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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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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륵: 가치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지성인(인물전기)
2019년 07월 09일 21시 41분  조회:404  추천:0  작성자: jinhua

가치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지성인

-김병민선생 략전

최창륵

 

 

선생은 20여권의 저서, 백여편의 론문, 수십편의 문학평론과 수필 등 정열적인 문필활동을 펼치며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 주류 학계에서 조선-한국학연구의 대표 주자로 활약한 저명한 학자이다. 또한 10여년 간 연변대학교 부교장과 교장을 력임하며 제도적 정비와 통합캠퍼스 신축을 통해 21세기 민족교육의 새로운 기반을 구축한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교육가이기도 하다. 

선생은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이후 태여나 ‘개혁개방’을 전후한 시기에 학업을 완성하고 탈리념적인 글로벌 시대에 학문활동을 펼친 전형적인 중국조선족 3세대 학자이다. 그리고 이 세대 학자들은 다원적인 시각과 리론에 의한 새로운 학문적 패러다임의 구축, 력사와 현실 그리고 세계와 지력사회의 력동적 관계 속에서 중국조선족 교육 및 사회문화적 전통의 계승과 갱신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완성하여야만 하였다. 

중국조선족은 제국주의 일본의 조선침략 및 중국 동북 지역으로의 세력 확장과 맞물린 근대 이민과정에서 형성된 극히 현대적인 특수 집단이다. 이들이 해방전쟁,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등 력사적 사변들과, 중·조, 중·한 관계의 복합적인 력학 관계 속에서 체험한 삶은 타집단의 추측을 불허할 만큼 특수하며 복잡한 것이다. 그 다난한 현대 과정에서 겪은 특수한 력사적 체험은 사회, 정치, 문화 및 지역적 경계지대에 위치한 다중성과 더불어 중국조선족의 사회·문화적 특징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반이라 할 것이다. 력사적 체험이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얻어지는 것이며 개개인의 삶의 경험이 루적되고 합쳐져 집단적 기억과 경험이 되는 법인 만큼 ‘중국조선족’의 사회·문화적 내포는 리념과 리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얻어지는 것이였다. 

연변대학교의 ‘평민교장’으로 널리 존경받은 선생은 실제로 가장 평균적인 중국조선족으로서의 삶을 살아오신 분이다. 학계는 물론 중국의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 연변대학교의 동료들이나 제자들, 외국의 지인들 모두에게 늘 감동으로 다가가며 젊은이들에게조차 친근한 벗인 선생은 바로 중국조선족의 삶의 체험에서 우러난 지혜와 미덕을 일신에 지닌 분이다. 그럼으로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살피는 작업은 곧 중국조선족의 력사적 현장과 사회·문화적 의미를 되짚는 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1. 가난이 준 선물

1951년 음력 9월, 선생은 흑룡강성 녕안시 발해진 향수촌(响水村)에서 태여나셨다. 향수라는 마을 이름은 마을 서북쪽을 감돌아 흐르는 목단강 물이 락차로 인해 멀리까지 그 여울소리가 들린다 하여 얻은 이름이다. 이곳 입쌀은 예로부터 황실에 공납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화산폭발로 인해 형성된 현무암 우의 충적층에서 자라기 때문에 차지고 빛갈 곱기로 유명하다. 선생의 가문은 1918년 할아버지이신 김인국(金仁国)이 자식들을 거느리고 국경을 넘으면서 중국에 정착하였고 선생은 조선족 9세대가 오붓하게 모여사는 작은 동네인 웃향수에서 태여났다. 

선생은 부친 김윤학(金允学)과 어머니 천숙선(千淑善) 사이의 4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여났는데 태여나서 50일 만에 촉한을 앓던 아버지를 여읜다. 그 때 어머니 년세가 33세, 큰형이 11살이였다. 그리고 36세에 남편과 시숙을 잃은 큰어머니가 딸과 조카딸을 데리고 선생의 집에 들어와 살았으니 그 가난이야 이루다 말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선생의 7살 되는 셋째형과 4살 되는 누나가 동시에 페염에 걸리는데 항생제인 페니실린을 맞아야만 살아날 수가 있었다. 페니실린 한대 값이 쌀 한가마니 값이였고 집에는 식량이라고는 고작 쌀 두가마니 뿐이였다. 선생의 어머니와 큰어머니는 의논 끝에 쌀 한가마니만을 팔아서 셋째형을 살리고 가슴 터지는 아픔을 누르며 누나가 죽는 것을 그대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고 하니 참으로 통탄할 만한 가난이였다. 언젠가는 어머니가 식량에 보태기 위하여 동네에서 30 리 가량 떨어져있는 산으로 도토리 줏기를 떠난 적이 있었다. 어린 선생은 호기심으로 그 뒤를 따라갔고 점심으로는 몸에 지닌 수수떡 하나가 고작이였다. 그것을 선생에게 먹이고 난 어머니는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쓰러지고 만다. 

그럼에도 가난이 선물한 것이 있으니 끈끈한 사랑과 사은(谢恩)의 마음이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섬약했고 유복자나 다름없는 막내였기에 어머니와 형님들의 류다른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중학교에 진학하자 선생은 집에서 10여리 떨어진 학교를 매일 오고가야 했는데 “신발과 털모자는 형님들이 쓰던 것을 물려받았지만 엄동설한이라 발이 얼고 귀가 얼기가 일쑤였다. 그 때 겨울은 왜 그다지도 추웠던지 꽁꽁 얼어서 동태가 되여가지고 손을 호호 불면서 울상이 되여 집에 들어서면 어머니는 랭수를 담은 토기대야에 내 발을 담가서 랭기를 빼주면서 몰래 눈물을 훔쳤다. 어머니의 그 모습은 오늘도 내 가슴을 한없이 아프게 한다.”(1)소박한 도리이지만 이 세상에서 정녕 값진 사랑은 가난 속에서의 사랑인 법이다. 그것은 삶에 희망을 주고 어려움을 이겨가는 방법을 배워주며 무엇보다 스스로의 소중함과 인간적 존엄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한편, 가난은 삶이란 많은 이들의 도움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중국어 속담에 ‘물 한방울의 작은 은혜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한다(滴水之恩, 涌泉相报)’는 말이 있는데 이는 주변 사람들이 흔히 선생을 형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선생은 산문집 《와룡산 일지》에서 자신에게 베푼 타인의 은혜에 대해 일일이 적고 있다. 례컨대 조선 류학시험을 앞두고 직접 기숙사를 찾아 시험 지도를 해준 허문섭선생에 대한 고마움이나 선생의 건강을 념려해 돼지염통을 구해다가 보이라실 연탄불에 구워준 김동익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감명깊이 전하고 있다. 선생의 어머니가 남긴 유언을 살펴보도록 한다. 

 

사람은 세상에 태여나서 남들의 구원을 받고 도움을 받고 출세를 한다. 제가 잘나고 수준 있고 능력 있어 출세했다고 득의양양해서는 안된다. 불행아인 너의 인생길에 길목마다 귀인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지어다. 그래서 너는 좋은 운을 가지게 된 게다. 은인을 잊는 자는 소인배다. (…중략…) 반드시 지나친 욕심과 야심을 버리고 량심을 지켜라. 이것이 인간도리이니라.(2)

 

이처럼 평범한 시골 마을에서 태여난 선생이 가난과 가족, 고향을 통해 터득한 삶의 지혜는 인정을 소중히 여기는 소박한 농가의 정서였으며 그 사랑과 보은의 마음이 선생이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였다. 

