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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회 대표
2013년 11월 04일 10시 15분  조회:2587  추천:2  작성자: 회령
실화

       강용회 대표
                                      회령


세상에 있는것은 중국에 다 있고 세상에 없는것도 중국에는 있다. 그것은 우선 사람이 많고 다음은 력사가 유구하고 땅이 크기 때문이다.

1959년 7,8월 려산회의에서 팽덕회는 국방부장에서 떨어지고 림표가 대신 올라 갔다. 림표는 국방부장으로 된후 죽을때까지 모주석에 대한 개인숭배, 우상화를 주업으로, 의식적으로, 맹렬히 고취 하였다. 림표는 왜서 그렇게 했는가? 그것은 스스로 보여준봐와 같이 “림가왕조”(적어도 아들 림립과를 령수로 만들자는 야심)를 건립하기 위해서였다. “림가왕조”를 건립하는 첯번째 보조인즉 자기가 모주석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인데, 그러자면 모주석의 눈에 가장 드는 사람이여야 했다. 즉 정치, 사상, 능력… 모든면에서 모주석의 신임과 만족을 가장 많이 쟁취해야 했다. ”정변”같은 다른수단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가장 좋은 수단은 합법적으로 “계승”하는 것이였다.

마침, 문화대혁명이라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림표는 때를 맞춰 중국인민해방군의 사업경험이란 것을 내여 놓았는데 그것은 “사람의 인소가 제일, 정치공작이 제일, 사상공작이 제일, 산사상이 제일이다.”라는 것이였다.(네가지 제일) 림표가 이런경험을 내여 놓은후 모주석은 당과 전국인민들에게 “농업은 대채를 따라 배우고 공업은 대경을 따라 배우며 전국은 해방군을 따라 배우자.”고 호소 하였다. 림표의 지명도는 한층 올라 갔다. 이에 단맛을 본 림표는 한술 더 떠서 “모주석의 글을 읽으며, 모주석의 말씀을 들으며, 모주석의 지시대로 하며, 모주석의 훌륭한 전사로 되자!”는 제사와 “대해항행은 키잡이에 의거하고 혁명은 모택동사상에 의거 한다.”는 제사를 써서 발표 했다. 잇따라 또 크게 한술을 더 떠서 “위대한 도사이시며, 위대한 령수이시며, 위대한 통수이시며, 위대한 키잡이이신 모주석 만세! 만세! 만만세!!”(네가지 위대)라는 제사를 써서 발표하고 그것을 친히 십여번이나 선창을 하며 목이 빠지게 높히 웨치기까지 하였다.  

력사는 모주석의 후계자로 류소기가 기본상 정해졌는데 보아하니 케가 글러 먹었다. 그러면 누가 후계자로 되는가. 문화대혁명이 전개되자 림표와 강청은 모주석의 눈에 들기 위하여 력사무대에서 서로 리용도 하고 배합도 하면서 치렬한 경쟁을 하였다. 그것은 마치도 하나는 북을 치고 하나는 장고를 치면서 쌍무를 추는것 같았다. 춤은 합작해서 추는 것이지만 누가 더 잘 추나 은근히 내기하듯. 림표는 “네가지위대”를 목청껏 웨치며 륙속 “명령” “최신지시”를 련발하고(모주석의 지시는 최고지시라고 했음.) 강청은 “전군문예좌담회”(림표의 전술)를 한다, “본보기극”을 만든다, “소근장활동”을 전개한다… 하며 우상화에 열을 올렸다. 결과, 빠른 시일내에 성과를 올렸는데 1969년4월 당”9대”에서 림표는 후계자로 당장에 규정되고 강청은 정치국 위원이 되였다. 그러나 림, 강의 암투는 계속 되였다. 림표는 “9대”후 스스로 폭로 자멸하고(1971년) 강청은 “10대”후 멸망 당하였다.(1976년)

