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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특색이 곧 우세다 댓글:  조회:931  추천:0  2016-08-05
글/명호   통화시조선족소학교 교정에 세워진 비     언제부터인가 많은 조선족학교에서는 일본어 교육을 자신의 렬세로 여기고 영어 교육의 대세에 합류하였다. 이와 더불어 한동안 조선족학교의 대학입시성적이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최근년간 크게 개선되였는데 그 주요원인이 바로 다년간 포기했던 일본어 교육을 다시 제자리로 복귀시킨데 있었다. 일본어 교육의 회복은 많은 조선족 학교와 수험생들이 “특색이 곧 우세”라는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하였다.     올해에도 각 지방의 조선족 고중은 대학시험에서 대풍년을 맞이했다. 길림성 문리과 장원은 물론 료녕성, 흑룡강성의 여러 지역에서도 조선족 학생이 장원을 차지했다. 와중에 상대적으로 약한 리과에서도 조선족 학생이 길림성 장원을 따냈다는것이 특기할 일이다.     아울러 몇년전까지만 해도 내리막길을 걷던 여러 지방의 조선족학교들이 다시 생기를 회복하면서 대학입시에서 실력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특히 필자의 고향에 있는 화룡시조선족고중을 실례로 들면 올해 79명의 수험생가운데 11명의 리과 수험생 전부와 68명의 문과 수험생가운데의 66명이 대학입학선에 도달하면서 리과생 100%, 문과생 97%가 대학문에 들어서는 쾌거를 이룩했다.     다만 이러한 목표가 일조일석간에 실현된것은 아니다. 개혁개방과 한국 로무수출의 배경하에 조선족사회는 도시화와 인구감소 및 류실의 진통과 더불어 우질교육자원이 연길 등 중점지구로 기울면서 각 지방의 조선족교육이 1990년대 이후로 심한 진통을 겪어왔다. 이런 상황은 최근년간에 많이 개선되고 있으며 여러 조선족 학교들에서는 지속적인 노력을 거쳐 교육질이 날로 향상되고 있다. 례컨데 화룡조선족고중은 2009년의 대학입학률이 11.8%에 불과하던것이 2010년, 2011년에는 각각 29.6%, 30.4%에 도달하였고 2012년에 50%선을 넘어서고 2013년 및 2015년에는 각각 89.5%, 91.1%에 도달하였다. 올해의 입학률은 문리과를 통털어 97.5%에 도달하였다. 이는 거의 모든 수험생이 대학에 붙는다는것을 의미한다.     상기의 상황들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근년래 조선족 학생들의 대학진학률의 제고는 여러 조선족중학교가 자신의 교육특색을 되찾고 부활시킨것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수 있다.     조선족교육의 특색을 얘기하자면 첫째로 본 민족의 언어로 대학시험을 치르는것이다. 과거 많은 사람들은 이를 조선족교육의 렬세로 여기고 한어문수업의 비률을 높힌 결과 조선족학생들의 해독능력이 떨어져 대학입시성적에 영향을 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근년래 조선족학교에서는 한어교육을 지속적으로 진행하는 한편 조선어교육 시간을 늘였다. 이는 학교와 담임교원들이 더욱 많은 정력을 학교수업에 쏟아부어야 함을 의미하였다. 화룡조선족고중의 교원들은 대학시험에 필요한 학습자료들을 모두 조선어로 번역하였다. 비록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나 학생들의 해독능력의 제고와 대학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어 공부에서 조선족학생이 우세를 차지하는 리유는 조선어와 일본어가 같은 알타이어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몇년전부터 영어가 대세를 타면서 많은 조선족학교에서도 이에 합류하였고 그동안 견지해오던 외국어수업을 영어로 바꾸었다. 조선족학생들이 영어에서 우세가 없는것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따라서 외국어 교육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조선족학생들의 대학입시 성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것이다. 이에 화룡시조선족고중과 같은 학교에서는 일본어수업을 다시 전개하였고 짧은 시간내에 좋은 효과를 보았다. 올해 대학입시에서 화룡시조선족고중의 정아학생이 화룡시 문과장원을 따낸데는 132점의 외국어 성적이 한몫을 톡톡히 하였다.     몇년전부터 시작된 영어교육 바람에 조선족학생들은 자신의 특색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오늘날 다양한 세계에서 자신만의 특색을 인식하고 그것을  제대로 장악하고 리용한다면 우세로 전환할수 있다. 특색의 가치는 대학입시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더욱 많은 선택의 기회를 부여한다. 화룡시조선족고중의 학생들은 일본어 성적으로 명문대의 문을 두드리는 동시에 향후 일본으로 류학갈수 있는 기회도 주어진다. 그리고 이런 일본어 우세에 근거하여 교육부와 일본교육기구의 더욱 많은 지지와 관심을 모으는 특혜를 누릴수 있다.▣
24    400년과 만나다 댓글:  조회:772  추천:0  2016-08-05
글/김홍란       한국행 출국을 앞두고 마음이 설레였다. 경기도 오천리라는 시골마을에 있는 400년의 나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것만 같아 괜히 마음이 급해졌던것이다.     령하 30도를 오르내리는 동북의 엄동설한, 그 긴 겨울나기가 두려워 따뜻한 한국을 찾은 나는 그러나 한국에 도착한 첫날부터 추위에 떨었으며 습도 높은 한국의 기후에 한껏 옹송거린 몸은 후회와 불안속에 잔뜩 위축되여 있었다. 보일러가 있는 방에서 전기장판까지 고온으로 켜놓고도 모자라 이불 네채나 덮고서야 밤을 지낼수 있었으며 두터운 옷을 두겹세겹 껴입고 실내화에 모자로 무장하고도 춥다는 소리를 노래처럼 했다. 그렇게 2,3일을 고투해서야 내 몸은 겨우 이곳 기후에 조금씩 적응하는 조짐을 보였다.     겨울만이 아니다. 지난 여름에도 같은 일을 겪었다. 한여름인 7월에 한국에 도착한 처음은 역시 오한이 든 사람마냥 덜덜 떨었다. 그리고 두달간의 체류가 끝나고 중국에 돌아와서도 또다시 열흘간 고생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내 몸은 자리를 옮길 때마다 낯선 기후에 적응하기 힘들어 했고 거기에 새롭게 적응하느라고 몸살을 앓아왔다.      그렇게 몸살을 겪고 설명절을 쇠고 하느라 20일을 훌쩍 보내고 오늘에야 나는 400년의 나무를 찾아 나섰다.     