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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칠/저 하늘의 찬란한 태양과 별 그리고 풍요로운 이 땅을 소유하고 있는 나는 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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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엔진을 달구며 한생을 뛰는 사나이 댓글:  조회:951  추천:0  2012-10-12
실화문학                                                     엔진을 달구며 한생을 뛰는 사나이                                                                                                                   전 병 칠 2003년 3월, “도라지”문예프로 촬영건으로 연변에 왔던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왕융디연출은 프로의 촬영을 끝마치고 북경으로 돌아가는 연회석상에서 70세 고령임에도 항상 오토바이를 타고 촬영현장에 나타나 프로제작을 여러모로 도와주고 또 도라지노래까지 친히 불러준 김남호선생님에게 술잔을 올리면서 이런 말을 했다. “ 김선생님은 오토바이 엔진에 앞서 마음속의 엔진을 달구며  열심히 일생을 뛰는 사람입니다.”                                           그의 하루 부르릉 – 오토바이 엔진소리가 2월의 매서운 새벽공기를 깨드리며 희붐히 잠을 깨는 도시를 휑-하고 가르고지나 흰 눈이 소복히 깔린 연길시동부 교외의 이란진소영촌 마을길을 울린다. 캐주얼차림의 김남호는 매끄러운 눈길을 요리조리 피해 오토바이를 몰면서 가끔 길옆에 스쳐지나가는 어두운 그림자에 눈길을 돌렸다.   퉁소아바이로 불리우는 리성명로인이 약속대로 길가에 나와 서 있었다. “김선생님의 전화소리에 깼습니다.이렇게 새벽에 찾아올줄은 정말 생각밖입니다.” 로인은 정주에 올라와 않는 김남호를 향해 담배를 권하며 웃어보였다. “댁을 몰라 전화를 걸었습니다.죄송합니다.새벽에 이렇게 뛰여들어서…” 김남호는약간은 황송해 하며 아침준비를 하는 안주인을 흘끔 쳐다본다. 내고향민속예술단의 예술감독과 지휘를 맡은 김남호가 오늘 이성명로인을 찾아온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명색이 민속예술단인데 전통악기인 퉁소를 불 배우가 한사람밖에 없었다.여기저기에 수소문해 보니 이성명로인이 퉁소를 잘 분다고 했다. 그는 3시에 깨여나 매일이다싶이 하는 조깅시간을 리용해서 이로인을 찾아왔다. “저희들과 함께 해보는거죠? 재미두 있을텐데.” 그는 로인의 살림형편이며를 물어가가다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선생님이 이렇게 열성을 보이는데 해야죠. 재간을 두었다가 관에 넣어가지고 가겠습니까?” 이미 전화상으로 내용이 통한데도 원인이 있겠지만 자기보다  근 열살이나 우인 김선생이 직접 집까지  찾아온터라 이로인은 그의 청구를 마다할수 없었다. 좀 지나 오토바이 엔진소리가 다시 오던 길에 울렸다. 해뜨기전의 재빛 하늘에서는 별 하나가 그때까지 추위에 떨고 있었다.  이 날인 2004년 1월 9일, 김남호의 일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3시     - 기침.