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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황족과 일본황실의 혼인
2013년 03월 19일 21시 24분  조회:2991  추천:3  작성자: 회령
수필

청나라황족과 일본황실의 혼인
                                ㅡ16년 헤어졌다가 만난 부걸부부


                                            회령


력사에는 긴 세월을(10년이상.)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 아끼고 사랑하며 해로한 부부가 있는가 하면 끝내 만나지 못하고 천고의 한을 남긴 부부도 있다. 하지만 그리 많지는 않다. 18년이나 헤어졌다가 만나서 부부의 애정을 만끽한 왕보천부부와 애타게, 절절히 그리다가 영영 만나지 못한 맹강녀부부의 공산당원 같은 선진적인 사상과 훌륭한 도덕, 모범적인 사적은 여전히 생명력이 있어서 우리를 몹시 감동시키고있다.

지금 상황은 어떠한가? 헤어졌다가 만나서 일희일비 빨고 물고 부등켜 안고 돌아치는 부부도 많고, 짝이고 나발이고 다른것을 눈이 벌개서, 빨개서 찾아안고는 역시 빨고 물고 늘어지는 풍쟁이들도 많다. 지금은 희극적인것, 비극적인것이 흔하다 못해 감동은 커녕 시끄럽고 시큰둥하다. 솔직히 말해서 상봉축하주요 리혼축하주요 위안주요 재혼주요… 술 먹고 부조하기도 짜증이 난다. 왜서 이렇듯 천지개벽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 원인은 간단하다. 부부애정관이 거족적인 변화를 했기때문이다. 어떻게 변화를 했는가? 발전도하고 퇴보도 하고, 전통미덕을 계승도하고 파괴도 하고, “보수파”도있고(옛날에는 결혼은 있었으나 리혼이란 없었다. 안해가 7거지악중에서 어느 한조목만 위반하면 쫓아낼수는 있었지만.) “혁명파”도 있고… 하여튼, 정, 반 두개파가 누가 이기나 한판 해보자고 치렬한 경쟁을 하듯 하고있다. 시끌벅적 소란스러운 이런 현실을 놓고 어떤 학자들은 《애정현대화》, 《빠른생활절주의수요와적응》, 《생리적정당성탐구》, 《성해방》, 《성자유의 기꺼운 산물》, 《다양한 성생활》… 하며 떠드는가 하면《전통관념과 도덕의 타락》, 《신앙위기의 일개 표출》, 《말세를 론함》, 《경제는 발전하고 도덕은 추락》, 《위성은 울라가고 붉은기는 꺼꾸러 짐》… 하며 팔을 걷어부치고 고함지르는 학자도 있다. 하여튼 높고 심오한 학술적 론단으로 갑론을박하는데 나는 그런 세미나에 참가 할 수준도 안되거니와 흥취도 없어서 그저 “응, 그러시구들 계시는구나!” 생각할 뿐이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 허다한 옛것이 되살아 났다. 이를테면 절간에 가서 불공을 드린다든지, 하느님 아버지를 부른다든지… 하여튼 많이 살아났다. 그런데 유독 혼인종신대사, 조강지처 백년해로… 이러루한 옛날관념만은 되살아나지 않고있다. 되살아나지 않고라기보다 점점 더《혁명파》가 기승을 부리며 우세를 보이고있는데 가히 말해서 가관이다.

