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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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느끼며 생각하며
2016년 04월 06일 19시 17분  조회:4191  추천:0  작성자: 최균선
                                         살며 느끼며 생각하며
 
 
     숲그늘 여린 풀우에 큰대자로 누워 나무가지에 의해 찢겨진 하늘을 멀쩡하니 바라보며 떠오르는 상념들을 이리저리 풀에 걸고있다. 내 잔등밑에서 풀들이 무참히 꺽여지며 가냘픈 신음을 내고있는지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나비가 앉든 꿀벌이 앉든 그리고 무거운 베짱이가 뛰여오르든 식을줄 모르는 반가움으로 수없이 허리굽혀 대자연의 구석진곳에서 있었던 얘기를 들려준 풀들이다. 작은 풀은 그렇게 이 호한한 세상을 마주하고 천지간에 대화를 나누며 한철을 살아간다. 바람은 분명 속삭였으리라. 그 아프고 슬프던 모든 일들을 잊으라고. 원래 홍천 세계가 아니던가? 가는 걸음에 한바탕 흑먼지를 날려 그 모든 쓰잘것없는 기억들을 매장해 주겠노라고.
    차분히 내리던 봄비도 분명 쏙닥거렸으리라 비는 먼지로 얼룩진 대지에 줄줄이 6월의 련가를 쓰면서 충고했으리. 잊으라! 이 먼지를 씻어내리는것처럼 하늘의 눈물로 너의 치욕을 씻어주련다고. 풀들은 예이제 다소곳이 듣고만 있었으리라. 그래 얼마나 많은 생활의 갈피들이 번져졌던가? 누가 아직까지 그 많은 세절들을 기억 하고있을가? 세월따라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속절없거니 그들은 앞에간 수많은 넋들을, 한과 유감을  아무 생각없이 밟고 지나고 그리고 뒤에는 새 발길이 온다.
    오직 작은 풀만이 잊지 않고 이 대천세계에 군림하는 춘하추동에 얽히고 맺힌 사연들을 알고있을것이다. 먼먼 그 옛날 어느 지사가 이 풀숲에 쓰러져 땅을 적시였 던 그 선혈이 풀잎에서 맑은 향기를 풍기는것일가? 오직 작은 풀들만이 그 투사의 마지막 체온을 기억할지 모른다. 그래서 풀들은 잊지 않고 있으리라. 별빛도 없는 캄캄한 밤에는 그처럼 처량하게, 불볕이 쏟아지는 한낮에는 푸른 그늘로 감싸주며 그렇듯 비장하게 노래했을것이다. 바로 양광이 박절히 수요되는 때에는 짙은 그늘도 박절하게 수요하는 인간심사이다.
    나는 자신이 이 호한한 대천세계에서 작은 풀 한포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공연히 슬퍼진다. 적어도 저기 우뚝솟은 소나무처럼은 살아야 하였는데…생활이 각축장이고 생활이 고통과 비애의 창고이며 생활이 한여름날 서늘한 그늘이였기에 더구나 의기소침해져서 작은 풀에 매달리는 나인가. 그리고 누구에겐가는 생활이 오락장이고 싶을것이다. 즐겁고 즐겁지 아니하는것은 부동한 시간에 부동한 지점에서 말달리기를 하는것과 같다. 그들은 늘 그것들 사이에서 이리뛰고 저리뛰고있다.
    평범한 일상속에서도 늘 행복을 느끼는 인생자세가 바로 일종 행복을 만드는 능력이요 몸가짐임을 모르지는 않는다. 멋스러운 서정시는 꽃피는 아침이나 달빛아래 읊어지지만 일상생활마당에는 오직 밥짓는 연기가 피여오르는 산문이 있을뿐이다.
