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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김창석 구술자: 현귀춘(玄贵春1937-), 조선 함경북도 명청군 출생, 연길현 해란촌 정착, 1950년 입대, 북대황 룡진농장(부대농장) 농장장, 제남군구 군마장 책임자, 제남군구 공장관리국 국장(사급) 력임. 취재일시: 2014년 12월 8일 취재지점: 청도시 현귀춘 로인댁 취재자: 김광현 김창석   명천군에서 고고성을 저는 1937년 5월 25일에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아버지 현창록(玄昌禄)과 어머니 김모란(金幕兰)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여났습니다. 제가 태여날 때 집에는 두 누님과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리순금(李顺今)이라 불렀고 큰 누님은 현천옥(玄千玉), 둘째 누님은 현현옥(玄贤玉)이라 불렀습니다. 저의 할아버지 현룡호(玄龙湖)는 연주 현씨 가문의 30대 장손으로 일찍 사망하다보니 할머니 리순금은 28살 젊은 나이에 과부로 한평생을 외독자인 저의 아버지와 손군들에게 모든 희망을 기탁하고 살아온 분이랍니다.  그런 가문에서 제가 현씨 가문의 5대 장손으로 태여나다보니 다들 저를 금산대 모시듯 했답니다. 누님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온 동네를 뛰여다니면서 남동생이 태여났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고 합니다. 당시 제가 태여난 함경북도 명천군의 우리 현씨네는 마을 둘레에 토성을 두르고 50여 가구가 모여살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그 후날 어머니께서 들려주던 한가지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 당시 명천군에서 활쏘기경기가 제법 자주 있었나 봅니다. 아버지가 워낙에 미남이고 총명하여 활쏘기를 잘하는지라 활쏘기경기가 있을 때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멋진 조선복장을 지어 입혀서 내보냈답니다. 누구보다 표가 나게 민족복장을 차려입은 아버지는 그에 걸맞게 활도 참 잘 쏘았다고 합니다. 워낙에 성품이 좋은 분인데다 목수재간이 있어 늘 남의 집 잔일들을 많이 해주었던터라 아버지가 활시위를 당길라치면 온 동네 남녀로소가 응원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버지는 활쏘기경기 때마다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을 뿐만 아니라 경기에서 늘 좋은 성적을 따냈다고 합니다.    명천군에서 온성군으로 제가 태여나자 아버지께서 저에게 현병덕(玄炳德)이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후 저의 손아래로 현병철(玄炳喆), 현병삼(玄炳三)이라 부르는 두 동생이 태여났는데 불행하게도 단명으로 두 돐을 넘기지 못했다고 합니다.  집안에 불길한 액운이 든거라고 생각한 할머니는 밤도와 두만강을 건너 중국 훈춘 량수천자라는 곳에 사는 무당할매를 찾아가 집안의 불길한 기운을 제거해달라고 간청하였다고 합니다. 그 굿쟁이할매가 하는 말이 집안의 나쁜 기운은 자기가 이미 말끔히 제거했노라고 하면서 문제는 현재 집안에서 금이야 옥이야 하는 그 장손의 이름을 개명하지 않으면 또다시 액운이 찾아들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예 이름자를 현귀춘(玄贵春)으로 개명해가지고 돌아왔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황당한 얘기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사는 내내 늘 그 굿쟁이할매가 많이 궁금했습니다. 과연 그 굿쟁이할매가 나한테 복을 가져다주어서인지 내 인생도 촌놈치고는 꽤나 잘 풀린 인생이라고 나름 고맙게 생각합니다. 물론 나 본인이 엄청난 노력의 대가를 치러온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1940년 한 겨울날, 우리 가문이 명천군에서 온성군으로 이사를 갈 때 제 나이가 겨우 3살이였기에 당시 상황은 거의 기억에 없습니다. 