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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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시절의 대학꿈 (홍천룡)
2010년 09월 08일 08시 42분  조회:1103  추천:24  작성자: 홍천룡

 

꿈결 2부곡 1

그 때 그 시절의 대학꿈

 
홍천룡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된지 30년이 되다니? 어길수 없이 흘러간 세월이였건만 어쩐지 믿어지질 않는다. 대학생이 되여보겠다고 글자도 제대로 보이지 않게 얼푸름히 등사된 복습제강을 밤중이면 서로 바꿔가며 베끼던 정경이 엊그저께 새벽 두시경에 있었던 일 같은데…

지난 세기 60년대초반에는 대학생이라면 그야말로 새중 봉황이요 옥중 옥이였다. 내가 살던 공신 “웅덩개마을”은 백호나 넘는 큰 마을이여서 우리 조무래기들도 아래 마을무리, 윗마을무리 하면서 갈라져 놀았었다. 그 큰 마을에 정구네 큰 형님만이 대학으로 다니는 대학생이였다. 온 동네 아이들을 가진 어머니들의 입에서는 늘 이런 말이 튕겨나오군 했다.

“공부를 잘해라. 정구형님처럼 대학생이 되게.”

“숙제를 제때에 해라, 정구형님처럼.”

“너 공부한다는 꼬라지를 보니 정구형님처럼 대학생이 되긴 백번도 틀려먹었구나.”

……

어머니들의 그 구질구질했던 시까스름이 후날 아이들이 대학꿈을 꾸게끔 흔들어준 요람이 된 것이 아니였겠는가! 세상 무서운줄 모르고 바자굽이골목길을 메우며 동네안팍을 들썩이던 우리 철부지들도 정구 형님만 골목길에 나타나면 인차 조용해진다. 그럴 때면 손등으로 코물을 닦는 놈도 있었고 단추가 떨어져나간 저고리앞섶을 더듬어 포개는 녀석도 있게 된다. 호랑이는 세살먹은 애도 알아본다고 대학생명성이 얼마나 뜨르르 했으면…

62년도 여름은 하늘도 맑았고 대지도 푸르렀다. 배를 쫄쫄 곯던 시절이 지나가며 아이들도 가끔씩 어른들의 손에서 “개눈깔사탕”을 얻어쥐고 냠냠거리게 되였다. 그해 여름에 나는 깜장 새옷에 헝겊책가방을 메고 어머니의 손에 손목을 잡혀 학교로 가게 되였다.

“공부를 잘해서 이다음−이다음 크거들랑 정구 형님처럼 대학생이 되여야 해. 알겠느냐?”

앞날에 대한 어머니의 먼 희망이였다. “대학생”이 정구형님이라는것밖에 모르는 나는 그 첫날등교에서 숱한 아이들과 면목을 익힌 흥분과 집에 돌아오니 “닭똥과자” 한봉지와 “개눈깔사탕” 한봉지가 기다리고있었다는 기쁨이 더 컸었다.

“ㅏ, ㅑ, ㅓ, ㅕ…”로부터 시작된 공부가 그래도 반급에서는 언제나 앞줄로 간다는 축에 속했다. 가끔 백점짜리 시험지가 나오면 나는 그걸 차곡차곡 개여서 교과서갈피속에 간직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그걸 꺼내 찬장모서리우에다 올려놓고 빈사발을 엎어놓는다. 그러면 “닭똥과자” 한봉지는 문제없이 생긴다. 그때까지 “닭똥 과자”보다 더 맛있는걸 먹어보지 못한 나였다. 어쩌면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과자도 있는가! 먹으면 먹을수록 사각거리며 깨고소해지는 “닭똥과자”- 어머니는 백점짜리 시험지만 보면 혼자 시물시물 웃으시였다. 그리고는 무슨 뜨개감이 아니면 그릇 빌리러 간다는 구실을 달고는 몇집 건너편에 있는 정구네 집으로 마실을 나가군 했다. 보나 마나 백점짜리 아들을 자랑하러 가는것이다. 아마도 자랑 할바에는 대학생네 집에 가서 자랑하자는 속셈이였을 것이다. 혹시 대학생네 집에 붙어있는 그 “기”를 묻혀 오자는 심사도 있었는지 모른다. 점치기에 무척 흥취가 있었으니까…

얼마후 과연 그 “기”가 나의 몸으로 옮겨오게 되였다. 어느날 내가 헝겊뽈을 안고 우사칸마당으로 달려가다가 바자굽이에서 그만 웬 사람과 콱 부닥치게 되였다. 올려다 보니 다름 아닌 대학생- 정구형님이였다. 내가 어쩔바를 몰라 쩔쩔 매는데 정구형님은 오히려 나를 내려다 보며 빙그레 웃었다.

“오, 백점짜리 선수였구나. 너 계속 백점을 맞으며 공부 해. 그러면 꼭 대학생이 되는거야.”