지난 여름, 여기 오천리 마을 한끝에 자리잡은 놀이터에서 처음 고목을 만났었다. 낮은 산에 기대여 있는 놀이터는 가파른 산자락에 울창하게 서있는 나무들이 그늘을 둥그렇게 만들어주어 서늘하고 아늑했다. 놀이터에는 간단한 운동기구들이 줄지어있고 한켠에 400년의 나무가 긴 가지들을 부채살마냥 휘우듬하니 펼치고 서있다. 덩실허니 큰 고목이 할아버지마냥 수염 어루쓸며 허허 웃는듯 하는데 그옆에 방석 펴고 점잔하게 앉아있는 정자와 졸졸졸 흐르는 시내물이 고목을 400년 벗해온듯 유정해보였다. 그 옛날 정자우에서는 시쓰기 경합이 벌어지고 고목에 매단 그네 타고 아녀자들은 하늘우로 날아올랐을 그림 같은 풍경.     그러나 겨울이 한창인 지금은 어떤 풍경도 읽을수 없다. 놀이터에는 썰렁하니 눈만 덮여있었고 놀이기구들은 누가 찾아주는 이 없이 차갑게 얼어있었다.     드디여 400년의 고목을 마주하고 반가운 마음으로 고목을 다시 읽었다.     보호수-     수종: 느티나무 / 수고: 20메터 / 나무둘레: 6.0메터 / 수령: 400년 / 지정일자: 1982.10.15 ... ...     엄격하게 말하면 82년도로부터 30년을 넘긴 현재 수령은 430년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고목은 온 겨울 추위에 떠느라 경직된듯 하다. 나는 오랜 지우를 만난듯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고목을 어루쓸었다. 430년이라, 그 오랜 수자앞에 마음이 숭엄해진다. 우리가 몇세대를 거쳐오는 동안 고목은 촌보의 움직임도 없이 이 한 자리를 굳건히 지킨것이 아닌가. 그동안 우리는 수없이 자리를 옮겼는데…할아버지가 남부녀대하여 낯선 곳에 가서 일군 새 터전을 다음 세대, 그다음 세대는 너무 쉽게 버리고 또다시 류랑의 길에 올랐다. 거퍼 100년도 안되여 삶의 터전을 잃고 있다. 아니, 버리고 있다. 기후차에 몸이 적응하기 힘들어하듯 새 정착지에 적응을 못해 몸살을 앓으며 우왕좌왕하면서도 말이다.     내 손의 온기가 나무에게 전달되였을까? 6메터 둘레에 내 키의 10배도 훨씬 넘는 나무앞에서 나는 너무 왜소했다. 내 체온의 전부를 준다 해도 고목에게는 간에 기별도 안갈것 같다. 한 나무앞에 선 한 인간이 이처럼 초라할수 있다니. 나무는 내가 반가울가? 나무를 닮고 싶어하는 나를 거부하지 말았으면.     400년 나무의 두리에는 그만한 수령은 안되여도 300년, 200년, 100년은 되였음직한 느티나무 몇그루가 더 있다. 400년 나무의 후대들이고 가족들임이 틀림없다. 수백년동안 느티나무 가족은 흩어지지 않고 한자리에 뿌리내리고 살며 서로 힘이 되고 격려가 되였을것이다. 그들에게는 나처럼 여기저기 옮겨다니느라 기후에 적응 못하고 환경에 적응 못해 겪어야만 하는 몸살 같은건 필요가 없다. 그들은 가족이 같이 하면서 튼튼해져 어떤 추위도 재난도 쉽게 견뎌냈을것이다. 혈육의 정을 나누며 행복했을것이다.     400년의 나무가 말해온다, 이제라도 늦지 않다고, 자기네처럼 한곳에 모여 살아보라고, 한곳에서 뿌리 박고 오래오래 살아보라고.     그래, 어디든 좋으니 이 고목처럼400년이고 800년이고 한번 내린 뿌리 살찌우며 오래오래 살고 볼판이다. ▣
23    문학으로 보는 조선족사회의 정착과 리산 댓글:  조회:885  추천:0  2016-08-05
 글/최학송           해방전, 동북지역에는 근 2백만명에 달하는 조선인(조선족이민 1세대)이 살고 있었다. 이중에는 적지 않은 문인들도 포함되여 동북조선인들의 삶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이는 본격적인 조선족문학의 전사(前史)라고도 할수 있는것으로서 흔히 재만조선인문학 또는 조선족이민문학으로 불린다. 이시기 문학을 관통하는 키워드의 하나로 “개척”을 들수 있다.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하여 낯설고 물설은 동북에 들어와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해나가는 과정의 어려움과 보람을 묘사한 작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의 터전의 개척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고향의 건설과 련결되여 “북향(北鄕)” 즉 북쪽의 고향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으며 널리 사용되였다. 1933년 11월, 룡정에서는 “북향회(北鄕会)”라는 문학동인회가 결성되였으며 이 동인회에서는 또 《북향》이라는 동인지를 발간하였다.       “북향”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안수길(1911-1977)을 들수 있다. 안수길은 동북 조선인들의 생활을 반영한 소설들을 묶은 그의 첫 개인창작집 제목을 《북원(北原)》(1944)이라 명하였으며 조선인들이 동북에서 리상촌을 건설하는 이야기를 다룬 그의 첫 장편소설의 제목을 《북향보(北鄕譜)》(1944)라고 달았다. 안수길의 말처럼 조선의 북쪽, 즉 동북에 제2의 고향을 건설한다는것이야말로 이시기 동북에서 생활한 조선족이민 1세대의 삶에 대한 가장 형상적인 요약이 되겠다. 오늘날 동북에 있는 조선족집거지들은 이런 “북향”건설의 결과물들인것이다.      박옥남의 “둥지”(2005)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둥지”는 벽동툰이라는 한 조선족마을과 그 마을에서 생활하는 한 가정의 이야기를 통하여 조선족공동체의 해체와 몰락을 보여준다.      송화강류역에 위치한 벽동툰은 평안북도 벽동에서 여덟가족이 이주하여 형성된 조선족마을로서 처음에는 팔가자(八家子)라 불렸으나 1954년 소학교를 세우고 그 학교의 이름을 벽동소학교로 명명하면서 마을이름도 아예 벽동툰으로 바꿔버렸다. 벽동소학교는 학생수가 가장 많을 때에는 200여명까지 되였으나 현재는 전교생이 7명이며 끝내는 페교를 맞이한다. 페교된 교사는 이웃 마을의 한족이 사들여 양우리로 사용하며 운동장은 양들이 먹을 사료를 재배하게 된다. 마을이름의 유래에서도 알수 있다싶이 벽동소학교의 흥망성쇠는 곧 벽동툰의 흥망성쇠를 반영한다. 소학교의 페교처럼 벽동툰도 현재 몰락을 거듭하고 있다. 소학생인 진수는 다니던 학교가 페교되면서 이제부터 외가집에 가 생활하면서 현성의 학교를 다녀야 한다. 한국에 돈벌이를 간 진수의 아버지는 현재 련락이 두절된 상태이다. 진수의 어머니는 농사일에는 관심이 없고 매일 도박판으로 돌아다니다 촌장과 바람을 피운것이 들통나 마을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다. 이외에도 오늘날 조선족농촌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제점들을 우리는 이 작품속에서 찾아볼수 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이 작품을 읽고 분석하다가 몇몇 학생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적이 있다. 