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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회고] 정판룡 교수의 사랑 (김호웅) 댓글:  조회:1768  추천:5  2020-08-22
[회고] 정판룡 교수의 사랑 김호웅 정판룡 교수   해방전 중국에서 빛나는 활약상을 보인 우리 민족 명인들중에 적지 않은 이들이 한족녀성과 결혼했고 서로 믿고 사랑하면서 빛나는 업적을 일구어내고 아름다운 일화들을 남겼다. 항일투사이며 농학자인 류자명(柳子明, 1894-1985)이 그러하고 영화황제 김염(金焰, 1910-1983)과 작곡가 정률성(郑律成, 1914-1976)이 그러하다. 아마도 해방후 한족녀성과 결혼해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우리 민족 교육과 문학의 발전을 위해 불멸의 업적을 남긴 분으로는 아무래도 정판룡 교수를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정판룡 교수의 문하에서 석박사과정을 밟았고 그분을  모시고 18년 간 공부하고 일했기에 그들 내외분에 대해서는 조금은 알고 있다고 자부했고 여러 편의 글도 쓴 적 있다. 하지만 요즘 정판룡 교수 내외분의 자료를 진일보 수집하는 가운데서 처음으로 정판룡 교수의 《나와 나의 안해》(민족출판사, 2002)라는 책자를 구해서 통독하게 되였다. 조선족과 한족이라는 두 민족 청춘남녀의 만남과 사랑의 이야기는 정판룡선생의 유명한 자서전 《고향 떠나 50년》과 왕유녀사의 자서전 《남방에서 북방에 와 70년 세월(从南到北七十载)》에도 일부 나오지만 《나와 나의 안해》는 두 분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더욱 구체적으로 진솔하게 쓴 작품이요, 참된 사랑의 서사시를 방불케 한다고 하겠다. 여기서는 두 분의 첫 만남, 련애와 결혼, 그리고 연변에 오게 된 경위에 대해서만 보기로 하자.   21살이라는 약관의 나이에 연변대학 교원이 된 정판룡, 잇달아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은 모스크바대학 류학을 마친 정판룡에게는 혼처를 주선하는 사람도 많았고 은근히 다가서는 처녀도 여럿 있었다. 연길 서시장 부근의 하숙집 주인이 주선한 왕청의 처녀, 연변조선족자치주 선전부장 배극과 황구헌 내외가 알심들여 자택에 마련한 북경 민족가무단 녀배우들과의 만찬, 연변가무단의 흑룡강출신 처녀와의 사귐이 그러하고 모스크바대학 류학 초기 대담하게 나젊은 정판룡에게 주동적으로 다가온 모스크바자동차공장 선반공 따마라와 그루지야의 녀가수 스펠라와의 만남이 그러하다. 하지만 정판룡은 공부를 더 해야 했기에 련애는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에게는 남다른 사랑의 철학이 있었다. 좀 길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한번 읽어볼만한 것이기에 여기에 줄여서 옮긴다.   1959년 모스크바 류학시절의 정판룡과 왕유 교수   서방의 어느 시인은 “사랑은 봄철에 꽃이 피듯이 자연스럽게 찾아오거니, 그 가슴이 울렁이는 순간은 인간세상의 영원한 신비이니라”라고 노래했다. 하기에 적잖은 사람들은 사랑은 격정이며 신비한 정신상태라고 하면서 사랑에는 리성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사랑속에 치밀한 리해관계나 타산과 같은 리성적인 것이 섞여있다면 순수한 사랑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혼해야 할 나이가 되여 생활의 동반자를 찾아 가정을 만들려고 할 때 리성을 배제하고 격정만 가진다면 흔히 실패를 자초하게 된다. 한쌍의 부부가 조화롭게 생활하고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될 때가지 행복하게 살자면 단순한 부부가 될 게 아니라 생활의 동반자가 되고 사업의 동지와 벗이 돼야 한다. 이러한 대상을 찾는다고 할 때 리성의 참여가 없다면 성공할 수 없다. 물론 결혼은 사랑을 기초로 한다. 격정이 없는 사랑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이 아니다.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자기 마음속에 있는 사람에 대해 애모의 격정을 갖게 된다. 하지만 사랑의 격정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대다수 사람들의 사랑의 격정은 가장 길어야 18개월에서 30개월간 지속된다고 한다. 그 뒤에는 이런 격정이 사라진다. 설사 젊은 부부라 해도 이 기간이 지나면 평범한 생활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부부관계는 언제나 격정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리성의 지배를 받게 된다. 부부는 상대를 련인으로 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서로 존중하고 관심하고 생활의 동반자, 동지와 벗으로 보아야 한다. 