(운동하러 못 감) 3시30분  – 소영촌 이성명을 찾아감 8시  - 대우주 지하실 련습장 (이성명 예술단성원들과 만남) 8시30분  - 대우주 지하실 련습장 (소품 “공연한 근심” 련습을 지도) 9시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 감,( ”스케이트장 아저씨” 록음) 오후    - 대우주 지하실 련습장에 감 ( “새 연길 새 연변 아름답게 가꿔가자” 악대 련습) 저녁 6시 – 방송국문예부 성기화주임댁으로 감 (“꽃피는 내 고향” 무용반주곡 미디제작 부탁) 저녁 7시 – 삼교불고기점에 감,(식사,한국 KBS 취재팀을 만나 연변창담에 관한 인테뷔 받음) 이날 김남호는 오토바이를 타고 연길시 공원가의 자택에서 출발해 연길시교외 동쪽의 소영촌으로부터  연길시 서쪽 맨끝머리에 있는 성기화주임집까지 25리 거리를 왕복으로 뛰였고 예술단의 련습장,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등 시 구역내에서 10여리 길을 뛰여 도합 60여리 길을 달렸다. 1995년 2월, 퇴직하자와 같이 원 사업단위인 연변예술집성판공실에 재초빙되여 사업하다가 2001년 12월, 67세에야 정식으로 자기의 사업터를 떠난 김남호는 의례 집에서 휴식하면서 손주나 손녀들의 손목을 이끌고 만년의 천륜지락을 누릴수 있었으나 그는 단연히 그런 향수를 버리고 오늘의 이 길을 택했다. 그는 사회에 나오자바람으로 연길시내 퉁소부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연변퉁소애호자구락부를 꾸리고 창작지도, 예술지도, 총책임을 맡아 하는 한편 연변천선복로인활동소조에서 민족악대를 꾸리고 창작지도 및 지휘를 했고 그들이 장춘으로 이동하자 작년 10월 중순부터는 연길고향민속예술단의 창작지도, 예술지도, 총고문을 맡아 동분서주했다. 그가 이끄는 이러한 민간예술단들은 이 몇해사이 연길시에서 50여차의 공연을 하였는데 연변퉁소애호자구락부 공연팀은 영예롭게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50주년 행사의 민속예술공연팀에 참가해 연길시의 민속촌과 시대광장에서 4차례 공연하였고 중앙텔레비죤,길림시텔레비죤,연변텔례비죤스크린에 오르는 영예를 지녔다. 2004년 6월 27일은 김남호한테 있어서는 행복한 날이였다. 그의 끈질긴 노력으로 연길고향민속예술단은 연변국제무역청사유한회사와 민속촌에서의 공연계약협의를 맺었는데 일주일에 3차례 공연하고 연변국제무역청사유한회사로부터 매차 공연료를 500원 받게 되였다. 돈보다도 연길고향민속예술단이 사회의 인정을 받고 민족예술을 꽃 피울수 있는 터전이 마련된것으로 그는 행복했다.                              그는 이런 사람이였다 뻐꾹-뻐꾹- 솔솔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타고 숲속으로부터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 모아산자락의 한 산등허리에 새로 생긴 봉긋한 무덤,그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않은 김남호의 얼굴에선 눈물이 비오듯 했다. 함께 온 어머니와 마누라 그리고 녀동생이 인젠 그만 일어나라고 했지만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 일어나셔서 이 불효자식을 매 하나래두 안겨줍소…어쩌면 그렇게 총망히 떠나심둥?.. 좀 만 더 살아 계셨어두 제가 돌아와 뵐수 있었는데… 아버지!…” 1962년 8월, 김남호는 개산툰화학팔프공장의 자치주창립10주년기념 문예프로를 만드느라 공회구락부에서 낮에 밤을 이어가면서 사업했다. 프로가운데는 그가 창작한  4부 대합창 “제지공의 노래”도 있었는데 합창대가 80명, 악대가 무려 40명이나 되였다. 프로가 한창 익어갈 때 룡정의 집에서 아버지가 몹시 앓으니 속히 오라는 전화가 왔다. 그런데 그는 떠날수가 없었다. 그가 없으면 합창지휘며  무용반주를 제대로 할수 없었다. 이튿날인 9월 1일,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떴다.쥐면 깨여질가 불면 날아날가 하며 애지중지 장중보옥으로 키워 온 외동아들을 보지 못하고 다시는 돌아올수 없는 황천의 길을 떠난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했으랴! 김남호는 아버지께 량해를 빌며 오래오래 무덤앞에 앉아있었다… 김남호는 1934년 음력 6월 7일 조선함경북도 명천군 서면 호산동의 강릉김씨 39대 후손으로 태여났다. 그의 부친 김룡복과 그의 모친 박분옥은 자식 다섯을 두었는데 위로 세 누님,아래로 누이동생 하나, 그는 가정의 넷째로 태여난 외동아들이였다.  