림, 강의 획책하에 개인숭배, 우상화광대극이 가장 비등한 시기는 문화대혁명 10년이다. 그때 남녀로소 전국 인민들은(9종인은 제외. 이들은 모주석께 죄를 비는 활동을 했는데 이것 역시 우상화의 변종이다.) 모주석께(초상 앞에서) 아침에 청시하고 저녘에 회보 했고 하루 한끼, 두끼 혹은 세끼를 먹을때면 밥상을 차려 놓은후 모주석 초상 앞에 기립하고 서서 “네가지 위대”를 웨쳤다. 더 잘하는 집들에서는 “우리 맘속의 붉디붉은, 붉은태양…”,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태양…”, “인류의 태양…”, “세계의 태양…”, “한개뿐인 태양…”(불손한 맛이 난다고해서 금지 시켰다.), “공산주의 혁명의 태양…”…… 하여튼 궁냥껏 최고로 아름다운 각종 수식어를 가득 붙힌후 끝에가서 “네가지 위대”를 힘껏 웨쳤다. 그리고 “만수무강”을 축원 했는데 림표와 강청은 여기서 한몫 끼여들어 지명도를 높히고 인심을 쟁취하는 리득을 보았다. 즉 림표에게는 “우리의 부통수 림표동지의 영원한 건강을 축원”, 강청에게는 “경애하는 강청동지를 따라…”라는 것을 붙이게 했든 것이다. 사람들은 또 붉은천으로 심장모양의 모형을 만들었는데, 보통 심장만큼 컸다. 어떤 사람들은 충성심을 더 충분히 표달하기 위해 바가지 만큼 크게도 만들었다. 그 가운데는 충성충자 한자를 쓰고 모주석 흉장을 달아 목에 걸었다. 가슴에도 모주석 흉장을 달고 어록책을 심장부위에 딱 붙이고 수식어들을 다 외운후 만세를 부르는 대목에 가서는 박자에 맞추어 어록책을 휘둘렀다. 그리고 어록노래를 하고 청성무를 추는 집들도 있었다.

이것을 통털어서 “충자활동”(모주석께 충성을 다지는 활동)이라고 했는데 기관 단위들과 일밭에서는 하나의 대사로, 매차 한시간 정도 하루 네번 규률적으로 진행 했다. 비판투쟁대회, 기타 회의등 공식행사에서는 두말할것도 없고 생뚱같은 경우에도 엉뚱하게 벌어지기도 했다. 나도 여러번 그런 황당한 봉변을 당해 보았다. 한번은 북도선(북경ㅡ도문) 렬차에 앉아서 곤히자며 연변으로 나가는데, 갑자기 “모주석께 청시 합시다!”하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어마지두 소리친 곳을 바라보니 허여멀끔한 중년의사내가 목에는 바가지만한 충자를 걸고 가슴에도 주먹만한 모주석흉장을 달았는데 우선우선해서 전후좌우를 살피고 있었다. 사람들이 북적와글거리며 부산을 떠는데 사내는 7,8가지 “위대한”을 붙혀 모주석의 명함을 웨친후 그이가 계신 곳을 향하여 서라고 구령을 했다. 우리는 드바삐 사내를 따라 뒤켠에 걸려 있는 모주석의 초상을 향하여 기립 하였다. 삼백명도 넘어되는(침대차란 명색뿐) 려객들은 한시간 거이 사내의 선창에 따라 어록을 외우고 어록노래를 하고 만세를 부르고 축수를 했다. 장소 관계로 충성무는 추지 못한다고 모주석께 아뢰고나서 “잠시 이만!”하고 사내는 소리치더니 코가 덩실해서 다음 바곤으로 건너 갔다. 이런일을 식당에서도 여러번 겪었다.

