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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회고] 정판룡 교수의 사랑 (김호웅) 댓글:  조회:1768  추천:5  2020-08-22
[회고] 정판룡 교수의 사랑 김호웅 정판룡 교수   해방전 중국에서 빛나는 활약상을 보인 우리 민족 명인들중에 적지 않은 이들이 한족녀성과 결혼했고 서로 믿고 사랑하면서 빛나는 업적을 일구어내고 아름다운 일화들을 남겼다. 항일투사이며 농학자인 류자명(柳子明, 1894-1985)이 그러하고 영화황제 김염(金焰, 1910-1983)과 작곡가 정률성(郑律成, 1914-1976)이 그러하다. 아마도 해방후 한족녀성과 결혼해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우리 민족 교육과 문학의 발전을 위해 불멸의 업적을 남긴 분으로는 아무래도 정판룡 교수를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정판룡 교수의 문하에서 석박사과정을 밟았고 그분을  모시고 18년 간 공부하고 일했기에 그들 내외분에 대해서는 조금은 알고 있다고 자부했고 여러 편의 글도 쓴 적 있다. 하지만 요즘 정판룡 교수 내외분의 자료를 진일보 수집하는 가운데서 처음으로 정판룡 교수의 《나와 나의 안해》(민족출판사, 2002)라는 책자를 구해서 통독하게 되였다. 조선족과 한족이라는 두 민족 청춘남녀의 만남과 사랑의 이야기는 정판룡선생의 유명한 자서전 《고향 떠나 50년》과 왕유녀사의 자서전 《남방에서 북방에 와 70년 세월(从南到北七十载)》에도 일부 나오지만 《나와 나의 안해》는 두 분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더욱 구체적으로 진솔하게 쓴 작품이요, 참된 사랑의 서사시를 방불케 한다고 하겠다. 여기서는 두 분의 첫 만남, 련애와 결혼, 그리고 연변에 오게 된 경위에 대해서만 보기로 하자.   21살이라는 약관의 나이에 연변대학 교원이 된 정판룡, 잇달아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은 모스크바대학 류학을 마친 정판룡에게는 혼처를 주선하는 사람도 많았고 은근히 다가서는 처녀도 여럿 있었다. 연길 서시장 부근의 하숙집 주인이 주선한 왕청의 처녀, 연변조선족자치주 선전부장 배극과 황구헌 내외가 알심들여 자택에 마련한 북경 민족가무단 녀배우들과의 만찬, 연변가무단의 흑룡강출신 처녀와의 사귐이 그러하고 모스크바대학 류학 초기 대담하게 나젊은 정판룡에게 주동적으로 다가온 모스크바자동차공장 선반공 따마라와 그루지야의 녀가수 스펠라와의 만남이 그러하다. 하지만 정판룡은 공부를 더 해야 했기에 련애는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에게는 남다른 사랑의 철학이 있었다. 좀 길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한번 읽어볼만한 것이기에 여기에 줄여서 옮긴다.   1959년 모스크바 류학시절의 정판룡과 왕유 교수   서방의 어느 시인은 “사랑은 봄철에 꽃이 피듯이 자연스럽게 찾아오거니, 그 가슴이 울렁이는 순간은 인간세상의 영원한 신비이니라”라고 노래했다. 하기에 적잖은 사람들은 사랑은 격정이며 신비한 정신상태라고 하면서 사랑에는 리성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사랑속에 치밀한 리해관계나 타산과 같은 리성적인 것이 섞여있다면 순수한 사랑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혼해야 할 나이가 되여 생활의 동반자를 찾아 가정을 만들려고 할 때 리성을 배제하고 격정만 가진다면 흔히 실패를 자초하게 된다. 한쌍의 부부가 조화롭게 생활하고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될 때가지 행복하게 살자면 단순한 부부가 될 게 아니라 생활의 동반자가 되고 사업의 동지와 벗이 돼야 한다. 이러한 대상을 찾는다고 할 때 리성의 참여가 없다면 성공할 수 없다. 물론 결혼은 사랑을 기초로 한다. 격정이 없는 사랑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이 아니다.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자기 마음속에 있는 사람에 대해 애모의 격정을 갖게 된다. 하지만 사랑의 격정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대다수 사람들의 사랑의 격정은 가장 길어야 18개월에서 30개월간 지속된다고 한다. 그 뒤에는 이런 격정이 사라진다. 설사 젊은 부부라 해도 이 기간이 지나면 평범한 생활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부부관계는 언제나 격정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리성의 지배를 받게 된다. 부부는 상대를 련인으로 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서로 존중하고 관심하고 생활의 동반자, 동지와 벗으로 보아야 한다. 요컨대 사랑은 격정도 있어야 하지만 리성도 있어야 한다……      정판룡과 왕유의 만남은 우연스럽지만 자연스럽게 시작되였다. 1954년 여름 정판룡은 연변대학에서, 왕유는 서남사범대학에서 교육부의 선발을 받고 쏘련에 가서 류학하게 되였다. 이들은 먼저 북경로씨야어전과학원(지금의 북경외국어학원)에 가서 로씨야어 연수를 받았다. 정판룡은 쏘련에 가서 대학원공부를 해야 하는 22반에, 왕유는 본과공부를 해야 하는 18반에 귀속되여 거의 1년간 같은 캠퍼스에 있었지만 서로 풋면목도 익히지 못했다.    그러다가 1957년 여름, 제6차 세계청년련환절이 모스크바에서 열렸는데 정판룡과 왕유는 다같이 중국청년대표단을 위한 후근사업을 하면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였다. 왕유는 성격이 활발하고 명랑해서 모든 남학생들의 눈길을 끌었다. 특히 그녀는 옷차림은 수수했지만 살결이 남달리 희고 몸매가 날씬한 전형적인 남방미인이였다. 그녀는 모스크바에 있는 레닌사범학원 중국류학생 공청단지부의 서기로 있으면서 사회활동에 적극 참가했고 롱구도 잘 하고 노래도 잘 부르는 재간둥이였다.       두번째로 왕유를 만난 것은 1958년 여름이였다. 모스크바시 공청단위원회에서 외국에서 온 류학생들을 조직해 30일간 볼가강연안의 도시들을 돌아보게 했다. 중국의 장강이나 황하와 마찬가지로 볼가강은 쏘련의 어머니강인데 짜리로씨야시대의 고색창연한 성곽들이 모두 이 강의 량안에 있었다. 볼가강에서 다시 만난 정판룡과 왕유는 더없이 기뻤고 서로의 출신과 현재 상황을 두고 적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왕유는 조선족을 만난게 정판룡이 처음이라고 했고 려행하는 내내 방긋방긋 웃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그때 모스크바대학 신문학과에 와서 연수하던 인도네시아 기자가 유람선 란간을 잡고 서있는 묘령의 중국아가씨 왕유를 찍었는데 그 사진이 오늘도 처녀시절 그녀의 꽃다운 모습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세번째로 왕유를 만난 것은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농장에 가서 일할 때였다. 둘은 다른 류학생들과 함께 풀을 뽑거나 채소를 캐고 버섯을 땄다. 밤에는 우등불을 피워놓고 ‘카츄샤’, ‘군항의 밤’, ‘공청단원의 노래’, ‘모스크바 교외의 밤’을 불렀다. 왕유는 악보도 볼 줄 알았거니와 노래도 썩 잘 불렀다. 정판룡은 어느 새 왕유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다. 고맙게도 형님벌 되는 호맹호(胡孟浩, 후에는 상해외국어대학 교장 력임)씨가 정판룡과 왕유의 속사정을 알고 슬그머니 다리를 놓아준 덕분에 둘은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정판룡은 남모르는 근심을 하게 되였다. 한족 아가씨와 사랑을 속삭이고 가정을 이룬다? 나는 조선족이고 앞으로 연변에 돌아가야 한다. 한족 아가씨와 련애하고 결혼한다면 앞으로 여러가지 곤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류학생의 몸값이 올라서 적잖은 류학생들은 심양이나 장춘과 같은 동북의 대도시에도 가려고 하지 않는다. 왕유가 나를 따라 구석진 연변에 가려고 할가?    하지만 이는 전부 공연한 근심이였으며 이는 왕유의 자서전에서 잘 나타나있다. 왕유는 자서전에서 조선족이면 어떻단 말인가? 기껏해야 남방사람과 북방사람의 차이가 아닌가? 판룡씨가 좀 촌스럽게 생겼다고 하지만 남달리 총명하고 성실하고 정직하다. 레브 똘스또이가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스러운게 아니라 사랑스럽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여러 날 고민 끝에 정판룡은 왕유에게 편지를 썼고 모스크바대학에 놀러 오라고 했다. 왕유가 쾌히 승낙했고 마침내 둘은 모스크바대학에서 만났으며 암실에 들어가 사진을 현상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둘은 자연스럽게 첫 키스를 했던 것이다.    “나는 왕유가 놀러온 날 밤, 창문에다 모포를 치고 어둡게 한 뒤 그와 함께 교외농장에서 찍은 사진들을 만들었다. 내가 필림을 확대기에 넣고 감광지에다 영상시킨 뒤 현상액에 넣으면 왕유가 건져서 말리는 일을 했다. 나는 기실 사진을 만든다는 것보다 왕유와 단 둘이서 이 작업을 하는 것이 더 기뻤다.    한번은 같이 사진을 만들다가 얼굴이 가까와졌다. 우리는 그만 키스를 하고 말았다. 첫 키스는 정말 달콤하고 신비스러웠다. 미국 보리스대학 연구원 츌 링크는 300명 중산계급에 대한 조사에서 첫 키스가 첫 성생활보다 더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첫 성생활은 사랑의 상태에서 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첫 키스는 절대적으로 사랑의 상태에서 진행된다고 했다. 나의 체험을 보아도 그렇다. 4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나는 첫 키스의 모든 세절과 느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키스를 한 뒤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느껴졌으며 기쁨을 누룰 수 없어 큰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물론 미치광이처럼 소리는 지르지 않았지만 나는 그때 가장 강렬한 사랑의 격정과 행복을 느낀 것만은 사실이다.”   《나와 나의 안해》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슬쩍 감추고 에둘러 암시하면서 멋지게 의론을 전개했으니 저명한 문학교수다운 글솜씨라 하겠다. 아무튼 1년 만에 정판룡은 왕유와의 사랑에 골인했고 모스크바대학 학생숙사 9동에 있는 회의실에서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왕유와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제자들과 함께 있는 정판룡 교수   하지만 인생의 중요한 고비가 또 하나 남았다. 1960년 2월  정판룡은  “아 똘스또이의 3부작  ‘고난의 길’의 인민묘사원칙”으로 부박사학위를 받고 5년 만에 북경에 돌아왔고 친구인 전중문 (钱中文)내외의 알선으로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판룡은 은사와 친구들의 부름을 거역할 수도 없었거니와 연변대학을 잘 꾸리기 위해 연변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렇다면 왕유는 어찌한단 말인가? 왕유는 나를 따라 변강인 연변으로 가서 간고한 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 연변대학에 로씨야어학과가 없으니 전공도 바꾸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정판룡은 모스크바에 있는 왕유에게 편지를 보냈다. 귀국하기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조선족 지식인이니까 연변대학에 돌아가서 일해야 한다. 이미 결정을 내린 일이니 당신은 나를 따라 연변에 갈 필요가 없다. 나 때문에 당신의 전도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다. 먼저 두 곳에 갈라져서 지내면서 차차 상황을 보아서 처리하자. 하지만 예전과 마찬가지로 왕유는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는 당연히 연변대학에 가서 일해야 해요. 당신이 이미 선택을 했다면 저는 무조건 따라갈 겁니다. 적잖은 한족들이 오래동안 연변에 살고 있는데 저라고 왜 살 수 없겠어요. ”    이게 바로 왕유의 “위대한 단순성”이였고 정판룡은 바로 여기서 또다시 깊이 감동됐다.   일부에서는 왕유를 중국 4대미인의 하나인 왕소군(王昭君)에 비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하겠다. 왕소군은 흉노에 잡혀 억지로 끌려간 셈이지만 왕유는 정판룡을 믿고 연변에 찾아와 헌신적으로 남편을 내조했으며 그 자신도 연변대학의 대표적인 교수로 되였다. 또 그만큼 정판룡은 부인을 사랑했고 일찍부터 부인을 위해 세가지 일을 성사시켜주리라 생각했다. 첫째로 뛴다 난다 하는 남개중학교나 서남사범대학 동창생들보다 먼저 교수직함을 가지도록 노력하리라, 둘째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보게 하고 국제적 시야를 갖게 하리라, 셋째로 왕유의 전기를 써주리라. 이 세가지인데 앞의 두가지는 대체로 실현한 셈이나 날마다 학문연구와 공무에 시달리다보니 전기를 쓰는 일은 많이 지체되였다. 암투병생활기간에야 《연변녀성》잡지사와 계약을 맺고 30가지의 이야기를 매 기마다 5000자씩 쓰기로 했다. 2000년 제 5기에 첫 편의 글이 나갔고 병상에서 집필을 다그쳐 20편, 약 10만 자를 쓰고는 더 쓰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왕유가 정판룡의 구술에 근거해 6편을 더 써야 했다. 정판룡이 부인을 보고 “적잖은 편폭을 썼는데 나의 한족친척들과 한어독자들이 볼 수 없구려. 이 책을 한어로 번역했으면 좋겠소. 그들도 우리 둘의 이야기들을 알아야 할 게 아니요?” 라고 했다. 그래서 저명한 번역가 뢰자금(雷子金)선생이 번역하여 2002년 북경 민족출판사를 통해 출간하게 된 것이다.   만년에 자택에서   요즘 도시화바람으로 우리 조선족의 적잖은 젊은이들이 타민족과 통혼하고 있다. 필자의 동창들 중에도 타민족 아가씨나 젊은이를 며느리로 삼거나 사위로 삼고 난색을 짓는 친구들이 일부 있다. 난색을 지을 필요가 없다. 그들이 살고 있는 대도시에서 같은 민족의 결혼상대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며 또 다른 민족과 살더라도 넓은 흉금과 사랑을 가지고 상대를 품어주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 이 방면에서 정판룡 교수는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한편 이런 의미에서 《나와 나의 안해》를 한어로 번역한 것은 아주 잘된 일이며 《나와 나의 안해》와 함께 왕유 교수의 《남방에서 북방으로 와 70년 세월》도 조선어로 번역 출판되여 많은 조선족 독자들 특히 조선족 젊은이들에게 읽히웠으면 하는 바램이다. ▣(출처:《중국민족》조선문판  글/김호웅  편집/리호남  조판/ 한동준)  
44    《중국민족》 2017년 1호 댓글:  조회:1716  추천:0  2017-04-13
43    성산에 만든 하늘동네의 이야기 댓글:  조회:1078  추천:0  2017-04-13
