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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칠/저 하늘의 찬란한 태양과 별 그리고 풍요로운 이 땅을 소유하고 있는 나는 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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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비교연구로 보는 21세기 중국조선족구연예술 댓글:  조회:1049  추천:0  2012-12-18
[론문]  비교연구로 보는 21세기중국조선족구연예술                    전 병 칠     중국 조선족은 조선반도를 떠나 한세기 넘는 기간 피와 땀과 눈물겨운 노력으로 중국의 광활한 동북대지에 자기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찬란한 민족문화유산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독특한 문화--중국특색이 있는 조선족문화를 창조하였다. 조선족구연예술은 그중에서 가장 유표한 한떨기꽃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필자는 본문에서 국외조선민족구연예술과 중국조선족구연예술의 내재적함의 및 그 종류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해 중국조선족구연예술의 민족성, 특이성, 다양성을 밝히고 중국조선족구연예술의 21세기 전망을 펼쳐보려 한다.     구연예술의 내재적함의 비교     언어말《사전》은 한 나라 또는 한 지역의 모종 언어의 한시기 언어규범으로서 그 나라, 그 사회의 언어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출판된 사전들을 보면 거개가 《구연》을 올림말로 올렸다. 1960년대초,  조선과학언어문화연구소에서 편찬한 《조선말사전》(6권)은 올리말 《구연》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무대에서 동화, 야담, 만담, 재담 등을 하는것》, 1972년 사회과학출판사에서 편찬한 《문화예술사전》은 올림말 《구연》을 《한사람의 출연자가 감동적이며 극적인 이야기를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세련된 화술로 표현하는 예술형식》이라고 그 풀이를 달리했다. 그후에 과학백과사전출판사에서 편찬한 《현대조선말사전》(1981년), 《백과전서》(1982년)에서 올림말 《구연》의 해석은 《문학예술사전》의 풀이와 대동소이하고 《현대조선말사전》은 《구연모임》,《재담과 구연》등 단어결합을 례로 실었다.     대한민국에서 출판한 《사전》들도 《구연》을 올림말로 사전에 올렸다. 1984년 민중서림에서 출판한 《민중엣센스국어사전》은  올리말 《구연》을 《구술(口述)》로만 풀이했다. 1975년 삼성출판사에서 출판한 《우리말큰사전》은 올림말 《구연》을 《문서에 의하지 않고 입으로 사연을 말함. 구술》로 풀이했고 1980년 범중당 출판 《현대국어대사전》은 《구연》을 《글로써가 아니라 말로써 사연을 베풀어말함》이라고 풀이를 달았다.                                     (1) 1992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조선말사전》(3권)은 올리말 《구연》풀이를 기본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과학출판사의 《문학예술사전》에 따랐다.     주관적인지는 몰라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60년대까지 구연이란 사전풀이대로 만담, 재담, 야담 등 종의미를 포함한 류의미단어로 해석했지만 70년대부터는 《구연》의 원래의 뜻을 떠나 만담, 재담과 같은 종의미단어로 해석했다. 조선민주주주의인민공화국 예술인들의 얘기를 들으면 현재 조선무대에 구연, 만담, 재담같은 프로들이 오르고있는데 구연과 만담은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해석된다고 한다. 똑같이 한사람이 표현하는 화술이지만 구연은 구가를 위주로 하고 만담은 폭로, 비판을 위주로 하고 구연은 주로 감동적인 이야기엮음이고 만담은 주로 풍자, 해학의 화술이라 한다.     대한민국《사전》에서의 올림말 《구연》의 풀이는 어쩐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든다. 《말로써 사연을 베풀어말함》이라고 했으니 어느 저도로 리해해야 될는지, 사실 대한민국에서 구연 즉 만담과 재담은 거의 자취를 감추어버린셈이다.     1994년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에서 펼쳐낸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 제3권은 예술사부분에서 조선족구연예술에 대한 함의해석을 올리지 않았지만 《구연사》(최수봉 글) 제1장에서는 《조선족구연예술의 혁신과 발전》이라는 제목아래 3로인, 판소리, 만담, 재담을 서술했고 제2장 《새 설창형식의 창제》에서는 연변창담, 편고엮음, 북타령, 노래엮음을 서술했다. 구연예술의 종류비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대한민국 여러 출판사들에서 출판한 우리말 사전류를 보면 그 풀이는 대동소이하나 모두 올리말 《구연》을 올린 동시에 올림말 《만담》과 《재담》도 올렸다. 1992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조선말사전》에서는 《만담》과 《재담》을 현실적으로 풀이하면서도 지방적특색을 살렸다. 이를테면 《만담--(문예) 혼자서 재미있고 익살스러운 말로 하는 풍자적인 군중무대예술의 한가지, 풍자와 조소, 해학과 익살을 통하여 긍정적인것을 찬양하고 부정적인것을 폭로규탄한다.》《재담--(문예)두 사람이 출연하여 청중의 웃음을 자아내는 재치있고 우스운 말을 번갈아 엮어가면서 하는 무대예술소품외 한가지, 연기자는 이야기속에 나오는 인물로                                 (2) 되기도 하고 제삼자로 되기도 한다.》로 표현하였다. 이외 기저적으로 올림말《3로인》을 올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출판한 《현대조선말사전》이나 우리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조선말사전》은 모두 《판소리》,《설화》를 올림말로 올렸는데 전자는 《음악》으로  후자는 《문학》으로 분류시켰다.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 예술사에서 언급된 기타 구연예술종목들인 연변창담, 편고엮음, 북타령, 노래엮음 등은 오늘까지 국외는  물론 국내에서 출판된 사전들에 올림말로 아직 오르지 못한 상황이다.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의 예술과학연구중점쩨마로서 문화부 예술과학지도소조의 지도아래 편찬되는 《중국구연지·길림권》에 수록된 조선족구연예술종류해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판소리: 가객(연기자) 이 고수(북치는 사람)의 북반주에 맞춰 노래를 위주로 일인다역의 말, 동작을 섞어가면서 슈제트를 설정하고 인물형상을 창조하는 조선족 전통설창구연예술.     만담: 연변인민출판사 출판《우리말사전》의 풀이와 대동소이하다.     재담: 연변인민출판사 출판《우리말사전》의 풀이와 대동소이하다.     설화: 한 연기자가 민간에서 류전되는 력사이야기나 속담, 우화, 현실이야기 등을 형상적으로 재미있게 엮는 조선족전통구연예술.     3로인: 1950년초 연변지구에서 형성. 세 로인이 등장하여 연극화한 슈제트와 희극화한 언어로 선진을 구가하고 후진을 교육하거나 긍정적 인물, 사건, 사물을 찬양하는 조선족구연예술.     연변창담: 1976년 연변지구에서 형성, 《수자풀이》등 조선족민가를 기본조로 말이 노래보다 많은 조선족설창구연예술.     편고엮음: 1975년 연변지구에서 형성, 녀배우들이 편고를 치고 노래하면서 표현. 말, 무용을 유기적으로 결합한 일인다역의 조선족설창구연예술.     북타령: 1977년 연변지구에서 형성. 북을 치고 노래하면서 표현. 말 ,무용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이야기를 서술하는 일인다역의 조선족설창구연예술. 중국 조선민족문사대계 예술사에  오른 《노래엮음》이 《중국구연지·길림권》에서는 그 형식이 《연변창담》과 공성이 많기에 조선족구연예술종류로 따로 정하지 않았다. 이밖에 연변지구에 한때 조선족설창구연형식으로 있었던 《장고엮음》,                                 (3) 《연변금창》,《연변고서》와 같은 것은 광범한 관중속에 아직 뿌리를 깊이 박지 못한 상황이고 미흡한 점들이 많기에 《중국구연지·길림권》에 수록하지 않았다. 비교연구에서 얻은 계시     첫째: 중국조선족구연예술은 조선반도의 《구연예술》보다 외연이 넓어졌고 이야기와 노래가 결합된 형식이 특이한 중국 조선족구연예술이다. (특이성)     둘째: 조선족구연예술에는 조선반도문화의 심각한 락인이 찍혀있다. 새롭게 창조된 조선구연예술 역시 말, 음악, 형식 등에서 다분한 민족성을 갖고있다. (민족성)     셋째: 중국조선족구연예술은 시대의 변혁과 함께 한족곡예(曲藝)예술의 장점을 널리 섭취함으로써 이채롭고 다양한 민족문화예술로 발전하였다.(다양성)     21세기 중국조선족구연예술의 전망     21세기에 이르러 우리 나라는 경제발전과 사회진보에서 획기적인 변화와 전변을 가져오게 될것이다. 이에따라 국민들의 생활수준과 문화정도도 새로운 차원으로 부상할것이며 정신생활에 대한 국민들의 욕구도 부단히 새로워지고 높아질것이다. 이런 총적추세하에서 민족특색과 지방특색이 농후한 중국조선족구연예술은 21세기의 중화예술백화원에 더한층 이채를 돋구어줄것이다.     1. 조선구연예술의 국내공연공간이 크게 넓어질것이다. 중국조선족은 오래동안 동북3성에 산재해서 살았다.그리고 수많은 민족집거구를 형성했다. 통계에 의하면 동북3성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제외하고 단일민족행정촌이 길림성에는 273개, 료녕성에는 147개, 흑룡강성에는 491개나 있다고 한다. 인구류동에 따른 상술한 민족집거지의 해체를 비관적으로만 보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민족집거지에서 떠난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지역에 가서 그 지역의 우리 민족집거지의 일원이 되기때문이다. 《마치 사막지역의 한곳에서 없어진 모래산이 다른 한곳에서  새로운 모래산을  이루듯말이다.》 더  락관적인것은 그러한《산》이 산해관을 넘어 청도, 북경, 천진, 광주 등 중국대도시에 일어서리라는것이다. 90년대에 조선족인구류동은 대규모적인 추세를 보이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1990년부터 1996년사이에 약 20만 조선족농초인구가 연해발달지구에로 이주하였다. 북경시 조선족인구는 1950년도의 28명으로부터 지금의 8,000여명으로 늘었는데 호구가 없는 수자까지 합하면 5만명,  멀지않은  장래에 북경시의                                 (4) 조선족인구는 10만을 돌파할것으로 예상돼 전국에서 조선족인구가 제일 많은 도시로 될듯싶다. 동북3성에서 날아간 《모래》가 진짜로 《산》을 이룬것이다. 우리의 조선족구연예술은 형식이 간단하고 내용이 다채로와 이러한 《산》에서 호함진 꽃으로 자랑을 떨치게 될것이다.     2. 조선족구연예술의 지위가 한층 높아질것이다.     우에서 언급하다싶이 우리 민족의 인구대류동은 현실로 되었는바 불가피한 것이다. 지적하고싶은것은 류입지역의 생활양식의 영향 및 민족동화의 엄연한 현실앞에서 우리 민족은 자기의 민족문화전통을 더욱 애착하게 될 것이다. 동북3성에 남아있는 조선족들의 상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1세기 중기에 가면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인구가 15%좌우될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따라서 우리 민족자치지방을 포함한 동북3성의 모든 우리 민족집거구성원들의 민족자아의식도 강해질 것이다. 거기에다가 물질문명이 갖다주는 향수로 전통예술을 포함한 민족뿌리찾기 운동이 세차게 일 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조선족구연예술도 민족지도자들과 전체 민족성원들의 중시를 받을 것이며 그 지위가 한층 높아질것이라 전망된다.     3. 조선족구연예술이 해외로 진출할 것이다.     지구촌에 살고있는 조선민족은 비록 사회적체제와 생활환경이 서로 다른 120여개 나라와 지역에 분포되여있다하지만 필경 동일한 보금자리 -조선반도에서 태여나 공동한 문화적유산을 계승하고 동일한 선조 -단군을 모시고있는 까닭에 언어, 문자, 민족의식, 풍속습관, 문화전통은 물론 전통적문화의 계승면에서도 공동성이 많다. 이런 공성은 상호 교류의 우월한 조건으로 된다. 우리들이 새롭게 창조한 민족구연종류들의 형식이 그들의것과 다르지만 그 형식은 필경에는 민족전통예술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연변의《3로인》은 우리 민족의《재담》에서 발전된것이며《연변창담》이나《편고엮음》,《북타령》도 음악적바탕을 전통민요에 두었으며 악기도 전통적인 민족악기를 쓰고 있다. 때문에 우리가 새롭게 창조한 형식일지라도 해외겨레들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뿐만아니라 우리 구연예술의 특이성과 다양성은 그들의 전통예술계승발전에 도움을 줄것이며 전체적 민족문화자질제고에 유조할 것이다.     4. 조선구연예술이 문화관광업중의 하나로 부상할것다. 최근 몇 년래 연변의 관광업은 전례없는 증폭을 보이고 있다. 21세기에는 조                                (5) 선반도의 관계개선과 세계완화추세로 더 많은 관광객이 연변을 찾아올것다. 20세기후반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연변의 관광업은 주로 백두산과 두만강금삼각 등 지리적우세를 리용한 관광업이였다. 21세기는 발해, 고구려 유적, 독립군 사적전적지, 지방민속, 예술 등 문화관광업이 크게 발전할 것이다. 민족성이 짙고 개성이 독특한 조선족구연예술은 이러한 문화관광코스에 가장 알맞다.     5.조선족구연예술의 종류, 내용 면의 도약이 일어날 것이다.     어떤 예술이나를 막론하고 그 발전은 모두 사회의 경제발전과 그에 따른 사회성원들의 문화적욕구를 따르게 된다. 우에서 언급했지만 사회발전과 민족의식의 강화와 함께 21세기에는 중국조선족연구예술이 사회의 각광을 받게 될것이다. 따라서 조선족구연예술은 자체의 민족성, 특이성, 다양성 등 특징을 보류하면서 그 종류가 현유의 몇가지로부터 보다 다양해질것이며 일부는 오늘에 비해 심도를 한층 깊이 할 것이다. 례하면 《판소리》나 《설화》등은 새로운 민족집거구에서 새로운 활약을 보일 것이다. 또한 민족의식, 풍속이나 민족력사인물 등을 구가한 내용이 대폭 증가될것이다.     전망을 위한 대책연구     21세기는 매력이 있는 세기이다. 어떻게 하면 중국조선족구연예술도 매력있는 세기에 매력있는 예술로 발돋움할것인가? 아래에 그것을 위한 대책을 제강식으로 적어본다.     1. 여론이 앞장에 서서 민족예술구축활동을 벌려야 한다.     2. 연변구연단을 회복하거나 다시 세우고 다체제, 다형식의 구연공연단체를 되도록이면 증가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연길시조선족구연단을 주급에 올려와 연변의 《얼굴》로 만들어야 한다.)     3. 민족인구류동에 따른 새로운 민족집거구건설에 중시를 돌려야 한다.     4. 문화관광코스건설을 다그치고 조선족구연예술의 해외진출을 위한 여건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5. 조선족구연예술일군들의 대오건설을 잘 틀어쥐고 무대공연, 리론연구 등 인재를 많이 양성해야 한다.                                               (6)  
