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안 대로변에 “3,6,9 농부산품시장”에서 본 일이다. 어떤40대의 한족사나이가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팔목을 움켜쥐고 자동차나 삼륜모터를 몰고온 장사군들을 붙잡고 상처가 엄중하니 병원으로 실어다줄수 없는냐고 사정사정 하는데 아무도 응대하지 않았다. 선지피가 흐르는 팔목을 보면서도 그럴수가?
그가 어찌하여 팔목을 베였는지 알수는 없었으나 보아하니 상태가 장난이 아니였다. 혹시 정맥이나 동맥을 상했다면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였다. 그런 다급한 사정을 보면서 내게 자가용이든 모터찌클이든 없는게 안타까웠을뿐이다. 하긴 이런 일이 내게 어쩌다 띄였을뿐 빙산일각에 불과할뿐이다. 당전 전국 각지에서 련속부절히 발생하는 일컬어“랭담사건”들을 두고 의론이 분분하다.
원래 동정심화제는 묵은 화제이지만 현시대 동정심의 존재의의와 가치에 대한 사고는 결코 묵은것이라고 말할수 없을것이다. 인간의 마음 또는 두뇌의 역할은 크게 지성, 감성, 의지로 나눌수 있는데 지성은 판단력, 정서는 동정심, 의지는 실천력이라 고 해석하고있다. 불행한 사람에게 보내는 동정은 일종 덕성이다. 동정심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정감으로서 그만큼 영원한, 그리고 가장 중요한 륜리적화제가 될수 밖에 없기때문이다. 동정심은 사람이 태여나서부터 처음 배우는것이 자사자리이지만 희노애락이 분명한 정상인이라면 그에 앞서 동정심이 고유되여있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의 불행을 동정할 때 왕왕 잘코사니를 부르는 심보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우는 소리가 당신과 다르다고 해서 아무것도 느낄수 없단말인가? 얼어죽는 뱀을 품어준 농부의 그런 동정심은 불필요하지만 련민은 절반의 공평이다. 자신이 생사지경에 빠지면 누구보다 도와달라고 아비규환을 부를것이 아닌가?
루쏘는“동정심은 전 인류의 생존에서 가장 주요한것이며 또한 유일한 법칙”이 라고 피력하였다. 아무리 눈물도 피도 없는 철석간장의 무정한이라도 동정심과 아예 등지고 태여나지 않았다. 동정심은 생면부지의 사람, 아무인연도 없는 사람들이 순간 적으로 령혼심처의 거리를 단축시켜주는 자연발생적인 계기로 된다. 인간이 심장이 없는 령장동물로 진화하면 몰라도 동정심은 인간의 가슴에서 고갈될수 없다.
동서고금에 동정심에 대한 론술이 많다. 이를테면 맹자의 측은지심(恻隐之心)으 로부터 왕양명(王阳明)의 만물일체설. 하회웅(何怀宏)의 량지(良知之见)에 이르기까지, 아리스 토텔레스의 덕성으로부터 아담 스미스의(亚当.斯密)의 동정관, 휴머의 인성론, 루쏘의 동정론 등에 이르기까지, 선인들의 론하였듯이 동정심은 도덕의 기점이자 근원이다. 생명과 생명의 교류중에 동정심이 없다면 사랑이란것도 있을수 없으며 동정심이 있어야 베푸는 사랑도 없다.
쇼펜하우에르가“련민과 수요는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친밀하게 만든다. 련민은 일체 도덕의 기준”이라고 했듯이 동정심이 없다면 도덕이란것도 없거나 적어도 진정한 도덕이 생길수 없다. 동정심이 생기는 초석은 다른 사람과 자아지간의 무차이성을 보아내는것이다. 동정심은 사람들 지간에 호상 전달되고 함께 나누는 정감의 기초로서 정면적인것과 부정적인 감정을 포괄하고있다. 인간은 자연속성과 사회속성의 복합체로서 동정심에도 자연속성과 사회속성도 있게 된다.
