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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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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휴대하고 장개석거실을 자유로 출입한 엽검영
2014년 11월 30일 09시 45분  조회:7392  추천:0  작성자: 넉두리

총을 휴대하고 장개석거실을 자유로 출입한 엽검영


 
(번역)



 

 
전국정협위원이며 국제유학련합회보급위원회 부주임인 엽향진(叶向真)은 개국원수 엽검영(叶剑英)의 둘째딸이다. 엽향진은 “아버지 엽검영은 총을 휴대하고 장개석의 거실을 마음대로 드나들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부터 짚신을 신고 혁명에 참가하는 길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1897년 4월 28일에 광동성 매현에서 출생한 엽검영은 1920년 여름에 손중산이 조직한 계계군벌(桂系军阀)을 몰아내는 전역에 참가했다. 1922년 6월에 월계(粤系)군벌 진형명(陈炯明)이 손중산을 배반하자 해군륙전대 영장직을 맡았던 엽검영은 부대를 거느리고 손중산을 보호하여 위험에서 벗어나게 했다. 1924년초에 건국월군 제2사 참모장직을 맡았던 엽검영은 료중개선생의 요청으로 황포륙군군관학교창건에 참가하여 교수부 부주임직을 맡았는데 당시에 매우 위망이 있는 교관중의 한분이였다.
엽향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는 그 시절에 손중산선생을 보호했으며 후에 황포군관학교를 건립할 때 20명 건교인중의 한명이였다. 황포군관학교가 건립되였을 때 아버지는 부교육장으로 임명되였다. 그 당시에 황포군관학교의 수업과목은 전부 아버지가 제정했다. 아버지는 황포군관학교의 모든 수업과목을 제정한후 동정(东征)을 하러 갔기에 개학의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1925년에 광동성 동강일대에 도사리고있던 월계(粤系)군벌 진형명(陈炯明)은 반혁명무장을 동원하여 광주혁명정부를 와해하고 뒤엎으려고 시도했다. 광동혁명근거지를 공고히 하고 진형명의 반동음모를 분쇄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의 창의와 호소하에 광주혁명정부는 진형명을 토벌하기로 결정했다. 1월 15일에 동정을 선언하고 2월 1일에 진군하기 시작했다.
엽향진은 엽검영한테서 들었던 그때의 이야기를 이렇게 언급했다.
“아버지는 황포군관학교건립과 동정에 참가했기때문에 장개석과 매우 깊은 우의를 맺게 되였다. 또 그때문에 장개석은 엽검영을 제일 신임했다. 누구나 검과 총을 휴대하고 장개석의 거실로 들어갈수 없었다. 그러나 유독 엽검영만은 검과 총을 휴대하고 장개석의 거실로 자유롭게 드나들수 있었다.”
장개석은 엽검영을 가장 중하게 여겼다. 후에 장개석은 엽검영을 제2사의 사장에 임명하고 겸하여 광동과 광서의 염무관리를 책임지게 했다. 1925년에 엽검영은 진형명을 토벌하는 동정에 두번이나 참가해 용감하게 싸우고 과단하게 지휘하여 출중한 군사재능을 보여주었다. 1926년 7월에 북벌전쟁에 참가한 엽검영은 초기에 국민혁명군 제1군 총예비대 지휘부 참모장직에 임명되였다. 남창을 공략한후 그는 국민혁명군 신편 제2사 사장직에 임되였다. 1927년 4월 12일에 장개석이 반혁명정변을 발동한후 엽검영은 단호하게 장개석을 반대하여 무한으로 가서 국민혁명군 제4군 참모장직을 맡았으며 그해 7월에 백색공포속에서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엽향진은 이렇게 말했다.
“광동과 광서의 소금을 관리하는 직무는 힘들이지 않고 돈을 많이 벌수 있는 자리였다. 아버지는 6개월사이에 100만딸라의 수입이 있게 되였다. 당시 사장인 아버지가 외출할 때면 말을 탔는데 뒤에서 가마가 따랐으며 사병이 단마르크에서 수입해들인 과자와 정제우유를 지게에 메고 따라갔다. 당시 정제우유는 모두 수입제여서 매우 비쌌다. 뒤에서는 또 사병이 위스끼(威士忌)와 브랜디(白兰地)를 가지고 따라갔다. 아버지는 말을 타고싶지 않을 때에는 가마에 앉아다녔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아버지의 지위를 부러워하며 하루만이라도 그런 자리에 앉고싶어했다.
당시에 아버지는 자신만 생각한것이 아니라 광대한 로고대중들을 위하고 민족과 나라를 위해 분발하려고 했던것이다. 그랬기때문에 후에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하고 ‘4.12’대도살을 일으켰을 때 아버지는 외래침략자에 대항하지 않고 자기의 동포와 공산당을 살해하고있는 장개석을 계속 따르는것은 진정한 애국자가 할일이 아니고 출로가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하여 아버지는 단호하게 구두를 벗어놓고 짚신을 신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정강산으로 찾아갔다. 아버지는 정강산에서 많은 혁명선배들과 함께 인민과 조국을 해방하는 대업을 위해 어깨곁고 싸웠다. 당시 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중에는 관리들의 핍박에 의해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도 있고 백성을 위해 청원하러 온 사람들도 있고 아버지처럼 높은 벼슬과 많은 록봉을 포기하고 리상을 위해 혁명에 참가한 사람들도 있었다. 아버지의 리상은 높은 직위와 명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로고대중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한것이였다. 만약 자신을 위한것이였다면 아버지가 장개석을 따르지 않았다고 해도 재산을 가지고 미국으로 갔을것이다. 당시의 100만딸라는 지금의 10억딸라에 맞먹을 거액이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렇게 하지 않고 많은 애국지사들처럼 인민과 조국에 충성하고 손중산선생처럼 전국의 압박받고 천대받는 인민을 각성시켜 3개의 큰 산을 뒤엎고 중국인민의 공화국을 건립하려고 했던것이다. 이것은 당년에 혁명에 참가한 공산당원과 우리 선배들의 공동한 리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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