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huiling 블로그홈 | 로그인
회령
<< 4월 2024 >>
 123456
78910111213
14151617181920
21222324252627
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문학 -> 발표된 작품 -> 수필

나의카테고리 : 작품

인민의 총리
2014년 01월 13일 15시 41분  조회:2522  추천:2  작성자: 회령

                    실화
                                      인민의 총리
                                                   주은래총리 서거 33주년에 즈음하여
                                                                                                                                  회령

    금년 1월8일은 새중국 제1임총리 주은래 서거 33주기가 되는 기념일이다. 

    주은래총리는 26년을 총리직위에 있으면서 자신의 전부의 심혈과 정력을 남김없이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였다. 그이는 사업에서 시종 최선을 다 하였다. 그러나 생활면에서는 항상 최저표준, 엄격한 요구를 했으며 추호의 특수화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이께서는 우리나라 인민들의 근검절약, 간고소박한 전통미덕을 충분히 발휘 하였다.

    건국후 주총리는 줄곧 중남해 서화청에서 살면서 사업하였다. 이 집은 청나라 선통년간에 지은 구식 단층주택이다. 집안광선은 어둑스레하고 방바닥은 조습하고 문은 쯤이 많아 세찬바람이 불면 책상에 먼지가 한벌씩앉았다. 수년간 이런 집에서 살며 사업하다보니 주총리는 늘 무릎이 아파하였다. 하지만 그이는 여러차례나 집 수리를 거절하였다. 1959년 겨울 비서는 주총리와 부인 등영초가 북경에 계시지않는 틈을타서 집을 보호성 수리를 했다. 그리고 몇가지 낡은기물을 새것으로 바꾸었다. 결과 비서는 주총리의 엄한 비판을 받았다. 주총리께서는 낡은기물을 제대로 들여 올때까지 밖에서 살다가 비로서 서화청으로 돌아왔다. 그후 그이께서는 총리판공실주임 동소붕과 행정비서 하겸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였다. “내가 총리로서 좋은 본을 보이면 넓은범위에서 좋은 영향을 주게 되고 나쁜 본을 보이면 역시 넓은범위에서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때문에 나는 반드시 자신에 대해 엄격히 요구해야한다. 동무들이 이렇게 많은돈을 들여 나의집을 잘 꾸며 놓으면 군중들이 어떻게 볼것같은가? 일단 모두가 나를따라 배워 집을 수선한다면 군중들 속에서 어떤영향이 조성 될것같은가? 이점을 왜서 생각하지 않았는가?!” 서화청을 수리한 일로해서 주총리는 국무원회의에서 여러번 자아검토를 했다. 그러면서 “동무들은 절대로 나의 착오를 중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주총리는 음식면에서도 간단하고 청담했다. 1/3은 잡곡이고 고기가 조금 들어간 채 한접시 나물채소 한접시 뿐이였다. 남는 밥과 반찬은 절대로 버리지 않고 다음끼에 잡수셨다. 사람들이 리해되지 않아할때마다 그이는 명랑한 어조로 “이것은 인민군중들이 먹는것보다 훨씬 낫다. 과거와는 비할수도 없다. 우리는 근본을 잊으면 안된다.”고 말하였다. 국민경제 곤난시기(지난세기 60년대 초) 그이와 모택동은 함께 앞장에서 고기, 물고기, 닭알을 먹지않는 규정을 세웠고 또 주총리는 자기와 등영초의 매달 량식표준을 각기 15근, 13근으로 낮추었다. 그이는 “모주석은 당중앙에서 앞장서고 나는 국무원에서 앞장선다. 군중들이 곤난할때 령도가 특수화를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주총리는 자신의 식생활이 간단할뿐만 아니라 자기의 국내손님들 대접도 간단하게 했고 종래로 공가의 돈을 쓰지않았다.

