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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당
2014년 01월 31일 15시 22분  조회:2630  추천:1  작성자: 회령
             중편실화
                                                       산천당
                                                                                                           회령

    신석동 동구앞에는 운동장 크기의 공터가 있는데 그 복판에 산천당이 있다. 산천당은 마을과 3백여메터가량 떨어져 있다. 그런데 신석동의 산천당은 그 무슨 단(坛)도 아니고 당(堂)도 아닌 수림이다. 운동장크기의 공지가운데 아름드리 참나무고목이 20여그루 무럭무럭 서 있는데 열두칸 기와집 터전보다 더 넓어보이는 땅이다. 주변으로는 배배 탈린 가지를 양산처럼 펼친 애송나무와 비술나무가 몇그루 서 있고 싸리나무 개암나무 무더기가 몇곳에 있을뿐 자질구레한 잡초들 뿐이였다. 마을에서 내다 보거나 멀리쯤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면 참나무숲은 마치도 커다란 궁궐같이 안겨왔다. 아름드리 미끈한 줄기가 10여메터 곧게 뻗친위로 무성한 가지들이 얼기 설기 엉켜 마치도 지붕같이 되였는데 봄, 여름에는 푸른기와, 가을에는 황금기와를 얹은듯 했고 겨울한철에는 검은기와를 덮은듯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당이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산천당 즉 참나무고목수림속에는 커다란 바위가 세개 박혀 있는데, 천신을 대표한다는 제일 큰 바위는 자동차대가리만큼 컸고 그옆으로 대여섯 발작 떨어져 있는 지신 대표 바위돌은 천신바위보다는 작았지만 그것도 수레안틀만큼은 컸다. 천신바위와 지신바위 뒤켠으로 대여섯발작 떨어진곳에는 커다란 바위돌이 또 한개가 있었는데 그것은 마을 보호신을 대표하는거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세개의 바위돌은 급에 따라 크기가 분명했는데 마치도 서너살 터울이 되는 형제들 같았다. 위치도 이를테면 아주 적절했다. 천신과 지신을 대표하는 바위는 다정하면서도 점잖은 부부처럼, 나란히 서있고 마을신을 대표하는 바위돌은 효자처럼 뒤에 선것이 공손해 보이였다. 현대적시각에서 보면 지도자 뒤에 따라다니는 겸손한 아래간부 같았다.

    산천당이 천생적인것인지 인공적인 것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산천당 제례행사만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백여년전에 신석동이 생겨서부터 해마다 치르는 동중대사로서 음력 사월초여드레날이면(4월8일) 마을사람들은 리유불문하고 하루 휴식하면서 극히 경건한 마음으로 산천제를 올리였다. 휴식이라기보다 매우 정중한 행사의 날이였던것이다.

    제례음식감은 추렴으로 걷었는데 집집마다 정성을 다해 자기몫을 내였다. 돼지값과 술값은 돈으로 풍기였는데 어떤때는 잘사는 집들에서 전담을 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공익행동을 한것인데 그런 소행은 오래동안 원근에 미담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극히 적었다.

    해방후 윤영칠이란 사람이 신석동에 토지개혁공작대로 오게 되였다. 그는 산천당제례를 걷어치우라고 불호령을 하였지만 빈고농협회적극분자들을 위수로 마을사람 전체가 듣는체도 하지 않아 시무룩하고 말았다.

    빈고농협회 몇몇 적극분자들은 마을에서 한집뿐인 부농인 문명순을 청산하는데는 말그대로 발벗고 나섰고 마을사람들도 따라 나섰는데 허석근이란 사람은 그때 입당까지 하게 되였다. 허석근은 사람들이 “거렁뱅이”라고 부르는 허씨문중에서 장손인가 한 30대 장년이였는데 정직하고 말머리가 무거운 사람이였다. 그런데 우직한것이 흠이였다. 그는 광복후 야학반에 다니긴 했으나 글귀가 트지 못해서 반문맹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지주, 부농을 때려부시고 빈고농은 번신해야 한다!”, “청산과실(지주, 부농의 모든 재산)은 혁명과실이다. 빈고농의 재산이다!”하는 몇마디 정치구호는 잘 사용했다. 그리고 사람이 우직해서 마을의 부농집 문명순을 투쟁하는데 앞장을 섯다. 윤영칠이 밀어주자 그는 자기도 신세진바 있는 문명순 내외를 여러번 호되게 구타 하기까지 했다. 어느 마을에서 부농이거나 상중농을 투쟁하는 열정이 높지 못하면 공작대에서는 허석근을 불러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허석근은 상기의 그 익숙한 정치구호를 고래 고래 소리친후 대뜸 호된 손찌검을 들이 댔다. 그런데 몇달후부터는 허석근이 주먹질이 쑥 들어가버렸다. 입당을 하면서 공작대책임자의 교육도 있었거니와 마을 또래들로부터 “그러는게 아니다.”는 꾸중도 받았던것이다.
   
    허석근의 안해는 동글납작하게 생긴 해사한 녀자였다. 알릴듯 말듯하는 사팔눈은 어찌보면 애교를 부리며 추파를 보내는것 같기도 했다. 토개공작이 끝나갈무렵 허석근의 처와 윤영칠이 바람피운다는 말이 수근수근 돌다가 얼마안되여 윤영칠이 흑룡강밀산에 있는 제집으로 돌아 가면서 흐지부지 해지고 말았다.

    다른 마을에서도 해마다 사월초여드레날이면 산천제를 지냈으나 농업합작화후부터는 선후로 거지반 식어버렸다. 그런데 신석동에서는 해마다 어김없이 산천당에 가서 신령께 제를 올리였다. 공사관리위원회(향정부)와 대대(촌)령도에서 허석근이나 마을의 간부라는 사람들께 봉건미신활동이니 그만두어야 한다고 몇번 말하였으나 다 귀등으로 흘려보냈다. 허석근이를 비롯한 신석동 간부들은 “동네로인님들이 쉬는겸 그러는걸 가지구 … 무슨 대단한 일이라구. 듣지 않는걸 완력으루 때려 부시겠수? 모르는체 하시우.”하고 되려 대방을 설득하려 들었다. 당시, 상부에서는 께름직하기는 했지만 경찰을 동원할일도 아니고 하늘이 무너질 일도 아니여서 그러다가 놔두고 말았다.차츰 개명해지면 저절로 없어질것이니까 급해할 일도 아니였다. 풍속습관이란 사회의 발전에 따라 변하는 것인데 페습은 저절로 점차 사라지고 진보적인 새로운 형식이 점차 또 형성되기 마련이다.

    신석동의 산천당제레행사는 끈질기게 해마다 이어졌다. 집집마다 귀한 차입쌀과 통장제로 사온 기름방울을 산신제 공양보시로 상몫을 떼여 두었다가는 행사전날 잔치집에 가져갔다. 거기서 정성껏 제사음식을 만들었다. 유사는 들어오는 진상품을 호별로 적발했다. 그리고 동중노인들 좌석에서 보고를 했는데 누구네가 추렴으로 분담한것보다 더 가져 왔거나 닭알 혹은 북어, 닭마리를 더 가져 왔다고하면 “그것참, 기특헌지고!”하며 머리를 끄덕여주었다. 집체에서는 돼지와 분토재(감분국수), 술 같은 큰돈이 드는것을 슬그머니 보시 했는데 군중들은 물론 상급령도에서도 눈감아주었다.

    그런데 “4청”운동때 공작조가 캐고 들어서 신석동간부들이 고백을 했지만 온마을 남녀로소가 누구도 빠짐없이 다 같이 먹었는데 대장이나 부기원을 탐오 했다고 할수도 없는 일이였다. 그리고 공작조로 온 사람이 우선 너그러운 사람이였다.

    “4청”운동을 련속 3년이나 거듭했지만 신석동의 그 랑비문제는 그냥 해마다 존재했고 계속 그 정도의 액수였다. 신석동에는 그때까지 다른 문제는 한건도 터지지 않았다. “랑비”부분은 “생산대집체봄놀이활동경비”라고 결론을 내리였다. 물론 신석동 간부들에게 예수쟁이 간부라느니, 미신에 걸린 얼떨떨간부라느니 … 하는 말도 들렸다. 그러나 결국은 모두 “깨끗한 간부”들이라는 감정을 받았다. 제례행사뒤에 온마을사람들이 점심밥으로 제사음식을 한밥 잘 먹고는 유쾌한 오락을 저녁때까지 하고는 저녁밥까지 먹고 헤여 졌던것이다. 하여 봄놀이라는 명분을 세우게 되였던것이다.

    제례전날 마을사람들은 몸을 깨끗히 씻었다. 부부들은 몸이 근질거려도 잠자리를 갈랐고 이튿날에는 새것이든 묵은것이든 아무튼 깨끗한 옷들을 갈아입었다. 이속에는 신령께 정성을 다해 앞날을 기원하는 심정과 마을 전체가 잘 되기를 바라는 집단의식이 들어있었다. 부정한 몸과 마음으로 산천당제례에 참석하면 본인과 가족, 동네 모두가 화를 당한다고 대대로 엄히 훈시를 받아 왔기에 사람들은 아주 자발적이고 자각적이였다. 신석동에서 제일 무서운 꾸중은 “동네를 망칠놈!”이라는 것이였다.

    산천당제례 도감은 당시 마을에서 좌상 로인이 맡는게 관례였다. 만일 좌상어른이 사정으로 (주요하게는 신체상황)도감을 못할 경우에는 동중어른들이 복이 있고 덕망이 높은 노인을 천거하여 지정했다.

    사월초여드레날, 늦으막한 아침이 되면 공복으로 제물을 실은 수레를 앞세우고 도감어른이하 년령의 고하순으로 줄을 서서 마을 사람들은 극히 공손한 자태로 산천당에 간다. 유사는 오늘 정중한 행사의 집사(집행주석)소임을 하게 되는데 그는 술방구리(술통)를 조심히 껴안고 수레옆에 붙어서 따라가야했다.

    산천당에 이른후 집사는 선정된 몇몇 사람을 지휘하여 제례상을 차리는데 천신께 먼저 상을 올린다. 그런데 수절은 꼭 두벌을 놓는다. 그것은 신령님과 부인이 겸상으로 음복하기 때문이다.

    상이 다 차려진후 도감어른이 사람들을 이끌고 신령님께 문안인사를 올린다. 도감어른이 “일배! 재배! 삼배!”하는 구령에 따라 남녀로소 전체가 말그대로 코가 땅에 닿게 절을 한다. 다음은 도감어른이 잔을 받쳐들고 집사가 술을 따른다. 도감은 첫잔을 좌측에 갖다놓고 다음잔은 우측에 갖다 놓는데 그것은 천신님은 남자고 좌측에 착석했기 때문이다. 잔을 올린후 도감은 땅을 짚고 꿇어 앉은 자세로 머리를 들어 천신바위를 쳐다보며 얼마간 뜸을 들이는데 이 시각이 제일 요긴한 대목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때에 도감어른이 천신님께 마을사람들의 간절한 념원을 말씀 올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리를 내면 신령님께서 놀라시기에 속으로 말한다. 하여 사람들은 제대로 잘 말씀하지 못할가봐 은근히 긴장해하고 말씀 잘하기를 또한 긴장해서 기다린다. 신령님은 지존지대지강한분으로 무소부지, 무소불위신통력을 갖고 있기에 심기를 노엽히지 말고 환심을 잘 사야한다고 사람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순간에는 모두가 한결같이 그랬는데 그것은 그들의 얼굴표정과 절하는 모습에서 충분히 보아 낼수 있었다. 토개당원인 허석근만 보더라도 이마와 코를 땅에 붙이며 참답게 절을 하고는 슬그머니 얼굴을 훔치였다.

