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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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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구량 대회전
2013년 11월 06일 11시 16분  조회:2359  추천:1  작성자: 회령
중편실화
                                       공구량 대회전
                                                                                       회령

  대약진때부터 개혁개방전까지 20여년 농촌에서는 대회전이 많았다. 대회전이란 해방전쟁때 3대전역처럼 포위하고 마구들부시여 철저히 소멸하는 것이다. 즉 규정한 임무를 규정한 시간내에 총동원하여 불이 번쩍나게 완성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비경생산대회전이다하면 그건 겨울에 진행하는 것인데 땅땅 언 비료더미에 곡괭이질, 남포질을 해가며 포전에 두엄을 내가고(랑비가 많고 효률이 적었다.) 수레, 발구, 가대기, 호리, 써레, 제초기, 탈곡기 등등 농기구들을 지어는 가래, 비자루까지 있는대로 다 끄집어 내서는 한바탕 후딱 수리를 해 치운다. 집체화시절 그때 농촌에서는 일년사계절 농사일을 대회전으로 진행하였다.

  대회전은 임무와 시간규정이 군대식으로 명확했는데 동원이 있고 총결이 있었다. 대회전의 규모와 중요성에 따라 동원대회와 총결대회를 현에서 직방 3급 혹은4급(현, 공사<향>, 대대<촌>, 생산대<촌민소조>)간부들을 불러다 성대하게 할때도 있었다. 그것이 만약 확대회의일때는 더욱 성대 하였다. 그때는 간부란 간부는 다 불러오는데 당, 단소조장, 치보조장, 민병패장, 빈하중농대표도 참가 했다. 간부에 대한 개념이 얼떨떨한 곳에서는 생산대출납, 기공원, 창고보관, 호림원, 양로대, 철공소, 위생소, 공소사, 지어는 소, 양, 돼지사양원까지 데리고 갈때가 있었다. 하여 쇠간부우동무, 양간부양동무, 돼지간부주동무라는 말이 생겨 났다. 수천명이 모여들어 정치사상성이 아주 높고 중대한 회의를 하기에 일체를 압도 하였다.

정치적대사라고만 붙혀놓으면 누구도 감히 찍소리를 못했다. 확대회의는 보통 3ㅡ4일을 하는데, 학생애들을 쫓아버리고 교실에 분회장을 설치하고 나팔을 늘여 놓았다. 회의군들의 주숙은 려관, 군중목욕탕, 지어는 개인집에다도 안배 하였다. 현에서 제일좋은 초대소는 하나뿐이여서 공사와 대대의 일급간부들만 들었다. 식당은 국영, 집체가 모두해서 서너개다보니 하루세끼 다른손님은 접대할 여유가 없었다. 거리에서는 기관과 단위들이 출동하여 꽹가리와 북을 두드려 대고 구호와 어록노래를 부르며 양걸춤을 추었다. 멋대가리를 모르고 이때에 현성으로 갔다가는 잘데도, 먹을데도 없어서 랑패상이 된다.

현의 회의가 끝나면 잇따라 회의정신을 관철하기 위하여 공사에서는 3급간부 확대회의, 대대에서는 2급간부확대회의, 생산대에서는 전체사원(농민군중)대회를 또 하였다. 현에서 하는 대회전동원대회와 총결대회는 일년에 2ㅡ3차이고 기타의 허다한 대회전의 동원과 총결대회는 일반적으로는 공사단위로 했다. 간혹 대대와 생산대별로 할때도 있었다. 동원대회는 정치사상분위기가 팽팽하였는데 현대회전지휘부 수장의 동원보고(전투 명령)에 이어 모주석저작, 어록, 사론, 문건학습과 인식토론, 결심발표, 축하연설을 하고 도전, 응전서, 창의서, 기관단위의 지지성원, 축하격려 대자보가 회의장과 거리를 붉게 물들였다.(붉은종이에 씀) 그리고 대회장이 떠나갈듯 회의 중간에 시도 때도 없이 구호를 웨치고 어록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밤에는 영화도 보고 문공단 연출도 구경하였다. 총결대회도 동원대회와 형식은 비슷했다. 물론, 내용은 다르다.

