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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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랑만의 깃을 펴는 천사의 날개
2013년 06월 19일 17시 04분  조회:1127  추천:0  작성자: 홍천룡

무용-랑만의 깃을 펴는 천사의 날개

홍천룡


“소곰재(잠자리)꽁-꽁-, 앉은 자리에 앉아라, 먼데 가면 죽는다…”

잠자리를 잡는것이 아이로 자라면서 시작되는 첫 사냥이였다. 그것도 인간의 기만술을 배워서 어설프게 실천하면서 말이다. 배재굽이에서 수수대꼬리를 잡고 식지 하나만 빼들고 잠자리야 고기에 앉으렴 하고 홀린다. 빠알간 꼬리에 유리 같은 날개를 파득이는 잠자리가 앉을가 말가 하다가도 살풋이 내려앉는다. 긴장해서 숨을 죽이는 순간, 엄지를 내밀어 가시발 같은 고놈의 발가락을 잡으려는 찰나, 앗차, 엄지 먼저 식지가 꼬부라진 실수! 고놈이 날개를 파르르 떨며 살짝 날아오른다. 먼데로 날아가면 죽는다는 말에 더 높이는 날지 않고 곧바로 머리우에서 맴돌며 하늘하늘 춤춘다. 붙잡히우지 않았다는 행운을 경축하는 양, 쌍쌍이 돋은 날개를 즐겁게 뱅뱅 돌린다. 아, 날개가 있어 자유스러운 녀석이다. 자유스럽기에 춤을 추는 녀석이다. 자유의 특징적표현방식이 춤이다. 그러니 춤을 춘다는 자체가 자유스러움을 의미한다.

어릴 때에는 춤에 대해 흥취도 없었거니와 춤을 추는걸 구경하기조차 싫어했다. 동네돌이를 해보면 대개 술뒤끝이면 춤판이 벌어지군 했다. 그런 춤판은 혼잡스럽기 그지 없다. 절반은 주정뱅들이 뚱땅거리며 주정부리는 발광이여서 곁에 가서 구경하기도 무섭다. 그다음 좀 점잖은 춤판은 결혼잔치뒤끝에 벌어지는 오락판이였다. 그런 오락판에서는 “주석”의 사회하에 질서있는 차례순서를 지키면서 그 집안에 걸려드는 친척들과 친구들이 자기의 장끼를 보여주면서 분위기를 돋군다. 노래가락이 흐르면 남녀가 팔을 흔들며 좁은 방안을 빙글빙글 돌아친다. 혹간 웃기는 사람들이 있어 볼만한 구경거리로도 되군 했다.

50년대중반에는 무도바람이 불었다. 쏘련의 “마우재”들 “딴스”가 류행되였었다. 마을에서는 직장으로 다니는 직장인들이나 다녔고 농호촌민은 다닐 엄두도 못내였다. 직장인들 가운데서도 젊고 멋이나 부리는 “하이칼라 도끼머리”들 아니면 “스까드 치마”들이 다녔을 뿐이였다.

춤에 대해 흥취를 가지게 된것은 “문화대혁명”시기부터였다. 우사칸마당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충성무”를 배워주었다. 가도주임이 동원해서 배웠는데 우리 어머니도 전에 없던 열성을 보였다. 나갈 때면 꼭 새옷을 바꿔입고 나갔다. 나도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런데 어머니의 동작이 굼떴고 팔과 다리가 맞지 않아 엉거주춤거릴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내가 어머니의 앞에 나서 시범동작으로 리드했던것이다. 집에 돌아와서는 체경과 마주 서서 배운 것을 련습하군 하셨는데 동작이 생각나지 않거나 제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밖에 나가 놀고있는 나를 불러들이군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다른 사람의 동작을 한두번만 보면 비슷하게 모방할줄 알았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머리, 목, 팔, 손목 등 주요부위의 움직임요령과 선률흐름에 따르는 동작의 변화를 상세하게 가르쳐드리군 했다.

“너 정말 어물쩍하구나. 배고프지? 식장안에 달걀이 있어. 딱 하나만이야!”