글 / 김호림 솔직히 그곳의 첫 이주민은 언제부터 살고 있었는지 잘 모른다. 전호산 촌장은 촌락에 앞서 산민(山民)이 벌써 내두산(奶頭山)의 산속에 살고 있었다고 말한다. 내두산은 장백산 천지 폭포의 북쪽에 위치하는데 쌍을 이룬 둥그런 모양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촌락은 1931년 내두산의 바로 동쪽에 생겼다고 안도현 지명지(地名志)가 전한다. 하늘 중턱에 걸린 이 동네도 부근 산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내두산촌”이라고 부른다.  그때 마을에서는 땅에 주로 감자와 보리를 심고 있었다. 고원 지대라서 기온이 낮아 소출이 그다지 많지 못했다. 보리고개면 집집마다 곳간이 비여서 사람들은 너나없이 늘 배를 곯았다고 한다. 다들 산에 들어가서 뭔가 먹을 음식을 찾았다.  “마침 산비탈에서 감자를 숨긴 움을 찾았는데요, 진작 녹말이 되여있더라고 합니다.”  전호산씨는 이렇게 그가 전해들은 마을 할머니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 할머니가 아직 현존한다면 약 120세의 고령이니 적어도 지난 세기 20년대 내두산 일대에는 인가가 있었다는것이다.  옛날 누군가 감자를 숨겼다고 하는 움은 마을 남쪽의 “왕더기” 부근에 있었다. “더기”가 높은 지대의 평평한 땅이니 “왕더기”는 그 땅이 아주 크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근처에는 또 “서울 막” 등 선민(先民)이 살면서 지은 옛 이름도 있었다.  마을 동쪽의 밭에서는 또 마제(磨製) 석기가 발견되여 이 고장에서 인간의 력사는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것을 알려주고 있다. 밭에서 돌도끼를 주었다고 하는 림씨는 이날 일행이 농가에서 식사하면서 만난 촌민이다. 그는 일행에게 돌도끼를 자랑하면서 아쉬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도끼의 뒤쪽 모서리가 부러졌는데요, 어디에 떨어졌는지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림씨는 내두산 현지의 태생이 아니다. 약 30년 전 내두산에 사냥을 왔다가 결혼하고 이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조금은 비유가 이상하지만, 정말로 내두산의 “노다지”는 노루가 아닌 처녀로 탈바꿈한것이다.  내두산에는 “노다지”의 천지라고 림씨가 거듭 말하고 있었다. 산에 노루는 물론이요, 곰이며 메돼지, 담비 따위가 수림을 이루고 있다는것. 그가 이곳에 장가를 왔던 지난 세기 80년대 담비의 모피는 벌써 천정부지로 치닫고 있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녀인들도 산짐승을 잡을줄 알아요.”  해마다 가을철이면 녀인들은 또 산에 올라 삼을 팠다고 림씨가 말했다. 마을 동쪽 20리 되는 곳의 산에 삼이 많다는것. 그러나 지금은 삼을 캐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인삼이 너무 많아서 산삼이 오히려 가짜로 간주된다는것.  “그럼 솥에 삶은 닭은 내두산에서 자란 닭인가요? 아니면 마당에서 키운 닭인가요?”  롱담은 두발이 달린 듯 냉큼 밥상에 뛰여오른다. 물론 이날 주인집에서 밥상에 올린 료리는 마당에서 기른 닭이였다.  기실 야생동물 보호조례가 실시되면서 수렵꾼은 거의 다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현성으로 나가는 길목에는 또 전문 야생동물 불법매매를 차단하기 위한 검문소가 생겼다. 그럴지라도 불법 포획자들이 돼지 대가리에 메돼지 몸뚱이를 합체로 만드는 등 야생동물을 집짐승으로 둔갑하여 검문소를 통과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고 한다.  이야기가 그만 다른 데로 흘렀다. 1644년 만족은 중원에 입주한 후 장백산 일대를 선조의 발상지로 삼아 성지(聖地)로 간주하고 봉금(封禁)지역으로 만들었다. 장백산 일대는 인가가 차츰 없어졌으며 고목이 하늘을 찌르고 야수가 출몰했다. 1881년 청나라는 봉금지역을 개방했으며 이에 따라 인적이 늘어나게 되였다.  내두산 기슭의 촌민은 함경북도 갑산 일대의 간민으로 여느 이주민처럼 강이 아니라 두만강 발원지 부근의 마른 땅을 건너고 있었다. 전호산씨는 내두산에서 국경 건너 이국의 촌락까지 1박 2일이면 도착할수 있다고 말한다. 갑산 일대의 간민이 내두산에 진출한게 꼭 언제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을수 없다고 하는 설이 나올 법 한다. 그러나 확실한건 1935년 겨울 내두산에 새로운 항일유격대 근거지가 창설되였다는것이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일부였다. 동북인민혁명군은 1931년 “9.18”사변 후 중국공산당이 동북지역에서 령도한 항일무장이다.  내두산은 일본과 위만주 군경의 거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또 남만의 무송과의 사이를 울창한 수림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또 그전부터 조선과 안도로 통하는 통로가 있었는데 내두산 촌락은 200리 무인지경을 지나는 로정에 있는 유일한 주민지대였다.  1936년 1월, 일본군은 8백여명의 군사를 인솔하여 내두산 유격구를 진공했다고 중국의 관방 간행물 《당건설(黨建)》이 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제2군의 창시자인 항일명장 왕덕태(王德泰)가 2개 중대의 병력을 지휘하여 300여명의 적군을 섬멸, 제2군의 전쟁사에서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이긴 전례를 만들었으며 내두산 항일부대 근거지를 보위했다. 그때부터 내두산 마을 동북쪽의 무명의 산은 현지인들에 의해 “왕덕태의 산”이라고 불렸다는것.  산기슭에 세운 석비로 일행을 안내했던 림씨는 산 이름을 속명 “포대산(砲臺山)”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포대산이 그에게 남긴 기억은 산마루의 포대나 밀영이였으며 언제인가 출토되였다는 탄알 깍지나 쇠솥 등 기물이였다.  촌장 전호산씨가 입에 올린 옛 이야기는 이목구비를 갖춘 항일부대 대원이였다. “김정숙이 녀성대원들과 함께 마을 학교의 아동 단원을 거느렸다고 하던데요.”  그 무렵 김일성 장군이 일본군의 탄환을 피했던 고목은 바로 마을 동쪽의 산비탈에 있었다고 전호산씨가 말한다. 이 고목은 마을 주변에 있던 원시림과 더불어 지난 세기 80년대에 소실되였다고 한다.  내두산의 이 항일부대는 유격구를 개설한 뒤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개편하며 1936년 가을 일본군의 “포위숙청”으로 인해 내두산 근거지에서 철수한다. 동만 지역의 제일 마지막 항일유격근거지는 이로써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첩첩산중의 유격구에 불안을 느낀 일본군은 미구에 내두산에 무장이민을 파견했다. 전호산씨는 이 자위단이 들어서면서 마을은 또 “백호동(百戶洞)”이라고 불렸다고 말했다. “그들이 총 100자루를 어깨에 메고 들어왔다고 해요.”  일본군은 내두산에 산재한 사람들을 한데 모여 집단부락을 세우고 나무로 2,3m 높이의 목책을 세웠다. 집단부락은 동북 지역에서 일본이 주민을 일정지역에 집결시키고 주민과 항일세력의 련계를 차단하기 위한 수단으로 건설한 촌락이다. 이 정책에 의해 동북지역에서 1933년부터 1939년까지 건설된 집단부락은 1만 3,451개에 달하는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일행을 내두산까지 안내했던 연변의 소설가 김춘택씨는 그가 살던 고등리(高登里)는 내두산의 목책과 달리 풀이 무성한 저습지의 뗏장으로 성벽을 세웠다고 말했다. 고등리는 1938년 가을 강원도 동명의 마을 이주민들로 인해 지은 이름인데 내두산의 북쪽으로 130리 정도 상거한다.  고등리에도 조선인 항일부대의 일부 흔적이 있었다. 북쪽 대사하(大沙河) 근처의 산기슭에 일명 “김일성의 금점굴”이라고 불리는 웅덩이가 있다는것. 김일성 장군이 금맥을 발견하여 이 웅덩이를 파고 강냉이의 알갱이 크기의 금을 한보자기나 캤다고 한다.  실제로 고등리의 첫 이주민인 할아버지가 김춘택씨에게 전한 이야기이다. “언제인가 조선인 부대가 집단부락의 경찰소를 습격하고 백여마리의 소를 로획한 적 있는데요, 마을 청장년들이 소의 뒤다리를 어깨에 메고 함께 유격구까지 운반했다고 합니다.”  이 유격구가 바로 후날 내두산으로 이전되였던 안도 부근의 화룡현 차창즈(車場子) 근거지이다.  내두산에 있던 집단부락의 목책은 지난 세기 80년대에 전부 사라졌다. 마을에서 저마다 바자를 세우거나 장작으로 목책을 사용했던것이다. 이맘때까지 마을에 흥성했던 소학교와 농촌중학교도 차츰 줄어들더니 미구에 겨끔내기로 가뭇없이 사라졌다. 도시 진출과 해외 로무의 바람은 심산속의 이 마을에도 불어들고 있었다.  보름날의 달밤에 산비탈에서 소발구에 올라 곡식을 실을 때면 멀리 천지의 폭포가 우중충한 달빛 아래 하늘에 걸리던 내두산촌의 그림 같은 옛 풍경은 슬픈 옛 이야기로 어디론가 멀어지고 있었다.  전호산씨는 마을에 호적으로는 120여 가구 되지만 실은 50여 가구라고 알려준다. “1976년에 논을 개간했는데요, 사람이 없어서 다시 밭으로 되여버렸습니다.”  내두산의 원근에 소문이 있던 감자도 마침내 옛말로 되였다. 메돼지가 출몰하면서 땅을 헤집었으며 감자 농사를 할수 없었다. 그래서 밭에 돈이 될 만한 곡식으로 10년 전에는 해바라기, 근년에는 또 호박을 심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내두산에 현존하는 옛 실상은 상두(喪頭)뿐만 아닐지 한다. 상두는 상여의 속된 말로 상례 때 시신을 운반하는 기구를 말하며 죽음의 전통의례와 상징의 세계이다. 상여라는 이 말은 조선 후기 관혼상제의 《사례편람(四禮便覽)》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 상두는 우리밖에 없어요, 상두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유일한 고장이죠.”  전호산씨는 내두산촌의 제일 높은 조직은 기실 그가 촌장으로 있는 촌민회가 아니라 상여회라고 말한다. 상여회는 매년 12월 20일 총화를 하는데 상여회에 가입하지 않으면 상례 비용은 따로 지불해야 한다. 입사를 한 후 또 상례에 참여하지 못하면 촌장이라도 벌금을 내야 한다는것.  “우리 마을을 조선족 장례문화의 표현기지로 만들자고 춘택이가 주장하고 있어요.”  조선족의 장례풍속은 2009년 길림성의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대상, 인제 내두촌의 관광품목으로 내세우자는 김춘택씨의 주장은 마을의 동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허약한 로인들만 잔존한 마을에서 무거운 상두를 메는 상여꾼도 찾기 힘든 현 주소이다. 김춘택씨는 연길에서 행사 때마다 상여꾼을 따로 찾아와야 할것 같다고 혼자말로 일행에게 말했다.  잠깐, 김춘택씨의 이야기를 잇자니 자칫 엉뚱한 물곬에 흘러들것 같다. 작가로서의 김춘택씨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은 내두산의 상여뿐만이 아니였다. 성산의 기슭에 중국 조선족문인의 창작기지를 만들고 하늘 아래의 첫 동네에서 민족의 하얀 혼을 불러일으키고 싶다고 한다.  “지금 내두산공원 편액을 만들었고 또 일부 소설비와 시비, 노래비를 세웠습니다.”  문뜩 조무래기의 오구작작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의 정말 오랜만의 일이라고 누군가 말한다. 이날 마침 제사를 지내기 위해 주인집에 손님이 찾아오면서 부근 현성에서 아들딸을 데리고 왔던것이다. 이윽고 제사상 앞에서 곡을 하듯 망자에게 이야기를 읊조리는 주인집 로인의 목소리가 창밖으로 새여나가고 있었다.  밖에 나서니 마을에는 벌써 어둠이 깊게 깔리고 있었다. 귀가에 간간이 울리는 곡소리는 마치 내두산의 상여가처럼 그 무슨 마지막 작품을 애절하게 연주하고 있는듯 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고 하거늘  눈물을 흘려서 뭣하나? 한숨은 쉬여서 뭣하나?  상사듸여! 상사듸여!…”▣ (편집/ 김향덕)  
42    문학으로 보는 조선인의 중국 이주와 정착 댓글:  조회:1098  추천:2  2017-04-13
글 / 최학송 알다싶이 조선족은 조선반도로부터 이민한 과경민족이다. 지난 19세기 중후반 2백여년간 지속되여온 동북 일대에 대한 청조의 봉금정책의 완화 및 페지 그리고 조선 북부지방을 강타한 홍수, 가뭄, 충해(蟲害) 등의 자연재해로 하여 조선인의 중국 이주가 시작되였다. 이 시기의 이주민은 모두 생계를 위하여 고국을 등진 사람들이였다. 19세기 중엽으로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이 시기를  “국경을 넘어 잠입한 시기”(1860~1904)라고 한다.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 체결로부터 1931년의 9.18사변에 이르는 기간 조선은 군대해산(1907), 한일합방(1910), 3.1운동(1919) 등 정치적 대격변을 겪었으며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때문에 대량의 농민들이 토지를 수탈당했다. 이리하여 수많은 조선인들이 정치적, 경제적 원인으로 중국에 이주하였다.  이 시기를 “자유 이민 시기”(1905~1931)라 한다. 1932년 위만주국 건국 이후, 일제는 동북을 중국 침략의 전략기지로 구축하면서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조선인을 동북에 이주시켰다. 이때 이주한 대부분의 이주민은 동북 개발을 위한 일제의 이민 정책에 속았거나 혹은 강제로 이주된 사람들이였다. 이 시기는 “강제 집단 이민 시기”(1932~1945)로 불린다. 이러한 이주 결과 1920년 중국의 조선인은 46만명으로 증가하였고 1930년에는 61만명, 1940년에는 140만명, 1945년 일제 패망 직전에는 216만명에 이르렀으며 이들 대다수는 동북에 거주하였다. 당시의 동북 인구가 3,500만명이였으니 동북 거주인 16명당 1인이 조선인이였던 셈이며 조선 인구가 2,500만명이었으니 조선인 11명당 1인이 동북에 이주한 셈이였다. 해방전 동북지역에서 생활한 조선인들중에는 적지 않은 문인들도 포함되여 동북 조선인들의 삶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이는 본격적인 조선족문학의 전사(前史)라고도 할수 있는것으로서 흔히 재만조선인문학 또는 조선족 이민문학으로 불린다. 조선인의 중국 “이주” 원인과 “정착” 과정은 이 시기 문학의 단골 소재의 하나라고 할수 있다. 최서해, 강경애, 안수길 등 대표적인 작가들은 모두 상기 내용을 소재로 작품을 창작하였다.  최서해는 동북으로 이주한 조선인의 삶에 주목하고 그것을 처음으로 소설의 세계에 끌어들인 사람이다. 1918년부터 1923년까지 6년간 연변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최서해는 대표작 “홍염”(1927)을 비롯하여 도합 11편의 소설을 연변체험을 소재로 하여 썼다. 장백산 아래 백하(白河)라는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홍염”은 중국인 지주 인(殷)과 조선 이주민 문서방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경기도에서 소작인생활을 하던 문서방은 좀 더 나은 삶을 찾아 연변으로 왔지만 이곳에서도 소작인이라는 신분에는 변함이 없다. 조선이나 연변이나 모두 지주 대 소작인이라는 계급적 관계가 존재했으며 문서방은 늘 소작인이라는 피착취의 지위에 처해있었다. 연변에서 빚을 제때에 갚지 못한 문서방은 딸을 지주의 첩으로 빼앗긴다. 문서방은 죽어가는 안해가 딸의 얼굴을 한번만 볼수 있도록 해달라고 네번이나 인가를 찾아가 애걸하였지만 거절당한다. 딸을 보지 못한 문서방의 안해는 정신혼란 증세를 보이더니 끝내는 숨지고 만다. 그리고 이런 안해의 죽음을 목도한 문서방은 지주 인가의 집에 불을 질러 지주를 죽이고 딸을 도로 찾아내온다.  강경애는 동북항일무장투쟁을 가장 생생하게 그려낸 작가이다. 10여년을 동북에서 생활한 강경애는 발표 작품의 절반 이상인 12편을 연변체험을 소재로 하여 썼다. “소금”(1934)은 이중의 대표작이다.  “소금”은 주인공 봉염 어머니의 수난사인 동시에 각성사(覺醒史)이기도 하다. “소금”은 우선 봉염 어머니의 회억을 통하여 봉염이네 가족의 연변 이주 원인과 연변에서의 생활을 그려낸다. 대다수의 농민이 그렇듯이 봉염이네 가족의 연변 이주도 경제적인 원인에 의한것이였다. 고향에서 부치던 밭을 떼이고 연변에 흘러들어 다시 중국인 지주의 땅을 얻어 농사를 하며 살아온 지난 10여년을 봉염 어머니는 “오늘까지 목숨이 붙어 있는것이 기적같다”고 말한다.  조선에서나 연변에서나 모두 소작인이라는 신분을 벗어날수 없다는 점에서 “소금”의 봉염이네는 “홍염”의 문서방네와 일치하다. 연변에서 봉염이네 가족의 생활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것은 수시로 마을에 들이닥치는 각종 무장세력과 불합리한 사회적 구조이다. 작품의 서두에서 이런 무장세력의 침입에 의한 가정의 파괴를 보여주었다면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봉염 어머니의 수난을 통하여 불합리한 사회적 구조를 그려낸다. 봉염 어머니는 믿고 찾아들어간 지주의 집에서 성적 착취를 당하며 생계를 위하여 자신의 친자식을 떼여두고 남의 자식에 젖을 먹이러 유모로 들어가나 이 자리도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잃게 된다. 이 사회의 법에 따라 법이 정해준 대로 열심히 살려고 하였지만 사회가 봉염 어머니에게 가져다 준것은 아들의 가출 및 남편과 두 딸의 죽음뿐이였다. 생존을 위하여 봉염 어머니가 최후로 선택한것은 법이 금지하는 소금 밀수이다. 어렵게 소금을 집까지 가져왔으나 그를 기다린것은 집사대였다. 일련의 수난을 통하여 봉염 어머니는 끝내 자신과 같은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선것은 공산당이라는것을 알게 되면서 계급적으로 각성한다.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중국에 조선이주민 자신의 현지문단이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대표적 작가가 안수길이다. 중국에서 16년간 생활한 안수길에게 있어서 중국은 말 그대로 “제2의 고향”이였으며 이곳에서의 삶은 일상 그 자체였다.  “새벽”(1935)은 안수길의 첫 발표작품이다. 함경도에서 간도의 M골로 이주해온 창봉이네는 창봉이의 누이를 담보로 조선인 마름 박치만으로부터 빚을 내여 소작인 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제시간에 빚을 갚기 위하여 소금밀수를 하며 이를 안 박치만은 집사대(緝私隊)와 짜고 들어 창봉이네 집에 벌금을 안긴다. 제시간에 빚을 갚지 못하도록 하여 담보로 내세운 누이를 첩으로 삼기 위함이였다. 창복이의 아버지는 박치만에게 딸을 빼앗기게 되는 상황에서 중국인 지주 호씨에게 청원하는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1차 청원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아버지가 2차 청원을 계획하고 있을 때 창복이의 누이가 자살을 하는것으로 갈등이 사라지며 작품도 끝난다. 최서해의  “홍염”(1927), 강경애의 “소금”(1934), 안수길의 “새벽”(1935)은 모두 연변을 배경으로 하며 여러모로 류사점을 갖고 있다. “새벽”에는 이주민이 겪은 고난사의 거의 모든 요소들이 등장한다. 경제적 원인으로 인한 중국 이주, 안해와 딸을 담보로 한 소작문제, 중국인 지주와의 관계문제, 당지 무장세력의 횡포, 소금밀수 등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쪽박 차고 살길을 찾아 간도에 이주 오는 모습, 중국인 지주와의 관계와 소작문제, 딸을 볼모로 중국인 지주에게서 빚을 냄으로써 겪는 불행 등 모티프는 최서해의 “홍염”에도 등장한것이며 쪽박 차고 살길을 찾아 간도에 이주 오는 모습, 중국인 지주와의 관계와 소작문제, 당지 무장세력의 횡포, 소금밀수 등 모티프는 강경애의 “소금”에도 나타난것이다. 물론 조선인의 중국 이주와 정착 과정에 봉착한 문제는 이외에도 많을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를 살아온 대표 작가들의 대표작이 공동으로 다룬 문제라는 점에서 이것이 어느 정도의 대표성을 갖고 있음은 부인할수 없겠다. 세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모두 연변이라면 시간적 배경은 대체로 “자유 이민 시기”(1905~1931)에 해당된다. 세 작품은 20세기 초반 생계형 조선이주민의 중국 정착 과정을 그리고 있다. 또한 이런 힘겹고 눈물겨운 과정을 통하여 정착하였기에 더욱 이 땅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았나 싶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조선반도가 광복을 맞이하면서 조선(한국)으로 귀환한 사람이 근 100만이였으며 절반 이상인 130만명 좌우의 조선인들이 중국에 남았다는 사실도 이를 반증하고 있다.  이렇게 중국에 남은 사람과 그 사람들의 후손이 곧 조선족인것이다. 지난 백여년간,참으로 많은 인물과 사건들이 모여 “조선족”이라는 개념을 형성하였다. 이제 우리는 “조선족”이라는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이 인물과 사건들을 돌이켜보고 핵심적인 내용들은 다시 정리하여 널리 선전함으로써 조선족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이고 사명감을 투철히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인의 중국 이주와 정착 과정에 겪은 일련의 아픔에 대한 리해로부터 시작된다고도 할수 있겠다.▣(책임편집/김향덕)   