선생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이는 선생의 큰형이였다. 열한살에 아버지를 잃은 큰형은 듬직한 소년가장이였다. 소학교 시절에 오전에는 학교에 가고 오후에는 집에 돌아와 어린 선생을 업어 달래곤 하였으며 중학교를 졸업한 후 단과대학인 농업전문학교에 진학하였으나 가족을 돌보기 위해 자퇴하고 사범학교 단기반을 거쳐 소학교 선생으로 취직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민족교육사업에 평생을 바친 큰형의 훈육으로 선생은 1957년 강서소학교에 입학하여 6년 간 우등생으로 공부하였다. 특히 시와 산문에 능한 문학청년이였던 큰형은 일찍부터 선생에게 그림책, 동화, 아동소설을 사주어 책을 가까이 하게 하였으며 선생은 중학시절에도 큰형의 서가에서 《서유기》, 《삼국지》 등 중국의 고전은 물론 조선현대문학 작품선집 등을 접하게 된다. 일찍부터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운 선생은 살벌하였던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서점을 들이쳐 반동적인 서적이라며 닥치는 대로 책을 불사를 때에도 면목이 있는 홍위병에게 사정하여 《청춘의 노래》, 《홍기보》 등 중국 당대 작품들을 몰래 빼내 읽곤 하였다.

‘문화대혁명’의 발발로 하여 청소년기의 선생은 큰 역경에 처하게 되는데 다행히도 가장 힘든 고비마다 큰형이 삶의 방향타가 되여주었다. 1966년, 선생은 발해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하고 고중 입시를 준비하던 중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학업을 중단하게 된다. 다시 1968년 4월에 이르러서야 녕안중학교 고중부 2학년에 편입되나 같은 해 10월 정부의 지시로 귀향하여 농민이 되고 만다. 그 당시 선생이 계속하여 지적 성장과 사회적 진출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군복무였다. 1970년 12월, 입대하기 위하여 집을 떠나게 된 선생을 앞에 앉혀놓고 큰형은 정중히 3가지 엄명을 내린다. 첫째는 중국어 수준을 제고해야 하며 둘째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군관으로 발탁되여야 하며 셋째는 시골 처녀에게 련애편지를 보내서는 안된다는 것이였다. 그만큼 큰형은 선생이 훌륭한 사람이 되여 더 너른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랐고 장차 선생의 사회적 진출을 위해 고심참담하였던 것이다.

큰형의 가르침 대로 군복무 기간 선생은 매일 중국어로 된 신문 읽기와 독서를 견지하였다. 모르는 한자가 있으면 휴대용 사전인 《신화자전》을 찾아보곤 하였는데 군복무를 마칠 때가 되여서는 사전의 글들을 거의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중국어로 일기를 쓰고 독서필기를 하였으며 집에 보내는 편지도 중국어로 쓰곤 하였다. 하여 선생의 중국어 수준과 필력은 빨리 제고되였으며 중대 지도원의 눈에 들어 보고서와 흑판보 작성, 무기 관리 등을 담당하는 중대 문서로 발탁이 되였다. 비록 군복무를 마칠 때 공교롭게도 군편제 축소가 실행되여 군관으로 발탁이 되지는 못하였지만 그간 닦은 중국어 실력은 장차 선생이 거대한 지식의 장이자 인류문명의 주요한 패러다임의 하나인 중국문화에로 시야를 넓혀갈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되였다. 

선생이 제대한 뒤, 군련대 정치부에서는 성실하고 공부에 열중하며 많은 성과를 올린 제대군인이니 직업배치를 해주거나 대학에 추천하는 것이 좋겠다며 지방정부에 특별히 추천서를 보내주었다. 이에 지방정부에서는 선생에게 수력발전소 혁명위원회 부주임 자리를 제안하나 이때에도 큰형은 그 유혹을 물리치고 대학진학을 선택하도록 한다. 이에 선생은 대련경공업대학교에 추천되나 큰형은 공과보다 문과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지방정부와의 몇차례 교섭 끝에 선생이 연변대학교 조문학부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하였다. 

큰형은 무엇보다 시골 소년인 선생에게 보다 큰 세상을 향한 포부와 꿈을 심어준 분이였다. 선생의 좌우명인 왕지환의 “더 높은 봉에 오르라(更上一层楼)”라는 시구는 젊은 시절 큰형이 종이에 써서 늘 벽에 붙여두었던 시구이기도 하였다.(3)실로 큰형은 선생에게 역경과 다난한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다른 한 힘, 즉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인 마음가짐을 심어주어 이 또한 선생의 삶에는 큰 선물이였다.

선생은 1975년 9월 연변대학교 조문학부에 입학하게 되며 비로소 본격적인 학문의 길을 걷게 된다. 특히 선생은 은사이신 정판룡선생을 만나 자신의 인간적, 학문적 폭을 키우고 큰 학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를 맞는다. 정판룡선생은 1950년대 중반에 쏘련 류학을 떠나 모스크바대학교에서 후보 박사 학위를 따낸 외국문학 학자이다. 정판룡선생은 국제적 시야를 지닌 학자였을뿐더러 뛰여난 식견과 드넓은 흉금, 문화 융합적 리념으로 시대를 선도한 대가였다.

선생이 대학에 입학하였을 때는 정규적인 교육이 불가능하였다. 학생들은 1년 간, 연길에서 북쪽으로 수십키로 떨어져있는 황초구(黄草沟) 학교농장에 이르러 오전은 로동을 하고 오후에야 수업을 보곤 하였다. 그 때 정판룡선생은 기숙사 구들 우에서 흑판이나 준비된 강의안조차 없이 즉흥적으로 엥겔스의 《반 듀링론》을 강의하였다고 한다. 시공간의 무한성이며 물질과 정신의 관계 등에 대한 명쾌한 해석들이 선생의 마음속에 현상 너머의 철학적 세계에 대한 탐구심과 동경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1978년 7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선생은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 중국현대문학강좌에 교원으로 남게 된다. 이에 학부장이였던 정판룡선생은 선생더러 중산대학교 중문학부에 이르러 1년 간 연수를 하고 돌아오라고 하명한다. 명문대인 중산대에는 거물급 학자들이 많으므로 “중산대학교에 가서 학문이 무엇인가를 알고 오오. 큰물에서 큰 고기가 노는 법, 사람도 깊은 물에 들어가보아야 용기도 생기고 지혜도 커지는 법”(4) 이라며 선생을 격려하였다고 한다.

