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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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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독수 당적을 제명당한 후 감옥에서 지내던 나날들
2016년 03월 13일 09시 03분  조회:5492  추천:1  작성자: 넉두리

진독수 당적을 제명당한후 감옥에서 지내던 나날들
 
(번역)




 
 
1927년에 대혁명이 실패한후 진독수의 아들 진연년과 진교년이 련이어 국민당에 의해 살해되였다. 진연년과 진교년은 1922년 6월부터 1923년까지 선후로 프랑스와 구쏘련의 모스크바동방대학에 가서 공부했다. 진연년은 선후로 중공광동구당위 조직부장, 구당위 서기, 중공절강구당위 서기, 강소성당위 서기직을 력임했다. 1927년 6월 29일에 살해될 때 29살밖에 되지 않았다. 진교년은 선후로 중공북경지당위 조직부장, 북방구당위 조직부장, 중공호북성당위 서기, 중공중앙조직부 부장, 중공강소성당위 조직부장 등직을 력임했다. 1928년 1월 19일에 살해될 때 26살밖에 되지 않았다. 반년사이에 두 아들을 잃은 진독수(陈独秀)는 고통으로 온몸이 초췌해졌다.

진독수는 복청천에게 “제5차대표대회에서 나는 공격의 대상으로 되였습니다. 모두들 나를 우경기회주의, 투항주의라고 했는데 내가 누구에게 투항했다는 말입니까? 장개석이 연년과 교년을 모두 살해했는데 내가 내아들을 살해한 그에게 투항했다는 말입니까? 왕정위가 ‘혁명을 하려는 사람은 왼쪽으로 오고 혁명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물러가시오’라고 높이 웨쳤는데 내가 그를 좌파라고 여겼을뿐만아니라 쓰딸린마저 그를 좌파라고 인정했습니다."라고 말했다.

1929년 11월 5일에 진독수는 당적을 제명당했다. 이 기간에 진독수는 점차 구쏘련의 트로쯔끼의 관점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공산국제의 독재전재에 대해 불만을 느낀 그는 간행물을 꾸리고 글을 써서 중국의 문제는 응당 중국인 자신이 연구하고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독수는 당적을 제명당했지만 신앙과 추구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남경국민당정부의 암흑통치를 견결히 반대했다.

1932년 10월에 상해의 저택에서 국민당은 “민국위해죄”로 진독수를 붙잡아 감옥에 처넣었다. 장개석은 진독수를 “민국위해죄”로 법정에서 재판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진독수는 남경군사법정으로 압송되였다.
1933년 4월 14일에 강소성고등법원에서 진독수의 사건을 공개심리하기 시작했다. 법정에서는 진독수를 “민국위해죄”로 기소했다. 진독수는 높은 소리로 항변했다.

“나는 국민당과 국민정부를 반대했다는것만 승인합니다. 국민을 해쳤다는것은 승인하지 않습니다. 정부는 국가가 아니기때문입니다. 손중산, 황흥 등은 만청정부를 뒤엎고 북양군벌을 타도했습니다. 정부를 타도하는것이 곧 반역죄라고 한다면 국민당은 두번이 반역죄를 지은것이 아니겠습니까?”

방청석에서는 한바탕 웃음소리가 터졌다.
진독수의 변호사는 그의 친구 장사소였다. 장사소는 경전중의 고사를 리용하여 장편대론을 하였고 진독수가 중국공산당에서 제명당한것은 국민당을 협조했기때문에 숙청을 당한것이라고 변호했다.
그 말을 들은 진독수는 즉시 성명을 발표했다.

“장변호사의 발언은 완전히 그 개인의 뜻입니다. 그는 나에게 동의를 얻은적이 없습니다. 나의 정치주장은 장변호사가 말하는 변호의 근거로 될수 없습니다. 응당 나의 변명문의 견해를 근거로 해야 합니다.”
이번 신판에 대처하기 위해 진독수는 2월 2일에 변명문을 써놓았다. 이 변명문에는 “법과 리치로 따지면 국민당정부와 국가를 구별해야 한다, 국민당이야말로 국민에게 해를 끼치는 당이며 국민정부는 나라를 망치는 정부이다. 이런 정부가 빨리 무너지지 않으면 나라의 전도가 없을것이다”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미 공산당을 떠났고 자신이 신앙하던 주의를 저버렸다는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진독수와 장사소의 변호는 도리가 있고 근거가 있었지만 법원에서는 당국의 뜻대로 진독수를 유기형 13년에 처하고 공민의 권리를 15년동안 박탈한다고 판결했다. 판결문랑독이 끝나자 진독수는 당장에서 큰소리로 항의했다.
“나는 국민당을 반대했지 나라를 반대하지 않았소! 판결이 공정하지 못하니 나는 상소하겠소!”

그후 옛친구 백문위는 진독수의 아들 진송년을 보고 “너의 아버지는 나이 들어도 그 기개가 변하지 않아 영웅호걸이 되려고 하는구나. 많은 친구들이 도와주려고 해도 도와줄수가 없구나”하고 말했다.
당시 진독수는 이미 53세였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서 다섯번째의 감옥행이였다.