춤동작을 배워준 “학비”로 아버지께만 드리는 삶은 닭알 하나씩 맛보는 장려를 받군 했다. 그러면 그날 하루는 기분이 둥 떠서 온하루 휘파람을 불어댄다. 지금 말로 피룬다면 “예술적세포”가 있었다고나 할가!

어느날 아버지가 시뻘건 입장권 몇장 가져왔다. 온집 식구가 입이 함박만해져 저녁밥을 일찌감치 해먹고 저마다 새옷을 떨쳐입고 나섰다. 동네골목을 와짝 짜기며 자랑질에 우쭐렁거려보기도 했다. “공인문화궁”이라는 건물앞에 이르러 나는 저으기 주눅이 들었다. 그처럼 웅장한 건물앞에 서보기는 처음이였다. 지금 내가 출근하는 직장인 출판사가 바로 그 옛날 “공인문화궁”과 마주 앉아있어 매일 두세번씩 그 앞을 지나다니게 된다. 매번 그때 생각을 하게 되면 어이없어 웃음이 나오게 된다. 지금 보면 한낱 고태가 력력한 구식건물에 불과한것뿐인데…

그때 나는 처음 무대공연을 관람하게 되였다. 무대우에서의 무용표현은 술놀이 뒤끝에 벌리는 춤판도 아니고 결혼잔치뒤끝에 진행되는 오락판도 아니고 우사칸마당에서 수십명씩 추는 집체무도 아니였다. 좌우량켠의 강렬한 조명이 무대를 신비스러운 다른 한 세계로 만들어놓고있었다. 배경에는 수려한 산천도 나오고 휘날리는 붉은기도 나오고있었다.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가 아닌 다른 한 세계처럼 보였고 거기에 올라가 보고싶은 동경심을 자아내는 유혹적인 꿈나라처럼 보였다. 그다음 나의 마음을 황홀한 선경에로 이끈 것은 음악선률이였다. 가끔씩 우사칸회의실에 손풍금수가 와서 풍금을 쳐도 그 소리가 듣기 좋았었다. 고요한 한밤중에 마을에 학철형님이 하모니카를 불어도 그 가느다란 소리가 은은하게 마음을 휘저어놓았는데 지금 이 극장안으로 흐르는 선률은 손풍금소리도 아니고 하모니카소리도 아닌 이름 모를 숱한 악기들이 어울려서 내는 협화음이였다. 때론 잔잔하게, 때론 경쾌하게, 때론 우렁차게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놓고있었다. 그리고 인상적이였던 것은 공연배우들의 화장한 얼굴이였다. 들어올 때 입구에서 한 녀배우가 새빨갛게 화장한 얼굴을 해뜩거리며 우리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인차 귀신이 아니냐는 생각부터 들었던것이다. 정구형님의 귀신옛말에서 나오는 요사한 요귀들이 일반적으로 얼굴에 피칠갑을 하고 다녔던것이다. 헌데 무대우에 올라선 배우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선남선녀와도 같은 아릿다운 모습이였다. 아마도 무대조명의 귀신 같은 조화였을것이다.

정채로운 절목가운데서도 나를 흥분시키는 것은 그래도 무용이였다. 독무도 있었고 쌍무도 있었고 집체무도 있었다. 독무를 추는 녀배우의 날씬한 몸짓, 버들가지처럼 하느작거리는 팔짓, 딛는듯 마는듯 잠자리날개인양 뱅뱅 돌아가는 다리짓에 눈이 가물거릴 지경이였다. 남녀쌍무 역시 동작도 경쾌했고 어울리는 분위기도 흔쾌했다. 큰 폭에 원을 그리다가 잦은 가락에 작은 폭으로 이어대는 앙금질뒤끝에 서로 빙글빙글 돌아서 감기고 스리살짝 풀리면서 돌고 하는 반복동작이 마치도 살짝쿵 소쿠라지는 시내물소용돌이를 보는듯 상쾌해진다. 더욱이 군무는 나에게 격동과 힘을 주었다. 동작들이 힘차고 폭이 컸을 뿐만 아니라 착착 꺾어지고 이어지는 교차성이 일치했고 선명했다. 종적횡적으로 부단히 변화되는 배렬, 원점으로부터 각을 이루며 갈라지는 대각선, 각이 큰 팔짓과 다리짓이 반복되면서 이루어지는 박력감,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지는 조형감, 군무가 보여주는 것은 앙양되는 투지력이였다…

