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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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조선족문화예술 60년 산책 5
2013년 08월 09일 13시 48분  조회:5979  추천:2  작성자: 김희관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으며
 
 
머리말
 
TV, 영화,사진 등 영상문화의 본질은 새로운 영상을 창조하여 시청자들을 새로운 비전을 주는것이다. 그러자면 PD와 제작진은 우선 새로운 정치,경제,문화,사회환경을 제때에 포착하는 안광이 있어야 할것이며 그솟에서 새로운 영상을 창조해내야 할것이다. 우리는 사진,영화,TV, 컴퓨터영상,애니메이션,모바일,게임 등 영상문화에서 아직 약세다.  21세기는 영상문화의 시대이며 앞으로 인류의 문화형태는 점점 더 영상문화에 기대고 영상문화로 표연하고 영상문화로 기록하게 된다. 하기에 우리는 앞으로 더욱 우수한 영상문화인재를 키우고 더욱 참신한 아이디어를 발굴하면서 영상문화의 새시대를 열어가야 할것이다.
 
TV영상문화의 초등생이 되여
 
1986년 4월부터 필자는 연변TV방송국 국장에 발령이 나서 이제부터는 영상문화를 전공해야 했다. 필자는 부임하기전에 우선 어머님을 모시고 어머님의 고향 한국 경상북도 대구부근에 있는 청송을 방문하기 위해 출국방문길에 올랐다. 그때 중국조선족 공무원으로는 한국방문이 필자가 첫사람이였다. 그 때는 한국을 가자면 반드시 홍콩을 거쳐 가야 하는데 당시 홍콩은 아직 귀환되지않았기에 우선 북경에 들려 영국대사관에서 홍콩방문비자를 받아야 했다. 홍콩에서는 화국호텔에 몇일을 투숙해서 유람을 하면서 대기하다가 4월16일 대한항공편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어머님께서 48년만에 고향을 방문하기에 감격하시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동행한 필자도 많은것을 보고 감동했다. 또한 KBS에서 약 2개월간의 연수를 받을수 있어서 귀국해서 연변의 TV방송사업을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였다.
 
7월초 귀국전야 한국올림픽운동위원회 제17차 아세아운동회(亚运会)준비위원회  문화식전국장의 요청으로 서로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김국장은 <대한민국이 제17차 아세아게임을 몇년간 준비해서 만사가 다 준비되였는데 다만 중국체육대표단의 참가여부가 아직 미결이여서 걱정이다. 김국장께서 우리를 도와 중국정부에 소통을 해주시기 바란다. 우리가 <중국체육대표단 초청장>과 아세안게임 준비상황에 관한 영화필름,비데오,녹화기,홍보책자,기념품 등을 준비해 드리겠다.> 나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신있게 그렇게 해드리겠다고 흔쾌히 대답했다. 나는 그러한 홍보물을 북경에 가지고 와서 중앙정부에 실수없이 교부하고 연변으로 귀가했다. 약 한달후 어느날 아침 중앙인민방송국의 <뉴스프로(新闻联播)>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체육대표단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열리는 제17차 아세안게임에 참가하게 된다.>는 뉴스가 터져나왔다. 그순간 나는 머리가 썽해나는 감각을 느끼면서 중국을 위해, 어머님의 고향을 위해 내가 민간사자 역할을 했다는 생각에 감격했다.
 
7월14일 , 나는 연변TV방송국 국장에 부임하여 영상문화사업의 새여정을 시작했다.
지난 70년대 중반부터 연변TV방송국의 창업자들은 몇년간의 간난신고를 거쳐 중국조선족의 TV방송국을 창설했다. 그들의 로고는 중국조선족 문화예술사에 길이 빛날것이다.
 
나는 연변TV방송국에 부임한후 한동안 조사연구사업을 벌렸다. 결과 우리의 TV방송설비가 아날로그인것은 물론이고 설비가 전업수준에서 거리가 멀고도 낙후하며 게다가 노화가 심하고 더우기 많은 시설들이 부족했다. TV프로그램을 보면 아이디어,동영상,색채,구성 등 여러면에서 아직은 걸음마 단계에 있어서 시청자들의 영상문화에 대한 요구를 만족시키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가장 중요한것은 기자,편집,TV기술대오가 아직은 TV전업지식이 부족하고 주요하게는 실천에서 더듬으며 배우는 체험단계에 처해 있었다. 그 당시 내가 미국,일본,한국을 방문하면서 TV영상문화를 주의깊게 고찰하고 연수를 받은 지식과 정보는 상술한 과제들을 풀어가는데 다소 추동력이 되였다.
 
