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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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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당원
2014년 01월 27일 12시 26분  조회:1975  추천:1  작성자: 회령
            실화
                                             비 당원
                                                                                                          회령

    80이 넘은 외삼촌 내외분이 회갑을 쇤다고하여 우리부부는 고향마을에 다녀오게 되였다. 수천리 먼 광주에서 제노릇에 바쁘다 보니,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하는 걸음이다.

    나의 고향은 향에서도 제일 궁벽해서 사람이 못살 고장이라고 소문난, 산골에서도 산골마을이다. 그런데 30여년만에 와보는 고향마을은 이거야말로 천지개벽 그대로 였다. 향정부마을에서 고향마을까지 30여리를 마치도 흰비단필을 쭉ㅡ편것같은 포장도로가 경탄을 금할수 없게 하였고 30여호의 벽돌기와집, 인삼장, 버섯장, 비닐하우스, 굉장히 큰 양돈장, 우사, 양봉, 양계장, 산천어, 하마양식장… 경운기, 자동차, 오토바이도 여러대가 보이였다. 마을에는 또 산장(다공능 유흥시설. 상점도 경영)하나, 가공업(가루를 내고 국수, 기름, 두부를 만듬)을 하는 집도 한집이 있었다. 그리고 합작의료를 하는 위생소도 있었다. 아이들은 향정부마을에 있는 소학과 초중에 다니는데 소형뻐스가 15분이면 실어가고 실어 왔다. 일손이 바쁜 마을사람들, 기계의 동음, 들락거리는 유흥객… 마을은 생기가 넘치고 흥성흥성 하였다.

    꼬부랑 산골로인네로 언녕 된줄로 알았는데, 웬걸! 외삼촌 내외는 꿋꿋하고 정정 했다. 60대 같았다. 내가 하아! 하아! 하면서 마을의 변화 발전에 연신 감탄을 하니 외삼촌은 매우 흐믓해 하면서 놀라운 일은 아직도 더 있다면서 흥분하며 말하였다. …지금은 새마을 초급계단이여서 원시적영농이 위주지만 이제 몇년내로 심층가공상품영농이 벌어지면서 더욱 흥성거릴거라는 것이였다. 개발여지 발전여지가 무한이 많다면서 성수가 나서 말하는 외삼촌은 혈기 왕성하고 패기가 넘치는 4,50대장년 같았다.

    회갑잔치는 마을의 산장에서 온하루 흥겹게 진행 되였다. 도시의 잔치는 돈냄새가 물큰물큰 나서 거뿐하고 유쾌한 기분이 못되지만 고향마을 외삼촌의 잔치는 그야말로 배껏 먹고마이고 한바탕 마음껏 놀아제끼는 신나는 잔치마당이였다. 남녀로소 온마을 사람들이(200여명) 점심 저녁을 함께 먹었다. 원근의 하객들은 점심후 대부분이 돌아갔다. 밤참까지 먹고가라면서 붙들고 말리고 야단법석을 하는가 하면 익살군 경로원 원장은 두무만한 벌건배를 두드리며 아낙네들 앞에서 마음대로 만져보라고 내밀어 웃음통이 터지게 하였다. 촌서기량반은 우정 비틀거리며 갈지자를 놓고 촌장은 뒹굴고 기며 사람들을 웃기고 향정부민정은 훌렁 벗어진 번들이마에는 증편을, 량 볼따구에는 찰떡을 붙이고 노들강변을 한들한들 췄다.… 하객들은 떠나가면서도 한막을 놀아 주었다. 생콩을 뜯어먹고 배가불어 다 죽게된 소를 살려줘서 한뉘 잊을수 없다면서 곱새춤을 추는 사람, 하우스에 도라지, 더덕, 산딸기와 곰취재배를 하게 인도해 줘서 오늘이 있게 됐다면서 감격에 목메여 연설하는 사람… 인정미, 사람맛이 물씬물씬 풍기는 푸짐한 잔치였다.

