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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의 명신 학봉 김성일 17. 진주성의 첫승리
2015년 08월 18일 14시 01분  조회:1922  추천:0  작성자: 옛날옛적
서정시방 :
  17. 진주성에서의 첫승리
 
 촉석루에서 조종도와 리로를 바래주고난 김성일은 수행인원들을 데리고 말안장우에 올랐다. 한시바삐 군사들과 백성들을 불러와서 진주성의 방어사업을 포치해야 하였다. 김성일이 단성에 이르러 그곳 백성들에게 알아보니 진주판관 김시민(金时敏1544--1592)이 단성에 와 있다는것이였다.
  김성일은 말을 달려 단성관청으로 찾아갔다. 초유사가 왔음을 안 단성의 관원들은 일제히 그에게 인사를 올리고나서 단성의 방비정황을 회보하였다. 김성일은 단성을 수비하는 장령들속에서 김시민을 알아보았다.
  <<김판관께서는 진주성을 수호하지 않고 왜 여기와서 계시오?>>
  김성일은 김시민의 얼굴을 뚫어지게 쏘아보면서 엄숙하게 물었다.
  <<...>>
     자신의 직책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얼굴이 홍시같이 상기된 김시민은 머리를 푹 숙이고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쩔쩔매였다. 마음속으로 태산같이 믿어오던 학봉 김성일이 경상우도병사(庆尚右道兵使)로 임명되여 진주성에 대이기도전에 억울하게 조정에 잡혀갔다는 불행한 소식을 들은데다가 진주목사(晋州牧使) 리경이 제살길을 찾아 심산속으로 도망갔으니 아무런   외부의 후원도 없이 혼자서는 진주성을 고수할수 없다는것을 절실히 깨달은 그는 진주성을 버리고 이곳 단성으로 와서 이곳의 전투를 도우려했던것이였다.
    <<김판관, 한번 생각해보시오. 진주성은 우리 령남땅을 지키고 나아가서 호남과 서울을 수호하는데 있어서 숨통과 같이 중요한 곳이요. 지금 진주성은 김판관이 아니고는 지켜낼만한 사람이 없는 상황이오.. 판관께서는 즉시 진주로 돌아가서 산속에 피난간 백성들을 불러오고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을 수호하시오. 내 이제 떠나가서 린근 각처의 의병들과 관군에게 지시를 내려 김판관을 후원해주겠소. 그러니 김판관은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진주성으로 돌아가시오. 그리고 진주성에 목사자리가 비였으니 판관께선 우선 진주에서 목사직을 대행하시오.>>
    <<초유사어르신의 분부대로 즉시 임지로 떠나겠소이다.>>
    <<김판관의 성공을 축원하오.>
김성일은 김시민의 손을 으스러지게 잡고 그를 떠나보내고나서 단성의 수비장령들과 함께 전투준비를 다그쳤다. 김성일은 김대명(金大鸣)을 초모관(招募管)으로 임명하고 각 장령들에게 분공하여 고성(固城)에 있는 적들을 쳐서 성밖으로 몰아내였다.
  비록 크지 않은 싸움이였지만 군사들의 사기는 왕성해지기  시작하였고 산속에 피난갔던 백성들도 줄을 지어 성안으로 돌아왔다. 김성일은 피난갔던 백성들을 이끌고 진주성안으로 돌아왔다. 그는 관병들과 진주성안의 백성들을 모아놓고 진주성방위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진양이 없으면 호남(湖南 :전라도를 가리킴)이 없고 호남이 없으면 나라는 이미 어찌할수 없게 됩니다. 적들이 항상 침을 흘리면서 엿보는 곳이 바로 이 진주성에 있으니 방수(防守)를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수 없습니다.다.  나는 결코 이 성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사수할것입니다.>>
 
     초유사 김성일의 비장한 연설을 듣고난 진주성안 군민들의 정서는 고도로 격앙되였다. 진주성안의 군민들은 김시민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무기를 정비하고 성을 수축하는데 밤과 낮을 모르고 서둘렀다.
    김성일은 김시민과 함께 진주성을 방어할 계획을  짜놓고 혹시나 미진한곳이 있는가 면밀히 검토한 뒤 진주성을 나왔다.
    이때 고성에서 조선군민에게 쫓겨났던 왜병들은 다시 군사를 정돈해가지고 고성을 다시 쳐서 점령하고 진해, 사천을 함락한 뒤 진주성을 향해 쳐들어왔다. 김시민은 온갖 고통을 군사들과 함께 겪으면서 진주성을 사수할 결의를 다지였다.