5    关于延边文化旅游的几点想法 댓글:  조회:740  추천:0  2012-10-15
关于延边文化旅游的几点想法            延边艺术集成办公室  全秉七 文化是旅游业发展的灵魂.发展旅游业必须重视旅游文化的建设,通过建设旅游文化打造文化产业,再通过文化产业推动旅游产业的发展,实现旅游产业和文化产业的良性循环.而到目前为止,我州旅游和文化的结合还相对滞后,没有做到有机的嫁接,文化产业所具有的巨大潜力还没有在旅游产业上充分释放出来.下面就有关延边文化旅游的问题谈谈几点不成熟的想法. 一, 要认清文化旅游中的朝鲜族传统艺术的位置 1, 延边朝鲜族自治州是国内唯一的朝鲜族人民行使自治权利的少数民族地区. 2, 朝鲜族文化艺术在延边朝鲜族自治州应起主导作用. 3, 朝鲜族传统艺术是朝鲜族艺术的精华与根基. 4, 朝鲜族传统艺术在旅游文化中的作用. 二, 要有保存和发展朝鲜族传统艺术的长期战略.   50多年来政府对保存和发展朝鲜族传统艺术没有长期的战略意识,因而导致: 1,没有朝鲜族传统艺术研究机构 2,没有朝鲜族传统艺术专门表演团队 3,朝鲜族传统艺术人才流失严重 4,在民间稀少看见朝鲜族传统艺术 5,一到旅游旺季就东摇西晃,惊慌失措.(平时没把鸡喂好,来客埋怨鸡不下蛋)  今后怎么办?— 1, 认真落实 “延边朝鲜族自治州朝鲜族文化工作条例” 2, 应有保存和发展朝鲜族传统艺术的长期战略   3, 制定 “传统文化保护法”,对有代表性或做出贡献的传统文化传承人, 传承单位授予相应的称号.并在经济上支持他们的传承活动.   4, 通过多种渠道,筹集并设立民间传统文化保护专项资金,扶持传统文化艺术的发展.并鼓励企事业单位﹑团体和个人捐赠资金用于民间传统文化保                               (1) 护工作,给予捐赠人税收减免优惠.   5, 在专业表演团体中从事朝鲜族传统艺术的演员应给予特种待遇. 三, 要积极展开含朝鲜族传统文化艺术的多种乡土文化节.   1, 州政府已命名14个民族民间特色文化乡镇   2, 傣族有 “泼水节”, 我们的“象帽舞”能不能上一台阶—变成“象帽节”? 3, 乡土文化节的作用 四, 要积极开发抗日遗址, 增添红色旅游品牌.  1,正确认识1928年2月,中国共产党龙井支部成立前的延边抗日历史. A,  龙井市的明东村—中国朝鲜族的第一村 b,  3,13反日大示威—“在“忠烈队”中有龙井东山学校的十名中国学生”.是中国境内首次进行的反日大示威 c,  凤梧洞战斗与青山里战斗-- (1920年6月4日,杀死日军150余名, 1920年10月21日,杀死日军1200余名),是中国境内首次进行的反日战斗,比1937年的平型关大捷早17年.   2,大力宣传 “海兰江大惨案”等延边的抗日斗争历史. 1931年10月至1933年2月的一年半期间,日魁及其走狗对海兰区的 “讨伐”竟达94次只多,残酷杀害朝鲜族革命者和无辜群众1,700余人,悠悠海兰江被鲜血染红. (设想: 每年举行大型民俗艺术节--海兰江民俗艺术节){请参考附加文件} * 第一天为; 1.700名冤民悼念祭礼  (表演大型集体舞‘黄泉舞’等) 通过抗日遗址旅游,宣传延边朝鲜族自治州是中国境内首次进行反日大示威的, 是中国境内首次进行反日战斗的地方,在漫长岁月(自从1907年日本建 ‘间岛派出所’到1945抗战胜利48年间)里延边朝鲜族人民付出了血的代价.( 延边朝鲜族自治州抗日烈士总3,125名中朝鲜族烈士就有3,026名,占96.8%) 五,灵活地掌握国家土地政策,把大量的民间资金引到文化旅游产业上来. 以上粗谈不成熟的想法,请各位领导和学者给予批评指正.  谢谢! 二00五年 七月 二十日                            (2)
4    연변문화관광에 대한 몇가지 생각 댓글:  조회:918  추천:0  2012-10-15
연변문화관광에 대한 몇가지 생각                    연변예술집성판공실 전병칠    문화는 관광업 발전의 혼이다. 관광업을 발전시키려면 관광문화의 건설을 중요시해야 한다.관광문화의 건설을 통하여 문화산업을 발전시키고 다시 문화산업을 통하여 관광산업의 발전을 추동함으로써 관광산업과 문화산업의 량성순환을 실현해야 한다. 우리 연변의 관광산업은 이제 금방 골격만 갖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백산생태관광이나 3국변경관광 그리고 조선족민속풍정관광에 어느정도 문화의 뼈와 살을 보태주는가 하는것은 연변관광산업의 래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이다. 연변의 관광은 오늘까지 관광과 문화의 상호보완이 둔하고 유기적인 접목을 이루지 못해 문화산업의 고유한 거대한 잠재력을 관광산업에서 충분히 발휘시키지 못하고있다. 아래에 연변문화관광을 두고 몇가지 생각을 적어본다. 1, 문화관광에서의 조선족전통예술의 위치를 똑바로 해야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우리 조선민족의 자치를 실행하는 조선민족 대집거지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자치조례”는 제2조 제1항에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길림성 행정구역내에서 조선족이 구역자치를 실시하는 지방이다.”  의논할 여지없이 연변은 조선족의 자치구역인만큼 조선족의 문화예술이 주인노릇을 해야 한다. 다시말하면 조선족문화예술을 연변조선족자치주 문화예술의 “기둥”으로 봐야 한다. 물론 다른 민족의 문화예술을 배척한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예술은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조선족의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족전통예술은 옹근 조선민족예술의 정수이면서 또한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예술의 정수라고 봐야 한다. 조선족전통예술을 포함한 조선민족의 문화예술함량을 증대, 향상시키는것은 자치주의 대외 홍보와 경제발전 나아가 자치주 주민의 지위향상에 홀시할수 없는 거시적역할을 할뿐만아니라 또한  다민족국가로서의 우리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공산당의 대외 형상홍보에도 십분 중요하다. 2, 조선족전통예술의 보존과 발전을 위한 장기적인 전략계획이 있어야 한다.    연변이란 이 중국 유일 조선족자치주에서의 조선족전통예술의 지위는 십분 중요하지만 우리의 지도계층의 사상인식이 아직 여기에 이르지 못하고 있기에 전통예술의 보존과 발전을 위한 장기적인 전략계획이 부족하고 행정적지원과 재정적지원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결과 자치주 창립이 50여년이 지났지만 자치민족으로서의 조선족이 그렇다할 전통예술연구기구 (혹은 전통문화연구기구)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전통예술전문공연단체가 없다. 때문에                                           (1) 전통예술을 전공한 예술인재들이 류실이 십분 심각하다.  전통예술을 전공한 예술학원 학생들은 힘들게 자기의 전업을 배우고도 결국 마땅한 자리가 없어 전업을 바꾸어야 하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한다.그리고  민간에는 “살아있는 전통예술”을 찾기 힘들다. 전통예술의 보존과 발전을 위한 자치정부의 장기적인 전략계획 부족이 가져다준 결과이다. 평시에 “닭모이는 주지않고” 관광계절이 오면 “닭알이 안나온다”고 닥달하지말고 오늘부터라도 조선족전통예술 발전을 위한 장기적인 전략계획을 세움이 바람직하다. 오늘의 현실에서 전통적예술이 자아생성적인것이 못되기에 정부차원의 목적성 있는 부축 양성이 필요하다. 우선 “연변조선족자치주자치조례”와 “연변조선족자치주조선족문화사업조례”를 착실하게 관철 시달해 “조선족민간전통문화서류와 보호명부를 작성하여 대표성이 있거나 중요한 기여를 한 조선족민간문화 전승인과 전승단위에 상응한 칭호를 수여”하고. “전승인과 전승단위가 장악한 조선족민간전통문화 지식과 기예를 전수하도록 고무,지지하고 후계인재를 양성하는데 필요한 물질조건을 제공”해야 한다. , 알아들을수 있는 말로 풀이하면 민간전통문화 전승인에게 민간인이더라도 공무원과 같은 로임대우를 해줄뿐만아니라 민간전통문화지식과 기예를 전수할수 있는 충족한 물질조건을 제공해주어야 한다.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이  력사적 또는 학술적으로 보존가치가 높은 조선족전통예술에 사회적으로 자연히 이목이 집중되게 하고 계승자가 잇따르게 할수 있다. 연변가무단이나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 민악대를 두거나 판소리나 창극이나 전통무용을 전문으로 무대에 올릴수 있는 전문예술단체를 내오고 전통예술을 전공하는 예술인들의 지위를 “첫자리”에 놓고 보호해줘야 한다. 그리고 조선족전통예술발전기금회(혹은 조선족전통문화발전기금회)를 내오고 다경로 투입기제를 형성하여 전통예술 융자경로를 넓히고 전통예술사업에 대한 기부를 권장해야 한다.시범성 인도성을 띤 중점 프로젝트는 정부에서 부축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문화행정주관부문과 인민단체를 통한 공익성기부에서 조선족전통예술대상에 대한 기부를 우선으로 놓고 고무격려해야 하며 기업이나 기업인일경우 세금감면정책을 향수 받게 해야 한다. 다음으로 연변대학 예술학원을 진정으로 조선족전통예술의 전수기기, 연구쎈터로 만들어 높은 소질의 교원대오, 예인대오를 적극적으로 양성해야 한다. 낡은 관념을 버리고 퉁소와 같이 오늘 없는 학과는 다시 창설하여 연변자치주의 민속기악브랜드로 만들기에 힘써야 한다. (‘연변에서의 퉁소의 지위’ 략) 토속적인것일수록 브랜드하기에 쉽고 그 가치가 높다. 3, 전통예술을 포함한 다양한 향토문화축제를 벌려야 한다. 향토문화의 중요성은 우선 지역문화, 특히 지역의 전통문화를 활성화 하는데 있고 그 다음                                       (2) 은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는것에 있다. 지역경제가 활성화되면 다시 지역문화가 꽃피는 량성순환이 이루어진다. 연변은 옹근 중국문화권 가운데 독특한 지역민족문화를 갖고있는 곳이며 또한 세계 조선민족문화권내에서 한국이나 조선과 력사적 및 이데올레기적 차이를 보여 주는 차별화된 지역문화를 소유한 곳이기도 하다.이러한 지역문화자체가 곧 우리의 부랜드인데 우리에게는 운남 따이족의 살수제와 같은 진정한 의미로서의 민속문화축제가 없다. 참으로는 유감이다. 확실히 우리에게 뭔가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그것을 잡지못하고 해마다 갈팡질팡 한다.훈춘 밀강의 “퉁소의 고향”이나 왕청 배초구의 “상모춤의 고향”에서 해마다 정규적으로 상모나 퉁소를 중심으로 한 향토문화축제를 진행하면 안될가? 우리 농악중에 상모놀이가 있는데 “상모제”를 만들어 한족과 기타 민족을 포함한 전주 200만 주민, 아니면 우리 80여만의 조선족만이라도 전부 혹은 50%가 상모를 돌린다면 상모제는 완전히  가능하지 않을가?  얼마전에 조선문판 흑룡강신문을 통하여 지난 음력 6월 6일, 연변 조선족민속학자이신 천수산교수님이 흑룡강성 녕안시 발해진에 가서 조선반도에서마저 거의 사라져 가고있는 우리 민족의 전통명절인 류두절을 복원 시킨 소식을 기쁘게 보았다. 그러면서 하나의 유감에 가슴이 저렸다. 자기가 살고있는 떳떳한 민족자치주를 떠나 먼 타향의 작은 시골에 가서 류두절을 복원시켜야만 했던 우리 민속학자의  아픈 가슴을 우리의 지도자들은 어느정도 알고 있는것일가? 4, 항일사적지를 잘 개발하여 적색관광브랜드로 부상시켜야 한다. 우선 1928년 2월, 중공용정촌지부 (혹은 동만특별지부라고 함) 설립전 연변의 항일력사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  ㄱ,룡정시의 명동촌: 김약연등 조선이주민들이 1899년 2월 18일 22세대주 142명이 두만강을 건너 정착한 중국조선족의 제1촌이다. ㄴ, 3,13반일대시위: “대한독립선언서”를 선포하는 대회를 이어 진행한 반일대시위, 시위대의 충렬대에는 용정동산학교의 중국학생 10명도 있었다. 3,13반일대시위는 중국경내에서 맨처음으로 진행된 항일대시위이다. ㄷ,봉오동전투(1920년6월 4일 ,일군150여명 살상)와 청산리전투(1920년10월 21일 일군 천여명 살상): 중국의 항일의 첫 총소리는 연변이란 이땅에서 울렸다. 1937년 7월 7일의 평형관대첩에 비해 17년 앞섰다. 등등. 그 다음으로 화련리대참안같은 연변항일투쟁력사를 대내외로 널리 홍보해야 한다.                                      (3) 지난시기 30년대초 해란강하류류역에는 좌우 량옆 골짜기들에12개의 자연부락에 2백호가량의 조선족 농호들이 있었다. 1931년 10월부터 1933년 2월에 이르는 기간에 일제침략자들과 자위단 놈들은 화련리를 비롯한 이 해란강하류일대를 94차나 “토벌”해 1,700여명에 달하는 조선족혁명자와 무고한 백성들을 살해하였다. (“해란강대참안” 또는 ‘화련리대참안’이라고도 함) 놈들은 혁명자들을 붙잡아서는 장작더미우에 올려놓고 불을 지펴 산채로 태워죽였는가 하면 사지를 뜯어내서 끓어번지는 물 가마속에 집어넣었으며 혁명자들의 몸을 토막토막 칼탕쳐 살해하기도 하고 목에 칼을 박아 피를 받은후 석마돌에 갈아죽이기도 하였다. 야수보다도 더 악독한 일제침략자들의 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우리는 그저 잊고지날수 없다.우리가 알아야 할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대들이 알게해야 하고 전국인민이 알게해야 한다.( “해란강대참안1700명피학살평민추모제”를 포함한 대형민속문화예술행사—“해란강민속문화예술제계획서”를 부록으로 첨부한다.) 우리 연변에는 이러한 항일투쟁력사 사적지들이 많다. 연길시의 왕우구쏘베트정부유적지, 화룡현의 약수동쏘베트유적지, 어랑촌13용사사적지,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유적,홍기하전적지,안도현의 미혼진항일련군2군설립지, 대사하전투전적지,내두산항일근거지유적,왕청현의 소왕청항일유격대근거지유적,라자구항일유격대근거지유적 ,라자구구위유적 등등.우리는 하루속히 항일력사관광을 장백산생태관광, 3국변경관광,조선족풍속관광 등 록색관광부랜드 뒤를 이어 연변의 적색관광부랜드로 만들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대내외에 알려야 한다.  연변은 중국경내에서 맨처음으로 3만명의 항일대시위를 진행한 곳이며 중국에서 맨처음으로 항일의 총소리를 쏘아올린 곳이다.연변인민은 기나긴 항일투쟁력사(1907년 간도파출소성립으로부터 1945년 항일전쟁승리까지 48년간으로 전국적인 항일투쟁력사에 비해 40년이나 앞섰다.)에서 피어린 대가를 치루었다.(전 주 3,125명 항일렬사중 조선족이 3,026명으로 렬사총수의 96.8%를 차지한다.) 5,토지정책을 령활하게 이용하여 대량의 민간자본을 문화관광산업에 끌어들여야 한다. 연변은 문화적관광자원이 많지만 다른 지구에 비해 그 개발이 미비상태에 처해있다. 훈춘의 토자비, 룡호석각,룡정의 일송정,룡드레우물, 윤동주 생가,화룡의 청산리,등은 어느정도 개발이 되여 국내 또는 외국의 유람객을 맞고 있지만(그것도 역부족) 대부분은 그대로 방치된 상태이다.