 거리를 넘친다. 징그러 징그러 노랫소리 질퍽하고, 한 목사가 하늘에서 돈뭉치를 뿌린 다. 파란 만원짜리 지폐들 낙엽처럼 날리고 한 무리 병들고 나약 한 노구들이 돈을 향해 허우적허우적 아우성친다.  띵-, 붉은 등이 켜진다. 다시 ������복제인간 아기 탄생!������화면이 겹 친다. 몸이 떨린다. 쾅!쾅!쾅! 맥박이 가슴친다 숨이 가빠지고 정 신이 없다 인내천 인내천 소리치고 숨을 고르면서 경운동 887번 지로 가는 탈출구를 찾는다. 쏴아-.싸늘한 바람, 번쩍,5번 출구의 표시등이 켜졌다. 침략으로 점멸하기 시작 하는 신호,→⑤번 출구, 바뀐다.  시련의 점멸하는 이름 동학 수운, 화살표를 바라보며 내 신호 체계가 경운동 88번지로 간다.  -------오남구「경운동 88번지로 간다- 염사」 전문    이 시는 다시점, 다감각, 다정서의 통합된 감각의 세계를 디지털적인 순간순간의 변화로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 다층구조의 감각과 이미지는 팔순노구→ 목사가 하늘에서 뿌리는 파란 만원짜리 지페→미래의 내 모습의 환영인 노구들의 허우적거리는 아우성→복제아기의 탄생의 화면이 겹치는 장면에서 발생한다. 시인은 시공을 이동하며 잠재의식과 현실의식 속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겹쳐져서 나타나는 화면을 생생하게 사진 찍 듯 찍어내고(염사) 있다. 그것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몇 분 사이의 사건이다. 이런 디지털 시의 감각은 하나의 미디어 안에서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 데이터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자재로 섞어서 저장, 전달, 재생하는 디지털적 감성통합과 맥을 같이 한다.   1.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디지털 시의 특징은 운동 에너지의 발산이다. 이 동적 이미지는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면서 계속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가상현실의 감각을 독자에게 전한다. 이 가상현실은 흥미로운 환상도 되고 꿈도 된다.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투명한 의식 속에서 탄생한 공과 운동 에너지의 결합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상이 만들어주는 시적공간이다. 만약 이러한 직관적인 감성을 언어가 아닌 빛이나 소리 등 다른 것으로 표현했다면 백남준 식의 비디오 아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아무런 부담 없이 경쾌한 리듬과 함께 공이 뛰어가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빌딩의 콘크리트를 뚫고 나온 공은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가기도 하고,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는 계단을  퐁퐁퐁퐁 올라가기도 하고,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가기도 하고,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기도 한다. 이런 자유롭고 재미있는 상상의 전개는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무한한 자유를 얻는다. 이 시의 언어들은 탈-관념의 언어들이라는 점에서 디지털의 정수로 된 수리적 데이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   5. 나가는 글-디지털 시의 미래    이제까지 “21세기 현대시의 길 열기”라는 주제의 중심에 “디지털 시”를 세우는 작업을 하였다. 21세기의 의사소통 방식은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는 세대가 시대의 핵심동력(核心動力)이 되고 있다. 그래서 21세기 현대시의 방향을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에 맞추어 탐구하는 것은 시대적 당위성을 갖는다.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는 디지털 시의 근원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1950년대의 조향의 초현실주의 시와 문덕수의 탈-관념의 사물성의 시도 디지털 시의 존재성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그 시들의 감각과 시에 대한 인식의 근본이 현대 컴퓨터의 디지털 특성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의 핵심부분 , , 은 순수한 독창적 것이 아니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이 글은 디지털 시와 연관된 재료들을 발굴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조합하여 구성한 21세기 디지털 시의 설계도인 것이다.  과 은 미래지향의 시창작방법론이다. 예시 작품들은 디지털 시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작품의 완성도 보다는 실험적인 방법론에 더 비중을 두었다. 예술에서 완성이란 신기루(蜃氣樓) 같은 꿈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는 디지털의 특성을 시로 환원하여 21세기적인 새로운 시의 표현방법을 모색하는 시 운동이다. 현재 이 시운동은 출발선상(出發線上)에 서 있다. 그래서 이 작은 디지털 시 운동이 한국을 넘어서 세계화가 될 날을 기대해 보는 것은 지나친 자만(自慢)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시론은 21세기적인 감각과 의식이 생동하는 젊은 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로   --- 디지털 시대의 시 쓰기                                                           심 상 운(시인) 1.  동양시의 경전이라고 일컫는 고대 중국의 「시경(詩經)」에서 보여주는 인간정서의 자연스런 분출이나,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피어난 ‘감정의 자유로운 유로’(워즈워즈)는 이성보다 감성을 선호하는 한국현대시에서 아직도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 근원은 ‘시는 인간 정서의 표현’이라는 명제 때문이다. 그러나 정서과잉, 상상력의 고갈 등 시적 긴장감이 풀어진 시들은 독자들에게 식상함을 안겨주었고 시가 외면당하는 현실을 불러왔다. 그래서 시인들은 언어, 리듬, 이미지, 스타일 등에서 시대적 감각에 맞는 시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0세기의 모더니즘 시가 지적인 언어와 회화적인 이미지의 기법으로 정서과잉의 낭만주의에 식상한 지적 성향의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의 영토로 환영을 받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모더니즘은 현대시에 ‘정서의 절제’와 ‘주지적(主知的) 인식(認識)’이라는 시의 방법을 도입하고, 정서의 자연적 노출에서 벗어나 이를 사물화하여 표현하는 기법으로 ‘이미지의 세계’를 열어줌으로써 사물과 존재에 대한 인식의 심화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게 했다. 이는 시의 역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희망. 희망은 분명 있다. 네가 내일의 닫힌 箱子를 굳이 열지만 않는다면......   희망. 희망은 분명히 빛난다. 네가 너무 가까이 가서 그 그윽한 距離의 노을을 벗기지 않는다면....   희망. 그것은 너의 寶石으로 넉넉히 만들 수도 있다. 네가 네 안에 너무 가까이 있어 너의 맑은 눈을 오히려 가리우지만 않는다면..... ------김현승 1〜3연    그러나 시에서 의미를 중시하는 지성의 과잉이 일으키는 병폐도 또한 새로운 시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지성의 과잉에 대응하는 반지성(反知性)의 시, 즉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surrealism)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 초현실의 시는 합리주의와 자연주의에 반대하여 비합리적 인식과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세계를 추구하고 언어표현의 과감한 혁신을 지향한다. 그리고 시적대상의 현실적인 공리성이나 합리적인 관계를 깨뜨려버리고 대상과 대상을 창조적인 새로운 관계로 맺어주는 시작방법(詩作方法)을 내세운다. 이때 시 속에서 현실적 실용성이나 합리성, 공리성을 다 없애버리고 순수한 시적대상으로 재탄생하는 대상을 오브제라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을 기존의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인간정신의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런 시작방법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反動)이거나 모더니즘의 전위(轉位)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초현실주의 시는 난해성을 수반하지만 시의 존재성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면서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조향「바다의 층계(層階)」부분    나의 영혼은 어느 무당집 촛불로 불타고 있다. 그해 겨울 동자상을 안고 오는 길은 뼈가 갈라지는 어둠이었다. 무당이 주는 병든 본능의 복숭아를 깨물며 내가 사랑했던 개들이 나를 자꾸 물어뜯어도 어디가 아픈지도 무서운지도 몰랐다. 그것은 어둠이었다. 잠들 수 없는 어둠, 소리칠 수도 없는 어둠, 껴안을 수도 없는 어둠이 토끼의 눈물처럼 내 손바닥에 쌓이고 그런 날 무당집 뒤뜰의 구렁이는 밤마다 나를 껴안았다. 그 때마다 묻어났던 벌개진 어둠.                           ----------양준호「나의 영혼은」전문    모더니즘은 이런 도전 속에서 초현실주의(surrealism)를 포용하고 새로운 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것이 반지성을 용인하고 지성과 반지성이 서로 어울리게 하는 20세기 말의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이다. 이런 시작방법과 인식의 변화는 21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시운동의 태동을 보이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한국 현대시에서 디지털 시대의 감각을 시에 도입하고자하는 ‘디지털 시’ 운동이다. 이렇게 모더니즘 시의 큰 테두리 안에서 새롭고 다양한 방법의 모색과 분출이 가능한 것은 모더니즘의 근본정신 속에는 인습적인 것이나 상식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창조의 영역을 확대하고자 하는 변혁(變革)의 정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21세기는 누가 뭐라고 하여도 디지털의 시대다. 컴퓨터의 발달과 개인 소유에 의해서 확산되는 커뮤니케이션의 변화는 ‘사이버 세계’라는 또 하나의 생활공간을 열어 놓고 있다. 이 사이버공간은 개인 간의 의사소통, 여론의 수집과 확산, 사무처리, 상업적 거래, 오락 등으로 말미암아 실생활의 공간과 개념상 구분이 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위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허상만이 아닌 실제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TV와 컴퓨터의 영상에 젖어 든 젊은 세대들은 관념적이고 설득적인 현대시 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때의 영상은 시에서 언어영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디지털의 특성이 만들어 내는 영상과 쉽게 합치될 수 있다. 이 영상(보여주기)은 근대 이성의 ‘문자권’, 을 넘어서는 미디어가 주인인 IT, 디지털 시대의 중심 매체다. 현대를 ‘영상권’의 이미지 시대, 보여주는 영상 시대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면 ‘디지털의 특성+시= 디지털 시’는 현대시에 어떤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가? 이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핵심을 요약하면 디지털의 공학적 세계에서 구현되는 현상을 언어의 예술인 시의 세계에서도 구현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디지털의 특성을 시로 ‘옮겨 온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시로 옮겨오는 디지털의 특성에서 중요한 것은 ‘디지털 적인 언어와 상상력’이다.  ‘디지털 적인 언어’라는 것은 언어를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컴퓨터의 데이터(data)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언어를 기호의 한 형태로 인식하고 음악의 ‘소리’나 회화의 ‘선과 색채’와 같이 의미나 실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언어에는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탈-관념(무의미)의 언어라고도 한다. 이 탈-관념의 언어는 디지털의 감각인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등을 구현하는 언어가 된다.  이런 디지털 시의 언어는 20세기 언어학자 소쉬르 (erdinand de Saussure 스위스 제네바 857. 11. 26 ~1913. 2. 22)의「일반 언어학 강의 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1916)에 근거를 두고 있다. 소쉬르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언어는 실제적인 의미의 구속에서 벗어나서 그 자체가 스스로 독립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의 상상은 이런 언어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이미지는 가상현실 속에 존재하는 허상(虛像)이지만 실재(실체)와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 프랑스 철학자 1884-1962)는 인간의 삶 속에 들어 있는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그의「순간의 시학」과「불의 시학」을 강의하는 김융희(서울예술대 교수)는 강의(2006,6,26)에서 가스통 바슐라르의 이론을 “인간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이미지와 더불어 살아간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이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떻게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것이며, 이미지로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오랫동안 철학이 이미지의 세계를 하나의 비실재로 바라보고 개념적 사유를 통해 이미지의 환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바슐라르는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현실로 바라보고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우리 영혼의 능력에 주목한다. 이미지는 인간의 영혼이 세계와 교감하는 순간에 탄생하며 아름다움 역시 그 순간에 빛을 발한다. 시가 포착하는 지점 역시 그 순간이며 그 순간을 향유하는 것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라고 ‘강의 개요’에서 요약․정리하고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시학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존재를 비실재의 단순한 환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인간의 심리적인 현실’로 인정한 것이다.  문덕수(시인, 예술원 회원)도「내면세계의 미학」(1966년 ‘사상계’ 157호)에서, “이미지는 어떤 객관적 대상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 반드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질 필요도 없다고 본다.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 이미지’란 객관적 대상도 없고 개념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것만으로 충분하고, 그 밖에 이미지가 지시하는 객관적 대상을 찾는다든지, 이미지가 내포하는 철학적·인생론적 관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지를 불순케 하는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라고 순수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수평으로 네 개의 막대기가 날아간다. 똑같은 속도로 나란히 열을 지어 때로는 장대처럼 일직一直으로 이어져, 그 중의 하나는 달을 두 쪽으로 쪼개고 그 중 하나는 지구를 툭툭 치고 그 중 하나는 꽃밭을 후려갈기고 그 중 하나는 사람을 쳐 죽인다. 흩어졌던 막대기들이 다시 날아와 수평으로 나란히 열을 짓다가 제각기 머리를 돌린다. 하나는 벽을 후비면서 돌고 하나는 유리창을 뚫고 드나들며 하나는 나비를 뒤좇아 내를 건너고 하나는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떨어져 죽는다. 뒤얽히던 세 개도 차례로 죽는다.                         -문덕수 「네 개의 막대기」전문    디지털 적인 상상력은 ‘가상세계(假想世界)’라는 무대를 설치하고 그 속에서 자유로운 상상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 가상세계는 ‘허구적(虛構的)’이란 면에서는 예술적인 전통을 계승한다. 그러나 디지털적인 상상은 허구적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서 무한대로 확장된다는 데서 기존의 허구와 차이가 생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을 제정하고 홍보하는 조선일보(2007,4,9)에 기고한 이인화 교수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의 글,「꿈을 현실로… 이것이 뉴 웨이브 문학!」은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는 그 글에서 “정보화 혁명은 문학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좌표 위에 위치시켰다. 이제까지 문학 작품은 현실을 재현한 가상, 즉 상상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 3차원 컴퓨터 그래픽이 만드는 인터랙티브(interactive)(서로 영향을 미치는, 상호작용을 하는, : 대화식의) 환경으로서의 가상세계가 나타나면서 가상은 곧 현실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상은 사람들이 마우스로 클릭해주기를 기다리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 된 것이다.” 라고 21세기 디지털의 세계가 펼치는 가상세계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그는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상세계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라고 하면서 가상과 현실의 벽을 허물어 버린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엄밀한 의미에서 오늘날에는 판타지문학도, SF문학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어스시의 마법사’ ‘듄’ ‘유배행성’ ‘로캐넌의 세계’는 새로운 현실을 그리고 있는 현대문학일 뿐이다. 그 반대편에 대학에서 가르치는 ‘현대문학’, 즉 1990년대 이전까지의 현실 개념에 따라 문학을 이해하는 근대문학이 있다.”라고 현대문학과 근대문학의 경계를 나누고 있다. 그의 이론은 극단적이고 선언적인 성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논리적인 검증을 철저히 거쳐야 하겠지만, 상상의 무한한 확대라는 면에서 21세기 문학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고 여겨진다.   3.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문학 형태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 문학 (Hypertext literature) 은 디지털 적인 순수한 상상력의 확산과 독자참여의 문학공간이라는 면에서 한계를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1965년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테드 넬슨(Ted Nelson)은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따라서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그런데 연결되는 텍스트들은 저자가 준비한 것이지만 선택은 독자의 임의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 독자의 선택은 텍스트를 고정적 상태가 아닌 유동적인 상태로 만드는 원천이 된다. 텍스트의 유동성(流動性)은 텍스트의 자율성과 내적 통일성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놓기도 한다. 그러나 다양하고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에 예술의 공간에서는 고정된 틀보다 가치를 지닌다.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에서 탈피하여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형성하는 문학이다. 따라서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유동성의 문학형태가 된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인터넷에서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리좀은 원래 수평으로 자라는 땅속줄기 즉 ‘뿌리줄기’를 가리키는 생물학적인 용어인데,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J. 데리다, G. 들뢰즈 등의 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 ‘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한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텍스트 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컴퓨터에서 구현되는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와 종이(책) 위에서 구현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로 구분된다.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는 입력과 동시에 hyper text markup language' 즉 HTML이라는 컴퓨터 언어로 변환되는 시다. HTML로 변환된 시에는 하이퍼링크(연결)의 기능이 들어있으며, 텍스트는 화면의 뒤에 숨어 있다가 독자의 선택에 의해서 나타난다. 그 시에는 그래픽과 음악도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종이에 문자로 표시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이에 표시되는 시는 하이퍼텍스트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정과리(문학평론가)는「컴퓨터와 문학- 문학의 새로운 이해」(문학과 지성사, 1996년)에서 “문학의 ‘文’ 그리고 literature의 'letter'는 문학이 ‘언어’ (더 좁혀, 문자)를 중심매체(中心媒體)로 삼는다는 뜻을 포함하고도 있다. 하이퍼미디어에서는 그런 중심매질(中心媒質)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퍼텍스트 또한 그 자체로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이퍼미디어의 장 속에 종속하여 있어서, 하이퍼텍스트는 끊임없이 불안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곳의 언어는 컴퓨터 부호로의 변신을 독촉 받고 있는 언어다. 중심매체가 붕괴된 문화적 장르에 대하여, 단순히 언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까? 차라리 새로운 장르의 탄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라고 하이퍼텍스트 문학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의 이론은 문학에서 중심매질이 되는 언어(문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점에서는 타당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에 예속된 하이퍼텍스트 문학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상력의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언어구조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 하이퍼텍스트를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다.    숨어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종이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건너뛰기,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 검은 철제 의자 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엔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밭의 환한 햇빛 속으로 들어갔을까?”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영하 10도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 장수가 떨어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 고 쓴다. 그는 그 밑에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라고 또 쓴다.   세 번째, 발가숭이 노인들이 노란 해바라기 밭으로 뛰어가는 그림을 지나 다섯 번째, 식탁 옆 젊은 여자의 풍만한 궁둥이 그림 곁으로 가는 순간, 벽에 걸려 있는 네 번째 그림- 뒤척이는 태평양의 퍼런 몸뚱이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그 물을 수조水曹 속 물고기들에게 매일 부어준다고 한다.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 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 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심상운 「미완성의 시-그림 감상하기」전문    현대의 모더니즘 시에서 상상의 결과물인 심상(心象, Image)은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미지는 어떤 형이상학적 관념을 사물로 표현하기도 하고,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감각적 매개로 쓰이기도 한다. 이때 이미지는 시인의 목적의식과 연관되어서 의도성을 갖게 되고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공상(Fancy)은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 1834 영국의 서정시인·비평가·철학자.)의 말처럼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진다.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연상)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따라서 21세기의 새로운 시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 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imagination)보다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기울게 된다. 상상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란 것은 그것이 어떤 결실을 맺기 위하여 뚜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런 목적성 때문에 상상하는 과정에서 공상이나 연상 작용만이 아닌 합리적인 지적추리(知的推理)도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탈-관념시나 디지털 시나 하이퍼텍스트 시의 창작 과정에서 시인을 괴롭히고 고민에 빠뜨리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시의 무목적성’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상상력이 관념이나 지적 사유 쪽으로 끌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공상이 상상보다 현대적인 감각을 더 넓게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시의 무목적성 외에 공상이 가지고 있는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인생의 엄숙성에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교훈적인 엄숙성보다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에서 미적 쾌감과 매력을 더 느낀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이나 유희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거나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력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이 하이퍼텍스트 시도 ‘디지털 시’에 포함됨은 물론이다. 필자의 현대시론「디지털 시의 이해」(2006년 12월 ‘시문학’에 발표)에서는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Module)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 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때 모듈화 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모듈 이론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방법론과 부합되는 면이 많다. 중요한 것은 기계적인 연결 관계보다 상상의 다양함과 풍부함이다. 그리고 내면 의식의 흐름이다. 이 의식의 흐름을 ‘시의 맥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시의 맥락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구성에서 중심역할을 한다.   4.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탈-관념의 영상언어 즉 보여주기(Showing)의 세계를 제시한 ‘디지털 시 운동’은 모더니즘의 구조(frame)속에 들어있으며 시의 창조적 표현방법에 핵심을 두고 있는 ‘시의 새로운 언어 운동’이다. 이 디지털 시 운동은 사물성 이미지의 창조는 물론 상상의 확대, 자유연상(공상), 영상성과 공연성을 통해서 ‘공연 시’나 ‘하이퍼텍스트 시’의 문을 열어놓음으로써 현대시의 공간 확장방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디지털 시의 중심이 되는 ‘탈-관념’, ‘기호의 세계’, 그리고 ‘사물성의 세계’, ‘가상현실의 공간’은 시의 위기가 화두가 되는 21세기의 문학 현실 속에 새로운 시의 공간을 개척하는 강한 에너지가 되고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적인 정서 위주의 시나 모든 시는 의미의 표현이라는 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시인들은 사이버 공간과 가상세계, 언어의 기호성에 대한 이해 부족과 거부감을 안고 있다. 그들 중에는 ‘디지털 시’를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기계의 시로 착각하고 있는 시인들도 있다. 그런 시인들에게 디지털 시의 넓은 공간과 새로운 감각을 이해시키는 일은 어쩌면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파는 일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21세기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호흡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시간이 경과하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터넷의 세계는 현대인의 정신을 정주(定住)에서 이동(移動)으로, 삶의 공간을 지역공동체에서 네트워크 공동체로 변화시키고 있다. 탈-중심은 다양한 가치의 세계 속에서 어떠한 대상과도 서로 융합하고 소통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런 현상은 언어예술의 세계에도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다. 따라서 현대 시인들은 과거시제의 ‘관념의 집’에서 나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유목민처럼 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시점에서 볼 때,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삼는 문학은 미지의 텍스트의 세계로 떠나가는 예술적 여정에서 다른 예술보다 뒤처져 있다. 언어의 의미성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문화의 집적(集積)인 언어의 의미성이 새로운 텍스트의 원천이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시와 기호(記號)                             심 상 운   1. 사물을 대리하는 기호의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처음 제창한 사람은 파블로프(1849-1936, 러시아의 생리학자)이다. 그는 개에게 먹을 것을 줄 때마다 벨 소리를 들려주면 개에게는 벨 소리가 먹을 것 또는 식사의 기호가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을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에서 ’조건반사‘라고 한다. 그는 이 조건반사를 1차 신호계라고 하고, 자연언어와 그 내용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 가지 반응을 제2차 신호계라고 명명했다. 이 기호는 그 형식적 특징에 따라 아이콘(icon:유상기호, 어떤 대상의 畵像 따위), 인덱스(index:지표기호, 화살표 등으로 무언가를 지시하는 경우), 심벌(symbol:상징기호, 약속된 기호로서 그 대표적인 것이 자연언어임)의 3종으로 분류된다. 20세기 대표적인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 스위스, )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예컨대, ‘남을 가르치는 사람’을 한국인들은 선생(교사)이라고 하고 미국인들은 티처(teacher)라고 하고 중국인들은 라우스(老師)라고 하는 것이 그 근거다. 따라서 언어를 기호의 구성체계로서 실질적인 의미부분과 자의적인 기호부분으로 분리하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2. 문덕수(시인, 예술원회원)는 그의 시집 『꽃먼지 속의 비둘기』에 게재한 시론(대담형식의 글)「한국시의 동서남북 (Ⅱ)」에서 한국 현대시의 실험시(탈관념 시. 디지털 시, 기호시)의 근거를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찾아내고 있다. 그는, “소쉬르의 기호학은 사물의 본질을 사물자체에서 찾는 실체론(實體論)을 관계론(關係論)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입니다. 기호학이나 기호론이 시쓰기에 미친 영향을 몇 가지로 요약해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시의 실험적 모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초론이 될 것입니다. 첫째, 시의 대상이나 주체에 집착했던 태도를 떼어내어,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게 됩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무엇입니까. 대상과 주체와의 사이에 있는 매개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기호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과 소쩍새와의 관계(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미당), 다시 말하면 사물의 생성에 있어서 사물 상호간의 ‘인과’와 같은 것이 아니라, 대상과 주체 사이에 있는 기호나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는 관점에서 언어학을 구성했는데, 그 의미작용이 다름 아닌 기호(sign)의 작용이 아닙니까. 소쉬르가 말하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과 의미되어지는 것(시니피에)이라는 두 가지의 관계에 의해서 된 것이 바로 언어기호입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관계의 시스템에서 구성된 것입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은 사물의 실체나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보다는 ‘관계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실체보다는 그 관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구조주의 언어학이 발생했습니다. 실체에 대한 인식이 실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시점(視點)― 시점도 관계 형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실체도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론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매개적 존재’(기호)를 강조하게 됩니다. 시론에서 사물이나 주체보다는 그 사이의 매재(媒材) 즉 기호를 중시하게 된 것은, 시에 있어서 언어실험이나 실험적 모험을 촉진하고, 그러한 혁명적 작업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입니다.   둘째 언어기호나 기호는 실체를 가지지 않습니다. 앞에서 소쉬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언급했습니다만, 언어기호의 이러한 관계도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언어기호 자체도 형식(形式)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의 방법론을 중시하는 시의 형식주의 이론의 근거도 바로 관계론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미 상식화된 예입니다만, 산의 소나무를 보고 “저것이 소나무다”라고 언표해도, 산에 있는 소나무 전체를 추상적으로 지시하고, 그 의미가 어느 한 그루의 소나무에 부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소나무’라는 기호는 소나무A, 소나무B, 소나무C를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학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호가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버철화(virtual化)한다는 사실의 근거입니다. “라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3. 소쉬르의 ‘기호학’에 따르면, 실체를 가지지 않는 매재(媒材)로서의 언어기호는 현대시에서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음악의 ‘소리’ 나, 회화의 ‘물감’ 같이 사용됨으로써 사실과 다른(관계없는) ‘언어의 독자적인 공간’을 열어준다. 예를 들면, “나는 태평양을 구겨서 주머니에 넣었다./주머니에서 붉은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방금 수평선을 넘어간 태양이 흘린 피다.” 라고 했을 때, 이 텍스트는 어떤 의미(관념)나 사물(실제)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영역은 회화에서 추상화(抽象畵)가 차지하고 있는 순수한 상상에 의한 선과 색채의 영역과 다르지 않다. 이 텍스트에서 ‘태평양’이란 기호에는 실제 태평양의 이미지가 들어 있지만, 텍스트 속의 태평양은 하나의 기표(시니피앙)일 뿐, 실제의 태평양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어느 상점의 간판이 ‘백두산 문방구’라고 했을 때, 문방구는 실제와 관련이 있지만 문방구를 수식하는 ‘백두산’은 실제의 백두산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기호일 뿐이다. 실제와 관계가 없는 기호라는 것은 언어가 의미와 실체의 속박과 간섭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기호는 고정된 의미가 없어서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도 같다. 그래서 이 기호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를 제2의 실재(實在)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 미당(未堂)의 대표시「동천(冬天)」을 예로 들어 보자.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미당「동천冬天」전문   이 시의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들도 실체와 관계없는 기호화된 언어다. 따라서 시인의 상상(심리적 이미지, 형이상학적 판타지)은 상상 자체일 뿐, 실제의 사실과는 전혀 상관을 맺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의 가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영상세계 그 자체를 맛보고 즐기는데서 더 찾아질 수 있다. 이 시는 그런 면에서 제2의 현실이라고 하는 디지털의 사이버 세계와도 맥이 닿는다. 따라서 이 시에서 어떤 의미를 발굴해 내려는 평론가들의 시도는 시를 관념화(고정화)시키는 불순한 작업이 될 뿐이다. 오남구의「데몬스트레이션」을 읽어보자.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 오남구「데몬스트레이션」2연   실체의 세계(물, 사물)와 별도로 독립되어서 언어의 기호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현대시의 현상(現象)은 초현실주의에서 주장하는 ‘오브제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컴퓨터가 열어 놓은 사이버 세계라는 제2의 생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상(virtual)의 세계는 현실과 경계선이 모호한 세계가 되었고, 그 범위가 무한히 넓어지기 때문에 ‘기호시’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론’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의 시는 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심리적인 이미지’나 ‘언어놀이(유희)’로 확대되기도 한다.「데몬스트레이션」에서 공과 햇빛이 만들어내는 동영상 이미지는 만화영화(漫畵映畵)의 한 장면 같다. 공과 햇빛에는 어떤 의미도 들어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시 속에서 캐릭터(character)의 역할을 하면서 상상의 재미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현실의 소멸과 새로운 현실의 탄생이라는 순수한 언어의 기호가 창조해내는 가상공간의 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유인한다.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있다.                                          -------심상운 「물고 기 그림」전문    이 시에 대한 정신재(문학평론가)의 견해에는(2007년 4월호 월평「실재 모색하기」) ‘현대시의 영역 확대’라는 공간이 들어 있어서 주목된다. 다음은 그 글의 인용문이다. “디지털 사회에서 시인은 시가 가지는 쾌락적 기능을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인이 20세기 상황에서와 같이 스타로 군림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래서 시인들은 21세기 사람들의 입맛을 찾아 다양한 모색을 시도한다. 소비경향의 글쓰기를 시도하고, 산문의 몸짓을 선보이며, 의식과 무의식을 빠른 동작으로 오가기도 한다. 그리하여 시에서도 놀이가 전개된다. 이들 놀이는 의미를 찾고, 영혼을 고양시키고 실재를 모색하는 흔적 찾기의 놀이가 될 것이다. 심상운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이용하여 존재와 상황 간의 가로지르기를 하고 있다. ‘그’는 물고기를 촬영하고 있고, 물고기처럼 자연스런 흐름을 타고 있다. ‘나’는 그가 촬영한 그림에 새를 넣고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를 회상한다. 나는 “오전 10시 30분”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다“. 여기서 물고기는 극화된 화자이고,‘그’는 극화되지 않은 화자이며, ‘나’는 시인의 생각을 대리하는 제2의 함축적 작가가 된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흐르는 이미지는 물고기이며, 새이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새는 공중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는 존재이다. ”설경 속“이라는 공간을 ‘그’는 기차여행을 하고,‘나’는 버스여행을 한다. 심상운은 극중 공간과 회상 공간과 현실 공간을 설정하여 놓고 놀이를 시도한다. 이런 놀이는 대비된 공간을 자유롭게 가로지르기 하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이는 자유 연상법을 슬로비디오로 형상화하여 놓은 것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에서 오락 게임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하여 사람들을 중독에 빠뜨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가 더 이상 진리를 핑계로 한 상아탑에 갇혀 있을 수만 없다. 진리가 상아탑 안에만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진리는 가까운 일상에도 있고 , 먼 우주에도 있는 법이다. 심상운은 그러한 진리를 찾아 때로는 물고기가 되고, 때로는 새가 된다. 그는 ‘설경 속’과 같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있으며,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로이 오가는 꿈꾸기를 시도 한다.” “작가들은 실재를 모색하기 위해서 해체나 가로지르기의 방법을 동원하였고, 이전에 경계 지어졌던 가치관을 허물고 탈경계를 모색하게 된다. 시 역시 각 시대에 걸맞는 양식을 가지고 발전되어 왔고, 현대인의 심리나 정서가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었다.”라고 하면서 그는 현대시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4. 2007년 여름, 한국 영화계에는 관객 800만을 동원한 심형래의 SF영화 가 뜨거운 시비(是非) 속에 많은 화제를 뿌리면서 관객들에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에 대한 시비의 원인은 가 영상(컴퓨터 그래픽의 판타지)에 비해서 스토리의 짜임이 부족하고 작품성이 떨어지는 영화라는 평론가들의 지적에서 비롯되었다. 평론가들은 순수한 영상보다는 서사성과 관념(주제의식)을 중시한다. 의미가 불확실한, 맹목적(盲目的)에 가까운 영상에 대해서 그들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이런 그들의 자세는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언어, 순수한 기호로서의 언어, 맹목적인 가상(virtual)의 세계(하이퍼텍스트의 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는 관념의 비유적인 표현, 의미의 표출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무장한 독자나 시인이나 평론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관객이나 독자들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능동적으로 작품에 참여하여 스토리(관념의 표출)보다는 영상(이미지)을 즐기고, 그 영상의 빈자리에 자신들의 상상을 넣는 ‘참여행위’가 새로운 시대의 영화와 시를 창조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지나친 상상일지 모르지만 심형래의 파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 시(기호시)’의 파동을 예고하는 전주곡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에서 인생론이나 교훈, 형이상학적 지향도 높은 가치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미 철학이나 도덕·규범 등에서 말해진 것들이다. 따라서 현대시를 언어예술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고정관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들은 창조성이 결여된 언어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현대시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시(문덕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언어의 밑바닥을 투명하게 응시하면서 ‘기호시의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07년 12월 사단법인 한국 현대 시인협회 기관지 2호에 발표 (2007,12,24 수정)               사단법인 2008년 여름 세미나 주제발표 원고 (수정보완)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세계에서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세계로 - 21세기 ‘하이퍼 시’의 이해를 위하여                                                                                                            심 상 운 (시인)    1.  2008년은 한국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다. 1908년 잡지 에 발표된 최남선의‘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시발점으로 출발한 한국의 현대시는 10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일제 강점기, 해방, 남북분단, 6,25전쟁, 경제건설,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를 거치면서 시의 영역에서 큰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의 현대시는 시대적 이념의 시, 개인적 서정시에서 전통적 서정시, 사회계층에 대한 시, 모더니즘의 예술적 감각의 시, 주지적 관념의 시, 언어실험 시 등 시대적 사회적 예술적인 변화에 대응하여 시의 공간을 대폭 확장시켜 왔다. 그리고 민조시(신세훈),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김규화, 심상운, 오남구), 공연시(신규호), 디카시(이상옥) 등 새로운 시의 형태를 정립하고 있다. 현대시의 이런 변화 속에는‘전통 언어의 계승과 변화’(민조시),‘언어와 실체의 관계’,‘시와 독자의 소통문제’(디지털 시, 공연시, 디카시) 등이 들어있다. 따라서 시에 대한 고정관념의 해체와‘시의 구조(構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설정은 중요성을 더 한다.  20세기 한국 현대시들은 시의 구조에서 공통적인 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국 현대시의 구조가 대부분 단선구조(單線構造)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 단선구조의 시는 시의 길이에 관계없이 한 편의 시에 하나의 시점(단일 시점)만 존재하면서 하나의 이미지 또는 하나의 메시지(의미)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시를 말한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이고 엿듣고 있다.       - 박목월 전문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먼언 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전문    이 두 편의 시 속에는 인물(눈먼 처녀, 내 누님)이 들어 있지만 그 인물들은 시의 시점을 변화시키는 인물이 아니다. 박목월의 속의 눈먼 처녀는 시적 화자(詩的 話者)의 관찰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눈 먼 처녀의 행위 속에 들어 있는 정서는 화자(시인)의 주관적 인식과 감성의 표출일 수밖에 없다. 만약 화자와 처녀가 독립적인 존재로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연출 된다면 단일시점에서 다시점으로 시점의 변화가 가능해 질 것 같다. 서정주의 속의‘내 누님’은 비유적인 소재라는 점에서 단일시점으로 고정된 화자의 사유와 감성에 더 밀접해 있다. 따라서 이미지의 독립적인 면이 박목월의 의 눈 먼 처녀보다 약하다. 작품 예시는 안했지만“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이라고 시 속에‘그’라는 인물을 삽입하여 정서를 객관화시키고자 했던 유치환의 도 단일시점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이런 단선구조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이라는 면에서 독자들에게 현대시의 고정된 틀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시의 정체(正體)도 시인의 주관적인 정서 표현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조향의 나 문덕수의 와 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라는 단선구조의 틀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낡은 아코오딩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전문   남쪽 북쪽의 불벼락을 맞아 지붕 기왓장 문짝 모두 휴지처럼 날려가버린 유령이네 반세기를 앓는 벽은 3층 윤곽만 남았네 태극기 인공기 번갈아 내걸려 펄럭이었을 그날의 불먼지, 벽귀퉁에서 시나브로 날려 떨어지는 문틈에는 바람에 실려 남북을 넘나드는 자잘한 잡초의 씨알들만 걸려 꽃 피네   부석사 무량수전*에 박힌 의상대사 지팡이에서 움튼 선비화에 나비 앉네                   ----문덕수 < 철원군 노동당 당사> 전문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선비화禪扉花로 피었다는 설화가 있음   마릴린 몬로가 호텔을 노크한다 제 유방 하나를 떼어 벽에 걸어 놓는다   마릴린 몬로의 떼가 몰려 온다 제 혼자 혹은 손잡고 어깨동무하고 혹은 휴대폰을 걸면서 종로에서 브로드웨이에서 인천국제공항에서 메뚜기처럼 뛰면서 금방 부화한 바닷가 모래밭의 자라새기처럼   마릴린 몬로의 노란 버스 마릴린 몬로의 빨간비행기 마릴린 몬로의 분홍 SST 마릴린 몬로의 파란 자전거 마릴린 몬로의 녹색 트럭   유방이 없는 마릴린 몬로가 고층빌딩 한 개 씩 들고 몰려온다           -----문덕수 전문     조향과 문덕수 시의 공통점은‘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그들은 이질적 이미지의 과감한 결합 즉 하이브리드(hybrid)를 통해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조향의 는 연결고리(링크)의 기능이 형성되지 않은 단순 이미지의 병렬적 결합을 통해서 주관적 정서와 의미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하고 있으며, 문덕수의 는 이질적인 이미지의 결합 (사실적 이미지 + 난해한 이미지) 즉 의식의 중층구조를 통해서 다선구조의 세계를 형성하려고 한다. 의식의 중층구조는 이 시의 끝부분 에서“꽃 피네”와 “선비화에 나비 앉네”의 링크(link)가 만들어주는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으로 형성된다.“꽃 피네”에 링크하여 “선비화에 나비 앉네”로 건너뛰는 의식의 비약이 현실을 초월하는 하이퍼(hyper)인 것이다. 에서는 마릴린 몬로의 다양한 이미지의 집합을 통해서 현대인의 내면에 들어있는 다양한 욕망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마릴린 몬로는 여성 이미지의 환유(換喩)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집합된 이미지들은 서로 논리적 맥락이나 인과를 맺지 않는 당돌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독립성을 갖는다. 이 시에서도 “마릴린 몬로”는 연결고리(링크)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 속에 수평적 네트워크(network)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이 시가 단선구조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드러낸다.  조향과 문덕수가 시도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의 탈출은 그들의 시에서 의미의 단절 또는 의미로부터 해방과 함께 시의 공간이동을 보여준다. 