작품속에서 자신의 고향마을을 보았을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쓰려났다. 필자가 다니던 소학교가 현재 소우리가 되여 있고 운동장이 옥수수밭으로 된것을 생각하면 이 작품을 보는 마음이 더욱 무거워진다.      김혜련의 “아빠트”(2011)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고있다. “아빠트”는 연변의 한 조선족농촌마을에서 태여난 30살좌우의 네 조선족 젊은이의 이야기를 다룬다. 철수는 연길의 한 파출소에 근무하고 있는데 연길에 아빠트가 없다는 리유로 사귀던 녀자친구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아일랜드에서 돈을 벌어 부모님에게 연길에 아빠트 한채를 사주겠다던 박연은 불법체류가 들통나 그사이 모은 돈을 모두 날리고 자기보다 7살 어린 당지 남성과 결혼하는것을 통하여 강체출국만은 면한다. 상해에서 박사공부를 하는 미자는 량가 부모님들이 10여년 한국에서 번 돈으로 선불금을 내고 상해에 아빠트를 마련한다. 매달 6천원씩 20년간 은행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지만 미자는 상해에서 대학 교수가 되여 “떠돌이 삶”을 자신의 세대에서 끝내겠다는 꿈을 안고 이악스레 살아간다. 한국에서 박사공부를 하는 영희는 사귀던 가난한 남자친구와 헤여지고 아빠트를 갖고 있는 한국남자와 결혼한다.      작품속의 인물들은 모두 “고향”을 등지고 도시에서 “아빠트”때문에 울고 웃는다. 도시에 아빠트를 가졌다는것은 도시에 정착하였다는것으로 리해할수 있다. 이로보면 작품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조선족 젊은이들의 도시지향적인 삶과 도시정착과정에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반영한것으로 볼수 있다.      안수길은 “북향” 건설을 제2의 고향건설이라고 하였다. “북향” 건설을 통하여 우리는“둥지”의 벽동툰처럼 농촌을 중심으로 집거생활을 진행하는 제2의 고향을 건설했으며 벽동소학교와 같은 민족학교의 건립을 통하여 우리의 언어, 문화,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왔다.     이런 새로운 도시조선족공동체의 건설을 우리는 “제3의 고향건설” 또는 “남향”건설이라고도 할수 있겠다. 우리가 그토록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북향”을 건설했던것처럼 비록 당분간은 여러가지 현실적 어려움이 많겠지만 “남향”도 또 하나의 “고향”으로 잘 꾸려갈수 있을것이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이런 “남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을 반영한 보다 많은 작품이 나타나 우리 조선족문학을 풍성히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22    주인공의식이 어느때보다 필요하다 댓글:  조회:921  추천:0  2016-08-05
글/정신철           이민으로 형성된 중국조선족은 유전이라할까 현재도 류동성이 강하다. 물론 류동은 현 시대의 중요한 상징의 하나로서 류동할수 있다는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것을 말한다. 류동을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터전을 닦고 더 좋은 생존환경을 도모하며 삶의 질을 높일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것은  초창기에 우리 선조들이 쪽박을 차고 중국땅에 건너올 때의 생계유지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 조선족의 대규모의 류동은 시대흐름에 맞는 움직임이고 새로운 재부를 창조하는 더 좋은 계기로 볼수 있다. 그리고 개척성이 강한 조선족들은 어디 가든 모두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고 기타 민족 부럽지 않게 자신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이라고도 할수 있다.     문제는 조선족은 적응성, 개척성이 강한 한편  “안착의식”,   “뿌리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하며 “주인공의식”은 더욱 약해 보인다. 례컨데 우리 조선족은 누구보다도 시대흐름에 항상 앞서 새로운 터전을 잘 개척해 나간다. 하지만 어느 정도에 와서는 더 철저히 해보려는 의지보다 늘 현상유지 또는 새로운 류동을 도모하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빈번한 류동때문에 그들에게는 주인공의식을 지니고 한 지역, 한 령역에 집착하여 지속적으로 원래의 기반을 더욱 넓게, 더욱 깊게 하려는 의지가 약해 보인다. 그 결과 조선족사회 전체를 보면 대단한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것 같은데 아주 돌출한 인물들은 기타 민족에 비하여 많이 부족하다는것이다.     현 시대에 있어서 령활성을 띠고 새로운 환경, 새로운 직업에 감히 도전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집착하고 꾸준히 밀고 나가는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자면 먼저 무엇을 하든, 어디에 가든 거기에 애착을 갖고 당당한 주인공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 다음으로 자기가 하는 일, 생활하고 있는 곳에 집착하여야 한다. 또한 우리 사회에는 한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장인정신이 특별히 필요하다.     때문에 조선족사회 성원들은 무엇을 하나, 어디에 가나 당당한 주인공의식을 갖고 그 령역, 그 지역을 사랑하고 꾸준히 산을 옮기는 “우공”과 같은 장인정신을 키워야 한다.  ▣
21    열린 생각이 뿌리를 강하게 만든다 댓글:  조회:777  추천:0  2016-08-05