당사학자들은 진독수가 일생에서 감옥생활을 한 차수는 네번이란 설과 다섯반이란 설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진장박이 믿는것은 다섯번이란 설이였다. 두가지 설의 쟁점은 1913년 7월에 구류된것을 체포로 셈에 넣을수 있는가 하는것이였다. 진독수는 안휘도독부 비서장직을 맡고있을 때 도독 백문위를 협조하여 원세개를 토벌하는 “2차혁명”에 참가했으나 백문위의 부하 호만태의 배반으로 실패했다. 진독수는 안휘성 무호를 지날 때 그곳에 주둔하고있던 공진붕에게 “랍치”당했다.

《진독수대전》의 저자 임건수는 “체포는 사법술어입니다. 이번에 진독수가 공진붕에게 묶이여 상객으로 끌려간것은 정권기관에서 체로한것과 성질이 다름니다. 때문에 나는 네번이란 설을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1934년에 진독수는 옥중에서 시 《금분루(金粉泪)》 56수를 썼다. 시중에는 비슷한 력사사실을 빌어 현실을 풍자하며 장개석을 위수로 한 4대가족의 암흑과 부패한 정치를 규탄했다.

1932년 10월 25일에 군정부장 하응흠이 와서 심문했다. 진독수에게서 시국에 대한 견해와 중국공산당에 대한 태도를 알아본후 하응흠은 정부와 합작하자고 권고했다. 그후 북경대학 교장 장몽린, 교육부 부부장 단석붕, 철도부장 고맹여 그리고 진공박, 서은증 등이 선후로 감옥에 찾아와 회개서만 쓰면 자유를 얻을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모두 퇴박을 맞고 화를 내면서 돌아갔다.
1937년에 항일전쟁에 폭발했기에 국민당은 정치범을 석방했다. 5년동안 감옥살이를 한 진독수는 남경고등법원에 석방을 제기했다. 1937년 8월 21일에 사법원에서 진독수를 감형한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범인은 이미 감옥에서 5년을 넘겨 징역을 받았는데 애국감정이 깊고 뉘우치는 태도가 좋았다… 범인 진독수의 원 징역기간을 감형하여 유기형 5년으로 집행하는것으로 관대하게 처리한다.”

진독수는 이 설법에 대해 몹시 화를 냈다. 출옥후 즉시 《신보》편집부에 편지를 써보냈다.
“그들이 나를 ‘애국감정이 깊고 뉘우치는 태도가 좋았다’고 했는데 애국한다고 감히 뽐내지 못하겠고 뉘우친다는것은 뭘 가리키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원래 무죄이기에 뉘우칠 대상이 없으며 억울하게 재판을 받았기에 뉘우침은 다른 사람에게 속해야 합니다.”
진독수가 출옥한후 옛친구 호적이 그에게 미국에 가서 “우공(寓公)”이 되라고 했고 장개석은 그에게 국민당 로동부장직을 맡아달라고 청했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다. 국민당정부는 또 10만원을 투자하여 그에게 따로 “공산당”을 창건하고 국민정부에 참가하라고 청했지만 진독수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장개석은 국민당 중앙조직부장 진과부를 시켜 진독수에게 로동부장직을 주고 해마다 10만원의 경비와 국민참정회 다섯명의 명액을 주는것으로 유혹하라고 했다. 또 국민당중앙 비서장 주가화를 시켜 진독수에게 새로운 공산당을 조직해줄것을 요구했다. 그들의 요구를 들은 진독수는 화가 나서 말했다.

“장개석은 나의 동지들을 죽였고 나의 두 아들도 죽였으며 나를 5년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나는 그와 철천지원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국공이 합작하여 공동의 원쑤 일본을 대적해야 하니깐 그와 합작하여 항일하는것을 나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더러 새로운 공산당을 조직하고 정부에 참가하라면 그것은 헛된 생각입니다!”
1937년의 7.7사변후에 국제국내형세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진독수는 출옥후에 정세를 잘 살펴보고 트로쯔끼파의 극좌주장을 비판하고 트로쯔끼파와의 결렬을 선포함과 동시에 국공합작을 옹호하고 중국공산당의 항일강령을 옹호하며 적극적으로 전민족의 항전대오에 뛰여들었다.
진독수는 출옥할 때 일본군이 상해를 공격하고있었다. 상해의 트로쯔끼파가 진독수더러 상해에 가서 다시 “당조직”을 세우라고 했을 때 진독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의견은 진독수외에 어떤 사람도 대표하지 않습니다. 나는 중국의 대다수 사람들을 위해 말할뿐이지 어떤 당파에게나 구속되지 않을것입니다.”

1937년 9월 9일에 진독수는 배를 타고 남경을 떠나 무한에 도착했다.
중국공산주의운동의 선구자이고 중국공산당창시인이며 중국공산당의 조기 최고령도자인 진독수는 1942년 5월 27일에 사천성 강진에서 사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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