그의 부모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 막내딸을 공부시키기 위하여 1940년 엄동설한에 출가한 두 딸을 고향에 두고  세 아이들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지금의 룡정시광신향류신촌에 정착했다. 집도 없고 땅도 없는 이주민, 그의 부모들은 자식만을 공부시킬 일념으로 아들 김남호를 웃마을에 있는 류신소학교에 보냈다. 집이 가난하다 보니 그는 항상 자기절로 초신을 만들어 신고 다녔는데 하루라도 더 오래 신기 위해 초신에 물을 뿜고 신고 다녔다. 물을 뿜은 초신은 겨울이면 꼬당꼬당 얼어서 발뒤꿈치에서 피가 흐르군 하였다.어쩌다가 아버지가 삼에 헝겁을 섞어 초신을 만들어주면 오래 신기 위해 길이 평평하거나  눈이 없는 곳을 다닐 때면 아예 신을 벗어 손에 쥐고다녔다. 그러면서도  그는 공부를 잘 했고 특별히 붓글씨쓰기와 그림그리기에 소질이 있어 그의 부친은 아들에게 벼루돌 하나 사주었다. 다른 애들한테는 없는 소중한것이라 그는 매일 그 무거운것을 책보에 싸가지고 다녔다.농한기나 명절 땐 마을에서 간혹 성이 황씨인 야장간집에서 퉁소를 불고 해금을 켜며 북장단에 맞춰 춤을 추는 민속놀이가 있었는데 어린 그는 그것이 그렇게 신기로울수 없었다. 매양 이럴적마다 마을에서는 그의 아버지더러 소리를 한마디 넘기라고 했다.묵묵히 살아오시던 아버지가, 어릴적에 서당에서 구학을 익혀 마을에서 학식이 있는 분으로 존경을 받으시는 아버지가 사양하시다가 가끔 넘기시는 “노래가락”,”성주풀이”,”춘향가” 등은 그의 나어린 동심에 민족전통음악이 뿌리를 심어주었다. 그의 부친의 소리는 ”3.1”운동시기 조선독립운동에 참가한 후 왜놈들의 추격을 피해 10여년 로씨야 연해주와 중국 동북지방을 떠돌아다니며 막벌이로 나날을 보낼 때 배워두었던것들이였다. 1947년 김남호는 제1기생으로 룡정련합중학교에  입학하였다.그는 이 시기 스케트타기와 그림 그리기를 즐기고 노래부르기에 특별히 열중했다.그는 학교합창대에도 적극 참가하고 겨울방학이면 중학생들로 조직된 공연대에도 적극 참가하였는데 그의 예술생애에 더없이 좋은 밑거름이 되였다. 1951년 1월, 열일곱살에 나는 김남호는 길림성농림청에서 꾸리는 립업문예선전대에 갔다가 그해 4월에 영길현 강밀봉구조선족완전소학교에 7월에는 길림시 다툰리가조선족완전소학교에 가서 음악교원으로 들어갔다. 그의 예술생애는 이렇게 시작되였다. 그의 예술생애를 간추려 적는다 1951년 7월-길림시다툰리가조선족완전소학교 음악교원(동요 처녀작 “발 맞추어 앞으로” 창작) 1954년 7월-연변사범학교 중사반에서 학습 (음악과대표. 허세록선생님한테서 기본악리를,라혜주선생님한테서 성악지식을, 김종화선생님한테서 가요창작지식 배움) 1957년- 연변인민방송국  (정교조, 신문보도조,음악조에서 문자편집과 기자사업,및 음악편집원 함.  본격적으로  음악창작에 달라붙음) 1961년-정치풍운의 억울한 루명을 쓰고 연변가무단에 전근 ( 행정후근사업을 함) 1962년-개산툰팔프공장에 초빙 (공회구락부에서 예술지도사업을 함) 1963년-연길현문화관으로 전근(음악창작원,음악보도원을 함) 1965년- 룡정현문공단에 전근 ( 연출, 예술지도를 맡음) 1969년- 문화예술부문이 해체되면서  연변인쇄공장에 초빙 (로동자로 있으면서 그림분색촬영, 디자인설계 등을 함 ,과외 창작에 정진하는 한편 공장의 선전대를 조직, 지도). 1973년- 연변군중예술관에 전근( 음악편집, 음악보도원. 예술부주임) 1989년-연변예술집성판공실 (“중국민간가곡집성”(길림권) 조선족민요의 책임편집 등) 1995년 2월-정년퇴직. 1995년 2월-2000년 12월;연변예술집성판공실 재초빙 김남호는 50여년의 예술생애에서 이룩한 성과로 국가급,성급,주급이상의 상장과 영예증서를 70여매 받았다.다년래 그의 사업실적은 “연변일보” , “길림일보”, “연길석간”에 소개되였고 “중국음악가사전”,중국소수민족음악사”, “중국당대문예명인록사전”,”세계명인록”(중국권)등 전국의 20여개 대형저서들에 그의 사업업적과 연구성과들이 실렸다.그는 지금 국제고려학회 회원,중국음악가협회 회원,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상무리사 겸 사회음악위원회 주임, 중국조선족아동음악학회 상무리사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상무리사, “20세기중국조선족가요대전”편찬위원회 부주임,연변음악가협회 고문 등 사회직무를 맡고 있다.                         