    도감이 신령님께 아뢰 올리는 기원에는 크게 두가지 부분이 있는데 첫부분은 지난해도 보살펴준 은덕에 잘 살았으니 고맙기 그지 없다는 찬사의 말이고 두번째 부분은 금년에도 여러모로 보살펴 주십사 하는 부탁이다. 끝으로 약소하지만 정성을 다하여 올리는 음식이니 많이 잡숫기를 복망하나이다하면 도감이 중임은 끝나는 셈이 된다. 이것은 고정된 격식이지만 도감의 언변과 수준에 따라 뜸을 들이는 시간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했다. 어찌되였든, 도감이 일배를 올리고 일어서면 기원이 끝난 것이다. 도감은 좌측으로 조용히 물러가서 량수거지를 하고 옆으로 시립한다. 수절을 진지밥그릇과 돼지 갈비우에 올린다. 술을 마시는 것은 끝나고 이제부터는 식사를 하신다는 뜻이다. 또 적당히 뜸을 들인후 수절을 내리워놓고 정화수 두사발을 올린후 집사는 우켠의 자기 위치로 가서 역시 도감처럼 량수거지를 하고 공순히 서 있는다. 천신님 내외가 양치질을 충분히 했겠다고 짐작되는 시점에 도감이 다시 제례상 앞에 나와 서서 천신바위를 바라보며 입속으로 우물 우물 중얼거린다. 이때의 말은 간단한데 “기체 평안히 다녀 가옵소서.” 하는 인사 말이다. 지금까지 좋이 한시간 벙어리 시늉만하던 도감어른은 홀가분한 기분이 되여 기세좋게 “일배! 재배! 삼배!” 하고 구령을 웨친다. 구령에 따라 마을사람 남녀로소는 또 이마빡과 코를 땅에 납작하게 붙이며 절을 한다. 이로써 천신님께 올리는 제례행사는 끝난것이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기꺼운 표정들이 되여 얼굴을 활짝 편다. 다음은 지신님과 마을 보호신차례가 되는데 제례법식은 먼저와 똑 같다.

    제례가 끝나면 마을사람들은 천신바위와 지신바위앞에 줄느런히 시립해서 도감어른의 훈시를 경청하는데 마치도 무슨 선서를 하는것처럼 엄숙하다. 도감어른의 훈시는 수십년 내려오는 “동훈(洞训)”인데 번마다 신성한 힘이 있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건한 심정을 품게 했다.

     “심성위정(마음과 성미를 바로 가지며) 언행위도(말과 행실은 도덕을 지키라)! 들었으냐?”
     “예.”
     “명심불망하겠습니다.”
     "잘 지키 겠수.”
    “암. 그렇습지요.”
    대답은 각가지 였으나 공통한것은 우렁차고 확고하고 또 진심인 것이였다. 이순간, 나쁜짓을 할 궁리를 하며 거짓대답을 하는 자는 한명도 없어 보였다. 신석동 산천당제례행사는 민속인지, 봉건문화인지 … 우매한 미신활동인지, 반혁명반동행위인지 … 그때까지는 누구도 알맞는 모자를 씌우지 못했다. “4청”운동에서 “생산대사원들의 집체적봄놀이활동”이라고 가래장부대보다 더긴 명함을 붙인바는 있지만 그것은 자타가 함께 만들어 붙인 엉터리 억지 변명이였다.

    하지만, 긍정할 점이 한가지는 있었다. 제례행사를 통하여 사람들께 “동훈”을 다시 한번 힘있게 강조했고 그 “동훈”은 제창할만한것이라는 점이다. 이 “동훈”은 신석동에서 확실히 일정한 생명력과 힘이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과 마을전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았고 바른마음, 바른행실을 하여야 나도, 너도, 모두가 좋다는 사상의식을 갖게 되였던것이다. 이것은 계급투쟁과 정치사상교육과 혁명화를 틀어쥐여 형성된것이 아니라 사람고유의 인성을 부단히 환기시켜 습성, 체질화 된것이였다. 신석동 사람들은 도둑질하거나 이웃간에 다툼을 하거나 지어는 아이들도 못된짓을 하거나 싸우는 일이 없었다. 광복전 왜놈들 등살에 가난은 해도 사람들은 화목하게 살았다.

    마을에서 자수성가해서 차츰 잘 살게돼, 토개때”부농”으로 성분이 매겨진 문명순도 마을 인심만은 좋았었다. 그는 신석동 토배기농민으로 주요하게는 목재장사를 해서 차츰 춰 섰고 광복나기 몇해전에는 기와집을 지었으며 (신석동 유일의 기와집) 뒷마을 최지주가 파는 땅을 눅다고 여러헥타르 사들였는데 그것을 소작도 주고 농망계절에는 계절고농도 사서 썼다. 광복이 된후 토개시 그는 정책계선에 걸려 꼼짝 못하고 “부농”이 되고말았다. 고아인 김문덕을 거두어준것은 되려 머슴을 둔 죄악으로 치부됐다.

    당시, 부농내외를 청산투쟁할때 허석근은 윤영칠이 부추기자 그들의 멱살을 쥐여 흔들던데로부터 부지깽이로 매질하기에 이르렀다. 감춘 돈과 보물따위를 내놓으라는 것이였다. 김문덕이 때리지 말라고 악을 쓰며 왕왕 울어대자 윤영칠은 덜미를 끌어 쫓아버렸다. 빈고농단 주임자리에 앉혀놓은 리순보는 “문명순(부농)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우.”하고 기막힌 소리를 어벌짝이 크게 한마디 했다가 윤영칠에게 반나절이나 줄욕을 먹었다.

    개체농시절이나 집체화세월이나 신석동 사람들은 화해롭게 살았다. 사람들의 인간미가 제일 짙게 풍긴시절은 소결이때와 호조조때였다.

    그후 초급사, 고급사, 인민공사로 그리고 “4청”때까지 정치바람은 점점 더 거세지면서 사람들 관계는 정치사상관계로 서먹해졌고 어제날의 다정하던 이웃사이도 계급관계로 변해버렸다. 사람마다 인성을 버리고 계급립장에 서야했다. 하지만 신석동 사람들은 인심, 인정, 인성을 더 중히 여겼다.

    다른 생산대들에서는 집체의 위력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농업산량이 내려가고 수입분배가 줄어들어 사람들은 점점 더 울상이 되여갔다. “계급투쟁은 틀어쥐기만 하면 효험이 있다.”는 말이 그때는 없었지만 사실은 계급투쟁, 정치사상교육을 점점 더 강도를 높혀 틀어 쥐였는데도 집체경제의 발전은 내리막 길만 되풀이했다.

    그러나 신석동에서는 농업산량이 온당한 수준을 기본상 유지했고 부업을 조직하였기에 수입은 원유 수준과 엇비슷 하거나 조금 올라갈때도 있었다. 신석동은 화해로운 마을, 살기좋은 마을이라고 원근에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부러워했고 총각들은 장가를 잘 갔다. 제마을 혼사는 과거급제보다 더 어렵다고 했는데, 신석동에서는 동네혼인도 여러쌍 되였다. 신석동은 공사내에서 제일 큰(50여호) 마을이였지만 사람들은 말썽없이 평온하게 화목하게 살았다. 누구네집에 불상사가 있으면, 이를테면 누가 앓거나 돼지가 갑자기 병이 나도 어느집에서나 빠지지 않고 위문을 가 보았다. 이것도 이 마을의 특유한 풍속이였다. 어떤사람들은 신석동에서 산천당제례를 잘 치르기에 동네가 잘 된다고 했지만 기실은 마을에 “동훈”같은 기강이 있고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을 책임지고 가족을 책임지고 남을 생각하며 마을을 위하며 정직하고 선량하고 또 너그럽고 무던한 품성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들의 인간성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을의 환경정리도 잘해서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어 갔고 그때 벌써 수도물(自来水)까지 끌어왔었다. 한집식솔이 서로 닮듯이 한마을에서 함께 오래 살면 서로 닮는법이다. 그리고 사람의 본성은 좋은것을 따라 배우려한다. 사람이 나쁜짓을 좋아하며 본을 받으려만 한다면 인간세상은 언녕 훼멸되여 버렸을 것이고 인간은 진작 동물화 되였을것이다. 동물세계에도 꿀벌이나 개미나 코끼리같은 우수한 족속들이 있기에 농통한 소리로 “동물화”라고 하지 말고 비렬하고 간악한 승냥이나 여우같은 짐승이 되였을거라고 말해야 마땅하리라. 그러나 인간은 문명으로, 화해의 사회, 화해의 세계로 나가고 있다. 인간쓰레기는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다. 그리고 래일도 물론 있을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아 청결능력을 갖고 있기에 근심할것이 없고 전도는 광명하다.

    말바른대로, 광복후로부터 인민공사가 성립되기까지 농민들은 당을 바싹 따르며 점점 더 열광적이였다. 곧 지상락원인 공산주의가 실현 되는데 공산주의가 되면 지주, 부농을 찜쪄 먹게 잘 살게 되고 기음매러가도 하이야나 오토바이를 타고 가며 아니, 김도 기계가 저절로 매기에 농민들은 당나무그늘에 앉아서 장기나 놀면 된다고하니, 이밥에 고기, 술도 마음껏 마시고 … 잘놀고 잘먹는 그런세상을 누가 좋다고하지 않겠는가!

    아낙네들은 밭머리 쉼을 할때면 모여 앉아 행복한 앞날을 놓고 까르르 웃고 떠들군 했다.
    “나는 그때가 되면 재봉침을 한대 가질 테야!”
    “그건 뭘 할려구?”
    “애들옷을 기워입히자면 밤잠을 못자니 얼마나 고되우. 나는 재봉침으로 새옷도 만들고 애들 옷도 깁고 …재봉침으로 박으면 기운것이 오히려 정말 보기 좋더라니.”
    “저 말하는걸 좀 봐. 공산주의는 낡은 옷이 없대요. 매일 새것을 준다는데…”
    “정말?! 정말 그렇겠구나! 호호호.”
    “야! 그런 세상이 어서 왔으면 …”
    “나는 술기(수레)는 몰수 있어두 그 오토반가 뭔가 하는건 아무래두 자신 없는데?” 옆에서 담배쉼하던 남정들도 깨끼였다.
    “그러면 영화나 기껏보지? 평원유격대는 보고도 또 보구 싶더라니 …”

    마을사람들이 와그르르 무리지어 일밭으로 나가고 또 함께 돌아 올때는 서로 기분들이 들떠있었다. 마을에서도 일터에서도 수십명이 무리지어 웃고 떠들고 … 집체화가 좋긴 좋았다. 어떤 사람들이 “양무리 모는식”으로 일한다느니 어쩐다느니하고 비꼬았지만 농민들은 흥겹고 즐겁기만 했다. 너도 나도 일을 잘하고 년말총결분배가 올라가고 공평하게, 서로 비슷하게 먹고 사니 마음에 불쾌할것도 별로 없었다. 먹는것은 모두가 같은 표준인데 현금분배에서 격차가 있는것이 아쉽긴 아쉬웠다. 그러나 배가 아플것은 없었다. 그 사람은 그만큼 일을 더 했으니 나보다 고생을 더 한것이고 나는 그대신 편안하지 않았는가. 일 한대로하는 분배이니 의견이 있을것이 없었다. 농민들은 그때까지는 정치바람에 불편을 느끼지 못했고 장단에 맞추어 춤을 잘 췄다.