1979년 2월 21일, 선생은 사흘 간 꼬박 일반석에 앉아 광주에 이른다. 연수 기간 지도교수인 중문학부 학부장 오굉총(吴宏聪)은 항일전쟁 당시 곤명에서 설립되였던 전시 림시 대학인 서남련합대학교 출신으로서 중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학자인 문일다선생의 애제자이기도 하였다. 중산대학교에서 선생은 중국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를 하게 되였으며 로신 연구로 유명한 진측광(陈则光)교수의 명강의를 들으며 로신문학에 심취되기도 한다. 불타는 학구열에 선생은 연수기한을 1학기 더 늘였으며 중국 고전문학과 고대한어를 포함한 다양한 학과목들을 청강하였다. 이처럼 중산대학교에서의 공부는 선생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학문적 눈높이를 키워주었을뿐더러 중국의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에 대한 탄탄한 소양을 갖출 수 있도록 함으로써 선생이 장차 중·한 비교문학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학문적 기반을 다져주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광주에서의 생활은 가난의 련속이였다. 선생의 월급은 고작 38원이였는데 호조금 5원과 식비 29원을 빼고 나면 한달에 4원 정도 남곤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선생은 중문학부 자료실을 통해 많은 책을 구입하다나니 88원이라는 거금을 빚지게 되였다. 마침 약혼녀 김인옥(金仁玉)녀사가 결혼식에 입을 진품 외투를 사오라고 일금 150원을 보내오는데 선생은 그 돈으로 밀린 책값을 물고 대신 값싼 ‘짝퉁’ 외투를 사서 돌아간다. 그 사실이 나중에 들통이 나고 말아 친인척 간에 유명한 일화가 되기도 하였다.

1980년 2월 선생은 대학 동기이자 평생의 반려자인 김인옥녀사와 결혼을 한다. 사모님은 장녀로 태여나 성품이 너그럽고 의연한 분으로서 사정이 어려웠던 시댁 식구들을 오랜 세월 일일이 보살피며 선생을 열심히 내조한 분이다. 또한 선생께서 마음 편히 공정한 공직생활을 할 수 있도록 여러차례 연변대학교 교수로의 전근기회를 단호히 물리치고 연변조선족자치주 번역국에서 전문가로서 많은 성과를 내신 분이다. 

결혼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은 중국 교육부의 외국류학연구생시험에 합격하여 1982년 9월에 김일성종합대학교로 떠나게 된다. 그 때 역으로 환송을 나온 정판룡선생은 꼭 학위를 받아가지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선생은 김일성종합대학교 박사원에서 리동원(李东源)교수를 지도교수로 현대문학을, 김춘택교수에게서 고전문학을 공부하게 되며 1985년 4월 15일 문학 준박사학위를 수여받는다. 

나중의 일이지만 선생은 1992년 3월에서 5월까지 방문학자로 한국의 한양대학교를 다녀왔으며 방문 기간 고전문학연구회, 민족문학사연구회, 동방비교문학연구회 등 학회의 월례 학술회의에 참석하여 론문을 발표함으로써 한국 학계와도 많은 학문적 소통을 하게 된다. 또한 1995년 7월에서 1996년 1월 사이에는 국제교류재단의 지원을 받아 특별연구원으로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에 머물면서 서울대 조동일교수, 고려대 정규복교수, 성균관대 임형택교수 등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문학 연구자들과 창작과비평사의 백낙청, 최원식 등 저명한 학자들과도 인연을 쌓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력으로 하여 선생은 남북을 아우르는 포용적인 학문적 시야를 갖출 수가 있게 되며 학문 활동의 폭도 넓혀갈 수가 있었다. 

평양에서의 류학생활을 마치고 모교로 돌아온 선생은 1987년 9월에 정판룡선생을 지도교수로 모시고 리암, 김관웅 등 선생과 동기로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된다. 정판룡선생은 박진석, 리홍순, 주홍성, 주칠성, 허호일 등 연변대 최고의 학자들을 조직하여 연변대학교 1기 박사연구생들을 위해 조선사, 동방철학사, 일본문학사 등 다양한 학과목을 개강함으로써 이들의 학문적 폭을 키워주기에 힘쓴다. 

1990년 3월, 선생은 박사학위청구론문 <조선중세기 북학파문학연구-청대문학과의 관련성 겸론>의 집필을 완성하였다. 정판룡선생의 요구에 따라 중국어로 론문을 작성하여야 했고 이에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였다. 특히는 보풀이 일 정도로 현대한어사전, 수사학사전, 문학묘사사전 등 중국어 사전을 뒤졌다고 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학위론문을 완성한 선생은 다음과 같은 체득을 얻는다. “첫째, 학문은 노력의 결정체이며 둘째, 연구자 인격의 반영이며 셋째, 연구시각과 방법론이 성패를 결정하며 넷째, 학문적 열정이 곧 론리의 힘으로 작용하며 다섯째, 성실하게 타인의 성과를 받아들여야 좋은 론문이 된다.”(5)

1990년 6월 27일, 박사학위론문 심의를 통과한 선생은 연변대학교에서 양성한 첫 박사가 되였다. 이에 9월 26일, 연변대 본관 4층 회의실에서 성대한 학위 수여식이 거행되였는데 선생은 겸연쩍다 하여 학위복 착용을 한사코 거부하다가 지도교수인 정판룡선생에게서 꾸중을 당하기도 하며 선생에게 학위증을 수여한 박문일교장이 학위모의 술을 왼쪽으로 돌려주는 것을 잊고 지나치는 등 적지 않은 일화를 남기기도 한다. 

《맹자》에 이르기를 “하늘이 장차 한 사람에게 큰 소임을 맡기려 할 떄에는 필시 그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몸을 고단하게 하며 배고픔과 야윔에 시달리고 가난케 하며 하는 일을 어지럽힘으로써 마음을 움직이고 강인함을 키워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 법이다.”라고 하였으니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던 선생의 성장 과정과 늘 힘겨운 고비를 넘겨야 했던 배움의 길은 선생을 대성(大成)으로 이끈 시대적 기운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의 바탕에는 어머니에게서 터득한 사랑이, 큰형에게서 자극된 세상을 향한 진취적 욕구가, 스승이신 정판룡선생을 모시고 갈고 닦은 인간적 폭이 아로새겨져있다 할 것이다. 

 

2. 학문적 폭과 깊이

1990년대 중반 선생은 중국 조선-한국학연구의 대표적인 학자로 부상한다. 이는 개혁개방 이후의 사회적 성과와 탈랭전시대의 세계사적 변화가 맞물리는 시점에 선생이 조선-한국학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지난 시기 불안정한 시대적 상황과 지역적 한계, 중국어와 외국어에 능란치 못한 언어적 한계 때문에 중국조선족 학자들의 학문 활동이 미비하였던 상황에서 왕성한 학문 활동을 통해 조선-한국학연구의 폭을 넓히고 새로운 리론적 높이에로 끌어올렸으며 그 영향력을 널리 과시하였던 까닭이다.

선생의 학문적 업적은 우선은 근대 이행기를 기점으로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고 중·한 비교문학연구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어냄으로써 폭넓은 학문적 령역을 개척해냈음에 있다. 