수장의 총결보고에 이어 학습, 인식토론, 결심발표를 하고 경험교훈과 선진사적(집체와 개인)을 소개하며 표창과 비판, 지어는 처벌도 있었다. 표창은 집체에 한해서는 금기, 혹은 류동홍기, 상장을 주고 모범에게는 호미, 삽, 낫가락, 수건, 초모자 같은 물질장려를 주었다. (거기에는 무슨대회전모범이라고 뻘건뼁끼로 글을 썼다.) 녀자들에게는 인심을 크게 쓸때는 꽃소래나 체경을(연변일보 반장만한) 줄때도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물질장려를 하지않고 액틀이 없는 상장종이장만 주었다. 하지만 표창을 받으면 입이 한함지가 되여 싱글벙글 하였다. 비판 처벌은 여러사람들 앞에서 욕사발을 얻어먹고 혹은 철직을 맞기도 하는데 그것은 대대와 생산대 간부로서는 이래도 농사군이고 저래도 농사군이여서 공수를 벌어먹고 사는 팔자에 대단한 일이 아니였다.

개구리 낯짝에 물을 치는 격이였다. 하지만 명예가 깎기고 조명나는 것은 수치스러운 노릇이였다. 그래도 비판, 처벌을 받지않는것이 좋았다. 받지않은 간부들은 안도의 숨을 쉬였다. 간부모자를 벗어메치고 싶어하든 치들은 오히려 앓던이를 뺀것처럼 쉬원해 하기도 했다. 사원들은 대회전 총결에서 제일 바라는 것이 한밥 잘 먹는것이 였다. 한바탕 전투를 승리적으로 했으니까 집체돈으로 외상돼지를 잡아먹든지 감분국수를 한사발씩 말아 먹기를 바랐다. 정 사정이 여의치 못하면 생산대 창고를 털어 소사료콩으로 두부를 앗아 먹기도 했다. 그러나 먹는 총결은 일년치고 간혹 한두번, 일반적으로는 없었다. 정치대장, 생산대장이 배짝이 맞아서 집체돈으로 먹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회전 총결을 턱대고 무슨 융통을 하겠지만 보통 그럴만한 밑천이 없다보니 빈입을 다시고 군침을 꿀떡꿀떡 삼킬 뿐이였다. 일단,

대회전이 벌어지면 현과 공사의 하향간부들이 각 대대와 생산대들을 들쑤시고 뻔질나게 돌아치며 신칙을 하고 고와따 쳤다. 그리고 대회전에 따라 현장회의도 했다. 농토기본건설대회전 즉 원전화, 대채전건설 같은때는 화선입당(단)을 시키기도 했다. 때로는 기관과 단위의 직공들이 동원 되기도 했고 학생들은 모내기방학, 기음, 추수방학을 하기도 했다. 한해 농사일은 겨울에 진행하는 비경생산대회전으로 부터 시작 되는데 그것은 또 다음 대회전으로 이어 졌다. 비경생산대회전이 끝나면 춘경생산대회전으로 이어지고 다음은 모내기대회전, 하서생산대회전, 추수탈곡대회전, 공구량대회전으로 일년 농사는 끝이 났다.

그사이에 또 이런 저런 대회전이 있다. 비교적 큰 대회전의 전투명령은 현지휘부에서 직접 내리고 공사에서는 팔을 걷고 나서서 진두지휘를 억척스레 하였다.(공사, 대대에서 자작결정을 내려 하는 대회전도 있었다. 례하면 옥수수영양단지대회전 지붕을 벗기고 온돌을 뜯고 구들고래재를 훑어내는대회전<비료로 함> 우사수리대회전 같은것도 있다.) 생산대대장과 사원들은 현이나 공사, 대대의 닥달에 대해서 처음에는 시끄럽다고 툴툴 거렸다. “제길할! 우리일을 우리가 알아서 하지 않으리? 거름을 낼가하면 비경생산대회전을 해라! 소리치구. 밭갈이를 할가하면 춘경생산 대회전을 해라! 모내기를 할가하면 모내기대회전을 해라!… 그것참! 공연히 사람을 들볶아 대면서… 우에 앉아서 할일이 꽤나 없는 모양이지? 쳇!”하고 명령을 마뜩찮아 하였다.