    세상이 어떻게 보일가? 취하면 세계가 자기것이 되고 깨여나면 자기가 곧 세계가 되는멋에 고달픔을 잊어가며 사는 우리 인간들이 아닐가? 인생길의 매 굽이는 물이 흘러가면서 만드는 도래굽이지만 그렇게 흔적을 남기고 흘러가버린 물은 자기가 흘러지난 기슭에 별로 미련이 없다.
    어떤 위치에 어떤 자세로든 생활의 배경앞에서 울고웃는다는것은 자기나름의 멋이고 생명운동의 표현이다. 생명이 일단 불타오르면 내심의 도화꽃은 이미 활짝 핀때 이고 아무도 그 찬란함을 빼앗아가지 못한다. 생활의 불꽃은 노상 단번에 튕기는것이 아니라 수없이 명멸하면서 인내로 튕기는것이다. 물론 단번에 성냥을 그어 불길을 일으키는것은 아주 바람직한 삶의 일종 예술이다.
    그러나 생활속에는 많은 결함들이 있다. 그것을 담담하게 접수하고 대하는것도 역시 가장 적극적인 일종의 생활태도이다. 그러나 금전욕이 팽창처럼 명예욕이 범람 하는 현시대, 사람들은 명함장을 찍으면 빈자리가 없이 무슨 ×××장이요 무슨 ×××원 하고 꽉 박아야 성차하는것 같다. 자기 이름앞에 규정어를 붙이거나 혹은 이름뒤에 설명이 적을수록 더 개운하게 더 자재적으로 쾌락하게 사는것이련만 왜 나는 그냥 내 이름앞에 무슨무슨 규정어가 붙도록 안달복달했던가?
    인생을 거의다 살고나서 그 모든게 우습고 유치하게 느껴질 때 더구나 우습고 유치해진다. 즐겁고 슬프고 고통스러웠고 행복했던 지난날의 뉴앙스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라. 피흐르던 상처도 세월따라 그 아프던 기억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바람이 불면 바람의 몸짓에 따라 휘청거리고 비가 오면 비속에서 갈한 목을 추기며 이 지상에 존재한다는 그 한가지 리유만이라도 행운이고 삶에서 소중한것이 아니냐?
     그러나 진실한 자기 모습으로 세상을 대하는 사람이 몇몇이나 있을가? 그렇다면 균이여, 너는 무슨 두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느냐? 한 얼굴로는 과거를 마주하여 교훈 을 섭취하고 다른 한얼굴로는 미래를 향하여 희망을 바라본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현재는? 가장 의의있는것은 현재인데 마음에 새겨둔적이 있는가? 나는 오직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기에도 바쁜데 어느 겨를애 현재를 생각해본단 말인가? 
    과거는 이미 죽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내가 유일하게 틀어쥘수 있는것이 현재뿐인데 너의 현재를 보면 너의 과거나 미래를 예측할수 있는데 과거가 무슨 의의가 있는데 집착하는가? 내가 수없이 놓아버린 현재였기에 나의 덧없는 인생이 사람들의 기억속에 곧 잊혀질 한단락의 생면사로 되였고 나중에 나는 이 풀숲속에 자지러진 풀벌레처럼 7월 한때를 즐기던 목숨이 되리라. 세상은 내 마음 끌리는대로 있다. 창턱에 비닐꽃도 진짜로 생각하면 진짜꽃이다.
    세상은 보는대로 있다. 누구나 자기가 보는만큼의 폭도로 세상을 안다. 마치 우물안 개구리가 하늘은 우물아구리만큼 큰줄로 알듯이, 세상은 있다고 다 보이는것도 아니 지 않는가? 너무 많은것이 보인다면 대뇌충추는 너무 많은 자극의 바다에 빠져 익사 할수 있다. 그래서 대뇌는 감수의 선택성기능을 가지게 된다. 옛날 늙은이들이 시끌벅적한 세상을 한눈 감고 한눈 뜨고 보라는 말도 이에서 비롯된것이리라.