군중문화 터전의 부지런한 황소 1982년 8월 20일, 황혼이 산마루에 걸렸던 마지막 한쪼각 노을을 삼켜버렸다. 한낮의 찜통더위에 달아올랐던 아스팔트길은 그때까지도 더운 열기를 확확 뿜기고 있었다. 부지런히 자전거페달을 밟으며 연길시북대 올리막길에 오른 김남호는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곧게 흥안향구락부로 향했다. 오늘 하루만도 그는 이 길을 세번 오르내렸다.한번은 회의때문이고 한번은 악보지 가지러내려오고 이번은 무용복장일로 내려 왔다. 무대우에서 배우들이 한창 전자풍금에 맞추어 악기의 음을 맞추고 있어 약간은 소란스러웠다. 그는 갖고온 복장을 배우들에게 나주어주고 마이크를 설치한다 조명을 지휘한다 하며 무대 아래우로 터벅터벅  뛰여다녔다.  무용곡 “호림원과 딱딱구리”의 반주에 맞추어 무대가 서서히 열렸다.  화려한 무대, 건들어진 선률에 따라 무용수들이  우아한 춤가락이 이어진다… 전성농촌과외문예콩클에 참가 할 이번 대표대의 1시간 40분의  문예프로를 위해 김남호는 다른 한 보도원인 유봉훈과 함께 옹근 반년을 바삐 뛰여 다녔다. 8개 현과 시를 돌면서 농민배우들을 물색하고 시험을 치고 그다음은 농민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배우들의 투숙할수 있는 숙소와 집단식사를 할수 있는 식당을 마련하고 그다음은 프로를 선택하고 무용창작일군을 모셔오고  편곡을 하고 그다음은 공연에 수요되는 소도구를 제작하고 악대를 조직하고… 하여간 오늘의 총련습까지 그는 별나별 일을 다했다. 배우들이 죄다 젊은 처녀 총각들이라 서로 눈이 맞아 련애를 하거나 배우들의 투숙한 마을의 젊은이들이 배우들의 뒤를 따르는 일이 매일이다싶이 있어 배우들을 불러 교육하고 지꿋게 말썽을 일구는 마을 젊은이들은 찾아 으름장을 놓고… 노래와 반주가 잘 맞고 무용수들의 앙상블도 잘 맞았다. 지휘봉을 흔들면서 악보를 넘기는 김남호의 얼굴에는 흥분된 미소가 물결쳐 지나갔다. 그의 마음을 헤아리기나하듯 열두발상모가 큰 원을 그으며 무대에서 기분좋게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번에 있었던 전성농촌과외문예콩클에서 연변대표팀은 창작상 7개 ,표현상 9개,그리고 종합우수공연대 상을 탔다 연변군중예술관에서 사업하는 기간 김남호는 선후로 “공농병문예”,”군중예술”, “해란강” 등 공연자료의 음악편집을 하는 한편 간행물의 사보, 미술설계,삽도를 거의 혼자 맡아서 하였으며 예술보도부주임으로 있으면서 주 내 여덟개 현 시 문화관의 업무지도 등으로 해마다 200여일씩 기층에 내려가 점을 잡고 문화예술창작활동을 조직, 지도하느라 휴가일이 따로없이 뛰여다녔으며 동북3성조선족문화관민족기악보도원학습반같은 여러가지 형식의 학습반을 15여차 꾸리고 근 20여차에 걸쳐 연변대표팀의 조직자,인솔자,예술지도로 성 과외문예콩클과 동북3성 조선족문예콩클에 참가했고 짬을 타서는 가요창작보도자료와 리론문장을 쓰고 과외 음악창작에 몸을  달구면서 연변의 8개 현 시 향촌의 수많은 농가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그는 또 70년대 중기에 주 문화국과 연변군중예술관의 적극적인 지지하에 구연예술에 조예가 깊은 최수봉을 모시고 10여년의 예술실천을 통해 안계림 등 음악일군들과 함께 중국조선족구연예술의 새 극종인 “창담”을 창설하였으며 1985년에는 당시 연변군중예술관의 관장이였던 김덕균의 지지하에 주내에서 맨 처음으로 손익을 자체로 책임지는 예술단체인 “해란강구연단”을 창설하여 단장책임을 맡고 연변을 비롯한 동북3성의 조선족이 집중된 도시와 향촌을 누비며 조선족구연예술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땀동이를 쏟고 많은 악사와 가수, 구연배우를 배양해 냈다. 그의 헌신적인 사업열성과 취득한 성과는 연변군중예술관 지도부와 관원들의 한결 같은 긍정을 받아 1987년도에 연변군중예술관은 당지부와 행정사업계획에 “10여년을 하루와 같이 부지런히 사업해 온 김남호동지의 황소정신을 따라 배우자”는 조목까지 써넣었다. 