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창석
구술자: 현귀춘(玄贵春1937-), 조선 함경북도 명청군 출생, 연길현 해란촌 정착, 1950년 입대, 북대황 룡진농장(부대농장) 농장장, 제남군구 군마장 책임자, 제남군구 공장관리국 국장(사급) 력임.
취재일시: 2014년 12월 8일
취재지점: 청도시 현귀춘 로인댁
취재자: 김광현 김창석
명천군에서 고고성을
저는 1937년 5월 25일에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아버지 현창록(玄昌禄)과 어머니 김모란(金幕兰)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여났습니다. 제가 태여날 때 집에는 두 누님과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리순금(李顺今)이라 불렀고 큰 누님은 현천옥(玄千玉), 둘째 누님은 현현옥(玄贤玉)이라 불렀습니다.
저의 할아버지 현룡호(玄龙湖)는 연주 현씨 가문의 30대 장손으로 일찍 사망하다보니 할머니 리순금은 28살 젊은 나이에 과부로 한평생을 외독자인 저의 아버지와 손군들에게 모든 희망을 기탁하고 살아온 분이랍니다.
그런 가문에서 제가 현씨 가문의 5대 장손으로 태여나다보니 다들 저를 금산대 모시듯 했답니다. 누님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온 동네를 뛰여다니면서 남동생이 태여났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고 합니다.
당시 제가 태여난 함경북도 명천군의 우리 현씨네는 마을 둘레에 토성을 두르고 50여 가구가 모여살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그 후날 어머니께서 들려주던 한가지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 당시 명천군에서 활쏘기경기가 제법 자주 있었나 봅니다. 아버지가 워낙에 미남이고 총명하여 활쏘기를 잘하는지라 활쏘기경기가 있을 때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멋진 조선복장을 지어 입혀서 내보냈답니다. 누구보다 표가 나게 민족복장을 차려입은 아버지는 그에 걸맞게 활도 참 잘 쏘았다고 합니다. 워낙에 성품이 좋은 분인데다 목수재간이 있어 늘 남의 집 잔일들을 많이 해주었던터라 아버지가 활시위를 당길라치면 온 동네 남녀로소가 응원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버지는 활쏘기경기 때마다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을 뿐만 아니라 경기에서 늘 좋은 성적을 따냈다고 합니다.
명천군에서 온성군으로
제가 태여나자 아버지께서 저에게 현병덕(玄炳德)이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후 저의 손아래로 현병철(玄炳喆), 현병삼(玄炳三)이라 부르는 두 동생이 태여났는데 불행하게도 단명으로 두 돐을 넘기지 못했다고 합니다.
집안에 불길한 액운이 든거라고 생각한 할머니는 밤도와 두만강을 건너 중국 훈춘 량수천자라는 곳에 사는 무당할매를 찾아가 집안의 불길한 기운을 제거해달라고 간청하였다고 합니다. 그 굿쟁이할매가 하는 말이 집안의 나쁜 기운은 자기가 이미 말끔히 제거했노라고 하면서 문제는 현재 집안에서 금이야 옥이야 하는 그 장손의 이름을 개명하지 않으면 또다시 액운이 찾아들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예 이름자를 현귀춘(玄贵春)으로 개명해가지고 돌아왔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황당한 얘기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사는 내내 늘 그 굿쟁이할매가 많이 궁금했습니다. 과연 그 굿쟁이할매가 나한테 복을 가져다주어서인지 내 인생도 촌놈치고는 꽤나 잘 풀린 인생이라고 나름 고맙게 생각합니다. 물론 나 본인이 엄청난 노력의 대가를 치러온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1940년 한 겨울날, 우리 가문이 명천군에서 온성군으로 이사를 갈 때 제 나이가 겨우 3살이였기에 당시 상황은 거의 기억에 없습니다. 후날 아버지한테서 들은바에 의하면 당시 명천군에서 온성군으로 이주하게 된 주되는 원인이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여 명천군에서 더는 살길이 막막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허구한 날 뼈빠지게 농사를 해도 배만 곯으니 별수 없어 내지에서 변두리나 골짜기쪽으로 땅이라도 뚜져먹을 곳을 찾아 더 깊이 들어간거지요.
사실 명천군 하면 함경북도에서는 청진이나 김책 다음으로 동해바다를 마주한 해변지역인지라 사람 살기에는 좋은 고장이였지요. 그런 명천군에서 조선반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온성군으로 이사갈려면 화성군, 어랑군, 경성군, 부령군, 라진시, 선봉군, 온덕군, 새별군을 거쳐야 하는데 이건 거의 함경북도를 남북으로 횡단하는 셈이지요. 그때 온 집식구가 몇날 며칠 걷고 또 걸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우리가 이사 온 온성군에서 두만강가에 나가 건너편으로 돌을 휙 던져버리면 “풍덩-”하고 떨어지는 곳이 바로 도문강변이지요. 중국의 최북단에 막하가 있는것처럼 조선의 최북단에 온성군이 있다고 보면 아마도 쉽게 리해가 갈겁니다.
