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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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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죽의 절개
2014년 01월 15일 13시 13분  조회:2665  추천:5  작성자: 회령
                실화
                                                 송죽의 절개
                                                                                                                   회령

    지금 절개니 지조니 정조니… 하는 말을 하면 시대에 떨어진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가? 그런 우려심에서 좀 망설일 때가 간혹 있다. 정조니 절개니 하면 렬녀문을 세워주던 춘향이 시절을 대뜸 생각하게 되고 케케묵은 봉건통 냄새가 물씬 난다. 말 자체가 봉건시대의 오래된 말이여서, 그리고 “삼강오륜” “삼종사덕” “칠거지악” 따위에서 강조한 주제사상 말하자면 핵심골자여서 봉건사상이라는 선입견이 즉각 튀여 나온다. 공맹지도를 죽어라고 비판투쟁한 여파라고도 할수 있겠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유가학설을 다시 학습하며 유교례의범절을 부활 강조하는 당전 시각에서 볼때 많이 응용해야할 말이라고 인정 된다. 이를테면 모주석의 어록을 학습하던 때처럼 활학활용 해야할 말이다. “신결혼 시대”요 “리혼 행진곡”이요 또 무슨 “자유의 인생 랄랄라”… 같은 주책없는 드라마의 망발을 배격하기 위해서, 청소년과 중장년… 인간들의 건강한 심령을 위해서 활학활용 해야할 말이다.

            림표의 첯번째 안해

    림표(원명 림육용)가 8살일때 그의 부모들은 그보다 3살 위인 왕(汪)씨네 둘째딸을 민며느리로 삼았다. 왕씨네도 림표네 집처럼 회룡진에서는 부자였다. 왕씨네 둘째딸은 수려하고 단정하고 령리하며 얌전하여 린근에서 모두 귀여워 했다. 전통관념에서 볼때 이 혼인은 매우 미만한 것으로 그야말로 문벌이 맞고 천생배필이 였다. 그러나 림표는 아이다 보니 남녀의 정애를 알지 못했다. 그는 어머니와 응석을 부리며 각시는 싫고 공부를 하겠다고 떼질을 썼다. 어머니는 아들을 어루만지며 이 혼사를 대답하면 장래에 꼭 큰 인물이 될거라며 달래 였다. 림표는 알둥말둥 하면서 응낙 하였다.

    림표는 외지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차츰 혁명의 길에 들어섯는데 황포군관학교를 거쳐1926년에는 실습패장으로 북벌전쟁에 참가 하였다. 당시 그는 이미 공산당원이 였다. 13살에 집을 떠난 림표는 그간 림가만에 있는 집으로 한번도 가지 않았다. 왕씨는 독수공방 하면서 23살이 되는 처녀로 되였다. 적막과 처량한 나날이 였다. 림, 왕의 이 혼인은 처음부터 비극적이 였다. 이것은 두말할것 없이 림표를 나무릴바가 아니다. 림표는 처음부터 처녀에게 아무런 정도 없었고 그의 일생을 책임질것도 없었다. 비극의 괴수는 오직 봉건례교일 뿐이다.

    1927년 음력설 전야에 무한에 있는 북벌군의 정식패장인 림표에게로 집에서 편지가 왔다. 편지는 부친이 쓴 것이였는데 늙고 또 병이 고망에 들어 기동도 못하니... 죽기전에 한번 얼굴이라도 보고싶다는… 그런 슬프고 절절한 사연이였다. 효자인 림표는 즉시 청가를 맡고 밤낮을 달려 집으로 갔다. 그런데 부친은 정정하고 집에서는 웃음꽃이 넘쳐 났다. 림표를 결혼 시키기 위하여 부친은 거짓말 편지를 보냈든 것이다.