글/명호       실내에서 키우는 식물은 잎이 무성하고 꽃도 류달리 아름답지만 뿌리가 깊지 못하며 어느날 창문가에 놓으면 작은 바람에도 쉽게 쓰러지고 만다. 그러나 광활한 벌판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거센 비바람속에서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며 풍성한 열매를 맺을수 있다.     한 민족을 말하면 식물과 다를바 없다.     인구가 수천만명이 넘는 민족들이 허다한 이 세계에서 유태민족은 인구수도 많지 않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면서 오랜 력사과정에 수많은 역경을 거쳤지만 굳건히 버텨냈고 현재는 가장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민족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흩어져 살면서도 체질적으로 갖게 된 열린 생각들과 모진 시련속에서 련마된 굳센 마음때문이 아닐까 싶다. 현재 조선족 전통집거지가 허물어지고 민족구성원들이 중국 다민족문화권속으로, 세계속으로 흩어지는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날개를 더욱 굳건히 하고 우리의 뿌리를 더욱 든든히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싶다. 오늘날 중국의 조선족은 중국 전역 내지는 세계속으로 그 발자취를 넓혀가고 있다. 조선족은 중국내 여러 민족들가운데서도 인구분포가 가장 분산되고 개방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이라 할수 있다. 류례없던 민족류동과 거세찬 개방의 물결속에서 우리 민족의 앞날과 운명에 대한 불안과 우려 또한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문제되는것은 인구의 분산이다. 조선족인구의 분산 현황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통계가 나온것은 없지만 현재 집계된 일부 수치들을 통해서도 대략적인 상황을 료해할수 있다. 2010년에 실시된 전국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조선족인구 183만명이다. 그 가운데 한국내 체류한 조선족인구가 60만명 이상에 달하는것으로 짐작된다. 이밖에 중국내 북경, 산동, 천진, 상해 등 지역에 산재해 살고 있는 조선족인구수도 어마어마하다.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중국 전역과 세계 각지(한국 제외)에 산재된 조선족인구는 한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인구수와 맞먹는것으로 추정된다. 다시말해 전체 조선족인구의 3분의 2정도가 전통적인 집거지인 동북3성을 떠나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2세, 3세가 여전히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을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러한 우려는 일부러 누구를 놀래우려는 의도가 아니라 현재 진행중이며 그리고 향후 더욱 심각해질 동화를 두고 하는 말이다. 타지역으로 이동한 조선족류동인구가 조선어를 사용하는 빈도가 현저하게 낮아지는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자녀들의 조선어 구사능력은 부모에 비해 훨씬 떨어지거나 심지어는 한마디도 할줄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것이 바로 민족의 동화이다. 이 추세대로 한세대, 두세대가 지나면 조선족이라고 자부할수 있는 특징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실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는 이러한 우려들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얻어낼수 있는 결론은 확연히 다를수도 있다.     우선 민족의 분산이 꼭 민족정체성의 약화와 소실을 의미하는것은 아니다. 유태인을 례로 들면, 그들은 방방곡곡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지만 그 정체성에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분산거주로 인해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보다 글로벌한 정체성을 지닐수 있게 되였다. 외부요소들을 우리의 상황에 맞게 이끌어가면서 다양한 도전들에 맞선다면 조선족의 정체성은 약화되거나 소실되는 대신 오히려 더욱 굳건해질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시도를 함에 있어서 우리 조선족은 리용할수 있는 외부자원들이 여러개 있다. 하나는 정부의 민족정책이 정체성 유지에 체제적인 보장을 마련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우리 민족의 량호한 이미지와 중국이라는 다민족국가의 포용적인 문화환경속에서 흩어져 살고 있는 조선족의 이미지가 대체로 부지런하고 문명하고 깨끗하다는 등 단어를 떠올려 쉽게 타민족에게 다가갈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조선족이 갖고 있는 창업기반이 지난날의 지역적 제한이 강한 벼농사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밖에도 한국, 한국인들과의 끈끈한 문화적 뉴대관계도 조선족의 발전에 독특한 외적자원이 되고 있다. 정보기술의 발전 또한 민족정체성을 현실적으로 보장해준다. 과거에는 분산거주가 흔히 민족, 고향과의 단절을 의미했다면 오늘날 날로 발전하고 있는 과학기술은 현지화와 민족뉴대관계의 통일을 가능하게 해준다. 우리의 정체성은 더는 자치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중국 전역에로,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다시 민족동화로 돌아오면 동화라는 말은 흔히 두려움을 앞세운다. 동화의 본질은 한 민족에 대한 생리적 도살이 아닌 문화적 의미에서의 민족의 소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인류력사상 특히는 산업혁명이후의 수백년의 력사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동화로 인해 소실된 민족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과감히 동화에 맞서고 동화의 위협을 이겨낸 민족이 더욱 활력을 갖게 되였다. 민족은 끊임없이 발전한다. 그 어느 민족도 기존의 특징이나 특징적 요소가 영원불변하지는 않는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적극 자신의 포지션을 조절해야만 변화와 도전에 더욱 잘 대응하고 맞설수 있다.     