우리 가족이 온성군으로 이주할 때 로할아버지 현희남과 28살에 과부로 된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두 누님과 저까지 일곱식솔이였습니다.
온성군으로 온 후 어머니가 두부장사, 떡장사를 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누님들이 어머니를 많이 도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할머니와 두 누님은 온성탄광에 가서 석탄을 주어서 얼어죽지 않을 정도로 집안을 덥히며 살았고 그때 온 집안 일곱식솔이 이불 한두채에 발만 밀어넣고 다들 새우잠을 자면서 지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까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아버지는 16살에 장가를 갔다고 하는데 그때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두살 년상인 18살이였다고 합니다. 그때는 다들 그랬나 봅니다. 아버지가 늘 밖으로 목수재간을 가지고 돈 번다고 나돌았기에 어머니는 로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를 모시고 두 누님과 저를 데리고 근근득식으로 생계를 유지했기에 당시 우리 집은 엄청 가난했었습니다.
제가 5살나던 해의 일입니다. 당시 어머니의 언니(큰이모)가 온성에서 복장업에 정미소까지 운영하는 차씨 성을 가진 가문에 시집을 갔는데 온성에서 두번째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부자집이였습니다. 저의 큰누님이 그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는데 저도 가끔 누님을 뵈러 간답시고 그 집에 갔는데 걸친 옷이 하도 초라해서 어지럽다고 구들에는 올라가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집은 왜 만날 아등바등하는데 이 모양 이 꼴로 살지? 어떻게 하면 우리도 잘살수 없을까?” 어린 나이임에도 저는 늘 이런 고민을 했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꽤나 솜씨 좋은 목수였는데 그때(1945년도)쯤 해서 이모부한테서 돈을 얼마간 꾸었나 봅니다. 그 돈이 이모부의 돈인지 이모부 동생의 돈인지는 딱히 모르나 여하튼 이모부의 동생되는 사람이 자주 저의 집으로 빚받이를 와서는 꼴사납게 굴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아버지가 거의 밖으로만 도는 품팔이인생을 사는 처지이다보니 저의 집안 힘으로는 그 돈을 갚을 여력이 없었지요. 빚을 갚지 못하게 되자 이모부의 동생은 저의 집 가마를 뽑아 밖에 마구 내동댕이쳤습니다. 그때 서러움을 달랠길 없어 어머니는 동네어구에 세워진 돌하루방을 부여잡고 아주 서럽게 통곡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얼른거리는듯 합니다. 두 누이와 저도 어린 나이지만 어머니의 팔다리를 부여잡고 함께 울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주 어렸지만 이를 앙다물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가난이 원쑤로구나, 가난하면 이렇게 무시당하는구나, 하루 빨리 가난에서 해탈되여야지…”
화김에 밟아버린 간도행
그러던 1945년의 어느날 고생고생하던 큰누님이 갑자기 시집을 간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누님은 째지게 가난한 집안 때문에 아니 그것도 아버지의 강권에 못이겨 마음에도 내키지 않는 결혼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큰누님은 아버지와 함께 목수일을 하던 백씨 성을 가진 사장의 조카뻘 되는 백용산이라 부르는 청년에게 시집을 가기로 했는데 그 매제가 될 사람이 키도 작고 생김생김도 누님하고는 격이 안되는 사람이였습니다. 누님은 그 당시 동네에서 일등 신부감으로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아버지의 억지에 못 이겨 마음에 내키지 않는 시집을 가게 되였으니 당사자는 물론 식구들 모두가 많이 속상했던거지요.
결혼을 앞두고 어머니께서 늘 아버지를 책망하면서 하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고놈의 술이 문제라니까. 술만 거나하면 사촌한테 기와집을 지어준다고 당신 술마시고 그런 답을 준거잖아요. 고놈의 술이면 마누라도 누가 달라면 주겠다는 그런 답복을 할 당신이라니까? 차라리 나를 팔아먹지 왜 애매한 딸을 말도 안되는 사람한테 주기로 한건데?”
어머니도 어지간히 화가 났으면 그 며칠은 시도 때도 없이 바가지를 긁어댔습니다.
