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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기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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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리덕수: 조남기정신 우리가 적극 계승 발양해야… 댓글:  조회:313  추천:0  2018-06-28
리덕수: 조남기정신 우리가 적극 계승 발양해야…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6월27일 00시00분    조회:73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전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 리덕수동지가 회고하는 조남기동지 전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 리덕수 6월25일 오후, 조남기동지의 추도회가 끝난후 본사기자는 조남기동지의 생전에 그분과 사업상은 물론 생활상에서도 다년간 매우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계셨던 전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이며 중앙통전부 부부장이였던 리덕수동지를 취재했다. 조남기동지의 추도회에 대해 리덕수주임은 중앙에서 매우 중시했는바 추도회가 성대하고 차원이 높았으며 범위가 넓었다고 강조했다. 이번 추도회에는 습근평, 리극강 등 현임 최고지도일군들은 물론 강택민, 호금도 등 전임 지도일군들까지 직접 추도회에 참가하거나 혹은 가타 방식으로 애도를 표시했으며 당정군 각계 대표들은 물론 흑룡강성, 료녕성, 길림성, 및 연변의 조선족대표, 그리고 연변대학의 대표들까지 참가했다. 리덕수주임은 중앙에서 조남기동지의 서거에 매우 큰 중시를 돌리였으며 추도회가 매우 엄숙하면서도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평가했다. 조남기동지에 대한 평가는 신화사, 중앙텔레비죤방송국 등 국가급 매체의 보도들에서도 보여주다싶이 평가가 매우 높았을뿐만아니라 전면적이고 무게가 있었다고 리덕수주임은 말했다. 조남기동지는 우수한 중국공산당원일뿐만아니라 우수한 민족사업자, 우수한 군대의 지도일군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조남기동지는 확실히 당과 국가, 민족, 인민군중들을 위해 매우 많은 일을 하였으며 또 걸출한 기여를 하였다. 리덕수주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알건데 조남기동지는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한 우리 나라 로일대들가운데서 얼마 남지 않은 제일 마지막 로일대 동지일것이다. 조남기동지의 일생은 초심을 잊지 않고 분투한 일생이라고 말할수 있으며 당과 국가, 인민군중 그리고 민족에 대한 기여의 일생, 영광스러운 일생이라고 말할수 있다. 조남기장군 추도식장에서 가족을 위로하는 전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리덕수 주임 조남기동지와의 사업관계에 대해 언급할 때 리덕수주임은 평소 그분과 접촉이 비교적 많았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제1임 서기는 주덕해이고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의 제2임 서기는 조남기동지였다. 나는 조남기동지의 뒤를 이어받은 제3임서기라고 말할수있다. 조남기동지와의 이러한 사업관계들로 하여 우리는 평소에 접촉이 비교적 많았다. 사업상에서는 물론, 생활상에서도 접촉이 많았는데 연변에 있을때는 물론, 길림성과 중앙에 온 후에도 우리는 접촉이 비교적 많았다. 조남기동지와 접촉하면서 나는 그분한테서 매우 많은 것들을 배웠다. 조남기동지는 나에 대해 매우 관심하였는데 그동안 돌려준 관심과 사랑에 감격되며 그분이 나에 대한 이러한 관심들을 영원히 잊을수 없다. 리덕수주임은 조남기동지와 가까이 접촉하면서 느껴왔던 조남기동지의 지도일군으로서 갖추신 몇가지 특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조남기동지는 머리를 잘 쓰셨는데 문제를 해결하는데 수준이 매우 높았으며 문제들을 잘 해결하셨다. 또한 사업가운데서 관찰능력이 뛰여나셨는데 문제를 제때에 발견하고 적시적으로 해결하시였다. 조남기동지는 형세를 제때에 따를줄 알았으며 시대와 호흡을 같이 하면서 대담히 돌파하고 창신할줄 아는 새로운 사유를 지닌 지도일군이였다. 조남기동지는 민족문제에 대해서도 연구가 깊었다. 민족에 대한 감정이 깊었으며 민족을 열애하고 민족문제 처리를 잘하셨을뿐만아니라 민족사업을 잘하신 매우 훌륭한 지도간부였다. 리덕수주임은 조남기동지가 평소 친구들을 널리 사귀고 깊이 사귄 특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남기동지는 벗들을 광범하게 사귀였을뿐만아니라 친분이 깊게 사귈줄 알았다. 때문에 조남기동지는 사업가운데서 단결과 조화에 능한 지도일군으로 될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건데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재부는 금전이거나 권력이 아니라고 본다. 돈이 많다고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니며 높은 직위에 있다고 해서 가장 대단한 것이 아니다. 가장 큰 재부는 바로 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벗들이 있는가 하는것이다. 벗이 많을수록 그만큼 행복하고 성공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리덕수주임은 마지막으로 조남기동지의 상술한 사상경지와 우수한 품덕들을 적극 계승하고 발양하여 향후 우리들의 각항 사업들을 잘 펼쳐 나갔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특히 리덕수주임은 조남기정신은 우리들의 제반사업, 즉 당과 국가, 사회와 인민을 위한 크고 가치있는 일들에 영향줄수도 있지만 작게는 우리들의 인생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잘 영위해나가는가 하는데도 분명히 좋은 계시와 도움이 될것이라고 말했다. /길림신문 북경특파 취재팀 안상근 김성걸기자
13    [아!조남기-조선전쟁1] 모택동의 아들 모안영과 만나다 댓글:  조회:1441  추천:0  2018-06-26
  조남기(1927년 4월 20일-2018년 6월 17일)   편자주: 우리민족의 령수인물 조남기 장군의 서거를 추모하여 본 위챗계정은 《조남기전》(곡애국 증범상 지음.연변인민출판사 2004년) 중에서 조남기의 굴곡적 인생사적 몇 단락을 특별 발취하여 련재한다.제목은 편자가 임의로 달았음을 밝힌다.-조글로   조선전쟁1 모택동의 아들 모안영과 만나다   지원군총지휘부에서       조선전쟁터에 들어선후 조남기는 지원군사령부 작천처에서 참모를 맡았는데 주로 세가지 사업임무를 수행하였다.      첫째는 중조고위급지도자들이 회견할 때 통역을 하는것이였고 둘째는 작전명령을 전달하는것이였다. 그 당시 지원군이 중대한 전역을 벌릴 때는 행동전에 지원군사령부로부터 각군에 중요한 작전명령을 보냈는데 모두 전문인원을 파견하여 송달하였다.조남기는 조선족이여서 조선경내에서의 외출행동이 비교적 편리했기에 늘 이런 임무를 맡아하였다.셋째는 련락사업을 맡는것이였다. 조남기는 중조군대지휘기구간의 정보전달을 책임진외에 조선지방정부와 거래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혹여 맡은 임무때문인지는 몰라도 조남기는 거처를 정할 때마다 늘 팽덕회가 들어있는 거처옆에 숙소가 마련되여 지원군총지휘부의 로어통역을 하는 동지와 함께 들었다. 조남기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런 배치로 말미암아 한 위인의 후대인 모택동의 큰아들 모안영과도 사귀게 되였던것이다.       몇십년후에도 조남기는 자기와 모안영이 처음 만났을 때의 정경을 그렇게도 똑똑하게 기억하고있었다.       그는 이렇게 회억했다.       《대유동에 도착한후 내가 배정된 방으로 들어갔더니 이미 누군가 자리를 정했더군요.키가 큰 축이고 좀 여윈데다 가른 머리를 했는데 나이가 나와 비슷하여 스무나문살 돼보였습니다. 그러나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매우 성숙되였더군요.난 이 동지가 어쩐지 낯익어 보이면서도 어디서 만났던지 인차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이때 그가 주동적으로 나한테 손을 내밀면서 열정적으로 말했습니다.〈자아소개를 하기요. 난 모안영이라고 하오. 총지휘부에서 로어통역을 맡고있소.〉       《〈모안영?!〉 나는 홀제 조선으로 들어오기전에 전하는말을 들은적이 있는지라 시탐조로 물었습니다.〈동무가 혹시… ?〉》       《〈아마 남들한테서 들었겠지. 맞소. 나의 부친이 모주석이요.〉모안영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조선에서는 모주석의 아들 역시 한갖 평범한 지원군전사라오. 우린 동지요. 우린 서로 도우면서 함께 사업하기요.〉》     1950년의 모안영 모안영(1922년10월24일-1950년11월 25일)       그들사이의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와졌다.그들은 이어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각자의 경력을 들려주었으며 각자의 가정정황을 터놓았다.모안영이 말했다.       《내가 지원군사령부에서 일하다보니 단지 몇몇 지도동지들만 내가 모주석의 아들이라는걸 알뿐이요. 우리가 한방에 들어있는 이상 서로간에 숨길게 뭐겠소.근데 동문 날 위해 비밀을 지켜줘야 하오. 다른것이 아니라 남들돌이 내 신분을  알게 되면 피차간 관계에 영향이 미칠수 있기때문이요.》       함께 생활하고 함께 사업하다보니 조남기는 모안영에 대한 료해가 더욱 깊어졌다.그가 느낀바이지만 모안영은 매우 소박한 사람이였다. 비록 류학을 한데다가 특수한 신분이였지만 생활이 매우 검박했고 자기에 대한 요구가 비상히 엄격했으며 종래로 모주석의 아들이라고 자처한적이 없었다.       뿐만아니라 조직관념이 매우 강했고 자신이 관할해야 할 일은 빈틈없이 해냈으며 자신이 관할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서는 종래로 간섭한적이 없었다. 비록 팽덕회사령원이 자기 자식처럼 모안영을 관심하고 돌보았지만 모안영은 도리여 자기 자신을 줄곧 지원군총지휘부의 보통사업일군으로 간주하였으며 여러 사람들과도 매우 잘 어울렸다. 이 점은 조남기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하나의 사소한 일이 조남기를 감개무량하게 하였다. 모안영과 조남기는 당시 모두 퇀급간부였다. 규정에 따르면 2명의 퇀급간부한테는 공무원 한명이 책임지고 일상적인 심부름을 해주게 되여 있었다. 그들의 주둔지는 산비탈에 있었기에 산아래에 내려가 물을 길어오자면 왕복에 한시간이 필요되였다.산길이 험한데서 공무원이 매일 물을 긷자면 여간만 신고스럽지 않은데다 적기의 공습문제도 있었다. 조남기는 자기와 주석의 아드님이 한방에 들었기에 응당 먼저 모안영의 생활수요를 만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그래서 물도 각별히 아껴썼다. 이렇게 하면 공무원이 하루에 물 두통만 길으면 되였다.       