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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랑송풍격에 대한 단상
2014년 05월 04일 11시 56분  조회:5023  추천:0  작성자: 최균선
                                                시랑송풍격에 대한 단상
 
                                                          최 균 선
      
    문학예술로서의 시작품에는 제반 특징들과 더불어 시각적미와 청각적미도 고유 하고있다.
    이른바 시각적미란 시의 외재적형식미(우미한 언어문자, 재치있는 외재률, 정교한 시행배렬 등)에서 락인된 시각적인상이 주는 미적감수이고 청각적미란 한수의 시를 멋지게 랑송하는 그 마당에서 청각을 통해 받아안는 미적감수이다.
    시는 특히 랑송을 통해서 독자들을 시적경지에 이르게 하고 그 미적향수속에서 시의 아름다운 뜻이 봄비처럼 가슴가슴에 스며들게 함으로써 그 과정에 시의 핵을 자 연스럽게 일반화한다. 이와같이 잘된 시랑송은 활자화되여 굳어진 시작품을 소리 와 색채로 윤색해주고 생명의 활력을 부여하는 기이한 마력을 갖고있다.
    랑송이란 어원이 라틴어(scande—re—올라가다)로서 시의 운률을 목소리로 강조하며 운각의 력점있는 매개 음절을 뚜렷이 구별하면서 시를 읽는것을 말한다.
    시랑송의 객관적물질기초는 시에 특유한 운률—말소리의 률동이다. 률동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음악에서 속도와 박자의 련쇄적인 작용에 의해 아름다운 률동이 생기는 것처럼 우리 말소리에도 률동이 생기는데 말소리의 높이세기가 대조되고 균형을 이루면서 률동을 만든다. 이 률동은 소리마디에 주는 힘의 량과 세기에서 나타난다.
     우리 말의 률동은 세계 어느 민족의 언어보다 아름다우며 그 변화가 다양하다. 그러므로 시에 운률—률동감이 없으면 시이기를 그만두는것처럼 시랑송에서도 이 률동이 무시되면 역시 랑송이 아니된다. 한것은 문장안에서 힘줄기가 더욱 뚜렷 해지고 높낮이가 고르로운것 등이 다 조선말흐름을 자연스럽고 부드러우며 우아하고 류창하게 발전시키는 요인으로 되고 또 그러함으로 시를 시처럼 쓸수 있기때문이다.
    우리 조선말 말소리흐름은 모든 구성요소에서 민족적특성이 옳게 살려지면서 우리의 생활감정에 맞게 다듬어지고 세련되여왔다. 그리고 말소리빛갈에서도 그 사회계급성원들의 구미에 맞게 발전되면서 말소리의 속도조절에서도 문화성과 더불어 시대적절주가 구현되고있다.
    우리 중국조선족들은 80년대말까지도 방송화술에서나 시랑송에서 평양을 기준으로 삼아 격정을 지니고 억양이 뚜렷하게 시를 읊어왔으며 전 사회적으로 별다른 이의(异义)가 없이 흔상되고 류행되여왔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인들의 창작풍격에 획기적변화가 생기고 그에 따라 시읊기풍격도 급전하여 지금은 완전히 경향적이 되였다. 말하자면 시마다 거의 한국식으로 읽는것이 기준이 되여진것이다. 바로 여기에 필자와의 분기점이 생성되고있다.
    일컬어 때지난 전통식이라는 딱지가 붙어 외면당해버린 (평양식)랑송과 소위 새풍격으로 인입되여 너도나도 본따고 또 그리함으로써 무척 흔상되고있는(한국 식)읽기사이에 어떤 근본적구별이 있는가? 민족을 특징짓는 중요한 표징의 하나인 언어 의 동질성으로부터 감안할 때 대동소이하다고 할수 있겠으나 풍격상 각이한 특징을 보여주고있다. 우선 억양에서 구별점이 뚜렷해진다.
    우리 말 흐름억양의 형태는 뜻을 전달할 때와 느낌을 전달할 때 서로 다른 특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흐름억양은 뜻억양과 느낌억양으로 나뉘여진다. 뜻억양의 특징은 흐름의 높낮이가 큰 물결을 이루는것이고 느낌억양의 특징은 흐름의 높낮이가 미미하나 소리빛갈로 사상감정을 보충하는것이다.
    필자의 천박한 견해에 의한다면 시랑송에서 뜻억양이 특별히 중시되고 큰 물결을 이루며 읊을것을 강조하는것이 평양식풍격이라면 흐름의 높낮이는 미미하나 소리 빛갈로 감정을 보충하는 느낌억양이 시읊기 일반에 애용되여 그 기본적정서 흐름으로 관통되는것이 한국식풍격이라 할수 있다.