아버지도 자신의 그런 못난 처사가 마음에 걸렸던지 어느날 간다온다는 말도 없이 훌쩍 사라져버렸습니다. 어디로 뭘하러 가버렸는지 누구도 몰랐습니다. 워낙에 떠돌이인생을 사는 목수이니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썩 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그때 그 착잡한 마음에 휭하니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합니다. 아마도 속상한 김에 돈이라도 왕창 벌어보려고, 아니 그놈의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보겠다는 오기만을 가지고 훌쩍 떠났나 봅니다.
화김에 북간도로 가버린 아버지는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였습니다. 하늘처럼 믿어오던 31대 장손이 갑자기 없어졌으니 급해난건 누구보다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그 외독자 아들 하나만 믿고 살아온터라 옳던 그르던 아버지편이였습니다.
“귀춘아, 우리가 이렇게 손놓고 한정없이 아비를 기다리기만 해서야 되겠니? 이렇게 살다가는 우리 모두가 굶어죽을터인데 아비를 찾아 떠나야겠다!”
어느날 할머니가 비장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때가 1946년이 막가는 한겨울이라 기억됩니다. 할머니는 장손인 저를 앞세우고 아버지를 찾아서 무작정 두만강을 건너기로 용단을 내렸습니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온성을 떠나 남양을 걸쳐 두만강변을 따라 걷고 또 걸었습니다. 도중에 두만강변의 한 마을에 농사를 짓고 있는 큰누님집에 찾아가서 하루밤을 묵고 그 이튿날 아침밥을 어설프게 먹고 또 걸음을 재우쳤습니다.
두만강을 건너 걷고 또 걷다가 해란강가에 닿았습니다. 거기서 크게 용기를 얻어 다시 해란강연안을 따라 걸음을 재우쳤습니다. 눈에 싸인 논둑길을 따라 걷고 또 걸어서 어느날 해질녁에야 연길현 동성용 해란촌이라는 곳에 당도하였습니다. 그곳에 할머니의 본가집이 있었던것입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십중팔구는 외가에 찾아갔을거라는 짐작을 했나 봅니다.
할머니는 해란촌에 도착하자 곧장 본가집으로 가서 우선 아버지부터 찾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외가에 얹혀살면서 은근히 우리 일가를 중국으로 데려올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 우리가 선손을 써 아버지를 찾아 중국으로 건너온 겁니다.
아버지는 외가집 아래목 사랑채에 별도로 온돌을 놓고 나와 할머니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그러다가 1947년도에 아버지가 다시 조선 온성에 나가서 어머니, 작은 누님, 3살되는 녀동생 금자를 업고 보따리를 걸머지고 해란촌에 오게 되여 그때에야 우리 온 가정이 해란촌에 한데 모여 살게 되였답니다.
북간도에서도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산다는 이곳 세전이벌, 우리가 고생고생해서 도착한 곳이 바로 그 세전이벌 동북쪽 변두리에 위치한 동성용 해란촌이였습니다.
마을뒤로 유유히 해란강이 굽이돌아 흐르고 그 해란강 량안으로 세전이벌이라 부르는 바둑판같은 논이 아득히 펼쳐져있어 이곳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아하, 여기라면 배를 곯을 걱정은 안해도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기에다 드넓은 세전이벌 평야를 떡하니 지키고선 하얀 백설을 떠인 모아산이 마을뒤에 병풍을 두르고 있어 더더구나 가관이였습니다.
당시 해란촌은 “8.15”광복을 맞이한 이듬해라 꽤나 분주했습니다.
어찌 보면 당시 저의 아버지가 이곳 세전이벌에 괴나리보짐을 풀어놓은건 아주 현명한 선택이였던것 같습니다. 부친께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이곳 해란촌에 외가집이 있어 한동안 머물러 앉은건데 하도 목수일을 잘하니까 동네 어른들이 아예 이곳에서 함께 살자고 발목을 잡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해란촌에 도착한 그 이듬해 촌정부에서는 진흙벽돌(투피)로 지은 두칸짜리 낡은 집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를 찾아 떠난 할머니의 결단이 참으로 영명했던것 같습니다.
“호박이 넝쿨채 굴러 들어온다”고 우리가 해란촌에 도착하기 바로 몇달전에 중앙에서 “토지문제에 관한 지시(5.4지시)”를 하달했는데 동북 각지의 조선족집거구들에서 선참으로 기세 드높은 토지개혁운동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우리 집은 수전 18무 , 한전 15무를 분배받았습니다. 이국타향에 도착하자마자 그냥 땅부터 분배받았으니 이거야말로 덩실덩실 춤추고 싶은 마음이였지요. 그때 그 즐거워하던 온 집 식구들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지금도 보는듯 합니다.▣(책임편집/김향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