     매번 시찰을 나갈때면 그이께서는 항상 간단하게 행차를 하였다. 앞에서 마중하고 뒤에서 옹위하며 기세가 어마어마하고 틀거지를 내며 위풍을 떨치지 않았다. 그리고 화식에 대하여 꼭꼭 문의하며 신변의 공작인원들로 하여금 자신의 식비를 제대로 결산하게 하였다. 한번은 항주 루외루에서 그이가 몇사람을 초대한바가 있었는데 성의 배동한 간부가 식사비를 지방에서 물겠다고 하였다. 하여 서로 싱갱이 끝에 총리가 20원을 기어이 냈는데 그러고도 그이는 비행기에 오를때 아무래도 식사비를 적게낸것 같아서 10원을 더 내고 떠났다. 그날 식사비는 모두 19원이였다. 루외루 복무원은 결산명세와 정황을 상세히 설명한 편지와 함께 승천(거스름돈)을 총리에게 부쳐 보냈다.

    주총리가 소집한 각종회의는 흔히 시간이 길어서 공작식사를 준비해야할때가 많았다. 식사를 하면서 회의를 계속 하였는데 총리께서는 공작찬은 꼭 가정의 일반끼니처럼 해야 한다고 명확히 규정해 놓았다. 하여 보통 죽과 짠지, 혹은 우동 이였다. 그이께서는 “이런 식사는 매우 경제적이며 실속이 있다.”고 하시면서 만족해 하였다. 어느 한번 늦게 회의에 온 하룡원수가 “와아! 국가의 경제는 호전 되였는데 총리네 밥상에서는 왜서 좋은형세가 체현되지 않는가?”하고 우스개를 하였다. 총리는 웃으면서 “장래에 나라가 부강해 지어도 간고소박한 전통은 잃으면 안되지 않겠는가. 그래서…”하고 말하여 한바탕 유쾌한 웃음통이 터졌다.

    주총리는 옷과 생활용품에서도 일관적으로 간고소박하였고 근검절약하였다. 그이 속옷은 깁고 또 기운 것이였으며 신은 수리하고 또 수리한 것이였다. 양말도 그랬다. 그이 손목시계는 줄곧 “상해”패 국산품이였다. 세수수건도 기운것이였고 욕조는 여러군데가 사기칠이 벗겨진 것이였다. 침대는 널판자 침대였고 쏘파는 구식의 낡은 것이였다. 그이의 잠옷은 1950년 1월에 쏘련 방문시 맟춘것인데 깁고기워서 원래의 모습이 다 없어졌다. 하지만 26년 그이를 동무해 주었다. 그러니까 총리로 되여서부터 사망할때까지 그이를 감싸준 것이다! 공작인원들이 새것을 갖추자고 하면 그이는 항상 “낡은것도 능히 입을수 있지 않는가. 간고소박은 우리 공산당인들의 본색이다.”하고 엄숙히 말씀 하셨다.

    주은래총리의 가정경제조건으로부터 볼때 생활은 본래 잘 살수 있으며 지어는 매우 잘 살수 있었다. 그러나 나라와 인민들이 가난한것을 생각할때 그이의 심정은 항상 괴롭고 불안 하였다. 그이는 늘 버릇처럼 자신과 타인에게 이런말을 자주 했다. “우리 령도간부들은 만족을 알아야 한다. 자신에 대한 물질대우가 이미 충분하다고 느껴야 한다. 나아가서는 과분하다고, 좀 적었으면 좋겠다고 느껴야 한다. 인민들이 우리에게 많이주면 불안감을 느낄줄 알아야 한다. 간고소박이 우리의 미덕으로 되게 하여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쉬원해지게 되며 절약할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러사람의 복리를 해결할수 있으며 나라에도 저축이 있게 할수있다. 이래야만이 우리나라를 더욱빨리 사회주의 강국으로 건설할수 있다.” 혹시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수도 있는데, “주은래와 등영초의 공자수입이 당시로는 매우 높았으니, 두분께서 일관적으로 그렇게 아껴먹고 아껴썼다니까 저축이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기실은 그렇지않다. 주은래의 매달 공자는 404원80전이고 등영초는 342원70전인데, 1955년7월 국가에서 공자제를 실시해서부터 1976년1월8일 주은래가 사망할때까지 두분은 생활비외에 쓰는곳이 많았다. 주요하게는 다섯가지에 썼다. 친척에게 부조, 생활이 곤난한 신변 공작인원들과 경위전사들께 부조, 렬사후대 양육비, 개인적손님 초대비, 당비를 더 낸것 등이다. 초보적 통계를 보면, 친척부조에 36645원50전, 신변공작인원, 경위전사부조 10218원60전, 자원으로 당비를 더 낸것이 3차인데 14000원이다. 이 세가지에서만 나간돈이 60864원10전이다. 이것은 12년5개월의 공자다. 저축해둔 돈이 얼마나 있을것 같은가?!...