나는 어망결에 “예!”하고는 인차 몸을 돌려 쫑드르르 꼬리를 뺐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꿈에 헝겊가방을 멘 내가 연변대학가의 큰 비술나무밑에 서서 “닭똥과자”를 먹고있 었다.(당시 연변대학이 우리 소학교서쪽이였고 대학주변은 아름드리 비술나무로 우거져있었음) 그후 점차 헴이 들면 서 나는 배움의 최고학부가 대학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나마 깨닫게 되였고 공부에 극성을 부려 5학년까지는 줄곧 우수생으로 되였다.

그런데 5학년 때부터 신문지상에 오함, 등척과 같은 인물들이 나오고 “삼가촌”이란 어느 동네이름 같은 말들이 나오게 되였다. 얼마후 아래동네 철봉형님이 차비도 없이 북경으로 갔다오더니 모주석을 만나보았다고 동네를 들썽 해놓았다. 모주석의 얼굴이 정말 보름달같이 둥굴고 떠오 르는 아침해처럼 불그스레 했다는것이였다. 뒤이어 거리에 대자보가 나붙게 되고 고깔모자를 쓴 사람들이 거리돌림을 당하게 되였다. 그다음에는 반란바람이 불더니 학교마다 수업이 중지되여 우리는 매일 무리를 지어다니며 노는게 업이 되였다. 그 무렵에 철봉형님이 어디서 “똥푸개모자” 를(당시 원예농장 장원들이 인분차를 끌고 다니며 공용 변소를 칠 때면 긴 장대기에다 철갑모를 달아썼는데 우린 그걸 똥푸개모자라고 불렀다) 얻어쓰고 다녔고 거리에서는 무시무시한 “돌팔매시가전”이 벌어지고있었다. 매일마다 어디에 불이 났소 어느 곳은 피바다가 되였소 하는 소문에 우리 조무래기들도 가슴을 조이고있었는데 나중에는 무서운 비보가 확실하게 날아들었다. 철봉형님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환자들의 생명을 구해줄 의사들을 양성해 낸다는 의학원마당에서 총에 맞아죽었다는것이다. 그 집 어머니가 미쳐났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땅을 치며 통곡 하던 그 처참한 모습을 나어린 내 눈으로도 차마 보아낼 수가 없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동구밖에 나서서 아들을 피타게 부르던 그 부름소리가 지금도 가끔 귀가에서 울리는것만 같아 가슴이 미여질 때가 있다. 그 “문화 대혁명”이 아니였더라면 철봉형님도 후에 대학생이 되였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시가전”이 끝나고 혁명위원회가 설립되더니 우리가 중학생이 되였다고 시3중으로 나오라는것이다. 중학교에 올라가보니 대학생출신이였던 교원들이 한쪽으로 밀려나고 석현제지공장의 “로동자선전대”가 들어와 우리들에게 “어록학습”을 시켰다. 그때 “어록”을 학습하니 정말 한마디가 만마디를 당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이 생기든 어떤 난관에 부딪치든 “어록”만 펼치면 그 속에 해결묘방들이 다 들어있었다. 1차방정식이요 2 차방정식  이요 하며 아무리 수학공식을 풀어도 실제문제를 해결하 는가? 골치 아프게 원소주기표를 외울 필요도 없었다. 중학시절 4년동안 우리는 벽돌공장에 가서 로동자들의 일본새를 배웠고 방공호파기삽질에 근육질을 굳혔고 “5•7 농장”의 콩밭기음에서는 의력을 키웠다. 졸업할 때 내가 사회에다 보여줄 “졸업증”은 붉은 사상과 건강한 신체였다.

사회로 나오고 보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대학교 입시제도가 페지된지 여러해 되였다. 연변대학서쪽에는 맥주공장이 있다. 나는 맥주공장림시로동자로 들어가 건축 일을 하였다. 고된 로동에 지쳐 무거워진 다리를 끌며 대학교앞을 지나 갈 때면 대학생이 되여보고싶은 욕망이 꿈틀거리군 했다. 그러나 림시공으로서는 그걸 바라볼 엄두도 못낼 처지였다. 나는 자동차운전기술을 배우려고 맘먹었다. 그래서 한 마을에 있는 조갑룡을 형님으로 모시고 그의 차에 따라다녔다. 밤이면 석탄실이를 갈 때 빈차는 내가 몰고가고 돌아올 때는 형님이 몰고 왔던 것이다. 헌데 림시공은 운전면허증취득시험을 치르게 못했다. 우선 정식공이 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때   삼도탄광에서 로동자모집을 하였는데 가서 잘하면 인차 정식공으로 넘길수 있다고 했다. 나는 부모들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불짐을 싸가지고 삼도만으로 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탄광으로 가길 원하는 사람은 별반 없다. 그때는 감옥에서 만기석방된 사람들과 산동, 하북 등 중국관내 에서 온 한족들이 많이 자원해갔었다. 당시 탄광으로 가면 두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한가지는 간고하고 위험하고 어려운 곳에 가면 정식로동자로 빨리 전이고정될수 있었고 정치적발전이 빠를수 있었다. (정치적 발전이란 주요하게 당원에 가입하는것인데 그래야 대학교도 추천받아 갈수 있고 간부로 승급할수도 있었음.)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로임이 높은것이였다. 대부분 사람들이 후자를 보고 갔지만 나는 전자를 보고 갔다. 간고한 곳에 가서 자신을 단련하면서 정치적으로 빨리 진보하려고 작심했던것이다. 삼도탄광은 연길시에서 약 200리 떨어진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잡고있었다. 당시 탄광에는 세개 탄굴이 있었는데 나는 제1호탄갱 제2작업반에 배치되였다. 우리 작업반의 십오명가량 되는 일군들가운데서 나 혼자만 조선족이였다. 대부분 산동사람들이라 혀를 꼬부랑치며 내뱉는 말을 잘 알아들을수가 없는것이 큰 장애였다. 나는 그래도 몇달간 일을 잘하느라고 애를 썼다. 산동사람들은 개인위생을 지킬줄 몰라 좀 더럽기는 했지만 소박했고 아주 근면했다. 그래서 나와 잘 어울렸다.