어떻게 보면 유태인은 세계에서 가장 “림기응변”에 강한 민족이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림기응변”은 유태민족의 생명력을 약화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세계에서 가장 굳건한 민족으로 성장할수 있게 했다. 앞에서 언급한 현대정보기술도 동화가 기존사회에서 지니던 의미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 고향을 등지고 민족집거지를 떠난 민족구성원들은 본인이 원한다면 언제 어디서든 기존과 비슷한 생활권을 만들수 있다. 이러한 생활권에서 일부 외적인 부분들이 그 지역의 특성에 맞게 변형된 부분도 있고 일부 민족적 특성이 약화된 부분도 없지는 않겠지만 민족의 내적인 소속감은 전혀 약화되지 않는다. 이국타향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더욱 민족자긍심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양복을 입어도 마음은 중국”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것이 아니다.     개방된 환경속에서의 열린 생각과 시련에 맞서며 키운 굳건한 마음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줄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    조선족 연극감독 척군옥의 “비밀” 댓글:  조회:1043  추천:0  2016-08-05
글/김향덕       척군옥(戚君玉, 1983년생, 흑룡강성 수화시 태생)은  지난해 “샤넬의 비밀(夏奈尔的秘密)”이라는 작품을 갖고 혜성처럼 연극감독계렬에 입성하여 각광받은 유수의 조선족 연극감독이다. 2015년 10월 2일부터 8일까지 연극  “샤넬의 비밀”이 북경 고루서극장(鼓楼西剧场)에서 상연되였다. 작품은 한 녀성의 성장과 각성과정을 주선으로 옛 상해의 대표적인 부자집 아들과 평범한 녀성 사이의 정감 스토리를 담아내고 있다.   지난 6월의 어느 무더운 오후, 기자는 연극예술을 두고 척군옥 감독과 인터뷰를 가졌다.   연극작품 “샤넬의 비밀”       “사람마다 숙명을 짊어지고 있다. 우리는 어두움과 곤혹을 파헤치면서 살아가고 포기와 책임 가운데서 선택을 해야 한다. 운명의 십자로에 들어섰을 때 과연 우리는 가장 정확한 선택을 해야 하지 않을까……”     어두운 장막을 꿰뚫고 녀주인공 샤넬이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예시하는 대사를 읊조리며 관중석을 가로질러 무대우로 등장한다. 암담한 무대배경,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배경음악, 복고적인 옷차림을 한 배우, 조용히 숨을 죽이고 감상하는 관중들, 이러한것들이 미묘한 분위기속에서 조화를 이룬다. 시간은 어느덧 사람들을 옛 상해의 조계지시기(1937-1941년)로 빠져들게 한다.     때는 옛 상해 조계지시기, 장소는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위치한 샤넬의 복장점이다. 복장 디자이너가 되여 상해탄에서 명성을 떨친 샤넬이 자신의 복장점에서 신상발표회를 한창 준비중이였다. 그런데 흥국은행 행장의 딸인 대청아(黛青娥)가 불청객처럼 불쑥 찾아왔다. 그녀의 또 다른 신분은 바로 샤넬의 애인이였던 남자주인공 륙백읍(陆柏邑)의 안해라는것이다. 그러나 륙백읍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죽는 탓에 대청아는 미망인이 되고 말았다. 대청아가 샤넬을 찾아 따지는 장면을 시작으로 샤넬의 신분, 성장과정, 인간관계 등 비밀이 일일이 풀어져 나아가면서 연극은 계속되였다.     극중에서 샤넬은 출신이 비천한 녀성이였지만 시종 세속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고 특유의 녀성적인 강인함을 소지한 인물이였다. 그녀는 부자집에서 말을 기르는 시녀로 있으면서도 대도시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자신의 손재주를 살려 디자이너의 꿈을 꾸었다. 사랑문제에서도 샤넬은 과감히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녀성이였다. 그녀는 귀공자 애제안의 가식적인 추구에 놀아나지 않았고 륙백읍의 배신을 두고도 자신의 판단으로 대처할 줄 알았다. 한 마디로 샤넬은 운명에 복종하지 않는 강인한 신식녀성이였다.     극작품 “샤넬의 비밀”은 잘 짜인 스토리와 배우들의 생동한 연기력으로 관중들을 정복시켰으며 이 작품으로 척군옥 감독은 청년극작가로 각광받게 되였다. 연극감독의 길을 걷다       어릴적부터 예술에 관심이 많았고 또한 기타를 잘 다루는 부친의 영향으로 척군옥 감독은 음악과 무용을 접하게 되였다. “제가 외동으로 자라다보니 집안의 온갖 사랑을 한 몸에 지녔어요. 아버지는 저에게 피아노와 무용을 가르쳤고 어머니는 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제가 문학적인 소질을 키워가도록 도와주셨지요.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외조부, 외조모는 나에게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시면서 뿌리의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유족한 가정은 명인을 탄생시키는 필수조건은 아니였지만 아주 유리한 조건이였다. 척군옥 감독의 부모님은 일찍 1990년대 초반에 사업에 성공하여 상당한 재부를 쌓았으며 자식의 미래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했다.     16살이 되던 해에 척군옥 감독은 홀로 상경하여 북경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기숙사생활을 하면서 많은 친구들과 어울렸고 그녀는 어린 마음에 자립의 의미를 터득하게 되였다. 그러던 중에 그녀는 자신만의 꿈을 갖고 무엇인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것을 깊이 느꼈다. 척군옥 감독이 처음으로 가지게 된 꿈이 바로 작가가 되는것이였다.     작가가 되기 위해 척군옥 감독은 스스로 배움의 길을 찾아 나섰다. 그녀는 평소에 세계명작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고 직접 시나리오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단막극의 조연배우로 출연했다가 중앙희극학원(中央戏剧学院)의 조숙보(赵淑宝) 교수의 주목을 받게 됐으며 그로부터 전문지도를 본격적으로 받았다. 