    주은래총리는 돈도 물건도 개인것으로, 말하자면 유산같은것으로 남긴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이는 자신의 골회마저도 조국의 산하에 비료로 뿌려달라고 여러번 유언하였다.(등영초와 당중앙에서는 그대로했다.) 20여년후 부인 등영초가 사망하면서 그의 “개인재산”은 더욱 철저히 정리되였다. 국가의 물건은 국가에 돌리고 사인용품은 혁명전통교육용으로 전람관에 바치였다. 거기에는 내의와 잠옷 끌신은 물론, “상해”패 손목시계와 치솔, 절반남짓 쓴 “백옥”표 치약까지 있다.(국산임) 등영초가 가지고 있던 사인편지와 사진들도 연구자료로 당안관에 들어 갔다. 주은래는 그야말로 말그대로 빈 손으로 인간세상에 왔다가 빈 손으로 사라졌다. 아니다! 주은래는 령도간부들, 당원들, 인민들, 후대들…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만고천추에 길이 빛날 형상을 지구에 남겼다.(련합국에서 반기를 내리여 애도했다.) 그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며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

    주은래총리는 종래로 례물을 받지 않았다. 되돌릴수 있는것은 돌리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가배로 값을 지불한후 유관부문에 보내여 처리했다. 절대로 안면을 보지 않았다. 1961년 그의 고향 회안현에서 토특산 련꽃씨, 국수 등 례물을 보내온 일이 있었는데 주은래는 비서를 시켜 사랑하고 관심하는 마음은 알지만 당의지시와 규률을 위반하는 이런 행동은 나쁘기에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편지와 함께 돈 100원을 보냈다. 그리고도 강소성위, 회음지위, 회음현위 책임자에게 중앙의 통지(칭커쑹리를 엄금할데 관한 통지)를 다시 한번 참답게 학습하며 철저히 락실 집행할데 대한 회시를 친필로 하였다. 외빈들이 증송한 례물에 대해서도 그이는 그것을 종래로 자기의 것으로 하지 않았고 우의의 상징으로 국가에 바치였다. 어느 한번, 한 렬사의 딸이 서화청 객실, 판공실, 침실에 아무런 장식품도 없는것을 보고 너무도 이상해서 총리에게 영문을 물은바가 있었다. 그때 총리는 다음과 같이 해석해 주었다. “내가 총리기 때문에 그들이 준 것이다. 만약 내가 총리가 아니라면 그들이 주겠느냐? 그들이 준 것은 우리나라에 준 것이지 이 주은래에게 준것이 아니다. 만약 내가 그것들을 모두 가진다면 그것은 무슨 행위겟니?” 이 한마디 말은 렬사의 딸로 하여금 어떤것이 렴결봉공인가하는것을 심각히 알게 하였다.