모안영이 이 정황을 발견한후 처음에는 매우 이상스럽게 생각하였다.자세한 관찰을 거쳐 그속의 심오한 비밀을 알게 되자 모안영은 조남기를 보고 말했다.       《동문 이렇게 할 필요가 없소. 물을 아껴쓰는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인거요.난 여직껏 주의를 돌리지 못했는데 즉시 공무원한테 가서 사과해야겠소.래일부터 우린 서로 감독하면서 하루에 물 한통만 쓰기로 하기요.》       그리하여 그들은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서 한사람이 한  세수대야의 물로 치솔질하고 세수를 했다. 그래서 공무원이  매일마다 물을 한번만 길어오연 수요를 만족시킬수 있었다.   (좌로부터) 강청 모택동 리나 모안영 류사제         시간이 길어지자 조남기 역시 모안영의 허다한 비밀을  알게 되였다.이를테면 모안영의 옷옷호주머니에는 언제나 한  녀성동지의 사진이 들어있었는데 모안영은 시간이 있을 때 마다 그 사진을 꺼내들고 보았으며 밤에 잠들기전에는 조심스레 사진을 꺼내서 머리맡에 놓고 잤다.       조남기는 모안영이 이미 결혼한줄 모르고 언젠가 문득 질문을 들이댔다.    《동무의 배우자요?》       그러자 모안영은 매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배우자가 아니라 안해요.》       모안영은 그 사진을 조남기한테 넘겨주었다.     《어떤가 보라구. 이쁘지?》   (좌로부터) 류사제 모안영       조남기는 이때야 비로소 모안영이 갓 결혼한 신랑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신부의 이름은 류사제였다.모안영은 매번 류사제의 말을 할 때면 늘 회색이 만면했다.그는 말했다.       《내가 떠나는 날 그는 입원했더랬소.조선에 온 다음 여직껏 그와 련락이 없었소. 지금 그의 정황이 어떤지도 모르고있소. 근심 되오!》       조남기가 말을 받았다.     《지원군사령부는 국내와 전보래왕이 빈번한데다 국내에서 찾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왜 기회를 찾아 물어보지 못하오?》       모안영이 정색하여 대답했다.     《이렇게 하면 특수화를 부리는것이고 규률을 위반하는것이요.그리고 부친이 알게 되면 한바탕 비판할거요.부친은  늘 이렇게 말했소.전쟁시기에 남녀간이 사랑에 빠지면 대사를 그르칠수 있다고 말이요.》       1950년 11월 24일은 조남기에게 있어서 잊을수 없는 하루였다.이날 아침 조남기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제시간에 일어났다. 그 전날 미군정찰기가 간단없이 대유동상공에서 선회했는데 지원군사령부 수장의 중시를 일으켰다.책임자동지는 아침식사를 한후 일부분 사람들은 산에 오르고 일부분 사람들은 방공굴에 들어가 사무를 보도록 지시룔 내렸다.조남기는 식사후에 물건을 수습하고 산에 올라가 공습을 피했다.           오전 10시좌우에 경보가 울렸다.미국비행기 4대가 구름층을 뚫고나오더니 대유동을 스쳐지나갔다.적기가 사라진후에도 경보는 여전히 해제되지 않았다.조남기는 의연히 산우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가 몇분후에 적기들이 갑작스레 되돌아왔는데 그중의 한대가 내리꽂히듯이 급강하하면서 산비탈에 있는 목표를 겨냥하여 수십개의 나팜탄을 투하하였다.       이때 누군가 세찬 블길속에서 뒹굴어나오면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어서,어서 와 사람을 구해주시오!》        부름소리를 들은 조남기의 뇌리속에는 무서운 생각이 번뜩 스쳐갔다.     《모안영이 보이지 않는다!혹시 그한테 일이 생긴건 아닐 가?》      조남기는 허둥지둥 산아래로 달려내려갔다.       그러나 모든것이 늦어진 뒤였다. 조남기와 동지들이 다그쳐 도착했을 때는 나팜탄이 이미 주변의 땅을 불바다로 만들어놓아 근본적으로 가까이 접근할수 없었다. 모안영과 작전처의 고서혼 참모가 불행하게 조난당했다.       지원군사령부의 동지들은 불을 끄고 재더미속에서 두구의 유해를 찾아냈다. 두 렬사의 유체는 불에 타서 근본적으로 신원을 알아낼수 없었다.후에 모안영의 손목시계가 쏘련제라는 이 하나의 단서로 비로소 모안영의 유체를 확인할수있 었다.       황혼무렵 지원군총지휘부의 전체 동지들은 팽덕회사령원의 인솔하에 모안영과 고서흔의 유체를 대유동의 산비탈에 안장하였다.   모안영의 무덤       팽덕회는 모안영의 무덤앞에서 점도록 묵도를 드리고나서 말했다.   《안영은 제일 처옴으로 지원군에 지원하여 참가한 사람입니다. 주석께서 나를 지원군사령원으로 금방 임명하자 안영이 찾아와서 전선에 보내달라고 요구했더랬습니다.얼마나 훌륭한 젊은이라구! 고작해야 스물몇살인데 한창 사업할 때입니다. 지금 그가 희생되였으니 내가 무슨 낯으로 주석께 여쭌단 말입니까!..》       조남기는 그때를 회억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모안영이 희생된후 우리는 너나없이 매우 비통해했습니다.나는 모안영과 조석으로 함께 지내던 나날을 생각하노라니 울음이 터져나왔습니다.그러나 감히 소리내여 울지 못했습니다. 왜냐 하면 팽덕회사령원께서 우리 뒤쪽 방공굴에  계시기에 그이가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그날 팽덕회사령원은 얼굴빛이 새까맣게 흐려서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랬습니다. 그낱 밤 팽덕회사령원의 거처에는 장밤 등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그이께서는 쉴새없이 오락가락하시였는데 이따금씩 장탄식을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이께서는 이렇게 장밤을 뜬눈으로 밝혔더랬습니다.》       1998년 6월 조남기는 중국정협대표단을 인솔하여 조선을 방문했을 때 특별히 지원군렬사릉원에 가서 모안영을 위해 성묘하였다.그는 모안영의 묘비앞에 오래도록 서있었다.       그는 조용히 모안영의 조각상을 어루만지며 하염없이 그리움의 눈물을 뿌리였다.     안내 이 글은 현재 조글로 위챗계정에서 련재중에 있습니다. 위챗으로 읽을 분은 아래 큐알코드를 스캔하시면 됩니다.  
“조남기 주석은 대성골안을 세차례나 다녀갔습니다” 편집/기자: [ 김영자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6-23 21:20:45 ] 클릭: [ ] -연변군분구 전임 부사령원, 안도대성농업종합개발합작사 리사장 김문원선생이 들려주는 원 전국 정협 부주석 조남기의 이야기 2007년 조남기 부주석(왼쪽 네번째 사람)이 안도현 석문진 경성촌 대성골안 김문원의 림지를 찾아주셨을 때 촌민들과 함께 남긴 사진./사진 김문원 제공 머리글: 연변군분구 전임 부사령원 김문원(67세)선생은 걸출한 민족사업 지도자이며 중국인민해방군 현대후근건설의 지도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9기 전국위원회 부주석이며 중앙군사위원회 전임 위원이며 중국인민해방군 전임 총후근부 부장, 군사과학원 전임 원장인 조남기동지가 서거한 부고를 접한후 6월 21일에 신문사를 찾아왔다. “가슴이 먹먹하고 애절하기 그지없어 도저히 이 내마음을 눅잦힐 수가 없습니다.조남기 주석(주:전국정협 부주석의 략칭)이 저희 대성골안에 친히 찾아오셔 저의 손을 잡고 저한테 하나하나 일러주시던 그때의 정경, 그때의 매 한마디 말씀이 어제런듯 생생히 떠오름니다. 이‘숙제생'의‘숙제'를 한번 더 보셔주실 줄 알았는데 ... ” 그때의 그 정경을 적으려고 필을 찾아들었다가 밤을 패고 신문사를 찾아온 사연을 말씀하는 김문원선생은 기실 손잡이뜨락또르 발동 수동쇄에 손목을 크게 다친 미열로 글쓰기에 무리한 상황이기도 했다. 김문원선생의 군복무기간은 37년, 그는 전사로부터 시작해 반장, 패장, 련장, 영장, 퇀장, 군분구 참모장, 부사령원 ‘계급장’까지 달았고 로산변경자위반격전, 산불끄기, 홍수에 훼손된 기초시설 건설 등 중대한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해 2등공, 3등공 수차, 심양군구뢰봉영예상장 2차 등 많은 영예를 수여받았으며 연변주당위 상무위원 등 직무를 지니기도 했던 분이다. 2004년에 부사령원직에서 은퇴한후 그는 여러 기업이나 단체조직의 특별 초빙을 마다하고 바로 귀향해 지금은 안도현 석문진 대성농업종합개발합작사 법인대표, 리사장이란‘농’자 ‘인솔자’로 되였다. 황산을 ‘림해’로,‘금산’으로 만들어가고 있으며 시골의 빈곤촌, 빈곤농민들을 치부에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는 길림성당위, 정부, 그리고 길림성군구로부터‘변강군중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모범’이란 영예를 수여받기도 했다. “제가 ‘제2전역'(은퇴후 귀향 창업을 말함)을 시작해 10여년간 초심을 잊지 않고 바른 길을 개척해가면서 농민들을 이끌어 저그마한 성적이라도 거두었다면 거기엔 조남기 주석의 교시와 고무, 배려, 관심이 고스란히 슴배여 있습니다.” “그이는 저의 훌륭한 지도자, 훌륭한 인도자(带路人), 훌륭한 스승입니다. 그이야말로 저를 오복투지(五腹投地)하게 한 분입니다.”김문원선생은 이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머금었다. “세여보니 조남기 주석을 만난 회수만 열 서너번은 족히 되더라구요. 그토록 자상하시고 상상할 수 없이 사려가 깊고 넓으며 멀리 내다 보시는 분임을 번번히 깊이 느꼈습니다. 후배, 후대들에 대한 기탁 또한 절절했습니다....” 조남기 주석과 김문원선생 두분의 인연은 김문원선생이 귀향한 후부터였는데 김문원선생이 들려주는 조남기 부주석의 이야기는 김문원선생의 말대로“로장군님이 로병사에 대한 인도와 기탁이였고 국가 고층간부와 기층간부, 인솔자(带头人)와의 이야기이며 궁극적으로는 그이가 마음속에 백성과 미래를 담은 이야기”이다. 조남기 부주석에 대한 김문원선생의 추억과 추모의 감정을 그대로 담기 위해 기자는 기사를 1인칭으로 정리해냈다.  (1)그이는 저더러 식수를 잘 하도록 고무했습니다 조남기: “너(나무)도 자라고 ‘나’도 자라서 나라의 재목으로 되자” 2007년 조남기 부주석(왼쪽 첫 사람)이 대성골안 김문원(왼쪽 네번째 사람)의 림지를 찾아주셨을 때 남긴 사진. /사진 김문원 제공 저는 제가 농민의 아들임을 잊은 적 없었고 고향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은퇴후 고향에 가서 제가 할수 있는 일을 하면서 고향건설에 적은 힘이라도 이바지하고 싶은 것이 저의 꿈이였습니다. 그래서 2004년 은퇴한후 저는 추호의 주저함도 없이 고향 안도현의 석문진 경성촌에 가서 황산에 재생림지가 섞인 대성골안 산(213.07헥타르)을 임대해 식수조림을 시작했지요. 조남기 주석은 연변 주요 책임자들과 식수조림을 의논하던 중 귀향해 식수조림을 한다는 저의 이야기를 듣고는 2007년 8월 15일에 대성 골안까지 찾아주셨습니다. 제가 부사령원으로 갓 발탁된 지난 세기 90년대 중기에 연변군분구를 시찰 오신 조남기 주석과 공식적으로 첫대면을 가진 후 10년만에 만나뵙게 된거죠. 촌마을에서 제가 식수하며 살고 있는 산꼭대기 외톨집까지 올라가자면 10여리되는 흙길을 지나야 했는데 그 전날 내린 큰비로 구간이 흙탕길로 되였지만 조남기 주석은 끝내 저와 함께 그 길을 동행했습니다. 전기도 안들어간 ,제가 살고 있는 외톨집까지 살펴보고 거기서 500메터 떨어진 림지에까지 기어이 걸어가시여 나무들을 살펴보시며 “자네, 식수할 생각을 잘했네. 장한 일일세. 당과 군에서 자네를 헛되이 양성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네. 시작한바 하고는 초심을 잊지 말고 견지하길 바라오.”