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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기에 깃든 사연을 회고하며
2014년 02월 13일 13시 23분  조회:2531  추천:1  작성자: 회령
                           “회상기”에 깃든 사연을 회고하며
                                                                                                        회령

    중화민족이란 중국공민 56개민족을 총칭한 고유명사다. 지금은 대체상 56개 민족을 가리켜 하는 말이지만 얼마후에는 아마 56개가 더 될것이다. 대만에 통계에 들지않은 민족이 몇개 있으니까. 중국인구의 10%도 안되는 55개 민족은 국토의 60%에 살고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100%이다. 서장의 “진주마미”(장족)가 서안, 북경, 연변까지 와서 령양뿔과 모우뼉다구를 명약이라며 팔고 있는가하면 신강의 “야커시” (위글족)는 광주, 상해, 천진에서 양뤄촬(양고기뀀, 산적) 장사를 불티나게 하고있다. 한족아이들이 입귀에 기름범벅고물을 고양이수염처럼 발라가며 제정신없이 먹는것이 볼수록 재미 있다. “꼬리빵즈”(고구려몽둥이, 조선족)는 중국땅 어디에나 다 있다. 뿐만아니라 주지하 다싶이 세계에 진출하고 있다. “지구촌”이라는 말을 제일먼저 만들어낸 자는 조선족이다. 인가가 있는곳은 두말할것도 없고 무인지경에 가서도 개척하고 살아간다. 여북하면 고구려놈들은 껍질을 벗겨놔도 30리를 달린다고 했겠는가. 대담무쌍하고 슬기롭고 근로하고 끈질기고 대바른 민족이 조선족이다. 이것은 자화자찬이 아니고 한족들을 비롯해서 다른 민족들이 자꾸 그렇게 말하니까 겸손하게 접수하지 않을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의친구 두 사람이 서안과 상해에서 한족처녀를 며느리로 삼았는데(두 집 다 사돈이 대학교 교수들이다.) 그 며느리들이 부모들한테서 특별상금을 따로 더 받았다는 것이다. 조선족총각에게 시집가기 때문에 장려금으로 탔다고 자랑하더라는 것이였다. 장모님 사랑으로 사위에게 술을 많이 사 먹이라고 경비항목으로 준것은 절대로 아닐게다.

    신해혁명 때로부터 조선사람들은 손중산의(거폭의 초상화를 천안문광장에 모시고 있다.) 령도를 받들고 새 중국을 위한 투쟁의 앞장에서 용맹과 슬기를 떨치며 활약했다. 그 대표적 위인으로 최용건을 말할수 있다. 중국공산당의 창건과 함께 새 중국을 위한 투쟁에서 수많은 우리겨레들은 마멸할수없는 기여를 하였다. 오늘도 여전히 하고있다.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이들로는 양림 무정 문정일 주덕해 정률성 림민호 로기순(로박사) 최창호(사과배 육종가) 최죽송(벼 육종가) 김시룡 려근택(벼 육종가) 김철송(전투영웅) 조남기 리덕수 정판룡 김학철 김철 류창은(벼 육종가) 송순녀 (민정간부) 김광진(공안간부)… 중국공산당이 새 중국을 위한 투쟁의 90성상을 살펴보면 각계각층 각종분야에서 우리겨레의 “위인” “명인”이 2만명은 넘을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중화조선족의 1%일 뿐이다! 광대한 중화조선족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영웅적민족으로 손색이 없다.

    사람들은 물론 이름을 날린, 사회에 알려진 위인과 명인에 대해서는 정도부동 알기마련이다. 그리고 찬탄을 한다. 력사도 그들만을 기록해 왔다. 대중에 대해서는 “인민은 력사의 창조자다.”라고 기록했을 뿐이다 지도자와 인민대중은 굳게 뭉친 통일체 정체다. 어느하나가 없어도 안되는 인간세계 인류사회다.