    주은래와 등영초의 애정은 오늘의 젊은이들까지도, 세인들이 모두 잘 알다싶이 각별히 심후 했다. 그들은 초혼으로 그야말로 흑발이 백두옹이 될때까지 백년해로를 하였다. 두분은 같은 시각에 혁명의 길에 나섯고 평생을 중요한 위치에서 자신을 공헌 하였다. 등영초는 재능, 경력, 위망, 그어느모로나 당과 국가의 주요간부로 될수 있는 당당한 자격자 였다. 주총리는 안해와 높은 정치적 표준을 견지 했으며 엄격 했다. 그는 부부관계에 정치관계까지 맺어지는것을 절대로 금지했다. 새중국이 탄생할때 적지않은 부녀계 지명인사들이 당과 국가의 령도직위에 등용 되였다. 송경령, 채창, 하향응, 리덕전, 사량… 등 녀성혁명가들이 부장급 이상의 중요직무를 담임 하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주총리가 직접 각계인사들과 협상하고 선발 임명한 것이다. 그러나 등영초만은 주은래가 절대로 동의하지 않아 아무런 “벼슬”도 하지 못했다. 이에대하여 도무지 리해가 되지않아 강선운녀사(황포군교 1기생이며 남창기의위수사령 팽간신렬사의 부인)가 주총리에게 직접 물은바가 있다. 그때 주총리는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해주었다. “이 문제를 당신이 처음으로 제출하는것이 아니다. 과거에 이미 말한 사람들이 있었고 건국초기에도 당내외 인사들이 여러번 제출한바가 있다. 지어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극진히 권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수 없었다. 나는 총리고 등영초는 무슨부장이라 할때 나 이 총리와 그를 분별하기 힘들어 진다. 사람들은 그의ㅡ 부장의 말을, 또 그가 한 일을 내가 지지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렇게 가정관계, 부부관계, 정치관계가 한데 엉키면 당의 사업에 불리하며 총리사업에 불리하다. 내가 하루라도 총리로 있는한 등영초는 령도벼슬을 절대로 못한다.” 주총리의 결정을 등영초는 충분히 리해했을뿐만 아니라 견결히 지지했다. 림표, 엽군, 강청들과 너무도 대조적이 아닌가!... 정치적 대우에서뿐만 아니라 생활향수에서도 주총리는 등영초에 대하여 종래로 엄격하였다. 1955년7월 공자급별을 확정할때 중공중앙에서는 채창은 3급, 등영초는 5급으로 비준 했는데 주총리가 친히 6급으로 깎아 내리었다. 1974년 모택동은 등영초를 인대부위원장으로 비준 하였다. 그러나 주총리가 그것을 깔아놓고 공개하지 않았다.(감추었다.) 1982년4월 등영초는 후대들과 이런말을 하였다. “지금 나는 인대부위원장이고 정치국상무위원이며 중앙기률검사위원회서긴데 이러한 공작들은 모두 당에서 나에게 분배해 준것이다. 그러나 너희들 큰아버지가 생전이라면 절대로 못하게 했을것이다. 물론 나도 하지 않았을 거고.”

    주은래총리는 인정이 매우 풍부한 사람이다. 그는 타인의 사정을 헤아려 주며 될수록이면 도와주기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친척에 대해서는 관심하고 방조함에 원칙이 있었다. 그는 인민이 준 권력으로 사리를 도모하지 않았고 친척들이 추호의 특수화도 못하게 하였다 위법란기 되지못한 짓은 두말할것이 없다. 그이가 몹시 증오한 것은 “손을 내밀기 좋아하며 뒤문거래를 하며 한사람이 벼슬을 하면 온 가정이 복을 누리며 한사람이 출세를 하면 개 닭도 승천하는” 부정부패의 추악한 사회현상이였다. 주총리는 친척들의 착오적 사상을 어떻게 대할것인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친속에 대하여 도대체 당신이 영향을 받을것인가 영향을 줄것인가? 이것은 한개 령도간부로서 우선적으로 대답해야 하며 해결해야할 문제다. 만약 잘 처리하지 못하면 당신이 그들을 영향줄수 없을 뿐만아니라 그가 오히려 당신을 영향줄수 있다.” 주은래의 친동생 주동우는 지난세기 20년대에 혁명에 참가한 사람이다. 건국후 그는 공업부에서 보통인원으로 사업 하였다. 후에 병으로 내무부참사로 안배 되였는데 이로해서 주은래는 내무부부장 증산에게 여러번 의견을 제출했다. 후에 또 한차례의 회의에서 이 일을 말했는데 “주모의 동생이 내무부참사로 있는데 그어떤 리유에서였든 영향이 나쁘다. 공업부에서는 능히 일할수 있었기에 나는 간섭하지 않았다. 지금은 참사가 되여 공짜로 월급을 타는데 이것은 고려해볼 문제다.” 회의후 주은래는 내무부에서 자기동생을 병퇴직 시키라고 엄숙히 요구했다. 연후 동생에게 자기돈으로 달마다 보조를 해 주었다.