    림표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씩씩거리며 나는 결혼할 생각도 없거니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일때 당신들이 해 놓은 일이니 당신들이 없던 일로 만들라. 고 딱 잡아 떼였다. 되기나 한 소린가! 자고로 혼인은 부모의 명에 따르는 법이고 중매의 말을 듣는것인데, 십여년 림표를 기다려온 왕씨 처녀는 그래 그저 헛되이 청춘을 랑비해야 한단 말인가. 이웃들에서는 림가네는 말에 신용이 없다고 하지 않겠는가. 늙은 부모들이 애걸하다싶이 사정사정하고 로안에 눈물까지 줄줄 흘리는데야 림표도 어쩔수가 없었다. 설날, 굉장하게 혼례를 거행하고 동방화촉의 신혼방에 떠밀려 들어간 림표는 울적하기만 했다. 그는 왕씨 처녀에게 아무런 인상도 호감도 없었고 애정이란건 더 말할 여지도 없었다. 왕씨 처녀는 달콤한 미소를 머금고 꿈나라로 들어 갔지만 림표는 도무지 잘수가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림표는 밖으로 나와 부모들이 계시는 방에 절을 한후 그길로 떠나 버렸다. 부대에 돌아온후 림표는 즉시 부모와 왕씨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자기는 이미 혁명에 몸을 바쳤으니 언제 죽을지 알수 없는 일이고… 왕씨 처녀께서는 아까운 청춘을 헛되이 하지말고 좋은 사람을 찿아 가기를, 인의가 없는 나를 량해 하여 달라고… 부모님들이 불효한 나를 용서해 주기를… 이런것이 였다. 편지를 받은후 부모들은 대노하여 줄욕을 퍼 부었으나 그것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왕씨 처녀는 며칠 대성통곡을 한후 이생에서 다시는 시집을 가지 않는다고 선포 하였다. 그는 말과 같이 그 누구의 권고도 듣지 않고 종신 재혼을 하지 않았다. 시종 림씨 집에서 온집 로소 식구들을 받들어 모셨다.

    해방후 림씨네 일가는 림표를 따라가서 복을 누리였으나 왕씨 녀인은 불청객으로는 되기 싫다며 본가로 돌아가서 독수공방을 하며 헝겁신을 만들어 팔며 적막한 여생을 보냈다. 류수와 같은 세월은 30여년이 지나 갔다. 림표는 시종 집으로 오지 않았고 무정한 세월은 아름다운 왕씨의 얼굴에 한오리 또 한오리의 깊은 주름살을 새겨 놓았다. 그는 피지 못한 꽃처럼 일찍 늙어 버렸다.

    1959년 초가을 무한에서 중앙공작회의에 참가한 림표는 회의가 끝나자 갑자기 고향에 가 보겠다고 하였다. 누가 감히 등한할수 있는가. 경찰차 한대가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여러대의 승용차가 림표의 까만 홍기패 하이야를 옹위하며 호호탕탕 림가만으로 달리였다. 고향집의 경물은 의구 했으나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치심의 왕씨는 어데로 갔을가. 반나절 두루 돌아 보던 림표는 공사(향)서기에게 왕씨가 어데로 갔는가, 생활은 할만 한가… 하고 물었다. 서기는 마을 로인들에게서 림표가 혼인을 피해 도망간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고 또 왕씨를 몇번 본적도 있는지라 림표가 누구를 묻는지 대뜸 알수가 있었다. 그는 인차 왕씨할머니는 금년에 56살이지만 신체는 단단하고 집에는 아무도 없는데 신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며 생활은 일반적이라고 대답 하였다. 그러면서 만나 보겠는가고 조심히 물었다. 림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머리를 흔들며 필요없다고 말한후 비서더러 3000원을 내여 서기에게 주게 하였다. 그는 서기에게 이 돈을 왕씨에게 전해 줄것과 그가 돈의 래력을 물으면 그저 당에서 주는거라고 말하라고 하였다. 림표가 돌아간후 서기는 왕씨를 사무실에 불러다 돈을 건네 주면서 정부에서 주는 생활보조비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씨가 그말을 곧이 들을리 만무했다.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돈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였다. 서기는 왕씨가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자 그의 귀에 대고 사실을 말해 주었다. 왕씨의 눈에서는 대뜸 뜨거운 눈물이 주루루 흘러 내렸다. 왕씨는 그 후에도 여전히 신발을 만들어 생계를 하였는데 다른점이라면 공소사(상점)에서 열훌에 한번씩 사람이 와서 시장값보다 한배 더 주면서 얼마가 있으면 얼마를 가져간 것이다. 그리고 얼마후에는 정부에서 “혁명로인광영카”를 주어 달마다 생활보조비를 탈수 있었다.