어느날 오후, 왕반장이 밤대거리에 지쳐 낮잠을 자고 있는 반원들을 깨웠다. 탄광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무산 계급독재리론"을 학습하고 심득발표도 해야 한다는것이다. 왕반장이 중공중앙기관지인 《인민일보》를 펼쳐들고 약 십분간 읽고는 반원마다 돌아가며 발언하라고 재촉하였다. 왕반장곁으로부터 련이어 네사람이 열기 띤 발언을 했다. 그다음 내차례였다. 탄광에 와서 처음 참가하게 되는 회의 여서 저으기 흥분되고 긴장해졌다. 더구나 탄광정치공작 조의 장씨라는 간사가 하얀 안경알을 번뜩이며 매 사람들 의 발언을 열심히 적고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한어를 제대로 배워내지 못했고 한어로 발언하기는 처음이였다. 처음 몇마디는 한어로 나갔지만 그다음엔 저도 모르게 조선말이 막 나갔다. 장씨가 알아못듣겠다고 손을 내저 었다. 나는 더구나 얼굴까지 화끈 달아오르며 어쩔줄 몰라 우물거리기만 했다. 그때 나와 사무상을 사이두고 마주 앉았던 로씨가(평상시 나와 매끄럽게 놀던 자식이였음) 야멸차게 한마디 내쏘는것이였다.

  "니 쩌거 꼬리빵즈, 지리와라디 쟝썬머? 워먼 팅부둥. 깐추이 베쟝라(이 조선놈새끼야, 뭐라고 씨부렁거리는지 알아못듣겠어. 아예 입다물어버려!)"

  "꼬리빵즈"란 한족들이 전문 조선족을 욕하는 모욕적 언어로 인정된 구두어이다. 만약 그가 다른 말로 욕했다면 혹시 내가 참았을 수도 있다. 나는 대뜸 밸이 왈칵 치밀어 올라 맞받아 한마디 내쏘았다.

  "마세이, 니 쩌거 싼뚱빵즈!(너 누굴 욕하고있어? 이 산동놈새끼야!)"

  "싼뚱빵즈"란 산동에서 온 한족을 욕하는 모욕적언어로 인정된 구두어이다.

  "쩌 쑈투짜이즈, 쩐 뿌샹화. 까이따스타!(요 빌어먹을 새끼, 덜돼먹었어. 잡아쳐!)"

  로씨가 벌떡 일어나며 나한테 주먹을 날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숙였다. 그의 주먹이 귀전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가 팔을 거둬들이는 틈을 타서 나도 주먹을 날렸다. 퍽! 하고 코피가 탁 터져흘렀다.

  "쩌 쑈즈, 따런나!(이 자식, 사람을 친다!)"

  내곁에 앉았던 녀석이 벌떡 일어나며 내 입술을 쳤다. 나의 입에서도 피가 터져나왔다. 그러자 다른 한 녀석이 사무상우로 풀쩍 뛰여올라 발길로 나의 턱을 걷어찼다. 나는 걸상과 함께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뒤이어 숱한 사람들의 주먹이 나의 면상으로 날아들었고 숱한 사람들의 발길이 나의 배며 하신을 걷어찼다. 사지가 얼얼해나며 숨이 꺽 막히는것만 같았다… 다행히 왕반장과 장씨가 그들을 뜯어말려냈다.

  이튿날 나는 매를 맞고도 "리론학습회"를 파괴했다는 죄로 비판까지 받았다. 그때 "조선족"이라는 설음이 북받쳐 혼자 눈물을 흘렸었다. 더는 탄광에 붙박혀 있을수가 없었다.

탄광에서 돌아온 나는 대학생이 되고싶어졌다. 당시 대학은 시험쳐서 붙는것이 아니라 추천받아가게 되여 있었다. 추천받자면 우선 정치적표현이 좋아야 했는데 정치적표현이 좋다는 표징은 공산당에 가입하여 "당표"를 얻는것이였다.