    이른바 전통식은 격정적이여서 고동성이 강하며 공명대가 크다고 할수 있으며 소위 새로운 풍격은 차분하게 정서적이여서 사색의 여지를 주며 흡인력이 강하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제특징들은 정치적, 시대적인 경향성에서 창출된것이라 보아 야 할것이다. 이에 반하여 량자는 부족점도 갖고있다.
    이를테면 시마다 뜻억양이 무분별하게 강조되거나 높낮이가 잘 조화되지 않으면 뜬감이 날수 있고 진실한감이 약화될수 있다. 반면에 시마다에서 느낌억양을 의식적 으로 읊기의 기본음조로 삼는다면 자칫 병없는 신음소리가 되여지기 쉽다. 정서적 이라해서 꼭 애상적인것이 아니며 사색적이라 해서 곧 저조적인것이 아닌것이다.
    다음 시읊기에서 소리빛갈을 어떻게 착용하는가에서도 다른 특색을 보이고있다. 우리는 소리빛갈에 대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느낌은 그 사회집단성원들의 특성과 정신적도덕풍모에 의해 결정되며 말소리발음에서 어떤 소리빛갈이 많이 쓰이는가 하는것은 중요하게 그 사회성원들의 감정정서에 의존하게 된다고 리론적으로 배워왔다. 따라서 다른 모든 화술에서와 마찬가지로 시랑송에서도 목소리의 기본 빛갈은 맑은 소리가 기본바탕이 되여야 한다고 인식해왔다.
    그러므로 느낌억양으로 서정성을 깊게 한다하여 자연스러운 전통적인 맑은 소리를 버리고 인위적인 다른 소리빛갈로 시를 형상한다면 시마다의 개성을 죽일수 있으며 진실감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바이다. 띄우는 어두운 소리나 울음섞인 우울한 소리. 떠는 목소리를 우리는 특수경우에만 써왔으며 또 효과를 보아왔다. 세기말적인 전 지구적비운이 도래하지 않은 이상 세상은 아직 아주 밝으며 시대 역시 너무도 격동적이다. 그러니 시마다 상아탑속에서 새여나오는 흐느낌이 될 필요도 없거니와 또 시마다를 울음식으로 뇌까릴 리유도 없다고 주장한다.
    하기야 우리에겐들 리별, 애수, 사랑, 배반, 증오, 눈물, 한탄, 랭혹, 저주, 비애가 없으며 또 그런 내심세계와 정서들을 토로할 창작자유야 어찌 없으랴만 그렇다해서 한국인들의 정감세계와 지향이 우리의 정감세계와 지향과 일치된듯한 착각은 유감 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비록 동일민족이라 할지라도 필경은 부동안 국도에서, 부동 한 정치체제하에서 생활하는 이상 많은 면에서 자기의 특징을 보류 할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참깨, 들깨 노는데 아주까리 못놀랴》한다면 되겠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중국이라는 그 특정된 정치환경속에서 자주권을 행사하는 중국 조선민족군체이다. 바로 그래서 우리는 다른 누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인것이다. 사회 풍토에서나 시대적정신풍모에서나 사상감정상에서 출발한다면 우리에게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보다 고상하고 전투적인 정신적도덕풍모가 반영되는 건전하고 듣기 좋으 며 씩씩하고 부드러운 소리빛갈이 접수심리상 더 공통적이고 공감대가 크며 바람직 한것이라 생각한다.
    시구를 입말처럼 억양을 붙이거나 읽기식으로 시를 읊지 못할것은 아니로되 시자 체가 일반적으로 운률을 붙여 읊을것을 요구하는 불가결의 전제하에서 시랑 송이라 하면 언필칭 높낮이를 뚜렷이 나타내여 음악적선률성을 보장해야 보다 감동적이 될것이라 본다. 아무리 잔잔한 정서의 시라도 산문처럼 읽는것은 비리이다.
    무릇 시의 흐름에는 잔잔한 물결도 있거니와 거세찬 파도도 있어야만 잔잔한것에 대비하여 거세찬것이 두드러지고 반대로 거세찬것에 대비하여 잔잔한것이 해면에 물처럼 속속들이 스며든다. 잔잔함도 거세참도 없고 높은것도 낮은것도 없는 산문을 읽는것과 별반 다를배 없는 그런 《시읊기흐름》은 마치 회전이 잔뜩 늘어빠진 록음 을 듣는것처럼 권태롭고 짜증이 난다. 시 구절구절에 어떤 감동이 맥맥히 흐르고 있을 진대 그속에서 랑송자도 어떤 감흥을 받았다면 마땅히 높고낮은 정서파동의 흐름과 세고 약한 방출이 있어야 할게 아니겠는가!