    1967년 왕씨는 적막하고도 처량한 한생을 마치였다. 그때는 “림부주석께서 영원히 건강하시라!”는 구호가 신주대지에 울려 퍼질때 였다. 왕씨가 사망 했다는 소식을 들은 모군구 후근부부장(림표와 절친한 사이)은 림표에게 전보를 쳐서 무슨 지시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림표는 그런일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부장은 상등관재를 마련하고 차 한대에 10여명 전사들을 데리고 가서 후사를 처리해 주었다. 유물을 정리할때 궤짝 제일 밑에서 붉은천에 꽁꽁 싼 3000원 돈뭉치가 나왔다. 부장은 그것을 들고 흐르는 눈물을 금할수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도 고지식한 녀인도 있단 말인가!” 부장은 깊이 한탄하며 머리를 숙이였다.

           허광달대장의 애정

    허광달(원명 허덕화)대장은 풍채가 름름하고 미남이면서도 위엄있게 생긴 인물 체격을 가진 사람이였다. 그와 부인 추정화의 애정은 절개와 정조를 지킨 미담으로 전기적 색채가 농후하다.

    허광달의 혼인도 림표의 첯번째 혼인처럼 부모가 도맡아 결정한 것이다.(림표보다 한살 어림) 그러나 허광달 부부는 그 혼인을 한평생 순결히 지키였다. 말하자면 “부모의 명”에 따른것이라고 할수 있다. 이런 사례는 공화국고급간부들의 혼인사에서 매우 드문일이다.

    허광달은 호남성 장사 동상향 라복충의 극히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 났다. 그의 아버지 허자귀는 순박하고 로실한 농민이였다. 허광달은 7살때부터 지주집의 소몰이를 하였다. 천성이 매우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허광달은 마을에 있는 학교 창문 밖에서 학생들이 글읽는 소리를 틈만 있으면 였듣군 하였다. 어느해 엄동설한의 어느날 그는 글읽는 소리를 였듣다가 까무러치기까지 했다. 학교의 선생은 추희로였는데 그는 밖에서 글읽는 소리를 자주 훔쳐 듣는 아이에 대하여 언녕부터 주의를 돌리고 있었다. 아이의 학습정신에 감동한 추희로선생은 학비를 받지않고 허광달을 학교에 다니게 하였다.

    반년후 추희로는 동창이며 친한 벗인 서특립이 창립한 장사사범학교에 초빙되여 교원을 하게 되였다.(모택동의 모교) 장사로 갈때 추희로는 허광달을 데리고 가려 했으나 가난 때문에 허자귀는 동의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추희로와 허광달의 두 백부가 적극 권고하고 설복한 결과 허광달은 장사사범에 다닐수 있게 되였다. 학교에서 허광달은 학습이며 품덕이 가장 우수한 학생이였다.

    허광달이 14살 되던해 추희로는 허자귀와 토론하고 자기의 9살난 둘째딸 추정화와 혼인을 결정하였다. 당자들은 아이들이다보니 혼인이 무엇인지 물론 알지 못했다. 혼약을 한후 추정화는 장사에 가서 녀자직업학교를 다니였다.

