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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인물전기 학봉 김성일 5.<<3공론>>과 시호쟁론
2015년 08월 14일 10시 22분  조회:1512  추천:0  작성자: 옛날옛적
서정시방 :
5.<<3공론>>과 <<시호쟁론>>
 
선조 6년 11월 5일 밤, 궁전안에 자리잡은 비현각(丕显阁 :세자가 업무를 보고 공부를 하던 곳)안에는 초불을 총총히 켜놓아 대낮같이 밝았다. 이날 밤은 선조왕이 규례대로 비현각에 와서 경서나 학문을 배우는 날이다. 선조왕은 대신들의 옹위를 받으며 비현각에 들어와 정좌에 앉아있고 조정의 명류들이 그뒤에 앉아있었다. 
이날 밤 검토관【检讨官:경연청에서 강독, 론사(论思)등을 맡아보는 정6품의 벼슬] 을 맡은 김성일은 서전(书传 서경의 주해를 달아놓은 책)의 태갑편(太甲篇)을 강의하기로 되여있었다. 일개 신하로서 잠시나마 임금의 스승이 되여 임금에게 학문을 닦아주는 이 좋은 기회에 김성일은 선조왕에게 시책(时策)에 관한 진강(进讲: 임금앞에 강론함)을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태갑편>>에는 중국 동한때의 현명한 재상인 진번(陈蕃 ?--168)이 제기한 <<3공론(三空论)〉〉이 중심이였는데 그것은 당시 조선의 국정에도 일맞는 내용이였다. 
진번은 <<태갑편>>에서 나라에 빈 곳이 세군데나 있다고 지적하였었다. 그중의 하나는 조정에 어진 신하가 없어서 조정이 비여있는것이고 둘째는 나라의 창고가 비여있는것이고 그 다음은 전야가 놀고있다는것이였다. 나라의 <<3공>>현상을 없애려면 조정에 인재가 있어야 하고 창고에 량식과 재물이 가득 차있어야 하고 전야에는 묵은 땅이 없이 잘 경작되고 삼림이 울창해야 하는바 <<3공>>현상이 없어야만 비로소 나라가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로 변한다고 하였었다.
      <<서전>>에 있는 <<태갑편>>의 내용을 상세히 강의하고난 김성일은 <<3공>>현상이 지금 조선에도 존재한다고 말하고나서 국정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토로하기 시작했다.
      <<......지금 조정에 인재가 없다고까지 말할수 없지만 국가대사를 담당해낼 사람은 하나도 없는 형편이여서 국가계책이나 백성들의 생계문제를 국왕께서 스스로 알아야 할 처지에 있나이다. 
 만약 이 모양대로 그냥 나아간다면 10년이 못가서 나라가 위망( 危亡)의 화를 입게 되겠나이다. 조정의 명령이 막혀서 잘 시행되지 않는데다가 상하의 세력이 분산되여 통일을 찾지 못하고있나이다. 비록 경연석상에서 신하들이 한두가지 좋은 건의를 올린다고는 하지만 그 시행절차가 아주 까다로와서 잠시동안은 시행될수 있겠지만 시행이 지속되지 못하는 동시에 다른 페단을 수반하게 될것이므로 이렇게 해서는 나라가 잘 다스려지기 어렵소이다. 맹자(孟子 본명은 맹가 BC 372--BC289)께서는 <임금의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아주는것>을 급선무로 삼으셨고 주자(朱子 중국 남송때의 성리학자)께서는 정심서의(正心诚意:뜻을 바르게 하고 성심껏 행동하는것)를 언어행동의 준칙으로 삼았나이다. 지금 전하께서 바른 마음으로 근본을 닦지 않으신다면 나라 백성들이 어찌 맘속으로 상감마마를 우러르 떠받들겠나이까?......>>
 자나깨나 백성만을 생각하는 김성일의 페부로부터 우러나온 진강은 예리한 비수마냥 선조왕의 요해처를 찔렀고 진강에 참석했던 여러 신하들의 심금을 울렸다.
  학봉선생의 진강이 끝나자 경연에서 검토관(检讨管)을 맡은  률곡(栗谷) 리이(李珥1536--1584)선생이 좌석에서 일어나 선조왕의 앞으로 다가갔다. 성리학의 연구에서 이미 대현인 퇴계 리황을  초월한 률곡선생은 성격이 호방하고 도량이 넓은 대학자였다. 그는 김성일의 진강을 듣고나서 그가 자신의 속심말을 대신해준것만 같아 몹시 흥분되였다.
 <<전하, 조정의 명령이 잘 시행되지 않는 원인이 오늘밤에 잘 밝혀진셈입니다. 군신사이에는 마땅히 부자사이와 같이 서로가 속심의 말을 다 할수 있어야 일이 잘되는것입니다....>>
<<그러하옵니다.전하>>
 률곡선생의 말이 끝나자 경연에 참석했던 다른 신하들도 모두 다 그 말이 옳다고 수긍하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였다.
 <<오늘 진강은 참으로 훌륭하오. 과인도 오늘밤에 많은것을 배웠소.>>
 좌중의 열렬한 분위기에 마음이 매우 흡족해난 선조왕이 싱긋이 웃으며 룡상에서 일어나 비현각을 나서자경연장에 모였던 신하들도 유쾌한 기분으로하나둘 자리를 떴다.
 동지달도 어느덧 저물어갔다. 이제 며칠만 더 지나면 퇴계선생이 돌아가신지 3년째가 된다. 학봉 김성일은 짬짬이 <<퇴계선생 언행록>>을 적고나서 퇴계 리황선생의 일생을 반영한 저서 <<퇴계선생사전(退溪先生史传)〉〉을 쓰기 시작했다.
 