플라톤은 “동정은 마치 커피와 같아서 처음엔 고통스럽지만 확실히 가장 유효한 구제와 치유의 령약이 된다. 그러나 만약 쏟아내는 동정심의 분량과 정지의 계선을 모른다면 무서운 독극물로 변해버린다.”고 깨우쳐주고있다. 악어의 눈물을 련상시 키는 그런 련민은 진정한 동정이 아니고 액수가 적혀있지 않은 송금통지서같은 눅거 리동정심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염오감을 던져준다.
어찌 론의되든 동정심의 심리바탕은 량심이다. 그런데 량심은 어디까지나 자률적이지 타률이 아니다. 인심에 내부법정의식은 바로 량심으로서 자률적이다. 량심의 소리는 인류령혼의 심처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로서 가장 진실된 납함이다. 동정심은 한 사람의 인격적 성숙도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오직 심령이 정파답고 량심이 바르며 가슴이 따스한 사람만이 성근한 동정심을 가지고있다.
하건만 아이러니컬한 경우도 있다. 례컨대 원래는 인간감정에 타인과 공감할수 있는 능럭이 있는데 각자 바쁘고 자기에 집중하기때문에 그 능력자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구결과 봉사하러 가는 도중에 정작 길거리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동정심은 사회환경의 영향을 받기에 불온정하여 부동한 시대에 따라 특수한 내함과 사고가치를 가지고있다. 작금에 인정세계가 사막화되고있는 현황에서 동정심은 더욱 열점화제로 되고있다. 동정심은 천성적이지만 리성사유를 할줄아는 사람에게만 구비된다. 동정심에 리성인소가 주입된후 중용사상이 수요되여 동정심에도 합리성을 비롯하여 기준, 적당성 등 문제가 제기되였다.
례컨대 인간이 고매한 리상의 실현을 위해 헌신할 때 생기는 무자비함과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잔인한 충동을 완화하는것은 정의의 원칙이나 선악의 구별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의 부단한 쟁투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힘은 동정심”이라고 피력한다. 즉 동정심이야말로 우리의 인간적인 성장과 성숙을 돕는 필수조건이라는것이다.
동정심은 사랑의 감정의 버금이지만 인심에서 가장 성결한 감정이다. 동정심은 선량한 마음에만 깃들어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애대받을수 있는 비결은 얼마간의 열 성과 동정이다. 그러나 체면치례로 눅거리동정심을 훌 내던지는 행위는 공백수표를 내주는것과 다름없이 얄팍하다. 즉 상대방의 감정호응을 얻지 못하는 동정은 위장된 사심이다. 베이컨은 동정심은 일체 도덕에서 가장 높은 미덕이라고 단언하였다.
생명을 지니고 있는 모든것에 대한 동정은 그가 도덕적인, 가장 희망적인 사람임 을 증명해준다, 원한이 사랑의 대립면이 아니라 랭담이야말로 사랑의 대립면이다. 동정심이 골수에 배여있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으며 남을 비방하지 않는 대신 오히려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싶어한다.랭담은 의지와 사랑의 퇴보이고 축소이다. 도를 넘은 동정은 잘못이지만 너무 적은것도 착오이다.
한 사람의 불행한 조우에 대하여 공명감이 생기고 행동으로 도와주고 찬성, 혹은 힘을 보태주려는 정감은 고귀하다. 그러나 동정심은 약자에게만 베푸는것이 아니라 강자, 정의를 신장시키는 사람에 대한 지지도 동정심도 포괄되며 감정상에서 공명할 뿐만아니라 남을 돕는것을 의무로 삼고 정의를 신장하려는 동기와 행동도 포괄된다. 그만큼 인식, 감정, 동기, 행동이 서로 얽혀돌아야 보람있는 동정심이라 할것이다.
더불어사는 세상에서 동정심만큼은 돈독해야 가슴이 따스한 사람이라 말할수 있다. 동정심은 결코 통크게 던져주는 돈뭉치가 아니며 명리의 하사가 아니다. 동정심은 진정으로 위안을 보내는 눈길로도 충분하다. 아주 사소한 도움에서도 동정심의 심오한 내함을 읽을수 있다. 화해로운 사회건설에 참여하려면 동정심부터 갖추시라. 동정심은 절대 일방적일수 없다. 세상사가 조석으로 엇바뀌듯 내 처지도 동정심이 수요될지 그 누가 알소냐? 그래서 늘 동정심만세를 부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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