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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수남촌건설을 위해 '소당원'이 됩시다!" 댓글:  조회:5868  추천:1  2014-07-09
도문시석현진수남촌당지부 활동 측기                       도문시석현진수남촌은 1920년 6월 7일에 중국 연변땅에서 반일의 총소리가 제일 먼저 울린 반일전투전적지(봉오동전투전적지)이며 도문에서 제일 먼저 당지부가 성립된 촌이다. 민국 16년(1927년)4월에 반일투사 오중화(吳仲和)가 수남촌남봉오동(원고려툰)에 도문지구제1공산주의단체(조선공산당지부)를 성립하고 4명의 당원을 발전시킨 뒤를 이어 민국19년(1930년)7월에 남봉오동의 8명 조선족공산주의자들이 모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공고려촌당지부를 성립하였다. 그만큼 수남촌은 영광스러운 혁명전통과 그에 따르는 자랑거리가 많다.    7월 1일 필자는 수남촌당지부의 초청을 받고 수남촌에서 당의 93돐 생일을 쇠는 기쁨을만끽했다.    이날 기념활동에는 당원, 당학습열성분자, 생산대대장까지 20여명이 참가했다. 흥진툰의 김종철(지난 세기 80년대 흥진촌당지부서기)이 당지부활동에 당원 한사람도 빠져서는 안된다며 제때에 통지를 못 받은 신선툰의 장일천을 모시려 오토바이를 타고 떠났다.  한참후 늦게나마 도착한 장일천은 먼저 당지부조직위원을 찾아 당비부터 냈다.   김진섭(66) 당지부서기가 오늘의 모임의 뜻에 이어 며 동원 하면서 오늘 활동에 각 생산대대장들이 2,3백원을, 라철룡촌장이 개인으로 500원을 부조하였다면서 이에 전체당원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수남촌건설에 더욱 노력할것이라고 표시했다.   김서기의 꾸밈없는 유모아적인 발언에 모두가 이 되자며 힘찬박수를 쳤다.  이어 김서기가 로당원들에게 발언을 부탁하였다.   오늘의 활동에 참가하고저 연길에서 왔다는 김용남(지난세기 60년대 수남대대단총지서기)이 실눈으로 웃음을 지으며 하는 말이다. 조용남의 말에 라며 오늘 지부활동에 참가하고저 도문서 왔다는 유문빈(78)이 말한다. 발언을 사양하는 로당원들은 일전에 열린 을 곁들면서 수남자랑, 촌장자랑, 젊은이들 자랑으로 술잔을 멀리하며 주름진 만면에 웃음꽃을 피웠다. 화제는 젊은 당원 허민호에게로 돌아 졌다. 허만호는 연변농학원을 졸업하고 8년간 청도에서 창업을 하다가 귀향하여 지금 수남촌식용균공장에서 버섯품종개발에 몰두하고 있단다. 오랜만에 수남촌당지부활동에 기자가 참가했다며 사람들 서로가 기자를 찾아 귀맛 좋은 얘기를 들려준다  지금은 표고버섯을 연구하고 있다는 허만호가 자기의 푸른꿈을 내비쳤다. 수남촌에서 고문으로 모셔온 서봉춘(장춘사람,63)의 얘기다.   술기운이 오른 사람들의 얘기는 들을수록 흥이났다. 조직위원 허세호는 기자한테 법률관련 원고를 쓰겠다며 명함장을 요구했다.  당지부활동에 빠져서는 안된다며 끝내 장일천을 모셔오는 김종철, 뒤늦게 오자바람으로 당비부터 납부하는 장일천, 대도시에서 귀향하여 자기의 푸른꿈을 키워가는 허민호, 젊은이들을 부추키는 로당원들, 고향건설에 여생을 다 바치겠다는 장춘사람, 당원 모두가 이 되여 수남촌건설을 위해 묵묵히 힘을 내겠다는 당원들,,,, 바로 이런 분들이 있기에 수남촌의 래일은 밝기만 하다.
148    《극좌》가 걱정된다 댓글:  조회:7055  추천:11  2014-06-17
《좌를 범할지언정 절대 우를 범하지 않는다》(宁肯犯左 決不犯右). 이는 지난 세기 6, 70년대 《문화혁명》시기의 류행어다. 그때 인민해방군까지 《지좌불지우》(支左不支右)의 기치를 들고 지방《좌파》지지에 동원되였으니 말이다. 그때 《좌경》은 혁명성이 강한것으로 혁명성 여하의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으나 《우경》은 무(약)혁명성으로 책임을 추궁했으니 말이다. 기실 좌경이든 우경이든 모두 혁명건설에 어긋나는 일인데도 말이다. 당년의 《좌》, 또는 《극좌》는 몽매하기로 다시 생각하기도 싫다. 오죽하면 혁명성의 표현으로 자기집 마당의 과일나무를 찍어버리고 아쉬워해야 할 대신 《자본주의 꼬리를 벴다》며 자랑 했겠는가. 필자가 오늘 지난날의 《범좌불범우(犯左不犯右)》를 반추함은 다름이 아니라 지금 습근평총서기를 위수로 하는 당중앙에서 실행하는 《8항 규정》,《4가지 기풍문제 척결》, 당의 군중로선교육활동 집행과정에서 백성들이 《언녕 이래야 한다》며 기뻐하는데 비춰 일부 지방과 단위의 구체적인 집행, 실시과정에서 나타나는 《좌》또는 《극좌》적인 행위가 걱정되여서이다. 모 시에서 로간부좌담회를 가지고 《상급정신》, 《4가지 기풍문제 척결》 등으로 효도적이고 례의적인 식사대접마저 금했다고 하며 로력모범좌담회후 농촌에서 온 로력모범들의 점심대접을 안한데서 《해도 너무하다. 습근평주석이 알면 비평할것이다》는 후론을 남겼다. 심지어 모 시 해당 부문에서는 몇달전에 준비했던 《장애자의 날》의 기념행사마저 《경비문제》때문에 행사를 취소했다 한다. 모시에 사는 김씨네는 명절때면 자기집 창문가에 국기를 걸어 놓는데 불법위성텔레비죤 수신장비를 철수하면서 집주인이 없는 사이에 외벽에 설치한 국기대마저 마구 뜯어갔다. 당중앙의 《8항 규정》, 《4가지 기풍문제 척결》, 군중로선교육활동은 부패현상, 형식주의, 떠벌려 랑비, 지도자, 공무원들의 기풍을 바로잡고 기강을 세우자는데 있다. 정상적인 행사, 례의적이고 상식적인 식사대접마저 엄금하라는것이 결코 아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해당 부문, 상급의 지시, 규정을 집행함에 있어서 형식적이고 맹목적이 아닌 실제적이고 적극적이며 합리적인 그리고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접수하고 옹호할수 있는 집행과 실시를 하자는 바램이다. 길림신문 6월 16일자  
147    음식업의 사회적책임감이 기대된다 댓글:  조회:5633  추천:2  2014-06-09
얼마전에 모 시 한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한적이 있다. 술이 거의 끝나고 주식을 주문할때 자리를 같이한 변호사사무소의 L주임이 옥수수국수를 작은 그릇으로 주문했다. 그런데 얼마후 복무원이 들고온 국수그릇을 보고 저마다의 눈이 동전잎처럼 둥그래졌다. 《이 많은 량을 어떻게 다 먹느냐?》,《여기는 쑈완(작은 사발)이 없는가?》고 물었는데 외마디 대답 "없다"로 말문을 막았다.  자리를 뜰 때 L주임이 복무원더러 나머지 국수를 싸달라(打包)는것이였다. 동석한 손님들이 블어버린 국수를 다시 먹을수 없다며 말려도 L주임은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음식랑비때문이다》《나머지로 두 때는 넉넉히 먹을수 있습니다》며 그냥 《따보(打包)》를 했다. 필자는 책임자를 불러 다른 식당에는 《작은 그릇》이 있는데 여기는 왜 없냐며 옥수수국수값을 물으니 아무런 꺼리낌도 없이 《한그릇에 15원입니다》고 했다. 이에 손님들 모두가 다른 식당에는 작은 그릇으로 8원을 한다며 돈벌이를 위해 《따완》만 판다고 음식점의 상도를 지적했다. 일전, 중공중앙선전부, 국가발전개혁위원회에서는 근검절약 미덕양성 전민 절약행동을 전개할데 관한 통지를 발표했다. 통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근검절약은 중화민족의 전통적미덕으로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의 중요한 내용이다. 근검절약 미덕양성 전민행동을 전개하는것은 전 사회가 분투목표를 실현하는 강대한 힘을 결집하는데 중요한 현실적 의의가 있다》. 《감독을 잘 틀어쥐고 떠벌려 랑비하는 전형적인 사례를 폭로하며 체면을 따지고 허세를 부리는 등 불량한 기풍을 바로 잡도록 강한 여론압력을 형성하며 절약은 영광스럽고 랑비는 수치스럽다는 방향인도를 강화해야 한다.》 필자는 랑비를 수치라며 체면도 허세도 부리지 않고 먹다남은 옥수수국수를 끝내 싸가지고 가는 L주임의 행동에 머리가 숙여진다. 한편 음식업종들에서 혀끝랑비를 줄이기 위하여 《반인분 료리》, 《간이 료리》등 메뉴로 자기 식사량에 따라 료리를 주문할수 있도록 음식업에서 앞장서 《접시비우기》사회기풍을 선도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말하자면 음식업들이 고도로 되는 사회적책임감으로 식당내에 표어, 벽보, 영상자료, 주문제시 등 여러가지 내용과 형식으로 소비자들의 리성소비 습관과 분위기를 하루속히 조성토록 인도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길림신문 6월 9일자  
146    연변축구팬, "쾐찮아!" "잘했다!" 웨쳐보자 댓글:  조회:6058  추천:4  2014-06-06
  지난 5월 24일 《길림신문》 3면에 《화제 》로 《연변축구팬 뽈 볼줄 몰라, 너무 실망이야!》란 제목의 한종훈의 글을 실었다. 필자 역시 《옳구나!》이다. 한종훈의 《연변축구팬, 실망이야!》의 부분 내용이다.     —하긴 무슨 《연변축구팬이 수준이 있소》, 《뽈 볼줄 아오》한다는데 볼줄 안다는게 앉으면 《말새》만 할줄 알았지… —시작할 때 좀 응원을 하는것 같고 꼴이 나니 좀 소리를 지르는것 갔던데 그 다음에는 응원이 어디 갔는지 답답하다. —이게 어디 응원인가? 이건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들을 감시하고 숙제검사를 하는 교원같다. 그러니 홈장에서 선수들이 더 긴장할수밖에…   확실히 그랬다. 필자가 본 연변팀 홈장경기장은 악대응원소리외에 거의 번번히 《헤이쏘우!》(黑哨), 《쌰커!》(下课),《 환런!》(换人)이란 세마디 웨침뿐이다. 필자는 《연변축구팬이 수준이 있소》,《뽈 볼줄 아오》를 연변사람들이 재판수준이 있다로, 어느 선수의 규칙위반여부를 볼줄안다로 인식했다. 그래서 《연변축구관중들이 축구규칙을 잘 알기에 재판들이 연길경기장에 오기를 로 리해했다》.   이밖에 《쌰커!》, 《환런!》웨침은 응원이 아닌 감독과 선수를 주눅이들게 하는 괴성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쌰커!》나 《환런!》이라 웨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감독을 해봐라》, 《당신이 들어가 차바라》고 한다. 연변축구팀은 연변의 명함장이고 연변팀 선수들은 연변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선수들은 잘 차도 연변의 아들이고 못차도 연변의 아들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쓸때까지 연변팀은2승 2무 8패 8점, 15위이다. 안타깝고 조급하고 미안해 하는것이 그래도 축구팬이나 관중들이 아닌 연변팀 감독과 연변팀의 선수들일것이다. 언젠가 한국 KBS 아침마당프로에서 천호식품 김영식회장이 자신의 성공사례로 《가족사랑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하고 힘있다》고 하던 말이 떠오른다. 김회장은 1994년 부산에서 현금보유량이 가장 많은 100등안에 들었다. 그런데 1997년에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기업들이 파산되여 3년만에는 또 부산에서 빚이 많기로100등안에 들었다. 온갖 노력으로 10년만에 다시 년매출 500억원대 회사로 재생시킨 김회장을 지켜준 사람들은 가족이였다. 1998년 설날에 아버지는 넘어질줄 모르는 《오뚜기》를 선물로 아들의 재생을 확신했고 안해는 《당신은 할수 있다. 분명히 해낼것이다. 꼭 해야 한다》며 남편에게 화이팅만을 불러줬다 《어려울 때는 피로회복제보다 가슴에서 울어나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서로에게 힘이 된다. 어려울수록 똘똘뭉쳐 가족끼리 화이팅을 해야 한다. 가족사랑의 힘으로 무슨 일이든 할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힘 있는것이 가족사랑이다》. 이는 김영식회장이 역경에서 성공을 이뤄내고 절감한 느낌이다. 이에 비춰 우리가 지금 해야 할 몫이란 바로 연변팀에 가장 위대하고 가장 힘이 있는 가족사랑을 몰붓는것이다. 장안순서기, 전임 리룡희 주장이 연변팀에 《오뚜기》를 주면서 《아들의 재생을 확신》하고 온 연변주민들이 똘똘 뭉쳐 《연변팀은 할수 있다, 분명 해낼것이다》며 《연변팀 화이팅!!》을 불러야 할것이다. 할빈의등팀의 8련패를 멈춰 세운것이 할빈축구팬들의 열혈응원이였다고 한다.   필자는 축구애호가도 아니고 축구팬도 아니다. 그러나 연변주민으로 연변팀을 위한 사랑과 책임은 지켜왔다. 례하면 국가축구협회에서 연변축구협회에 공개사과를 했던 1998년 6월 2일에 《연변일보》기자신분으로 주용기총리에게 등록우편으로 편지를 써올린적이 있다. 연길경기장에서의 《검은 호르래기》 상황을 반영, 《푸른잔디에 민족기시가 존재한다》고 했고 2003년 연변팀의 봄철 한국훈련 때 필자의 련줄로 경상남도 고성군 초등학교 이정찬교장이 연변팀의 숙박, 교통, 훈련장 배치를 전담하게 했는데 당시 5000만원을 썼다 한다. 늦었다고 할 때가 바로 시작할 때다. 우리 모두 연변축구팀에 가장 위대하고 가장 힘있는 가족사랑을 주자. 《쌰커!》나 《환런!》이 아닌 《괜찮아!》, 《잘했다!》, 《힘내라!》, 《연변팀 화이팅!》을 웨치면서 말이다 . 길림신문 6월 6일자
