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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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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대지에서 싸운 조선족 청춘들
2014년 02월 10일 13시 15분  조회:3754  추천:1  작성자: 회령
          

 회상기                          
                                 새중국을 위하여 싸운 조선족 청춘들
                                                 (팔로군, 조선의용군, 해방군에서 싸운 류동호의 회상기에서)
                                                                                                                     회령

          무장선전대

    1940년 4월 기로변군구 주력은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사령원 소화 적공부 부장 로소한 등 사령부 수장들은 부대와 함께 행동했는데 그들은 말을타고 행군했다. 나는 로소한의 직속간사(중대장급)여서 사령부와 함께 갔다. 대 부대가 대낮에 행군하는 정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였다. 우리는 진포선을 따라 서남쪽으로 매일 100여리씩 행군했다. 로소한은 때론 나에게 말을 주며 타라고 했는데 나는 매우 송구해서 어쩔바를 몰라했다. 어떤날에는 왜놈들이 비행기를 물고와서 기총소사를 했는데 비행기가 저공으로 내려오면 우리도 까투리사냥을 하듯 기관총을 갈기였다. 쌍방은 별로 손실이 없었다. 20여일 행군하여 진포선을 넘어서자 그곳은 로서군구였다.

    로서군구는 동평, 동아, 범현 등7개현의 광활한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왜놈들이 없었다.

    5월하순, 매우 화창한 어느봄날 우리군구와 로서군구는 련합으로 군인대회를 하였다. 수천명 군인이 참가한 대회는 씩씩하고 활발한 기상이 넘쳐 흘렀다. 노래소리 구호소리가 말그대로 하늘땅을 진감하였다. 오늘 이 대회는 기로변군구와 로서군구를 합쳐서 새로운 로서군구로 만드는 대회였다. 대회는 우리군구의 정치부주임 왕휘구가 집행하였다. 먼저 로서군구의 사령원 양용이 연설한후 우리사령원 소화가 연설하였다. 그들 연설의 주제는 당이령도하에 굳게 뭉치여 일제를 바다에 처넣고 인민의 새중국을 건설하자는 것이였다. 이어서 지방혁명정권대표들의 열정적인 축하연설들이 있었다. 대회가 끝나고 잇따라 문예공연을 하였다. 나는 난생처음 이런 장쾌한 정경을 목격했다. 자기이름도 바로쓰지 못하는 선전대동무들의 공연은 입을 딱 벌이게했다. 전 군에서 조선족은 나 하나뿐이였지만 외로움이니 고독이니 하는걸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나는 이들과 친밀한 전우로 되여 왜놈들을 무자비하게 때려부시리라 또 한번 굳게 맹세했다.

    로서군구의 사령원에는 양용이 임명되고 소화는 다른곳으로 갔다. 적공부는 로소한이 계속 부장을 맡았는데 나는 그의 직속간사로 그냥 사업하게 되였다.

    그해9월 연안으로부터 리명이 100여명의 간부대오를 인솔하고 로서군구로 왔는데 그는 조선족이였다. 내가 팔로군내에서 처음으로 만난 조선족이다. 동족의 감정은 숨길수 없는것이다. 그때의 반갑고 기쁘고 격동되던 심정을 나는 지금도 잊을수 없다. 나는 열아홉살이고 그는30여세였지만 즉시 딱친구로 되였다. 나는 금년에 입대한 순 했내기였지만 그는 벌써 상당한 혁명가였다. 그는 나에게 많은 혁명도리를 알기쉽게 설명해 주었고 동지들과 잘단결하며 사업을 잘하라고 신신 당부를 하였다. 나는 그의말을 가슴깊이 새기였다.

    며칠후 리명은 30명간부를 우리적공부에 떨궈놓고 남어지를 인솔하고 산동으로 나갔는데 팔로군 115사 적공부 부장으로 사업하면서 조선독립동맹 산동분맹을 설립했고 지도했다.(광복후 조선으로 나가서 계속 혁명사업을 잘 하였음.)

