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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언제나 저 푸른 언덕우에
2013년 08월 06일 14시 29분  조회:1694  추천:0  작성자: 홍천룡
희망은 언제나 푸른 언덕우에

홍천룡

그 래일이 없으면 사람은 무슨 멋에 오늘을 살가? 그 래일에 가서 좀 더 보람차게 살아보자고 사람들은 오늘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다. 먹고싶지 않은 밥도 푹푹 퍼먹고 하기 싫은 공부도 또박또박 하고 해도해도 끝이 없는 일도 꾸벅꾸벅 하고 가기싫은 외국나들이도 윙윙 날아가고…그 래일에 삶의 희망이 있는가부다. 인젠 60고개를 바라보는 나도 언제나 그 래일을 바라보고 여지껏 별로 쉬지도 않고 걸어온것 같다.

아리숭한 유년시절은 잘 기억나지 않으나 깜장 헝겁가방을 달랑 메고 엄마의 손에 손목을 잡혀 학교로 끌려가던 일은 어제 있었던 일과도 같이 기억에 생생하다. 가기싫은 학교였지만 엄마는 그 학교에 가서 공부를 잘해야 이다음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했다. “ㅏ, ㅑ, ㅓ, ㅕ…”를 배우고 “1, 2, 3, 4…”를 외워서 백점을 맞으면 그당시 사먹기 힘들었던 “닭똥과자” 한봉지가 차려졌던것이다. 수수밥에 강냉이떡만 먹었던 그 시절에 “닭똥과자”의 맛이란 영영 고소하기만 해서 그 유혹이 컸다. 그래서 백점을 맞는것이 래일에 희망이였고 그당시 올라가서 뛰놀고 싶었던 푸른 언덕이였다. 그런 푸른 언덕이 있었기에 소학교는 내내 우등생으로 올라갔었다.

초중시절은(당시 고중이 없었음) “문화대혁명”이라는 장마철을 만나 내내 비바람속에서 보냈다. 토끼새끼를 훔쳐다가 키웠고 토끼풀인 “세투리”(씀바귀)캐러 비행장에 갔다가 하남아이들과 무리싸움도 벌리군 했다. 학업이 중지된 상황이여서 매일 무리를 지어 싸다니며 말썽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업이였다. 한번은 권투련습을 한답시고 “컬레브”(권투장갑)를 끼고 대방의 “훅구”(명치끝)를 친다는것이 아래배를 쳐서 그 아이가 배를 안고 대굴대굴 구을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그 아이가 죽는가 해서 속이 한줌만 해졌다. 헌데 그 아이가 일어나 바지를 벗고 똥을 눈것이 우굴우굴거리는 “거시”(회충)뭉치를 내싼것이였다.

마음이고 몸이고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학업이 회복되여 학교에 나가게 되였고 매일 벽돌공장이 아니면 “5·7농장”에 가서 고된 로동교육을 받았다. 그러다가 행운스럽게도 학교의 “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에 들어 춤노래를 배우게 되였다. 처음 로동자문화궁무대에 올라가 공연할 때의 그 황홀함은 이루 다 말로써 형언할수가 없다. 동틀무렵의 서광이 부채살처럼 비껴오는 저기 저 동산마루를 향해 활개쳐오르는 기분이여서 무아지경 황홀속에 빠져 넋을 잃어버렸다. 수백쌍 선망의 눈길들이 지켜보고 열망의 가슴으로 안아주는 무대우에서 두 다리를 폈다 꺾으며 두팔을 날개처럼 마음껏 퍼득이면서 저 요원한 곳의 행복의 요람으로 희망의 언덕으로 평화의 천당으로 날아예려는 매 하나의 동작, 매 한송이의 웃음꽃은 아름다운 미에 대한 부각이고 고고지성이였다. 무대의 그 예술적 감화력이 나의 심신을 도야시켰고 내가 갈망하는 푸른 언덕이였다. 매 하나의 동작, 매 한곡조의 가락을 익히고 숙련되기까지는 밤에 밤으로 땀동이를 흘리며 땀으로 절궈내야 했다. 매번 공연에서 터득되는것은 예술기능이란 잔혹한 련마속에서 닦아진다것이였다. 그것이 내 인생의 길에서 반짝이는 한점의 불꽃으로 되여주었다. 무대라는 푸른 언덕우에서 뛰놀수 있어 나는 그당시 우리 또래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자아내기도 했었다. 그래서 나는 앞날의 나의 일생을 예술로써 장식하려고 다지고 또 다졌었다. 허나 그것은 천진한 아이들의 새벽꿈에 불과했다.

