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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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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은 왜 남경을 수도로 정했는가?
2015년 03월 15일 10시 59분  조회:6572  추천:2  작성자: 넉두리

국민당은 왜 남경을 수도로 정했는가?

 
(번역)




 
 
1840년대부터 중국의 국가안전은 서방렬강의 위협을 받아왔다. 신해혁명후에 어느 곳을 중국의 새로운 정치중심으로 할것인가 하는 문제는 혁명당인들이 직면한 중대한 정치론쟁으로 되였다. 각파는 당시 무창을 새로운 정치중심으로 하는 파와 상해를 새로운 정치중심으로 하는 파로 갈라져 서로 다투었다. 무창은 신해혁명이 일어난 곳이다. 무창봉기가 일어난후인 1911년 11월 7일에 악군도독부는 신정부건립문제에 관하여 각지로 통지을 보냈다. 각성에서 전권위원을 무창으로 파견해서 림시정부를 구성하자는 내용이였다. 당시 혁명당인들의 정치적기반이 비교적 강한 곳은 동남연해지역이였다. 강소절강지역에서는 새로운 정치중심으로 상해를 주장했다. 강소도독 정덕전, 절강도독 탕수잠은 련명으로 호군도독 진기미에게 전보를 보내여 상해에 “림시회의총기관”을 설립하자고 요구했다.
 
중국의 새로운 정치중심을 어디에 둘것인가 하는 문제는 남경을 점령하면서 혁명당내부에서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했다. 1911년 12월 12일에 각성대표는 무한, 상해에서 남경으로 모였다. 그해 12월 29일에 각성의 대표회의가 남경에서 개최되였고 중앙림시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1912년 1월 1일에 중화민국이 정식으로 성립되였다. 손중산은 남경에서 중화민국림시대통통에 올랐다. 혁명파는 잠시 론쟁을 거쳐 마침내 남경을 림시정치중심으로 결정했다. 이렇게 되여 당시 중국정치지리국면에서 두개의 정치중심이 생기게 되였다: 하나는 청왕조의 정치중심인 북경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당의 중치중심인 남경이였다.
 
손중산이 림시대통령직을 맡을 때에 “원세개가 공화제를 옹호하고 청나라황제를 퇴위시키면 나는 대통령자리를 양보하겠다”고 말한바 있다. 수도에 관하여 손중산은 남경이든 북경이든 모두 좋다는 립장이였지만 남경을 선호하는 편이였다. 1912년 2월 12일에 원세개는 청나라황제를 퇴위시켰다. 손중산은 사직하고 원세개로 하여금 그의 자리를 대체하게 했다. 그러나 손중산은 원세개에게 3개의 조건을 내밀었다. 그중의 2개조건은 남경을 수도로 하는것과 관련된다.
 
첫째, 림시정부는 남경에 둔다. 둘째 신임대통령은 남경에서 취임한다. 즉 원세개를 남방혁명파의 감독과 통제하에 두겠다는것이였다.
그외에 일본에 가있던 손중산에 대한 영향력도 회피할수 없는 문제였다. 신해혁명때 중국의 남북정권에 모두 영향력을 가지고있던 일본의 조정과 민간에는 중국의 정치중심을 남경에 두기를 원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일본의 생각은 아주 명확했다. 중국정치중심이 남으로 옮겨오는것을 리용하여 중국의 북방방어력을 약화시키자고 함이였다. 그렇게 해야 동북과 몽골에 대한 침략이 쉬웠기때문이다.
 
동맹회 회원들이 이 문제를 토론할 때에 북경을 수도로 하자고 주장한 사람이 20명이고 남경을 수도로 하자고 주장한 사람이 8명이였다. 나중에 손중산과 황흥이 남경을 수도로 하자고 견지하는 바람에 토론에 붙여 남경을 수도로 확정했다.
원세개는 자신의 세력권인 북방을 벗어나 남방으로 옮겨와서 혁명파의 견제를 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북방의 군인집단도 정치중심의 남쪽이전을 바라지 않았다.
 
1912년 4월 2일에 원세개는 림시정부를 북경으로 옮기기로 결의했다. 손중산이 남경에 정치중심을 건설하려는 계획은 무산되였다. 원세개가 북경을 정치중심으로 고집한것은 그 나름대로의 음모가 있었다고 볼수 있다. 그렇지만 합리성도 있었다. 첫째, 북경을 선택하는 자체가 바로 각지역이 원하는 바였다. 둘째, 일본제국주의가 동북지방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상황하에서 북경의 정치중심을 유지하는것이 일본에 대응하는데 유리했고 황제복벽파를 막는데도 유리했다.
 
북경의 정치중심으로서의 지위는 1912년에서 1927년까지 유지되였다. 원세개의 통치기간동안 표면적으로는 강권정치였지만 원세개가 죽은후에는 북양군벌 3대파인 환계군벌, 직계군벌, 봉계군벌과 다른 지방군벌들이 할거하면서 정치중심으로서의 북경의 지위는 약화되였다.
 