    12월 적공부에서 “적공공작훈련반”을 조직했는데 학기는 3개월, 학원은 30명, 내가 일어교원을 했다. 동시에 모도하시(후에 리명이 요구해서 산동으로 나감.) 미즈노(후에 팔로군 포병교관이 됨.) 기노시다, 다나까가즈오(후에 연안에서 모택동의 병을 치료했음. 본명은 사도다께오. 1993년 일본에서 만나봄.)를 골간으로 “일본사병각성련맹” 로서분맹을 설립하고 내가 지도와 협조를 책임졌다.

    로서군구의 항일전쟁은 매우 활약적이고 전과가 대단했다.

    우리적공부는 일본군과 괴뢰군에 대한 반전와해선전공작을 다종다양한 형식과 전술로 세차게 진행했는데 그 효력이 무척 좋았다. 우리는 여러패의 무장선전대를 조직하여 밤마다 적들의 코밑으로 갔다. 은밀하게 먼저 코밑치성을 한다. 즉 담배, 치약, 대추가 든 작은주머니에 선전물을 곁들여 가득 뿌려놓고 은페를 잘한후 총을 세방 쏜다. 다음은 구두선전을 들이대는데 웅변 노래 재담 만담이 무대연출을 하듯 멋들어지게 쏟아진다. 조선말 일본말 한어가(대상에 따라 선택) 류창하게 나가는것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련마했기 때문이다. 밤이여서 원고나 대본을 보지못하지만 한구절 실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놈들이 총을쏘고 지어는 척탄통까지 쏘며 지랄을 하고 교란을 했다. 그러나 3ㅡ4일이 지나면 조용해진다. 간혹 싱거운 작자가 “낮에와서 춤이랑 추며 그럴게지. 어른이 주무시는데. 엑퉤! 얘들아, 듣지 않는다. 가서 불알이나 쥐고 자거라. 얼씨덩!(얼른)”하고 익살을 피우며 소래기를 지를때도 있었다. 새벽녘이 되면 우리는 “잘 생각해라.”하고 소리친후 총을 세방 쏘고 돌아왔다. 때로는 선전하는척 하다가 진짜로 들이쳐서 소멸해 버리기도 했다.

    일본군과 괴뢰군에서 기의하는 사병이 한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과 포로들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들이 선전효과는 이만저만한 정도가 아니였다. 거점의 적들은 낮에도 밤에도 긴장과 공포에 떨었고 장교들은 밤낮으로 사병들의 눈치를 살폈다. 사병들은 “저치들의 말이 옳아.”하고 수근거리기도 했다.

          판시투 매복전

    내가 로서군구에서 참가한 전투중에서 가장 멋드러진 전투는 1941년1월8일에 한 판시투 전투다.

    왜놈들은 후집과 운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거리는30여리가 되였다. 놈들의 두 거점 중간쯤에 판시투가 있었다. 거기에는 놈들이 없었다. 후집에는 한개 중대가 있고 운성에는 대대가 있었다.

    우리의 대부대는 판시투에 매복하고 소부대가 7일날 밤중부터 후집을 들이칠듯 공격하였다. 나는 명령을 받고 무장선전대 전사 3명을 이끌고 놈들의 전화를 도청하게 되였다. 도청내용은 세전사가 즉시즉시 달려가서 수장에게 보고하기로 되여있었다. 얼마 안되여 후집에 있는 중대장 이다가 운성 대대본부에 긴급보고를 하였다. 전화는 대대장 니히다가 받았다.