선생의 본격적인 첫 학문성과로는 김일성종합대학교 준박사학위 청구 론문인 <조선 근대소설에 대한 력사적 고찰>을 들 수 있는데 선생은 2년 반 동안의 심혈을 기울여 1984년 12월에 원고를 완성하고 1985년 2월에 론문 심의를 통과한다. 계몽기 소설을 총괄적으로 다룬 이 론문은 그간 학계에서 간과되여오던 1910년대의 많은 작가와 소설들을 새롭게 발굴하고 근대소설 창작의 문학사조적 특징과 창작방법 등을 천명함으로써 근대소설의 전체적 양상을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특히 선생의 학문적 출발로서 이 론문이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조선문학은 물론 동아시아문학 전반에 있어서도 근대이행기는 커다란 분수령이였으며 근대이행기란 고전과의 내적인 계승 관계를 지니고 있는 한편 근대적 기획의 다양한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선생은 지도교수인 리동원선생으로부터 신채호 문학유고가 인민대학습당에 소장되여있음을 알게 되자 1984년 겨울 학위론문 집필이 끝나는 대로 자료 수집과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3개월 동안의 자료 수집에 이어 선생은 다시 3개월의 시간을 리용하여 20만자에 달하는 저서 《신채호 문학연구》를 탈고한다. 선생은 신채호선생의 애국정신과 통찰력, 달필에 심취되여 밤낮 없이 붓을 달렸으며 그 유고도 정성껏 필사하였는데 손에 물집이 생겨 늘 붕대를 감고 글을 써야 했다. 이에 김일성종합대학교 위생소에서는 의사를 파견하여 한주에 한번씩 치료를 해주었다고 한다. 단재 사상의 변화 과정과 미학사상, 다양한 쟝르에 걸친 문학 창작에서 보여준 주제와 예술성 등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와 평가를 시도한 《신채호 문학연구》(1989)는 나중에 중국과 한국에서 출간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북경대학교의 박충록교수가 서평을 써주었고 한국에서는 문학과지성사의 김병익선생이 일면부식의 한 젊은 해외 학자를 위해 단행본 서언을 써주었다. 신채호의 문학창작에 주목한 첫 연구로서 이 저서는 국내외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별도로 편집 출간한 《신채호 문학유고선집》(1995)과 함께 지금까지도 신채호 연구의 귀중한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선생은 <단재 신채호의 철학과 그 인간상>(2014) 등 10여편의 론문을 발표하여 신채호와 아나키즘의 관련성, 중국에서의 활동 등에 대해 지속적인 보완작업을 이어갔다. 

다시 선생은 박사학위 과정을 거치며 보다 앞선 시기인 자발적인 근대적 사상이 태동하던 18세기 실학파 문학에 관심을 지니게 된다. 특히 <域外 视角: 청나라 문학에 대한 조선 북학파의 비평과 수용>은 1991년 정상급 학술지 《외국문학연구》에, <조선 북학파문학과 청대시인 王士祯>은 2002년 중국 최고의 학술지인 《문학평론》에 발표가 되면서 중국학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기도 한다. 또한 박사학위론문 《조선중세기 북학파문학연구-청대문학과의 관련성 겸론》(중문판, 연변대학출판사, 1990)은 북학파를 하나의 문학류파로 파악하고 그 형성 발전 과정과 문학관, 미학, 작품 창작의 실제와 의의 등을 체계적으로 접근, 론의했다는 점에서, 북학파문학과 청대문학 간의 관련성을 처음으로 전면적으로 천명하였다는 점에서, 비교문학, 수용미학,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방법론과 리론적 시야를 동원해 고전문학연구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 등에서 론문심사위원회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북경대학교의 위욱승(韦旭升)교수는 한국의 조동일교수에게 “중국의 외국문학 박사학위론문으로서는 최고의 수준이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론문은 나중에 연세대 허경진교수의 주선으로 한국에서도 단행본으로 출간이 되며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문학 연구자들인 정규복, 임형택 등 교수들도 선생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내 그 발상의 새로움이나 론리적 힘을 긍정하기에 이른다.

선생은 북학파문학연구를 통해 자신의 학문적 령역을 고전문학으로 확대하였을뿐더러 특히는 중국문학과의 관련성 연구에 주목함으로써 학문적 폭을 크게 확장하였다. 중·한 비교문학연구를 통해 선생은 중국문학과 영어·로씨야어문학연구가 주도적인 중국 주류학계에서 조선-한국문학에 대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었다. 편저인 《조선문학의 발전과 중국문학》(1994), 《조선 실학파문학과 중국문학의 관련성 연구(전2권)》(2007) 등과 <량계초와 조선근대소설>(1993), <《韩客巾衍集》과 청대문인 李调源, 潘廷筠의 문학비평>(2001), <연암소설과 로신소설의 비교문학적 고찰>(2002) 등 론문들을 통해 선생은 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중·한 비교문학의 새로운 과제들을 개척하였다. 

선생은 근·현대문학연구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는바 주요 론문으로는 <조선 모더니즘 시인 정지용의 시 창작 연구>(2002), <동아시아의 근대화와 중국에서의 한국형상: 梁启超의 ‘朝鲜哀词五律24首’를 중심으로>(2005), <抵抗과 想象: 망명공간과 中国体验叙事-류자명의 산문의 경우>(2017) 등이 있다. 실제로 근·현대문학과 고전을 아우름으로써 선생은 중국에서의 조선-한국문학 연구령역을 넓히고 수많은 차세대 학자들을 양성해낼 수가 있었다. 실제로 선생의 많은 제자들이 현재 학계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이들은 고전문학, 근대문학, 현대문학, 중국조선족문학 등으로 학문적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 이에 동아시아 한문학 연구의 대가인 남경대 장백위(张伯伟)교수는 “중국의 한국학 영재는 모두 김문(金门)에서 양성되였다”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 바가 있다.

다음으로 선생의 학문적 업적은 시대에 앞서 남과 북을 아우르는 통합적 연구시각을 이루어내고 새로운 리론과 연구방법론을 도입함으로써 조선-한국문학연구의 풍조를 일신함에 있다. 중·한 수교 이전에 중국에서의 조선 근·현대문학에 대한 리해는 랭전체제의 영향으로 주로 조선의 지식체계에 근거하였으며 리광수, 김동인 등은 물론이요 렴상섭이나 한용운, 정지용 등을 포함한 많은 민족주의 계렬 작가들이 문학사에서 언급조차 되지 못하는 상황이였다. 1994년 선생이 펴낸 《조선문학사(근현대부분)》는 당시의 지적 상황에서 급시우와도 같은 존재였는데 그동안 거의 반 이상이 루락이 되여있던 근·현대 작가, 작품 및 문학적 사실들을 통합적 시야에서 복원한 기념비적 저서이다. 문단상황, 문학사조, 창작방법, 문학비평 등의 발전과정에 대해 깊이 있게 서술하였으며 그 체계성과 론리성의 명징함, 풍부한 문학적 사례 등으로 선후하여 4번에 걸쳐 간행을 거듭하며 지금까지도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 및 기타 중국 내 한국어학과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로 빛을 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선생은 다양한 리론적 시야를 조선-한국문학연구에 도입함으로써 중국 내 주류 학계와의 학문적 대화와 소통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일찍 <조선 북학파문학과 청대시인 王士祯>(1989)에서는 수용미학 방법론을, <량계초와 조선근대소설>(1993)에서는 비교문학에서의 영향연구 방법론을 활용하고 있으며 <‘호질’ 신론: 범의 형상분석을 중심으로>(1992)에서는 원형 비평 방법론을, <철리소설 ‘의산문답’에 체현된 홍대용의 철학사상과 문화의식>(1995)에서는 맑스주의 철학리론을, <동아시아 근대지향의 태동과 조선지식인의 자각-연암에서 로신에 이르기까지>(2005)에서는 비교문학에서의 류형학 방법론을, <대화와 상상: 단재 신채호의 동아시아 인식과 근대상상>(2016)에서는 탈식민주의 비평리론을 활용하여 연구의 깊이를 더하는 한편 연구의 다양성을 기하기도 하였다. 