우에서 렬거한 항일유적지는 물론 룡정의 한왕산산성, 연길시의 성자산성,서고성발해유적 등 허다한 력사유적지를  민간자본을 끌어들여 개발할수 있다고 보아지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연길시해란호골프장으로 가는 길옆에 중국조선족민속촌이리는 패말이                                       (4) 박힌지 몇해되지만  민가 하나없는 빈 공지로 남아 있고 그곳에 들어선다던 해란호민속관광휴가구 역시 묘연하기만 하다. 부지면적 56만 30평방메터로 어린이놀이터, 유람선선박장, 문화교육구 등 시설이 들어 앉는다고 우리의 언론에서 보도한지도 몇해되지만 언제나 현실로 될는지?  관건은 토지징용문제라고 본다.나라의 토지정책이 엄하고 까다롭기에 사인기업이나 개인들이 문화관광자원에 흥취가 있으면서도 감히 투자를 못하거나 투자하기를 꺼려한다.정부의 령활성이 필요하다고 본다.짧은 소견이지만 사적지소재 토지나 문화관광에 유용하게 쓸수 있는 토지를 국유토지든 집체토지든 점검해서 주관광국이나 주문화국의 이름으로 공시를 낸다면 콩크리트 곽속에서 살면서 오염으로 진절머리를 느끼는 도시의 사인기업인나 개인이 경영하려고 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다. 해란호옆의 중국조선족민속촌도 억대를 넘기는 투자유치를 기다리지만 말고 일단 토지를 점검하고 개개의 민속건물을 잘 설계하여 하나 하나 초상공시를 내면 민간자본이 쉽게 억대를 넘겨 원만하게 일이 성사될수 있을것이라고 본다. 이상과 같이 성숙되지 않은 생각을 피력하면서 여러분의 기탄없는 비평을 부탁한다.                                                 2005년 7월 20일                                       류두절: 류두절은 음력 류월 보름으로서(6월15일) 신라때부터 전해져 왔다고 한다. 류두란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의 준말인데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의미이다.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푸르고 양기가 가장 왕성하다고 한다.이날 남자 녀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 동쪽으로 흐르는 내물을 찾아가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였는데 이것으로 무든 액을 풀어 버린다는것이였다. 새로운 과일이 나고 곡식이 여물어갈 무렵 몸을 깨끗이 하고 조상과 동신에게 정갈한 음식물로 제사를 지내며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우리 민족의 오랜 풍속중의 하나이다.                                                        (5)
3    조선족민속문화-되놀이에 대한 고찰 댓글:  조회:1167  추천:0  2012-10-15
논문 조선족민속문화-되놀이에 대한 고찰 전 병 칠 중국조선족은 월경민족으로서 자기들의 고유의 민속문화를 갖고 조선반도로부터 중국의 동북지방에 정착하였다. 그네뛰기,널뛰기,씨름,활쏘기, 줄다리기,제기차기, 등 경기놀이와 장기, 바둑,윷놀이 등 겨루기놀이,연띄우기,팽이돌리기,썰매타기,바람개비놀이,숨바꼭질,자치기,줄넘기,공기놀이, 실뜨기 등 아동놀이를 포함한 허다한 민속놀이들은 중국조선족이 집거한 곳들에서 오랫동안 류전되면서 오늘까지도 그 맥락을 이어가고 있다.  조선족민속문화의 하나인 되놀이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 민족의 고유의 민속문화의 하나로 보고 어떤 사람들은 중국조선족의 력사에서의 자연 발생적인 산물로서 특이한 민속문화로 보고있다.                                  되놀이의 기원에 대하여 조선이나 한국의 “우리말 사전” “대국어사전” 등에는 “되놀이”란 올림말이 없으나 1973년 조선 사회과학출판사 출판으로 출판된 “조선문화어사전”은 “되놀이”(273P)를 올림말로 올리고 그 해석을  “(낟알같은것을) 여러 사람이 한몫씩 내서 그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놓고 함께 즐기며 노는 놀음놀이”라고 달았다. 유감스운것은 아직까지 되놀이 기원에 관한 상세한 력사기재가 없는것이다. 필자는 되놀이 기원에 관한 상세한 력사기재를 보지 못한 상황에서 되놀이의 기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천박한 견해를 제기한다. 첫째; 되놀이의 어음적기원 리조시기의 기록에는 “되”를 “승”이라고 씌여있고 “말”은 “두”라고 씌여있다. 리조시기의 “말”은 네모난것인데 그 용량은 지금의 3.5리터정도, “되”는 말이 10분의 1이였다. “되”의 모양은 “말”과 같은데 작았다. “말”과 “되”는 낟알을 팔고 사는데는 물론 가정마다 수시로 쓰는 도구였다. 끼니마디 밥을 지을 때는 “되”로 한정한 쌀의 량을 꺼내는 일상도구로서 쌀독안에는 반드시 쌀되박이 있기 마련이였다. 지난시기 쌀되박은 나무로 만들었지만 나무대신 바가지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을 민간에서는 되바가지라고 불렀다. 되놀이를 할 때는 되놀이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저마끔  집에서 자기의 몫의 낟알을 쌀되박이나 되바가지로 떠 가지고 가서 그번 놀이에서 정해논 음식을 만들었다. 되놀이란 어원은 이로서 산생되였다. 둘째; 되놀이는 두레의 호미씻이에 기원을 두고있다. 지난날 우리 농민들은 황두, 두레와 같은 공동로력협조조직을 무어가지고 모내기,김매기,가을걷이와 같은 한꺼번에 많은 노력이 요구되고 힘이 드는 농사일을 서로 도우면서 제철에 해내였다.건삶이를 많이하던 서북조선의 별방지대에서는 황두라는 공동로력협조조직을 무었                                      (1) 고 중이남조선이나  일부 서북조선지역에서는 두레라는 공동로력협조조직을 무었다. 이러한 황두나 두레는 농호들의 로력과 축력, 농기구의 부족울 타개하고 일손이 많이 들며 시간을 다투는 모내기와 김매기를 제철에 끝낼수 있게하는데서 큰 역할을 하였다. 농민들은 공동로동과정에서 집단로동과 호상부조의 우월성을 더욱 느꼈으며 이웃사이에 더욱 화목해지고 친근하게 지냈다. 황두와 두레는 이러한 우월성으로 하여 오래동안 농촌에서 특유의 공동로동풍습으로 계승되여 왔다. 두레에는 호미씻이라는 특수한 놀이가 있었는데 김매기를 끝낸 다음 두레 일을 총화하고 여름내 농사에서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두레군들이 벌리는 놀이였다. 김매기를 끝내고 호미나 후치 등 농기구들을 깨끗이 씻어 광속에 넣어둔다고 하여 호미씻이라고 불렀다. 17세기전반기에 활동한 학자이며 관리였던 장유(호 계곡 1587-1638) 자기의 문집 “계곡집”에서 “농가에서 김매기가 끝나면 남녀로소가 다같이 모여서 음식을 함께 먹는데 세서희(洗鋤戱-호미씻이놀이)라고 하였다고 썼으며 “천일록”은 “산간지대나 평야지대를 막론하고 매년 7월 보름날에는 농가의 남녀들이 음식을 차려놓고 모여서 노는데 이것을 세서연(洗鋤宴-호미씻는 잔치)라고 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알수있는바  호미씻이는 17세기이전부터 전해오는 농사와 관련된 오랜 풍습의 하나였다.자료에 의하면 호미씻이에는 공동식사와 집단적인 춤과 노래, 씨름경기 등을 하였는데 공동식사의 준비는 매 집에서 없는 살림이지만 별식들을 성의껏 차려가지고 나오는것으로 하였고 술과 고기, 떡 같은 것은 집집에서 얼마간의 낟알이나 돈을 모아가지고 준비하였다고 한다.이날 농민들은 농기가 펄럭이는 넓직한 풀밭우에서 배불리 먹고 마시며 농악에 맞추어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으며 씨름판에 뛰여들어 힘을 겨루기고 하고 꽹과리와 징을 울리면서 씨름군들을 응원도 하였다.이러한 놀이는 농민들이 여름철 쌓인 피로를 풀어주고 이웃간의 친목을 두텁게 해주는 의의있는 계기로 되였다.이러한 호미씻이는 7월 15일인 백중날에 논다하여 일명 백중놀이라고 하였으며 두레군들이 논다하여 두레놀이라고도 하였다. 두레군들이 두레놀이에 참가하기 위해 쌀되박에 낟알을 담으면서부터 두레놀이가 되놀이로 되였을수 있고 두레놀이가 점차 서북조선지역으로 옮겨지면서 “두레”가 “되”로 와전되였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되놀이는 일제 탄압시기 간도땅에서 자연 발생하였다. 필자는 지난 7월 19일과 20일 행운스럽게 심양시에서 펼쳐진 “동방민족 전통민요의 현대적 재조명” 학술세미나에 참가하여 반도의 남북학자를 대상으로 되놀이에 대한 조사를 할수 있는 기회를 가질수 있었다. 아래의 도표는 조사한 내용이다. 국       가 조사인수 되놀이 경력 유 되놀이 경력 무 되놀이를  모름 조         선       5명       1명        4명       3명 한         국       5명       0명        5명       5명 도표에서 보여준바와 싶이 조사중 한국의 5명은 모두 되놀이를 모르고 있었고 그 경력도 없었다.올해 65세에 나는서울대 조동일교수는 한국경내에서 민요수집으로 남쪽땅을 다 밟은 명성있는 학자인데 시골마을을 돌며 민요를 수집할 때 혹시 되놀이라는 말을 들어본                                      (2) 일이 있는가 하는 물음에 “죄송하지만 한번도 들어 못 봤다”고 말했다. 반대로 조선의 학자들중 평양음악무용대 안병균 부학장은 되놀이를 알고 있었고 고향인 함경북도 새별군에서 어릴적 되놀이를 해본 경력을 갖고 있었다. 사회과학자협회 오영일처장은 되놀이를 직접 해본 경력은 없지만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면서 필자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조선의 위대한 항일투사  김정숙어머니는 1917년 조선 회령에서 태여나 22년도에 부모를 따라 중국 연변의 팔도의 베이궈에 갔다가 27년도에는 서산에 옮기고 29년도에는 팔도 부암동에서 살았다고 한다.1930년도 가을에 마을에서 있은 되놀이에 참가해야 하겠는데 자기 몫으로 갖고갈 곡물이 없어 김정숙어머니는 나어린 남자동생이 밭에서 뜯어온 풋강냉이를 가루내 가지고 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밭이 소작받고 있는 밭이라고 지주한테 걸려들어 100일간 그 지주집에 들어가서 머슴살이를 했다고 한다. 오처장은 되놀이는 함북도에서만 하는 놀일거라고 주장했다. 필자가 조사한데 의하면 조선에서의 두레놀이는 두만강과 가까운 회령, 무산, 새별 등 곳에서 많이 볼수 있었고 두만강과 멀리 떨어질수록 적거나 거의 볼수 없었다. 지난세기 한일합병후 일제는 조선의 본토에 가혹한 헌병정치를 펼쳐 반일 항쟁을 막고 우리 민족의 사소한 단합의 요소라도 철저히 탄압하였다.그러다보니 간도지방은 우리 인민들과 일제가 사활을 겨루는 주요한 곳이였다.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의 선구자들이 되놀이라는 이 음식놀이로 일경이나 반역자의 눈을 피해 민중의 단합의 자리를 마련하고 항일력량을 키웠을수 있다. 간도에서의 되놀이가 조선반도의 북부지역으로 흘러들어갈수 있고 항일투사 김정숙어머니의 되놀이 일화로 “조선문화어사전”에 되놀이라는 올림말이 올려졌을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다.오늘까지 조선에서 출판한 민속놀이를 소개한 허다한 서적에는 되놀이라는 민속놀이가 없다. 중국동북지역에서의 되놀이의 류전과 보존 1).되놀이의 류전과 보존 구역 필자는 본 론문을 준비하는 기간 출장길로 2차에 걸쳐 연길에서 북경으로 다시 북경에서 연길로 24시간씩 기차를 타면서 근 90여명 인원들의 되놀이경력을 쉽게 조사할수 있었다. 아래의 도표는 필자가 동북3성의 부분적 사람들을 만나 조사한 내용이다. 지     역 조사인수 되놀이 경력 유 되놀이 경력 무 되놀이를  모름 길림성 연변지구       52명       50명        2명   길림성 통화지구        5명        1명        3명       1명 길림성 사평지구        4명        1명        3명   길림성 길림지구       8명        1명        7명   요녕성 단동지구       2명        1명        1명   요녕성 심양지구       6명       2명       3명       1명 흑룡강성 할빈시       5명       2명       3명   흑룡강성 상지시       1명         1명   흑룡강성 계서시       1명         1명   흑룡강성 목단강       8명       7명       1명   이상이 도표가 보여주다싶이 되놀이는 연변지구와 목단강지역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고 또 그 경력이 있는 사람도 많았다. 연길시 영락구역의 한 휴식터에서 2차에 걸쳐 (04,7,6일,11일) 13명의 할머니들과 6명의 할아버지들을 마주하고 조사를 벌린데 의하면 이 로인들중 1명을 제외한 18명이 되놀이를 해 본 경력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필자와 흥미진진하게 자기들의 되놀이를 하던 과정을 이야기했다. 이 로인들은 대부분 연변의 타 현시의 농촌에서 자식들을 따라 연길로 이주해 온 로인들이였다.  올해 80세에 나는 조도수(趙道洙)로인은 안도현 자흥촌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15,16세때에 동네청년들과 함께 되놀이를 자주 했다고 했다. 주로는 메밀국수 되놀이를 했는데 바람이 크게 부는 날이면 사전에 준비한 삼줄그물로 새밭에 내린 꿩들을 잡아서는 꿩탕 메밀국수를 해먹었다고 했다.로인은 바람부는 날이면 새밭의 바람소리에 꿩들이 그물을 끄는 소리를 잘 못 듣기에 그물을 끌면서 힘차게 달리면 새밭에 숭어있던 꿩들이 많이 걸릴 때는 7,8마리씩 그물에 걸려들었다고 하면서 당시 추억으로 흥분했다. 되놀이라는것을 해 본 경력이 없다고 대답한 1명의 로인은 흑룡강성 계서시에서 온 할아버지였다. 그 옆의 시장에서 만난 80세나는 윤주순할머니도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태여나 9살에 흑룡강성 상지시 하동촌에 이주와 평생을 농사질을 했지만 되놀이를 한 경력이 없다고 했다.  부모의 고향이 충청북도 청주시인 올해 84세인 이형봉로인은 훈춘시 량수진 출생인데 되놀이 한 경력이 많았고 어린시절 소학생시절에 메밀국수되놀이도 했고 참새를 잡아서는 참새되놀이도 한적이 있다고 했다. 북경행 기차에서 만난 73세의 방금손할아버지는 왕청 신흥향 룡천촌 태생인데 16,17세좌우에 마을 친구들과 되놀이를 자주 했는데 메밀국수 되놀이를 많이 했다고 했다. 그는 1955년 사범을 졸업하고 류하현 조선족중학교에 가서 교편을 잡았는데 류하현의 조선족들은 되놀이라는걸 몰라 그 후에는 못해봤다고 했다. 조선어문 교원으로 퇴직한 방선생님은 되놀이는 함경도풍속이기에 햠경도사람이 많은 연변에서만 류전되는것이라고 찍어 말했다. 연변의 40대,50대 60대들은 대부분 60년대와 70년대 80년대에 되놀이를 많이 해왔다. 필자는 60년대 중기와 말기 화룡시 두도진 연풍촌에 있었는데 남녀 청년들이 함께 모여 조개떡되놀이, 언감자떡되놀이 등을 많이 했다. 2).되놀이 군체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50년대와 그 전후를 포함해 되놀이를 제일 많이 하는 군체는 녀성들이였다. 