1977년과 1988년 TV음력설야회는 커다란 시험대였다. 당시 내가 생각하는 의 아이디어는 음악,무용,소품 3대 지주프로에서 <만남>을 체현하는것이다. 나는 <만남>은 인간의 감동을 최대한 담아낼수 있는 커다란 <정감의 그릇>이라고 생각했다. 엄동설한과 따스한 봄날의 만남, 오래동안 헤엊졌던 부모형제들지간의 만남, 전통문예와 현대문예의 만남 등이다. 이러한 <만남>이라는  아이디어는 TV음력설야회로 하여금 영상으로 할말이 많게 해주었다. 그리고 TV음력설야회가 반드시 TV스튜디오에서만 제작되는것이 아니라 TV카메라를 봄부터 겨울까지 야외에 돌려 좋은 풍경,좋은 야외프로를 미리 축척하는 내공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안도현 신흥촌의 <농악무>, 청년호에서 전주의 300여명 가무배우들을 동원해서 찍은 김성삼의 가야금독주<노들강변> 등 프로들은 좋은 반응을 보였다. <연변가요 련창>, 기타합주와 노래<고향의 봄> 등 음악프로도 <우리 력사와의 만남>이여서 좋은 효과를 보았다. 무용프로는 되도록 민속무용에 중점을 두었고 순수 무용프로도 좋지만 되도록 백댄서식으로 무용의 출연기회를 넓혔다. 그리고 소품프로는 시대의 맥박을 잘 짚어 시청자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과정에 동감을 하는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그때 소품을 통해 만들어진 신조어가 바로 <사촌언니(水肉)> <땅우에 노배> <부조바람> <쌍카역> <깍쟁이> <황혼련애> <예조리영감> 등 이다. 1988년 TV음력설야회<백두의 봄>이 중앙 CCTV전국TV음력설야회 스페셜방송에서 첫프로로 방송이 되였다. 얼마후 CCTV에서 <1988년전국TV음력설야회 스페셜방송 1등상>이 내려와서 연변TV방송국에는 경사가 났다.
 
뉴스프로는 TV방송의 눈동자이다. 1987년5월말의 어느날 오후, 당시 연길비행장에서 발생한 <5.12특대살인사건>을 정찰하던 공안일군들이 급히 저희들을 찾아와서 범죄자가 도주하고 있는데 그의 사진을 TV방송에 방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나는 그 공안일군더러 <빨리 집에가 경찰복장을 입고 와서 직접 방송해 달라. 우리는 지금부터 그 사진화면을 방송화면으로 제작할것이다.> 우리는 저녁6시반30분 <연변뉴스>방송개시을 약 40분을 앞두고 공안일군이 직접방송하는 특보뉴스를 긴장하게 제작하여 제시간에 방송을 했다. 3일후 그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 TV방송을 본 하남가두의 <치안소조>할머니들이 거리를 순찰하다가 굶어서 밥을 먹으려고 손목시계를 파는 범죄자를 즉각 알아보고 잡았다는것이다. 6월말,연변예술극장에서 국가 공안부와 길림성정부에서 개최한  <5.12사건 파안 경축대회>가 성대히 열렸다. 그 공안일군들은 <영웅>이 되였다. 당시 국가 공안부 령도동지가 이번 파안과정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TV방송수단으로 파안한 력사상 첫사례이다.>라고 선포했다. 참, 그렇게까지 될줄은 정말 몰랐다. 기막힌 일이다. 그날 오후 대회에 참석했던 길림성 성장 왕충우(王忠禹 후날에는 국무원 비서장, 전국정협 부주석 역임)동지께서 친히  연변TV방송국을 찾아 우리를 격려해 주시였다.
 