    부농분자인 문명순내외는 청산투쟁에 그냥 불만을 품고 있어 인민공사 사원이 되지 못하고 떼여준 돌밭에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다. 십여년 집체화의 길로 마을은 달렸지만 그들은 그냥 개채농으로 있었다. 가을에 탈곡이 끝나면 민식(농량)표준이 초과되는 곡식은 생산대에서 가져갔다. 그들에게 제일 척박한 돌밭을 조금 떼여 줬는데도 어찌도 이악스레 걸구었는지 소출이 해마다 괜찮았다. 생산대에서 밭을 잘 다루는가 드문드문 검사도 했지만 워낙 그들은 내외가 모두 “꼬리없는 수쇠, 암쇠”로 별명을 불리우는 농사군들이여서 공연한 근심이였다. 그점을 보면 “감독개조”가 잘되는것 같았는데, 속에는 “청산투쟁”에 대한 앙심이 그대로 있었던것이다. 그들은 늘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아들딸 5남매는 사원에 들었다.

    《공산풍》에 농민들이 와뜰 놀라기 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 얼마간은 신기하기도 하고 희한한것이 어정쩡했는데 다음은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이거, 도대체 사람 사는 꼴이 무슨 란장판인지 모르겠다.

    식당은 기와집(문명순의 집)에 앉혔는데, 하루세끼 애새끼들은 데리고 사발두개에 숟가락을 가지고 가서 줄을 서서 밥을 타먹는것이 … 사나운 날씨에는 여간만 귀찮은일이 아니였다. 강냉이 죽이나 된장찌개, 오구랑떡을 먹고 싶어도 어쩔수 없었다.(집에다 먹거리는 일률로 감춰두지 못함.)거동이 불편한 로인네와 환자가 있을 경우에는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먹기 싫을 때는 별일 없어도 더 먹고 싶을때는 짜증이 났다. (후에는 밥표제가 실시되여 적게 먹을수도 많이 먹을수도 있었다. ) 설상가상으로 3년재해가 왔다. 사람들이 맛이 있다고하든, 없다고하든, 배가 부르든 말든 … 그것은 아직 둘째, 세째문제고 당장 하루세끼 가마를 끓이는 것이 답답한 골치거리였다. 공산주의로 가는 광명대로요 금빛다리요 하긴 하지만 그것은 보아하니 하루이틀 사이에 이루어 질 일이 아닌것 같고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하는게 아닌가 …

    사람들은 이것이 점점 더 기승부리는 정치란것은 아직 몰랐지만 《공사바람》, 《식당바람》,《공산풍》이라고 부르며 공개적으로 타발을 하기 시작했다. 겁모르는 리순보는 “집체식당인지 집체돼지굴인지… 이게 무슨 지랄이야! 날마다.”하고 벌컥 역정을 쏟을때도 많았다. 어느날 누가 “반동패 소리를 한다.”고 시까스르자 순보는 “내가 반동파면 이 마을에 반동파가 아닌놈이 어데 있어? 속으로는 모두 투덜거리면서. 너도 아니야.”하고 발끈했다. 사람들은 모두 동감하는 표정들이였다.

    잇따라 들이 닥친 “4청”(농촌사회주의 교양운동)은 사람들사이를 뒤숭숭하게 하던데로부터 긴장하게 만들었다. 공작조가 이사람 저사람을 붙들고 적발하라고 들쑤시는가하면 사원대회를 열고 다른곳의 엄중한 사실들을 렬거하면서 신석동에도 문제가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 다들 정신을 바싹 차리고 두눈을 딱 부릅뜨고 주인의 각도에서, 인민공사 사원답게 간부들 문제를 대담히 검거적발하라고 몰아 붙였다 (간부아닌 사람도 적발할수 있다고했다.) 그때도 농민들은 “4청”바람이라고 했을뿐 점점 승화하는 정치운동임은 감감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경계하기 시작했고 민심은 불안해지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감자나 콩 이삭을 주어 집체에 내놓지 않고 집에 가져다 아이들을 먹인 사람들도 있었고 가만히 땅을 뚜져 호박이나 콩, 감자 따위를 심어 먹은 사람들도 있었던것이다. (자류지는 이미 취소했다.) 새강물(시냇물) 혹은 논코에 채발을 놓아 세치네(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기도 하고 말려서는 시가지에 가지고 가서 푼돈잎을 만들어 쓴 사람들도 발편잠을 잘수 없었다. 이게 모두 “4청”에 걸린다고 하니 사람들 마음이 불안 할수 밖에.

     “4청”의 마지막해(1965년)에는 끝내 마을을 뒤숭숭하게 하는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것은 호조조때부터 마을의 추렴새문서(돼지나 소를 잡아먹은 문서 따위)를 봐주던 신병호가 탐오를 했다는 것이였다. 병호는 매우 정직하고 또 마음이 어질어서 누구와 언쟁 한번 못해보고 자라온 사람인데 초급사 시절부터 오늘까지 줄곧 신석동 생산대의 부기원을 맡고 있었다. 근년에 와서 부기원공수(보수)라는걸 조금 주었지만, 근 10년 그는 무보수로 부기원장부를 맡아 했다. 안해가 밤잠을 바로 자지도 못하면서 그 고생 그만 걷어치우라고 바가지를 긁었으나 마을사람들이 한결같이 청드니 병호도 해마다 거절할수 없었다. 그만큼 그는 마을사람들의 신임을 받았고 착실하게 일했다. 사람들이 자기공수합계가 맞지 않는것 같다고 찾아오면 그는 공수기록전표를 한장한장 다시 수판질하며 맞춰보았다. 어떤 사람은 두세번 지어는 여나문번씩 찾아 와도 항상 웃는낯으로 차근차근 대조를 하며 문서를 따져 주었다. 마을에서는 그를 《비당원!》하고 불렀는데, 그도 그 별명에 습관이 되여《예. 》하고 대답하고는 선량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해 공사 3급간부회의에서 당위서기가 “신석동의 비당원동무 왔소? “하고 회장에 대고 소리친적이 있는데, 그로해서 그의 “비당원”별명은 공사내에 까지 퍼지였다. 그는 현의 표양을 받은적도 있었다. 그런 신병호가 탐오를 했다고 하니 모두가 꿈쩍 놀랐다. 그리고 여론이 와글와글 했다.

    마을의 간부들인 정치대장 허석활, (대약진때 입당) 생산대장 허명남, 부녀대장 남옥자, 그리고 대대치보주임인 허석준 (대약진때 입당) 등 골간인물들은 토개당원 허석근, 토개간부 윤영칠(그해봄에 이사를 왔음.) 빈고농단주임이였던 리순보 그리고 청년단 소조장, 민병패장 등 사람들을 이끌고 신병호를 “단지고움”(심사)을 하였다. 그들은 밤마다 허석근의 집(문명순의 기와집을 허석근이 분배받았었다.)에 모여 신병호를 압박했는데 윤영칠은 병호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귀썀을 치기까지 했다. “4청”공작대로 온 박영주는 심사를 지휘하는 한편 공사재량위원과 대대부기원을 불러다 모든 장부를 엄밀히 검사했다. 근 10여일 정치사상공세를 들이대고 장부검사를 했는데도, 결과는 “청백”이였다.

    그해 년말결산분배총결후 신병호는 부기원을 안한다고 딱 나누웠다. 사원들이 간청을 하고 간부들이 정치사상공세까지 들이 댔지만 어질디 어진 사람이 한번 아니라고하니 어쩌는수가 없었다. 그후 신석동에서는 해마다 부기원을 바꾸었는데 3년후에는 또 신병호가 부기원을 맡게 되였는데 그는 1983년 집체를 해산할때까지 부기원을 맡아왔다.

    그해 “4청”에서 또 한가지 사건이 마을 인심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허문수라는 사람이 탈곡장 콩, 수수, 조, 벼를 훔쳤다는 소문이였다. 허문수는 기골이 장대하고 근력이 좋은 사람이였다. 그에게는 아이들이 여덟이나 있었고 안해는 새들 새들 말라서 늘 앓기만했다. 잔밥이 많고 로동력이 하나뿐이다보니 허문수네는 안해의 병치료는 둘째치고 죽물로 연명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였다. 아이들이 민식표준은 낮았지만 먹기는 어른들에 짝지지않았다. 허문수는 늘 배고픈 설음을 안고 억척스레 일했다. 우로 아들 둘이 소학교를 졸업하자 일을 시켰으나 애들이 버는 공수는 몇푼되지 못했다. 문수는 그야말로 헐벗고 살았는데 그는 팬티도 없이 홑바지를 입고 다니였다. 그나마 집체덕분에 생산대 저비량을 꿔 먹을수 있은것이 다행이였다. 해마다 탈곡철이 되면 문수는 산더미같이 그 많은 낟알을 도맡다싶이 양창질(바람에 북데기와 쭉정이를 날려버리고 알곡을 정선하는 일)을 했다. 힘들고 솜씨가 수요되는 양창질을 문수는 잽싸게 잘 했다. 그런데 하늬바람은 항상 밤이면 잘 불어 왔다. 남포등이 둬개가 희미하게 켜진 탈곡장에서 문수는 바람이 끝날때까지 담배쉼도 없이 바삐 돌아치며 양창질을 하고 검불을 쓸어내고 낟알을 끌어모았다. 커만가는 낟알무지는 그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였고 눈에는 만풍년이였다. 거지반 그는 밤새도록 일하고 사람들이 탈곡장에 나오는 아침이면 지치고 허기 진 배를 쓰다듬으며 집으로 아침먹으려 가군 했다. 아침을 먹고는 또 일하려 나왔다. 문수는 해마다 거의 생산모범이 되여 낫가락이거나 초모자, 어록책 (문화대혁명시) 같은것을 상품으로 타군 했다. 그리고 어떤때는 량식을 50여근 장려 받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의 배려이기에 받는 마음은 눈물겹게 고마웠다.