145    조선족이라면 조선어를 알아야 댓글:  조회:7830  추천:17  2014-05-22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4기 인대상무워원회 9차 회의에서 9월 2일을 《조선어문자의 날》로 결정지었다. 결의는 《조선어문자의 날》을 제정함은 《사회적으로 자치민족언어습관을 존중하고 조선어발전의 량호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민족단결사업을 추진하고 민족전통을 계승하며 민족의 우수한 문화와 특색경제를 발전시키고 조선어 문자사업을 번영 발전시키기 위함이다》고 썼다. 연변에서 《조선어문자의 날》을 제정한것은 실로 경하할만한 일이라 하겠다. 《조선어문자의 날》제정은 한편으로 우리 민족이 자기민족의 문자를 홀시하고 잃어 버림에 대한 하나의 법적 조치임을 말해준다. 최근 필자는 연변에서 조선족 법관, 교원, 의무일군을 만났는데 놀랍게도 세분 모두가 아무런 꺼리낌 없이 《나는 조선글을 모른다》고 하였다. 그래서 필자가 《당신은 잔페인이구만!》라고 당장에서 지적해도 모두가 무감각이였다. 언젠가 모 시 법원에서 조선족법관을 초빙했는데 초빙후에 알고보니 그 법관은 조선족문맹이였다. 그래서 할수 없이 그더러 사업터를 뜨게 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그 《조선족문맹》이 부시장으로 승급했다니 말이 아니다. 조선족으로 조선어문자를 모르니 그것도 사회적으로 일정한 직위와 권리가 있는 조선족들이 조선글과 조선말을 모르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언젠가 도문시방화안전위원회에서 조한문으로 된 《도문시공민방화공약》을 한장에 15전씩 받으며 집집이 나누어주었다. 조선문으로 된 방화공약을 읽고나서 너무 실망했고 분노에까지 이르렀다. 700자 좌우밖에 안되는 공약에 틀린 글자가 51개나 되였다. 공약이 콩약, 곰약, 말것이 말멱, 그리고 전염기, 폭숙… 교정이 틀렸는지 번역이 틀렸는지 무슨 말인지를 모를 단어가 수두룩했다. 얼마전에 장춘가스(도문)유한회사에서 도문시 옥림1구에서 홍보활동을 벌였는데 그들이 발행한 조문전단지는 더 말이 아니였다. 《존경하는 사용자 안녕하세요. 장춘가스 현경영 가스灶具, 가스 膠管, 품질을 보증, 안전이다. 가게 당신 안심을 우리는 저렴한 가격 열정적인 태도 를 보 지성껏 당신을 위해 서비스다》.인사말까지 4줄 되는 글을 마지막까지 읽자니 분하기 짝이 없었다.(아래 사진) 5월 13일 필자는 해당 책임자(한족)를 찾아서 《당신네 전단지가 조선민족문화를 희롱한다》고 하니《그래도 그 글을 조선족이 번역한 것이다》며 당장에서 진렬했던 전단지를 몽땅 거둬들이는 것이였다. 이를 지켜보던 한족분이 《조선족이 번역한 것이라고 해서 정확한 것이 아니다. 언젠가 우리 술공장의 술을 어느 조선족 어른이 으로 번역해 고객들이 며 놀려주기에 망신을 당했다.》고 했다. 필자는 특수환경을 제외하고 조선족이 조선말을 모르고 조선글을 모르는 것은 완전히 부모들의 문제라고 감히 지적한다. 중국인민해방군 공군대좌이며 감동중국 걸출조선족 리광남은 부모들이 자기를 군대에 보내며 《조선말을 잊지 말라, 군대에 갔다 와서 조선말을 안하는 사람을 동네서 덜된 사람이라고 한다》던 말씀을 명기하고 40여년간의 군생활을 하면서 《덜된 사람》 이 안되기 위하여 조선말을 잊지 않고 지금도 농촌토배기대장마냥 조선말을 술술한다 했다. 그리고 그는 두 딸을 참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하여 어릴 때부터 조선말과 조선글을 배우도록 강요했다. 뿐만이 아니다. 그는 자기를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기사에 《외래어를 사용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전제조건을 단다. 모종 의미에서 말하면 민족이란 언어의 공동체다. 공동한 언어문자는 그 민족의 얼이 살아숨쉬는 기본조건으로 그 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의 발전계승의 둘도 없는 도구이다. 우리말과 우리글은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이며 밑천이다. 과거 청나라를 세운 만족은 본 민족의 언어를 쓰지 않은 데서 만어가 소실되여 지금 중국 전역에 만어를 아는 만족이 겨우 10여명 밖에 없다 한다. 지금은 글로벌시대다. 우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우리 민족 전통문화의 자주성과 우수성을 고수해야 한다. 자기 민족의 말과 글조차 모르고 어찌 민족군체, 민족자질을 운운할 수 있겠는가! 글로벌시대에 불어치는 《한국붐》이 다행히도 우리 민족의 밑천을 지킴에 보탬을 한다고 생각한다. 도문시 신화가 신흥사회구역판공실에는 조선족을 접대하는 창구가 따로 있는가 하면 한족간부들이 조선글을 배우는 흑판과 조선어학습시간표가 뚜렷히 걸려 있어 기분이 좋았다. 필자는 다가오는 《조선어문자의 날》을 맞으며 《조선족문맹》,《조선족문맹족》들이 조선말과 조선글을 배우는 붐을 일으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맹퇴치는 빠르면 빠를 수록 좋고 우리 민족에게 유익하니 말이다.  길림신문
144    《그 마작판이 제 에미보다 더 중할가?》 댓글:  조회:6087  추천:6  2014-04-18
일전에 도문—연길 행 택시를 탔던 70대 할머니의 넉두리다. 10일, 도문에 계시는 할머니가 오전 9시 반경에 도문—연길 택시를 탔는데 동행한 60대 남성이 운전사와 잘 아는 사이인지라 그들간에 오가는 얘기란다. 손님: 연길에 가서 한 20분을 기다려 주오, 내가 일을 보고 인츰 돌아 설테니… 운전사: 어머니를 보러 간다면서 어찌 인츰 돌아섭니까? 손님: 한 20분이면 되지, 엄마가 내가 가면 손을 잡고 울면서 놓치 않소. 남 보기가 민망스러워서… 운전사: 그게 부몹지. 손님: 11시전에 돌아가서 마작을 놀아야 한다이, 좀 기다려 주오. 어떤 날에는 한 2000원씩 나드오. 알고보니 이날 그 손님이 해바라기를 사들고 엄마를 보러가는 행차였다. 《지금은 별난 세월이오. 자기를 낳아준 에미도 모르니. 그 마작판이 제 에미보다 더 중할가?》, 《보고싶은 아들의 손을 잡고 우는 제 에미가 그렇게 민망한가? 자식을 낳아서 무슨 소용이 있소!》70대 할머니의 말이다. 《자식을 낳아서 무슨 소용이 있소!》, 그 말에 《글쎄…》하며 얼른 답이 따르지 않는다. 언젠가 필자가 도문—연길 행 뻐스에서 목격한 일이다. 40대 녀성(한족)이 뻐스에서 늙은 로인의 다리와 손발을 꽁꽁 주물러 드린다. 《로인님을 모시고 병원에 갑니까?》,《아니요, 연길구경을 가는데 그만 옷을 얇게 입으셔서 추워하실가봐 안마해드려요》. 정말 효성합니다는 말에 《어머니 년세가 80세인데 이 좋은 세월에 오래 사셔야 하지요. 아버지가 50세에 암으로 돌아 가시다나니 어머니가 우리 여섯자매를 키우시느라 얼마나 고생했겠습니까》. 왕씨라는 그녀는 여섯자매가 서로 어머니를 모시며 효성을 다하기에 어머니는 지금 정말 행복하다며 효성은 공부를 하고 못하고와 관계 없다고 말한다. —부모를 멀리 떠난 자식들이 부모에게 늘 전화를 하는 자식들이 별로 많지 않다 한다. 부모가 돌아간다 해도 눈물이나 흘리겠는지…》. —《한국에 가 돈벌이를 하는 조선족 자식들은 부모들한테 자주 전화하는지…》. 세종대왕은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이라는 친필로 《충과 효를 가문에 전하고 어질고 공경하는 정신을 대대로 지키라》고 하였다. 하남성 창담현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해야 승진할수 있다》는《효도규정》을 신설하고 간부를 고찰할 때 친척, 동료들을 찾아 고찰대상의 효도여부를 묻는다 한다. 효는 인간의 백행지원이다. 효도는 덕을 근본으로 하는 실천이고 불효한 교육은 무효이다. 지난 로인절에 어느 교원의 한 말이 생각난다. 《효도하는 아들이 내 아들이다》. 길림신문 4월 18일자
143    "조선어문자의 날"과 우리의 자세 댓글:  조회:6343  추천:6  2014-04-18
 일전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제 14기 인대상무워원회 9차회의에서 9월 2일을 로 결정했다.  중국에서(중국조선족을 대상함) 을 제정한것은 실로 참 경하할 일이라 하겠다.  제정은 한편으로 우리 민족이 자기민족의 문자를 홀시하고 잃어 버림에 대상한 하나의 법(조례)적 조치임을 말해준다. 그래서 주인대상무위원회 결의는 을 제정함은 고 밝혔다. 최근 필자는 사업적으로 조선족 법관, 교원, 의무일군을 만났는데 놀랍게도 세분 모두가 아무런 꺼리낌도 없이 고 하였다. 이에 필자가 당장에서 라고 경멸했는데도 모두가 무감각이였다.  언젠가 모 시 법원에서 조선족법관을 초빙했는데 초빙후에 알고보니 그 법관은 조선족문맹이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더러 사업터를 뜨게 했는데 운이 좋게도 그 이 부시장으로 승급하였다. 아니, 조선족의 비례를 차지한 그 시장이 집권기간에 시켰으면 얼마를 시켰겠는가?  필자는 이처럼 한심한 실정에 비춰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특별히 을 제정했는가 본다.  언젠가 도문시방화안전위원회에서 조한문으로 된 을 한장에 15전씩 받으며 집집에 발부하였는데 필자가 조선문을 읽고서 분개와 실망을 어쩔수 없었다. 글쎄 모두 700자 좌우 밖에 안되는 공약에 틀린글자가 51개(공약이 콩약, 곰약… 으로), 전혀 모를 구절이(난로곁을 떠나지 말멱, 쉼게 불이 달리거나 등) 여섯, 무슨 말인지를 모를(전염기, 폭숙… 등)곳이 수두룩하니 말이다. 필자는 특수환경을 제외 하고 조선족으로 조선말을 모르고 조선글을 모르는 것은 완전히 부모들의 문제라고 말한다.  중국인민해방군 공군대좌, 감동중국걸출조선족 리광남은 부모님들이 그를 군대에 보내면서 는 말을 명기하고 40여 년의 군생활을 하면서 이 안 되기 위하여 지금까지 농촌대장이 못지않게 토배기말로 조선말을 하고 두 딸로 참된사람으로 키우려고 어릴때부터 조선말을 하도록 강요했단다. 그리고 자기를 취재하는 조선족기자에게 기사에 는 전제조건을 내 놓는다. 모종 의미에서 말하면 민족이란 언어의 공동체다.  공동한 언어문자는 그 민족의 얼이 살아 숨쉬는 기본조건으로 그 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의 발전계승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공구이다. 과거 날에 청나라를 세운 만족은 본민족의 언어를 쓰지 않은 데서 만어가 소멸되여 지금 중국전역에 만어를 아는 만족이 겨우 10여 명밖에 없다는 조사가 있었다.  지금은 글로벌(세계화)시대다. 우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의 우수성과 자주성을 고수해야 한다. 자기 민족의 말과 글조차 모르고 어찌 민족군체며 민족자질이며를  운운할수 있겠는가!  우리의 말과 글은 우리의 선조들이 물려준 문화유산으로서 우리 민족의 밑천이다. 글로벌시대에 이 우리를 도와 사섰다. 유네스코(국제련합교육과학문화기구)의 통계에 따르면2005년도에 벌써 세계적으로 7200만명이 조선어를 배우고 중국의 150개 대학, 세계 650개 대학에서 조선어 교육을 실시하고있다고 밝혔다.  일전에 도문시신화가 신흥사회구역사무실을 찾았더니 조선족을 접대하는 창구가 따로 있는가 하면 한족간부들이 조선글을 배우기위한 흑판이 걸려있고 조선어학습시간표까지 있어 너무도 기분이 좋다.  필자는 다가 오는 을 마중하며 이나 들이 조선말과 조선글을 배우는 붐을 이르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맹퇴치는 빠르면 빠를수록 자기에게 유익하니 말이다.  