후날 아버지한테서 들은바에 의하면 당시 명천군에서 온성군으로 이주하게 된 주되는 원인이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여 명천군에서 더는 살길이 막막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허구한 날 뼈빠지게 농사를 해도 배만 곯으니 별수 없어 내지에서 변두리나 골짜기쪽으로 땅이라도 뚜져먹을 곳을 찾아 더 깊이 들어간거지요.  사실 명천군 하면 함경북도에서는 청진이나 김책 다음으로 동해바다를 마주한 해변지역인지라 사람 살기에는 좋은 고장이였지요. 그런 명천군에서 조선반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온성군으로 이사갈려면 화성군, 어랑군, 경성군, 부령군, 라진시, 선봉군, 온덕군, 새별군을 거쳐야 하는데 이건 거의 함경북도를 남북으로 횡단하는 셈이지요. 그때 온 집식구가 몇날 며칠 걷고 또 걸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우리가 이사 온 온성군에서 두만강가에 나가  건너편으로 돌을 휙 던져버리면 “풍덩-”하고 떨어지는 곳이 바로 도문강변이지요. 중국의 최북단에 막하가 있는것처럼 조선의 최북단에 온성군이 있다고 보면 아마도 쉽게 리해가 갈겁니다.  우리 가족이 온성군으로 이주할 때 로할아버지 현희남과 28살에 과부로 된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두 누님과 저까지 일곱식솔이였습니다.  온성군으로 온 후 어머니가 두부장사, 떡장사를 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누님들이 어머니를 많이 도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할머니와 두 누님은 온성탄광에 가서 석탄을 주어서 얼어죽지 않을 정도로 집안을 덥히며 살았고 그때 온 집안 일곱식솔이 이불 한두채에 발만 밀어넣고 다들 새우잠을 자면서 지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까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아버지는 16살에 장가를 갔다고 하는데 그때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두살 년상인 18살이였다고 합니다. 그때는 다들 그랬나 봅니다. 아버지가 늘 밖으로 목수재간을 가지고 돈 번다고 나돌았기에 어머니는 로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를 모시고 두 누님과 저를 데리고 근근득식으로 생계를 유지했기에 당시 우리 집은 엄청 가난했었습니다. 제가 5살나던 해의 일입니다. 당시 어머니의 언니(큰이모)가 온성에서 복장업에 정미소까지 운영하는 차씨 성을 가진 가문에 시집을 갔는데 온성에서 두번째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부자집이였습니다. 저의 큰누님이 그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는데 저도 가끔 누님을 뵈러 간답시고 그 집에 갔는데 걸친 옷이 하도 초라해서  어지럽다고 구들에는 올라가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집은 왜 만날 아등바등하는데 이 모양 이 꼴로 살지? 어떻게 하면 우리도 잘살수 없을까?” 어린 나이임에도 저는 늘 이런 고민을 했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꽤나 솜씨 좋은 목수였는데 그때(1945년도)쯤 해서 이모부한테서 돈을 얼마간 꾸었나 봅니다. 그 돈이 이모부의 돈인지 이모부 동생의 돈인지는 딱히 모르나 여하튼 이모부의 동생되는 사람이 자주 저의 집으로 빚받이를 와서는 꼴사납게 굴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아버지가 거의 밖으로만 도는 품팔이인생을 사는 처지이다보니 저의 집안 힘으로는 그 돈을 갚을 여력이 없었지요. 빚을 갚지 못하게 되자 이모부의 동생은 저의 집 가마를 뽑아 밖에 마구 내동댕이쳤습니다. 그때 서러움을 달랠길 없어 어머니는 동네어구에 세워진 돌하루방을 부여잡고 아주 서럽게 통곡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얼른거리는듯 합니다. 두 누이와 저도 어린 나이지만 어머니의 팔다리를 부여잡고 함께 울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주 어렸지만 이를 앙다물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가난이 원쑤로구나, 가난하면 이렇게 무시당하는구나, 하루 빨리 가난에서 해탈되여야지…”   화김에 밟아버린 간도행 그러던 1945년의 어느날 고생고생하던 큰누님이 갑자기 시집을 간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누님은 째지게 가난한 집안 때문에 아니 그것도 아버지의 강권에 못이겨 마음에도 내키지 않는 결혼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큰누님은 아버지와 함께 목수일을 하던 백씨 성을 가진 사장의 조카뻘 되는 백용산이라 부르는 청년에게 시집을 가기로 했는데 그 매제가 될 사람이 키도 작고 생김생김도 누님하고는 격이 안되는 사람이였습니다. 