    어느날, “4청”공작대 박영주가 문수네 집앞을 지나가다가 길에 콩알이 떨어진것을 보았다. 무심히 지나치다가 문득 계급투쟁신경이 꿈틀해난 그는 자세히 주변을 보았다. 문수네 집 마당에도 콩알 몇개가 보이였다. 박영주는 대대치보주임을 맡은 허석준과 수근거린후 탈곡장 보초를 서는 청년(민병)들을 조용히 불러 조사를 했다. 청년들은 탈곡장 보초막에서 저희들 놀음만 놀고도 아주 보초를 명심히 잘 선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이상동정 없었음!”하고 큰 소리를 치며 장담 했다. 박영주는 이번에는 허문수네 아이들을 꾀여냈다. 이리 저리 유인전술로 조사를 해 보니 콩을 닦아 먹은 일이 여러번 있었는데, 큰애가 말하기를 그것은 터밭에서 거둔 콩과 저희들이 밭에 나가 주어온 콩이삭이라는 것이였다. 박영주는 치보주임 허석준과 부녀대장 남옥자를 데리고 허문수네 집을 들추기까지 했는데 사실 지푸래기라도 잡을게 없었다. 한번 크게 공을 세워보려고하던 영주는 달갑지 않는지 생산대골간회의를 열고 문수를 죄인처럼 심문 했다. 련 3일간 밤마다 허석준의 집에서 문수를 족쳤는데 하지 않은 일을 – 그것도 도둑이라는 루명을 문수는 도저히 쓸수 없었다. 사흘째 되는날 리순보가 “허문수는 나와 같이 자란 불알친군데 그런 사람이 아니야! 생사람을 잡자고 해서 되는게우? 4청인지 지랄인지 … 거, 박동무 그만 두우.”하고 꾸중하여서 박영주는 머쓱해 물러나고 회의도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얼마 안되여 “4청”이 이젠 원만히 끝났다고 했다. 신석동 당원과 간부들은 물론 사원들까지도 무슨 영문인지는 알턱이 없다보니, 끝났다고하니 끝났는가하고 … 그저 그랬다. 그보다도 회의를 안하고 발편잠을 잘수 있으니 한시름 놓았다.

    “4청”이 농민들의 사회주의사상각오를 높이고 집체화의 길로 한걸음 더욱 전진하게 하였다고, 그리고 더욱 뭉치게 하였다고 하였지만 신석동사람들의 민심은 어수선 해만 져 갔다. 사람들은 서로 의심하고 경계하고 바짝 긴장하게 보냈다. 당내에 자본주의 길로 나가려는 나쁜놈이 있고 계급투쟁이 날로 엄중해간다고하니 모든게 무시무시했다. 세상이 이제 어찌 되려나 … “4청”에서 들은 소리를 보면 그저 일이 아닌것 같고 … 하여튼 다른 사람을 조심해야했고 제입을 주의 해야해. 풀떡하다가는 억울하게 큰코 다친다니까. “비당원”이나 문수를 보지? 재수없을때는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니깐. 마을에는 언제부터인가 수근수근 뒤공론을 하며 다른사람을 헐뜯거나 꼬집는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10여년전에 쉬쉬거리던 윤영칠과 허석근의 마누라 추문까지 새삼스레 되살아나 말밥에 오르기까지 했다.

    이듬해(1966년)봄 동네로인들이 산천당제례를 해야 하지 않는가고 마을의 간부들께 물었다. 모두들 이번에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꽁무니를 사리였다. 언제부터 마을의 대,소사를 좌지우지 해오던 그들이 아닌 보살하니 로인들은 혀를 끌끌 찼다. 정치대장 허석활이와 물으면 생산대장께 밀고 생산대장 허명남이와 물으면 정치대장께 밀었다. 토개당원 허석근이는 어정쩡한 태도로 “글쎄 ,4청에서 해마다 말썽이 많아서 … 원! … 지금이사 령도아덜이 다 알지 내가 뭘 알아야주 … 그러다가두 또 4청이 내려 오겠는지 …”하고 어물거리며 자리를 피했다. 나중에 동네로인들은 리순보를 위수로 산천당제례를 했는데 정치대장 허석활이와 대대치보주임을 맡은 허석준이가 빠지고는 몽땅 참가 했다. 생산대에서는 돼지를 잡아 사원들께 추렴으로 나눠주고 대가리는 제례에 쓰라고 보시를 했다. 음식은 매우 간단하게 만들었기에 제례 뒤끝에 로인 10여명이 술추렴을 하고 말았다. 신령님 내외들도 섭섭 했겠지만 마을사람들도 허전하고 서운했다. 이해를 마지막으로 굳건히 거행해 오던 신석동의 산천당제례행사는 옛말로 되고 말았다.

    그해 여름부터 마을에는 뒤숭숭한 소문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령도간부들속에 반동패가 숨어 있었다우. 지금 막 파내기 시작했는데 한둘이 아니라 우에두 있구 아래두 있는데 비밀조직이라우. 들추기 시작하니 자꾸 걸려 나온 다오. …”
    “문화대혁명을 한다는데 세상이 히뜩 번져질게라더구만. 우리 백성이사 이래두 백성이구 저래두 백성인데 뭐라우. 우리는 별일 없을 게우…”
    “현장과 현위서기를 가두어 넣었다더구만. 자본주의를 만들자고 했다오. 그런패들이 모두 권력을 잡았는데 이번에 몽땅 뽑아 죽인다오. 에—끔찍해라…”
    “그러게 벼슬한다구 해서 대구 좋아 할게 아니라니. 벼슬이란게 앉아 있을때는 흐뭇해두 일단 떨어진다하면 모가지가 날아 난다는 거요. 흥!”
    “벼슬을 해 봤수?”
    “딱 해봐야 알겠는가. 변학도나 장개석을 봐두 아는게지.”
    “그나 저나 … 제일 무서운게 홍위병이라구 합데. 처녀애들 치마를 벗겨버리구 량태를 잘라 버리구 뒤축이 높은 구두만 신으면 몽둥이루 갈긴다오. 잔치두 제사두 못 지내게 한다오. 상을 막 부수고 감투를 벗겨 버리고 물매를 안긴 다오…”
    “저런! 그건 왜?”
    “봉건이라우. 치마를 입고 꺼떡구두를 신는건 서양 미국애들식이구 … “
    “허허 – . 그것 참!”
    “상문이나 병풍도 다 불질러 버리구 개다리소반도 박살을 낸다는데 … 들키면 큰일난다오. 일찌감치 없애 버리거나 잘 치워 두든지…”
    “그것 참! 별일이네 … “
    ……

    그야말로 매일 매일 도무지 리해할수 없는 으스스한 소식이 무성히 날아 들었다. 제일 후두두 떨리게 하는 소문은 홍위병이 마을마다 검사를 하며 부실건 부시고 잡아갈건 잡아 간다는 소문이였다.

    “범이야! 범이야!” 하면 정말로 범이 온다고 신석동에 홍위병이 들이 닥친건 그해 초가을이였다.

    이 공사에는 초중학교가 하나뿐이였는데, 현성에 있는 고중에 붙지 못한 애들로 고중반 두개를 두고있었다. 고중반은 갓 설치하다보니 1학년과 2학년뿐이였는데 학생은 모두 30여명뿐이였다. 머리가 큰 그애들은 홍위병을 조직하고 초중애들을 끌고 “파구립신(破旧立新)”운동에 나섰다. 거기에는 학교선생도 대여섯 끼여있었다. 기관단위에서 뛰쳐나온 반란파도 몇사람 있었다. 그들은 참모 혹은 고문격이였다.

    어느날 점심시간, 홍위병이라고 쓴 붉은기를 앞세우고 홍위병 완장을 낀 학생이 신석동에 기세등등하게 들이 닥치였다. 어른들도 칠팔명 끼여 있었다. 홍위병들은 우사칸 앞에 있는 넓직한 탈곡장에 진을 치고 노래를 부르고 어록을(모주석저작중의 단락)합창으로 소리높이 랑독하고 또 구호를 웨치였는데 “당내의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를 타도하자!”(그때는 아직 류소기를 타도한다는 구호를 웨치지는 않았다.) “봉건미신을 타도하자!” “자본주의, 수정주의를 타도하자!” “네가지 낡은것을 타도하자!”(그들은 봉건적사상, 문화, 풍속, 습관을 말한다고 했다. ). “잡귀신을 타도하자!”… 등등의 구호를 신석동이 떠나갈듯이 소리소리 질렀다. 마을 사람들은 한창 점심을 먹거나 좀 누웠다가 기겁을 해서 탈곡장으로 달려 왔다. 그들은 난생 처음으로 홍위병이란걸 보았는데 머리 큰사람 몇을 빼고는 말짱 아이놈들 뿐이였다. 몽둥이나 무슨 쟁기를 들고 들부시려 쳐들어 왔는가 했는데 몽땅 자기네 자식같은 아이들뿐이여서 놀란 가슴은 진정이 되고 대신 호기심이 부쩍 일었다.

    마을사람들이 숱해 모여오자 대장인지 사령인지 한 애가 연설을 하였다. 그는 문화대혁명은 무얼 무얼 때려부수는 운동이라고 열변을 토한후 오늘 이 마을의 네가지 낡은것을 검사하고 때려 부시려 왔다고 선포했다. 머리가 유별나게 큰 그애는 호각을 까륵 까륵 세번 불고 명령을 하였다.

    “소조별로 해산! 집집마다 검사 시작!”

    아이들이 대여섯씩 짝을 지어 쫙 흩어지더니 탈곡장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마을로 뛰여 들어갔다.

    그날 그들은 상문(부모가 사망한후 3년간 위패를 모시는 제사상) 세개를 걷어치우게 하고 병풍 두폭, 개다리소반(6각의 작은 상, 량반들의 밥상이라고 했다.) 여라문개 그리고 상복(베로 만든 감투와 옷, 제사때 입음.) 대여섯 벌, 산다루(서양물건, 수정주의, 자본주의것으로 인정) 몇컬레를 탈곡장에 걷어왔다. 어떤 아낙네들은 상복을 돌려 달라고 악을 쓰기도 했다. 뜯어서 베옷을 만들어 입겠다는것였다. 홍위병들은 듣는체도 하지 않고 “잡귀신을 타도하자!” 고 우렁찬 구호를 웨치며 물건들을 모아놓고 불질러 버렸다.

    홍위병을 따라온 나먹은 사내가 쑥 나서면서 연설을 했다.그의 팔에도 홍위병완장이 끼워있었다. 그는 이 마을의 이름에 신(神)자가 앞자리를 차지한것은 엄중한 봉건미신적, 반동적 행위라고 하면서 당장 고치라고 했다. 마을사람들은 저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어정쩡해있는데 윤영칠이 불쑥 나서서 그사내한테 물었다. 그래도 되느냐고, 그러면 당신이 이름을 지어 세상에 공포를 하라고, 우리는 아무래도 일없으니 좋을대로 하라고 했다. 그 사내는 머쓱해서 입만 씰룩거리다가 올봄 산천당제사를 누가 주동했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마을사람들이 뜨끔해서 멍해 있는데 이번에는 리순보가 나섰다. 그는, 해마다 동네로인들이 주관했는데 금년에는 최로인이 앓아누워 동중의 의논에 따라 자기가 주동을 했다고 말했다. 홍위병사내는 순보를 노려보다가 성분이 뭐냐고 물었다. “성분이사 공사적으루 다 알지만 나는 대대루 머슴살이를 산 사람이요. 산천당 제례는 생산대가 봄놀이 삼아 해오던것인데 이젠 걷어치우기로 했소.” 리순보는 급기야 생각나는대로 산천당제례를 이젠 걷어치운다고 말해 버렸다. 그런데 그말이 동중결론으로 되여 버렸다.

    홍위병들은 그날 산천당 나무들을 찍어버리고 바위돌을 짓부셔 버리라고 엄포를 놓은후 호호탕탕 돌아가다가 몇개 마을에서 함께 쓰는 상여막에 불을 질렀다. 상여막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참으로 곱게 만든 상여 였는데 한시간도 못되여 흔적없이 사라졌다. 그후부터 상측이 나면 관을 수레에 덜렁덜렁 실어 내가는것이 여간만 볼성 사나운 일이 아니였다.