하며 저를 치하하고 격려해주셨습니다. 나는 그때 그이의 말씀에서 강한 힘과 용기를 얻었으며 내가 한 선택에 대해 더한층 확신을 가지게 되였습니다. 2009년 8월 5일, 저는 그이가 재차 저희 골안을 찾아주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요. 그 때 저는 이미 5만여그루의 잣나무를 심었고 나무들은 무성해지고 있었습니다. ‘자네 참 큰 일 하고 있구만. 식수하는 자네는 자네가 군에서‘장군’으로 있을 때보다 못하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하네.”하면서 그이는 “식수조림은 지구에 리롭고 인류에 리로우며 국가에 리롭고 사회에 리로우며 개인에게도 리로운 장거요...”하며 식수공정에 내포된 풍부한 내용들을 저한테‘보충 강의'해주었습니다. “자네가 자네 주머니를 털어 식수한다는 건 사회에 대한 공헌으로서 그 의미가 크네.”라고 말하면서 그이는 저한테 3가지 일을 잘하라고 당부하시였습니다. 즉 개인적으로 옳바른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으로 고상한 지조를 키워야 하고 식수조림 지원자(志愿者)대오를 양성하여 공민들의 식수의식, 환경보호의식을 키우도록 영향주어야 하며 차세대를 잘 양성해야 한다는 당부였습니다. 그이는 저의 식수조림공사에 “너(나무)도 자라고‘나’도 자라서 나라의 재목으로 되자”는 주제를 제시하시면서 차세대 교육양성사업프로그램 가입의 의미까지 부여해주었습니다. 저는 조남기 주석의 가르침대로‘숙제'를 하나하나 진지하게 풀어가며 보람차게 ‘답'을 얻어내고 있습니다. 현재 저의 조림지에는 소학생으로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장군으로부터 현역군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각 분야 애심협회 인사들, 각급 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사업일군들과 학생들을 포함해 식수 지원자들이 해마다 200여명씩 다녀가고 있습니다. 저의 전우들을 비롯한 군인 지원자들이 찾아와 식수해‘전우림'을 세웠는가하면 주 및 안도현 그리고 연변대학 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와 손잡고 간고분투, 식수, 환경보호 등 관련 전통교육장소를 만들었으며 학생들과 함께‘희망림’림지와 기념비도 만들었습니다. 제가 학생들을 대상해 전통교육강의를 시작한지도 어언 5년이 되였습니다. 2009년에 오셨을 때 조남기 주석은 한키 넘게 자란 나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면서 “자네가 심은 나무가 숲을 이루어‘림해’로 된걸 보니 해변가에서 일망무제한 바다를 마주한듯 가슴이 후련해나고 기분이 유쾌해지네!”하며 저의 꽛꽛한 손을 잡아주시면서 “자넨 젊은 몸이 아니니 너무 힘에 부치게 일하지 말아야 하네. 집도 ,로임까지도 온갖 재산을 다 여기에 부어넣고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을텐데 말이요.”하고는 저의 집사람더러 저의 건강을 잘 돌봐달라고 신신당부하시는 것이였습니다. 조남기 주석은 2011년 8월 24일에 세번째로 저희 골안을 찾아주셨습니다. 그번에 그이는 “나무를 심어도 과학적으로 심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과학적으로 심을 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 관리하여 국가와 개인을 위해서라도 재부를 창출해내야 할세. 나무들이 다 재목이 되고 특히 잣나무는 열매가 많이 달리도록 연구해야 하네.”,“반드시 생태, 사회 , 경제 세가지 효과성을 창출해야 하네.” 그러면서 그이는 동행한 연변주림업과학연구원 현영남 원장에게 림업연구원에서 저를 과학적으로 잘 지도하고 부축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3년째 림업국과 림업과학연구원에서는 저를 적극 돕고 있습니다. 정책적 지지를 받는 과학실험기지까지 설립해 실험작업을 본격화했습니다. 2009년 조남기 부주석이 대성골안 림지를 돌아본 후 김문원 부부와 함께 남긴 사진. /사진 김문원 제공 지금 저의 림지에 심은 잣나무 14만주, 이깔 4만주, 홍피운삼 5만주는 잘 자라고 있습니다. 주석께서 다녀가신 후로부터 저는 저희 내외의 손을 꼭 잡아주시던 조남기 주석을 그리면서 매일이다싶이 잣나무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군하였습니다. 며칠전까지만해도 저는 갓 달린 잣송이 800여개를 바라보면서 “올해 주석께서 연변에 오시면 꼭 저 잣을 맛보시게 해야지!”라고 별렀었는데 그이가 이렇게 총망히 돌아가시다니... (2)그이는 저더러 농민들을 치부의 길로 이끌게 했습니다 조남기: “은‘3농'문제를 해결하고 농민들의 치부문제를 해결하며 공동히 치부해감에 있어서 가장 적절한 방식” 2011년 8월 24일, 조남기 주석이 세번째로 저희 골안을 찾았을 때였습니다. 당시 그이는 이미 심은 나무가 15만그루라는 회보를 듣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며 “이제는 완연히 수림이 우거진 록주로 변했네 .”라고 말하고는 저에게 한마디 부탁했습니다. “내 자네한테 새로운 숙제를 줘야겠네. 이제부터 식수도 하고 관리도 잘함과 동시에 자네 주변의 백성들을 이끌어 치부의 길을 개척해보게. 우리부터, 주변부터 이끌고 가느라면 빈곤에서 벗어나 치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가 ?” 그리고는 수행한 간부들에게 저의 사업을 지지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아무튼 저의 외톨집에 그후 전기가 들어왔고 등짐을 지고 걸어다니던 6리길도 세멘트포장도로로 변모되였습니다. 그 길은 경성촌의 전간 생산도로였기에 저 뿐만아니라 많은 촌민들도 혜택을 보게 되였습니다. 조남기 부주석께서 그날 김문원에게 새로운‘숙제 '를 포치하고나서 함께 남긴 사진. /사진 김문원 제공  조남기 주석이 다녀간 이튿날인 2011년 8월 25일, 저는 부름에 응해 조남기 주석의 거처로 찾아갔는데 그날 그이는 저에게 옹근 2시간 남짓한 “특강”을 해주셨습니다. 그이는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우리는 군인이고 당원이네. 아직도 소궁둥이 두드리며 농사를 짓던 시기가 아니네. 기계화작업은 보기 힘들고 점점 마을이 비여가고 로약자만 남아있는 걸 보면서 저 땅이 어떻게 개간된 땅인데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네.‘김사령원’이 그 골안이라도 이끌어 줄 수 있겠나? " 그리고 저의 군에서의 표현, 식수조림에서의 표현에 대해 긍정하고 치하하고나서 “나는 자네가 촌민들을 꼭 잘 살도록 이끌어 갈수 있을 거라 믿네 ! 결심이 있소?”하시는 것이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수장님이 주신 임무를 군인, 대장부의 명의로 꼭 잘 완수하겠습니다!”라고 답복했습니다. “‘3농'문제는 큰 문제요. 농민이 부유해지지 못하면 초요실현은 공담으로 될 수밖에 없는 거요. 어떻게 하면 농민들을 치부에로 이끌 것이가?” 그러면서 조남기 주석은 저에게〈중화인민공화국 농민전업합작사법〉에 대해 상세히 해석해주셨습니다. 그이는 “은 ‘3농'문제를 해결하고 농민들의 치부문제를 해결하며 공동히 치부해가는 데 있어서 가장 합리한 방식”이라며 저더러 돌아가 참답게 리해하는 한편 촌민들에게도 터득시켜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선전, 동원으로부터 시작하여 3개월 반만인 2011년 12월 13일, 우리는 사원대회를 열고 석문진대성농업종합개발합작사를 설립했습니다. 대회에서 합작사에 가입한 20여가구가 만장일치로 저를 추대해 저는 합작사의 법인대표에, 리사장직을 겸임하게 되였습니다. 지금은 합작사 가입호는 123가구, 골안 전체 농민을 커버했고 논 150헥타르를 포괄한 경작지가 가입되였으며 전촌의 10여가구 빈곤호도 다 합작사에 받아들인 상황입니다. 3만원, 만원...500원씩 사원들이 도합 10만원을 모아 등록한 합작사의 고정자산은 현재 400만원을 초과하였고 생산 전과정은 기계화를 실현했으며 3년전부터 해마다 주식의 수익금을 20%씩 배당하고 있습니다. 저희 합작사의 기초자금은 조남기 주석께서 조률해주셨습니다. 그이는 연길 거처에서 제가 합작사를 설립했다는 회보를 들으시고 기뻐하시면서 걱정도 앞세우셨습니다. 합작사 명색이 농업종합개발합작사였는데 2012년 8월, 벼이삭이 무르익어가고 있을 때까지만해도 우리한테는 가공공장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이 때문에 조남기 주석은 저를 연길에 두번 불렀습니다. 두번째로 갔을 때 조남기 주석은 50만원을 조률해낸 기쁜 소식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50만원이 토대가 되여 입쌀가공공장을 앉이는데 수요되는 130만원을 잇따라 해결해 공장 건물도 기계설비도 갖추어 그해로 공장을 가동했습니다. 합작사를 세울 때부터 “합작사 경영을 전통방법으로는 안될 거고 과학적으로 농사짓고 부가가치를 높혀야 하네.” 라고 하신 주석님의 말씀이 귀전에 맴돕니다. 지금 저희 합작사의 입쌀은 적어도 키로그람당 12원씩은 받습니다. 유기농입쌀, 록색입쌀증을 취득한 토대우에서 올해는 최신 량자기술 재배(1헥타르 실험)실험도 하고 있어 본촌, 나아가 주변농민들한테 과학적재배, 과학적 가공 경영 시범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무의 사령, 산의 사령’에 이어 북경, 상해, 광주, 청도...동에 번쩍, 서에 번쩍 판로 개척을 위해 뛰여다니는 저를 보고 이제는 “입쌀 사령”으로 변신했냐며 하시던 주석님의 우스개 말씀이 아직도 귀전에 들려오는듯 합니다.... 올해 설을 맞으며 조남기 주석께 전화를 드린 것이 그이와 제가 가진 마지막 통화가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주석님, 시름놓으십시요. 저는 주석님의 간곡한 부탁을 명기하여 빈곤호 부축에 더욱 진력하겠습니다. 주석님, 고이고이 잠드시오소서! 2018년 6월 21일 학생 김문원 올림. /길림신문 김영자기자