김남호는 준중문화사업에 종사해온 30여년간, 해마다 단위의 선진사업일군으로 당선되였으며 1987년에는 길림성문화청과  연변문화국으로부터 선진사업일군, 전주문화계통우수공산당원 칭호를 수여받았고 주 문화국의 당대표대회의 대표로 당선되기도 했다.                          민족전통예술의 끈질긴 탐구자             1996년 겨울은 빨리도 흘렀다. 중국사람들의 전통명절인 춘절을 십여일 앞둔 북경의 거리는 벌써부터 명절의 기분으로 들떠 있었다. 여기저기 가게에 갖가지 모양의 채색등룡이 걸리고 “사구려”소리 높은 가운데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랐다. 호텔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며 한창 팔운동이며 허리운동을 하고난 김남호는 다시 원고더미를 마주하고 않았다. 글자 몇줄을 보기도 전에 또 경추가 지끈지끈 동통이 왔다.그는 경추견인기를 꺼내 목에 두르고 공기를 압축해 넣었다.견인기에 공기가 차면서 목이 빠지듯했다.약간은 시원했다.그런데 목이 자유스럽지 못해 원고보기가 힘들었다. 그런대로 일할수 있어 다행이였다. 그는 벌써 10일을 이렇게 일해 왔다. 얼마전, “중국민간가곡집성”총부는 길림권의 인쇄전 최후 심열을 위해 편집위원회 위원들을 북경에 불렀는데 그 중에는 조선족민가부분의 원고심열을 위해 특별히 부른 “중국민간가곡집성” (길림권)의 부편심 김진과 특약편집 김남호도 있었다. (연변민가집성일군들이 40여년간 피와 땀으로 수집,정리,편집한 한수 한수의 민가들,글자 하나 음이 하나 틀려도 력사의 죄인이 되는것이다.)  두사람은 고도의 책임감을 안고 오늘도 눈을 뜨자와 같이 원고와 씨름을 하고있었다. “량워이 로찐, 슈시슈시!”(두분 김선생님,좀 휴식하세요!) 언제 방에 들어왔는지 성 예술연구소 호명주임이 김남호의 어깨를 토닥이며 휴식을 권고했다. 항상 더운 마음으로 연변예술집성사업일군들을 관심해 온 호명주임이였다.목에 견인기를 두른 김남호는 몸 전체를 돌려서 호명주임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눈길을 원고지우에 쏟았다. 12일간의 긴장한 사업을 거쳐  “중국민간가곡집성” (길림권)의 최후 심열을 마치고 연길로 돌아오는 날 80고령의 전 문화부부장이며 전국예술과학연구계획령도소조의 주임인 주워이즈는 김진과 김남호의 두 손을 꼭 잡고 항미원조 때 배워둔 류창한 조선말로 “수고했습니다. 정말 수고했습니다.” 라고 연신 치하를 드렸다. 1999년 7월의 장춘 날씨는 연길보다 더 무더웠다. 숨 막힐듯한 더위에 길가의 가로수마저  휘줄근히 잎을 드리운채 노곤하게 서있었다. “중국구연지”(길림권)의 심열회의에 심의위원으로 참가한 김남호는 가슴이 침침하고 머리가 어지러워 슬그머니 자기 침실에 돌아가 누웠다.갑자기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연변에서 온 김남호선생님이 까무라쳤다!” 누군가가 복도에서 소리쳤다. 북경에서 온 “중국구연지”총부의 지도자들과 성 집성판공실 지도자들이 그의 침실에 달려왔다.그와 함께 회의에 간 연변예술집성판공실의 전병칠주임은 낯이 새까매서 달려왔다. (10년전 연변예술집성일군인 김원창선생이 이 곳 장춘에 와서 민가의 원고 심열을 하다 심장병으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그런 일이 김남호선생님한테서 재연되면 안 된다… ) 다년간 주임으로 사업한 전병칠주임은  김남호를 연변예술집성판공실의 보배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위치를 알고 내심으로부터 우러러 존경했다. 