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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가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누구도 모른다. 워낙 가축을 가둬 넣고 길들이는데 사용되였을 울타리가 살림집 주변에 설치되면서 뜻밖에 인간의 신분과 품위를 돋보이는데 일조했다.
봉건시대 한자리 벼슬하던 량반들은 거개가 울타리를 치고 살았은즉 높은 담장, 길손이 쉽사리 들여다 볼 수 없는 신비속에서 자신의 령역만을 집착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인젠 유적으로 남아있어야 할 담장이 오늘 현대사회 거리의 여기저기서 의연히 올망졸망 또아리를 틀고 있다. 어섯눈 떠서 처음 바라본 곳이 창밖의 담장이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들어선 학교의 공간 역시 소리 높은 철대문 울타리였다. 하여튼 외부의 침입을 막고 안전을 지킨다는 리유로 학교란 이름만 달면 무릇 소학교든 대학교든 담장을 치는 것이 사회관습으로 되여버렸다.
아파트단지도 례외가 아니다. 오히려 이웃과 철저히 단절된 봉페식을 입주자들은 마치 체코브의 ‘갑속에 든 사나이’처럼 체질화되여 무척 반기는 양상이다. 정부를 비롯한 봉사성 건물 둘레에 친 옹벽은 이미 십여년전부터 철거한 상태라 친민의 뜻을 어느 정도 내비쳤지만 진정 마음에 와닿는 거리를 좁히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실정이다. 오랜 세월을 두고 울타리에 갇혀 살다보면 머리속에 어느덧 타인이 범접하기 힘든 성역이 생기기 마련이다. 마작판의 투전군처럼 남의 속은 무등 알고 싶어하면서 자신의 속궁냥은 터놓기를 꺼리는 배타적 경향이 요즘의 끼리끼리란 류행어를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인맥을 굳이 저마끔 분리시키고 돈 하나로 인간의 가치를 흥정하는 옹졸한 소시민성격이 우리 몸속 깊이 뿌리 박혀 참말로 안타까울뿐이다. 건전한 인간관계는 돈도 명예도 아닌 서로가 존중하는 순수한 관계일뿐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한사코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긍정하면 동아리를 뭇고 부정하면 멀리하는 마이너스 사고방식이 개인이나 사회에 모두 백해무익이다 .
시대는 변했다. 먹자판에서 어울리는 ‘형님’,‘동생’보다 누군가 비뚤게 나아갈 때 따끔하게 귀띔해주는 친구, 분쟁과 갈등 속에서 자신의 견해와 립장을 분명히 밝힐 줄 아는 친구가 보석처럼 값진 것이 아닐가.
근간 열린문화로 향한 각계각층의 소통과 나눔의 활동이 봄물 터지듯 활발해지고 있다. 따뜻한 커피 한잔으로 꿈의 크기를 재여보고 축하해주는 기분은 짱이다. 너와 나의 존재가 사회에 어떤 보탬을 주었는가를 항상 걱정하는 스타일을 짜는 멤버는 미래지향적이다.
도약을 꿈꾸는 기술혁명은 참신하고 투명한 인간관계를 선호한다.
빠금히 열린 뙤창문밖으로 내밀어 잡은 손과 활짝 트인 대문밖에서 잡는 손의 의미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비좁고 고리타분한 울타리를 떠나 사회의 넓은 광장에 나서서 수많은 눈길과 마주치며 화합과 협력의 통로를 닦는 적극성이 왕성한 생활력을 발산한다.
막힌 늪은 썩지만 흐르는 강은 생명이 약동한다. 이것이 곧 소통의 힘이다.
길림신문 2018.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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