아마 녀성들이 음식을 자체로 만들수 있고 또 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기들끼리 앉아 스트레스를 풀기에는 되놀이 그 이상이 없었던것과 관계되는가 싶다.  그다음으로 50년대 후반부터 80년대말 좌우까지는 청춘 남녀들이 주체로 민병이나 공청단조직의 이름을 달아 함께 모여서 처녀들은 떡방아를 찧고 총각들은 나무를 패거나 등 힘든 일을 했다.떡가루가 도착하면 처녀총각이 마주 앉아 떡을 만들었다.  3).되놀이의 음식                                        (4) 필자가 조사한 되놀이음식을 보면 1, 메밀국수 2,가랑잎떡(가람떡) 3,송편 4,언감자조개떡(당콩을 밖는다) 6, 만둑 7,입쌀밴새 8,시루떡(설기떡) 9,언감자밴새 10,오그랑죽 11,찰떡 12,계피떡 등이 많았고 개별적인 사람들은 김치나 참새로 되놀이를 하기도 했다. 올해 78세인 정금숙로인은 위자구 장안촌에서 살았는데 배추랑 속에 넣는 만둑떡놀이를 많이 했다고 했다. 가람떡만 그 만드는 방법을 소개한다. 먼저 집집에서 가져온 입쌀을 물에 불구어 씻은후 건기를 들이고 발방아나 절구에 가루를 낸다. 그 다음 거기에 찹쌀을 약간 섞어서 떡을 빗고 그 우에 새파란 가둑나무잎이나  깨잎 혹은 보드라운 옥수수잎사귀를 붙이고 가마에 찐다.이런 가람떡은 잘 쉬지 않고 또 맛이 특별했다, 가람떡에 당콩을 밖지않았을 경우는 따로 콩고물을 만들어 찍어 먹기도 했다. 4).되놀이 방식   되놀이기본방식이라면 입쌀, 메쌀,언감자 등 낟알들을 여러 사람이 한몫씩 낸후 미리 정해 논 집에 모여 그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놓고 함께 즐기며 노는 것이였다. 되놀이끝에는 보통 모여서 북을치고 퉁소를 불면서 춤추고 노래부르고 하였는데 퉁소나 북이 없는 마을에서는 물함지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북대신 그걸 두르리면서 흥을 돋구었다.  화룡시 두도진 연풍촌부녀들은 되놀이 뛰끝이면 꼭 북장단에 맞춰 춤을 췄다. 마을에 북을 잘 치는 전고분할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란다. 또 되놀이끝에는 공기놀이, 윷놀이, 화토놀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올해 79세인 오경숙할머니는 왕청현 서위자촌에  살았는데 처녀때 대부분 찰떡되놀이를 하고 되놀이 끝에는 돌을 숨기는 놀이를 놀았다고 했다. 돌을 숨긴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유희였다. 그리고 과거에는 쌀 같은 낟알을 사람마다 한몫씩 내서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었으나 지금의 경우는 생활형편도 좋아지고 현금 류통이 많은지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자기 몫으로 현금을 내고 되놀이에 참가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도시 로임족들도 가끔 돈을 거두어 사전에 정해 논 집에서 개를 잡고 개 되놀이를 한다던가 또는 특별한 음식상을 차린다든가 하면서 놀음판을 벌리는데 되놀이의 잔류로 볼수 있다. 지금도 연변의 농촌들에서는 부녀들이 되놀이를  많이 하고 있다. 농촌에 청년들이 적다보니 청년들이 하는 되놀이는 매우 적다. 상대적으로  지금은 독보조로인들이 남녀 함께 하는 되놀이가 많다. 되놀이의 미학적가치   되놀이를 해 본 사람들 대부분이 똑 같은 체험을 이야기 했다 귀납해 보면 다읔과 같다. 첫째, 마음이 서로 통하는 사람들이 되놀이를 한다. 둘째, 조용한 집을 찾는데 외딴집일수록 좋다. 셋째,말성이 많거나 성질이 고약한 사람은 참가시키지 않는다. 넷째, 지나치게 가난하여 자기 몫을 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의 몫을 담당하거나 되놀이군들의 상의를 걸쳐 몫을 내지 않아도 참가할수 있었다.다섯째, 음식이 남으면 로인을 모시고 있는 집이나 환자가 있는 집에 우선적으로 보내주었다.  아래에 되놀이가 갖고있는 미학적가치를 적어본다.                                        (5) 1,실향민의 애환을 달래주고 고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다분히 키워주었다. 기아와 가난 그리고 조국을 빼았겨 낯설은 타국 땅에 쪽지게를 내린 우리의 1세들은 되놀이를 하면서 그리운 자기의 고향과 보고싶은 형제, 친척들을 그리며 떠난 고국에 대한 열애를 되새겼다.올해 73세인 화룡시 토산진에 산 주장권할아버지는 일찍 어렸을적에 화룡시 남평진 가마골에서 살았는데 자기의 아버지 주철운(1906년생)이 마을사람들과 함께 되놀이를 하면서 고향에 두고 온 동생들을 그리며 눈물을 흘리는걸 보아왔다고 했다. 2,반일사상을 선전하고 민중의 단합해 항일의 힘을 키워주었다.  도문시 79세에 나는 박령감은 2,30년대 되놀이는 혁명인들이  반일사상을 선전하거나 반일투쟁, 폭동 등을 조직하기 위해 모임을 가지는 주요 수단의 하나였다고 했다. 그들은 일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항상 “오늘 저녁에 김아무개네집에서 되놀이를 하니 참가하라”는식으로 모임을 가졌다고 했다.. 3,봉건적인 세습에서 벗어나 사회에 참여하려는 부녀자들의 소박한 념원을 반영하였다.                          되놀이는 부녀들이 제일 많이 했다. 장시기 동안 우리 민족의 부녀들은 봉건적인 유교제도아래 가정에서 우로는 시부모들을 모시고 아래로는 시누이 시동생과 자기의 어린 자식들을 키우면서 허리 한번 시원히 못 펴면서 큰소리 한번 치지 못하고 꼭두새벽에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가무일에 시달렸다.그들에게 있어서 되놀이는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피곤이 실린 허리를 쭉 펼수 있는 더없이 좋은 자리였다. 백두산처럼 높은 시아버지, 고추 후추처럼 매운 시어머니,배추잎처럼 푸른 맏동서, 올콩볼콩 발라메이 시애끼, 벼개 벼고 눈물 짓고 이불 쓰고 통곡하던 시집살이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공명감을 주었고 또 사회적인 남녀불평등에 대한 똑 같은 원망의 마음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가 되게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드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동네소식이며 나라소식,세계소식을 듣느것이 더없이 행복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이런 자유와 평화속에서 사회에 참여하려는 자기들의 소박한 념원을 반영하면서 마음껏 노래 부르고 춤을 췄다. 그들은 자기들의 소유한 이 소천지를 보호하기 위해 조용한 집, 외딴집을 찾고 말을 나르는 입 빠른 녀인을 싫어하면서 그런 녀자는 될수록이면 되놀이에  참가시키지 않았다.  4,자아를 찾고 인생의 향샹을 위해 노력하는 계기가 되였다.  “인생은 만남에서 이룩된다”는 말이 있다. 공자는“3인지행필유아사”(三人之行必有我師)라고 했다 .되놀이는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자리라 서로가 배울 점이 많았다. 다른 사람이 살아온 인생에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반성도 하게 되고 남의 좋은 권고와 충고로 새로운 인생 출발도 할수 있었으며 또한 남의 음식만드는 법, 노래재간 ,춤재간 등을 배워 자기를 향상 시킬수도 있었다.  5. 주위 사람들과의 친목을 도모하고 호상부조의 정신을 키워주었다. 인간은 더불어 산다고 한다. 주위 사람과의 친목을 도모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이면서 또한 지혜이다. 되놀이는 여러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음식을 만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놀이같은것을 함께 하면서 기쁨과 슬픔을 주위 사람들과 함께 나눌수 있는 자리였을뿐만아니라                                        (6) 불쾌했던 일은 서로 리해해 주고 량해를 빌수 있는 자리, 숙적이였던 사람들을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다시 화해시켜 다정히 보낼수 있게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또한 어려운 사람을 도와  묘책을 낼수 있는 자리, 도와 줄수 있는 자리이기도했다. 되거리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되놀이를 할 때 지나치게 가난하여 자기 몫을 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의 몫을 담당하거나 되놀이군들의 상의를 걸쳐 몫을 내지 않아도 되놀이에 참가시켰다고 하면서 음식이 남으면 로인을 모시고 있는 집이나 환자가 있는 집에 우선적으로 보내주었다고 했다.로인을 존경하고 약자를 도와주는 우리 민족 미덕이 되놀이에서의 체현이 아닐수 없다.  한마디  더 이야기 하고 싶은것은 중국조선족의 되놀이에 가끔 다른 민족성원들도 끼워 우리 민족의 민족단결정신과 넓은 포옹력을 보여주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방금손할아버지는 왕청 신흥향 룡천촌에 있을 때 마을에 40%가 한족이였다고 하면서 자기들은 되놀이를 할적마다 왕상진(王尙進)이란 한족친구를 불러 함께 되놀이를 했다고 했다. 필자는 이상과 같이 조선족민속문화-되놀이를 초보적으로 고찰하면서 여러분들의 심도있는 연구를 기대하는바이다.                                                  2004년 7월 11일 초고 2004년 7월 29일 수개                                                                                                                  (7)                                     
[론문] 연변에서의 조선족전통예술의 지위와 그 보존 및 계승대책                                                           전병칠,차국진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의 조선족전통예술의 지위를 정확하게 확립하고 그 보존과 계승대책을 심도있게 연구하여 문화예술을 포함한 조선민족의 문화함량을 증대, 향상시키는것은 자치주의 대외 홍보와 경제발전 나아가 자치주 주민의 지위향상에 홀시할수 없는 거시적역할을 할뿐만아니라 또한  다민족국가로서의 우리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공산당의 대외 형상홍보에도 십분 중요하다. 조선족전통예술의 위치 우선 전통예술이란 개념부터 정리한다. 전통예술하면 흔히들 “고전예술”이나 “민간예술”, “민속예술”또는 “정통예술”을 분별없이 같은 의미로 사용하면서 거기에서 거기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의 견해를 적어본다. “고전예술”이란 자기생성적 전승력이 지난 어느 시기에 단절되였던 비교적 오랜 시기의 예술을 일컫는다. “민간예술”이나 “민속예술”은 거의 대등하게 쓰이나 “민간예술”은 말그내로 민간 백성들사이에 이어오는 예술을 말하고 “민속예술”이라면 민간의 풍속으로 이어내려오는 예술을 의미하는바 그 내연이 “민간예술” 보다는 어느정도 작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정통예술”은 궁중예술이나 민간예술중에서 곁갈래가 아니고 곧바로 이어져 내려오는 바른 계통의 예술을 일컫는 말이다.그러면 전통예술이란 무엇인가? 지난 력사시기에 이루어져 대를 이어 물려내려오는 예술의 총칭이 아닐가? 이럴 경우 전통예술은 고전예술이나 민간예술, 민속예술 또는 정통예술, 궁중예술을 두루 포괄한 류의미를 나타낸다. 자연히 본문은 이러한 개념의 전통예술을 갖고 서술함을 밝힌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조선족이 자치를 실행하는 민족대집거지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자치조례”는 제2조 제1항에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길림성 행정구역내에서 조선족이 구역자치를 실시하는 지방이다.”  의논할 여지없이 연변은 조선족의 자치구역인만큼 조선족의 문화예술이 주인노릇을 해야 한다. 다시말하면 조선족문화예술을 연변조선족자치주문화예술의 “기둥”으로 봐야 한다. 물론 다른 민족의 문화예술을 배척한다는 말이 아니다. 조선족문화예술이 어느 정도의 주인노릇을 하는가 어느 정도의 기둥으로 되는가 하는것은 연변이 소수민족특정지구로서 어느 정도의 황금지역으로 되는가의 가름대로 되며 또한 중국공산당이 일관하게 주장해 오는 소수민족정책의 이미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                                             (1) 모든 예술은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조선족의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족전통예술은 옹근 조선민족예술의 정수이면서 또한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예술의 정수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예술이 사실 주인노릇을 못하고 있어 안타까운 일이다. 요지음 지역문화란 말을 많이들 사용하고 있다. 연변은 옹근 중국문화권 가운데 독특한 지역민족문화를 갖고있는 곳이며 또한 세계 조선민족문화권내에서 한국이나 조선과 력사적 및 이데올레기적 차이를 보여주는 차별화된 지역문화를 소유한 곳이기도 하다.21세기는 문화의 세기이다. 이에 지금 선진문화가 홍수처럼 밀려들어오고 있고,또한 정보화의 물결속에 외래 문화가 급속도로 파고들어 조선족의 전통문화를 포함한 우리의 지역문화가 위험받고 있는것이 오늘의 현실이다.이러한 시기에 이들과 경쟁하여 살아남을수 있는것은 우리의 우수한 전통문화뿐이라고 말할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민족전통예술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그것을 고스란히 지키고 발전시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지명도를 한층 높이기에 공동히 노력해야 한다. 조선족전통예술의 보존 새중국의 창립과 1952년 9월 3일의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성립은 연변조선족으로 하여금 정치상에서 다른 형제민족과 함께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자기의 고유한 문화권의 향수를 받게 하였다. 자치주정부는1957년에 연변예술학교를 건립하고 민족무용, 민족성악, 민족기악 등 전업의 민족예술후계자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오늘 연변예술학원으로 이름을 바꾼 이 학교는 여러 전업의 예술인재  4000여명을 양성하였는데 조선족 전통 음악, 무용, 기악 예술인재 600여명을 양성하였다. 