이 공간이동은 그들의 시를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형이하의 세계에서 형이상의 세계로, 의미의 세계에서 영상(이미지)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그들의 이미지 결합 방식은 김춘수의‘무의미 시’의 기법과는 다른‘시의 무의미화 기법’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대시가 지향하여야 하는 시의 정체(正體)에 대한 문제제기와 새로운 기법의 제시다. 따라서 언어의 링크 기능을 통한 하이퍼(의식의 건너뛰기, 초월)의 구현을 보여주고 있는 문덕수의 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출구를 여는‘디지털 시 또는 하이퍼 시’의 선구적 작품이라는 점에서 평가된다.    2.  21세기의 한국현대시의 대표적인 시운동‘디지털 시’또는‘ 하이퍼 시’는 현대시의 구조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 변화는 현대시의 정체에까지 영향을 주는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급격한 생활환경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21세기는 20세기의 사람들이 상상조차 어려웠던 공간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다. 그 공간 변화의 대표적인 것이 컴퓨터 발달과 개인 소유에 의해서 확산되는‘사이버(cyber) 세계’라는 또 하나의 생활공간이다. 이 사이버공간은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를 형성한 개인간의 의사소통, 여론의 수집과 확산, 사무처리, 상업적 거래, 오락 등으로 말미암아 실생활의 공간과 개념상 구분이 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위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허상만이 아닌 실제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TV와 컴퓨터의 공간에 젖어 든 젊은 세대들은 관념적이고 설득적인 현대시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시를‘의미의 예술’에서‘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때의 영상은 시에서 언어영상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20세기의 단선구조의 틀에서 벗어나서 21세기적인 다선구조의 틀을 세우려는 ‘하이퍼 시 운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시대적 조류에 부합하는 시 형태로 부상하고 있다. 이 다선구조는 논리적(인과적)이고 공리적인 선명한 주제의식의 단선구조에서 벗어나 현실과 가상현실의 복합구조를 시에 도입하여 상상의 영역을 넓히고 이미지의 독자성을 시의 중점에 두고자 하는 시의 방법이다. 따라서 이 다선구조에는 엉뚱한 이야기, 돌출 이미지 등이 뒤섞이어서 시의 기본 줄기가 무엇인지 모호해지고 난해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의 시보다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고, 가상현실의 공간, 영상성과 공연성, 자유연상의 이미지 세계를 다양하게 펼쳐준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의 예술적 공간을 담고 있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1965년 하이퍼텍스트(hypertext)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테드 넬슨(Ted Nelson)은“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따라서 하이퍼 시는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를 거부하고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전시형태(展示形態)로 작성된 여러 텍스트가 모여서 형성되는 시가 된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이 리좀은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현대철학(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한다. 따라서 리좀은 구조상 위계적이지 않다. 선후(先後)가 없으며,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리좀의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 시다. 그러나 전자 하이퍼 시가 아닌 종이에 문자로 표시되는‘문자 하이퍼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이에 표시되는 문자의 시는 하이퍼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숨어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문자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흐름,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의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 문덕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와 전자 하이퍼텍스트」(월간『시문학』 2008년 4월호)에서  “컴퓨터의 인공언어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은 지향대상(작품의 바깥에 있는 현실의 어떤 세계나 사물)을 시뮬레이트해서, 즉 허구적으로 구성해서 우리에게 보고 듣게 해주는 것과 같이, 우리가 쓰는 언어도 컴퓨터의 인공언어처럼 가상현실을 창조하고, 그리고 그 ‘가상현실’은 흔히 우리는 ‘이미지’라고 부르고 있는 그런 세계를 우리에게 체험하도록 해줍니다.”라고 이미지 세계(시)와 가상현실 세계(컴퓨터)의 동일성을 논증하면서,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하이퍼 시)’ 이론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컴퓨터에서 하이퍼텍스트는 ‘여러 가지 텍스트를 서로 관련시켜 하나의 데이터로 다루는 복합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텍스트의 특정 부분으로부터 다른 별개의 텍스트를 관련시킬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에서는, 컴퓨터 화면과 유서(user)의 메시지를 접속시키는 ‘시프터’(shifter)라는 이동장치가 있음은 여러분들께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장치를 이용하여 어떤 한 시행(詩行)이나 센텐스의 임의의 부분에 다른 어구나 시행 또는 텍스트가 연결되어(링크되어), 복수의 텍스트가 상호간에 복잡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기존의 시 텍스트나 산문 텍스트는 그 문맥이 선조적(線條的), 일방적 순서로 진행됩니다만, 이동장치인 시프트를 이용함으로써 사용자가 맥락을 자기 시점에서 자유롭게 접속하여 전환하게 됩니다. 시간적, 선조적, 앞뒤의 순서로 진행되는 한 맥락이, 중간에서 전혀 다른 맥락이 가지처럼 붙어서 갈라지고, 다시 그 가지에서 또 다른 맥락의 가지로 갈라져, 이리하여 맥락을 달리하는 많은 복수의 텍스트가 얽혀 하나의 커다란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①여자의눈은北極에서邂逅하였다.②北極은초겨울이다.③여자의눈에는白夜가나타났다.  ― 이상(李箱), 「興行物天使」에서   ‘여자의 눈은 北極에서 邂逅하였다’의 1문 다음에, ‘北極은 초겨울이다’의 2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2문은 1문의 “北極”이라는 맥락의 한 부분에서 갈라져나간 또 다른 맥락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문은 1문의 “여자의 눈”이라는 주어에 링크됨으로써 원래 문맥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엄밀한 의미에서 제2문도 맥락에서 완전히 일탈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1문의 “여자, 여자의 눈, 북극, 해후” 등의 부분에서 갈라져 또 다른 맥락의 텍스트가 증식되어 하나의 복잡한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하이퍼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바꾸는 방법에서 1차적인 방법은 시 속에 제2 제3 화자의 등장이다. 제1의 화자가‘나’라면 제2 제 3의 화자는‘너‘와‘그’가 된다. 소설에서 1인층 시점에서 3인층 시점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화자의 변화는 시점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점의 변화는 구조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이동하는 방법에는 화자의 시점 변화가 아닌 하이브리드   (hybrid)적인 리좀(이미지)의 연결이나 화자의‘의식의 변화’도 가능하다. 의식의 변화는 실세계와 가상세계의 만남과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의식의 다선구조’라고 한다. 위에 예시한  와 는 하이브리드 적 다선구조의 시이고, 는 의식의 중층구조로 이루어진 다선구조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 속에 ‘나’만이 아닌 ‘너’나 ‘그’가 들어가서 시상을 전개하는 다선구조의 시는 서정시의 표현형식을 주관적인 독백 형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화자는 시 속에서 리포터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를 평면적인 구조에서 입체적인 구조로 바뀌게 한다. 따라서 시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서사구조(敍事構造)가 된다. 인물과 환경과 행위가 결합할 때 서사는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때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은 시의 캐릭터(character)가 된다. 그리고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 즉 동영상이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에 등장하는‘나’와 일반 서정시의‘나’는 입장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일반 서정시의 나는 시인 자신일 경우가 많지만, 하이퍼텍스트 시의 나는 ‘상상 속의 나’가 되어 시의 캐릭터로서의 나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하이퍼텍스트의 시의 중심이 되는 상상에 대한 고찰(考察)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시인의 목적의식, 의도성과 연관되어서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보다 콜리지(Coleridge 영국의 문예비평가)의 말처럼‘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자유롭게 펼쳐지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비중을 두게 된다. 공상은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이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서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  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 심상운 전문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1,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2,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3,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4,가상현실의 구현 등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된 시다. 그래서 네트워크가 형성된 하이퍼텍스트 적인 공간의 시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시의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된다. 따라서 이 시의 맥락을 추적해보면, 시의 내면에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먹는다’라는 행위와‘아우성’으로 표현된다. 안개는 나무를 먹고, 나는 야채를 먹고, 여자 리포터는 갈치 회를 먹는다. 안개 속의 나무들도 또한 안개의 입 속에서 아우성치듯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고, 시위대들은 구호를 외치고(아우성치고) 있다. 이 시는 이런 생명현상의 움직임을‘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디지털적 기법으로 표현한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설득적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법이다. 그래서 영화의 몽타주 기법도 사용된다. 이 시에 나오는‘나’와‘그’는 시 속의 캐릭터다. 끝부분 는 사이버 공간의 장면이지만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이 21세기의 현실감각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시에서 TV도 등장인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매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하나의 경로만을 고집하지 않다. 이 시는 하나의 독립된 공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세계를 모사(模寫)한다거나 어떤 정리된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시 속에 존재하는 것은 실세계와 맞닿아 있는 가상공간(假想空間)이다. 그래서 이 공간은 실세계와의 관계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이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복제(複製)하거나 또는 다른 하나의 의미가 되기를 거부하는 하이퍼텍스트의 공간이다.               4.  다각적인 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동시적인 배열은 디지털 시대의 감각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 편의 시에서 최소 2,3개의 다른 리좀(이미지)이 들어가는 것을 시의 기본구조로 삼는 하이퍼 시는 현대의 생활구조를 반영하는 시형태가 된다. 이 구조변화의 핵심에는 위계적 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고정된 관념의 틀을 거부하는 수평적인 다양한 선(線)들(이미지, 사유, 정서)이 들어 있다. 이 선들은 새로운 영토를 만들어 내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려는 선들도 있지만 자신의 영토에서 탈출하여 미지의 세계로 달아나 탈영토화하려는 선들도 있다. 이 선들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하이퍼 시에는 의미의 연결과 단절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이 수평적인 다양한 선들의 움직임은‘가상현실의 보여주기(showing)’라는 디지털 시의 특성과 결합하여 독자와의 새로운 소통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독창성을 갖는다. 이 하이퍼 시의 소통은 정서와 의미(관념)를 소통의 중심에 놓는 아날로그의 논리적 소통에서 이미지(상상력)와 감성의 소통이라는 디지털적 방식으로 확장된다. 디지털적 소통은 아날로그의‘선택과 집중’‘설득’의 세계에서 탈출하여‘다양한 상상의 집합과 연결’‘가상현실의 세계’라는 디지털 세계의 문을 여는 21세기적 소통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가상현실의 보여주기와 하이브리드(hybrid)를 중심축으로 삼는 하이퍼 시의 다선구조(多線構造)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뿐 만이 아니라 열린 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게 된다는 점에서 시적 생명력을 얻는다.     앞의 서술 내용을 요약하면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열거한 9가지 방법이 유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9가지 방법은 하이퍼 시의 창작방법이 되기도 한다.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하이퍼(hyper)에는 불가시적인 세계를 가시적인 세계로 전환시키기 위한 무한한 상상의 변화와 에너지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다선구조는 시대적 성향변화에 대한 현대시인의 적극적이며 창조적 대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출처] 심 상운의 하이퍼시에 관한 시론|작성자 최진연  
366    하이퍼시의 도우미 댓글:  조회:4188  추천:0  2015-02-18
하이퍼시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함(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즘)을 형성한다. 다시점의 이이지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김규화.심상운-편집자 발간사 中 일부 발췌 page 5-6]     발간사에서 설명하고 있는 하이퍼시의 구현방법을 읽어보고서야 책에 수록된 시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하이브리드. 링크. 네트워크. 敍事. 초월. 變換. 이중구조. 연출자’ 하이퍼시를 이해하기 위해 나름대로 추려내 본 낱말들이다. 무척이나 초현대적인 단어라는 느낌이다. 문학적이기보다는 철학적인 뉘앙스가 더 많이 풍긴다고 해도 틀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 특히 敍事라는 낱말에 머릿속이 명징해지는 느낌이다. 나는 그동안 왜 하이퍼시는 길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시의 운율보다는 자칫 산문적인 느낌으로 읽히는 시를 읽으면서 줄곧 풀지 못 했던 문제였다. 초월의 이미지도 따라가기엔 너무 보폭이 크고 넓어서 영 어렵기만 하다고 생각했었다. 9가지의 하이퍼시 구현방법을 읽고 나니 비로소 내 문제의 답들을 찾아낼 수 있을 거 같다. 아무튼, 나는 새로운 세상을 하나 더 알아보려는 착한 학생의 마음으로 하이퍼시의 문 앞에 서 보았다.   내가 하이퍼(hyper)시를 처음 만난 건 월간 시문학을 통해서이다. 매달 문덕수 선생님의 하이퍼 시론을 읽으며 하이퍼 시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배움이 부족해서일까 하이퍼시는 여전히 내겐 너무 어렵다. 한국하이퍼시클럽 동인들이 작품집 ‘하이퍼시’를 출간했다. 하이퍼시에 대해 궁금해 했던 참이라 반가운 시집이다. 물론, 이미 시문학에 게재되어 만나본 시도 있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시들을 한꺼번에 모아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시집을 읽는 재미 이외에도 새로운 시를 공부하기 위한 텍스트로서의 가치도 충분하다고 나는 본다.     잘 익은 부사를 깍는다/ 둥글게 깎여나간 ‘잘’이란 꽃뱀 한 마리/ 쟁반에다 또아리를 튼다// 과도에, 내 손에 닿아 끈적끈적 달라붙는 군살// 우리집 통유리창 틈으로 들어오다 보름달이 해체된다/ 초승달 하현달 반달 갈고리달 둥글게 머리 맞대고 모/니터 앞에 앉아/ ‘부사’란 단어를 검색 중이다/ ‘사과의 한 품종으로서 당도가 높고 색깔이 붉다. 품/사의 하나로서 한 문장의 특정한 성분을 꾸며주는 성분/ 부사(잘 매우 겨우) 등 그리고 문장 전체를 꾸며주는/ 문장부사(과연 설마 제발) 등’// 내가 갂아낸 부사, 슬슬 기어다니는 붉은 꽃뱀을 만/진다/ 미끈 소름이 돋는다// 잘 깎은 내 얼굴, 속살이 달다// [송시월-사과를 깎으며 全文 page95]   눈을 뜨고 잠을 자다 소복한 여인처럼 시장골목 여기/저기 종종 걸음으로 넘쳐나 돌아치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숨죽이고 엎어져 있다 왜들 그러냐고 묻지 마라/ 입을 다물고 산자락에 꽃뱀처럼 똬리를 틀다 거리에 춤/추다 어디에서 숨바꼭질을 하는지 누구 가슴에 숨어 울/다 잠들다 작은 소리로 징징거리다 기우뚱거리며 실룩거리다 늪에 빠져 이내 조용하다 채송화 봉선화 벌겋게/피었다 흘러내리다 주막집 끝자락에 연분홍 바람 한줌/매달다. [정연덕-유월의 낮달 全文 page164]     시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있든 시를 매개로 한 시인과 시를 읽는 독자와의 교감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쓴 시인의 생각이 시를 읽는 독자와 모두 일치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시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서 해독불가의 암호 문자가 되어서도 곤란하지 않을까. 물론, 시인이 독자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일단 어떤 매체로든 독자와의 만남을 의도한다면 독자에 대한 배려 또한 시작과정에서 어느 만큼은 안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할 때 입에서 꽃이 튀어나오는 사람이 있네/ 그런 사람의 가슴에는 꽃밭이 있지/ 당신도 그런 하늘이었으면 좋겠네/ 저기 푸른 물고기가 뛰노네/ 만지면 붉은 잎맥이 전달되는 꽃이 있네/ 꽃의 눈에는 연못이 있지/ 그 연못이 해를 들어올리네/ 초인종 소리 느리게 떨어지는 저녁/ 가시연이 하늘을 떠다니네/ 바람에 턱을 괴고 있던 별이 물끄러미 바라보다/ 스멀스멀 일어나 꽃이 되네// [김은자-꽃과 물고기 정물 全文 page71]     시 공부를 위해서 시를 많이 읽는 편이지만 시는 텍스트만으로는 읽히지 않는다. 공부를 위한 시 읽기로 시작해서 문학과 예술로서의 시 읽기로 끝이 나서 난감할 때가 더 많지만 그럼에도 시란 ‘정서’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독자로서의 나는 시를 복잡한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려고 읽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퍼시는 얼핏 불친절한 시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하이퍼시가 가지는 특성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보니 하이퍼시가 의외로 유쾌하고 재미있는 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는 아래로 내리고 바람은 누워서 불어 비와 바람이 마주치는 비바람소리에//숲속의 새들은 날개를 접고 풀슾을 헤치며 놀던 아이들도 발걸음 줄이며 함께 내리는 소리가// 어울려 알아들을 수 없는 무슨 Z Z Z? // 손가락으로 밀며 보는 스마트폰 안에서는 킬힐 신고 춤추는 잡가에 판소리에// 건물 옥상에서 나오는 울음 타는 소리, 초가집 구들장 무너지는 소리// 없이 고양이가 쥐를 잡는다는 소식, 소리소문없이 나는 소리 [김규화-소리에 링크하기 全文 page32]   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툭하고 딴다. 그 속에 꽃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유통기한이 찍힌 주검이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 눈감고 있던 맨살이 꿈틀거린다// 물에 젖은 살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 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며 몸뚱일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 나와 세면대 바닥에서 통통거린다// 누가 푸른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깨를 감싸고 있다// ( ) // *()안은 당신의 상상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링크해서 펼쳐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마음이 반짝이며 나타날 것입니다. [심상운-맨살에 링크하기 全文 page119]     사전을 찾아보아도 hyper라는 말의 의미는 참 어렵다. 나는 그동안 나름대로 하이퍼시를 컴퓨터 용어로서의 하이퍼텍스트라는 말의 의미에 더 비중을 두고 이해하려 했었다.(hyper-컴퓨터 용어. in nonsequential manner 비순차적으로 연결된// hypertext-정보란을 마음대로 만들거나 연결시키고 정보를 검색할 수 있게 비순차적으로 기억된, 데이터의 텍스트) ‘낯설게 하기’로 설명 하는 ‘은유’와 ‘하이퍼’의 차이점을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이즈음의 문학잡지들은 저마다 한 가지씩 뭔가를 주장한다. 어떤 문학잡지는 ‘정신’으로의 회기를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잡지는 ‘탈관념’을 부르짖기도 하고 ‘순수’를 표방하지만 그렇다고 순수하지만도 않은 문학잡지들의 주장 속에서 ‘하이퍼시’는 근래의 문학잡지들이 표방한다고 하는 그 주장 또는 지향점들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하이퍼시가 지닌 색체는 일단 범접하기 어렵고 부담스러운 면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문덕수 선생님의 하이퍼시론을 요약해보면, 하이퍼시에 대한 개념 정리가 조금 더 명료해지고 텍스트로서의 하이퍼를 비로소 시의 하이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이퍼(hyper)라는 말은 과도(過渡)한, 과다(過多)한, 초월하여, 넘어서, 초(超)...3차원보다 더 높은 등의 의미로서, 본래 그리스어에서의 일종의 연결어입니다. 사전에 hyperpoetry라는 말은 보이지 않으나, hyperacid(위산과다증), hyperactivity(극단적으로 활동적인), hyperacute(아주 과민한, 초과민한) 등의 용어가 보입니다. hyperpoerty라는 말은 미국의 브라운대학 교수인 P.란도의 저서 [하이퍼텍스트 3.0]에서 보입니다. 처음엔 하이커텍스트를 발견하였으나 뒤에 하이퍼시(hyperpoetry)를 발견하여 이 말로 대체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하이퍼’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세계를 넘어선, 저쪽 너머의, 또는 초월의 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따라서 하이퍼시는 틈이 있는 두 세계(일상적 의식에서는 결합될 수 없는 두 세계)가 연속 연결되는 형식을 일컫는 말로 볼 수 있고, 문학작품 특히 시의 경우엔 하이퍼적인 것이 도입되어 비로소 시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문덕수-하이퍼시 개관 中page193-page194)     지난 며칠. 갑자기 착한 학생이 되어선 나름대로 열심히 하이퍼시에 대한 공부를 했다. 과월호 시문학을 꺼내놓고 다시 읽어보기도 하고 이 책 ‘하이퍼시’에 실린 작품들도 다시 읽어보았다. ‘디지털리즘’에 소개되었던 작품들도 다시 찾아 읽어보았다. ‘하이퍼시’가 대중들에게 다가서기엔 다소 시간이 걸릴는지도 모른다. 내 나름대로의 결론대로라면 하이퍼시는 매우 고급스러운 시의 한 표현양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365    하이퍼시의 전환기법 관찰 댓글:  조회:4475  추천:0  2015-02-18
  하이퍼시의 항등성 배제 및 전경과 배경의 전환기법 관찰       -김해빈 시 중심으로                          이오장(시인)     1. 하이퍼시란 무엇인가   하이퍼시가 무엇이냐는 의문은 많은 시인으로부터 듣게 되는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그만큼 하이퍼시가 시인들의 관심과 연구 대상이 되었다는 증거이며 시문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으로 새로운 시 연구에 있어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에 비하여 요즘 일부 젊은 시인들 주축으로 언어의 형식적인 서술과 비틀린 이미지의 조합으로 독자들이 외면하게 하는 부류가 있는데 바로 난해시파라고 불리는 시인들이다. 하이퍼시는 그러한 난해시 와는 확실한 거리가 있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를 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에 비하여 난해시는 관념과 허구를 결합하여 이미지의 이탈을 은연중 유도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이미지 이탈이 목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거기서 발생한 상상은 독자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본질을 이탈해 언어의 폭력으로까지 번지기 때문이다.   하이퍼시를 처음 도입하고 하이퍼시의 새로운 연구에 적극적인 문덕수 시인은 하이퍼시를 한마디로 압축하여 설명한다. "하이퍼시는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를 연결한 시다. 탈관념의 사물을 한 단위로 보고 상상의 이미지를 한 단위로 본다면 모든 하이퍼시는 A단위와 B단위의 두 단위의 구조를 이룬다. 결국, 하이퍼시는 A단위를 어떻게 만들고 B단위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점으로 귀결되고 그 두 단위를 연결함으로써 완결된다." 즉 하이퍼시는 관념을 완전히 버리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물을 묘사하여 시를 쓰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물만을 가지고 시를 쓴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는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사물에 대하여 새로운 상상으로 몰입되기에는 자신만이 가진 사물의 본질적 이해가 필요하다.   시는 시인의 눈에 비친 사물의 감정적 변화의 그림이다. 어떠한 대상이든 시인의 눈에는 사물에서 얻은 이미지를 연상하게 되며 그것을 문자로 표현하여 독자와 공유한다. 한마디로 사물에서 느낀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고 그릴 줄 아는 게 시인이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이 느끼고 표현하지 않는다. 같은 사물을 두고 여러 가지 방법을 찾게 되고 이미지의 연상을 다른 사물과 대비하여 자신만의 세계로 읽는 이의 감정을 끌어 모은다. 그것이 개개인의 능력이다. 여기서 하이퍼시에서 빠트리기 쉬운 감동의 여부가 결정되어 새롭고 진정한 하이퍼시가 완성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껴야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하이퍼시가 되는가, 시인과 독자가 같은 감동을 공유하게 되는 것은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시문학의 발전만큼 독자들도 발전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시를 써도 그 순간은 자신이 감동하게 되고 완성을 이뤘을 때는 독자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론에 맞는 하이퍼시를 쓰려면 많은 연구가 필요하고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수밖에 없다.   2. 하이퍼와 항등성에 대하여   어떠한 대상을 보든 인간의 두뇌는 기하학적 원리를 따르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시각정보를 해석하는 인간의 두뇌는 자신만이 가진 의심을 지우지 못하는 것이다. 눈과 대상의 거리가 두 배로 늘어나면 대상의 크기는 당연히 반으로 작아져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100m 앞의 사물의 크기와100m 높이에서의 사물의 크기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물리적 거리는 같지만, 위에서 내려다 볼 때가 훨씬 작아 보인다. 수직으로는 기하학적 원리가 작동되지만, 수평으로 볼 때는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항등성이라는 지각 심리학적 원리 때문이다. 항등성이란 주위의 환경이 바뀌어도 사물을 일정한 방식으로 계속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둥근 접시를 옆에서 봐도 타원이 아니라 여전히 둥근 원으로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변하는 상황과 관계없이 사물의 본질을 본다는 말이다. 철학에서 말하는 동일성의 심리학적 구성 원리다.   시를 쓴다는 것은 대상의 본질을 본다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모른다면 시의 구성이 되지 않고 사물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져 시의 목적을 잃게 된다. 그러나 하이퍼시에서는 사물의 본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모양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모양에서 얻은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다. 소나무를 봤을 때 소나무의 생태와 자연과의 동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눈으로 본 그대로의 모습을 그때의 상황과 연계하여 거기서 파생된 상상을 이어가는 것이 하이퍼시다. 시는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면 안 되는 줄 알았고 실제로 우리는 시를 그렇게 써왔다. 그러나 하이퍼시에서는 대상의 본질 보다는 보이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멀리 떨어진 큰 고목이 작은 묘목으로 보일 수도 있는 허상도 그릴 수 있고, 위에서 보는 크기와 거리를 두고 보는 크기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인간의 생활은 대부분 수평 공간에서 이뤄진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은 대부분 항등성을 잊고 산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시를 쓸 때 그러한 원리를 생각하지 않고 감동을 앞세워 본능적인 감각으로 씨를 쓰기 때문이다.이것은 객관적이고 과학적 세계에 대한 강박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이 중요한 순간에 한쪽 눈을 감게 된 것은 원근법 때문이다.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평면에 정확히 재현하려는 시도에서 인간은 양쪽으로 보이는 세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공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원근법은 눈이 하나일 때만 가능했다. 렌즈가 하나인 카메라처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러한 현상은 두드러졌다. 그것은 항등성과 같은 두뇌의 작용을 제거하고 눈을 두뇌로부터 단절시켜 기계적인 정보만을 얻겠다는 것이다.   객관적 세계와 본질적 세계가 다르다는 것은 시인들에서 먼저 나타났다. 서양의 인상파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파괴하기 전부터 시에서는 항등성 제로의 원근법 강박에서 벗어나 보이는 데로 느끼는 데로 시를 쓰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부터 시의 주류는 본질적 세상의 이상을 그려나가 인류는 객관적 재현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사람들은 기계문명에 완전히 길들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스마트폰.컴퓨터 등의 화면 세상에 빠져 두 눈으로 확인한 것보다 카메라가 잡은 세상만을 믿고 산다. 본질의 통찰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질을 모르니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하이퍼시는 시작됐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상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무시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그림 위에 새로운 상상을 결합하여 하나의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카메라가 잡은 객관적 정확성에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담을 수 있는 세 번째의 눈, 다시 말해 본능적인 감성이 있어야 이미지의 연속성으로 하이퍼시가 이어지는 것이다.   3. 하이퍼시의 전경과 배경의 전환   시를 쓴다는 것은 창조적 행위다. 시인은 창조자로서의 요건을 갖췄을 때 비로소 진정한 시인이 된다. 창조적 사고에 대한 선구적 연구자인 월리스는 창조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어떠한 문제로부터 몸과 마음이 일시적으로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시의 대상인 사물을 대했을 때 확연한 이미지가 이어지지 않는 것을 고민하지 말고 잠시 떨어져 다른 것을 상상하게 되면 불현듯 어떠한 상상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상상의 존재란 자신이 속한 맥락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물을 지각할 때 사물의 각 부분을 따로 인식하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형태 즉 게슈탈트(독일어로써 심리현상은 어떠한 요소의 가산적 총화로는 설명할 수 없고 전체성을 갖는 동시에 구조화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성질)로 파악한다. 이때 중요한 부분은 전경이 되고 나머지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마치 사진을 찍어 인물만 뚜렷하게 나오게 하는 아웃포커싱과 같은 원리다. 시에서 이와 같은 전경과 배경의 관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물의 어떤 부분이 관심의 초점이 되어 전경이 되면 나머지는 배경이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맥락이 바뀌면 전경이 배경이 되고 배경이 전경이 된다. 이렇게 게슈탈트의 끊임없는 형성과 해소, 이 과정이 사물의 서사 즉 이야기되는 것이고 새로운 이미지의 연결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묘미이며 진정한 하이퍼이다. 전경과 배경의 전환이 매끄럽지 못하여 배경으로 물러나야 할 전경을 바꾸지 못하고 고정된 존재만 바라본다면 하이퍼의 구성이 한정되게 되어 형성이 뒤엉켜버리는 데 있다. 여기서 하이퍼시에서 잃게 되는 감동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하이퍼시의 전경과 배경을 전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몇 가지를 든다면, 첫째. 기존의 고정 관념을 확실하게 버리는 것이다. 같은 하이퍼시에서도 똑같은 단어가 중복될 수 있는데 이것이 또 다른 관념이 되는 것이므로 유행 같은 언어의 유희에 빠져서는 안 된다. 둘째. 사물의 움직임과 동화된 주위 환경을 봐야 한다. 즉 새로운 사물을 찾아내어 그 움직임을 자신에게 맞춰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움직여 사물의 움직임을 찾아야 한다. 셋째. 관심을 바꾸는 것이다. 이제까지 몰랐던 사물에 흥미를 느끼고 새로운 사실을 깨치고 경험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게슈탈트 전환이 가능해야 창조적인 발상으로 하이퍼시를 쓸 수 있다.   4. 김해빈 시에서 나타난 하이퍼시의 관찰   하이퍼시가 새로운 시문학으로 자리 잡아 시단의 큰 방향을 일으킨 후로 많은 시인이 참여하여 하이퍼시에 대한 연구와 그 실현에 앞장서고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성향에 맞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하여 그동안에 익혀왔던 사물의 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적극적으로 참여한 시인들을 보면 문덕수 시인을 중심으로 심상운. 김규화. 조명제. 송시월. 안광태. 이춘하. 정연덕. 고종목. 이솔. 위상진. 김기덕. 이선. 김예태. 허순행. 김해빈 등 문단의 활동이 활발한 시인들이다. 나열된 이름에서 빠진 시인들도 상당수가 있어 새로운 시론으로 나타난 하이퍼시 운동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증명하고 있다. 이중 김해빈 시인의 작품을 중심으로 하이퍼시의 이론과 실제의 작품이 하이퍼답게 이해되고 부합되는 것에 대하여 관찰해보기로 한다.   김해빈은 초기 작품부터 전통 서정을 크게 벗어난 상태로 나타났다. 처음 작품집 "새에 갇히다"를 살펴본다면 그 제목부터 하이퍼 유형을 표출하고 있는데 이는 하이퍼 이론을 접하지 아니한 상태에서 자신의 안목과 상상을 은연중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새에 갇힐 수는 없다. 그러나 김해빈은 스스로 새에 가두어 날개를 빌리고 새를 통하여 본 새로운 세상을 그린 것이다. 그 후의 작품집에서도 하이퍼적인 요소를 품고 있는 것이 곳곳에 보이는데 이는 원래의 시적 감성이 일반 서정에서 크게 벗어나는 감각을 타고난 듯하다.   시문학 5월호에 발표된 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비 그친 자운서원 잔디마당 위로 눈알 굴리는 잠자리 떼 뇌관 푼 핵폭탄 물고 몰려간다   유럽을 평정한 히틀러 독일공군이 영국 본토를 향해 도버해협 상공을 날고 있다 우중충한 날씨에 내려다보는 도시는 무표정하고 괴링의 출격명령에 날개를 편 전투기 노선을 이탈해 런던 제국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 *블리츠(Blitz)체험관 상공을 낮게 날고 있다   잠시 멈추었던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전투기는 급하강한다   빗금으로 치닫는 빗줄기에 야금야금 저려오는 날개 나치는 영국 상륙을 포기하고 두 손을 들었다   아버지보다 위에 있는 율곡무덤도 오만원권 오천원권 지폐도 아닌, 기념관 빛바랜 초충도에 앉은 고추잠자리   헤드라인 ‘오늘이 우리의 승전일입니다(TODAY IS V.E. DAY!)’     *블리츠Blitz 체험관: 유대인 학살 기록관과 런던 대공습 당시 일반인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꾸며 놓은 곳                           이 작품은 하이퍼적인 이론에서 벗어나지 않은 전형적인 하이퍼를 보여주고 있다. 고추잠자리는 평화의 상징이며 한가롭고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는 자연의 개체이다. 누구나 비 그친 뒤에 잔디밭 상공을 바람 없이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를 대하면 내면에 감춰진 그 어떤 고민과 울화도 잊게 된다. 어린아이가 고추잠자리를 잡겠다고 뛰어다니는 모습에 함께 동조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마디로 평화의 상징이라 아니할 수 없는 곤충이 고추잠자리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겉모양뿐이다. 잠자리의 생태를 보면 곤충 중에서도 상위급인 포식자이다. 잠자리 유충이 물속에서 자랄 때 장구벌레 등 작은 애벌레나 심지어 개구리의 올챙이까지 잡아먹으며 사는데 애벌레의 시기를 보내며 먹는 먹이의 수효가 몇 만 마리가 된다는 학계의 발표도 있다. 또한, 땅 위에서 유충으로 지내는 명주잠자리는 일명 개미귀신이라 불리며 함정을 파 수많은 개미를 잡아먹는 포식자이다. 이것이 잠자리의 생태이며 본질이다. 사물의 본질을 보고 시를 구상하지 않고 사물의 현재 보습을 보고 시를 쓴 것이지만, 전투기와 히틀러를 잠자리에 대입시킨 것을 보면 김해빈은 사물의 본질까지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의 위패를 봉안한 사원이며 율곡의 가족묘를 조성한 곳이다. 알다시피 율곡 이이는 성리학자로 알려진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또한, 평화를 지키는 데는 힘이 있어야 한다며 10만 군병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힘을 앞세운 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잠자리가 평화로운 모습을 보이는 데는 힘을 기르는 포식자의 시기가 있다는 것을 자운서원과 잠자리를 대비하여 나타낸 것으로 사물의 실체를 연결 인식하는 항등성을 벗어버리고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대비시킨다.   히틀러는 근대의 몇 안 되는 독재자의 대명사이다. 힘을 내세워 유럽과 전 세계를 점령할 목적으로 폭격기를 동원하여 이웃 나라를 폭격한다. 김해빈 시인의 상상은 사물의 현 상태에서 멈추지 않고 유럽까지 날아가 히틀러의 폭격기를 불러낸다. 도버해협을 날아가는 폭격기가 자운서원 앞마당을 날고 있는 잠자리가 된 것이다. 이것이 사물에서 파생된 새로운 이미지의 연결이다. 고추잠자리는 전경으로, 자운서원은 배경으로 나타나다가 폭격기의 등장으로 자운서원이 전경이 되고 잠자리는 배경으로 물러나는 전환의 기교와 이율곡의 사당과 가족이 배경이 되어 그려지다가 다시 고추잠자리가 전경이 되는 하이퍼적인 기법은 게슈탈트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운서원의 유래와 형성. 잠자리의 생태와 실태, 히틀러의 폭격기와 폭탄의 파열음을 하나의 장면에 대비시켜 이미지의 연결을 이뤄낸 하이퍼의 퍼즐을 무리 없이 그려냈다. 사물의 과거가 현재의 평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현재 보이는 모습의 잠자리가 그대로의 움직임으로 평화를 만들어 모두가 승리한 승전 일을 만든 것으로 복합된 이미지가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하이퍼에서 빠지기 쉬운 감동까지 만든 것이다.     웃음보에 헛바람 들었는지 멸치같이 깡마른 남자가 귀에 이어폰을 끼고 시청 앞 건널목 횡간막 사이를 비집고 히죽히죽거리며 다가온다   가을걷이 끝날 무렵 볼썽사납게 조무라든 꽈리를 보았을까 소피 마려운 여자의 뒤태를 보았을까 2시간 전 언양불고기 먹고 ktx 타고 올라온 여자의 하프코트에 묻은 쇠똥 굴러가는 소리를 들은 게야   설익은 시에 짓눌려 내 흉강에 덧쌓인 말씨들이 폐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혹시 눈치챘는지 남자는 이내 뒤따라오던 스키니 차림에 킬힐 신은 여자의 꽁무니에 눈길 꽂힌다   거미줄 같은 거리를 기웃거리며 권력을 찾던 남자는 몇몇 조무래기들의 웃음과 교회 전도사로부터 받은 일회용 휴지를 주머니에 우겨넣고 도마뱀처럼 꼬리 자르고 건물 안 으로 들어 가버린다   성형외과에서 나온 얼굴 퉁퉁 부은 여자, 공터를 지나다 울타리 넘어온 축구공에 뒤 통수 맡고 미간을 찌푸리려 하자 완충지대 튤립나무에 앉았던 까치가 깔깔거리며 날아 간다   주유소 화장실에 뛰어든 여자의 스커트자락 놓지 못한 남자 여자의 핸드백 들고 휘파람 부는 듯 볼을 잔뜩 오므렸다 부풀리며 달착륙을 시도하고 있다   정지신호 무시한 채 응급처치하고 나오는 여자의 오줌보가 조무라 들자 주유하고 있던 남자의 자동차 바퀴에 짓눌린 꽈리 터질 듯 팽팽해진다                                                                                앞의 작품이 사물의 모양을 그려 새로운 이미지를 엮어낸데 비하여 이 작품은 사람의 감정을 사물화하여 전경과 배경의 전환을 적절히 이뤄낸 데 있다. 남녀의 생태적인 일상을 여러 각도의 방향에서 바라보고 남자의 히히낙낙 거리는 실태와 여자의 팽팽해진 감정을 하나의 구멍으로 빠져나가게 하여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였다. 여기에는 남자를 전경으로 하고 그 뒤의 배경에는 여자의 감정이 언제나 받혀주는 형태로 사물의 표현보다 사람의 감정을 그려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남자는 세상의 모든 여자가 자신의 소유라고 믿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후손 번식이라는 지대한 자연의 섭리가 남자들을 착각하게 하였을 것이다. 작품 속의 남자는 여자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혼자만 들을 수 있는 이어폰을 꽂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키득거리는 모습을 여자는 뒤에서 살펴본다. 현시대의 새로운 모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배경으로 있는 여자의 감정 기복은 폭발 직전이다. 그런데도 남자의 눈길은 또 다른 여자의 모습에 현혹되어 뒤따라가는 실태를 보인다. 이때의 모습을 바라보는 여자는 남자의 기본 욕망을 이해할 수 있을까. 권력과 금전을 얻기도 전에 섭리적 욕망만을 풀어내려는 남자는 여자의 표적이 된다. 대부분 여자는 표적의 남자를 향해 창을 던지는 게 아니라 다른 출구를 찾게 되고 그 출구로 성형외과를 들락거린다. 그것이 실패할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남자에 대한 분노를 그렇게 푸는 것이다. 여기에서 김해빈 시인의 고민은 시작이다. 남자와 여자의 생태적인 모습을 버리고 현실에 맞는 모습을 그려야 할지. 남자의 비뚤어진 욕망의 발산을 원칙적으로 그려야 할지를 고민한다. 그 결과로 달이라는 위성을 찾았다. 해결을 위하여 선물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땅을 찾아 원색적인 남자의 욕망을 잡은 것이다.   기흉은 결핵성 파괴 등의 원인으로 폐의 표면에 구멍이 생겨 흉막강 안에 공기 또는 가스가 찬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자꾸만 헛바람이 빠져나와 남들이 보기에는 실없이 웃는 모습으로 보이는 병이다. 김해빈의 기흉은 그러한 질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남녀관계에서 시적 모티뷰를 찾아낸 것이지만 사물의 모습이나 움직임에서 이미지를 찾지 않고 사람의 감정과 행동을 사물화하여 원리적인 항등성을 배제하고 전경과 배경을 적절하게 전환하여 한 편의 하이퍼시를 완성하였다. 이것은 사물에서 찾은 이미지보다 쉽게 그려질 것 같아도 사람의 변화가 짐작하지 못할 이변의 연속인 것을 고려할 때 훨씬 더 어려운 작업이다.   마지막 연에서 "여자의 오줌보가 조무라 들자 주유하고 있던 남자의 자동차 바퀴에 짓눌린 꽈리 터질 듯 팽팽해진다"는 남녀의 생리적인 차이는 결국 하나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남녀관계는 이율배반적으로 동등하다는 항변으로 보인다.     날카롭게 솟은 뿔 동그란 눈 지그시 감은 타르보사우루스 알을 낳는다 간척지 모래 위로 퍼져가는 억새를 스쳐온 바람이 알을 날름 삼켜버린다   화성, 개미섬 기슭 따라 풀잎까지 벌떡 일어서서 조이는 팽팽한 호흡 바위를 핥아대던 기다란 혀들이 용암에 젖은 이빨, 발톱, 눈빛들이 번뜩인다   알을 깨트리며 주먹을 휘두르던 주몽이 활을 만들고 당긴 시위를 놓는다 경주로를 이탈한 말의 울부짖음 벌판을 가르는 선이 무너져 뚜렷하게 찍히는 발자국 부러진 청동검 반쪽을 주몽이 알 속에 감춘다 뺏고 빼앗기는 칼 유리가 알 속에서 청동검을 찾는다 얼었던 송화강이 녹는다   철거덕 철컥 철거덕 철컥 고개 쳐들고 들판을 달리는 점박이 또다시 커다란 알을 쏟아낸다 논바닥에 뒹구는 알 사육장 소가 침 흘리며 되새김질한다   돌알을 품고 있던 메갈로사우루스 시화방조재를 바라보며 푸른 눈 껌벅거리고 삭아버린 티라노의 하얀 숨결 솟아오르는 공단 굴뚝 안킬로사우루스의 잿빛 눈물이 하수구를 따라 흘러내린다 고삐 묶인 폐선 허리께서 삐거덕삐거덕 막대뼈 조이는 소리 몸 사르며 찢어진 풍어 깃발마다 익룡 발가락 펄럭인다   산조, 칠면초, 갈대가 뒤덮인 갯벌 알을 낳은 타르보사우루스 위턱을 치켜들고 슬금슬금 바닷가 암벽 속으로 사라진다 억새의 손짓을 기억하는 코리아케라톱스 알이 입 쫙쫙 벌린다                               첫 번째 작품이 사물의 형태와 움직임을 그려 새로운 이미지의 연결을 이뤄낸 것이라면 두 번째의 작품은 사람의 심리 상태를 사물화하여 사물과 똑같은 상태로 전경과 배경을 전환하여 하이퍼적 완성도를 높인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세 번째 작품인 코리아케라톱스는 과거와 현재를 합하여 미래로 이끌어나가는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김해빈 시인의 시각과 감각이 사물과 사람의 연결된 상상의 고리를 한 차원 뛰어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코리아케라톱스는 5천만 년 전 이 땅을 지배했던 공룡의 이름이다. 시화간척지가 생긴 후에 드러난 갯벌 개발 중 우연히 발견된 공룡알 화석에서 그 이름을 얻은 우리의 토속 공룡으로 그 흔적을 다 찾지 못하여 아직도 발굴 중이다. 그곳에 가면 금방이라도 공룡들이 포효하며 뛰어나올 것 같은 환상에 쌓이고 알 화석을 마주한 순간은 누구나 과거의 자연 상태를 떠올리며 현실을 잊게 만드는 곳이다. 김해빈이 본 것은 누구나 똑같이 보는 사물이다. 각자의 상상과 현재 보이는 현실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상상으로 몰입되어 각종 공룡을 만난다. 그러나 김해빈이 본 것은 남과 확연히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은 알을 떠올리게 되면 그 크기를 재어보고 부화될 새끼의 크기와 성장한 크기를 상상한다. 김해빈은 초기 삼국시대의 전설인 주몽을 불렀다. 건국에 필요한 힘과 힘을 받쳐줄 각종 무기와 활, 불타는 듯한 눈빛을 공룡의 힘과 대비하여 나라를 세운 주몽의 활약을 그려냈다. 거기에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떠올리고 주몽과 유리와의 관계를 설정하여 전경과 배경의 전환을 이뤄낸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현실로 돌아와 농기구인 트랙터가 뱉어내는 하얀 덩이(소를 먹이려고 볏짚을 효소와 섞어 단단하게 굴리는 일종의 싸이로 방법)를 알과 전설에 혼합하여 인간이 자연과 싸워 만든 거대한 방조제를 향해 생태파괴의 폭력을 항의한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산조. 칠면초. 갈대가 뒤엉켜 펄럭이는 갯벌의 평화에서 쫓겨 가는 공룡의 마지막 장면으로 한 편의 희극과 같은 연출기법을 보여줘 하이퍼적시에서 빠트릴 수 있는 서정의 감동을 이끌어내었다. 항등성을 배제하고 사물의 모양과 움직임만으로 전경과 배경의 전환을 그려낸 것이다.     눈 쌓이는 모스크 앞에서 기도하는 무슬림들, 눈밭에 앉아 있는 낙타, 피라미드 앞 스핑크스는 미소를 잃었다. 사람들 호기심이 파라오의 역사를 뒤집어놓고 말았다   대립이 가득한 지붕을 하얗게 덮은 눈은 주도권 싸움에 뜨겁고 치열했던 여의도 십자가를 잠재울 수 있을까                                       압축된 삶은 의미가 없다며 하루하루를 느슨하게 흘려보내던 여자는 접시에 채소셀러드와 과일을 듬뿍 담아 테 이블 아래 주름진 의자에 앉는다   1월을 지나 2월이 오면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젖은 쭉정이도 제 몸 부풀리며 이벤트의 계절을 또 기다리겠지   12월 어느 날 베고니아 뷔페 시인의 접시 위에 퉁퉁 불어 튼 강남콩 한 알 덩그러니 남았다                                           위에 부분적으로 나열한 두 편의 시에서도 김해빈의 시는 시종일관 하이퍼적인 기법을 유지하며 시의 방향을 잡아 나간다. 폭설에서 100년 만에 이집트를 덮은 눈에 사막의 피라미드는 하얗게 덥히고 스핑크스가 미소를 잃은 상황에서 군중은 자유를 외치며 혁명가를 부른다. 개인의 염원이 하나로 뭉쳐 짓눌린 자유를 찾는 과정에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되찾은 자유는 폭설에 갇혀 다른 고난을 불러내는 피의 역사, 한 송이의 눈이 뭉치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보여주지만 웃음을 잃어버린 승리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다시 일으킨다. 이에 대비하여 우리의 의사당인 여의도를 등장시켜 대립과 설전이 난무한 상황을 꼬집고 그 옆에 위치한 높다란 십자가의 건물에서 일어난 분쟁을 종교적인 문제 즉 폭설로 불러낸 전환의 기법이다.   배부른 콩에서는 자유분방하고 욕망을 위해서라면 어떤 거리낌이 없는 행동을 보이는 남자와 여자를 대비시켜 인간의 추악함이 얼마나 높아야 무너질 수 있는지를 쭉정이 콩에 비유하였다. 완성된 인간은 없으나 완성으로 가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 남자와 여자가 군중들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려는 과욕에 대한 행동을 꼬집어 통통하게 영걸은 콩과 익지 않아 쭉정이가 된 콩으로 그려낸 기법은 김해빈의 특유한 하이퍼적 시의 기교다. 어느 작품에서든 사물과 사물의 연관을 찾아내고 사물의 움직임과 멈춰진 정서를 끄집어내는 김해빈의 하이퍼시에 대한 연구와 몰두는 앞으로 한 발짝 더 나갈 것이 분명하다. 이는 시의 실제가 이론을 앞질러 가기 때문이다.     5. 하이퍼시의 방향   시 자체가 원래 하이퍼라고 주장하는 시인도 있다. 일상의 용어에서 벗어나 그 위의 가상 현실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시는 언제나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의 주장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다만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한 걸음 더 나가 지금껏 사용한 관념과 묶인 상상을 벗어버리자는 하이퍼시 운동은 우리 시단에 새로운 활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하이퍼시는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물에서 나온 가닥의 실을 한곳에 모아 하나의 실타래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시를 쓰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가능하다. 결코,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사물을 볼 때 이미 머릿속에 박혀있는 고정된 환경과 형태를 벗어버리고 사물마다 가진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내어 하나의 특출한 이미지를 만들자는 것은 난해한 시를 쓰자는 것이 아니다. 문명의 발달에 맞춰 자연적인 정서에 기계적인 정서를 도입하고 발달에 따라 변해가는 인간의 정서도 바뀌어 가야 한다는 주장은 분명히 옳다. 하지만 하이퍼시에서 이미지의 연결을 위하여 여러 갈래의 사물이 등장하고 조합된 이미지가 매끄럽지 못하여 시적 감동이 적다는 지적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는 개개인이 극복하여 풀어내야 할 숙제다.    