초중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오게 되니 나의 꿈은 다 깨여졌다. 사회는 현실적이였다. 맥주공장에 가서 하루에 1원25전씩 받고 보이라굴뚝을 쌓는 일도 해보고 제약공장에 가서 문틀을 짜는 목수일도 배우고 뜨락또르부속품공장에 가서 주물직장의 주조공으로 쇠물을 붓기도 했고 시정공정처에 가서 길닦기도 해보았다. 그러다가 삼도탄광에 가서 석탄을 캐기도 했다. 탄광이란 돈을 많이 벌어 좋은 곳이기는 하지만 무시무시한 곳이기도 했다. 한 숙사에서 같이 자던 쑹개가 하루밤 밤대거리에 저승의 귀신으로 되는걸 보고는 두말없이 이불짐을 쌌던것이다. 그 시기에는 나의 눈앞에 푸른 언덕이 보이지 않았다.

그후에 나는 시정부 로동국의 배치에 따라 량식국산하에 있는 숙식품가공공장으로 들어갔다. 몇백명 지식청년들로 이루어진 새단위여서 매일 시끌벅적했고 말썽이 많았다. 후근반 반장직을 맡은 나는 밤낮이 따로 없이 뛰여다니며 맡은바 임무를 어김없이 해내군 했다. 학교문예선전대에서 절목연습에 땀을 흘리던 그 본새로 일을 해재꼈던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지도부의 눈에 든것 같았다. 두달후에는 새공장건물을 짓는 건축시공대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후근반 반장으로 있을 때에는 직공 여섯명을 거느렸는데 시공대 대장이면 직공 칠팔십명을 거느려야 했다. 그것이 1975년도 이른 봄 일이였으니까 내 나이가 만 스므살이였다. 나는 우선 미장반, 목수반, 운수반, 후근반 등 각 반조의 반장을 새롭게 바꾸고 일에 달라붙었다.

제일 곤난한 점이 언어였다. 시공대에는 한족이 절반이상이였던것이다. 매번 작업을 포치하고 총결을 지을 때면 한족직공들이 말을 알아못듣겠다고 눈을 희번뜩거리며 야지로운 심술을 부리군 했다. 그래서 나는 한어를 배워내자고 마음먹었다. 마침 그때 당지부에서 청년들한테 당조직을 따라배우라는 호소를 내렸고 사상회보를 써내라고 추동하였다. 나는 인차 사상회보를 써냈는데 최서기가 다음번 사상회보는 한어로 써내라는것이였다. 기실 그때 우리의 한어수준은 소학교수준이였다. 중학교에 올라와서는 기본상 공부를 않했던것이다. 나는 신화자전을 빌려다가 사흘밤에 겨우 편지지 한장에 글을 채웠던것이다. 그걸 최서기께 바쳤더니 그는 손수 만년필을 꺼내 새까맣게 고쳐주는것이였다. 그때 한어를 잘하는 최서기가 그처럼 부러울수가 없었다. 그후부터 나는 무슨 글을 쓸 일이 있게 되면 틀리든말든 한어로 썼고 크고작은 회의를 소집할 때마다 틀리든말든 한어로 사회하군 했다. 그래서 수시로 웃음거리를 자아내군 했다. 처음엔 좀 부끄러웠지만 후에는 낯짝이 두꺼워져 부끄러움도 없이 같이 웃어주군 했다. 한족직공들이 나의 열정에 감동되였는지 후에는 저마다 선생이 되여주느라 틀리면 제때에 시정해주고 모르는걸 알려주기도 했다. 반년후에는 전공장직공대회에서 반시간이상씩 한어로 강화할수 있게 되였다. 당조직에 바치는 사상회보도 한번에 네댓장씩 써낼수 있게 되여 최서기의 칭찬도 여러번 받았다.