[추모글] 소중한 정신적 유산들 영원히 우리를 영향줄 것 原创: 길림신문 朝闻今日 2018.6.25   전임 전국정협 조남기 부주석님의 고향은 비록 길림성 영길현은 아니지만 그 곳에 이사와서 성장하셨으니 제2의 고향과 같은 고장이다.     영길현 차로하진에서 태여난 나는 어릴 때부터 웃어른들로부터 항상 차로하에서 성장한 걸출한 민족지도일군인 조남기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그 영향으로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벌써 열심히 공부하여 장차 조남기 장군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웅대한 포부와 리상도 갖고 있었다.     후에 중국인민대학에 입학하여 북경에 와서 공부하면서 조선족대학생들을 몹시 관심하고 사랑해주시는 조남기 장군님의 자애로움을 한몸으로 느꼈으며 ‘한고향’ 차로하 사람이라는 뉴대로 가까이에서 장군님의 총애를 받는 ‘행운’도 누렸다.       내가 알고 있는 조남기 장군은 자타가 공인하는 걸출한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위대한 리더이시다. 그 분은 항상 자애롭고 정직하시였다. 내 인상 속의 조남기 장군은 높은 직위에 있었지만 종래로 자기의 개인 리익을 위해 사심을 챙기려 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인 2000년도에  나를 비롯한 7명의 대학생 멤버들이 중국조선족네트워크를 구축하여 민족발전과 건전한 학원문화의 길을 모색하고저 조선족대학생모임(ksc)을 결성하려고 조남기 장군님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장군님은 참 좋은 생각이라면서 적극 지지해주었으며 열심히 잘해보라는 격려도 해주시였다.     지금도 이 모임은 계속 운영되고 있는데 그 때 조남기 장군님의 격려와 지지가 금후 내가 대학교를 졸업한 후 사회에 나와서도 열심히 사업을 추진할 수 있은 동력이 되였고 내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북경시에서 사업하면서 북경시의 투자유치를 위해 많은 일들을 했다. 지금까지 북경시의 경제발전을 위한 컨설팅과 투자유치에 창조해준 자금이 300억원을 넘는다. 이런 성과들을 인정받아 나는 북경시 조양구 정협위원과 북경시 정협위원에까지 당선됐다.    내가 북경시 조양구의 정협위원이 되였을 때에도 조남기 장군께서는 내 어깨를 다독여주면서 사회와 민족을 위한 책임을 다할 것과 사업에서 멀리 내다보고 열심히 잘하라는 금쪽 같은 고무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현재 나는 아직 사업에서 성공했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는  조남기 장군님의 위대한 민족애와 인민군중을 위해 일하는 실사구시적이고 견정불이한 사업작풍, 항상 타인을 관심하고 자애로우며 정직하신 등 여러가지 긍정적인 영향들이 부단히 나를 고무하고 격려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나는 길림성과 연변의 경제발전을 위한 투자유치사업을 목표로 우리 민족의 발전을  위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고 있으며 이미 구체적인 사업들은 적극적인 추진 중에 있다.     비록  조남기 부주석님께서는 이미 서거하셨지만 그분이 남겨주신 많은 정신적인 유산들은 소중한 재부로 남아 영원히 우리들의 앞길을 찬란히 밝혀줄 것이다. 박철-북경세박투자그룹 리사장 
10    [추모글] 과학연구일군들에게 보내준 따뜻한 관심 (김록송) 댓글:  조회:225  추천:0  2018-06-26
[추모글] 과학연구일군들에게 보내준 따뜻한 관심 原创: 길림신문 朝闻今日 昨天2018.6.25     내가 처음 조남기동지를 만났던 때는 1979년 가을이였다. 그 때 나는 중국과학원 생물물리연구소와 중국과학원 유관 지도국의 동의를 받고 조수 두명을 거느린 채 도문에서 석달간의 공동연구를 진행하였다.     연구내용은 초고속원심기 회전자(로터)의 회전폭발실험(초고속원심기의 안전성을 확보하는 실험)이였는데 중국에서 처음 하는 실험이였다. 이 실험의 성과는 공동으로 소유함과 동시에 또 전문적으로 도문시원심기공장에서 생산 판매할 중국의 첫 고속원심기를 시험 제작하는 일이였다.     나는 연구소로부터 연구에 필요한 특수강철재료를 가지고 도문에 갔고 공장에서는 기계가공만 하면 되는 상황이였다. 기실 우리 연구소 측의 요구는 연구성과의 공유일 뿐이지 어떤 경제상의 요구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일도 공장과 도문시 해당 부문 지도일군들의 의견이 서로 엇갈리다 보니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나누어져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당시 연변의 주요 지도일군이였던 조남기동지에게까지  반영되였다. 하루는 조남기동지가 내가 일하는 도문의 원심기공장에 직접 찾아오시여 조사연구를 진행하시였다.     조남기동지는 기름(机油)기 가득한 내 손도 꺼리지 않고 덥석 잡아주시면서 북경 중국과학원의 최첨단 연구를 위해 고향마을(도문은 나의 출생지)까지 찾아온 나의 노력에 감동하신다면서 무슨 곤난이 있으면 직접 찾으라고까지 말씀하시였다. 조남기동지는 또 연변주에서는 나의 사업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 후 사업과정에서 도문시에서 곤난이 있으면 주저없이 주정부를 찾아가군 했는데 무슨 일이든 주에서 해결할 만한 일은 인차 해결해주었다. 나의 동창생 여러명도 연변의 타지방으로부터 도문공장에 전근해왔다.     조남기동지가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변강의 작은 도시인 도문에 중국에서 유명한 원심기공장이 나타나게 되였다. 그 때의 성과를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서 인차 국가 항목으로 비준하고 큰 자금적 지지까지 주었다. 이로써 우리는 중국의 고속원심기 설계제작에서 당시 국제 보편수준에 도달하는 전부의 관건적 기술을 해결하게 되였다.     조남기동지의 과학연구사업일군들을 위한 따뜻한 관심과 직접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이런 성과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였을 것이다. 중국과학원 연구원 김록송 -본문은 작자가 조남기동지를 추모하면서 자신의 잊지 못할 한단락 추억을 정리한 내용임-
[추모글] 조남기 부주석은 영원한 우리들의 방향과 길잡이 原创: 길림신문 朝闻今日 20182018.6.25   전임 전국정협 조남기 부주석은 중국 여러 민족 인민들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우리 조선족민족의 자랑이기도 하다.    당과 국가의 지도일군으로서 조남기 부주석의 경력은 항일전쟁 시절부터 시작해 항미원조에 이르기까지 전쟁년대의 뛰여난 공헌은 물론 전쟁 후에는 연변주 및 길림성의 간부로 사업하였고 후에는 중앙군사위원회, 전국정협 등 국가의 중요한 요직에까지 있으면서 일생을 당과 국가, 인민군중을 위해 마멸할 수 없는 크나큰 기여를 하신분이시다.     조남기 부주석은 우리 민족의 제반 사업에 대해서도 크나큰 관심을 기울이시였다. 80년대초, 조남기 부주석께서 중앙민족대학에 오셔서 여러 민족 학생들을 만나주셨는데 지도간부였지만 틀이 없고 매우 소박하셨다.     나는 그 때 처음 조남기 부주석님을 뵙게 되였는데 당시 중앙민족대학의 77년급 학생회 간부였던 나는 조주석님과 긴밀히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많은 영향을 받았다.    조남기 부주석님은 조선족학생들을 적극 격려하시였는데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된 후 제1진으로 수도 북경에까지 와서 공부하게 된 우리 대학생들이 결코 쉽게 오지 않은 대학공부의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학습을 잘할 것을 당부하시고 격려하시였다. 또 모든 학생들과 일일이 사진까지  찍어주셨는데  나 역시 학생시절에 조남기 부주석님과 함께 찍은 사진까지 가지고 있다.     후에 대학을 졸업한 후 사업의 수요로 북경시에서 사업하면서 또 조남기 부주석님의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통주에서 사업할 때 통주에까지 오셔서 격려를 받은 일까지 있어 너무 감동된다.     북경시에서는 해마다 전통조선족운동회와 신년련환회와 같은 조선족들의 모임이 펼쳐지군 하는데 조남기 부주석님은 북경에 계시기만 하면 이러한 모임에 꼭 참석해 우리들을 고무격려해주시군 했다. 국가급 지도일군으로 되신 후에도 사업이 다망하신 가운데서도 될수록이면 민족모임에 참석하시여 우리들을 격려해주시였다.     가장 잊지 못할 일은 조남기 부주석님의 80세 생신 때의 일이다. 그 때 조남기부석님께서는 자신의 견정한 신념과 견인분발한 노력으로 일관된 평범하지 않은 경력을 말씀해주시였다.    아울러 그 자리에 모인 우리들에게 요구와 희망사항을 말씀하셨는데 모두들 깊은 감명과 고무를 받았으며 조남기 부주석의 넓은 흉금과 숭고하고 초월한 사상경지를 깊이 체득하였다.     조남기 부주석께서는 한평생을 우리 당과 국가의 부흥과 인민군중들의 발전을 위해 탁월한 기여를 하셨다. 특히 우리는 우리 조선족에게 이처럼 위대하고 존망이 가는 당과 국가의 지도일군이 계셨다는 것에 무한한 영광과 자랑, 그리고 긍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제반 사업에서 조남기 부주석의 당과 국가, 인민군중을 위해 일생을 기여하신 우량한 전통과 고상한 풍격을 따라배워야 하며 조선민족의 번영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조남기 부주석님은 영원한 우리들의 방향이고 길잡이이시다.    김성화-국가민족사무위원회 전임 사장
8    [추모글]군중을 근본으로, 사업을 첫자리에 (박복선) 댓글:  조회:276  추천:0  2018-06-26
[추모글]군중을 근본으로, 사업을 첫자리에 편집/기자: [ 안상근,김성걸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6-25 16:28:55 ] 클릭: [ ] 조남기 부주석과 《중국민족》조문편집실 전임 주필 박복선의 기념사진 얼마전 위챗을 통해 전임 전국정협 조남기 부주석께서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비록 지인을 통해 조남기 부주석님이 이젠 공식석상에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래도 너무 갑자기 돌아간 것 같은 아쉬움과 허망함이 못 견디게 가슴을 파고든다. 우리 민족의 걸출하고 위대한 위인이 서거했다는 데 대한 비통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사실 조남기 부주석님과의 첫인상은 지난 세기 80년대 초반 쯤으로 생각된다. 연변에서 자치주 당위서기 사업을 할 때 쯤으로 생각되는데 어느 한번 연길에서 조남기 서기의 연설을 감명깊게 들은 적이 있다. 당시 조남기 서기는 요점을 기록한듯한 작은 메모지 한장만을 들고도 한점 흐트러짐이 없이 중요한 연설을 하셨는데 나는 놀라움과 함께 대단한 지도일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남기 서기는 사업에서 항상 실사구시적이였으며 군중을 근본으로 하는 사업을 가장 첫자리에 놓았다. 어느 한번 연변에서 있은 한 행사 도중 비가 내렸는데 조남기 서기가 비를 맞으면서 행사에 참가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때 나는 조남기 서기가 조금도 특수화를 부리지 않고 언제나 우리 군중들과 함께 숨쉬고 있다는 따뜻한 난류와 함께 진한 감동을 받았다. 사실 조남기동지는 연변과 길림성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줄곧 높은 직위에서 사업하셨지만 특수화를 부리지 않고 언제나 인민군중과 함께 고락을 나눈 훌륭한 지도자였다. 조남기 부주석은 언제나 인자하고 선량하면서도 지도일군의 틀거지가 없어서 만나는 사람들을 편하게 대해주었다. 북경에서 있은 많은 조선족 모임에서 보아도 조남기 부주석은 항상 로동지들을 존중하고 공경하였으며 수하사람들을 아끼고 격려해주었다. 덕망이 높은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나는 사업차 조남기 부주석의 저택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국가급 큰 지도자의 호화로운 저택이라는 느낌보다는 근검하고 소박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내가 사업했던 《민족단결》잡지는 지난 1989년도에 창간되였는데 조남기 부주석께서는 잡지 창간 10돐을 맞으면서 흔쾌히 제사까지 써주시였으며 금후 《민족단결》잡지를 더 잘 꾸리여 민족문화 발전에 적극 기여하라고 격려해주시였다. 어느 한번은 연길에서 동북군정대학 교우회가 소집되였는데 그 때 마침 룡정에 오신 조남기 부주석을 교우회에 모시는 일을 내가 맡게 되였다. 긴가민가하면서 달려간 일개 평범한 기자일 뿐인 나에게 조남기 부주석께서는 흔쾌히 참가를 수락하시여 나는 또 한번 몹시 감동되였던 적이 있다. 1989년도에 조선문 《민족단결》잡지가 창간되여서부터 2004년 퇴직하기까지 나는 항상 기자신분으로 북경에서 조남기 부주석 관련 행사들이 있기만 하면 거의다 참가했다. 물론 조남기 부주석님도 북경의 조선족 행사들에 많이 참가하시고 빛내주시였다. 행사들을 취재하면서 많은 사진기록들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중에는 조남기 부주석님의 진귀한 력사적 사진들도 적잖게 들어있어 자부심을 느낀다. 조남기 부주석님의 생전에는 찍은 사진들을 현상해드리기라도 하면 매우 기뻐하셨지만 이제는 더는 조남기 부주석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이는 결코 나 한사람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걸출한 지도일군인 조남기 부주석님을 보내는 우리 모든 사람들의 똑같은 아픔이고 슬픔일 것이다. 조남기 서기는 일찍 실사구시적이고 창의적인 사업원칙과 군중을 근본으로, 사업을 가장 첫자리에 놓는 것을 평생의 추구로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우리들에게 깊은 감명과 계시를 주고 있다.