  글/ 김창석 구술자: 현귀춘(玄贵春1937-), 조선 함경북도 명청군 출생, 연길현 해란촌 정착, 1950년 입대, 북대황 룡진농장(부대농장) 농장장, 제남군구 군마장 책임자, 제남군구 공장관리국 국장(사급) 력임. 취재일시: 2014년 12월 8일 취재지점: 청도시 현귀춘 로인댁 취재자: 김광현 김창석   명천군에서 고고성을 저는 1937년 5월 25일에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아버지 현창록(玄昌禄)과 어머니 김모란(金幕兰)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여났습니다. 제가 태여날 때 집에는 두 누님과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리순금(李顺今)이라 불렀고 큰 누님은 현천옥(玄千玉), 둘째 누님은 현현옥(玄贤玉)이라 불렀습니다. 저의 할아버지 현룡호(玄龙湖)는 연주 현씨 가문의 30대 장손으로 일찍 사망하다보니 할머니 리순금은 28살 젊은 나이에 과부로 한평생을 외독자인 저의 아버지와 손군들에게 모든 희망을 기탁하고 살아온 분이랍니다.  그런 가문에서 제가 현씨 가문의 5대 장손으로 태여나다보니 다들 저를 금산대 모시듯 했답니다. 누님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온 동네를 뛰여다니면서 남동생이 태여났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고 합니다. 당시 제가 태여난 함경북도 명천군의 우리 현씨네는 마을 둘레에 토성을 두르고 50여 가구가 모여살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그 후날 어머니께서 들려주던 한가지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 당시 명천군에서 활쏘기경기가 제법 자주 있었나 봅니다. 아버지가 워낙에 미남이고 총명하여 활쏘기를 잘하는지라 활쏘기경기가 있을 때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멋진 조선복장을 지어 입혀서 내보냈답니다. 누구보다 표가 나게 민족복장을 차려입은 아버지는 그에 걸맞게 활도 참 잘 쏘았다고 합니다. 워낙에 성품이 좋은 분인데다 목수재간이 있어 늘 남의 집 잔일들을 많이 해주었던터라 아버지가 활시위를 당길라치면 온 동네 남녀로소가 응원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버지는 활쏘기경기 때마다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을 뿐만 아니라 경기에서 늘 좋은 성적을 따냈다고 합니다.    명천군에서 온성군으로 제가 태여나자 아버지께서 저에게 현병덕(玄炳德)이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후 저의 손아래로 현병철(玄炳喆), 현병삼(玄炳三)이라 부르는 두 동생이 태여났는데 불행하게도 단명으로 두 돐을 넘기지 못했다고 합니다.  집안에 불길한 액운이 든거라고 생각한 할머니는 밤도와 두만강을 건너 중국 훈춘 량수천자라는 곳에 사는 무당할매를 찾아가 집안의 불길한 기운을 제거해달라고 간청하였다고 합니다. 그 굿쟁이할매가 하는 말이 집안의 나쁜 기운은 자기가 이미 말끔히 제거했노라고 하면서 문제는 현재 집안에서 금이야 옥이야 하는 그 장손의 이름을 개명하지 않으면 또다시 액운이 찾아들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예 이름자를 현귀춘(玄贵春)으로 개명해가지고 돌아왔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황당한 얘기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사는 내내 늘 그 굿쟁이할매가 많이 궁금했습니다. 과연 그 굿쟁이할매가 나한테 복을 가져다주어서인지 내 인생도 촌놈치고는 꽤나 잘 풀린 인생이라고 나름 고맙게 생각합니다. 물론 나 본인이 엄청난 노력의 대가를 치러온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1940년 한 겨울날, 우리 가문이 명천군에서 온성군으로 이사를 갈 때 제 나이가 겨우 3살이였기에 당시 상황은 거의 기억에 없습니다. 후날 아버지한테서 들은바에 의하면 당시 명천군에서 온성군으로 이주하게 된 주되는 원인이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여 명천군에서 더는 살길이 막막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허구한 날 뼈빠지게 농사를 해도 배만 곯으니 별수 없어 내지에서 변두리나 골짜기쪽으로 땅이라도 뚜져먹을 곳을 찾아 더 깊이 들어간거지요.  사실 명천군 하면 함경북도에서는 청진이나 김책 다음으로 동해바다를 마주한 해변지역인지라 사람 살기에는 좋은 고장이였지요. 그런 명천군에서 조선반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온성군으로 이사갈려면 화성군, 어랑군, 경성군, 부령군, 라진시, 선봉군, 온덕군, 새별군을 거쳐야 하는데 이건 거의 함경북도를 남북으로 횡단하는 셈이지요. 그때 온 집식구가 몇날 며칠 걷고 또 걸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우리가 이사 온 온성군에서 두만강가에 나가  건너편으로 돌을 휙 던져버리면 “풍덩-”하고 떨어지는 곳이 바로 도문강변이지요. 중국의 최북단에 막하가 있는것처럼 조선의 최북단에 온성군이 있다고 보면 아마도 쉽게 리해가 갈겁니다.  우리 가족이 온성군으로 이주할 때 로할아버지 현희남과 28살에 과부로 된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두 누님과 저까지 일곱식솔이였습니다.  온성군으로 온 후 어머니가 두부장사, 떡장사를 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누님들이 어머니를 많이 도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할머니와 두 누님은 온성탄광에 가서 석탄을 주어서 얼어죽지 않을 정도로 집안을 덥히며 살았고 그때 온 집안 일곱식솔이 이불 한두채에 발만 밀어넣고 다들 새우잠을 자면서 지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까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아버지는 16살에 장가를 갔다고 하는데 그때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두살 년상인 18살이였다고 합니다. 그때는 다들 그랬나 봅니다. 아버지가 늘 밖으로 목수재간을 가지고 돈 번다고 나돌았기에 어머니는 로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를 모시고 두 누님과 저를 데리고 근근득식으로 생계를 유지했기에 당시 우리 집은 엄청 가난했었습니다. 제가 5살나던 해의 일입니다. 당시 어머니의 언니(큰이모)가 온성에서 복장업에 정미소까지 운영하는 차씨 성을 가진 가문에 시집을 갔는데 온성에서 두번째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부자집이였습니다. 저의 큰누님이 그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는데 저도 가끔 누님을 뵈러 간답시고 그 집에 갔는데 걸친 옷이 하도 초라해서  어지럽다고 구들에는 올라가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집은 왜 만날 아등바등하는데 이 모양 이 꼴로 살지? 어떻게 하면 우리도 잘살수 없을까?” 어린 나이임에도 저는 늘 이런 고민을 했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꽤나 솜씨 좋은 목수였는데 그때(1945년도)쯤 해서 이모부한테서 돈을 얼마간 꾸었나 봅니다. 그 돈이 이모부의 돈인지 이모부 동생의 돈인지는 딱히 모르나 여하튼 이모부의 동생되는 사람이 자주 저의 집으로 빚받이를 와서는 꼴사납게 굴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아버지가 거의 밖으로만 도는 품팔이인생을 사는 처지이다보니 저의 집안 힘으로는 그 돈을 갚을 여력이 없었지요. 빚을 갚지 못하게 되자 이모부의 동생은 저의 집 가마를 뽑아 밖에 마구 내동댕이쳤습니다. 그때 서러움을 달랠길 없어 어머니는 동네어구에 세워진 돌하루방을 부여잡고 아주 서럽게 통곡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얼른거리는듯 합니다. 두 누이와 저도 어린 나이지만 어머니의 팔다리를 부여잡고 함께 울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주 어렸지만 이를 앙다물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가난이 원쑤로구나, 가난하면 이렇게 무시당하는구나, 하루 빨리 가난에서 해탈되여야지…”   화김에 밟아버린 간도행 그러던 1945년의 어느날 고생고생하던 큰누님이 갑자기 시집을 간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누님은 째지게 가난한 집안 때문에 아니 그것도 아버지의 강권에 못이겨 마음에도 내키지 않는 결혼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큰누님은 아버지와 함께 목수일을 하던 백씨 성을 가진 사장의 조카뻘 되는 백용산이라 부르는 청년에게 시집을 가기로 했는데 그 매제가 될 사람이 키도 작고 생김생김도 누님하고는 격이 안되는 사람이였습니다. 누님은 그 당시 동네에서 일등 신부감으로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아버지의 억지에 못 이겨 마음에 내키지 않는 시집을 가게 되였으니 당사자는 물론 식구들 모두가 많이 속상했던거지요. 결혼을 앞두고 어머니께서 늘 아버지를 책망하면서 하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고놈의 술이 문제라니까. 술만 거나하면 사촌한테 기와집을 지어준다고 당신 술마시고 그런 답을 준거잖아요. 고놈의 술이면 마누라도 누가 달라면 주겠다는 그런 답복을 할 당신이라니까? 차라리 나를 팔아먹지 왜 애매한 딸을 말도 안되는 사람한테 주기로 한건데?” 어머니도 어지간히 화가 났으면 그 며칠은 시도 때도 없이 바가지를 긁어댔습니다. 아버지도 자신의 그런 못난 처사가 마음에 걸렸던지 어느날 간다온다는 말도 없이 훌쩍 사라져버렸습니다. 어디로 뭘하러 가버렸는지 누구도 몰랐습니다. 워낙에 떠돌이인생을 사는 목수이니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썩 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그때 그 착잡한 마음에 휭하니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합니다. 아마도 속상한 김에 돈이라도 왕창 벌어보려고, 아니 그놈의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보겠다는 오기만을 가지고 훌쩍 떠났나 봅니다. 화김에 북간도로 가버린 아버지는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였습니다. 하늘처럼 믿어오던 31대 장손이 갑자기 없어졌으니 급해난건 누구보다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그 외독자 아들 하나만 믿고 살아온터라 옳던 그르던 아버지편이였습니다.  “귀춘아, 우리가 이렇게 손놓고 한정없이 아비를 기다리기만 해서야 되겠니? 이렇게 살다가는 우리 모두가 굶어죽을터인데 아비를 찾아 떠나야겠다!” 어느날 할머니가 비장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때가 1946년이 막가는 한겨울이라 기억됩니다. 할머니는 장손인 저를 앞세우고 아버지를 찾아서 무작정 두만강을 건너기로 용단을 내렸습니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온성을 떠나 남양을 걸쳐 두만강변을 따라 걷고 또 걸었습니다. 도중에 두만강변의 한 마을에 농사를 짓고 있는 큰누님집에 찾아가서 하루밤을 묵고 그 이튿날 아침밥을 어설프게 먹고 또 걸음을 재우쳤습니다.  두만강을 건너 걷고 또 걷다가 해란강가에 닿았습니다. 거기서 크게 용기를 얻어 다시 해란강연안을 따라 걸음을 재우쳤습니다. 눈에 싸인 논둑길을 따라 걷고 또 걸어서 어느날 해질녁에야 연길현 동성용 해란촌이라는 곳에 당도하였습니다. 그곳에 할머니의 본가집이 있었던것입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십중팔구는 외가에 찾아갔을거라는 짐작을 했나 봅니다. 할머니는 해란촌에 도착하자 곧장 본가집으로 가서 우선 아버지부터 찾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외가에 얹혀살면서 은근히 우리 일가를 중국으로 데려올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 우리가 선손을 써 아버지를 찾아 중국으로 건너온 겁니다. 아버지는 외가집 아래목 사랑채에 별도로 온돌을 놓고 나와 할머니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그러다가 1947년도에 아버지가 다시 조선 온성에 나가서 어머니, 작은 누님, 3살되는 녀동생 금자를 업고 보따리를 걸머지고 해란촌에 오게 되여 그때에야 우리 온 가정이 해란촌에 한데 모여 살게 되였답니다. 북간도에서도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산다는 이곳 세전이벌, 우리가 고생고생해서 도착한 곳이 바로 그 세전이벌 동북쪽 변두리에 위치한 동성용 해란촌이였습니다.  마을뒤로 유유히 해란강이 굽이돌아 흐르고 그 해란강 량안으로 세전이벌이라 부르는 바둑판같은 논이 아득히 펼쳐져있어 이곳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아하, 여기라면 배를 곯을 걱정은 안해도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기에다 드넓은 세전이벌 평야를 떡하니 지키고선 하얀 백설을 떠인 모아산이 마을뒤에 병풍을 두르고 있어 더더구나 가관이였습니다. 당시 해란촌은 “8.15”광복을 맞이한 이듬해라 꽤나 분주했습니다.  어찌 보면 당시 저의 아버지가 이곳 세전이벌에 괴나리보짐을 풀어놓은건 아주 현명한 선택이였던것 같습니다. 부친께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이곳 해란촌에 외가집이 있어 한동안 머물러 앉은건데 하도 목수일을 잘하니까 동네 어른들이 아예 이곳에서 함께 살자고 발목을 잡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해란촌에 도착한 그 이듬해 촌정부에서는 진흙벽돌(투피)로 지은 두칸짜리 낡은 집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를 찾아 떠난 할머니의 결단이 참으로 영명했던것 같습니다.  “호박이 넝쿨채 굴러 들어온다”고 우리가 해란촌에 도착하기 바로 몇달전에 중앙에서 “토지문제에 관한 지시(5.4지시)”를 하달했는데 동북 각지의 조선족집거구들에서 선참으로 기세 드높은 토지개혁운동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우리 집은 수전 18무 , 한전 15무를 분배받았습니다. 이국타향에 도착하자마자 그냥 땅부터 분배받았으니 이거야말로 덩실덩실 춤추고 싶은 마음이였지요. 그때 그 즐거워하던 온 집 식구들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지금도 보는듯 합니다.▣(책임편집/김향덕)
40    장백산 식물자원 개발에 가속도가 붙는다 댓글:  조회:781  추천:0  2017-04-13