50년대 말, 건국초기에 성립된 연변가무단을 이어 연변 각 현,시에 문공단이 성립되여서부터 우리 전통악기들인 가야금,새납,피리,해금,저대,퉁소 등 기악이 무대에 오르고 민요를 비롯하여 민간무용이 널리 보급되면서 연변은 전국에서 “가무의 고향”이란 미칭을 갖게 되였고 국가와 문화부의 굵직굵직한 상들을 수십차 안아 왔다. 조선족문화예술사업의 발전을 추진하기 위하여 자치주정부 문화부문은 민족문화특색과 지방문화특색이 있는 향,진을 중점적으로 부추기고 선후로 “조선족민속활동향”,“상모춤고향”, “퉁소의 고향”, “장고춤의 고향”등14개 민족민간문화특색문화향,진을 명명했으며 자치주성립 기념일이나 큰 명절 때면 대형의 조선족민간예술공연활동을 벌려 조선민족전통문화를 크게 홍보하고 대중속에서의 그 보급면을 넓혔다.                                          (2) 1956년의 “연변민간문예가협회”성립을 이어 “연변문학예술연구소”, “연변조선족민속학회”, “연변예술학원민족예술연구소”, “연변예술집성판공실”이 륙속 성립되고 이러한 사회단체와 연구기관 사업일군들이 동3성 조선족이 집거해 있는 마을을 찾아다니며 대량의 진귀한 조선족민간문화유산을 발굴,정리하여 편찬,출판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 연변에서 조선족민간의 음악, 무용과 희곡, 구연 등 예술집성자료의 수집,록음,기보,정리,집필,번역,편집 등 사업에 참여한 골간이100여명이고 취재한 군중이 5천여명이며 1500여수의 민요, 30여종의 민간무용,100여곡의 민간기악곡, 150여수의 희곡 및 구연음악을 수집하였다. 자치주 창립 50여년래 연변예술일군들은 조선족전통예술의 체계적인 연구에도 힘썼는바 《민요연구》(조성일), 《조선족민족음악특징》(전화자 ), 《중세기이래 조선족음악발전》(최순덕), 《조선족민요장단에 대한 분석》(리황훈), 《조선족전통민요분류》(왕보림), 《판소리기원과 우리 나라에서의 류전》(김창호), 《조선족민간음악개론》(정준갑), 《중국조선족민간음악연구》(김남호),《이민시기중국조선족전통음악연구》(남희철), 등 리론저작과 론문들이 륙속 출판, 발표된 동시에 연변예술집성의 대저서로 되는 《중국민가가곡집성·길림권》(1997년 9월 출판), 《중국민족민간무용집성·길림권》(1997년 10월 출판),《중국민족민간기악곡집성·길림권》(2000년 12월 출판)등 7부의 예술집성책(한문)이 출판되였다. 연변의 전통예술보존사업은 이상과 같이 괄목할 성과를 이룬 동시에 또한 허다한 부족점의 존재로 그 계승과 발전을 제약하고 있다. 1, 전통예술이 마땅한 지위를 찾지 못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연변이란 이 중국 유일 조선족자치주에서의 조선족전통예술의 지위는 십분 중요하지만 우리의 지도계층의 사상인식이 아직 여기에 이르지 못하고 있기에 전통예술의 보존과 발전을 위한 행정적지원과 재정적지원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결과 자치주 창립이 50여년이 지났지만 자치민족으로서의 조선족이 그렇다할 전통예술연구기구 (혹은 전통문화연구기구)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문화예술인들이 수십년간의 노력으로 수집, 정리한 전통예술자료들이 국가문화부의 예술과학중점쩨마로 이미 한문으로 출판되였으나 여직 조선문으로 출판되지 못했다. 민족문화예술의 결정이며 징표인 전통예술을 살리려면 장기적인 전략계획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것도 하나의 일례라 하겠다. 여기에서 꼭 한마디하고싶은것은  개별적 지도자들이 일단 지도자위치에 오르면 무턱대고 타민족이나 외래예술에 편승하면서 자기 민족의 전통예술을 멀리하고 또 그렇게 해야만 정치를 잘 한다고 생각하고있는것이 우습고 꼴불견이라는것이다. 2, 전통예술 전문연구기구와 전문공연단체가 없다. 1979년에 연변문학예술연구소를 성립                                     (3) 하였으나 문학연구를 주요 과업으로 한 연구소로 예술연구인원이 기껏해 2명뿐이였고 그나마 무슨 영문인지 2003년에 정부에서 연변사회과학원과 함께 해체시켰다. 1981년 연변예술학원에 민족예술연구소가 성립되였으나 필자는 그것을 어디까지나 교육리론에 중점을 둔 연구소라고 본다. 1985년에 성립된 연변예술집성판공실은 전통예술연구기구로 볼수도 있겠으나 분명 그 직책이 “예술집성”이였다. 1960년3월에 처음으로 연길시에 《신창극단》이 성립되여 창극 《흥부와 놀부》를 무대에 내놓은 일이 있으나  그 운명을 1년반정도 하고 해체되고 말았다. 1979년 연변구연단이 세워져 현재 연길시조선족구연단이란 이름으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나 실상은 “재담”, “만담”, “3로인”, “북타령”등 전통구연예술종목들이 현대의 소품예술에 자리를 빼앗기고 있고 연변가무단이나 연길시조선족예술단이 있으나 전통보다는 현대에 치우치고 있다. 3, 전통예술을 전공한 예술인재들이 류실이 십분 심각하다.  예술무대에서 현대음악이나 양악기를 중시하고 민간전통음악이나 전통악기를 홀시하기에 전통예술을 전공한 예술학원 학생들은 힘들게 자기의 전업을 배우고도 결국 마땅한 자리가 없어 전업을 바꾸어야 하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한다.통계에 의하면 연변예술학원에서 오늘까지 30여명의 가야금 전과생와 본과생을 졸업시켰는데 그 중 현재 외국에 나가 공부하는 학생을 포함해 5,6명만 자기의 전업을 하고 나머지는 모두 전업을 바꾸었다고 한다. 해금 전업은 가야금에 비해 더 비참하다.졸업생 2명이 기본적으로 모두 전업을 바꾸었다. 지금 학원에서 공부하는 10여명 재학생들의 미래는 캄캄하기만 하다. 민간기악전업에는 해마다 지망생이 적어 초생까지 힘들다고 한다. 심지어 민간기악전업 지망생이 없어  서양관현악초생이 끝남을 기다려 그 나머지 학생으로 초생계획을  완성하는 경우까지 있다고 하니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수 없다. 4, 민간에서 “살아있는 전통예술”을 찾기 힘들다. 십여년전까지만해도 우리들이 농촌에 가면 “아무개가 판소리를 잘 하오” 또 “아무개는 학춤을 잘 추오.” 하는 말들을 가끔 들을수 있었으나 지금은 기본상 그런 말을 들을수 없다. 그만큼 우리에게 민간예인과 민간의 “살아숨쉬는 전통예술”이 적다는것을 말해준다. 1988년 연변예술집성판공실에서 “중국민족민간가요집성·길림권”을 편집하면서 “원시음향자료를 동봉”해야 한다는 중국민족민간가요집성 총편집부의 지시에 따라 181수의 민요를 록음하게 되였는데 연창에 참가한 예인들이 1882년의 188명에서 25명으로 줄어  먼저번의 13.29%에 미치는 정도였다. 연변예술집성판공실에서 수집한 민간기악곡 70여수는 민간예인들을 찾지못하여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교원, 학생과 전문예술단체에 의거하여 록음한 실정이다. 연변예술집성판공실에서 수집한 15건의 조선족전통악기중                                      (4) 에서 퉁소,가야금,장고,북,소고,소금(깽매기) 등 6건의 전통악기들은 “살아있는 전통악기”들로 서 민간에서 찾아볼수 있으나 대금(저대),단소,피리,새납,해금,양금,거문고(현금)아쟁,대금(깽매기의 일종) 등 9건의 악기들은 민간에서 그것들을 다룰수 있는 민간예인은 물론 그 악기조차 보기 힘들다.    5, 전통예술발전을 위한 다경로 투입기제를 형성하지 못햇다. 조선족전통예술에 대하여 정부에서 어느 정도 중시를 돌리고 있으나 정부의 재정지원이 제한되여 전통예술보존계승사업에 대한 부축, 발전이 시대의 수요와 거리가 있다. 조선족전통예술의 계승대책 1, “연변조선족자치주자치조례”와 “연변조선족자치주조선족문화사업조례”를 착실하게 관철 시달해야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2기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에서 개정 채택한 “연변조선족자치주자치조례”는 제61조에서 자치주자치기관은 문화사업에서 조선족의 우수한 문화전통을 계승발양한다고 밝힘과 동시에 제 62조 제2항에서 새롭게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자치주 자치기관은 재능이 있고 공헌을 한 조선족 및 기타 민족 민간예인,민속보유자를 보호한다.”  그리고 2005년 1월15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2기인민대표대회 제3차회의에서 개정 통과한 “연변조선족자치주조선족문화사업조례”는 제14조에서 “자치주자치기관은 조선족문화유산의 수집,발굴,정리,출판사업을 진행하고 조선족민간전통문화 보편조사사업을 적극 벌리며 조선족민간전통문화서류와 보호명부를 작성하여 대표성이 있거나 중요한 기여를 한 조선족민간문화 전승인과 전승단위에 상응한 칭호를 수여한다. 자치주자치기관은 조선족민간전통문화 전승인과 전승단위가 장악한 조선족민간전통문화 지식과 기예를 전수하도록 고무,지지하고 후계인재를 양성하는데 필요한 물질조건을 제공한다.” 참으로 훌륭한 조례이다. 민간전통문화예술인들을 흥분케하는 이러한 내용들이 동산에 걸린 칙색무지개처럼 황홀한 그림만으로 되지않도록 그 락실을 위한 전문적인 행정부서를 내오고 강한 행정조치로 그 실행을 담보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연변조선족자치주조선족문화사업조례”를 바탕으로 가능한 속히 무형문화재보호법규를 제정해야 한다.이를테면 음악, 무용 등 전통예술,민속놀이, 공예기술, 등 전통생활속에서 전래되여온 무형의 문화적소산으로서 력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큰 기능과 예능을 중점적으로 엄선하여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강한 규제와 충족한 경제 투입( 알아들을수 있는 말로 풀이하면 민간전통문화 전승인에게 민간인이더라도 공무원과 같은 로임대우를 해줄뿐만아니라 민간전통문화 지식과 기예를 전수할                                      (5) 수 있는 충족한 물질조건을 제공해주어야 한다.)으로 유력하게 보호함으로써  력사적 또는 학 술적으로 보존가치가 높은 전통예술에 사회적으로 자연히 이목이 집중되게 하고 계승자가 잇따르게 해야 한다. 연변가무단이나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 민악대를 두거나 판소리나 창극이나 전통무용을 전문으로 무대에 올릴수 있는 전문예술단체를 내오고 전통예술을 전공하는 예술인들의 지위를 “첫자리”에 놓고 보호해줘야 한다. 2, 조선족전통예술발전기금회(혹은 조선족전통문화발전기금회)를 내오고 다경로 투입기제를 형성하여 전통예술 융자경로를 넓히고 전통예술사업에 대한 기부를 권장해야 한다.시범성 인도성을 띤 중점 프로젝트는 정부에서 부축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문화행정주관부문과 인민단체를 통한 공익성기부에서 조선족전통예술대상에 대한 기부를 우선으로 놓고 고무격려해야 하며 기업이나 기업인일경우 세금 감면정책을 향수 받게 해야 한다. 3. 연변대학 예술학원을 진정으로 조선족전통예술의 전수기기, 연구쎈터로 만들어 높은 소질의 교원대오, 예인대오를 적극적으로 양성해야 한다. 낡은 관념을 버리고 퉁소와 같이 오늘 없는 학과는 다시 창설하여 연변자치주의 민속기악브랜드로 만들기에 힘써야 한다. (‘연변에서의 퉁소의 지위’ 략) 토속적인것일수록 브랜드하기에 쉽고 그 가치가 높다. 4, 농촌을 중심으로 전통예술의 근거지를 개척하고 전통예술을 포함한 다양한 향토문화축제를 벌려야 한다. 예술학원을 비롯한 예술관, 문화관들에서는 농촌에 내려가 농민들을 도와 장기적으로 전통예술을 보급하면서 그들의 참여의식과 예술수양, 심미감상수준을 향상시켜아 한다. 훈춘 밀강의 “퉁소의 고향”이나 왕청 배초구의 “상모춤의 고향”에서 해마다 정규적으로 상모나 퉁소를 중심으로 한 향토문화축제를 진행할수 있지않는가?  우리에게는 운남 따이족의 “살수제”와 같은 진정한 의미로서의 민속축제가 없는것이 유감이다. 우리 농악중의 상모놀이를 “상모제”로 만들어 한족과 기타 민족을 포함한 전주 200만 주민, 아니면 우리 80여만의 조선족만이라도 전부 혹은 50%가 상모를 돌린다면 상모제는 완전히  흡인력이 있지않을가?  향토문화의 중요성은 우선 지역문화, 특히 지역의 전통문화를 활성화 하는데 있다. 향토축제는 현대인에게 여가문화의 욕구를 충족시켜줄뿐만아니라, 해당 축제의 지역에는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고 그것이 나아가 지역문화를 꽃피우는데 기여하기도 한다. 5, 무속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그것을“귀신놀이”로부터 해방시켜아 한다. 혹 어떤사람은 필자를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필자가 이렇게 주장하는것은 무속 신앙이 우리 민족의 종교적 심성의 뿌리를 이루고 있고 넓고도 깊은 우리 전통문화의 진수를 담고 있기때문이다. 무(巫)는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과 친숙하며 그런만큼 우리 삶에 그 정서가 녹                                     (6) 아 있다.우리들이 말하는 농악만 보더라도 원래 그 이름을 “풍물”, “풍장”, “매굿”, “굿”이라고 했다고 한다.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는 삼국시기의 축원형태로 나타난 다음과 같은 제천기록이 있다. “마한에서는 5월달에 모심기를 끝내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밤낮을 쉬지 않고 춤추며 술을 마신다. 수십명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면서 땅을 밟으며 뛰였다 내렸다 하는데 서로 손과 발이 응한다.절주는 탁무와 같다.” 사실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수렵의 단계를 거쳐 농사를 주업으로 한 관계로, 씨 뿌린 후와 수확을 거두어들이는 일이 끝나게 되면 먼저 하늘과 땅 그리고 조상신에 기원하고 감사드리는, 엄숙하면서도 환희에 넘치는 제의를 갖는 습속이 있었다. 이렇게 놓고 볼때 풍물과 무악은 불가분의 관련을 갖고 있는것으로 볼수 있다.다른 하나로 “산신제”등 우리 민족의 허다한 전통축제에는 의례를 통한 종교적상징이 넉넉한 가운데 지역사회 사람들이 크게 모여놀면서 대동화합하는 정신이 이어 내려왔다.무(巫)에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다. 마치 불교에서 관음보살이나 기독교에서 하나님처럼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巫)를 종교로서 리해하지 못하고 또 이해하기를 꺼려한다. 이렇게 된데는 무(巫)를 부정적인 미신으로 몰아 탄압을 가한탓도 있겠으나, 다른 종교들처럼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하지않고, 현대사회에 걸맞는 종교인의 상을 정립하지 못한것도 한 원인이 된다. 이제 우리는  무(巫)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통해 우리의 무가 서장 장족의 라마교나 만족의 샤만문화처럼 전통적 종교이자 문화체계로서의 샤머니즘으로 옳바른 인식을 가져와야 한다.   전통예술의 계승대책으로 이외에도 중소학교에서의 전통예술교육의 중시,언론매체에 의한 전통예술의 홍보, 여러 나라와 지역 동족간의 활달한 예술교류 등 수두룩한 대책이 있으나 편폭에 제한이 있어 여기에서 줄인다. 이상과 깉이 천박한 견해를 피력하면서 여러분들의 기탄없는 의견과 조언을 바란다.                                                                                  2005년 7월 15일              (7)
