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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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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초상(3)
2012년 12월 07일 16시 10분  조회:2219  추천:3  작성자: 회령
선생님의 초상(3)

윤순임선생님

초중을 졸업하면서 우리들은 처음으로 인생행로 선택이라는 과제에 부딪쳤다. 우리들의 앞에는 두갈래의 길이 뻗어 있었다. 당과 국가와 인민의 수요에(배치에) 무조건 복종한다는 전제하에 고중으로 가겠는가? 아니면 중등전업학교로 가겠는가? 두갈래길중에서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주지하다싶히 고중으로 간다는건 계속 문화과를 학습하여 대학으로 가기위한것이고 중등전업으로 간다는건 직업기술을 학습하여 사회생활속으로 나간다는것이다. 고중은 자비기 때문에 그만한 경제력이 있어야 하고(학교는 현성이상 도시에만 있었다.) 중등전업은 국가부담 면비였다. 국가에서 기술인재 수요가 대량적으로 급박했기에 중등전업학교는 여러가지 전업이 많았다.

우리집은 어머니가 여러가지 만성질병으로 자주 앓고 아버지 한손으로 네식구가 살았는데 그때의 집체로동수입이란 워낙 보잘것 없는데다가 개인부업도 별로 할것이 없었고 한다해야 푼돈벌이도 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라. 집체생산로동에는 빠지면 안되고 비가 오거나 혹 여가가 있어서 도라지나 황기(약초)를 캐여 공소사(상점)에 판다면 푼돈잎이 물론 생기지만 기를 쓰고 캐였대야 몇근안되고 수매가격이 또한 아주 헐값이였다. 닭알 한알을 크면 1전, 작은것은 두알에 1전5리, 그것도 마음씨가 후더분한 영업원이면 그렇게 계산해 주었지만 욕심많은 영업원은 작다면서 두알에 1전을 주었다.

그때는 시대도 시대였거니와 우리고장은 꽉막힌 궁핍한 산골이여서 사람들이 산다는게 사실상 말이 아니였다. 모두가 비슷한 처지였으나 우리집을 비롯하여 네댓집이 제일 가난했다.

학교에서는 지망결정은 심중히 토론 연구하여 일주일내에 등기표를 바치라고 하였다. 나는 토론이고 연구고 할것도 없이 지원서를 이듵날로 선생님에게 바치였다. 나의 지망은 성 교통학교 자동차운전 전업이였다. 담임선생님은 안된다고, 고중을 써야한다고 딱 잡아 떼였다. 고중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을, 나는 허구픈 웃음을 웃었다. 현성에 가서 하숙방 살이만 하자고 해도 한달에 입쌀 서말, 장작 한수레, 그리고 달마다 현금 5원이였다! 지금 말로하면 나에게는 그야말로 천문학적 수자였다. 네식구의 량식대도 빚을 지는 처지에 당키나 한 일인가. 선생님은 여러가지 도리를 말하면서 고중을 쓰라고 나를 설복하고 나는 나대로 도리를 저었다. 선생님은 고학을 하더라도 고중으로 가야한다고까지 말씀했지만 그때의 현성에는 고학 할데도 없었다. 일주일이 되는날 나는 눈물을 씻으며 원래대로 전업학교를 쓰고 선생님은 매우 태연한 기색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셨다. 선생님은 나에게 금후에 함수(통신)를 해서 꼭 대학에 다니라고 하였다. 나는 그러겠다고 선생님께 약속했다.(나는 약속대로 하였다.)

졸업한후 나는 부지런히 산으로 다니며 약초를 캐고 버섯을 뜯었다. 한푼이라도 학교로 갈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3년만 이를 악물고 버티면 월급쟁이가 되겠으니 어머니 아버지가 그때까지만 참아달라고 나는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의 심정은 나보다 퍽 많이 착잡했을것이다. 한달남짓 지나서 입학통지서가 왔는데 학교는 위생학교 서의전업이였다. 학교에서 나의 전업ㅡ 전도를 의학자의 길로 잡아 주었던것이다. 나의 가정형편과 사람됨됨이에 근거하여 의사가 가장 알맞다고 판단한 모양이였다. 할수없는 일이였다. 무조건 복종이라 하지 않았는가.

학교에 간후 나는 우리의 교재와 의학대학의 교재를 같은 진도로 학습하였다. 학습을 잘하여 전 교에 이름을 떨치게 되였으나 나의 전업사상에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의사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든것이다. 나는 전업이 싫으니 집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그때는 2학년 하학기초였다. 되기나한 소린가! 국가계획에 든 기술인원수자였고 벌써 절반이나 배양했는데 무슨 잠꼬대같은 소린가! 허튼생각을 집어쳐! 절대로 안된다. 무조건 복종해. 너는 당의 공구일뿐이야. 되지못하게 자산 계급 자유주의, 개인주의 물을 먹어 가지구, 혼떨어 지고 싶어?!... 학교에서는 담화, 교육, 비판으로 강도를 높혀가고 나는 발악적으로 반항하였다. 그때는 “3년재해”에서 가장 간고한해 였다. 집체숙사 2층다락방은 석탄이 없어서 난로를 피우지도 않았고 숙사안이 바깥보다 더 얼음장이 였다. 화식은 더 말할여지도 없었다. 나는 홑옷에 내복도 없었고 맨발에 헌가죽구두를 신고 다녔다.(어머니가 친척집에서 주어온것) 이불이란 얇다란 포대기 하나뿐. 그해 나는 손발을 다 얼구었다.