7    [추모글]아버지의 마지막길 '아리랑'과 함께 하시길 (조건) 댓글:  조회:263  추천:0  2018-06-26
[추모글]아버지의 마지막길 〈아리랑〉과 함께 하시길 편집/기자: [ 안상근 김성걸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6-25 17:00:26 ] 클릭: [ ] 6월 22일, 정협 전임 부주석 조남기의 저택에서 본사기자의 단독취재를 접수하고 있는 조남기 부주석의 장남 조건(가운데) 기실 어떠한 어휘나 문자를 사용하든지 아버지의 일생을 형용한다는 것은 빈약한 표현일 수 밖에 없다. 필경 아버지는 매 하나의 작은 일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위대하고 소박하며 선량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아버지는 종래로 자기 자신을 권력을 행사하는 지도간부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생각에 아버지는 매우 인간적이였다. 아버지는 직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수하일군들이거나 군중, 지어 어려움을 겪었거나 지금 어려움 속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모두 따뜻이 돕고 부축해주기를 즐겨하셨다. 며칠 전 아버지의 서거 소식을 듣고 조문하러 달려온 한 근무병이 아버지에 대한 감명적인 이야기를 해서 감동되였다. 과거 근무병의 아버지가 아들 보러 찾아왔는데 이를 우연히 알게 된 부친께서는 근무병의 아버지를 집에까지 초대해서 허물없이 함께 식사를 나누었다는 평범하지만 감명깊은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얼마나 큰 직위에 있었는가 하는 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의 살아생전 당과 국가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과 기여,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위대하고 선량하고 소박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넓은 흉금과 고상하고 정확한 삶의 신조가 우리 자식들에게 깊은 감명을 남겨준다. 아버지가 서거한 후 우리는 집에 령전을 설치하지 않았다. 북경의 날씨가 요즘 35도를 웃도는 고온날씨이고 조문객들이 6월 25일 있게 될 장례식장에까지 두번이나 걸음을 걸어야 할 불편과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이다. 아버지가 평소에도 소박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깊으신 분이였기에 이런 우리의 마음을 리해하고 찬성하실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아버지를 보내는 마지막 날인 25일, 장례식장에서 애절하고 슬픈 추도곡을 결코 마지막까지 틀지 않을 것이다. 추도회가 끝나고 마지막 남은 가족 고별식 때는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슬픈 애도곡이 아닌 우리 민족의 정과 얼이 스민 전통민요〈아리랑〉을 틀어드릴 것이다. 아버지는 생전에 우리 민족의 노래를 그토록 즐겨하셨기 때문이다. /조건(조남기 전임 정협 부주석의 장남)
[추모글]조남기 부주석의 민족 위한 정신 계속 이어져나가야 편집/기자: [ 안상근,김성걸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6-25 17:09:22 ] 클릭: [ ] 중국조선족사학회 명예 회장, 중앙민족대학교 교수 황유복 내가 조남기 장군을 처음 만난 것은 그 분이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당서기로 계실 때였다. 회의하러 북경에 오셨다가 자치주 주장의 소개로 인연이 되여 만났다. 당시 조남기 서기는 북경에서 개인적으로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을 나에게 이야기하면서 련락해줄 것을 부탁해 그 분을 모시고 안내해드렸다. 그 당시 조남기 서기께서는 개인적으로 나를 상당히 믿어주었는데 북경에 회의나 행사가 있어 공식적인 일정이 끝나면 꼭 만나주군 했다. 조남기 서기와 만나면서 느낀 것이 바로 그 분은 상당히 강직하며 하실 말씀이 있으면 반드시 직언을 하고 또 매우 정직한 분이라는 것이였다. 소수민족 출신으로서 높은 직위에 올라온 후에는 자기 민족과 접촉하면 좀 불리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 조남기 부주석은 그런 개념이 전혀 없는 분이셨다. 오히려 조남기 부주석은 조선족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상당히 관심을 기울이고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 상당한 관심과 지지를 지속적으로 보내주신 분이였다. 조선족사회가 중한수교 이후 큰 변화를 겪으면서 우리는 지난 1993년도부터 시작하여 중국조선족의 발전을 위한 학술심포지엄을 해마다 펼치게 되였다. 제3회 학술심포지엄에서 우리는 도시에서 조선족 언어가 날이 갈수록 단절되는 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주제로 많은 학자들과 동북3성의 민족사무위원회 간부들을 모시고 북경에서 학술심포지엄을 진행했다. 그 때 이 학술심포지엄에 대해 조남기 부주석에게 회보했더니 다망한 사업 때문에 회의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친히 편지를 써서 비서에게 인편으로 보내왔다. 그 편지의 내용은 《민족단결》잡지에도 실렸는데 편지에서 조남기 부주석은 우리가 의제로 회의에 내놓은 민족교육 과제에 대해 상당히 지지했다. 그 때 그 편지를 회의에서 읽었는데 많은 참석자들이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렇게 높은 직위에 있으면서도 민족의 발전을 계속 진지하게 관심하고 지지해준다는 자체가 너무 고마운 일이였기 때문이다. 그 후부터 조남기 부주석께서는 나 보고 우리의 회의가 있을 때마다 사전에 알려달라고 했다. 회의가 있을 때면 회의 참석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시고 오실 때마다 꼭 자신이 준비한 술 두병을 가지고 와서 회의 참석자들에게 직접 일일이 부어주면서 따뜻이 마음을 나누었다. 만약 회의 때 외지에 나가계시거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참석하지 못하게 되면 꼭 축사를 써보내주시였다. 조남기 부주석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우리가 하는 회의는 항상 높은 수준의 회의로 될 수 있었다. 전국정협 부주석으로 되신 후에도 조남기 부주석께서는 우리들의 회의를 지속적으로 관심하고 지지해주시였다. 우리들이 어떤 어려움과 곤난이 있어 찾아가면 꼭 해결해주군 하여 우리들에게는 상당히 큰 힘이 되여주었다. 조남기 부주석의 이 같은 다함없는 관심과 지지가 있었기에 우리의 학술회의가 20여차례나 지속적으로 이어져나가면서 중국조선족 발전을 위한 높은 수준의 심포지엄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되였다. 조남기 부주석은 기타 조선족 지역들에서 부탁이 와도 외면하지 않았다. 길림시의 알라디조선족촌에서 민속촌을 만들면서 간판글을 부탁할 때도 조남기 부주석은 전혀 주저가 없이 친필제사를 통쾌하게 써주시였다. 알라디촌 뿐만 아니라 기타 조선족 지역들에서 무슨 부탁이 있어 조남기 부주석에게 그 부탁을 드리면 단 한번도 거절하지 않으셨다. 우리 민족과 민족사회에 대한 큰 관심과 사랑이 없다면 결코 이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하는 회의에 대해서도 조남기 부주석께서는 번마다 구체적인 건의들을 제기해주시군 했다. 특히 당시 한국문학연구소 소장의 신분이였던 내가 조선족 발전을 위한 심포지엄을 잘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조선족을 연구하는 학술단체를 만들 것을 건의하였는데 국가1급 협회인 중국조선족사학회를 설립하기까지 지대한 관심과 지지를 주시였다. 2007년 4월, 중국조선족사학회가 오랜 노력 끝에 설립되면서 제일 먼저 조남기 부주석을 찾아갔는데 당시 전국정협 부주석의 높은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조선족사학회의 명예회장 직을 기꺼이 수락해주시였다. 2008년 4월에 설립대회를 하였는데 조남기 부주석께서 직접 참가하시여 중국조선족력사에 대해 40분이 넘는 연설을 하시였다. 조남기 부주석께서는 조선족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완전히 개인의 리해득실 같은 것을 따지지 않았다. 또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에 대해 많은 관심을 하고 중국 전체 소수민족정책은 물론 민족사회의 발전에 대해 상당히 지지를 하신 분이시다. 내가 조남기 부주석을 가장 흠모하는 것은 그 분이 높은 직위에 계셨지만 소수민족과 조선족의 발전에 그렇게 큰 관심을 돌리셨다는 것과 직접적으로 지지하셨다는 것인데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남기 부주석께서 생전에 나한테 큰 믿음과 신임을 주었던 것도 결국은 내가 조선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러한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보건대는 우리 조선족사회가 앞으로 계속 발전해나가려면 조남기 부주석의 언제 어디서나 사심없이 항상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사업을 지지하는 고상한 민족정신이 계속 발양되고 이어져나가야 할 것이라고 본다. 나 역시 조남기 부주석에게서 이러한 정신을 배웠으며 계속적으로 우리 민족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열심히 뛰고 싶다.  