1    연변조선족예술집성작업의 제 단계와 그 특점 댓글:  조회:1079  추천:0  2012-10-12
[론문] 연변조선족예술집성작업의 제 단계와 그 특점   연변예술집성판공실  전병칠       공화국창건이래, 연변의 각급 문화예술부분과 여러 문화예술인들은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예술유산의 발굴, 수집, 정리, 연구작업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하였고 혁혁한 성과들을 이룩하였다.     70년대말기부터 시작된 연변예술집성작업은 건국초부터 시작된 민간문학예술유산의 발굴, 수집, 정리, 연구작업의 연장이며 총화이다.     아래에 연변조선족예술집성작업을 력사적시기에 따라 단계를 더듬으면서 그 특점을 간추려 살펴보려 한다. 첫번째단계: 발굴, 수집, 정리작업의 초창기     건국전 우리 연변에는 민간예술수집, 정리작업이 기본상 없었다. 있었다면 기껏해 개별적예술인들의 개인계승을 위한 수집, 정리였다.     새중국의 창립과 1952년 9월 3일의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성립은 연변조선족으로하여금 정치상에서 다른 형제민족과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자기의 고유한 문화권의 향수를 받게 하였는바 자치주정부는 초기부터 민간예술유산의 발굴과 계승사업에 큰 중시를 돌렸다.     자치주 제1임주장인 주덕해동지는 예술일군들과 민간예술을 발굴, 수집할데 관한 의견을 여러차례 나누었으며 민간예인 대부분이 고령인 실정에 비추어 일찍 《불끄러가는 소방차의 속도》로 민간예술발굴작업을 다그치라고 지시하였다.《동북조선인민보》는 《민간문학예술에 중시를 돌리자》등 제목으로 글을 실어 민간문예발굴, 계승사업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였다. 1953년대중기, 정부의 이러한 지지와 사회여론에 고무된 예술일군들은 조선족이 집거해있는 마을을 찾아다니며 민간예술을 발굴, 수집, 정리하고 학습하면서                                (1) 민간예술에 대한 사회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런 과정에 민간가수 김문자, 조종주, 우제강, 박정렬, 리금덕, 신옥화, 민간무용수 하태일, 김룡옥, 퉁소연주가 리임룡, 장단연주가 리병렬 등 재능있는 예술인들을 발견하였으며  발굴, 수집한  민요 49수를 정리해 《민요곡집》으로 묶어 1954년도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하게 하였다.     1952년에는 연길시에서 가야금을 발굴했고 1953년에는 훈춘시에서 또 가야금을 발굴했다. 그 바람에 성악배우들이 가야금연주를 배우는 열조가 일어났으며 1955년도에는 민족기악발전을 위해 연변가무단의 김진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립음악대학에 류학생으로 파견하였다.     1953년 연변가무단의 조득현 등은 민간무용가 김태익을 모셔다 3개월간 4시간나마 긴 《농악유희》를 한자국 한자국 걸음발을 익히면서  수집, 학습하였다. 그해 10월, 길림시에서 있은 《전성민간예인콩클》에는 113명으로 구성된  연변예술대표대가 참가하여 《농악무》,《칼춤》,《부채춤》,《학춤》을 춰 최상을 받았다. 1957년 연변가무단에서는 민간무용의 발굴과 수집을 위하여 전문 무당들을 청해놓고 돼지를 잡아 접대하면서 무속무용을 수집, 학습하였다.     민간예술수집, 정리작업과 함께 예술인들은 이 시기 민간예술발굴에 기초하여 《처녀의 노래》,《좋은 종자 가려내세》등 많은 민가를 창조하였으며 연변가무단에서는 1955년도에 민요 《새타령》을 가야금병창으로, 《농악유희》를 《농악무》로 무대에 올렸고 1956년에는 새로 창작한 판소리 《떡메의 증오》를 무대에 올렸다.     1957년에는 연변예술학교를 건립하고 민족무용, 민족성악, 민족기악 등 전업을 두었으며 높은 로임으로 민간예인들인 박정렬, 김문자, 신옥화, 리금덕 등을 교원으로 초빙하여 민족예술후계자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공화국창건 10돐이 되는 1959년은 민족민간예술의 무대공연에 열조를 일으킨 한해였다. 주문화처에서는 70여명 로인이 참가한 《민간예인무용콩클》을 조직하여 100여개 무용종목을 무대에 올렸다. 그해 3월 14일, 연길시에 《신창극단》이 성립되여 창극 《흥부와 놀부》를 무대에 내놓았으며 연변가무단과 연변예술학교에서는 함께 대형민족악대를 조직하여 가야금산조를 개편한 민족관현악곡과 고대전통기악곡인 《령산회상》 등을 무대에 올렸다.                                     (2)    전반 50년대를 포함한 이 시기의 민간예술발굴, 수집, 정리작업은 수집도구가 극히 락후한 상태에서 선전과 동원을 동반한 학술적인 연구보다는 실용적인 학습, 리용을 위한 민간예인 및 민간악기의 발굴, 민요와 민간무용의 발굴, 수집으로 그 특점을 보여준다. 이런 실용적인 학습, 리용을 위한 발굴, 수집은 당시 갓 성립된 민족자치주의 민족예술무대번영과 민족예술교육발전을 힘있게 추동하였다. 두번째단계: 수집, 정리작업의 제1차고봉기     60년대의 상반기 즉 1960년도부터 1966년도까지 이 단계에 속한다.     1961년 연변에서는 국가문화부와 중국음악가협회의 련합통지정신에 근거하여 《연변미간문예연구조》라는 전문조직기구를 내왔다.     연구조는 맨 처음 안도현 석문향에 가서 점을 잡고 발굴, 수집작업을 진행한 다음 1962년말과 1963년초에 연변을 비롯한 길림, 료녕, 흑룡강성의 60여개 현, 시의 200여개 향과 촌을 돌아다니면서 5000여명의 군중을 찾아 사회조사와 수집작업을 진행하였는데 전통무용사진 200폭을 수집하고 800여수의 민요를 발굴하였으며 120개의 록음테프를 록음하고 선후로 조선민요 180수를 묶은 《민요곡집》, 항일가요와 구전동요 80수를 묶은 《혁명가요와 동요곡집》을 등사본으로 내놓았다.     이 시기 룡정, 훈춘, 화룡, 안도 등 각 지방에서도 민간예술발굴작업이 널리 진행되였는데 안도현에서만도 등사본 《민요곡집》을 5권이나 내놓았다.     주문화처에서는 여러차례에 걸쳐 민간예인모임을 가졌는데 주덕해, 요흔, 김문보 등 지도자들이 출석하여 중요한 연설들을 하였다.     이 시기 연변예술학교에서는 민족예술의 체계적인 연구에 힘썼는바 김진과 조순희는 민간예술인들한테서 배운 가야금곡들을 기보하여 다섯권은 가야금곡집을 묶었으며 정준갑은 김문자, 박정렬, 신옥화 등 민간예인들의 민요를 수집하여 민요집 세권을 묶었다. 이 밖에 또 1962년부터 1964년 사이 김진, 고자성, 엄상준, 박정렬, 신옥화 등 음악교원을 중견으로 창극연조를 내오고 《춘향전》창극본을 정리하였으며 《광한루》의 한개 장면을 공연까지 하였다. 이 기간의 민간예술수집, 정리작업은 초창기에 비해 조직기구가 비교적 완정하고 수집, 정리범위가 광범위하고 동원된 문예일군들이 많으며 수집한 민간예술작품 또한 전례없이 많은것과 발굴, 수집에 따른 정리작업이 궤도에 오르고 일정                                (3) 한 학술연구대오가 형성된 특점을 보여준다. 세번째단계:《민족문화혈통론》에 의한 매몰기     우리의 민간예술수집, 정리작업이 한창 열기를 올리고 민족전통음악이 한창 생기발랄하게 발전하던 좋은 시기에 《문화대혁명》이란 대동란 이 중국땅을 휩쓸었다.     《민족문화혈통론》에 의한 민간예술수집, 정리작업의 매몰기로 취금되는 이 시기, 무대와 민간에서는 《어록노래》나 《본보기극》노래만 불렀지 민가를 부를수 없었으며 민족전통예술연구사업에서 거둔 모든 성과들은 죄다 말살되고 이 작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잡권신》,《복고주의》,《제왕장상》등 터무니없는 감투를 썼다. 동시에 다년간 수집, 정리한 전통예술연구자료들과 록음테프들이 죄다 《독초》로 몰리워 민간예술수집, 정리작업은 좌절을 당하고 매몰돼버렸다. 네번째단계:수집, 정리작업의 제2차고봉기     1976년 10월, 《4인무리》가 꺼꾸러지자 민족예술도 해빛을 보게 되였다.     1977년, 주문화국에서는 천여명이 참가한 《민가연창대회》를 조직하여 《아리랑》을 비롯한 30수의 민요를 해방하였고 1978년에는 《전주과외민요콩클》과 《전업예술단체민족음악콩클》을 조직하였따.     1978년, 국가문화부 등 유관부분에서는 통지를 내여 민족예술유산을 수집, 정리하여 《중국민간가곡집성》,《중국민족민간무용집성》등 10부의 예술집성책을 2000년전으로 편집, 출판할것을 지시하였다. 여기에 호응하여 주문화국에서는 1979년, 해체되였던 민간문예수집조인원들을 재조직하여 민가집성판공실을 설립하는 등 적극적인 조치를 대여 다시 민가수집 등 민간예술수집작업을 시작하였다.     1981년 6월까지 민간예술수집일군들은 록음기를 둘러메고 길림, 통화, 연변 등 지역의 11개현과 시 55개 마을을 찾아 380명 민간예인을 취재하고 500여수의 민요를 수집하고 록음하였으며 이것을 기초로 400여수의 민요집성의 초고를 편집하였고 365수의 《민요곡집》을 출판하였다.     본론을 떠나 여기서 재미있는 이야기 두가지를 하겠다. 리황훈이라면 연변음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50년대말 조선족미가를 수집하기 시작해서부터 1990년 불치의 병에 걸려 사망하기 직전까지 그는 옹근 36년이란 긴 시간을 민가수집, 정리, 편찬사업에 흔신을 다 바쳤다. 갓 민가집                                 (4) 성판공실이 설립되여 사무실이 없고 경비가 부족되니 그는 자기의 집을 사무실로 1년나마 내놓았고 일손이 딸릴 때면 안해와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자료정리를 시켰다. 대동란기간, 그가 수집한 민간예술유산자료들이 홍위병들에 의해 불속에 던져졌다. 《태우면 나를 태웠지, 이것만은 못태운다.》그는 비판투쟁을 받으면서도 불속에 뛰여들어 그 자료들을 끄집어냈다. 한번은 이런 일까지 있었다. 민가도 많이 알고있는 맹인민간예인 한분을 취재하게 되였는데 밤중이 되니 배가 고프다면서 개고기를 먹고싶다고 하는것이였다. 한밤중에 어디에 가서 개고기를 사온단 말인가. 그 사람은 개고기를 사지 않으면 노래를 안부르겠다고 딱 잡아뗐다.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일이였다. 리황훈 선생님은 입씨름하다 못해 그 맹인한테 무릎을 꿇고 사정하고  또  사정하였다. 《래일은 꼭 개고기에다 찰떡까지 사서 대접하겠으니 마저 불러주십시오.》쇠로 만들어지지 않은 이상 그 누구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랴. 맹인예인은 끝내 자기가 알고있는 민가를 죄다 털어놓고말았다. 기염만장해 달려든느 반란파앞에서 그처럼 도고했던 선생님이 어떻게 보면 남들앞에서 고스란히 머리를 수그리고 무릎을 꿇는것까지 마다한 리유는 뭘가.     류사한 일들은 너무나도 많다.     1978년 민가수집조의 리동구, 김봉관 두 선생님이 화룡현 숭선향 남석촌에 갔을때의 일이다. 독보조에서 박남선로인이 민가를 잘 부른다고 하기에 찾아갔더니 미리 알고 스그머니 하천에 있는 딸집으로 피신을 갔었다. 7-8리 길을 걸어 로인을 찾아 상급의 문건들을 내놓으면서 찾아온 리유를 말하니 죽어라고 민가는 안부른다고 했다. 결국 수집조일군들에 의해 설복되였는데 로인은 쌈지에서 담배종이를 꺼내놓으며 《내가 소리를 해도 죄가 없다구 여기에 쓰고 도장을 찍소.》라고 했다. 한심한 일 같지만 리해는 할수 있었다. 이전에 민가를 많이 불렀다는 죄로 문화대혁명기간에 투쟁까지 맞아 소리는 물론 술까지 끊고 조용히 살아간다는 로인, 수집조일군들은 로인이 시키는대로 쓰고 민가집성사무실의 도장을 찍었따. 박남선로인이 부른 《초한가》등 민가는 이렇게 수집된 것이다. 줄거리를 벗어나는 얘기지만 하고싶다. 그날 로인은 초한가의 1절을 부르고 끼억끼억 울었다. 그토록 부르고싶은 내 민족 내 노래를 부른것이 죄가 되여 투쟁맞은 어제가 통분하고 술대접까지 받으며 그 노래를 다시 통쾌하게 부르는 오늘이 눈물나도록 기쁘다는것이였다. 정녕 민족이란 뭐고 전통이란 또 무엇인데!                                     (5) 1981년에는 일찍 해방전에 만주국성립10주년경축대회때 장춘에 가 농악유희를 공연하여 상까지 탄 안도현 장흥향 신촌의 《농악유희》를 발굴하였다.     1979년의 연변문학예술연구소의 성립과 1981년의 연변예술학원 민족예술연구소의 성립은 문예집성작업을 비롯한 민족예술사업을 한층 더 높은 차원에로 끌어올릴수 있는 조직적담보를 제공해주었다.     1980년, 조종주,박정렬 두 민간예인은 북경에서 열린 《전국소수민족민간가수대회》에 참가하여 수도인민들의 절찬을 받았다.     1982년, 연변인민출판사와 연변음악가협회에서는 다년간 발굴, 수집한 민가 300수를 묶어 《민요곡집》을 출판하였다.     1983년 3월, 주문화국에서는 제1차민간음악집성회의를 열고 민족음악집성사무실을 내오고 민간음악수집작업에 성과가 돌출한 단위와 개인을 표창하였으며 그해 10월에는 성 문화청에서 전 성 집성사업회의를 열고 연변민가집성판공실에 축기를 드림과 동시에 안도현 문련과 문화관을 선진집체로 표창하고 조종주, 리황훈, 김태갑, 김성민 등 30여명 연변의 민간예술인과 집성사업일군들에께 각기 출연, 기보, 정리, 번역 등 면에서의 우수상을 발급하였다.     이 기간 민간예술수집작업과 함께 민간예술에 대한 연구사업도 활발히 전개되여 《민요연구》(조정일 저), 《조선족민족음악특징》(전화자 저), 《중세기이래 조선족음악발전》(최순덕 저), 《조선족민요장단에 대한 분석》(리황훈 저), 《조선족전통민요분류》(왕보림 저), 《판소리기원과 우리 나라에서의 류전》(김창호 저), 《조선족민간음악개론》(정준갑 저) 등 리론저작과 론문들이 륙속 출판, 발표되였다.     1976년말부터 1984년말까지를 포함한 이 시기의 민간예술수집, 정리 작업을 보면 민간예술수집작업의 조직회복과 함께 민간예술수집범위가 광범위하고 수집한 작품 또한 풍부한 등 제1차고봉기와 같은 특점을 보여주고 있는 동시에 수집도구가 비교적 선진적인 특점, 지방내부의 미간예술수집으로부터 국가적인 예술집성에로의 전이, 수집과 리론연구의 밀착된 결합 등 특점을 보여준다. 다섯번째단계: 민족전통예술의 정립을 기한 대집성기 1985년 1월, 연변예술집성판공실의 정식성립은 민간예술수집에서 다년간 온정된 상설기구가 없고 고정된 수집, 정리, 편집일군들이 없이 여기저거 문화예술부분으로부터 이 사람 저 사람 빌려쓰던 국면을 종말짓고 믿음직한 국가재정의                                  (6) 경비담보로 전문인원을 배치하고 사업경비를 해결함으로써 예술집성작업발전에 탄탄대로를 편쳐주었다.     이때로부터 연변예술집성판공실에서는 국가문화부 예술과학계획령도소조의 구체배치에 따라 국가예술과학연구 중점째마인 《중국민족민간문예10부집성》에 수록될 조선족희곡지, 조선족구연지, 조선족민가, 조선족민간무용, 조선족기악곡, 조선족구연음악, 조선족희곡음악 등 7대 예술집성(문학에 속하는 민담, 민간가요, 속담 등 집성작업은 상급지시정신에 따라 연변민간문예가협회 등 단위에서 맡음)의 편집사업을 일제히 전개하였다.     