    지금 인기있는 영상물들을 보면 두개측면의 형상을 공평하게 정확하게 잘 배려하였다. 결책자들이 고심하는 모습도 감동적이고 천군만마가 내닫는 화면은 그야말로 장쾌하다. “그때 어른들이 참! 대단했어! 제 죽는건 꿈도꾸지 않았다니까. 잔뜩 역어빠진 지금 놈들은 저렇게 못해.” 자기도 포함시켰는지 빼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이전에 탈곡장에서 전쟁영화를 볼때면 돌격나팔이 울리고 대부대가 “충아!”(돌격)하는 장면이 나오면 남녀로소가 엉덩이와 어깨를 들썽거리며 손바닥이 깨여져라 박수를 쳤다. 사장이 “따!”(답새워라)하고 전화로 포병부대에 소리칠때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사람은 자기와 같은 신분에서는 쉽게 동감이 되지만 처지가 다르면 리해력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대포를 갈기고 적들이 묵사발이 될때는 “시연허다. 에쿠! 저거 저거, 잘헌다.”하며 성수가 났는데 강원도 대머리 박령감은 벌떡 일어나서는 영사막에 대고 내리조기는 주먹질까지 했다. 그의 강원도 도리깨질이 유명했다. 사람들은 통쾌해서 와하하 웃었다. 박령감의 동생은 해방전쟁에서 회생되고 그의 두 아들은 항미원조에서 하나는 희생됐다. 둘째는 잔페로 전쟁후에 돌아왔다.

    팔로군, 조선의용군, 해방군에서 9년을 싸우고 그후에는 연변에서 한생을 기여한 로혁명간부 류동호는 자기의 회상기를 나에게 부탁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하였다.

    “일개 기층간부로서(부현급, 리직휴양) 내가 회상기를 쓰려고 하는것은 연변, 한국, 일본의 벗들이 여러번 권고하기에, 처음에는 뚱단지같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고 그후 오래동안은 사상갈등으로 망설였고 정작 쓰려고하니 이젠 능력과 힘이 안되는구만. 중문, 조문, 일문이 다 안되겠어요.(신의주상업학교 졸업. 고급지식분자. 일문초고 10여 장을 나에게 보여줬다. 사망 2년전임.) 회상기는 위인, 명인이 쓰는것이지 나같은 보통군중이 쓰는게 아니라고 생각 했어요. 다음은 몇년을 사색하며 말며하다가 금년초에 쓰자고 결심 했어요.(1998년) 나는 회상기를 나를 위한일로 생각 했는데 그게 아니였어요. 그렇게도 뽑느라고 한 개인주의가 질기기도 했지요. 당의 령도하에 중화민족은 기나긴 년대에 그것은 토지혁명전쟁, 항일전쟁, 해방전쟁, 사회주의건설 년대에 걸쳐 억만대중이 2천5백여만명의 희생을 내며 비장하고 장쾌하고 거창한일을 했지요. 세계적으로 드문일이예요. 나는 항일전쟁때부터 혁명대오를 따라 오늘까지 살아 왔습니다. 내가 한 일은 보잘것 없으나 당과 인민들이 한 일은 너무도 대단합니다. 회상해보면 깊은 감탄이 저도모르게 나옵니다. 어떤일들은 지금도 눈물이 나요. 참, 대단했지요. 대단했어요. 나는 내가 체험한 사실들을 기록하여 조선족들의 당년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께 보여드릴 임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였습니다. 특히 젊은 후대들이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가 새 중국을 위하여 어떻게 싸웠는가를 앎으로서 중화일원으로 떳떳한 긍지를 갖고 선인들을 계승하여 중화대지에서 더욱 빛나게 살아가기를 제일 크게 바랍니다. 대대손손이 번영창성키를 바랍니다. 하여 쓰리라 결심은 했는데… 내가 있는 힘껏 협조를 하겠는데, 수고해 주시오.”