문화대혁명기간에 보수파였든 나는 여지없이 뚜드려 맞고서도 령혼심처의 혁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그 무슨 전통미덕이니 공맹지도니 삼강오륜, 삼종사덕이니 3불혹, 수신제가, 수신9용, 립신10계… 하면서 케케 묵은것들에 미련을 갖고있다. 아무리 음미해 보아도 일정한 도리가 있는것 같고 일정한 옳은점이 있는것 같아서… 리혼이요, 애인요, 동거요, 성해방, 성체험, 인권자유, 서양식, 서방문화… 등등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혁명파》들의《선진적인 문화의 발전방향》에 어긋나는 소리, 생각을 하게 된다. 하다보니 왕보천이요 맹강녀요 하는 일자면무식의 사람들에 대하여 침을 한발씩이나 흘리면서 찬탄을 하고 16년이나 헤어졌다가 만난 부걸씨 부부에 대해서도 눈물이 글썽해서 감동을 금치 못해 하는것이다. 나 스스로는 찬탄하고 감동할만한 모범사적이라고 인정하지만 정말로 그럴만한것인지, 얼떨떨하기에 내가 아는데까지 실상을 요약 소개를 하며 시시비비는 여러 사람들께 맡기고저 한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부언 한다면 나는 리혼이라면 무조건 부정하지는 않는다는것이다. 벙거지 쓰고 똥싸든 팬티마저 벗고 춤추든 다 제멋이고 인권자유이긴 하겠으나 그래도 인간사회에는 자고로《기강》, 《법도》라는것이 있지 않는가… 결혼에 대해서는 종신대사경사니까 무슨시비가 있을수 없으나 리혼은 시비가 있다. 세상에 까닭없이 죽은 사람이 없듯히 리유없는 리혼은 없다. 하지만 정당한 리유가 있고 부당한 리유가 있으며 그 부당한 리유는 몽땅 예방가능의 것들이다. 2001년에 제정한《공민도덕건설실시강요》, 2006년에 반포한《8영8욕》은 중화전통미덕과 일맥상통하는 온갖 잡것을 없애는 유력한 예방책이다.(그외에도 4조, 10조, … 예방책이 많다.) 리혼은 어쨌든 경사는 아니다. 그러니 가급적 피면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쌔고 흔한 리혼의 대부분은 예방할수 있는것들이다.

왕보천이 18년이나 헤어졌던 남편을 만났을 때에는 38살, 남편은 36살이였다. 그들은 정혼을 한후 3년이 지나서 혼례를 했는데 1년 넉달을 살고 궁정정변을 당하여 헤어졌다. 보천이가 거지가 되여 남편곁으로 왔을때는 남편이 이미 황제로 된지가 3년도 지났다. 황제가 된후 얼마안되여 남편은 주변의 재취압력에 견디다 못하여 10년을 기다려 안해를 만나지 못할때는 새 황후를 맞는다고 군령장을 놓았다. 남편은 보천과 헤어졌을때도 만난후에도 다른 녀자와는 한번도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지금말로하면 청렴결백한 령도간부였다. 보천도 한몸을 지키느라 그방면의 고생을 이만저만 하지 않았다. 그는 우정 추한몰골로(워낙 추녀다.) 구역질 나는 냄새를 풍기며 거지로 살았는데 전화위복으로 몸을 지키는데는 그것이 오히려 상당히 효력적인 방편이였든것이다. 왕보천부부는 자손도 여러명, 부귀영화를 누리며 천수를 다하였다.

맹강녀는 산골농부의 안해다. 그는 5년기한으로 만리장성부역에 나간 남편이 5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찾아 나섰다. 맹강녀는 빌어먹으며 장성을 따라 산해관을 지나 바다가에 이르기까지 애타게 남편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무슨소식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그는 다시 되돌아서서 꼼꼼이 남편의 행방을 탐문하였다. 다시 산해관에 이르러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데다 묻었는지 그건 정말 도무지 알수 없었다. 장성의 산해관보루에서 맹강녀는 너무도 원통하여 하늘땅을 우러러 한바탕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러자 얼마후 산해관보루앞의 장성이 와르르투두둑! 굉음을 내면서 무너졌다. 맹강녀는 자식도 없이 종신수절을 하였다.

왕보천과 맹강녀의 눈물겨운 모범사적은 오래된 일이여서 더정확하고 구체적인것은 알수없다. 그러나 부걸부부의 애정사는 잘 알수있다. 그것을 줄거리만 귀납한다면 다음과 같다.