어느 한번은 눅거리 고구마술을 한사발 들이켜고 기분이 흐믓한데 마침 “충자활동”이 벌어 졌다. 그번에는 춤을 신나게 췄다. 나는 오동사단이 저절로 잘 돌아가서 사바께딴스에 충성무를 배합해서 멋드러지게 잘 췄다. 하여 “호! 호! 짜래이거!”(잘한다! 잘한다! 또 한번 더!) 재청을 받기 까지 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련속 두판을 추고 헐떡거렸다.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하며 나를 칭찬, 고무격려를 했다. 좀 쉬고나서 나는 또 한판을 췄는데 이번에는 곱새춤에 충성무를 섞어 춰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팔딱거리는 꼬부랑 곱새춤과 절뚝거리는 충성무는 비슷한 률동이여서 섞어 추기 좋았다. 누구도 나를 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후 단위에서 강용회를 할때, 이번에는 누구나 다 임무적으로 해야 한다고 해서 근심이 태산같이 속을 태우다가 나는 식당에서 춤춘것을 가지고 충성심을 잘 표현한 행동을 하였다고, “산사상”할동을 강용 하였다. 그때 확실히 모주석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춤을 췄는데, 나는 강용을 잘 했다고 은근히 자부심을 가졌다. 그런데 웬걸! 하마트면 쏘련특무, 수정주의분자, 반동분자로 몰릴번 했다. 다행히 출신, 성분, 력사가 좋고 반란파들을 따라 다닌 경력이 있고 쏘련이 어데가서 붙었는지도 바로 모르는 무식쟁인데다가 아무런 해외관계도 없은덕에, 그리고 군중들이 보호해 줬기에 “주의하라!”는 엄포만 받고 무사히 풀려 났었다. 그것은, 우리단위의 혁명위원회주임과 호사 강인선 (입당하려고 기를쓰는 유명한 반란파 맹장이며 우리단위의 강용회 대표다. 그는 항상 다른 사람을 내리까는 방법으로 자기의 적극성 선진성을 표현한다.)등 두 세 사람이 계급투쟁의 깡과, 로선투쟁의 선. 정치투쟁의 높히, 사상투쟁의 깊히에서 분석하고 내리 조기는데 숱한 혁명적 군중들이 그건 아니라고 변론해 주었기 때문이다.

“충자활동”에서 제일 심도가 있고 무게가 있는 것은 강용회다. 강용회란 모주석의 어록을 인용해 가면서 자기의 사상을, 말하자면 림표가 말한 “산사상” 활동을 대중들 앞에서 얼음에 박밀듯이 한바탕 내리 푸는 것이다. 원문대로 말하면 “활학활용강용 회”라고 하는데 100%로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다. 즉, 원래는 나의 사상이 알게 모르게 봉, 자, 수(봉건주의, 자본주의, 수정주의)사상잡귀신의 꼬드김에 들어 어떠어떠하게 락후 했는데 위대한(잘하는 강용자는 십여개씩 “위대한”을 엮어댔다.)모주석의 로작 혹은 어록 몇구절을 학습한후 즉각 황연대각 깨도가 돼서 무산계급혁명가로 되였다. 나는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다 바쳐 위대한 모주석을 따라 공산주의 혁명을 끝까지 할것을 맹세 한다…! 대부분이 천편일률로 강용을 이런 격식으로 했다. 문화대혁명은 벙어리도 말하게 했다는, 그때는 나를 빼고는 말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강용회에 나서는 사람들은 특히 말을 잘 했다.

그런데, 우리병원의 호사 강인선의 강용은 특색이 있었다. 그는 그저 말로만 강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몸짓, 발짓, 손짓, 울고, 웃고, 구호를 부르고, 책상을 뚜드리고, 발을 구르고, 어록노래를 하고, 또 충성무를 추며 아주 생동하게 강용을 해서 시청할 멋이 있었다. 구호를 부르고 노래하고 춤추는 대목에 가서는 청중더러 함께 하자고도 했다. 하여 대회장이 수라장이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말을 잘한다. 리론이 세다.”하며 감탄을 하는데 어느 한번 나는 말재간도, 아는것도 없으면서 “흥! 미친년이 지랄을 한다. 쿼털(입)혁명파 같은게…”하고 비웃었다가 시비에 걸려서 혼빵을 먹었다. 내가 그런 엄중한 “반동언론”(혁명위원회주임은 반동언론이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나를 닦아 세웠다. 그리고 대가리를 숙이고 수레를 끌지말고 혁명로선을 좀 내다 보라고 눈이 빠지게 훈계를 했다. 나는 코방귀는 대포알같이 뀌였으나 말로는 당할 재간이 없어서 부옇게 몰리우기만 했다.)을 줴친데는 말로는 반박을 못했지만 사실적 근거는 있었다. 강호사는 거이 매일을 혁명을 한다면서 모주석의 어록을 들추고 강용회 준비를 하면서, 다른 호사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달아 다니며 환자 치료를 하는데, 뻔히 알면서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되려 그들을 “유일생산력론자”들이라느니, “머리를 수그리고 수레를 끄는 민주혁명파”들이라느니, 계급투쟁, 정치사상투쟁, 로선투쟁 각오가 너무도 한심하게 낮은자들이라느니, 목이 날아나도 어떻게 날아났는지도 모를자들이라느니, 류등수정주의 졸개라느니… 하여튼 10여가지 모자를 씌워 조기는데 나로서는 알아들을수 없는 술어가 가득했다. 그러나 얼토당토 않은, 개나발보다도 못한, 궤변이라는 것만은 알았다. 하지만 말로는 당할수 없기에 흥!흥! 코방귀만 뀌였다. 그리고 기껐 큰소리를 친다는 것이 “쿼털혁명파”라는 한마디 배운 소리였던 것이다.