    그는 기본상 침대에 반자세로 누워서 이야기를 했다 집은춥고(80여평 1층인데 허줄하고 썰렁했다. 1998년11월 초에 처음 만남.) 기침을하며 숨이 차 하였는데 담배를 자주 피웠다. 식사는 죽 한공기를 억지로 드시는것 같았다. 고기나 기름기 있는 반찬은 먹지 못했다. 연변주 창작평론실주임 리광수씨가(극작가) 내가간 첯날 알락달락한 떡 한합을 사왔는데 그는 증편 반개를 겨우 먹고는 젓가락을 내려 놓았다. 그러면서 “한뉘 술은 못해도 떡과 고기는 무척 좋아해서 떡보라고 별명까지 달았는데 이젠 맛이 나먼저 갔어!”하고 우스개를 하였다. 그는 전해가을 맹장염수술을하고 연변병원 로간부병실에 열흘있은것이 병으로 받은 최대의 우대였다고하면서 참, 미안하더라고… 더 있으라는걸 출원했다면서 만족해하는 밝은 표정이였다. 그런데 수술후 개운치 못하여 금년 여름까지 별로 출입도 뭇했는데 지금은 별일 없다고 하였다. 신체는 바람이 좀 크게불면 날려갈듯 몹시 허약해 보였다. 그러나 정신상태는 매우 건강했다. 특히 비상한 기억력은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회상에서 노래에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노래를 부르며 유쾌해하였다.

    우리는 시간을 다그쳤다. 보아하니 류동호의 여생이 그리 많을것같지 않았고(필경 80고령의 로인이 아닌가.) 나에게도 할일이 많았든것이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매일 7ㅡ8시간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부지런히 필기를 하였다. 련삼일 강행군을 하고나니 그는 매우 피로해하였다. 더는 무리를 할수 없었다.

    나는 회상의 모를 해방전에 두었다. 전쟁년대의 그복잡한 상황에 대하여 나는 전혀 모르다보니 적지않은 사실은 뭐가 뭔지를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어서 무척 품을 들여야 했다. 해방후 부분은 사실만 말해주면 내가 력사시기에 맞추어 정리할수 있었다. 3일을 이야기한후 류동호는 이젠 기본상 되였다고 하였다. 그는 문학을 하려고 노력한 사람이다보니 문학적소질이 있는데다가 회상기에 대해서도 대체적 륜곽을 가지고 있었든 것이다.

    우리는 회상기를 전,후편으로 정리하기로 하였다. 류동호는 동이하지 않았는데 내가 설복했다. 난관은 해방전인데 그의 신체상황이 여유롭지못하다고 나는 인정했기 때문이다. 빨리 써서 그의 심열을 거쳐야 하지않겠는가. 나는 밤낮으로 긴장히 다그쳤다. 필요재료를 찿고 류동호가 이미 발표한 회상기를 수집했는데 모두 3편이였다. 일주일 남짓 분투하여 초고가 완성되자(전편. 1948년 부대에서 전업하기까지 17만여자) 나는 부랴부랴 연길로 달려갔다. 그때는 1999년1월이였다. 그의 신체상황은 두어달전보다 별로 다름이 없는같기도하고 못해진것같기도 했는데 견딜만한 상황이여서 나는 우선 안도의 숨을 하ㅡ뿜었다.

    류동호는 무등 기뻐했다. 초고는 내가 읽고 그가 수개의견을 말했는데 한두곳만 아니였다. 무릇 자신을 떠받든 어구나 세절만 있으면 가차없이 취소 혹은 수개였든것이다. 이렇게 심열에 걸린것이 무려 2만여자는 되였다. 수개를 나도 각오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엄청날줄은 상상못했든 것이다.

    심열이 끝난후 그와 나는 심각한 대화를 나누게 되였다.