    고향마을에서는 4년전부터 관혼상제(결혼 회갑 상측)를 마을공적금으로 치른다고 한다. 듣다가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생활이 윤택해지니,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틀린말이 아니였다.

    마을에는 “촌민소조”라는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을사람들의 추천으로 만들어진 행정기구 였다. 말하자면 옛날 집체화시절의 “대무위원회”같은 것이다. 다섯사람으로 된 소조에서 조장은 정부에서 승인하는 법인대표격이고 다른 네사람은 마을에서만 인정하는 령도들이다. 그속에는 나의 외삼촌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벼슬은 어마어마하게도 고문이라는 것이였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지금도 “장회계아바이” 혹은 “비당원아바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호조조시절로부터 개체화가 될때까지 줄곧 마을의 회계일을 했기 때문이고 그리고 어느땐가 공사(향)3급간부회의때 당위서기어른이 “거, 천불치에서 장회계비당원동무가 왔소? 주석대루 나오우.”하고 별명을 부른데서 아주 정식으로 명명이 되였든 것이다.(그날 대회에서 생산대재무관리경험을 소개 했음.) 촌민소조간부들은 일전한푼 보수를 받지 않았다. 그들은 조화로운 새마을 건설을 위하여 크고작은 실제적인 일들을 참답게, 책임성 있게, 열성껏 한다고 하였다. 중대사는 마을회의에서 결정하고 재무장부는 낱낱히 공개하여 그야말로 관료주의, 형식주의, 부정부패가 없었다.

    나의 외삼촌은 내가 알기로는 원근에서 드문 훌륭한 분이였다. 그는 공산당원처럼 살려고 은근히 노력한 사람이다. 그의 본보기는 김시룡(전국로동모범)이였던것 같다. 외삼촌은 “자기집을 집체우사로 내여놓다니?! 참!... 김시룡은 정말로 훌륭한 분이다.”하고 감탄하며 자주 말했다. 그가 아는 김시룡은 대개 이정도 뿐이였으나 그는 매우 감동해 하였다. 그는 김시룡과 같은 당원이 되리라 다짐한것 같다.

    그러나 외삼촌은 끝내 입당을 하지 못했다. 왜서 입당을 못했는가? 이 문제를 말하자면 좀 심각하고 길다.

    외삼촌은 조선 청진에서 고중을 다니다가 광복이 되자 집으로 돌아 왔다. 그때로부터 줄곧 마을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농민지식분자인 셈이다. 토지개혁공작대가 소수레가 있고 자작농을 하며 생활상 자급을 한다고 해서 나의 외가집가정성분을 상중농이라고 획분 했었는데, 외삼촌이 그것을 바로 잡아 집안에 큰 공헌을 했다. 상중농은 부농이 될가말가한 것으로 개혁개방전까지 기본상 계급의 적으로 취급하였다. 이것은 후일담이고, 당시에는 소수레와 밭의 일부를 청산과실로 빼았겨야 했다. 그런데, 외삼촌이 밭이며 소수레, 집… 가정재산 전체를 식구당 비례를 뽑아보니 그것이 아니였다. 하여, 하중농으로 매겨지고 몰수를 피면했든 것이다. 여기서 간단히 짚고 넘어갈것은 그때 마을에서 득세한 허씨네가(빈고농단간부들) 공작대간부를 롱락하여 수작을 부렸다는 것이다. 지금말로 하면 부정부패행위라고 할수 있겠다.

    외삼촌이 정직하고 온순하고 착실함을 잘 아는 마을사람들은 소겨리, 호조조때로부터 마을의 “도티(돼지)고기문세(장부)”를 하게 하였다. 고집이 센 외할아버지는 마을간부질을 하는 허씨네가 보기싫어 싹! 걷어장지라고 하루건너 야단을 쳤지만, “마을사람들이 자꾸 부탁을 하는데 어찌 그럴수 있어요.” 하며 외삼촌은 문세를 맡았다. 그렇게 시작한 회계일을 외삼촌은 장장 38년이나 하였다. 그러다가 개체화가 되면서 집체의재산처리까지 원만히 끝낸후 마을의문세를 젊은사람에게 인계해 주었다. 외삼촌의 회계능력은 현에서도 높히 인정해 주었다. 그는 현과 공사(향)의 표양도 여러번 받았다.