142    《공무원이 멋이 없다》에 대해 댓글:  조회:5261  추천:3  2014-04-14
필자는 《공무원이 멋이 없다》는 최근의 화제에 비춰 1990년 심수개방 10주년 때 심수시 정부판공실 주임이 하던 얘기가 떠오른다. 《사람들의 가치관념이 많이 바뀌였습니다.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며 공부를 잘하라고 합니다. 지금 심수서 교통경찰을 모집하려면 신청하는 사람이 없어서 정말 힘듭니다》. 그때 우리는 누가 정부기관에 들어가면 큰 벼슬을 한것처럼 부러워했는데 《공부를 못하면 정부기관에 간다》니 무슨 뜻인지를 잘 몰랐다. 24년이 지난 오늘에야 비로서 그 말이 《공부를 잘해야만 자기의 능력으로 생계를 개척할수 있고 아니면 앉아서 주는 돈이나 받아 써야 한다》는 뜻임을 대략 알게 되였다. 필자는 당중앙 《8항규정》,《4가지 기풍》실시 이후 특히 설명절을 계기로 화제에 오른 《공무원이 멋이 없다》를 이런 세가지 원인으로 분석해 본다. 첫째는 젊은 공무원들의 로임이 적은 것, 둘째는 공무원기강확립과 반부패강화로 숨겨진 부가수입(공짜, 뢰물)이 없어진 것, 셋째는 공무원사업작풍과 조직규률이 째워진것이다. 올해 공무원시험응시자가 줄어든것 역시 《공무원이 멋이 없다》를 말해준다. 자료에 따르면 중국공무원시험의 경쟁률은 1994년의 9 :1 로부터 근년의 1000 : 1 까지 치솟은 추세였는데 올해의 공무뭔시험에서 북경이 1만 7000명 줄고 절강성이 30%, 천진시가 5000명이 줄어 공무원시험응시자가 4년만에 처음 줄어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무원이 되려는것은 공무원의 밥통이 철밥통, 황금밥통이라는것, 거기에 경기불안정과 미래불투명으로 모험과 도전보다는 안정성이 있는 직업이기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 된다면 나라가 경쟁력을 잃고 정체부진하게 된다. 몇해전 희랍을 비롯한 유럽국가들의 경제위기의 원인이 바로 방대한 공무원대오와 게을러진 공무원탓이였다는 분석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공무원이 되려고 애쓰는 나라는 비전이 없다. 편안하다는것이 자랑이 아니다》고 말하는 한국의 동화그림작가 강우현은 적자경영이던 남이섬을 도맡고 5년만에 남이섬을 한국의 《환상의 나라》, 세계의《동화의 나라》로 부상시켜 유명 CEO와 한국의 《유태인》으로 불린다. 강우현사장은 《마음상상》경영으로 남이섬의 원래의 55세 퇴직년령을 페지하고 《80종신직원제》(80세가 넘으면 일을 안해도 무조건 80만원 월급을 받는 종신직원제)를 실시하여 회사의 분위기를 살리고 직원들의 열성을 끓게 하였다. 지난 1월 재한 중국교민협회총회 한성호 총회장을 인터뷰할 때 한총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듣자니 중국서 공무원들이 매우 긴장하게 일을 한다는데 이는 아주 잘 된것이다. 공무원들이 긴장하게 사업을 하면 나라가 강하게 발전하지 않을수 없다.》 길림신문 4월 14일자  
141    “문화혁명”도 기념비를 세우자 댓글:  조회:7596  추천:31  2014-03-26
필자는 “중국혁명”하면 신해혁명, 토지혁명, 문화혁명을 떠올린다. 그에 따라 “혁명”하면 떠오르는것이 혁명령수와 혁명에서 희생된 선렬(렬사)들이다. 그래서 “신해혁명”하면 중국에서 제일 처음 삼민주의(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기치를 추켜든 혁명의 령수 손중산을 떠올리고 “토지혁명”하면 농민을 땅의 주인으로 만든 새중국의 령수 모택동을 떠 올리며 “문화혁명”하면 무산계급독재하에서 계속혁명을 한다는 미명하에 억울한 루명을 쓰고 희생된 로간부, 지식분자, “현행반혁명분자”,”계급이색”분자를 떠올리게 된다. 혁명이 끝나면 규례적으로 그 혁명을 기리하기 위한 혁명기념비(혁명의 령수, 혁명렬사)를 세우기 마련이다. 그래서 중국에 손중산, 모택동 기념관(릉원),동상(석상)이나 수많은 “혁명렬사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런데 필자는 지금까지 중국의 혁명과 건설을 기로에로 몰아넣은 “문화혁명 기념비”, 또는 “문화혁명”의 렬사로 추인받은 “혁명렬사기념비”가 없는것으로 알고있다. “문화혁명”에서 그 많은 로간부, 로지식분자, “현행반혁명분자”, “계급이색분자”들이 한을 품고 목숨을 잃었는데도 말이다. “문화혁명”때 당과 국가의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야심가, 음모가들로 목숨을 잃은 많은 로간부, 로혁명가, 무산계급전정하에서 계속혁명한다는 미명하에 목숨을 잃은 “반혁명분자”, “계급이색분자”, 파벌성과 타인위락(打人爲樂)을 일삼은 미쳐 날뛴 놈들에게 목숨을 잃은, 원을 품고 타살, 자살한 무고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필자의 백부도 “조선특무”라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미친놈들한테 맞아서 당일에 원을 품고 세상을 떴다. 필자는 “문화혁명”때 가장 억울하게 희생된 “현행반혁명분자”는 그래도 장지신(張志新)이라고 생각된다.  장지신(1930-1975, 한족, 당원)의 아버지(张玉藻)는 신해혁명에 참가하였으며 장지신은 조선전쟁이 폭발하자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하여 부대의 급번역(急飜譯)수요로 중국인민대학에 보송(保送)되여 로어를 전공, 1955년에 입당, 료녕성당위선전부에서 선전간사로 사업하다가1968년 8월에 모택동을 비평하고 림표를 적발하고 류소기와 로간부들의 억울한 원한을 곁든 것으로 “4인무리”들의 눈에 걸려 1969년 9월 24일에 “현행반혁명분자”로투옥되여 7년간 비인간적인 고문 받다가 사형, 사형할때 그가 군중들 앞에서 “반혁명구호”를 부를까봐 후두를 잘리우고 잔혹하게 사형당했다. 1979년 3월 1일 료녕성중급인민법원에서는 장지신을 무죄로 선포하고 그의 모든 루명을 벗겨주고 3월 31일 료녕성당위에서는 장지신을 평판하는 대회를 열고 그를 혁명렬사로 추인했다. “… 기념비”란 그 뜻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않고 후대들의 마음에 간직하기 위하여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중국을 망친 “문화혁명”을 중국혁명력사의 반면교재로, 장지신처럼 억울하게 희생된 “문화혁명렬사”들을 정면교재로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문화혁명기념비”가 아니면 장지신기념비나 장시신동상을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기활
140    투우절과 연변황소 그리고 도문투우 댓글:  조회:5608  추천:1  2014-03-25
《지금까지 전문투우장이 있는 곳은 길림성치고 도문밖에 없습니다. 투우장도 두만강관광코스인 도문-개산툰길 옆에 있다보니 도문투우는 연변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널리 홍보되여 전국에, 세계에 알려지고있습니다. 성 해당 책임자에 따르면 도문투우는 길림성의 브랜드라고 합니다.》 도문시문화관광봉사중심 조동범주임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도문투우에 대해 열망어린 소개를 들려주었다. 2006년 10월 3일에 시작된 연변투우민속대회는 8년간 꾸준히 견지되여오면서 질적인 제고를 가져와 인제는 《연변투우절》을 내올만큼 기틀을 잡았다. 2007년 7월 제1회두만강문화관광 《분복컵》투우대회(연변제2회민속투우대회)가 열렸고 그 이듬해는 안도현에서 《금사백춘생컵》투우대회(동북3성의 소들이 참전)가, 잇달아 《연변황소명명 및 제 1차 룡정황소투우절》, 중국조선족민속투우절, 《화룡 건현 100돐 제1회 연변황소선발대회》 《연변의 여름》두만강문화관광절투우대회가 연변에서 선후로 11차 조직되였다. 그사이 도문시에서 7차나 투우대회를 성공적으로 조직하였는데 인지도가 높아져 매차의 투우절때마다 취재진만도 수십명씩 모여왔다. 도문투우가 연변에서 인기종목으로 인정받게 된것은 해당 부문의 조직력이 우선 구비된 때문이라고 볼수 있다. 더욱 중요한 원인은 《도문의 황소질이 전 성의 앞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라고 도문시축목국 리위문(李伟文)부국장이 말한다.그는 도문투우대회를 주도해온 장본인의 한사람이였다. 지금 연변의 소사양호들이나 전문가들은 연변황소를 화제에 올리면 《연변황소는 그래도 장안진!》이라고 단언한다. 여기서 연변황소는 75% 연변소혈통에 25% 외국산 고기소(肉牛)혈통으로 개량한 소를 말한다. 도문시 장안진은 연변소개량을 시작한지 이미 30여년의 력사를 갖고있다. 장안진의 소사양호들은 황소개량에 대한 인식과 자각성이 대단히 높다. 하기에 장안진의 소는 전 주 앞자리를 차지한다. 암소선발(選美母牛)이나 투우조직에서 장안소들이 거의 모든 상들을  싹쓸이를 해간다. 첫 투우대회에는 외지 소들이 60여마리나 참가하였었는데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다. 몇년간의 투우대회를 치르면서 장안진의 소 값이 상당히 올랐다. 1년에 마리당 소값이 2000원이상 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장안진의 소사양호들은 《 한국 가서 고생스럽게 돈벌이를 하기보다 제집에서 소 20마리를 기르는것이 낫다.》고 말한다. 장안진 소사양호들의 수입이 그만큼 짭짤하다는 표현이라 하겠다. 몇년전에 연변황소가 아닌 기타 잡종 소들도 도문투우대회에 참가하였는데 흰소, 검은소, 얼룩소들이 모두 장안소들한테 혼나고나서 지금은 감히 참가조차 못한다고 한다. 도문시는 재력이 긴장한 상황에서도 지난해 60여만원을 투자해 성내의 첫 전문투우장을 건설했다. 아직은 시설이 미숙하지만 앞으로는 투우장시설을 완미하게 보완하고 해내외의 관광객을 대상하여 경상적으로 도문투우대회를 조직하면서 상규관광상품으로 개발, 발전시킬 예정이다. 또한 투우, 관광, 교역이 접목된 도문시의 브랜드로, 길림성의 명품 브랜드로 확고히 자리를 잡아가는것이 도문투우의 전망으로 되고있다.  길림신문 3월 24일자