문화부의 중점예술과학항목인 “중국민간가곡집성”(길림권)의 편집위원회 위원,조선족민가의 책임편집, “중국구연음악집성”(길림권)의 편집위원회 위원,조선족구연음악의 책임편집,그리고 ”중국희곡음악집성”(길림권) 편집위원회 위원,조선족창극음악의 책임편집 , “중국민족민간기악곡집성”(길림권)의 편집위원회 위원, “중국희곡지”(길림권)과 “중국구연지”(길림권)의 특별심사위원을 하면서 “적벽가”등 민요,판소리, 창극음악을 비롯하여 국내 해방전쟁시기 력사가요 200여수를 수집,정리하고 조선족민요의 개술, 석문 ,주해를 비롯하여 판소리음악과 창담음악의 개술, 민간예인소개 등 100여만자의 원고를 집필하고 “중국에서의 창극의 연변” 등 론문,평론,잡문 수십여편을 쓴 부지런한 학자 ,  중앙집성총부에서 조선족의 구연음악과 희곡음악의 가사를 국제음성기호로 표기할것을 요구하자 환갑나이를 훨씬 넘긴 나이임에도 연변대학 전학선언어학박사를 찾아 스승으로 모시고 소학생이 되여  국제음성기호를 배워서는 50여수의 구연음악과 희곡음악 가사의 국제음성표기를 알뜰하고 준확하게 해온 열성의 사나이, 일년에 10여번씩 북경이나 장춘으로 출장다니면서 원망소리 한마디 없이 자기의 직책에 추호의 소홀도 없던 믿음직한 로인, 300여수의 민요를 불러 연변예술집성사업에 마멸할수 없는 공적을 쌓은 조종주 민간예인에게 기념비를 세울것을 제기하고 그 일로 동분서주 뛰여다니며 일을 성사시킨 의리있는 지성인,  “조선족전통음악의 사나운 운명”이란 문장을 써서 세미나와 “당대예술”간행물에 발표함으로서 연변 음악계에 일대 쟁론을 불러오면서까지 민족전통예술의  지위확보를 고집스럽게 주장한 민족전통예술의 참다운 효자, 연길 방송국의 “문예싸롱”프로를 통하여 조선족전통음악강좌를 30여차나 한 조선족전통음악리론 인재- 김남호선생님…   마침,대회에 배치된 승용차가 대기중에 있어 김남호는 곧 바로 병원에 호송되였다.  CT결과 엄중한 경추병으로 인한 대뇌산소공급부족이였다. 다행이였다. 주사를 맞고 잠시 휴식한 김남호는 다시 회의 장소에 나타났다. 먼저 연길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나 그는 “아니” 라고 딱 잡아떼고 마지막날까지  회의에 참가했다. “ 나두 죽는줄 알았소. 그런데 염라대왕이 나를 보더니 하는 말이 ‘남호야, 너는 아직 하던 일을 채 못했으니 그 일들을 다 마무리 하구 오너라’ 하더구만.” 회의를 끝마치고 연길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김남호는  전병칠주임하고  유머있게 이렇게 말하며 소탈하게 웃었다. 김남호는 예술집성사업에서 쌓아온 성과로 1993년도에는 “중국민간가곡집성”(길림권)의 편집부로부터 선진사업일군으로 당선되였고 1997년도에는 전국예술과학연구계획령도소조로부터 “문예집성지편집성과” 1등상을,1998년도에는 길림성 문화청으로부터 “중국민간가곡집성”(길림권), “중국구연음악집성”(길림권),  ”중국희곡음악집성”(길림권) 편찬성과상을 ,2000년도에는 전국예술과학연구계획령도소조로부터 “중국구연음악집성”(길림권) 편찬성과 3등상을 수여받았다.                            인정미 가득찬 사나이 1974년 여름. 20대의 젊은 학생이 김남호를 찾아왔다. 길림시 리가툰에서 온 학생인데 연길에 와서 이곳저곳 물어서 그를 겨우 찾아왔다고 했다. “선생님이 음악을 잘 한다기에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자고 왔습니다.”   알고보니 그가 리가툰에서 음악교원을 할 때 알고지낸 사람의 아들이였다.그는 누구에게서도 음악은 배우지 않았다지만 자체로 자습하여 악보를 볼줄 알았다. 머리가 총명해 보였다.  이렇게 석천수란 제자를 받아들인 김남호는 20여년간 그를 자기의 친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하며 열심히 배워주었다. 제자는 방학이면 일년에 둬번씩 량식쌀을 메고 공부하러 왔는데 올 때면 자기가 창작한 곡 20~30수씩 가져왔고 때로는 편지로도 10여수씩 부쳐왔다. 그는 그때마다 정성껏 필을 들어 의견을 제출하거나 고쳐주었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석천수는 1994년 첫 작곡집을 낸 뒤를 이어 “석천수아동곡집”, “석천수작곡집”을 출판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류학을 떠나 박사생공부를 하던 그 제자가 1998년에 심장마비로 돌아갔다. 김남호는 자기에 대한 제자의 인정과 스승의 직책을 저버릴수 없어 김뎍균과 김창욱선생님의 방조를 받으며 그 제자의 유작인 “화성악”과 민담집 “임금의 화상”, “중학교음악교수법”(합작)을 출판해 주고 여기저기 뛰여다니며 그 책들의 발행을 끝까지 책임져주었다.  