  이듬해 1월에 나는 시정부의 통일배치로 시량식국산하 의 "숙식품가공공장"에 정식로동자로 들어가게 되였다. 그때는 공장에 지식청년이 몇백명 되였다. 나는 날듯이 기뻤다. 로임은 림시로동자로 일할 때의 절반도 안되였지 만 정상적으로 조직생활을 할수 있게 되였다는데서 더 흥분되였다. 나는 인차 사상회보를 써서 당지부에 바쳤다. 당지부 최서기가 나를 찾았다. 그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사상회보를 제때에 써낸것을 높이 치하했다. 그리고 어떻게 진보하겠는가에 대해 구체적인 조언을 주었다. 나중에 특히 한어를 잘 배워내라고 강조하면서 다음번 사상회보는 한어로 써오라는것이였다. 그것이 난처한 일이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동네를 돌아 다니며 한어자전을 찾았다. 자전이나 사전을 찾아보기 힘든 세월이라 대여섯집을 돌아서야 겨우 두부모만큼 크고 두꺼운 《신화자전》을 빌릴수 있었다. 그걸 뒤적거리며 장밤 썼는데 겨우 편지지 반장도 못써내려갔다. 그렇게 사흘밤을 악을 써서야 문장을 마무릴수 있었다. 눈에 피발 이 섰지만 마음은 즐거웠다. 그걸 최서기한테 바쳤더니 그는 손수 만년필을 꺼내 여기저기 틀렸거나 어휘사용이 타당치 못한 곳을 새까맣게 고쳐주는것이였다.

  그후부터 나는 무슨 글을 쓸 일이 있게 되면 틀리든 말든 한자로 썼고 누구와 말을 하거나 회의발언할 때면 꺽꺽거리면서라도 한어로 했다. 그래서 웃음거리를 자아낸 적이 많았다. 몇백명이 참가한 직공대회에서 한어발언을 잘못해서 크게 망신당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고 한어말을 잘못해서 비판도 받았고 욕도 얻어먹었고 매도 얻어맞은 적이 있다. 우습고 생동한 일들이 많았는데 그걸 다 쓰자면 너무 길어질것 같다. 그해 가을에 시당교에 가서 "맑스레닌주의-모택동사상리론"을 학습하고 심득필기를 써내게 되였는데 나는 장장 만여자에 달하는 글을 한자로 20여페지 써냈다. 잘썼든 못썼든간에 나로서는 대단한 "걸작"이였다.

  1975년도는 나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한해였다. 1월 달에 정식로동자로 되였고 그달 중순에는 제2직장 제2조의 조장이 되였으며 4월달에는 공장건축시공대 대장이 되였다. 나는 밤낮이 따로 없이 뛰여다녔다. "말띠" 인 내가 말처럼 뛰여다닌다고 "말새끼"란 별명이 붙기까지 했다. 원래 1년반으로 계획되였던 공장건물시공을 우리 시공대가 8개월만에 완성하여 그해 12월 28 일에 나는 "화선입당"을 하여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였다. 그후 선후 하여 공장, 량식국, 재무계통의 선진공작자가 되였고 전시 모범당원이 되여 상장과 영예증서만 해도 대여섯개를 수여받았다. 그해 겨울은 눈바람을 타고 둥둥 떠서 다녔다.

  인젠 모든 조건이 다 구비되였다. 대학생추천지표만 내려오면 당상인것이였다. 그야말로 "만사구비에 지결 동남풍(万事俱备, 只欠东南风)"인 셈이였다.

헌데 그해도, 그 이듬해에도 대학생지표는 우리 공장에 내려오지 않았다. 당조직에서는 갈수록 나에게 더 큰 과업을 맡겼다. 민병련장, 단총지 전직서기, 정공조 (政工组)조장 등 책임을 맡겼다. 그리고 학습을 할 기회도 많이 주었다. 단간부훈련반, 공회학습반, 당교리론학습반, 청년간부양성반 등 부동한 강습반을 통해 나의 리론수준도 크게 제고되였다. 후에는 “시 재무계통쌍학판공실(市财 贸系统学大寨学大庆办公室)”로 발탁되여 사업하게 되였 다 . 판공실주임으로는 재무계통을 책임진 시위 부서기 최장부라는 로간부였는데 학식이 깊고 세심한 분이였다. 부주임으로는 상업국, 량식국, 은행, 공소사 등 부문의 제1책임자들이였지만 일이 있을 때만 모여서 회의를 하군 했다. 구체일은 판공실사업일군 6명이 처리했다. 회의와 활동이 많았고 상급지시문건과 아래 각 부문에서 올라오는 보고재료들이 많았다. 정말 눈코뜰새없이 보냈다. 내가 제일 어리고 수준도 제일 낮았다. 끝없이 물어보고 자꾸만 청시하면서 일을 처리해야 했다. 반면에 뛰여다니 며 심부름을 잘했기에 사람들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1977년도 겨울에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였다. 11월말 일이라고 기억된다. 시험치기 사흘전에 시험을 쳐보겠다고 말미를 받으려니 판공실사람들이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그때 우리 판공실을 책임진 최서기의 비서가 하던 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시험이라니 전도가 양양한 동무가 시험을 치겠다니? 량식국산하 각 단위에도 대학졸업생이 얼마나 많소? 하지만 다 동무보다 못하지 않소? 황차 지금 사업이 이렇게 긴장한데 당원으로서 개인전도보다 혁명사업을 먼저 생각해야 할게 아니겠소? 솔직히 말해서 지금 시조직부에서 동무를 중시하고있단말이오."