5    [추모글] 赵南起将军,无限怀念您!(崔龙浩) 댓글:  조회:585  추천:0  2018-06-26
赵南起将军,无限怀念您!    崔龙浩         一颗灿烂、耀眼的星星陨落了,痛哉,哀哉!       赵南起将军,您原任全国政协副主席,是我们国家的领导人之一;您曾任中央军委委员、总后部长,是我军现代后勤建设的领导者;是我国杰出的民族工作领导人。您的一生充满传奇,建树光辉业绩,在漫长革命生涯中,为中华民族散射、耗尽了光和热,如今乘鹤西去,给我们留下了无尽的思念!      我是一个平凡的人,却有幸与您相识、交往30多年,长期受到到您的亲切关怀和教诲。此情此景已镌刻在我脑海里,永志不忘。     1982年4月我做为主要翻译随邓小平、胡耀邦访朝归来,局领导便告知由于我的“民族属性”,不便继续在中联部工作。我突然遭到一记闷棍,心情很迷茫。恰在这时闻得您出差来京,由中央党校崔龙水教授引荐,我到宾馆进行第一次拜访。您时任中央委员、中共吉林省委书记。对我而言,重要的您是朝鲜族的领袖人物,可以向您倾诉遭受的冤屈!初次见面,您平易近人,如同慈祥的兄长,和蔼可亲,善气迎人。您认真倾听我的诉说,明确指出这是违背民族平等政策的,不应如此对待少数民族的外事干部,但现在还不能改变这些社会偏见,还不如面对现实相应改变人生方向。你有能力,建议去国家民委工作,在那里发展进步可能更快些。第一次聆听您的谈话,那样的入理、中肯、透心,使我清新起来。您的导向,使我改变了工作轨迹。我采纳了您的建议,调入国家民委从事民族理论政策研究,开始了新的出发。     1989年秋,我奉国家民委党组委派,去开发地处西单商业闹市区寸金之地,此处开发价值极高。我引进延边一企业合作经营韩餐一条街,利用银行贷款,创办“民族大世界”市场。初具规模后,诚恳邀请您前来视察、指导。您利用星期天,携夫人来了,这真是莫大的支持。您听取我的相关介绍和规划,轻松自在、随意察看,边看边议,即席发表指导性意见。您认为这是块风水宝地,“民族大世界”会给民委赚大钱的。您嘱我好好经营,有所作为,并表示支持。此后民族大世界建成了,我却被调离了。此地后来按的您的预测发展,“民族大世界”果然赚足了很多钱,但也不幸,这里也养肥了大贪官。     2000年以后,我在中国西部发展促进会任法人代表、秘书长,主持日常工作。该会由退休书记、部长领导,网络一批部级干部,以民间社团身份,配合政府促进西部开发。我们创办《西部发展论坛》,几乎每年举办一次,为西部开发建言献策。您时任全国政协副主席,热情支持我们的论坛,有一次还莅临指导。我听说您亲自主持调研防止荒漠化课题,向中央提出重要报告。中央非常认可并采纳您的建议,大幅提高了治理经费 ,从此我国防止荒漠化事业进入了新的阶段。中国沙化、荒漠化基本都在西部,我会领导非常重视生态环境建设。我促进会与内蒙自治区合作,在呼和浩特召开论坛,我邀请您再次莅临支持指导。当时您有要事不能亲临,特拿出您的调研报告作为论坛的论文。在会上印发了,这是一篇政策性的论文,广受与会者的欢迎、重视,它对开好这次论坛具有指导意义。     李红光烈士是毛主席亲自点名的东北抗日三大英雄之一,他最早在磐石创建抗日游击队,开展武装斗争,是杨靖宇将军的生死之交。为纪念、继承、发扬他的革命精神,把磐石朝中更名为“红光中学”,拟在操场上塑李红光像,希望德高望重的中央领导题词。为此,该校校长来京要我帮助,磐石是我的家乡,朝中是我的母校,义不容辞。我认为彭真委员长德高望重,解放战争时担任过中央东北局书记,对朝鲜族很了解,请他题写合适。此事我先报告民委领导,按程序上报的同时,到总后向您提交致彭老的请示报告,恳请您支持并促成。我知道您非常重视教育,尤其是民族教育。您认为磐石朝中采取实际步骤,继承革命传统,弘扬英雄精神,高举爱国主义旗子,应予鼓励、支持。此后不久,我接到了彭老苍劲有力的两幅题词。母校于1988年9月举行简朴典礼,正式挂出彭老题写的“红光中学”校牌,题写“民族英雄李红光将军”的塑像揭幕,令母校焕然一新。由于有了您的亲切关心和鼎力支持,红光中学才成为定点的革命传统教育基地。      2012年喜迎您80华诞,我们组织小范围的家庭式祝寿聚会,洋溢着融融情谊。酒过几巡,空军原副司令员李永泰将军祝酒,他动情地说,当时空军的基础设施欠账很多,问题不少,赵部长对此特别关心,经过视察研讨,制定改革方案,积极实施,终于改变面貌,焕然一新。据说您任总后部长期间,勇于改革,敢于担当,领导、推进我军的现代后勤建设,我们得知都肃然起敬。崔雄济(崔健之父)和我情同手足,共同深受您的厚爱。我们非常珍视这份真挚情谊,由衷地祝您健康长寿,像不老松长青。用茅台酒祝贺时,您老人家说我不会喝酒,享受不到其中的乐趣,可惜呀,然后拍拍我背,举杯一饮而尽。一举一动暖人心,关爱之情溢于言表。     2000年4月,时任全国政协副主席的您率政协代表团访问韩国,这本是正常的友好访问,却因您的韩国血统而引起韩国朝野的轰动,韩国政府以最高礼遇接待,您的家乡百姓则倾城出动迎接在中国功成名遂的家乡赤字。据说,卢武铉总统会见您时提到“双重国籍"问题,可能是不了解朝鲜族群体形成的历史,及中国的相关政策。您从历史和现实的结合上,介绍了中国朝鲜族的形成历史,特别强调:一、新中国成立时进行土地改革,只有中国公民才能分得土地。留在中国的朝鲜人群体,绝大多数是农民,他们入籍才有土地;二、朝鲜族重视教育,只有成为中国公民才能获得政府支持,获得教育经费;三、朝鲜族对中国革命的贡献很大,已有几万村级以上干部在各级政府、团体工作。他的权威性的阐述,使卢总统了解了真相,认识到提出“双重国籍”不合适。从此违背中国政策的、损害朝鲜族中国公民地位的“双重国籍”论,在韩国消声匿迹,韩国媒体也不再进行炒作了。这是您发挥的无可替代的独特作用。您是促进中华民族大团结的、捍卫朝鲜族权益的杰出代表。如今您弃我们而去,有谁能代替您的特殊作用呢?失落感油然而生。     您胸怀坦荡,磊落光明,克己奉公。您对社会、军内的贪腐行为深恶痛绝,自己则守身如玉、廉洁奉公。对我个人而言,您是我的良师益友,是导师也是挚友。在那么多的接触、交往中,只有您的单方付出,而无我的相应回报。我从没想过给您什么回报,也没送过什么礼物或纪念品。“君子之交淡如水”。您是我们永远的楷模,您的崇高精神、豁达品格、高尚情操,是我们的精神财富,将永远激励我们向前。     安息吧,将军!无限怀念您!  