364    하이퍼시의 리해와 창작 댓글:  조회:4361  추천:0  2015-02-18
하이퍼시의 이해와 창작                                 이 오장 시인                                                   1. 현대시의 원리   17세기 폴란드의 미학자 사르비에브스키(K.M.sarbiewski)는 “모든 예술의 창조개념은 자연이나 사물을 모방할 뿐이지만 시인의 예술 행위만은 새롭게 창조(de novocrat)해야한다.”라고 말했다. 이는 미술이나 조각 등 기타 예술 행위는 자연과 사물 등의 대상을 모방하지만 시인의 시적 상상력은 끝없이 펼쳐져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으로 시가 모든 예술의 정점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시의 발생이 인간의 탄생과 더불어, 함께 존재했다는 학설은 시가 예술의 근원이라는 것을 뒷받침한다. 원시시대부터 인간은 자연을 두려워하고 경외심을 가졌다. 자연과 더불어 살다가 자연에 비해 너무나 나약함을 깨달은 인간이 구원의 행동으로 언어가 발생하기 전부터 자연에서 얻은 소리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게 되었고 언어를 습득한 이후 리듬이 발생하여 이것이 시로 발전했다는 학설은 누구나 부정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시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다. 순간의 전시성에 그치는 미술이나 청각적 예술은 인간의 정서를 다듬어주는 데 그치지만, 정신적 감동을 전달하는 시는 인간이 만든 역사를 바꾸기도 하는 것이다. 단 몇 줄의 시가 수많은 전쟁사를 기록으로 남겨 인류 발전에 공헌한 사실도 있다. 인간 생활은 끝없는 변화의 연속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연속적으로 구성되었다가 해체되고 다시 재구성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언제나 안정이다. 그 안정은 변화 속에서 자리잡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물질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오직 영적인, 즉 정신적인 안정이 필요하다. 시는 인류의 발전과 더불어 정신세계를 다듬어 왔다.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이 시를 구성하는 첫 번째 단계다 그러나 첫 번째 단계부터 선택적 지각으로 왜곡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자연에 한정된 시야를 가졌기 때문이다. 시가 자연 속에서 발생하였지만 꾸준히 자연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있었고 현대에 이르러 인간이 원하는 시의 형태가 자리잡아가고 있는 현상이다. 일찍이 조지훈 시인은 시의 원리에서 "시인은 자연이 능히 나타내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시에서 창조함으로서 한갓 자연의 모방에만 멈추지 않고 자연의 연장으로서 자연의 뜻을 현현하게 하는 대자연일 수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시인이 자연을 소재로 하여 다시 완미한 결정을 이룬 제2의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연에 더 많이 통할수록 우수한 시며 실제에서도 훌륭한 예술작품은 하나의 자연으로 남는 것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이를 모두 수용한다는 것은 착오다. 인간이 발전하는 속도에 뒤처지는 시라면 가치가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진화가 끝이 없다는 것을 가정할 때 과연 사실과  실재성 즉 현실성만 가지고 시를 쓴다면 꾸준하게 발전되어온 시가 정체되고 말 것이다. 이것을 벗어나기 위하여  현대적인 감각을 쫒으려는 새로운 형태의 모더니즘(modernism)이 발생하여 전통주의와 사상에 대립하여 문명적 주관주의를 강하게 주장하는 시파가 등장하였고 근대 시인들이 꾸준하게 이를 발전시켜 많은 유파를 남겼다.  인간은 자기가 필요한 것만을 보게 된다. 실제로 세상에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자극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한 이유로 필요한 자극만 받아 그것만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창조적인 존재로서 남들이 지나치는 자극을 잡아들이는 능력을 갖췄다. 이것이 낯설게하기다. 시 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똑같은 방법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낯설게하기가 기본임을 감안할 때 방법을 달리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시 창작의 원칙이다. 이 같은 낯설게 하기의 기본이 시의 방향을 새롭게 만든다. 시는 미학이 아니다.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무엇도 아니다. 미학에 빠져있는 창조는 막힌 길이다. 예술의 창조는 시만이 가진 것이라면 우리는 새로운 시학을 가져야 하고 새로운 시학을 발전시켜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2. 하이퍼시란 무엇인가   하이퍼시란 한마디로 이미지의 탑 쌓기다. 여러 가지 사물에서 받은 자극을 각각의 이미지로 그린 후 하나의 탑으로 쌓는 것이 하이퍼시다. 기존의 시가 하나의 이미지로 시의 완성을 추구한다면 하이퍼시는 다수의 이미지를 하나로 합하여 더 확장된 시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넘어 시의 표현력을 끝이 없게 상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기존의 시만을 고집한다면 모더니즘의 공간에서 더 이상의 확장을 멈춰야 한다. 시는 인류의 발전에 앞장서야지 발전을 따라가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대개 시인은 하나의 사물만을 관찰하고 거기에서 시의 모태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즉 관념에 갇힌 시작법을 고수하는 것이다. 심리학계의 저명한 학자인 크리스토퍼 차브리스(chrstopher chabris)와 대니얼 사이먼스(Daniel simons)는 인간의 맹시현상을 실험하여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결과는 인간의 시선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본다는 것이다. 어떠한 연극이나 경기를 보게 한 뒤 극 중이나 경기와는 관계없는 움직이는 사물을 지나게 하면 대개의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연구결과이다. 자기가 보고 있는 사물의 움직임만 보게 되지 그 밖의 사물은 관심 없다는 맹시현상은 시인의 시 쓰기에도 동일하다. 어떠한 사물에서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오직 하나의 이미지만을 떠올리게 되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다른 이미지는 관심 밖에 두는 것이 일반적인 자세다. 하이퍼시는 맹시현상의 허점에서 출발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하나의 이미지를 그리며 거기서 파생된 다른 이미지를 그릴 수 있다면 하이퍼시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파생된 이미지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은 편집이다. 사물은 끝없이 구성되고 해체되었다가 재구성되는 성질을 가졌다. 이미지는 사물의 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유동성 상상이다. 하이퍼시는 변하는 이미지를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변화하는 각각의 사물마다의 이미지를 편집하여 하나로 융합시키는 것이 하이퍼시의 완성이라 할 것이다.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천재적인 재능이 필요하지는 않다. 천재는 한없는 상상을 하다가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능력을 가졌다. 이에 반하여 둔재는 끝없이 상상하기만 한다. 시를 쓰는 시인은 누구나 천재라고 자평한다. 그렇다면 하이퍼시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가장 창의적일 때는 멍하니 있을 때다. 멍하니 있다고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무엇인가 자신도 모르는 것을 생각하며 끝없이 상상력을 확장해 나간다. 이때의 상상은 생각의 흐름을 놓칠 때까지 계속되다가 어느 순간에 멈추게 되는데 그 멈춤에서 흐름을 찾아내는 사람이 시인이고 찾아내지 못하고 놓치는 게 보통 사람이다. 이러한 상상은 시인들에게는 일상이다. 이럴 때의 생각은 그림 곧 심상이 되고 시인은 이를 문장으로 옮겨 시를 쓰게 된다. 이때 그림을 설명하는 글이 관념적인 문장이고 객관적으로 묘사를 강조한다면 사물시가 되어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론을 보면 하이퍼시는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를 연결한 시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고 탈관념의 사물을 한 단위로 보고 상상의 이미지를 한 단위로 본다면 모든 하이퍼시는 A단위와 B단위의 구조를 이룬다고 했다. 하이퍼시는 A단위를 어떻게 만들고 B단위를 어떻게 만들어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함으로써 완성된다고 말한다. 사물에서 받은 자극을 상상으로 끌고 간 후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하는 것으로 이는 하나의 그림을 최소 단위로 세분화하고 각 부분을 사물화하여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결국, 하이퍼시는 보고 느낀 것에 대한 관념의 그림을 세분화하여 사물에서 파생되는 연결 이미지를 놓치지 않고 처음의 이미지와 융합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하이퍼시의 단계   1) 1단계   안개는 피어서 강으로 흐르고   잠꼬대 구구대는 밤 비둘기   이런 밤엔 저절로 머언 처녀들....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박목월  전문   위의 시는 목월의 초창기 작품으로 한편의 그림을 추억 저편의 꿈으로 그려낸 시다. 강가에 핀 안개가 밑바탕을 이루고 잠들어야 할 밤에 울어대는 비둘기가 그리움을 재촉한다. 그런 밤엔 저절로 고향 이웃에 살던 처녀가 떠올라  잠을 못 이룬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고향이고 봄의 풍경이다. 단 한마디도 고향의 이야기는 없으나 유년시절의 향수가 읽는 이의 내면을 흔들어 놓는다. 환상적인 그림을 강가의 안개 밤에 우는 비둘기 갑사댕기를 맨 처녀 등, 사물로 대비한 목월의 시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하이퍼적인 기질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것이 하이퍼시의 1단계라고 볼 수 있다.  . 2) 2단계   봄은 차 한 잔의 향기가 난다 귀 가까이 은박지를 밟고 와 똑똑똑 여보세요 아침 하얀 풋잠을 깨운다 울타리의 장미가 새순을 뻗고 기어가 바람 일렁이는 꽃불을 켜고 있는 가슴 신록을 꼭 누르면 깜박 깜박 디지털 숫자가 찍히고 싱그러운 손전화 푸른 벨소리가 난다 감전되는 떨림으로 여보세요 신록의 첫 목소리가 울려온다 울타리에 멧새 한 마리가 날아 앉아 도록또록 눈망울을 굴린다                          오진현 ‘푸른 벨소리’ 전문   오진현 시인은 일찍부터 탈관념의 시론을 주창하며 관념을 모두 깨트리려 직관적인 수학적 존재증명이라는 시론을 발표하고 누구보다 앞서 하이퍼적인 시 쓰기를 주장하였다. 모든 시어를 사물로 대체하며 이미지의 연결과 확장을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새로운 시 쓰기를 실천하여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생을 일찍 마감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하이퍼시를 한 차원 더 끌어올리는 데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이 작품은 하이퍼시의 초기 단계로 당시에는 디지털시라고 명명했던 시로서 이미지의 단순함을 빼고 나면 하이퍼적인 요건을 갖췄다. 하이퍼시가 여러 개의 이미지를 펼쳐내고 다시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하여 상상 속에서 캐낸 더욱 더 큰 이미지의 집합체라면 이 작품 속에 나타낸 이미지는 봄 그림 하나에 불과하다. 여기까지가 하이퍼시의 2단계라 할 수 있다.   3) 3단계   까만 머리통에 볼펜으로 두 눈동자를 찍은 손톱만한 몸뚱이. 반짝이는 갑옷 앞다리 갈퀴와 뒷다리 톱니로 쇠똥더미에 올라 곰상곰상 쇠똥을 굴려 금방 구워낸 똥경단 핑크 냄새나는 달덩이 빵 달은 없고 고공 철탑농성 2백일 비정규직 B씨의 눈에는 별없는 칠흑 밤하늘이 두 아이와 아내를 위한 더 큰 빵만 하였다   쇠똥구리 작은 눈을 화등잔만큼 키우고 말랑한 똥경단 밟고 오른 무대에서 팔을 비틀고 다리를 꼬아 깨끼춤을 춘다 하늘을 조아 은하수 등불을 찾는다 은하사다리가 감마선 광목을 펼쳐 미끄럼 타고 내려오면 똥경단을 탈없이 집으로 가져가기 달덩이 방을 빼앗기지 않기   하늘 공중에 떠서 굶고 사는 B씨가 은하 젖줄에 더 가까이 가려고 양 어깨를 들썩인다 똥 굴려 똥경단 먹고 똥경단 틈새에 새끼 낳고 똥 구워서 쇠똥찜 한다              김규화 ‘쇠똥구리의 춤’ 전문   하이퍼시가 이미지의 탑 쌓기라고 정의한다면 쇠똥구리의 춤은 하이퍼시가 분명하다. 생존한다는 것은 먹는 것이다. 살아 있는 존재는 먹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한다. 더럽고 작고 뜨겁고 차갑고를 떠나서 각자의 현실에 맞게 먹을 것을 찾아 헤맨다. 똥을 먹는 쇠똥구리, 아이와 아내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하여 철탑에 올라 농성하는 근로자. 작은 일당을 얻기 위하여 관객도 없는 무대에 오른 곡예사,모두가 먹기 위한 행동으로 움직인다. 그 방법이 모두 달라도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은 같다. 굴러가고 높이 오르고 춤을 추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 움츠리다가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를 하나의 작품 속에 모두 배열하고 전체적으로 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 작품은 하이퍼시만이 가진 표현 방식이다. 김규화 시인의 시는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췄으면서도 읽기가 편하고 이해하기가 빠르다. 너무 난해하여 독자와의 소통이 어려운 하이퍼시 속에서 하이퍼시의 완성도를 갖췄다.        4. 하이퍼시의 배제요소   1) 주관의 배제      모든 시는 시인의 주관으로 시작되고 주관으로 끝나는 게 보편적이다. 화자의 감정 몰입으로 얻은 이미지가 끝날 때까지 일직선으로 움직여 주제를 벗어난다면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독자의 감동을 유도하려는 경향이 많다. 이는 화자의 울타리에 독자의 감동을 강제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라기보다는 화자가 창작한 작품이 화자의 내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있다. 하이퍼시는 여기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하이퍼시가 된다. 새로운 시운동은 실험이다. 그 결과가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주관을 빼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둘째 반복하여 써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 셋째 나타내고자 한 이미지가 뚜렷해야 한다. 넷째이미지의 결과가 표준화 및 일반화되어야 한다. 어느 것이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하이퍼시의 최대 쟁점은 주관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 속에서 화자인 ‘나’가 있고 없고는 시작법에 있어 많은 논란이 되고 있으나 보편적으로 볼 때 화자의 존재는 표시하지 않아도 존재할 수밖에 없으므로 배제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오케스트라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지휘자밖에 없다. 연주자나 관객 모두가 지휘자의 몸짓에 따라 감정의 기복을 나타내고 감동의 결과는 연주가 끝나지 않아도 발출된다. 시에서 화자는 지휘자에 속한다. 그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보여주는 몸짓을 한다면 객관적이지 못하여 감동의 결과는 끝내 발출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 발표되는 많은 하이퍼시가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지만, 화자인 ‘나는’을 나타내어 객관을 벗어나는 듯한 작품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한국 하이퍼시클럽 2집을 보면 여러 시인의 작품에서 ‘나는’의 주관적인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하이퍼시가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시론과는 거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시 속의 화자 즉 ‘나’와 ‘나는’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나’는 존재를 나타내고 ‘나는’은 존재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나는’은 은연중 움직이려는 의도성 즉 주관성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은 차이를 갖고 있어 ‘나’와 ‘나는’을 굳이 나타내고자 한다면 ‘나는’ 보다는 ‘나’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진정한 하이퍼시는 화자의 울타리 밖에서 인정받는다. 화자가 만든 울타리에 독자를 들여놓을 수 없으며 처음부터 울타리 없는 시를 창작하여 읽는 이에게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게 해야 한다.   2) 직유법의 배제    직유는 본의와 유의의 관계가 지표에 의하여 분명히 나타나는 비유로서 ‘넓은 의미의 은유의 한 종류다’라고 문덕수 시인의 시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고 그동안 많은 평론에서 직유가 논의가 되었다. 시에서 직접적인 비유가 필요한가는 시작법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인 개개인의 표현방법이라 할 수 있다. 미당 서정주시인의 대표작 “국화 옆에서”도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는 직유가 사용되기도 했지만, 하이퍼시에서는 과연 직유가 필요한가는 논의되어야 할 사항이다. 사물의 이미지를 찾고 객관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하이퍼시의 이론을 따른다면 직유는 옳지 않을 것이다. 예로 효도를 나타내는 시를 쓴다면 “나는 심청이처럼 아버지를 모셨다“ "나는 이순신 장군처럼 국가를 위해 싸웠다" "나는 빌게이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등 이렇게 직접적인 표현을 한다면 과연 그 밖에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처럼’ ‘같이’ 등 직유를 쓰게 되면 단 한 구절로 시를 완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특히 하이퍼 시에서는 직유는 피해야 한다고 본다. 하이퍼시클럽 2집에서 예시를 본다면 "물계자의 노래“ 1연 첫 행부터 "나는 어느덧 지렁이처럼 거미처럼 무엇보다 지네처럼” 등 무려3번의 직유가 있고 그 밖의 시에서도 많은 직유가 유행처럼 보인다. 하이퍼시를 쓴다면 직접적인 비유가 하이퍼시의 최고 지향점인 사물의 객관화를 크게 떨어뜨리는 결과가 된다.   3) 항등성의 배제   대부분 사람은 사물을 대할 때 주위의 환경이 바뀌어도 그 사물의 본질을 이미 인식된 대로 바라보게 된다. 사물은 거리와 환경에 따라 그 모습은 확연히 다르게 나타나는데 인간의 두뇌는 이미 각인된 인식을 거의 바꾸지 않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사물의 본질대로 생각하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하이퍼시는 사물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현실에 맞게 그리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객관적인 기술 방식이다. 커다란 소나무를 매일 본 사람이라면 멀리 있을 때도 소나무의 크기를 원래의 크기대로 인식하고 그 모습을 그리게 되는데 하이퍼시는 그것을 배제하고 현재 보이는 모습을 그대로 그려야 한다. 하이퍼시가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로써 자기가 나타내고자 하는 이미지를 그려 내는 것이 분명하다면 사물의 크기나 모양을 주위의 환경과 움직임에 맞춰 이미지의 상상력을 확대해야 한다. 사물에 대한 본질보다는 허상과 허구의 상태를 그려 여러 각도의 방향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야 한다. 이것이 항등성 곧 관념의 배제이다   88올림픽자동차전용도로에 철가방이 갈지자로 흔들며 휙휙 달려간다 소나기 지나가고 63빌딩이 부르르 떤다 흩어진 물방울이 여의도병원 성모마리아상에 내려앉는다 임종실에 들어갔다는 예수의 소식이 가슴 적신 이탈리아 아드리아 연안의 보라(bora)가 2000cc의 배기량에 우아한 보디라인과 넓은 트랙, 차체 둘러싸고 있는 탄탄한 범퍼를 자랑하며 지중해 상쾌한 바람 몰고 한남대교 나들목을 빠져나간다 내 두 바퀴 무겁다   오후 2시 네팔 카투만두 시장을 지나 한차례 쏟아진 비에 발이 묶인 바이크족이 더위를 피해 망중한의 시간을 보내다가 청평 75번국도를 물고 찰나에 달아난다 지름길이 훤하다   질척이던 길 지우고 집으로 들어선다 아들이 남겨둔 하루가 냄비 속에 바싹 말라 있다       김해빈 시인  전문   김해빈 시인은 사실적인 묘사로 하이퍼시를 전개한다. 자동차 전용도로를 불법으로 질주하는 배달 오토바이, 뒤따라 한바탕 내리는 소나기, 스콜이 지나간 것처럼 활짝 갠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의 죽음 등 도무지 연관성이 없을 것 같은 상황이 보인 그대로 전개되고 불황 속에서도 사치한 모습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외국산 자동차, 네팔 카투만두는 스콜이 잦은 곳인데 그곳에 바이크족이 갑자기 청평 75번 국도를 달리는 오토바이 부대로 전환된다. 평소 흔히 마주하는 장면 중의 하나인 쏜살같이 달리는 오토바이 행렬을 끌어와 상습 정체구간임을 은연중 내포하고 있다. 반복되는 혼란과 불안의 연속선상에서 겪게 되는 하루가 전개되다가 안주할 집에 도착하여 보게 된 어지러운 상황과 연계시켜 하루를 마무리하며 갈등과 사회적인 격차를 그려냈다. 기존에 굳어진 이미지 대신 항등성을 배제하고 여러 가지 상황을 끌어들여 하나의 이미지로 묶은 것이다   4) 제목의 사물화 및 관념 배제   하이퍼시의 최대 목표는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로써 객관적으로 이미지를 넓혀가는 데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제목 곧 주제부터 관념어가 쓰여 진다면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기존의 관념시가 되고 말 것이다. 하이퍼클럽 2집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해부학 교실. 환각제 복용. 생존 본능. 노란 불꽃. 인연론. 냉동된 자유. 삶과 죽음의 시편. 희고 붉은 시. 환상여행. 미궁. 원앙생가, 돋아나는 서녘. 사이에 대한 소고. 나의 고독은. 겨울 여행. 세한도. 등 제목만 보면 하이퍼시라 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 많다. 이는 사물이나 형상으로 얼마든지 새로운 이미지의 제목을 붙일 수가 있는데 이것을 잊고 하이퍼시를 쓴다. 또한 제목이나 내용에 알 수 없는 외래어가 많이 보이는데 이것 또한, 배제해야 할 요소들이다.  5. 하이퍼시의 구성 요소   1) 몽타주 기법   몽타주 기법의 창시자 소비에트의 쿨레쇼프(kuleshov)는 A장면과 B장면의 합은 A더하기 B가 아니라 C가 된다고 하였다. 이는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라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명제와 같다. 시에서도 각각의 이미지가 합쳐지면 부분의 특성은 사라지고 전혀 다른 이미지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이것은 사물 이미지의 합과 합은 완결성의 법칙에 의해 불완전한 자극을 서로 연결해 완전한 이미지로 전환된다는 뜻이고 서로 모순되거나 부자연스러운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제시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적극적 해석을 유도하는 상호작용적 방법론이다. 하이퍼시는 여러 대의 카메라로 잡은 화면을 이어 붙여 하나의 연속적인 화면으로 편집하는 시작법이다. 희극적인 사실을 묘사하고 칼 든 사람을 보여주면 비겁한 내용이 되지만 우울한 사실이 먼저 나오고 칼 든 장면이 나온 뒤 웃는 사실을 묘사하면 전혀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이퍼시는 문장 편집의 몽타주기법에서 완성여부를 결정짓는다. 서로 관계없는 여러 가지 이미지를 하나의 그림에 담아 새로운 정서적 경험을 가능케 하는 시작법이다.   비행기가 지나자 물보라가 일었다 반딧불과 어우러져 은어 떼처럼 별들이 유영하는 밤하늘 달의 목선을 타고 심해로 떠나는 항해를 꿈꿨다 턱시도를 입고 구름과 파도에 휩쓸리던 밤바다엔 용암이 흘러 넘쳤다 꽃밭의 별들이 숯불을 피워 이글이글 타올랐다 해저에 닻을 내리고 은사의 투망을 던지는 초신성의 바다 달의 나침판은 지상을 가리켰다 아버지의 이마에서 남자의 등에서 말의 엉덩이에서 새의 날개에서 나뭇잎의 푸른 잎맥에서 신의 성경책에서 마주보던 거울 속에서 출렁이는 바다 달의 뒷편에서 어둠은 바다를 잊고 살았다 문득 발견한 빛, 둥실 허공에 뜬 몸에서 엔진소리가 들렸다 밀물로 차오른 보름달 망망대해엔 북극성의 부표가 떠올랐다 온 세상 밤의 물결로 차오른 중수감 손안에서 바다가 출렁이고 바람에 깃발처럼 달력이 찢어진다 시간의 속력에 찌그러진 유선형의 그믐달, 화살이 날아간다                                김기덕 시인 전문   김기덕 시인의 "달의 항해"는 직유와 관념이 부분적으로 보이는 작품이지만 전체적으로 하이퍼시가 갖춰야 할 몽타주기법이 살아 있다. 하늘과 바다가 넘실대고 아버지, 남자, 말과 새, 나뭇잎 등 온갖 이미지가 난무한다. 하지만 그 이미지들은 하나로 묶여 읽는 독자의 시선을 한곳에 집중시키고 빛과 엔진소리 화살로 빠르고 정확하다는 집합된 이미지를 전달한다. 위의 시처럼 이해하기 힘든 이미지의 집합을 낯설게 하기의 특징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이퍼시는 각기 다른 이미지를 서로 연결해 완전한 이미지를 만들려고 하는 새로운 시작연구의 결과물이다. 중간마다 떨어져 있는 불안전한 이미지를 하나로 통합하여 독자가 이해하도록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불안전한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연속 제시하여 혼란을 가증시켜서는 안 된다.   2) 서사성   모든 동물은 영역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영역을 지켜내기 위하여 싸움하고 자기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자신만의 성을 쌓고 산다. 모든 학문도 마찬가지로 영역을 가진다. 특히 시인들의 영역은 확고하다. 자신이 주장하는 시창작 방법에 도전을 받게 되면 참지 못한다. 뚜렷한 학설을 제시하지도 않고 무조건 다른 이론은 배척하는 경향은 시인들이 가진 특권처럼 되어있다.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 발상은 은연 중에 나타내야지 갑자기 돌발하면 폭력적이라고 비난을 받기 마련이다. 하이퍼시는 어느 날 뚝 떨어진 이론이 아니다. 인간의 발달에 따라가기 위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새로운 시창작방법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면 혁명적인 요소를 가진 것도 사실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하이퍼적인 기법을 동원하더라도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풀어가야 한다. 어떻게 하면 독자의 이해를 돕고 하이퍼시의 발전을 위한 시를 쓸 수 있는 것인가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우선은 서사성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을 나는 제시한다.   붉은 바윗가에 잡은 손의 암소 놓고 날 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꺾어드리리다   이것은 어떤 신라의 늙은이가 젊은 여인네한테 건네인 수작이다   붉은 바윗가에 잡은 손의 암소 놓고 날 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꺾어 드리리다   햇빛이 포근한 날  그러니까 봄날 진달래꽃 고운 낭떨어지 아래서 그이 암소를 데리고 서 있던 머리 흰 늙은이가 문득 그의 앞을 지나는 어떤 남의 안사람보고 한바탕 건네인 수작이다 자기의 흰 수염도 나이도 다아 잊어버렸던 것일까   물론 다아 잊어버렸다   남의 아내인 것도 무엇도 다아 잊어버렸었다   꽃이 꽃을 보고 웃듯이 하는 그런 마음씨밖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었다                           미당 서정주  일부   일찍이 미당 서정주 시인은 신라초에서 야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현실에 맞도록 풀어내어 주목을 받았다. 인연 설화조. 수로부인의 얼굴. 신부 등 많은 시를 설화조로 표현하여 하이퍼적인 요소가 깃든 시를 썼다. 오늘날의 하이퍼와는 이미지의 전개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일찍부터 과거와 현실을 융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 것이다. 서사로 시작되는 시는 누구에게나 친숙하게 와 닿아 이미지의 전개를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시선을 잡아두는 효과를 본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하이퍼에서 이러한 시도는 새로운 시창작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강영은 시인은 이러한 효과적인 방법을 미당의 시와 더불어 서사가 있는 하이퍼시로 발표하고 있다.   아부오름, 움푹 파인 굼부리가 아버지 무릎 같다 좌정한 무릎 아래 빙 둘러 심은 삼나무들, 연하장에서 막 빠져나온 푸른 미간이다   아부지, 여기가 정토인가요   뾰족한 잠이 돋아 있는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마음은 죽어서도 번득이는 붉은 돔 눈깔, 가본 적 없는 시간의 미늘이어서   잔물결 이는 생각 속으로 핏빛 물기 스미는 지상의 한 시간은 먼 거리 한 시간 후에 닿아보지 않은 발자국이 벌써 촉촉하다   눈 아래 방목장에는 푸른 지붕을 가진 축사   달맞이꽃이 평생 걸어야 닿는 저 곳에도 무릎 구부린 아비소가 갓난 송아지의 등을 핥아주고 있을 거라고 그 무릎에 가만히 지상을 얹어보는데        강영은 시인 일부   제주도의 풍경이 둘러쳐지고 삼나무 울타리에 펼쳐진 아버지의 기억이 한 편의 영상으로 전개된다. 불교에서 원하는 서방정토에 아버지가 이미 갔으나 달맞이꽃 되어 바라보기만 하는 화자는 따라가지 못하여 한 마리 송아지가 되어 등을 핥아줄 아버지의 혀를 기다리며 지상에 전개된 목장에 촉촉한 발자국을 찍으며 배회한다.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듯 불가능한 일을 해내려는 시도는 돌아간 아버지를 보는 것과 같아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은 서녘에 목멘 목젖을 필사한다. "원왕생가"의 전설을 모르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작품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통하지 않고 여러 가지의 사물로 적절한 비유를 하여 하이퍼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작품이다.    수학자 폴리아(G.polya)는 재미있는 실험을 하였는데. 곰 한 마리가 a지점에서 출발하여 1킬로미터를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방향을 바꿔 동쪽으로 1킬로미터를 간다. 그리고 다시 방향을 바꿔 북쪽으로 1킬로미터를 간다. 그러다보니 출발점인 a지점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 곰의 색깔은 무슨 색일까 하는 실험이다. 답은 흰색의 북극곰이다. 문제는 곰의 색깔이 아니다. 남쪽으로 1키로 동쪽으로 1키로 북쪽으로 1킬로미터로 갔는데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지구가 둥근 입체가 아니라 평면이라고 생각하는 맹점을 말하는 문제다. 습관적으로 새로운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독자들도 마찬가지다. 시는 무조건 어렵고 외우기가 불편하다는 선입감을 더 느끼고 시를 대한다. 더구나 하이퍼시라면 이해하기 힘들다는 선입감을 갖고 있으며 시인들조차 하이퍼시가 무슨 시인가 하고 의문을 갖는다. 문제는 이야기 즉 서사에 있다. 어려운 문제를 푸는데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쉬운 이야기를 이미지에 맞춰 풀어간다면 하이퍼시의 성공은 분명하다고 본다. 폴리아의 문제처럼 시선을 끌어들여야 하이퍼의 공간이 자리를 잡는 것이다.   6. 하이퍼시의 방향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시론 발표 이후 많은 시인이 참여하여 현재까지 발표된 하이퍼시는 시단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꾸준히 발전되고 있다. 하지만 하이퍼시의 이론과 맞게 발표된 작품이 과연 몇 편이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주관을 벗어나 객관적으로 사물의 이미지를 찾지 못하고 제목부터 관념을 벗어나지 못한 작품과 국적 모를 외래어의 남발, 이어가지 못하는 이미지의 확장을 위한 과도한 직유, 상상 보다 허구의 조합이 많고, 과도한 낯설기작법 등, 독자들이 외면하기 좋은 충분한 요소를 가진 것이 사실이다. 평론가 이성혁은 "시문학" 8월호에 "한국 현대시에서의 하이퍼텍스트 문제 고찰"이란 시론에서 이상의 시 "광녀의 고백"을 들어 현란한 이미지들이 자유롭게 흐르면서 하이퍼하게 결합하고 벌거숭이인 채로 달리고 있는 푸른 불꽃 탄환은 모순적인 색채이미지가 결합하고 있어 진정한 하이퍼적 요소를 갖춘 시라고 극찬하며 현재의 하이퍼시를 일부 폄하하는 듯한 글을 발표하였는데 또한 하이퍼텍스트가 시에 내장된 어떤 특성을 활성화하여 개발된 것이라면 하이퍼텍스트는 테크롤리지에서 시를 예속시키려하는 하이퍼텍스트의 시의 시도는 진보적이라기보다 퇴보적이기에 실패하게 된다고 비평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적 인식은 일부 평론가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인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하이퍼시가 문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꾸준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이퍼 시이론에 맞게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며 자신의 시창작에 한계를 느껴 유행을 따르듯 하이퍼시에 동참하고 시의 낯설게 하기가 낱말의 낯설기가 아니라 이미지의 낯설기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363    하이퍼시와 디카시 댓글:  조회:4228  추천:0  2015-02-18
  디카시와 하이퍼시와의 관련성   문덕수     [1] ‘디카詩’의 창시자는 누구일까. 신(神)의 유무보다는 디카시의 창시자의 누구냐의 물음엔 한 가지 대답밖에 없으니 더 쉽습니다. 디카시의 창시자라는 말에 “창시자” 그 동격어 “이상옥”이라고 하면 대답하면 되겠습니다만 말하자면 디카시의 창업자는 이상옥입니다.   [2] 디카는 “디지털 카메라‘의 준말입니다. 우니라에도 생산되고 있고, 이제는 스마트폰에도 장착되어 있으므로 아이든 어른이든,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과학기기인 이 디카가 시쓰기의 주체인가, 아니며 단지 보조기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주체라고도 할 수 있고 보조기구(원고지나 펜같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TV나 컴퓨터가 안방에 들어와 있는 판에 과학기기가 시쓰기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버스, 지하철, 비행기, 승용차 등 인간은 과학기기의 사용이 없으면 생활이 안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디지털 카메라가 시와 결부될 수 있음도 불가피한 시대의 요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에 등 돌려서 현대시를 쓸 수 있겠습니까?   [3] 가만히 들여다보면 디카시는 기호시임을 깨닫게 됩니다. 『디카시마니아 24인사화집』(2012, 도서출판 디카시)에는 이상옥의 디카시 「숙명」(The Fare)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의 시는 망가지고 있는 나무 뿌리 등의 사진 옆 페이지에 “이제 내 몸 부수어 너에게로 간다”(Breaking down mybody now I go to you)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에서는 “내 몸 부수어” “너” 가 가장 요점이 되는 어구인 것 같습니다. “내 몸 부수어”는 많은 함축(含蓄)을 연상하게 합니다. 사랑의 주체인 “나”, 가장(家長)으로서의 나, 제자들의 스승으로서의 나, 역사(歷史) 속의 한 주체로서의 나, 주인이 아닌 봉사자로서의 나 등이 그러한 연상의 목록입니다. 이렇게 제시해 내놓고 보니 그 나열이 대단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기호화해 가는 목적적 존재를 “너”라고 했습니다. “너”는 분명히 남(他者)입니다만, 우리의 삶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우수한 “남”으로 둘러싸여 공생하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의 의지를 내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실존적 삶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것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타자의 의지에 의해 사는 존재입니다. 어쨌든 이 “나”는 앞에서 “나”의 경우에 열거한 그러한 나와 대등되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너”의 대응 관계로 수용할 때 이상옥의 디카시는 1차시입니다만, 그 함축과 내포는 다양하고 풍성한 의미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디카시가 언어로 기록되건 사진영상으로 촬영되건 그것의 1차적, 기본적으로 사물시와 동질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디카는 하이퍼 시와 첫걸음을 함께 내딛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이퍼와 디카는 같은 스타트라인에서 같은 신호로 함께 출발합니다. 여기서 사물시와 디카시는 일치합니다.   [4] 그런데, 문제는 제시된 ‘사진’도 기호(記號)이고, 언어로 표현된 디카시 문자도 “기호”라는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기호라고 하면 프랑스의 소쉬르(1857~1913)와 미국인 퍼스(1839~1914)의 두 사람을 듭니다만 기호의 세계를 더욱 폭넓게 본 사람은 퍼스인 것 같습니다. 퍼스는 언어 뿐만 아니라 “사진”을 포함한 영상이나 도상, 길바닥이나 눈 위의 발자국 같은 것을 모두 기호로 보았습니다. 퍼스는 이 세계는 기호로 충만한 세계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물이 다 기호이지요. 퍼스는 다만 “기호 처리의 프로세스로서 인간”을 이해했습니다. 아마 시인도 기호체계의 한 프로세스를 처리하는 자로 이해하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그림이나 사진으로 반사된 빛이 눈의 망막에 도달하는 순간, 일련의 감각이나 인지적(認知的) 기능이 마치 연못의 둑을 끊은 것처럼 흐르는 것— 이것이 경험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눈이 사진의 어떤 부분에 집중하는 것은, 이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어지럽게 이동하는 색이나 윤곽이나 형태를 즉시 감각신호로 변환시켜 후두부에 있는 시각야(視覺野)라고 불리는 뇌의 영역에 보내집니다. 거기서 특징들이 분석되어 그 결과가 대뇌피질(大腦皮質)의 많은 영역을 이동시킵니다. 그러한 활동분야의 하나가 피질의 중앙에 위치하고 근운동(筋運動)의 중추 역할을 맡은 운동야(運動野)입니다. 여기서 눈의 움직임을 제어하고 근육을 움직이는 지령이 나와, 눈은 사진 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눈이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향하게 하는 과정이 몇 백 번 되풀이됩니다. 한 번 얻은 상(像)은 피질의 뉴런 네트워크로 보여지며, 그때까지 저장되어 있는 정보와 연결되고, 사진에 대한 해석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뇌가 행하는 사진(그림 포함) 이해의 프로세스를 인지 과학자 R L. 소쉬르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빛이라는 물리 현상에서 시작하는 ‘그것이 감각 신호로 바뀌는 그 처리를 거친 특징이 추출되어 세계에 대한 여러 가지 사전 지식도 참조하면서 해석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상옥의 디카시가 망가지고 있는 「숙명」이라는 디키시는 많은 내포가 다양하게 응축된 디카시의 전형인 것 같습니다. 사화집 『너머』(Beyond Over)는 대분분 이와 같은 보편적 레벨에 도달한 디카시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5] 그런데 이상옥의 「숙명」을 잘 들여다보면, 그 해석은 단지 나무 밑둥이 부서지고 있는 붕괴현상만이 아니라 현상이 형이하(形而下)의 세계와 형이상의 세계(形而上世界)를 연결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이해는 디카시의 형이하적 특징과 형이상적 특징을 연결하는 것으로 보여 무척 흥미롭습니다. 나무 밑둥의 붕괴는 풍화작용인지, 세균의 잠식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시간의 먼 지평 속에서 변호마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상을 발견한 인도인(특히 힌두교도)은 모든 만물은 시간상에서 변화하며 여러 가지 존재의 직접적, 간접적 조건과 원인에 의해 생겨서 변화한다라고 한, 그 위대한 사상체계의 “연기설”(緣起說, Pratitiya-samurāda)을 발견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독교에서 사람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중국에서 한(漢)나라를 세운 유비도 사람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상옥의 디카 사진을 잘 봅시다. 산에서나 길가에서, 나무 밑둥지가 부서져가는 현상을 흔히 발견할 수 있고, 이 현상에서 흙구덩이 속의 인체도 결국 이런 과정을 밟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인체의 경유, 균이나 박테리아가 흙 속에서 겨드랑이나 허벅지 등을 먼저 먹게 되겠지요. 사물인식은 가정, 사회, 역사, 문화에 대한 지식과 결부되어 나무밑둥이라는 물체의 내면의식세계가 형성됩니다. 사물은 감각성, 시각성, 외부성 등의 욉줙 존재입니다만, 동시에 내면의 영혼적 무의식적 무한성을 가지고 있음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있음 esse)는 있는 것(ens, 개별 사물 존재)의 시간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사물을 외면이나 내면의 한 측면에서만 보지 않고 외부적 존재로 보고 동시에 내면세계를 본다는 것은, 모든 사물이 지닌 α위상과 β위상의 이중을 본다는 뜻이 되고, 또 이렇게 보아야만 사물 전체를 본다는 것이 됩니다. 이상옥이 있는 것(ens), 즉 「숙명」을 통해서, 우리가 가정→역사의 영역에서 가지고 있는 정보와 연결시킨다는 것은, 사물의 내면성도 동시에 본다는 의미입니다. 이상옥의 「숙명」의 밑둥은 흙 속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꽤 깊이 박힌 듯합니다. 지표에서의 윗부분이 갈라져 부서지고 있으나, 아마 그 뿌리는 여전히 땅속에서 꿈쩍 않고 대지(大地)를 물고 호흡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것은「숙명」이 지닌 형이하적(形而下的) 특질인 것입니다만, 한편 부서짐의 과정을 통하여 껍질이 벗겨지고 나무의 육질이 파삭파삭해지면서 그 영혼이라고 할까 정신이라고 할까 그런 것은 형이상적(形而上的) 세계로 차원이 다른 자리를 옮기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역사 너머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해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즉「숙명」이라는 디카 영상은 형이하와 형이상에서 초월을 동시에 공존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디카시는 이러한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고, 여기서 디카시와 하이퍼시와의 짙은 공통 관련성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 내 몸 부수어 너에게로 간다”라는 일행시에서도 형이하와 더불어 여기서 초월하려고 하는 형이상의 몸짓을 감지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서진다”(망가지다, 붕괴핟, 변화한다)라는 말의 뉘앙스가 매우 다채롭고 풍부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6] 마지막으로 두 장르의 통합단계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즉 디카 영상과 언어예술의 두 단계를 하나의 세계로 통합해야 하는 단계입니다. 디카시는 디카 영상과 언어시와의 두 존재를 포함하고 있고 두 단계가 통합해서 다르나 같은 의식적 이미지의 세계를 이룩합니다. 통합 단계는 두 장르가 “서로 관계”를 가지고 하나의 세계(시 세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두 장르의 관계는 접근, 영향, 융합 등의 상생(相生) 공발(共發)의 관계입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전히 정복하거나 먹어버리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어디까지 상생공존의 발전 관계를 맺고 더 높은 하나의 통합세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형이하적 관계와 형이상적 관계가 엄존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먼저 형이하적 관계부터 보겠습니다. 형이하적 관계는 사물의 감각적, 가시적, 외부적 관계에서 연관을 맺게 됩니다. 그러한 외부적 배치에 의하여 하나의 가시적 이미지(즉 사물존재로서의 이미지, 그러니까 β위상의 관계에서 형성된 이미지)를 이루게 되면, 그러한 가시적인 두 이미지가 융합되어서 서로 보완하여 하나의 더 높은, 더 완성된 이미지의 세계를 이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단계는 형이하적 세계, 즉 물질세계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높은 형이상적 단계로 상승해야 합니다. 이 단계에서 디카시라고 하는 통합적 장르가 비로소 “의의”(意義: 의미보다는 높은 의미의 세계로 연결된다는 뜻)의 단계에 이르게 되고, 그 의의주제에 접근한 가장 높은 뜻으로 뭉치게 됩니다. 이렇게 형성된 형이상적 통합의 의의는 첫째 형이상적(신적) 뜻을 이루고, 둘째 그 뜻은 형이하적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하고, 어떤 미세하거나 광대한 움직임에 의해 영향력을 공급하는 에너지 역할도 합니다. 우리의 삶은 방향과 방법을 정립시켜 주기도 합니다. 흔히 ‘섭리’라고도 하고, ‘천명’(天命)이라고도 하는 그런 차원의 뜻입니다. 모든 디카시는 여상과 언어의 두 단계가 통합된 형이하적, 형이상적인 미학적 뜻으로 통합, 형성되어 완료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단계적 통합을 거쳐, 두 장르는 장르적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이미지 세계를 이룩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하이퍼적이라고 하고, 이 점에서 디카시가 하이퍼시의 또 한번의 강력한 유대와 그 관련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7] 여기서 간단히 결론을 내리고 그칠까 합니다. 디카시가 가진 기호성, 디카시의 이중성(형이하와 형이상) 등을 토대로 디카시와 하이퍼시의 관련성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밖에 디카시의 사진과 언어는 사진과 언어라는 장르적 경계를 허물면서 디카시의 특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하이퍼적 패러독스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이퍼시에서는 진실과 허위의 두 세계가 비유의 본의(本義)와 유의(喩義)의 양 항에 관련되어 있고, 그 관련에서 진실과 허위의 두 세계를 역설적으로 사사해 준다는 점이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런 점에서 디카시나 하이퍼시는 파라독스의 언어로 된 역설의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362    ...계속 6 댓글:  조회:3858  추천:0  2015-02-18
5. 나가는 글-디지털 시의 미래     이제까지 “21세기 현대시의 길 열기”라는 주제의 중심에 “디지털 시”를 세우는 작업을 하였다. 21세기의 의사소통 방식은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는 세대가 시대의 핵심동력(核心動力)이 되고 있다. 그래서 21세기 현대시의 방향을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에 맞추어 탐구하는 것은 시대적 당위성을 갖는다.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는 디지털 시의 근원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1950년대의 조향의 초현실주의 시와 문덕수의 탈-관념의 사물성의 시도 디지털 시의 존재성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그 시들의 감각과 시에 대한 인식의 근본이 현대 컴퓨터의 디지털 특성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의 핵심부분 , , 은 순수한 독창적 것이 아니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이 글은 디지털 시와 연관된 재료들을 발굴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조합하여 구성한 21세기 디지털 시의 설계도인 것이다. 과 은 미래지향의 시창작방법론이다. 예시 작품들은 디지털 시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작품의 완성도 보다는 실험적인 방법론에 더 비중을 두었다. 예술에서 완성이란 신기루(蜃氣樓) 같은 꿈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는 디지털의 특성을 시로 환원하여 21세기적인 새로운 시의 표현방법을 모색하는 시 운동이다. 현재 이 시운동은 출발선상(出發線上)에 서 있다. 그래서 이 작은 디지털 시 운동이 한국을 넘어서 세계화가 될 날을 기대해 보는 것은 지나친 자만(自慢)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시론은 21세기적인 감각과 의식이 생동하는 젊은 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1, ... 2, ... 3. 『컴퓨터 및 정보통신 용어 사전』 4. 문덕수 저 『문덕수 시전집』시문학사(2006,3,20) 5. 『한국 전후 문제 시집』신구문화사(1961,10,5) 416쪽 「데뻬이즈망」의 미학」-조향(趙鄕) 6. 문덕수 저 『니힐리즘을 넘어서』시문학사(2003,5,30) 183쪽~195 쪽 7. 임종국 편 『이상전집』문성사 (1968,9,15)405쪽 8. 오남구 저『이상의 디지털리즘』범우사(2005,4,15) 9. 오남구 편『디지털리즘-1집』글나무(2003,3, 15)    
361    ...계속 5 댓글:  조회:4359  추천:0  2015-02-18
다. 디지털 시의 조건   디지털 시의 새로운 표현방법의 모색에 전제되는 조건은 디지털 시는 시 본래의 특성(아날로그의 특성)을 훼손시키지 않아야 하며 보통의 시와 같이 읽히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가 실험시라는 껍질을 깨고 나와서 감각만이 아니라 시가 사유와 정서의 표현이라는 일반적인 시의 조건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디지털 시가 일반적인 시와 조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은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이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디지털 시의 근원(기본원칙)과 전제조건을 만족시키고 디지털 시의 특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은 무엇일까? 그것을 열 가지로 구분하여서 다음과 같이 정한다.     1) 디지털 시는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한다. 언어 단위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을 근간으로 한다. 따라서 그 언어 단위는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요소 즉 객체지향의 모듈(module)화가 이루어 질 수도 있다.(예시작품: 문덕수의「꽃잎세기」,오남구의「푸른가시짐승-빈자리x.3」,심상운의「빈자리-낮12시25분」)   2) 디지털 시는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하지만 탈-관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인지단계의 관념은 수용한다. (심상운「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2006, 8 월간 참조)   3) 디지털 시는 현실을 직접 샘플링(1차적 방법)한 자료로 생성된 시와 추상적(2차적인 방법) 샘플링을 통해서 구성된 시로 구분한다. 그러나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디지털 시에는 샘플링(sampling견본추출)된 현실세계가 극소화될 수도 있다.   4) 디지털 시는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순간포착 등)과 사물성의 순수 이미지를 중요한 요소로 한다. 사물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의 순수 감각을 드러내고 사물의 충돌과 융합 등을 보여주는 방법은 디지털 감각과 영상언어의 산실이 된다. 이러한 영상언어는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5) 디지털 시는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하는 과정에서 탈-관념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을 아날로그의 노이즈(noise 잡음) 제거라고 한다. 그러나 시인의 심리적 현상 속에 들어 있는 관념의 그림자가 남는 것은 허용한다. (예시 작품: 심상운의「검은 기차 또는 흰 비닐봉지」)   6) 직관을 통한 염사와 원근법을 깨뜨리고 실상에 접근하는 접사는 디지털 시의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샘플링의 방법이다. 따라서 더 많은 방법들이 원용될 수 있다. (예시 작품 :오 남구의 「밤비」)   7) 디지털 시의 정서는 현실이 제거된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와 현실(관념)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로 분류한다. 증류수 같은 정서의 대표적인 작품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의 (시제1호),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의 시는 송시월의 「입춘무렵」을 예시작품으로 들 수 있다.   8) 디지털 시는 단일한 시점과 감각과 정서만 고집하지 않고 다시점, 다감각, 다정서의 통 합된 감각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개념에서 디지털의 불연속적인 개념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와 뒤섞이기도 시 속에서 구현될 수 있다. 이런 감각의 다층구조의 예시작품으로는 오남구의 「경운동 88번지로 간다-염사」를 들 수 있다.   9) 디지털 시는 작가(시인)가 만들어낸 완성품의 시에서 벗어나 독자가 참여하여 각자의 사고와 인식과 감정과 감각이 들어가서 만들어 내는 독자 참여의 열린 시를 지향한다. 그 바탕에는 텍스트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受容美學, Rezeptionsasthetik)이 들어있다. 이 때 시인은 시의 설계도를 제시하고 그것의 자유로운 변형을 보여줌으로써 독자 참여를 유도하는 연출자가 된다.   10) 디지털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지향한다. 그래서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면서 계속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가상현실의 감각을 독자에게 전해야 한다. 그 가상현실은 환상도 되고 꿈도 되지만 현실의 절실한 감성과 정서를 전하는 것에 가치를 둔다. 움직이는 이미지의 예시작품으로는 오남구의「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을 들 수 있다. 이 열 가지의 조건은 한 작품 속에서 서로 조화로운 비중으로 구현될 수도 있지만 한두 가지의 조건만으로도 작품을 형성할 수 있다.    
360    ...계속 4 댓글:  조회:4246  추천:0  2015-02-18
  1.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디지털 시의 특징은 운동 에너지의 발산이다. 이 동적 이미지는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면서 계속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가상현실의 감각을 독자에게 전한다. 이 가상현실은 흥미로운 환상도 되고 꿈도 된다.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투명한 의식 속에서 탄생한 공과 운동 에너지의 결합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상이 만들어주는 시적공간이다. 만약 이러한 직관적인 감성을 언어가 아닌 빛이나 소리 등 다른 것으로 표현했다면 백남준 식의 비디오 아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아무런 부담 없이 경쾌한 리듬과 함께 공이 뛰어가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빌딩의 콘크리트를 뚫고 나온 공은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가기도 하고,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는 계단을 퐁퐁퐁퐁 올라가기도 하고,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가기도 하고,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기도 한다. 이런 자유롭고 재미있는 상상의 전개는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무한한 자유를 얻는다. 이 시의 언어들은 탈-관념의 언어들이라는 점에서 디지털의 정수로 된 수리적 데이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    
359    ...계속 3 댓글:  조회:4012  추천:0  2015-02-18
라. 예시 작품에 대한 디지털적 독해(讀解)   다음은 와 에서 예시작품으로 거론된 시에 대한 디지털적 독해다. 예시된 시들은 탈-관념의 세계를 보여주는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 시와 2000년대 이후 디지털 시의 방법론을 의식하고 쓴 작품이다. 그래서 앞에 제시한 열 가지의 조건(방법)에 대입하여 디지털 시의 가능성을 진단해보고 새로운 감상과 해석의 길을 열어보는 것은 실제의 창작을 위해서도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낡은 아코오딩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바다의 층계(層階)」전문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이 시는 시가 “의미의 예술”(최재서「문학원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서 탈-관념의 순수한 영상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불연속적인 각 연의 언어들은 집합적 결합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시의 각 연은 서로 독립적인 관계 즉 객체지향성(모듈)을 드러낸다. 그것은 시인이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입장에서 독자에게 “보여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5연 는 통사적 구문에서 벗어난 시의 한 형태를 보여주면서, 단위(단어, 구문)들의 충돌과 간섭을 통한 감각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전체적 면에서 구성이 산만하다. 그 원인은 이 시에 숨어 있는 시인의 의식(의도)이 시 전체를 통제(관통)하지 못한 때문인 것 같다.     마을을 덮은 코스모스 덤불 아무거나 한 송이 골라 꽃잎을 열심히 세어 본들 나비처럼 머무를 수야. 대추나무 밑동을 감고 한창 뿌득뿌득 기어오르고 있는 나팔꽃 푸른 것은 깔때기 모양 흰 것은 나팔주둥이 한 잎 두 잎 세 잎 네 잎 다섯 여섯 세어보지만 실은 한 송이일 뿐이다. 돌담을 돌자 앞장선 나비는 오간 데 없고 순하고 야들야들한 연보라 무궁화꽃 그 한 송이의 여섯 개 꽃잎을 확인한들 내 어쩌랴 어쩌랴. 해바라기는 서른네 개의 황금 꽃잎을 둥글게 박고 들국화는 서른아홉 개로 쪼개진 보랏빛을 빽빽이 둘렀거늘 내 어찌 머무를 수야. -------문덕수「꽃잎세기」전문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디지털 시의 탈-관념된 언어 단위(unit)들은 결합을 통해서 대상의 모습(현상)을 드러내지만 분리(해체)를 통해서 존재의 본질을 확인하게 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나팔꽃은 여섯 잎, 무궁화꽃 여섯 잎, 해바라기 서른 네 개의 꽃잎, 들국화 서른아홉”이라고 대상을 구성하는 작은 부분들을 분리하고 숫자화 함으로써 색(色)과 공(空), 결합과 분리의 경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구상적인 자연현상을 추상적 디지털 언어로 환원하는 작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문덕수는 이러한 시적 형상의 방법론을 그의 시론 「나의 시쓰기-물리주의와 집합적 결합」에서 “사물이나 대상 하나하나를 1,2,3,4,5.......와 같은 추상적 기수(基數)로서 개개의 구체적 특성을 추상화할 수 있고, 추상된 그 대상을 결합하여 한편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으며, “이러한 방법을 나는 역시 인접학문의 용어를 빌어서 “집합적 결합”이라고 명명해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통찰은 디지털을 형성하는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의 의미 즉 디지털의 최소의 단위의 개념을 인식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이 시는 디지털 시의 본질인 단위의 분리와 결합의 원리를 보여준 시라고 판단된다. 이 시에서 ”나팔꽃, 무궁화꽃, 해바라기, 들국화“는 디지털 시의 구조를 형성하는 부분 단위(module)가 된다.      