우선, 몇십년래 수집, 정리한 민가들을 중앙의 《범위가 넓어야 하고 품종이 구전해야 하며 질이 높아야 한다》는 편집방침에 따라 재심사, 재편집하였으며 수십차례에 걸친 중앙집성총부의 회의에 책임편집들이 직접 참가해 중앙과 성 유관부문의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전국성적인 통일방안에 따른 수차의 반복수개작업을 하였다.     잇달아 예술집성일군들은 희곡지, 구연지의 자료와 민간무용, 민간기악곡, 민간희곡음악, 민간구연음악 등을 수집, 정리하는 한편 록음, 편집, 수개 등 작업을 활바하면서도 깐지게 벌려나갔다. 한단락의 문자자료, 한음의 기보라도 의혹이 생기면  무더기로 쌓인 자료를 다시 뒤졌고 록음자료테프를 몇번이고 다시 들었으며 몇십리길을 다시 다녀왔다.     1997년 9월에 출판된 《중국민가가곡집성·길림권》은 우리 연변민간예술수집일군들이 수년간의 피와 땀으로 수집, 정리한 1,500여수의 민가중 315수를 선정하여 개술, 주해, 역문 등 문자자료와 함께 악보자료 50여만자를 수록하였다.     1994년 6월 중국민간가곡집성총부에서는 북경에서 《제1차동북3성조선족민가출판협조회의》를 열고 동북3성에서 련합으로 조선문판 《중국조선족민간가곡집성》을 출판하도록 결정지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출판하게 될 소수민족문자집성책이다.     《중국민간가곡집성·길림권》출판에  앞서 1988년 10월에 출판된 《중국희곡지·길림권》에는 조선족의 희곡으로 창극을 소개하고 전통 극목으로 《춘향전》,《흥부전》,《심청전》,현대극목으로 《붉은 자매》,《룡강송》등을 올린 동시에 《적성가》등 8개 소리단락음악과 함께 복장, 도구 등 자료 20여만자를 실었다.                                     (7) 1997년 10월에 출판된 《중국민족민간무용집성·길림권》에는 우리 연변에서  다년간 수집, 정리한 민간무용 《승무》,《원무》,《농악무》,《칼춤》, 《탈춤》, 《양산도》, 《학춤》, 《아박춤》,《지게춤》,《물동이춤》, 《갓춤》, 《살풀이》, 《접시춤》,《무당춤》,《삼삼이춤》,《손춤》,《손벽춤》,《부채춤》,《장고춤》등 19종을 수록하고 무용도구와 함께 복장, 음악, 소도구 등 내용을 50여만자되게 상세히 소개하였다.     조선족민간기악곡수집, 정리작업은 1984년도부터 시작되였다. 수집일군들은 연변의 8개현, 시의 몇백명 민간예인들을 방문하고 단소, 저대, 피리, 해금, 새납, 퉁소, 가야금 등 여러가지 기악곡의 분포상황을 조사한 기초상에서 130여수의 민족기악곡을 수집하고 정리하였다. 1991년에는 성 예술연구소와 연변예술학원의 지지와 협조를 받아 거의 매몰되여가던 조선족전통기악협주곡 《시나위》,《삼현륙각》,《령산회상》,《농악》을 수집하고 정리하였으며 록음록화까지 하였다. 조선족기악소개를 비롯한 인물전기 등 문자자료와 75수의 조선족전통기악곡을 수록한(30만자)《중국민족민간기악곡집성·길림권》은 2000년 12월에 출판되였다.     1999년에 출판된 《중국구연음악집성·길림권》은 조선족 판소리음악 《춘향가》등 전통극목을 비롯해 해방후에 새로 창설된 설창음악들인 《연변창담》,《북타령》,《평고엮음》의 소리단락 63수와 함께 중국에서의 판소리발전상황, 선률, 조식, 장단, 창법 등 음악적특성과 창본의 묘사수법, 가사결구형태 등 문학적특성을 포섭한 개론 등 문자와 악보자료 20여만자가 기재되였다.     《중국희곡지·길림권》의 자매편인 《중국희곡음악집성·길림권》은 1999년 6월에 출판, 조선족전통창극극목 《춘향전》,《심청전》,《흥부전》,《토끼전》과 현대극목들인 《김삿갓》,《붉은 자매》등 극목의 36수의 소리단락을 망라하여 《개론》,《무대미술》,《인물》 등 자료 15만자를 수록하였다.     이상 두편에 수록된 구연음악과 희곡음악의 소리단락들은 전부 가사부분에 국제음성기호로 표기를 달아 중국은 물론 세계 어느 민족이나를 막론하고 우리말로 가창이 가능하도록 했다. 《중국구연음악·길림권》의 자매편인 《중국구연지·길림권》은 연변구연대사기를 비롯해 조선족전통구역종목들인 판소리, 설화, 재담, 만담과 해방후 중국 조선족 예술인들이 자체로 창조한 3로인, 연방창담, 북타령, 평고엮음 등 구연종목                                 (8) 에 대한 곡종소개, 대표극복, 표연예술, 인물전기 등 음악, 문자자료 15만자를 수록. 이미 총심사를 마치고 출판을 기다리고 있다.     민족전통예술의 정립을 기한 대집성기인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민간예인들과 예술집성일군들이 사회의 보다큰 중시와 배려를 받게 되였다.     1987년 9월 15일, 중국민간문예가협회 연변분회에서는 룡정현 합성촌에서 조종주, 박정렬 두 로인에게 민간가수 칭호를 수여하였고 1993년 1월 7일, 연변예술집성판공실과 연변예술학원 예술연구소에서는 공동으로 신옥화예술생애60돐기념가창대회를 가졌으며 1995년 7월 2일, 연변예술집성판공실과 연변민간문예가협회에서는 민간가수 조종주로인의 서거 3돐에 즈음하여 룡정시 조양천진 합성촌에 있는 그의 묘지에 《저명한 조선족가수》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1997년 11월, 국가문화부 전국예술과학계획령도소조에서 소집한《전국문예집성사업회의 및 성과표창대회》와 1998년 3월, 길림성 문화청에서 소집한 《전 성 예술집성성과표창대회》에서 김남호, 최호욱, 김창호 등 연변예술집성사업일군 45명이 각기 중아과 성의 여러가지 영예상과 성과상을 탔고 연변예술집성판공실은 다년래 예술집성편찬사업에서 성적이 돌출하여 성문화청으로부터 예술집성사업선진단위로 표창받았다.     1998년 5월 18일, 연변예술집성판공실에서는 《연변예술집성성과소식공개회》를 열고 다년간 거둔 예술집성성과들을 전 사회에 광범히 선전하였다.     상기한 사실들은 이 단계에 와서 우리 연변 민간예술수집, 정리작업이 개별적 민간예술의 수집, 정리작으로부터 전반 민간무대예술의 수집, 정리작업에로의 전이, 지방내부적 수집, 정리로부터 민족전통예술의 정립을 기한 국가급고차원의 수집, 정리에로의 전이를 엿볼수 있는바 넓어진 집성의 대상성, 고차원의 목적성, 거시적인 전략적리론연구로 독특한 특점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연변예술집성작업이 걸어온 길을 력사적시기에 따라 다섯 개단계로 더듬어보면서 그 특점을 살펴보았다. 사실, 공화국창건이래 수십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민간예술집성작업에 참가하여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수많은 농가의 무턱을 드나들면서 수천명의 민간예인들을 만나 단절된 민간예술의 맥락을 이어놓고 사그러져가는 민간예술의 불씨를 되살리는데 기여를 하였다. 장기간 우리의 전통예술을 위해 힘써 오신 선배들인 조                                 (9) 종주, 박정렬, 김말순, 류준선, 김문자, 우제강, 신인순, 구룡환, 김경모, 리복제, 신철, 강성기, 신옥화 등 수많은 민간예술인들은 우리 전통예술의 발굴과 계승, 및 후대양성에 피타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분들 대부분은 세상을 떴다. 그리고 건국후 우리 민족전통예술수집, 정리작업을 열심히 해온 리황훈, 김승경, 김태갑, 리동구, 김원창, 상설산(한족), 왕보림(한족), 정준갑 등 선생님들도 오늘 우리곁을 떠났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 연변예술집성판공실 전체 성원을 대표하여 이분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시한다. 우리는 지금 그들이 다 하지 못한 일을 계승하고 있다. 민족전통예술의 정립을 기한 민족전통예술집성작업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사업이다. 오늘, 우리는 전통예술유산을 학습, 연구, 계승하여 우리 민족예술사업의 발랄한 발전을 위해 땀을 흘리고 또 흘려야 할 의무를 한층 더 깊이 느끼고 있다.     이상으로 천박한 견해를 피력하면서 여러 선배님들과 학자선생님들의 기탄없는 지도와 편달이 있기를 충심으로 바라는바이다.            [론문] 연변조선족예술집성작업의 제 단계와 그 특점   연변예술집성판공실  전병칠       공화국창건이래, 연변의 각급 문화예술부분과 여러 문화예술인들은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예술유산의 발굴, 수집, 정리, 연구작업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하였고 혁혁한 성과들을 이룩하였다.     70년대말기부터 시작된 연변예술집성작업은 건국초부터 시작된 민간문학예술유산의 발굴, 수집, 정리, 연구작업의 연장이며 총화이다.     아래에 연변조선족예술집성작업을 력사적시기에 따라 단계를 더듬으면서 그 특점을 간추려 살펴보려 한다. 첫번째단계: 발굴, 수집, 정리작업의 초창기     건국전 우리 연변에는 민간예술수집, 정리작업이 기본상 없었다. 있었다면 기껏해 개별적예술인들의 개인계승을 위한 수집, 정리였다.     새중국의 창립과 1952년 9월 3일의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성립은 연변조선족으로하여금 정치상에서 다른 형제민족과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자기의 고유한 문화권의 향수를 받게 하였는바 자치주정부는 초기부터 민간예술유산의 발굴과 계승사업에 큰 중시를 돌렸다.     자치주 제1임주장인 주덕해동지는 예술일군들과 민간예술을 발굴, 수집할데 관한 의견을 여러차례 나누었으며 민간예인 대부분이 고령인 실정에 비추어 일찍 《불끄러가는 소방차의 속도》로 민간예술발굴작업을 다그치라고 지시하였다.《동북조선인민보》는 《민간문학예술에 중시를 돌리자》등 제목으로 글을 실어 민간문예발굴, 계승사업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였다. 1953년대중기, 정부의 이러한 지지와 사회여론에 고무된 예술일군들은 조선족이 집거해있는 마을을 찾아다니며 민간예술을 발굴, 수집, 정리하고 학습하면서                                (1) 민간예술에 대한 사회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런 과정에 민간가수 김문자, 조종주, 우제강, 박정렬, 리금덕, 신옥화, 민간무용수 하태일, 김룡옥, 퉁소연주가 리임룡, 장단연주가 리병렬 등 재능있는 예술인들을 발견하였으며  발굴, 수집한  민요 49수를 정리해 《민요곡집》으로 묶어 1954년도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하게 하였다.     1952년에는 연길시에서 가야금을 발굴했고 1953년에는 훈춘시에서 또 가야금을 발굴했다. 그 바람에 성악배우들이 가야금연주를 배우는 열조가 일어났으며 1955년도에는 민족기악발전을 위해 연변가무단의 김진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립음악대학에 류학생으로 파견하였다.     1953년 연변가무단의 조득현 등은 민간무용가 김태익을 모셔다 3개월간 4시간나마 긴 《농악유희》를 한자국 한자국 걸음발을 익히면서  수집, 학습하였다. 그해 10월, 길림시에서 있은 《전성민간예인콩클》에는 113명으로 구성된  연변예술대표대가 참가하여 《농악무》,《칼춤》,《부채춤》,《학춤》을 춰 최상을 받았다. 1957년 연변가무단에서는 민간무용의 발굴과 수집을 위하여 전문 무당들을 청해놓고 돼지를 잡아 접대하면서 무속무용을 수집, 학습하였다.     민간예술수집, 정리작업과 함께 예술인들은 이 시기 민간예술발굴에 기초하여 《처녀의 노래》,《좋은 종자 가려내세》등 많은 민가를 창조하였으며 연변가무단에서는 1955년도에 민요 《새타령》을 가야금병창으로, 《농악유희》를 《농악무》로 무대에 올렸고 1956년에는 새로 창작한 판소리 《떡메의 증오》를 무대에 올렸다.     1957년에는 연변예술학교를 건립하고 민족무용, 민족성악, 민족기악 등 전업을 두었으며 높은 로임으로 민간예인들인 박정렬, 김문자, 신옥화, 리금덕 등을 교원으로 초빙하여 민족예술후계자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공화국창건 10돐이 되는 1959년은 민족민간예술의 무대공연에 열조를 일으킨 한해였다. 주문화처에서는 70여명 로인이 참가한 《민간예인무용콩클》을 조직하여 100여개 무용종목을 무대에 올렸다. 그해 3월 14일, 연길시에 《신창극단》이 성립되여 창극 《흥부와 놀부》를 무대에 내놓았으며 연변가무단과 연변예술학교에서는 함께 대형민족악대를 조직하여 가야금산조를 개편한 민족관현악곡과 고대전통기악곡인 《령산회상》 등을 무대에 올렸다.                                     (2)    전반 50년대를 포함한 이 시기의 민간예술발굴, 수집, 정리작업은 수집도구가 극히 락후한 상태에서 선전과 동원을 동반한 학술적인 연구보다는 실용적인 학습, 리용을 위한 민간예인 및 민간악기의 발굴, 민요와 민간무용의 발굴, 수집으로 그 특점을 보여준다. 이런 실용적인 학습, 리용을 위한 발굴, 수집은 당시 갓 성립된 민족자치주의 민족예술무대번영과 민족예술교육발전을 힘있게 추동하였다. 두번째단계: 수집, 정리작업의 제1차고봉기     60년대의 상반기 즉 1960년도부터 1966년도까지 이 단계에 속한다.     1961년 연변에서는 국가문화부와 중국음악가협회의 련합통지정신에 근거하여 《연변미간문예연구조》라는 전문조직기구를 내왔다.     연구조는 맨 처음 안도현 석문향에 가서 점을 잡고 발굴, 수집작업을 진행한 다음 1962년말과 1963년초에 연변을 비롯한 길림, 료녕, 흑룡강성의 60여개 현, 시의 200여개 향과 촌을 돌아다니면서 5000여명의 군중을 찾아 사회조사와 수집작업을 진행하였는데 전통무용사진 200폭을 수집하고 800여수의 민요를 발굴하였으며 120개의 록음테프를 록음하고 선후로 조선민요 180수를 묶은 《민요곡집》, 항일가요와 구전동요 80수를 묶은 《혁명가요와 동요곡집》을 등사본으로 내놓았다.     이 시기 룡정, 훈춘, 화룡, 안도 등 각 지방에서도 민간예술발굴작업이 널리 진행되였는데 안도현에서만도 등사본 《민요곡집》을 5권이나 내놓았다.     주문화처에서는 여러차례에 걸쳐 민간예인모임을 가졌는데 주덕해, 요흔, 김문보 등 지도자들이 출석하여 중요한 연설들을 하였다.     이 시기 연변예술학교에서는 민족예술의 체계적인 연구에 힘썼는바 김진과 조순희는 민간예술인들한테서 배운 가야금곡들을 기보하여 다섯권은 가야금곡집을 묶었으며 정준갑은 김문자, 박정렬, 신옥화 등 민간예인들의 민요를 수집하여 민요집 세권을 묶었다. 이 밖에 또 1962년부터 1964년 사이 김진, 고자성, 엄상준, 박정렬, 신옥화 등 음악교원을 중견으로 창극연조를 내오고 《춘향전》창극본을 정리하였으며 《광한루》의 한개 장면을 공연까지 하였다. 이 기간의 민간예술수집, 정리작업은 초창기에 비해 조직기구가 비교적 완정하고 수집, 정리범위가 광범위하고 동원된 문예일군들이 많으며 수집한 민간예술작품 또한 전례없이 많은것과 발굴, 수집에 따른 정리작업이 궤도에 오르고 일정                                (3) 한 학술연구대오가 형성된 특점을 보여준다. 세번째단계:《민족문화혈통론》에 의한 매몰기     우리의 민간예술수집, 정리작업이 한창 열기를 올리고 민족전통음악이 한창 생기발랄하게 발전하던 좋은 시기에 《문화대혁명》이란 대동란 이 중국땅을 휩쓸었다.     《민족문화혈통론》에 의한 민간예술수집, 정리작업의 매몰기로 취금되는 이 시기, 무대와 민간에서는 《어록노래》나 《본보기극》노래만 불렀지 민가를 부를수 없었으며 민족전통예술연구사업에서 거둔 모든 성과들은 죄다 말살되고 이 작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잡권신》,《복고주의》,《제왕장상》등 터무니없는 감투를 썼다. 