     진주성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들은 의병장 곽재우도 의병들을 거느리고 후원하러 왔다.  김성일은 각 고을의 군사들을 독촉하여 진주성을 후원하게 하였다. 함안에서 떠나 진주성과 마주한 남강언덕에 까지 쳐들어왔던 왜적들은 조선군대의 위세에 눌리워 감히 강을 건너지 못하고 철퇴하기 시작했다. 
이때 각 고을의 전투포치를 마친 김성일이 달려왔다. 김성일의 독전하에 김시민은 정예군 천여명을 인솔하여 적을 추격했다. 의외의 추격을 받고 성안으로 쫓겨들어간 왜적들은 성문을 꼭 닫아걸고 감히 성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 뒤 김시민은 군사들을 지휘하여 계속 적들을 추격하여 적들의 목을 몇개 자르고 여러놈을 쏘아죽였다. 
김시민이 교묘한 계책을 써서 적장 평소대(平小大)를 포로하고 또 세개의 성을 회복하여 군대에서의 위신이 굉장히 제고되였다. 
 김성일은 김시민이 세운  공을 조정에 회보하고 조정의 허가를 받아 김시민을 정식으로 진주목사로 승진시켰다.
따사로운 5월도 어느새 다 지나가고 무더위가 시작되는 6월이 찾아왔다. 김성일은 목사 김시민과 함께 진주성 방위대책을 면밀히 토의한 뒤  자기 수하의 의병은 정암나루터를 중심으로 지키게 하고 의녕, 초계연안일대는 곽재우에게 맡기고 섬천을 후방기지로 하여 초계연안에서 가야산동록의 고령일대의 전선은 정인홍에게, 거창을 기지로 우지(牛旨)를 전방으로 하여 가야산서록(迦耶山西鹿)에는 김면의 부대를 포치하고 의병장 리정(李瀞)은 적진쪽으로 쑥 나가 함안에 전초기지를 구축하여 각곳의 의병들이 서로 협력하기 편리하게 하였으며 그 자신은 지리상의 중심으로 되는 산음에 지휘부를 설치하여 진주성일대의 방위에 물샐틈없는 포치를 해놓았다.
 날마다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크고작은 전투는 짧디짧은 40여일동안에 100여차나 있었지만 아군은 매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어느날, 김성일은 각지에서 가져온 승리의 소식을 접하고 기쁨을 금치 못해 말하였다.
    <<래일 아침에 나는 의녕, 초계, 성천을 돌아보고 거창으로 가보겠소.>>
    이튿날 행장을 수습한 김성일은 말안장에 올라 길를 재촉했다. 이때 거창방면의 의병통신원이 말을 달려왔다.
    <<초유사어르신, 지례, 금산, 개령에 있는 왜적들이 합세하여 이쪽으로 쳐들어오고있는데 적들이 우계를 이미 넘어섰소이다. 의병대장 김면의 군대는 왜적들의 포위속에 들어가 매우  위급하나이다.>> 
     통신병의 보고를 듣고 사태의 엄중함을 깊이 느낀 김성일은 수행해온 리정, 리로를 돌아보면서
    <<본래 나는 각 고을을 순시해보려했는데 거창이 위급하다하니 그리로 가봐야겠소.>> 하고 말하였다.
     말을 마친 김성일은 곧추 삼가 등지로 달려가서 의병들을 거느리고 거창으로 진군했다. 김성일의 지휘를 받은 산음, 함양, 안음 등지의 의병들이 일시에 몰려오고 또
 김성일이 친히 독전함에 의병들이 죽기내기로 막아나서는바람에 왜적들은 수십명의 시체를 남기고 뿔뿔이 도망치는수밖에 없었다. 
     적들에게 포위되였던 김면의 부대를 구원하고나서 거창을 떠나 섬천에 이른 김성일은 의병장 리정을 함양으로 보내여 군병을 수습하고 군량을 모집하도록 지시하고 의병장 정인홍을 만나서 방어보취를 말한 뒤 다시 말안장에 올랐다. 그는 령산, 창녕, 현풍 등  고을에 들려서 고을의 장령들과 의병초모관들을 임명하고나서 령남일대의 사민들에게 보내는 글을 썼다.