  그 말을 듣고 나오면서 나의 사상은 좀 동요되였지만 대학꿈을 이뤄보겠다는 결심만은 꺽지 못했다. 이튿날 그 일이 최서기께 회보되였는지 나더러 하던 일감을 김동무 한테 인계시키고 집에 들어가 시험준비를 하라고 했다. 산고개에 올라 짐을 풀고 내리막길에 들어선 기분이였다. 그날 밤중까지 돌아다니면서 나는 수학, 어문, 정치 등 방면의 복습제강을 빌리거나 베껴왔다. 이틀동안 대충 훑어보고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시험문제가 별로 바쁜것 같지 않았다. 중문시험에서 활 펼쳐공포한다는 뜻인 "披露"란 단어를 제대로 써넣지 못한것이 후회되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 단어는 내가 보고문을 쓰거나 비판문장을 쓸 때 가끔 써먹던 단어였는데…

  쉽게 여겼던 시험이 결코 쉽지 않았던 모양인지 나는 몇점차이로 락방되였다. 77년도 겨울은 날씨도 혹독하게 추웠다. 시험을 친후 얼마 안되여 나는 본단위로 소환되 였다. 아마도 고집을 부리며 시험을 친 것이 무슨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니 화창한 봄날이 찾아왔다. 78년도 봄은 봄바람도 거세찼고 봄물도 빨리 녹아내렸다. 우리 사회에는 가끔 "바람"이 잘 부는것이 특징이다. 례하면 전쟁시기의 참군바람으로부터 초급사바람, 약진바람, 도끼 머리에다 금을 쪽 내는 하이칼라바람, 원피스에다 딴스 바람, 문화대혁명시기의 충성무바람… 78년도 봄은 대학 시험바람에 공부열이 끓어번졌다. 아마 중국의 5천년 문 명사에도 그 전례가 없었을것이다. 10년간 대학시험을 쳐보지 못한 중청년세대들이 모두 복습제강을 들고 나섰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광활한 대지가 하루 아침새에 배움의 천당으로 변하는것 같았다. 실안개 감도는 이른 아침이면 어디 앉아 책을 볼 자리를 찾기 힘들게 되였다. 거리에도 강둑에도 숲속에도 책을 보는 사람들로 공간이 다 메워 졌다. 만민이 대학생이 되고 만천하가 교정이 된것 같은 성스러운 분위기여서 책을 쥐고 나서면 숭엄해지는 기분이였다. 그 가운데는 학교문을 금방 나온 초중졸업 생도 있었고 "로싼제(老三届)"고중졸업생도 있었으며 혼자 나온 사람도 있었고 부부동반하여 나온 사람도 있었다. 개중에는 챤스를 잘보는 "못된 송아지"들도 있었다. 공부도 할겸 련애도 할겸 슬금슬금 처녀애들의 뛰꽁무니를 따라 이 나무 저 나무밑을 기웃거리며 어슬렁거리는 녀석들도 있었다. 한창 나이라 나도 그런 유혹에 빠져들 었다. 당시 부르하통하수원지(지금의 연길호텔주변임)에 가면 자그마한 개울물이 흐르고있었다. 개울가곁에 큰 비술나무가 있었는데 나는 아침마다 그 비술나무밑에 가서 복습문제를 외우군 했다. 어느날 아침에 한 처녀애가 그 비술나무에서 얼마쯤 떨어진 백양나무밑에 와서 복습제강 을 외우는것이였다. 날씬한 몸매라든가 갸름한 얼굴이 라든가 어느 모로 보나 총각들의 눈길을 끌만한 처녀애 였다. 댕금하니 서서 책을 보는 자태나 앙증맞게 앉아서 글을 쓰는 모습은 정말 한폭의 그림이였다. 더구나 량어깨를 사선으로 이어놓은 두가닥의 쌍태머리가 몸매의 움직임에 따라 한쌍의 깜장나비처럼 어깨우에서 춤을 출 때면 률동미가 시각조화를 이루어주어 더욱 눈뿌리를 뺐다. 나는 복습제강에 눈길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러면 안되는데…)  눈을 팔지 말자고 결심하며 고개를 들지 않고 한동안 죽치고 앉아있노라면 혹시 그 처녀애가 자리를 뜨지 않았나 돌아앉지 않았나 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또다시 고개를 들고 눈길을 그 쪽으로 돌리게 되였다. 혹간 처녀애가 내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눈길이 옮겨질 때면 나는 바짝 정신이 긴장해지며 흥분에 떨군 했다. 아늑한 아침에 미묘한 화면분위기에 매달려 일렁이는 감정파문이랄가! 아무튼 혼쭐이 방향없이 둥둥 떴다. 그렇게 허황한 분위기속에서 귀중한 아침복습시간을 며칠간 랑비했다. 출근시간때문에 언제나 내가 먼저 아쉬운 자리를 뜨군 했다. 어느 하루아침이였다. 내가 거의 한시간이나 복습제강을 외웠는데도 저쪽 백양나무 밑은 그냥 비여있었다. 허전한 감이 들며 별로 근심스럽기도 했다. 아침복습을 포기했을가 아니면 앓아누웠을가? 시간이 되여 자리를 차고 일어나 강뚝길에 올라섰다. 헌데 웬걸, 마침 그 처녀애도 저쪽켠으로부터 강뚝길에 올라서고있었다. 어쩔수 없이 정면으로 마주 띠우게 되였다. 처녀애가 낯을 살짝 붉히면서 고개를 숙이였다.