요컨대 사랑은 격정도 있어야 하지만 리성도 있어야 한다……      정판룡과 왕유의 만남은 우연스럽지만 자연스럽게 시작되였다. 1954년 여름 정판룡은 연변대학에서, 왕유는 서남사범대학에서 교육부의 선발을 받고 쏘련에 가서 류학하게 되였다. 이들은 먼저 북경로씨야어전과학원(지금의 북경외국어학원)에 가서 로씨야어 연수를 받았다. 정판룡은 쏘련에 가서 대학원공부를 해야 하는 22반에, 왕유는 본과공부를 해야 하는 18반에 귀속되여 거의 1년간 같은 캠퍼스에 있었지만 서로 풋면목도 익히지 못했다.    그러다가 1957년 여름, 제6차 세계청년련환절이 모스크바에서 열렸는데 정판룡과 왕유는 다같이 중국청년대표단을 위한 후근사업을 하면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였다. 왕유는 성격이 활발하고 명랑해서 모든 남학생들의 눈길을 끌었다. 특히 그녀는 옷차림은 수수했지만 살결이 남달리 희고 몸매가 날씬한 전형적인 남방미인이였다. 그녀는 모스크바에 있는 레닌사범학원 중국류학생 공청단지부의 서기로 있으면서 사회활동에 적극 참가했고 롱구도 잘 하고 노래도 잘 부르는 재간둥이였다.       두번째로 왕유를 만난 것은 1958년 여름이였다. 모스크바시 공청단위원회에서 외국에서 온 류학생들을 조직해 30일간 볼가강연안의 도시들을 돌아보게 했다. 중국의 장강이나 황하와 마찬가지로 볼가강은 쏘련의 어머니강인데 짜리로씨야시대의 고색창연한 성곽들이 모두 이 강의 량안에 있었다. 볼가강에서 다시 만난 정판룡과 왕유는 더없이 기뻤고 서로의 출신과 현재 상황을 두고 적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왕유는 조선족을 만난게 정판룡이 처음이라고 했고 려행하는 내내 방긋방긋 웃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그때 모스크바대학 신문학과에 와서 연수하던 인도네시아 기자가 유람선 란간을 잡고 서있는 묘령의 중국아가씨 왕유를 찍었는데 그 사진이 오늘도 처녀시절 그녀의 꽃다운 모습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세번째로 왕유를 만난 것은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농장에 가서 일할 때였다. 둘은 다른 류학생들과 함께 풀을 뽑거나 채소를 캐고 버섯을 땄다. 밤에는 우등불을 피워놓고 ‘카츄샤’, ‘군항의 밤’, ‘공청단원의 노래’, ‘모스크바 교외의 밤’을 불렀다. 왕유는 악보도 볼 줄 알았거니와 노래도 썩 잘 불렀다. 정판룡은 어느 새 왕유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다. 고맙게도 형님벌 되는 호맹호(胡孟浩, 후에는 상해외국어대학 교장 력임)씨가 정판룡과 왕유의 속사정을 알고 슬그머니 다리를 놓아준 덕분에 둘은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정판룡은 남모르는 근심을 하게 되였다. 한족 아가씨와 사랑을 속삭이고 가정을 이룬다? 나는 조선족이고 앞으로 연변에 돌아가야 한다. 한족 아가씨와 련애하고 결혼한다면 앞으로 여러가지 곤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류학생의 몸값이 올라서 적잖은 류학생들은 심양이나 장춘과 같은 동북의 대도시에도 가려고 하지 않는다. 왕유가 나를 따라 구석진 연변에 가려고 할가?    하지만 이는 전부 공연한 근심이였으며 이는 왕유의 자서전에서 잘 나타나있다. 왕유는 자서전에서 조선족이면 어떻단 말인가? 기껏해야 남방사람과 북방사람의 차이가 아닌가? 판룡씨가 좀 촌스럽게 생겼다고 하지만 남달리 총명하고 성실하고 정직하다. 레브 똘스또이가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스러운게 아니라 사랑스럽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여러 날 고민 끝에 정판룡은 왕유에게 편지를 썼고 모스크바대학에 놀러 오라고 했다. 왕유가 쾌히 승낙했고 마침내 둘은 모스크바대학에서 만났으며 암실에 들어가 사진을 현상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둘은 자연스럽게 첫 키스를 했던 것이다.    “나는 왕유가 놀러온 날 밤, 창문에다 모포를 치고 어둡게 한 뒤 그와 함께 교외농장에서 찍은 사진들을 만들었다. 내가 필림을 확대기에 넣고 감광지에다 영상시킨 뒤 현상액에 넣으면 왕유가 건져서 말리는 일을 했다. 나는 기실 사진을 만든다는 것보다 왕유와 단 둘이서 이 작업을 하는 것이 더 기뻤다.    한번은 같이 사진을 만들다가 얼굴이 가까와졌다. 우리는 그만 키스를 하고 말았다. 첫 키스는 정말 달콤하고 신비스러웠다. 미국 보리스대학 연구원 츌 링크는 300명 중산계급에 대한 조사에서 첫 키스가 첫 성생활보다 더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첫 성생활은 사랑의 상태에서 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첫 키스는 절대적으로 사랑의 상태에서 진행된다고 했다. 