청나라말대황제 부의는 세살에 황위에 올라 여섯살에 페위를 당하고 고궁에 연금되여 있었다. 그러다가 1924년 풍옥상에게 쫓기워 천진에 있는 일본령 사관조계지로 달아났다. 7년후, 일본이 동북을 꿀꺽하고 이듬해 만주국을 세우자 부의는 초대집정수령으로 되였다. 2년후 일본은 저희들 식으로 만주제국이라고 이름을 고쳐 달고 황제제를 했는데 부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코풀기로 모자를 바꿔쓰고 황제가 되였다. 이 허수애비 황제에게 남자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말하고저 하는 부걸씨다. 부걸은 부의보다 한살이 어리다. 1937년 부걸은 일본륙군사관학교에서 학습중이였는데 그해 일본천황 황실인 후작 차아실승의 딸 차아호와 결혼을 하였다. 부걸과 차아호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는데 중매결혼을 하였다. 그런데 그 뚜쟁이, 매파가 누구냐 하면 관동군사령부라는것이다. 만주제국을 직접 쥐고 흔드는 관동군사령부, 그것도 사령관씨 본장대장각하가 직접 매파로 나선것이다. 긴말을 짧게 한다면 일본은 만주제국에 일본피가 섞인 종자를 박아놓아 종주국으로서의 지위를 더욱 다지겠다는 엉뚱하고 어리석은 미개한 생각에서 그런 짓거리를 하였든것이다. 지금말로하면 명령성 정략결혼인데 부걸과 차아호가 거기에 걸려들게 된것은 문벌이 비슷하고 당사자들이 엇비슷하게 맞았기때문이다. 맞다기 보다는 그야말로 천상배필이였다. 훗날, 사실이 증명하다싶히 본장씨는 허구많은 일을 하던중 그 한가지 일만은 면바로 했다. 하여 후세에 미담 한컬레는 남겼다.

강박이였든 명령이였든 1937년1월18일 저녘 부걸과 차아호는 맞선을 보았는데 말그대로 일견종정ㅡ첫눈에 반해버렸다. 30살 먹은 로총각과 24살의 처녀는 누가 누구에 짝짐이 없이 아주 훌륭했던것이다. 하여 절대루 안된다고 딱 잡아떼고 우기던 차아호의 외할머니도 《아주 좋다!》고 하면서 호물때기 입이 짝 벌어져 다물지 못했다. 그는 한술 더 뜨기를《대국의 황족과 사돈을 맺는것이 그게 어디 보통일인가?!》하고 감격해 하기까지했다. 2월6일 주일만주제국대사관에서 정혼소식을 발표,  3월 6일 두 집에서는 상견례, 4월 3일 결혼식… 부걸과 차아호의 결혼은 그야말로 소뿔을 단숨에 뽑듯 속도를 내서 석달남짓한 시간에 벼락같이 치뤄졌다. 그리고 이듬해 2월 26일 딸 혜생이를 낳았다. 일본제국과 만주제국은 나라의 큰 경사로 해서 입이 큰함지 세배반은 잘되게 떡 벌어졌다. 그것도 그럴것이 부의씨 한테서는 2세를 볼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한 해 10월16일 차아호는 만주제국에 와서 시집인사를 올렸다. 그때로부터 그는 중국에서 살면서 중국사람이 되기위하여, 중국문화에 적응하기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큰딸 혜생은 조건이 우월한 일본에 가서 낳았지만 작은딸은 중국에서 낳았다. 물론 남편이 주일대사관에서 사업할때 등 때론 일본에서 살림을 하기도 했으나 기본상에서는 중국에서 살았다. 하여 재빨리 중국사람이 되였다.