-“장백산 생물자원 및 기능분자 교육부중점실험실”, “길림성장백산생물    자원 및 건강산업 중대수요협동혁신센터”주임 리동호 교수 인터뷰  글/ 리호남 “현재 장백산의 야생식물종류는 1,800여종에 달합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개발된 식물은 인삼을 비롯하여 몇가지에 불과합니다.” 이는 연변대학 “장백산 생물자원 및 기능분자 교육부중점실험실” 주임이며 “길림성장백산생물자원 및 건강산업 중대수요협동혁신센터“ 주임인 리동호 교수의 소개이다. 리교수는 선후로 연변대학 분석측험센터 주임, 연변대학 “장백산 생물자원 및 기능분자 교육부중점실험실“ 주임, “장백산생물자원 및 건강산업 중대수요협동혁신센터“ 주임, 길림성 고첨단기술혁신플래트홈 주임 등을 맡아왔으며 장백산 식물자원의 분석연구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렸다. 지난 2005년부터 그가 이끄는 연구진은 선후로 국가863대상, 국가자연기금대상, 성부급 과학연구대상을 따냈으며 실험실 연구성과를 생산력으로 적극 전환했다. 현재까지 그가 이끄는 연구진이 수여한 특허는 29가지이며 완성한 기술양도는 4개에 달한다. 특히 지난 2009년 연구진에 의해 개발된 샘플 전처리의기인 “ME-101다기능미량추출기”는 길림성 공업정보청의 신상품 검증을 통과했으며 전문가들의 “국내 공백을 메웠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식물자원을 연구하려면 우선 분석기술이 안받침돼야  로켓트를 발사하려면 전자, 재료 등 기술이 필요한것처럼 장백산의 식물자원을 개발하려면 우선 식물에 어떤 유효성분과 활성물질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 식물이 몸에 여차여차하게 좋다는 입소문만을 갖고서는 본격적인 자원개발에 나설수 없다. 반드시 유효성분을 정확히 분석한 후 분석결과에 근거하여 개발가능성 여부를 판단하여야 한다. 그리고 식물의 유효성분을 분석하려면 우선 샘플을 의기분석에 필요한 상태로 사전 처리할것이 필요하다. 이를 샘플의 전처리라고 하는데 전처리를 거치지 않은 식물은 흔히 분석의기로 유효성분을 정확하게 측정할수 없다. 하지만 기존의 샘플 전처리기술을 보면 한가지 샘플을 처리하는데 며칠씩 소요된다. 그러므로 기존의 기술로는 사실상 많은 식물의 분석을 할수 없다. 한편 식물의 유효성분의 경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함으로 기존의 방법으로 전처리를 거칠 경우 오랜 시간의 분석방법으로 인해 식물의 유효성분이 금방 채집할 때와 확연히 다른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효률이 높은 샘플 전처리기술개발이 장백산식물개발의 관건적인 요소로 되고 있다.  “저희 연구팀에서 개발한 샘플 전처리의기를 사용하면 며칠을 해야 할 샘플 전처리과정을 몇분동안에 끝낼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획기적인 기술이라 할수 있습니다. 현재 연변 현지의 기업에 기술양도를 이미 완성한 상태이며 래년부터 대량생산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이는 장백산생물자원분석전문가 리동호 교수의 소개이다. 이 기술을 도입할 경우 쾌속적이고 조작이 간편하게 유효성분을 추출하며 소량의 샘플(mg 단위)과 유기용매(µL)를 사용하는 등 우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휘발성, 반휘발성 성분을 동시에 추출하고 추출과 정제 일체화를 실현하여 직접 의기분석을 진행할수 있다. 지금 이 의기는 길림대학, 중국지질대학, 화동사범대학, 한국전남대학, 한국인하대학, 말레이시아 버터라대학, 향항리공대학, 이딸리아 푸쟈대학, 중국과학기술원 란주식물연구원, 중국제1해양연구원, 길림연초공업유한책임회사, 연변환경보호검측소, 한국광주록색환경지원센터 등 대학들과 연구기구들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향후에는 일반인 가정에서의 보급도 계획하고 있다.  지난 1985년 연변대학 화학학부에 입학하여 본교에서 본과, 석사 과정을 마친 뒤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선후로 한국건국대학교, 한국해양연구원에서 박사, 박사후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리교수는 국내 연해지구 연구기구 및 유명대학교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모교의 부름을 받고 연변대학에 돌아와 장백산 식물자원 분석연구에 몰입했으며 연변대학의 장백산 천연자원 보호와 개발, 연구를 한단계 업그레이드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리고 지난 2013년 연변대학 “장백산 생물자원 및 기능분자 교육부중점실험실” 주임으로 부임한 뒤 리교수는 학과 교차와 융합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정부, 기업, 실험실의 공동합작을 적극 모색하였고 2015년에 성급 과학연구플래트홈인 “길림성장백산생물자원 및 건강산업 중대수요협동혁신센터”를 건립하였다. 현재 이 센터에는 국내외 30여개 대학과 연구소 및 50여개 기업이 포진해 있다.   건강산업은 발전잠재력이 무궁무진한 산업  최근년간 길림성에서는 “록색발전, 순환발전, 저탄소발전”구호를 제기하고 지역자원우세를 발휘하여 생태경제구조조정을 진행해왔으며 생태순환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진력하고 있다.  “과거에는 장춘제1자동차공장, 길림화학공업공사 등 중공업이 길림성의 기둥산업이였지만 금후에는 건강산업, 관광산업, 보건식품산업 등 록색산업이 길림성의 주요산업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리동호 교수는 동북진흥전략, 장길도발전전략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길림성은 생태자원우세에 근거하여 생태문명산업, 서비스산업을 가일층 발전시키게 될것이며 따라서 “길림성장백산생물자원 및 건강산업 중대수요협동혁신센터”에서 창조한 연구성과들이 지역경제의 활성화에 큰 역할을 담당할것으로 예측했다. 지금 기술혁신연구는 연변대학 “장백산 생물자원 및 기능분자 교육부중점실험실”에서 담당하고 산업화는 “길림성장백산생물자원 및 건강산업 중대수요협동혁신센터”에서 추진하는 좋은 기제가 건립되였으며 실험실의 연구성과들이 산업화되여 연변지구 건강산업발전에 이바지하게 될 예정이라고 리동호교수는 밝혔다.  “장백산의 식물은 한랭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하여 오랜 시간의 진화를 거쳐왔으며 장백산지역 식물만의 특유한 성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런 원인으로 장백산지역 식물의 연구가 더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리교수는 전에는 장백산식물에 대한 연구가 안받침되지 못해 장백산식물보건상품을 개발하지 못했지만 금후에는 이런 상황이 크게 개변될것이라고 한다. 장백산의 자원우세와 연변대학의 기술우세를 합치면 큰 시너지효과가 발생하게 될것으로 예측했다. 멀지 않은 장래에 장백산식물자원을 기본으로 한 보건식품, 보건약품, 건강식품들이 잇달아 개발되게 될것이다.  “우리 민족의 음식구조를 보면 민들레, 도라지, 고사리 등 산나물을 소재로 한 반찬들이 많은데 이 또한 장백산지역의 식, 약 량용 식물의 전형적인 실례이기도 합니다. 한편 이는 장백산지역의 식, 약 량용식물개발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리교수는 또한 식물의 분석기술은 식물개발리용에 유리하며 병치료에도 큰 도움을 줄수 있다고 했다. 인체에 생기는 많은 병들은 각 부위에 소재한 세포들이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해 생긴다. 부적절한 치료방법 또한 문제로 된다. 실례로 현재 항암치료로 흔히 화학치료, 방사성치료를 꼽는데 이런 치료방법은 암세포와 인체의 면역세포를 모두 파괴하기에 치료과정에 인체의 면역계통의 파괴를 피면할수 없게 된다. 암세포가 급속도로 번식하고 다른 부위로 확산되는것을 공제한다면 암치료에 획기적인 돌파구를 갖다줄것이다. 음식료법을 통해 암세포의 증식과 전이를 공제하고 인체 면역세포를 증강시킨다면 리상적인 암치료효과를 볼수 있을것이다. 향후 식물연구가 인체건강연구에 더 심입되면 항암치료가 아닌 식의료법을 통해 암을 극복할수 있는 시대가 꼭 도래할것이라고 리교수는 예측했다. ▣ (편집/한동준)
39    2017년 《중국민족》조선문판 주문안내 댓글:  조회:1529  추천:0  2016-12-05
38    김경원:전자상거래산업으로 제2차 창업을 꿈꾸다 댓글:  조회:1463  추천:0  2016-11-18
글/ 김향덕 “1980년대말 1990년대초의 산동성 위해시는 아주 보잘것없는 곳이였어요. 그러나 한창 대외개방의 돌풍이 불고 있던 터라 연해도시는 젊은이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차마련해주었지요.” 연길에서 전자상거래관리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경원씨의 말이다.   1964년 연길에서 태여난 그는 길림대학 행정관리학과를 나왔고 일본어와 한국어에 능통했다. 1988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는 산동성 위해시의 수출입무역공사에 배치 받았다.    당시 국가적으로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한지 10년이 되였다. 연해도시는 대외개방의 교두보인 만큼 수출입무역이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였다. 덕분에 김경원씨는 직접 대외무역과 관련된 지식을 착실히 습득할수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안해가 있는 청도시로 전근하여 계속해서 대외무역사업에 종사하다가 드디어 1996년에 복장회사를 꾸리면서 자주창업에 나섰다. 오래동안 쌓아두었던 무역경험에 의거하여 그의 회사에서 생산한 복장은 순리롭게 유럽과 카나다로 수출되였다.   이로부터 김경원씨는 창업후의 첫 수익을 올렸고 복장회사는 날로 규모가 확대되여 종업원이 가장 많을 때는 680명에 달했다. 그러나 필경 로동밀집형산업인만큼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인건비 상승, 시장환경 변화 등 여러 가지 요소의 종합적인 영향으로 인해 결국 김경원씨는 복장회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말았다.   2015년에 이르러 김경원씨는 고향인 연길을 찾아 전자상거래산업으로 제2차 창업을 꿈꾸기로 했다. “연변의 독특한 지역자원, 인력자원 그리고 정책자원은 제가 돌아오기로 결심한 가장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물론 고향건설에 투입하려는 개인정감도 일부 동력이 되긴 했습니다만.”   2014년 7월, 연변신통택배(申通快递)회사 윤기천 총경리는 북경에 있는 김경원씨를 찾아 연길에 돌아와서 함께 전자상거래산업을 해보는것이 어떠냐는 제의를 해왔다.   마침 2015년에 중한자유무역협정이 정식으로 체결되면서 연변의 지역우세가 더욱더 충분히 발휘될것이라 판단하고 김경원씨는 흔쾌히 승낙했다.   2015년 5월, 김경원씨는 윤기천씨와 함께 전자상거래관리회사를 창립하였고 총경리직을 맡았다. 그들이 투자한 연길첨단기술개발구에 위치한 전자상거래빌딩(延吉电商大厦)이 운영되면서 예상대로 연길시의 록색산업발전 및 산업구조조정에 중요한 추진역할을 일으키게 되였다.   현재 김경원씨는 연변의 지역적 우세를 충분히 발휘하여 한국과 일본을 대상으로 한 국제상품물류중심지를 건립하는것을 분투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전자상거래산업방면의 전문인재를 배양하는것이 급선무였다.   지금까지 그의 회사는 무료로 800여명의 전문인재를 배양시켰고 일부 귀향하여 전자상거래산업에 종사하는 대학생들에게 기술적인 지지나 기타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2015년 11월에 김경원씨는 연변대학과 손잡고 대학생창업기지를 건립하고 대학생들에게 직접 창업을 경험해보고 실습할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현재 연길전자상거래빌딩에는 35개의 기업이 입주하고 300여명의 인원들이 전자상거래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김경원씨의 전자상거래관리회사는 연길뿐만 아니라 전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전자상거래교육기지로 거듭나고 있다.   귀향창업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김경원씨는 “귀향창업하려거든 첫째는 튼튼한 기술력을 장악하고 제일 좋기는 어느 한 방면의 전문가가 되는것, 둘째는 목표가 명확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고향의 여러 가지 실제적인 요소를 충분히 고려한 다음에 실천에 옮길것”이라고 조언했다.▣   중국민족 2016년 5월호
글/ 리설선   안무에 깃든 이야기를 알아보고저 필자는 무극 “아리랑꽃”을 맡은 연변가무단의 김희 총감독과 만났다. 국가1급 안무가인 김희 총감독은 1990년대까지만 하여도 연변가무단 창작실의 막내였다. 선배들이 퇴직하고난 지금까지도 그는 홀로 창작실을 지키며 묵묵히 예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번에도 그는 후배들을 이끌고  “아리랑꽃”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력사를 돌이켜보면 연변가무단은 매 10년마다 한개 시대를 대표할수 있는 예술작품을 선보였다. 1980년대에는 무극 “춘향전”이 있었고 1990년대에는 무용시 “장백의 정”이 있었으며 2000년대에는 음악무용시 “천년아리랑”이 있었다. 오늘의 무극 “아리랑꽃”은 바로 이처럼 유서깊은 조선족의 대표적 예술작품의 전통을 이어받은것이다.   “1980년대 무극 ‘춘향전’을 선보인 이래 30년간 공백기인 무극예술에 대해 우리 세대가 손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알리고 우리 춤을 통하여 문화의 깊은 향기를 공감할수 있도록 하는것이 민족예술업무에 종사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업이자 사명감입니다”라고 전하는 김희 감독이다.  “안무가들은 항상 창작사유의 끈을 놓치 않고 일상을 보냅니다. 춤과 대화하고 춤과 싸우고 춤과 사랑을 나누는 그야말로 우리의 일상은 지겨운 춤과의 전쟁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리랑꽃’은 자신의 신변에서 가장 가깝고 사실적인 부분을 제재로 해서 창작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작품이였습니다.”  “아리랑꽃”을 만들게 된 계기에 대해 김희 총감독은 이렇게 밝혔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것을 토대로 만들어진 춤은 단지 춤의 맵시, 고운 형식만 뽐내는, 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무대로 밖에 될수 없다고 김희 총감독은 말한다. 이는 무용가들의 삶의 철학, 무용철학과 일상의 에피소드 등 이야기 줄거리를 갖춘, 관객과 소통할수 있는 공연무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김희 감독의 무용철학이기도 하다. 2014년 3월 가무단에서는 기획발표가 있었다. 김희 감독의 “아리랑 꽃향기”는 4개 공모작품중 현대감각이 돋보인다는 호평을 받으면서 최종 기획작품으로 선정되였다. 그후 국가1급 작곡가이며 원 연변가무단 단장인 박서성 선생이 예술고문과 작곡을 맡고 국가1급 연출이며 저명한 조선족시인이며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이며 연변인민출판사 《문화시대》잡지 총편인 김영건 선생이 극본창작을 맡게 되였다. 그렇게 3년이란 긴 시간을 거쳐 반복적인 수정과 노력끝에 오늘의  “아리랑꽃”으로 대중들에게 선보이게 되였다. 진달래꽃, 도라지꽃, 무궁화 등은 모두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꽃들이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아리랑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김희 감독은 “아리랑꽃”이라고 작품명을 결정하게 된데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을 가장 먼저 떠올릴수 있는, 우리 민족의 혼과 얼이 담겨있는 대명사이고 상징입니다. 꽃은 문화를 뜻하는 부호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리랑은 유구한 우리 민족의 력사이며 혼백의 노래, 꽃은 혼의 개화이며 그 향기는 만방에 울려퍼지는 민족문화의 메시지를 가리킵니다. 그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우리 장단, 장고를 모티브로 하여 작품의 흐름에 맞게 한 예술가의 혼을 장고에 불어넣고 싶었습니다.” “아리랑꽃”은 장고를 중심으로 부채춤, 탈춤, 상모춤, 아박춤, 수박춤, 수건춤 등 우리 전통무용들을 도입하여 한 무용가가 걸어온 희노애락의 성장과정을 그려주었을 뿐만아니라 “향기속으로”, “파란향기”, “빨간향기”, “하얀향기”, “노란향기”, “천년향기”를 통해 우리 민족의 파란만장한 력사를 보여주고 있다.  세계 무대를 겨냥한 연변가무단의 무극 “아리랑꽃은” 춤과 음악의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인 한(恨)과 미(美), 신명을 그속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170명의 “아리랑꽃” 스탭진, 특히 90여명의 무용가들은 3년 동안 매일 16시간의 혹독한 훈련을 겪었다. 허리부상, 다리부상 등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원망 한마디 없이 훈련장 바닥을 땀으로 적셔왔다.  우리의 굴곡진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내는 주인공역을 맡은 김선화, 방려미와 박현길은 훈련과정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간고했지만 개인이 아닌 우리 민족을 대표해서 나간다는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낀다며 관중들의 박수소리, 만족스런 표정을 보면 모든 로고가 말끔히 사라지는것 같다며 한결같이 심경을 밝혔다.  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조선족 동포의 성원속에서 무극 “아리랑꽃”은 인터넷에서 뜨겁게 인기투표 1위를 차지했다. 투표수가 올라갈수록 어깨가 더 무거워지고 있다고 김희 총감독은 말한다.  “지구촌 우리 민족들이 하나같이 동원되면서 무극  ‘아리랑꽃’에 대한 기대가 엄청 높아졌습니다. 관계부문의 지지와 연변가무단의 신뢰에 힘입어 이제 곧 열리게 될 제5차 전국소수민족문예공연과 중국문화상 평선임무를 원만하게 마치고 기대에 부응하는 좋은 성적을 안아와야겠다는 결심을 안고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 3년간 모든 스탭들의 피타는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초심을 잃지 않고 총연출로서의 직책을 다할것입니다.” 김희 감독은 “아리랑꽃”을 공연하는 무용가들이야말로 진정한 “아리랑꽃”의 주인공이 아니겠냐고 피력했다. 그의 말처럼 우리 민족의 찬란한 전통문화를 계승발전하기 위해 오늘도 묵묵히 자신의 일터를 지키며 노력분투하고 있는 예술가들 모두가 아름다운 “아리랑꽃”인것이다.▣ 