나의 체험을 보아도 그렇다. 4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나는 첫 키스의 모든 세절과 느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키스를 한 뒤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느껴졌으며 기쁨을 누룰 수 없어 큰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물론 미치광이처럼 소리는 지르지 않았지만 나는 그때 가장 강렬한 사랑의 격정과 행복을 느낀 것만은 사실이다.”   《나와 나의 안해》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슬쩍 감추고 에둘러 암시하면서 멋지게 의론을 전개했으니 저명한 문학교수다운 글솜씨라 하겠다. 아무튼 1년 만에 정판룡은 왕유와의 사랑에 골인했고 모스크바대학 학생숙사 9동에 있는 회의실에서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왕유와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제자들과 함께 있는 정판룡 교수   하지만 인생의 중요한 고비가 또 하나 남았다. 1960년 2월  정판룡은  “아 똘스또이의 3부작  ‘고난의 길’의 인민묘사원칙”으로 부박사학위를 받고 5년 만에 북경에 돌아왔고 친구인 전중문 (钱中文)내외의 알선으로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판룡은 은사와 친구들의 부름을 거역할 수도 없었거니와 연변대학을 잘 꾸리기 위해 연변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렇다면 왕유는 어찌한단 말인가? 왕유는 나를 따라 변강인 연변으로 가서 간고한 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 연변대학에 로씨야어학과가 없으니 전공도 바꾸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정판룡은 모스크바에 있는 왕유에게 편지를 보냈다. 귀국하기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조선족 지식인이니까 연변대학에 돌아가서 일해야 한다. 이미 결정을 내린 일이니 당신은 나를 따라 연변에 갈 필요가 없다. 나 때문에 당신의 전도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다. 먼저 두 곳에 갈라져서 지내면서 차차 상황을 보아서 처리하자. 하지만 예전과 마찬가지로 왕유는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는 당연히 연변대학에 가서 일해야 해요. 당신이 이미 선택을 했다면 저는 무조건 따라갈 겁니다. 적잖은 한족들이 오래동안 연변에 살고 있는데 저라고 왜 살 수 없겠어요. ”    이게 바로 왕유의 “위대한 단순성”이였고 정판룡은 바로 여기서 또다시 깊이 감동됐다.   일부에서는 왕유를 중국 4대미인의 하나인 왕소군(王昭君)에 비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하겠다. 왕소군은 흉노에 잡혀 억지로 끌려간 셈이지만 왕유는 정판룡을 믿고 연변에 찾아와 헌신적으로 남편을 내조했으며 그 자신도 연변대학의 대표적인 교수로 되였다. 또 그만큼 정판룡은 부인을 사랑했고 일찍부터 부인을 위해 세가지 일을 성사시켜주리라 생각했다. 첫째로 뛴다 난다 하는 남개중학교나 서남사범대학 동창생들보다 먼저 교수직함을 가지도록 노력하리라, 둘째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보게 하고 국제적 시야를 갖게 하리라, 셋째로 왕유의 전기를 써주리라. 이 세가지인데 앞의 두가지는 대체로 실현한 셈이나 날마다 학문연구와 공무에 시달리다보니 전기를 쓰는 일은 많이 지체되였다. 암투병생활기간에야 《연변녀성》잡지사와 계약을 맺고 30가지의 이야기를 매 기마다 5000자씩 쓰기로 했다. 2000년 제 5기에 첫 편의 글이 나갔고 병상에서 집필을 다그쳐 20편, 약 10만 자를 쓰고는 더 쓰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왕유가 정판룡의 구술에 근거해 6편을 더 써야 했다. 정판룡이 부인을 보고 “적잖은 편폭을 썼는데 나의 한족친척들과 한어독자들이 볼 수 없구려. 이 책을 한어로 번역했으면 좋겠소. 그들도 우리 둘의 이야기들을 알아야 할 게 아니요?” 라고 했다. 그래서 저명한 번역가 뢰자금(雷子金)선생이 번역하여 2002년 북경 민족출판사를 통해 출간하게 된 것이다.   만년에 자택에서   요즘 도시화바람으로 우리 조선족의 적잖은 젊은이들이 타민족과 통혼하고 있다. 필자의 동창들 중에도 타민족 아가씨나 젊은이를 며느리로 삼거나 사위로 삼고 난색을 짓는 친구들이 일부 있다. 난색을 지을 필요가 없다. 그들이 살고 있는 대도시에서 같은 민족의 결혼상대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며 또 다른 민족과 살더라도 넓은 흉금과 사랑을 가지고 상대를 품어주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 이 방면에서 정판룡 교수는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한편 이런 의미에서 《나와 나의 안해》를 한어로 번역한 것은 아주 잘된 일이며 《나와 나의 안해》와 함께 왕유 교수의 《남방에서 북방으로 와 70년 세월》도 조선어로 번역 출판되여 많은 조선족 독자들 특히 조선족 젊은이들에게 읽히웠으면 하는 바램이다. ▣(출처:《중국민족》조선문판  글/김호웅  편집/리호남  조판/ 한동준)  