누님은 그 당시 동네에서 일등 신부감으로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아버지의 억지에 못 이겨 마음에 내키지 않는 시집을 가게 되였으니 당사자는 물론 식구들 모두가 많이 속상했던거지요. 결혼을 앞두고 어머니께서 늘 아버지를 책망하면서 하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고놈의 술이 문제라니까. 술만 거나하면 사촌한테 기와집을 지어준다고 당신 술마시고 그런 답을 준거잖아요. 고놈의 술이면 마누라도 누가 달라면 주겠다는 그런 답복을 할 당신이라니까? 차라리 나를 팔아먹지 왜 애매한 딸을 말도 안되는 사람한테 주기로 한건데?” 어머니도 어지간히 화가 났으면 그 며칠은 시도 때도 없이 바가지를 긁어댔습니다. 아버지도 자신의 그런 못난 처사가 마음에 걸렸던지 어느날 간다온다는 말도 없이 훌쩍 사라져버렸습니다. 어디로 뭘하러 가버렸는지 누구도 몰랐습니다. 워낙에 떠돌이인생을 사는 목수이니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썩 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그때 그 착잡한 마음에 휭하니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합니다. 아마도 속상한 김에 돈이라도 왕창 벌어보려고, 아니 그놈의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보겠다는 오기만을 가지고 훌쩍 떠났나 봅니다. 화김에 북간도로 가버린 아버지는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였습니다. 하늘처럼 믿어오던 31대 장손이 갑자기 없어졌으니 급해난건 누구보다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그 외독자 아들 하나만 믿고 살아온터라 옳던 그르던 아버지편이였습니다.  “귀춘아, 우리가 이렇게 손놓고 한정없이 아비를 기다리기만 해서야 되겠니? 이렇게 살다가는 우리 모두가 굶어죽을터인데 아비를 찾아 떠나야겠다!” 어느날 할머니가 비장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때가 1946년이 막가는 한겨울이라 기억됩니다. 할머니는 장손인 저를 앞세우고 아버지를 찾아서 무작정 두만강을 건너기로 용단을 내렸습니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온성을 떠나 남양을 걸쳐 두만강변을 따라 걷고 또 걸었습니다. 도중에 두만강변의 한 마을에 농사를 짓고 있는 큰누님집에 찾아가서 하루밤을 묵고 그 이튿날 아침밥을 어설프게 먹고 또 걸음을 재우쳤습니다.  두만강을 건너 걷고 또 걷다가 해란강가에 닿았습니다. 거기서 크게 용기를 얻어 다시 해란강연안을 따라 걸음을 재우쳤습니다. 눈에 싸인 논둑길을 따라 걷고 또 걸어서 어느날 해질녁에야 연길현 동성용 해란촌이라는 곳에 당도하였습니다. 그곳에 할머니의 본가집이 있었던것입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십중팔구는 외가에 찾아갔을거라는 짐작을 했나 봅니다. 할머니는 해란촌에 도착하자 곧장 본가집으로 가서 우선 아버지부터 찾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외가에 얹혀살면서 은근히 우리 일가를 중국으로 데려올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 우리가 선손을 써 아버지를 찾아 중국으로 건너온 겁니다. 아버지는 외가집 아래목 사랑채에 별도로 온돌을 놓고 나와 할머니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그러다가 1947년도에 아버지가 다시 조선 온성에 나가서 어머니, 작은 누님, 3살되는 녀동생 금자를 업고 보따리를 걸머지고 해란촌에 오게 되여 그때에야 우리 온 가정이 해란촌에 한데 모여 살게 되였답니다. 북간도에서도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산다는 이곳 세전이벌, 우리가 고생고생해서 도착한 곳이 바로 그 세전이벌 동북쪽 변두리에 위치한 동성용 해란촌이였습니다.  