1991년1월, 강택민주석이 연변을 시찰할 때였다. 엄동설한에 강주석일행이 훈춘방천을 시찰하면서 높은 관망탑에 올랐다. 그런데 중앙뉴스매체 기자들만 관망탑까지 따라 올라가고 지방의 기자들은 소외되였다. 연변TV의 홍길남기자(현재 길림신문사 사장)은 울분을 참고 관망탑아래 눈판에 기여들어가 손가락에 동상을 입으면서 TV카메라를 추켜들고 강주석의 시찰장면을 잘 촬영했다. 결과 CCTV에서는 자기네 기자의 TV뉴스화면을 못쓰고 우리의 뉴스화면을 쓰게 되였다.
 
1992년6월, 나는 연변의 중러변경의 개방과 변경무역이 흑룡강성에 뒤지는것을 감지하고 홍길남,윤상룡기자를 인솔해 수분하,흑하와 러시아 아무르시 등 지역을 취재하여 특별뉴스를 두주일간 방송함으로써 시청자들에게 참신한 소식과 정보를 제공했고  <타산지석 가이공옥(它山之石可以攻玉)>의  뉴스효과를 보았다. 그때부터 연변의 뻐스가 보따리장수들을 싣고 수분하를 왕복했다.
 
TV문화의 국제협력시대를 열어
 
TV영상사업은 국제협력이 아주 필요한 문화령역이다. 1987년 여름, 우리가 일본NHK방송사 제쟉진을 초청하여 다큐프로를 공동제작하던 때만해도 국제협력사업은 아주 어려운 일이였다. 그 때 NHK방송사는 벌써 위성방송을 시작하느라고 분주했고 우리와 함께 제작한 프로를 위성방송으로 방송했다. 그후 그들의 초청으로 필자는 NHK방송사를 방문하여 많은것을 보고 배웠다.
 
그해 겨울 우리는 한국의 유명한 한복디자이너 이영희여사를 초청하여 처음으로 <이영희 한복패션쇼>을 진행하고 그 TV실황을 방송 했는데 그야말로 연변의 한복<장인>들에게 한복디자이너로 발전하는 계몽의 계기가 되였다. 지금 이영희여사는 프랑스 빠리에서 유명한 한복디자이너가 되였다.
 
1991년9월 17일, 연변TV방송국은 제작진은 밤 12시반에 연변예술극장에서 한국 MBC문화방송국 연변방문예술단의 공연프로를 영상록화하는 전대미문의 작업을 했다. 그당시 한국의 톱가수들인 주현미 최진희 김미애 김완선 이상은 등이 무대에 올랐고 국민MC 리덕화가 사회를 했다. 사실 이번 공연행사는 그 전해 여름 필자가 서울에서 MBC방송국을 방문할 당시 협의한 TV문화교류사업인데 당시 중한수교가 아직 이루에 지지 않았고 중한문화는 꿈도 못꾸는 시기여서 무대공연과 영상록화 허가를 받는데 많은 난항을 겪었다. 지금보면 그 때 진행된 연변TV방송과 한국MBC문화방송의 TV문화교류행사는 <한류>가 중국대지를 휩쓰는 첫신호탄이였다. 몇년후 MBC문화방송이 제작한 TV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처음으로 중국관중들에게서 커다란 히트를 쳤다. 그 드리마 시나리오의 중국어대본도 중앙CCTV의 부탁으로 연변TV방송의 김련란 등이 번역한것이다.
 
또한 우리는 평양과 서울에 아나운서들을 파견하여 견학과 연수를 받게 하였을 뿐만아니라 기타 여러TV프로의 국제협력을 펼쳐나갔다.
 
위성방송시대를 맞으면서
 
1997년 필자는 <21세기 중국조선족문화발전방략>연구에 참여하여 <21세기 연변조선족문화발전방략>을 집필하면서 <앞으로 우리도 나라에서 위성TV방송을  비준받아 동북아의 조선어시청권을 대상으로 TV방송을 해야 한다.>는 취지의 제안을 했다. 그때가 어제 같은데 연변위성TV방송이 벌써 6년이 되였다.
 
연변위성방송은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의 혜택이다. 2003년6월, 중앙의 유관 지도자가 연변을 시찰할 때 연변의 조선어 라디오TV방송사업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갈데 관한 지시를 내리면서 연변위성방송사업은 국가의 <서신공정(新疆西藏工程)>의 일환으로 되였했다. 2006년8월10일, 연변위성방송은 정식으로 동북아의 하늘에 전파를 발사하면서 조선어 위성방송의 새시대를 열었다. 사실 위성방송은 성,시,자치구급이상에서만이 할수 있는 방송인데 우리는 지구급이면서도 위성방송을 할수 있어서 특혜를 누리는것이다.
 