    925년17살에 허광달은 이미 공산당원이였다. 이듬해 그는 조직의 안배하에 황포군관학교에 가서 제5기 포병과에 입학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허씨네와 추씨네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년 13살이 된 추정화는 조숙한 셈이였는지 허광달에 대하여 몽롱한 애정이 있기 시작했다. 허광달은 황포군교에 간후 인차 추정화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군복을 입고 칼까지 찬 멋드러진 사진까지 한장을 보내였다. 추정화는 그사진을 보배처럼 한평생 귀중히 갖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그때 황포군교는 손중산이 세운거고 손중산을 따라서는 틀림이 없을거라고 믿었다.

    1927년 허광달은 황포군교를 필업한후 국민혁명군에 배치 되였는데 그해9월 부상을 당하였다. 하여 손씨 농민집에서 치료를 하게 되였다. 18살 되는 그집 딸 손취화는 적위대원으로 허광달을 극진히 보살폈고 사랑하기에까지 이르렀다. 허광달은 자기의 혼인사를 그에게 말해주면서 그의 사랑을 거절 하였다. 취화는 십분 괴로웠으나 여전히 허광달을 세심히 보살펴 주었다. 얼마후 취화의 아버지가 허광달을 반동파들에게 밀고하였다. 취화는 생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심산밀림속에 전이 시키고 계속 보살펴 주었다. 취화는 허광달의 구명은인이였고 혁명전우였으며 또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처녀였다. 인물체격도 추정화보다는 훨씬 나은 처녀였다. 그러나 애정면에서 허광달은 추호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 상처가 회복되자 그는 즉시 부대로 돌아 갔다.

    1928년 허광달은 당의 지시로 국민당군대에 들어가서 병운공작을 하였는데 신분이 폭로되여 도망치게 되였다. 도중에서 동지들이 서로 흩어지다보니 그는 우선 집에 돌아가서 다시 조직을 찿기로 결심하였다. 오래만에 만난 허광달과 추정화의 기쁨은 이를데 없었다. 때는 이미 허광달은 21살, 추정화는 16살이여서 애정을 아는 청춘들이 였다. 허광달이 집으로 오자 두집 부모들은 8월20일(음) 그들을 제꺽 결혼 시켰다. 그들은 결혼으로 허광달을 집에 붙잡아 두자는 속셈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허광달은 아직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자기는 혁명을 하는 공산당원이기에 수시로 희생을 각오하는 사람이고 정화에게 련루되는 피해를 방지하자는데서 였다. 결코 정화가 싫어서가 아니였다. 하지만 부모들의 결정에 따랐다. 결혼후에도 그는 매일 장사에 가서 조직과 련계를 가지였다. 아니나 다르랴! 결혼후 열흘째 반역자의 밀고로 허광달의 신분은 폭로 되였는데 마침 장사경비사령부에 근무하는 친척이 급보를 전해와서 그는 피신할수 있었다. 급보는 부모들과 정화에게 청천벽력이였다. 정화는 아연실색해서 “당신이 정말 공산당인가요?! 빨리 도망 하세요. 멀리 도망할수록 좋아요.” 여기까지 말한 추정화는 목이 메여 더 말하지 못하다가 좀 진정한후 말을 이었다. “당신이 걷는 길은 옳아요. 나쁜무리를 타도하지 않고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이 살길이 없어요.” 이렇게 급급히 갈라진 그들은 기적같이 꼭 10년후에 만나게 된다. 아니,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리저리 피신하며 도망친 허광달은 당조직과 련계가 끊어졌을뿐만아니라 북경의 어느려관에서 병들어 눕고 말았다. 아울러 병세는 날따라 엄중해만 갔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경지였는데, 이때에 한 처녀가 구원의 손길을 뻗쳐 올줄이야! 그는 려관집 주인의 딸 수씨처녀 였다. 수씨처녀는 북경녀자사범에서 학습중이 였는데 정직하고 열정적이고 아름답고 쾌활한 현대적 처녀 였다. 다다소소 허광달의 경력을 료해하고 있은 처녀는 그를 몹시 존중하였으며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 허광달은 병이 차츰 회복되여 갔을뿐만 아니라 그의 방조로 지하당조직까지 찿게 되였다. 수씨처녀는 허광달을 존경하던데로부터 절절히 애모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때 허광달은 참으로 이 복지에서 살고 싶었다. 그러나 안해를 생각할때 남편으로서의 책임감과 의무를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허광달은 이번에도 리지적으로 수씨처녀를 떠났다.