마을뒤로 유유히 해란강이 굽이돌아 흐르고 그 해란강 량안으로 세전이벌이라 부르는 바둑판같은 논이 아득히 펼쳐져있어 이곳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아하, 여기라면 배를 곯을 걱정은 안해도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기에다 드넓은 세전이벌 평야를 떡하니 지키고선 하얀 백설을 떠인 모아산이 마을뒤에 병풍을 두르고 있어 더더구나 가관이였습니다. 당시 해란촌은 “8.15”광복을 맞이한 이듬해라 꽤나 분주했습니다.  어찌 보면 당시 저의 아버지가 이곳 세전이벌에 괴나리보짐을 풀어놓은건 아주 현명한 선택이였던것 같습니다. 부친께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이곳 해란촌에 외가집이 있어 한동안 머물러 앉은건데 하도 목수일을 잘하니까 동네 어른들이 아예 이곳에서 함께 살자고 발목을 잡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해란촌에 도착한 그 이듬해 촌정부에서는 진흙벽돌(투피)로 지은 두칸짜리 낡은 집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를 찾아 떠난 할머니의 결단이 참으로 영명했던것 같습니다.  “호박이 넝쿨채 굴러 들어온다”고 우리가 해란촌에 도착하기 바로 몇달전에 중앙에서 “토지문제에 관한 지시(5.4지시)”를 하달했는데 동북 각지의 조선족집거구들에서 선참으로 기세 드높은 토지개혁운동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우리 집은 수전 18무 , 한전 15무를 분배받았습니다. 이국타향에 도착하자마자 그냥 땅부터 분배받았으니 이거야말로 덩실덩실 춤추고 싶은 마음이였지요. 그때 그 즐거워하던 온 집 식구들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지금도 보는듯 합니다.▣(책임편집/김향덕)
 글/김원범        우리 민족의 천재적인 작곡가 홍란파(洪蘭坡, 본명은 홍영후1898.4-1941.8)라면 일부 음악연구자와 작곡가들을 제외하고는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가 작곡한 노래만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고 있다. 홍란파의 가요들중 “봉선화”가 대표작이라면 동요 대표작은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고향의 봄”이다.     필자도 그전에는 홍란파에 대해 구체적으로 잘 몰랐다. 다만 대중들이 즐겨부르는 노래를 지은 작곡가라는 생각에만 그쳤을 뿐이였다. 련련이 뻗은 삼천리 금수강산에 연분홍 진달래가 곱게 피여나는 지난 4월초, 필자는 한국에 갔다가  홍란파의 생가를 찾아뵙는 기회가 있었다.     필자는 그의 생가를 돌아본후 일부 작곡가와 음악평론가들을 만나 홍란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며 문헌자료들도 찾아보았다. 조선의 유명한 음악평론가인 최창호 선생이 1995년 평양출판사에서 출판한 “홍란파의 ‘봉선화와 그의 가요들’”이란 서적과 한국의 “두산백과”, “한국예술지”, “한겨레음악대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 자료들을 참조하면서 홍란파에 대한 이 글을 정리하게 되였다.     홍란파는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활초리의 한 농부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홍란파는 5살에 상경하여 14살이 되던 해인 1912년에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류달리 음악에 흥취를 갖게 되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의 초기음악학교였던  “정악전습소”에서 공부하였는데 창립당시에는 “조양구락부”라고 불리웠다. 이곳에서 홍란파는 1년동안 김인식 선생한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조선의 저명한 음악평론가 최창호는 “홍란파의 ‘봉선화’와 그의 가요들”이라는 책에서 “홍란파는 정악전습소 재학당시에 양산도와 노래가락을 바이올린으로 훌륭하게 연주하여 그의 예술적재능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정악전습소”를 졸업한후 홍란파는 음악으로서는 외세에 짓눌린 험악한 세상을 살아갈수 없다는 부모들의 주장으로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전공하려는 지향을 굽히지 않고 그후 일본 우에노음악학교에 신청하여 입학했다.     