 
    의병들을 지휘하여 락동강 대안의 좌도일대를 수습하고 우도로 통하는 길을 개척한 김성일은 경상도 각 고을에 <<선악부(善恶簿)를 만들어놓고 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의 이름은 선적(善籍)에 올리고 적에게 투항한 사람들의 이름은 악적(恶籍)에 올리도록 지시하였다. 사민들에게 보낸 격문(檄文)과 선악부는 경상도일대의 백성들을 크게 흥분시켰으며 적에게 투항했거나 적을  따르던 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그런데 의병투쟁의 긴요한 관두에 의병장 곽재우와 순찰사 김수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였다. 당시 경상도수호의 책임을 맡았던 김수는 왜적들과 맞서 싸우는것을 몹시 두려워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밀양이 왜적들에게 빼앗길 위급한 관두에도 그는 자신의 관할구역인 밀양에 아무런 원조활동도 하지 않고 밀양근방에 있으면서 제 살 궁리만 하였었다. 그는 전쟁의 형세가 아군에게 완전히 불리하게 되자 적들과 싸울 생각을 버리고는 임금의 거가를 호위하러 간다는 핑게를 대고 령산, 초계, 거창을 거쳐 운봉에 이르렀다. 그는 운봉에서 초유사로 되여 령남으로 내려오는 김성일과 마주쳤다.
    <<감사께서 어이하여 령남을 떠나 북상하시오?>>
     김수의 행동이 수상하다고 생각한 김성일이 이렇게 묻자 김수는 당황한 기색을 감투느라 애쓰면서 변명쪼로 말했다.
    <<김공, 이번에 초유사로 내려오게 되였으니 고생이 많겠소이다. 나는 근왕(勤王 : 임금을 호위하는 일)하러 북상(北上 : 북쪽으로 올라가다.)하니 그동안 이곳에서 공이 많이 수고해주오.>>
    김수는 김성일의 앞에서 호남을 거쳐 북으로 뺑소니치는 발뺌을 하고나서 급히 말안장에 올라 북쪽으로 떠나갔다.
    비겁한 작자와 도리를 따져봐야 아무런 쓸모도 없다고 생각한 김성일은 김수의 말에 아무런 응대도 하지 않고 한동안 차가운 눈길을 그의 등뒤에 돌리였다. 김수네 일행이 눈길에서 사라지자 김성일은 운봉에 남아있는 군사들을 보고 결연히 말하였다.
    <<가는 사람은 가고 남은 령공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적을 토벌하여 국은(国恩)에 보답하기를 바라오.>>
    학봉선생의 강의한 태도를 목격한 군사들은 깊이 감동되였다. 전주영리 하자용(河自溶)은 그 장면을 목격하고나서 감동된 나머지 동료들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칭찬했다.
    <<학봉선생은 임금이 장차 자기를 죽이려하는데도 임금을 원망하지 않고 오로지 나라일만 생각하니 참으로 충신이오.>>
    거가를 호위하러 간다는 명목하에 수십명밖에 남지 않은 병졸을 이끌고 령남을 떠난 김수는 전라감사 리광(李:1541--1607),충청감사 윤국형(尹国馨:1543--1611)과 더불어 소위 <<3도순찰사군(三道巡查使军)>>을 무어가지고 북으로 올라갔었다. 그러나 그의 군사는 6월초에 서울 근방의 룡인에서 적을 만나자마자 혼비백산하여 대패하고말았다. 조정의 처분이 두려워난 김수는 얼마 남지 않은 패잔병들을 이끌고 부랴부랴 령남으로 돌아왔다.
선불맞은 노루마냥 제정신을 잃고 산음까지 도망쳐와서 산음에다 감사공관을 차려놓은 김수는 앞일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눈앞이 캄캄하고 기가 막혔다.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패잔병 몇몇을 가지고 이제 흉악한 적들의 침범을 맞으면 무슨 수로 막아낸단 말인가? 적과 싸운다는것도 문제거리지만 그보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조정에서 알가봐 두려웠다. 김수는 조정에서 진상을 알기전에 한시바삐 부족한 관군을 보충하지 않았다간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르겠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래기라도 쥐려고 덤비듯이 거의 다 없어진 관군을 다시 조직하여 군사력을 가강해볼 욕심에서 군사를 모집했다. 그러나 김수의 무능함을 너무나 잘아는 백성들은 어느 누구도 그의 부대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관군의 보충래원을 잃어버리고난 김수는 한창 전투중에 있는 각 의병부대를 찾아가서 군사를 빼앗아가기 시작했다. 김수의 작간으로 의병부대가 붕궤의 위기에 직면하자 의병장들은 김수에 대해 이를 갈면서 김수가 경상도 순찰사로 된것을 극구 반대해 나섰다. 그가운데도 홍의장군 곽재우는 김수를 왜적과 같이 증오하였다.