3    장백산 식물자원 개발에 가속도가 붙는다 댓글:  조회:781  추천:0  2017-04-13
-“장백산 생물자원 및 기능분자 교육부중점실험실”, “길림성장백산생물    자원 및 건강산업 중대수요협동혁신센터”주임 리동호 교수 인터뷰  글/ 리호남 “현재 장백산의 야생식물종류는 1,800여종에 달합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개발된 식물은 인삼을 비롯하여 몇가지에 불과합니다.” 이는 연변대학 “장백산 생물자원 및 기능분자 교육부중점실험실” 주임이며 “길림성장백산생물자원 및 건강산업 중대수요협동혁신센터“ 주임인 리동호 교수의 소개이다. 리교수는 선후로 연변대학 분석측험센터 주임, 연변대학 “장백산 생물자원 및 기능분자 교육부중점실험실“ 주임, “장백산생물자원 및 건강산업 중대수요협동혁신센터“ 주임, 길림성 고첨단기술혁신플래트홈 주임 등을 맡아왔으며 장백산 식물자원의 분석연구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렸다. 지난 2005년부터 그가 이끄는 연구진은 선후로 국가863대상, 국가자연기금대상, 성부급 과학연구대상을 따냈으며 실험실 연구성과를 생산력으로 적극 전환했다. 현재까지 그가 이끄는 연구진이 수여한 특허는 29가지이며 완성한 기술양도는 4개에 달한다. 특히 지난 2009년 연구진에 의해 개발된 샘플 전처리의기인 “ME-101다기능미량추출기”는 길림성 공업정보청의 신상품 검증을 통과했으며 전문가들의 “국내 공백을 메웠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식물자원을 연구하려면 우선 분석기술이 안받침돼야  로켓트를 발사하려면 전자, 재료 등 기술이 필요한것처럼 장백산의 식물자원을 개발하려면 우선 식물에 어떤 유효성분과 활성물질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 식물이 몸에 여차여차하게 좋다는 입소문만을 갖고서는 본격적인 자원개발에 나설수 없다. 반드시 유효성분을 정확히 분석한 후 분석결과에 근거하여 개발가능성 여부를 판단하여야 한다. 그리고 식물의 유효성분을 분석하려면 우선 샘플을 의기분석에 필요한 상태로 사전 처리할것이 필요하다. 이를 샘플의 전처리라고 하는데 전처리를 거치지 않은 식물은 흔히 분석의기로 유효성분을 정확하게 측정할수 없다. 하지만 기존의 샘플 전처리기술을 보면 한가지 샘플을 처리하는데 며칠씩 소요된다. 그러므로 기존의 기술로는 사실상 많은 식물의 분석을 할수 없다. 한편 식물의 유효성분의 경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함으로 기존의 방법으로 전처리를 거칠 경우 오랜 시간의 분석방법으로 인해 식물의 유효성분이 금방 채집할 때와 확연히 다른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효률이 높은 샘플 전처리기술개발이 장백산식물개발의 관건적인 요소로 되고 있다.  “저희 연구팀에서 개발한 샘플 전처리의기를 사용하면 며칠을 해야 할 샘플 전처리과정을 몇분동안에 끝낼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획기적인 기술이라 할수 있습니다. 현재 연변 현지의 기업에 기술양도를 이미 완성한 상태이며 래년부터 대량생산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이는 장백산생물자원분석전문가 리동호 교수의 소개이다. 이 기술을 도입할 경우 쾌속적이고 조작이 간편하게 유효성분을 추출하며 소량의 샘플(mg 단위)과 유기용매(µL)를 사용하는 등 우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휘발성, 반휘발성 성분을 동시에 추출하고 추출과 정제 일체화를 실현하여 직접 의기분석을 진행할수 있다. 지금 이 의기는 길림대학, 중국지질대학, 화동사범대학, 한국전남대학, 한국인하대학, 말레이시아 버터라대학, 향항리공대학, 이딸리아 푸쟈대학, 중국과학기술원 란주식물연구원, 중국제1해양연구원, 길림연초공업유한책임회사, 연변환경보호검측소, 한국광주록색환경지원센터 등 대학들과 연구기구들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향후에는 일반인 가정에서의 보급도 계획하고 있다.  