1945년8월15일, 일본은 투항을 하였다. 급작스러운 사태앞에서 저마끔 살길을 찾아 갈팡질팡, 소위 만주제국의 관료들은 독수리에게 쫓기는 어미잃은 병아리 모양이였다. 그들은 관동군에 살려 달라고 뻔질나게 련락을 했으나  천황페하 자신도 죄인이 된 이 마당에 부의가 다 누구네 아들놈인가? 내코 건사도 도무지 경황이 없는판에… 어데서도, 아무도 상관하는 놈팽이는 하나도 없었다. 부의, 부걸네는 권속을 끌고 신경(장춘)에서 통화지구 대률자로 좌우간 용케도 도망을 쳤다. 숨을 좀 돌린후 그래도 체통을 지키느라 소위 어전회의를 했다. 회의에서 얼빠진 소리를 장밤 갑론을박 떠들다가 18일1시에 결정을 지었는데 박살이 된지도 석삼년인《만주제국해체》, 《황제퇴위》를 생뚱같이 만장일치문건이라며 채택하였다. 부의, 부걸 등 남정네들은 금덩이를 있는대로 모아서 그것도 겨우 똥파리만한 관동군 비행기를 한대 세냈다. 일본으로 달아날 비행기를 구하긴 했으나 너무 작아서 아낙네들은 걸어서 도망쳐 오라하고 저들만 비행기 타러 통화비행장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때 부걸은 차아호에게《호생(작은딸애)을 데리고 꼭 살아서 오시요! 우리 네식구가 일본에서 만나 아기자기하게 잘 살날이 꼭 있을겁니다. 》하고 신신당부를 했다.(큰딸 혜생은 일본에 있음.) 그런데 웬걸! 그들은 통화비행장에서 마우재친구들에게 몽땅 잡히고 말았다.

남편과 헤어진 차아호는 그날부터 다섯살밖에 안되는 호생을 데리고 천신만고의 고행길에 올랐다.

대률자에서 피난을 온 이 한무리 녀자들속에 황제의 안해도 있고 일본녀인도 있다는 소문을 들은 한무리 폭도들은 18일 점심 포위하고 달려들었다. 그들은 물건을 내여 놓으라고 을러메며 빼앗는한편 일본사람을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다 때려죽이겠다는것이였다. 차아호는 다섯째 시누이 등 중국인들의 보호로 요행 잡히지 않았다. 그는 중국인 난민들속에 섞여 그들을 따라 난민소에 들어갔다. 이들은 인차 공산당이 지휘하는 어떤 무장소부대에 접수 되여 조사를 받는 한편 무장소부대와 함께 자주 전이하고 다른 부대에 자주 넘겨져 역시 틈만 있으면 조사를 받는한편 또 다른부대에 넘겨지면서… 계속 공산당의 무장부대에 끌려 다녔다. 이렇게 림강ㅡ통화ㅡ심양ㅡ장춘ㅡ길림ㅡ돈화ㅡ연길ㅡ도문(46년6월 황후 완용은 도문에서 죽었다. 41살.)ㅡ가목사ㅡ할빈까지 갔다. 할빈에서 수용소 책임자는《당신들에게는 전쟁범 죄장이 없기에 우리가 더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게 되였다. 모두 석방하고 자유를 주니 마음대로 하라.》고 하였다. 다 알다싶히 당시의 정세는 매우 혼란하고 복잡 하였다. 공산당, 국민당, 쏘련홍군, 각지에 창궐한 대, 소 토비무장… 이런 살벌한 상황에서 차아호는 다섯살짜리 작은딸 호생을 데리고 일본개척단난민단에 끼였다. 난민단은 호로도에 나가서 배를 탈 계획이였다. 할빈에서 떠난 난민단은 도보로 간난신고를 무릅쓰고 끝내 호로도에 이르렀다. 그들이 배를 타려 할 때 국민당군 상교가 와서 차아호를 체포했다. 그는 아이를 데리고 북경에 끌려 갔다가 다시 상해로 끌려 갔다. 거기서 1947년1월 차아호는 도망쳐서 일본으로 가는 난민무리에 숨어 결국은 무사히 일본까지 도망쳤다.

일본에 있는 본가집에 도착하고보니 부모와 혜생은 모두 무사히 살아있었다. 그러나 남편 부걸은 일본에 오지 않았다...