    1929년7월 허광달은 상해에서 주은래가 령도하는 중공중앙군사간부훈련반을 거쳐 하룡이 지휘하는 홍2군단의 참모 등 직을 력임하면서 혁명투쟁을 하였다.

    추정화는 결혼 열흘만에 남편이 도망한후 장사에 있는 본가로 돌아와서 명헌녀자중학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러다가 집이 더욱 가난해 지여 학업을 접고 한 방직공장에 들어가서 로동을 하였다. 남편이 공산당원이며 혁명을 하는 사람임을 아는 추정화는 항상 남편의 안위를 근심 하였고 또 몹시 그리며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수많은 나날을 보내였다.

    1931년 부상을 당한 허광달은 상해에서 치료하면서 가명으로 집에 편지를 보내였다. 남편이 살아있었다! 추정화는 일희일비의 격정을 참을길 없어 아이처럼 엉엉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후 다시 여러달 감감 무소식이였다. 추정화의 초조한 심정은 무어라 말할수 없었다. 어느날 문득 쏘련에서 편지가 왔는데 그것은 남편이 보낸것이 였다.(상해에서 수술을 곧 하려는 때에 반역자의 밀고로 갑자기 쏘련으로 전이함,) 편지에는10장의 종이오리에 로문으로 쓴 남편의 주소까지 있었다. 회답시 이것을 봉투에 붙이라는 것이였다. 그리고 은전 백원을 보내여 왔는데 사범학교에 다니라는 부탁이였다. 추정화는 곧 그대로 하였다. 하지만 10장의 종이오리로 한 편지는 다시 종무소식이 였다. 추정화의 가슴속에서는 자꾸 불길한 생각이 솟아 올랐다.

    1937년 항일전쟁이 폭발하자 서특립은 추정화를 연안항일군정대학에 보내는것이 좋겠다고 추희로에게 건의 하였다. 아버지와 딸은 대뜸 찬동 하였다. 하여 추정화는 허광달의 녀동생 허계량과 함께 연안으로 달리였다. 여러날이 걸려 연안에 이른 그들은 몹시 피로 했다. 그들이 한바탕 푹 자려고 하는때에 꺽두룩한 군인이 불쑥 집으로 들어 왔다. 삼씨기름 등잔불에 비쳐진 그는 허광달! 6년이나 소식이 없던 남편이였다!

