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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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택호
2006년 01월 24일 00시 00분  조회:5096  추천:59  작성자: 황유복
택 호



20세기와 함께 사라진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가운데서 가장 아쉽다고 생각되는 것이 바로 《택호》라는 호칭문화이다.

어릴 때 나는 동내 할머니들이 우리 집이나 우리 할머니를 《남호댁》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자주 들어왔다. 《남호댁이 뭐예요?》라고 할머니에게 물었더니 ⟪우리집 택호란다.⟫라고 대답하셨다. 그런데 내가 택호의 참뜻을 알게 된 것은 수십년이 지나고서였다.

거의 모든 이민일세들이 다 그랬겠지만 할머님은 꿈에서도 당신의 그리운 고향을 잊지 못했다. 아들을 따라 중국으로 이주해왔지만 10년도 않되는 사이에 아들과 며느리를 여의고 어린 손자를 키우면서 어렵게 생계를 유지해가고 계시던 할머니는 당신께서 생전에 고향땅을 밟지 못 하더라도 손자가 커서 뿌리를 찾아가기를 원하셨던 것 같다. 내가 어릴 때, 집에 떡이나 별미가 생기면 할머니는 나를 불러 놓고 먼저 고향과 돌아가신 할아버지, 아버지의 성함을 줄줄이 외우게 하였다. 거침없이 선친의 성함과 함께《강원도 울진군 온정면 덕산리 (지금은 울진군이 경상북도에 소속되지만 광복전에는 강원도에 속했다)》하고 고향주소를 외우게 되면 상을 주듯이 떡을 먹게 하셨다. 그런데 그렇게 의도적으로 내 머릿속 뇌세포에 새겨넣어준 그 정보로는 뿌리를 찾을수 없다는 것을 할머니는 생전에 생각조차 하지 못하셨다.

내가 처음으로 한국방문초청을 받은 것은 1983년 서울대학교 문화인류학과가 주최하는 학술회의 초청이였다. 그런데 그때는 《남조선》이 이스라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함께 지구상에서 중국공민이 갈수 없는 나라로 지정되여 있었기 때문에 나의 한국방문 꿈은 실현될 수 없었다.

그때 마침 서독의 보홈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독일학자 휜들링그씨가 서울대학교의 학술회의에 참석했다가 나를 대신해 선친의 고향을 방문하여 산골마을에서 하루밤을 자면서 나의 소식을 그쪽 친척들에게 알려주었고 고향의 상황을 사진으로 찍어 나에게 보내왔었다. 휜들링그박사는 1982년에 처음으로 나를 유럽한국학학계에 소개한 학자였다. 서울로 떠나기 전에 나의 서울행기회가 좌절된 사실을 알게 된 휜들링그는 편지를 통해 나의 선친 성함과 고향주소 등 필요한 정보를 갖고 갔던것이다. 그런데 그는 족보에서 나의 위치를 찾아내는 일만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 소식을 접하고 나는 그가 독일학자이기 때문에 한자에 익숙하지 않아 족보를 제대로 읽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988년초에 나는 두 번째 한국방문초청을 받게되였다. 88서울올림픽개막식전야에 개최될 올림픽국제학술회의의 초청이였다. 그때 나는 미국 하버드대학의 교환교수로 보스턴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뉴욕주재 중국 총령사관을 통해 우여곡절 끝에 리붕(李鵬) 국무원 총리가 직접 사인한 한국방문 공식허가를 받을수있었다. 서울에서 학술회의와 올림픽개막식에 참석한 후, 올림픽국제학술회의 조직위원회는 한국의 10개 대학의 특강부탁을 하면서 한국에서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어왔다. 나는 주저 없이 선친의 고향이라고 했다.

그들의 배려로 나는 대학특강을 시작하기 전에 시간을 타서 고향을 방문하게 되었다. 서울을 떠나 승용차로 대전, 대구, 경주를 거쳐 포항까지 도착했고 포항에서 다시 동해안을 따라 흥해, 영덕을 거쳐 평해에 도착하였으며 평해에서 좌회전하여 백암온천쪽으로 가다가 다시 좌회전하여 덕산리에 도착할수 있었다.