일본에서 그는 음악, 문학, 미술 등 세가지 분야에 걸쳐 배우면서 잡지발간 등의 문예활동에 주력하였다. 일본에서의 고학은 참으로 눈물겨운 생활의 련속이였다. 낮에는 땀을 철철 흘리며 신문배달을 하고 밤이면 번화한 네거리에 나서서 바이올린을 켜면서 담배장사도 했지만 학비를 마련하는데는 여전히 힘에 부쳤다. 일본에서 겨우 2년간을 수료하고 1919년 봄에 귀국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고 재일류학생들중에서 항일운동 중심인물로 적극 활동한것이 드러난것 또한 서둘러 귀국하게 된 계기의 하나로 된다.     귀국후 홍란파는 “대한매일신보” 의 기자로 또한 소설가로도 활동하면서 창작노래집 “처녀혼”을 출간하였으며 1920년 22살에 “처녀혼”이란 단편소설을 쓰기도 하였다. 홍란파는 창작노래집을 내기 전에 “봉선화”,  “옛 동산에 올라”, “사랑”, “그리움”, “봄처녀”, “여름의 별무리”를 비롯하여 수많은 가요들과 기악곡들을 창작하였다. 홍란파의 대표작 “봉선화”는 “처녀혼”의 첫 머리에 “애수”(哀愁)라는 곡 이름으로 발표되였다. 한국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활초리에 복원한 홍란파 선생의 생가      1920년에 창작된 가요 “봉선화”는 나라를 잃은 애조곡으로 널리 불리워졌다. 가요 “봉선화”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깃들어있다.     1919년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홍란파는 어릴 때 송아지친구들과 함께 뛰놀던 고향산천이 하도 그리워 팔달산을 끼고 앉은 시골마을을 찾아갔다. 그가 꿈결에도 잊을수 없었던 그리운 고향에 찾아온 바로 그 이튿날이였다. 이웃집의 봉선이란 처녀가 방직회사 녀공으로 팔리워가면서 그를 찾아왔다.     소학교시절에 홍란파는 가난한 탓으로 학교에 못가는 봉선이가 불쌍하여 그에게 가끔 글도 배워주고 노래도 배워주군 하였는데 봉선이는 홍란파를 친오빠처럼 따랐다. 그때 봉선이는 봉선화를 그토록 좋아하였으며 해마다 자기 집 뜨락에다 봉선화를 심고 가꾸었으며 홍란파의 집 울타리 밖도 잊지 않고 봉선화를 심어주군 하였다.     봉선이는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후 살길이 막히게 되자 방직회사로 팔리워가면서 홍란파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작별인사를 하려고 찾아왔던것이다.     “영후오빠, 잘 있으라요. 인젠 오빠의 양행금소리도 다 들었군요. 마지막으로 한 곡조 듣고 싶어요.”     홍란파는 자기를 친오빠처럼 믿고 따르는 봉선이의 마지막 애절한 부탁을 들어주리라고 바이올린을 들었으나 정작 그를 위로해줄만한 곡을 찾을수 없었다. 걸음걸음 피눈물을 뿌리며 떠나가야 할 그 앞에서 “양산도”를 탈수도 없었고 “노래가락”을 탈수도 없었다.     “아리랑”을 타던 홍란파의 머리에는 피뜩 하나의 곡상이 떠올랐다. 그는 그 곡상을 잡고 활을 그어나갔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바이올린의 음선을 적시고 음선에서 미끄러져 처량하게 흐르던 바이올린소리도 뚝 멎고 말았다. 그러자 솟구치는 눈물을 참느라고 입술을 깨물며 서있던 봉선이는 세차게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했다. 봉선이가 흐느껴 울자 그를 바래주려고 모였던 마을사람들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홍란파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봉선이를 바래주고는 방금전에 탔던 곡상을 그대로 5선지에 적어나갔다.     그후 홍란파는 울밭에 피여난 봉선화를 볼 때마다 이 곡을 타면서 봉선이를 생각하였고 나라를 잃은 민족의 슬픔을 통탄하군 했다. 봉선이의 비참한 운명이자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라고 생각한 홍란파는 이 곡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홍란파의 처녀작이라는것을 생각할 때 창작초기에 바이올린 독주곡으로 가사가 없이 슬프다는 뜻에서 곡명이 “애수” 였다.     그는 5년뒤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작사자 김형준에게 위탁하여 가사를 달게 했다. 김형준은 그의 집에 봉선화가 많아 가사를 쓰는데 큰 도움이 되였다고 한다.     