그러나 두세해가 지나서 부터는 습관이 되여 상급에서 명령이 내려오기를 태평스레 기다렸다. 사원들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군대처럼 쐈! 하면 쏘고 뿌렷! 하면 수류탄을 던지고 철퇴! 하면 돌아서 냅다 뛰듯 대장이 시키는대로 따라하면 되였다. 아니, 대회전 명령대로 하면 되였다. 공사에서도 매번 자작으로 대회전을 개시할때면 현의 방식을 본따서 우선 동원대회를 하는데 그것은 3급간부확대회의를 했다. 공사, 대대, 생산대의 간부와 무슨 직책이 있는 사람이면 다 불러다가 정치사상기압을 먹였다.(기관단위 직원들도 참가 함) 농촌회의는 제일 짧아야 하루품이 걸린다.

공사 3급간부확대회의는 당, 단원, 기간민병, 기공원, 창고보관, 출납, 호림원, 양로대, 위생소, 공소사, 철공소, 우사, 양사, 돈사사양원까지 참석하다보니 회의군이 그들먹하게 많아서 대회장이 근엄 하였다. (총결대회도 같음)하여 공사당위서기와 사장은 령도위풍을 보이기가 좋았지만 정작 회의공수를 부담해야할 사원들은 배가 아팠다. 공사동원대회에 잇따라 또 대대에서 동원대회를 하고 생산대에서 전체사원대회를 하였다. 집체화시절에는 각종 회의가 많았는데, 밤에도 하고 대낮에도 하고 지어는 밭머리에서도 하였다. 일하기 싫어하는 하향간부거나 대대, 생산대간부들은 쩍하면 대낮에 회의를 하였다. 대대, 생산대 간부들과 기타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회의한데 대해서는 탈리공수를 줘야 하는데 사원들 한테는 그것이 적지않은 부담이였다. 뒤에서 틀틀거리는 사원들도 있긴했지만 대부분은 소태씹은 벙어리상이 였다. 회의마다 정치사상간판을 걸기에 누구도 감히 찍소리를 못했다.

대회전은 시간을 결정하고 매일 진도를 층층이 보고케 하였는데 농사일보다 그것이 더 까다롭고 힘들었다. 비경생산대회전을 보더라도 몇시부터 몇시까지 일했고, 동원된 인원과 우차수, 어떤거름을 각각 몇립방을 몇무에 냈으며, 우수표현과 존재한 문제, 전투에 대한 예견과 새로운 타산…매일 시시콜콜 회보를 해야하는데 그때세월 생산대에는 전화가 없다보니 대장이 대대에 직접가서 회보를 해야 했다. 하여 일찌감치 일밭을 떠나가지만 공수는 공수대로 다 받았다. 사원은 지각하거나 조퇴를 하면 공수를 깎았다. 사실대로 말해서 집체화시절에는 탈리간부, 반탈리간부, 얼류즈간부(겉등치기), 이런저런 리유로 생산을 탈리하는 인차수가 많았다.

사원들도 약삭발라져서 알심을 들여 일하지 않았다. 때문에 밭에는 풀이 무성하고 산량은 해마다 내려 갔다. 계속 “3면홍기”(총로선, 대약진, 인민공사)를 높히 추켜들때여서 대약진 여파가 간부들 머리속에서 그냥 움씰움씰 요동을 쳤다. 해동도 되지않은 밭에 파종을 하라고 내리 먹이고 벼모가 소털만큼 한데 얼음물속에 모를 내라고 명령이 추상 같았다. 실제산량은 또 감산이 되였것만 다수확 표준으로 어느날 몇시까지 완성하라며 공구량임무를 떨구었다… 관료주의, 명령주의, 형식주의에 사원들은 아예 맥을 버리고 넌덜머리가 나서 일을 하는체 하며 어정어정 하루해를 보내기가 일수였다. 일년사시절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듭되는 크고작은 대회전에서 사원들이 가장 관심하며 열의를 내여 잘하는 것이 추수탈곡대회전과 공구량대회전이다.