그후 중앙희극학원에 입학하여 연극감독을 전공하게 되였고 2011년에는 석사학위까지 따냈다.     “중앙희극학원을 다니면서 연극에 관한 공부를 계통적으로 했습니다. 연극은 동일시간에 동일한 공간에서 여러 인물들에 의해 벌어지는 이야기를 관중들에게 집중적으로 표현하는 예술이라 볼수 있습니다. 때문에 정경을 꾸며내고 인물들의 은폐된 성격을 표현해내는것이 관건입니다.”     연극과 관련해 척군옥 감독은 전문가의 시각에서 거침없이 설명을 더해준다. 사람들이 평소에 고급적인 예술로만 인식하고 거리를 두었던 연극이 실은 수없이 많은 인간성을 부각해내여 공명을 일으킬수 있다. 자신이 표현하려는 인간성을 자유자재로 만들어내고 그것을 대중들에게 보여주는것이 연극의 매력이였다. 이러한 매력에 심취된 척군옥 감독은 처녀작인 “샤넬의 비밀”을 써냈고 무대에 옮겨놓음으로서 직업 연극감독의 길을 걷게 되였다.     샤넬의 형상을 두고 척군옥 감독은 어느 한 인물을 부각하는것보다도 녀성들의 보편적인 일면을 반영하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말한다. “샤넬의 이야기는 너와 나의 이야기가 될수 있고 모든 녀성의 이야기도 될수 있습니다. 그녀는 바로 이처럼 천하의 각성한 녀성들을 대표할수 있는 신식 녀성입니다.”     샤넬처럼 대중들이 공명을 불러일으킬수 있는 인물형상을 부각하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척군옥 감독은 “샤넬의 비밀”을 창작함에 있어서 3년이라는 시간을 들였고 각본을 수없이 수정하였다. 또한 쉐익스피어, 체호브 등과 같은 세계대가들의 극작품을 모두 섭렵하면서 그들이 부각한 전형인물들을 연구했으며 창작리론뿐만 아니라 심리학, 철학 등 다방면의 지식을 습득했다.     “경전이 될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이것이 바로 척군옥 감독의 희망이자 포부였다. 민족문화에 관심을 돌리다       척군옥 감독의 남편은 오래전부터 가요계에서 명성을 떨친 이족(彝族) 가수그룹 이인제조(彝人制造)의 곡비합포(曲比哈布)이다. 예술에 대한 공동한 애호와 비슷한 추구는 그들로 하여금 부부의 연을 맺게 하였다. 그녀가 연극감독의 길을 걷게 된것도 남편의 적극적인 지지와 갈라놓을수 없었다.     “남편은 저의 튼튼한 뒤심이 되여 주었어요. 남편은 음악에 전념하였고 저는 연극작품을 창작하는데 주로 신경을 썼습니다. 겉보기에는 서로 다른 예술령역이지만 실은 교감할수 있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생활상 그들은 서로 의지하는 동반자였고 창작방면에서는 서로에게 의견을 제기할수 있는 친밀한 벗이였다. 이번  “샤넬의 비밀”을 공연함에 있어서 그녀의 남편이 음악감독을 맡아주었다.     또한 두 사람은 모두 소수민족이다보니 민족문화에 각별한 관심을 돌렸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가요계에서 민족풍의 음악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해서부터 1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곡비합포는 시종 음악으로 이족의 정신문화를 반영해내는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척군옥 감독은 몸에 배인 조선족 녀성의 유순함으로 집안의 내조역할을 잘 해왔을 뿐만 아니라 녀성도 자기만의 사업에 몰두해야함을 몸소 실천해왔다.       “고향에 대한 어릴적 인상은 가물가물하지만 부모님들이 김장을 담그고 우리말을 가르쳤던 기억만은 새록새록 합니다.” 조선족 관련 제재로 극작품을 내놓을수 있지 않을가? 어느날 그는 이런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는것이다. 그 꿈이 둥글어지면서 점차 마음속 비밀로 자리잡기 시작했다는것이다. 현재 그는 조선어를 아주 잘 구사하지는 못하지만 자주 사용하도록 노력한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그녀 필하의 샤넬은 꿈을 위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자신의 모습과도 닮았다. 샤넬은 대중들이 공감하는 강인한 녀성이자 척군옥 감독 자신이기도 했다. 더욱더 많은 우수작품을 내놓기를 그녀에 기대해 보아도 좋다.▣
19    금메달 리스트로 된 두 사람 댓글:  조회:678  추천:0  2016-08-05
글/김몽         브라질 리우 올림픽이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다.  리우 올림픽을 눈앞에 둔 지금 지구촌이 벌써부터 열광에 들떠있다.     그런데 문득 올림픽을 떠올리니 서글프고 안타까운 생각이 갈마드는것은 웬 일일까.     그것은 울림픽 력사에 우리 민족으로서는 영원히 지워버릴수 없는 아프고도 서러운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37년에  독일 베를린에서 제11차  올림픽 이 있었다. 당시 독일은 당장 2차대전을 일으킬  만단의 준비를 마친 상황하에서 세인의 이목을 가리고저 세계평화니 민족평등이니 하는 간판을 내걸고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그번 경기에서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조선인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세계신기록을 깨고 우승의 금메달을 따내 세상을 크게 놀래웠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기뻐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고  침울하였다. 종점을 통과하자 손기정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고 기자들의 질문에도 응하지 않았다. 조선은 당시 일제의 식민지였기에 손기정은 부득불 일본 일장기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뛰였던것이다. 손기정은 비록 일등을 하였지만 망국노로서 일본을 대표하여 운동에 참가한것이 죄라고 생각했다. 일설에는 손기정이 종점을 통과한 다음 겉에 입었던 일장기가 새겨진 유니품을 벗어버리고 미리 밑에 입었던 태극기가 새겨진 옷을 입고 “대한민국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하였는지  아니면 애국심이 강한 우리 민족들이 꾸며낸 사건인지는 딱히는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것은 올림픽이 끝나고 서울에 돌아온 후인 8월 3일에 당시《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리광수가 손기정을 인터뷰하고 신문에 커다랗게 손기정의 사진을 실었는데 유니품에 새겨져있던 일장기표식을 지워버렸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페간되고 리광수는 편집국장에서 해임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일장기사건이다. 