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한직능
나는 내몽골 우란호트시에서 약 40리 떨어진 뽀다리칸 조선족 마을에서 태여났다. 지난 세기50년대초 인구대이동으로 우리집은 우란호트시에서 약 20리 떨어진 고성촌으로 이사하였고 제3대에 편입되였다. 그리고 몽골족과 한족이 위주인 졸라무촌에서 나는 유년시기를 보내였다. 고성촌은 일년사계절 몽골바람이 기승을 부리고 겨울이 되면 혹한에 폭설이 자주 내리는 대흥안령 끝자락의 한 빈곤한 마을이다. 100여호가량 되는 이 마을은 나름대로 환경과 자연에 잘 적응하면서 민족전통을 개혁개방전까지만 하여도 그대로 유지하며 살아온 민족공동체이다. 해마다 설날, 정월대보름, 오월단오, 추석, 동지가 되면 마을 전체가 한복을 차려 입고 함께 먹고 마시고 춤추며 즐겼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일은 바로 설 제사이다.
겨울은 농한기라서 할 일이 없는데다 일년 농사하여 먹을것이 많은 때이다. 집집마다 이맘 때면 설음식과 제사음식을 준비하느라 눈코뜰새 없다. 집집마다 거의 제사를 치르기 때문에 조과, 포(육포,어포), 반(흰쌀밥), 나물무침 등을 만드는것은 기본이다. 제례상에 올리는 떡은 절편, 인절미, 시루떡, 송편, 경단 같은것이 있는데 주로 편류(녹두고물편, 흑임자고물편)를 사용하며 제사식 전날 미리 쌀을 담그고 편에 고물로 얹을 녹두와 팥, 그리고 흑임자를 물에 불려 껍질을 벗겨둔다. 제사 당일 새벽 일찍 담가두었던 쌀을 가루로 빻은 뒤 고물을 얹어 찐다. 정성스럽게 찐 떡은 여러개 포개여 고인다. 그믐날 저녁에는 방마다 호랑불을 환하게 켜고 그 누구도 잠 잘 생각을 못한다. 잠들었다가는 귀신이 와서 이튿날 두 눈섭을 하얗게 만든다고 얼음장을 주어서 설친 잠을 자기 일쑤다.
제사는 사람이 죽어도 혼백은 남아있다는 원리로 살아 있을 때처럼 조상을 모시고 그것이 효도라는 조상 숭배사상이였다. 우리 집은 4대조까지 설날과 추석에 제사를 지냈다. 나는 해마다 제사가 오는 날이 제일 감미로운 때이다. 평소 사과와 배는 구경도 못했지만 제례상을 올릴 때 사과와 배는 겉껍질을 벗겨야 함으로 그것도 버리기 아까워서 모아두었다가 내가 먹어 치우군 했었다. 제사에 올리는 음식은 양식과 진설에서 신위로부터 보아 제1렬에 메(밥)와 갱(국), 제2렬에 적과 전 , 제3렬에 탕, 제4렬에 포(脯,육포,어포)와 나물, 제5렬에 과일과 조과를 놓는다. 각 렬의 진설원칙도 정해져서 “좌포우혜”라 하여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보았을 때 왼편에 포를, 오른편에 식혜를 놓고 “어동육서”라 하여 어류는 동편, 육류는 서편에 두었다. “두동미서”라 하여 생선의 머리가 동쪽으로, 꼬리가 서편에 향하도록 하고 “생동숙서”라 하여 동쪽에 김치를,서쪽에 익힌 나물을 진설한다. “좌메우갱”이라하여 밥은 왼편에 국은 오른편에 놓는다. “홍동백서”라 하여 동쪽에 붉은 과일을 서쪽에 흰 과일을 놓고 그 가운데 다식이나 산자, 약과 등 조과를 둔다.