赵南起同志遗体在京火化 习近平等到八宝山革命公墓送别    조남기동지 병세 위중 기간과 서거 후 습근평 리극강 률전서 왕양 왕호녕 조락제 한정 왕기산 강택민 호금도 등 동지들 병원을 찾아 문안 또는 여러가지 형식으로 조남기동지 서거에 침통한 애도를 표시하고 그 가족들에게 따뜻한 문안 표시    습근평 리극강 률전서 왕양 왕호녕 조락제 한정 왕기산 호금도 등 팔보산혁명릉원에 가 송별   [북경=신화통신]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며 오랜 시련을 겪은 충실한 공산주의전사이며 무산계급 혁명가이며 걸출한 민족사업 지도자이며 우리 군 현대 후근 건설의 지도자이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9기 전국위원회 부주석이며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전임 위원이며 중국인민해방군 총후근부 전임 부장이며 군사과학원 전임 원장인 조남기동지의 유체가 25일, 북경 팔보산혁명릉원에서 화장되였다.    조남기동지는 병환으로 2018년 6월 17일 23시 12분 북경에서 서거, 향년 91세였다.   조남기동지 병세가 위중한 기간과 서거 후 습근평, 리극강, 률전서, 왕양, 왕호녕, 조락제, 한정, 왕기산, 강택민, 호금도 등 동지들이 병원을 찾아 문안하거나 또는 여러가지 형식으로 조남기동지 서거에 침통한 애도를 표시하고 그 가족들에게 따뜻한 문안을 전했다.    25일 오전, 팔보산혁명릉원 강당은 장엄하고도 숭엄했으며 추도곡이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중앙대청 웃쪽에는 ‘조남기동지를 침통하게 추모한다’는 검은 바탕에 흰 글발이 새겨진 현수막이 걸려있고 현수막 아래쪽에는 조남기동지의 유상이 모셔져있었다. 조남기동지의 유체는 생화 속에 모셔져있었고 붉은색 중국공산당 당기가 덮여있었다.    오전 9시경, 습근평, 리극강, 률전서, 왕양, 왕호녕, 조락제, 한정, 왕기산, 호금도 등이 추도곡 속에서 조남기동지의 유체 앞에 숙연히 기립해 묵도하고 조남기동지의 유체에 허리 굽혀 세번 절을 하고 나서 조남기동지의 가족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문안을 표시했다.    당, 국가, 군대의 해당 지도자동지들이 영결식에 참석하거나 여러가지 방식으로 애도를 표시했다. 중앙 및 국가기관 해당 부문 책임자동지, 조남기동지 생전의 벗들과 고향의 대표들도 영결식에 참석했다./길림신문 번역    
3    조남기 동지 서거 댓글:  조회:233  추천:0  2018-06-26
赵南起同志逝世   신화사 북경 6월 18일 보도: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며 장기간의 고험을 겪은 충성스러운 공산주의전사이며 무산계급 혁명가, 걸출한 민족사업지도자이며 우리 군대의 현대후근건설의 령도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9기전국위원회 부주석,중화인민공화국 군사위원회 원 위원,중국인민해방군 원 총후근부 부장이며 원 군사과학원 원장인 조남기 동지가 병치료에 효험을 보지 못하고 병으로 2018년 6월 17일 23시 12분 북경에서 향년 91세로 서거했다.      조남기동지는 1945년 12월 혁명사업에 참가하여 1947년 2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88년 9월 상장계급을 수여받았다.   新华社北京6月18日电 中国共产党的优秀党员,久经考验的忠诚的共产主义战士,无产阶级革命家,杰出的民族工作领导人,我军现代后勤建设的领导者,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第九届全国委员会副主席,中华人民共和国中央军事委员会原委员,中国人民解放军原总后勤部部长,原军事科学院院长赵南起同志,因病医治无效,于2018年6月17日23时12分在北京逝世,享年91岁。     赵南起同志1945年12月参加革命工作,1947年2月加入中国共产党,1988年9月被授予上将军衔。
2    赵南起同志生平 댓글:  조회:89  추천:0  2018-06-26
赵南起同志生平   新华社北京6月25日电 赵南起同志生平     中国共产党的优秀党员,久经考验的忠诚的共产主义战士,无产阶级革命家,杰出的民族工作领导人,我军现代后勤建设的领导者,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第九届全国委员会副主席,中华人民共和国中央军事委员会原委员,中国人民解放军原总后勤部部长,原军事科学院院长赵南起同志,因病医治无效,于2018年6月17日23时12分在北京逝世,享年91岁。     赵南起同志,朝鲜族,1927年4月20日出生,吉林永吉人。1945年9月,在吉林市参加解放同盟,参与做好联络工作,并发动群众给部队捐献粮食。同年12月起,先后任东北军政大学吉林分校学员、班长,吉林省民运工作队队员。1947年2月加入中国共产党。同年12月起,先后任中共吉林省延边地委组织部文书、干事。1948年3月起,先后任中共吉林省延边地委总务科副科长、地委秘书,中共吉林省委办公室研究员。基层斗争和革命工作的磨练与经验积累,使他迅速成长为一名优秀的青年干部。     1950年10月,赵南起同志任中国人民志愿军司令部情报处、作战处参谋,随首批志愿军部队赴朝参战,承担志愿军首长的朝鲜语翻译工作。1952年5月起,先后任志愿军后勤司令部参谋处参谋、运输科副科长、计划科副科长,其间于1955年至1957年在解放军后勤学院指挥系学习并任后勤学院教员。1957年11月任志愿军后勤司令部组织计划处计划科科长。在朝鲜战场上,他出生入死,经历了血与火的洗礼,圆满完成各项任务。他担负汽车运输计划与总调度工作,认真负责,勇挑重担,为志愿军后方计划运输体系的形成作出了重要贡献。特别是在反“绞杀战”时期,他提出了许多意见建议,为建立起“打不断、炸不烂、冲不垮”的钢铁运输线,夺取反“绞杀战”的胜利,保障前线作战和官兵生活的物资供应发挥了重要作用。1958年10月,他与最后一批志愿军部队撤离朝鲜,受到毛泽东主席的亲切接见。     1959年起,赵南起同志先后任吉林省延边军分区政治部副主任、主任,吉林省延边军分区副政治委员、第二政治委员。他积极探索民兵建设的特点规律,注重树立典型,以点带面,使军分区民兵工作成为吉林省军区和沈阳军区的先进典型。1963年10月参加吉林省社会主义教育运动工作,担任珲春县敬信公社社会主义教育运动工作队书记,其间组织群众迁居位于图们江入海口处的防川。“文化大革命”开始后,他为维护延边地区的稳定和进行工农业生产做了大量工作,作出了贡献。1968年起受到冲击。1973年4月恢复工作后,任吉林省通化军分区政治委员。     1977年4月,赵南起同志任吉林省军区政治部主任。1978年10月任吉林省延边军分区第一政治委员。1979年6月任吉林省军区副政治委员兼延边军分区第一政治委员。1984年3月任吉林省军区政治委员。其间于1978年4月至1985年3月历任中共吉林省延边朝鲜族自治州委第一书记,州革委会主任、州人大常委会主任,吉林省副省长,中共吉林省委副书记、书记(当时设有第一书记)。他主持延边地区的拨乱反正工作,坚持把民族团结摆到首位,对待不同民族干部坚持“一碗水端平”,大力推动平反冤假错案工作,全力维护民族团结,仅用半年多时间就稳定了延边地区局势。他坚决推动延边地区把党的工作重心转到现代化建设上来,积极推行农村改革,提出“因地制宜,分类指导,区别对待”的工作方针,推动延边地区实行家庭联产承包责任制。他全力振兴延边地区经济,提出将资源优势转化为经济优势和现实生产力的“内涵与外延”并重的经济发展新思路,主张大力发展工业,建立与青岛等城市的经济技术协作关系,组织筹建了一批效益高、影响广的企业,推动延边地区经济进入快速发展时期。他重视立法工作,组织力量总结与探索民族工作理论和实践,主持起草的《延边朝鲜族自治州自治条例(草案)》在第五届全国人大民族委员会第二次会议上引起强烈反响,为民族区域自治立法工作提供了重要经验和范例,对促进延边地区政治稳定和经济、文化、教育等事业发展产生了良好影响。在担任省级领导主抓农业期间,全面推行家庭联产承包责任制,使吉林农村发展焕发出勃勃生机,1983年创下粮食产量增幅、提供商品粮、粮食人均占有量、投入产出比增幅“四个全国第一”,使吉林省成为主要商品粮基地。他大力发展水稻生产,努力解决吉林全省人民吃细粮问题。他鼓励发展专业户、重点户,促进了农村多种经营发展。他提出“吉林省农业发展战略”,启动“农业生态工程”,主持制定“东部山区退耕还林、西部草原退耕还草、中部地区建立养地制度”等治理措施,综合治理沙化、碱化、退化耕地,为吉林省率先跨入全国生态省打下了坚实基础。     1985年3月,赵南起同志任解放军总后勤部副部长兼副政治委员、总后勤部党委副书记(1985年4月起)。1987年11月任解放军总后勤部部长、总后勤部党委书记。1988年4月任解放军总后勤部部长、总后勤部党委书记,中华人民共和国中央军事委员会委员。在总后勤部工作时,他提出“以改革总揽全局”,全面推动军队后勤改革。主持制定《军队后勤保障体制改革的总体方案》、《全军后勤改革五年规划》、《“八五”期间全军后勤工作的基本思路》,确定在10年内分三步走,实现全军后勤保障工作根本好转的目标。这些我军后勤建设目标要求的提出并实施,使全军后勤改革得以有序展开、整体推进、健康发展,全军后勤建设成效显著,在积极“忍耐”中有所作为,确保了军事经济效益和军事效益的提高,增强了后勤保障能力和军队战斗力。     赵南起同志善于总揽全局开拓创新。他提出将军队战略物资储备与国家物资储备紧密结合,缩减军队储备规模,节省人力、物力、财力;军队基础设施建设尽可能与国家统筹规划,统一建设,走军民兼容、平战结合的发展路子;强化全军后勤的作战保障机能,倡导并实现战略、战役、战术三级保障体系;在军队员额大幅精简后,提出按照“加强、开放、看守、淘汰”的原则,调整后勤基础设施,收缩后勤摊子,打破“大而全”、“小而全”的模式和自我封闭格局;坚持走“科技兴后勤”的路子,深化后勤科技体制改革,调整科技组织结构,扩大科研单位自主权,建立科研成果开发转化机制;为打破我军长期沿用的按建制关系各成体系的保障体制,探索三军大联勤保障体制,大力推进以“代供、代修、代医”为主要内容的网络化划区保障,先行试点、逐步展开,有效提高了后勤保障效能,为全军大联勤的全面实现奠定了坚实基础。     