36    “당신 해봤어?” 댓글:  조회:791  추천:0  2016-11-18
글/ 김몽 세상 사람 모두가 성공이라는 “집”안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러나 성공의 “집”안에 들어가는 사람은 결국은 얼마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공이라는 이 “집”은 아주 매정하여 아무에게나 문을 열어주는것이 아니고 오직 용감한 자, 긍정적인 사유를 가진 자, 끈질긴 의력을 갖고 있는 자에게만 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오늘 이 글에서는 세계적인 대기업, 현대그룹을 만든 정주영 회장의 일화를 례로 들어 두드림의 미학을 말하려 한다. 1970년대 초에 정주영은 조선산업에 뛰여들려고 작심했다. 당시 정주영에게는 배를 만들만한 막대한 자금도 없고 배를 만들어본 경험도 없었다. 그해에 정주영 회장은 독일로 돈 빌리러 갔다. 돈을 꿔주면 배를 만들어 당신들에게 팔겠다는 정주영의 말을 듣고 독일재벌들은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고 한다. 사실 조선업에 대해 아무런 경험도 없고 거기다 자본도 없는 사람에게 누가 거액의 돈을 꿔주겠는가? 독일인들은 “당신은 나무배나 만드시오.”라고 하며 조롱섞인 거절을 했다고 한다. 결국 정주영 회장은 독일의 문을 한번 두드렸다가 고배를 마셨던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빈털터리로 돌아온 정주영 회장을 보고 배를 만들 희망이 안 보이니 그만 포기하라고 권고했다. 그때 정주영 회장은 “당신 해봤어?” 하고 반문했다.  “당신 해봤어?” 란 이 말은 오늘 한국에서는 어록으로 불리우고 있다. 직접 해보지 않은 사람은 발언권이 없다는 뜻과 결심만 있으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 뜻이 모두 포함된 말이다. 정주영은 독일이라는 문을 두드렸다가 괄시를 받고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배를 만들겠다는 웅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1971년에 정주영은 영국의 문을 두드려 보려고 런던으로 갔다. 정주영이라는 사람이 돈을 빌리러 왔다는 소문을 듣고 재벌들이 이 핑게 저 핑게 하면서 정주영을 만나주려고 하지 않았다. 며칠을 뛰여다니다가 요행 대재벌인 애플도이사의 총재인 롱바톰의 사무실을 알게 되여 그를 찾아가게 되였다. 그러나 롱바톰 회장은 동양의 작은 나라,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름도 없는 기업가를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허나 정주영은 실망하지 않고 매일이다싶이 찾아갔다. 정주영의 끈질긴 행동에 감동된 롱바톰 회장이 마침내 정주영 회장과 만났다. 체면으로 만나주기는 했지만 정작 돈을 빌려달라는 말에는 이런 저런 구실을 대면서 거절하였다. 이때 정주영이 5백원짜리 한국지페를 롱바톰 회장에게 내밀었다. 당시 한국의 5백원짜리 지페에는 리순신 장군과 거북선이 그러져있었다. 정주영 회장은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철갑선을 만든 나라가 우리 나라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람이 당신들이 가장 자랑하는 넬슨 제독도 엎드려 절을 한다는 리순신 장군입니다. 우리의 잠재력을 믿어주십시오.” 정주영의 끈질긴 열정에 감동을 받은 롱바톰 회장은 버클리은행에 긍정적인 보고서를 제출해주었다. 결국 정주영 회장은 영국에서 돈을 빌리게 됐으며 배를 만들어본 경험도 없고 자본도 없던 한국의 조선업이 발을 떼였고 오늘은 한국의 조선업이 세계 1위를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기업으로 우뚝 솟게 된것이다. 한국 기업들의 중동진출도 한강기적의 창조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는데 중동의 문을 두드리고 중동진출을 이끌어 낸 사람도 정주영이다. 1970년대 중동은 석유로 막대한 딸라를 벌어들였다. 중동나라들에서는 벌어드린 돈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하려고 많은 나라의 기업들을 청했으나 기업인들이 한번 와 보고는 조건이 렬악하다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돌아갔다. 당시 경제발전에 혼신을 쏟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이런 기회에 중동의 돈을 벌어오려고 정부관리들을 중동에 파견하여 고찰하게 하였다. 정부고찰단은 고찰이 끝난 후 대통령에게  “너무 더워 낮에는 일할수 없고 건설에 필요한 자재와 물이 부족함으로 중동진출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며칠간 고민을 하던 박정희가 정주영을 청와대로 불렀다. “정회장 당신의 견해를 말해보시오. 당신마저 중동진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난 중동진출계획을 포기하겠소.” 정주영 회장도 중동지구를 돌아보고 왔던차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년 열두달 비가 오지 않으니 일년내내 공사를 할수 있고 건설에 필요한 모래와 자갈은 현장에 있으니 자재조달이 쉽고 물은 어디에서 실어오면 되고 50도가 되는 뜨거운 날에는 초막을 치고 자고 밤에 서늘해지면 그때 일하면 됩니다. 중동에서 기름을 싣고 우리 나라로 오는 배는 돌아갈 때 빈 배이니 그 배에다 물을 싣고 가면 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긍정적인 사고로 사물을 판단하는 정주영 회장의 전위적인 기업가정신에 탄복하고 중동진출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30여만에 달하는 한국인들이 중동으로 대거 진출하여 막대한 딸라를 벌어들였다. 오늘의 중동지구의 고속도로와 지하수도관은 거의 다 한국로동자들이 건설한것이다. 중국에도 문을 두드리는 영웅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등소평이다. 등소평은 오래동안 봉페상태에 있던 가난한 중국을 개변시키기 위해 개혁개방이라는 큰 대문을 열어제끼고 중국을 오늘과 같은 경제대국, 군사대국으로 전변시켰다. 문이란 한번 두드려서 열리는것이 아니다. 한번에 안되면 두번, 두번에 안되면 세번……문이 열릴 때까지 계속 두드려야 하며 정 안되면 몸을 문에 부딪치면서라도 열어야 한다. 나라나 개인이나 이런 정신만 있다면 못해낼 일이 없을것이다. ▣
35    연길 음식배달시장의 달인 박세봉 댓글:  조회:1272  추천:0  2016-11-18
글/ 한동준 국내의 음식배달시장에 삼총사가 있다면 사람들은 대개 바이두배달(百度外卖), 메이퇀배달(美团外卖), 그리고 어러마(饿了吗) 등 브랜드를 떠올릴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도시의 음식배달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부인 연길시에 가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필자가 만난 과과왕회사(呱呱网)의 CEO인 박세봉은 조선족사회 소비문화의 특점을 잘 파악하고 연길 현지의 음식배달시장을 공략한 일인자이다.    10년간의 상해생활, 창업의 기초를 닦다   박세봉은 어릴적부터 취미가 명확했다. 방과후 친구들이 숙제를 완성하고 과외수업을 받을 때 그는 집에서 그림을 그렸다. 할아버지가 연변에서 이름난 화가인 리유로 부모들은 이를 반대하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에 접어들어 박세봉은 학업을 그만두고 만화 그리기에 올인하였다. 그리고 차츰 회화기초를 토대로 디자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는 2000년초, 인터넷은 속도가 느렸고 PC방이 점차 보급되는 시점이라 국내에는 아직 디자인에 관한 교과서가 매우 적었다. 박세봉은 한국에서 출판한 디자인 교과서를 구입하여 자체로 배웠다.  일정하게 실력을 쌓은 박세봉은 연길의 한 IT기업에 취직을 하였는데 설계를 아는 직원은 전 회사에 그 혼자뿐이였다. 당시 회사 사장은 한국에서 IT산업의 성황을 보고 곧바로 연길에 돌아와 회사를 차렸던것이다. 그곳에 있는 몇년간 박세봉은 인터넷 쇼핑몰, 꽃배달 전문사이트 등을 만드는데 참여하였고 명함, 화첩 심지어 고추장 포장까지도 설계했다. 그 당시 모방할 선례가 없다보니 그의 작품은 가장 좋고 훌륭한것으로 평가됐다. 박세봉은 회사에서 능력쌓기의 한계점에 다달았음을 느끼고 더욱 높은 곳에서 자신의 실력을 검증받고 싶었다.  2003년, 19세의 나이에 박세봉은 단돈 1500원을 가지고 상해로 떠났다. 부모님은 그를 적극 지지해 나섰다. “부모님은 18세를 넘기면 스스로 독립해야 된다고 여러번 얘기하셨습니다. 연길에 있기보다 외지에 나가 단련받는것이 자립하는데 훨씬 도움이 되였습니다.”  상해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중한 합작회사인 모 게임회사에 입사하였다. 중국어와 한국어에 능통하고 게임과 설계도 잘 안다는 점이 회사 책임자에게 어필되였던것이다.  “사실 그때 회사에서는 본과졸업이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학력이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으로 이런 학위를 갖고 있는 관련 인재들이 적었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이중언어를 알고 IT산업에 종사하면서 게임까지 만들수 있는 조선족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취직후 박세봉은 중한 부서간의 통역을 하면서 게임설계, 웹사이트 설계업무도 맡았다. 그 시기 웹사이트 설계분야는 한국이 앞서고 있어 그는 한국에서 보내온 요구대로 설계를 진행하였다. 이렇게 몇년간 그는 꾸준히 경험과 아이디어를 쌓았다. 그후 또 일본게임회사와 한국게임회사에서 2~3년간 근무하였고 수중의 자원을 리용하여 친구들과 창업도 해보았다. 상해에 간지 10년을 넘길 무렵, 박세봉은 연길을 떠날 때 10년만 상해에서 분투하다 고향으로 돌아오겠다는 예상대로 연길에 돌아와 창업준비를 시작하였다. 박세봉(좌1)과 회사기술책임자    귀향창업, 음식배달시장 공략   정식으로 연길에서 창업하기전, 박세봉은 여러번 돌아와 시장조사를 하였다. 집을 따로 세맡아 부모와 떨어져 살면서 그는 하루세끼를 배달음식으로 해결하였는데 연길의 음식배달시장이 상해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 시기 연길의 음식배달방식은 아주 전통적이였다. 고객이 배달회사에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하면 배달회사에서 이를 적은 후 해당 식당에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하고 다음 배달회사에서 소형 무전기를 통해 심부름아저씨에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무엇을 배달해야 된다고 통지하는 방식이였다. 이렇게 음식을 주문하는데 전화를 두번씩이나 들고 놓고 또 심부름 아저씨도 직접 통지해야 하니 많은 시간이 소모되였고 또 주문 고봉기에 전화가 아예 안되거나 식당에서 식재가 없어 만들지 못하는 상황도 발생하여 음식주문 자체가 변수로 충만되여있었다. “그때 디디택시(滴滴打车)가 연길에서 차츰 보급되던 시기였습니다. 저는 디디택시의 고객이 주문을 어플에 내걸면 기사들이 자유로 수주(接单)하는 이러한 모식을 음식배달시장에 도입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였고 곧바로 집행에 나섰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웹사이트가 바로 과과왕닷컴이다. 고객들이 과과왕 사이트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심부름 아저씨들은 어플을 통해 이를 자유로 수주하고 다음 해당 식당에 전화를 걸어 음식을 주문하고는 시간내에 배달하는것이였다.  그러나 단지 이러한 혁신적인 배달방식만을 가지고 음식배달업계의 삼총사가 도사리고 있는 현지시장에서 발목을 굳히기란 약간 부족했다. 고심끝에 그는 과과왕의 정체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삼총사와 차별화되는 전략을 생각해냈다.  우선 그는 각 식당에서 제공한 이중언어 메뉴판을 근거로 사이트에 등록된 모든 료리에 한어와 조선어로 이름표기를 하였다. 이는 고객들이 음식을 검색하는데 편리를 제공하고 또 한족이 대부분인 심부름꾼 아저씨들이 각양각색의 료리이름에 구애없이 무난하게 식당에 전화를 걸어 주문할수가 있게 되였다. 이중언어 메뉴검색은 전국시장을 겨냥하고 만든, 배달업계 삼총사의 어플이 제공할수 없는 기능이였다. 다음 그는 차별화된 주문 메뉴를 선택했다. 보통 배달업계 삼총사가 연길에서 주문량이 많이 들어오는것은 마라탕과 같은 중저가 음식들이였다. 박세봉은 이와 반대로 비싸지만 질과 량이 보장되는 양식, 일식, 조선족 및 한국음식 그리고 고급중식 등 중상권 가격의 료리들을 사이트에 등록했다.  고향이 연길이고 여기서 자라난 박세봉은 그를 포함한 조선족들의 소비심리를 잘 료해하고 있었다. 조선족 고객들은 비싼 가격이라도 맛있고 즐거움을 줄수 있다면 기꺼이 돈을 쓰는 특점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충동소비의 심리에 “통”까지 크다는것이다. 그리하여 가격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사이트에는 고객들의 주문이 끊기지 않고 있다. 박세봉의 소개에 따르면 현재 과과왕의 서비스를 사용하는 고객가운데 90%이상이 조선족이라고 한다.  음식배달 외에 박세봉은 과과왕닷컴에 24시간 온라인 슈퍼를 운영하고 있다. 심부름 아저씨가 수주하여 배달하는 식으로 운영되는 슈퍼는 연변특산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류 및 간식 등 먹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주말에 축구경기가 있으면 맥주가 불티나게 팔립니다. 수입산이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또 쉽게 저의 사이트를 통해 구매할수 있고 여기에 배송비도 낮아 많이들 찾고 있습니다.” 연길시장을 겨냥하고 제정한 박세봉의 차별화 전략은 배달업계의 삼총사를 따돌리고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현재 그는 과과왕닷컴의 상업모식을 진일보 발전시켜 향후 북경의 왕징, 청도의 청양구, 상해의 민항구, 광주의 백운구 등 조선족 집거지까지 넓힐 계획이다. 필자는 이것이 바로 귀향창업의 가장 좋은 발전방향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글/ 김향덕 연길시내에서   “룽마트” 라고 하면 모를 사람이 없을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일찍이 한국상품을 전문 판매하는 마트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이다. 2005년부터 지금까지 10여년간 “룽마트”는 줄곧 안전한 상품과 성실한 경영으로 소비자들의 신뢰를 받아왔다. “룽마트”의 사장은 고향이 왕청현인 박철남씨였다. 그는 어릴적 부모님을 따라 흑룡강성으로 이사하여 줄곧 거기서 자랐다. 1980년대말, 할빈공업대학이라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았던 박철남씨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당시 개혁개방정책의 추동으로 사회적으로 창업의 열조가 일어났다. 여느 청년들처럼 박철남씨도 마음속으로 상업계에 발길을 들여놓고 무언가를 자신의 힘으로 해내고 싶었다.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듯이 그는 선후로 전자연구소와 기계공장을 꾸려보았지만 실패를 거듭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1999년에 이르러 식품회사를 꾸리고 주로 패스트 소비품(快速消费品)을 판매하게 되였다. 올바른 경영리념과 투철한 관리방식으로 박철남씨는 신속히 흑룡강성에서 패스트 소비품시장의 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후, 우연한 기회로 연변을 찾은 박철남씨는 어린 시절 부모님과 고향을 떠나기전의 추억이 떠오르면서 깊은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번영발전해가는 연변의 현재 모습이 옛날과는 퍽 달랐기 때문이다.   전기의 시장고찰을 거쳐 2005년에 박철남씨는 드디어 연길시내에 식품소매상점을 꾸리게 되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연길은 조선족들의 집거지인 만큼 한국상품소비가 많았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박철남씨는 전문 한국상품을 판매하는 마트를 꾸리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룽마트”였다. 