지난 1985년 연변대학 화학학부에 입학하여 본교에서 본과, 석사 과정을 마친 뒤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선후로 한국건국대학교, 한국해양연구원에서 박사, 박사후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리교수는 국내 연해지구 연구기구 및 유명대학교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모교의 부름을 받고 연변대학에 돌아와 장백산 식물자원 분석연구에 몰입했으며 연변대학의 장백산 천연자원 보호와 개발, 연구를 한단계 업그레이드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리고 지난 2013년 연변대학 “장백산 생물자원 및 기능분자 교육부중점실험실” 주임으로 부임한 뒤 리교수는 학과 교차와 융합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정부, 기업, 실험실의 공동합작을 적극 모색하였고 2015년에 성급 과학연구플래트홈인 “길림성장백산생물자원 및 건강산업 중대수요협동혁신센터”를 건립하였다. 현재 이 센터에는 국내외 30여개 대학과 연구소 및 50여개 기업이 포진해 있다.   건강산업은 발전잠재력이 무궁무진한 산업  최근년간 길림성에서는 “록색발전, 순환발전, 저탄소발전”구호를 제기하고 지역자원우세를 발휘하여 생태경제구조조정을 진행해왔으며 생태순환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진력하고 있다.  “과거에는 장춘제1자동차공장, 길림화학공업공사 등 중공업이 길림성의 기둥산업이였지만 금후에는 건강산업, 관광산업, 보건식품산업 등 록색산업이 길림성의 주요산업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리동호 교수는 동북진흥전략, 장길도발전전략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길림성은 생태자원우세에 근거하여 생태문명산업, 서비스산업을 가일층 발전시키게 될것이며 따라서 “길림성장백산생물자원 및 건강산업 중대수요협동혁신센터”에서 창조한 연구성과들이 지역경제의 활성화에 큰 역할을 담당할것으로 예측했다. 지금 기술혁신연구는 연변대학 “장백산 생물자원 및 기능분자 교육부중점실험실”에서 담당하고 산업화는 “길림성장백산생물자원 및 건강산업 중대수요협동혁신센터”에서 추진하는 좋은 기제가 건립되였으며 실험실의 연구성과들이 산업화되여 연변지구 건강산업발전에 이바지하게 될 예정이라고 리동호교수는 밝혔다.  “장백산의 식물은 한랭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하여 오랜 시간의 진화를 거쳐왔으며 장백산지역 식물만의 특유한 성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런 원인으로 장백산지역 식물의 연구가 더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리교수는 전에는 장백산식물에 대한 연구가 안받침되지 못해 장백산식물보건상품을 개발하지 못했지만 금후에는 이런 상황이 크게 개변될것이라고 한다. 장백산의 자원우세와 연변대학의 기술우세를 합치면 큰 시너지효과가 발생하게 될것으로 예측했다. 멀지 않은 장래에 장백산식물자원을 기본으로 한 보건식품, 보건약품, 건강식품들이 잇달아 개발되게 될것이다.  “우리 민족의 음식구조를 보면 민들레, 도라지, 고사리 등 산나물을 소재로 한 반찬들이 많은데 이 또한 장백산지역의 식, 약 량용 식물의 전형적인 실례이기도 합니다. 한편 이는 장백산지역의 식, 약 량용식물개발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리교수는 또한 식물의 분석기술은 식물개발리용에 유리하며 병치료에도 큰 도움을 줄수 있다고 했다. 인체에 생기는 많은 병들은 각 부위에 소재한 세포들이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해 생긴다. 부적절한 치료방법 또한 문제로 된다. 실례로 현재 항암치료로 흔히 화학치료, 방사성치료를 꼽는데 이런 치료방법은 암세포와 인체의 면역세포를 모두 파괴하기에 치료과정에 인체의 면역계통의 파괴를 피면할수 없게 된다. 암세포가 급속도로 번식하고 다른 부위로 확산되는것을 공제한다면 암치료에 획기적인 돌파구를 갖다줄것이다. 음식료법을 통해 암세포의 증식과 전이를 공제하고 인체 면역세포를 증강시킨다면 리상적인 암치료효과를 볼수 있을것이다. 향후 식물연구가 인체건강연구에 더 심입되면 항암치료가 아닌 식의료법을 통해 암을 극복할수 있는 시대가 꼭 도래할것이라고 리교수는 예측했다. ▣ (편집/한동준)
2    신승우 사진작가, 취미가 프로를 낳는다 댓글:  조회:1293  추천:0  2016-08-05
글/리호남 사진작가 신승우     흔히 나이가 들수록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직업이 있다. 의사, 변호사 등을 실례로 들수 있는데 사진작가도 이 범위에 속한다고 할수 있다. 젊은 사진작가에 비해 어딘가 모르게 나이가 지긋한 사진작가에게 신뢰가 가기 마련이며 그만큼 사진작가로서 성공하려면 10년, 20년 지어 30년 이상 오랜 기간의 단련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올해 70고개를 바라보는 신승우 선생(辛承佑,1946.10)은 사진기를 만진 시간만 해도 어림짐작으로 근 50년이 되는 로장 사진작가이다. 여간한 노력가가 아닌 그는 일찍 길림신문사 촬영기자로 20여년간 근무해오면서 선후로 “중국우수사진작가”, “제1회 중국문예금작상”, “제1회 세계민간예술가 금비웅상”, “2008중국예술년도인물” 등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웬만해서는 자기 “자랑”을 할줄 모르는 연고로 그의 경력은 남들한테 잘 알려져있지 않다.   