해뜨기전에 일어나서 깨끗이 세수를 하고 아버지는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는다. 그러나 홀기(의식의 순서)를 읽는다거나 축을 읽는 일은 없었고 지방을 쓰고 신위를 모시는 일도 거의 하지 않았다. 아마 간소화된것 같다. 아버지가 술을 한잔 따라서 피운 향을 중심으로 시계바늘 방향으로 한바뀌 돌린 다음 그릇에 붓고 모두가 정중히 큰 절을 두번 올린다. 이는 토지신을 숭배하여 농사가 잘 되라고 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다음 아버지가 정중히 술 한잔씩 부어서 4대조에게 올리고 큰 절을 두번 한다. 종손의 형제들, 종손의 아들, 손자 등 순위에 따라 각각 술을 붓고 큰 절을 올린다(실은 아버지도 외동이고 나도 외동이여서 이 절차는 금방 끝났다). 밥그릇마다 숟가락 두개를 꽂는다. 여덟모의 저가락은 먼저 어류우에다 얹었다가 절차가 진행되면서 한번 옮겨 찐 통닭우에 둔다. 그리고 종손이 술을 올린다음 일제히 큰 절을 올리고 종손이 헛기침을 할 때까지 엎드려서 소원을 빈다. 그 다음 숟가락에 밥을 조금씩 떠서 국에 넣고 숟가락도 국에 둔다. 술잔에 술을 첨잔하여 부은 후 정중히 큰 절을 두번 한다. 제사 절차는 끝나고 제사술을 한모금씩 마시는데 어린 나이지만 그때부터 나는 술맛을 알았다. 밥 한 그릇은 뚜껑을 닫아 저녁 때까지 찬장에 보관해 둔다. 비닐봉투를 네개 준비하여 각 봉투마다 각종 채소와 고기, 사탕, 술 등을 조금씩 넣고 그 봉투를 집앞의 큰 나무 밑에 버려둔다.
제례상의 음식들은 가족의 아침식사외에 대부분 점심때가 되면 마을 어른들을 청해다가 나누어 먹군 했다. 이 때 제일 신나는 사람들은 어른들보다 아이들이다. 아무리 빈곤해도 설이 되면 거덜거덜한 헌 옷을 버리고 새 목천 옷과 새 양말을 신고서 들까불며 삼삼오오로 떼를 지어 설인사를 한다는 빛깔 좋은 구실하에 좋은 음식 포식할 심산으로 상로인들 집부터 들쑤신다. 신을 벗고 구들에 올라가서 꾸벅 큰 절을 하면 한복을 차려입은 로인들은 만면에 웃는 얼굴로 “장가 갈 꿈 잘 꿨냐?”라는 덕담을 하면서 어느새 쟁반우에 다과나 떡을 내놓으며 먹으라 한다. 내놓을것이 많지 못해 맛이나 보는 정도지만 감칠맛 나서 후딱 해치우고는 또 다른집으로 향한다. 온 종일 쏘다니다 저녁이 되여 집에 올 때는 이미 올챙이 배가 된다.
상로인들은 다른것은 다 잊어도 어느 집 어느 아이가 설 인사를 하지 않음을 잘도 기억하고 “가정교육을 어찌 하였노?”하며 대노한다. 집에 오면 부모님들은 귀신같이 다 알고서 결례가 있었다고 호되게 꾸지람 하거나 귀한 자식 매 한개 더 때리는 격으로 걸핏하면 회초리로 종아리를 내리친다.
1958년부터 공공식당을 하면서 제례상도 할수 없었고 그후 닥쳐온 “4청운동”이나 “문화대혁명”으로 하여 온 동네의 제례상은 어디론가 모두 증발했다. 개혁개방후 량친부모가 다 돌아가신다음 우리집 제례상은 지금까지 내가 이어가고 있다. 도시에 살면서 조과나 떡을 만드는 일은 없고 제사음식을 거의 시장에서 구입하면 그만이다.
설이 오면 해마다 제례상을 하느라 나는 힘들었다. 집사람은 그래도 잘 따라주었으나 애들이 모두 한족학교에 다니다보니 제사지내는것을 마음속으로는 못마땅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견지하며 제사를 지냈는지 나 자신도 좀 모호하지만 가가호호 다 가족문화가 있다는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우리민족의 문화의 핵심은 효문화이고 제사는 효문화의 중요한 일환이며 보귀한 민족전통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은 자기의 부모를 선택할수 없고 자기의 민족을 선택할수 없듯이 주어진 운명을 직시해야 한다. 민족도 출생도 전통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남을 진정 사랑할수 있다 하겠는가?
지금은 이주민 2세들마저도 제사를 지내는 집은 극히 드물고 민족문화에 대한 인식도 갈팡질팡하고 있다. 우리집도 그 어느 대에 가서 동화되여 설 제사도 없어지고 청주한씨 세헌공파 장손의 혈맥이 이름없이 사라질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설 제사를 고집하는것은 내가 살아있는 기간이라도 조상들의 유훈을 지키고 정성을 다해 모시고 싶음이다. 나의 솔선적인 행동이 자식들에게 무언의 교육이 되여 설 제사가 오래오래 이어가기를 기대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