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연현과 피천득의 수필을 즐겨 읽는다. 조의 수필은 지성(知性)적인 개성이 강한 대신 피의 글은 좀 더 정서적이지만 그들의 글에는 당신들의 삶의 정취와 여운이 흠뻑 배여 있어 읽을 때마다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한잔의 차를 마주한 기분이 든다.
그런데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술을 못 마신다. 《나의 무주도(無酒道)의 변》을 읽다보면 조연현은 《생리적으로 술이 받아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고, 피천득은 《술》이라는 글에서 《체질》 때문에 술을 못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모두 술을 례찬했고 주당(酒黨)들을 부러워했다.
나도 술을 먹지 않는다. 나는 나의 체질이 술을 받아주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도 전에 이루어진 약속때문에 술을 입에 대지 않게 되었다.
60대 이상의 년륜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1957년 《반우파투쟁》으로부터 《문화대혁명》이 막을 내린 1970년대 말까지, 중국의 사회생활 전반에 만연되였던 좌경적 정치, 사상풍토를 쉽게 잊을수 없을것이다. 《반우파투쟁》이 시작되던 그해 나는 15세의 초중 3학년 학생이였다. 그 투쟁의 결과로 내가 존경하던 몇몇 선생들이 《우파》로 몰려 학교교정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선생들을 불행에로 내몬 결정적인 《죄장》들이 대부분 술좌석에서 나온 말들이였다는 사실을 나는 시간이 좀 지나서 알게 되였다.
고중 2학년 때, 나는 나를 많이 관심해주던 은사님이 입원한 병원에 병문안을 간적이 있다. 선생님은 《술을 좋아하는 조선족 남자들은 술이 몇잔 들어가면 호언장담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것이 조직에 보고되여 당사자를 불행에로 몰아가게 된다. 또한 이러한 사회적 억압분위기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술에 의존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지게 된다》고 이야기하면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는 앞으로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나와 약속하자.》술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던 나는 선뜻 선생님의 손을 잡으면서《약속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후 은사님은 술이 남긴 화근때문에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선생님이 나에게 씌워 준 약속이라는 굴레가 얼마나 무거운 짐인지 점차 깨닫게 되였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 학생 식당에서는 명절 때마다 술을 공짜로 제공해주었다. 그때의 학생식탁은 《팔선탁(八仙卓) 》이라는 정방형 식탁이였는데 식탁마다 포도주 한병, 그러니까 매 8명에 술 한병씩 차려진 셈이다. 그리고 그때의 포도주라는것도 지금 흔히 볼수 있는 《중국건홍(中國乾紅)》이요 《장성건백(長城乾白)》이요 하는 식의 꼬냑형 와인이 아니고, 당분 함유량이 높고 알콜 함유량이 낮은 술이여서 누구라 할것없이 무난하게 마실수 있었던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입학식이 끝나고 저녁 만찬 때 포도주가 나왔다. 대학생이 되였다는 긍지에 부푼 학우들은 누구라 할것없이 모두 잔을 들고 《건배》의 짜릿한 맛과 멋을 함께 즐기였다. 그런데 나만은 그 금주(禁酒)의 약속때문에 학우들과 함께 휩쓸릴수 없었다. 그때 나는 완전히 따돌림당한 기분이였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족 동학들은 술이 생길 때마다 반에서 유일하게 술을 안 마시는 나에게 술을 권하면서《술도 안 먹으면 어찌 사나이 대장부라 할수 있느냐》라고 빈정거리는것이였다. 대학 5년 동안, 그것도 멋 모르게 자존심이 한참 강했던 그 시절에, 술을 안 먹기때문에 사나이 대장부가 아니라는 야유를 들을 때마다 찐하게 다가오는 치욕감을 고스란히 가슴속에 묻어야만 했던 엄청난 고역을 치르게 되였다. 그러한 고역이 지속되면서 나는 무의식중에 《내가 진짜 사나이로서 무엇이 부족한것이 아니냐》하는 의구심에 빠져 쉽게 해탈할수 없었다.
그러다가 졸업을 맞이하게 되였고 학우들은 학교부근의 음식점에서 작별을 위한 마지막 만찬을 마련하였다. 5년간의 우정과 오늘의 리별 그리고 내일의 행운을 위하여 60명의 동학들은 차례로 건배하게 되였다. 모두가 함께 하는 건배가 끝난후 친구였던 고(顧)군이 술잔대신 찻잔으로 건배하고 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내 손에서 찻잔을 빼앗아 놓고 맥주잔을 쥐여주면서 래일 서장으로 떠나가는 자신을 축복해달라는것이였다. 대학시절 테니스를 함께 치면서 친구가 된 고군은 광서출신의 한족동창이였는데 자진해서 서장으로 가게 되였다. 지금과 달리 그때에는 대학졸업생 전원이 국가의 통일분배를 거쳐 직장이 결정되던 시절이였다. 나는 본 대학의 조교로 발탁되여 좋은 직장이 차려졌고 친구인 고군은 삶의 환경 조건이 가장 열악한 서장으로 배치되였던것이다. 그때 나는 술을 안 먹는다는 리유로 고군의 부탁을 거절한다는것은 돌아올수도 없는 전쟁터로 나가는 친구에게 축복해주기를 거절하는 것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선생님과의 약속이 제동을 걸기 전에 나는 고군을 축복하여 맥주잔을 들었고 고군을 위해 그리고 북경을 떠나 멀리 변방으로 가게 되는 동창들과 그 자리에 모인 모든 동창들을 축복하여 단숨에 500CC짜리 맥주잔 3개를 비웠다. 문자 그대로 일명경인(一鳴驚人)의 순간이였다. 놀라서 눈이 둥그레졌던 동창들은 한결같이 기립 박수를 쳐주었다.