139    "기녀추도식" 단상 댓글:  조회:7193  추천:16  2014-03-18
  이는 우리나라 감숙성의 한 농촌소학교에서 발생한 일이다 빈곤지역인 이 농촌소학교의 시설은 헐망하기로 말이 아니였다. 어느 날 바람이 불어쳐 학교시설이 망가진데서 교장이 현교육국국장을 찾아가 자금지원을 요구하니 국장이 하는 말이 그 학교의 모 녀교원(21살, 민반교원)을 보내란다.  주변서 미녀로 불리는 이 처녀는 고중을 졸업한후 다른 녀자애들처럼 남방으로 돈벌를 떠난것이 아니라 빈곤농촌의 소학생교육을 위해 무상으로 민반교원을 하다가 시험에 합격되여 정식민반교원으로 초빙된 마음 착한 처녀다. 교장의 말에 그녀는 학교를 위해 두려운 마음을 앞세우고 처음으로 현성에 가서 교장이 시키는대로 하였다.    미녀에  미친 교육국장은 대뜸 성욕을 채운 뒤 그녀의 몸값으로 학교에 얼마간의 자금을 하달하였다.   한번이 있으면 두번이 있기가 마련이다. 국장은 그 교원을 자기의 성욕을 채우는 로 학교에 야금씩 돈을 주었다. 그녀는 모든 수입을 그대로 흑판, 책걸상 등 학교시설개선에 돌려졌다. 그녀는 새학교를 지으려는 꿈을 품고 계속하여  외지서 유권자(유전자)들의 첩(二奶)이 되여 자금을 모으다가 나중에 3명 외국인들의 성폭행으로 목숨을 잃었다. 녀교원이 죽은 후 교장은 학교에서 계양한 국기까지 절반을 내리우고 그 교원의 추도식을 열고 추도식에서는 그 녀의 일기를 랑독하였다.  모든 학생과 학부모들은 빈곤학교운영을 위해 생명을 바친 그 녀를 그리며 슬픔의 눈물을 그칠줄 몰랐다… 실로 눈물이 없이는 읽을수 없는 기사였다. 필자는 을 화제로 나름대로 교장, 녀교원, 교육국국장을 평한다. 수선 학교를 위해 상급에 찾아 다니며 애걸복걸한 순결한 농촌소학교 교장이 을 조직하고 대담하게 녀교원의 일기를 랑독한 것이  부패에 대한 과감한 도전으로 그 교장에게 기공표창(記功表彰)을 하고 싶다 다음 학교운영을 위해 보귀한 정조와 목숨까지 바친 녀교원을 기리기 위해 학교에서 추모를 위한 기념물이라도 세웠으면 한다. 기념물을 세운다면 그것이 반부패의 산교육장으로 될것이니 말이다.  돈을 버는 것은 기술이고(등소평의 검은고양이 흰고양이론) 돈을 쓰는 것은 예술이라고 한다. 100원짜리 돈에는 몸으로 번것과 머리로 번것이 따로 찍혀있지 않다. 는 자기 몸으로 번 돈을 모두 실학학생을 구하고 희망학교를 만구하는데  바쳤으니 그녀가 쓴 돈은 예술의 돈이며 향기나는 돈이라 하겠다.   그 다음 인민이 준 권력과 국가돈으로 자기의 야욕(성욕)을 채운 짐승보다도 못한 그 교육국국장은 그 학교에서 다가 만인공노하는 공소대회를 열고 법적판결을 받게해야 한다.  필자는 4년전에  쓴 글(렴정- 영원한 주제)의 한 단락으로 이 글을 맺는다. …어느 술상에서 부패를 화제로  다루던 얘기이다. -   -  - 반부패력량의 근본은 민중에 있다. 지난해 주규률검사위원회는 도합 572건의 부패고발사건을 접수, 327건을 조사처리하였다.      
138    어머님 생각...자애의 손 사랑의 눈 자비의 마음 댓글:  조회:6775  추천:6  2014-02-28
어머니 생각 오기활 올해의 첫눈은 11월 17일에 내린 30년 만에 처음 내린 대설이란다.8일 아침, 이날도 필자는 장애자 최원네를 돕느라고 도문원샘목욕탕의 눈치기를 하는데 핸드폰소리가 울렸다.                                누님의 말이 어제(음력 10월 15일)는 엄마의 제사날인데 엄마가가 세상을 뜬 후 65년간 해마다 제사날에 눈이 내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님이 한국에 갔을 때 한국사람들이 중국에 언제 눈이 내리는가는 물음에 고 장담을 했단다. (나이와 동반하는 설음일가? ) 나는 언제부턴가 생각에 종종 눈물을 흘리군 한다.이 날도 마찬가지였다누님의 전화를 받고 나서 방금까지 부담으로만 느껴지던 눈마당이 볼수록 어머니생각으로 설레이는 마음을 달랠수 없었다. (어머니가 해마다 어김없이 눈이불을 하사하다니?) 이런 생각으로 더는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아서 눈치기를 접고 누님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누님의 얼굴도 그림자가 비꼈다. 6살에 어머니를 잃은 셋째누님(71)이 하는 얘기가 기껏해서 이뿐이다.  (어머님이 해마다 자식들에게 눈꽃을 하사 하는 것을 보아 꼭 무슨 뜻이 있겠는데…)이런 생각에서 필자는 이번을 기회로 어머니에 대한 추억의 글을 쓰겠다고 작심했다. 큰 누님(계옥,79)이 치매에 걸렸으니 찾을 수 없고 왕청에 있는 둘째누님(순옥,76)한테 전화를 걸어 어머니에 대한 남는 기억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둘째누님 역시 어머니의 제사날엔 해마다 눈이 내린다며 하는 얘기다. (모두 3녀 3남을 낳았는데 우로 2남이 요절) 누님에 따르면 엄마가 계실 때 금자는 너무 울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돼지굴에 들어갔고(그 때 아이가 울면 돼지굴에 넣는다고 위협하며 달랬다) 오래비(기활)는 자주 앓다 보니 생진 후에도 혼자서 앉지 못하여 이불이나 포대기를 둘러놓아야 앉았다는것이다. 그런데 별일이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부터 울음보였다는 금자의 병과 오래비의 병이 기적같이 떨어 졌다는 것이다. 아마도 어머가 저세상으로 가면서 자식들의 병을 함께 챙겨갔는지 말이다.  엄마는 마음이 너그럽기로 한량이 없단다.  혹시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언쟁을 하면 일에 지친 몸이라 싸울맥이 없으니 하며 언쟁을 피했단다. 그때 우리 집은 아버지가 병으로 일을 못하고 엄마가 혼자서 일하다 보니 생활이 궁핍하기로 말이 아니였었다. 둘째 누님의 기억에 여름에 엄마가 신을 신고 다니는 것을 못 봤다고 한다. 한번은 약을 다리려고 동네에서 풍로(風爐)를 빌려 왔는데 땔 것이 없어서 어머니가 마른 소똥을 주어서 풍로에 때더란다. 그 때 우리 집은 로동력이 없다 보니 늘 친척들이 동원해서 일손을 도왔다고 하는데 어머니가 세상을 뜨던 해(1949년)에도 동네서 제일 마지막으로 탈곡을 끝내고 그날에 어머니가 촉한(땀이 난후 불시에 찬바람을 맞으면 걸리는 병)에 걸려 일주일만에 32살 나이에 하늘나라에 갔단다. 어머니는 림종전에 혀가 움직이지 않아서 겨우 겨우 이런 말을 하였단다. 물남(곡수)에서 시아버님이 이 둘째며느리를 오라고 부른다.(그때 할아버지는 이미 타계했음) 큰형님(필자의 백모)이 저 도깝들을 거둘라니 얼마나 고생 하겠습둥… 기활이를 한번 더 보고 가겠다!(그 날 마을에서 오민준의 참군환송을 하느라 누님들이 필자를 데리고 갔다고 함)    둘째누님은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지금까지 한번도 꿈에 나타나지 않더라며 목이 메여 말을 있지 못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철없는 누님들은 늘 아버지와 라고 투정을 하면 아버지도 라며 긴 한숨을 쉬더란다. 그런데 아버지의 운명도 기구하여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8년 만에 이외의 사고로 40살 나이에 세상을 하직할 줄이야!나는 지금까지 엄마를 본 기억이 없으니 를 불러본 기억은 더욱 없다. 아버지가 한동안 계모를 맞았을 때 나는 늘 계모를 라고 불러서 아버지가 그저 라고 부르라고 시키던 일이 기억된다. 나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지 않기로 장모님을 이라고 불러 장인, 장모의 오해까지 받았다.그런데 어머니는 이 아들과 정녕 그 무슨 인연이 있는듯 하였다. 1973년 내가 연변농학원에서 입당할 때다.내가 입당지원서를 쓸 때 그만 어머니 이름을 몰라서(그때 집안의 친척들도 몰랐음) 한창동안 망서리다가 (간대로 조직에서 몇 십년전에 사망한 사람의 이름을 조사하겠는가?)는 생각으로 어머니 이름을 이라고 작명했다.  그후 1976년이라고 기억되는데 내가 사업차로 훈춘에 갔다가 훈춘에 계신다는 어머니의 언니를 끝내 찾아서 처음 큰이모 한테서 어머니 얘기를 나누었다. 큰이모가 하는 말이 하루는 동네놀이를 갔다가 집으로 오는데 퇴비장부근에서 애기가 우는 소리가 나서 가보니 두 다리를 바둥거리며 우는 아기가 바로 너의 에미여서 안고 들어 왔단다. 알고 보니 그때 집이 하도 구차하여서 남들이 아기를 주어가라고 포대기에 잘 싸서 따뜻한 재무지우에 내놓은 것을 큰딸이 보고서 안아 왔다는 것이다.    큰이모는 고 하였다.그때 나는 무슨 생각에서 어머니의 이름을 물었더니 전정숙이라고 해서 나는 귀를 의심하였다. 내가 엄마 이름을 작명했다는 과정을 들은 큰이모도 세상에서 이렇게도 희한한 일이 있는가 하며 아마도 엄마가 하늘나라에서 너에게 알려준 것 같단다. 나는 노래부르기를 비교적 즐긴다. 그것도 술상에서 한 세대 한 세대를 이어 가면서 당년에 류행되던 노래를 말이다. 그런데 나는 지난 50년대에 누님들한테서 배웠던 이 노래만은 지금도 끝까지 못 부른다. 아무리 끝까지 부르려고 해도 눈물이 앞서기에 부를수가 없었다. 노래가사다        1 쓸쓸한 가을바람 불어 오면은 사랑하는 우리 엄마 보고 싶어요. 엄마 죽어 나비 되고 내가 죽으면 꽃이 되니 찾아 와서 안아 주세요.             2 동생아 울지 말고 어서 자거라 네가 울면 내 눈에서 피가 흐른다 오늘 저녁 우리 함께 꿈나라에서 사랑하는 엄마 품에 안겨 보자야 원래 2절 가사의 마지막 두 줄은 엄마품에 안겨보려는 생각에서 내가 고쳤다.어머니는 철부지 자식들만 남겨놓고 가을바람의 가랑잎마냥 홀로서 저세상으로 떠나간 분이다. 그래서 필자는 불효하기로 어머니에 대한 면목이나 추억이 전부다. 