그는 상급의 지시에 따라 “해란강구연단”이 해산되자 배우들의 안치로 여기저기  련계를  달아 재간있는 사람들은 연길시예술단이며, 장춘시조선족예술관에 추천해 보내고 농촌에서 데려온 배우들은 집을 찾아 방문하며 유관부문에 련계해 연길시호적을 해결해주고 그들의  출로를 해결해 주기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연길시퉁소애호자협회를 꾸리면서 자금이 없어 음악효과설비를 갖출수 없으니 자기 집의 만여원어치의 효과설비를 선듯이 내놓고 또 협회를 위한 사업에 2천여원의 현금을 썼다.  그는 여려운 사람들을 만나면 항상 뜨거운 마음으로 도와 나섰는데 가수 송대윤이 당뇨병으로 앓으니 가끔씩 돈을 주어 약을 사게 하고 생활이 어려워 약 사기 힘들어 하자 돈 5000원을 가져다 쓰게 하였다. 그는 생활이 어려운 예술인들을 만나면 항상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 식당에 모시고 여러모로 관심해 주었다. 그는 고향민속예술단으로 다니는 한성우가 몸이 말째다고 하니 아침저녁으로 그를 오토바이에 싣고 다니며 그의 불편을 덜어주었다.                            다능다재의 처연한 멋쟁이 19세기 로씨야의 걸출한 문예리론가 체르늬셉쓰끼는 “사람이 개성이 세계상의 고도의 미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연변문화예술계의 어떤 사람이 김남호를 남자면서 녀자, 고집통이면서 유연한 시람, 학자이면서 멋쟁이라고 했다.개성이 뚜렷하다는것이리라. 웅장한 체구, 너부죽한 얼굴 , 부르면 항상 캐쥬얼차림으로 오토바이와 함께 달려오는 열성의 사나이, 시원시원하고 호방스러우며 풍류적인 성격, 김남호는 분명 남자이다. 연변군중예술관에서 있을 때의 일이다.  김남호의 사무상옆에는 인쇄공장에서 가져온 활자들로 가득 찬 나무상자가 있었는데 매번 사보할 때면 까근하게 필로 5선보를 치고 가사는 그 활자들을 뽑아서  하나하나 찍었다. 약간 비뚤어도 안되고 누워도 안된다. 그는 그런식으로 예술관과 연변일보의 “해란강”부간, 출판사 가요집의 수천수의 노래 사보를 했다.진짜 서캐를 캐는일, 여자들도 혀를 차며 탄복을 했다.이래서 김남호를 녀자라고 했는가보다. 김남호가 고집을 부린다고 하면 그누구도 꺽지를 못한다. 고집이 있다는 말을 “주견이 세다”라고 바꾸어 말할수 있다. 김남호는 사업에서 자기의 주견이 일단 서면 굽히질 않는다. 1999년의 일이다. “중국구연음악집성”총부는 “중국구연음악집성” 길림권을 심사하면서 조선반도지명이 들어간 조선족판소리의 10여개 단락들을 빼여버리기로 결정했다. 회의에 참가한 김남호는 여러 번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주견을 세웠으나 남들이 들어 주지 않았다. 연변에 돌아온 그는 주 문화국지도부에 청시하고 곧 연변음악전문가들로 죄담회를 조직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 문화국과 연변음악가협회,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이름으로 월경민족으로서의 조선족의 문화배경을 밝히면서 실사구시원칙으로 중국조선족의 전통음악을 대해야 한다는  “의견”을 “중국구연음악집성”총부에 바침으로서 총부로하여금 “의견”을 받아들여 빼버리기로 한 판소리단락들을 다시 보충해 넣게 했다.  김남호는 오늘도 그런 고집으로 마누라와 아들 딸,사위 며느리가 해마다 권장해오는 환갑을 세지 않고있다. 자식 4남매가 모두 끌끌하고 사회적으로도 잘 나가는축이여서 모르는척 하고 한번 환갑상에 않으면 몇만원의 돈도 쉽게 벌수 있는데도 말이다.  “중국민간가곡집성” 길림권의 편찬작업은 예술집성편찬작업중에서 맨처음 시작한 편찬작업이고 또 전국의 통일방안을 따라야 했기에 수차의 반복을 거쳤다. 조선족민가개술은 그 변하는 편찬방침을 따르다보니 12번의 대수술을 했다. 이 작업의 90%는 김남호의 손을 거쳤다. 그는 짜증 한번없이 유연하게 편집방침을 따랐다. 누가 김남호를 고집통이라 했던가?  