    “내가 처음에 명백히 말했는데, 선생이 내 말뜻을 채 장악하지 못한것 같아요. 내가 회상기를 쓰려는 목적은 내가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체험한 력사의 현장을 실사구시적으로 기록하여 특히 후대들이 선인들의 모습을 생동하게 보고 학습하고 느끼고 제고하며 긍지를 갖고 우수한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서입니다. 나에게 그 무슨 기념비같은걸 세우려는 사심은 꼬물도 없어요! 당과 상급의 령도와 지시를 받들고 동지들과 함께 임무를 잘 완성하려고 노력했을 뿐이지요. 모든것은 다 당에서 하라는 것이였고 상급에서 지시한 것이였지요. 나는 줄곧 그런 환경속에서 사업했고 생활했고 살아왔든 것입니다. 개별행동은 없었어요. 나는 줄곧 혁명대오내에서 전투집체속에서 하달된 임무수행에 충직하고저 했을 뿐이예요. 그때 모든 동지들이 다 그렇게 했어요. 동지들이 함께 맡은바의 혁명임무를 하나하나 완성했어요. 이 전투집체를 나는 회상한겁니다. 그집체를 쓰자는겁니다.”
    “옳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느부대나 단위의 력사를 쓰려는게 아니고 류동호 자신을 그의일생 그의인생을 쓰는것이지요. 물론 집체속의 류동호 동지지요.”
    “아니예요. 류동호가 속한 집체를 쓰세요. 바로 이문제 때문에 내가 오래동안 고심한거예요. 무엇때문에 조직에서 표양받는 모든 동지들이 성적과 영예를 당과 조직에 인민에게 돌린다고 말할가요? 거짓말일가요? 위대한겸손일가요? 모주석께서 “인민 만세!”를 여러번 웨쳤지요? 왜서 지금 누구 누구 만세를 웨치지 않습니까/? 력사는 인민이 창조하지요. 위대한 수령도 인민들 속에서 조명해야하는데 내가 다 뭡니까. 집체와 개인의 위치를, 선과후를 절대로 혼돈하면 안돼요. 개인을 집체위에 올려 놓으면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아요. 망신해요. 공산당원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는 개인주의를 부단히 반대하는겁니다. 개인주의는 만악의 근원이라 하지 않습니까. 자산계급 학자들은 개인주의가 인간의본질ㅡ인성이라고하며 지어는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라고까지 하는데 그건 틀린말이지요. 원동력은 생산력이지 그게 어디 개인주읩니까. 사람은 교육과 수양, 사회실천속에서 부단히 개인주의와 투쟁하며 극복하며 “대공무사”하게 행동할수 있고 그렇게 일생을 살수있는겁니다. 나의 한생을 회고해 본다면 개인주의와 투쟁하지 않은때가 없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은때가 없었어요. 이 개인주의라는게 참 끈질기고 집요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개인주의와 투쟁하며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지요. 나를 좀 찬미하는것도 괜찮치않나? 이런생각도 한켠에는 지금 있거든요. 이것이 개인주의죠. 나는 극복하겠어요. 절대로 찬미냄새가 나는 어구는 사용하지 마세요. 이 회상기가 나의 기념비같은걸로 보여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동의하지 않아요.”

    나는 집필의 지도사상이 뚜렸해 지는것 같았다. 평범한 이 로인의 정신세 계ㅡ사상경계가 어디까진가?!... 안중근? 윤봉길? 동존서? 뢰봉? 초유록?...나는 정신을 바짝 가다듬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문혁시기 입당을 위해 갖은애를 다 쓰던 일부동무들이, 뻘건주먹을 높히 들고 선서한 일부동무들이 개혁개방후 너무도 변한모습을 보고 나는 리해가 되지않았다. 다른사람에게는 혁명성이 그렇게도 철저하던것이, 원칙성 투쟁성이 두번째라면 섧다고 할 어떤동지들은 자기의 당과 정부를 속이고 외국에 나가서는 이번에는 또 그나라정부를 속이고 불법체류를 하면서(나라망신, 민족망신을 시키면서)돈벌이를 하였다. 그런가하면 어떤동지는 한술 더 떠서 위장인지 진짜인지 결혼을하고 반공국가의 국민증까지 따냈다고하는데 백색구역에서 지하혁명투쟁을 하려고 그런건 아닐게다. 돈을벌고 국민이되고 꼬부랑말까지 흉내내며 아주 외성인인양 우월감을 풍기는것은 곁사람이 창피할 지경인데… 왜서 저렇게까지 되였을가… 곤혹을 느낀적이 여러번 있었다. 지금 그 답안이 환히 보이는것 같았다.

