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씌여지는가? 짜내는가? 하는 물음은 공연한것이라 인지될수도 있고 따라서 진부한것이라 말할수도 있겠다. 그러나 소설을 엮는다는 말처럼 시도 짜내는 경우도 없지 않기에 유익한 화제가 될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시가 환기하는 창조적특성을 전제로 할 때 경물ㅡ시적대상으로부터 인기된 정서를 읊조린 경물시는 읊어진것이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머리에서 시구를 짜내여 엮은것이 아니였다. 말하자면 자발적으로 씌여진것이라는 화제가 성립되는것이다.
시적감동을 “경이로움”에 둔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지금껏 보여져 온 세계가 아니라 새롭게 투영된 특별한 세계, 우리가 무심코 보아넘겼던 일상의 경험에 대해 새로운 경지를 펼친것으로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정경을 재인식하게 한다. 즉 어떤 대상이나 현상의 복제품에 대한 일상적인식이 아니라 시적인식으로서 이미 표상된 대상을 부정하면서 새롭게 본 인식이기에 시는 씌여진다고 해야 할것이다.
전통시는 시인의 심령의 외재세계이다. 시인은 외재사물에서 계발을 받고 그 외재형태를 내재공간에 이입시킨후 제련과정을 거쳐 심령의 메아리로 울린것으로서 시 특유의 선률이였는데 창조라기보다 재현, 자연에의 모방, 복사에 가까웠기에 시적대상을 보다 형상적으로 묘사하면서 느낌도 전달하기 위한 수사적형식에 신경을 썼다. 이 때는 시가 씌여지지만 시적감정을 치약처럼 짜내는게 아니다
시적자아로서의 시인은 자연경물에 감탄하고 혼자 자각하는것만이 아니라 자기의 정감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어한다. 이것이 시인의 핵심적기능이다. 주정시에서 시적감각은 일종 사상의 지각화가 되는바 독특한 예술적인식이며 내면화된 인식으로서의 자기 성찰이기도 하다. 주지시에서도 시적정서는 개체정서의 즉흥적류출이지만 그것은 모종 깨우침을 내재한 보편화된 인류일반의 정서로 전환시키려 애쓴다.
무릇 시적감각은 인간화된 자연이다. 아름다운 대자연에 도취하게 되고 그 경이로움에 정감활동은 치렬해진다. 달리말하면 시의 종자가 생명의 꽃을 피운다. 시적령감은 순간적인것이다. 시의 핵은 시인의 본능이기도 한 감동의 세계를 여는 열쇠이다. 시인본성의 핵심은 창조로 불타는 심정이다. 이 정감의 작용에 의하여 참됨과 선과 미를 추구하는 마음이 곧 시의 령혼인데 그것을 짜낼수는 있단말인가?
시인으로 하여금 경물과 자기 감수가 일체감을 갖게 하는 상상력이 시인의 힘을 실어주고 시에 속성을 불어넣음으로써 전도체에 전류가 흐르듯이 심정에 정서파장이 흐른다. 그러나 시의 효용은 감동과 쾌락에 있기에 사상이 정서를 앞설수는 없다. 시적감각은 때론 일종 사상의 지각화이지만 억지로 조합한 지각화가 아니다.
“사상의 지각화”도 역시 일종 시적감각이다. 감각은 감촉된 반응의 결과이지 만들어낸것이 아니다. 서방의 어느 시인은“사상의 직각화 즉 사상이 직각으로 환원될 때 장미꽃향기를 맡을수 있듯이 당신은 사상을 감지할수 있다.”고 하였다. 정서에 사상이 조명되면 정서는 가열되고 승화되며 앙양되여 시혼을 불태운다. 하지만 정서를 짜내고 그것을 미화분식하는 작업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만약 생활소재를 바다라고 한다면 문자, 사상은 그속에 용해되여있는 물질로서 일정한 조건하에서 결정체의 형식으로 현연될 때 시는 곧 그 결정체로 나타난 소금이라 할수 있다. 그것은 일종 승화이며 응결이다. 시에서 상상이 중요하지만도 정감의 파동이 없으면 서정시도 없거니와 시도 없다. 따라서 시는 미적절주의 창조이고 시인의 정감의 울림, 진실하고 아름다움의 메아리이다.