어릴적의 꿈은 화가로 되는것       길림성 교하시의 평범한 농촌마을에서 태여난 신승우 선생은 어렸을 적부터 그림그리기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림책에 나오는 인물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그의 그림소재로 되였다. 한편 어렸을 적 꿈이 바로 화가가 되는것이였다. 초중 때부터는 호주머니에 돈만 생기면 미술출판사에 편지를 써서 미술책을 구입했다. 고향의 신화서점에서는 미술책을 살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학교에 미술선생이 없다보니 미술공부는 자습이 위주였습니다. 고중에 들어가서야 미술선생의 지도를 받을수 있었습니다.”신승우 선생은 이처럼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견지해왔으며 끈질긴 노력 끝에 미술수준이 놀랍게 제고됐다. 고중 때 그는 학교공청단위원회 선전위원으로 활약하면서 교내 선전란과 표어를 도맡았다. 후에 하는 얘기지만 그의 이러한 미술재능은 촬영기교의 제고에도 아주 유용한 요소로 작용했다. 원인인즉 촬영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인 구도와 색채는 미술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가 한창 화가꿈을 무르익히고 있을 때 “문화대혁명”을 맞이했다. 대학진학길은 꽉 막혔으며 이불짐을 둘러메고 고향인 강밀봉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와서도 신승우 선생은 농사는 별반 짓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각 지방마다 모주석초상화와  “문화대혁명” 선전화를 그리는게 류행이였는데 신승우 선생은 이곳저곳 불리워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강밀봉에서는 신승우를 향에 남겨두기 위해 1970년 11월 향문화소 간사로 받았다. 그는 문화소에서  대외선전을 책임졌으며 사진도 많이 찍고 그림도 많이 그렸다. 그러다가 1982년에는 영길현문화관에 전근되였으며 1983년 년말에는 영길현선전부 간사로 자리를 옮겼다.         길림신문과 맺은 인연       지난 1984년 “길림신문”이 정식으로 창간되면서 촬영기자가 급히 수요됐다.  길림신문사에서는 신승우 선생이 사진을 잘 찍는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왔으며 현지 선전부와 어려운 교섭을 진행하였다. 그렇게 1985년 8월에 끝내 신승우 선생을 길림신문사 기자로 데려갔다.     길림신문사에 입사해서 퇴직할 때까지 신승우 선생은 줄곧 길림신문사 길림지사 지사장으로 있으면서 길림시 조선족들의 상황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당시 신문사에 촬영기자가 그를 내놓고는 전무한 상황이였으므로 중대한 행사 때마다 사진을 도맡아 찍군 했다. “한달에 한번은 연변에 출장을 가군 했습니다. 그때 침대권을 사는게 무척 힘들었으므로 흔히 좌석에 앉아가지 않으면 밤새도록 서서 연변까지 가야 했습니다.”     신승우 선생은 이렇게 길림시와 연변, 장춘을 제집나들듯이 다녔다고 한다. 1년에 밖에 나가있은 시간이 집에 있은 시간보다 훨씬 많았다. 길림지사를 혼자 맡고 있는지라 취재도 나갈라니 기사도 쓸라니 사진도 찍을라니 지어 사진현상도 자체로 해야 하는 상황으로 눈코뜰새없이 바삐 돌아야 했다. 하지만 한번도 일에 싫증을 낸 적이 없었으며 항상 일욕심이 북받쳤다고 한다.     그는 기사를 써 본사에만 보내는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한문판 신문에도 투고하여 영향력을 넓혔다. 길림신문사에 입사한지 얼마 안되여 그는 만창진 차로하향 관개수로 부실공사를 길림신문 조선문판에 보도한 한편 이 기사를 《강성일보》에 보도하여 길림시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길림시에서는 이 일을 갖고 즉각 전문회의를 소집하고 해결대책을 마련하는데 총출동했다고 한다. 이 사건에서 신문의 여론감독역할을 절실히 느낀는 신승우 선생은 그후에도 언론매체 기자로서의 사명감을 잊지 않고 여론감독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기에 노력했다. 그는 여태까지 길림신문 이외에도 《인민일보》, 《중국청년보》, 《중국환경보》, 《중국교육보》, 《길림일보》, 《연변일보》 등 수십종 간행물에 기사를 발표했으며 《중국환경보》, 《길림일보》(한문판), 《강성일보》 등 언론매체의 특약통신원으로도 활약했다.     신승우 선생은 지난 2006년 퇴직수속을 밟았지만 사업의 수요로 4년간 길림신문사에서 계속 근무하다가 2010년에야 비로소 길림신문사 촬영기자직을 그만두었다. 은퇴한후 그는 자신의 취미와 애호인 사진, 전각, 미술 작품의 정리에 모든 정력을 몰부어왔으며  “신승우사진미술전각작품집” (2006년, 중국화보출판사),  “신승우사진판화작품집”(2009년, 중국민족미술출판사), “중국사진작가가 보는 세계-신승우사진작품집”(2013년, 중국촬영출판사), “국가예술-전국실력파예술가 신승우 특집”(2015년, 중국문련국제출판사) 등 11권의 작품집을 이미 출판했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계속 정리하는데 시간을 할애하는 한편 시간이 나는대로 작품집을 출판하지 못한 주변의 예술가들을 도와 그들의 작품집을 내주는 일에 진력할것이라 밝혔다. ▣