    이듬해 봄, 신석동에서는 유사이래 처음으로 든장질 사건이 발생 했다. 주인공은 윤영칠이였다.

    윤영칠은 흑룡강성 밀산의 어느 농촌마을에서 살았는데 집은 몹시 가난했다. 그러나 머리가 꽤 총명하고 말을 잘 하는 그는 주변의 불량자 청년들과 섭쓸려 다니며 건달을 피웠다. 그러다가 당지 조선족들의 참군열에 휩쓸려 참군했다. 군대에 참군은 했으나 윤영칠은 가만 가만 술을 먹고 때로는 싸움질도 해서 중대에서 몇번 호된 비판을 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영칠이 나쁜 버릇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는데 주둔해 있은 마을의 한족처녀를 희롱하는 건달행위까지 발생했다. 중대에서는 영칠이 착오를 종합하여 대대에 보고하였는데 군사재판으로 처리할것을 청시하였다. 지도층에서는 젊은 청년의 전도를 고려하고 출로를 주어야한다는 판단으로 제대를 시키고 지방 토지개혁공작대에 소개해주었다. 하여 윤영칠은 토개공작대성원이 되고 후에 연변에 와서 신석동에까지 오게 되였던것이다. 윤영칠은 머리가 꽤 총명한데다 한어를 잘하고 소학교정도의 문화수준도 있고 공작에서 적극적이긴 했으나 입당은 아직 못하고 일반대원으로 있었다. 허석근이처와 쉬쉬한 소문이 돌자 공작대에서는 윤영칠을 심사했는데 그는 희롱을 한바는 있으나 사통한 일은 없다고 딱 잡아 뗐다. (기실은 몇번 사통을 했었다. 그외에도 부농 문명순의 처도 두번이나 강간했다.) 공작대에서는 윤영칠을 제집으로 쫓아 버렸다. 윤영칠은 밀산에 돌아간후 인차 장가를 갔고 농업합작화운동에서 꽤 열성적으로 나왔다. 그는 자기가 병으로 집에 오긴 했으나 조선의용군3지대와 토개공작대에서 혁명한 간부라고 은근히 생색을 내었다. 그후 인민공사가 된후 그는 입당을 하고 대대부주임으로 사업하다가 공사간부가 되였다. 그때 그가 맡은 사업은 생산조리원이였는데, 두개 대대의 부녀주임(한사람은 한족이고 다른 한 녀자는 조선족이였는데 그들은 모두 유부녀였음)과 자주 사통을 했다. 어느해 여름 윤영칠은 공사부련회주임을 끌어안고 억지로 간음하려다가 성사하지 못하고 덜미를 잡히웠다. 부련회주임이 그 자리로 서기에게 고발하자 윤영칠은 출당, 제명(开除)을 당하고 다시 제집으로 돌아 가게 되였다.

    윤영칠은 마흔살이 되는 사람이 마을에서 더는 낯짝을 들고 다닐수 없게 되었다. 그는 다른 고장으로 이사하려고해도 갈만한곳도 없었다. 뒤통수에 손가락질이 따라 다니니 다른곳에 간들 별반 나을바가 없었고 사람취급 받기는 다 틀려 버렸던 것이다. 그는 수천리 떨어져 있는 신석동을 떠올리게 되였다. 하여 허석근이에게 편지를 쓰고, 두해전에 신석동으로 이사를 왔었다. 마을에서는 토개공작대로 왔다가 돌아간후 윤영칠이도 줄곧 농사를 지은줄로 알고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당시 몸이 좋지못해 집으로 돌아가다보니 간부가 되지 못하고 이렇게 농사군이 되였노라고 넉두리했다.

    그해봄 어느날밤 윤영칠은 허석근의 동생 허정근의 안해가 집에 혼자 있는 기회를 타서 그의 집에 뛰여들었다. 그는 신석동에 온후 이미 허석근의 처와 옛정을 다시 나누기 시작했고 허정근이처와도 이미 사통을 했는데, 불을 죽이고 엉켜있다가 정근이가 집으로 오는 바람에 꼼짝 못하고 들통이 났던것이다. 영칠이는 옷을 걷어 안고 뒤문으로 내빼고 정근이 안해는 영칠이가 강간을 하려고 뛰여들었는데 악을 쓰며 발악하다가 기진맥진했는데 아슬아슬한 고비에 당신이왔기에 화를 면했다고 둘러대면서 엉엉 울었다. 손가락틈새로는 남편의 반응을 살폈다. 어리무던한 사람이긴하지만 정근이도 남자다보니 자기 안해몸을 영칠이가 깔아뭉개려고 했다니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다. 안해가 소문내지 말고 딴 방법으로 원쑤를 하자고 애걸복걸했지만 정근이는 집을 와닥닥뛰쳐 나갔다. 정근이가 장작개비를 거머쥐고 씩씩거리며 가다가 생각해보니 조력군이 하나 더 있는것이 좋을것 같았다. 그는 형님벌되는 석준이를 우선 찾아 갔다. 그들은 간이 콩알만해서 떨고 있는 영칠이를 다짜고짜로 한바탕 두들겨패고는 정근이네집으로 끌고 왔다. 영칠이가 피투성이 되여 집에 끌려 들어오자 정근이 안해는 선손을 써서 “네놈이 나를 더럽히자구?!”하고 악을 쓰며 그를 쥐여 뜯었다. 석준이는 안해를 시켜 석근이, 석활이와 명남이를 데려 오게 했다. 이를테면 신석동의 간부들이자 세력가들인데 또한 허씨문중 사람들이였다. 그날밤 영칠이는 늘씬히 물매를 맞고 강간죄를 승인하는 자백서를 쓴후 피를 발라 지장까지 찍었다.

    이튿날오전 파출소에서 영칠이한테 수갑를 채워 끌고 갔다. 동네가 발칵 뒤집힌 와중에 이번에는 허씨문중젊은이 몇이 어른들의 지휘하에 영칠이네 문이며 가장집물을 부수고 든장대를 가져다 구들고래까지 휘딱 번져 놓았다. 이것이 이른바 “든장질”이라는 것인데 옛날 고약한 원을 거적들것에 싸서 지경밖으로 갖다버리는, 축객령과 같은 것이다. 백성들은 마을에서 못된짓을 한 집은 “든장질”을 해서 쫓아 버렸다. 허씨네는 원근에서 “거렁뱅이허씨네”들이라고 소문은 났었지만 신석동에 집안들이 많고 광복후에는 세력이 커졌다. 그들은 자기네 허씨문중을 모욕했다고 영칠이집에 축객령을 내렸던것이다.

    그런데 사태는 희극적으로 번져졌다. 파출소에 잡혀간후 영칠이는 이실직고를 했는데, 정근이처와 사통한것외에도 석근이처와도 오래전부터 사통했노라고 자백을 했던것이다. 파출소에서는 영칠이를 “군중독재지휘부”에 넘겨 비판투쟁하라고 하였다. 석근이처와 정근이처는 영칠이와 함께 헌신발짝과 (오입쟁이를 모욕하는 한족들의 법) 개패를 걸고 온공사 마을마다 끌려다니며 지대한 모욕과 호된투쟁을 당했다.

    신석동마을사람들은 집체화후부터 점차 허씨네를 은근히 질투하고 미워하기 시작했는데, 마지막 산천당제례후부터는 즉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여서부터는 허씨네를 거의 로골적으로 미워하며 맞서기도 했다. 신석동의 권력은 허씨사람들이 모두 쥐고 흔들었는데 그들은 허씨네를 드러내놓고 싸고돌았다. 그리고 나먹은치들은 쩍하면 “허씨문중”을 들먹이며 무슨 대단한 문벌이라도 되는듯 거들먹거리기 좋아했고 아낙네들과 젊은 축들도 집안세력이 세다고 은근히 우쭐해 하였다. 농촌에서는 특히 집안(친척)관념이 세다. 타성씨들이 보기에는 좋은일은 모두 허씨네가 독차지하는것 같았다. 대대나 공사기업에 로동자를 뽑아가거나 벌이가 좋은 일자리 혹은 외지부업에는 거지반 허씨들이 차지했다. 민영교원으로 자격이 더 나은 리순보아들과 신병호딸 대신 석근이 아들과 선준의 딸이 간것도 뒤공론이 많았다.

    윤영칠사건이 터진후 타성치들은 30여호가 이구동성이 되여 석근이네와 정근이네 집에도 “든장질”을 하였다. “개쌍년들을 마을에서 쫓아! 신석동에는 그런 쌍년들이 사는곳이 아니야! 더러운 것들!” 리순보와 몇사람이 소리치자 타성씨들이 와하고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이제 와서 치보주임인 허석준이나 석활이, 명남이도 어쩔수 없었다. 그해 윤영칠, 허석근, 허정근이네는 선후로 다른곳에 멀리 이사를 갔다. 그들이 정작 이사를 갈때 마을사람들은 이사짐을 역전까지 실어다주며 잘 가라고 했다. 그야말로 시원섭섭한 모순된 감정이였다.

    한해에 세집이나 이사를 가서 마을에는 괴괴한 빈집이 우두커니 있는것이 여간한 꼴불견이 아니였다. 다른곳에서 이사 오려는 사람이 간혹 있었으나 신석동 동중여론은 받지 않는다고 그루를 박았다. 그것은 인구는 늘고 땅은 줄어든다는 리유에서 였다.

    허석근이네 기와집은 1년넘어 비여있다가 부농 문명순이 큰아들이 샀는데, 그때, 사람들은 착잡한 기분에 시달렸다.(문명순의 세 아들은 장가간후 마을에 세간나고 두딸은 외지로 시집갔다.)

    그후 장춘에서 한족애들 20여명이 하향지식청년으로 왔는데 마을에서는 비여있은 두집을 수리하여 들게했다. 하여 공사적으로 신석동은 집체호가 두집이라고 소문이 났다.

    진보도싸움(중, 쏘 변경 충돌사건)후 마을에는 현성으로부터 소산호가 한집 배치되여 왔다. 그집세대주 탁광도는 40대중년인데 늙은부모를 모시고 아이는 넷이나 있었다. 그중 한 아이는 오른족다리가 병신이고 막내인 딸애는 왼쪽다리가 소아마비로 불구였다.

    탁광도는 시가지에서 장마당 되거리 장사도 하고 보이라불도 때며 뜨내기로 살다가 “불안정요소”로 찍혀 농촌으로 왔던것이다. 그가 왔을때는 계급대오청리운동이 한창 진행중이였다.

    “회억밥”(해방전 극빈시절에 먹던 악식–겨푸대죽 같은것)을 몇번 먹고 “피눈물의 공소”(고생을 회억함)와 “회억대비”를 한후 지금은 사람마다 사상인식관을 넘는고비였다. 즉 사회주의각오를 제고하고 잘못을 반성하고 자아비판, 호상방조를 하며 (사실은 비판투쟁) 소자산계급(농민을 소자산계급이라 했다.) 근성, 사상을 뿌리채 뽑고 사상혁명화를 하는중이었다. 이번에도 간부나부랭이는 두말할것없고 군중들까지도 하나 하나씩 모두 고비를 넘어야 했다. 신석동 사람들은 한마을에서 오랜세월 함께 살아왔기에 서로 조상3대까지도 잘아는 사이였다. 하중농 두집외는 말짱 빈농이였고 순전한 빈하중농대오무산계급켠이였다.