이렇게 나는 평생 처음 술을 경험하게 되면서 선생님과의 약속을 깨쳤고 술에 대한 동정(童貞)도 잃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더 귀중한것들을 얻게 되였다. 우선 나는 친구에 대한 의리를 지킬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나도 남 못지않게 술을 마실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였다. 그것이 확인되는 순간 5년간 내 가슴속에 묻어온 치욕감(술을 못 먹기 때문에 사나이 대장부가 아니라는)을 훌훌 털어 버릴수 있었으며 불주(不酒) 콤플렉스에서 해탈할수 있었다. 《나도 술을 마실수 있다. 다만 나는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시지 않을 뿐이다. 남들이 사나이 대장부의 대명사처럼 사용하고 있는 술의 유혹을 이겨내면서 약속을 지키는것이야말로 사나이대장부가 아니면 해낼수 없는 장한 일일것이다.》 그후부터 나는 긍지를 갖고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킬수 있었고 다시는 그 약속을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였다.
불혹(不惑)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나는 약속을 주문하신 선생님의 참뜻을 올바르게 읽어낼수 있었다. 사회전반이 열병을 앓고 있던 그 시대를 살면서 무사히 살아남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선생님은 금주(禁酒)라는 호신부(護身符)를 나에게 달아준것이였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 고중 동창 10여명이 북경의 각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한달에 한두번정도 함께 모여 술을 마시곤 했다. 문화대혁명 초기에 술좌석에 모였던 사람들이 국외에서 밀반입된 소책자를 돌려가며 읽은것이 화근이 되여 그들 다수가 감옥에 수감되여 옥고를 치르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그런데 술을 안 먹는 나는 그 모임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무사할수 있었다. 반우경(反右傾), 사회주의 교육운동, 문화대혁명 등 운동을 차례로 겪으면서 선생님의 본뜻대로 금주의 약속은 여러번 나를 위기상황에서 보호해주었다.
투쟁의 철학이 사회생활의 기본가치로 인정되던 그 시대가 사라지면서 선생님과의 약속도 존재의 가치를 잃게 되였다. 그러나 나는 계속 술을 먹지 않는다. 《술도 모르고 인생을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애주가들의 말을 귀 아프게 들으면서 대학 때부터 술과 관계없는 곳에서 인생의 재미를 찾기 시작한것이 40대가 되면서 고칠래야 고칠수 없는 습관처럼 되어버린것이다.
남들이 술을 마시면서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고 친구들을 사귈 때 나는 완전히 다른 취향으로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고 친구들을 사귀였다. 자신의 전공외에 음악, 미술, 문학에 기웃거리기도 했고 테니스, 배드민턴, 수영, 스케이팅, 등산, 낚시 등 스포츠를 선호했으며 카드놀이, 바둑, 장기에서 마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임을 익히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술 외에도 삶의 정취는 어디서나 찾을수 있다고 믿게 되였다. 한문으로 쓴 시가 신문에 발표되거나 전각(篆刻) 작품이나 작사, 작곡한 노래가 발표되였을 때 아마추어답게 희열을 느끼면서도 그 분야의 친구들에게 슬그머니 미안해지는것도 어쩔수 없었다. 《외도》중에서 내가 가장 긍지를 느끼게 된것은 미술에 대한 사랑이 밑거름되여 세번이나 800만원 이상 가치의 예술품 감정(鑑定)을 해낸것이고, 내가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는 일은 문혁초기 별 볼일 없어 의학공부를 좀 한것이 문제되여 군 부대농장에서 로동단련을 할 때 《맨발의사》자격으로 주변 농민들의 병을 봐준적이 있고, 1985년에는 할빈시 위생국으로부터 할빈시조선족병원 명예원장으로 정식 임명받은 것이다.
선생님과의 약속때문에 나의 인생에서 술의 자리는 완전히 비여있다. 그 빈자리를 꽉 채워메운것이 바로 여러가지 취향이다. 그 취향들을 쫓아버리고 자리를 다시 비워 술을 쏟아붓는다는것도 당초에 술의 자리를 비우던것 못지 않게 어렵다는것을 불혹의 나이에 터득하게 된것이다.
그렇다 해서 나의 인생에서 술이 전혀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다. 입으로 먹는 술의 자리는 비여 있지만 글로 읽는 술의 자리는 남 못지 않다. 술에 대한 글은 대체로 세가지로 구분되는데 예찬론, 혐오론 그리고 중용론이 그것일것이다. 예찬론의 백미는 《가장 좋은것이 뭔지 아나? 술에 취해 물가 모래밭에서 잠자는 것이야》라고 한 아르튀르 랭보의 명언일것이고, 혐오론중에 가장 정곡을 찌른 사람은 《모든 악덕중에 음주만큼 성공을 방해하는것은 없다》고 한 영국시인 월터 스코트일것이다. 중용론으로는 우리가 평시에 자주 듣게 되는 《술은 적당히 마시면 약이요, 과음하면 독약이다》라는 말이겠지만, 그보다 더 해학적인 속담을 1992년 몽고를 방문했을 때 울란바또르의 한 애주가가 들려준적이 있다. 《술을 마시면 죽는다, 그러나 마시지 않아도 죽는다》.
한국시인 조지훈은 술 마시는 사람들을 18등급인 9급 9단으로 나누고 있다. 나는 9급인 불주(不酒)급에나 속할는지 모르겠다. 아주 못 마시진 않으나 잘 안 마시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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