358    ...계속 2 댓글:  조회:4110  추천:0  2015-02-18
나, 문덕수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어닥칠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 전문     문덕수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도 디지털의 특성을 찾아낼 수 있다. 그 단서는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유리컵 세 개.”와 “열린 문으로는/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에서 발견된다. 이 장면은 어떤 의미에 감염되지 않은 탈-관념의 영상언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시인의 의식이 만들어낸 가상현실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의 최소 단위들 “빨간 저녁 놀, 재떨이, 유리컵 세 개, 라이터 ,청자 담배. 육각형 성냥갑, 한 사나이 등”은 분리와 합성이 가능한 집합적 결합이라는 것. 그리고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모듈)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재떨이를 물주전자로, 라이터를 핸드폰으로, 유리컵을 사기 찻잔으로, 청자 담배를 신문지로 변경시키고, 사나이를 20대 젊은 아가씨로 바꾸어도 시의 성립에 영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 시에 등장하는 소재에는 어떤 관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가상현실은 순수한 이미지로 이루어진 생동하는 사물성의 공간이 되고, 독자들의 상상과 의미 붙이기가 무한정 허용되는 세계로 확대된다. 그러나 이 시는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보다 독자의 상상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넓지 않다. 그 까닭은 이 시는 현실세계에서 직접적으로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계의 자료들은 아날로그에서 샘플링 된 자료다. 샘플링의 방법은 1차적인 방법과 2차적인 방법으로 구분된다. 1차적인 방법은 직접 현실세계를 사진 찍듯이 하는 샘플링 방법이고 2차적인 방법은 추상적인 상상을 통해서 샘플링 하는 방법이다. 이 때 1차적 방법은 독자가 들어갈 시적공간은 제한되지만 현실과 현장이라는 생명의 감각에 더 접근되어 있어서 정서의 표현이 살아난다. 이에 비해서 2차적인 방법은 추상적인 상상의 공간을 무한대로 펼치면서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열어놓아서 독자가 들어 갈 수 있는 시적 공간은 무한히 넓어질 수 있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성의 세계는 현실적인 생명감각에서 멀어지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의 조작성이 쉽게 드러난다. 따라서 시의 정서도 조작된 정서가 된다.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은 1차적 방법에 해당하는 시이고,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는 2차적 방법에 해당되는 시라고 판단된다.   4. 디지털 시의 성립과 조건     가. 디지털 시의 개념과 근거   디지털(digital)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각에 호응하려는 시운동을 디지털리즘이라고 이름붙이기를 해 본다.(2003년 「디지털리즘」1집에서 오진현 시인이 디지털리즘 선언을 함) 그리고 이를 넘어서서 디지털적인 시각, 사유, 지각, 감성, 정서, 언어 등을 망라하여 그것을 현대시에 흡수하여 언어표현의 방법으로 활용하고, 새로운 상상(시각)과 감각과 감성과 사유의 영역을 열어 보이는 시를 즉 디지털 시라고 개념정의를 한다. 그런데 디지털 시의 성립에서 짚고 넘어야 할 문제는 디지털의 특성과 시가 결합할 때, 디지털 시는 기성의 시와 어떤 차별성을 갖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의 성립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날로그 시(디지털 시에 대응하는 시로 기성의 시를 의미함)나 디지털 시나 공통적인 것은 시의 현실은 현실자체가 아니고 샘프링(sampling 견본추출)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원래, 현실 그 자체에서 벗어난 가상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샘플링이나 가상현실은 디지털 시만의 특성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디지털 시의 특성은 기성의 시와는 다른 표현방법에서 찾게 된다. 그래서 디지털 시는 탈-관념을 기본조건으로 하는 분리와 합성이 가능한 언어단위들(unit)에 근거(根據)를 두게 된다. “탈-관념은 글자 그대로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대상의 의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지각(知覺)을 감지와 인식(의미형성 이전의 의식의 분별작용)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표현에서 대상에 대한 어떤 감정이나 판단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즉 감정, 판단, 배경의미의 유보를 뜻한다. 그것은 지각(知覺)을 사고(思考) 이전의 단계로 내려서 순수인지(純粹認知)의 세계로 낮추는 것이다. 이 때 대상은 그가 태어날 때의 상태로(원래의 상태)돌아 가게 되고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주체들은 대상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탈-관념에서는 꽃은 식물학적인 꽃으로, 길은 도로의 의미로, 숲이나 나무도 자연 그대로의 숲이나 나무로 인식되고 표시된다. 여기에 관념의 표현 방식들 -상징, 암시, 풍자 등-은 발붙일 수가 없다. 이렇게 사물에 붙어있는 의미가 다 벗겨져서 의미(관념)의 제로 포인트로 돌아가면 어떤 의식현상이 생길까. 그런 상태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그것은 시인들이 원시상태의 인간으로 돌아가서 사물을 접촉하는 것과 같다.“ (심상운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2006, 8 월간 ) ...
357    李箱시의 디지털적 해석 댓글:  조회:4276  추천:0  2015-02-18
  * 이 글은 에서 발췌한 글로서, 이상의 시에 대한 새로운 디지털 적 접근을 시도한 글입니다.   디지털 적 관점과 특성으로 해석한 이상(李箱)의 시                ----「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 와(詩第十一號)                                                                                                                                                  심 상 운     현대시에서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만큼 난해하면서도 많은 연구 과제를 던져주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시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시(難解詩)로 꼽히는 시가「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다. 이 시가 난해한 이유는 현실적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의 방법과 의미가 생산되었으며 앞으로도 누구나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은  디지털의 특성과 만날 때 선명하고 명료한 공간이 된다. 그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것. 2) 이 시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에도 감염되지 않아서(탈-관념) 분리와 결합을 통한 변형이 자유롭다는 것. 3) 이 시의 언어들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4) 이 시가 표현하는 것은 가상현실의 영상 즉 추상적인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라는 것. 5) 이 시는 컴퓨터 그래픽의 자유로운 그림 바꾸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아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해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   -----이상(李箱)「烏瞰圖」(詩第一號)전문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을 나타내는 이 다섯 가지의 개념에「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를 대입해보면 이 시가 안고 있는 새로운 시의 공간이 열린다. 먼저 이 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도로(道路)를 질주하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들(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에 대한 해석이다. 그 아해(兒孩)들을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첫 번째 특성에 대입하면 그들은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object)라는 디지털적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시 속의 아해(兒孩)들를 수식하는 제1,제2,제3....제13이라는 서수(序數)에도 어떤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그것은 이 서수(序數)가, 작가가 임의로 지정한 추상적인 숫자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의 아해를 제2의 아해로 바꾸어도 되고 제3의 아해를 제10의 아해로 바꾸어도 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서수(序數)로 표시된 이 시의 아해(兒孩)들은 시인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의미와 무의미의 이중적 이미지가 들어 있는 재료(object)라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를 “ '공포'라는 단 한 가지 감정원소로 환원된 추상적 부호집단”이라는 문덕수의 해석도(「이상론(李箱論)」)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라는 디지털적 해석에 수용된다. 그의 해석은 이 아해(兒孩)들이 캐릭터(character)의 원소(元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들은 “추상적 부호집단” 즉  디지털의 데이터(숫자나 문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컴퓨터 프로그램의 객체지향적 모듈의 특성과도 부합된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이 시에는 연극적인 캐릭터의 액션과 작가의 일방적 개입만 있을 뿐 언어단위들의 논리적인 연결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이 시 속에는 "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등장해야 하는지, 13인의 아해(兒孩)들이 도로를 질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처음에는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고 했다가 끝에서 왜 길은 뚫린 골목길이라도 적당하다고 하는지, 그리고 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지, 왜 다른 사정이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는지" 등 작가의 일방적인 개입 외에 사건의 배경이나 원인을 알 수 있는 어떤 논리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언어들이 표현하는 것은 문제만 제시하고 해답을 독자의 사유와 상상에 전부 맡기는 간화선(看話禪)의 화두(話頭) 같은 기능을 하는 순수한 가상현실의 동적인 그림이며 그것을 조정하는 시인의 심리적인 의도만 드러내는 추상화 된 그림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인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은 탈-관념의 가상현실이라고 해석된다. 그 해석을 확대하면 이 시 속의 화자는 연극의 연출자와 같은 입장이 되어서 자신의 그림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행위자에 그치고,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시는 텍스트(text)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 (受容美學,Rezeptionsasthetik)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때, 디지털의 가상세계를 전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독자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함정이나 속임수같이 생각되었던 이 시의 끝부분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의 진술기법(陳述技法)도 쉽게 풀리게 된다. 앞의 내용을 번복(飜覆)하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이 끝 구절은 컴퓨터 그래픽의 그림 바꾸기 즉 디지털 적인 변형의 자유로움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1930년대의 이상(李箱)이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인식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건축기사였던 이상(李箱)이 건물의 치수·비율·구조 등을 조정하기 위해 임의로 정하던 단위인 모듈(module)의 개념을 현대시의 구조 즉 “집합적 결합”(문덕수-「나의 시쓰기」『문덕수 시전집』에 수록) 속에 끌어들인 것이라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이 건축용어의 모듈(module) 개념은 현대 컴퓨터에 응용되어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라는 단위(unit)로 쓰인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兒孩)와 무서워하는 아해(兒孩)도 시적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대상에 옷 입히기” 이상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시에 등장하는 아해(兒孩)들의 수효를 2~3명 더 늘이거나 줄여도 좋고 길은 막힌 골목길이나 뚫린 도로(道路)나 모두 가능하다는 가정(假定)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오감도(烏瞰圖)」를 인류문명 위기의 암시란 관점으로 해석하여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를 최후의 만찬의 예수와 12제자”로 인식하고 이해한 임종국의 견해(『이상전집(李箱全集)』)나,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기간의 10개월을 제10의 아해(兒孩)까지로 보고 이 시를 “생명의 탄생과 관념이 성장․분화․심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오남구의 견해를 (『이상(李箱)의 디지털리즘』) 이 시는 의미의 큰 격차에도 불구하고 모두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 까닭은 아무런 고정관념이 들어있지 않은 백지상태 같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즉 디지털의 영상(이미지)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고 이야기를 붙이는 것은 독자의 자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미 붙이기는 그들의 상상력과 분석력과 체험, 지적수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약 선입견(先入見)을 가지고 이 시의 순수 이미지를 지식이나 관념으로 덧칠을 해서 옳다거나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와 판단의 잣대로 가름한다면, 이 시의 끝부분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로(迷路)의 비밀로 남을 수도 있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이다. 이 데이터의 기호와 숫자들은 각자의 기능은 있지만 고정된 의미가 없다. 그것은 디지털 시에서 탈-관념된 언어 단위와 같다. 이 단위들은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와도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열린 공간과 열린 사고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를 디지털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시의 공간이 얼마나 넓어지는가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오남구의 성과도 높게 평가된다. 그는 이 시에서 “아해들” 또는 “아해들의 움직임을” 디지털의 최소단위(unit)의 표현 즉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의 점(dot) 또는 화소(畵素)로 직관하고 "관념의 제로 포인트(무의미, 탈-관념)"라는 시의 새로운 관점을 찾아냈기 때문이다.(오남구의「이상의 디지털리즘」 범우사) 이 시에서 이상(李箱)이 창조한 시적공간은 현실세계와 연결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추상화된 현실의 그림이 들어 있는 공간일 뿐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현실의 정서나 감각은 찾아볼 수 없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대시키는 사유의 공간만 보인다.  요컨대, 이 시의 언어들은 관념이 전혀 묻지 않은 순수한 인지단계의 언어들이라는 것과 그 언어들을 조정하는 이상(李箱)의 사고(思考)가 탈-관념된 사고라는 것은 이 시의 해석과 감상에 무엇보다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러나 이 시에 대한 이런 접근은 이 시가 이상(李箱)이 디지털적인 탈-관념과 상상의 언어로 그려낸 단순한 액션(action)의 그림(가상현실)이며, 그의 개성적인 사고(思考)가 창조한 짧은 허상의 드라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어떤 의미도 없다는) 관점 즉 디지털적 관점에 의한 해석일 뿐이다. 또 다른 해석의 방법이 나올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다른 시를 읽어보자.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쥐었을때 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 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어부딪는다.내팔은그사기 컵을사수(死守)하고있으니산산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 과흡사한내骸骨이다.가지났던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 전에내팔이或움직였던들洪水를막은백지白紙는찢어졌으리라.  그러나내팔은如前히그사기컵을死守한다.                         -----「오감도(烏瞰圖)」「詩第十一號」 전문     에도 가상현실(假想現實)의 이미지(동영상)가 들어있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난데없는팔하나가접목(접목)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락에메어부딪는다/산산이깨어진것은그럼사기컵과흡사한내해골이다.“라는 영상언어가 그것이다. 이 그로테스크한 영상언어는 사기 컵을 사수(死守)하는 내 팔과 사기 컵을 깨뜨려버리려는 또 하나의 팔(돋아난 팔)의 대립과 갈등을 디지털적 변형의 그림(graphic)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이 시인의 내면적인 심리현상과 관련된다는 암시를 던진다. 그러나 이상(李箱)은 이 시에서도 「오감도(烏瞰圖)」같이 액션(action) 이외에 아무런 단서도 남겨놓지 않고 자신의 관념을 숨기고 있어서 이 시에 등장하는 팔이나 사기 컵, 해골 등에서 어떤 관념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의 언어들은 가상현실의 영상 속에서 캐릭터의 구실을 하는 도구(재료)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래서 ”내 팔“ ”돋아난 팔“ ”사기 컵“ ”해골“ 그리고 사기 컵을 깨뜨리는 행위와, 사수하는 행위, 깨어진 것은 사기 컵이 아니라 자신의 해골이었을 것이라는 시 속 화지(나)의 진술은 시의 공간을 확장하고 탈-관념의 가상공간을 만드는 디지털 시의 원소(元素)가 된다. 그리고 이 시에 의미공간을 여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 공간 속에는 독자들의 다양한 상상이 수용된다. 오남구는『이상의 디지털리즘』에서 “사기 컵은 해골과 흡사하다. 시각적으로 흰색과 빛나는 모양이 있고, 내용적으로 물을 담고 관념(생각)을 담는 유사성이 있다.“라고 하면서 ”깨뜨려진 것은 사기 컵과 흡사한 관념의 해골(환상)일 뿐, 집착하고 있는 손에 "실제 꼭 쥐고 있는 컵(고정관념)은 깨어지지 않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의 해석은 이 시가 감추고 있는 숨은 의미에 근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그런 해석은 독자로서의 일방적인 해석일 뿐,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는 언제나 남아있다. 이 시에서도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시의 내용(시인의 심리현상 등)이 아니라,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탈-관념의 이미지다. 그것이 이 시에서 발견되는 디지털적인 요소다.///
356    탈관념 시의 리해 댓글:  조회:4069  추천:0  2015-02-18
   이 글은 월간 2006년 8월호에 발표한  글로서, 탈-관념에 대한 논쟁을 잠재우고 탈-관념의 이론을 새로 정립한 글입니다. 이 글의 논리를 바탕으로 해야 아방가드르의 시론이 성립됩니다.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                                                                                심 상 운            1. 인지의 본질과 인지과정      관념의 개념을 정리하고 탈관념이라는 새로운 단어의 성립이 가능한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인지認知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고대부터 철학자들은 인지의 본질 및 인식하는 정신과 외부 현실의 관계에 대해 철저히 논의해왔다. 원시불교에서는 인지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그것을 감각기관인 근根(6근), 대상세계인 경境(6경), 식별작용인 식識(6식)의 세 범주로 분류하고, 그것을 인간의 존재문제로까지 확대․심화하였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인지認知를 인식 혹은 인식행위와 관련된 과정으로 본다. 인지는 인식의 경험으로 설명할 수 있는 모든 정신과정을 포함하는데, 인식은 감정이나 의지와는 구별된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인지는 감정과 의지를 제외한 지각·재인再認·상상·추론推論 등 지식을 구성하는 모든 의식적 과정을 포함한다. 따라서 인지의 본질은 지각과 판단이며 판단을 통해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구별하고 그 대상을 어떤 한 개념 또는 몇 가지 개념으로 특징짓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의미형성의 전단계가 된다.  사람이 어떤 대상을 대할 때 몸에서 제일 먼저 발생하는 것은 감각기관 6근根(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을 통과(감지)하는 6식識(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작용이다. 이 감지작용은 지각知覺의 초기과정이다. 이 여섯 감각기관은 각각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을 대상으로 한다. 이것을 6경境이라고 한다. 그런데 6식識 중 여섯 번째의 의식意識은 다섯 감각기관을 총괄하고 모든 감각을 식별하는 식識이다. 이 의식意識에는 인식認識하는 것과 인식認識되는 것이라는 두 가지의 계기契機가 내재되어 있다. 즉 의식意識 속에 주관과 객관이 공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다섯 가지의 식識이 모두 장애를 일으켜도 이 여섯 번째의 의식意識에 의해서 대상을 지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식識의 작용은 감정과 의지를 포함한다는 데서 일반적인 인지와 구별된다. 그리고 이 여섯 번째의 의식은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존재의 본질을 투시하는 내적 행위를 하는데, 그것을 직관이라고 한다. 이 6식과 함께 인지과정을 정리하면 ①감지(6식의 초기작용)→②인지(의식의 분별작용)→③의미형성(의미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과정을 거쳐서 그 주위에 있는 것들과의 연관성에 의해서 결정된다. 따라서 순수인지는 ②항까지를 말한다.), ①감지(의식작용)→②직관의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직관直觀(intuition)은 선禪의 핵심이 되는 불교의 독특한 사유방법이지만 서양 철학에서도 중요한 사유의 방법으로 인정한다. 칸트(Kant, Immanuel)는 관찰에 근거하지는 않는 모든 사실인식의 원천을 직관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직관은 다른 원천에 의해 얻지 못하는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근원적이고 독자적인 인식의 원천으로 여겨진다. 필연적 진리와 도덕원리들의 인식은 종종 직관의 방식으로 설명된다. 예컨대 논리학이나 수학의 진술은 다른 진리로부터 추론되거나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다. 그러나 공리公理처럼 다른 명제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진술들은 직관을 통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리와 규칙은 명백한 직관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직관은 과학이나 일상적 관찰에 의해 얻어진 단편적인 '추상적' 인식과 달리 상호 연관되어 있는 세계 전체에 대한 구체적 인식을 의미한다.  직관을 통해서 보는 상像을 직관상直觀像(eidetic image) 이라고 한다. 이것은 주관적인 시각현상의 하나다. 직관상을 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상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눈을 감고 있거나 상像의 배경 구실을 하는 표면만을 보면서도 마치 실제로 그 대상을 보고 있는 것처럼 인식한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특정 대상이 시야에서 사라지거나 제거된 후 곧바로 선명하게 떠오를 수도 있고 몇 분, 몇 날 또는 몇 년이 지난 후에 떠오를 수도 있다고 한다. 직관상과 그것이 나타내는 원래의 대상은 색깔, 모양, 외관상의 크기, 공간상의 위치, 세밀성 및 다른 많은 특징에서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고, 대상이 거의 사진처럼 선명하게 재생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는 직관상의 성격·원인·의미에 대해 거의 밝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직관상은 현대시에서 관념을 뛰어넘는 방법론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적인 꿈의 현상과는 다른 생생한 생명의 감각을 담아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2. 관념과 탈관념의 개념 정리    국어사전에서 관념觀念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풀이 되어 있다. 관념(觀念)[명사] 1.(어떤 일에 대한) 생각이나 견해. 2.《불》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어 생각에 잠김 3. 심리학에서 대상을 표시하는 심리내용의 총칭. 철학에서 대상을 표시하는 심리형상의 총칭. 선악의 관념, 죽음에 대한 관념 같은 것.  1번 항의‘ (어떤 일에 대한) 생각이나 견해“라는 풀이는 관념이 인식과 사유와 판단을 통해 “(어떤)의미”를 표시하는 인간의 의식내용이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3번 항의 “대상을 나타내는 의식의 내용 (선악의 관념, 죽음의 관념 따위)”에서도 관념은 “의미”를 나타내는 의식의 내용이라는 것이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관념은 대상에 대한 감지와 인지의 과정이 끝난 뒤에 일어나는 사유와 지식에 의한 의식의 현상이라고 풀이 된다. 이것을 좀 더 알기 쉽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방바닥이 차다.” “굶어서 배가 고프다” “그는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는 관념이 아닌 사실인식(감각)이다. 그리고 “꽃이 피었다”는 자연현상에 대한 단순한 인지다. 현상에 대한 느낌, 현상에 대한 사실적인 인식은 그 속에 배경의미가 없기 때문에 관념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한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다” “사랑은 세상을 따뜻하게 한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등은  관념이다. 그 말 속에는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지식과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상어 중에서 가장 관념적인 말들은 속담이나 잠언이나 명언들이다. 언어는 사물에 대한 인식기호다. 따라서 언어를 형성하는 기의와 기표는 관념이다. 그러나 그 조건만으로 언어로 표현되는 것들의 내용을 모두 “관념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형식주의적 논리에도 맞지 않는다.    다음은 “탈관념脫觀念”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는 일이다. 탈관념은 글자 그대로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대상의 의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지각知覺을 감지와 인식(의미형성 이전의 의식의 분별작용)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표현에서 대상에 대한 어떤 감정이나 판단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즉 감정, 판단, 배경의미의 유보를 뜻한다. 그것은 지각知覺을 사고思考 이전의 단계로 내려서 순수인지純粹認知의 세계로 낮추는 것이다. 이 때 대상은 그가 태어날 때의 상태로(원래의 상태)돌아 가게 되고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주체들은 대상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탈관념에서는 꽃은 식물학적인 꽃으로, 길은 도로의 의미로, 숲이나 나무도 자연 그대로의 숲이나 나무로 인식되고 표시된다. 여기에 관념의 표현 방식들 -상징, 암시, 풍자 등-은 발붙일 수가 없다. 이렇게 사물에 붙어있는 의미가 다 벗겨져서 의미(관념)의 제로 포인트로 돌아가면 어떤 의식현상이 생길까. 그런 상태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그것은 시인들이 원시상태의 인간으로 돌아가서 사물을 접촉하는 것과 같다.     3. 현대시에서의 관념과 탈관념의 문제    이상으로 인지의 본질과 과정, 관념과 탈관념에 대한 개념정리를 마치고,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시가 성립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실제 작품의 예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관념과 탈관념의 철학적 심리학적 탐구는 계속 천착되어야하지만 그것은 전문적인 분야의 연구 성과에 의뢰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현대시에서 관념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모더니즘의 시에서 관념은 시의 전면에 나서기도 하고, 배경이 되어서 주제를 드러내고 독자들을 설득하고 시인이 의도한 형이상의 세계로 유인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그래서 모더니즘 시를 포함한 전통적 서정시가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의 현대시에서 관념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관념이 없는 시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그러나 극소수의 시인들은 관념을 거부하는 시운동을 펼치고 있다. 새로운 시를 추구하는 그들에게 고정관념들이 안고 있는 인생론이나 과거 지향적 향수, 누적되어 있는 때 묻은 지식은 거부의 대상이 안 될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언어와 의식 속에 고약같이 끈끈하게 붙어있는 관념들을 지우고 직관直觀을 통해서 대상과 직접적인 내통을 시도한다. 그리고 무의식의 세계로 탐색의 눈을 돌리기도 하고, 사물성의 이미지를 시의 목표로 삼기도 하고, 언어의 허구에서 벗어나 실상의 모습을 보고자한다. 따라서 그들은 시의 출발점을 관념이 침범할 수 없는 의미의 제로 포인트 지점인 대상의 인지영역에 두려고 한다. 이런 면에서 탈관념을 지향하는 시는 언어유희의 무의미 시, 초현실주의 시, 순수 이미지의 사물시를 비롯하여 21세기 아방가르드의 맨 앞에 서 있는 디지털리즘의 시 등 네 가지로 분류하여 살펴볼 수 있다. 이런 탈관념의 실험은 김춘수 시인이 시도한 무의미시의 원천이다. 김춘수 시인은 그가 내세운 무의미시에서 언어의 의미를 배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그는 긍정과 부정의 충돌을 통한 의미 없애기, 정서나 의미가 묻어나지 않는 언어의 사용, 순수한 단순 이미지의 창출 등 언어유희의 방법을 동원한다. 다음 시를 읽어보자.   너를 위하여 피 흘린 그 사람은 가고 없다   가을 벽공에 벽공을 머금고 익어가는 능금 능금을 위하여 무수한 꽃들도 흙으로 갔다   너도 차고 능금도 차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눈은 유리같이 차다   가버린 그를 위하여 돌의 볼에 볼을 대고 누가 울 것인가    -----김춘수 전문   3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이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 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쪽바다, 그날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3월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김춘수 전문   두 편 모두 김춘수 시인의 시다. 그러나 이 두 편의 시를 시의 의미면에서 비교할 때 전혀 영역을 달리하는 시로 분류된다. 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유의미의 시인데 반해 는 김춘수 시인 한 사람 외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무의미의 시다. 그 이유는 의 내용 “가을 벽공에/벽공을 머금고 익어가는 능금/능금을 위하여 무수한 꽃들도/흙으로 갔다//너도 차고 능금도 차다/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눈은/유리같이 차다”는 이미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체험을 통하여 인식한 지식들이 굳어져서 만들어낸 “죽음의 의미”가 들어 있고 그것이 공감을 주고 있는데 반해 의 시의 내용,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 옷 속의/일찍 눈을 뜨는 남쪽바다,/그날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개인 체험과 인식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관념)도 형성되지 않는다. 또 이 시의 자연현상 ”3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눈은/라이락의 새순을 적시고/피어나는 산다화를 적시고 있었다/“는 현상에 대한 단순한 인지(사실) 외에 어떤 배경의미도 없다. 그래서 무의미의 시는 어떤 의미(관념의 틀)가 형성이 되기 이전의 인지단계의 시라고 판단된다. 이런 인지단계의 시는 관념의 때가 묻어 있지 않은 순수한 상태의 언어를 보여준다. 그리고 시 속에 들어있는 감각이나 사실에 대해 누구도 시비를 걸 수없는 자유로운 상상의 언어를 보여준다. 그래서 언어유희라는 말이 타당성을 갖는다. 유희는 예술의 전단계로서 자기만족에 충실한 예술정신의 원천이다. 의미(관념)의 세계에 만족하지 못한 김춘수 시인은 순수 언어를 도구로 하여 언어예술의 세계에 도전한 것이다. 이렇게 시의 예술성을 지향한 탈관념의 무의미시는 1950년대 조향 시인의 시가 더 적극적으로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인정되는 시인이다. 그의 대표작 를 읽어보자.          모래밭에서 受話器      女人의 허벅지          낙지의 까아만 그림자             ------조향 일부   주어와 서술어가 없는 이 구절은 통사적인 면에서 문장구조가 불완전하다. 따라서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의미가 모호하다. 그리고 시행의 독특한 나열은 형태면에서 독자들의 상상을 자극한다. 그러면서 이질적인 사물의 대립적 배치로 언어충돌을 일으킨다. 바닷가 모래밭과 수화기受話器는 자연과 물질문명이라는 대립적 구도를 연상하게 하고 수화기受話器는 여인의 허벅지와 이미지의 조화를 이룬다. 끝부분 낙지의 까아만 그림자는 또 어떤 상상력을 불러일으킬까. 어떤 성적性的인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것일까. 이 시는 그런 것들을 모두 독자들에게 맡기고 있다. 그래서 관념(의미)의 틀로부터 해방된 언어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 그림으로 남는 시가 된 것이다. 다음은 문덕수 시인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을 읽어보자.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어닥치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 전문    이 시도 어떤 관념이 보이지 않는다. 이 시의 이미지는 언어를 매개로 하고 있지만 그 언어는 사고(사유) 이전의 언어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의미를 철저히 배제한 이 시는 객관적인 눈으로 빨간 저녁노을이 반쯤 담긴 유리컵, 그 유리컵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의 표정과 위치, 한 사나이의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금방 무슨 일이 일어 날 것 같은 긴장감 속으로 시의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그 하나의 풍경만으로도 독자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충실한 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사물들의 생동하는 모습에서 사물성의 존재가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독자들은 도시와 인간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고 또 바람직한 행위다. 하지만 그 작업은 이 시가 시도하고 있는 탈관념의 언어 이미지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이유는 “서 있는 한 사나이,/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세 유리컵/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그 금 밖으로 밀려나/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는 시인의 지각작용이 포착한 생동하는 사물성과 한 순간에 집중된 감각적인 순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탈관념과 디지털리즘 시를 주장하고 있는 오진현 시인의 시를 읽어보자.   어느 날 정원에서 가위를 들고 나무를 다듬다가, 문득 눈이 맞아서 나무가 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 화 단에 서있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꽃 !“하고 바로 눈 에 보이자, 국어대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 눈 물이 주룩 쏟아지고 이날, 나무의 이름이 모두 없어져 서 내 앞에 선다.            ----------오진현 전문   시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감상과 해석을 낳는다. 그것이 시의 생명력이다. 만약 하나의 시점으로만 해석되고 감상되는 시가 있다면 그 시는 가장 불행한 시라고 말할 수 있다. 도 보는 이의 지식과 취향과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그가 왜 탈관념을 주장하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시 속에는 꽃은 꽃이고 나무는 나무라는 관념의 틀에 갇혀 살다가 그 관념의 틀이 허물어지는 순간을 체험하고 감격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 직관의 장면을 견성見性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그런 견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자아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언어와 사물(대상)의 관계에 대한 실제적인 깨달음을 말하고 있다. 언어는 사물과 사고思考의 표현기호다. 그런데 그 기호가 역전현상을 일으켜 오히려 사물과 사고를 지배한다. 따라서 “국어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는 언어가 쌓아놓은 거대한 성벽 즉 고정관념의 성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시의 화자는 “나무”와 “꽃”이라는 언어의 기호에서 해방된 기쁨을 감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언어와 그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사고思考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가변적인 것이라는 깨달음은 언어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 시는 그런  배경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에 탈관념의 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언어(기표․기의)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는 그가 말하는 탈관념의 첫 걸음이 된다.   비, 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선들이 팔딱팔딱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으면 수평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버린 빗길. 팔딱팔딱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흘깃 보는, 조각 허공에서 뿌리는 부스러기 무지개               -------오진현 전문    이 시는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 거리에서 비를 맞고 섰다가 비가 그치자 빌딩 사이 조각난 허공을 한 번 흘깃 쳐다본 순간의 장면을 사진 찍듯(접사) 찍어 놓은 것이다. 비를 맞는 감각이 차다→단단하다→날카롭다로 순간순간 변하고 있다. 비는 팔닥팔닥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지고, “부드러운 선들이 팔닥팔닥 숨을 쉰다”. 방금 살아 움직이는 동영상動映像의 한 장면을 보는 거 같다. 사실과 현장 체험의 생생한 감각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생각(지각)의 속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관념)도 보이지 않는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오진현 전문    자신의 내면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이 시의 지각작용은 직관이다. 그래서 이 시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관념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의 주관적 직관상直觀像(eidetic image)이다. 그 직관상 속에는 독특한 감각의 에너지가 전류처럼 흐른다. 그 에너지는 어떤 관념도 의도意圖도 들어갈 틈을 남겨주지 않는다. 그는 그 의식의 내면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찍어내어(염사)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무의식의 자동기술과도 구별된다. 다만 마음의 눈이 마음에 비친 의식의 영상을 사진 찍듯이 찍어서 시각적 영상으로 떠오르게 한다는 점에서 디지털리즘의 시인은 시의 주체이면서도 객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양준호 시인의 시에서도 탈관념의 한 장면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꽃잎을 짓밟고 간다. 문득 저승에서 뻐꾸기 세 번 울고 간다. 너는 뭐니 너는 뭐니. 노란 파도가 노란 파도를 따라간다. 비이슬에 젖은 철조망, 메뚜기의 눈이 등대처 럼 설레고 간다.                    ----------------양준호 전문   양준호 시인은 고정된 사고思考로부터의 탈출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조향시인의 초현실주의 시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 시에서는 꽃잎을 짓밟고 가는 어느 날 한 찰나의 의식이 담겨있다. 그 의식에는 “간다”라는 동사가 이끄는 네 개의 문장이 병렬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네 개의 문장은 논리적(객관적)인 의미의 연결이 안 된다. 따라서 어떤 의미의 형성이 불가능하다. 어쩌면 그 네 개의 문장이 담고 있는 영상은 그의 무의식의 내면에서 포착한 영상 같기도 하다. 그래서 독자들은 다만 그의 무의식의 속으로 들어가 보는 희귀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다음은 송시월 시인의 시 를 읽어보자.     비 그친 후, 물웅덩이 붉은 하늘 한 조각 하늘 속의 물구나무 선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와 육교 한 토막, 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 조각 언뜻 멧새 한 마리가 휙 일렁이며 간다                     --------송시월의 전문     이 시는 오진현의 같이 비 그친 날의 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찍어낸 시다. “그려낸”이 아닌“찍어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눈에 들어 온 풍경이 언어의 구문 조직상 순차적 연결로 되어 있지만 “물웅덩이, 하늘 한 조각, 하늘 속의 물구나무 선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 육교 한 토막, 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 조각, 멧새 한 마리가”가 눈에 포착되는 순간은 동시적同時的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각영상이 이렇게 질서화 된 것은 직관을 통한 의식의 작용이 선택하여 만들어 냈다는 것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인정한 것이다. 우리들의 눈은 물리적인 면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이 빛으로 들어오는 것은 다 받아들인다. 그래서 단일시점單一視點이 아닌 다시점多視點의 시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의식(마음)은 외부의 것을 기억의 그릇에 선택적으로 담는다. 그것을 마음의 눈이라고 한다. 이 선택적인 시각視角 즉 마음의 눈에 관해서 영국의 수필가 가드너는 라는 수필을 통해서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깐 이 시는 송시월 시인의 마음의 눈이 카메라가 되어서, 비 그친 후 물웅덩이에 멧새 한 마리가 휙 일렁이며 지나가는 동動․정靜의 한 순간을 찍어낸 사진 즉 인식의 그림이 된 것이다. 이것이 디지털리즘이 주장하는 탈관념이며 직관을 통한 염사 또는 접사의 기법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독자들은 관념의 작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사물과 직접 만남, 즉 인간과 사물(물에 비친 영상)과의 내통만이 있을 뿐이다. 다음은 이솔 시인의 을 읽어보자.   욕조 가득 비누거품이 부풀고 있다 거품 속에 색들이 팔딱거린다 거울 속에서 허물이 흘러내린다 구석구석 비누거품을 벗겨낸다 동그랗게 굴러가는 색깔들   텃밭에서 갓따온 가지빛깔 처음 우러나온 치자빛깔 옥수수 수염색깔 샘물바닥에서 솟아나는 모래빛깔 청심환을 싸고있는 금박지 씨가 환히 비치는 청포도빛깔   바구니 가득한 캔디 눈에 담기는 색깔부터 입 속에 넣는다 달콤하다가 시다가 씁쓰레 하기도 캔디맛인지, 색깔맛인지 욕조 가득 넘치는 맛과 색 맛으로 빛으로 춤춘다 ------이 솔 전문   이 시는 비누거품의 빛과 맛의 세계로 독자들의 감각을 끌어들인다. 그 빛과 맛은 시인이 감지하고 상상한 사물성의 세계다. 따라서 그것은 시인과 사물의 순수한 교감交感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시인과 사물의 직접적인 내통과 상상은 독자들에게 관념이전의 순수한 사물성이 만들어주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그 세계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세계다. 그래서 이 시 속에 들어 있는 시인의 자기소멸의 빈 마음과 섬세한 감각, 그리고 날카로운 관찰과 상상은 신선하고 창조적인 사물시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한다.     이제까지 일반적인 관념(고정관념)에서 벗어난 무의미의 시(김춘수), 초현실주의의 시(조향, 양준호), 사물성의 감각과 이미지 중심의 사물시(문덕수, 이솔), 디지털리즘의 시(오진현, 송시월)의 시편들을 나름대로 살펴보면서 한국 현대시에서 창작된 탈관념 시의 존재를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탈관념의 시는 대상에 대한 지각을 의미 형성의 이전, 감지와 인식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검증하였다. 어떤 의미도 형성되기 이전의 감지와 인식의 단계는 관념시와 탈관념 시의 경계가 된다. 따라서 관념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인간의 의식 활동 전체(생각)를 관념이라고 모호模糊하게 정의하지 않는다면(관념의 지나친 확대는 거대한 고정관념의 형성이다), 한국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시는 가능하고 그런 시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시들은 언어의 관념에 시달려온 우리들의 정신을 맑은 물로 씻어주고 사물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감각과 정신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끝으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면 대상을 보는 눈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하는 가장 기본적 관점觀點의 자세를 산문체로 풀어쓴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면서 글을 줄인다.   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지 못 하나, 우리의 눈. 풍경들은 시시각각時時刻刻 새롭게 변화하고 치장하고 은밀한 부분까지 스스로 환히 보여주고 있데, 이미 우리들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그 계곡의 숲길이나 꽃나무들, 묵은 생각이 그려내어 벌려놓는 화판 위의 그림.   이젠 그 관념觀念의 안경을 깨뜨려 버려라, 우리의 눈. 순간순간 펼쳐 보이는 풍경의 색깔이나 모양, 변화의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눈부신 육체와 혼魂을 찾아내어 아이들처럼 즐겁게 놀면서 교감交感하라, 순백과 눈 맞춰라, 우리의 눈. 뇌세포 속에 푸른 반점으로 남아 있는 몇 만 년 전의 원시기억原始記憶까지 모두 지울 수 없나, 우리의 눈. 먼지 묻고 얼룩이진 유리창을 계속 깨뜨려라, 들어오는 밝은 빛을 굴절시키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형상形象들을 계속 깨뜨리고 또 깨뜨려라, 우리의 눈.   오오, 아무 배경背景 없는 순수인식純粹認識, 그 한가운데서 투명하게 빛날 새 눈을 위해.                              --------심상운 전문              
355    <<네오아방가르드>>--~(아이고나 머리가 뗑...) 댓글:  조회:4383  추천:0  2015-02-18
『Return of the Real』 Hal Foster  누가 네오-아방가르드를 두려워하는가?  *네오-아방가르드: 1910년대와 1920년대의 아방가르드적 고안들, 즉 콜라쥬와 앗상블라쥬, 레디메이드와 그리드, 모노크롬 회화와 구성조각 같은 것들을 재활용했던,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북미와 서유럽 미술가들을 느슨하게 묶어서 지칭하는 말.  할 포스터는 전후부터 지금까지 우후죽순으로 등장했던 수많은 '네오'와 '포스트'들 중에서, 예술적 관례들과 역사적 조건들 둘 다에 대해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려 열망했던 복귀들에 주목한다.  그는 '근본적인 독해'의 예로, 알튀세의 마르크스 독해와 라캉의 프로이트 독해를 들고 있다. 이 두 복귀의 핵심은 담론의 구조, 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나 정신분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보다는 어떻게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의 의미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변형시켰는가 하는 데에 있었다. 알튀세는 마르크스 내에서 잊혀진 단절을 분명히 밝혀내는 데에, 라캉은 프로이트와 소쉬르 사이의 잠재된 연계를 명료화시키는 데에 집중하여 각기 다른 내부의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지만, 독해의 방법과 모티브는 유사하다. 즉, 억압적으로 느껴지는 현재의 작업방식으로부터 그 담론을 떼어내기(disconnect)위해서, 그것을 어떤 상실된 실천과 다시 연결시키려는(reconnect) 전략을 명확히 하려는 것이다. 후자의 움직임(다시)은 시간적인 것으로, 전자의 공간적인 움직임(떼어내기)속에서 새로운 작업장소를 열어놓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미술에서는 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의 뒤샹적인 다다의 레디메이드들과 러시아 구축주의의 불확정적 구조들의 복귀가 앞서 말한 근본적인 복귀에 해당할 수 있다. 이 두 움직임은 다른 양상을 보이지만, 모두 자율적 미술 및 표현주의적 미술가의 부르주아적 원리들에 대해 투쟁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방법-전자는 미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의 포즈와 일상 사물들을 포용함으로써, 후자는 산업 재료들을 사용하거나 미술가의 기능전환을 시도함으로써. 목적-미적 범주들에 대한 인식론적 탐구를 통해서 예술 제도를 규정하고/하거나 그것의 형식적 관례들에 대한 무정부주의적 공격을 통해 그 같은 예술제도를 파괴하려고. 그러한 제도를 혁명적 사회의 유물론적인 실천들에 따라 변형시키려고.) 두 경우 모두 미술을 세속적인 시·공간과의 관계 속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사회적 실천과의 관계 속에서 재위치지우기위한 것이다. 50년대의 미술가들이 대체로 아방가르드적 고안들을 재활용했다면, 60년대의 미술가들은 그것을 비판적으로 탐구했다.  두 가지 전제: 아방가르드를 구축하는 일의 가치에 대한 것, 아방가르드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서사들의 필요에 대한 것.  아직까지도 아방가르드에 대해서 논할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예술적 형태와 정치적 형태사이의 상호접합(articulation)이라는 문제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예술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상호접합이야말로, 포스트모던이라는 절충적 개념 뿐 아니라 네오-아방가르드에 대한 탈역사적(posthistorical)설명이 말소하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나온 과거를 복합적으로 만들고 나아갈 미래를 지원하는, 아방가르드의 새로운 계보가 필요하다.    *페터 뷔르거의 의 핵심과 할 포스터의 관점.  뷔르거의 전제, 그러니까 아방가르드의 모든 활동들이 부르주아 예술의 허구적 자율성을 파괴하려는 기획 아래 포섭될 수 있다는 것에 문제가 많다. 그보다 더한 문제는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절대적 기원으로, 즉 그 미적 변형이 첫 번째 단계에서 완전히 그 의미를 드러내고 또 역사적으로 그 효과를 발휘한 것으로 그려낸 것. 이는 지금 현재 역사적 아방가르드라는 의미를 얻을 수 있는 작업(작가)들이 아방가르드적 실천과 제도적 수용 사이의 대화의 시공간을 가로질러 나아가는 상황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뷔르거의 전제: 어떤 한 예술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오로지 그 예술이 진전하는 정도에 따라서만 진전할 수가 있다. 뷔르거의 주장에 따르면, 부르주아 예술에 대한 아방가르드의 비판은 이 부르주아 예술의 전개, 특히 그 역사 안에서의 세 단계들에 의존한다. 첫단계는 18세기 말경 예술의 자율성이 계몽주의 미학에서 하나의 이상으로서 선언되었을 때 생겨났고, 두 번째 단계는 19세기 말경 이러한 자율성이 바로 예술의 주제자체로 바뀌었을 때, 그리하여 추상적 형식뿐 아니라 또한 세상으로부터의 유미주의적 퇴각 역시 추구했던 예술 속에서 생겨났다. 세 번째 단계는 20세기 초엽 이 유미주의적 퇴각이 역사적 아방가르드에 의해, 예를 들면 미술은 사용가치를 회복해야한다는 생산주의자들의 명백히 드러난 요구나, 혹은 미술은 자신의 무용성을 인정해야한다는-문화질서로부터의 예술의 퇴각은 또한 이 질서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다다이스트들의 함축적인 요구의 형식으로 공격받았을 때 생겨났다. 그의 이론이 신봉하는 진화의 개념은 이전과 이후를 원인과 결과라고 하는 전혀 별개의 것과 합성시키는 단순한 것이며, 역사를 순간적이면서 또한 종국적인 것으로 제시하게끔 그를 이끌어 갔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네오-아방가르드에 의한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반복은 오로지 반-미학을 예술적인 것으로, 위반적인 것을 제도적인 것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뿐이다.(물론 그것이 다 거짓은 아니지만) 따라서 역사적 아방가르드=영웅적(성공한) 과거, 네오-아방가르드=실패한 현재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하지만 두 아방가르드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뷔르거는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예술양식들이 역사적 관례들임을 드러냈으며, 그것들을 실천적인 수단들로 다루었다고 주장하며, 이것들이 예술-역사를 넘어서고 목적을 결여한 것으로 간주되는 -에 대한 아방가르드의 비판에 근본적인 이중의 수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이런 자의성은 네오-아방가르드의 "어떤 의미설정도 가능케 하는 공허한 의미의 선언"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질적 차이는 아니다. 여기서 두 아방가르드 사이의 연속성을 찾을 수 있다.  할 포스터가 뷔르거를 걸고넘어지는 목적은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네오-아방가르드 사이의 시간적 교류, 말하자면 예상과 재구성의 복합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실패를 시뮬레이트하는 네오-아방가르드라는 뷔르거의 논리는 더 이상 충분치 않으며, 그가 주장해마지않는 역사적 진화라는 개념과도 모순된 것이다. 그의 결론은 1. 아방가르드의 다음과 같은 교훈, 즉 동시대 예술의 역사성이라고 하는 교훈을 무시하고 있는데, 그러한 교훈을 뷔르거는 다른 곳에서는 우리에게 설파하고 있다. 그것은 또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이러한 역사성에 대한 이해가, 바로 그로 인해 예술이 오늘날 예술로서 진전되었음을 주장할 수 있는, 하나의 평가기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2. 그것은 네오-아방가르드가 예술제도에 대한 전전의 비판을 전복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애썼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네오-아방가르드가 그렇게 하는 가운데 새로운 미적 경험들과 인식상의 연관들, 그리고 정치적 개입들을 생산해냈다는 사실을 무시하며, 또 이러한 새로운 개방들이 바로 그로 인해 예술이 오늘날 진전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평가기준을 구성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할 포스터는 '네오-아방가르드는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기획을 무효화한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처음으로 이해한 것은 아닌가?'라는 가설에서부터 새로운 개방의 가능성을 탐구해나가려 한다.    뷔르거에게 또 한 번 딴지를 걸자면, 그는 아방가르드가 예술과 삶을 다시 연결시키기 위해 자율적인 예술제도를 파괴한다고 했는데, 이런 관점은 문제가 되는 자율성을 예술에게 할당하고 삶은 그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위치시켜서 필연적으로 아방가르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아방가르드의 실천들이 지닌 결정적 차원을 놓치게 된다.(예: 아방가르드가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타락한 세계를 조롱하기 위해서 흉내낸 모방적 차원, 아방가르드가 무엇이 존재할 수 있는가보다는 무엇이 존재할 수 없는가를 제안하려고 했던 유토피아적 차원) 하버마스는 뷔르거에 한 술 더 떠서 아방가르드는 단순히 실패했을 뿐 아니라, 항상 이미 잘못된 것, 즉 "넌센스한 실험"이라고 말한다. 그의 관점을 밀고 나가는 사람들은 아방가르드는 예술-그-자체라는 범주를 그대로 유지하며 그저 "동일한 이데올로기적 수준에서의 역전 현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방가르드들의 목표는 예술의 추상적 부정이나 삶과의 낭만적 화해가 아닌, 삶과 예술이라는 이 양자의 관례들을 지속적으로 시험하는 것이며, 그 실천은 모순적·유동적, 악마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이것은 예술과 삶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예술의 관례와 제도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예술제도는 미적 관례들을 총체적으로 지배하지는 않는다. 또 이러한 관례들은 예술제도를 총체적으로 구성하지는 않는다. 이런 차이는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네오-아방가르드의 역점들을 구분하게 해주는데, 전자가 관례적인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후자는 제도적인 것에 집중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네오-아방가르드들은 역사적 아방가르드들이 수행한 전통적 매체들의 관례들에 관한 비판을 미술제도에 대한 탐구, 즉 그 제도의 지각적이며 인식적인, 또 구조적이며 담론적인 매개변수들에 대한 탐구로까지 발전시켰다. 따라서 할 포스터의 세 가지 주장은 1) 예술제도가 그 자체로 포착되는 것은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더불어서가 아니라 네오-아방가르드와 더불어서이다. 2) 네오-아방가르드는, 최상의 상태에서는, 이 제도에 대해서 특정하면서도 해체적이기도 한 창조적인 분석(역사적 아방가르드에서 자주 그랬듯이, 추상적이면서 무정부적인 성격을 띠는 허무주의적 공격이 아니라)을 수행한다. 3)네오-아방가르드는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무효화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기획을 처음으로-이 처음이라는 것은 이론적으로 재차 끝이 없는 것이다-실행한 것이다.    네오-아방가르드라는 용어를 더 세분화해보면, 초기 네오-아방가르드에 있어서 두 계기를 구분할 수가 있다. 첫 번째 네오-아방가르드는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기본적인 고안들을 반복함으로써 미술제도를 변형시킨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방가르드를 제도로 변형시킨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억압과 반복에 대한 프로이트적인 모델과의 유비에 따르면 이는 억압된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그 모순들이 충분히 다뤄지기 전, 그러니까 회고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반복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평가와 판단, 분류가 있기 전, 무의식적인 저항으로서 수용되는 단계로 볼 수 있다. 이런 아방가르드의 제도화는 두 번째 네오-아방가르드에 있어서,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첫 번째 네오-아방가르드 양자의 한계들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을 촉구한다. 다시 말하자면,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첫 번째 네오-아방가르드의 소위 말하는 실패, 즉 미술제도를 파괴하는 데에 있어서의 그것들의 실패는 두 번째 네오-아방가르드에 의한 이 제도의 해제 실험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네오-아방가르드를 종착점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럴려면 그것의 비판이 그 자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의 여러 상황은 두 번째 네오-아방가르드에게 또 다시 성찰을 요구하는데, 그 제도적 분석을 발전시키려는 데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동시대 미술가들은 거대한 대립들(oppositions)로부터 미묘한 전치들(displacements)에로, 그리고/혹은 다른 집단들과의 전략적인 협업들(collaborations)에로 옮겨갔다. 이런 과정이 아방가르드의 비판이 지속되는 한 방식이며, 아방가르드가 지속되는 한 방식이다.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네오-아방가르드 사이의 이러한 개정된 관계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로 다시 되돌아가자. 할 포스터의 텍스트를 관통하는 한 가정을 전면으로 드러내면, '역사는, 특히 모더니즘의 역사는 자주, 암암리에건 혹은 그 반대이건 간에, 개인 주체라는 모델에 입각해 실로 하나의 주체로서 포착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가정에서 자유로워지거나 포기하는 대신, 그것을 하나의 덕목으로 만드는데, 개인 주체에 대한 이러한 유추가 역사 연구에 있어 거의 구조적인 것이라면, 차라리 주체에 관한 가장 정교한 모델인 정신분석학 모델을 적용하는 것이 어떠하냐고 공공연히 제안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심리적 시간성을 포착한 것을 라캉의 프로이트 독해로 풀어보면, 하나의 사건은 오로지 그것을 기록하는 또 다른 사건을 통해서만 등재되며, 또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오로지 지연된 작용 속에서만 알게 된다는 내용인데, 포스터는 모더니즘 연구 목록들 속에 이런 유추를 집어넣는다.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네오-아방가르드는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즉 미리-당김(protention)과 다시-당김(retention)의 지속적인 과정, 예상된 미래들과 재구성된 과거들 간의 복잡한 이어달리기로서-간단히 말해, 이전과 이후, 원인과 결과, 기원과 반복이라는 그 어떤 단순 도식도 헛되게 되고 마는 지연된 작용 속에서-구성된다는 것이다. 뷔르거의 '최초의'시작과 끝이라는 결론과 달리, 이런 유추에 의거한다면 아방가르드 작업은 그 시초의 계기에 있어 결코 역사적으로 효과적이지도, 또 충분히 의미있지도 않다.(그저 그 시대의 상징질서에 뚫려 있던 하나의 외상(구멍)일 뿐.) 이 외상은 레디메이드와 모노크롬 같은 아방가르드적 사건들의 반복이 지닌 또 다른 기능, 즉 그러한 구멍들을 깊게 할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덮기도 하는 기능을 지시해 준다. 그리고 이런 기능은 처음에는 분열적이고 두 번째에는 회복적인 두 작동방식을 구별할 것인가, 과연 그것들은 서로 분리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지시해 준다. 네오-아방가르드는, 역사적 아방가르드에 의해서 그것이 작용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역사적 아방가르드에 작용하기도 한다. 억압되었던 아방가르드는 복귀를 거듭한다. 미래로부터.    