1927년에 국민당이 북벌을 시작했다. 새로운 정치중심을 확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국민혁명군총사령관인 장개석은 처음에는 정치중심을 무한에 두는데 찬성했다. 나중에는 립장을 바꾸었는데 여기에는 두가지 리유가 있었다: 하나는 당생지가 기본적으로 량호(两湖)지역을 지배하게 되였기때문이다. 장개석은 당생지가 지배하는 호북과 호남지역에서는 자신이 총사령관의로서의 권위를 발휘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다른 하나는 북벌전에 광주지역은 홍색화되여있었기때문이다. 장개석이 무한으로 천도하는것에 동의했던것은 공산주의운동의 기반이 약한 량호지역을 선택하기 위함이였고 국민당내의 좌파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였다. 그러나 북벌로 무한을 점령한후에 무한의 홍색화정도는 광주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무한에 정치중심을 두는것은 국민당내의 좌파에 유리할것이 뻔했다. 이런 두가지 리유로 장개석은 남경을 수도로 정하게 되였던것이다.
 
장개석은 남경에 정치중심을 두었지만 당시에 무한에도 왕정위를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정치중심이 형성되였다. 얼마후에는 서산회의파가 상해에 또다른 국민당중앙당부를 결성했다. 이외에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군벌정권이 아직 소멸되지 않았다. 중국은 당시에 실제로 여러 정치중심이 병존하는 국면이였다. 그러나 이러한 국면은 오래가지 않았다. 1927년 9월에 국민당내 각 세력은 타협을 이루어 특별위원회를 남경에 두기로 선포했다. 1928년 2월 2일에 국민당은 회의를 개최하여 상해, 무한, 남경에 3개의 당중앙이 있던 국면을 끝냈다. 같은해 6월에 장개석은 다시 북벌을 시작했고 북경을 함락시켰다. 곧 이어 동북의 장학량도 국민당에 합류하여 전국은 형식적인 통일을 이루게 되였다. 당시의 조건하에서 국민당은 중국의 정치중심을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기는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북경의 전통적인 정치중심으로서의 개념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국민정부는 북경을 북평(北平)으로 개칭했다.
 
중국의 정치중심으로 된 남경은 중국에서 근 1000년동안 형성되였던 전통적인 정치지리국면을 뒤바꿔 버렸다. 중국은 력대이래로 국방요지인 장성이북지역에 대한 방어능력이 상당히 약화되였다. 중국의 정치중심이 남으로 이전된후 장개석은 중심지역의 통치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게 됨에 따라 정부가 동남지역에서 상인들과 리권을 다투는 현상이 심해졌다. 이리하여 중국은 국가자본과 관료자본이 독점하는 기형적인 형태로 바뀌였다. 동남연해지역과는 달리 중국의 내륙지역에 대하여는 갈수록 덜 중시하게 되였다. 그 결과 농촌에 대한 국민당의 통치력이 갈수록 약화되였다.
 
정치중심을 남쪽으로 이전한것은 국가의 대외방어력에 빈틈을 생기게 한 실수였다. 이에 따라 국민당은 서방렬강과의 관계를 처리함에 있어서 영국과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일본에 대한 방어에 소홀하게 되였다. 일본은 제1차대전기간동안에 중국에 대한 침략을 확대하여 중국의 국가안전에 큰 위협을 미치는 상황이였다. 일본은 동북, 몽골을 점령하는것을 기본국책으로 정했다. 장개석이 군사력을 모아서 2차북벌을 시도할 때에 일본은 장개석더러 장강류역에 뿌리를 내리도록 요구하면서 북벌을 반대했다. 그 뜻은 중국이 통일되는것을 막겠다는것이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장개석이 남방에 수도를 정함으로써 북방에 대한 방어는 갈수록 약해졌다. 객관적으로 일본의 동북에서의 세력확장을 도와준 격이 되였다. 국민정부가 건립된후 5년의 기간내에 일본은 동북에 군대를 출병시키고 1937년에는 중국침략전쟁을 개시했다.
 
이 때문에 국민당은 큰 대가를 치렀다. 국민당의 정치중심남쪽이전과 소극적 항일은 일본군의 세력확장을 간접적으로 도와 결국은 국민당의 수도 남경까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는 참패를 겪게 했다. 장개석이 소극적으로 항일한것은 군사세력을 보존했다가 공산당을 소멸하기 위함이였다. 하지만 그것은 장개석의 오산이였다. 장개석은 조국땅을 짓밟은 외적은 못본척 하고 중국사람으로서 중국사람(공산당)을 쳤기때문에 인심을 잃었다. 수천년의 중국력사를 살펴보면 한때 세력이 아무리 강했더라도 인심을 잃으면 결국 력사의 무대에서 물러나는 꼴이 되였다. 물론 장개석도 그런 끝장을 면치 못했다. 만약 국민당이 정치중심을 북경으로 정하고 동북방어를 강화했더라면 일본은 쉽게 중국을 침범하지 못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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