예상대로 한국상품은 연길 소비자들의 환영을 받았고 “룽마트”의 매출액도 날로 상승하였다. 따라서 박철남씨는 경영규모를 확대하여 현재 연길에 13개의 매장, 할빈에 2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최근 년간 인터넷의 발전에 따라 소비자들의 소비방식이 크게 변화되였다는것을 박철남씨는 일찍이 감지하였다. “룽마트”는 매장을 통하여 직접 상품을 판매하는 동시에 인터넷에서도 상점을 운영하고 있다. 따라서 소비자들은 컴퓨터나 핸드폰으로 인터넷에서 “룽마트”의 상품을 주문하면 즉시로 배송 받을수 있다. 현재 박철남씨는 새로운 물류중심지를 건설하여 1400평방메터의 사무구역과 5000평방메터의 물류창고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아름다운 꿈은 이제야 첫 걸음을 뗀 셈이다. 왜냐하면 박철남씨의 최종목표는 단순히 한국상품을 들여다가 중국에서 판매하는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연변특산품을 한국, 일본 등 해외로 수출하는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리념대로라면 고향 연변의 특색을 살려 연변상품을 내다파는것이 진정한 재능이다. “연변은 예로부터 산 좋고 물 좋은 고장으로 이름났지요. 특히 연변의 농산품들은 대부분 록색 유기농제품으로서 앞으로의 발전전망이 크다고 판단됩니다.” 2014년에 연길시 정협위원으로 당선된 박철남씨는 연변의 농업산업화 발전에 관련된 제안을 내놓았다. 앞으로 박철남씨는 연변의 농산품개발에 주력할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그는 식구들을 모두 할빈에서 연길로 데려옴으로 진정으로 귀향한 셈이 된다. 그의 말대로라면 번잡한 대도시 생활도 좋지만 그래도 산 좋고 물 좋으며 인정이 넘치는 고향에 되돌아와야만 진정으로 살맛을 느낄수 있다는것이다. 박철남씨는 정부차원에서 더욱 많은 기회를 창출하고 더욱 많은 우대정책을 내놓아 더욱 많은 인재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창업할것을 희망했다. 고향에 돌아와서 창업을 결심한 사람이라면 단순히 누군가에게 의지하는것보다 명확한 목표를 갖고 자신만의 재간으로 꾸준히 실천해나가는것이 성공에 다다르는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글/ 김향덕  1995년 리경희씨는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과 함께 고향 연길을 떠나 심수로 향했다. 당시 그들의 선택은 누가보기에도 다소 모험적이고 과감했다.  심수에서 리경희씨에게 차례진 첫번째 직장은 향항기업이였다. 영어를 조금 알고 한국어가 가능했기에 그는 한국과 관련된 업무를 능숙하게 처리할수 있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한국기업에 전근하여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재무부 부장자리까지 올랐다.  한국기업에서의 근무는 조선족 직원들의 처지를 제대로 파악할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였다. 당시 한국기업들은 세계화의 물결속에서 해외시장공략에 주력하였고 비교적 완벽한 업무체계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에 대비하여 조선족 직원들은 대부분 경력이 부족한 햇내기들로서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도 별로 많지 않았다. 특히 학창시절 주로 일본어를 외국어로 배운 조선족들은 한국상사들이 흔히 사용하는 영어에서 나온 외래어를 잘 알아들을수가 없었다. 따라서 의사소통문제로 조선족 직원들은 한국상사들의 지적을 받기가 일쑤였다.  1996년 리경희씨는 심수에서 전자기기공장을 세우고 직접 재무관리를 비롯한 제반 경영에 참여하였다. 4년간의 실천으로 그는 풍부한 관리경험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직업기술교육의 시급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4년간의 분투로 저는 일정한 자금축적을 하게 되였다. 그러나 심수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무거워났습니다. 특히 연변에서 온 조선족청년들중에서 낮은 학력과 부족한 기술력으로 랭대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리경희씨는 고중에 진학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사회에 들어서면 여러 방면에서 오는 압력을 받기가 쉽다고 말한다. 특히 한가지 장끼라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면 대도시에서 생존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는 마음속으로 장차 고향에 돌아가 학원을 꾸려 취업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영어, 컴퓨터, 재무기술 등을 전수하기로 다짐했다. 고향의 젊은이들이 재능을 넓혀 조금이나마 쉽게 사회생활에 적응하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2000년 리경희씨는 다년간 모았던 자금과 실천경험을 갖고 연길로 돌아왔다. 꿈을 실현할 시각이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리경희씨는 곧바로 연길시 유관부문을 찾아가 민영직업학교를 꾸릴 생각을 털어놓았다. 교육을 공립학교가 아닌 민간인이 꾸린다는 발상은 그 당시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였다. 유관부문의 반대가 있었으나 리경희씨의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민영직업학교설립이 허가를 받았다.   얼마후 리경희씨는 연길시현대인재양성학교를 인수하고 교장직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재무경력에 의거하여 “현대기업회계”라는 교재를 편찬하였고 직접 학생들에게 재무지식을 전수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외국어, 컴퓨터, 전자상거래 등 다양한 전공을 개설하고 교육부에서 인증하는 학력증서를 발급할수 있게 되였다.  리경희씨는 심수에서의 경력이 없었더라면 연길에서의 성공이 있을수 없다고 말한다. “2000년에 연길에 돌아왔을 때 친지들은 제가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냥 단순한 외모의 변화가 아니라 사고방식과 사무처리능력의 진보에 모두 감탄했지요.” 리경희씨는 한술에 배불릴 생각보다 꾸준한 노력과 적극적인 사고가 귀향창업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을 하였다.▣
32    조용철: 조선족표 김치로 세상에 자리매김하고 싶다 댓글:  조회:1337  추천:0  2016-11-18
연변금강산식품유한회사(조용철 사장)에서 생산하는  “금강산”표 김치는 대형마트, 슈퍼, 대리점, 소매점 등을 포함한 1000여개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동북3성뿐만 아니라 전국에로 뻗어나가면서 대표적인 조선족 특색의 식품 브랜드로 되였다. 1990년대초, 조용철씨는 로씨야로 건너가 국제무역에 종사했으며 6년간의 분투를 거쳐 일정한 자금을 모았다. 그러나 장기간의 외국생활은 그의 마음을 안착시키지 못했으며 돈이 모아지면 꼭 고향에 돌아가 창업을 시작하리라 마음먹었다.  1996년 조용철씨는 손에 창업자금을 쥐고 고향인 연길로 돌아왔다. 그는 그동안 쌓은 국제무역경험만 믿고 창업으로 크게 성공하리라 확신하였다. 그는 선후로 복장무역, 료식업, 유흥업 등 여러 분야의 창업을 시도해보았지만 모두 실패의 고배를 마셨다. 그는 실패원인을 고향의 우세 또는 특색을 살릴수 있는 분야를 찾아내지 못하고 무턱대고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었을 때는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는 조선족이나 한족이나 모두 우리 민족 김치를 즐겨 먹는것을 보고 그 분야에 대해 시장조사를 진행하였다. 당시 연변의 김치는 모두 재래시장의 개인매대에서 판매하고 있었으며 대규모화 생산기업이 극히 적었다. 연해도시를 보아도 대부분 한국기업들이 입주하였고 조선족기업은 거의 찾아볼수가 없었다.  2003년 4월 조용철씨는 연변금강산식품유한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김치생산에 들어갔다. 다년간의 모색과 실천 끝에 그는 김치생산도 반드시 자주적인 특색을 살려야 함을 깨달았다. “집집마다 김치 맛이 다르듯이 우리도 조선식 또는 한국식이 아닌 조선족식의 김치를 생산해야겠다는것을 확신했습니다.” 조용철씨는 선진적인 김치생산설비를 도입하는 동시에 제품의 연구개발에 각별히 중시를 돌렸다. 새롭게 설립된 회사의 연구개발중심은 8명의 연구인원과 10명의 기술인원 그리고 6명의 품질감독인원을 두었다. 게다가 정기적으로 연변대학에서 식품생산 관련 전문가를 초청하여 기술지도를 받았다. 그는 앞으로 연변대학 식품학과와 합작하여 최초로 되는 중국조선족 김치과학기술연구중심을 설립하고 한국의 김치생산기업과 전면적인 기술교류를 거쳐 조선족 특색의 김치를 진일보 발전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 “저희는 13억 인구를 대상으로 한 국내시장을 겨냥하고 있으니 멀지 않은 장래에 국내의 일부 대도시뿐만 아니라 로씨야, 몽골 등 나라에 가서 김치공장을 세울 계획입니다.” 이 회사는 김치생산에 소요되는 배추를 모두 연변에서 구입함으로 현지 농민들의 수입을 증가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2015년 상반년에 부지면적이 3.2만평방메터에 달하는 새로운 구역에 입주하면서 생산규모와 수준을 진일보 제고시켰다.  올해 3월, 유정성 전국정협주석이 연변에서 조사연구사업을 진행하면서 연변금강산식품유한회사를 찾았다. 당시 조용철씨는 연변의 지역특색을 활용하여 김치를 비롯한 조선족 음식문화를 더욱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주력하겠다고 뿌듯하게 회보하였다.▣ 
31    《중국민족》 2016년 5호 댓글:  조회:1524  추천:0  2016-11-18
30    경희대학교 교환기 댓글:  조회:1314  추천:0  2016-08-05
 글/한동준  청와대 앞에서 저자     2014년2월27일, 나는 순리롭게 인천으로 행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제 4개월간의 경희대학교 교환생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천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학교뻐스에 앉은 나는 생소한 환경에 저으기 긴장되는 마음을 쓸어 내리며 학교로 향하였다. 한국은 나를 포함하여 우리 조선족과 끈끈하게 련결되여 있는 곳이다. 많은 초중, 고중 친구들이 현재 여기서 일을 하거나 학업을 이어가고 있고 부모세대들은 일찍 내가 어릴적에 이곳에서 몸을 숨기며 돈을 번 적이 있다. 주위친구들과 비교해보면 나의 한국행이 시간적으로 늦은 느낌도 주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발로 이곳을 누비며 나만의 인상을 만들수 있다는 생각에 다소 들뜬 심정이였다.   조선족과 한국어       2012년부터 산동대학교에서 한국문학 석사공부를 시작한 나는 경희대학교에서도 관련 수업을 신청하였다. 한국의 본토 연구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발표를 한다는것은 나에게 하나의 도전이였다. 그것은 내가 줄곧 경상도 방언을 사용해오면서 표준 한국어인 서울말은 석사공부를 시작해서야 배웠고 또 순 한국어로 된 수업에는 참여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걱정은 수업이 시작되면서 점차 소실되였다. 동일한 언어, 동일한 전공이란 점이 나로 하여금 빠른 시일내에 새로운 수업환경에 적응하고 류창히 발언을 할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모든 한국에 있는 조선족이 나처럼  “안일한” 환경에서 한국문학 관련 수업을 들으며 한국어를 배울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것은 아니였다. 다수의 조선족들이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는 이미지가 한국인들에게 각인된것이 현실이였다.     경희대에서의 생활이 2개월을 맞이하는 시점이라 기억된다. 중국어를 꽤 잘하는 고려대학교의 한 녀대생이 나와 같은 학과의 친구들을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알게된 인연으로 우리들을 교회에서 주최한 자선모임에 요청하였다. 특별히 가고픈 생각은 없었으나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모임이란 얘기에 체험삼아 참석하였다. 종교에 크게 관심이 없는 나는 덤덤히 앉아 있다가 곁에 있는 한국인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가지 주제가 오가던 중에 그는 무엇인가 생각이 난듯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어보는 것이였다. 그리고 대답을 들은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잠간 침묵하다가 말을 꺼내였다. “제가 그동안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선생님처럼 한국어를 잘하는 중국동포는 처음이네요.”     목사의 평가에 나는 약간 당황하였으나 이내 평온을 찾았다. 사실 연구생 1학년부터 짬짬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통역 아르바이트를 해온 나는 이와같은 평가를 들은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직접 듣고보니 재한 조선족의 이미지가 “한국어가 서툴다”로부터 시작돼서 이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것이 심심히 느껴졌다.     중한수교를 기점으로 조선족사회의 주된 이야기거리는 줄곧 한국행이였다. 우리의 부모세대들은 큰돈을 벌 목적으로 이웃나라로 넘어갔고 재한 조선족의 이미지는 이때로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 정착한 부모세대들은 다수가 문화수준이 낮았고 돈을 벌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 두발로 뛰는것이였다. 보통 남성은 공사장에서, 녀성들은 식당에서 일을 했다. 그들은 한국어를 제대로 배울 시간이 없었고 한국에 온 목적도 여기에 있지 않았다.     서툰 한국어 실력과 다수가 3D업종에 종사하는 현황, 그리고 와중에 언론매체에서 의식적으로 보도되는 조선족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기사들, 이 모든것들이 한데 뭉쳐 재한 조선족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자선모임에서 만난 그 목사의 반응은 분명 기존에 유지해왔던 조선족에 대한 이미지가 나에게는 적용되지 아니함에서 일시적인 혼란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나의 집단에 대한 이미지가 일단 형성되면 쉽사리 개변되지 않는다. 이는 재한 조선족사회 개개인의 노력과 시간적으로 몇세대의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서 아이러니한것은 근년래 대학교육을 받은 신세대 조선족이 한국에 정착하여 사회의 여러 업종에 종사하면서 재한 조선족사회가 다계층의 구조를 이루어 가고 있지만 이들의 대부분이 한국어, 즉 서울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원인으로 주위의 한국인들이 같은 국민으로 착각하면서 재한 조선족사회에 일어난 긍정적인 변화들이 한국 서민층으로부터 간과되여버렸다는것이다. 언어에서 시작된 문제는 결국 또 언어에서 말썽이 일어난 셈이다. 그러나 이는 그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다. 재한 조선족사회가 한국 서민사회와의 융합과 발전은 소통의 원활에서부터 시작되는것이 당연한 행보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족사회는 집단적인 목소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기쁜것은 몇년전부터 재한 조선족사회의 집단적인 움짐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개개인의 활동이 무의식간의 착각을 일으킬수 있다면 집단이 내는 목소리는 재한 조선족 사회를 한국사회에 정면적으로 알리고 나아가 재한 조선족 사회의 이미지 개선과 응집력 제고에도 크게 도움이 될것이다.     나는 부모세대든 신세대든 한국어를 능숙히 구사하든 못하든 모든이가 힘을 합쳐 함께 움직이면 언젠가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것이라 굳게 믿는다.   경희대 캠퍼스 친척 방문       경희대에서의 교환생활은 편안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숙사를 따로 찾을 필요가 없이 우리는 희소한 학교 기숙사에 배정됐다. 숙사는 통일로 2인실이였고 층마다 면학실이 있어 굳이 도서관에 가서 자습할 필요가 없었다. 기숙사 지하에는 자동 세탁기와 건조기가 설치되여 있었고 세탁실 바로 옆쪽에는 헬스방도 무료로 운영되고 있었다. 국내의 기숙사는 이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널찍한 거주공간에 습관된 나는 현실속의 삶의 공간에 대한 감촉이 무디여 있었다. 