시의 사상은 정감을 통해 체현되는것이지 메가폰을 들고 하는 선전선동이 아니며 선률을 통해 연장되는것이 아니다. 유성유색(有声有色)의 시혼은 시의 절주와 음악적선률과 경지속에 존재할뿐이기에 조작은 불가능하며 조작했더라도 울림이 있을수 없다. 궁극적으로 시는 시인의 세계관에 따라 특수한 정조로 물들게 되고 독자는 그 물든 세계에 공명하게 되므로 짜내기는 무효로동이 된다. 생명이 존재해야 할 새로운 리상이 곧 시의 지향이 되고 시가 독자들에게서 읊어져 많은 감명을 줄 때 자체, 내지는 개체의 유지목적이 달성되여 시적가치가 실현되므로 더욱 그렇다.
시인의 자아도취라는 말은 시인의 가슴에 희노애락의 감정으로 와닿아 시를 낳지 않으면 안되게 한 그 내속을 옳바르게 전달하라는것이다. 시인의 감정을 움직인것이 동기가 되고 시대적요청과 사회적정서가 시의 존재의 의의로 되고 시가 지향하는 방향 등이 제대로 전달되여야 시의 존재리유가 있게 된다. 따라서 독자들의 감정에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선지선각이 선행되여야 하는데 선각한체 할수 있단말인가?
시창작의 목적은 자아표현을 달성하는것으로서 참됨과 선과 아름다움을 심어주고 모종 감명과 기쁨을 새겨주어야 하므로 추상적의미보다 시적대상을 순진 그대로 감각하고 인식하도록 자극해야 하는데 말을 꾸며내다면 효과를 볼수 있을것인가? 시적감정은 인간의 자주적인 활동에 의하여 생성되기에 사상의식의 준비정도에는 따르지만 지어낼수 없다. 시를 짓기는 집짓기와 같으나 마음이 움직이는대로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읊어지거나 혹은 씌여진다고 하는것이다.
시적정서는 시적대상의 표면에 직선적으로 비낀 모종의 정서적색가인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서적으로 깊이 파고들어 과거와 현재, 미래에로 잇닿은, 다양한 정서적색갈로 채색된 감정의 표현이기에 자연로출이고 그래서 짜낼필요가 없게 된다. 시의 정서는 생활과 인성과 인간의 심령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와 관념으로부터 체현되는것만큼 그속에서 부차적이며 비본질적인것들을 정리하는것은 결코 지어내는것도 더욱이 짜내는 신고스러운 작업도 아니다.
시적감흥은 현실생활의 정경과 현상, 경물에서 받는 단순한 감동이 아니며 일상생활에서 부닥치는 일에서 촉발되는 단순한 즉흥이 아니기에 가공이 수요되지만 그것은 억지로 엮는 일과 또 다른일이다. 송가만 불러야 하던 지난시기, 구호식시는 확실히 감동된것처럼 꾸며내고 분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해야겠다.
이를테면 “모내길세 모내길세 성수나는 모내길세”라는 가사가 있다면 긴긴 하루낮 땡볕아래 모를 내거나 구질구질 비가 내리는데 비닐박막을 쓰고 모를 내면서도 정말 신이나는 감을 느끼여 흥얼거린것이 아니라 책상머리에서 합목적인 추상을 앞세우고 쓴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벼모를 내고 가을에 거둘 풍작을 생각하면 어떤 기대를 가질수는 있어도 당면하여 허리가 부러질듯한데 신이나할 사람이 어디에도 없었기때문이다. 치통을 앓으면서 소리내여 웃을수 없는 도리와 같다고할가,
그럼에도 그때 우리는 감동의 노래를 부른것이 아니라 지어먹은 “격정”으로 웨쳐대였다. 그러니 그런 “시”는 씌여진것이 아니라 짜낸것이라 말할수 있다.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담박한 료리를 볶는 주방이 없듯이 질박한 비단을 짜는 비단공장이 없다. 자연으로부터 얻는것이기때문이다. 그처럼 애써 구하거나 지혜를 짜내여 엮어낼수 있는 “시”는 있을수 있되 절대 진실된 시는 못되는것이다.
지금은 감각과 정서에서 출발한 주정시보다 지성(사상)을 강조하는 주지시(主知詩)를 선호하는 때여서 감정만으로도 되지 않고 소재와 언어를 처리하는 지적능력이 따라 붙어야 하므로 자칫 짜내기가 될수도 있다. 말하자면 주지주의시에서 격정의 분출은 생경한것으로 간주되기에 자칫 짜낸 “주지”가 서정인양 분식될수도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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