그 공연을 관람한 후부터 나에게는 한번 무대에 올라가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무대가 천당처럼 신성해보였고 그 우에서 춤추는 배우들이 선녀나 신선처럼 보였던것이다. 그후 나는 어디에서 무슨 공연이 있다하면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입장권이 있든 없든간에 무조건 찾아가군 했다. 표가 없으면 보일러작업실을 리용하지 않으면 변소간유리를 깨면서라도 들어갔다. 한번은 들키워서 “로동자규찰대”한테 귀썀을 얻어맞고 극장안에서 쫓겨난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무대에서의 기본 무용동작을 익히느라 애를 썼다. 그래서 동네아이들을 웃길 때가 많았다.

“임마, 제 주제꼴이나 좀 보고 너덜거려라. 네가 무대에 올라 춤추면 누가 봐줘?”

헌데 세상에는 이따끔씩 주제에 넘는 일이 생겨나기도 했다. 중학교에 올라가니 학교에는 “학교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가 있었고 각 반급에는 반급끼리 꾸리는 “반급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가 서게 되였다. 학교”선전대”와 반급”선전대”의 사이는 모주석의 말씀에 비추면 “양춘백설(阳春白雪)”과 “하리파인(下里巴人)”사이였고 지금 말로 풀이하면 전문직“수준급”과 과외직”아마추어”사이라고 할가? 아무튼 “반급”은 시시한 축에 속했고 “학교급”은 쟁쟁한 축이였던것이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나도 행운스럽게 “학교급”에 들었던것이다. 당시 허숙자선생님이 지도하신 “연길시3중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라면 연길시안에서는 제일 기백이 있고 꼴꼴한 공연대였다. 무슨 “5•1절”이요 “7•1절”, “8•1절”, “국경절”이요 하는 기념행사에는 꼭 우리들의 공연임무가 떨어졌고 주, 시혁명위원회의 주요행사에도 공연임무가 떨어지군 했었다. 그러다 보니 방학이란 없었고 절목련습에 밤을 팰 때가 많았다. 공부를 뒤전에다 둘 때라 뭐 학업에는 크게 영향이 없었고 다른 아이들보다 덕을 보게 된 것은 참가하기 싫은 비판회의나 동원대회 같은 정치활동에 빠질수 있었고 의무로동이나 “5•7농장”에 가서 기음을 매지 않았던것이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의 부러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처음 무대에 올라서본 것은 그 웅장한 건물이였던 “공인문화궁에서였다. 주초대소(지금의 주당위사무청사임)에서 점심을 먹고 화장한 다음 렬을 지어 문화궁으로 갔는데 자꾸만 가슴이 두근닥근거렸었다. 무대에 올라서면 모든 것이 불빛아래에 드러나고 수백쌍 눈이 지켜보고있기에 그 어떤 미세한 실수도 감출수 없다는것이다. 우리가 나갈 첫 절목은 “동풍이 불고 전고가 울린다”였다. 전주곡이 울리였는데도 나의 가슴은 그냥 두근거렸었다. 드디어 전주곡이 끝나고 트럼펫 고음선률의 울림과 함께 우리는 2렬종대로 한결같이 팔을 반공중에서 절주있게 폈다 꺾으며 무대에 나섰다. 무대공간은 휘황하고 현란하기만 했다. 모든것이 활 풀리면서 가슴도 뛰지 않았다. 공산주의서광이 비껴오는 저기 저 동산마루로 활개쳐 오르는 기분으로 전환되였다. 무대아래에서 박수소리가 터져올랐다. 격정이 각일각 고조되고있었다. 무대우에서는 절대 관람석을 내려다 보지 말라고 선생님이 늘 강조하셨다. 높은 무대우에서 내려다 보면 눈가녁을 짙게 화장한 눈이 꼭 감고있는것으로 보인다는것이다. 무대우에서 눈이 감긴것으로 보이면 우선 전반 얼굴의 광채를 잃게 된다는것이다. 그러니 광채를 잃은 얼굴에서 감정표현같은 것은 더구나 운운할 여지도 없단다. 때문에 무대우에서는 눈을 늘 45도 높이를 바라보며 떠야 한다고 했다. 무대우에서는 45도가 아주 중요한 각도였다. 얼굴을 옆으로 돌릴 때에도 90도로 꺾지 말고 45도에 맞추어 탈고 팔을 쳐들 때도 45도 높이, 턱을 쳐들어도 45도 높이, 다리를 펴들어도 45도 높이… 그런데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몇번 관람석을 내려다 훔쳐보군 했다. 앞좌석 몇줄은 운무속에 잠긴 영상처럼 보얗게 알렸고 뒤쪽은 거뭇한 장막속에 가리운 까막 나라여서 보이지 않았다. 마치도 우리가 구름우에 떠서 해빛을 받으며 춤추는 천사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 황홀함은 이루다 형용할 수가 없었다. 사람의 일생에서 도대체 몇번이나 무아지경 황홀속에 빠져 넋을 잃어본적이 있는가! 그 격동, 또한 한가슴 뿌듯이 부풀어오른다. 그 희열적인 충격감은 무대에 올라가 직접 춤을 춰보지 못한 사람은 감수해낼수가 없다. 수백쌍 선망의 눈길이 지켜보고 열망의 가슴으로 안아주는 무대우에서 두팔을 날개처럼 마음껏 퍼득이며 행복의 요람으로, 희망의 언덕으로, 평화의 천당으로 날아예려는 매 하나의 동작, 매 한송이의 웃음꽃은 아름다운 미에 대한 부각이였고 사랑의 선물이였다.