그리고 이는 한국에 나와 일하는 친척을 만나면서 점차 되살아났다.     이국생활에서 느끼는 생소감이 얼마간 가셔질 때 나는 한국에 나와 일하고 있는 이모집에 초대됐다. 그곳은 조선족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골목길을 걷는 동안 익숙한 연변 사투리가 곁을 지나가는 아주머니들속에서 들려왔다. 이모는 현재 이모부와 이모할아버지, 이모할머니 이렇게 네 식구가 한집에서 살고 있다고 하였다. 한참을 걸어 우리는 자그만한 4층 주택의 1층과 지하사이에 박혀져 있는 문앞에 멈춰섰다. 계단 세개정도를 내려 나는 문을 열수 있었다. 평소에 말로만 듣던 반지하가 어떤 모습일까하는 의문의 표정으로 나는 집안으로 발을 옮겼다. 그런데 또 세개의 계단을 걸어서야 지면에 도착했다. 이모할머니는 한창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주방이자 거실인 이 좁은 공간을 한눈에 둘러보고 이모할머니께 인사를 올렸다. 실외의 빛은 집문 오른쪽켠에 낸 창문 웃쪽을 통해 가까스로 들어왔다. 주방은 다소 캄캄하였으나 전등을 켤 정도까지는 아닌 애매한 상황이였다. 어두움속에 서서 나는 이모할머니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들과 눈앞의 정경에 약간의 충격을 먹은 나는 너무나 대조되였다. 이모할머니는 환히 웃으며 나더러 방에 앉으라 하였다. 집안의 유일한 잠자리방은 주방과 방문 하나로 갈라져 있었다. 크기는 주방만큼 하였으나 옷장과 책상, TV 등이 있다 보니 더욱 비좁아 보였다.     방에 앉아 있던 이모부는 반가이 인사를 건네였다. 이모와 이모부는 나와 나이 차이가 별로 없어 관심사가 비슷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모부는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였다. 알고보니 몇달전에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허리를 다쳐 현재 물리치료중이였다. 다행히도 회사에서 모든 비용을 부담하게 되여 있어 이모부는 치료에만 열중하면 되였다. 그러나 이모는 돌연히 현재 이모부와 함께 인터넷을 통해 국내로 화장품을 판매하는 사업을 계획중이라고 하였다. 그 뜻은 이모부가 완치되여도 이후에는 육체로동을 할수 없다는것을 의미하였다. 나의 주변에는 이모부처럼 공사장에서 다치거나 고된 로동에 골병이 든 친척들이 적지 않았다. 이모가 이제부터 가정의 기둥 노릇을 해야 된다는 생각에 나는 가슴 어딘가 찡해났다.     창밖이 네온등의 빛에 아른거릴 무렵 이모할아버지가 돌아왔다. 저녁까지 일을 하였지만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이모가 짧게 소개를 하고서야 그는 나를 알아보았다. 이모할아버지는 웃으면서 예전에 걸음마를 금방 뗏을 적의 나를 본적이 있다고 하였다. 저녁식사는 푸짐하게 차려졌다. 이모할아버지와 이모할머니는 나더러 한국에 있는 동안 집밥이 생각나면 꼭 오라고 하였다. 나는 정성스레 만든 반찬을 먹으며 그들과 한집식구가 된 느낌이 들었다.     이모할아버지와 이모할머니는 일흔을 앞두고 있으나 여전히 이국땅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며 돈을 벌고 있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아니였다면 이는 불가능 했을것이다.     돌아가는 길에 보슬비가 내렸다. 나는 문득 소학교 때 한국에 간 어머니가 걸어온 한통의 전화가 생각났다. 그때 어머니는 한국의 어느 식당에서 카운터 안내원으로 있었다. 전화속에서 그는 요즘 비가 많이 내려 퇴근하고 나면 먼저 바가지로 세집에 고인 비물을 퍼내야 된다고 하였다. 나는 홍수가 졌는가고 걱정스레 물었다. 어머니는 그게 아니라 반지하에 살면 비가 약간만 많이 와도 비물이 흘러든다고 하였다. 그때까지도 반지하란 무엇인지 모른 나는 아는척하며 얼버무려버렸다.     천천히 움직이는 인파속에서 나의 머리속에 어머니가 바지가랑이를 걷고 물을 퍼내는 모습이 잡히였다. 순간 목이 메여 왔다. 이미 10년도 더 지난 과거에 대한 회억이였지만 눈가에 차오르는 뜨거움을 걷잡을수 없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이름못할 아픔과 어려움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이들은 신변에 혹은 바다건너 저편에 기댈수 있는 희망이 있어 끝까지 버티고 있는것이다. ▣
29    신승우 사진작가, 취미가 프로를 낳는다 댓글:  조회:1293  추천:0  2016-08-05
글/리호남 사진작가 신승우     흔히 나이가 들수록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직업이 있다. 의사, 변호사 등을 실례로 들수 있는데 사진작가도 이 범위에 속한다고 할수 있다. 젊은 사진작가에 비해 어딘가 모르게 나이가 지긋한 사진작가에게 신뢰가 가기 마련이며 그만큼 사진작가로서 성공하려면 10년, 20년 지어 30년 이상 오랜 기간의 단련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올해 70고개를 바라보는 신승우 선생(辛承佑,1946.10)은 사진기를 만진 시간만 해도 어림짐작으로 근 50년이 되는 로장 사진작가이다. 여간한 노력가가 아닌 그는 일찍 길림신문사 촬영기자로 20여년간 근무해오면서 선후로 “중국우수사진작가”, “제1회 중국문예금작상”, “제1회 세계민간예술가 금비웅상”, “2008중국예술년도인물” 등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웬만해서는 자기 “자랑”을 할줄 모르는 연고로 그의 경력은 남들한테 잘 알려져있지 않다.   어릴적의 꿈은 화가로 되는것       길림성 교하시의 평범한 농촌마을에서 태여난 신승우 선생은 어렸을 적부터 그림그리기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림책에 나오는 인물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그의 그림소재로 되였다. 한편 어렸을 적 꿈이 바로 화가가 되는것이였다. 초중 때부터는 호주머니에 돈만 생기면 미술출판사에 편지를 써서 미술책을 구입했다. 고향의 신화서점에서는 미술책을 살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학교에 미술선생이 없다보니 미술공부는 자습이 위주였습니다. 고중에 들어가서야 미술선생의 지도를 받을수 있었습니다.”신승우 선생은 이처럼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견지해왔으며 끈질긴 노력 끝에 미술수준이 놀랍게 제고됐다. 고중 때 그는 학교공청단위원회 선전위원으로 활약하면서 교내 선전란과 표어를 도맡았다. 후에 하는 얘기지만 그의 이러한 미술재능은 촬영기교의 제고에도 아주 유용한 요소로 작용했다. 원인인즉 촬영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인 구도와 색채는 미술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가 한창 화가꿈을 무르익히고 있을 때 “문화대혁명”을 맞이했다. 대학진학길은 꽉 막혔으며 이불짐을 둘러메고 고향인 강밀봉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와서도 신승우 선생은 농사는 별반 짓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각 지방마다 모주석초상화와  “문화대혁명” 선전화를 그리는게 류행이였는데 신승우 선생은 이곳저곳 불리워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강밀봉에서는 신승우를 향에 남겨두기 위해 1970년 11월 향문화소 간사로 받았다. 그는 문화소에서  대외선전을 책임졌으며 사진도 많이 찍고 그림도 많이 그렸다. 그러다가 1982년에는 영길현문화관에 전근되였으며 1983년 년말에는 영길현선전부 간사로 자리를 옮겼다.         길림신문과 맺은 인연       지난 1984년 “길림신문”이 정식으로 창간되면서 촬영기자가 급히 수요됐다.  길림신문사에서는 신승우 선생이 사진을 잘 찍는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왔으며 현지 선전부와 어려운 교섭을 진행하였다. 그렇게 1985년 8월에 끝내 신승우 선생을 길림신문사 기자로 데려갔다.     길림신문사에 입사해서 퇴직할 때까지 신승우 선생은 줄곧 길림신문사 길림지사 지사장으로 있으면서 길림시 조선족들의 상황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당시 신문사에 촬영기자가 그를 내놓고는 전무한 상황이였으므로 중대한 행사 때마다 사진을 도맡아 찍군 했다. “한달에 한번은 연변에 출장을 가군 했습니다. 그때 침대권을 사는게 무척 힘들었으므로 흔히 좌석에 앉아가지 않으면 밤새도록 서서 연변까지 가야 했습니다.”     신승우 선생은 이렇게 길림시와 연변, 장춘을 제집나들듯이 다녔다고 한다. 1년에 밖에 나가있은 시간이 집에 있은 시간보다 훨씬 많았다. 길림지사를 혼자 맡고 있는지라 취재도 나갈라니 기사도 쓸라니 사진도 찍을라니 지어 사진현상도 자체로 해야 하는 상황으로 눈코뜰새없이 바삐 돌아야 했다. 하지만 한번도 일에 싫증을 낸 적이 없었으며 항상 일욕심이 북받쳤다고 한다.     그는 기사를 써 본사에만 보내는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한문판 신문에도 투고하여 영향력을 넓혔다. 길림신문사에 입사한지 얼마 안되여 그는 만창진 차로하향 관개수로 부실공사를 길림신문 조선문판에 보도한 한편 이 기사를 《강성일보》에 보도하여 길림시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길림시에서는 이 일을 갖고 즉각 전문회의를 소집하고 해결대책을 마련하는데 총출동했다고 한다. 이 사건에서 신문의 여론감독역할을 절실히 느낀는 신승우 선생은 그후에도 언론매체 기자로서의 사명감을 잊지 않고 여론감독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기에 노력했다. 그는 여태까지 길림신문 이외에도 《인민일보》, 《중국청년보》, 《중국환경보》, 《중국교육보》, 《길림일보》, 《연변일보》 등 수십종 간행물에 기사를 발표했으며 《중국환경보》, 《길림일보》(한문판), 《강성일보》 등 언론매체의 특약통신원으로도 활약했다.     신승우 선생은 지난 2006년 퇴직수속을 밟았지만 사업의 수요로 4년간 길림신문사에서 계속 근무하다가 2010년에야 비로소 길림신문사 촬영기자직을 그만두었다. 은퇴한후 그는 자신의 취미와 애호인 사진, 전각, 미술 작품의 정리에 모든 정력을 몰부어왔으며  “신승우사진미술전각작품집” (2006년, 중국화보출판사),  “신승우사진판화작품집”(2009년, 중국민족미술출판사), “중국사진작가가 보는 세계-신승우사진작품집”(2013년, 중국촬영출판사), “국가예술-전국실력파예술가 신승우 특집”(2015년, 중국문련국제출판사) 등 11권의 작품집을 이미 출판했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계속 정리하는데 시간을 할애하는 한편 시간이 나는대로 작품집을 출판하지 못한 주변의 예술가들을 도와 그들의 작품집을 내주는 일에 진력할것이라 밝혔다. ▣
28    우리 집 설 제사 댓글:  조회:1372  추천:0  2016-08-05
글/한직능       나는 내몽골 우란호트시에서 약 40리 떨어진 뽀다리칸 조선족 마을에서 태여났다. 지난 세기50년대초 인구대이동으로 우리집은 우란호트시에서 약 20리 떨어진 고성촌으로 이사하였고 제3대에 편입되였다. 그리고 몽골족과 한족이 위주인 졸라무촌에서 나는 유년시기를 보내였다. 고성촌은 일년사계절 몽골바람이 기승을 부리고 겨울이 되면 혹한에 폭설이 자주 내리는 대흥안령 끝자락의 한 빈곤한 마을이다. 100여호가량 되는 이 마을은 나름대로 환경과 자연에 잘 적응하면서 민족전통을 개혁개방전까지만 하여도 그대로 유지하며 살아온 민족공동체이다. 해마다 설날, 정월대보름, 오월단오, 추석, 동지가 되면 마을 전체가 한복을 차려 입고 함께 먹고 마시고 춤추며 즐겼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일은 바로 설 제사이다.     겨울은 농한기라서 할 일이 없는데다 일년 농사하여 먹을것이 많은 때이다. 집집마다 이맘 때면 설음식과 제사음식을 준비하느라 눈코뜰새 없다. 집집마다 거의 제사를 치르기 때문에 조과, 포(육포,어포), 반(흰쌀밥), 나물무침 등을 만드는것은 기본이다. 제례상에 올리는 떡은 절편, 인절미, 시루떡, 송편, 경단 같은것이 있는데 주로 편류(녹두고물편, 흑임자고물편)를 사용하며 제사식 전날 미리 쌀을 담그고 편에 고물로 얹을 녹두와 팥, 그리고 흑임자를 물에 불려 껍질을 벗겨둔다. 제사 당일 새벽 일찍 담가두었던 쌀을 가루로 빻은 뒤 고물을 얹어 찐다. 정성스럽게 찐 떡은 여러개 포개여 고인다. 그믐날 저녁에는 방마다 호랑불을 환하게 켜고 그 누구도 잠 잘 생각을 못한다. 잠들었다가는 귀신이 와서 이튿날 두 눈섭을 하얗게 만든다고 얼음장을 주어서 설친 잠을 자기 일쑤다.     제사는 사람이 죽어도 혼백은 남아있다는 원리로 살아 있을 때처럼 조상을 모시고 그것이 효도라는 조상 숭배사상이였다. 우리 집은 4대조까지 설날과 추석에 제사를 지냈다. 나는 해마다 제사가 오는 날이 제일 감미로운 때이다. 평소 사과와 배는 구경도 못했지만 제례상을 올릴 때 사과와 배는 겉껍질을 벗겨야 함으로 그것도 버리기 아까워서 모아두었다가 내가 먹어 치우군 했었다. 제사에 올리는 음식은 양식과 진설에서 신위로부터 보아 제1렬에 메(밥)와 갱(국), 제2렬에 적과 전 , 제3렬에 탕, 제4렬에 포(脯,육포,어포)와 나물, 제5렬에 과일과 조과를 놓는다. 각 렬의 진설원칙도 정해져서 “좌포우혜”라 하여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보았을 때 왼편에 포를, 오른편에 식혜를 놓고 “어동육서”라 하여 어류는 동편, 육류는 서편에 두었다. “두동미서”라 하여 생선의 머리가 동쪽으로, 꼬리가 서편에 향하도록 하고 “생동숙서”라 하여 동쪽에 김치를,서쪽에 익힌 나물을 진설한다. “좌메우갱”이라하여 밥은 왼편에 국은 오른편에 놓는다. “홍동백서”라 하여 동쪽에 붉은 과일을 서쪽에 흰 과일을 놓고 그 가운데 다식이나 산자, 약과 등 조과를 둔다.     해뜨기전에 일어나서 깨끗이 세수를 하고 아버지는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는다. 그러나 홀기(의식의 순서)를 읽는다거나 축을 읽는 일은 없었고 지방을 쓰고 신위를 모시는 일도 거의 하지 않았다. 아마 간소화된것 같다. 아버지가 술을 한잔 따라서 피운 향을 중심으로 시계바늘 방향으로 한바뀌 돌린 다음 그릇에 붓고 모두가 정중히 큰 절을 두번 올린다. 이는 토지신을 숭배하여 농사가 잘 되라고 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다음 아버지가 정중히 술 한잔씩 부어서 4대조에게 올리고 큰 절을 두번 한다. 종손의 형제들, 종손의 아들, 손자 등 순위에 따라 각각 술을 붓고 큰 절을 올린다(실은 아버지도 외동이고 나도 외동이여서 이 절차는 금방 끝났다). 밥그릇마다 숟가락 두개를 꽂는다. 여덟모의 저가락은 먼저 어류우에다 얹었다가 절차가 진행되면서 한번 옮겨 찐 통닭우에 둔다. 그리고 종손이 술을 올린다음 일제히 큰 절을 올리고 종손이 헛기침을 할 때까지 엎드려서 소원을 빈다. 그 다음 숟가락에 밥을 조금씩 떠서 국에 넣고 숟가락도 국에 둔다. 술잔에 술을 첨잔하여 부은 후 정중히 큰 절을 두번 한다. 제사 절차는 끝나고 제사술을 한모금씩 마시는데 어린 나이지만 그때부터 나는 술맛을 알았다. 밥 한 그릇은 뚜껑을 닫아 저녁 때까지 찬장에 보관해 둔다. 비닐봉투를 네개 준비하여 각 봉투마다 각종 채소와 고기, 사탕, 술 등을 조금씩 넣고 그 봉투를 집앞의 큰 나무 밑에 버려둔다.     제례상의 음식들은 가족의 아침식사외에 대부분 점심때가 되면 마을 어른들을 청해다가 나누어 먹군 했다. 이 때 제일 신나는 사람들은 어른들보다 아이들이다. 아무리 빈곤해도  설이 되면 거덜거덜한 헌 옷을 버리고 새 목천 옷과 새 양말을 신고서 들까불며 삼삼오오로 떼를 지어 설인사를 한다는 빛깔 좋은 구실하에 좋은 음식 포식할 심산으로 상로인들 집부터 들쑤신다. 신을 벗고 구들에 올라가서 꾸벅 큰 절을 하면 한복을 차려입은 로인들은 만면에 웃는 얼굴로 “장가 갈 꿈 잘 꿨냐?”라는 덕담을 하면서 어느새 쟁반우에 다과나 떡을 내놓으며 먹으라 한다. 내놓을것이 많지 못해 맛이나 보는 정도지만 감칠맛 나서 후딱 해치우고는 또 다른집으로 향한다. 온 종일 쏘다니다 저녁이 되여 집에 올 때는 이미 올챙이 배가 된다.     상로인들은 다른것은 다 잊어도 어느 집 어느 아이가 설 인사를 하지 않음을 잘도 기억하고  “가정교육을 어찌 하였노?”하며 대노한다. 집에 오면 부모님들은 귀신같이 다 알고서 결례가 있었다고 호되게 꾸지람 하거나 귀한 자식 매 한개 더 때리는 격으로 걸핏하면 회초리로 종아리를 내리친다.     1958년부터 공공식당을 하면서 제례상도 할수 없었고 그후 닥쳐온 “4청운동”이나 “문화대혁명”으로 하여 온 동네의 제례상은 어디론가 모두 증발했다. 개혁개방후 량친부모가 다 돌아가신다음 우리집 제례상은 지금까지 내가 이어가고 있다. 도시에 살면서 조과나 떡을 만드는 일은 없고 제사음식을 거의 시장에서 구입하면 그만이다.      설이 오면 해마다 제례상을 하느라 나는 힘들었다. 집사람은 그래도 잘 따라주었으나 애들이 모두 한족학교에 다니다보니 제사지내는것을 마음속으로는 못마땅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견지하며 제사를 지냈는지 나 자신도 좀 모호하지만 가가호호 다 가족문화가 있다는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우리민족의 문화의 핵심은 효문화이고 제사는 효문화의 중요한 일환이며 보귀한 민족전통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은 자기의 부모를 선택할수 없고 자기의 민족을 선택할수 없듯이 주어진 운명을 직시해야 한다. 민족도 출생도 전통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남을 진정 사랑할수 있다 하겠는가?     지금은 이주민 2세들마저도 제사를 지내는 집은 극히 드물고 민족문화에 대한 인식도 갈팡질팡하고 있다. 우리집도 그 어느 대에 가서 동화되여 설 제사도 없어지고 청주한씨 세헌공파 장손의 혈맥이 이름없이 사라질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설 제사를 고집하는것은 내가 살아있는 기간이라도 조상들의 유훈을 지키고 정성을 다해 모시고 싶음이다. 나의 솔선적인 행동이 자식들에게 무언의 교육이 되여 설 제사가 오래오래 이어가기를 기대할 뿐이다. ▣