    그런데 “회억대비”에서 모두 말문이 열리어 시간이 많이 걸리고 사상혁명화고비에서 또 시간이 걸리였다. “공산당과 모주석덕분에 번신하고 잘 살게 되였다. 모주석께서 집체화로 나가라고 하시니 좋든 궂든 따라야 합네다.”하고 누가 말하면 “동의하우.” “그게사 그래야지비. 좋든 궂든, 좌우간 옳은 말이우.”하고 여럿이 태도표시를 했다. 그러면 먼저 말을 한 사람은 관을 넘는 셈이였다. 다른사람이 또 관을 넘을때도 같은 장면이였다.

    어느날 반란파맹장이자 공사 모주석저작학습적극분자모범인 대대혁명위원회주임이 친히 시찰을 와서 참가 했는데 사람들의 발언은 여전히 그 모양새였다. 그날 리순보는 기껏 잘 말한다는것이 “그래두 소겨리때와 호조조때가 좋기는 좋았지. 후에 도거리를 할때가 좋았는데 … 소도 개인이 기를수 있고 … 류소기로선이라구 다 때려 부시긴 했소만, 우리사 모주석이 시킨걸루 알았지. 그때 모주석께서 집에 계시지 않았을 게우. 류소기맘대루 한걸 봐서는. 하여튼 모주석이 하라는 대루 안하면 혼쌀이 나우. “하고 생전 처음으로 긴말을 했다. 군중들은 또 “동의하우.” “옳게 말했소.”하고 찬동을 표시 했다. 대대혁명위원회 주임은 너무도 한심하고 억이 막혀 한동안 아무말도 못하고 멍해 있었다. 한참후 그는 계급투쟁, 로선투쟁, 모택동사상을 한바탕 내리 푼후 빈하중농협회 주임이라는 간부가 이렇게 사상혁명화를 못했으니 말이 되는가고 잔뜩 흥분하면서 정치대장은 뭘 하느냐고 소리질렀다. 그는 선전대를 파견 하겠으니 다시 하라고 호통을 쳤다. 그는 계급대오청리에서 사상혁명화 – 지금고비가 제일 관건적인 것인데, 사상에 따라 계급대오를 청리한다고… 사상이 락후하면 반면으로 나가서 적이 된다고 을러메기까지 했다. 어제날의 계급의 전우가 새로운 계급의 적이 되니까 모두 정신들을 바짝 차리라고 얼떨떨해 있다가는 머리가 떨어져도 어느칼에 떨어졌는지 모르니까… 계급의 적들은 아주 교활하니까 경각성을 높이고 그러자면 모주석저작을 잘 학습하고 모택동사상으로 무장하고 사상혁명화를 잘 해야 한다고 한바탕 력설하면서 리순보가 교활하고 엉큼하고 음험한 계급의 적인듯 변죽을 울리기까지 했다.

    대대혁명위원회 주임은 거리가 먼 신석동을 밤낮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런데 하루이틀 지나 부녀대장 남옥자를 자주 만나는 것이 눈에 띄우면서 마을사람들이 뒤에서 쉬쉬했었다. 그가 반란파대장질을 하면서 맹장으로 날뛸 때 남옥자도 섭쓸려 다니며 우정을 쌓았던것이다. 그는 남옥자한테서 정치대장 허석활의 표현을 알아보기도 했다. 남옥자는 석활이와 이미 은밀한 관계였는데, 춰올리지도 않고 내리깎지도 않으면서 괜찮게 사업한다고 둘러댔다. 마을의 다른 정황도 그는 너그럽게 회보했다.

    계급대오청리에서 대대혁명위원회주임이 파견한 선전대는 집요하게 밤마다 신석동에 와서는 이른바 사상각오가 제고되였음을 알리는 말들을 주입하느라 진땀을 뺐다.

    어느날밤, 탁광도가 고비를 넘겠다고 나섰다. 그는 무엇을 헷갈렸는지, 해방후 시내에서 품팔이를 하면서 지긋지긋 고생한 이야기, 아이가 다리를 분질렀는데 치료를 못하여 병신이 되고만일, 소아마비에 걸린 아이는 병원문앞에도 못가보고 역시 영원한 불구가 된일, 량식고생, 석탄고생, …온갖 눈물겨운 이야기를 울먹이며 늘여놓았다. 선전대가 “그러면 당신은 새 중국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오?”하고 눈총을 쏘았다. 탁광도는 속이 꿈틀했다. 그러나 시가지에서 굴러먹은 그는 약삭빨리 대뜸 말머리를 돌렸다. “이게 다 류, 등로선의 피해지요. 모주석로선대로라면 나는 시가지에서 그냥 행복하게 살았을 겁니다. 그리고 나에게도 잘못이 있었는데 무산계급대오를 떠나 (그는 보이라 삯일을 한것을 무산계급이라고 했다.) 생활의 핍박하에 장사를 하면 좋다는 말을 듣고 장마당에서 이것저것 쫄막 쫄막한 장사를 했지요. 그것은 더욱 말이 아니여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답니다. 지금, 모주석사상을 학습하고 선전대동지들의 가르침을 받아보니 나의 사상이 바로 소자산계급의 악독한 사상이란걸 크게 깨닫고 알게 되였어요. 소자산계급사상은 죽음의 길로 나가는 사상입니다. 나는 소자산계급사상을 뽑아버리는 실제행동으로 산천당나무를 몽땅 찍어버리고 바위를 뽑아버리겠습니다.” “그게 탁동무 혼자 힘으로 될가 … 생산대 일은 안 하겠소? 밤낮 붙어 있어도 1년은 걸릴 텐데. 좌우간, 장하우.” 리순보가 칭찬인지 비웃는 것인지 슬쩍 께끼였다. “밤시간에 혁명으로 생각하고 하겠습니다.” 선전대(모두세명)들은 너무도 감동되여 박수까지 쳤다.

    탁광도의 발언은 대대혁명위원회주임의 중요한 사업성취의 생동한 일례로 여러번 사용되였고 탁광도는 공사로동자로 제발 되였으며 불구자 아들은 대대공급판매합사(상점)점원으로 채용되였다.

    그런데 탁광도는 혁명임무를 완성하지 않았다. 그는 산천당 당나무숲에서 변두리에 있는 제일 가는 참나무한대를 겨우 찍어 넘겼을 뿐이다. 그것도 밑둥이가 그의 몸통만큼은 되여 아름찼다. 참나무고목은 워낙 쇠덩이 같이 단단하고 무겁다. 그는 반나절이나 똥힘을 다 써가며 비지땀을 흘렸는데 누구도 거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보니 줄기는 어쩌지 못하고 가지를 쳐다가 땔나무를 했다. 줄기는 생산대에서 가지라고 했으나 석활이도 명남이도 듣는체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은 거기에 손을 대는것이 몹시 께름직 했던 것이다. 그후 탁광도는 그 나무줄기를 여러토막을 내여 대대기업 전기톱으로 각목과 널판자를 뽑았는데 한수레가 너머 되었다. 그는 그것으로 변소도 짓고 돼지우리도 만들고 또 사립문도 만들어 달았다.

    그런데 무슨 조화냐? 공사기업에 출근한지 얼마 안되여 탁광도는 자전거와 함께 언덕밑으로 내리 굴러 타박상을 입고 즉사하고 말았다. 한달남짓 지나서 멀쩡하던 아버지가 밤에 쉬던 맵시대로 사망했다. 잇따라 어머니는 풍을 맞고 두어달 고생하다가 돌아 가고 또 얼마후에는 안해마저 풍을 맞고 죽었다. 한집안을 폴싹한 어처구니 없는 참변에 신석동은 말할것도 없고 전공사를 놀래 웠다. 사람들은 괴상한 일이라고 수근거렸고 락후한 농민들은 신령이 노한 탓이라고 내놓고 우기였다.

    대대혁명위원회주임도 그때쯤에 두어달 몹시 앓았다. 탁광도의 혁명적소행을 자꾸 입에 올린탓이라는 엉뚱한 해석도 있었다. 사실은 남옥자와 을씨년스러운 어느날밤 밖에서 운우지정을 나누고 병에 걸렸던 것이다.

    결국, 신석동 계급대오청리는 룡두사미격으로 지지부진 여러달을 걸려 끝냈는데 몽땅 고비를 넘어 여전히 빈하중농협회 회원이 되고 주임은 이구동성으로 리순보를 선거해서 그는 그냥 벼슬자리에 앉아 있게 되였다.

    림표사건후 “림표와 공자를 비판” 할때는 열정들이 높았고 운동도 빨리 끝났다. 그런데 림표는 줄욕을 퍼부으면서도 공자는 욕을하지 않아 싱겁게 되였는데 어떤 사람들은 절반운동을 했다고 비꼬긴 했으나 그런대로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신석동에서는 리순보가

    “림표가 하여튼 묘한 사람이우. 좌우간 간사하게 생겼더라니. 모주석을 죽이자고 하다니… 그런 놈은 급살을 맞아야 하우. 모주석이 그렇게 춰 주는데두 배때기가 차지 않던게지? 쌍놈이새끼… 어느집이나 안깐들이 납뜨고는 잘 되는 일이 없수. 여북하면 옛날부터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구 했겠소? 좌우간. 그런데 공자님은 농사 지을줄도 모른다면서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해 가지구는 지금도 욕을 먹소? 가만 있을 게지… “
    “동의 합네다.”
    “리주임아바이는 무슨 문제나 정말 정통으루 잘 보시우. 동의합네다.”
    “암. 항상 그렇지. 나도 동의하우.”

    사람들이 동의 한다는 외마디 소리에 신석동의 “림표와 공자를 비판”하는 운동은 원만히 결속 되었다. 리순보가 페막사 겸 총화발언을 했던 것이다.

    석활이와 석준이는 마을의 유일한 당원들이지만 마을사람들에게서 인심을 잃지 않으려고 될수록이면 군중들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들도 련이어 진행되는 운동에 싫증이 났다. 우선 밤마다 하는 회의가 딱 질색이였다. 낮에는 고되게 일을 하고 밤에는 회의를 하는데(그럴수밖에 없으니.) 사람이 고단해서 죽겠다. 아홉시나되여 두루 거지반 모이면 회의는 빨리 끝나야 12시가 지난뒤였다. 남옥자도 오지 않은 사람을 소리쳐 불러오는일이 무척 시끄럽고 짜증이 났다. 그러나 그것은 부녀대장이 소임이라 어쩔수 없었다. 사람들의 “동의합니다.” 소리가 나오면 석활이는 “발언들을 잘 했어요. 일찌감치 돌아가서 쉬시우.”하고는 제꺽 회의를 끝내버렸다. 이것은 그가 오래전부터 애용하는 페막사 였다.

    그사이 탁광도네집이 페가로 되다싶이 된후 마을에서는 예닐곱집이 외지로 이사를 갔는데, 그들은 어쩐지 불안하고 스산해서 더는 못 살겠다는 것이였다. 동네에는 이사 오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장춘지식청년들도 선후로 떠나가고 마을에는 빈집이 여나무호가 되였다. 마을에 빈집이 있으면 그야말로 스산하다. 한집이 있어도 그런데 여러집이 괴괴하니 비여 있으니 그 정상이 말이 아니였다. 신석동은 몰라보게 변해 갔다. 마치도 페허로 몰락하는것만 같았다. 생산대에서는 빈집은 1년이 지나면 허물어 버린다고 결정하고 그렇게 했다.