1    조선족 연극감독 척군옥의 “비밀” 댓글:  조회:1042  추천:0  2016-08-05
글/김향덕       척군옥(戚君玉, 1983년생, 흑룡강성 수화시 태생)은  지난해 “샤넬의 비밀(夏奈尔的秘密)”이라는 작품을 갖고 혜성처럼 연극감독계렬에 입성하여 각광받은 유수의 조선족 연극감독이다. 2015년 10월 2일부터 8일까지 연극  “샤넬의 비밀”이 북경 고루서극장(鼓楼西剧场)에서 상연되였다. 작품은 한 녀성의 성장과 각성과정을 주선으로 옛 상해의 대표적인 부자집 아들과 평범한 녀성 사이의 정감 스토리를 담아내고 있다.   지난 6월의 어느 무더운 오후, 기자는 연극예술을 두고 척군옥 감독과 인터뷰를 가졌다.   연극작품 “샤넬의 비밀”       “사람마다 숙명을 짊어지고 있다. 우리는 어두움과 곤혹을 파헤치면서 살아가고 포기와 책임 가운데서 선택을 해야 한다. 운명의 십자로에 들어섰을 때 과연 우리는 가장 정확한 선택을 해야 하지 않을까……”     어두운 장막을 꿰뚫고 녀주인공 샤넬이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예시하는 대사를 읊조리며 관중석을 가로질러 무대우로 등장한다. 암담한 무대배경,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배경음악, 복고적인 옷차림을 한 배우, 조용히 숨을 죽이고 감상하는 관중들, 이러한것들이 미묘한 분위기속에서 조화를 이룬다. 시간은 어느덧 사람들을 옛 상해의 조계지시기(1937-1941년)로 빠져들게 한다.     때는 옛 상해 조계지시기, 장소는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위치한 샤넬의 복장점이다. 복장 디자이너가 되여 상해탄에서 명성을 떨친 샤넬이 자신의 복장점에서 신상발표회를 한창 준비중이였다. 그런데 흥국은행 행장의 딸인 대청아(黛青娥)가 불청객처럼 불쑥 찾아왔다. 그녀의 또 다른 신분은 바로 샤넬의 애인이였던 남자주인공 륙백읍(陆柏邑)의 안해라는것이다. 그러나 륙백읍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죽는 탓에 대청아는 미망인이 되고 말았다. 대청아가 샤넬을 찾아 따지는 장면을 시작으로 샤넬의 신분, 성장과정, 인간관계 등 비밀이 일일이 풀어져 나아가면서 연극은 계속되였다.     극중에서 샤넬은 출신이 비천한 녀성이였지만 시종 세속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고 특유의 녀성적인 강인함을 소지한 인물이였다. 그녀는 부자집에서 말을 기르는 시녀로 있으면서도 대도시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자신의 손재주를 살려 디자이너의 꿈을 꾸었다. 사랑문제에서도 샤넬은 과감히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녀성이였다. 그녀는 귀공자 애제안의 가식적인 추구에 놀아나지 않았고 륙백읍의 배신을 두고도 자신의 판단으로 대처할 줄 알았다. 한 마디로 샤넬은 운명에 복종하지 않는 강인한 신식녀성이였다.     극작품 “샤넬의 비밀”은 잘 짜인 스토리와 배우들의 생동한 연기력으로 관중들을 정복시켰으며 이 작품으로 척군옥 감독은 청년극작가로 각광받게 되였다. 연극감독의 길을 걷다       어릴적부터 예술에 관심이 많았고 또한 기타를 잘 다루는 부친의 영향으로 척군옥 감독은 음악과 무용을 접하게 되였다. “제가 외동으로 자라다보니 집안의 온갖 사랑을 한 몸에 지녔어요. 아버지는 저에게 피아노와 무용을 가르쳤고 어머니는 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제가 문학적인 소질을 키워가도록 도와주셨지요.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외조부, 외조모는 나에게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시면서 뿌리의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유족한 가정은 명인을 탄생시키는 필수조건은 아니였지만 아주 유리한 조건이였다. 척군옥 감독의 부모님은 일찍 1990년대 초반에 사업에 성공하여 상당한 재부를 쌓았으며 자식의 미래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했다.     16살이 되던 해에 척군옥 감독은 홀로 상경하여 북경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기숙사생활을 하면서 많은 친구들과 어울렸고 그녀는 어린 마음에 자립의 의미를 터득하게 되였다. 그러던 중에 그녀는 자신만의 꿈을 갖고 무엇인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것을 깊이 느꼈다. 