 
...심금은 맑기가  추월빙호(秋月冰壶)같고 기상은 온수(温粹 따스하고 순수하다)하기 정금미옥(精金美玉 ) 같고 장중(庄重)하기는 산악(山岳)같고 정심( 静深)하기는 연천( 渊泉)과 같다. 그의 청연( 请筵), 등대(登对), 소탑(疏剳), 진계(陈启)는 어느것이나 다 성학(圣学)을 밝히고 왕도(王道)를 행함으로써 본(本)을 삼아 비록 세상과 맞지 않아 서로 반대되여도 마침내 도를 굽혀 사람을 따르지는 않았다. 일찍부터 <<벼슬이란 도를 행하기 위한것이요 록을 구하기 위한것이 아니다>>라고 하시면서 벼슬살이 40년에 4대군주를 섬겼으되 출처진퇴(出处进退)는 한결같이 의(义)에 따르면서 의에 어긋나면 반드시 물러났었다. 근세 사대부들은 글을 읽으면 과거보다는 리익만을 알고 성현의 배움이 있는줄은 모르며 벼슬을 살면 총록(宠录)의 영화(荣华)만 알고 염퇴(恬退)의 절의(节义)가 있는줄은 모르며 어둡고 어리석어 부끄러움도 모르고 의리도 모르다가 선생의 언행록으로부터 사대부되는 사람들중에서 간혹 그 소문을 듣고 일어나는자가 있었다...
 