그것은 수확이라는 농민 특유의 본능적 기쁨과 드디여 내것을 곧 갖게 된다는 기대, 긴장, 조급, 궁금 등 복합적 심정이 마음속에서 맴돌기 때문이다. 공구량임무까지 완성하고 나면 바로 년말결산분배를 하지 않는가!(농민들이 가장 관심하는 년말총결에 대해서는 대회전을 하라는 말이 없었다.) 농민들은 가장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다. 금년에는 얼마가 차례질가… 목이 마르지 않을수 없다. 4인패가 거꾸러지기 전해 왜버즈생산대에서는 불이 번쩍나게 추수탈곡대회전과 공구량대회전을 해 제꼈다. 일년내내 별로 논 날이 없이 모택동사상을 높히 추켜들고 련속작전, 계속혁명의 정신으로 만난을 물리치고 거듭 대회전을 하여 왔지만 작황이 그닥지 않았다. 하다보니 추수도 빨리 끝나고 탈곡도 빨리 끝났다. 공구량까지 다 바치고 나면 인츰 분배를 할수 있었다. 추수탈곡대회전과 공구량대회전은 사실상 서로 긴밀히 이어진 것으로 기실은 하나의 대회전이 였다. 하지만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공구량 상납은 리해가 걸린 대사로 중대한 대목이였다.

하여 특히 따로 떼여 공구량대회전으로 하고 고도의 정치사상성을 부여하며 돌출히 틀어쥐였다. 모택동사상, 애국주의, 공농단결, 혁명에대한공헌, 계속혁명, 홍색정권보위, 공산주의, 세계혁명…등등 어마어마한 정치사상에 련계하여 공구량을 한알이라도 더 많이 바칠것을 선전 강조 하였다. 동시에 공구량대회전공작대(현과 공사의 국가간부들로만 조직 됨)가 돌아치며 질량과 진도를 다그쳤다. 한편, 사분(가만히 나누어 먹는것)하려고 종곡, 사료로 더 떨구고 감춘것이 없나해서 눈을 밝히였다. 여기서 간단히 교대해야 할것이 있다. 공구량 징수사업은 집행은 정부에서 하고 업무는 량잠에서 하였다. 공구량이란 공량과 여량을 말하는 것인데, 공량은 다 알다싶히 그건 토지세다. 여기에는 흥정도 에누리도 없다. 국가에서 결정한 것이 얼마면 얼마를 바쳐야 한다.

지독한 흉년이면 안쪽에서는 감면 혹은 면제를 했다고 하지만 혁명성이 가장 높은 우리고장에서는 이듬해 그 이듬해, 하여튼 꼭 물게 하였다. 여량은 농민들이 먹고 남는것을 국가에 파는 것이다.{그러나 기본임무량이 있다.} 당시에 실행한 “통구통소”(국가에서 정한 가격으로 국가가 사들이고 파는것)정책은 량식 암거래를 엄중히 단속 하였다. 부득히한 사정이라 해도 량식을 개인끼리는 매매하지 못한다. 돈쓸일이 있으면 한근이든 두근이든 국가에ㅡ 량잠에 가지고 가서 팔아야 했다. 그런데 그값은 형편없이 눅었다. 집체화시절 농촌인구에 한해서는 “민식”표준이 있었다.(성시인구도 배급표준이 있음.) 그런데 그 표준은 작황에 따라 오르내리기도 했는데, 성인일 경우 평년이면 오곡을 겉곡으로 최저표준이 300근이였다. 하지만 생산대마다 상황이 달랐다.