    그 누가 말했듯이 느낌에는 워낙 짝이 없는 법이다. 바로 그러기에 하늘에 별들처럼 하많은 시인들이 같은 경물을 두고 각이한 내용측면, 각이한 형식, 각이한 풍격의 시작품을 창출해낼 가능성이 있는것이다. 이에 따라 시랑송자의 내심감정의 로출방식에서도 그 모든것이 그대로 드러나야 할것은 자명하다. 재언명하거니와 시랑송의 흐름은 바늘이 가는데 실이 가듯이 시의 내용여부, 내재적감정정서의 각이 한 흐름에 따라 각이하게 물결쳐야 한다. 이는 필자의 주관욕망이 아니라 시자체에 고유한 마멸될수 없는 제특징이 규명해주는것이다.
    하긴 우리의 시도 애상에 푹 젖어나올수 있고 고독한 감정의 몽롱한 기분에 사로잡혀 자아를 나직이 표백할수도 있다. 이런 시는 확실히 느낌억양으로 읊으면 좋을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연변에 재빨리 류행된 시랑송풍격이 이대로 한가지 경향에서 굳어져버린다면 페단이 아닐수 없다. 뻐꾸기는 종달새소리를 흉내낼 필요가 없으며 부엉이는 매미소리를 본딸 리유가 없다, 앵무새는 아무리해도 까치의 울음소 리를 외울수 없는 노릇이다.
    시랑송은 방백이 될수는 있어도 독백이 되여서는 안된다. 격조높은 조기천의 《백두산》이나 《불타는 거리에서》와 같은 격정적인 명시편들을 시종 느낌억양 으로는 도저히 읊어낼수 없다는것은 명백하건만 어느 한번 규모가 꽤 큰 시랑송 콩클에서 한 랑송자가 《백두산》을 느낌억양으로 랑송하는것을 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시읊는 사람이 혼자 시설질하듯 뇌까리고 듣는 사람들은 한가한 구경군이 되여 하품을 한다면 시에 대한 그보다 더한 모독은 없을것이고 또 그처럼 무료한 일은 없을것이다.
    한 시인이 자기 심령의 비밀을 노래할지라도 흔상자가 직접 감지할수 있도록 진실하게 예술적으로 재현해야 함은 기성도리이다. 바꾸어말하면 시인이 시공간 관념을 자유롭게 운용하면서 시적예술미를 창조해야만 곧 개방된 문화상태의 심미 심리결구에 대한 자각적인 탐구로 되듯이 그 시를 표현하는 랑송자도 시인과 같은 심리자세로 시를 읊어야 한다는말이다.
    만약 세상의 모든 가수들이 권위가수를 본따서 같은 목소리, 같은 창법으로 노래한다면 그처럼 안타깝고 따분한 일이 더 있으랴! 숲속의 뭇새들은 저마다 명 창인데 왜 처마끝의 참새들은 아침저녁으로 재잘거리건만 그처럼 시끄러울가? 그것은 그것들의 울음소리에 똑같이 률동이 없고 절주감이 없이 단조로운 반복만 있기때문이 아니겠는가?!
    문화경험을 기초로 진행되는 자유선택과정으로서의 문화예술교류에서 접수심리 문제는 복잡한 사회심리현상으로서 누가 누구를 설복하는 문제가 아니며 나아가서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학술성문제로서 전문가들의 연구와 쟁론이 요청된다. 그런 각도에서 이 단상은 결코 전통에 대한 막무가내한 보수성과 신생사물간의 충돌이 아니라 표연주체와 접수자일 개인의 심미심리간의 락차에서 인기된 작은 울림이라 하면 가당할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말하고자하는 뜻을 이렇게 비유해본다. 어깨에 어깨를 겯고있거나 서로 마주보는 면면한 산봉우리들을 보통 산이라고 부를지라도 그 뭇봉우리들은 높고 낮아도 저마끔 자기의 모습을 지키고있어 사람들의 눈에 기이하고 또 그래서 이목을 끄는것이다. 이는 사람도 산의 그 개성처럼 자기 특성을 끝까지 살려야 한다는 말과 통한다.
    대저 사람이 지나친 추종과 자기를 잃고 남을 닮아보려는 심리는 심히 부끄러이 여길바이다. 뭇사람들이 다 부끄럽게 여겨야 할뿐만아니라 문화지성인으로서는 더구 나 꺼릴바이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기를 지키는것으로부터 출발한다면 나가는 걸음이 현대파적이든 국제적이 되든간에 자기다운 튼튼한 진출이 될것이다.
    우리에게 우선 우리의 시가 따로 있어야 하고 우리만의 랑송풍격이 있어야 하리라고 기대해본다.
 
※ 때때로 시를 읊는 양자와 소리를 들으며 10년전의 묵은 장부를 다시 들추어 내여 오늘의 시읊기를 잣대질해본다. 낡은것이라 해서 모두 쓸모없는것이 아니며 옛 것이라 해서 모두가 볼장을 다본것이라 말할수 없겠다는 혼자 생각에서 다시금 중언 부언해보는 바이다.
 
                 2007년 10 월 14 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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