赵南起同志主张把“好钢用在刀刃上”。他提出军费分配要确保部队生活水平不下降、确保战略预备队和应急作战部队战斗力不降低,要向团以下部队倾斜、向装备倾斜,大力压缩基本建设规模、大力压缩各项公务费开支、大力压缩集团购买力。“七五”期间全军装备失修率每年递增幅度较大,他向中央军委提出建议,并千方百计筹措资金,解决了军队大型装备库房建设问题,为空降兵装备了大型运输机,组织了空军机场翻修和海军军港、基地整修工程,使多年制约军队发展的老大难问题得到解决。他心系基层官兵,提出对团以上机关少搞“锦上添花”,对营以下部队多搞“雪中送炭”,组织实施全军营以下部队营房综合治理工程,到1992年三分之二的建制营搬进了新营房,建立旅团生活服务中心,既方便了连队,又改善了生活。他协调安排专项经费,解决驻边远地区部队吃水、洗澡、照明、取暖等难题和驻青藏、新疆高寒地区部队肉菜禽蛋自给问题。他主持制定《军队基层后勤管理暂行条例》并狠抓贯彻落实,到1991年年底全军70%的基层单位后勤管理达标。     赵南起同志推进军队财务管理体制改革。他提出实行事业经费由业务部门和财务部门共同管理的“双轨制”运行机制,有效克服了财务管理上的分散主义、本位主义倾向,使军费使用管理逐步走上标准化、制度化轨道。他提出设立军队财务结算中心,有效发挥其聚财、生财、调剂、服务、监督的综合作用,提高了资金的使用效益和安全性。     赵南起同志无私无畏狠抓从严治军。在整顿以赢利为目的的经营性生产工作中,他深入调查研究,直面突出问题,主持制定了清理整顿军队生产经营的方针政策,在中央军委的领导下,对全军生产经营单位分三步进行清理整顿。他主持开展全军房地产、团以上单位决算审计的清理整顿,组织全军编外车辆、银行账号、油料供应管理检查清理,产生了很好的经济效益和政治影响,实现了中央军委提出的从严治军目标任务。     1992年10月,赵南起同志任解放军军事科学院院长、党委书记,中华人民共和国中央军事委员会委员(至1993年3月)。他提出发展中国军事科学事业的新思路,确定史料的收集、汇编工作要与研究工作相结合,以研究工作为主;基础理论、历史研究要与国防建设、军队建设重大现实问题的研究相结合,以现实问题研究为主;注释性、借鉴性、总结性的研究,要与面向未来、着眼发展的创造性超前研究相结合,以创造性的超前研究为主;低层次的一般性课题的零散研究,要与宏观的战略性课题的系统研究相结合,以宏观的战略性系统性研究为主。他倡导的“四个结合、四个为主”军事科研新方法,受到中央军委首长的充分肯定。仅1993年,军事科学院重大现实课题研究就增加了66%,在“新时期军事战略方针论证”、“未来作战问题研究”等重大课题中,军事科学院都发挥了重要的理论支持和对策咨询作用,使军事科学院作为中央军委决策咨询机构的职能得到强化。他主持拍摄的《较量——抗美援朝战争实录》,获得“1995年度中国电影华表奖最佳纪录片奖”和“中国电影金鸡奖”。他坚持尊重知识、尊重人才的理念,重视人才和学科建设,深化改革科研管理体制,要求各项工作以科研为中心,以科研工作和科研人员为主体,千方百计为科研人员营造良好、舒心的工作生活环境,特别是解决了住房难等问题,得到科研人员的高度赞扬,至今仍传为佳话。     1998年3月,赵南起同志当选为政协第九届全国委员会副主席。他胸怀大局、求真务实、心系民生、开拓进取,把工作重点放到关系国计民生的全局性重大问题的专题调研和对策性研究上,足迹遍布祖国大江南北,主持起草了《关于辽宁省开展节水农业问题的调研报告》、《关于我国防治荒漠化面临的严峻形势及对策建议》、《关于防治土地沙化问题的若干建议》、《加速农村沼气建设是一件需要重视的大事》、《关于动员全社会力量加快造林绿化的建议》等16份专题报告,引起党中央高度重视,为再造祖国秀美山川倾注了自己的心血与智慧。他多次率团出访,并接待访华外国政要,为加强全国政协与各国议会间联系,促进中国人民与各国人民友好往来,作出了积极贡献。     赵南起同志2003年3月退出领导岗位后,仍然关心党和国家事业,关注国际国内形势变化,关注国防和军队深化改革进展,关心人民群众疾苦冷暖,关心祖国统一大业,表现了一名共产党员的赤胆忠心。为颂扬宣传老一辈无产阶级革命家的崇高风范,传承红色基因、弘扬优良传统,他建议拍摄《彭德怀元帅》等影视作品,产生了良好社会影响。     赵南起同志是中国共产党第十二届、十三届、十四届中央委员会委员,第五届、六届、七届全国人民代表大会代表,第五届全国人大民族委员会副主任委员。1988年9月被授予上将军衔。     赵南起同志具有坚定的共产主义信念和强烈的革命事业心。在70多年的革命生涯中,他对党和人民无限忠诚,在生死关头不怕牺牲、勇于斗争,把毕生精力献给了中国人民解放事业、社会主义建设事业和军队现代化建设事业。他坚决执行党的路线方针政策和中央军委的决策指示,认真学习践行马克思列宁主义、毛泽东思想、邓小平理论、“三个代表”重要思想、科学发展观、习近平新时代中国特色社会主义思想,始终自觉在思想上政治上行动上同党中央、中央军委保持高度一致。在大是大非面前,他政治立场坚定,政治敏锐性强,旗帜鲜明地坚持真理,经受住了各种大风大浪的考验,表现了一名共产党员的优秀品质。     赵南起同志具有无产阶级革命家的胆略和高超的政治、军事经济领导才能。他敢于直言,在参与党、国家和军队的重大决策中卓有建树。他有胆有识,在重大军事行动中敢于担当、敢于挑战、敢于胜利,善于克服困难,千方百计地完成使命和任务。在抗美援朝战场上的运输保障中,他以非凡的勇气迎难而上,表现出了无畏的革命精神和出色的工作能力。     赵南起同志具有共产党人的崇高风范。他立党为公、尽责为民,心系国家、情注军队。始终坚持共产党员的标准,出以公心,事业为上,顾全大局,淡泊名利。他始终坚守滴水不漏、万无一失的工作标准,始终保持举轻若重、深谋远虑的战略意识。他把“求实、创新、群众为本、事业至上”作为自己的工作准则和终生追求。在担任总后勤部领导的7年多时间里,每年坚持上高原、下海岛、走边防,深入基层官兵调查研究,扎扎实实办实事、解难题。他一身正气,光明磊落,无私无畏,严于律己,清正廉洁,作风严谨,是保持共产党员先进性和纯洁性的楷模。     赵南起同志具有无产阶级革命家的胸怀和人民公仆的本色。在他所有经历过的岗位上,始终视党、军队的事业和人民的利益高于一切、重于一切。他坚持以群众和士兵为本,密切联系群众,心系基层,全心全意服务于人民和官兵。他坚持立党为公、执政为民,从不滥用权力、以权谋私。他尊重知识和人才,注重发挥专家的特长与作用,同时关心支持中青年人才成长。他生活简朴,始终保持我党我军艰苦奋斗的优良传统,赢得了全军官兵和人民群众的尊敬和爱戴。     赵南起同志的一生,是革命的一生、战斗的一生、光辉的一生,是为党、军队和人民无私奉献的一生。他的逝世是我们党、国家和军队的重大损失。他为人民解放事业,为社会主义建设事业,为国防和军队建设所建立的丰功伟绩将永载史册!我们要学习他的坚强党性、崇高品德和优良作风,化悲痛为力量,更加紧密地团结在以习近平同志为核心的党中央周围,高举中国特色社会主义伟大旗帜,坚持以马克思列宁主义、毛泽东思想、邓小平理论、“三个代表”重要思想、科学发展观、习近平新时代中国特色社会主义思想为指导,为决胜全面建成小康社会、夺取新时代中国特色社会主义伟大胜利、实现中华民族伟大复兴的中国梦、实现人民对美好生活的向往继续奋斗。     赵南起同志永垂不朽! (新华社北京2018年6月25日)
1    조남기 (赵南起) 략력 댓글:  조회:92  추천:0  2018-06-26
    조남기 (赵南起) 략력       조남기(1927년 4월 - 2018년 6월 17일),남,조선족,길림영길사람(吉林永吉人),1947년 2월 중국공산당에 가입.1945년 12월 입대.해방군후근학원지휘학부 졸업,전문학교문화,상장계급.   선후로 중앙군사위원회 위원,해방군군사과학원 원장,전국정협 부주석,중앙중앙 위원,중국인민해방군 원 총후근부 부장 력임.   2018년 6월 17일 23시 12분, 조남기 북경에서 향년 91세로 서거.       人物生平 1945.12—1947.12 任东北军政大学吉林分校学员、班长,吉林省民运工作队队员 1947.12—1948.3 任吉林省延边地委组织部文书、干事 1948.3—1950.10 任吉林省延边地委总务科副科长、地委秘书,中共吉林省委政策研究室研究员 1950.10—1952.5 任志愿军司令部作战处参谋 1952.5—1957.11 任志愿军后勤部司令部参谋处参谋、运输科副科长、运输科科长(其间:1955—1957 在解放军后勤学院指挥系学习、后勤学院教员) 1957.11—1959.任志愿军后勤部司令部组织计划处计划科科长     1959.至1963.8 任吉林省延边军分区政治部副主任 1963.8—1964.8 任吉林省延边军分区政治部主任 1964.8—1966.3 任吉林省延边军分区副政委 1966.3—1968 任吉林省延边军分区第二政委 1968—1973.4 在“文化大革命”中受冲击   1973.4—1977.4 任吉林省通化军分区政委 1977.4—1978.10 任吉林省军区政治部主任 1978.10—1979.6 任吉林省延边军分区第一政委 1979.6—1984.3 任吉林省军区副政委兼延边军分区第一政委   1984.3—1985.3 任吉林省军区政委(1978.4—1985.3 任中共吉林省延边自治州委第一书记,州革委会主任、州人大常委会主任,吉林省副省长,中共吉林省委副书记、省委书记)   1985.3—1987.11 任解放军总后勤部副部长兼副政委 1987.11—1992.10 任解放军总后勤部部长、总后勤部党委书记,中央军委委员 1992.10—1995.7 任解放军军事科学院院长 1998.3—2003.3 任第九届全国政协副主席。 [2-3]  中共第十二届、十三届、十四届中央委员,第五届、六届、七届全国人大代表,第五届全国人大民族委员会副主任委员,十三届五中全会决定任命为中共中央军事委员会委员,第七届全国人大第一次会议任命为中华人民共和国中央军事委员会委员,全国政协第九届委员会第一次会议当选为全国政协副主席。    晋升军衔 1965年晋升上校军衔。 1988年9月14日被授予上将军衔。   -百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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