방대한 량의 저술을 펴낸 선생의 학문적 업적은 쉽게 정평을 내리기가 힘들다. 특히 로익장으로 선생의 학문연구는 지금도 진행형인바 2014년 10권으로 된 《중국현대문학과 한국 자료총서》를 펴낸 데 이어 2016년에는 <중·한 근·현대문학 교류사 문헌정리와 연구>로 조선족 학자로서는 최초로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가장 무게 있는 연구 프로젝트인 국가사회과학기금 중대과제를 따냈다.

그럼에도 굳이 선생의 학문 전반에 관통된 학술사상을 언명한다면 특히 두가지가 주목된다. 

우선 선생은 인간의 주체적 노력에 의한 사회발전관에 기초하여 꾸준히 북학파문학 및 근대문학이 담지하고 있는 근대지향성과 원동력을 밝히는 데 주력하여왔다. 선생의 제자인 류연산은 “선생님의 학문과 인격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 두분” 가운데 한분이 신채호라고 지적한 바가 있다.(6) 선생이 신채호를 사표로 삼은 데는 무엇보다도 단재의 인격적 독립성과 주체성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근대적 혁신을 위해 기울인 노력과 신념에 체현된 미래지향적 가치에 주목하였기 때문이다.

선생이 북학파문학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지닌 리유 또한 중세의 암흑에서 헤쳐나기 위하여 미래적인 지향을 보인 력사적 주체들에 대한 긍정에서이다. 선생은 박지원의 소설 <호질>에 대하여 그 문화적 반성을 높이 평가하며 “이 소설을 통하여 독자들은 중세기의 어둠 속에서 몸부림친 18세기 지성인들의 웨침을 엿듣게 된다. 그것은 그대로 력사의 교체기를 자각한 조선의 웨침이였고 시대의 웨침이였다.”(7) 고 평가하고 있다. 선생이 <동아시아 근대지향의 태동과 조선지식인의 자각-연암에서 로신에 이르기까지>(《한국한문학연구》 36, 2005)에서 근 150년이라는 시간을 뛰여넘어 현대 중국의 대문호 로신과 18세기 조선조 박지원의 문학사상을 비교할 수 있었던 것도 두 작가 모두가 시대가 부여한 소명을 다한 선구자라는 인식에서였으며 시대를 앞서간 연암의 근대지향성과 로신의 투철한 근대 계몽적 정신이 내적 동질성을 지니고 있음에 주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의 이러한 학문적 사상은 다난한 사회적 현실을 이겨온 선생의 삶의 현장에서의 고투 및 그 체험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신이 몸소 겪은 사회적 변화의 현장에서 선생은 사회적 합리성과 ‘진보’를 갈망하여왔으며 개개인의 삶에 미치는 그 진실한 영향과 의미를, 그리고 시대를 개척하는 인간의 주체적 노력과 선구자적 투혼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를 깊이 있게 체득하였던 까닭이다.

다음으로 선생의 학문적 사상은 타문화에 대한 포용적이며 개방적인 자세와 문화의 상생적 가치에 대한 긍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선생이 주된 학문적 대상으로 하였던 신규식, 신채호, 류자명 등 근대적 인물들이나 북학파 문인들은 모두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나든 초월적 인물들이였으며 그들의 중국서사 혹은 연행문학은 중·한 문화 융합지대 혹은 탈경계적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선생이 북학파문학에 대해 큰 관심을 지녔던 또 하나의 리유는 “북학파들은 명을 ‘대중화’(大中华)로 보고 조선을 ‘소중화’(小中华)로 보면서 청清을 오랑캐(胡)로 보던 기성된 인식에서 뛰여나와 자신들을 스스로 ‘호(胡)’로, 청과 같은 존재임을 시인했고 아울러 청과 화하(华夏)를 평등한 것으로 인식하였다.”(8)는 평가에서 보다 싶이 문화적 평등관에서 기인한 것이였다. 그리고 이러한 평등관은 문화적 교류에 있어서 주체성이 지켜질 때 가능한 것이였다. 선생은 <조선 북학파문학과 청대시인 왕사정>에서 북학파 시인들의 시문이 청 문단에서 일으킨 큰 반향을 강조하는 동시에 “북학파 문인들의 왕사정 및 그 문학에 대한 수용과 창조적 응용은 조선문학의 대외적 영향력을 확대하였으며 중·조 문학의 쌍향교류를 힘있게 추진하였다”(9)며 일방적인 영향관계를 넘어선 상호 영향 관계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선생은 나아가서 문화융합과 그 상생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량계초의 수용을 두고 선생은 “조선 근대소설에 미친 량계초의 영향은 일면으로는 량계초 소설리론의 시대성과 국제적 의의를 충분히 과시하며 타면으로는 중·조 두 나라 근대소설발전의 융합성과 생명력을 실증해주기도 한다.(10)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선생은 반일투쟁 과정에서 이루어진 중·한 련대가 지닌 반폭력, 반파쑈적 성격과 의미를 높이 사며(11) 류자명의 중국체험 서사를 자신의 언술능력을 상실한 식민지 지식인이 중국이란 제3의 공간에서 저항담론을 일구어냄으로써 “조선민족의 정신사적 공백을 망명공간에서 슬기롭게 메워나간”(12) 사례라고 파악함으로써 근대 중·한 관계의 복합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선생은 일찍 중국조선족 문화를 론함에 있어서 중국조선족은 중·한 문화교류에 있어서 단순한 가교적 역할이 아니라 문화융합 촉진의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선생은 “오늘 우리 민족은 중국이라고 하는 이 망망대해의 한汉문화권에서 자신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있다”는 현실인식에서 출발하여 주체민족인 한족과의 문화적 교류를 끈질기게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13) 즉 선생은 문화경계 공간에서의 삶의 체험을 통해 민족문화와 중국문화라는 두개의 좌표축 내에 스스로를 위치함으로써 협소한 민족인식 혹은 문화관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상보·상생의 가치 탐구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3. 실천하는 지성인