    “갑자기 팔로아새끼들이 포위공격을 시작했다. 어떻게두 많은지 당해낼 재간이 없다. 빨리 지원해 달라!”
    “얼마냐? 상세한 보고룰 해라. 겁부터 먹지말구…”
    “캄캄해서 정확히 알수없다.”
    “하긴 그렇군. 하지만 가급적 상세히 보고해! 낮에 올게지 밤중에 와가지구선. 제길할”
    “4면 포위를 했는데 저 경우시비도 없는 독종들이 아주 먹어치울 잡도리다. 간나새끼들! 아직은 견딜만 한데 저것들이 그저 이러다 말 놈들이 아니다. 죽고 사는걸 개코같이 여기는 도깨비들이다. 먹자고 왔다. 확실하다.”
    “건방진놈! 내가 그새끼들을 더 안다. 그렇게 속단하지 말아. 지휘관은 침착하고 판단이 정확해야해! 방어를 든든히 하며 동태를 수시로 보고해.”
    전화가 뻔질나게 오갔는데 나중에는 이다가 빨리 구원해 달라고 목멘소리로 애원을 했다. 니히다는 날이 밝으면 부대가 출발한다고 말하면서 자기들이 포위하고 들이칠때 용맹하게 돌진해 나오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전화선이 무사해서 다행이였다고하며 팔로들이 그것도 생각못한걸 보면 멍텅구리라고 했다. 날이 휘붐히 밝자 니히다는 출발한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전화선을 끊어놓고 전선주에서 쭈루룩 내려와 매복지점으로 달려갔다.

    그날전투는 매우 순리롭게 끝났다. 후집과 운성의 적들은 몽땅 섬멸되였다. 많은 군수물자도 로획했는데 거기에는 대대포도 한문 있었다.

            호메가

    1942년1월 나는 려단교도대에 가서6개월 정치학습을 하였다.(전해 7월 기로예군구와 로서군구가 합병하여 기로예군구로 됨. 사령원 양득지, 부사령원 양용, 정치위원 소진화 적공부 부장 리비, 과장 로소한) 패장이상간부 120명이 참가했는데 조선족은 나뿐이였다. 졸업시 11명이 우수생으로 뽑였는데 나도 그속에 들었고 입당까지 하였다.

    그해 8월29일(조선 망국 국치일) 나와 양원은 “조선독립동맹” 기로예분맹을 성립했다. 나는 여전히 적공부에서 사업하며 분맹사업도 지도했다.

    1943년봄 로소한은 신사군으로 가고 내가 과장대리로 사업하는데 태항산으로부터 김한중이 무정의 지시로 기로예분맹의 사업시찰을 왔다. 그는 우리의 사업에 대하여 대단히 만족해 하였다.

    김한중은 군구사령부와 토론하고 돌아갈때 나를 데리고 갔다. 이때로부터 나는 조선의용군 전사로 되였다.

    태항산 항일근거지에는 “조선청년혁명학교”가 있었는데(곡원촌 절간) 교장은 무정, 교무주임은 정률성이였다.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많은 조선혁명가들을 알게 되였다. 리화림 등 녀성혁명가들을 보고 나는 무척 놀랐다. 학교는 고급반, 초급반으로 나누었는데 최창익 한빈 등 나많은 사람들은 고급반에 편입되고 젊은치들은 초급반이였다. 나는 물론 초급반인데 반장을 하였다.

    중국공산당과 팔로군 근거지 인민들은 우리를 말그대로 금싸락같이 귀중히 여겼다. 어느 한차례의 반소탕전에서 우리동지 한명이 희생되였는데 그후부터 팔로군에서는 부대를 파견하여 우리를 호위하며 전투에 참가시키지 않았다. 우리를 위하여 팔로군 전사 몇명이 희생되기까지 했다. 그곳은 소금이 특별히 귀한곳인데 근거지 인민들은 세겹 네겹의 봉쇄망을 뚫고 희생을내며 소금을 구해다 주었다. 우리는 있는힘껏 자급하기에 노력했다. 그리고 팔로군과 인민들을 위해 무엇이나 하려고 노력했다. 태항산의 생활은 참으로 간고했다. 그러나 조선의 혁명가들은 여기서 씩씩하게 성장했다!

    항일전쟁은 승리의 서광이 뚜렷히 밝아왔다. 이런 형세하에서 중공중앙은 조선의용군 이 연안에 집결하여 정치와 군사를 잘 학습하며 대오를 정돈하여 앞으로의 조선혁명에 대비할것을 요구하였다.