“선진사상”이 우세면 민식표준을 낮추면서라도 여량을 더 팔았고 “락후분자”들이 우세면 한알이라도 더 먹겠다고 적어도 300근 표준은 돼야 한다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층층의 간부들과(특히 국가간부들) 공작대는 여량을 한근이라도 더 팔기를 원했다. 그것은 그들의 사업성적과 직접 관계되기 때문이였다. 이해, 왜버즈생산대에서는 공구량을 잘 염근 낟알로 앞몫을 잘라서 량잠에서 가져온 200근짜리 청줄마대에 착착 절복해 놓았다. 작년까지는 수레로 공사량잠에 가져다 바쳤지만 금년부터는 현량식창고에서 자동차를 보내여 실어 갔다. 생산대에서는 공구량대표 한명이 따라 다니면 되였다. 왜버즈생산대대장 성길이는 문화대혁명의 대풍랑속에서 단련 성장한 간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해 초중에 붙혀서 꾸린 고중반을 졸업하긴 했으나 한동안은 홍위병대장을 하면서 반란하려 뛰여다녔다. “파4구”(낡은사상, 문화, 풍속, 습관을 뚜드려 부시는것.)를하고, 선생님들을 투쟁하고, 공사 대대 생산대간부들을 투쟁하고, 잡귀신을 투쟁하고, 대비판을하고, 최신지시경축집회 유행시위를하고, 모택동사상 선전대를하고… 기를쓰고 혁명을 했는데 먹을알은 없고 고생스럽기만 했다. 혁명을 하며 성길이가 얻은 수확은 꽤나 반주그레 하고 발랑거리는 동창생 처녀를 꿰여찬 것과 대대의 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된것이다. 하지만 그 위원이라는 벼슬은 하나마나한 것으로 유명무실 하다가 얼마후에는 취소 되였다. 집체호 처녀애들을 집적거리고 술을 먹고 집체호 청년들과 싸움질 한것이 화근으로 되였든 것이다.

림표사건후부터 성길이는 딴 사람이 되였다. 그는 입당을 하여야겠다고 결심을 하였든 것이다. 농촌에서 벗어나자면, 참군(그건 결혼했기에 안됨) 공인추천, 학교추천, 맨발의사학습반, 수의훈련반, 사반기업공인, 민판교원… 등등이 있는데 첯째조건이 정치사상이다. 당원이기만 하면 만사형통이였다. 아무리 못된다고해도 생산대, 대대간부가 되는건 식은죽 먹기다. 농촌간부라고 해서 깔볼건 아니다. 저만 똑똑하면 절에가서도 새우젖을 먹듯히 먹을알이 있었다. 회의요, 대회전진도료해요, 질량검사요, 파종검사요, 씨붙임, 모살이, 초황, 병충해검사요, 제방뚝검사, 외지참관학습, 무슨빤썰… 얼렁뚱땅 일하지 않고도 상등공수를 받아먹으며 얼마든지 살수 있다. “입당벼슬론”을 앞장서서 죽기로 비판하던 그가 되려 진짜배기 “입당벼슬론”자가 되였다. 성길이는 워낙 옹골진데 일을 세차게 하며 모주석저작을 일터에도 가지고 다니며 학습 하였다.

그는 활학활용강용도 잘해서 이티후에는 공사모주석저작 학습모범까지 되고 두해전부터는 왜버즈생산대대장을 하였다. 왜버즈생산대의 금년농사는 보기에는 왕년과 비슷했으나 정작 탈곡까지 끝내고 보니 소출이 많이 적어 보이였다. 잡곡(옥수수, 꼬량, 감자 등)까지 300근민식표준에 넣는다 해도 여량이 작년보다 많이 적을것 같았다. 아니, 확실히 적었다. 작년에는 전해보다 여량을 더 많이 했고 금년에는 두말할것 없이 작년보다 또 더 많아야 하겠는데… 입당이 가망있는 판에 이거 야단이 아닌가!... 성길이는 모택동사상으로 저촉정서가 심한 정치대장, 부녀대장과 회계를 “제압”하였다. 그리고 결량호로 유명한 “푸대죽노친”을 계발, 발동하여 부녀들속에서 작년보다 여량을 더 많이 하자고, 왜버즈생산대 빈하중농들의 기개를 떨치자고 여론을 펴게 하였다.