선생은 1990년 3월, 박사학위 청구론문의 집필을 완성하자 바로 조선언어문학학부 부학부장을 맡게 되며 2년 뒤인 1992년 3월에는 학부장을 맡게 된다. 그 때만 하여도 학과 내의 학문적 분위기가 저조한 상황이였다. 이러한 시기에 선생은 ‘정판룡 교육종사 40주년 학술회의’를 조직하여 학과 내의 학문적 분위기를 쇄신하고 1992년 8월에는 전국적인 규모의 ‘중국조선민족문화학술회의’를 개최함으로써 중국조선족 학계의 학문적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학문적 소통과 교류를 무엇보다 중시하였던 선생은 그 이후로도 국제고려학회 문학분과 주최의 ‘세계 조선민족문학’ 국제학술회의(1997), 중국조선-한국문학연구회와 한국한문학연구회의 공동 주최로 된 ‘한문학의 전통과 전망’ 국제학술회의(1999), 창작과비평사와 공동으로 주최한 중·한 수교 10주년 기념 학술대회인 ‘중·한 문화교류의 력사와 전망’ 학술세미나(2002.7) 등 영향력이 큰 학술행사들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1992년 9월, 선생은 연변대학교 교무처장으로 임명이 되여 1996년 6월까지 4년간 중임을 맡는다. 일찍부터 학문에만 뜻을 둔 선생은 이를 여러차례 사절하나 결국 학교 지도부의 간곡한 당부에 등이 밀려 본격적인 학교 행정 직에 몸을 담그게 되였던 것이다. 임직 기간 선생은 중국에서 가장 선도적으로 학점제 교무 관리 시스템을 개발하여 연변대학교에 도입한다. 선생은 학점제란 시장경제라는 보다 거시적인 사회적 변화와 맞물린 대학제도 개혁의 핵심적 사안임을, 학생의 종합 능력과 개개인의 창의력 양성에 그 취지가 있음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미국, 일본, 한국 등 여러 나라 대학들의 앞선 경험을 널리 수용하여 선생이 몸소 집필한 <연변대학 학점제 방안>은 기타 4개 대학의 실천안과 함께 학점제 개혁의 전범으로 뽑혀 청화대학출판사에서 묶은 단행본 《중국학점제》에 수록이 되며 길림성 교수연구 성과 1등상을 수상한다. 

한편 선생은 연변대학교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젊은 교원들의 양성 특히는 학문적 시야를 넓혀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으며 이에 이들의 외국류학을 적극 주선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3년 사이에 영어와 일본어 등 출국 류학시험에 통과하였으나 마땅한 대학교와 련락이 닿지 않아 류학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22명의 젊은 교원을 전부 외국의 대학교와 연구기관으로 파견하였다. 특히 선생은 한국의 대학교들에 일일이 편지를 보내여 연변대학교의 교원과 직원들이 연수를 다녀올 수 있도록 지원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선생은 교무처장 임직 기한이 끝나는 대로 학과에 돌아가 학자로서의 삶에 전념하려 하였으나 교육부의 개혁조치에 의하여 연변대학교과 연변의학원, 연변사범고등전과학교, 연변농학원, 연변예술학원 등 연변의 5개 대학이 합병을 하게 되면서 박문일 교장의 부름을 받아 1996년 7월에 사범학원 원장을 맡게 된다. 당시 연변대학교 사범학원은 교수진과 학생이 모두 한족 위주인 단과대학 연변사범고등전과학교와 구성원 대부분이 조선족인 연변대학교의 일부 인문학과를 합병한 대학이였으며 교직원 360여명에 학생 3000여명의 큰 규모였다. 선생은 학생 자질 양성을 위한 사범교육 개혁을 중심으로 학과 간 모순을 봉합하였고 인내심과 포용력 그리고 공정성과 원칙성을 지킴으로써 사범대학 내의 진정한 융합과 민족단결을 추진하였다. 

그 이후, 선생은 1998년 11월에 부교장으로 발탁이 되고 다시 2003년 1월에는 교장으로 임명이 되여 2012년 6월에 이르기까지의 9년 반 동안 연변대학교의 최고 지도자로서 소임을 다하게 된다. 선생은 교장 임직과 동시에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도 당선이 되여 직업 행정인의 길을 걷게 되였지만 스스로를 랭정이 반성하면서 학자로서의 신념을 버리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였다고 한다. 이에 선생은 중국조선족 교육과 문화 및 학문 발전을 위한 지성인으로서의 력사적 소명을 다하는 한편 ‘학자형 교장’의 길을 걸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연변대학교는 비록 1996년에 연변 지역 5개 대학의 합병을 완성하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모양새에 그치고 실질적인 융합을 이루지 못한 상황이였다. 이에 선생은 연변대학교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내적인 통합이 가장 주된 숙제라고 판단하였으며 우선 설립 50년이 넘도록 명문화되지 못한 학교 교훈과 건학리념 등을 정비함으로써 대학정신을 새롭게 부각하는 작업에 착수를 하였다. 연변대학교의 건학 취지와 정신사적 의미들을 깊이 있게 읽어내기 위하여 선생은 연변대학교의 많은 학자들과 의론, 소통을 거듭하였으며 친히 수많은 자료들을 섭렵하면서 연변대학교의 력사에 대해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력사 현장 속에 살아있는 선현들의 지혜와 참된 뜻을 추출해내게 된다. 선생이 몸소 정립한 연변대학교 교훈인 ‘진리, 선행, 융합’에는 지식과 사물의 궁극적 원리에 대한 추구라는 대학의 기본 정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사회에 대한 기여라는 휴머니즘적 인문정신 그리고 다민족, 다문화, 다원적 가치의 융합이라는 연변대학교의 지역적, 구성적 특징에 기초한 문화존중과 가치창조의 정신이 담겨져있다. 이와 함께 선생은 주변부만이 지닌 문화적 힘을 자각하고 다문화 경계지대의 우세를 살리며 학문을 중심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질 높은 대학교육을 실시하는 등을 골자로 하는 구체적인 건학리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 선생은 제도적 역할을 중시하여 학문성과를 주된 평가기준으로 하는 인사제도와 장려제도를 확립함으로써 효과적으로 학문 연구에 대한 교수들의 열의를 동원하였다. 선생이 갓 교장으로 부임하였을 때 연변대학교는 대학 평가에서 길림성 6위에 그쳤으나 2006년에는 3위로 부상하였으며 2012년에는 중국 내 126위로 부상하였다. 실제로 SCI 등재지 론문의 경우만 하여도 2002년의 30편에서 2012년의 300편으로 급증하였으며 조선언어문학학과가 국가 중점학과(2004)로, 조선-한국연구센터가 교육부 중점연구기지(2006년)로, 장백산 생물자원과 기능분자 실험실이 교육부 중점실험실(2007)로 선정되여 정부지원을 받게 되였다.

교장 재임기간 선생이 이룩해낸 주요한 성과의 하나는 세간에서 ‘제2의 창업’으로 일컬어진 연변대학교 캠퍼스 확장공사이다. 1949년에 개교한 연변대학교는 1958년에 연변대학교, 연변의학원, 연변농학원, 연변공학원으로 나뉘였으며 나중에 설립된 연변예술학원까지 포함하여 연길시 및 룡정시의 여러 캠퍼스에 나뉘여져있었는데 수십년 간 각자의 전통과 시스템을 지니고 있다나니 행정효률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 자원에 대한 랑비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캠퍼스 확장공사는 2004년에 기획을 시작하여 2007년에 착공을 하였고 2010년 8월에 이전이 끝났으며 2011년 5월 16일에 준공식을 마무리하였으니 실로 ‘대장정’이라 표현할 만한 것이였다. 그 과정에서 선생의 로고 또한 막심하여 후두염으로 수술을 받게 되여 캠퍼스 이전식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등 인고의 시간을 견디여내야만 했다. 2010년 8월 28일 이전식이 진행되는 날, 선생은 북경의 한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있었다. 수많은 위로의 문자 메시지가 날아들자 선생은 그간 뜻을 함께 한 이들에게 “장백산의 기상과 두만강의 랑만에 실려 통합캠퍼스 공사를 끝낼 수가 있었습니다.”라는 진정어린 메시지를 날린다.