    1944년2월 우리는 태항산을 떠나 세겹의 봉쇄선을 뚫고 두달동안 1000여리 행군을하여 연안에 도착했다. 4월말까지 100여명이 연안에 왔고 그후에도 조선혁명가들이 륙속 연안으로 왔다.

    우리는 연안의 동관에 집결한후 건축대 농업대 후근대로 나누어 행동했다. 건축대는 라가평에 가서 학교와 숙사(요동) 건설을 하고 농업대는 감천에 가서 농사를 지었다. 나는 농업대의 부 대장을 하였다.(대장은 방호산, 광복후 조선으로 나감.)

    그해 추석날 밤, 조선의용군은 성대한 문예경색을 하였는데 우리 농업대의 “호메가”가 대단한인기를 끌었다. “호메가”는 조선동지들 뿐만아니라 중국동지들도 인차 따라배워 흥얼거리였다. 그 노래는 평안도 룡암포 일대의 민요인데 평시에 우리대의 전사 황칠성이 곧잘 부르군 했다. 나는 그 민요곡에 가사를 붙혀 한족들이 호미질하는 동작으로 20명으로 표연창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그런데 평심에서 기음매는 동작이 닭이 모이쫏듯 하다느니 껑충대며 궁둥춤을 췄다느니 하고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99%가 호평을 해서 1등을 했다. 건축대 심술쟁이는 “꺼꾸러뜨려야 1등을 하는건데…추석날에 뚱딴지 같이 호미깡댕이를 메구 나와서는. 떡메두 아니구. 떡메를 메구 나왔다면 두손들어 찬동하겠수. 재수없게스리.”해서 좌석에서는 와하하 웃음통이 터졌다.

    “호메가”가 지금도 오락판에서 인기가 있나본데 그건 가사보다 곡이 좋아서일 게다. 가락 장단이 워낙 우리민족의 감정에 맞으니까. 그때는 8절로 가사를 붙혔는데 지금 기억 되는건 다섯개 뿐이다. 두구절이 한절인데 다음과 같다.
    동산천리 돋으신 해는 점심때가 되여 온다.
    알뜰하게 가꾸어라. 땀에서 나오는 곡식이로다.
    일하면서도 배울수 있는 즐거운 일터로다 배움터로다.
    무찌르자 일제놈들을 삼천리 조국으로 진군해가자.
    붉은기를 높히 날려라. 인민의 락원을 건설하자.
    후렴은 에라 에라 에라 호호메야 호메 호메를 메고가자.

    1945년1월5일! “조선혁명군정학교”는 연안 라가평에서 성대한 개학식을 하였다. 학원은 300여명, 세개 구대로 나누고 매개구대는 세개 분대로 나누었다. 나는 1구대에 편입되였는데 3분대 분대장이였다.

             할빈이여

    광복후 조선의 38도선 이남에서는 미국, 북에서는 쏘련이 제3세력이 입국하는것을 가로막는 상황에서 조선의용군 3지대 간부들은 할빈에서 지대건설에 박차를가했다.

    3지대 정치위원 주덕해(오기섭) 등 연안에서 나온 우리일행 19명이 할빈에 도착한것은 1945년 11 월 19일 저녘이였다. 당시 할빈에는 지대장 김택명(리상조)과 한개대대의 병력이 있었다. 국민당이 항일승리과실을 독차지하고 공산당을 소멸하려고 다급히 서두르는 형세하에서 확군, 정군임무는 긴급하고 간고했다. 확군은 북만(흑룡강성)각지에서 조선족들이 참군하겠다고 벌떼처럼 몰려드는바람에 오히려 간고했다. 중화조선족들의 혁명열정은 워낙 높은데 광복후의 기세는 붙는불에 기름을 친 그대로였다! 남녀청년 들은 두말할것도 없고 지어는 40여세되는 아주머니 50여세의 아저씨도 참군하겠다고 부대를 찿아왔다. 갑자기 대부대가 생겨나다보니 먹는것 입는것 무기까지 모든 물질급양이 단통 문제였고 정치사상소질 군사소질을 제고시키는 관건적 사업도 화급한 임무였다.