작곡가 홍란파가 봉선이를 바래주면서 얻은 곡상이기 때문에 노래제목을 “봉선화”라고 하였다.     조선의 음악평론가 최창호는 “고향의 봄” 을 이렇게 평가했다. “일제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그 시기 이 땅에서 살래야 살수가 없어 피눈물을 뿌리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느는 겨레들과 현해탄을 건너 일본의 광산이나 탄광지대로 내몰리는 동포들이 날따라 늘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망국의 설음과 타향살이의 슬픔을 함께 겪어야만 하였으니 ‘고향의 봄’이 창작된것은 그 시대가 안겨준 음률이다.”고 했다.     홍란파는 1922년에 서울 연악회를 창설하였고 1925년에는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를 창간하였으며 바이올리니스트, 평론가, 교향악단 지휘자, 음악전문지 발행인, 소설가등 다양한 신분으로 활동을 펼쳤다.     홍란파는 생전에 대중들이 즐겨부르는 노래를 많이 작곡했다. 그는 대표작 “봉선화”를 비롯해 “봄노래”, “고향의 봄”, “봄처녀”, “고향생각” 등 100여수의 노래를 작곡했는데 그가 작곡한 가곡들이 조선반도와 해외동포들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홍란파는 음악수준을 더 제고하려고 1931년 미국에 건너갔으며 “SHEYWOD”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수업에 진력하였다. 미국에서 그는 독주회를 여러번 가졌으며 졸업 후 경성보유학교(지금의 리화녀자대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그후 홍란파는 1936년 서울방송국의 현악단 지휘자로부터 레코드의 부장으로 력임하기도 하면서 평론집  “음악만필” 등을 통하여 우리 민속음악문화의 계몽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홍란파가 작곡한 많은 노래중에서 민족의 아픔을 노래한 조선의 최초가곡으로 불리우고 있는 “봉선화”가 그의 대표작이다. 이 노래는 민족의 노래로 일제에 항거하는 저항의 노래이기도 하고 우리 겨레의 아픔을 대표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을 그때 당시 홍란파의 대표작 “봉선화”는 “금지곡”으로 지정되였으며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구금되고 고문까지 당했다. 그러나 일제는 그 어떤 탄압수단으로도 가요 “봉선화”의 전파를 막을수 없었다.     1981년에 81세 나는 일본의 량심있는 지식인 노무라 모토유기 목사가 한국주재 일본대사관 앞에 위치한 “평화소년상”을 찾아 플루트(목관악기)로 “봉선화”를 연주했다. 그는  “노래속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가을바람은 일본침략자를 의미하고 떨어진 꽃송이는 위안부 피해자 같다”며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봉선화”노래가 창작된지도 어느덧 한세기가 된다. 이 노래는 아직까지도 예술적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을 뿐만아니라 조선반도와 해외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지고 있다.     홍란파 작곡가는 1937년 일제반항운동을 벌린 연고로 감옥에 갇혔으며 차디찬 옥중에서 잔인한 고문으로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는 그후 옥중에서 얻은 병으로 그토록 갈망하던 광복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했다. 생을 마감하기 전에 홍란파는  “나 죽으면 연미복(악대지휘자들이 입는 옷)으로 내 몸을 덮어주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1941년 8월 30일, 우리 민족의 작곡가 홍란파는 명곡들을 창작할 나이(43살)에 너무 일찍 세상을 떴다. 1954년부터 “홍란파기념사업회”가 성립되여 매년 한국 경기도 수원시에서 란파음악콩클을 비롯하여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며 홍란파의 넋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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