덕산리는 아직도 황씨 친족마을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황씨문중의 최년장자의 집을 찾아갔더니 반시간도 않되여 온 마을사람들이 다 모이였다. 몇년전 키가 큰 독일인이 대신하여 왔다간 적도 있었고 또 중국 북경의 어느 대학 교수로 알고있었는데 이번에는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 명찰까지 달고 왔으니 고향사람들에게 비쳐진 나의 이미지는 《금의환향》한 《선비》정도가 아니였나 싶다. 나의 첫 고향방문은 이렇게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저녁은 마을사람들이 함께 하는 푸짐한 잔치였다. 식사를 마치고 집안어른들이 사랑방에 모여앉아 족보를 앞에 놓고 나의 위치를 찾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알고 있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성함은 족보에서 전혀 찾아볼수가 없었다. 결국 휜들링그가 시도했다가 실패한 일을 한자에 상당히 익숙한 나도 해내지 못하고 말았다. 집안어른들은 이전 사람들이 평소에 쓰던 이름과 족보에 올라있는 이름은 다르다고했다. 그리고 족보에 올라있는 이름은 할머니도 모르실거라는 것이 였다. 족보는 족인의 일종의 신원보증서이기 때문에 족보에서 위치를 찾아낼수 없는 상황에서 나의 정체성은 확인될수 없게 된다. 고향사람들과의 촌수도 따질 수 없고 상하 세대관계도 계산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과 《우리》라는 일체를 이룰수도 없다.

나는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실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말문이 막혀 옴을 느끼게 되었다.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그나마 탈출해 보려고 나는 될수록 화두를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몰아갔다. 그러다가 우연히 할머니의 택호가 《남호》라는 말을 하게 되었는데 생각밖에《기적》이 일어났다. 좌석에 앉아계시던 아저씨뻘(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되시는 세분 로인께서 이구동성으로 《남호댁아지매!》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들은 급히 족보를 뒤적이다가 《여기 있다》라고 하였다. 나도 목을 길게 빼고 족보를 들여다보았는데 할아버지 족보 성함자아래 아버지와 삼촌의 이름(수자돌림의 낱선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고 아버지함자아래에는 만주로 이민 갔다고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적어 놓았다. 혼돈은 사라지고 천지개벽이 일어난것처럼 모든 질서가 순식간에 정립되였다. 앉아 계시는 모든 분들과 나 사이의 상하 세대관계와 촌수관계가 금방 확정된것이다. 고향에는 나의 7촌, 9촌 숙부님들과 8촌, 10촌 형제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6촌형님 두분이 포항제철에 근무하고 있음을 알수있었다.

《택호》에 대한 사전적해석은 《장가든 곳의 땅 이름을 붙여 그 사람의 집을 부르는 이름》이라고 하고 있다. 쉽게 말한다면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시집오기전에 남호리라는 마을에서 살았는데 결혼후 그 친정마을이름이 시집의 이름으로 된것이다. 옛날 호칭법이 까다롭던 시절, 결혼을 하여 어른이 되면 아무리 웃 세대라도 그냥 이름을 부를수 없었다. 그러한 호칭상의 불편을 덜수 있었던 지혜가 바로 택호였던 것이다. 할아버지도 결혼하여 어른이 된후 개인의 이름보다는 할머니의 친정마을 이름으로 된 《남호댁》이란 택호로 통했기때문에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마을 로인들은 할아버지의 성함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택호는 기억하고 있었것이였다.

택호가 그렇게 중요한 문화적 기호라는것을 나는 첫 고향방문에서 절실하게 체험했다.

200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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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상공
날자:2006-01-24 08:14:22
무슨 댁이라고 노인들이 호상 부르는건 들었지만 그것이 택호인줄은 몰랐습니다. 정말로 우리는 너무 많은 귀중한것들을 잊으면서 살아가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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