    <<김수는 왜적을 친다면서 서울로 올라갔다가 적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도망쳐왔다. 그놈은 적을 치지도 않으면서 우리의 의병대오를 해치고 있다. 지금 우리의 적은 왜적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군사를 이끌고 그놈부터 먼저 토벌해야 한다.>>
     곽재우는 김수에게 김수가 지은 일곱가지 죄상을 적어 보낸 뒤 다시 그의 죄를 조정에 보고하여 조정에서 김수를 처단할것을 요구한 동시에 각 고을에 통문을 돌려 다같이 김수를 성토할것을 당부하였다.
김수는 곽재우가 자기의 죄상을 조정에 보고한것을 알고 겁이 더럭 나서 칼을 뽑아들고 자결하려다가 수하 군관이 말리는바람에 생각을 고치고 함양으로 달아났다. 그 뒤 약간의 군사를 끌어모은 김수는  곽재우를 몹시 경계하고 있었다. 
김수는 선손을 써서 곽재우를 무너뜨릴 목적하에 수하의 군관 김경로(金敬老)를 시켜서
      <<곽재우는 의병을 빙자하고 반역음모를 꾸미고있다>> 라는 내용의 격문을 써서 각 고을에 퍼뜨렸다.
     곽재우는 김수의 격문에 대한 대답으로
     <<애국과 반역은 세상이 분간할것이고 옳고 그름은 공론이 판단할것이다>>라는 내용의 격문을 써서 돌리면서 김수에게 반격을 가하였다.
     민심을 완전히 잃어 형세가 자기에게 매우 불리하게 된것을 깨달은 김수는 미친개가 저를 기른 주인을 물듯 조정에 사람을 보내여 곽재우가 반역음모를 꾸미고있다는 얼토당토 않은 내용의 장계를 올린 동시에 의녕군수와 김성일에게 한시바삐 김성일을 나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곽재우가 역적으로 몰릴 위험에  처하게 되자 곽재우를 따르던 적잖은 의병들도 죄가 자기들한테까지 미칠가봐 두려워서 의병대오를 몰래 빠져나 하나둘 뺑소니치기 시작했다.
 
(흉악한 적들을 앞에 두고 자기사람들끼리 싸울수 있단 말인가? 절대로 관병과 의병들간에 싸움이 일어나게 할수는 없다..)
 
기막힌 사연을 듣고 깜짝 놀란 김성일은 즉시 김수와 곽재우에게 편지를 써보내서 두 사람이 화해하고 다같이 힘을 모아 왜적과 싸우도록 설복하였다. 그는 곽재우가 의분을 참지 못해 김수를 토벌함으로써 상상할수 없는 후과를 초래할가봐 곽재우에게 김수는 이번 임진왜란에서 비록 큰죄를 지었지만  관원을 처분하는 일은 조정에서 알아서 처리할 일이지 백성들이 사사로이 처리할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곽장군은 대의를 지키기 위해 노여움을 가라앉히고 우선 왜적을 물리치는 큰 일에 떨쳐나서야 한다고 간곡히 타일렀다. 
김성일은 김수가 조정에 써보낸 무고로 하여 곽재우가 억울하게 죄를 덮어쓸가봐 두려워서 즉시 조정에 장계를 써올렸다.  그는 곽재우가 임진왜란이후의 두어달동안 세운 빛나는 공적을 회보하고 곽재우와 김수사이에 생긴 충돌의 전반과정을 상세히 회보하고나서 곽재우가 김수를 사사로이 죽이려고 한것은 비록 그 죄가 크지만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폭발한후 왜적을 치는데 누구보다도 더 큰 공을 세웠으므로 그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김성일은  장계에서 지금 곽재우를 처분한다면 그의 수하에 있는 의병들을 해산시키는것과 같게 되기때문에 의병투쟁을 약화시킬뿐만아니라 왜적들이 바라는 일을 저지르게 된다고 강조하였다.