354    아방가르드詩 몇수 댓글:  조회:2448  추천:0  2015-02-18
    테라야마 슈우시(寺山修司1935-1983)의 첨예한 아방가르드 시 나의 이솝                      -테라야마 슈우시(寺山修司)         1. 초상화 속에 그만 실수로 수염을 그려 넣어버렸으므로 할 수 없이 수염을 기르기로 했다.   문지기를 고용하게 되어 버렸으므로 문을 짜 달기로 했다.   일생은 모두가 뒤죽박죽이다 내가 들어갈 묘혈(墓穴) 파기가 끝나면 조금 당겨서라도 죽을 작정이다.   정부가 생기고 나서야 정사를 익히고 수영복을 사고나면 여름이 갑자기 다가온다. 어릴 때부터 늘 이 모양이다.   한데 때로는 슬퍼하고 있는데도 슬픈 일이 생기지 않고 불종을 쳤는데도 화재가 발생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여 개혁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바지 멜빵만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는 것이다.       눈물은 인간이 만드는 가장 작은 바다이다.       개가 되어 버렸다. 법정에서 들개사냥꾼이 증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개가 되어 버렸을까? 개가 되기 전에 당신은 나의 아는 사람 중의 누구였습니까? 크로스워드 퍼즐 광인 교환처(交換妻) 선원조합 말단회계원인 부친 언제나 계산자를 갖고 다니는 여동생의 약혼자 수의(獸醫)가 못되고 만 수음상습자 숙부 하지만 누구든 모두들 옛날 그대로 건재하다. 그러면 개가 되어버린 사람은 누구인가? 세계는 한 사람의 개 백정쯤 없어도 가득 찰 수 있지만 여분인 한 마리의 개가 없어도 동그랗게 구멍이 뚫리는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다윈의 진화론을 사러 갔다가 한 덩이 빵을 사서 돌아왔다.     4. 고양이……다모증(多母症)의 명상가 고양이……장화를 신지 않고는 아이들과 대화가 되지 않는           동물 고양이……먹을 수 없는 포유류 고양이……잘 안 써지는 탐정소설가 고양이……베를리오즈 교향악을 듣는 것 같은 귀를 갖고           있다 고양이……재산 없는 쾌락주의자 고양이……유일한 정치적 가금(家禽)     5. 중년인 세일즈맨은 갑자기 새로운 언어를 발견했다. 마다가스칼語보다 부드럽고 셀벅로찌어語보다도 씩씩하고 꿀벌의 댄스 언어보다 음성적이며 의미는 없는 것 같고 표기는 될 것 같으면서도 안 되고 새들에게는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새로운 언어다.   라고 세일즈맨은 그 언어로 말을 하고 나는 해석하여 감상했다. 그리고 얼마 후 중년인 세일즈맨은 가방을 든 채 벤치에서 죽고 친척도 없이 신분증명서만이 그의 죽음을 증명했다. 나는 그가 발견한 새로운 언어로 그의 죽음을 증명했다. 말을 걸어 봤으나 아이들은 웃으며 도망치고 일꾼들은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빵집에서는 빵도 팔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가 새로운 언어로 되어 있는 것인지 새로운 언어가 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것인지를 알기 위하여 말을 거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는 것이다.     라는 새로운 언어가 통할 때까지 지나가는 그들 사물의 folklore 가라앉는 석양을 향해 나는 말을 건다 말을 건다 말을 건다 말을 건다 말을 건다 말을 건다     6. 불행이란 이름의 고양이가 있다. 언제나 나에게 바싹 붙어 있다.     7. 도포이송한 와우여 한도포이송 여와우 송도포이한 우여와 포송이한도 우와여   여우와 한 송이 포도를 종이에 쓰고 한 자씩 가위로 잘라 흐트렸다간 다시 아무렇게나 나열해 봅니다. 말하기 연습은 적적할 때의 놀이입니다.   *《일본현대시선》 도서출판(1984년 간행. 박현서 역)에서 발췌         일본 천재시인--- 테라야마 슈우시(寺山修司1935-1983) 1983년에 약관의 나이 48세로 요절함.   ㅡ - 시 번역; 박현서 시인(1931년 김해 출생) 시인이자 번역자.   [출처] 테라야마 슈우시(寺山修司1935-1983)의 첨예한 아방가르드 시 |작성자 banyantree  
353    책 경매 !!! 댓글:  조회:5344  추천:0  2015-02-18
(서울)=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읽어봤을 만해 한용운(1879~1944)의 시집 '님의 침묵' 초판본 1책이 경매에 나온다. 18일 고서적 경매사 코베이에 따르면, 1926년 발간된 '님의 침묵' 24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경운동 수운회관 6층 코베이 전시장에서 열리는 '제182회 삶의 흔적' 경매에 3000만원에 출품된다. ↑ 만해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 '님의 침묵'은 최근 문화재청이 주관한 근대 문학작품 문화재 등록후보에 오른 작품이다. 초판본은 현재 만해기념관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 몇 곳에서만 소장하고 있다. 코베이 측은 "경매에 나온 '님의 침묵'은 1926년 회동서관 발행 초판본으로 한용운이 설악산 오세암에서 원고를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다"며 "일제의 탄압과 억압 속에서 저항문학에 앞장선 인물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의미가 있다"고 소개했다. 앞서 코베이는 백석의 '사슴'과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경매해 각각 7500만원, 1300만원에 팔았다. 이번 경매에는 월북시인 임화의 '현해탄' 초판본 1책이 시작가 300만원에 출품된다./// 2015.18/2
352    <<최첨단 현대시론(?)>>과 <<아방가르드 시론>> 댓글:  조회:3968  추천:0  2015-02-18
  * 이 글은 월간 2006년 12월호에 발표하여 21세기 한국시단에 파문을 일으킨 심상운의 최첨단 현대시론이다.  디지털의 원리를 현대시에 도입하여 라는 새로운 시론을 전개하고 개념을  정립하였다                             21세기 현대시의 길 열기-             디지털 시에 대한 이해                 --디지털 시의 원리와 언어의 특성                                                                                                                    심 상 운     1. 들어가는 글-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     21세기 문화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은 디지털(digital)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디지털 감각, 디지털 시를 말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다. 따라서 디지털이 펼치는 놀라운 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디지털 시대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참여가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의사소통 방식은 아날로그 형식에서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여기서 생기는 모든 변화를 통틀어 디지털 혁명이라고 한다. 혁명이라는 과격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컴퓨터 체계와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시스템 변화 때문이다. 즉 CD, 정보통신기기, 휴대폰, 개인컴퓨터(P.C.), 인터넷(Internet), 통신위성, 광섬유, HDTV, 디지털 영상 등, 영상을 공학적으로 처리하는 영상공학, 영상신호처리(Image Signal Processing) 등의 영역은 현대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를 밑바닥에서부터 뒤바꾸는 근원적인 동력이 되어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부지불식중에 생활 패턴, 사고방식, 감각, 감성, 언어 등에 변화를 겪으며 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변화의 현상을 디지털 문화라고 하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고 사는 사람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디지털 세대라고 한다. 인터넷 네트워크 속의 이 세대는 새로운 정보기술의 활용능력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디지털 세대의 특성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요인에 의해서 움직이고, 소외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집단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강한 독립성과 감성을 드러내며, 지적 개방성을 나타낸다. 자유로운 표현, 확실한 소신, 혁신적 태도, 탐구정신, 즉각적인 반응, 공동 관심사에 대한 민감성은 햄릿 같은 아날로그 시대의 세대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들은 익명성에 숨어서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선입견에서 해방되어서 세대와 성(性)을 뛰어 넘기도 한다. 그리고 파도와 같이 무분별한 군종성(群從性)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만이 통용하는 상징이 있으며 언어(문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용 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하는 자기표현에도 익숙하다. 따라서 그들은 귀에 대응하는 라디오, 눈에 대응하는 신문 등 하나의 미디어에 하나의 감각능력으로만 대응하는 아날로그 시대의 ‘감각분할’ (그것을 한쪽으로의 미디어에 치중하는 모노미디어 Monomedia 라고도 한다.)의 불완전성에서 벗어나서 디지털의 ‘감각통합의 시대’ 에 사는 세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의 몸 안에서 오감을 자유로이 융합하듯 하나의 미디어 안에서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 데이터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자재로 혼융하여 저장, 전달, 재생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통제 범위를 넘는 전달성과 재생(재창조)성은 그 한계를 규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고대 중국의 한 황제가 궁정 수석 화가에게 “벽화 속의 물소리가 잠을 설치게 한다.”고 궁궐에 그려진 벽화를 지워버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인간은 원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등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감각능력을 응집시켜 수용하는 감성통합의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을 향유할 수 있는 현대인의 자질로 연장된다.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변화의 중심 원리와 특성(디지털과 컴퓨터의 특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시 창작의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은 현대시의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 이유는 시란 대상에 대한 정서의 표현이고, 새로운 해석이고, 이름붙이기이고, 혼란한 생각들을 질서화 하여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는 현대시의 이론에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이 과거와 같이 언뜻 그대로 동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전통적인 서정시나, 지성의 기능을 우월하게 내세우는 모더니즘 시의 일반적인 경향에 대한 반동(反動)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은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끌려가고 설득을 당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따라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해방시켜서 의미보다는 감각과 이미지의 예술로 전환시키고 독자에 대한 일방적인 설득이 아닌 독자 참여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시의 방법론은 시대적인 당위성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성을 탐구․수용하고 그것을 현대시의 표현기법으로 활용하는 것은 현대시의 새로운 길 열기라고 말할 수 있다.     2. 디지털의 컴퓨터 공학적 특성     디지털은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digitus’에서 숫자 ‘digit’, 2진법을 의미하는 ‘digital’이란 단어로 형성되었으며, 모든 계산을 ‘0과 1’, ‘켜짐과 꺼짐(on-off)’, ‘있음과 없음’의 구조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아날로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료를 1,2,3,4,5,6...과 같은 연속적인 실수가 아닌, 특정한 최소 단위를 갖는 이산적인 수치를 이용하여 처리한다. 이런 원리를 지닌 컴퓨터의 정보처리 방식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의 특성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디지털은 정수로 이루어진 최소 단위들(unit)이기 때문에 분리와 합성에 의한 변화가 자유롭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운용되는 아날로그에 비해 디지털은 숫자나 문자로 표시되는 *데이터(data)에 의해서 불연속적인 변화를 순간적으로 구현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카메라에서 화소(畵素)는 화소(畵素)의 위치와 색상을 숫자화 한 데이터에 의해서 구현된다. 이 데이터는 소리의 높이 성량 음색 등도 숫자로 처리하고 보존하기 때문에 언제나 정확한 소리의 재생과 전달이 가능하다. 수리적(數理的) 데이터로 처리되는 이 최소 단위들(unit)은 컴퓨터에서 문서와 통계 자료 뿐만이 아니라 음성 및 영상 자료까지 재편집 재창조를 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을 편집(edit)이라고 하는데, 사용자가 컴퓨터를 이용하여 어떤 문서를 작성하거나 흩어져 있는 여러 자료들을 필요한 형식에 맞추어 재배열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 편집을 하기 위해 이용되는 워드프로세서 등의 편집 도구를 편집기 또는 에디터(editor)라고 한다. 따라서 디지털은 복제, 삭제, 편집이 간편하며, 복사물과 원본의 차이가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 최소 단위들의 결합과 분리 즉 편집은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만들어내는 컴퓨터 그래픽의 기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컴퓨터그래픽은 어떤 그림의 부분을 떼어내고 다른 것들과 합성시켜서 원래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때 그림의 의미도 바뀌게 된다. 또 은행나무 뿌리와 버드나무의 줄기와 벚나무의 꽃을 합성(집합적 결합)하여 새로운 나무를 만들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이런 변형은 실제 생명체의 유전자(DNA) 조작(생명공학)에 의해서 가능하지만, 디지털의 가상현실에서는 데이터의 조작(최소 단위들의 수리적 조합과 분리)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구현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그림을 형성하는 단위의 데이터 속에는 원래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탈-관념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인 근거가 존재한다. 이 가상현실의 세계는 가상적인 세계를 현실로 착각하게 한다. 영화 에 나오는 동물들은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 만든 그림이다. 이 “버추얼”의 영상은 색깔, 모양 등을 마음대로 변화시킨다. 어떤 사람이 누워 있을 때, 그의 옷을 바꿔 입히기도 하고, 옷의 색깔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그 사람의 얼굴 팔 다리 등을 바꿀 수도 있다. 또는 그 사람의 주변 환경을 마음대로 바꿀 수가 있다. 또 현실세계의 소리의 일부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등)를 채집하여 그것을 여러 음계의 소리로 확대․변형시키기도 한다. 아직 후각의 디지털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그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아날로그 시대에는 사진이 사실 확인의 증거가 될 수 있었지만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될 뿐이다. 이런 디지털의 기능들은 모듈(module)화에 의해서 더 효과적으로 운영된다. 컴퓨터의 여러 부분에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로서 작용하는 모듈은 시스템을 구성하는 독립적 단위가 되어서 기능의 효과를 높이고 더 분화된 독자적 역할을 수행한다. 모듈은 컴퓨터에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중앙통제의 시스템에 의해서 일괄적으로 정보가 처리(입력, 편집, 출력 등)될 때, 한 부분의 기능이 장애를 일으키면 그 장애로 인해서 전체적인 장애현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그런 비능률적 중앙통제의 기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기능을 분산하고 독립시켜서 시스템 전체의 능률을 강화하고 장애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구조가 컴퓨터의 모듈이다. 이 모듈은 건축 재료의 효과적인 사용을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을 컴퓨터에서 프로그램 시스템의 구조에 응용한 것이다. 정밀한 조직의 네트워크 속에서 다른 부분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운용과 독립성을 갖는 모듈화의 특성은 새로운 프로그램(시스템)을 만들 때, 이미 만들어진 모듈을 가져다 쓰면 된다는 재사용성과 다른 부분과 연관이 없이 자기 일만 수행하기 때문에 기능을 고도화하고 확대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모듈은 새로운 프로그램(모듈)을 생산하는 모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듈은 객체지향성에 의해서 독립된 영역을 구축한다. 디지털의 자료(데이터)는 아날로그에서 채집한 자료(화상, 소리 등)를 바탕으로 성립된다. 그것을 샘플링이라고(sampling 견본추출) 하는데, 아날로그의 소리가 디지털로 변화될 때 아날로그에 있던 노이즈(noise 잡음) 현상은 말끔히 제거된다. 그것은 디지털의 명료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은 감각자체의 변화가 아니고 기법의 변화에 한정되기 때문에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은 아날로그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단절적 현상(초기의 계단현상)은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현상(경사진 언덕)으로 점차 복귀된다. 그것은 디지털시계가 외형상으로는 아날로그시계의 모양을 닮아 가는 것과 같다. 이 밖에 아날로그는 고갈되거나 변질되는데 비해 디지털은 무한히 재사용해도 고갈되거나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도 디지털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이터(data- 컴퓨터가 통신, 해석 및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형성된 사실 및 개념의 표현을 어떠한 조건, 값 또는 상태로 나타내는 숫자나 문자)     3. 현대시에 나타난 디지털적인 요소     가, 이상(李箱)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현대시에서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만큼 난해하면서도 많은 연구 과제를 던져주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시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시(難解詩)로 꼽히는 시가「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다. 이 시가 난해한 이유는 현실적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의 방법과 의미가 생산되었으며 앞으로도 누구나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은 디지털의 특성과 만날 때 선명하고 명료한 공간이 된다. 그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것. 2) 이 시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에도 감염되지 않아서(탈-관념) 분리와 결합을 통한 변형이 자유롭다는 것. 3) 이 시의 언어들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4) 이 시가 표현하는 것은 가상현실의 영상 즉 추상적인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라는 것. 5) 이 시는 컴퓨터 그래픽의 자유로운 그림 바꾸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아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 -----이상(李箱)「烏瞰圖」(詩 전문)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을 나타내는 이 다섯 가지의 개념에「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를 대입해보면 이 시가 안고 있는 새로운 시의 공간이 열린다. 먼저 이 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도로(道路)를 질주하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들(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에 대한 해석이다. 그 아해(兒孩)들을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첫 번째 특성에 대입하면 그들은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object)라는 디지털적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시 속의 아해(兒孩)들를 수식하는 제1,제2,제3....제13이라는 서수(序數)에도 어떤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그것은 이 서수(序數)가, 작가가 임의로 지정한 추상적인 숫자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의 아해를 제2의 아해로 바꾸어도 되고 제3의 아해를 제10의 아해로 바꾸어도 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서수(序數)로 표시된 이 시의 아해(兒孩)들은 시인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의미와 무의미의 이중적 이미지가 들어 있는 재료(object)라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351    열린 시 운동과 公演詩 댓글:  조회:3641  추천:0  2015-02-18
공연시의 특성과 전망                                                  심 상 운   1.   현대는 사회의 곳곳에서 창조적인 상상력이 활화산처럼 분출되는 시대다. 이 상상력은 고정관념의 벽을 허물고 서로의 존재성을 높이면서 다양한 가치의 세계를 열어준다. 그 대표적인 예(例)가 현대예술의 첨단에 위치한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다. 그는 이전의 예술가들에게는 전혀 예술의 재료가 되지 못했던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세계 최초의 ‘테크놀로지 사상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 현대시의 실험적인 시인들은 언어문자의 틀을 넘어서, 시가 음악과 영상, 시인의 연기를 포함하고, 연극의 무대로 진출하여 독특한 시의 공간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시에서 시가 언어의 의미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무의미시, 탈관념시). 시가 사물화 되려는 것(사물시). 시가 순수 이미지의 집합만으로 만족하려는 것(디지털 시, 기호시)과는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현대시의 창조적인 변화의 모습이다. 이런 변화는 언어(문자)를 유일한 표현매체로 삼는 전통적 시의 기능에서 벗어나는 창조적인 변화의 양상으로서 그 속에는 현대의 특성인 ‘경계 허물기’ 와 ‘통합하기(퓨전)’가 들어있다. 그들은 시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시인의 사상, 감성, 상상, 영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시의 공연화(公演化)는 시와 연극, 시와 무용, 시와 회화, 시와 음악 등이 융합하는 현대시의 혁신적 변화로써 독창적인 표현영역을 확립해야 하는 미래지향적 과제를 안고 있지만, 영상매체에 위축된 현대시의 독자(관객)를 향해 새로운 소통의 문을 여는 ‘열린 시 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존재의미가 평가된다.     2. 공연시(公演詩)는 이미 존재하는 극시나 시극과는 성격이 다르다. 극시나 시극은 스토리를 중심으로 1시간 이상 공연되는 연극의 대본(희곡)이지만, 공연시는 보통의 짧은 서정시의 낭송언어를 공감각적 이미지에 조화시켜 5~7분 동안 무대에서 연출하여 보여주는 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연시(perfomance poetry)는 글자 그대로 ‘공연+시’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시와 다른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공연시를 창작할 때에는 첫째로 ‘공연을 위한 시’의 요소(극적 요소)가 창작과정에서 의식적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둘째로 무대에서 연출되기 위해 시인, 연출자, 배우 등의 역할분담(분업화)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셋째로 공연시의 독자성을 살리기 위해서 연극, 음악, 무용 등 기존의 예술들과 융합되면서 ‘시의 언어감각과 이미지와 상징성’을 살려나가는 독창적인 표현양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공연을 위한 시의 목적에 부합되는 새로운 장르로서의 공연시가 정착되고 창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창작된 기존의 작품들은 ‘각색(脚色)’의 과정을 거치거나 창조적 연출의 기능에 의해서 공연시(각색시)로 재탄생할 수 있다.     현재 무대에서 공연되는 공연시는 ‘1인 낭송시’, ‘합송시’, ‘무용시’, ‘퍼포먼스’, ‘영상시’ 등으로 분류된다. 1인 낭송시의 경우에는 도우미가 캐릭터의 역할을 하고, 배경음악, 효과음, 소품사용 등을 통한 시인의 낭송연기로 문자시의 한계를 벗어나는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일반적인 시낭송(詩朗誦)과 차별성을 갖는다. 그리고 녹음된 시의 낭송을 곁들이는 무용시(舞踊詩)는 언어의 시를 몸의 시로, 퍼포먼스는 간단한 무대 장치를 갖춤으로써 언어의 시를 극적인 연출의 시로, 영상시(映像詩)는 노래나 해설과 함께 사이버 공간에서의 영상과 시의 결합이라는 방법으로 시의 이미지를 표현하여, 문자를 유일한 매개로 하는 ‘종이 속에 갇힌 시’와는 차원이 다른 전달성을 드러낸다. 이런 공연시의 표현 효과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평면성을 입체성으로, 청각이나 시각을 공감각으로 바꾸는 이미지의 다양한 변화다. 그리고 이와 함께 영상시를 제외한 공연시에서 이루어지는 시공연자(시인)와 관객(독자)의 직접적인 만남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관객(독자)들에게 문자시에서 맛보지 못하는 즐거움을 주고 독자와 함께 시의 호흡을 나누는 것이다. 오늘날의 관객(대중)들은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공통적 특징인 비유적, 상징적 표현이나 문맥 파괴적인 현대시의 공연을 충분히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3. 공연시는 시의 커뮤니케이션에서만 아니라 시의 창조적인 이미지 면에서 현대시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것이 예상된다. 공연시는 언어와 문자를 기본으로 하지만 무대의 공연을 통해서 시인(배우)의 연기와 무대장치, 조명, 소리 등의 효과로 전달되는 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째로,그 변화의 양상에 일반적인 현대시를 대입해보면  영상시를 지향하는 시에서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통한 복합적인 이미지의 세계(하이퍼택스트)를 구현하는 시가 더 확산 될 것 같고, 짧은 서정시에도 극적인 요소를 넣어서 입체적인 표현을 하는 시가 일반화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전망이 가능한 것은 공연시가 확산되면 그것이 전통(일반) 서정시의 표현 방법에 도미노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시의 주체는 시인(창작자)이라는 고정관념의 변화다. 시를 무대에서 행위예술로 표현하는 배우나, 시를 각색하고 연출하는 연출자도 시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독창적 해석에 의해 시의 의미와 감각이 여러 방향으로 달라질 수 있다. 셋째로는 시의 표현에 사용되는 음향과 영상기기와 시의 만남이다. 악기와 전자기기들이 시의 표현양식 속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은 언어를 대신하는 매체로 자리를 잡게 된다. 따라서 물리적인 기기(機器)와 시의 합성은 새로운 감각의 시를 탄생하게 하는 원천이 될 수 있다. 이외에도 시가 한정된 종이의 공간에서 무한정한 사이버의 공간으로 확산되어서 시의 대중화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예상이다.     공연시의 이론을 세우고 실제적 공연에 앞장서서 새로운 시의 영역을 개척해온 신규호 시인(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은 이제까지 벌여온 공연시운동의 경험을 토대로 현대사회에서 구현가능한 공연시의 전망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하여」2007, 4,27) “실제로, 시인들이 중심이 되어 무대 위에서 직접 창작시를 합송 등, 다양한 방법으로 낭송하거나, 시에 곡을 붙여 노래하거나(노래시), 또는 시극이나 무용시, 퍼포먼스 등을 시청각 매체를 이용해서 무대 위에 올림으로써, 청중들에게 몸으로 다가가고자 시도하는 ‘공연시’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2000년 1월부터 현재까지 ‘좋은시 문학회’가 총 88회에 걸쳐 실험하고 있음.) 무대 위에서 ‘공연’되는 시는 캠코더나 디지털 카메라나 카메라 폰 등으로 녹화하여 다시 사이버 공간이나 DMB, TV 등에 재생하여 감상하게 함으로써 ‘공연시’의 재생산, 재활용도 가능하다고 본다. 더구나, 최근에 새로 등장한 'UCC'(사용자 제작 콘텐츠)나 'SECOND LIFE'와 같은 콘텐츠 제작 방법을 ‘공연시’가 앞으로 잘 활용하면 무궁무진한 가능성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전망은 현대 영상매체의 기기와 공연시를 밀접하게 연결하고 있다. 이는 백남준이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든 것과 유사한 독창적인 비전이다.     4 공연시를 창작하고 발표하는 시인은 ‘시인, 연출가, 배우’의 세 가지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종합예술인의 의식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들의 시를 언어(문자)에서 해방시켜서 온 몸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전문가적인 정신과 열정이 있다. 그래서 “ ‘공연시’는 보다 ‘인간적’이다. 시인과 청중이 시를 가지고 직접 서로 만나서, 면대 면으로 호흡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들을 이용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을 발표해 보여줌으로써, 창조적인 시적 상상력을 통한 감동을 서로 공유한다는 데에 참뜻이 있다. 비인간화 시대에 시적 정서를 직접 교환함으로써 인간적 유대감을 증진함은 실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신규호 시인의 글(「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하여」)은 더욱 공감을 준다.   예술작품을 비롯한 문화 현상들에서 형식이 내용의 대부분을 만들어내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근거가 되는 예(例)는 집의 형태에 따라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모습이 달라지는 것에서 찾아 볼 수 있고, 환경이나 제도가 사람의 생활 형태와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형식은 내용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용기(容器)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공연시의 앞날을 긍정적으로 전망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오늘 열리는 ‘한국 현대 시인협회 주최 제1회 ’는 이제까지 검토한 여러 가지 사실에 비추어볼 때 매우 의미 있는 행사라고 생각된다. 무대에서 연기하는 시인과 도우미(조연)는 전문적인 연기자가 아닌 순수한 아마추어들이지만 그들은 자기가 창작하는 시에 대한 애정과 신념이 있으며 열정이 넘친다. 따라서 어설픈 장면도 많겠지만 전문가를 넘어서는 재치와 상상력의 싱싱함도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그들이 보여주는 몸의 시, 행위의 시를 받아들이고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말자. 그리고 우리도 그들과 한 몸이 되어 보자. 그러면 ‘종이’에서 해방된, 뜨겁고 빛나는 새로운 시의 혼(魂)과 만나게 될 것이다.      
350    하이퍼텍스트 시의 지향 댓글:  조회:4275  추천:1  2015-02-18
  하이퍼텍스트 지향의 동인지/대담   월간시문학 2008년 4월호 김규화 / 심상운    아무리 아니라고 머리를 저어도, 우리는 인터넷, TV, 핸드폰 등의 IT기기들로 둘러싸인 환경, 즉 하이퍼텍스트의 세계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위아래(상하), 앞뒤(전후), 좌우라는 3차원의 공간에서만 살고 있다기보다는 이러한 현실을 초월한(hyper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시는 그 시대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만,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오늘의 삶과 시가 변화된 리얼리티를 추구하며 하이퍼텍스트로 가고자 하는 노력은 시대의 불가피한 한 흐름으로 생각됩니다. 시대에의 맹목적 예속보다는 시읽기와 시쓰기의 새로운 리터라시(literacy)를 정립해 보고, 소외된 삶의 모습을 조명하는 비판적 시각도 시인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이 시대의 한 자원이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오남구(吳南球) 시인의 제의로 심상운(沈相運), 김규화(金圭和), 오남구 세 시인이 『하이퍼텍스트 시』 동인지를 계획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IT시대를 선도할, 에콜 있는 동인지가 출현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심상운 시인은 오남구와 더불어 디지털 시와 그 이론을 양역(兩役)해 왔고, 김규화는 이번 동인 운동의 동참으로 변신과 더불어 새로운 하이퍼텍스트를 지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새 동인의 영입도 있겠지만, 우선 심상운, 김규화 두 분께서 다음 토픽으로 새 동인운동의 계획과 포부에 대한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해 주기 바랍니다. ― 편집자   1. 동인지 운동에 앞선 소감은?   심상운:문학에서 에콜 활동은 매우 중요합니다. 문학적 특성을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나는 오남구와 몇 년 동안 동인 아닌 동인활동을 해왔습니다. 「2004년의 한국시단의 동향」(한국현대시인협회의 연간 사화집, 2005)의 평문을 쓸 때, 오남구가 제창한 「디지털리즘」에 대해 퍽 흥미를 느끼고, 그 방법론에서 시대적인 당위성과 새로운 감각의 언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디지털 시에 대한 이해'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남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고민하였습니다. '탈관념 시'와 '디지털 시'를 주창하는 오남구를 동인이라고 서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김규화 시인의 시에서 디지털의 기법이 보이고, 그것이 신선한 감각으로 느껴졌습니다. 오랜 시간 축적되어 있는 관념에서 해방되어 관념이 아닌 언어의 이미지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나는 김규화 시인이 시에서 디지털 시의 언어기법이 생동하는 것을 보고 내심 놀라움과 기쁨을 느끼고 동인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독자들의 사고방식과 문화감각은 21세기에 와 있는데, 많은 시인들의 의식은 아직도 20세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이퍼텍스트의 시를 지향하는 우리들의 동인운동은 시대적 중요성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시 창작의 기본이 되는 언어, 정서, 사물, 관념, 상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한 표현방법에 대한 모색과 실험은 현대시의 길을 여는 작업이 되기 때문입니다.   김규화:우리 시(한국현대시)는 계속하여 2천여년 전의 예수나 석가 시대의 비유, 상징의 기법으로 정서와 관념을 표현해 왔습니다. 이제 형식과 내용면에서 조금은 반성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미 늦은 감이 있습니다. 21세기는 전자 테크놀로지 시대입니다. 이러한 변화한 시대에 맞는 변화한 시쓰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인터넷 인구가 날로 증가해 가고 있습니다. 전자책과 종이책을 구분할 정도로 종이책(시)이 안 읽히고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 대신 인터넷 속의 하이퍼텍스트를 대하는 것이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이퍼텍스트는, 쓰는 사람들의 인성을 즉흥적.도발적.비선형적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비판적 시각에서 여기에 상응하는 새로운 시를 써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연유로 오남구와 심상운 제가 하이퍼텍스트시를 쓰자는 데 합의했습니다. 앞으로의 시문학은 동인지 운동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미래의 문학은 한 지역 안에서 10명 내외의 그룹이 모여앉아 읽고 감상하는 정도로 그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수없이 쏟아지고 있는 경향 각지의 문학지들도 동인지적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남구 시인은 처음부터 실험시의 깃발을 들고 써왔고, 심상운 시인은 근년에 와서 디지털 시에 대한 이론과 시작품을 쓴 사람입니다. 여기에 신입생인 내가 합류한 셈입니다.   2. 동인지는 '하이퍼텍스트 시'(또는 '하이퍼 시')로 할 예정인 것 같은데, 동인지의 방법이나 에콜로서 '하이퍼텍스트'라는 방법적 지표를 세운 이유나 동기를 말씀해 주세요.   심상운:동인지의 명칭은 '하이퍼텍스트 시'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이 생각되지만 '텍스트'와 '시작품'은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하이퍼 시'로 정하는 것이 좋을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쉽게 이해하기 좋게 '하이퍼텍스트 시'라고 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디지털 시'의 가장 발전된 상태를 '하이퍼텍스트 시'라고 말한 것과 같이, 하이퍼텍스트의 시는 미래지향의 예술적 공간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의 에콜로서의 특성을 지니게 됩니다. 하이퍼텍스트에는 가상현실의 공간, 영상성과 공연성, 3차원 세계를 뛰어넘은 자유연상의 이미지 등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흔히 버추얼 세계라고도 일컫는 가상세계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세태를 가진 현실입니다. 이것은 21세기적인 상상의 공간형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이퍼텍스트를 동인지의 지표로 세운 이유가 되겠습니다. 김규화:앞서도 말했지만, '혁명'이라 할 만큼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 속에 사는 우리는, 문학 작품도 변화를 하지 않고는 살아 남지 못할 시대에 와 있습니다. 아날로그 시대에서의 선형적∙순차적 질서, 구문론적 선조성, 서론∙본론∙결론 식의 글쓰기의 틀을 지켜야 한다는 시대를 지나, 지금은 디지털 시대의 텍스트인 하이퍼텍스트를 외면하는 시(글)쓰기는, 현재에 살면서도 현재에 살기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직선적인, 즉 리니어(linear)시대가 아니라 '넌 리니어,(non-linear)' 시대라는 인식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3. 하이퍼텍스트란 무엇인가요? 하이퍼텍스트의 개념 또는 定義를 말씀해 주세요.   심상운:『IT용어사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문자, 그래픽, 음성 및 영상을 하나의 복잡한 비연속적인 연상의 거미집(web of associations)과 같이 서로 연결시켜, 제목의 제시 순서에 관계없이 이용자가 어떤 제목과 관련된 정보를 검색할 수 있도록 하는 정보 제공 방법. 이와 같이 연상을 연결하는 링크는 하이퍼텍스트 문서의 의도(목적)에 따라 종종 하이퍼텍스트 문서의 작성자와 이용자 둘 다에 의해 생성된다. 예를 들면, 어떤 화제 또는 제목에 들어 있는 '쇠(iron)'라는 단어와 연관된 링크들을 조사하여, 이용자는 철기시대의 연대표를 찾거나 철기시대 유럽에서의 야금술의 발달∙이동 경로를 보여주는 지도를 찾을 수도 있다.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는 1965년 넬슨(Nelson)이 책, 필름, 연설 등의 선형 구성(linear format)과는 대조적으로 비선형 구조(non-linear structure)로 컴퓨터를 통해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었다. 최근에 도입된 하이퍼미디어라는 용어는 하이퍼텍스트와 거의 같은 의미이지만, 하이퍼텍스트의 비문자적 구성 요소 즉 애니메이션, 녹음된 음성 및 영상 등을 강조하는 용어다. "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넬슨은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됩니다. 그런데 연결되는 텍스트들은 저자가 준비한 것이지만 선택은 독자의 임의로 이루어집니다. 이 독자의 선택은 텍스트를 고정적 상태가 아닌 유동적인 상태를 만드는 원천이 됩니다. 텍스트의 유동성은 텍스트의 자율성과 내적 통일성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양하고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에 예술의 공간에서는 고정된 틀보다 가치를 지닙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에서 탈피하여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세계로서,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전시형태(展示形態)로 작성된 여러 텍스트가 모여서 형성되는 시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유동성(流動性)의 문학형태가 됩니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리좀은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현대철학(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입니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 '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합니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 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텍스트 적인 시입니다.   김규화: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넬슨(Nelson)이 처음 쓴 용어입니다. 컴퓨터 화면에 보이는 텍스트에서 그림이나 밑줄 친 부분을 마우스로 누르면 다른 텍스트가 연결되어 떠오르는데, 이렇게 다른 텍스트로 연결해 주는 것을 하이퍼링크라 하고 하이퍼링크로 연결된 복수의 텍스트 전체가 하이퍼텍스트입니다. 기존의 모든 정보(텍스트)가 평면 형태, 즉 선형성, 고정성, 유한성이었지만 하이퍼텍스트 구조는 이러한 선조성, 고정성, 유한성을 파괴한 한편, 하이퍼텍스트는 매체를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하이퍼미디어라고도 합니다.   4. 시에서 말하는 하이퍼텍스트는 종이에 손으로 기록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컴퓨터나 TV에서의 '전자 하이퍼텍스트'와 전자장치가 없는 '종이 하이퍼텍스트'(시 하이퍼텍스트, 또는 하이퍼텍스트 시)와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심상운:전자 하이퍼텍스트 시는 입력과 동시에 'hyper text markup language' 즉 HTML이라는 컴퓨터 언어로 변환된 시입니다. HTML로 변환된 시에는 하이퍼링크(연결)의 기능이 들어 있으며, 텍스트는 화면의 뒤에 숨어 있다가 독자의 선택에 의해서 나타납니다. 그 시에는 그래픽과 음악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이에 문자를 기록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종이에 기록되는 문자의 시는 하이퍼텍스트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숨어 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종이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됩니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됩니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의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립니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됩니다.   김규화:하이퍼텍스트 문학이라고 하면 하이퍼링크가 적용된 문학으로서, 링크에 의해 작성된 여러 텍스트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기존의 문자 텍스트는 텍스트의 첫 페이지에서부터 작가(또는 시인)가 정해놓은 한 가지 주제나 한 가지 이미지가 형성하는 문맥의 시간적 순서로(순차적으로) 이어나가는 데 반해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독자가 마우스로 선택적 링크를 하여 갈라져나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건이나 이미지를 만들고, 한 문장 중의 단어나 어구에서 문맥의 가지가 파생하여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문장들이 종합된 하나의 복합 네트워크로 구성된 것입니다. 즉 하이퍼텍스트 시는 발달된 컴퓨터 기술의 특성을 종이 위의 문자면에서 최대한 활용하여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 나갈 수 있는 형태입니다.   5. 하이퍼텍스트 시의 방법을 말씀해 주세요.(시 인용도 무방함)   심상운: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시인의 목적의식, 의도성과 연관되어서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imagination)보다, 콜리지(Coleridge, 영국의 문예비평가)의 말처럼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지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비중을 두게 됩니다. 공상은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합니다.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합니다. 이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력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입니다.   김규화:종이 위의 하이퍼텍스트 시는, 컴퓨터 화면이 아니면 입력할 수 없는 그림, 소리, 동영상, 그래픽, 음악 만을 제외한 모든 특성을 종이 시에 이용한 것을 말합니다. 하이퍼텍스트에서 보이는, 순차적 질서나 위계적 시스템 구조를 안 지킨, 혼란스럽기까지 한 비선형성, ―어쩌면 인간의 사고과정이나 뇌세포의 덩어리(의식의 흐름)를 닮은―, 어떤 논리적 체계가 있는 수목(樹木)과 같은 시스템이 아니라, 감자의 알뿌리 같은 근경(根莖)처럼 사방으로 마구 이동하여 중심이 없이 그물 상태를 만들어내는 리좀(rhizome)성, 그로 인한 일방향적이 아니라 다방향적, 혹은 쌍방향적인 네트워크를 하이퍼텍스트시에 이용하여야 합니다. 하이퍼텍스트(시)를 이루는 마디(node:단어, 행, 연)들은 동시적으로 공존하거나 나열하여 존재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무화시키거나 초월하거나 평준화시켜 닫힌 코드가 아닌 열린 코드로 무한한 상상력(공상∙환상)의 세계를 만들 수 있게 합니다.   6. 구체적인 작품을 들어 설명해 주세요.   심상운:다음은 내 시에 대한 자작시 해설입니다. 나는 나름대로 하이퍼텍스트 적인 시를 구현해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 '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 전문(『시문학』 2007년 6월호)   이 시의 기법은 첫째, 사물어의 사용(탈-관념), 둘째, 가상현실, 셋째, 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넷째, 영화의 몽타주 기법(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등입니다. 그래서 자연풍경+사회 및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 등의 결합은 하이퍼텍스트적인 공간이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시의 맥락을 추적해 보면, 시의 내면에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먹는다'라는 욕망 행위와 '아우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안개는 나무를 먹고, 나는 야채를 먹고, 여자 리포터는 갈치회를 먹습니다. 안개 속의 나무들도 또한 안개의 입 속에서 아우성치듯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고, 시위대들은 구호를 외치고(아우성치고) 있습니다. 생명현상을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기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설득하려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법입니다. 그래서 연극적인 기법도 사용되었습니다. 이 시에 나오는 '나'와 '그'는 시 속의 캐릭터입니다. 끝부분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는 사이버 공간의 장면이지만 현실과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21세기의 현실감각입니다. 나는 현대시론, 「디지털 시의 이해」(2006년 12월 『시문학』에 발표)에서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module)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때 모듈화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모듈 이론도 하이퍼텍스트 시의 방법론과 부합되는 점이 많습니다. 기존의 문장에서 낱말, 문장, 문단과 같은 구성단위의 전후 관계를 바꾸게도 하고 서론, 본론, 결론으로 이어지는 직선적인 틀을 깸으로써 독자에게 재구성의 공간을 만들어 줍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연결 관계의 논리성이 아니라 상상의 다양함과 풍부함입니다. 그리고 내면 의식의 흐름입니다. 그것을 '시의 맥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론을 아무리 치밀하게 전개하여도, 다양한 상상의 집합, 그 집합의 내면으로 흐르는 시인의 의식, 동적인 이미지, 해방감 등을 독자와 함께 나누는 시를 어떻게 종이 위에 '문자시'로 구현하느냐 하는 문제는 영원한 숙제로 남습니다.   김규화:설명하기 쉬운 졸시 「한강을 읽다」를 들겠습니다.     이젤을 거꾸로 일요일의 한강이 그림을 그린다 우우우 몰려와 늘어선 물가의 아파트군 단숨에 세우고 짐짓 흔들어본다 하늘을 제 가슴 깊숙이 클릭하고 그 위에 구름 몇 송이 흘리다가는 이내 지워버린다 아파트를 흑수정으로 꾸며놓고 올랑촐랑 물살 속의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 뒤따르는 나를 덥석 안는다 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 한강은 우리를 지운다 피사로의 「수문」을 물새가 가로지른다   이 시는 사이버세계와 현실세계와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강과 한강가에 늘어선 고층 아파트들의 '현실'과, 한강 물속에 비치는 아파트와 그 속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환상)'을 병치시켜 놓고, 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 이 모든 것(현실과 환상)을 지워버리는 가상현실(?)을 표현해 본 것입니다.   7. 앞으로의 계획은?   심상운:디지털 시의 이론을 더 충실하게 연구하여 가다듬고 그 이론에 부합되는 시를 모아서 '하이퍼텍스트 시집'을 상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동인활동을 통해서 한국 시문학사에 남을 유파를 형성하는 것이 꿈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남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서 벗어나서 길 없는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길은 어쩌면 현실에서 벗어난 공상(空想) 또는 몽상(夢想)으로 번역되는 환상(Fancy)의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성적 사고를 넘어서는 해방된 공간을 나름대로 시로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그 공간 속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떤 창의적 생각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상상과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주고 즐거움을 줍니다. 언어는 언제나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놓고 있습니다. 김규화:이 시에 공감하는 시인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내 시는 더욱 다듬어서 좋은 동인지를 만들 계획입니다. 특히 덧붙이고 싶은 점은, 부분이나 작은 단위를 자유연상에 의해 연결하는 '링크'는 어떤 정해진 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연상에 의한 '무한 링크'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링크 작업이 어느 지점에서 스톱하여 한 작품의 전체로서의 네트워크의 형태나 스타일을 형성하는가도 큰 문제입니다. 앞으로의 모색 과제입니다.    