    나는 조급성을 억제하며 참답게 수개를 하였다. 두어달 고심하니 기본상 합격이 될것같았다. 나는 가방을 메고 연길로 달려갔다. 이번에도 전번처럼 내가 읽고 류동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침대에 반자세로 누워 심사를 하였다. 초고는 1고보다 더 커져서 근20만자가 되였다. 그것은 동지들의 모습을 더 그려넣고 류동호의 사상투쟁, 개인주의 극복ㅡ당원으로의 성장과정을 꽤 세심히 서술했기 때문이다. 특히 안효상 과의 사랑에서 그를 조선에 보내는 문제에서 사상투쟁을 세심하게 다루었다. (정률성의 부인ㅡ조선중앙화교대표 정솔송이 할빈으로 와서 주덕해와 상론하고 한패의 조선족 간부들을 데려갔음. 효상이를 데려가는 문제에서 주덕해는 결정권을 류동호에게 맡겼는데 그는 효상이를 설복하여 가게했음.) 이번에는 류동호가 “싱! 만의!.”(됐다.) 했는데 내가 불만족이였다. 마치도 조직에 사상회보 공작보고를 하는것 같아서 구수한감이 적었든 것이다. 나는 류동호의 심기를 건드리지않는 전제하에 첨삭을한후 작은사위에게 맡겨 타자를 하게 하였다.

    나는 후편 집필에 달라 붙었다. 나도 체험한 시대여서 쉬울줄 알았는데 웬걸! 걸음마다 난관이였다. 그것은 계급투쟁, 사상투쟁, 혁명성, 당성제고, 부단혁명의 각오를 억세게 틀어진 그 년대들에 류동호는 적잖은 사람들과 혹은 첨예한, 혹은 껄끄러운 일들이 상당히 많았든 것이다. 거기에는 하급도 있었지만 상급이 더 많았다. 그는 자기의 개인주의와 투쟁했을 뿐만아니라 다른사람의 개인주의도 묵과하지 않았든 것이다. 나는 사실과 시비를 밝히는 작업에서 무척 애를 먹었다. 적지않은 사람들은 자기의 허물을 인정하지 않거나 변명하였다. 지어는 궤변을 장황이 늘여 놓기까지 하였다. 이건 취재를 하는건지 규률검사위에서 조사를 하는건지 스스로도 어색할때가 많았다. 작은사위가 여가를 타서 타자를 하다보니 그해(1999.12월초)년말이 되였다.

    나는 원고를 첫사람으로 리광수씨에게 심열을 부탁했다. 그는 속도가 빨랐다고 나를 고무해 주면서 됐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문학수단을 동원해서 감칠맛을 더 돋구면 좋겠다고 했는데 내생각과 같았다. 그후 최국철씨(소설가)가 심열 했는데 력사배경을 좀 더 넣으면 좋을것 같다고 하였다. 나는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나는 전편은 그쯤에서 놓아두고 후편 집필에 박차를 가했다. 우선먼저 류동호의 심열을 거쳐야겠는데 어쩐지 그가 기다려 줄것 같지 못해서 자꾸 조바심이 났든것 이다. 새천년 첯해6월 초고가 완성되자 나는 연길로 달려갔다. 류동호는 몰라보게 수척해 졌는데 정신만은 맑았다. 나는 안도의 숨을 가만히 내 쉬였다. 이번에는 합격을 맞았다. 나는 두달남짓 품을들여 전, 후편을 하나로 차근히 추고를 하였다. 그리고 작은사위에게 타자를 시켰다.

    9월초 어느날 밤, 나는 가도 되겠냐고(원고심열) 류동호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는 막내아들(연길에서3식구가 살았다.)이 받았다. 며칠전에 연변병원에서 페암 같다고 해서 장춘에 갔다는 것이였다. 확진이 나오면 아마 올거라고 하는것이였다. 내가 와서야 되느냐구, 입원해야지… 하니 막내는 “에이구! 엄마가 자꾸 가자구해서 억지루 갔는데…이제 옵니다. 그 령감이 국가돈을 쓰자 합니까. 성질이 워낙 그래서 안됩니다.”라고 하는 것이였다.