당조직에서 나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최서기가 나를 불러다 개별담화를 하고 조직위원이며 공회주석인 요아바이가 당의 지식에 대한 책들을 가져다 주었다. 시공임무가 그렇게 바빴지만 한달동안 당교에 보내 강습을 시키기도 했다. 당교에 가서 무산계급독재리론학습을 하면서 나는 공산주의 불꽃을 튕겼던 빠리공사의 비장한 국제가의 선률을 들었고 자본사회의 비밀을 까밝힌 맑스를 숭경하게 되였으며 세상에 첫 사회주의 사회를 실현시킨 레닌에 대해 감복을 금할수 없게 되였다. 그래서 공산주의서광을 맞아오기 위해 이 한몸을 다 바치리라 마음을 다지고 또 다졌다. 바로 공산주의가 푸른 언덕이 되였던것이다. 그런 푸른 언더우에 락원을 짓는데 한장의 벽돌장이 되여보겠다고 나는 단위에 돌아와서 죽을둥 살둥 모르고 일했다. 늘 시간이 딸려서 공지의 초막에서 밤을 새워가며 일했고 학습심득을 써냈다. 헛된 노력없이 결실은 보람찼다. 원래 1년반으로 계획되였던 공장건물시공을 우리 시공대가 8개월만에 완성하여 그해 12월 28일에 나는 영광스럽게도 “화선입당”을 하여 그 푸른 언덕우에 올라서게 되였다. 그후 나는 선후하여 공장, 량식국, 재무계통의 선진공작자가 되였고 전시 모범당원이 되여 찦차에 앉아 모주석저작학습활용강용회마다 불리워 다니느라 바빴다. 당조직에서는 갈수록 나에게 더 큰 과업을 맡겼다. 민병련 련장, 단총지 전직서기, 정공조(政工组) 조장 등 직책을 맡겼고 후에는 량식국정공과에 올라가 간사로 일하게 하였고 몇달후에는 “시재무계통쌍학판공실(市财贸系统学大庆学 大寨办公室)”로 발탁시켰다. 판공실주임으로는 전시 재무계통을 책임진 시위 부서기 최장부라는 로간부였는데 학식이 깊고 점잖고 세심한 분이였다. 부주임들로는 상업국, 량식국, 은행, 공소사 등 부문의 국장, 행장, 주임들이였는데 일이 있을 때면 모여서 회의를 하군 했다. 구체일은 판공실사업일군 6명이 처리하였다. 회의와 활동이 많았고 상급지시문건과 아래 각 부문에서 올라오는 보고재료들이 많았다.

정말 눈코뜰새 없이 보내야 했다. 내가 나이가 제일 어리고 수준도 제일 낮았다. 쉴새없이 물어보고 청시하면서 일을 처리해야 했다. 허지만 열정이 좋았고 뛰여다니길 좋아했기에 총애를 받기도 했다. 또 후에는 나를 “청년간부양성반”에 보냈다. 그 양성반 학원들 가운데서 리중조, 서수란, 곽세서, 곽순리 등 사람들은 후에 시위 부서기, 시정부 부시장으로 되였고 대부분 학원들이 각 부와 국의 부장, 국장으로 되였다.