부모없는 자식이라는 세상살이의 비난과 어설픈 동정에 유년시절부터 익숙해 진 나, 비난이나 동정이 부모에 대한 갈증을 가슴에서 몰아 낸 나다.그래서 어머니란 의미를 알수 없었고 모르는척하기도 했다.  어머니의 모성애는 나는 안해의 자식사랑에서 감수할수 있었다. 어느 책에서 읽은 명언이다. 아버지의 책임을 늦게나마 알게 된 나는 그 후부터 언젠가는 봄날의 햇살처럼 따사로운 모성애에 대한 글을 쓰려고 잡도리를 하였다. 바로 이런 준비로 망설이던 나날에 셋째누님이 를 듣고서 마음을 다잡고 서투나마 이렇게 필을 들었다.  어머니의 모성애를 좀처럼 모르는 나는 내 딸 염희가 어머니 60회갑생일에 올린 로 이 글을 마감 한다. 둘도 없는 나의 어머님과 세상의 모든 어머님들에게: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신은 인간에게 어머니의 가슴을 만들었습니다. 어머니의 손은 자애의 손이요 어머니의 눈은 사랑의 눈이며 어머니의 마음은 자비의 마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요? 정답게 자녀를 바라보고는 어머니의 맑은 눈동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눈물겨운 광경이 무엇인가요? 일편단심으로 자녀를 위하여 헌신하는 어머니의 거룩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몸에서 태여났습니다. 어머니의 육체는 우리형제 존재의 고향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최초로 만난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최초로 얻은 스승님은 어머니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최초로 입을 맞춘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우리가 이세상에서 가장 겁나고 가장 기쁘고 감격했을 때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어머니의 무릎은 우리의 학교요, 어머니의 가슴은 우리의 교실이며 어머니의 얼굴은 우리의 스승이고 어머니의 입은 우리의 교과서였습니다.  율곡의 뛰여난 인격의 배후에는 신사임당이 있었고 맹자의 름름한 정신 뒤에는 맹모의 가르침이 있었고 에디손의 뒤에는 어머니의 격려가 있었답니다. 위인을 만드는 것은 어머니입니다. 녀성은 약하나 모성은 강합니다. 녀자는 어머니가 될 때 자녀의 생명에 대한 강한 책임을 느끼고 자식을 위한 한량 없는 사랑이 생기고 자녀를 위한 씩씩한 용기가 솟구치며 아들 딸을 위한 뜨거운 헌신이 발동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머니에게 무엇을 배울가요?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희생하는 것을 배우고 용서하는 것을 배우고 인내하는 것을 배우고 수고하는 것을 배우고 기도하는 것을 배우고 감사하는 것을 배운답니다.  인간이 가지는 낱말 중에서 가장 위대한 말은 어머니라는 말이랍니다. 이 말 속에는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아름다운 것, 착한 것, 참된 것, 고귀한 것 모두랍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습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사람이 되였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비춰주는 태양이요 우리를 지켜주는 마음속 기둥이며 우리를 감싸주는 안식처랍니다. 이 딸은 목청껏 불러봅니다 존경하는 어머니란 사랑노래를, 사랑합니다 어머니, 존경합니다 우리의 모든 어머니들을. 존경하는 어머니, 부디 건강 장수하세요! 어머니의 사랑하는 딸 오염희 올림,  2011년 음력 5월 9 일 … … … 감은절인 오늘 이 밤에 필자는 천국의 기별인 어머니가 하사하는 눈꽃의 참뜻이 뭔가를 나름대로 풀이하며 이 밤을 지새운다. 한편으로 이 시각에 재더미에 버려졌던 나의 "예비엄마"를 재생시킨 큰 이모님께 생전에 효도를 못한 이 철부지를 후회와 반성의 불도가니속에 처넣는 마음이랄가.  2013년 11월 25일
137    《북방의 흑마》 만족을 말한다 댓글:  조회:5980  추천:2  2014-02-20
-나를 고발하는 종업원이 한명도 없다는것에 만족합니다! 환갑생일 답사 병오년 청마해의 첫날인 음력설날은 연변의 간판기업가의 한사람인 조광훈씨(말띠)의 환갑생일날이다. 조광훈은 1986년부터 지금까지 근 30년간 도문시민족비닐공장 공장장, 도문민족비닐집단공사 총경리, 연변제비필름유한회사 총경리, 미국독자기업인 연변범서방프라스틱유한회사 총경리를 지내왔다. 그는 60돐 환갑생일을 맞으며 회사원들에게는 《절대 못 온다》고, 친구와 사회분들에게도 《생일을 안 쇤다》고 길목을 막아버렸다. 친척들 위주로 단촐하게 모여앉은 자리에 《불청객》들도 찾아와 함께 어울리며 진지한 덕담들을 주고받았다. 하객들의 진심 어린 축사에 조광훈은 답사를 올렸다. 《나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낳아 주고 사랑해준 부모님과 친척들, 나를 아껴주고 믿어준 회사의 종업원들, 나를 믿고 부축해준 사회의 여러분들이 있었기때문입니다. 내가 공장장직에 있으면서 제일 감동되고 잊지 못할 일이라면 지난 90년대에 도문시민족비닐공장종업원들이 공장벽에다 〈공장장의 마음에 종업원이 있으니 종업원의 마음에 공장장이 있다》는 문구를 내붙인 사연입니다. 지금까지 해당 부문을 찾아다니며 나를 고발(신소)하는 종업원들이 한명도 없다는것에 저는 만족할따름입니다. 》 필자는 30년간 기자사업을 하면서 28년간 줄곧 한눈으로 조광훈과 그의 기업을 지켜보았다. 그의 생일에는 두번 참가하였는데 환갑생일답사에서 한 그 의미심장한 말의 뜻을 깊이 음미해보게 되였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종업원들이 자기들 공장장을 고발(신소)하게 되는가? 필자의 분석이다. 종업원들이 자기네 공장장을 고발하는 대체적인 원인은 공장도급제를 실시한후 일부 공장장들이 단기행위로 자기 염낭을 챙기는데서 그리고 독선을 하는데서, 종업원들의 로임을 제때에 발급하지 않거나 종업원들의 합법적 권익을 보장하지 않기때문이 아닐가. 그러나 조광훈은 달랐다. 배경자료로 16년전 첫 생일에 참가하고 쓴 기사 《뜻 깊은 생일날》을 다시 펼쳐들었다. 16년전의 기록 1월 28일, 음력설날은 도문민족비닐집단공사 조광훈총경리의 43돐 생일이다.   아침 7시30분, 생일축하술이라도 함께 나누려는 생각으로 그에게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해마다 설날이면 그가 분망히 보내는줄 알고 처가편에서 밤 12시에 《대표》4명을 보내 새벽생일을 쇴단다. 오늘은 부모님께 세배를 올린 다음 회사에서 초빙한 로간부들을 방문할것이란다. …설명절에 운전기사를 쉬라고 조경리가 직접 운전을 하였다. 9시15분, 염종운(원 도문시남새국 부국장)네 집에 갔다. 집에는 염종운내외뿐이였는데 새해 첫날 첫손님이 조경리라며 그들내외는 기뻐서 야단이다. 염종운네 뜰에 잘 가꾼 과수나무가 있었다. 조광훈은 이리저리 유심히 살펴보더니《올봄 공장주위에 나무를 심는것을 책임져주십시오. 로간부는 회사의 보배입니다. 식수는 공장미화뿐아니라 후대들에게도 좋은 유산을 물려주는 일이지요.》라고 부탁한다. 이에 염종운은 과수나무품종선택부터 자기가 맡겠다고 자진하였다. 9시 45분, 도문 오공촌에 있는 로간부 려조요네 집으로 가는 길에 도문민족비닐집단공사 멜라민공장을 지나게 되였다. 차에서 내린 조광훈이 공장의 당직실과 공장주위를 돌아본후 공장대문을 나서는데 한 녀성이 그의 뒤를 따라 허리를 굽혀가며 연신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알고보니 이 종업원네는 생활이 곤난하였는데 조광훈은 재무과에 부탁하여 달마다 자기 로임에서 100원씩 떼여 보조해주고있었다. 기실 조광훈은 이 녀성종업원과 그의 남편의 이름조차 모르는 사이였다. 조광훈은 이런 식으로 다른 3명의 빈곤종업원 가정도 정기적으로 돕고있었다. 10시 30분, 김복렬(원 도문시농업위원회 주임, 시장조리)네 집이다. 《지난해 우리 아주버님께 합리화건의 1등상을 기입해준 조총경리께 감사를 올립니다.》김복렬의 제수가 영예증서를 들고 하는 말이다. 《나도 회사의 절반 사원》이라며 김복렬의 안해까지 조언을 하며 나서다보니 간단히 차린 술상이 기업운영계책모임으로 번져졌다. 11시30분, 연변제비필름유한공사 생산직장을 찾은 조광훈은6명 당직종업원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며 말하였다.《설에도 쉬지 못하게 해 죄송합니다.》 《지면피복필름생산설비를 방금 올렸기에 지금 생산을 다그치지 않는다면 공급이 딸리니 방법이 없습니다.》 12시15분, 장안진에 있는 손유리(원 장안진 진장, 진당위서기)네 집이다 술잔을 부어 올리는 손유리의 안해는 3일전 조총경리는 6명의 로간부와 17명의 판매원 그리고 그들 가족을 동부인하여 회사를 참관시킨후 좌담회를 소집하고 기념품까지 발급했다고, 44명 일행과 함께 연길대우호텔에 가서 《평생 처음 그런 대접을 받아보았다.》고 입에 침이 마를새 없이 치하를 하였다. 오후 3시 30분, 연길 철남 권춘자네 집이다. 10년간 한해도 빼놓지 않고 방문을 오는 조광훈의 관심에 권춘자는 감개무량해한다.《1988년 나는 직장책임자였는데 어느 날 기계사고로 오른손을 잃었습니다. 그 후부터 조광훈은 해마다 한두번씩 집까지 찾아와 방문하며 생활을 돌봅니다. 자기의 돈으로 우리 딸 귀옥이를 대학공부까지 시키고 …》 오후 4시 45분, 도문으로 돌아가는 도중 조광훈의 핸드폰이 또 울렸다. 음력설이 생일날인 조광훈은 매년 그렇게 생일을 쇠고있었다. 하객의 축사 조광훈의 60돐 환갑생일에 한 하객이 올린 축사다. 조광훈의 삶의 취지는 《건강하라, 돈을 벌라, 그리고 베풀라》입니다. 조광훈의 드팀없는 인생철학은 《약속은 서로간의 얼굴이고 성실은 서로간의 마음이며 신용은 서로간의 생명이다.》