    “4청”운동시 허씨네를 중심으로한 대무위원회에서는 회계직을 빼앗아 자기네 집안사람에게 넘기려고 하였다. 그들은 탐오한걸 탄백하라면서 단지곰을하며 지어는 때리기까지 하였다. 생사람을 잡는판인데, 공사재량위원과 몇개대대(촌)회계들이 와서 장부를 몽땅 맟춰본후 1전의 차이도 없다고 결론해서야 외삼촌은 풀려 났다. 전체사원대회에서 문제가 없다고 재량위원이 선포한후 외삼촌은 회계를 다시는 안한다고 성명을 했다.

    그리고 반년거이 파업을 하다가 마을사람들의 아우성을 못이겨 다시 수판을 쥐였다. 이번에는 외할아버지는 더 말할것도 없고 외삼촌댁까지 나서서 기를 쓰고 막아 나섯다. 장부책이며 수판을 둘러메친것이 몇번인지 모른다. 수판은 네개나 박살이 났는데 외삼촌은 번마다 자기돈으로 수판을 사서 썼다. 석유등잔도 여러개가 부셔졌다. 외삼촌댁은 일전한푼 보수도 못받는일을, 아까운 집의 석유만 축낸다며 시도때도없이 쩍하면 바가지를 긁고 또 긁었다.(문화혁명중기부터 회계공수를 주었지만 종래로 받지 않았다. 장부처리는 밤이거나 일을 못하는 날이면 하였다.) 여기서 또 간단히 짚고넘어갈것이 있다. 외삼촌이 파업을 할때 공사재량조리원으로 갈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무위원회”에서 장회계를 데려가면 집체경제가 망태기로 된다면서 사원들이 반대한다고, 집체를 내들고 훼방을 했다. 하긴 회계뿐만 아니라 농업기술에서 지식이 깊다보니 외삼촌은 생산대(촌민소조)총공정사 역활도 착실히 했든 것이다. 그는 오직 생산대가 잘되게 하려고, 자신을 포함해서 마을사람들이 하루라도 빨리 잘살게 하려고, 그 일념뿐이였다. 그야말로 전심전의 였다. 그에게 만약 “사심”이 있었다면 그것은 추호도 량심을 속이는 일이 없이, 집체를 위하여, 사원들을 위하여, 부지런히 노력을 한다면 어느날엔가는 자기도 김시룡과 같은 당원으로 될수 있겠다는 것이였다. 재량조리원건에 대하여 사원들은 아깝긴 하지만 남이 출세하는걸 막으며 심술 피우는건 일이 아니라고들 했다. 역시 그때 대대에서 회계로 쓰려고 했다.(로동탈리 전직임) 그런데 이것은 본인이 싫다고 했다. 그것은 후보자가 둘이였는데 락선이 되는 사람인즉 능력이 약하기도 했지만 신체가 허약했다. 하여 외삼촌은 다시는 회계를 안한다는 태도로 막아치웠다. 기실은 이번 기회에 생산대를 떠나고 싶었으나 허약한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때 양보하지 않고는 량심상 내려가지 않았던 것이다.