그후부터 손기정은 마라톤경기에 한번도 참가하지 않았다. 더는 일본의 얼굴에 분칠을 해주고싶지 않았던것이다. 이렇듯 손기정은 민족심이 강한 애국자였다.     제11차 올림픽에 손기정 외에 또 한명의 조선인 녀자 륙상선수가 참가했는데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800메터에서 금메달의  월계관을 따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가능하게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것이다.     1936년, 금릉녀자대학(金陵女子大學)에 강미려(姜美麗) 라는 평양 출신의 녀대생이 있었다. 그녀는 마라톤선수로 유명했다. 중국 국내의 큰 경기 때마다 우승을 했으나 중국국적이 아니라는 리유로 번마다 수상이 인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김구가 여러모로 노력하였고 학교 측에서도 적극 나섰으나 일이 그냥 꼬이기만 했다. 이 일로 강미려 본인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때 강미려에게 눈독을 들이는 한 일본외교관이 있었다. 그 일본외교관이 일본정부로부터 강미려를 쟁취하여 일본국적을 만들어 미구에 독일에서 열리는 제11차 올림픽에 내보내라는 비밀지시를 받았다. 일본외교관이 중국정부 중앙철도국의 국장인 장경립(張競立)에게 강미려를 유인하여 쟁취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장경립은 친일파였다. 마침 장경립의 집이 금릉녀자대학 근처에 있었고 그의 둘째 딸이 금릉녀자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장씨 부부는 둘째 딸을 내세워 강미려를 자주 집에 초청하여 맛있는 음식도 해먹이고 선물도 사주면서 은혜를 베푸는척 하였다. 일정한 시간이 흐르자 때가 성숙되였다고 생각한 장경립이 중국에 있으면 전도를 망치게 되고 일본에 가면 앞길이 창창할것이라고 꼬드겼다.  장경립이 달콤한 말로 꼬드기니 강미려의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거기다 장씨가 부지런히 쐐기를 박았다.      애국단 단원들로부터 이런 상황을 회보받은 김구는 일본인들의 흉계를 반드시 파탄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도 뾰족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김구의 한 측근이 김구를 보고  강미려가 영화황제 김염의 독실한 팬이라고 귀뜀했다. 김구가 김염을 불러 강미려의 마음을  돌려세워달라고 부탁했다.      김염은 당시 촬영 스케쥴이 빽빽했지만 상해로 가지 않고 곧장 강미려를 찾아갔다. 그는 강미려 앞에서 일본인들이 조선반도와 중국땅에서 저지른 침략만행을 낱낱이 성토하고 나서 조선인으로 민족의 기개와 량심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당부하였고 만약 일본국적으로 넘어가 일본을 위해 일하면 매국역적이나 다를바 없다고 단단히 모를 박았다. 강미려는 자기의 우상이였던 김염이 몸소 찾아와서 타이르는지라 그 자리에서는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김염은 자신이 가지고 간 사진에다 싸인까지 해주었고   “나라와 민족에 루를 끼치는 삶을 선택해서는 안된다. 언제 어디서나 백의동포라는것을 절대 잊지말라!”는 쪽지까지 써주고 돌아갔다. 하지만 김염의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강미려는 허영심과 금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학교를 자퇴한 다음 장경립의 집에 얼마간 머물러 있다가 곧장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체육총회에 가입했고 프로선수가 되였다.      강미려는 이름을 안창숙으로 바꾸고 일본국적을 취득했다. 일년 후에 베를린에서 거행된 제11차 올림픽에서 녀자 800메터 금메달을 따내 아시아권 최초의 육상메달리스트로 되였다.     결국 제11차 올림픽에서 조선인이 큰 종목에서 금메달을 두개나 따낸것이다. 그러나 금메달 두개가 모두 일본의 몫으로 되여버렸다. 애국자 손기정의 이름은 오늘까지도 빛을 뿌리고 있다. 하지만 조국을 배반한 강미려의 이름은 력사에 영원히 매몰되고 말았다.  ▣  
18    《중국민족》 2016년 4호 댓글:  조회:1343  추천:0  2016-08-05
17    《중국민족》 2016년 3호 댓글:  조회:1504  추천:0  2016-07-04
16    《중국민족》 2016년 2호 댓글:  조회:2008  추천:0  2016-04-13
15    《중국민족》 2016년 1호 댓글:  조회:1978  추천:0  2016-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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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중국민족》 2015년 6호 댓글:  조회:1875  추천:0  2015-12-08
관련기사 보기: 고향이 그리울 때에는 그림을 그린답니다.                           그녀가 궁금하다                  고희를 넘어 사진작가가 된 리해숙할머니                  청계천우에다 화장실을 짓다니
13    《중국민족》 2015년 5호 댓글:  조회:1911  추천:0  2015-09-29
12    《중국민족》 2015년 4호 댓글:  조회:2056  추천:1  2015-08-06
관련글 보기 * 고려성의 머리없는 장군
11    《중국민족》 2015년 3호 댓글:  조회:2498  추천:0  2015-06-29
10    중국민족 2015년 제2호 댓글:  조회:2350  추천:0  2015-04-09
중국민족 2015년 제2호 링크기사 옛추억 끄집어내고 공감 불러일으킨 2015 연길TV음력설야회 남룡 최첨단 전자의료기기 생산, 대중 건강증진에 크게 이바지 90세 전사의 끝나지 않은 전쟁 로구교의 돌사자에 깃든 예 이야기 독자들의 주문을 기다립니다.
9    중국민족 2015년 제1호 댓글:  조회:2013  추천:1  2015-02-04
독자들의 주문을 기다립니다.