    주은래와 등영초에게는 자녀가 없다. 그들은 친속의 자녀들을 매우 귀여워 했다. 주은래는 그들에게 줄곧 타이르기를 “너희들은 자기에게 엄격한 요구를 해야한다. 대두적으로 당과 국가의 각종 정책규정을 지켜야 하며 절대로 친척의 직권을 리용하여 특수화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두분은 그들에게 엄격한 “가법”을 규정해 주었는데, 전문적으로 우리를 보기위해서는 북경으로 오지 못함. 북경에 오면 일률로 초대소에 들며 식당에서는 줄을 서며 자기돈으로 밥을 사 먹어야 하며 돈이 없으면 우리가 화식비를 물어 준다. 공가의 자동차를 쓰지 못한다. 주은래의 친척이라는 것을 말하지 못함. 생활은 간고소박해야 하며 특수화를 못한다. 이런 조항이였다. 그는 친속자녀들에게 지망을 선택할때 당과 국가의 수요를 제1지망으로 하며 거기에 복종해야 한다고 항상 교육 하였다. 1961년 중앙에서 성시인구를 축감할데 대한 호소를 한후 주총리는 친조카부부가 솔선적으로 향응할것을 요구하였다. 하여 그들부부는 북경을 떠나 고향 회안으로 갔다. 중학을 졸업한 친조카 주병화와 주병건(녀)은 각기 연안과 내몽골 농촌에 자리 잡았는데 1970년말 둘이 모두 당지에서 참군하게 되였다. 병건이는 기쁜소식을 큰아버지에게 알리였다. 그런데 큰아버지가 “군복을 벗고 농촌으로 돌아가라.”고 하실줄이야?! 남매는 깜짝놀라 아연실색 하였다. 그러나 차근 차근 하시는 큰아버지 말씀을 들어보니 도리가 있었다. “얘들아, 너희들의 참군은 비록 수속에는 부합되지만 생각해 보아라. 그곳에 그렇게 많은 청년들이 있는데 왜서 너희들을 골랐겠니? 우리들의 얼굴을 본게 아니겠니? 우리는 이런 특수화를 절대로 할수 없다. 조금치도 할수 없단다. 참군하는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농촌이 간고해서 일부 령도간부들은 자녀를 참군으로 빼 돌리는데 인민군중들 속에서 영향이 아주 나쁘단다.” 남매는 기꺼히 제고장으로 돌아갔다.

    주은래는 일부 고급간부 자녀들의 성장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에 비추어 중공중앙과 국무원 직속기관 책임자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대성질호 하였다. “우리의 령도간부, 우선 나를 포함한 407명의 사람들은 마땅히 본보기가 되여야 한다. 작은나으리를 만들어 내지 말아야 한다. 늙은나으리도 반대해야 하며 작은나으리도 반대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후대들에게 할말이 없게된다. 우리는 사회주의 국가다. 봉건사회와 자본주의사회처럼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력사를 거울로 할수있다. 진시황은 능히 중국을 통일할수 있었지만 진2세를 너무도 어루만졌다. 결과 진왕조는 그의 손에서 망하고 말았다. 우리는 절대로 자기의 자녀를 나라와 사회의 골치꺼리가 되게해서는 안되며 우리사업의 전진을 방해하게 해서는 안된다. 자녀들에 대해서 요구를 높히고 엄하게 책망하는것은 응당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 좋은점이 있고 그들의 진보를 독촉할수 있다.” 주총리의 이 말씀은 오늘도 경종으로 되며 지도적 의의가 있다.