입니다. 조광훈은 바로 이런 삶의 취지와 인생철학으로 자신을 닥달하면서 가정을 경영하고 기업을 경영하며 참된 인간관계를 확립하여왔습니다…근 30년간 조광훈을 지켜보면서 그의 이런 삶의 취지와 인생철학을 배우고있습니다. 조광훈은 1986년 리윤액이 10만원을 맴도는 도문시민족비닐공장 공장장을 떠맡고 6년만인 1990년에 공장을 길림성의 첫《국가경공업부 중점골간기업소》로 부상시켰습니다. 말띠인 그는 용맹과 질주의 기상을 떨쳐 중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다공능제비필름을 생산하여 국가의 여섯가지 공백을 메웠으며 중국프라스틱업종에서 《북방의 흑마)》(北方黑馬)로 자랑스럽게 불렸습니다. 2000년 12월 28일, 조광훈은 자기가 친히 설립한 중한합자도문내쇼날플라스틱유한회사를 떠나면서 회사 총주식의 34%에 달하는, 1,000만원의 개인주식을 1전 한푼 남김없이 전부 회사전체종업원들의 공동주식으로 돌렸습니다. 조광훈은 또 30여명의 불우학생들의 부모로 되여 그들을 떳떳한 대학생으로, 튼튼한 사회일군으로 진출시킨 《대학생부자》이기도 합니다. 부모가 없는 김미영은 6년간이나 조광훈네 집에서 먹고 자면서 공부를 해 대학에 붙었습니다. 미영이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조광훈은 미영이의 창업자금으로 3만원을 저금해준 《대학생아버지》입니다. 조광훈의 참된 삶의 취지와 드팀없는 인생철학으로 하여 그는 길림성청년기업가협회 부회장, 전국소수민족용품생산협회 부회장 등등의 많은 영예를 받아안았고 연변의 공장장원로와 간판기업가로 발돋움하였습니다. 조광훈은 연변에 2700만 딸라 되는 외자를 유치한 공신이기도 합니다.. 조광훈은 또 가정경영을 잘한데서 아들조웅일(趙雄一)을 꼴프영재로 키워 우리 나라 국가골프팀에 첫 조선족선수로 보낸 공신아버지아기도 합니다. 길림신문 2월 19일자
136    생일을 《모난일(母难日)》로 쇠면… 댓글:  조회:5738  추천:4  2014-02-20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되기까지는 이런 배경이 있다. 순서적으로 배렬하면 정인갑교수의 글 《우리 민족의 부조문화를 개조하자》, 감동중국조선족걸출인물 오기철의 생일조사 보고 《전화벨소리가 겁납니다》, 《로인세계》잡지사 김장혁주필의 글 《나의 불효》를 읽고, 거기에 60대 녀성이 《아들이 엄마는 무관하고 밖에서 생일을 잘 쇳다》며 늘어놓는 자랑과 모 공무원의 생일에 어머니가 200원을 내놓더라는 자랑을 듣고, 그리고 중한 수교 전기인물 한성호 (88세)박사가 《내 생일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니 나는 지금까지 한번도 생일을 안 쇳다》는 얘기와 모 외국로무일군이 《기자선생님, 우리 조선족들의 생일쇠기를 개변할수 없습니까?》는 물음을 듣고 바로 필을 들었다. 이상의 글, 노여움, 자랑, 얘기와 물음은 한마디로 부조금이 오가며 해마다 쇠는 생일에 대한 반감이였다 오죽하면 오기철씨가 생일에 청하는 전화벨소리가 겁난다고 했겠는가? 이에 필자는 각자가 자기 생각에 따라 생일은 쇠데 어떻게 하면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문명한 생일을, 우리 민족의 미풍량속발양에 의미가 있는 생일을 쇨것인가를 고안해보았다. 바로 생일을 모난일(母难日)로 어머니를 위문하고 어머니에게 감사를 올리는 생일로, 효도를 바탕으로 부모자식이 자리를 같이하는 행복한 생일로 《모난일》을 쇠는것이다. 생일은 명실공한 《모난일》이다. 지난해 나는 아들이 촬영한 며느리의 출산동영상을 보다가 마음이 저려남을 금할수 없었다.하늘땅이 맞붙는 출산의 산통과 산통에 따른 애처로운 비명과 신음은 남성으로서 도저히 상상할수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지난 1월 손녀 첫돐생일에 제왕절개수술을 포기하고 자연분만을 선택한 장한 며느리에게 손녀의 《모난일》에 특제한 《사랑패》와 금반지로 며느리에 대한 시부모의 사랑을 표했더니 자리를 함께 한 중한명문대학교의 교수들과 많은 하객들로부터 생일에 《모난일》을 쇠는것이 옳(좋)다는 인정을 받았다 생일을 《모난일》로 쇤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로인을 존중하고 애들을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전통과 따사로운 《가풍(家風)》을 세세대대로 전하는데 유조하고 《모난일》에 많은 하객들을 청하지 않기에 남들에게 경제부담을 주지 않을것이다. 그리고 해마다 당신의 생일이면 형제자매가 함께 모여 부모에게 효도하는 다정다감한 가족모임으로 될것이니 당신의 생일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가화만사흥(家和萬事興)》에 보탬이 되고 동네서 부러워하는 가족모임과 남에게 부담이 없는 문명한 생일로 될것이므로 나 좋고 너 좋고 동네 좋은 길일로 될것이 불보듯하다. 물론 어머님이 타계하고 부득불한 사정으로 어머니를 모시지 못할 경우는 별도의 추모와 효도이벤트를 조직하면서 말이다. 길림신문 2월 19일자
135    "한국 정부의 협량"에 한마디를 댓글:  조회:9380  추천:5  2014-02-19
기자의 인생에는 한방이 없다. 기사 하나를 마치면 다른 기사를 또 준비하는것이 기자의 직책이고 기자의 일생이다. 그래서 필자는 지난해 한국을 다녀오고 “동포라고 하면서 왜?”라는 글을 쓴 뒤를 이어 올해는 “왜?”의 답을 찾고저 한 달간의 한국방문기간에 재한조선족들과 대화하고 신문과 문고학습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 와중에 “한겨레” 탐사보도팀장, 사건팀장, “한겨레21” 사회팀장 등을 지낸 안수찬기자 쓴 “뉴스가 지겨운 기자 -내러티브 탑사보도로 세상을 만나다”를 읽게 되였다. 필자는 안수찬기자의 “…수많은 밀입국과 사기피해는 한국정부의 협량에서 비롯된것이다”를 읽고 “왜?”의 답을 찾은듯 마음이 개운하였다. 저자는 “한겨레”탐사보도팀은 “조선족 대이주 100년”취재를 위해 “단행본과 연구론문 등 1500여쪽의 자료를 검토”하는 등 품을 들여 8회에 걸쳐 “조선족 대이주 100년”을 련재하였다며 이렇게 쓰고 있다. -조선족은 일제시기의 수탈을 피해 만주로 건너갔다. 그들은 독립운동의 기반이였다. 1945년 해방 때 그들 대부분은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돌아와도 농사지을 땅이 없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조선족이 홍군에 가담했다. 당시 사망한 이들이 수두룩하여 지금도 동북3성지역 조선족마을에는 혁명렬사기념비가 곳곳에 있다.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들은 북한(조선) 인민군대에 편입되거나 중공군에 징집되여 전쟁에 참여했다. 동족상잔이 비극이라 할 때 그 동족에는 조선족이 포함된다. 1960년대 문화혁명시기 중국공산당은 조선족의 지도급 엘리트들을 대거 숙청했다. 강고한 민족문화의 전통이 빌미가 됐다.1980년대 개혁개방이 시작되자 중국 농민들은 대도시로 몰려가 돈을 벌었다. “농민공”이 등장했다. 중국의 독특한 호구제도 때문에 조선족은 “농민공”이 되는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마침 문호를 개방한 한국은 그들의 유일한 활로였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그 뿌리가 북한(조선)에 있는 조선족의 입국은 불허했다. 조선족 다수의 고향이 북에 있었으므로 그 시절 수많은 밀입국과 사기피해는 한국정부의 협량에서 비롯된것이다. 한국에 들어왔어도 자긍심 높은 조선족들은 한국인의 차별 대우에 마음이 상했다. 이들은 미국과 유럽으로 눈을 돌렸다. 원래 목표와 달리 그곳에서도 한인타운의 최하층 로동을 담당했다 그렇게 아득바득 돈 벌려는것은 자식교육때문이다. 그러나 부모가 고향을 떠나자 가족이 붕괴하고 마을이 사라지고 학교조차 문을 닫았다.…  필자는 저자의 글이 세절면이나 표현상에서 비록 차도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총적으로 조선족의 어제와 오늘을 옳게 반영한 글이며 재한조선족들의 불미한 원인을 “한국정부의 협량”때문이라고 옳게 짚은 글이라 하겠다. 이번 걸음에서 필자가 들은 조선족들의 오가는 화제는 F-4 비자를 따기 위해 거액의 “쓸데 없는 교육비”를 낸다는것, "F-4 취업제한을 철페하라”는 것이였다. 그들은 한국정부에서 2007년에 한국방문취업제 때 제정한 한국어시험 때 응시자의 40%이상이 연변조선족인데도 연변에 시험장을 설치하지 않은데서(전국에 10개) 조선족들이 많은 경비를 팔면서 내지에가 시험을 쳤다는것(시험장배치는 한국정부와는 관계없다고 필자는 생각함), 한국정부에서 H-2 비자를 F-4 비자로 바꿔주면서 거금의 교육비를 받으며 실시하는 “기술교육”과 그 후의 “F-4 취업제한”을 거론하면서 “모든 것이 조선족을 대상한 한국정부의 돈벌이”라며 성토했다. 80여만원의 거금을 내고 육아도우미자격증을 딴 정씨(56세)녀성과 58세 나이에 75만원의 거금을 팔고 자격증을 따기 위한 시험공부를 하는 강씨남성은 여러모로 “한국정부의 돈벌이”를 렬거했다. “그래도 한국덕분에 돈은 벌었다”고 하면서도 “한국정부에서 조선족을 대상해 돈벌이를 한다”는 재한조선족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이에 동참해 한국매체에 “일한게 죄인가요?”, “새해 F-4취업제한 철페해야”등 한국의 언론이 뒤따르는것이 그래도 다행이였다. 한중미래재단 정인갑리사장의 말이다. “동포들이 기술력에 따르는 대우를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 한국의 비자정책때문이다.” “비자변경을 미끼로 하는 동포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한국체류의 합법성을 위한 비자장사다.”