“문과를 복습하죠?”

“양. 거긴?”

“저도 문과예요. 집체호일때문에 늦게 시작하다보니 복습제강을 제대로 얻지 못해서…”

“그럼 이걸 가져다가 보오.”

“아니 그럼 거긴…”

처녀애는 뒤걸음질 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럴수록 더 대범해지는 것이 남자다.

“일없소. 난 또 얻을수 있다니까.”

기실 그 복습제강은 힘들게 얻은것이였다. 나는 우격다짐으로 복습제강을 처녀애의 손에 쥐여주었다. 처녀애가 그걸 받아쥐고 훑어보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한어문이구만요. 한어로 쳐요? 대단해요. 전 수준이 낮아 한어로는 안돼요.”

그러면서 처녀애는 복습제강을 되돌려주는것이였다. 갈라질 때 우리는 서로 복습을 잘해서 대학에 붙기를 기원해주었다.

이튿날 아침, 예전대로 나갔더니 웬 녀석이 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제법 소리를 왕왕 내며 무엇을 외우고있 었다. 녀석은 수시로 빨간 내의를 입고 백양나무밑에 앉은 처녀애쪽으로 눈을 흘끔거리고있었다. 괘씸했지만 쫓을수 도 없는 일이였다. 그래서 좀 떨어진 다른 비술나무밑으로 찾아갔다. 한 처녀애와 두 남자애가 갈라져앉은 세곳을 점선으로 이어놓는다면 아마도 직각삼각형쯤은 될 것 같았다. 그 녀석이 언제나 나보다 일찍 나오는 바람에 그런대로 며칠은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참, 이성지간의 흡인력이란 어쩔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이십대의 청춘들임에야! 나는 주동이 되여 먼저 “공격”을 개시해보자고 작심했다. 그래서 그 처녀애가 얻지 못했다는 복습제강을 얻어놓았다. 헌데 “공격”을 개시하자고 나갔던 그날 아침부터 그 처녀애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며칠은 무엇을 잃어버린듯 마음이 허전해서 복습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후회되였다. 강뚝길에서 맞띠웠을 때 집이 어딘가고 물어봐야 했을걸! 그럼 후에 찾아갈수도 있는데… 그후 한번도 그 처녀애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갸름한 얼굴에 새물거리는 실눈이 인상적이였는데…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눈만 감으면 백양나무밑에서 공부하던 그 처녀애의 동탕한 모습이 떠오른다. 후에 그 처녀애도 어느 대학의 대학생처녀로 되였을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어왔다. 헌데 지금에 와서 하는 솔직한 말이지만 그 처녀애가 후에 계속 나왔더라면 나의 복습공부는 엉망이 되였을는지도 모른다. 

  시험날을 한달 남겨둔 6월초라고 기억된다. 복습을 다그쳐야겠다고 청가를 달라고하니 그자리에서 부결당했다. 시험을 치겠다고 나선 사람이 20여명 되니 다 허락해주면 공장이 마비상태에 들어갈수 있다는것이다. 나는 금방 부임되여온 서서기네 집을 찾아가 울며불며 야단을 피웠었다.

  이튿날 나는 예나 다름없이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가방에 넣고 공장으로 나간것이 아니라 공원뒤산으로 올라갔다. 배나무밑에 앉아 복습제강을 외웠다. 배가 고프니 도시락을 꺼내 먹고는 계속 외웠다. 지껄이는 놈이 없어 좋았다. 날씨가 무더우니 옷을 활활 벗어 배나무에 걸어놓고 팬티바람에 앉아 외웠다. 선선하고 조용하니 복습제강의 글발들이 머리안으로 쏙쏙 들어와 붙었다.