    무엇 때문에 주총리는 일생을 시종여일 솔선수범하며 엄격히 자률하고 간고소박 렴결봉공 할수 있었는가? 그 근본적인 원인은 맑스주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굳게 수립했기 때문이다. 즉 사상이다. 사람의 행위는 사상의 지배를 받는다. 정확한 행위는 정확한 사상이 지배한 것이다. 중국공산당인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의 핵심은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것이다. 주은래는 일찍부터 절대다수의 사람들의 리익을 도모하는것을 숭고한, 유일한 인생목표로 추구해 왔다. 하여 그는 자신을 시종 인민의 근무원(공복ㅡ공무원)으로 인정했고 충실히 복무 하였다. 민주혁명시기 그는 “성근하게, 로실하게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겠다. 소처럼 노력분투하며 동지들과 일치단결하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길에서 죽겠다.”고 말했다. 사회주의건설시기 그는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것은 곧 우리의 국가, 민족, 아름다운 미래를 위한 것이며 전인류의 광명한 전도를 위하여 복무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우리들에게 “공산당원은 누구를 막론하고 만강의열정으로 부지런히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고귀한 품질이 타락하여 자산계급의 비렬한 개인주의로 되는것을 반대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신변의 공작인원들에게 경상적으로 “1분의 시간을 쟁취하여 1분의 공작을 더 하자. 나는 늙었기에 인민을 위하여 복무할 시간이 많지 않다. 시간을 앞당겨 공작해야 옳다.”하고 밀하였다.

    그는 언행이 일치했고 표리가 일치 했다. 인민들의 우환을 근심했고 인민들의 행복을 기뻐했다. 그이는 군중들이 급해하는것을 급해했고 군중들이 생각하는것을 생각 했다. 인민들이 질고에 시달릴때면 항상 침식을 잃었고 동분서주 하였다. 주은래총리는 인민군중들이 한재 수재 풍설 지진 등 엄중한 재해에 부딫히면 곧 그곳으로 친히 달려갔다. 나라의 전반 대소사를 그는 관활하면서 많은 일들은 친히 틀어쥐고 처리 하였다. 1956년 광서 부분적 지구에서 아사현상이 발생 했을때도, 1958년7월 황하특대홍수, 1961년5월 하북에서 공공식당과 대약진 편차로 문제가 발생 했을때도, 1966년3월 형태대지진, 문혁시기 좌경로선이 고도로 득세하여 횡포를 마구 휘두르는 그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등소평 등 100여명의 간부를 보호한것…그가 직접 지휘하고 처리한 중대한 허다한 사업들을 여기서 일일히 다 꼽을수는 없다!... 그는 생명의 마지막 경각에도 수술대에서 중국의학과학원 리빙교수를 불러 운남 석광공인들이 폐암에 많이 걸리는데 즉시 내려가서 조사를 하고 대책을 연구하라고 십분 견결한 어조로 분부 하였다. 서거하기 바로전에는 오계평의사가 병상 곁에 서 있는것을 보고 “오선생, 나는 별일 없으니 다른 사람들을 가서 돌보시오.”하고 부탁 하였다. 이 말씀은 그이가 생전에 한 마지막 말씀이다. 주은래총리는 만년에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자”라고 새긴 기념장을 가슴에 항상 달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오직 헌신만 하며 종래로 사욕을 챙기지 않으며 한이 있는 생명을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데 몽땅 바치리라는 위대한 사상과 인격, 고상한 정조의 진실한 표현이다.