그는 일에는 배돌이고 말에는 악돌이였다. 그리고 환자들을 비롯해서 대내외 군중들과 쩍하면 말싸움을 하는 이악스러운 사람이였다. 그러다보니 복무태도, 자고자대, 단결, 로동태도 등 문제에서 늘 사람들의 미움을 삿다. 그는 어쩌다 한번 생산대 일을 나갔는데(다른 동무들은 경상적으로 나갔다.) 마침 쇠똥부스러기가 신안에 들어가서 반나절 털어냈다. 그는 그것을 화제로 무산계급과 자산계급사상 령역을 왔다갔다 하면서 “산사상”활동을 두시간 남아 강용을 했다. 그는 군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여 령도기구에는 들지 못했지만 혁명위원회주임과는 친한 사이 였다.(간통하는 관계. 후에 혁명위원회주임은 나떨어졌다.)

강호사는 우리단위에서 내여 놓는 강용회대표 였다. 그는 현의 강용회에도 몇번 출마 했는데 쇠똥부스러기 화제로 강용을 해서 호평을 받았다. 그의 강용은 형세의 변화에 바싹 따랐다. 림표가 “영원건강”할때는 림표를 겯들어 찬양하고(강청도) 림표가 폭발한 후에는 주먹을 부르쥐고 림표를 족치며 “경애”강청을 있는 힘껐 찬양하고, 강청이 꺼꾸러진 후에는 강청을 똥물에 튀해 먹을듯 내리 족치며 화주석을 따라 “두가지 반드시”를 명기하며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다 바쳐 무산계급혁명, 공산주의혁명을 끝까지 하겠다고 눈물까지 똑똑 떨구며 맹세를 하였다. 사람들은 평시에도 그를 “어이, 강용회대표!”하고 이름대신 내놓고 별명을 부르며 풍자하고 조롱 하였다. 그러건 말건, 강호사는 강용회란 강용회는 빼놓지 않고 다 돌아다니며 강용을 멋드러지게 하였다. 하여 그 사적이 긍정을 받고 림표사건후에는 입당까지 하였다. 사람들도 형세 변화에 바싹 따라 이번에는 그를 “어이, 강용회당원!”하고 불렀다. “강용회”라는 신생사물이 생겨난후 그 신조어에 따라 선후로 별명을 두개나 얻어 단 사람으로는 우리고장에서는 유일무이 강호사 혼자 뿐이였다. 원래 사무롭기로(이악스러움) “지명도”가 높은 사람인지라 “강용회대표”, “강용회당원”하면 아이고 어른이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강호사는 강용회 산물이기도 하고 피해자기도 하다고 할수 있겠다.

개혁개방이 시작되자마자 강호사는 인츰 조선 나들이를 해서 돈을 벌었다.(혁위회 주임과 흘끔흘끔 해서는 제한해 주는 페니싱, 마이싱 등 병원약을 가지고 장사를 함.) 규정에는 일년에 한번만 조선통행을 허가 했지만 그는 수단이 좋아서(퀴퀴한 수단) 파출소와 해관의 유관인원을 끼고 한해에 다섯번씩이나 조선을 나들며 장사를 했다. 하여 그때에는 무척 희귀한 색텔레비며 자동세탁기, 랭장고까지 번지르르 갖추어 놓았다. 사람들은 “먼저 부유해진 일부분 당원의 대표인물”이라느니, 전형인물이라 느니 하며 비꼬았다.