또한 선생이 2003년 교장에 부임하였을 때 연변대학교의 채무는 그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수자에 가까운 3억 2천원이였다. 이에 선생은 정부의 자금지원, 은행대부금과 사회자금의 유치 등을 위해 불철주야 동분서주하였으니 선생이 친히 방문한 국가와 각급 정부의 지도자, 기업 총수들은 100명을 훨씬 넘는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선생은 여러번 병환으로 몸져누웠으나 “연변대학교를 위해 지탱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겨냈다. 한편 젊어서부터 학자로서 고고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선생은 “연변대학교를 위하여 머리를 수그려야 한다”, “연변대학교를 위한 일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곤 하였다고 한다. (14)

2005년 선생은 연변대학교를 ‘성부공건(省部共建)’ 대학교로 격상시키기 위하여 여러차례 교육부 주제(周济) 부장을 방문하였다. ‘성부공건’이란 준교육부 직속 대학교로 인정을 받아 교육부와 소속 성정부에서 공동으로 중점 지원하게 되는 국가차원의 프로젝트였는데 연변대는 이미 서부건설 대학으로 선정된 탓에 중복지원이 불가능한 상황이였다. 교육부를 찾아간 선생은 정문 초소에서 검문에 걸리면 다시 뒤문 초소를 찾아가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증을 내보이고 들어갔으며 부장이 난색을 지으면 ‘앉아 버티기’, 끈질긴 설복과 협상 작전을 벌였다. 선생은 처음부터 연변대학교 통합캠퍼스 추진을 제안한 바 있는 주제 부장에 대한 믿음으로 “민족지역 대학인 연변대학교의 건설은 교육부와 길림성정부의 공동 건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장님과 저 역시 소명을 다해야 하는 력사적인 사안입니다.”라고 맞장을 뜨기도 하였다. 침묵이 이어지던 중, 주제 부장은 선생이 그간 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부황을 뜬 자국이 목덜미에 선명히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초지종을 묻고 나서 크게 감동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연변대학교는 끝끝내 ‘성부공건’ 대학교로 선정이 되며 해마다 정부로부터 2천만원에 이르는 지원금을 받게 되였을뿐더러 캠퍼스통합에 필요한 토지 양도세의 반환 등 여러가지 정책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였다. 

연변대학교의 캠퍼스 확장공사는 그 전체 면적이 57.36만평방메터, 건축면적이 총 37.5만평방메터이며 투자금액은 14억 8천만원에 달한다. 선생은 재임 기간 연변대학교를 위하여 38동이나 되는 강의동과 기숙사 등 현대식 건물들을 신축하였다. 더우기는 룡정시에 있는 농학원 부지를 그대로 보유한 채 자신이 임직하기 전에 이미 있던 학교 채무조차 대폭 줄였으니 사업가로 비유하여도 그만한 업적을 이루기가 힘든 것이였으며 력사적 사명감이 없이는 도무지 불가능한 불가사의를 이루어냈다고 할 것이다. 

교장 재임 기간에 선생은 행정 관료가 되고 마는 것을 스스로 늘 경계하였으며 중국조선족 학계의 학문적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선생은 한국 고등교육재단의 후원에 힘입어 연변대학교 아시아연구센터를 설립하고 110만딸라의 지원금을 유치하여 ‘와룡학술상’을 설치하고 학술 년례행사인 ‘두만강포럼’을 개최하였다. 또한 일본의 마루한회사 및 북경 억리(亿利)그룹의 후원을 받아 장백산 생물자원과 기능분자 실험실 주관의 ‘장백산포럼’을 개최함으로써 두 포럼이 자연과학 분야와 인문과학 분야의 2대 학술 브랜드로 성장하게 하였다. 한편, 선생은 한국녀성문학회의 지원으로 룡정시 비암산 기슭에 ‘강경애 문학비’(1999.8.8)를 세웠으며 중국조선족 문화단체의 지원으로 연변대학교 캠퍼스 뒤동산에 ‘정판룡 문학비’(2004.10.7)를 세움으로써 선현들의 문학적·학문적 정신을 계승하는 작업에도 앞장섰다. 

특히 선생은 연변대학교에만 그치지 않고 다양한 학술활동을 통해 중국조선족학계와 중국 조선-한국학연구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선생은 중국의 《문학평론》, 《외국문학연구》, 《사회과학전선》, 《외국문학》, 《민족문학》 등 정상급 학술지에 많은 론문을 발표하여 학자로서의 학술적 영향력을 확대하여갔을뿐더러 정판룡선생의 뒤를 이어 중국 조선-한국문학연구회 회장의 중임을 맡아 학회를 개편 확대시켰으며 중국비교문학학회 리사(2002)와 상무리사(2014), 동방문학연구회 부회장(2005), 길림성사회과학련합회 부주석(2003) 등 주요 학술단체의 중임을 맡음으로써 중국 주류학계에 한국학의 가치와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실로 선생은 중국조선족을 대표하는 교육가이자 사회 지도자로서 소신 있는 삶을 살아온 분이다. 선생은 확고한 교육·사회 리념을 지니시고 몸소 실천하신 분으로서 그것은 우선 학문과 인격의 독립성을 으뜸가는 가치로 내세웠음에서 볼 수가 있다. 

선생은 학문에 대한 사랑과 집요함이 유난했다. 보직생활 내내 연구와 글쓰기를 멈춘 적이 없었음에도 선생은 행정에 몸 담고 있는 자신을 ‘반쪽학자’라고 자평하곤 하였다. “저명한 국문학자이신 서울대학교의 조동일교수 앞에서 스스로 반쪽학자라고 평하였을 때 조교수는 ‘민족대학을 위해 봉사해왔다는 하나만으로도 뿌듯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하였다.”(15) 달리 보면 이는 선생이 얼마 만큼이나 학문에 대해 신성시하고 소중히 여겼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선생은 학문의 근본적 의미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이는 중국조선족 정신사의 귀한 전범이 되고 있는 《와룡산 일지》에서 많은 례를 찾아볼 수가 있다. 연변대학교의 선현들을 기리는 50만자에 달하는 《와룡산 일지-인물로 보는 연변대학의 력사와 전통》은 선생이 2009년 개교 60돐을 계기로 2012년까지 지속적으로 창작한 실기 작품이다. 선생은 2005년 5월부터 심한 불면증에 시달려 그 이후로는 매일 수면제를 복용해야 했다. 이에 선생은 밤마다 객실에 나와 밥상을 마주하고 《와룡산 일지》를 쓰면서 선현들과의 령혼의 대화를 통해 그 불면을 치료하였다고 한다. 그 글들에서 선생은 대학의 가치를 사회의 세속적 특징과의 차별성에서 찾고 있다. 선생은 “행정권력중심이 아닌 학술전문가중심, 대학자치 혹은 학술자치, 나아가서 학자의 인격독립은 대학문화정신을 지켜가는 담보”(16)라 보았으며 교수는 대학의 령혼이고 대학운영의 주체임을 강조하고 있다. 