기아, 추위, 그리고 피를 말리는 사상투쟁(비판)…련 10여일 한숨도 자지못하니 정신에 가끔가끔 착란이 생기는것 같았다. 사태가 이렇게 번져지니 학교에서는 휴학시킨다고 하면서 부모가 와서 데려가라고 하였다.(나는 몰랐다) 하지만 2, 3원차비를 마련할수 없어서 부모님은 안절부절 속을 태우다가 어머니가 무작정 200여리 먼길을 걸어서 떠났다. 학교에서는 2,3일 기다려도 나의 부모들이 오지 않으니 반주임인 윤순임선생님을 파견하여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게 하였다. 뻐스에서 선생님은 기진맥진한 나를 안다싶이하고 길을 떠났다. 뻐스가 령을 넘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향땅에 들어섰다. 이제 80여리 령길을 내려가면 집마을이 저 멀리에 보일것이다.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끝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집으로 가게 되였다. 누가 휴학시켜 달라고 했는가. 휴학기가 끝나면 또 그곳으로 가야하는게 아닌가. 왜서 퇴학을 시켜 주지 않는가. 내가 반혁명을 하겠다는것도 아니고 나의 뜻대로 포부대로 인생을 살겠다는데 기어코 안된다고 하는가. 나 하나가 의사를 안한다고 해서 중국에 의사가 없어진단 말인가 …죽도록 비판을 받았으나 나의 머리속에는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외고집불통 자산계급개인주의, 자유주의 완고분자였든것이다. 지금의 인권사상환경을 50여년전에 바란것은 그야말로 망상이였다. 당시는 일체가 계획적이여서 거기에 복종하는것만이 옳은것이였다. 나는 그것을 리해못했을 뿐만아니라 반항하였든것이다. 훗날 회고해보니 결과적으로 퇴학처벌을 받지않은것이 다행이였다. 그때 만약 학교에서 나를 처벌로 퇴학해 버렸다면 나의 인생은 그때에 요절되고 마는것이다. 개혁개방전까지는 우파와 같은 취급을 당해야할것이니…새로운 인생행로를 잡는다는건 꿈도 꿀수없는 일이고 개혁개방시대가 열렸을 때에는 50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였겠으니 나의 인생은 볼장을 다 본것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고향산천을 바라보니 반갑고 슬펐다. 뻐스가 오랑캐령을 넘어 조금 내려가자 앞에 어떤 사람이 보이였다. 어머니 였다! 80여리 무인지경 산길을, 범이 나든다는 그길을 어머니는 허위허위 혼자서 걸어 왔던것이다…

나는 1년후에 머리를 수그리고 다시 학교로 갈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윤순임선생님이 다른곳으로 전근한 후였다.

내가 극도로 긴장해하며 가끔씩 혼란해 할때 선생님은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한후 자기집으로 데려갔다. 선생님의 남편은 부대의 간부였고 어린 아들과 친정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서울말씨를 쓰는 할머니는 단아하고 매우 인자했다. 집은 두칸짜리였는데 20여평 되였다. 나는 선생님의 집에서 사흘이나 살뜰한 보살핌을 받았다. 그때 세월에 남을 먹일것이 어데 있는가! 그러나 할머니는 나에게 입쌀죽을 쒀 주었다. 아이를 먹이는 비상미였을것이다. 없는 석탄불도 많이 때였다. 나는 선생님의 집에서 사흘이나 정신없이 잤다. 할머니는 기뜨지 못하는 나에게 입쌀죽을 떠 먹어였다. 사흘후 나는 정신이 번쩍 나는것 같았다. 그러나 몸은 후둘후둘 떨리였다. 하지만 너무도 송구해서 선생님댁에 더는 있을수 없었다. 이튿날 선생님은 나를 데리고 우리집으로 떠났다. 그날, 선생님은 돌아가는 뻐스를 타기위해 물한모금을 마신후 인차 돌아섰다. 우리집에는 선생님에게 드릴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가 산나물 말린것을 무척 미안해하며 보자기에 싸 드렸으나 선생님은 완곡히 사절하였다.

학교에 간후 알게된 바이지만 내가 퇴학처벌을 받지 않게 된것은 윤순임선생님이 한사코 보호해준 덕분이였다.(내가 다닐때 3명이 퇴학처벌을 받았다. 처벌로 퇴학을 맞으면 제2의 출로를 주지 않았다.) 나를 벼랑끝까지 몰고간것은 학교단위 였다. 그러니까 나와 단위가 결사적으로 싸웠든것이다. 쌍방이 다 열혈청년들이다보니 누구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고 너그럽지 못했고 더구나 지려 하지 않았다. 황차 나는 절대로 용서할수없는 착오적 사상을 고치려 하지 않는 엄중한 완고분자였든것이다. 이런자 앞에서 단조직이 물러설수 있겠는가. 말도 되지않는 소리였다. 하여 그들의 공세는 걸음마다 강력해 지였다. 반 단지부에서 비판하다가 전 반에서 비판하고 학년급(다섯개 반)에서 비판 하였다. 다음은 단위에서 비판하였다.(전 교 전체단원) 다음은 마지막으로 학생회와 단위가 련합으로 비판할참이였다.(전 교 학생) 성세호대한 비판을 한후 퇴학처벌의견을 교무위원회에 건의하면 그들의 전역은 승리적으로 끝나는 것이다. 비록 한사람은 만구하지 못했지만 전 면을 교육한 성적 과 의의는 절대로 과소 평가할수 없는것이였다. 그들이 방안 토론중인 바로 그때 윤선생님은 리화림(항일 연안간부. 녀.)교장선생님과 의견 일치를 보았든것이다.

 

사업에 참가한후 나는 성급선진인물이 되면 윤순임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을 꼭 찾아 뵙겠다고 맹세를 하였다. 그러나 그후의 주, 객관상황으로 하여 나는 맹세를 실현하지 못하였다. 맹세는 나의 일생에서 커다란 유감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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