척군옥 감독이 처음으로 가지게 된 꿈이 바로 작가가 되는것이였다.     작가가 되기 위해 척군옥 감독은 스스로 배움의 길을 찾아 나섰다. 그녀는 평소에 세계명작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고 직접 시나리오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단막극의 조연배우로 출연했다가 중앙희극학원(中央戏剧学院)의 조숙보(赵淑宝) 교수의 주목을 받게 됐으며 그로부터 전문지도를 본격적으로 받았다. 그후 중앙희극학원에 입학하여 연극감독을 전공하게 되였고 2011년에는 석사학위까지 따냈다.     “중앙희극학원을 다니면서 연극에 관한 공부를 계통적으로 했습니다. 연극은 동일시간에 동일한 공간에서 여러 인물들에 의해 벌어지는 이야기를 관중들에게 집중적으로 표현하는 예술이라 볼수 있습니다. 때문에 정경을 꾸며내고 인물들의 은폐된 성격을 표현해내는것이 관건입니다.”     연극과 관련해 척군옥 감독은 전문가의 시각에서 거침없이 설명을 더해준다. 사람들이 평소에 고급적인 예술로만 인식하고 거리를 두었던 연극이 실은 수없이 많은 인간성을 부각해내여 공명을 일으킬수 있다. 자신이 표현하려는 인간성을 자유자재로 만들어내고 그것을 대중들에게 보여주는것이 연극의 매력이였다. 이러한 매력에 심취된 척군옥 감독은 처녀작인 “샤넬의 비밀”을 써냈고 무대에 옮겨놓음으로서 직업 연극감독의 길을 걷게 되였다.     샤넬의 형상을 두고 척군옥 감독은 어느 한 인물을 부각하는것보다도 녀성들의 보편적인 일면을 반영하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말한다. “샤넬의 이야기는 너와 나의 이야기가 될수 있고 모든 녀성의 이야기도 될수 있습니다. 그녀는 바로 이처럼 천하의 각성한 녀성들을 대표할수 있는 신식 녀성입니다.”     샤넬처럼 대중들이 공명을 불러일으킬수 있는 인물형상을 부각하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척군옥 감독은 “샤넬의 비밀”을 창작함에 있어서 3년이라는 시간을 들였고 각본을 수없이 수정하였다. 또한 쉐익스피어, 체호브 등과 같은 세계대가들의 극작품을 모두 섭렵하면서 그들이 부각한 전형인물들을 연구했으며 창작리론뿐만 아니라 심리학, 철학 등 다방면의 지식을 습득했다.     “경전이 될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이것이 바로 척군옥 감독의 희망이자 포부였다. 민족문화에 관심을 돌리다       척군옥 감독의 남편은 오래전부터 가요계에서 명성을 떨친 이족(彝族) 가수그룹 이인제조(彝人制造)의 곡비합포(曲比哈布)이다. 예술에 대한 공동한 애호와 비슷한 추구는 그들로 하여금 부부의 연을 맺게 하였다. 그녀가 연극감독의 길을 걷게 된것도 남편의 적극적인 지지와 갈라놓을수 없었다.     “남편은 저의 튼튼한 뒤심이 되여 주었어요. 남편은 음악에 전념하였고 저는 연극작품을 창작하는데 주로 신경을 썼습니다. 겉보기에는 서로 다른 예술령역이지만 실은 교감할수 있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생활상 그들은 서로 의지하는 동반자였고 창작방면에서는 서로에게 의견을 제기할수 있는 친밀한 벗이였다. 이번  “샤넬의 비밀”을 공연함에 있어서 그녀의 남편이 음악감독을 맡아주었다.     또한 두 사람은 모두 소수민족이다보니 민족문화에 각별한 관심을 돌렸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가요계에서 민족풍의 음악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해서부터 1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곡비합포는 시종 음악으로 이족의 정신문화를 반영해내는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척군옥 감독은 몸에 배인 조선족 녀성의 유순함으로 집안의 내조역할을 잘 해왔을 뿐만 아니라 녀성도 자기만의 사업에 몰두해야함을 몸소 실천해왔다.       “고향에 대한 어릴적 인상은 가물가물하지만 부모님들이 김장을 담그고 우리말을 가르쳤던 기억만은 새록새록 합니다.” 조선족 관련 제재로 극작품을 내놓을수 있지 않을가? 어느날 그는 이런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는것이다. 그 꿈이 둥글어지면서 점차 마음속 비밀로 자리잡기 시작했다는것이다. 현재 그는 조선어를 아주 잘 구사하지는 못하지만 자주 사용하도록 노력한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그녀 필하의 샤넬은 꿈을 위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자신의 모습과도 닮았다. 샤넬은 대중들이 공감하는 강인한 녀성이자 척군옥 감독 자신이기도 했다. 더욱더 많은 우수작품을 내놓기를 그녀에 기대해 보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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