선생은 실생활에 있어서도 늘 학문연구를 첫자리에 두었다. 4년 동안 연변대학교 교무처장으로 있으면서도 대외 교섭이나 술자리 등을 모두 외면한 채 근무 이외의 모든 시간을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래서 정부 기관이나 중학교, 교장들조차 선생이 연변대학교 교무처장인 줄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가 하면 부교장으로 승진 결정이 내려졌을 때 길림성당위 조직부의 지도자가 선생에게 그 소식을 알리며 소감을 물으니 “별다른 느낌이 없다.”고 하여 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선생이 연구생 강의를 하면서 사무실 전화선을 뽑아버리고 출입문에 ‘수업중,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큼직한 글자를 써서 붙인 일은 유명한 일화이다.(17) 선생은 아무리 공무가 바쁘더라도 “집에 들어오면 먼저 책상머리에 앉아 책을 뒤적거려야 되고 침대에 누워도 꼭 책을 몇줄 보고야 잠들 수 있다. 출장 가도 책을 갖고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꼭 무엇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토요일, 일요일이면 반드시 시간을 충족히 내여 책을 읽어야만 시름이 놓”(18)여하는 성품이였다. 

다음으로 선생의 교육·사회 리념으로는 합리적이고 진취적인 사고에 기초한 지식인의 사회적 사명감을 중요시하고 있음을 들 수가 있다. 선생은 교육은 미래를 위한 사업으로서 “대학은 인재양성, 과학연구, 사회봉사를 중요한 사명으로”(19) 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선생은 연변대학교 초대교장인 주덕해의 공적에 대해서도 지방병 예방치료, 사과배 재배, 연변황소 신품종 육성 등에 기울인 노력을 들면서 연변대학교가 ‘지역경제와 사회발전의 견인차’로서의 역할을 수행케 하였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외에도 선생은 지성인의 사회적 사명감을 높이 평가하여 조선족 의학자 로기순박사에 대해서 “개인의 영달과 명예보다는 연변인민들의 부름을 따랐다. 이것이 바로 의사이며 학자인 로박사의 인격적인 매력이다.”(20)고 보고 있다.

2012년 8월 16일, 선생의 교장 퇴임식에서 당시 연변대학교의 당위서기였던 김웅선생은 “김병민 교장은 학문을 숭상하고 진리를 추구할뿐더러 지고의 선과 조화로움 및 공존의 정신을 사랑하는 인격자이며 겸허하고 드넓은 흉금과 과학적인 사고 및 실천적 예지를 지니신 분으로서 국내외에서 공인하는 조선-한국학 연구령역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일뿐더러 연변대학교의 가장 존경스럽고 친근하며 사랑스러운 교장입니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실제로 선생은 연변대학교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학문적·사회적 사명을 다하였을뿐더러 중국조선족 지성사의 미덕을 집대성하고 그 지혜를 일일이 실천하신 분이라 할 것이다. 비록 교장 퇴임식에서 선생은 “연변대학이 한그루 나무라면 나는 이름 없는 나무잎이 되리라.”는 시구로 그 겸허함을 보이고 있음에도 선생은 미시적인 담론이 성행하는 이 지리멸렬한 시대에 학문과 교육 그리고 인격의 근본적인 가치를 몸소 실행하고 주어진 사회적 사명을 다함으로써 직업인이 아닌 가치자(价值者)로서의 길을 당당히 걸어온 지성인이자 사회적 지도자였다. 

2013년 3월 5일, 선생은 한국의 제17회 KBS 해외동포상 인문사회부문상을 수상한다. 수상소감으로 선생은 여생을 학자로 남겠다고 밝힌다. 실제로 2014년 2월, 선생은 명문대인 남경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수석전문가로 초빙되며 같은 해 6월, 산동대학교 인문사회과학 1급 교수로 초빙되여 학문으로의 귀환을 실행하였다. 실로 선생은 가난한 중국조선족 시골 어린이로 태여나 다난한 세월을 거치면서 학문의 길을 통해 변화된 세상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간단없이 스스로를 완성해온 인격체라 할 것이다. “난 큰 일물은 절대 아닙니다. 진실하고 책임성 있게 살았을 뿐입니다.”라는 선생의 자평(21)은 많은 후학들의 심중에 오래도록 메아리로 남을 것이다.


(1)김병민,  <나의 중학생시절>, 《와룡산 일지》, 연변인민출판사, 2013, 415페지.

(2)김병민,  <민족교육가-리희일 서기와 박규찬 교장>, 《와룡산 일지》, 연변인민출판사, 2013, 74페지.

(3)한정일·량고범, <김병민-연변대학 교장>, 《길림신문》, 2006.5.9. A2면.

(4)김병민, <허문섭교수와 그의 환난지우 리해산교수>, 《와룡산 일지》, 연변인민출판사, 2013, 173페지.

(5)김병민, <나의 회억>, 2017년 8월 17일 필자에게 제공한 원고.

(6)류연산, <영원한 선생님-김병민>, 《도라지》 3, 길림시조선족예술관, 2005, 2~11페지.

(7)김병민, <‘호질’ 신론-범의 형상분석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문화연구》 20, 한양대학교출판부, 1992, 85페지.

(8)김병민, <‘호질’ 신론-범의 형상분석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문화연구》 20, 한양대학교출판부, 1992, 89페지.

(9)김병민, <조선 북학파문학과 청대시인 왕사정>, 《文学评论》 4,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2002, 64페지.

(10)김병민·吴绍纨, <량계초와 조선근대소설>, 郑判龙主编: 《조선학―한국학과 중국학》, 중국사회과학출판사, 1993, 327페지.

(11)김병민, <조선의용대 관련 항일서사에 대한 문화적 고찰-‘전선에서의 조선의용대’를 중심으로>, 2017, 미발표작.

(12)김병민, <抵抗과 想象: 망명공간과 中国体验叙事-류자명의 산문의 경우>, 《한국문학과 예술》 21,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2017, 354페지.

(13)김병민, <민족문화 교류사에 대한 반성과 전망>. 《예술세계》 4, 연변인민출판사, 1992, 47~49페지.

(14)김병민, <나의 회억>, 2017년 8월 17일 필자에게 제공한 원고.

(15)전윤길, <원망도 후회도 없는 뿌듯한 삶-연변대학 교장 김병민박사를 쓴다>, 장연하, 전윤길 외, 《신화를 엮어가는 겨레의 선두주자들》, 연변인민출판사, 2013, 47~57페지. 

(16)김병민, <후기>, 《와룡산 일지》, 연변인민출판사, 2013, 422페지. 

(17)최일, <스승, 학자 그리고 교장-연변대학 김병민교수 인상기>, 《문학과 예술》 6, 연변문학예술연구소, 2012, 16~21페지. 

(18)김병민, <독서와 삶의 계시>, 《청년생활》 3, 연변인민출판사, 2003, 17페지. 

(19)김병민, <주덕해교장과 연변대학>, 《와룡산 일지》, 연변인민출판사, 2013, 11페지. 

(20)김병민, <조선족의학교육의 선구자-‘신의’ 로기순박사>, 《와룡산 일지》, 연변인민출판사, 2013, 82페지.

(21)<자화상>, 2017년 8월 13일 김병민선생이 필자에게 보내준 메일.


출처:<장백산>2018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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