1947년부터 남편의 행방을 찾기위하여 차아호는 눈물겨운 행각을 시작하였다. 그는 쏘련, 중국, 조선으로부터 돌아오는 사람들을 무수히 찾아다니며 부의, 부걸의 소식을 수백차 탐문 하였다. 1949년 쏘련에서는 일본군 포로송환을 기본상 끝내였는데 차아호는 돌아온 사람들한테서 부의와 부걸이 백력전쟁범수용소에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하지만 그들과 통신거래는 되지 않았다. 차아호는 확실한 상황을 알기 위하여 귀국하는 사람들을 계속 찾아 다니는 한편 유명인사들과 일본적십자회, 중국적십자회, 스위스적십자회총부 등 여러기구에 여러번 편지를 썼다. 그러나 모두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1954년 어느날 차아호에게 일본적십자회에서 편지 한통을 보내왔다. 우표에는 중국무순우정국도장이 찍혀있었다. 차아호의 심장은 터질것만 같았다. 편지는 애타게 찾던 남편ㅡ부걸이 보내온것이였다! 큰딸 혜생이가 주은래총리께 보낸 편지를 총리는 부걸에게 보냈던것이다!(차아호는 몰랐다.) 자애로운 총리각하시여!... 기특한 혜생아!... 차아호는 딸을 끌어 안고 뜨거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마구 부비며 흐느꼈다… 1961년5월, 차아호는 1959년 특사로 이미 석방되여 북경에서 사업하는 남편을 만났다. 꼭 16년 세월이 흘러 갔다…

그해5월의 화창한 봄 어느날, 총리께서는 차아호 일행을 연회에 초대하였다. 연회에서 총리께서는 친절한 말씀을 많이 하셨다.

《항일전쟁이 결속되고 만주국이 붕괴될때 우리는 부의일가가 지금 동북에 있는데 그들을 찾아내여 타당하게 보호하라고 지시를 하였는데 지시가 기층에까지 전달되지 못하여 당신들이 고생하게 되였다. 이에 대하여 다시 한번 미안함을 표시한다… 한시기 우리가 당신들을 무순에 숨겨놓았는데 당신들이 많이 근심했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한것은 당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털어놓고 말해서 중국백성들이 당신네를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지… 당시 우리도 다 알수 없었든것이다. 하지만 이젠 이 모든것이 끝났다. 우리 모두는 일본군국주의자들의 피해자다… 이제부터 우리는 좋은벗이 되자… 비록 늦었지만 나는 혜생의 죽음에 대하여 침통한 애도의 뜻을 표시한다.(1957년12월4일 아침 학교로나간후 실종. 10일오후 변사체로 발견.)… 나는 혜생이와 같은 용감한 아이를 아주 좋아한다… 호생아! 너의 부모들은 중국에서 살기로 결정했지만 너의 거취는 너 자신이 결정하거라. 잘 생각해 보아라. 네가 좋아하는 생활방식을 선택하여라. 혼인같은것도 그렇다. 일본사람을 좋아하면 일본사람과 결혼하고… 억지로 중국사람을 찾을 필요는 없다.ㅡ》

연회석에서 총리께서는 또 왕보천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시였다.

《왕보천부부와 비교하면 당신들은 2년이 적지만 당신들은 떳떳한 중화인민공화국 의 주인이 되였다. 얼마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인가!... 》

1947년, 일본에 돌아간 차아호는(33살) 얼마든지 다른 남편을 얻을수 있었다. 실지로 그런 권고도 많았다. 1959년, 특사령으로 북경에 돌아와 사업하는 부걸(52살)은 얼마든지 훌륭한 반려를 찾을수 있었다.  1961년, 16년을 애타게 그리다가 다시 만났을 때는 차아호는 47살, 부걸은 54살이였다. 그들은《만나지 못하면 일편단심 혼자 산다》고 하였다. 그들은 여생을 행복하게 살았다…

요즘 주변을 돌아보면 아무개 아들이 리혼 했소. 아무개 딸이 리혼 했소. 아무개가 리혼 했소… 소란하다. 왜서 이러시나.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리숙이고 생각해 보면 알릴듯 알릴듯… 생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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