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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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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초상(4)
2012년 12월 14일 09시 39분  조회:1907  추천:3  작성자: 회령
선생님의 초상(4)


풍옥환선생님


곡절 많았던 의학전업을 나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하였다. 우리 동창 13명은 연길현(룡정시) 위생과(국)으로 가서 사업배치를 받게 되였다. 학교에서는 나이가 제일 어린 나에게 일행을 책임지게 하였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스개로 가끔 화제가 되지만 그때 나는 위생과 령도와 간부들을 돌아가며 꼬박꼬박 경례를 하고 일률로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며칠후 어느날 위생과에서는 우리를 다시 오라고 하였다. 위생과를 나온 우리는 뿔뿔히 헤여졌다. 소위 인솔책임자라는 내가 그날 다 같이 국수 한사발 먹자는 건의도, 4촌짜리 기념사진 한장 찍자는 말도 돈이 없어서 못했다. 집으로 가는 차시간을 놓치면 부득불 려관에 들어야 하는데 나에게는 그런 호사를 할만한 돈이 없었다. 다른 동창들도 나와 비슷한 사정들이였는지 발론이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헤여져서 광활한 사회무대로 나섰다.

우리 동창 13명에서 3명만 의사로 배치를 받았는데 1명은 산골의 조그마한 림장위생소로 가고 1명은 역시 작은 집체단위인 중의련합진료소로 갔다. 국가병원인 공사위생원의사로는 나뿐이였다. 다른 동창들은 진병원과 현병원에 화험 혹은 약국인원으로 배치를 받았다. 후에 안 바이지만 그때 우리조에서는 한명도 “소동작”(뒤문거래)을 한 사람이 없이 모두가 기꺼이 당과 국가의 수요, 인민의 부름에 따라 긍지 높히 달려 나갔던것이다.

내가 간 공사위생원에는 4, 50대의 의사 4명(서의1명, 중의1명, 치과1명, 접생1명)에 원장(서기 겸임)을 비롯해서 13명의 직원이 있었다. 내가 가면서 우리학교 졸업생인 녀의사는 현병원으로 올라 갔다. 햇내기긴 하지만 제대로 정규적인 배양을 받은 의사로는 나 하나뿐이 였다. 그리고 갓 20대에 들어선 생기발랄한 젊은이였다. 그때의 농촌 사람들은 의사라고 하면 무슨병이나 다 볼줄아는 줄로 알았고 다 고칠줄 아는줄로 알았다. 말을 바꾼다면 이것은 곧 인민의 수요였다. 현급이상 의료단위에는 전업화가 구전해서 병원, 방역, 결핵, 부유보건, 의약공사, 애국위생 등 기구가 있었지만 공사위생원은 그 모든업무를 다 끌어안아야 했다. 고양이에게 소대가리를 안긴격이였지만 내가 해야할 일은 그야말로 정신이 휭ㅡ 돌아갈 지경이였다. 그리고 밤이고 낮이고 쩍하면 왕진이 없는날이 없었다. 나는 당의사업, 국가의사업, 인민의 사업이라는 각오로 열심히 사업했다. 업무리론학습과 실무연찬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로의사들을 비롯해서 모든 임직원들을 존중하고 허심히 묻고 배웠다. 나는 재빨리 사상상 업무상에서 성장 하였다. 하여 군중들의 호평을 받게 되였고 상급부문의 표창도 자주 받게 되였다. 그것은 또 고무와 편달이 되여 나의 진보를 다그쳐 주었다.