푸대죽노친은 덜덜거리며 말을 잘하는데 누가 무엇을 좀 불어 넣으면 그것을 피뤄치면서 마치도 자기 궁냥인듯히 열변을 곧잘 했다. 거기에는 대비판, 로선분석을 잘하는 반란파출신의 녀자도(그속에는 성길이와 바람을 쓰는 아낙네도 있었다.) 두셋이 합세를 하였다. 성길이는 또 그들을 선동하여 “억고사감”(쓴것을 회억하며 단것을 생각함. 즉 과거의 고생을 회고하며 오늘의 행복을 노래함. 일명 회억대비활동이라고도 함.) 활동을 벌이게 하였다. 푸대죽노친은 팔을 휘두르며 “선진사상”녀자 셋을 거느리고 “억고사감”밥을 지었다. 그들은 소사료인 두병과 나뱃겨, 시래기와 배추뿌리를 주 재료로 해서 우사가마에 푸대죽을 쒔다.

소금과 된장덩이를 두어사발 풀어 넣으니(넣자느니 말자느니 시비를 하다가 맛있게 해야한다고 바람쟁이가 우겨서 푸대죽노친을 이겼다.) 제법 푸대죽냄새가 났다. 죽이 다 준비되자 성길이는 전체사원대회ㅡ 어른이고 아이고 몽땅 우사로 불러 왔다. 그는 이신작칙으로 가마전에 붙어서서 죽을 대여섯숟가락 떠 먹고 시범을 보인후 사람들을 따라하게 하였다. 그런데 사상이 락후한 아이들은 뱉아버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또 투레질까지 하여댔다. 하여 웃어대고 줄욕을하고…. 소란이 일기도 했다. 푸대죽은 효력을 냈다. 과거에는 이런것이라도 있었던가!... 그래, 우리 빈하중농들이 국가에 공헌하지 않아서야 말이 되는가!... 푸대죽을 행복죽이라느니 원한의 눈물죽이라느니 이런것만 먹고는 일을 못한다느니 할수있다느니… 시비도 있었지만 어쨌든, 성길이는 목적을 달성 했다.

왜버즈생산대에서는 금년 민식표준을 오곡과 잡곡 모두를 합쳐서 200근으로 정하고 여량을 작년보다 또 더많이 바치기로 결정했든 것이다. 95%의 사람들은 어처구니가 없고 밸이 곤두서서 분통이 꼭두까지 치밀었지만 입도 뻥끗할수 없었다. 말한마디에 모가지가 왔다갔다 하는 세월이 아닌가!... 사람들은 새삼스레 먼저번의 김대장을 그리워 했다. 그는 사원들의 부족되는 민식을 해결해 보려고(여량임무를완성하고나면 농량이 늘 부족했다.) 사원들을 데리고 산속에 가만히 들어가 부대를 일구고 감자를 심었다.

이것은 자본주의 꼬리를 잘라던지는 당시로서는(담배열포기, 과수한그루, 닭두마리…극력 제한할때다.) 너무도 위험한 모험이였고 엄중한 반혁명행위 였다. 그러나 별 말썽이 없이 가을이 되였는데, 호사다마로 감자캐기를 하다가 산불을 일굴줄이야! 점심거리로 감자굴찜을 하다가 그만 그런 사고가 생기였다. 하여 감자는 전부 몰수당하고 깁대장은 감옥으로 갔다.(3년) 그리고 정치대장(지금의 정치대장)은1년류당차칸 처벌을 받았다, 왜버즈생산대는 이해 공구량을 잘한데다가 또 자작결정으로 대식품대회전(무우 감자를 껍질채로 먹으며 통강냉이 죽을 먹으며 나뱄겨 배추뿌리를 모으며 하루 한끼 혹은 두끼를먹으며 될수록 푸대죽 먹기 등등)을 기세높히 전개한데서 현에 이름을 떨쳤고 성길이는 모범대장으로 되였다. 이른봄(4인무리가 거꾸러지던 해) 왜버즈생산대 “량식절약강용단”(사람들은 푸대죽강용단이라고 했다)은 성길이와 바람쟁이 인솔하에 (현부련회주임이 지도자로 따라 다녔음.) 전 현을 돌면서 순회강용을 하였다. 성길이와 바람쟁이는 량식절약의 심원한 혁명적의의를 주로 정치사상각도에서 내리풀고 푸대죽노친을 비롯해서 다른 두 사람은 건강식이라느니 보건식이라느니 하며 영양분의 풍부성과 조리방법을, 말하자면 과학기술각도에서 주로 전수 했다.(현에서 내용을 짜 주었다.)

