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나 큰 떡을 먹고 싶은 욕심이 있다. 시골의 외할머니가 만든 감자지짐은 작고 볼모양이 없어 젊은이들은 대도시의 우유와 빵을 선호한 채 고향을 등지고 멀리 떠났다. 고향 떠나 10년, 20년, 타향에서 돌고돌며 지친 마음에 응어리가 맺혀 귀향길을 선택했다가도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고향을 떠난 그들 중 비즈니스로 이름도 나고 부자가 된 이들도 가끔 있겠지만 태반은 부평초처럼 떠돌며 품팔이로 사는 처지이다. 받는 로임이 많다 해도 세금을 떼내고 세집비, 교통비, 생활비를 지출하고 나면 남는 돈이 별로 없다. 젊은 부부 평생 벌어도 코딱지 만한 집 한채도 살 수 없는 현실앞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고충이 실로 가긍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현실은 이러함에도 젊은이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이루어보려고 오늘도 남행렬차에 몸을 싣고 있다. 산밖의 산이 더 높아보이는 착시 현상이랄가, 고향마을은 말그대로 눈 내리는 들판, 달 없는 사막과도 같다. 사과배 따던 처녀들의 노래소리도 온데간데 없고 동구밖의 느티나무도 무겁게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있다. 그래 고향은 과연 성 쌓고 남은 돌, 무능과 패배자들 만이 모여있는 곳이란 말인가? 아니다.
연변돈황환경예술회사 사장 송영학의 창업이야기가 이에 좋은 해답을 주고 있다. 2000년도에 대도시의 유혹을 뿌리치고 고향—연변을 찾아온 그는 단돈 백원으로 창업의 걸음마를 뗐다. 남들이 버린 묵정밭을 도맡아 도시록화용 묘목을 심었다. 뒤에서 비웃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는 자신의 꿈을 접지 않고 완강한 의력과 투지로 밤낮없이 일했다. 교통사고로 두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헤쳐나온 그는 두려움을 웃음으로 막아내는 담력과 기질이 있었다.
고생끝에 그의 회사는 해마다 천만원을 웃도는 리윤을 창출하여 오늘 연변의 유명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지금 고향—연변은 귀향창업프로젝트를 가동하면서 타향에서 기업을 성사시킨 기업인들을 부르고 있다. 근간에 만여명이 귀향하여 3천여종의 경제실체를 꾸리는 쾌거도 이루어냈다.
천만갈래 시내물이 모여 대하를 이루 듯이 너나가 고향에 머리를 돌리고 고향건설에 일조한다면 고향의 새 전설은 또다시 아름답게 엮어지게 될 것이다.
길림신문 2017-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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