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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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언수상록 59) 무어나 보기나름
2017년 07월 13일 11시 10분  조회:2814  추천:0  작성자: 최균선
                               무어나 보기나름
 
                                       진 언
 
    푸른색 안경을 끼고 보면 맑은 물도 잉크처럼 보이고 붉은색안경을 걸고 보면 피물처럼 보일수 있다. 이는 관념문제로 번지기도 한다. 례컨대 물이 절반 담긴 컵을 보고 비관론자들은“절반밖에 남지 않았군”하고 울상이지만 락관론자들은“아직도 절반이나 있네!”하고 웃는것은 사고방식, 관념의 차이가 낳은 결과이다.
    사람은 자기의 리해득실로, 감정적으로 판단하는 본성이 있다. 사람은 자기가 보는만큼 보이고 보는만큼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객관적판단력이라곤 전혀없는 자라면 아름다운 장미에 하필이면 가시가 많이 돋았다고 푸념질할것이요 심정이 바른 자라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하기에 이런 험한 가시덩굴속에서 아름다운 장미가 피였났다고 감탄하며 축복하기 마련이다.
    사물을 보는데 본능도 장난친다. 이를테면 문인상경은 문인의 본능의 작간인것이다. 대방을 자기 개인의 자대로 잰다는 말이다. 본인은 공정한 판단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어디까지나 주관적이지 객관적이 되지 못하고있다. 즉 자기 안광으로 볼수 있는 가능한것을 볼뿐이지, 실제 있는 그대로를 보는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채로운 객관사물에 대해서 여러가지 그릇된 억측을 하는것은 조금도 이상할것이 없다. 그리고 그 자신의 잘못의 아니다. 인격력량과 품질이 그 정도이니 어쩐단 말인가,
    그래도 마냥 자기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데 대해 객관성은 알아야 한다. 그 기준이 공정하지 못하거나 감정적인 쪽에 치우친것을 안다면 상대방이 피해를 보거나 상처를 입힐수도 있다는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흔히 남을 평가하기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편견의 오유가 가져올 결과도 생각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례컨대 문학작품으로서의 수필은 단순히 현상을 기록해서 보여주려는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깨달음에 이른것을 전달함으로써 함께 깨닫기를 시도해보는 작품이라는것, 그리고 그 깨달음도 시나 소설과 달리 읽는 사람의 경험만으로도 쉽게 납득할수 있도록 정서적의미를 함께 제시하기때문에 론점을 론거로 증명하려 든다면 부질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수필은 수필로 감상해야 할뿐 론리적시비를 걸 건덕지가 없다.
    히냥 비평의 눈길에 모를 세우고싶다면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무집착의 관찰을 선행시키는것이 기본자세이다. 사람들이 대방을 공정하게 보지 못하는것은 미묘한 집착과 편견에서 비롯되는것으로서 그것은 그 어떤 설득에 의해서도 제거되기 힘든것이다. 오직 그 자신의 내적인 통찰과 지혜에 의해서만 개진이 가능하다.
    마치 땅에 떨어진 바늘을 찾을 때 바짝 엎드려야 하는것처럼 비평자는 순간순간 완전히 자세를 낮추고 보아야 명지하다. 객관성과 나란히 가고있는 비평은 경험의 주관적인 성질을 제거하는 탐조등이 되여야지 냄새를 맡는 수색견이 되여서는 바람직 하지 않다. 아집과 증오심, 그리고 어리석음이 진정으로 우리의 성정속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몰각한다면 비평가로 자처하기를 그만두어야 할것이다.
    감각대상들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은 심오한 내적통찰의 경지에 이르는것을 방해하므로 무집착적인 관찰만이 공정성, 객관성의 체현을 가능하게 한다. 또 하나의 기본품성에는 긍정부정의 천평에 평가분동을 주어놓는 문제이기도 하다. 공정성은 객관성을 의미한다. 그래야만 평가저울의 눈금이 중도(中道)에서 벗어나지 않을것이다. 이는 “객관적”이라는 저울의 속성때문이다. 결국 극단을 피하는것이 바로 비평작업의 진수이다. 비평에서 작자에 대한 호악은 그 자신을 청맹과니로 만들고 만다.