 필을 날리는 김성일의 가슴은 연덩이같이 무거웠다. 세상에 태여나서 처음으로 보게 된 대현인(大贤人)이요 십여년이나 배움의 길을 열어주신 은사요 마음의 등대였던 퇴계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3년이란 세월이 지났건만 조정에서는 아직까지 그분의 업적을 개괄한 시호(谥号)가 내려지지 못하였던것이다. 그때까지 조정에서는 퇴계선생의 력사와 업적을 적은 행장(行状)이나 언행록이 만들어지지 못했던것이다. 그런데 시호를 내리는것은 원래 행장에 의거하여 시장(谥状)을 올린 뒤 조정에서 토론해서 결정하는것이였다. 
 김성일은 퇴계선생의 행장이나 언행록이 그때까지 만들어지지 못한것에 자기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분의 문하에서 가장 오래 공부한 제자도 자기요 그분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도 자신이였고 그분의 마음과 업적을 누구보다 잘아는 사람도 자신이였기때문에 그는 퇴계선생의 시호를 받아내지 못하고선 그분의 자녀들을 대할 면목이 없었고 마음속으 자책을 금할수 없었다.
 어느날 퇴계선생의 제자이자 김성일과 자별한 동료 로식(卢植)이 찾아왔다. 김성일은 자기의 고뇌를 털어놓을수있게 되여 무척 반가왔다.
  <<로공, 퇴계선생이 작고한지도 어언 3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조정에서 아직까지 그분에게 시호도 내려지지 않았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소?>>
  <<나도 바로 그일때문에 김공을 찾아왔소. 조정에 청계해서 한시 바삐 시호를 내리도록 해보기오.>>
 두사람은 한참동안 머리를 맞대고 청계문을 어떻게 쓸것인가를 토의하였다. 이윽고 김성일이 두사람을 대표하여 <<퇴계선생의 행장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를 내려줄것을 청함>>이란 청계를 썼다. 이 청계에서 그들은 퇴계선생과 같은 대현인을 우대함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규례에 얽매일 필요가 없이 특례(特例)로써 반드시 시호를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봉선생의 청계가 올라가자 조정에서는 일대풍파가 일어났다.
경연에서 먼저 률곡 리이선생이 김성일의 청계를 지지해나섰다.
<<퇴계선생의 행장은 아직 지어지지 못했지만 박순(朴纯 1523--1589)이 지은 퇴계선생의 묘지(墓志)가 있고 또 퇴계선생의 제자들이 적어놓은 언행록도 있으니 이를 참고삼아 시호를 내려도 될것 같습니다.>>
뒤이어 로수신이 이를 반대해나섰다.
<<퇴계선생께 시호를 내리는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규례에 따라 행장이 지어지기를 기다려서 시호를 내리는것이 합당한가 보옵니다.>>
조정의 원로대신인 로수신이 이렇게 말하자 특진관이나 참찬 이하의 여러 관원들도 특례를 반대하였다. 그러자 선조왕도 로수신의 의견에 동감을 표시하였다.
    <<행장이 지어지기전에 시호를 내렸다가 후페(后弊 :이후에 생기는 폐단)가 생기면 어떻게 할고?>>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 학봉 김성일은 임금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견지하고나섰다.
   <<상감님, 옛법에만 의지하다보면  모든 일에 변통성이 없어져서 도를 닦는데 지장이 있사옵니다. 종전에 없던 일도 정황에 따라 선례(先例)를 만드는것은 마땅한 일인가 보옵니다.>>
    김성일과 생각을 같이 했던 한성좌윤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이 일어나 선조왕에게 절을 올리고나서 말했다.
     <<상감님, 소신의 생각에 퇴계선생은 비상한 덕업(德业)이 있는까닭에 시호를 내림에 있어서 상규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보나이다.>>
     개혁을 주장하는 신하들과 보수를 견지하는 신하들은 오래동안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며 낯을 붉히고 언성을 높였다.
      <<퇴계선생에게 시호를 내리고싶은 마음은 과인도 경들과 마찬가지요. 신례(新例)를 만들어 후환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행장이 다 지어질 때까지 기다리기오.>>
     선조왕이 결단을 내리고 일어서자 경연에 참석했던 신하들은 모두다 따라 일어났다. 
스승의 시호를 내리기 위해 경연석에서 임금과 맞서 나서고도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김성일은 스승에게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스승의 묘가 있는 먼 남쪽하늘을 향해 죄송한 마음으로 고이 절을 올렸다. 
김성일은 퇴계선생의 행장이 하루 일찍 지어지게 하기 위해   날마다 짬짬이 언행록을 썼는데 그가 쓴 언행록은 무려 백구십여덟건에 이르러서 퇴계문인들이 쓴 전체기록의 3분지1이나 차지하였다.
    3년이 지난 선조 9(1576)년 12월에 조정에서는 퇴계선생의 문인들이 쓴 언행록과 행장에 근거하여 퇴계선생에게 <<문순(文纯)》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례페(礼币)도 내려졌다.
    학봉 김성일은 조정의 명을 받고 퇴계선생의 시호와 례페를 지니고 퇴계선생의 유가족이 살고있는 안동  례안으로 내려갔다. 쌍두마차를 타고 설한풍을 등에 지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는 학봉 김성일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실로  기쁘다고 해야 할지 슬프다해야 할지 하염없는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단양을 지나면서 그는 소회를 풀어보려고 먹을 갈아 시 한수를 지었다.
 
           ......
           시호를 받들고 남행길에 올랐나니
           이 밤의 이 심정 어 뉘가 알소냐?
 
           (奉溢南行路     谁知此夜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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