  해가 떨어지고 어둑어둑해질 때 자전거에 올라탔다. 저녁바람이 선들선들 샤쯔자락을 날려주어 기분이 났다. 그렇게 나는 사흘동안 공원뒤산으로 “출근”했다. 사흘째 되는 날 저녁에 집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달랐다.

  "너 단위로 안나가고 어디로 갔댔냐?"

  어머니의 질문에 나는 흠칫 놀랐다. 누가 알려주었을까? 이어 아버지가 엄하게 타일렀다.

  "단위에서 요주석이라는 분이 왔다갔네라. 래일 단위로 나가보거라. 너 무슨 노릇을 하겠으면 조직에다 알리고 해야지. 무슨 짓거리를 그렇게 마음대로 하는거냐? 아래우도 없이."

요주석이란 우리 공장의 공회주석이다. 요주석의 가정방문은 문제의 심각성을 제시해준다. 이튿날 공장회의실에 가보니 20여명 남녀청년들이 저마다 고개를 푹 떨구고 앉아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대학꿈을 이뤄보겠다는 공장의 "열혈학도"들이였다. 그들 대부분은 공장의 골간이였으며 입당신청서를 낸 당조직의 후비력량들이였다. 그들은 아마 당원인 나의 거동을 주시해온것 같았다. 내가 출근하지 않으니 그들도 약속이나 한듯 몽땅 출근하지 않고 시험공부에 달라붙었던것이다. 하여 후과는 엄중해졌다. 당지부의 서서기, 공장의 진주임, 공회의 요주석 등 지도간부들 로부터 차례로 입을 열면서 비판의 불을 토했다. 우리 20여명 직공수험생들의 무조직, 무규률성으로 말미암아 막대한 경제손실이 빚어졌는바 어떤 직장에서는 부득불 밤대거리를 취소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도 우리 공장에서는 비판대회가 여러 번 있었다. 탐오분자를 붙잡아내여 비판한 적이 있었고 남녀문제로 작풍이 단정치 못한 “바람쟁이”를 비판한 적도 있었으며 공자, 림표, 등소평을 비판한 적도 있었다. 허지만 이날처럼 치렬하고 분위기가 험악해져본적은 없었다. 생산을 책임진 진주임이 일어나서 책상을 치며 대성질호했다. 입에서 침방울이 튕겼고 원래 망울이 큰 눈이 당금 삐여져 나올것만 같이 눈을 부릅뜨기도 했다. 이것이 그래 사회주의기업의 담벽을 허무자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하며 문제를 아짜아짜한 경계선에까지 끌어올렸다. 비판의 초점은 점차 나에게로 돌려졌다. 당원으로서 반면적인 솔선작용을 놀았다는것이다. 혁명의 리익과 개인전도를 두고 관건적인 시각에 어느쪽을 선택하겠는가? 입당선서를 할 때에는 무엇이라고 했는가? 지금 당조직에서 너를 고험할수 있는 시각이 닥쳐왔다는것이다. 나는 고개도 쳐들지 못했다. 비판의 대상이 된 기타 수험생들도 고개를 푹 떨군채 입을 다물고있었다. 래일부터 무조건 출근하라고 강요되였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당원은 당적을 고려하고 공청단원은 단적을 고려하고 일반 사람은 로동자적을 고려하라는것이였다.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그때 한 “용사”가 나타났다. 제분직장의 오동무라고 기억되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는 대학입시제도의 회복은 당과 국가의 영명한 결책인데 공산당원과 공청단원들이 호응해 나서지 않고 누가 나서겠는가, 시험치는 문제를 가지고 당적문제요 단적문제요 하며 압박을 가하는 것은 그릇된 작법이라고 지적했다. 지금 와서 그런 말은 누구든지 다 할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말을 감히 생각해냈다는 자체가 웬간한 수준이 아니였고 또 그런 말을 그런 회의장소에서 꺼낼수 있었다는 것이 조련찮은 일이였다. 옳지, 그래 그 말이 맞다. 물에 빠진 놈이 지프래기라도 잡은 격이라 할가 우리는 머리가 팩팩 돌았고 흥분되였다. 10년간 빼앗꼈던 권리를 우리가 당당하게 행사해야지. 이것은 결코 당과 국가의 전도에 관계되는 대사이지 어느 한 공장의 생산에 영향이 미치는가 안미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 우리가 “죄” 아닌 죄를 졌다고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 이건 아니다! 그래 우리가 누구냐? 공장에서 제일 똑똑한 총아들이 아니고 누구냐! 이어서 우리의 “반격”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원래 똑똑한 녀석들이라 너도나도 입을 터뜨리니 당할 자 없었다. 나중에는 예상외로 타협적인 결과를 보게 되였다.        공장에서 로동력을 다시 조절하여 정상적인 생산운행을 보장하고 수험생들은 생산강위를 지키면서 시간을 짜내 시험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나는 출근해서 될수록 오전에 사무를 보고 오후엔 사무실문을 꾹 닫아놓고 시험공부에 몰두하려고 하였다. 허지만 일은 삐뚤게만 나갔다. 제일 신경질나는것은 전화벨소리였다. 전화가 보급되지 못했던 시기여서 전 공장에 전화가 몇대 없었다. 평생 전화를 쳐보지 못했다는 사람도 있었을 때였으니깐. 그래서 전화가 오면 틀림없이 급한 일이거나 중요한 통지였다. 그러면 그걸 전달해야 했고 활동을 포치해야 했다. 전화가 서너통만 와도 그날 오후복습은 엉망이 된다.