    재삼숙고하는것은 결코 우유부단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형평성을 보장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란 표지이다. 우리의 시야를 가리는 수많은 편견때문에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는 어렵기때문에 비평은 이런 혜안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작품을 감상하는것이지 닭알속에서 가시를 찾기가 아니다.
    보이는것은 본대로, 들은것은 들은대로, 냄새맡은것은 본래의 냄새대로, 생각한것은 생각한대로 비평의 기틀을 세워야 공정성할수 있다. 세상에 모든것들이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부수적인것들일뿐, 절대적이라고 할만한것이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릇속의 물을 거울로 삼으려한다면 그릇속의 물은 자신을 비추어 보기에 충분할만큼 맑아야만 한다. 색안경을 쓰고 맑은 물을 보려한다면 우직하다. 붉은색, 노란색, 푸른 색이 섞여있다면 얼굴을 비추는 맑은거울이 되기는 아시당초 글러먹었다.
    가령 그릇속의 물을 끓이면 거품을 일것이요 얼굴을 비추어 볼수 없을것은 자명하다. 말하자면 한편의 글을 읽기전에 그 작자에 대한 악감정을 앞세우면 “사악”한 마음의 불은 원한속에 풀어놓은 혹평을 끓이게 하며 그것은 깨끗이 비춰주는 기능을 망치고만다. 이끼덮인 그릇속의 물이 거울역할을 하지 못하는 도리와 같다. 바람에 흔들려 잔물결이는 호수물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볼수 있을것인가? 비평자의 사심과 편견은 비평의 천평을 조작할수밖에 없다.
    맹자는 "중용의 덕을 가진 사람은 중용의 덕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가르쳐주고 재주가 있는 사람은 재주가 없는 사람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현명한 부형을 갖기를 바라는것이다. 만약 중용의 덕을 가진 사람이 중용의 덕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버리고 재주가 있는 사람이 재주가 없는 사람을 버린다면 현자와 불초한 자의 거리는 한치의 차이도 없게 될것이다."라고했다. 탈절된 인용이지만 패러디할진대 곧 작자를 깎아내리기 위해 비평의 칼을 들었다면 “졸문”의 작자와 크게 나을것없는 졸자가 된다는 비슷한 해석이 되겠다.
    남에게 완전완미함을 요구하기전에 “나는 완전완미한가?”라는 자문을 앞세워보라. 그러면 저도모르게 실어증이 생기지 않으면 소심성이 생겨날것이다. 충족과 부족은 동전의 량면과 같고 선량함과 악감은 한지붕아래서 티각태각한다. 편견의 색안경도 벗어야 하거니와 사심으로 녹쓸어버린 마음의 눈도 닦아야 사물을 바르게 볼수 있다. 마음이 비뚤어있으면 사팔뜨기처럼 사물을 사선으로 볼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진실이 변질하는것은 아니며 더구나 진실이 소실되는것이 아니다.
    지구가 돈다고 주창한 갈릴레이가 이단자로서 당시 종교재판소에서 심문을 받을 때에 재판관에게 "나는 당신을 설복시킬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망원경이 있으니 여기를 들여다 보시면 당신은 목성을 볼수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 재판관은 그 망원경을 들여다 보기를 거절했다. 그는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지않는것으로 믿고 있었던 까닭에 아무런 증거도 그를 설복시킬수 없었던것이다. 편견의 힘이란 이처럼 무서운것이다. 무섭긴 하지만 종래로 진리로 되여진적이 없었다는것은 아이러니다.
    문학도 예술이다. 예술의 의미는 일종 상상해낸 정감과 정서이다.“인간의 정감은 추리성부호와 보통언어로 표현할수 없다.”라는 니체의 말을 빈다면 수필은 론문이 아니기에 정서로 읽을것을 론리로 읽는다면 장님의 코끼리만지기와 같게 된다..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가 달린다던가, 바른 생각의 씨앗을 뿌려야 좋은 말의 싹이 나오고 좋은 언행의 줄기가 있어야 좋은 언론의 열매가 맺는다. 이건 상식도 아니다.
   지혜는 그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운용된다는 말이 있듯이 글은 작자의 창조품이지만 독자에 공용된다. 그리고 비평자의 과녁이 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무릇 모든 류형의 글의 생리이다. 이런 생리현상은 순탄해야 한다. 변비를 푼다고 억지로 설사를 시켜서야 되겠는가? 비평도 그렇고 그렇다. 

                                                 2014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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