    세상은 자기가 보는것만 보인다. 나는 농토에서 밭갈고 김맬 때, 붉은 찰흙이 보습날에 검질게 달라붙어 애먹던 안굽의 논빼미가 내게는 곧 세상이였고 모아산아래 사리긴 콩밭사래가 끝이 보이지 않는 세상이였으며 사과배철 숨벅차 헝헝거리며 한 광주리 한광주리 메여나르던 그 비탈밭길이 내 인생길이였다.
    그러나 후반생에 접어들어 숙망의 첫교단에 올랐을 때 10년 광란의 시대, 문화의 쑥밭에서 소년시절을 키우다보니 구지욕을 잃어버리고 시들해진 아이들의 그 눈이 내가 보는 새 세상이였고 잡초무성한 심령의 골짜기에 지식의 감로수를 대여주고 그 색바랜 눈동자들에 지식의 들창이 활짝 열려있음을 새겨주는것이 나의 전부의 세상이 고 내 삶의 옹근 마당이였다.  
    시골학교에 옮겨가 교편을 잡고 있을 때 나에겐 사면을 둘러싼 우중충한 산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저녁, 문뜩 산마루에 둥실 걸린 밝은 달을 보며 신비로운 산의 높이와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되였다. 조금은 유심론적이긴 하지만 세상은 내가 느끼는것만 이 보이고 또 보이는것만 존재하는것이 아니던가? 존재가 나의 인식대상인것이 아니라 내 인식대상이 곧 존재물이 되는것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것을 그냥 모른채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다 보지 못하고 다 느낄수 없는 너무나 넓은 세상이다. 세상을 다 보고 세상을 다 알고 죽는 사람은 없 다.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그것들속에 가장 귀중한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또 그냥 무심하게 지나쳐버리는것들도 있다. 눈에 보이는것은 모든 아름다운것들보다 보다 많은 슬픈것들이다.
    세상엔 내가 보는것만이 존재하고 또 보는대로 있기에 내가 보고싶은대로 현연 되는 세상이기에 그래서 사는 맛이 있게 된다. 아침에 뜨는 해, 곱게 물든 저녁노을, 밤하늘을 수놓은 별무리, 둥글고 이즈러지는 달, 부는 바람, 흘러가는 구름…늘 그렇게 찬란하게 펼쳐있건만 눈에 비쳐드는것들것들은 지나쳐버린다. 세상엔 터벅터벅 걸어야만 하는 울퉁불퉁한 길만 있는것도 아니고 꽃마차타고 신나게 달릴수 있는 탄탄대로만이 있는것도 아니다.
    세상을 보는 눈은 마음을 먹기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초점이 변할수 있건만 너무 눈에 거슬리는것만 마음에 담아둔다. 지겨운 장마철 구질거리는 먹장구름이 한없이 밉다가도 그것을 꿰뚫어보는 마음의 눈을 가진다면 저 구름우에는 눈부시고 따스한 태양이 변함없이 웃고있다는것을 믿게 되고 씻은듯 개인날을 바라며 평온한 마음을 다시 찾게 될수 있건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게 인간이다.
    그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해석하는만큼의 인생을 산다. 스스로 약자라고 단정하면 정말 약자에 머믈러있을수밖에 없어진다. 스스로 용기가 없다고 생각하면 매사에서 뒤걸음을 치게 된다. 견뎌내고싶지만 견딜수 없다고 생각하면 십상팔구 이기지 못할것이 확정된다. 질거라고 생각하면 진다. 세상을 헤쳐가노라면 성공은 의지에서부터 시작된다는것을 알게 된다. 모든것은 마음에 달렸다. 스스로 남보다 뛰여났다고 생각하면 남을 앞설수 있다. 인생이란 전쟁은 …언제나 더 강하고 더 빠른 사람이이기는것만은 아니다. 스스로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의 해석한만큼 생을 살아간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하여 사전적인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로 직접 들여다 보고 부닥쳐 볼일이다. 복속에 화가 있고 화속에 복이 있었다. 내가 시골에 가게 된것은 처음엔 돌이킬수 없는 화였지만 몇년간 시골체험이 있었기에 아이들 교육은 도시에서 보다 훌륭하게 완성된다는것을 절감하게 되였고 도시학교에 전근할수 있는 천방백계로 기회를 발굴하며 분발하게 되였다. 그때 그렇게 현재에 만족하고 있었더라면 내 아들은 그저 시골에서 송이버섯이나 따서 치부하는 얼간이 농군이 되였을지 모른다.