청중들은 크게 교육을 받으며 찬탄을 금치못해 하였다. 그런데 역시 호사다마로 사달이 생길줄이야. 성길이와 바람쟁이가 려관방에서 바람을 쓰다가 부련회주임한테 들키고 말았던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바람쟁이는 성길이가 입을 막고 완력을 쓰는 바람에 겁탈을 당했다고 발뺌을 하였다. 성길이는 강간범으로 공안국에 잡혀가서 심문을 받고 5년 옥살이를 갔다. 조사를 거쳐 강간죄는 삭감 되였으나 류망죄에 걸렸다. 그리고 그에게는 절도죄가 더 있었든 것이다. 성길이는 공구량대표를 맡고 현량식창고로 다닐때 벼 두마대와 콩 한마대를 현공구량대회전 하향공작대 대장에게 코밑치성을 했다. 운전수에게는 벼 한마대를 주었다. 현공작대대장은 현농업국부국장이 였다.(원래는 현토산공사의 일반간부로서 반란단 대장이였다.) 그는 공구량대회전을 할때 왜버즈생산대를 점으로 자기가 직접 틀어쥐며 전 공사를 지휘 하였다.

성길이는 금덩이 같은 닭을 잡아 먹이고 두부를 앗아 먹이면서 그와 친했다. 대장은 성길이를 구체적으로 지도하며 이번 공작을 잘하면 입당은 두말할것도 없고 현비료공장에 넣어 주겠다고 힘과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성길이가 정치대장을 비롯해서 대무위원들을 “제압”하느라고 쩔쩔 맬때 그는 직접 회의에 참석하여 정치사상방망이를 휘둘러 성길이가 승리하게 관건적인 지원을 했다. “억고사감”활동도 사실은 그의 씨나리오다. 그날 그는 우사칸에 와서 푸대죽을 맛있는 동작으로 먹고 사뭇 비분강개한 회억대비 연설을 했다. 공구량대회전이 결속된후 부국장은 사업총결을 현대회전지휘부판공실에 바쳤는데 높은 긍정을 받아 선진으로 되였다.(후에 철직을 맞고 원 단위로 돌아 갔음.) 성길이가 강간범으로 공안국에 잡혀가자 “량식절약강용단”은 마을로 돌아 왔다. 마을사람들은 속이 쉬원해 하였다. 그러나 정치대장은 문제를 달리 생각했다.

그는 부녀대장과 회계를 데리고 공안국에 찿아가서 성길이가 강간범일수는 없다고 역성을 들며 변호를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들은 우연히 공구량을 날라가던 운전수를 만났는데, 운전수는 술을 한잔 사겠다며 그들일행을 식당으로 끌었다. 석간에서 운전수는 대무위원들이 비밀토론을 하고 자기에게 벼를 한마대나 준것이 너무도 고맙다고(성길이가 그렇게 말했다.) 거듭 감사를 표시 했다. 그러면서 왜버즈생산대 령도어른들은 인심이 후하다고, 금년의 공구량도 자기가 꼭 싣겠다고 은근슬쩍 암시를 하는것이 였다.

정치대장네들은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 했다. 이건 역성들 일이 아니였다. 사원들을 굶기며 대장이란 작자가 이런 꿍꿍이를 치다니?! 이럴수 있는가?! 억이 막혔다.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졌다. 성길이 죄행은 왜버즈생산대를 들썽했을뿐만 아니라 전 공사를 들썽했다. 사람들은 “그느마새끼! 아이때도 까불더니, 콩밥을 콱 먹여야 해! 망할놈이 새끼!...”하고 증오하며 격분해 하였다. 그해, 왜버즈생산대 사람들은 푸대죽과 반소량(량잠에서 강냉이, 수수따위를 다시 꿔다 먹는것, 가을에 세량으로 갚는다.)을 먹으며 대식품대회전을 하느라고 죽을고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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