강호사의 남편씨는 꽤 약삭빠른 사람이다. 그도 강호사 못지않게 활약을 잘했는데 한국령감을 하나 친해 가지고 형님, 형님 하며 집에까지 끌고 왔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으로 될줄이야?! 강호사가 그 령감하고 눈이 맞았든 것이다. 한국령감은 강호사네 집에 몇차례 방문을 오고 초청장이 어쩌구 저쩌구 하던중 생떼같던 남편씨가 울화로 갑자기 덜컥 죽었다. 얼마후 강호사는 형님이라는 그 한국령감에게 시집을 가고 국적까지 떼여 갔다. 입당심사시마다(세번 미끌어 지고 네번만에 입당함. 그번에는 마침 특수관계인 현공작대 대장이 군중들과 자주 싸우는건 계급투쟁, 로선투쟁, 정치사상투쟁성이 높은 표현이고 강용회 대표까지 되였다는 것은 계급, 로선, 정치사상, 당성각오가 아주 높다는 증거라며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문제가 있다고 을러멘데서 통과 되였다.) 공산주의혁명을 위하여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바치겠다고 기염을 토하며 호언장담을 하였는데, 그 강철같은 맹세와 당증은 어떻게 했는지… 한국에 가서 공산주의 혁명을 하는지… 사람들은 킬킬, 끌끌, 쯧쯧하며 침을 뱉았다. 그러면서 강호사와 같은 쿼털당원이 적어진것은 당에 유익하다고 하였다. 이번에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선지 별명을 붙이지 않았다. 듣는말에 의하면, 강호사는 한국령감과 이혼을 하고 중국으로 건너와서 딸집에 얹혀 산다고 하는데 풍을 맞았다고 하였다. 강호사도 이젠 볼장을 다본 노친네가 되였다만 당년에 왜서 그토록 이악스레 다른 사람들을 몹살게 굴었던가… 리유는 간단한 것이였다. 그는 포부가 큰 사람이였는데, 입당을 하고 서기나 원장을 하리라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그것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그닥잖은 의사들의 심부름을 한다는 것이(그는 원내의 의사들을 자기보다 못하다고 늘 불복이였고, 그래서 쩍하면 시비를 걸고 까놓자고 해서 싸움을 자주했다. 그야말로 비일비재 였다. 그리고 호사라는 신분이 워낙 그의 자존심에 늘 허락되지 않았다.) 시시각각 비위에 거슬렸고 자기의 발전에 가장 큰 걸림돌은 원장(작은 단위여서 서기도 겸임.)이였다. 하여, 고아로 거지질을 하다가 광복이 되자 해방군으로 해방전쟁, 항미원조까지 갔다온 잔페군인인 원장을 고깔을 씌우고 개패까지 걸어 끌고 다니며 투쟁한 주모분자는 강호사였 다.(공사적으로 제일 처음으로 되는 혁명적행동이 였음.) 그때 많은 사람들은 격분을 했었다. 그러나 혁명의 기세에 눌리워 떠들고 일어나 막지는 못했다. 원장은 비록 문화수평은 아주 낮았지만 군공도 여러번 세웠고 대위였다. 엄격한 것이 흠이랄가 그는 좋은 간부였는데 당시 그와같은 공농간부ㅡ 외항이 많았다. 후에는 보황파들이 원장을 구해냈다.

강호사는 문화대혁명 기간 공사(향)내에서 가장 활약한 혁명자의 한 사람이였다. 그리고 모범적인 강용회대표 였고 또 토구납신(낡은것을 토해내고 새것을 받아들 임)때 입당까지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그의 본질은 백일하에 드러나고, 악착한 성미는 그냥 고치지 못하여 사람들로 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그의 말년은 보나마나 쓸쓸할 것이다. 문화대혁명기간 강호사처럼 날뛴 사람이 적지않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회과자신 하며 정상인으로 돌아 왔다. 달아났던 량심을 찿아 왔던 것이다.

보다싶히 사람이란 언제나, 어느때나, 어데서나, 어떤일에서나, 량심을 바로 먹어야 한다. 그래야 남에게 죄짓지 않고 미움사지 않고 대접 받을수 있다. 그리고 다른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것이다. 조화사회란 별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옳바른 량심으로 열심히 사는 사회인즉 곧 조화사회인 것이다. 아닌가!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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