    그날밤 나는 이런 저런 생각으로 잘수가 없었다. 류동호의 일생을 죽ㅡ 생각하니 행복했다고 해야겠는지 불행했다고 해야겠는지… 얼핏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는 행복하다고 하였으나 그런것만은 아닌것 같았다.ㅡ 그후 막내에게 전화를 하니 “페암 말긴가 뭔가한데 형님네 집은 작아서 세집을 맡고 치료를 하는데 그러루 하다.”고 하는 것이였다. (류동호의 자녀는4남1녀, 셋째아들은 성 병원의사임.) 국경절이 지나서 또 전화를 했는데 막내는 장춘에 갔다 왔다면서 “좀 나은것 같기두 하구… 아마 며칠후에 올겁니다. 그때 선생님을 보자고 합데다.”라고 하는것이였다. 나는 한숨을 후ㅡ 내 쉬였다.

    10월말, 막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다급히 아버지가 돌아 왔느냐고 물었다.
    “오긴했는데 엄마한테로 갔어요.”
    “엄마한테라니?”
    “23일날 장춘에서 사망 했어요. 친척 친구 누구한테도 알리지 말라구 해서…내 혼자 생각에 그래두 단위에는 알려야할것같아… 창평실 리광수주임과 서기가 나와 함께 아침차로 갔다가 그분들은 그날 밤차로 돌아오고 누나(상해에 있음)와 형님이 나와 함께 골회함을 가지고 나와서 엄마산소에 합장 했어요.”
    “아버지가 그러라드냐?” “뭐, 그런얘기는 없었지만… 산소 댕기기두 편리할게구… 합장하는게 좋습니다.”
    “나한테 무슨 말씀이 없더냐?”
    “없었어요.”
     ……

    류동호는 82세를 일기로 한생을 마치였다.

    첯사랑 안효상은 조선중앙 김두봉 비서로 사업하다가 후에는 부녀동맹중앙에서 활약했다. 그들은 서신으로 그리움을 전하며 상봉을 기대하였다. 그런데, 조선전쟁이 일어난후 이듬해봄부터 효상은 소식이 없었다. 그먼저 기다린다는 편지가 한통 왔었다. 후에는 영영 종무소식이였다. 할빈에 있는 친정에서도 모른다고 하였다. 조선정부에서는 “불명”이라고 했다.

    류동호는32살에 화룡중학교 처녀교원 리경숙과 결혼해서 4남1녀의 자식을 보았다. 지난세기 70년대는 새 중국의 불행한 년대였을 뿐만아니라 류동호에게 있어서는 특히 액운이 겹쳐든 년대였다. 그는 “일본헌병대통역”이라는 개패를 걸고(1940년 2월 팔로군에 입대하기전 일본군 중대헌병의 통역을 4개월 했음. 고용원이였는데 지금말로 하면 림시공.) 온갖 모욕과 투쟁을 받으면서 학교교실에 같혀 있었고 맏이와 둘째는 공상으로 죽었고(류동호는 단위에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는 안해가 죽었다.

    딸과 두 아들은 그의 유언대로 5천1백원 저금과(월급 8백여원) 무휼금을 몽땅 후어머니에게 드리였다.(어머니는 그속에서 당비와 상장비를 기어코 내 놓았다.) 집은 막내가 가지였다. 막내는(한족학교 초중문화) 아버지의 그 많은 책들을 몽땅 땡땡이 페품수구 한족로친께 팔아버렸다. 한족로친은 너무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막내는 건축공사 로동자다.

    광활한 중국대지 장강이북 절반땅에서 류동호는 동지들과 함께 당의 령도하에 새 중국을 위하여 노력분투를 하었다. 그의 말대로 한다면 “개인주의를 극복하며 임무를 잘 완성하려고 동지들과 함께 싸웠다.”

    그의 마지막 혁명대오ㅡ집체(단위)는 연변주 창작평론실이였다. 1982년1월에 갔는데 11개월 부주임으로 사업하다가 조직의 결정대로 리휴(리직휴양)를 하였다. 규정상 5년을 더 사업할수 있었지만 그는 한마디 의견도 제출하지 않았다.

    그는 43년간의 사업생애에서 개인일로 조직에 손을 내민적이 한번도 없었다. 

                                                                                                                      200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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