연변위성TV방송은 중국조선족의 위성방송이다. 연변위성TV방송은 연변이라는 지리적인 지역을 넘어 국내 각지에 살고 있는 조선족을 대상으로 하는 위성방송이다. 하기에 연변위성방송 뉴스프로는 중국조선족의 새로운 기상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고, 두만강지역개발과 장길도선도구건설 실황, 우리의 력사와 전통문화를 실은 TV매거진<두만강>, 우리생활의 이모저모를 보여주는 <사랑으로 가는 길> <고향의 아침> <청춘스타트><우리네 동네> <경제와 생활> 등 프로는 중국조선족의 정치,경제,문화,청소년,사회 등 각방면의 새기상을 생동하게 전해주고 있다. 또한 <아라랑극장><문화광장><매주일가><드라마극장> 등 문예프로는 우리의 전통문화와 문화유산을 배경으로 21세기 중국조선족문화의 진수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연변위성방송은 중국의 뉴스와 문화를 조선어TV방송으로 전파하는 창구이다. 연변위성방송은 CCTV방송의 뉴스와 사회교양프로, 다큐, 드라마 등 우수한 프로들을 조선어로 역제하여 방송함으로서 국내조선족들에게는 물론이고 동북아의 조선어 TV프로  시청자들에게 중국의 소식과 문화를 전파하는 사명도 수행하고 있다. 그 와중에 해외에서 유학,사업,노무를 하고 있는 조선족동포들에게 고향의 소식을 전해주는 메신저역할도 잘 하고 있다.
 
위성방송의 핵심적인 기능은 와이드앵글(넓을 시각)에 있다. 위성방송은 보다 넓은 세상을 취재대상으로 하고 있고 보다 넓은 세상에 새소식과 참신한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하는 방송이다. 하기에 연변위성방송은 앞으로 중국조선족 동포들이 살아가고 있는곳이라면 국내외 그 어디라도 찾아가서 카메라로 대화를 할것이다.
 
위성방송은 하늘에서 대지를 내려바 보는 방송인만큼 21세기를 살아가는 중국조선족동포들의 이야기를 더욱 심각하게 내려다 보고 그중에서 참신하고  다이나믹한 뉴스들를 제때에 전파해주어야 할것이다. 또한 중국조선족문화의 새기상을 제때에 파악하여 그것을 다 같이 향수할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것이다.
 
위성방송은 국내외에 시청자들을 두고 있다는것을 잊지말아야 할것이다. 국내에서 조선족동포들은 물론이고 조선어를 배우는 형제민족시청자들도 있다. 또한 동북아지역의 조선어시청자들이 우리의 위성방송을 지켜보고 있음을 명기해야 할것이다. 그러한 시청자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는 위성방송을 위성안테나, 인터넷, 케이블방송을 통해 다 시청할수 있도록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려야 할것이다.
 
연변은 중국조선족문화의 <종가집>이다. 또한 TV사업의 본질은 영상문화이다. 하기에 우리는 중국조선족동포들을 위해 뉴스와 참신한 조선족문화를 TV영상으로 전파해드려야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 35년전 연변TV방송국이 개국하면서 전국의 지구급에서는 처음으로 이러한 역할을 시작했었는데 지금은 연변위성방송도 지구급에서 선참이라니 참 뿌듯하다. 자고로 <청출어람>이라 했다. 연변위성방송이 중국조선족문화 <종가집>의 특색이 짙은 TV프로를 많이 개발하고 제작하여 국내외 광대한 시청자들 마음속의 샛별이 되기를 바라는바이다.
 