동시에 다년간 수집, 정리한 전통예술연구자료들과 록음테프들이 죄다 《독초》로 몰리워 민간예술수집, 정리작업은 좌절을 당하고 매몰돼버렸다. 네번째단계:수집, 정리작업의 제2차고봉기     1976년 10월, 《4인무리》가 꺼꾸러지자 민족예술도 해빛을 보게 되였다.     1977년, 주문화국에서는 천여명이 참가한 《민가연창대회》를 조직하여 《아리랑》을 비롯한 30수의 민요를 해방하였고 1978년에는 《전주과외민요콩클》과 《전업예술단체민족음악콩클》을 조직하였따.     1978년, 국가문화부 등 유관부분에서는 통지를 내여 민족예술유산을 수집, 정리하여 《중국민간가곡집성》,《중국민족민간무용집성》등 10부의 예술집성책을 2000년전으로 편집, 출판할것을 지시하였다. 여기에 호응하여 주문화국에서는 1979년, 해체되였던 민간문예수집조인원들을 재조직하여 민가집성판공실을 설립하는 등 적극적인 조치를 대여 다시 민가수집 등 민간예술수집작업을 시작하였다.     1981년 6월까지 민간예술수집일군들은 록음기를 둘러메고 길림, 통화, 연변 등 지역의 11개현과 시 55개 마을을 찾아 380명 민간예인을 취재하고 500여수의 민요를 수집하고 록음하였으며 이것을 기초로 400여수의 민요집성의 초고를 편집하였고 365수의 《민요곡집》을 출판하였다.     본론을 떠나 여기서 재미있는 이야기 두가지를 하겠다. 리황훈이라면 연변음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50년대말 조선족미가를 수집하기 시작해서부터 1990년 불치의 병에 걸려 사망하기 직전까지 그는 옹근 36년이란 긴 시간을 민가수집, 정리, 편찬사업에 흔신을 다 바쳤다. 갓 민가집                                 (4) 성판공실이 설립되여 사무실이 없고 경비가 부족되니 그는 자기의 집을 사무실로 1년나마 내놓았고 일손이 딸릴 때면 안해와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자료정리를 시켰다. 대동란기간, 그가 수집한 민간예술유산자료들이 홍위병들에 의해 불속에 던져졌다. 《태우면 나를 태웠지, 이것만은 못태운다.》그는 비판투쟁을 받으면서도 불속에 뛰여들어 그 자료들을 끄집어냈다. 한번은 이런 일까지 있었다. 민가도 많이 알고있는 맹인민간예인 한분을 취재하게 되였는데 밤중이 되니 배가 고프다면서 개고기를 먹고싶다고 하는것이였다. 한밤중에 어디에 가서 개고기를 사온단 말인가. 그 사람은 개고기를 사지 않으면 노래를 안부르겠다고 딱 잡아뗐다.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일이였다. 리황훈 선생님은 입씨름하다 못해 그 맹인한테 무릎을 꿇고 사정하고  또  사정하였다. 《래일은 꼭 개고기에다 찰떡까지 사서 대접하겠으니 마저 불러주십시오.》쇠로 만들어지지 않은 이상 그 누구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랴. 맹인예인은 끝내 자기가 알고있는 민가를 죄다 털어놓고말았다. 기염만장해 달려든느 반란파앞에서 그처럼 도고했던 선생님이 어떻게 보면 남들앞에서 고스란히 머리를 수그리고 무릎을 꿇는것까지 마다한 리유는 뭘가.     류사한 일들은 너무나도 많다.     1978년 민가수집조의 리동구, 김봉관 두 선생님이 화룡현 숭선향 남석촌에 갔을때의 일이다. 독보조에서 박남선로인이 민가를 잘 부른다고 하기에 찾아갔더니 미리 알고 스그머니 하천에 있는 딸집으로 피신을 갔었다. 7-8리 길을 걸어 로인을 찾아 상급의 문건들을 내놓으면서 찾아온 리유를 말하니 죽어라고 민가는 안부른다고 했다. 결국 수집조일군들에 의해 설복되였는데 로인은 쌈지에서 담배종이를 꺼내놓으며 《내가 소리를 해도 죄가 없다구 여기에 쓰고 도장을 찍소.》라고 했다. 한심한 일 같지만 리해는 할수 있었다. 이전에 민가를 많이 불렀다는 죄로 문화대혁명기간에 투쟁까지 맞아 소리는 물론 술까지 끊고 조용히 살아간다는 로인, 수집조일군들은 로인이 시키는대로 쓰고 민가집성사무실의 도장을 찍었따. 박남선로인이 부른 《초한가》등 민가는 이렇게 수집된 것이다. 줄거리를 벗어나는 얘기지만 하고싶다. 그날 로인은 초한가의 1절을 부르고 끼억끼억 울었다. 그토록 부르고싶은 내 민족 내 노래를 부른것이 죄가 되여 투쟁맞은 어제가 통분하고 술대접까지 받으며 그 노래를 다시 통쾌하게 부르는 오늘이 눈물나도록 기쁘다는것이였다. 정녕 민족이란 뭐고 전통이란 또 무엇인데!                                     (5) 1981년에는 일찍 해방전에 만주국성립10주년경축대회때 장춘에 가 농악유희를 공연하여 상까지 탄 안도현 장흥향 신촌의 《농악유희》를 발굴하였다.     1979년의 연변문학예술연구소의 성립과 1981년의 연변예술학원 민족예술연구소의 성립은 문예집성작업을 비롯한 민족예술사업을 한층 더 높은 차원에로 끌어올릴수 있는 조직적담보를 제공해주었다.     1980년, 조종주,박정렬 두 민간예인은 북경에서 열린 《전국소수민족민간가수대회》에 참가하여 수도인민들의 절찬을 받았다.     1982년, 연변인민출판사와 연변음악가협회에서는 다년간 발굴, 수집한 민가 300수를 묶어 《민요곡집》을 출판하였다.     1983년 3월, 주문화국에서는 제1차민간음악집성회의를 열고 민족음악집성사무실을 내오고 민간음악수집작업에 성과가 돌출한 단위와 개인을 표창하였으며 그해 10월에는 성 문화청에서 전 성 집성사업회의를 열고 연변민가집성판공실에 축기를 드림과 동시에 안도현 문련과 문화관을 선진집체로 표창하고 조종주, 리황훈, 김태갑, 김성민 등 30여명 연변의 민간예술인과 집성사업일군들에께 각기 출연, 기보, 정리, 번역 등 면에서의 우수상을 발급하였다.     이 기간 민간예술수집작업과 함께 민간예술에 대한 연구사업도 활발히 전개되여 《민요연구》(조정일 저), 《조선족민족음악특징》(전화자 저), 《중세기이래 조선족음악발전》(최순덕 저), 《조선족민요장단에 대한 분석》(리황훈 저), 《조선족전통민요분류》(왕보림 저), 《판소리기원과 우리 나라에서의 류전》(김창호 저), 《조선족민간음악개론》(정준갑 저) 등 리론저작과 론문들이 륙속 출판, 발표되였다.     1976년말부터 1984년말까지를 포함한 이 시기의 민간예술수집, 정리 작업을 보면 민간예술수집작업의 조직회복과 함께 민간예술수집범위가 광범위하고 수집한 작품 또한 풍부한 등 제1차고봉기와 같은 특점을 보여주고 있는 동시에 수집도구가 비교적 선진적인 특점, 지방내부의 미간예술수집으로부터 국가적인 예술집성에로의 전이, 수집과 리론연구의 밀착된 결합 등 특점을 보여준다. 다섯번째단계: 민족전통예술의 정립을 기한 대집성기 1985년 1월, 연변예술집성판공실의 정식성립은 민간예술수집에서 다년간 온정된 상설기구가 없고 고정된 수집, 정리, 편집일군들이 없이 여기저거 문화예술부분으로부터 이 사람 저 사람 빌려쓰던 국면을 종말짓고 믿음직한 국가재정의                                  (6) 경비담보로 전문인원을 배치하고 사업경비를 해결함으로써 예술집성작업발전에 탄탄대로를 편쳐주었다.     이때로부터 연변예술집성판공실에서는 국가문화부 예술과학계획령도소조의 구체배치에 따라 국가예술과학연구 중점째마인 《중국민족민간문예10부집성》에 수록될 조선족희곡지, 조선족구연지, 조선족민가, 조선족민간무용, 조선족기악곡, 조선족구연음악, 조선족희곡음악 등 7대 예술집성(문학에 속하는 민담, 민간가요, 속담 등 집성작업은 상급지시정신에 따라 연변민간문예가협회 등 단위에서 맡음)의 편집사업을 일제히 전개하였다.     우선, 몇십년래 수집, 정리한 민가들을 중앙의 《범위가 넓어야 하고 품종이 구전해야 하며 질이 높아야 한다》는 편집방침에 따라 재심사, 재편집하였으며 수십차례에 걸친 중앙집성총부의 회의에 책임편집들이 직접 참가해 중앙과 성 유관부문의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전국성적인 통일방안에 따른 수차의 반복수개작업을 하였다.     잇달아 예술집성일군들은 희곡지, 구연지의 자료와 민간무용, 민간기악곡, 민간희곡음악, 민간구연음악 등을 수집, 정리하는 한편 록음, 편집, 수개 등 작업을 활바하면서도 깐지게 벌려나갔다. 한단락의 문자자료, 한음의 기보라도 의혹이 생기면  무더기로 쌓인 자료를 다시 뒤졌고 록음자료테프를 몇번이고 다시 들었으며 몇십리길을 다시 다녀왔다.     1997년 9월에 출판된 《중국민가가곡집성·길림권》은 우리 연변민간예술수집일군들이 수년간의 피와 땀으로 수집, 정리한 1,500여수의 민가중 315수를 선정하여 개술, 주해, 역문 등 문자자료와 함께 악보자료 50여만자를 수록하였다.     1994년 6월 중국민간가곡집성총부에서는 북경에서 《제1차동북3성조선족민가출판협조회의》를 열고 동북3성에서 련합으로 조선문판 《중국조선족민간가곡집성》을 출판하도록 결정지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출판하게 될 소수민족문자집성책이다.     《중국민간가곡집성·길림권》출판에  앞서 1988년 10월에 출판된 《중국희곡지·길림권》에는 조선족의 희곡으로 창극을 소개하고 전통 극목으로 《춘향전》,《흥부전》,《심청전》,현대극목으로 《붉은 자매》,《룡강송》등을 올린 동시에 《적성가》등 8개 소리단락음악과 함께 복장, 도구 등 자료 20여만자를 실었다.                                     (7) 1997년 10월에 출판된 《중국민족민간무용집성·길림권》에는 우리 연변에서  다년간 수집, 정리한 민간무용 《승무》,《원무》,《농악무》,《칼춤》, 《탈춤》, 《양산도》, 《학춤》, 《아박춤》,《지게춤》,《물동이춤》, 《갓춤》, 《살풀이》, 《접시춤》,《무당춤》,《삼삼이춤》,《손춤》,《손벽춤》,《부채춤》,《장고춤》등 19종을 수록하고 무용도구와 함께 복장, 음악, 소도구 등 내용을 50여만자되게 상세히 소개하였다.     조선족민간기악곡수집, 정리작업은 1984년도부터 시작되였다. 수집일군들은 연변의 8개현, 시의 몇백명 민간예인들을 방문하고 단소, 저대, 피리, 해금, 새납, 퉁소, 가야금 등 여러가지 기악곡의 분포상황을 조사한 기초상에서 130여수의 민족기악곡을 수집하고 정리하였다. 1991년에는 성 예술연구소와 연변예술학원의 지지와 협조를 받아 거의 매몰되여가던 조선족전통기악협주곡 《시나위》,《삼현륙각》,《령산회상》,《농악》을 수집하고 정리하였으며 록음록화까지 하였다. 조선족기악소개를 비롯한 인물전기 등 문자자료와 75수의 조선족전통기악곡을 수록한(30만자)《중국민족민간기악곡집성·길림권》은 2000년 12월에 출판되였다.     1999년에 출판된 《중국구연음악집성·길림권》은 조선족 판소리음악 《춘향가》등 전통극목을 비롯해 해방후에 새로 창설된 설창음악들인 《연변창담》,《북타령》,《평고엮음》의 소리단락 63수와 함께 중국에서의 판소리발전상황, 선률, 조식, 장단, 창법 등 음악적특성과 창본의 묘사수법, 가사결구형태 등 문학적특성을 포섭한 개론 등 문자와 악보자료 20여만자가 기재되였다.     《중국희곡지·길림권》의 자매편인 《중국희곡음악집성·길림권》은 1999년 6월에 출판, 조선족전통창극극목 《춘향전》,《심청전》,《흥부전》,《토끼전》과 현대극목들인 《김삿갓》,《붉은 자매》등 극목의 36수의 소리단락을 망라하여 《개론》,《무대미술》,《인물》 등 자료 15만자를 수록하였다.     이상 두편에 수록된 구연음악과 희곡음악의 소리단락들은 전부 가사부분에 국제음성기호로 표기를 달아 중국은 물론 세계 어느 민족이나를 막론하고 우리말로 가창이 가능하도록 했다. 《중국구연음악·길림권》의 자매편인 《중국구연지·길림권》은 연변구연대사기를 비롯해 조선족전통구역종목들인 판소리, 설화, 재담, 만담과 해방후 중국 조선족 예술인들이 자체로 창조한 3로인, 연방창담, 북타령, 평고엮음 등 구연종목                                 (8) 에 대한 곡종소개, 대표극복, 표연예술, 인물전기 등 음악, 문자자료 15만자를 수록. 이미 총심사를 마치고 출판을 기다리고 있다.     민족전통예술의 정립을 기한 대집성기인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민간예인들과 예술집성일군들이 사회의 보다큰 중시와 배려를 받게 되였다.     1987년 9월 15일, 중국민간문예가협회 연변분회에서는 룡정현 합성촌에서 조종주, 박정렬 두 로인에게 민간가수 칭호를 수여하였고 1993년 1월 7일, 연변예술집성판공실과 연변예술학원 예술연구소에서는 공동으로 신옥화예술생애60돐기념가창대회를 가졌으며 1995년 7월 2일, 연변예술집성판공실과 연변민간문예가협회에서는 민간가수 조종주로인의 서거 3돐에 즈음하여 룡정시 조양천진 합성촌에 있는 그의 묘지에 《저명한 조선족가수》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1997년 11월, 국가문화부 전국예술과학계획령도소조에서 소집한《전국문예집성사업회의 및 성과표창대회》와 1998년 3월, 길림성 문화청에서 소집한 《전 성 예술집성성과표창대회》에서 김남호, 최호욱, 김창호 등 연변예술집성사업일군 45명이 각기 중아과 성의 여러가지 영예상과 성과상을 탔고 연변예술집성판공실은 다년래 예술집성편찬사업에서 성적이 돌출하여 성문화청으로부터 예술집성사업선진단위로 표창받았다.     1998년 5월 18일, 연변예술집성판공실에서는 《연변예술집성성과소식공개회》를 열고 다년간 거둔 예술집성성과들을 전 사회에 광범히 선전하였다.     상기한 사실들은 이 단계에 와서 우리 연변 민간예술수집, 정리작업이 개별적 민간예술의 수집, 정리작으로부터 전반 민간무대예술의 수집, 정리작업에로의 전이, 지방내부적 수집, 정리로부터 민족전통예술의 정립을 기한 국가급고차원의 수집, 정리에로의 전이를 엿볼수 있는바 넓어진 집성의 대상성, 고차원의 목적성, 거시적인 전략적리론연구로 독특한 특점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연변예술집성작업이 걸어온 길을 력사적시기에 따라 다섯 개단계로 더듬어보면서 그 특점을 살펴보았다. 사실, 공화국창건이래 수십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민간예술집성작업에 참가하여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수많은 농가의 무턱을 드나들면서 수천명의 민간예인들을 만나 단절된 민간예술의 맥락을 이어놓고 사그러져가는 민간예술의 불씨를 되살리는데 기여를 하였다. 장기간 우리의 전통예술을 위해 힘써 오신 선배들인 조                                 (9) 종주, 박정렬, 김말순, 류준선, 김문자, 우제강, 신인순, 구룡환, 김경모, 리복제, 신철, 강성기, 신옥화 등 수많은 민간예술인들은 우리 전통예술의 발굴과 계승, 및 후대양성에 피타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분들 대부분은 세상을 떴다. 그리고 건국후 우리 민족전통예술수집, 정리작업을 열심히 해온 리황훈, 김승경, 김태갑, 리동구, 김원창, 상설산(한족), 왕보림(한족), 정준갑 등 선생님들도 오늘 우리곁을 떠났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 연변예술집성판공실 전체 성원을 대표하여 이분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시한다. 우리는 지금 그들이 다 하지 못한 일을 계승하고 있다. 민족전통예술의 정립을 기한 민족전통예술집성작업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사업이다. 오늘, 우리는 전통예술유산을 학습, 연구, 계승하여 우리 민족예술사업의 발랄한 발전을 위해 땀을 흘리고 또 흘려야 할 의무를 한층 더 깊이 느끼고 있다.     이상으로 천박한 견해를 피력하면서 여러 선배님들과 학자선생님들의 기탄없는 지도와 편달이 있기를 충심으로 바라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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