27    대림동에서의 사색 댓글:  조회:1243  추천:0  2016-08-05
 글/효문         말로만 자주 듣던 한국 서울의 대림동에서 보름이라는 시간을 체류했다. 백문불여일견이라더니 한족과 조선족들이 많이 집거하여 있는 대림동은 명실공히 서울안의 중국거리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스스럼없이 들리는 한어, 연변 나그네들의 함경도 말씨, 심양지구 사람들의 평안도 말씨가 한데 뒤섞여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음식점, 중국상점, 직업소개소, 환전소 등 한국사람보다는 중국조선족과 한족을 상대로 하는 크고 작은 간판들속에는 사천의 마라탕, 동북타래떡과 만두를 파는 간판도 있었다. 그밖에 노래방 또한 도처에 있는데는 노래를 못부르는 사람을 상대로 노래연습장도 있었다.     대림동은 매우 자유스러운 거리다. 법과 질서를 위반하지 않으면 소신껏 자신을 표현할수 있는 거리다. 그러나 그속에서 우리는 우리대로 살고 있지 않는가? 아무데나 뱉어놓은 가래춤과 되는대로 널린 담배꽁초가 여기저기 자주 눈에 띄였다. 조금은 부끄럽고 유감스러웠다.     대림의 낮은 이렇다하고 밤은 어떠한지 알아보기 위해 토요일과 일요일날 일부러 대림거리를 산책하였다. 지금은 한국행이 아주 편리하여 가족이 모두 나가 함께 생활하는 가정이 많다고 들었는데 가족을 떠난 외로움과 그리움이 아직도 해소된것이 아닌지 휴식날 밤 끼리끼리 활동이 빈번했다. 도처에 남자들이 술마시고 좋은 기분에 큰소리로 떠드는 장면과 부처간이 아닌 남녀들이 한데 몰켜 다니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수 있었다. 전에 불법체류 단속을 할 때야 어디 이런 풍경이 있을가? 이런 기회에 친구끼리 술을 마시며 직장에서, 회사에서, 노가다판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확 풀어놓는것 같아 좀은 무질서해보였지만 리해가  되였다.     이것은 또한 아무리 같은 민족이라해도 오랜 세월 다른 체제에서, 다른 가치관에서 생활했기에 이질적인 차이로 다년간 한국인들속에서 살아왔지만 그들 세계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원인과도 관련된다. 그러니 한국에 살면서도 부득이 같은 문화권에서 오래 생활해 온 조선족들끼리 래왕하게 되는것이다. 이제는 한국에 와 가족이 함께 사는 사람이 날로 많아져 생일이나 잔치, 환갑연, 지어는 아기 돐잔치까지 한국에서 진행한다. 그리고 동창회, 향우회 등 동아리도 수없이 많다. 그렇게 자주 만나 스트레스를 풀면서 우의를 돈독히 하는것은 좋은데 소비돈이 늘어나고 술좌석이 잦다고 한다. 부조돈만도 대국의 기질이 있어 통크게 10만원(인민페 600원), 서로 사이가 좋으면 20만원이다. 한국인은 보통 5만원정도인데 말이다.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한국인의 생활페턴을 따르는것이 아니라 점차 중국에서 생활할 때의 그 생활방식대로 살아가는것이다. 돈은 한국사람만큼 벌고 한족사람처럼 절약하여 쓰지 않으면 돈이 모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저런 허점이 있는 와중에도 이제 더는 불법체류를 단속하지 않아 사람들이 왕래가 매우 쉬워졌고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 역시 자유스러워 그 어떤 불안이나 공포감을 찾아볼수 없다는것이 반가왔다. 이제 한국행은 조선족에게 거의 자유왕래라 해도 되지 않을가. 거의 6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가 있다니 세 사람당 한사람 꼴로 한국에 정착하고 있는것이다.     그러니 이제 한국땅은 서울을 중심으로 어디가나 중국조선족이 있는 곳으로 되고 있다. 전에는 월세나 고시원 등에서 거주했다면 이젠 점차 월세도 아니고 전세집, 형편이 좋은 사람들은 아예 살림집을 사고 눌러앉은것이다.     대림동에서 필자가 알아본데 의하면 많은 사람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다. 젊은 계층들이 더욱 그렇다면 조선족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가? 백여년 지켜온 우리의 민족공동체는 어떻게 될것인가?     정녕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수시로 제기하게 되는 곳이 바로 서울의 중국거리 대림동이다. 우리는 아무리 그 속에 살아도 남인것이다. 말하자면 렴가의 로동력에 불과하다는것이다. 그렇다면 서울에만 가면 되고 돈만 벌면 되는것인가? 사회적 인간으로서 마땅한 대우와 권리를 가져야 인간다운 삶을 사는것이 아닐까? 공민권을 갖지 못하고 선거권과 피선거권도 없이 그저 세월가는대로 산다. 돈만 바라보고 사는것이다. 그것이 한국에서의 중국 조선족의 삶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것인가? 우리가 처음 한국땅을 디뎠을 때 이곳이 낯설었듯이 언제가는 중국도 낯설어질것이다. 점차 중국의 정치사회제도에 관심을 갖지 않게되고 중국을 모르는데서 많은 불편이 생길것이다. 특히 가장 걱정되는것은 한창 성장하는 아이들이다. 그들은 한국에서 태여나 한국에서 교육을 받는다. 그러므로 중국인이지만 한어를 모른다. 한어를 모르고 향후 중국에 와서 어떻게 적응하겠는가? 때문에 왔다갔다를 시계추처럼 반복하다보면 우리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될것이다.     우리는 어찌해도 조선족으로서 중국의 물을 먹고 중국에서 뼈를 자래웠기에 중국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이 좋은 나라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동질성을 지키면서 앞서가는 민족으로 사는것이 한국에서 생활하는것보다 훨씬 보람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글/김원범        우리 민족의 천재적인 작곡가 홍란파(洪蘭坡, 본명은 홍영후1898.4-1941.8)라면 일부 음악연구자와 작곡가들을 제외하고는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가 작곡한 노래만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고 있다. 홍란파의 가요들중 “봉선화”가 대표작이라면 동요 대표작은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고향의 봄”이다.     필자도 그전에는 홍란파에 대해 구체적으로 잘 몰랐다. 다만 대중들이 즐겨부르는 노래를 지은 작곡가라는 생각에만 그쳤을 뿐이였다. 련련이 뻗은 삼천리 금수강산에 연분홍 진달래가 곱게 피여나는 지난 4월초, 필자는 한국에 갔다가  홍란파의 생가를 찾아뵙는 기회가 있었다.     필자는 그의 생가를 돌아본후 일부 작곡가와 음악평론가들을 만나 홍란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며 문헌자료들도 찾아보았다. 조선의 유명한 음악평론가인 최창호 선생이 1995년 평양출판사에서 출판한 “홍란파의 ‘봉선화와 그의 가요들’”이란 서적과 한국의 “두산백과”, “한국예술지”, “한겨레음악대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 자료들을 참조하면서 홍란파에 대한 이 글을 정리하게 되였다.     홍란파는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활초리의 한 농부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홍란파는 5살에 상경하여 14살이 되던 해인 1912년에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류달리 음악에 흥취를 갖게 되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의 초기음악학교였던  “정악전습소”에서 공부하였는데 창립당시에는 “조양구락부”라고 불리웠다. 이곳에서 홍란파는 1년동안 김인식 선생한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조선의 저명한 음악평론가 최창호는 “홍란파의 ‘봉선화’와 그의 가요들”이라는 책에서 “홍란파는 정악전습소 재학당시에 양산도와 노래가락을 바이올린으로 훌륭하게 연주하여 그의 예술적재능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정악전습소”를 졸업한후 홍란파는 음악으로서는 외세에 짓눌린 험악한 세상을 살아갈수 없다는 부모들의 주장으로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전공하려는 지향을 굽히지 않고 그후 일본 우에노음악학교에 신청하여 입학했다.     일본에서 그는 음악, 문학, 미술 등 세가지 분야에 걸쳐 배우면서 잡지발간 등의 문예활동에 주력하였다. 일본에서의 고학은 참으로 눈물겨운 생활의 련속이였다. 낮에는 땀을 철철 흘리며 신문배달을 하고 밤이면 번화한 네거리에 나서서 바이올린을 켜면서 담배장사도 했지만 학비를 마련하는데는 여전히 힘에 부쳤다. 일본에서 겨우 2년간을 수료하고 1919년 봄에 귀국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고 재일류학생들중에서 항일운동 중심인물로 적극 활동한것이 드러난것 또한 서둘러 귀국하게 된 계기의 하나로 된다.     귀국후 홍란파는 “대한매일신보” 의 기자로 또한 소설가로도 활동하면서 창작노래집 “처녀혼”을 출간하였으며 1920년 22살에 “처녀혼”이란 단편소설을 쓰기도 하였다. 홍란파는 창작노래집을 내기 전에 “봉선화”,  “옛 동산에 올라”, “사랑”, “그리움”, “봄처녀”, “여름의 별무리”를 비롯하여 수많은 가요들과 기악곡들을 창작하였다. 홍란파의 대표작 “봉선화”는 “처녀혼”의 첫 머리에 “애수”(哀愁)라는 곡 이름으로 발표되였다. 한국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활초리에 복원한 홍란파 선생의 생가      1920년에 창작된 가요 “봉선화”는 나라를 잃은 애조곡으로 널리 불리워졌다. 가요 “봉선화”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깃들어있다.     1919년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홍란파는 어릴 때 송아지친구들과 함께 뛰놀던 고향산천이 하도 그리워 팔달산을 끼고 앉은 시골마을을 찾아갔다. 그가 꿈결에도 잊을수 없었던 그리운 고향에 찾아온 바로 그 이튿날이였다. 이웃집의 봉선이란 처녀가 방직회사 녀공으로 팔리워가면서 그를 찾아왔다.     소학교시절에 홍란파는 가난한 탓으로 학교에 못가는 봉선이가 불쌍하여 그에게 가끔 글도 배워주고 노래도 배워주군 하였는데 봉선이는 홍란파를 친오빠처럼 따랐다. 그때 봉선이는 봉선화를 그토록 좋아하였으며 해마다 자기 집 뜨락에다 봉선화를 심고 가꾸었으며 홍란파의 집 울타리 밖도 잊지 않고 봉선화를 심어주군 하였다.     봉선이는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후 살길이 막히게 되자 방직회사로 팔리워가면서 홍란파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작별인사를 하려고 찾아왔던것이다.     “영후오빠, 잘 있으라요. 인젠 오빠의 양행금소리도 다 들었군요. 마지막으로 한 곡조 듣고 싶어요.”     홍란파는 자기를 친오빠처럼 믿고 따르는 봉선이의 마지막 애절한 부탁을 들어주리라고 바이올린을 들었으나 정작 그를 위로해줄만한 곡을 찾을수 없었다. 걸음걸음 피눈물을 뿌리며 떠나가야 할 그 앞에서 “양산도”를 탈수도 없었고 “노래가락”을 탈수도 없었다.     “아리랑”을 타던 홍란파의 머리에는 피뜩 하나의 곡상이 떠올랐다. 그는 그 곡상을 잡고 활을 그어나갔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바이올린의 음선을 적시고 음선에서 미끄러져 처량하게 흐르던 바이올린소리도 뚝 멎고 말았다. 그러자 솟구치는 눈물을 참느라고 입술을 깨물며 서있던 봉선이는 세차게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했다. 봉선이가 흐느껴 울자 그를 바래주려고 모였던 마을사람들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홍란파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봉선이를 바래주고는 방금전에 탔던 곡상을 그대로 5선지에 적어나갔다.     그후 홍란파는 울밭에 피여난 봉선화를 볼 때마다 이 곡을 타면서 봉선이를 생각하였고 나라를 잃은 민족의 슬픔을 통탄하군 했다. 봉선이의 비참한 운명이자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라고 생각한 홍란파는 이 곡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홍란파의 처녀작이라는것을 생각할 때 창작초기에 바이올린 독주곡으로 가사가 없이 슬프다는 뜻에서 곡명이 “애수” 였다.     그는 5년뒤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작사자 김형준에게 위탁하여 가사를 달게 했다. 김형준은 그의 집에 봉선화가 많아 가사를 쓰는데 큰 도움이 되였다고 한다.     작곡가 홍란파가 봉선이를 바래주면서 얻은 곡상이기 때문에 노래제목을 “봉선화”라고 하였다.     조선의 음악평론가 최창호는 “고향의 봄” 을 이렇게 평가했다. “일제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그 시기 이 땅에서 살래야 살수가 없어 피눈물을 뿌리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느는 겨레들과 현해탄을 건너 일본의 광산이나 탄광지대로 내몰리는 동포들이 날따라 늘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망국의 설음과 타향살이의 슬픔을 함께 겪어야만 하였으니 ‘고향의 봄’이 창작된것은 그 시대가 안겨준 음률이다.”고 했다.     홍란파는 1922년에 서울 연악회를 창설하였고 1925년에는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를 창간하였으며 바이올리니스트, 평론가, 교향악단 지휘자, 음악전문지 발행인, 소설가등 다양한 신분으로 활동을 펼쳤다.     홍란파는 생전에 대중들이 즐겨부르는 노래를 많이 작곡했다. 그는 대표작 “봉선화”를 비롯해 “봄노래”, “고향의 봄”, “봄처녀”, “고향생각” 등 100여수의 노래를 작곡했는데 그가 작곡한 가곡들이 조선반도와 해외동포들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홍란파는 음악수준을 더 제고하려고 1931년 미국에 건너갔으며 “SHEYWOD”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수업에 진력하였다. 미국에서 그는 독주회를 여러번 가졌으며 졸업 후 경성보유학교(지금의 리화녀자대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그후 홍란파는 1936년 서울방송국의 현악단 지휘자로부터 레코드의 부장으로 력임하기도 하면서 평론집  “음악만필” 등을 통하여 우리 민속음악문화의 계몽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홍란파가 작곡한 많은 노래중에서 민족의 아픔을 노래한 조선의 최초가곡으로 불리우고 있는 “봉선화”가 그의 대표작이다. 이 노래는 민족의 노래로 일제에 항거하는 저항의 노래이기도 하고 우리 겨레의 아픔을 대표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을 그때 당시 홍란파의 대표작 “봉선화”는 “금지곡”으로 지정되였으며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구금되고 고문까지 당했다. 그러나 일제는 그 어떤 탄압수단으로도 가요 “봉선화”의 전파를 막을수 없었다.     1981년에 81세 나는 일본의 량심있는 지식인 노무라 모토유기 목사가 한국주재 일본대사관 앞에 위치한 “평화소년상”을 찾아 플루트(목관악기)로 “봉선화”를 연주했다. 그는  “노래속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가을바람은 일본침략자를 의미하고 떨어진 꽃송이는 위안부 피해자 같다”며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봉선화”노래가 창작된지도 어느덧 한세기가 된다. 이 노래는 아직까지도 예술적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을 뿐만아니라 조선반도와 해외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지고 있다.     홍란파 작곡가는 1937년 일제반항운동을 벌린 연고로 감옥에 갇혔으며 차디찬 옥중에서 잔인한 고문으로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는 그후 옥중에서 얻은 병으로 그토록 갈망하던 광복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했다. 생을 마감하기 전에 홍란파는  “나 죽으면 연미복(악대지휘자들이 입는 옷)으로 내 몸을 덮어주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1941년 8월 30일, 우리 민족의 작곡가 홍란파는 명곡들을 창작할 나이(43살)에 너무 일찍 세상을 떴다. 1954년부터 “홍란파기념사업회”가 성립되여 매년 한국 경기도 수원시에서 란파음악콩클을 비롯하여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며 홍란파의 넋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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