134    중-로-한 륙해 3국 려행 인상기 댓글:  조회:2833  추천:1  2014-02-17
지난해 12월 23일 필자는 《뉴블루오션》호배를 타고 한국에 다녀왔다. 이번 출국길을 바다길로 선택한것은 륙해3국려행길의 10년간의 변화를 알아보기 위함이였다. /오기활  《황금물길》 필자는 중한수교 10주년을 맞으며 연변경제문화인고찰단 일원으로 당년의 《동춘호》 배를 타고 한국에 다녀왔다. 그러니까 이 물길을 리용하기는 이번이 두번째다. 우리들에게는 《바다길》로 불리는 이 항로는 환동해권의 활성화를 위해 강택민, 김대중, 예리친 등 5개 나라 수뇌자들이 합의하여 근 10년 간의 노력끝에 2000년 4월 28일에 개통하였다.  중-로-한 륙해3국려행길에서 《뉴불루오션》호를 타고 기념사진을 남긴 오기활기자. 중, 로, 한, 조선, 일본 등 동북아 여러 나라의 인적, 물적 교류를 활성화시키는데서 중대한 역할을 하는 바다항로는 하나의 《비단길》이기도 하다. 이 항선은 표 한장으로 륙해3국을 오가는 지구상의 유일한 통로며 길림성의 유일한 바다무역항선이다. 당년에 길림성 홍호성장은 《동춘항운은 길림성의 관문이고 생명선》이라며 이 항선의 중요성에 력점을 찍었다.  2010년 10월 동춘항운이 부득이한 원인으로 운행을 중단한후 2012년 1월 한국 대아그룹에서 항선주식의 90%를 스웨덴스제나그룹에 양도하였다. 그후 스테나대아항운주식유한회사가 설립되였고 작년 3월 20일 훈춘통상구에서 《뉴불루오션》호 개항식을 열어 《황금물길》의 새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소개에 따르면 지난해말까지 《뉴불루오션》호는 52차의 항행으로 연인수로 7399명의 려객을 운송하고(입경1880명, 출경 5513명) 여러 류형의 표준컨터이너 731개(수입 283개, 수출 448개)를 운송하였다. 12월 23일 우리 일행 11명은 연변춘천국제려행사에서 배치한 뻐스를 타고 아침 7시25분 연길에서 출발하였다. 뻐스운전기사가 올 여름부터 려행사의 대형뻐스가 직접 로씨야 자르비노항까지 가게 될것이라고 소개하였다. 우리는 9시30분에 장령자 훈춘통상구에 도착하였다. 휴대했던 짐들을 부치고(물품을 한국 속초항에서 찾는다고 함) 출경수속을 끝낸 뒤 9시 50분에 로씨야에서 배치한 44인승 뻐스에 올랐다. 누군가 이 뻐스는 한국 삼성회사에서 통근용으로 사용하던 중고뻐스라고 했다. 훈춘에서 20 명이 동행하다보니 우리 일행은 31명으로 늘어났다. 훈춘통상구로부터 자르비노항까지의 거리는 뻐스로 한시간 푼히 걸리는데 로씨야경내에서 세번이나 검사를 하다보니 시간이 퍼그나 지연되였다. 로씨야측의 검사는 10년전이나 지금이나 꼭 마찬가지였다. 달리는 뻐스창문으로 시야에 안겨드는 넓디 넓은 메마른 초원과 느슨한 평지에 삼대같이 빼곡이 들어선 겨울나무들이 가관이였다.  자루비노항에서 만난 조선족부부 북경시간으로 12시경에 자르비노항구에 도착, 첫눈에 안겨오는것이 일본에서 수입했다는 수백대의 승용차무리였다. 동행자들의 오가는 말이 이 승용차들을 며칠안에 모스크바와 내지로 가져간다는것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려객들의 발길을 엄격히 통제하는 이 통상구의 부지와 통상구의 지상물(地上物)들이 로씨야의 어느 한 고위급간부의 사유재산이란다.     자르비노통상구휴계실 첫머리에 커피, 음료, 라면, 삶은 닭알 등 먹거리장사를 하는 남녀가 있었다. 알고보니 그들은 훈춘에서 온 조선족 강학철씨(50살)부부였다. 강씨는 로씨야에 온지 30년이 된다고 했다. 그는 로씨야의 고려인녀성과 결혼하고 2남 1녀를 두었는데 두자식은 모스크바대학까지 졸업하고 내지에서 근무한다고 한다.   그는 가깝게 지내던 로씨야의 한 고위간부가 《돈벌이가 될것》이라며 소개하기에 지난해 여름부터 장사를 시작했단다. 지금은 하루 려객이 30-50명 좌우지만 지난 가을 성수기에는 하루에 700여명이나 되였다고 하면서 하는 일이 전망이 있다고  기뻐하였다. 그가 경영하는 먹거리는 중국산 삶은 사발라면 하나에 25원(우리 고장은 3원 50전), 삶은 닭알 한개에 5원, 커피 한잔에 5원이였다. 상대적으로 커피값이 쌌다.  《나밖에 없다》는 《뉴불루오션》의 호기   《뉴불루오션》호는 10년전의 《동춘》호와 대비가 안될 정도로 웅장하고 호화로웠다.《동춘》호는 12000톤급 카페리선박으로 승객정원이 467명, 화물적재능력이 136TEU, 선내의 승무원과 선원이 43명(중국인 23명, 연변적 14명)이였다. 그외 160명(한국인 130, 중국인30명)의 대리운반공(代工)들이 훈춘- 속초를 오가며 소무역을 하였다. 《뉴불루호션》이란  《나밖에 없다》는 뜻으로 통한다고 한다. 《뉴불루오션》호의 정태화(鄭泰華) 총지배인이 《뉴불루오션》호를 소개했다. 《뉴불루오션》호는 길이 160메터, 폭 25메터, 총 톤수 16.435톤, 승객정원 750명, 적재능력 182TEU(컨터이너), 속초-훈춘항행시간 17시간이란다. 《뉴불루오션》호에 상선한 승무원과 선원이 49명(한국인이 24명, 필리핀인이 25명), 상인들이 많으면 관광승객이 적어지는 원인으로 대리운반은 불허란다.정태화총지배인은 《뉴불루오션》호는 승무원들이 다감하고 친절하며 배표값이 저렴하다고 한다. 특히 학생들의 방학간 수학려행에 제격이라며 선박의 객실과 부대시설을 소개했다. 《뉴불루오션》호의 키를 잡은 정희섭선장. 《뉴불루오션》호는 넓은 창으로 보이는 바다의 랑만적인 풍경과 편안함이 함께 하는 격조있는 휴식의 공간(스위트 룸), 가족이 함께하는 여유로움과 즐거움을 누릴수 있는 세련된 공간(슈페리어 룸), 소중한 가족, 친구들이 함께 모여 좋은 추억을 만들어가는 행복한 공간(패밀리 룸), 부담없는 가격으로 바다의 넉넉함과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공간(스탠다드 룸), 출출할 때 간식거리나 필요한 생필품을 구입할수 있는 편의점, 어린이들이 즐겁고 자유롭게 즐길수 있는 예쁘고 아기자기한 어린이 놀이방, 저렴한 가격으로 소중한분들의 선물을 구입할수 있는 면세점, 선상에서 함께 부르며 모두에게 특별한 추억을 남길수 있는 노래방, 오션 바 등 랑만의 려행을 위한 호화롭고 편리한 시설들이 구전하였다. 《뉴불루오션》호는《일류의 시설로 일류의 봉사와 일류의 안전을 위하여》란 리념으로 항행하고있으며 50년의 상선경력을 갖고있는 정희섭(鄭喜燮)선장이 친히 키를 잡으면서 고객들의 안전을 보호하고 멀리까지 막아주고있다고 한다.   24일 저녁 우리는 성탄절을 맞는 기분에 잠겨 《뉴불루오션》호 로비에 아름답게 단장된 성탄수를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찍고 커피숍에서 망망한 밤바다를 바라보며 끼리끼리 여유로운 이야기꽃을 피웠다. 와중에 필자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로비에 《길림신문》이 진렬되여있어 길림신문기자로서의 자부감으로 동행자들 앞에서 어깨가 으쓱해졌다. 25일 아침 6시(중국시간)에 식사방송소리에 깨였더니 때마침 하늘과 바다가 일출로  온통 진붉게 물들어있었다. 레스토랑에서 맛좋은 뷔페로 아침을 챙겼다. 물론 반주술도 빼놓지 않았다. 우리가 탄 《뉴불루오션》호는 현지시간으로 11시 15분에 속초항에 입항하였다. 《뉴불루오션》호에서 바라본 해돋이. 천혜의 관광해양도시 속초 강원도 속초시는 인간과 자연, 미래의 삶이 어우러진 축제의 도시다. 한국 7번국도와 바다를 따라 길게 자리잡은 속초시는 시내 구석구석에서 바다의 내음을 맡을수 있다. 산, 바다, 호수, 온천해수욕장 등 천혜의 관광자원으로 관광해양도시로서의 립지(立志)를 한껏 펼치고있었다. 《속초》라는 지명은 들풀의 일종인 속새가 많이 자라는 고장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였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호수속의 풀을 베여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를 묶었다고 한다. 속초는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의 허리에 우뚝 솟은 명산이며 한라산과 지리산 버금으로 높은 우람찬 기상을 지닌 설악산(해발 1708메터), 해맞이 운치를 맛볼수 있는 쪽빛동해바다, 설악산과 바다의 품안에 꼭 안긴 영량호와 청초호, 놀이시설과 레저수영장이 구전히 갖추어진 사계절 관광지온천이다. 《동춘》호와 《뉴불루오션》호의 운항으로 속초는 백두산과 한라산을 련결하고 무역관광직항로를 활짝 열어놓은 한, 중, 로 무역관광길로 자리매김을 했다. 기자는 지난해  5월 풍치 좋은 설악산관광에 이어 또 한번 설악산의 설경을 만끽한것으로 기쁨을 금할수 없었다. 《뉴불루호션》호의 빛과 그림자 륙해3국 려행의 륙로가 10년전의 흙길로부터 포장도로로 바뀌였고 선박과 선박시설이 크고 호화롭고 구전하고 편리하고 봉사질이 한결 친절하고 다감하게 바뀌였다. 상냥한 미소로 친절봉사를 하고있는 《뉴불루오션》호 녀승무원들. 일반인들의 발길이 엄격히 통제된 로씨야통상구내에서 우리 조선족이 로씨야고위급간부의 소개로 장사를 벌린다는것, 《뉴불루오션》호에 《길림신문》이 진렬되였다는것이 글로벌시대 승화된 조선족의 위상과 세계화로 활약하는 우리 조선문언론사의 역할을 무한한 자랑으로 느낄수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2000년 4월에 《동춘》호가 운항을 시작하여 거의 1년 반이나 로씨야에서 중국공민들의 《동춘》호승선을 허락하지 않아 우리는 《그림의 떡》을 구경하는 신세가 되였으니말이다. 조선족들의 몸값 제고는 한국인들의 외국인 고용에서도 엿볼수 있었다. 《동춘》호와 《뉴불루오션》호의 승무원과 선원들의 자국인과 외국인의 비례는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모두 거의 반반(50%)이였는데 고용외국인이 10년전에는 중국인(특히는 조선족)이였고 지금은 필리핀인이다. 10년전 《동춘》호 선장은 중국사람(특히 연변조선족)들이 언어소통이 잘되여 편리하였다고 했고 《뉴불루오션》호 정태화총지배인은 필리핀사람들이 영어권이여서 언어소통이 편리하다고 했다. 그러나 필리핀인이 조선족보다 몸값이 싸다는것이 그 직접적인 원인임은 불보듯하다. 이는 한방면으로 중국인의 몸값이 승격되였음을 증명한다. 이밖에 당년의 《동춘호》는 《더 많은 대리운반공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였고 오늘의 《뉴불루오션》호는 상인들이 많으면 관광승객이 줄어든다는 분석으로 대리운반업(소무역상)을 불허한다. 이런 부동한 경영사로에서 지금의 승객은 순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향수형승객군체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있다. 깔끔한 선박로비. 다음은 그림자로 드리운 문제점들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화지 않는 로씨야정부의 선상비자 미허락문제, 로씨야측의 짜증나는 검사, 로씨야경내에서 무리하게 지체되는 시간, 헐망한 통상구시설(좁다란 출입문, 짊을 끌 때 울퉁불퉁한 콩크리트바닥) 등 이다. 거기에 개까지 동원하여 지나가는 려객들의 몸과 물품을 검사하고 척하면 뻐스를 세우고 이런 저런 검사를 하는것이 려객들의 불만을 자아냈다. 올 때는 로씨야측의 불허로 려객들이 물건짝을 끌고 들고 배를 오르내려야 했고 뻐스에서 내려서 물건을 끌고 다니며 검사를 받아야 했다. 게다가 로씨야뻐스의 적재함이 작아서 려객들이 짐짝을 들고 뻐스에 오르다보니 더욱 고생스러웠다. 그리고 한국서 중국으로 올 때 왕복배표가 아니면 반드시 로씨야에서 하루밤을 자야 한다는것이 큰 걸림돌이였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출국할 때는 국제신사였는데 귀국할 때는 따이궁(代工)신세》, 《출국은 배로, 귀국은 비행기로》라는 결론을 내리였다. 랑만의 륙해3국려행을 끝내면서 필자의 가슴에는 불붙듯한 소망이 생겨났다. 조선라진항을 빨리 개방하여 중, 조, 한 3국 륙해관광선로로 판도가 바뀌였으면 얼마나 편리할가? 한마디로 하루빨리 한반도의 통일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기대해보게 되였다. 길림신문 2월 14일  