349    詩作과 자작시 해설 댓글:  조회:4526  추천:0  2015-02-18
                -자작시 해설                                                           심상운     시의 언어는 고정관념과의 싸움에서 획득한 뜨겁고도 선연鮮姸한 빛깔의 언어이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감각과 생명을 얻은 시가 탄생한다. 이제까지 우리들에게 기억되는 좋은 시들은 모두 이러한 언어로 표현된 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시대 황진이의 시조 이나 1930년대 미당 서정주의  등을 읽어보면 그 언어의 싱싱한 기운이 지금도 가슴에 와 닿는다. 그것은 바로 그 시에 담긴 시어가 뿜어내는 힘이 시대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를 쓸 때 내가 제일 먼저 염두에 두는 것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신선한 감각의 시어다.      “시의 표현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들을 들리게 하는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소박한 생각도 시어의 신선한 감각과 생명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시인이면 누구나 하게 되는 정통적인 시의 일반론一般論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반론이 안고 있는 방법론은 조금만 깊이 들어가서 방향을 바꾸면 “비대상非對象, 무의미無意味, 탈관념脫觀念, 초현실超現實” 등 여러 가지 현대적 기법들과 만나게 되는데, 이 기법들은 일상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시적 피안彼岸을 보여준다. 시작과정에서 그것들의 깊이를 헤아리고 응용하는 것은 시인의 정신과 시를 젊게 하는 일이 된다. 그러나 어떤 방법에 들어가든 그 중심中心에 자리잡고 있는 샤먼의 우주목宇宙木같은 시인의 개성적인 시어가 좋은 시를 탄생시키는 근본이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많은 시인들이 그러했듯이 언어와 관념을 안고 뒹굴며 밤잠을 설치는 운명을 감수甘受하는 것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들을 들리게 하는 것으로 만들어서 독자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시작과정에서 시의 이미지image를 중시하였다.  이미지는 시의 완성도를 높이고 시의 의미를 싱싱하게 지속시켜주는 힘을 발휘하고, 이미지는 그 자체가 언어의 투명한 보석이 되어 자율적自律的인 독립된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언어의 한계를 스스로 돌파하고 무한히 넓혀준다. 그런데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나에게 고민이 되는 것은 이미지의 객관성과 주관적인 정서의 적절한 조화調和와 현실의 문제였다.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영혼, 생명, 그리움, 신적神的인 존재 등 ―을 중시하여도 현실의 문제들은 피할 수 없고 피해서는 안 되는, 시인의 존재 이유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현실의 문제들도 문제의 원형原形속으로 들어가서 이미지화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현실문제에 대한 시들은 첫 시집 「고향산천故鄕山川」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다.     나는 또 시각적視覺的인 이미지와 함께 들리지 않는 소리를 시속에 담아보려고 시도하였다. 이 소리는 시속에서 의미를 감각화感覺化 하는데 도움을 주면서 시의 리듬을 돋구어주고 신명을 불러들이는 구실을 한다. 다음에 소개하는 세 편의 시는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서 두 번째 시집「당신 또는 파란 풀잎」에서 골라 본 것이다.    아직 개발開發되지 않은 컴컴하고 습한 지역을 아시나요   눈 내리는 날 우리 그곳으로 가요 그곳에는 아직도 고생대古生代의 신神들이 살고 있어 이렇게 눈 내리는 날 저녁엔 흰 수염 달린 떡갈나무가지 사이에 집을 짓고 웅웅 벌떼처럼 날아다니며 소리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인가人家와는 멀리 떨어져 마을의 길은 이미 끊어지고 컴컴하고 습한 진흙 벌만 계속되는 미개발의 그 곳은 하얗게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이면 자연의 거대한 사원寺院   하얀 잡목 넝쿨 사이사이 얼굴 비비며 히히덕 히히덕 너풀춤 추는 젊은 신神들의 환한 노래 소리가 들려요         -------- 전문    이 시의 제목을 처음에는 “신神들의 마을”이라고 했는데 너무 직선적인 것 같아서 이라고 고쳤다. 그리고 시 전체의 이미지는 흰 색과 검은 색을 대조시켜 시의 그림이 선명하게 나타나도록 하였다.    나는 이 시에서 생명의 고향이 어디에 있는가를 독자들에게 환기시키면서 개발開發이라는 인위人爲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컴컴한 잡목림雜木林속에서 벌어지는 생명들의 움직임과 그들의 환희를 동적動的인 이미지로 그려보려고 하였다. , 라고 시의 앞뒤에 시청각視聽覺이 서로 한 데 어울린 동적인 이미지를 넣은 것은 생명의 움직임과 환희의 감정을 움직이는 그림으로 그려보려는 의도였다.    이 시는 단순한 환경문제에 관한 시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생명이 지향하는 근원적인 삶의 모양을 환상적幻想的인 언어의 그림으로 그려보려고 하였다. 윤강원尹江遠시인은 이 시에 대해 월평月評에서 고 하였다. 그는 이 시를 깊이 이해하고 시에 담긴 의미를 높은 정신세계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렸던 것이다. 나는 이 시에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원형적 생명의 기운을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신神을 등장 시켰다. 이 신은 생명의 원형을 은유적隱喩的으로 표현한 것이다. 독자들은 원시적인 에니미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시류성時流性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의미와 미감美感을 가진 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시각적인 이미지에 중점을 둔 시로 또 과 을 들 수 있다.   나는 언제나 검은 꿈의 바다를 떠도는 수부水夫 한밤중 달의 은사시빛 밧줄이 부서진 내 배의 동체를 끌고 간다. 나는 저 북해北海의 빙산氷山 곁으로 가고 싶다. 그것이 항해의 끝이 되어도 설령 내가 영혼만으로 떠돈다 할지라도 사시사철 하얀 풀잎으로 덮인 지구地球의 지붕 나는 얼마나 황홀한 빛의 침대 위에 누워 있을 것인가. 그 곳에는 악惡도 선善도, 오직 순수한 신神들의 소리만 살아 고생대古生代의 바다가 아직도 파도 친다. 아아, 나의 첫 항해는 여기서 시작된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차디찬 꿈의 빙산氷山을 지나 더 멀고 먼 푸른 바다로 떠나가야 한다. 내 시간時間의 바닥이 환히 보이는 해변 그 모래밭까지 --전문    앞의 시 이 외적인 것을 대상으로 한데 반해 은 시인의 내면의식을 시각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시다. 두 편의 시에 공통점이 있다면 생명의 원적지原籍地를 찾는 의식의 흐름이다. 나는 이 시에서 내 존재의 고향을 찾아 항해하는 수부水夫가 되었다. "북해北海의 빙산氷山, 사시사철 하얀 풀잎으로 덮인 지구地球의 지붕, 황홀한 빛의 침대, 고생대古生代의 바다, 내 시간時間의 바닥이 환히 보이는 해변" 등은 내 의식을 객관화하여 드러내기 위한 은유의 언어이고 상상想像 속의 그림이다. 나는 불교의 선禪이 지향하는 세계를 아직 체험하지 못했지만 그 세계는 선善과 악惡, 죽음과 무無의 세계를 넘어선 푸른 바다와 같은 생명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최진연崔進淵 시인은 이 시의 앞부분 를 인용하여 "검은 꿈의 바다"를 불교에서 말하는 고해苦海로 해석하고, “은 불자로서 그가 도달하기를 꿈꾸는 정토淨土라는 관념의 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라고 이 시의 내용을 불교의 구도 행위로 풀이하고 있다. 나는 그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어떤 고정된 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에서 의 의미를 절망적인 상황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반대의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꿈이든 꿈속에는 생명의 에너지가 가득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관념적觀念的이고 사색적思索的인 내용이 중심이 되는 시다. 나는 벽돌같이 딱딱한 관념을 부드럽고 신선한 상상의 언어로 포장해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어는 관념어를 배제하고 구상어具象語를 사용했으며, 객관적인 이미지와 주관적인 정서를 조화시켜 독자들에게 친근감과 시적인 감흥感興을 주기 위해서 "나"를 시의 화자로 삼아 독백조獨白調의 어조로 시를 구성하였다.         높은 산 벼랑 위 바위틈에 피어 있는 속살까지 빨간 꽃들을 아시는가   우리들이 산을 오르다 잠시 바위 위에 앉아 땀을 들일 때 그 꽃들 만나고 가는 바람이 우리들 머리나 가슴을 향기롭게 스치고 지나가고 그 때마다 하늘은 유난히 파란 가슴을 드러내곤 하였지   높은 산 까마득한 벼랑 위 바위틈에 뿌릴 박고 피어 있는 꽃   햇볕 따뜻한 날이면 누군가 그 꽃 옆에 누워 잠을 자고 있을 거 같다 이 세상과는 영영 이별을 해버린 모습으로 한평생 찾아 헤매던 사랑을 찾은 듯한 모습으로 속살까지도 빨간 꽃 옆에서 파란 하늘을 이불 삼아 그 곳이 먼 옛날 떠나온 제집인 양 누워 있을 거 같다 ---- 전문     이 시는 어느 봄날 산행 중에 떠오른 순간적인 생각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갈무리한 시다. 높은 산 벼랑 위 바위틈에 피어 있는 속살까지 빨간 꽃은 실제의 꽃도 될 수 있지만 상상 속의 꽃으로도 확대된다. 저 신라시대 수로부인水路夫人을 유혹했던 절벽 위의 철쭉꽃으로, 아니면 이승과 저승의 중간쯤에서 피어있는 꽃으로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자연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산행山行을 할 때 우리들의 가슴을 더 향기롭게 해주는 것은 그 상상 속의 꽃들을 만나고 가는 바람의 향기라고 차원을 높여보았다. 그리고 햇볕 따스한 봄날 그 꽃 옆에 누군가 잠을 자고 있으리라고 상상의 세계를 넓혀 보았다. 여기서 "누군가"는 영원한 생명 속에 잠들고 싶어 하는 내 존재의 본래적本來的인 모습일 수도 있고, 떠나온 낙원을 그리워하는 인간존재의 한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속의 은 영원한 생명의 고향을 상징象徵하는 꽃이 되는 것이다.    나는 시의 기능 중에서 이 세상의 허무虛無를 극복할 수 있는 기능을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은 그런 면에서 내가 아끼는 시가 되었다. 나는 이 시에서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기법으로 언어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시속의 빨간, 파란 등 색채언어色彩言語는 회화적인 효과를 높이고 또 의미를 상승시키는 구실을 하면서 미적 감각과 서정성도 잘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시의 표현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의 속뜻을 짚어보면 시의 표현은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이는 존재로 만드는 존재의 암시와 발견, 존재의 창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발견자요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말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기 때문이다.
348    디지털시의 현장성 댓글:  조회:4565  추천:0  2015-02-18
                     현장과 시                                 --- 디지털 시의 현장성                                                                                                              심 상 운(시인)     20세기를 대표하는 모더니즘은 시의 예술적인 면에서 풍성한 암시와 반짝이는 상상의 언어세계를 독자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 어쩌면 현대인에게 잃어버렸던 신화를 되돌려주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중세의 허풍장이기사騎士에 머물지 않고 현재까지 아이들이나 어른들의 상상 속에 살아 있는 것은 그의 비현실적인 꿈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 때문이다. 모더니즘도 우리들의 시에 언어의 꿈을 담아주었기 때문에 현실주의자들의 반대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을 이어온 것이다. 만약 시인들이 현실과 역사의 진보에만 매달려서 싸웠다면 시인들은 전사戰史에 기록될 수 있는 영웅은 되었을지 몰라도 예술의 세계에서는 상상력이 고갈된 허수아비 같은 존재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나라의 주권을 일제日帝에 침탈당한 국권상실시대에 일제에 직접 저항하며 치열하게 살다간 1930년대 이육사李陸史의 시편들 속에서 발견되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아름다운 만남이 명징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絶頂」전문     이 시의 끝 구절 에서 강철+무지개가 던져주는 죽음을 초월하는 희망의 경이로운 상상과 암시는 지금도 생생한 모습 그대로 살아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모더니즘의 이미지, 즉물적卽物的 감각이 우리의 현대시에 수놓은 금싸라기 같은 수사의 미학을 귀중한 재산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더니즘이 시인과 독자들을 자연발생적인 시들의 고식적인 감상感傷과 영탄성詠嘆性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딱딱한 관념어의 굴레에서 시를 해방시켰다는 공적만이 아니라,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신뢰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더니즘의 긍정적인 생명력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사회적 현실과의 관계에서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꽃을 피우던 일은 그만두고 인제는 한 개 벽돌이나 되겠다. 이 살덩이를 흙가루로 빻고 썩기 전에 이 피로 곱게 물들여 1천도의 시뻘건 불 속에서 다시 벽돌로 태어나고 싶다. 그리하여 빈틈없이 차곡차곡 쌓여 백 층이나 삼백 층의 빌딩이 되거나 반월형半月形 의 만리장성이 되거나 원수의 포탄이 우박처럼 박혀도 끄덕도 않는........ 구름을 피우던 일은 그만두고 인제는 단단한 벽돌이나 되겠다. ----------문덕수의 「벽돌」전문     이 시에서 비유와 상징으로 쓰인 과 , 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또 현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강한 의지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 또 사물어事物語의 쓰임이 이 시에서 어떤 시적 효과를 나타내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어디까지 자극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 시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1980년대의 사나운 현실 속에서 이 시가 보여주고 있는 모더니즘 언어의 바른 자세와 당당함이다. 이 시의 앞부분 는 사회적 현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정신과 함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시 속에서 결코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예술)과 리얼리즘(현실)의 이런 아름다운 만남은 더 이상 넓게 확산되지 못 했다. 대부분의 모더니즘 시들이 삶의 현장의 뒤쪽으로 물러서서 스스로 존재영역의 범위를 축소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몇 가지 면에서 더 검토할 수 있지만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한국의 모더니즘 시가 안고 있는 현실회피와 현장성(사물)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일부 모더니즘의 시인들이 현실과 예술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언어의 건강한 긴장감과 조화를 외면하고, 현장에서 발생하는 생동하는 이미지나 환상과 상징을 잃어버린 편협偏狹한 언어 관념의 시로 변질되면서 모더니즘 시의 한계가 노정露呈된 것이다. 그것을 간단히 압축하면 모더니즘 시의 언어 관념주의는 모더니즘 시의 함정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21세기의 새로운 감수성과 꿈을 담은 시의 탄생을 기다리게 하는 원인이 되고, 병든 모더니즘(포스트 모더니즘)을 치유하고 개혁해야하는 당위성의 원천이 되었다.       주지적 모더니즘의 시를 ‘언어 관념의 시’라고 하는 것은 시인의 정서, 직관, 관찰, 순수한 상상력에 의해서 시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을 표출하기 위한 시인의 수사적인 언어작업에 의해서 시가 제작되기 때문이다. 이 수사적인 언어작업은 어떤 관념을 중심에 세우고 그것을 비유, 상징, 우유(allegory)로 포장하여 시인의 감정까지 관념이 만들어내는 의도성과 논리성으로 휘감아버린다. 이런 기법을 선관념 후사물(先觀念 後事物)의 기법이라고 한다.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대부분의 한국 현대 시인들은 이러한 시의 기법에 익숙하고 그것을 정통적인 시의 기법으로 인식하고 있다. 어떤 시인은 아주 엄밀하고 냉랭하게 계산된 논리적인 비유, 상징의 언어를 시의 중심에 넣고 감정까지도 객관화하여 독자들의 반응을 계산하면서 시를 제작한다.     난 해질 무렵 몽상가 소부르주아 시인 세상엔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두는 건 의자, 작은 방, 개미 , 염소   피와 이슬로 된 술 난 현실 따윈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지만 난 현실을 모르는 국문과 교수 허리띠를 헐렁하게 매고 거울을 연구하는 교수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감기엔 맥을 못 춥니다 30년 전부터 어디론지 떠나고 싶었지만 --------------이승훈 「오토바이」 전문      이승훈의 시는 비록 시인의 관념이 시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지만 시인은 현장(현실)에서 벗어나서 시라는 무대에 올라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시인과 독자들이 갈구하는 낯 설음, 새로운 기법의 언어, 경쾌한 감각의 현대성을 충족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 등의 언어에서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 존재의 탐구에만 전념하는 시인의 모습을 통해서 ‘또 다른 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현실에 대한 의식적인 외면과 환상적인 이미지에 대한 강한 집착이 모더니즘 시의 원형인 것처럼 독자들을 유인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칠 때,  삶의 현장감이 생동하는 시의 실체는 사라지고 관념의 감옥 속에 갇혀버린 시인의 의식만 드러내게 된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결 어른이 된 소리로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김춘수 「처용단장 제1부의 1의 4」전문       김춘수의 시는 이승훈의 시와는 달리 실제의 현장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현장의 사실성을 무화無化 또는 추상화抽象化시키는 것으로 시적 효과를 달성하려고 한다. 그 근거는 이 시에서 의 구절에서 찾아진다. 이 구절에서 시인은 실제의 바다 풍경을 비현실의 바다 풍경으로 전환시키고 있음을 알게 한다. (서해 갯벌에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는 대상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로 표현함으로써 대상을 무화 또는 추상화하는 기법이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에서도 ‘죽은 물새’가 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현실이다. 그 물새는 문맥상으로 보아 여름에 본 물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실제를 비실제로 변환시키는 실체적 대상의 무화 또는 추상화의 근거가 된다. 이 추상화의 그림은 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상식적인 의미의 세계를 뛰어 넘으려는 시인의 몸부림이 개척한 세계로 이해된다. “바다는 가라앉고”나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는 현실적 논리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시적인 상상의 세계에서는 전혀 모순성이 없는 새로운 의미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김춘수는 논리의 단절이라는 기법으로 일상의 의미에서 탈피하고자 한다. 문덕수(시인, 예술원 회원)는 김춘수의 이런 기법을 그의 「시론」에서 ‘무의미의 심상’으로 분류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시도한 ‘무의미’는 사실적인 현상現象을 추상적인 현상으로 상태를 전환시켜 ‘또 다른 세계의 의미’를 창조하려는 언어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대상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로 표현함으로써 대상을 무화 또는 추상화하는 기법의 남상은 한국의 고전시古典詩에서 발견된다. 이규호(李圭虎 대구대학 인문교수)는「한국고전시학론」에서 그런 표현방법을 ‘정석가식鄭石歌式 표현’이라고 한다.의 작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실을 제시하여 현실적 시간을 무화無化시키고 영원성을 표현하고 있다.   므쇠로한쇼를디여다가 므쇠로한쇼를디여다가 철수산鐵樹山에노호이다 그쇠철초鐵草를머거야 그쇠철초鐵草를머거야 유덕하신님여아와지이다       -------------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논리적인 조작으로 무의미를 추구하던 김춘수는 논리 단절의 세계에 염증을 느끼고 절망하여 관념(의미)의 세계로 회귀하게 된 것 같다. 논리적인 ‘모순어법’만으로는 의미(대상)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문이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사물과 언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언어의 기호성과 가상현실에 관심을 두었다면 그의 세계는 더 다양하고 자유로워졌을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무의미의 언어실험’은 삶의 현장에 대한 이탈, 단순 이미지의 나열에 그치고 있어서 그가 목적으로 한 "관념이 장차 거기서 태어날, 관념의 제로 지대地帶"(事物詩와 觀念詩의 問題- 1981년 12월호 「시문학」)에 도달하지 못하고, 현대시의 현장에 난해성만 남겨놓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그의 무의미시는 한국 모더니즘 시에 대한 성찰의 근거가 되고 시에 대한 정의를 다시 찾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극단적인 언어논리주의 시에 대한 성찰은 누가 뭐라고 해도 시는 현장 속에서 숨 쉬고 움직이고 향기 나는 생명체를 모셔놓은 언어의 집이라는 시의 정체성을 다시 찾게 한다. 그래서 오히려 모더니즘의 언어예술로서의 시보다 자연발생적인 서정시가 더 본래적인 시에 가깝게 인식되기도 한다.   비오는 날 묵밭에 소를 먹이고 있으면 어디서 깊은 소리가 들리네.   온 天地가 共同墓地같은데 오동나무만 저승의 길잡이처럼 서 있네.   어쩌면 세상이 그렇게도 푹 빠졌을까. 안개사이로 인업이 꼭 걸어올 것만 같네.   喪輿를 놓고 그렇게 울던 곳. 그 곳엔 이상한 불빛이 서려 있었네. -------이성교「비오는 날(1)」 전문     자연발생적인 서정은 시인의 언어조직만으로는 만들어내기가 매우 어렵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자연스럽고 순수한 서정의 시에는 이성(지성)보다 감성이 주류를 이루어서 때로는 원시적인 야성의 감성이 시의 생명력을 키워내는 원천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에서 관념과 비유, 상징을 떨쳐버리고 직관의 눈으로 직접 대상과 만나자는(의식→대상→이미지) 디지털 시 운동은 시의 현장성과 내재적인 생명성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인 서정시와 연결된다. 그것은 내면의식의 흐름 위에 자리한 디지털 시가 논리적인 관념의 시나 언어조작의 시보다 시의 원래 모습에 더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디지털 시는 현장과 상상의 예술적 언어융합을 시의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북한산 비가 오락가락, 찜통 더위 속 , 땀을 흘리고 확 터진 능 선에 올랐다. 앞에 서 있는 봉우리들 얇은 구름이 그림이다. 주저 앉아 상상하며 가슴쯤 산의 옷을 벗기면서, 이렇게 시에 빠져들고 있는데, 한 시인이한다. 나는 내색을 못하고 하고 이성理性을 말 했다. 그 때 지나가는 등산객이 했다. 멍! 모두 몽둥이로 한 대씩 맞은 기분이었다.   이 날 산행은 흰수염을 휘날리고 아슬히 바윗서리에 걸터앉은 내가 희죽이 웃으며, 리모콘으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비밀한 얇은 비단을 밀어 올리고,                ---------오진현 「산행」 전문      오진현 「산행」은 때 묻은 감각과 지식을 뛰어 넘는 디지털 시대의 감각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하면서 그것을 수용하는 맑은 현장언어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어떤 관념도 미리 들어가 있지 않은 탈-관념의 빈 마음은 새로운 감각이 모여드는 맑은 못이 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 새로운 감각을 거부감 없이 수용하는 열린 마음이 디지털 시대의 시인의 마음이다. 그 마음에는 삶의 현장에서 살아 있는 물고기처럼 숨을 쉬고 지느러미를 펄떡이면서 움직이는 자신의 심리적 현상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직관(초논리超論理, 비논리非論理)의 눈이 살아 있다. 따라서 그 현상을 언어 카메라로 찍어내는 디지털 감각(염사念寫, 접사接寫)의 이미지 시와 어떤 관념을 솟대같이 중심에 세워놓고 언어의 수사에 의해서 만들어 내는 모더니즘의 이미지 시와는 선명한 차이가 생긴다는 것을 알게 한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오진현 「밤비」전문     직관적인 염사의 시에서는 독특한 감각의 에너지가 전류처럼 흐른다, 그런 에너지가 흐르는「밤비」는 시인 자신의 내면이 시의 현장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적 의식의 흐름 속에는 어떤 관념도 의도意圖도 보이지 않는다. 직관의 눈이 의식의 현상을 사진 찍듯이 찍어서 시각적 영상으로 떠오르게 할 뿐이다. 의식의 집중이라는 점에서 무의식의 자동기술과 구별된다. 그리고 디지털 감각은 시인이 시의 주체이면서도 객체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그는 눈 덮인 12월의 산속에서 누군가가 두드리는 북소리를 듣고 있다고 한다.   그가 촬영한 여름 바다 푸른 파도는 우 우 우 우 밀려와서 바위의 굳은 몸을 속 살로 껴안으며 흰 가슴살을 드러낸다.   나는 식탁 위의 빨간 방울토마토 하나를 입에 넣고 TV를 켰다. 무너진 흙벽돌 먼지 속에서 뼈만 남은 이라크 아이들이 뛰어나온다. 그 옆으로 완전 무장한 미 군 병사들이 지나가고 있다.     갑자기 눈보라가 날리고 1951년 1월 20일 새벽 살얼음 진 달래강 얼음판 위 피난민들 사이에서 아이를 엎은 40대의 아낙이 넘어졌다 일어선다. 벗겨진 그 의 고무신이 얼음판에 뒹굴고 있다.     나는 TV를 끄고 밖으로 나왔다. 벽에 붙어서 여전히 흰 거품을 토하며 소리치고 있는 파란 8월의 바다   그때 겨울 산 속으로 들어갔던 그가 바닷가로 왔다는 메시지가 핸드폰에 박혔다.                                  ---심상운 전문     이 시에는 현실과 가상현실이 결합된 디지털시의 현장성(하이퍼 세계)이 들어 있다. 이 디지털 시의 현장은 시의 구조에서 다선구조를 형성한다. 다선구조는 ‘선택과 집중’ ‘설득’을 중시하는 단선구조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상상의 결합과 연결’, ‘현실과 가상현실의 세계’를 시 속에 구축한다. 이 시에서는 눈 덮인 12월의 숲 속에 들어가서 북소리를 듣고 있는 그와 벽에 붙은 여름바다 사진, 식탁에서 빨간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고 TV를 켜는 나, TV화면 속의 이라크 아이들과 달래강의 풍경 등의 이미지 결합이 그 원천이 되고 있다. 따라서 시의 시점도 평면적인 단일시점에서 입체적인 다시점으로 변화된다. 그것은 다선구조의 이미지는 시를 어떤 목적의식과 관념에서 벗어나게 하고 시에 입체성과 현장성과 생동감을 불어넣는 에너지가 되기 때문이다. 이 다선구조는 우리들의 일상이 단일시점이 아니고 다시점(의식과 무의식의 결합) 이라는 점에서 더 자연스럽게 총체적인 실존의 모습을 형성한다.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은 우리들의 삶이 논리성보다는 심리적인 이미지의 세계에 더 가깝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 속에 흐르는 내적 의식의 흐름이 불연속적인 이미지를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     이러한 이미지 결합의 디지털 시는 또 문명적 사고(객관적이며 추상적인 과학적 사고)와 대립되는 문명이전의 야생의 사고(구체적 사고)에 맥이 닿는다. 문명이전의 야생의 사고는 구체적이고 주술적이고 감각적이다. 이는 다른 표현으로 신화적 사고라고 한다. “신화적 사고는 표상(image)에 묶인 채 지각(percept)과 개념(concept)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어 우리에게는 표상으로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일반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나름으로는 과학적일 수 있다고 레비-스트로스는 주장한다.” 이런 면을 중심에 두고 생각할 때, 디지털 시는 비인간적인 기계의 시가 아니라 언어적인 면에서 모더니즘의 이미지를 확장하고 현장의 긴장감을 내포한 매우 인간적인 직관과 감성에 의해서 탄생하는 탈관념의 새로운 감각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디지털 시는 사실, 생명, 현장을 바탕으로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을 중시하는 21세기적인 감수성(디지털 감각)과 인간의 내면에 잠겨 있는 야성적 감각이 만나서 순수 직관의 이미지(탈관념, 시공간 초월), 즉 신화적인 언어 표상(image)으로 탄생되는 시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그것은 문명적인 면에서 볼 때, 과학적 사고(문명)와 야생의 사고(문명이전)의 융합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는 시인의 사유와 감각과 언어의 수사修辭에 의해서 제작되는 정통적 모더니즘의 시에 비해서 시의 일반화에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다. 디지털 시는 탈관념의 의식이 전제가 되고 이제까지 사용된 익숙해진 언어(비유, 상징)로부터 벗어나서 때 묻지 않은 원초적 현장언어와 디지털 감각(염사, 접사,가상현실)의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모더니즘 시의 한계를 넘어서는 디지털 시의 “새로운 신화 만들기”는 매우 어려운 도정이 예상된다. 그러나 21세기는 도처에서 새로운 변화(IT, DNA 등)의 구름을 계속 몰아오고 있어서 시인들도 그것을 피해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347    문제 시집, 시와 현대시 동향 및 그 新모색 댓글:  조회:4127  추천:0  2015-02-18
2004년 한국 현대시의 동향과 새로움의 모색                    -------문제 시집과 시와 시론을 중심으로                                                                           심  상  운     1. 들어가는 글    현대시의 도전 양상은 무엇보다도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시인들의 자세와 젊은 의식에서 발견된다. 시의 숙명은 언어의 한계와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갖기 때문에 현실과 예술 사이에서 고뇌하고 도전하고 변화를 꿈꾸는 시인들의 의식은 그 자체가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면서 새로운 현대시를 낳는 모태가 되어왔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 현대시의 역사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1930년대의 박용철・ 김영랑 등의 순수시 운동이나, 이상李箱의 심층심리와 초현실주의, 김기림 ・정지용의 모더니즘 시운동 등은 외국의 문예사조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과 당대의 현실을 외면한 것을 지적하여 비판할 수 있지만, 한국 현대시의 준거를 마련하고 시를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공적을 남긴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시에 대한 개념을 확대시켜 현재까지 한국 현대시의 다양한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다. 이때부터 시작된 한국 현대시의 회화성과 내면의식의 표현, 사상의 감각화 등은 전통적인 서정시에도 많은 영향을 주어서 서정시의 다양한 변화를 이끌어왔다. 그러나 IT, DIGTAL, DNA 등이 주도하는 빠른 변화의 21세기에도 20세기의 모더니즘이나 리얼리즘의 방법으로 인간과 자연과 생명의 문제에 대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 지각知覺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의 사물인식事物認識과 표현기법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될 수 있는 시론과 시집과 시편들을 중심으로 2004년 한국 현대시의 동향을 예시하고 새로운 시의 모습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밖에도 한국 전통적 서정시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샤머니즘 계열의 시인들과 시는 자신의 영혼을 찾아가서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서정시인들의 시편들. 언어의 감각적인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서정시. 풍자나 역설, 사상의 감각화를 중시한 주지시. 사상이나 메시지 전달을 강조하는 관념시. 언어의 유희적 기능을 내세우는 초현실적인 시 등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는 한국 현대시의 시편들의 모습을 나름대로 살피면서 변화의 징후를 발견해보려고 한다.  먼저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21세기 시에 대한 대안으로 문덕수가 제시하는 사물시事物詩에 관한 시론이다. 문덕수는 「오늘의 시인 총서- 문덕수시 99선」의 후기 시론에서 “21세기에는 언어 예술이라는 개념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어야한다”고 전제하면서, 라는 새로운 아이템을 제시하고 있는데, 한국 모더니즘 시를 대표하는 원로시인이 젊은 시인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끊임없는 탐색의 정신에서 솟아나는 사고思考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진다.  두 번째는, 현대의 언어는 인간의 존재 상황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 인간의 사유思惟를 담고 있는 언어는 지식知識의 틀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그것은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가 갖고 태어난 것을 얼마나 잘 담고 있는가, 하는 언어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바탕으로 하면서, 오진현(필명 오남구) 시인을 중심으로 IT 시대에 고뇌하고 도전하는 일군一群의 젊은 시인들이 벌이고 있는 탈관념과 디지털리즘의 시운동이다. 오진현은 90년대 중반에 탈관념의 시적 방법론을 제시한 이후 2002년에 과감하게 디지털리즘을 선언하고, 2년 만에 1930년대의 이상李箱의 시를 시발점으로 하는 「디지털리즘 선언」 3집(2004, 9, 11)을 내놓고 있어서 그 열정과 힘이 더욱 강하게 감지된다.   세 번째는 산업사회의 한계를 드러내며 인간의 존재를 위기상황으로 몰고 가는 환경문제에 대응하여 생태시(녹색시, 환경시)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일군一群의 시인들도 한국 현대시의 출구를 보여주고 있는 건강한 시인들로 분류된다. 신진, 송용구 등 이 분야의 시인들은 시작詩作에서 방법보다 내용을 중시하고 있어서 현실 참여시의 폭을 넓히고 그 분야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시운동은 모두 2004년 한국 현대시에 젊고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어주고 있어서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변화의 시대에 과거의 틀에 안주하는 시인과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며 새로운 시를 꿈꾸는 시인들을 구분하고 그들의 시사적 위치를 가늠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2. 21세기 새로운 시의 모색     가. 사실과 생명과 현장 체험을 중시하는 사물시事物詩    문덕수는 「오늘의 시인 총서- 문덕수시 99선」( 2004,7,5)의 후기 시론 에서 21세기 시의 키워드로 “사실, 생명, 현장”이라는 세 가지 전제를 제시하면서 이것을 “DIGITAL, DNA, DMZ”의 공통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언어가 아닌 사물事物이야 말로 21세기 시의 모든 문제를 내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중적 리얼리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시학'으로 심화된 김지하의 시론, 이상李箱의 심층심리를 기점으로 출발한 탈관념의 실험, 에콜로지즘에 의한 녹색시학의 시도, 그리고 분단현장의 새로운 관찰과 전망 등은 모두 적나라한 사물의 실제에 대한 직접적 체험에서의 출발로 볼 수 있다.'사실''생명''현장'이라는 전제를 일관하는 밑바닥에는 '사물事物'이 공통분모로 자리 잡는다. 그것은 리얼리티를 찾고자 하는 시인들의 오랜 방황의 길목에서의 불가피한 만남이다. 21세기 시는 언어 이전 또는 모든 사유를 벗어난 사물 그 자체의 날것에서 출발한다. 21세기의 시는 모더니즘의 모든 언어주의(특히 언어유희)를 초극하고 내면세계와 외면 세계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그대로의 적나라한 '사물'에서 새로운 시의 원점(제로지점)을 찾으며, 시의 내재적 특징과 지향적 특징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말하고 있다. 그 말 속에는 모더니즘의 언어주의(언어유희, 언어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허구성에서 벗어나려는 갈망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와 사물의 불일치라는 언어의 숙명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사물의 본질에 더 가까이 접근해보고자 하는 시인의 치열한 도전의식이 들어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시인의 주관적인 감성이나 사상,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존재의 본질과 만나는 방법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것은 또 시속에서 대상에 대한 시인의 인내심과 내공內空의 힘을 드러내게 하여 시를 도道의 경지까지 끌어올리려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시는 사물시의 특성을 안고 있는 시다. 두 편의 시를 살펴보자. 이솔의 시집 「수자직繻子織으로 짜기」(2003, 10, 30)에서 사물시의 구체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큰집 마루에 앉아서 꽈리를 분다/아랫입술에 구멍을 대고 부풀린 다음 윗니로 살짝 누른다/뽀르륵 꽈리소리에 빠져서 자꾸 불어댄다//햇빛이 가득한 큰집 마루에 혼자 앉아 꽈리를 분다/원추형의 치마를 들치면 동그란 꽈리가 매달려 있다/아주 조심스럽게 만져가며 말랑말랑하게 만든다/심지가 만져지고 씨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면/꼭지를 살살돌리면서 천천히 심지를 뺀다/바람을 불어 넣고 햇빛을 담으니 동동 뜰 것 같다//꽈리 속에는 소리가 많다/입을 오므리고 불면 개울물이 굴러 흐른다/돌틈으로 비비대며 흐르는 개울물소리/바람을 잔뜩 부풀리고 서서히 불면 굴렁쇠소리가 난다/맨발로 마당을 빙빙 돌며 굴리던 둥근소리/입을 옆으로 하고 누르듯이 불면/칭얼대는 아기소리가 난다/돌사진 한번 찍어보지 못한 아기/입안 가득히 흐르고 구르는 소리//큰집 마루기둥에 기대앉아/꽈리를 부는 일은 지치지도 않는다// -----------이솔 전문   이솔의 시에는 사물을 직접 보고 만지고 체험하는 시인의 독특한 사물인식의 양식이 보인다. 이러한 사물인식의 방법은 사실성과 현장성을 바탕으로 하여 시를 언어 이전의 사물세계에 접근시키고 있다. 그래서 시를 모더니즘의 언어주의(특히 언어유희)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 시는 또 사물시에서 지향하는 순수직관의 방법도 보여주고 있어서 새로운 시대의 언어감각을 감지하게 한다. 최진연의 「여름시편․4-소나기」에서도 사물시의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해열제를 먹고 누워서 듣는 이웃집의 피아노소리/갈매기한두 마리 끼룩거리며 날고 있을뿐/아직도 비어 있는 바다가 보임./시골에도 비가 온다는 조카의 고추밭 고추들처럼/얼굴이 환해지는 아내/방안에서도 비를 맞는 행운 목 잎들이 길게 늘어져 있음./비를 받아 먹느라 쳐들었던 그간에 마른 얼굴의 꽃들/보나마나 이젠 고개 숙이고 있을 것임./해열제를 먹은 내 몸에서도 소낙비는 쏟아지고/자면서도 나무들 지절거리는 소리는 들을 수 있음.// ---최진연 「여름시편․4-소나기」 전문   이 시에서는 시인과 사물과의 관계가 '사물시'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솔 시인의 시편들은 시인의 위치가 중립적인데 비해 이 시는 시인이 사물 쪽으로 들어가서 사물의 내면(혼)까지 드러내려고 한다. 사물이 시의 원점(제로지점)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시인이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사물과 만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솔, 최진연의 시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물시의 모습은 문덕수가 제시하고 추구하는 사물시의 한 부분이다. 언어 이전의 사물인식은 “DIGITAL, DNA, DMZ”의 시편에 내재된 공통개념이다. 모더니즘의 언어주의(언어유희, 언어 이미지)와 관념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사실과 생명과 현장 체험을 중시하는 새로운 시운동으로서의 '사물시'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나, 디지털리즘의 선언과 디지털리즘의 시   오진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디지털리즘 시운동은 사물시의 연장선상에서 더 구체화되고 세밀화 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데, “사실, 생명, 현장”이라는 사물시가 지향하는 전제前提를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도 모더니즘의 언어유희, 언어 이미지를 포함하는 다른 측면을 실험시의 형태로 과감하게 보여주고 있다. 「디지털리즘」 1집(2003,3, 15)에서 선언한 디지털리즘의 핵심 내용을 인용해보면, “지금까지 아날로그 시대의 시가 '기술記述' 또는 '자동기술自動記述 '하는 것이라면, 미래의 디지털 시대의 시는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염사 念寫'또는 '찍는다'는 행위로 구분 짓기도 한다. 그래서 ”인체人體의 신비전神秘展“에서 보듯 '진열된 세계'의 시신屍身을 종으로 갈라놓거나 횡으로 갈라놓아 진실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그런 현란한 색깔의 무늬를 보고 황홀해 하는 '디지털리즘'을 실험하였다. 마치 이것은 현미경으로 보는 '생명의 절편切片'으로서 일찍이 초현실주의 작가 부르통이 몸에 유리관을 끼워서 내장을 들여다보았던 '상상의 세계'가 실제 시신의 절편을 통해서 충격적으로 직접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선언문의 내용을 찬찬히 짚어보면 디지털리즘의 표현방식은 염사念寫'또는 '찍는다'는 행위이고, 충격적인 사실을 직접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여주는 것은'생명의 절편切片'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물시의 전제 조건 “사실, 생명, 현장”을 구체화한 것으로 사물시의 공통 개념에 부합된다. 그런데 “현란한 색깔의 무늬를 보고 황홀해 하는'디지털리즘'”이라는 말에서는 언어 이미지나 언어유희의의 세계가 발견된다. 이것은 사물시가 벗어나고자 하는 모더니즘의 언어주의 세계와는 다르지만 디지털리즘의 언어유희와 언어감각의 모양을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언어 이미지, 언어유희, 찍어서 보여주기의 방법에서 디지털리즘은 사물시와 별개의 시로 나누어 진다. 디지털리즘의 시는 단순히 읽히는 시가 아닌 사실 또는 현상을 보여주는 시, 언어 그림의 시이면서 시인의 내면적 의식을 떠올리는 시이기 때문이다. 다음 시를 읽어보자.   아침바다, 나의 첫 말言들이 꽃과 섹스를 시작한다./ 오늘/ 「미역국」 「미끄러졌다」는 탈脫의 이미지 미끄러지기/ 탈관념脫觀念이, 해日에서 「꽃」 꽃에서 「춤」으로 미끄러지기, 유쾌히 말이 미끄러진다./--수평선에 이쁜 눈썹 같은 민족이란 언어가 기우뚱하다. (단, 민모 또는 민족시인*이 내말을 못 알아/ 들어도 어쩔 수 없다.)/창가에서 언어와 꽃의 고독한 섹스,이미지 미끄러지기. 힘차게 꽃대 뽑아올리고 있는 제주 한란寒蘭, 뚝 뚝 피멍울이 져버리는 한란寒蘭, 순백이 일순간 흔들리면서, 오르르르...... . 전 신경이 떤다./ 꽃아,/ 달 하나 반짝이며 떨어진다/천 개 만 개 별들이 쏟아진다/간밤에 맺힌/ 이슬 한 방울 선한 자식듣,/모어母語의 첫 언어 아-.아-.                             ---오남구 < 해맞이 첫 언어- 디지털리즘 ①> 전문  * 민족시인:큰 고정관념을 상징. 참고로 나는 신(神)을 고정관념의 대표선수로 노래한 적이 있음    이 시는 「디지털리즘」 1집에 수록된 첫 실험시다. 이 시에서 먼저 발견되는 것은 “-시작한다, -미끄러지기, -미끄러진다 , -신경이 떤다, -쏟아진다” 등의 현재형 종결어미가 보여주고 있는 어떤 사실(현상)의 순간적 변화다. 의식의 흐름이 아닌 의식의 깜박임(단절과 이어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디지털 시계의 깜박이는 영상과 흡사하다. 여기엔 지나간 사실은 순간순간 지워지고 현재의 사실만 보인다. 모더니즘의 언어유희, 언어 이미지와는 다른 디지털의 세계에서 보여주는 새로운 언어유희, 언어감각이다. “연속적 흐름”이라는 아날로그 세계의 개념을 넘어서 시간時間이 아닌 시각時刻이 지배하는 디지털 세계의 현상이 담겨있다. 첫 행, 에서는 “해맞이 첫 언어”의 신선한 감각적 이미지가, < 「미역국」 「미끄러졌다」는 탈脫의 이미지>에서는 탈관념 언어유희의 한 부분이 보인다. 한 언어로부터 연상되는 이미지가 해→꽃→춤으로 이어지고, 이'이미지 미끄러지기'는 제주 한란寒蘭→꽃→달→별→이슬방울→모어母語의 첫 언어 아- 아-로 맺어지는데, 어떤 의미나 관념과는 무관하다. 그래서 독자는 관념에서 해방되어 시의 언어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시의 전개는 순수하게 시인의 내면적인 염사念寫의 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디지털리즘 선언」 2집(2003,12,15)에서 시 한 편을 또 읽어보자.     비,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선들이 팔닥팔닥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으면 수편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버린 빗길. 팔닥팔닥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흘깃 보는, 조각 허공에서 뿌리는 부스러기 무지개               -------오남구 「부드러움의 단상」 전문    이 시는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 거리에서 비를 맞고 섰다가 비가 그치자 빌딩 사이 조각난 허공을 한 번 흘깃 쳐다본 순간의 장면을 사진 찍듯 찍어 놓은 것이다. 비를 맞는 감각이 차다→단단하다→날카롭다로 순간순간 변하고 있다. 비는 팔닥팔닥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지고, “부드러운 선들이 팔닥팔닥 숨을 쉰다”. 방금 살아 움직이는 동영상動映像의 한 장면을 보는 거 같다. 사실과 현장 체험의 생생한 감각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생각의 속도가 들어 있다.  디지털리즘의 핵심은 대상(사물)을 접촉할 때 관념을 배제하고 대상(사물) 그 자체에 의식의 촉수를 넣어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인은 의식의 집중에 전념해야하고 의식의 힘으로 건저올린 사물(대상)의 본질을 순간적으로 순수 언어로 드러내야 한다. 이 때 대상에 대한 표현 방법을 염사念寫와 접사接寫로 나누고 있는데, 염사는 내적인 의식의 흐름을 포착하여 순간적으로 사진을 찍듯이 표현하는 방법이고, 접사는 외적인 대상을 순간적 감각으로 포착하여 찍어내는 방법이다. 그래서 대상의 순간적인 포착과 사진을 찍는 듯한 언어표현의 방법을 현대과학의 용어인 디지털의 개념에 융합시켜 만들어 낸 “디지털리즘 시”라는 용어가 새로운 문학 언어로 성립된 것이다. 이 디지털리즘의 시론은 탈관념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 시론과는 다르다. 무의미시는 대상이 없이 언어를 유희적으로 사용하여 만들어낸 단순한 언어 이미지인데 반해 디지털리즘 시는 눈에 보이는 대상(또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대상)을 어떻게 포착하여 표현하느냐 하는, 대상의 표현 방법에 관한 시론이다. 따라서 이 시론은 어떤 관념의 표현을 위해 사용되는 비유적인 이미지의 기법과도 다르다. 보통의 시들이 의식→대상→관념→ 비유적인 언어(이미지)→의미의 표현이라는 방식인데 반해 디지털리즘의 방법론은 의식→대상→이미지다. 이것을 순수 직관적 표현이라고 한다. 이 직관적 표현은 불교의 선시禪詩와도 차이가 있다. 선시는 하나의 분명한 관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리즘의 시에는 어떤 뚜렷한 의미(관념, 주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의식→대상→이미지로서 최종적인 것은 이미지다. 이 이미지는 독자의 판단과 해석에 의해 재창조되는 소재로 탄생한다. 그래서 디지털리즘 시는 독자에게 일정한 역할을 맡기는 시, 즉 독자참여의 시로 확대될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리즘의 시는 독자들에게 기존의 시와는 전혀 다른 경험과 맛을 느끼게 해준다. 디지털리즘의 시는 또 '사진 찍기의 기법'이라는 측면에서 시인에게 종합적인 사고와 예술적인 다양한 기법을 요구한다. 이런 요구는 디지털리즘의 시가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처럼 TV화면에 영상화 될 수 있는 시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디지털리즘은 현대적인 감각과 시대의 조류에 잘 어울리는 시론이다. 그러나 단순한 ‘사진 찍기’의 기법이 안고 있는 가벼움과 차가움(비인간적인 면)은 문제로 남는다. 디지털리즘 시의 종결어미가 대부분 현재형 이라는 점이 그런 면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현대의 복잡다기한 의식과 관념, 인간정서의 은은한 맛, 강렬한 감정 등을 표현하는 데에는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부족한 부분이 오히려 특징으로 남는다. 남과 다른 면이 있을 때 이것이 장점이 된다. 디지털리즘의 시운동은 현대와 미래사회에서 요구하는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순간포착 등)을 내포하고 있어서 한국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디지털리즘선언」3집(2004,9,11)에 실려 있는 박유라, 송시월, 이낙봉, 심언주, 김서은, 이인선, 류기봉, 김병휘, 박햇살, 고종목 등 동인들의 시편들이 풍기는 디지털리즘의 참신한 감각과 독특한 표현양식은 실험시의 범위를 넘어서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한 유파流派를 형성할 수있음을 보여준다. 그 중 한 편의 작품을 읽어보자.   아침, 나무사이/은색 자전거가 싱싱하게 지나간다/파란 산소 초록을 흘리며 간다/바짝, 4차선 쪽으로 촘촘히 걸어나오는 햇빛/물오른 캔버스를 한획 한획 푸르게 덪칠하며 걸어온다/초고층 아파트에서 졸고 있던 낮달이/슬며시 횡단 보도를 건너/하늘 파란 울음 한 조각 옆구리에 끼고서/빠르게 차창 안으로 날아든다./-누군가 내 핸드폰에 보내온/초록 문자 멧세지/전철안이 푸릇푸릇하다./누-구-세-요-?//---김서은 전문    김서은의 은 어느 여름날 전철 안에서 순간적으로 포착한 풍경(사물)이다. 이 영상은 한 순간에 마음(염사)과 눈(접사)을 통과하면서 어떤 관념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하고 선명한 형태의 감각(디지털 감각)으로 되살아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싱그러운 향기까지 풍기면서.   다. 현실 참여와  생명 사랑의 생태시    생태시의 바탕에는 생명의 근본 사상이 깊이 간직되어 있다. 그래서 환경시, 녹색시 등 인간의 환경파괴를 고발하고 무분별한 인공人工과 비자연성非自然性, 공해에 저항하는 사회참여의 시에서 출발한 생태시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중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생명의 근본 세계를 포함하는 보다 상승된 세계를 지향한다. 여기에는 인간을 위한 환경보존만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삶을 보존하기 위한 생태계의 문제가 들어있다. 그래서 생태주의 시는 환경시보다 더 적극적으로 생명세계를 지향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생명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시로 변화하고 있다. 이것이 환경시, 녹색시와 생태시의 차이점이다.  생태시라는 용어는 생태학生態學과 시의 합성어로 환경에 대한 생태학적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래서 송용구는 “자연환경과 생명체의 질적 변화를 생태학적, 사회적, 정치적 인식 및 생명의식에 근거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고발하는 현대시의 한 장르”라고 생태시를 정의하고 있다. 그가 소개한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독일의 생태시 1950-1980」 (송용구 번역)는 파괴된 생태계의 문제를 고발하고 그로 인해서 신음하며 죽어가는 인간의 운명을 저항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시편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이 사화집에 들어 있는 시편들은 주제, 내용, 관심에서 인간중심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21세기 한국의 생태시에 많은 영향과 자극을 주고 있다. 신진의 시집 「녹색엽서」(2002)도 산업화이후 파괴되고 훼손된 한국의 환경문제에 정면 대응하는 생태시로 평가 받고 있다.  2000년을 전후한 「시문학」의 생태주의・생명주의 시운동, 「문학사상」,「현대시학」,「녹색평론」 등의 생태시운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생태시의 위치를 확고하게 정립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시정신 운동으로 한 단계 높이고 있다. 2000년 10월 호 「시문학」에 발표된 의 「환경선언문」은 인간과 예술과 환경의 인과관계를 지적하면서 자본주의에 의해 파괴되고 황폐화 되는 환경과 이로 인해서 발생하는 정신의 황폐화와 정서의 궁핍을 고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생명에 대한 경외심, 인간과 자연을 똑같이 존중하는 생명사랑의 시정신을 천명闡明하고 있는데, 이 생명사랑의 시정신은 21세기 한국 생태시의 핵심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생태시의 언어에도 문덕수의 사물시가 전제로 내세운 “사실, 생명, 현장”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초여름 아침햇살이 부챗살처럼 퍼져 초록숲을 뒤흔든다// (황금꼬리를 낚아야겠다)//산수유 골진 잎사귀와 산벚꽃나무 팔랑팔랑 까불어대는 숨구멍 사이에다 초록그물을 친다 그물코에, 하루살이 작은 몸뚱이가 걸렸다//_ 작다고 얕보지마!// 이래뵈두 천일동안 물속에 잠겼다가 스물다섯번이나 허물을 벗은 후에 태어난 생이야/ 어디, 하찮고 떫은 생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그 누가/여름날 하루해가 너무 길다고 했던가?          -------- 이춘하 전문 (시문학, 2004, 8)    이춘하 시인의 는 파괴된 생태계의 문제를 고발하고 그로 인해신음하며 죽어가는 인간의 운명을 저항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기존의 환경시, 생태시와는 전혀 다른 면을 보여준다. 그는 언어 이미지나, 주장, 고발, 당위적인 관념 등에서 벗어나 생태계의 모습을 세밀히 관찰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독자들에게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하잘 것 없는 미물이지만 천일동안 물속에 잠겼다가 스물다섯번이나 허물을 벗은 후에 태어난 하루살이의 생. 그 하루살이를 포획하는 초록그물. 이런 생태계의 사슬 관계를 시인의 미시적인 눈이 자연스럽게 포착한 것이다. 이것은 시인의 생명존중, 생명평등의 열린 마음이 포옹抱擁한 생명세계의 현장이다. 이 말은 하루살이의 항변만이 아닌 시인의 항변이다. 이 세상에는 가치 없는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명존중 의식. 여기서 새로운 생태시 모습이 발견된다. 이것이 21세기 한국 생태시의 미래를 예시해 주는 단서라고 한다면 지나친 예단일지도 모르지만.   라. 변화의 징후徵候를 보여주고 있는 시편들   진헌성의 연작시(시문학, 2004,9)은 물성物性이 본래 가지고 있는 비의를 우주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여 시화詩化하고 있다. 신神보다 앞선 물질계의 본성을 직관적인 감성과 과학적인 추리로 통찰하고 있다. 관념적인 면이 강하지만 아무도 인식하지 못한 우주적 신비세계를 추적하는 시인의 의지와 상상력이 뜨겁게 감지된다. 과학철학의 관점에서 물성의 본질을 이만큼 추적하고 드러낸 시는 아직까지 없었다고 생각된다. 문덕수의 '사물시'시론과 원초적인 면에서 조화調和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의 전통적인 서정시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샤머니즘 계열의 대표적인 시인 박재릉은 시집「삭발하고 분바르고」(2002) 이후에도 신작시 특집 등을 통해 활발하게 시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그런데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 (시문학, 2004,9)에서, 아직도 시속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에너지는 여전하지만, 무속巫俗 세계의 뜨거운 인간적 욕망에서 벗어나는 탈속脫俗과 관조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샤머니즘을 넘어선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바다같이 출렁이는 생명세계의 무한한 가능성을 기대하게 한다. 또 풍자와 역설로 관념의 속살을 드러내며 흥겨운 시의 판을 벌이고 있는 안수환의 시집 「하강시편」(2004,2)에서 보여주는 독특한 감성과 관념 너머의 세계. 그리고 언어 놀이도 새로운 변화의 징후를 감지하게 한다.  이 밖에도 내적(정신적) 시선의 이동으로 시의 의미(상징)를 확장하고 놀라움을 주는 박찬일의「모자나무」, 독자들을 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고 시의 언어를 즐기게 하는 양준호의 「포크」, 디지털리즘의 언어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내면찍기를 보여주고 있는 박유라의 「겨울 X-Ray」, 봄에 산에서 꽃이 피는 평범한 사실을 감각적이고 우주적인 발상의 이미지로 순간적인 언어자극을 통해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는 이종현의 「우주가 하혈하는 희한한 풍경」, 사물과 사물의 연결을 통한 비유 속에(허물어진 �달의 그림자, 쭈그러져 누운 단화 등) 자신의 꿈과 현실을 함축하고 이를 “다시 피는 들꽃”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송문헌의 「소리의 넋-자화상」, 대상(나무)과 시인의 관계가 일체가 되어서 시인의 자아의식自我意識을 찾아 볼 수 없고 오로지 대상에 대한 순수한 인식만이 감지되는 정유준의 시집「나무의 명상」(2004,6,30) 속에 들어 있는 시편들은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개성적인 언어기법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시로 평가된다.       3. 맺는 글    이 글에서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융합하는 문덕수의 '사물시', 탈관념을 바탕으로 사실과 현상을 순간적인 생각의 속도에 실어 사진 찍듯 찍어서 보여주는 오진현의 '디지털리즘의 시론과 실험시,'사회참여의 저항성에서 출발하여'생명사랑으로 변화하는 생태시', 그 밖에 개성적인 언어 기법과 변화의 징후를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시들을 대상으로 하여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변모를 모색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 이유는 1년간 상재된 시집을 열거하고 사족蛇足을 붙이는 일보다는 젊고 발랄한 정신을 뿜어내는 시인들의 참신한 의식과 언어를 추적하면서 새로움을 모색해보는 것이 더 즐겁고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법의 변화에는 생각의 변화가 수반隨伴되고 생각의 변화는 새로운 기법을 탄생시킨다. 이 둘의 관계는 인과因果를 만들면서 톱니바퀴처럼 돌아간다. 사실・생명・ 현장을 전제로 하는 사물시, 디지털리즘 시, 생태시 등의 시들은 현대인들의 변화하는 생활과 사고思考와 환경과 행동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반영함으로써 당위성當爲性과 새로운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사실(사물)의 본질과 직접 만나고 싶어 하는 감각과 순간적인 변화를 즐기는 현대인들의 생활과 사고와 감성과 행동양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사물시와 디지털리즘의 시는 20세기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통합하는 21세기 새로운 현대시의 모델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시는 자신의 영혼을 찾아가서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내면의식의 서정시나 풍자나 역설, 사상의 감각화를 중시하는 주지시나 사상이나 메시지 전달을 강조하는 관념시 등 다양한 모습의 현대시들도 그 존재가치를 지속시키고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21세기의 시대적 흐름을 수용受容하는 새로운 시로 변모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04년의 한국 현대시는 매우 중요한 시점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46    디지털시대와 글쓰기 방법론 댓글:  조회:4601  추천:0  2015-02-18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학 환경과 글쓰기의 방법론 -최동호 시인의 에 대한 반론                                                                                     심 상 운   1. 최동호 시인은 에서 주관한 학술세미나[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학 환경과 글쓰기의 방법론](2003.8.13)의 기조발표문 에서 “디지털 시대를 대변하는 음유시인(吟遊詩人)이 출현한다면 대중적 관심은 그 어느 시대보다 폭발적인 것이 될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우고 21세기 영상성의 시대에 오히려 서양의 고대나 중세에 활동하던 음유시인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다. 음유시인의 출현을 기다리는 이유는 일부시인의 대중적인 인기를 빌어서 현대시의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는 시의 내적 방법론보다는 대중에 영합하는 포퓰리즘(populism)을 선택한 그가 현대시의 미래에 절망하고 자포자기에 빠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끊임없이 현대시의 시론을 탐색해야 할 입장의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가 내세우는 가설에는 그의 실증적 체험이 들어있지 않고 막연한 예언 같은 추상성만 들어 있어서 어리둥절하였다.   그는 그 가설의 근거를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김소월이 민요 시인으로 불리면서(본인은 그 명칭을 거부했다고 하더라도) 한국인의 20세기적 정서를 대변하는 시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김소월과 대극점에 이상의 시가 있고, 김수영이나 김춘수 같은 시인은 관념의 세계를 파고들어 그 나름의 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앞으로 노래와 결합되지 않는 시는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 예견된다.” 라고 한국현대 시사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의 어디에도 오늘의 현실에 입각한 실증적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시대의 변화와 다양한 취향의 독자들을 외면하고 21세기에도 김소월과 같은 민요조의 시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눈에는 백남준 같은 세계적인 예술가는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한국 현대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1980년대 한국시단을 휩쓸고 간 베스트셀러의 열풍을 기억할 것이다. 그때 베스트셀러의 시집들이 지금도 인기가 있고 문학적 가치가 있는 시집으로 존재하는가를 한번이라도 냉정하게 검토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구체화 하는 방법을 디지털 시대의 매체의 기능에서 찾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여러 매체들을 종합적으로 사용 가능한 것이 시의 쟝르적 특징이고, 이를 살려 시와 음악, 시와 무용 등이 결합하는 방식”이라고 시와 음악, 시와 무용의 결합을 현대시의 한 방법“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그러면서 “시의 연구”라는 말을 통해서 음악과 무용과 결합할 수 있는 시의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그의 결합방식에는 현대시의 독자성을 포기하고 현대시의 언어를 종합예술의 형태 속에 넣어서 음악이나 무용의 힘을 이용하여 대중의 인기를 얻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 같다. 이때 시가 음악이나 무용에 붙어서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가를 숙고해 보았는지 묻고 싶다. 