그 첫 공연이 있은다음부터 나는 무용련습에 더 땀을 흘리군 했다. 기교를 잘 련마하여 더 많은 공연에 나가 표현하고싶었던것이다. 그래도 나는 일정한 “예술적세포”가 있다는 말을 가끔 듣기도 했다. 당시 우리 선전대의 남대원들의 우상은 발레무용극 “백모녀”에서 등장하는 남배우 “왕대춘”과 “홍색랑자군”에서 나오는 남주인공 “홍상청”이였다. 거리나 영화관에 나붙은 포스터나 팸플릿에서 그들의 형상을 볼 때마다 정신이 분발되고 힘이 막 솟구쳤다. (나도 이다음 꼭 저렇게…) 그들의 형상이 나어린 나의 가슴에 무용이라는 이 희망의 불길을 활활 지펴놓았다. 무용에 나의 일생을 바치리라 속으로 수없이 다지기도 했었다. 무용보다 더 우아하고 더 고상하고 더 예술적인 직업은 이 세상에 없다고 인정했기때문이였다.

허나, 그 랑만에 넘치는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비극이 한발자국 한발자국 소리없이 나에게로 발볌발볌 다가서고있음을 나는 감촉하지 못하고있었다. 후에 연변가무단이 회복되고 시문공단이 서면서 일부 대원들이 추천되고 뽑혀서 전문직 문예일군으로 되였다.지어 심양군구철도문공단이요 북경군구에서도 예술인재들을 모집하러 오게 되였다. 헌데 나는 초벌기음에 속하는 예선에도 뽑히우지 못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자연조건”이 얼마나 악렬했던지… 속상해서 소리없는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다른 아이들의 몸은 종적으로 우썩우썩 키돋음했지만 나의 몸은 어쩌라구 횡적으로 밀밀 뻗어나갔던것이다. 부모님들이 물려주신 “자연조건”임에야 어찌하랴!

허나, 후회는 없다. 오히려 감사한 일이다. 그 시기 짧았던 무대경력이 나의 심신을 예술적으로 도야시켰고 무용에 대한 감성적인식을 가지게 하였던것이다. 생활에서의 무용은 희열의 표현이고 예술에서의 무용은 생활에 대한 반영이고 아름다운 미에 대한 부각이기에 앞으로 계속 훨훨 춤을 추며 천당어귀까지 날아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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