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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엄한 중산릉(1)
청해
우리 부부는 항주와 상해유람을 마치고 10월 7일 아침 상해에서 남경행 렬차에 올랐다. 남경역에 도착하니 8시 반이였는데 그전의 급행렬차로는 상해와 남경사이를 5시간 남짓이 달리던 것이 이번에는 고속렬차를 타니 1시간 반 밖에 걸리지 않았다.
남경역에 내려서 관광뻐스에 앉아 중산릉으로 행하였다. 그전에 몇 번 남경에 다녀오면서 다른 관광명소들은 구경하였지만 시간상 관계로 중산릉은 구경 못하였기에 이번 유람에는 제일 코스가 중산릉이였다.
중산릉은 남경시 동쪽의 자금산(紫金山)의 울창한 수림속에 위치하여 있었는데 저명한 설계사 려언직(呂彦直)이 설계하였는데 총 면적은 2000무 되며 주요 부분과 건축물을 보면 광장, 박애방, 묘도, 릉문, 비정, 층계, 제당, 묘실 등이다. 손중산 선생이 1925년 3월 12일 북경에서 59세를 일기로 서거하여 1926년 3월부터 1929년 봄까지 시공하였는데 그해 6월 1일에 봉안(奉安)의식을 하였다고 한다.
1. 입구(入口)
중산릉의 입는 中山陵園 이라고 쓴 사주삼문(四柱三門)식의 화강암 패방(牌坊)으로 되였다.
입구(入口)
중산릉 패방으로 들어서면 화원으로 장식된 반원형의 광장이 있는데 북쪽으로 올리다 보면 중산릉의 전경이 보인다.
중산릉 전경
2. 박애방(博愛坊)
다음으로는 광장으로부터 묘도(墓道)에 들어서는 사주삼문(四柱三門)으로 되어 있는 박애방(博愛坊)이다. 가운데 문미(門眉)에 '博愛'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하여 '박애방'이라고 하는데 이는 손중산선생이 생전에 가장 즐겨 부르던 두 글자이다. 패방은 길이 17m, 높이 12m로 되였으며 패방우에는 남색의 오지기와가 얹혀져 있다. 손중산 선생은 일생을 위대한 박애정신으로 자산계급 민주혁명에 이바지하였으며 '박애' 이 둘 글자는 그의 일생에 대한 고도의 괘괄이며 가장 적절한 묘사이다.
박애방(博愛坊)
3. 묘도(墓道)
박애방으로 들어서면 릉문까지 통하는 길이 480m, 넓이 40m의 넓은 길이 있는데 곧게 세갈래로 뻗어 있었다. 가운데 길은 너비 12m의 콩크리트로 된 길바닥인데 고대의 릉묘로 통하는 길옆의 석인(石人), 석수(石獸)가 있는것과는 달리 량쪽에 두 줄의 설송나무와 네줄의 전나무가 좌우 대칭으로 줄지어 있다. 그리고 그 나무들의 좌우 량쪽에 4.2m의 너비의 길이 있다. (아래의 사진과 전경도를 참조)
묘도(墓道)
4. 릉문(陵門)
묘도를 다 걷고나면 앞에 단층집이 가로 앉아 있는데 이것이 바로 릉문(陵門)이다. 릉문 전체가 복건성 화강암으로 건축되였고 지붕은 단층 산봉우리식으로 남색의 오지기와로 되였으며 세 개의 아치형 문은 동을 조각하여 만들었고 중간문 우의 횡액(橫額)에는 손중산 선생의 친필로 된 “天下为公(천하위공)”란 네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뜻인즉 천하는 어느 한 개인이나 어느 한 집의 천하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의 천하라는 뜻이다. 이 네글자가 바로 손중산 선생이 평생 분투한 목표와 리상이다. 평시에는 중간문을 열지 않고 옆의 두문으로 유람객들이 다니는데 국민당 련전(连战) 주석과 친민당 송초유(宋楚瑜)주석이 참배하러 왔을 때에는 열었다고 한다.
릉문(陵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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