    그간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 젊고 름름하고 고급군사간부인 허광달이 연안에 나타나자 사람들의 주의력이 집중 되였다. 특히 처녀들이 그를 눈박아 보았다. 많은 녀작가 녀연원 녀기자 녀군관 등 녀자들이 그에게 경모의 감정을 품었으며 어떤 녀자들은 사랑을 고백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두말할것없이 모두 거절을 당하였다. 하여 어떤 녀자들은 그를 “감정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까지 하였다. 하지만 보다싶히 허광달이야말로 가장 감정을 알며 가장 감정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였다. 그는 시종 자기의 결발지처를 잊지 않았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은근히 권념조로 “당신이 안해와 헤여진지 10년이나 되고 또 이 란세에 만약 안해가 이미 없어졌다면 기다리는것이 헛짓이 아닌가.”라고 말하니 허광달은 견정불의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였다. “나는 기다리겠다. 만일 그가 죽지 않았는데 내가 다른 사람을 얻는다면 그의 마음을 너무도 상하게 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이 여러해동안 그는 나를 위하여 그렇게 많은 희생을 하며 나를 기다렸는데… 만약 그가 정말로 죽었다해도 그의 묘를 꼭 보고야 승인할것이며 한줌의 흙을 덮어줄 것이다. 그러기 전에는 다시 얻는 일이 없을 것이다.” 추정화가 연안으로 오려할때, 하광달과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은 림백거는 서안에서 허광달에게 전보를 쳐서 오는것을 동의하느냐고 물었다. 세심한 림백거는 적지않은 사람들이(특히 고급간부들이) 혁명에 참가한후 부모들이 결정한 혼인을 추호의 미련도 없이 뒤엎는것을 보았기에, 혹시 허광달의 생각은 어떻겠는지?... 그래서 전보를 쳤든 것이다. 전보를 받은 허광달은 너무도 놀랍고 기뻐서 마구 날뛰며 춤을 추었다. 정화가 무사히 살아 있었을 뿐만아니라 혁명에 참가 하겠다고 까지 하니 희사가 하늘에서 떨어진것만 같았다. 허광달은 즉시 회답전보를 날렸다. 그러나 추정화는 그런저런것을 알기전에 이미 연안길에 올랐다. 허광달 부부가 만난후 항대의 동사들과 학원들은 교육부장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린 녀자가 이토록 평범한 녀자임에(인물체격도 언변도) 모두 놀랐다… 그리고 허광달에게 심심히 탄복 했다.

    그때로부터 그들 부부는 줄곧 함께 있었다. 이듬해, 결혼 10주년을 맞으며(그해 추정화는 입당) 허광달은 금할수 없는 격동을 시로 써서 안해에게 주었는데 추정화는 그것을 진귀한 보물로 보관하며 한평생 감미로움을 만끽 하였다. 1949년 허광달 부부는 란주해방전쟁에 참가한후 그곳에서 개국성전을 맞게 되였다. 그날 그들 부부는 무량한 감개로 밤을 새우며 지나온 나날들을 회고 하였다. 그날밤 추정화는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당년에 내가 어찌 오늘과 같은 날을 생각 하였겠어요. 당신과 만날날만 바라면서 만나기만 하면 더 바랄것이 없다고 생각 했죠.” 얼마나 진지한 순정이며 진솔한 고백인가!...

    1950년 허광달은 중국인민해방군 장갑병사령부가 성립 되면서 사령원으로 임명 되였다. 그리고 추정화는 사령부기관당총지서기가 되였다. 국가의 고급 장령이면서 령도인인 허광달은 부인을 대동하여 중대한 례의장소에 나가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추정화는 그런 활동에 참가하는것을 싫어 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젊고 아름답고 눈부신 부인들 앞에서 자신은 너무도 늙고 평범하여 볼품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남편의 형상에 손상을 준다는데서 였다. 그러나 허광달은 전혀 다른 관점이였다. 그는 중대한 활동마다 꼭꼭 부인을 대동하여 참가 했다. 그는 매번 부인을 이런말로 설복 하였다. “국가의 위엄있는 례의는 겉치례에서만 표현되는것이 아니다. 주요하게는 국가의 령혼, 사기, 민풍과 인민의 정신면모에서 보게 된다. 이면에서 당신은 외국의 무관부인들과 당당하게 비교할수 있다. 조강지처는 자리에서 물러나게 못한다는 말과 같이 이것은 최저의 사람도덕이다. 황차 당신과 나는 수 년의 환난부부가 아닌가!”

             태산의 송죽같은 진소민

    동악의 태산은 오악에서도 제일 이름 높은 태악이다. 태산의 상상봉에 조용히 서 있는 몇그루의 낮으막한 송죽은 음미하며 보면 볼수록 감회가 깊다. 소나무는 변함없는 그 푸름으로 절개를 상징하고 대나무는 꺾길지언정 굽으러 들지 않는 특성으로 정조를 표현한다. 진소민이 바로 그 송죽과 같은 녀인이다. 그의 32주기제를 보내며 고인을 간단히 회고해 본다.