문화대혁명은 나의 대학꿈을 무참히 짓밟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초중때 반주임선생님과 대학을 꼭 다닐거라고 약속했다. 매번 무슨 등기표를 쓸때마 다(그때는 간부등기표가 많았다.) 문화정도란에 《중전》이라고 쓰는것이 너무도 자존심이 상했고 동시에 금후에는 꼭 《대학》이라고 쓰고야 말리라 결심을 다시 다지군 했다. 대학함수생 모집이 있으면 시험을 치려고 학습을 하였는데 그것은 자산계급사상표현이라며 비판을 하였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되고 직함시험이 회복되자 나는 첫패로 중급모자를 벗고 고급으로 승진 했다. 동시에 대학함수제도도 회복되였는데 그것이 꿀떡보다 더 욕심이 났지만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였다. 그당시 나는 시급병원에서 사업했는데 분망한 업무와 령도직책은 도무지 여유시간과 마음의 안정을 가질수 없었다. 함수를 하자면 몇가지 문화과 시험을 쳐야 하는데 그것도 자신 없었다. 특히 고등수학과 유기, 무기화학이 생각만 해도 정신이 아찔해 났다. 뒤문거래를 하면 될것 같기도 했지만 량반은 물에 빠져도 개발헴은 치지 않는다는 격으로 나는 치사스럽게 비굴하게 그러기는 참으로 싫었다. 무슨일이나 시와 때가 있는법이 아닐가하는 생각에 나는 아쉬운대로 대학함수공부를 단념하였다. 얼마후 나는 주치의사로 또 승진 했다. 나는 이길로 주임의사(교수)까지 올라가리라 마음 먹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랄가. 돌도 오래동안 들여다 보면 구멍이 뚤리는 법이다. 나에게는 뜻밖의 행운이 닥쳐 왔다. 그것은 당에서 나이를 먹은 재직간부들에게 대학에 가서 학습할 기회를 주었는데 조직의 배려로 그 행운이 나에게도 차례졌든것이다. 시간은 2년7개월, 학습이 끝나고 시험을 쳐서 합격이 되면 대학전과문화수평을 국가에서 인정해 준다는것이였다. 전과든 본과든 대학은 대학이다. 모로가던 세로가던 서울로 가면 되는거니까… 나는 이렇게 ‘억지합법화”를 하며 무등 좋아했다. 이불짐을 둘러메고 의과대학으로 공부하러 갔다. 성내외에서 온 학생이 40여명이 되였다. 학교에서는 우리들을 학생숙사에서 자고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게 하였다. 체조며 과외의 활동에는 참가시키지 않았으나 규률은 학생들과 똑같이 요구하였다. 적어도 학생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주면 안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교학은 일사천리로 내달리고 학습부담은 막중하였다. 언제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 나쁜 버릇을 보여주기는 고사하고 제발등의 불을 끄기도 바빠맞았다. 어쩌다가 가끔씩 보면 학생들이 오히려 우리보다 더 “대범”하였다. 우리는 천금같이 귀중한 이 기회를 바싹 틀어쥐고 지식제고와 리론 갱신에 온갖 심혈을 기울렸다. 과학의 발전은 눈부시여 3년내지5년에 한번씩 갱신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그러했다. 의학의 기성리론이 심화, 제고를 가져 온것은 더 말할것도 없고 어떤 리론은 완전히 부정되고 참신하고 새로운 학설이 수두룩 나왔었다. 배우고 배우고 또배우고 배움에는 끝이 없었다. 그러나 무척 고되여도 아주 재미있었다.

어느덧 졸업시험을 치게 되였다. 나는 10여개 학과에서 다른것은 다 자신이 만만한데 생리화학이 두려웠다. 화장실까지도 책을 들고다니며 열심했으나 자꾸 혼돈이 되고 잊어지기도 했다. 막다른 골목에서 나는 체면을 무릅쓰고 유명한 교수이자 생리화학 담임이신 풍옥환선생님(한족)을 찾아 갔다. 선생은 내가 적어간 까다로운 문제들을 자세히 본후 대여섯시간이면 되겠다고 하면서 하루저녁에 두시간씩 지도를 하여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날자를 정해 주기까지 하였다.

나는 풍옥환선생님 덕분에 어려운 생리화학시험을 잘 치루고 우수졸업생으로 표창까지 받았으며 학생들에게 학습에 대한 인식을 연설하기까지 했다. 나는 사상인식과 당의 은덕을 중점에 두고 한시간 거의 말했다. 학생들은 나에게 우렁찬 박수를 쳐주었다.

졸업사진을 찍은날 저녁 학교에서는 연회를 베풀어 우리를 환송해 주었다. 이튿날 우리 동창들은 조국각지의 자기 사업터로 돌아갔다. 그날 점심시간에 나는 풍옥환선생님을 조용하고 아담한 음식점에 초대를 했다. 그리고 지도비라고 하면서 금일봉(500원, 초청강연비 표준임.)을 드렸다. 풍선생은 완곡히 사절하였다. 그때 나는 풍선생의 마지막 한마디 말에 나는 진한 감동을 받았다. 풍선생님께서는 《나는 모범인물은 아니지만 나의 량심을 속인일은 한번도 없습니다. 학생이 알때까지 배워주는건 응당한 직책입니다. 나는 량심에 꺼리끼는 일을 할수 없습니다. 미안 합니다. 》

우리는 8촌짜리 채색사진을 한장 찍고 작별하였다. 나는 그 사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겨 넣었다. 《생리학교수 풍옥환과 학생 회령》나는 한평생을 풍옥환성생님처럼 한평생 량심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것이라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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