그러면 먼저 그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한국현대시의 새로운 돌파구로 내세우고 있는 그의 ‘음유시인(吟遊詩人)’이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서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 대안인지 검토해보자. 그가 거론한 음유시인은 중세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 각지에서 봉건 제후의 궁정을 찾아다니면서 스스로 지은 시를 낭송하던 시인이나 고대 그리스에서 광장이나 길거리에서 오랜 동안 전승되어 오는 서사시를 간단한 악기의 운율에 실어서 대중들에게 들려주던 형태와 같은 시인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을 본뜬 현대의 음유시인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현대의 도시에서는 공원이나, 카페나, 다방에서 자기가 지은 시에 곡을 붙여 노래하거나 낭송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는 시인의 존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사회구조 속에서 음유시인의 일반적인 형태는 시인이 쓴 시를 작곡가의 곡에 붙여서 가수가 노래하는 형태가 될 것 같다. 정지용 시인의 시 에 곡을 붙여서 대중들에게 가수가 들려주는 것처럼. 그럼 그때 '음유시인'은 누가되는 것일까. 시인일까? 작곡가일까? 가수일까? 이런 모든 복잡한 문제들이 세밀하게 구상되어 있지 않은 채, 단순히 대중에 영합하는 시를 말하기 위해서 ‘음유시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면 그의 은 매우 즉흥적이고 아마추어적 발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현대는 그가 말한 대로 디지털의 여러 매체를 종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대다. 그래서 시인이 대중들과 가까워지는 방법은 ‘활자매체’ 한 가지 만은 아니다. 활자매체에 영상 이미지를 넣고 음악과 시인의 음성을 담아서 컴퓨터 인터넷의 사이버 공간에서 독자들과 만날 수 있다. 만약 그가 인터넷 가상공간의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음유시인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라면 그의 은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하지만 현대성을 획득하는 아이템이 될 수도 있다.   다음은 두 번째로 음유시를 위한 시의 연구가 현대시의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하는 시론으로 성립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검토해보자. 음유시가 되기 위해서는 현대시가 대중가사의 노랫말같이 읽고 노래하기에 적합한 운율적인 언어로 조직되어야 하고 시인의 정서를 대중들이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영탄형의 구문이 되어야 한다. 고려시대의 속요에도 음악성을 나타내는 후렴구가 들어 있고, 시조에도 4음보와 3,4 4,4 조의 운율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가사에도 3,4, 4,4 조의 가락이 있다. 정지용 시인의 에도 반복되는 구절이 있다. 이런 비슷한 운율을 현대시에 넣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그런 시가 진정으로 대중과 가까워지는 현대시의 언어가 될 수 있을까? 이때 현대시와 대중가사와의 거리는 또 어떤 기준으로 설정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이제까지 쌓아온 한국 현대시의 언어적 성과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대두된다. 따라서 이런 여러 가지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그의 인 것 같아서 씁쓸한 기분만 든다.   그러나 시와 음악과의 결합은 근래에 산문화 되고 있는 현대시의 ‘음악성 회복’이라는 측면에서는 연구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런 생각과 함께 현대시의 새로운 운동으로, 일부의 시인들이 독자(관객)와 호흡을 함께하는 나 의 시가 매스컴의 외면으로 대중화에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라는 주제를 논하고, 음유시인을 거론하는 자리에서 그냥 지나쳐버린 것은 편향된 시각이나 좁은 안목 때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게 한다.     2. 이상으로 디지털 시대의 시가 나아갈 길을 제시한 최동호 시인의 음유시인의 등장에 대한 검토를 나름대로 해보았다. 다음은 왜 최 시인이 디지털의 시대에 사는 세대들이 선호하는 영상 이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오히려 가상세계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점을 짚어보자. 그는 의 도입부에서 갑작스런 사이버 시대의 도래를 이야기하면서 사이버 세계에 의한 독서 인구의 감소를 지적하고 있다. 이 독서 인구의 감소 문제가 가상세계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온 원인이 된 것 같다. 그러면서 그는 대학에서 ‘문학의 이해’ 수업시간에 경험한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박목월의 시 ‘청(靑)노루’를 다루면서 우선 전혀 다른 이질적인 반응에 놀라게 되었다. 리얼리즘 문학론이 붕괴되고 해체시와 정신주의가 충돌하던 90년대 초반에 이 시에 대해 학생들은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세계가 이미 자신들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이 시에 그들은 전혀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박목월이 그리던 자연은 이미 파괴되어버렸고, 있지도 않은 현실을 그린 시에 어떻게 시적 공감을 느낄 수 있겠느냐는 것이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머언 산 靑雲寺/ 낡은 기와집 /山은 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구비를 /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박목월, ‘청노루’ 전문     60년대 이후 회화적인 구도를 가진 자연시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거론되어온 박목월의 ‘청노루’가 젊은 세대들에게 이처럼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을 보고 필자는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젊은 학생들에게 유행하던 시들은 현실에 대한 풍자나 야유이거나 기성의 작품을 모방하는 패러디적 작품들이었다. 물론 많은 시인들에 의해 전통적인 서정시가 쓰여지고 있었지만 그런 류의 시들은 젊은 세대의 새로운 감각을 반영하지 못하는 낡은 작품으로 치부되는 듯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오늘의 학생들에게 박목월의 ‘청노루’를 다시 읽혀보고, 종전과 유사한 반응을 기대했었는데, 의외로 2000년대 초의 학생들은 이 시에서 그들 나름의 시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고 답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더 크게 부정될 줄 알았던 것과 정반대의 반응에서 필자는 일단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최근의 학생들이 이 작품에 공감을 보인 것은 이미 ‘청노루’의 자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감각이었다.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에서 흥미를 느끼는 그들이 ‘청노루’ 정도의 표현에 괴리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은 그만큼 인터넷의 가상현실 속에서 그들의 삶이 영위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   최동호 시인의 현실진단은 정확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진단에 대한 그의 해석은 한마디로 부정확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인터넷의 가상세계를 부정적으로만 보고 거기에 대응하는 시적 방법론을 새롭게 찾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 해답이 되는 시적 방법론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 대한 그의 진단 속에 들어있었다. 1990년대 초에 “박목월이 그리던 자연은 이미 파괴되어버렸고, 있지도 않은 현실을 그린 시에 어떻게 시적 공감을 느낄 수 있겠느냐는 것이 학생들의 반응이었다.”던, ‘청노루’가 2000년대 이후의 독자들에게 읽히는 이유가 그 해답의 단서가 된다. 다시 말하면 ‘‘청노루’의 자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감각이었다.“는 학생들의 반응 속에 정답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 까닭은 세대 차이에서 찾아볼 수도 있지만 그의 마음이 활짝 열려 있지 않았다는데, 근본이 있다.   1990년대 초반에 유행하던 현실에 대한 풍자나 야유, 기성의 작품을 모방하는 패러디적 시들은 현실에 대응하는 참여시로서의 가치는 있었지만, 시의 상상력을 추구하는 예술적인 본령에서는 멀리 떨어진 시의 작은 부분이라는 것을 2000년대의 학생들은 직감한 것이다. 컴퓨터 인터넷을 생활의 일부로 삼는 그들은 시에서 의미보다 영상성(이미지)에 더 친밀감을 느끼고, 가스통 바스라르와 같이 철학적 명상에는 잠겨보지 않았겠지만 ‘가상현실을 이미지의 세계’로서 현실과 같은 수준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현대시에 대한 이런 감각은 시의 예술적인 면에서 얼마나 건전하고 바른 접근인가 거듭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그들이 단지 사이버의 가상세계에 빠져서 독서를 등한시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감성을 긍정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부정적으로만 몰아간 것이 과연 현대시의 강의 현장에서 현명한 판단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원하는 방향이든 원하지 않는 방향이든 필연적인 방향으로 변하는 것이 시대의 현실이다. 그래서 그의 표현대로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로 떠나간 신감각의 새로운 종족”인 그들에게 그들이 선호할 수 없는 시만 보여주고 “왜 시를 읽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고집일 뿐”이라는 말을 그에게 되돌릴 수밖에 없다.     3.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영상 언어의 세계를 제시한 운동은 아날로그와 대칭되는 디지털이라는 관점에서 ‘기계의 시’ ‘반인간적인 시’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외면하는 시인들을 이해시켜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의 언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그들의 그런 자세는 현대의 물질주의적 상황에서 인간의 정서를 옹호하고 시의 생명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태도라는 점에서 공감이 가는 행위라고 인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이 없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어처구니없는 태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도 이제까지 현대시를 이끌어온 모더니즘이나 초현실주의와 같이 시의 창조적 표현방법에 핵심을 두고 있는 시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이버 공간, 가상세계에 대한 이해 부족과 거부감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의 존재 이유가 첫째,‘인간 정서의 표현’이라는 시의 서정성을 근본적인 바탕으로 한다는 것. 둘째, ‘모더니즘의 절제와 사물성 이미지의 창조’, 슈르의 반지성적인 ‘상상의 확대’,‘자유연상’, ‘창조적인 이미지에의 유혹’은 물론 리얼리즘의 ‘현장성’ 까지 모두 포함하는 시의 큰 그릇이라는 것. 셋째, 디지털 시의 중심이 되는 직관을 통한 염사와 접사’,‘무의미(탈관념)의 세계’, 그리고 ‘사물성의 세계’ ‘가상현실의 공간’은 시의 위기가 화두가 되는 21세기의 문학 현실 속에 새로운 시의의 공간을 여는 열쇠가 된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일이 선결과제가 된다. 그것은 현대시의 문제의 해결 방법을 외부가 아닌 현대시의 언어내부에서 찾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적 지향점을 안고 있는 는 과학적인 사실주의(실증주의)도 중시하지만 인간 내면의 심리적 현상에도 깊이 있는 시선을 던진다. 그것은 가 ‘언어의 의미’에서 탈출하여 ‘이미지의 세계’를 시의 근원으로 삼기 때문이다. 가스통 바슬라르는 과 에서 인간의 삶 속에 들어 있는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가스통 바슬라르의 과 을 강의 하는 김용희는 그의 강의 노트에서 가스통 바슬라르의 이론을 “인간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이미지와 더불어 살아간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이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떻게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것이며, 이미지로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오랫동안 철학이 이미지의 세계를 하나의 비실재로 바라보고 개념적 사유를 통해 이미지의 환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바슐라르는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현실로 바라보고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우리 영혼의 능력에 주목한다. 이미지는 인간의 영혼이 세계와 교감하는 순간에 탄생하며 아름다움 역시 그 순간에 빛을 발한다. 시가 포착하는 지점 역시 그 순간이며 그 순간을 향유하는 것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라고 요약․정리하고 있다.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존재를 비실재의 단순한 환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인간의 심리적인 현실’로 인정한 것이다. 가스통 바슬라르가 이미지의 존재를 비실재의 단순한 환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인간의 심리적인 현실’로 인정한 것은 ‘‘청노루’의 자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일 수 있다“고 하는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로 떠나간 신감각의 새로운 종족”인 학생들의 시적 인식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그러나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실제로 행하여졌던 이미지의 실재성을 인정한 것일 뿐, 그가 새로 창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실증적 관찰을 통한 이미지의 실재성은 현대시에서 ‘상상의 가치’를 높이는 데 힘이 되고 있으며, 미래지향의 가치를 창조하는 동력을 공급고 있다고 생각된다. 는 상상력의 확대와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라는 면에서 가스통 바슬라르의 상상의 시학과 맥을 같이 한다.     4. 그가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가상의 세계로 떠나간 신감각의 새로운 종족” 들은 어떤 상상력을 가진 세대이어야 하는가? 그들에게 기성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중심이 되는 이슈가 ‘창조적 상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다.2007년 2월 16일자 기사에는 2007년 주요 기업의 신입사원 연수 주제가 ‘창조교육’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한 신제품 만들기다. 그 제품은 지금까지 세상에서 보지 못한 것이어야 한다. 제품은 실제 물건일 수도 있지만, 완전히 새로운 제도나 시장ㆍ금융상품ㆍ마케팅 아이디어도 포함된다고 한다. 이런 미래지향적 연수의 결과물 중에서 '아이-라이크(Eye-Like)‘라는 제품이 있다. 콘택트렌즈처럼 이 제품을 눈에 착용하고 일상생활을 하도록 한다. 집에 들어와 아이라이크를 빼내 별도 플레이어(재생기)에 장착하면, 그날 일상에서 본 모든 영상이 아이라이크에 담겨 있다. 플레이어를 통하면 그날 하루 일과가 그대로 재생된다. 눈에 끼는 캠코더를 연상케 하는 제품이다.'루미트리(Lumi-Tree)'란 제품도 이와 같다. 반딧불이의 발광 DNA를 식물의 DNA와 합성해 나무나 꽃의 잎(또는 줄기)에서 발광물질을 발산하게 한다. 식물 자체에서 나오는 빛으로 가로등을 대체할 수 있다. 이런 상상의 제품은 미래 시장을 향한 제품이다. 과거 지향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가상세계의 현실화에 도전하는 자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꾸는 꿈은 현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 세계 속에서도 존재하는 꿈이라는 점에서 의 꿈과 같다. 따라서 현대시의 전위적인 실험시도 그들의 신제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감성과 상상력의 조화와 확대로 새로운 시의 원천이 되는 아이템을 찾아내는 일이다. 상상은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모태가 된다. 그 이미지는 가상현실 속에 존재하는 허상이지만 실재(실상)와 동일하게 취급된다. 인간의 삶을 움직이는 동력은 실제적인 이해타산과 인과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이미지’에 의해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즉 심리적 이미지는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동적 에너지가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현대시에서 이미지를 ‘심상(心象)’이라고 번역한 것은 이미지의 범위를 좁힌 점은 있지만 심리적인 면에서는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함축하는 단어로 존재성을 갖는다. 그 심리적 이미지는 오랜 옛날부터 예술의 동력이 되어서 사람들을 움직여왔지만 실상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그 이미지의 비중이 커지고 비약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현대시에서 상상력의 확대를 추구하는 는 가상세계를 포함한 인간의 심리적 이미지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한다. 그 변화 속에 디지털 시대에 시가 존재하는 방식이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345    하이퍼시와 디지털시대 댓글:  조회:3865  추천:0  2015-02-18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                        --- 디지털 시대의 시 쓰기                                                                       심 상 운(시인)     1.  동양시의 경전이라고 일컫는 고대 중국의 에서 보여주는 인간정서의 자연스런 분출이나,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피어난 ‘감정의 자유로운 유로’(워즈워즈)는 이성보다 감성을 선호하는 한국현대시에서 아직도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 근원은 ‘시는 인간 정서의 표현’이라는 명제 때문이다.  그러나 정서과잉, 상상력의 고갈 등 시적 긴장감이 풀어진 시들은 독자들에게 식상함을 안겨주었고 시가 외면당하는 현실을 불러왔다. 그래서 시인들은 언어, 리듬, 이미지, 스타일 등에서 시대적 감각에 맞는 시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0세기의 모더니즘 시가 지적인 언어와 회화적인 이미지의 기법으로 정서과잉의 낭만주의에 식상한 지적 성향의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의 영토로 환영을 받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모더니즘은 현대시에 ‘정서의 절제’와 ‘주지적(主知的) 인식(認識)’이라는 시의 방법을 도입하고, 정서의 자연적 노출에서 벗어나 이를 사물화하여 표현하는 기법으로 ‘이미지의 세계’를 열어줌으로써 사물과 존재에 대한 인식의 심화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게 했다. 이는 시의 역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희망. 희망은 분명 있다. 네가 내일의 닫힌 箱子를 굳이 열지만 않는다면......   희망. 희망은 분명히 빛난다. 네가 너무 가까이 가서 그 그윽한 距離의 노을을 벗기지 않는다면....   희망. 그것은 너의 寶石으로 넉넉히 만들 수도 있다. 네가 네 안에 너무 가까이 있어 너의 맑은 눈을 오히려 가리우지만 않는다면..... ------김현승 1〜3연      그러나 시에서 의미를 중시하는 지성의 과잉이 일으키는 병폐도 또한 새로운 시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지성의 과잉에 대응하는 반지성(反知性)의 시, 즉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surrealism)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 초현실의 시는 합리주의와 자연주의에 반대하여 비합리적 인식과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세계를 추구하고 언어표현의 과감한 혁신을 지향한다. 그리고 시적대상의 현실적인 공리성이나 합리적인 관계를 깨뜨려버리고 대상과 대상을 창조적인 새로운 관계로 맺어주는 시작 방법을 내세운다. 이때 시 속에서 현실적 실용성이나 합리성, 공리성을 다 없애버리고 순수한 시적대상으로 재탄생하는 대상을 오브제라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을 기존의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인간정신의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런 시작 방법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反動)이거나 모더니즘의 전위(轉位)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초현실주의 시는 난해성을 수반하지만 시의 존재성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면서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조향「바다의 층계(層階)」부분     나의 영혼은 어느 무당집 촛불로 불타고 있다. 그해 겨울 동자상을 안고 오는 길은 뼈가 갈라지는 어둠이었다. 무당이 주는 병든 본능의 복숭아를 깨물며 내가 사랑했던 개들이 나를 자꾸 물어뜯어도 어디가 아픈지도 무서운지도 몰랐다. 그것은 어둠이었다. 잠들 수 없는 어둠, 소리칠 수도 없는 어둠, 껴안을 수도 없는 어둠이 토끼의 눈물처럼 내 손바닥에 쌓이고 그런 날 무당집 뒤뜰의 구렁이는 밤마다 나를 껴안았다. 그 때마다 묻어났던 벌개진 어둠. ----------양준호「나의 영혼은」전문      모더니즘은 이런 도전 속에서 초현실주의(surrealism)를 포용하고 새로운 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것이 반지성을 용인하고 지성과 반지성이 서로 어울리게 하는 20세기 말의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이다. 이런 시작방법과 인식의 변화는 21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시운동의 태동을 보이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한국 현대시에서 디지털 시대의 감각을 시에 도입하고자하는 ‘디지털 시’ 운동이다.   이렇게 모더니즘 시의 큰 테두리 안에서 새롭고 다양한 방법의 모색과 분출이 가능한 것은 모더니즘의 근본정신 속에는 인습적인 것이나 상식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창조의 영역을 확대하고자 하는 변혁(變革)의 정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21세기는 누가 뭐라고 하여도 디지털의 시대다. 컴퓨터 발달과 개인 소유에 의해서 확산되는 커뮤니케이션의 변화는 ‘사이버 세계’라는 또 하나의 생활공간을 열어 놓고 있다. 이 사이버공간은 개인 간의 의사소통, 여론의 수집과 확산, 사무처리, 상업적 거래, 오락 등으로 말미암아 실생활의 공간과 개념상 구분이 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위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허상만이 아닌 실제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컴퓨터의 영상에 젖어 든 젊은 세대들은 관념적이고 설득적인 현대시 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때의 영상은 시에서 언어영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디지털의 특성이 만들어 내는 영상과 쉽게 합치될 수 있다. 이 영상(보여주기)은 근대 이성의 ‘문자권’, 을 넘어서는 미디어가 주인인 IT, 디지털 시대의 중심 매체다. 현대를 ‘영상권’의 이미지 시대, 보여주는 영상 시대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면 디지털의 특성+시= ‘디지털 시’는 현대시에 어떤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가? 이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핵심을 요약하면 디지털의 공학적 세계에서 구현되는 현상을 언어의 예술인 시의 세계에서도 구현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디지털의 특성을 시로 ‘옮겨 온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시로 옮겨오는 디지털의 특성에서 중요한 것은 ‘디지털 적인 언어와 상상력’이다.  디지털 적인 언어라는 것은 언어를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컴퓨터의 데이터(data)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언어를 기호의 한 형태로 인식하고 음악의 ‘소리’나 회화의 ‘선과 색채’와 같이 의미나 실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언어에는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탈-관념(무의미)의 언어라고도 한다. 이  탈-관념의 언어는 디지털의 감각인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등을 구현하는 언어가 된다.  이런 디지털 시의 언어는 20세기 언어학자 소쉬르 (erdinand de Saussure 스위스 제네바 857. 11. 26 ~1913. 2. 22)의「일반 언어학 강의 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1916)에 근거를 두고 있다. 소쉬르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언어는 실제적인 의미의 구속에서 벗어나서 그 자체가 스스로 독립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의 상상은 이런 언어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이미지는 가상현실 속에 존재하는 허상(虛像)이지만 실재(실체)와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 프랑스 철학자 1884-1962)는 인간의 삶 속에 들어 있는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그의「순간의 시학」과「불의 시학」을 강의하는 김융희(서울예술대 교수)는 강의(2006,6,26)에서 가스통 바슐라르의 이론을 “인간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이미지와 더불어 살아간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이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떻게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것이며, 이미지로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오랫동안 철학이 이미지의 세계를 하나의 비실재로 바라보고 개념적 사유를 통해 이미지의 환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바슐라르는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현실로 바라보고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우리 영혼의 능력에 주목한다. 이미지는 인간의 영혼이 세계와 교감하는 순간에 탄생하며 아름다움 역시 그 순간에 빛을 발한다. 시가 포착하는 지점 역시 그 순간이며 그 순간을 향유하는 것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라고 ‘강의 개요’에서 요약․정리하고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시학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존재를 비실재의 단순한 환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인간의 심리적인 현실’로 인정한 것이다.  문덕수(시인, 예술원 회원)도「내면세계의 미학」(1966년 ‘사상계’ 157호)에서, “이미지는 어떤 객관적 대상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 반드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질 필요도 없다고 본다.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 이미지’란 객관적 대상도 없고 개념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것만으로 충분하고, 그 밖에 이미지가 지시하는 객관적 대상을 찾는다든지, 이미지가 내포하는 철학적·인생론적 관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지를 불순케 하는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라고 순수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수평으로 네 개의 막대기가 날아간다. 똑같은 속도로 나란히 열을 지어 때로는 장대처럼 일직一直으로 이어져, 그 중의 하나는 달을 두 쪽으로 쪼개고 그 중 하나는 지구를 툭툭 치고 그 중 하나는 꽃밭을 후려갈기고 그 중 하나는 사람을 쳐 죽인다. 흩어졌던 막대기들이 다시 날아와 수평으로 나란히 열을 짓다가 제각기 머리를 돌린다. 하나는 벽을 후비면서 돌고 하나는 유리창을 뚫고 드나들며 하나는 나비를 뒤좇아 내를 건너고 하나는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떨어져 죽는다. 뒤얽히던 세 개도 차례로 죽는다. -문덕수 「네 개의 막대기」전문      디지털 적인 상상력은 ‘가상세계(假想世界)’라는 무대를 설치하고 그 속에서 자유로운 상상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 가상세계는 ‘허구적(虛構的)’이란 면에서는 예술적인 전통을 계승한다. 그러나 디지털적인 상상은 허구적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서 무한대로 확장된다는 데서 기존의 허구와 차이가 생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을 제정하고 홍보하는 조선일보(2007,4,9)에 기고한 이인화 교수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의 글,「꿈을 현실로… 이것이 뉴 웨이브 문학!」은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는 그 글에서 “정보화 혁명은 문학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좌표 위에 위치시켰다. 이제까지 문학 작품은 현실을 재현한 가상, 즉 상상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 3차원 컴퓨터 그래픽이 만드는 인터랙티브(interactive)(서로 영향을 미치는, 상호작용을 하는, : 대화식의) 환경으로서의 가상세계가 나타나면서 가상은 곧 현실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상은 사람들이 마우스로 클릭해주기를 기다리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 된 것이다.” 라고 21세기 디지털의 세계가 펼치는 가상세계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그는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상세계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라고 하면서 가상과 현실의 벽을 허물어 버린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엄밀한 의미에서 오늘날에는 판타지문학도, SF문학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어스시의 마법사’ ‘듄’ ‘유배행성’ ‘로캐넌의 세계’는 새로운 현실을 그리고 있는 현대문학일 뿐이다. 그 반대편에 대학에서 가르치는 ‘현대문학’, 즉 1990년대 이전까지의 현실 개념에 따라 문학을 이해하는 근대문학이 있다.”라고 현대문학과 근대문학의 경계를 나누고 있다.  그의 이론은 극단적이고 선언적인 성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논리적인 검증을 철저히 거쳐야 하겠지만, 상상의 무한한 확대라는 면에서 21세기 문학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고 여겨진다.     3.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문학 형태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 문학 (Hypertext literature) 은 디지털 적인 순수한 상상력의 확산과 독자참여의 문학공간이라는 면에서 한계를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1965년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테드 넬슨(Ted Nelson)은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따라서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그런데 연결되는 텍스트들은 저자가 준비한 것이지만 선택은 독자의 임의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 독자의 선택은 텍스트를 고정적 상태가 아닌 유동적인 상태로 만드는 원천이 된다. 텍스트의 유동성(流動性)은 텍스트의 자율성과 내적 통일성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놓기도 한다. 그러나 다양하고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에 예술의 공간에서는 고정된 틀보다 가치를 지닌다.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에서 탈피하여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형성하는 문학이다. 따라서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유동성의 문학형태가 된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인터넷에서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리좀은 원래 수평으로 자라는 땅속줄기 즉 ‘뿌리줄기’를 가리키는 생물학적인 용어인데,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J. 데리다, G. 들뢰즈 등의 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 ‘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한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텍스트 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컴퓨터에서 구현되는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와 종이(책) 위에서 구현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로 구분된다.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는 입력과 동시에 hyper text markup language' 즉 HTML이라는 컴퓨터 언어로 변환되는 시다. HTML로 변환된 시에는 하이퍼링크(연결)의 기능이 들어있으며, 텍스트는 화면의 뒤에 숨어 있다가 독자의 선택에 의해서 나타난다. 그 시에는 그래픽과 음악도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종이에 문자로 표시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이에 표시되는 시는 하이퍼텍스트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정과리(문학평론가)는「컴퓨터와 문학- 문학의 새로운 이해」(문학과 지성사, 1996년)에서 “문학의 ‘文’ 그리고 literature의 'letter'는 문학이 ‘언어’ (더 좁혀, 문자)를 중심매체(中心媒體)로 삼는다는 뜻을 포함하고도 있다. 하이퍼미디어에서는 그런 중심매질(中心媒質)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퍼텍스트 또한 그 자체로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이퍼미디어의 장 속에 종속하여 있어서, 하이퍼텍스트는 끊임없이 불안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곳의 언어는 컴퓨터 부호로의 변신을 독촉 받고 있는 언어다. 중심매체가 붕괴된 문화적 장르에 대하여, 단순히 언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까? 차라리 새로운 장르의 탄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라고 하이퍼텍스트 문학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의 이론은 문학에서 중심매질이 되는 언어(문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점에서는 타당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에 예속된 하이퍼텍스트 문학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상력의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언어구조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 하이퍼텍스트를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다. 숨어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종이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건너뛰기,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 검은 철제 의자 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엔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밭의 환한 햇빛 속으로 들어갔을까?”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영하 10도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 장수가 떨어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 고 쓴다. 그는 그 밑에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라고 또 쓴다.     세 번째, 발가숭이 노인들이 노란 해바라기 밭으로 뛰어가는 그림을 지나 다섯 번째, 식탁 옆 젊은 여자의 풍만한 궁둥이 그림 곁으로 가는 순간, 벽에 걸려 있는 네 번째 그림- 뒤척이는 태평양의 퍼런 몸뚱이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그 물을 수조水曹 속 물고기들에게 매일 부어준다고 한다.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 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심상운 「미완성의 시-그림 감상하기」전문      현대의 모더니즘 시에서 상상의 결과물인 심상(心象, Image)은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미지는 어떤 형이상학적 관념을 사물로 표현하기도 하고,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감각적 매개로 쓰이기도 한다. 이때 이미지는 시인의 목적의식과 연관되어서 의도성을 갖게 되고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공상(Fancy)은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 1834 영국의 서정시인·비평가·철학자.)의 말처럼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진다.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연상)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따라서 21세기의 새로운 시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 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imagination)보다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기울게 된다.  상상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란 것은 그것이 어떤 결실을 맺기 위하여 뚜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런 목적성 때문에 상상하는 과정에서 공상이나 연상 작용만이 아닌 합리적인 지적 추리도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탈-관념시나 디지털 시나 하이퍼텍스트 시의 창작 과정에서 시인을 괴롭히고 고민에 빠뜨리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시의 무목적성’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상상력이 관념이나 지적 사유 쪽으로 끌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1.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공상이 상상보다 현대적인 감각을 더 넓게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시의 무목적성 외에 공상이 가지고 있는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인생의 엄숙성에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교훈적인 엄숙성보다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에서 미적 쾌감과 매력을 더 느낀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이나 유희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거나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력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하이퍼텍스트 시의 바탕에는  언어의 기호성과 영상성, 가상현실,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등 ‘디지털 시'의 원리가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필자의 현대시론「디지털 시의 이해」(2006년 12월 ‘시문학’에 발표)에서는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Module)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 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때 모듈화 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모듈 이론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리좀 이론과 부합되는 면이 많다. 중요한 것은 기계적인 연결 관계보다 상상의 다양함과 풍부함이다. 그리고 내면 의식의 흐름이다. 이 의식의 흐름을 ‘시의 맥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시의 맥락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구성에서 중심역할을 한다.     4.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탈-관념의 영상언어 즉 보여주기(Showing)의 세계를 제시한 ‘디지털 시 운동’은 모더니즘의 구조(frame)속에 들어있으며 시의 창조적 표현방법에 핵심을 두고 있는 ‘시의 새로운 언어 운동’이다. 이 디지털 시 운동은 사물성 이미지의 창조는 물론 상상의 확대, 자유연상(공상), 영상성과 공연성을 통해서 ‘공연 시’나 ‘하이퍼텍스트 시’의 문을 열어놓음으로써 현대시의 공간 확장방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디지털 시의 중심이 되는 ‘탈-관념’, ‘기호의 세계’, 그리고 ‘사물성의 세계’, ‘가상현실의 공간’은 시의 위기가 화두가 되는 21세기의 문학 현실 속에 새로운 시의 공간을 개척하는 강한 에너지가 되고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적인 정서 위주의 시나 모든 시는 의미의 표현이라는 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시인들은 사이버 공간과 가상세계, 언어의 기호성에 대한 이해 부족과 거부감을 안고 있다. 그들 중에는 ‘디지털 시’를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기계의 시로 착각하고 있는 시인들도 있다. 그런 시인들에게 디지털 시와 하이퍼텍스트 시의 넓은 공간과 새로운 감각을 이해시키는 일은 어쩌면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파는 일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21세기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호흡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시간이 경과하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터넷의 세계는 현대인의 정신을 정주(定住)에서 이동(移動)으로, 삶의 공간을 지역공동체에서 네트워크 공동체로 변화시키고 있다. 탈-중심은 다양한 가치의 세계 속에서 어떠한 대상과도 서로 융합하고 소통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런 현상은 언어예술의 세계에도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다. 따라서 현대 시인들은 과거시제의 ‘관념의 집’에서 나와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는 디지털 시와 하이퍼텍스트의 공간을 향해 유목민처럼 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시점에서 볼 때,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삼는 문학은 미지의 텍스트의 세계로 떠나가는 예술적 여정에서 다른 예술보다 뒤처져 있다. 언어의 의미성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문화의 집적(集積)인 언어의 의미성이 새로운 텍스트의 원천이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344    詩와 기호(記號) 댓글:  조회:4287  추천:1  2015-02-18
                             시와 기호(記號)                                                                         심 상 운     1. 사물을 대리하는 기호의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처음 제창한 사람은 파블로프(1849-1936, 러시아의 생리학자)이다. 그는 개에게 먹을 것을 줄 때마다 벨 소리를 들려주면 개에게는 벨 소리가 먹을 것 또는 식사의 기호가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을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에서 ’조건반사‘라고 한다. 그는 이 조건반사를 1차 신호계라고 하고, 자연언어와 그 내용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 가지 반응을 제2차 신호계라고 명명했다. 이 기호는 그 형식적 특징에 따라 아이콘(icon:유상기호, 어떤 대상의 畵像 따위), 인덱스(index:지표기호, 화살표 등으로 무언가를 지시하는 경우), 심벌(symbol:상징기호, 약속된 기호로서 그 대표적인 것이 자연언어임)의 3종으로 분류된다. 20세기 대표적인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 스위스, )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예컨대, ‘남을 가르치는 사람’을 한국인들은 선생(교사)이라고 하고 미국인들은 티처(teacher)라고 하고 중국인들은 라우스(老師)라고 발음하는 것이 그 근거다. 따라서 언어를 기호의 구성체계로서 실질적인 의미부분과 자의적인 기호부분으로 분리하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2. 문덕수(시인, 예술원회원)는 그의 시집 『꽃먼지 속의 비둘기』(2007,7,30, '시문학사')에 게재한  대담형식의 시론「한국시의 동서남북 (Ⅱ)」에서 한국 현대시의 실험시(탈관념 시. 디지털 시, 기호시)의 근거를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찾아내고 있다. 다음은 그 글의 일부다.    소쉬르의 기호학은 사물의 본질을 사물자체에서 찾는 실체론(實體論)을 관계론(關係論)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입니다. 기호학이나 기호론이 시쓰기에 미친 영향을 몇 가지로 요약해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시의 실험적 모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초론이 될 것입니다. 첫째, 시의 대상이나 주체에 집착했던 태도를 떼어내어,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게 됩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무엇입니까. 대상과 주체와의 사이에 있는 매개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기호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과 소쩍새와의 관계(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미당), 다시 말하면 사물의 생성에 있어서 사물 상호간의 ‘인과’와 같은 것이 아니라, 대상과 주체 사이에 있는 기호나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는 관점에서 언어학을 구성했는데, 그 의미작용이 다름 아닌 기호(sign)의 작용이 아닙니까. 소쉬르가 말하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과 의미되어지는 것(시니피에)이라는 두 가지의 관계에 의해서 된 것이 바로 언어기호입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관계의 시스템에서 구성된 것입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은 사물의 실체나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보다는 ‘관계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실체보다는 그 관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구조주의 언어학이 발생했습니다. 실체에 대한 인식이 실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시점(視點)― 시점도 관계 형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실체도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론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매개적 존재’(기호)를 강조하게 됩니다. 시론에서 사물이나 주체보다는 그 사이의 매재(媒材) 즉 기호를 중시하게 된 것은, 시에 있어서 언어실험이나 실험적 모험을 촉진하고, 그러한 혁명적 작업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입니다. 둘째 언어기호나 기호는 실체를 가지지 않습니다. 앞에서 소쉬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언급했습니다만, 언어기호의 이러한 관계도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언어기호 자체도 형식(形式)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의 방법론을 중시하는 시의 형식주의 이론의 근거도 바로 관계론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미 상식화된 예입니다만, 산의 소나무를 보고 “저것이 소나무다”라고 언표해도, 산에 있는 소나무 전체를 추상적으로 지시하고, 그 의미가 어느 한 그루의 소나무에 부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소나무’라는 기호는 소나무A, 소나무B, 소나무C를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학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호가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버철화(virtual化)한다는 사실의 근거입니다.     라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3. 소쉬르의 ‘기호학’에 따르면, 실체를 가지지 않는 매재(媒材)로서의 언어기호는 현대시에서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음악의 ‘소리’ 나, 회화의 ‘물감’ 같이 사용됨으로써 사실과 다른(관계없는) '언어의 독자적인 공간'을 열어준다. 예를 들면, “나는 태평양을 구겨서 주머니에 넣었다./주머니에서 붉은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방금 수평선을 넘어간 태양이 흘린 피다.” 라고 했을 때, 이 텍스트는 어떤 의미(관념)나 사물(실제)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영역은 회화에서 추상화(抽象化)가 차지하고 있는 순수한 상상에 의한 선과 색채의 영역과 다르지 않다. 이 텍스트에서 ‘태평양’이란 기호에는 실제 태평양의 이미지가 들어 있지만, 텍스트 속의 태평양은 하나의 기표(시니피앙)일 뿐, 실제의 태평양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어느 상점의 간판이 ‘백두산 문방구’라고 했을 때, 문방구는 실제와 관련이 있지만 문방구를 수식하는 ‘백두산’은 실제의 백두산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기호일 뿐이다. 실제와 관계가 없는 기호라는 것은 언어가 의미와 실체의 속박과 간섭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기호는 고정된 의미가 없어서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도 같다. 그래서 이 기호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를 제2의 실재(實在)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 미당(未堂)의 대표시「동천(冬天)」을 예로 들어 보자.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미당「동천冬天」전문     이 시의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들도 실체와 관계없는 기호화된 언어다. 따라서 시인의 상상(심리적 이미지, 형이상학적 판타지)은 상상 자체일 뿐, 실제의 사실과는 전혀 상관을 맺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의 가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영상세계 그 자체를 맛보고 즐기는데서 더 찾아질 수 있다. 이 시는 그런 면에서 제2의 현실이라고 하는 디지털의 사이버 세계와도 맥이 닿는다. 따라서 이 시에서 어떤 의미를 발굴해 내려는 평론가들의 시도는 시를 관념화(고정화)시키는 불순한 작업이 될 뿐이다. 오남구의「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을 읽어보자.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2연     실체의 세계(물, 사물)와 별도로 독립되어서 언어의 기호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현대시의 현상(現象)은 초현실주의에서 주장하는 ‘오브제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컴퓨터가 열어 놓은 사이버 세계라는 제2의 생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상(virtual)의 세계는 현실과 경계선이 모호한 세계가 되었고, 그 범위가 무한히 넓어지기 때문에 ‘기호시’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론’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의 시는 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심리적인 이미지’나 ‘언어놀이(유희)’로 확대되기도 한다.「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에서 공과 햇빛이 만들어내는 동영상 이미지는 만화영화(漫畵映畵)의 한 장면 같다. 공과 햇빛에는 어떤 의미도 들어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시 속에서 캐릭터(character)의 역할을 하면서 상상의 재미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현실의 소멸과 새로운 현실의 탄생이라는 순수한 언어의 기호가 창조해내는 가상공간의 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유인한다.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있다. -------심상운 「물고 기 그림」전문     이 시에 대한 정신재(문학평론가)의 견해(2007년 4월호 월평「실재 모색하기」) 에는 현대시의 영역 확대라는 공간이 들어 있어서 주목된다. 다음은 그 글의 인용문이다.   디지털 사회에서 시인은 시가 가지는 쾌락적 기능을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인이 20세기 상황에서와 같이 스타로 군림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래서 시인들은 21세기 사람들의 입맛을 찾아 다양한 모색을 시도한다. 소비경향의 글쓰기를 시도하고, 산문의 몸짓을 선보이며, 의식과 무의식을 빠른 동작으로 오가기도 한다. 그리하여 시에서도 놀이가 전개된다. 이들 놀이는 의미를 찾고, 영혼을 고양시키고 실재를 모색하는 흔적 찾기의 놀이가 될 것이다. 심상운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이용하여 존재와 상황 간의 가로지르기를 하고 있다. ‘그’는 물고기를 촬영하고 있고, 물고기처럼 자연스런 흐름을 타고 있다. ‘나’는 그가 촬영한 그림에 새를 넣고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를 회상한다. 나는 “오전 10시 30분”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다“. 여기서 물고기는 극화된 화자이고,‘그’는 극화되지 않은 화자이며, ‘나’는 시인의 생각을 대리하는 제2의 함축적 작가가 된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흐르는 이미지는 물고기이며, 새이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새는 공중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는 존재이다. ”설경 속“이라는 공간을 ‘그’는 기차여행을 하고,‘나’는 버스여행을 한다. 심상운은 극중 공간과 회상 공간과 현실 공간을 설정하여 놓고 놀이를 시도한다. 이런 놀이는 대비된 공간을 자유롭게 가로지르기 하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이는 자유 연상법을 슬로비디오로 형상화하여 놓은 것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에서 오락 게임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하여 사람들을 중독에 빠뜨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가 더 이상 진리를 핑계로 한 상아탑에 갇혀 있을 수만 없다. 진리가 상아탑 안에만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진리는 가까운 일상에도 있고 , 먼 우주에도 있는 법이다. 심상운은 그러한 진리를 찾아 때로는 물고기가 되고, 때로는 새가 된다. 그는 ‘설경 속’과 같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있으며,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로이 오가는 꿈꾸기를 시도 한다.(생략) 작가들은 실재를 모색하기 위해서 해체나 가로지르기의 방법을 동원하였고, 이전에 경계 지어졌던 가치관을 허물고 탈경계를 모색하게 된다. 시 역시 각 시대에 걸맞는 양식을 가지고 발전되어 왔고, 현대인의 심리나 정서가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라고 하면서 그는 현대시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4. 2007년 여름, 한국 영화계에는 관객 800만을 동원한 심형래의 SF영화 가 뜨거운 시비(是非) 속에 많은 화제를 뿌리면서 관객들에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에 대한 시비의 원인은 가 영상(컴퓨터 그래픽의 판타지)에 비해서 스토리의 짜임이 부족하고 작품성이 떨어지는 영화라는 평론가들의 지적에서 비롯되었다. 평론가들은 순수한 영상보다는 서사성과 관념(주제의식)을 중시한다. 의미가 불확실한, 맹목적(盲目的)에 가까운 영상에 대해서 그들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이런 그들의 자세는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언어, 순수한 기호로서의 언어, 맹목적인 가상(virtual)의 세계(하이퍼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는 관념의 비유적인 표현, 의미의 표출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무장한 독자나 시인이나 평론가와 비슷하다. 그들은 관객이나 독자들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능동적으로 작품에 참여하여 스토리(관념의 표출)보다는 영상(이미지)을 즐기고, 그 영상의 빈자리에 자신들의 상상을 넣는 ‘참여행위’가 새로운 시대의 영화와 시를 창조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지나친 상상일지 모르지만 심형래의 파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 시(기호시)’의 파동을 예고하는 전주곡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에서 인생론이나 교훈, 형이상학적 지향도 높은 가치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미 철학이나 도덕·규범 등에서 말해진 것들이다. 따라서 현대시를 언어예술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고정관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들은 창조성이 결여된 언어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현대시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시(문덕수,『오늘의 시작법』2004, 개정판 )-   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언어의 밑바닥을 투명하게 응시하면서 ‘기호시의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343    하이퍼시와 젊은 시 운동 댓글:  조회:4234  추천:0  2015-02-18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형태를 추구하는 젊은 시 운동-‘하이퍼시’ -기존관념에서 해방, 자유로운 상상력의 발현, 우주적 개안開眼                                                                                    심 상 운   「시문학」에서 2008년 5월부터 2009년 7월까지 4회에 걸쳐 특집으로 엮은 김규화, 오남구, 심상운의 60편, 2009년 11월부터 2010년 2월까지 3회에 걸쳐 기획특집으로 발표한 57편(참여시인 19명)을 비롯하여 하이퍼시 운동의 추진력으로 작용한 이슈의 숲길 과 , , 등은 21세기의 감각과 문화현상에 대응하여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형태를 추구하고 구현하려는 젊은 시 운동의 치열한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하이퍼시는 한국현대시를 오래 동안 지배해온 단선구조의 틀을 다선구조의 틀로, 시인의 독백적 서술을 객관적 이미지로, 정적 이미지를 동적 이미지로, 시인을 시의 주체에서 이미지의 편집자로, 고정된 관념에서 다양하게 확산되는 상상으로, 읽고 생각하는 시에서 보고 감각하고 사유하는 시로 바꾸어보려는 현대시의 개혁운동이다.   이런 개혁성으로 인해서 하이퍼시는 고정관념에 묶여 있는 일부 시인이나 독자들에게 당혹감과 거부감을 안겨주고 ‘소통疏通의 단절, 자기들만의 만족’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이퍼시의 이론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인들과 독자들의 호응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것이 추세趨勢다. 이 호응에는 젊은 감각을 선호하는 독자들과 시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일상생활에 밀착된 사실적인 이미지와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이미지의 뒤섞임을 즐기고자 한다. 이 뒤섞임은 그들에게 관념이나 의미를 넘어선 비약飛躍의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경향傾向은 과거의 인습적인 사유나 관념에 대한 거부,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이고 환상적인 디지털의 감각을 선호하는 현대시의 변화로 파악된다.   변화는 하이퍼시의 생명이다. 이제까지 하이퍼시는 영화의 몽타주 기법과 같은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시구조의 바탕으로 하였다. 그래서 장면을 연결하는 링크를 당연한 기법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하이퍼시의 특징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링크를 답답하게 여기고 링크를 클릭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과격한 성향의 텍스트도 등장하고 있는 것이 하이퍼 시의 현장이다. 나는 ’상상의 클릭‘이라는 개념을 하이퍼시에 넣어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하이퍼시의 기법은 컴퓨터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난 독립적인 현대시의 기법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텍스트를 빼고 하이퍼시로 명칭을 정한 이유의 일부도 거기에 있다.    2006년 나는 라는 시론에서 ‘디지털 감각’ ‘가상현실(virtual reality)’ ‘모듈(module)’, ‘샘플링(sampling)’ 등의 용어를 검증절차 없이 과감하게 디지털 시의 이론에 도입하여 시인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보여주기(showing)의 ‘디지털 감각’이나 ‘가상현실’은 개념의 일반화 과정에 들어간 것 같으며, 모듈 이론은 하이퍼시에서 리좀 이론으로 언어만 바뀌었을 뿐, 그 중심개념은 그대로 살아있다고 생각된다. 샘플링 즉 견본추출이라는 개념도 ‘시와 현실의 관계’를 논의할 때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탈관념, 링크, 클릭 등의 용어도 현대시의 이론 속에 흡수되어서 새로운 기법의 용어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탈관념은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워지자는 것이지, 시에서 관념을 아주 없애자는 무관념이 아니다. 기존관념에 집착하지 않을 때 더 큰 세계가 열리게 된다. 그것이 살아 움직이는 탈관념의 세계이며, 현실과 상상이 결합된 새로움으로 가득한 하이퍼(hyper)의 세계다. 따라서 하이퍼시에서 중요한 것은 기존관념으로부터 과감한 탈출과 창의적인 상상력의 발현이다. 거기에는 우주적인 개안開眼이 들어있다.    