    진소민은 산동 수광 사람으로 1902년에 태여났다. 그는 13살에 일본 면사공장에서 아동공으로 일했으며 1928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 하였다. 1930년 스물아홉의 로처녀 진소민은 임국정과 결혼 하였다. 당시 임국정은 산동성위서기였는데 청도에서 세집을 맡자고 하니 부부가 아니면 세집을 주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하여 조직에서는 진소민을 그의 안해로 가장시켜 세집을 맡게 했다. 후에 그들은 애정이 생기면서 가짜부부가 진짜부부로 되였다. 1931년10월 반역자의 밀고로 임국정은 체포 되고 그해 11월에 사형당했다. 1년 남짓 부부생활을 한 진소민은 서른살에 과부로 되였다. 그후 한평생 재혼을 하지 않았는데 그를 마지막까지 지켜준 반려는 임국정의 사진과 작으마한 도자기 조각상이 였다.(강서에서 남편을 기념하여 특별히 만들었음) 그야말로 “일부종신”(한 남편을 지킴)을 지킨 렬녀라 하겠다.

    지난세기 20년대부터 직업 혁명자로 나선 진소민은 우수한 공산주의전사였고 인민의 좋은간부였고 좋은누나였다. 그는 당의 중요한 위치에서 여러가지 령도직무를 력임하면서 혁명사업에 충성을 다 하였다. 군에서도 사업했고 정부에서도 사업 했으며 7기 중앙후보위원, 8기중앙위원이였고 인대와 정협의 상무위원 전국총공회부주석을 지내였다.

    1968년10월13일부터 31일까지 중공중앙8기12차 전체회의가 북경에서 진행 되였다. 중앙위원인 진소민은 당연히 회의에 참가해야할 사람이였으나 총공회반란파들이 회의통지서를 깔아두고 계속 그를 투쟁하였다. 진소민은 문화대혁명에 대하여 처음에는 소수의 자산계급사상이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교육을 진행하는 것인줄로 알았다. 하여 적극적으로 군중을 발동하며 운동에 뛰여 들었다. 그는 기층에 내려가서 운동의 진행정황을 료해하는 한편 총공회당조 령도들에게 군중속에 들어가서 운동에 대한 령도를 가강할것을 요구 하였다. 동시에 군중들에게 자신의 착오와 결함, 부족점들을 대자보로 지적 비판하며 총공회 사업에 대해서도 비판의견을 대자보를 붙이라고 호소 하였다. 그런데 운동은 류소기를 타도하는 방향으로 치달으며 건국후 그때까지 17년의 모든것을 부정 하였다. 자산계급반동로선, 수정주의, 검은선이 통치했다고 하면서 모든 로간부와 각급령도를 비켜 세우고 비판투쟁을 진행 하였다. 당신들은 검은사령부에 속하는 사람들이고 당신들의 검은사령은 류소기라는 것이였다. 해방전과 해방후 장기간 류소기 신변에서 그의 령도를 받으며 사업해온 진소민은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으로 그런 견해를 절대로 동의할수 없었다. 그는 이것은 딴심보를 품은 일부 사람들의 작간이며 로간부들을 밀어내고 권력을 빼앗기 위한 수작이라는 것을 간파 하였다. 진소민은 자기의 정치적 관점을 조금도 숨김이 없이 공개적으로 반란파들과 맞서고 문화대혁명과 대항 하였다 그는 두말할것 없이 극히 완고한 “보황파”, “검은맹장”, “반동분자”로 찍혀 호된 투쟁과 참혹한 학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회의직전 주은래는 직접 사람을 보내여 진소민을 데려오게 하였다. 반란파들은 “진소민은 검은패거리며 반역자다. 중앙수장(강청)이 지시했는데 그는 참가자격이 없다.”하며 맞섯다. 파견을 받고 간 사람들은 “주총리의 지시를 누구도 막지 못한다.”하고 엄정히 선포하였다. 이렇게 진소민은 8기12차 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다.