    허씨네 사람들은 무식하고 사심이 많은 사람들이긴 하지만 정치후각만은 민감 했다. 문화혁명 기간까지 허씨네는 세 사람이 선후로 입당 했다. 그들은 대대와 공사의 간부들을 잘 친하는 기교가 있었는데 미인계도 쓸줄 알았다. 허씨네 소위 문중에는 젊은과부가 있었다. 그의 남편은 조선전쟁시 변방보초 순번을 나갔다가 밤에 특무놈들에게 피살 되였다.(민병임) 아이가 셋이나 되는 과부는 미인은 아니여도 바람 쓸줄은 알았다. 이런 눈치를 알고 있는 허씨 간부들은 뭐니뭐니해도 령도어른들과 잘 친해야 이런저런 리득을 본다느니, 무슨일이나 득이되는 일을 해야 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며 바람멱수를 내다보게 은근슬쩍 꼬드겼다. 대대와 공사의간부 몇은 과연 과부와 도둑재미를 보았다. 농민들은 남의 허물은 부부간에도 수월히 말하지 않는다. 과부는 수년을 그렇게 살면서 별탈이 없은외에는 실제로 리득을 본것은 별로 없었다. 바람피운 간부들은 제발등이 저리고 사람들의 눈치가 꺼려 과부를 내놓고 돌봐주지 못했다. 대신 허씨네는 있는힘껐 달라붙어 세 사람이 입당했다. 그리고 자식들을 합작사며 림창 공사기업에 취직시키는 등 소궁둥이를 벗어나게 하였다. 과부는 아들 하나를 겨우 대대벽돌가마에 출세시켰을 뿐이다.(얼마후에는 벽돌가마를 걷어 치웠다) 문화혁명후 틀린것을 바로 잡을때 허씨네 당원 세 사람은 재료며 리력을(당안) 위조하여 토개간부라느니 문화혁명기간에 맞아서 을병이 들었다느니 하며 온갖 간계를 다 썼다. 하여 그들은 국가의 유관정책 대우를 받아먹는 “농민월급쟁이”로 둔갑 했다. 그중 한사람은 공사생산조리원으로 승진까지 했다. 그들의 뼈속까지 궤뚫고 아는 마을사람들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혀를 끌끌 차기만 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남의 허물을 추켜들고 말하지 않았다. 훗날 그들은 왜서인지 슬금슬금 다른 고장으로 이사 가 버렸다.

    나의 외삼촌은 대대, 생산대 “간부”들을 속으로 미워하며 싫어 했다. 지어는 멸시하기까지 하다보니 결과적으로는 조직과 멀어 졌다. 대대와 공사의 어떤 간부들과 당원들이 조직에 의거하며 사상회보를 적극하며 입당을 쟁취하라고 한두번만 권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외삼촌은 결벽증(더러운것 그릇된것을 극단적으로 미워하는 성질)이 있는 사람처럼 “나는 아직 멀었수다.”하며 될수록이면 “령도”들을 멀리하였다. 그리고 재무에 한해서는 추호의 모호함도 허용치 않았다. 공금으로 먹거나 지출에서는 일전한푼 똑똑히 눈을 밝혔다. 결국은 “령도”들도 그를 눈에든 가시처럼 미워 했다….

    개체화후 외삼촌은 아들 며느리를 로무로 한국에 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인삼장과 버섯장을 소규모로 시험삼아 꾸리였고 성공 했다. 그후 아들 며느리를 돌아오게 하고 본격적으로 상품화영농을 통이 크게 벌이였다. 외삼촌이 “만원호”에 들어선것을 보고 마을사람들도 술렁거리기 시작 했다. 외삼촌은 그들에게 항목 선택으로부터 기술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고도 정성어린 방조를 하였다.ㅡ

    회갑잔치후 어느날 내가 입당을 하지 못한것이 섭섭하지 않은가고 물으니 외삼촌은 왜서 섭섭하지 않겠는가?! 섭섭한 마음은 지금도 그냥 여전하지만, 이젠 다 지나간 일이 아닌가! 김시룡 같은 당원을 본보기로 일생을 살아온것은 가슴이 뿌듯하다고 하였다. 비록 그이처럼 영웅은 되지 못했지만… 여한은 없다고 하였다. 여한이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외삼촌의 말이 리해 되였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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