342    하이퍼시와 포스트 구조주의 댓글:  조회:3981  추천:0  2015-02-18
    하이퍼시와 포스트 구조주의                                                                                      심 상 운     1,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   구조주의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S/Z』(1970)에서 이음, 노드, 네트워크,다중 경로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미지들의 덩어리들(그의 말로는 lexia)로 구성된 이상적인 텍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이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네트워크는 다양하고 상호작용적이며, 그들 중의 어떤 것도 다른 나머지를 초월할 수 없다. 이 텍스트는 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지 기의(signified)들의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시작도 없다. 그것은 뒤집을 수 있다. 우리는 그것에 여러 입구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자기가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그것이 동원하는 부호들은 눈이 미치는 한 확장된다. 그 부호들은 결정 불가능하다."   그의 말은 텍스트의 의미에 내재적인 통일성이 전혀 없는(다양한 언어가 기표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그가 상정한 이상적인 텍스트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을 하이퍼시에 대입할 때‘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미지들의 덩어리들)’이란 말과 함께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을 예리하게 집어낸 것 같아서 놀라움을 준다. 초기 구조주의에서 랑그를 말하면서‘저자의 죽음’을 지적한 바르트는 포스트구조주의에서는 독자들이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과 독자들은 저자가 깔아놓은 기의에 구속되지 않고 텍스트의 의미부여과정을 자유롭게 개방하고 폐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론을 내세운다. 그것은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만든다. 그것은 또‘진리’나‘실재’에 대해 위압적인 강요를 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언어에 대한 반발로 초기의 구조주의에서 전환된 1970년대의 포스트구조주의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이퍼시와 비하이퍼시의 기본적인 차이는 비선형/ 선형, 비순차/ 순차, 다선구조/단선구조라는 대조적 형태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 등 전통적인 시의 구조가 배제 되고, 새로운 연결구조가 성립된다. 그 구조는 독자들의 생각을‘의미(정해진 정보)’로부터 벗어난 상상의 네트워크로 퍼져나가게 하는 구조다. 그 속에는 어떤 정해진 중심 즉 기의(記意)가 없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은유의 시가 아니고 환유(換喩)의 시 즉 기의(記意)가 아닌‘기표(記票)의 시’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그래서 저자에 의해 정해진 순서와 기의(記意)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기표(記票)만으로 끝나는 하이퍼시에서 당황한다.   하이퍼시의 기본구조는 이미지의 마디들 속에 산발적으로 퍼져있는‘이음(link)’에 의해 연결되는‘마디(node)들의 집합(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그 마디들은 한 단어 또는 몇 개의 단어일 수도 있고 독립된 이미지 또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마디들은 의식과 무의식이 섞여있는 의식의 흐름으로 형성된다. 이 흐름은 리좀의 선(line)과 같은 개념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무엇을 무엇과 연결시키며 어떤 상상이 다른 상상의 앞에 나오거나 뒤따라오는지를 결정하는데, 독자의 자유가 훨씬 더 많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이퍼시의 구조는 다양한 방법을 수용하고 정해진 경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무경계(상상의 무한한 생산과 확산)의 구조’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가들(들뤄즈, 가타리)이 말한 '선(단선)의 횡포로부터의 해방'과 상통한다. 선으로부터의 해방은 혼란스러움을 수반하지만 인간의 사고과정(思考過程)을 닮았다는 점에서는 기승전결의 논리성보다 자연에 더 가깝게 인식된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전통적인 시에서와 같이 메시지(주제, 관념)를 중시하지 않는다. 기의에서 벗어나서‘이미지의 덩어리’를 감각하게 하는 하이퍼시에서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메시지를 말할 수 없다.   2. 하이퍼시와 리좀의 관계   하이퍼시의 다선구조는 리좀 이론과 관련된다.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작가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년 1월 18일 ~ 1995년 11월 4일)는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1930〜)와 하이퍼텍스트의 수평적 구조를 표현하기 위해『천 개의 고원』(1980년)에서 하나의 새로운 은유를 제안하는데 그것은 바로 리좀(rhizome)이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전적으로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뿌리나 곁뿌리를 가진 식물들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보면 리좀 형태를 하고 있을 수 있다. 두더쥐 굴 같은 것도 그것이 가진 서식, 식량조달, 이동, 은신, 출몰하는 기능에서 보자면 리좀이다. 리좀 그 자체는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감자나 개밀(couchgrass)에서 잡초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가장 좋은 것에서 가장 나쁜 것까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리좀, 즉 사방으로 펼쳐지는, 중심이 없는 뿌리줄기식물(박하나무, 풀들)은 뿌리를 중심으로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위계적으로 조직화된 나무뿌리들과는 상반된 구조를 보여준다. 이런 리좀 적 구조를 제시하면서 들뤄즈와 가타리는 그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개념을 표출하고 있다. "글쓰기는 의미작용(signifying)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영역을 측량하고 그곳의 지도를 만드는 것과 관계한다." 는 말이 그것이다. 그리고 『천 개의 고원』의 형식으로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에는 이 책의 형식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이 책은 장(章)이 아니라 "고원들"(plateaus)로 이루어져 있다. 맨 마지막에 읽어야만 하는 결론을 제외하고는, 이 고원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서로 독립적으로 읽힐 수 있다." 따라서 리좀의 제시는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와 책의 개념을 통해서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로고스의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도의 표출이라고 생각된다.『천 개의 고원』에서 리좀의 특성을 보여주는 여섯 가지 원리는 다음과 같다.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principles of connection and erogenity)  다양체의 원리(principle of multiplicity)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principle of asignifying rupture)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principles of cartography and decalcomania)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   "리좀 체계 내의 어떤 점이든 다른 점과 연결될 수 있고 연결되어야 한다." 리좀은 구조상 반위계적이다.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모든 점들은 연결되어 있고 또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고,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은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 놓은 공간을 통과하는 모든 독자들은 새로운 경로를 찾는 탐험가, 미개의 땅을 찾아가는 모험가, 미지의 것에 대한 예언가의 경험을 하게 된다. 하이퍼시의 마디들(이미지)의 연결도 이와 같은 효과를 위한 것이다.    다양체의 원리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갖지 않는다. 다양체는 결정들(determinations), 크기들, 그리고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차원은 그 단계가 높아지기 위해 다양체의 본성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나의 모임(assemblage)은 정확히, 그 연결이 증가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 다양체의 차원들의 이러한 성장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 속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점들이나 위치들(positions)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이 이론은 하이퍼시는 위계적 구조가 강요하는 각각의 마디에 대한 고정된 해석을 거부하고 하나의 마디를 관통하는 다양한 선들(이미지)과 그 선들의 집합(이미지 덩어리)이 빚어내는 새로운 세계와 감각을 중시한다는 것과 연결된다.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   "리좀은 어느 한 지점에서 끊어지거나 산산히 부서지더라도 예전의 선들 중의 하나나 또는 새로운 선들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구절은 모든 리좀은 층을 만들고, 영토를 만들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는 선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또한 끊임없이 달아나는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선들이 파생될 때마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이퍼시 속에도 의미작용을 하는 이미지와 의미작용을 거부하는 이미지들이 섞여 있다. 이 두 이미지들은 단절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한다.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원리 5, 원리 6>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지도를 갖고 길을 찾아가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우리는 지도를 찢어서 다닐 수도 있고, 거꾸로 뒤집어서 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자기에게 필요한 새로운 정보나 기호를 그 위에 덧붙여 기록해 넣을 수도 있다. 여기서 지도는 실제 세계와 계속해서 맞닿는다. 지도는 그 자체가 리좀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다양한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리좀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지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와 맞닿아 있다. 지도는 벽에 그려질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구상될 수도 있고, 정치적 행동이나 명상의 일환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 리좀의 원리에서 현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지도(map)의 이미지는 가상공간을 바탕으로 하는 하이퍼시의 발상원리와 접합된다. 하이퍼시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덩어리지만 현실과의 관계 속에 생명력을 얻는다. 그리고 시인과 독자의 관계를 암시한다. 시인이 지도를 만들어 내지만 지도(가상현실) 속에서 독자와 시인은 동반여행자가 되기 때문이다. 지도는 스스로의 내부에 갇혀 있는 무의식을 복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구성해 내고 창조한다. 지도의 에너지는 현실세계와 접점을 이루는데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의 공간 속에 재현하여 수행(performance)함으로써 더 큰 에너지가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포스트구조주의의 들뤄즈와 가타리의 리좀 이론은 하이퍼시의 창작이론과 상통하는 접점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리좀의 이론은 하이퍼시 창작에 많은 영감과 동력을 제공한다. 컴퓨터의 하이퍼텍스트 원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컴퓨터에서 벗어나서 독자적 형태를 취하고 있는 하이퍼시의 에너지는 의식의 흐름, 탈-관념, 다선구조, 가상현실(상상과 공상의 공간), 기표, 등을 바탕으로 한 새롭고 다양한 감각과 상상의 무한한 확대에서 분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구조를 통합하고 변화시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은유, 상상과 추리, 수평적 공간이동의 사상과 합치된다. 하이퍼시의 마디(node)를 리좀에 대한 논의와 연결지어보면 그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리좀이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로고스의 이념을 실현하는 어떤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한 비유라면, 하이퍼시는 그러한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환유(기표, 이미지의 덩어리)로 인식된다. 하이퍼시에서 링크는 환유의 수평이동이다.   3, 하이퍼시와 무의식의 관계-자크 라캉의 무의식에 대한 이해  하이퍼시의 중심에는 의식의 흐름이 놓여 있다. 이 의식의 흐름은 의식과 무의식의 뒤섞음이 만들어내는 이중 삼중의 다차원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시간의 질서도 바꾸어 놓는다.그리고 기표와 기의의 관계, 무의식의 기표, 기표의 미끄러짐,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 등은 하이퍼시를 창작하는 데만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의식을 이해하고 즐기는 중심요소로 작용한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이론에서 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철학에서는 그에 대한 이해는 현대철학의 관문통과 의례라고도 한다.)   20세기 중엽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스트로스, 바슐라르 등과 더불어 활동한 그는‘구조주의 정신분석학’의 대표자로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적 맥락에서 새롭게 재창조했으며, 거기에 인간존재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성찰을 가미함으로써 후기구조주의 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주체를 지배하는 무의식( unconsciousness)   무의식(unconsciousness)은 프로이트 학파에서 사용하는 정신분석의 용어로, 의식적인 자각을 할 수 없거나 의식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사고, 기억, 욕망 등을 가리키는 마음의 세계이다.   “자크 라캉은 S. 프로이트를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해서 무의식이 언어적으로 구조화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인의 말이 특히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에서 동시에 두 수준에서 작용한다고 본다. 개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말하지만, 동시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전혀 다른 것을 무의식적으로 얘기한다고 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주체는 '코기토'(cogito:생각하는 나)에 의해 구성된다. 이때 의식적·반성적 주체가 자아라면 다른 하나는 누구인가? 라캉은 이 다른 하나를 무의식이라고 본다. 그는 무의식이 언어처럼 은유와 환유의 체계로 구조화해 있다고 본다. 이 무의식은 한 개체 안에서 그를 이끄는 타자(他者)이다. 이 타자는 자아에 앞서서 얘기하며 자아의 욕망을 통제한다. 개인들은 자신이 행위하고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구조가 말하게 하고, 행위하게 하고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브리테니카 백과사전에서 부분발췌) 이런 사유는 인간을 이성과 주체로 정의했던 서구 사유의 전통(데카르트의 명제)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의 발견이란 의식 속의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인식이다.의식적인 나는 무의식의 나를 모르지만 무의식의 나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이 의식적 나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이 ‘무의식의 나’로 인해 인간은 원초적으로「분열증」환자가 된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주체(나)가 의식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로 갈라진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은 분열적 존재임을 증명한다.   라캉에 의하면 유아기(생후 6개월에서18개월 사이)의 아이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는에 있는 존재이다. 아이는 의식의 거울에 나타나는 파편화된 자아의 이미지 속으로 어떤 통일성을 투사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아이는 하나의 ‘허구적인 이상’ 즉 자아를 만들어 낸다. 라캉은 이 세계를 상상계라고 한다. 이 상상적 경향은 아이가 자란 후에도 계속된다. 그러나 언어를 배우면서(언어의 바다 속에서) 아이의 의식 속에는 상징의 세계가 펼쳐진다.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 즉 타자(他者)는 어린아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옮겨갈 때 어린아이의 무의식에 자리 잡는 언어, 기표의 세계다. 어린아이는 상상계의 달콤함과 환상을 포기하는 대신 상징계 안에서 인간으로서, 주체로서 일어선다. 그래서 타자란‘나와 남’을 분별하는 상호주체성의 장이기도 하다. 상징계에 들어서는 동시에 개인들의 무의식에는 상호주체성이 각인된다. 상호주체성이라는 말 속에는 바라봄과 보여짐이라는 두 개의 주체가 있다. 보여짐을 모르는 주체는 상상계인 에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대상을 실재로 믿고(동일시함)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소외된 나르시즘의 신경증환자에 해당된다. 이 고착에서 벗어나 상징계로 이행할 때, ‘나’는 바라봄과 보여짐의 두 가지 의식을 갖게 되고, 대상이 허구임을 깨닫고 다시 또 연기된 대상을 향해서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계와 상징계의 차이가 이성에 환상을 개입시키는 작용을 함으로써 인간은 현실적인 면과 비현실적인 면을 공유하게 된다     무의식의 한 가운데에는 욕망(desire)이 자리 잡고 있다. 욕망은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에서 생긴 것이다. 결핍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 형성되는 인간의 원초적 조건에 의해서 발생한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최초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기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는다. 따라서 라캉은 욕망이 지향하는 곳은 어떤 분열(결핍)도 없는 미지의 ‘신화의 세계’라고 한다. 의식 속에는 욕구(need)와 요구(demand)가 들어 있다.  욕구는 사물들을 향하지만 요구는 사람들을 향한다. 어린 아기는 장난감을 욕구하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엄마의 사랑을 요구한다. 욕구와 요구는 합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간극이 생긴다. 라캉은 욕망과 욕구 사이에 ‘충동(pulsion)’을 넣는다. 충동은 욕구와 유사하지만 ‘성애적(性愛的)’ 모양을 띤다는 점에서 욕구와는 다르게 해석된다. 이 성애적(性愛的)충동은 예술적 에너지의 원천되기도 하는데, 작가에 따라서 작품의 내면에 잠재되기도 하고 표면으로 솟구치기도 한다.     욕망은 영원한 그리움(결핍에 대한 충족희망)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시인이 시를 창작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번뇌의 원천이기도 하다. 욕망의 허상을 실재라고 믿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욕망은 위험해진다. 그러나 자신의 시선 속에 타인을 억압하는 욕망의 시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 좀 더 쉽게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집착하는 대상이 허상임을 스스로 인식할 때 집착에서 해방된다. 따라서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와의 만남’은 스스로가 욕망하는 주체임을 인정할 때 열리는 정신의 자유로운 경지이다. 그것은 불교경전『금강반야바라밀경』의 끝부분 “일체의 함이 있는 것들은 /꿈과 허깨비와 거품과 그림자 같으며/이슬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와 상통한다.   라캉의 언어관   꿈은 억압된 욕망들의 배출구라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라캉에 의해 재해석된다. 그는 왜곡되고 수수께끼 같은 꿈의 현상이 은유와 환유라는 기표의 법칙에 따른다고 한다. 기호에 대한 라캉의 설명에 의하면 기의는 ‘떠 있는’ 기표 밑에서 계속 ‘미끄러진다’. 그의 이론에는 왜곡되지 않은 기표들은 없다. 그의 정신분석은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라는 점에서 구조주의의 객관성과 부합된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먼저 기표들의 장(언어의 법칙)이 존재하고, 각 개인의 무의식이 그 언어법칙에 따라 작동한다는 라캉의 언어인식은 의식으로부터 기의가 생기고 기의를 나타내기 위해 기표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현상학적 언어인식(선관념후사물)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캉에게서는 소쉬르에게서처럼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 대응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전제 위에서 활동했던 소쉬르와 기표와 기의의 ‘미끄러짐’에 대해 이야기한 라캉 사이의 합치될 수 없는 지점이 생긴다.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에게는 기표/기의의 대응관계가 성립하며 때로 그 관계를 일탈하는 경우들이 존재하는데 반해 라캉에게는 기표와 기의는 처음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캉은 기표들의 무의식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기의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의는 끝내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기의가 숨어 있다는 것, 기의는 언어가 포획할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 그 곳은 상징계를 넘어선 실재계라는 것이다. 인간은 기표라는 껍데기를 사용하면서 그 껍데기에는 약속된 기의가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따라서 눈앞에 실재하는 것은 기표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시가 지리 잡는 곳도 기표의 이미지다.   인간의 의식이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은 라캉이 시도한 프로이트의 재해석이다. 그에 의해 욕망은 환유의 기표로 부상(浮上)한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기표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계속 지연시키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지칭하는 뜻으로 차연(Différance)이란 용어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것은 지연시키다(to defer)와 차이짓다(todiffe r) 두 개의 단어를 결합해 만든 단어다. 대상은 실제처럼 보이지만 허구일 뿐이다.따라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기의의 심연’이 놓이게 된다. 불교에서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으로 뜻을 전한다는 염화시중(拈華示衆)도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를 대변하는 예가 된다. 라캉이 정신분석의 과정을 거쳐 무의식의 세계에서 인식한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 관계는 하이퍼시에서 이미지와 대상과의 관계와 같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대상의 기표로서 고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341    하이퍼시와 형이상시 댓글:  조회:4226  추천:0  2015-02-18
  하이퍼시와 형이상시의 결합을 위한 시론試論                                                                                    심 상 운   1. 현대시에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요소는 예술적 감흥을 고양시키는 효과를 드러낸다. T. S.엘리엇은 문학평론
340    하이퍼시와 무의미시 댓글:  조회:4399  추천:0  2015-02-18
  하이퍼텍스트 시 들여다보기 - 심상운의                                                                      이 선       밤 12시 05분. 흰 가운의 젊은 의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을지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40대의 사내. 눈을 감고 꼬부리고 누워있는 그의 검붉은 얼굴을 때리며 “재희 아빠 재희 아빠 눈 떠 봐요! 눈 좀 떠 봐요!“ 중년 여자가 울고 있다. 그때 건너편 방에서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   그는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을 꺼내 후끈후끈한 수증기가 솟구치는 찜 통에 넣고 녹이고 있다. 얼굴을 가슴에 묻고 웅크리고 있던 밥 덩이는 수증기 속에서 다시 끈적끈적한 입김을 토해 내고, 차 갑고 어두운 기억들이 응고된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던 밥의 가슴도 끝내 축축하게 풀어지기 시작한다. 푸른 옷을 입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그는 나무젓가락으로 밥의 살을 찔러 보며 웃고 있다.   이집트의 미라들은 햇빛 찬란한 잠속에서 물질의 꿈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미라의 얼굴이 검붉은 색으로 그려진 둥근 무화과나무 목관木棺의 사진을 본다. 고대古代의 숲 속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의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니는 오전 11시.   ― 심상운, 「검붉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전문     심상운의 시 은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입각하여 쓴 새로운 시 쓰기 방법을 모색한 시다. 심상운 시인은 컴퓨터의 모듈(module)과 리좀 용어를 시론에 도입하여 하이퍼텍스트 시의 정의를 새롭게 하였다. 아직 하이퍼텍스트 시론은 학계의 학문적인 검증을 거쳐야 하고 더 연구하고 발전할 과제가 많지만 심상운 시인은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증명할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 위하여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도 그의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심상운의 시 에 나타난 하이퍼텍스트적 요소를 살펴보고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역으로 추정해 보고자 한다.   하이퍼텍스트 이론은 컴퓨터 용어인 하이퍼와 텍스트를 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오도르 넬슨이 만든 말이다. 미국작가 조지 피 랜도(George P. Landow)의 저서 『Hypertext』(1992)에서 유래된 문학이론이다. 하이퍼링크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용어를 문덕수 시인이 시에 처음 도입하였다. 컴퓨터의 링크는 기존의 텍스트의 선형성, 고정성, 유한성의 제약을 벗어나 마음대로 검색할 수 있다. ‘건너뛰기, 포기하기, 다른 텍스로의 이동’ 등 한 블록에서 다른 블록으로 이동하며 텍스트를 검색한다. 하이퍼텍스트는 한 편의 시 안에서 단어, 행, 연을 동시적으로 나열하여 한 공간에서 공존하게 한다. 리좀이라고 불리는 그물상태를 구축하여 단어와 이미지를 연결한다. 하이퍼텍스트의 병렬구조는 탈중심적으로 텍스트를 링크하며 무한한 상상력을 한 공간에 집합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맞게 은 3연이 각각 다른 이야기를 담은 몽타쥬 기법을 쓰고 있다. 1연은 병원 응급실, 2연은 밥, 3연은 이집트 미라, 세 개의 이야기를 짜깁기 하였다. 시적 거리가 먼 각각 독립된 이야기를 한 공간에 펼쳐 놓았다. 소설의 옴니버스 구조를 도입한 짧은 이야기는 극적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병’과 ‘밥’, ‘죽음’의 문제는 인간과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큰 관심 주제였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인생’과 ‘인간’이라는 큰 그림 속에 그려진 또 작은 세 개의 그림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작가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객관적으로 사건과 사실을 펼쳐 ‘보여주기’ 하고 있다. 그 그림에 색칠을 하는 것은 독자의 상상력의 몫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아날로그 시보다 자유로운 상상적 공간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독자는 가상현실의 플롯을 각각 다르게 상상하여 해석하고 감상한다.   ‘병원 응급실’, ‘냉동고의 찬밥’, ‘이집트 미라’는 평범한 듯 보이는 짧은 이야기지만 많은 얘깃거리를 담고 있다. 세 개의 그림은 하이퍼텍스트의 리좀 이론에 따라 다양한 얼개를 가지고 그물망을 짠다. 1연, 2연, 3연 모두 각각의 객체이지만 또한 서로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1연의 ‘재희 아빠’는 2연의 중심 주제인 ‘밥’을 구하려고 피곤한 몸으로 일에 몰입하다 큰 사고를 당했을 것이다. 또한 응급실의 ‘재희 아빠’는 통상적으로 병원 응급실 바로 곁에 붙어 있는 장례식장, 죽음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3연의 ‘이집트 미라’인 고대 인간의 주검은 1, 2연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1, 2, 3연이 본질적 인간 생활과 일맥상통하며 연계된다. 동서양을 떠나서 남자는 기본적으로 가족부양이라는 가장의 책임을 떠맡고 있다. 이렇게 한 공간 안에서 세 개의 이야기는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서로 링크되어 공존하면서 연상작용을 하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1연, ‘병원 응급실’에 실려온 ‘40대 사내’라는 객관적 사실을 가지고 시는 출발한다.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화하여 ‘보여주기’ 한다. 극한상황을 제시하여 사건을 구성한다. 그런데 2연에서 생뚱맞게 사물인 ‘밥’이 등장한다. 전혀 다른 이물질들의 결합이다. 병렬적 구조인 ‘사내’와 ‘밥’은 서로 내포적이거나 종속적이지 않으며 등가적이다. 그런데 그 밥은 정상적인 밥이 아니다.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이다. 마치 냉동고에 안치된 시체처럼 서늘한 기운이 나는 ‘찬밥’이다. 1연의 ‘사내’는 세상에서 ‘찬밥신세’로 살다가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다. 사내가 세상의 밥이었을 수도 있고 ‘세상’이 사내의 '밥‘이었을 수도 있다. 사내는 ‘재희 엄마’와 ‘재희’에겐 그들을 먹이는 밥일 수도 있다. 가족을 먹이려고 밥을 구하려고 동분서주 뛰어다니다 응급실에 실려온 것이다.. ‘밥’은 냉동고에서 찜통으로 들어가고 여러 단계를 거쳐서 녹는다. 차갑고 어두운 기억이 응고된 밥.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는 밥의 가슴. 2연의 ‘밥’은 1연의 ‘사내’와 치환되어 동일시된다. 그러나 이 또한 고정적이지 않다. 자유롭게 독자는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그것이 사물시의 장점이다.   심상운 시에서의 ‘밥’은 무생물이 아닌, 생각과 고통을 느끼며 가슴이 얼어붙은 활유화된 밥이다. ‘밥’과 ‘사내’의 아픔을 병치시켜 사내의 극단적으로 어려웠던 삶을 상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단순한 밥이 아니다. 이 ‘밥’은 먹을 수 있도록 녹기까지 상당히 복잡한 사연을 가진 밥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또한 2연은 ‘그’라는 3인칭을 써서 1연의 ‘사내’와 ‘그’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는 여지를 준다. ‘밥’의 살을 찔러보며 웃는 ‘그’는 전혀 1연과 다른 사내일 것이다. 2연의 ‘그’는 1연의 ‘사내’를 진찰하는 의사일 수도 있다. 의사는 사내를 찔러보며 관찰하고, 진찰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검진한다. 또 어쩌면 2연의 ‘그’는 관을 꺼내서 염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렇게 1연과 2연은 다초점, 다원화된 구조의 그물망을 짜서 독자에게 복잡한 리좀을 만들고 있다. ‘그’는 여러 정황적 상황과 상징성을 가지며 독자에게 상상력을 제공한다. 지금까지의 의미시보다 해석의 폭이 넓다. 이렇게 하이퍼텍스트 시는 아날로그 시의 단선구조를 다선구조로 바꾸었다. 이미지와 이미지를 링크하여 관념에 묶이지 않고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또한 그 상상력은 사실에서부터 출발한 객관화된 상상력이다.   그런데 3연은 1, 2연과 또 동떨어진 소재 ‘이집트 미라’가 등장한다. 1연과 2연과 3연은 각각 다른 이야기로 ‘낯설게하기’를 극대화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지금까지 연과 연이 결합하여 의미를 생산하던 시 쓰기 방법을 버리고 연과 연의 연결을 일부러 끊어버린다. 시적 거리가 먼 사물을 등장시켜 시적 논리와 질서를 파괴한다. 인간인 ‘사내’와 무생물인 ‘밥’, ‘사진’을 한 공간에 병렬 배치하여 같은 값을 준다. 지금까지 시의 연에서 이뤄지던 내포와 종속의 관계를 부정한다. 3연의 미라는 실제의 미라가 아니라 사진에서 본 ‘목관’ 속의 ‘미라’다. 고대의 숲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현대의 ‘5월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닌다. ‘오전 11시’라는 시간을 제시함으로써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현재성을 제공하여 실감을 더하고 있다.   1연- 객관적 사실. 2연- 객관적 사물과 상상력. 독자를 연상작용으로 유도한다. 3연- 객관적 사물인 사진. 다시 사진에서 상상력을 더하여 현재로 이동. 심상운 시인은 거실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을 보고 위의 시를 썼을 수도 있다. 시인은 벽에 걸린 이집트 미라의 목관 사진을 보면서 주검을 생각하고, 죽음은 병원응급실에 대한 심상운 시인의 사전지식인 기억과 만난다. 죽음은 다시 직업과 연결되고 직업은 밥을 구하기 위한 과정이다. 단순한 이집트 미라 목관 사진 한 장이 병원, 밥을 연상작용으로 연결하여 이야기를 꾸민 것이다. 또한 현재의 ‘새소리’를 등장시켜 화자인 시인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과 공간으로 돌아온다. 흡사 영화의 회상 기법처럼 현재와 과거를 넘나든다. 사진을 ‘본다’는 작은 사실에서 출발하여 ‘바라본다 - 관찰한다 - 상상한다 - 이야기를 조립한다 - 뼈대를 세운다 - 꾸민다’는 시적 발상과 완성까지, 시 쓰기의 전 과정을 심상운 시인은 여과 없이 시로써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눈을 감고 상상력의 가지를 뻗어 ‘무화과나무 목관- 무화과나무 숲- 숲에 사는 고대의 새-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새소리- 현대 청계산- 오전 11시의 화자인 나’까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연상을 한다. 시간과 공간, 인간과 사물에 같은 값을 주고 병렬 배치한다. 사진에서 생물과 사건이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상상력의 줄기를 잡고 우주 끝까지 연상작용을 하는 상상력을 중시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논리성을 파괴하며 무의미를 추구한다. 논리를 버리고 의미찾기를 버린다. 연과 연의 연결고리를 일부러 끊어버린다. 연과 연의 지시, 명령을 받지 않은 언어는 상상력의 폭이 넓어져 독자는 감각적이며 청량한 정서적 미의식을 경험한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시는 사물시의 본질, 사물에서 파생된 상징과 본질적 이미지와 만나게 된다. 2연의 ‘밥’처럼, 밥이라는 사물은 일과 직업이라는 묵계된 상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찬밥’을 녹이는 과정은 ‘찬밥’이 아웃사이더 인간을 의미하는 단어로 변이된 것처럼 굳어버린 변형된 의미체계나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 또한 ‘병원 응급실’과 ‘미라’도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학습된 섬뜩한 무서운 이미지가 독자에게 연상작용을 하여 상상력을 증폭시킨다. 독자는 상상력의 범주를 넓혀 1, 2, 3연을 조합하여 극적으로 사건을 만들고 이야기를 꾸민다. 스스로 사건을 구성하는 토대는 경험과 지식, 극적구조물을 짜는 능력에 따라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이것이 하이퍼텍스트 시가 추구하는 텍스트의 명령과 지시, 패턴에 얽매이지 않는 시 감상의 매력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무의미를 추구한다. 무의미한 단어와 무의미한 사실들을 혼합시켜 미술의 표현기법처럼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보는 것이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처럼 독립된 연과 단어를 나열하여 독자가 각기 다른 감상을 할 수 있도록 상상력의 여지를 남겨주는 것이다. 각각의 연들은 병렬적으로 널브러져 있지만 서로 말을 하고 연관을 갖는다. 리좀이 되어 단어와 이미지들이 그물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의 모듈(module) 이론은 최소 독립된 단위인 단어들이 연속적으로 연계되어 한 공간에 나열된다. 그 단어나 문장, 연은 바꾸거나 버려도 전체에 전혀 영향을 미치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모듈 이론이다. 교환 가능한 이미지, 독립된 기능을 가지면서도 분리될 수 있는 덩어리들이 하이퍼텍스트 시 쓰기 방법론이다. 또한 시는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시를 새롭고 감각적이게 한다.   또한 연과 연은 병렬배치 되어 있지만 각 연들은 서로 링크된다. 블록과 블록은 서로 연계성을 가지고 검색된다. 또한 각 연의 단어와 단어, 이미지와 이미지들도 병렬 배치되어 있지만 서로 링크된다. 모듈처럼 단어와 이미지, 사건들이 한 연 안에서 모자이크처럼 내밀한 구조로 연합되어 있다. 단어와 단어, 연과 연, 이미지와 이미지는 동시다발적 구도를 가지고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의존적이며 주장적이다.   하이퍼텍스트는 컴퓨터 용어로서 한 개의 모티브를 검색하기 위해서 여러 번 클릭한다. 이 시의 화자는 ‘검붉은 색의 그림’을 클릭한다. 또한 디지털의 모자이크 기능처럼 ‘을지병원 응급실’이라는 절박한 상황과 ‘밤 12시 05분’이라는 시간을 클릭하고, ‘재희 아빠, 울고 있는 중년 여자,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 를 클릭하여 모자이크 하여 빠르게 빤짝빤짝 보여주고 있다.   2연에서도 ‘허연 비닐봉지, 냉동고, 딱딱, 후끈후끈, 찜통, 얼굴, 가슴, 밥덩이, 수증기, 끈적끈적, 입김, 차갑고, 어둡고, 기억, 응고, 뼈, 가슴, 축축, 푸른, 옷, 가스레인지, 나무젓가락 등, 밥의 살, 찔러본다, 웃다’ 등 많은 명사와 형용사들이 모자이크 되어 있다.   3연에서는 ‘이집트, 미이라, 햇빛, 찬란, 꿈, 무화과나무, 목관, 사진, 고대 숲, 날다, 새,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 청계산, 숲, 오전 11시’ 등 시간, 사물, 공간, 시대를 짜깁기 하여 종적, 횡적으로 모자이크하였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추상화와 같다. 연과 연은 흩어져 있지만 전체로 집합된다. 단어와 단어는 모듈과 리좀으로 얽혀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여러 색깔이 섞인 구성과 같다. 그 구성의 덩어리들이 떠다니는 것이 연이다. 여러 개의 연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의 인상을 결정한다. 독자는 추상화를 일일이 색깔을 분석하여 해석하려고 하지 않고 전체적인 인상으로 감상한다. 즉 하이퍼텍스트 시는 상황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유기체의 결합은 모자이크처럼 여러 색깔이 모여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하나의 그림 속에는 여러 개의 구성물과 색들이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일일이 의미를 분석하지 않고 전체적인 상황으로 그림을 받아들인다. 즉 추상화는 감상자의 직관과 느낌이 중요하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의성어와 의태어, 무의미한 단어 나열로 가볍다는 지적을 받았다. 의미를 추구하던 아날로그 시를 버리고 하이퍼텍스트 시가 무의미를 추구하면서 경박하고 진정성이 없다는 비난을 계속 받아왔다. 상황제시만 있지 인간 삶에 대한 진정한 고민이 없는 철학의 부재가 하이퍼텍스트 시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또한 똑같은 형태의 시가 난립하여 개성적인 작품생산이 어렵고 자기 상표가 없다는 지적도 받았다. 이름만 가리면 누구 작품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단어 던지기는 어떤 단어로 대체하여도 되기 때문에 절실함과 진정성이 없다고 부정적 시각으로 보았다.   그에 반하여 심상운의 에서는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실현하기 어려웠던 사유와 철학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심상운 시인은 ‘죽음’과 ‘병’, ‘밥’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치명적인 결함으로 지적된 사유의 부재와 무작위 단어들을 연결하여 만들어낸 무의미한 이미지 나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진정성의 결여를 극복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이 ‘밥’이다. 또한 ‘밥’을 얻기 위해서 죽도록 일하다가 병과 죽음을 얻는다. 인간생활에서 죽음과 밥, 병이라는 테마는 ‘전쟁과 사랑’만큼 절실한 문제다. 인간이 영원히 관심을 가지고 추구해야 하는 예술의 테마다.   심상운은 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한계성으로 지적된 사유와 철학의 부재를 극복하고 있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시가 단어 던지기와 무의미 단어 나열로 가볍고 정신없다는 비난을 무력화시켰다. 위의 시는 여러 상황을 모자이크하여 보여주면서도 산만하거나 어지럽지 않고 질서정연한 폼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퍼 시의 문제점은 바로 그 파괴된 형태를 보여주는 시 쓰기를 실현하면서 보여주는 단어던지기와 무분별한 단어의 조합과 나열, 각각 다른 연의 ‘낯설게하기’ 기법이 무작위적으로 여러 편의 시를 생산했을 때 그 새로운 방법론이 시인의 목을 조이는 올가미가 될 수 있다. 천편일률적인 방법으로 양산된 시가 과연 새로움을 가질 수 있는지, 창조성과 유일성, 철학을 가진 예술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이 새로운 문예사조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새로운 표현기법으로 쓰여진 하이퍼텍스트 시로써 시론을 증명하여야 한다. 이 문제는 필자를 포함하여 하이퍼텍스트 시를 쓴다고 주장하는 시인들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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