영상으로 기록하는 우리의 100년사
 
TV다큐프로는 TV방송의 허브이다. 199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40돐을 맞아 필자가 기획하고 연변력사연구소 소장 권립교수가 집필한 연변조선족백년사 다큐멘타리 <피와 땀으로 가꾼 대지 연변>는 우리의 백년사를 영상으로 제작하는 첫시작이였다. 이러한 영상작업은 필자가 <중국 연변조선족력사화책>과 <당대 중국조선족화책>을 기획하고 주필을 맡아 출판하는 용기를 주었다. 또한 1999년11월에는 그러한 성과작들을 기반으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중국조선족 백년사 사진전>을 열어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조선족 100년사 영상작업은 두만강일대 연변조선족 고촌락고찰사업(古村落考察事业)으로 이어지면서 150여년전부터 두만강북안으로 이주하여 살아온 우리 조상들의 발자취를 몇년간 현지답사하였다. 우리는 훈춘시 경신진 회령봉에서 화룡시 숭선까지 무릇 두만강가의 마을이면 모두 현지답사를 하고 그중에서 오래된 기와집이면 더우기 자세하게 영상과 문자기록을 하였다. 그중에서 옛날의 화룡욕 명동촌(지금의 룡정시 명동촌)을 몇차례 자세히 고찰하면서 반일 저항시인 윤동주의 옛생가를 다시 고증하는 작업을 집중적으로 벌렸다. 결과 1958년 윤동주생가가 허물리여 기와는 누구네가 벗겨가고 목재는 누구네가 사갔는가를 파악하고 그 막새기와를 찾는데 주력하여 끝내 무궁화, 십자가, 태극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막새기와를 찾아냈다. 이 막새기와는 전문가들의 고증을 커쳐 윤동주생가의  막새기와 진품으로 확정 받았다.  2002년 5월, 필자는 연변TV방송국 최선화PD의 제작진과 함께 TV다큐 <기와에 살아 숨쉬는 령혼>을 제작하여 국제대상을 받았다.
 
2011년 4월,우리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창시자이신 주덕해주장님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했다. 필자는 2010년초부터  대하다큐멘타리<주덕해> 프로의 고문을 맡아 동분서주했다. 당시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조남기장군님께서 우리에게 <주덕해동지는 당의 우수한 민족간부이시며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창시자이시다. 주덕해주장님은 당의 민족정책을 정확하게 관철하신 모범이였고 우리의 교육,문화예술,과학기술과 농업,공업의 기반을 닦아주신 개척자이시다.>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초청에 기꺼히 응하시여 북경에서 주덕해주장님에 대한 추모의 정을 담은 TV화면을 제작하여 <주덕해>제작진에 보내주시였다. 2011년 1월중순 <주덕해>제작진은 외지 취재에 났다. 필자는 제작진과 함께 장춘에 들려 주덕해주장님의 자녀들을 만났다. 필자의 아버지는 1948년 봄부터 할빈에서 주덕해동지의 비서로 발탁되여 그의를 따라 연변에 와서 당위사업을 했다. 하기에 필자는 주덕해의 자녀들과 함께 주위관사에서 가까히 살았다. <문화대혁명>이라는 대동란은 우리들을 모두 뿔뿔히 흩어지게 했다. 이번 장춘에서의 만남은 40여년만의 만남이여서 20세좌우에서 흩어진 우리들이 모두 60여세의 로인들의 만남이 되였다.
 
올해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이하게 된다. 1952년 9월3일 오후, 필자는 중앙소학교 3학년 학생이여서 동창들과 함께 연길시 서광장에서 3만여명의 시민들이 모여 성대하게 열린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창립 경축대회>에(1955년 8월 길림성정부에서 연변조선민족자치구를 연변조선조선족자치주로 변경한다는 지시를 하달했다.) 합류했고 저녁에는 초롱불시가행진을 하면서 즐거웠다. 요즘은 그러한 옛날을 회고하며서 주정부에서 지시한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 홍보영상프로>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문화는 민족의 혈맥이고 령혼이며 정신의 터전이다. 우리가 경제를 부흥시키면서 <문예부흥>을 잊을수 없다. 인간이 경제를 부흥하는 최종적 목표는 문화로 쌓아올린 문명한 생활터전이기 때문이다. 영상문화는 우리의 문화를 더욱 윤택하게 해 주고 있다.
 
고희를 맞으면서 필자는 농사를 배운것이 후회없고 신문기자 생활이 재미있었고  문화행정과 TV방송에서 열심히 봉사한 나날이 그립다. 작년 여름부터는 연변인물연구회에서 문화예술인물편 주필을 맡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아 출판할 <연변인물록(문화예술편)>과 앞으로 출판예정인 <중국조선족인물록(문화예술편)>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문화예술인물들을 많이 만나고 그들의 업적들을 정리하면서 연변조선족문화예술의 앞날이 밝을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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