    선조왕은 김성일이 초유사로 내려간 뒤 써보낸 장계에서 곽재우의 영웅적 사적을 읽어보고 그를 칭찬해마지않았다. 그런데 그는 경상감사 김수의 장계를 받고 훌륭한 의병장을 나포하기 아까와서 망설이고있었다. 이때 김성일이 올려보낸 새로운 장계문을 받아보고 모든 의혹을 해소한 선조왕은 마음을 놓고 곽재우에 대한 처분을 면해주었다.
      김성일의 <<곽재우를 신구할데 관하여>>라는 장계는 비단 곽재우 한사람을 구했을뿐만아니라 의병과 관병간의 대결을 피면하게 하였다. 그뒤 의병과 관병이 손잡고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작용을 일으켰다. 임진왜란초기에 관병과 의병의 장령들은 서로 불화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관병의 장령들은 의병장들을 깔보고 그들이 승전하는데 시기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서로 협력을 잘 하지 않아 적을 만나면 패하기가 일쑤였다. 유독 초유사로 내려온 김성일만은 적당한 방법으로 량군 장령들을 설복하여 큰 효과를 보았으므로 령남의 의병들은 그를 믿고 존중하여 그의 지휘에 잘따라 전투에서 패하는 경우가 극히 적었다.
    김성일의 지휘를 받는  의병들은 싸움에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였다.
    6월에는 의병장 손인갑(孙仁甲)이 초계에서 로획물을 싣고 올라오는 적선을 배를 타고와서 까부시고나서 전사했고 거창의 김면은 멀리 성주성내의 무계진(茂溪津--성주남쪽 49리되는 동안나루의 아래에 있음)까지 나가 왜적의 배를 격파하고 로획한 보물을 여러 바리로 실어서 진주성에 머물었던 김성일에게 수송하였으며 7월에 들어서서는 의병장 김준민(金俊民)이 다시 무계에서 적선을 격파함으로써 적들은 락동강의 통로를 완전히 상실고 군량의 운송은 대구를 경유하는 륙로에만 의지하게 되였다. 편리한 수상운수조건을 상실하고 험난한 산길로 군수물자를 수송하는데 지쳐난 왜병들은 교통의 요충지인 진주성을 빼앗으려고 미쳐날뛰였다.
     6월말에 김성일은 각지에서 봉기하여 그의 관할하에 있는 의병들을 돌아보고나서 거창, 우지(牛旨)에서 지례면의 적을 맞아 혈전을 벌이고있는 김면의 군대를 성원하기 위해 오래동안 거창에 머물러있었다. 이 틈을 탄 창원, 진해방면의 적들은 고성, 사천 등지를 휩쓸고 진주성의 주장대인 촉석루아래 남강대안까지 쳐들어왔다. 
    적들이 진주성쪽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김성일은 급히 단성으로 달려가서 진주성에 있는 김시민으로 하여금 서뿔리 움직이지 말라고 지시한 뒤 북쪽은 함양, 산음, 단성의 의병으로, 남쪽은 곤양군수 리광악, 고성의병장 최강(崔堈)을, 그리고 동에서는 김수와 대결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곽재우를 시켜 일제히 진주성으로 쳐들어가게 하였다. 모든 포치를 마친 김성일자신도 뒤이어 성내에 당도하여 전투를 몸소 독전함으로써 적은 우리측의 협격에 견디다못해 무수한 사상자만 남긴채 물러나고야 말았다. 아군은 승승장구로 추격하여 사천, 진해, 고성까지 단숨에 수복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진주성의 제1차 승첩이다.
진주성의 첫승리는 령남(岭南 :경상도)의 의병들과 백성들에게 임진전쟁에서의 승리의 신심을 북돋아주었다. 김성일은 이르는 곳마다에서 관병 및 의병 그리고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경상좌도 영천지방에서는 의병이 새로 60여명이나 조직되였는데 그들은 사람을 보내서 김성일의 지휘를 받겠다고 요구하였다.
 김성일은 그들의 요구를 흔연히 허락하고나서 전임봉사(奉事 ) 권응수(权应洙)를 의병대장으로 파견하여 영천지방의 의병들을 지휘하게 하였다. 같은 경상우도에 있지만 상주, 함창, 문경 등 지방은 금산, 개령의 저쪽너머에 있어서 련락이 잘 통하지 않았다. 김성일은 리봉(李逢 )을 의병장으로, 정경세(郑经世 )를 초모관으로 차임하여 적들에게 빼앗겼던 국토의 수복에 안깐힘을 다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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