    어느해 3.8절밤이었다. 그날 생산대에서는 돼지를 잡아 추렴으로 사원들께 나누어주고 두족(头,足)과 내포는 부녀들이 명절음식으로 먹으라고 주었다. 그리고 생산대공익금에서 몇십원을 더 보내주었다. 신석동부녀들은 남옥자의 지휘하에 순대도 만들고 분토재와 사탕, 과자도 사왔다. 부녀들은 말그대로 명절분위기에 흠뻑 젖어 웃고 떠들고 성수나서 기뻐 했다.

    저녁에 마을부녀들은 기와집(문명순이 큰아들집)에 모여 음식을 먹은후 오락만회를 벌리였다. 그들은 마을의 간부어른들인 정치대장 허석활, 생산대장 허명남, 그리고 빈하중농협회주임인 리순보와 부기원 신병호를 초청했는데, 대대치보주임인 허석준이는 공사파출소에 회의를 가서 참석하지 못했다. 연회후 오락판이 벌어지자 남자들은 조금 앉아 있다가 모두 제집으로 돌아 갔다. 남자들이 없으니 녀자들은 별이별 오락을 다하며 집이 떠나갈듯 흥이 올랐다. 거기에는 물론 석활이 처도 한몫 했다.

    그런데, 오락판이 한창 무르익어가는데 남옥자가 어째서 속이 좋지 못하다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남옥자는 문명순이 집에서 거둬준 김문덕의 안해다.

    김문덕은 문명순이 청산투쟁을 맞은후 리순보네 집에 얹혀 살았다. 량식은 청산품 입쌀을 타다보니 별문제 없었다. 그후 김문덕은 변방부대에 참군하여 보초를 섯는데 신체도 허약하거니와 사람이 어수룩해서 취사원으로 배치 되였다. 그는 그저 장작을 패고 불을 때고 돼지를 기르는 따위의 허드레 잡일이나 하는 정도였다. 그는 부대에서 3년 좀 넘게 있다가 제대 되여 다시 신석동으로 찾아 왔었다. 그때부터 그는 허석근이 사랑방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허석근이가 청산분배로 탄 문명순의 기와집) 다행히 집체화가 되였기에 문덕이는 시키는 일이나하고 민식을 주기에 밥술을 먹을수 있었다. 문덕이는 31살 되던해 천만뜻밖으로 남옥자한테 장가를 들게 되었는데 그때 옥자는 20살이였다. 옥자는 리순보네 먼 친척벌되는 녀자였는데 흑룡강성 목단강부근의 어느 산골에서 살았다. 그는 그곳 소학교의 유부남선생과 바람을 써서 아이를 낳은 어두운 과거가 있었다. 문덕이는 늙은 장모와 어린 처남을 달고온 옥자를 안해라기보다 부모같이 받들었다. 그는 데릴사위로 되였지만 세상이 좋기만하고 기쁘기만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옥자는 늘씬하고 풍만한 체격이였는데 인물은 말그대로 함박꽃 같이 환하고 몸매 또한 탐스러 웠다. 남자라면 누구나 두세번 다시 보고싶은 녀자였다.

    어느해, 여름밤, 옥자는 준수하고 끌끌하게 생긴 허석활이 품속에 와락 감겨들었다. 석활이는 헛간에 침대같이 다락을 매고 거기서 자고 있었다. 그날밤에도 모기불을 피워놓고 잠에 들었는데, 뭉클하고 녀자가 품에 감기니 안해인가 했었다. 그후부터 그들의 관계는 극히 은밀히 계속되였는데 그들은 서로 육욕을 즐길뿐 다른 일은 없었다. 자기의 성욕을 도무지 만족 못주는 문덕이가 안타깝기 그지 없었으나 그때 사람들은 리혼이란걸 천하에 없는 사변으로 생각했고 옥자는 그럴상황도 아니였고 꿈도 꾸지 못했다. 문덕이가 사람이 온전해서 밤일을 제대로 한다면 옥자는 바람을 쓰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찌되였든, 옥자는 석활이와의 정사에서 맛을 들인후 그를 붙잡고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살아 가리라 작심하였다. 그런데 대대혁명위원회주임이 치근거리니 또 그쪽에도 몸을 열어주었다. 옥자는 결국 방탕한 녀자로 전락 했다.

    3.8절밤, 옥자가 나가자 젊은 아낙네 셋이 서로 눈짓하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먹은 아낙네 몇이 한창 각설이 타령을 놀았는데 너무 우스워 오줌이 나갈 지경이였다. 그날은 그믐께인데다 흐리기 까지 하여 밖은 칠흑같이 캄캄 했다. 긴장한 눈으로 살펴보니 옥자가 자기집 방향으로 가다가 바로 꺾어 돌지 않는가?! 그쪽으로 가면 석활이네집이다. 아낙네들은 쿵쿵거리는 가슴을 안고 도적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뒤를 밟았다. 그들은 석활이네 집으로 접근하며 두귀를 도시렸다. 눈길은 예리했으나 이상한것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헛간안에서 사람의 자취소리가 났다.

    “음 –. 아, 숨막혀.”
    “별일 없겠지?”
    “그냥 여기 있었어요?”
    “그럼.”

    아낙네 들은 밖에서 지키고 하나는 급급히 기와집으로 갔다. 얼마안되여 석활이처와 달려갔던 아낙네가 왔다. 헛간문을 와락 열고 손전지 두개를 쫙 비추니 이불속에누운 옥자와 석활이의 머리가 보였다. —

    이튿날 점심후, 동네 젊은 아낙네 대여섯이 석활이네 집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머리를 싸매고 누워있는 석활이처를 잔뜩 충동질 하여 일어나게 한후 가새와 장작개비를 들고 옥자네 집으로 달려 갔다.

    옥자네 식구들은 모두 집에 있었다. 옥자는 가마목에 누워있고 그의 늙은 어머니는 무엇을 깁고 있었는데 문덕이는 방웃목에서 새끼를 꼬고 있었다. 오누이 자식들은 웃방에서 놀고 있었다.

    아낙네들은 다짜고짜로 신발도 벗지 않고 옥자에게 덮쳐 들었다. 그들은 콩타작하듯 장작개비로 옥자를 두들겨 팼다. 석활이처는 옥자의 머리를 마구 가위질 했다. 옥자는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웅크리고 엎딘채 찍 소리도 치지 못했다. 문덕이와 할머니는 두눈을 화등잔처럼 뜬채 와들 와들 떨며 구석에 피해서서 보고만 있었다. 아이들이 기겁을 해서 엉엉 울다가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들은 외삼촌한테 알리려 뛰여갔다. “네, 이 개쌍년아! 말해라! 오늘 죽지 않겠으면 제대로 다 말해라.…” 아낙네들은 옥자를 사정없이 족치며 악다구니질을 했다. 옥자는 “살려 주세요.” “잘못 했어요.”하고 연신 애걸하면서 모진매앞에서 실토를 하고 말았다. 석활이는 더 말할것도 없고 그가 실토한 사내가 넷이나 되였는데, 바로 지금 여기서 옥자를 두들겨 패는 아낙네 남편들이 였다. 그중 두 아낙네의 남편들은 애매하게 안해의 의심을 받아 왔던것이다. 그 두 아낙네는 시름이 활 놓이였다. “피해자”아낙네 다섯이 새삼스레 분통이 폭발하여 옥자를 또 한바탕 쥐여 뜯고 꼬집고 뚜드려 팼다. 손발에 못지 않게 입으로는 온갖 쌍욕과 악다구니가 쉴새없이 쏟아져 나왔다. “피해”를 보지 않아 시름이 놓인 아낙네 둘은 리지를 회복 했다. 그들은 승냥이처럼 달려 드는 아낙네들을 뜯어 낸후 자기들이 심문을 맡아 했다. 그들은 옥자가 자기네 남편들과는 정말로 살지 않았다는 확답을 다시 받아 낸후 간통사연을 한사람 한사람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었다. 옥자가 틀림없이 자기 남편과도 살았을거라고, 이를 갈며 주먹을 부르쥐고 달려 왔댔으나 그게 아니니 가슴이 쑥 내려 갔다. 남편을 도적 맞히고 랑패상이 되여버린 “동료”들을 보니 오히려 흐뭇하고 깨고소 했다. 잘코사니야! 잘난척 하더니… 그들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계속 옥자를 심문했다. 옥자는 대대혁명위원회주임과 사통한것도 승인했다. 그러니까 여섯이나되는 사내놈들께 궁둥이를 들이 댔단 말인가! 에익! 더럽고 너절한 화냥년, 개도 붙었던것과만 붙는데, 너는 개보다 못한 쌍년이다. 낯짝이 아깝다. 썩고 구린내나는 변소칸이구나. 공동변소… 심문하던 두 아낙네는 옥자를 걷어차며 침을 퉤퉤 뱉았다. 그들은 뒤켠으로 물러 났다. 우리는 볼장을 다 봤다. 우리가 할일은 없다는 배짱이였다. 옥자입에서 “살았다.”는 말을 정작 듣고 보니 다섯 아낙네들은 심경이 복잡해졌다. 옥자도 괘씸하고 남편도 괘씸하고 그리고 개골망신이 아닌가 … 분하고 원통하다. 이게 무슨 개판인가. 죽은듯 늘어진 옥자를 더 때리고 짓밟을 여지가 없었다. 손맥이 탁 풀리였다. 한동안 망연자실해 있던 그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죽일년 탓이야! 저런년은 마을에 들수 없어. 그중의 두사람이 밖으로 씽 나가더니 장대를 들고 들어 왔다. “든장질을 해 놓고 가자!” 아낙네 다섯의 눈에는 다시 살기가 번뜩이였다. 그들은 가마를 뽑아 던지고 물독을 박살내고 찬장을 뒤엎었다. 장대기 두대를 구들고래에 깊숙히 들이 처박고 번쩍 들었다. 구들이 벌컥 벌컥 뒤집혀 졌다. 옥자 남동생부부가 달려 오고 대대치보주임인 허석준이가 숨가삐 달려 왔을때는 란동이 끝나갈 무렵이였다. 말그대로 기막힌 수라장이였다. 석준이를 보자 아낙네들은 악에 받쳐 소리 쳤다. “저 쌍년을 잡아 가요!” “때려 죽여요!” 아낙네들은 뽀르르 제집으로 달려가고 뒤늦게 모여온 마을사람들이 멍—해서 옥자네 집을 들여다 보았다. 그속에는 옥자와 계집질을 한 사내도 둘이 있었는데 그들은 영문을 모르다 보니 역시 멍청해서 참상을 보고 서있었다.

    지금까지 말한마디 못하고 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부들 부들 떨고만 있던 문덕이가 맨발바람으로 밖으로 불쑥 나왔다. 그는 장작더미로 씽 — 가더니 장작개비를 쥐고 달려와서 무작정 두사내를 마구 두들겨 팼다. 칠푼도 못된다던 사람이 성을 내니 아주 미치광이 같았다. 문덕이는 석활이 등 다섯사람의 이름만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던것이다. 그는 처남과 함께 다섯집을 돌아가며 들부셨다.—

    신석동은 발칵 뒤집혔다. 석준이와 리순보, 명남이 등 마을사람들이 붙잡고 말리고 달래고 해서야 싸움을 겨우 진정시킬수 있었다. 그러나 석활이 등 다섯사내의 집들에서는 밤새껏 가정싸움이 끊어나질 않았다. 신석동은 마치도 집단초상이 난것 같았다.