    회의는 소조로 나뉘여 소위 “2월역류”의 “검은맹장”들인 진의 엽검영 담진림 리부춘 리선념 등 로일대 혁명가들을 포위공격 하였다. 다음은 류소기전안조에서 만든 “심사보고”를 토론 하였다. 그리고 위원마다 태도표시를 해야 했는데 진소민은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고하였다. 하여 그는 여러날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듣는체도 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심사보고”는 사실과 맞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모순이 많았다.

    10월31일! 전체회의가 열리였다. 회의에서는 류소기에 대한 “심사보고”와 “당에서 영원히 제명”하는 결정을 통과하는 절차를 거행하게 되였다. 대회가 시작되자 집행자 림표는 “심사보고”를 공중에 내여 흔들며 “이것을 한개 재료로만 보지 말아야 한다. 이것으로 류소기가 영원히 번신하지 못하게 한다. 지금부터 표결을 하겠는데 동의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 132명이 손을 들었다. 림표는 또 공식적인 어조로 “반대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말하였다. 진소민 한사람이 손을 들었다.

    페회후 강생은 진소민과 따지고 들었다. “무엇때문에 심사보고를 동의하지 않소?” “나는 심사보고의 그런 사실들을 믿지 않소. 적발한 사람의 재료도 믿지 않소.” “왜서 류소기의 출당을 동의하지 않는거요?” “이건 나의 권리요.” “그럼, 당중앙을 믿지않는 거요?” “강생동지! 나는 당원이요.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무슨표를 내든지 이건 나의 권리요. 나의 그 한표에 그렇게 많은 내용이 포함되여 있지 않소. 무한히 고도에 끌어 올리지 말기를 바라오.”

    그날, 진소민은 회의실에서 쓰러졌는데 마음 좋은 운전수가 집까지 모셔 갔다. 그후 진소민은 줄곧 병석에서 신음하며 비인간적인 투쟁을 당하였다.

    이듬해 10월 진소민은 림표의 “전비소산” 명령으로 해서 악예변구의 로 혁명근거지였던 라산으로 갔다.(병이 중하여 사람들이 기차에 들어 올렸다) 이곳은 당년에 그가 군중을 령도하여 항일을 하였던 곳이다. 당지의 군중들은 진소민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감독인원들을 아랑곳 하지않고 진소민을 보살폈다. 하지만 매우 차한 환경에서 그의 건강은 몹시 악화 되였다. 림표가 죽으후 그는 비로서 북경으로 돌아와서 치료를 받게 되였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회복되지 못했다.

    4인패가 망한후 그는 몹시 기뻐하면서 “이젠 당과 국가가 희망이 있게 되였다. 나도 눈을 감을수 있게 되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신변의 사람들에게 그 어떠한 정황에서도 진리를 견지해야 한다고 당부 하였다. 림종에 그는 두 조카에게 “나는 가야겠다. 너희들은 나처럼 당당정정한 사람이 되여라. 제손으로 살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줄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내가 죽으면 돈을 쓰지말고 내가 한평생 제일 즐겨 입던 그 곤색낡은옷을 입혀 다오. 로동하기 편리하게.”

    1977년12월14일 밤, 진소민은 76세의 빛나는 한생을 마치였다. 그는 인민들에게 사심도 두려움도 없는 혁명정신을 청사에 길이 빛날 한표에 담아 남겨 주었다.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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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정영구
날자:2014-08-31 14:52:20
음...한마디로 대서사시네요...어쩌면 저렇게 영웅의 삶을 살수가 있을까...절개 충성..의리...정말 살아가면서 쉬운 것이 아닌데..그저 눈시울이 뜨겁고 가슴이 뭉클해질뿐입니다.
진소민

마지막 유언 노동하기 편리하게....아 잊을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좋은글 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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