    각개력사시기 특히 사회주의현대화건설시기에 인민을 위하여 일정한 기여가 있었던 일부 령도간부들이 왜서 좋게 끝나지 못하고 시대의 락오자 지어는 부화타락 퇴화변질하고 말았는가? 우리는 주은래가 참답게 당성수양을 견지하고 부단히 사상개조에 힘쓴 감동적인 사적들에서 그 정확한 답안을 쉽게 찿을수 있다. 당원들의 사상개조를 중시하는 것은 중국공산당이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할수 있는 근본이며 전투력을 제고할수 있는 근본이다. 주은래는 공산당인들의 사상개조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비상히 강조 하였다. 그는 “무산계급은 기타 로동자들을 단결, 교육, 개조시켜야 할 사명을 짊어 지고있다. 하지만 우선 자아개조를 해야한다. 자아개조를 능히 하는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을 개조 시킬수 있다…각종 낡은 정치영향과 습관세력은 우리에게 여전히 영향을 준다. 하여 사상 작풍상의 문제가 더욱 많게 되였다… 사상개조는 공기처럼 없어서는 안된다.”라고 엄숙히 지적 했다. 그이는 자신의 좌우명은 “늙을때까지 일하며 늙을때까지 배우며 늙을때까지 개조한다.”는 것이라고 여러번 말씀 하였다. 그는 전당의 사상개조를 중시하였을 뿐만아니라 자신의 모범대두작용, 이신작칙, 자각적이고도 엄격한 사상개조를 더욱 중시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바가 있다. “나는 금년에65살이다. 당성수양을 잘 했기에 이젠 더 개조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나는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하겠다… 각종관계와 각종사물들이 개인의 사상에 영향 준다는것을 승인해야 한다. 경상적으로 반성하며 동지들과 의견을 교환하며 경상적으로 <목욕>해야 한다… 나는 지금도 개조중에 있다. 나는 달갑게 선두가 되겠다… 간부의 정치소질의 좋고 나쁨은 당풍의 좋고 나쁨에 직접 영향주며 당의로선, 방침, 정책제정과 집행에 직접 관계가 된다.” 1961년 그는 일부 령도간부들이 자아사상개조를 홀시하는 경향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호되게 질책 하였다. “자아개조는 진보를 위한것으로 광영한 것이다. 전문 남만 개조시키는 사람은 없다. 남을 개조시키려면 자신부터 먼저 개조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대성질호를 해야 한다. 너부터 먼저 개조 하라!” 령도면 우선 령도다워야하며 연후에 백성을 령도하라는 것이였다. 제코가 석자나 되는 주제에 누굴 훈계하며 군중들 앞에 “령도”노라고 나설 면목이 있는가!... 주은래총리의 마디마디 말씀은 오늘도 경종으로 되며 우리들의 인생지침으로 된다. 주은래총리는 시종 참답게 당성수양을 견지하며 사상개조를 진행했기 때문에 공산당인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항상 튼튼히 보지할수 있었으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길에서 죽겠다!”고 한 맹세를 유감없이 충실히 리행할수 있었다. 인민의 훌륭한총리로 길이 빛날수 있게 되였다.

    주은래총리의 위대한 형상은 청사에 영생불멸 할것이다!

                                                                                                       09.12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전체 [ 2 ]

2   작성자 : 똑바르게
날자:2014-01-15 09:45:19
서거한지 34주년이 아니고 38주년
1   작성자 : 감사합니다.
날자:2014-01-14 10:27:43
이렇게 좋은 글들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글들도 기다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세요..
Total : 206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206 모택동의 이야기(27) 2024-04-18 0 28
205 모택동의 이야기(26) 2024-03-25 0 52
204 모택동의 이야기(25) 2024-03-03 0 113
203 어제 일 2024-01-11 0 141
202 악독한 독수리 2024-01-11 0 132
201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24) 2023-10-14 0 268
200 모택동의 이야기(23) 2023-09-05 0 187
199 모택동의 이야기(22) 2023-08-04 0 129
198 모택동의 이야기(21) 2023-07-21 0 174
197 모택동의 이야기(20) 2023-07-01 1 137
196 모택동의 이야기(19) 2023-06-02 0 162
195 모택동의 이야기(18) 2023-05-05 2 185
194 모택동의 이야기(17) 2023-04-09 3 181
193 모택동의 이야기(16) 2023-03-10 0 167
192 모택동의 이야기(15) 2023-02-06 3 174
191 모택동의 이야기(14) 2023-02-01 3 163
190 모택동의 이야기(13) 2023-01-15 0 146
189 모택동의 이야기(12) 2023-01-01 0 196
188 나의 고국 2022-12-25 0 312
187 모택동의 이야기(11) 2022-12-21 0 175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