어느날 오후였다. 금방 전화를 받고나서 복습제강을 펼쳐들었는데 또 전화가 울렸다. 신경질이 나서 송수화기 를 들었다가 콱 놓아버렸다. 이어 련속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전화벨이 네번째로 울릴 때 방정맞게도 진주임이 들어서면서 송수화기를 집어드는것이였다. 몇번 "오오, 예예"하더니 송수화기를 놓고 내앞에 와서 장승처럼 뚝 박아섰다. 올려다보니 두눈을 뚝 부릅뜨고 있었다.

  "사무실에 앉아있으면서도 왜 전화를 받지 않았소?"

  "금방 시험문제를 푸느라…"

  "시험, 시험, 그래 이곳이 시험공부만 하는 장소요? 이따위로 공작하려면 당장 이 자리를 내놓소."

  "진주임이 내놓으라면 내놓을 자리입니까!"

  나는 벌떡 일어나 대들었다. 둘은 서로 삿대질 하면서 말다툼을 벌렸다. 그 소리에 저쪽 사무실사람들이 나와 말렸다. 우리 아버지년세와 비슷한 진주임은 평상시 나를 아들처럼 생각해주시던 분이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버르장머리없이 놀았다는 자책감 이 들었다.

  시험날자가 하루하루 박두해오면서 나는 더욱 조바심만 났다. 복습제강은 절반도 못외운 꼬락서니였다. 이래 저래 짜증만 났다. 계속 이렇게 나간다면 또 미역국을 먹게 될 판이였다. 하루라도 빨리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다시 서서기를 찾아가니 딱 잡아떼는것이였다. 이튿날 나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과서, 필기장, 복습제강을 대충 꿍져가지고 농촌에 있는 외가집으로 꼬리를 감추었다. 하늘이 무너지겠으면 무너져라는 배짱이였다. 끼니마다 외할머니가 보글보글 끓여주는 토장국에다 이밥을 두세사발씩 제끼며 시험공부에만 전념했다. 인츰 효과가 나타났다. 외가집 뒤뜰안의 살구나무밑은 그야말로 천국속의 학당이였다. 기분이 날 때면 왕왕 소리를 내며 읽었다. 가끔 외할아버지가 지나가며 대견스러운지 껄껄 웃기도 하셨다.

"더 크게 읽거라. 온동네에서 우리 외손주가 대학공부를 한다고 알게스리."

기운이 났다. 복습제강에 찍힌 글이 그대로 머리에 쏙쏙 들어와 배겼다. 그동안 어머니가 몇번 왔다갔다. 공장에서 사람이 두번 왔다갔다는것이다. 그들이 와서 무슨 말을 했는지 나도 캐여묻지 않았고 어머니도 말씀해주지 않았다. 다만 어머니의 얼굴에 근심에 쌓인 그늘이 비꼈을 뿐이였다.

  드디어 시험칠 날이 돌아왔다. 시험치는 세날동안 날씨가 특별히 무더웠었다. 긴장해서 목이 말랐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시험지를 바치고 밖에 나오면 눈앞이 아물거릴 지경이였다. 시험을 다 치고 친구들과 함께 렬군속식당에 가서 생맥주를 대여섯 사발씩 들이켰다. 변두리가 쪼각쪼각 짓쫏겨진 자리에 까만 때가 박힌 큰 국수사발이였다. 그런 사발로 마셨지만 시원컬컬하기만 했다. 배를 두드리며 거나하게 마신탓에 가방까지 두고와서 어머니의 꾸지람을 들었던 기억도 난다.

  대학입학통지서가 날아들던 날 우리 사무실은 왁짝 들끓었다. 20여명가운데서 나만 붙었던것이다. 숱한 사람 들이 와서 축하해주었다. 그 가운데는 서서기도 있었고 진주임도 있었고 요주석도 있었다. 진주임의 지시에 따라 공장에서는 돼지를 잡아 엎어놓고 환송연을 베풀기도 했다. 그리고 군용멜가방과 사지옷 이래웃벌을 선사했다. 진주임 한테서 그걸 받아안으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개학을 앞두고 나는 연변대학을 찾아 교정안팎을 한바퀴 빙 돌아보았다. 그제날 어린 시절의 꿈속에서처럼 대학가 의 비술나무밑에 서서 "닭똥과자"라도 한봉지 사서 먹고싶어졌다. 허지만 정작 사먹자니 다 큰 녀석이 길가에 서서 과자를 와삭와삭 씹어먹는다는것이 별로 쑥스러울 것만 같아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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