그렇게 내가 한창 그 푸른 언덕우에서 활개치며 나가고 있을 때 세월은 다시 한번 돌변했다. “4인무리”가 꺼꾸러지고 대학입시가 회복되였던것이다. 모든 리념과 리론이 뒤바뀌여졌다. 더는 계급투쟁의 적대적리념이 아니였고 무산계급독재리론이 아니였다. 나는 한시기 고민에 빠지고 방황했다가 대학시험을 쳐서 대학으로 갔다. 대학가에서는 시야비야 하는 리론탐구에 열이 올랐고 문학붐이 일고있었다. 방황하고 있던 젊은 나이라 나도 인차 그 바람에 말려들었고 산기슭에 오붓하게 자리잡은 문학동네를 찾아냈고 그 동네 동구밖에 있는 푸른 언덕을 새롭게 발견하였다. (문학이 사람을 만드는 동네구나.) 하늘아래 첫동네에 들어선 기분으로 문학서적을 탐독했고 신성한 창작에 달라붙는다고 필을 끄적거리기도 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대학가의 문과생들은 그 대부분이 문학도들이였고 문학애호가들이였다. 누가 문학잡지에 한두편의 작품을 발표하면 모두 흠모하군 했다. 그 허영심에 들떠서 나도 모든걸 뿌리치고 창작에만 열중하였다. 정말 미칠정도로 집념에 빠졌다. 거기에 빠지고 보니 정말 파아란 하늘의 햇구름처럼 몸이 동동 뜨기도 하고 한밤중 무덤묘지에서 시퍼런 귀신불을 보듯 몸이 오싹 떨리기도 하고 늪가의 파도속 소용돌이에 몸이 말려드는듯한 절망감을 느껴볼수도 있었다.

혼자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떨기도 하는 그 기묘한 감격과 스릴을 맛볼수 있는것이 너무나도 좋았다. 나의 필끝에서 하나하나의 부동한 인물들의 독특한 개성이 생동하게 그리워져 나온다는것이 또한 신기하기도 했다. 그렇게 잘 쓰느라고 애를 썼고 또한 그처럼 잘된 작품은 없을것이라고 자신있게 투고하면 한강에 돌 던진격이 되고마는것이였다. 실망도 가져봤다. 푸른 언덕이 노랗게 보이기도 했다. 그때 필을 꺾었더라면 나의 후반생은 좀 더 안온한 길에 들어섰을것이다. 그런데 어찌라구 필을 꺾지 않고 계속 원고무지에 골을 처박고 안되는 글을 계속 갈개쳤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하느님이 그 정신을 귀엽게 봐준것 같다. 그렇게 쓰고 또 쓰다가 “어애가 방귀를 뀌다”는 식으로 “포”를 한방 쿵! 하고 쏘게 되였다. 내가 쓴 단편소설 “구촌조카”가 제2회 “연변문예문학상”을 타게 되였던것이다. “연변문예”잡지가 복간되여서 두번째 문학상인것만큼 당시 문단을 들썽해놓았던것이다. 정말 푸른 언덕우에서 뛰놀다가 제일 고운 들꽃을 딴것이였다. 그 꽃을 가슴에 안고 앞을 내다보니 가없이 펼쳐진 푸른 언덕이 저 요원한 하늘가로 잇대여져 있었다. 그때의 그 끓어번지던 격동, 그 둥둥 뜨던 기분은 지금와서 다시 추억에 잠겨 음미해보아도 그처럼 감미로울수가 없다. 그해가 1981년도였으니까 내 나이가 스물일곱이였던것이다.

한때나마 객기를 부렸던 젊은 시절을 돌이켜 보면 지금도 그 어떤 희망에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것만 같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래일이란 희망을 내다 볼줄 알아야 밤에 꿈이 오고 꿈이 있어야 그걸 현실로 만들고저 한 기운이 생기고 기운이 생겨야 일을 잘할수 있고 좌절과 침체속에서도 꿋꿋이 일어설수 있는것이다. 그래서 마음이란 언덕에 희망이란 잔디풀을 자주 심어야 할것 같다. 그래야 그 언덕이 늘 푸릇푸릇해서 싱싱함을 확보할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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