133    설기간 세간에서 오간 두마디 말 두고 댓글:  조회:5564  추천:6  2014-02-17
올해의 음력설을 맞으며 세간에서 오가는 두가지 말에 귀맛이 당긴다. 《올해는 간부들이 위문하는 뉴스가 없어서 좋다》, 《공무원이 메유 이쓰다》(공무원이 재미가 없다). 뜻인즉 왕년에는 설명절이면 신문방송에 간부들이 줄을 서서 다니며 극빈호와 로간부를 위문하는(기실 보면 년령이 많아서 로간부가 아니라 전임 리직간부)뉴스가 신문지면이나 텔레비죤화면을 메웠는데 올해는 그런 뉴스가 없어서 좋다는것이고 왕년에는 설명절에 공무원(특히는 권력자 공무원)들에게 차례지는 공짜들이 많았는데 금년에는 달력마저 없어서 멋이 없다는것이다. 확실히 그랬다. 지난 일을 돌아보면 해마다 설명절이면 여러 부문의 지도간부들이 극빈호나 로간부를 위문했다는 뉴스가 진저리가 날 지경이였다. 기실 방문이나 위문은 간부들의 정상적인 일로서 뉴스가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백성들이 신문이나 텔레비를 보고나서 《공가돈을 가지고 제인사를 내면서…》라며 불만을 토했다. 한편 위문금을 받은 극빈호들 역시 《평상시에는 모른척 하다가 그까짓 돈을 주면서…》라며 신문이나 텔레비화면에 자기들의 낯을 빌려주기를 꺼려하였다. 오죽하였으면 모 시 위문단 수행기자가 극빈호에서 받은 위문금이 100원이라는것을 알고 (너무하구나!)는 생각이 들었는데, 웬걸 위문단들이 돌아와서 벌린 푸짐한 술상을 보고 량심이 가책되여 《원고를 빨리 써 바쳐야 한다》는 구실을 대고 자리를 피했다고 하겠는가. 《간부들이 위문하는 뉴스가 없어서 좋다》는 간부사업 작풍과 신문보도 가치의 변화를 말해주고 《공무원이 메유 이쓰다》는 당정간부 반부패 성과를 말해준다. 길림신문 2월 16일자
132    《백년대계》설에 대한 단상 댓글:  조회:8902  추천:4  2013-12-24
어찌 보면 우리는 지금 백년을 보고 사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군 한다. 너나가 관심하는 《백세시대》, 부르기 좋은 《백년부락》, 교육에서의 《백년대계》, 건축에서의 《백년대계》 등등이 이를 말해준다. 이러루한 생각을 갖고 필자는 요즘 방송된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장수암호(长寿密码)》프로를 주시해보게 되였다.《지금까지 발견된 중국의 최장수로인은 127세이다. 그러나 로씨야의 생물학자는 인간의 최장수명을 280년으로, 유럽의 학자들은 인체세포재생의 기제로 인간의 최장수명은 800년, 1000년, 5000년도 가능하다》고 하였으니 이런 설화에 실로 경악하지 않을수 없었다. 기실 필자는 언녕부터 건축현장의 《백년대계 질제1》이라는 구호판을 보고 《백년밖에 못 견디는 집을 지으면서…》라며 별로 탐탁치 않다는 생각을 했다. 연길의 한 학교 옥상에 세워진 《백년대계 교육위본》이란 홍보간판물을 보면서 교육에서도 《백년대계》라니 앞길이 멀지 않다는 김빠진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긴 백년대계가 꼭 100년을 두고 한 개념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이런 제기법은 퍽 뒤떨어진 혹은 먼 앞날에 대한 설계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얼핏 떠오르는 생각으로도 북경의 고궁 등 중국 고도의 고택들과 지금까지 전해져내려오고있는 2500년전 공자의 교육학과 례(礼)문화 등과 비교하면 백년대계는 너무 단거리라는 느낌이다. 《하늘을 쳐다보며 뛰면 나무높이만큼 뛰지만 나무를 쳐다보며 뛰면 채석돌높이만큼 뛴다》는 말이 있다. 뜻인즉 무슨 일을 함에 있어서 앞을 멀리 내다보라는것이다. 필자는 눈앞에 다가온 백세시대에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를 막론하고 후세들에게 한치의 부끄럼 없이 《백년대계》가 아닌 《천년대계》, 《만년대계》로 계획하고 더 깔끔히, 더 튼튼히, 더 신중하게, 더 책임적으로 해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주장을 크게 내밀고싶다.
131    백성은 언제나 옳다 댓글:  조회:8236  추천:1  2013-12-11
근래에 크고작은 모임이거나 공공장소의 열띤 화제가 습근평총서기를 위수로 한 당중앙의 포치에 따라 진행되는 당의 군중로선교육활동, 네가지 불량기풍 배격, 부패분자 타격, 절약실시와 랑비반대에 대한 백성들의 평가다. 백성들의 평가를 종합하면《지금 공무원들의 봉사질이 좋아지고 령도들이 부지런히 사업하며 공가돈을 대상하던 업주들이 울상이고 먹은자들이 불안해하며 백성들이 기뻐한다》는 한마디로 《지금 정말 잘한다》는것이다. 확실히 그랬다. 호화음식점의 경리는 물론 심지어 모 사진관의 경리마저 《공산당의 돈을 벌어야 하는데 점점 돈줄이 끊어진다》며 울상이다. 반면 70대의 송모는 《오늘 텔레비에서 습근평주석이 헐망한 농촌집에서 농민들과 함께 마주앉아 조사연구를 하는것을 보고 우리 주석이 잘한다며 박수를 쳤다》고 기뻐했다. 수선복장업을 하는 50대 장애인 김녀는 장(長)자 붙은님들의 자녀직업배치를 례로 사회의 부정부패를 성토하며 《지금 정말 잘한다》고 통쾌해했다. 필자는 요즘 병원, 사회구역, 파출소, 정부대청 등 곳에 다니며 일을 보았는데 공무원들의 봉사태도는 물론 의사, 민경들의 봉사태도 할것없이 모두 달라지고있다는감을 느꼈다. 호적을 올리는 문제로 그전 같으면 첫마디로 본인이 아니면 《안된다》던 일을 지금은 안내서류까지 만들어주면서 순서를 알려주었고 또 주동적으로 전화련계까지 하면서 어느 부문의 누구를 찾으란다. 최근에 필자는 세번 공식행사에 참가했었는데 공직자들의 사업작풍에 탄복하게 되였다. 한번은 국장을 비롯한 공무원들이 촌에서 마련한 행사에는 끝까지 참가하였지만 음식상은 피했고 한번은 마감까지 회의를 사회한 진장이 래빈들에게 《식사를 배동하지 못해 미안합니다》,《다음에 내가 개인 이름으로 접대하겠습니다》라고 사과하고나서 회의장을 떠났다. 또 한번은 불가피한 정황으로 음식상을 배동했던 공무원들이 오후 출근때문이라며 아예 술잔을 멀리하고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자리를 떠나는것을 본적있다. 백성들이 말하는 《지금 정말 잘한다》는 뜻은 지난날에 가졌던 그 어떤 바람이나 오늘의 현실에 대한 긍정,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당과 정부를 따르는 백성들의 신심과 자세를 말해주는것이 아니겠는가싶다. 상업계에서 《고객은 언제나 옳다》를 진리라고 한다면 정계에서는 《백성은 언제나 옳다》를 영원한 진리로 간주해야 하지 않을가. 그래서 필자는 지난 10월에 길림성당위 상무위원회 지도부에서 소집한 민주생활회의에서《작풍건설의 실제성과로 백성들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고 한 결론의 진정한 뜻을 알게 되였다.
130    친절이란 뭐길래? 댓글:  조회:6903  추천:7  2013-11-26
친절이란 상대방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과 행동으로 정성의 마음이 행동표현이다. 친할《親》자를 어버이 《親》자라 하겠다. 《親》자를 풀이한 이야기다. 어느 마을에 모자간이 살았다. 하루는 아들이 일보러 먼 길을 떠났는데 돌아오기로 한 약속시간이 이미 지났어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으로 안절부절 못하시던 어머니는 마을앞에 나서서 아들을 기다렸다. 날이 저물어가는데도 아들이 나타나지 않으니 어머니는 큰 나무우에 올라가서 아들이 오는 쪽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이렇게 어머니가 나무(木)우에 서서(立) 바라보는(見) 형상을 담은 글자가 바로 《親》자이다. 그러니까 친은 어버이의 지극한 사랑의 마음이다. 친에 붙은 말은 나쁜 말이 없다. 친절(親切),친밀(親密),친목(親睦),친화(親和),친애(親愛),친숙(親熟),친근(親近),절친(切親),간친(懇親)… 모두가 아름답다. 친절이 베푼 일례다. 뉴욕 변두리의 한 가구점 처마밑에서 람루한 차림을 한 로파가 비를 피하고있었는데 가구점 주인(브랜든)이 다가와 그에게 자기 가게에 들어와 쉬였다가 비가 그치면 가시라며 친절을 베풀었다. 그 일이 있은후 브랜든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가 왔다. 《친애하는 브랜든씨, 그날 저희 어머님께 베풀어주신 친절에 감사하며 이번에 저희 그룹이 구입하고자 하는 가구전부를 귀하의 가구점과 계약을 맺기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전보 발신인은 당시 미국 최고의 부자인 백반장자 록펠러였다. 그후 브랜든의 가구점은 기적 같은 매출로 발전을 거듭하여 몇년후엔 미국의 굴지 가구회사로 되였다. 흔히 일본을 경제대국이라고 한다. 필자는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된것은 국민들의 친절성과 친절을 핵으로 한 직업도덕이라고 말하고싶다.일본사회를 쓴 저서에 일본의 친절봉사가 경제대국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밝혔다. 일본을 소개하는 《이라비아 상인이 주는 교훈》의 한 단락이다. 옛날부터 세계적으로 장사를 가장 잘하는 민족을 아라비아인이라고 했다. 계산이 빠르고 리해타산이 빠르며 론리적이고 상술이 특별히 높다.이런 아라비아상인이 일본서 물품을 구매했는데 처음에는 100만딸라만 구입하려 했으나 결국은 180만딸라어치를 구입했다. 원인을 물었을 때의 그의 대답이다. 《그 기업의 정문에 있는 수위의 친절에 감동되여 20만 딸라를 추가하고 구매상담자의 친절과 제품에 감탄되여 20만 딸라를 추가하고 90도로 인사하는 사장의 극진한 친절과 례절에 매료되여 40만딸라를 더 구해하게 되였다》. 일본의 이런 작은 친절이 모여 오늘의 일본을 경제대국으로 만들었다는것이다. 일본에 가보면 알게 된다. 필자가 일본땅에서 처음으로 친절을 느낀것은 바로 공항에서 본 《참 잘 오셨습니다!》라는 우리 글 프랑카트였다. 마치 일본국민들이 언녕부터 우리를 기다리고있은듯한 친절감을 느끼게 되였다. 필자가 일본서 목격한 은행의 은행원과 병원의 안내원들은 한쪽 무릎을 땅에 굽히고 웃음띤 상냥한 얼굴과 공손한 말씨로 고객을 상대하였다. 부모들과의 동거로 아들네는 갑자기 식솔이 늘어나는바람에 수도물사용량이 늘어나게 되였다. 생각밖으로 수도물회사에서 먼저 전화를 걸어와 집식구가 불었는가 아니면 수도시설이 고장났는가고 친절히 묻는것이였다. 만약 수도시설이 고장났다면 회사에서 사람을 보내 수리해드리겠단다. 아무튼 국민들의 친절과 직업도덕이 일본사회를 움직이는 황금열쇠가 아닌가싶어졌다. 친절은 례의만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배려의 미덕이다. 친절은 타인에 대한 배려이기때문에 주는 자는 흐뭇하고 받는 자는 감동을 받는다. 그래서 친절이 아름다운것이다. 친절은 실행하고 베풀수록 그에 대한 보답(보상)은 내가 준것 이상이 되여 돌아오고 가구점의 주인(브랜든)처럼 어느 날 갑자기 운명이 바뀌여지는 기적의 행운을 만날수도 있다. 친절과 배려가 그토록 아름다운 리유는 우리가 함께 하는 사회를 더 따뜻하고 향기롭게 만들기때문이다. 친절에 관한 명언이다 -똑똑하기보다는 친절한 편이 더 낫다(탈무드). - 친절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며 모든 비난을 해결한다. 그리고 얽힌것을 풀고 어려운 일을 쉽게 하며 암담한것을 즐거움으로 바꾼다(똘스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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