    풍요로움의 뒤에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뒤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나는 몰락가정에서 인생을 시작하다보니 지지리도 못난 가난속에서 동년이 얼룩졌고 청년시절을 거쳐 전반생을 쭈욱 내리 못생긴 새끼오리처럼 동란의 시대에 소외당하고 뒤몰리며 가난한 농부의 생활에 철저히 속속들이 찌들어버렸다. 그것이 오히려 막연하기 그지없으나 내 운명을 바꾸어보고 내 삶을 윤택하게 하려는 끈덕진 욕망을 불태워주었는지 모른다. 그 정신적빈곤이 나를 역반심리를 가지게 하고 이미 온 세상을 끝까지 가야겠다고 마음을 다져먹게 하였고 몇번이나 구접스러운 생명을 뒤산 참나무가지에 걸려던 비겁한 생각을 꿍져버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살아갈수록 내 마음 밭이 자꾸만 척박해지고 메말라간다는것을 절감하게 되였다. 늘 세상을 탓하고 운명을 탓하고 다른 사람들을 곁눈질하였다. 내 마음밭에 아름다운 꽃이 피지 못하는것이 그들때문이라고 생각했기때문이다. 내 마음이 늘 불안한것도 외로움에 모대기게 되는것도 가슴속에 불평불만이 마른 재무지처럼 풀썩 거릴때도 세상을,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였다.
    그들이 내 마음밭에 잡초를 심어놓고 그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나를 버리고 나를 불평에 애끓게 하는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남들처럼 가지지 못하게 된것도 알지 못하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빼앗긴것으로 알았고 내 기쁨도, 희망도 다 남들때문에 시들해지는것으로 생각하고 좌절감을 가지고 실망하게 되는것도 다 남의 탓으로 돌리 게 되였다. 그러나 그게 아니였다.
    그 모든것은 내 마음에 세상을, 다른 사람을 포용할 빈자리가 없이 리기만 가득차있고 세상을 관용할줄 아는 아량과 남을 따스하게 품어줄수 있는 사랑이란것이 없었기때문이였다. 더없이 척박해지고 메말라버린  마음밭을 휘딱 갈아엎고 찰찰히 넘치도록 사랑의 감로수를 관개하고 그 모든것의 상징사인 사랑이라는 이름의 씨앗을 한알 고이심어 향기로운 인생의 꽃이 필수만 있다면 장차 인생록에 흐지부지하게 숨김표를 찍지 않을것이였다.
    허나 이런 인생의 지혜를 조금 깨닫게 되고보니 이미 인생의 종점에 와있다. 지금 풀밭에 누워 그래도 전에는 나도 피가 설설 끓던 청춘이였다고 헌헌한 마음으로 말할수 있을것인가?
    나는 제딴엔 늦깍이나마 문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문인은 우선 마땅 히 골기가 있어야 하고 불의에 맞설 용기가 있는 사람이 되여야 한다. 그러나 그게 내게 없으니3류문인에서 종지부를 찍게 되였고 사회의 량심인 지식분자가 되기 열번도 더 틀렸다. 기껏해야 “지분자(知分者)”로 남을지 모른다.
    세상은 참으로 느끼고 생각하며 살게 되여있지만 자신이 보는만큼의 세상을 살고 해석하는 만큼의 느끼게 될뿐인줄을…
                               
 
                               2007 년 6 월 23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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