김남호는 1951년 음악교원으로 예술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민족음악창작에 종사하면서 “꽃상점 아가씨”, ”춤의 고향 노래의 고향” 등 명곡을 비롯해 700여수의 음악작품을 창작하고 “김남호작곡집”, “우리마을 보배산”, ”중국조선족민간음악연구” 등 개인작곡집과 저서를 펼쳐낸 명망높은 음악가인 동시에 사회대중음악예술활동가이고 대중음악리론연구와 민족전통음악연구에서 괄목할 성과를 올린 전통음악리론학자이다. 동시에 그는 또한 흥취가 다양하고 여러가지 재간을 갖춘 다능다재의 재미있고 처연한 멋쟁이이다. 여름이면 풍막에 고무배까지 오토바이에 싣고 강가로 늪으로 다니는 낚시애호가. 겨울이면 가끔 빙장과 연집강의 얼음강판우에 나타나는 스케트선수, 산촌마을 농민들과 같이 하는 놀음판에서는 신나는 손풍금수, 그림도 잘 그리고 붓글씨도 잘 쓰는 멋스런 남자, 그는 붓글씨 잘 쓰는 그 하나의 재간만으로도 연길시의 100여집 식당과 다방의 광고글자를 무상으로 써주었다. 어려서 만화그림을 전시회에 내놓은 그는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음악사전”의 삽도도 100여폭 그렸다. 그는 젊었을 때 집이영도 잘 예고 룡마루까지도 잘 틀어 이집저집에서 모셔 갔다. 목수재간이 있어 집도 2채나 지었고 80년대에는 문련과 예술관의 건축구도설계도 척척 해냈다. 단위의 전기수리 녹음기수리,스찜수리… 그에게는 막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는 여지껏 수십개의 과외팀과 전업팀의 공연대를 조직하면서 무대설계, 등광, 음악효과의 많은 설비를 머리를 써가며 자기의 손으로 만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무대도구들을 운반 할 상자들을 손수 짰다 . 그는 부지런한 로동속에서 이러한 재간을 익혀 사회를 위해 복무했다. 어찌 이것만이랴.당뇨병이 있으면서도 12일씩이나 굶으며 벽공을 하는 환자, 외국나들이인 한국에 가서마저 허리병치료를 위해 강가에 나가 돌멩이를 주어다 허리에 받치고 자는 로인, 그는 또한 이렇게 재미있으면서도 처연한 남자였다.   2004년 7월 22일 오전, 연길시 대우주 3층의 례식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연변로교수협회와 연변음악가협회 그리고 “예술세계”편집부,연변군중예술관,연변예술집성판공실의 공동 주최로 이곳에서 바로 “김남호예술생애50돌학술연구모임”을 가지고있었다. 연변음악계의 원로들인 동희철,라혜주,안국민,최창규,림성호 등 선생님들과 연변문화예술분야의 유명 인사들,그리고 주 문화국과 연변예술집성판공실의 사업일군 등 100여명이 모임에 참석하셨다. 연변로교수협회 전국권비서장의 사회에 따라 조선족의 고유한 전통 저고리복장을 한 김남호가 연분홍치마저고리를 곱게 받쳐입은 부인 윤금숙녀사의 손목을 정답게 잡고 여러 사람들의 축복의 미소에 받들려 꽃보라속에 나란히 주석대를 향해 걸어가고있었다. 아직까지는 젊은 패기가 다분한 단단한 몸,쩍 벌어진 가슴,둥글둥글한 얼굴, 정력이 넘실거리는 눈빛… 김남호는 이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것일가? 명예? 영요? 아니면 래일의 꿈?… 내 고향 민속예술단의 출국공연도 따와야 하고 , 동북3성조선족민간가곡집성 편찬작업도 마무리져야 하고, 국외로부터 부탁받은 “20세기 중국조선족전통음악문화”의  70여만자의 원고도 완성해야 하고…김남호는 해야 할 일들이 너무너무 많았다… 바람 잔 언덕에 들국화 곱게 피고 꽃노을 펼치며 진븕게 타오르는 석양속에 지축을 울리며 오토바이 엔진소리 은은히 들려라! 김남호는 오늘도 시들줄 모르는 녹색의 꿈을 안고 마음속의 엔진을 달구며 그가 가고픈 찬연한 대로를 향해 멋쟁이로 힘차게 달리고 있다.             (2004년 7월 6일)   (2004년 9월 21일 수개)                                          --“장백산”잡지에 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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