    1945년11월25일 부대는 배극도에 집결하여 3지대 창립대회를 하였다.
    지대장 김택명, 정치위원 주덕해, 3개대대와 경위중대 교도대 위생대를 두었다.(얼마후 후근대 선전대도 설립.) 나는 2대대 대대장으로 임명되였다. (3지대가 부대건설에 분전한 이야기는 략함.)

    1945년11월10일 심양 고력툰 회의후부터 조선의용군은 지대별로(동만 북만 남만 서만) 갈라져서 독립행동을 하며 각 성군구의 편제에 들어갔다. 대외로는 “조선의용군”(몽땅 조선족임.)이라고 했지만 실제상에서는 중국인민해방군이였다. 그때로부터 우리대오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무장력량으로 되여 새중국을 위하여 싸우게되였다.

    1945년11월21일 오후 우리는 쏘련홍군의 명령에의해 할빈시내에서 철퇴하였다. 당시 할빈시내에 중공의 무장력으로는 우리뿐이였다. 쏘련은 할빈시를 금후 국민당에게 넘길방침이였다. 하여 할빈시는 국민당과 쏘련홍군이 함께 장악하고 있었다.

    1946년 4월28일 낮 12시, 쏘련홍군은 할빈에서 전부 철거했다. 3지대는 이미 만단의 전투준비를하고 할빈시내로 진격할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할빈에 주둔하고있던 쏘련홍군은 할빈을 국민당이 가지든 공산당이 가지든 나와는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그들은 여유작작 행군해 나갔다. 그들의 마지막 대오가 빠져나가자 3면으로부터 3지대가 그야말로 노도와같이 처들어 갔다. 돌격의 함성은 천지를 진감했다. 4천여명의 국민당 군대는 북쪽으로(그곳을 열어 놓았음.) 도망쳐서 송화강을 건너 갔다. 국민당정부 관원들은 말그대로 갈팡질팡 네거리에 나선 쥐 꼴이였다. 할빈시는 이렇게 인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해 9월2일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한다.

    할빈을 해방한후 3지대는 할빈시 위수임무를 담당하였다. 할빈해방전투 바로 직전에 나는 3대대로 전근해서 대대장 사업을했다. 우리 3대대는 할빈시 남강, 향방구 위수를 책임지고 사회치안을 유지하며 그 부근의 시교 토지개혁운동을 지원 보위 하였다.

    9월2일 9시경, 향방구에 주둔하고있는 우리대대 7중대에 긴급정보가 들어왔는데 “지금 사리툰(지금의 평방구 부근)일대에서 토비들이 살판치고 있다.”는 것이였다. 정보를 가져온 사람은 민운공작대 대원이였는데 후에 밝혀진데 의하면 그는 토비들과 내통하는 변절자였다. 중대장 리영택은 한개소대를 이끌고 그를 길잡이로 화급히 사리툰으로 달려갔다. 사리툰으로 가려면 반드시 서구라는곳을 지나야한다. 서구는 길량켠이 가파롭고도 높은언덕이고 거기에는 곡식과 풀이 키들이로 자라있었다. 토비들은 그속에 매복하고 있었든겄이다. 지대부에서 회의를 하고 있던 우리가 보고를 받고 달려 갔을때는 토비들이 이미 도망친 뒤였다. 그날 중대장 리영택과 전사들이 모두 21명이 희생되였다. 이것은 3지대가 할빈에서 입은 가장 큰 손실이였다. 렬사들은 할빈 인민들의 마음속에, 나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것이다. (할빈시에 렬사들의 기념비가 있음.)

    1947년1월 나는1대대 교도원으로 임명 되였다. 5월 나는 1대대 전우들과 함께 할빈을 떠났다.

    새로운 전투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09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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