    이튿날 늦은아침때 사람들은 산천당 왜송나무에 목매죽은 옥자의 시체를 발견했다. 허석활이도 농약을 먹고 자기집 헛간 침대에서 죽어 있었다.

    그해봄, 석활이네와 문덕이 그리고 옥자 남동생네가 외지로 이사를 간후 잇따라 계집질한 네집에서도 선후로 멀리 이사를 떠나 갔다. 그들은 얼굴을 쳐들고 나 다닐수 없었던것이다. 아이들이 까만눈으로 말똥말똥 쳐다 볼때는 면구스럽기 짝이 없고 사람들이 그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살자니 신석동에서는 차마 더는 살수가 없었던것이다. 계집질 한 당사자뿐만아니였다. 안해도 아이들도… 온집식구가 모두 그랬다. 사람에게는 얼굴이라는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여북하면 얼굴이 아니면 무슨짓을 못하랴 했겠는가.

    대대혁명위원회주임은 반란파 맹장으로 벼락출세하다보니 공사적으로 위신이 괜찮은 허석활이를 은근히 경계하고 있던차였다. 석활이를 벼슬자리 경쟁적수로 보았던것이다. 그런데 석활이가 죽었다니 그는 마음이 홀가분해 났다. 옥자가 죽은건 은근히 아까 웠다. 그러나 그는 며칠뒤에 자기의 머리우에도 벼락이 떨어질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날 저녁, 래일 아침 일찌기 공사로 오라는 전화를 받고 그는 밤새도록 궁싯거리면서 바로 자지 못했다. 전화는 공사당위 조직위원한테서 왔는데,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좋은 일이니 와보면 안다.”고 하며 전화를 끝는 것이였다. 이튿날 아침 그는 설레는 가슴을 진정하며 30여리를 단숨에 자전거로 달려갔다. 정말로 아침일찍 갔던것이다. 공사에 이르러 들어가라는 소회의실에 들어서니 거기에는 당위서기, 부서기 그리고 조직위원과 파출소 소장, 또 낯모를 경찰 두사람이 있었다. 그는 지은죄가 있기에 대번에 가슴이 꿈틀하고 얼굴이 벌개 지었다. 거기서 주임은 반나절도 안되여 죄를 승인하고 그자리로 잡혀 갔다. 그는 유부녀 대여섯명과 간통했을뿐만아니라 (두사람은 강간)지식청년처녀애들도 여럿을 희롱, 간음 했던것이다. 두달후 주임은 6년도형을 받고 감옥살이를 갔다.

    어수선해진 신석동은 30여호밖에 남지 않았는데 정치대장을 할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부녀대장은 모두 싫다는걸 억지로 한명 뽑았지만 정치대장이 문제였다. 정치대장은 당원이여야 하는데 신석동에는 당원이라고는 허석준 하나뿐이였다. 그런데 그는 대대치보주임을 맡다보니 이래 저래 일이 많았다. 하여 정치대장을 명남이가 잠시 맡는것으로 하고 석준이가 거들게 하였다.

    어느날 겨울밤 사원대회가 소집되였는데 회의에서 석준이가 지금부터 우경번안풍을 반격하는 운동을 하게 된다고 선포했다. 상급에서 바싹 틀어쥐고 잘 틀어쥐라고 하는데 이 운동은 우리들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것이여서… 다들 회의에 잘 나오라고 그는 엄포를 놓았다. 회의에 잘 참가하지 않는것 때문에 미리 조치를 한다는것이 그렇게 침을 놓았던것이다. 물론 말은 상급에서 들은 말이다.

    “운동은 또 무슨 개뿔짝같은 운동이우? 밤낮운동을 해서 마을이 이 꼴이우? 나라에서는 좋겠는지 … 우리는 개뿔짝도 리로운게 없소. 좌우간 며칠밤 하우?”
    리순보가 부르튼 소리를 하자 다들 동감인듯 석준이 입을 쳐다 보았다.
    “하, 주임아바이는 무슨 말이나 그렇게 툭! 툭! 하시우? 지금이 어느때라구. 말한마디에 감옥에 가구 총살을 맞는데. 거, 말을 조심하우. 큰코 다치지 말구. 원… 머리를 수그리고 수레를 끌지 말구 밭고랑을 타구 세계를 좀 내다 보시우.…”
    “별소리를 다 하는구만. 수레가 무거울수록 머리를 수그리고 끄는법이우. 빈수레를 끄는 소새낄수록 대가리를 쳐들고 우줄렁거리지. 그런데, 밭고랑을 타구 무슨 세계를 내다보우? 허리도 펼겸 밭머리를 내다 볼때는 있지만.”
    “농사꾼이 농사를 잘지어 배불리 먹고 뜨뜻하게 입으면 됐지. 나라에 여량을 많이 바치구. 그게 모주석을 따르는게 아니우. 제앞도 바루 못가리는게 세계혁명은 무슨 개뿔짝같은 세계혁명이우? 지금은 말을 잘하는 년놈일수록 나쁜것들이라니. 대대주임아새끼만 보우. 말이사 누가 따르겠소. 석준이두 말은 잘 한다지만 그 자식 발뒤축에나 가우? 석준이사 싸움을 말리는 말이사 잘하지.”
    그건 그랬다. 오래동안 치보주임을 하다보니, 쟁기를 들고 죽일내기 하는 사람도 석준이는 화해술을 마이게 했다. 그는 될수록 큰문제는 적게 만들고 작은것은 덮어주며 사건을 만들지 않았다. 어떤 치보주임들은 될수록 문제를 크게 해서는 사소한 일도 안건으로 만들고 그것으로 성적을 올리였다. 상급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계급투쟁, 로선투쟁, 사상투쟁, 사상혁명화, 계속혁명자각성과 각오가 높은 간부라고 춰 주었다. 그런나 석준이는 치안사업을 잘 해서 안건 발생률이 적다고 말해주면서도 표양할때는 찬밥신세로 빼놓았다. 그에게는 “투쟁”적인 사적이란 별로 없고 “화해”시킨 사례들만 있어서 선진재료로는 구미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석준이는 우선 군중위신이 좋았다. 그래서 그는 앉은 다섯동으로 그냥 대대치보주임질을 했다.
   
    “나는 안 나오겠수. 데리려 오지마우. 그렇지 않아두 허리가 아픈데…”
    “하, 그만 하시라는데두. 원! …”
    석준이는 히죽히 웃고 회의를 끝내였다.

    리순보는 옥자가 죽고 마을이 피페해진후 몹시 기분이 얹짢았다. 그는 옥자가 괘씸했고 문덕이가 억울했고 계집질한녀석들이 더럽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바락바락 악을 쓰던 아낙네들도 다 미웠다. 밤낮 경읽듯 학습이요 혁명화요 한것이 다 어데로 갔단 말인가. 사람들은 점점 더 이악해지기만 하는것 같았다. 하긴 밤낮 투쟁이라고만 하니 그럴수밖에… 그는 지어는 운동이니 학습이니… 뭐니 하는것이 산천당제례보다 못하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그런말은 하지 않았다. 인심이 더럽게 된것이, 사람들이 나쁜마음, 나쁜행실을 한것이 다 이 근년에 문화대혁명인가 뭔가 한 것을 했기때문이라고 그는 생각 했던 것이다. 그는 소겨리, 호조조때가 그리웠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흘러간 옛노래다. 그는 가끔 서글프기도 했다. 자기 생전에 다시는 좋은 세월을(호조조 때 같은)볼것 같지 못했다.

    우경번안풍을 때려 부신다던 운동은 제대로 발동이 되지 못하고 소리없이 사라졌다. 4인무리가 꺼꾸러졌던것이다. 그 운동은 그들이 한바탕 멋드러지게 하자던 고단수였는데, 그만 일망타진 되고 말았다.

    4인무리가 멸망된후 운동이라는 소리가 다시는 없었다. 문화대혁명이 이젠 끝났다고 했다. 10년세월을 누구정신에 살았는지… 리순보는 도깨비장난에 끌려 다닌것만 같았다.

    “그거 보우. 내가 말하지 않았수?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구. 하기사 내가 말한게 아니라 조상님들이 말한게지만. 녀자가 할일이 있구 남자가 할일이 있지. 공자님이 말했지만. 거? 강청이란년이 진짜 녀자는 옳수? ”
    “글쎄… 안까니란게 어째 젖통두 없구 엉덩짝두 없구… 밤낮 모자만 쓰는게…”
    “원, 별소리를 다하우. 하여튼 리주임아바이가 천리앞을 내다 본다니까… 저래 뵈두.”
    “에끼! 고현놈. 하내비에게 그게 무슨 버르장머리여.”
    “그러니까, 림표가 죽을때 강청이두 사달이 날걸 내다 봤수?”
    “그렇지! 좌우간.”
    “으하하…”
    마을 늙은이들이 우스개 잡담을 할때면 아낙네들이고 소동패들이고 곁에서 재미있게 들으며 좋아했다.

    그후에도 마을에서는 여러집이 인맥(관계망, 친척)을 따라 이사를 갔다. 그들은 더 좋은 곳으로 찾아갔다.

    신석동에는 20여호 밖에 남지 않았다. 큰마을로 화해롭게 살던 그젯날은 말그대로 옛말이 되여 버렸다. 신령이 삐친다느니, 제마을사람끼리 붙어먹는 더러운촌이라는둥, 사람들이 이악스럽고 질이 나쁘다는둥, 지맥이 이젠 기수를 다 했다는둥… 신석동은 원근에 더럽게 소문나서 이사 오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1983년 봄! 신석동에서는 집체농사에서 개체화시대에 들어섰다. 틀속에 갖혀 있던 사람들이 풀어지는 순간이였다. 사람들은 광복과 같은 해방을 맞았던 것이다. 기쁘기도 하고 좀 두렵기도 하고… 하여튼 자기맘대로 살라고하니 긴장되면서도 격동 되였다. 밭을 썩썩 베여 패말까지 박아 놓으니 개체화가 현실로 성큼 안겨왔다. 진짜 토지개혁이였다. 옛날 토개때처럼. 사람들은 다시 원래의 제자리로 돌아 왔음을 느끼였다. 이제야 제대로 되였음을 느끼였다.

    신석동사람들은 토지분배를 많이 받았다. 그것은 50여호의 몫을 20여호가 나누어 가졌기 때문이다. 마을에서는 부농분자인 문명순내외에게도 똑같이 좋은 땅을 주었다. 이 마을의 대부분 면적은 수전인데 자판이 좋고 일조가 길고 또 관개수가 총족하고 좋았다. 이를테면 오염이 없는 자연수ㅡ 광천수 같은것이였다. 그것이 저수지를 거쳐 흘러나오기에 수온이 높고 땅이 기름져 벼가 잘 되였다.

    저수지, 산천당, 탈곡장은 공중재산으로하고 나머지는 철저히 분배를 했다. 그런데 문명순네 둘째가 저수지에 물고기를 길러보겠다고하면서 사용권을 줄수 있느냐고 물었다. 마을사람들은 엉뚱한 소리를 한다면서도 그러라고 쾌히 동의해 주었다.

    신석동은 개혁개방의 새 시대를 맞이 했다.—

                                                                                                              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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