8    중국민족 2014년 제4호 댓글:  조회:2075  추천:1  2014-08-18
목차 권두언 지금은 조선족 전체가 힘내야 할 때/김현철 초점 길림성민족단결진보사업의 현주소와 전망/조홍 연변대지에 뿌리내린 민족단결의 꽃/범은혜 특별기획:조선족 영원한 "품팔이"로 남을것인가? 중국 조선족 52만명 돌파, 한국사회속 현주소/한겨레 부모님은 돈밭에서 일하고 계십니다/김현철기 한국에서 고민하고 있는 조선족기술 사회론/예동근 리춘식씨의 한국 생활 8년, 수타면이란 한우물 팠다/서정옥 귀국후에도 유용하게 써먹을수 있는 기술이나 재간을 배워오는것이 바람직/안상근  인물포커스 서장과 사진으로 만나다/서정옥 원사 김홍광의 숨겨진 "전설"/김호림발 리광평, 조선족집단이민력사의 기록자/김향덕 리얼하게 그리고 치렬하게-녀류작가 강경애/김혁 특별기고 중한 자유무역협정의 협상 동기 및 그 영향과 전망(하)/리천국 력사현장 석문을 여는 마법의 주문/연지명 망각된 력사의 현장. 연길서광장/안상근합 오늘의 화제 영어앓이/려희 칼럼 브라질월드컵을 말하다/김몽 로인세계 "지난 30년간 우리 협회는 줄곧 전국의 앞장에서 달려왔습니다"/리호남 훈춘제2고중 성립 60주년에 올리는 글/최돈걸 윤수범 한장의 편지로부터 시작된 10년간의 선행/박민걸 문화나루 사라져가는 세시풍속/리동렬 리서지 장백산지구 한국어번역일군 양성 과정 및 체험/김경수 소수민족전통체육과 민담의 상호 영향관계/정진빈 인터넷 뉴스 기사를 어떻게 쓸것인가?/전금화국 소수민족문자출판사업의 공익성지위를 법적조치로 보장해야/최성춘 청소년을 위한 서양미술사(9)/ 앞표지 중앙인민방송국 리춘남 역심민 표지2,3 "연변조선족자치주성과전"/리호남 박복선족 뒤표지 꽃피는 봄 사진/리종걸
7    중국민족 2014년 제3호 댓글:  조회:1891  추천:0  2014-06-13
목차 권두언 습근평 총서기 신강에서 고찰 초점 민족단결,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제반 사업을 견인하는 한폭의 기치/리영호 특별기획:나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게 될까? 자기 개발과 발전에 유리한 직장이 최고 직장이다/김의진 취직에서의 첫 관문, 면접은 이렇게 봅시다/김미현 나의 꿈, 나의 직장/김현철 도전이 있는 곳에 기회가 있다/박홍전 특별기고 우리 말이 여기서 꽃 핀다/서정옥 우리 아이를 얼빠진 사람으로 키울것인가?/유병수 되돌아보는 조남기장군의 민족간부 성장기(하)/리철수 중한 자유무역협정의 협상 동기 및 그 영향과 전망(중)/리천국 인물포커스 "단합을 해야만 힘이 생기고 서로 도울수 있습니다!"/리호남 서영수, 길림시 민족사업 코기러기/김향덕 "태양신"의 이름을 찾은 사람/김호림 태항산에서 싸운 풍운의 종군 작가-김사량/김혁 력사현장 영국더기의 "일본귀신의 집" 형제민족칼럼 설역고원, 그 깨달음과 감동/왕족 칼럼 동양평화론의 선구자-안중근/김몽 로인세계 김석찬 로인의 우리말 우리글 사랑/윤수범 문화나루 중국조선족민족사학회 제2기 제2차 회의/김향덕 나는 그냥 좋아서 축구를 본다/심섬와 수도에서 우리 민족 축구문화를 빛내가고 있는 북경조선족축구협회/리호남  사라져가는 세시풍속/리동렬 리서지 민족화보 조선문판의 표지인물설계에 대한 고찰/김병순 드라마번역의 특성의 몇가지 번역원칙 /리성철 뉴미디어시대 라지오방송의 창의적 발전과 지켜야 할 리념/손연 청소년을 위한 서양미술사(8)/박갑영 앞표지: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 김의진 초대회장 표지2:중앙민족대학교 "박걸장학금"서명의식 열려 표지3:남영전토템시와의 만남의 장인 토템문화제 뒤표지:날아라, 구중천에 사진/리종걸
6    중국민족 2014년 제1호 댓글:  조회:2915  추천:0  2014-03-07
목차 권두언 새해의 달력 첫장을 번지며/김철 초점 전국민족단결진보시범주 건설 위해 연변조선족자치주 8대 프로젝트 추진/범은혜 특별기고 되돌아보는 조남기장군의 민족간부 성장기(상)/리철수  특별기획:울려라 나의 노래여 그때 그 시절의 노래/남복실 거위의 꿈/김향란 아버지의 초원 어머니의 강/왕옥룡 먼 타향에서 떠올리는 고향의 축배가/ 양자만 인물포커스 수학교원으로부터 우수한 민족사업지도로  -흑룡강성민족사무위원회 리순보 부주임/서정옥 조선족의 첫 세계바둑우승자 박문요 프로기사/리호남 김향덕 문화관의 생존과 발전을 위하여 -료녕성 철령시 조선족문화예술관 김영주 관장/김례호 자연과 함께 달리는 야생버섯사나이 라동도/도옥 외발로 력사의 질곡을 넘다-김학철/김혁 력사현장 까마귀바위에 울린 빨찌산의 나팔소리/연지명 조선의용군의 피어린 호가장 전투/김성룡 녕안의 우리 민족/남영선 칼럼 중국조선족문화에 관한 사색/최돈걸 광인의 망언/김몽 로인세계 중화강산도를 그리는 곤륜산인/김향덕 고향,정 그리고 꿈/리윤희 문화나루 시와 사진과 그림이 펼친 한마당 민족잔치/김영건 텔레비죤프로그램 대본으로 본 어휘사용에 대한 고찰/리광실 새농촌건설가운데서 보도매체의 역할/최광춘 장족전통문화와 유목경제의 관계로부터 본 민족문화와 민족경제의 관계/장민 청소년을 위한 서양미술사(6)/박갑영 사라져가는 세시풍속/리동렬 리서지 앞표지:흑룡강민족사무위원회 리순보 부주임/정영사진 표지2:2014년 북경조선족 신년하례회 표지3:2014년을 맞이하는 북경조선족사회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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